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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국가(소련/중국/북한 등)의 사회성격
2022.04.04 08:28

중국의 사회성격과 노동계급

조회 수 2993 댓글 10

중국의 사회성격과 노동계급

 

중국 문제는, 자본주의 반혁명 이전 소련이 그러했듯, 이 시대 혁명의 첫 번째 주제이다. 세계 최대 인구가 거주하는 거대 국가 중국은 미국 중심 제국주의 진영의 핵심 공격 대상이다. 그런 이유로 세계에서 일어나는 각종 갈등에서 미국과 더불어 중국은 거의 항상 연관된 핵심 참여자이다. 이런 점에서 혁명으로 나아가는 세계 노동계급은 중국의 사회성격과 그 정치적 동기를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이 문제를 중심으로 혁명과 반혁명의 바리케이드가 갈린다.

우리는 중국에 관한 입장을 기회 있을 때마다 발표했다. 기존에 발표된 다음 문서들은 여전히 유효하다.

중국 사회성격에 대한 메모: 중국은 이미 자본주의가 되었는가?

홍콩 송환법 반대 시위에 대한 입장

중국은 자본주의가 아니며, 제국주의도 아니다

맑시즘 2015 참관기 1: ‘중국사회주의인가 자본주의인가?’

소련 중국 북한 등 노동자국가들의 사회성격 논쟁

맑시즘 2012’ 참관기 3: ‘중국의 부상과 미국의 귀환동아시아는 어디로?’

(IBT) 붕괴의 벼랑으로 향하는 중국(26, 2004)

(IBT) 중국은 어디로? : 정치혁명과 반혁명의 갈림길(31, 2009)

 

이번 글은 중국 문제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2022년 시점에서 총괄하는 의미가 있다. 이 문서를 세계 공산주의 운동 지도부가 견지해야 할 핵심 강령에 대한 제안으로 제출한다.

 

<차례>
Ⅰ. 1949년 혁명에서 1978년 '개혁 · 개방’까지

노동자국가 중국의 탄생/ '신민주주의론': 중국식 계급협조/ 관료집단의 계급협조주의와 '일국사회주의론’/ 스탈린의 중국 견제: 중-소 분쟁의 씨앗/ ‘계급 공존'에 대한 환상/ 미제와 국민당의 정치의식/ 연속혁명의 실현/ 혁명의 성과/ 생산력 증진의 세 가지 길/ 1) 생산력 증진의 첫 번째 길: 혁명을 성취한 선진국의 도움/ 생산력과 연속혁명/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후속 혁명' 불발/ 중-소 분쟁과 경제 협력 파탄/ 중-소 분쟁에 대한 마오의 평가/ 고립된 중국/ 2) 생산력 증진의 두 번째 길: '대약진 운동’/ 대재앙, 마오의 실각, 우선회/ 류사오치와 덩샤오핑 지도부의 정책/ 마오쩌둥 분파의 권토중래(捲土重來): ‘문화대혁명’/ 신격화된 권위/ 공황 상태의 중국: 문화대혁명의 배경/ '삼국'관계의 변화/ 미제의 소련봉쇄를 돕는 중국/ 마오의 사망과 '실용주의 분파'의 집권/ '개혁 · 개방’의 길


Ⅱ. ‘개혁 · 개방' 결과로서 중국사회의 변화

1. 생산력의 괄목할 성장

1) 국내총생산(GDP): 한국 · 인도와의 비교/ 경제위기와 중국/ 2008년 대공황/ 노동계급에 떠넘기기/ 중국의 위기 대응/ 1인당 GDP

2) ‘세계 500대 기업’:

3) 달러와 금 보유량: 중국의 달러 보유량/ 패권 통화 달러의 갑질/ 중국의 금 보유량

4) 절대빈곤 감소


2. 중국 내 친자본주의 세력의 위험한 성장

노동자국가의 '자본주의적 양보’/ ‘자본주의적 양보'에 대한 레닌과 트로츠키의 분석/ 중국의 ‘자본주의적 양보’/ 중국의 '억만장자’

1) 국유기업 ‘민영화’: ‘민영화’ 두 가지 방식과 단계/ 소련과 중국의 '사유화’/ 관료적 방식과 공유자산 약탈/ 벼락부자의 시대/ 사유화 허용의 후과(後果)/ ‘국진민퇴(國进民退)’/ 엎질러진 '사유화’

2) 첨단기술과 IT 등 신생 산업의 '억만장자들’: 중국의 '억만장자’들

3) 관료집단 내 친자본주의 분파: 특권과 부정부패/ 특권의 상속/ 관료집단 내 친자본주의 분파

4) 부동산 사용권 매매 허용과 대중적 사유화 지지층: 중국 토지제도와 그 변화/ 토지·주택 사용권 매매와 연장의 귀결점/ 부동산 가격의 급등/ 사적소유 지지층의 양산/

5) 중국에 촉수를 뻗은 제국주의 금융자본: 중국공산당과 '월가’/ 제국주의 자본의 중국 투자/ 세계은행과 중국 국무원의 공동보고서/ 관료집단의 이중성과 시진핑 정부


3. 중국의 소유관계: 여전히 지배적인 국가소유 체제

1) 핵심 산업의 국유화와 그 비중: '국가소유가 중국경제를 지배한다’/국유기업의 성장/상위 500대/100대 기업의 국유기업 비중

2) 은행 등 금융 부문의 국유화: 중국의 국유은행/중국 은행의 사업 목적과 운영 방식/증권과 보험 등 기타 금융 부문

3) 해외투자: 중국의 해외투자/심기 불편한 제국주의/제국주의 트집 목록과 코 꿰인 좌익: '채무의 덫 이론'/중국의 해외투자 동기: '일대일로(一帶一路)’/제국주의 해외침략과의 차이/아프리카와 중남미 인프라 건설/중국에 우호적 여론의 형성/‘중국 채무의 덫'이라는 허구

4) 공기업 국제 비교


중국과 좌익

중국과 세계 노동계급의 임무

 

 

Ⅰ. 1949년 혁명에서 1978년 '개혁 · 개방'까지

* * *

노동자국가 중국의 탄생

1949101, 미제국주의가 지원한 자본주의 구심 국민당과의 내전에서 승리한 중국공산당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언했다. 이렇게 세계 인구 약 1/4이 거주하는 광대한 지역에 사적소유를 철폐한 또 하나의 노동자국가가 탄생하였다.

 

‘신민주주의론': 중국식 계급협조

격렬한 혁명적 분출이 있던 1925~27년 시기, 국민당과의 합당이라는 재앙적 계급협조주의 정책으로 중국공산당은 괴멸적 타격을 입었고, 도시 지역을 잃고 변방으로 쫓겼다. 그 이후로 중국공산당은 도시지역 노동계급의 조직적 기반을 거의 상실하였다. 중국공산당이 기사회생한 정치적 배경은 일본 제국주의의 야만적 침략과 도탄에 빠진 빈농들의 지원이었다. 항일 민족해방투쟁으로 결집하여 승리로 이끈 홍군(紅軍)은 대부분 농민 자제들로 충원되었다.

마오와 중국공산당이 사적소유를 철폐하는 사회주의 혁명을 구상하지는 않았다. 공산당과 국민당의 반제 공동전선을 그대로 이어가서, 제국주의로부터 해방된 이후 노동자와 자본가계급의 공동정부, ‘공산당과 국민당의 공동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목표였다. 이 몽상적이고 재앙적인 구상은 <신민주주의론>으로 불렸다.

지금은 아직 사회주의를 실시할 때가 아니다. 지금 중국혁명의 임무는 반제, 반봉건이며 이 임무가 완수되기 이전에는 사회주의를 논의할 여지가 없다. 중국혁명은 두 단계를 거치지 않을 수 없는데, 첫걸음은 신민주주의, 두 번째 단계는 사회주의이다.

중국의 민족자산계급은 식민지, 반식민지적 국가의 자산계급이며 제국주의의 억압을 받고 있기 때문에혁명성을 가지고 있으며,

지금 창건하려는 중화민주공화국은 오직 무산계급 영도 하에서의 반제, 반봉건적인 연합독재 민주공화국이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즉 신민주주의 공화국이며 또한 진정한 혁명적인 3대 정책을 실시하는 신삼민주의 공화국이다.”마오쩌둥 연설, 194019, 모택동선집 2범우사

멘셰비키의 러시아혁명 구상이었던 계급협조주의 단계론과 똑닮은 이 신민주주의론은 마오의 독창적 구상이 아니었다. 러시아 10월 혁명의 성과와 퇴보의 응고물 스탈린 관료집단의 이른바 일국사회주의론의 중국식 표현이었다.

오성홍기와 중국:   중국 공산당, 작은 별들은 각각 노동자, 농민, 소자산계급, 민족자산계급


관료집단의 계급협조주의와 '일국사회주의론’

러시아 10월 혁명으로 노동계급은 지배계급이 되었지만 후속 혁명의 불발로 그 기세가 이어가지 못하고 주춤했다. 바로 그 지점에 관료집단이 자리잡았다. 모스크바의 관료집단은 세계 혁명의 이해와 부분적으로 겹치지만,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그리하여 관료집단은 10월 혁명에 한편으로 의존하며 방어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배신하며 반혁명의 토대를 닦는다. ‘일국사회주의론은 바로 이러한 관료집단의 단기적 이해와 모순의 응고물이다. 일국의 혁명으로 부상(浮上)하여 출세한 관료집단의 이해에 세계 각 지역 노동계급 전체의 역사적이고 장기적 전망을 굴종시키는 이론이다.

각 지역 노동계급의 혁명적 전진이야말로 소련을 방어하는 가장 근본적 수단이다. 10월 혁명을 타고 앉은 크렘린의 관료집단은 그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근시안적 사고에 사로잡혀 있었다. ‘언 발에 오줌누기식 대응으로 일관했다. 소련 국경을 당장 위협하는 독일과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그와 경쟁하는 미국 영국 프랑스 제국주의에 아부하는 정책을 취했다. 1943년엔 세계 노동계급의 공산주의 지도부 코민테른 해체를 선물했다. 각 나라 노동인민의 혁명적 진출을 주저앉히고 그 나라 지배계급과 화해하는 계급협조주의 정책을 강요했다.

결국 계급협조주의는 몰락 직전의 자본주의 세력을 지탱하고 회복을 도왔다. 회복한 그들은 이내 반격하여 혁명적으로 진출한 그 나라 노동계급을 궤멸시켰다. 이러한 역관계 속에서 결국 동유럽과 소련 노동자국가는 자본주의 반혁명으로 내파되었다.

 

스탈린의 중국 견제: 중-소 분쟁의 씨앗

모스크바의 스탈린 지도부는 차라리 중국 혁명을 부담스러워하였다. 그 이유는 첫째, 중국혁명이 2차 대전에서 막강한 힘을 보여준 미제국주의의 분노를 자칫 자극할까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둘째, 혁명 이후 중국이, 유고슬라비아 티토 정부처럼, 모스크바의 스탈린 지도부에 순종하지 않을지 모른다는 일국사회주의론에 빠진 관료적 걱정 때문이었다.

현상유지를 옹호하는 스탈린 지도부는 국민당과의 공동정부 구성을 끝끝내 고집했다. 국민당에게 결정타가 될 최종적 진격을 가로막았다. 홍군의 장강 도하를 만류했다. 이는 일국사회주의론이라는 관료집단의 사고체계가 얼마나 재앙적인지와 더불어 중-소 분쟁의 단초를 엿볼 수 있게 하는 사건이었다.

관련된 대화 몇 개를 소개한다.

소련 동부지역에 거대한 공산국가의 출현은 우리에게 일련의 문제를 일으킬 것이다.방대한 영토와 인구를 가진 중국은 공산당이 원한다 할지라도 소화’(통일)하기 어렵다. 미국인들이 중국에 계속 물자와 돈을 쏟아 붓도록 내버려두자이는 그들을 더욱 약하게 만들 뿐이다.”주중 소련대사 니콜라이 로쉰(Nikolai Roschin)과 인도사절단 차크라바티의 대화, 194918

스탈린은 중국에 대하여 일련의 잘못을 저질렀다.... 해방전쟁 시기에는 우리에게 혁명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만일 내전이 발발하면 중화민족은 멸망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내전이 시작되었을 때 그는 우리의 승리에 대해 반신반의하고 승리 후에는 우리의 승리를 티토식 승리라고 의심했다.”마오쩌둥, 중공정치국 확대회의 발언, 1956425, 김동길 역사학보 202, 2009219

(장강) 도하 직전에 모스크바로부터 아나스타스 미코얀이 시바이포에 도착하였다. 그는 스탈린을 대표하여 중국혁명의 형세와 우리의 의견을 듣기 위해서왔다. 당시 군사적, 정치적 상황은 우리에게 매우 유리하였고 우리는 장강을 넘어 전 중국의 해방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련은 우리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에게 내전 중지를 요구하고 실질적인 남북조 상황을 만들어 두 개의 중국을 만들려고 기도하였다.”저우언라이, 주소련 중국대사 부임하는 류샤오(劉曉)를 접견하며, 1955, 같은 논문 219~220

중국 인민해방군이 남하한 후 영국과 미국의 군대가 인민해방군 후방에 상륙할 위험성이 현저히 높아졌다. 중국 인민해방군은 성급히 남하해서는 안 된다.”스탈린의 서한, 1949423, 같은 논문 240

 

‘계급 공존'에 대한 환상

이처럼 모스크바의 관료집단은 자본과 노동두 계급 연정을 중국공산당에 지시했고, 마오가 이끄는 중국공산당은 이를 신민주주의론으로 체화했다. 스탈린과 마오의 이 노동자본의 연립정부구상은 비()마르크스주의적 몽상이었다. 공산당과 국민당으로 결집된 두 계급이 일시적이고 우연적으로 이루고 있던 균형이 지속되리라는 비과학적 환상에 기초한 구상이었다.

역사 속에서 적대적 두 계급이 다른 한쪽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하는 이중 권력이라는 불안정한 상황은 종종 등장한다. 그러나 지배계급이 되고자 하는 두 적대 계급의 공존은, 마치 같은 극의 자석이 서로를 미는 것처럼, 불안정한 정세를 조성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중 권력 정세는 매우 일시적으로만 나타난다. 안정을 찾기 위해 사회는 요동친다. 그러다가, 자본가계급 또는 노동계급 중 하나가 다른 계급을 폭력적으로 제압하며 이중 권력 정세는 종료된다.

191710월 노동자혁명 이전까지 약 8개월 동안이 그 대표적 사례이다. 케렌스키가 7월 볼셰비키 지도자를 가두고 모든 활동을 불법화한 것이나, 8월 말 코르닐로프의 쿠데타는 자본가 계급이 주도하는 안정화 시도였다. 볼셰비키는 10월 봉기를 통해 노동계급이 지배하는 사회 안정을 이루었다.

일시성과 우연성 그리고 불시에 닥칠 폭력적 격돌의 필연성은 혁명적 시기 나타나는 이중 권력 정세의 본질이다. 이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우연적 균형이 지속될지 모른다는 환상은 계급협조를 낳고 끔찍한 재앙으로 귀결된다. 근현대 역사 속에서 그 재앙의 피해자는 대부분 계급적 각성이 늦은 피착취계급쪽이었다. 1937년 스페인, 1965년 인도네시아, 1973년 칠레는 그 대표적 사례들이다.

 

미제와 국민당의 정치의식

미 제국주의와 국민당 자본가계급은 몰계급적이지 않았다. 중국 노동인민의 깊은 환멸과 적대에 시달릴지언정 그들의 계급본능은 투철했다. 중국과 세계 노동계급에 매우 다행스럽게도, 그들은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몽상적이고 비현실적인 두 계급 연정을 거부했다.

미 제국주의는 광대한 중국 지역이 자칫 노동자국가 지역으로 넘어갈 불안을 용납할 수 없었고, 국민당은 공산당을 완전히 궤멸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항일 전쟁 시기나 국공내전 시기 군사적으로 불리할 때에만, 잠시 시간을 벌 요량으로 공동전선(‘국공합작’)이나 평화협정 등에 응하는 척했지만, 상황이 유리해지면 기존 약속을 번번이 저버리며 배신했다. 그때마다 방심하고 있던 공산당군을 기습하여 깊은 상처를 입혔다.

 

연속혁명의 실현

미제와 국민당군은 결국 정세를 사생결단의 지경으로 몰아갔고 그 판가름의 내전에서 패배해 대만으로 도주했다. 이는 현지 인민의 이해에 철저히 반하는 제국주의의 패배, 부패한 현지 하수인 정권의 패배였다. 반면에, 노동인민의 광범위한 지지를 통해 초기의 군사적 불리를 극복한 공산당의 최종 승리였다.

이것이 두 계급 공동정부를 추구한 코민테른과 중국공산당의 의도와 달리, 사적 소유가 철폐된 기초 위에 노동자국가가 수립된 역사적 배경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형태로 수립된 노동자국가를 기형적 노동자국가라고 부른다. 이로써 중국엔, 1917년 혁명으로 수립된 노동자국가 소련의 영향력 아래, 동유럽 북조선에 이어 기형적노동자국가가 탄생하였다. 수많은 희생으로 이루어낸 세계 노동인민의 빛나는 승리였다.

또한 중국 혁명은 일국의 혁명이 일국의 경계에 한정되지 않고 세계사적 성숙과 국제적 역관계에 따라 그 성격이 형성된다는 것을 또 다시 보여주었다. 자본주의 미성숙 지역의 반제국주의 해방투쟁으로 성장했지만, 1917년 혁명 성과와 결합하면서 사적소유를 철폐하고 사회주의 혁명으로 나아갔다. 소련, 동유럽, 북조선에 이어 연속혁명의 또 하나의 역사적 실천 사례가 되었다.

 

혁명의 성과

오랫동안 아시아의 병자로 모욕당해 온 중국이었다. 사적 소유를 철폐하는 것만으로도 혁명은 중국의 산업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공업 총생산이 38, 중공업생산이 90배 증가했다. 1952~1977년 사이 연평균 11.3%씩 증가한 공업생산은 근대 세계 역사에서 비슷한 시기의 다른 어떤 나라에서 이룩한 것보다도 훨씬 빠른 공업화 속도였다. 1970년대 중반에 이르면, 중국은 이미 제트기, 중형 트랙터, 근대적인 원양어선, 핵무기와 장거리 탄도 미사일을 제작했고, 1970년엔 인공위성을 쏘아올렸다.

혁명 이전엔 인구의 대다수가 문맹이었지만 혁명 이후 절대다수가 교육혜택을 받았다. 종합적인 보건의료제도가 도입되었다. 평균수명이 거의 두 배로 늘어 1949년 이전 35세에서 1970년대 중반 65세가 되었다.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모리스 마이스너)

혁명 이전 전족여아살해’, ‘매매혼’, ‘축첩등으로 억압당하던 중국 여성이었다. 혁명으로 중국 여성의 지위는 급신장하였다. 낮은 생산력이라는 한계가 있었지만, 생산수단과 가사노동 사회화 그리고 여성의 사회참여의 결과였다.

“2010년대 중반, 한 사회학자가 1950년대생 중국여성에게 마오쩌둥 시대로 돌아가고 싶으냐는 질문을 하였다. ‘가난이 싫어서 절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라고 답한 뒤 여성은 묻지 않았음에도 자신의 어머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1927년생인 그녀의 어머니는 공산당에게 감사해야 돼. 해방이 되지 않았더라면 네 아버지는 분명 첩을 여럿 들였을 거야.”라고 늘상 이야기하면서 문맹 교육반에 열심히 나가는 며느리가 못 마땅해서 대문을 잠가버린 시어머니 얘기를 하고는 공산당이 옳아. 엄마는 예전엔 글을 몰랐지만 해방 후 문맹교육 덕분에 지금은 책도 신문도 읽을 수 있단다.”라고 하였다.”―『현대 중국 여성해방 100년의 변천, 그 독법김미란

한국 사람들은 중국이 공산주의 국가라서 여러 가지로 안 좋다고 말하지만 남녀평등에 있어서는 오히려 중국이 한국보다 앞선다.사회주의화 후 중국에서는 여자는 하늘의 절반을 차지한다.’는 말이 일반화되어 한국보다 여성의 권리를 더 인정해주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돼 있다.”―「양성평등, 한국이 중국에 뒤져, 박혜영, 여성신문, 2010820

“1949년 사회주의 신중국 건립 이후, 새로운 혼인법반포를 시점으로 해서 이들 중국 여성들은 구시대에서 받아왔던 온갖 억압과 불평등에서 벗어나 사랑과 결혼의 자유를 비롯해서 여성들의 자주적인 권리를 법적으로 보장받고 있다. 법적으로 보장된 형식적인 남녀평등의 논리에 비추어보더라도 이들 중국 여성들이 누리고 있는 평등의 정도는 세계 다른 국가들과 비교할 때 전혀 손색이 없는 듯하다.”―「‘3.8세계여성의 날을 계기로 보는 중국 여성들의 현황, 오마이뉴스, 200138

 

생산력 증진의 세 가지 길

() 자본주의적 생산력을 가진 후진국에서의 사회주의혁명이 그 혁명 성과를 방어하기 위해서는 생산력의 증진이 사활적이다. ‘쌀밥에 고깃국이라는 상징적 표현처럼, 안정적인 생활조건이 보장되어야 자신이 속한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유지되는 법이다. 그리고 사적소유 철폐 후 더욱 살기등등해진 국내외 자본가계급의 적대에 맞서는 군사적 방어를 위해서도 생산력의 성장이 절실하다.

갓 태어난 노동자국가가 생산력 증진을 이루는 길은 세 가지가 있다: ‘첫째, 혁명을 성취한 선진국의 도움, 둘째, 일국 생산력의 총동원, 셋째,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와의 타협

 

1) 생산력 증진의 첫 번째 길: 혁명을 성취한 선진국의 도움

생산력과 연속혁명

물론 첫 번째 길이 가장 바람직하고 근본적인 해결책이다. 이제 갓 자본주의적 발전을 시작한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발생한 것은, 객관적 역사법칙의 실현이었다. 그런데 그와 더불어 그 역사법칙을 가장 날카롭게 이해한 혁명가들의 주체적인 목적의식의 실현이기도 하였다. 엥겔스는 연속혁명의 법칙성이 러시아에 관철될 것을 예견했고, 레닌과 트로츠키는 그 법칙에 대한 이해 속에서 러시아 혁명을 사회주의 경로 위에 올려놓았다.

러시아 자본주의 이제 막 발전하고 부르주아적 소유가 일부, 그러나 절반 이상이 농민의 공동 소유, 원시적 공동소유의 나라에서 공산주의적 공동소유로 직접 넘어갈 수 있는가 아니면 서유럽의 역사 발전이 보여준 것과 같은 해체 과정을 먼저 거쳐야만 하는가? 러시아 혁명이 서구 노동자혁명의 신호탄이 되고 이 두 혁명이 보완한다면 러시아의 공동소유는 공산주의 발전의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엥겔스, 1882, 공산당선언러시아어판 서문

사회주의 정책이 러시아의 기술적 후진성에 걸려 더 나아가지 못하게 되면 그 즉시 노동자 정부는 정치적 난관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유럽의 프롤레타리아로부터의 국가적인 차원의 직접적 지원 없이는 러시아의 노동계급은 권력을 계속 유지할 수 없으며 또한 자신들의 일시적 지배를 지속적인 사회주의 독재로 전환시킬 수 없다.”트로츠키, 평가와 전망, 1906

세계사적 사실들은 러시아 혁명의 사회주의 혁명으로의 전환은 모험이 아니라 불가피한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왜냐하면 다른 선택이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세계적으로 볼셰비키 정치가 승리하지 않는다면 , 영국-프랑스와 미국 제국주의는 결국 러시아의 독립과 자유를 목조를 것이다.”레닌, 191811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후속 혁명' 불발

세계 패권을 둘러싼 경쟁전인 2차 대전에 제국주의 국가들이 몰입하고 있는 동안, 소련과 식민지에 대한 압력이 느슨해졌다. 이렇게 압력이 약화되자, 여러 식민 지역에서 반제 민족해방투쟁이 격화되었다. 소련군은 동유럽과 북조선에서 독일과 일본 제국주의를 격퇴하였고, 그 지역 노동인민의 해방의지와 결합하여 노동자국가 지역이 확대되었다. 내전에서 승리한 중국이 그에 합세했다.

그러나 간절히 바랐던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혁명은 2차 대전 이후에도 불발하였다. 독일, 프랑스, 스페인 등 선진 자본주의 국가 지역에서 노동자혁명이 거의 성공할 기세로 타올랐다가도 혁명지도부라는 마지막 결핍을 채워내지 못하면서 식어버렸다.

이렇게 소련 등 퇴보한/기형적노동자국가의 후진적 생산력을 보완할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후속 혁명은 불발했다.

 

중-소 분쟁과 경제 협력 파탄

그런 상황에서 중국에 비해 상대적 선진국인 소련 등 노동자국가 블록과의 경제 협력이 긴요했다. 오랜 내전으로 지친 중국 노동인민에게 소련의 물자와 기술 등 경제적 지원은 큰 힘이 될 것이었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는 많이 못 미치지만, 10월 혁명의 성과에 힘입은 소련의 산업성장은 눈부셨다. 사적소유 철폐로 빗장이 풀린 생산력은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비약에 비약을 거듭했다. 1949년 세계 두 번째로 핵무기 실험에 성공하고 1957년엔 세계 최초의 우주선인 스푸트니크호를 발사한다.

그러나 소련과 중국의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의 이해는 세계 노동계급의 이해와 부분적으로만 일치했다. 국제적 시야를 잃고 일국적 시야에 갇혀 있었다. 그리하여 세계 노동계급의 역사적 대의에 맞서며 빈번히 갈등했다. 세계 노동계급 전체의 대의에 기초하여, 거시적 장기적 전망 속에서 역량을 배치하지 않고 협소한 일국의 시야에 갇혀 자국의 이해를 최우선시하고 각자 살아남는 방식으로 역량을 배치했다.

세계 노동계급의 총체적 이익을 조율할 공산주의 세계 지도부 코민테른을 1943연합군이라고 불리던 미 영 프 제국주의에 조공용으로 해체했다. 191710월 혁명의 권위를 남용하며, 소련은 패권적이고 고압적인 태도로 노동자국가 진영을 운영했다. 호혜평등이 아니라, 주종관계를 강요했다.

이렇게 시작된 중소분쟁은 결국 군사적 충돌로까지 발전한다. 소련이 스탈린에서 흐루쇼프 그리고 브레즈네프로, 중국이 마오쩌둥에서 덩샤오핑으로 지도부가 교체되는 과정에서도 이 갈등은 완화되지 않고 오히려 악화되며 심지어 군사적 충돌 지경에 이르렀다.

급기야 두 노동자국가는 형제국이 아니게 되었다. 갈등에 미 제국주의까지 끌어들이며, 믿기 어려운 비열한 노동계급 배신행위까지 자행했다.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었다. 이 두 나라의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에 의해 노동자국제주의는 파탄났고, 조롱거리가 되었다. 미국 등 제국주의는 이 갈등을 이이제이(以夷制夷) 수단으로 이용했다.

수십 년간 이어진 이 중소분쟁은 갖가지 사건을 낳았다. 이 주제는 일국 사회주의론을 비롯한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의 세계관과 구체적 정책, 소위 현실 사회주의진영의 일그러진 역사 등을 이해할 중요한 열쇠이다. 우리는 그 일단을 미얀마 군부독재와 노동계급등 몇몇 글에 서술한 바 있지만, 더 구체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우리는 이 -소 분쟁에 대한 더 자세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연구의 성과를 머지않아 발표할 계획이다.

 

중-소 분쟁에 대한 마오의 평가

다만 이 글에서는 갓 태어난 노동자국가 중국의 숨통을 막아버린 중-소 분쟁을 살짝 들여다 볼 흥미로운 대화 일부를 소개한다.

마오쩌둥: 모스크바에서도 말했었지만, 스탈린의 실수를 비판하는 것은 정당하다. 다만, 비판에 제한을 두어야 할지 여부에 이견이 있는 것이다. 나는 스탈린이 한 일 10개 가운데 잘못이 3개라고 생각한다.그의 두 번째 오류는 중국 혁명이 무르익었을 때, 장제스와 전쟁을 시작하면 중국 전체가 파멸에 이를 것이라고 말하면서, 혁명을 일으키지 말라고 충고한 것이다.우리 혁명의 승리 이후에 스탈린은 혹시 중국이 유고슬라비아처럼 될 것을 의심했다.[중국공산당이 전국토를 장악한 이후인 194912]에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스탈린은 우리와의 우호조약 체결을 거절했다. 한편 국민당과의 과거 조약 파기도 원하지 않았다. 소련 측 통역가와 외교사절이 이왕 왔으니 소련 이곳저곳을 둘러보라는 스탈린의 말을 전해준 것을 기억한다. 그래서 내가 반문했다. 그럼 나더러 이곳에서 먹고 자고 싸는 일만 하다가 가라는 것이냐고.작년에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불가닌도 있던 자리에서, 그 당시 스탈린이 우리를 도청했다고 들었다.

흐루쇼프: 맞다. 그때 내가 말했을 것이다. 그는 우리도 도청했다. 심지어 그는 자기 자신도 도청했다. 한번은 그와 함께 휴가를 갔을 때, 그는 자기 자신조차 믿지 못한다고 고백했다. 그는 나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나 자신도 믿지 못한다.’라고 말했다.”마오쩌둥과 흐루쇼프의 첫 번째 대담, 소련 측 포노마레프(B. N. Ponomarev), 중국 측 덩샤오핑 참석, 1958731일 베이징 중난하이

일국적 이해에 눈 먼 두 노동자국가 스탈린주의 지도부의 불화는 소련의 핵기술 중국 이전 거부 등으로 이후 더욱 악화되었다. 이듬해인 195910월 양국은 관계 단절을 선언한다.

 

고립된 중국

-소 협력 파탄으로 갓 태어난 노동자국가 중국은 사면초가의 위기에 빠졌다. 미 제국주의는 1950~53년 한반도 전쟁 당시 중국 본토에 핵공격 위협을 가했을 뿐 아니라, 그 후에도 국민당 잔당 등을 이용하여 끊임없이 도발을 자행한다. 파탄의 책임을 서로에게 떠넘기는 소련과 중국 관료지도부의 국제적 비난전은 곧 총격전으로 이어졌다. 원체 후진국이었던데다가 내전과 한반도 전쟁 등으로 어려웠던 중국의 경제적 곤란을 해결할 소련의 도움은 이로써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혁명을 이룬 인민의 희생은 생활의 개선으로 보상되어야 했지만 크게 지연되었다. 이렇게 중국은 내우외환에 시달리는 절체절명의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2) 생산력 증진의 두 번째 길: '대약진 운동’

반복하지만, 노동자국가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생산력을 확보해야 한다. 그래야 노동인민의 요구를 충족시키고 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설 수 있다. 그리고 후진국에서 수립된 고립된 노동자국가가 생산력을 높이기 위한 방법은 세 가지 길[혁명을 성취한 선진국의 도움 사적소유 철폐된 국유화된 경제체제 속에서 생산력 최대화’(스타하노프, 대약진, 천리마 운동 등) 자본주의적 타협 (신경제정책, 부하린주의 정책, 중국 선부론, 베트남 도이머이 등)]이 있다. 그런데 그 중 첫째 길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혁명 불발과 소련과의 관계 파탄으로 막혀버렸다.

중국은 두 번째 길로 들어섰다. , 인민이 총력을 다해 생산력을 최대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1958년 무렵, 15년 안에 선진국을 따라잡겠다는 대약진운동이 시작되었다.

생산력은 생산성에 좌우되며 생산성은 그 사회의 과학기술 수준에 의존한다. 따라서 과학기술의 뒷받침 없이 단지 사회구성원들의 열성만으로 생산력 발전을 이루는 것은 한계가 있다. 그러나 비과학적 사고에 빠져있던 마오쩌둥 지도부는 노력을 통해 선진국을 따라잡을 수 있다고 믿었다.

 

대재앙, 마오의 실각, 우선회

결과는 재앙적이었다. 중공업 발전에 필요한 철광을 수공업적 방식으로 늘리려는 운동은 여타의 비과학적 농업 계획 등과 결합하며 처참한 흉작을 낳았다. 곡물 부족으로 수많은 인민이 굶어죽었다. 목표와 실행 방법 비과학적 설정과 관료주의적 실행, ‘~으로 모든 고난을 이겨낼 수 있다는 관념론, 지도부에 대한 무비판적 추종 등이 복합된 결과였다.

오랜 내전을 승리로 이끌어 당과 국가 내에서 어마어마한 권위를 누리고 있던 마오였지만, 적게는 수백만 많게는 수천만으로 추산되는 대기근 사망자 앞에서 버텨낼 수는 없었다. 1962년 마오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뒷선으로 물려났다.

 

류사오치와 덩샤오핑 지도부의 정책

마오를 중심으로 하는 주관주의 분파 실각 이후, 중국의 방향키를 잡은 류사오치와 덩샤오핑 지도부는 당장의 생존을 위해 자본주의와의 일정한 타협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 사회는 이번엔 오른쪽으로 선회했다.

류사오치와 덩샤오핑 지도부의 급선무는 극단적 굶주림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식량생산을 늘려야 했다. 4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새 지도부가 매달린 가장 중요한 정책은 이 문제였다.

트랙터 등 생산기술이 뒷받침할 때 인민공사로 대표되는 집단 영농이 제 역할을 한다. 수공업적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할 경우, 집단 영농은 오히려 생산량을 떨어뜨릴 수 있다. 류사오치 덩샤오핑 지도부는 작은 규모의 개인 토지 소유와 부업의 허용’ ‘지역 시장 부활’ ‘노동에 따른 분배’ ‘할당량 초과 생산물 소유 허용등 사적소유와 타협하는 정책을 도입했다. 효과가 있었다. 1961년 이 정책을 도입한 지역의 생산량은 40% 가까이 증가했다.

 

마오쩌둥 분파의 권토중래(捲土重來): ‘문화대혁명’

갓 태어난 노동자국가 중국의 목숨을 위협하는 안팎의 어려움들이 쌓여 있었고 그 중심엔 경제 문제가 있었다. 마오를 비롯한 중국공산당의 주관주의적 좌익분파는 이 문제에 무지했다. 1958~61대약진운동실험은 재앙적 결과를 낳으며, 경제 문제에 대한 그들의 무지와 무능력을 여실히 드러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오를 중심으로 결집한 중국공산당의 주관주의적 좌익분파는 실각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들은 중국 혁명의 중심이 된 중국공산당의 지도 권력을 수십 년 동안 손에 쥐고 있었다. 이 경험은 마오 중심의 좌익분파로 하여금 스스로의 운명을 혁명의 운명과 동일시하게 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신의 실각을 혁명에 대한 위협으로 여겼다. 역시 매우 주관적으로. 게다가 실각은 국가 권력으로 누릴 각종 특권을 잃어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권력 맛에 심취한 부패한 관료들에게는 이는 반혁명보다 더 견딜 수 없는 일일 수 있다.

 

신격화된 권위

중국 관료집단 내 주관주의적 좌익분파는 마르크스주의 과학 대신 마오가 가진 신적 권위를 무기로 이용했다. 중국 인민은 빈곤과 외세 억압으로 수십 년 동안 시달렸다. 그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을 가지고 있다. 마오는 반일 민족해방투쟁과 국민당과의 내전을 승리로 이끈 중국공산당과 홍군의 정점에 있었다. 그리하여 마오는 중국 인민 해방 열망의 응집점이 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마오는 신보다 더 현실적 권위를 지닌 기복(祈福)의 화신이 되었다.

마오를 중심으로 결집한 중국공산당의 주관주의적 좌익분파는 권력 회복에 나섰다. 당장의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 류사오치 덩샤오핑 지도부가 실시한 약간의 응급조치를 친자본주의 반혁명으로 과장 선동하였다.

 

공황 상태의 중국: 문화대혁명의 배경

주관주의적 좌익분파의 악선동은 극한 스트레스 상태의 사회 분위기와 결합하며 광적으로 타올랐다. 연이은 고난과 실패 속에서 중국 사회는 패닉에 빠져있었다. 고통과 실패를 손쉽게 설명하고 책임을 지울 희생양이 필요했다.

세계 제국주의 체제 아래에서 중국 인민의 고난은 끝없이 이어졌다.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으로 수십 년 동안 이어진 치욕의 역사, 일제와 치른 10년에 가까운 해방 전쟁, 이어진 국민당과의 내전, 곧이어 벌어진 미제에 맞선 3년 동안의 한반도 항미원조전쟁, 대약진 정책 실패와 재앙적 굶주림, 소련과의 불화와 급기야 전쟁으로 치달은 양국 관계 등

지도부의 악선동과 극도로 긴장된 사회가 맞물리며 중국 사회는 격렬하게 진동했다. 이 문화대혁명은 앞뒤가 꽉 막힌 스트레스 최고조 상태의 사회가 앓는 몸살이나 발작 같은 증상이었다. 1966년 마오를 중심으로 하는 주관주의적 좌익분파가 권력을 되찾기 위해 지핀 불길은 1976년 마오 사망까지 10년 동안 타올랐다. 사회의 몸살이 가라앉기까지 필요한 시간이었다. 탈출구 없음을 사회구성원 모두가 깨닫고 새로운 방향에 동의하기 위해 필요한 시간이었다. 그 동안 노동자국가 중국의 인적, 물적 자원 상당량이 그 소모적 불길 속에 소진되었다.

 

‘삼국'관계의 변화

문화대혁명으로 마오를 중심으로 결집한 주관주의적 좌익분파는 공고한 권력을 얻었다. 그러나 국내의 경제, 국외의 소련 그리고 미국과의 갈등 문제는 여전히 해결하지 못했다. 소련 권력이 흐루쇼프에서 브레즈네프로 이동하였지만 두 나라의 갈등은 완화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악화되었고 핵전쟁을 운운할 정도로 험악해지며 무장충돌로 발전했다. 중국과 소련 두 노동자국가 사이의 갈등은 지도자의 자질에 따른 우연적 결과가 아니었다. 스탈린주의의 필연이었다. 그리고 미 제국주의의 적대는 여전했다. 중국은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데 1964년 미국 개입으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베트남전쟁은 소련 중국 미국 세 강대국의 관계에 변화를 주었다. 중국이 변화를 가장 먼저 가장 간절히 원했다. 중국은 양 강대국 모두를 적으로 상대하기 버거웠다. 양국을 이간하여 버티는 삼국지의 책략이 계급정치를 대체하였다. 중국 입장에서 소련과의 무력 충돌은 우선 꺼야할 눈썹의 불이었다. 한편 베트남전을 치르고 있던 미국은 그러한 중국을 꼬드겨 이간하면 소련을 고립시킬 수 있었다.

 

미제의 소련봉쇄를 돕는 중국

그리하여 중국과 미국 불구대천의 두 나라는 갑자기 눈이 맞았다. 국경분쟁으로 중-소의 불화가 최고조에 이른 1969년 중국과 미국 관계에 훈풍이 불기 시작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1972년 닉슨의 북경 방문으로 중국과 미국의 화해(‘데탕트’)는 절정에 이르렀다. 노동자국가 중국은 제국주의 미국과 손을 잡았고, 같은 노동자국가 소련을 고립시켰다. 그리고는 미제국주의의 소련 봉쇄 정책에 동참했다. 73년 칠레 피노체트 쿠데타, 75년 앙골라 내전, 79년 아프가니스탄 전쟁, 79년 베트남과의 전쟁 등에서 중국은 미제와 같은 편에 서서 소련에 적대했다.

이로써 중국 사회는 다시 급격히 우선회했다. 제 살길을 찾기 위해 제국주의와 화해하며 노동자국제주의를 배신했다. 마오쩌둥과 중국공산당이 미제가 구축한 반소봉쇄에 참여하여 세계 노동계급 반대 편에 선 것은, 소련공산당 스탈린주의 지도부의 계급협조와 코민테른 해산과 짝을 이루는 배신행위였다. 이 두 노동자국가 지도부는 노동자국제주의를 배신하고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결정적으로 수정했다.

 

마오의 사망과 '실용주의 분파'의 집권

1976년 미국과의 수교로 개혁개방에 길을 터 준 마오쩌둥이 사망했다. 마오의 후광 뒤에 숨어있던 공산당 내 주관주의적 좌익분파는 권위를 상실했다. 마오 사망 한 달 뒤의 4인방의 체포와 숙청은 문화대혁명으로 집권한 중국공산당 내 주관주의적 좌익분파의 종식을 의미하는 사건이었다. 이어 덩샤오핑으로 대표되는 중국공산당 내 실용주의분파가 집권했다. 긴 고난으로 탈진한 중국은 10년 전 친자본주의 반혁명이라고 공격하던 이 분파의 등장을 별다른 저항없이 받아들였다.

 

‘개혁 · 개방'의 길

앞서 설명했듯, 생산력이 뒤처진 지역의 노동자국가가 생산력을 발전시킬 방책은 혁명을 성취한 선진국이나 선행 노동자국가(소련)의 지원 사회구성원들의 분발을 통한 생산력의 총결집 사적소유 일부 허용을 통한 자본주의적 양보라는 세 가지이다. 그런데 중국은 30년에 가까운 자신의 실천적 경험을 통해 ⑴ ⑵의 길이 막혀있음을 확인했다. 이제 남은 길은 뿐이었다. 소련이 내전 직후 택했던 레닌 당시의 신경제정책(NEP)이나, ‘누구든 먼저 부자가 되시오!’라는 언명으로 대표되는 부하린의 정책 등과 닿아 있는 길이었다.

이전 시기의 갖은 고난에 대약진운동문화대혁명으로 탈진한 중국의 키를 쥔 덩샤오핑 지도부는 그렇게, 마지막 남은 세 번째 길로 들어섰다. 그 길은 선부론(先富論)’ ‘흑묘백묘론’ ‘개혁 · 개방’ ‘시장사회주의등으로 불렸다. 당장의 빈곤을 면하고 생산력을 높이기 위해 어느 정도의 자본주의를 끌어들이는 길이었다.

  2022년 4월 4일





Ⅱ. ‘개혁 · 개방' 결과로서 중국사회의 변화

 

1978년 덩샤오핑 지도부가 집권하고 이른바 시장 개방을 실시한지 40여 년이 지났다. 덩샤오핑 지도부가 운전대를 잡은 국가는 커다란 난제를 안고 있었다. 생산수단 대부분은 국유화되었으나 생산력 수준은 거의 전()자본주의 수준의 국가였다.

식민지 중국의 반제국주의 민족해방 투쟁은 공산당이 이끌었다. 제국주의 현지 하수인 세력인 국민당의 패배로 중국 몸통에 박혀있던 제국주의의 발톱이 뽑혔다. 중국 노동인민의 반제투쟁 승리는 기존의 승리인 러시아혁명과 결합했다. 그리하여 민족해방 투쟁의 승리는 세계사적 연관 속에서 사적소유 철폐라는 사회혁명으로까지 발전하였다.

문제는 전()자본주의 수준의 생산력이었다. 비유하자면, 필사의 투쟁으로 큼지막한 무쇠 가마솥을 장만하였다. 그러나 그 속에 던져 넣어 볶을 밥은 달랑 한 공기밖에 없는 형국이었다. 생산력 증진이 절실했다. 발전된 생산력이 전제되지 않으면, 반제 투쟁의 승리와 사적소유 철폐라는 기존 투쟁의 성과는 곧 도전에 직면하게 되고, 이내 반혁명의 위기에 처할 것이기 때문이다.

생산력 발전은 공산주의 사회 건설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전제조건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없이는 궁핍이 일반화될 것이며 이로 인해 생활필수품확보 투쟁이 다시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 상황이 되면 과거의 모든 난센스가 다시 살아날 수밖에 없다.”마르크스, 독일 이데올로기, 공산주의의 물질적 전제 조건 및 생산력 발전

기형적 노동자국가 중국이 풀어야 할 과제는 난해했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후속 혁명이 한없이 지연된 데다가, 설상가상으로 소련과의 관계마저 단절된 매우 협애한 조건 속이었다.

이 조건 속에서 중국 지도부는 시장 개방, 자본주의적 양보 조치를 도입했다. 내전으로 피폐해진 경제를 살리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던 소련의 신경제정책(NEP)처럼, 선택이라기보다는 강제된 것이었다. 그로부터 40여 년이 지났고, 그 과정에서 중국은 극적으로 변했다.

* * *

구체적인 경제사는 우리의 초점이 아니다. 이 글의 주제는 중국의 사회성격을 따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시장 개방’ 40여 년이 지난 지금, ‘중국은 어떻게 변했는지, 항간의 견해처럼 중국은 이제 완연히 자본주의 국가가 된 것인지 아니면 여전히 노동계급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 그래서 앞으로 발생할 격돌의 성격은 어떠한 것일지, 그 격돌에서 노동계급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를 따지는 것이 이 글의 초점이다.

<1949년 혁명에서 1978개혁 · 개방까지>를 다룬 부에 이어, 부의 주제는 <‘개혁 · 개방결과로서 중국사회의 변화>이다. 그 변화를 ‘1. 생산력 발전 2. 자본주의 세력의 성장 3. 지배적 소유형태로 나누어 살핀다.

 

1. 생산력의 괄목할 성장

40여 년 동안의 시장 개방, 부분적 자본주의 양보 조치로 중국의 생산력 발전은 눈부셨다. 이 발전은 국내총생산(GDP), 세계 500대 기업, · 외환 보유량, 빈곤등의 수치를 통해 나타난다.

 

1) 국내총생산(GDP)

1978~2017년 사이 중국의 실질 GDP는 연평균 9.5% 성장하였다. 그 사이 1인당 명목GDP385위안(1978)에서 59,660위안(2017)으로 약 155배 증가했다(한국은행, 중국경제 개방 40년 성과와 과제).

그로써 세계 경제 내 중국의 위상이 크게 달라졌다. 아래 표처럼, 1978년 당시 1위와 2위였던, 미국과 일본의 세계 경제 GDP 비중이 각각 27.7%, 11.8%일 때 중국은 고작 1.8%였다. 그러나 2017년에 미국과 일본이 각각 24%, 6%일 때 중국은 15.2%가 되었고, 일본을 끌어내리며 GDP 기준 세계 2위가 되었다.

한국은행, 중국경제 개방 40년 성과와 과제


GDP 총량에서 중국은 2010년에 일본을 추월했다. 2020년에는 미국의 턱밑까지 따라잡았다. 2008년 당시에는 미국 GDP31%에 불과했으나 2020년에는 미국의 71%까지 추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