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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애국주의로 한 걸음

전쟁과 파시즘에 대한 제4인터내셔널의 입장

  [역주]

우리 팔레스타인 친구들이 사회애국주의로 한 걸음 더 다가가며 명백하고도 극도로 위험한 양보를 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들 논의의 출발점이 사회애국주의 반대라고 한다. 따라서 우리는 실수가 아닌가?라는 (그들의) 문서에서 가장 문제적인 부분만 지적할 것이다.

지난 세계대전 발발 이후 이십여 년을 지나면서, 제국주의는 훨씬 더 폭압적으로 세계를 지배하고, 그 영향력이 평시에도 전시 못지않게 막강하며, 여러 가지 정치적 가면 아래에서 훨씬 더 반동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제국주의 전쟁에 대한 프롤레타리아 패배주의정책[‘Defeatism’: 1차 대전 무렵 레닌 등 노동계급 혁명가들이 수립한 정책. 제국주의와 제국주의의 전쟁에서, 진정한 적은 상대 국가가 아니라 제국주의 금융자본 자신의 이익을 위해 노동자들을 대포밥으로 내모는 자국의 부르주아 정부라는 것, 그리하여, 제국주의 각 나라의 노동계급은 주적은 국내에 있다라는 구호 아래에서 전쟁을 계급내전으로 전환시키고, 자국의 패배와 혁명을 위해 투쟁해야 한다는 노선. 이하 자국 패배주의로 표기]의 모든 원칙들이 오늘날에도 전적으로 타당하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출발점이며, 뒤따르는 모든 결론은 여기에 종속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해당 문서의 저자들은 우리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더 나아가 두 가지 측면에서 지난 전쟁과 다가올 전쟁이 질적으로 다르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먼저, 지난 전쟁 참전국이 전부 제국주의 국가라고 단정 짓는다. 그리고 세르비아는 그 역할이 너무 미미해서 참전국 명단에 이름을 올릴 수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식민지와 중국의 참전 사실을 잊었다.) 그들은 세르비아보다 훨씬 존재감이 큰 소련이 다가올 전쟁에 참전할 것이라고 확언한다. [제국주의 국가들만 참전한 1차 세계대전과 소련도 참전할 2차 세계대전은 질적으로 다르기에 후자의 경우 혁명적 패배주의를 적용할 수 없다는 주장. 하지만 중국과 식민지 그리고 세르비아가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사실을 외면하고 1차 세계대전을 촉발시킨 세르비아의 역할을 축소한 억지.]

여기까지 읽은 독자는 편지 저자의 다음 논의의 초점은 소련 참전문제일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 문제를 빠르게 내려놓고, 그것을 파시즘의 세계적 위협이라는 주제의 배경으로 격하시킨다. 그들은 지난 전쟁의 반동 군주정을 호전적인 역사적 특성이 부재한 (구시대의) 잔재였던 반면에 오늘날의 파시즘은 모든 문명 세계에 대한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위협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반파시즘) 투쟁이 전시뿐 아니라 평시에도 국제 프롤레타리아의 과제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 대목에 이르러) 한층 더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혁명 과제를 축소시키는 것, (투쟁 목표를) 제국주의가 아닌 제국주의의 정치적 가면 중 하나인 파시즘으로 바꿔치는 것은 코민테른과 이른바 민주주의 나라사회애국주의자들의 전매특허이기 때문이다.

먼저, 전시 정책의 변화를 강제하는 새로운 역사적 요인인 소련과 파시즘은 반드시 같은 하나의 방향으로 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자. 스탈린과 히틀러 혹은 스탈린과 무솔리니는 전시이건 평시이건 같은 편이 될 가능성이 있다. 스탈린은 두 파시즘 정부 모두와, 혹은 둘 중 하나와 협정을 체결하여 짧고 불안정한 중립을 얻어낼 수도 있다. 그러나 무슨 이유 때문인지, 우리 저자들은 이러한 돌발적 가능성을 간과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모든 가능성에 대비하기 위해 원칙적 입장으로 무장해야 한다고 정당하게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팔레스타인 동지들의 논증에서 소련 문제는 큰 의미 없이 다뤄지고 있다. 그들은 세계 노동계급과 피억압민족에 대한 즉각적 위협인 파시즘에 집중한다. 그들은 자국 패배주의정책이 파시스트 국가와 전쟁할 수도 있는 나라에는 적용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하지만, 이러한 논증은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시켜 파시스트 국가와 민주/()민주 국가가 마치 화해할 수 없는 적대 진영인 것처럼 묘사한다. 이러한 편리한구분을 보증할 근거는 사실 그 어디에도 없다. 독일과 이탈리아는 지난 전쟁에서 그랬듯, 다가오는 전쟁에서도 서로 적대할 수 있다. 이러한 가능성은 결코 배제될 수 없다. 이럴 경우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실제로, 국가를 순전히 정치적 특성에 따라 구분하는 일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과연 폴란드, 루마니아, 오늘날의 체코슬로바키아, 그 밖의 이류, 삼류 열강은 어떻게 분류할 것인가? [1차 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는 독일과 전쟁을 벌였다. 이 글이 쓰인 1938년과 2차 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는 독일의 동맹이었다. 동맹국과 적대국이 순식간에 뒤바뀌는 유동적인 현실을 지적한 것이다.]

이 문서 저자들의 주요 경향은 다음과 같다. ‘주요 파시스트 국가들(독일, 이탈리아)에서는 자국 패배주의노선을 견지하는 것이 의무인 반면, 주요 파시스트 국가들과 전쟁 중인 나라에서는, 심지어 그 국가에 민주주의가 있는지 없는지 의심스러울지라도, 자국 패배주의를 포기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이 문서의 대략적 주제이다. 이것은 완전히 잘못되었고 명백한 사회애국주의이다.

현재 망명 중인 모든 독일 사민주의 지도자들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자국 패배주의자를 자처한다. 히틀러가 그들의 영향력과 수입을 빼앗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민주주의적패배주의나 반파시즘패배주의는 진보적 성격이 거의 없다. 그것은 혁명 투쟁에 희망을 거는 것이 아니라, 프랑스나 다른 제국주의 국가의 해방자로서의 역할에 희망을 거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문서의 저자들은 유감스럽게도 자신들의 의지에 명백히 반하는, 바로 그 방향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애당초, 우리가 보기에, “패배를 이끌어내기 위한 특별하고도 독립적인 행동체계라는, ‘자국 패배주의에 대한 그들의 정의는 지나치게 모호하고 불분명하다. 아니, 그들의 정의는 틀렸다. 패배주의는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정책으로, 전시에 특정 제국주의 나라의 국내에서 주적을 찾는 것이다. 반면 애국주의는 자국 바깥에서 주적을 찾는다. 자국 패배주의 사상이 현실에서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자국 부르주아에 맞서 비타협적으로 싸울 것, 혁명 투쟁으로 자국 정부가 패배할 수 있다는 사실에 유념치 말 것, 그리고 혁명 운동의 관점에서 볼 때, 자국 정부의 패배는 차악이다.’ 레닌은 이외에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고, 그러길 바라지도 않았다. 따라서 자국 패배주의에 대해 우리는 더 이상 왈가왈부할 권리가 없다. 파시스트 국가가 아닌 나라에서 혁명적 패배주의를 포기해야 하는가?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혁명적 국제주의의 생사가 여기에 달렸다.

예를 들어, 36천만 인도인이 자신의 해방을 위해 이 전쟁을 이용하면 안 되는 것인가? 전쟁 중에 일어난 인도 인민의 봉기는 의심의 여지없이 영국을 패배로 강하게 몰아칠 것이다. 더 나아가, 인도에서 봉기가 일어났을 때, 영국 노동자들은 (반대를 정당화하는 온갖 근거들에도 불구하고) 이를 지지해야 하는가? 아니면 반대로 파시즘에 대항한영국 제국주의의 성공적인 투쟁을 위해 인도 인민을 진정시키고 그들이 얌전해지도록 구슬려야 하는가? 어느 쪽인가?

“(내일은 또 다를 수 있으나) 현재로선 독일이나 이탈리아에 대한 승리가 곧 파시즘의 몰락이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내일은 또 다를 수 있으나) 현재로선이란 구절에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다. 무엇을 전달하기 위해 위와 같이 말했는지를 저자들은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들의 주장이, 본인들이 봐도 일회적이고 불안정한데다 불확실한 것이기에, ‘내일에는 쓸모가 없어질 것임을 미리 암시한다. 그들은 자본주의 쇠퇴기에 정치체제의 급격한/부분적 변화가, 사회적 토대를 바꾸지도 자본주의의 쇠퇴를 억제하지도 못하지만, 상당히 갑작스럽고 빈번하게 일어난다는 사실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전쟁 같은 근본적 문제에서 우리의 정책은 정치체제의 형태 변화에 주목할 것인가? 아니면 모든 형태의 정치체제가 공유하는, 그리고 그들 모두를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에 맞서 단결시키는 제국주의의 사회적 기초에 주목할 것인가? 전쟁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근본적 전략의 문제이다. 그것은 일회적이고 전술적 고려와 추측에 종속되지 않는다.

그러나 순전히 일화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위에서 인용한 구절에 표현된 그 문서의 사상은 틀렸다. 히틀러와 무솔리니 군대에 대한 승리는 단지 독일과 이탈리아의 군사적 패배를 의미할 뿐, 파시즘의 붕괴를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 저자들은 파시즘이 부패하는 자본주의의 필연적인 산물이고,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제때 대체하지 못한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렇다면 부패한 민주주의 국가들이 독일과 이탈리아를 상대로 군사적 승리를 거둔다 한들 어떻게 파시즘이, 아주 잠깐 동안이더라도, 청산될 수 있다는 말인가? 만약 (지난 전쟁에서 본 것과 유사한) 새로운 승리와 약간 낡은 ‘(이탈리아가 빠진) 협상국이 상술한 기적을 일으킬 것이라 믿을 만한, 동시에 사회-역사적 법칙에 정면으로 반하는, 근거가 있다면, (우리는) 그 승리를 소망만 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해야 할 것이다. 이는 영국과 프랑스의 사회애국주의자들이 올바르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25년 전보다도 더 올바르지 않고,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훨씬 더 반동적이고 더 해로운 역할을 하고 있다.

만약 독일과 이탈리아의 패배와 혁명운동으로 파시즘을 무너뜨릴 기회가 생긴다면 (틀림없이 그럴 터인데), 프랑스 노동계급의 정치적 지지로 일궈낸 프랑스의 승리는 곧바로, 무너져가는 이른바 민주주의 국가에 최후의 일격을 가할 기회가 될 것이다. 특히 그 승리가 프랑스 노동계급의 정치적 지지를 획득한다면 말이다. 굳건한 영국과 프랑스 제국주의는 즉, 군부-파시스트 반동이 승리한 프랑스 그리고 인도를 포함한 여러 식민지를 강고히 지배하는 영국은, 독일과 이탈리아의 사악하기 짝이 없는 반동을 지원할 것이다. 승리의 순간에, 프랑스와 영국은 히틀러와 무솔리니를 구하기 위해 모든 것을 다할 것이고, 이를 통해 혼란을 수습하려 할 것이다. 물론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이 모든 것을 바로잡을 수 있다. 그러나 그 혁명을 도와야지 방해해서는 안 된다. 독일과 전쟁을 치르는 나라에서 혁명적 국제주의 원칙을 행동으로 실천하지 않으면서 독일 혁명을 돕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문서의 저자들은 추상적 평화주의에 단호히 반대하는데, 이 점은 물론 옳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가 스스로 일으킨 전쟁이 아닌, 자신의 철천지원수 제국주의 정부가 일으킨 전쟁으로 위대한 역사적 과업을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다. 그러나 어느 누군가는 이 문서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도 있다: ‘체코슬로바키아 위기 때 프랑스나 영국의 우리 동지들은 자국 부르주아지의 군사적 개입을 요구하고 그럼으로써 전쟁, 그것도 그냥 전쟁이나 혁명전쟁이 아닌 제국주의 전쟁에 대한 책임을 떠맡아야 했다.’ 이 문서는, ‘히틀러가 끔찍한 위협으로 대두되기 전인 1933년에 소련이 히틀러를 무찔러야 했다(1933321일자 반대파 회보).’는 트로츠키의 말을 인용한다. 그러나 이 말은 노동자국가의 진정한 혁명 정부가 마땅히 그렇게 행동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같은 요구를 제국주의 국가의 정부에 들이미는 것이 용납될 수 있는가?

우리는 스스로를 평화의 정권이라 부르는 정부에 대한 그 어떤 책임도 지지 않는다. ‘평화를 위해서라면 뭐든지!’는 우리 구호가 아니며, 우리들 중 그 어떤 지부도 그런 구호를 내걸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평화에 대한 것 이상으로 그들의 전쟁에는 더더욱 책임을 질 수 없다. 우리의 입장이 더 단호하고 확고하며 비타협적일수록, 지금 당장은 아닐지라도, 전쟁 중에 대중들은 우리를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이다.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롤레타리아가 자국 정부와 정부의 항복에 맞서 평화와 패배주의의 구호 하에 투쟁할 수 있었을까?”라고, 매우 구체적 문제를 매우 추상적 형태로 제기하고 있다. 당시에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고(그리고 전쟁이 뒤따르지 않을 것이 명백했기에) ‘자국 패배주의가 제기될 여지가 전혀 없었다. 전반적 혼란과 분노로 얼룩진 결정적인 24시간 동안 체코슬로바키아 프롤레타리아트는 항복한정부를 전복하고 권력을 장악할 충분한 기회가 있었다. 이를 달성하려면 혁명적 지도부가 필요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권력을 잡은 프롤레타리아는 히틀러에 맞서 필사적으로 저항했을 것이다. 의심의 여지없이 이는 프랑스와 다른 나라 노동인민의 엄청난 호응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그 다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에 대해서는 더 이상 상상하지 않기로 하자. 그러나 어찌 되었건 오늘날의 세계 노동계급에게 훨씬 더 유리한 정세가 조성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평화주의자가 아니다. 우리는 혁명전쟁을 지지한다. 그러나 체코 노동계급은 파시즘에 대항하는전쟁의 지휘권을 의원 양반들에게 위임할 권리가 조금도 없었다. 자본가들은 불과 며칠 만에, 아무 탈 없이 파시스트나 유사 파시스트로 전향했다. 지배계급의 이러한 변신과 전향은 전쟁 시기에 소위 민주주의 국가모두의 필연적 모습이다. 이 때문에 프롤레타리아가 파시즘 지지파시즘에 맞서같은 형식적이고 불안정한 말에 근거해 노선을 결정하면 자멸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레닌이 열거한, ‘패배주의를 거부할 수 있는 세 가지 조건 중 세 번째 조건 , “전쟁 중인 모든 나라의 혁명운동이 상호 지원할 가능성이 오늘날에는 낮을 것이라는 이 문서의 핵심 내용을 오류라고 간주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저자들이 지금까지 보고된 전체주의 정부의 전능함에 압도되었음이 명백하다. 사실 독일과 이탈리아 노동자를 무기력하게 만든 것은, 파시스트 경찰의 전능함이 아니라, 강령의 부재와 낡은 강령과 구호에 대한 불신 그리고 제2, 3인터내셔널의 매춘 행위이다. 오로지 이러한 정치적 쇠퇴와 환멸의 분위기 속에서 경찰기구가 그러한 기적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인데, 안타깝게도, 그것이 우리 동지들 중 몇몇의 마음에 과장된 인상을 심어 주었다.

당연히 노동계급 조직이 아직 파괴되지 않은 나라에서 투쟁을 시작하는 것이 더 쉽다. 그러나 투쟁은 오늘날까지 국내의 주적에 맞서면서 시작되어야 한다. 프랑스의 선진 노동자들이 독일 노동자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여러분이 파시즘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것을 안다. 스스로 벗어날 능력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 정부를 도와 여러분의 히틀러를 물리치도록 할 것이다. , 독일을 새로운 베르사유 조약의 올가미로 옭아매 질식시키고 나서그리고 나서 우리는 당신들과 함께 사회주의를 건설할 것이다.” 이런 제안에 독일인들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미안하지만 우리는 지난 전쟁 때 사회애국주의자들의 이러한 노래를 질리도록 들었고, 그 끝이 어땠는지도 잘 알고 있다.”라고. 이래서는 안 된다. 이런 방식으로는 혼수상태에 빠진 독일 노동자들을 깨어나게 할 수 없다. 우리는 그들에게, 전쟁 중인 모든 국가에서 각자의 제국주의 정부에 맞서 동시에 투쟁하는 것이 혁명 정치라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 물론 이 동시성을 기계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혁명의 성공은, 어디에서 제일 먼저 터져 나오건, 모든 나라에서 저항과 반란의 정신을 고양시킬 것이다. 호엔촐레른 군국주의는 10월 혁명에 의해 완전히 전복되었다. 어느 선진국 한 나라에서 성공한 사회주의 혁명이, 제국주의 민주국가들모두의 군사력을 합한 것보다 히틀러와 무솔리니에게 훨씬 더 큰 위협이다.

부르주아와 그들의 전쟁 정책이 초래한 모든 위협을 회피하는, 도저히 해낼 수 없는 일을 프롤레타리아에게 맡기는 정책은 허망하고, 기만적이며, 치명적으로 위험하다. “하지만 파시즘이 승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소련이 위협받고 있다!”, “하지만 히틀러의 침공은 노동자들의 학살을 불러올 것이다!” 등등 핑계는 끝도 없이 많다. 물론 우리가 직면한 위험은 크다. 매우 크다. 이 모든 위험을 회피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심지어 예견하는 것조차 어렵다. 그때그때의 일회적 위험을 좇느라, 프롤레타리아가 자기 기본강령의 선명성과 비타협성을 포기한다면, 정치적으로 파산하고 말 것이다. 전시에 전선은 시시각각 변화할 것이고, 군사적 승패가 교차할 것이며, 정치체제도 뒤바뀔 것이다. 노동자들은 역사적 과정을 관망하지 않고 계급투쟁에 직접 개입할 때에만, 이 거대한 혼란의 가장 큰 수혜자가 될 수 있다. 오로지 상승하는 노동계급의 국제적 공세만이 일회적 위험뿐 아니라 그것을 야기한 계급사회도 끝장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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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on Trotsky: A Step Towards Social Patriotism (May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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