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는 헌법기관이다. 헌법상 사법기구이지만 대법원위에 있는 최고 재판소이다. 지금까지 사법부가 노동운동에 대해서 보수적인 태도로 일관해 왔던 것을 기억한다면 헌법재판소는 국회가 임명한 특검법에도 불구하고 민의를 반영하지 않고 탄핵을 기각할 가능성도 얼마든지 공존한다. 이른바 사법부는 국가기관으로서 법률의 최고 재판의 보루일뿐 지배계급의 양심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 국가(지배계급의 독재 이데올로기 행동체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지금까지 헌법재판소는 진보보다는 보수편에 서왔고 혁명편보다는 수구들의 편에서 일해왔으며 극히 소수 의견자만이 소신 평결을 내려왔다.

어제 보수적인 사법부가 인사방침에서 이정미 재판관 후임 인선을 발표함으로써 헌법재판소에 압력을 행사하였다. 지금 촛불이 주말에 한번 꼴로 집회에 여는 것에 비해 태극기집회는 헌재 평결을 앞두고 1박2일을 계획하였고, 정부는 국회의 동의도 얻지 않고 사드배치를 강행하려 한다. 이것으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헌법재판소는 지배자들에게 양심을 지키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 민중의 분노를 도막내려고 있는 것이다. 노동계급의 분노를 국회에서 1차적으로 걸러내고 기일과 절차를 통하여 국민의 열망을 식힌다음 다시 최고재판소에서 법리를 다툼으로써 지배계급의 통치도구인 국가를 노동자혁명으로부터 파도막이를 하려는 것이다.


가깝게 역사적으로 살펴보자면 사법부의 보수주의 역사와 판이하게 다르게 헌법재판소는 집권세력과 지배계급의 안전판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왔다. 이석기의원 내란음모 조작사건과 통진당 해산 판결 과정에서 수구 비선인의 사주를 받아 친자본가적 판결을 내렸고 정치반혁명을 자행하였다. 사법부처럼 보수의 편에 섰고 수구편에서서 오욕의 역사를 지어내었다. 한마디로 민중의 생산적 윤리에 반하는 정치판결로 민주주의를 조롱해왔다.

문재인 후보가 헌재에 승복하겠다는 것은 그 당시 촛불의 위세를 반영한 계급역학 관계에서 나온 달콤한 말이며 자신의 대통령후보 선거전략이다. 지금은 노동자의 책 탄압과 철도파업 후속 탄압 등으로 계급역관계가 역전되고 있다. 게다가 황교안 대행이 대통령 후보를 저울질하며 유력주자를 넘보는 상황에서 파쇼세력을 두둔하는 포석이다. 계급역관계가 퇴조할 것이라는 분위기 속에서 헌재는 정권심판보다는 공정성이라는 객관성에 치우쳐 있다. 계급사회에서 객관성이란 소수의 가진자를 다수의 생산계급의 도덕으로 변칠하는 것이다. 탄핵평결이 탄핵인용보다는 탄핵기각으로 흘러갈 수 있는 가능성도 얼마든지 상식밖으로도 가능하다. 우리는 최후까지 투쟁해야 한다. 피흘리지 않는 혁명은 영국의 시민혁명과 러시아혁명 뿐이었다.


헌법재판소는 87년 민중혁명의 결과로 제헌의회 슬로건과 민주헌법 쟁취투쟁의 역사속에서 만들어졌지만 지금까지 모두 반혁명편에서 역사를 꺾어왔다. 우리는 헌재가 역사의 물줄기를 꺾는 반혁명을 옹호하고 탄핵을 기각한다면 마땅히 가두전선에서 80년대의 노동해방 전사로 돌아가야 한다. 


민주주의란 우리가 생각하는 바대로 민중의 도덕이나 노동자의 윤리대로 그대로 즉각 실현되지 않는다. 30여년이 넘는 민주화운동이 그것을 말해준다. 민주주의란 다수의 독재이다. 민주주의란 사회주의 혁명의 전야제이다. 촛불이 힘이 쎄면 탄핵인용이고 수구가 힘이 쎄면 탄핵기각이다. 아직은 노동해방이나 생산의 정부적 역할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황교안 내각, 그들은 정치인이 아니라 제국주의자이다. 지금은 자본가들이 기업가 단체의 힘으로 청와대를 주무르고 사법부를 움직이며 노동악법 입법개악으로 국회를 조종하고 태극기 깃발아래 국민을 조롱한다.

이러한 힘은 자본의 지원을 받으면 더 막강해진다. 황교안 개독대행은 우리나라에서 탄핵에 반대하는 개독교인들의 조직동원을 부르고 있고 성조기를 태극기 대신으로 삼는다. 지배자들은 종교이데올로기를 동원하여 탄핵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를 깎아내리며 개독의 돈십자가로 헌재에 압박을 가함으로써 역사의 물줄기를 탄핵기각으로 돌리려한다.


노동운동가들은 당장의 가두 투쟁이 불러온 결과가 탄핵의 국정화, 헌재로의 공론화이어서 우리 운동이 승리할 수 있다고 보기도 하지만 아직까지 확정적인 탄핵혁명은 바라볼 수 없다. 현실은 냉정하다. 우리의 바램과는 다르게 물줄기가 갈라지고 불꽃이 사라진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촛불을 꺼뜨리고자 노동자의 책 이진영 동지를 빼앗아갔고 천륜을 지키고자 탄원한 양심수를 풀어주지도 않았다. 그러나, 주저하지 말자. 우리에게는 세계 도처에서 생산의 역동력으로 투쟁하는 노동자계급이 보여준 단결의 저력이 있다. 우리 노동자들이 믿을 수 있는 것은 노동해방 깃발이다. 노동자정부 깃발아래 얼마나 대정부 가두투쟁과 대국가주의 계급해방 국제연대의 깃발로 단결하고 투쟁하였냐이다. 탄핵인용이라는 1000만 평결의 승리는 탄핵의 물결을 노동자계급에게 유리하도록 노동현장의 힘으로 얼마나 압박하였냐에 달려있다. 즉 노동자평의회를 얼마나 건설하였고, 그 힘이 파업으로 향해서 노동자들이 현장에서 파업을 결의하고 가두투쟁으로 몰려 나와 얼마나 자본가 국가에 다수의 힘으로 압박을 가했는가로 나타난다. 우리의 단결투쟁이 헌법재판 탄핵인용의 바로미터이다.


오늘도 헌법재판소는 태극기 애국보수앞에 노출되어 있다. 개독교인 황교안 권한대행은 여호와종교로 수구 정치를 대신한다. 개독신자들의 가두순례에 광화문 대문은 빗장을 열어놓고 있다. 박근혜는 혼자가 아니며 수구세력의 얼굴이고 지배계급의 지존심이다. 공안총리, 수구정당, 보수국회. 그들이 나으면 얼마나 박근혜보다 낫겠는가? 그들은 성조기아래 호가호위한다. 그들이 민중을 배신하는 것은 당장 현장에서 일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자본주의 체제 때문이다. 사적인 이윤추구 세력과 손잡았기 때문이다. 사적인 자본소유가 자본가들의 최고시 여기는 도덕율이었기 때문이고 그 윤리적 가식을 강제로 보장하는 정치권력이 그들의 수중에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힘을 휴전선너머로 또 노동현장으로 확장시키기 위해 노동운동을 탄압하고 노동자 정당을 해산시키고 바다건너서 항공모함을 데려온다.

우리 노동자들이 믿을 수 있는 것은 단결투쟁 뿐이고 스스로 일어선 파업운동으로 조직한 혁명적 시민운동의 입법투쟁력이다. 노동자들이 단결을 내팽개치고 사적 생산에 몰두한다면, 정치적 단결투쟁, 파업 투쟁을 게을리한다면 자본가 정부는 노동자 민중을 개돼지로 보고 탄핵기각을 앞세워 폭압으로 공격해 올 것이다.

우리는 탄핵기각에 맞서, 광장의 민주헌법 불복에 맞서 새로운 반격과 저항을 다짐해야 한다. 촛불이 이룬 연인원 천만 인파는 장차 민주주의혁명이라는 역사의 이정표로 남아 우리의 꽃다운 청춘이 이룬 과업을 길이길이 역사교과서에 전해줄 것이다. 만국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 조직하라!! 선전하라!!!



2017.3.8

선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