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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락처 :
bolle1917@gmail.com

* 원출처 – 국제볼셰비키그룹(IBT)


혼돈 속의 중동

제국주의, 이슬람 반동 그리고 시리아 내전


[역주]

[원래 글의 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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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 자본과 제국주의 지정학

지하드 테러의 기원: CIA에 의한 아프가니스탄 반동의 군사화

유엔/미국/영국 전쟁광들이 이라크를 유린하다

이라크가 종파갈등에 휩쓸리다

CIA가 지원하는 시리아 지하드

제국주의자들이 ‘살라피주의 공국’을 기획하다

계산을 흩트려 놓은 러시아의 개입

제국주의자들의 시리아 분할 계획

시리아 정치상황에서 터키, 쿠르드, 제국주의자들

PKK의 공상적 지방자치주의 그리고 쿠르드족의 자결권

가짜 좌익들이 이슬람주의 ‘혁명’과 연대하다

제국주의 개입의 부산물인 ISIS의 야만

중동사회주의연방을 위하여!



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과 프랑스가 오스만 제국의 아랍영토를 분할하면서 수립된 중동의 국가체제가 무너지기 일보직전이다. 원래 살던 인민들의 정치, 종교, 민족 정체성에 대한 고려 없이 멋대로 그어진 국경선은 한 세기 가량 지속되었지만 많은 부분들이 곧 지워질 것 같다. 1991년 (UN깃발 아래 수행된) 이라크 정복으로 시작된 25년간의 잔혹한 제국주의 군사개입은 이 지역의 사회적, 정치적 구조를 심각하게 유린했다.

미국의 ‘정 권 교체’ 열망으로 지펴진 시리아 내전은 4년 동안 25만 명의 목숨을 빼앗았고, 최소 1천 억 달러 가치의 사회기반시설을 파괴했으며, 천백만 명의 인민들이 고향을 등지게 함으로써 유럽의 ‘난민 대란’을 낳았다. 이 갈등은 인종적, 종파적 적대를 포함한 시리아의 사회모순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반란은 그것이 시작될 때부터 미국과 터키, 사우디아라비아 그리고 카타르 등 그 지역 여러 국가들의 방대한 도움에 의지해 왔다.

시리아는 세속적 문명화를 추구하는 (소수인, 시아파에서 파생된 알라위파가 중심이 되고 1970년부터 2000년까지 하페즈 알 아사드Hafez al-Assad가 그리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 아들 바샤르가 이끄는) 바트당 정권과 (지방과 도시하층의, 사회적으로 후진적이고 전통적 부위를 이루고 있는 다수인, 수니파에 뿌리를 둔) 무슬림형제단이 서로 오랫동안 적대해 온 역사를 가지고 있다. 1982년, 아사드 정권은 무슬림형제단 봉기를 진압하고, 반란을 지지한 도시 하마Hama의 시민 수천 명을 학살하고 이슬람주의 반대파를 불법화했다.

최근 몇 년 동안 중동 지역 전체에서, 고향을 떠난 농업노동자들이 도시로 몰려들었고 빈민촌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투쟁을 해왔다. 시리아의 제국주의가 촉구한 ‘시장개혁’ 정책 참여는 이미 가장 고통스런 삶을 누리고 있던 인민들에 대한 압박을 강화했고 그것은 지금과 같은 갈등을 낳는 계기가 되었다.

“한때 밀을 자급자족했던 시리아는 갈수록 더 비용이 많이 드는 곡물수입에 점점 더 의존하게 되었다. 2011~12년에 곡물수입이 1백만 톤 더 증가했는데, 2012~13년에는 수입이 다시 30% 가까이 늘어서 총 4백만 톤에 이르렀다. 가뭄은 시리아의 농촌을 강타했고, 여러 해의 흉작을 낳았다. 그러자 수니파가 지배적인 농촌에 살던 인민 수십 만 명이 소수인 알라위파가 전통적으로 우세했던 해안도시들로 몰려들었다.

“아사드 정권은 오랫동안 다수 수니파를 배척하고 (소속 구성원들이 서로 친척이거나 부족 동맹인) 알라위파를 선호했는데, 이는 종파갈등을 낳았고, 대규모 인구이동은 이 종파 갈등에 불을 댕겼다.”

“특히 2001년 이후, 그 지역 기준으로 볼 때에도 시리아 정치는 점점 더 억압적이었는데, 아사드 정권이 역점을 두어 추진한 IMF의 시장개혁은 실업과 불평등을 더욱 심화시켰다. 새로운 경제정책으로, 정권과 사적 영역의 부패한 유착이 더 심해지고 알라위파 군부엘리트와 기생적 기업가들에 더욱 힘을 실어주는 정부 후원 벤처기업은 확장되었지만, 농촌 지역 수니파 빈민의 삶은 악화되었다.”—Guardian, 2013년 5월 13일


개혁’은 (종종 정권과 좋은 연줄을 가진 자에게 큰 혜택을 주는) 국가 자산의 매각과 교육, 의료 그리고 기타 사회보장서비스들의 사유화를 의미했다. 사유화된 기관들의 혜택을 받을 수 없는 도시빈민들은 세속주의에 반대하는 이슬람주의 정치 선동을 곁들여 기초적인 사회보조를 제공하는 종교 자선단체들에 점점 더 의존하게 되었다.

시리아 바트당 정권은 오랫동안 미 국무성 살생부에 올라 있었다. [1]  이른바 아랍의 봄이 한창이던 2011년 나토는, 정권에 저항하는 인민에 대한 살해 위협을 막아야 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또 다른 세속주의 독재자로 정권교체대상자가 있던 리비아에 개입했다. 그로부터 몇 개월 뒤 무아마르 카다피는 끌어내려졌다.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의 바트당 정권은 자신의 생명력이 그보다 더 질기다는 것을 입증했다. 서방 자본주의 언론들은 입을 모아 억압적인 독재정권에 맞선 인민의 저항이라는 단순한 이야기로 그 반란을 포장하지만, 2011시리아 혁명에서 무슬림형제단의 이슬람주의 지하드 계승자들은 순식간에 주도권을 장악했다. 친제국주의 이론가들은 아사드 정권이 (마지못해서일 때도 있지만) 인민 다수의 지지를 누려왔다는 사실을 또한 무시한다. 아사드의 가족과 정권의 중추들이 알라위파임에도 불구하고 (아사드의 부인 아스마는 예외적으로 수니파), 다른 많은 종족들과 종교적 소수파들 그리고 다수인 수니파의 상당수는, 보수적이고 종교적인 반대파에게 기회를 주는 것보다, 상대적으로 덜 종파적이고 세속적인 바트당 정권 하에서의 삶을 더 선호한다. [2]

지역 동맹자들과 더불어 미국은, 2006년 이스라엘 군대를 격퇴한 전사들을 거느린 헤즈볼라 그리고 이란과 밀접히 연계되어 있고 중동에서 러시아의 유일한 동맹인 이 정권을 끌어내리고 싶어 안달이다. 시리아와 러시아의 연계는 사우디 석유를 지중해로 나르려는 미국 석유 거대기업 아람코Aramco의 ‘아라비아 관통 송유관’ 계획을 시리아 통치자들이 거부했던 194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로 인해 시리아는 1949년 미 중앙정보국CIA의 첫 번째 ‘정권교체’ 쿠데타 목표물이 되었다. [3] 쿠데타는 실패했고, 뒤이은 여러 시도마저 실패했다. 이는 시리아 바트당 정권과 소련 정보기관 사이의 더욱 깊어진 유대 때문이었다. 이 관계는 지금까지 이어져왔고, 이와 더불어 오늘날까지 미국 석유거대기업과 그들의 지역 동맹자들에게 시리아는 눈엣가시이다.

 

석유 자본과 제국주의 지정학

2014년 미국의 <군사저널Armed Forces Journal>에 실린 논문에서 포트 레번워스Fort Leavenworth에 있는 <미국지휘참모대학U.S. Command and General Staff College>의 로버트 타일러 소령은 최근 시리아에서 발생한 대재난의 진정한 원인이 종파나 종교 갈등이라기보다 “돈 문제”라고 말했다.

“2009년 카타르는 시리아와 터키를 거쳐 유럽으로 가는 천연가스관 건설을 제안했다. 아사드는 수니파 사우디아라비아와 카타르의 접근을 거절하는 한편, 그 대신에 시아파가 지배적인 국가들이 유럽 천연가스 시장에 접근할 수 있도록 동쪽으로 가스관을 연결하는 조약을 이라크, 이란과 체결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카타르는 시리아를 자신들의 통제 하에 두고 터키로 향하는 자신들의 가스관을 운영하기 위해 아사드 제거를 시도하고 있는 것 같다.”

. . .

“지정학적, 경제적 관점에서 볼 때, 시리아 분쟁은 내전이 아니다. 그것은 국제 열강들이 2016년 가스관 개통 준비를 둘러싸고 지정학적 체스판에 개입한 결과물이다. 가스관을 통해 세 시아파 국가들에게 이익을 안겨줄 아사드의 결정은 또한 러시아가 아사드를 통해 시리아 석유 및 중동지역과 연계되어있음을 보여준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카타르 게다가 알카에다 및 다른 조직들은 아사드 퇴진을 책동하면서 이를 그들이 소망해온 수니파의 다마스쿠스 정복 기회로 삼고자 한다. 이를 통해 그들은 ‘새로운’ 시리아 정부를 공동으로 통제하고 가스관 수익을 공유하길 희망한다.—<군사저널Armed Forces Journal>, 2014년 3월 21일


중동지역에 매장된 에너지자원에서 이익을 뽑아내려는 외부세력의 이해관계로 인해 유럽으로 가는 수송로가 이리저리 틀어지는 것은 전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중동 석유 통제권을 둘러싼 투쟁은 한 세기 이상에 걸쳐 제국주의 지휘부의 핵심 관심사였다.

영국 해군이 동력자원을 석탄에서 석유로 대체하기 시작할 무렵인 1903년 5월, 외교장관 랜스다운 경은 상원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영국 정부는 ‘페르시아 만에 다른 세력이 해군 기지나 요새화한 항구를 건설할 경우 그것을 영국의 이익에 대한 매우 심각한 도전으로 간주’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가진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이를 저지할 것이다. 인도 총독 커즌 경은 ‘이 선언은 중동지역에 대한 우리의 먼로 독트린[북남미 대륙에 있는 나라들에 대해 유럽의 간섭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내용으로 미국 대통령 제임스 먼로가 1823년 발표한 대외정책]이다.’라고 들뜬 어조로, 말했다.—다니엘 예르긴Daniel Yergin, 1991, 『The Prize: The Epic Quest for Oil, Money, and Power』에서 인용


석유는 저장과 적재가 훨씬 싸고 쉽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석유는 석탄의 두 배나 되는 열량을 가지고 있다. 1923년 1차 세계대전 동안 해군대신이었던 윈스턴 처칠에 따르면, 석유는 “계산하기 힘들 만큼의” 이익을 안겨주는 것이다. “석유를 사용하면 모든 종류의 선박이 더 적은 크기와 더 적은 경비로 더 많은 탄약을 싣고 더 빨리 운항할 수 있게 된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영국은 상당한 석탄을 가지고 있지만, 석유는 없다는 점이 그것이다. 그 점 때문에,

“시장과 독점체에 상당한 문제를 안겨준다. 석유 공급은 외국이 통제하는 거대한 석유 트러스트의 손에 있다. 해군을 석유 체제로 전격적으로 전환시키는 것은 실상 아비규환으로 뛰어드는 격이다.…만약 우리가 그 위험을 극복해 낸다면 우리는 해군의 총체적 전력과 효율성을 훨씬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다. 더 좋은 배와 더 훌륭한 승무원, 더 높은 수준의 경제와 보다 증강된 전력, 한 마디로 말해 그것을 정복하는 것은 모험에 대한 커다란 보상이었다.”—윈스턴 처칠, 「The World Crisis, Part One 1911-1914」


그 난관들은 중동석유를 가로채는 방식으로 해결되었다.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결국 우리는 영국-페르시아석유협약을 체결할 수 있었다. 2백만 파운드의 초기 투자가 들어간 그 계약으로, 해군에 방대한 양의 석유를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석유자산 통제권을 통해 얻은 가치는 현재 가치로 수백만 파운드에 해당하는 것이다.”—같은 글


어마어마한 천연자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국의 지배는 그 지역을 상대적으로 낙후된 채로 남게 했다. 물론 외국 기업들은 돈을 갈퀴로 긁고 있었다. 식민 지배자들은 (종종 세습귀족으로 떠받들려지는) 말 잘 듣는 지역 하수인들을 이용한다. 외국의 지지를 받고 떡고물을 떼어먹는 대가로, 그 하수인들은 석유개발이익 대부분을 다국적 석유기업 투자자들이 챙길 수 있도록 보증한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갈 무렵, 미 제국주의는 영국과 프랑스 제국주의 세력을 밀어내고 중동에서 지배적인 세력으로 떠올랐다. 1950년 10월 이븐 사우드 국왕에게 보낸 편지에서 미국의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과거 여러 차례에 걸쳐 확인했던 것처럼, 미국은 앞으로도 사우디아라비아의 독립 유지와 영토보전을 원한다는 것을 폐하께 다시 보증하고 싶습니다. 당신의 왕국은 어떤 위협도 받지 않을 것이고, 그것은 당분간 미국의 관심사가 아닐 것입니다.”—예르긴의 윗글


제국주의 후견인은 항상, 그 지역 인민이 그 나라 천연자원을 통제할지도 모르는 그 “위협”을 특히 경계해 왔다. 1957년 1월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는, 그 지역 어떤 정권이든 “무장봉기”에 직면하면 군사적으로 지원할 것이라는 내용의 「중동 상황에 대해 의회에 고하는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1921년 영국 힘으로 즉위한 하심가Hashemite[예언자 무함마드의 가문으로 20세기 초에 영국과 협정을 맺어 오스만 제국에 맞선 아랍인들의 반란을 지도했고 과거 헤자즈, 시리아-아랍, 이라크, 예멘 왕국의 왕가였으며 현재는 요르단 왕국의 왕가] 왕정이 이라크 민족주의자 ‘자유 장교들’이 조직한 쿠데타로 1958년 7월에 타도되었을 때, 아이젠하워는 미국 병력을 레바논에 파견했고, 영국 병사들은 요르단에 상륙했다. 평화와 안정을 확보한다는 구실을 내세웠지만, 그들의 진짜 목적은 이라크 석유에 대한 서방의 통제를 지키는 것이었다.

“미국 정부가 ‘이라크에서 일어난 쿠데타를 되돌리기 위한 무력 개입’을 ‘적극적으로 고려’하고 있다는 뉴욕 헤럴드 트리뷴지Herald Tribune의 보도는 이라크가 [이 파견의] 진짜 목표물임을 시사한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이라크 혁명정부가 서방의 석유 이익을 존중한다면, 무력 개입이 이라크로 확대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미국과 영국 지도자들이 공동으로 결정했다.”—「Beyond the Storm: A Gulf Crisis Reader」, 1991


서방의 정보기관들은 제국 자산에 대한 민족주의 또는 좌익 운동의 잠재적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이슬람 반동세력을 수십 년 동안 이용해 왔다. 그 초기 형태는, 모하마드 모사데크Mohammad Mossadeq가 (지금은 영국석유British Petroleum–BP로 알려진) 영국-이란석유의 자산을 국유화했던 1951년 이란에서 나타났다. 미국은, 영국에게 개입하지 말라고 먼저 경고한 뒤, 이란 석유를 미국 회사들과 나눌 뜻이 모사데크에게 없음을 확인하고는, 이른바 ‘정권 교체’ 작업에 착수했다.

모사데크를 성공적으로 제거한 뒤인 1953 년, 1925년 군사쿠데타로 수립된 바 있었던 팔레비 왕정이 복고했다. 이란은 그 이후 25년 간 미국 중동지배의 중심축이었다. 모사데크의 현대화 계획에 극렬히 반대했고 미 CIA의 쿠데타를 적극적으로 도왔던 지하조직 <이슬람열성신자들Devotees of Islam> 은, 약간의 사회경제적 개혁을 추구한 이란 왕조의 1963년 ‘흰색 혁명’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대적이었다. <이슬람열성신자들>과 함께 1953년의 사건에 참여했던 아야톨라 호메이니는 추방당했다. 그리고 1978년에 그는 팔레비 왕조를 타도하고 이란의 미국 예속을 끊어낸 반동적인 이슬람주의 혁명 지도자로 불쑥 그 모습을 드러냈다.

 

지하드 테러의 기원: CIA에 의한 아프가니스탄 반동의 군사화

페르시아 만에서 반동의 방파제와 제국주의 행동대 노릇을 하던 이란 하수인 정권을 잃은 것은 미국에게 커다란 손실이었다. 1980년 1월, 육지로 둘러싸인 아프가니스탄에 소련이 군사개입을 하자, “중동석유의 자유로운 이동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라며, 지미 카터 대통령은 ‘카터 독트린’을 발표했다. 중동은 “거대한 전략적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그 지역은 미국이 장악하고 있는 전 세계 석유 수출물량의 2/3를 지니고 있다.”라고 카터는 말했다.

“우리의 태도를 분명히 하자. 페르시아 만 지역 석유에 손대려는 어떤 외부 세력의 시도도 미국 이해에 대한 치명적 도전으로 간주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침해는 군사력을 포함한 필요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격퇴할 것이다.”—예르긴의 윗글


1980년 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개입이 페르시아 만에 대한 접근과 전혀 관련이 없다는 것은 카터 역시 잘 알고 있었다. CIA가 모집하고 무장시킨 이슬람 반동들이 일으킨 무장 폭동에 맞서 우호적 정권을 방어하기 위함이었다. 서방 언론이 아프간의 ‘자유의 전사들’이라고 묘사하는 그들은 여성들을 교육하고 신부 값을 인하하며 적절한 토지개혁을 실시하려는 친 소련 정권의 계획에 분개했다. 미국의 목표는 퇴보한 노동자국가 소련의 영향력을 억제하고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친 소련 아프간 정권과 아프가니스탄에 주둔한 소련군대를 격퇴시키기 위해, 미국 독일 그리고 다른 나토 회원국들은 아프간 무자헤딘뿐만 아니라 오사마 빈 라덴을 포함한 아랍 지하드주의자들에 의지했다. 당시 잘 알려지지 않았던 오사마 빈 라덴과 지하드주의자들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재정적 군사적 지원을 통해 양성되었다. 당시 사우디 해외정보국의 수장이었고 빈 라덴의 연락선이었던 투르키 알 파이살 빈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Turki al Faisal bin Abdulaziz al Saud 왕자가 핵심적 역할을 했다. 오늘, 그가 뮌헨안보총회의 ‘자문위원회’에 그의 정치적 식견을 제공했다.”—German Foreign Policy, 2005년 5월 28일


사우디와 파키스탄 정보국과 더불어 CIA 는, 아프간 무자헤딘을 효과적인 군사조직으로 만드는 데에 성공했고, 이는 아사드 끌어내리기를 포함한 미래의 ‘정권교체’를 위한 가치 있는 교훈이 되었다. 그러한 개입 모두는 ‘인도주의’라는 그럴 듯한 포장지에 싸여 진행되지만, 중동에서의 근본적 목표는 언제나 자원 장악이다. [4]

카불의 세속 좌익민족주의 정권을 몰아낸 아프간 지하드주의자들은 탈레반 통치 시대를 열었다. 한편 오사마 빈 라덴과 다른 무자헤딘 요인들은 무슬림 세계에서 서방 침략자들을 몰아내기 위해 알카에다를 조직했다. 2001년 세계무역센터의 범죄적 파괴 이후 중동에서 높아진 빈 라덴의 인기를 언론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말하지만, 우리는 그 당시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 있다.

“이에 대한 설명은 상당히 간단하다. 빈 라덴의 정치노선이 그 지역 인민 대다수가 원하는 것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만약 3가지 조건이 충족된다면, 알카에다의 지하드[성전] 를 해산할 것이라고 그는 말해 왔다. 첫째, 가장 성스러운 이슬람 성지인 메카와 메디나가 있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미군이 철수할 것, 둘째, 백 만 명 이상의 인민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이라크에 대한 경제제재를 중단할 것, 셋째, 이스라엘이 요르단 강 서안과 가자 그리고 동예루살렘에서 철수하고 그 지역에 팔레스타인 국가를 수립할 것.

“대부분의 미국인은 이 요구들에 반대하지 않을 것이고, 그 이유로 언론은 이것을 다루지 않았다. 빈 라덴의 궁극적 노선은 물론 중동 전역에 걸쳐 근본주의적인 이슬람 정권을 수립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첫걸음으로 그 지역에서 ‘이교도’들을 쫓아내는 것이 지금의 주된 관심사이다.”—「제국주의의 피비린내 나는 발자취」, <1917> 24호

 

유엔/미국/영국 전쟁광들이 이라크를 유린하다

사담 후세인이 수장인 세속 바트당 정권을 목표로 한 유엔의 1991년 ‘걸프전쟁’은 25년 동안 전개되었고 그로 인해 이라크 사회는 초토화되었다. 점령기간이 너무 길어질 것을 우려한 미국 주도 침략군은 이라크군을 격퇴한 이후 철수했고 경제제재를 통해 정권을 무너뜨리는 방법을 취했다.

정권은 생존했지만 이라크 인민들의 희생은 끔찍했다. 유엔 아동기금 유니세프UNICEF는 이 경제 제재로 5세 이하 어린이들이 최소한 50만 명 이상 죽었을 것이라고 계산했다. 빌 클린턴 정권 당시 미 국무성 장관이었던 마들렌 올브라이트Madeleine Albright에게 이 참담한 범죄에 대해 묻자, 그는 “희생이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우리는 생각한다.”라고 간단히 대답했다.

물론 이 대규모의 무차별적인 잔학행위는 서방 언론이 잘 깔아준 멍석 위에서 진행되었다. 이에 비하면 ISIS의 자살폭탄, 처형 그리고 참수 장면을 담은 끔찍한 비디오는 소규모이고 몇몇 개인에 한정된 것이다. 무방비의 신식민지에서 무고한 인민 수십 만 명의 학살을 조용히 기획하는 제국주의 ‘인권’ 옹호자들의 이 기괴한 위선은 거의 믿을 수 없는 수준이다. 존 필거는 소위 ‘자유세계’를 이끄는 지도자들의 정신병적인 태도를 적절하게 묘사한다.

“카메론[영국 수상], 올랑드[프랑스 대통령], 오바마 그리고 그들의 ‘자발적 국가연합’엔 따분하고도 반사회적인 수사가 난무한다. 그들은, 이전 공격으로 인한 피가 아직 채 마르지도 않은 [이라크] 도시들에 3만 피트 상공으로부터 폭격을 가하자고 처방한다.”—『From Pol Pot to ISIS: The blood never dried


광대한 석유자원을 직접 통제하기 위하여 중동 중심부에 강력한 군사거점을 마련하는 것이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목표였다. 몇몇 전략가들은 아랍 중동의 지도를 새로 그리는 것이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최선일 것이라고 제안한다. 2002년 9월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두 번째 침공 6개월 전, CIA와 연계된 스트렛포[Stratfor: 세계 정보와 전략을 다루는 미국의 사설 회사] 연구원들은, 미 부통령 딕 체니와 국방성 차관 폴 월포위츠가 이라크를 쪼개고 “미국의 장기적이고 대규모 군사주둔을 정당화하기” 위해 종족 갈등을 이용하는 방법을 논의하는 중이라고 보고했다.

“이라크 전역을 통제하려는 새 정부의 시도는, 미군이 중간에 낀 채 수니파, 시아파 그리고 쿠르드족 사이의 내전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 치열한 전투는 석유시설들을 둘러싸고 전개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하심가 정부 아래에서 요르단과 이라크 합병은 미국에 몇 가지 전략적 이점을 안겨줄 것으로 여겨진다.

“먼 저, 반은 영국인인 [요르단 왕] 압둘라의 친미적인 새 왕국 건설은 미국에 상당히 유리한 군사 균형을 이 지역에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라크가 주권국가의 지위를 잃게 되면, 수도가 요르단 암만에 있는 한, 어느 날 바그다드에 반미정부가 들어설 걱정이 사라지게 된다. 그들 사이의 커다란 땅덩어리가 친미세력의 통제 하에 들어가게 된다면, 현재적이고 잠재적인 미국의 지정학적 적대국인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그리고 시리아는 서로 고립될 것이다.

“그와 똑같이 중요한 것으로, 미국은 중동지역에 장기적인 대규모 군사주둔을 정당화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 태어난 신생국이 미국의 보호를 원하고 석유시장과 공급의 안정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 다시 미국이 이라크 석유를 직접 만질 수 있게 할 것이고, 만약 사우디와 대립할 경우 사우디 석유를 이라크 석유로 대체할 수도 있을 것이다.”—「ProFuture Investments


2003년 미국이 ‘자발적 국가연합’을 이끈 자신의 똘마니 영국과 함께 한 이라크 침략과 점령은, 남아 있던 사회시설을 초토화시키고 나라를 산산조각 내었다. 나라를 혼란으로 밀어넣고 종파 유혈충돌을 낳으며 그 침략으로 50만 명 가량이 죽었다.

사담 후세인을 끌어내린 후, ‘테러에 대한 세계 전쟁’에 미국과 함께 했던 이웃나라 시리아와 이란의 정권교체 가능성을 미국 권력자들이 의논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시리아와 이란은 점령군에 저항할 준비가 되어있기만 하다면 시아파이든 수니파이든 어떤 세력이든지 지원할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이라크 인민들의 광범위하고 효과적인 저항은 미국 입안자들을 깜짝 놀라게 했고, 지금까지의 모든 모험은 엄청난 돈만 탕진한 채 실패로 귀결되었다. 시아파 다수의 지지를 얻어내기 위해, 점령자들은 바트당 정권의 군사/경찰력과 더불어 국가기구를 해산했다. 시아파 대중은 점령자들을 해방군으로 맞이하길 거부했다. 점령 1주년 기념일 무렵 수니파 전사들의 저항에 시아파 전사들이 가세했다.

“전 국무성 관료였던 부르스 젠틀슨은 ‘우리는 지금까지 이것을 사담 후세인 잔당이거나 이러저러한 잔챙이들이 벌이는 사소한 사건으로 대했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것은 반미주의를 공유하고 점점 더 강력해지는 세력들이 일으킨 광범위한 봉기이다.’라고 말한다.”

“최근 미군 점령에 맞서 경쟁 세력인 이라크 수니파와 시아파가 협조하고 있다는 보도들이 있었다.”—USA Today, 2004년 4월 13일


무크타다 알 사드르Muqtada Al Sadr의 강력한 시아파 군사조직인 마흐디 부대Mahdi Army는 2004년 이라크 도시 나자프에서 미군에 맞서 치열하게 싸운 바 있다. 영국과 미국 군대가 2004년 11월 팔루자를 공격하자, 이 부대가 수니파를 적극적으로 도왔다.

 

이라크가 종파갈등에 휩쓸리다

2006년 2월 모든 것이 바뀌었다. 사마라의 중요한 시아파 성지인 알 아스카리 사원이 파괴되자, 종파주의 유혈사태가 시작되었다. 누구 짓인지 밝혀지지 않았다. 점령자들은 알카에다를 비난했지만 알카에다는 혐의를 부인했다. 한편 이란과 헤즈볼라는 미국과 이스라엘 정보기구를 지목했다. 분명한 것은 이 범죄를 기획한 자는 시아파와 수니파 공동체 사이에 쐐기를 깊게 박아 넣는 데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마흐디 부대는 시아파의 복수전을 이끌었다.

“그 다음 두 해 동안 고문당한 수 천 명의 시신이 바그다드 거리에서 수거되었다. 마흐디 부대는 그 당시 자기 손을 떠나있었고 그는 2007년 군대에서 물러났다고 무크타다가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수니파에게 무크타다는 잔인한 행위를 그들에게 저지른 살아있는 상징이 되었다.”—Independent, 2013년 3월 6일


이라크를 삼켜버린 지독한 종파주의는 이라크알카에다(AQI)를 급속히 성장시켰고 이는 이라크/시리아이슬람국가(ISIS)의 모태가 되었다. 1980년 후반 아프간 무자헤딘에 몸담았던 아부 무삽 알자르카위Abu Musab al-Zarqawi가 AQI를 지도했다. 자르카위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상당히 허무적인 전술을 통해 ISIS의 미래를 예시했다. 어느 날은 그가 미국 포로의 목을 톱으로 써는 비디오를 공개했다. 알카에다 지도부는 좋아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2005년 알카에다 지도자들은 자르카위에게 그런 끔찍한 짓을 공개하는 것을 그만두라는 의사를 전했다. 그들은 ‘전투의 절반 이상은 언론에서 전개된다.’라는 현대적 전략 경구를 사용한다.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이 패배한 이유는, 지금 자르카위가 그러는 것처럼, 지나치게 용렬하고 종파적인 행동에 의존하는 것 때문이라고 그에게 말했다.”—New York Review of Books, 2015년 8월 13일


인민의 분개를 식히기 위해, 미 점령당국은 시아파 지도자 누리 알 말리키Nouri Al Maliki가 이끄는 꼭두각시 정부를 앉혔다. 그러나 쿠르드족, 수니파 그리고 심지어 다수의 시아파마저도 부패한 말리키 정부에 등을 돌렸다.

“공공기금 도적질과 대규모의 무능력은 그 정부가 충분한 전기, 깨끗한 물 그리고 공중위생을 공급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노동력의 1/3은 실업 상태이고, 불완전고용까지 포함하게 되면 그 수는 반이 넘는다. 종종 뇌물을 써야만 그나마 직장을 얻을 수 있다. ‘나는 7~8년 전에 이라크가 나이지리아처럼 되지 않을까 걱정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실제로 그보다 더 못하다.’라고 전직 장관이 말한다. 그는 이름만 존재하는 캐나다 유령회사 그리고 이미 파산한 독일회사와 맺은 13억 달러짜리 전기사업 계약을 그 근거로 제시한다.”—Independent, 2013년 3월 3일


워싱턴은 공식적으로 말리키 정권의 부패와 종파주의를 부정한다. [5] 미 국 입안자들을 진짜 심란하게 만드는 것은, 그들의 꼭두각시가 점점 이란 종교지도자들 편으로 다가가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페르시아 만의 만만찮은 경쟁자였던 이라크 바트당 정부제거와 함께 이 지역에 대한 이란의 영향력은 훨씬 증대되었다.

이란의 영향력 증가를 차단하기 위해, 미국은 이라크에 대한 이란의 영향력에 맞서고 동시에 저항을 억제하려는 작전을 실시했다. 2006년, 워싱턴은 이전 안바르Anbar 지방 수니파 저항세력에게 ‘각성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자금을 대기 시작했다. 알카에다를 점령반대 동맹군으로 대했던 이라크 종족 지도자들과 외국인이 이끄는 지하드주의자들과 사이가 틀어지면서 이런 기회가 생겼다. [6]

사우디의 협조 아래, 이란과 그 동맹국들에 맞서 싸우는 수니파 지하드주의자를 미국이 비밀리에 지원하는 작전에 따라 시리아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2007년 시모어 허쉬Seymour Hersh는 “우리는 악당들에게 돈을 대주고 있고, 이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상당히 위험한 시도이다.”라는 전직 미국 정보담당자의 분석을 인용했다. 허쉬는 다음과 같이 보도한다.

“시아파가 지배적인 이란을 잠식하기 위해, 부시 행정부는 중동지역의 우선순위를 재조정하기로 결정했다.…미국은 이란과 그 동맹국 시리아를 겨냥한 비밀작전에 참여했다. 이 작전의 부산물은 수니파 근본주의 조직들의 성장이다. 그들은 알카에다에 공감하고 미국에 적대적이며 이슬람주의 전투적 전망을 지니고 있다.

“이 새 전략의 모순된 측면 가운데 하나는 이라크에서 미군을 겨냥한 반란은 대부분 수니파 세력으로부터 나오지 시아파로부터 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나 행정부의 시각에 따르면, 이라크 전쟁의 가장 심대한, 의도하지 않은 결과는 그 전쟁으로 이란이 강해졌다는 것이다.”—New Yorker, 2007년 3월 7일


2010년 경, 이라크 알카에다는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시아파 주도 바그다드 정부가 안바르 전사들에 대한 자금 지원을 중단하고 수니파 정치인들과 종족 지도자들을 박해하자, AQI는 부활했다. 새 지도자 아부 바크르 알 바그다디Abu Bakr al-Baghdadi 지도하에, AQI는 해체된 바트당 군대로부터 많은 수의 장교를 충당했고, ‘각성운동’에 몸담았던 경험 있는 종족 전사들을 끌어들였다. [7]

2011년 시리아에서 시작된 수니파 이슬람주의 봉기는 AQI 기간요원들을 보내어 시리아 지파(자바트 알누스라Jabhat al-Nusra)를 조직한 바그다디의 AQI에게 중요한 출발점이 되었다. 2012년 경 미국 국방성 정보보고서Department of Defense Information Report 는 (알카에다를 포함한) 지하드주의자들은 “시리아의 봉기를 주도하는 세력들이다.”라고 한다.

 

CIA가 지원하는 시리아 지하드

활기 넘치는 시리아 반란은 시리아 정권에 대한 인민들의 자발적인 지지의 산물인 것처럼 서방 언론들은 묘사했다. 그러나 시리아의 짱짱한 국가기구에 성공적으로 도전하기 위해서 외국의 많은 지원이 필요했고, 그 지원은 지역 동맹국들의 협력을 얻은 미국이 지휘했다. 허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시리아 반군을 돕기 위해 터키, 사우디아라비아 그리고 카타르가 미국에 어느 정도 규모로 협력하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CIA가 ‘쥐구멍(rat line)’이라고 부르는 시리아로 이어지는 비밀통로를 구축하는 데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 오바마 행정부는 전혀 밝히지 않는다. 2012년 승인된 쥐구멍은 터키 남부를 거쳐 리비아를 통해 시리아 국경을 가로질러 반란군에게 무기와 탄약을 공급하는 깔때기로 쓰였다. 시리아에서 그 무기를 최종적으로 받아 쓴 것은 지하드주의자들이었다. 그 중 몇몇은 알카에다 소속이었다.”—London Review of Books, Vol.36, No.8, 2014년 4월 17일


런던 검사들이 스웨덴 시민 벌린 길도Bherlin Gildo에 대한 ‘테러’ 혐의를 취하하라는 압력을 받은 2015년에, 시리아 지하드주의자 무장에 영국이 한 역할이 불거졌다. 그가 도왔다는 혐의를 받은 조직과 영국 정보국 스스로가 협력했다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Guardian, 2015년 6월 1일).

뉴욕타임스 (2013 년 3월 24일) 기사는 160대가 넘는 군병참기가 최소한 “3,500톤의 군수품”을 시리아의 이른바 ‘혁명가들’에게 실어 날랐다고 보통과 달리 솔직하게 밝혔다. 1980년대의 아프가니스탄에서처럼, CIA는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2012년 11월까지 CIA 본부장이었던 데이비드 페트라우스는 이 운항 네트워크 가동에 큰 역할을 했고 여러 나라들이 참여하도록 고무했다.” 1980년대에 파키스탄이 아프간 무자헤딘에 대해 했던 것처럼 터키 역시 시리아 반란을 지원하는 데에 중추적 역할을 했다.

“담당자에 따르면, 터키 정부는 터키를 통과하여 군수품을 수송하는 트럭에 통신장비를 싣는 일에까지 계획 전반을 감독하고 있다. 그래서 시리아로 들어가는 육로 수송을 살피고 있다고 한다. 수송관을 잘 아는 관리와 수송기와 관련된 자료를 수집하는 무기밀매 조사관에 따르면, 수송량이 대규모라고 한다.”—같은 글


 

제국주의자들이 ‘살라피주의 공국(公國)Salafist Principality’을 기획하다

2012년 8월 국방성 정보보고서Department of Defense Information Report 는 다음과 같은 계획을 언급했다.

“특정 상황이 형성되면 시리아 동부(하사카Hasaka 그리고 데르 조르Der Zor)에 살라피주의[극도로 보수적인 수니파 이슬람근본주의] 공국을 수립할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이것이, (이라크와 이란) 시아파 확장에 전략적 중요성이 있는 시리아 정부를 고립시키기 위해, 반란 지지세력들이 원하는 바로 그것이다.”

그 보고서는 지하드의 “지지세력”을 “서방, 페르시아 만 국가들 그리고 터키”라고 콕 집어 말하고, AQI가 “이라크와 시리아의 다른 테러리스트와 결합을 통해 이슬람 국가를 선언할 수 있다.”라고 앞날을 내다보듯이 말한다.

2013년 바그다디는 AQI와 시리아 지파가 합쳐서 ISIS를 출범했다고 선언했다. 자바트 알누스라 회원 상당수의 참여 거부는 격렬한 내부투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자중지란이 있기는 했어도 ISIS는 2014년 1월 라마디와 팔루자를 성공적으로 점령했고 그를 통해 안바르 지방의 통제권을 장악했다. 같은 달, ISIS 세력은 시리아 북동부 라카Raqqa를 손에 넣었다. 2014년 6월 ISIS 병력 1천 명이, 15 대 1 정도의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이라크 육군 2개 사단을 패퇴시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내버리고 도망친 상당한 양의 군수품과 더불어 이라크 중요도시인 모술을 장악했다. 몇 주 뒤, 2014년 6월 30일, ISIS는 바그다드에서 시작하여 시리아를 가로질러 터키 국경에 이르는 ‘칼리프의 나라’를 선언했다.

워싱턴에게 이는 환영할만한 뉴스가 아니었다. ISIS가 사우디를 비롯한 페르시아 만 제국주의 보호국들에 대한 잠재적 위험이 되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응답으로 미국은 바그다디의 이른바 ‘온건파’ 지하드 경쟁세력, 특히 알카에다의 시리아 지파인 (누스라전선이라고 불리는) 자바트 알누스라에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언론들은 갑자기 시리아의 알카에다 회원들을 세속 아사드 정권에 대한 ‘온건’ 반대파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뉴욕타임스 최근 기사는 “알카에다 소속 누스라전선은” CIA로부터 “성능 좋은 화력을 제공받는 그룹 가운데 하나이다.”라고 운을 뗀 뒤, “스스로를 자유시리아군대라고 부르는 미국 지원 세력들은” 실질적으로 알카에다 시리아 지파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을 시인했다.

“자유시리아군대 지휘부가 필요에 따른 불편한 동거라고 묘사하는 전술적 동맹이다. 더 규모가 크고 강한 누스라전선의 허락 없이는 작전을 전개할 수 없기 때문에 형성된 동맹이다. 그러나 아사드 대통령과 그 동맹들은, 그들을 모두 공격목표가 되어 마땅한 테러리스트로 규정하면서, 그 편제를 반란 조직들 사이에 차이가 거의 없는 증거라고 지적한다.”—New York Times, 2015년 10월 12일


미국 외교정책에 대한 최고의 잡지는 오사마 빈 라덴의 조직이 “미국의 적에 대한 적”으로 진화했다고 보다 직접적으로 설명한다.

“911이후 워싱턴은 알카에다를 어떤 비용과 시간을 들여서라도 제거해야 할 미국의 가장 위험한 적으로 간주했었다. 미국 정부가 오사마 빈 라덴을 2011년에 살해한 이후, 알카에다의 새 지도자인 아이만 알자와히리Ayman al-Zawahiri가 다음 목표가 되었다. 그러나 아랍 혁명 이후 조성된 중동의 불안정과 갑자기 등장한 ISIS로 인해 워싱턴은 알카에다에 대한 전략, 특히 자와히리를 목표로 삼는 것을 다시 생각해야 했다. 이 시기에 알카에다를 흔드는 것은 현실적으로 ISIS를 격퇴하려는 미국의 노력에 반하는 것이다.”—Foreign Affairs, 2015년 3월 9일


중동과 자원을 지배하겠다는 미국의 전략적 목표는 늘 한결 같다. 그러나 ‘테러와의 전쟁’에서 협력자였던 무아마르 카다피와 바사르 알 아사드 사례가 보여준 것처럼, 그 목표를 향한 전술은 갑자기 바뀔 수도 있다. 이 경쟁에서 다른 참여자들의 태도는 보다 다양하다. 사우디와 이란은 페르시아 만 주도권을 싸고 경쟁구도에 있는 한편, 한때 오토만제국 땅이었던 이라크 북부와 몇몇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이란과 다투는 터키는, 그 한 해 전 이집트 대통령에 당선되었던 무슬림형제단 소속 모하메드 무르시 대통령을 끌어내린 2013년 쿠데타에 대한 사우디의 지원을 격렬하게 반대했다.

 

계산을 흩트려 놓은 러시아의 개입

2011년 러시아 정부는 리비아에 대한 나토의 ‘정권교체’를 마지못해 따랐다. 한때 아프리카에서 가장 발전된 나라였던 리비아는 군벌과 지하드 깡패들에 의해 지옥처럼 황폐해진 나라로 변했다. [8] 2015 년 9월 30일 러시아 공군이 시리아 갈등에 개입했다. 같은 재앙이 시리아에서 반복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만약 아사드 정권이 무너진다면, 이란이 약화될 것이고 승리를 거둔 이슬람근본주의자들이 이슬람세계 전역을 장악하게 될 것이다. 지금 시리아에서 수백 명의 외국 지하드주의자들이 러시아 여권을 가지고 있다. [9] 헨리 키신저가 지적하듯이, 시리아와 이라크를 지하드가 삼키면 러시아의 무슬림 지역이 불안정해질 것이다(Wall Street Journal, 2015년 10월 16일).

2015년 11월 130명의 목숨을 앗아간, ISIS가 자신이 했다고 주장하는 파리 테러에 대한 프랑스의 응답은 나토 동맹의 잠재적 균열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한편으로 ISIS 지역에 대한 미국 등의 공격에 힘을 실어주면서도, 동시에 프랑스 대통령 올랑드는 러시아의 왕성한 공중 폭격을 칭찬했다. 모스크바 방문 동안 올랑드는 공동의 군사행동으로 힘을 모으자는 생각을 개진했다. 미국과 러시아가 시리아에서 전혀 다른 목표를 추구한다는 현실에서 볼 때, 이는 상당히 미묘한 제안이었다.

다른 나토 나라들처럼 국내에서 지하드 테러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프랑스는 자연스럽게, 이라크와 시리아에서 이슬람주의 반란 조직들을 분쇄하려는 러시아/이란 정책이 합당하다고 여기게 된다. 사우디, 터키, 카타르 동맹국처럼 그 지역 시아파 경쟁자를 약화시키려는 목적으로, 지하드에 자원을 제공하고 무장을 돕는 미국은, 파괴보다는 적절한 통제라는 보다 교묘한 정책을 추구해 왔다. 아사드 정권을 끌어내리는 지렛대로 써보려 하기 때문이다.

과거에 프랑스 부르주아지는 미국으로부터 독립하여 다른 길을 걷고자 했다. 샤를 드골은 1966년 나토로부터 프랑스를 철수시켰고, 공식적으로 재가입한 것은 2009년이 되어서였다. 유사한 일이 곧 일어날 것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미국이 주도적으로 추구한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리비아, 시리아의 ‘정권교체’로 인한 역풍은 주로 미국의 유럽 동맹국들을 타격하였다. [10]

푸틴의, 아사드에 대한 군사지원 결정은 반란군과 그들의 공급망에 직접적인 압력을 가하면서 갈등의 양상을 변화시켰다. 또한 그 결정은 시리아 아랍군의 사기를 진작시켰다. 이란과 헤즈볼라 지원군으로 인해 강화된 시리아 군대는 이전에 빼앗겼던 지역을 서서히 되찾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개입은 미국 정보기관들을 놀라게 했고 미국 부르주아지들은 소란스러워졌다. 미 상원군사위원회가 서둘러 개최되어 시리아에서 “러시아의 전략과 군사작전Russian Strategy and Military Operations”을 토론했다. ‘지상군투입boots on the ground’에 대한 영원한 찬양자 미국 상원의원 존 매케인은 러시아의 시리아 개입을 “미국의 치욕적 후퇴이고 중동지역에서 가장 최근의 재앙”이라고 규정했다. 그의 말은 지배계급 상당수의 격노를 잘 대변하는 것이다.

“행정부는 몇 주 전, 시리아로 병력을 보내지 말 것을 러시아에 경고했다. 러시아는 하고 싶은 대로 했다. 그러자 행정부는 시리아로 가는 항공노선을 차단하려 했다. 그러나 실패했다. 그 결과는? 미국 관리들은 러시아 군부에 달려가 시리아의 ‘갈등완화’를 논의하려고 했다. 우리 국무성은 러시아의 행동을 협력의 ‘기회’라고 불렀다. 우리가 ‘근본 원칙’들을 공유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2년 만에 처음으로 블라디미르 푸틴과 공식 대화를 했다.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점령한 이후 러시아를 고립시키기 위한 국제적 협력을 약화시키면서까지 말이다. 그것이 바로 푸틴이 바라던 것이다. 그리고 푸틴이 그에 어떻게 응답했나? 미국이 지원하는 시리아 반란군에 폭격을 하고 있다.”


매케인은 계속 말한다.

“만약 푸틴이 미국 동맹에 반대하는 작전을 이라크에까지 확대하더라도 우리는 놀라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이미 바그다드와 정보 협력체계를 수립했다. 그러나 이 갈등이 끝날 때, 푸틴이 바라는 것처럼, 푸틴이 그의 동맹자들을 떠받치고, 우리 것은 부수고, 중동지역에서 우리에 대한 남은 신뢰를 파괴하고, 이 전략적 요충지에서 러시아가 핵심 세력으로 복귀하는 것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 시리아에서 러시아와 맞서는 것을 주저해서는 안 된다.”


일찍이 2014년 우크라이나의 이른바 ‘마이단 혁명’ 극우 지도자들에 대한 열광적 칭송자였던 매케인은 러시아가 치러야 할 대가를 제시한다.

“그러나 우리의 대응을 시리아에만 한정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러시아로 하여금 보다 광범위한 지역에서 대가를 지불하도록 해야 한다. 우크라이나의 군사력 증강, 더 강화된 제재조치, 러시아의 국제적 고립 강화 등을 포함해서 말이다.”


2015년 11월 터키 전투기가 시리아 국경 근처 이슬람주의 군대를 공격하던 러시아 SU-24 폭격기를 떨구었을 때, 관계자들은 미국이 개입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Harper’s Magazine, 2015년 12월 4일). 모스크바를 찾아가 사과하거나 설명하는 대신에, 터키 정부는 즉각 나토와 미국에 달려가 호소하였고, 둘은 곧바로 터키의 행동에 동조하였다. 그로 인해 주춤거리는 대신에, 러시아는 이미 수립된 계획보다 두 배의 공격을 반란군에게 가했고 터키에 경제제재 조치를 취하였다. 러시아 공중방어 역량은 보다 증진되었다. 푸틴은 러시아 군부에 “앞으로 우리 [군사] 조직이나 [시리아 내] 시설을 위협하는 모든 목표물은 즉각 파괴하라.”라고 공식적으로 지시했다(RT, 2015년 12월 11일).

이 사건은 시리아 갈등이 세계의 두 핵강국 사이의 직접적인 군사대결로 이끌 위험을 환기시켰다. 2015년 12월 15일 공화당 대통령 후보 논쟁에서, 뉴저지 주지사 크리스 크리스티는 만약 자신이 대통령이 된다면 그는 시리아 상공에 ‘비행금지’ 구역을 지정하고 러시아 비행기가 그를 감히 어기려고 하면 바로 격추시킬 것이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선언했다. 공화당 경쟁자인 랜드 폴은 “내 생각에 당신은 3차 세계대전을 원하는 후보인 것 같다.”라고 응답했다(The Hill).

지상의 역관계 변화는 아사드 정권의 궁극적 붕괴를 가만히 지켜보는 전략의 현실성을 떨어뜨렸다. 중동에서 군사적 모험을 더 확대하는 것에 대한 상당한 반감이 있는 상황에서, 최소한 지금은, ‘평화적 처리’가 최선이라고 미국 지배자들은 결론내린다. 겉으로는 ‘테러주의 칼리프공화국’의 형성을 저지하려는 의지를 공유한다는 것을 협상 구실로 내세운다.

러시아 개입으로 인해 오바마 행정부는 전술을 재검토해야 했다. 그러나 시리아에서 서로의 목표가 양립불가능하다는 것을 워싱턴과 모스크바 모두 잘 알고 있다. 이것은 알누스라에 대한 서로 다른 태도를 통해 잘 드러난다. 아사드와 그 지지자는 무장 반란의 절대다수를 구성하는 누스라전선과 그 지하드 동조자들을 사라져야 할 테러리스트라고 본다. 한편 백악관은 수줍은 표정으로 그들을 ‘온건파’라고 부른다. 미국은 러시아 공군이 ISIS보다는 CIA가 지원하는 ‘온건파’ 군사력에 초점을 맞춰왔다고 호들갑을 떤다. 러시아는 미국 공군력으로 이슬람국가에 대한 변변한 타격을 준 것이 무엇이냐고 반문한다. 크렘린은 특히, ISIS가 장악한 시리아와 이라크 유전에서 퍼낸 석유가 터키 암시장으로 자유롭게 흘러들어간다는 점을 지적한다. [11]

2014년 석유 밀매가 이슬람국가를 먹여 살린다고 서방 언론 여럿이 보도하기 시작했다. CNN은 그로 인해 “매일 2백만 달러의 수입이 생길 것이고, 매년 7억 3천만 달러 이상을 벌어들여서, 이라크를 넘어 작전을 수행하기에 충분한 자금이라고” 지적한다(CNN, 2014년 8월 22일). 그렇게 다들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항공기가 공격하기 이전까지 석유를 실어 나르던 그 수송트럭들은 거의 무사통과였다. (캐섬하우스Chatham House라고도 불리는) 국제문제연구소 Royal Institute of International Affairs에 따르면, “유조차 행렬이 2km까지 늘어서곤 했다.”라고 한다. 2015년 11월, 터키에서 열린 G-20 회담에서 푸틴이 이 문제를 지적했을 때, 미국 대표들은 어버버거리며, 무고한 시민의 희생이 있을까봐 밀매자들을 타격하는 데에 주저해 왔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언론에 공표되어 난처해지자, 정책은 변경되었다. 한 주도 지나지 않아 미 국무성은 미국 항공기가 시리아 동부에서 116대의 수송트럭을 파괴했다고 발표했다.

러시아 군사작전으로 인한 영향을 줄이고 시리아 군대의 성장을 늦추기 위해, 미 국무성은 페르시아 만 동맹국들과 공조하여 반란군의 무장 수준을 높이기 시작했다.

“시리아 정부를 위해 러시아가 공습을 개시한 이후, 처음으로 강력한 미제 대탱크 미사일을 대량으로 지원받았다고 반란군 지휘부는 말한다.”—New York Times, 2015년 10월 12일


워싱턴포스트의 월터 핀커스는 아사드 퇴진 요구를 협상 전제로 내걸지 않는 것은 “오바마 대통령이 시리아에서 목표를 잃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는 우려를 표명한다.

“지금껏 그래왔고 지금도 전략적 목표가 있다. 2011년부터 군사적 방법보다는 외교적 방법을 앞세워, 시리아 대통령 바사르 알 아사드 정권을 종식시키는 것이 그 목표였다. 2012년 이후, 오바마의 전략은 군사력을 사용하여 이슬람국가를 약화시키고 파괴하는 것이었다.”—Washington Post, 2015년 11월 2일


미국은 사실, 지하드 반란을 “약화시키고 파괴”하기보다는 그것을 강화하고 방향을 돌리는 일에 관심을 더 쏟아왔다. “외교적” 통로는 러시아의 개입으로 반란군이 후퇴한 때에야 채택되었다. 핀커스가 설명하는 것처럼, “지난 주에 바뀐 것은 오바마의 시리아 전략이 아니라, 미국의 몇몇 전술이다. 왜냐하면 먹히지 않기 때문이다.” 목표는 여전히 ‘정권교체’이다.

“오바마의 전략 아래에서, 시리아의 이슬람국가 패배는, 시리아 지역 세력의 강화에 달려있다. 단지 이슬람국가 병사들을 물리치는 것만이 아니라, 다마스쿠스에 새로 수립된 중앙정부가 권력을 이양할 수 있게끔 해방된 지역을 장악하도록 하기 위함이다.”—같은 글


제국주의자들의 시리아 분할 계획

2015년 10월 상원청문회에서, 퇴역 장성인 존 킨은 시리아 이전투구에 ‘인도주의적’ 전환을 제안했다.

“만약 우리가 온건 반대파 세력을 위해서 그리고 또한 망명자들의 안식처를 제공하기 위해, 자유지역을 만든다면, 세계 여론은 극적인 지지로 돌아설 것이다. 만약 푸틴이 그곳을 공격한다면, 세계 여론은 당연히 그를 등지게 될 것이다.”—New Eastern Outlook, 2015년 10월 12일


상원청문회에서 존 매케인은 시리아를 발칸반도처럼 만드는 것에 대해 상당한 교감이 지배계급 내부에 있다고 말했다.

“시민과 우리의 온건파 친구들을 보호하고 그들을 방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을 할 수 있기 위해, 우리는 반드시 시리아에 소규모 진지들을 구축하는 데에 국제적 협력을 모아야 한다. [전직 CIA 수장인] 데이비드 페트라우스에서 힐러리 클린턴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이 이것을 옹호한다.”


외교협회Council on Foreign Relations 대 표이자 포린어페어Foreign Affairs 편집장인 리차드 하스는 “미국뿐만 아니라 누구도 지금의 영토 전부를 다스릴 시리아 정부를 재건하는 데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라고 평가한다. 하스는 “작은 지역으로 나뉜 시리아가 지금과 가까운 미래에 가장 바람직한 결과일 것이다.”라고 결론짓는다(Project Syndicate, 2015년 10월 15일).

2015년 6월 부르킹스연구소Brookings Institution의 마이클 오핸런은 『시리아 해체하기: 미국의 가장 희망 없는 전쟁에 대한 새로운 전략』이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했다. 그 글에서 “앞으로 남은 현실적인 길은 시리아를 해체하는 계획일 것”이라고 그는 제안한다. “사우디, 터키, 영국과 더불어 미국”의 특수전 병력이 “온건 반대파”를 지탱하여 “아사드 정부나 ISIL 모두의 지배에 다시는 직면하지 않을, 신뢰할 만한 안전지대를 시리아 안에” 수립하는 것이다. [12]

추상적으로 볼 때, 지역 군벌이나 이슬람주의 병력이 운영하는 작은 국가들의 소용돌이로 시리아를 분할한다는 발상은 복잡한 문제를 해결할 묘책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어려운 과제를 수행할 하위파트너나 동맹자들을 구하는 어려움 가운데 하나는 그들이, 종종 서로 배타적인, 그들 자신의 이익을 추구할 것이라는 점이다. 터키와 사우디아라비아는 이집트 무슬림형제단과 군부가 갈등할 때 서로 다른 편에 선 바 있다. 사우디와 카타르가 자금을 대는 지하드 병사들은 시리아에서 서로를 상대로 싸운다. 그리고 골란고원에 이스라엘 석유 보호지역이 생길 가능성이 있는데 여러 무슬림 동맹국들이 그것을 결코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다. [13]

 

시리아 정치상황에서 터키, 쿠르드, 제국주의자들

시리아 분할은 “아마도 쿠르드 지역 같이 가장 안전한 지역에 설치”되어야 한다고 오핸런은 제안한다. 왜냐하면 쿠르드 병사들은, 미국의 전폭적인 공중지원에 힘입어, 시리아 북쪽 자신의 지역에서 ISIS를 성공적으로 쫓아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쿠르드 인민은 국경이 맞닿은 터키, 시리아, 이라크 그리고 이란 지배자들로부터 혹독한 탄압을 받아왔다. 터키 정부는 시리아 내에 쿠르드족 국가 비슷한, 특히 인민방어부대(YPG, 민주연합당(PYD)의 군사조직) 전사들이 지배세력이 되는, 어떤 것도 생기는 것을 한사코 반대한다. 민주연합당(PYD)은 터키 남동부에 본부를 두고, 소부르주아 좌파민족주의 게릴라 운동을 전개하는, 쿠르드노동자당(PKK)의 시리아 지부이다.

터키 군대는 지난 30 년 간 PKK를 없애기 위한 시도를 지속해왔다. 그 동안 주로 쿠르드인 4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이 군사작전으로 터키 정부는 수천 만 달러를 지출했지만, PKK는 그 지역에 여전히 건재하다. YPG/PYD는 증오스러운 아사드 정부와 수니 반란군 사이의 내전에서 한 발 물러서 있었다. 2012년 말 아사드가 쿠르드 지역에서 철수한 이후, YPG는 지하드주의자의 위협을 받는 소수민족들을 조직하는 데에 앞장섰다.

“마수드 바르자니Massoud Barzani의 부패한 쿠르드민주당의 지부인 시리아 쿠르드민주당 당원 모하메드 이스마일은 알모니터Al-Monitor에 말했다. ‘우리는 이 지역 다른 구성원들인 아시리아인, 아랍인들과 이 문제를 의논했다. 그들 대부분은 이 계획을 수용한 정부를 지지한다. 그러나 시리아 혁명과 함께 하는 자들은 이것을 지지하지 않는다.’라고 그는 우려했다.”

. . .

“YPG는 지상을 장악하고 알카에다 소속 조직들에 맞서 싸울 능력이 있는 유일한 군사조직이다. 또한 시리아에 사는 쿠르드족뿐만 아니라 그 지역 아랍인과 기독교인들 가운데서 PYD에 대한 지지를 끌어내고 있다.”—Al-Monitor, 2013년 11월 12일


ISIS 병 사들이 시리아와 이라크 많은 지역을 휩쓸고 있을 때, PKK는 키르쿠크의 이라크 도시 근처 석유매장지에서 사업을 벌이는 외국 에너지회사에 대한 보호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외교적 고립에서 벗어날 기회를 포착했다. PKK 병사들은 또한 쿠르드어로 말하는 야지디Yezidi  소수민족 구성원들을 구조했다. 그들은 ISIS에 의해 신야산Mount Sinjar에 포위되어 있었고, 서방 언론은 개입의 필요성을 고취하기 위해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했었다.

ISIS가 2014년 가을 시리아 북쪽 국경에 있는 코바니Kobanê의 쿠르드 마을을 점령했을 때, 미국 관리들이 ‘인도주의’를 운운하며 고함을 질러댔음에도, 터키는 국경 너머 YPG 방어대에 탄약 공급과 지원군 파견을 거부했었다. 절박한 전투 끝에, 미국의 공중지원에 힘입은 쿠르드 병사들은 코바니 점령을 분쇄하는 데에 성공했다. 한편 터키 공군은 이라크의 PKK 기지를 공격하느라 ISIS는 관심 밖이었다.

몇 년 동안 워싱턴은, 미국의 ‘테러’ 조직 명부에 있는 PKK에 대한 정보를 터키 정부에 공급했다. 그러나 ISIS 대신에 미국의 쿠르드 동맹 공격에 초점을 맞춘 터키의 태도는 긴장을 자아냈고 2015년 7월 일정한 합의에 이르렀다. 미국이 시리아 국경 인근에 있는 터키 인설릭Incirlik 공군기지를 사용하는 대가로, 워싱턴은 터키의 PKK/YPG 공격을 눈감아 주기로 한 것이다. 요 근래 미국은 YPG와 PKK가 서로 다른 존재인 것처럼 가장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회피하려 하고 있다.

“오바마 행정부 관계자는, PKK와 YPG가 이슬람국가에 맞선 투쟁에서 서로 연계되어 있고 보조를 맞추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미국은 YPG와는 직접 거래하면서 PKK와의 공식 접촉은 꺼린다. 그 관계자는 서로 다른 명령체계 아래에서 다른 목적을 가진 조직이라고 말한다.”—Wall Street Journal, 2014년 7월 24일


이것은 이라크 시리아 이란에서 그 지부들이 서로 자율적 조직이라는 PKK의 공식 규정에 상응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은 긴밀히 통합되어 한 몸처럼 움직인다.

“[전투로 단련된 24세의 게릴라인] 루켄 양은 ‘다른 지부들이지만 모두 PKK이다.’라고 말한다. 신야산 꼭대기에 있는 야영지에서 만난 그녀는, 기지로부터 1마일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광분한 이슬람국가 병사들과 치른 지난 봄의 전투로 피곤에 지친 기색이었다. ‘가끔 나는 PKK이고 때로는 [PKK 이란 지부인] PJAK 당원이다. 또 다른 때는 나는 YPG 소속이 된다.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모두 다 PKK 소속이다.”—같은 글

 

PKK의 공상적 지방자치주의 그리고 쿠르드족의 자결권

PKK와 감옥에 있는 창립자 압둘라 오칼란Abdullah Öcalan은 마오주의적 스탈린주의 단일조직 모델을 거부하고, 무정부적 지역주의를 선호한다고 주장한다. 외국 좌익 다수는 그리하여 PYD/YPG의 로자바 지역Rojava Cantons에서 실시되고 있는 ‘민주주의 실험’을 보며 환호하고 있다.

“지금 존재하는 것처럼, 로자바 자치지구는 시리아 혁명의 비극으로부터 탄생하여 매우 빛나는 곳 가운데 하나이다. 사실 가장 빛난다. 아사드가 파견한 부대를 2011년에 물리치고, 이웃한 세력 거의 대부분의 적대에도 불구하고, 로자바는 단지 독립을 지켜내는 것만이 아니라, 눈에 띄는 민주적 실험이 되고 있다. 최고의사결정기구로 인민의회가 수립되었다. 위원회들이 세심한 종족 균형을 맞추어 선출되었다.…그리고 페미니스트 군사조직인 스페인의 무헤레스 리브레스Mujeres Libres[‘자유여성’, 스페인혁명 시기인 1936년에 여성해방과 사회혁명을 목표로 결성된 스페인의 무정부적 여성조직]의 지원을 받으며, ‘YJA Star’ 부대(‘자유여성 부대’, 이 명칭에서 별(Star)이 의미하는 것은 고대 메소포타미아 여신 이슈타르Ishtar를 의미한다)는 이슬람국가 군대에 맞선 많은 전투에 참가했다.”—Guardian, 2014년 10월 8일


로 자바 지역위원회는 내전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생필품과 공공사업의 배급을 관리한다.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거주민들은 지역조직들을 민주적으로 통제한다. 그리고 여성 평등권이 강력히 집행되고 있고, 인종적이거나 종교적 소수자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러한 조치들은 현존하는 계급과 씨족 구조에 심각한 위협이 되지 않는다. 로자바 지역헌법Constitution of the Rojava Cantons  41조는 재산권을 명확히 지지한다.

“모든 이는 자신의 사적 재산을 사용하고 누릴 권리가 있다. 정당한 대가를 치르거나, 사회적 필요 또는 공공의 목적일 경우가 아니거나, 법에 적시된 경우가 아니라면, 그의 재산을 누구도 빼앗을 수 없다.”


1978년 창립문서에서 PKK는 그들의 지향을 천명한 바 있다.

“독립적이고 통합된 쿠르드국가 내에서의 민주적 인민독재와 무계급 사회의 수립을 지향한다. PKK가 수행하고 있는 쿠르드 민족해방투쟁은 사회주의 국가들과 민족해방운동과 노동계급 운동에 의해 강화되는 세계 사회주의 혁명과 분리되지 않는다.”—걸리스탄 야르킨 Gullistan Yarkin, 「The ideological transformation of the PKK regarding the political economy of the Kurdish region in Turkey」, Kurdish Studies, Vol. 3, No. 1, 2015년 5월


그래버는 PKK의 공상적 지방자치주의가 쿠르드 자결권을 위해 중요한 진전이라고 평가한다.

“PKK는 쿠르드국가 건설을 더 이상 추구하지 않는다고 천명해 왔다. 그 대신에 사회생태주의자이자 무정부주의자인 머레이 부크친Murray Bookchin의 전망에 부분적으로 영감을 얻어, ‘자유지방자치주의’[libertarian municipalism민주적으로 운영되는 지방자치기구의 연합으로 국가를 대체하자는 정치사상]를 채택했다. 장차 국경을 가로질러 합쳐질, 직접민주주의 원칙에 기초한 자유로운 자치공동체 건설을 쿠르드족들에게 호소한다. 국경은 점점 그 의미가 사라질 것이라고 희망한다.”


감옥에 갇힌 오칼란이 전향하여 채택한, 자본주의 국가권력이 저절로 녹아내릴 것이라는 무정부주의적 공상은, 자본주의 소유관계와 착취를 파괴하지 않고 교정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초한 PKK의 ‘민주적 현대화’ 정책의 중요부분이 되었다. 오칼란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자본주의가 하나의 경제체제라고 인식할 수 없다. 아마도 우리는 그것을 완전히 파괴하지 못할 것이다. 다만 우리는 변화시키고 갉아먹을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경제체제를 수립할 수 있다.”—야르킨의 책


퇴보한 노동자국가 소련에서 반혁명이 승리한 이후,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 ‘제3의 길’을 찾으려는 노골적 개량주의 결론에 도달한 많은 조직들이 있는데, PKK 역시 그 중 하나이다. [14]

맑스주의자인 우리는, 코바니와 그밖 다른 지역에서, 쿠르드족이 ISIS, 알누스라 또는 터키 군대를 포함하여 그들을 억압하고 심지어 박멸하려는 세력들에 맞서 자신들을 방어하려는 권리와 민족자결권을 지지한다. 맑스주의를 표방하는 대부분의 정치조직들이 이에 동의할 것이다. 하나의 예외가 있는데, 점점 더 특이해져가는 미국의 스파르타쿠스동맹과 국제공산주의동맹International Communist League : ICL 소속 지부들이 그들이다. 그들은 미국에 군사협력을 한 PYD가 제국주의 꼭두각시가 되었다고 결론내렸다. 군수품을 제공받고, ISIS를 약화하기 위한 미국의 공습에 협력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오칼란의 사상적 유연성에 비추어 보면, 어느 날 그가, 중동을 재편하려는 제국주의 동맹의 하위파트너가 되기로 결심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특히 그것이 그의 석방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PKK는 아직 그 식탁에 초대되지 않았다. 지금 PKK/YPG는 독립적 요인으로 남아 있다. 여태까지 해 왔던 전술적 협력은, 미국의 제국주의 동맹에 예속되거나 전략적으로 통합되었다는 근거로 삼기에는 미흡한 것이다.

오칼란의 병사들보다 터키가 더 가치 있는 동맹으로 여겨지는 한, 이러한 틀은 변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것이 바로, PKK를 박멸하려는 터키를 미국 정부가 저지하지 않는 이유이다. 동시에 미 국무장관 존 케리는, 2015년 10월 28일 국제평화를 위한 카네기재단Carnegie Endowment for International Peace의 연설에서, ISIS에 대한 YPG/PKK의 공적을 인정했다.

“시리아 북부에서, 동맹과 그 동맹자들[즉, YPG/PKK]은 17,000평방미터가 넘는 땅을 ISIS로부터 수복했다. 그리고 우리는 유프라테스 강 동쪽의 터키-시리아 국경을 확보했다. 그것은 터키 국경의 85% 정도이고 대통령은 나머지를 수복하려는 다음 작전을 승인했다.…”

“우리는 또한, 한때 70마일 가량의 시리아-터키 국경을 지배했던 ISIS를 몰아내기 위해 공군력을 증강했다.”—U.S. Department of State


터키 정부는 제국주의 후견인과 다소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다. 국경에 인접한 이라크와 시리아 땅을 가능하면 많이 차지하고자 하는 터키 지배계급은, 쿠르드의 독립이나 시리아 북쪽에 PKK가 지배하는 국가가 들어서는 것을 자신들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한다. ISIS가 장악한 시리아 국경의 “70마일”을 따라 PKK/YPG “동맹자들”이 더 나아가는 것을 격렬하게 반대한다.

모든 형태의 쿠르드 자치에 대한 반감에도 불구하고, 터키는 ‘쿠르드지역정부Kurdistan Regional Government: KRG’ 와는 경제적 정치적 관계를 발전시켜 왔다. 이는 이라크 북쪽에 1991년에 수립되어 쿠르드민주당이 통치하는 미국의 부패한 보호국이다. PKK/YPG에 대한 터키 정부의 극렬한 적개심을 공유하는 KRG의 지도자는 바그다드로부터의 공식적 독립을 원한다.

미국은 시리아 지상에 동맹국 터키의 개입을 원한다. 그러나 터키의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Recep Tayyip Erdogan 대통령은, 미국이 두 군데의 YPG/PKK 지역을 가르는 “국경 70마일”을 포함한 시리아 북부에 ‘비행금지구역’을 선포할 경우에만, 이 모험의 늪에 들어서려 한다. 워싱턴은 터키 군대가 시리아 갈등에 들어서기를 소망하면서도, 공중지원에는 선뜻 나서려하지 않는다. 터키 국경 근처의 ISIS 주둔지에 대한 러시아 공군기의 작전이 전개되는 상황에서, ‘비행금지’ 구역을 선포하는 것은 불필요하게 커다란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다.

YPG가 국경 전체를 장악하는 것은 지원자, 무기, 공급물자가 전달되는 소위 ‘인도주의 회랑[回廊: 띠처럼 기다란 땅 humanitarian corridor]’ 을 단절하여 투쟁의 결과에 상당한 영향을 가져올 것이다. 이는 터키 암시장으로 흘러들어가는 이슬람국가의 석유 수출을 더욱 힘들게 만들 것이다. 터키 정부는 남아 있는 나머지 국경을 ISIS로부터 빼앗아오려는 YPG/PYD의 시도를 러시아와 미국 정부가 지원하려는 것을 보며 긴장하고 있다.

“터키는 시리아 북서부 국경에 인접한 쿠르드 병력이 영토를 확장하는 것을 참지 않을 것이라고 미국과 러시아에 경고하고 있다고 두 명의 고위 관료가 말했다.

“관료 중 한 명은, ‘우린 지금 농담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면서, 시리아 쿠르드 병력이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터키 국경을 따라 이라크 쿠르드 지역에서 지중해 해안까지 통제권을 넓힐 가능성을 언급했다.”

. . .

“또 다른 한 명은 ‘최근 PYD는 미국과 러시아 양쪽 모두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우리는 PYD를 테러조직이라고 보며 그들의 협력이 가져올 결과를 모든 나라들이 생각해볼 것을 원한다.’라고 말했다.

“터키는 2주 전에 시리아에 공습을 감행했던 러시아가 YPG와 PYD를 지원하고 있지 않나 의심한다.”

“그 관료는 말하기를,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PYD가 유프라테스 강 서쪽을 따라 자라블루스Jarablus와 아자즈Azaz 사이의 땅을 장악하려 한다. 우리는 결코 용납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Reuters, 2015년 10월 13일


YPG가 시리아에서 서로 불화하고 있는 러시아와 미국이라는 두 열강 사이에서 책략을 쓴다는 사실은, YPG/PKK가 미국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반박하는 것이다. [15]

ISIS 가 (쿠르드, 시아파 그리고 여타의 인종 종교적 소수) ‘이교도’들에 대한 잔악한 공격으로 그에 합당한 평판을 얻고 있는 한편, 국제사면위원회는 로자바 지역에서 자행되는 연좌제 사례를 보고해 왔다. YPG 부대는 “IS나 또는 다른 무장조직의 조직원과 연계되었거나 동조하는 주민에 대한 보복으로, [시리아 쿠르드 지역의] 자치정부 아래에 있는 마을들을 초토화했다.”라는 혐의를 받는다. 희생자 대부분은 투르크만 사람이나 아랍 사람들이다. 그들이 처한 곤경은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인종청소는 범행을 저지른 자가 친구인지 적인지에 따라 제국주의 ‘국제사회’는 그 심각성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국제사면위원회에 따르면, “만약 떠나지 못하면 미국 중심 동맹국들의 공습을 받게 된다고 몇몇 주민들이 말했다.”라고 하는데 이것은 일종의 아이러니이다(「시리아: 전쟁범죄에 해당하는 미국 동맹의 마을 초토화Syria: US Ally’s Razing of Villages Amounts to War Crimes」). YPG는 그 혐의를 부인하지만, 인종청소라는 잔악한 악순환으로 나아가는 것이 공동체간 갈등의 논리이다.

시리아의 이 얽히고설킨 군사충돌에 대한 맑스주의적 태도는, 그 형태를 불문하고 모든 제국주의 개입에 대한 무조건적 반대로부터 시작한다. 쿠르드 민족자결권과 터키 억압자와 ISIS의 잔악한 민족학살에 맞서 쿠르드족이 스스로 방어할 권리를 옹호하는 한편, 계급의식으로 각성한 투사들은 YPG 부대의 위협으로부터 투르크만과 아랍 사람들의 자기방어에 똑같이 헌신한다. 시리아 내전에서 혁명가들은 혹독한 바트당독재와 반동적인 이슬람 반란군 모두를 지지하지 않는다. 동시에 미국과 여타 제국주의자들로부터 공격당할 때 군사적으로 모든 토착 세력들 (이슬람주의자를 포함하여) 편에 서는 것이 필요하다.

 

가짜 좌익들이 이슬람주의 ‘혁명’과 연대하다

2011년 반(反)아사드 봉기를 ‘시리아 혁명’이라고 규정한 자칭 혁명적 사회주의자 다수는 결국 부인할 수 없는 추악한 지하드의 현실과 자신들의 애초 규정 사이의 모순을 보며 난처해한다. 프랑스의 반자본주의신당(Nouveau Parti anticapitaliste: NPA, 통합서기국 지지자들이 창립한 당)은 “북아프리카와 중동의 혁명적 과정”은 “[애초의 목표였던] 민주주의, 사회정의, 평등”을 달성하는 데에 실패했다고 주장한다. “한편으로는 권위주의적인 구체제 대표들이, 다른 한편으로는 이슬람근본주의자들과 다양한 분자들로 이루어진 반동 세력이” 지배하는 정치상황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Revue L’Anticapitaliste, 62호, 2015년 2월). 그럼에도 불구하고 PYD와 더불어 자유시리아군대 안의 “민주적이고 인민의 지지를 받는” 세력이 “그 혁명”을 살리고 있다고, NPA는 상상한다.

“PYD(시리아 PKK) 쿠르드족 조직과 자유시리아군대(FSA)의 민주적이고 인민의 지지를 받는 부위는 아사드 정부와 반동적인 이슬람 세력에 맞서 싸웠고 지금도 싸우고 있다. 그 부위에 대한 정치적 지지와 군사적 지원을 거부하는 시리아혁명의 소위 ‘친구들’이 있다.”—같은 글


변덕스러운 인상주의자 제5인터내셔널동맹(League for the Fifth International: L5I, 최근까지 영국 노동자권력Workers Power으로 대표되었던)은, 왜 그들의 “시리아 혁명”이 그렇게 반동적 색채를 띠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교묘한 곡예를 하면서, 이슬람주의 봉기가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이었다고 비슷한 평가를 계속한다.

“그 정도 규모의 주거지 박탈과 분산은 왜 시리아 혁명이 이른바 혁명가들의 교과서에 따라 진전되지 않았는지를 분명하게 한다. 그리고 또한 시민사회 세력들과 조직들이 전쟁을 위해 위축되고 제한되었는지도.

“공장과 작업장은 문을 닫고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었다. 그리고 바트당 정권에 손과 발이 묶였던 공식 노동조합들은 독립적인 행동을 수행하거나 그들을 방어할 능력도 의지도 없었다. 이러한 사실은 또한 왜 시리아 노동계급이 지엽적 사건 이외에 독립적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는지를 설명해 준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최악의 조건 속에서 다양한 반혁명 세력들에 맞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은 지속되고 있다.”—Workers Power, 2015년 8월 11일


그 지지자 다수가 자리를 떠나 이러저러한 지하드 부대로 들어가면서, 한때 “시리아 혁명”의 지도자라는 신망을 얻었던 자유시리아군대는 시나브로 사라져버렸다. L5I는 이슬람전선Islamic Front을 “인민적 지지 기반을 제대로 가지고 있는” 것으로 다양한 반란조직들 가운데에서 선별한다. 이슬람전선이 강제하려는 샤리아 법도 L5I는 “시리아 혁명”의 일부분으로 스스럼없이 받아들인다.

“점점 고립되고 간신히 용인되는 자바트 알누스라 그리고 시리아에서 그들의 존재가 이라크인 점령군처럼 비치는 IS와 달리, 이슬람전선은 인민적 지지 기반을 제대로 가지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혁명 속 혁명’이 확대되면, 특히 아사드와 IS의 위협이 사라지기 시작할 때, 조만간 이슬람전선과 대결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인민은 오래지 않아 깨닫게 될 것이다.”—같은 글


L5I는, CIA 지원을 받아 아사드에 맞서 싸우는 반란군들을 “혁명 속의 반혁명”이라고 규정한다. 한편으로는 그들의 “시리아 혁명”을 제국주의자들이 좀 더 지원해야 한다고 투덜거린다. [16]

“그들[오바마, 카메론 그리고 올랑드]은 반(反)아사드 반란군들에 대한 물질적 지원을 너무 아낀다. 알카에다 무장 즉, 어떤 급진적 이슬람주의 병사들에 쓰일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사실 그들은 누구의 무장도 지원하지 않았다. 지원은 카타르, 사우디아라비아 그리고 터키로부터 왔고 이 점에서 이들은 백악관의 단순한 꼭두각시가 아니다. 그들과 가장 가까운 입장을 가진 다양한 종류의 이슬람주의자들에게 지원했다는 사실과 그들이 아사드정권을 두려워하는 것보다 미국이 아사드정권을 더 두려워한다는 사실로 인해 이것은 입증된다.”—League for the Fifth International IEC theses, 2014년 8월 19일


L5I가 붙들고 놓지 못하는 시리아 “혁명”은 노동계급과 피억압인민에 적대적이라는 점에서 그 혁명이 대체하려는 바트당 독재와 다를 바 없다.

 

제국주의 개입의 부산물인 ISIS의 야만

부르주아 언론에서 ISIS는 뭐라고 이해할 수 없는 순수한 악마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2015년 11월 20일 유엔안전보장이사회 결의문Security Council resolution은 “국제 평화와 안전에 대한 유례없는 위협”이라고 표현했다. 1년 전 (2014년 10월 2일) 뉴욕타임스 편집부는 “아부 바크 알 바그다디가 이끄는 이슬람국가는 의도적이고 체계적이고 공공연한 야만을 대표한다.”라고 큰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참수, 십자가형, 고문, 강간과 포로, 아동, 여성, 기독교인, 시아파 살해”를 “이슬람 칼리프주의 국가 수립을 위한 무기로서만이 아니라 그 존재 자체인 가학성 숭배”라고 비난했다.

ISIS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피비린내 나는 잔악함에 걸맞은 평판에 근거한 것이지만, ISIS의 ‘가학행위 숭배’는 제국주의 세계 질서의 비이성적 부산물이다. 이교도, 변절자, 여성의 ‘천박함’에 대한 가혹하고 광적인 비난을 통해, 점령과 전쟁과 절망적 가난으로 인해 산산 조각난 삶을 살아가는 많은 수니파 아랍인들의 분노를 느낄 수 있다. 비록 빗나간 분노이긴 하지만 말이다.

ISIS는 통신서비스를 능숙하게 이용하여 제국주의 중심부에 살고 있는 고립된 청소년들과 직접 접촉하는 능력을 보이고 있다. ISIS에 합류하기 위해 3,000명 가량의 서유럽 청년들(주로 프랑스, 영국, 독일)이 중동으로 들어갔다고 추산되고 있다. 그 중 다수는 유럽 도시에서 직업 없이 암담한 미래를 바라보고 사는 청년들이다. 점점 더 무거워지는 국가탄압과 노골적인 이슬람혐오증을 볼 때, 이슬람국가는 이 같은 통로를 통해 꾸준히 새로운 가입자를 받아들이게 될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순조로운 인터넷 홍보를 통해, 이슬람국가는 자신의 전사들이 코란의 가르침을 잘 따르는 독실한 이슬람 신봉자로 보이게 한다. 그러나 포로로 잡힌 ISIS 전사 다수와 인터뷰 한, 캠브리지문예평론Cambridge Literary Review 편집자 리디아 윌슨은, 대부분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이슬람에 대해 무지하고 샤리아 법, 전투적 지하드, 칼리프 국가에 대해 잘 대답하지 못한다.”라고 지적한다(The Nation, 2015년 10월 21일). 그는 또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0 년이나 20년 전의 아프가니스탄 외국인 전사들을 살펴보면, 그들은 상당히 밀도 높은 종교와 신학 교육을 통해 가입시켰다. 지금 우리가 보는 것은, 상당히 다른 유인 요소를 통해 훨씬 넓은 범위의 추종자를 가입시키는 정책이다.”


윌슨은 또 이렇게 덧붙인다.

“내가 인터뷰한 이 [이라크] 포로들이 이슬람을 위해 헌신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슬람국가의 그것과 거리가 멀 뿐, 그것은 자기가 생각하는 이슬람인 것이다. 비슷하게, 서방에서 이슬람국가로 건너온 전사들 또한 대단히 헌신적이다. 그러나 진정한 신학적 주장이거나 코란에서 근거를 끌어온 것이라기보다는 자기가 생각하는 지하드이다. 전략적대화연구소[Institute for Strategic Dialogue: 주로 외국의 극단주의에 대한 전략 연구를 위해 프랑스, 영국, 독일이 수립한 기관]가 말한 것처럼, ‘정신적 충족감과 더불어 모험, 실천, 낭만성, 권력, 소속감에 대한 열망이 가입 동기이다.’ 즉, 이슬람의 역할은 부분적이다. 그러나 이슬람국가 지도부가 요구하는 것처럼 엄격하고 살라피[Salafi: 극단적으로 보수적인 수니파 이슬람]적인 것은 아니다.”


ISIS 가입자 대부분은 그들의 삶을 악몽으로 만든 제국주의 정복자들에게 보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를 갈망한다.

“이들은 재앙을 몰고 온 미국의 2003년 점령 이후에, 말도 못하게 종파적인 누리 알말리키의 시아파 정부가 다스리는, 혼란스럽고 폭력으로 가득한 이라크 아랍지역에서 태어난 소년들이다. 수니파 아랍인으로 자라는 것은 고달픈 일이다. 그들은 점령기의 아이들이다. 혹독한 시기에 (감옥, 처형, 봉기 중의 전투 등으로) 아버지를 잃은 아이들이 많다. 이들은 자기 정부와 미국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차 있다. 국경 없는 이슬람국가라는 사상으로 불붙은 것이 아니다. 알카에다가 사라진 이후, 이 모욕당하고 분노하는 젊은이들에게 자존감, 가족, 부족을 지킬 방법을 제공한 첫 번째 조직이 바로 이 ISIS이다. ISIS식 삶의 양식 때문에 급진화한 것이 아니다. 그들의 불안하고 존중받지 못하는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약속이고, 이라크 수니파 아랍인으로서 긍지를 갖고 살 수 있는 약속이기 때문이다. 단지 종교적 일체감만이 아니라 문화적, 종족적 그리고 삶터에 기초한 일체감이다.”


부정직한 부르주아 주류 언론들은 ISIS 가 마치 허공에서 갑자기 불쑥 솟아난 것처럼 묘사한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수십 년 동안 아랍 세계를 유린한 제국주의 침략으로 생긴 상처에서 나타난 필연적 결과일 뿐이다. 사람들이 찬미하는 프랑스 좌파 자유주의 지식인 토마스 피케티는 2015년 11월 파리를 강타한 테러를 회고하며 말한다. 제국주의 지배로 인해, 특히 세습 귀족가문을 지역 하수인으로 책봉하는 중동은 “지구상에서 가장 불평등한 곳이다.”라고.

“그는 계속 말한다. 그 귀족들 가운데, 아주 소수가 대부분의 부를 쥐고 있다. 반면 여성과 망명자를 포함한 대다수는 거의 반(半)노예 상태로 국가에 매여 있다. 서방 강대국들이 이 지역에서 잇달아 벌인 전쟁으로 인한 사상자와 더불어, 그와 같은 경제적 상황이 지하드 투쟁에 정당성을 부여해 왔다.”—Independent, 2015년 12월 1일


2011년 ‘아랍의 봄’에 대한 대중적 인기는, 서방이 그 지역의 현상유지 임무를 맡긴 부패한 독재자를 끌어내릴 희망에 의한 것이었다. 잠깐 동안 그 저항은, 독재정권과 제국주의 금융자본의 명령에 따라 강제된 ‘신자유주의’ 긴축정책으로 인한 수백만 희생자들에게 희망을 안겨주었다. 호시니 무바라크를 제거하면 인민의 삶이 개선될 것이라는 이집트 시위대의 순진한 소망은 머지않아 깨져버렸다. 진정한 반제국주의 조직의 부재 속에서, “코란이 우리의 헌법이다.”라는 구호를 중심으로 1928년 창립된 이슬람주의 운동인 무슬림형제단이 무주공산의 지도부를 차지했다. 2012년 6월 모하메드 무르시Mohamed Morsi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1년 후 무르시는 군사쿠데타로 타도되었고, 모든 저항은 곧이어 분쇄되었다.

무슬림형제단의 선거 집권 전략의 실패는 이슬람 통치는 오직 무장투쟁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고 오랫동안 주장해 온 지하드주의 반대자들을 정당화한 것으로 보인다. (아부 바크르 나지Abu Bakr Naji)라는 익명의 저자가 쓴 책 『이슬람공동체(Umma)가 걸어가야할 가장 중요한 단계: 야만의 운용The Management of Savagery: The Most Critical Stage through which the Umma Will Pass 이 2004년 인터넷에 모습을 드러냈고, 수니파 지하드주의자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2006년 영어로 번역되었는데, 이는 10년 전의 자르카위의 AQI(이란 알카에다)와 지금의 ISIS가 차용한 ‘양극화’ 전략을 들여다 볼 의미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하지만 두 조직은 그것을 공식적으로 승인하지 않았다.

그 책은 어떻게 이슬람 전사들이 미국과 그 동맹국과 하수인들을 이길 것인지 그리고 중동전역에 이슬람국가를 수립할 것인지에 대한 전략의 개요를 다룬다. 신학적 편견과 교조적이고 성서적인 구절들로 가득 차 있지만, 또한 몇몇 핵심적 문제에 대한 답을 담고 있기도 하다. 특히, 지하드의 외국 지배가 아랍 세계에 가한 피해를 지하드 언론 부서가 다루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석유 가격 하락으로 인해 움마[Umma: 세계 무슬림공동체] 가 겪은 부정의의 정도에 초점을 맞춰 경제 담당자가 준비한 연구의 요약본이 있다. 그것은 또한 수십 년 동안 움마를 위해 부가 쓰이기보다는 주로 아랍과 이슬람정권 내 한 줌 밖에 안 되는 서방 부역자와 하수인들의 손아귀에 들어갔다는 것을 설명한다. 찌꺼기 중의 찌꺼기만 움마와 그 인민들에게 돌아갔다.…”


1980년대 소비에트에 대항한 아프간 지하드의 성공에 특히 주목하면서, 이전의 지하드 작전에서 여러 교훈을 끌어낸다. 저자가 지적하는 교훈들은,

“지하드에 뛰어든 가난한 아프간 인민을 보면서, 초강대국에 굴종하며 살아가던 무슬림 대중의 가슴 속에 교리와 지하드가 부활하게 될 것이다. 가장 강력한 군사무기와 (세계에서) 가장 사악한 군대 앞에서 완강하게 버틴 그 당시 그 구성원들에 대한 존경을 금할 수 없다. 그 후로 우리는, 체첸이나 타지키스탄 같이, 알려지지 않던 땅에 사는 무슬림에 의해 지하드가 전개되는 것을 보았다.”


1983년 레바논에서 미국과 그 동맹국들이 근거지를 버리고 쫓겨가게 만든 일은 상대적 수월함을 드러낼 만한 유력한 사건일 것이다. 저자는 소련군을 미군과 대비한다.

“여러분! 러시아 병사들의 악랄함은 미군의 두 배는 된다. 만약 아프간과 체첸에서 죽은 소련군의 10분의 일만 죽어도 미군은 모든 것을 다 팽개치고 내뺄 것이다.”


아부 바크르 나지는 안정적이고 지속가능한 이슬람국가를 수립하는 투쟁에 세 단계가 있다고 말한다. 첫 번째는 “괴롭히고 짜증나게 만들기” 단계이다. 이 과정 동안 4가지 목표가 있다. 1) 관광지와 석유시설에 대한 산발적 공격을 통해 간접비용을 늘리고 자원을 소모하게 하며 치안병력을 넓은 지역에 분산시켜서 “적을 지치게 하기” 2) “사람들의 이목을 끌 규모의 수준 높은 작전을 수행하여 젊은 층을 지하드에 유입하기” 3) “배신자 정권의 통제로부터…해당 지역을 탈취하기” 4) 지하드 통제에 들어온 “해당지역”을 관리할 기간요원 양성하기

“괴롭히고 짜증나게 만들기” 단계는 모든 사회질서가 파괴된 혼돈과 절망적 불안을 특징으로 하는 “야만의 땅”을 조성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야만의 땅은 탈레반이 장악하기 이전 아프간의 상황과 유사한 모습이 될 것이다. 원시적 정글의 질서가 지배하는 곳에서, 착한 사람 심지어 악인 가운데 현명한 사람은 이 야만을 관리할 누군가를 갈망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 조직이 선하건 악하건 관계없이 어떤 것이든 받아들이게 된다.”


야만의 땅”은 그 다음 단계인 “야만적 혼돈 관리”를 준비한다.

“그 초기 형태를 그려본다면, 야만의 땅에서 살아가는 인민들의 식량과 의료, 안전과 정의의 확보에 대한 요구를 관리하는 것이다. 그 야만의 땅을 침범하려는 자들을 제압하여 국경을 지키고 방어적 무장기구를 설립하여야 한다.”


우리가 지배하는 지역을 관리하는 것”은 그 자체로 끝이 아니다. 다만 보다 큰 규모의 작전을 통한 “양극화 첫 단계”로 진입할 기초를 마련하는 것이다.

“모든 인민을 양극화시킬 전투로, 대중들을 끌어들이는 것을 나는 말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중 한 집단은 진실의 편으로 가고 다른 집단은 거짓의 편으로 가고 세 번째 집단은 승자에게 붙기 위해 전투의 결과를 기다리면서 중립적 위치에 남게 될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이 집단의 지지를 끌어내어야 한다. 지금 전투의 다음 단계에서 이 집단이 결정적 역할을 할 것이기 때문에, 이 집단에 승리의 확신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대중을 전투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인민들이 전투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반란에 불을 댕기는 보다 많은 행동이 필요하다. 그 와중에 각각의 개인들은 자신이 지지하는 편으로 가게 될 것이다.”


야만의 관리는 “가장 결정적 단계”로 규정된다. 왜냐하면, 성공하게 되면, 그것은 “칼리프국가가 붕괴된 이후 기다려 왔던 이슬람국가로 가는 다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 “실패한다면, 우리는 죽음의 세계로 망명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끝은 아니다. 그 실패는 더 확대된 야만의 세계로 이끌 것이다!”

2014년 6월 알바그다디가 천명한 “칼리프국가”는 허약하지만, 최소한 그것은 그들이 장악한 지역에서, 차악이라는 의미에서, 의미 있는 지지를 얻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시리아 관련 미국 고위관료이고 오클라호마 대학의 조슈아 랜디스Joshua Landis는 사회질서가 너무나 간절한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바트당이 관리하든 아니면 ISIS가 관리하는 것이든 관심이 없다고 말한다.

“지난 4년 반 동안 시리아 상황이 심각해져서 시리아인 다수는 독재를 다시 받아들이고 있다. 그들은 불안정에 대해 안정을, 혼돈에 대해 권위를 원한다. 차라리 정치적 자유를 포기하고 독재 치하에서 사는 것을 감수한다. 우리는 이런 모습을 ISIS 지역에서 볼 수 있다. 아무 권력도 없는 것보다 혹독한 권력이라도 있는 편이 더 살만하다고 많은 사람들이 주장한다. 그들은 이미 ISIS가 그 지역을 휩쓸기 이전 만연했던 전투로 인한 혼란을 맛보았다. 그들은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알았다. 그들이 ISIS를 좋아하지는 않겠지만, ISIS가 가져온 안정, 사회기관, 유사(類似) 질서는 바란다.”—2015년 11월 9일, interview with RT


랜디스는 자신의 출생지를 최근 다시 방문한 시리아 망명자 오마르 알 와르디의 익명 보고서를 그의 블로그에 올렸다. 알 와르디는 “범죄와 비인도적 행동”에도 불구하고, 이슬람국가가 통치하는 지역은 “시리아 내에서 유럽으로 망명을 떠나는 젊은이들이 가장 적은 곳 가운데 하나이고, 많은 사람들이 이점을 놓치고 있다.”라고 적었다(「칼리프국가로의 여행: ISIS 치하의 억압적 정의A Trip to the ‘Caliphate’: Oppressive Justice under ISIS」).

전사들에게 더 많이 지불하는 것이 지하드 경쟁자들보다 ISIS가 우위에 서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이다. 반란 지역에서 시민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를 알 와르디는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많은 사람들이 ISIS를 받아들이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아사드 반대 봉기의 처음 몇 해 동안 이 지역에 부패가 만연했기 때문이다. 먼저, 자신들을 자유시리아군대라고 부르는 부대가 지배했다. 그들은 도둑이나 강도떼처럼 행동했다. 시민들은 자기가 가진 것들을 하나 둘씩 빼앗기는 두려움 속에 살았다. 괴롭힘에 시달렸고 죽을 수도 있었다. 그 다음 오직 권력만 신경 쓰고 정의나 좋은 정부에는 거의 신경 쓰지 않는 알 누스라가 왔다. 자유시리아군대와 누스라가 지배하는 사이 사회는 사라져버렸다. 누구도 감히 분쟁 해결을 위해 권력기관에 기대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칼리프국가가 들어서 통치를 수립하자, 사람들은 조금 더 편하게 숨을 쉬고 덜 억압받는다고 느끼게 되었다.”


미국 정부가 “온건파”라고 묘사하는 자들 아래에서가 아니라, 혼란스러운 ISIS 통치 아래에서 시민들이 “덜 억압받는다고 느끼”는 것은, 미국 선전이 거짓말이라는 명백한 근거이다.

 

중동사회주의연방을 위하여!

2001년 9월 11일 뉴욕에서 일어난 범죄적 공격 일주일 후 우리는, 무슬림에 대한 군사공격은 이슬람 근본주의를 부추길 것이라고 내다봤다.

“세계무역센터에 대한 공격은 사건의 긴 연쇄에서 단지 하나의 고리에 지나지 않는다.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에 대한 제국주의자의 가공할 공격은 재앙을 낳을 것이고, 애꿎은 수 천 명의 목숨을 앗아갈 것이고 궁극적으로 그 지역에 이슬람 반동 세력을 강화하게 될 것이다.”—「미국 제국주의 통치: 끊임없는 공포U.S. Imperialist Rule: An Endless Horror」, 2001년 9월 18일 (<1917> 24호에 재수록)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그리고 그 다음 리비아에 대한 군사침략은 수십 만 명을 학살했고 수백만 명이 집을 잃게 만들었다. 중동에서 한때 강력했던 노동운동은 스탈린주의 계급협조와 반(反)노동계급 사상의 정치적 수용(대표적으로 1979년 아야톨라 호메이니의 ‘회교혁명’)으로 약화되었다. 그리하여 노동운동은 제국주의 점령군에 대한 저항을 이끌 정치능력을 상실했다. 그 틈으로 알카에다, ISIS 등등이 서방 제국주의 원정대에 맞서 저항을 이끄는 지도자로 부각되었다. 그 결과 이슬람 반동세력은 유례없이 강해졌다. 그러나 이슬람 신권통치의 수립은 가난한 중동 인민들을 고통과 빈곤 속에 살게 만드는 세계 시장의 작동을 멈추지 못한다.

세계 노동운동은 시리아의 바트당 독재나 반동적인 이슬람 반란군 어느 쪽의 승리에도 관심이 없다. 궁극적으로, 그 둘은 모두 착취의 도구들이라는 점에서 같다. 그러나 혁명가들은 반동적인 탈레반이나, ISIS, 알 누스라 그리고 알카에다를 포함하여 소위 ‘민주적’ 제국주의자들에 대항하는 모든 토착세력들과 군사적으로 같은 편에 선다. 1983년 베이루트에 있는 미국 해병과 프랑스 외인부대 막사를 이슬람 지하드가 폭파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제국주의 억압에 대한 정당한 공격이라고 규정했다.

지하드가 야만적이라고 해도 그것이 이라크 노동자가 뻔뻔스러운 ‘민주적’ 제국주의자 그리고 그들의 ‘테러에 대한 전쟁’을 수용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2014년 10월 노동자평의회연합과 이라크노동조합Federation of Workers’ Councils and Unions in Iraq: FWCUI은 무임금 노동이라는 사상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ISIS가 8명의 노동자를 티크리트에서 살해했다고 보고했다. 그 몇 달 전 FWCUI의 팔라 알완은 제국주의 개입이 문제의 근원이라고 지적했다.

“처음부터 줄곧 이 모든 문제들의 첫째 원인인 미국 정부는 원하는 것에 개입할 준비를 한다. 오바마 대통령은, 최근의 사건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라크 석유에 대한 관심을 거듭 표명했다. 지금 ISIS 통치 속에서 살아가는 2백만 명의 인민이나 ISIS 도당들 때문에 모술에서 연이어 자살하는 여성들의 운명에 대해서는 어떤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우리는 미국의 개입을 거부하며 인민이 아니라 석유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는 오바마 대통령의 어처구니없는 연설에 항의한다.”—Jadaliyya, 2014년 6월 13일


2009년 이란, 2011년 튀니지, 이집트, 바레인 그리고 2013년 이스탄불에서 최근 이 지역을 흔든 저항들이 있었다. 이 저항은 이 사회 저변에 날카로운 사회적 긴장이 깔려 있다는 증거이다. 엄청난 난관에 직면하여 노동자 투쟁은 중동 전역에서 계속되고 있다. 2015년 5월 15,000 터키 자동차노동자들은 국가의 협박과 조합 지도자의 지시를 무시하고 임금인상을 위한 ‘아래로부터의 파업wildcat strike’을 전개했다. 2016년 1월 이집트 페트로트레이드Petrotrade 노동자 18,000명은 거리로 나와 파업금지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중동지역의 허약한 신식민지 정권 지도자들은 그들의 미래를 충분히 불안해 할만하다.

1848년 공산당선언에서, 칼 맑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세계의 모든 노동자는 같은 이해를 공유한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그 점 때문에 그들에겐 “모국이 없다.” 미국과 그 탐욕스런 동맹자들이 세계지배를 위해 일으키는 전쟁의 주된 희생자는 물론 무슬림 대중들이다. 그러나 제국주의 국가 내부에서 ‘테러에 대한 전쟁’에서 국기를 흔들어대며 나타나는 공격적인 외국인혐오는 생활수준 하락, 민주적 권리에 대한 전반적 침해 그리고 사악한 국가감시의 증가와 더불어 거세지고 있다.

국 제노동운동은, 특히 제국주의 국가들에서, 제국주의 전쟁과 사회해체로 인해 수많은 인류에게 가해지는 빈곤과 불행에 대해 역사적이며 진보적인 해결책을 찾는 데에 지도적 역할을 할 가능성이 있다. 2008년 5월 1일 그 가능성이 얼핏 드러난 바 있다. 그 날 국제항만/창고노조International Longshore and Warehouse Union: ILWU는 이라크 전쟁에 항의하며 미국 서부해안의 모든 항구를 봉쇄하는 일일 파업을 전개했다. 이라크와 제국주의 심장부 노동자들 사이의 강력한 연대를 보여준 이 모범사례는 ILWU의 계급의식적 정치 실천의 오랜 역사에 근거한 전투적 행동의 결과였다 (「전쟁반대파업Anti-War Strike」을 볼 것).

시리아와 이란을 가로지르는 혼돈, 빈곤, 유혈 사태는 이윤이 지상의 가치라는 원칙으로 지배되는 세계 자본주의 축적체제의 필연적 결과이다. 생산수단, 교통, 통신수단 몰수와 인간의 필요를 위한 생산이라는 원칙으로 이성적 사회계획에 기초한 세계경제 구축만이 자본주의 광기가 낳는 폭정을 극복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정치적으로 가장 각성한 투사들이 규율 잡힌 혁명적노동자정당으로 결집하는 것이 필요하다.

중동을 파괴하는 반(反) 계몽주의와 해로운 자민족중심주의 그리고 제국주의 군사침략 속에서, 국가 종교 인종을 뛰어넘는 노동계급의 단결을 높이 내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노동계급은, 우선적으로 제국주의자 그리고 또한 이스라엘, 터키, 페르시아와 아랍 지배자 등 모든 억압자들에 맞선 계급투쟁에 단결하여 나서야 한다. 오직 프롤레타리아 혁명만이 이 지역의 방대한 자원이, 서방 에너지자본과 그들의 부패한 현지 하수인들이 아니라, 수많은 피억압 피착취 인민을 위해 사용될 수 있게 할 것이다. 이 투쟁을 위해서 레닌-트로츠키주의 정당이 필요하다. 프롤레타리아에 깊이 뿌리내리고 외국과 국내 자본의 몰수를 통해 피억압 피착취 인민의 정치, 사회 그리고 경제적 문제를 해결할 연속혁명의 강령으로 무장한 정당 말이다.


 

1. 전직 나토 최고사령관 웨슬리 클라크 장군은 2007년 행한 연설에서, 1991년 사담 후세인 치하 이라크에 대한 ‘사막의 폭풍’ 작전의 교훈에 대해 당시 국무성 차관이던 폴 월포위츠와 나눈 대화를 회고한다.

“우 리는 우리의 군사력을 중동지역에서 사용할 수 있고 소련은 막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다른 강력한 열강이 우리를 방해하기 이전, 시리아, 이란, 이라크 등 과거에 소련과 우호적 관계였던 나라들을 청소하는 데에 5~10년 정도 걸릴 것이다.”라고 그는 말했다.”—YouTube

 

2. 2015년 10월 9일 미국 의회조사국Congressional Research Service 보고서에 따르면, “[시리아 군대]의 하급 직업군인들은 다수 수니파 아랍 인민과 여타의 소수 집단에서 충원되었다.”라고 한다. 또한,

“시아파 전사들의 아사드 정권 지지는 수니파의 눈에 정권이 돌이킬 수 없게 종파적이라는 시각을 갖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니파 무장반란세력과 수니파 징집병으로 이루어진 시리아군대 사이에 폭력사태가 일상적으로 벌어진다.”—  “Armed Conflict in Syria: Overview and U.S. Response”

수니파 병사 대다수가 정권에 충성한다는 사실은 그 갈등의 첫 번째 축이 종파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력히 시사한다.

 

3. 비밀 해제된 미국 문서는 “1948년 11월 30일부터, [CIA 요원 스티븐] 미이드는 비밀스럽게 [시리아 군 참모총장] [후시니] 자임 대령을 최소 여섯 차례 만나서, ‘군부가 지지하는 독재정권의 가능성’을 의논했다.”(「Cold War and Covert Action」, Middle East Journal, 1990년 겨울).

 

4. 2003년 이라크, 2011년 리비아를 상대로 한 이른바 ‘인도주의 전쟁’은 세르비아에 대한 1999년의 대규모 공습을 모델로 한 것이다. 그 공습은 카스피 해 지역에서 새로 발견된 석유와 가스 매장지에 접근하려는 열망이 주된 요인이었다. 우리는 당시 「나토의 ‘인도주의’를 가장한 테러NATO’s ‘Humanitarian’ Terrorism」 <1917> 22호에서 그 사실을 지적했다.

세르비아 침공의 구실은 코소보의 알바니아인들에 대한 ‘인종학살’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1991년 쿠웨이트 아기들이 죽었다는 소문이나, 2003년 사담의 ‘대량살상무기’ 그리고 2011년 리비아 시민의 임박한 학살들처럼, 알바니아인 코소보주민들을 학대한다는 언론보도는 잔혹한 군사침공을 합리화하기 위해 지어낸 뻔뻔한 거짓말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언론인 존 필거는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전쟁범죄를 다루는 특사 데이비드 쉐퍼는 14세에서 59세 사이 225,000 명의 알바니아인들이 학살되었다고 주장했다.…

“학교 병원 수도원 국영방송국 등 세르비아 사회시설이 폐허가 되면서 나토의 폭격이 끝났다. 그 후 국제 범죄수사팀이 학살 증거 수집을 위해 코소보에 들어갔다. FBI는 단 하나의 집단 매장지도 찾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스페인 수사팀도 마찬가지였고, 그 책임자는 화난 목소리로 ‘전쟁 선전기관들이 만들어낸 헛소리’라고 비난했다. 1년 뒤, 유엔 유고슬라비아 재판소는 코소보 내전에서 죽은 사람의 수는 2,788명이었다고 최종적으로 확인했다. 이는 양쪽의 전투원과 KLA가 살해한 세르비아인과 집시를 포함한 숫자이다. 대량학살은 없었고, 인종청소는 거짓말이었다.”—Counterpunch, 2015년 2월 27일

 

5. 2014년 8월 말리키 후임으로 수상이 된 하이더 알 아바디 치하에서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아바디 치하에서 몇몇 시아파 전투조직 가운데 하나인 바드르 조직 다수의 국가기구를 통제했다.

“[바 드르] 조직의 지배는 이라크 치안대 깊숙이 뻗쳤다. 많은 경찰과 특수작전 조직들 다수를 직접 관리했다고 말한다. 바드르는 정치 분야에서도 대단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이라크 정부의 주요 자리를 차지하고 하이더 알 아바디 수상의 헌법동맹의 일원이기도 하다. 아바디는 그 지도자인 하디 알 아미리를 내무장관으로 임명하려고 한다.”— Foreign Policy, 2014년 9월 18일

 

6. 미국 폭동대응 전문가 데이비드 킬컬렌에 따르면, “이라크 알카에다(AQI)가 결혼을 통해 동맹을 맺는 알카에다의 기준을 적용하려 하자” 갈등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라크 전통 사회에서, 관습(aadat)은 종교(deen)만큼 중요하다. 이슬람 이전에 기원하고 종종 이슬람의 그것들과 구별된다. 어떤 이라크 종족구성원이 그것을 내게 이렇게 제기했다. ‘샤마르 사람에게 종교를 묻는다면, 그는 나는 샤마리 사람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많은 이라크 종족들처럼, 수니파와 시아파 지파들의 동맹으로서의 샤마리.’

“물론 무슬림이 아닌 이방인을 대할 때는 이슬람이 정체성을 가름하는 열쇠이다. 그러나 다 무슬림일 경우, 친족이 종교에 우선한다. 사실, 내가 얘기해 본 가장 종족적인 이라크인은 알카에다의 ‘이슬람’ 표방을 자신들의 전통에 낯선 것이고 믿음에 부합하지 않는 것으로 본다. 핵심적 차이는 결혼 관습이다. 종족들은 자신의 여자를 종족 내 사람에게만 내어준다. 또는 (술하[sulha, 평화]) 라고 알려진 과정의 일부로서 불평을 잠재우기 위한 드문 경우에) 그들의 동맹(qabila) 안에 있는 씨족이나 다른 종족에게 내어주기도 한다. 외국인을 떠나서, 여자를 낯선 사람에게 결혼시키는 것은 없는 일이다. 문화에서 일부만 떼어내는 대단히 축약적인 그들 식의 ‘이슬람’에 따라, 알카에다는 종족의 관점을 무지하고 바보스럽고 범죄적인 것이라고 깎아내린다.

“이 것이 폭력으로 이끌었다. AQI는 딸을 자기들에게 내어주지 않은 어떤 족장(sheikh)을 죽였다. 그 종족 사람들은 복수 의무를 느꼈고 AQI를 공격했다. 테러리스트들은 야만적인 방식으로 보복했다. 목격자들이 말하길, 그 유명한 족장의 자식들을 매우 잔인한 방식으로 살해했다. 이는 인내의 한도를 무너뜨렸다. 종족들이 들고 일어났다. 이웃한 씨족들이 이 싸움에 가세했고 (위압적인 태도로 인해 그들에 대한 호의적 감정을 다 잃어버린) AQI는 보다 잔악한 방법으로 그 저항을 분쇄하려 했다. 곧 봉기가 터졌다. 친족 관계를 따라 안바르 지방에 번졌고 이웃한 지역으로 확산되었다.”—Small Wars Journal, 2007년 8월 29일

 

7. “AQI 창립자 아부 무삽 알자르카위는 이전 바트당원들과 거리를 두었다. 하심[ISIS를 연구하는 싱가폴 난양공대 교수인 아쉬메드 S 하심]에 따르면, 그들의 세속적 관점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분석가들과 전직 장교들에 말에 의하면, 현 이슬람국가 지도자 아부 바크르 알바그다디 감독 아래, 의도적으로 이전 바트당 장교를 모집했다.

“2010년 이후 매우 허약해진 반란조직을 재건하라는 임무 아래, 바그다디는 전직 장교들을 끌어들이는 적극적인 정책을 전개했다. 실업자가 되거나 보다 덜 급진적인 반란조직에 가담한 다수를 끌어들였다.

“2007년 [미군의] 전력 증강 시기 동안, 미국이 지원하는 ‘각성운동’ 편에 선 몇몇은 위치를 바꾸어 알카에다에 맞서 싸웠다.

Washington Post, 2015년 4월 4일

 

8. “2015년 3월 9일 론폴연구소(Ron Paul Institute)는, 2011년 리비아 제국주의 개입을 앞장 서 옹호했던 존 매케인 의원과 이슬람 반동 지도부 중 한 명인 압델하킴 벨하지 사이의 관계를 지적했다.

“매케인이 미국의 리비아 공격을 응원하고 있을 때, 벨하지는 민주적 리비아의 미래를 약속하며 추천된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벨하지는 그 당시 리비아 알카에다와 연계된 이슬람무장단체 조직인 ‘리비아의 새벽’ 창립자였다. 매케인 의원은 카다피 타도라는 욕망 때문에 그의 리비아 친구들과 알카에다와의 연계를 무시한 것일까, 아니면 그 사실을 단순히 몰랐던 것일까?

“그러나 이것은 새 발의 피다! 우리는 최근에, 매케인 의원의 친구가 알카에다 요원에서 현재 리비아 ISIS의 수장으로 승진했다는 것을 알았다!”—Ron Paul Institute

 

9. “뉴욕타임스 New York Times(2015 년 9월 26일)에 따르면, ‘3만 명 가량 되는 외국인 가입자가 요즘 시리아로 밀려들고 있다. 다수는 이슬람국가에 가입한다. 지난 12개월 동안 있었던 자원자의 두 배가 된다.’ 여기에는 ‘이라크 또는 시리아의 갈등에 개입했거나 개입하기 위한’ 미국인 250명과 영국 출신 750명이 포함된다. 이 기사는 ‘1800명의 프랑스 시민과 거주민들이 세계 지하드 네트워크에 소속되어 있다.’라고 말한다.”

 

10. “2015년 11월 24일 아시아타임스Asia Times 피터 리는 파리 공격은 프랑스가 중심적 역할을 한 리비아 침공에 대한 보복이라고 한다.

“요약하자면, 파리 테러의 설계자라고 알려진, 고(故) 아브델하미드 아바우드는 IS를 ‘위해’ 싸운 것이 아니다. 그는 ISIS보다 먼저 시리아에 등장한 리비아 부대인 카티바트 알 바타르 알 리비와 ‘더불어’ 싸웠다. 카티바트 알 바타르 알 리비가 ISIS에 대한 충성을 맹세한 이후에도, 그 조직은 독립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리는 카티바트 알 바타르 알 리비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리비아에서의 경험을 시리아 봉기와 혁명에 공유할 목적으로 리비아 이슬람주의자들이 조직한 일부이다. IS가 부상하여 군사/재정적으로 지배세력이 된 이후, ‘KBL’은 ISIS와 운명을 함께 하기로 했다. 부대원들은 IS 교두보를 리비아에 건설하기 위하여 돌아갔다.”

 

11. “터키 대통령의 아들인 빌랄 에르도간이 석유 밀매에 깊이 개입해 있다는 보도가 많다(Zero Hedge, 2015년 11월 26일).”

 

12. “오핸런은 CIA가 지원하는 소위 ‘온건파’ 반란군과 알카에다의 연계를 장님도 알아볼 것이라고 말한다. 봉기에 참가한 극단주의자들과의 과거 협력은 그 자체로 주홍글씨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시리아의 복잡하고 힘겨운 전투현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필수적 방법으로 어떤 협력은 필요했기 때문이다.”

 

13. “명백한 이유 때문에, 미국의 대외정책은 1967년 시리아와의 전쟁을 통해 빼앗은 골란고원 병합에 대한 이스라엘의 이해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었다. 2013년 2월 이스라엘은 석유가스회사 아펙(Afek)의 골란고원 탐사를 허가했다. 아펙은 제니에너지회사(Genie Energy Ltd)의 이스라엘 지사이다. 그 ‘전략고문단’엔 전직 미국 부통령 딕 체니, 언론재벌 루퍼트 머독, 전진 CIA 수장 제임스 울시, 영국 은행왕 제이콥 로스차일드 남작, 전진 미국 에너지장관 빌 리차드슨, 전직 미국 재무장관 래리 서머스 등 최고위 제국주의 포식자들이 포진해 있다.

 

14. “자본주의 이후 사회조직 모델에 대한 무정부주의와 맑스주의 차이를 논의한 것으로, 「어느 무정부주의자와의 대화Conversation with an Anarchist.」가 있다.

 

15. “스파르타쿠스동맹은 최근 시리아 상황에 대해 반제국주의적 자세를 확고히 견지해 보이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그들은 “미군을 격퇴하거나 방해하거나 공격한다면, 설령 아름답지 않더라도, 모든 세력은 피억압 피착취자의 이해를 위해 공격한 것이다(Workers Vanguard, 2014년 9월 5일).”라고 옳게 주장한다. 이것은 1983년 제국주의 군대를 레바논에서 내쫓기 위해, 베이루트에 주둔하던 프랑스 외인부대와 미 해병 막사를 ‘이슬람 지하드’가 날려버렸을 때 발표한 부끄러운 사회애국주의와 크게 대비된다. 이에 대해서는 「맑스주의와 사회애국주의Marxism vs. Social Patriotism」를 볼 것. 2010년 ICL은 미국의 아이티 군사개입을 또 다시 합리화했다. 그러나 1983년과 달리 그들은 사회애국주의 입장을 뒤늦게 철회했다. 「SL이 제국주의에 대한 굴종을 철회하다Sclerotic Spartacists Unravel」를 볼 것.

 

16. “노동자권력(Workers Power)의 논문은 바트당 정권의 생존은 안전보장이사회에서 행한 러시아 제국주의의 거부권과 아사드에 대한 무기와 군수품 공급에 있다고 지적한다.…지금까지, 이것은 말로만 했던 오바마, 카메론 또는 올란드와 달리, 시리아에서 발생한 최초의 제국주의 개입이다.” 러시아의 지원은 아사드 정권의 생존에 결정적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우크라이나, 러시아 그리고 유라시아의 쟁투」에서 설명한 것처럼, 맑스주의자는 러시아를 제국주의로 보지 않는다.

“국제 가격으로 석유와 가스를 파는 것 이외에, 저개발 국가들로부터 의미 있는 크기의 부를 끌어올 수 있는 구조를 러시아는 가지고 있지 않다. 실제로 최근 몇 년 동안 러시아는, 구 소비에트 권역의 이웃나라에서 거의 독점적 에너지공급자임에도 불구하고, 초과이윤을 얻기보다는 보조금을 제공해왔다.”

 

 

12 February 2016
Middle East Chaos
Imperialism, Islamic Reaction & Syria’s Civil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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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중국은 자본주의가 아니며, 제국주의도 아니다

  2. 제국주의의 뿌리와 결과

  3. 제국주의에 대한 <뿌리>의 기회주의적 인식

  4. 제국주의 언론과 ‘좌익’ 들러리들

  5. 볼셰비키그룹 발표문: <‘마르크스주의자의 호소: 우크라이나 전쟁 200일’ 토론회>

  6. 레닌주의 제국주의론 vs 클리프주의

  7. 『제국주의와 전쟁』 책 소개

  8. (IBT) 혼돈 속의 중동

  9. (IBT) 팔레스타인 인민을 방어하자!(26호, 2004)

  10. (IBT) 제국주의의 피비린내 나는 자취 ( 24호, 2002)

  11. (IBT) 제국주의와 세계불평등: 자본축적과 신식민지 약탈( 31호, 2009)

  12. (IBT) 제국주의 전쟁과 최소저항선을 좇는 가짜 사회주의자들

  13. (IBT) 자본주의와 테러(27호, 2005)

  14. (IBT) 세계화와 계급투쟁(24호, 2002)

  15. (IBT) 북한에서 손을 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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