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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출처 – 국제볼셰비키그룹(IBT)

IBT의 이행 강령 해설

 

*** 이 글은 국제볼세비키그룹(International Bolshevik Tendency) 편집부가 1998년출판한  '트로츠키의 이행강령(The Transitional Program)'에 실린 새로운 해설이다.

 

트로츠키는 러시아 10월 혁명을 레닌과 함께 지도했으며 적군(Red Army)을 창설하였다. 그는 1938년 3월과 4월에 걸쳐 망명지 멕시코에서 [이행 강령](Transitional Program)의 초안을 작성하였다. 이 문서의 공식 제목은 [자본주의의 단말마적 고통과 제 4 인터내셔널의 임무](The Death Agony of Capitalism and the Tasks of the Fourth International)이다. 이 문서는 같은 해 9월에 열린 제 4 인터내셔널 창립대회에서 공식 문서로 채택되었다. 제 4 인터내셔널은 스탈린 관료집단의 냉소적이며 부패한 정책에 대항하여 레닌의 국제주의를 계승하기 위해 조직되었다. 당시 소련의 관료집단은 코민테른(Communist International) 즉 제 3 인터내셔널(The 3rd International)을 국제자본가계급에 대한 계급협조정책의 도구로 변질시켜 버렸다.

[이행 강령] 초안을 완성하기 전에 트로츠키는 제임스 캐넌을 비롯해 당시 제 4 인터내셔널의 미국 지부였던 사회주의노동자당(Socialist Workers Party)의 지도부 4명 즉 제임스 캐넌, 빈쓴 던, 로우즈 카쓰너, 맥스 셱트먼 등과 일련의 토론을 가진 바 있다. 사회주의노동자당은 제 4 인터내셔널의 지부 가운데 조직 규모, 정치적 능력, 대중 영향력 등에 있어서 가장 강력한 지부였다. 이 토론은 [이행 강령]의 토론자들이 특정 측면들을 명확히 이해하고 이것이 대중에게 제시될 방법들에 대한 사고를 다듬는데 도움이 되었다. 1938년 4월 15일자 캐넌에게 보낸 편지에서 트로츠키는 이렇게 말했다:

"동지가 멕시코에 와서 같이 논의를 하지 않았다면 강령 초안을 결코 작성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토론을 통해 주요 내용들을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1)

[이행 강령]은 지금도 유효하다. 노동계급을 국가권력 장악으로 지도할 우리 시대의 중심 임무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1938년 이후 세계는 크게 바뀌었다. 따라서 이 강령을 적용하기 위해 혁명가들은 강령적 개념들을 다루고 있는 핵심 부분과 작성된 당시의 특수상황을 뚜렷하게 반영하고 있는 부분을 구분해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제 1차 제국주의 세계대전 이후 자본주의 질서를 결정한 1919년의 베르사이유 조약은 1938년이 되면서 파산지경에 이르렀다. 경제 대공황의 엄청난 사회적 파괴, 파시즘의 등장 그리고 다른 사건들은 이제 새로운 제국주의 세계대전이라는 유혈 사태를 준비하고 있었다. 따라서 트로츠키가 [이행 강령]에서 제시한 정치전망은 단언과 예언의 어조로 물들었다:

  “노동계급 혁명을 위한 경제적 조건은 자본주의 체제가 허용할 수 있는 최고 수준까지 이미 다다랐다. 인류의 생산력은 현재 정체상태에 머물러 있다. 새로운 발명과 개선 조치들도 물질적 수준을 더 이상 높이지 못하고 있다....

국제관계도 전망이 암울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자본주의 체제의 붕괴를 재촉하는 위기가 증대되는 상황에서 제국주의 세력들 사이의 적대관계는 난관에 봉착하고 있다. 이 상황의 절정에서 이디오피아, 스페인, 극동, 중부 유럽 등지에서 발생하고 있는 개별 전쟁과 유혈사태는 불가피하게 세계적 규모의 전쟁으로 비화할 수밖에 없다. 물론 자본가 계급은 새 전쟁이 자신의 지배질서에 치명적인 위험이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이 계급이 현재 전쟁을 피할 수 있는 능력은 제 1차 세계대전 전야의 경우보다 비교할 수 없이 부족하다.”

제 1차 제국주의 세계대전처럼 제 2차 세계대전 역시 혁명의 물결로 끝날 것이라고 그는 확신하였다. 그리고 당시 제국주의 세력들도 이 전망을 공유하고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기 며칠 전인 1939년 8월 25일 베를린 주재 프랑스 대사는 히틀러에게, “이 전쟁의 결과 단 한 명의 진정한 승리자만 존재할 것입니다. 그는 바로 트로츠키입니다.”(2) 라고 말했다.

제 2차 세계대전은 수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역사상 유례 없는 파괴를 가져온 인류의 대재앙이었다. 이 결과 유럽 여러 나라에서 잠재적인 혁명적 상황이 조성되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스탈린주의 공산당 지도부의 배신으로 혁명적 위기는 해소되었다. 공산당 간부들은 인민이 조직한 빨찌산 민병대를 해체시키고 “반(反)파시스트” 부르주아 민주주의 체제를 지지하였다. 프랑스 공산당 지도자 토레즈의 구호는, “단일한 경찰기구, 단일한 군대, 단일한 국가!” 였다. 그리스에서 스탈린은 영국군, 반동 왕당파, 나찌 협력자들을 넌지시 지원하였다. 이 결과 좌익 민족해방전선(EAM)은 참혹하게 전멸 당했다.

서유럽을 독일 히틀러의 군대가 점령하자 자본가 계급은 파시스트들에게 대대적으로 협력하였다. 따라서 이에 대한 대중의 증오심이 격렬히 끓어올랐다. 그러나 이 상황은 “반파시즘” 제국주의 세력에 대한 환상을 소생시켰다. 스탈린주의 공산당은 반나치 저항운동의 핵심 역할을 통해 획득한 권위와 승리한 적군과의 관계를 이용하여 제국주의 세력과의 화해를 추구했다. 1943년 스탈린은 코민테른까지 해체하여 영국과 미국 제국주의에 대한 우호를 과시하였다. 5월 23일자 뉴욕의 [헤럴드 트리뷴]지는 이렇게 보도했다:

“현 소련 정권의 코민테른 해체가 단순한 제스처라고 의심할 이유는 없다. 트로츠키와 스탈린이 러시아 국가권력을 놓고 벌인 권력투쟁의 결말로 이 조치를 해석하는 것이 훨씬 개연성이 있어 보인다. 이로써 러시아는 세계혁명의 중심이라기보다 공산당 노선에 따라 운영되는 일개 국가에 불과하다.”(3)

전쟁이 끝나자 제 4 인터내셔널만이 레닌의 코민테른을 계승하는 조직이 되었다. 그러나 전쟁 기간 동안 공산당과 나치에 의해 수많은 트로츠키주의 중핵들이 살해되었다. 따라서 제 4 인터내셔널은 응집력 있는 조직의 기능을 상실했다. 개개 혁명가들과 소규모 혁명 그룹들이 활동을 계속하여 일부 모범적인 투쟁을 벌였으나 인터내셔널 조직은 너무나 허약하여 전후에 제공된 혁명적 기회들에 부응할 수 없었다.

한편 나치 점령 기간에 활동을 중단했던 사회민주주의 조직들은 영국과 미국의 지원을 받아 유럽 노동운동 내에서 공산당의 영향력을 상쇄시키는 친자본 대항축이 되었다. 1945년과 1946년 사이의 혁명적 격동을 넘긴 서구 자본주의는 초강대국인 미국의 지원을 받아 이후 20년이 넘는 상대적 안정기와 번영기를 맞이했다. 이 시기에 1930년대와는 뚜렷이 대조적으로 노동계급의 개량주의 지도자들은 부르주아 계급으로부터 일부 제한된 그러나 실질적 양보를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이 결과 서구 노동계급은 보수화 경향을 보였다.

 

전후 경제 팽창과 이행 강령

1938년 트로츠키가 작성한 [이행 강령] 초안은 일부 단정적인 표현들을 담고 있다. 그리고 이후의 사태에 의해서 그의 단정적 예언들은 틀린 것처럼 보였다. 이 결과 일부 자칭 맑스주의자들은 [이행 강령]의 내용이 제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시기에 적용될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 그러나 이 강령의 핵심인 혁명적 이행 요구체계는 1938년 상황에 대한 트로츠키의 진단에서 나오지 않았다. 특정 시기 자본주의 경제의 상태는 계급투쟁과 이 결과 파생되는 정세를 규정하는 한계를 제공할 뿐이다. 따라서 사회주의의 도래가 객관적 역사적 필연이라는 혁명적 맑스주의자들의 인식의 결과 작성된 [이행 강령]의 핵심적 내용들은 1938년의 상황적 요인들과 무관하다.  

사회주의 체제의 역사적 필연은 자본주의의 전지구적 모순이 질적으로 격화되는 데에 연유한다. 레닌과 트로츠키는 “제국주의” 단계라는 말로 이 질적 모순의 격화를 표현했다. 자본주의 선진국들은 경제가 취약한 지역의 부를 자신의 지역으로 이전시키고 지극히 불균등한 경제발전 패턴을 초래한다. 이를 통해 이들은 자본주의 축적과정에 내재하는 위기적 경향들을 해소하려고 시도한다. 이것이 제국주의 시대의 특징이다. 제국주의 국가들의 신식민지 지역에 대한 끊임없는 군사적 모험과 이들 간의 경쟁은 세계대전을 필연적으로 초래한다.

“자연을 정복하여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인간의 능력”으로 넓게 정의되는 생산력이 제국주의 시대에는 더 이상 발전하지 않는다. 제국주의 국가들 내부에 존재하는 자본주의 모순의 심화는 세계적 차원에서 생산력을 대규모로 파괴시키는 군사적 분쟁들을 야기 시킨다. 더욱이 제국주의는 선진 기술의 후진국 이전을 막아 세계적 규모로 노동생산성의 발전을 방해한다. 21세기의 도래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는 “제 3 세계” 대부분 지역에 존재하는 전(前)자본주의적 경제 형태를 완전히 뿌리뽑는데 실패했다. 그러나 세계 노동력의 30% 이상을 실업 및 반실업 상태의 산업예비군으로 편입시키는 데에는 “성공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개별 기업의 “미시 경제적” 생산력을 자극하는 일에는 대단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지만 “거시 경제적 의미의 생산력”을 질적으로 발전시킬 능력은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이런 의미에서 자본주의가 인류 진보의 장애물이라는 레닌과 트로츠키의 오랜 주장은 올바른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행 강령]에서 트로츠키가 생산력이 “정체하고 있다”고 주장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 주장은 자본주의 개별기업의 차원에서 기술과 노동생산성이 계속 발전한다는 점을 간과하였다. 따라서 이 주장은 일면적이며 정확성을 결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경제가 계속 극심한 위기에 처한 1930년대에는 이 측면조차 의심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사실 지난 50년에 걸쳐 제조업 분야에서는 생산성이 엄청나게 발전했다. 이 결과 물질적 부는 대대적으로 팽창했다. 이런 의미에서 계획경제를 수립할 수 있는 “경제적 전제조건”은 1930년대보다 지금 훨씬 더 높은 수준에 도달해 있다.

그러나 “단말마적 고통”의 시대에 처한 자본주의가 생산기술의 계속적 발전에 절대적인 장애를 초래한다는 주장을 트로츠키가 표명했다고 보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그가 최후로 작성한 강령적 문서인 [제국주의 전쟁과 노동계급의 세계혁명에 대한 제 4 인터내셔널의 선언문]에서 그는 무심코 나마 이렇게 말했다: “제 1차 세계대전후보다 지금 기술은 비교할 수 없이 강력한 수준에 도달했다.”(4)

제 2차 세계대전은 대대적인 파괴를 자행하여 전후 자본축적의 새로운 물질적 기초를 세웠다. 그러나 전후 자본주의 경제의 팽창은 사회위기와 노동계급의 국가권력 장악 기회를 제거하지 못했다. 식민지 반식민지 세계에서는 격심한 사회 위기가 조성되었다.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는 민족해방을 위한 대중투쟁이 격화되었으며 중국, 베트남, 쿠바에서는 반(反)자본주의 사회혁명이 성공하였다. 제 1차 세계대전 후에 비해 제 2차 세계대전 후 선진 자본주의국가들의 잠재적 혁명 상황은 빈도수가 더 적었다. 그러나 1940년대 중반의 격동이 종료된 지 한참 지난 후에도 유럽 여러 나라들에서는 격렬한 계급투쟁이 분출했다. 1968년 5월-6월의 프랑스, 1969년 이탈리아의 “뜨거운 가을”, 1974년-1975년 포르투갈의 위기 등은 모두 명백히 준혁명 상황이었다. 노동계급의 생활수준이 향상되었으며 상대적으로 경제도 역동적으로 성장했다고 인정되고 있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도 주요한 계급투쟁이 터져 나와 자본주의의 구조적 취약성을 입증시켰다. 1961년 벨기에 총파업, 1972년-1973년 칠레의 꼬르도네스 인두스뜨리알레쓰(노동자 소비에트), 1972년 케나다 퀘벡주의 총파업, 1974년 영국 광부들과 보수당 정권의 대결 등이 이때 일어났다. [이행 강령]의 요구들은 1920년대-1930년대의 격동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때에도 그 유효성이 조금도 퇴색되지 않았다.     

1950년대-1960년대의 경제성장은 지금 돌아보면 예외적인 상황이었음이 아주 명확하다. 선진 제국주의 국가들의 경우 지난 20여 년 간 실질임금과 생활수준은 하락했으며 사회적 불평등은 더욱 커졌다. 노동자들은 허리끈을 졸라 맬 것을 강요당해 왔다. 그리고 젊은 세대는 더 어려운 삶을 각오하라는 충고를 들어왔다. 제 3세계 전역에서는 수억의 인구가 희망 없는 절대적 빈곤 속에서 짧고 잔인한 인생을 마감한다. 현재 전세계 60억 인구 가운데 절반이 하루 미화 2달러 이하의 수입으로 생활한다. 태국, 인도네시아, 멕시코 등과 같이 저임금이 판치는 “신흥공업국” 신식민지 국가에서는 과도하게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이 산업혁명 당시의 공포를 재연하고 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지구 어느 곳에도 통신이 가능하며 “유연” 생산이 유행하는 이 멋진 신세계에서 수만 명의 어린이들이 매일 굶어죽고 있다. 생태계의 파괴는 저지되지 않은 채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으며 적절한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는 수십 억 인구를 불치의 전염병이 위협하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는 계속 살아남을 수 있을까?

20세기에 들어와 이미 두 번이나 세계 무역전쟁이 진짜 전쟁으로 비화하면서 지구를 피로 물들인 바 있다. 이 비극은 돌발적인 사건이나 자연재해의 결과가 아니라 자본주의 논리의 결과일 뿐이다. 이 논리는 각국의 자본가 계급이 경쟁국 자본가 계급을 희생시키면서 국제시장에서 자신의 지위를 높이도록 끊임없이 강제하고 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터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트로츠키는 다음과 같이 전망하였다:

“이 전쟁의 결과 세계경제는 계획경제로 재건되던가 아니면 이 시도가 유혈사태 속에 진압될 것이다. 후자로 귀결될 경우 제국주의 세계체제는 인류문명의 무덤이 될 제 3차 세계대전까지만 그 생명을 부지할 것이다.”(5)

제국주의 세계체제는 지금도 생명을 부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주요 무역권 사이의 경쟁은 격화되고 있다. 이 상황이 계속된다면 제 3차 세계대전은 불가피하다. 1938년이나 지금이나 “자본가 계급을 타도하고 사회주의 체제를 건설하는 것 이외에는 탈출구가 없다.”

“공산주의는 죽었다. 맑스의 자본주의 분석은 더 이상 유효성이 없다.”고 자본주의 선전꾼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좌익 학자들의 최근 증가하는 연구 결과들에 의해 반박되고 있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자본축적의 동력이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대한 맑스의 “운동법칙”과 놀랍게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 연구들은 입증하고 있다.(6) 생산과정에서 산 노동에 대한 “죽은” 노동의 비율인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상승과 함께 장기적 평균이윤율은 떨어진다. 이 일반 현상은 최소한 1970년대 말까지 여러 선진 자본주의 경제에서 명백히 드러났다. 맑스가 예상한 바대로 이 이윤율 위기에 대해 자본가 계급은 노동력 착취율을 증대하여 대응했다. 또한 “생산의 외적 영역을 확대하여” “내적 위기”를 해결하고자 했다.(7) 즉 시장과 이윤율 높은 투자 부문을 확보하기 위한 제국주의 자본가들의 경쟁이 가열되었다.

지난 이십 년의 경기 침체 현상은 고전적인 이윤율 위기의 직접적 결과이다. 자본 축적/경쟁 과정이 강요하는 노동 절약의 요구와 추상적 노동시간으로 물질적 부를 측정하는 자본주의의 구조적 필연 사이의 모순이 이 이윤율 위기를 가져온다. 새로운 세계 대전을 통해 생산수단에 구현된 “죽은 노동”을 대대적으로 파괴하는 방법을 피할 경우 이 위기를 완화시킬 수 있는 자본가 계급의 유일한 “약”은 노동계급의 생활수준과 노동조합의 권리를 무자비하게 공격하는 것이다. 최근 몇 십 년 간 진행된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산 역사”는 맑스의 기본 통찰력 즉 자본의 축적은 시간이 진행됨에 따라 계급 갈등을 더욱 증폭시키고 이 증폭된 계급 갈등은 노동계급이 자본의 지배를 끝장내고 새로운 사회 질서를 수립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을 확연히 증명하고 있다.

자본주의가 근본적으로 불안한 일시적 체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견해는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자본주의의 미래를 진지하게 숙고한 몇 몇 부르주아 경제학자들도 이윤 동기로 움직이는 자본주의가 오래 지속될 수 없는 불안한 체제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1942년에 발간된 저서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Capitalism, Socialism and Democracy)에서 슘페터(Joseph Schumpeter)는 “자본주의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여기에 대한 그의 대답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였다. 1993년에 [21세기 자본주의](21st Century Capitalism)라는 방대하고 영향력 있는 저서를 출간한 미국의 저명한 부르주아 경제학자 하일브로너(Robert Heilbroner)는 다음과 같이 묻고 있다:

"자본주의 질서를 옹호한 애덤 스미스나 슘페터 등과 같은 철학자들조차 왜 자본주의의 미래가 순탄할 수 없다고 예견했는가?

여기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자본주의를 유지하는 것이 대단히 어렵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정치적 도덕적 정당성은 계속 도전 받을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려면 다양한 형태의 핵심적 난관들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투자와 기술개발에는 불확실성이 지배하고 있다. 부의 불평등한 분배, ... 인간노동을 필요 없게 만드는 자동화, 과학기술의 독점적 경향, 경기 호황의 인플레 경향, 경기 위축의 디플레 경향 등이 바로 이런 난관들이다. 자본주의는 자동적으로 변화를 계속 도모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바로 이 특징이 이제 자본주의의 가장 위협적인 적이다. 자본주의는 조만간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에 봉착할 것이며 새로운 후계 체제에 길을 내주어야 한다."(8)

자본주의에서는 모든 것이 사적 이윤을 극대화시키는 약탈적 투쟁에 종속된다. 그리고 생산의 한 요소인 산 노동이 갈수록 덜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전유한 잉여노동”으로 인간의 부가 측정된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의 근본 문제이다. 산 노동이 계급착취 논리에 의해 지배되는 체제는 노동 절약 기술의 잠재력을 최대한 실현시킬 수 없다. 이 문제들을 진보적 방식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후계” 체제가 등장하여 인류가 자신의 사회환경을 의식적으로 통제하고 생산을 계급 불평등의 유지가 아니라 인류의 필요를 위해 운영해야한다.

 

의식적 요인의 역할

부르주아 혁명은 사회적 지위가 상승하던 자본가 계급이 경제를 장악한 후 일어났다. 그러나 노동계급에게는 이 과정이 역순을 밟는다. 봉건주의 체제는 생산력을 발전시키면서 저절로 자본주의를 낳았다. 그러나 계획경제 체제는 무정부적 자본주의로부터 저절로 탄생하지 않는다. 사회를 발전시키고 유지시키는데 필요한 상품과 서비스를 인간이 의식적으로 통제해야 계획경제가 가능하다. 그러나 이 혁명적 변화는 노동계급의 높은 정치의식을 통해서만 시작될 수 있다.

사회주의 건설 투쟁을 위한 “주관적 요인” 즉 엄격한 규율에 입각한 노동계급 정치 전위의 핵심적 중요성은 트로츠키주의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새로운 혁명정당과 새로운 인터내셔널은 새로운 기초 위에서 건설되어야 한다. 이것이 다른 모든 임무를 해결하는 열쇠이다. 새로운 혁명운동을 건설하고 완성하는 속도와 시간은 물론 계급투쟁의 일반적 전개 과정, 미래 노동계급의 승리와 패배에 달려 있다. 그러나 맑스주의자는 숙명론자가 아니다. 역사 과정이 자신에게 제기한 임무를 ‘역사 과정’ 자체에 전가시키지 않는다. 의식적 소수의 주도성, 과학에 입각한 강령, 명확히 설정된 목표에 따른 대담하고 줄기찬 선동, 모든 불명확함에 대한 가차없는 비판 등이 노동계급의 승리에 필요한 가장 중요한 요인들이다. 강력한 응집력을 과시하는 단련된 혁명정당이 없이는 사회주의 혁명은 생각할 수도 없다.”(9)

레닌과 마찬가지로 트로츠키는 자본주의가 “불가피하게” 즉 자동으로 붕괴할 것이라는 객관주의적 망상을 거부했다:

"자본주의 체제를 전복할 위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불황과 호황 등 자본주의 경제 주기는 노동계급이 자본주의를 타도하는데 더 쉽거나 더 어려운 상황을 제공해줄 뿐이다.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자기 역사를 창조하는 살아 움직이는 사람들의 행동을 전제로 한다. 이들은 우연이나 자기 변덕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결정되는 원인들의 한계 내에서 역사를 창조한다. 그러나 이들의 주도성, 과감성, 헌신성, 어리석음, 비겁함 등은 역사 발전을 이어가는 필연적 고리이다.

자본주의 위기는 횟수가 정해져 있지 않다. 어느 위기가 마지막 위기가 될지 미리 알 수도 없다. 그러나 우리 시대 전체의 위기 그리고 무엇보다도 현재의 위기는 노동계급에게, “정권을 잡아라!”라고 엄하게 명령한다. 그러나 호조건에도 불구하고 노동자 정당이 노동계급을 국가권력 장악으로 이끌 수 없을 경우 사회는 자본주의를 기반으로 계속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위기, 새로운 전쟁, 어쩌면 유럽문명의 완전한 붕괴가 뒤따를 것이다."(10)

“혁명 지도부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제 4 인터내셔널이 건설되었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새로운 인터내셔널이 직면한 엄청난 난관들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사회주의 혁명을 지도할 능력을 갖춘 당을 제 때에 건설할 수 있을까? 올바른 답을 내려면 올바로 질문해야한다. 이러저러한 봉기들은 노동계급 지도부의 미성숙 때문에 당연히 패배로 끝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단 하나의 봉기가 아니라 혁명 시대 전체이다.

자본주의 종말의 기나긴 단말마적 고통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는 자기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수십 년은 아니더라도 오랜 세월의 전쟁, 봉기, 짧은 계급투쟁의 휴지기, 새로운 전쟁, 새로운 봉기 등에 대비해야한다. 나이 어린 혁명 정당은 장기적 전망을 가져야 한다. 역사는 이 정당이 스스로를 시험하고 경험을 축적하여 성숙할 수 있는 기회와 가능성을 충분히 제공할 것이다. ... 혁명 정당이 노동계급의 선두에 서기전에는 거대한 역사의 문제는 어떤 경우에도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속도와 시간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나 이것이 일반적 혁명 전망이나 우리 정책의 방향을 바꿀 수는 없다."(11)

상승하는 계급투쟁기에 노동계급의 전투성은 증대되고 이에 대해 자본가 계급은 더욱 강력한 탄압으로 대응한다. 심각한 충돌에 대비하여 ‘민주적’ 부르주아 국가의 모든 자원들이 즉시 배치된다. 경찰 병력은 파업노동자들을 대체할 인력을 공장에 들여보내기 위해 파업방어선을 공격한다. 노동조합의 자산을 압류하기 위해 법원의 명령서가 발부된다. 그리고 파업주동자들은 체포되어 감옥에 갇힌다. 노동자들의 효과적인 투쟁전술은 즉시 “불법”으로 간주된다. 이 상황에서 계급평화기에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 경찰 역을 맡는 언론 대기업들은 노동자들을 혼란, 사기저하, 분열에 빠뜨리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바삐 돌아간다.

이 조치들은 부르주아 계급 지배를 다시 확립하는데 종종 충분하다. 그러나 때때로 불에 기름을 붓는 격으로 인민의 새로운 부위들이 투쟁에 참여하는 요인을 제공하기도 한다. 부르주아 체제의 이 심각한 위기는 지배계급 내의 분열, 자신감 상실 등을 초래한다. 또한 국가의 억압기구 내부에 불안, 혼란, 주저를 야기한다. 이 상황에서 자본가 계급은 “애국적” 소자본가, 룸펜노동자, 노동계급의 후진 층에서 파시스트 깡패, 파업파괴 구사대 등을 모집하여 이들에게 크게 의존한다.

노동계급의 능력 있는 지도부는 이 사태를 예상하고 반동 세력이 증대하기 전에 재빨리 단호하게 행동할 준비를 갖추어야한다. 이 행동을 위해 적절한 준비를 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임무는 투쟁과정에서 자신의 역사적 이익을 자각하는 노동계급 대중을 정치적으로 끊임없이 지도하는 것이다. [이행 강령]은 노동계급 전위가 투쟁을 확대시키고 준혁명적 상황 또는 혁명적 상황에서 계급 적들의 공격에 대응할 수 있는 핵심적 조치들을 일반적으로 집약한 문서이다: 

   “노동자 혁명 승리의 기본 조건들은 다음과 같이 역사적 경험에 의해서 확립되었고 이론적으로 해명되었다: (1) 부르주아 체제의 위기와 지배계급의 혼란 (2) 금융자본가 계급의 지배를 위해서 그 지지가 필수적인 소자본가 계급의 격심한 불만과 사회변화에 대한 갈망 (3) 체제에 대한 인내력을 상실한 노동계급의 반체제 인식과 혁명적 행동에 대한 욕구 (4) 노동계급 전위당의 명확한 강령과 확고한 지도력. 이것들이 노동자혁명 승리의 4가지 조건이다.”(12)

 

‘전혀 새로운’ 강령과 정당

19세기말 제 2 인터내셔널 지도자들은 이렇게 예상했다: 사회적 비중, 내적 응집력, 정치적 성숙성을 갖출 경우 노동계급은 농민, 도시 소자본가계급과의 관계를 서서히 끊을 것이며 사회주의 정치 프로젝트(사회민주주의 최대 강령)를 받아들일 것이다. 이 생각을 바탕으로 이들은 자본주의의 한계 내에서 노동계급이 느끼는 “최소” 요구들에 집중하여 “노동계급 전체”의 단일정당 속으로 노동계급을 결집시키려했다.

그러나 이들은 제 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자국 부르주아 계급의 전쟁 노력을 지지하여 노동대중을 전쟁의 참화 속으로 밀어 넣었다. 이에 레닌은 노동운동 내 상층 관료집단이 자본가들에 의해 매수되어 친자본 “노동귀족층”을 형성하여 노동계급에게 자본가적 허위의식을 적극적으로 조장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 결론은 “노동계급 전체의 당” 대신 “전혀 새로운 유형의 당” 즉 노동계급을 국가권력 장악으로 지도해낼 수 있는 혁명적 전투정당을 요구했다. 노동계급의 가장 선진적 부위만을 당으로 조직해야할 필요성을 인정함으로써 레닌은 맑스주의의 자산에 가장 크게 기여하였다.

“전혀 새로운 유형”의 레닌주의 정당에게는 당연히 새로운 강령이 필요했다. 제 2 인터내셔널 정당들은 맑스주의 그리고 심지어는 “혁명”을 표방했다. 그러나 이들은 “최대” 강령을 먼 미래에나 실현될 수 있는 것으로 치부했다. 이에 비해 제 3 인터내셔널(코민테른)은 노동계급의 당면한 경제투쟁을 혁명 의식과 행동으로 지도하기 위해서 적극 노력했다. 레닌의 지도하에 코민테른은 모든 부문의 노동계급을 단결시키면서 동시에 미래 노동자 국가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내용을 미리 제시하는 “이행 요구들”을 적극 주창했다. 이를 통해 최소한 암묵적이나마 생존권 투쟁에 나선 노동계급에게 사회주의 혁명의 필요성을 인식시켰다.

이행 요구들은 제한된 경제적 목표를 위한 투쟁을 대중이 포기할 것을 주장하지 않았다:

“오래된 ‘최소’요구들의 강령이 아직까지 핵심적으로 유효한 이상 제 4 인터내셔널은 그것을 계속 옹호하고 유지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노동계급의 민주적 권리와 투쟁의 성과들을 옹호한다. 다만 이 일상 투쟁들을 올바르고 현실적인 혁명적 전망 속에서 수행한다.... ‘최소강령’은 사회주의 혁명의 길로 대중을 체계적으로 인도하는 이행 강령으로 대체된다.”(13)

개량주의자들에게는 이행 강령이 필요 없다. 이들의 활동은 자본주의 사회를 개량하는 “실제적” 임무로 제한되기 때문이다. 자본가 계급 지배의 조건을 유지하며 특히 이 계급이 “적절하다”고 판단하는 이윤율에 합당한 개량을 얻는 것만이 진정 이들의 목표이다. 이와 반대로 혁명적 맑스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요구를 자본주의 이윤율의 명령에 제한하지 않는다:

“자신이 발생시킨 재앙에 기인하는 요구들을 만족시킬 능력이 없다면 자본주의는 망해야 한다. 이 요구들을 만족시킬 조건이 있고 없는 것은 계급 역관계의 문제이다....”(14)

트로츠키, 룩셈부르크, 기타 맑스주의자들이 말한 것처럼 노동계급이 거둔 가장 커다란 성과는 혁명 투쟁으로 획득되었다:

“가능한 정도만 요구하겠다고 말하면 지배계급은 줄 수 있는 것의 10분의 1만 주거나 아예 아무 것도 주지 않는다. 좀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우리의 요구들을 강요하면 자본가들은 최대치를 내놓지 않을 수 없다. 전투성이 확대되고 투쟁의 수위가 높을수록 노동자들은 더 많은 것을 얻고 승리한다. 우리의 요구는 단순히 의미 없는 구호가 아니다. 자본가들에게 압력을 가하는 수단이며 이를 통해 즉시 가능한 가장 커다란 성과를 올린다.”(15)

그러나 개량주의자들만이 이행 강령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종파주의 초좌익들에게도 이것이 필요 없다. 이들은 가장 극단적이며 공허한 수사가 난무하는 투쟁방식을 택하며 개량을 위한 전술, 타협, 투쟁 등을 거부한다. 대신 무시무시한 급진적 구호들을 늘어놓으면서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대중이 자신들을 찾을 위대한 그 날을 참을성 있게 기다린다.

 

부르주아 계급의 ‘휴식’과 노동계급의 ‘전략적 후퇴’

1938년 3월 23일 트로츠키는 미국 사회주의노동자당 지도부와 토론을 가졌다. 이때 그는 “강령 초안에 있는 나의 제안이나 요구가 객관적 상황에 부응하지 못하고 일부는 기회주의적이며 ... 어떤 것들은 너무 혁명적이라는 인상을 준다.”(16)고 말한 바 있다. 미국이 당시 “유례없는 사회 위기”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그는 미국의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좀더 낙관적이고 대담하며 적극적으로 전략과 전술을 구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행 강령을 행동 강령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전략 개념에 의하면 이행 강령이다. 이것은 대중이 관습으로 이어받은 투쟁에 대한 생각, 방법, 형태들을 극복하고 객관적 상황의 필요에 스스로를 적응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행 강령은 가장 단순한 요구들을 포함해야 한다. 공장이나 지역 상황에 맞는 요구들을 예측하거나 처방할 수는 없다. 이 요구들을 발전시켜 노동자 소비에트 수립 구호를 개발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 단순한 이행 요구들을 통해 투쟁의 고리들을 찾아내고 대중을 권력장악의 길로 인도해야 한다. 이 이유 때문에 일부 요구들은 아주 기회주의적으로 보인다. 노동자들의 실제 의식에만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요구들은 너무 혁명적으로 보인다. 노동자들의 실제 태도보다는 객관적 상황을 더 많이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객관적 요인들과 주체적 요인들 사이의 간극을 될 수 있으면 줄이는 것이 우리의 임무이다. 이행 강령의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17)

계급투쟁에는 밀물 뿐 아니라 썰물도 있다는 사실을 트로츠키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본주의 체제가 제 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인정하는 선까지 나아갔다:

“사태 전개의 리듬과 템포를 예상할 수 없으며 어쩌면 부르주아 계급이 전쟁 후에 정치적 휴식을 얻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고 여러분들은 생각할 수도 있다. 이 상황은 배제될 수 없으며 실제로 이 상황이 현실화되면 우리는 전략상 후퇴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은 전략적 후퇴가 아니라 공세를 지향해야 한다.”(18)

그런데 부르주아 계급은 정말로 “정치적 휴식을 얻어냈다”. 따라서 혁명가들이 대중사업의 전망과 즉각적 혁명 상황에 대한 예상을 포기하고“후퇴하여” 좀더 선전적 활동에 치중하는 것이 필요해졌다. 즉 중핵들을 참을성 있게 조직하고 훈련시키며 노동계급 조직에 뿌리를 내리고 미래의 투쟁을 준비하는 작업으로 전환하는 것이 당면과제가 되었다. 그러나 이 후퇴는 사회주의 혁명의 이행 강령을 포기하고 개량주의적 최소/민주 강령을 채택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우리는 국제 노동계급혁명이 불가피하며 임박했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이 기본 사고는 제 4 인터내셔널만의 특징이며 우리의 모든 활동들을 규정한다. ... 그러나 정치 뿐 아니라 경제에도 일시적인 밀물과 썰물이 있으며 상승기와 침체기가 있다. 시대 전체의 특징에만 기초하여 구체적인 단계들을 무시한다면 쉽게 도식주의, 종파주의, 기이한 환상에 빠질 수 있다. 상황이 심각하게 바뀔 때마다 우리는 기본 임무들을 주어진 단계의 구체적 상황에 적용시킬 것이다. 여기에 전술의 묘미가 있다.”(19)

 

이행 요구와 공산당 선언

트로츠키의 지지자들이나 비판자들 할 것 없이 “이행 요구” 사상이 1938년 [이행 강령] 초안에 처음 등장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1938년 3월 미국 사회주의노동자당 지도부와 가진 최초의 토론에서 “이행 요구들”이란 말을 트로츠키가 처음 사용했다고 설명하면서 패스파인더 출판사의 편집자는 이렇게 주장한다:

“맑스주의 이론과 실천에 기여한 트로츠키의 가장 중요한 공헌 가운데 하나는 1938년 그가 개진한 이행 요구와 구호 사상이다. 이 사상은 제 4 인터내셔널 창립대회를 위해 그가 그 해 4월에 작성한 강령적 문서의 핵심이 되었다.”(20)

그러나 이 잘못된 생각을 트로츠키는 사회주의노동자당 지도부와 토론하면서 훨씬 미리 반박했다:

“이행 강령은 어느 한 사람의 발명품이 아니라 볼셰비키들의 오랜 경험에서 나왔다. 즉 혁명가들의 집단적 경험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이것은 오랜 원칙들을 새로운 상황에 적용한 것이다. 무쇠처럼 고정된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적용될 수 있는 것으로 이행 강령을 인식해야 한다.”(21)

1922년 제 4차 세계대회에서 코민테른은 이행 요구 사상을 명확히 수용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사실 이행 강령의 모든 핵심 요구들은 코민테른의 첫 4차 세계대회들에서 채택된 다수의 결의문들 속에 다양한 형태로 제출되었다.

이행 요구의 가장 오랜 형태는 카알 맑스(Karl Marx)와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가 1848년에 작성한 [공산당 선언]에 나와있다. 이들이 제시한 “아주 일반적으로 적용 가능한” 10개 요구사항에는 토지소유권과 상속권의 폐지, 매우 누진적인 세금제도, “반항적” 자본가들의 재산 몰수, 수송수단과 통신수단의 국유화, “국가소유 공장의 확대”, “동등한 노동의 의무” 등이 있었다. 맑스와 엥겔스는 이 요구들이 “재산권과 부르주아 생산조건에 대한 일방적 침해“를 증진하는 수단이라고 보았다. 이들은 이 조치들을 이렇게 표현했다:

“경제적 측면에서 보면 불충분하고 실현 불가능해 보이지만 운동의 발전과정에서 스스로의 한계들을 극복하고 구사회의 기반을 더욱더 침식하는 조치들이다. 그리고 생산양식을 완전히 혁명화하는 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조치들이다.”(22)

[‘공산당 선언’의 90년 역사]라는 글에서 트로츠키는 이렇게 말했다:

“혁명의 시대에 부응하고자 작성된 [공산당 선언]은 자본주의에서 곧바로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시대에 걸맞는 10개항의 요구들을 담고 있다. 이 저작의 1872년판 서문에서 맑스와 엥겔스는 이 요구들이 일부 낡았다고 평가했다. ... 이 평가에 대해 개량주의자들은 혁명적 이행 요구들이 사회민주주의 ‘최소강령’으로 영원히 대체되었다고 해석했다. 그런데 잘 알려져 있듯이 최소강령은 부르조아 민주주의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다. 사실 맑스와 엥겔스는 이행 강령에 주요한 수정을 가하여, ”노동계급은 기존의 (부르주아) 국가기구를 단순히 접수하여 자신의 목적에 맞게 이용할 수가 없다. 이것을 분쇄하고 새로운 사회주의 국가기구를 수립해야 한다.“라는 혁명적 명제를 덧붙였다. 이 수정된 문구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신성화를 반대하기 위해 삽입되었다. 나중에 맑스는 자본주의 국가에 꼬뮌형 국가를 대비시켰다. 이후 이 국가유형은 훨씬 뚜렷한 소비에트 유형으로 모양을 갖추었다. 따라서 오늘날 소비에트와 노동자에 의한 생산의 통제가 명시되지 않은 혁명 강령은 없다. 마지막으로 [공산당 선언]의 10개 요구사항들은 평화적 의회시대에는 ‘고리타분한’ 것으로 보였으나 지금은 본래의 의의를 완전히 회복했다. 반면 사회민주주의 ‘최소 강령’은 구제가 불가능할 정도로 낡아버렸다.”(23)

1918년 12월 독일공산당 창립대회에서 로자 룩셈부르크 역시 트로츠키와 대단히 유사한 내용의 연설을 하였다:

“70년 전 [공산당 선언]이 나온 시기와 지금은 상황이 비슷하다. 익히 알고 있듯이 이 저작은 사회주의 실현을 노동자 혁명의 즉각적인 임무로 다루었다. 이것은 1848년 혁명에서 맑스와 엥겔스가 표현했던 사상이었다. 이들은 노동자 혁명을 국제적 차원에서 사고했다.” (24)

1848년 혁명의 패배는 맑스와 엥겔스에게 사회주의 혁명의 즉각적인 도래를 가정한 이전의 전망을 수정하도록 했다. 1891년 독일사민당이 채택한 에어푸르트 강령은  최소강령과 최대 강령을 명확히 구분했다. 이것을 로자 룩셈부르크는 이렇게 설명했다:

“따라서 사회주의 강령은 완전히 다른 기초 위에 성립되었다. 그리고 이 변화는 독일에서 특이하게 전형적인 형태를 보였다. 1914년 8월 붕괴될 때까지 독일 사회민주주의는 에어푸르트 강령에 기초하였다. 그리고 이 강령에 의해 소위 즉각 실현 가능한 최소 목표들이 전면에 등장했다. 이제 사회주의는 저 멀리 존재한 채 방향을 제시하는 북극성에 지나지 않았다.”(25)

이제 최소 강령과 최대 강령의 이분법을 거부하면서 룩셈부르크는 [공산당 선언]의 원래 사상으로 되돌아 갈 것을 촉구했다:

“이제 1848년 맑스와 엥겔스가 세운 기반을 바탕으로 지금의 사회민주주의 강령을 볼셰비키 강령으로 대체하는 것이 시급한 임무가 되었다.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을 위한 즉각적 요구를 담고 있는 소위 최소 강령과 사회주의 목표를 담은 최대 강령 사이의 분리에 기초한 사회민주주의 강령을 볼셰비키 강령으로 대체해야한다.”(26, 27)

 

노동자에 의한 생산의 통제와 공장위원회

노동계급 대중투쟁의 직접적 결과들은 맑스주의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1871년 빠리 꼬뮌 이전에 맑스와 엥겔스는 노동계급의 국가권력 장악이 기존의 부르주아 국가기구의 접수로 끝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꼬뮌의 경험은 “노동계급이 단순히 기존의 국가기구를 자신의 목적에 맞게 통제하는 것으로는 노동자국가를 건설할 수 없다”(28)는 점을 증명시켰다. 맑스는 꼬뮌이 “마침내 발견된 노동계급의 경제적 해방의 최종적인 정치형태”(29)라고 결론 내렸다.

1905년 러시아혁명 과정에서 처음 등장한 노동자 소비에트를 트로츠키는 이행 강령의 “정점”이라고 보았다. 이행 강령의 다른 두 핵심 요구인 “노동자에 의한 생산의 통제”와 “공장위원회”는 1917년 혁명에서 직접 도출되었다. 1905년 소비에트와 마찬가지로 이 두 요구들은 좌익정당이나 이론가에 의해 창안된 것이 아니라 계급투쟁 자체의 논리에 의해 등장했다.

1917년 2월혁명으로 짜르체제가 타도된 후 수많은 사업장에서 공장위원회가 수립되었다. 공장위원회는 사업장의 모든 부서, 모든 노동조합, 비조직 노동자들의 대표기구로 조직되었다. 트로츠키는 공장위원회를 “노동자 공동전선이 실현된 하나의 예”(30)라고 말했다. 원래 임금, 고용조건, 노동시간 등의 문제로 등장한 공장위원회는 권위와 영향력을 얻으면서 더 넓은 사회문제들을 다루기 시작했다. 이들 중 좀더 전투적인 조직들은 서서히 경영자들의 결정을 거부하고 회사의 장부를 조사하고 금융관련 기록들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이것들은 “노동자에 의한 생산의 통제”체제의 주요한 요소들이었다:

“공장위원회가 주관하는 노동자에 의한 생산의 통제는 격심한 계급투쟁의 상황 속에서만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은 기업, 트러스트, 산업의 전 분야, 경제 전체 등에서 진정으로 이중권력 상황이 조성되었음을 의미한다.

어떤 국가권력이 노동자에 의한 생산의 통제와 조응할 것인가? 권력이 아직도 노동계급의 수중에 들어오지 않은 것은 명백하다.... 지금 우리는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발생하고 있는 노동자에 의한 생산의 통제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권력을 확실히 장악하고 있다고 느끼는 자본가들은 결코 기업 내에 이중권력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노동자에 의한 생산의 통제는 계급 역관계가 부르주아 계급과 그 국가기구에게 급격하게 불리해지는 상황에서만 발생한다. 노동계급이 권력을 장악하는 순간으로 나아가는 상황에서만 노동자에 의한 생산의 통제가 자본가계급에게 강요될 수 있다...."(31)

공장위원회와 노동자에 의한 생산의 통제는 격심한 사회 위기의 순간에 등장한다. 이때 노동자 대중은 자신들의 생계와 노동조건을 방어하기 위해 “평상시” 노동조합주의의 한계를 넘어 자본가의 재산권과 경영권을 침해할 태세를 가져야 한다.

노동자에 의한 생산의 통제는 혁명적으로 계급 의식이 고양되는 과정에서 반드시 거쳐야할 단계는 아니다. 그러나 이 혁명의식은 대개의 경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위기, 실업, 자본가의 경영조작 등의 상황에서 혁명의식으로 무장된 노동계급 다수는 기업 비밀의 철폐와 은행, 상거래, 생산 등에 대한 통제를 위해 싸울 각오를 한다. 이 각오는 권력 장악의 필요성을 대중들이 이해하기 이전에 먼저 생길 수 있다.

생산 영역에서 통제를 시작한 후 노동계급은 불가피하게 권력과 생산수단 장악의 길로 전진하게 된다. 신용대부, 원자재, 시장의 문제는 즉시 개별 기업의 영역을 넘어서서 노동자에 의한 생산의 통제를 사회의 모든 영역으로 확대하게 된다."(32)

제 1차 세계대전 직후 독일과 이탈리아에서도 공장위원회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투쟁을 승리로 이끌 혁명 지도부가 존재하지 않은 상황에서 자본가들은 전열을 재정비하여 상황을 다시 장악할 수 있었다:

“노동자에 의해 생산이 통제되는 상황은 근본적으로 화해 불가능한 모순을 안고 있다. 결국 이 모순은 이 조치의 영역과 임무가 확대되고 상황이 참을 수 없을 정도까지 날카롭게 격화되는 지점에 도달한다. 이 모순은 노동자 계급이 권력을 장악하거나(러시아의 경우) 파시스트들이 반혁명에 성공하면서 해결된다. 후자의 경우 자본은 노골적인 독재체제를 수립한다.(이탈리아의 경우)”(33)

1932년 1월에 쓰여진 중요한 저작인 [다음에는 무엇이? 독일 노동계급이 직면한 사활의 문제들]에서 트로츠키는 노동자에 의한 생산의 통제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접근했다:

“이 운동은 상황에 따라 생산 영역이 아니라 소비 영역에서 발전할 수도 있다. 브뤼닝(Bruening) 정부는 임금 인하와 동시에 물가 인하를 약속했었다. 그러나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이 문제는 권력 장악에 대해 생각해본 적도 없는 노동계급의 후진 층에게 중요한 사안으로 등장한다. 물가 인하를 위해서는 산업 자원과 상거래 이윤 등을 노동자들이 직접 통제할 수밖에 없다. 모든 인민이 불만을 표출하는 상황에서 마가린 가격 인상 이유를 조사하는 노동자 위원회가 여성노동자-주부들의 참여를 통해 조직될 수 있다. 이것은 노동자에 의한 산업 통제의 생생한 출발이 될 수 있다.”(34)   

[이행 강령]은 노동자에 의한 생산의 통제와 자본가계급에 대한 몰수를 면밀하게 구분하고 있다. 전자는 후자로 가는 학교이다: “생산 통제의 경험에 기초하여 노동자들은 때가 왔을 때 국유화 산업을 직접 운영하는 준비를 할 것이다.” 노동계급에 의한 생산수단의 몰수는 자본주의에 대한 결정타가 될 것이며 노동계급 독재의 핵심적 경제 내용이 된다.

 

1917년 레닌의 이행 강령

1917년 중반 케렌스키의 부르주아 임시정부 치하에서 전쟁에 지친 러시아의 경제 상황은 놀라운 속도로 악화되고 있었다. [임박한 파국](The Impending Catastrophe and How to Combat It)에서 레닌은 러시아의 절망적인 경제상황이 대자본가들의 소행 때문임을 명확히 지적하였다:

"자본가들은 의도적으로 끊임없이 생산을 방해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유례없는 파국이 공화국, 민주주의체제, 소비에트, 노동자 조직, 농민 조직의 붕괴를 재촉하기를 희망하고 있다. 그리고 이 결과 짜르와 자본가-지주의 무제한적 권력을 부활시키려 기도하고 있다.

대대적인 파국과 기근의 위험이 임박했다. 모든 신문들은 이것에 대해서 다시 또다시 보도했다. ...

그러나 조금만 관심을 두고 생각해보면 이 파국과 기근을 해결할 조치들이 마련될 수 있다. 그리고 이 조치들은 단순 명확하며 완벽하게 현실성을 구비하고 있다. 그리고 인민의 능력으로 충분히 시행할 수 있다. 이 조치들이 시행되지 않는 유일한 이유는 한줌도 되지 않는 지주와 자본가들의 엄청난 이윤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것 이외에 다른 이유는 없다."(35)

레닌은 자본가들의 생산방해 공작을 중지하기 위해 법을 통과시킬 것을 케렌스키에게 요구하지 않았다(“최소”강령). 그리고 임박한 파국에 대한 해결책으로 사회주의 혁명을 추상적으로 제시하지도 않았다(“최대”강령). 대신 그는 경제 결정과정에서 대중의 개입을 촉진하여 경제를 회생시키고 자본가들의 생산방해 공작에 반격을 가하는 구체적인 조치들을 제시했다. 그가 제안한 “주요한 조치들”은 다음과 같았다:

“1. 모든 은행을 하나로 통합하고 그 운영을 국가가 책임지는 은행의 국유화.

 2. 설탕, 석유, 석탄, 선철, 강철 등을 비롯한 주요 분야의 독점체인 신디케이트의 국유화.

 3. 상거래 비밀의 철폐.

 4. 실업가, 상인, 고용주들의 전국연합체에 의무적 가입.

 5. 대중으로 구성된 소비자 협의회의 의무적 조직 또는 이것의 권장 그리고 대중에 의한 이 조직의 통제권 행사.“(36) 

이 조치들은 부르주아 재산권에 대한 상당한 침해를 의미했다. 레닌은 이 조치들의 혁명적 의의를 다음과 같이 천명했다:

“자본의 기반을 혁명적으로 침식하는 방식 그리고 ‘아래로부터의’ 통제 즉 자본가에 대해 노동자와 빈농이 통제를 행사하는 진정한 민주적 통제의 조직 이외에 경제의 혼란과 붕괴에 더 효과적으로 대처하는 방법은 없다....”(37)

레닌이 제기한 강령은 당시 통용되지 않은 용어로 말하면 이행 강령이었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노동자 권력과 사회주의의 임무를 제기했다.

 

이행 요구와 좌익반대파

1933년 2월 최초의 국제회의에서 국제좌익반대파(International Left Opposition)는 “기본 원칙들”이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채택하여 이 조직이 “코민테른 첫 4차 세계대회들의 성과에 기초하고 있음”을 선언했다. 또한 제 3기 스탈린주의 노선의 무의미한 최후통첩 정책을 비난하고 공동전선 전술과 이행 요구들의 중요성을 다시 천명했다. 이 조직은 이렇게 촉구했다:

“각국의 구체적 상황에 부응하는 이행 구호들을 통해 대중을 투쟁으로 인도해야한다. 특히 봉건적 사회관계, 민족적 억압, 다양한 종류의 공공연한 제국주의 독재 등과 관련하여 민주주의 구호 하에 대중을 투쟁으로 인도해야한다....”(39)

1934년 6월 국제좌익반대파 프랑스 지부는 [프랑스 행동강령]을 발표했다. 1934년 2월 6일 파시스트들은 독일 히틀러의 집권에 용기를 얻어 프랑스 의회를 무장 공격하는 쿠데타를 시도했다. 이에 대해 프랑스 노동계급은 총파업으로 응수했다. 이 격동 직후 트로츠키가 그 초안을 작성한  이 문서는 기업비밀의 철폐, 은행-산업-상업에 대한 노동자 농민의 통제, 노동시간 감축과 임금인상, 은행-핵심산업-보험회사-수송 등의 국유화, 외국무역 독점 등을 촉구하였다. 또한 소련 방어, 경찰 해체, 노동자-빈농의 무장화, 노동자-농민 꼬뮌 소속 노동자 민병대의 치안 유지 등도 주창했다(40).

1935년 3월 프랑스 최대 노동조합인 노동총연맹(CGT) 회의에서 청년 트로츠키주의자 알렉시스 바르뎅(Alexis Bardin)은 트로츠키가 작성한 문서에 기초하여 연설하였다. 그는 자본주의 경제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노조 관료들이 제안한 공상적/개량주의적 “계획”을 비판하였다. 그리고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촉진하는 계획으로 노동조합 정책을 수정할 것을 촉구했다. 노동총연맹 지도부가 신용대부를 경제의 ”지렛대“라고 모호하게 표현한 것에 반해 바르뎅은 사회주의 경제건설의 지렛대로서 자본가 소유 은행들의 몰수를 제안했다. 노동총연맹 강령이 90명의 대자본가들이 나라의 경제를 소유하고 관리하고 있음을 한탄한 반면 그는 이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원래 주인들에게 돌려줄 것을 촉구했다. 노조관료들이 계급투쟁과 계급협조의 경계선을 모호하게 만든 반면 트로츠키의 초안은 이것을 더욱 부각시켰다.

 

이행 요구들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바르뎅의 연설을 통해 트로츠키는 이행 요구들을 활용하여 노동조합 대회에서 사회주의 혁명의 내용을 적절하게 전달하는 방식을 훌륭하게 보여주었다. 그는 미국 사회주의노동자당 지도부와 토론할 때도 같은 문제를 다루었다. 자본가들의 회계장부 공개 요구가 어떻게 다른 정치적 사안들과 연관되는 지를 그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수백만의 실업자가 생겨났다. 정부와 자본가들은 더 이상 재정 지출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때 우리는 사회 전체의 회계장부를 공개할 것을 요구한다. 공장위원회가 회계를 담당해야 한다. 노동계급의 이해에 헌신하는 통계 전문가에게 일을 맡겨야 한다고 노동자들은 말한다. 산업의 어느 분야가 파산했을 경우 우리는 이것을 몰수하여 관리하겠다고 제안한다. 노동자들이 자본가들보다 경영 능력이 우수하다고 말한다. ... 또한 이 이행 요구는 노동자에 의한 생산의 통제를 향한 일보전진이 된다. 그리고 이것은 노동자가 사회 전체를 관리하는 준비과정이다. 모든 것이 내일의 주인이 될 노동자에 의해 관리되어야 한다. 그러나 권력 장악을 촉구하는 것은 미국 노동자들에게 불법적이며 황당한 주장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자본가들이 실업자들에게 생계에 필요한 급료도 지불하지 않으며 회계장부 조작을 통해 국가와 노동자들에게 이윤의 실제 규모를 숨기고 있다고 말하면 노동자들은 권력 장악의 필요성을 이해한다. 농민에게 은행이 농민들을 속이고 있으며 거대한 이윤을 챙기고 있으므로 은행의 회계장부 관리를 위해 농민위원회를 구성해야 한다고 말하면 모든 농민들은 이 조치의 참 뜻을 이해할 것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농민이 믿을 것은 자신 밖에 없으며 영농자금 대부 관리 위원회를 구성해야 한다. 그러면 이들은 우리의 뜻을 충분히 이해할 것이다. 이 작업이 하루아침에 성공할 수는 없다. 다만 대중과 우리 동지들에게 이 사상을 즉시 인식시켜야 한다.”(43)

이 인용문의 마지막 요지는 특히 중요하다. 대중이 이행 요구들을 중심으로 매일같이 투쟁에 나설 수는 없다. 그러나 계급투쟁이 상대적으로 덜 첨예한 시기에도 이 요구들을 노동계급 대중 속에 전파하는 것이 혁명가의 임무이다. 올바른 혁명전술의 씨앗을 평소에 뿌리지 않으면 혁명 상황에 대처하기는 그만큼 어려울 뿐이다. 노동계급의 전위는 대중의 견해를 추종할 것이 아니라 지도해야 한다.

제 4 인터내셔널 중핵들이 공장 폐쇄, 임금 삭감, 정리해고, 인플레, 은행의 차압 등 자본주의 위기/경제적 해체와 관련된 현상들을 대중에게 설명하고 이들에게 노동계급 혁명의 필요성을 인식시키도록 트로츠키는 이들을 훈련시켰다:

“노동자 민병대와 노동자에 의한 생산의 통제는 같은 문제의 두 측면에 지나지 않는다. 노동자는 회계 담당자가 아니다. 그는 회계장부를 요구하면서 스스로 회계를 통제하고 지시하면서 현실을 바꾸어 나가고자 한다. 당연히 우리의 구호는 대중의 반응에 달려있다. 대중의 반응을 통해 문제의 어느 측면을 강조할 지를 알게 된다.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군수산업을 가동시켜 실업자들을 도울 것이지만 노동자가 생산을 운영한다면 죽은 자들이 아니라 산 자들을 위해 새로운 산업을 창출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문제를 설명할 경우 정치운동의 경험이 전혀 없는 보통 노동자들도 권력 장악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44)

트로츠키는 사회주의노동자당 지도부에게 물가-임금 및 노동시간 연동제를 대중화시키는 캠페인을 제안했다:

“우리 강령을 노동자들에게 제시하는 방법의 문제가 있다. 당연히 이 문제는 아주 중요하다. 우리의 정치를 대중 심리학/교육학과 접목시켜야 한다. 이를 통해 대중의 의식에 접근하는 다리를 놓아야 한다. 각 지역에서 이 작업을 수행하는 방법은 경험만이 말해줄 것이다. 당분간 노동자들의 관심을 물가-임금 및 노동시간 연동제 구호에 집중시키려고 노력해야 한다.... 당연히 이것은 하나의 측면에 지나지 않는다. 우선 이 구호는 지금 상황에 전적으로 적절하다. 그러나 상황이 바뀌면 다른 측면들도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 연동제 구호는 무엇인가? 바로 사회주의 노동제도이다. 노동자 전체 숫자로 노동시간 전체를 나누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 체제의 온갖 측면들을 미국 노동자들에게 제시하면 이들은 이것들이 황당하며 뭔가 유럽에서 건너온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먹고 마시고 적절한 주택에 살 권리를 보장하여 경제위기를 해결할 조치를 이 구호로 제출한다. 이것은 사회주의 강령의 일부이다. 다만 아주 대중적이며 단순한 형태로 표현되었을 뿐이다.”(45)

이 구호를 현실화시키는 문제에 대해 트로츠키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 요구를 자본주의에서 실현하느니 아예 자본주의를 타도하는 것이 더 쉽다. 우리의 어느 요구도 자본주의에서는 실현이 불가능하다. 바로 이 때문에 이것을 이행 요구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요구는 노동자의 의식에 다리를 놓고 사회주의 혁명으로 가는 물리적 다리를 놓는다. 문제는 대중을 혁명투쟁으로 일어서게 만드는 것이다. 이때 실업자와 노동자 사이의 장벽을 극복하는 문제가 제기될 것이다. 우리는 이 문제를 극복하는 방식들을 찾아야한다.”(46)

 

‘완벽한 강령은 아니다’

미국 사회주의노동자당 지도부와 논의하면서 트로츠키는 [이행 강령]이 모든 문제를 포괄하지 못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이행 강령] 초안은 완벽한 강령이 아니다. 이 강령 초안에는 빠진 부분도 있고 그 성격 상 강령에 속하지 않는 것도 있다고 할 수 있다. 강령이 아닌 것은 논평이라고 할 수 있다. ... 완벽한 강령은 제국주의 단계에 머물고 있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이론적으로 표현해야 한다. ... 이 강령의 도입부는 완벽하지 않다. 제 1장은 힌트에 지나지 않으며 완벽한 표현이 아니다. 강령의 끝 부분도 완벽하지 않다. 사회혁명, 봉기에 의한 권력장악,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계급 독재로의 이행, 노동계급 독재에서 사회주의 체제로의 이행 등에 대한 설명이 빠져 있다. [이행 강령]은 독자를 문턱으로만 인도한다. 이 강령은 지금부터 사회주의 혁명 시작 사이에 필요한 행동강령이다. 의식수준이 각기 다른 다양한 노동계급의 부위들을 모두 사회혁명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 이 강령의 가장 중요한 임무이다.”(47)

이 강령은 다른 의미에서도 “불완전”했다. 각국의 정치생활에 중요한 구체적인 사회적 역사적 상황을 제시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트로츠키는 제 4 인터내셔널의 각국 지부가 이 국제 강령을 바탕으로 각국의 고유한 정치지형에 맞게 일국 차원의 구체적인 강령을 정식화할 것을 기대했다:

“이 강령은 최초의 개략적 요약에 불과하다. 다가올 국제 대회에서 발표되는 관계로 내용이 너무 일반적이다. 이것은 세계 자본주의의 일반적 발전 경향을 표현하고 있다. ... 세계정세가 일반적일 수밖에 없는 것은 명확하다. 모두 제국주의 경제체제의 압력 하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나라는 각각 특정 조건 속에 놓여 있다. 진정한 살아있는 정치는 각 나라의 특정 조건 속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심지어는 각 나라의 각 지역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48)

강령은 각국 지부에 의해 달리 정식화되어야 할 뿐 아니라 특정 노동조합에서 제시할 요구들은 노동조합의 특수한 사안들을 다루어야 한다. [이행 강령]의 본문이 주목하고 있듯이 “구체적 상황 속에서 전국, 지방, 노동조합의 차원에서 끊임없이 제기되는 개별적이고 부분적인 요구들을 여기서 일일이 나열하는 것”(49)은 불가능할 것이다. 혁명가들이 이 문제들에 대해 관심이 없기 때문이 아니다: “볼세비키-레닌주의자는 모든 투쟁의 선두에 선다. 심지어 노동계급의 가장 사소한 물질적 이익과 민주적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에서도 마찬가지이다.”(50)

이행 강령의 요구들을 대중에게 알리고 이 요구들에 기초하여 투쟁을 대중적으로 수행해야 한다. 그러나 혁명가들이 이행 강령의 내용을 그저 반복해서는 안된다고 트로츠키는 생각했다:

“상황의 전개에 따라 그리고 대중의 의식이 나아가는 방향에 따라 이행 강령의 기본 내용들을 좀더 구체적이고 부분적인 내용으로 나누어 해석하는 것이 필요하다.”(51)

이행 강령의 내용을 실제 상황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 융통성 있게 그리고 지혜롭게 적용해야 한다. 이 점은 식민지 및 반식민지 국가들에 관련된 내용에서 특히 명확하게 표현되어 있다:

“노동자 투쟁 가운데 민주주의 및 이행 요구들이 각각 차지하는 비중, 그리고 이들이 제시되는 순서와 서로 간의 관계는 해당 후진국의 구체적인 특수성과 후진성의 정도에 따라 결정된다.”(52)

더욱이 투쟁 과정에서 특정 요구들에 대한 혁명가들의 강조점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상황이 바뀌면 이에 따라 선동의 초점도 바뀌어야 한다. 따라서 혁명가들이 제출하는 요구들은 각각의 투쟁마다 다를 수 있으며 오늘과 내일이 다를 수 있다:

“이행에는 노동운동이 체계적이고 균형 잡힌 특성보다는 열병과 같은 또는 폭발적인 특성을 보인다. 조직 형태 뿐 아니라 구호 역시 운동의 상황에 종속되어야 한다.”(53)

 

1938년 이후의 정세와 강령의 내용적 확장

[이행 강령]은 10월 볼셰비키 혁명이 남긴 교훈들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문서이며 권력장악의 길로 노동계급을 인도하는 강령이다. 이 문서는 제국주의 시대에 맞게 맑스주의 강령을 표현했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지금도 이 강령은 대단히 유효하지만 모든 시대의 모든 문제들에 대한 영구적이며 변할 수 없는 해답으로 제시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파시스트 국가에서의 이행 강령” 부분은 독일과 이탈리아 노동자들이 파시즘에 의해 압살되고 있던 상황에 비해 현재 그 중요성이 당연히 떨어진다. 연속혁명론도 기본 내용은 아직 유효하지만 오늘날 신식민지 세계의 상황은 1938년 당시와는 많이 다르다. 제 2차 세계대전 후의 명목적 “탈식민지화”와 “제 3 세계”의 공업화/도시화의 상당한 진전은 세계의 정치지형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제 2차 대전 직후 소련군이 점령한 동유럽 등지에는 부르주아 계급의 생산수단이 몰수되어 소련과 유사한 체제가 수립되었다. 1938년 강령은 이 사태를 예상하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베트남, 유고슬라비아, 중국, 쿠바 등지에서 농민의 지지를 얻은 게릴라 부대가 스탈린주의 정당의 지도를 받으며 부르주아 체제를 전복하였다. 이 결과 기형적 노동자국가(deformed workers state)가 수립되었다. 이 사태 역시 [이행 강령]은 예상하지 못했다.

1938년 이후의 세계정세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는 소련과 동유럽에서 자본주의 반혁명이 승리한 사실이다. 세계노동계급의 거대한 역사적 패배로 기록될 이 변화는 그 가능성이 [이행 강령]에 언급되어 있다:

“소련의 정치상황은 두 가지 중 어느 한 방향으로 결론이 날 것이다. 관료집단이 더욱더 세계 부르주아계급의 도구가 되어 새로운 (집단적) 소유형태를 파괴하여 나라를 다시 자본주의로 추락시킬 수 있다. 아니면 노동계급이 관료집단을 타도하여 사회주의의 길을 개척할 수 있다.”(54)

그러나 불행하게도 노동계급에게 불리한 쪽으로 사태는 전개되었다. 오늘날 혁명가들은 쿠바, 중국, 베트남, 북한에 존재하는 기형적 노동자국가의 집단적 소유형태를 방어하고 관료집단 타도를 위한 노동계급의 시도를 지지해야한다. 그러나 러시아와 동유럽의 경우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곳에서는 부르주아 반혁명 이후 경제적 정치적 기반을 구축하고 있는 자본가 계급을 타도하고 노동자 민주주의에 기초한 계획경제 체제를 다시 수립해야 한다.

그리고 [이행 강령]은 북아일랜드, 키프로스, 보스니아, 이스라엘/팔레스티나 등 혼합민족(interpenetrated peoples) 국가의 민족문제도 다루지 않았다. 더욱이 1938년 이후 다양한 사회 문제들이 세계적으로 생겨났다. 전체 국민에 대한 적절한 무상 의료, 무상 주택, 유치원에서 대학교까지 무상 교육, 학생의 생계 보장적 장학금 지급 등 필수적인 요구들도 이 강령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인종차별, 여성차별 등 특별한 사회적 억압이 제기하는 역동적인 문제들도 이 강령에는 거의 언급이 없다. 여성노동자의 조직화, 피임 수단의 무상 제공, 무상 임신중절, 24시간 무상 탁아서비스, 동일 노동에 대한 동일 임금 지급 등은 이행 요구에 포함되지 않았다. 동성애자들의 민주적 권리 보장이나 쌍방 합의 성 관계에 대한 국가의 간섭 반대 등을 위한 투쟁의 필요성 역시 언급되어 있지 않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이행 강령 비판

[이행 강령]의 내용 가운데 “기회주의와 무원칙한 수정주의” 부분은 확실히 현재 상황에 맞게 수정되어야한다. 이 부분에서 언급한 모든 조직들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되었다. 그러나 대부분 이들의 자리는 트로츠키주의를 자처하는 다양한 그룹들에 의해 채워져 있다. “기회주의자와 무원칙한 수정주의자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이행 강령]을 이미 지나간 시대의 유물로 간주한다는 점이다.

이들 가운데 이삭 도이처(Isaac Deutscher)는 가장 영향력 있는 최초의 인물이다. 트로츠키의 전기 집필가로 잘 알려져 있는 그는 국제좌익반대파 폴란드 지부 회원이었으나 이후 제 4 인터내셔널의 수립을 반대했다. 3부작으로 이루어진 트로츠키 전기의 제 3권 [추방당한 예언자](The Prophet Outcast)에서 도이처는 제 4 인터내셔널 창립 문서인 [이행 강령]을 단 하나의 문장으로 무시하고 있다:

“트로츠키가 제 4 인터내셔널을 위해 작성한 강령 초안은 원칙을 담은 문서가 아니다. 노동조합 활동과 일상 정치투쟁으로 바쁜 당이 대중에 대한 정치적 지도력을 즉시 획득하기 위해 마련한 전술 지침 정도에 불과하다.”(55)

노동계급 전위당이 혁명의 길로 대중들을 인도하는 정치투쟁은 단순한 “전술”의 문제가 아니다. 혁명전략에 대해서 도이처는 제 4 인터내셔널과 근본적으로 견해를 달리하고 있었다.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세계 정당”을 건설하는 대신 도이처는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의 자기개혁에 희망을 걸고 있었다. “혁명운동의 발전이라는 넓은 법칙” 속에서 소련의 관료집단은 서서히 자기개혁을 이루어 나갈 것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트로츠키의 위대성을 인식하고 그의 정치 강령의 핵심 부분들을 채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그는 예상했다.

그러나 그의 정치 전망은 역사의 전개에 의해 논박되었다. 불행하게도 많은 수의 당대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제 4 인터내셔널에 대한 도이처의 입장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토니 클리프(Tony Cliff)가 주도했던 국제사회주의(International Socialists) 경향은 이들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조직이다. 대체로 국제사회주의자들은 트로츠키를 조심스럽게 다룬다. 자신들이 트로츠키의 “혁명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이행 강령]을 오늘날 노동계급의 투쟁과 거의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조직 지도부의 일원으로 오랫동안 활동했던 던컨 핼러스(Duncan Hallas)는 자신의 저서 [트로츠키 사상의 이해](책갈피, 1994년)에서 이렇게 주장한다:"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전개될 혁명적 격동에 대한 트로츠키의 예상은 “메시아적 예언”의 어조를 담고 있어서 이후 혁명가들이 “계급 역관계의 변화”에 부응하는 전술적 전환을 이루기 어렵게 만들었다." 그리고 트로츠키가 노동대중으로부터 분리된 정도를 드러낸 문서가 바로 [이행 강령]이라고 보았다:

“그가 너무도 커다란 역할을 했던 노동운동으로부터 고립을 강요당했다. 이 상황은 계급투쟁의 변화무쌍한 과정을 그가 이해하는데 어느 정도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이것은 불가피하였다. 그의 거대한 투쟁 경험과 뛰어난 전술 감각도 일상 투쟁에 개입한 투사들이 제공하는 정보의 부족을 전적으로 상쇄할 수 없었다. 진정한 공산당만이 일상 투쟁에 개입하여 계급투쟁의 구체적 변화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다. 고립의 기간이 길어짐에 따라 이 부정적 영향은 더욱 두드러졌다. 1938년에 그가 작성한 [이행 강령]과 이것의 원형인 1934년의 ‘프랑스 행동강령’을 비교해 보면 이 사실이 명백해진다. 실제 투쟁과 관련된 생기, 유효성, 구체성 등에 있어서 후자는 월등히 뛰어났다.”(56)

1934년의 “원형”이 좀더 “구체적이고 생생한” 이유는 이 문서가 “실제 투쟁”을 위해 작성되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핼러스 동지는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행 강령]은 좀더 높은 추상의 수준에서 쓰여질 수밖에 없었다. 세계 노동계급 전체의 일반적 역사적 상황에 초점을 맞추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동지가 [이행 강령]을 비판하는 데에는 좀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현재 노동대중의 (부르주아) 의식과 사회주의의 필요성을 인식하는 혁명의식 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임무이다. 그런데 이 임무를 충족시키는 구호나 ‘요구들’을 찾는 것이 가능한지 아닌지는 당연히 상황에 좌우된다. 주어진 시점에서 ‘노동계급의 광범위한 부위가 보여주는 의식’이 완전히 비혁명적이라면 이 의식은 구호를 통해 바뀌지 않는다. 실제 조건의 변화가 필요하다. 투쟁의 각 단계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최소한 노동계급 일부의 심금을 울릴 뿐만 아니라 노동계급을 행동으로 인도할 수 있는 그런 구호들을 찾아내고 제기하는 것이다. 이 구호들은 트로츠키의 매우 엄격한 규정에 의하면 이행 구호가 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할 것이다....

그의 추종자 대부분은 이행 요구들 특히 ‘물가-임금 연동제’와 같은 구체적인 요구들을 무조건 숭배하는 경향이 있었다. 물론 트로츠키 자신이  이 교조적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질 수는 없다. 그러나 그가 이 문제를 강조한 정도는 너무 지나쳤다. 결국 트로츠키는 ‘요구들’ 자체가 노동계급 내 혁명조직의 존재와는 별개의 가치를 지닌다는 믿음을 조장하였다."(57)

그러나 핼러스는 노동운동 내의 조직 규모나 영향력 정도가 아니라 정치 즉 쟁취하기 위해서 싸우는 요구들에 의해서 혁명조직과 중도주의 또는 개량주의 좌파 조직이 구별된다는 사실을 간단히 무시하고 있다. 조직의 규모나 노동계급에 대한 영향력은 사태에 영향을 미치는 조직의 능력을 크게 결정한다. 그러나 이것은 조직의 근본적 노선과는 무관하다. 1930년대 스페인 내전 상황에서 스페인의 제 4 인터내셔널 그룹은 아주 규모가 작았다. 이에 비해서 안드레스 닌(Andres Nin)이 주도한 중도주의 조직인 맑스주의통일노동자당(POUM)은 규모가 대단했다. 그러나 혁명을 승리로 이끌 유일한 길은 계급협조주의에 대해 강력하게 투쟁하는 것이라는 트로츠키의 “종파주의적” 주장에 대해 닌은 불만을 품고 제 4 인터내셔널과 결별하였다. 대중으로부터 고립되는 것이 두려워 이 정당 지도부는 인민전선에 대한 비판을 자제했다. 그리고 “실제 조건의 변화”를 위해 필요한 영향력을 획득한다는 미명 아래 부르주아 정부에 참여하였다. 이 결과 맑스주의통일노동자당은 곧이어 소위 진보적 부르주아 계급과 함께 하는 반(反)파시즘 “연합” 전략에 당연히 “비판적” 지지를 보냈다. 트로츠키는 이것을 노동계급에 대한 “범죄행위”라고 올바르게 규정하였다. 부르주아 계급에 대한 항복 노선을 추종한 나머지 맑스주의통일노동자당은 스탈린주의자들에 의해 무참하게 압살되었다. 스페인 자본주의를 보존하려는 스탈린주의자들의 결연한 의지는 결국 노동대중의 사기저하를 가져왔고 파시스트 프랑코 장군의 내전 승리를 도왔다.

그러나 1917년 러시아에서 레닌은 안드레스 닌과는 완전히 다른 노선을 걸었다. 유명한 “4월 테제”에서 그는 짜르를 타도한 2월 혁명으로, “러시아는 모든 전쟁 참가국들 중에서 현재 가장 자유로운 나라”라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케렌스키의 "진보적" 자본가 정당들과의 연합에 대해서 가장 결연하게 반대하였다: “임시정부에 대해서는 어떠한 지지도 표명해서는 안된다. 임시정부의 모든 약속들이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폭로해야 한다.” 이때 임시정부는 대중들의 대단한 지지를 얻고 있었으므로 레닌의 노선은 심지어 볼셰비키당 내부에서도 미친 종파주의의 표본이라고 인식되었다. 그러나 계급협조주의 노선에 대한 절대적인 반대는 10월 혁명 승리의 전제조건이 되었다.

1969년과 1973년 사이에 발간된 [국제사회주의] 계간지는 제 4 인터내셔널의 역사에 대해 일련의 논문을 실었다. 여기서 당시 영국 국제사회주의자 그룹의 정치국 비서였던 핼러스는 [이행 강령]이 제 4 인터내셔널의 붕괴에 기여했다고 주장한다:

“불리한 정세가 제 4 인터내셔널의 쇠퇴에 일조 하였다. 그러나 더 중요한 요인은 [이행 강령]의 근본 약점이었다. 이 강령은 특히 스탈린주의 체제를 아주 잘못 분석했다. 더욱이 노동계급의 대중 기반이 진정으로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인터내셔널’을 자칭한 것도 약점으로 작용했다.”(58)

국제사회주의자들에 따르면 트로츠키가 소련을 “국가자본주의 체제”로 보지 못한 점 즉 소련이 영국, 미국, 기타 제국주의 국가들과 질적으로 같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은 것은 “아주 잘못된” 것이었다. 1960년대에 이 그룹은 “영구 군비 경제(Permanent Arms Economy)”라는 이론으로 맑스주의 경제이론의 지주인 이윤율 저하 경향 이론을 뒤집어 버렸다. 핼러스는 당시 이 그룹의 주요한 이론가였던 마이클 키드런(Michael Kidron)을 인용했다. 후자는 자본집약재가 “유출”될 경우 발생하는 현상을 이렇게 설명했다:

“‘그러면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증가하는 정도는 둔화될 것이다. ... 그리고 심지어는 이 현상이 중지되거나 역전될 수도 있다. 이 경우 평균 이윤율은 떨어지지 않는다. 이 결과 불경기가 점점 심각해진다고 말할 이유가 존재하지 않게 된다 등등.’ 이러한 유출은 영구 군비 경제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

이 사실의 결과 신자본주의 체제(Neo-capitalism)의 전망과 한계를 올바르게 설정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오늘날 혁명가들은 바로 이 근본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정통 트로츠키주의자들의 난관은 바로 여기에 있다. 만약 이 문제가 진정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면 트로츠키의 자본주의 파국론은 거부되어야 한다. 이로서 제 4 인터내셔널의 두 주요한 기둥 가운데 하나는 무너진다. 제 4 인터내셔널의 소규모 그룹들은 자본주의 파국과 함께 혁명의 파도를 타고 힘차게 전진할 것으로 예상하였다. 그러나 20년간의 자본주의 호황이 조성한 (혁명적) 썰물에 의해서 갯벌에 빠진 자신들을 발견하였다. 결국 ‘세계 지도부’, ‘세계 대회’, ‘국제집행 전원회의’등 코민테른에서 이름을 빌려온 모든 기구들은 허풍에 지나지 않았다.“(59)

자본주의 체제가 대대적인 경제 파동들을 더 이상 드러낼 수 없을 것이라는 인상주의적 견해는 당시 소부르주아 신좌익들(New Leftists) 사이에 만연하고 있었다. 핼러스는 이렇게 주장한다. 이윤율 저하 경향 때문에 자본주의 체제가 주기적인 공황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는 트로츠키의 경제 파국론은 거부되어야 한다. 그러나 “정통 트로츠키주의자들”은 교조적으로 이 이론을 고수한다. 이것은 이들의 고질적인 문제이다 등등. “영구 군비 경제”에 입각한 수정주의적 “신자본주의” 이론은 현재 자본주의 체제의 격렬한 모순들에 의해 여지 없이 논박되었다. 이 사실은 맑스주의 이론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국제사회주의자들에게 당혹스러움만을 가져다주었다.

“영구 군비 경제”는 이제 인기를 잃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행 강령]에 대한 클리프의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1993년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행 요구들은 자본주의가 깊은 불황에 빠진 전반적 위기 상황에나 적합했다. 그러나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자본주의의 대대적인 경제 팽창의 조건에서는 이 요구들은 제일 좋은 경우에는 무의미했으며 제일 나쁜 경우에는 반동적이었다. 임금 인상을 물가 상승에 맞추어 제한하는 것은 자본가들의 요구였으며 생활수준을 개선하려는 노동자들의 열망에 배치되었다. 또한 어느 정도 완전고용 하에서는 ‘노동시간 연동제’는 정말 무의미하다.”(60)

사실 “무의미한 것은” 바로 클리프의 비판이다. 이행 요구들이 자본주의의 구조개혁을 위해 제출되는 것이 아님을 트로츠키는 명확히 설명했다. 이것들은 적절한 상황에서 기술적으로 제기되고 노동자 대중에 의해 인정될 경우 이윤체제의 논리 자체에 도전한다. “노동시간 연동제”는 혁명가들이 매년 대중선동의 초점으로 제기하는 것이 아니다. 대대적인 실업 상태에서나 적합한 요구이기 때문이다. 노동시간 단축과 연계되지 않는 “물가-임금 연동제”는 인플레가 노동계급의 생활수준을 위협할 때만 적절하다. 이 요구는 디플레 상황에서는 전혀 의미가 없다. 임금을 인플레와 연계시키는 것이 임금인상 투쟁을 배제하는 것도 아니다.

[이행 강령]에 대한 클리프의 비판은 이 전제를 깔고 있다: 사회주의자들의 강령은 모두 최소(즉 개량주의) 강령이 되어야 한다. 자본주의를 개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착취당하고 억압당하는 대중의 부르주아 의식을 변화시키기 위해 이행 요구들을 제출한다는 사상을 그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이행 강령]은 비현실적이며 “가장 나쁜 경우에는 반동적일 뿐인” 개량을 위한 “최소 강령”에 불과하다고 그는 잘못 보고 있다. 이 잘못된 견해에서 잘못된 비판이 도출된다:

"마찬가지로 ‘노동자 정당방위대’, ‘노동자 민병대’, ‘노동계급의 무장’ 등 [이행 강령]의 요구들은 비혁명적 상황에 맞지 않았다. 유감스럽게도 많은 트로츠키주의자들은 교조적으로 이 구호들을 반복했을 뿐이다.

경제위기가 너무 격심해서 노동자의 조건을 아주 적게 개선하는 투쟁도 자본주의와 충돌할 것이라는 것이 [이행 강령]의 기본 전제이다. 그러나 현실이 이 전제를 부정하자 이 강령을 뒷받침하고 있던 근거가 무너졌다."(61)

그러나 클리프의 “기본 전제”에 의하면 자본주의는 계속될 것이고 사회주의자들의 임무는 소규모 개선투쟁에 환호하는 것이다. “노동계급의 무장”, “노동자 정당방위대” 등의 구호가 “혁명적 상황에서나 적합하다”고 클리프는 간단히 무시한다. 그러나 이 “교조적인” 구호 대신 클리프주의자들은 대중의 현재(부르주아)의식을 반영하는 요구들을 제출하는 것으로 투쟁을 제한한다. 국제사회주의자들이 가지고 있는 논리의 유일한 모순은 자신들을 “혁명가”라고 계속 주장하는 점에 있다. 만약 “노동계급의 무장”과 “노동자 민병대”의 수립이 더 이상 일정에 오르지 않는다면 “사회주의 혁명”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현재 국제사회주의 경향의 지도적 이론가인 앨릭스 캘리니코스는 비판적 표현을 좀더 조심스럽게 사용한다. 그러나 그 역시 [이행 강령]을 부정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최근 발간된 저서에서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 트로츠키의 이론을 반박으로부터 방어하려는 시도는 그의 이론을 한 세트의 교조(도그마)로 변모시킬 위험을 안고 있었다. 그러나 너무 자주 이 위험은 현실로 나타났다. 트로츠키가 그 초안을 작성했고 1938년 제 4 인터내셔널의 제 1차 대회에서 채택된 [이행 강령]은 특별한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이 문서는 ‘이행 요구들’을 내용으로 담고 있었기 때문에 이 이름이 붙여졌다. 예를 들어 물가-임금 연동제 같은 것이 이행 요구였다. 이행 요구들은 1914년 이전 제 2 인터내셔널의 최소 강령과 최대 강령 사이의 오래된 간극을 해소하기 위해서 제기되었다.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달성될 수 있는 제한된 개혁을 포함한 최소강령과 노동자 권력이 수립된 경우에만 달성될 수 있는 최대강령 사이의 거리가 바로 오래된 간극의 내용이었다. 경제 위기가 너무 격심하므로 가장 소폭의 노동조건 개선도 자본주의 체제의 이해와 충돌할 것이라고 트로츠키는 주장했다.”(62)

캘리니코스는 최소 강령과 최대 강령 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미래의 가상적 시점에서 자본주의가 경제성장을 이룩할 가능성을 완전히 소진시키지 않는 한 그는 클리프처럼 이행 요구들을 쓸모 없는 것으로 치부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그때가 올 때까지 사회주의자의 임무는 노동자의 직접적 요구에 사회주의가 궁극적으로 바람직하다는 언급을 양념으로 덧붙이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분석하면 [이행 강령]에 대한 “신주 모시기”, “교조주의”, “파국론” 등의 비판은 제 2 인터내셔널의 최소/최대 강령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을 담고 있다. 즉 지금은 개량주의가 필요하고 “나중에”(즉 실현되지 않을 시점에) 사회주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트로츠키는 이런 종류의 “사회주의”를 잘 알고 있었다:

“개량주의자들은 대중이 원하는 것을 잘 냄새맡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진지한 혁명 활동이 아니다. 우리는 어느 순간 대중으로부터 외면 받을 용기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당신들은 바보이다’, ‘저들은 당신들을 배반할 것이다’라는 말을 통해 가끔 평지풍파를 일으키면서 열정적으로 우리의 생각을 천명해야 한다.”(63)

캘리니코스와 클리프에게 트로츠키의 이 말은 “종파주의”에 불과하다. 그런데 최소한 강령 문제에 대해서는 국제사회주의자들을 종파주의자라고 비판할 수는 없다. 이들의 역사는 끊임없는 정치적 좌충우돌의 역사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조직 대상이라고 생각되는 부위의 현재 부르주아 의식에 편승해 조직 확대를 끊임없이 시도해왔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지금 “똑똑한”(즉 인기 있는) 노선은 종종 내일은 당혹스러운 노선이 된다. 이것의 고전적인 예는 북아일랜드 유혈사태에 대한 영국군의 개입 당시 국제사회주의자들의 지지 표명이었다:

“영국군의 개입으로 야기된 유혈사태의 중지 시간은 짧지만 아주 중요하다. 영국군의 즉각적 철수를 주장하는 자들은 ... 사회주의자들에게 최초의 가장 강력한 타격이 될 인종학살을 자초하고있다.”(64)

국제사회주의자들의 상투수단은 “평조합원” 노동조합 경제주의이다. 그러나 이들의 기회주의 성향은 때때로 비노동계급 분자들에게 이들이 정치적으로 야합하는 결과를 빚기도 한다. 최근 몇 년 동안 국제사회주의자들은 공공연히 부르주아 후보들에게 지지를 보냈다. 예를 들어 1992년 남한의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을 지지했으며 1994 남아프리카 대통령 선거에서는 백인지배계급과 정치흥정을 한 아프리카민족회의의 넬슨 만델라에게 지지를 보냈다.

또한 클리프주의자들은 이란의 골수 반동인 아야톨라 호메니의 1979년 “이란혁명”을 열정적으로 지지했었다. 그때 이후 거의 10년이 지난 시점에서 캘리니코스는 호메니의 승리가 의미하는 바를 이렇게 주장했다:

“... 우리는 회교 율법사들이 미국과 그 동맹국들에 대해 혁명전쟁을 벌일 것을 요구했다. 이라크와의 전쟁 시초에 내가 글을 통해 밝혔듯이 우리는 ‘이란의 회교지도자들이 테헤란을 중동지역의진정한 혁명의 불빛으로 만들 것을 요구했다. 쿠르드족, 아랍인, 기타 소수민족들에게 자치권을 부여하고 인민권력 기구를 수립하고 회교의 멍에에서 여성들을 해방시킬 것을 요구했다.’”(65)

트로츠키의 이행 요구들을 무의미하고 실현 불가능한 것으로 치부하면서 한편으로는 이란의 종교지도자 반동들에게 “진정한 혁명”을 수행할 것을 기꺼이 촉구하는 행위는 국제사회주의자들의 비겁한 기회주의와 자기기만의 놀라운 능력이 동전의 양면임을 보여주고 있다.

 

노동자들에게는 오직 진실만을 말해야한다

[이행 강령]을 비판하는 일부는 이것을 “기회주의적”이라고 규정한다. 노동계급의 직접적 요구투쟁에 개입하는 요구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비판은 이 강령이 노동자의 현재 의식에 부응하지 못하며 너무 추상적이라는 것으로 집약된다. 이 비판에 대해 트로츠키는 1938년 미국 사회주의노동자당 지도부와 가진 토론에서 이렇게 답변했다:

"강령이 노동자의 현재 의식에 영합해야 하는지 아니면 현재의 객관적 사회적 경제적 상황을 표현해야 하는 지를 물어야 한다. 이것은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

강령은 노동계급의 후진성보다 이 계급의 객관적 임무를 표현해야 한다. 노동계급의 후진성이 아니라 사회 상황을 반영해야 한다. 강령은 후진성을 극복하고 제압하는 도구이다.... 우리는 노동자들에게 진실을 말해야 한다. 그러면 노동계급의 최우수 분자들을 획득할 수 있다. 이들이 노동계급을 권력장악의 길로 인도할 수 있을 지는 알 수 없다.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으나 확실히 보장할 수는 없다. 그러나 최악의 상황이 닥쳐 노동계급이 사회주의 혁명의 길로 의식과 역량을 충분히 동원하지 못하여 파시즘에 의해 압살될 수도 있다. 그러나 여전히 최우수 분자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는 이 당에 의해 경고를 받은 적이 있었다. 이 당은 좋은 당이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위대한 혁명전통은 노동계급 내부에 여전히 살아남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 것이다. 최선의 상황은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일 것이다. 따라서 강령이 노동계급의 현재 의식에 부응하지 못하므로 제출되지 말아야 한다는 온갖 주장들이 틀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주장들은 혁명에 대한 두려움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현실에 눈을 감는다면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장밋빛 강령을 작성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 객관적 상황이 혁명조직에게 부과하는 임무가 달성되지 못할 것이다. 강령은 객관적 상황에 부응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무엇보다 중요하다. 노동계급의 의식은 후진적이지만 공장, 광산, 철도와 같은 고정 불변의 물체가 아니다. 변화 가능성이 대단히 크며 수백만이 실업자로 전락하는 객관적 위기의 냉엄함 속에서 혁명적으로 급변할 수 있다.(66)

[이행 강령]이 작성된 지 60년이 넘은 지금 좌익반대파가 계승한 볼셰비키 전통은 과거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유효하다. 그리고 제 4 인터내셔널의 창립문서인 [이행 강령]에 명시된 정치적 전통은 “노동계급 지도부의 위기”를 진보적인 방식으로 해결하려는 투쟁의 가장 중요한 무기로 지금까지 남아있다.   

 

<출전>

1. Leon Trotsky, "Letters to James Cannon," Writings of Leon Trotsky(1937-38)(New York: Pathfinder Press, 1976), p 317

2. Leon Trotsky, "The Twin Stars: Hitler-Stalin," Writings of Leon Trotsky(1939-40)(New York: Pathfinder Press, 1973), p 122

3. Herald Tribune(New York), 23 May 1943

4. Leon Trotsky, "Manifesto of the Fourth International on the Imperialist War and the Proletarian World Revolution," Writings of Leon Trotsky(1939-40)(New York: Pathfinder Press, 1973), p 184

5. Leon Trotsky, "The World Situation and Perspectives," Writings of Leon Trotsky(1939-40)(New York: Pathfinder Press, 1973), p 147

6. See: Gerard Dumenil and Dominique Levy, The Economics of the Profit Rate: Competition, Crises and Historical Tendencies in Capitalism (Brookfield, Vermont: Elgar Publishing Co.,1993); Fred Moseley, The Falling Rate of Profit in the Postwar United States Economy(London: Macmillan, 1991); Anwar Shaikh and Ahmet Tonak, Measuring the Wealth of Nations: The Political Economy of National Account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4); Murray E.S. Smith, Invisible Leviathan (Toronto: University of Toronto Press, 1994); Union for Radical Political Economics, Empirical Work in Marxian Crisis Theory, special double issue of Review of Radical Political Economics, Vol.18 Nos.1-2, 1986; Michael J. Webber and David L. Rigby, The Golden Age Illusion: Rethinking Postwar Capitalism (New York: Guildford Press, 1996)

7. Karl Marx, Capital, Vol.3 (London: Penguin Books, 1981), p 353

8. Globe and Mail Magazine (Toronto), May 1993 

9. Leon Trotsky, "Open Letter for the Fourth International," Writings of Leon Trotsky (1935-36) (New York: Pathfinder Press, 1977), p 27

10. Leon Trotsky, "Once Again, Whither France?" Leon Trotsky on France (New York: Monad Press, 1979), p 79

11. Leon Trotsky, "Manifesto of the Fourth International on the Imperialist War and the Proletarian World Revolution," Writings of Leon Trotsky (1939-40) (New York: Pathfinder Press, 1973), pp 217-218

12. Ibid., pp 216-217

13. Leon Trotsky, The Transitional Program, see p 37

14. Ibid., see pp 38-39

15. Leon Trotsky, "The Political Backwardness of the American Workers," The Transitional Program for Socialist Revolution (New York: Pathfinder Press, 1974), p 129

16. Leon Trotsky, "A Summary of Transitional Demands," The Transitional Program for Socialist Revolution (New York: Pathfinder Press, 1974), p 232

17. Ibid., p 235

18. Ibid., pp 235-236

19. Leon Trotsky, "On the Question of Workers' Self-Defense," Writings of Leon Trotsky (1939-40) (New York: Pathfinder Press, 1973), p 103

20. Writings of Leon Trotsky (1937-38) (New York: Pathfinder Press, 1976), note 290, p 488

21. Leon Trotsky, "The Political Backwardness of the American Workers," The Transitional Program for Socialist Revolution (New York: Pathfinder Press, 1974), p 129

22. Karl Marx and Frederick Engels, “Manifesto of the Communist Party," Karl Marx and Frederick Engels Selected Works in One Volume (New York: International Publishers, 1969), p 52

23. Leon Trotsky, "Ninety Years of the Communist Manifesto," Writings of Leon Trotsky (1937-38) (New York: Pathfinder Press, 1976), pp 23-24

24. Rosa Luxemburg, "Speech to the Founding Convention of the German Communist Party," Rosa Luxemburg Speaks (New York: Pathfinder Press, 1970), p 405

25. Ibid., pp 407-408

26. Ibid., p 408

27. Ibid., p 413

28. Karl Marx, "The Civil War in France," Karl Marx and Frederick Engels

Selected Works in One Volume (New York: International Publishers, 1969), p 288

29. Ibid., p 294

30. Leon Trotsky, "Workers Control of Production," The Struggle Against Fascism in Germany (New York: Pathfinder Press, 1971), p 80

31. Ibid., p 78

32. Ibid., p 81

33. Ibid., p 82

34. Leon Trotsky, "What Next? Vital Questions for the German Proletariat," The Struggle Against Fascism in Germany (New York: Pathfinder Press, 1971), pp 241-242

35. Vladimir I. Lenin, "The Impending Catastrophe and How to Combat It," V.I. Lenin Selected Works in Three Volumes (Moscow: Progress Publishers, 1970), Vol.2 pp 241-242

36. Ibid., p 246

37. Ibid., p 266

38. "The International Left Opposition, Its Tasks and Methods," Documents of the Fourth International (New York: Pathfinder Press, 1973), p 23

39. Ibid., p 24

40. Leon Trotsky, "A Program of Action for France," Writings of Leon Trotsky (1934-35) (New York: Pathfinder Press, 1971), pp 21-32

41. Alexis Bardin is mentioned by Jean Heijenoort in his book With Trotsky in Exile (Harvard University Press, 1978), p 74

42. Leon Trotsky, "From the CGT's Plan to the Conquest of Power," Writings of Leon Trotsky (1934-35) (New York: Pathfinder Press, 1971), p 223

43. Leon Trotsky, "How to Fight for a Labor Party in the U.S.," The Transitional Program for Socialist Revolution (New York: Pathfinder Press, 1974), pp 120-121

44. Ibid., pp 121-122

45. Leon Trotsky, "The Political Backwardness of the American Workers," The Transitional Program for Socialist Revolution (New York: Pathfinder Press, 1974), pp 127-128

46. Ibid., pp 128-129

47. Leon Trotsky, "Completing the Program and Putting It to Work," The Transitional Program for Socialist Revolution (New York: Pathfinder Press, 1974), p 138

48. Ibid., p 138

49. Leon Trotsky, "The Transitional Program, see p 38

50. Ibid., see p 39

51. Ibid., see p 50

52. Ibid., see p 58

53. Ibid., see p 40

54. Ibid., see p 62

55. Issac Deutscher, The Prophet Outcast (New York: Vintage Books, 1965), pp 425-426

56. Duncan Hallas, Trotsky's Marxism (London: Bookmarks, 1979), pp 96-97

57. Ibid., p 104

58. International Socialism No.60, July 1973

59. International Socialism No.40, October/November 1969

60. Tony Cliff, Trotsky: The Darker the Night the Brighter the Star (London: Bookmarks, 1993), p 300

61. Ibid., p 300

62. Alex Callinicos, Trotskyism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90), p 40

63. Leon Trotsky, "Completing the Program and Putting It to Work," The Transitional Program for Socialist Revolution (New York: Pathfinder Press, 1974), p 145

64. Socialist Worker, 11 September 1969

65. Socialist Worker Review, September 1988

66. Leon Trotsky, "The Political Backwardness of the American Workers," The Transitional Program for Socialist Revolution (New York: Pathfinder Press, 1974), pp 126-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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