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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혁명을 옹호하며

— 1932년 11월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에서 행한 강연

 

사회주의자 국제총회가 개최되어 참석했을 때 코펜하겐과 나는 처음 인연을 맺었다. 그리고 애틋한 추억을 간직한 채 나는 이 도시를 떠났었다. 그러나 그때 이후 25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그 동안 오레순트와 피요르드의 물결은 다시 또 다시 바뀌었다. 그리고 바뀐 것은 물결만이 아니었다. 전쟁이 유서 깊은 유럽 대륙의 등뼈를 분질러 놓았다. 이 대륙의 강과 바다는 피로 물들었다. 인류 특히 유럽의 인류는 격심한 시련을 겪었으며 더욱 우울하고 야만적이 되었다. 모든 종류의 갈등은 더욱 가혹해졌다. 세계는 거대한 변화의 시기로 들어섰다. 이것의 극단적인 표현이 바로 전쟁과 혁명이다.

오늘 강연의 주제인 혁명에 대해 말하기 전에 우선 이 모임을 주선한 사회민주주의 학생 조직에 감사의 말을 전한다. 나는 사회민주주의의 정치적 반대자로 강연을 하게 되었다. 사실 나의 강연은 역사과학에 관한 것이며 정치와는 무관하다. 이것을 강연에 앞서 먼저 강조하고 싶다. 그러나 정치적 입장을 말하지 않고 소비에트 공화국을 수립한 혁명에 대해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내가 러시아 혁명에 참여했을 때 표방했던 정치노선을 나는 오늘 강연에서도 그대로 고수한다.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러시아의 볼세비키당은 사회민주주의 인터내셔널(제 2 인터내셔널)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1914년 8월 4일 독일사회민주당은 의회에서 전쟁 공채 발행에 찬성하여 독일 제국주의 부르주아 계급의 전쟁을 지지하고 유럽 노동계급을 전쟁터로 밀어 넣었다. 이때부터 볼세비키주의는 사회민주주의와 영원히 절연하고 후자에 대한 화해할 수 없는 투쟁을 중단 없이 전개해왔다. 그렇다면 나를 이 모임의 강연자로 초청한 사회민주주의 학생조직은 실수를 한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나의 강연이 끝난 후 청중 여러분이 내릴 것이다. 예를 갖추어 주최측은 나에게 러시아 혁명에 대한 강연을 요청했다. 나는 이에 호응했기 때문에 이 자리에 섰다. 우선 나의 결정을 정당화하기 위해 나는 다음과 같이 밝힌다: 35년에 걸친 나의 정치활동에서 러시아혁명의 문제는 나의 사상과 행동의 실천적 이론적 주축이 되어왔다. 터어키의 프린키포섬에서 4년간 머물면서 나는 주로 러시아혁명이 제기한 문제들을 역사적으로 자세하게 해명하는데 주력했다. 아마 이 사실 때문에 나는 이렇게 희망한 권리가 있을 것이다: 최소한 부분적으로나마 나는 동지와 동조자들 뿐 아니라 정치적 반대자들에게도 이들이 관심을 갖지 못한 러시아 혁명의 많은 측면들을 이해시킬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내 강연의 목적은 이해를 돕는 것이다. 나는 혁명 선전을 시도할 생각이 없다. 여러분들에게 혁명활동에 참여하라고 촉구할 의사 역시 없다. 나는 다만 러시아 혁명을 설명할 뿐이다.

우선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지만 러시아 혁명과 같이 복잡한 현상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기본적 사회과학적 원리들을 먼저 환기시키고자 한다.

사람 3명의 이미지일 수 있음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인식

인간 사회는 생존을 도모하고 후세를 보존하기 위해 역사적으로 유래한 협동체제이다. 사회의 성격은 이 사회의 경제가 갖는 성격에 의해 결정된다. 그리고 이 경제의 성격은 사회의 생산적 노동 수단에 의해 결정된다.

생산력 발전의 거대한 시대마다 이에 조응하는 명확한 사회체제가 존재한다. 지금까지 모든 사회체제는 지배계급에게 엄청난 장점들을 부여했다.

따라서 특정 사회체제는 영원하지 않다. 이것은 역사에 등장하여 이후 사회 발전에 족쇄가 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소멸한다.”

그러나 어떤 지배계급도 자발적이고 평화적으로 자신의 지배력을 포기한 적이 없다. 삶과 죽음의 문제에서 이성에 기초한 주장이 무력에 기초한 주장을 대체한 경우는 없다. 이것은 애석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다. 이 세계를 창조한 것은 우리가 아니며 우리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혁명의 의미

혁명은 사회질서의 변화이다. 혁명은 잠재력을 소진 당한 계급의 손에서 상승하는 계급에게 권력을 넘겨준다. 봉기는 두 계급의 권력투쟁에서 가장 치열하며 결정적인 순간이다. 봉기는 진보적 계급에 기초하고 있을 때에만 혁명의 진정한 승리를 가져와 새로운 질서를 확립할 수 있다. 진보적 계급만이 자신 주위로 압도적 다수의 인민을 결집시킬 수 있다.

자연과정과는 달리 혁명은 인간에 의해 인간을 통해 성취된다. 그러나 혁명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조건을 인간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다. 과거로부터 물려받았으며 그의 앞길을 필연적으로 인도하는 이 조건 속에서 인간은 행동할 따름이다. 오직 이 때문에 혁명은 특정 법칙들을 따라 진행된다.

그러나 인간의 의식은 자신의 객관적 조건을 수동적으로 반영할 뿐 아니라 이 조건에 능동적으로 반응한다. 어떤 시기에 이 반응은 날카롭고 열정적이며 대중적이 된다. 기득권 세력의 장벽들은 무너진다. 역사 과정에 대한 대중의 적극적 개입, 이것이 혁명의 가장 핵심적 요소이다.

그러나 가장 격렬한 대중 행동도 혁명의 절정에 도달하지 못한 채 데모나 반란의 수준에서 정체할 수 있다. 대중의 봉기는 반드시 한 계급에서 다른 계급에게 권력을 넘겨야 한다. 이때에만 혁명이 승리한다. 대중 봉기는 필요할 때 언제든지 이룰 수 있는 고립된 행동이 아니다. 이것은 혁명의 객관적으로 조건 지워진 과정을 대표한다. 그러나 봉기의 필요조건들이 존재한다고 입을 벌린 채 수동적으로 기다리지 말아야 한다. 셰익스피어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사에는 밀물과 썰물이 있는 법이다. 밀물 때에 시도하면 성공을 거둔다.”

이미 수명이 다한 사회질서를 쓸어버리기 위해 진보적 계급은 자신의 시간이 왔음을 이해하고 권력 장악 임무를 스스로 설정해야한다. 바로 여기에 의식적인 혁명 행동의 장이 열린다. 의식적인 혁명 행동에는 선견지명과 명확한 계산이 의지 및 용기와 결합한다. 바로 여기에 혁명정당의 행동의 장이 열린다.

 

“쿠데타”

혁명정당은 진보적 계급의 최상 분자들을 결집시킨다. 이 정당은 방향을 정확히 잡고 사태의 전진과 리듬을 정확히 감지하여 초기에 대중의 신뢰를 획득해야 한다. 진정한 혁명정당이 없을 경우 노동계급의 혁명은 불가능하다. 바로 이것이 봉기와 혁명의 객관적 주관적 요인들의 상호관계이다.

논쟁 특히 이론 논쟁에서 논적들은 상대방이 제시하는 과학적 진실을 모순으로 몰아 그 가치를 깎아 내리는 것이 관례이다. 이 방식을 귀류법이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이와 반대로 모순에서 시작하여 진실에 도달하는 더 안전한 방법을 택할 것이다. 어쨌든 모순은 우리 주위에 너무도 흔해서 이것이 부족하다고 불평할 수는 없다. 가장 최근에 모습을 보였으며 가장 조야한 수준의 모순을 예로 들겠다.

이탈리아의 저술가 말라파르테(Malaparte)는 파시스트 이론가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 도저히 이론이라고 할 수 없는 파시즘에도 이론가는 존재한다. 그는 쿠데타의 기술에 관한 저서를 출판했으며 당연히 이 저서의 상당 부분을 러시아 10월 혁명을 “조사”하는데 할애했다.

그의 표현에 의하면, 1917년 러시아의 사회적 정치적 조건과 언제나 연관된 레닌의 “전략”과는 반대로 “트로츠키의 전술은 그 나라의 일반적 조건에 전혀 제한 받지 않았다.” 이것이 그의 저서의 요지이다! 이 저서에서 레닌과 트로츠키는 저자의 강제로 많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이 대화들은 레닌과 트로츠키의 정신적 심오함이 자연이 말라파르테 한 사람에게 부여한 것 정도에 불과하다고 폭로한다. 혁명의 사회적 정치적 전제조건에 대한 레닌의 심사숙고에 대해 말라파르테는 트로츠키가 이렇게 말하게 만든다: “동지의 전략은 유리한 조건들을 너무 많이 필요로 한다. 그러나 봉기에는 아무런 조건도 필요 없다. 봉기는 스스로 필요조건을 충족시키기 때문이다.” “봉기에는 아무런 조건도 필요 없다.”고 그는 말한다. 바로 이것이 진실로 인도하는 모순이다. 말라파르테는 계속 이렇게 주장한다: 10월 혁명은 레닌의 전략이 아니라 바로 트로츠키의 전술 때문에 승리했다. 그리고 그의 말에 의하면 트로츠키의 전술은 지금도 유럽 국가들의 평화에 위협을 가하고 있다. 그의 말을 하나 하나 정확히 인용해보자: “레닌의 전략은 유럽국가들의 정권에 직접 위험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트로츠키의 전술은 정말이지 실제적이며 결과적으로 영구적인 위험 요인이다.” 더욱 구체적으로 그는 이렇게 말한다: “프웽까레(Poincare)가 케렌스키 대신 임시정부의 수상이 되었더라도 볼세비키의 10월 쿠데타는 똑같이 성공했을 것이다.” 이런 저서가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어 진지하게 받아들여지다니 믿기 어려울 따름이다.

정말 “트로츠키의 전술”이 모든 상황에서 똑같은 임무를 완수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레닌의 역사적으로 조건 지워진 전략이 무슨 필요가 있는지 알아보는 것은 헛수고에 불과할 것이다. 또한 몇 몇의 기술적인 처방만으로도 혁명이 성공할 수 있다면 왜 성공한 혁명은 이리도 드물까?

이 파시스트 저자가 지어낸 레닌과 트로츠키의 대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내용과 형식 모두에서 무미건조한 발명품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종류의 발명품들이 적지 않게 판치고 있다. 예를 들어 마드리드에서는 [레닌의 생애]라는 저서가 버젓이 내 이름으로 출판되었는데 나는 말라파르테의 전술과 마찬가지로 이 저서에 대해서도 아무 책임이 없다. 마드리드의 주간지 [추적]은 트로츠키가 썼다고 주장되는 이 저서의 몇 개 장 전체를 출판되기도 전에 미리 선보였다. 그런데 이 저서는 내가 동시대인 어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이 대단히 소중히 여겨왔던 레닌의 생애를 지독하게 모독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날조를 일삼는 자들의 운명은 그들에게 맡기자. 잊을 수 없는 투사이자 영웅인 카알 리이프크네히트의 부친 빌헬름 리이프크네히트는 즐겨 이렇게 말했다: “혁명 정치인은 낯짝이 두터워야한다.” 슈토크만 박사는 그보다 더 표현력을 발휘하여 이렇게 우리에게 권유했다: 사회의 상식에 반대하여 행동할 사람은 새 바지로 갈아입는 것을 삼가야한다. 이 두 훌륭한 조언을 염두에 두면서 강연을 계속하겠다.

 

10월 혁명의 원인들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10월 혁명의 문제들을 이렇게 제기할 것이다:

“10월 혁명은 왜 그리고 어떻게 일어났는가? 좀더 정확히 표현해서 왜 유럽의 가장 후진적인 나라에서 노동계급 혁명이 성공했는가? 10월 혁명은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10월 혁명은 역사의 시험대를 통과해서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시켰는가?”

혁명의 원인을 묻는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지금 어느 정도 자세하게 답변할 수 있다. 나의 저서 [러시아혁명사]는 이 질문에 대한 자세한 답변이 될 것이다. 이 강연에서는 가장 중요한 결론만을 말하겠다.

 

불균등 발전 법칙

짜르의 러시아처럼 후진국에서 역사상 최초로 노동계급이 국가권력을 장악했다. 이 사실은 언뜻 생각하면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로는 역사의 법칙과 완전히 일치한다. 따라서 이 사건은 예측될 수 있었으며 실제로 예측되었다. 더욱이 이 사건에 대한 예측을 토대로 혁명적 맑스주의자들은 이미 오래 전에 전략을 수립했다.

우선 가장 일반적인 설명은 이렇다: 러시아는 후진국이지만 세계경제의 일부일 뿐이며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한 요소에 불과하다. 이 의미에서 레닌은 러시아 혁명의 비밀을 간략히 이렇게 표현했다: “(제국주의 세계체제의) 사슬 가운데 가장 약한 고리가 끊어졌다.”

거칠게 설명하면 이렇다: 제국주의 세계체제의 모순 때문에 폭발한 제 1차 세계대전은 발전 단계가 각기 다른 나라들을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몰아넣었으나 참전국들 모두에게 똑같이 커다란 희생을 강요했다. 가장 후진적인 국가들에게 전쟁의 부담은 가장 무거웠다. 이 것은 당연하다. 러시아는 맨 먼저 전쟁터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전쟁을 그만두기 위해 러시아 인민은 지배계급을 타도해야했다. 이렇게 전쟁의 사슬은 가장 약한 고리에서 끊어졌다.

더욱이 전쟁은 지진과 같이 외부에서 발생하는 재앙이 아니다. 클라우제비츠(Clausewitz)가 말했듯이 다른 수단을 통한 정치의 연장일 뿐이다. 지난 대전을 통해 “평화”시 제국주의 체제의 주요 경향들은 좀더 거칠게 모습을 드러냈을 뿐이다. 일반적 생산력 수준이 높을수록, 세계시장의 경쟁이 더 치열할수록, 갈등이 더 격화되고 군비경쟁이 더 미친 듯이 전개될수록 허약한 참전국들은 그만큼 견디기가 더 어려웠다. 전후 일련의 붕괴과정이 후진국에서 시작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세계 자본주의의 사슬은 언제나 가장 약한 고리에서 끊어진다.

예외적으로 불리한 상황의 결과 제국주의의 군사 개입이 성공하거나 소련 정부가 회복할 수 없는 오류를 범해 자본주의가 다시 비교할 수 없이 넓어진 소련의 영토에 등장했다고 가정하자. 이 경우 자본주의의 역사적 부적합성은 어쩔 수 없이 모습을 드러낼 것이고 1917년의 폭발과 같은 모순을 또 다시 연출할 것이다. 러시아 사회가 뱃속에서 10월 혁명을 잉태하지 않았다면 어떠한 전술도 그것을 탄생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최종적으로 분석하면 혁명정당은 제왕절개에 의존하는 산부인과 의사의 역할만 수행할 수 있다.

나의 설명에 대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러시아에는 후진적 자본주의와 궁핍한 농민들 위에 기생적 귀족계급과 썩어 가는 왕정이 군림했다. 이 나라에서 왜 혁명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 가를 당신은 대체로 적합하게 설명했다. 그러나 사슬과 그 가장 약한 고리에 대한 직유에서 진짜 비밀의 열쇠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후진국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는가? 나라와 문명이 썩어 들어가서 구 지배계급이 붕괴했으나 진보적인 계승 세력이 없었던 예를 역사는 몇 번 이상 보여주었다. 구 러시아의 붕괴는 언뜻 보기에 이 나라를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라 자본주의 식민지로 전락시킨 것처럼 보인다.”

이 반박은 대단히 흥미롭다. 문제의 핵심에 접근하도록 돕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반박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 차라리 내적 균형이 결여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우선 이 주장은 역사적 후진성을 과장하고 있다.

인간을 포함한 생물은 물론 나이에 따라 비슷하게 발달한다. 정상적으로 성장한 5세의 아동들은 대체로 체중, 신장, 내부 장기 등이 비슷하게 발달한다. 그러나 신체적 구조나 현상과는 달리 집단적 개인적 심리 현상은 주어진 상황에 대해 대단한 적응력, 신축성, 유연성을 보인다. 바로 이 때문에 인간은 자신과 가장 가까운 원숭이에 비해 월등하다. 적응력과 신축성을 갖춘 심리는 생물적 유기체에 비해 소위 사회적 “유기체”에 대단한 내부 구조적 다양성을 부여한다. 이것이 바로 역사 발전의 필요조건이다. 민족과 국가 특히 자본주의 민족과 국가의 발전에는 일반 생물에서 볼 수 있는 유사성과 규칙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같은 나라 안에서도 각기 다를 뿐 아니라 심지어는 정반대인 문화적 발전 단계들이 서로 접근하고 뒤섞인다.

 

결합발전의 법칙

역사적 후진성은 상대적 개념에 불과하다. 후진국과 선진국은 따로 떨어진 별개의 존재가 아니다.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 선진국은 후진국을 압박한다. 후진국은 선진국을 따라잡고 기술과 과학 등을 빌려야 살아남을 수 있다. 이 결과 결합발전이 이루어진다: 후진성이 세계적 차원의 최고의 기술 및 사상과 결합된다. 마침내 후진국은 후진성을 탈피하기 위해 다른 나라들을 추월하도록 강제된다.

개인의 심리에서 “열등의식이 극복”되듯이 사회에서도 집단의식의 신축성은 특정 조건 속에서 후진성을 극복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10월 혁명은 러시아 인민이 자신의 경제적 문화적 후진성을 극복할 수 있는 영웅적인 수단이었다.

이제 너무 추상적인 역사적 철학적 일반화를 피하고 구체적인 형태 즉 살아 움직이는 경제 현실의 단면도로 같은 문제를 제기해보자. 20세기가 시작되었을 때 러시아의 공업은 농업에 비해서 아주 하잘 것 없었다. 여기서 러시아의 후진성은 가장 명백히 드러났다. 대체로 이것은 나라의 노동생산성이 낮다는 것을 의미했다. 제 1차 세계대전 이전 그나마 짜르체제의 러시아가 가장 건강했을 때 이 나라의 전체 소득은 미국에 비해 8배에서 10배나 낮았다. “충분히”라는 표현이 후진성과 관련해서 사용될 수 있다면 이 수치는 러시아의 후진성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결합발전 법칙은 경제의 단순하고 복잡한 현상 모두에서 매순간 표현되었다. 자동차 도로가 거의 없는 러시아는 곧바로 철도를 건설하도록 강요되었다. 유럽의 수공업 및 공장제 수공업(매뉴펙춰) 단계를 거치지 않고 러시아는 곧바로 기계화 생산체제로 들어섰다. 중간 단계를 건너뛰는 것이 후진국의 발전 방식이다.

러시아는 농업 부문이 17세기의 수준에 머물러 있을 때 공업 부문은 규모 면은 아니더라도 유형 면에서 선진국 수준에 도달했으며 일부 측면에서는 이 수준마저 추월했다. 1천명 이상을 고용하는 대기업은 미국의 경우 공업노동자 전체 수의 18% 미만이다. 그러나 러시아에서 이 수치는 41%가 넘었다. 이 사실은 러시아의 경제적 후진성과 좀처럼 양립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사실은 러시아의 후진성을 반박하는 것이 아니라 변증법적으로 보완하고 있을 뿐이다.

위와 같은 모순은 계급구조에도 드러났다. 유럽의 금융자본은 러시아 경제를 가속도로 공업화시켰다. 공업자본은 즉시 자본주의적 대규모성과 반(反)인민성을 드러냈다. 더욱이 외국인 주주들은 러시아 밖에서 살고 있었다. 반면 노동자들은 당연히 러시아인이었다. 국내에 뿌리가 없는 몇 안되는 부르주아 계급에 대항하여 인민의 폐부에 깊이 뿌리 내린 상대적으로 강력한 노동계급이 등장했다.

선진국을 따라잡기에 바쁜 후진국 러시아는 자신의 사회적 정치적 보수주의 장치를 구축할 수가 없었다. 이것이 노동계급의 혁명성을 촉진시켰다. 유럽 아니 전세계에서 가장 보수적인 국가는 자본주의가 가장 오래된 영국이다. 그렇다면 유럽에서 보수주의가 가장 빈약한 나라는 러시아일 것이다.

그러나 젊고, 건강하고 결의에 찬 러시아 노동계급은 전체 인민의 아주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혁명 역량의 저수지는 노동계급 외부의 농민층이었다. 이들은 반(半)농노였으며 억압받는 민족들이었다.

 

농민

혁명의 깊은 토양은 바로 농업문제였다. 구 봉건 왕정은 새로운 자본주의 착취질서 하에서 농민에게 이중으로 견디기 힘든 고통을 안겨주었다. 농민의 공유지는 약 1억4천만 데시아틴이었다.(역주: 1 데시아틴은 10,900 평방미터) 그러나 3만 명의 대지주들은 1인당 평균 2천 데시아틴이 넘는 토지를 소유하여 총 7백만 데시아틴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것은 1천만 농민의 토지에 해당했다. 이 토지소유 통계는 즉시 농민반란의 강령을 제공했다.

1917년 귀족 보코린은 최후의 의회 의장이었던 로지안코에게 편지를 보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지주이다. 따라서 특히 사회주의 사상을 실험한다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목적을 위해 나의 토지를 잃는 것을 생각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지배계급이 생각도 할 수 없는 것을 성취하는 것이 바로 혁명의 임무이다!

1917년 8월 러시아 거의 전역에 농민반란의 소용돌이가 몰아쳤다. 642개 군 가운데 482개 군 즉 77%가 이 운동의 영향을 입었다! 불타는 농촌 마을이 도시의 봉기를 환하게 비추어주었다.

그러나 이렇게 주장할 수도 있다: 지주계급에 대한 농민전쟁은 노동계급 혁명이 아니라 부르주아 혁명의 핵심적 요소가 아닌가!

완전히 맞는 말이다. 과거에는 늘 그랬기 때문이다. 러시아라는 후진국에서 자본주의가 생존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은 이렇게 표현되었다: 농민 반란은 부르주아 계급을 진보의 선두주자로 등장시키기는커녕 영원히 반동 진영으로 숨어들게 만들었다. 따라서 농민이 완전한 파멸을 원치 않는다면 공업노동자들과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레닌의 천재성은 이 두 억압받는 계급이 혁명의 길에 하나로 단결할 것이라고 이미 예측했고 준비했다.

농업문제가 부르주아 계급에 의해 용감하게 해결되었다면 러시아 노동계급은 당연히 1917년에 권력을 잡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너무 늦게 역사에 등장하여 시기심과 겁 밖에 남은 것이 없는 러시아 자본가 계급은 애늙은이였다. 그리고 봉건소유체제에 대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때문에 국가권력을 노동계급에게 넘겨주었으며 이와 함께 부르주아 사회의 운명을 결정할 권리마저 노동계급에게 넘겨주었다.

러시아에서 소비에트체제가 등장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성격이 다른 두 요인 즉 부르주아 여명기의 특색인 농민전쟁과 부르주아 사회의 쇠퇴를 알리는 노동계급의 봉기가 동시에 필요했다. 여기서 우리는 러시아 혁명의 이중적 결합성을 파악할 수 있다.

농민이라는 곰을 일단 잠에서 깨우면 이 짐승의 분노는 무시무시하다. 그러나 이 짐승은 자신의 분노가 어디서 기인하는지를 의식할 수 없다. 그는 지도자가 필요하다.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 농민은 역사상 최초로 노동계급에게서 진정한 지도자를 찾아냈다.

공업과 수송업에 종사한 4백만 노동자가 1억 농민을 지도했다. 이것이 러시아 혁명에서 노동계급과 농민의 필연적인 상호관계였다.

 

민족문제

노동계급을 위한 혁명의 두 번째 저수지는 억압받는 민족들이었다. 특히 이들은 절대 다수가 농민이었다. 나라의 후진성과 밀접히 관련되어 마치 물위에 뜬 기름 덩어리처럼 국가기구는 모스크바에서 변방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동방에서 가장 후진 민족들을 복종시킨 후 이들에 기초해서 서방의 선진 민족들을 제압했다. 인구의 다수인 7천만 대러시아 민족에 9천만의 다른 민족들이 서서히 종속되었다.

이렇게 제국이 수립되어 대러시아 지배 민족은 인구의 43%를 차지했으며 나머지 57%는 문명적 법적 차별을 다양한 편차로 받았다. 서쪽 국경 뿐 아니라 동쪽 국경에 인접한 이웃나라들보다 러시아 제국의 민족 억압은 비교할 수 없이 더 야만적이었다. 이 결과 민족문제는 엄청난 폭발력을 가졌다.

민족문제나 농업문제에 대해 러시아의 자유 부르주아 계급은 억압과 폭력 체제를 어느 정도 개선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따라서 근본적인 문제해결의 의지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2월 혁명 후 8개월을 지속한 밀류코프와 케렌스키의 “민주” 정부는 대러시아 출신 부르주아와 관료집단의 이익을 반영했을 뿐이었다. 이 결과 불만에 가득한 피억압 민족들의 분노에 불을 질러 “무력으로만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이들의 인식을 부추겼다.

일찌기 레닌은 민족주의운동의 원심력이 필연적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다. 따라서 수년에 걸쳐 볼세비키당은 민족자결권 즉 완전한 분리 독립의 권리를 위해 끈질기게 투쟁해왔다. 민족문제에 대한 이 용기 있는 노선을 통해서만 러시아 노동계급은 피억압 민족들의 지지를 서서히 얻을 수 있었다. 민주정부에 대항할 수밖에 없었던 농민운동과 민족독립운동은 이렇게 노동계급을 강화시켜 10월 혁명의 물줄기로 터져 나왔다.

 

연속혁명

이렇게 후진국의 노동계급 혁명은 그 신비의 베일을 완전히 벗어 던졌다.

10월 혁명이 발발하기 오래 전에 이미 맑스주의 혁명가들은 혁명의 진전과 젊은 러시아 노동계급의 역사적 역할을 예상하고 있었다. 1905년에 나온 나의 저서 [평가와 전망]에서 이와 관련된 내용을 일부 인용하겠다:

“경제적 후진국의 노동계급은 선진국 노동계급보다 더 일찍 국가권력을 장악할 수 있다…”

“자유 부르주아 정책이 정권을 장악하여 자신의 능력을 펼쳐 보일 기회를 갖기도 전에 노동계급은 혁명의 성공과 함께 국가권력을 장악할 수밖에 없다. 러시아 혁명은 이 새로운 사태의 조건을 창출하고 있다.”

“농민의 가장 기초적인 혁명적 이해는 … 혁명 전체 즉 노동계급의 운명과 밀접히 결부되어있다. 일단 권력을 장악한 노동계급은 농민에게 해방의 계급으로 등장할 것이다.”

“나라 전체의 혁명 대표로서 그리고 절대주의와 농노제의 야만에 대항하는 인민 투쟁의 인정받은 지도자인 노동계급은 정권을 장악한다.”

“노동계급 정권은 애초부터 농업문제를 해결해야한다. 이 문제에 러시아의 절대 다수 대중의 운명이 밀접히 결부되어 있다.”

 

오늘 내가 강연하는 10월 혁명에 대한 이론이 즉흥적으로 나온 것이 아니며 사태가 다 지나간 후 압력을 받아 나온 것도 아니라는 증거를 위의 인용문들이 말해주고 있다. 정치적 예측을 담은 위의 내용들은 10월 혁명이 발발하기 오래 전에 이미 제출되었다. 일반적으로 이론은 사태의 과정을 예측하고 여기에 목적 의식적 영향을 미칠 때만 가치가 있다. 사회적 역사적 지향의 무기로 맑스주의가 한없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강연의 물리적 한계로 인해 위에서 인용한 문장들에 덧붙여 좀더 풍부한 내용들을 제시할 수 없어 아쉬울 뿐이다. 따라서 1905년부터 진행된 나의 활동을 간단히 소개한 것에 만족하겠다.

당면한 임무의 측면에서 러시아 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이다. 그러나 러시아 자본가 계급은 반혁명적이다. 따라서 노동계급을 통해서만 혁명은 승리할 수 있다. 그러나 승리한 노동계급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강령에 혁명을 제한시키지 않는다. 계속 전진하여 사회주의 강령을 실현한다. 러시아 혁명은 사회주의 세계혁명의 첫 단계이다.

이것이 1905년 내가 정식화한 연속혁명론이며 그때 이래로 “트로츠키주의”라는 이름으로 신랄하게 비판받았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위의 내용은 이 이론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이 이론의 나머지 부분을 이렇게 언급하는 것이 아주 적절할 것이다:

“현재의 생산력은 일국적 한계를 이미 오래 전에 넘어섰다. 일국의 국경 안에서는 사회주의체제의 현실성이 상실된다. 고립된 노동자국가의 경제적 성과가 아무리 대단해도 “일국 사회주의” 강령은 소부르주아 유토피아에 지나지 않는다. 유럽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그리고 이후 세계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만이 진정 조화로운 사회주의체제의 장이 될 수 있다.”

혁명의 진행에 의해 이 이론의 올바름이 입증된 지금 이 이론을 폐기할 이유는 더욱 없다.

 

10월 혁명의 전제조건

지금까지 말한 것에 비추어 파시스트 저술가 말라파르테의 주장은 기억할 가치가 전혀 없다. 그는 전략으로부터 독립적이며 모든 경우에 적용될 수 있는 봉기에 대한 기술적 처방(전술)을 내가 창조했다고 주장했다. 이 형편없는 쿠데타 이론가의 이름이 쿠데타의 귀재와 다른 것이 다행스럽다. 어느 누구도 말라파르테를 보나빠르뜨와 혼동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1917년 11월 7일의 무장봉기가 아니었다면 소비에트체제는 지금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봉기는 하늘에서 저절로 떨어지지 않는다. 10월 혁명의 승리를 위해서는 일련의 역사적 전제조건들이 필요했다:

“귀족, 왕정, 관료집단 등 구 지배계층의 부패. 인민 대중에 토대를 두지 않은 러시아 자본가 계급의 정치적 허약성. 농업문제의 혁명적 성격. 피억압 민족문제의 혁명적 성격. 노동계급에게 가해진 상당한 사회적 책무. 이러한 유기적 전제조건에 매우 중요한 관련 조건들을 부가해야 한다. 1905년 혁명은 위대한 학교였으며 레닌의 말을 빌리면 1917년 혁명의 ‘총 예행연습’이었다. 혁명 시기에 노동계급의 대체할 수 없는 공동전선체인 소비에트가 1905년 처음으로 수립되었다. 제국주의 전쟁은 모든 모순들을 더욱 격화시켰다. 그리고 후진적 대중을 마비상태에서 깨어나게 만들었다. 이렇게 거대한 규모의 재앙이 준비되었다.”

 

볼세비키당

그러나 이러한 조건들은 혁명 발발 당시 충분히 존재했는데 노동계급 혁명의 승리를 위해서는 아직도 부족했다. 이 승리를 위해서는 볼세비키당의 존재라는 한가지 조건이 더 필요했다.

혁명의 조건들을 순서대로 나열하고 있는데 이 순서는 논리적 연관에 따른 것이다. 볼세비키당이 가장 덜 중요해서가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자유부르주아는 정권을 장악할 수 있으며 실제로 자신이 전혀 참여하지 않은 투쟁의 결과 두 번 이상 권력을 잡았다. 권력장악을 위해 대단히 좋은 기관을 이들은 가지고 있다. 그러나 노동 대중은 입장이 다르다. 이들은 오랫동안 주는 법은 알았어도 갖는 법은 알지 못했다. 이들은 노동에 종사한다. 그리고 한계에 이를 때까지 참고 견딘다. 희망한다. 그리고 결국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들고일어나 투쟁한다. 그리고 죽는다. 다른 세력에게 승리를 가져다주고 배반당한다. 절망에 빠져 고개를 늘어뜨린 후 다시 노동에 종사한다. 이것이 모든 사회체제에서 이어져온 인민 대중의 역사이다. 자기 손에 권력을 확고히 잡으려면 노동계급은 정당이 있어야한다. 이 정당은 사상의 명확성과 혁명적 결의에서 다른 정당들을 훨씬 추월한다.

볼세비키당은 두 번 이상 인류 역사상 가장 혁명적인 정당이라고 묘사된 바 있다. 이 평가는 완전히 정당하다. 이 정당은 러시아 현대역사의 역동성을 있는 그대로 몸에 지니고 있는 살아있는 정당이다. 짜르체제의 타도는 오랫동안 경제와 문화 발전의 필요조건이라고 인식되어왔다. 그러나 이 임무를 완수할 충분한 역량이 없었다. 자본가 계급은 혁명을 두려워했다. 지식인들은 농민이 봉기하도록 선동하였다. 자신의 고통과 목적을 일반화할 능력이 없었던 농민은 지식인들의 호소를 듣는 중 마는 둥 했다. 그러자 지식인들은 폭탄으로 스스로 무장했다. 이 투쟁에 한 세대 전체가 허비되었다.

1887년 3월 1일 알렉산드르 울리아노프는 거대한 테러 음모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알렉산드르 3세에 대한 암살 기도는 실패로 끝났다. 그와 다른 음모자들은 처형되었다. 폭탄 제조가 혁명 계급을 대신했는데 결국 처절히 실패했다. 가장 영웅적인 지식인도 대중이 없으면 전혀 힘을 발휘할 수 없다. 후에 레닌이 된 울리아노프의 동생 블라디미르는 러시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이다. 그는 인민주의자들의 투쟁과 정치적 결론을 직접 느끼면서 성장했다. 아주 어린 청년기부터 그는 맑스주의의 반석 위에 자신을 위치시키고 노동계급에게 얼굴을 향했다. 잠시도 농촌 마을에 눈을 떼지 않은 채 그는 노동자들을 통해 농민에게 다가가는 길을 찾았다. 혁명 선배들로부터 자기희생의 능력과 끝을 보려는 적극성을 물려받은 그는 어린 나이부터 새로운 지식인과 선진노동자 세대의 혁명 스승이 되었다. 파업, 시가전, 감옥, 유형지 등에서 노동자들은 필요한 훈련을 받았다. 이들에게는 절대주의의 암흑기에 자신의 역사적 임무를 밝혀줄 맑스주의의 등불이 필요했다.      한편 1883년 해외 망명자들 가운데에서 최초의 맑스주의 그룹이 등장했다. 1889년 비밀회합에서 러시아사회민주주의노동자당이 선포되었다. 당시 우리는 모두 서로를 사회민주주의자라고 불렀다. 1903년 볼세비키와 멘세비키가 분열했고 1912년 볼세비키 분파는 마침내 독자적인 정당이 되었다.

1905년부터 1917년까지 12년간 일어난 사건들과 투쟁들을 통해 볼세비키들은 사회의 계급 관계를 인식하는 방법을 배웠다. 이들은 주도성과 복종을 동시에 실천할 능력이 있는 그룹들을 교육시켰다. 이들의 혁명적 행동의 규율은 사상의 통일, 공동투쟁의 전통, 단련된 지도부에 대한 신뢰에 기초하고 있었다.

이것이 1917년 볼세비키당의 성격이었다. 공식 “여론”과 지식인 언론은 종이호랑이의 포효로 이 정당을 경멸했다. 이에 아랑곳 할 이유가 없었던 볼세비키들은 대중운동에 자신을 적응시켰다. 노동자들이 밀집한 공장과 병사들이 밀집한 연대를 확실히 장악했다. 더욱 많은 농민 대중이 이들에게 다가왔다. “국민”이 특권층이 아니라 노동자 농민 등 인민 대다수를 의미한다면 볼세비키당은 1917년에 러시아의 진정한 국민정당이 되었다.

1917년 9월 레닌은 몸을 숨기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가운데에서도 그는 “위기는 무르익었다, 봉기의 시간이 다가왔다”고 신호를 보냈다. 그는 옳았다. 전쟁, 토지, 자유의 문제에 직면한 지배계급은 빠져 나올 수 없는 난관에 봉착했다. 부르주아 계급은 확실히 이성을 상실했다. 소위 민주정당들이라는 멘세비키와 사회혁명당은 제국주의 전쟁을 지지하고 부르주아 계급과 봉건소유 계급들에게 양보와 화해를 제시했다. 이 결과 이들은 그나마 대중이 자신들에게 가졌던 신뢰를 몽땅 잃어버렸다. 각성한 군대는 제국주의의 이익을 위해 전투를 계속 하기를 거부했다. 민주정당들의 충고를 무시하고 농민은 지주들을 영지에서 몰아내 버렸다. 변방의 피억압 민족들은 뻬쩨르부르그 관료들에 저항해 들고 일어섰다. 가장 중요한 노동자 병사 소비에트에서 볼세비키는 다수파가 되었다. 궤양은 확실히 도졌다. 수술 칼로 이것을 잘라내야 했다.

이러한 사회적 정치적 조건들 속에서만 봉기는 가능했다. 그리고 불가피했다. 그러나 봉기를 장난 삼아 할 수는 없다. 수술 칼을 가지고 정신없이 설쳐대는 외과의사에게 불행이 있을 지어다! 봉기는 기예이다. 나름의 법칙과 규칙들을 따라야 한다.

볼세비키당은 냉철한 계산과 열정적인 결의로 10월 혁명의 현실에 직면했다. 이 때문에 희생자가 거의 없이 권력을 장악했다. 승리한 소비에트를 통해 볼세비키당은 지구의 6분의 1을 차지하는 나라의 지도세력이 되었다.

지금 청중 여러분 대다수는 아마 1917년의 정세에 관심을 갖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더 좋은 일이다. 젊은 세대 앞에는 언제나 쉽지는 않겠지만 흥미로운 많은 것들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청중 가운데 구세대는 볼세비키당의 권력 장악이 어떤 반응을 촉발시켰는지 잘 기억할 것이다. 신기한 사건, 오해로 일어난 사건, 스캔들 그리고 대부분 여명의 햇살과 함께 사라질 악몽으로 받아들였다. 이 정권은 24시간, 일주일, 한달, 아니면 일년을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기한은 끊임없이 연장되었다. 전세계 지배자들 모두는 최초의 노동자국가에 대해 무장했다. 내전이 부추겨지고 군사적 개입이 다시 또다시 반복되었다. 국경이 봉쇄되었다. 이렇게 일년 일년이 지나갔다. 이제 역사는 소비에트 권력을 15년째 기록하고 있다.

 

10월 혁명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나의 반대자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그렇다. 10월의 모험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내용이 알차다는 것이 드러났다. 어쩌면 ‘모험’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많은 희생에 비해 얻어진 것이 무엇인가? 이 질문은 완전히 정당하다. 혁명 전야에 볼세비키들이 약속한 휘황찬란한 것들은 성취되었는가?”

이 가상의 반대자에게 대답하기 전에 이 질문은 전혀 새롭지 않다는 점을 언급하고자한다. 이런 종류의 질문은 10월 혁명이 승리하자마자 곧바로 제기되었다.

혁명이 진행되는 동안 뻬쩨르부르그에 있었던 프랑스의 언론인 끌라 아네(Clad Anet)는 1917년 10월 27일에 이미 이렇게 기사를 썼다:

“최대강령주의자들(프랑스인들은 당시 볼세비키들을 이렇게 불렀다)은 권력을 잡았으며 위대한 날이 당도했다. 마침내 그렇게 오랫동안 우리에게 약속되었던 사회주의 낙원이 실현되는 것을 보겠다고 나는 스스로에게 말한다… 멋진 모험이다! 나는 특권을 누리고 있다!”

이런 식으로 그는 글을 계속 써내려 갔다. 혁명에 대한 이 아이러니컬한 경례에는 혁명에 진정한 증오심이 깊이 배어있다! 동궁이 점령된 바로 그날 아침 이 반동 언론인은 낙원으로 가는 입장권을 서둘러 자기 것이라고 주장했다. 혁명 이후 지금까지 15년이 흘렀다. 그러나 지금도 소련은 모두가 복지를 누리는 낙원과는 전혀 닮은 점이 없다. 이 사실에 대해 우리의 적들은 악의에 찬 기쁨을 은근히 느끼고 있다. 그렇다면 왜 혁명을 구태여 일으켰으며 왜 그 허다한 희생을 치렀는가?

물론 소비에트 정권의 모순, 난관, 오류, 부족함 등은 나도 익히 알고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것들을 말이나 글로 결코 숨기지 않았다. 보수정치와 달리 혁명정치는 은폐와 기만을 배격한다. 이것을 나는 그 동안 믿어왔고 지금도 믿고있다. “진실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이 노동자국가의 최고의 원칙이 되어야한다.

그러나 창조적인 활동과 마찬가지로 비판에서도 안목과 전망이 필요하다. 특히 거대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주관주의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개인적 변덕에야 시간이 필요할 리가 없다. 그러나 과업이나 임무에는 그에 해당되는 시간이 주어져야한다. 15년! 한 인간의 일생에서 이 시간은 얼마나 긴가! 이 시간동안 우리 세대의 적지 않은 인물들이 무덤으로 갔으며 남아있는 자들은 수많은 새치를 머리에 이고 있다. 그러나 이 15년의 세월은 한 인민의 삶에서는 얼마나 하잘 것 없는 시간인가! 그리고 역사의 시계에서는 단 일분에 지나지 않는다.

자본주의는 중세 봉건주의에 대항하여 자신을 확립하고 과학과 기술의 수준을 높이고 철도를 건설하고 전기를 이용하는데 수백 년이 걸렸다. 그리고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인류는 이 자본주의 때문에 전쟁과 위기의 지옥으로 밀쳐졌다.

그런데 자본주의를 신봉하는 사회주의의 적들은 사회주의에게 모든 현대적인 개선을 갖춘 지구상의 낙원을 건설하는데 15년의 시간 여유 밖에 주지 않는다. 15년만에 기적을 이루겠다고 약속한 사람들은 우리가 아니다.

거대한 변화의 과정들은 이에 걸 맞는 규모의 시간이 필요하다. 사회주의 사회가 성경에 나오는 낙원과 같을 지는 모르겠다. 별로 그럴 것 같지 않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소련이 아직도 사회주의를 성취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소련은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전환되는 이행기를 경과하고 있으며 온갖 모순들을 가득 가지고 있다. 또한 과거의 후진성을 물려받아 짓눌려 있으며 더욱이 자본주의 국가들의 적대적인 압박을 받고 있다. 10월 혁명은 새로운 사회의 원칙들을 천명했다. 소비에트 공화국은 이 새로운 사회 실현의 첫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에디슨이 맨 처음 만든 전구는 성능이 형편없었다. 우리는 미래를 조망하는 방법을 배워야한다.

그러나 살아있는 인간들에게 비오듯 쏟아지는 불행은 얼마나 처참한가! 혁명의 결과는 그 희생을 정당화시킬까? 그러나 이것은 아무런 결실이 없는 허망한 질문에 불과하며 철저한 말장난에 불과하다. 마치 역사 과정이 대차대조표로 계산될 수 있는 모양이다! 인간 생존의 난관과 고통을 생각하면 차라리 이렇게 질문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 도움이 되는가?” 이 질문에 대해 독일의 시인 하이네(Heine)는 어느 글에서 이렇게 썼다: “그리고 바보들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기대한다.”… 인간의 운명에 대한 이 우울한 생각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태어났으며 자식을 낳고 있다. 예를 찾을 수 없는 전세계적 위기가 닥쳤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자살율은 미미하기 그지없다. 인간은 결코 자살에 의존하지 않는다. 짐이 너무 무거워 참을 수 없을 때는 혁명으로 살길을 모색한다.

더욱이 사회의 격동으로 희생된 사람들에 대해 분노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대개의 경우 제국주의 전쟁에 노동자와 인민을 총알 밥이 되게 만든 작자들이다. 아니면 최소한 이 전쟁을 미화하거나 인정한 작자들이다. 이제 우리가 질문할 차례이다: “전쟁은 스스로를 정당화시켰는가? 그것이 우리에게 준 것이 무엇이며 가르쳐준 것이 무엇인가?”

프랑스 대혁명에 반대하는 11번째 팜플렛에서 반동 역사가 이뽈리트 떼느(Hippolyte Taine)는 악의에 찬 기쁨으로 자꼬벵 독재시기 이후에 겪은 프랑스 인민의 고통들을 묘사하고 있다. 혁명으로 가장 고통받은 계층은 도시의 최하층 계급들로서 이들은 “평민(쌍뀔로뜨)”으로 혁명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이제 이들과 이들의 부인들은 추운 밤 내내 생필품 줄에 서서 기다리다 배급도 받지 못한 채 빈손으로 난로 불이 다 꺼진 집으로 돌아왔다. 혁명이 일어난 지 10년째 되는 해에 빠리는 혁명 전보다 더 빈곤했다. 떼느는 꼼꼼히 선택하여 자기 멋대로 편집한 사실들을 가지고 혁명에 파괴적인 판결을 내린다. 평민들은 독재자가 되기를 원했고 스스로 고통을 자초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보다 더 무미건조한 도덕적 설교는 없을 것이다. 첫째, 혁명이 나라를 고통으로 몰아넣었다면 인민을 혁명으로 몰아간 지배계급들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다. 둘째, 프랑스 대혁명은 빵집 앞에 배고픈 자들의 줄만 만들지 않았다. 현대 프랑스 전체 그리고 많은 측면에서 현대 문명 전체는 프랑스 혁명의 목욕 세례를 받고 탄생했다!

지난 세기 60년대 미국 남북전쟁의 과정에서 5만 명이 살해되었다. 이 희생들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미국의 노예소유자들 그리고 이들과 함께 행진했던 영국의 지배계급들은 이 질문에 대해 이렇게 대답한다: “아니다!” 흑인들과 영국 노동계급은 이렇게 대답한다: “물론이지.” 그리고 인류 전체의 관점에서는 조금의 의심도 가질 수 없다. 남북전쟁을 통해 무한한 실용적 진취성, 합리화된 기술, 경제적 활력 등으로 무장한 현대 미국이 탄생했다. 미국의 이러한 업적들로부터 인류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것이다.

10월 혁명은 이전의 어떤 혁명보다 사회의 소유관계에 깊이 침투했다. 따라서 삶의 모든 영역에서 자신의 창조적인 결과를 드러내려면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거대한 변화의 일반적 방향은 벌써 명확하게 이해된다: 소비에트 공화국은 자본가들의 비난에 대해 머리를 숙이거나 변명을 늘어놓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

인류 발전의 관점에서 이 새로운 체제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렇게 질문해야한다: “사회 진보는 어떻게 표현되고 측정될 수 있는가?”

 

10월 혁명에 대한 결산

가장 깊고 가장 객관적이며 가장 논란의 여지가 없는 기준은 이렇게 말한다: 진보는 사회적 노동생산성의 성장으로 측정된다. 이 각도에서 보면 10월 혁명에 대한 평가는 이미 경험적으로 내려졌다. 사회주의 생산조직 원리는 역사상 최초로 짧은 시간에 전대미문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능력을 입증시켰다.

정교하지 않은 지수로 표현된 러시아 산업발전의 곡선은 다음과 같다. 전쟁 전의 1913년을 기준 지수인 100으로 잡으면 내전이 최고조에 달한 1920년은 산업의 최저점으로 지수가 25 밖에 되지 않는다. 즉 전쟁 전 생산의 4분의 1에 불과하다. 1925년에 이 지수는 75 즉 전쟁 전 생산의 4분의 3이었다. 1929년에는 약 200, 1932년에는 300이다. 즉 전쟁 전보다 산업생산이 3배나 되었다.

국제 지수와 비교하면 이 상황은 더욱 놀랍다. 1925년에서 1932년까지 독일의 산업생산은 1.5배 하락했으며 미국의 경우 2배가 하락했다. 반면 소련에서는 4배가 증가했다. 이 수치들 자체가 사회주의 생산의 우월성을 입증한다.

나는 소련 경제의 부정적인 측면들을 부인하거나 은폐할 의도가 없다. 산업지수의 결과들은 농업의 불리한 발전 때문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이 분야는 아직까지 사회주의 생산 방식으로 상승하지 못했으며 동시에 제대로 준비도 갖추지 못한 채 강제로 집단화가 되었다. 기술적이고 경제적으로가 아니라 관료적으로 농업집단화가 이루어졌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나 시간 관계상 이 강연에서 다룰 수는 없다.

위에서 제시한 지수들은 중요한 제한 조건이 또 하나 필요하다. 소련의 공업화의 논란의 여지가 없으며 나름대로 놀라운 결과들은 경제 분야들의 상호 적응, 역동적인 균형 그리고 이 결과 생산능력의 관점에서 평가되어야한다. 이 점에서는 커다란 난관과 후퇴가 불가피하다. 제우스신의 머리에서 미네르바 여신이 또는 바다의 거품에서 비너스 여신이 탄생하는 것처럼 5개년 계획으로부터 완성된 사회주의가 탄생하지는 않는다. 사회주의가 제대로 건설되려면 수십 년간의 지속적 작업, 오류, 교정, 재조직 과정이 필요하다. 더욱이 사회주의 건설은 그 본성상 국제적 차원에서만 완성될 수 있다. 지금까지 성취된 결과들에 대한 가장 유리한 결산조차도 예비 계산의 부정확함, 계획의 결함, 방향의 오류 등만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사회주의 방식의 도움으로 과거에 이룩되지 못한 수준으로 집단적 노동 생산성이 향상될 수 있다는 가능성만큼은 경험적으로도 확고히 증명되었다. 세계 역사적 중요성을 지닌 이 성과는 어느 누구도 우리에게서 빼앗을 수 없다.

지금까지 말한 것을 보아서 10월 혁명이 러시아를 문명의 몰락으로 인도했다는 불평들에 대해서는 시간을 할애할 이유가 조금도 없다. 이것들은 심기가 불편한 지배계급의 저택과 살롱에서 나오는 소리에 불과하다. 노동계급의 혁명으로 타도된 중세적 부르주아 “문명”은 딸미(Talmi)식으로 장식된 야만상태에 불과하다. 이것은 러시아 인민이 누릴 수 없었지만 그 동안 존재했던 인류의 보물창고에 새로운 것을 거의 부가하지 못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반동 망명가들에 의해 그렇게도 한탄되고 있는 이 찬란했던 러시아 문명에 대해서조차 질문을 정확히 해야한다. 어떤 의미에서 이 문명이 파괴되었는가? 단 한가지 의미 밖에 없다: 문명의 보물창고에 대한 극소수의 독점이 폐기되었다. 구 러시아 문명의 모든 가치 있는 문화유산들은 그대로 보존되어있다. 볼세비키 “흉노족”은 정신적 업적이나 예술 창조물 어느 것도 파괴하지 않았다. 이와 반대로 이들은 면밀하게 인간 창조력의 기념물들을 수집하여 모범적으로 진열했다. 왕정, 귀족, 부르주아 계급의 문화는 지금 역사 박물관의 문화가 되었다.

인민은 이 박물관들을 열심히 방문한다. 그러나 그 속에서 살지는 않는다. 이들은 배우고 건설한다. 10월 혁명은 러시아 민족과 짜르체제 러시아에서 살고 있던 수십 개 민족들에게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가르쳤다. 이 사실 하나 만으로도 혁명 후의 문명은 과거 러시아 매음굴 문명 전체보다 비교할 수 없이 더 높은 수준에 도달했음을 보여준다.

10월 혁명은 선택된 극소수가 아니라 인민 모두를 위한 새로운 문명의 기초를 마련했다. 이것을 전세계 대중은 느끼고 있다. 따라서 이들이 짜르 체제에 대해 품었던 증오심만큼이나 열렬하게 소련에 공감을 보내는 것도 당연하다.

인간의 언어는 사건들에 대해 이름을 붙이는 것 뿐 아니라 사건들을 평가하는 데에 있어서도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귀중한 도구이다. 이것은 우연적이고 일화적이며 인공적인 것을 걸러내고 핵심적이고 특징적이며 아주 중요한 것들을 흡수한다. 문명국 언어들이 러시아 역사의 두 시대를 구별하는 현상을 세밀히 주시해볼 필요가 있다. 귀족 문화는 짜르, 코작, 유태인 학살, 나가이카(nagaika) 등과 같은 야만적인 어휘들을 유행시켰다. 여러분들은 이 단어들과 그 의미들을 알고 있다. 10월 혁명은 세계의 언어들에 볼세비키, 소비에트, 콜호즈(kolkhoz), 고스플란(Gosplan), 피아틸레카(Piatileka) 등을 도입시켰다. 여기서 실용 언어가 역사를 판결하는 대법원의 역할을 맡고 있지 않은가!

즉시 측정하기는 가장 어렵지만 가장 의미심장한 혁명의 의미는 혁명이 인민의 성격을 형성하고 단련시킨다는 데에 있다. 러시아 인민이 느리고 수동적이며 우울하고 신비스럽다는 생각은 널리 퍼져있으며 우연히 생긴 생각도 아니다. 과거 역사에 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서방 여러 나라들에서 혁명에 의해 새로 형성된 러시아 인민의 성격은 충분히 고려되지 않고 있다. 이것은 어떻게 할 수 없는 노릇이 아닌가?

삶을 경험한 모든 사람은 자신이 알고 있는 어떤 청년에 대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이 청년은 예민하고 서정적이고 너무 상처받기 쉬운 성격이었는데 이후에 더 강인하고 더 균형감각을 가지고 있으며 좀처럼 인식되지 않는 강력한 도덕적 자극을 받아 전혀 다른 인간이 된다. 혁명에 의해 한 나라의 발전에도 이러한 도덕적 변화가 일어난다.

전제에 대한 2월 봉기, 귀족에 대한 투쟁, 제국주의 전쟁에 대한 투쟁, 평화와 토지와 민족적 평등을 위한 투쟁, 10월 봉기, 부르주아 계급과 그 지지 정당들의 타도, 5천 마일 전선에서 벌어진 3년간의 내전, 국경 봉쇄와 기아와 고통과 유행병의 수년, 긴장된 경제재건과 새로운 난관들과 과거의 청산들로 이루어진 수년 —- 이것들은 힘들지만 훌륭한 학교가 된다. 무거운 망치는 유리를 박살내지만 강철을 벼린다. 혁명의 망치는 인민의 성격에 강철과 같은 강인함을 부여한다.

혁명 직후 분노에 찬 짜르의 장군 잘외스키는 이렇게 적었다: “짐꾼이나 경비원이 갑자기 대법원 판사가 된다. 병원의 조수가 병원장이 된다. 이발사가 관리가 된다. 상병이 총사령관이 된다. 일용노동자가 시장이 된다. 자물통 만드는 자가 공장주가 된다. 누가 이 사실을 믿겠는가?”

“누가 이 사실을 믿겠는가?” 그러나 믿을 수밖에 없었다. 상병이 장군을 패배시켰다. 전에 일용노동자였던 시장이 구 관료들의 저항을 분쇄했다. 마차에 윤활유를 치는 일꾼이 수송체계를 정상화시켰다. 자물통 만드는 사람이 공업장비를 작동시켰다. 이런 일들이 벌어질 때 이들은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누가 이 사실을 믿겠는가?” 믿지 않으려고 애를 써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혁명의 시기 내내 소련의 인민 대중은 대단한 인내심과 끈기를 발휘했다. 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외국인들은 과거의 습관에 따라 러시아 인민의 “수동적 성격”을 들먹인다. 얼마나 시대착오적인 발상인가! 혁명 대중은 궁핍을 참을성 있게 견디지만 결코 수동적으로 견디지는 않는다. 자신의 손으로 이들은 더 나은 미래를 창조하고 있으며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렇게 하려고 결심했다. 이 참을성 있는 대중에게 적대 계급이 자신의 의지를 강요해 보아라!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큰 코 다칠 것이니까.

 

10월 혁명과 이 혁명의 역사적 위치

강연을 마치기에 앞서 러시아 역사 뿐 아니라 세계역사에서 10월 혁명의 위치를 확인해보겠다. 1917년 8개월 동안 두 역사의 곡선이 교차한다. 지난 세기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뿐 아니라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에서 수행된 거대한 투쟁들이 뒤늦게 러시아에 2월 혁명으로 메아리쳤다. 2월 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의 연속선상에 위치한다. 10월 혁명은 노동계급의 권력을 선포하고 개막했다. 러시아에서 세계 자본주의는 처음으로 거대한 패배를 맛보았다. 사슬은 가장 약한 고리에서 끊어졌다. 그러나 끊어진 것은 고리 뿐이 아니라 사슬이었다.

세계체제로서의 자본주의는 이미 시효가 지났다. 그런데도 목숨을 부지하고 있을 뿐이다. 인간의 능력과 부의 수준을 상승시켜야할 기본적 기능을 자본주의는 이미 상실했다. 인류는 자신이 도달한 수준에서 정체할 수 없다. 생산력의 강력한 증가와 건실하고 계획에 입각한 사회주의 생산 및 분배 조직만이 모든 인류에게 품위 있는 삶을 보장할 수 있다. 그리고 동시에 인간은 자신이 운영하는 경제에 대해 귀중한 자유를 느낄 수 있다. 이 자유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첫째, 인간은 인생 대부분을 육체 노동에 바치도록 더 이상 강요되지 않는다. 둘째, 그는 자신의 등뒤에서 작동하는 맹목적이고 알 수 없는 시장의 법칙에 더 이상 종속되지 않는다. 그는 계획에 따라 콤파스를 손에 들고 자신의 경제를 자유롭게 운영한다. 사회 구조를 엑스선으로 철저히 찍고 그것의 모든 비밀을 파헤치고 그것의 모든 기능을 인간의 이성과 집단적 의지에 복종시키는 것이 이제 경제운영의 목표가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회주의는 인류 역사 발전의 새로운 단계임에 틀림없다. 맨 먼저 돌도끼로 무장한 인류의 조상에게 자연은 비밀스럽고 적대적인 세력의 음모를 의미했다. 이때 이후 실용 기술과 함께 자연과학은 자연의 가장 깊숙한 비밀도 전부 파헤쳤다. 전기 에너지를 통해 물리학자는 원자의 핵을 판단한다. 과학이 연금술사들의 과업을 쉽게 해결하여 거름을 금으로 금을 거름으로 변화시킬 때가 그리 멀지 않았다. 자연이라는 악마들과 복수의 여신들이 판치던 곳에서 이제 인간의 근면한 의지가 좀더 용기 있게 판을 친다.

그러나 자연과 열심히 싸워나가면서 인간은 마치 벌이나 개미처럼 맹목적으로 다른 인간들과의 관계를 만들어나갔다. 천천히 그리고 전진과 지체를 반복하면서 그는 인간사회의 문제들에 접근했다.

종교개혁은 죽은 자들의 전통이 지배한 종교의 영역에서 부르주아 개인주의의 첫 승리를 가져다주었다. 이를 통해 교회에도 비판적 사고가 발전하고 이것이 국가로 이전되었다. 절대주의와 중세 계급들과의 투쟁에서 탄생한 인민주권과 인간적 시민적 권리 사상은 더욱 강해졌다. 이렇게 해서 의회체제가 등장했다. 비판적 사고는 정부 행정 영역에 침투했다. 민주주의의 정치적 합리주의는 혁명적 부르주아 계급의 최상의 업적이었다.

그러나 자연과 국가 사이에는 경제생활이 존재한다. 과학 기술은 흙, 물, 불, 공기 등 4원소의 압제에서 인간을 해방시켰다. 그러나 곧 자신이 압제를 행하면서 인간을 가두었다. 인간은 자연의 노예 상태를 면했으나 기계의 노예 그리고 더 나쁘게 수요와 공급 법칙의 노예가 되었다. 대양의 바닥까지 잠수하고 성층권까지 올라가고 지구의 정반대에서 보이지 않는 전파를 통해 대화를 나누는 이 자랑스럽고 용감한 자연의 지배자는 자기 경제의 맹목적 힘의 노예가 되었다. 현재 세계 경제의 위기는 이 사실을 특히 비극적 방식으로 증언하고 있다. 통제되지 않는 시장 법칙을 합리적 계획으로 대체하고 생산력을 인류의 필요에 조화롭고 순종적으로 기여하도록 강제하는 것 — 이것이 이 시대의 역사적 과업이다. 오직 이 새로운 사회적 기초를 통해서만 선택받은 극소수가 아닌 모든 남녀 시민이 자신의 피곤한 팔다리를 뻗고 사상의 영역에서 완전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인류의 미래

그러나 이것이 인간이 도달할 종착역은 아니다. 아니다, 이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하다. 인간은 자신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부른다. 그가 이렇게 주장하는 데에는 근거가 있다. 그러나 지금의 인간이 호모사피엔스의 최후의 최고의 대표라고 주장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그는 결코 완성되지 못했다. 생물적으로는 너무 일찍 태어나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아야하고 생각도 유약하며 새로운 유기적 균형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인류는 두 번 이상 마치 산맥의 정상처럼 동시대인 위에 우뚝 솟은 생각과 행동의 거인들을 배출해냈다. 인류는 아리스토텔레스, 셰익스피어, 다윈, 베토벤, 괴테, 맑스, 에디슨, 레닌에 대해 자부심을 가질 권리가 있다. 그러나 이 거인들은 왜 이리도 드물게 배출되었는가? 무엇보다도 이들은 거의 예외 없이 중간 계급과 상층 계급 출신이기 때문이다.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인민의 억압받은 심연 깊숙이 천재성의 불똥은 불꽃으로 활활 타오르지도 못하고 질식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의 창조, 개발, 교육 과정들은 이론과 실천에 의해 인식되고 의식과 의지에 종속되지 않은 채 우연에 의해 지배되어왔기 때문이다.

인류학, 생물학, 생리학, 심리학은 인간의 신체와 정신을 최상의 수준으로 완성시키고 발전시킬 수 있게 산더미 같은 자료들을 축적해 놓았다.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마술 같은 손으로 창조된 정신분석학은 시적으로 “영혼”이라고 부르는 우물의 뚜껑을 열어놓았다. 그리고 무엇을 밝혔는가? 우리의 의식은 암흑 같은 심령의 힘이 작용해서 이루어진 아주 하잘 것 없는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혔다. 박식한 잠수부들이 대양의 바닥까지 내려가 신비로운 물고기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놓는다. 인간의 사고는 자신의 심령의 근원의 바닥까지 내려가 영혼의 가장 신비로운 원동력을 규명하여 이것을 이성과 의지에 종속시켜야한다.

일단 자기가 창조한 사회의 무질서한 힘을 정복한 후, 인간은 자기 자신을 화학자의 절굿공이와 증류기의 실험 대상으로 올려놓을 것이다. 최초로 인간은 자기 자신을 실험 재료 또는 기껏해야 신체적 심리적 반(半)완성품으로 간주할 것이다. 사회주의는 필요의 영역에서 자유의 영역으로의 비약이 될 것이다. 조화의 부족과 온갖 모순에 시달리는 지금의 인간은 스스로 새로운 그리고 더 행복한 족속이 될 길을 열어 재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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