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혁명사』 제 1권 <상편>

by 볼셰비키 posted Oct 19,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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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혁명사』 제 1권 <상편>

 

 

 

<차례>

 

저자 서문

 

1장: 러시아 사회발전의 특이성

 

2장: 전시의 차르체제

 

3장: 노동계급과 농민

 

4장: 차르와 황후

 

5장: 궁정 쿠데타에 대한 논의

 

6장: 구체제 멸망의 격심한 고통

 

7장: 5일간(1917년 2월 23일부터 27일까지)

 

8장: 누가 2월 봉기를 지도했는가?

 

9장: 2월 혁명의 역설

 

10장: 새로운 권력




저자 서문

 

1917년 2월 말까지 러시아는 여전히 로마노프 왕조의 나라였다그러나 8개월 후 볼셰비키들은 국가권력을 장악했다. 1917년이 시작되었을 때만 해도 이들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이들의 지도자들이 권좌에 올랐을 때 이들은 국가반역죄로 기소된 상태였다모든 것이 이렇게 순식간에 바뀐 사례는 인류 역사에서 찾아볼 수는 없을 것이다특히 1억 5,000만이나 되는 나라에서 이런 일이 있어났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놀랍다. 1917년의 사건들에 대해 우리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건 간에, 그것이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다른 모든 역사 서술과 마찬가지로 혁명의 역사를 서술하는 것도은 어떤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가를 말하는 것이다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서술을 제대로 하자면 어떤 일이 왜 일어났으며 왜 사건이 그렇게 전개되어야만 했는지 이유와 필연이 명확히 설명되어야 한다역사적 사건들을 일련의 모험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또한 미리 정해진 도덕률에 따라 꿰맞추어서도 안 된다. 그 사건들은 법칙에 따라 이루어지며, 이 법칙을 밝히는 것이 역사 서술자의 임무다.

 

역사적 사건에 대중이 직접 개입하는 것이것이야말로 혁명의 가장 명확한 특징이다평상시에는 왕정이나 민주정, 국가가 인민 위에 군림한다그리고 역사는 정치 전문가들 즉 왕각료관료의원, 문필가 등에 의해 창조된다그러다 대중이 구체제를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결정적인 순간이 온다그러면 그들은 자신들이 정치의 각축장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장벽들을 부순다그리고 기존의 대표기구들을 쓸어없애버리고, 자신들의 손으로 새로운 체제의 기초공사를 시작한다이것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도덕가들의 판단에 맡겨두자다만 우리는 사건의 객관적 과정에 의해 주어진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것이다우리에게 혁명의 역사는, 대중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창조하는 영역으로 힘 있게 들어서는 역사다.

 

사회가 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면 계급들은 서로 대항하며 투쟁한다혁명의 시작과 끝 사이에 도입되는 사회의 경제적 토대와 계급적 기반의 변화들을 설명하는 것만으로는 혁명의 전개 과정을 온전히 밝힐 수 없다혁명은 순식간에 오래된 제도들을 뒤엎고 새로운 제도들을 창조한다그리고 다시 이것들을 뒤엎는다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형성되어 있던 계급들의 빠르고 강렬하고 격렬한 심리 변화에 의해 혁명 사건들의 원동력이 직접 결정된다.

 

사회는 자신의 제도들을 기계공이 연장을 바꾸는 방식으로 필요에 따라 바꾸는 것은 결코 아니다이와 반대로 사회는 자기에게 매달리는 제도들을 영원히 주어진 것으로 간주하고 그대로 받아들인다수십 년 동안 진행되는 반체제 세력의 비판은 대중의 불만을 배출시키는 안전밸브에 불과하다이것은 사회구조의 안정성을 유지하는 필요조건이다예를 들어 차르체제에 대한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세력의 비판이 원칙적으로 이와 같았다대중의 불만에 덮어 씌워진 보수주의의 멍에를 벗기고 대중을 봉기로 인도하기 위해서는 개인과 정당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전적으로 예외적인 조건들이 성립되어야 한다.

 

혁명 시기에는 대중의 견해와 정서가 급격한 변화를 겪는다이 변화는 인간 심리의 융통성과 기동성에서 나오지 않는다반대로 깊이 뿌리 박힌 보수주의 심리로부터 나온다새로운 객관적 상황들이 재앙이 되어 인민의 머리 위로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바로 그 순간까지 인간의 사상과 관계들은 고질적으로 객관적 상황에 뒤쳐져 있다바로 이 상황이 혁명 시기에 볼 수 있는 사상과 열정의 폭발적 운동을 창조한다이것은 경찰관의 눈에는 "선동가들"의 활동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그러나 실제로는 거대한 것을 배후에 깔고 있다.

 

대중은 사회 재건의 준비된 계획을 가지고 혁명에 돌입하지 않는다다만 구체제를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날카로운 감각으로 혁명에 돌입할 뿐이다계급 대중의 지도적 부위만이 정치 강령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도 혁명의 시험과 대중의 승인을 거쳐야한다혁명의 근본적 정치과정은 대중이 사회위기로부터 도출되는 문제들을 서서히 이해하는 데에 있다즉 연속적으로 사태의 본질을 이해하면서 대중이 적극적으로 투쟁에 나서는 데에 있다혁명의 각 단계들은 지도적 정당들의 변화에 의해서 확인되는데 정당 내의 더 과격한 분파가 항상 덜 과격한 분파를 밀치고 등장한다이것은 혁명운동의 파도가 객관적인 장애물에 부딪치지 않는 한 대중이 왼쪽으로 운동을 더욱더 압박하는 현상을 표현한다그런데 객관적 장애물이 혁명의 전진을 가로막을 때 반동이 시작된다즉 혁명 대중의 다양한 부위들이 상황 전개에 대해 실망감을 표출하고 혁명에 대한 환멸을 증대시킨다이와 함께 반혁명 세력의 입지가 강화된다최소한 이것이 과거 혁명들의 일반적 경향이다.

 

대중 자신의 정치적 과정들을 연구한 기초 위에서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정당들과 지도자들의 역할을 이해할 수 있다이들은 혁명과정의 독립적 요인은 아닐지라도 매우 중요한 요인임에 틀림없다지도 조직이 없다면 대중의 혁명 에너지는 피스톤 실린더 안에 들어가지 않은 증기처럼 산지사방으로 흩어질 뿐이다그러나 역시 원동력은 피스톤이나 실린더가 아니고 증기에게 있듯이 혁명의 원동력은 대중에게서 나온다.

 

혁명 시대에 나타나는 대중의 의식 변화를 연구하는 데 이런 저런 어려움이 등장한다이것은 당연하다억압받는 계급들은 공장군대의 막사농촌의 마을도시의 거리 등 관심이 안가는 장소에서 역사를 만든다더욱이 이들은 사물들을 글로 적는 일에 전혀 익숙하지가 않다사회적 갈등이 높은 시기에는 명상에 잠기고 반성할 여지가 거의 없다모든 뮤즈 여신들 특히 언론을 관장하는 인민 성향의 뮤즈 여신은 엉덩이가 튼튼하기는 해도 혁명이라는 썰매의 요동과 충격을 견디기 어렵다따라서 격동의 시기에는 글들이 남아나기 힘들다그러나 역사가의 상황이 가망이 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역사 기록들은 불완전하고 흩어져 있으며 우연히 여기저기에 발견된다그러나 벌어지는 사건들의 조명을 받아 이 단편적인 기록들은 숨겨진 역사과정의 방향과 리듬을 추측할 수 있게 만든다좋든 나쁘든 혁명정당은 대중 의식의 변화를 계산하여 전술을 수립한다볼셰비키주의의 역사는 이러한 계산이 거칠게나마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이 계산이 투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는 혁명 지도자에게 가능하다면 혁명이 지난 후 역사가가 이 계산을 못할 이유가 있겠는가?

 

그러나 대중의 의식이 변화하는 과정은 별개로 존재하지 않는다관념주의자들과 절충주의자들이 아무리 소동을 벌인들 의식은 객관적 조건들에 의해 결정된다러시아라는 나라그 경제와 계급들 그리고 그 국가기구를 형성한 역사적 조건 속에서 그리고 다른 국가들이 러시아에 가한 작용 속에서 2월 혁명과 10월 혁명의 전제조건들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러시아라는 후진국이 노동계급을 권력의 주인으로 올려놓은 첫 나라라는 사실은 대단히 이해하기 힘들다이 때문에 이 후진국의 특이성 즉 이 나라가 다른 나라들과 다른 점들 속에서 이 이해하기 힘든 현상을 해명해야 한다.

 

본 저서의 첫 몇 장들은 러시아 사회와 그 내부 세력들의 발전과정을 짧게나마 훑어볼 것이다이를 통해 러시아의 역사적 특이성과 이 특이성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상대적 비중이 다루어질 것이다이 첫 장들의 불가피한 도식적 서술 때문에 독자들이 이 책을 멀리하지 않기를 감히 희망한다본 저서를 계속 읽다 보면 러시아 내부 세력들을 살아 움직이는 채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본 저서는 필자 개인의 회상에 조금도 의존하지 않을 것이다혁명 과정에 필자가 참여했다 하더라도 엄격히 고증된 문서들에 기초하여 서술해야할 의무가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서술에 꼭 필요하다면 혁명 참가자인 필자는 제 3인칭으로 말할 것이다그리고 이것은 단순히 문학적 장치만이 아니다자서전이나 회고록에 불가피하게 드러나는 주관적 목소리는 역사 저서에는 인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투쟁에 참여했다는 사실 때문에 필자는 혁명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개인적으로 집단적으로 투쟁에 참여한 세력들의 심리 뿐 아니라 사건들의 내적 관련들을 필자는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입장에 있다그러나 이 혜택은 하나의 조건이 지켜질 때만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올 것이다사소한 사항이건 중요한 문제이건사실과 관련된 문제이건 행위의 동기와 정서의 문제이건필자가 자신의 기억에 의존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이 하나의 조건이다필자가 역사서술자라는 임무를 유념하는 한 이 조건이 지켜질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필자의 정치적 입장이 또 하나의 문제로 남는다그러나 필자는 혁명에 참여했을 때나 역사서술자로 있는 지금이나 똑같은 관점을 가지고 있다물론 독자는 필자의 정치적 견해를 공유할 의무가 없다이 점을 필자는 전혀 숨기지 않겠다그러나 역사서가 특정 정치적 입장을 옹호해서는 안되며 내적 기초가 탄탄한 혁명의 실제과정에 대한 묘사가 되어야 한다고 독자가 요구할 권리는 없다역사서의 지면을 통해 역사 사건들이 완벽한 필연성을 가지고 전개될 때이 때만 역사서는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 소위 역사가의 "중립성"이 필요하지 않을까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 중립성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설명해본 적이 없다혁명을 하나의 "덩어리즉 전체로 간주해야 한다는 자주 인용되는 클레망소(역자 주: Georges Clemenceau, 1841~1929년, 프랑스 제 3공화국의 수상, 1917년부터 1920년까지 수상직에 있었다제 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의 승리에 기여했으며 전후 베르사유 조약을 기초)의 말은 기껏해야 이 문제를 재치 있게 회피할 뿐이다각 세력들의 분리와 상호투쟁이 핵심인 혁명이라는 사물을 어떻게 하나의 덩어리로 간주할 수 있는가그의 경구는 부분적으로는 너무 주관이 강해 자기주장이 난무하는 역사서를 저술했던 자기 선조들이 부끄러워서 나온 것이다그리고 부분적으로는 선조들의 그늘 앞에서 당혹스러움을 느꼈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현재 프랑스의 반동적 경향의 따라서 인기 있는 역사가 중의 하나가 마들렝(Madelin)이다그는 사교계 응접실에서 하는 것처럼 조국의 근대적 탄생을 가져온 프랑스 대혁명을 비방하면서 이렇게 주장한다: "역사가는 적에게 포위 당한 도시의 성벽 위에 서서 포위 당한 쪽과 포위한 쪽을 동시에 조망해야한다." 오직 이 방식을 통해서만 "화해적인 중립성"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그러나 그의 말은 자기가 성벽에 올라서서 두 적대 진영을 바라볼 때 반동세력의 정찰병으로서만 그렇게 한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그가 과거 전쟁 중인 적대 진영들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는 것은 좋다그러나 혁명 시기에는 성벽 위에 올라서 있는 것 자체가 아주 위험하다더욱이 상황이 험악하게 돌아갈 경우 "화해적인 중립성"을 주창하는 자들은 보통 방안에 앉아서 어느 쪽이 이기는 지를 기다렸다가 이긴 쪽에 붙는 것이 보통이다.

 

진지하며 안목이 있는 독자는 이 위험천만한 중립성을 원치 않을 것이다이 중립성이라는 놈은 컵 밑바닥에는 반동적 성향의 증오심을 가득 가라앉힌 채 컵의 위쪽 부분에만 화해의 단맛을 가지고 있는 이율배반적인 놈이다현명한 독자는 차라리 과학적 양심을 원할 것이다이것은 공감과 적대감을 공개적으로 당당하게 드러낸다그리고 사실들을 정직하게 연구하고 사실들 사이의 진정한 관련들을 찾아낸다그리고 사실들의 움직임을 통해 인과법칙을 드러낸다그리고 이를 통해 독자의 지지를 구한다이것이야말로 유일하게 가능한 역사적 객관주의이며 그 자체로 충분한 역사서술 방식이다왜냐하면 역사서술자 자신의 좋은 의도는 자기만이 보증할 수 있는 반면 그의 노력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역사과정 자체의 필연법칙은 모두에게 이 서술방식의 진실성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본 저서를 위해 동원한 자료는 여러 정기간행물신문잡지회고록보고서 등이다이것들은 부분적으로는 원고의 형태로 존재하지만 대다수는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의 혁명역사연구소에서 간행한 것들이다본문에서 특정 출판물을 일일이 언급하는 것은 독자들을 귀찮게 할뿐이므로 생략했다필자가 특별히 자주 사용한 자료 가운데에는 집단적 역사서의 성격을 띤 저서가 있다두 권으로 구성된 [10월 혁명사에 대한 시론집](1927모스크바-레닌그라드)이 바로 이것이다여러 저자들이 참여한 이 책의 각 부분들은 특별히 귀중한 가치가 있을 뿐 아니라 사실관계 자료들을 풍부히 포함하고 있다.

 

본 저서에 언급된 날짜들은 모두 구력에 의한 것이므로 국제적으로 그리고 현재 소련에서 사용되고 있는 신력보다 13일이 늦다혁명 당시에 사용되었던 구력을 사용해야할 의무감을 느꼈기 때문에 이런 조치를 취했다물론 구력을 신력으로 바꾸는 수고도 필요 없기 때문이었다그러나 이 수고를 없애는 것 말고도 다른 좀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로마노프 왕조를 타도한 혁명은 2월 혁명으로 역사에 남아있다그러나 신력으로 바꿀 경우 3월 혁명이 된다임시정부의 제국주의 정책에 저항한 무장 시위는 "4월 시기"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남아있다그러나 신력으로는 5월이 된다다른 사건들과 날짜를 제외하더라도 10월 혁명은 신력으로 11월에 일어났다다 알고 있듯이 달력이란 역사 사건들로 채색되어있다따라서 역사가는 단순한 산수 계산으로 혁명 연표를 다룰 수는 없다구력을 타도하기 전에 혁명은 먼저 구력에 집착해 있던 구제도들을 타도해야 했다는 점을 독자들은 선심으로 기억할 것이다.

 

레온 트로츠키

 

프린키포에서

 

1930년 11월 14

 

 

제 1장: 러시아 사회 발전의 특이성

 

러시아 역사의 근본적이면서도 가장 일관된 특징은 사회 발전의 느린 속도이다이 결과가 경제의 후진성사회형태의 원시성문화수준의 낙후성으로 나타났다.

 

이 나라의 광활하고도 거친 대평원은 동쪽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아시아 민족들의 이동에 자신을 열어주었다이 대평원을 삶의 터전으로 삼은 민족들은 불리한 자연조건에 의한 오랜 후진성을 운명으로 받아들였다유목민족에 대한 이들의 투쟁은 17세기 끝까지 계속되었다겨울 추위와 여름 가뭄을 가져오는 바람에 대해 이들은 아직도 힘겹게 싸우고 있다사회 발전의 기초인 농업은 집약농업이 아니라 조방농업으로 발전했다북쪽에서 이들은 숲을 베어내고 불태웠으며 남쪽에서는 태초 그대로의 광활한 초원지역을 침입했다자연 정복은 깊고 철저히 진행되기보다는 느슨하게 산지사방으로 전개되었다.

 

서쪽의 야만 민족들은 로마문화의 폐허 위에 정착하였다이곳에서는 오래된 수많은 돌이 건축재료로 즉시 이용될 수 있도록 널려있었다반면 동쪽의 슬라브족은 황량한 평원에서 문화 유산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없었다차라리 자신들이 만든 문화가 선조의 문화보다 수준이 더 높았다서유럽 민족들은 자연이 만든 국경을 인정하고 이 안에서 경제적 문화적 결절점인 상업도시들을 건설했다반면에 동쪽 대평원의 민족들은 사람들이 모이는 징조가 나타나는 순간 숲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거나 광활한 초원 위로 퍼져나갔다서쪽 농민의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부위는 도시민수공업자상인이 되었다동쪽 농민의 적극적이고 대담한 부위는 더러는 상인이 되었으나 대부분은 카자크(역자 주타타르족과 슬라브족의 혼혈 종족유목생활을 하며 러시아 제국 시절 반동적 군대를 제공하는 대신 독립적 특권을 일부 누렸다.)와 변방 개척민이 되었다서쪽에서는 치열한 사회분화가 진행되었다그러나 동쪽에서는 이 과정이 지연되거나 국경의 확장에 의해 묽어졌다표트르 대제와 동시대인이었던 이탈리아의 비코(Vico)는 이렇게 적었다: “기독교인인 모스크바의 차르는 머리가 느려터진 민족을 통치하고 있다.” 모스크바 사람들의 느려터진” 머리는 경제발전의 느린 속도사회 발전의 낙후성에 따른 계급 관계의 미분화내부 역사발전의 일천함을 반영하였다.

 

이집트인도중국의 고대문명들은 생산력이 낮았다그러나 공예품의 정교함과 맞먹는 수준으로 사회 관계들을 발전시킬 자족적 특성과 시간을 가졌다그러나 러시아는 지리사회역사에 있어서 유럽과 아시아의 중간에 위치했다따라서 서유럽 뿐 아니라 동방의 아시아와도 뚜렷이 구분되었다그리고 각기 다른 시기에 각기 다른 특징을 보이면서 한때는 전자에 또 한때는 후자에 접근했다동방은 러시아에게 타타르족(역자 주칭기즈 칸을 따라 동유럽과 서아시아를 침략한 몽골계, 투르크계 유목민족)의 야만성을 멍에로 씌웠다이 멍에는 러시아 국가 구조에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서방은 동방보다 더 위협적인 적이었으나 동시에 스승이기도 했다러시아는 동방의 사회형태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서방의 군사적 경제적 압력에 끊임없이 적응해야 했기 때문이었다과거에 역사가들은 러시아에 봉건적 관계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그런데 이후의 연구를 통해 봉건적 관계가 존재했다고 무조건적으로 인정된 것 같다더욱이 러시아 봉건제도의 근본 요소들은 서방의 것들과 같았다그러나 봉건시대의 존재는 더 많은 과학적 연구에 의해 확립되어야 했다이 사실만으로도 러시아 봉건제도의 불충분한 발달미분화문화적 업적의 빈곤 등이 충분히 입증된다.

 

후진국은 선진국의 물질적 지적 성과를 흡수한다그러나 이 성과를 노예처럼 비굴하게 맹목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또한 선진국의 모든 발전 단계들을 그대로 반복하지도 않는다비코와 최근 그의 추종자들은 순환적 반복적 역사관을 제창했다그러나 이 역사관은 오래된 전()자본주의 문화권들의 반복적 순환현상들을 관찰한 결과에 불과하다그리고 부분적으로는 자본주의 발전의 첫 실험들을 관찰한 결과이다계속 새로 존재하는 유럽인의 식민지들은 문화적 단계들을 일부 반복해서 보여준다이 현상은 문화발전 자체의 지방적이며 일회적인 특성과 긴밀히 결합되었다그러나 자본주의는 이런 조건들을 극복한다자본주의는 인간 발전의 보편성과 영속성을 준비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실현한다이로써 후진국은 선진국의 발전 형태를 반복하지 않는다후진국은 선진국을 뒤따르도록 강요당한다그러나 선진국과 같은 순서로 발전하지는 않는다역사적 후진성의 특권은 진짜 존재한다특정 시점에서 최신 성과들을 바로 받아들이면서 후진국은 발전의 중간단계들을 건너뛴다야만인은 활을 내던지고 즉시 소총을 무기로 사용한다중간단계에 해당하는 무기들은 쳐다보지도 않는다아메리카에 정착한 유럽인들은 처음부터 역사를 다시 시작하지 않았다독일과 미국은 영국을 경제적으로 추월했는데 이것은 두 나라가 자본주의를 늦게 시작했기 때문에 가능했다반면 영국 석탄산업 그리고 맥도널드(역자 주영국 노동당 당수로 최초로 영국의 수상이 되었다노동운동 내부에서 자본의 부관으로 기능하는 노동조합 관료들의 계급적 이익을 대표하는 서구 개량주의의 시조)일당의 두뇌는 보수적 무질서를 드러내고 있다이것은 영국이 너무 오랫동안 자본주의의 선구자였기 때문에 드러난 현상이다말하자면 과거의 보복인 셈이다후진국의 발전 과정은 역사의 다양하고 개별적인 과정들을 필연적으로 특이하게 결합한다이 결과 무계획성복잡성결합성 등이 일반적 특징으로 드러난다.

 

물론 중간단계들을 건너뛸 가능성이 절대적인 것은 결코 아니다이 가능성은 장기적으로 나라의 경제적 문화적 능력에 달려있다더욱이 후진국은 자신의 토착 원시문화에 외국문화를 도입하면서 아주 빈번하게 외국문화가 원래 가지고 있던 품질을 떨어뜨린다이렇게 흡수과정 자체는 자기 모순적이다예를 들어 표트르 대제는 서구의 기술과 훈련의 일부 요소들 특히 군사적 공업적 요소들을 러시아에 도입했다그런데 이 과정에서 러시아 생산조직의 기본 형태인 농노제는 더 강화되었다선진문화의 산물이 틀림없는 유럽의 군비와 신용대부는 봉건적 차르체제를 강화시켰다그리고 이 강화된 체제는 러시아의 발전을 지연시켰다.

 

역사의 법칙은 현학자의 도식과는 전혀 무관하다발전의 불균등성은 역사의 가장 일반적인 법칙이다그러나 이것은 후진국의 역사발전에 가장 날카롭고 복잡하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외세의 압력에 직면하여 후진국의 문화는 도약을 강요받는다따라서 보편 법칙인 발전의 불균등성에서 결합발전(combined development) 법칙이라고 부를 수 있는 또 다른 법칙이 따라 나온다즉 역사의 각 단계들이 겹치게 되면서 현대적인 형태들이 낡은 형태들과 혼합된다이 법칙의 유물론적 내용 전체를 받아들인다면 러시아 또는 이류삼류 아니 십류 문화국의 어떤 역사도 이 법칙 없이는 이해가 불가능하다.

 

러시아는 부강한 유럽 제국의 압력을 받았다이 결과 서방보다 상대적으로 훨씬 많은 인민의 부를 국가적 목적을 위해 집어삼켰다러시아 인민은 이중의 빈곤을 강요당했고 유산 지배계급의 경제 기반은 약화되었다러시아 국가는 지배계급의 지지가 필요했으나 동시에 이 계급의 성장을 강제하고 자신의 의지에 복종시켰다이 결과 관료적 특권계급들은 제대로 성장할 수가 없었다이 결과 러시아는 아시아 전제군주제와 근접하였다. 16세기 초 차르가 공식 채택한 비잔틴 전제체제는 신 귀족계급의 도움을 받아 봉건 보야르(역자 주: Boyars, 표트르 대제 이전까지 존재했던 러시아 구 귀족계급)를 제압하였다그리고 농민을 국가의 노예로 만들어 신 귀족계급을 제압했다그리고 이 기초 위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역자 주: 1703~1914년: 상트페테르부르크, 1914~1924년: 페트로그라드, 1924~1991년: 레닌그라드1991~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1917년 10월 혁명 당시에는 페트로그라드로 불림)를 수도로 절대주의 제국을 건설했다. 16세기 말에 수립된 농노제는 17세기에 그 형태가 완성되었으며 19세기에 꽃을 피운 후 1861년이 되어서야 법적으로 폐기되었다이 사실만으로도 러시아 국가발전의 후진성이 전부 드러난다.

 

귀족계급 다음으로 성직자계급도 차르 전제체제를 수립하는데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그러나 이 역할은 비굴함을 벗어나지 못했다러시아 교회는 서방 카톨릭교회처럼 거대한 절정을 결코 맞지 못했다전제체제의 정신적 시녀 역할에 만족한 후 이것을 자신의 겸손함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했다주교와 대주교들은 세속 권력의 부관이 되어야 그나마 권위를 누릴 수 있었다교회의 수장인 대주교는 차르가 바뀌면서 함께 바뀌었다상트페테르부르크 시기에 국가에 대한 교회의 종속성은 더 심화되었다. 20만 명에 달하는 신부와 수도승은 실제로는 국가관료집단의 일부가 되어 일종의 복음경찰이 되었다이에 대한 보답으로 교회는 신앙토지수입 등에서 독점적 지위를 누렸다그리고 진짜 경찰의 보호를 받아 이것을 방어했다.

 

슬라브족 애호주의(Slavophilism)는 후진국의 구세주 사상이다이 사상은 러시아 인민과 교회는 철저히 민주적인데 러시아 국가기구는 표트르 대제가 강요한 독일 관료주의에 불과하다는 사고에 기초하였다이 사상을 맑스는 이렇게 평가했다: “독일의 멍청이들은 프랑스 계몽주의의 감화를 받은 프리드리히 2세의 압제에 대해 프랑스 사람들을 비난했다후진국 노예들은 선진국 노예들이 자기들을 훈련시키는 것이 항상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다.” 이 짧은 논평은 슬라브족 애호주의자들의 낡아빠진 철학 뿐 아니라 최근 인종주의자들의 언행도 완벽하게 논박한다.

 

상업과 수공예의 중심지인 진정한 중세 도시는 러시아에 존재하지 않았다이 사실은 러시아 봉건시대 뿐 아니라 러시아 역사 전체의 빈곤을 가장 우울하게 표현하고 있다러시아에서 수공업은 농업과 분리되지 못한 채 가내공업을 통해 그대로 유지되었다러시아의 구 도시들은 상업행정군사장원의 필요에 따라 건설되었다따라서 생산 중심지가 아니라 소비 중심지였다노브고로드는 한자동맹의 도시와 성격이 같았으며 타타르족의 지배를 받지 않았다그러나 이 도시조차 상업도시였을 뿐 공업도시는 아니었다넓은 지역에 걸쳐 농업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대규모의 중개무역업이 정말 필요했다그러나 유목민들과 거래하는 상인들이 이 역할을 맡을 수는 없었다서방에서는 농촌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던 수공업 길드상공업 중소 자본가들이 이 역할을 맡았다더욱이 러시아의 주요 무역로는 국경을 넘었다따라서 오랜 옛날부터 무역의 주도권은 외국 상업자본에게 있었다이 결과 러시아는 일종의 반()식민지가 되었고 러시아 무역인들은 서방 도시와 러시아 농촌 사이에 다리를 놓은 중개인에 불과했다이런 종류의 경제 관계는 자본주의 시대에 들어와 더욱 발전하여 제국주의 전쟁에서 그 특징을 가장 뚜렷하게 드러내었다.

 

러시아 도시의 낮은 비중은 무엇보다도 아시아식 국가기구의 발전을 촉진시켰다그리고 봉건관료적 정교회를 부르주아 사회의 요구에 걸맞는 현대화된 기독교로 대체시키는 종교개혁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국가기구에 저항하는 투쟁은 농민 종파들의 선을 넘지 못했는데 구신도(Old Believers) 종파는 이들 가운데 가장 강력했다.

 

프랑스 대혁명보다 15년 앞서서 러시아 우랄지역에는 카자크농민노동자-농노 등의 운동인 푸가초프 반란이 터졌다이 위협적인 인민봉기가 혁명으로 전환되려면 상공업 부르주아 계급이 존재해야 했다도시 산업에 기초한 민주주의가 지도하지 않는 농민전쟁은 혁명으로 전환될 수 없었다이것은 농민 종파가 종교개혁의 절정에 도달할 수 없는 것과 똑같았다푸가초프 반란으로 귀족계급의 이익을 지켜주는 관료적 절대주의는 강화되었다즉 원래 운동의 목적과는 정반대의 결과를 낳았다위협받는 순간에 구체제는 자신의 정당성을 다시 입증시켰을 뿐이었다.

 

표트르 대제가 시작한 러시아의 유럽화는 그 다음 세기에는 더욱더 지배계급 귀족들의 요구가 되었다. 1825년 귀족계급의 지식층은 이 요구를 정치적으로 일반화하면서 차르의 권한을 제한하는 군사적 음모를 꾸몄다유럽 자본주의가 압력을 가하자 존재하지 않는 상공업 부르주아 계급을 진보적 귀족층이 대신하려는 몸부림이었다이들은 자유주의 체제를 통해 자신들의 계급지배를 안정시키고 강화시키려 했다따라서 농민을 자극하는 것을 가장 무서워했다이 결과 군사적 음모는 대중운동으로 확대하지 못하였다이것은 뛰어난 능력을 지녔으되 대중으로부터 고립된 군대 장교들의 시도에 불과했다그런데 이들은 싸움 한번 제대로 못하고 이 시도를 포기했다제까브리스트(12월당봉기의 의의는 이 정도에 불과했다.

 

공장을 소유했던 지주들은 농노제를 임금노동으로 대체하는 것을 찬성한 최초의 지주 분파였다러시아산 곡물 수출이 점점 늘어나자 농노제 해체의 흐름이 추진력을 얻었다. 1861년 자유주의 지주층의 지지를 업고 귀족 관료층은 농업개혁을 실시했다이 과정에서 힘없는 자유부르주아 계급이 겸허하게 들러리를 섰다. 차르체제는 러시아의 근본문제인 농업문제를 아주 인색하게 도둑놈처럼 해결했다다음 10년간 프로이센 왕정이 독일의 근본문제인 국가통일 문제를 해결했던 방식보다 더 짜게 굴었다이것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어느 계급의 문제를 다른 계급이 대신 해결해주는 경우는 후진국에 늘 있는 결합발전의 한 방식이다.

 

러시아 공업의 역사와 성격에서 결합발전의 법칙은 가장 의심의 여지없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늦게 시작된 러시아의 공업은 선진국의 발전과정을 반복하지 않고 이 발전과정 자체에 스스로를 투여하여 자신의 후진성에 선진국의 최신 성과들을 접목시켰다전반적으로 러시아의 경제 발전은 수공업 길드와 공장제 수공업의 시기를 건너뛰었다이와 똑같이 공업의 각 부문들은 서방에서 수십 년이 걸린 기술단계들을 일련의 예외적인 도약들을 통해 건너뛰었다이 덕분에 러시아의 공업은 한순간에 예외적으로 빠른 속도로 발전했다. 1905년 혁명과 제 1차 세계대전 사이에 러시아의 공업생산은 거의 두 배로 늘었다이 현상 때문에 러시아 역사가들 일부는 러시아의 후진성과 느린 발전속도라는 통념을 버려야 한다(저자 주포크로프스키 교수가 이렇게 주장했다.)”고 결론 내릴 충분한 근거를 확보한 것처럼 보였다사실은 이 급속한 성장의 잠재력은 후진성 자체에 있었다그리고 이 후진성은 구체제의 청산 직전 뿐 아니라 지금도 유감스럽게 유산으로 남아있다.

 

일국 차원에서 경제수준의 기본조건은 노동생산성이다그런데 이 노동생산성은 나라의 경제 일반에서 차지하는 개별 공업부문들의 상대적 비중에 달려있다제 1차 세계대전 전야에 차르의 러시아는 번영의 정점에 도달했는데 일인당 국민소득은 미국보다 8배에서 10배까지 적었다이 사실은 전혀 놀랍지 않다러시아에서 경제 인구의 5분의 4는 농업에 종사했다반면 미국에서는 농업인구 1인당 공업인구는 2.5인이었다그리고 덧붙일 필요가 있는 사실이 더 있다제 1차 세계대전 전야의 러시아 철도망은 100km2 당 0.4km에 불과했다이에 비해 독일은 11.7km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7km였다다른 비교지수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경제분야에서 결합발전 법칙은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혁명 직전까지 러시아 농민의 토지경작은 일반적으로 17세기의 수준에 머물렀다그러나 공업은 기술과 자본주의의 구조적 측면에서 선진국의 수준에 도달했으며 어떤 측면에서는 선진국들을 추월했다. 100명 미만의 노동자를 고용한 영세기업은 1914년 미국의 경우 전체 공업인구의 35%를 차지했다그러나 러시아에서 이 비율은 17.8%에 불과했다. 100명에서 1000명 사이의 노동자를 둔 기업들의 상대적 비중은 두 나라가 동일했다그러나 1000명이 넘는 노동자를 둔 거대기업은 미국의 경우 전체 공업인구의 17.8%러시아의 경우 41.4%를 차지했다가장 중요한 공업지구의 경우 이 비율은 더 높았다. 페트로그라드 지구에서 이 수치는 44.4%이었으며 모스크바 지구의 경우 심지어 57.3%까지 되었다러시아를 영국이나 독일과 비교해도 같은 결과가 나온다필자가 1908년 최초로 확인한 이 사실은 러시아의 경제적 후진성이라는 통념과는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그러나 이 사실은 러시아의 후진성을 부인하기보다 변증법적으로 완성하고 있다.

 

공업자본과 은행자본의 결합 수준도 역시 러시아가 가장 높았다그리고 은행자본이 공업자본을 지배하듯이 서유럽 자본시장은 러시아 공업자본을 지배했다금속석탄석유 등 중공업은 거의 전부 외국 금융자본의 손안에 있었다한편 외국 금융자본은 자기의 편의와 이익을 위해 러시아에 종속적인 중간단계 은행들을 탄생시켰다경공업도 같은 처지였다외국인들은 일반적으로 러시아 주식의 약 40%를 소유하고 있었다그리고 공업의 주요부문들에서 이 비율은 더 높았다과장이 전혀 없이 러시아의 은행공장생산설비의 지배적인 주식은 해외에 있었으며 영국프랑스벨기에는 독일에 비해 거의 두 배에 가까운 러시아 주식을 손에 넣고 있었다.

 

러시아 자본가 계급의 사회 성격과 정치적 모습은 러시아 공업의 유래와 구조에 의해 결정되었다공업의 극단적인 집중도(集重度하나만 보아도 이 사실은 확인된다이 때문에 자본가 지도층과 대중 사이에는 중간계층이 존재하지 않았다여기에 덧붙여 주요 공업은행수송 관련 기업들의 소유주는 외국인이었다이들은 투자 이윤을 실현시켰을 뿐 아니라 러시아 의회에 정치적 영향력까지 행사했다그래서 러시아 의회체제의 발전을 촉진하기는커녕 저해했다프랑스 정부의 부끄러운 짓거리가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러시아 자본가계급의 정치적 고립과 반()인민적 성격은 근본적으로 이 때문이었다러시아 역사의 여명기에 자본가 계급은 너무 어렸기 때문에 종교개혁을 성취할 수 없었다그런데 이제 부르주아 혁명을 주도할 시간이 다가왔으나 너무 늙어서 힘을 쓸 수 없었다.

 

러시아 사회의 일반적 발전 과정에 조응하여 러시아 노동계급이 배출된 수원지는 공예-길드가 아니라 농업이었으며 도시가 아니라 농촌이었다여러 시대를 거쳐 형성된 영국의 노동계급은 전통의 짐을 그대로 지고 다녔다반면 러시아 노동계급은 환경관계 등의 급격한 변화를 겪으면서 과거와 날카롭게 단절하여 도약했다. 차르 국가의 집중된 억압 때문에 러시아 노동자들은 혁명 사상의 가장 대담한 결론들을 쉽게 받아들였다이것은 마치 후진국이 자본주의 생산조직의 최신 발명품을 쉽게 받아들이는 것과 똑같았다.

 

러시아 노동계급은 자신의 일천한 역사를 영원히 반복하고 있었다금속산업 특히 페트로그라드의 경우 세습 노동계급의 한 부위가 형성되면서 농촌과 완전히 단절했다그러나 우랄지역에서는 반()노동자 반()농민이 지배적이었다농촌으로부터 모든 공업지구들로 신선한 노동력이 유입되면서 노동계급의 기본 수원지인 농민층은 노동계급과 연대를 계속 새롭게 했다.

 

자본가 계급의 정치적 무능력은 노동계급 및 농민과의 관계에서 직접 발생했다노동계급은 일상생활에서 자본가 계급에게 적대적이었으며 자기 문제를 아주 일찍 일반화하는 법을 배웠다당연히 자본가 계급은 노동계급을 정치적으로 지도할 수 없었다마찬가지로 자본가계급은 농민도 지도할 수 없었다왜냐하면 자본가계급은 지주들과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으며 어떤 종류든 소유관계의 혁신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따라서 러시아에 혁명이 늦게 터진 이유는 사회발전의 느린 속도 뿐 아니라 사회구조에도 존재했다.

 

영국은 인구가 550만이 넘지 않았을 때 부르주아 청교도 혁명을 완수했다그런데 이 가운데 50만이 런던에 거주하고 있었다대혁명 시기에 프랑스의 경우 2,500만 인구 가운데 파리의 인구는 50만에 불과했다. 20세기초 러시아 인구는 1억 5,000만이었으며 이 가운데 300만 이상이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에 살고 있었다이 비교 수치에 엄청난 사회적 차이가 숨어있다. 17세기 영국 뿐 아니라 18세기 프랑스에는 현대적 의미로 노동계급이 존재하지 않았다그러나 1905년 러시아의 농촌과 도시의 모든 공업 분야에서 노동계급은 1,000만을 넘었다여기에 부양가족을 포함시키면 2,500만이 넘는다즉 부르주아 대혁명 시기 프랑스의 전체 인구보다 많았다크롬웰 군대의 주축이었던 억센 수공업자와 자영농민파리의 평민페트로그라드의 공업노동자로 이어지면서 혁명은 사회체제투쟁 방식정치 목표 등을 크게 변화시켰다.

 

1905년 혁명은 1917년의 두 혁명이었던 2월 및 10월 혁명의 서막이었다서막에는 극의 모든 요소들이 등장했다그러나 이것들은 모습을 보였을 뿐 실제 연극 과정에 모두 동원되지는 않았다러일전쟁은 차르체제를 뒤흔들었다대중운동을 배경으로 자유부르주아 계급은 차르 왕정에 반대하여 구체제를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노동계급은 자본가 계급에 반대하여 독자적으로 소비에트를 조직했다이 조직은 역사상 최초로 등장했다토지 점거를 목표로 농민봉기가 광활한 러시아 전국에서 일어났다농민 뿐 아니라 군대의 혁명적 부위 역시 소비에트를 지지했다투쟁이 절정에 도달했을 때 소비에트는 공공연히 차르와 국가권력을 다투었다그러나 이때 모든 혁명세력은 처음으로 정치무대에 등장했을 뿐 경험과 자신감이 부족했다체제를 뒤흔드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며 그것을 전복시켜야 한다는 점이 명백해졌다그러나 바로 이 순간 자유부르주아 계급은 자신이 혁명과 무관하다는 사실을 증명하듯이 혁명으로부터 후퇴했다부르주아 계급은 인민운동 내에 민주적 지식인들을 상당수 끌고 들어갔었다그런데 이 계급이 이제 인민과 자신 사이에 확실한 분리선을 그었다이 때문에 차르는 군대 내에 왕당파 부대들을 혁명파와 분리시켰다그리고 이들은 노동자 농민에 대한 피비린내 나는 탄압을 손쉽게 자행했다갈비뼈가 몇 개 부러지기는 했어도 차르체제는 1905년 혁명을 겪으면서 생기 있고 튼튼하게 살아남았다.

 

이 서막과 본격적인 드라마를 가르는 11년의 역사는 계급 역관계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가이 기간동안 차르체제는 역사발전의 요구와 더욱 날카롭게 갈등을 일으켰다부르주아 계급은 경제적으로 더 강력해졌다그러나 알다시피 이 계급의 권력은 공업의 상대적 집중도와 외국 자본의 더욱 강화된 지배력에 기초하고 있었다. 1905년을 교훈 삼아 부르주아 계급은 보수성과 의심증을 더욱 키워갔다과거에도 미미했던 중소 부르주아 계급의 상대적 비중은 더 낮아졌다일반적으로 말해 민주적 지식층은 사회적 기반을 전혀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는 있었으나 독자적 역할을 수행할 수는 없었다자유부르주아 계급에 대한 이 계층의 종속성은 이미 크게 높아져 있었다이 상황에서 젊은 노동계급만이 농민에게 강령깃발지도력을 제시할 수 있었다이렇게 막중한 임무가 부여된 노동계급에게는 한가지 요소가 시급히 필요했다인민대중을 혁명으로 금방 나서게 지도할 특별한 혁명조직이 바로 이것이었다이렇게 해서 1905년의 소비에트는 1917년에 거대하게 성장했다소비에트는 러시아의 후진성이 낳은 자식일 뿐 아니라 결합발전의 산물이다공업이 가장 발전한 독일에서 노동계급이 1918-1919년의 혁명 절정기에 소비에트 이외의 다른 조직형태를 찾을 수 없었다는 사실이 이 점을 입증한다.

 

1917년 혁명의 시급한 임무는 관료적 차르체제의 타도였다그러나 과거 부르주아 혁명들과는 달리 이제 혁명의 결정적인 원동력은 집중된 공업의 기초 하에 새로운 조직과 새로운 투쟁방법으로 무장한 새로운 계급이었다여기서 결합발전 법칙은 극단적인 형태로 등장한다부패한 봉건 국가기구의 타도를 시작으로 하여 몇 달만에 혁명은 노동계급과 공산당을 국가권력의 정점으로 상승시켰다.

 

애초의 임무를 보았을 때 러시아 혁명은 민주주의 혁명이었다그러나 이 혁명은 정치 민주주의의 문제를 새로운 방법으로 제기했다노동자들이 병사와 농민을 일부 포함시킨 채 나라 전역에 소비에트를 건설하는 동안 부르주아 계급은 계속해서 물건값을 흥정하고 있었다즉 제헌의회 소집 문제를 따지고 있었다본 저서를 통해 이 문제는 완전하게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다만 지금은 혁명 사상과 투쟁형태의 역사적 연속과정 속에 소비에트의 위치를 규정하는 것으로 논의를 제한하겠다.

 

17세기 중엽 영국의 부르주아 혁명은 종교개혁의 외양을 띠고 일어났다자기 나름의 기도서에 따라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권리를 갖기 위한 투쟁은 왕귀족교회의 수장로마 카톨릭 교황에 대한 투쟁과 동일시되었다장로교도들과 청교도들은 자기의 세속적 이익을 신의 섭리가 흔들림 없이 보호하고 있다고 깊게 확신하고 있었다새로운 계급들의 투쟁 목표들은 이들의 의식 속에 성경 구절 그리고 교회에서의 예배방식과 분리될 수 없었다신대륙의 이주자들은 피로 봉해진 이 전통을 대서양 건너까지 가지고 갔다앵글로-색슨족이 기독교를 해석할 때 뿜어내는 엄청난 박력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성경이라는 마술 책으로 17세기 사람들은 자기 용기를 정당화시켰다그런데 똑같은 이 마술 책으로 영국의 사회주의자” 장관들은 자신들의 비겁함을 정당화시키고 있다.

 

프랑스는 종교개혁의 물결을 건너뛰었다카톨릭교회는 부르주아 혁명 때까지 국가제도로 살아남았다그런데 이 나라에서 혁명은 성경 본문이 아니라 민주주의라는 추상어를 통해 부르주아 사회건설의 임무를 표현하고 정당화시켰다현재 프랑스의 지배자들은 자코뱅주의를 대단히 증오하고 있다그러나 로베스피에르의 금욕적인 근엄한 노력 덕분에 이들은 지금도 자신들의 보수적 통치를 구체제를 폭발시켰던 구호인 민주주의로 은폐할 수 있다.

 

거대한 혁명들 하나 하나는 부르주아 사회의 새로운 단계를 확정했다그리고 사회 계급들의 새로운 의식형태도 탄생시켰다프랑스가 종교개혁을 건너 뛴 것과 똑같이 러시아 역시 형식적 민주주의를 건너뛰었다자신의 성격을 혁명 시대 전체에 뚜렷이 남기게 될 러시아의 혁명정당은 혁명의 임무를 성경책 또는 순수” 민주주의라는 세속화된 기독교가 아니라 사회계급의 물질적 관계를 통해 표현하고자 했다소비에트 체제는 이 관계를 가장 단순하게 거짓 없이 투명하게 표현했다근로인민의 통치가 역사상 처음으로 소비에트 체제를 통해 실현되었다이 체제가 가까운 장래에 겪을 역사적 풍파는 예상할 수 없다그러나 종교개혁이나 순수 민주주의가 당시 대중의 의식에 깊이 새겨진 것처럼 소비에트 체제도 대중의 의식 속에 깊이 새겨졌다.

 

 

제 2장: 전시의 차르체제

 

러시아가 제 1차 세계대전에 참여한 동기와 목적은 전부 자기 모순적이었다이 피비린내 나는 전쟁은 근본적으로 세계 지배를 위한 것이었다그렇다면 이 전쟁의 범위는 러시아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것이었다그러나 터키 해협갈리치아아르메니아에서 러시아가 벌인 전쟁들은 국지전이었으며 그 목적은 주요 교전국들의 이해에 부응하는 정도에 따라 개별적으로 달성될 수 있었다.

 

동시에 러시아는 하나의 강대국으로서 선진 자본주의국가들의 싸움에 끼어 들지 않을 수 없었다전쟁 바로 전까지 상점공장철도자동화기비행기 등 서방의 문물을 국내로 도입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과 똑같았다러시아 역사를 연구하는 학파가 최근에 성립했다그런데 이 학파에 속하는 학자들 사이에 빈번하게 논쟁들이 벌어졌다이 논쟁들의 쟁점은 러시아가 추진했던 제국주의 팽창정책의 시기적절성 여부이다그러나 이 논쟁들은 스콜라주의 식으로 대단히 비현실적이다왜냐하면 이 논쟁들은 국제무대에서 러시아를 고립된 독립적 요인으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사실 러시아는 세계체제의 고리에 불과했다.

 

인도는 근본적으로 그리고 공식적으로 영국의 식민지로 이 전쟁에 참여했다중국의 참전은 형식적으로는 자발적이었으나 실제로는 주인들끼리의 싸움에 노예 하나가 끼어 든 것에 지나지 않았다러시아의 참전 이유는 프랑스와 중국의 참전 이유 사이에 위치했다참전을 통해 러시아는 선진 자본주의국가들과 동맹하여 이들의 자본을 수입하고 이자를 지불할 권리를 샀다즉 동맹국들로부터 특혜를 받는 자본 식민지가 되었다그러나 동시에 터키페르시아갈리치아 그리고 일반적으로 자신보다 더 허약하고 후진적인 국가들을 억압하고 강탈할 권리도 함께 샀다러시아 자본가 계급의 이중적 제국주의는 자신보다 더 강한 국가들의 하수인이라는 근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중국의 매판자본가는 민족자본가 계급의 고전적인 유형으로 외국 금융자본과 중국 경제 사이의 중개인이다세계 강대국의 순위에서 제 1차 세계대전 전에 러시아는 중국보다 한참 높았다전쟁 후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러시아의 순위가 어떠했을 지는 또 다른 문제이다그러나 러시아의 전제체제와 부르주아 계급은 모두 매판자본주의의 특징들을 더욱 명확히 가지고 있었다즉 외국 제국주의 세력과 연줄을 맺어 이들에게 봉사했으며 이들의 지원이 없었다면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물론 장기적으로는 혁명이 승리했기 때문에 이들의 지원을 받고도 살아남지 못했다()매판자본의 러시아 자본가 계급은 세계제국주의와 이해관계가 일치했다몇 퍼센트의 수수료를 받으면서 고용주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하수인과 똑같았다.

 

전쟁의 도구는 군대이다민족 신화에서 군대는 남의 나라 군대에 의해 절대로 정복될 수 없다당연히 러시아 지배계급도 차르 군대를 신화로 포장했다그러나 현실에서 이 군대는 반()야만 민족이웃 약소국붕괴 와중의 나라에 대해서만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그리고 유럽의 전쟁터에서는 연합 세력의 일부가 될 수 있을 뿐이었다이 군대는 광대한 영토산산이 흩어져 있는 인구다니기 힘든 도로의 도움을 통해서만 나라를 지킬 수 있었다농노들로 구성된 이 군대의 거장은 수보로프였다새로운 사회와 새로운 군사기술의 시대를 연 프랑스 대혁명은 수보로프 식 군대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농노제의 절반이 폐지되고 국민 징병제가 도입되어 러시아 군대는 현대화되었다그러나 이것은 러시아식 현대화에 불과했다부르주아 혁명을 아직 완수하지 못한 나라의 온갖 모순들을 군대는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차르 군대가 서구의 모델에 따라 창설되고 무장된 것은 사실이다그러나 이것도 내용보다는 형식에서 그랬다낙후된 농촌문화의 산물인 병사는 현대 군사기술을 습득할 수 없었다지휘관들은 지배계급의 무식경박성거짓 등의 악습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그러나 전시의 요구들이 집중적으로 제기되기도 전에 이들의 무능력은 공업과 수송 분야에서 계속 드러났다전쟁 첫날에 군대는 무장을 제대로 갖춘 것처럼 보였다그러나 실제로는 무기도 신발도 없다는 것이 곧 드러났다러일전쟁은 차르 군대의 진면목을 드러냈다. 1905년 혁명의 패배와 함께 도래한 반혁명 시기에 차르 왕정은 의회의 도움으로 군대의 창고에 군수품을 채워 넣었다그리고 특히 천하무적이라는 신화에 누더기 깁듯이 여기 저기에서 많은 개선을 이루었다그러나 1914년에 이 군대는 새롭고 훨씬 무거운 시험에 직면했다.

 

군수물자와 자금 면에서 러시아는 동맹국들에게 노예처럼 종속된 존재에 불과하다이 사실이 전쟁과 함께 갑자기 드러났다이것은 러시아가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게 전반적으로 종속되어 있음을 군사적으로 표현한 것일 뿐이다그러나 동맹국들의 지원이 상황을 호전시키지는 않는다탄약의 부족적은 수의 탄약생산 공장탄약수송용으로는 너무도 빈약한 철도망 등으로 러시아의 후진성은 곧바로 패배라는 익숙한 단어로 번역되었다전쟁 패배로 러시아 자유부르주아 계급은 선배들이 부르주아 혁명을 완수하지 못했으며 후배들인 자기들이 역사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전쟁의 첫날은 수모의 첫날이었다일련의 부분적인 군사적 재앙 후 1915년 봄에 대규모적인 후퇴가 불가피했다장군들은 자신들의 범죄적 무능력을 민간인들에게 전가시켰다광활한 토지가 무참하게 황무지로 변했다인간 메뚜기 떼가 채찍질을 당해 떼거지로 후방으로 밀려들었다겉으로 드러난 대대적인 패배와 후퇴는 곧 심리적인 대규모 패배와 후퇴가 되었다.

 

동료 장관들이 전선의 상황에 대해 걱정스럽게 질문하자 전쟁 장관 폴리바노프는 이렇게 대답했다: “광활해서 건널 수 없는 대평원지나다닐 수 없는 진흙탕 도로성스러운 러시아의 수호자 성 니콜라스 미를리키스키의 은총을 신뢰할 뿐입니다.”(1915년 8월 4일 회의이로부터 일주일 후 루즈키 장군은 같은 장관들에게 이렇게 고백했다: “ 지금 요구되는 군사 기술이 우리에게 없습니다독일군을 따라잡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 군대의 일시적 정서가 아니었다스탄케비치 장교는 공병대 엔지니어의 말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독일군과의 대적은 가망이 없다왜냐하면 우리 군대는 어떻게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새로운 전술조차 패배의 원인이 될 뿐이다.” 이런 증언은 수없이 많다러시아 장군들이 멋을 내며 신나게 했던 유일한 일은 나라의 인적 자원을 시체로 만드는 것이었다쇠고기와 돼지고기도 병사의 시체보다는 훨씬 더 경제적으로 처리된다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직속의 야누슈케비치, 차르 직속의 알렉세예프 등 무능한 지휘관들은 새로 동원령을 내려 병사들로 전선의 모든 틈을 메웠다그리고 실제 전투력이 있는 병사들이 필요한 경우에는 숫자상의 대단한 병력을 제시하며 자신들과 동맹국들을 위로했다약 1,500만 병사들이 동원되어 신병훈련소부대 막사병력이동소 등을 꽉 채웠다이들은 한 군데에 몰려 있으면서 몸에 도장이 찍히고 옆에 있는 병사들의 발을 밟았다그리고 서로 거칠게 굴면서 욕을 퍼부었다이 인간의 무리가 전선에서 가상의 규모였다면 후방에서는 진짜 파괴력을 가지고 있었다약 550만 병사들이 전사자부상자포로로 집계되었다탈영병의 수는 계속 증가하고 있었다이미 1915년 7월 장관들은 이렇게 되풀이 외쳤다: “불쌍한 러시아여과거에 승리의 포효로 전세계를 호령했던 러시아의 군대조차 ... 겁쟁이와 탈영병의 무리임이 드러났다.”

 

장관들조차 장군들의 후퇴할 때의 용감성에 대해 음흉한 농담을 던졌다그리고 키예프에 안치된 성인들의 유골을 이전할 것인지 말 것인지 등 하찮은 문제들을 논의하면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다그런데 유골 이전 문제에 대해 차르는 이전이 불필요하다는 의견을 냈다. “독일군은 유골들을 건드릴 생각을 감히 못할 것이다건드리면 자기들만 손해볼 것이다.” 그러나 정교회의 종교회의는 이미 유골 이전 작업을 시작하고 있었다이들은 말했다: “우리가 이곳을 버릴 경우가장 소중한 것은 가지고 간다.” 이 일화는 십자군 전쟁 때의 일이 아니다러시아군의 패배 소식이 무선 전신으로 전해지던 20세기의 일이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군대에 대한 러시아 군대의 승리는 후자보다는 전자에 그 원인이 있었다해체되고 있던 합스부르크 왕정은 이미 오래 전에 장의사를 구한다는 간판을 내걸었었다장의사의 자격요건은 요구하지도 않았다과거에 러시아는 자체 붕괴를 겪고 있던 터키폴란드페르시아 등을 패배시켰었다오스트리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러시아군의 남서 전선은 대단한 승리들을 기록하여 다른 전선들과는 매우 달랐다이 전선의 몇몇 장군들은 분명 군사적 재능은 없었지만, 최소한 연전연패를 거듭한 지휘관들처럼 숙명주의에 완전히 찌들어있지는 않았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10월 혁명의 승리 후 이어진 내전 시기에 백군의 '영웅들'로 모습을 나타냈다.

 

전쟁 패배의 책임을 물을 인물을 찾느라 모두가 혈안이 되어 있었다이들은 유대인들 전부가 간첩활동을 하고 있다고 싸잡아 비난했으며 독일 이름을 가진 사람들에게 달려들었다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의 사령부는 헌병 대령 미야소예도프를 독일 스파이로 몰아 사형 명령을 내렸다물론 그는 독일 스파이가 아니었다이들은 속이 빈 칠칠맞은 전쟁 장관 수호믈리노프를 반역죄로 체포했다물론 반역죄에 대한 근거가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영국의 외무장관 그레이는 러시아 의회대표단 단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전시에 전쟁 장관을 반역죄로 기소한다면 귀하의 정부는 정말 대담합니다.” 총사령부와 의회는 차르의 내각을 친독파라고 비난했다이들은 모두 동맹국들을 부러워하면서 동시에 증오했다프랑스 사령부는 자기 병사들을 아끼기 위해 러시아 병사들을 전투에 투입했다영국군은 천천히 전투에 참여했다페트로그라드의 응접실과 전선의 사령부에서는 부드럽게 이런 농담이 나돌았다: “영국은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모두 흘리며 싸우겠다고 맹세했다 ... 그런데 이 피는 러시아 병사의 피이다.” 이런 농담들은 군 조직 체계의 아래로 스며들어 전선의 참호에 도달했다장관의원장군기자들은 이렇게 말했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시키자!” 그러자 참호에 웅크리고 있던 병사들은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모두 최후의 피 한 방울까지 아끼지 않고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런데 최후의 피 한 방울은 나의 피를 말하는 것이다.”

 

전쟁 기간 통틀어 러시아군은 국지전에 참여했던 어떤 군대보다 병력 손실이 컸다약 250만 명의 병사가 사망했는데 이 수치는 동맹국 전체 병력 손실의 40%에 해당되었다전쟁 첫 몇 달 동안 러시아 병사들은 아무 생각 없이 또는 거의 생각 없이 포화에 희생되었다그러나 하루하루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의 경험은 늘어났다이것들은 무식한 지휘관 밑의 하급병사들이 겪는 쓰라린 경험이었다이들은 밑창도 없는 신발을 신고 목적도 없는 작전에 투입되거나 저녁 식사를 먹지 못한 횟수를 모두 확인하면서 장군들의 혼란스러운 정신상태를 측정했다사람과 사물의 피범벅 속에서 이 상황을 일반화시킨 엉망진창이라는 말이 나왔다이 말은 병사들의 더 생생한 은어로 대체되었다.

 

농민으로 구성된 보병은 해체 속도가 가장 빨랐다일반적으로 공업노동자의 비율이 높은 포병은 혁명 사상을 비교할 수 없이 빠르게 받아들인다. 1905 혁명은 이 점을 입증시켰다이와 반대로 1917년에는 포병이 보병보다 혁명사상을 수용하는데 더 보수적이었다보병 사단을 통해 마치 채에 걸러지는 모래처럼 경험이 더 미숙하고 덜 훈련된 대중이 스쳐 지나갔다바로 이 때문에 보병은 혁명 사상에 더 적극적이었다더욱이 포병은 보병보다 전투에서 사상자가 훨씬 더 적었기 때문에 애초의 간부들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다른 전문화 부대들에도 똑같은 현상이 목격되었다그러나 장기적으로는 포병도 혁명사상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갈리치아 전선에서 후퇴하던 중 총사령관의 비밀명령이 떨어졌다탈영과 기타 범죄를 저지른 병사들에게 채찍질을 가해라피레이코 병사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놈들은 가장 하찮은 위반사항에 대해서도 채찍질을 가했다허락 없이 몇 시간 자리를 비우는 것이 하나의 예라고 할 수 있었다때때로 이들은 병사들의 오기를 키우기 위해 채찍질을 가했다.” 1915년 9월 17일에 이미 쿠로파트킨은 그의 글에서 구치코프의 말을 인용했다: “병사들과 하급장교들은 열성적으로 전투에 임했다그러나 이제 이들은 지쳐있으며 계속되는 후퇴 속에서 승리에 대한 신념을 상실했다.” 이와 거의 같은 시간에 이 내무장관은 부상에서 회복중인 30,000명의 병사가 모스크바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들은 규율이라고는 전혀 없는 난폭한 군중이다소동을 일으키고 경찰과 싸우고(최근에 경찰 한 명이 병사들에게 살해당했다체포된 사람들을 구출하는 등 나쁜 짓을 일삼고 있다소요가 발생하면 이들 모두는 당연히 군중과 한패가 될 것이다.” 피레이코 병사는 또 이렇게 적고 있다: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전쟁이 끝나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 누가 승리할 것이며 어떤 평화조약이 체결될 지는 관심 밖이다군대는 무조건 평화를 원했다전쟁에 지쳤기 때문이다.”

 

자원 간호원으로 일하던 관찰력이 예민한 여성 페오도르첸코는 병사들의 대화를 주의 깊게 듣고 그들의 마음까지 읽었다그리고 흩어진 종이쪽지에 꼼꼼하게 그 내용들을 적어 내려갔다이렇게 해서 소책자 [전시의 인민]이 출판되었다폭탄엉킨 철조망질식시키는 독가스권력자들의 치사스러움 등이 오랜 시간에 걸쳐 수백만 농민의 의식을 형성했다또한 인민의 뼈와 함께 낡아빠진 편견들도 삐걱 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렸다이 전반적인 분위기를 이 소책자는 잘 묘사하고 있다병사들이 직접 생각해낸 수많은 표어들 속에 임박한 혁명의 구호들이 이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1916년 12월 루즈키 장군은 리가(Riga)지구는 북부전선의 불행이라고 불평했다이곳은 드빈스크와 마찬가지로 혁명에 대한 선전활동이 벌집처럼 활발한 곳이다.” 브루실로프 장군은 이 점을 확인시켰다: “리가 지구로부터 병사들이 전의를 상실한 채 도착하고 있다병사들은 공격명령을 거부하고 있다이들은 한 중대장을 총검 끝으로 들어올렸다여러 병사들을 총살시킬 필요가 있었다등등.” 장교들과 가까이 접촉했으며 전선을 방문했던 로지안코도 이렇게 인정했다: “혁명 발발 오래 전에 이미 군대의 최종적 붕괴는 시작되고 있었다.”

 

전쟁 초기에 혁명 분자들은 뿔뿔이 흩어진 채 흔적도 없이 군대 속으로 사라졌다그러나 군대 내의 불만이 일반화되자 이들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체포된 파업노동자들이 전선에 투입되면서 선동가들의 숫자가 늘어났다그리고 전투의 패배와 전선에서의 후퇴로 인해 병사 대중은 이들에게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어느 비밀경찰 요원이 이렇게 보고하고 있다: “후방의 군대 그리고 특히 전방의 군대에는 봉기에 적극적으로 가담할 수 있는 분자들이 가득하다이들 외에 다른 병사들도 형벌을 거부할 지도 모른다.” 페트로그라드주()의 헌병 사령부는 토지협회의 대표가 보낸 보고서를 토대로 1916년 10월 이렇게 선언하고 있다: “군대 내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장교와 병사의 관계는 대단히 긴장되어 있으며 유혈 사태까지 발생하고 있다도처에 탈영병이 수천 명씩 존재한다군대를 밀착하여 관찰한 사람은 누구든지 병사들이 전의를 완벽히 상실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큰 충격을 받는다.”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이 보고서는 이렇게 덧붙인다: “이런 종류의 통신문들은 믿기 어렵지만 믿어야 한다왜냐하면 현역 복무 후 귀환하고 있는 의사들 다수가 이와 같은 내용의 보고서를 작성했기 때문이다.” 후방의 정서는 전방의 정서에 호응했다. 1916년 10월 입헌민주당 회의에서 대의원 다수는 이렇게 언급했다: “모든 계층 그리고 특히 농촌의 마을과 도시빈민들이” 전쟁의 승리에 대해 관심과 신념이 없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1916년 10월 30일 보고서 요약문에서 경찰청장은 모든 곳에서 사람들은 전쟁에 지쳐 있으며 무조건적인 조속한 평화가 오기를 갈망하고 있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나면 의원경찰관장군토지협회 대표의사전직 헌병 등은 모두 혁명 때문에 군대가 애국심을 상실했다볼셰비키들이 확실한 전쟁의 승리를 도둑질해갔다고 주장한다.

 

입헌민주당은 전쟁 승리를 노래하는 합창단의 의심의 여지없는 주역이었다. 1905년에 혁명과의 의심스러운 유대관계를 재빨리 청산한 자유주의는 이후 반혁명 시기 초기에 제국주의 깃발을 높이 들어올렸다매사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다부르주아 계급이 사회의 지배권을 확실히 넘겨받으려면 봉건적 쓰레기가 일소되어야한다그러나 부르주아 혁명의 과제는 성취 불가능한 것으로 입증되었다이 상황에서 러시아 자본가 계급이 세계시장의 최고 지위를 보장받으려면 왕정 및 귀족계급과 동맹해야한다세계적 차원의 재앙은 여러 곳에서 준비되고 있었다따라서 막상 재앙이 닥치자 가장 책임이 큰 당사자들조차 이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차르의 대외정책에 영감을 제공한 자유주의는 이 재앙을 준비하는데 의심의 여지 없이 상당한 역할을 했다. 1914년에 제 1차 제국주의 세계대전이 터지자 러시아의 부르주아 지도자들은 이것을 자기들의 전쟁이라고 크게 환영했다이들로서는 이 반응은 당연했다. 1914년 7월 26일 의회의 엄숙한 회기 중 입헌민주당의 의원단 대표는 이렇게 발표했다: “전쟁과 관련하여 어떠한 조건이나 요구사항도 제시하지 않을 것이다단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적을 정복하려는 확고한 결의를 제창할 뿐이다.” 다른 참전국과 마찬가지로 러시아에서도 온 국민의 일치단결은 공식 입장이 되었다모스크바에서 애국심 고취 행사가 열리고 있을 때 사회자 벤켄도르프 백작은 외교관들에게 이렇게 외쳤다: “보라베를린에서 터질 것이라고 예언되었던 그대들의 혁명이 여기에서 터지고 있다!” 프랑스 대사 팔레올로그는 설명했다: “모든 사람들이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점이 명백하다.” 환상을 절대적으로 배격하는 것 같은 전쟁의 혹독한 상황에서도 이들은 환상을 키우고 전파하는 것이 자기 임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들이 환상에서 깨어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전쟁이 시작된 직후 입헌민주당 중앙위원회 회의가 열렸다이때 변호사이자 지주이면서 포용력이 있는 로디초프가 이렇게 외쳤다: “저런 바보들을 데리고 승리할 수 있다고 정말 믿습니까?” 이후 사건들은 바보들과 함께 해서는 승리가 불가능하다고 증명했다자유부르주아 계급은 승리에 대한 신념을 절반 이상 상실했다이들은 전쟁 패배의 대세를 이용하여 차르의 측근파를 숙청하고 차르와 협상을 강제하려했다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가장 주요한 도구는 차르 내각을 친독파로 몰고 이들이 독일과 단독평화조약을 꾸미고 있다고 비난하는 것이었다.

 

1915년 봄 무기도 지급 받지 못한 러시아 병사들이 모든 전선에서 후퇴하고 있었다이때 동맹국들의 압력을 받아 정부는 군대의 개선을 위해 개인기업의 창의성을 도입하기로 결정했다이 목적을 위해 소집된 특별회의에는 관료들과 영향력 있는 기업가들이 참석했다전쟁 초에 등장한 토지 및 자치도시 협회들, 1915년 봄에 설립된 군사-산업 위원회들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권력을 장악하려는 부르주아 계급의 버팀목이었다이런 조직들의 지지를 받은 러시아 의회(두마)는 부르주아 계급과 차르를 좀더 자신감 있게 중재하도록 부추겨졌다.

 

그러나 이 광범위한 정치적 전망은 당시 중요한 문제들에 집중된 관심을 분산시키지 못하였다중앙저수지에서 흘러나온 것처럼 특별회의로부터 수억 그리고 수 십억 루블에 이르는 돈이 산업에 물을 대주고 수없이 많은 욕구들을 채워주었다의회와 언론은 1914년과 1915년의 전쟁 이윤을 일부 공개했다리아부쉰스키 가문의 모스크바 직물회사는 75%, 트베리 회사는 111%의 순이익을 기록했다콜추긴 구리회사는 1,000만 루블의 기초자본금에서 1,200만 루블이 넘는 이윤을 챙겼다이 분야에서 애국심을 가진 자들은 후한 보상을 즉시에 누렸다.

 

시장에 대한 모든 종류의 투기와 도박은 광란의 수준에 육박했다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엄청난 이윤이 생성되었다수도에서는 빵과 연료가 부족했다그런데도 궁정 보석상 파베르제는 이렇게 장사가 잘된 적이 없다고 뻐겼다그리고 궁정의 시종부인 비루보바는 1915-1916년 겨울에 가장 훌륭한 가운들이 귀부인들을 장식했으며 가장 많은 다이아몬드가 구입되었다고 말한다후방의 영웅들합법적 탈영병들전선에 있기에는 너무 늙었으나 삶의 쾌락을 누리기에는 충분히 젊은 품위 있는 인간들로 나이트클럽은 북새통을 이루었다재앙이 닥쳤지만 대공들도 이들과 함께 노는 일에는 뒤지지 않았다돈을 너무 많이 쓰는 것을 무서워하는 자는 하나도 없었다하늘에서 금이 소낙비처럼 계속 쏟아져 내렸다. “상류사회는 손과 주머니를 내밀었다귀족부인들은 치마를 높이 펼쳤다모두 핏빛 진흙탕 속에서 철썩거리고 돌아다녔다은행가장관실업가, 차르와 대공이 총애하는 발레리나정교회의 주교와 대주교궁정 시종부인자유주의 의원전선과 후방의 장군급진파 변호사저명한 관리수많은 조카와 특히 조카딸 등 모두가 한통속으로 돈과 향락을 움켜쥐고 집어삼켰다축복 받은 황금 소나기가 멈출 것을 두려워하듯 모두들 날뛰고 있었다그리고 때도 되지 않은 평화조약은 부끄러운 짓이라고 이들은 모두 열을 냈다.

 

공통의 이익겉으로 드러난 전쟁의 패배국내 정치의 불안정이 내포하는 위험성 등이 지배계급의 파벌들을 단결시켰다전쟁 전야에 분열되었던 의회는 1915년 애국심으로 단결한 후 야당을 결성하여 진보 동맹이라는 이름을 얻었다이 동맹의 공식 목적은 전쟁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이라고 당연히 선언되었다좌익에서는 사회민주주의자들과 트루도비키(역자 주지주에 대항하여 농민의 이익을 옹호한 정당그러나 소심한 인민주의 지식인들로 구성된 이 정당은 자본주의의 철폐를 주창하지는 않았다케렌스키가 의회 의원으로 있을 때 소속된 정당이었다.), 우익에서는 흑백인조가 이 동맹에 불참했다이들을 제외한 의회 내 모든 정파들 즉 입헌민주당진보당, 10월당의 세 그룹중앙파민족당의 일부 등이 이 동맹에 참여하거나 지지를 표명했다폴란드인리투아니아인, 무슬림, 유대인 등 민족주의 정파들도 여기에 참여했다국민에게 책임지는 내각을 수립하라는 요구로 차르를 경악시키지 않기 위해 이 동맹은 국민의 신뢰를 누리는 정치인으로 구성된 단합된 정부를 요구했다당시 내무장관이었던 쉐르바토프공은 진보 동맹을 사회혁명의 위험에 직면하여 결성된 일시적 정치연합이라고 묘사했다이 점을 인식하는 데에는 대단한 통찰력이 요구되지 않았다입헌민주당 따라서 야당연합의 지도자 밀류코프는 입헌민주당 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지금 화산 위를 걸어가고 있다.... 정치적 사회적 긴장은 극단적인 수위에 도달했다.... 무심코 던진 성냥이 끔찍한 대형 화재를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정부가 좋든 나쁘든 어느 때보다도 지금은 강력한 정부가 필요하다.”

 

전쟁 패배의 부담을 안은 차르가 양보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희망은 너무 컸다따라서 8월에 자유주의 신문에는 국민의 신뢰를 얻는 내각의 예상 명단이 실렸다이 명단에 따르면 의회 의장 로지안코는 수상(다른 신문에는 토지협회 회장 르보프공이 수상이었다), 구치코프는 내무장관밀류코프는 외무장관이었다혁명이 일어날까 두려워 이들은 차르와 정치연합을 체결하기 위해 자신들을 내각에 입각시켰다이들 대부분 1년 후 혁명정부의 각료로 등장한다역사는 두 번 이상 이렇게 기이한 짓을 해왔다다만 이번의 경우 역사의 기이한 행위는 너무나 수명이 짧았다.

 

차르가 임명한 고레미킨 내각의 장관들 대다수는 입헌민주당 만큼이나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있었다그래서 진보 동맹과의 합의를 선호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최고통치자군대자치도시도의회(젬스트보), 귀족상인노동자 등의 신뢰를 받지 못하는 정부는 제대로 역할을 할 수도 존재할 수도 없다이런 정부는 명백히 언어도단이다.” 쉐르바토프공은 1915년 8월 자신이 내무장관으로 있던 내각을 이렇게 평가했다외무장관 사조노프는 이렇게 말했다: “무대장치를 제대로 하더라도 한군데 빈틈을 남겨두어야 한다그러면 입헌민주당이 맨 먼저 타협안을 들고나올 것이다밀류코프는 부르주아 가운데 아마 가장 위대한 인물이고 사회혁명을 무엇보다 두려워한다이외에도 입헌민주당원 대다수는 혁명으로 자기 자본이 날아갈까 전전긍긍하고 있다.” 밀류코프 자신은 진보 동맹이 어느 정도 양보해야한다고 생각했다양측은 협상을 시작할 준비가 되었으며 모든 것이 철저히 기름칠이 된 것처럼 보였다고레미킨 수상은 오랜 세월과 훈장으로 무장했기 때문에 철저히 저자세를 고수하는 관료였다그는 대단한 참을성을 제 1책략으로 하고 전쟁은 나의 임무가 아니다.”라고 말했다그리고 모든 불평들에 대해 자신을 방어하는 제 2책략을 가진 늙은 냉소주의자였다그는 8월 29일 전쟁 사령부로 차르를 알현하였다그리고 모두가 자기 위치를 찾아야 하며 시끄러운 의회는 9월 3일 해산될 것이라는 내용의 정보를 가지고 돌아왔다. 차르의 의회 해산 포고령이 낭독되자 누구 하나 항의하지 않았다의원들은 차르 만세를 부르고 해산했다.

 

차르 정부는 스스로 고백했듯이 어느 누구의 지지도 받지 못했다그런데 어떻게 의회를 해산시킨 후 1년 반을 살아남을 수 있었는가러시아 군대의 일시적인 승리가 당연히 정세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그리고 이 유리한 정세는 황금 소나기로 강화되었다물론 전선의 승리는 곧 패배로 바뀌었지만 후방의 이윤은 계속되었다그러나 대중의 불만이 크게 분열되어 있었다는 점이 차르 정부가 유지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이었다모스크바 비밀경찰국장은 전쟁이 끝난 후 혁명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부르주아 계급이 우경화 했다고 보고했다전쟁 중에는 혁명이 불가능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군사산업위원회의 일부 지도자들이 노동자들에게 던진 추파에 대해 자본가들은 무엇보다도 놀랐다헌병 대령 마르티노프는 맑스주의 문헌들을 전문적으로 읽어서 뭔가를 알고 있었다그는 정세가 유리하게 일부 개선된 이유가 사회계급들의 꾸준한 분화 때문이다이것이 계급간의 날카로운 이해관계의 모순을 은폐했다이 모순은 특히 지금 강하게 느껴진다.”라고 일반적인 결론을 내렸다.

 

1915년 9월 차르의 의회 해산 조치는 노동자가 아니라 부르주아 계급에게 던져진 단도직입적인 도전장이었다이때 자유주의 의원들은 별로 열성적이지 않은 차르 만세를 외치며 항의 한번 하지 않고 스스로 해산했다그러나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의 노동자들은 이 조치에 항의하여 파업에 돌입했다이것은 썰렁한 자유주의자들을 더욱 썰렁하게 만들었다이들은 차르의 가족회의에 초대받지 않은 제 3자가 끼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그러면 차르에게 만세를 부르는 것 이외에 다른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는가좌익으로부터 약한 불평을 들은 후 자유주의자들은 자주 사용하는 방법을 택했다합법적 영역에만 머물고 애국적 의무만 달성하여 차르 관료들을 불필요한 존재로” 만든다어쨌든 새로운 내각 명단은 당분간 한쪽에 조용히 모셔놓아야 했다.

 

당시 정세는 자동적으로 악화되고 있었다. 1916년 5월 의회는 다시 소집되었다그러나 소집의 이유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어쨌든 의회는 혁명을 촉구할 의도는 전혀 없었다그리고 회기를 통해 달리 말할 것도 없었다로지안코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회기는 힘없이 진행되었다의원들은 등원하다가 말기를 반복했다. ... 계속적인 투쟁은 아무 소득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정부는 아무 것도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부정부패는 증대하고 있었다나라는 붕괴되고 있었다.” 부르주아 계급은 혁명을 두려워했다그러나 혁명 외에 이 계급이 할 일은 하나도 없었다이 때문에 1916년 차르는 자기가 사회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환상에 빠져있었다.

 

그러나 가을이 되자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전쟁이 전혀 가망이 없음이 모두에게 명백해졌다대중의 분노는 어느 순간에든 터져 올라올 것 같았다지난번과 같이 차르 정부를 친독파라고 공격한 후 독자적으로 평화조약을 체결할 방안을 모색해서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고 자유주의자들은 생각했다진보 동맹의 지도자 프로토포포프 의원은 1916년 가을 스톡홀름에서 독일 외교관 바부르크와 협상에 들어갔다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자유주의자들의 의중을 충분히 알 수 있다의회 의원단은 프랑스와 영국을 친선 방문했다동맹국들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 후 후진국 러시아를 주요한 경제 식민지로 삼으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이를 위해 동맹국들은 전쟁을 통해 러시아의 진을 전부 짜내려 했다동맹국들의 의중을 자유주의 의원들은 너무도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연합국들이 승리하는 동시에 러시아가 패배한다면 러시아는 식민지로 전락할 것이었다따라서 러시아의 유산 지배계급은 연합국들과의 너무 가까운 관계를 피하고 독일과의 독자 평화조약 체결을 모색하여 구국의 길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이를 위해서는 영국과 프랑스의 적대관계를 이용해야했다프로토포포프와 바부르크의 회담은 이 방향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이었다이 회담은 연합국들에게 위협을 가해 양보조치들을 끌어내려는 포석과 독일과 평화협정을 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하는 포석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프로토포포프는 차르의 외교관들과 합의하여 행동에 나섰다이 회담은 스웨덴 주재 러시아 대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되었다이 뿐이 아니었다그는 의회 의원단 전원의 동의를 얻었다부수적으로 자유주의자들은 이 정찰 행위를 통해 꽤 중요한 국내 정책을 펴고 있었다이들은 차르에게 암시를 보냈다: “우리를 믿으십시오그러면 슈튀르머(역자 주: 1916년 1월부터 11월까지 차르 내각의 수상)보다 더 조건도 좋고 믿을만한 단독 평화조약을 이끌어내겠습니다.” 프로토포포프 즉 그를 밀고 있는 세력의 구상은 단순했다러시아 정부는 동맹국들에게 전쟁을 끝낼 수밖에 없으며 만약 동맹국들이 평화협상을 거부한다면 러시아 자신이 독일과 단독 평화조약을 체결할 수밖에 없다고 몇 달 전에 미리” 통보한다. 10월 혁명이 성공한 후 스스로 작성한 자백서에서 프로토포포프는 당연히 이렇게 밝혔다: “러시아의 모든 합리적인 사람들 그리고 이들 중 인민자유(입헌민주당)의 모든 지도자들도 러시아가 계속 전쟁을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프로토포포프는 협상을 끝내고 귀국한 후 자초지종을 차르에게 보고했다. 차르는 독일과의 단독 평화조약에 완전히 공감했다다만 그는 자유주의자들을 이 일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덧붙이자면 프로토포포프는 진보 동맹과 결별한 후 차르 친위 세력의 일원이 되었다이 멋쟁이 양반은 차르와 황후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런 행보를 취했다고 자백했다그러나 아마 내무장관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자유주의 진영을 배신했을 것이다그러나 프로토포포프의 배신적 행위는 탐욕비겁함배신을 특징으로 한 자유주의 대외정책의 일반적 성격을 확인시켰을 뿐이었다.

 

11월 1일 의회는 다시 소집되었다국내 정세는 참을 수 없는 긴장상태에 도달했다의회가 중대한 조치를 발표할 것이라고 기대되었다뭔가 행동이 필요했다아니면 최소한 뭔가 말하는 것이 필요했다진보 동맹은 의회에서 차르의 실정을 폭로해야하는 자신의 처지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의사당 의석에서 정부의 주요 조치들을 평가한 후 밀류코프는 조치 하나 하나가 발표될 때마다 이렇게 물었다: “정부의 조치들은 어리석음의 소산인가 아니면 일부러 나라를 망치려는 국가반역 행위인가?” 다른 의원들도 정부의 정책에 거세게 항의했다정부의 조치를 옹호하는 의원은 거의 없었다이에 대해 정부는 늘 그렇듯이 이렇게 응답했다의원들의 연설은 공개가 금지되어 있다그러나 연설문들은 백만 부 규모로 복사되어 널리 읽혀졌다후방 전방 할 것 없이 모든 정부 부서에는 금지된 연설문 복사판이 나돌았다그리고 연설문을 복사한 사람에 따라 빈번하게 내용이 덧붙여졌다. 11월 1일 의회의 토론 내용은 전국적으로 그 반향이 너무 커서 연설 당사자들은 후환이 두려워 벌벌 떨었다.

 

1905년 혁명을 진압한 두르노보의 영감을 받은 강인한 극우 관료 일개 그룹이 이 순간을 이용하여 차르에게 특별조치를 청원했다이 경험이 풍부한 관리들은 진지한 경찰학교에서 훈련받았기 때문에 정세를 멀리까지 내다볼 줄 알았다그리고 이들이 청원한 조치들이 아무 소용이 없었다면 그것은 구체제의 질환을 치료할 수 있는 약이 없었기 때문이었다이 청원자들은 부르주아 자유주의 야당에게 추호도 양보하지 말 것을 조언했다흑백인조 극우분자들은 자유주의자들이 너무 멀리 나가고 있다고 생각했다그러나 공직에 있는 이 반동들은 흑백인조들의 저속한 생각을 경멸했다. “자유주의자들은 너무 허약하고 분열되어 있으며 솔직히 말해 너무 별 볼일 없는 인간들이다이들의 집권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며 불안한 것이 문제였다이 반동들의 지적에 의하면 주요 야당인 입헌민주당의 허약함은 그 이름에 표현되어 있다즉 이 정당의 정치 핵심은 부르주아적인데 이름에는 민주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다상당한 정도 자유주의 지주들의 정당이기도 하지만 이 정당은 차르 정부의 의무적 토지보상제(역자 주: 1861년 농노해방령에 의해 농민들에게 일정량의 토지가 유상으로 분배되었다농민들에게 분배된 토지를 소유했던 지주들은 국가로부터 금전적인 보상을 받았다.)에 서명했다. 차르의 친위부대인 이들 비밀 고문관들은 자신들에게 익숙한 상징을 사용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남의 카드 한 벌에서 빼낸 트럼프 카드가 아니었다면(즉 차르의 권위주의 정책이 아니었다면입헌민주당은 자유주의 변호사교수정부의 관리들로 구성된 다수 회원의 협회에 지나지 않는다.” 혁명가는 이와 다르다고 이들은 지적한다이들은 혁명정당들의 의의를 인정하되 분노로 이를 갈면서 인정한다: “혁명 정당들의 위험성과 힘은 이들이 사상(!), 잘 준비된 조직 대중을 보유하고 있는 데에서 나온다.” 혁명정당들은 농민의 압도적 다수의 공감을 기대할 수 있다농민은 혁명 지도자들이 다른 사람들의 토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바로 그 순간 노동계급을 뒤따를 것이다.” 이 상황에서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국민에게 책임지는 내각은 어떤 정책을 취할 것인가? “우익 정당들이 완전하게 파괴될 것이다처음에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질 중간 정당들(중앙당자유보수당, 10월당입헌민주당의 진보분파)은 서서히 영향력을 잠식당할 것이다그리고 같은 운명이 입헌민주당을 위협할 것이다... 그리고 혁명 군중, 코뮌, 차르 왕조의 멸망대대적으로 학살되는 유산계급에 뒤이어 마지막으로 농민 산적대가 등장할 것이다.” 여기서 경찰의 분노는 일종의 역사적 비전으로 상승하고 있다.

 

이들이 제시한 정책의 적극적인 부분은 과거부터 일관되게 존재해왔던 것으로 새로운 내용은 전혀 없었다: 차르 전제를 가차없이 옹호하는 정부의 수립의회의 철폐두 수도에 대한 계엄령 선포반란 진압군의 편성이 정책의 핵심들은 혁명 직전 마지막 몇 달간 정부 정책의 기초가 되었다그러나 이 정책은 두르노보가 1905년 겨울에 휘두른 권력을 전제로 했을 때만 성공할 수 있었다그런데 이 권력은 1917년 가을쯤에는 존재하지 않았다이 현실을 인식하여 차르체제는 몰래 그리고 부분으로 나누어서 인민의 목을 졸라 죽이려했다무조건 차르와 황후에게 충성을 바치는 우리 사람들로 장관들이 바뀌었다그러나 우리 사람들은 특히 배신자 프로토포포프의 경우 하찮은 인간들에 지나지 않았다의회는 철폐되지 않았으나 다시 해산되었다페트로그라드에 대한 계엄령은 유보되어 결국 혁명은 승리했다그리고 반란 진압군 자체가 반란에 가담해 버렸다이 모든 것이 2개월 또는 3개월 후에 명백해졌다.

 

이때 자유주의 진영은 상황을 구출하기 위해 최후의 노력을 쏟고 있었다참정권을 누리는 부르주아 계급의 모든 조직들은 야당의 11월 의회 연설들을 일련의 새로운 선언문을 통해 지지했다이 선언문 가운데 가장 무례한 것은 12월 9일자 자치도시연합의 결의문이었다: “무책임한 범죄자들과 광신도들이 러시아의 패배치욕그리고 노예화를 준비하고 있다.” 의회는 국민에게 책임지는 정부가 구성될 때까지 해산하지 말 것이 촉구되었다심지어는 관료집단과 엄청난 재산가들의 이익을 옹호하는 국무회의조차 국민의 신뢰를 얻고 있는 인사들이 정부를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귀족연합조차 이와 비슷한 내용을 촉구했다즉 이끼가 잔뜩 낀 돌들도 정부 정책을 반대하며 아우성을 부린 셈이었다그러나 변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차르는 권력의 마지막 남은 쪼가리들을 손에서 놓으려 하지 않았다.

 

주저와 지연 끝에 마지막 의회의 마지막 회기가 1917년 2월 14일에 소집되었다혁명 발발 2주일 전이었다시위가 예상되었다입헌민주당의 기관지 <레치>(역자 주연설이라는 의미이다)는 시위를 금지하는 페트로그라드 군단장 하발로프 장군의 담화문과 암흑 세력의 위험하고 나쁜 충고를 노동자들에게 경고하는 밀류코프의 편지를 실었다파업에도 불구하고 의회는 평화스러운 분위기에서 개원했다권력의 문제에는 더 이상 관심이 없는 체하면서 의회는 중요한 그러나 여전히 실무적인 식량 공급 문제에 몰두했다로지안코가 나중에 회상했듯이 분위기는 무기력하기 그지없었다: “우리는 의회의 무력감과 아무 소득 없는 투쟁에 대한 피로감을 동시에 느꼈다.” 진보 동맹이 말로 그리고 오직 말로만 행동할 것이라고 밀류코프는 계속 반복했다. 2월 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될 의회는 이런 상태였다.

 


제 3장 노동계급과 농민

 

러시아 노동계급은 전제국가의 정치환경 속에서 정치투쟁의 걸음마를 배웠다불법파업지하 서클불법성명서거리 시위경찰 및 군대와의 대치 등이 노동자들을 정치적으로 훈련시켰다급격히 발전하고 있던 자본주의와 천천히 진지들을 내주고 있는 절대주의가 합동으로 노동자 정치학교를 세워주었다거대기업에 의한 노동자의 집중격심한 국가탄압젊고 패기 넘치는 노동계급의 추진력 등으로 서구에서 대단히 희귀한 정치파업이 러시아에서는 노동자 투쟁의 기본 메뉴가 되었다. 20세기 초 러시아의 파업 통계는 러시아 정치사의 매우 인상적인 지표이다책의 내용을 통계수치로 도배할 수는 없다그러나 1903년부터 1917년까지 러시아에서 발생한 정치파업 통계를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가장 단순하게 상황을 드러내는 이 통계는 공장감독 대상기업만 조사대상으로 하고 있다농업은 물론이고 철도광산기계 및 일반 영세기업들은 여러 이유로 인해 통계 대상에서 빠져있다그러나 이 결함에도 불구하고 시기별 파업빈도를 나타내는 그래프는 변화가 뚜렷하다.

 

러시아는 자궁 속에 거대한 혁명이 들어앉아 있는 나라이다이 나라의 정치 체온을 잴 수 있는 유일한 그래프가 눈앞에 드러난다공장감독 대상기업들이 고용한 노동자의 수는 1905년에는 150, 1917년에는 200만이었다노동계급의 비중이 이렇게 적은 후진국에서 파업운동은 세계역사상 유례가 없는 폭발력을 보인다소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허약성농민운동의 분산성 및 맹목성 때문에 노동계급의 혁명파업은 막 깨어나고 있는 인민이 절대주의 갑옷에 내려치는 철퇴가 된다여러 번 파업에 참가한 노동자를 두 번 파업에 참가한 것으로 계산하면 1905년 정치파업에 참여한 노동자는 184만 3,000명이다러시아의 정치 역사를 전혀 모르는 사람도 이 수치를 통해 혁명이 발발한 해를 알 수 있다.


연도

정치파업 참여 노동자 수(단위: 1천명)

1903

87

1904

25

1905

1,843

1906

651

1907

540

1908

93

1909

8

1910

4

1911

8

1912

550

1913

502

1914(6개월)

1059

1915

156

1916

310

1917(1월과 2)

575


(저자 주: 1903년과 1904년의 경우는 모든 파업을 의미한다당연히 경제파업이 지배적이었다.)

 

공장감독 기록에 의하면 러일전쟁의 첫해인 1904년에는 전부 합해 겨우 25,000명의 노동자가 파업에 참가했다. 1905년에는 정치파업과 경제파업을 합쳐 286만 3,000명의 노동자가 파업에 참여했다전년에 비해 무려 115배나 많은 수치이다이 놀라운 사실 자체는 이렇게 제안한다노동계급은 정세의 흐름에 따라 즉흥적으로 그리고 유례없는 혁명활동을 전개할 동력을 가진 계급이다이 계급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자신의 대오 내에서 투쟁과 거대한 임무의 차원에 적합한 조직을 만들어낸다이 조직이 바로 소비에트였다소비에트는 1905년 첫 러시아 혁명 과정에서 탄생하여 총파업과 국가권력 장악의 기관이 되었다.

 

1905년 12월 봉기에서 패배한 후 노동계급은 다음 2년간 투쟁의 성과를 방어하는 영웅적인 투쟁을 벌인다이 2년은 파업통계가 말해 주듯이 혁명과 직접 관련이 있는 기간이지만 혁명의 퇴조기였다파업통계에 의하면 1908년부터 1911년까지는 반혁명이 승리한 시기이다반혁명의 승리와 함께 들이닥친 경제위기는 이미 너무 많은 피를 흘린 노동계급을 탈진상태에 빠뜨린다추락의 깊이는 상승의 높이와 대칭을 이룬다러시아 사회의 격동은 이 단순한 수치 속에 반영되어 있다.

 

1910년에 시작된 경기호황은 노동자들을 일으켜 세우고 이들에게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1912년부터 1914년까지의 통계는 1905년부터 1907년까지의 통계를 거의 되풀이하고 있으나 흐름은 정반대이다위에서 아래로가 아니라 아래에서 위로 곡선이 움직이고 있다이제 노동자의 수도 늘어나고 투쟁경험도 쌓였다이 새로운 그리고 더 높은 역사의 기초 위에 새로운 혁명공세가 시작된다. 1914년 첫 6개월간의 정치파업 수치는 1905년 혁명 절정기에 기록된 수치에 접근한다그러나 전쟁의 발발로 이 과정은 급격히 교란된다전쟁 첫 몇 개월간 노동계급은 지배계급의 전쟁 선동에 이렇다할 정치적 대처를 하지 못하고 무기력에 빠진다그러나 1915년 봄이 되면 이 증상은 과거지사가 된다정치파업의 새로운 순환이 시작되고 이 순환은 1917년 2월 병사와 노동자의 봉기로 절정에 이른다.

 

대중투쟁의 급격한 하강과 상승 때문에 몇 년이 지난 후 러시아 노동계급은 이전과는 전혀 달라져서 거의 알아볼 수가 없다. 2, 3년 전 만해도 단 한 건의 자의적인 경찰 공격에 대해서도 만장일치로 파업에 돌입하던 공장들이 지금은 완전히 혁명의 색깔을 상실하고 저항 한번 없이 가장 극악한 범죄행위도 참아 넘긴다거대한 패배는 상당한 기간 무기력을 초래한다의식적인 혁명분자들은 대중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한다아직도 전부 없어지지 않은 편견과 미신이 다시 살아난다이 시기에 농촌 마을에서 도시로 이주하는 회색 빛 인구가 노동계급의 대오를 희석시킨다이때 회의주의자들은 혁명의 불가능성을 확신하며 고개를 젓는다회의가 확신으로 변하는 아이러니가 연출된다. 1907년부터 1911년까지의 시기가 바로 이랬다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대중은 패배의 심리적 상처를 극복한다새로운 정세 또는 새로운 경기의 흐름이 새로운 정치투쟁의 순환을 개시한다혁명분자들은 다시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대중을 만난다이제 투쟁은 더 높은 차원에서 다시 시작된다.

 

멘셰비키주의는 혁명의 퇴조기와 반동기에 그 모습을 완성했다러시아 노동계급의 두 으뜸가는 정치경향을 이해하려면 이 사실을 유념해야한다이 경향은 혁명과 결별한 노동자의 얇은 부위를 주요 정치기반으로 삼았다반면에 볼셰비키주의는 반동기에 잔인하게 분쇄된 후 전쟁이 터지기 전 몇 해 동안 새로운 혁명의 파도 위로 급히 상승하기 시작했다. “쉬지 않는 투쟁저항계속적인 조직활동을 수행할 준비가 된 가장 열성적이며 대담한 분자는 바로 레닌 주위로 결집된 분자조직인물들이다.” 러시아 경찰청은 이렇게 말하면서 전쟁 전 몇 년간의 볼셰비키 혁명 활동을 개략적으로 묘사했다.

 

1914년 7월 외교관들이 유럽을 십자가에 매달고 마지막 못을 박아 전쟁의 재앙을 준비하고 있을 때 페트로그라드는 혁명의 용광로처럼 끓어오르고 있었다프랑스의 대통령 푸앵카레는 가두투쟁의 마지막 메아리와 애국주의 시위의 첫 웅성거림이 들리는 가운데 알렉산드르 3세의 무덤에 화환을 증정했다.

 

전쟁이 없었다면 1912년에서 1914년까지의 대중적 정치공세가 곧바로 차르체제의 전복을 가져왔을까이 질문에 확신을 가지고 답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불가피하게 혁명은 터졌을 것이다그러나 어떤 단계들을 거치면서 혁명이 진행되었을까혁명이 또 패배하지는 않았을까농민을 투쟁으로 인도하고 군대의 공감을 획득하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까이런 방향들로는 추측만이 가능하다어쨌든 전쟁은 처음에 투쟁을 후퇴시켰다그러나 다음 시기에 더욱 강력하게 투쟁을 추진시켜 압도적인 승리를 가능케 했다.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첫 북소리에 혁명운동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투쟁에 좀더 적극적인 노동자들이 전선으로 끌려갔다혁명분자들은 공장에서 전선으로 내몰렸다파업에 대해 가혹한 벌이 내려졌다노동자 신문들은 전부 강제 폐간되었으며 노동조합은 목이 졸렸다수십만의 여성소년농민 등이 공장으로 밀려들어왔다제 2인터내셔널의 정치적 파산과 함께 발발한 전쟁은 정치적으로 노동자들을 대단히 혼란시켰다그리고 막 등장한 공장통제위원회(factory administration)가 공장의 이름으로 애국심을 고취시키면서 상당수 노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좀더 대담하고 결의에 찬 혁명 성향의 노동자들은 침묵을 강요받고 때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침묵을 강요당한 소규모 혁명서클에서 혁명사상은 아주 희미하게 빛을 내고 있을 뿐이었다이 당시 볼셰비키라고 자기를 감히 소개하는 노동자는 아무도 없었다체포당할 수도 있었으며 후진 노동자들에게 몰매를 맞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의회의 볼셰비키 의원단에는 믿을만한 인물들이 별로 없었을 뿐더러 전쟁 발발의 순간에 당의 노선을 선전할 임무를 완수할 수준도 아니었다멘셰비키 의원들과 함께 인민의 문화 복지를 공격하는 세력이 어디서 나타나든 대적하겠다고 약속하는 선언문을 발표했을 뿐이었다이 저자세를 의회는 박수로 환영했다레닌은 해외에서 러시아군의 패배와 이로 인한 국내의 혁명을 주창했다(혁명적 패배주의). 그러나 그의 선언을 공개적으로 대변한 당 조직은 하나도 없었다그러나 볼셰비키 가운데 애국주의자의 비율은 무시해도 좋을 만큼 미미했다러시아의 전쟁 승리를 주창한 인민주의자나 멘셰비키와는 대조적으로 1914년 볼셰비키는 전쟁에 반대하는 대중 선동을 연설과 유인물로 전개했다의회 의원단은 곧 평정을 되찾아 혁명활동을 재개했다그러나 차르 정권은 고도로 발달된 비밀경찰 조직을 통해 이들의 활동을 면밀히 추적하고 있었다당의 페트로그라드 위원회 위원 7인 가운데 3인은 전쟁 전야에 비밀경찰에 고용되어 있었다이 사실을 통해 당시의 상황이 충분히 이해될 것이다이렇게 차르체제는 혁명운동과 술래잡기를 하고 있었다. 11월에 볼셰비키 의원들이 체포되었다그리고 전국적으로 당 조직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시작되었다. 1915년 2월 볼셰비키 의원단은 국가반역죄로 재판을 받았다기소된 볼셰비키 의원들은 조심스럽게 행동했다의원단의 이론적 지도자 카메네프는 레닌의 혁명적 패배주의와는 한참 거리가 있는 노선을 가지고 있었다우크라이나 중앙위원회 의장 페트로프스키 역시 마찬가지였다의원들에 대한 중형 선고에 노동자들이 전혀 항의하지 못했다고 경찰청은 만족스럽게 보고했다.

 

마치 전쟁이 노동계급을 새로 만들어낸 것처럼 보였다상당한 정도 이것은 사실이었다페트로그라드에서 노동계급의 인적 구성은 거의 40%나 바뀌어 있었다혁명활동의 연속성이 갑자기 단절되었다볼셰비키 의원단을 포함하여 전쟁 전의 모든 당 조직들은 갑자기 후위로 물러나고 거의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혁명세력의 침묵애국주의 함성 그리고 어느 정도 왕당파의 함성 밑에서는 새로운 폭발의 분위기가 서서히 대중 사이에 축적되고 있었다.

 

1915년 8월 차르의 장관들은 서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독일을 이롭게 하기 위해 자행되고 있는 국가반역 행위배신행위태업 등을 모든 곳에서 노동자들이 이 잡듯이 찾아내고 있다그리고 이들은 전선의 패배에 책임이 있는 자들을 찾아내는데 아주 열성적이다.” 당시 대중은 정치현실에 각성하고 있었으며 비판적 시각을 키우고 있었다이들 가운데 일부는 진심으로 그리고 일부는 자기보호를 위한 의도로 조국 방위” 입장을 채택했다이것은 사실이다그러나 이 생각은 출발점에 지나지 않았다노동자의 불만은 더욱 골이 깊어졌으며 작업반장흑백인조 노동자정부의 하수인 등을 침묵시켰다그리고 노동자 볼셰비키들이 머리를 들고 대담하게 나서게 했다.

 

대중은 비판에서 행동으로 나아간다이들의 분노는 맨 처음 식량 공급에 대한 항의로 표출되면서 때로는 지역차원의 봉기로까지 상승한다공장에서 군복무의 짐을 지고 있는 노동자들보다 여성노인소년들이 시장이나 광장에서 더 대담하고 독자적인 투쟁으로 나선다. 5월에 모스크바에서는 대중운동이 독일인에 대한 학살로 변질된다이 만행을 저지른 자들은 대부분 경찰이 보호하는 도시의 인간쓰레기들이다그러나 공업도시 모스크바에서 이런 학살이 자행되었다는 사실 자체는 노동자들이 불만에 찬 소읍의 인민에게 자신의 구호와 규율을 강제할 정도로 충분히 각성되지 못했음을 증명한다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던 식량 공급에 대한 항의투쟁은 전쟁의 최면을 깨고 파업투쟁의 길을 열었다.

 

미숙련 노동력의 공장 유입과 전쟁 이윤에 대한 탐욕스러운 각축은 모든 곳에서 노동조건의 하락을 가져오고 가장 야만적인 착취방법들을 등장시켰다생활비의 증가는 자동적으로 실질 임금을 하락시켰다경제파업은 이에 대한 대중의 어쩔 수 없는 반응이었다특히 이 투쟁이 전쟁의 개시로 유보되어왔기 때문에 그 규모는 폭풍우와 같이 거세었다파업은 집회정치선언문의 채택경찰과의 대치 그리고 빈번하게 발포와 희생자의 발생으로 이어졌다.

 

투쟁은 주로 도시중심부의 섬유공업지구에서 일어났다. 6월 5일 경찰은 코스트로마의 방직공들에게 연속해서 발포했다. 4명의 사망자와 9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8월 10일 군대는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노동자들에게 발포했다. 16명의 사망자와 30명의 부상자가 나왔다섬유노동자의 투쟁에 동조하여 지역 대대의 일부 병사들이 참여했다이 발포사건에 항의하여 전국 여러 곳에서 항의 파업이 일어났다이와 병행하여 경제투쟁이 진행된다섬유노동자들이 종종 맨 앞에서 행진한다.

 

1914년 첫 6개월간의 투쟁에 비교하면 이 운동은 위력과 구호의 명확함에 있어서 큰 후퇴에 해당된다그러나 이것은 전혀 놀랍지 않다경험 없는 대중이 투쟁에 나선 반면 지도적 노동자들이 완벽하게 해체되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전쟁 발발 후 발생한 이 첫 파업투쟁에서 뒤이어질 거대한 투쟁의 메아리를 느낄 수 있다법무장관 흐보스토프는 8월 16일 이렇게 말했다: “지금 노동자들이 무장시위에 나서지 않는 이유는 아직 이들이 조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레미킨은 더욱 집약적으로 이렇게 표현했다: “노동자 지도부에게는 조직이 없다이것이 이들의 문제이다볼셰비키 의원 5명의 체포로 조직이 와해되었기 때문이다.” 내무장관은 이렇게 덧붙였다: “볼셰비키 의원들을 사면시키지 말아야 한다이들은 운동의 중심이므로 가장 위험하다.” 이 인간들은 최소한 누가 진짜 적인지를 제대로 알고 있었다.

 

차르 내각은 극도의 절망감에 빠져 있었으며 자유주의적 양보조치를 취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그러나 이때에도 이들은 노동자 혁명의 두뇌 즉 볼셰비키를 강력하게 탄압하는 것이 과거 어느 때만큼이나 필요하다고 생각했다이때 대부르주아 계급은 멘셰비키와 협조하려 했다파업운동의 범위에 놀란 자유주의 기업가들은 선출된 노동자 대표들을 군사산업위원회에 포함시켜 노동자들에게 애국주의 규율을 강제하려했다내무장관은 구치코프가 입안한 이 계획을 반대하기가 아주 어렵다고 불평했다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 모든 일은 애국의 깃발 아래 그리고 국방의 이익에 맞추어 진행되고 있다.” 경찰 역시 사회애국주의자들에 대한 체포를 회피했다이 사실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이들이 파업과 혁명투쟁의 과도함에 대항하는 투쟁에서 반동의 동조자가 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전쟁이 계속되는 동안은 어떠한 봉기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비밀경찰은 확신했다사회애국주의자들의 영향력에 너무 커다란 신뢰를 보냈기 때문이었다.

 

군사산업위원회 선거에서 정열적인 금속노동자 구보즈데프가 주도한 조국방위주의자들은 소수파로 판명이 났다그는 혁명 후 수립된 연립정권에서 노동장관이 되었다그러나 조국방위주의자들은 자유부르주아와 관료들의 지지를 받았다볼셰비키들이 군사산업위원회 선거 보이코트를 주도하고 있었으며 이들을 패배시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결국 조국방위주의자들은 산업애국주의 기관들의 노동자 대표들을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들에게 강요하는데 성공했다멘셰비키의 입장은 이 위원회의 기업가들에게 행한 멘셰비키 대표의 연설에서 명확히 드러났다: “관료주의 권력이 물러나도록 요구하고 대신 여러분들이 현재의 사회구조를 물려받아야 한다.” 이 새로운 정치적 유대는 비약적으로 성장하고 있었다혁명 후에 이 관계는 잘 익은 과실을 가져다줄 것이었다.

 

전쟁은 지하혁명운동을 무섭게 황폐화시켰다의원단이 체포된 후 볼셰비키당에게는 중앙 집중화된 조직이 하나도 없었다지역위원회는 간간이 존재했으나 노동자지구들과의 관계가 종종 끊어졌다분산된 그룹서클고립된 개인들만이 활동했다그러나 소생하는 파업운동은 공장에서 이들에게 어느 정도 투쟁의지와 힘을 불어넣었다이들은 서서히 서로를 찾아내어 노동자지구와의 관계를 회복하기 시작했다지하운동도 소생했다경찰청 문서는 이렇게 보고하고 있다: “전쟁이 시작된 후 사회민주주의 지하조직의 압도적 다수파였던 레닌주의자들은 페트로그라드모스크바하리코프, 키예프툴라코스트로마블라디미르주(), 사마라 등 중심부에서 전쟁 중지정권 타도공화국 수립 등을 요구하는 혁명 유인물을 상당 분량 발행해왔다그리고 이 혁명 작업은 노동자 파업과 소요사태에서 눈에 띄는 성과를 내었다.”

 

노동자들의 전통적인 동궁 학살 기념행진은 전년에는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그러나 이 기념식이 1916년 1월 9일에는 광범위한 파업을 촉발시켰다이 해에 파업운동의 규모는 배로 늘었다경찰과의 대치는 대규모 장기화 파업에서 일상사가 되었다군대와 대치했을 때 노동자들은 눈에 띄게 이들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비밀경찰은 이 우려할만한 현상을 두 번 이상 목격했다.

 

전쟁 산업은 규모가 팽창하면서 주위의 모든 자원들을 집어삼키고 자신의 기초까지 무너뜨렸다평화시의 산업들은 소멸하기 시작했다모든 계획에도 불구하고 산업에 대한 통제시책은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관료집단은 강력한 군사산업위원회의 반대에 맞설 능력이 없었다그러나 이 책임을 자본가에게 넘겨주기도 거부했다혼란이 증대했다숙련 노동자들은 비숙련 노동자로 대체되었다폴란드의 광산과 공장은 독일의 손에 넘어갔다전쟁 첫해에 러시아 산업능력의 5분의 1이 사라졌다섬유생산의 약 75%를 포함해 무려 국내총생산의 50%가 군대와 전쟁의 필요에 투입되었다과부하가 걸린 수송수단은 공장에 필요한 연료와 원자재를 공급할 수 없었다전쟁은 경상국민소득 전체를 집어삼켰을 뿐 아니라 나라의 기본 자본재를 심각하게 갉아먹기 시작했다.

 

자본가들은 노동자에게 조금도 양보하지 않으려 했다이 성향은 점점 강해졌다그리고 정부는 늘 그렇듯이 모든 파업에 대해 가혹한 탄압으로 일관했다이 모든 것이 노동자의 사고를 특수에서 일반으로 그리고 경제에서 정치로 인도했다: “동시에 파업해야한다.” 이렇게 총파업 사상이 탄생했다대중의 급진화 과정은 파업 통계에 가장 설득력 있게 반영되어있다. 1915년에 정치파업 참여 노동자들은 경제파업의 경우보다 2.5배가 적었다. 1916년에는 2배가 적었다. 1917년 첫 몇 달에는 정치파업에 참여한 노동자 수가 경제파업의 경우보다 6배나 많았다페트로그라드의 역할은 단 하나의 수치에 잘 드러나 있다전쟁 기간에 정치파업에 참여한 노동자의 72%가 이 도시 출신이다!

 

이 투쟁의 불길 속에서 낡아빠진 수많은 관념들이 불에 타버린다. “차르 폐하에 대한 무례함과 공공연한 모욕의 모든 경우를” 법에 따라 처리할 경우 칙령 103조에 따라 진행될 재판의 수는 유례없이 상승할 것이다라고 고통스럽게” 비밀경찰은 보고하고 있다그러나 대중의 의식은 자신의 행동보다 한참 뒤쳐진다전쟁의 끔찍한 압력과 나라의 파괴는 투쟁을 극도로 가속화시킨다이 결과 농촌 마을이나 도시의 소부르주아 가족 내에서 갖게 된 수많은 견해와 편견들로부터 해방되지 못한 광범위한 노동자 대중은 혁명과 함께 이것들을 뿌리친다. 2월 혁명의 첫 단계에 이 사실은 강하게 그 진실성을 입증한다.

 

1916년 말이 되면 물가는 급격히 올라간다인플레와 수송의 마비에 실제 물건의 품귀현상이 추가되었다생필품에 대한 인민의 수요는 이때쯤이면 반으로 줄어들었다노동운동의 투쟁 곡선은 급격히 상승한다. 10월에는 투쟁이 결정적인 국면에 이르고 모든 형태의 불만이 하나로 모인다페트로그라드는 2월 혁명의 도약을 위해 잠시 숨을 고른다공장에서는 집회의 물결이 넘실거린다집회의 주제는 식량 공급높은 생활비전쟁정부이다볼셰비키 유인물이 배포된다정치파업이 시작된다즉흥적으로 준비된 시위가 공장 정문에서 시작된다일부 공장의 노동자들과 병사들이 서로 동지가 된다발트 함대의 혁명적 수병들에 대한 재판이 정치파업의 폭풍을 몰고 온다일부 병사들이 경찰에 발포한 사실을 프랑스 대사가 슈튀르머 수상에게 상기시킨다슈튀르머는 대사를 진정시킨다: “그런 놈들은 가차없이 없앨 겁니다.” 군사적 임무를 띠고 페트로그라드 공장에 배치된 상당한 숫자의 노동자들이 전선으로 보내진다한 해가 폭풍과 천둥으로 끝난다.

 

지금과 1905년 상황을 비교하면서 경찰청장 바실리예프는 아주 불안한 결론을 내린다: “반정부 정서는 아주 멀리까지 나아갔다위에서 언급한 소요기간 중에 광범위한 대중에게 목격된 어떤 정서보다 훨씬 더 멀리 나아갔다.” 바실리예프는 주둔군에 희망을 걸지 않는다심지어는 경찰관들도 완전히 믿을 수 없다정보부는 총파업 구호가 소생하고 테러가 소생할 위험성을 보고한다전선에서 온 병사와 장교들은 현 상황을 이렇게 말한다: “더 이상 무엇을 기다릴 것인가이런 저런 놈들을 왜 없애지 못하는가우리가 여기 있다면 생각하느라 시간을 낭비하지는 않을텐데,” 등등금속노동자 출신이자 볼셰비키 중앙위원인 슐리아프니코프는 당시 노동자들의 신경이 얼마나 날카로운 상태에 있었는지를 이렇게 묘사한다: “때때로 휘파람 또는 어떤 소음이든 충분했다노동자들은 이것을 공장을 멈추는 신호로 받아들이곤 했다.” 이 사실은 정치적 증상의 측면에서나 심리적 사실로서나 대단히 중요하다혁명은 거리로 나서기 전에 이미 대중의 신경 속에 존재한다.

 

지방의 주()들도 같은 단계를 경과하고 있다다만 그 과정이 더딜 뿐이다운동의 규모가 커지고 투쟁 의지가 높아감에 따라 투쟁의 중심은 섬유노동자로부터 금속노동자로 경제파업에서 정치파업으로 지방의 주들에서 페트로그라드로 이동된다. 1917년 첫 몇 달간 정치파업에 참여한 노동자의 숫자는 57만 5,000명으로 이중 대다수는 수도에서 나왔다. 1월 9일 저녁 경찰이 새로 공격에 나섰으나 15만 명의 노동자들은 수도에서 피의 일요일 기념 파업에 돌입했다대중의 정서는 긴장되어 있었다금속노동자들이 선두에 섰다노동자들은 모두 후퇴할 수 없다고 느꼈다모든 공장에서 주로 볼셰비키 주위로 적극적인 중핵이 형성되고 있었다. 2월 첫 2주일간 내내 파업과 집회가 계속되었다. 2월 8일 푸틸로프 공장에서 경찰은 광석 찌꺼기와 낡은 쇠 덩어리의 우박 세례를 받았다의회가 개원하는 14일에는 약 90,000명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했다모스크바에서도 여러 공장들이 조업을 중지했다. 16일 당국은 페트로그라드에 빵 배급 카드를 도입하기로 결정했다이 새로운 조치는 대중의 신경을 거슬렸다. 19일 대부분 여성인 군중이 식료품 상점에 모여서 빵을 요구했다하루 후 이 도시의 여러 곳에서 빵집들이 털렸다이런 사건들이 바로 며칠 후에 터질 혁명의 소리 없는 번갯불이었다.

러시아 노동계급의 혁명적 대담성은 이들에게만 그 원인이 있지 않았다노동계급은 전체 인민의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따라서 인민의 막강한 지지가 없었다면 노동계급은 자신의 투쟁에 충분한 넓이를 부여할 수 없었을 것이다특히 인민의 선두에 설 정도의 충분한 지위를 부여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이 지지는 농업문제로 인해 노동계급에게 보장되었다.

 

1861년 농노제의 폐지로 농민은 늦게나마 반 정도의 해방을 누렸다이 당시 농업의 생산력 수준은 200년 전과 똑같았다농업개혁 과정에서 어느 정도 도난 당하기는 했지만 오랜 전통의 공유지는 보존되었으며 옛날의 경작방식도 그대로 유지되었다이 상황은 자동적으로 농촌의 과잉인구와 격심한 위기를 초래했다동시에 이것은 삼포제 농업방식의 위기이기도 했다이 상황은 17세기가 아니라 19세기에 발생했다즉 발전한 화폐경제가 트랙터만이 부응할 수 있는 요구를 나무쟁기에게 요구한 셈이었다이 때문에 농민은 더욱 답답하게 막다른 골목에 갇혔다고 느꼈다여기서도 개별적으로 진행되었던 역사의 과정들이 하나로 결합되었으며 이 결과 극단적으로 첨예한 모순을 낳았다학식을 갖춘 농학자와 경제학자는 오랜 토지에 합리적인 경작방식을 도입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농업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설교해왔다즉 이들은 지주토지관리인, 차르를 그대로 둔 채 더 높은 수준의 기술과 문화로 도약할 수 있다고 농민에게 말했다그러나 어떤 경제체제도 자신의 가능성들을 소진할 때까지는 사라지지 않는다모든 경제체제 가운데 가장 발전속도가 느린 농업경제체제는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농민은 좀더 집약적인 재배방식으로 전환할 것을 강요받았다그러나 이 방식으로 나아가기 전에 농민은 삼포제 농경지를 넓히려는 마지막 시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이 시도는 당연히 지주 소유의 토지를 농민 소유로 전환시켜야 성공할 수 있었다화폐와 시장의 따가운 채찍질을 받으면서 농토의 협소함에 질식하고 있던 농민은 지주를 이번 기회에 아주 확실히 없애려 했다.

 

1905년 혁명 직전에 유럽 러시아에서 경작 가능한 토지의 총면적은 2억 8,000만 데시아틴(역자 주: 1데시아틴은 2.702 영국식 에이커이다.)으로 추산되었다이 가운데 공유지는 약 1억 4,000만 데시아틴이었고 차르 소유지가 500만 데시아틴교회 소유지가 250만 데시아틴이었다개인소유지 가운데 7,000만 데시아틴이 30,000명의 대지주 소유였는데 대지주 한 명이 500데시아틴이 넘는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이 7,000만 데시아틴이 대체로 1,000만 농민 가족들의 것이 되었어야 할 농지였다이 농지 통계야말로 최종적으로 완벽한 농민전쟁 강령이었다.

 

1905년 혁명은 지주를 없애지 못했다모든 농민들이 들고일어난 것은 아니었다농촌운동은 도시운동과 동시에 일어나지 않았다농민 병사들은 동요했으며 마침내 봉기 노동자들을 진압할 충분한 병력을 제공했다세메노프스키 방위군 연대가 모스크바 봉기를 진압하자마자 차르는 자신의 전제적 권리와 지주 소유지를 줄여야겠다는 생각을 모두 지워버렸다.

 

그러나 패배한 혁명이 농촌에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정부는 오래된 농지에 대한 국가 보상제도를 철폐하고 넓은 시베리아를 식민지로 개척하기 시작했다이에 놀란 지주들은 소작료에 대해 상당히 양보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토지를 대규모로 팔기 시작했다혁명의 이러한 과실들은 부유한 농민의 것이 되었는데 이들은 지주의 농토를 빌리거나 구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승리한 반혁명이 도입한 가장 주요한 개혁인 1906년 11월 9일의 법은 농민으로부터 자본주의적 농민이 등장할 수 있는 문을 활짝 열어놓았다대다수 농민의 의지에 반하여 소수의 농민에게 공유지의 일부를 개인적으로 소유하도록 허용한 이 법은 공유지에 떨어진 자본주의 포탄이었다스톨리핀 수상은 정부 농민정책의 핵심을 강한 농민을 지지하는 정책이라고 묘사했다이 정책의 핵심은 농민의 상층부가 공유지를 소유하게 만들어 이들이 정부를 지지하는 새로운 자본주의 농민이 되도록 유도하는 것이었다그러나 이 과제를 제시하는 것은 쉽지만 성취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농민문제를 부농 육성문제로 바꿔치기 하려는 시도를 통해 반혁명은 결국 자신의 목을 분질렀다.

 

1916년 1월 1일까지 250만 자영 농민이 1,700만 데시아틴의 토지를 손에 넣었다그리고 또 다른 200만 자영 농민이 1,400만 데시아틴의 농지를 자기들에게 넘길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이로서 개혁이 대대적으로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그러나 자영 농민 대다수는 자활 능력이 전혀 없었으며 자연도태의 대상에 불과했다후진적 지주가 자신의 넓은 토지를 그리고 소농이 조그만 땅뙈기를 파는 상황이 되자 이 토지들을 주로 구입하는 새로운 농민 부르주아 계급이 등장했다농업은 의심의 여지없는 자본주의 호황을 맞았다러시아의 농산물 수출액은 1908년 10억 루블에서 1912년 15억 루블로 증가했다이것은 농민의 상당수가 노동자가 되고 상층부 농민들이 더욱더 많은 곡물을 시장에 내놓았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었다.

 

농민의 전통적 공동체 관계를 대체하기 위해 아주 빠르게 자발적 협동체제가 발전했다이 새로운 관계는 몇 년 동안 농민대중 속에 아주 깊이 침투했다그리고 즉시 자유주의자와 민주주의자들이 추구하는 직접 민주주의의 이상향이 되었다그러나 협동조합의 진정한 권력은 부농에게만 있었다최종적으로 분석하면 협동체제는 이들의 이익에 봉사했을 뿐이었다나로드니크(인민주의지식인들은 농민의 협동체제에 자신들의 주요한 역량을 집중시켜 마침내 인민에 대한 사랑을 확고한 부르주아적 방식으로 전환시켰다이렇게 해서 최소한 부분적으로나마 ()자본주의적” 사회혁명당과 최상의 부르주아 정당인 입헌민주당의 정치연합이 준비되었다.

 

겉으로는 차르의 농업정책에 반대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자유주의 세력은 농촌공동체를 자본주의적으로 파괴하는 과정을 커다란 희망으로 지켜보았다자유주의자 트루베츠코이 공작은 이렇게 적었다: “농촌에는 아주 강력한 소부르주아 계급이 등장하고 있다이 계급의 전체적 모습과 핵심 성격은 단결된 귀족사회 또는 사회주의 몽상이라는 두 이상향과는 전혀 다르다.”

 

그러나 이 멋진 메달은 다른 측면을 가지고 있었다파괴된 농촌공동체로부터 아주 강력한 부르주아 계급” 뿐 아니라 대항 세력도 등장했기 때문이다생활 유지가 불가능한 토지를 내다 파는 농민의 숫자는 전쟁이 시작될 즈음 100만에 달했다이것은 500만 이상의 인구가 노동계급으로 합류했다는 것을 의미한다또한 절대빈곤의 좁은 농토에 붙어있을 수밖에 없는 수백만의 농민거지들이 강력한 폭발력을 가진 화약이 되었다이 결과 일찍부터 러시아의 부르주아적 발전을 저지했던 농민들 사이에 이 모순들이 계속 재생산되고 있었다()지주의 지지자로 설정된 이 새로운 농촌부르주아 계급은 기본 대중과 대립했다구지주들이 인민 전체에 대립한 것과 똑같았다이 계급은 차르체제를 지지하는 버팀목이 되기 전에 우선 자신들이 정복한 진지를 지킬 자기만의 질서가 필요했다이 상황에서 농업문제가 계속해서 의회에서 날카로운 이슈가 되는 것은 당연했다의회 내 모든 세력은 농업문제가 아직 최종 결론이 나지 않았다고 느꼈다농민 출신 의원 페트리첸코는 의회 연단에서 이렇게 선언한 적이 있었다: “아무리 오래 논의를 하더라도 새로운 지구를 만들지는 못할 것이다우리에게 토지를 양도해야한다.” 이 농민은 볼셰비키도 사회혁명당도 아닌 우익 왕당파 의원이었다.

 

노동자의 파업운동과 함께 1907년 말에 가라앉았던 농민운동은 1908년 부분적으로 소생했으며 다음 몇 년간 강력하게 성장했다물론 투쟁은 상당한 정도 농촌공동체 안으로 이전되었다이것이 바로 반동 세력이 정치적으로 바라던 바였다공유지를 분할하는 과정에서 농민들 사이에 무장충돌이 빈번히 일어났다그러나 지주에 대항하는 투쟁 역시 사라지지 않았다농민들은 빈번하게 지주의 장원수확물건초더미에 불을 질렀으며 공동체 농민의 의지에 반해 잘려나간 개인소유 토지도 점령했다.

 

이 상황에서 전쟁이 터졌다정부는 농촌으로부터 약 1,000만 명의 일꾼과 약 200만 마리의 말을 가지고 가버렸다허약한 자영농민은 더 허약해졌다토지에 씨를 뿌릴 수 없는 농민의 수가 늘어났다전쟁 발발 2년째가 되자 중농들 역시 파산하기 시작했다전쟁에 대한 농민의 적대감은 개월이 지나면서 더욱 격렬해졌다. 1916년 10월 페트로그라드 헌병국은 이렇게 보고했다농촌은 전쟁의 승리를 더 이상 믿지 않는다이 보고서는 보험설계사교사상인 등의 말에 기초하고 있었다. “모두가 기다리면서 이렇게 안달이 나서 묻는다언제 이 빌어먹을 전쟁이 끝나지?”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모든 곳에서 정치문제들이 토론되고 있으며 지주와 상인에 대항하는 결의문들이 채택되고 있다여러 조직들의 중핵이 형성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불만을 통일적으로 수렴하는 구심은 없다그러나 러시아 전역에 매일 매일 늘어나는 협동조합을 통해 농민이 단결할 것이라고 가정할 이유는 있다.” 이 말에는 과장이 섞여있다어떤 경우 헌병은 약간 앞서나갔다그러나 기본 사항들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없이 올바로 보고하고 있었다.

 

농민들이 자기에게 계산서를 들이밀 것이라고 유산계급은 예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러나 이들은 이 끔찍한 생각을 몰아냈다어쨌든 이 생각으로부터 벗어나기를 희망하였다이 주제에 대해 캐묻기 좋아하는 러시아 주재 프랑스 대사 팔레올로그는 전쟁 기간 중에 전농업장관 크리보쉰전수상 코코프셰프대지주 보브린스키 백작의회 의장 로지안코대기업가 푸틸로프 그리고 여타 저명인사들과 대화를 나누었다대화 가운데에서 그에게 드러난 사실은 이것이었다근본적인 토지개혁을 시행하려면 최소한 15년에 걸쳐 30만 명의 측량사가 동원되어야한다그러나 이 기간동안 자영농민의 수는 3,000만 명으로 늘어날 것이다따라서 이 모든 사전 계산들은 의미 없게 될 것이다따라서 지주관리은행가의 눈에는 토지개혁을 실시하는 것이 마치 원을 동일 면적의 정사각형으로 만드는 것과 같이 불가능했다그러나 이와 같은 수학적 엄밀성은 농민과는 완전히 무관했다농민들은 이렇게 생각했다우선 지주들을 몰아내고 그 다음에 어떻게 되는 지를 보자.

 

그러나 전쟁 중에 농촌은 비교적 평온했다적극적 분자들이 전선으로 끌려갔기 때문이었다그러나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있지 않을 때마다 병사들은 토지문제를 잊지 않았다참호 속에서 농민 병사의 미래 계획은 화약냄새로 찌들어있었다그러나 총기를 다룰 줄 알고 난 후에도 이 농민 병사들은 혼자 힘으로 자신들만의 농업민주혁명을 결코 달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이 혁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지도부가 필요했다세계역사상 처음으로 농민은 노동자에게서 자신의 지도자를 찾게될 운명이었다바로 이점에서 러시아 혁명과 이전의 모든 혁명들은 근본적으로 그리고 완벽히 차이가 난다.

 

영국에서는 농노제가 14세기말에 실질적으로 사라졌다러시아에 농노제가 수립되기 2백년 전 그리고 농노제가 폐지되기 450년 전의 일이다한번의 종교개혁과 두 번의 혁명을 통해 농민소유 토지의 몰수과정은 19세기까지 질질 끌었다이 나라의 자본주의적 발전은 외부의 압력이 없었다따라서 노동계급이 정치투쟁에 눈을 뜨기 훨씬 전에 자영농민을 청산시킬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절대왕정귀족계급교회 수장들에 대한 투쟁을 통해 다양한 층위의 부르주아 계급이 여러 번에 걸쳐 18세기초까지 급진적인 농업혁명을 완료했다이 격변 이후 오랜 시간에 걸쳐 자영농민은 부르주아 체제의 버팀목이 되었으며 1871년에는 부르주아 계급이 파리 코뮌을 진압하도록 도와주었다.

 

독일에서는 부르주아 계급이 농업문제를 혁명으로 해결할 능력이 없음을 입증했다그래서 이 계급은 1848년 농민을 배신하여 이들을 지주에게 넘겨주었다마치 약 300년 전에 루터가 농민전쟁 중에 농민을 배신하여 이들을 영주들에게 넘겨준 것과 같았다반면 19세기 중반에 독일 노동계급은 너무나 허약하여 농민의 지도부가 될 수 없었다이 결과 성장할 시간이 영국보다는 짧았지만 독일 자본주의는 미완성 부르주아 혁명을 시발로 발전하면서 농업을 자신의 이익에 종속시킬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얻었다.

 

러시아의 1861년 농업개혁은 정치적으로 완전히 무기력한 부르주아 계급의 요구에 따라 귀족과 관료 왕정에 의해 수행되었다이 농노해방 조치는 러시아의 강요된 자본주의적 변모와 결합하여 농업문제를 불가피하게 혁명의 문제로 전환시켰다러시아 부르주아 계급은 프랑스 모델아니면 덴마크 모델아니면 미국식 모델에 따라 농업개혁이 이루어지기를 꿈꾸었다어쨌든 러시아 식만 아니면 되었다그러나 이 계급은 프랑스 역사나 미국의 사회구조를 제때에 공부하는 일을 게을리 했다과거 혁명투쟁의 이력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 지식인층은 결정적인 순간에 혁명적 농민이 아니라 자유부르주아 계급과 지주 쪽에 붙었다이 상황에서 노동계급만이 농민혁명의 선두에 설 수 있었다.

 

후진국의 결합발전 법칙에 의하면 후진적인 요소들은 가장 현대적인 요인들과 기이하게 결합한다이 법칙은 농업문제에 봉착한 러시아에서 가장 완성된 모습을 보였다그리고 러시아 혁명의 근본적인 수수께끼에 열쇠를 제공했다오랜 러시아 역사의 야만적 유산인 농업문제가 부르주아 계급에 의해 해결되었거나 해결될 수 있었다면 러시아 노동계급은 아마 1917년에 국가권력을 장악하지 못했을 것이다소비에트 국가체제를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완전히 별개인 두 역사 과정 즉 (1) 부르주아 사회발전의 여명기에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운동인 농민전쟁과 (2) 부르주아 발전의 쇠퇴를 알리는 노동자 봉기이 두 역사 과정이 서로 합쳐지고 침투해야했다이것이 바로 1917년 혁명의 핵심내용이다.

 


제 4장: 차르와 황후

 

역사를 연구하는 일에 사회 및 역사 분석 대신 전혀 무관한 심리연구가 빈번히 애용되기도 한다본 저서는 무엇보다도 이런 경향을 무조건 멀리할 것이다대신 역사의 거대한 살아 움직이는 힘이 가장 크게 부각될 것이다이 역사의 거대한 동력은 그 성격상 개인의 한계를 초월한다. 차르 왕정도 이 역사의 동력 가운데 하나이다그러나 이 동력은 개인들을 통해 작용한다그리고 왕정의 작동원리는 개인과 분리될 수 없다역사 발전의 과정 중에 차르는 혁명과 마주쳤다따라서 역사발전의 한 고리인 차르의 개인적 특성에 관심을 갖는 것은 정당하다더욱이 최소한 부분적이나마 차르 개인의 영역이 끝나고 집단적 역사가 진행되는 부분을 엄밀히 확인할 필요가 있다그런데 종종 이 개인의 영역은 생각보다 훨씬 좁다개인의 특성은 역사발전의 더 높은 법칙이 개인에게 남긴 흔적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필자는 이 장에서 이 진실을 조명하려고 한다.

 

니콜라이 2세는 자기 아버지로부터 거대한 제국은 물론 혁명까지 물려받았다그런데 그는 제국은 고사하고 지방의 도나 군을 통치할 자질을 단 하나도 물려받지 못했다궁전 대문 앞으로 갈수록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역사의 저 거대한 파도에 대해 이 마지막 로마노프는 멍청한 무관심으로 일관했다그가 살고 있는 시대와 이 시대에 대한 그의 인식 사이에는 투명한 그러나 결코 침투할 수 없는 어떤 매질이 채워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차르 측근들은 10월 혁명의 승리 후 종종 이렇게 회상했다그의 치세 중 가장 비극적 순간은 만주 여순항에서 러시아군이 일본군에게 항복했을 때발트 함대가 쓰시마 해협에서 일본 함대의 공격을 받고 침몰했을 때이로부터 10년 후 러시아군이 갈리치아 전선에서 후퇴했을 때그리고 다시 2년 후 그가 왕좌에서 쫓겨나기 직전 측근들 모두가 침울함경악충격을 느낀 때였다그러나 차르는 자기 혼자만 평정을 유지했다주위에 천둥이 울리고 번갯불이 번쩍거릴 때 그는 평소와 똑같이 자신이 러시아 전역을 순회한 전체 길이를 물었다그리고 사냥이나 공식 회의 때에 있었던 일화들을 회상하였고 하루 일과의 사소한 일들에 관심을 가졌다그를 수행한 어느 장군은 이렇게 물었다: “거의 믿을 수 없는 대단한 절제력황태자 시절의 교육신이 모든 것을 예정한다는 믿음불충분한 상황인식이 가운데 무엇이 그를 그렇게 평온하게 만든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질문 속에 이미 반 이상 들어있다소위 황태자 시절의 교육” 즉 가장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그의 능력은 단순히 외부에서 강제된 훈련으로 설명될 수 없다이것의 핵심은 기질적인 무관심정신력의 빈곤의지력의 허약함이었다훈련의 결과라고 일부가 인정했던 차르의 무관심은 실제로는 그의 타고난 기질이었다.

 

차르의 일기는 이 점을 가장 잘 입증하고 있다정신적 공허함의 우울한 기록이 매해 매일 일기장을 지겹게 채우고 있다. “산보를 오래 했으며 까마귀 두 마리를 사냥했다낮의 햇빛 속에 차를 마셨다.” 산책과 보트 타기그리고 다시 까마귀 사냥그리고 다시 차 마시기이 모든 것은 인간의 의식적 행위라기보다는 생리 작용의 수준에 가깝다교회 예식에 대한 회상은 음주 파티와 같은 격조로 기록되고 있다.

 

의회가 개원을 앞두고 나라 전체가 격동에 휩싸여 있을 때 차르는 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4월 14얇은 셔츠를 입고 산보를 나갔고 노젓기도 다시 했다발코니에서 차를 마셨다스타냐는 우리와 함께 식사와 승마를 즐겼다책을 읽었다.” 독서의 주제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다영국의 감상적 애정소설아니면 경찰청의 보고서? “4월 15비테 수상의 사직서를 받다마리드미트리와 식사를 했다이들을 궁전까지 태워주었다.”

 

의회 해산을 결정하는 날자유주의자 클럽은 물론이고 내각도 두려워 벌벌 떨고 있을 때 차르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7월 7금요일아주 바쁜 아침이었다관리들과 30분 늦게 아침을 먹었다... 폭풍 때문에 푹푹 찌는 날이었다우리는 함께 산보했다고레미킨 수상을 영접했다의회 해산 포고령에 서명했다올가페티아와 식사를 했다저녁 내내 책을 읽었다.” 의회 해산을 언급한 문장 끝의 감탄부호가 그나마 가장 강렬한 감정 표현이었다해산된 의회의 의원들이 세금 납부를 거부할 것을 촉구했다일련의 군대 봉기가 스베아보르그크론슈타트군함 선상육군 부대 등에서 일어났다고위 관료들에 대한 혁명 테러는 유례없는 규모로 다시 시작되었다그런데도 차르는 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7월 9일요일결국 일이 터졌다의회가 오늘 폐쇄되었다미사 후 아침식사에 동석한 사람들은 뚜렷하게 침울한 표정이었다.... 날씨는 좋았다산보 중에 어제 가치나에서 오신 미샤 숙부를 만났다저녁 식사 때까지 그리고 저녁시간 내내 조용히 바빴다카누를 타고 노를 저었다.” 그는 카누 위에서 노를 저었다이 사항은 기록되어있다그런데 저녁시간 내내 무슨 일로 바빴는지는 적혀있지 않다항상 이런 식이었다.

 

아주 중요한 시기를 그가 어떻게 기술했는지 좀더 살펴보자: “7월 14옷을 입고 해수욕장까지 자전거를 타고 갔다즐겁게 해수욕을 했다.” “7월 15두 번 목욕했다날씨가 아주 더웠다우리 두 명만 저녁식사를 했다폭풍우가 지나갔다.” “7월 19아침에 목욕을 했다농장에 갔다블라디미르 숙부차긴이 우리와 점심을 먹었다.” 봉기와 다이너마이트 폭발사건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 잘하는 짓이다!” 이외에는 거의 언급이 없다평정을 잃지 않는 무관심이 놀라울 뿐이다그러나 이 무관심은 의식적인 냉소로까지는 결코 나아가지 못했다.

 

오전 9시 30분 카스피 연대 막사로 말을 타고 갔다... 산보를 오래 했다날씨가 너무 좋았다해수욕을 했다차를 마신 후 르보프공과 구치코프를 영접했다.” 두 자유주의자들을 예상치 않게 영접한 것은 스톨리핀이 야당 지도자들을 내각에 참여시키려 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이 사실에 대해서는 한마디의 언급도 없다미래 임시정부의 수반이 될 르보프공은 이 알현에 대해서 이렇게 적었다: “슬픔에 잠긴 황제가 우리를 맞이할 것을 예상했었다그러나 그는 짙은 자주색 셔츠를 입은 채 즐겁고 활기찬 모습이었다.” 차르의 시각은 하급 경찰관의 시각보다 나은 것이 조금도 없었다두 사람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후자는 현실감이 더 뛰어났으며 미신에 덜 짓눌렸을 것이라는 점뿐이었다몇 년간 니콜라이가 구독하여 자신의 사상을 형성하는데 도움을 받았던 유일한 신문은 국가예산으로 메슈체르스키공이 발행한 주간지였다그는 비열하고 뇌물을 받는 언론인으로 반동 관료 파벌에 속했다그는 자기 집단에서도 경멸의 대상이었다두 번의 전쟁과 두 번의 혁명을 거치면서도 차르의 시각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그의 의식과 사건들 사이에는 항상 무관심이라는 매질이 채워져 있었다그는 숙명론자로 인식되었는데 근거가 없지는 않았다다만 그의 숙명주의는 자기 별자리에 대한 적극적 신념과는 정반대였다그는 진정 자신을 운이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했다그의 숙명주의는 역사발전에 저항하여 수동적으로 자신을 방어하는 태도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의 자의적 성격과 함께 했다그런데 그의 자의적 성격은 심리적 동기로는 하찮으나 그 결과는 엄청났다. 비테 백작은 이렇게 적었다: “--나는 그것을 원한다따라서 그것은 존재해야한다.-- 이 표어는 이 허약한 통치자의 모든 활동 속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그의 치세의 특징은 죄 없는 피가 목적 없이 대단히 많이 흘려진 것이었다이 모든 일들은 오직 그의 나약함 때문이었다.”

 

니콜라이는 때때로 그의 반미치광이 고조부 파벨과 비교된다. “축복받은” 아들 알렉산드르와 내통한 친위 세력에 의해 파벨은 목 졸려 살해되었다자신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모두를 불신하는 경향전능한 권력을 쥐고 있으나 능력이 없는 사람의 특징인 예민한 감성자포자기소위 천민 취급을 당하는 왕이라는 자의식 등에서 이 두 로마노프는 똑같았다그러나 파벨은 니콜라이와 비교할 수 없이 화려한 인물이었다아무리 무책임해도 그의 호언장담에는 기발한 상상력이 있었다그러나 니콜라이에게는 모든 것이 흐릿했다날카로운 구석은 전혀 없었다.

 

그는 불안감 뿐 아니라 배신적 성격도 가지고 있었다아첨꾼들은 그가 신하들을 부드럽게 다루었기 때문에 그를 주술사라고 불렀다그러나 차르는 해고하기로 결심한 관리들에게만 특별한 애정을 베풀었다총애를 받은 장관은 귀가하여 자신의 사직을 요청하는 편지를 받고는 했다자신의 무능과 미미한 영향력에 대해 차르는 이런 식으로 복수했다.

 

재능 있는 인물과 출중한 모든 것에 대해 그는 차가운 적대감으로 대했다완전히 평범하고 머리가 빈 사람성자 같은 탁발승성자 등 자기처럼 무능한 인물들과 같이 있을 때만 그는 안심이 되었다그는 나름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그리고 이것은 상당히 날카로운 종류의 자부심이었다다만 이것은 조금의 자발성도 없는 수동적인 것으로 시기심과 자기방어의 성격이 강했다그는 계속해서 전임자보다 무능한 신임장관으로 내각을 교체했다두뇌와 패기를 가진 인물은 사면초가의 위기와 같은 대단히 예외적인 경우에만 불렀다마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외과의사를 부르는 것과 똑같았다비테 그리고 나중에 스톨리핀을 임명했을 때가 바로 이런 경우였다. 차르는 어설프게 감춘 적대감으로 이 두 인물을 대했다그리고 위기가 사라지면 곧바로 자기보다 뛰어난 능력을 보유한 두 수상들을 서둘러 해임했다그가 신임 장관을 선택하는 과정은 너무도 체계적이었다. 차르 치하 마지막 의회 의장 로지안코는 혁명이 이미 문을 두드리고 있던 1917년 1월 7일 차르에게 감히 이렇게 말했다: “폐하폐하 주위에 믿을만한 자는 하나도 없습니다가장 훌륭한 사람들은 모두 제거되었거나 은퇴했습니다이제 평판이 좋지 않은 자들만 남았습니다.”

 

차르 내각과 공통의 언어를 찾으려는 자유부르주아 계급의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지치지 않고 항상 시끄러운 로지안코는 자신이 작성한 보고서를 통해 차르를 뒤흔들어보려고 애를 썼으나 소용이 없었다. 차르는 주장이나 무례함에 대해서는 응답을 하지 않고 조용히 의회를 해산할 준비를 했다한때 차르의 총애를 받았으며 이후 라스푸틴 살해사건의 공범이었던 드미트리 대공은 자기 동료인 유수포프공에게 이렇게 불평했다총사령부에 있으면서 차르는 시간이 지날수록 주위 사람들에게 더 무관심했다누군가가 차르에게 정신능력을 마비시키는 마약을 먹이고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자유주의 역사학자 밀류코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마시는 술의 양을 계속 늘리면서 차르는 정신적 도덕적 냉담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것은 모두 상상이나 과장에 지나지 않았다. 차르에게는 마약이 필요 없었다그의 피에는 치명적인 마약이 이미 녹아 있었다그의 증상은 혁명 직전의 전쟁과 내치의 위기 등 거대한 사건들 때문에 특히 두드러지게 보일 뿐이었다일종의 심리치료사였던 라스푸틴은 차르가 속이 텅 비었다고 짤막하게 말한 바 있었다.

 

더욱이 이 둔하고 평온하고 교육을 잘 받은” 인간인 차르는 잔인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그러나 그의 잔인성은 역사적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이반 뇌제나 표트르 대제가 보였던 적극적 잔인성이 아니었다니콜라이 2세는 이들처럼 역사적 목표를 가질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그의 잔인성은 역사의 무대에서 한참 늦게 태어나 자신이 멸망할 것을 두려워하는 비겁한 잔인성에 지나지 않았다. 차르가 되자마자 니콜라이는 노동자들에게 발포한 파나고리치 연대를 멋진 사람들이라고 칭찬했다단발 여학생을 채찍질하는 방법과 유대인 학살 때 자기방어력이 없는 유대인의 머리를 깨는 방법이 실린 책을 그는 항상 만족스럽게 읽었다.” 검은 양처럼 마음이 악한 이 왕은 영혼을 다 바쳐 인간 쓰레기의 대명사인 흑백인조 깡패들을 가까이 했다국가 예산으로 이들에게 돈을 듬뿍 주었을 뿐 아니라 이들의 무용담을 즐겨 들었다이들 중 누가 야당 의원 살해에 우연히 연루되면 사면조치를 내렸다. 1905년 혁명 때 정부를 대표해 앞장서서 혁명을 진압했던 비테는 회고록에 이렇게 적었다: “흑백인조 우두머리들의 쓸데없는 잔인한 기행의 소식을 듣자 차르는 이들의 행위를 승인하거나 옹호했다.” 발트해 연안국의 어느 총독은 저항하지 않는 사람들을 재판 없이 마음대로 처형하는” 리히터라는 이름의 중위가 저지른 만행을 자신이 중지시킬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그러자 차르는 그가 올린 보고서 여백에 참으로 멋진 인물이군!”이라고 적었다잔악 행위에 대한 이런 식의 격려사를 그는 수없이 남발했다의지목적상상력 중 어느 하나도 갖추지 못한 이 주술사는 고대와 현대의 어떤 폭군보다 수준이 떨어지는 인간이었다.

 

한편 황후는 차르에게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그리고 세월이 흐르고 어려움이 많아질수록 이 영향력은 도를 더했다. 차르와 황후는 한 덩어리가 되었다그리고 이 부부의 결속도는 상황의 압박을 받을 경우 개인이 집단에 의해 어느 정도 보완되는 가를 잘 보여준다그러면 먼저 황후에 대해서 살펴보자.

 

전쟁 기간 중 프랑스의 러시아 대사 모리스 팔레올로그는 페트로그라드에 있었다그는 프랑스의 학자들과 시종부인들에게 세련된 심리치료를 베풀었다그는 러시아의 마지막 황후를 이렇게 치밀하게 묘사했다: “도덕적 불안감고질적인 우수무한한 동경간간이 드러나는 기복이 심한 활력저승에 대한 고뇌의 상념미신에 대한 집착 등은 황후에게 명확히 드러나는 특성이다그런데 이것들은 러시아인의 특징이 아닌가?” 이상하게 들릴지는 몰라도 이 사카린같이 달콤한 거짓말 속에는 일말의 진실이 있다발트해 연안국의 호족 출신으로 러시아의 장관과 주지사가 된 인물들에 대해 러시아의 풍자가 살티코프는 러시아의 영혼을 가진 독일인이라고 말했다이 표현에는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다러시아 인민과 조금의 유대감도 없는 외국인들이 진정한 러시아” 행정관의 가장 순수한 교양을 구비하고 있었다이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진실이다.

 

그런데 팔레올로그의 말대로 러시아의 정신을 그렇게도 완벽하게 자기 것으로 동화시킨 황후를 왜 러시아 인민은 그렇게 공공연히 증오했는가대답은 간단하다자신의 새로운 상황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 독일 여성은 일종의 냉정한 분노로 러시아 봉건시대의 모든 전통과 뉘앙스를 흡수했다그런데 러시아 봉건시대는 모든 봉건체제 가운데 문화적으로 가장 빈약하고 조야했으며 러시아 인민은 이 봉건체제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었다따라서 독일 헤센주(출신의 이 공주는 문자 그대로 전제의 악마에게 혼을 빼앗긴 셈이었다독일의 벽촌에서 살다가 비잔틴 전제의 정점에 올라선 그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정점에서 내려올 생각이 없었다그녀는 러시아 정교회에서 자신의 새로운 운명에 적합한 신비주의와 마술을 찾아냈다구체제의 해악이 노골적으로 드러날수록 그녀는 자신의 소명을 더욱 고지식하게 믿었다그녀는 강인한 성격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무미건조하고 딱딱한 감정을 격앙시켰다이 결과 그녀는 의지가 박약한 차르를 보완하고 지배했다.

 

혁명이 터지기 1년 전인 1916년 3월 17고문을 당한 것처럼 격렬한 고통을 겪고 있던 러시아가 패배와 파멸의 구렁텅이 속에서 몸을 비틀고 있을 때 황후는 총사령부의 차르에게 편지를 보냈다: “관용책임 내각 등 ... 또는 그들이 원하는 어떤 것도 허용해서는 안됩니다의회가 아니라 폐하의 전쟁폐하의 평화조약폐하의 명예 그리고 조국의 명예가 되어야 합니다의회는 이 문제들에 대해 발언할 권리가 조금도 없습니다.” 어쨌든 이것은 대단히 철저한 정치 강령이었다이렇게 그녀는 계속 동요하는 차르에게 채찍질을 가했다.

 

니콜라이가 허수아비 총사령관의 역할을 완수하기 위해 총사령부로 출발한 후 황후는 공공연히 내정을 지휘하기 시작했다장관들은 마치 그녀가 섭정인 것처럼 그녀에게 보고서를 제출했다그녀는 의회장관들총사령부 장군들전세계 그리고 어느 정도는 차르에게까지 맞서서 차르의 소수 친위 세력과 음모를 꾸몄다. 1916년 12월 6일 황후는 차르에게 편지를 보냈다: “... 폐하는 프로토포포프를 유임시키고 싶다고 언젠가 말했습니다그런데 트레포프 수상이 어떻게 폐하의 뜻을 거스를 수 있습니까탁자를 주먹으로 치세요굴복하면 안됩니다보스가 되어야 합니다폐하의 굳건하고 귀여운 황후와 우리 친구 라스푸틴의 말에 복종하세요우리를 신뢰해야 합니다.” 그리고 3일 후에 다시 편지를 보냈다: “폐하가 옳다는 것을 폐하는 아십니다머리를 높이 쳐드세요트레포프와 함께 일하려면 그에게 명령을 내려야 합니다....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치세요.” 이런 말들은 지어낸 것처럼 들린다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진본으로 증명된 편지들의 내용이다더욱이 이런 말들을 누가 지어내기는 힘들다.

 

12월 13일 황후는 차르에게 이렇게 제안한다: “책임 내각에 대해 모두가 미쳐 날뛰고 있습니다그러나 그것은 결코 허용될 수 없습니다매사가 조용해지고 개선되고 있습니다그러나 러시아 백성들은 폐하의 손길을 원합니다여러 해 동안 백성들은 저에게 똑같은 말을 해왔습니다: ‘러시아는 채찍의 맛을 느끼고 싶다.’ 이것이 그들의 본성입니다!” 영국의왕조인 윈저(Windsor)가문의 교육을 받았으며 비잔틴 황후의 관을 머리에 쓴 이 정통 헤센 여자는 러시아 정신의 화신이면서 동시에 천성적으로 이것을 경멸하고 있다왕정이 붕괴의 나락으로 추락하기 꼭 2개월 15일 전에 이 여자는 차르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러시아 인민의 본성은 채찍질을 원합니다.

 

성격의 강인함과는 대조적으로 황후의 지적 능력은 남편보다 더 낮았다그녀는 멍청이들과 함께 지내는 것을 차르보다 더 좋아했다. 차르 부부는 그들의 시종부인인 비루보바와 가까우면서도 오랜 친분을 유지했다이것은 차르 부부의 정신적 수준을 어느 정도 가늠하게 해준다비루보바는 자신을 바보라고 묘사했다이것은 겸손함에서 나온 말이 아니었다사물을 정확한 보는 눈을 가진 비테는 대단히 평범한어리석은페트로그라드의 젊은 여자이다비스킷 반죽의 거품만큼이나 하잘 것 없는 존재라고 그녀를 묘사했다나이 많은 관료들과 대사들과 은행가들은 아양떨면서 그녀와 놀아났다그런데 이 여자는 자기 호주머니에 들어올 돈은 잊지 않는 지능을 가지고 있었다그런데 이런 수준의 여자와 차르부부는 많은 시간을 보냈고이런 저런 일들에 대해 그녀의 의견을 묻고그녀와 편지를 주고받았으며그녀를 언급하는 편지를 썼다비루보바는 의회 심지어는 내각보다도 더 큰 영향력을 차르 부부에게 행사했다.

 

그러나 비루보바 자신도 친구의 도구에 불과했다그의 권위는 그녀와 차르 부부를 모두 능가했다. 황후는 차르에게 편지를 썼다: “...이것은 저의 개인적 견해일 뿐입니다우리 친구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친구의 견해는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결정력을 가지고 있다이로부터 몇 주 후 황후는 이렇게 애써 주장했다: “...저는 확고합니다그러나 저의 말 즉 우리 친구의 말을 들어보세요그리고 모든 일에 대해서 우리를 믿어주세요.... 폐하는 나쁜 신하들의 말을 따르고 있어서 지도가 필요합니다마음이 여린 어린아이와 같은 폐하폐하 때문에 저는 고통스럽습니다그런데 신이 보낸 사람이 폐하께서 해야 할 일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신이 보낸 친구는 바로 그레고리 라스푸틴이었다.

 

“....우리 친구의 기도와 도움이면 ... 모든 일이 잘될 겁니다.”

 

그가 아니었으면 모든 일은 이미 오래 전에 끝장났을 겁니다저는 이 점을 절대적으로 확신하고 있습니다.”

 

차르 니콜라이와 황후 알렉산드라의 치세 내내 점쟁이들과 미치광이들이 러시아 전국 뿐 아니라 외국에서 궁정으로 수입되었다일시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점쟁이 주위로 차르 직속 관리들이 모여 강력한 상원을 형성하고 있었다백작부인 직함을 가진 편협한 할머니아무 일도 하지 않는 무료한 관리장관 전부를 매수한 은행가들이 조정에 들끓었다최면술사와 마술사의 공인되지 않은 경쟁을 정교회의 고위 성직자들은 시기심 가득한 눈으로 지켜보았다그리고 음모를 꾸미는 성자 가운데 성자인 라스푸틴에게 서둘러 접근했다비테는 이 지배집단을 나병환자처럼 더러운 차르의 친위 세력이라고 불렀다이들 때문에 그는 두 번이나 발가락을 채였다.

 

왕조가 인민으로부터 고립되고 자신이 불안감을 느낄수록 차르는 저 세상으로부터 도움이 필요했다좋은 날씨를 부르기 위해 어떤 야만인들은 지붕의 기와를 끈에 매달아 공중에 대고 흔든다. 차르 부부는 아주 다양한 목적을 위해 이 기와를 사용했다. 차르의 전용기차에는 크고 작은 성상과 온갖 종류의 부적이 가득한 예배당이 설치되어 있었다이것들을 차르는 먼저 일본군에게 그리고는 독일 포병에게 흔들어 대었다.

 

조정에 모이는 인간들의 수준은 세대가 지나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해방자로 불리었던 알렉산드르 2세 때 대공들은 진심으로 가문의 귀신과 마녀들의 존재를 믿었다알렉산드르 3세 때에도 상황이 나아지지는 않았다다만 좀더 조용하게 미신 행위들이 유행했을 뿐이었다. “나병환자처럼 더러운 차르의 친위 세력은 언제나 존재했으며 다만 인적 구성과 방식만이 차르가 바뀔 때마다 달랐다니콜라이 2세는 야만적인 중세의 미신마저 선대로부터 물려받았다한편 지난 몇십 년간 나라는 계속 변화하여 문제들은 더 복잡해졌으며 문화수준은 더 높아졌다따라서 차르 주위로 모여든 인간들의 문화수준은 일반인들보다 훨씬 뒤 처져 있었다.

 

차르 왕정은 외부의 강제 때문에 새로운 사회세력들에게 양보조치들을 허용하였다그러나 내적으로는 전혀 현대화되지 못했다이와 반대로 자기 안으로 계속 파고 들어갈 뿐이었다적대감과 두려움의 압력이 커짐에 따라 조정의 중세적 미신은 더 힘을 발휘했다그리고 마침내 나라 전체를 뒤덮는 구역질나는 악몽이 연출되었다.

 

1905년 11월 첫 혁명의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차르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토볼스키도()에서 우리는 신이 보낸 사람 그레고리를 알게되었다.” 그는 시베리아의 농민 라스푸틴이었다그의 머리에는 말을 훔친 벌로 구타를 당한 흉터가 그대로 있었다적당한 순간에 나타난 이 신이 보낸 사람은 곧 보조역할을 해줄 관리들을 찾아냈다아니 그들이 그를 찾아낸 셈이었다이렇게 황후를 꽉 잡는 그리고 그녀를 통해 차르를 꽉 잡는 새로운 친위 파벌이 형성되었다.

 

고위 관직의 임명과 계약의 체결을 모두 라스푸틴 파벌이 좌지우지한다는 소문이 1913년과 1914년 사이의 겨울부터 페트로그라드에 공공연히 나돌았다. “장로” 자신은 서서히 국가기관이 되었다그의 신변은 철저히 보호되었으며 서로 경쟁하는 장관들에 의해 그만큼 조심스럽게 접근되었다경찰청의 스파이들은 시간마다 그의 동태를 기록했다그리고 그가 고향 마을 포크로프스키를 방문하면서 거리에서 술에 취해 자기 아버지와 피 터지게 싸운 내용도 전부 기록되었다이 일이 벌어진 1915년 99일 그는 친근한 내용의 전보 두통을 하나는 차르스코예 셀로 궁전의 황후에게 또 하나는 총사령부의 차르에게 보냈다서사시 같은 언어로 경찰 스파이들은 매일 이 친구의 향락을 기록했다. “오늘 새벽 5시에 그는 만취된 채 돌아왔다.” “25일과 26일 밤 어느 여배우는 라스푸틴과 밤을 보냈다.” “아스토리아 호텔에 차르의 침실시종의 부인인 어느 여배우와 그가 도착했다.” ... 그리고 바로 옆에 이렇게 적었다: “밤 11시 경 차르스코예 셀로에서 자택으로 돌아왔다.” “___ 공주와 만취한 채 집에 왔다가 함께 금방 나갔다.” 다음날 아침이나 저녁에 차르스코예 셀로로 가다이 장로가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이유를 묻는 스파이의 동정적인 질문에 다음과 같은 대답이 나왔다: “의회를 소집할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해서 그는 선뜻 결정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는 크게 취하여 아침 5시에 자택에 도착했다.” 이렇게 수년 수개월간 멜로디의 조성은 세 가지뿐이었다: “많이 취한,” “무지무지 취한,” “완전히 취한.” 현병감 고르바초프는 국가적으로 중요한 이 보고서들을 전부 정리하여 서명했다.

 

라스푸틴의 영향력은 차르의 마지막 6년 동안 지속되었다라스푸틴과 페트로그라드 생활을 조금 같이 했으며 후에 그를 죽인 유스포프공은 이렇게 말한다: “페트로그라드에서 그의 생활은 계속되는 향락 그 자체였다노예선의 노예가 풀려나 갑자기 출세한 후 술에 취해 부리는 온갖 추태였다.” 의회 의장 로지안코는 이렇게 적었다: “이 무뢰한에게 당한 딸들의 엄마들이 나에게 보낸 편지가 수북히 쌓여있다.” 그러나 페트로그라드 대주교 피티림 그리고 거의 문맹인 대주교 바르나바는 라스푸틴 때문에 높은 성직에 올랐다정교회 최고종교회 의장 사블러는 라스푸틴 덕분에 직책을 오랫동안 유지했다코코프세프 수상은 장로를 영접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해임되었다라스푸틴은 슈튀르머를 수상으로프로토포포프를 내무장관으로정교회 최고종교회 의장으로 라에프 등 많은 인물들을 임명했다프랑스 대사 팔레올로그는 라스푸틴을 만나려고 애썼다그리고 그를 보자마자 그를 포옹하고 이렇게 외쳤다: “진짜 현인이 여기 계셨군요!” 이렇게 그는 프랑스의 국익을 위해 황후의 마음을 사려고 했다. “장로의 재정 대리인을 맡은 유대인 시마노비치도 나이트클럽의 도박꾼이자 고리대금업자로서 비밀경찰의 감시를 받고 있었다그는 라스푸틴을 통해 완전한 사기꾼 도브로볼스키를 법무부 관료로 만들었다.

 

새로운 공직 임명과 관련하여 황후가 차르에게 편지를 보낸다: “옆에 공직 예정자들의 명단을 조그맣게 만들어 두세요우리 친구가 폐하께서 이 일을 프로토포포프와 상의하라고 요청했습니다.” 이로부터 이틀 후에 다시 편지를 썼다: “슈튀르머가 수상으로 며칠 더 있어도 좋다고 우리 친구가 말합니다.” 그리고 다시: “프로토포포프는 우리 친구를 아주 경애합니다그는 축복받을 겁니다.”

 

경찰 스파이들이 라스푸틴이 소비한 술병과 여자의 수를 계산하고 있던 날에 황후는 차르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슬픔을 토로한다: “라스푸틴이 여자들에게 키스하는 등의 행위에 대해 사람들이 비난하고 있습니다사도신경을 읽어보십시오사도들도 인사로 모든 사람들에게 키스를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에 대한 언급도 경찰 스파이들을 전혀 설득시키지 못했을 것이다다른 편지에서 황후는 한술 더 뜬다: “저녁기도를 하면서 우리 친구에 대해 많이 생각해보았습니다유대교 법학자들과 바리세인들이 스스로 완벽한 체하면서 얼마나 예수를 핍박했습니까... 맞아요정말이지 자기 나라에서 예언자 행세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친위 파벌은 언제나 라스푸틴을 예수와 비교했다이것은 전혀 우연이 아니었다역사의 위협적 힘 앞에 너무 놀란 차르 부부에게 비인격 신과 쓸모 없는 예수의 그림자는 전혀 만족스럽지 못했다이들에게는 신의 아들이 재림해야했다세상으로부터 거부당하고 고통스러워했던 차르 부부는 자기들 모습을 한 예수를 라스푸틴에게서 찾아냈다.

 

구체제의 상원의원 타간세프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라스푸틴이 없었다면 그와 같은 인간이 다시 만들어졌을 것이다.” 이 말에는 타간세프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많은 진실이 담겨져 있다사회 밑바닥을 구성하는 반()사회적 기생 집단의 극단적인 행동을 패거리 행위라고 한다그렇다면 라스푸틴의 횡포는 사회 최정상에서 왕을 끼고 한 패거리 행위라고 규정지을 수 있을 것이다.



제 5장: 궁정 쿠데타에 대한 논의

 

지배계급은 혁명을 막아 자기 목숨을 부지하려 하였다그렇다면 이들이 차르와 측근 파벌을 제거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이들은 그렇게 하고 싶었으나 할 수가 없었다이들은 의지가 박약했으며 정치 목표에 대한 신념이 없었다궁정 쿠데타를 생각하고 있던 바로 그때 혁명이 이들을 집어삼켰다혁명 직전까지 조성되었던 귀족관료집단부르주아 계급들 간의 상호관계를 좀더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잠시 시간을 할애하자.

 

유산 지배계급은 이해관계관습비겁함의 측면에서 차르체제를 완전히 지지하고 있었다그러나 이들은 라스푸틴이 없는 차르를 원했다그러자 차르는 지금의 나를 그대로 인정할지어다라고 이들에게 응답했다품위 있는 책임 내각을 구성해야 한다는 요구에 대해 황후는 라스푸틴이 건넨 사과 하나를 총사령부의 차르에게 보냈다그리고 차르가 강한 의지를 갖도록 이 사과를 먹으라고 재촉했다그리고 이렇게 간청했다: “기억하세요무슈 필립(랑스의 돌팔이 약장수이자 최면술사)도 폐하께서 헌법을 허용하지 말 것을 진언했습니다헌법을 허용하면 폐하와 러시아는 끝장입니다.... 표트르 대제이반 뇌제, 파벨 황제가 되세요놈들을 폐하의 발 밑에 짓이겨야 합니다!”

 

두려움미신인민에 대한 악의적인 소외감 등이 참으로 역겹게 혼합된 심리가 아닐 수 없다물론 권력의 정점에 있는 차르 일가가 외롭지 않을 수도 있었다라스푸틴은 귀족 부인들을 정말이지 끌고 다녔다그리고 주술행위가 귀족 사회 전체에 창궐했다그러나 두려움에서 시작된 신비주의는 이들을 단결시키기는커녕 분열시키기만 했다각자는 나름의 방식으로 자기를 방어한다귀족가문들은 자기가 섬기는 성인이 영험하다고 강변하면서 서로 경쟁한다페트로그라드 사회의 정점에 서있는 차르 일가는 마치 페스트에 걸린 것처럼 불신과 적대감의 검역선에 둘러 처져 있었다시종부인 비루보바는 이렇게 회상한다: “내가 존경하는 분들에 대한 악감정이 주위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깊이 느껴왔다그리고 이 감정이 대단한 규모로 확대될 것이라고 느꼈다.”

 

전쟁의 자줏빛 배경과 발 밑에서 똑똑히 들리는 사회 격동의 굉음 속에서도 특권층은 삶의 쾌락을 한순간도 포기하지 않았다이들은 탐욕스럽게 환락에 빠져있었다그러나 더욱더 자주 이들의 연회에 해골이 나타나 손가락의 조그만 뼈를 흔들었다. 황후 '알릭스'의 혐오스러운 성격, 차르의 배신적인 나약함탐욕스러운 바보 비루보바머리에 흉터가 그대로 드러난 시베리아의 예수 라스푸틴 등 때문에 자신들이 이 모든 고통을 겪고 있다고 이들은 느끼기 시작했다견디기 힘든 불길한 징조들이 파도처럼 지배계급을 덮쳤다주변에서 중심까지 공포의 전율이 몰아쳐 지배계급을 오그라들게 만들었으며 차르스코예 셀로의 증오스러운 차르의 측근 파벌을 고립시켰다대체로 아주 기만적인 회상을 통해 비루보바는 당시 상층부의 정서를 아주 명확하게 표현했다: “...100번이나 페트로그라드 사회가 왜 이런가하고 내 자신에게 물었다이들은 모두 정신병이나 전시에 맹렬하게 퍼지는 유행병에 걸리기라도 했는가이해하기는 힘들지만 모두가 비정상적으로 흥분되어 있었다.” 머리가 돈 사람들 속에는 로마노프 황실 전체탐욕스럽고 거만하고 모두가 증오하는 대공들과 대공부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죽을 것같은 공포에 질려 이들은 자기 주위를 포위하며 좁혀 들어오는 포위망 바깥으로 몸을 비틀고 나오려 했다이들은 비판적인 귀족들에게는 머리를 조아리고 차르 부부에 대해서는 가십을 늘어놓았다그리고 이들과 주위 사람들을 충동질했다존엄스러운 차르의 삼촌들이 차르에게 보내는 충고의 편지는 예절을 갖추었다그러나 행간에는 분노의 으르렁거림과 이빨 가는 소리가 들렸다.

 

10월 혁명 직후 프로토포포프는 자신이 자세하게 알지 못했던 당시 상층부의 정서를 자못 화려하게 표현했다: “혁명 전에는 최상층 계급들조차 야당이 되었다호화 살롱과 클럽에서 정부의 정책은 가혹하고 적대적으로 비판되었다. 차르 일가의 관계들은 분석되고 토론되었다국가 수반에 대한 사소한 일화들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시가 지어졌다많은 대공들이 공개적으로 이런 모임에 참석했다그리고 이들의 지위 때문에 일반인들은 우스개 이야기들과 악의에 찬 과장된 이야기들을 대단히 권위 있는 것으로 받아들였다그러나 이러한 과시성 행위가 위험하다는 생각은 마지막 순간이 되어서야 최상층 부위의 뇌리에 떠올랐다.”

 

차르의 조정이 친독파이며 심지어 독일과 직접 내통한다는 비난 때문에 차르의 측근 파벌에 대한 소문들은 특히 민감하게 받아들여졌다시끄러울 뿐 깊이가 없는 로지안코는 단정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라스푸틴의 야망이 내포하는 연관과 유추는 논리적으로 너무 명백하다따라서 독일군 사령부와 라스푸틴 파벌 사이의 협력관계에 대해서 최소한 나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어느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다.” '논리적' 명백성을 단순히 말하기만 했으므로 이 증언의 단정적 목소리는 그 효과가 크게 약화된다혁명이 끝난 후에도 라스푸틴 파벌이 독일군 사령부와 내통했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그러나 소위 친독일 성향은 달랐다물론 이것은 독일인 황후슈튀르머 수상클라인미헬 백작부인궁내 장관 프레데릭스 백작 그리고 독일이름의 다른 신사들의 민족적 공감이나 러시아 인민에 대한 냉담성의 문제는 아니었다늙은 여자 모사꾼 클라인미헬의 냉소적인 회고록은 대단히 명쾌하게 다음의 사실들을 증명하고 있다유럽 모든 나라의 귀족계급들은 자기 민족을 초월하는 국제적 성향을 지녔다이들은 가문의 유대관계상속재산인민에 대한 경멸오랜 성채와 최신 유행의 온천장과 해수욕장 그리고 조정에서 이루어지는 범유럽적 간음행위 등으로 서로 결속되어 있었다프랑스 공화국의 아첨꾼 변호사들에 대한 유럽 왕족들의 천성적인 반감독일 정권의 진정한 (봉건적러시아 정신에 대해 독일인이든 슬라브인이든 반동세력들이 가지고 있는 공감 등은 클라인미헬이 열거한 내용보다 훨씬 더 실재했다독일 정권의 왁스칠한 콧수염주임상사 식의 군대식 언동자신감에 찬 어리석음 등에 대해 유럽반동세력은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지금까지 열거한 내용들은 결정적인 요인이 아니었다내통의 위험은 상황의 논리 자체로부터 나왔다왜냐하면 차르에게는 독일과의 단독 평화조약을 통해 위기에서 벗어나는 방법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그리고 상황이 위험해질수록 그는 이 탈출구를 더 줄기차게 추구할 수밖에 없었다곧 드러나겠지만 자유주의 지도자들은 차르를 밀어내고 권력을 장악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그리고 자기들이 직접 독일과 단독 평화조약을 체결할 기회를 독점적으로 누리고자 했다바로 이 때문에 자유주의자들은 맹렬하게 국수주의를 선동하면서 인민을 속이고 차르 조정을 공포에 몰아넣었다. 차르의 측근 파벌은 이렇게 민감한 문제에 대해 감히 성급하게 입장을 정할 수가 없었다대체로 애국주의 목소리를 흉내내도록 이들은 강요당했다그리고 동시에 이들은 독일과 단독 평화조약을 체결할 조건을 모색하고 있었다.

 

물론 라스푸틴 파벌에 속한 전 경찰청장 쿠를로프 장군은 라스푸틴이 독일과 연계가 있었다거나 독일에 동정적이었다는 사실을 부인한다그러나 그는 곧 이렇게 덧붙인다: “독일과의 전쟁이 러시아로서는 가장 큰 불행이며 정치적으로도 전혀 정당화될 수 없다는 슈튀르머의 견해를 비난할 수는 없다.” 이 흥미로운 견해를 가진 슈튀르머가 독일에 대항하여 전쟁을 하고 있는 적대국 러시아의 수상이었다는 사실은 주목할만하다. 차르의 마지막 내무장관 프로토포포프는 장관 임명 직전 스톡홀름에서 독일의 외교관 와부르크와 협상을 벌이고 그 결과를 차르에게 보고했다쿠를로프에 따르면 라스푸틴 자신은 독일과의 전쟁이 러시아에게는 거대한 불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황후는 1916년 4월 5일 차르에게 편지를 보냈다: “...우리 친구 라스푸틴이 독일과 내통하고 있다는 말을 그들은 감히 꺼낼 수도 없습니다그는 예수처럼 모든 이들에게 친절하며 관대합니다어떤 종파에 속하든 훌륭한 기독교인은 그렇게 행동해야합니다.” 물론 거의 언제나 술에 취해 있던 이 좋은 기독교인은 사기꾼고리대금업자귀족의 뚜쟁이 뿐 아니라 적의 진짜 스파이들로부터도 아첨을 받았다이런 종류의 내통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그러나 야당 애국지사들은 문제를 좀더 직접적이고 폭넓게 제기했다즉 이들은 황후에게 직접 국가반역죄를 물었다한참 뒤에 쓴 회고록에서 데니킨 장군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군대에서는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황후가 독일과의 단독 평화조약을 끈질기게 요구하고 있다느니 영국 원수 키츠너의 여행을 황후가 독일에게 일러바쳤다는 등 온갖 소문이 떠돌고 있다. 차르와 혁명에 대한 군대의 태도 형성에 이 소문들은 대단히 큰 역할을 했다.” 혁명 후 알렉세예프 장군이 황후의 국가반역죄에 대한 심문에서 애매하게 그리고 마지못해” 대답한 것을 데니킨은 언급하고 있다문서들을 검토하던 중 황후가 모든 전선의 군대 배치상황을 담은 지도를 가지고 있음을 알아냈다이 사실은 알렉세예프 장군을 우울하게 만들었다데니킨은 이렇게 덧붙인다: “그는 이에 대해 말 한마디하지 않은 채 화제를 바꾸었다.” 황후가 그 신비의 지도를 가지고 있었든 그렇지 않았든 운이 나쁜 장군들은 확실히 자신들의 패배에 대한 책임을 황후에게 떠넘기려했다조정의 반역죄에 대한 비난은 무능한 총사령부에서 시작하여 아래로 퍼지면서 군대 내로 잠입했다.

 

사실 차르는 황후에게 모든 사실들을 털어놓았다그러나 만약 황후 자신이 독일 황제 빌헬름에게 군사비밀과 심지어는 연합국 사령관들의 머리까지 갖다주었다면 차르 부부를 타도하는 것 외에 무슨 일이 더 남아있었겠는가그리고 군대의 통수권자이며 독일을 반대하는 정당의 우두머리인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이 궁정 쿠데타의 수장으로 선택되는 것이 나라를 구하는 임무로 보았을 때 당연하지 않았겠는가라스푸틴과 황후의 주장을 받아들인 차르가 대공의 군대 통수권을 박탈하고 스스로 총사령관의 직책을 장악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그러나 황후는 군대 통수권을 위임받는 조카와 삼촌의 만남 자체를 두려워했다. 황후는 총사령부의 차르에게 편지를 보냈다: “사랑하는 분조심하셔야 합니다니콜라샤가 폐하로부터 어떤 약속이나 다른 어떤 양보를 받아내도록 허용하면 안됩니다그레고리가 그와 그의 패거리로부터 폐하를 구한 사실을 기억하세요...러시아를 위한다는 미명으로 그들이 무엇을 모의했는 지를 기억하세요그들은 폐하를 물러나게 만들고 저를 수도원에 집어넣을 계획이었습니다이것은 단순한 소문이 아닙니다오를로프는 필요한 문서들을 전부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차르의 동생 미하일 대공은 로지안코에게 이렇게 말했다: “황후 알렉산드라 페오도로브나가 얼마나 해로운 지를 황실 전체는 알고 있다그녀와 나의 형 주위에는 반역자들만이 모여있다정직한 사람들은 모두 그들 곁을 떠났다이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바로 이것이 문제였다무엇을 할 것인가?

 

로지안코가 황후 제거 작업을 주동할 것을 대공부인 마리아 파블로브나는 주장했다그것도 자기 아들들이 보는 앞에서 주장했다로지안코는 이 대화를 없었던 일로 할 것을 제안했다그렇지 않으면 차르에 대한 충성 선서에 따라 대공부인이 의회 의장에게 황후를 제거할 것을 제안했다고 자신이 직접 차르에게 보고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이렇게 해서 재치가 빠른 궁내 장관 로지안코는 황후 살해 문제를 응접실의 한담으로 바꾸어 놓았다.

 

가끔은 내각도 차르와 심하게 충돌하였다혁명 발발 1년 6개월 전이었던 1915년에 이미 지금도 믿을 수 없는 대화들이 내각 회의에서 오갔다전쟁장관 폴리바노프: “인민에 대한 유화정책만이 상황을 구할 수 있습니다지금 서있는 불안한 제방은 대홍수라는 대재앙을 막을 수 없습니다.” 해양장관 그리고로비치: “군대가 우리를 신뢰하지 않으며 변화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비밀이 아닙니다.” 외무장관 사조노프: “차르의 인기와 권위는 상당히 흔들리고 있습니다.” 내무장관 쉐르바토프공: “지금 상황에서 내각은 러시아를 통치할 능력이 없습니다....독재 아니면 유화정책 밖에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1915년 8월 21일 회의록). 그러나 이 상황에서는 어떤 조치도 도움이 될 수 없었다어느 정책도 달성이 불가능했다. 차르는 독재를 결행할 의지가 없었다그리고 유화정책도 거부했다그리고 통치능력이 없는 내각의 사직서를 받아들이지도 않았다기록 책임을 맡은 고위관리는 장관들의 연설 내용에다 짤막한 논평을 달고 있다당연히 우리는 가로등 기둥에 목을 매달아야 한다.

 

이런 정서가 지배적인 상황에서임박한 혁명을 막는 유일한 수단으로 궁정 쿠데타의 필요성이 관료집단 내에서도 논의되었다이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이 대화들에 참여한 어떤 인물은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눈을 감고 대화를 나누었을 경우 필사적인 혁명가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러시아 남부에서 군대에 대해 특별 사찰 중인 어느 헌병 대령은 자신의 보고서에 어두운 전망을 제시했다: 차르와 황후가 독일과 내통하고 있다는 선전 때문에 군대는 궁정 쿠데타를 수용할 준비가 되어있다. “이런 내용의 대화들이 공공연히 장교회의에서 나오고 있는데 총사령부는 전혀 제지도 하지 않고 있다.” 프로토포포프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총사령부의 상당수가 쿠데타에 공감하고 있었다일부 개인들은 소위 진보연합의 주요 지도자들과 접촉하고 있었으며 이들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혁명 이후 악명을 떨친 콜차크 제독은 그의 군대가 적군에 의해 패퇴한 후 소비에트 조사위원회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야당의원 다수와 나는 접촉하고 있었다나는 이들의 연설을 환영했다왜냐하면 차르에 대해 나는 부정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궁정 쿠데타에 대한 정보를 그는 제공받지 못했다.

 

라스푸틴이 살해되고 이 사건에 연루된 대공들이 수도에서 추방된 이후 상류사회는 더 큰 목소리로 궁정 쿠데타의 필요성을 떠들었다라스푸틴 살해와 관련하여 드미트리 대공이 궁중에서 체포되었을 때 여러 연대의 장교들이 그에게 다가와 결정적인 행동 계획들을 제안했다. “그러나 물론 그는 동의하지 않았다고 유스포프공이 전하고 있다.

 

연합국의 외교관들 그리고 어쨌든 영국 대사는 이 음모의 부속물로 간주되었다러시아 자유주의자들의 음모가 일자 영국 대사는 1917년 1월 차르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했다그는 이미 영국 정부의 사전 승인을 얻은 후였다니콜라이는 주의 깊고 정중하게 영국 대사의 말을 경청하고는 감사의 말을 표현했다그리고 곧 다른 문제들에 대해 얘기했다프로토포포프는 니콜라이에게 영국 대사 부캐넌과 진보연합 지도자들 사이의 관계를 보고했다그리고 영국 대사가 감시 대상자에 포함될 것을 제안했다그러나 니콜라이는 이 제안을 승인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대사를 감시하는 일이 국제적 관례와 어긋나기 때문이었다한편 전 경찰청장 쿠를로프 장군은 거리낌없이 정보부가 입헌민주당 지도자 밀류코프와 영국 대사의 관계를 매일 파악하고 있다고” 주장한다그렇다면 국제적 관례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그러나 이들의 결례는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궁정 쿠데타 음모는 전혀 발각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정말 쿠데타 음모가 있었는가이것을 증명할 물증은 하나도 없다. “음모라는 말 자체가 너무 범위가 넓었다음모가 되기에는 너무 많은 집단이 포함되었다궁정 쿠데타에 대한 생각은 혼란스러운 해결책 또는 절망의 구호로 페트로그라드 상류사회의 정서가 되어 공중에 나돌아 다녔을 뿐이었다결국 이 음모는 실제 계획으로까지 발전하지 못했다.

 

18세기 러시아의 상류 귀족들은 한 번 이상 황위 계승에 개입하여 거슬리는 황제들을 독살하거나 목 졸라 죽였다. 1801년 파벨 황제는 음모의 마지막 희생자였다따라서 궁정 쿠데타가 러시아 왕조의 전통에 위배된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이와 반대로 전통의 일관된 부분이었다그러나 오랫동안 귀족들은 강력한 의지를 느끼지 못했다이들은 차르와 황후를 목 졸라 죽이는 영광을 부르주아 계급에게 양도했다그러나 후자의 지도자들 역시 의지가 더 강하지는 못했다.

 

혁명 이후 음모의 핵심으로 자유부르주아 구치코프와 테레쉬첸코 그리고 이들과 가까웠던 크리모프 장군이 두 번 이상 언급되었다구치코프와 테레쉬첸코는 자신들이 음모를 꾸몄다고 확인해 주었다그러나 불명확하게 확인해 주었을 뿐이었다보어 전쟁에서 영국에 대항한 보어군에 자원 입대했으며 결투를 즐겼던 자유주의자 구치코프에 대한 공식 '사회의 평가'가 그를 음모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인물로 부각시켰던 것임에 틀림없다말많은 밀류코프 교수는 절대로 적합하지 않았다의심의 여지없이 구치코프는 어느 방위군 연대가 사회혁명을 저지하는 짧고도 날카로운 일격을 가할 것이라고 두 번 이상 상상했다비테는 회고록에서 자기가 혐오한 구치코프를 이렇게 묘사했다그는 불편한 술탄을 타도한 터키 소장 장교들의 방법들을 숭상했다그러나 구치코프는 터키 소장 장교들의 대담함을 과시할 기회를 젊었을 때 누리지 못했다그리고 지금은 훨씬 나이를 먹어버렸다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스톨리핀의 하수인이었던 이 인물은 러시아와 터키의 차이를 간과할 수 없었다그래서 스스로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궁정 쿠데타가 진짜 혁명을 막는 수단이 아니라 혁명의 눈사태를 가져오는 마지막 움직임이 되지 않을까치료약이 병 자체보다 더 파멸적이지 않을까?

 

2월 혁명과 관련된 문헌들은 궁정 쿠데타에 대한 준비가 확고히 입증된 사실인 것처럼 언급하고 있다밀류코프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2월에 쿠데타는 실행되고 있었다.” 데니킨은 3월에 쿠데타가 진행될 예정이었던 것처럼 말한다이 두 인물은 모두 계획을 말한다이동 중에 있는 차르의 전용기차를 멈춘 후 그의 퇴위를 요구한다그가 거부할 것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이는데 그럴 경우 차르를 물리적으로 제거한다등등밀류코프는 이렇게 덧붙인다: “혁명의 발발을 예상하면서 차르 제거 계획에 참여하지 않은 진보연합 지도자들은 정확히’ 그 준비상황을 알고 있지 못했다이들은 쿠데타가 성공할 경우 상황을 가장 올바르게 활용하는 방안에 대해 소수의 모임에서 논의했다.” 최근 몇 년간 일부 맑스주의적 역사 연구도 쿠데타가 실제로 준비되었다는 이야기를 진심으로 믿고 있다이 예를 보더라도 신화가 역사과학에서 얼마나 쉽고 확고한 자리를 차지하는 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음모의 가장 주요한 증거로 로지안코의 화려한 이야기가 빈번히 제시되고 있다그런데 그의 이야기는 음모가 없었다는 사실을 증언할 뿐이다. 1917년 1월 크리모프 장군이 전선에서 돌아와 지금 상태로는 전쟁이 계속될 수 없다고 의회 의원들 앞에서 불평했다: “만약 여러분들이 차르 제거라는 극단 조치를 결정한다면 우리는 여러분들을 지지할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결정한다면그러자 10월당의 쉬들로프스키가 화를 내면서 고함을 질렀다: “차르가 러시아를 파멸시키고 있는데 그를 동정하거나 살려줄 필요는 없습니다.” 이어서 벌어진 시끄러운 논쟁 중에 브루실로프의 진짜 또는 상상의 말들이 보도되고 있다: “차르와 러시아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필요가 있다면 나는 러시아를 선택합니다.” 만약 필요하다면젊은 백만장자 테레쉬첸코는 차르를 살해하자는 확고한 입장을 들고 나왔다입헌민주당의 싱가레프는 이렇게 말했다: “장군님 말이 맞다타도가 필요하다...그러나 누가 타도를 결행할 것인가?” 바로 이것이 문제이다누가 결행할 것인가이것이 로지안코가 증언한 내용의 핵심이었다그 자신은 차르 타도에 반대했다이 논쟁이 있은 후 몇 주 동안 이 계획은 확실히 조금의 진전도 보지 못했다이들은 차르의 전용기차를 멈추는 것에 대해 얘기를 했다그러나 누가 이 작전을 실행할 것인지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유년기의 러시아 자유주의는 돈과 공감으로 혁명 테러주의자들을 지원했다폭탄을 터뜨려 차르를 자기 품으로 끌어들일 것을 희망했기 때문이었다이 존경받는 신사들 중 어느 누구도 자기 목숨을 거는 일에는 익숙하지 못했다그러나 개인적 두려움이 아니라 계급적 두려움이 역사발전에 주요한 역할을 맡았다지금 상황은 나쁘다그러나 더 나빠질 수 있다이것이 이들의 논리였다어쨌든 구치코프테레쉬첸코크리모프가 쿠데타 쪽으로 진지하게 움직였다면 즉 그것을 실제적으로 준비하고 필요한 인력과 수단을 동원하였다면 이 사실은 혁명 후에 명확히 그리고 정확하게 입증되었을 것이다쿠데타에 가담한 자들 특히 거사를 실현시키는데 필요했을 많은 수의 적극적인 청년들은 거의” 성사된 행위에 대해 이후 침묵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2월 혁명 이후 이 거사에 가담한 행위는 그들에게 확실히 좋은 직장을 제공했을 것이다그러나 이런 일이 있었다는 얘기는 전혀 없었다크리모프와 구치코프가 애국심에 충만한 한숨을 쉬면서 포도주와 궐련을 즐기기는 했을 것이다그러나 이 이상의 단계로 일이 진전되지 않았음이 아주 명백하다귀족계급의 경박한 야당 인사들이나 대부르주아 계급의 거물급 야당 인사들이나 신의 뜻이 예정한 불길한 역사과정을 행동으로 수정할 의지가 없었다.

 

혁명은 차르와 함께 의회도 쓸어 없앴다의회의 개인적인 회의에서 1917년 5월 웅변을 가장 잘하면서도 가장 텅빈 자유주의자 마클라코프는 이렇게 부르짖는다: “후세가 이 혁명을 저주한다면 위로부터의 혁명을 통해 제때에 이 혁명을 막을 수 없었던 우리도 저주할 것이다!” 이로부터 시간이 좀 지나서 국외로 망명하게 될 케렌스키는 마클라코프처럼 이렇게 한탄했다: “그렇다참정권이 부여된 러시아가 그렇게도 많이 말하고 그렇게도 많이 준비했던(?) 위로부터의 쿠데타를 제때에 성사시키기에는 너무도 행동이 굼떴다러시아는 자생적인 폭발 즉 혁명을 저지하기에는 너무 행동이 느렸다.”

 

혁명이 정복당할 수 없는 힘을 폭발시킨 후에도왕조의 얼굴마담만이라도 제때에” 바뀌었다면 혁명이 저지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식자층의 바보들은 계속 생각했다따라서 케렌스키와 마클라코프의 외침은 당시의 전체적인 상을 완성하는 역할을 한다.

 

거대한” 궁정 쿠데타를 감행하기에는 의지들이 부족했다그러나 이로부터 조그마한 혁명을 수행하자는 계획이 나왔다자유주의 음모가들은 왕정의 주연배우는 감히 제거할 수 없었다그러나 대공들은 주연배우인 차르에게 외우지 못한 대사를 속삭여주는 자를 제거하기로 결심했다라스푸틴 제거가 왕정을 구하는 마지막 수단이라고 이들은 생각했다.

 

로마노프 왕조의 여자와 결혼한 유스포프공은 드미트리 파블로비치 대공과 왕당파 의원 푸리슈케비치를 이 일에 끌어들였다이들은 또한 자유주의자 마클라코프를 끌어들이려 애썼다살해사건에 전 러시아적” 성격을 부여하기 위해서였다그런데 이 유명한 변호사는 이 제안을 지혜롭게 거절했지만 음모가들에게 독특한 방식의 독약을 제공했다음모가들은 로마노프 왕조의 자동차가 라스푸틴의 시체를 옮기는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판단했다이것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마침내 대공들도 쓸모가 있게 되었다나머지는 악취미 인간들을 위해 짜여진 영화 시나리오처럼 수행되었다. 12월 16일과 17일 밤 라스푸틴은 조그만 파티에 참여하도록 유인되었다그리고 유스포프공의 소규모 가옥에서 그는 살해되었다.

 

극소수로 구성된 차르 친위 파벌과 신비주의 숭배자들을 제외하고 지배계급들은 모두 라스푸틴의 살해를 구원의 행위로 환영했다대공은 가택연금에 처해졌다. 차르의 표현에 따르면 그의 손은 농민(비록 예수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농민!)의 피로 묻혀졌다대공은 당시 페트로그라드에 있던 모든 황족들의 공감 어린 방문을 받았다. 황후의 유일한 자매인 세르게이 대공 미망인은 살해자들을 위해 기도 드리며 이들의 애국적 행위에 축복을 보낸다는 내용의 전보를 보냈다그때까지만 해도 라스푸틴을 언급하는 것도 금지되었던 신문들은 환희에 찬 기사를 실었다극장에서 사람들은 살해자들을 기리는 데모를 시도했다행인들은 거리에서 서로 축하했다유스포프공은 이렇게 말한다: “가정에서장교 회의에서식당에서 사람들은 우리의 건강을 위해 축배를 들었다공장 노동자들은 우리를 위해 만세를 불렀다.” 노동자들이 라스푸틴 살해의 소식을 접했을 때 슬퍼하지 않았다는 것은 인정된다그러나 그들의 만세는 왕조 재생의 희망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라스푸틴 파벌은 세인의 시야에서 사라진 후 상황을 주시했다이들은 차르, 황후, 차르의 딸들과 비루보바 등이 모르게 라스푸틴의 시체를 매장했다대공들에 의해 살해된 말 도둑 출신의 성스러운 친구의 시체 위에 서 있었을 경우 차르 일가는 소외감을 느꼈을 것이다일개 농민의 죽음에 차르 일가가 애도하다니 말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그런데 매장된 후에도 라스푸틴은 평화를 찾지 못했다나중에 혁명과 함께 니콜라이와 알렉산드라 로마노프가 가택 연금에 처해졌을 때 차르스코예 셀로의 병사들이 라스푸틴의 무덤을 파고 관을 열었다시체의 머리에는 알렉산드라올가타티아나마리아아나스타샤아니아의 서명이 있는 성상이 놓여져 있었다어떤 이유에서인가 임시정부는 사신을 보내 시체를 페트로그라드로 이송하도록 조치를 취했다그러나 군중이 이 시도에 저항하자 사신은 그 자리에서 시체를 불태우지 않을 수 없었다.

 

친구의 살해 후 왕정은 전부 합쳐 10주일 밖에 지탱하지 못했다그러나 이 짧은 시간도 차르의 시간임에는 틀림없었다라스푸틴은 가고 없었으나 그의 그림자는 여전히 차르를 지배했다음모가들의 모든 기대와는 달리 차르 부부는 살해사건 후에도 특별한 의지를 가지고 라스푸틴 파벌의 가장 경멸스러운 인간들을 승진시키기 시작했다라스푸틴 살해에 대한 복수인 마냥 악명 높은 악당이 법무장관으로 임명되었다여러 명의 대공들이 수도에서 추방당했다프로토포포프가 심령술을 배워 라스푸틴의 귀신을 부르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절망의 올가미가 구체제의 목을 더 옭아매었다.

 

라스푸틴의 살해는 거대한 역할을 했다그러나 살인범들과 이들을 부추긴 자들이 계산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거대한 역할을 했다즉 위기를 약화시키기는커녕 악화시켰을 뿐이었다궁중총사령부공장농민의 오두막집 등 모든 곳에서 사람들이 살해사건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결론은 스스로 나 있었다나병환자처럼 더러운 차르 친위 세력에 대해 대공들조차 독과 권총에 의존해야했다시인 블로크는 라스푸틴 살해에 대해서 이렇게 적었다: “그를 죽인 총알은 왕조 지배층의 심장부를 가격했다.”

 

로베스피에르는 입법의회에서 이렇게 말했다절대왕정에 대한 프랑스 귀족들의 반대는 왕정을 약화시키면서 부르주아 계급을 분기시키고 이후 인민대중을 분기시켰다동시에 로베스피에르는 이렇게 경고했다유럽의 다른 국가들에서 혁명은 프랑스만큼 빨리 진행될 수 없다다른 나라의 특권계급들이 프랑스 귀족들의 경험에서 교훈을 얻어 혁명을 주도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이 경탄할만한 분석을 내리면서도 로베스피에르는 다음과 같은 인식의 오류를 범했다절대왕정에 대한 프랑스 귀족계급의 무분별한 반대는 다른 나라들에게 확실한 교훈을 남겼다. 1905년에 그리고 특히 1917년에 러시아에서 일어난 일들은 로베스피에르와는 달리 이렇게 증언했다전제 그리고 반봉건체제 즉 귀족계급에 저항하는 혁명은 첫 단계에서 비록 일관되지는 못하나마 귀족왕족 등 특권 최상층의 진정한 협력을 얻는다이 놀라운 역사 현상은 사회계급 이론에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그러나 실제로는 이 이론의 조잡한 해석에 모순을 일으킬 뿐이다.

 

사회의 모든 적대관계가 최고조에 도달했을 때 혁명은 터진다그러나 이 상황은 구체제의 계급들 즉 해체될 수밖에 없는 계급들에게도 참을 수 없는 상황이 된다생물에 대한 유추를 그 가치보다 더 높이 사주고 싶지는 않다그러나 자연에서 탄생의 행위는 어느 순간이 되면 어미와 새끼 모두에게 피할 수 없는 일이 된다이 점은 말할 가치가 있다특권계급들이 기존 체제를 반대하는 이유는 이들이 누렸던 기존의 사회적 지위가 사회의 생존과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기 때문이다모든 것이 지배 관료집단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것처럼 보인다귀족계급은 자신이 모든 적대감의 초점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관료집단을 비난한다그러면 관료집단은 귀족계급을 비난하고 이 양자가 함께 또는 따로 자신들의 불만을 자기 권력의 원천인 왕정의 정점에 퍼붓는다.

 

귀족의 세습기관들에 봉직하다가 잠시 내각에 입각한 쉐르바토프공은 이렇게 말했다: “사마린과 나는 둘 다 우리 도에서 귀족의 우두머리 역할을 했다지금까지 아무도 우리가 좌익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으며 우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그러나 차르와 내각이 모든 합리적인 사회(우리는 혁명적 음모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즉 귀족상인자치도시도의회심지어는 군대 등과 근본적으로 의견을 달리하는 그런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만약 위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의 의견을 원치 않는다면 이들을 제거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자신들이 겪는 모든 불행의 이유는 왕정의 맹목이나 이성 상실에 있다고 귀족계급은 생각한다구 사회를 새로운 사회와 화해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특권층은 믿을 수 없다다른 말로 하면귀족계급은 자신의 종말을 인정할 수 없다이 때문에 죽을 것 같은 피로감을 구체제의 가장 성스러운 권력인 왕정에 대한 반대로 전환시킨다역사는 귀족계급의 상층부를 버릇없는 자식으로 키웠으며 이들은 혁명에 직면하여 두려움을 참을 수 없다바로 이 때문에 이 귀족들의 반대는 격렬하면서도 무책임하다귀족의 불만은 비체계적이고 일관되지 못한다미래가 없는 계급의 저항이기 때문이다등불은 꺼지기 전에 환하면서도 그을음이 많은 빛으로 확 타오르다 꺼진다귀족도 이런 식으로 체제 저항의 빛을 내고 사라진다이로서 이들은 자신의 철천지 원수인 인민에게 커다란 봉사를 한다이것이 바로 구체제 붕괴의 변증법이다이 변증법은 사회계급 이론과 일치한다이 뿐이 아니다이 이론으로만 이 변증법이 설명될 수 있다.

 


제 6장: 구체제 멸망의 격심한 고통

 

혁명의 첫 번째 문제는 차르 왕정을 타도하는 것이었다그러나 혁명이 이 문제를 해결할 시간을 갖기도 전에 차르체제는 나무에 매달린 썩은 과일처럼 건드리자마자 붕괴했다이 붕괴의 순간들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구 지배계급에 대한 지금까지의 상세한 묘사는 미완성으로 남을 것이다.

 

차르는 모길레프의 총사령부에 있었다딱히 할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페트로그라드의 혼란을 외면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총사령부에서 차르와 함께 있던 궁중 사관(史官두벤스키 장군은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여기에는 조용한 삶이 시작된다모든 것은 과거 그대로이다. 차르가 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오직 우연적이고 외적인 원인들만이 어떤 변화를 야기할 뿐이다...” 2월 24일 황후는 항상 그랬듯이 영어로 차르에게 편지를 보냈다: “케드린스키(케렌스키를 의미했다의원은 끔찍한 내용의 연설을 했으므로 교수형에 처해야 합니다전시의 법이 그렇습니다하나의 모범이 될 것입니다모두가 폐하의 확고한 의지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2월 25일 전쟁장관이 보낸 전보가 도착했다수도에서 파업이 일어나고 노동자들 사이에 혼란이 조성되고 있으나 적절한 조치들이 취해졌기 때문에 심각한 사태는 아니라는 내용이었다한마디로 이런 내용이었다: “이런 일은 늘 있던 일입니다!”

 

차르에게 양보하지 말 것을 언제나 주문했던 황후는 여기에서도 확고한 모습을 유지하려고 애를 썼다. 26일 니콜라이의 흔들리는 용기를 북돋우기 위해 그녀는 이렇게 전보를 쳤다: “도시는 조용합니다.” 그러나 저녁때 보낸 전보는 이렇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시에서 일이 전혀 해결되지 않고 있습니다.” 편지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노동자들에게 파업하지 말라고 말씀하셔야 합니다그리고 파업할 경우 벌로 전선에 보내질 것이라고 경고해야 합니다발포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필요한 것은 질서뿐입니다그리고 이들이 다리를 건너지 못하게 막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다큰 것이 필요 없다질서만 있으면 된다가장 중요한 일은 노동자들이 교외에서 분노하고 무력감을 느끼게 하면 된다.

 

27일 아침 이바노프 장군은 독재적 권한을 위임받아 성 게오르기우스 대대와 함께 전선에서 수도로 복귀한다그러나 차르스코예 셀로를 점령한 직후에 자신의 임무를 발표할 예정이다차례가 돌아와 자신도 나중에 군사독재를 시행한 데니킨 장군이 이렇게 회상한다: “그보다 더 부적합한 인물을 상상하기는 힘들 것이다살이 축 늘어진 노인에 불과한 그는 정세를 제대로 파악도 못하고 위력활력의지근엄함 등 어느 것도 없는 인물이다.” 이바노프 장군이 선택된 이유는 그가 1905년 혁명 당시 노동자들을 진압했으며 이보다 11년 전에는 크론슈타트 수병들의 반란을 진압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세월은 그에게 흔적을 남겼다진압군을 지휘했던 그는 이제 힘없는 노인이었으며 진압되었던 노동자들은 강력한 조직력을 갖추고 있었다북부와 서부 전선의 병력은 페트로그라드로 진군할 것을 명령받았다시간이 충분하다고 모두들 생각했음이 명백했다이바노프 자신도 사태가 곧 정상화될 것으로 생각했다심지어 페트로그라드의 친구들에게 줄 식료품을 모길레프에서 구입하라고 부관에게 명령해야겠다고 한가하게 생각했다.

 

2월 27일 오전 로지안코는 차르에게 이렇게 끝맺는 새 전보를 보냈다: “조국과 왕조의 운명이 결정될 최후의 시간이 왔습니다.” 차르는 조정(朝廷장관 프레데릭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배불뚝이 로지안코 놈이 또다시 말도 되지 않는 내용을 잔뜩 써서 나에게 보냈어수고스럽게 답장을 보낼 필요가 없어.”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말도 되지 않는 내용이 아니었다그는 답장을 보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같은 날 정오쯤 총사령부는 파블로프스키볼린스키리토프스키프레오브라젠스키 연대들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며 믿을만한 군대를 전선에서 수도로 복귀시킬 필요가 있다는 내용을 담은 보고서를 하발로프 장군으로부터 받았다한 시간 후 전쟁부에서 대단히 안심되는 전보가 날아왔다: “일부 부대에서 오늘 아침 시작된 소요사태는 군무에 충실한 중대와 대대들에 의해 확고하고 열정적으로 진압되고 있다...곧 평온을 되찾을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그러나 저녁 7시 직후 전쟁장관 벨라예프는 이렇게 보고하고 있다: “군무에 여전히 충실한 몇몇 부대만으로는 반란을 진압하기 어렵다.” 그리고 도시 여러 지구에서 동시에 공격하도록” 진짜 믿을만한 부대들을 충분한 규모로 빨리 보낼 것을 요청했다.

 

한편 내각의 장관들은 모든 불행의 근원이라고 모두들 생각하고 있는 반미치광이 내무장관 프로토포포프를 해임할 적기가 왔다고 생각했다동시에 하발로프 장군은 비밀리에 정부가 준비한 포고령을 발동했다폐하의 명령에 따라 페트로그라드에 계엄령을 실시한다여기서도 뜨거운 것을 차가운 것과 섞으려는 어리석은 행동이 시도되었다그러나 의도적인 것은 거의 아니었고 실제로 아무 소용도 없었다시장 발카는 풀과 솔을 마련할 수가 없어서 계엄령 포고문을 도시 전역에 붙일 수가 없었다이 관료들에게는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이들은 이미 저승에 있었다.

 

차르의 마지막 내각의 대표 그림자는 70세가 된 골리친공이었다그는 전에 황후가 관할하는 자선단체들을 운영하다가 전쟁과 혁명의 시기에 그녀에 의해 수상으로 승진되었다자유주의자 놀데 남작의 묘사에 의하면 이 성격 좋은 러시아의 신사이 늙은 약골” 골리친은 왜 이 골치 아픈 직책을 맡았느냐고 친구들이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즐거운 추억거리를 하나 더 만들기 위해서.” 어쨌든 그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당시 최후의 차르 내각이 어떤 분위기였는지를 로지안코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내각이 회의를 하고 있던 마린스키 궁전으로 군중이 몰려오고 있다는 첫 소식을 접하자 모든 건물에 소등 조치가 취해졌다혁명 군중이 내각을 그냥 지나치기를 정부는 원했다그러나 소문은 거짓이었다군중은 공격하지 않았다그래서 건물의 모든 등불이 다시 켜지자 어느 장관은 스스로 놀랄 정도로” 탁자 밑에 숨어 있었다골리친 자신이 어떤 종류의 추억을 만들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로지안코의 감정 역시 최고로 상승해 있지 않았던 것 같았다전화로 내각과 교신하려고 그는 한참 애썼으나 허사였다결국 이 의회 의장님은 다시 골리친에게 전화를 건다그러자 후자가 이렇게 응답한다: “나에게 더 이상 연락하지 마십시오나는 이미 사임했습니다.” 이 소식을 듣자 로지안코는 그의 충실한 비서의 말에 따르면 힘없이 팔걸이 의자에 앉아 얼굴을 양손으로 덮었다. ... “하느님이렇게 끔찍할 수가!...정부가 없이...무정부 상태......” 이렇게 말하고 그는 소리를 죽여 부드럽게 흐느꼈다. 차르 정권의 노쇠한 그림자가 목숨을 다하자 로지안코는 불행삭막함부모를 여윈 듯한 감정에 휩싸였다자신이 혁명을 대표해야 한다는 다음 날의 생각과는 한참 거리가 먼 감정이었다!

 

골리친의 전화 응답은 다음의 사실로 설명된다: 27일 저녁 내각은 자력으로 상황을 해결할 수 없다고 명확히 인정했다따라서 차르에게 인민의 신뢰를 얻고 있는 인물을 수상으로 임명할 것을 건의했다. 차르는 골리친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지금 상황에서 수상을 바꿀 수는 없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상황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차르는 내각이 반란 진압을 위한 가장 단호한 조치들을 취할 것을 요구했다그러나 이것은 말이 쉬울 뿐이었다.

 

다음날 28일에는 기가 드센 황후조차 낙담에 빠져 있었다그녀는 니콜라이에게 전보를 보낸다: “파업은 계속되고 있습니다상당수의 부대들이 혁명의 편으로 넘어갔습니다알릭스.”

 

방위군과 주둔군 모두가 봉기를 일으키자 왕정에 대한 미련에 미쳐있는 이 헤센주 출신의 여인은 양보조치가 필요하다.”고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이제 차르도 배불뚝이 로지안코가 말도 되지 않는 내용을 전보로 보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니콜라이는 가족과 합류하기로 결정한다. 차르를 불편하게 느낀 총사령부 참모들이 그를 부드럽게 밀어낸 결과일 수도 있다.

 

차르의 전용기차는 처음에는 별 탈없이 여행했다도의 유지들과 도지사들이 그를 맞이하기 위해 역에 나왔다. 차르는 혁명의 소용돌이에서 멀리 떨어진 채 습관이 된 황실 전용 객차의 수행원들에 둘러싸여 있었다따라서 그는 다시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위기를 느끼지 못한 것 같았다. 28일 오후 3시 혁명이 이미 그의 운명을 결정한 뒤에도 그는 비야즈마에서 황후에게 전보를 보냈다: “아주 좋은 날씨당신이 건강하고 평온하기를 비오전선에서 많은 부대들이 이리로 보내지고 있소부드러운 사랑을 당신에게니키” 황후조차 주장하는 양보조치 대신 부드러운 사랑을 보낸 차르는 전선에서 군대를 부르고 있다그러나 아주 좋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몇 시간 후 차르는 혁명의 폭풍과 대면하게 된다그의 기차가 비셔 역에 도착하자 철도 노동자들은 이렇게 말하면서 기차의 진행을 중지시켰다: “교량이 손상되었습니다.” 대개의 경우 이러한 변명은 상황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 조정의 대신들이 발명한다니콜라이는 볼로고에를 경유하여 니콜라예프스키 철도로 계속 여행하려고 했다아니면 수행원들이 그렇게 하려고 애썼는지도 모른다그러나 여기서도 노동자들이 기차의 통과를 허용하지 않았다페트로그라드에서 날라온 전보들보다 이 일은 사태의 심각성을 훨씬 강하게 피부로 느끼게 해주었다. 차르는 총사령부를 떠난 후 수도로 갈 수가 없었다철도의 하찮은 졸들을 가지고 혁명은 왕에게 장군받아라하고 외쳤다!

 

기차에서 차르를 수행한 궁정 사관 두벤스키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비셔 역 사건이 일어난 그 한밤중은 역사적인 밤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인정하고 있다...헌법 인정 문제가 결론이 났음이 완전히 명백해진 것처럼 보인다헌법은 확실히 제정될 것이다....임시정부 각료들과의 협상만 남았다고 모두 말하고 있다.” 열차의 통행을 막기 위해 아래로 내려진 신호기 저편에는 치명적인 위험이 증대하고 있었다그러자 신호기를 대면하면서 프레데릭스 백작돌고루키공로이히텐베르크 백작 등 고위 귀족들 모두가 헌법 제정을 찬성한다이들은 더 이상 투쟁을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협상을 통해 1905년처럼 적들을 속이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차르의 전용기차가 갈 길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 황후는 하루바삐 돌아올 것을 호소하는 내용의 전보를 계속 차르에게 보내고 있었다그러나 그녀가 보낸 전보들은 모두 파란 연필로 수취인 행방불명이라고 쓰여진 채 우체국에서 반송되었다전보 담당 사무원은 차르의 소재를 알 수 없었다.

 

방위군 및 주둔군 연대들은 음악과 깃발을 앞세우고 타우리데 궁전으로 행진했다클라인미헬 백작부인의 말에 의하면 아주 갑자기 혁명적 성향을 보인 시릴 블라디미로비치의 지휘 아래 방위군 일개 중대가 행진하고 있었다보초들은 사라지고 없었다상황을 잘 아는 병사들이 궁전을 포기하고 도망쳤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자기 목숨을 구하고 있었다고 비루보바는 말한다혁명 병사들의 무리가 궁전 주위를 배회하면서 대단한 호기심으로 모든 것을 관찰하고 있었다소위 혁명 지도부가 이 궁전의 용도를 결정하기도 전에 하급 병사들은 이 곳을 관람용 박물관으로 바꾸고 있었다.

 

위치가 확인이 안된 차르는 푸스코프로 방향을 돌려 루즈키 장군이 지휘하는 북부전선의 사령부로 향했다수행원들은 이런 저런 제안을 했다. 차르는 어쩌지도 못하고 어물쩍거리고 있었다혁명이 분 단위로 시간을 계산하고 있을 때 차르는 하루와 일주일 단위로 시간을 계산하고 있었다.

 

폐위되기 전 마지막 몇 달의 차르를 시인 블로크는 이렇게 묘사했다: “완고하면서도 의지가 박약하였고 초조하면서도 매사에 느린 인간이었다사람을 믿지 못해 긴장된 말을 조심스럽게 내뱉는 모양을 보아 그는 더 이상 자기 운명의 주인이 아니었다그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고 단 하나의 명확히 의식적인 조치도 취하지 못하여 권력을 쥔 부하들의 손아귀에 자신을 맡기고 있었다.” 그렇다면 2월의 마지막 며칠과 3월의 첫 며칠간 그의 긴장의지 박약조심성불신감 등은 얼마나 더 컸겠는가!

 

마침내 니콜라이는 증오스러운 로지안코에게 전보를 치기로 결정했다그러나 결국 전보는 수취인에게 도착하지 못했다이 전보에서 차르는 조국을 구하기 위해 자신이 외무전쟁해양 장관직을 겸임하고 로지안코가 수상이 되어 새 내각을 구성하는 안을 제시했다. 차르는 여전히 그들과” 협상하기를 원했다. “상당수의 부대들이 페트로그라드로 향하고 있다고 그는 믿고 있었다.

 

이바노프 장군은 아무 어려움 없이 차르스코예 셀로에 도착했다철도 노동자들은 성 게오르기우스 대대와 충돌하기를 원치 않았던 것 같다나중에 장군은 자신에게 무례하게 구는 하급 병사들에게 아버지뻘 되는 사람에게 무례하게 굴면 되냐고 여러 번 핀잔을 주었다고 고백했다결국 그는 병사들이 무릎 꿇도록 만들었다이 독재자가 차르스코예 셀로에 도착하자마자 지구 행정당국은 그에게 이렇게 통보했다성 게오르기우스 대대와 군대의 충돌은 차르 가족을 위험에 빠뜨릴 것이다이들은 자기 목숨이 두려웠다그래서 이바노프가 기차에 내리지 말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라고 충고했다.

 

이바노프 장군은 페트로그라드에 있는 다른 독재자” 하발로프 장군에게 10개의 질문을 담은 전보를 보냈다그리고 그는 간략한 답장을 받았다가치가 있는 내용이므로 모두 인용하겠다.

 

1)

군대의 규율을 따르고 있는 병력과 반란 병력의 수는 각각 얼마인가?

해군부 건물에 방위군 4개 중대기병과 카자크병 5개 대대포병 2개 중대 등이 나의 지휘를 따르고 있다나머지 병력은 혁명 편으로 넘어갔거나 동조하고 있거나 중립을 지키고 있다병사들은 혼자 또는 무리를 지어 배회하면서 장교들의 무장을 해제시키고 있다.

 

2)

어느 철도역들이 방어되고 있는가?

모든 역들은 혁명 세력에 점령당했고 이들의 엄중한 방어 하에 있다.

 

3)

도시의 어느 지구에 질서가 회복되었는가?

도시 전체가 혁명으로 넘어갔다전화는 불통이다도시 각 지구간의 통신이 두절되었다.

 

4)

도시 각 지구를 누가 통치하고 있는가?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

 

5)

모든 정부 부처는 제대로 기능하고 있는가?

장관들은 혁명 세력에 의해 체포되었다.

 

6)

현재 귀하의 지휘를 받는 경찰 병력은 어느 정도인가?

전혀 없다.

 

7)

전쟁부의 어느 기술 보급 부처가 귀하의 통제를 받고 있는가?

전혀 없다.

 

8)

식료품이 어느 정도 확보되어 있는가?

전혀 없다. 2월 5일 도시 안에는 560만 파운드의 밀가루가 창고에 있었다.

 

9)

반란군에게 넘어간 무기대포군수품은 어느 정도인가?

포병의 모든 시설을 혁명군이 장악하고 있다.

 

10)

귀하의 지휘를 받고 있는 병력과 참모는 누구인가?

지구 참모부장은 나의 지휘를 받고 있으나 다른 지구 행정기구들과 연락이 전혀 되지 않고 있다.

 

상황을 명확히 확인한 이바노프 장군은 드노(역자 주바닥이란 뜻의 러시아어)”역에서 하차하지 않고 참모들과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로 합의했다”. 참모부의 주요 인물 루콤스키 장군은 이렇게 결론지었다: “독재 권력을 가진 이바노프 장군의 원정은 공개적인 모욕 만 당했다.”

 

그러나 이 모욕은 매우 조용하게 가해졌기 때문에 전혀 주목받지 못하고 혁명의 파도에 가라앉았다아마 독재자 이바노프 장군은 식료품을 페트로그라드의 친구들에게 배달했을 것이며 황후와 오랜 대화를 나누었을 것이다. 황후는 병원에서의 자기 희생적 봉사활동을 언급했다그리고 군인들과 사람들이 자신의 희생을 감사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불평했다.

 

이때 모길레프를 경유해서 프스코프에 소식이 전달되었다갈수록 암울한 내용들이었다. 차르의 경호대원들은 황실 가족들에 의해 이름이 모두 기억되고 총애를 받았다그런데 이들은 의회에 출석하여 반란에 참여하기를 거부한 장교들을 체포할 수 있게 허가해 달라고 요청했다부제독 쿠로프스키는 크론슈타트의 반란을 진압할 어떠한 조치도 취할 수 없었다고 보고했다충성을 확인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부대도 없었기 때문이었다제독 네페닌은 발트 함대가 의회의 임시위원회를 인정했다고 전보를 쳤다모스크바 총사령관 므로조프스키는 이렇게 전보를 보냈다: “병력의 대다수는 포병과 함께 혁명 편으로 넘어갔다도시 전체가 이들에 의해 장악되었다시장과 그의 보좌관들은 시청을 떠났다.” 떠났다는 것은 도망쳤다는 의미였다.

 

이 모든 사항은 3월 1일 저녁 차르에게 전달되었다밤늦게까지 차르 주위의 인물들은 책임 내각이 필요하다고 그를 어르기도 하고 주장을 펴기도 했다마침내 새벽 2시 차르는 이를 허가했고 이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이것으로 혁명의 문제가 해결된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에 명령이 떨어졌다페트로그라드로 이송되고 있는 병력들은 다시 전선으로 돌아가라루즈키는 동이 트자 이 희소식을 로지안코에게 전하기 위해 급히 서둘렀다그러나 차르의 시간은 사태의 전개보다 한참 늦었다타우리데 궁전에서 이미 민주주의자사회주의자병사노동자 대표들에 파묻힌 로지안코는 루즈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귀하의 제안은 불충분합니다이제는 왕조의 존립 자체가 어려워지고 있습니다....모든 곳에서 군대는 의회의 편을 들고 있습니다인민은 폐하가 황위를 황태자에게 물려주고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가 섭정이 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물론 군대는 황태자의 황위 계승이나 섭정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혁명을 저지하려고 로지안코가 둘러대었을 뿐이었다그러나 어느 경우든 차르의 양보조치는 너무 늦게 내려졌다: “혼란상태는 너무 극에 달해서 나(로지안코)는 오늘밤 임시정부를 구성하지 않을 수 없다불행하게도 차르의 폐위 포고령은 너무 늦었다....” 이렇게 장엄하게 선언한 의회 의장은 골리친 앞에서 흘린 눈물을 이제 확실히 거두었다. 차르는 로지안코와 루즈키의 대화 내용을 파악한 후 머뭇거렸다그리고 그 내용을 다시 읽은 후 상황을 주시하기로 결정했다그러나 이제 장군들이 경고하기 시작했다이 문제는 그들에게도 약간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알렉세예프 장군은 그날 밤 전선의 사령관들을 대상으로 일종의 투표를 실시했다현대의 혁명이 전보의 도움으로 성취되는 것은 좋은 일이다권력을 쥐고 있는 자들의 첫 충동과 반응이 기록을 통해 역사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3월 1일과 2일 밤 전선의 사령관들 사이에 오간 대화는 비교할 수 없이 귀중한 문서이다. 차르가 폐위되어야 하는가서부 전선 사령관 에버트 장군은 루즈키 장군과 브루실로프 장군 다음으로 견해를 밝히겠다고 말했다루마니아 전선 사령관 사하로프 장군은 자기가 견해를 밝히기 전에 다른 전선 총사령관들이 견해를 밝힐 것을 요구했다오랜 지연 후 이 용감한 사령관은 차르에 대한 자신의 따뜻한 마음이 비열한 제안을 받아들일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그러나 흐느끼면서” 그는 더 비열한 요구들을 피하기 위해 차르가 퇴위해야한다고 조언했다에버트 군무국장은 항복의 필요성을 상당히 합리적으로 이렇게 설명했다: “수도의 상황에 대한 정보가 군대 내로 퍼졌다이에 따른 의문의 여지없는 혼란을 막기 위해 모든 조치를 취하고 있다수도의 혁명을 진압할 수 있는 수단은 없다.” 캅카스 전선의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은 무릎을 구부리고 차르에게 최상의 조치로 퇴위를 간청했다알렉세예프 장군과 브루실로프 장군 그리고 네페닌 제독도 이와 비슷한 내용을 청원하였다루즈키도 비슷한 내용의 견해를 밝혔다이렇게 해서 장군들은 존경하는 차르의 정수리에 7개의 총구를 예의를 갖추어 들이댔다새로운 권력과 화해할 시간이 낭비되는 것을 이들은 두려워했다그리고 자기 휘하의 군대도 그만큼 두려워했다이들은 진지를 적에게 넘겨주는 일에 익숙했지만 군 최고 통수권자 차르에게는 아주 단호하게 만장일치의 조언을 했다저항하지 말고 황위에서 내려와라이들이 있는 곳은 멀리 떨어진 페트로그라드가 아니라 군대가 있는 전선이었다.

 

상황을 참작한 이 보고사항들을 들은 후 차르는 더 이상 자기 것이 아닌 왕좌에서 물러나기로 결정했다로지안코에게 보내는 적절한 내용의 전보가 작성되었다: “나의 모국 러시아의 진정한 안녕과 구원을 위해 내가 치를 수 없는 희생은 없다따라서 나는 왕좌에서 물러나고 나의 아들이 뒤를 잇게 할 용의가 있다그가 성년이 될 때까지 나의 동생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가 섭정이 될 것이다니콜라이.” 그러나 이 전보는 전달되지 못했다수도에서 구치코프 의원과 슐긴 의원이 차르가 있는 프스코프로 출발한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차르는 전보를 다시 자신에게 돌려보낼 것을 명령했다당연히 그는 너무 값싼 항복을 두려워했으며 위안의 소식 아니 좀더 정확히 표현하면 기적을 아직도 기다리고 있었다니콜라이는 3월 2일과 3일 밤 12시에 두 의원을 맞이했다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으며 더 오래 상황을 끌 수가 없었다의외로 차르는 아들과 떨어질 수가 없다고 선언하며 동생에게 황위를 넘기는 양위문에 서명했다그렇다면 그는 어떤 모호한 희망을 품고 있었는가이와 동시에 상원에 보내는 포고령에도 그는 서명했다이를 통해 그는 르보프공을 수상으로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를 최고사령관으로 임명했다황실 가족에 대한 황후의 의심은 올바른 것으로 드러난 것처럼 보였다증오스러운 니콜라샤가 음모꾼들과 함께 권력에 복귀했다구치코프는 혁명 세력이 최고사령관을 인준할 것으로 진지하게 믿었다그리고 니콜라예비치도 자신의 임명을 진정으로 받아들였다심지어 그는 며칠동안 애국적 의무를 완수하자는 일종의 명령과 호소를 공포할 것을 모색하기도 했다그러나 혁명은 조금의 힘도 들이지 않고 그를 제거했다.

 

자유의사라는 외양을 보존하기 위해 퇴위는 오후 3시에 일어난 것으로 기록되었다. 차르의 원래 결정이 그 시간에 있었다는 것을 위장하기 위해서였다그러나 사실은 자기 동생이 아니라 아들에게 황위를 물려준 오후의 결정은 좀더 상황이 좋아질 것을 기대해서 철회되었었다그러나 이에 대해서 아무도 큰 소리로 말하지 않았다. 차르는 증오스러운 의원들 앞에서 체면을 유지하려고 마지막 노력을 기울였다한편 의원들은 역사적인 행위가 조작되었음을 인정하면서도 인민을 속였다왕정은 평소 모습을 간직한 채 무대에서 사라졌다그리고 차르에 이어 권력을 계승한 자들도 원래 모습에 충실했다이들은 아마도 이 묵인 행위를 정복당한 자에 대한 정복자의 아량으로 간주했을 것이다.

 

무뚝뚝한 기존의 문체에서 약간 벗어나 니콜라이는 3월 2일 이렇게 일기를 썼다: “아침에 루즈키의 방문을 받았다그리고 전신을 통해 그가 로지안코와 나누었던 긴 대화문을 읽었다그의 말에 의하면 페트로그라드의 상황은 너무나 악화되어 의원들로 구성된 내각도 속수무책이다노동자 위원회를 통해 사회민주당이 반대하기 때문이다내가 퇴위할 필요가 있다루즈키는 이 대화 내용을 총사령부의 알렉세예프 장군 그리고 모든 전선의 사령관들에게 전달했다. 12시 30분에 응답이 도착했다러시아를 구하고 군대를 전선에 묶어두기 위해 나는 이 조치에 동의했다그래서 그들은 총사령부에서 퇴위 성명서의 원문을 보냈다저녁때 페트로그라드에서 구치코프와 슐긴이 도착했다이들과 이 문제로 대화를 나누었으며 이들에게 수정하고 서명된 문서를 건네주었다새벽 1시에 무거운 마음으로 프스코프를 떠났다반역비겁함속임수가 나를 둘러싸고 있다.”

 

니콜라이의 쓰라린 마음은 근거가 없지 않았다. 2월 28일까지만 해도 알렉세예프 장군은 전선의 사령관들 앞으로 이렇게 전보를 보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충성 서약을 이행하고 현역 군인들의 의무를 다해야한다이것은 차르와 조국에 대한 우리의 신성한 의무이다.” 그런데 이로부터 이틀 후 알렉세예프는 사령관들에게 자신들의 서약과 의무에 대한 충성을 파기하도록 호소했다총사령부의 참모들 가운데 차르를 위해 행동한 장군은 하나도 없었다이들은 모두 서둘러 혁명의 배를 탔다그리고 이 배에서 편안한 방을 찾기를 기대했다장군들과 제독들은 모두 차르의 리본을 제거하고 혁명을 상징하는 붉은 리본을 착용했다곧이어 혁명에 대한 새로운 충성선서 도중 심장마비로 사망한 어느 부대 지휘관에 대한 소식이 돌았다유일하게 올바른 영혼이었다그러나 그의 심장마비가 상처받은 왕당파적 감정 때문이었다는 사실은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공무원들이 군인들보다 더 많은 용기를 보여줄 의무는 당연히 없었다각자는 능력에 따라 자기 목숨을 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왕정의 시계는 혁명의 시계와 일치하지 않았다이것은 결정적이었다. 3월 3일 동틀 녘에 루즈키는 수도에서 온 직접 전보에 의해 다시 소환되었다로지안코와 르보프공은 그가 차르의 퇴위를 지연시킬 것을 요구했다퇴위 결정은 이번에도 너무 늦은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었다새 정부는 알렉세이를 왕으로 인정할 수 있으나 미하일은 절대 인정될 수가 없다고 은근히 말했다그러나 누가 알렉세이를 인정한다는 것일까전날 밤에 도착한 의원들이 여행의 목적을 정확히 알지 못했다고 루즈키는 약간의 악의와 함께 유감을 표명했다그러나 이 점에서도 의원들은 정당했다궁내 장관 로지안코는 루즈키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예상도 못한 가운데 한번도 본적 없는 병사들의 반란이 터졌다.” 마치 평생 병사들의 반란만 관찰해온 것처럼 그는 말했다. “미하일을 새 황제로 선언하는 것은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며 제거될 수 있는 모든 것이 가차없이 제거되기 시작할 것이다.” 이 말은 정말이지 모든 것을 휘몰고 흔들고 구부리고 비틀고 있다!

 

장군들은 말없이 이 새로운 혁명의 비열한 허세를 꾹 참았다알렉세예프 만이 사령관들에게 보내는 전보문에서 자신의 기분을 약간 안심시켰다: “좌익 정당들과 노동자 대의원들이 의회 의장에게 강력히 압력을 가하고 있다따라서 로지안코의 말에는 솔직함이나 진실성이 조금도 없다.” 당시 장군들에게 제공되지 못한 것은 진실뿐이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차르는 다시 마음을 바꾸었다프스코프에서 모길레프에 도착하여 그는 전 최고사령관 알렉세예프에게 종이 한 장을 건네고 이것을 페트로그라드로 보내라고 지시했다자기 아들에게 황위를 넘겨주는 내용이었다명백히 그는 이것이 장기적으로 더 희망이 있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데니킨의 일기에 따르면 알렉세예프는 이 전보를 가지고 갔으나 ... 보내지는 않았다군대와 나라에 이미 공개된 두 성명서로 충분하다고 그는 생각했다이 불협화음은 차르그의 측근의회 자유주의자 등 모두가 혁명의 진전보다 늦게 사고했기 때문에 발생했다.

 

3월 8일 모길레프를 마지막으로 떠날 때 차르는 이미 공식적으로 체포상태에 있었다이때 그는 군대에 호소하는 말을 이렇게 끝맺었다: “지금 평화를 생각하고 그것을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 조국의 반역자요 배신자이다.” 차르와 주위 인물들이 친독일 성향이라는 자유주의자들의 비난을 없애려는 자극 받은 시도였다그러나 이것은 아무 효과도 없었다이 호소문을 공포할 용기가 있는 자는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해서 한 치세가 끝났다이 치세는 악운실패불행사악한 행위 등의 연속이었다대관식 중에 발생한 호징카의 재앙(역자 주: 차르의 대관식에 모인 군중 가운데 다수가 밟혀 죽은 사건), 파업노동자와 반란 농민들에 대한 발포러일전쟁, 1905년 혁명의 잔인한 진압수많은 처형형벌 목적의 원정대대적인 소수민족 학살과 박해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계대전 참전이라는 미친 그리고 경멸할만한 정책 등이 그의 치세에 꼬리를 물었다.

 

차르스코예 셀로에 도착하자 차르와 그의 가족은 궁전에 가두어졌다비루보바의 말에 의하면 여기서 차르는 부드럽게 말했다: “인간에게는 정의가 없다.” 그러나 비록 늦게 나타날지언정 역사의 정의는 존재한다이 사실을 그의 말이 논란의 여지없이 증명하고 있다.

 

최후의 로마노프 부부와 프랑스 대혁명 당시 부르봉 부부 사이의 유사성은 아주 명백하다이 점은 문학에서 언급된 바 있었으나 지나가는 투로 그랬을 뿐 그로부터 어떤 법칙이 유추되지는 못했다그러나 이 유사성은 처음 볼 때 느껴지는 것처럼 우연적인 것은 결코 아니며 유추의 소중한 재료가 된다.

 

비록 125년의 시차를 두었으나 차르와 프랑스 왕은 어떤 순간에는 같은 배역을 맡은 두 배우인 것 같았다수동성참을성복수심에 불타는 배신적 성격은 두 지배자의 뚜렷한 특징이었다다만 루이 16세는 의심이 스민 친절함으로 니콜라이는 상냥함으로 이것을 감추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이 두 왕은 모두 직무로 과부하가 걸린 인상을 주었다그러나 동시에 전혀 쓸모 없는 권력의 일부분이라도 포기할 생각이 없는 인간이었다이들이 쓴 일기는 문체 또는 문체의 결여에 있어서 유사하면서 똑같이 음울한 정신적 빈곤을 드러내고 있다.

 

오스트리아 여자 마리 앙투아네트도 독일 헤센의 여자 알렉산드라와 놀라운 유사성을 보여주고 있다신체 뿐 아니라 도덕에서도 두 명의 비(妃) 모두 두 명의 군주 위에 서있다마리 앙투아네트는 알렉산드라 페오도로브나에 비해 덜 경건했으며 후자와는 달리 쾌락을 열정적으로 쫓았다그러나 두 여자 모두 인민을 경멸했으며 양보조치를 허용한다는 생각을 참을 수 없었으며 자기 남편을 깔보고 그의 용기를 불신했다다만 앙투아네트는 경멸을 알렉산드라는 연민을 드러내며 그랬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회고록의 저자들은 페트로그라드 혁명 시기를 회상하면서 니콜라이 2세가 일개 시민이었다면 좋은 기억을 남겼을 것이라고 필자에게 확신시킨다그러나 이들은 오래 전에 나돌았던 루이 16세에 대한 판에 박힌 말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이들의 말은 역사나 인간 본성에 대한 탐구에 조금도 도움되지 않는다.

 

첫 혁명이 낳은 비극적 사건들의 절정기에 차르는 우울해 하지 않았다이와 반대로 즐거운활기찬 조그마한 인간인 차르가 자줏빛 셔츠를 입고” 르보프공을 맞이했다이 때문에 그는 분노했다인식은 못한 채 르보프공은 1790년 구베르뇌르 모리스가 루이 16세에 대해 했던 말을 반복했다: “그 상황에서 잘먹고 잘마시고 잘자면서 웃음을 터뜨리고 귀뚜라미처럼 명랑하게 지내는 그런 인간에게 바랄 것이 무엇이겠는가?”

 

왕정이 무너지기 3개월 전 알렉산드라 페오도로브나는 이렇게 예언했다: “모든 일이 가장 잘 풀리고 있다우리 친구 라스푸틴의 꿈은 너무 의미가 깊어!” 그녀의 이 말은 왕정이 무너지기 1개월 전에 마리 앙투아네트가 한 말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정신의 생기를 느껴우리는 곧 행복하고 안전할 것이라고 뭔가가 나에게 말해주고 있어.” 이들은 모두 익사하면서 무지개 꿈을 꾸었다.

 

이러한 유사성의 일부 요소들은 물론 우연적이며 역사의 일화로서만 흥미롭다그러나 역사의 거대한 힘에 의해 인물에게 접합되고 직접 강요되는 특성들은 이것들보다 비교할 수 없이 더욱 중요하다이 특성들은 개인의 특성과 역사의 객관적 요인 사이의 상호관계를 명쾌하게 드러낸다.

 

프랑스의 어느 반동 역사가는 루이 16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소망하는 법을 몰랐다이것이 그의 가장 두드러진 성격이었다.” 이 말은 니콜라이에게도 그대로 해당되었다이들은 소망하는 법을 몰랐으며 다만 소망하지 않는 법만 알고 있었다그러나 가망이 없이 패배한 역사적 대의의 마지막 대표들이 소망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대개 그는 남이 하는 말을 듣고 미소짓고 좀처럼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그가 내뱉는 첫 말은 보통 아닙니다’ 정도였다.” 이것은 카페 왕조의 루이 16세에게 한 말이었다그렇다면 니콜라이의 방식은 완전히 루이 16세를 표절한 것이다이들은 모두 왕관을 눈을 가릴 정도로 눌러쓰고” 몰락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그러나 어쨌든 탈출할 수 없는 몰락의 구렁텅이로 눈을 뜬 채 걸어가는 것은 더 쉬운 일이었을까이들이 왕관을 머리 뒤통수로 재낀 채 상황을 맞이했다면 무슨 뾰쪽한 수가 있었을까?

 

전문 심리연구가는 니콜라이와 루이알렉산드라와 앙투아네트 그리고 이들의 궁정 대신들이 표현한 서로 유사한 말들을 모아서 선집을 만들어야 한다선집을 구성할 재료는 무궁무진할 것이다그리고 결과는 유물론적 심리학을 지지하는 매우 유익한 역사적 증언이 될 것이다물론 동일한 것과는 거리가 멀지만 유사한 상황이 만들어낸 유사한 짜증들은 유사한 반사작용을 불러일으킨다짜증이 강력할수록 이 짜증은 개인적 특이성을 극복하고 보편성을 획득한다간지러움을 태우면 사람들은 각기 다르게 반응한다그러나 빨갛게 달아오른 쇠를 갖다대면 동일하게 반응한다증기망치는 구체와 육면체를 똑같이 납작한 금속판으로 만든다마찬가지로 너무 거대하고 어쩔 수 없는 사건들의 충격은 모든 저항을 분쇄하고 개인의 경계를 없앤다.

 

루이와 니콜라이는 격동의 세월을 견딘 왕조의 마지막 후손이었다잘 알려진 이들의 온화함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유지되는 평정과 유쾌함은 이들의 내적 동력의 빈약성신경 표출의 허약성정신적 재능의 빈곤 등이 잘 길들여져 표현된 것이었다도덕적 고자인 이들은 상상력과 창조력을 완전히 결여했다이들은 자신의 왜소함을 느낄 수 있을 정도의 지능만을 가지고 있었으며 재능과 의미를 갖춘 모든 것에 대해 시기심이 결합된 적대감을 보였다이 두 인물은 심오한 국내 위기와 인민의 혁명적 각성에 대면할 운명을 타고났다이 두 인물은 새로운 사상의 침투와 적대 세력들의 조류에 저항했다우유부단위선거짓 등은 두 인물의 개인적 약점이기보다는 세습적 지위를 확고히 부여잡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한 상황의 표현이었다.

 

그렇다면 이들의 부인들은 어떠했는가헤센이라는 시골 출신의 공주 알렉산드라는 강력한 나라의 무한 권력을 누리는 전제 군주와 결혼했기 때문에 앙투아네트보다 더 높이 꿈의 정점으로 들어올려졌다앙투아네트는 좀더 경박했다알렉산드라의 개신교적 편협함은 러시아 교회의 슬라브 언어로 번역되었다그러나 이 두 여성은 나름의 고매한 임무에 대한 생각들을 잔뜩 가지고 있었다운이 따르지 않는 통치와 점점 높아 가는 인민의 불만은 진취적이지만 동시에 닭대가리를 가진 이 두 여성의 환상 세계를 무자비하게 파괴했다자기에게 머리를 조아리지 않는 이국 인민에 대해 이들이 심장을 갉아먹는 적대감과 원한을 더욱 크게 가졌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그리고 적대 국가에 약간의 배려를 베풀기를 원했던 장관들에 대한 이들의 증오심도 여기서 나왔다또한 조정 대신들로부터의 소외감과 충족되지 않는 기대감을 자극했던 남편에 대한 계속된 짜증 역시 이 때문에 발생했다.

 

심리학 경향을 지닌 역사가와 전기작가들은 거대한 역사의 힘이 개인을 통해 굴절된 곳에서 뭔가 순수하게 개인적이고 우연적인 것을 빈번히 찾는다이것은 최후의 차르를 불행하게” 태어났다고 생각한 신하들의 잘못된 견해와 동일하다. 차르도 자기가 불행한 별 밑에서 태어났다고 생각했다그러나 그의 불행은 그가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낡은 목표들과 그의 시대가 조성한 새로운 역사적 조건 사이의 모순에서 나왔을 뿐이다제우스는 자신이 파멸시키고자 하는 인간들을 먼저 미치게 만들었다고 고대인들은 말했다이들은 미신의 형태로 심오한 역사적 통찰을 요약한 셈이었다괴테는 이성이 비()이성으로 변한다고 말했다이와 똑같은 생각이 역사 변증법의 비인격체 제우스에 대해서도 표현되었다역사 변증법은 시효를 넘긴 제도들의 이성을 거두어들인다그리고 이 제도들을 옹호하는 자들을 실패의 운명으로 몰아넣는다니콜라이 로마노프와 루이 카페의 역할에 대한 대본은 역사 드라마의 일반적 발전법칙에 의해 쓰였다. 오직 해석상의 미묘한 차이만이 배우들의 몫으로 떨어졌을 뿐이었다루이와 마찬가지로 니콜라이의 불행은 개인적 사주팔자가 아니라 관료적 왕정의 사주팔자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다이들은 무엇보다도 절대주의의 마지막 자손이었다허약한 왕조에서 배출된 이들의 도덕적 빈곤은 니콜라이에게 특히 극악한 성격을 부여했다.

 

독자들은 반대되는 의견을 제시할 지도 모른다알렉산드르 3세가 술을 좀 덜 마셨다면 상당히 더 오래 살았을 것이고 혁명은 아주 성격이 다른 차르와 마주쳤을 것이며 그와 루이 16세와의 유사성은 없었을 것이다그러나 이러한 반대 의견은 위에서 말한 것을 조금도 반박하지 않는다역사 과정은 개인의 의의를 부인하거나 개인에게서 우연의 중요성을 부인하지 않는다만약 부인한다면 그것은 허세가 될 것이다필자는 허세를 부릴 생각이 전혀 없다다만 모든 특이성을 보유한 역사상의 개인이 심리적 특성만 줄줄이 가지고 있지 않다고 주장할 뿐이다개인은 정해진 사회조건 속에서 배출되어 이것에 반작용하는 살아있는 실체이다자연과학자는 장미꽃을 피운 토양의 요소들과 공기의 특성을 발견한다그러나 이것 때문에 장미가 그 향기를 잃지는 않는다마찬가지로 개인의 사회적 뿌리를 드러내더라도 개인이 풍기는 향기나 악취는 제거되지 못한다.

 

알렉산드르 3세가 장수했을 가능성에 대한 생각은 바로 이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조명할 수 있게 해준다알렉산드르 3세가 1904년 일본과의 전쟁에 걸려들지 않았다고 가정하자그렇다면 1905년에 일어났던 첫 번째 혁명은 지연되었을 것이다그러나 얼마나 오래 지연시킬 수 있었을까? “1905년 혁명” 즉 노동대중의 최초의 힘 자랑이자 절대주의에 대한 최초의 타격이 두 번째 공화국 혁명과 세 번째 노동계급 혁명의 단순한 도입부가 될 수도 있었다이 문제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흥미로운 추측을 할 수 있다그러나 혁명이 니콜라이 2세의 성격 때문에 터진 것이 아님은 어떤 경우든 의심의 여지가 없다그리고 알렉산드르 3세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는 것도 어떤 경우든 의심할 수 없다봉건체제에서 부르주아 체제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격렬한 사회혼란이 없었던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이 점을 기억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이 점을 바로 어제에 중국에서 목격했고 오늘 이것을 다시 인도에서 목격하고 있다우리가 말한 수 있는 것 전부는 이것이다왕정의 이러한 저러한 정책왕의 이러한 저러한 개성 등은 혁명을 재촉하거나 지연시켰을지도 모른다그리고 혁명의 외적 과정에 어떤 자취를 남겼을지도 모른다그러나 이것이 전부이다혁명을 근본적으로 막을 수는 없었다.

 

마지막 몇 달몇 주며칠간 가망 없이 패배하는 상황에서 엄청난 분노와 무기력한 완고함으로 차르체제는 자신을 방어하려고 애를 썼다니콜라이가 의지가 박약했다면 황후가 이것을 보완했다라스푸틴은 자기보존을 위해 미친 듯이 싸운 지배파벌의 도구에 불과했다심지어 이 좁은 공간 속에서도 과거와 과거의 마지막 발악이 라스푸틴 파벌과 차르의 개성은 하나로 결합시켰다혁명과 마주친 차르스코예 셀로 상층 그룹의 정책은 독약을 먹고 허약해진 맹수의 반사작용에 지나지 않았다대평원에서 자동차로 늑대를 뒤쫓으면 늑대는 마침내 포기하고 무기력하게 누워버린다그러나 이놈의 목에 줄을 매달려고 하면 늑대는 사람을 찢어발길 태세로 덤벼든다아니면 최소한 사람에게 상처를 입힌다늑대에게 다른 대안이 있는가?

 

자유주의자들은 차르에게 대안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상상했다최후의 차르에 대해 자유주의자들은 이렇게 비난의 화살을 돌렸다참정권을 부여받은 부르주아 계급과 제 때에 합의했다면 혁명을 막을 수 있었을 텐데그러나 차르는 양보조치에 대해 완고하게 움츠러들었다운명이 칼날 위에 서 있어서 1분, 1분이 계산되고 있을 마지막 순간에조차 그는 계속 질질 끌면서 운명과 흥정을 하며 마지막 가능성들이 사라지도록 내버려두었다이 모든 것은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그러나 왕정을 구하는 방법을 그렇게 정확하게 알고있던 자유주의자들은 자기를 구하는 방법은 알고있지 못했다얼마나 불행한 일이었던가!

 

차르체제가 양보조치를 전혀 취하지 않았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자기보존에 필요할 때는 양보조치가 허용되었다크림 전쟁의 패배 후 알렉산드르 2세는 농민의 반쪽 해방 그리고 토지행정법원언론교육기관 등의 분야에서 일련의 자유주의적 개혁을 실시했다. 차르 자신은 이 개혁의 지도사상을 이렇게 표현했다농민들이 아래로부터 해방을 시도하기 전에 위에서 이들을 해방시킨다첫 혁명의 물결에 떠밀려 니콜라이 2세는 반쪽 헌법을 허용했다자본주의 발전의 장을 넓히기 위해 스톨리핀은 농촌공동체를 해체시켰다그러나 차르체제는 계급사회와 왕정의 토대를 보존할 수 있을 경우에만 부분적 개혁조치를 허용했다그러나 개혁의 결과들이 한도를 넘어 체제 자체를 위협하자 왕정은 개혁 정책에서 후퇴하기 시작했다알렉산드르 2세는 통치 후반기에 전반기의 개혁조치들을 전부 철회시켰다알렉산드르 3세는 반()개혁의 길로 더 멀리 나아갔다. 1905년 10월 니콜라이 2세는 혁명 앞에서 후퇴하였다그리고 혁명의 산물인 의회를 나중에 해산시켰다그리고 혁명의 힘이 약화되자마자 쿠데타를 일으켰다알렉산드르 2세의 개혁이 시작된 후 75년 동안 어떨 때는 지하에서 어떨 때는 지상에서 역사적 세력들의 투쟁이 벌어졌다이 결과 차르의 개인적 특성을 훨씬 초월하여 왕정은 전복되었다이 과정의 역사적 틀 내에서만 차르 개인그의 성격그의 생애는 의미가 있다.

 

가장 전제적 군주조차도 자신의 자의적인 자취를 역사 사건에 남기는 자유로운” 개인이 될 수가 없다언제나 자기 모습대로 사회를 만드는 특권 계급들의 왕관을 쓴 대리인일 뿐이다이 계급들이 아직 자기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을 때 왕정은 강력하고 자신감을 발휘한다이때에는 자신의 손에 믿음직한 권력기구를 쥐고 행정기구의 권력을 무제한으로 즐긴다왜냐하면 좀더 재능있는 인물들이 아직 적대 진영으로 넘어가지 않았기 때문이다이때 군주는 개인적으로든 강력한 총신의 중재를 통해서든 거대하고 진보적인 역사적 임무의 대리인이 될 수 있다그러나 구사회의 태양이 마침내 서쪽으로 기울 때는 상황이 전혀 달라진다특권 계급들은 나라의 운명을 결정하는 위치에서 벗어나 기생적인 혹의 위치로 격하된다자신들의 지도적 기능을 상실했기 때문에 이들은 임무에 대한 의식과 권력에 대한 자신감을 모두 상실한다이로써 자신에 대한 불만족은 왕정에 대한 불만으로 비화하고 왕정은 고립된다사멸하는 왕조에 충성하는 인물들이 줄어든다이들의 수준도 하락한다한편 위험은 증대한다새로운 세력들이 밀고 올라온다왕정은 창조적인 주도력을 완전히 상실한다그리고 자신을 방어하고 반격하고 후퇴한다이제 왕정의 활동은 단순 반사작용에 불과하다로마노프 왕조의 반()아시아적 전제체제도 이 운명에서 탈출할 수 없었다.

 

소위 수직 단면도를 통해 차르체제의 고통을 바라보자니콜라이는 과거에 뿌리를 둔 가망 없이 죽을 운명에 처한 파벌의 중심축이다역사적으로 명맥을 유지해온 왕정을 수평 단면도로 바라보자니콜라이는 왕조 사슬의 마지막 고리이다그의 가장 가까운 선조들 역시 가족계층 그리고 관료적 집단 속에 통합되어 있었다다만 니콜라이보다 더 넓은 범위의 집단 속에 있었을 뿐이었다이들은 다가오고 있는 운명에 거역하여 구체제를 보존하기 위해 다양한 통치 방식과 조치들을 구사했다그러나 결국 이들은 니콜라이에게 성숙한 혁명을 배태하고 있는 혼란스러운 제국을 물려주었을 뿐이었다따라서 멸망으로 가는 각기 다른 길 이외에 그가 선택할 길은 없었다.

 

자유주의자들은 영국식 왕정을 꿈꾸고 있었다그러나 템즈강 위의 의회체제는 평화적인 진화의 과정 속에서 탄생했는가아니면 한 명의 왕이 발휘한 자유로운” 선견지명의 열매였는가어느 것도 아니었다영국식 의회체제는 여러 시대를 통해 진행된 투쟁의 결과였다이 과정에서 한 명의 왕은 목이 잘려 네거리에 버려졌다.

 

위에서 언급한 로마노프 왕조와 부르봉 왕조 사이의 역사적-심리적 대조는 영국의 첫 혁명 시대에 영국의 국왕 부부에 대해서도 적절히 적용될 수 있다회고록 작가들과 역사가들이 루이 16세와 니콜라이 2세에게 부여했던 특성들의 조합은 기본적으로 찰스 1세에게도 해당되었다몬테규는 이렇게 쓰고 있다: “따라서 찰스는 수동적이 되었으며 저항할 수 없는 경우에는 항복했다그리고 이 항복을 대단히 꺼려하고 있음을 드러내었다그는 조금의 인기나 신뢰도 얻지 못했다.” 찰스 스튜어트를 연구한 또 다른 역사가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어리석지는 않았으나 성격이 확고하지 못했다....그의 사악한 운명은 그의 왕비인 루이 13세의 여동생 앙리에타와 결부되어 있었다그녀는 찰스보다 절대주의 사상에 더 열렬했다.” 최초의 국민혁명으로 압살된 국왕 부부의 특징들을 여기서 자세하게 얘기할 수는 없다영국 인민의 증오심은 무엇보다도 프랑스 여성이자 카톨릭 교도인 왕비에게 집중되었다그녀는 로마와 음모를 꾸미고 아일랜드 반란자들과 비밀 접촉을 하고 있으며 프랑스 조정과 술수를 꾸민다고 비난받았다이 점만은 특이한 사항으로 언급될 수 있다.

 

그러나 영국은 어쨌든 여러 시대에 걸쳐 독자적인 발전의 길을 모색할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영국은 부르주아 문명의 선구자였다다른 나라의 압박에 시달리기는커녕 다른 나라들을 자신의 멍에 아래 더욱더 강하게 종속시켰다이 나라는 전세계를 착취했다이 때문에 국내의 모순은 완화될 수 있었으며 보수주의는 토대를 확고히 축적할 수 있었고 기생 지배계층신사계급왕정상원국가교회 등의 형태로 풍요와 안정의 두터운 완충장치들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부르주아 영국이 누린 독점적인 역사발전의 특권 덕분에 신축성과 결합된 보수주의는 이 나라 제도의 도덕적 근간이 되었다러시아의 교수 밀류코프나 오스트리아 맑스주의자 오토 바우어 등 유럽대륙의 다양한 속물들은 지금까지도 이 사실에 대해 열광하고 있다그러나 바로 지금 영국은 전세계에서 압박을 받고 있다그리고 과거 누렸던 특권적 지위의 마지막 자원들을 낭비하고 있다이 나라의 보수주의는 신축성을 상실하고 있으며 심지어 노동당 지도자들의 매개를 통해 노골적 반동으로 나아가고 있다인도 혁명에 대면하여 노동당의 최초 수상인 사회주의자” 맥도널드는 니콜라이 2세가 러시아 혁명에 대항하여 동원한 조치들 이외에 다른 대안을 찾지 못할 것이다영국은 혁명이라는 거대한 지진의 충격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이 과정에서 이 나라 보수주의의 마지막 잔재이 나라의 세계 지배이 나라의 현재 국가기구 등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맹인만이 이 점을 보지 못할 것이다맥도널드는 니콜라이 2세만큼이나 이 충격에 대해 갈팡질팡하면서 맹목에 의존하고 있다그래서 여기서도 역사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한 개인의 역할에 대한 문제가 풍부하게 예시되고 있다.

 

러시아는 유럽 선진국들의 꽁무니를 쫓아 늦게 발전을 시작했으며 경제적 기초가 허약하기 그지없다이 나라가 어떻게 신축성을 보유한 보수주의를 특히 교수양반들의 자유주의와 이것의 좌익적 그림자인 개량적 사회주의를 위해 발전시킬 수 있는가러시아는 너무나 뒤져 있었다그래서 세계 제국주의가 이 나라를 손에 넣었을 때 러시아는 정치 및 역사 과정을 너무 짧은 기간에 통과해야 했다만약 니콜라이가 자유주의자들과 합의해 슈튀르머를 밀류코프로 교체시켰다면 사건은 약간 달리 전개되었을 것이다그러나 실제 내용은 그대로였을 것이다루이 16세가 혁명의 제 2단계에서 정신을 차리고 지롱드파를 권좌 위로 밀어 올린 것이 바로 이 방식이었다그러나 이것이 루이 16세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지롱드파가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쌓이고 있던 사회모순들은 표면으로 터져 나오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이 과정에서 정화 작업을 수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마침내 인민은 공개의 장에서 그 동안 참아냈던 모든 불행고통분노열정희망환상과 목표 등을 쏟아내었다인민 대중의 압력 앞에서 왕정과 자유주의자들의 상층 야합은 하루살이에 불과했다이들은 물론 사건들의 전개 순서에 영향을 미치고 행동의 횟수에 영향을 미칠 수는 있었다그러나 거대한 혁명의 드라마 그리고 이것의 중요한 절정에는 전혀 영향을 미칠 수 없었다.

 


제 7장: 5일간(1917년 2월 23일부터 27일까지)

 

2월 23일은 국제 여성의 날이었다사회민주주의 운동권은 늘 그랬듯이 이 날을 집회연설유인물 배포 등으로 기념할 생각이었다이날이 혁명을 시작하는 첫날이 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이날 파업을 촉구한 조직은 하나도 없었다더욱이 대단히 전투적인 볼셰비키당 비보르그 지구위원회 노동자들은 모두 파업에 반대하고 있었다이 지구위원회의 지도자 카유로프는 대중의 정서가 아주 긴장되어 있었다고 말했다어떤 파업도 공공연한 전투로 급격히 상승할 것처럼 보였다그러나 이 위원회는 전투적 투쟁으로 돌입하기에는 때가 무르익지 않았다고 판단했다당은 역량이 충분하지 않았다노동자들은 병사들 사이에서 지지자들을 별로 확보하지 못했다이들은 파업을 촉구하기보다 미래의 혁명 투쟁을 준비해 나가기로 결정했다이것이 2월 23일 전야에 비보르그 지구위원회의 방침이었으며 모두들 동의하는 것처럼 보였다그러나 23일 아침 이 방침은 지켜지지 않았다여러 공장의 여성 섬유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갔다그리고 지원을 호소하기 위해 이들은 금속노동자들에게 대표들을 보냈다카유로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볼셰비키들은 마지못해 지원에 동의했으며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 소속 노동자들도 이에 동조했다그러나 대대적인 파업이 일어나면 모든 사람들을 거리로 불러 이들의 선두에 서야한다.” 카유로프는 이렇게 하기로 결심했고 비보르그 위원회도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리로 나서자는 생각이 오랫동안 노동자들 사이에서 무르익고 있었다그러나 거리로 나서는 순간 그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몰랐다.” 그의 증언을 유념해야한다왜냐하면 혁명 사건들의 역학을 이해하는데 중요하기 때문이다.

 

시위가 일어날 경우 노동자들을 진압하기 위해 병사들이 동원되는 것은 당연하게 생각되었다그러나 진압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지금은 전시였다공안당국은 농담할 분위기가 아니었다반면 전시의 예비역” 병사는 정규군의 고참 병사와는 다르다예비역 병사들이 정말 막강할까혁명운동권에서 이 문제는 추상적으로 많이 논의되었다왜냐하면 2월 23일에 절대주의에 대한 결정적인 공격이 시작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이 점은 모든 자료에 기초하여 확실히 말할 수 있다명확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제한된 전망을 가진 시위에 대한 논의가 기껏해야 전부였다.

 

이렇게 2월 혁명은 혁명조직들의 저항을 극복하고 아래에서 시작되었다노동계급의 가장 억압받고 핍박받은 여성 섬유노동자들이 스스로 합의하여 선두에 나섰다물론 이들 중에는 병사의 부인들이 많이 있었다너무 길게 늘어선 빵 배급 줄이 혁명을 촉발시킨 마지막 자극이 되었다이날 남녀 모두 합쳐 약 90,000명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참가했다데모집회경찰과의 대치 과정에서 전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시위는 대규모 공장들이 밀집한 비보르그 지구에서 시작되었다그리고 페트로그라드 쪽으로 옮아갔다비밀경찰의 증언에 의하면 다른 곳에서는 파업이나 시위가 없었다이날 경찰을 돕기 위해 군대가 투입되었으나 이들의 수는 많지 않았다그리고 노동자들은 이들과 대치하지 않았다노동자가 아닌 경우를 포함한 여성의 무리는 빵을 요구하며 시의회 건물로 몰려갔다그러나 이것은 염소 수컷에게 젖을 달라고 하는 것과 같았다도시 여기저기에 붉은 깃발이 등장했다깃발의 구호는 노동자들이 왕정이나 전쟁이 아니라 빵을 원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이렇게 해서 국제 여성의 날은 열정적으로 그러나 사상자 없이 성공적으로 지나갔다그러나 이 날이 배태하고 있던 것을 밤이 되도록 추측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 다음날 이 운동은 없어지기는커녕 두 배나 커진다. 2월 24일 페트로그라드 공업노동자의 약 반수가 파업에 참가한다아침에 노동자들은 공장에 출근한다이들은 조업에 나서는 대신 집회를 연다그리고 도시 중심지로 행진한다이 운동에 다른 노동자 지구들과 인민의 다른 부위들이 합류한다. “전제 타도!”, “전쟁 타도!”의 커다란 구호 소리에 묻혀 빵을 달라!”는 구호는 들리지 않는다네프스키 가도로 시위는 계속된다혁명가를 부르는 밀집된 노동자 대중이 먼저 나타나고 학생의 푸른 모자가 간간이 섞인 잡다한 도시민들이 등장한다. “산책 나온 사람들이 공감을 표시했으며 전쟁병원의 병사들이 손에 아무 것이나 들고 흔들며 우리를 환영했다.” 시위 노동자들에 대한 환자 병사들의 공감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 지를 명확히 인식한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그러나 카자크 기병들이 시위 군중에게 가볍지만 줄기찬 공격을 가했다이들이 타고 있던 말의 입은 게거품으로 뒤덮여 있었다시위대는 이들이 통과하도록 대오를 열어 길을 비켜주다가 다시 닫았다시위 군중은 두려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카자크 병사들이 발포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는 말이 퍼졌다노동자들의 일부는 카자크 병사들에게 개인적으로 접촉했다그러나 욕을 퍼부으며 반정도 술에 취한 채 대구경 소총을 든 기마 병사들이 곧 이어 나타났다이들은 군중 속으로 헤집고 들어와 총검으로 시위 군중의 머리를 내려치기 시작했다그러나 시위대는 모든 힘을 동원하여 굳게 대오를 닫았다. “이들은 발포하지 않는다.” 그리고 정말 이들은 발포하지 않았다.

 

어느 자유주의 상원의원은 서있는 전차들을 바라보고 있었다아니면 이것이 그 다음날 벌어진 일이었던가어쩌면 그는 기억을 잘못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전차 일부는 유리창이 깨져 있었고 일부는 선로에 넘어져 있었다그리고 그는 전쟁 전야인 1914년 7월을 회상하고 있었다. “과거에 시도되었던 것이 반복되는 것처럼 보였다.” 이 상원의원의 눈은 그를 속이지 못했다혁명의 연속성은 명확했다역사는 전쟁으로 끊어진 혁명의 실타래를 다시 들어 올려 묶고 있었다.

 

그날 하루 종일 군중의 무리들이 도시 여기 저기에서 쏟아져 나왔다경찰은 이들을 끈질기게 뒤쫓았다그리고 경기병과 가끔은 보병이 이들을 저지하자 이들은 한군데로 몰렸다. “경찰 타도!”의 함성과 함께 카자크 부대에 대한 만세!”의 함성이 점점 더 자주 들렸다이것은 의미심장했다경찰에게 군중은 격렬한 증오심을 드러냈다이들은 휘파람얼음 조각 등으로 기마경찰을 물리쳤다그러나 이와 정반대로 노동자들은 병사들에게 접근했다병사들의 막사초소순찰로대오 주위에 남녀 노동자 무리들이 병사들과 친근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파업의 확산과 병사에 대한 노동자의 개인적 접촉은 새로운 단계를 의미했다이것은 모든 혁명에서 불가피하게 등장하는 단계이다그러나 매번 새로워 보일 뿐 아니라 다른 모습을 띤다이 단계에 대해 글을 읽고 쓴 적이 있는 사람들도 이것을 알아보지 못한다.

 

이날 의회에는 의원들이 모였다이들은 얼마나 많은 군중들이 즈나멘스키 광장과 네프스키 가도 전부 그리고 이웃한 도로들을 메웠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그리고 전혀 유례가 없는 사건 즉 혁명적이지만 결코 애국주의적이지 않은 군중이 만세!”의 함성으로 카자크 부대와 밴드를 앞세운 연대들을 환영한 일들을 말하고 있었다. “도대체 이것이 무슨 일이오?”라는 어느 의원의 질문에 누가 이렇게 대답했다: “경찰이 한 여성을 가죽채찍으로 때리자 카자크 병사들이 개입하여 경찰을 몰아냈습니다.” 실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아닌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그러나 군중은 이렇게 일이 실제 벌어졌으며 이런 일이 가능하다고 믿고 있었다이 믿음은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지지 않았다과거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었으며 따라서 승리의 보증수표가 될 것이었다.

 

에릭슨 공장은 비보르그 지구에서 가장 큰 규모의 공장 가운데 하나였다이 공장의 노동자 2,500여 명은 아침 집회를 끝내고 삼프슨니에프스키 가도로 진출했다그리고 좁은 장소에서 카자크 부대와 마주쳤다카자크 장교들은 처음에는 말의 가슴을 들이밀어 군중 속으로 돌진했다이들 뒤에서는 가도 전체를 덮으며 병사들이 빠른 속도로 말을 타고 돌진했다결정적인 순간이었다그러나 병사들은 조심스럽게 길게 대열을 형성하며 장교들이 뚫은 좁은 공간으로 말을 몰았다카유로프는 이렇게 회상한다: “이들 중 일부는 미소를 지었다그리고 한 명은 노동자들에게 선의의 윙크를 보냈다.” 이 윙크는 의미가 없지 않았다안전을 보장해 주겠다는 이 호의적인 신호를 받자 노동자들은 대담해졌다그리고 이 대담성은 카자크 병사들을 전염시켰다그러자 더 많은 병사들이 윙크를 보냈다장교들은 규율을 엄히 세우려고 애썼다그러나 병사들은 공공연히 규율을 어기지 않으면서도 군중과 함께 행진했다군중을 해산시킬 이들의 임무는 이렇게 방기되었다이 상황은 세 번 또는 네 번 반복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병사들과 군중의 관계는 더 가까워 졌다카자크 병사들은 개별적으로 노동자들의 질문에 답하면서 이들과 짧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규율은 최소한으로 유지되고 있었으며 언제든지 깨질 위험이 있었다그러자 카자크 장교들은 서둘러 순찰 병사들을 노동자들과 분리시켰다시위대 해산 작전은 포기되었다대신 시위대가 가도 중앙으로 진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가도 가장자리에 병사들을 일렬로 세운 방패막이 형성되었다그러나 이것도 별 소용이 없었다규율을 겉으로 지키면서 병사들은 뻣뻣하게 서 있었다그리고 노동자들이 이들이 탄 말의 배 밑으로 뛰어들어” 대오에 합류하는 것을 막지 않았다혁명은 나아갈 길을 이것저것 따지지 않는다카자크 병사가 탄 말의 배 밑으로 뛰어들어 승리를 향한 첫 발을 내디뎠다이것은 대단한 사건이었다이 사건을 묘사한 사람의 눈 역시 대단했다그는 혁명 과정의 모든 굴곡을 인상적으로 묘사했다이것은 당연했다그는 지도자였다그는 2,000명이 넘는 노동자들의 선두에 서 있었다적군의 채찍과 총탄을 주시하는 지휘관의 눈은 날카로울 수밖에 없다.

 

혁명으로 맨 먼저 넘어간 부대는 카자크 부대였던 것 같다이들은 봉기를 진압하고 징벌을 강제하는 오래된 부대였다그러나 카자크 부대가 다른 부대보다 더 혁명적이었다는 것은 아니다이와 반대로 이 토지소유주들은 자기들이 기른 말을 타면서 카자크 문화의 특이성을 매우 자랑하면서 평원의 농민들을 경멸했으며 노동자들을 불신하는 등 보수적 측면이 강했다그러나 바로 이 때문에 전쟁이 가져온 변화는 이들에게 더 날카롭게 반영되었다더욱이 이들은 이리저리 호출되었고 파견되었으며 인민과 대치하는 등 언제나 긴장했다따라서 이들은 제일 먼저 시험에 처해졌다이들은 지금 모든 일에 염증이 났으며 집으로 가고 싶어했다그래서 이들은 윙크를 보낸 것이었다: “그래 할 수 있으면 열심히 해봐방해는 놓지 않겠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아주 의미심장한 징후에 불과했다군대는 여전히 군대였다규율의 오랏줄로 묶여있었으며 오랏줄은 차르의 손에 있었다노동대중은 무장되지 않았다대중 지도자들은 결정적인 위기를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차르 내각은 무엇보다도 이 날을 수도에서 소요가 일어난 날로 기록했다파업시위그러나 이런 일이 한두 번 있는 일은 아니다모든 대책은 세워져 있다지시사항들은 전부 하달되었다평상시의 업무로 복귀하라.

 

그렇다면 지시사항들은 어떤 것이었을까? 23일과 24일 28명의 경찰관이 시위대에 의해 폭행 당했다이 수치는 정확해서 대단히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그런데도 지구 지휘관이자 독재자에 가까운 하발로프 장군은 발포명령을 내리지 않았다시위대에 친절을 베풀어서가 아니었다발포명령을 포함한 모든 것이 미리 준비되고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이들은 혁명이 터질 정확한 순간을 알지 못했다이들은 기습을 당한 셈이었다일반적으로 말하면 혁명 진영과 차르 정부 모두 혁명의 순간에 대비해 몇 년간 꼼꼼하게 준비하고 있었다볼셰비키들에게 1905년 혁명 이후 모든 활동은 두 번째 혁명에 대한 준비작업이었다그리고 정부 활동의 대단히 많은 부분도 새로운 혁명을 저지하는데 바쳐졌다. 1916년 가을 특히 정부는 꼼꼼하게 계획을 세워 혁명을 대비하고 있었다. 1917년 1월 중반까지 하발로프의 지휘 아래 정부 위원회는 새로운 봉기를 진압할 아주 정교한 계획을 완성해놓고 있었다페트로그라드는 6개의 경찰지구로 나누어졌다그리고 경찰지구는 다시 하위 단위인 라욘(rayon)으로 나누어졌다예비역 방위군 사령관 체비킨 장군은 국군의 최고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연대는 각 라욘에 배치되었다. 6개 경찰지구에는 특별지휘부에 의해 경찰헌병군대가 통합 배치되었다카자크 기병대는 대규모 작전을 위해 체비킨 자신이 직접 지휘했다작전 순서는 다음과 같이 계획되었다경찰의 단독 작전이 먼저 진행되고 다음으로 채찍을 든 카자크 기병대가 나선다진짜 필요할 때만 군대가 소총과 자동소총으로 무장하여 작전에 투입된다. 1905년 경험에 의해 입안된 바로 이 계획이 2월 혁명 내내 시행되었다문제는 예측의 부족이나 계획 자체의 결함이 아니었고 인적 자원에 있었다바로 이 때문에 계획 전체가 수포로 돌아갈 위기에 놓였다.

 

공식적으로 이 계획은 15만 병력의 페트로그라드 주둔군에 기초하고 있었다그러나 실제로는 약 10,000명만이 진짜 동원 가능한 병력으로 계산되었다. 3,500명의 경찰 병력 외에도 사관학교 생도들이 있었다이들에게 거는 희망은 확고했다왜냐하면 당시 페트로그라드 주둔군은 거의 예비역 부대로만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특히 당시 전선에 배치된 방위군 연대들에 부속된 14개 예비역 대대가 페트로그라드 주둔군의 주력이었다이와 함께 주둔군은 예비역 보병 1개 연대예비역 자전거 1개 대대예비역 장갑차 1개 사단공병과 포병 소규모 부대 그리고 돈 카자크 2개 연대로 구성되어 있었다이 정도면 대단한 병력이었다아니 너무 많은 병력이었다불어난 예비역 부대들은 훈련을 거의 하지 못했거나 훈련에서 면제되었다그러나 사실은 군대 전체가 이런 상태에 있었다.

 

하발로프는 자신이 입안한 계획을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하게 실행에 옮겼다혁명 첫날인 23일에는 경찰력만이 동원되었다그 다음날에는 대부분의 경우 기병 부대만 거리에 투입되었다그러나 이들은 채찍과 총검만 사용하도록 명령받았다보병과 총포는 상황에 따라 사용될 계획이었다그러나 사태는 급박하게 돌아갔다.

 

25일이 되자 파업은 확산되었다정부의 수치에 따르면 24만 명의 노동자가 파업에 참여했다노동자의 가장 후진적 부위들이 선진 부위를 따르고 있다이미 상당수의 소규모 사업장들이 파업 중이다거리의 전차는 멈추었고 기업들은 문을 닫았다시간이 지나면서 고등학교와 대학교들도 파업에 동참한다정오가 되면 수만의 군중이 카잔 대성당과 주변 거리들로 쏟아져 나온다가두 집회를 조직하려는 시도가 나타난다무장한 시위대가 경찰과 대치한다알렉산드르 3세 기념비 주위에 모인 군중에게 연설이 행해진다기마경찰이 발포한다연설자 한 명이 총에 맞아 부상을 입고 쓰러진다군중 가운데에서 누가 총에 쏘아 경감이 살해되고 경찰청장을 비롯한 여러 경찰관들이 부상을 당한다헌병들에게 병폭약수류탄이 던져진다전쟁은 군중에게 이 기술을 가르쳤다병사들은 경찰에 대해 무관심 그리고 때때로는 적대감을 표출한다이 감정이 흥분과 함께 재빨리 군중 사이에 퍼진다알렉산드르 3세 기념비 옆에서 경찰이 발포하자 카자크 기병대가 기마 파라오라는 별명이 붙은 기마경찰에 연속으로 발포했다그러자 후자는 급히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이것은 혁명군중을 격려하기 위해 지어낸 소문이 아니었다구체적인 사항들은 전달자들에 따라 달랐지만 이 사건은 여러 경로를 통해 그 진실이 확인되었다.

 

당시 진정한 지도자였던 볼셰비키 노동자 카유로프는 당시 있었던 사건 하나를 이렇게 전한다카자크 부대가 보이는 쪽에서 시위대가 기마경찰의 채찍질에 흩어진다그러나 카유로프 자신과 여러 명의 노동자들이 도망가는 군중 틈에 끼이는 대신 모자를 벗고 카자크 병사들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한다: “카자크 형제들평화롭게 요구를 성취하기 위해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도와주시오파라오들이 우리 굶주린 노동자들을 취급하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소우리를 도와주시오!” 손에 모자를 들고 의식적으로 겸손한 자세를 취한 것은 얼마나 정확한 심리 계산인가모방할 수 없는 모습이 아닌가가두전과 혁명이 승리한 역사에는 이러한 즉흥적 투쟁들이 가득하다그러나 이것들은 거대한 사건들의 소용돌이 속에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다사건들의 껍데기 즉 일반화는 역사가들의 손에 넘겨진다카유로프는 계속 이렇게 전한다: “카자크 병사들은 특이하게 서로 쳐다보았다그리고 우리가 길을 비켜서기도 전에 경찰을 향해 돌진한다.” 이로부터 몇 분이 지난 후 기차역 정문 근처에서 군중은 자신들이 보는 앞에서 기병도로 경감을 살해한 카자크 병사를 헹가래치고 있었다.

 

곧 경찰은 완전히 군중의 눈에서 사라진다이제 이들은 비밀리에 활동을 시작한다이때 칼을 꽂은 소총을 아래로 향한 채 병사들이 나타난다노동자들이 이들에게 걱정스럽게 묻는다: “동지들경찰을 도우려고 온 것은 아니지요?” 그러자 거칠게 옆으로 물러서!”라는 대답이 나온다다른 노동자의 똑같은 질문도 똑같은 대답을 얻을 뿐이다병사들은 기분이 좋지 않다신경이 날카로운데 자신들의 아픈 곳을 정확히 건드리는 질문을 참아낼 수가 없다.

 

한편 기마경찰의 무장을 해제시키자는 구호가 여기저기서 들린다경찰은 잔인하여 제압할 수 없다이들은 증오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증오심을 가득 간직하고 있다이들을 혁명의 편으로 획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이들을 무자비하게 패고 죽여라그러나 병사들은 다르다군중은 이들과 적대를 피하고 우호적 관계를 만든다그리고 이들을 설득시키고 동지로 만들어 이들과 단결할 이런 저런 방법들을 찾는다카자크 부대에 대한 좋은 소문들은 아마 약간 과장되었을 것이다그러나 이들에 대한 군중의 태도는 조심스럽기만 하다기병은 군중의 머리 높이 앉아있다그의 영혼은 말의 네 다리 위로 솟아있어 시위 군중의 영혼과 거리가 있다위로 올려보아야 할 사람은 항상 더 높은 것처럼 그리고 더 위협적으로 보이게 마련이다이에 비해 보병은 보도에서 군중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기 때문에 더 가깝고 대하기가 쉽다대중은 보병들 가까이 접근하여 이들의 눈을 똑바로 보고 자신의 뜨거운 입김으로 이들을 감싸려 한다노동자와 병사의 관계에서는 여성 노동자가 커다란 역할을 한다이들은 병사의 대열에 남자보다 더 대담하게 접근한다그리고 이들의 소총을 잡고 호소하고 거의 명령한다: “총검을 내려놓고 우리와 합류하세요.” 병사들은 흥분되고 부끄러워서 서로 근심 어린 눈길을 주고받는다그리고 동요한다어느 병사가 먼저 결심을 하고 죄책감 속에 다가오는 군중 어깨 위로 총검을 들어올린다시위의 장애물이 걷혀진다기쁨에 찬 감사하는 마음의 만세가 공기를 뒤흔든다병사들은 군중에 의해 둘러싸인다모든 곳에서 주장하는 소리야단치는 소리호소하는 소리들이 들린다 -- 혁명은 이렇게 한 발짝 또 전진한다.

 

총사령부에서 니콜라이 2세는 하발로프에게 전보로 명령을 내린다: “내일 당장” 소요사태를 진압해라. 차르의 의지는 하발로프가 세운 계획의 제 2단계와 일치했다. 차르의 전보는 자극제에 불과했다내일은 군대가 자기 할 말을 할 것이다너무 늦지 않았을까아직도 알 수 없다혁명의 문제는 제기되었을 뿐 아직 해답을 얻지 못했다카자크 부대의 관대함일부 보병 대오의 동요 등은 혁명의 앞길을 밝혀주는 일회적 사건에 불과하다그러나 이것들은 예민한 혁명의 거리에서 1천의 메아리로 반복될 것이다이것들은 혁명 군중에게 영감을 불어넣기에는 충분하지만 혁명을 승리로 이끌기에는 한참 부족하다정반대의 사건들도 있기 때문에 특히 그렇다대구경 소총을 든 기마 보병대가 오후에 나타나 군중 일부의 권총 사격에 응답하여 고스키니 드보르 근처에서 시위대에 처음으로 발포했다총사령부에 보낸 하발로프의 보고서에 따르면 3명이 살해되고 10명이 부상을 입었다심각한 경고가 아닐 수 없다동시에 하발로프는 징병대장에 등록된 노동자들이 28일 전까지 공장에 복귀하지 않으면 전선에 투입될 것이라는 위협적인 성명서를 발표했다. 3일의 여유를 준 최후통첩이었다그러나 장군은 자기와 왕정이 타도되고 이 결과 협상이 진행되도록 만드는데 필요한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혁명에게 허용했다그러나 이 사실은 혁명이 승리한 후에야 밝혀진다. 25일 저녁 시점에서 그 다음날 어떤 일이 준비되고 있는지 아무도 추측할 수 없었다.

 

혁명운동의 내적 논리를 좀더 명확하게 파악해보자. 2월 23일 여성의 날” 깃발 아래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들의 오래 성숙되고 저지되었던 봉기가 시작되었다봉기의 첫 걸음은 파업이었다. 3일에 걸쳐 파업은 확대되어 실제적으로 총파업으로 발전했다이것만이 대중에게 확신을 불어넣었으며 이들은 전진을 계속했다더욱 공격적이 되면서 파업은 시위와 하나가 되었다시위를 통해 혁명 대중은 군대와 대치하였다이로써 혁명의 문제는 전체적으로 수준이 상승하면서 무장을 준비할 단계로 나아갔다혁명의 첫 며칠동안 상당수의 개별적인 승리들이 기록되었다그러나 이것들은 혁명에게 승리를 가져다주지 못했으며 단지 승리의 징후를 드러냈을 뿐이었다.

 

며칠에 걸쳐 확산된 봉기는 한 단계 한 단계 상승하면서 계속해서 성공할 때만 최종적으로 승리할 수 있다상승을 멈추면 상황은 위험해진다그리고 시간을 오래 끌수록 혁명은 치명타를 입는다더욱이 개별적인 승리로는 불충분하다대중이 제 때에 승리의 사실을 알고 이것의 가치를 이해할 시간을 가져야 한다손에 잡힐 정도로 가까이 있는 바로 그 순간에도 승리는 손아귀에서 빠져나가 패배로 변할 수 있다역사에서 이런 경우는 얼마든지 있었다.

 

투쟁의 범위와 강도로 보면 첫 3일은 중단 없는 상승기였다그러나 바로 이 때문에 혁명운동은 승리의 징후에 불과한 것으로는 불충분한 단계에 도달했다적극적인 대중 전체가 거리로 나섰다그리고 경찰에 대항해 쉽게 승리했다마지막 2일 동안 군대가 사건에 끌려 들어왔다두 번째 날에 기병이 세 번 째 날에는 보병이 투입되었다군대는 길을 막고 대중을 밀치고 한곳으로 몰아넣었다때때로 군중에게 아량을 베풀 뿐 결코 발포하지 않았다군대 지휘관들은 기존의 계획을 잘 바꾸지 않았다이들이 사태의 심각성을 과소 평가한 것이 이유의 일부였다반동세력의 잘못된 현실인식은 혁명지도자들의 잘못된 현실인식을 부추겼다군대에 대한 자신감의 결여도 이유의 일부였다그러나 바로 3일째 되는 날에 터져 나온 투쟁의 위력과 차르의 명령은 정부가 군대를 진지하게 지휘하도록 만들었다노동자들 특히 그 선진 부위는 이 점을 이해했다기마 보병은 이미 전날에 발포했었다이제 혁명 진영과 반동 진영은 명확하게 문제의 본질에 접근했다.

 

26일 밤 약 100명이 도시의 여러 곳에서 체포되었다이들은 여러 혁명조직에 속했는데 이들 중에는 볼셰비키당 페트로그라드 위원회 5인도 포함되어 있었다드디어 정부가 공세로 나섰다오늘은 무슨 일이 벌어질까어제의 발포 사건 후 어떤 느낌으로 노동자들은 잠에서 깨어날 것인가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군대였다이들은 어떻게 나올 것인가불확실성과 격심한 우려의 안개 속에서 2월 26일의 해가 떴다.

 

볼셰비키당 페트로그라드 위원회의 체포 때문에 이 도시의 활동 전체는 비보르그 지구 노동자들의 지도에 달려 있었다어쩌면 이 상황은 정당한 지도 몰랐다당의 상층 지도부는 가망 없이 반응이 느렸다. 25일 아침이 되어서야 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집행부는 전국 총파업을 촉구하는 유인물을 발행하기로 결정했다그러나 이 유인물은 발행되지 못했다만약 발행되었다면 그 순간에 이미 페트로그라드 총파업은 무장봉기에 돌입한 상태였을 것이다지도부는 이 운동을 위에서 내려다보고만 있었다이들은 주저했으며 사태를 주도하지 못하고 질질 끌려 다녔다.

 

투쟁은 공장에 가까울수록 더 단호하다그러나 26일 노동자 지구들에도 우려의 빛이 역력하다배고프고 지치고 추위에 노출된 채 비보르그 지도자들은 거대한 역사적 임무를 어깨에 지고 있었다이들은 도시 경계 밖에 있는 채소밭에서 회의를 갖는다보고 들은 정보를 교환하고 투쟁 과정을 계획하기 위해서였다그러나 무슨 계획이 나올 것인가시위를 재개한다군대가 발포하고 있는데 비무장 시위로 충분할까이 문제는 이들 마음 속 깊이 박힌다. “한가지는 명백한 것 같다봉기는 붕괴하고 있다.” 여기에서 이미 우리에게 친근한 카유로프의 목소리가 들린다처음 듣기에는 그의 목소리가 전혀 아닌 것 같다폭풍이 닥치기 전에 기압계는 크게 떨어진다.

 

대중과 가장 가까이 있는 혁명가들조차 주저하고 있던 시간에 혁명운동은 참여자들이 생각한 것보다 이미 한참 앞서 나가 있었다전날인 25일 저녁에 비보르그 지구는 벌써 완전한 봉기 상태에 들어갔다경찰서는 파괴되었다경찰관 일부는 살해되었다이들의 다수는 줄행랑을 놓았다도시 군사령부는 도시 다수 지역과의 교신이 차단 당했다. 26일 아침 비보르그 지구 뿐 아니라 리트에이니 가도에 이르기까지 페스키 지구도 봉기에 돌입했다최소한 경찰보고서는 상황을 이렇게 보고 있었다혁명가들은 거의 인식하지 못했지만 어떤 의미에서 경찰의 판단은 옳았다노동자들의 위협이 있기 전에 경찰관 대부분은 이미 도망치고 없었다그러나 노동자들은 공장지구 경찰관들의 도망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왜냐하면 군대가 최후의 결정을 내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가장 대담한 혁명가들조차 봉기가 붕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그러나 봉기는 이제 막 시작되고 있을 뿐이었다.

 

2월 26일은 일요일이었다공장이 가동되지 않았기 때문에 파업의 정도로 대중의 힘을 측정할 수는 없었다더욱이 지난 며칠과 마찬가지로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집회를 열 수 없었다아침에 네프스키 가도는 한산했다이 시간에 황후는 차르에게 이렇게 전보를 보냈다: “도시는 평온합니다.”

 

그러나 이 평온은 오래가지 않는다노동자들이 서서히 결집하여 교외지구에서 도시 중심부로 이동하고 있다이들은 다리에서 저지 당한다그러자 무리를 지어 강 위를 건넌다아직 2월이므로 네바강은 탄탄한 얼음 다리이다얼음 위의 군중에게 발포해보았자 이들을 저지할 수 없다시위 대중은 도시가 변모되어 있음을 목격한다치안 민병대저지선기마 순찰대 등이 온 곳에 깔려 있었다특히 네프스키 가도로 가는 길목은 경계가 철통같았다이따금 매복 병사의 발포가 귀를 울린다사상자의 수가 늘어간다여기 저기서 구급마차가 쏜살같이 달린다누가 발포하고 있으며 총알이 어디서 날아오는 지를 언제나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그러나 한가지는 확실하다잔인하게 교훈을 체득한 후 경찰은 대중에게 노출되지 않기로 결심했다이들은 창문발코니 문건물기둥 뒤다락방 등에서 총을 쏜다추측이 쉽게 난무하고 전설이 된다시위자들을 협박하기 위해 다수 병사들이 경찰복으로 위장하고 있다는 소문이 돈다프로토포포프가 수많은 건물의 다락방에 기관총 초소들을 배치해 놓았다고 한다혁명이 승리한 후 구성된 위원회는 이런 초소들을 찾지 못했다물론 이런 것들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그러나 이날 경찰은 들러리에 지나지 않는다군대가 결정적으로 싸움에 투입된다이들은 엄격한 발포 명령을 하달 받는다그리고 하사관연대 학교의 훈련분대들은 진짜 발포한다공식 수치에 따르면 이날 40명이 살해되고 같은 수가 부상당했다군중이 싣고 가거나 인도해간 숫자는 물론 이 수치에서 제외된다투쟁은 이제 결정적 단계에 도달한다납 총탄 앞에 대중이 굴복하여 다시 교외지구로 되돌아갈 것인가아니다이들은 굴복하지 않는다자체 동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페트로그라드의 관료들자본가들자유주의자들은 공포에 떨었다이날 의회 의장 로지안코는 전선에 배치된 믿을만한 군대가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투입되어야 한다고 요구했다나중에 그는 다시 생각한 후” 전쟁장관 벨라예프에게 총탄이 아니라 소방호스의 찬물로 봉기 대중을 해산시킬 것을 권유했다하발로프 장군과 협의한 후 벨라예프는 그럴 경우 군중이 흥분할 것이므로” 결과는 정반대가 될 것이라고 답변했다이렇게 자유주의자와 관료 상층부는 시위대에 더운 물을 퍼부을지 아니면 차가운 물을 퍼부을 지에 대해 논의했다이 날 작성된 경찰보고서는 소방호스가 부적절하다고 증언하고 있다: “순찰대에 대한 대중의 엄청난 저항이 소요의 일반적 현상이다해산을 종용하자 군중은 순찰대에게 도로에서 파헤친 돌과 얼음 덩어리를 던졌다경고 사격이 허공을 갈라도 군중은 해산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너털웃음으로 응답했다군중 한가운데로 총을 쏘자 시위대는 흩어졌다그러나 이들은 근처 집 마당으로 몸을 피한 후 총격이 멈추자마자 다시 거리로 나왔다.” 이 경찰 보고서는 대중의 저항의식이 대단히 높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군대나 훈련병들에 대해 군중이 자발적으로 돌과 얼음 덩어리로 공격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이것은 봉기 대중의 심리나 군대에 대한 이들의 전술과 너무 모순되었을 것이다살육을 보충적으로 정당화시킨 글이기 때문에 경찰 보고서는 상황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않았다그리고 개개 사실들도 정확하지는 않다그러나 가장 중요한 내용은 올바로 특히 놀랄 정도로 생생하게 보고되고 있다대중은 더 이상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이들은 낙관적인 밝은 표정으로 저항하고 있다연속 발포로 사상자가 발생했으나 이들은 물러서지 않고 있다이들은 자기 목숨이 아니라 보도얼음 덩어리에 집착하고 있다군중은 격렬히 분노하고 있을 뿐 아니라 과감하다왜냐하면 발포에도 불구하고 군대에 대한 신념이 있기 때문이다혁명 대중은 승리를 기대하고 있으며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승리를 원하고 있다.

 

군대에 대한 대중의 압력은 증대하고 있다정부 당국은 이 압력에 대항하고 있다페트로그라드 주둔군은 사태의 방향을 결정한다봉기에 대해 병사 대중이 우호적 중립을 지킬 수 있었던 3일의 기간은 끝났다왕정은 군대에게 명령을 내린다: “적들에게 발포하라!” 그러자 노동자들은 이렇게 외친다: “당신들의 형제 자매에게 발포할 수 없다!” 이것뿐이 아니다: “우리와 함께 봉기에 나서자!” 거리광장다리막사 정문 등에서 병사들의 마음을 차지하기 위해 때로는 극적으로 때로는 평범하게 그러나 언제나 필사적인 투쟁이 계속된다이 투쟁남성 여성 노동자와 병사들 사이의 날카로운 대치지속적으로 울리는 소총과 기관총 소리이 가운데에서 정권전쟁나라의 운명이 결정되고 있었다.

 

군대의 발포는 대중 지도자들에게 불안감을 증대시켰다운동의 균형추가 위험하게 기우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다혁명이 승리하기 12시간 전인 26일 저녁비보르그 위원회 회의는 파업을 끝내자는 토론을 했다이것은 놀라운 현상인 것처럼 보인다그러나 기억할 것이 있다승리하기 전날보다 승리한 다음날에 승리를 인정하는 것이 훨씬 쉬운 법이다그리고 대중의 정서는 사건들의 영향과 소식에 의해 빈번히 변한다침체의 분위기는 금방 열광의 분위기로 변한다카유로프와 추구린 같은 진짜 대중 지도자들은 대단한 개인적 용기를 가지고 있다그러나 가끔 대중에 대한 책임감이 이들을 짓누른다이와 반대로 투쟁 중인 노동자들은 훨씬 적게 동요한다정보가 빠삭한 경찰 첩자 슈르카노프는 볼셰비키 조직에서 활동하고 있었다그는 시위대의 정서를 당국에 보고했다그의 보고서는 이렇게 말한다: “군대는 시위대를 진압하지 않았고 병사 개개인은 경찰의 공격을 마비시키는 행동을 했다이 때문에 군중은 면책권을 부여받았다고 생각했다이틀동안 이들은 거리를 활보했다그리고 혁명 진영은 전쟁 타도!’, ‘차르 타도!’의 구호를 내걸었다이제 대중은 혁명이 시작되었으며 자신들이 승리할 것이라고 확신했다군대가 자기들 편이기 때문에 당국이 운동을 진압할 수 없다군대가 곧 혁명의 편에 설 것이기 때문에 결정적 승리의 순간이 가까이 다가왔다시동이 걸린 혁명운동은 가라앉기는커녕 끊임없이 전진하여 완벽한 승리와 국가에 대한 혁명으로 나아갈 것이다.” 압축성과 명확성의 측면에서 대단한 글이 아닐 수 없다이 보고서는 대단히 가치 있는 역사적 문서이다물론 승리한 노동자들은 이 작자를 살려두지 않았다.

 

슈르카노프와 같은 경찰 첩자들은 대단히 많았다이들은 특히 페트로그라드에서 많이 활동했다그런데 이들은 어느 누구보다 혁명의 승리를 두려워했다따라서 이들은 자기 나름의 정책을 추구하고 있었다볼셰비키 회의 때마다 슈르카노프는 가장 극단적인 투쟁방식을 옹호했다비밀경찰 보고서에서 그는 시위대에 대한 총격을 크게 강화하여 사태를 과감히 결정지을 것을 제안했다이 목적을 위해 그는 노동자들의 높은 자신감을 과장했을 수도 있다그러나 대체로 그는 옳았다이후의 사건들이 그의 판단이 옳았음을 확인했다.

 

혁명과 반동 두 진영의 지도자들은 추측하고 동요했다왜냐하면 이들 중 어느 누구도 역관계를 선험적으로 미리 추정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겉모습들은 역관계를 측정할 수 있는 잣대가 결코 되지 못했다대중의 현재 의식과 사회관계의 낡은 형태들 사이에는 날카로운 모순이 존재한다바로 이것이 혁명적 위기의 가장 주요한 특징이다새로 조성되는 역관계가 신기하게 노동자와 병사들의 의식에 각인 되고 있었다새로운 역관계를 가능성에서 현실성으로 전화시킨 것은 혁명 대중의 공세에 대한 정부의 공세였다노동자는 목이 말라 병사의 눈을 명령하듯 응시했다이것을 병사들은 걱정과 무기력으로 외면했다어떤 의미에서 이 표정은 병사가 더 이상 자기에 대해 책임질 수 없다는 암시였다노동자는 병사에게 더 대담하게 다가갔다적대감보다는 죄책감으로 병사는 무뚝뚝하게 대답을 거부했다또는 심장의 두근거림을 감추기 위해 더욱더 뻣뻣한 체했다이렇게 해서 미묘한 변화가 나타났다병사는 본래의 모습을 확실히 벗어 던지고 있었다이 과정에서 이들은 자신의 변한 모습을 즉시 알아보지는 못했다혁명이 병사들을 취하게 했다고 당국은 말했다그러나 반대로 병사들은 군대 막사의 아편에서 깨어나고 있었다이렇게 결전의 날 2월 27일이 준비되고 있었다.

 

그러나 전날 밤에 한 사건이 일어났다이 사건은 그 일회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26일의 사건 전부를 새로운 빛으로 조명하고 있다저녁때가 다가오자 제국 방위군에 소속된 파블로프스키 연대의 제 중대가 반란을 일으켰다어느 경감의 보고서에는 반란의 원인이 딱 잘라 제시되고 있다: “네프스키 가도 근무 중 같은 연대 소속의 훈련병 분대가 군중에게 발포했다이에 대한 분노가 반란의 원인이었다.” 누가 이 사실을 제 중대에 알렸는가우연히 그 기록이 보존되어 있다오후 2시쯤 노동자 몇 명이 파블로프스키 연대의 막사에 뛰어갔다네프스키 가도의 발포에 대해 이들은 서로 다투어서 병사들에게 알렸다. “네프스키 가도에서 당신들과 똑같은 군복의 병사들이 우리에게 발포하고 있다고 동료들에게 알리시오.” 이것은 뜨끔한 문책이었으며 열렬한 호소였다. “모든 병사들은 이 말을 듣자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다.” 혁명의 씨앗이 뿌리 내릴 곳을 제대로 찾은 셈이었다. 6시쯤에 제 중대는 상관의 허락도 없이 어느 하사관의 인솔로 막사를 떠났다그 하사관은 누구인가그의 이름은 그와 똑같이 영웅적인 수십만의 전사들과 함께 영원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제 중대는 네프스키 가도로 행진하여 훈련병 분대를 귀대시켰다이 행위는 벌레가 기어다니는 고기 덩어리 식사에 불만을 품은 병사들의 반란이 결코 아니었다이것은 고귀한 혁명적 자발성이었다막사로 돌아가는 길에 이 중대는 기마경찰의 일개 부대와 마주쳤다병사들은 이들에게 발포했다경찰 한 명과 말 한 마리가 살해되었다경찰 또 한 명과 말 또 한 마리는 부상을 당했다거리에 몰아치는 혁명의 폭풍 속에서 반란 병사들의 이후 행적은 알 수가 없다이 중대는 막사로 돌아가 연대 전체를 선동했다그러나 연대의 무기를 누가 이미 숨긴 후였다일부 소식통들에 의하면 이들은 소총 30정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프레오브라젠스키 연대는 이들을 곧 포위했다파블로프스키 연대 병사 19명은 체포되어 요새 감옥에 갇혔다나머지는 항복했다다른 정보에 따르면 이날 저녁 장교들은 병사 21명이 소총을 분실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아주 위험한 누출사고였다이 21명의 병사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동정하고 옹호할 병사들을 밤새 찾아 다녔다혁명의 승리만이 이들의 목숨을 살릴 수 있었다노동자들은 이 병사들로부터 사건의 자초지종을 확실히 알게 될 것이었다이것은 내일의 전투를 위해서는 썩 나쁘지 않은 징조였다.

 

나보코프는 유명한 자유주의 지도자였다그의 솔직한 회고록은 가끔 그가 속한 당과 계급 자체의 일기인 것처럼 느껴진다그는 어둡고 경계가 삼엄한 거리를 따라 어떤 곳을 방문한 후 새벽 1시에 귀가하고 있었다그는 어두운 예감으로 마음이 가득 차 지극히 불안했다”. 어느 건널목에서 그는 파블로프스키 연대의 탈영병을 한 명 만났다이 두 사람은 서둘러 서로를 지나쳤다이들은 서로 할 말이 없었다노동자 지구와 병사의 막사에서 일부는 보초를 서거나 대화를 나누었고 일부는 야영 할 때와 같이 선잠을 잤거나 다음 날에 대해 열병에 걸린 듯한 지독한 꿈을 꾸었다이곳에서 파블로프스키 연대의 탈영병은 쉴 곳을 찾았다.

 

2월 혁명에서 대중투쟁의 기록은 정말이지 찾기 힘들다. 10월 혁명의 빈약한 투쟁 기록보다 더욱 그렇다. 10월에 당은 봉기를 매일매일 지도했다신문 기사선언문보고서 등 투쟁의 외적인 연속성은 최소한 기록으로 남아 있다. 2월의 경우는 달랐다대중 지도부는 거의 없었다신문들은 파업 때문에 발간될 수 없었다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대중은 스스로 역사를 창조했다거리의 투쟁들을 재구성하여 생생하게 복원시키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다최소한 사건들의 일반적 연속성과 내적 순서를 재구성 해내기만 해도 좋을 것이다.

 

아직도 권력기구를 쥐고 있었던 정부는 좌익 정당들보다 더 상황을 잘못 파악하고 있었다그러나 후자도 별로 나을 것은 없었다. 26일의 성공적인” 군대의 발포 이후 정부의 장관들은 잠시 용기를 가졌다접수된 정보에 따르면 27일 아침 일찍 프로토포포프는 노동자들 일부가 업무에 복귀할 생각을 하고 있다고 자신 있게 보고했다그러나 노동자들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다어제의 발포와 시련은 대중의 기를 전혀 꺽지 못했다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겉으로 보기에는 손실에 비해 성과가 더 컸다시위대는 거리로 몰려나와 적들과 충돌했다병사들의 팔을 잡아당겼다말의 배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공격하다 흩어졌다건널목에 시체를 남기고 몇몇 총기를 집어들었다소식을 전하고 소문을 들었다이 경험을 통해 봉기 대중은 수없이 많은 눈안테나를 가진 집단이 된다밤에 노동자 지구로 돌아온 후 이들은 하루의 인상을 정리하고 사소하고 우연한 일은 솎아버린다그리고 나름대로 깊이 계산한다. 27일 밤 이 계산은 경찰 첩자 슈르카노프가 당국에 제출한 보고서의 내용과 일치했다.

 

아침에 노동자들은 다시 공장으로 줄지어 들어갔다그리고 공개 집회에서 투쟁의 재개를 결의했다언제나 그렇듯이 비보르그 지구 노동자들은 강한 결의를 보였다그러나 다른 지구들 역시 아침 집회가 열기로 가득했다투쟁을 계속한다그러나 이것은 오늘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가총파업으로 대규모 노동자들이 혁명 시위를 벌였다그리고 시위대는 군대와 충돌했다오늘의 계속된 투쟁은 무장봉기를 촉구했다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 내용을 명확히 표현하지 못했다무장봉기는 사태의 전개 속에서 불가피하게 도출되었다혁명정당이 무장봉기를 촉구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혁명 지도력의 10분의 9는 대중의 정서를 감지하는 데에 있다규모가 훨씬 클 뿐 카유로프가 카자크 병사의 눈썹 움직임을 감지한 것과 같다대중의 정서를 누구보다 잘 감지한 것이 레닌의 위대함이었다그러나 이때 레닌은 페트로그라드에 없었다합법 반합법 사회주의” 지도부인 케렌스키, 치헤이제스코벨레프 그리고 기타 인물들 모두 경고를 보내며 대중의 공세에 반대했다슐리아프니코프잘루츠키몰로토프 등 볼셰비키당 중앙 지도부는 놀랄 정도로 무기력했으며 주도력을 상실하고 있었다사실 노동자 지구들과 병사의 막사들은 방치되어 있었다볼셰비키당과 정치적으로 가까운 어느 사회민주주의 조직이 26일 군대에 대해 최초의 선언문을 발표했다이것의 내용은 조직의 동요를 드러내고 있었다더욱이 이 선언문은 인민의 편에 설 것을 군대에 호소하지도 않았다이 글은 27일 아침 도시의 모든 지구에 배포되었다그러나 조직의 지도자 유레네프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혁명은 너무 빨리 전개되어 우리가 제출한 구호들은 사태에 이미 훨씬 처져 있었다유인물이 군대에 침투했을 때 군대는 이미 혁명의 편으로 넘어온 후였다.” 2월 혁명에서 가장 훌륭한 노동자 지도자의 하나인 추구린의 요구에 따라 볼셰비키당 중앙의 슐리아프니코프는 27일 아침 병사들에게 호소하는 글을 작성했다이 글이 공개되고 배포되었는가기껏해야 혁명이 끝난 후 나왔을 것이다어쨌든 그의 글은 2월 27일의 사건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상층으로 올라갈수록 지도부는 사태에 더욱 처져 있었다이것은 당시의 일반적 법칙이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아무도 봉기라고 이름 붙이지 않았던 이 봉기는 스스로를 일정에 올렸다노동자들의 생각은 전부 군대에 집중되어 있었다. “병사들을 우리편으로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러나 이날 두서없는 선동은 더 이상 먹히지 않았다비보르그 지구 노동자들은 모스크바 연대의 막사 근처에서 집회를 열었다그러나 이 시도는 실패했다장교나 상사가 기관총의 방아쇠를 당기는 것이 힘든 일이었겠는가노동자들은 잔인한 총격을 받고 흩어졌다예비군 연대의 막사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여기서도 장교의 기관총 총격으로 노동자와 병사들은 만날 수 없었다노동자 지도자들은 화가 나서 총을 찾았다그리고 당에게 총을 요구했다그러자 이런 대답이 나왔다: “병사들이 총을 가지고 있다가서 가지고 와라.” 이것은 노동자들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그러나 문제는 총을 입수하는 방법이었다오늘 한꺼번에 모든 일이 물거품이 되지 않을까이렇게 투쟁의 결정적인 순간이 다가왔다기관총이 봉기를 싹 쓸어버릴 것인가 아니면 봉기가 기관총을 손에 넣을 것인가혁명은 기로에 놓여 있었다.

 

볼셰비키당 페트로그라드 중앙의 우두머리였던 슐리아프니코프는 자신이 총포나 권총을 달라는 노동자들의 요구를 거절하고 이들을 병사 막사로 보냈던 사실을 회상했다그는 이렇게 해서 노동자와 병사 사이의 유혈사태를 막고자 했다그리고 선동에 모든 것을 걸었다즉 근면과 모범을 통해 병사들을 정복하는 일에 모든 것을 걸었다이 출중한 지도자가 했던 당시의 말을 확인하거나 부인하는 다른 증언은 아직 없다그런데 그의 말은 지도자의 선견지명이 아니라 책임 회피를 드러냈다봉기를 지도할 수 없다면 무기가 없다고 고백하는 것이 지도자들에게는 더 손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일정 시점에서 모든 혁명의 운명은 군대의 보수적 성향이 깨지는 것에 달려있다이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군대는 수가 많으며 규율과 무장력이 뛰어나며 올바른 지도력을 확보하고 있다이 군사력에 대항하여 비무장이거나 거의 비무장인 대중이 승리하기란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그러나 격심한 사회 위기는 군대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바로 여기에 혁명이 반드시 승리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승리할 가능성이 진정한 인민혁명의 조건들과 함께 존재한다그러나 군대는 저절로 또는 단순한 선동으로 봉기를 지지하지 않는다군대는 이질적인 분자들의 조합으로 적대 세력들이 징벌의 공포에 의해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결정적인 순간 직전에 혁명 병사들은 자신의 역량과 영향력을 알지 못한다물론 근로 대중도 이질적인 분자들의 집단이다그러나 이들은 반동의 무장력과 결정적으로 대치하기 전에 자기 역량을 시험할 수 있는 기회를 군대와는 달리 수없이 많이 갖는다파업집회시위 등은 투쟁 행위일 뿐 아니라 역량의 잣대이기도 하다파업에 대중 전체가 참여하지는 않는다모든 파업 노동자들이 투쟁 의지가 충천한 것도 아니다투쟁이 가장 첨예한 순간에는 가장 대담한 분자들만 거리로 나선다주저하고 피곤하고 보수적인 분자들은 집에서 쉰다여기서 혁명투사들은 저절로 걸러진다대중은 사건들의 채로 걸러지면서 최상의 분자들을 결집시킨다군대는 그렇지 않다혁명에 공감하든 동요하든 적대적이든 병사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장교가 휘두르는 강제적 규율에 모두 구속된다병사들은 매일 매일 제 1열과 제 2열로 명령에 따라 구분된다이들이 어떻게 반항적인 병사와 복종하는 병사로 나누어질 수 있겠는가?

 

병사들은 혁명의 편이 되기 전에 심리가 서서히 변하는 과정을 거친다이 점진적 변화에는 자연에서와 마찬가지로 결정적인 순간이 있다그러면 이 순간은 언제 오는가어느 부대는 부대 전체 차원에서 인민의 편에 가담할 준비가 되어 있을 수 있다그러나 가담하는데 필요한 자극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혁명 지도부는 군대가 자기편으로 넘어올 가능성을 확신하지 못한 끝에 이들을 획득할 기회를 놓칠 수가 있다조건이 성숙했으나 성공하지 못한 반란 직후 반동세력이 군대를 장악할지도 모른다병사들은 가슴속에 불타던 희망을 상실한다이들은 규율의 멍에에 다시 복종한다그리고 노동자들과 새로 대치할 경우 이들과 거리를 두고 봉기 반대세력에 속한다이 과정에서 생각할 수 없거나 측량하기 어려운 많은 분자들많은 경향들집단적 암시와 자기 암시들이 존재한다그러나 이 복잡한 물질적 심리적 힘들의 엉클어짐 가운데에서 하나의 결론이 명쾌하게 도출된다봉기 세력이 진짜 봉기를 일으키고 있다이것은 막사로 돌아가서 보고해야 하는 단순한 시위가 아닌 목숨을 건 투쟁이다우리들이 합류하면 인민이 승리할 수 있고 이 승리는 우리의 면책권을 보장할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운명을 개선시킨다이 결론을 병사 집단이 확신하고 실감하면 할수록 이들은 총검을 내려놓고 상관의 명령을 따르지 않거나 총검을 들고 혁명 인민의 편으로 넘어올 가능성이 그만큼 크다달리 표현하면 혁명 세력은 유혈사태를 포함한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승리를 잡아챌 준비가 확실히 되어있어야 한다이 때에만 병사들의 수동적 보수적 정서가 무너진다그리고 최고의 투쟁의지는 병사들의 총칼을 반드시 혁명의 편으로 끌어들인다.

 

시위대는 길을 막는 병사들을 밀치며 계속 행진한다병사들은 대오를 이루어 시위대의 길을 막는다이때 양자는 서로 대면한다혁명의 운명을 결정하는 이 중요한 시간 중에도 더욱 결정적인 1분 1초가 있다병사들은 회색 장벽을 이루며 어깨와 어깨를 서로 붙인다그러나 이미 이들은 동요하고 있다장교가 자신의 마지막 남은 의지력을 동원하여 발사!”의 명령을 내릴 때가 결정적인 순간 중의 순간이다군중의 아우성공포와 위협의 고함소리 등이 장교의 명령 소리를 덮어 버리지만 완전히 죽이지는 못한다병사의 소총이 동요한다군중은 밀친다이때 장교는 가장 의심이 가는 병사에게 권총을 겨눈다결정적인 1분은 이제 결정적인 1초에 의해 좌우된다병사들이 자기도 모르게 지도자라고 인정하는 가장 대담한 병사가 살해당하고 이 죽은 병사의 소총으로 상병이 군중에 발포하는 순간 병사들의 장벽은 굳세게 유지되며 소총 대열에서 저절로 불이 뿜어져 나온다이 순간 시위대는 골목과 뒤뜰로 흩어진다그러나 1905년부터 지금까지 이와 정반대로 상황이 전개된 경우도 대단히 많았다장교가 지도적 병사를 살해하기 위해 권총 방아쇠를 당기려는 결정적인 순간에 카유로프와 추구린 같은 지도자를 가진 군중 가운데 누가 총을 쏘아 장교가 쓰러진다바로 이 순간이 시가전의 운명 뿐 아니라 하루 전체 또는 봉기 전체의 운명을 결정한다.

 

슐리아프니코프는 이렇게 생각했다봉기 노동자들에게 무기를 주지 않으면 군대와 충돌하지 않을 것이며 노동자들의 생명은 보호받는다그러나 그의 생각은 실행될 수 없었다대중은 군대와 충돌하기 전에 이미 경찰과 무수히 충돌했다증오의 대상인 파라오들의 무장 해제와 함께 시가전은 시작되었다증오스러운 경찰의 권총은 봉기 대중의 수중에 들어갔다군대의 소총기관총대포 등에 비해 권총은 거의 장난감 같은 무기이다그러나 이 위력적인 무기들이 진짜 적의 수중에 있는가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동자들은 무기를 요구했다이것은 심리적인 문제였다그러나 봉기에서도 심리적 과정은 물리적 과정과 분리될 수 없다병사들의 소총을 손에 넣기 전에 먼저 파라오들의 권총을 빼앗아야 한다.

 

이 당시 병사들의 정서는 노동자들에 비해 더 수동적이었으나 그 깊이는 결코 뒤지지 않았다페트로그라드 주둔군의 주력은 수천 명으로 구성된 예비군 대대들이었다이 점을 다시 상기할 필요가 있다이들은 전선에서 죽어나가는 병사들을 대체하기 위해 대기 중이었다대부분 가장인 이들은 전투가 패배하여 국토가 유린되면 전선의 참호로 배치될 예정이었다이들은 당연히 전쟁보다는 고향의 농장에 있고 싶어했다이들은 차르의 궁전에서 일어나는 추잡한 사건들을 잘 알고 있었다따라서 왕정에 대해 조금의 애착도 없었다이들은 독일군과 전투하기를 원치 않았다당연히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들과도 충돌할 생각이 없었다이들은 수도의 지배계급을 증오했다왜냐하면 지배계급은 전쟁 중에도 사치와 쾌락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다주둔군 가운데에는 혁명을 경험한 노동자들도 있었다이 경험 있는 노동자 출신 병사들은 모든 정서를 일반화해서 표현할 수 있었다.

 

가슴 깊이 숨어있지만 아직 표출되지 못한 혁명적 불만을 공개적인 반란 또는 최소한 항명과 반란 행위로 유도하는 것이 당면 임무였다투쟁 3일째에 병사들은 봉기에 대한 우호적 중립 태도를 완전히 버렸다노동자와 병사들의 충돌은 그 우연적인 파편들만이 지금 전해지고 있다어제 노동자들은 파블로프스키 연대 병사들에게 소속 훈련병 분대의 행동을 열렬하게 불평했다이 내용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이러한 장면대화질책호소 등은 도시의 모든 구석에서 다반사로 벌어지고 있었다이제 병사들은 주저할 시간이 없었다이들은 어제 발포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리고 오늘도 그럴 것이다노동자들은 항복하거나 후퇴할 생각이 없다총탄 세례 속에서도 이들은 여전히 대오를 유지하고 있다그리고 이들과 함께 여성들 즉 부인모친여동생애인 등도 같이 투쟁하고 있다그렇다그리고 지금이 바로 이들이 그렇게 자주 속삭였던 바로 그 순간이다: “우리 모두 함께 투쟁할 수만 있다면...” 다가오는 또 다른 하루에 대한 견딜 수 없는 두려움느껴지는 극도의 고통자신들을 살인자로 만든 놈들에 대한 숨막히는 증오심이 정서들이 병사들을 지배하는 순간 군대 막사에서 공공연한 분노의 첫 목소리들이 울려나온다그리고 영원히 그 이름을 알 수 없는 이 분노의 목소리들에 의해 군대 전체는 안도와 환희 속에 자신의 진정한 역할을 인식한다로마노프 왕조가 멸망할 그날이 이렇게 러시아 대륙에 밝아왔다.

 

불굴의 지도자 카유로프의 집에서 아침 회의가 열렸다. 40명이 넘는 공장대표자 가운데 다수는 계속 투쟁할 것을 결의했다그러나 다수였을 뿐 전부는 아니었다어느 정도 다수였는지 알 수 없어 아쉽다그러나 당시 급박한 상황에서 기록을 남길 시간이 있을 리 없었다어쨌든 이 결정은 이미 너무 늦었다병사들이 봉기했으며 감옥 문이 열렸다는 황홀한 소식에 회의가 중단되었다경찰 첩자 슈르카노프는 회의 참석자 전원에게 입맞춤을 했다이 입맞춤은 배신자 유다의 입맞춤이었다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참석자들은 예수처럼 십자가에 못 박히지는 않았다.

 

군대들이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차례로 막사 밖으로 불려 나오기 전 아침 일찍부터 예비역 방위군 대대들이 차례로 반란을 일으켰다이렇게 해서 전날 파블로프스키 연대 제 중대의 행동이 계승되었다문서기록회고록 등은 인류 역사의 이 거대한 사건을 희미하게 조명하고 있을 뿐이다억압받는 대중은 창조적 행동의 절정으로 상승할 때조차 자기 얘기가 거의 없다그리고 글도 제대로 남기지 않는다그리고 나중에 터지는 압도적인 승리의 환희와 열광이 그나마 남아있던 기억도 지워버린다그러면 그나마 남아있는 기록들이라도 확인해보자.

 

볼린스키 연대의 병사들이 처음으로 반란을 일으켰다아침 7시 어느 대대장이 전화를 통해 하발로프 장군에게 이 위협적인 소식을 전했다훈련병 분대 즉 봉기 진압의 신뢰받는 선봉 부대가 막사 밖으로 행진하기를 거부했다이 부대의 지휘관은 살해되었거나 병사들 앞에서 총으로 자결했다는 소문이었다그러나 후자는 곧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이 부대는 막사 뒤편의 다리들을 불태웠다이를 통해 서둘러서 봉기를 확대시키려했다봉기의 승리만이 이들의 목숨을 살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이들은 이웃한 리토프스키프레오브라젠스키 연대들의 막사로 달려가 병사들을 불러냈다”. 마치 파업노동자들이 이 공장 저 공장으로 달려가 노동자들을 불러내는 것과 같았다시간이 어느 정도 지난 후 하발로프는 이렇게 보고를 받았다볼린스키 연대가 소총을 반납하라는 장군의 명령을 거부했을 뿐 아니라 더 놀라운 것은 노동자들과 합류한 후” 리토프스키 및 프레오브라젠스키 연대들과 함께 정치경찰의 막사를 파괴했다이로써 파블로프스키 연대 병사들의 어제 실험이 헛되지 않았다봉기는 마침내 지도자들을 찾아냈으며 동시에 행동 계획도 찾아냈다.

 

27일 이른 아침까지 노동자들은 봉기가 승리할 가망성은 거의 없다고 생각했다그리고 이 승리는 훨씬 뭔 미래에나 가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그러나 실제로 승리는 이미 10분의 정도 성취되어 있었다노동자들이 병사들의 막사에 가한 혁명적 압력은 이미 거리로 진출한 병사들의 혁명 운동과 맞아 떨어졌다낮 시간에 이 두 막강한 물결은 하나로 합류하여 구체제의 벽지붕 그리고 기초 전체를 깨끗이 쓸어가 버렸다.

 

추구린은 볼셰비키 중앙 본부에 제일 먼저 나타난 노동자 가운데 하나였다그는 손에 소총을 들고 어깨에 탄띠를 매고 몰골은 형편없었으나 얼굴에 환한 웃음을 띤 채 의기양양한 모습이었다그렇지 않을 이유가 있겠는가소총을 든 병사들이 우리 진영으로 넘어오고 있다일부에서는 노동자들이 병사들과 뒤섞여 막사에 들어가 소총과 탄창을 받았다비보르그 노동자들은 가장 대담한 병사들과 함께 대강의 행동 계획을 짰다무장 경찰이 진을 치고 있는 경찰서를 점령한다경찰 전부의 무장을 해제시킨다경찰서에 잡혀 있는 노동자들과 감옥의 정치범들을 모두 석방시킨다도시 안에 주둔하는 정부에 충성하는 군대를 모두 격퇴시킨다소극적인 군대 및 다른 지구의 노동자들과 결합한다.

 

모스크바 연대는 내부 분란을 겪은 후 봉기에 합류했다그러나 이런 경우가 거의 없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정부에 충성하는 지휘관들은 병사 대중들과 무기력하게 분리되었다그리고 몸을 숨기거나 서둘러 부대 깃발을 바꾸었다. “병기” 공장의 노동자 코롤레프는 이렇게 회상한다: “2시에 모스크바 연대가 막사 밖으로 행진할 때 우리는 이미 무장을 마친 후였다...우리는 소총과 권총을 각각 한 자루씩 들었다그리고 나타난 병사들을 하나로 모았다. (이들 중 일부는 우리가 지휘를 맡을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경찰서를 공격하기 위해 티흐빈스카야 거리로 출발했다.” 노동자들은 병사들에게 당면 임무를 지시하는 일이 전혀 어렵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승리했다는 즐거운 보고들이 계속 이어졌다우리 장갑차들이 나타났다붉은 깃발이 휘날리는 가운데 장갑차들이 지구들을 질주하며 항복하지 않은 모든 자들에게 공포를 퍼뜨리고 있다이제 카자크 병사가 탄 말의 배 밑으로 들어갈 필요는 없을 것이다혁명은 이제 위풍 당당하게 행진하고 있다.

 

정오 경에 페트로그라드는 다시 전투의 격전장이 되었다소총과 기관총들이 모든 곳에서 소리내어 불을 토했다누가 어디서 총을 쏘고 있는지 분간하기가 쉽지 않았다한가지는 확실했다과거와 미래가 서로에게 총질하고 있었다목표물도 없이 쏘는 총들이 많았다어린 소년들이 생각지도 않은 권총을 손에 넣어 여기 저기서 쏘고 있었다병기고는 파괴되었다. “브라우닝 권총 수만 자루가 반출되었다고 한다.” 지방법원과 경찰서의 불타는 건물에서 연기 기둥이 올라갔다일부에서는 충돌과 작은 전투가 진짜 전투로 변하고 있었다삼프소니에프스키 대로에서는 노동자들이 자전거 부대 막사에 도착했다자전거 부대 병사 일부는 정문에 몰려 있었다병사들은 노동자들에게 동지들물러나시지.”라는 말과 함께 미소를 지으며 침묵을 지켰다어느 시위 참가자의 증언에 의하면, “선한 미소는 아니었다.” 한편 장교들은 노동자들에게 물러나라고 거칠게 명령했다. 10월 혁명 때와 같이 2월에도 기병과 함께 자전거 부대는 군대의 가장 보수적인 부위였다노동자와 혁명 병사 무리가 곧 울타리 주위로 모였다. “의심스러운 대대를 우리가 직접 끌어내야 한다!” 장갑차를 부르러 보냈다고 누가 보고했다기관총을 보유한 자전거 부대를 제압할 방법이 장갑차 이외는 없었을 것이다그러나 장갑차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힘들다이들은 대단히 성미가 급했는데 이것은 옳았다양측에서 총을 쏘았다그대로 서있는 판자 울타리가 병사들과 혁명군중을 갈라놓고 있었다군중이 공격에 나서서 울타리를 무너뜨릴 결심이었다이들은 울타리 일부를 무너뜨렸고 나머지는 불을 질렀다울타리가 없어지자 약 20동의 막사가 눈에 들어왔다자전거 부대 병사들은 이 가운데 두세 동에 모여있었다빈 막사들에 즉시 불이 질러졌다이로부터 6년 후 카유로프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불타오르는 막사들이들 주위 울타리의 붕괴기관총과 소총의 사격포위 군중의 흥분된 얼굴돌진하고 있는 트럭 한 대에 가득 실린 무장 혁명가들 그리고 마침내 번쩍이는 포구를 뽐내는 장갑차의 도착 등은 기억에 남을만한 대단한 장면이었다.” 낡은 차르체제봉건제교회체제경찰국가 러시아 등이 불타 무너지고 있었다막사와 울타리는 불길연기기관총 소리와 함께 사라지고 있었다수십수백수천 명의 카유로프들이 환호했다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자전거 부대 병사들과 장교들의 바리케이드에 장갑차가 도착하여 포탄을 몇 발 갈겼다부대 지휘관이 살해되었다견장과 다른 장식들을 떼어내면서 장교들은 막사 옆의 채소밭을 가로질러 도망쳤다나머지는 항복했다이것은 아마 27일의 가장 커다란 승리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군대의 반란은 이제 유행병처럼 번져나갔다소문을 듣지 못한 부대만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다저녁때가 되자 1905년 모스크바 봉기를 무참히 진압한 악명이 높은 세메노프스키 연대도 봉기에 합류했다. 11년은 헛되지 않았다경기병(輕騎兵부대와 함께 이 연대의 병사들은 밤늦게 이즈마일로프스키 연대 병사들에게 봉기에 참여하라고 소리쳐 불렀다.” 이즈마일로프스키 연대의 병사들은 지휘관들이 자물쇠로 잠근 막사 안에 감금되어 있었다이 연대는 1905년 12월 3일 역사상 최초의 소비에트를 포위하고 대의원들을 체포했었다그리고 지금도 가장 후진적인 연대였다.

 

15만 병력의 수도 주둔군은 수가 줄어들면서 사라지고 있었다밤이 되면 이 군대는 존재하지 않았다.

 

연대들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아침 소식을 전달받은 후 하발로프는 계속 저항했다천 명의 합동연대에게 가장 극단적인 명령을 내려 내보냈다그러나 이 연대의 운명은 대단한 미스터리로 남았다혁명이 승리한 후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난 하발로프는 이렇게 말한다: “그날 뭔가 불가능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한다...용감하고 결의에 찬 장교(쿠티에포프 대령을 의미했다)의 지휘 아래 연대는 출동한다그러나 ...결과가 없다.” 이 연대 다음으로 출동한 중대들도 역시 흔적 없이 사라졌다하발로프 장군은 궁전 광장에 예비군들을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그러나 탄창이 없었고 이것을 구할 데도 없었다.” 이것은 임시정부의 조사위원회에서 하발로프가 직접 증언한 말이다반란군을 징벌하기 위해 보낸 연대들은 어떻게 되었는가이들은 부대 밖으로 행진하자마자 봉기에 흡수되었다이 사실은 쉽게 추측할 수 있다노동자여성청년반란군 등이 하발로프 군대를 사면에서 포위해 모여들었다이 연대를 같은 편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몰랐다아니면 같은 편으로 만들기 위해 군중과 함께 움직이도록 길을 열어주지 않았을 것이다무리를 지어 다니며 모든 것에 침투하는 대중은 이제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이 군중과 싸우는 것은 밀가루 반죽으로 울타리를 세우는 것처럼 허망한 일이었다.

 

더욱더 많은 수의 부대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그리고 반란군을 진압하고 전화국리토프스키 성곽마린스키 궁전기타 성스러운 장소들을 지킬 믿을만한 부대를 보내라는 요구가 들어왔다하발로프는 크론슈타트 요새에 있는 정부에 충성하는 군대에게 수도로 진군할 것을 전화로 명령했다그러나 요새 사령관은 요새 병사들의 반란이 우려된다고 대답했다봉기가 이웃 주둔군으로 퍼지고 있다는 사실을 하발로프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이 장군은 겨울궁전을 요새로 전환시키려 했거나 하는 체 했다그러나 이 계획은 실현 불가능했기 때문에 금방 폐기되었다마지막 남은 몇 줌의 충성스러운” 부대는 해군본부로 보내졌다마침내 여기서 이 독재자는 아주 중요하고 시급한 임무에 몰두했다그는 두 건의 정부 포고령을 공표하기 위해 인쇄작업을 명령했다. “신병으로 인한” 프로토포포프의 은퇴와 페트로그라드의 포위를 명령하는 포고령이었다후자의 포고령은 정말 서둘러 인쇄해야 했다왜냐하면 몇 시간 후 하발로프의 군대는 포위를 풀고 해군본부를 떠나 귀대했기 때문이었다이 막강한 권한을 부여받은 그러나 전혀 막강하지 않은 장군은 27일 저녁까지 체포되지 않았다이것은 무지의 소치였다그러나 다음날 그는 조금의 문제도 없이 체포되었다.

 

멸망의 위험 앞에서 난공불락 러시아 제국이 동원한 저항이 이것뿐이었는가그렇다인민을 압살한 그간의 경험과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교하게 혁명에 대비한 계획이 작성되었다그러나 이 정도가 전부였다나중에 모든 일이 종결되고 정신을 차리자 차르 주위의 인물들은 이렇게 설명했다페트로그라드 주둔군의 특이한 성격 때문에 2월 인민혁명이 쉽게 승리했다그러나 이후 혁명이 계속 전개되면서 이 주장은 반박되었다물론 1917년이 시작될 때 차르의 친위 파벌은 수도 주둔군을 개선하는 제안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차르는 이 제안에 쉽게 동의해 주었다왜냐하면 그간의 노고로 보아 기병 방위군은 페트로그라드 부대 막사에서 휴식을 취할 정당한 권리가 있다고 그가 생각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전선에서 온 대표들이 공손하게 상황을 보고하자 그는 기병 방위군 4개 연대 대신 해군 방위군 3개 함대를 수도에 주둔시키라고 지시했다프로토포포프는 이렇게 말했다: “주둔군 교체는 차르의 동의도 없이 명령에 따라 배신적으로 이루어졌다...수병들은 노동자들로부터 징집되었기 때문에 군대 내에서 가장 혁명적인 분자들이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히 틀린 말이었다방위군 특히 기병의 최고위 장교들은 전선에서 너무 만족스럽게 경력을 쌓고 있었기 때문에 후방 복귀를 원치 않았다이외에도 이들은 징벌 작전에 투입될 가능성을 두려워했음에 틀림없다이 부대는 수도에서 행진이나 하다가 전선에서 쓰디쓴 경험을 했다이 결과 이 부대는 성격이 완전히 변해 있었다이 부대를 지휘하여 징벌 작전에 투입할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지 장담할 수가 없었다전선의 사건들이 곧 증명했듯이 이때 기병 방위군은 나머지 기병들과 다른 점이 조금도 없었다그리고 수도로 전근된 해군 방위군은 2월 혁명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았다이미 구체제는 완전히 썩어 제대로 남아있는 기둥은 하나도 없었다.

 

2월 27일 군중은 피를 흘리지 않고 수도의 여러 감옥에서 모든 정치범들을 석방시켰다이들 가운데에는 1월 26일 체포된 군사산업위원회의 애국적 그룹, 40시간 전 하발로프에 의해 체포된 볼셰비키 페트로그라드 위원회 위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그런데 감옥 정문에서 곧바로 정치 분열이 일어났다멘셰비키-애국주의 인물들은 의회로 향했다거기에서 이들의 역할과 지위가 정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볼셰비키들은 노동자와 병사들의 지구로 향했다이들과 함께 수도 장악의 임무를 완료하기 위해서였다적에게 숨쉴 틈을 주지 말아야한다다른 어떤 사업보다도 혁명 사업은 끝을 봐야한다.

 

반란군을 타우리데 궁전으로 인도할 생각을 누가 했는지 말하기는 불가능하다반란군의 이 정치적 행진은 전체 상황에 의해 규정되었다대중기반이 없는 모든 과격분자들은 자연스럽게 반체제 정보의 구심점인 타우리데 궁전으로 향했다아마 이들은 27일 갑자기 활력을 주입 받아서 반란군의 안내자가 되었을 것이다이것은 명예로운 역할이었으며 이제 전혀 위험하지 않은 역할이었다위치로 보아 포템킨 궁전은 혁명의 중심부가 되기에 아주 적합했다타우리데 공원은 방위군의 막사들과 일련의 군사기관들이 포함된 군사지구와 거리 하나를 두고 떨어져 있었다오랫동안 이 지역은 정부와 혁명가들에 의해 왕정의 군사적 중심부로 간주되었다이것은 사실이었다그러나 이제 모든 것이 변했다병사들의 반란이 방위군 막사 구역에서 시작된 후였다반란군은 거리 하나만 건너면 바로 타우리데 궁전의 공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그리고 타우리데 궁전에서 한 블록 지나면 네바강이었다네바강을 건너면 혁명의 용광로 비보르그 노동자지구였다노동자들은 알렉산드르 다리를 건너거나 교각 상판이 올라가 있어서 건널 수 없으면 강의 얼음 위를 걸어가 방위군 막사나 타우리데 궁전에 도달할 수 있었다페트로그라드 북동 삼각지는 방위군 막사포템킨 궁전거대한 공장 등 서로 기원이 다른 시설들이 가까이 몰려 있는 이질적 지점으로 혁명의 각축장이 되었다.

 

타우리데 궁전에는 이미 여러 쎈터가 수립되었거나 엉성하게나마 수립이 시작되고 있었다이중에는 봉기 지휘부도 있었다이것은 그리 대단하지는 않았다어떤 방식으로든 실수로 혁명과 연계를 가졌거나 봉기가 일어날 동안 잠만 자고 있던 혁명 장교들은 혁명이 승리한 후 서둘러 스스로 또는 다른 사람들의 부탁으로 혁명에 봉사하기 위해” 현장에 도착한다이들은 심오한 생각으로 상황을 파악한 후 비관적으로 고개를 흔든다무기도 없는 시끄러운 병사 대중은 전투태세가 전혀 되어있지 않다대포기관총통신장비지휘관 등 어느 것도 변변히 없다적이 강력한 일개 연대만 동원하면 이 오합지졸들은 싹쓸이 될 것이다물론 당장은 혁명 군중이 거리를 장악하고 있어서 계획된 전술을 운용할 수가 없다그러나 밤이 되면 노동자들이 집으로 돌아갈 것이고 주민들은 조용해질 것이고 도시 중심부는 텅 비어버릴 것이다막사에 남아있는 강력한 일개 연대를 동원하여 하발로프가 공격을 가한다면 상황을 장악할 수 있을 것이다그런데 이런 종류의 사고는 혁명의 모든 단계에서 각기 다른 모습으로 등장한다두 번 이상 용감한 대령들이 친구들에게 이렇게 외친다: “나에게 강력한 일개 연대만 준다면 단 2초만에 모든 것을 정리할텐데!” 그리고 곧 보게 되겠지만 이들 중 일부는 이런 시도를 한다그러나 이들은 모두 하발로프처럼 같은 말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연대는 용감한 장교의 지휘를 받아 출동한다그러나...결과는 전혀 없다.”

 

그렇다어떻게 결과가 있을 수 있겠는가가장 믿을만한 무력은 경찰헌병일부 연대 소속의 훈련병 부대뿐이다그러나 이로부터 8개월 후인 10월에 성 게오르니우스 대대와 사관학교 생도들이 증명한 바와 똑같이 이 부대들도 진짜 대중의 공격 앞에서는 전혀 힘을 쓰지 못했다. 200만 도시 대중과 장기 필사항전을 벌일 충성파 연대를 왕정은 어디서 구할 수 있었겠는가말만 거창하게 떠버리는 대령들에게 혁명은 자기방어 능력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인다왜냐하면 대단히 무질서하기 때문이다어디를 보아도 목표가 없는 인간들의 움직임서로 충돌하는 경향들인간의 소용돌이갑자기 귀가 먹은 것처럼 놀란 표정의 사람들단추도 없는 참호 외투를 걸친 군인들과격한 동작의 학생들소총이 없는 병사들병사가 없는 소총들허공에 총을 쏘는 소년들천 개의 목소리를 가진 야단법석황당한 소문의 폭풍잘못 작동된 경고음거짓 축제소동 등등이 모든 혼란 위에 칼 한 자루만 휘두르면 모든 것이 흩어지고 흔적도 없을 것 같다그러나 이것은 조야한 착각에 불과하다혼란은 피상적일 뿐이다혼란의 표면 밑에서 대중은 새로운 축을 중심으로 결집한다수많은 대중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아직 명확하게 규정하지 못하고 있다그러나 이들은 혐오스러운 것들에 대한 쓰디쓴 증오심으로 가득 차있다과거는 돌이킬 수 없으며 끔찍했던 역사의 눈사태로 기억에 남아있다과거로 되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혁명 대중을 지금 해산시킬 수는 있다그러나 이들은 한 시간 후에 다시 나타날 것이다그리고 두 번째 홍수는 첫 번째 홍수보다 훨씬 더 맹렬하고 파괴적일 것이다. 2월 이후 페트로그라드의 분위기는 시뻘겋게 달아오른 거대한 용광로와 같았다따라서 옆에 있거나 근처에 접근하는 적대적 군대는 이 용광로의 불길에 그슬려 비틀리고자신감을 상실하고마비되고싸움 한번 하지 못한 채 승리한 군중의 자비를 구한다내일 성 게오르기우스 대대와 함께 차르의 명령으로 전선에서 도착한 이바노프 장군은 이 사실을 직접 확인하게 될 것이다. 5개월 후와 8개월 후 똑같은 운명이 코르닐로프 장군과 케렌스키에게 닥칠 것이다.

 

봉기 직전 첫 며칠간 카자크 병사들은 혁명 대중의 설득에 귀를 가장 열심히 기울인 것처럼 보였다이들이 가장 학대받는 병사들이었기 때문이다그러나 실제 봉기가 진행되자 기병은 다시 한번 자신의 보수적 평판을 입증하여 보병보다 보수적이었다. 27일까지 기병은 사태를 관망한 채 중립을 표방했다하발로프는 기병을 더 이상 믿지 않았다그러나 혁명은 여전히 기병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대공들의 궁전과 겨울궁전 반대편 네바강 섬에 위치한 페트로파블로프스키 요새는 수수께끼였다성벽 안에 숨어있는 요새 주둔군은 외부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차단되어 전혀 다른 세계처럼 보였다이 요새에는 페트로그라드 시민에게 정오을 알리기 위해 발사되는 오래된 대포가 설치되어 있었다이것을 제외하면 포대에 확고히 설치된 대포는 없었다그러나 오늘은 야전 대포가 성벽에 설치되어 알렉산드르 다리를 겨누고 있다이 무기들은 무엇을 과녁으로 삼고 있는 것일까타우리데 궁전의 봉기 지도부는 이 요새에 대해 밤새 고민했다그리고 요새는 혁명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그러나 아침이 밝아오자 수수께끼는 풀렸다: “장교들을 해치지 않는다면” 요새는 타우리데 궁전의 봉기 지도부에게 항복할 것이다요새의 장교들은 상황을 분석했다항복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장교들은 불가피한 상황을 서둘러 차단했다.

 

27일 저녁이 되자 병사노동자학생 그리고 여타 다양한 대중의 물결이 타우리데 궁전으로 흐르고 있다모든 것을 알고 있어서 지시를 내리고 정보를 제공할 사람들을 대중은 이 궁전에서 찾을 생각이었다모든 방향에서 탄약이 한아름 궁전 안으로 운반되어 탄약고로 용도가 바뀐 방에 저장된다밤이 되자 혁명 지도부가 일을 시작한다기차역을 지킬 부대를 보낸다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은 어디든지 정찰대를 보낸다병사들은 열성적으로 말 한마디 없이 비록 대단히 비체계적으로나마 새로운 정부의 명령을 따른다그러나 이들은 언제나 문서로 된 명령을 요구한다군대 사령부의 일부 또는 군대의 민간인 직원들이 새 정부의 지도부를 제공했을 것이다그러나 이들은 옳았다혼란 속에 즉시 질서를 찾는 것이 필요하다새로 태어난 소비에트와 혁명 지도부에게는 아직 인장이 없었다혁명은 아직도 관료 행정기구를 구비하지 못하고 있다시간이 지나면 이것은 마련될 것이다이것이 너무 잘 마련되는 것이 슬플 뿐이다.

 

혁명은 반동분자를 색출하기 시작한다자유주의자들은 나중에 질책하듯이 말한다: “자의적으로” 도시 전역에서 체포가 이루어지고 있다그러나 혁명 전체가 자의적이다체포된 사람들이 타우리데 궁전으로 물결처럼 흘러 들어간다수상장관경찰관비밀정보원, “친독일파” 백작부인헌병 장교의 무리들이다프로토포포프와 같은 정치인들은 자수한다더 안전한 방법이기 때문이다백작부인이 나중에 이렇게 말한다: “절대주의를 칭송하는 노래로 가득했던 방은 이제 훌쩍거리는 울음소리와 한숨만이 가득하다체포된 장군이 대단히 지친 듯 가까이 있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는다의원 여러 명이 친절하게 차를 대접한다영혼이 심하게 흔들린 장군은 흥분되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백작부인위대한 나라의 멸망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한편 멸망할 의사가 전혀 없는 이 위대한 나라는 과거의 인물들을 무시하고 행진한다장화로 쿵쿵 땅을 울리고 소총의 개머리판을 쩔렁쩔렁 부딪친다함성으로 공기를 가르고 발을 구르며 전진한다혁명은 언제나 무례하다지배계급이 제때에 좋은 예절을 인민에게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혁명은 아직도 얼굴에서 피와 땀을 씻어 내지 못했다타우리데 궁전은 혁명의 임시 야전사령부정부청사탄약고감옥요새가 되었다이 소용돌이 속에 대담한 적들이 잠입했다변장한 헌병 대위가 구석에서 노트를 작성하는 것이 우연히 적발되었다물론 역사를 위해서가 아니라 반란군들을 군사법정에 세우기 위해서였다병사들과 노동자들은 그를 당장 처치하려했다그러나 참모부의 누가 개입해서 손쉽게 이 헌병을 군중이 없는 곳으로 인도했다이때 혁명은 아직도 성격이 좋았다신뢰하며 친절했다일련의 긴 배신사기피비린내 나는 시련을 겪은 후에야 혁명은 무자비해진다.

 

승리한 혁명의 첫 날 밤은 경계심으로 가득했다기차역과 다른 장소들의 급조된 책임자들은 개인적 연줄의 지식인혁명 출세가서로 아는 사람들로 두서없이 선정되었다노동자 출신의 하사관들이 이런 일에는 더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이제 감투를 쓴 책임자들은 신경이 날카로웠다사방에서 위험을 감지했다병사들을 귀찮게 굴고 타우리데 궁전에 계속 전화를 걸어 증원군을 요청했다그러나 타우리데 궁전의 혁명 참모부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이들은 전화를 걸고 증원군을 보냈다그러나 이들은 도착하지 않았다이 궁전의 밤 근무 참모부의 일인이 이렇게 말했다: “명령을 받고도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다그리고 명령도 없이 행동한다.”

 

노동자 지구들은 명령 없이 행동한다혁명의 진정한 지도자들은 공장 밖으로 노동자들을 인도하고 경찰서를 접수하고 병사들을 큰소리로 부르고” 반혁명 아성들을 파괴했다이들은 타우리데 궁전혁명 참모부행정본부로 서둘러 가지 않는다이와 반대로 빈정거림과 불신감으로 그쪽에 대고 고개를 흔든다: “자기들이 잡지도 않은 사냥감을 죽기도 전에 나누려고 용감한 놈들이 빨리도 모여드는군.” 다른 좌익 정당들의 가장 훌륭한 노동자들 뿐 아니라 노동자 볼셰비키들은 거리에서 낮을 보내고 밤은 지구본부에서 보내면서 병사들의 막사와 연락을 유지하고 내일의 일을 준비한다승리의 첫 날 밤 이들은 5일 동안의 낮과 밤을 꼬박 세워 했던 같은 일들을 계속하고 확대시킨다모든 혁명의 초창기가 그렇듯이 이들은 혁명의 아직 굳지 않은 어린 뼈들이다.

 

나보코프는 이미 입헌민주당 지도부의 일원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합법적 탈영병으로 총사령부에서 일하고 있었다그는 27일 평소와 다름없이 출근한 후 오후 3시까지 일했다그는 상황을 전혀 알지 못했다저녁에 모르스카야 가도에서 총성이 울렸다그는 이 총성을 자기 아파트에서 들었다장갑차가 거리를 질주했으며 병사들과 수병들이 옆 걸음으로 벽에 기대어 달려가고 있었다이 존엄한 자유주의자는 자기 집 현관 옆 창문으로 이들을 관찰했다. “전화가 계속 울렸다내 기억으로는 친구들이 낮에 일어났던 일을 전해주었다평상시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잠자리에 들었다.” 이 인물은 곧 혁명(!) 임시정부 수립에 가담하여 총무청장 감투를 쓸 것이다내일은 알지도 못하는 노인이 거리에서 그에게 다가갈 것이다그 노인은 회계사나 교사일 것이다그는 몸을 숙이고 모자를 벗어들고는 나보코프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인민을 위해 하신 모든 일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나보코프는 적당한 자부심으로 이 때의 일을 훗날 얘기할 것이다.

 


제 8장: 누가 2월 봉기를 지도했는가?

 

혁명으로 타격을 입은 계급들의 변호사들과 언론인들은 상당한 양의 잉크를 낭비하면서 이후 이렇게 주장했다: 2월 사건은 기본적으로 여성들의 반란이었으며 이어서 병사들의 반란으로 지지를 받아 혁명으로 치장되었다프랑스 혁명 당시 루이 16세도 바스티유 감옥의 함락이 반란이라고 생각했다그러나 주위 사람들은 그 사건이 혁명이라고 공손하게 그에게 설명했다혁명으로 잃는 것이 있는 자들은 혁명을 진짜 이름으로 불러줄 기분이 좀처럼 나지 않는다왜냐하면 악의에 찬 반동들의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혁명이란 단어는 모든 족쇄와 편견들로부터 해방을 의미하는 것으로 인류의 기억에 남아있기 때문이다모든 시대의 특권계급들과 이들의 하수인들은 자기들을 타도한 혁명을 과거의 혁명들과 대비하여 군대의 반란이나 소동 또는 군중 폭동으로 격하시키려고 애써왔다역사의 무대에서 물러나야 하지만 아직도 버젓이 주역 행세를 하고 있는 계급들은 전혀 독창적이지 않다.

 

2월 27일 혁명 직후 이 혁명을 터키 청년장교들의 군사쿠데타에 비유하려는 자들이 있었다이미 알고 있듯이 러시아 부르주아 계급 상층부는 이런 성격의 쿠데타를 적지 않게 꿈꾸어 왔었다그러나 이런 성격 규정은 너무도 가망이 없다심지어 어느 부르주아 신문조차 이 규정을 진지하게 반대했다젊은 시절에 맑스를 연구했던 경제학자 투간-바라노프스키는 러시아의 좀바르트(역자 주:Werner Sombart, 1863~1941, 독일의 경제사학자초기에는 맑스주의자였으나 이후 극우 진영으로 전향했다.)라고 할 수 있다그는 3월 10일자 일간 증권거래소 신문(Birzhevoe Vedomosti)에 이렇게 적었다:

 

청년 장교들의 터키 혁명은 군대의 승리한 봉기였으며 군대 지도자들에 의해 준비되고 수행되었다병사들은 장교들의 계획을 공손히 실행에 옮겼을 뿐이었다그러나 2월 27일 왕정을 타도한 러시아의 방위군 연대들은 장교들의 지도가 없이 독자적으로 행동했다... 군대가 아니라 노동자들이 봉기를 시작했다장군들이 아니라 병사들이 의회로 몰려들었다병사들은 노동자들을 지지했다장교들의 명령을 공손히 이행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과 똑같은 근로인민 계급인 노동자들을 자신들의 피를 나눈 형제라고 느꼈기 때문이다농민들과 노동자들은 러시아 혁명을 수행한 두 사회계급이다.”

 

그의 말은 고치거나 보완할 필요가 전혀 없다혁명 이후 전개된 사건들은 이 말의 올바름을 확인하고 강화시켰을 뿐이다페트로그라드에서 2월의 마지막 날은 혁명 승리의 첫날이었다황홀포옹환희의 눈물감정의 복받침이 터져 나온 날이었다동시에 적들에 대한 마지막 타격의 날이기도 했다거리에서는 여전히 총소리가 들렸다프로토포포프의 반동 경찰인 파라오들이 인민의 승리를 알지 못하고 건물 지붕 위에서 여전히 총을 쏘고 있다고 사람들이 말했다밑에서 혁명 대중은 다락방가짜 창문교회 첨탑 등 차르의 무장 귀신들이 아직도 숨어있을 곳에 총을 쏘고 있었다오후 4시쯤 이들은 과거 국가기구의 마지막 잔당들이 피신해 있던 해군성을 점령했다혁명 조직들 그리고 즉흥적으로 조직된 그룹들이 도시 전역에서 반동분자들을 체포하고 있었다슐뤼쎌부르크 중노동 감옥은 총 한방 쏘지 않고 접수되었다더욱더 많은 수의 연대들이 수도와 주변 지역들에서 혁명에 가담하고 있었다.

 

모스크바의 함락은 페트로그라드 봉기의 메아리에 불과했다노동자와 병사들의 정서는 똑같았다다만 이 도시에서는 이 정서가 좀더 불명확하게 표현되었을 뿐이었다그리고 이 도시에서 부르주아 계급은 약간 왼쪽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었다그리고 페트로그라드보다 이곳에서 혁명조직들은 힘이 더 약했다네바강의 페트로그라드에서 혁명이 시작되었을 때 모스크바의 급진 지식인들은 회의를 소집하여 무엇을 할 것인지 논의했으나 결론을 내지 못했다. 2월 27일이 되어서야 모스크바의 공장과 작업장들이 파업을 시작했고 시위가 이어졌다장교들은 막사의 병사들에게 군중이 폭동을 일으키고 있으므로 진압해야 한다고 말했다쉬쉴린 병사는 이렇게 당시의 상황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때쯤 병사들은 군중 시위의 의미를 정반대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오후 2시경이 되자 여러 연대의 병사들이 시의회 건물에 도착하여 혁명에 동참하는 방법을 물었다다음날 파업은 확대되었다군중은 깃발을 들고 시의회로 몰려들었다무랄로프는 자동차 중대의 병사였다그는 거대한 덩치에 성격 좋고 용감한 고참 볼셰비키였으며 정원을 가꾸는 원예가였다그는 시의회에 처음으로 완벽하고 규율이 잡힌 부대를 데리고 왔다이 부대는 전신국을 비롯한 중요 거점들을 점령했다. 8개월 후 무랄로프는 모스크바 군사지구의 군대를 지휘하게 된다감옥의 문도 열렸다무랄로프는 석방된 정치범을 가득 실은 트럭을 몰고 있었다어느 경찰이 그에게 경례를 한 후 유대인들도 석방하는 것이 좋겠냐고 물었다중노동 감옥에서 바로 석방된 후 죄수복을 갈아입지도 않고 제르진스키(역자 주폴란드 사민당을 창당하고 러시아 혁명에 적극 가담한 혁명가, 소비에트 정부에서 혁명수호위원회 체카의 초대 위원장이었다이후 스탈린을 지지하였으며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는 소비에트가 이미 수립된 시의회 건물에서 연설했다. 3월 1일 사탕공장 노동자들이 깃발을 들고 포병 여단의 막사에 찾아와 병사들과 어울렸다포병 병사 도로페브에 의하면 이때 많은 노동자와 병사들이 기쁨을 주체하지 못해 울음을 터뜨렸다도시 중심부에서 저격병이 몇 번 사격을 가했으나 대체로 무장 충돌이나 사상자는 없었다페트로그라드가 모스크바를 대신해 미리 희생을 했기 때문이었다.

 

모스크바에서 이미 혁명이 완수된 3월 1일에 지방 도시들에서도 혁명이 시작되었다트베리에서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병사들의 막사까지 행진한 후 병사들과 함께 도시 거리를 행진했다이때 그들은 아직도 인터내셔널이 아닌 라 마르세예즈”(역자 주프랑스 혁명 당시의 대표적 혁명가요, 지금은 프랑스 국가가 되었다.)를 부르고 있었다니즈니-노브고로드에서는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시의회 건물 주위에 모였다이 건물은 대다수 도시에서 페트로그라드의 타우리데 궁전과 같이 혁명의 구심이 되었다시장이 연설한 후 노동자들은 붉은 깃발을 앞세우고 행진하였고 정치범들을 석방시켰다저녁이 되자 주둔군의 21개 부대 가운데 18개 부대가 자발적으로 혁명의 편으로 넘어갔다사마라와 사라토프에서는 집회가 열리고 노동자 소비에트가 수립되었다하리코프에서는 경찰청장이 기차역에서 혁명의 소식을 접한 후 자기의 객차에 올라서서 흥분된 군중에게 모자를 들어 있는 힘을 다해 이렇게 외쳤다: “혁명 만세만세!” 하리코프에서 예카테리노슬라프로 혁명 소식이 전해졌다시위대 맨 앞에는 경찰부청장이 큰 걸음으로 행진했다그리고 마치 성인들의 기일에 있는 대규모 행진 때처럼 기병들의 기다란 칼을 손에 쥐고 있었다왕정이 소생할 기미가 없다는 것이 최종적으로 명확해지자 이들은 조심스럽게 정부 건물에 걸려 있는 차르의 초상화를 내리고 다락방에 이것을 감추기 시작했다이런 종류의 일화들은 진짜이기도 하고 상상의 소산이기도 했는데 자유주의자들 사이에 널리 유포되었다이들은 아직도 혁명을 농담처럼 가볍게 다루었다그러나 노동자와 병사들의 태도는 전혀 달랐다프스코프오렐리빈스크펜자카잔차리친 그리고 다른 지방 도시들에 대해서는 [연대기]지가 3월 2일자로 이렇게 보도했다: “봉기 소식이 전해지자 사람들은 혁명에 가담했다.” 이 묘사는 간략했지만 당시의 상황을 올바로 말하고 있다.

 

혁명 소식은 근처 도시로부터 농촌 마을로 부분적으로는 행정당국에 의해 그러나 대개는 장터노동자휴가를 맡아 고향에 온 병사 등을 통해 조금씩 전해졌다농촌 마을들은 도시들보다 혁명을 더 천천히 그리고 덜 열성적으로 받아들였으나 도시에 못지 않게 깊게 혁명의 정서를 느끼고 있었다이들에게 혁명의 문제는 전쟁과 토지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었다.

 

페트로그라드가 혁명을 성취했다는 말은 전혀 과장이 아닐 것이다러시아의 나머지 도시들과 시골들은 혁명을 추종했다페트로그라드를 제외한 어떤 곳에서도 반동세력과의 충돌은 없었다구체제를 위해 싸움을 벌일 계층정당기관부대 등은 어디에도 없었다페트로그라드 주둔군이 기병 방위군으로 대체되었거나 이바노프가 전선에서 믿을만한 여단을 이 도시로 이동시켰다면 왕정은 무너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반동들은 때늦게 항변한다그러나 이 주장은 근거가 대단히 미약하다니콜라이 2세를 위해 전투를 벌일 준비가 된 여단이나 연대는 전선이고 후방이고 전혀 없었다.

 

혁명은 러시아 전체 인구의 약 75분의 1을 보유한 페트로그라드의 주도성과 역량으로 수행되었다이 가장 거대한 민주주의 행위가 대단히 비민주적 방식으로 성취되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나라 전체는 이미 성취된 결과를 받아들였다제헌의회가 소집될 전망이 있었다고 해도 사태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왜냐하면 전국 차원의 대의기구인 제헌의회를 소집하는 날짜와 방식은 페트로그라드 봉기의 승리가 탄생시킨 기관들에 의해 결정되었기 때문이었다이 사실은 일반적으로 그리고 특히 혁명 시대에 민주적 조직들의 기능에 대해 통찰력을 제공한다혁명은 언제나 민주주의적 법치에 대한 물신 숭배에 커다란 타격을 가했다그리고 혁명이 더 깊고더 대담하고더 민주적일수록 이 타격은 더욱 가차없이 가해졌다.

 

특히 프랑스 혁명과 관련하여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절대 왕정의 극단적인 권력집중화 현상이 이후 혁명의 수도 파리가 나라 전체를 위해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만들었다그러나 이 견해는 피상적이다혁명이 중앙집중적 경향을 보이는 것은 타도된 왕정을 모방하기 때문이 아니다혁명이 수립한 새로운 사회는 억누를 수 없는 요구들을 내세운다그리고 새로운 사회는 편협한 지역주의와 화해할 수 없다결국 새로운 사회의 요구들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중앙집중적 경향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수도는 나라 전체의 의지를 자신에게 집중시킨 것처럼 혁명에서도 절대적인 역할을 한다왜냐하면 수도가 가장 명확하고 철저하게 새로운 사회의 기본적인 경향들을 표현하기 때문이다지방은 자신의 요구가 이미 실현되었기 때문에 수도가 택한 조치들을 받아들일 뿐이다도시가 떠맡는 혁명 초기의 주도적 역할은 민주주의 원칙을 침해하지 않는다다만 민주주의를 역동적으로 실현시킬 따름이다거대한 혁명에서 이 역동적 사건의 리듬은 형식적 대의민주주의와 리듬을 같이 탄 적이 한번도 없다지방은 중심 도시의 활동을 뒤늦게 따라갈 뿐이다혁명은 번갯불과 같이 빨리 진행된다이 빠른 속도는 혁명적 의회주의를 크게 위협한다이 위기는 민주주의 방식으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다모든 진정한 혁명에서 전국적 대의 기구는 혁명의 역동성과 언제나 충돌했다혁명의 주요한 현장은 나라의 수도이다. 17세기 영국, 18세기 프랑스, 20세기 러시아 혁명들이 이 사실을 입증한다수도의 역할은 관료적 중앙집중주의의 전통이 아니라 주도적 혁명 계급의 상황에 의해 결정된다이 계급의 전위는 당연히 가장 중심적인 도시로 집중한다이 점은 부르주아 혁명이나 노동자 혁명이나 차이가 없다.

 

2월 혁명의 승리가 완전히 확인되었을 때 사람들은 희생자의 숫자를 계산하기 시작했다페트로그라드의 사상자는 1443명이었다이 가운데 869명은 군인이었으며 이들 가운데 60명은 장교였다제 1차 세계대전의 어느 전투와 비교해보아도 사상자의 숫자는 정말로 적다자유주의 언론은 2월 혁명을 무혈혁명이라고 선언했다애국주의 정당들이 기분 좋게 서로를 용서할 때에는 아무도 이 선언의 진위를 가리려고 애쓰지 않았다승리한 모든 것 심지어는 승리한 봉기조차 옹호하는 앨버트 토머스는 가장 밝고 휴일 같은 가장 피를 적게 흘린 러시아 혁명에 대해 글을 썼다물론 그는 이 혁명이 프랑스 증권시장의 손아귀에 계속 놀아나기를 희망했다그러나 그는 예외가 아니었다. 1789년 6월 27일 미라보는 이렇게 외쳤다: “이 위대한 혁명은 사악한 짓거리와 눈물이 없이 성공할 것이다얼마나 다행스러운가!...역사는 너무 오랫동안 포식동물의 행동을 모방했다....이제 우리가 진정 인간의 역사가 시작되기를 바라는 것도 당연하다.” 국민의회에서 삼부회가 열렸을 때 앨버트 토머스의 선배들은 이렇게 적었다: “혁명은 단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고 끝났다.” 그러나 그때는 혁명의 초기였다당연히 피가 흐르지 않았다그러나 러시아 2월은 그렇지 않았다그런데도 2월 무혈혁명의 신화는 끈질기게 지속되었다그래서 권력이 저절로 조화에 의해 자기들의 손아귀에 들어왔다고 치장하려는 자유부르주아의 필요에 부응했다.

 

2월 혁명은 무혈혁명이 결코 아니었다그러나 혁명 당시 뿐 아니라 혁명 후 첫 시기까지 희생자가 아주 적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러시아 대중이 수세기에 걸쳐 당해왔던 억압박해경멸사악한 공격에 대한 앙갚음이 혁명으로 나타났다이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물론 어떤 곳에서는 수병과 병사들이 가장 사악한 장교들에게 즉시 복수를 했다그러나 이런 행위의 발생 건수는 과거의 온갖 피비린내 나는 모욕들에 비하면 처음에는 아주 적었다지배계급은 자신이 생산하지 않은 좋은 것들을 항상 독차지해왔다이와 똑같이 이제 이들은 모든 것을 되돌리고 자기들이 성취하지 않은 혁명의 과실을 전부 차지하기를 원했다이 사실을 한참 나중에 확신한 후에야 대중은 지배계급에 대한 아량을 거두었다.

투간-바라노프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2월 혁명은 노동자들과 병사로 둔갑한 농민들에 의해 달성되었다그의 말은 맞다그러나 여전히 큰 문제가 하나 있다누가 이 혁명을 지도했는가누가 노동자들을 일어서게 만들었는가누가 병사들을 거리로 나오게 만들었는가혁명 승리 후 이 문제는 정당들 사이의 논쟁거리가 되었다그리고 이렇게 보편적 정식으로 아주 단순하게 정리되었다지도세력이 없이 혁명은 저절로 일어났다어제까지만 해도 구체제 속에서 평화롭게 통치하고판결을 내리고유죄 선고하고변호하고교역하고군대를 지휘하다가 오늘 신체제에서는 서둘러서 혁명과 화해한 신사양반들이 많다이들은 수많은 전문 정치인들 및 과거 혁명가들과 함께 이 자연발생적 혁명” 사상을 가장 열광적으로 환영했다특히 혁명이 일어나는 동안 잠자고 있었던 과거의 혁명가들은 다른 사람들도 자기들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고 싶어했다.

 

혁명이후 벌어진 내전에서 백군 사령관 데니킨 장군은 자기의 신기한 저서 [러시아 소요들의 역사]에서 2월 27일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이 결정적인 날에 지도자는 없었고 오직 혁명분자들만 있었다이들의 위협적인 경향은 혁명의 목표계획구호 등 어느 것도 표방하지 않았다.” 이 장군은 문필에 대한 열정이라도 있다그러나 박식하다는 역사학자 밀류코프는 혁명에 대한 탐구의 깊이가 이 장군에 비해 조금도 깊지 않다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이 자유주의 지도자는 혁명을 일으키려는 자들은 독일 총사령부와 관계를 맺고 있다고 선언한 바 있었다그러나 혁명이 자유주의자들을 권력에 앉히자 상황이 좀더 복잡해졌다이제 밀류코프의 임무는 독일 호엔촐레른 왕가가 혁명을 사주했다는 식으로 혁명을 비하하는 것에 있지 않았다반대로 혁명가들이 혁명을 지도하지 않았다고 말하여 이들의 명예를 박탈하는 것이 그의 새로운 임무가 되었다따라서 자연발생적이며 비인격적인 혁명 이론을 자유주의자들은 심혈을 기울여 짜내었다()자유주의자요 반()사회주의자인 대학강사 스탄케비치는 나중에 최고사령부의 인민위원이 되었다그의 생각을 밀류코프는 인정하고 공감하면서 이렇게 인용하고 있다: “대중은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내적인 부름에 따라 스스로 움직였다...어떤 구호를 가지고 병사들이 거리로 나섰는가이들이 페트로그라드를 정복하고 지방법원을 불태웠을 때 누가 이들을 지도했는가정치사상혁명 구호음모반란 등 어느 것도 이들을 움직이지 못했다혁명은 구체제의 모든 것을 갑자기 태워버린 자연발생적인 운동에 지나지 않았다.” 자연발생성은 여기서 거의 신비로운 색채를 띠고 있다.

 

그러나 스탄케비치는 동시에 가장 값어치 나가는 증언을 하고 있다: “1월말 나는 아주 은밀한 서클에서 케렌스키를 우연히 만났다....인민봉기의 가능성을 서클의 성원들은 모두 명확히 부정했다그리고 일단 불이 붙은 대중운동이 극좌의 방향으로 발전하여 전쟁 수행에 대단한 난관을 조성하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케렌스키 서클의 입장은 입헌민주당의 노선과 본질적으로 같았다따라서 이들이 혁명을 지도하지 않은 것은 확실했다.

 

사회혁명당 대표 젠지노프는 이렇게 말한다: “혁명은 천둥처럼 하늘에서 떨어졌다솔직히 말하자오랜 세월 혁명을 위해 일했으며 언제나 이것을 기다렸던 혁명가들에게도 혁명은 예상 밖으로 즐겁게 도래했다.”

 

멘셰비키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어느 부르주아 망명 언론은 2월 21일 전차에서 혁명정부의 장관이 될 스코벨레프를 만난 일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운동의 지도자 가운데 하나인 이 사회민주주의자는 혼란이 약탈로 변질되고 있기 때문에 군중을 진압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이렇게 말한 후 그의 패거리는 한달 후에 자기들이 혁명을 지도했다고 떠들었다.” 이 말에는 약간 진한 감정이 배어있는 것 같다그러나 근본적으로는 합법적 사회민주주의자인 멘셰비키들의 혁명에 대한 입장을 충분히 전달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나중에 볼셰비키가 된 사회혁명당 좌파의 최근 지도자 스티슬라프스키는 2월 봉기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 당 사람들이 마치 성경에 나오는 어리석은 처녀들처럼 졸고 있을 때 혁명은 갑자기 찾아왔다.” 이들이 처녀들과 얼마나 닮았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다만 이들이 모두 깊은 잠에 곯아떨어져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볼셰비키들은 어떠했는가이들의 상황은 앞에서 일부 확인되었다지하 볼셰비키 조직의 주요 지도자는 노동자 출신 쉴리아프니코프와 잘루츠키 그리고 학생 출신 몰로토프였다해외에 당분간 체류했고 레닌과 긴밀한 협력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쉴리아프니코프는 중앙위원회 정치국 3인 가운데 정치적으로 가장 성숙하고 활발했다그러나 그의 회고록은 혁명이 3인에게는 너무 벅찬 일이었음을 무엇보다 잘 증명한다혁명이 터질 마지막 순간까지 이들은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이 혁명의 징후이며 수많은 징후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했다이들은 무장봉기를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비보르그 노동자 지구의 지도자인 우리의 친구 카유로프는 딱 잘라 이렇게 주장한다: “당 중앙의 지도는 전혀 감지되지 않았다...페트로그라드 위원회는 이미 체포되었고 중앙위원회 의장 쉴리아프니코프 동지는 다음 날에 대해 어떤 지침도 제시할 수 없었다.”

 

지하조직들의 허약함은 경찰 습격의 직접적 결과였다전쟁 초에 만연했던 애국주의적 호전 분위기 속에 경찰의 공격은 파괴력이 컸다이 때문에 혁명조직을 포함하여 모든 조직들은 자신의 사회적 기반인 대중보다 사태에 뒤떨어졌다. 1917년 초 볼셰비키 지하조직은 탄압과 고립에서 회복되지 못했다반면 대중은 애국주의 히스테리에서 벗어나 혁명적 분노로 정서가 급격히 바뀌었다.

 

혁명 지도부의 당시 상황을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억할 것이 하나 있다가장 권위 있는 혁명가들인 좌익 정당 지도자들은 해외에 있었으며 이들 중 일부는 감옥과 유형지에 있었다정당이 구체제에 위험한 존재일수록 혁명 발발의 순간에 그 지도부는 더욱 잔인하게 제거된 것처럼 보였다인민주의자(나로드니키)들의 의원단 대표는 당원이 아닌 과격파 케렌스키였다사회혁명당의 공식 대표 체르노프는 해외에 있었다치헤이제와 스코벨레프는 멘셰비키 의원단의 대표였다멘셰비키 지도자 가운데 마르토프는 해외에 있었으며 단과 쩨레텔리는 유형지에 있었다혁명의 이력을 가진 상당수의 사회주의 지식인들은 인민주의와 멘셰비키 주위에 결집했다이들은 일종의 정치 지도부를 구성했으나 혁명의 승리 후에야 모습을 드러냈다볼셰비키는 의원단이 없었다. 차르 당국에 의해 혁명의 조직중심으로 인정된 5명의 노동자 출신 의원들은 전쟁 첫 몇 달 사이에 체포되었다레닌은 지노비예프와 함께 해외에 있었다카메네프와 당시 거의 알려지지 않은 실제적인 지도자 스베르들로프라이코프스탈린 역시 유형지에 있었다폴란드의 사회민주주의자 제르진스키는 나중에 볼셰비키가 되었는데 중노동형을 받고 있었다당시 우연히 남아있던 지도자들은 권위적인 상관들의 명령에 따라 무조건 움직이는데 익숙했던 인물들이었다따라서 자신들이 혁명 상황에서 지도적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다른 사람들도 이들과 같은 생각이었다.

 

볼셰비키당이 봉기 당시 권위 있는 지도부를 제대로 제공할 수 없었다면 다른 조직들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이 때문에 2월 혁명의 자연발생성에 대한 확신은 강화되었다그러나 이 확신은 심대한 오류이거나 최소한 무의미한 견해이다.

 

수도의 투쟁은 한두 시간이 아니라 무려 5일간 지속되었다지도자들은 이 운동을 막으려고 애썼다대중은 이에 대해 더 거센 압력을 가하며 앞으로 전진했다이들은 낡은 국가기구와 대항하고 있었다이 국가기구의 전통적 위용 뒤에는 막강한 권력이 존재한다고 생각되었다그리고 의회의 자유부르주아토지 및 도시 협회군산복합조직학계대학고도로 발전한 언론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중의 아래로부터의 공격에 애국주의적 저항을 감행한 두 개의 강력한 사회주의 정당 등이 버티고 있었다이들에 대해 대중은 저항했다봉기 대중에 가장 가까이 있던 조직은 볼셰비키당이었다그러나 지도부가 없었고 당원들은 흩어져 있었던 허약한 비합법 중핵 조직에 불과했다이 상황에서 전혀 예상 밖으로 혁명이 터졌다그런데 소위 지도자들이 보기에 이 운동은 가라앉고 있는 것 같았다그러나 바로 그 순간에 갑자기 다시 살아나 막강하게 위력을 발휘하면서 승리를 움켜쥐었다.

 

그렇다면 이 운동의 유례없는 공격력과 통제력은 도대체 어디서 나왔는가구체제에 대한 대중의 원한을 지적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원한 하나만으로는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전쟁 기간 내내 혁명적 인적 자원이 소모되었지만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들은 과거에 위대한 혁명을 경험했다지도부가 없었으며 상층부의 저항에 직면하였지만 노동자들은 공격력과 통제력으로 역관계를 상당한 근거를 가지고 계산하고 있었으며 전략적 시야를 견지하고 있었다.

 

전쟁 전야에 노동 계급의 혁명적 부위는 볼셰비키들을 따르고 있었으며 자신의 뒤를 따르는 대중을 지도하고 있었다전쟁의 시작과 함께 상황은 급격히 변했다노동자의 보수적 부위가 머리를 쳐들고 상당수의 대중을 애국주의 물결 속에 끌고 들어갔다혁명 분자들은 고립되었고 이들의 목소리는 억눌렸다그러나 전쟁 과정에서 처음에는 서서히 그러나 전선의 패배 이후 더 빨리 그리고 더 급진적으로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다적극적인 불만이 대중 전체를 사로잡았다물론 애국주의의 잔재가 남아있기는 했다그러나 지배계급의 잔머리 굴리고 겁먹은 그런 애국주의는 아니었다지배계급은 국내의 모든 문제들을 전쟁 승리 이후에 해결할 생각이었다그러나 전쟁 자체와 그 희생자그 공포그 치욕 등은 대중의 장년층 뿐 아니라 청년층도 구체제에 대항하게 만들었다그것도 새로운 예리함으로 대항하게 만들었다이들은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이 결론은 보편적이었으며 대중을 하나로 단결시켜 막강한 동력을 창조했다.

 

군대의 수는 불어나 수백만의 노동자와 농민을 대오로 끌어들였다누구든 자기 주변 사람들을 군대에서 볼 수 있었다아들남편형제친척 등전쟁 전처럼 군대가 인민과 단절된 상황은 끝났다사람들은 훨씬 더 자주 병사들을 만났다전선으로 배웅하고 휴가 나왔을 때는 함께 지냈다거리와 전차에서 전선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병원을 방문했다노동자 지구군대 막사전선 그리고 어느 정도 농촌 마을 역시 대화의 통로가 되었다노동자들은 병사들의 생각과 감정을 알았다이들은 수많은 대화를 나누었다전쟁전쟁으로 떼돈 번 사람들장군들정부, 차르와 황후 등이 대화의 소재였다병사들은 빌어먹을 전쟁을 되뇌었다노동자들은 빌어먹을 정부를 되뇌었다병사는 노동자에게 왜 수도에서 가만히 있기만 하느냐고 물었다그러면 노동자는 맨손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며 1905년에는 군대 때문에 발가락이 부러졌다고 말했다그러자 병사들은 함께 즉시 들고일어나면 된다고 생각했다그러자 노동자들은 그렇지모두 함께 즉시 들고일어나자고 외쳤다이런 종류의 대화는 전쟁 전에는 두 명 사이에 은밀히 진행되었다그러나 지금은 모든 곳에서 모든 경우에 그리고 최소한 노동자 지구에서는 거의 공개적으로 진행되었다.

 

차르의 정보부는 가끔 상황을 아주 올바르게 파악하고 있었다혁명이 발발하기 2주일 전 크레스티아니노프라는 이름의 어느 정보원은 교외의 노동자 지구를 가로지르는 전차에서 엿들은 대화를 보고했다대화를 나누는 병사가 소속된 연대는 작년 가을 노엘 공장의 노동자에게 발포하라는 명령을 거부했다대신 경찰에게 발포한 후 8명이 중노동형에 처해졌다이 대화는 아주 공개적으로 진행되었다왜냐하면 노동자 지구에서는 경찰과 첩자들이 신분을 드러내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복수를 할 것이다라고 병사가 결론을 내렸다.” 이 보고서는 계속된다: “어느 숙련 노동자가 그에게 대답했다: ‘그렇게 하려면 모두가 단결되도록 조직할 필요가 있다.’ 그러자 병사는 응답했다:‘걱정할 필요가 없다우리는 이미 오래 전에 조직을 시작했다....우리들은 이미 충분히 많은 피를 마셨다병사들이 참호에서 고통 당하는 동안 후방인 여기에서는 사람들이 배를 불리고 있다!’... 특별한 소요는 일어나지 않았다. 1917년 2월 10크레스티아니노프.” 비교할 바 없이 우수한 첩자의 서사시이다. “특별한 소요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소요는 그것도 곧 일어나게 된다이 전차 속의 대화는 소요사태가 제지될 수 없을 정도로 임박했음을 암시하고 있다.

 

봉기의 자연발생성에 대해 스티슬라프스키가 신기한 예를 들면서 설명한다: “2월 27일 장교연합이 혁명 직후 결성되어 볼린스키 연대를 거리로 나오도록 누가 먼저 유도했는지를 알아보려고 설문지 조사를 했다이때 결정적인 행동을 유도한 7명의 이름을 적은 7장의 답장을 접수했다주도력의 일부는 정말이지 병사들에게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또한 봉기를 주도한 인물이 시가전에서 사망하여 그의 이름이 영원히 묻혀 버렸을 수도 있다그러나 그의 이름이 없는 주도성은 여전히 역사적으로 중요하다그리고 더 중요한 일은 막사 담벼락 바깥에서 벌어졌다방위군 대대들의 봉기는 자유주의자들과 합법적 사회주의자들이 완전히 놀랄 정도로 터져 나왔다그러나 노동자들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노동자들의 봉기가 없었다면 볼린스키 연대는 거리로 나서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었다노동자들이 카자크 부대와 대치한 사건을 어느 변호사가 자기 사무실 창문에서 목격하여 의원에게 전화로 전했다그런데 이 일화는 노동자와 카자크 병사에게는 개인과 무관한 일회적 사건에 지나지 않았다즉 공장의 메뚜기가 막사에서 나온 메뚜기와 부딪친 것과 같았다그러나 노동자에게 윙크를 한 카자크 병사와 카자크 병사가 우호적으로 윙크를 보냈다고 즉시 판단한 노동자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군대와 인민이 상호 침투하는 과정은 계속 진행되었다노동자들은 군대의 체온이 결정적인 수위까지 올라가고 있다는 것을 즉시 알아 차렸다바로 이 인식이 승리를 확신한 대중의 공격력에 정복당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을 부여했다.

 

여기서 2월의 사건들을 관찰한 후 그 결과를 요약한 어느 자유주의 관료의 날카로운 시각을 소개해야한다: “운동이 자연발생적으로 시작되었고 병사들이 스스로 거리로 나섰다대개 이렇게 생각한다그러나 나는 이 생각에 전혀 동의할 수 없다결국 자연발생적으로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자연발생성 이론은 자연과학의 경우보다 사회과학에서 더 우스꽝스럽다어느 혁명지도자의 이름이 운동에 붙어있지 않다고 해서 이 운동이 개인들과 무관한 것은 결코 아니다다만 이름이 없을 뿐이다.” 이 시각은 밀류코프가 독일의 첩자니 러시아 인민의 자연발생성이니 하고 떠드는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이 진지하다이 관료는 전직 검사 자바스키인데 그는 상원의원의 신분으로 혁명을 맞이했다법정의 경험을 통해 그는 외국 첩자들의 명령이나 자연발생적 과정으로는 봉기가 일어나지는 않는다고 인식한 것 같다.

 

자바스키는 혁명 과정을 실험실의 열쇠구멍을 통해 보는 것처럼 통찰하게 만드는 두 사건을 소개하고 있다. 2월 24일에 금요일 지배계급 상층부의 어느 누구도 혁명이 임박했음을 감지하지 못했다그런데 어느 상원의원이 타고 있던 전차가 리테이니 가도에서 골목길로 들어서는 지점에서 갑자기 돌면서 차체가 심히 요동쳤다이 결과 창문들이 덜컹 소리를 낼 정도로 흔들거렸고 창문 하나는 깨져버렸다전차는 멈추어 섰다차장은 승객 전부에게 차에서 내리라고 말했다: “이 전차는 더 이상 갈 수 없습니다.” 그러자 승객들이 차장을 욕하면서 차에서 내렸다. “나는 아직도 승객의 욕에 대해 답변을 하지 못한 그 차장의 얼굴을 잊을 수 없다화가 났지만 말을 못하고 입을 꼭 다문 근엄한 표정이 꼭 늑대와 같았다.” 보이는 모든 곳에서 전차는 운행을 중지 당하고 있었다이 근엄한 차장은 이 자유주의 관료에게 늑대와 같이” 보였다그러나 그는 전쟁 중인 제국의 수도 페트로그라드에서 관료들을 싣고 가는 전차를 혼자서 정지시켜야 한다는 높은 의무감에 사로잡혀 있었음에 틀림없었다왕정의 전차를 이 전차는 더 이상 갈 수 없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정지시킨 것은 바로 이 차장들이었다그리고 이들은 관료들을 밖으로 끌어냈다그리고 바쁜 와중에 헌병 장군과 자유주의 상원의원을 구별하지도 않았다리테이니 가도의 차장은 역사의 의식적 요인이었다그리고 그를 미리 혁명의식으로 교육시키는 것이 필요했다.

 

지방법원이 불타고 있었다이때 자바스키와 같은 부류의 어느 자유주의 법률가가 한방 가득히 보관되어 있던 판결문과 공증 문서들이 불길로 사라지고 있다고 거리에서 말하면서 유감을 표시하기 시작했다그러자 노동자 옷을 입은 근엄한 모습의 노인이 화를 내면서 이렇게 반박했다: “당신들의 보관 문서가 없어도 우리는 집과 토지를 나누어 가질 수 있어.” 아마 이 일화는 문필의 방식으로 세련되게 다듬어졌을 것이다군중 속에는 이렇게 필요한 내용으로 반박할 수 있는 노인 노동자들이 많이 있었다이들은 지방법원의 화재와 아무런 관련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