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연락처 :
bolle1917@gmail.com

* 원출처 – 국제볼셰비키그룹(IBT)


혁명 정당의 건설과 공동전선 전술


  2014년 4월 수정


<차례>

 

서문

 

제1장 노동계급 전체를 포괄하는 정당

제2인터내셔널 / 레닌주의 이전의 레닌

 

제2장 볼셰비키 정당

비혁명적 의식의 유지 / 레닌주의 전위당 / 우리 시대의 레닌주의

 

제3장 개량주의 정당과 공동전선

부르주아 노동자당 / 코민테른의 공동전선 / 청산주의와 중도주의 / 공동전선에 대한 버넘의 견해 /

공동전선에서 조직의 독립성 유지 / 정치적 명확성을 위한 전제조건 / 공동전선의 종결

 

제4장 공동전선 전술의 변종들과 왜곡된 형태들

아래로부터의 공동전선 / 사회주의를 위한 공동전선? / "전략적 공동전선" / 공동전선의 역할을 하는 대중조직들 /

비판적지지 전술 / 입당전술

 

제5장 인민전선

인민전선 이전의 인민전선들 / 트로츠키주의와 인민전선 / 정부 구성과 무관한 인민전선들 /

부르주아 세력과의 공동행동

 

제6장 혁명 중핵의 건설

 



서문


소규모 혁명그룹은 활동 초기부터 어려운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다른 정치 세력들과 다양한 종류의 연합을 체결할 것인가 말것인가? 그리고 연합을 체결할 경우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체결해야 하는가? 이 글은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우리에게 귀중한 교훈들을 제공할 혁명운동의 경험들을 검토할 것이다.


혁명정당은 노동계급의 가장 높은 정치의식, 노동계급이 일상적으로 제기하는 요구들 그리고 이러한 요구들이 달성될 수 있는 다양한 투쟁방식들을 체현하는 조직이어야 한다. 노동계급의 과거 정치투쟁 경험 그리고 이러한 투쟁들과 관련된 강령적, 전략적, 전술적 논쟁들을 올바로 이해하는 일은 사회주의의 전진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 러시아 혁명의 성공 후 6여년 간 레닌과 트로츠키의 지도 하에 수행된 제3인터내셔널 건설 투쟁은 귀중한 교훈들을 남겨 놓았다. 그리고 1930년대 제4인터내셔널 건설 투쟁도 역시 우리에게 아주 필요한 교훈들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과거 교훈들을 깊이 이해하고 있는 노동계급의 혁명정당이 없이는 노동계급의 사회주의 혁명은 불가능하다.


문제는 한다발의 규칙들을 배우는 데에 있지 않다. 모든 새로운 상황은 과거의 특정 상황과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과거의 정식들을 단순히 반복하는 데에 있지 않다. 행동에 나설 때에는 언제나 다양한 선택의 길이 우리 앞에 놓여있다. 이 많은 길들 중에서 올바른 길 하나를 선택하기 위해서 우리는 과거 세계노동계급 투쟁의 경험들을 배워야 한다. 혁명 선배들의 경험을 제대로 배울 경우 허다한 함정들을 피할 수 있다.


그렇다고 문제가 단순히 원전을 인용하는 데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과거 혁명운동의 지도자들이 남긴 말들은 오류가 전혀 없어서 그저 암송만 하면 되는 그런 경전이 아니다. 다만 이들의 말은 좀처럼 어리석은 법이 없다. 우리는 레닌, 트로츠키를 비롯하여 혁명 지도자들의 견해들을 당시의 역사적 맥락을 통해서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 팜플렛은 무엇보다도 동지들이 혁명운동의 찬란하고 힘찬 역사를 깊이 이해하고 혁명전통을 계승할 것을 촉구하는 의미에서 쓰여진 것이다.

 

 

제1장 노동계급 전체를 포괄하는 정당

 

노동계급 대중의 의식은 비혁명적 개량주의적 부르주아적 또는 그 밖의 즉자적 계급의식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보통이다. 이들을 혁명을 달성하는 데 필요한 대자적 계급의식으로 변화시키는 것, 이것이 맑스주의 정치의 핵심이 되어왔다. 종교, 술, 가족 등 단순히 자본주의 하에서 일상생활이 영위되는 방식들을 통해 노동계급의 비혁명적 의식이 유지된다. 맑스주의자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맑스주의자들은 사회주의 혁명이 노동계급의 객관적인 이해에 부합된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러나 초기의 맑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가 발전하여 일정 시점에 도달하면 노동계급의 비혁명적 의식을 조장하는 방식들이 필연적으로 한계를 드러낼 것이라고 믿었다.


레닌이 볼셰비키당을 건설하기 이전의 맑스주의자들은 대중이 노동자로 전환되는 과정이 아직 완료되지 않았기 때문에 부르주아적 의식이 여전히 대중을 사로잡고 있다고 믿었다. 많은 수의 노동자들은 농촌에서 도시로 이전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농민의 특성을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 이들 중 일부는 도시에서 돈을 제대로 벌지 못하면 다시 농촌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그리고 최소한 농촌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 믿는 노동자들도 있었다. 그리고 어떤 노동자들은 부업을 가지기도 했다. 이들은 시간제 노동, 소규모 상거래, 소규모 생산 등으로 부족한 노동자 봉급을 보충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일부 노동자들은 대체로 독립 수공업자의 생활을 영위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자본주의가 좀더 진전되면 노동계급도 따라서 완전한 노동자로 변할 것이므로 대중의 비혁명적 의식을 조장하는 물질적 기초가 사라질 것이라고 당시 맑스주의자들은 믿고 있었다.


그렇다고 레닌 이전의 맑스주의자들이 대중의 비혁명적 의식이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라 자동적으로 극복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물론 아니었다. 다만 맑스주의자의 작업이 더 수월해질 것이라고 본 것은 사실이었다. 이때가 되면 노동자 정당이라는 매개를 통해 대중의 비혁명적 의식이 과학적이며 혁명적인 의식으로 변화할 것이라고 이들은 기대하였다.

 

제2인터내셔널

제1인터내셔널과 제2인터내셔널 시기의 맑스주의자들은 혁명적 맑스주의 정당이 따로 존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따라서 노동운동 내의 모든 정치 경향들을 통합한 당을 건설하는 것이 이들의 목적이었다. 부르주아 계급의 정당들에 대항하여 노동계급의 모든 정치세력들을 통합하는 노동계급 전체의 단일정당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레닌 이전의 당강령은 일종의 상설 소비에트나 노동계급 전체의 상설 공동전선에 해당되는 정당의 건설을 주창했다. 결국 개량주의자, 기회주의자, 공상적 사회주의자 등이 모두 이 정당을 통해 포괄되어야 한다고 이들은 보았다.


맑스와 그의 후계자들은 프루동, 바쿠닌, 라쌀레, 베른슈타인 등과 같은 인물들이 주도하는 정치 세력들과 중요한 문제들을 놓고 논쟁하였다. 그러나 이런 비맑스주의 정치 경향들이 노동계급에 기반한 정치세력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노동계급의 미성숙 즉 노동계급의 일부가 수공업자나 농민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는 현실이 이들 다양한 정치 세력을 낳았다고 생각되었다. 즉 이들에게 비맑스주의적 정치세력들은 노동계급의 후진성을 반영하고 있을 뿐이었다.


자본주의의 발전을 통해 노동계급이 성장하고 집중되면 자본주의 이전의 상황이 해소될 것이며 노동계급의 후진성을 반영하는 이데올로기적 표현들 역시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노동계급과 노동계급 정당은 혁명적 전망을 갖게 될 것이었다.


따라서 이런 상황이 도래할 때까지 노동계급 내부에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대변하는 비혁명적 정치 경향들은 단일하고 거대한 노동계급 전체의 정당 속에 포괄되어야 했다. 이들 경향들과의 정치논쟁은 계급의식의 발전을 순탄하게 하는 데 필요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맑스주의자들은 혁명적 계급의식이 어쨋거나 반드시 증진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레닌주의 이전의 레닌

레닌이 이러한 노동계급 단일정당 이론과 단절하고 전위당 이론을 발전시킨 과정은 긴 시간을 요했다. 1901년에 완성된 [무엇을 할 것인가]는 이 주제와 관련된 첫 저작이었으나 최종적인 결론을 내린 저작은 아니었다. 이 저작은 멘셰비키와 볼셰비키가 분열하기 이전에 지도적 멘셰비키들과 공동으로 내놓은 결과였다. 그리고 지도적 독일 맑스주의자들의 논쟁에 크게 의존했다. 레닌은 이때만 해도 당시의 맑스주의자들과 같이 평범한 사회민주주의자에 지나지 않았다.


[무엇을 할 것인가]는 제2인터내셔널 내에서 레닌을 좌파로 인식시킨 저작으로 레닌주의를 표방하는 첫걸음에 지나지 않았다. 이 저작은 당의 개입이 없이도 노동대중이 객관적 역사발전을 통해 맑스주의적 의식을 발전시킬 수 있다는 사고를 거부하고 전위당의 개입만이 노동대중의 혁명의식화에 진정한 기여를 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데올로기의 중요성을 과대평가한다'거나 의식적인 요소의 역할을 과장한다는 식으로 떠드는 자들은 노동운동이 스스로 자신의 독립적인 이데올로기를 개발할 수 있다고 상상한다. 노동자들이 `지도자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기만 한다면' 이런 일은 곧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크게 잘못되었다. (…) 노동계급은 운동과정에서 스스로 독립적인 이데올로기를 가질 수 없다. 따라서 유일한 선택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아니면 사회주의 이데올로기 둘 가운데 하나이다. (…) 그러나 노동계급 운동의 자연발생적인 발전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굴복할 수밖에 없다. (…) 따라서 사회민주주의자의 과업은 대중의 자연발생적 즉 부르주아적 의식에 대해서 투쟁하고 자연발생적인 노동조합운동이 부르주아계급에 자신을 복속시키려는 경향으로부터 사회민주주의의 품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이다."--- 레닌, [무엇을 할 것인가]


 

그러나 [무엇을 할 것인가]의 논지는 노동계급의 모든 정치경향들을 하나로 통합한 단일한 노동계급 정당으로부터 정치적으로 분립하여 강령에 기반한 전위당을 건설하자는 것이 아니었다. 이 저작은 단순히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RSDLP)을 철저히 통제하고 전문화하며 정치적 수준을 높이자는 주장을 했을 뿐이었다. 당시 레닌은 사회민주노동당이 여전히 모든 경향들을 포괄하는 정당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노동운동 내의 모든 정치 경향들과 협력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레닌이 판단한 경우가 자주 있었다. 그리고 겉으로 보기에는 단일한 정당인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내의 볼셰비키 분파는 조직적으로 멘셰비키와 분립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볼셰비즘은 1903년 멘셰비즘에 대항하는 정치투쟁을 통해 자신을 명확히 정립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정치투쟁의 사안은 직업혁명가들만이 모인 당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여러차례에 걸친 당의 분열이 1914년까지 진행되었지만 레닌은 멘셰비키들이 노동계급의 일원이 아니거나 당 전체의 결정사항들을 위반했다는 식으로 멘셰비키와의 분립을 정당화했을 뿐이었다. 따라서 이 시기 레닌은 여전히 노동계급 전체의 단일한 정당 이론에 머물러 있었다.


이 당시 레닌은 노동계급 단일정당 내 좌파의 대표자였다. 그가 당원의 규율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사고는 나중에 그가 제3인터내셔널을 창건했을 당시보다 훨씬 느슨했다. 규율에 입각한 당의 통일은 정치활동을 올바로 수행하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생각으로 당원은 공개적으로 당이나 당의 강령을 비판할 권리가 있었다. 당시 그가 작성한 짧은 팜플렛의 제목은 "비판의 자유와 행동의 통일"이었다. 이 제목은 그의 입장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후 완성된 수준에 도달한 레닌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이 정식은 제3인터내셔널의 혁명정당보다는 노동계급 내 각기 다른 경향들이 한데 모인 공동전선 조직에게나 적합한 내용이었다.

 

 

제2장 볼셰비키 정당

 

레닌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나서야 공개적으로 노동계급운동 내에서 강령에 입각한 조직의 분립을 주장하였다.


맑스주의 강령, 제2인터내셔널의 온갖 선언문들, 노동계급의 기본적인 요구 등과 완전히 반대로 각국에 존재하던 노동계급 단일정당들이 전쟁에서 자국 부르주아 계급을 지지했을 때 레닌을 비롯한 볼셰비키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조국의 방어" 구호 하에 제2인터내셔널의 지부인 각국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노동자들이 자기나라 부르주아 계급의 이익을 위해서 다른 나라 노동자를 죽이고 자신들도 죽으라고 부추겼다.


이 결과 볼셰비키들은 노동계급 단일정당에서 떨어져 나와 새로운 정당과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창건할 것을 촉구하였다.


"세계대전이 초래한 위기는 모든 허식, 관례 등을 다 부수고 이미 오래 전부터 곪을대로 곪아 신체 내부에 쌓여있던 고름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부르주아 계급의 진정한 동맹자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기회주의 세력들을 만천하에 폭로하였다. 따라서 노동자 정당으로부터 이러한 요소들을 조직적으로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 시급한 임무가 되었다. 제국주의 시기를 맞고 있는 지금 단일한 노동자정당 내에 혁명적 노동자 전위당과 노동계급의 귀족인 쁘띠부르주아 세력이 공존하는 것을 허용할 수 없다. 기회주의 세력은 자국의 "강대국" 지위로부터 나오는 알량한 특전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고 있다. "극단"을 피하고자 애쓰는 노동자 단일정당 내에 기회주의가 "정당한 하나의 조류"라고 주장하는 낡은 이론은 이제 노동자를 대대적으로 속이는 술책이며 노동계급 운동에 거대한 장애물이 되었다."--- 레닌, [제2인터내셔널의 붕괴], 1915년 6월


 

제2인터내셔널 산하 각국의 정당들이 강령적으로 퇴보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들이 제국주의 전쟁을 지지하는 것에서 명확히 드러났다. 그러나 노동자 정당의 혁명적 좌파가 단순히 이들 정당들의 강령적 퇴보를 증명하는 것만으로는 조직 분립을 이론적으로 정당화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맑스주의자는 노동자 정당이 불가피하게 계급의 후진성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노동계급의 후진성이나 퇴보가 혁명적 맑스주의 의식을 노동계급과 당이 획득하는 과정을 방해하는 새로운 메카니즘의 표현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필요했다.

 

비혁명적 의식의 유지

레닌의 제국주의론은 단일 노동자정당으로부터 혁명적 분파를 분립시키는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그는 지노비에프(Zinoviev)와 긴밀히 협력하여 제국주의 단계의 세계자본주의를 분석하였다. 이 결과 노동계급 전체의 객관적 혁명 전망을 파괴하는 메커니즘이 해명되었다. 식민지 착취-억압의 결과 발생하는 초과 이윤의 일부가 제국주의 국가 노동계급의 상층에게 전달되면서 노동계급 내에 상당한 특권을 누리는 귀족층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이 노동계급 귀족의 중요한 부위가 바로 노동관료들로서 노동계급 대중을 조직기반으로 하고 있는 노동조합과 개량주의 정당들의 관료층이다.


이렇게 레닌은 제국주의의 등장과 함께 개량주의가 노동계급 내부에 물질적 기반을 확보한 현상을 보여주었다. 이제 개량주의는 노동계급을 도매금으로 부르주아 계급에게 팔아넘기고 계급협조를 도모하는 독특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 혁명적 사회주의 의식이 불가피하게 획득될 수밖에 없다는 기본 전제가 이제 무의미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리고 사회민주주의적 개량주의 지도부가 혁명의식의 발전을 근본적으로 방해하는 장애물이라는 사실이 이제 드러났다.


그러나 레닌과 지노비에프의 이러한 분석은 노동귀족과 노조관료들의 특권이 직접적으로 그리고 노골적으로 노동계급 내부에 비혁명적 또는 부르주아적 의식을 주입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다만 노동계급이 자본주의의 발전과 함께 수가 증가하고 집중되는 경향을 보이지만 이들 내부에 비혁명적 의식을 조장하고 유지하는 거대한 사회적 기반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였을 뿐이었다. 제국주의 이론을 통해 비혁명적 의식이 창출되고 유지되는 메커니즘 전체를 해명했다고 레닌과 지노비에프가 허세를 부린 것은 아니었다.


노동계급의 혁명적 전위당은 부르주아 계급이 노동계급에게 이데올로기적인 지배를 행사하기 위해서 동원하는 온갖 다양한 수단들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대중매체, 스포츠, 연예, 종교, 전쟁, 정치적 지도력, 핵가족의 성격과 발전, 인종주의, 성차별, 일상생활의 압력 등이 바로 이러한 역할을 수행하는 수단들이다. 제국주의 시대의 노동귀족 계층에 대한 이론은 이런 측면들을 어느 하나도 경시하지 않는다. 다만 자본주의가 계속 발전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노동계급에게 성공적으로 주입되는 사회적 물질적 기초를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 이론은 혁명적 의식을 대중에서 증진시키기 위해 조직적인 투쟁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레닌주의 전위당

노동계급의 모든 정치 경향들을 포괄해야 한다는 정당 이론을 기각시킨 것은 바로 제국주의 체제의 발전이었다. 제국주의 체제의 성장으로 인해 노동계급의 온갖 정치 조류들을 포괄해서는 투쟁이 올바르게 진행될 수 없었다. 자본주의의 개조를 주장하는 개량주의 경향은 노동계급 대중정당의 대세가 되었다. 그리고 이 대세에 대항하기 위해서 의식적이고 치밀하게 조직된 투쟁을 통하여 명확한 혁명적 강령을 쟁취해야 했다. 결국 개량주의에 대한 투쟁은 노동계급 내부에 새로운 유형의 정당을 창설하는 것을 통해서만 가능하게 되었다. 이 정당은 새로운 조직구조와 규율을 가지고 새로운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명확하고 일관된 혁명적 사회주의 강령에 기초한 레닌주의 전위당은 노동계급 대중과 비혁명적 대중정당들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 오직 이러한 분리를 통해서만 혁명적 강령을 위해 투쟁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후 독일 파시즘에 대한 투쟁 방식에 대해 논쟁하면서 트로츠키는 전위당의 필요성을 이렇게 설명하였다:


"노동계급의 이해는 강령을 통해서만 정식화될 수 있다. 그리고 당을 건설하는 것을 통해서만 이 강령은 옹호될 수 있다. (…) 노동계급은 그 자체로만 보면 착취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즉자적 계급이 대자적인 정치적 계급으로 변모될 때에만 노동계급은 독자적인 역사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이러한 변모는 당이라는 매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당은 노동계급이 계급의식을 획득하는 역사적인 기관이다. `노동계급 대중이 당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다'는 주장은 즉자적 노동계급이 계급의식을 획득하는 도정에 있는 대중보다 더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주장이 된다. 이 주장은 올바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반동적이다."--- 트로츠키, [다음에는 무엇이](What Next)


 

혁명적 의식과 전망을 획득하기 위해서 개량주의자들과 비타협적으로 투쟁하는 것을 통해서 노동계급은 부르주아 계급에 대항하여 단결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볼셰비키들은 멘셰비키들과 분열하여 새로운 당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이 투쟁은 [무엇을 할 것인가]의 논쟁이 이미 제시한 방법들을 일관되게 적용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제2인터내셔널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자본주의의 객관적인 발전을 통해 혁명이 저절로 도래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반면에 볼셰비키들에게는 의식의 발전이 핵심적이었다. 즉 혁명 정당의 존재와 대중의 혁명적 의식의 발전이 혁명 승리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가 되었다. 볼셰비키당의 역할은 다른 비혁명적 강령들에 대해 투쟁하는 것을 통해서 노동계급에게 혁명적 강령의 올바름을 확신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당의 성원이 당의 강령을 외부에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인정될 수 없다. 당의 성원들이 비판의 자유를 행사할 권리는 오직 당 내부에서만 가능하다. 이것이 레닌주의 민주집중제의 핵심적 내용이다.


그리고 당원들이 당의 혁명적 강령을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도 공개적으로 당의 강령을 비판하는 것은 허용될 수 없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당내에서 당강령에 대해서 완전하고 솔직하며 비판적인 논쟁이 가능한 수준에서 언제나 그리고 모든 단위조직 수준에서 전개될 필요가 있다.

 

우리 시대의 레닌주의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볼셰비키당은 짜르 전제주의의 러시아에서나 적당했다. 현대에 이런 유형의 정당은 시대착오이다." 그러나 레닌주의 이론의 객관적 근거인 제국주의의 발전과 노동귀족 및 노동관료층의 유지 및 발전은 레닌 당시 대단히 초보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레닌 이후 제국주의는 계속 발전하였고 이 결과 노동계급은 점점 더 복잡한 양상을 띄고 계층분화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노동계급 전체의 단결을 저해하는 요소들은 제국주의의 발전과 함께 더욱 다양하고 복합적으로 재생산되고 있다. 사회 내에서 특별한 역할을 수행하거나 특별한 기술을 획득한 노동계급의 일부 그리고 전문적인 훈련을 통해 노동을 수행하는 대중의 일부는 물질적으로 다른 노동 대중들에 비해 특권을 누리고 있다. 이 결과 당연하게 이들은 자신들이 노동계급 전체의 이해와 무관한 존재이며 자본주의 체제의 안정을 도모하는 것이 자신들의 이익에 부합된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다. 레닌 당시에 이미 존재했던 여성과 소수인종에 대한 초과착취는 이러한 특권 노동대중의 복잡한 발전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었다. 이 결과 제국주의 국가에서 노동계급의 사회적 비중은 레닌 당시 러시아의 경우보다 훨씬 커졌음에도 불구하고 노동계급의 점점 더 많은 부위들이 전문직업 엘리트주의, 페미니즘, 민족주의 등 비혁명적 의식에서 자신들의 이해를 찾고있다.


현재 자본주의의 발전으로 인해 노동대중이 혁명적 의식을 자동적으로 획득할 수 있는 가능성은 과거 어느 때보다 적다. 서서히 자연스럽게 노동대중이 자신의 정치적 이해를 이해하고 투쟁하는 경우는 없다. 따라서 볼셰비키 조직들이 여타 정치 경향들과 정치투쟁을 벌이는 것이 과거 어느 때보다 더 필요하다. 이 과정을 통해 혁명 조직은 비혁명 조직들에 대항하며 자신을 치밀하게 성장시킬 수 있다. 레닌 당시와 지금 구체적인 전술이 같을 수는 없다. 그러나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를 위해 레닌 당시보다 지금 레닌주의 정당은 더욱 필요하다.

 

 

제3장 개량주의 정당과 공동전선

 

노동계급 전체를 포괄한다고 자처하는 옛날 식 정당 즉 사회민주주의 노동자당이 아직도 많은 나라에 존재하고 있다. 문제는 이런 정당들의 정체이다. 레닌도 명확히 인식했듯이 이들 정당들은 노동계급의 혁명의식 획득, 대중 혁명정당 건설 그리고 혁명 그 자체에 가장 커다란 장애물이 되어 왔다. 그러나 어떤 장애물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 장애물의 성격을 이해하는 것이 먼저 필요하다.

 

부르주아 노동자당

비록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덜 그렇지만 이러한 정당들은 노동조합을 조직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하나의 계급으로 조직된 노동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많은 수의 노동자들은 이 정당이 부르주아 정당들로부터 자기의 이익을 지켜주는 노동자 대중정당이라고 은연 중에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공공연히 자본가계급을 대표하고 있는 부르주아 정당과 구별하여 이런 정당을 노동자 정당이라고 인정하고 이에 걸맞게 행동해야 한다. 그러나 이 정당은 평당원이 노동자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정치노선과 강령은 철저히 부르주아계급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다는 점에서 명백히 모순을 보이고 있는 정당이다. 그리고 이들 정당의 지도부는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상당한 정도의 특권을 누리고 있으며 노동계급의 귀족 특권층과도 긴밀하게 연결된 쁘띠부르주아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 정당은 계급을 초월해서 존재한다고 허세를 부렸던 과거 자유주의적 부르주아 정당들로부터 분립하면서 탄생하였다. 영국과 뉴질랜드의 자유당 그리고 미국의 민주당이 자유주의 부르주아 정당들로서 아직까지 살아남아 있다. 맑스주의자들은 부르주아 노동자당의 분립을 지지하였다. 노동계급의 정치투쟁을 높은 수준에서 표현한 것으로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하나의 계급으로 노동자가 나름의 이해를 가지고 있다는 원칙 하에 노동조합이 조직되었다. 이 조직을 기반으로 성립한 노동자당의 등장은 맑스주의자들에게 역사적 진보로 받아들여졌다. 물론 이 정당이 노동계급의 이해가 정확히 무엇인지를 명확히 인식하거나 규정하지 않았다는 단점을 이들도 이해하고 있었다.


이 정당은 부르주아 정당들과는 어느 정도 독립된 정치영역을 차지하고 있다고 대체로 인식되었다. 이 정치영역에서 노동계급의 다양한 정치 경향들이 모여 부르주아 계급에 대항하는 주장을 하면서 서로 토론을 하고 이 과정에서 노동계급을 정치적으로 교육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서 노동계급은 점차 스스로 이러한 정치 경향들 사이에서 자신의 정치 지도집단을 선택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레닌의 노동관료 이론은 이러한 낡은 사고에 변화를 가져왔지만 이 사고를 완전히 불식시킨 것은 아니었다. 이제 이 정당이 혁명의 도구로서 변모될 수 없다는 점은 너무도 명백해졌다. 그러나 노동계급의 독자적 이해를 초보적으로나마 대표하고 있으므로 부르주아 정치영역을 어느 정도 침범한 성과를 담고 있다고 여전히 인정되었다.


이 노동자당들은 명백히 모순을 안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에 긴밀히 연결된 정치 강령과 지도부가 존재하는 한편, 계급투쟁을 확대하고 이 투쟁을 정치적으로 표현하는 노동계급 대중과 조직적 독립성 또한 존재한다.


이러한 모순은 미국의 민주당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민주당의 기반은 노동자 계급이 아니다. 어느 누구도 민주당이 노동계급의 이해를 대변한다고 믿지 않고 있으며 이 정당 역시 이것을 인정하고 있다. 우리는 민주당이 계급의 이해에 따라 분리될 경우 이 현상을 지지할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혁명적 계급투쟁이 자신의 강령을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이 결과 등장하는 노동자당이 부르주아 계급의 강령을 채택하더라도 노동계급의 이해에 봉사하려고 시도했다는 그 자체만 해도 출발치고는 괜찮은 셈이다.


그러나 출발을 그런대로 인정하더라도 노동계급의 진정한 역사적 이해는 일관된 계급정치를 통해 부르주아 노동자당을 산산조각내어 노동계급의 강령을 실현하는 데에 있다. 즉 이 정당의 기반인 노동대중이 쁘띠부르주아적인 지도부에 반기를 들고 공산주의 노동자당 건설 투쟁에 나설 때만 노동계급의 진정한 이해가 보장된다.

 

코민테른의 공동전선

1917년 러시아혁명은 계급투쟁의 새로운 시기를 열었다. 국제노동계급의 투쟁이 치열해지면서 노동운동 내부에는 제3인터내셔널의 강령만을 부분적으로 인정하는 움직임이 구체적으로 일어났다. 단지 몇 년에 불과하지만 혁명적 격동과 정치투쟁이 진행되면서 상당수의 노동자들이 사회민주주의 정당들로부터 이탈했다. 그리고 볼셰비키들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위한 투쟁을 통해 명확한 강령을 확립한 후 국제정당(인터내셔널)의 중핵들을 결집시켰다.


그러나 1920년대에 이르면 국제적으로 혁명투쟁의 파고가 상당히 가라앉아 버리게 된다. 혁명적 격동이 비교적 안정된 자본주의 체제에 다시 자리를 내어주자 사회민주주의 노동자당들이 세계노동운동의 헤게모니를 다시 장악하게 된다. 코민테른 제3차 대회에서 트로츠키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분석하였다:


"세계혁명, 노동계급의 정치권력 장악이라는 목표에 우리가 가까이 다가서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이제 처음으로 명백해졌다. 1919년 코민테른이 결성될 당시만 해도 우리는 `몇달만 지나면' 하고 스스로 다짐하였다. 이제 우리는 `어쩌면 수년이 걸려야 한다' 고 되뇌이고 있다."--- W. 앤그리스 [사산당한 혁명] 1963년에서 인용


 

이런 상황에서 부르주아 노동자당으로부터 이탈할 것을 대중에게 촉구하는 이전의 정책을 계속하더라도 혁명적 강령의 영향력이 더욱 증대될 가능성은 별로 크지 않았다.


이렇게 부르주아 질서가 상대적으로 안정되는 상황에서 레닌은 볼셰비키의 전술 지침서 [좌익 공산주의-소아병]를 1920년 6월에 출간했다. 레닌은 이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주요한 과업은 이미 달성되었다. 즉 노동계급의 전위당은 이미 수립되었다. 그러나 전위당만으로 정치권력 장악이라는 노동계급의 승리가 달성될 수는 없다."


 

이제 중요한 것은 사회민주주의 노동자당에 남아있는 노동자들을 전위당의 영향력 안으로 끌어들이는 일이었다.


노동계급 전체의 당이라는 제2인터내셔널의 강령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와 노동관료집단에 대항하여 혁명가들이 대중을 조직하는 데 거대한 장애물로 등장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하나의 이점은 있었다. 즉 혁명조직 바로 옆에 노동자 대중을 조직시켜 놓음으로써 이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수많은 기회를 제공했다는 사실이 바로 이것이었다.


혁명의 파도가 가라앉은 새로운 시기에 공산주의 전위당을 해체하지 않고 주어진 기회를 이용하여 부르주아 노동자당의 대중에게 침투하는 일이 이제 필요해졌다. 이 시기에 공동전선 전술이 개발되었다. 이 전술은 강령에 기반한 공산주의 전위당 건설 원칙을 보완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공동전선 전술은 혁명적 전위당을 청산하지 않고 비혁명적 노동자당의 노동대중에게 접근하는 방식 중의 하나이다.


또한 거의 같은 시기에 개발된 공동전선의 변종이 있다. 혁명정당이 선거시기에 부르주아 노동자당에게 보내는 비판적 지지(critical support) 전술과 이 당의 내부로 혁명정당의 분자들이 들어가는 입당(entrism) 전술이 이것이다.


그러나 제3인터내셔널은 단순히 노동자당을 분열시킨 후 당원을 획득해왔기 때문에 새로 개발된 이 전술들에 대해 상당한 오해와 반대가 나타났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이러한 전술이 혁명정당을 해소하는 기회주의 정책이라고 본 좌파 인사들이 이 전술들을 반대했다. [좌익 공산주의-소아병]은 코민테른 내부의 이들을 겨냥한 논쟁서였다. 이들은 사회민주주의 노동자당과 공동행동을 취하거나(공동전선), 선거시기에 이 정당에게 비판적 지지를 보내거나 공산주의 전위당의 강화를 위해 이들 정당에 명확한 원칙을 가지고 들어가는 일(입당 전술)을 반대했다.


[좌익 공산주의-소아병]에서 제기된 원칙들은 공동전선 전술과 관련하여 코민테른 제4차 대회의 토론과 결정을 통해 확대되고 새로 개발되었다.

 

청산주의와 중도주의

이후 공동전선 전술은 자칭 레닌주의자들을 포함하여 노동운동 우파진영에 의해 종종 오해되었으며 왜곡되어 왔다. 공동전선 전술의 오용은 볼셰비키당의 청산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제2인터내셔널처럼 노동계급 전체의 당으로 퇴보하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노동운동을 강령에 기반하여 분리시키려는 레닌주의 전략에 대해 허다한 편견과 반대압력이 있어왔다. 볼셰비즘은 언제나 인기가 없었다. 이 현상은 부르주아계급의 이해에 영합하는 자들이 볼셰비키의 정치적 패배를 원했기 때문에 다양한 통로를 통해 유지되어왔다.


그러나 레닌주의를 인기없게 만드는 메커니즘은 노동계급 운동 내부에도 존재하고 있다. 노동운동 내부의 개량주의 지도부는 자신들을 계급 배신자로 낙인찍는 볼셰비키들의 폭로활동을 밉게 보는 것이 당연했다. 더욱이 자본가들에 대항하는 노동자들의 초보적인 단결을 해치는 듯이 보이는 레닌주의 전략과 제2인터내셔널 정당에 대한 레닌주의자들의 경멸이 이들 개량주의 지도자들의 명성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은 뻔한 이치였다.


볼셰비키들은 말과 행동을 통해 자신들이 자본가에 대항하는 노동자들의 단결을 주창하고 있으며 이 단결을 해치는 자들은 바로 개량주의자들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드러내야 한다. 노동조합과 정부의 계약을 통해 그리고 인민전선과 부르주아 정부에 참여하는 것등을 통해서 개량주의자들은 실제로는 자본가들과의 단결을 도모한다. 궁극적으로 그리고 아주 직접적으로 이들은 노동자들의 단결을 해치는 자들이다.


부르주아 노동자당으로부터 정치적 조직적으로 분립하여 볼셰비키당을 건설하는 일은 노동계급의 진정한 단결 즉 혁명적 단결을 이루는 필요조건이다. 볼셰비키들은 정치적 분립이 아무리 인기가 없다고 하더라도 포기해서는 안되며 이러한 분립을 은근슬쩍 호도하거나 숨겨서도 안된다. 더욱이 이것을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치부해서는 안된다. 혁명정당과 개량주의정당 사이의 아주 중요한 차이점을 흐리는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


한편 중도주의는 개량주의와 혁명정치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불안정한 정치 경향이다. 중도주의자는 자신이 혁명가라고 자처한다. 주관적인 의지에 있어서는 완전히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들은 혁명을 주도하고 완수하는 정치와는 거리를 둔다. 이들은 이론을 경시하는 경향을 보이며 혼란된 이론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언제나 정치적 조직적 이익을 위해 편리한 길을 택한다. 또한 이들은 원칙, 정치적 명확성, 일관성 등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며 스스로를 "반종파주의자(anti- sectarian)"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혁명조직에게 기회를 제공한다. 혁명적 맑스주의로 획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중의 혁명의식화 작업을 가장 교묘한 방식으로 방해한다는 점에서 혁명을 가로막는 위험세력이기도 하다.


이들은 공동전선 전술 등 혁명 전술을 혁명정당과 개량주의정당 사이의 차이점을 모호하게 하는 데 이용해 먹는다. 이들은 선전활동이나 사회주의를 위해서 공동전선을 결성할 것을 촉구한다. 또는 부르주아 노동자당에 영구적으로 들어가거나 언제나 비판적 지지를 보낼 것을 촉구하기도 한다. 또는 자생적으로 폭발하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전투성을 새로운 혁명 전위세력으로 치켜세우기도 한다. 이들은 공동행동을 조직해야할 시점을 완벽하게 파악하는 장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비혁명적 동맹세력을 혁명적인 것으로 치켜 세운다는 점에서 위험한 세력이다.


이들은 정치투쟁이 "과도하게" 진행되는 것을 막아 보겠다는 경향을 드러낸다. 그리고 비혁명 세력이 혁명세력이 될 수 있다고 치장함으로써 혁명정당 건설투쟁을 말아먹는 행위를 자행한다. 또한 객관적인 대중투쟁의 파도가 혁명을 가지고 올 수 있다고 믿는 점에서 혁명정당의 의식적 역할을 무시하는 치명적인 위험을 가지고 있다.

 

공동전선에 대한 버넘의 견해

제임스 버넘(James Burnham)은 뛰어난 트로츠키주의 선전가로 1937년 당시 미국의 트로츠키주의 조직인 사회주의노동자당(Socialist Workers Party)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곧 혁명활동을 그만두기는 했지만 공동전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유용한 정의를 내리기도 했다:


"각기 다른 강령을 가진 둘 이상의 조직이 특정 사안에 대해서 공동행동에 합의하는 것을 공동전선이라고 한다. 이러한 합의에는 공동으로 견지해야할 강령의 문제는 전혀 제기되지 않는다. 공동전선에 참여하는 각 조직은 자신의 강령을 온전히 유지하고 이에 따라 선전활동을 전개한다. 그리고 공동전선에 참여하는 다른 조직들을 비판할 권리를 갖는다. 따라서 각 조직은 완전한 조직적 독립성을 유지한다. 바람직하다고 생각되는 행동을 다른 조직들과 공동으로 동시에 수행하는 것을 통해 공동전선은 가장 광범위한 단결을 이룰 수 있다. 강령이나 최종적 목표가 각기 다른 조직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특정 행동을 지지하기 때문에 공동전선은 존재한다. 예를 들어 정당방위, 파업지원, 시민권을 비롯한 민주적 권리의 탄압에 대한 저항, 법원 명령에 대한 불복종, 시위 조직 등의 사안에서 공동전선이 성립될 수 있다. 사회 위기가 더욱 격화된 상황에서는 노동자 민병대의 조직, 파시스트 깡패들에 대한 정당방위, 노동자 농민 병사 위원회의 구성 등과 같은 사안에서 공동전선이 형성되어야 한다. 이런 경우 공동전선은 가능할 뿐만 아니라 투쟁의 성공을 위해 반드시 수립되어야 한다. 공동전선을 통해서 가장 광범위한 세력이 결집될 수 있다. 동시에 대중은 자신들에게 지도력을 확보하고자 애쓰는 조직들의 사상과 투쟁방식을 비교하여 자신의 정치적 소속을 분명히 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제임스 버넘 [인민전선 : 새로운 배신], 1937년 파이어니어 출판사, 12 13쪽


 

공산주의자들은 공동전선을 노동계급 정치활동의 모든 문제에 대한 손쉬운 해답으로 또는 모든 경우에 제시할 원칙으로 바라본 적이 없다. 이것은 무슨 대단한 전략은 아니다. 단순히 혁명정당이 간간이 사용할 수 있는 전술에 지나지 않는다. 자본주의의 맹공에 대중이 맞서거나 공세를 취할 때 단결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무기인 셈이다. 공동전선은 노동계급의 기본 이익을 옹호하기 위해 때때로 반드시 필요한 전술이 된다. 그리고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노동계급의 기본 이익을 옹호한다. 그러나 공동전선만으로 사회주의를 쟁취할 수는 없다.

 

공동전선에서 조직의 독립성 유지

공동전선에 참여하는 혁명조직은 언제나 독립성을 유지하며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선전할 능력을 가져야 한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이 점을 강조하였다:


"공동행동에 필요한 규율을 받아들이면서도 공산주의자는 동시에 공동전선이 이루어지기 이전과 이후 그리고 실제 과정에서 하나의 예외도 두지 않고 공동전선에 참여하는 모든 노동운동 조직들의 정치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공표할 권리와 기회를 보유해야 한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공동전선에 대한 테제], 1921년 12월, 제4차 대회에서 채택됨


 

공동전선 투쟁이 진행되는 동안 혁명정당은 직접적으로 또는 노골적으로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전술적 유연성을 발휘하여 혁명적 사회주의 사상을 투쟁하는 대중에게 설명한다. 플래카드, 전단, 구호 등을 통해 혁명정당은 공동전선의 합의된 요구사항들을 알릴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혁명 투쟁을 촉진시키는 다른 요구들도 널리 알린다. 공동전선의 요구들을 혁명적 행동과 의식으로 나아가게 하는 이행 요구들로 보완하는 것이 공산주의자들이 공동전선에 참여하는 목적인 셈이다.


공동전선의 요구들이 아주 기본적이거나 수세적인 성격에 머무는 경우에도 혁명조직은 역관계에 따라 비사회주의자들에게 사회주의적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다. 실업문제에 대한 공동전선의 요구가 "모든 사람에게 직장을 갖게 하라" 정도에 그칠지라도 혁명정당은 "40시간 노동임금에 30시간 노동을", "전투적 파업으로 감원선풍에 저항하자", "해고에 반대하는 방어선을 구축하자", "수입억제책을 반대한다", "노동조합 관료들을 몰아내자", "노동자에 의한 생산의 통제를 통해 산업을 자본가들의 손에서 몰수하자", "기업의 회계장부를 공개하라" 등의 구호가 담긴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에 참여할 수 있다. 전단과 토론은 공동전선의 요구들이 어떻게 달성될 것이며 또한 사회주의 혁명 투쟁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정치적 명확성을 위한 전제조건

공동전선 및 이와 유사한 전술들이 당시 코민테른에게 유효한 전술이 될 수 있었던 이유가 있었다. 러시아혁명의 성공, 구 사회민주주의 정당들로부터 대중의 이탈, 혁명의 파고가 높았던 시기의 투쟁을 통해 축적되었던 이데올로기적 명확성 등 탄탄한 정치적 자산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전술들은 운용될 수 있었다. 공동전선 전술을 운용하기 위해서는 정치적으로 응집된 혁명조직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코민테른 지도부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공동전선 전술이 사회주의의 대의를 전진시킬 수 있기 위해서는 이 전술을 운용하는 공산당이 강력하고 단결되어 있으며 이론적으로 명확한 지도부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 코민테른 [공동전선에 대한 테제]


 

이로부터 10년 후 독일 파시즘에 대한 투쟁을 벌이고 있을 때 트로츠키는 위와 같은 생각을 이렇게 피력하였다:


"그러나 공동전선 정책은 나름의 위험을 안고 있다. 경험이 있으며 시련을 거친 혁명정당만이 이 정책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 트로츠키, [다음에는 무엇이], 1971년 패스파인더 출판사, 200쪽


 

 

공동전선의 종결

공동전선 투쟁의 말미에 개량주의자들은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요구들을 배반하게 마련이다. 이 상황에서 혁명가들은 될 수 있으면 이 배신이 노동계급의 이해를 해치지 않도록 모든 조치를 취함과 동시에 이 배신행위를 최대한 폭로해야 한다.


혁명정당이 공동전선에 참여하는 목적은 비혁명적 지도부로부터 대중을 분리시키기 위한 것이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혁명정당은 빈번하게 노동계급 대중에게 비혁명적 지도부로부터 이탈하고 혁명정당에 가입하라고 촉구해야 한다. 따라서 어떤 경우에는 공동행동이 끝나기도 전에 공동전선에서 퇴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 공동전선을 언제 결성하고 끝내며 얼마나 오래 공동전선을 유지할 것인가는 혁명적 전술에 있어서 가장 민감하면서도 중요한 문제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규칙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20세기 계급투쟁의 역사에 대한 깊은 이해와 현실감각이 반드시 도움을 줄 것이다.


레닌이 죽은 후 영국과 체결한 코민테른의 공동전선 전술은 1925년 5월 러시아와 영국 노조지도자들 간에 체결된 합의에 기초하고 있었다. 이 합의는 영국 노조관료들을 좌파의 경향으로 묶어두고 소련을 방어한다는 의미에서 처음에는 원칙에 입각한 전술이었다.


그러나 이로부터 1년후 영국의 노동계급은 총파업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리고 공동전선에 합의했던 영국 노조관료들은 총파업을 배신하면서 총파업이 혁명으로 발전하는 것을 막았다. 대중에 대한 이들의 권위는 많은 부분 러시아 공산당 대표들과 체결한 합의에 의존하고 있었다.


총파업과 혁명 직전까지 육박한 치열한 계급투쟁의 시기에 영국의 개량주의 노조관료들이 자본주의 체제를 방어하려고 뒷걸음치는 것은 불가피했다. 이런 상황에서 코민테른은 단호하게 영국의 개량주의 파트너들과 협약을 파기하여 총파업이 혁명으로 나아가도록 조치를 취해야 했다. 왜냐하면 이 조치가 총파업의 승리와 혁명투쟁의 개시에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코민테른 지도자들은 1926년 총파업을 자본가 계급에게 팔아넘기고 있던 이들 개량주의 파트너들과 공동전선을 계속 유지하여 이들 계급배신자들에게 러시아 10월 혁명의 권위를 그대로 빌려주었다. 이 오류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지금 훨씬 더 나은 세계에 살고 있을 것이다.


이 사건은 공동전선 전술이 그 효용성을 상실한 후에도 계속 지속되어 재앙적인 결과를 가져온 역사적인 경우에 속한다. 이때 이후 코민테른의 최상 분자들은 혁명으로부터 퇴보하여 결국 세계트로츠키주의 운동을 탄생하게 만들었다. 1936년 미국 뉴욕의 파이오니어 출판사가 간행한 트로츠키의 저작 [레닌 이후의 제3인터내셔널](Third International After Lenin) 126쪽 이하에는 이 사건에 대한 분석이 상세히 실려 있다.

 

 

제4장 공동전선 전술의 변종들과 왜곡된 형태들

 

쉽게 예상할 수 있듯이 부르주아 노동자당 지도부는 코민테른의 공동전선 제안에 대해서 일관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공동전선 전술의 근본적인 목적은 개량주의 지도부의 성격을 폭로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들이 코민테른의 공동전선 제안을 거부하는 것만도 나름의 성과가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노동계급의 단결에 장애물이 되는 것은 바로 이들 개량주의 지도부라는 점을 확실히 대중들의 뇌리에 각인시킬 다른 전술들이 개발되었다.

 

아래로부터의 공동전선

개량주의 지도부가 공동전선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그리고 반복하여 계속 오래 선언하자 이 전술은 확대되었다. 즉 개량주의 지도부를 무시하고 "아래로부터의 공동전선"에 참여할 것을 대중에게 직접 촉구하는 전술이 개발되었다.


물론 이 전술은 엄격히 말하면 공동전선 전술이 아니다. 직접 대중에게 개량주의 지도부로부터 이탈하라고 촉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전술은 진짜 공동전선 전술만큼 효과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특정 상황에서는 매우 유용한 전술이 될 수 있다.


스탈린이 정권을 장악한 이후 1924년부터 코민테른 지도부도 혁명으로부터 급속히 퇴보하였다. 이에 따라 코민테른의 조직활동 목표가 완전히 바뀌었다. 세계혁명에 대한 지도를 완전히 포기하고코민테른은 러시아 관료지배층의 대외정책을 돕기 위해서 자본주의 세계 각 나라에 노동자 압력집단을 수립하고 이 조직을 조종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일국사회주의(socialism in one country)" 이론이 이 국제조직의 활동을 지배하였다. 부르주아 노동자당을 분열시키는 전술은 더 이상 필요없게 되었으며 모든 레닌주의 전술들은 원래의 목적과는 전혀 다른 용도로 쓰이게 되었다.


1924년 중반에 열린 코민테른 제5차 대회에서 아래로부터의 공동전선은 가장 중심적인 전술로 격상되었다. 즉 "코민테른 지도 하에 수행되는 국제공동전선을 위한 투쟁"이 이것의 이름이었다. 이제 개량주의 지도부를 추종하는 노동자들에게 다가가는 공동전선 전술의 원래 목적은 완전히 정반대로 변했다. 이 전술은 대중을 외면하는 정책이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코민테른이 명명한 제3기(Third Period, 1928 1934) 동안에는 아래로부터의 공동전선이라는 미명 하에 대중에게 공산당의 지도를 받아들이라는 촉구가 더욱 그 도를 더해갔다. 이제 부르주아 노동자당은 "사회주의 파시스트"로 불리었고 이 정당에 속한 노동자들은 "파시즘 반대 공동전선"에 합류할 것을 종용받았다. 물론 이런 식의 전술은 그리 효과적일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 나찌들을 막을 수 있는 효과적인 공동전선이 건설될 수 없었다. 아래로부터의 공동전선은 결국 공동전선을 회피하는 수단이 되었으며 스탈린이 장악한 코민테른이 히틀러의 집권을 허용하는 수단으로 전락했다.

 

사회주의를 위한 공동전선?

혁명조직이 비혁명 대중과 같이 투쟁하면서 이들에게 말과 행동으로 혁명적 강령의 유효성을 확신시키는 데에 공동전선의 목적이 있다. 비혁명 대중과 투쟁해야 하기 때문에 공동전선의 요구들은 비혁명적 요구들이다. 공동행동을 위해서 개량주의자들에게 접근하는 법을 레닌 당시의 코민테른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 개량주의 노조지도부가 장악하고 있는 부르주아 노동자당이나 노조조직들의 목표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위한 투쟁이 아닌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이 투쟁은 우리의 목표였으며 지금도 우리의 목표이다."--- 코민테른, [제2인터내셔널과 비엔나 노동조합 그리고 전세계 노동조합들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1922년 12월 4일. 라버트 블랙의 [독일 파시즘], 1975년 스테인 출판사 508쪽에서 재인용


 

사회주의를 위한 공동전선을 건설하려는 시도는 원칙적으로 레닌주의 혁명정당을 청산하는 술책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공동전선 수준의 단결과 정치적 명확성만 있으면 혁명 과업을 달성할 수 있다는 주장에 불과한 것으로 일종의 허세에 지나지 않으며 결과적으로 혁명에 대한 오해를 낳는 해악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제2인터내셔널의 당개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노동계급 전체의 당은 거의 사회주의를 위한 공동전선이라고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서 레닌주의 당은 필요하지 않으며 모두가 종파적인 차이점들을 잊어버리고 안락하게 동거할 수 있는 공동전선만 있으면 된다는 환상을 퍼뜨린다.


다른 무엇보다도 혁명정당 건설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이해시키는 것이 볼셰비키의 임무이다. 이러한 당은 대중의 자연스러운 투쟁 과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의식적인 투쟁을 통해서만 건설될 수 있다.

 

"전략적 공동전선"

공동전선은 전술이지 전략이 아니다. 이것을 영구적인 정책의 지위로 격상시키는 것은 노동계급 정당의 분립을 촉진시켜 이탈하는 대중을 혁명정당으로 획득한다는 레닌주의적 전략을 거부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공동전선을 전략으로 채택하는 강령은 혁명정당을 청산하는 또 다른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노동계급은 때때로 일상적인 요구들을 쟁취하기 위해서 전술적으로 그리고 일시적으로 단결할 수 있다. 그러나 노동계급의 유일한 전략적 단결은 이 계급의 역사적 이해관계에 기반해야 가능하다. 따라서 노동계급은 공동전선의 지도가 아니라 혁명정당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


일부 국가들의 경우 중도주의자들이 지지하는 전략적 공동전선의 한 형태는 개량주의자들 즉 사회민주주의자들과 스탈린주의자들 사이의 분열을 한탄하며 이들이 공동전선을 결성할 것을 촉구하는 것이다. 공동행동에 개입할 수 있는 트로츠키주의 조직이 없는 상황에서 이러한 사고는 개량주의 지도부에 대해 노동계급에게 신뢰를 보여달라고 촉구하는 것과 같은 행동이다. 즉 개량주의자들이 혁명적 전위당의 역할을 어느 정도 대신할 수 있다는 사고로서 혁명적 전위당의 역할을 부정하는 결과를 가지고 온다.


공산주의자가 상당수 결합되지 않는 공동전선은 공동전선이 아니다. 개량주의자들이 혁명가들보다 수가 터무니 없이 많아서 이 상황을 이용하여 혁명정당을 강화할 수가 없다면 이것은 개량주의자들의 연합체에 지나지 않는다. 개량주의자들은 특정 압력에 직면하여 유용한 개량을 위해 투쟁할 수도 있다. 이러한 연합이 형성되어 있든 그렇지 않든 혁명가들은 개량주의자들이 노동계급의 이해를 위해 진짜 투쟁할 것을 당연히 요구해야 한다.


그러나 개량주의자들이 노동계급의 이해를 증진하는 투쟁을 하는 경우는 정말이지 예외이다. 개량주의 조직 하나 하나에 대해서 대중에게 환상을 심어주는 것은 우리의 임무가 아니다. 그리고 당연히 이들 조직들의 연합에 대해서도 환상을 심어주어서는 안된다. 개량주의 조직들의 연합이 마치 노동계급의 이해에 일관되게 도움이 될 것인양 이러한 연합을 공동전선의 이름으로 촉구하는 과오를 혁명가들은 절대로 범하지 말아야 한다.


전략적 공동전선에 대해 변명하는 중도주의자들은 트로츠키가 1930년대 독일에서 사회민주주의자들과 스탈린주의 공산당이 공동전선을 결성할 것을 촉구한 사실로부터 근거와 권위를 빌리려고 한다. 그러나 이 당시 스탈린주의자들은 아직도 근본적으로 반혁명적인 성격을 드러내기 전이었다. 이 당시 트로츠키주의자들은 공산당이 아직도 혁명을 주도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으며 자신들의 조직인 국제좌익반대파(International Left Opposition)를 코민테른 내부의 분파로 간주했다.


당시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스탈린주의자들에게 공동전선에 참여하라고 촉구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혁명의 길로 복귀하라고 압력을 가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1933년 독일공산당이 투쟁 한번 하지않고 무기력하게 히틀러의 집권을 허용했을 때 스탈린주의 공산당의 혁명적 역량이 소진되었다고 트로츠키주의자들은 확신하였다. 그런데 이로부터 50년이나 지난 후에 스탈린주의자들이 혁명적 역할을 수행할 것을 기대하는 것은 역사의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리려는 것과 같다. 볼셰비키는 노동계급 대중들에게 개량주의자들의 단결에 기대를 걸어보라고 가르쳐서는 절대로 안된다.

 

공동전선의 역할을 하는 대중조직들

혁명가들이 노동조합에 들어가 있다면 노동조합 역시 특별한 종류의 공동전선이다. 만약 혁명적 강령에 입각한 분파가 노동조합 내에서 우세를 점하고 있다면 노동조합 역시 부차적으로 혁명적 역할을 수행할 수가 있다. 그렇지 않다면 노동조합은 계급투쟁을 부르주아 국가의 틀 속에 가두게 된다.


소비에트 역시 특별한 형태의 공동전선이다. 그러나 다른 모든 공동전선과 마찬가지로 소비에트를 과도하게 평가해서 숭배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된다. 자칭 혁명가들은 때때로 대중의 전투성이 높은 수준에 도달하지 않은 경우에도 소비에트 건설을 촉구한다. 그리고 소비에트가 혁명 지도부의 도구가 될 가능성이 없을 경우에도 소비에트 건설을 촉구한다. 이런 상황에서 소비에트는 혁명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트로츠키는 1930년 당시 독일의 상황에서 공동전선을 촉구해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소비에트의 역사적 기능을 잘못 이해하면서 `좌익' 운동권은 소비에트를 우상처럼 숭배하고 있다. 대개의 경우 소비에트는 노동계급의 정치권력 기관이라고 규정된다. 형식적으로는 이러한 규정이 올바르다. 그러나 이 규정은 왜 정치권력 장악 과정에서 소비에트가 필요한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렇다. 경제투쟁에서 노동조합이 공동전선의 기본적인 형태인 것과 똑같이 소비에트는 노동계급의 정치권력 장악 시기에 등장하는 가장 높은 형태의 공동전선이다. 소비에트는 그 자체로는 기적을 이룰 힘이 없다. 다만 이 기관은 노동계급의 장점과 단점을 모두 나타낸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소비에트는 다양한 정치 경향의 노동자들이 단결하여 정치권력을 향한 혁명적 투쟁을 수행할 수 있는 조직적 기회를 제공한다."--- 트로츠키 [다음에는 무엇이], 193 194쪽


 

 

비판적 지지 전술

영국의 노동당과 같은 개량주의 대중정당을 선거시기에 비판적으로 지지하는 것 역시 공동전선의 특별한 형태이다. 이러한 정당에 들어가는 입당 전술 역시 마찬가지이다. 정당의 조직기반인 노동대중과 보조를 같이 맞추면서 이들이 쁘띠부르주아 지도부와 부르주아 강령에 대항하여 정치투쟁을 벌이게 하기 위해 이러한 전술들이 사용된다.


선진노동자층의 일부가 개량주의 정당이 노동계급을 대표할 책임이 있다고 보면서 이 정당의 후보들에게 표를 던질 때 혁명가는 이 후보들에게 비판적 지지를 표명하며 표를 던질 수 있다. 이 행위를 통해 혁명가는 노동계급이 자본가 계급과는 구별되는 나름의 독립적인 이해를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이해는 노동계급의 독립적인 조직에 의해서 대표될 필요가 있다는 사고에 표를 던지는 것이다. 이러한 특정 상황에서 혁명가는 노동계급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개량주의자들에게 표를 던지시오. 그러면 우리도 그들에게 표를 던지겠습니다. 우리가 던지는 표는 이 당의 지도부, 강령, 후보에게 던지는 표가 아닙니다. 개량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노동계급을 돌보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들이 당선되면 대신 자본가 계급의 이익을 돌볼 것입니다. 이들은 노동계급을 배신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표를 던질만한 당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개량주의자들은 노동계급을 대표하기 때문에 노동계급의 지지를 받습니다. 이들이 당선된 후 이들이 진정 부르주아 계급을 대변한다는 것이 증명되면 이들의 정체를 폭로하는 것이 더 쉬울 것이며 이에 기반하여 혁명정당을 건설하는 것이 더욱 쉬워질 것입니다. 따라서 개량주의 정당에게 우리가 던지는 표는 노동계급이 자본가 계급에 대항하여 자신의 이해를 대변할 정당이 필요하다는 원칙에 던지는 표입니다. 개량주의 정당에 표를 던집시다! 개량주의 지도부를 몰아냅시다! 혁명정치를 위해 투쟁합시다!"


 

비판적 지지를 보내는 진정한 목적은 이 지지를 철회하고 노동계급 대중을 냉소적이며 자기 계급을 팔아넘기는 개량주의 지도부로부터 떼어내는 데에 있다. 따라서 영구적인 비판적 지지는 "전략적 공동전선"이라는 청산주의적 정치의 변종에 지나지 않는다.


언제 비판적 지지를 보내며 언제 이것을 철회할 것인지는 종종 구체적 판단의 문제이다. 비판적 지지는 단순히 전술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러나 비판적 지지를 거부하는 것이 계급에 대한 배신행위가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다만 비판적 지지를 거부하는 것이 어리석은 전술일 경우는 있다.


비판적 지지의 철회도 전술 문제인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비판적 지지를 철회해야 할 상황이 상당 경우 존재한다. 예를 들어 정권을 장악한 개량주의 정당이 부르주아 국가의 군대를 동원하여 노동자의 투쟁을 탄압하는 등 공공연히 그리고 적극적으로 계급의 배신자라는 것을 폭로했을 때 비판적 지지는 철회되어야 한다. 제국주의 전쟁과 같이 자본가 계급이 세계적으로 노동계급을 공격할 때 개량주의 지도부가 이것을 지지할 경우도 비판적 지지는 철회되어야 한다. 그리고 개량주의 지도자들이 노동계급을 대표할 자신들의 임무를 공공연히 그리고 명확한 표현으로 거부했을 때 그리고 자본가 계급을 위해 좀더 효율적으로 사회를 운영하는 일에 가담할 때 역시 비판적 지지는 철회되어야 한다.


부르주아 노동자당이 어떤 의미에서든 노동계급의 독립적 이해를 실제로 구현하고 있을 때에만 비판적 지지 전술은 유용하다. 만약 이 당이 부르주아 정당과 연합을 체결했을 때 즉 인민전선을 결성했을 때는 비록 이 당의 강령이 피상적으로는 좌파적인 냄새가 나더라도 비판적 지지를 보낼 하등의 이유가 없다.

 

입당 전술

입당 전술의 목적 역시 비판적 지지 전술의 목적과 같다. 혁명정당의 발전을 더욱 효과적으로 촉진하기 위해 개량주의 대중정당 내부에서 정치투쟁을 수행하는 것이 입당 전술이다.


1920년대에 레닌은 [좌익공산주의-소아병]에서 영국 노동당으로 혁명가들이 들어갈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그의 제안은 실현되지 못했다. 결국 고전적인 볼셰비키 입당전술은 1930년대에 트로츠키주의자들에 의해 실현되었다. 1938년 제4인터내셔널이 창립될 즈음 각국에서 사회민주주의 지도부가 거느리고 있던 노동자들은 좌경화하고 있었다. 트로츠키운동은 새로운 세력을 얻기 위해 이 상황에 개입하여 입당 전술을 운용하였다. 원래 프랑스에서 시행되었기 때문에 기록이 가장 잘 정리되어 있는 이 전술은 트로츠키주의 역사에 "프랑스 전환(French Turn)"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실 이 전술은 미국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다. 미국 노동자당은 약 일 년 정도(1936 37) 사회당에 입당하면서 자신의 세력을 배로 늘릴 수 있었다. 1944년 뉴욕의 파이오니어 출판사에서 출판된 제임스 케넌의 [미국 트로츠키주의의 역사]에 당시의 상황이 아주 잘 기록되어 있다.


당시 트로츠키의 지지자들은 결벽증에 걸려 사회민주당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다. 따라서 트로츠키는 이들에 대해 격렬히 투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도주의자들은 이 점을 아주 잘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입당전술을 종결하고 지지자들을 이 정당 밖으로 다시 끌어낼 때 그가 수행한 더 힘든 투쟁은 잘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들어갈 때와 나갈 때를 잘 파악하는 것이 이 전술의 핵심이다.


1950년대에 트로츠키주의 운동이 파블로주의와 투쟁할 때 이 전술은 "단기" 입당 전술이라고 불렸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제4인터내셔널은 중핵들이 나찌에 의해 다수 총살되는 등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전후 트로츠키주의 운동은 격심한 반동기에 새로운 문제들에 직면하였다. 이 기간 동안 미셸 파블로(Michel Pablo)는 제4인터내셔널의 지도자였으며 의식적이고 주관적인 요인을 과소평가하고 대신 객관적인 요인들을 과대평가하여 혁명적 맑스주의인 트로츠키주의를 수정하려고 하였다. 이 결과 발생한 정치투쟁으로 1953년 제4인터내셔널은 조직이 분열되면서 혁명적 국제조직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붕괴된다. 그러나 파블로 추종자들과 그의 반대자들 간에 부분적인 통합이 이루어지면서 제4인터내셔널 통합서기국(United Secretariat of the 4th International)이 탄생한다. 이 새로운 조직은 파블로주의의 객관주의적 강령에 기초하였으며 인터내셔널에 걸맞지 않게 각 지부가 독자성을 보유했다.


파블로는 애초부터 특별한 유형의 입당 전술로 당을 청산하려고 시도하였다. 즉 스탈린주의자들이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압력에 의해 좌경화되어 혁명의 길을 걸을 것이라는 근거하에 트로츠키주의 혁명정당을 해체하고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스탈린주의 공산당 안으로 해소되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하였다. 이것은 "장기" 입당 전술로 불리며 혁명정당의 해체를 가져오는 청산주의적 사고이다.

 

 

제5장 인민전선

 

  모든 개량주의적 캠페인이나 노동자와 자본가가 함께 하는 조직들 또는 자본가들이 참여하는 모든 정치 블록에 인민전선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은 문제를 혼란스럽게 바라보는 것이다. 인민전선은 노동자정당이나 정당들이 부르주아의 특정정당이나 또는 공개적인 정치 대표들과 더불어, 정권을 장악하거나 사회 변화를 위한 일정한 정책을 위해 지속적인 사업을 함께 하기로 합의하는 것이다. 이것은 노동계급의 단결을 저해하고 개량주의 노동자당의 정치강령과 노동자적 기반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을 이용할 수 없게 한다.


인민전선은 노동자 투쟁을 삼천포로 빠지게 하기 위해 부르주아 계급이 애용하는 방식이다. 평상시에 부르주아 노동자당은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시키는 본연의 역할을 잘 수행한다. 그러나 계급투쟁이 격화하여 부르주아 질서가 위협당할 때 인민전선은 특히 그 효력을 발휘한다. 인민전선은 노동계급의 가장 전투적인 부위를 포함하여 노동자의 전투성을 거세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인민전선 술책이 성공할 경우 가장 전투적인 노동자들이 대거 학살되며 이 결과 노동운동은 몇 세대 후퇴한다.


개량주의 정당이 인민전선에 결합되어 있는 한 노동계급의 요구는 개량주의자들에 의해서 극히 제한된다. 노동자들이 요구를 쟁취하기 위해서 투쟁하면 인민전선이 와해된다고 개량주의자들은 변명을 늘어놓는다. 칠레의 아옌데는 노동계급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무 격하게 투쟁하지 마세요. 우리 자유주의자 동지들을 소외시키면 안됩니다. 그러면 우리 (인민연합) 정부는 붕괴합니다." 따라서 인민전선에 참여한 부르주아 정당들은 대중 통제의 도구이며 계급투쟁이 부르주아 소유체제를 위협하지 않게 하는 안전밸브 구실을 한다.

 

인민전선 이전의 인민전선들

"인민전선" 구호는 1930년대 중반 스탈린이 장악한 코민테른에서 나왔다. 이 구호는 파시즘에 대한 투쟁에서 초좌익 기권주의 정책이 비참한 패배를 당한 이후 급작스러운 정책 전환용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이때 이전부터 인민전선에 대한 레닌주의자들의 결연한 저항은 1917년 혁명과정에서 그리고 1927년 스탈린이 조종한 중국혁명 실패의 과정에서 각각 긍정적으로 그리고 부정적으로 그 해악성이 이미 증명되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당시 임시정부에 대항한 볼셰비키당의 투쟁은 인민전선을 무찌른 훌륭한 예를 제공했다. 임시정부는 2월 혁명으로 짜르가 타도된 이후 사회주의자들과 자유부르주아들이 연합하여 수립한 인민전선적 권력기구였다. 노동자 소비에트는 임시정부와 비공식적으로 정치권력을 공유하였다.


2월 혁명이 끝난 후 대중은 당분간 임시정부를 크게 신뢰하였다. 그래서 러시아 노동운동의 골수 좌파였던 볼셰비키들의 대부분은 혁명 성과를 옹호하는 한 임시정부를 지지하겠다는 혼란되고 자신없는 입장을 보였다. 4월 레닌이 뻬제르부르그로 돌아와 격렬한 투쟁을 전개한 후에야 볼셰비키들은 임시정부를 확고히 반대했다. 임시정부에 대한 명확한 거부, 소비에트 정부 수립이 레닌의 전략이었다.


그러나 특정 시점에 이르러 임시정부에 대한 정치적 반대는 우익, 반민주주의 세력에 대해 임시정부를 군사적으로 방어하는 전술과 병행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임시정부의 중심인물은 사회혁명당의 낭만주의자 케렌스키가 되었다. 그러나 케렌스키와 임시정부는 대중에게 제시할 구체적인 방안이 없다는 사실이 서서히 명확해졌다. 점차 그리고 불가피하게 케렌스키에 대한 환상이 광범위한 불만으로 변했다. 이런 와중에서 대중은 한편으로는 우익 세력에게 또 한편으로는 케렌스키의 좌익 반대파였던 볼셰비키에 대해 점점 더 많은 지지를 보내게 되었다.


9월이 되면 대중은 케렌스키 정부를 더 이상 지지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익 반동세력은 반혁명이 성공할 기회가 왔다고 생각한다. 반혁명 쿠데타가 코르닐로프 장군의 주도하에 시도되었다. 이에 케렌스키는 공포에 질린 채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과 "단결"을 호소한다. 이에 볼셰비키들은 코르닐로프에 맞서 임시정부와 군사적 동맹을 맺게 된다.


그러나 군사적 동맹 상황에서도 볼셰비키들은 케렌스키 정부의 반노동자적 반인민적 성격을 철저히 폭로했으며 이 정부의 타도를 선전-선동했다. 특히 코르닐로프 반혁명 쿠데타를 가능하게 한 인물이 바로 케렌스키라는 사실을 대중에게 명확히 설명하였다. 볼셰비키들이 케렌스키 임시정부와 동맹을 맺은 이유는 임시정부를 정치적으로 지지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노동계급과 혁명조직의 민주적 권리를 방어하기 위해서 였다. 우익 반동 쿠데타가 승리했을 경우 혁명의 민주적 성과는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볼셰비키들이 노동계급의 요구에 부응하는 강령을 중심으로 노동계급의 최상부위를 결집시켰기 때문에 코르닐로프는 패배했다. 그리고 볼셰비키들이 케렌스키의 인민전선 정부를 혁명적 강령으로 반대했기 때문에 대중은 혁명을 위해서 떨쳐 일어나 코르닐로프 반동쿠데타에 저항할 수 있었다. 케렌스키 정부에 대한 가차없는 반대가 없었다면 코르닐로프를 패배시킬 세력을 확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대중은 케렌스키 정부를 전혀 지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코르닐로프의 쿠데타 기도가 실패한 이후 볼셰비키들은 주요 도시들의 소비에트에서 다수를 장악하였다. 그리고 곧이어 10월에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무장봉기를 성공시킬 수 있었다.


한편 2월 혁명 이후 멘셰비키들은 케렌스키 "좌익" 임시정부를 지지하였다. 예를 들어 멘셰비키들이 칠레의 아옌데 정부를 지지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기타 사이비 국제좌익 정치세력들도 아옌데 인민전선 정부를 "비판적"이라는 형용사를 단 채 정치적으로 지지했다.


그러나 만약 볼셰비키들이 자신의 강령을 은폐하고 소비에트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을 자제하면서 케렌스키 "좌익" 정부를 지지했을 경우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틀림없이 국가권력 장악에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코르닐로프를 필두로 한 우익 반동세력이 케렌스키 임시정부를 타도하도록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최근 케렌스키의 정치적 후예들은 계급협조적인 인민전선 정부에 일관되게 참여하였다가 반동 우익의 쿠데타에 의해 유혈낭자한 패배를 당하였다. 그러나 이 정치적 자살행위는 지리하게 계속 되었다. 이 결과 수십만의 전투적 노동자들이 학살당했다. 우익이 패배할 때까지 자신의 강령을 은폐하는 혁명가들은 결국 우익의 승리를 재촉할 뿐이다. 우익이 패배하기 위해서는 대중들이 혁명적으로 들고일어나야 한다. 흔히 그렇듯이 러시아 혁명은 응축된 형태로 우리 시대 노동계급 정치의 주요한 교훈들을 표현하고 있다. 우익의 반동 쿠데타에 직면하여 인민전선 정부를 정치적으로 반대하되 군사적으로 방어하는 정책은 20세기에 들어서서 계속 필요했다. 인민전선에 대항하는 볼셰비키들의 올바른 정책은 인민전선이란 말이 만들어지기 전에 이미 인민전선의 부정적 측면을 폭로하였다. 그러나 스탈린은 멘셰비키와 똑같은 입장을 표명하면서 중국 공산주의자들을 부르주아 민족주의 정당인 국민당에 묶어 놓았다. 그는 부르주아 국민당과의 인민전선을 유지하기 위하여 노동계급이 무기를 국민당에게 반납하도록 명령내렸다. 그러나 결국 1927년 4월 상해에서 공산주의자들은 장개석의 국민당 군대에 의해서 무참히 학살당했다. 5만명의 공산주의 노동자들이 스탈린에 의해서 무장해제된 채 장개석에 의해서 살육당한 것이었다. 장개석은 스탈린에 의해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명예위원이 되었지만 부르주아 계급과 노동계급 사이의 화해할 수 없는 이해가 극복될 수 있다고 믿은 적이 결코 없었다.


 

트로츠키주의와 인민전선

스탈린의 인민전선 정책은 1930년대 독일에서 파시스트들이 정권을 잡은 후 그 고전적인 모습을 선보였다. 그리고 그는 스페인 내전에서 프랑코에 반대하여 부르주아 공화파 정치세력들과 인민전선을 수립하였다. 이 당시 상황과 관련하여 트로츠키가 남긴 저작들은 인민전선의 실체를 이해하는 데 커다란 가치를 지니고 있다.


당시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스페인에서 큰 세력을 형성하지 못했다. 그러나 공화국 정부와 군사적 동맹을 체결했으나 정치적 지지를 표명하지는 않았다. 트로츠키는 노동자에 의한 산업의 몰수, 농민에 의한 토지의 몰수, 소비에트 건설 등을 골자로 하는 강령을 주장했다. 그러나 스탈린의 인민전선 정책은 노동계급을 지배하고 있었고 결국 투쟁은 자본주의의 틀 내에서만 진행되었다. 피억압 피착취 대중들은 공화국 정부의 부르주아적 정책을 지지할 수 없었다. 이 결과 프랑코가 이끄는 파시스트들이 공화국 정부를 전복시키고 정치권력을 장악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서유럽에서 탄생한 인민전선 정부에서 노동자당 대표들이 부르주아정부의 각료가 되어 레지스탕스운동으로 단련된 전투적 노동자들의 투쟁을 무장해제시켰다. 인도네시아 공산당은 수카르노와 인민전선을 결성한 후 우익 군사쿠데타에 직면하여 50만 명의 당원들이 학살당하는 비극을 치렀다. 이 결과 군사독재 정권이 들어섰다. 1970년대 칠레에서는 아옌데가 이끄는 인민연합(Unidad Popular) 정부가 노동계급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결국 노동계급의 투쟁이 가라앉고 반동세력의 힘이 충분히 결집되자 피노체트는 피비린내 나는 군사쿠데타를 감행하여 수천 명의 노동자와 좌익활동가들을 총살시켰다. 인민전선은 사소한 문제가 결코 아니다.


대개의 경우 인민전선 정부는 전투적인 수사를 남발하며 노동자들의 열화와 같은 지지를 업고 정치무대에 등장한다. 따라서 중도주의자들은 최소한 인민전선의 노동자 정치세력에게 비판적 지지를 보내고 싶어한다. 그러나 이러한 소망도 노동계급의 정치적 독자성 확보나 공산주의 전위당 건설에 도움을 주지는 못한다. 혁명가들은 인민전선의 계급 배신적 성격을 폭로하면서 당분간 대중으로부터 고립될 각오를 해야한다.


과거 제4인터내셔널의 통합서기국과 영국의 사회주의노동자당 등 좌파 조직들은 습관적으로 인민전선 정부의 부르주아 노동자당에게 비판적 지지를 표명했다. 따라서 이들은 인도네시아와 칠레 등지에서 일어난 대학살극에 대해 정치적인 책임을 일부라도 지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이들은 프랑스의 좌익연합 인민전선 등을 선거 때만 되면 비판적으로 지지했다. 그러니 이런 조직들을 어떻게 혁명정당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는가.


개량주의자들이 특정 상황에서 최소한 노동계급의 이해를 옹호한다고 말하며 독립된 노동자당의 강령에 따라 투쟁한다고 선언할 경우 비판적 지지의 근거는 마련된다. 그런데 부르주아 정당들과 선거연합을 체결할 경우 노동계급의 정치적 독자성 요구가 자본가 계급과의 공동강령 때문에 당분간 수용될 수 없다고 말한다. 바로 이 말을 듣기 위해 자본가 정당들은 부르주아 노동자당의 개량주의 지도부와 선거연합을 체결한다. 따라서 이런 상황에서 개량주의자들에게 비판적 지지를 보내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정부 구성과 무관한 인민전선들

정권 장악을 위해서만 인민전선이 결성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해방이라는 광범위한 목표를 가지고 많은 운동들이 움직인다. 그러나 이 운동들이 진정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체제를 극복해야 한다. 그런데 제국주의 전쟁, 인종차별, 여성억압 등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적인 측면들에 대항하는 투쟁들을 자본주의 질서 내로 가두어 두기 위해서는 이 운동들의 전투성을 거세해야 한다. 자본가 계급의 대표들에게 이러한 운동의 강령을 맡기는 것은 자본주의 질서를 그대로 유지하자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이런 행위 역시 인민전선이라고 할 수 있다.


가능한 한 넓은 연합을 구성하려는 인민전선 좌익들은 자유부르주아 정치인들을 끌어들이려고 애쓴다. 그래서 자신들의 운동을 이 목적에 종속시켜 버린다. 이 결과 부르주아 동맹자들에 의해서 철저하게 제한된 내용의 평화운동, 동성연애자 권리 운동, 여성해방운동 등이 생겨나게 된다. 혁명가들은 이러한 인민전선적 운동들을 철저하게 반대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소규모 인민전선체들은 일정 기간 동안 그 성격이 불명확하거나 미결정 상태인 경우가 많다. 우리는 이러한 운동들이 인민전선의 성격을 띨 경우 반대를 표명해야 하며 대신 이 운동들이 노동자적 성격 또는 공동전선적 성격을 갖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운동들의 불명확한 성격을 이용하여 볼셰비키 혁명가들은 이들 운동에 참여하여 혁명적 교훈들을 이식시킬 좋은 기회를 갖는다.


혁명가들은 인민전선 조직들이 주최하는 모임이나 데모에 참가하여 이들에게 이 정책이 노동자들에게 가져올 비극적인 결과들을 폭로할 기회를 찾아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조직에 대해 정치적인 책임을 지거나 지지하거나 지지를 호소하거나 그 지도부의 일원이 되는 경우는 결코 없다.

 

부르주아 세력과의 공동행동

우리는 인민전선에는 반대하지만 파업지원, 좌익의 기본권 옹호, 제한된 개혁을 위한 투쟁 등 노동자당이 수행하는 공동전선적 투쟁에 동참하는 자본가 개인들에 대한 마녀사냥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노동계급의 필요에 의해서 이러한 투쟁이 전개되는 한 자본가 개인 또는 단체들은 언젠가는 계급적 이해에 따라 이 투쟁에서 발을 뺄 것이다.


혁명조직은 부분적 개혁이나 일반민주주의적 권리의 옹호를 위해 종종 활동을 할 수 있다. 노동계급은 모든 억압에 대해 투쟁해야 할 이해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공산주의자들은 인민의 권리와 해방을 옹호하는 자유의 투사가 되고자 한다. 따라서 어떤 경우 자유부르주아가 주도하는 공동행동에 참여할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도 우리의 강령을 숨기지 말고 선전해야 한다.

 

 

제6장 혁명 중핵의 건설

 

레닌과 트로츠키가 주도하던 코민테른은 공동전선 전술을 대대적인 규모로 상정하였었다. 그래서 소규모 공산주의 그룹에게 이 전술이 적당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트로츠키는 공동전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산당이 수적으로 별 의미가 없는 소수로 남아있는 한 대중투쟁의 전선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은 결정적인 의의를 갖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대중행동은 여전히 부르주아 노동자정당의 지도부에 의해서 좌지우지될 것이다."--- 트로츠키 [코민테른의 첫 5년], 뉴욕 1972년 패스파인더 출판사 제2권 92쪽


 

따라서 소규모 그룹이 대중적 공동전선을 주도할 수 있다는 말은 순전 거짓이거나 전략적 공동전선이라는 사고에 기반한 것이다. 그러나 소규모 그룹도 노동계급의 이해 증진을 위해 계속 대중행동에 참여해야 한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대중행동을 촉발시키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혁명정당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이러한 대규모 대중행동은 고전적인 공동전선 전술과는 그 성격을 달리할 수밖에 없다. 물론 전술 운용의 원칙은 대동소이할 것이다. 다만 벼룩이 코끼리에게 구애할 경우 제기되는 문제들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소규모 혁명그룹이 대중행동을 주도할 수 있다는 환상을 경계해야 하며 대중행동을 주도하는 개량주의 지도부를 신뢰할 수 있다는 환상을 대중들에게 퍼뜨리는 오류를 범해서도 안된다.


그러나 소규모의 공동전선이 가능하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된다. 특히 소규모 혁명그룹에게는 이런 종류의 활동이 대단히 중요할 수 있다. 파업지원, 해외 혁명조직의 방어, 제한된 개혁투쟁, 희생된 좌익활동가의 보호 등이 이런 류의 활동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류의 공동행동에 참여하는 조직들은 다른 좌익 조직들이거나 한시적인 투쟁을 전개하는 지방에 기반을 둔 노동조합이 될 것이다.


공동전선이 내거는 요구의 정치적 수준은 혁명조직의 요구와 여타 노동운동 조직들의 요구가 일치하는 지점에서 결정될 것이다.


가끔 소규모 혁명조직은 대단히 초보적인 사안에 대해 상당한 역량을 투여할 수도 있을 것이며 아주 인기없는 사안을 중심으로 소규모 캠페인을 조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도 혁명적 강령을 선전하면서 선진 노동자와 지식인들을 이 강령으로 획득할 수 있어야 한다.


소규모의 혁명 중핵이 명확한 원칙을 가지고 강령을 중심으로 공고히 결집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초기에는 "공동행동"을 약속하는 모든 그룹들과 힘을 결집하는 것보다 올바르지 못한 정치적 내용에 대해서 가차없는 비판을 수행하는 것이 후일을 위해서 훨씬 더 바람직하다.


소규모 볼셰비키 조직에는 작은 영향밖에 미칠 수 없는 초보적 계급적 사안을 중심으로 공동전선을 수행하는 것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있는 좌파가 있을 수 있다. 또한 조직이 대중에 뿌리내릴 수 있는 적합한 기회에 좀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우파 등 다양한 경향들이 존재할 수 있다. 어느 경향도 혁명적 강령이 대중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방향으로 행동해야 한다. 이를 통해서만 이 조직의 올바름이 입증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혁명적 강령에 입각하여 활동하는 혁명정당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에는 노동계급조차 결국 파괴되고 말기 때문이다.

레닌은 [좌익 공산주의-소아병]에서 이렇게 말했다:


"노동계급의 전위당을 공산주의로 획득하는 문제에 관한한 우선 순위는 선전작업에 있었고 지금도 그렇다. 심지어는 선전서클조차도 그 협소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상황에서는 유용하며 좋은 결과들을 낸다. 그러나 대중의 실제 행동을 조직하고 수많은 노동자 군대를 운용하며 사회의 최종적이며 결정적인 전투에 모든 계급 역량을 발휘시키는 일에서 순수한 공산주의의 진실을 단순히 반복하는 선전방식만으로는 부족하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역량을 수천 명으로 상정해서는 안된다. 수백만 그리고 수천만을 상정해야 한다."


 

따라서 소규모 혁명그룹의 중심적인 과업은 당분간 선전작업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작업을 초월하여 대중을 동원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우선 효과적인 선전그룹이 형성되어야 한다. 그리고 공동전선의 목적도 선전그룹의 필요에 종속되어야 한다.


물론 대중행동의 상황에서 우리가 제한된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도 아주 간간이 나타날 뿐이라는 사실을 명심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대중적인 세를 형성하기 전까지 개량주의 대중정당이 대중행동을 주도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쩔 수 없다. 이러한 상황을 우회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Building the Revolutionary Party and the United Front Tactics]

?

  1. 4.13 총선에 대한 볼셰비키그룹의 입장

  2. (IBT) 혼돈 속의 중동

  3. 제 16대 대통령 선거에 대한 혁명적 맑스주의자들의 입장(2002년 12월)

  4. 『레닌과 전위당』 옮긴이 후기

  5. (IBT) 쿠바 혁명을 방어하자!

  6. (IBT) 어떤 정당이 필요한가?

  7. (IBT) 북한을 방어하자!

  8. 사내유보금 환수운동에 대한 볼셰비키그룹의 입장

  9. (IBT) 제레미 코빈과 계급투쟁정치

  10. (IBT) 1920~1950년대 미국노동운동 속에서의 혁명활동

  11. (IBT) 대서양무역투자협정(TTIP): 노동계급에 대한 공격

  12. (IBT) 맑스주의와 부르주아 선거

  13. (IBT) 루비콘강을 건넌 소련과 좌익의 반응

  14. 인민전선 : 새로운 배신

  15. (IBT) 1989년 사태 25년 후

Board Pagination Prev 1 ... 5 6 7 8 9 10 11 12 13 14 ... 20 Next
/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