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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러시아 사회구성체에 대하여

재발간에 붙이는 저자 서문

 

<평가와 전망>

 

제1장 러시아 역사발전의 특수성

제2장 도시들과 자본

제3장 1789-1948-1905년의 혁명들

제4장 혁명과 프롤레타리아

제5장 프롤레타리아 권력과 농민

제6장 프롤레타리아 정권

제7장 사회주의의 제반 선행조건들

제8장 러시아에서의 노동자 정부와 사회주의

제9장 유럽과 혁명

제10장 권력을 위한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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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사회구성체에 대하여

트로츠키의 『러시아 혁명사』(1931) 제1장 「러시아 발전의 특수성」

  러시아 역사의 가장 불변적이며 가장 본질적인 특징은 이 나라의 완만한 발전 속도에 있으며, 따라서 그 결과로서 후진적인 경제, 원시적인 사회 구조, 낮은 문화 수준 등을 들 수 있다. 동쪽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아시아계 이주민들에게 무방비 상태로 열려 있던, 이 광활하고 거친 평원의 주민들은 그들이 갖고 있는 자연적 조건들 자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오랜 기간 동안 정체될 수밖에 없었다. 유목민들과의 싸움은 거의 17세기말까지 계속되었다. 겨울에는 혹한을, 그리고 여름에는 가뭄을 몰고 오는 바람에 대한 싸움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모든 발전의 기반인 농업은 원시적인 조방적(extensive:단위 면적의 땅에서의 생산량이 적은, 거친 경작 형태의 원시적 영농 방식─역주) 방법을 통해서 발전했다. 즉, 북부 지방에서는 전적으로 산림을 벌채하거나 태우는 방식이었으며, 남부 지방에서는 개간되지 않은 초원들을 마음대로 개척하는 방식이었다. 자연의 정복은 밀도 있게 이루어졌던 것이 아니라 단지 확산적으로만 이루어졌던 것이다.

  서구의 야만인들이 로마 문명의 폐허 위에 정착해서는 그토록 많은 고대의 자산들을 자신들의 국가 건설을 위한 재료로 활용하고 있는 동안, 동구의 슬라브인들은 그들의 삭막한 초원 위에서 어떠한 과거의 문화적 유산도 물려받지 못한 채로 남아 있었다. 이전에 그 초원에 살고 있던 민족들의 수준은 그들 자신의 수준보다도 훨씬 더 낮았던 것이었다. 곧 자신들의 자연적 경계선에 봉착하게 된 서구의 민족들은 경제적 및 문화적 중심지인 상업 도시들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동쪽 평원의 주민들은 협소함을 느낄 때마다 산림을 더욱 깊숙이 뚫고 들어가거나 변방에 위치한 초원 쪽으로 산개해 갔다. 서구에서는 농민들 중 가장 진취적이고 활동적인 분자들은 수공업자와 상인, 그리고 자치 도시의 시민들이 되었다. 동구에서는, 적극적이고 대담한 자들 중의 일부는 상인이 되었지만, 그러나 대다수는 코자크 기병이나 국경수비대원 흑은 변방의 개척민이 되었다. 사회분화 과정은 서구에서는 가속화되었으나, 동구에서는 지체되었으며 또한 이 같은 영토 팽창 과정을 통해서 희석화되었다. 뽀뜨르 1세(대제)와 동시대인인 비꼬(Vico:18세기 초에 활약한 이태리의 역사가─역주)는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러시아의 짜르는 비록 그리스도인이지만, 나태한 정신을 지닌 국민을 통치하고 있다.” 러시아인들의 “나태한 정신”은 경제 발전 속도의 정체성, 계급관계의 무정형성, 내부 역사의 빈약함 등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집트, 인도, 중국의 고대 문명들은 충분히 자율적인 성격을 지녔었으며, 또한 저급한 생산력에도 불구하고 이들 나라의 수공예품들이 보여 주고 있는 것처럼 세부까지도 완결된 형태로 사회관계들을 정립시킬 수 있는 충분한 시간적 지속성을 지녔었다. 러시아는 비단 지정학적으로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그리고 역사적으로도 유럽과 아시아의 중간에 낀 상황이었다. 러시아는 서쪽의 유럽과도 차이가 있었으나 또한 동쪽의 아시아와도 달랐다 :러시아는 상이한 시기마다, 상이한 양상으로 둘 중의 어느 한편에 접근하곤 했던 것이다. 아시아로부터 밀려들어온 따따르인(Tatar:러시아에서는 몽고인을 이렇게 부른다─역주)에 의한 오랜 질곡은 러시아의 국가 구조에 중요한 요소로 남게 되었다. 서구는 이보다 훨씬 더 위협적인 적이었으나 그와 동시에 일종의 스승이기도 했다. 러시아는 자신의 형성 과정에서 동양을 모델로 삼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언제나 서구로부터 가해지는 군사적 및 경제적 압력에 대처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과거에는 역사가들이 러시아에는 봉건 시대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으나, 최근의 연구들은 오히려 봉건 시대가 존재했음을 명확히 입증해 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러시아에서의 봉긴 시대의 본질적인 요소들은 서구의 그것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사실만 보더라도, 즉 러시아에서의 봉건 시대의 존재를 사실적으로 입증하는데 그토록 기나긴 과학적 논쟁들이 필요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러시아의 봉건제는 불완전한 형태였으며, 무정형적이었고 또한 문화적 유산들을 거의 남겨 놓지 못했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후진국은 선진국들이 성취한 물질적 및 이념적 진보에 동화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것은 후진국이 선진국들을 노예처럼 졸졸 따라가는 것, 즉 선진국들이 과거에 밟아 온 모든 단계들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비꼬 및 최근 그의 계승자들의 이론인 역사발전의 순환에 관한 이론은 전자본주의적인 고대 문화들이 보여 주고 있는 반복적인 현상에 대한 관찰에 기초하고 있다. 또한 부분적으로는 자본주의 발전의 초기 경험들에도 기초하고 있다. 항상 새로운 문명 근원지에서 제반 문화적 단계들이 일정하게 반복되는 것은 실제로는 그러한 역사 과정 전체의 지역적 및 시대적 특수성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바로 그러한 조건들에 대한 획기적인 진보를 의미한다. 자본주의는 인류의 발전의 보편성과 영속성을 마련해 주었으며, 또한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을 실현시켰다고 볼 수 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자본주의 발전의 여러 형태들이 서로 다른 나라들에서 반복될 가능성이 배제되는 것이다. 후진국은 비록 선진국들을 따라가도록 끔 강요당할 수밖에 없다 할지라도 선진국들의 과거의 발전과 동일한 절차를 밟는 것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후진적인 상황이 갖는 특권은-그 같은 특권은 존재하게 마련인데─그 나라의 국민이 어떤 일련의 중간적인 단계들을 건너뛴 채로 선진국들에 의해서 이미 마련된 모든 발전의 성과들을 특정한 시기를 기점으로 해서 수용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한다면, 후진국은 그러한 방식으로 선진국의 발전을 수용할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오늘날 미개인들이 그들의 활을 버리고 총을 잡는다면, 그것은 단숨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즉, 그들은 활로부터 총으로 발전하기까지 필요했던 모든 과거의 역사들을 단번에 뛰어넘는 것이다. 아메리카를 식민지로 개척한 유럽인들은 거기서 역사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오늘날 독일이나 미국이 경제적으로 영국을 앞질렀다면, 그것은 바로 그 나라들의 자본주의가 뒤늦게 출발한 결과로써 그렇게 된 것이다. 반면, 영국의 석탄 산업의 고질적인 혼돈 상태는─맥도널드(MacDonald:영국 노동당의 지도자로서 1924, 1929~35년에 걸쳐 수상을 역임하였다─역주) 및 그의 추종자들의 소심한 머리가 그러하듯이─영국이 너무 오랫동안 자본주의의 패권을 쥐고 있던 대가이다. 역사적으로 후진적인 나라의 발전은 필연적으로 역사 발전 과정의 다양한 국면들의 독특한 결합으로 귀결된다. 후진적인 나라에서의 발전의 전체적인 모습은 불규칙하고 복합적이며 결합적인 특징을 띠는 것이다. 물론, 중간 단계들을 건너뛸 수 있는 가능성은 결코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한 가능성은 궁극적으로 그 나라의 경제적 및 문화적 수용 능력에 따라 결정된다. 더구나 후진국은, 전적으로 외부로부터 도입한 발전의 성과들을 자신의 낮은 문화적 수준과 맞추기 위해서, 종종 빌려 온 것들을 하향 조정하게 되는 것이다. 이 경우, 그러한 동화과정 자체도 일종의 모순적인 성격을 띠게 되는 것이다. 뾰뜨르 1세의 치하에서 특히 군사 및 공업에 관한 서구의 기술과 지식의 부분적인 도입이 농노제를-노동의 조직화의 기본 형태로서─더욱 강화시키게 된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인 것이다. 유럽식에 의거한 군대의 무장과 유럽으로부터의 차관은-양자 모두 보다 발전된 문화의 산물들임이 틀림없다─제정체제의 강화로 귀결되었으며, 이러한 제정 체제의 강화는 역으로 러시아의 발전을 지체시켰던 것이다.

  역사의 이성적인 법칙은 현학적인 도식들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역사 전개 과정의 가장 일반적인 법칙인 발전 리듬의 불균등성은 후진국들의 운명 속에서 가장 첨예하게 그리고 가장 복합적으로 드러난다. 외부적인 압력의 가혹한 채찍질 밑에서 후진적인 문화는 비약적인 발전을 하도록 끔 강요당하는 것이다. 발전 리듬의 불균등성이라는 이러한 보편적인 법칙으로부터 또 다른 법칙이 도출되는데, 적당한 명칭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결합 발전의 법칙(the law of combined development)이라고 부르겠다. 다양한 단계들의 응축, 상이한 국면들의 융합, 낡은 형태들과 보다 현대적인 형태들의 아말감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말이다. 물론, 이 법칙이 내포하고 있는 물질적인 내용 전체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러시아의 역사를 이해할 수 없다. 또한, 일반적으로 말해서, 뒤늦게 문명의 대열에 끌려들어온 모든 나라들의 역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보다 부강한 유럽의 압력 아래서 러시아 국가는 국가 자원 가운데-서구와 비교해 볼 때-상대적으로 훨씬 더 많은 부분을 소모해 왔다. 그리고 그것은 민중을 더욱 가중된 궁핍 상태로 몰아넣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유산계급의 토대까지도 약화시켰다. 그러나 또한 유산계급의 지지를 필요로 하는 국가는 법적 강제 조치 등을 통해서 그들의 성장을 촉진시켰다. 그 결과, 특권화되고 관료화되어 버린 이 계급은 결코 완전한 성장을 이룩할 수 없었으며, 러시아 국가는 아시아의 전제 군주제와 보다 가까운 모습을 지닐 수밖에 없게 되었다.

  모스크바 공국의 짜르들이 16세기 초부터 공식적으로 채택한 비잔틴적인 전제 군주제는 궁정 귀족들(dvoryane)의 도움을 통해서 봉건적 대귀족들(boyare)을 굴복시켰으며, 농민을 궁정 귀족들에게 농노로 안겨 줌으로써 이들의 충성심을 보장받았다. 그리고 이러한 기반 위에서 비잔틴적 전제 군주제는 뻬제르부르끄(peterburg) 시대로, 즉 절대군주제로 전환한 것이었다. 이러한 역사 전개과정의 후진성은 바로 다음과 같은 사실로부터 충분히 드러나고 있다. 즉, 16세기 말 무렵부터 시작된 농노제는 17세기에 비로소 정착되었으며, 농노제가 가장 번창한 것은 18세기였다. 그리고 1861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법적으로 폐지되었다.

  전제 군주제의 형성 과정에서 귀족 다음으로 무시 못할 역할을 한 것은 사제 계급이었다. 그러나 사제들은 오직 국가에 대한 일종의 종복으로서의 역할만을 담당했을 뿐이다. 러시아에서 교회는 서구의 가톨릭 교회가 도달했던 지배적인 위치로까지 상승한 적이 결코 없었다. 러시아 정교회는 절대 군주들에 대한 영적인 신하의 역할에 만족했으며, 또한 그러한 역할로부터 자신의 겸손에 대한 보상을 찾았던 것이다. 주교와 대주교들은 단지 세속적인 권력 체계내의 하급자로서만 어느 정도 권력을 향유했다. 짜르가 새로 바뀔 때마다 교회의 총대주교도 바뀌곤 했다. 수도가 뻬제르부르끄로 이전되었을 때, 국가에 대한 교회의 종속은 훨씬 더 굴종적인 것으로 되어 갔다. 요컨대, 약 20만 명 정도의 세속 사제와 수사들이 일종의 종교 경찰의 자격으로서 관료 집단의 일부를 구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대가로서 신앙의 문제에 관한 정교회의 독점권과 재산 및 수입 등이 보다 일반적인 세속 경찰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후진적인 나라의 메시아 사상이었던 슬라브파의 교리는, 러시아 민중과 그들의 교회는 근원적으로 민주주의적인 반면 지배계급의 러시아는 뽀뜨르 1세에 의해서 이식된 독일식의 관료 체제라는 생각에 근거해서 자신의 철학 체계를 세웠다. 이와 유사한 주제를 놓고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논평했던 것이다. “그러나, 마치 후진적인 노예들이 그들에게 필수 불가결한 노예 수업을 받는 데에 보다 개화된 다른 노예들의 도움을 결코 필요로 하지 않는 양, 튜튼족(원래 게르만 민족의 한 일파로서 이 문장에서는 독일인을 지칭함─역주)의 바보들은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 :프러시아의 절대주의적 ‘계몽 군주’로서, 여기서는 러시아의 뽀뜨르 1세 역시 절대주의적 ‘계몽 군주’였음을 참조할 것─역주)의 전제 정치를 프랑스인들의 탓으로 돌렸다.” 이 짤막한 논평은 슬라브파의 낡은 철학의 정곡을 찌르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인종차별주의자”들이 내세우는 최신의 학설들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는 것이다.

  비단 봉건 러시아뿐만 아니라 고대 러시아 역사 전체의 특징이기도 한 문화의 빈약함은 전형적인 중세 도시가 보여 주는 것과 같은 상업과 수공업의 중심지로서의 도시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너무나 명확하게 드러난다. 러시아의 수공업은 농업으로부터 분리되지 못했으며 전반적으로 지방적인 가내 수공업(kustari)의 성격을 계속 유지해 왔던 것이었다. 과거 러시아의 도시들은 상업과 행정 및 군사의 중심지였으며 또한 귀족 신분인 지주들의 거주지이기도 했다.─따라서 소비의 중심지였으나 생산의 중심지는 아니었다. 한자동맹(the Hanstatic.League:14세기 중엽부터 17세기까지 존속했던 독일 북부 도시들의 상업 동맹~역주)과 관계하고 있었으며 또한 따따르인의 통치를 결코 겪어 본 적이 없는 노브고로뜨(Novgorod:862년에서 1478년까지 존재한 러시아의 중세 국가로서 교역과 문화의 중심지였다.─역주)조차도 상공업 도시라기보다는 단지 상업 도시였을 뿐이다. 물론, 러시아 전역에 걸쳐 다양한 지방들에 분산되어 있던 소규모적인 농촌 가내 수공업들은 넓은 활동 범위를 지닌 중개상들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이러한 이동 상인들은 결코 사회 생활에서 서구의 중소 부르조아지가 차지하고 있던 것과 비견될 만한 위치를 점유할 수 없었다. 서구의 중·소 부르조아지는 동업조합(길드;guild)내의 장인들, 상인들 및 실업가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또한 그들의 주변에 위치한 농촌과는 불가분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반면, 러시아에서는 상업의 주된 통로는 모두 국경을 넘는 것으로서, 그것은 아주 오래 전부터 외국의 상업 자본을 지배적인 것으로 만들었으며, 따라서 서구의 도시들과 러시아의 촌락들 사이에서 중개상 역할을 하는 러시아 상인들의 모든 활동에 일종의 반(反)식민지적인 성격을 부여했다. 이러한 경제적 관계는 러시아의 자본주의 시대까지 계속 발전되어 왔으며, 그것은 바로 제국주의 전쟁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던 것이다. 러시아 국가가 아시아적 형태의 모습을 띠게 된 가장 큰 요인은 바로 이와 같은 러시아 도시의 빈약함에 있었다. 특히 도시의 빈약함은 종교 개혁의 가능성을 배제시켰다. 다시 말해서, 바로 그 때문에, 봉건적이고 관료적인 러시아 정교회를 부르조아 사회의 요구에 적합한 모종의 보다 근대적인 형태의 그리스도교가 대신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국가 교회에 대한 투쟁은 농민을 중심으로 한 개별 종파의 형성 이상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 가운데 가장 강력했던 것은 구교 신봉파(starove.chestvo)의 운동이었다. (17세기 중반 교회의 전례(典禮)를 개정·통일시키려는 짜르의 개혁안에 반대하여 일어난 보수 종파의 운동으로서, 국가 교회로부터의 이탈을 꾀했으나 국가의 강력한 탄압을 받았다.─ 역주)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하기 약 15년 전에, 러시아에서는 우랄 지방의 코자크족들과 농민들 및 농노적 노동자들(농노로부터 충원되는 강제부역 노동자들로서, 이들은 당시 이 지방에 집중되어 있던 국가 소유의 작업장들의 중요한 노동력이었다─역주)의 운동이 발생했다. 그것은 바로 뿌가쵸프(Pugatchov)의 반란이다. 이 위협적인 민중의 반란이 혁명으로 전환될 수 없었던 것은 대체 무엇이 결핍되었기 때문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제3계급(The 3rd Estate.평민)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도시의 산업 민주주의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농민 전쟁은 혁명으로 발전될 수 없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농촌의 종교적 분파들도 종교개혁으로까지 나아갈 수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뿌가쵸프의 반란은 결과적으로, 귀족의 권익을 수호하는 관료적 절대주의 체제를 더욱 공고화시켰다. 귀족 계층이 어려움에 처한 이 때, 절대주의는 다시 한번 더 그들의 수호자로서의 진가를 충분히 발휘했던 것이다. 뾰뜨르 1세에 의해서 정식으로 시작된 러시아의 유럽화는 19세기 내내 갈수록 지배계급, 즉 귀족의 요구가 되었다. 1825년, 이러한 요구를 정치적으로 일반화시키려는 귀족 출신의 지식인들이 절대 왕권을 제한할 목적으로 군사적 모반을 계획했다. 이것은 귀족 가운데 진보적인 인자들이, 발전하고 있는 서구 부르조아지에 자극 받아, 러시아에는 존재하지 않는 제3계급의 역할을 대신하려고 한 시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주의 체제를 귀족의 특권적 통치 기반과 결합시키려는 것이 그들의 의도였다. 바로 이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농민 봉기를 촉발시키게 되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 모반은 단지 고립된 일군의 뛰어난 장교들의 계획으로만 남아 있었으며, 그들이 거의 싸워 보지도 않고 항복했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바로 이상과 같은 것이 12월당원(Decabrist:데까브리스뜨)들의 반란이 갖는 의미인 것이다.

  귀족 계급 중에서 최초로 농노적인 노동을 자유 임노동으로 대체시키자는 의견을 내세운 자들은 공장을 소유하고 있던 귀족들이었다. 또한 러시아에서 생산되는 곡물의 수출량이 증가함에 따라 그 같은 의견은 더욱 지지 기반을 얻게 되었다. 1861년, 자유주의자 지주들을 지지 기반으로 한 귀족 관료 체제는 농노 해방령과 농업 개혁 조치들을 단행한다. 무기력한 러시아의 부르조아 자유주의자들은 그것이 시행되는 동안 한결같이 비굴한 모습으로 들러리를 선다. 제정 체제가 러시아의 본질적인 문제인 농업 문제를 아주 탐욕스럽고 교활한 방식으로 해결하려 했다는 것은 두말 할 나위 없다. 그것은 프러시아의 군주 체제가 향후 10년간에 걸쳐서 독일의 본질적인 문제, 즉 독일 민족의 통일 문제를 해결하는 데 활용한 방법보다도 훨씬 더 비열한 것이었다. 어느 한 계급의 문제를 다른 계급이 떠맡아 해결한다는 것은 바로 후진적인 나라에 고유한 결합 방식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결합 발전의 법칙은 러시아 공업의 역사와 그 특성에서 가장 확실하게 드러난다. 늦게 출발한 러시아의 공업은 선진국들이 거쳐온 발전의 전 과정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 아니라 가장 근대적인 기술들을 자신의 후진적인 상태에 알맞게 적용시킴으로써 발전의 궤도에 끼어들었던 것이다. 러시아의 경제 발전은 전체적으로 수공업적 조합의 시대나 매뉴팩처의 시대를 건너뛰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공업의 개별 분야들에서도, 서구에서 수십 년이 걸렸던 기술 발전의 몇몇 단계들을 부분적으로 건너뛰었다. 이 덕택에 러시아의 공업은 몇몇 기간 동안은 아주 급속히 발전했다. 1905년 혁명부터 제1차 세계대전사이에 러시아의 공업 생산은 거의 두 배나 증가했다. 이것은 몇몇 러시아 역사가들에게는 러시아의 후진성과 발전의 정체성이라는 신화를 폐기해 버려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는 데 충분한 근거를 제공해 주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사실에 있어서는, 그토록 급속한 발전의 가능성은 바로 후진성에 의해서 결정된 것이었으며, 이 후진성은-애석하게도-구체제를 일소하는 순간까지도 계속되어 왔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이 구체제 러시아의 유산으로서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

  한 나라의 경제 수준은 본질적으로는 그 나라의 노동생산성을 기준으로 한다. 그리고 노동생산성은 그 나라의 전체 경제에서 공업이 차지하는 상대적 비중에 달려 있다. 제정 러시아가 번영의 정점에 도달했던 1차 대전 직전에, 러시아의 1인당 국민소득은 미국의 8분의 1 내지 10분의 1 정도밖에 안 되었다. 러시아의 취업 인구 중에서 5분의 4가 농업에 종사한 반면, 미국에서는 농민 1명당 공업 노동자 2.5명 꼴의 비율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본다면, 이러한 소득 격차는 그다지 놀라운 일이 못 된다. 또한, 여기에다 추가로, 1차 대전 직전, 100 평방킬로미터당 철도의 길이는 러시아가 0.7km, 독일이 11.7km, 오스트리아-헝가리가 7km 였다는 사실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다른 비교 계수들 역시 이와 동일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미 앞에서 말한 것처럼, 결합 발전의 법칙이 가장 예리하게 드러나는 곳은 바로 경제 분야이다. 러시아의 농업은 혁명 전까지는 대부분 거의 17세기의 수준에 머물러 있던 반면, 러시아의 공업은 그것이 지니고 있는 기술과 자본주의적 구조 덕택에 선진국 수준에 도달해 있었으며,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선진국들을 능가하기조차 했다. 1914년 당시, 미국의 경우 100명 미만의 노동자를 필요로 하는 소기업들이 전체 공업 노동자의 35%를 고용하고 있었다. 반면, 러시아의 경우 그 비율은 17.8%밖에 안 되었다. 100명에서 1,000명 미만의 노동자를 고용하는 중기업들이 차지하고 있는 상대적 비중은 두 나라 모두 대체적으로 동일한 양상을 보였다. 그러나 1,000명 이상을 고용하는 대기업의 경우, 미국은 전체 노동자의 17.8%를 차지한 반면, 러시아에서는 그 비율이 무려 41.4%였던 것이다. 더구나, 공업 중심 지역의 경우 그 수치는 더욱 높아진다.  뻬뜨로그라뜨 지역은 44.4%, 그리고 모스크바 지역은 57.3%나 되었다. 만일 러시아의 공업과 영국, 또는 독일의 공업을 비교해 본다면, 아마도 위와 동일한 결과를 얻게 될 것이다. 1908년 저자에 의해서 최초로 확인된 이러한 사실은 후진적인 러시아 경제에 대해서 학자들이 통상 제시하고 있는 진부한 도식으로는 설명되기 힘든 현상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러시아 경제의 후진성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그 후진성을 단지 변증법적으로 설명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산업 자본과 금융적 자본의 융합은 역시 러시아에서도 이루어졌다. 그것도 너무나 완벽하게 이루어져서 어떠한 다른 나라에서도 그와 유사한 경우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러시아의 공업이 은행에 종속되었다는 사실은 실제로는 그것이 서유럽의 금융시장에 종속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중공업(금속, 석탄, 석유 분야들)은 거의 전적으로 외국 금융자본 밑에 놓여 있었으며, 이러한 외국 자본들은 자신들을 위해 러시아내에 은행 지점망을 설치했다. 경공업도 중공업과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러시아에 투자된 모든 자본들의 약 40% 정도를 외국인이 소유하고 있었으며, 이 비율은 기간산업 분야에서는 훨씬 더 올라갔다. 러시아의 은행과 기업이 발행한 주식의 지분에 의한 경영 통제권은 외국에 있었으며, 영국, 프랑스, 벨기에의 자본이 확보한 지분이 독일 자본의 지분의 거의 두 배에 달했다고 우리는 아무런 과장 없이 단언할 수 있다.

  러시아의 공업이 형성된 조건과 또 그 구조 자체가 이 나라의 부르조아지의 사회적 성격과 그들의 정치적 특징을 결정지었다. 공업의 과도한 집중화 현상은 그 자체로 이미 자본주의의 주도 계층과 민중사이에 어떠한 중간적인 계층도 없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여기에 덧붙여서, 가장 중요한 공장들, 은행들, 운송회사들은 외국인의 소유였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이들 외국 자본가들은 러시아로부터 이윤을 거둬 갔을 뿐만 아니라 또한 자국의 의회 내에서의 자신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더욱 강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러시아에서의 의회주의를 위한 투쟁을 고무한 것은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이들은 종종 그러한 투쟁에 대해서 반대했던 것이다. 그것은 프랑스 정부가 행한 비열한 역할을 상기해 보더라도 충분히 알 수 있다. 바로 이 같은 사실들이 러시아 부르조아지의 정치적 고립 및 반민중적 성격을 규정짓는 기본적인 요인들이었다. 러시아의 부르조아지는 그들의 맹아기에는 어떠한 개혁도 수행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왜소했다. 그리고 혁명을 주도해야 할 순간이 도래했을 때는 그렇게 하기에는 너무나 성숙해 있었던 것이다.

  러시아의 발전의 전 과정에 걸쳐서, 노동계급이 배출되는 곳은 수공업적 조합들이 아니었다. 그것은 농업 분야였다. 즉, 도시가 아니라 농촌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는 영국에서처럼 과거의 무거운 전통을 힘겹게 끌고 가면서 수세기에 걸쳐서 조금씩 조금씩 형성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환경과 유대 및 사회관계에서의 급격한 변화를 통해서, 그리고 바로 가까운 과거의 관습들과의 급격한 단절을 통해서 비약적으로 형성되었던 것이다. 바로 이렇게 해서─그리고 특히 제정 체제의 혹심한 억압 밑에서─러시아의 노동자들은 혁명적 사고의 가장 대담한 결론들을 쉽게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마치 후진적인 러시아의 공업이 자본가 조직의 최신 용어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과 똑같은 일이었다.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는 언제나 이처럼 짧은 형성 과정을 되풀이하는 상황에 있었다. 금속 공업 분야에서는-특히 뻬쩨르부르끄의 경우-농촌과 완전히 단절된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출신의 노동자들이 형성되어 가고 있던 반면, 우랄 지방에서는 여전히 반농─반프롤레타리아적인 요소들이 우세했다. 농촌은 매년 모든 공업 지역들에다 새로운 노동력을 공급해 주었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와 그들이 배출되는 사회적 근원지 사이에 항상 밀접한 접촉이 이루어졌다. 부르조아지의 정치적 무능력은 그들이 프롤레타리아 및 농민과 맺고 있던 관계들로부터 직접 야기된 것이었다. 부르조아지는 노동자들에게 지신의 뒤를 따르도록 인도할 수 없었다. 노동자들은 일상 생활에서 부르조아지와 적대적으로 대립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아주 일찍부터 그들의 목적에 보다 일반적인 의미를 부여할 필요성이 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다른 한편, 부르조아지는 농민을 이끌어 갈 능력 역시 없었다. 왜냐하면 부르조아지는 대지주들과 공통된 이해관계로 묶여 있었으며, 따라서 기존의 토지 제도를 어떠한 방식으로든 동요시키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러시아 혁명의 촉발이 지연된 것은 단지 연대기적인 문제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또한 이 나라 사회 구조의 문제이기도 했던 것이다.

  청교도혁명이 이루어졌을 당시 영국의 인구는 약 550만 명 정도였으며, 그 중에서 50만 명 가량이 런던에 살고 있었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을 때, 프랑스의 전체 인구는 2,500만 명이었으며, 파리에는 고작 50만 명밖에 살지 않았다. 20세기 초 러시아의 경우, 전체 인구는 약 1억 5천만 명이며, 그 중 300만 명 이상이 뻬뜨로그라뜨와 모스크바에 살고 있었다. 더구나 이러한 단순한 수치상의 비교 이면에는 훨씬 중요한 사회적 차이점들이 숨어 있다. 17세기의 영국이나 18세기의 프랑스에는 우리 시대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은 프롤레타리아가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1905년 러시아의 경우, 도시와 농촌을 포함한 노동의 전 분야에 걸쳐서 노동계급의 수는 이미 1,000만 명을 돌파했던 것이다. 여기다 만일 그들의 가족까지 포함시킨다면, 그 수는 2,500만 명 이상이 될 것이며, 이것은 대혁명 당시 프랑스의 전체 인구의 수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혁명의 주도 세력은 크롬웰(Cromwell) 군대의 억센 수공업자들과 자영 농민들로부터 출발하여 파리의 상뀔롯뜨(Sans-culottes ;프랑스 대혁명 당시의 급진 소시민 및 대중─역주)들을 거쳐서 베쩨르부르끄의 공업 노동자들로 변화해 갔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혁명의 사회적 메카니즘, 그 방법들, 그리고 따라서 그 목적들까지도 급변해 나갔던 것이다.

  1905년의 사건은 1917년의 두 혁명, 즉 2월혁명과 10월 혁명의 서곡이었다. 이 서곡 속에는 이미 앞으로 전개될 드라마의 모든 요소들이 내포되어 있었다. 단지 그 당시에는 그러한 요소들이 전면적으로 부각되어 있지 않았을 뿐이었다. 러일전쟁은 제정체제를 뒤흔들어 놓았다. 대중 운동을 위협 수단으로 활용하면서, 자유주의자 부르조아지는 제정체제에 경종을 울렸다. 부르조아지와는 독자적으로 그리고 심지어 그들과 대립하면서, 노동자들은 소비에트(soviet:평의회)들을 조직했다. 이렇게 해서 소비에트의 역사는 시작된 것이다. 농민들로 말하자면, 토지의 쟁취를 위해 농촌 전역에서 봉기들을 일으켰다. 농민들뿐만 아니라 군대내의 혁명적인 인자들까지도 소비에트를 지향해 갔으며, 이러한 소비에트는 혁명의 물결이 가장 고양된 순간에는 권력을 놓고 제정 체제와 공개적인 대결을 벌였던 것이다. 그러나, 처음으로 역사의 무대에 공개적으로 나타난 모든 혁명적 세력들은 경험과 자신감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리고 자유주의자들은, 제정을 동요시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을 전복시켜야 한다는 점이 명확하게 드러나자마자, 보란 듯이 혁명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민중에 대한 부르조아지의 이러한 노골적인 결별은-그 이후로,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지식인 단체들 중의 대다수를 부르조아지가 지도함에 따라서 그 단절의 폭은 더욱 심화되어 간다-제정체제의 유지에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즉, 정부가 선별적으로 군대를 해산시키고 보다 충성스러운 사병들을 징집해서는 노동자와 농민에 대한 학살적인 탄압을 가하는 것을 용이하게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제정체제는 비록 몇 군데 상처를 입었을지라도 무사히 1905년의 시련을 빠져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금 충분히 원기를 회복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서곡과 앞으로 도래할 드라마 사이에 위치한 11년 동안의 역사 발전은 세력 관계에서 어떠한 변화를 유발시킨 것일까? 이 기간 동안, 짜르의 체제는 역사적 요구들과는 더욱 상반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부르조아지는 경제적으로 더욱 강력해졌다. 그러나, 이미 우리가 앞에서 본 것처럼, 그들의 힘은 과도한 공업 집중화 및 외국 자본의 역할 증대에 의거한 것이었다. 1905년의 교훈에 영향을 받은 부르조아지는 보다 보수적으로 그리고 보다 용의주도하게 되어 간다. 이미 과거에도 하찮은 것이었던, 중소부르조아지의 상대적인 비중은 훨씬 더 축소되었다.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지식인들은 일반적으로 안정된 사회적 기반을 지니고 있지 못했다. 그들은 어느 정도 일시적인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는 있었으나 독자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부르조아 자유주의자들에 대한 지식인들의 종속은 급격히 심화되어 갔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농민에게 하나의 강령, 하나의 깃발, 하나의 지향점을 제시해 줄 수 있는 계급은 오직 짧은 역사를 지닌 프롤레타리아뿐이었다. 이처럼 프롤레타리아에게 제기된 막중한 과제들은 필연적으로 특수한 혁명 조직, 즉 단숨에 민중을 결집시킬 수 있으며 또한 노동자의 지도하에 그들을 혁명적 행동으로도 나아가게 만들 수 있는 조직의 지체 없는 건설을 촉진시킨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1905년의 소비에트는 1917년에 와서는 엄청난 발전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소비에트는 단순히 러시아의 역사적 후진성으로부터 비롯된 결과가 아니라 결합 발전의 산물이었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이 점은 가장 공업화한 나라인 독일의 프롤레타리아조차 1918~19년의 혁명적 고양기에 소비에트 이외에는 어떠한 다른 조직 형태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자명한 일일 것이다.

  1917년 혁명의 당면 목표 관료적 군주제의 타도에 있었다. 그러나 이 혁명은 과거의 고전적 부르조아 혁명들과는 다른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 혁명에서는 집중화된 공업의 토대 위에서 형성된 새로운 계급이 명백히 지도적인 역할을 담당했으며, 이들은 새로운 조직 및 새로운 투쟁 방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결합 발전의 법칙이 가장 극단적인 방식으로 표현된 것이다. 즉, 다 낡아빠진 중세적인 건물을 붕괴시키는 것으로부터 출발한 혁명은 불과 몇 달만에 프롤레타리아 및 그들의 선두에 선 공산당에 의한 권력쟁취를 실현시켜 주었던 것이다.

  따라서, 최초의 당면 과제들을 기준으로 해서 본다면 러시아 혁명은 민주주의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혁명은 정치적 민주주의의 문제를 새로운 방식으로 제기했던 것이다. 노동자들이 나라 전역에 소비에트들을 조직하고 거기에 병사들과 그리고─부분적으로는─농민들을 가담시키고 있던 반면, 부르조아지는 여전히 제헌의회를 소집할 것인가 아니면 소집하지 말아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자기들끼리 흥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후의 사태의 추이가 보여 주듯이, 우리들은 이 문제를 훨씬 구체적인 방식으로 제기할 수 있었다. 여기서 잠시, 혁명 이념과 혁명의 형태에 관한 역사적 발전 과정 속에서 소비에트가 차지하는 위치를 규정해 보자.

  17세기 중반 영국에서는, 일종의 종교 개혁을 구실로 한 부르조아혁명이 발생했다. 자신의 기도서에 따라 마음대로 기도할 수 있는 권리를 위한 투쟁은 국왕과 귀족들, 교황과 주교들에 대한 투쟁과 동일시되었다. 장로교도들과 청교도들은 그러한 투쟁이야말로 지상에서의 자신들의 이익을 신의 섭리의 확고한 보호 아래 놓는 일이라고 굳게 확신하고 있었다. 이 새로운 계급의 투쟁 목적은 그들의 의식 속에서는 성경의 해석 및 교회의 전례(典禮)에 관한 문제들과 불가분적으로 얽혀 있었다. 대서양 너머로 이주해 간 사람들은 자신들의 피로써 봉인된 전통을 함께 가지고 갔다. 기독교의 해석에서 앵글로-색슨족이 보여 주는 실로 활기찬 다양성은 바로 이러한 역사로부터 기인되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까지도 우리들은 소위 “사회주의자” 각료들이 성서를 근거로 해서 자신들의 비겁함을 정당화시키는 광경들을 종종 목격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비겁자들은 17세기에 그들의 선조들이 그러한 자유를 위해서 실로 용감하게 싸웠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종교 개혁을 건너뛴 나라인 프랑스에서는, 국가교회의 자격을 지닌 가톨릭교회는 대혁명 전까지 계속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대혁명은 부르조아 사회의 합목적적인 표현을 성서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추상적인 원리 속에서 발견했다. 프랑스의 현 지도자들이 쟈꼬뱅주의를 아무리 증오할지라도 쟈꼬뱅들의 급진적인 표현을 빌려 자신들의 보수적인 통치 행위를 은폐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은 로베스피에르(Robes Pierre)와 같은 인물의 가차없는 행동 덕택인 것이다. 왜냐하면 과거에 낡은 사회를 전복시킨 것은 그들이 현재 빌려 쓰고 있는 구호들이었던 것이다.

  모든 위대한 혁명들은 부르조아 사회의 새로운 단계 및 그 사회의 제반 계급들의 의식에서의 새로운 변화를 표현해 주었다. 프랑스가 종교 개혁을 건너뛴 것과 마찬가지로 러시아는 순전히 형식적인 민주주의(즉, 부르조아 민주주의─역주)를 건너뛰었다. 낡은 시대 전체에 대해서 봉인을 찍어야만 했던 볼셰비키 당은, 혁명의 과제를 정식화하는 데 있어서 성서나, “순수” 민주주의라는 세속화된 기독교 형태가 아니라 계급간에 존재하는 물질적 관계를 기반으로 한 것이다. 그리고 소비에트 체제는 이러한 물질적 관계에 가장 단순하고 가장 솔직하며 가장 명쾌한 표현을 부여해 주었다. 노동계급의 지배는 역사상 처음으로 이러한 소비에트 체제를 통해서 실현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소비에트 체제가 장차 어떠한 역사적 시련들을 겪게 될지라도, 그것은-과거에 종교 개혁이나 순수 민주주의가 그러했던 것처럼-대중의 의식 속에 이미 확고부동한 것으로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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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발간에 붙이는 저자 서문

 

  러시아 혁명의 성격은 러시아 혁명 운동의 여러 다양한 이념노선들과 정치조직들의 형성에 관련된 근본적인 문제였다. 이 문제는 여러 사건들을 통해 실천적 성격을 부여받게 되자마자 사회민주주의 운동자체 내에서도 심각한 의견 대립을 자아냈다. 이와 같은 견해 차이는 1904년 이래로 멘셰비즘과 볼셰비즘이라는 두 가지 주요 노선들로 모습을 나타냈다. 멘세비끼의 관점은 우리 혁명이 일종의 부르조아 혁명일 것이라는 것이었다. 즉, 러시아 혁명의 당연한 결과는 부르조아지에게 권력을 넘겨줘 부르조아 대의제도(代議制度: parliamentarism)를 위한 조건들을 창출하는 것이라는 관점이다. 반면에, 볼셰비즘의 관점은 다가올 혁명이 부르조아적 성격을 불가피하게 가질 것임을 인식하면서도, 프롤레타리아와 농민의 독재에 의한 민주공화국 수립을 혁명의 과업으로 제기하는 것이었다.

  멘세비끼의 사회 분석은 극히 피상적인 나머지, 그 본질에 있어서 조야한 역사 유비론(歷史類比論: historical analogies)-이것은 “교양 있는” 속물들의 전형적인 방법이다-으로 환원되어 버렸다. 러시아 자본주의의 발전이 비상한 양극화적 모순들을 발생시켜 부르조아 민주주의의 역할을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렸다는 사실도, 뒤따라 일어난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경험도, 그 어느 것도 멘세비끼의 “참된”, “진정한” 민주주의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추구를 막지 못했다. 그들에 따르면, “참된”, “진정한” 민주주의는 “국민”을 선도하여 자본주의 발전을 위한 대의제적 및 가능한 한 민주제적인 조건들을 확립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멘세비끄들은 언제 어디에서든지 부르조아 민주주의가 발전하는 징후들을 발견하려고 애썼으며, 발견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발명해 냈다. 그들은 모든 “민주주의적” 선언과 시위의 중요성을 과장하면서도, 동시에 프롤레타리아의 역량과 그들의 투쟁의 전도에 대해서는 평가절하해서 보고 있었다. 그들은 러시아 혁명의 “정당한” 부르조아적 성격이 역사 법칙에 의해 요청되는 것이라는 주장의 근거를 확보한답시고 그와 같은 진보적 부르조아 민주주의를 하도 열렬히 추구한 나머지, 혁명의 와중에서조차 그와 같은 것을 발견할 수 없는데도 자기들 스스로가 그것을 수행할 의무를-때로는 성공하기도 했고 때로는 실패하기도 했지만-떠맡고자 했다.

  사회주의 이념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즉 계급의 마르크스주의자적인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쁘띠부르조아적 민주주의가 러시아혁명의 제 조건하에서 행동했었다면, 틀림없이 멘세비끼가 2월 혁명의 “지도” 정당 역할을 수행하면서 행동했던 것과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다. 사실, 멘세비끼는 곧 영향력을 잃어 혁명 8개월째에는 계급투쟁에 의해 밀려나 버림받았으므로, 부르조아 민주주의를 위한 어떠한 중요한 사회적 기초도 존재하지 않았던 현실에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그와는 반대로, 볼세비즘은 결코 러시아의 혁명적 부르조아 민주주의의 역량과 강고함에 대해 어떤 믿음도 갖고 있지 않았다. 볼셰비즘은 다가 올 혁명에서 노동계급이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진다는 점을 애초부터 인식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혁명 프로그램 그 자체는 처음에는 수백만의 농민의 이익에 제한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프롤레타리아가 농민 없이, 그리고 농민과 대항해서는 혁명을 철저히 완수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볼셰비키는 (당분간이긴 했지만) 혁명의 부르조아민주주의적인 성격을 인정했던 것이다.

  혁명의 내적 추진력과 그 전망에 대한 평가로 말하자면, 필자는 그 당시(1904년 9월  말부터 1917년 5월 초에 이르는 기간을 말함─역주) 러시아 노동운동의 두 주요 노선들 중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았다. 필자가 당시 가지고 있던 관점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즉, (러시아─역주)혁명은 그 최초의 과업에 관한 한 일종의 부르조아 혁명으로 시작됐지만, 이내 첨예한 계급 갈등을 야기시켜 피억압 대중의 선봉에 설 수 있는 유일한 계급, 즉 프롤레타리아가 권력을 장악함으로써만 최후 승리를 획득할 것이다. 프롤레타리아는 일단 권력을 장악하게 되면 부르조아민주주의적 프로그램에 제한되길 원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실로 그렇게 될 수도 없을 것이다. (러시아─역주)프롤레타리아는 러시아 혁명이 유럽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으로 전화될 경우에만 혁명을 끝까지 철저하게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혁명의 부르조아 민주주의적 프로그램은 혁명의 일국적(一國的) 한계와 더불어 지양되어, 러시아 노동계급의 일시적인 정치적 지배가 영속적인 사회주의 독재로 발전될 것이다. 그러나, 유럽(혁명─역주)이 불발하게 되면 부르조아 반혁명이 러시아 근로 대중의 정부를 용납하지 않고 러시아를 뒤로-노동자와 농민의 민주공화국보다도 훨씬 뒤로-퇴보시켜 놓을 것이다. 그러므로, 프롤레타리아는 일단 권력을 장악하게 되면 부르조아 민주주의의 한계 안에 머물 수는 없는 것이다. 즉, 프롤레타리아는 영구혁명(전략─역주)의 제 전술을 채택해야한다. 다시 말해, 프롤레타리아는 사회민주주의의 최소강령(제2인터내셔널의 개념 구분으로서 사유재산 제도 내에서 해결될 수 있다고 여겨진 과제들─역주)과 최대강령(제2인터내셔널의 개념 구분으로서 사유재산 제도의 철폐가 전제되어야 해결될 수 있다고 여겨진 과제들─역주) 사이에 가로놓인 장벽을 허물고 더욱더 철저한(radical) 사회 개혁을 수행해야 하며, 서구의 혁명에 대해 직접적이고도 즉각적인 지원을 모색해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입장은 1904년부터 1906년에 이르는 기간에 처음 씌어져 이제 재발행되는 이 책에서 개진되고 논증될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15년간(1904년부터 1919년까지의 기간을 뜻함─역주)영구혁명의 관점을 유지하면서 사회민주주의 운동의 경합(競合: 대중을 올바르게 지도하기 위해 선의의 경쟁을 한다는 의미에서─역주)하는 분파들(볼세비끼와 멘세비끼를 말함─역주)을 평가하는 데 잘못을 범했다. 양 분파 모두가 부르조아 혁명이라는 관점에서 출발했으므로 필자는 양 분파간의 차이가 분열을 정당화할 수 있을 만큼 그리 심각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와 동시에 필자는 역사적 사건의 전개방향이, 한편으로는 러시아 부르조아 민주주의의 취약성과 무의미함을, 다른 한편으로는 프롤레타리아가 민주주의적 프로그램에 제한되는 것이 객관적으로 불가능함을 명백히 입증해 줄 것을 희망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이 점이야말로 양 분파간의 차이의 근저에 있는 이념적 기초를 제거해 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망명 중에 양 분파 모두로부터 독립적인 입장을 취했던 필자로서는 볼세비끼와 멘세비끼간의 견해 불일치의 이면에 실로 한편으로는 비타협적 혁명가들이 결집되고, 다른 한편에는 갈수록 기회주의적이고 순응적인 분자들이 결집되고 있었다는 바로 그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1917년 혁명이 발발했을 때, 볼세비끄 당은 가장 탁월한 선진적 노동자와 혁명적 인텔리겐차를 결속시킨 강고한 중앙집권화된 조직을 이루고 있었는데, 이들 선진적 노동자와 혁명적 인텔리겐차는─어느 정도 내부 논쟁을 거친 후─노동계급의 사회주의 독재를 지향하는 전술들을 명시적으로 채택했다. 실로 그 전술들은 국제 정세 전반과 러시아의 계급관계에 꼭 들어맞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에 멘세비끼 파로 말하자면, 필자가 앞에서 말했듯이, 부르조아 민주주의의 과제들을 수행할 의무를 떠맡을 만큼만 성숙해 있었던 것이다.

  지금, 필자의 책을 공개적으로 재발행하면서 필자는 필자 자신과 그 밖의 다른 동지들이 여러 해 동안 볼세비끄 당 밖에서 활동하다가 1917년 초에 그 당의 운명과 자신들의 운명을 합치시킬 수 있도록 만들어 준 이론적 원리들을 설명하길 원한다. (이와 같이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설명만으로는 이 책을 재발행하는 이유를 충분히 해명해 주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뿐만 아니라 필자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기정 사실로 되기 훨씬 이전에, 러시아 혁명에 대한 사회·역사적 분석으로부터 노동계급에 의한 정치권력 장악이 러시아 혁명의 과제로 될 수 있으며 또한 되어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되었다는 것을 환기시키고자 한다. 이미 1904년에 그 사고의 골격이 형성되어 1906년에 씌어진 이 책을 지금 아무런 수정 없이 재발행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멘세비끼가 부르조아 민주주의를 대신해 대변한 이론의 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독재를 실제로 수행한 당(볼세비끼를 말함─역주)의 편에 있음을 입증해 주기에 족한 것이다.

  어떤 이론의 궁극적인 시금석은 경험이다. 우리가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올바르게 적용해 왔다는 데 대한 논박할 수 없는 증거는, 우리가 지금 참여하고 있는 사건들과 심지어는 우리가 그 사건들에 참여하고 있는 방식이 약 15년 전에 그 기본 진로가 예견되었다는 사실이 제공하고 있다.

  필자는 글 하나를 재간행하여 부록으로 실었다. (『평가와 전망』 제10장을 이루고 있다─역주) 그 글은 파리에서 발행된 『나세 슬로보』(Nashe slovo“우리의 말”이란 뜻─역주)지(誌)의 1915년 10월 17일 호에 “권력을 위한 투쟁”이라는 제목으로 실렸었다. 이 논설은 멘세비끼 지도자들이 “러시아에 있는 동지들에게” 보내는 강령적 성격의 “편지”에 대한 비판이므로 논쟁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필자는 그 논설에서 1905년 혁명 이후 10년 동안의 계급관계의 발전으로 부르조아 민주주의를 향한 멘세비끼의 희망이 더욱 설 땅을 잃었으며, 따라서 러시아 혁명의 운명은 이전의 어느 때보다도 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음이 명백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지난 여러 해 내내 벌어져 온 이념 투쟁에도 불구하고 10월 혁명이 “모험주의”라고 말하는 사람은 실로 멍청이임에 틀림없다.

  10월 혁명에 대한 멘세비끼의 태도에 대해 말하면서 카우츠키(Karl Kautsky)의 멘세비끄적 타락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카우츠키의 이론적 및 정치적 타락이 이제 마르또프(Martov)와 단(Dan)과 체레쩽리(Tsereteli)의 “이론”들에서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1917년 10월 이후 카우츠키가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음을 듣는다. 즉, 노동계급에 의한 정권 장악이 사회민주주의자 당의 역사적 과업으로 여겨져야 하긴 하지만, 러시아공산당(RCP:볼세비끼─역주)이 카우츠키가 정한 특정한 진로와 특정한 시간표에 따라 권력을 잡지 않았으므로 소비에트 공화국을 께렌스끼(Kerensky), 체레쩰리 및 체르노프(Chernov)에게 이양시켜야 올바르다는 것이다. 카우츠키의 반동적이고도 현학적인 비판은 제1차 러시아 혁명에 충분히 사정을 알고 동참했고 그의 1905~6년 논설을 읽었던 사람들에게는 그만큼 더 예기치 못하게 다가왔음이 틀림없다. 당시에 카우츠키는 (실로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 의 유익한 영향을 받아)러시아 자체의 계급투쟁 수준과 국제 자본주의의 전반적인 상황 때문에 러시아 혁명이 부르조아 민주공화국으로 귀결될 수 없고 불가피하게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귀착되어야 한다는 것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었고, 또 인정하고 있었다. 그때 카우츠키는 사회민주주의자 다수파가 포함된 노동자 정부에 대해 진솔하게 쓰고 있었다. 그는 계급투쟁의 진정한 전로를 가변적이고도 피상적으로 짜맞춰진 정치적 민주주의에 종속시키려는 일을 생각조차 안했다.

  그 당시 카우츠키는 (러시아─역주)혁명이 처음에는 수백만의 농민과 도시의 쁘띠부르조아지를 분기(奮起)시켜-단숨에 그런 게 아니라 한걸음 한걸음 점차적으로-마침내 프롤레타리아와 자본가 부르조아지 사이의 투쟁이 절정에 달했을 때 광범위한 농민 대중은 그 정치 의식의 발전이 여전히 원시적 수준에 머물러 있으므로 자기들(즉, 농민)의 후진성과 편견을 반영할 뿐인 중도적 정당들에게 표를 던질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 당시 카우츠키는 만약 프를레타리아가 권력 장악으로 향하는 혁명의 논리에 따르지 않고 자의적으로 권력 장악을 무기한 연기시켜 버린다면 이와 같은 포기 행위가 단지 반혁명을 위한 터를 닦아 줄 뿐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때 그는 프롤레타리아가 일단 혁명 권력을 쥐게 되면 어느 순간에도 혁명의 운명을 의식 수준이 저급하고 정치적으로 미각성된 대중의 비영속적이고 심정적인 태도에 의존하게 만들 수 없을 것이며, 그와는 사뭇 반대로 자기들 손에 집중된 정권을 바로 이들 후진적이고 미각성된 농민 대중을 각성시키고 조직화시킬 강력한 (국가─역주)기구로 전환시킬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고 있었다. 카우츠키는 또한, 러시아 혁명을 일종의 부르조아 혁명이라고 부름으로써 혁명의 과업을 제한시키려는 것은 도대체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에 대해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소치라는 점을 이해하고 있었다. 러시아와 폴란드의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더불어, 그는 러시아 프롤레타리아가 유럽 프롤레타리아보다 먼저 권력을 장악하게 되면 그들은 지배계급으로서의 자기들의 위치를 이용해-지금의 카우츠키가 주장하고 있듯이 자기들의 지위를 부르조아지에게 신속히 양보하는 게 아니라-유럽과 전세계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대해 강력한 지원을 해주어야 할 것이라는 점을 올바르게 인식하고 있었다. 마르크스주의의 정신에 충실한 이와 같은 세계적 전망을 카우츠키나 우리가 1917년 11월과 12월의 이른바 제헌의회(the Constituent assembly) 의원선거에서 농민이 어떻게 그리고 누구에게 표를 던질 것인가에 달린 문제로 만들 수는 없는 것이었다.

  15년 전에 그 윤곽이 잡힌 전망이 현실이 된 지금에 와서, 카우츠키는 딴소리를 하면서 러시아혁명에 출생증명서를 부여하기를 거부하고 있다. 그가 대고 있는 이유는 러시아혁명이 부르조아 민주주의라는 정치적 관청에 때맞춰서 출생신고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놀라운 일이다: 마르크스주의의 믿을 수 없는 타락이다! 제2인터내셔널의 타락은 1914년 8월 4일 전쟁 공채 법안에 찬성표를 던졌던 사건에서보다 그들의 가장 탁월한 이론가 중의 한 사람이라는 자가 러시아혁명에 대해 이따위 속물적 판단을 내렸다는 사실에서 훨씬 더 가증스럽게 표현되고 있다고 우리가 말하는 것은 전적으로 정당하다.

  카우츠키는 수십 년 동안 사회혁명의 이념을 발전시켜 왔고 지지해왔다. 이제 사회혁명이 현실이 되고 나자, 그는 두려워서 사회혁명으로부터 도피하고 있다. 그는 러시아의 평의회(소비에트) 권력에 두려움을 느끼고 독일 공산주의자 프롤레타리아의 강력한 운동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카우츠키는 사면이 벽으로 둘러싸인 답답한 교실에서 학생들에게 봄에 대해 묘사하는 것을 반복하다가 마침내 정년 퇴직하여 밖으로 나와 신선한 공기를 맛보게 되자, 봄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것이 자연 법칙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화를 내면서(도대체 그가 화를 낼 줄 안다면 말이다) 봄은 결국 봄이 아니라 단지 자연계의 대혼란일 뿐이라고 주장하면서, 그것을 헛되이 논증하려 하는 교장 선생님과 꼭 닮았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가장 권위 있는 공론가조차 신뢰하지 않고 봄의 소리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은 정말 잘하는 일이다!

  우리는 마르크스의 제자들로서, 독일 노동자들과 더불어 혁명이라는 봄이 사회라는 자연의 법칙과 완전히 부합하여, 또한 동시에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법칙과 완전히 부합하여 도래했다는 확신을 고수한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주의는 초역사적 지칭물을 가리키는 교장 선생님의 지휘봉(指揮棒)이 아니라 현실에서 진행되고 있는 역사 과정의 방식과 수단에 대한 사회적 분석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1906년의 논설(제1장부터 제9장까지를 포함하는 『평가와 전망』초판 부분을 가리킴─역주)과 1915년치 논설(제10장에 해당하는 첨가된 부분으로서, 1915년 10월 17일자 『나체 슬로보』지에 실렸던 글을 가리킴─역주)로 이루어진 본문에 아무런 수정도 가하지 않은 채 놔두었다. 필자의 원래 의도는 각주를 달아 현 상황에 맞춰 제시하려는 것이었으나 본문을 훑어본 후 그 생각을 포기했다. 왜냐하면, 세부 항목까지 짚고 넘어가려면 책의 두께가 두 배로 불어날 판인데, 필자로서는 그럴 시간도 없거니와 그렇게 “이중구조”화된 책이 독자가 읽기에 별로 편리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더욱 중요한 점으로서 필자는 이 책의 큰 줄기로서 관통하고 있는 일련의 개념들이 우리 시대의 조건들과 매우 유사하므로 이 책을 숙독해 그 내용을 숙지하려고 애쓴 독자는 쉽사리 이 책이 해설한 바에다가 현재의 혁명에 대한 경험으로부터 얻은 필요한 사실적 자료를 보충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기도 했다.

1919년 3월 12일 끄레믈린에서

레온 뜨로츠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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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와 전망>

 

  러시아 혁명(이 문장에서는 1905년 제1차 혁명을 가리킴─역주)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을 제외한 모든 이들에게 예기치 못하게 다가온 것이었다. 마르크스주의는 오래 전에 러시아에서 혁명이 불가피함을 예견했다. 자본주의의 발전과 화석화된 절대주의 체제 사이의 갈등의 결과로서 혁명이 일어나게끔 되어 있었던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는 다가올 혁명의 성격을 예견했다. 마르크스주의는 러시아 혁명을 일종의 부르조아 혁명이라고 부름으로써, 그 혁명의 즉각적․객관적 과업들이 “부르조아 사회 전반의 발전을 위한 정상적인 조건들”을 창출하는 데 있음을 지적했다.

  마르크스주의가 옳았음은 입증되었다. 이 점은 논의할 필요도 증명할 필요도 없게 되었다. 이제 마르크스주의자들 앞에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과업 하나가 기다리고 있다. 전개 과정 중에 있는 혁명의 내적 구조(메커니즘)를 분석함으로써 그것의 여러 가능성들을 포착하는 것이 그것이다. 만약 우리의 혁명을 단순히 1789-93년의 사건(프랑스대혁명을 말함─역주)이나 1848년의 사건(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산주의자 선언』을 공표한 직후에, 유럽 대륙을 휩쓸었으나 영구혁명이 되기 직전에 차단당한 노동계급 혁명을 말함─역주)과 동일시한다면 어리석은 과오이리라. 자유주의의 배양처인 역사 유비론(歷史類比論)이 사회 분석을 대신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러시아 혁명은 전적으로 특수한 성격을 지닌다. 그 이유는 우리 사회 전반의 역사적 발전의 특수한 추세 때문인데, 이번에는 혁명의 그러한 특수성이 전적으로 새로운 역사적 전망을 우리 앞에 펼쳐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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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러시아 역사 발전의 특수성

 

  우리가 러시아의 사회 발전과 다른 유럽 국가들의 사회 발전을 비교해 보면-유럽 여러 나라들의 역사가 공통으로 지니고 있으면서 러시아의 역사와는 변별적(辨別的)으로 구별되는 측면이란 점에서 그 나라들을 일괄해서 취급할 수 있겠다-러시아 사회의 발전에서 주된 특징은 상대적인 원시성과 완만성이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필자가 이 자리에서 이와 같은 원시성의 자연적 원인들을 고찰할 수는 없다. 그러나, 러시아의 사회 생활이 좀더 빈곤하고 좀더 원시적인 경제적 기초 위에 성립되었다는 사실만큼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분명한 사실로 남아 있다.

  마르크스주의는 생산력의 발전이 사회·역사적 과정을 결정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경제적 법인체들과 계급 및 (전자본주의 사회의 위계질서인)신분(estate)은 생산력의 발전이 일정 수준에 달했을 때에야만 형성될 수 있는 것이다. 신분과 계급의 분화는 분업의 발전과 보다 전문화된 사회적 기능들의 창출에 의해 결정되므로, 직접적인 물질적 생산에 동원된 인민들이 자기들 자신이 소비해야 하는 것(필요 생산물─역주) 말고도 그 위에 여분의 생산물, 즉 잉여(생산물─역주)를 생산해야 함을 전제하고 있다. 즉, 잉여를 소외시킴으로써만 비생산 계급이 등장해서 형성될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직접 생산자 계급 자체 내의 분업은 농업이 일정 정도 발전하여 농업 생산물을 비농업 인구에게 공급할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사회 발전에 관한 이러한 기본적인 명제들은 이미 아담 스미스(Adam Smith)에 의해 명확히 정식화된 바 있다.

  이런 사실의 당연한 귀결로서 다음과 같은 지적을 할 수 있겠다. 즉, 우리나라 역사에서 노브고로뜨(the Novgorod) 시기는 유럽의 중세초기와 일치하지만, 자연적·역사적 조건들(불리한 지리적 입지 조건, 낮은 인구밀도 등)로 인한 완만한 페이스의 경제 발전이 계급 형성 과정을 억제하여 그 과정에 좀더 원시적인 성격을 부여하였다.

  만약 러시아가 고립되어 그 자체의 내적 경향들의 영향력만 받았더라면 러시아의 사회 발전이 어떤 모습을 취했었을 것인가에 대해 말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리라. 러시아의 사회 생활은 일정한 대내적 견제 토대 위에 성립되었지만, 줄곧 대외적인 사회·역사적 환경의 영향을 받았으며, 심지어는 직접 그러한 압박 아래 놓여 있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 사회·국가 조직체(organization)가 그것의 형성 과정에서 이웃의 다른 (사회·국가)조직체들과 충돌하게 되면서, 자신의 경제 관계의 원시성과 이웃의 비교적 고도(高度)로 발전된 경제관계가 후속 과정에서 이 조직체를 결정적으로 규정하는 역할을 했다.

  러시아 국가(state)는 원시적인 경제 토대 위에서 성장하여 더 고차원적이고 더 안정된 토대 위에 세워진 국가 조직체들과 관계를 맺고 갈등도 겪게 되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앞에 놓여 있다. 즉, 모스크바 공국(the moscow State)과의 투쟁에서 몰락한 킵차크 국(the Golden Horde:몽고족이 13세기 중반에서 15세기말까지 러시아를 지배할 당시 건설했던 국가─역주)처럼 러시아 국가도 몰락하든가 혹은 경제 관계의 발전에서 이운 국가들을 추월하여 고립된 상태로 남아 있는 경우와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의 커다란 활력을 흡수하든가의 두 가지 가능성이 그것이다. 그런데, 러시아의 경제는 몰락의 가능성이 현실화되는 것을 막기에 이미 충분할 정도로 발전해 있었다. (러시아─역주)국가는 엄청난 경제력의 압박을 받으면서도 붕괴되지 않고 오히려 성장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러시아가 외적에 의해 사면초가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이 아니다. 그런 사실만으로는 러시아의 처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사실, 이 점은-아마도 영국은 예외일 수도 있지만-유럽의 다른 어떤 나라에도 적용되는 얘기일 것이다. 이들 유럽 여러 나라들은 상호 생존경쟁에서 거의 동일한 경제적 기초에 의존하였으므로, 그 나라들의 국가 조직체의 발전은 이렇게도 강력한 외압에 좌우되지 않았다.

  크리미아(Crimea)와 노가이(Nogai)의 따따르족(Tatars)에 대항한 투쟁은 극도의 노력을 경주하게 만들었지만, 말할 나위 없이 영불간의 백년전쟁 중에 기울인 노력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구(舊)러시아로 하여금 소형 화기(火器)를 도입하고 스뜨렐치(Streltsi) 상비군 연대를 창설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것은 따따르족이 아니었다. 즉, 기병 기사단과 보병 부대를 창설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은 따따르족 때문이 아니라 리투아니아(Lithuania)와 폴란드 및 스웨덴의 압박 때문이었던 것이다.

  서구측의 이런 압박의 결과로 (러시아─역주)국가는 잉여 생산물의 대부분을 소모해 버렸다. 즉, 러시아 국가는 당시 형성되고 있던 특권 계급들에게 손해를 입힘으로써만 존속할 수 있었고, 그리하여 그 특권 계급들의 기존의 완만한 발전마저 억제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국가는 농민의 필요 생산물조차 강탈해 갔다. 국가는 농민의 생계를 위한 생산물을 박탈했던 것이다. 결국, 농민은 자기 땅에 제대로 정착할 시간조차도 갖지 못한 채로 자기가 가꿔 놓은 경작지를 도망치듯이 떠나야만 했다. 이렇게 해서 국가는 인구의 증가와 생산력의 발전을 저해하게 된 것이다. 또한, 잉여 생산물 중에서 터무니없이 많은 부분을 국가가 소모해 버렸기 때문에, 국가는 그나마도 속도가 완만한 신분(estate) 분화 과정을 더욱 완만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필요 생산물 중의 중요한 부분을 가로채 버림으로써 국가는 바로 자신의 토대가 되고 있던 원시적인 생산 기반조차도 파괴하게 되었다.

  그러나 국가가 존속하고 기능하기 위해서, 그리고 특히 사회적 생산물 중에서 자신이 필요한 부분만큼을 양도받기 위해서 국가는 여러 신분들을 위계(位階)적으로 계층화시켜 조직하는 것을 필요로 했다. 바로 이 때문에 러시아 국가는 자신이 발전하는 데 필요한 경제적 토대를 잠식하고 있으면서도, 그와 동시에 억지로 정부의 법적 강제 조치들을 통해서 그러한 토대를 발전시키려고 애썼던 것이다. 그리고 다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신분제의 발전 과정을 국가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돌려 놓으려고 애썼던 것이다. 러시아 문화사 학자인 밀류꼬프(Milyukov)는 러시아의 바로 이러한 점이 서유럽의 역사와 정반대되는 점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여기에는 어떠한 반대되는 사실도 실제로는 없는 것이다.

  후에 관료제적 절대주의로 발전한 중세의 봉건 군주제는 일종의 국가 형태를 이루고 있었는데, 그것은 특정한 사회적 이해관계들을 강화시켜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단 출현해서 존재하게 된 이상, 이러한 국가 형태도 그 자체로 고유한 자신의 이해관계를 갖게 되며, 그러한 이해관계는 하층 계급들의 이해관계뿐만 아니라 상층 계급들의 이해관계와도 상충하게 되었던 것이다. 일반 대중과 국가 조직체 사이에서 사회적으로 필수불가결한 '중간 벽'을 구성하고 있던 지배적인 신분들은 국가 기구에 압력을 행사해 국가의 실제적인 활동의 내용을 자신들의 이익과 부합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국가 권력은 하나의 독자적인 힘으로서, 상충 신분들의 이해관계를 자신의 고유한 관점으로부터 바라보게 되었다. 국가 권력은 상층 신분들의 욕망에 대해 저항하기 위한 장치들을 마련했으며 그들을 자신에게 복종시키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국가와 제 신분계층간의 관계의 실제 역사는 이같이 결국은 역학적 상관관계에 의해서 결정되는 궤도를 따라서 진행되었던 것이다.

  러시아에서도 근본적으로는 이와 동일한 과정이 일어났다.

  국가는 발전하고 있던 여러 경제 집단들을 이용하려 노력했으며, 그것들을 국가 자신의 고유한 특정 재정적․군사적 목적들에 종속시키려고 애썼다. 당시 출현하고 있던 지배적인 경제 집단들은 국가를 이용해서 자신들의 유리한 위치를 신분적 특권 형태로 만들어 더욱 공고히 하려고 노력했다. 러시아에서의 여러 사회 세력들의 이러한 활동의 전개 과정은 서유럽의 경우보다도 훨씬 더 국가 권력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노동 대중의 희생 위에 기초한 국가 권력과 사회 상층 집단들간의 상호봉사 관계는 권리와 의무, 세금과 노역의 부담과 특권의 분배 방식으로 표현되기 마련인데, 이 관계는 신분제에 기초한 중세 서유럽의 군주제와 비교해 볼 때, 러시아의 경우 귀족 및 사제들에게는 덜 유리한 것이었다. 이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밀류꼬프처럼 서구에서는 제 신분이 국가를 만들었지만 러시아에서는 국가 권력이 자신의 고유한 이해관계에 따라 신분들을 만들었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아주 과장된 표현이며 또한 전혀 균형 감각이 결여된 말이 될 것이다.

  신분들은 국가의 행위, 즉 법에 의해서 창조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회 집단이 국가 권력의 도움을 빌어서 특권 신분으로 부각될 수 있기 위해서는, 그 신분은 이미 자신의 사회적 이점들을 십분 활용해서 경제적으로 발전되어 있어야만 한다. 이에 정해져 있는 어떤 위계 서열표나 또는 포상 규범에 따라서 신분계층들이 제조될 수는 없는 법이다. 국가 권력은 보다 높은 단계의 경제 구성체로 나아가는 근원적인 경제발전 과정을 자기가 지닌 모든 자원을 통해서 촉진시켜 줄 수밖에 없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러시아 국가는 국민의 생산력 중에서 상당히 많은 부분을 독차지했으며, 따라서 사회 구조의 고착화 과정을 방해해 왔다. 그러면서도 국가는 동시에 자신의 고유한 목적을 위해 그러한 과정이 필요했다. 따라서 당연히 러시아 국가는 구조적으로 보다 분화된 서구의 영향과 압력 하에-이러한 압력은 군국주의적 국가 조직체를 통해서 전달되었다-뒤늦게나마 원시적인 정제 토대를 바탕으로 사회 분화를 강제로 촉진시키려고 노력했다. 더구나, 사회·경제적 구성상의 취약성에서 비롯된 바로 이 같은 강제성의 필요로 말미암아 자연스럽게 국가는 국민의 보호자로서의 자신의 역할과 더불어, 자신이 지닌 막강한 권력을 자신의 고유한 재량에 따라 상층 계급의 발전 방향을 감독하는 데 사용하려고 노력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감독 활동이 커다란 성공을 거두기도 전에, 국가는 먼저 바로 자신의 조직이 지니는 취약성과 원시적인 성격 때문에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같은 국가 조직체의 원시적인 성격은, 앞에서 우리가 언급한 것처럼 바로 사회 구조의 원시성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이렇듯, 러시아의 경제적 조건을 토대로 해서 세워진 러시아 국가는 보다 발전된 경제적 토대 위에서 성장해 온 인접 국가 조직체들의 우호적이거나 때로는 적대적인 압력에 밀려서 전진해 나가고 있었다. 어떤 일정한 시점부터-특히 17세기 말부터-러시아 국가는 자신의 모든 권력을 동원해서 나라의 자연 경제적 발전을 가속화시키려고 노력했다. 말하자면, 새로운 분야의 수공업, 기계류, 공장, 대기업, 자본 등이 자연경제의 줄기에 인공적으로 접목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러시아의 자본주의는 국가의 산물(産物)인 것으로 보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러시아의 모든 학문은 정부의 노력에 의한 인위적인 산물, 즉 국민의 무지(無知)라는 자연적인 줄기에 인공적으로 접목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적어도, 공장처럼 학교가 국가의 인위적인 산물이었음을 깨닫기 위해서는 국가와 학교 사이의 초창기 관계들을 나타내 주고 있는 특징들을 회상해 보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교육을 위한 국가의 노력은 이러한 ‘인위성’을 잘 보여 주고 있다. 학업을 게을리 하는 학생들은 사슬에 묶여 처벌을 받았다. 학교 전체가 사슬에 묶여 있었던 것이다. 학업은 일종의 부역의 한 형태였다. 학생들은 급료를 지급받았던 것이다. 기타 등등의 사실들.-L.T. (L.T.)는 뜨로츠끼 자신의 註이다. 특별한 표시가 없는 것은 영역자의 註이다.)

  러시아의 사상은 러시아의 경제와 마찬가지로 서구의 보다 발전된 경제와 보다 차원 높은 사상의 직접적인 압력 하에 발전했다. 경제 조건들의 자연 경제적 성격 때문에, 즉 대외 교역의 빈약한 발전 때문에, 다른 나라들과의 관계는 거의 전적으로 국가에 의해서 주도되었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이러한 나라들로부터의 영향은 그들과 러시아 국가간의 직접적인 경제적 경쟁 관계로 표출되기보다는 오히려 러시아 국가 자체의 존립을 위한 치열한 싸움으로 표현되었다. 서구 경제학은 러시아의 경제학에 국가를 매개로 해서 영향을 미쳤다. 보다 잘 무장된 적대적인 나라들 사이에서 살아 남을 수 있기 위해서 러시아는 어쩔 수 없이 공장들을 세우고, 항해 학교들을 설립하며, 축성술에 대한 교과서들을 출판하는 등의 일들을 해야 했다. 그러나 만일 이처럼 광활한 나라의 국내 경제의 전반적인 흐름이 국가가 추구하는 방향과 동일한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만일 제반 경제 조건들의 발전으로 인해서 순수과학 및 응용과학을 위한 수요가 창출되지 않았더라면, 국가의 모든 노력들은 결실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 자연스럽게 실물 경제로부터 화폐 및 상품 경제로 발전해 가고 있던 국민경제는 단지 그 같은 발전에 부합되는 정부 조치들에 대해서만 반응했으며, 또한 그 조치들이 자신의 발전과 부합하는 범위에만 국한해서 작동했다. 이상과 같은 분석을 가장 잘 입증해 주는 것은 러시아의 공업 및 통화 제도, 그리고 국가 대부(國家貸付)의 역사이다.

  멘젤레에프(Mendeleyev)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대다수의 공업 분야들은(금속, 제당, 석유, 정유 및 섬유 공업까지도) 정부 조치들의 직접적인 영향 아래 조성되었으며, 때로는 대규모의 국가 보조금의 도움을 받기조차 했다. 그리고 특히 정부는 언제나 의식적으로 보호 정책을 펼쳤던 것이다. 짜르 알렉산드르의 통치 기간 내내 정부는 이 같은 정책을 솔직하게 구호로 내세웠다.‥‥‥보호주의의 원칙들을 전적으로 수용하여 러시아에 적용시킨 정부의 고위 당국자들이 우리나라의 지식인 계급 전체보다도 더 진보적이었음이 입증되었다. (D. 맨젤레예프, 『러시아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 뻬쩨르부르끄, 1906, p.84)


  공업 보호 정책을 이처럼 찬양한 박식한 멘젤레예프 교수는 정부의 그러한 정책이 공업 생산력의 발전에 대한 관심과는 전혀 상관없이 단지 재정상의 이유와 부분적으로는 군사 기술상의 이유로 강요된 것임을 덧붙여 말하는 것을 잊어 버렸다. 바로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보호 정책은 공업 발전의 근본적인 이익들뿐만 아니라 다양한 실업가 집단들의 개별적인 이익들과도 종종 대립되곤 했던 것이다. 실제로, 방적 공장의 소유주들은 “면화에 대한 높은 관세는 면화 재배를 장려할 목적에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재정상의 이익을 위해서 부과되고 있다”라고 드러내 놓고 말하곤 했다. 정부가 신분계층을 “창출”할 때 무엇보다도 먼저 국가의 목적을 추구하는데 열심이었던 것처럼, 공업의 “이식”에서도 마찬가지로 주된 관심사는 국고의 재정을 충당하는데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토양에 공장화된 생산 체계를 이식하는데 전제주의 체제가 전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발전하고 있던 부르조아 집단들이 서구의 정치 제도를 도입할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한 시점에 이르렀을 때, 전제주의 체제는 이미 유럽 국가들과 완전히 동일한 물질적 수단으로 무장하고 있음이 판명되었다. 전제주의는 중앙집권화된 관료 기구에 의거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관료 기구는 새로운 사회관계를 확립하는 데는 전혀 무용지물이었지만 체계적인 탄압을 수행하는 데는 커다란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국토의 광활함은, 제반 행정 활동에 지령을 내려 주고 탄압 활동을 비교적 단순하고 신속하게 수행하도록 해주는 전신 설비에 의해서 극복되었다. 철도는 나라의 한 끝에서 다른 한 끝으로 군대를 급파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었다. 혁명 이전의 유럽의 전제주의 정부들은 철도나 전신과 같은 설비들을 거의 알지 못하고 있었다. 러시아의 절대주의가 소유한 군대는 엄청난 것이었다. 물론 이 군대는 러일전쟁과 같은 심각한 고비에는 무용지물임이 판명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 안의 통치를 위해서는 충분히 쓸모 있는 것이었다. 대혁명 이전의 프랑스 정부뿐만 아니라 1848년 혁명 당시의 프랑스 정부조차도 오늘날 러시아의 군대와 유사한 군대는 결코 갖지 못했다.

  조세 및 군사 기구를 통해서 나라를 최대한도로 쥐어짜면서 러시아 정부는 연간 20억 루블이라는 어마어마한 예산을 설정하게 되었다. 이처럼 거대한 군대와 예산을 보증으로 해서 전제주의 정부는 유럽의 금융시장(원문에는 증권거래소로 되어 있음─역주)을 국고 조달원으로 활용하였으며, 러시아의 납세자들은 이러한 유럽의 금융시장에 공물을 바치는 구제불능의 공납자가 되었다.

  이렇게 해서, 19세기의 80년대와 90년대에 와서 러시아 정부는 무적의 위세를 지닌 거대한 군사·관료 조직으로서, 그리고 재정 및 채권거래 조직으로서 세계와 상면하게 되었다.

  절대 군주제의 재정적·군사적 위세 앞에 유럽의 부르조아지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자유주의자들 역시 압도당했으며, 또한 눈이 멀어버렸다. 그래서 러시아의 자유주의자들은 절대주의에 공공연히 도전해서 한판을 겨루어 볼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모든 신념을 상실해버렸다. 절대주의의 군사적·재정적 위력은 러시아 혁명에 관한 한 어떠한 기회도 허용하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정확히 그 반대의 경우가 사실로 입증되었다.

  정부가 더욱 중앙집권화되고 더욱 사회와 유리된 독자적인 것이 되어 갈수록, 그것이 사회 위에 군림하는 전제주의적인 조직으로 되어버리는 일이 보다 빨리 일어난다. 그 같은 조직의 재정 및 군사력이 보다 커질수록 그 조직은 보다 오랫동안, 그리고 보다 성공적으로 존립을 위한 투쟁을 지속할 수 있다. 비록 러시아 국가가 사회 발전의 가장 초보적인 요구들조차도 더 이상 만족시키지 못할지라도, 그리고 국내 행정상의 요구들뿐만 아니라 군사적 방위를 위한 요구들조차도 더 이상 만족시키지 못할지라도(그런데 원래 이처럼 강력한 국가는 군사적 안보의 유지를 위해서 형성되었던 것이다), 연간 20억 루블의 예산을 쓰며 80억 루블의 부채를 안고 있고, 수백만 명의 무장된 병사들로 구성된 군대를 보유하고 있는, 이처럼 거대한 중앙집권화된 국가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존속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같은 상태가 오랫동안 답습되어 감에 따라 경제 및 문화 발전의 요구들과 정부의 정책 사이의 모순은 더욱 커져만 갔다. 정부는 자신이 지닌 타성을 ‘수십억 배’로 보다 강력하게 발전시켜 왔던 것이다. ‘급조된 위대한 개혁들’의 시대가 지나간 뒤에-그런데 그 개혁들은 이러한 모순들을 해결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그 모순들을 처음으로 생생하게 드러내 주었다-정부가 자발적으로 의회주의의 길로 들어서는 깃은 훨씬 더 어려워졌으며, 또한 심리적으로도 불가능한 것이 되어 버렸다. 결국 이 같은 상황이 사회에 지시해 준 이러한 모순들로부터의 유일한 출구는, 절대주의라는 보일러 내에서 절대주의 자체를 폭발시킬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양의 증기를 축적하는 길이었다.

  따라서, 사회 발전에도 불구하고 절대주의를 계속 존속시켜 줄 수 있었던 국가의 행정적․ 군사적․재정적 위세는 자유주의자들의 의견처럼 혁명의 가능성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혁명을 유일한 출구로 만들어 준 것이다. 더구나, 이 혁명은 절대주의의 위세가 자기 자신과 국민 사이에 파놓은 심연의 깊이에 비례해서 더욱더 철저한(radical) 성격을 띠어 갈 것임이 이미 분명해졌다. 러시아의 마르크스주의는 오직 자신만이 이러한 발전의 방향을 설명했으며, 또한 그러한 발전의 일반적인 형태들을 예고해 주었다는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것이다. (맨젤레예프 교수와 같은 반동적인 관료도 이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공업 발전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은 관찰을 하고 있다: “이점에 관해서 사회주의자들은 무엇인가를 감지했으며 부분적으로나마 그것을 이해했지만, 그러나 길을 잘못 들어섰다. 그들은 그들의 고유한 어법(!)에 따라서 폭력에 의지할 것을 호소하고 있으며, 하층 천민들의 난폭한 본능에 영합해서 혁명과 권력을 추구하고 있다.” (『러시아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 p.120)) 반면, 자유주의자들은 가장 황당무계한 ‘실천지상주의'에 만족하고 있었으며, 혁명적 “인민주의자”들(나로드니끼)은 환상으로, 그리고 기적에 대한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지금까지 진행되어 온 사회 발전 전체가 혁명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혁명의 동력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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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도시들과 자본

 

  도시화된 러시아는 최근 역사의 산물이다. 보다 정확히 말해서, 지난 수십 년간의 산물이다. 18세기 초 뽀뜨르 1세(대제)의 통치 말기에 도시에 거주하는 인구의 수는 32만 8천 명을 약간 상회했다. 즉, 나라전체 인구의 약 3% 정도였다. 18세기 말에 와서 그 수는 130만 1천명으로서 총인구의 약 4.1% 가량 되었다. 1812년까지 도시 인구는 165만 3천 명으로 증가했으며, 그것은 전체 인구의 4.4%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19세기 중반이 되었을 때 그 수는 아직 348만 2천 명 정도로서 인구의 7.8%밖에 되지 못했다. 끝으로, 마지막 인구 조사(1897년)에 따르면 도시 인구는 1,628만 9천 명으로 나타났으며, 이것은 전체 인구의 약 13%에 해당하는 수치이다.(이 수치들은 밀류꼬프(Milyukov)의 『논문집』에서 발췌한 것이다. 시베리아와 핀란드를 포함할 경우, 러시아 전체의 도시 인구는 1897년의 인구 조사에 따르면 1,712만 2천 명으로서 전체 인구의 13.25%를 차지한다.(멘젤레예프의 『러시아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 제90쪽에 실려 있는 도표를 참조할 것.))

  만일 우리가 도시를 단순히 행정 단위로서가 아니라 일종의 사회·경제 구성체로서 본다면, 우리는 위에서 본 수치들이 도시의 발전에 대한 참된 실상을 제시해 주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러시아 국가의 역사를 통해서 전혀 합리성이 결여된 이유들을 근거로 도시로 승인되거나 도시 승인이 취소되는 경우들을 많이 보아 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수치들은 “대개혁”(1861년 알렉산드르 2세에 의해서 시작되었으며, 그 대표적인 것이 농노해방령의 공포이다-역자 주) 이전의 러시아에서 도시는 하찮은 비중을 차지했으나 최근 10년 동안 엄청나게 급속도로 성장했다는 사실을 명확히 보여 주고 있다. 미하일로프스끼(Mikhailovsky)의 계산에 따르면, 1885년과 1887년 사이의 도시 인구의 증가율은 33.8%에 달한다. 이것은 러시아 전체의 인구 증가율(15.25%)의 2배를 넘는 것으로서, 농촌 인구의 증가율(12.7%)과 비교해 볼 때 거의 3배에 가까운 것이다. 만일 여기에다 공단 마을 및 부락들을 추가한다면, 도시인구의(농업에 종사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급격한 증가는 훨씬 더 명확하게 드러날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의 근대적 도시들은 거주자의 수뿐만 아니라 사회적 유형에서도 이전의 도시들과는 차이가 난다. 즉, 근대적 도시들은 상업 및 공업 활동의 중심지인 것이다. 반면, 과거 러시아의 전근대적인 도시들은 대부분 어떠한 경제적인 역할도 거의 하지 못했다. 그것들은 군사 및 행정상의 요충지나 요새들이었으며, 거기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어떠한 형태로든 국가에 고용된 자들로서 국고의 지출에 의해 살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도시는 행정 및 군사, 징세(徵稅)의 요충지였다.

  적으로부터 보호를 받기 위하여, 국가에 봉직하지 않는 주민들이 도시의 변두리나 외곽지대에 정착하였을 경우에도 그들은 전혀 아무런 구속 없이 자기들이 전부터 해오던 농업을 생업으로 계속해 나갈 수 있었다. 과거 러시아에서 가장 큰 도시였던 모스크바조차도, 밀류꼬프에 따른다면, 한낱 “왕실의 장원이었으며, 주민들의 상당한 부분이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즉 시종이나 근위병 또는 하인으로서 궁정과 연결되어 있었다. 1701년의 호구조사에 따른다면, 대략 16,000세대 가운데 단지 7,000세대만이, 즉 44%만이 독립적인 정착자들 및 장인들이었으며, 이들조차도 국가의 언저리에서 살면서 궁정을 위해서 일하고 있었다. 나머지 9,000세대들은 교회(1,500세대)와 지배 신분층에 속해 있었다.” 이처럼, 러시아의 도시들은 아시아의 전제 군주제의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그리고 중세 유럽의 수공업 및 상업 도시들과는 대조적으로, 오직 소비자의 역할만을 수행했다. 중세 서구의 도시들은 장인이 촌락에서 살아야 할 어떠한 정당한 이유도 없다는 원칙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성공적으로 확립시켰다. 그러나, 러시아의 도시들은 결코 그러한 목적을 추구하려 애써 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매뉴팩처와 수공업은 대체 어디에 있었을까? 그것들은 농업과 연결된 채로 시골에 있었다.

  국가의 가혹한 수탈과 더불어 낮은 경제 수준 때문에 어떠한 부의 축적이나 사회적 분업도 가능할 수가 없었다. 서구와 비교해 볼 때, 상대적으로 여름이 훨씬 짧았기에 겨울의 휴한기가 훨씬 길었다. 이러한 요인들로 인해서, 매뉴팩처는 결코 농업과 분리되지 못했으며, 또한 도시에 집중될 수도 없었다. 오히려 그것은 여전히 농촌에 머물러 있었으며, 단지 농업에 수반되는 보조적인 생업 활동으로 여겨졌다. 19세기 중반 무렵, 자본주의적 공업이 널리 발전하기 시작했을 때, 그것과 대립했던 것은 결코 도시의 수공업이 아니라 주로 농촌 촌락의 수공업이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 밀류꼬프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당시 러시아에는 기껏해야 150만 명 정도의 공장 노동자들이 있었다. 반면, 아직도 400만 명 이상의 농민들이 자신들의 마을에서 가내 수공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그와 병행해서 이전부터 자신들의 주된 생업이었던 농사일을 여전히 계속하고 있었다. 유럽의 공장들은 바로 이와 같은 계급(농촌의 수공업자─역주)으로부터 나왔다. 그러나, 러시아에서 공장들을 세우는 데 이 계급은 (농민적 성격이 더 강했기 때문에─역주)결코 미미한 역할조차도 하지 못했다.”

  물론, 이후의 인구 증가 및 생산성의 증대로 사회적 분업의 기초가 조성되었다. 이 과정은 당연히 도시의 수공업에도 적용되었다. 그러나, 선진국들의 경제적 압력의 결과로서, 이러한 기반을 자본주의적 방식의 대규모 공업이 먼저 선점해 버렸다. 결국, 도시의 수공업은 스스로 발전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를 박탈당한 것이다.

  유럽에서는 동업조합(길드:guild)에 장인이나 직인으로 가입하면서 도시 인구의 핵심을 이루었던 분자들이 러시아에서는 400만 명이나 되는 농촌의 가내 수공업 종사자들 속에 정체적으로 머물러 있었으며, 따라서 점점 동업조합들과는 무관한 것으로 되어 갔다. 프랑스 대혁명 기간 동안 파리의 가장 혁명적인 지구들의 주민들 중 핵심을 이루고 있던 부분도 바로 수공업자 계급이었다. 결국, 러시아에서 도시의 수공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미미했다는 사실 자체만 해도 우리의 혁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러시아 혁명과 1789년 프랑스 혁명간의 무비판적인 비교가 유행하던 시기에 파르부스(parvus)는 대단히 예리하게도, 러시아 혁명의 특수성은 바로 위의 사실로부터 기인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L.T.)

  근대적인 도시의 본질적인 경제적 특성은 도시가 농촌으로부터 공급되는 원료를 가공한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한 이유로 운송 수단의 발달은 도시에게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단지 철도를 부설했을 뿐만 아니라 도시에 대한 공급원들을 거대하게 확장시킬 수 있었으며, 그 결과 많은 인민 대중을 도시에 집중시킬 수 있었다. 인구를 집중시킬 필요성은 큰 공장들을 주축으로 하는 공업의 성장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근대적인 도시, 다시 말해서 최소한 어느 정도의 정치적·경제적 중요성을 지니는 도시의 주민의 핵심은 첨예하게 분화되어 있는 임금 노동자 계급이다. 비록 프랑스 대혁명 기간 동안에는 충분히 드러나 있지 않았지만, 그러나 바로 이 계급이 우리의 혁명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끔 예정되어 있는 것이다.

공장을 중심으로 한 공업 체계는 프롤레타리아를 전면에 등장시켰을 뿐만 아니라 또한 부르조아 민주주의의 지반(地盤)을 붕괴시켰다. 1905년 혁명에서 부르조아 민주주의를 지지한 것은 도시의 쁘띠부르조아들, 즉 수공업자들과 소상인들 등이었던 것이다.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가 거의 걸맞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정치적 역할을 담당하게 되는 또 다른 이유는 러시아 자본의 상당한 부분이 외국에서 이입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카우츠키에 따르면, 바로 이 때문에 러시아 프롤레타리아의 수적 성장 및 힘과 영향력의 증가는 부르조아 자유주의자들의 성장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러시아의 자본주의는 수공업 체계로부터 발전한 것이 아니었다. 자본주의가 러시아를 정복한 배후에는 유럽 전체의 발달된 경제가 있었으며, 그 전면에는 직접적인 경쟁 상대로서 농촌 촌락의 무력한 수공업자나 도시의 불쌍한 수공업자만이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노동력으로 활용할 보유자원으로서 반(半)거지상태의 농민이 있었다. 농촌을 자본주의의 족쇄로 속박하는 데 절대주의는 다양한 방식으로 거들어 주었다.

  먼저 절대주의는 러시아의 농민을 세계 금융시장의 공물헌납자로 전환시켰다. 국내 자본의 결여와 더불어 정부는 끊임없이 화폐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고리(高利)의 외국 차관을 거침없이 도입했다. 예까쩨리나 2세(Catharine ll )의 통치기부터 위떼(Witte)와 두르노보(Durnovo)내각에 이르기까지 암스테르담, 런던, 베를린, 그리고 파리의 은행가들은 러시아의 전제주의를 거대한 금융시장의 투기 대상으로 전환시키기 위해서 체계적으로 노력해 왔다. 소위 국내 대부라고 하는 것도, 즉 국내 금융기관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대출도 상당 부분에서 결코 외국 차관과 다를 바가 없었다. 왜냐하면, 국내 금융기관들도 사실 외국 자본가들과 합작으로 설립된 것이기 때문이었다. 과중한 세금 부과를 통해서 농민들을 프롤레타리아화시키고 빈민화시키면서, 절대주의는 유럽 금융시장으로부터 들여온 막대한 금액을 가지고 병력을 증강하고 전함과 철도, 그리고 감옥들을 만들었다. 경제적으로 볼 때 이러한 비용 중의 많은 부분은 전혀 비생산적인 것들이었다. 국민 생산 가운데 막대한 부분이 이자의 형태로 해외로 유출되었으며, 이를 통해서 유럽의 금융 귀족들은 보다 부강하게 되었다. 지난 십 년 동안 의회주의 국가들 내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증대시켜 가면서 상업 및 산업 자본가들을 뒷전으로 물러서게 만들어 온 유럽의 금융 부르조아지는 짜르 정부를 사실상 자신들의 신하로 삼았던 것이다. 그러나, 유럽의 금융 부르조아지는 짜르에 반대하던 러시아의 부르조아 세력들과 유기적 관계를 맺을 수도 없었으며, 또한 그럴 의향도 없었다. 그들이 러시아의 부르조아지에게 공감이나 반감을 표시하는 데에 지침이 되는 것은, 1798년 짜르 빠벨(Pavel)에 대한 차관 조건으로서 네덜란드의 은행가 호페(Hoppe)와 그 일당들이 정해 놓은 원칙, 즉 “이자는 정치적 상황과는 관계없이 지불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유럽 금융시장으로서는 절대주의를 유지시키는 것이 심지어 직접적인 이익이 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다른 형태의 정부가 들어설 경우, 그처럼 엄청난 고리의 이자를 지불해 줄 것이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국가 차관만이 유럽의 자본이 러시아로 유입되는 유일한 통로는 아니었다. 러시아의 국가 예산 중에서 제법 큰 비중을 차지하던, 외국 차관에 대한 이자로서 지불된 돈은 상업 및 산업 자본의 형태로 다시금 러시아에 재투자되었다. 그것은 아직 개발되지 않은 풍부한 천연자원에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그 때까지 결코 저항하는 데 익숙해 있지 않던, 조직화되지 못한 노동력 또한 구미가 당기는 대상이었다. 1893년부터 1899년까지의 급속한 공업 발전시기 중 그 후반부는 유럽 자본의 이입이 급속히 강화된 시기였다. 이렇듯, 러시아에서 노동계급을 동원시킨 것은 대부분이 유럽의 손아귀에 들어 있는 자본이었으며, 또한 프랑스와 벨기에에서는 의회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자본이었다.

  러시아라는 후진국을 경제적으로 예속화시키는 과정에서 유럽 자본은, 자신이 오늘날의 상태로 발전하기까지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서 거쳐야만 했던 일련의 기술적·경제적 중간 단계들 전체를 생략한 채로 가장 선진적인 형태의 주요 생산 분야들과 교통 및 통신 수단들을 러시아에 이식시켰다. 그러나, 유럽 자본이 자신의 경제적 지배를 추구해 나가는 과정에서 마주치는 장애물이 갈수록 줄어듦에 따라서 그것이 수행하는 정치적 역할은 더욱더 사소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유럽의 부르조아지는 중세의 제3계급(the Third Estate, 즉 ‘평민’)으로부터 발전한 것이다. 그들은 귀족과 사제 신분에 의해서 자행되던 약탈과 폭력에 대항해서 민중의 이익이란 명분으로 항거의 깃발을 높이 치켜들었다. 물론 그러한 대의명분을 내세우면서 바로 그들 자신이 민중을 착취하려는 속셈이었다. 신분(estate) 제도에 기초한 중세의 군주제는, 관료제적 절대주의 체제로 전환해 가는 과정에서, 즉 사제와 귀족 계급의 요구와 주장을 억누르는 과정에서, 주로 도시의 주민들에 의존했다. 그리고 부르조아지는 자기들 자신의 정치적 신분 상승을 위해서 바로 이 같은 과정을 이용했다. 이렇게 해서, 관료제적 절대주의와 자본가 계급은 동시에 발전하였으며, 1789년 양자가 충돌하게 되었을 때 국민 전체의 지지를 받은 것은 바로 부르조아지임이 판명되었다.

  러시아의 절대주의는 서구 국가들의 직접적인 압력 하에 발전하였다. 그것은 제반 경제적 조건들을 통해서 자본가적인 부르조아지가 발생하기 훨씬 이전부터 서구 국가들의 통치 및 행정 방법들을 모방해 왔다. 러시아의 도시들이 아직까지 극히 미약한 경제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을 당시에, 절대주의는 이미 막강한 상비군과 중앙집권화된 관료 기구 및 조세 기구를 갖추고 있었으며 또한 유럽 은행가들에게 상환이 불가능할 정도의 엄청난 빚을 지고 있었다. 절대주의의 직접적인 협력과 더불어 자본은 서구로부터 밀려들어 왔으며, 단기간 내에 많은 고풍스런 재래의 도시들을 상업과 공업의 중심지로 변모시켰다. 그리고 심지어는, 전에 아무도 살지 않던 곳에 단시간 내에 상업 도시와 공업 도시들을 건설시켰다. 이러한 자본은 종종 대규모의 주식회사 형태로 나타났다. 1893년부터 1902년에 걸친 10년간의 급속한 공업 발전 기간 동안 주식 형태의 자본의 총액은 20억 루블로 증가됐다. 반면에, 1854년에서 1892년 동안의 주식자본 총액은 단지 900만 루블로 증가되었을 뿐이었다. 프롤레타리아는 곧 자신이, 응집된 엄청난 대중으로 변모했음을 깨닫게 되었다. 반면, 이 같은 프롤레타리아 대중과 전제주의 체제 사이에는 대단히 적은 수의 자본가 부르조아지가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인민'으로부터 고립되어 있었으며, 어느 정도는 외국인과 같은 존재들로서 역사적 전통도 없었고, 오직 이윤만을 갈망하는 존재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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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1789-1848-1905년의 혁명들

 

  역사는 반복하지 않는다. 러시아 혁명을 프랑스 대혁명과 아무리 비교해 보아도, 전자가 결코 후자의 재반복으로 변화될 수는 없다. 그것은 바로 19세기가 결코 헛되이 지나가 버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1848년은 이미 1789년과는 엄청나게 차이가 난다. 프러시아의 혁명이나 오스트리아의 혁명이 프랑스 대혁명에 비해서 별로 진전된 것이 없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놀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서는─역주) 이 혁명들은 너무 일찍 발생했다고 볼 수 있으며, 또 한편으로는(부르조아 혁명으로서는─역주) 너무 늦게 일어났다고 볼 수도 있다. 부르조아 사회가 구시대의 영주들을 철저하게 청산하는 데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엄청난 노력들은 오직 다음 두 가지의 경우에만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즉, 국민 전체가 봉건적 전제정치에 대항해서 궐기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 해방되려고 노력하는 이러한 국민 내부에서 계급투쟁이 강력하게 발전되어야 하는 것이다. 1789년부터 1793년에 걸쳐서 일어났던 일은 바로 전자의 경우에 해당되는데, 이 경우 구질서의 맹렬한 저항에 의해서 압축된 국민적 에너지는 전적으로 반동에 대한 투쟁에 쓰였던 것이다. 다른 한편, 후자의 경우는 역사적으로 아직 일어난 적이 결코 없으며,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단지 하나의 가능성으로서만 생각하고 있는데, 만일 그러한 경우가 실현된다면, 역사의 암흑 세력들을 타도하는데 필요한 실제적인 힘은 부르조아 국가 내에서 일종의 ‘격렬한 내전적인’ 계급 전쟁에 의해서 생성된다. 그 같이 가차없는 내전적인 갈등은 막대한 양의 국민적 에너지를 흡수해 버릴 것이며, 또한 부르조아지로부터 지도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해 버릴 것이다. 따라서, 부르조아지의 적대자인 프롤레타리아를 전면에 부각시키게 될 것이며, 단시일 내에 프롤레타리아에게 10년에 해당하는 경험을 안겨 줄 것이다. 프롤레타리아에게 상황의 주도권을 부여할 것이며, 또한 단단하게 조여진 권력의 고삐를 그들에게 건네줄 것이다. 단호하고 의심을 모르는 이 계급은 사건들의 회오리를 휘몰아쳐 올 것이다.

  만약 어떤 국민이 혁명을 달성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 국민 전체가 마치 도약할 준비를 하는 사자처럼 스스로 하나로 결집되는 경우거나, 그렇지 않으면 국민 전체가 투쟁 과정에서 포괄적으로 분열되면서 그들 가운데 최상의 부분이 해방되고, 또한 바로 이들에 의해서 국민 전체로서는 수행할 수 없는 과제들이 해결되는 경우이다. 이상과 같은 두 가지의 서로 다른 경우를 이루는, 역사적 조건들의 집합은 서로 상반되며, 만일 두 집합을 완전히 추상화된 순수 형태로만 파악한다면, 물론 양자간의 대립은 한낱 논리학에서의 대우명제의 관계밖에는 되지 않을 것이다.

  다른 많은 경우들에서도 그러하듯이, 이러한 대립선상에서 중간의 길로 나아간다는 것은 가장 최악의 길이다. 그런데, 1848년의 혁명은 이러한 중간의 길로 나아갔던 것이다.

  프랑스 대혁명 기간 동안에는 프랑스의 부르조아지가 진보적이었고 능동적이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위치가 지니고 있는 모순들을 아직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으며, 역사는 그들에게 프랑스의 다 낡아빠진 제도들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의 반동세력들에 대항해서 새로운 질서를 건설하기 위한 투쟁을 지도하라는 임무를 부과했다. 따라서 부르조아지는 철저하게, 그리고 그들 내부의 파벌이야 어떻든 간에, 자신을 국민의 지도자로 간주하였고, 대중을 투쟁에 결집시켰으며, 이들에게 투쟁 구호 및 전술들을 제시해 주었다. 민주주의는 하나의 정치 이데올로기를 통해서 국민 전체를 결속시켰다. 민중, 즉 농민과 노동자들 및 도시 쁘띠부르조아지는 부르조아를 자신들의 대표로 선출했으며, 이들 대의원들이 자신의 선거인들로부터 위임받은 권한들은 자신의 구세주적 사명을 의식하게 된 부르조아지의 언어로 문서화되었다. 비록 계급적 적대 관계가 이미 드러나 있었다 할지라도, 혁명기간 내내 혁명 투쟁의 강력한 관성은 시종일관 부르조아지 중에서 보다 보수적인 인자들만을 정치적 궤도 밖으로 내동댕이쳐 버렸던 것이다. 어떠한 계층도 자기 바로 뒤에 위치한 계층에게 자신의 혁명적 에너지를 넘겨주고 나서야 비로소 궤도에서 밀려났다. 따라서 일반 국민은 보다 예리하고 보다 단호한 방식으로 그들의 목적을 위해 계속 투쟁해 나갔다. 대부르조아지의 상층부가 운동을 촉발시켰던 국민의 중핵과 결별하고 루이16세와 동맹을 형성하였을 때, 국민의 민주주의적 요구들은 이러한 대부르조아지에 대항하는 방향을 지향했으며, 따라서 민주주의의 논리적, 필연적 형태인 보통선거와 공화국 수립으로 귀결되었다.

  프랑스 대혁명은 실로 범국민적인 혁명이었다. 그리고 나아가서, 그러한 국민적(national : ‘부르조아 사회 일반’의 발전이라는 뜻임─역주) 테두리 내에서 지배권과 권력과 완벽한 승리를 위한 부르조아지의 세계적인 투쟁이 고전적으로 표출된 것이었다.

  쟈꼬뱅주의라는 낱말은 현재에는 현자인 것처럼 행세하는 모든 자유주의자들에게 일종의 욕설로 통용되고 있다. 혁명, 대중, 거리에서 이루어지는 역사의 힘과 장엄함에 대한 부르조아지의 증오는, 그들이 겁에 질리고 분노에 차서 내뱉는 이 한마디의 외침─쟈꼬뱅주의!-속에 응축되어 있는 것이다. 공산주의의 국제 전위대인 우리는 이미 오래전에 쟈꼬뱅주의와 역사적 결말을 보았다. 현재의 국제 프롤레타리아 운동 전체는 쟈꼬뱅주의의 전통에 대항한 투쟁 속에서 형성되었으며, 또 그 투쟁을 통해서 강력하게 성장해 온 것이다. 우리들은 쟈꼬뱅주의의 이론들을 비판했으며, 그것의 역사적 한계, 사회적 모순, 공상적 이상 및 미사여구들을 폭로했다. 즉, 우리들은 수십 년간 혁명의 성스러운 유산으로 여겨져 왔던 쟈꼬뱅주의적 전통들과 단절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빈혈증에 걸려 무기력해진 자유주의자들의 멍청한 욕설과 중상모략 등과 같은 공격에 대해서는 쟈꼬뱅주의를 옹호한다. 부르조아지는 그들의 역사적 전성기에 이루어 놓은 모든 전통들을 파렴치하게 배신했으며, 현재 그들의 후계자들은 자기 조상들의 무덤을 욕되게 하고 이미 해골이 되어 버린 조상들의 이상을 비웃고 있다. 부르조아지의 혁명적 과거의 명예로운 유산을 떠맡아 현재 보존하고 있는 것은 바로 프롤레타리아이다. 사실, 아무리 철저하게 부르조아지의 혁명적 전통들과 결별했다고 할지라도 프롤레타리아는 여전히 그 전통들을 위대한 열정과 영웅적 투쟁과 진취적 기상의 성스러운 유물로서 보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쟈꼬뱅들이 국민의회(La Convention nationale)에서 보여 준 언행의 대담성에 대해서 심정적으로 공감하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프랑스 대혁명의 전통이 아니었다면 자유주의에게 어떤 매력이 있었겠는가? 1793년 로베스삐에르를 중심으로 한 쟈꼬뱅, 상뀔롯뜨(Sans-culotte;주로 소상인, 임금 소득자, 부랑자로 구성된 급진 공화주의자─역주)들의 공포 민주주의(terrorist democracy)의 기간만큼이나 부르조아 민주주의가 높이 치솟아 민중의 가슴 속에 위대한 불꽃을 타오르게 한 때가 도대체 언제 있었겠는가?

  부르조아 급진주의가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는 그것이 보여 준 왜소함과 파렴치함으로 인해서 간단히 막을 내려 버린 시기에, 쟈꼬뱅주의 말고 다른 무엇이 프랑스의 다양한 색조를 지닌 부르조아 급진주의로 하여금 민중의 압도적 다수 및 심지어 프롤레타리아에 대해서까지도 그토록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만들 수 있었는가?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끌레망소(Clemenceau), 밀랑(millerand), 브리앙(Briand), 부르죠아(Bourgeois)와 같은 프랑스의 급진주의자들과 급진주의적 사회주의자들, 그리고 적어도 빌헬름 2세 밑의 저 우둔한 융커(Junker:19세기 중반 프러시아의 특권 귀족당의 당원─역주)들 보다는 졸렬하지 않은 방식으로 부르조아 사회의 대들보를 방어하는 법을 알고 있는 모든 정치가들을 키워 주고 있는 것은 대체 무엇이겠는가?-그것이 만일 그 추상적인 정치 이데올로기, 신성 공화국에 대한 그 숭배, 의기양양한 그 선언문들과 더불어 쟈꼬뱅주의가 발산하는 매력이 아니라면 말이다. 다른 나라의 부르조아 민주주의자들은,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것에 대한 선망의 눈길로 프랑스의 급진주의자들을 쳐다보고 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들은 급진주의자들의 정치적 장점의 근원인 영웅적 쟈꼬뱅주의에 대해서는 중상모략을 퍼붓고 있다.

  많은 희망이 깨어져 버린 지금에 와서조차도 쟈꼬뱅주의는 여전히 민중의 기억 속에 하나의 전통으로 남아 있다. 과거의 언어는 프롤레타리아가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말하는 데에 오랫동안 여전히 사용되었다. 산악당(La Montagne:프랑스 대혁명 당시 로베스삐에르와 당똥을 중심으로 한 국민의회의 좌파 대의원들을 일컬음; 이들은 통상 회의장내에서 가장 높은 데 위치한 좌석에 앉아 있곤 했다─역주)의 정부가 붕괴된 지 거의 반세기가 지난 1840년, 즉 1848년 6월의 혁명이 발생하기 바로 8년 전에 하이네(Heine)는 파리 외곽의 생 마르소 공장 지대(faubourg de Saint-Marceau)에 있는 몇 개의 작업장을 둘러보았다. 그는 거기서 “하층 계급들 중 가장 견고한 부분”인 노동자들이 독서하는 것을 보았다. 이 광경에 대해서 그는 한 독일 신문에 다음과 같이 기고했다: “나는 거기서 과거 로베스삐에르의 알려지지 않았던 몇몇 새로운 연설문들과 아주 값싸게 제본되어 돌아다니고 있는 옛날 마라(Marat)가 쓴 소책자들을 발견했다. 또한 그밖에도 많은 것들이 있었다. 까베(Cabet)의 『혁명사』, 까르메넨(Carmenen)의 적의에 찬 풍자시들, 『바뵈프(Babeuf)의 가르침과 음모』와 같은 부오나로띠 (Buonarroti)의 각종 저술들,‥‥‥즉 피비린내를 풍기는 모든 글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어서 그 시인은 다음과 같은 예언을 한다: “이러한 씨앗이 거둘 결실 중의 하나로서, 조만간 새로운 공화국의 탄생이 프랑스에 도래하게 될 것이다.”

  1848년에는, 부르조아지가 이미 과거와 필적할 만한 역할을 할 수 없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권력을 향한 길을 가로막고 서 있던 사회체제를 혁명적으로 일소할 의향이 없었으며, 또한 그럴 능력도 없었다. 지금에 와서 우리는 당시 부르조아지가 왜 그러했는가를 명확히  알고 있다. 그들의 목적은 자신들만의 독점적인 정치적 지배가 아니라 단지 구시대의 세력들과 권력을 나누어 갖는 데 필요한 보장 조치들을 구체제 내에 도입시키는 것이었다.─그리고 그들은 이 점을 명확히 의식하고 있었다. 그들은 프랑스 부르조아지의 과거 경험들을 통해서 비열한 짓을 하는 데는 더욱 현명해졌으며, 프랑스 부르조아지의 배신을 통해서 부패하였고, 이들의 실패로 인해서 겁을 집어먹었다. 1848년의 부르조아지는 대중을 인도하여 구질서를 덮치는 데 실패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구질서에 의지함으로써, 앞으로 나아가라고 그들에게 압력을 가하던 대중을 배척했던 것이다. 프랑스 부르조아지로 말하자면 자신들의 대혁명을 완수하는 데 성공했다. 그들의 의식은 사회의 의식이 되었으며, 어떤 것이든지 간에 하나의 제도로서 확립될 수 있으려면 반드시 먼저 부르조아지의 정치의식 속에서 창출될 필요가 있다는 판정을 받아야만 되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부르조아 세계의 한계를 스스로 감추기 위해서 종종 극적인 몸짓을 취하곤 했다.─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혁명만은 완수했던 것이다.

  반면, 독일 부르조아지는 애초부터 '혁명을 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들을 혁명으로부터 유리시켜 버린 것이다. 그들의 의식은 그들의 정치적 지배를 위한 객관적 조건들과 정면으로 대립했다. 따라서 혁명은 부르조아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에게 대항해서만 수행될 수 있었다. 민주주의적인 제도들은 부르조아지의 마음 속에서, 쟁취해야 할 목표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의 안락을 위협하는 것으로 비춰졌던 것이다.

  1848년의 경우에는, 부르조아지 없이도 그리고 부르조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라도 사건을 떠맡을 수 있는 계급, 즉 부르조아지에게 압력을 가해서 앞으로 나아가게 만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결정적인 순간에는 부르조아지라는 정치적 산송장을 궤도 밖으로 내던져버릴 준비가 되어 있는 계급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도시의 쁘띠부르조아지나 농민들은 이것을 할 능력이 없었다.

  도시 쁘띠부르조아지는 과거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해서도 적대적이었다. 이들은 아직 중세적인 관계들 속에 얽매여 있었으나 이미 '자유' 상공업에 대항할 능력은 없었다. 아직은 도시에 자신들의 자취를 새겨 나가고는 있었지만, 그러나 이미 중간 부르조아지와 대부르조아지에게 굴복하고 있는 상태였던 것이다. 편견에 깊이 빠져 있었으며, 사건 전개의 폭발적인 굉음에 귀가 먹어 버렸다. 이들은 착취하면서 착취당하는 존재들로서 탐욕스러웠으며, 또한 자신들의 탐욕을 만족시키기에는 어쩔 수 없이 무기력해야만 했다. 이처럼 궁지에 빠져 꼼짝 못하게 된 존재인 쁘띠부르조아지는 당시의 엄청난 사건들을 통어할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농민은 쁘띠부르조아지보다도 훨씬 더, 독자적인 정치적 주도력(이니셔티브)이 결여되어 있었다. 수세기 동안 속박당해 왔으며 궁핍으로 괴로워하고 분노에 차 있는, 그리고 또한 구시대의 착취와 새로운 시대의 착취의 모든 실타래가 자신에게 감겨 있는 농민은 어떤 시점에서는 혁명적 동력의 풍부한 원천을 이루었다. 그러나, 조직화되어 있지 못했고, 산개(散開)된 채로 문화와 정치의 중추부인 도시로부터 유리되어 있었으며, 도시가 당시 생각하고 있던 모든 것들에 대해서 무관심한 채로 각자 자신의 촌락에 국한된 한정된 시야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농민들은 주도 세력으로서의 어떠한 비중도 차지할 수 없었다. 농민들은 봉건적 의무라는 무거운 짐으로부터 벗어나자마자 즉시 진정되었으며, 그들의 권리를 위해서 싸워 온 도시에게 엄청난 배은망덕한 보답을 했다. 즉, 해방된 농민들은 '질서'의 광신자들이 되어 버린 것이다.

  지식인 민주주의자들에게는 계급으로서의 힘이 결핍되어 있었다. 이 집단은 어느 순간에는 자신들의 선배 격인 자유주의자 부르조아지를 정치적으로 추종했다가 또 다른 순간에는, 즉 위급한 순간에는 자유주의자 부르조아지를 버림으로써 자신들의 고유한 약점을 노출시켰던 것이다. 그들은 풀리지 않는 모순 속에서 혼란을 겪고 있었으며, 또한 가는 곳마다 이러한 혼란을 달고 돌아다녔다.

  프롤레타리아는 너무 약했으며, 조직과 경험, 그리고 인식이 결핍되어 있었다. 낡은 봉건적 관계들의 폐지가 필수적일 만큼 자본주의는 충분히 발전되어 있었으나, 새로운 생산관계의 산물인 노동계급을 결정적인 정치 세력으로서 전면에 부각시킬 정도로 충분히 발전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혁명의 내부적 마찰은 프롤레타리아에게 정치적 독자성에 대한 절박성을 인식시켜 준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대중의 활력과 행동통일을 약화시켰으며, 쓸데없는 힘의 낭비를 초래했고, 또한 최초의 성공을 거둔 후부터는 혁명을 너무 지지부진하게 지체시켜 버렸으며, 따라서 반동 세력의 반격에 어쩔 수 없이 퇴각하도록 만들어 버렸다.

  혁명 기간 중에 제반 정치적 관계들이 갖고 있던 이러한 미완의 불완전한 성격을 특히 명확하게, 그리고 비극적으로 보여 주는 예는 바로 오스트리아의 경우였다.

  1848년 비엔나의 프롤레타리아는 경탄할 만한 영웅적 행위와 지칠 줄 모르는 활력을 보여 주었다. 오직 어렴풋한 계급적 본능에 이끌려서, 그리고 투쟁의 목표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 설정도 갖추지 못한 채로 단지 암중모색의 상태에서 이 구호에서 저 구호로 옮겨 다니면서, 비엔나의 프롤레타리아는 거듭해서 몇 번이고 격전 속으로 돌진했던 것이다. 그런데 프롤레타리아의 지도력이 당시 유일하게 활동적인 민주주의자 집단인 학생들의 손에 넘어갔다는 사실을 충분히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당시 학생들은 자신들의 활동 덕택에 대중에게 거대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으며, 따라서 사건의 추이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들이 바리케이드 선상에서 용감하게 싸웠으며 또한 명예롭게 노동자들과 동지애로 결속될 수 있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그러나 거리에서의 ‘독재적인 권위’를 그들에게 넘겨 준 혁명의 앞으로의 발전과정을 그들이 지도할 수는 전적으로 없는 것이었다.

조직화되어 있지 못했고 정치적 경험이나 독자적인 지도력도 갖고 있지 못했던 프롤레타리아는 학생들의 뒤를 따랐다. 개개의 위급한 순간마다 변함없이 노동자들은 ‘머리로 일하는 양반들’에게 ‘손으로 하는 자신들의 도움’을 제공해 주었다. 학생들은 어떤 순간에는 노동자들에게 싸울 것을 촉구했으며, 또 다른 순간에는 학생들 스스로가 변두리에서 도시로 진입하는 노동자들의 길을 가로막았다. 때때로 자신들의 정치적 전위를 활용하면서, 그리고 사관생도대의 무력에 의존하면서, 노동자들이 자기들 자신의 독자적인 요구들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을 금지시켰다. 이것은 명백히 프롤레타리아 위에 군림하는 시혜적(施惠的)인 혁명적 독재의 고전적인 형태였다. 이러한 사회적 관계의 결과는 무엇이었을까? 왜 다음과 같은 결과가 나왔을까? 즉, 5월 26일 비엔나의 모든 노동자들이 학생들의 부름에 따라, 사관생도대의 무장해제를 막으려고 과감히 일어섰을 때, 수도의 거주민 전체가 도시 곳곳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엄청난 힘으로써 비엔나를 점령하였을 때, 오스트리아 전체가 무장한 비엔나 편을 들었을 때, 군주제가 도피행각을 벌이면서 모든 위신을 상실했을 때, 민중의 압력의 결과로서 군대가 완전히 수도로부터 철수했을 때, 그리고 오스트리아 정부가 후임 정부를 지명하지도 않은 채로 사퇴했을 때-국가 권력을 장악할 만한 정치 세력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자유주의자 부르조아지는 그같이 강탈적인 방식으로 확보된 권력을 잡지 않겠다고 고의적으로 거절했다. 그들은 오직 티롤(Tyrol) 지방으로 도망친 황제의 복귀만을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노동자들은 반동 세력을 패퇴시킬 정도로 충분히 용감했으나, 그러나 이들의 자리를 대신 점유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조직화되어 있지는 못했으며, 또한 그러한 의식을 가지고 있지도 못했다. 강력한 노동운동이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명확한 정치적 목적을 지닌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투쟁은 아직 충분히 발전되어 있지 못했던 것이다. 권력을 장악할 수 없었기에 프롤레타리아는 이처럼 위대한 역사적 과업을 완수할 수 없었으며, 그리고 종종 그러하듯이 아주 시급한 순간에 부르조아 민주주의자들은 살그머니 뺑소니를 쳐 버린 것이다.

  이러한 도망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의무를 수행하게끔 강제하기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에게 임시 노동자 정부를 수립하는데 필요한 것만큼의 활력과 성숙된 의식이 필요했을 것이다.

  결국, 그 당시 어떤 사람이 정확히 지적한 것처럼 다음과 같은 사태가 발생했던 것이었다: “현재 비엔나에 공화국이 수립되어 있는 셈인데 불행하게도 아무도 이 점을 간파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한 공화국은 합스부르크(Habsburg) 왕가에 자리를 넘겨주고 오랫동안 무대에서 퇴장 당하게 되었다. 일단 흘려 보낸 기회는 결코 다시 돌아오지 않는 법이다.

  헝가리와 독일에서의 혁명의 경험으로부터 라쌀레(Lassalle)는 이제부터 혁명은 오직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투쟁에서만 그 지주(支柱)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결론을 이끌어 냈다. 1849년 10월 24일자로 마르크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라쌀레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헝가리에서의 투쟁은 다른 어느 나라에서보다도 성공적인 결과를 가져올 기회가 있었다. 그것은 특히 헝가리의 당이 서유럽과는 달리 분열이나 날카로운 대립 상태에 처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거기에서의 혁명은 특히나 민족 독립을 위한 투쟁의 형태를 취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헝가리는 패배했다. 그것도 정확히 말해서 민족적인 국민당의 배신으로 인해서 말이다.

〔라쌀레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러한 경험과 그리고 1848~49년의 독일 역사는 나로 하여금 어떠한 혁명도 애초부터 그것이 순전히 사회주의적인 것이라고 선언되지 않는다면 유럽에서는 성공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끔 만들었다. 만일 ‘사회 문제’들이 투쟁 속에 일종의 어렴풋한 요소로 들어가서는 단지 그 투쟁의 배경 속에만 머물러 있게 된다면, 그리고 투쟁이 민족의 부활이나 부르조아적인 공화주의의 깃발아래 수행된다면 어떠한 투쟁도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단호한 결론들을 비판하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벌써 19세기 중반에 정치적 해방이라는 문제가 전국민의 압력이라는 만장일치로 합의되는 전술로써 해결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자신의 계급적 입장에 근거해서-그리고 오직 그러한 입장에만 근거해서-투쟁을 위한 힘을 결집시킨다는, 오직 프롤레타리아의 독자적인 전술들만이 혁명의 승리를 보장해 줄 수 있게 된 것이다.

  1905년의 러시아 노동계급은 결코 1848년 당시의 비엔나의 노동자들과 닮지 않았다. 이 점을 가장 잘 증명해 주는 것은 러시아 전역에서 노동자 대표들로 구성된 소비에트들이 출현했다는 사실이다. 이 소비에트들은 봉기의 순간에 노동자들에 의한 권력 장악을 목적으로 전부터 미리 준비된 음모적인 조직들이 아니었다. 결코 그렇지가 않았다. 소비에트들은 대중의 혁명적 투쟁들을 상호 연결시키기 위해서 대중 자신에 의해서 고안되었으며 또한 그렇게 건설된 기구들인 것이다. 그리고, 대중에 의해서 선출되었고, 또한 대중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이 소비에트들은 의심할 여지없는 민주적인 제도들로서 혁명적 사회주의에 근거한 아주 단호한 계급 정책을 수행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러시아 혁명의 사회적 특성은 특히 국민을 무장시키는 문제에서 명확히 드러나고 있다. 국민방위군이라는 일종의 민병대의 창설은 모든 혁명마다 제일 먼저 제기되는 요구였으며, 또한 제일 먼저 얻어내는 성과였다. 1789년에도 그러했으며 1848년 파리, 이태리의 모든 지방국가들, 비엔나, 베를린에서도 그러했다. 1848년의 경우, 국민방위군은, 즉 유산계급 및 ‘교육받은 계층’의 무장은 정부와 대립한 부르조아지 전체의 요구였다. 심지어는 가장 온건한 부르조아 분파까지도 여기에 가담했다. 그들의 목적은 획득한 자유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위로부터의 보수적인 의지에 어긋나게 ‘수여된’ 자유들을 지키는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부르조아지의 사유재산을 프롤레타리아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기도 했다. 따라서 민병대의 창설 요구는 명확히 부르조아지의 계급적 요구였다. 이태리의 통일을 연구한 영국의 어느 자유주의자 역사가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무장한 시민들의 민병대 때문에 전제 정치가 앞으로 더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을 이태리인들은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이밖에도 그러한 민병대는 장차 있을지도 모르는 무정부 상태 및 하층 계급으로부터의 어떠한 종류의 교란에 대해서도 유산계급을 보호해 줄 수 있는 확실한 방책인 것이다.” (볼튼 킹(Bolton King), 『이태리 통일의 역사』, 러시아어 판, 모스크바, 1901, 제1권, p.220.) 그래서, 무정부 상태, 즉 혁명적 대중에 대처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수의 병력을 작전의 요충지에 갖고 있지 못했던 반동적인 통치 세력은 부르조아지를 무장시킨 것이었다. 절대주의는 먼저 공민(公民, 즉 재산세를 내는 시민)에게 노동자들을 제거하고 진압하는 것을 허용해 주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공민들을 무장해제 시키고 진압했던 것이다.

  러시아에서는 민병대 창설의 요구가 부르조아 정당들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자유주의자들은 무장력이 갖는 중대한 의미를 이해할 수조차 없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 절대주의가 그들에게 몇 개의 실제적인 교훈을 주었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그들도 프롤레타리아와 별개인 혹은 프롤레타리아에 대항하는 민병대를 러시아에서 창설한다는 것이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은 이해하고 있다. 상점주인들과 학생들 및 법률가들이 왕실 근위대의 장총을 어깨에 메고 허리에는 군도를 찬 반면에 자신들은 겨우 곡괭이와 돌로써 무장했던  1848년의 노동자들과 러시아의 노동자들은 닮지 않았던 것이다.

  러시아에서는 혁명을 무장시킨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맨 먼저 노동자들을 무장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이 점을 알고 또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에, 자유주의자들은 결국 민병대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것조차 삼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한번 싸워 보지조차도 않은 채로 절대주의에 대해서 자신들의 입장을 양보하고 있다. 마치 노동자들을 무장시키는 것을 피하려는 이유만으로 파리와 프랑스를 비스마르크에게 굴욕적으로 넘겨 준 저 부르조아 정치가 띠에르(Thiers ;파리 꼬뮌 당시 정부측에 서서 노동자들을 탄압한 장본인─역주)처럼 말이다. 자유민주주의자들의 합동 선언문에서-그들의 논문집의 제목은 『입헌국가』이다-지벨레고프(Dzhivelegov)는 혁명의 가능성을 논하면서, “사회는 필요한 순간에는 스스로 자신의 헌정을 수호하기 위해서 일어설 각오가 되어 있어야만 한다”고 전적으로 옳은 말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지적으로부터 도출되는 논리적 귀결이 민중의 무장에 대한 요구인 이상, 이 자유주의자 철학자는 반동으로의 복귀를 방지하기 위해서 “모두가 무기를 소지할 필요는 전혀 없다”(『입헌국가』, 논문집, 제1판, p.49.)라고 “부연 설명할 필요성”을 느꼈다. 단지 필요한 것은 사회 자신이 저항할 채비를 하고 있으면 된다는 것이다.─그러나 어떠한 저항 방식인가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 만일 이러한 견해로부터 어떠한 결론이 도출될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민주론자들의 마음 속에는 무장된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공포가 전제주의의 군대에 대한 공포보다 더 크게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일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혁명을 무장시키는 과제는 전적으로 프를레타리아에게 달려 있다. 1848년 당시 부르조아지의 계급적 요구인 시민 민병대의 창설은 러시아에서는 그 시초부터 민중의 무장을 위한 요구, 즉 무엇보다도 먼저 프롤레타리아의 무장을 위한 요구인 것이다. 러시아 혁명의 운명은 바로 이 문제와 결부되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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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혁명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권력 투쟁에서 제 사회세력간의 역(力)관계에 대한 공개적 척도이다. 국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국가는 단지 지배하는 사회세력들의 수중에 있는 기관일 뿐이다. 모든 기관처럼 국가도 자신의 추진 장치, 전달 장치, 실행 장치를 갖고 있다. 국가의 추진력은 계급이익이다. 즉, 국가 기관의 추진 장치는 선동, 언론·교회·학교를 통한 선전, 정당, 가두집회, 청원, 그리고 봉기이다. 전달 장치는 신의 의지로 표상되거나(절대주의) 국민의 의지로 표상되는(의회주의) 카스트적, 왕조적, 신분적, 혹은 계급적 이익의 입법 조직이다. 끝으로 실행장치는 경찰을 갖춘 행정, 감옥을 갖춘 법정, 그리고 군대이다.

  국가 그 자체는 목적이 아니라 사회관계를 조직하고 해체하며 재조직하기 위한 거대한 수단이다. 국가는 누가 그것을 통제하느냐에 따라 혁명을 위한 강력한 지렛대가 될 수도 있고 계통화된 정체(organized stagnation)를 위한 도구가 될 수도 있다.

  모든 명실상부한 정당은 정치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자신이 대변하는 계급에게 국가가 봉사하도록 만들려고 노력한다. 프롤레타리아의 정당인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당연히 노동계급의 정치적 지배를 위해 노력한다.

  프롤레타리아는 자본주의가 성장함에 따라 성장하고 더욱 강력해진다. 이러한 의미에서 자본주의의 발전은 또한 독재를 지향하는 프롤레타리아의 발전이다. 그러나 권력이 노동계급의 손으로 넘어갈 정확한 시간은 직접적으로는 생산력의 수준이 아니라 계급투쟁에서의 제 관계, 국제적 상황,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노동자들의 전통과 선제주도력(이니셔티브) 및 투쟁 각오 등의 수많은 주관적인 요인들에 달려 있다.

  경제적 후진국의 노동자들이 선진국의 노동자들보다 더 일찍 권력에 다다를 수 있다. 1871년에 노동자들은 쁘띠부르조아적인 파리에서 계획적으로 권력을 수중에 장악했지만-두 달 동안에 불과했지만 어쨌든 사실이다-영국이나 미국과 같은 대자본가적 중심부에서는 노동자들이 단 한 시간도 권력을 장악해 본 적이 없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한 나라의 기술 발전과 자원에 어떤 점에서는 자동적으로 의존한다는 (쁠레하노프의─역주)생각은, 단순화되어 어리석은 발상이 되어 버린 ‘경제적’ 유물론의 편견이다. 이러한 관점은 마르크스주의와는 전혀 아무런 관계도 없다.

  우리의 관점에 의하면, 러시아 혁명은 부르조아 자유주의자 정치가들이 자신들의 통치술을  충분히 발휘할 기회를 갖기도 전에 노동자들의 수중으로 권력이 넘어올 수 있는-혁명이 승리하려면 그래야만 한다-조건들을 창출할 것이다.

  마르크스(오늘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엥겔스이다─역주)는 1848-49년의 혁명과 반혁명을 요약하여 미국의 신문인 『트리뷴』(The Tribune)지에 다음과 같이 썼다.

독일의 부르조아지가 영국과 프랑스의 부르조아지에 뒤져 있듯이, 독일의 노동계급은 사회·정치 발전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노동계급에 훨씬 뒤져 있다. 고용주나 피고용인이나 마찬가지이다. 수많은, 강력한, 집중된, 그리고 총명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존재 조건의 발전은 수많은, 부유한, 집중된, 그리고 강력한 중간계급(당시에는 부르조아지를 가리키는 말이었다─역주)의 존재 조건의 발전과 병행한다. 노동계급 운동 그 자체는, 중간계급의 모든 서로 다른 분파들, 특히 가장 진보적인 분파인 대규모 매뉴팩처 경영자들이 정치 권력을 장악하여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국가를 재구성하고 나서야 비로소 독립적이 되며, 비로소 전적으로 프를레타리아적 성격을 갖는다. 바로 그 때에야 비로소 고용인과 피고용인 사이의 불가피한 갈등이 급박하게 되어 더 이상 연기될 수 없게 된다. (F. 엥겔스, Revolution and Counter-Revolution in Germany, 마르크스 엥겔스 전집, 영어판, 제11권, p. 10.)


  이 인용문은 최근에 교조적인 마르크스주의자들에 의해 상당히 남용되어 왔기 때문에 틀림없이 독자들에게 친숙할 것이다. 그들은 러시아에서의 노동계급 정부라는 개념에 반대하는 반박할 수 없는 논거로서 이 인용문을 제시해 왔다. “고용주나 피고용인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주장은, (러시아의─역주)자본가 부르조아지가 (국가)권력을 장악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하지 못한데, 하물며 어떻게 노동자민주주의, 즉 프롤레타리아의 정치적 지배를 확립하는 것이 가능할 수 있겠는가라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는 무엇보다도 분석-원전 본문의 분석이 아니라 사회관계의 분석-방법이다. 러시아에서 자본가 자유주의가 유약하다는 것이 불가피하게 노동운동이 유약하다는 것을 뜻한다는 말은 참인가? 러시아에서 부르조아지가 권력을 장악했을 때에만 비로소 독자적인 노동운동이 가능하다는 말은 참인가? 마르크스의 역사적으로 상대적인 언급을 초역사적인 공리(公理)로 바꾸려는 시도 뒤에 얼마나 구제불능의 형식주의가 자리 잡고 숨어 있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질문들을 던지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공업 호황기에 러시아의 공업 발전은 ‘미국적’ 성격을 띠었으나, 러시아의 자본주의 공업의 실제 규모는 미국의 공업과 비교할 때 어린애이다. 러시아에서는 경제활동인구의 16.6%인 5백만 명이 제조업에 종사하고 있고, 미국에서는 경제활동인구의 22.2%인 6백만 명이 제조업에 종사하고 있다. 이 숫자만으로는 여전히 별반 설명해 주는 게 없지만, 러시아 인구가 미국 인구의 거의 두 배임을 상기해 본다면 러시아 자본주의 공업의 실상을 극명하게 보여 줄 것이다. 그러나 이들 두 나라 공업의 실제 규모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1900년에 미국의 공장과 대규모 사업장에서 2천 5백만 루블에 해당하는 상품이 생산되었음에 반해, 같은 기간에 러시아의 공장은 2백 5십만 루블에도 못 미치는 상품을 생산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D. 멘젤레예프, 『러시아에 대한 이해를 위하여』, 1906. p.99.)


  공업 프롤레타리아의 수, 집중도, 문화 수준, 정치적 중요성은 자본주의 공업의 발전 정도에 의존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의존이 직접적인 것은 아니다. 주어진 시점에서 한 나라의 생산력과 그 나라 제 계급의 정치적 역량 사이에는 일국적 및 국제적 성격의 다양한 사회․정치적인 요인들이 개입하며, 이 요인들이 경제적인 관계의 정치적인 표현을 굴절시키고 심지어는 때때로 완전히 바꿔 놓는다. 미국의 생산력이 러시아보다 10배나 더 크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프롤레타리아의 정치적 역할, 국내 정치에 미치는 영향력, 가까운 장래에 세계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할 가능성은 미국 프롤레타리아의 역할과 영향력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크다.

  미국의 프롤레타리아에 관한 최근의 저작에서 카우츠키는 프롤레타리아 및 부르조아지의 정치적 역량과 자본주의 발전의 수준 사이에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두 나라〔미국과 러시아─역주〕는 서로 정반대이다. 한 나라[즉, 미국─역주]에서는 부르조아지가 불비례적으로, 즉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발달 수준에 조응하지 않게 발달되어 있고, 다른 나라〔즉, 러시아─역주〕에서는 다른 한 요소, 즉 프롤레타리아가 불비례적으로 발달되어 있다.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미국에서야말로 자본의 독재를 말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 반면에, 다른 어떤 나라도 러시아만큼 투쟁적 프롤레타리아가 중요성을 갖고 있는 나라는 없다. 또한 이 중요성은 증대하고 있음이 틀림없고 또 반드시 증대할 것인데, 그것은 이 나라가 최근에야 비로소 근대적인 계급투쟁에 참가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며, 또 최근에야 비로소 이러한 투쟁을 위한 어느 정도의 행동반경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독일은 어느 정도는 러시아로부터 자신의 미래를 배울 것 같다고 지적하면서 계속 말하기를,─L.T.]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가 우리에게 미래를 보여 준다는 것이 자본의 발전 정도가 아니라 노동계급의 항의로서 표현되는 한에 있어서는 이 점은 실로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러시아가 자본주의 세계의 최대 국가들 중 가장 후진적인 나라라는 사실은 경제 발전이 정치 발전의 기초라는 유물론적 역사관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사실은 유물론적 역사관을 탐구 방법이 아니라 단지 이미 만들어진 판에 박힌 문구로 여기는 우리의 반대자들과 비판자들에 의해 묘사되는 그러한 유물론적 역사관과 모순될 뿐이다. (K. 카우츠키, “미국 노동자”(Der Americanische Arbeiter), 『새 시대』(Neue Zeit), 제24권, 1905~06, 제1호, pp.676~677. 뜨로츠끼는 1906년 성뻬쩨르부르끄에서 출판된 러시아어 판에서 인용하였다.)


  우리는 특히, 사회관계에 대한 독자적인 분석을, 생활의 모든 경우에 적용하기 위해 선택된 원전 본문으로부터의 연역으로 대신하는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이러한 시각을 권하고자 한다. 이들 자칭 마르크스주의자들만큼 마르크스주의의 신용을 떨어뜨리는 자들이 또 누가 있는가.

  그러므로, 카우츠키의 분석에 따르면, 러시아는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의 자본주의 발전으로,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자본가 부르조아지의 보잘것없음과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의 강력함으로 특징 지워진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로 귀결된다.

러시아 전체의 이익을 위한 투쟁은 러시아에 현존하는 유일한 강력한 계급, 즉 공업 프롤레타리아의 역할이 되었다. 이런 이유로 공업 프롤레타리아는 러시아에서 막대한 정치적 중요성을 가지며, 또 이런 이유로 절대주의의 숨막히는 압박으로부터 러시아를 해방시키기 위한 투쟁은 절대주의와 공업 프롤레타리아 사이의 단일한 전투, 농민이 상당한 지원을 제공할 수는 있으나 지도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는 없는 단일한 전투로 전환되어 버린 것이다.


  러시아의 “피고용인”이 그 “고용주”보다 더 일찍 권력을 장악할 것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는 근거를 이 모든 것이 제공하고 있지 않은가?

  정치적 낙관주의는 두 가지 형태를 취할 수 있다. 우리는 혁명적 상황에서 우리의 역량과 우리에게 유리한 점들을 과장하여 제 세력간의 주어진 상관관계에 의해 정당화되지 못하는 임무들에 착수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우리가 처한 입지의 논리에 의해 불가피하게 내몰려서 넘어서지 않을 수 없는 혁명적 임무들을 낙관적으로 제한할 수도 있다.

  우리의 혁명이 그 객관적 목표와, 따라서 그 필연적 결과에 있어서 부르조아적(성격의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이 부르조아 혁명의 주역이 혁명의 전체 경로에 의해 권력을 향해 나아가지 않을 수 없는 프롤레타리아라는 사실에 눈을 감음으로써 우리는 혁명의 모든 문제들의 범위를 제한할 수 있다.

  부르조아 혁명이라는 틀 내에서 프롤레타리아의 정치적 지배는 단지 일시적인 에피소드일 따름이라며, 프롤레타리아가 일단 권력을 장악하고 나면 무장력에 의해 권력을 탈취당할 때까지 필사적인 저항을 하지 않고는 권력을 내놓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망각해 버림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안심시킬 수도 있다.

  러시아의 사회적 조건들이 아직 사회주의 경제를 시행하기에 성숙하지 않았다며, 권력을 장악한 프롤레타리아가 자신들이 처한 입지의 논리 그 자체에 의해 불가피하게 산업의 국영화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간과해 버림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안심시킬 수도 있다.

일반적인 사회학 용어인 부르조아 혁명은 어떤 주어진 부르조아 혁명의 역학이 제기하는 정치적·전술적 문제들, 모순들, 그리고 난점들을 결코 해결하지 못한다.

  18세기 말, 혁명의 객관적 과제가 자본 지배의 확립이었던 부르조아 혁명의 틀 내에서, 상뀔롯뜨(Sans-culottes:주로 임금 소득자, 소상인, 부랑자 등으로 구성된 프랑스 혁명의 급진 공화파 행동가들─역주) 독재는 실현될 수 있었던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 독재는 단지 일시적인 에피소드가 아니었다. 그것은 19세기 전반(全般)에 걸쳐 그 흔적을 남겼는데, 그것도 부르조아 혁명이라는 포위 장벽에 부딪혀 곧 분쇄되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러했던 것이다.

  그 직접적·객관적 과제가 역시 부르조아적인, 20세기 초의 혁명에서, 가까운 전망으로서 프롤레타리아의 정치적 지배가 불가피한 또는 적어도 가능한 것으로 대두하고 있다. 프롤레타리아 자신은 이 지배가, 어떤 속물 현실주의자들이 바라고 있는 바처럼, 단지 일시적인 ‘에피소드’가 결코 안 되도록 주의를 기울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에조차,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가질지도 모른다: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부르조아 혁명의 장벽에 부딪혀 분쇄된다는 것이 불가피한 일인가, 아니면 주어진 세계사적 조건 속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일단 그 장벽을 깨뜨려 버리고 승리의 전망을 열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가?” 여기에서 전술과 관련된 문제가 제기된다. 즉, 혁명의 발전이 그러한 단계를 근접시킴에 따라 우리가 의식적으로 노동자 정부를 지향해 활동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그 순간에 정치 권력을, 부르조아 혁명이 노동자들에게 전가한, 피하는 편이 더 나은, 불행으로 여겨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현실주의자” 정치가 폴마르(Georg von Vollmar:독일사회민주당의 수정주의자─역주)가 1871년의 파리 꼬뮌 참여자들에 대해 “그들은 권력을 잡지 말고 차라리 잠을 잤더라면 더 나았을 텐데”라고 했던 말을 우리들 자신에게 적용해야 한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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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프롤레타리아 권력과 농민

 

  혁명이 결정적으로 승리한 경우, 권력은 투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계급, 다시 말해서 프롤레타리아의 손에 넘어갈 것이다. 이것은 프롤레타리아가 아닌 사회 집단들의 혁명적인 대표들이 정부에 참여하는 것을 배제하는 것이 결코 아님을 일단 지적해 둘 필요가 있다. 그들도 정부에 참여할 수 있으며 또한 참여해야 한다: 건실한 정책을 시행하려면 프롤레타리아는 도시 쁘띠부르조아지와 지식인 및 농민의 영향력 있는 지도자들을 권력에 참여시킬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단지, 모든 문제의 핵심은 ‘누가 정부 정책의 실질적인 내용을 결정할 것이며, 누가 정부 내에서 확고한 다수를 형성할 것인가?’라는 점이 될 것이다.

  노동자들이 다수파를 점하고 있는 정부에 민중의 다른 민주주의적인 계층들의 대표들이 참여한다는 것과 프롤레타리아의 대표들이 어느 정도는 대접받는 인질의 자격으로서 명백히 부르조아․민주주의적인 정부에 참여한다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인 것이다.

  자유주의 자본가 부르조아지의 정책은, 그들이 드러내는 모든 동요와 후퇴 및 배신 행위에도 불구하고, 전적으로 명확한 것이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의 정책은 훨씬 더 명확하고 확정적인 것이다. 반면에, 지식인이나 농민 또는 도시 쁘띠부르조아지의 정책은 전적으로 불명확하며, 무정형적이고, 개연성들로 가득 차 있으며, 따라서 많은 돌발적인 사태들을 유발시킬 수 있다. 그것은 이들 집단의 사회적인 성격 때문이다. 즉, 지식인들은 사회적으로 중간적인 존재로서, 정치적으로 볼 때 너무 큰 신축성이 있다. 그리고 농민들은 사회적 다양성과 중간적인 위치 및 원시적인 성격을 그 특징으로 한다. 도시 쁘띠부르조아지도 역시 중간적인 위치에 속하는데, 앞의 두 집단들과는 달리 이들은 자신의 성격도 없고 정치적인 전통도 완전히 결여되어 있다.

  이러한 세 집단이 어떤 정책을 펼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그 자체로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단지, 프롤레타리아 대표들이 없는 혁명적 민주주의 정부를 상상해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만일 어떤 혁명 정부가 사회민주주의자들이 거기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한다면, 그러한 정부는 실로 존립할 수 없을 것이며, 따라서 혁명에 대한 배신으로 귀착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정부에 프롤레타리아가 참여한다는 것은, 그것이 통치권과 주도권을 쥔 참여일 경우에만 객관적으로 실현 가능하며 또한 원칙적으로 허용될 수 있는 일이다. 물론 그러한 경우, 정부의 형태는 프롤레타리아와 농민의 독재나 프롤레타리아와 농민 및 인쩰리겐챠(지식인)의 독재, 또는 심지어 노동계급과 쁘띠부르조아지의 독재와 같은 다양한 형태들 중의 어느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다음과 같은 질문이 해결되어야 하는 것이다: 정부 자체 내에서, 그리고 나라전체에 대해서 누가 헤게모니를 행사해야만 되는가? 따라서 우리는 노동자 정부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그 헤게모니는 노동계급에 속해야 된다는 것을 명확히 해 주는 것이다.

  쟈꼬뱅 독재의 의결 기구였던 국민의회(la Convention nationale)는 결코 쟈꼬뱅들만으로 구성되어 있지는 않았다. 더구나 쟈꼬뱅은 거기서 소수파의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국민의회 밖에서 상뀔롯뜨들이 행사한 영향력과,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는 단호한 정책이 필요하다는 요구는 권력을 쟈꼬뱅의 수중에 안겨 주었던 것이다. 따라서, 국민의회는 형식적으로는 국민 전체의 대의 기구로서 쟈꼬뱅과 지롱댕, 그리고 그 사이에 통상 늪지대파(Le Marais)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 동요하는 다수의 중도파로 구성된 반면, 본질적으로는 쟈꼬뱅의 독재를 위한 기구였다.

  우리가 노동자 정부라는 말을 쓰는 것은, 그 안에서 노동계급의 대표들이 다수파의 위치에서 지도하는 정부를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는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혁명의 토대를 확장시킬 수밖에 없다. 오직 혁명의 전위, 즉 도시 프롤레타리아들이 국가 권력을 장악하고 난 다음에야 노동 대중의 많은 부분들이─특히 농촌의 경우-혁명 속으로 이끌려 들어올 것이며, 또한 정치적으로 조직화될 것이다. 그 경우, 혁명적 선동과 조직화 작업은 국가 자원의 도움을 받아 가며 수행될 것이다. 입법상의 권력 그 자체만으로도 대중을 혁명화시키는 강력한 도구가 될 것이다. 우리의 제반 사회적·역사적인 제 관계의 특성 때문에 부르조아 혁명의 모든 힘겨운 과제들은 프롤레타리아의 어깨 위에 놓이게 되었다. 그 때문에 노동자 정부는 엄청난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그러나 또한,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적어도 노동자 정부의 초기에는 비할 바 없이 유리한 조건들이 만들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바로 이 같은 사실이 프롤레타리아와 농민간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1789~93년과 1848년의 혁명에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권력이 절대주의 체제로부터 부르조아지 중에서 온건한 분파 쪽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혁명적 민주주의자들이 권력을 장악하거나 혹은 장악할 준비를 채 갖추기도 전에 농민을 해방시킨 것은-어떻게 해방시켰냐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지만-바로 부르조아지였다. 일단 해방된 농민은 ‘도시 사람들’의 정치적 곡예에 완전히 흥미를 잃어 버렸다. 즉, 혁명이 계속 진전돼 가고 있는 상황에서, 마치 육중한 주춧돌처럼 스스로 ‘구질서’의 터전이 되어 버림으로써 농민들은 혁명을 배신하고, 혁명을 황제정치의 신봉자들, 즉 구체제의 절대주의자 반동 세력에게 넘겨주었던 것이다.

  러시아 혁명에서는, 민주주의의 가장 초보적인 과제들을 해결할 수도 있을 부르조아적인  헌정 질서의 수립은 결코 가능하지 않으며 또 앞으로도 오랫동안 그럴 것이다. 위떼(Witte)나 스똘르이삔(Stolypin)과 같은 개혁 추진 관료들의 모든 ‘계몽적인’ 노력들은 허사가 되고 있는데, 그것은 러시아에서는 그들조차도 살아남기 위한 투쟁에 자신들의 온 힘을 쏟아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러시아에서는, 가장 초보적인 개혁 조치들을 요구하는 농민들의 운명조차도-그리고 심지어는 하나의 단일한 계급(원문에는 신분 estate로 되어 있다─역주)으로서의 농민 전체의 이익조차도-혁명 전체의 운명, 즉 프롤레타리아의 운명과 결부되어 있는 것이다.

  권력을 장악한 프롤레타리아는 농민 앞에 바로 그들을 해방시킨 계급으로서 등장하게 될 것이다. 프롤레타리아에 의한 통치는 비단 민주주의적 평등, 자유로운 자치(自治), 부유한 계층에게 세금 부담 전체를 떠맡기는 것, 상비군의 해체와 민중의 무장화, 그리고 강제적인 교회세의 폐지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또한 농민에 의해 수행되는 토지 관계에서의 모든 혁명적 변화(토지의 몰수)를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프롤레타리아는 이러한 변화들을 국가에 의해서 장차 시행될 농업 정책을 위한 출발점으로 삼을 것이다.

  이러한 조건들 하에서 러시아의 농민들은 혁명의 초기, 즉 가장 어려운 시기에 프롤레타리아 정부(노동자 민주주의)의 수호에 관심을 보일 것이다. 적어도 그들의 열성은, 총검을 동원해 가면서까지 새로운 토지 소유자들의 신성불가침한 원리를 보장해 준 나폴레옹 보나파르뜨 군사 정부를 수호하기 위해서 프랑스 농민들이 발휘한 열성 이상이 될 것이다. 따라서, 농민의 지지를 확보한 프롤레타리아의 지도력아래 소집되는 국민의 대의 기구는 다름아니라 바로 프롤레타리아의 통치를 위한 민주주의적인 외피일 뿐일 것이다.

  그러나, 농민이 프롤레타리아를 밀쳐내고 대신 들어앉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그러한 일은 결코 불가능하다. 지금까지의 모든 역사적 경험들에 비추어 보아 이 같은 가정은 결코 실현될 수 없다. 역사적 경험들은 농민이 어떤 독자적인 정치적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두마(Duma :짜르 시대의 제정 의회─역주)에서 농민 연맹과 노동단(뜨루도비끼; Trudoviki)이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의 논거에 대한 반증이 될 수 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농민 연맹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민주주의 혁명과 농업 개혁의 강령에 기초한 연맹으로서, 거기에는 농민 중에서 보다 의식이 있는 분자들과 더불어, 대중의 지지를 구하고 있는 몇몇 급진적 민주주의자들이 포함되어 있다. 물론 이 연맹에 참여한 농민들은 결코 최하층 농민들이 아님은 명백한 사실이다.

  농민 연맹의 존재 이유인 농업 강령(‘토지의 사용에 있어서의 평등’)으로 말하자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농민 운동의 발전이 보다 확장되고 깊이를 더해 감에 따라, 그리고 토지의 몰수 및 분배(재분배─역주)의 시점이 보다 빨리 도래함에 따라, 농민 연맹은 보다 빠른 해체 과정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이 연맹이 안고 있는 무수한 모순들-계급적, 지역적, 일상적, 기술적인 성격의-때문이다. 이 연맹의 구성원들은 촌락 내에서의 농업 혁명의 기구인 농민 위원회에서 자신들에게 할당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경제적 및 행정적인 성격의 제도인 농민 위원회가 도시에 대한 농촌의 정치적 종속을 철폐할 수 없으리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런데 그러한 종속이야말로 근대 사회의 기본 성격들 중의 하나인 것이다.

  노동단(뜨루도비끼)의 급진주의와 무장형성은 농민의 혁명적 열망에 내포되어 있는 모순적인 성격의 발로였다. 제헌의회의 환상이 우세하던 기간 동안에 노동단은 어쩔 수 없이 무력하게도 ‘까데츠’(입헌 민주주의자들)의 뒤를 따라야만 했다. 두마가 해체되는 시점에서 노동단은 자연히 사회민주주의자 조직의 지도를 따르게 되었다. 이처럼 독자성의 결여라는 농민 대표들의 특징은 특히, 확고한 주도적 선제 행동(이니셔티브)이 필요한 순간에. 즉 혁명가들이 권력을 장악해야만 하는 시기에 명확하게 부각될 것이다.)

  자본주의의 역사는 농촌의 도시에 대한 종속의 역사이다. 유럽 도시들의 순조로운 공업 발전은 농업에서의 봉건적인 관계들의 유지를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농촌 그 자체만으로는 봉건체제의 폐지라는 혁명적 과제를 담당할 수 있는 계급을 결코 창출해 내지 못했다. 농업을 자본에 종속시킨 도시는 농촌에 대한 정치적 헤게모니를 잡고서 국가 및 소유관계에서의 혁명을 농촌에까지 확산시키는 혁명 세력을 창출해 냈다. 발전이 계속 진행되어 감에 따라서 농촌은 결국 자본에 대한 경제적 예속 상태로 빠져들었으며, 농민은 부르조아 정당들에 대한 정치적 예속 상태로 빠져들었다. 부르조아 정당들은 농민을 자신들의 선거 사냥을 위한 대상물로 전락시킴으로써 의회 정치 안에서 봉건주의를 부활시켜 왔다. 현대 부르조아 국가는 조세와 군국주의를 통해서 농민을 고리대금업자의 자본이 뻗치는 악랄한 마수 속에 밀어 넣고 있다. 또한 국가의 사제들과 학교를 통해서, 그리고 병영 생활의 부패를 조장함으로써 농민을 고리대금업자들의 정치적 희생물로 삼고 있다.

  러시아의 부르조아지는 혁명적인 지위 전체를 프롤레타리아에게 양보하게 될 것이다. 또한 그들은 농민에 대한 혁명적 헤게모니도 양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에게 권력을 양보할 수밖에 없는 이러한 상황에서 농민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노동자 민주주의 체제의 편을 드는 것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 만일 농민이 통상 부르조아 체제의 편을 들 때와 거의 동일한 의식 수준으로 프롤레타리아 체제의 편을 든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리 중대한 차이를 가져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농민의 표를 차지한 모든 부르조아 정당이 권력을 이용해서 농민을 기만하고 사취하는 데 급급하는 동안,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자기들끼리 권력 놀음을 하고 있는 동안, 농민의 지원을 받는 프롤레타리아는 농촌의 문화 수준을 향상시키고 농민의 정치 의식을 발전시키기 위해 전력을 다할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이야기해 온 것으로부터, 우리가 ‘프롤레타리아 및 농민의 독재’라는 관념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명확해졌을 것이다. 실제로 그것은, 우리가 그러한 관념을 원칙상 받아들일 수 있는 것으로 여기느냐 하는 문제나, 또는 ‘우리가 그러한 형태의 정치적 협력 관계를 원하는가 안 원하는가’하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우리는 솔직히 프롤레타리아와 농민의 독재라는 관념은 실현될 수 없다-적어도 그러한 관념이 직접적으로 의미하는 바로는-고 생각한다.

  더구나 그러한 연립은 기존의 부르조아 정당들 중의 어느 하나가 농민에 대한 영향력을 독점하는 정부나 그렇지 않으면 농민 스스로가 곧 자신의 독자적인 강력한 당을 건설하는 경우를 전제로 한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경우 모두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입증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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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프롤레타리아 정권

 

  프롤레타리아는 전국민의 봉기 및 전국민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음으로써만 권력을 쟁취할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는 국민의 혁명적 대표로서, 절대주의와 봉건적 야만성에 대한 투쟁에서 국민이 인정하는 지도자로서 정부를 이루게 될 것이다. 그러나 권력을 장악한 프롤레타리아는 새 시대, 즉 혁명 입법과 단호한 정책의 시대를 펼칠 것이다. 그리고 이 점과 관련해서 생각해 볼 때, 프롤레타리아는 전국민의 의지에 대한 공인된 대변자로서의 역할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지는 결코 확신할 수 없다. 구체제의 케케묵은 외양간을 말끔히 청소하고 그 안에 거주하는 자들을 몰아내기 위해서 프롤레타리아가 취할 최초의 조치들은 국민 전체의 적극적인 지지를 얻게 될 것이다.─비록 거세된 자유주의자들은 인민 대중 속에 아직도 어떤 편견들이 완강히 지속되고 있다고 말하더라도.

  이러한 정치적 일소 작업에는 모든 사회 관계 및 국가 관계의 민주적인 재조직화 작업이 수반될 것이다. 노동자 정부는 대중의 직접적인 압력과 요구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모든 관련 사태들에 결정적인 개입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노동자 정부의 첫 번째 과제는 민중의 피로 얼룩져 있는 자들의 군대와 행정부로부터의 추방 및 반민중적인 범죄로 오염되어 있는 무리들의 면직과 해산이어야만 할 것이다. 이 과제는 반드시 혁명의 초기에 이루어져야만 한다. 즉, 사병들이 장교를 선출하고 선출된 장교는 사병들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제도의 도입 및 전국적인 민병대의 조직이 장차 실현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노동자 민주주의는 즉시 노동 시간에 관한 문제, 농업 문제, 실업 문제 등과 직면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점은 분명하다. 즉, 시간이 지남에 따라, 권력을 장악한 프롤레타리아의 정책은 보다 깊숙이 뿌리를 내리게 될 것이며, 또한 더욱더 계급적 성격을 확고히 할 것이다. 이와 병행해서, 프롤레타리아와 국민 사이의 혁명적 유대는 결렬될 것이며, 농민내의 계층적 분열은 정치적 형태를 띠게 될 것이다. 그리고 노동자 정부의 정책이 자기 규정성을 더해 감에 따라, 즉 더 이상 일반 민주주의적인 정책이 되지 않고 계급 정책이 되어 감에 따라, 분열된 농민내의 각 계층간의 적대 관계는 더욱 심화될 것이다.

  농민과 인쩰리겐챠 사이에 부르조아 개인주의적인 전통이나 반(反)프롤레타리아적인 편견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프롤레타리아가 권력을 쟁취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 같은 편견의 결여는 정치적 의식 때문이 아니라 바로 정치적 야만성, 사회의 무정형성, 원시성 및 특징의 부재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후진적인 특성들 중의 그 어느 것도 지속적이고 적극적인 프롤레타리아의 정책을 위한 신뢰할 수 있는 토대를 결코 마련해 줄 수 없다.

  봉건제의 철폐는 그 제도 내에서 모든 부담을 떠맡는 계급(원문에는 estate로 되어 있음─역주)인 농민 전체로부터 지지를 얻을 것이다. 누진적인 소득세의 부과 역시 농민 대다수의 지지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농업 프롤레타리아를 보호할 목적으로 취해지는 어떠한 입법행위도 농민 다수의 적극적인 공감을 얻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소수 농민들로부터는 적극적인 반발에 부딪치게 될 것이다.

  결국, 프롤레타리아는 촌락에서도 계급투쟁을 수행할 수밖에 없는 입장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투쟁적인 방식을 통해서, 모든 농민들 사이에 명백히 존재하고 있는 이익 공동체를 비록 비교적 제한된 범위 내에서나마 어쩔 수 없이 파괴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권력을 장악한 초기부터 프롤레타리아는 부유한 마을과 가난한 마을 사이의 적대 관계 및 농업 프롤레타리아와 농업 부르조아지 사이의 적대 관계 속에서 자신의 지지 세력을 발견해 낼 필요가 있다. 농민의 계급적 이질성이 프롤레타리아의 정책에 여러 가지 어려움을 안겨 주고 그 정책의 기반을 협소한 것으로 만드는 반면, 농민내의 계급분화가 불충분한 경우에는 농민 내에 발전적인 계급투쟁을 도입하는 데에서 난관이 발생할 것이다. 그런데 도시의 프롤레타리아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같은 발전적인 계급투쟁인 것이다. 따라서 농민의 원시성은 프롤레타리아를 향해 적대적인 얼굴로 모습을 바꿀 것이다.

  농민의 냉담성과 정치적 수동성 및 더군다나 농민 상층부의 적극적인 반발은 일부 지식인들과 도시의 쁘띠부르조아지에게 일정한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권좌에 오른 프롤레타리아의 정책이 더욱 단호하고 명확한 것이 되어 갈수록 프롤레타리아가 딛고 서 있는 기반은 더욱더 협소해지고 위태로워질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거의 확실한 일이며 또한 심지어는 거의 불가피한 일이기도 하다.

  프롤레타리아가 자기의 동맹 세력들로부터 반발을 사게 될 프롤레타리아 정책의 중요한 두 가지 특징은 집산주의와 국제주의이다.

  농민의 원시성 및 쁘띠부르조아적인 성격, 농촌에 한정된 그들의 시야, 국제정치적 유대 및 헌신으로부터의 고립 등은 프롤레타리아 권력의 혁명 정책을 공고히 하는 데 심한 어려움을 안겨 줄 것이다. 임시 정부에 참여해서 제반 혁명적 민주 개혁의 기간 동안 그 정부를 이끌어 가면서, 그러한 개혁 조치들이 보다 철저하게 근본적인 성격을 갖도록 조직화된 프롤레타리아에 의지해 싸우고, 그리고 나서 민주주의의 강령이 완전히 실현된 후에는 스스로 닦아 놓은 터전을 떠남으로써 부르조아 정당들에게 길을 열어 주고 자신은 야당으로 돌아가 의회 정치 시대의 막을 열어 주는 것이 사회민주당의 임무라고 생각하는 것은, 노동자 정부라는 생각 자체의 신용을 떨어뜨리는 식으로 상황을 상상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러한 단계론이 ‘원칙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원칙적'이라는 추상적인 형태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전혀 무의미한 일이다─바로 그것이 절대로 비현실적이며 가장 나쁜 종류의 공상-일종의 속물 혁명가의 공상-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리의 강령을 최대강령과 최소강령으로 구분하는 것은 권력이 부르조아지의 수중에 있는 동안에는 아주 중대하고 원칙적인 의의를 지닌다. 부르조아지가 권력을 잡고 있다는 사실 자체는 우리의 최소강령에서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와 양립할 수 없는 모든 요구들을 제외시키게 된다. 그러한 요구들(즉, 최대강령을 이루는 요구들)은 사회주의 혁명의 내용을 형성하며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권력이 사회주의자들을 다수파로 하는 혁명 정부로 넘어가게 되면, 그 즉시로 우리의 강령을 최대강령과 최소강령으로 나누는 것은 전혀 무의미하게 된다. 그것은 원칙이나 즉각적인 실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프롤레타리아 정부는 결코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그러한 제약 내에 한정시킬 수 없는 것이다. 하루 8시간 노동의 문제를 예로 들어보자. 알다시피, 이 문제는 결코 자본주의의 관계들과 모순되지 않는다. 따라서 사회민주당의 최소강령의 어느 한 항목이 될 것이다. 그러나, 혁명기간 동안에, 즉 계급의식들이 서로 열정적으로 비화된 시기에 이러한 방침을 실제로 도입한다고 상상해 보자. 그 경우, 이러한 방침이 공장 폐쇄 및 공장의 가동 중지라는 형태로 나오는 자본가들의 조직적이고도 단호한 저항에 부딪치게 될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 결과, 수십만 명의 노동자들이 거리를 헤매게끔 될 것이다. 이 때 정부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그것이 만일 부르조아 정부라면, 아무리 급진적인 정부라 할지라도 결코 사태를 그러한 지경에 이르게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공장 폐쇄와 직면해서는 그러한 정부는 권력(힘)을 상실한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부는 어쩔 수 없이 사임하게 될 것이며, 하루 8시간 노동제는 도입되지 않을 것이고 항의하는 노동자들은 해고될 것이다.

  프롤레타리아가 정치적으로 지배하는 상황에서는 하루 8시간 노동제의 도입은 전혀 상반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자유주의와는 달리, 자본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에게 의지하고 있으며 또한 부르조아 민주주의가 주장하는 소위 “공정한” 중재자의 역할을 수행할 의사가 없는 정부에게 공장 폐쇄 행위는 당연히 노동 시간을 연장시키기 위한 구실이 될 수 없다. 노동자 정부에게는 오직 한 가지의 해결책 밖에는 없다. 즉, 폐쇄한 공장들을 몰수하고, 사회화된 토대에 기초해서 그와 같은 몰수된 공장들의 생산 활동을 조직화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 수도 있을 것이다. 즉, 자신의 강령에 충실한 노동자 정부는 하루 8시간 노동제를 위한 법령을 공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만일 자본이, 사유재산 제도에 기초한 민주주의 강령이 취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가지고도 진압할 수 없는 강력한 저항을 꾀한다면,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사임함과 동시에 프롤레타리아에게 직접 호소할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해결책은 단지 정부에 참여하고 있는 집단의 관점으로부터 도출된 해결 방식이다. 그리고 그러한 해결 방법은 결코 프롤레타리아나 혁명의 발전을 위한 것이 못 된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사임한 후에 상황은 처음 그들이 권력을 잡지 않으면 안 되었던 때와 똑같이 될 것이다. 자본의 조직화된 반발 앞에서 도망친다는 것은 애당초 권력을 잡기를 거부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큰 혁명에 대한 배신이 될 것이다. 정부에 참여해서는 자신의 약점을 노출시키고 그 다음에 도망치는 것보다는 처음부터 정부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실제로 노동계급의 당을 위해서 훨씬 더 나은 일이 될 것이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프롤레타리아 권력은 실업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가장 적극적인 조치들을 채택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정부 내에 있는 노동자 대표들이 해고된 노동자들의 요구에 대해서 혁명의 부르조아적인 성격을 근거로 응답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정부가 실업자들을 부양하는 책임을 맡는다면─그러한 부양책이 어떠한 형태로 이루어질까 하는 문제는 여기서는 중요하지 않다─그것은 경제적 권한이 즉시 그리고 완전히 실질적으로 프롤레타리아에게로 넘어가는 것을 의미하게 될 것이다. 노동자들을 억압할 때 언제나 산업 예비군의 존재를 활용해 은 자본가들은 자신들이 경제적으로 무력해지고 있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혁명 정부는 그들에게 정치적 무능력이라는 낙인을 찍는 것이다.

  실업자들을 지원하는 과정에서 정부는 파업자들을 지원하게 된다. 만일 정부가 파업자들을 지원하지 않는다면, 정부는 그 즉시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정도로 자신의 존재 기반 자체를 손상당하게 된다.

  정부가 그러한 지원 조치를 취하면 자본가는 공장 폐쇄에 의지하는 수밖에는 다른 어떤 방법도 남아 있지 않게 된다. 고용주들이 노동자들보다 훨씬 오랫동안 조업 중단을 견디어 낼 수 있음은 극히 명확한 사실이다. 따라서 노동자 정부가 전반적인 공장 폐쇄 사태에 대응할 수 있는 길은 단 한 가지뿐이다. 즉, 공장들을 몰수하고 되도록 많은 공장 내에 국영 생산방식이나 공동 생산방식을 도입하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문제들이 단순히 토지를 몰수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농업에서 발생하게 된다. 프롤레타리아 정부는, 대규모 생산을 수행하는 대규모 사유지들을 몰수하자마자 그 즉시로 그것들을 분할해서 소규모의 경작자들에게 매각해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결코 안 된다. 이 문제에 있어서 프롤레타리아 정부에게 가능한 유일한 길은 공동 통제에 의한 협동 생산방식을 조직하거나 아니면 직접 국가의 통제에 의한 생산방식을 조직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사회주의를 향한 길인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극히 명확히 무엇이 문제의 핵심인가를 보여 주고 있다. 즉, 만일 노동자들에게 최소강령에 대해서는 양보하지 않겠다고 미리 약속했다면, 그리고 그와 동시에 부르조아지에게는 최소강령을 넘어서지 않겠다고 약속했다면, 사회민주주의자들은 혁명 정부에 참여할 수 없는 것이다. 그 같은 양면적인 약속을 실현한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의 대표자들이 무기력한 인질로서가 아니라 지도 세력으로서 정부에 참여한다는 사실 자체로 인해서, 최소강령과 최대강령 사이의 경계선은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즉, 집산주의가 당면 과제로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가 이러한 방향으로 전진하는 과정에서 봉착하게 되는 한계점은 세력 관계에 달려있는 것이지, 결코 프롤레타리아 당의 원래의 의도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부르조아 혁명에 있어서의 어떤 종류의 특별한 형태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즉 민주주의적인 프롤레타리아 독재(또는, 프롤레타리아와 농민의 독재) 따위를 결코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다. 노동계급은 민주주의 강령의 한계를 과감히 넘어서지 않고서는 자신들에 의한 독재의 민주주의적인 성격을 보존할 수 없다. 이 점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환상을 갖는 것은 치명적인 것이 될 것이다. 그러한 환상이야말로 사회민주당에 대한 신뢰를 처음부터 실추시키는 일이 될 것이다.

  일단 권력을 잡은 프롤레타리아는 끝까지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싸워야 한다. 권력의 유지와 강화를 위한 이러한 투쟁에서의 주요한 무기 중의 하나가 선동과 조직화 작업-특히 농촌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이라면, 집산주의 정책 역시 그러한 무기 중의 하나인 것이다. 집산주의는 당이 권력을 잡자마자 서 있게 될 최초의 위치로부터 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필연적인 수단일 뿐만 아니라 또한 프롤레타리아의 지원 아래 그 위치를 고수하기 위한 수단이기도하다.

  연속 혁명(uninterrupted revolution)이라는 생각은 이미 사회주의 신문에서는 정식화되어 있다. 즉, 점증하는 사회적 갈등과 새로운 부문들에서 일어나는 대중의 반란들, 그리고 지배계급의 경제적․정치적 특권에 대한 프롤레타리아의 끊임없는 공격과 더불어, 절대주의와 봉건주의의 일소를 사회주의 혁명과 연계시킨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 우리의 소위 “진보적”인 신문들은 한결같이 분노에 차서 외치고 있다: “이런, 우리는 많은 것을 참아 왔지만 이것만은 용납할 수 없다. 혁명은 합법화될 수 있는 길이 아닌 것이다. 예외적인 조치의 적용은 예외적인 상황에서만 받아들여질 수 있는 법이다. 해방을 위한 운동의 목적은 혁명을 영구적으로 만드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혁명을 가능한 한 빨리 법의 통로로 유도하는 데 있는 것이다” 기타 등등.

  이러한 진보적 민주주의를 보다 근본적으로 대변하는 자들은 이미 확보된 입헌적인 “성과들”이라는 관점에서 보더라도 감히 혁명에 반대하는 태도를 취하는 모험을 감수하지는 않는다. 그들의 견해로는, 의회주의 자체가 실현되기 전에 나타나는 이러한 의회에 대한 과대망상증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반대하는 투쟁에서 강력한 무기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다른 길을 택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법률이라는 기반 위에 기초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에게 사실적으로 여겨지는 기반들, 즉 역사적 “가능성”과 정치적 “현실주의”라는 기반 위에 기초하고 있다. 그리고 끝내는 “마르크스주의”까지 끌어들이고 있다. 왜 안  그러겠는가? 저 신앙심 두터운 베니스의 부르조아인 안또니오(Antonio)가 아주 적절하게 말했듯이, “악마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성서까지도 인용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근본적 민주주의자들은 러시아에서의 노동자 정부라는 생각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긴다. 뿐만 아니라, 장차 도래할 역사적 전환기에도 유럽의 사회주의 혁명은 불가능하다고까지 단언한다. 그들은 “혁명의 선행 조건들이 아직 보이지 않고 있다”고 말한다. 이 말은 사실일까? 물론 사회주의 혁명의 일정을 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혁명의 현실적인 역사적 전망을 지적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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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사회주의의 제반 선행 조건들

 

  마르크스주의는 사회주의를 과학으로 발전시켰다. 그러나 이것이 어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마르크스주의를 하나의 공상으로 변질시키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

  사회화 및 협동 생산에 관한 강령을 반박하면서 로슈꼬프(Rozhkov)는 “마르크스에 의해 확고하게 제시된, 미래 사회에 필요한 선행 조건들”이라는 것을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해석한다.

개인적인 이윤 추구의 동기, 금전욕〔?〕, 개인적인 노력 및 진취성과 모험심 등을 최소화시켜 줄 수 있고, 따라서 사회화된 생산방식을 가장 중요한 문제로 부각시켜 줄 수 있을 정도로 기술의 발전이 이루어져 있어야만 하는데, 현재 그러한 객관적인 물질적 선행 조건들이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한 기술 수준은 경제의 모든〔!〕 분야에서 대규모 생산방식이 완전히〔!〕우세하게 되는 것과 아주 밀접한 연관이 있다. 그러한 단계에 이미 도달했는가? 프롤레타리아 속에서의 계급의식의 성장과 같은 주관적, 심리적 선행 조건들조차도 아직 결여되어 있는 상태이다. 즉, 압도적인 대다수 인민들의 정신적 통일을 이룰 수 있을 정도로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의식의 수준이 성장해 있지 못한 것이다. 프랑스 알비(Albi)에 있는 유명한 유리 제조업과 같은 생산자 조합과 역시 프랑스의 몇몇 농업생산의 협동 형태들 및 프랑스 전체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프랑스와 같은 선진국의 제반 경제적 조건들조차도 협동생산 방식이 우세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발전돼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아주 명확하게 알 수 있다. 그 같은 협동 기업들은 단지 평균 수준 정도의 규모이며, 그들의 기술 수준도 일반 자본주의 기업들의 수준을 넘어서지는 못하고 있다. 그러한 협동기업들은 선두에서 산업 발전을 이끌어 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평범한 평균 수준에 접근해 가고 있는 것이다.

개별적인 협동 기업들이 경제 활동 전반에 걸쳐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에 이르렀을 때에만 비로소 우리는 새로운 경제 체제에 접근해 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으며, 또한 그러한 체제의 존재에 필요한 제반 조건들이 마련되었다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N. 로슈꼬프, 『농업 문제에 대해서』, pp. 21~22.)


  로슈꼬프 동지의 원래 의도는 충분히 존중해 줄 수 있지만, 그러나 우리는 유감스럽게도 사회주의의 선행 조건들로 알려진 것과 관련해서 그가 드러낸 것과 같은 혼란된 견해는 부르조아의 문헌에서조차도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혼동에 대해서 어느 정도 자세히 다뤄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로슈꼬프 동지를 겨냥해서가 아니라 적어도 문제 자체의 본질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개인적인 이윤 추구의 동기, 금전욕(?), 개인적인 노력 및 진취성과 모험심 등을 최소화시켜 줄 수 있으며 사회화된 생산방식을 가장 중요한 문제로 부각시켜 줄 수 있을 정도의 단계까지 기술의 발전이 아직은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로슈꼬프는 선언하고 있다.

  이 구절이 함축한 뜻을 정확히 찾아내는 일은 아주 어려운 것 같다. 그러나 아마도 로슈꼬프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말하고자 한 것 같다. 첫째, 현대의 기술은 공업 분야에서 인간의 노동력을 축출하는 것을 아직까지 충분히 달성하지 못하고 있다. 둘째, 이러한 축출 작업이 확고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경제의 전 분야에 걸쳐 대규모의 국가 기업들이 ‘거의’ 완전한 지배 형태를 이루어야 하며, 따라서 한 나라의 인구 전체의 ‘거의’ 완전한 프롤레타리아화가 이루어져야 만다. 이 두 가지 점이 소위 “마르크스에 의해서 확고히 제시되었다”는 사회주의의 선행 조건들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로슈꼬프에 따른다면 사회주의가 도래할 때 그것이 마주치게 될 자본주의적 관계들이라는 배경을 상상해 보자. “산업 전 분야에 걸쳐 대기업이 거의 완전히 장악한다”는 것은 자본주의하에서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농업과 공업 분야에서의 모든 중소 생산자들의 프롤레타리아화, 즉 전 인민의 프롤레타리아화를 의미하다. 그러나 대기업들에서 자동생산 기술이 완전히 지배적인 것으로 될 경우 인력 고용은 최대한으로 축소될 것이며, 따라서 한 나라의 인구 중 압도적인 다수가-가령 90% 정도-국가의 비용으로 빈민 구제소에서 살아가는 노동 예비군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인구의 90% 정도가 그렇게 될 것이라는 상상을 해 봤는데, 그러나 논리적인 관점에서만 본다면, 생산의 전과정이 단 하나의 자동화된 기계 장치로 구성되어 있고 또 이것은 단 하나의 연합 기업이 소유하며 산 노동(living labour)으로는 단 한 마리의 훈련된 오랑우탄만이 필요하게 되는 상황을 상상하는 것조차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우리가 알다시피, 바로 이러한 논리가 뚜간─바라노프스끼(Tugan─Baranovsky) 교수의 현란하고도 일관된 이론인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라면 ‘사회화된 생산방식’은 ‘전면’에 위치할 뿐만 아니라 전 분야를 지배하게 된다. 더구나, 이러한 상황에서라면 트러스트를 소유하고 있는 10%를 제외하곤 국민 전체가 공공비용으로 빈민 구제소에서 살 것이라는 사실로 인해서 소비 또한 자연적으로 사회화되게 될 것이다. 따라서, 로슈꼬프의 뒤에는 뚜간─ 바라노프스끼의 낯익은 얼굴이 웃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제 사회주의가 무대에 등장할 수 있게 되었다라고 한다면, 국민들은 모두 빈민 구제소로부터 탈출해서 소유 집단의 재산을 몰수한다. 물론, 여기서는 어떠한 혁명이나 프롤레타리아 독재도 필요치 않다.

  한 나라가 사회주의를 위해 성숙되어 있다는 두 번째 경제적 표지는, 로슈꼬프에 따른다면, 그 나라에서 협동생산 방식이 지배적일 수 있는 가능성이다. 그러나 프랑스에서조차도 알비에 있는 유리 공업과 같은 대규모적 협동생산 방식은 다른 자본주의 기업들보다 더 높은 단계에 와 있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사회주의 생산방식은 협동 생산활동이 선도 기업으로서 공업 발전의 전면에 자리잡을 때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그의 논거 전체는 시종일관 공허한 순환논법에 기초하고 있다. 협동생산 활동이 공업 발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없다면, 그것은 경제 발전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 많이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경제 발전은 협동생산을 위한 토대를 창출해 준다. 그러나 어떠한 종류의 협동생산을 위한 토대인가? 물론, 임노동에 기초한 자본주의적 협동생산을 위한 토대이다.─모든 공장 하나 하나가 우리에게 그러한 자본주의적 협동생산의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그러한 협동생산의 중요성 역시 증가한다. 그러나 어떠한 방식으로 자본주의의 발전이 협동생산 방식의 기업들을 '공업의 중심부'에 위치시킬 수 있겠는가? 대체 무엇에 근거해서 로슈꼬프는 협동생산 방식의 기업들이 신디케이트와 트러스트들을 누르고 공업발전의 주도적인 위치를 대신 차지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되었을까? 만일 이러한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협동생산 방식의 기업들이 단지 다른 모든 자본주의적 기업들을 자동적으로 몰수해 버리기만 하면 될 것임이 분명하다. 이후로는, 협동생산 방식의 기업들이 모든 시민들에게 직장을 제공할 수 있도록 노동 시간을 충분히 단축하고, 공황을 방지하기 위해서 상이한 생산 분야들의 생산량을 조절하는 것밖에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사회주의의 주된 특징들이 정착되는 것이다. 여기서는 어떠한 혁명이나 노동계급 독재도 전혀 필요치 않을 것이라는 점이 재차 명백해진다.

  세 번째 선행 조건은 심리적인 것이다: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의식이 민중의 압도적인 다수를 정신적으로 단결시킬 수 있는 단계까지 도달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 경우 “정신적 단결”이라는 것은 명백히 의식적인 사회주의적 유대를 의미하는 것이 틀림없기 때문에, 따라서 사회주의의 심리적인 선행 조건을 “인민의 압도적인 다수”가 사회민주당 내에서 조직화된 상태라고 로슈꼬프 동지는 생각하는 것 같다. 요컨대, 명백히 로슈꼬프는 자본주의가 소생산자들을 프롤레타리아화시키고 또한 프롤레타리아 대중을 노동 예비군으로 전락시킴으로써 사회민주주의가 인민의 압도적인 다수(90% 정도?)를 정신적으로 단결시키고 계몽할 수 있는 가능성이 발생할 것이라고 가정하고 있는 것 같다.

  자본주의 경쟁의 틀 내에서 협동생산 방식의 우세가 불가능하듯이, 야만적인 자본주의 세계 내에서 이것은 실현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만일 이것이 실현될 수 있다면, 그렇다면 물론 의식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단결된 국민의 “압도적인 다수”는 전혀 아무런 어려움 없이 극소수의 거대한 자본의 제왕들을 분쇄할 것이며, 또한 혁명과 독재를 거치지 않고 사회주의 경제를 조직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다음과 같은 의문들이 발생한다. 로슈꼬프는 마르크스를 자신의 스승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자선언』에서 “사회주의를 위한 필수적인 선행 조건들”을 요약한 후에 1848년 혁명을 사회주의에 대한 직접적인 서곡으로 간주했다. 물론 60년이 지난 오늘날, 마르크스가 당시에 잘못 생각했다는 것을 깨닫는데 그리 많은 통찰력이 요구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세계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떻게 마르크스가 이 잘못을 저지를 수 있었겠는가? 그는 대체 당시에 대기업들이 산업 전반에 걸쳐서 아직 지배적으로 되지 못하고 있던 사실을 간파하지 못했단 말인가? 생산자들의 협동조합은 아직 대기업의 선두에 있지 못했고 인민의 압도 다수가 아직 『공산주의자 선언』에 제시되어 있는 사상에 기초해서 단결되어 있지 못했다는 사실을 간파하지 못했단 말인가? 우리의 시대에서조차도 이러한 사실들을 찾아볼 수 없는데, 대체 어떻게 마르크스가 1848년 당시에 이 같은 것은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을 간과할 수 있었겠는가? 오늘날 마르크스주의의 많은 완벽한 자동인형들과 비교해 볼 때, 아마도 1848년의 마르크스는 한낱 공상적인 젊은이였나 보다!

  따라서, 비록 로슈꼬프 동지가 결코 마르크스를 비난하는 자들 속에는 포함되지 않을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사회주의의 필수적인 선행 조건인.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완전히 폐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닫게 된다. 로슈꼬프는 물론 우리 당의 양대 경향(즉,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역주) 안에 있는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지니고 있는 공통된 견해들을 단지 아주 논리정연하게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그가 저지른 오류들의 원칙 및 방법적 기초들을 좀더 자세히 분석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얼핏 보기에는, 협동생산의 필연적인 발전에 관한 로슈꼬프의 논거는 그 자신의 독창적인 견해인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생산의 집중화 및 인민의 프롤레타리아화 현상이 어쩔 수 없이 증가할 것이라고 믿으면서, 그와 동시에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앞서 우선 생산자 협동조합들이 지배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고 믿는다는 사회주의자들을 우리는 결코 어디서도 만나 본 적이 없다. 처음의 두 선행 조건들을 통합하는 것은 실제 경제 발전의 과정 속에서는 머리 속에서보다도 훨씬 더 어려운 것이다. 더구나 우리에게는 맨 마지막 선행 조건은 언제나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보다 더 전형적인 편견을 심어 주고 있는 처음 두 개의 “선행 조건들”을 취급해 보고자 한다. 의심할 여지없이, 생산의 집중화, 기술의 발전, 그리고 대중 속에서의 의식의 성장은 사회주의를 위한 필수적인 선행 조건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들은 동시에 발생하며, 따라서 각자 서로 다른 과정을 상호 촉진시킬 뿐만 아니라 또한 서로를 억제하고 제한시켜 주는 것이다. 이 과정들 중 어느 하나가 좀 더 높은 수준에 위치해 있을 경우 그것은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는 나머지 과정들이 어느 정도 일정한 수준으로 발전하도록 요구하게 된다. 그러나 어느 한 과정의 완전한 발전은 나머지 다른 과정들의 완전한 발전과 양립할 수 없다.

  의심할 여지없이 기술 발전의 이상적인 극한점은, 자연계라는 모태로부터 원료를 추출해서 그것을 완성된 소비재의 형태로 인간의 발 아래 던져 놓은 단일한 자동화 생산 장치에 있다. 만일 자본주의 체제의 존속이 계급관계 및 그것으로부터 발생하는 혁명적 투쟁에 의해서 제한되지 않는다면, 기술은 자본주의 체제의 틀 내에서 단일한 자동생산의 그러한 이상에 근접해 감으로써 자본주의 자체를 자동적으로 폐기시킬 것이라고 추측할 근거가 어느 정도 있을지도 모른다.

  경쟁의 법칙으로부터 발생하는 생산의 집중화 현상은 그 자체로 전 인민의 프롤레타리아화를 촉진시키는 내재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다. 이 경향을 따로 분리해서 생각할 경우, 자본주의가 자신의 이상적인 종말을 맞이하기까지 계속해서 자신의 과제를 수행해 나갈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도 일리가 있을 것이다. 즉, 만일 프롤레타리아화 과정이 혁명에 의해서 중단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러나 일정한 세력 관계가 존재하는 이상, 자본주의가 국민의 대다수를 감옥과도 같은 막사에 수용된 노동 예비군으로 전락시켜 버리기 훨씬 이전에 혁명은 이미 불가피한 것으로 등장할 것이다.

  더구나, 일상적인 투쟁의 경험과 사회주의자 당의 의식적인 노력 덕택에 의심할 나위 없이 의식은 계속 성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의식의 성장 과정을 따로 분리시켜 생각할 경우, 민중의 대다수가 노동조합과 정치조직에 포섭될 때까지, 그리고 그렇게 해서 정신적 유대감과 단일한 목적으로 단결될 때까지 계속 의식이 성장해 갈 것이라고 상상할 수도 있다. 만일 실제로 이러한 과정이 질적인 변화 없이 단지 양적으로만 확대되어 간다면, 사회주의는 아마도 21세기나 22세기쯤 돼서 ‘시민의 만장일치의 결의’라는 의식적인 행위에 의해서 평화적으로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의 요점은, 사회주의를 위해서 역사적으로 선행되어야 할 과정들이 서로 고립적으로 발전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제약적이고 어떤 일정한 단계에 도달해서는 많은 상황 변수를 매개로 해서 질적인 변화를 겪는다는 사실에 있다. 더구나 그러한 질적 변화의 단계는 이 과정들의 수학적 극한점과는 전혀 동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이 과정들의 복합적인 결합으로 이루어지는 그러한 질적인 변화는 우리가 통상 사회 혁명이라고 부르는 것을 발생시키는 것이다.

  끝으로, 제일 나중에 언급된 과정, 즉 의식의 성장 과정에 대해서 살펴보자. 우리가 알다시피, 이 과정은 학술 활동들 속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속에서는 프롤레타리아를 50년이나 백 년 아니면 오백 년 동안이라도 인위적으로 붙잡아 매두는 것이 가능할 법하다. 의식의 성장은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의 다양한 일상 생활 과정에서, 그리고 지칠 줄 모르는 계급투쟁을 기반으로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역으로,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의식의 성장은 이러한 계급투쟁을 변화시킨다. 즉, 계급투쟁에 보다 심도 있고 보다 합목적적인 성격을 부여하게 되는데, 여기에 맞서 지배계급도 적극적인 대응책을 마련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부르조아지에 대한 프롤레타리아의 투쟁은 대기업들이 산업 전 분야를 장악하기 시작하기 훨씬 이전에 그 결말을 볼 것이다.

  물론, 정치적 의식의 성장이 프롤레타리아의 수의 증가에 달려 있음은 사실이며, 또한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프롤레타리아의 수가 부르조아 반혁명의 저항을 극복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많아야 함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인구의 ‘압도적인 다수’가 프롤레타리아이어야만 하고 프롤레타리아 중의 ‘압도적인 다수’가 의식적인 사회주의자이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계급의식으로 무장된 프롤레타리아 혁명 진영이 자본의 반혁명 진영보다 강할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 반면, 인구 중에서 중간적이거나 자신이 없는 계층 및 무관심한 계층은 유보적인 입장을 취할 것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강력한 프롤레타리아 독재 체제는 그러한 계층들을 반혁명 쪽으로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혁명 쪽으로 끌어들이게 될 것이다. 당연히 프롤레타리아 정책은 이 점을 의식적으로 고려해야만 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결국 농업에 대한 공업의 헤게모니 및 농촌에 대한 도시의 지배를 전제로 한다.

 

  이번에는 사회주의의 제반 선행 조건들을 보다 구체적으로 그리고 보다 복합적으로 검토해 보자.

  1. 사회주의는 평등한 분배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또한 계획 생산의 문제이기도 하다. 사회주의, 즉 대규모 협동생산 방식은 생산력의 발전이 소기업보다 대기업이 훨씬 더 생산적인 단계에 도달했을 때만 비로소 가능해진다. 대기업들이 소기업들보다 큰 비중을 차지해 감에 따라, 즉 기술이 더욱 더 진보해 감에 따라, 사회화된 생산방식은 더욱 더 경제적으로 유리한 조건을 갖추게 된다. 그리고, 그에 따라서 계획생산에 기초한 평등한 분배의 결과로서 인구 전체의 문화적 수준은 더욱 향상될 것임에 틀림없다.

  사회주의를 위한 이러한 객관적인 첫 번째 선행 조건은 이미 오래 전부터-사회적 노동 분업이 매뉴팩처에서의 노동 분업을 초래한 때부터-존재해 오고 있다. 그리고 매뉴팩처가 공장, 즉 기계 생산으로 대체된 후부터는 이러한 선행 조건은 훨씬 더 큰 범위에서 존재하게 되었다. 대기업 방식은 더욱 더 유리해져 갔으며, 이 사실은 또한 그러한 대기업들의 사회화를 통해서 사회의 부를 더욱 더 증대시킬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수공업적인 작업장이 수공업 종사자들의 공동 소유로 전환될 경우, 노동자들은 단지 약간의 여유만이 생기게 될 것임이 명백하다. 반면, 매뉴팩처들을 거기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공동 소유로 전환하거나 또는 공장들을 그렇게 할 경우-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해서, 대공장들의 모든 생산수단을 국민 전체의 손에 넘겨 줄 경우-국민의 물질적 수준은 명백히 향상될 것이다. 그리고 대규모 생산방식이 더욱 더 높은 단계에 도달해 있을수록 이러한 향상의 폭은 더욱 커질 것이다.

  사회주의 문헌들 속에서는 영국의 하원의원 벨러스(Bellers)(존 벨러스는 하원 의원이 아니라 퀘이커교를 신봉한 지주였다. 그는 하원에 대한 청원의 형태로 자신의 계획을 발표했다.)의 예가 자주 인용되곤 하는데, 그는 1696년, 즉 바뵈프의 음모보다도 1세기 전에 하원에다 독자적으로 자신들의 필요한 모든 물품들을 생산해 낼 수 있는 협동적인 단체들의 설립안을 제출한 사람이다. 그의 제안에 따른다면, 각 생산자 조합은 200명~300명 사이의 인원들로 구성 수 있다. 물론 우리는 여기서 그의 주장을 검증할 수 없으며, 또 그것은 우리의 목적에 전혀 필요하지도 않다. 중요한 것은 집산 경제가 이미 17세기 말에 벌써─비록 그것이 단지 100, 200, 300 또는 500명 단위의 집단으로 구상되었다 할지라도─ 생산의 관점에서 볼 때 보다 유리 한 것으로 여겨졌다는 사실이다.

  19세기 초에 푸리에(Fourier)는 생산자·소비자 연합체인 '팔랑스떼르'(phalanstere;공상적 공산주의 형태의 집산촌─ 역주)에 대한 계획을 설계했는데, 여기서는 구성 인원의 수가 2,000명~ 3,000명 사이로 불어나 있다. 푸리에의 이러한 계산이 정확한지 어떤지는 결코 판별되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어쨌든 간에, 그 때까지의 매뉴팩처의 발전은 그에게 벨러스의  구상보다 훨씬 더 규모가 큰 경제적 집산체의 가능성을 제시해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명백하게도, 존 벨러스의 공동체와 푸리에의 팔랑스떼르 양자 모두는 그 성격상 무정부주의자들이 꿈꾸고 있는 자유로운 경제 공동체와 아주 흡사하다. 그리고 거기에 담겨 있는 공상적인 이념은 그러한 공동체들이 ‘불가능’하거나 ‘인간 본성’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미국에 존재하고 있는 공산주의적인 공동체들은 그러한 것들이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시켜 준다-오히려 그들이 주장하는 공동체들은 경제 발전이 이루어 놓은 진보에 비추어 볼 때 100년 내지 200년 정도 뒤 처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노동의 사회적 분업의 발달이,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계적 생산방식의 발달이, 결국 다음과 같은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게 되었다. 즉, 오늘날 대규모의 집단적 생산방식의 장점들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유일한 협동체는 바로 국가라는 것이다. 더욱이 사회주의적인 생산방식은 정치적․경제적 이유들로 인해서 개별 국가들의 제한적인 범위 내에 갇혀 있을 수가 없다.

  독일의 사회주의자로서 마르크스의 관점을 채택하지 않았던 아틀란티쿠스(Atlanticus:G. Jaeckh─ 영역자 주)는 19세기 말에 독일과 같은 단위 국가들 내에 사회주의 경제를 적용시킬 경우 발생하게 될 장점들을 계산해 보았다. 아틀란티쿠스는 결코 유별난 상상의 나래를 펼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생각은 전반적으로 자본주의 경제의 일상적인 순환 과정 내에서 이루어졌을 뿐이다. 그는 현대의 권위 있는 농업학자들과 기술자들의 저술에 근거해서 자신의 논거를 세웠다. 이것은 그의 논거를 약화시켜 주기보다는 오히려 더욱 강화시켜 주었다고 볼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부당한 낙관주의를 멀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간에, 아틀란티쿠스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즉, 사회주의 경제를 알맞게 조직화함으로써, 그리고 1890년대 중반의 기술적 자원들을 활용함으로써, 노동자들의 수입은 2배 내지 3배로 증가할 수 있으며 노동 시간은 반으로 줄어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의 경제적 장점들을 최초로 입증해 준 이가 아틀란티쿠스였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아틀란티쿠스의 사회주의적인 부기법보다도 훨씬 더 설득력 있게 사회주의의 필연성을 입증시켜 주고 있는 것은 바로 대기업들 내에서의 엄청난 노동생산성과 또한 생산의 계획화에 대한 필연성이다. 아틀란티쿠스의 공헌이라면 단지 그가 이러한 장점들을 개략적인 수치로 나타내 주었다는 데 있다.

  지금까지 이야기해 온 것들로부터 당연히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즉, 인간의 기술 수준이 앞으로 더욱 발전할수록 사회주의는 더욱 더 자본주의보다 유리한 것으로 부각될 것이다. 그리고 집단 생산을 이룩하기에 충분할 정도의 기술적 선행 조건들은 이미 백년이나 이백 년 전부터 존재해 오고 있다. 더구나 현 시점에서 사회주의는 일국적인 틀 내에서뿐만 아니라 상당히 많은 나라들을 포괄하는 세계적인 차원에서도 기술적으로 유리한 것이 되고 있다.

  사회주의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지닌 단순한 기술적인 장점들만으로는 충분하지가 못하다. 18세기와 19세기에 걸쳐서 대규모 생산방식의 장점들을 입증시켜 온 것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자본주의인 것이다. 벨러스의 생각이나 푸리에의 생각은 결코 실천되지 않았던 것이다. 대체 왜 그랬을까? 그것은 바로 당시에는 그들의 생각을 실천할 준비가 되어 있고 또한 그럴 능력이 있는 사회 세력이 결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2. 여기서는 사회주의의 생산·기술상의 선행 조건들로부터 사회․경제적인 선행 조건들로 이야기를 바꿔 보자. 만일 우리가 여기서 계급적 적대 관계로 분열되어 있는 사회가 아니라 어떤 동질적인 공동체, 즉 의식적으로 자신의 경제적 형태를 선택할 수 있는 동질적인 사회를 취급하고 있다면, 사회주의의 건설이 시작되기 위해서는 의심할 여지없이 아틀란티쿠스의 계산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아틀란티쿠스 자신도 통속 사회주의자였기 때문에 실제로 자신의 작업을 그러한 목적을 위한 것으로 여겼다. 오늘날 그 같은 견해는 단지 어느 한 개인이나 회사의 사적 영리추구 활동의 한계 내에서나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새로운 기계류나 원료, 새로운 형태의 경영이나 보수 체계 등의 도입과 같은 개별적인 경제 개혁안은, 그것이 가져다주는 상업적 이점이 입증되기만 한다면, 언제나 기업 소유주들에 의해 채택될 것이며, 또한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데는 어떠한 잘못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사회 전체의 경제를 대상으로 하고 있는 한, 그러한 관점만으로는 충분하지가 못하다. 여기에서는 대립적인 이해관계들이 서로 상충하고 있는 것이다. 즉, 어느 한 계급에 유리한 것이 다른 계급에게는 불리한 것으로 되는 것이다. 어느 한 계급의 이기주의는 다른 계급의 이기주의에 적대적인 것으로 작용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사회 전체에 불리한 것으로도 작용한다. 그러므로, 사회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사회의 적대적인 계급들 중에서 자신의 객관적인 조건 때문에 사회주의의 실현에 관심을 갖는 사회 세력이 존재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세력은 사회주의의 실현에 적대적이며 저항하는 다른 세력을 제압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과학적 사회주의가 이룩한 중요한 공헌들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점에 있다. 즉, 과학적 사회주의는 그 같은 사회세력이 프롤레타리아임을 이론적으로 밝혀 놓았다. 그와 동시에 또한 과학적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와 더불어 필연적으로 성장하는 프롤레타리아는 오직 사회주의 안에서만 구원받을 수 있으며 프롤레타리아가 처한 총체적인 조건은 그들로 하여금 사회주의를 지향하도록 만들고 사회주의 이론은 궁극적으로는 프롤레타리아의 이데올로기가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틀란티쿠스가 얼마나 후진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가를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단언했던 것이다: “생산수단을 국가의 수중에 이전시킴으로써 일반적인 복지뿐만 아니라 노동 시간의 단축도 확보될 수 있다는 사실이 증명된 이상 자본의 집중 및 사회의 중간 계층들의 소멸에 관한 이론이 사실로 판명되는가 또는 그렇지 않게 되는가 하는 문제는 상관없는 일이다.”

  아틀란티쿠스에 따른다면, 사회주의의 장점들이 일단 입증된 이상, “경제 발전에 대한 맹목적인 숭배에 희망을 거는 것은 쓸모없는 일이며 사람들은 사적 생산 제도로부터 국가 또는 사회화된 생산 제도로의 이행을 위해서 광범위한 연구를 하고 또한 포괄적인 철저한 준비를 시작(!)해야 할 것”이라는 것이다.(아틀란티쿠스, 『미래의 국가』, 젤로(Dyelo ; 일─ 역주) 출판사, 뻬쩨르부르끄, 1906, pp. 22~23.)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순전히 비판적이기만 한 전술을 반박하면서 그리고 사회주의로 전환할 준비를 즉시 ‘시작’할 것을 촉구하면서, 아틀란티쿠스는 그렇게 하는 데 필요한 권력을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아직 장악하지 못했다는 사실과 빌헬름 2세를 위시해서 뷜로프(Bülow)및 독일 의회의 다수파가 그들의 손에 권력을 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를 도입할 의사가 티끌만치도 없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푸리에의 도식들이 복위된 부르봉(Bourbon) 왕가에게 전혀 설득력이 없었듯이, 마찬가지로 아틀란티쿠스의 도식들은 호엔쫄레른(Hohenzollern) 왕가에 전혀 먹혀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푸리에는 경제 이론의 분야에 대한 열정적인 환상에 입각해서 자신의 정치적 공상주의를 내세웠다. 반면에 아틀란티쿠스는 그 이상의 공상적인 정치학을 가지고, 설득력 있으면서도 냉담하고 속물적인 부기 활동에 근거해서 자신의 의견을 내세웠던 것이다.

  사회주의를 위한 두 번째 선행 조건이 실현될 수 있기 위해서는 사회적 분화 과정은 어떤 수준에 도달해야만 하는가? 다시 말해서, 프를로레타리아의 상대적인 수적 우세는 어느 정도가 되어야만 하는가? 인구의 절반 또는 3분의 2 아니면 10분의 9가 되어야만 할까? 여기서 단순히 산술적인 한계를 규정지으려 노력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무익한 작업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만일 우리가 그러한 도식적인 노력을 한다면, 우리는 누가 ‘프롤레타리아’ 의 범주에 속하는가 하는 질문을 해결해야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우리는 반(半)프롤레타리아적인 반(半)농민들로 구성된 광범위한 계층을 포함시켜야 할 것인가? 또한 도시 프롤레타리아 출신의 실업자 집단들도 포함시켜야할까?(이들의 일부는 도둑이나 거지와 같은 기생적인 룸펜프롤레타리아로 전락하며, 또 다른 일부는 경제 체제 전체에 대해서는 기생적인 역할을 하는 소매 상인으로서 도시의 거리에 나서게 된다.) 결국 이러한 문제는 결코 단순한 것이 아닌 것이다.

  프롤레타리아가 차지하는 비중은 전적으로 그들이 대규모의 생산활동에서 수행하는 역할에 달려 있다. 부르조아지는 정치적 지배를 위한 자신들의 싸움에서 그들이 지니고 있는 경제력에 의존한다. 정치 권력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기에 앞서, 부르조아지는 나라의 생산수단을 자신의 손아귀에 집중시킨다. 이것이 바로 사회 내에서 그들이 지니는 특별한 비중을 결정짓는 것이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는 그 모든 주마등과도 같은 협동생산의 환상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사회주의 혁명이 발생할 때까지는 여전히 생산수단을 박탈당한 채로 있게 될 것이다. 프롤레타리아의 사회적 위력은 부르조아지의 손안에 있는 생산수단들이 오직 프롤레타리아에 의해서만 가동될 수 있다는 사실로부터 나온다. 부르조아지의 관점에서 본다면, 프롤레타리아 역시 생산수단들 중의 하나로서 다른 것들과 결합해서 하나의 단일화된 기계장치를 구성하는 일종의 부속품일 뿐이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는 이러한 기계장치 내의 유일한 비자동적인 부분으로서, 아무리 부르조아지가 애를 쓴다 하더라도 결코 자동인형의 상태로 축소될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프롤레타리아의 이러한 객관적인 조건은 부분 파업이나 총파업을 통해서 사회 전체의 경제적 기능을-부분적으로 또는 전체적으로-마음대로 차단할 수 있는 힘을 부여해 주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사실로 인해서, 프롤레타리아의 중요성은 명백히-그들의 수가 고정되어 있다고 가정할 경우-그들이 가동시키는 생산력의 양과 비례해서 증가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큰 공장에서 일하는 어느 한 명의 노동자가 다른 모든 것들이 동일한 경우 수공업에 종사하는 어느 한 명의 노동자보다 더 큰 사회적 비중을 차지하며, 도시 노동자가 농촌의 노동자보다 더 큰 사회적 비중을 갖는 것이다. 즉, 프롤레타리아의 정치적 역할은, 대규모 생산이 소생산을 지배함에 따라, 공업이 농업을 지배하고 도시가 농촌을 지배함에 따라, 더욱 더 중요한 것으로 부각되는 것이다. 영국이나 독일의 프롤레타리아가 전체 인구 중에서 차지하는 비율에서 현재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가 차지하는 비율과 동일한 수준에 있던 시기의 그 나라들의 역사를 살펴본다면, 당시에 영국이나 독일의 프롤레타리아는 오늘날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가 행하고 있는 것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들이 차지하고 있던 객관적인 중요성으로 미루어 보아 그러한 역할을 수행할 수도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이미 제2장에서 보았던 것처럼, 도시에 관해서도 동일한 설명이 적용될 수 있다. 독일에서 도시의 인구가 전체 인구 중의 15%만을 차지하고 있던 당시에-오늘날 러시아가 그와 동일한 수준에 와 있다─독일의 도시들은 나라의 정치 및 경제 활동에 있어서 오늘날 러시아의 도시들이 수행하고 있는 것과 같은 역할을 결코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대규모의 공업 시설 및 상업 시설들이 도시에 집중됨으로써, 그리고 또한 철도망을 통해서 도시들과 시골들이 연계됨으로써 러시아의 도시들은 전체 인구에 대한 도시 거주자들의 단순한 수적  구성비율을 훨씬 능가하는 중요성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즉, 러시아 도시들의 성장은 그 중요성에서 도시 거주자들의 단순한 수적 증가를 훨씬 앞지르고 있고, 도시 인구의 증가율은 나라 전체의 자연적 인구 증가율을 앞지르고 있는 것이다.‥‥‥ 1848년 당시 이태리의 경우, 수공업자들의 수효는-프롤레타리아들뿐만 아니라 독립 장인들도 포함해서-전체 인구의 약 15% 정도였다. 즉, 오늘날 러시아에서 프롤레타리아와 수공업자들이 차지하는 비율과 동일한 수준이거나 그 이상의 수준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행한 역할은 현재 러시아의 공업 프롤레타리아가 행한 역할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미미한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정치 권력을 쟁취할 시점이 되려면 전체 인구 중에서 프롤레타리아가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 되어야만 하는가를 미리 결정하려는 노력이 무익한 것임을 명백히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노력 대신에, 우리는 현재 선진국에서 프롤레타리아가 차지하고 있는 상대적인 수적 강세를 보여 주는 일차적인 수치들을 몇 개 제시하고자 한다. 1895년 독일에서 일정한 직업을 가진 인구는 2,050만 명이었다. (이 숫자에는 군인과 국가 공무원, 그리고 일정한 직업이 없는 사람들은 포함되지 않았다.) 이 중에서 프롤레타리아는 1,250만 명이며(농업, 공업, 상업 분야의 임노동자들 및 하인들이 여기에 포함된다), 그 가운데 농업과 공업 노동자들의 수효는 1,075만 명이다. 나머지 800만 명중의 많은 부분도 실제로는 프롤레타리아들로서 가내 공업이나 가족 단위의 작업장 등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다. 농업 분야의 임노동자들만을 따로 파악할 경우 그 수효는 575만 명이다. 그리고 농업인구는 이 나라의 전체 인구 중에서 36%를 차지하고 있다. 거듭 반복해서 말하건대, 이 수치들은 1895년에 해당되는 것들이다. 그 후로 11년이 흘렀으므로, 그 사이에 엄청난 변화가 생겼을 것임에 틀림없다.-즉, 1895년과 비교해서, 농촌 인구에 대한 도시 인구의 비율이 증가했을 것이며(1882년에 농촌 인구는 전체의 42%였다), 농업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공업 프롤레타리아의 비율이 증가했을 것이고, 또한 마지막으로 공업 노동자 1명당 차지하는 생산 자본의 양도 증가했을 것이다. 그러나 1895년을 대상으로 한 수치들조차도 독일의 프롤레타리아는 이미 오래 전부터 이 나라의 지배적인 생산력을 이끌어 왔음을 보여 주고 있다.

  700만 명의 인구를 가지고 있는 벨기에는 전적으로 공업 국가이다. 직업을 갖고 있는 인구 중에서 100명당 41명은 엄밀한 의미에서의 공업 분야에 고용되어 있으며 단지 21명만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는 형태이다. 불규칙적인 보수를 받고 있는 300만 명의 고용인들 가운데 약 180만 명이, 즉 60% 가량이 프롤레타리아이다. 만일 첨예하게 분화되어 있는 프롤레타리아의 수효에 그들과 사회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계층들, 즉 소위 외형상으로만 독립적일 뿐 실제로는 자본에 예속되어 있는 “독립” 생산자들과 하급 장교들이나 사병들 등을 추가한다면 이 수치는 훨씬 더 의미심장한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경제의 공업화 과정 및 인구의 프롤레타리아 과정과 관련지어서 제일 먼저 주목해야 할 나라는 틀림없이 영국일 것이다. 이 나라의 경우 1901년에 농림 어업에 종사하는 인구의 수는 230만 명이었다. 반면, 상공업 및 운수업에 고용된 인구의 수는 1,250만 명이었다. 우리가 보다시피, 유럽의 주요 국가들의 경우 도시의 인구가 수적으로 농촌의 인구를 압도하고 있다. 그러나 도시 인구의 이처럼 엄청난 압도적인 양상은 단지 그들이 만들어 내는 막대한 양의 생산력뿐만 아니라 그들의 질적인 인적 구성에도 근거하는 것이다. 도시는 농촌으로부터 가장 활력적이고 지적이며 능력 있는 분자들을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을 통계적으로 증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단지 도시 인구와 농촌 인구의 연령 구성을 비교해 보면 간접적인 증거가 나타날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도 그 자체로 어떤 의의를 지니고 있다. 1896년 독일의 경우 농업 인구와 공업 인구는 각각 800만 명으로 추산되었다. 그러나 연령 분포에 따라 인구를 분할해 보면, 14세와 40세 사이에 위치하는 활동력 있는 인구의 경우, 도시가 농촌보다 100만 명 이상이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이 사실은 우선적으로 농촌에 남는 인구는 ‘노인과 어린이’들임을 보여 주고 있다.

  이상과 같은 사실들로부터 우리는 결국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즉, 경제 발전은─공업의 성장, 대기업들의 증가, 도시의 성장, 프롤레타리아 일반 및 특히 농업 프롤레타리아의 성장 등─정치 권력을 위한 프롤레타리아의 투쟁뿐만 아니라 그러한 권력의 정복을 위한 싸움터를 이미 마련해 놓고 있는 것이다.

  3. 마지막으로, 사회주의의 세 번째 선행 조건인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관해서 이야기해 보자. 정치는 사회주의의 객관적인 선행 조건들이 주관적인 선행 조건들과 서로 맞물리는 분야이다. 어떤 일정한 사회․경제적 조건들 하에서 어떤 하나의 계급은 스스로 일정한 목적─정치 권력의 쟁취─을 추구하게 된다. 즉, 그 계급은 자신의 힘을 결집시키고 적의 힘을 가늠해 보며 상황을 평가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조차도 프롤레타리아는 절대적으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주관적인 요인들─의식, 각오, 선제주도력(이니셔티브) 등의 발전 과정 역시 자신의 고유한 논리를 지니고 있다─외에도, 프롤레타리아는 자신의 정책을 수행할 때 지배계급의 정책이나 기존의 국가 제도들(군대와 계급적인 도구로서의 학교, 국가, 교회 등과 같은 것들), 그리고 국제 관계 등과 같은 많은 객관적인 요인들과 부딪혀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주관적인 조건들─ 사회주의혁명을 위한 프롤레타리아의 각오-을 다뤄 보고자 한다. 물론, 기술 수준이 사회적 노동생산성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사회주의 경제를 보다 유리한 것으로 만들어 놓았다는 사실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기술에 기초한 사회적 분화가 수적인 측면이나 경제적인 역할에 있어서 주된 계급으로 부각되는, 그리고 객관적으로 사회주의와 이해를 같이하는 프롤레타리아를 창출했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이 계급이 자신의 객관적인 이익을 의식하는 것이 더욱 필요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프롤레타리아가 사회주의 말고는 자신의 이익을 위한 어떠한 다른 출구도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나. 또한 이 계급이 단결해서 충분히 강력한 군대를 이룸으로써 공공연한 전투를 통해서 정치 권력을 쟁취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프롤레타리아가 이러한 방식으로 혁명을 준비할 필요성을 부인한다면 그것은 이제는 어리석은 태도일 것이다. 오직 구태의연한 블랑끼스트들만이 대중과 유리되는 고립적인 방식으로 형성된 음모적인 조직들의 지도 하에 혁명이 성공하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반면, 그들과는 정반대의 태도를 취하는 무정부주의자들은 대중의 자발적이고 원초적인 폭발에 희망을 걸겠지만, 그러한 자생적인 폭발이 어떻게 끝날지는 아무도 말할 수 없으리라. 이들과는 달리,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권력의 쟁취를 혁명적인 계급의 의식적인 행동으로서 이야기한다.

  그러나 많은 사회주의적인 관념론자들은(즉, 모든 것을 형이상학적으로 파악하는 자들은) 프롤레타리아가 도덕적으로 재생된다는 의미로서의 사회주의를 노동자 대중에게 이야기하려 든다. 즉, 프롤레타리아와 “인류” 전체는 무엇보다도 먼저 그들의 낡은 이기주의적인 본성을 벗어 던져야 하며 애타주의(愛他主義)가 사회 생활을 지배하는 원리로 되어야 한다는 등의 소리를 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 같은 상태에 도달하는 것은 아직 요원한 일이며 '인간 본성'은 대단히 느리게 변화하기 때문에, 사회주의는 그 말대로 라면 수세기 뒤에나 가능할 법하다. 이러한 관점은 아마도 대단히 현실적이고 진화론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실제로는 단지 얄팍한 도덕론 이외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사회주의자적인 심리가 사회주의가 도래하기 이전에 발전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있다. 다시 말해서, 대중이 자본주의하에서 사회주의자적인 심리를 습득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사회주의를 향한 의식적인 노력을 사회주의자적인 심리와 혼동해서는 안 될 것이다. 후자의 경우는 경제 활동에 이기주의적인 동기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전제로 한다. 반면 사회주의를 향한 노력과 투쟁은 프롤레타리아의 계급 심리로부터 발생되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의 계급 심리와 무계급적인  사회주의자적 심리 사이에 아무리 많은 접촉점들이 존재한다 할지라도, 어떤 깊은 심연이 둘을 여전히 갈라놓고 있는 것이다.

  착취에 맞선 공동 투쟁은 이상주의, 동지적 유대, 그리고 자기희생의 찬란한 새싹들을 돋아나게 한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생존을 위한 개인적인 투쟁, 언제나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궁핍의 심연, 노동자들 자체 내의 계층적 분화, 아래로부터 나오는 무지한 대중들의 압력, 그리고 대중을 타락시키는 부르조아 정당들의 영향력 등은 이러한 찬란한 새싹들이 충분히 성장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균적인 노동자는 그가 여전히 속물적인 이기주의자로 남아있을지라도, 그리고 '인간적인' 가치에서 부르조아 계급의 평균적인 대표치를 능가하지 못할지라도, 경험을 통해서 그의 가장 단순한 요구나 자연적인 욕망조차도 오직 자본주의 체제의 몰락 위에서만 충족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이상주의자들은 사회주의에 값할 만한 먼 훗날의 미래 세대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는데, 그것은 기독교인들이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구성원들에 대한 모습을 그려내는 일과 하등의 차이도 없는 행위이다.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의 심리 상태가 어떠한 것이었든지 간에─사도행전을 통해서 우리는 공동 재산의 횡령에 관한 이야기들을 알고 있다-그리스도교는 더욱 더 확산되어 감에 따라 결국 국민 전체의 영혼을 소생시키는 데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타락하였으며 물질주의적이고 관료제적인 것으로 변질되었던 것이다. 즉, 박애적인 상호 가르침의 실천으로부터 교황제일주의로, 그리고 방랑의 구걸 고행으로부터 수도원의 기생주의로 변질하였던 것이다. 요컨대, 그리스도교는 자신이 성장해 온 환경의 사회적 조건들을 지배하는 데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신 스스로가 그러한 환경들에 의해서 예속 당했던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의 사제들과 교부들의 능력이 모자랐거나 탐욕스러웠기 때문에 야기된 결과가 아니었다. 오히려, 인간의 심리는 사회적 생활과 노동의 제반 조건들에 종속되어 있다는 냉혹한 법칙으로부터 기인된 결과였다. 그리고 교부와 사제들은 몸소 이러한 종속의 법칙을 입증시켜 주었던 것이다.

만일 사회주의가 기존 사회의 한계 내에서 새로운 인간성을 창조해 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그것은 도덕론자들의 새로운 형태의 공상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사회주의는 사회주의에 대한 선행조건으로서의 사회주의자적인 심리를 창조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주의자적 심리에 대한 선행 조건으로서의 사회주의적인 생활 조건을 창조해 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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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러시아에서의 노동자 정부와 사회주의

 

  앞에서 우리는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객관적 선행 조건들이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의 경제 발전을 통해서 이미 조성되어 있는 상태임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이와 관련해서, 러시아에 관한 한 우리는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일까?

  러시아 프롤레타리아의 손에 권력이 이전되는 것은 우리의 국민경제가 사회주의로 전환되는 과정의 시초가 될 것이라고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것일까? 1년 전에 우리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어떤 문건을 통해서 발표했는데, 그 문건은 우리 당의 양대 분파의 조직들로부터 가차없이 쇄도해 들어오는 비판의 집중 포화를 받아야만 했다. 그 문건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마르크스는 우리들에게 “파리의 노동자들이 그들의 꼬뮌으로부터 어떤 기적을 요구한 것은 아니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들 역시 프롤레타리아 독재로부터 어떤 즉각적인 기적을 바라서는 안 될 것이다. 정치 권력은 전지전능한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를 사회주의로 대체시키기 위해서는 단지 프롤레타리아가 권력을 잡고 몇 개의 법령을 공포하는 것만으로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터무니없는 생각일 것이다. 경제 체제는 정부 활동의 산물이 아닌 것이다. 프롤레타리아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집산주의를 향한 경제 발전의 길을 보다 쉽게 만들고 보다 단축시켜 줄 수 있도록 가능한 한 자신의 모든 노력을 기울여 정치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는 이른바 최소강령으로 표현되는 개혁안들로부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가 처한 객관적인 입지 그 자체의 논리로 인해서 프롤레타리아는 어쩔 수 없이 이러한 개혁 조치들로부터 집산주의적 조치들로 즉각 이행해 나가게 될 것이다.

  하루 8시간 노동제와 누진적인 소득세의 도입은 비교적 용이한 일이 될 것이다. 비록 이것을 시행할 때조차도, 문제의 핵심은 ‘법’의 제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제반 실천적인 조치들을 효율적으로 조직화하는 데 있을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주된 난관은 이러한 법률 제정에 대한 반발로서 공장주들이 문을 닫아 버린 공장들을 국영 생산방식으로 조직화하는 데 있을 것이다.─그리고 이러한 작업을 통해서만 집산주의로의 이행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상속권의 폐지를 위한 법을 제정하고 또 그 법을 실제로 시행하는 것은 비교적 용이한 과제가 될 것이다. 화폐자본 형태로 남아 있는 자본의 잔재들이 프롤레타리아를 난처하게 하거나 그들이 운용하는 경제에 짐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토지와 산업자본(생산수단─역주)의 접수자로서 행동한다는 것은, 노동자 정부가 사회적 생산의 조직화를 수행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좀 더 범위를 확장해, 몰수에 관해서-보상을 하든 보상을 하지 않든 간에─이와 똑같은 말을 할 수 있다. 보상을 해주는 몰수는 정치적으로는 유리하지만 재정적으로는 어려운 문제이다. 반면 보상이 없는 몰수는 재정적으로는 유리하지만 정치적으로는 어려운 문제이다. 그러나 가장 어려운 난관에 봉착하게 되는 것은 바로 생산의 조직화의 문제일 것이다. 거듭 말하건대, 프롤레타리아 정부는 기적을 행할 수 있는 정부가 아닌 것이다.

  생산의 사회화는 가장 어려움이 적은 분야들부터 시작될 것이다. 초기에는, 생산의 사회화가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이 극소수의 기업들에서 이루어질 것이며, 사회화된 기업들은 상품의 유통 법칙에 의해서 사(私)기업들과 연결될 것이다. 사회화된 생산의 분야가 더욱 확장될수록, 그것이 지니는 장점은 더욱 명백히 드러날 것이다. 따라서 갓 탄생한 정치 체제는 더욱 자신감을 느끼게 될 것이며, 프롤레타리아가 앞으로 취하게 될 경제 조치들은 더욱 대담한 것이 될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는 단지 일국적인 생산력에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한층 더 나아가서 전세계의 기술에 의지하게 될 것이다. 프롤레타리아가 자신의 혁명 정책에 있어서 일국에 한정된 계급관계의 경험들뿐만 아니라 또한 전세계 프롤레타리아의 총체적인 역사적 경험들에 의지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프롤레타리아의 정치적 지배가 그들의 경제적 예속과 양립할 수 없다. 어떠한 정치적 깃발 아래 권력에 도달하였든지 간에, 프롤레타리아는 사회주의 정책의 길로 들어설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는 부르조아 혁명의 내적 메카니즘으로 인해서 권력을 잡을 수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사명을 부르조아지의 사회적 지배를 위한 공화주의․민주주의적인 조건들을 조성해 주는 데 국한시켜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아주 허황된 몽상일 것이다. 프롤레타리아의 정치적 지배는, 비록 그것이 일시적일지라도, 언제나 국가의 후원을 필요로 하는 자본의 저항을 극단적으로 약화시킬 것이며, 또한 프롤레타리아의 경제적 투쟁에 엄청난 위력을 부여해 줄 것이다. 노동자들은 혁명 정부에게 파업자들을 원조해 줄 것을 요구할 수밖에 없으며, 노동자들을 기반으로 하는 정부는 이 요구를 거절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산업 예비군을 활용해서 노동자들의 요구를 탄압하려 드는 자본가들의 술책을 무력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을 의미하고, 따라서 노동자들은 정치의 영역뿐만 아니라 경제의 영역에서도 지배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리고 또한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로부터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이러한 사회․경제적 결과들은, 정치 제도의 민주화가 달성되기 훨씬 전에 아주 신속히 완전한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소위 말하는 “최대”강령과 “최소”강령사이의 장벽은 프롤레타리아가 권력에 도달하자마자 그 즉시로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정부가 수립되자마자 다루어야 할 첫 번째 과제는 농업 문제의 해결이다. 그것은 러시아의 대다수 국민의 운명이 바로 이 문제와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과제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할 때에도, 프롤레타리아는 자신이 취하는 경제 정책의 근본적인 목적과 일치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즉, 사회주의 경제의 조직화를 수행할 수 있는 분야를 가능한 한 광범위하게 장악하려는 정책을 펼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농업 정책의 시행 속도와 그것이 취하는 형태는 프롤레타리아가 자신의 재량에 따라 활용할 수 있는 물질적 수단들의 한계에 의해서 결정될 수밖에 없다. 또한 거기에는, 잠재적인 동맹 세력들이 반혁명 분자들의 대열로 넘어가 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한 세심한 배려 조치들도 고려되어야만 한다.

  농업 문제, 즉 농업의 사회관계들 속에서 규정되는 농업의 운명에 관한 문제는 전적으로 토지의 문제, 즉 토지 소유의 형태에 관한 문제로만 환원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비록 토지 문제의 해결이 농업발전을 미리 결정짓는 것은 아닐지라도, 그것이 최소한 프롤레타리아의 농업 정책을 미리 규정해 주는 것임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다시 말해서, 프롤레타리아 정부가 토지에 관해서 취하는 정책은 이 정부가 농업 발전의 경로 및 농업 발전의 필요성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입장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어야 한다. 바로 이 때문에 토지문제가 일차적인 중요성을 차지하는 것이다.

  사회혁명당이 제시한 토지 문제에 관한 해결책은 모든 토지의 사회화인데, 이것이 담고 있는 실질적인 내용을 살펴본다면 그들이 현재 누리고 있는 그럴싸해 보이는 인기와는 전혀 걸맞지 않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모든 토지의 사회화란, 이 표현을 치장해 주고 있는 서구적인 포장을 벗겨 버리고 나면, ‘토지 사용에서의 평등’(또는 ‘토지 재분배’)을 의미하는 것일 뿐이다. 따라서 토지의 평등한 분배라는 강령은 모든 토지의 몰수를 전제한다. 다시 말해서, 사유지 일반, 즉 농민 개인이 소유한 토지뿐만 아니라 마을의 공유지도 몰수해야만 하는 것이다. 새로 탄생할 정부가 첫 번째로 취해야 할 조치들 중의 하나가 바로 이러한 몰수이며, 그 반면 상품 생산에 기초한 자본주의적 관계는 여전히 사회 전체를 지배할 것이라고 가정해 보자. 그럴 경우, 이러한 몰수 조치의 첫 번째 ‘희생자’는 다름이 아니라 바로 농민들 자신일 것이다. 보다 정확히 말해서, 농민은 자신들이 희생자라고 느끼게 될 것이다. 농민들은 수십 년 동안이나 자신들에게 할당된 토지를 자신들의 개인 소유로 만들기 위해서 상환금을 지불해 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 중 일부 보다 유복한 농민은 대단히 많은 땅을 개인 소유로 만들 수 있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 이들은 엄청난 희생을 감수했으며, 그 부담은 현재의 자손들에게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을 생각해 볼 때, 공동 소유의 토지(공유지) 및 사적 소유의 토지(사유지) 모두를 국가 소유(국유지)로 전환시키려는 시도가 엄청난 저항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사실을 쉽사리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새로 수립될 정부가 이러한 방식으로 행동한다면, 농민들 가운데 많은 부분이 처음부터 이 정부에 대항해서 들고 일어날 것이다.

  대체 무슨 목적으로 공동 소유의 토지와 개인 소유의 소규모 토지들을 국가 소유로 전환시키려 하는 것일까? 그것은 결국 현재의 토지 없는 농민들과 농업 노동자들을 포함한 모든 토지 소유자들이 경제적으로 ‘평등’하게 토지를 이용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되게 하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새로 수립된 정부는 공동 소유의 토지와 소토지들의 몰수를 통해서 경제적으로는 아무 것도 얻을 것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재분배 이후에는 국유지나 공유지가 사적 소유물처럼 경작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치적으로는, 이러한 정부는 대단히 커다란 오류를 범하는 셈이 될 것이다. 그러한 정책으로 인해서 정부는 혁명 정책의 지도자인 도시 프롤레타리아와 다수의 농민들을 대립시키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토지의 평등한 분배는 농업 노동자의 고용을 법으로써 금지시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임노동의 폐지는 경제 개혁의 귀착점일 것이며, 또한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것은 법률적인 금지 조치로써 선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주 자본가의 임노동자 고용을 금지시키는 것만으로 충분하지가 않은 것이다. 그보다는, 농업 노동자들에게 생존권을 확보해 주는 것이─그것도 사회 경제적 측면에서 합리적인 방식으로 말이다-가장 필요한 일이다. 토지의 평등한 경작이라는 계획 아래 임노동의 사용을 금지시키는 것은, 한편으로 토지가 없는 노동자들에게 얄팍한 몇 조각의 땅 덩어리 위에 정착하도록 강요하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에게 강요된 이처럼 사회적으로 비합리적인 정착을 위해서 정부가 필요한 물품들과 농기구들을 조달해 주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농업의 재조직화 작업에 대한 프롤레타리아의 개입은 분산되어 있는 농업 노동자들을 분산된 땅 조각들 위에 묶어 두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토지들의 국가에 의한 경작이나 공동 경작으로부터 시작할 것이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생산의 사회화가 제대로 정착되었을 때만 비로소 보다 발전된 사회화 과정으로 나아갈 수 있으며, 따라서 임노동의 금지 조치도 가능할 수 있는 것이다. 집단경작 방식의 정착은 소규모의 것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그러나 집단경작 방식의 정착은 소규모의 자본주의적 영농방식을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그러나 자급자족 내지는 반자급자족적인 영농을 위한 공간은 여전히 남겨 둘 것이다. 그 같은 것을 강제로 몰수하는 것은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프롤레타리아의 강령 속에 결코 들어 있지 않다.

  어떠한 경우라도, 우리는 토지의 균등 분배를 시행하겠다는 약속을 할 수 없다. 그러한 계획은, 한편으로 소토지들에 대한 무의미하고 순전히 형식적인 몰수를 전제로 하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대토지들을 완전히 산산조각 내는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경제적인 관점에서 볼 때 전적으로 소모적일 뿐이다. 따라서 이러한 정책은 단지 반동적이고 공상적인 저의만을 내포하는 것으로서, 무엇보다도 먼저 혁명적인 당의 정치적인 약화를 의도하는 것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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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노동계급의 사회주의적인 정책은 러시아의 경제적 조건들 속에서 어느 정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일까?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다음의 것 하나만은 장담할 수 있다.─즉, 사회주의적인 정책이 러시아의 기술적 후진성에 걸려 더 나아가지 못하게 되면 그 즉시로 노동자 정부는 정치적 난관에 봉착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유럽 프롤레타리아들로부터의 국가적인 차원의 직접적인 지원이 없이는, 러시아의 노동계급은 권력을 계속 유지할 수 없으며 또한 자신들의 일시적인 지배를 지속적인 사회주의 독재로 전환시켜 나아갈 수 없다. 이 점에 대해서는 어떠한 의심도 결코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또한, 서구에서의 사회주의 혁명은 우리로 하여금 노동계급의 일시적인 지배를 사회주의 독재로 직접 전환시켜 나아가는 것을 가능하게 해 줄 것이라는 사실 역시 명백한 것이다.

  1904년, 카우츠키는 러시아의 사회 발전의 전망에 관한 논의와 보다 일찍 혁명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계산을 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러시아에서의 혁명은 그 즉시 사회주의 체제로 귀결될 수 없을 것이다. 이 나라의 경제적 조건은 그렇게 될 수 있을 정도로 성숙되어 있지 못하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은 확실히 유럽의 다른 국가들의 프롤레타리아 운동에 강한 자극을 주게 될 것이며 일단 불붙은 투쟁의 결과로서 독일의 프롤레타리아가 권력을 쟁취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어서 카우츠키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이 같은 결과는 유럽 전체에 영향을 미치게 될 것임에 틀림없다. 결국 서유럽에서는 프롤레타리아의 정치적 지배로 귀결될 것이며, 동유럽에서는 프롤레타리아가 사회 발전의 단계를 축약시키고 독일의 예를 따라서 인위적으로 사회주의 제도를 구축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기게 될 것이다. 하나의 전체로서의 사회는 그것이 밟아야 하는 발전의 단계들 중 어느 하나도 인위적으로 건너뛸 수 없다. 그러나 사회의 각 구성부분이, 보다 발전된 나라들을 모방함으로써 자신들의 지체된 발전을 촉진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가능성 덕택에, 심지어 그들은 발전의 최첨단부에 위치할 수도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오랜 역사를 지닌 선진국들이 거추장스럽게 끌고 다닐 수밖에 없는 전통의 부담으로 시달리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들은 아마 실제로 일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우리가 말한 것처럼, 여기서 우리는 역사의 필연성의 영역을 벗어나 가능성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독일사회민주당의 지도적인 이론가인 카우츠키는 혁명이 러시아에서 먼저 일어날 것인가 아니면 서구에서 먼저 일어날 것인가 하는 문제를 고찰하면서 이 글을 썼던 것이다. 그 직후에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는 우리 사회민주주의자들이 가장 낙관적인 분위기 속에서조차도 감히 예상할 수 없었던 그토록 엄청난 힘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러시아 혁명의 경로는 그것의 본질적인 특징에 관한 한 이미 결정된 것이다. 불과 2~3년 전에만 하더라도 가능한 것(the possible)으로만 여겨졌던 것(러시아에서의 혁명의 가능성─ 역주)이 거의 틀림없는 것(the probable)으로 나타났으며, 그리고 모든 것들은 거의 틀림없는 것이 필연적인 것(the  inevitable)으로 되기 직전의 상태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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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유럽과 혁명

 

  1905년 6월 우리는 다음과 같이 썼다.

1848년 이래로 반세기 이상이 지났다. 이 시기는 자본주의가 세계 전역을 끊임없이 정복해 온 반세기였다. 또한 부르조아 반동 세력과 봉건반동 세력간의 상호협력의 반세기였다. 이 기간 동안 부르조아지는 지배하려는 광적인 욕망에 가득 차 있었으며 또한 이를 위해서 야만적으로 싸우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영구 기관(외부로부터 에너지 공급을 받지 않고도 영구히 작동을 계속하는 기구로서, 실현 불가능한 상상의 기관─역주)을 발명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언제나 새로운 장애물과 마주치기 마련이며, 그는 이것을 극복할 목적으로 항상 새로운 도구들을 만들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르조아지는 자신에게 적대적인 세력과의 '초법적인' 갈등을 피해 가면서 자신이 장악한 국가 기구를 수정하고 재구성해 왔다. 그러나 우리 주변의 영구기관을 발명하려고 헛되이 노력하는 사람은 궁극적으로,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라는 뛰어넘을 수 없는 마지막 장애물에 부딪치게 마련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르조아지도 궁극적으로 자신의 궤도 내에서 뛰어넘을 수 없는 마지막 장애물과 마주칠 수밖에 없다. 필연적으로 충돌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밖에 없는 계급 적대 관계가 바로 그것이다.

  모든 나라들을 자본주의 생산양식과 교역을 통해 서로 결속시켜 가면서, 자본주의는 전세계를 하나의 단일한 경제적 및 정치적 유기체로 전환시켜 왔다. 근대적인 신용 제도는 무수히 많은 기업들을 보이지 않는 끈으로 결속시키고 있으며 또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이동성(mobility)을 자본에게 부여해 주고 있다. 이 이동성은 많은 사소한 파산들을 예방해 주고는 있지만, 그러나 그와 동시에 경제의 전반적 위기의 범위가 전례 없이 확장될 수밖에 없는 원인이 되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의 모든 경제적․정치적 노력들, 자본주의적인 세계 교역, 엄청난 국채 제도, 모든 반동 세력들을 일종의 범세계적인 주식회사 형태로 결속시켜 주고 있는 개별 국가들간의 정치적 연합 등은 모든 개별적인 정치적 위기 상황을 견디어 낼 수 있게 해 주었지만, 그러나 근원적으로 볼 때 이 모든 것들은 또한 전대미문의 엄청난 규모의 사회적 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는 셈이다. 부르조아지는 모든 불건전한 과정들을 깊숙이 은폐해 왔으며, 모든 난관들을 우회해 왔다. 또한 국내 정치와 국제 정치의 모든 심각한 문제들을 뒤로 미루어 왔으며, 모든 모순들을 얼렁뚱땅 넘겨 왔다. 요컨대, 부르조아지는 최종적인 결말을 뒤로 미루는 데 급급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때문에 부르조아 지배의 근본적인 청산이 세계적 규모로 일어나게 될 것이다. 부르조아지는 게걸스럽게 모든 반동 세력들을 부여잡았다. 그 반동 세력들의 배출처가 어떠한 것이든지 간에 말이다. 교황과 술탄조차도 그들의 친구에 속했던 것이다. 부르조아지가 중국 황제와 '우정'의 결속을 맺지 않았던 유일한 이유는 그가 아무런 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신들의 금고 속에 있는 돈을 줘 가면서 중국 황제를 자신들의 파수꾼으로 고용하기보다는 그의 영토를 약탈하는 것이 부르조아지에게는 훨씬 더 이익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세계 부르조아지가 자신의 국가 체제의 안정을 전(前)부르조아적인 반동 세력의 불안정한 요새에 의존하게 만들어 버렸음을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현재 전개되고 있는 사건들에다 국제적인 성격을 부여해 주며, 또한 폭넓은 시야를 열어 준다. 노동계급이 지도하는 러시아의 정치적 해방은 지금까지 역사에서 볼 수 없었던 수준으로 이 계급을 부상시킬 것이다. 러시아의 노동계급은 막강한 권력과 자원을 획득하게 될 것이고, 세계 자본주의를 일소하는 데에서 주창자가 될 것이며, 이것을 위해 역사는 모든 객관적 조건들을 만들어 냈다.(‘몰로뜨’(Molot:망치─역주)에 의해서 출판된 『F. 라쌀레의 배심원을 향한 연설』속에 들어 있는 저자의 서문을 참조할 것.─L.T.)

 

  만일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가 일시적으로나마 권력을 장악한 후에 자신의 주도하에 혁명을 계속해서 유럽 지역으로 전파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유럽의 봉건적․부르조아적 반동 세력들 때문에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는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물론, 현 시점에서 러시아 혁명이 유럽의 낡은 자본주의 체제를 공격할 방법들을 미리 규정하려 한다면, 그것은 한가한 짓일 것이다. 그러한 방법들은 전혀 예기치 않게 나타날 수도 있을 것이다. 혁명적인 동 럽과 혁명적인 서유럽간의 고리로서 폴란드를 예로 들어보자. 물론, 이 예는 우리의 생각을 보다 잘 나타내기 위한 것이지 어떤 현실적인 예언은 아니다.

  러시아 혁명의 승리는 폴란드에서의 혁명의 필연적인 승리를 의미할 것이다. 러시아가 통치하는 폴란드내의 10개 주(州)에 혁명 정부가 들어선다면 필연적으로 갈리치아(Galicia)와  뽀즈난(Poznan) 지방에서도 반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 호엔쫄레른 왕가와 합스부르크 왕가의 정부들은 폴란드 국경 쪽으로 군대를 급파함으로써 응수할 것이다. 그 군대는 물론 폴란드의 중심부, 즉 바르샤바로 진군해 들어가 혁명 세력을 진압할 목적인 것이다. 러시아 혁명이 자신의 서쪽에 위치한 혁명의 전위를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 군대에게 짓밟히도록 내버려 둘 수 없다는 것은 아주 자명한 일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빌헬름 2세의 정부 및 프란쯔 요세프의 정부에 맞서는 전쟁이 발생한다면, 그것은 러시아 혁명 정부의 편에서는 자기방어의 행위일 것이다. 그렇다면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프롤레타리아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자기 나라의 군대들이 반혁명 원정을 수행하고 있는 동안 그들이 잠잠한 채로 숨죽이고 있을 수 없으리라는 것은 명백한 일이다. 봉건적․부르조아적 독일과 혁명적 러시아간의 전쟁은 필연적으로 독일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유발시킬 것이다. 이러한 단언이 너무 낙관적인 것으로 생각되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독일 노동자들과 반동들로 하여금 서로 공개적인 힘의 대결을 벌이도록 강요할 가능성이 이보다 더 많은 역사적 사건이 있으면 어디 한 번 생각해 보라고 말할 것이다.

  우리의 10월 내각(1905년 혁명 당시 짜르가 대중을 무마할 목적으로 내세운 정부, 준자유주의자 위떼가 수상으로 있었다.─ 역주)이 갑자기 폴란드에 계엄령을 선포했을 당시, 그러한 조치는 직접 베를린으로부터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는 취지의 대단히 그럴 듯한 소문이 떠돌아 다녔다. 두마 해산 직전에 정부 기관지들은 베를린과 비엔나 사이의 협상에 관해 보도했다. 그것은 이 두 나라 정부가 반란을 진압할 목적으로 러시아의 내정에 무력적인 개입을 할 의도가 있다는 보도였으며, 물론 정부는 그것을 민중에 대한 위협 수단으로 활용했던 것이다. 장관들이 아무리 그 사실을 부인해도 그것은 이러한 보도가 안겨 준 충격을 상쇄할 수 없었다. 서로 인접한 이들 세 나라의 궁전 안에서는 잔혹한 반혁명적인 복수의 음모가 획책되고 있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밖에 어떤 다른 것이 가능할 수 있었겠는가? 혁명의 불꽃이 자기들 나라의 국경을 넘실거리고 있는데, 어떻게 반봉건적인 군주 체제가 수동적으로 방관만 하고 있을 수 있었겠는가?

  러시아 혁명은, 비록 그 때까지 승리가 요원한 상태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폴란드를 거쳐 갈리치아에 파급효과를 미치고 있었다. 올해 5월 르보프(Lvov)에서 열린 폴란드 사회민주당의 회합에서 다신스끼(Daszynski)는 다음과 같이 외쳤던 것이다. “일 년 전만 하더라도 누가 현재 갈리치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예견할 수 있었겠는가? 이처럼 거대한 농민 운동은 오스트리아 전역을 진동시켰던 것이다. 즈바라즈(Zbaraz)에서는 사회민주당원이 지방 의회의 부의장으로 선출됐다. 농민들은 ‘적기’라는 이름의 일종의 사회혁명당적인 농민 신문을 간행하고 있으며, 3만여 명의 건장한 농민들이 참가한 대규모의 대중 집회들이 열리고 있고, 적기와 혁명가(革命歌)로 뒤덮인 행렬이 갈리치아 지방의 마을들을 활보하고 있다. 이 마을들은 이전에는 그토록 조용하고 냉담했건만‥‥‥. 러시아로부터 토지의 국유화를 요구하는 함성이 가난에 찌든 이 농민들에게 와 닿을 때, 대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2년 전 폴란드의 사회주의자 루스냐(Lusnia)와의 논쟁에서, 카우츠키는 러시아가 더 이상 폴란드의 발 밑을 위협하는 장전된 포탄으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한 폴란드를 야만적인 모스크바가 지배하는 초원을 파고 들어가는, 혁명적인 유럽의 동부군(東部軍)으로 여겨야 한다고 말했다. 카우츠키에 따르면, 러시아에서 혁명이 전개되고 또 그 혁명이 승리하는 경우, “폴란드 문제는 다시금 날카롭게 부각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루스냐가 생각한 방향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갈 것이다. 그것은 폴란드가 러시아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오스트리아와 독일에 대항하는 것이 될 것이다. 폴란드가 혁명의 대의에 봉사하는 한, 폴란드의 임무는 러시아에 맞서 혁명을 수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오스트리아와 독일에 확산시키는 것이 될 것이다.” 이 예언은 정작 카우츠키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실현될 가능성이 많은 것이다.

  그러나 혁명적인 폴란드만이 유럽 혁명의 유일한 출발점은 결코 아니다. 우리는 위에서 부르조아지가 대내 및 대외 정치에 영향을 끼치는 많은 심각한 문제들의 해결을 용의주도하게 기피해 왔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을 군대로 밀어 넣은 부르조아 정부들은 국제 정치의 복잡한 분규를 단칼에 해결할 능력이 없다. 전쟁에 국민들의 본질적인 이익이 걸려 있기 때문에 국민의 지지를 받는 정부나 아니면 지지 기반을 상실했기 때문에 절망적인 최후의 몸부림에 빠져 있는 정부만이 오직 수천, 수만 명의 사람들을 싸움터로 내보낼 수 있는 것이다. 현대의 정치문화, 군사기술, 보통선거, 징병제 등의 조건하에서는, 오직 정부에 대한 국민의 깊은 신뢰나 정부의 광적인 모험주의만이 서로 다른 두 국민을 충돌로 몰아넣을 수 있다. 1870년 보불전쟁 당시에, 한쪽에는 독일의 프러시아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던 비스마르크가 있었으며, 다른 한쪽에는 파렴치하고 무기력하며 국민에게 경멸을 받고 있는 나폴레옹 3세의 정부가 있었다. 비스마르크의 정책은 결국 독일 민족의 통일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따라서 모든 독일인들은 그 필요성에 동의하고 있었다. 한편, 국민의 신뢰를 잃은 나폴레옹 3세의 정부는 자신의 수명을 조금이라도 더 연장시킬 수 있는 것이라면 어떠한 모험도 마다하지 않을 태세였던 것이다. 러일전쟁에서도 이와 동일한 배역을 발견할 수 있다. 한편에는 일본 천황 미까도의 정부가 있었는데, 이 정부는 그 때까지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의 방해를 받지 않은 채로 극동에서 일본 자본의 지배를 위해서 싸우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는, 이미 몰락기에 접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의 패배를 해외에서의 승리를 통해서 만회하려고 애쓰는 전제적인 정부가 있었던 것이다.

  노후한 자본주의 국가들의 경우, '국민적' 요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즉, 하나의 전체로서의 부르조아 사회의 요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현재 지배하고 있는 부르조아지만이 그것의 수호자로 자처할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 영국, 독일 그리고 오스트리아 정부는 국민적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없다. 대중의 사활적인 이해관계를 실현하기 위해서라든가, 피압박 민족의 이해관계를 실현하기 위해서라든가, 또는 인접 국가의 야만적인 국내 정치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는 등의 명분조차도 어떤 하나의 부르조아 정부가 해방적 및 그러므로 국민적 성격을 띠는 전쟁을 수행할 수 있게 해 주지는 못한다. 한편, 때때로 정부들을 부추겨서 세계를 상대로 요란한 군사적 시위를 하도록 교사하는, 자본가적 약탈에 관한 이해관계는 대중 속에서 아무런 반응도 불러일으킬 수 없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부르조아지는 국민적 전쟁을 선전포고할 수도 없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 시대의 반국민적 전쟁이 어떠한 것으로 귀결될 것인지는 최근의 두 경험으로부터─남아프리카와 극동에서의 경험으로부터─명확히 알 수 있다.

  영국에서의 제국주의적인 보수당의 참패는 궁극적으로는 보어전쟁(Boer War)의 교훈 때문이 아니다. 제국주의 정책이 맞이하게 될 훨씬 더 심각하고 위협적인─부르조아지에 대해서─결말은 영국 프롤레타리아에 의한 정치적 자결권의 요구이다. 왜냐하면 일단 움직이기 시작한 프롤레타리아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전진할 것이기 때문이다. 러일전쟁의 결과가 러시아 정부에 끼친 영향으로 말하자면, 너무나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1905년 혁명─역주)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두 경험이 없었다 할지라도, 유럽의 정부들은 프롤레타리아가 자신의 독자적인 입장을 내세우기 시작한 이래로 전쟁이냐 혁명이냐 하는 양자택일적인 상황을 프롤레타리아에게 제시하는 것을 언제나 두려워해 왔다. 프롤레타리아의 반란에 대한 바로 이러한 공포 때문에, 엄청난 예산의 군사비를 승인하면서 조차도 부르조아 정당들은 어쩔 수 없이 평화를 위한 엄숙한 선언문들을 발표하고, 국제사법재판소나 심지어 유럽합중국과 같은 것들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졸렬한 선언문들은 결코 국가간의 적대관계나 군사적인 충돌을 일소할 수 없다.

  보불전쟁 이후 유럽에서 출현한 무장된 평화는 일종의 힘의 균형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균형은 터키의 신성불가침성, 폴란드의 분할, 잡다한 민족들이 모자이크를 이루고 있는 오스트리아의 보존을 전제로 했다. 뿐만 아니라, 머리 끝까지 무장한 러시아의 전제주의를 유럽 반동 세력의 파수꾼으로 삼았다. 그러나 전제주의가 최전선을 담당하고 있는, 이러한 인위적으로 유지되어 온 균형 체제는 러일전쟁의 패배로 인해서 가차없는 타격을 받게 되었다. 러시아가 일시적으로 이러한 힘의 공조체제로부터 떨어져 나갔으며, 그 결과 힘의 균형이 깨어져 버렸다. 다른 한편, 일본의 성공은 자본가 부르조아지의 공격적인 본능을 자극시켰다. 특히, 현대 정치에서 대단히 큰 역할을 담당하는 주식 시장들을 자극시켰다. 유럽에서의 전쟁 가능성이 대단히 높아진 것이다. 이제 어느 곳에서나 분쟁의 위험이 절박하게 대두되고 있다. 그리고 비록 지금까지는 외교적인 수단들을 통해서 그러한 위험들을 완화시켜 왔다 할지라도, 이러한 수단들이 앞으로도 오랫동안 성공을 거둘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유럽에서의 전쟁은 필연적으로 유럽에서의 혁명을 의미하게 될 것이다.

  러일전쟁 동안 프랑스 사회당은, 만일 프랑스 정부가 러시아 전제주의의 편을 들기 위해서 그 전쟁에 개입한다면 그것은 프롤레타리아에게 가장 단호한 행동들─반란까지도─을 취하라고 부추기는 셈이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모로코를 놓고 프랑스와 독일이 서로 충돌 일보 직전에 있던 1906년 3월, 사회주의자 인터내셔널의 사무국은 다음과 같이 결의했다: “전쟁의 궁극적인 위협 앞에서, 우리는 최상의 행동 방법을 동원해서 인터내셔널의 모든 사회주의자 당들과 조직화된 전체 노동계급이 전쟁을 예방하거나 또는 종결시킬 수 있도록 할 것이다.”  물론 이 말은 단지 하나의 결의였을 뿐이다. 이 결의가 갖는 실제적인 의의를 시험해 보기 위해서는 실제로 전쟁이 일어나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부르조아지는 그러한 시험을 회피할 것이 당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르조아지에게는 불행스럽게도 국제관계의 논리(국제적 이해관계─역주)가 외교의 논리(전쟁을 예방하려는 외교적 노력─역주)보다 훨씬 더 강력한 것이다.

  관료 집단에 의한 국사 운영의 누적된 잘못으로 인해서 파탄이 오든지, 아니면 혁명 정부가 구체제의 죄악에 대한 지불 정지를 선언함으로써 파탄이 오든지, 여하튼 러시아 국가의 파산은 프랑스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현재 프랑스의 정치적 운명을 손에 쥐고 있는 급진주의자들은 직접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또한 자본의 이익을 보호하는 모든 기능도 떠맡아 왔다. 바로 이 때문에, 러시아의 파산으로 인해서 발생하게 될 재정적 위기는 그 즉시 심각한 정치적 위기의 형태로 프랑스에서 재현될 것이며, 프랑스의 프롤레타리아가 권력을 장악함으로써만 그러한 위기가 종식될 수 있다고 가정할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는 것이다. 어쨌든 간에, 폴란드에서의 혁명을 통해서, 아니면 유럽 전쟁의 결과로써, 또는 러시아 국가의 파산으로 인해서, 혁명은 노쇠한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유럽의 영토를 가로지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전쟁이나 국가의 재정적 파산과 같은 외적인 사건들의 압력이 없다 할지라도, 혁명은 계급투쟁의 극단적인 첨예화의 결과로서 유럽 어느 한 나라에서 가까운 장래에 발생할 수도 있다. 유럽에서 어느 나라가 최초로 혁명의 길로 접어들 것인가 하는 데 대해서는 지금 여러 가지 가설을 세워 볼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단지 이 한 가지는 분명한데, 그것은 근래에 와서 유럽의 모든 국가들에서 계급간의 모순이 아주 팽배해 있다는 사실이다. 준절대주의적인 헌법의 틀 내에서의 독일사회민주당의 엄청난 성장은 냉혹한 필연성에 의해 프롤레타리아를 봉건․부르조아 군주제에 대한 공개적인 싸움으로 인도할 것이다. 정치적 쿠데타에 맞서 총파업으로 대항한다는 문제는 작년에 독일 프롤레타리아의 정치 활동에서 핵심 문제들 중의 하나로 부각되었다. 프랑스에서는 권력이 급진주의자들에게 이양됨으로써 모든 프롤레타리아가 단결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마련되었다. 프랑스의 프롤레타리아는 민족주의 및 교권주의와의 투쟁에 있어서 오랫동안 어쩔 수 없이 부르조아 정당들과 협력 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지나간 혁명들이 남겨 놓은 불멸의 전통들을 풍부히 지니고 있는 사회당과, 급진주의의 가면 뒤에 자신을 은폐하고 있는 보수 부르조아지는 이제 정면으로 맞서고 있다. 1세기 동안이나 두 개의 부르조아 정당이 규칙적으로 의회정치의 시소게임을 벌여 온 영국에서도 모든 일련의 요인들의 영향을 받은 프롤레타리아가 최근 정치적 독자성의 길로 접어들었다. 즉, 이미 시작된 7개 단체의 동맹으로의 발전이 성취될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 도달하기까지 독일에서는 40년이 걸린 반면, 막강한 노동조합들이 있으며 또한 경제적 투쟁의 경험이 풍부한 영국의 노동계급은 단시일 내에 대륙의 사회주의자 투사들을 능가하게 될 것이다.

  러시아 혁명이 유럽의 프롤레타리아에게 미치는 영향은 엄청나다. 그것은 유럽 반동 세력의 주된 힘인 러시아의 절대주의를 분쇄하는 것 이외에도 유럽 노동계급의 의식과 정신 속에 혁명을 위해 필요한 선행 조건들을 창출해 줄 것이다.

  사회주의자 당의 임무는, 자본주의의 발전이 사회적 관계들을 혁명적으로 만들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노동계급의 의식을 혁명적으로 만드는 일이었으며 또 지금도 그렇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의 대열을 조직하고 선동하는 작업에 일종의 내적 타성이 붙어 있다. 유럽의 사회주의자 정당들 내에서는, 그리고 특히 그들 중 가장 규모가 큰 독일사회민주당 내에서는, 보다 많은 대중들이 사회주의를 수용하고, 조직화되고, 훈련되어 감에 따라서 차츰차츰 일종의 보수적인 견해들이 성장해 오고 있다. 이 결과, 프롤레타리아의 정치적 경험을 구현하는 조직으로서의 사회민주당은 어느 순간에는 노동자들과 부르조아 반동간의 공개적인 싸움에 직접적인 장애 요소가 될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프롤레타리아 당의 임무를 사회주의 선전 활동에만 국한시키는 보수주의는 어느 시점에 가서는 권력을 위한 프롤레타리아의 직접 투쟁을 만류하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이 지니는 엄청난 영향력 덕택에 그러한 유럽 사회주의자 정당의 판에 박힌 듯한 일상 활동과 보수주의는 사라져 버릴 것이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와 자본가 반동간의 공개적인 힘겨루기의 문제가 당면 과제로 부각될 것이다.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작센 및 프러시아에서 일고 있는 보통선거권 쟁취를 위한 투쟁은 러시아에서 발생했던 10월 총파업(1905년 혁명 당시의 사건─역주)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서 보다 첨예화되었다. 동구에서의 혁명은 서구의 프롤레타리아들을 혁명적 이상주의로 감염시킬 것이며, 그들에게 자신들의 적을 상대로 ‘러시아식으로’ 응수하고자 하는 욕망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만일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가 권력을 장악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단지 부르조아 혁명적인 요소들의 일시적인 결합으로 인한 우연한 결과였다면, 그들은 전세계 반동 세력들의 조직적인 적대 행위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또한 전세계의 프롤레타리아들로부터 조직화된 지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단지 자신들의 능력에만 의지할 수밖에 없게 고립될 경우, 러시아의 노동계급은 농민이 그들에게 등을 돌리는 순간 어쩔수없이 반혁명에 의해서 분쇄 당하게 될 것이다.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에게는 자신들의 권력의 운명과 그리고 나아가서 러시아 혁명 전체의 운명을 유럽에서의 사회주의 혁명의 운명과 연계시키는 것밖에는 다른 어떤 대안도 있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부르조아 혁명적인 상황들의 돌발적인 결합에 의해서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에게 그 엄청난 국가 권력이 주어질 경우, 그들은 전세계의 자본주의에 대한 계급투쟁과 자신들의 운명을 같이하게 될 것이다. 자신들이 쟁취한 국가 권력과 더불어서 그리고 배후의 반혁명과 전면의 유럽 반동 세력 사이에 위치해서,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는 전세계의 모든 동지들에게 이전부터 외쳐 온 구호를 전파시킬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것이 최후의 공격을 위한 호소가 될 것이다: 모든 나라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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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장 권력을 위한 투쟁

(『나셰 슬로보』(Nashe Slovo ;우리의 말)로부터, 파리, 1915. 10. 17.)

  우리의 강령과 전술에 대한 문건 하나가 지금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그것의 제목은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가 직면한 임무들─러시아에 있는 동지들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그리고 이 문건에는 악셀로뜨(P. Axelrod), 아스뜨로프(Astrov), 마르띠노프(A, Martynov), 마르또프(L. Martov), 그리고 셈꼬프스끼(S. Semkovsky)의 서명이 들어 있다.

  이 “편지”에는 혁명의 문제가 대단히 일반적인 형태로 요약되어 있는데, 저자들이 전쟁에 의해 야기된 상황에 대한 서술로부터 정치적 전망과 전술적 결론들로 넘어감에 따라서 그것이 지니는 명확함과 정확성이 더욱 희박해지고 있다; 용어들 자체도 산만해지고 사회적 정의들도 애매모호해지고 있다.

  해외에서 볼 때, 두 가지의 분위기가 러시아에 팽배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첫째 “조국 방위”에 대한 관심의 고조이며─로마노프 왕가로부터 쁠레하노프에 이르기까지─, 둘째 전반적인 불만의 고조─정부에 반대하는 관료 정치가 프론데(Fronde)로부터 빈번히 발생하는 거리에서의 폭동에 이르기까지─이다. 이처럼 확대되어 가고 있는 두 가지 분위기들로 인해서 또한 일종의 환상이 야기되고 있다. 즉, 조국 방위라는 대의로 인해서 장차 민중은 자유를 획득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민중 혁명”의 문제가 불명확한 형태로 제기되는 것에 대한 대부분의 책임은 바로 이러한 두 가지 분위기의 팽배에 있는 것이다. ‘민중 혁명’을 형식적으로나마 ‘조국 방위’에 대한 문제와 대립시키고자 하는 경우에조차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현재의 전쟁 자체는 러시아가 겪은 일련의 패배들과 더불어 혁명의 문제를 야기하지도  않았으며, 또한 그것을 해결해 줄 어떠한 혁명세력도 발생시키지 못했다. 우리를 위한 역사는 바르샤바가 바바리아 대공(The Prince of Bavaria)에게 항복한 사실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현재의 혁명적 모순들과 제반 사회세력들은 우리가 1905년 당시에 처음으로 목격했던 바와 동일한 것들이다. 단지 그 외양만이 지난 10년 사이에 아주 많이 달라졌을 뿐이다. 전쟁은 오직 현 체제의 객관적인 파산만을 극명하게 드러내 주었을 뿐이다. 또 그와 동시에, 사회의 의식에 혼란을 가져다 주었다. 즉, ‘모든’사람들은 힌덴부르크(독일군 총사령관─역주)에게 대항하겠다는 욕망과 더불어 ‘6월 3일 체제’(스똘르이삔의 주도 아래 1907년 6월 3일의 쿠데타로 들어선 반동 체제─역주)에 대한 증오로 감염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인민의 전쟁’을 조직하는 일은 애초부터 짜르의 경찰과 부딪쳤으며, 이것은 따라서 러시아의 ‘6월 3일 체제’는 하나의 현실인 반면 ‘인민의 전쟁’이라는 것은 한낱 허구임을 명백히 드러내 주고 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민중 혁명’의 방식은 쁠레하노프가 주장하는 사회주의 경찰론과 대립되는 것이었다. 만일 그의 뒤에 께렌스끼(Kerensky), 밀류꼬프(Milyukov), 구치꼬프(Guchkov) 및 일반적으로 비혁명적이고 반혁명적인 국민─민주주의자들과 국민─자유주의자들이 서 있지 않다면 쁠레하노프야말로 그의 모든 추종자들과 더불어서 일종의 허깨비로 여겨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앞에서 말한 “편지”가 국민의 계급적 분열이나, 국민은 혁명을 통해서 전쟁의 재앙과 현 체제로부터 벗어나야만 한다는 점을 간과할 리는 없다. “국수주의자들과 10월당원들(Octobrist), 진보주의자들, 입헌주의자들, 기업가들과 그리고 급진적 지식인들의 일부조차도(!) 모두 한 목소리로 현재의 관료 체제는 나라를 방어하는 데 무능력하다고 외치고 있으며, 또한 조국 수호의 대의를 위해 모든 사회 세력들을 동원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국가의 수호라는 대의명분 아래서 현재 러시아의 통치권자들, 관료들, 귀족들 그리고 장군들과의 단결“을 상징하는 이 같은 입장의 반혁명적 성격과 관련해서 편지는 올바른 결론을 이끌어 내고 있다. 또한 온갖 종류의 부르조아 애국자들의 반혁명적 입장에 대해서도 올바르게 지적하고 있다. 여기에다 우리는 사회주의자 애국자들도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편지1은 이들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이상으로부터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즉, 사회민주당은 가장 일관된 입장을 지닌 가장 혁명적인 당일 뿐만 아니라 또한 러시아에서 단 하나의 유일한 혁명적인 당이다. 그리고, 사회민주당과 나란히, 혁명적인 방법들을 실천하는 데 보다 덜 단호한 단체들뿐만 아니라 또한 비혁명적인 정당들이 서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혁명적인 방식으로 문제들을 제기함으로써 사회민주당은 ‘전반적인 불만의 고조’에도 불구하고 공개적인 정치의 무대에서는 완전히 고립되어 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첫 번째 결론은 대단히 중요한 것으로서 아주 심각하게 고려될 필요가 있다.

  물론, 당이 계급은 아니다. 어떤 당의 입장과 그 당이 의거하고 있는 사회 계급의 이익 사이에 일종의 불일치 현상이 나타날 수 있으며, 그것은 후에 심각한 모순으로 변질될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당의 진로가 대중의 감정에 영향을 받음으로써 변화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들은 명백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당의 구호나 전술과 같은 그다지 안정적이지 못하고 또한 그다지 믿을 수도 없는 요소들에 의거해서 그 당의 성격을 판단을 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오히려 국민의 사회적 구조, 계급간의 세력 관계, 발전의 경향과 같은 보다 안정된 역사적 요인들에 의거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편지”의 저자들은 이러한 문제들을 완전히 회피하고 있다. 도대체 1915년의 러시아 상황에서 “민중 혁명”이란 이 말은 무엇을 뜻한단 말인가? 저자들은 단순하게도 그것은 프롤레타리아와 민주주의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져야만 하는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우리들은 프롤레타리아가 무엇인지는 알고 있다. 그러나 대체 “민주주의자들”이란 무엇인가? 그들이 하나의 정당이라도 되는가? 위에서 이야기된 바로는 명백히 그렇지 않다. 그러면 그들은 대중을 의미하는 것일까? 도대체 어떤 대중 말인가? 명백히 그들은 중소 상공업자들과 지식인들 그리고 농민들이다. 저자들이 말하고 있는 대상은 바로 이들일 수밖에 없다.

  “전쟁의 위기와 정치적 전망”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된 일련의 논설들을 통해서 우리는 혁명에 있어서 이들과 같은 사회 세력들이 지닐 수 있는 비중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를 제시했다. 1905년 혁명의 경험에 기초해서 우리는 지난 10년 동안 1905년 당시에 이루어진 세력 관계 내에 어떠한 변화들이 발생했는지를 고찰해 보았다. 즉, 그러한 변화들이 민주주의자들(부르조아지)에게 유리한 것들이었는가 아니면 불리한 것들이었는가 하는 문제 말이다. 이 문제는 혁명의 전망과 프롤레타리아의 전술들을 결정하는 데 핵심적인 역사적 문제인 것이다. 러시아에서 1905년 이래로 부르조아 민주주의자들은 더욱 세력이 강화되어 왔는가 아니면 훨씬 더 몰락해 왔는가? 과거에 우리들 사이에 있었던 모든 논쟁들은 부르조아 민주주의의 운명에 관한 문제를 중심으로 한 것들이었다. 그리고 아직도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할 수 없는 사림들은 여전히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혁명적인 부르조아 민주주의자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부르조아 국민 혁명은 러시아에서 불가능하다고 말함으로써 우리들은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적어도 유럽에서는, 국민 전쟁을 위한 시대가 지나가 버렸듯이 국민 혁명을 위한 시대도 지나가 버린 것이다. 국민 전쟁과 국민 혁명 사이에는 내적인 연관이 있다. 현재 우리는 식민지 정복을 위한 체제일 뿐만 아니라 그와 동시에 또한 국내에서는 일정한 확고한 체제의 정립을 전제로 하는 제국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 제국주의는 부르조아 국민국가를 구체제와 대립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프롤레타리아를 부르조아 국민국가와 대립시키고 있는 것이다.

  1905년 혁명에서 중소 상공업자들은 이미 미미한 역할밖에 하지 못했다. 그리고 지난 10년 동안 이 계층의 사회적 비중이 훨씬 더 쇠퇴해 왔음은 명백한 사실이다. 러시아 자본주의는 과거 다른 나라들의 경제 발전 과정과 비교해 볼 때 훨씬 더 격렬하고 가혹하게 중간 계층들을 다루어 온 것이다. 물론 지식인들의 경우는 수적으로 성장했으며 또한 그들의 경제적 역할도 증대해 왔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들이 과거에는 환상적으로나마 지니고 있었던 “지식인의 독자성”이라고 하는 것이 완전히 소멸해 버렸다. 이제 지식인들의 사회적 의의는 전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와 부르조아 여론을 조직화하는 데 그들이 담당하고 있는 기능에 의해서 결정되고 있다. 지식인들은 자본주의와 물질적으로 연계됨으로 인해서 제국주의적인 경향으로 충일되어 있다. 이미 앞에서 인용한 것처럼, “급진적 지식인들의 일부조차도‥‥‥ 조국 방위의 대의를 위해 모든 사회 세력들을 동원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라고 “편지”는 말하고 있다. 이 말은 절대로 사실이 아니다. 즉, 급진적 지식인들의 일부가 아니라, 그들 전체가 그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보다 사실적으로 말한다면 급진적 지식인들 전체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적 지식인들의 상당 부분까지도─비록 다수는 아닐지라도─그렇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지식인들의 성격을 보다 짙게 색칠함으로써 소위 말하는 “민주주의자”들의 대열을 과대평가해 줄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상공업 부르조아지의 정치적 비중은 훨씬 더 쇠진했으며 지식인들은 그들의 혁명적 입장을 포기해 버렸다. 도시의 민주주의자들은 혁명적 인자로서 거론될 가치조차도 없다. 오직 농민만이 남아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한, 악셀로뜨나 마르또프도 농민의 독자적인 혁명적 역할에 큰 기대를 걸고 있지 않다. 그러나 혹시 이 두 사람이 생각을 바꿔서, 지난 10년 동안 농민들 속에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온 계급 분화로 인해서 농민의 그러한 역할이 증대되었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 아닐까? 그러한 가정은 모든 이론적 귀결과 모든 역사적 경험에 정면으로 위반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놓고 볼 때, “편지”는 어떠한 종류의 “민주주의자”들을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일까?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저자들은 “민중 혁명”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제헌의회라는 구호는 혁명적 상황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지금 혁명적 상황이 존재하는가? 물론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른바 부르조아 민주주의의 탄생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비록 저자들은 부르조아 민주주의가 이제 제정 체제를 청산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하려고 한다고 주장하지만 말이다. 그 반대로, 만일 현재의 전쟁이 실로 명확하게 드러내 준 어떠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이 나라에는 혁명적 민주주의자들이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국내의 혁명적인 문제들을 제국주의를 통해서 해소시켜 보려는 러시아의 '6월 3일 체제'의 시도는 명백히 대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러한 실패는 '6월 3일 체제' 내에서 책임을 맡고 있거나 혹은 반쯤 책임을 맡고 있는 정당들이 혁명의 길로 접어들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군사적 대실패로 인해서 완전히 노출되어 버린 혁명의 문제는 지배계급을 더 한층 제국주의의 길로 몰아넣을 것이며, 그와 동시에 이 나라에서  유일한 혁명적 계급인 프롤레타리아의 중요성을 배가시켜 줄 것이다.

  ‘6월 3일 체제’ 내의 결속은 내부적 마찰과 갈등으로 인해서 약화되고 분열되었다. 이것은 10월당원들과 입헌주의자들이 권력을 혁명의 문제로 간주하면서 관료 집단들과 귀족의 거점을 쓸어버릴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혁명적 압력에 저항하는 정부 권력이 일정 기간 동안은 명백히 약화되어 갈 것임을 의미한다.

  제정과 관료 체제의 신용은 실추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이 싸우지도 않은 채로 권력을 포기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두마의 해산 및 최근의 내각 개편은 이러한 지레짐작이 얼마나 사실과 동떨어진 것인가를 모두에게 보여 주었다. 그러나 관료 체제의 불안정한 정책은 사회민주당에 의한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결집에 상당히 도움이 된 것만은 틀림없다. 그리고 그러한 관료 체제의 불안정은 앞으로도 계속 확대될 것이다.

  도시와 농촌의 하층 계급들은 더욱 더 지치고, 기만당하고, 불만스럽고 분노에 차게 될 것이다. 이것은 혁명적 민주주의자들이라는 한 독자적인 세력이 프롤레타리아와 나란히 나아가게 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한 세력(어떤 독자적인 혁명적 민주주의─역주)을 위한 사회적 기반이나 지도적인 인물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하층 계급들의 심각한 불만이 노동계급의 혁명적 압력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조아 민주주의의 출현을 뒷바라지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그리고 쁘띠부르조아지와 농민의 수동성과 한계에 순응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프롤레타리아의  투쟁이 더욱 더 단호하고 가차없는 것이 되어 끝까지 나아가려는 각오, 즉 권력 쟁취를 위한 그들의 각오가 더욱 확실해질수록, 프롤레타리아가 아닌 대중들을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일 가능성이 훨씬 더 커지게 될 것이다. 물론, “토지의 몰수” 등과 같은 단순한 구호들을 앞세움으로써 이루어질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정부의 붕괴 여부가 좌지우지되는 군대의 경우는 훨씬 더 그렇다고 볼 수 있다. 대다수의 사병들은 프롤레타리아가 지금 단순히 불만을 표출하는 시위가 아니라 권력 쟁취를 위한 투쟁을 보이고 있으며 또한 그것을 쟁취할 가능성이 어느 정도는 있다는 확신이 설 경우에만 비로소 이 혁명적 계급을 향해 경도될 것이다. 지금 이 나라에는 전쟁과 그 전쟁에서의 일련의 패배들로 인해서 명약관화하게 드러난 혁명의 문제─즉 정치 권력의 문제가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지배계급의 점차적인 해체 과정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도시 및 농촌의 대중 속에서는 불만이 고조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을 유리하게 활용할 수 있는 유일한 혁명적 인자는 바로 프롤레타리아인 것이다. 현시점에서 볼 때, 이점은 1905년 당시보다도 훨씬 더 명확하고 일반적인 사실인 것이다.

  “편지”는 어느 한 구절에선가 문제의 이러한 핵심에 접근하는 듯이 보였다. 즉,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 노동자들은 “짜르의 6월 3일 체제를 전복시키기 위한 이러한 국민적 투쟁에서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국민적” 투쟁이 무엇을 의미할 수 있는가는 이미 바로 위에서 지적되었다. 그러나 만일 “주도권을 잡는다”는 것이 단순히 선진 노동자들은 너그럽게─스스로 어떤 목적을 위해서인가 하는 질문도 없이─피를 흘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투쟁의 전 과정에 걸쳐─특히 그것이 프롤레타리아의 투쟁이 될 것이기 때문에─정치적 지도력을 잡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사실은 명백한 것이다. 즉, 이 투쟁에서 승리할 경우 권력은 투쟁을 지도해 온 계급, 즉 사회민주주의자 프롤레타리아에게 넘어가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단순히 “임시혁명정부”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것은 한낱 공허한 문구로서, 장차 역사적 과정을 통해서 그 속에 어떤 종류의 내용이 채워지게 될 것이다. 문제는 노동자 혁명 정부, 즉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에 의한 권력 쟁취인 것이다. 국민 제헌의회, 공화국 수립, 하루 8시간 노동제, 지주들 소유의 토지에 대한 몰수 등의 요구들은 전쟁의 즉각적인 종결, 민족 자결권, 유럽합중국 등의 요구들과 더불어서 사회민주당의 선동 활동 가운데 커다란 비중을 차지할 것이다. 그러나 혁명은 무엇보다도 최우선적으로 권력의 문제인 것이다.─국가 형태(제헌의회, 공화국, 합중국 등과 같은)의 문제로서가 아니라 그 정부가 내포하는 사회적 내용의 문제로서 말이다. 프롤레타리아가 권력 쟁취를 위해 싸울 태세가 되어 있지 않다면, 제헌의회 및 토지 몰수의 요구들은 현재의 상황에서는 모든 직접적인 혁명적 의의를 상실하게 된다. 왜냐하면 만일 프롤레타리아가, 제정을 고수하려는 자들의 손아귀로부터 권력을 무력으로써 탈취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할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혁명 과정의 속도(템포 혹은 리듬─역주)는 특별한 문제이다. 그것은 군사적, 정치적, 일국적 및 국제적인 많은 요인들에 달려 있다. 이러한 요인들은 혁명의 과정을 지체시키거나 촉진시킬 수 있으며, 혁명 승리를 용이하게 만들거나 혹은 또 다른 패배로 이끌 수 있다. 그러나 조건들이 어떠한 것이든지 간에, 프롤레타리아는 자신의 길을 명확히 알아야 하며 또한 용의주도하게 그 길을 밟아 나가야 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프롤레타리아는 환상들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가 지금까지 고통받아 온 전 역사에 걸쳐서 가장 해로운 환상은 언제나 타 계급들에 대한 신뢰 및 의존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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