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깃발선언] 붉은 혁명은 푸른 개혁과 공존할 수 없다.

 


방송노동자의 투쟁 깃발이 펄럭인다. 개혁정부가 들어서고 북풍한파에도 깃발은 펄럭인다.

 

개혁정부의 노동자투쟁이 다시 물결친다. 노동자투쟁의 파고는 잔잔한 개혁에 추진력을 주고 똑바로 나아가도록 원동력을 제공하였고 방향타 노릇을 하고 있다.


지금 우리는 정권교체로 큰 희망을 얻게 되었다. 핏빛 깃발이 아니었지만 거친 폭풍이 지나갔고 잔잔한 대양은 우리를 잠시 안심시키고 있다. 그러나 육지가 멀었기에 닥쳐올 자연의 변덕앞에 고개 숙이게 만들었고 키를 놓치 못하게 한다.


지금 전세계는 일신교와 다신교와 분쟁으로 살아온 종교사를 막론하고 평화를 하나의 신()으로 삼고 싶어한다. 유일신교가 분쟁을 일으켰고 세계를 황폐화시켰다. 착취가 분쟁을 키워왔다. 이런 역사 때문에 평화는 종교적 교리에 멈추지 않고 정치적 목표로 자라왔다. 사회주의는 한사회의 생산양식의 대립과 갈등에서 드러나는 계급문제의 해결 이론임에도 불구하고 두진영이 갈등하는 시기에는 민족국가간, 진영 영토간 적대적 투쟁을 통해서 발흥되고 민중의 투쟁으로 지양되면서 새로운 강물을 만들어 왔다. 우리는 분쟁대신 협력으로 가야 한다.


지금 우리 남한은 민주주의의 깃발아래 개혁세력이 선봉에 나섰다. 우리는 전쟁으로 도태되어 적대적 분단을 악화시킨 9년만의 신식민지 파시즘을 끝내고 우리가 주체가 될 수 있는 민족 자주의 노동해방의 큰 냇강에 다다랗다.


우리 노동자들은 파업투쟁으로써 반파시즘 민중총궐기 깃발을 올린 지 아홉 해 만에 노동운동은 비온 뒤에 떠오르는 무지개처럼 영롱한 빛을 발하는 합법의 시기를 맞이하였다. 촛불이 새벽을 열었고 파업이 우리의 단잠을 깨웠다. 우리는 각성하였고 우리에게는 붉은 색 낌새에는 미약하지만 푸른색 자연이 우리의 노력을 기다린다. 민주당은 벌써 낫을 부리고 있고 우리는 날빠진 낫을 망치로 두들겨야 한다. 우리는 파업 속에서 더 단단해져야 한다. 이제부터는 개혁의 깃발이든 혁명의 깃발이든 자연을 개조하는 노동운동에 노동해방의 못을 박고 공장자주화를 우리 민중운동의 목표점을 삼아야 한다. 낫을 들든 망치를 들든 우리는 수확의 계절을 염두해두고 동앗줄을 사려야 한다. 우리는 단결해야 한다. 투쟁에 합류하지 못했더라도 공장에 들어가 노동운동을 열어야 한다. 우리는 다시 어깨를 걸어야 한다. 우리의 파업은 우리를 해방시킬 것이다.


이제 박근혜정권이 물러갔고 그들도 또한 아열대 폭풍우가 얼마나 무서운지 깨닫고 승복의 깃발을 내걸었다. 그들은 다시 총파업의 깃발을 노란색으로 칠하고 반역을 모의하려 하지만 태풍은 아무 때나 일어나는 게 아니다. 우리 노동자들은 민중총궐기와 민중총파업을 잠시 접고 노력의 시대를 선언하며 칼대신 낫과 망치를 들고 무너진 가옥을 보수하고자 한다.


우리는 똑같이 피해를 당한 옆집이 기와옥에서 사람부리는 소리에 반대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초가집에도 사람이 필요하고 쌀이 필요하다고 품앗이를 요청한다. 촛불은 초가삼간 여기에다가도 손잡고 깃발을 함께 세우라고 소리쳤을 뿐이다. 지난 100일을 보건대 혁명의 깃발과 개혁의 깃발은 공존할 수 없다. 기와집과 초가집은 평등과 해방의 두레안에서만 공존할 수 있다. 민주당이 앞으로 나가야 한다. 민주당과 우리 노동자들은 전쟁반대 반파시즘 아래서 동거할 수 있다. 우리는 한반도 전쟁에 대해서 한 목소리로 반대해야 한다.


그 이색 동거가 가능해질 수 있는 것은 역사의 투쟁속에서 자라나는 과학적 사상 때문이다. 혁명의 깃발이었든 개혁의 깃발이었든 더 힘차게 펄럭이려면 과학적 사상이 투쟁속에서 실천되어야 한다. 실천이 영속적이려면 목적의식적 실천이 필수적인 과정이 되어야 한다.


개혁이 더 어렵다. 아쉽게도 우리에게는 붉은 깃발이 반제국주의 전쟁반대로 자라나지 못했지만 노동해방의 과학은 자라나고 있다. 우리는 단결투쟁속에서 더 크고 있다.


우리나라는 개화기 이후 내전을 한 번 걸쳤고 황폐화 되었다. 다시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기나긴 시간이 필요했다. 우리는 가까스로 파시즘 세력을 떨구어 냈다.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해 혁명적 노동운동의 역사가 매우 짧다. 그래서 당장은 혁명적인 정당이 나오지 못한다. 그러나, 세계는 하나다. 우리는 세계적인 투쟁속에서 혁명적인 정당을 탄생시켜야 한다. 우리의 단결투쟁은 전세계를 반파시즘 반자본주의 깃발로 뭉치게 할 것이다.

 

이제 우리 노동운동은 평화의 대장장이를 결의하고 선봉의 깃발을 선명하게 만들기 위해, 그 깃발에 망치와 낫을 그려 넣기 위해 푸른 깃발을 내리고 붉은 깃발을 올리려 한다. 망가진 조직을 추스리고 다시 헤어진 사자의 갈기는 새로 수선해야 한다.


이제까지 투쟁을 해온 깃발이 푸른 깃발이라고 푸념한 적도 없다. 낡고 헤어졌다고 손을 놓치도 않았다. 다만 새로운 세대가 자라나 나서는 만큼 새로 직조한 붉은 노동해방 깃발을 새로운 세대의 과학적 색깔에 조응하여 근육의 역사를 올려야 한다. 해방의 깃발은 선봉의 대열 다음으로 일으켜 세워야 한다. 당장은 선봉에 선 투사들이 단결해야 한다.


아직은 우리에게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 붉은 깃발은 아직도 그 깃발에 무슨 사상을 그려 넣을지 판가름 나지 않았다. 붉은 장미와 붉은 근육은 다르다고 하면 다르지만 무엇이 다른지 아직은 분명하지 않다. 별로 다르지 않더라도 우리의 선택은 분명하다. 우리는 붉은 근육을 깃발로 삼을 것이다.


혁명과 개혁도 마찬가지이다. 붉은 혁명의 깃발이 밀이라면 푸른 개혁의 깃발은 보리이다. 보리와 밀은 다르면서도 과히 다르지 않다. 찔레꽃과 장미도 이와 같다. 장미는 울타리 안에서 자라나지만 찔레는 들판에서 자라고 있다. 우리는 장미 대신 찔레를, 꽃찔레 대신 붉은 근육을 그려 넣을 것이다.


혁명은 이제 시작이다. 아직은 겨울이 시작되기 전의 파종기이다. 보리를 심든 밀을 심든 변함이 없는 것은 농사철이 돌아왔다는 것이고 단결이 더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제부터는 우리의 노동운동이 더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팔뚝과 근육이 밀과 보리를 키울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팔똑과 근육이 자본주의를 갈아엎을 것이다. 우리는 투쟁으로 보리가 풍년이 들든 밀이 풍년이 들든 배부르게 할 것이다. 한 줌의 착취자들을 몰아내게 될 것이다. 우리는 반전의 깃발을 노동해방의 깃발로 바꿔 들 것이다. 풍년이 들려면 우리는 밭갈이에 노력을 투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배고프지 않으려면 자본주의를 갈아엎어야 한다.


비핵화이든 반미 반핵화이든 우리는 기나긴 민중해방 대장정을 위해서 우리의 깃발을 손질해야 한다. 우리의 노동해방 깃발아래 군량미를 길러서 단결력을 비축해야 한다. 우리는 투쟁으로 자본주의대신 전쟁반대 사회주의를 내걸어야 한다. 우리의 파업 투쟁과 단결투쟁 자주정부 노력만이 추수철이 되어서 착취자 없는 풍년을 기약할 것이다.

 

우리가 깃발을 들 수 있는 날은 보리밟기를 하게 될 11월 노동자대회 전야제이다. 우리는 다시 깃발을 들 것이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영농계를 조직하고 대장간을 놀리지 않는 일이다. 봄보리에 풍작이 오려면 우리 노력에 전적으로 달려있다. 우리는 더 많은 깃발과 더 많은 낫과 망치로 단결해야 한다. 밀밭을 바라건 보리밭을 바라건 우리는 투쟁속에서 싹을 틔워야 하고 근육을 놀려야 한다. 농사꾼인 우리는 낫과 망치를 놓쳐서는 안된다는 만고의 법칙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무기는 단결투쟁이다. 우리의 단결은 우리 보리밭을 무지개대신 보리이삭으로 물결치게 만들 것이다. 한반도는 노동해방 새세상이 될 것이다.<불꽃>


2017. 9. 4

불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