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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출처 – 국제볼셰비키그룹(IBT)


레닌주의: ‘화해할 수 없는 이념적 경계’



[
 녹색 ]…역주

시카고에서 오리너구리(Platypus) [Platypus Affiliated Society: 2006년 Chris Cutrone 등이 시작하여, 좌익의 이념적 부흥을 목표로 독서회, 토론회, 연구, 출판 등의 활동을 하는 단체. ‘오리너구리’란 특이한 이름은 특정한 정치적 형태를 가지지 않아서 붙였다고 함. 위키피디아 등 참조] 국제회의의 일부로 3월 31일 “오큐파이[월가점령운동] 이후 레닌과 맑스주의 좌익”이라는 주제로 개최된 회의에 참석 발표한 IBT 톰 라일리 동지의 비평을 옮긴 것이다. 영국공산당(Communist Party of Great Britain: CPGB)의 벤 루이스 동지도 발표자로 참석했다. 전 국제사회주의조직(International Socialist Organization:ISO) 지지자였고, 뉴욕의 월가점령운동의 유명한 활동가인 팜 빈 동지는 세 번째 발표자였지만, 마지막 순간 개인적 사유로 불참을 통보했다.

 

이윤을 위한 생산의 광기에 대한 맑스주의 비판이 옳다는 것이 매일 강력하게 입증되고, ‘자본주의’는 점점 추한 단어가 되고, 현존 사회질서에 대한 대중적 지지가 1930년대 이후 가장 낮은 특별한 시기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끝없이 이어지는 ‘자유 시장’의 공포에 대한 매력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능력 면에서나 영향력의 측면에서 좌익의 힘이 이처럼 약한 적도 없었다. 참으로 모순적인 상황이다.

좌익의 정치적 재무장과 혁명적 노동운동 부활의 기초 건설 투쟁은, 반드시 앞선 세대 투사들의 긍정적이고 부정적 교훈 모두를 우리 것으로 만드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믿는다. 무엇보다도 이것은 역사 속에서 유일하게 성공한 노동자 혁명인 1917년 10월 혁명의 교훈 연구를 의미한다.

오늘 우리는 이 방대한 주제를 다룰 만한 시간이 없다. 그러므로 나는 기본 노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그것은 ‘볼셰비키 혁명 성공의 기본적 전제조건은 노동운동의 독립에 대한 인식이라는 것 즉, 혁명가들은 기회주의, 중도주의 그리고 개량주의로부터 분리하여 조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미 대륙이 지금까지 배출한 가장 뛰어난 공산주의 지도자인 제임스 P 캐넌은 레온 트로츠키와 로자 룩셈부르크라는 또 다른 혁명적 거인들과 레닌의 역할이 어떻게 달랐는지를 이렇게 지적했다.

“그가 레닌과 결합하기 전에 인식하고 극복해야 했던, 트로츠키의 가장 커다란 잘못은 그가 볼셰비키와 멘셰비키가 합쳐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레닌 정책의 올바름은 실천적으로 입증되었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그의 탁월한 능력과 재능으로도 이뤄내지 못했고, 그가 가졌던 멘셰비키에 대한 잘못된 평가 때문에 트로츠키가 이뤄낼 수 없었던 당 건설을 레닌은 해냈다.” —‘색트먼 분파와의 통합에 대해 다시 한 번’, 1945년 9월 2일

트로츠키는 1929년에 출판된 『연속혁명』의 첫째 장에서 이 사실을 분명히 인정했다.

“나는 계급투쟁의 논리는 두 분파[볼셰비키와 멘셰비키]를 같은 혁명 노선으로 밀어붙일 것이라고 믿었다. 그 당시 나는 레닌 노선의 위대한 역사적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타협해선 안 되는 이념적 경계와, 필요할 경우, 진짜배기 혁명정당의 핵심을 단련시키기 위해 분립해야 한다는 레닌의 정책 말이다.”

트로츠키는 그 교훈을 수용하는 데에 느렸고, 1917년 레닌주의에 도달하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그 교훈을 한 번 이해한 이후로는 절대로 잊지 않았다. 스탈린주의 악몽 속에서 볼셰비키주의 정치 유산을 홀로 계승한 좌익반대파는 항상 ‘강령 우선!’의 기초 위에서 조직되었다.

비교적 이른 시기에 레닌은 혁명조직은 반드시 혁명가들로만 건설되어야 한다는 사상을 제기했다. 즉, 맑스주의 강령을 이해하고 동의하며 조직적으로 그것을 수행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 말이다.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RSDLP) 1903년 총회에서 이 문제를 둘러싼 멘셰비키 ‘온건파’와 볼셰비키 ‘강경파’ 사이의 분열은 유명한데, 이것은 1917년 케렌스키와 그의 부르주아 임시정부를 지지할 것인가 전복할 것인가를 놓고 나타난 궁극적 분열의 전조였다.

‘민주 집중제’라는 레닌주의 사상은 내부적으로 강령 수정과 지도부 교체를 포함한 모든 논의의 자유에 기초한다. 이것이 ‘민주’의 내용이다. ‘집중’이라는 것은 모든 회원들이―개인적으로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회원들까지도―다수를 획득하여 정책을 변경하기 전까지 다수에 의해 채택된 결정을 수행할 의무를 말한다.

CPGB를 포함하여 자신을 레닌주의자라고 여기는 몇몇 사람들은, 회원들이 공공연하게 이견을 가지고 있다고 드러내는 것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CPGB는 ‘배신자 카우츠키’를 수용하면서 동시에 레닌주의 전통 위에 있음을 주장하는 독특함을 가지고 있다. 레닌은 이 같이 ‘폭넓게 포용하는(broad church)’ 노선을 ‘모래 위에 탑 쌓기(Swamp-building)’라고 비웃었고, 우리는 레닌의 견해에 동의한다. 하지만 우리의 동의를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한, CPGB 동지들은 카우츠키 노선을 환영하고 있다.

물론 우리는 토니 클리프의 『레닌 전기』의 제1권에 대한 팜 빈 동지의 비평으로 인해 이 자리에 모였다. 클리프는 탁월한 작가도 뛰어난 역사가도 아니다. 그 누구도 국제사회주의경향(International Socialist Tendency: IST)이 ‘강령을 우선으로!’라는 정책을 가졌다고 얘기하지 못할 텐데, 만약 그가 이 조직의 오랜 지도자가 아니었다면 그의 책은 별 관심을 끌지 못했을 것이다.

클리프는 1950년 냉전의 압박 속에서, 미국과 여러 제국주의 열강 그리고 동원된 종속국들의 공격에 맞서 북한과 혁명 이후 중국 방어를 거부하면서 트로츠키주의 운동을 저버렸다. 그 다음 거의 20 년 동안 IS는 영국의 사회민주주의 정당인 노동당에 둥지를 틀었다. 그리고 그 시기(1959)에 토니 클리프는 로자 룩셈부르크 연구를 출판했는데, 이 저서를 통해 우리는 그 당시 IS의 정치를 엿볼 수 있다. 이 책에서 토니 클리프는, 노동계급의 자생적 투쟁으로 자본주의를 전복할 수 있고 지도부 없이도 국가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볼셰비키 혁명 이전의 로자 룩셈부르크 견해에 박수갈채를 보냈다.

룩셈부르크는 정치적 활동의 대부분을 독일의 개량주의 사회민주당 내의 소규모 혁명분파의 지도자로 활동했다. 레닌의 노선과 이 노선을 대조하면서 클리프는 “선진적 산업 국가에서, 레닌의 노선은 로자 룩셈부르크의 것보다 적용하기 어렵다.…”라는 결론을 도출한다. 1968년 무렵, IS가 그 책을 다시 찍어내게 되었을 때, 레닌은 이전보다 큰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그러자 문제가 되는 구절들은 (아무런 설명 없이) 삭제되었다. 그런 방식은 진지한 맑스주의자의 것이 아니지만, 클리프와 그가 건설한 정치조직이 자주 사용하는 방식이다.

클리프의 레닌 전기에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많지만, 빈 동지와 내가 제기하는 비판은 많은 부분 다르다. 예를 들어 1903년 멘셰비키와의 분립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하는 그의 주장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 비평을 읽지 않았을지 모르는 분들을 위해 인용해보겠다.

“클리프는 대부분의 소위 ‘레닌주의자’들처럼 1903년 회원 자격 논쟁의 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만약 레닌이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의 역사를 잘 모르는 외국 공산주의자를 위해 쓴 『좌익 공산주의 소아병』의 ‘볼셰비키 역사의 주요 단계’라는 장에서 이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그렇게나 중요한 문제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1월 24일, Links International Journal of Socialist Renewal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좀 놀랐다. 멘셰비키와의 분립을 그처럼 가볍게 무시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다. 빈 동지가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이용했던, 『좌익 공산주의 소아병』에 있는 레닌의 설명을 다시 살펴보면서, 나는 2장의 다섯 번째 문단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발견했다.

정치사상과 조직으로서의 볼셰비키주의는 1903년부터 시작되었다. 오직 볼셰비키주의 역사만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를 위해 필요한 강철 같은 규율을, 대단히 어려운 조건 하에서 확립하고 지속할 수 있었던 까닭을 만족스럽게 설명할 수 있다.”—강조 추가

레닌의 말을 더 들어보자.

한편으로 볼셰비키주의는 1903년 맑스주의 이론의 매우 견고한 기초 위에서 탄생했다. 이 혁명이론, 그리고 단지 이것만의 정확성이 19세기 동안의 세계적 경험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특히 러시아에서의 혁명적 사상의 탐색과 동요, 그리고 오류와 실망의 경험에 의해서 증명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이론의 이러한 차돌 같은 기초 위에서 탄생한 볼셰비키주의는 그 풍부한 경험에 있어서 세계 어디에도 비할 바 없는 15년간(1903~17)의 풍부한 경험을 했다.”—강조 추가

이러한 구절들 모두는 레닌이 1903년(즉, 멘셰비키와의 최초의 정치적 분열과 분립)을 의미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빈 동지가 특별히 인용한) 제3장의 첫 부분의 제목은 “혁명의 준비기: 1903~1905”이다. 이 부분에서 몇 개의 문장을 읽어보려 한다.

세 개의 주요 계급과 세 갈래의 주요 정치노선―자유주의 부르주아,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사회민주주의자, 사회혁명가라는 칭호 뒤에 숨은)[여기에 Marxist Internet Archive의 다음과 주가 붙어 있다: ‘멘셰비키(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의 기회주의 우파를 형성한)와 사회혁명당을 가리킨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혁명가[즉 볼셰비키]―의 대표자들은 강령과 전술문제에 관해 더욱 거센 투쟁을 감행함으로써 임박한 공개적 정치투쟁을 예비하고 있었다. 1905~07년, 그리고 1917~20년에 대중들이 무장투쟁을 감행하는 것과 관련된 모든 주제는 이 시기의 출판물을 통해 그 맹아적 형태를 발견할 수 있다.”—강조 추가

레닌은 이 세 조류 사이의 투쟁은 이후 1905년에서 1917년까지 혁명 투쟁의 “모든 주제”를 제기하고 있으며 그리고 그것들은 “이 시기의 출판물을 통해 즉, 1903년에 시작된 멘셰비키에 대한 정치투쟁에서 그 맹아적 형태를 발견할 수 있다.”라고 명확하게 설명한다. 어떻게 빈 동지가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 레닌은 1903년의 분립을 “그렇게나 중요한 문제”는 아니라는 결론을 도출해 낼 수 있는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레닌의 초기저작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클리프의 평가는 ‘레닌이 때때로 분파적 목적을 위해 당 규율을 구부렸을 것이라는 것’ 이외에는 “별로 주목할 만한” 점이 없다는 비평을 통해 빈 동지는 [클리프와] 유사한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그것이 빈 동지가 클리프의 잘못을 지적하는 유일한 부분이다. 사실 “주목”할 만한 것은, ‘노동자의 고립된 경험으로는 단지 부르주아 의식의 한 형태인 노동조합 의식을 발전시킬 수 있을 뿐’이라는 주장을 통해 레닌이 “자생성과 의식성을 기계적으로 대립시켰다.”라는 클리프의 주장이다. 의식적 사회주의자의 개입 없이 자생적으로 혁명 의식에 도달할 수 없다는 인식이 바로 노동운동을 “혁명 정당의 날개 아래에”로 끌어들이기 위한 투쟁이 필요한 이유이다. 이러한 레닌의 인식을 근거로, 클리프는 레닌이

“당은 자생적 투쟁이 제기하는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피억압 인민 다수는 무지한 반면, 소수 엘리트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빈 동지는 그다지 “주목”할 만하다고 생각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특히 레닌주의에 대한 모종의 입문서를 쓰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으로부터 그런 얘기를 들을 때 더욱 그러하다. 클리프의 속물적 비평은 의식적 혁명전위와 “즉자적 계급” 대중과의 관계에 대한 볼셰비키 사상 전체를 공격하는 것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클리프의 기본적 적대감은 전혀 우연이 아니다. 왜냐하면 레닌의 모든 저작은, 그때그때 인기 있는 환상에 자신의 정치를 꿰어 맞추려는 기회주의자들에 맞선 투쟁이기 때문이다. 레닌은 그러한 자들을 “추종주의자”라고 불렀고 국제사회주의자(International Socialists: IS)는 그 완벽한 최신 사례이다.

클리프의 책이 처음 나타났을 때, 이전 IS 회원이었다가 탈퇴한 브루스 란다우는 클리프가 저지른 심각한 잘못들을 적시하는 통렬한 비평을 출판했다. 레닌의 “경제주의”에 대한 이해 실패, 이스크라 출판 이유에 대한 잘못된 설명, 그리고 1903년의 분립과 1905년의 노동자 대중의 충원―클리프가 직업적 혁명가들의 정당이라는 초기 사상을 “교정”하는 것으로 묘사한―의 의미에 대한 오독 등이 지적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당시에는 혁명적이었던 스파르타쿠스동맹의 지도적 선전가 조셉 시무어의 『레닌과 전위당』이 출판되었다. 우리는 이 팸플릿이 볼셰비키주의의 기원과 발전에 대해 대단히 가치 있는 연구라고 생각하여 우리 웹사이트에 올려놓았다.

나는 1905년과 1912년 프라하 대회에 대한 라스 리[몬트리올 맥길대학McGill University 교수. 『무엇을 할 것인가?』에 관해 『Lenin Rediscovered』라는 책을 펴냄]의 언급들이 빈의 클리프 비평에 대한 논의와 관련하여 의미 있는 정보를 담고 있다는 점을 발견했다. 빈 동지 생각과 달리, 프라하 총회는 볼셰비키/멘셰비키의 재통합은 이제 없음을 확인하는 총회였다고 여겨진다. 시무어 동지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심지어 1912년 이전에도 볼셰비키는 기본적으로 분파라기보다는 당이었다. 왜냐하면 멘셰비키 지도부 아래에서 규율을 지키는 소수파로 활동하기를 거부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플레하노프를 포함한 멘셰비키 지도자들 역시 그처럼 행동했다. 수적으로 적은 멘셰비키 ‘친당파’와의 통합은 프라하 총회에서 재구축된 레닌 지도부에 도전하지 않았다.”

벤 루이스 동지와 나는 1912년 총회에 대해 지난 밤 짧은 대화를 나누었고 나는 우리가 그 시기부터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는 각각 분리된 지하 기구, 지도부, 재정, (대부분의 주제에서 날카롭게 대립하는 노선을 표현하는) 출판물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에 동의할 수 있었다는 점을 발견하고 약간 놀랐다. 그들이 공유했던 것은 단지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이라는 당명이었다. 내 생각에 그것은 그들이 두 개의 서로 다른 조직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루이스 동지는 다른 결론을 도출했는데, 이는 그가 간단하게 설명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민주 집중제 조직구조를 가지고 있는 조직들은 필연적으로 관료적으로 퇴보한다는 빈 동지의 견해에 대하여 언급하려 한다. 나는 그러한 견해는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와 같은 조직구조 속에서 민주적인 운영을 수십 년 동안 이어가는 조직들이 있어 왔다. 1920년대에서 1960년대까지 제임스 P 캐넌이 이끌었던 미국 트로츠키주의 운동은 기본적으로 민주적 방식으로 운영된 사례이다. 반대 견해는 충분히 개진되었고 소수의 권리는 존중되었다. 다른 사례들도 있을 것이다.

이스크라 출범과 1912년 총회 사이의 10년 동안, 볼셰비키 분파는 (카우츠키가 지도한 독일 사회민주당에 영향 받은) 혁명적인 사회민주주의 조직에서 초기 혁명 정당으로 진화했다. 그 과정에서 몇 개의 막대가 구부러졌고, 몇 개의 문은 요란하게 닫혔으며, 언성이 높아지기도 하고, 거친 말들도 오갔다. 레닌은 의심할 여지없이 몇몇 잘못을 저지르고 잘못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그 잘못들을 교정했고 “이론과 실천을 완벽하게 조화”(빈이 불쾌하게 여기는 클리프의 표현)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다른 모든 시도가 실패한 반면, 레닌의 당이 유일하게 성공했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그 경험이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준다고 인정한다.

Leninism: ‘Irreconcilable Ideological Demarc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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