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사

볼셰비키그룹 전사 고 정OO(도훈) 동지 추모회 기록

by 볼셰비키 posted Sep 02,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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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셰비키그룹 전사 고 정OO(도훈) 동지 추모회

일시: 2023827일 오후 9

도훈.png

 

순서:

추모 묵념

늙은 투사의 노래

고 정OO(도훈) 동지의 삶: 학생 운동가트로츠키주의 혁명가볼셰비키그룹 전사

투병 일지: 발병(20232)에서 사망(2023819)까지

나와 정OO 동지 그리고 혁명 정치: HK/ J/ Ho/ KH/ HG/ MM/ WK/ SM/ T/ Moon

추모시

임을 위한 행진곡

 

고 정OO(도훈) 동지의 삶: 학생 운동가트로츠키주의 혁명가볼셰비키그룹 전사

 

196721녀 중 장남으로 출생

전두환 독재를 종식시킨 6월 항쟁과 7, 8, 9월 노동자 대투쟁으로 사회 격변의 에너지가 최고조에 이른 1987년 인하대 통계학과 입학

학생운동 참여

당시 다수이던 민족해방 계열(NL)이 아니라 이른바 ‘PD 계열에서 학습하고 활동

 

3학년에서 4학년으로 올라가는 시기에 평생 운동에 헌신하겠다고 부모님께 고백

깜짝 놀란 부모님이 극단적으로 반대

감금당하고 결국 강제 휴학

스트레스성 탈모 시작 그 후 탈모를 10년간 치료

 

졸업 후 방황하다가 공제조합에 입사하여 10년 근무

술에 빠진 방탕한 생활

이후 변호사 사무장으로 근무

인천으로 직장 옮긴 후 2005년 뇌경색 발병

2009년 뇌혈관이 좁아지는 모야모야병으로 수술

뇌병변 장애 얻게 됨

 

2015년 무렵 노동자의 책 회원

20155월 노동절에 볼셰비키그룹과 만남

2015517일 맑스꼬뮤날레 볼셰비키그룹 강연회 참가

20157맑스주의 입문 세미나라는 이름의 학습팀에 참여하며 볼셰비키그룹 활동 시작

 

스스로 장애인이고, 부모 두 분 그리고 조카 역시 중증 장애인이기 때문에 장애인 현실을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이해, 인천장애인협회 뇌병변 장애인 모임에서 활동, 장애인 강령 수립에 생생한 조언 제공

국제 국내 문제 등 정치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올바른 입장을 용기 있게 세우는 데에 기여

 

투병 일지: 발병(20232)에서 사망(2023819)까지

227: 오른 다리의 통증이 극심하다고 모임에 보고

36: 모임에 불참

3월 둘째 주 ~ 셋째 주: 심각한 통증 호소

316: 건강 상태가 걱정되어 자택 방문

오른 다리의 통증이 악화되어 밤에 2시간도 자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마침 제가 방문한 날 정밀 검사를 위해 인하대학병원을 내원할 것이라고 말씀

그러나 예전처럼 밝은 모습으로, 오랜만에 방문한 반가운 동지를 위해 점심 식사를 준비하고, 마르크스주의와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얘기를 즐겁게 나눔

병원 밖에서 만난 마지막 날, 이후 병세가 급격히 악화

327: 자택에서 넘어져 허리에 부상 입음

3월 마지막 주 ~ 4월 첫째 주: 인하대학병원에서 허리와 다리 정밀검사, 통증 때문에 한밤중에 응급실에 갈 정도

 

410: 볼셰비키그룹 모임에 마지막으로 참석 투병으로 인해 조직 활동 중단

417: 췌장암 진단

420: 전화 통화 입원했고 암을 진단받았다. 집에서 내원이 어려워 요양병원에 들어갈 예정이고 거취가 정리되면 연락해주겠다.”

427: “병문안 가려고 합니다.” “처리되지 않은 일이 많아서 병문안은 아직 어려워요.”

 

5월 첫째 주: 암이 간과 뼈로 전이되었다는 진단. 항암치료 시작

5월 둘째 주 ~ 셋째 주: 항암치료 때문에 심신이 쇠약해져서 통화가 불가능

523: 인천뇌병변장애인인권협회를 통해 여동생분과 연락

526: 요양병원 면회, 통증과 항암치료로 몸이 많이 초췌해보였지만 정신은 맑음. 1시간 정도 대화

 

6:

통화와 문자로 소식을 주고받음

 

711: 요양병원 간호사가 무례한 행동. 상습적 행동이었기에 대학병원으로 옮김

712: T, HK 병문안. 항암치료 후 음식을 제대로 삼키지를 못해서 이전보다 더 야윔

병상에 누워 레닌의 국가와 혁명을 다시 읽게 됨, 훌륭한 책이라고 극찬.

714: T, K 병문안. 힘들게나마 식사를 한 덕분에 12일보다 상태가 약간 호전되어 보임. 4차례의 항암치료를 받았는데 더 이상 몸이 버티질 못해서 중단했다고.

마지막을 정리하는 것처럼, 미국의 절친한 친구에게 인사 편지를 보내고 자신이 트로츠키주의자임을 밝히고 싶다고.

제수씨가 간병 중, 남동생, 여동생분과 더불어 도훈 동지를 보살핀 감사한 분.

719: T, HG 병문안. 다음 주 호스피스 병원에 입원할 예정이라고. 호스피스 병원에서 면회가 가능할 것이고 그 때 만나면, 사회주의자로서 마지막으로 남길 말씀을 녹음하자고 약속. 하지만 이날이 마지막 만남이 됨

7월 넷째 주: 전화 연락이 두절

730: 여동생분과 연락이 닿음. 이송 과정에서 핸드폰이 파손되었다는 소식. 호스피스 병동은 가족 1인 이외에 환자를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전달 받음.

 

88: 제수씨와 연락, 핸드폰 복구했다는 소식.

통화: 이전과 비교해 건강이 나빠졌으나 정신은 온전한 것으로 짐작

토론 행사에 참석 소식을 전함. 앞으로 볼셰비키그룹이 잘 되기만을 바란다고 말씀.

마지막 목소리

814~15: 연락했으나 제수씨가 받음, 약 기운 때문에 받을 수 없다고.

819: 새벽 5, 조금 전 별세했다는 문자

여동생, 남동생, 제수씨, 조카 두 명이 정OO 동지의 마지막을 지켰다고

 

 

나와 도훈 동지 그리고 혁명 정치

 

HK:

처음 봤던 작년 1월 민중총궐기 때부터 마지막으로 본 지난 712일까지, 제가 도훈 동지를 알고 지낸 시간은 2년이 채 되지 않을 정도로 짧습니다. 하지만 많지 않았던 만남의 시간 동안 제 인상에 남은 동지의 모습은 결코 범상치 않았습니다.

동지는 모두에게 귀감이 될 만한 혁명적 의지와 열정으로, 거동이 아주 불편한 몸을 이끌고 항상 집회에서 볼셰비키그룹에 힘을 보태셨습니다. 그는 언제나 진지한 태도로 정치에 임하고, 결코 압력 앞에 굴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압력이 죽음이라는 가장 극악한 형태로 나타날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동지가 세상을 떠나기 대략 한 달 전, 저는 인하대학교병원 중환자실에서 동지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몰라볼 정도로 수척해진 동지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저와 T동을 맞이해 주셨습니다. 동지는 병원에 기거하면서 레닌의 <국가와 혁명>을 비롯한 서적을 탐독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암세포가 몸을 지치게 만들었을지언정 마음까지 침투하지는 못한 것입니다. 그의 심장에는 이전과 다를 것 없는 혁명정신이 있었습니다.

망치는 유리를 깨뜨리지만 강철을 제련한다.”라는 유명한 어구가 있습니다. 제가 본, 삶의 끝자락에 서 있었던 동지는 마치 강철과 같은 존재이셨습니다. 압력에 굴복하지 않는 동지는 태도는, 죽음의 공포보다 강했습니다. 자랑스러운 사회주의 혁명가의 기개를, 동지는 끝까지 지켜내셨습니다.

혁명정치는 계급지배에 맞서 해방을 꿈꿉니다. 그러나 부르주아지는 자신의 지배를 유지하기 위해 혁명정치가들에게 수많은 압박을 부과합니다. 혁명정치는 이러한 압박을 이겨내는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동지는 진정한 혁명정치가이셨습니다.

동지는 우리 곁에 계시지 않지만, 그 정신을 우리는 기억할 수 있습니다. 사회주의에 대한 정OO 동지의 헌신적 기여가 미래 사회라는 건물을 건설하는 데에 벽돌 하나가 되었음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J: 남아 있는 자들이 정OO 동지가 못 다한 일 이어 갑시다.”

 

Ho:

비록 부산에서 활동하는지라 동지를 뵐 기회는 적었지만, 동지를 뵌 기억은 지금까지도 강렬하게 남아있습니다.

저는 20218월부터 볼셰비키그룹과 같이 학습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상경 집회에 참석한 202111월 전국 노동자 대회에서 동지를 처음 만나뵈었습니다. 동지에 대한 첫인상은 지금도 또렷합니다. 다리가 불편하심에도 우리 볼셰비키그룹의 깃발 아래에서 굳건히 서 계신 모습이었습니다. 이후 동지들과 합류하여 함께 식사를 하고 카페로 가는 와중에 몇 번 동지를 부축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비록 몸이 불편하실지언정 동지의 에너지는 강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카페에서 저와 부산의 다른 청년 동지, K동지 그리고 동지와 함께 이야기 나눈 자리에서 그 에너지를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혁명 정치에 대한 진지함과 그 중요성, 그리고 새롭게 합류하는 청년 동지들에 대한 큰 기대는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이 납니다. 어쩌면 그때 동지께서 하신 말씀이 저로 하여금 지금까지 볼셰비키그룹과 함께하게 한 동력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후 20221월 민중총궐기에서 뵈었을때도 여전히 우리의 깃발을 지키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여러 동지들과 함께하며 혁명 정치와 사상 그리고 그 정신을 이야기하시던 순간도 생생합니다.

그 이후로 동지를 직접 뵌 적은 없으나, 회의에 참가하면서 동지의 분석과 글 등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국내 좌익동향에 대한 발제와 평가를 보면서 동지의 과학적 안목이 정말 대단하며 한편으론 본받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동지에게서 받을 수 있었던 인상은, 언제나 혁명 정치에 진중하고 열정적이셨다는 것입니다.

추모회에서 동지의 삶을 들으면서, 왜 동지께서 특히나 새로운 동지들이나 젊은 동지들에 큰 기대를 거셨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동지께선 젊은 시절에 잠시 운동을 중단하셨지만, 다른 동지들은 멈추지 않고 끝까지 그리고 진중하게 혁명 정치를 이어나가라는 기대였을 것입니다. 그 기대를 이어나가는 것이 지금 함께하고 있는 볼셰비키 그룹 동지들의 몫일 겁니다.

동지의 혁명에 대한 열정과 과학성 그리고 진지함은 언제나 우리에게 남아있을 것입니다. 동지의 정신을 끝까지 지켜나가면서, 여기 계신 모든 동지들이 인류 해방과 사회주의 혁명을 향해 끝까지 전진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KH:

OO 동지에 대해서 기억나는 것은 언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집회가 끝난 후 노량진에 가서 함께 짜장면을 먹고 이디야커피를 갔던 기억이 납니다. 동지가 몸이 상당히 불편하셔서 중국집 계단을 내려갈 때 K동께서 동지를 부축해 주셨던 기억이 납니다.(얼마 전 동지를 추억하며 혼자서 한 번 가 보았습니다.) 동지는 겉으로 보기에는 걸음걸이도 매우 느리고 매우 나이들어 보이셨지만, K동과 장애인 문제에 대해서 토론할 때, 그리고 이디야커피에서 이야기하던 중 인민전선과 공동전선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KH동은 설명할 수 있나요?’등의 질문을 할 때에는 눈빛과 표정에 힘이 넘치셨습니다.

특히나 동지와 관련해서 기억이 나는 말씀이 있습니다. 집회에 참석하기 전 모였을 때 하셨던 말씀인데, ‘나는 운동을 중간에 포기했다. 그래서 후회하고 있다. KH동은 후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혁명정치의 일원이 되면서 많은 선택의 순간, 압력의 순간이 있었습니다. 때로는 그 압력에 굴복하는 선택을 하기도 했으나 스스로에게 거짓말하고 스스로 괴롭게 살기보다는, 주변의 다른 이들에겐 숨기더라도 스스로에게 당당한 삶을 사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렵고 힘든 환경 속에서도 생을 다하는 그 날까지 <국가와 혁명>을 읽으신 동지의 모습은, 혁명정치가 결판이 날 그날까지 버텨내는 자세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제가 재작년 군대에 갈 때, 동지께서는 어깨 걸어 함께 가고 싶다라는 작별 인사를 전하셨습니다. 혁명정치가 소수, 극소수일 때는 엄청난 압력을 받고,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은 동지입니다. 정치적으로는 냉정하게 따지고 비판하되 행동에서는 전력을 다하여 협력하고 도와주는 동지가 있기에 모두가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도훈 동지를 잃었습니다. 그러나 동지가 학습과 선전과 조직에 기여하여 혁명정치에 기여한 성과는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성과를 이어받아 새로운 젊은 동지들이 길을 이끌 것이고, 때가 된다면 그 성과의 가치를 알아보고 함께하려는 사람들이 늘어날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임무는, 동지가 혁명정치에 기여한 바를 기억하며 그것을 더욱 발전시켜 나가는 데 우리의 삶을 투여하는 것입니다. 함께 나아갑시다!

 

HG:

도훈 동지와의 기억은 처음 집회에서 봤을 때, 그리고 병문안 갔을 때 두 번 있습니다.

집회에서 봤을 때는 인사를 많이 나누지는 못했지만, 휠체어를 타고서 참석하는 모습에 궁금했었는데요.

다음으로 7월 중순 경에 병문안을 갔을 때가 사석에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동지와 인사를 나눈 때입니다. 6인실 정도의 중환자실이었고, 동지는 누워계셨습니다.

병문안을 가면서 이전에 상황을 듣고 있던 터라 마음이 무거운 자리였습니다. 그럼에도 동지를 볼 수 있는 반가운 자리였구요.

동지와의 대화 중 기억나는 것들을 이 자리에서 전하고 싶습니다.

우선 동지가 오래된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낸 것을 보여주셨는데, 트로츠키주의에 대해서 그리고 자신은 트로츠키주의자임을 설명하고, 친구의 사상과는 적대적인 사상이지만 이를 연구해보길 권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동지는 지금이 마지막 메시지일 수 있고, 그 친구분이 소중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이 생각하는 진실을 허례허식 없이 전달했던 것 같습니다.

당시에 제가 모임에 합류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는데 저를 엄청 반겨주시면서 대화했습니다. 학습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단호함이라고 강조하기도 해주셨구요.

또 동지께서 합류소식을 이전에 전해 들었을 때 굉장히 반가웠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라는 말씀해주시면서 활짝 웃는 모습, 그리고 울먹이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전혀 예상 못했던 모습이라서 이분에게 동지가 새로 생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그리고 저에게는 동지란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기도 했습니다.

병문안 자리를 떠나기 전에 후배들에게 전하는 음성메세지를 남기자는 약속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병실보다 더 편하게 말할 수 있을 때 하자고, 그래서 다음번에 다시 방문하겠다고 하고 헤어졌는데, 그 이후로 이뤄지지 못한 약속이 되어버렸는데요. 부고 소식을 듣고 나서, 기회를 미루면 다시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새삼스러운 진리가 유난히 무겁게 다가왔습니다.

여전히 지금도 저는 도훈 동지를 어렴풋하게 밖에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사상적으로 저의 동지. 우리의 동지였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때문에 먼저 떠난 동지를 정신적으로 계승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단호함이 흔들릴 때, 도훈 동지의 가장 중요한 것은 단호함이라는 말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고, 그가 꿈꾸었던 혁명을 우리가 준비해나갑시다.

 

MM:

도훈 동지가 있었기에 제 생애 처음으로 입문하는 혁명정치를 온전히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불편하신 몸을 이끌고 모든 행사에 적극적이고 열성적으로 참여하셨으며, 늘 반가운 얼굴로 맞아주셨던 기억이 새록새록 합니다.

성공회대에서, 고려대에서, 거리에서, 함께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던 기억 역시 지금껏 뚜렷하게 남아 있습니다.

학습하면서 늘 올바른 원칙과 강령, 날카로운 문제의식으로 말씀하시던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도훈 동지 늘 혁명정치에 헌신해오셨던 도훈동지 안타깝고 그립습니다.

트로츠키의 유언장 낭독

의식을 깨친 이래 43년의 생애를 나는 혁명가로 살아왔다. 특히 그 중 42년 동안은 마르크스주의의 기치 아래 투쟁해 왔다. 내가 다시 새로이 시작할 수만 있다면 이런저런 실수들을 피하려고 노력할 것은 물론이지만, 내 인생의 큰 줄기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가요, 마르크스주의자이며, 변증법적 유물론자다. 결국 나는 화해할 수 없는 무신론자로 죽을 것이다. 인류의 공산주의적 미래에 대한 내 신념은 조금도 식지 않았으며, 오히려 오늘날 그것은 내 젊은 시절보다 더욱 확고해졌다.

방금 전 나타샤가 마당을 질러와 창문을 활짝 열어주었기에, 공기가 훨씬 자유롭게 내 방안을 들어오게 됐다. 벽 아래로 빛나는 연초록 잔디밭과 벽 위로는 투명하게 푸른 하늘, 그리고 모든 것을 비추는 햇살이 보인다. 인생은 아름다워!

훗날의 세대들이 모든 악과 억압과 폭력에서 벗어나 삶을 마음껏 향유하게 하자!”

동지가 저희들의 곁을 떠나갔다는 것이 실로 잘 믿겨지지 않지만, 늘 언제나 저희와 함께 이 길에 함께 해주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WK:

2015년 학습모임을 통해서 처음으로 도훈 동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만, 의사표현이 원활하지 않은데 과연 저런 분이 혁명운동에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장애인에 대한 자본주의적 편견에 오염되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정OO 동지는 누구보다도 명석하고 예리하셨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반박근혜 투쟁, 그밖의 노동자 투쟁 집회에 늘 헌신적으로 참여하셨습니다. 지팡이를 짚고, 혹은 휠체어에 몸을 싣고. 저기 멀리 인천에서부터.

카카오톡을 통해서 엊그제가 동지의 생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동지께서는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으로 오토바이가 질주하는 사진으로 해놓으셨습니다. 그리고 텔레그램 프로필 이미지는 암벽을 오르는 등반가의 모습입니다. 오토바이가 질주하듯이, 암벽을 기어 오르듯이, 자본주의가 철폐된 해방세상으로 가고 싶은 본인의 소망이 담긴 프로필이 아니었을까 추측합니다. 그런 동지의 뜻을 우리 모두가 이어받아야 하겠습니다.

 

SM:

나는 아마 여기 있는 사람들 중 훈동과 함께한 시간이 가장 짧을 것이다. 나는 도훈 동지를 작년 12월에 처음 보았고 오프라인으로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만큼 나는 동지에 대해서 구체적이고 세세하게 기억이 난다. 이는 동지가 항상 따뜻하고 너그러웠기 때문이다. 동지는 항상 사정이 생겨 늦게 들어오거나 결석하는 분들에게 괜찮다고 해주셨으며, 까먹고 발제 할 문서를 복사하지 못한 발제자에게 파일을 보내주기도 하셨다. 그러면서도 마르크스주의에 대해서 높은 이해도를 토대로 지식을 전수해주셨고 흔들리지 않는 신념으로 자신의 의견을 밝히셨다.

도훈 동지가 2월부터 몸이 좋지 않으셔 학습팀에 참가가 어려워지시고 이후 투병 생활을 하시면서 학습에 아예 참여하지 못하실 때 나는 그저 조금 아프다고만 생각하고 학습팀에 언젠가 복귀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얼마 전 별세 소식을 들었고 동지는 영원한 잠에 빠지셨다.

별세 소식을 들을 날 정말로 안타까웠다. 동지가 돌아오면 더 많이 물어보고, 더 많이 의견을 나눌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동지가 가졌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높은 식견과 정세를 파악하는 능력이 굉장히 뛰어나다는 것을 학습하면서 느꼈기 때문이다. 꼭 그것이 아니더라도 도훈 동지는 항상 다른 동지들에게 잘 지냈는지 학교 방학이 시작했는지 건강은 어떤지 등 일상적인 질문을 해줌으로써 어색하지 않고 훈훈한 분위기를 유지하려고 노력하셨다. 그런 분이었기에 그의 죽음은 큰 빈자리를 느끼게 한다.

하지만 우리는 단지 주저앉을 수 많은 없다. 그것은 도훈 동지도 바라는 바가 아닐 것이다. ‘주저앉아 우는 것만이 할 일은 아니다 너는 가슴에 불을 품고 살아야 하리라는 말이 있다. 동지는 본인이 보지 못한, 그러나 끊임없이 노력한 노동계급의 해방을 누구보다 바랄 것이고 우리가 그 전선에 자신 대신 서주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동지의 뜻을 이어 우리가 노동계급 해방의 길에 서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끝으로 도훈 동지는 마지막에 트로츠키의 인생의 아름다워라는 트로츠키의 유언장을 읽었다고 한다. 그 유언장에 보면 다시 태어난다면 실수를 피하려고 노력하겠지만 큰 줄기는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문장이 있다. 아마 동지도 그러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는 아마 다시 기회가 주어져도 학생운동가로서 트로츠키주의자로서 전사로서 살지 않았을까?라는 확신이 든다.

 

T:

저는 2015년 초 민주노총 집회에서 동지를 처음으로 만났습니다. 동지를 처음 봤을 때는 몸이 불편하다는 점 외에 큰 인상이 남지 않았습니다.

저는 동지와 함께 학습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분에 대해 알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민주노총 집회, 세월호 집회, 민중총궐기, 반박근혜시위 등 수많은 집회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습니다. 저와 동지는 항상 그곳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함께 트로츠키주의를 배우는 중이었습니다. 매번 집회가 끝나고 귀가하는 지하철에서 새로이 배운 것과 느낀 바에 대해 열정적으로 얘기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동지는 트로츠키주의를 배우며 신이 나 조잘대는 조카 같은 동지를 보며 흐뭇해 하셨을 것 같습니다.

마침 저는 동지와 멀지 않은 곳에 살았습니다. 덕분에 자택을 방문해 더 오래, 깊은 얘기를 나눌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동지가 항상 저를 반갑게 맞아주시며, 함께 식사하고 열띠게 마르크스주의와 세계에 대해 토의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마다 동지는 모르는 것이 있으면 거리낌 없이 저에게 배움을 구하셨습니다. 동시에 동지는 저에게 투사로서의 성실함과 압력을 버텨내는 힘을 가져야 한다고 매번 강조하셨습니다.

동지는 대학생 시절 사회주의 운동에 몸담았지만, 부모님의 살벌한 반대에 못 이겨 운동을 그만두었습니다. 동지는 당시의 그 선택을 깊이 후회했습니다. 사회인이 된 동지는 당신 말씀을 따르자면 탕자처럼 살았습니다. 하지만 병을 얻어 쓰러진 뒤 동지는 항상 마음에 걸렸던 사회주의 운동으로 복귀했습니다. 심지어 대학생 시절보다 정치적으로 더 성장해 트로츠키주의 전통으로 들어왔습니다.

동지는 정치적으로 높은 단계에 도달했습니다. 비록 항상 자신의 이해가 느리다고 안타까워하셨지만, 돌과 같이 단단했습니다. 자신의 정치를 지켜냈습니다. 한번은 동지가 JJ와 집회에서 만나 논쟁한 적이 있었습니다. 동지는 노동자국가 문제를 놓고 반박해 결국 논쟁에서 승리했습니다.

동지와 자주 얘기했던 주제로 대학생 시절 사회주의에 헌신했지만 이제는 그 찬란했던 과거를 팔아 부르주아의 하수인이 된 운동가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일상에 치이며 운동과 멀어졌습니다. 반면 동지는 돌아왔습니다. 심지어 대학생 시절보다 더 높은 정치적 수준에 도달했습니다. 백만 명 중 한 명꼴일 것입니다. 큰일을 해내신 것입니다.

제가 볼셰비키그룹에서 활동을 시작한 이래로 10명 정도의 사람이 우리에게 접근했다가 사라졌습니다. 개중에는 한동안 헌신적으로 활동했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반면 동지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었습니다. 동지는 학습, 회의, 집회에 빠진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도훈 동지 몸 상태를 생각할 때 정말로 우리 조직을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항상 그 자리에 있으면서 우리를 지지해준 동지이기에 그 부재는 참으로 참담합니다.

저는 712HK동과 함께 병문안을 갔습니다. 저는 그때 죽음을 맞아서 혹시 종교에 대한 믿음이 생기지는 않는지 물었습니다. 훈동은 웃으며 가족들이 자신을 위해 기도한다고 말씀하시더니, 자신은 공산주의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지금껏 사람이 죽음을 맞이하면, 없던 믿음도 생기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완전히 지우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도훈 동지는 성경 대신 <국가와 혁명>과 마지막을 함께 하셨습니다. 죽음의 공포조차 과학에 대한 확신을 꺾을 수 없다는 사실을 눈앞에서 봤습니다. 그러니 저도 죽을 때까지 공산주의자로 남을 것입니다.

최근 동지의 투병 과정에서 더 잘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가 많습니다. 다만, 단 한 가지 후회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712일 병문안에서 정OO 동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온 마음을 다해 전달한 것입니다. 동지가 그 말을 듣고 기쁨과 슬픔의 눈물을 흘렸던 순간이 기억납니다.

그 마음은 저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동지를 만나기 전날 저는 K동을 만나 동지에 대한 애정 어린 사랑을 느꼈습니다. 말하던 순간이나 지금이나 저는 그때 그 사랑이 저를 거쳐 도훈 동지에게 전해졌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더 이상 그 사랑은 동지에게 닿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동지가 평생 사랑했던 노동계급에게 닿을 수는 있습니다. 훈동이 사랑했고 우리가 사랑하는 세계 노동계급에게 그 사랑을 쏟읍시다. 진정으로 그들을 사랑하는 일인 세계 혁명과 공산주의 건설을 이룹시다.

 

Moon:

혁명동지 여러분, 오늘 우리는 우리 그룹의 열성적인 회원이셨고, 평생을 혁명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으셨던 한 혁명가를 추모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제가 도훈 동지를 처음 뵌 건 2021, 살을 에이는 겨울 바람이 불던 2월의 민중총궐기였습니다. 당시 저는 막 대학 입시를 마친 재수생이었고, 인생에서 처음으로 어느 단위의 소속으로 집회를 나가는 것이었기 때문에 무척이나 긴장하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그때 여의도역에서 나와 여의도공원으로 이동하던 와중에, 우리의 대오에서 지팡이를 짚고 열심히 걸어가시던 도훈 동지의 뒷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때 K동께서 말해주시길 우리 그룹에도 동지의 누나와 같이 장애를 갖고 있는 분이 계신다. 바로 저 분이다.”라고 말씀해주신 기억이 납니다.

당시 저는 대단하다, 몸에 장애를 가지고 있으심에도 저렇게 활동에 열심히구나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혹시나 집회 도중 장애 때문에 불편한 상황이 생기시면 도와드려야겠구나, 이 정도로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저의 그런 생각이 얼마나 오만한 생각이었는지 시간이 지나면서 스스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가 집회에 참석할 때마다 언제나 같이 우리 볼셰비키그룹의 대오에서 꿋꿋이 자리를 지키던 동지의 모습을 보고 저는 참 많은 생각이 들었었습니다.

동지는 단순히 주변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능동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는 독립적인 주체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도훈 동지는 명료한 사고와 날카로운 판단으로 이 세계를 과학적으로 인지하고 분석할 줄 알았던 한 명의 이론가이자 실천가 즉, 혁명가였습니다. 저는 단순히 도와드려야겠다라고만 생각하던 제가 얼마나 무지했는지, 또 오만했는지 매 집회 도훈 동지를 보면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비록 저는 긴 대화를 나누지 못했지만 도훈 동지와의 짧은 대화 속, 그리고 집회에서의 도훈 동지의 모습은 제 기억 속에 동지를 언제나 당당하게 서 있는 하나의 주체로서 각인시켰습니다.

그런 동지의 투병 소식을 듣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부음을 듣게 되면서 저는 엄청난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랜 세월 운동에 헌신하던 한 명의 훌륭한 혁명동지와 이제 더 이상 함께 하지 못한다는 것은, 실로 우리 운동에 있어 크나큰 손실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도훈 동지의 죽음은 별이 떨어진 것이 아니라 새로운 빛이 되어 우리의 앞길을 밝히기 위해 잠시 숨은 것일 뿐이라고, 비록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도훈 동지와 함께 할 수 없지만 그의 정신은 볼셰비키그룹의 앞길을 밝혀주는 횃불이 되어 남아 있는 동지들의 선봉에 서서 붉게 타오르리라 저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옆에서 헌신적으로 병간호를 해주셨던 도훈 동지의 가족분들, 정말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볼셰비키그룹의 혁명동지들, 동지의 넋을 기리고 그의 정신을 계승해 더욱 가열차게 투쟁합시다. 제국주의 패권의 균열 사이에서 터져 나오고 있는 모든 피억압 인민과 민족의 해방운동을 올바른 세계혁명의 방향으로 인도할 시기입니다. 전 세계가 혁명의 붉은 물결로 물들 때까지 전진, 또 전진합시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추모시

볼셰비키그룹 전사 고 정OO

 

도훈 동지

56세로 사망한 벗

고 정OO

잘 가시라

 

201551일 시청광장에서 처음 만난 이래

우리는 8년 동안 거의 일주일마다 만났다.

 

그대도 인정할 테지?

그런 애틋하고 뿌듯한 관계는 오직 뜻을 같이 하는 사람

/와만 가능하다는 것

 

국가와 혁명, 제국주의론, 배반당한 혁명을 학습하고

노동자국가의 방어, 영미 국수주의, 중국 문제를 토론하고

새로운 참여자 소식

그가 얼마나 건실하고 희망적인지를 전하며

우리는 8년을 함께 했다.

 

둘만의 대화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시청 도서관 앞 계단에 앉아,

광화문 가판대를 지키며,

집회를 마친 종로 1호선 지하철역에서

그리고 전화로 얘기를 나누었다.

 

여러 차례 다짐한 것은 이렇다.

우리는 그 자체로 힘이 된다,

젊은 동지들에게 우리가 그저 버텨주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새 동지들에게 우리가 쥔 보물지도, 그리고 바통을 무사히 넘겨주는 것이 우리 일이다.’라고

 

견뎌내기가 우리 첫 번째 임무라고

그러니 견디고 또 견뎌내자고.

 

싱크홀처럼 꺼져갔던 그 30여 년 반동의 시기

가장 날카로운 사상을 만났고

그것을 또 날마다 갈아 시퍼렇게 벼려내었고

바로 그 때문에 가장 많은 적에게 둘러싸이고

그래서 가장 차가운 냉대를 받는 사상을

끝내 같이 움켜쥐었다.

 

최소저항선을 찾지 않고 버텨내자고

사물의 이름을 올바르게 부르며 진실을 사수하자고

합의를 보았다.

 

그것이,

소련 붕괴 이후의 세대,

쓰나미처럼 덮친 반동의 시기에

인생의 청춘기를 맞고,

그 시간을 살아야 하는 마르크스주의자의 숙명일 거라는

얘기를 나누었다.

 

때론, 1917년 혁명의 때에

페트로그라드 내전의 거리를 기관포와 같이 달리는 것도 가치 있고,

그 시기 꽃다운 전사로 붉은 깃발에 덮이거나,

어쩌면 용케 살아남아 노동자정부 수립 현장에 있는 것도

자랑스러울 테지만,

 

이 길게 이어지는 절대 가뭄의 시기

시들지 않고 버텨내는 것도 아름답지 않냐고,

혁명과 인류에 가치 있는 일 아니냐고.

 

그대는 그 전선에서 지금 스러졌다.

무정한 벗의 죽음을 본다.

허탈하다.

원망스럽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시간을 이겨낼 장사는 없다.

그대는 조금 더 빨랐을 뿐

 

보물지도는 건넸나? 동지의 바통은 넘겨주었나?

대답을 미처 듣지 못했다.

 

그러나 젊은 동지들은 벗의 헌신을 보았을 것이다.

부주의한 행인에 조금이라도 부딪히면

크게 넘어져야 하는

위험하고 불편한 몸을

등산스틱 하나에 바들거리며 의지하여

종로와 광화문의 인파

혹독한 겨울을 버티던 모습을

생존 한계선에 살면서도

그 생계비 일부를 떼어 재정적으로 기여하던 모습을

학습과 회의에 개근하던 모습을

정치 토론에 늘 진지하였고 물러섬 없이 자기 의견을 개진하던 모습을

유머 감각을 결코 잊지 않으려 때론 무리하던 모습을

 

혁명가의 인생은 아름답노라는 트로츠키

선배 동지의 의견에 더불어 고개 끄덕이며

분명하게 동의를 표하고 떠난 동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특히 무엇이 그렇게 아름다웠는지

물어볼 새도 없이 그대는 떠났다.

삶을 정리할 시간도 없이 낙하하듯 가버렸다.

 

훈동 휴대폰은 복구했어요?”

89일 보낸 마지막 문자.

그러나,

휴대폰은 복구했어요?”

이 문자엔 갈고리 표시가 끝내 찍히지 않았다.

 

동지의 삶과 죽음을 통해 다시 깨닫는다.

시간은 한치의 허세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

천년만년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

그러다가 후딱 지나며,

아뿔싸 하는 찰나에 마무리된다는 것

그러니

후회 없이 살아야 한다는 것

 

“I stake my life!”

트로츠키는 목숨을 걸고

싸우다 전사했다.

 

도훈 동지

사랑하는

고 정OO

그대도 목숨 걸고 싸웠고

그 싸움 과정에서 볼셰비키그룹 전사로 사망했다.

 

나도 목숨을 걸었다.

2023827

볼셰비키그룹 전사 고 도훈 동지 추모식에서

친애하는 벗 K

 

 

202392

 

볼셰비키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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