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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의 반스탈린 투쟁

**이 전자문서는, 미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이 편집한 Lenin's Fight Against Stalin (N. Y.: Pathfinder, 1974)을 대본으로 하여, 신평론출판사가 1989년 번역 출간한 것을 복구한 것이다.**

 

 

<차례: 신평론출판사 1989>

 

옮긴이의 머리말

 

제1장 서문

 

제2장 레닌의 유언장

배경

대회에 보내는 서한……레닌

스탈린 동지에게……레닌

 

제3장 레닌의 유언장에 대하여

배경

레닌의 유언장에 대하여……트로츠키

 

제4장 관료제

배경

제11차 당대회에 보내는 정치보고……레닌

부의장들의 활동에 대한 레닌의 제안에 대한 논평……트로츠키

국가계획위원회에 입법기능을 부여하는 것에 관하여……레닌

정치국에 보내는 1923년 1월 15일자 서한……트로츠키

노농감찰부를 어떻게 재조직할 것인가……레닌

적더라도 더 나은 것이 더 낫다……레닌

제12차 당대회의 과제

 

제5장 대외무역의 독점에 대하여

배경

대외무역 독점에 관해 러시아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들을 위하여 스탈린에게 보내는 편지……레닌

L. D. 트로츠키에게……레닌

레닌 동지에게……트로츠키

프룸킨 동지와 스또모냐코프 동지에게……레닌

L. D. 트로츠키 동지에게……레닌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들을 위하여 J. V. 스탈린에게 보내는 편지……레닌

L. D. 트로츠키에게 외……레닌

 

제6장 민족문제

배경

러시아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원들을 위하여 L. B. 카메네프에게 보내는 편지……레닌

대러시아 국수주의와의 투쟁에 관해 L. B. 카메네프에게 보내는 메모……레닌

민족문제 또는 자치공화국화 문제에 대해……레닌

L. D. 트로츠키에게……레닌

P. G. 므지바니, F. Y. 마하라제, 그 밖의 다른 동지들에게……레닌

당에 관한 소고: 민족 문제와 청년 당원의 교육 문제에 대하여……트로츠키

 

 

제 2장 레닌의 유언장

 

배경

본래 레닌의 “당대회에 보내는 편지”는 1923년 4월로 예정되어 있던 볼셰비키당 제 12차 대회에 보내려던 것이었다. 이 문서가 작성되었다는 사실은 단지 크룹스카야와, 레닌의 구술을 받아 기록했던 두 명의 비서 M.A. 볼로지체바와 L.A. 포치예바만이 알고 있었다. 1923년 3월 10일 레닌이 뇌일혈을 일으켜 쓰러진 직후, 크룹스카야는 이 문서를 비밀에 부쳐 보관했는데, 레닌 서거 직후인 그 다음 해(1924년)의 제13차 당대회 직전에야 공개하였다. 바로 이런 식으로 그 편지는 레닌의 “유언장”으로서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유언장은 제 13차 대회 (1924년 5월)에서 아무도 필기를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대회의 대표들에게 낭독되었다. 유언장이 있었다는 사실이 처음 외부에 알려지게 된 것은 미국의 급진주의자인 맥스 이스트먼 (Max Eastman)에 의해서였는데, 그는 자신이 저서 ‘레닌 사후’(Since Lenin Died, London : Labor Publishing Co., 1925)에 유언장의 핵심적인 구절들을 수록하였다. 이스트먼 (Eastman)은 “모두 최근에 그 서한을 읽었으며 그 핵심 구절들은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 러시아의 세 명의 신뢰할 만한 공산주의자들”의 말을 근거로서 인용하였다(pp.30~31).

1926년 10월 18일 이스트먼(Eastman)은 ‘뉴욕 타임스’지에 “완벽한 원문”을 발표하였는데, 그것은 실제로는 유언장의 두 번째 부분 및 추신 부분이었다. 이 두 부분은 모두 중앙위원회 지도자들의 개성들을 다루고 있는 것이었다.

중앙위원회 위원을 50명 혹은 100명까지도 확충할 것에 대한 논평을 포함하여 서한의 전문이 비로소 빛을 보게 된 것은 1956년 최초로 소련 당국이 서한을 출간하고 나서였다.

유언장에 대한 세밀한 분석은 1932년 발표된 트로츠키의 논설에서 이루어졌는데, 이는 현재 우리의 책 제3장을 이루고 있다. 중앙위원회의 확충에 관해 언급한 부분이 사실은 총괄적인 시야를 제시하고 있는 부분이다. 레닌은 전부터 행정기관에 근무해 와 그 동안에 이미 관료적 습관에 물들어 버린 자들보다는 “일반 노동자 대중이나 농민에 가까운” 새로운 인물들을 영입시킴으로써 중앙위원회내의 관료적 경향을 상쇄시켜 버리려고 하였다. 이는 트로츠키에 의해 지도되고 있는 반(反)관료 투쟁 조직화에 더 큰 전술 운용의 여지를 부여하며 분열을 초래하고야 말 양 입장의 강경화를 피하려는 것이었다.

서한 중 12월 25일에 구술된 부분에서 레닌은 이런 방법을 통해 스탈린과 그의 지지자들을 견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므로 그 서기장(스탈린-역자)에 대한 진지하지만 사려 깊은 비판을 하는 선에서 그쳤다. 그러나 1월 4일의 추신에는 태도의 변화가 보인다. 이때쯤 레닌은 그루지야 문제에 대한 스탈린의 대응을 알게 되었다(서문 및 제6장 “민족 문제에 관하여” 참조). 스탈린의 무례함과 변덕스러움, 성심의 결여 등등에 대한 레닌의 지적은 이 문제(민족 문제-역자)에 대한 스탈린의 대처방식에 대한 직접적인 지적인 것으로 보인다. 이제 레닌은 스탈린을 서기장직으로부터 제거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제2장의 마지막 글은 레닌이 스탈린에게 절교를 불사하겠노라고 위협하는 내용의 친서이다. 12월 21일 레닌은 트로츠키에게 대외무역의 독점 문제에 관해 자신들의 입장이 관철되었음을 선언하는 내용이 구술된 편지를 보냈다. 이 서한은 의사의 허락 하에 레닌의 요청에 따라 크룹스카야에게 구술해 그녀가 받아 적은 것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스탈린은 즉각 크룹스카야에게 전화를 걸어 화를 벌컥 냈다. 스탈린은 크룹스카야를 겁줌으로써 레닌의 병을 구실 삼아 그가 더 이상 정치활동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려 했던 것이다.

크룹스카야는 12월 23일 카메네프에게 편지를 보내 도움을 요청하였다: “일리치와 논의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어떤 의사보다도 제가 더 잘 알 거예요. 왜냐면 무엇이 일리치의  신경을 쓰이게 하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를 저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어떤 경우라도 스탈린보다는 제가 더 잘 알죠.”(Robert V. Daniels, Conscience of the Revolution , New York : Simon & Schuster, 1960, p.179.) 레닌은 3월 초까지는 이 사건에 대해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레닌은 3월 초에야 비로소 이 사건에 대해 알고 나서 스탈린에게 절교를 불사하겠다는 편지를 썼던 것이다.

 

대회에 보내는 서한

 

I.

저는 이번 대회에서 우리의 정치체제에 상당한 변화가 이루어지기를 강력히 촉구하는 바입니다.

저는 제가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고 있는 문제들을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최우선적으로 저는 중앙위원회 위원수를 수십 명 내지 심지어 백여 명에 이르도록 증원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이러한 개혁이 없다면 우리의 중앙위원회는 유리하지 못한 여러 가지 사태가 전개될 때 심각한 위험에 빠질지도 모릅니다.(그리고 그러한 사태전개는 미리 예측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저는 대회가 국가계획위원회의 결정들에 일정한 조건하에서 입법력을 부여해 줄 것을 제안하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이 점에서 트로츠키 동지의 희망을--일정 정도, 일정 조건하에서--충족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첫 번째 문제, 즉 중앙위원회 위원의 증원에 관해서는, 중앙위원회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의 행정기구를 철저히 개선하고 중앙위원회 내부의 제 분파간의 갈등이 당의 미래를 위해 과도한 중요성을 갖게 되는 사태를 예방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이루어 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당은 노동계급에게 그들로부터 50~100명의 중앙위원회 위원을 충원하도록 요구할 수 있으며, 그들에게 무리한 부담을 지우지 않고도 그것이 가능하리라고 생각됩니다.

그러한 개혁은 틀림없이 우리 당의 안정성을 증대시킬 것이며, 적대적인 국가들에 둘러싸인 상황에서 당이 수행해야 할 투쟁, 제 생각으로는 앞으로 몇 년간 훨씬 더 치열해질 수 있으며 또 치열해질 것임에 틀림없는 그러한 투쟁을 보다 수월하게 해 줄 것으로 생각됩니다. 저는 그러한 조치를 통해 우리 당의 안정성이 천 배로 강화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레닌

1922년 12월 23일

M. 볼로지체바 기록

 

 

II.

편지 초고의 계속(1922년 12월 24일)

앞서 제가 언급한 중앙위원회의 견고성이란 분열을 막을 조치들--그러한 조치들이 채택될 수만 있다면 말입니다--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루스카야 므이슬(Russkaya Mysl)의 한 백위군 인사(올덴부르크 S.S. Oldenburg라고 짐작됩니다)가 소비에트 러시아에 대항하는 백위군의 도박에서 기대할 것이 있다면 일차적으로는 우리 당의 분열에, 그 다음으로는 그러한 분열을 초래하는, 우리 당내의 심각한 알력에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확실히 옳기 때문입니다.

우리 당은 두 계급에 의지하고 있으므로, 만일 그 두 계급 사이에 동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당이 동요할 수 있을뿐더러 당의 붕괴마저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사태가 벌어질 때에는, 이러저러한 조치들과 일반적으로 우리 중앙위원회의 안정성에 대한 모든 논의가 쓸모없게 될 것입니다. 어떠한 조치도 그와 같은 경우에는 분열을 방지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러한 사태가 너무나 먼 미래의 일이고 너무나 있을 법하지 않은 사건이라 논할 가치도 없는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당면한 미래에 있을 분열을 막을 보장으로서의 안정성을 염두에 두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개인적인 자질에 관한 몇 가지 생각을 언급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안정성의 문제에서 가장 먼저 제기되는 인물들은 스탈린과 트로츠키와 같은 중앙위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그들 사이의 관계가 분열의 위험의 대부분을 이루는데, 이러한 분열은 피할 수 있는 것이므로 제 생각에는 무엇보다도 중앙위원회 위원을 50~100명 선으로 증가시키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 것입니다.

서기장이 되어 있는 스탈린 동지는 자신의 손에 무제한적인 권력을 집중시켜 놓고 있습니다. 저는 그가 언제나 충분한 주의력을 가지고 그러한 권한을 잘 사용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확신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편 트로츠키 동지로 말하자면, 운수교통 인민위원회 문제에 관해서 중앙위원회에 대항하여 투쟁했던 사례에서도 이미 입증되었다시피,1) 탁월한 능력만으로도(not only by outstanding ability) 단연 돋보입니다. 아마도 그는 개인적인 능력에서 현재의 중앙위원회 내에서 가장 유능한 인물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지나친 자신감(excessive self-assurance)을 보여 왔으며 사업의 순전히 운영적인 측면에 지나치게 이끌리는 경향을 보여 왔습니다.

현재의 중앙위원회를 이끌고 있는 탁월한 두 지도자가 갖고 있는 이들 두 가지 자질은 조금만 주의를 게을리 하면 당의 분열로 귀결될 수 있는 요인들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 당이 이를 방지할 조치들을 취하지 않는다면, 분열은 예기치 않게 찾아올 수 있습니다.

저는 그 밖의 다른 중앙위원회 위원들이 개인적 자질에 대해서는 더 이상 평가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다만,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의 10월의 일화가 물론 결코 우연은 아니었음을 상기시키겠습니다.2) 트로츠키에 대해 그가 볼셰비키가 아니었다는 개인적인 지적을 해서는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사건이 그들을 개인적으로 비난하는 데에 이용되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중앙위원회의 젊은 위원들에 관해 말하자면, 부하린과 피야타코프에 대해 몇 마디만 해볼까 합니다. 제 생각으로 그들은 (젊은 동지를 가운데에서)가장 탁월한 인물들인데, 그들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점을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부하린은 당의 주요하고도 귀중한 이론가일 뿐만 아니라 전당적인 호감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론적인 관점은 완전히 마르크스주의적인 것으로 간주하기에는 상당히 현학적인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그는 한 번도 변증법을 공부한 적도 없거니와, 제가 보기에는 변증법을 완전히 이해한 적도 없는 것 같습니다.)

12월 25일. 피야타코프에 관해 말하자면, 그는 의심할 바 없이 탁월한 의지와 능력을 가진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는 너무 사업을 운영하려는 열망에 가득 차 사업의 운영적 측면에 매몰되는 경향이 있어서 중대한 정치적 문제를 믿고 맡기기가 어렵습니다.

물론 이 두 사람에 대한 언급 모두는, 탁월하고 헌신적인 이 두 당활 동가들이 자신들을 일면성을 교정하고 자신들의 인식을 제고시킬 호기를 놓친다는 가정 하에, 단지 현재 상태만을 고려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레닌

1922년 12월 25일

M. 볼로지체바 기록

 

1922년 12월 24일자 서한에 대한 추신

스탈린은 너무도 무례합니다. 그리고 이 결점은 우리들 공산주의자들 속에서 사업을 할 때나 우리들 사이에서는 용인될 수 있을지라도, 서기장직을 맡는 데에서는 용납될 수 없습니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저는 동지들이 스탈린을 그 직위에서 해임하는 방법을 생각해 볼 것을 제안하는 바입니다. 다른 모든 측면에서 스탈린 동지와는 다른 사람을, 말하자면 보다 참을성 있고, 보다 성심 있으며, 보다 공손하고, 동지들에 대해 보다 세심하게 배려하며, 덜 변덕스러운 등등의 그런 사람을 그 대신 지명하도록 요청합니다. 이러한 구체적 제안이 하찮고 자질구레한 것으로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분열에 대한 안전장치를 마련한다는 견지에서 본다면, 또 제가 위에서 언급한, 스탈린과 트로츠키 사이의 관계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를 결코 자질구레한 이야기가 아닐뿐더러, 자질구레하다 하더라도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질 수 있는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레닌

L. 포치예바 기록

1923년 1월 4일

 

III.

편지 초고의 계속(1922년 12월 26일)

중앙위원회 위원수를 50명에서 심지어 100명까지로 늘리는 것은, 제 생각에는, 두세 가지 목적에 도움이 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중앙위원회 내에 더 많은 위원이 있을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중앙위원회의 사업에 대해 훈련될 것이며 모종의 경솔한 행동들로 인해 분열이 일어날 위험이 훨씬 줄어들게 될 것입니다. 많은 노동자들이 중앙위원회에 들어오게 된다는 것은 노동자들이 매우 열악한 상태에 있는 우리의 행정기구를 물려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짧은 기간 내에, 특히 전쟁과 기든 등의 악조건 속에서, 새로운 행정기구를 재조직해 낸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 행정기구의 결점들을 조롱과 악의에 찬 비난을 퍼부어 대며 꼬집는 “비판자”들에게 우리는 다만 현재 혁명이 직면하고 있는 어려운 조건들을 그들이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조용히 대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5년이라는 기간 내에, 그것도 우리 혁명이 일어났던 그런 조건하에서, 적합한 행정기구를 새롭게 재조직해 낸다는 것은 농민을 자신의 편으로 지도해 나갈 새로운 유형의 국가를 우리가 지난 5년 동안에 창출해 왔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리고 적대적인 국제환경 속에서는 그것만으로도 거대한 성과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고 하여 우리가 짜르와 부르주아지로부터 낡은 국가기구를 넘겨받았다는 점과 이제 어느 정도 평화가 정착되고 대기근을 방지할 최소한의 필요조건을 충족시킬 만큼 된 마당에 우리의 모든 노력이 행정기구의 개선에 기울여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을 외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저는 새롭게 중앙위원회에 충원된 몇 십 명의 노동자들이 우리의 국가기구들을 점검하고 개선시키며 재구성해 내는 일을 어느 누구보다도 잘 처리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최초에 이러한 기능이 부여되었던 노농감찰부는 그 기능 부여되었던 노농감찰부는 그 기능을 제대로 수행해 내지 못했으므로 단지 “부속기관” 또는 경우에 따라서는 중앙위원회의 이 위원들의 조력기관으로서만 활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중앙위원회에 새로 들어오게 되는 노동자들(여기서 노동자라는 표현은 언제나 농민을 포함하는 것입니다)은 소비에트의 기구들에서 오랫동안 종사해 왔던 사람들 이외에서 충원되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소비에트 기관들에서 오랫동안 일해 온 그런 노동자들은 우리가 싸워서 극복하고자 하는 바로 그런 전통과 편견에 이미 물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노동계급 출신의 중앙위원회 위원들은 주로, 지난 5년간 승격되어 소비에트 기구 내에서 활동하는 자들보다 더 낮은 지위에 속한 노동자와 농민들에 더 가까운, 그러나 직접적으로건 간접적으로건 착취자의 범주에 속하지 않은 그런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저는 그 노동자들이 중앙위원회와 정치국의 모든 회합에 참석하고 또 중앙위원회의 모든 문서들을 열람함으로써, 첫째, 중앙위원회 자체에 안정성을 부여할 수 있으며, 둘째, 국가기구의 혁신과 개선을 효과적으로 추신할 수 있는, 소비에트 체제의 현신적인 지지자들로 이루어진 참모부를 형성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레닌

L. 포치예바 기록

1922년 12월 26일

 

또한, 중앙위원회는 그 위원수를 증원할 때 전혀 좋은 상태라고 할 수 없는 우리의 행정기구를 정비하고 개선하는 데에 주로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우수한 자질을 갖추고 있는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할 것이며, 그러한 전문가들을 공급하는 임무는 노농감찰부에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행정기구정비 전문가들과 중앙위원회 신입 위원들은 결합시킬 수 있을 것인가? 이 문제는 실천 속에서 해결되어야 할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노농감찰부는 (그 발전의 결과 또 그 발전에 대한 우리의 당혹감의 결과) 대체로 우리가 현재 관측하고 있는 바대로 즉, 특별한 인민위원회와 중앙위원회 위원들의 특별한 기능 사이의 어중간한 지위로 귀착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 모든 부문에 걸쳐 어떤 일에 대해서건 감찰하는 기관과 높은 보수를 받아야 하는, 수는 많지 않지만 일급 감찰자 집단 사이의 어중간한 위치에 처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이러한 사정은 모든 일에 대해 보수를 지불해야만 하며 감찰자들이 더 나은 보수를 주는 기관에 직접 고용되어 있는 우리 시대에서는 불가피한 것입니다.)

중앙위원회 위원이 적절하게 증원되고, 그들이 우수한 자질을 가진 전문가들 및 모든 분야에서 상당한 권위를 갖고 있는 노농감찰부원들의 도움을 받아 해마다 국가운영 과정을 체득해 나간다면, 제 생각으로는, 그렇게 오랫동안 우리가 해결하지 못해 온 이 문제를 우리는 성공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약하면, 100명 이내의 중앙위원회 위원과 사오백 명이 넘지 않는 조력자들 및 그들의 지도하에 감찰 사업에 종사하는 노농감찰부원들이 우리의 정치체제 혁신에 근간이 되어 줄 것입니다.

레닌

1922년 12월 29일

M. 볼로지체바 기록

[레닌, 『전집』, 제4판, 모스크바: 프로그레스 출판사, 1960~1970, 제33권, pp593~597, 603~604. 특별히 명시되어 있지 않다면 레닌 저술로부터의 모든 발췌는 이 제4판으로부터임을 밝혀둔다.]

 

스탈린 동지에게

제1급 비밀

친서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 동지에게도 복사본 전달됨.

친애하는 스탈린 동지,

동지가 제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심한 욕설을 퍼부었다니 정말 동지의 태도는 거칠기 짝이 없습니다. 비록 그녀가 그 일을 잊어버리기로 마음먹었다고 동지에게 말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은 이미 그녀의 입을 통해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에게도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저에게 퍼부어진 그와 같은 모욕을 결코 그렇게 쉽사리 잊어버릴 의향이 없습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저는 제 아내에게 퍼부어졌던 모욕은 제게 퍼부어진 것이나 다름없다고 여깁니다. 그러므로 저는 당신에게 당신이 했던 말을 취소하고 사과를 하든가 아니면 우리 사이의 관계를 파기하기를 택하든가 둘 중 하나를 심사숙고할 것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레닌 

1923년 3월 5일

[레닌, 『전집』, 제45권, pp667~608]

 

1)  이것은 노동조합에 관한 토론을 언급한 것이다. 제3장 주16)을 보라.

2)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1917년 10월 16일에 개최된 볼셰비키 중앙위원회 회합에서 레닌이 무장봉기를 즉시 준비할 것을 제안했을 때 이에 반대하였다. 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의안이 통과되자, 그들은 멘셰비키 신문 ‘노바야 쥐즈니’(‘새 삶’ 10월 18일)에 글을 발표하여 그와 같은 봉기는 “자포자기적인 행위”라고 공격하였다. 같은 날 레닌은 “볼셰비키 당원들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두 사람을 “파업 파괴자”로 비난하고 그들을 당으로부터 축출할 것을 요구했었다.

 

 

제3장 레닌의 유언장에 대하여


배경

 “발표 금지된 레닌의 유언장에 대하여”라는 트로츠키의 논설은 1932년 12월 31일에 완성되었다. 그 논설은 ‘새로운 인터내셔널’(New International : 현재의 International Socialist Review)의 1934년에는 파이어니어 출판사(Pioneer Publishers)가 레닌의 유언장을 곁들여 트로츠키의 논설을 소책자로 출간했다. 트로츠키 논설의 약간 수정된 번역본이 파이어니어 출판사에 의해 1946년 재출판되었다. 1970년에는 패쓰파인더 출판사(Pathfinder Press)가 1946년의 팸플릿을 새로운 서문을 달아 제3판으로서 재출판했다.

 이 책에 실린 글은 1946년판을 근거로 삼았다. 철자와 대문자 사용, 구두점은 현대 어법에 따랐으며 몇몇 명백한 실수들은 수정되었지만, 그 밖의 원문은 고치지 않았다. 이것은 트로츠키가 발행한 레닌이 쓴 기록들의 본문과 마침내 약 30년 후 소련에서 발행된 것을 비교해볼 기회를 독자들에게 제공할 것이다. 이 책에 실린 레닌의 다른 기록들의 본문은 영어판에 없는 두 가지의 글만 빼고는 프로그레스 출판사(Progress Publishers)가 모스크바에서 출판한 ‘레닌 전집’ 제4영어판을 근거로 했다. 파이어니어 출판사의 번역과 모스크바의 번역 사이의 주요한 차이점들은 제5러시아어판 ‘레닌 전집’과 대조하여 검토했으며, 이 책에서는 각주로 달아 놓았다.

 

 

레닌의 유언장에 대하여

트로츠키

 

제2차 대전 이후, 주인공을 심리학적으로 분석하는 전기 작가들이 대상을 사회 구조로부터 뿌리째 뽑아내어 연구하는 경향이 광범위하게 유행해 왔다. 이들은 추상적 개념인 개성(Personality)을 역사의 원동력으로 여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에 대한 멋진 정의인 “정치적 동물”의 행동은 개인의 감정과 충동으로 설명되어지고 있다.

개성이 추상적이라는 주장이 터무니없어 보일는지도 모른다. 역사의 초인간적인 힘들이란 실로 추상적인 것이 아닌가? 그리고 살아 있는 인간보다 더 구체적인 것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렇지만 우리는 개성이 추상적이라는 우리의 주장을 거듭 천명한다. 만일 환경*민족*시대*계급*집단*가족 등에 의해 형성된 내용을 개성으로부터 분리해 낸다면, 비록 그 개성이 가장 풍부한 것일지라도 거기에 남는 것은 공허한 자동인형과 정신물리학적 로봇일 것이며, 이는 사회과학이나 “인문”과학의 대상물이 아니라 자연과학의 대상물인 것이다.

이렇게 역사와 사회를 폐기해 버리는 이유들은 항상 그렇듯이 역사와 사회 속에서 찾아져야 한다. 20년에 걸친 전쟁과 혁명과 공황은 자주적인 인간 개성을 나쁜 면으로 대개편시켰다. 현대사라는 저울에서 무게를 갖기 위해서는 어떤 사물이든 백만 단위로 측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 공격당한 개성은 이러한 현상에 대해 복수를 하려고 한다. 광포한 사회에 대처할 수 없게 되자 개성은 사회로부터 도망치게 된다. 자신을 역사적 과정으로 설명할 수 없게 되자 개성은 자신의 내부로부터 역사를 설명하려고 시도한다. 그리하여 인도의 철학자들은 자기들의 배꼽을 정관함으로써 전우주적 체계를 세우려 했다.

 

순수심리 학파

새로운 전기 학파에 대한 프로이트의 영향은 부인할 수 없긴 하지만 피상적인 것이다. 근본적으로 이들 응접실의 심리학자들은 순수문학적 무책임성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프로이트의 방법이 아니라 그의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데 불과하며, 그것도 분석을 위해서가 아니라 문학적 장식을 위해서 그러고 있다.

이 분야의 가장 인기 높은 대표자인 에밀 루드비히(Emil Ludwig)는 그의 최근 저작에서, 선택된 방향으로 새로운 일보를 내디뎠다. 즉, 그는 주인공의 삶과 활동에 대한 연구를 대화로 대체해 버렸다. 제기된 질문에 대한 한 정치가의 대답의 이면에서, 그의 억양과 표정의 이면에서, 작가는 그의 진정한 동기를 발견한다. 대화는 거의 고백이 되어버린다. 주인공에 대한 루드비히의 새로운 접근법은 이러한 기술에서 프로이트의 환자에 대한 접근법을 연상시킨다. 즉, 루드비히의 접근방식은 개성 자신의 협조를 얻어 개성을 표면에 부각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외형상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 그것은 얼마나 다른가! 프로이트의 연구의 풍부한 결실은 모든 인습과의 과감한 단절을 대가로 성취되었다. 그 위대한 정신분석가는 가차 없다. 연구에 임할 때의 프로이트는 마치 외과 의사 같았으며, 거의 소매를 걷어올린 백정 같았다. 프로이트에게는 다른 건 몰라도 외교적 수완 따위는 전혀 없다. 프로이트는 화자의 위신을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좋은 모양새를 갖추려고 숙고하는 애를 쓰지도 않고, 다른 종류의 그릇된 명망이나 허세를 부리려고 번거로워하지도 않는다. 병실 뒤에 조수나 속기사를 두지 않고 단지 환자와 마주 않아 그가 대화를 계속할 수 있는 것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루드비히는 그렇지 않다. 그는 무쏠리니나 스탈린의 정신세계에 대한 참된 묘사를 세상에 보여 주기 위해서 그들과의 대화에서 착수한다. 그러나 모든 대화는 사전에 동의된 프로그램을 따른다. 모든 말이 속기사에 의해 기록된다. 그 저명한 환자들은 이 과정에서 자신들에게 유용하고 해로운 것을 매우 잘 알고 있다, 그 전기 작가는 수사학적 속임수를 구별할 만큼 충분한 경험을 갖고 있으며, 또한 그 속임수를 지적하지 않을 만큼 공손하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진행되는 대화는, 비록 그것이 고백과 실로 유사하더라도, 유성영화에 들어가는 고백과 비슷하다.

에밀 루드비히는 여러 가지 변명거리를 가지고 있다. 그는 “나는 정치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고 추장한다. 이것은 “나는 정치를 초월해 있다”는 뜻일 것이다. 이것은 사실 단지 개인적 중립성의 판에 박힌 표현이다. 프로이트의 말을 빌려 표현하면 그 심리학자가 그의 정치적 기능을 더 쉽게 수행하도록 해 주는 것은 바로 그러한 “정신의 검열관”이다. 마찬가지로 외교관들은 그들이 파견되어 주재하는 나라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작을 지원하고 테러리즘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작을 지원하고 테러리즘 행위에 돈을 대주는 것을 그들이 못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조건에 따라 개성의 다른 측면이 발달한다. 얼마나 많은 현자들이 돼지를 치고 있으며, 얼마나 많은 돼지치기들이 머리에 왕관을 쓰고 있는가! 그러나 루드비히는 볼셰비즘과 파시즘 사이의 차이조차도 개인 심리라는 단순한 문제로 가볍게 해소해 버릴 수 있다. 심지어 가장 통찰력 있는 심리학자조차도 무사안일하게 그러한 의도성 있는 “중립성”을 채택할 수는 없을 것이다. 루드비히는 인간 의식의 사회적 조건을 도외시하고 단순한 주관적 감성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정신”은 3차원의 세계가 아니므로 그 밖의 다른 모든 실체에 공통된 다루기 힘든 성질은 없다. 그 작가는 사실과 기록에 대한 연구에는 관심이 없다. 이러한 색깔 없는 증거를 밝은 색의 추측들이 대신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무슨 쓸모가 있단 말인가?

루드비히는 무쏠리니에 관한 책에서와 마찬가지로 스탈린에 대한 저작에서도 여전히 “탈정치”적이다. 이렇다고 해서 그의 저작이 정치적 무기가 못 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누구의 무기인가? 전자는 무쏠리니의 무기이고 후자는 스탈린과 그의 분파의 무기이다. 자연은 진공을 싫어한다. 루드비히가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것이 정치가 루드비히와 상관없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약 3년 전에 나의 자서전이 출판되었을 때, 지금은 고인이 된 소련의 공식 역사학자 포크로브스키(Pokrovsky)는 “우리는 이 책에 즉각 응답해야 하며, 반박할 수는 있는 모든 것을 반박하는 작업에 우리의 소장 학자들을 투입해야한다. 운운...”이라고 썼다. 그러나 아무도, 결코 아무도 대응하지 않았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아무것도 분석되지 않았으며, 아무것도 반박되지 않았다. 반박할 것이 아무 것도 없었고, 독자들이 읽을 책을 쓸 수 있는 사람을 아무도 발견 할 수 없었다.

정면 공격이 불가능함이 판명되자 측면 공격에 호소하는 것이 필요 하게 되었다. 물론 루드비히는 스탈린 학파의 역사학자는 아니다. 그는 무소속의 심리학적 묘사가이다. 그러나 모든 정치에 문외한인한 작가에 불과한 사람이, 대중적 명성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통념적 사고를 유포하는 데 가장 편리한 수단으로 판명될 수도 있다. 자, 그러면 이 점이 실제 사실에서는 어떻게 전개되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여섯 개의 낱말”

에밀 루드비히는 칼 라덱(Karl Radek)의 증언을 빌어 그로부터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를 인용하고 있다.

레닌의 임종 후, 19명의 중앙위원회 위원들인 우리들은 잃어버린 우리의 지도자가 임종 시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를 듣기 위해서 긴장하여 기다리며 함께 앉아 있었다. 레닌의 미망인은 그의 편지를 우리에게 건네주었다. 스탈린이 그것을 읽었다. 낭독 중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트로츠키에 대한 대목에 이르렀을 때, 다음과 같은 말이 나타났다 : “그의 비(非)볼셰비키로서의 과거는 우연이 아니다.”(His non-Bolshevik past is not accidental : 이렇게 영어로는 그리고 노어로도 여섯 단어이다-역주.) 그 순간 트로츠키는 낭독을 중단시키고 다음과 같이 물었다 : “그게 무슨 소리요?” 그 문장이 반복하여 읽혀졌다. 그것이 그 엄숙한 순간에 발설된 유일한 말들이다.

그런데 루드비히는 내레이터 입장을 떠나 분석가의 입장에서 자기 나름대로 다음과 같은 논평을 덧붙이고 있다: “트로츠키의 심장이 멎어 버렸음에 틀림없을 무시무시한 순간, 여섯 개의 낱말로 된 이 문구가 그의 인생의 행로를 근본적으로 결정지었다.” 역사의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을 구하는 것이 이렇게도 단순하게 보일 수가! 만일... 만일에 이러한 라덱-루드비히의 이야기가 처음부터 끝까지, 작은 것에서 큰 것까지, 중요한 것에서 사소한 것까지 거짓이 아니었다면, 이와 같은 루드비히의 청산유수의 궤변은 의심할 여지없이 나의 운명의 바로 그 비밀을 바로 나 자신에게 밝히 드러내 보여 줬을 것이다.

우선, 유언장은 우리들의 작가(에밀 루드비히-역자)가 증언하는 바처럼 레닌의 임종 2년 전에 씌어진 것이 아니라 1년 전에 씌어졌다. 그것은 1923년 1월 4일자로 되어 있다. 레닌은 1924년 1월 21일에 서거했다. 그의 정치적 삶은 1923년 3월에 완전히 끝났다. 루드비히는 마치 그 유언장의 전문이 공표된 적이 결코 없었던 양 말하고 있다. 사실은 그 유언장은 세계 신문의 모든 나라 말로 수도 없이 복제되었다. 크렘린에서 유언장의 첫 번째 공식적인 낭독은, 루드비히가 쓰고 있는 것처럼 중앙위원회의 회의석상에서가 아니라, 1924년 5월 22일 제13차 당대회의 원로회의(Council of Elders)에서였다. 유언장을 낭독한 사람은 스탈린이 아니라, 당시 중앙당 기구의 상임의장이던 카메네프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매우 중요하다--나는 감정적인 외침으로 낭독 중에 끼어든 적이 없는데, 이는 그런 행동을 할 아무런 동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루드비히가 라덱의 구술에 의거해서 기록한 문제의 낱말들은 유언장의 원문에 없다. 그 단어들은 노골적인 날조다. 믿기 어렵겠지만 이것은 사실이다.

만일 루드비히가 자신의 분류한 심리유형들의 사실적 근거에 대해 그렇게도 경솔하지는 않았다면, 그는 별 어려움 없이 유언장의 정확한 원문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며, 필요한 사실들과 날짜들을 확증할 수 있었을 것이며, 그리하여 크렘린과 볼셰비키들에 관한 그의 작품이 저질의 오류로 가득 채워지는 것은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소위 유언장이라는 것은 열흘의 시차에 의해 구분되는 두 기간에 걸쳐 씌어졌다--1922년 12월 25일과 1923년 1월 4일에. 처음에는 두 사람만이 그 문서에 대해 알고 있었다--구술을 문서로 기록했던 속기사 볼로지체바(M. Volodicheva)와 레닌의 부인 크룹스카야(N. Krupskaya)였다.1) 레닌의 회복에 대한 한 가닥 희망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크룹스카야는 그 문서를 몰래 보관해 두었다. 레닌의 서거 후 제13차 당대회 얼마 직전에, 당대회를 통하여 유언장이 예정대로 당 대의원들 앞에서 읽혀지도록 하기 위해서 그녀는 유언장을 중앙위원회 서기국에 넘겨줬다.

당시 당기구는 반 공식적으로는 3두체제(트로이카 : 지노비예프 * 카메네프 * 스탈린)의 수중에 장악되어 있었다. 물론 실제로는 이미 스탈린의 수중에 있었다. 3두체제는 당대회에서 유언장을 낭독하는 것에 결단코 반대를 표명했다: 그 동기를 이해하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다. 크룹스카야는 그녀가 원하는 바 (당 대의원들에게 공개적으로 낭독되는 것-역자)를 주장했다. 이 단계에서 논쟁은 막후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그 문제는 당대회의 원로회의 즉, 지역 대의원들의 지도자들로 이관되었다. 나를 포함한, 중앙위원회내의 반대파 중앙위원들이 유언장에 관해 처음 알게 된 것은 바로 여기서였다. 아무도 필기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결정이 채택된 후에 카메네프가 원문을 큰 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청중들의 분위기는 실로 고도로 긴장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장면을 내가 기억하는 한, 나는 문서의 내용을 이미 알고 있던 사람들이 비할 데 없이 가장 불안해했다고 단언한다. 3두체제는 자기의 심복 중의 한 사람을 통해, 사전에 지역 지도자들과 합의한 처리방안을 제출했다: ‘유언 기록문은 집행회의에서 각 대의원단에게 따로따로 낭독된다; 누구도 감히 필기를 해서는 안 된다; 총회에서는 유언장에 대해 언급해서는 안 된다.’ 크룹스카야는 그녀 특유의 점잖은 주장으로, 이러한 처사는 레닌의 유언에 정면으로 위배되며 마지막 조언을 당원들에게 전달하려는 그의 권리를 당신들이 거부할 수는 없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원로회의의 멤버들은 당파적 기율에 묶여 여전히 냉담했다. 그리하여 3두체제가 제시한 처리방안이 압도적 다수로 채택되었다.

소위 나의 운명을 결정지었다고 하는 그 신비하고 신화적인 “여섯 단어”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전후사정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10월 혁명을 주제로 첨예한 논쟁을 벌이던 시기에 이미 일부 우익반대파의 “고참 볼셰비키들”은 불쾌해 하면서 결국 트로츠키는 이전에 볼셰비키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몇 번 지적했었다. 레닌은 항상 이 발언에 반대했다. 그는 트로츠키가 오래전에 멘셰비키와의 통합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이해했다고 말했다--예를 들면, 1917년 11월 14일 그는 “그 때 이후로 트로츠키보다 더 훌륭한 볼셰비키는 없었다”2)라고 말했다. 레닌이 직접 언급한 이 말은 어떤 의미가 있다.

2년 후, 볼셰비즘이 발전해 온 조건들과 그 동안 의견 불일치와 분열이 어떻게 존재해 왔는지를 외국인 공산주의자들에게 편지로 설명하던 중에 레닌은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결정적 시기에, 즉 노동계급이 권력을 장악하여 소비에트 공화국을 창설했던 시기에, 볼셰비즘은 통일되어 있었으며, 그것에 가장 가까운 사회주의 사상의 경향들 중에서 가장 훌륭한 인자들 모두를 자기 자신에 끌어들였다.”3) 내가 1917년까지 대표하던 경향보다 볼셰비즘에 더 가까운 경향은 러시아에도 서구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레닌과 나의 통일은 사상의 논리와 겪었던 상황들의 논리에 의해 예정되어 있었다. 결정적 시기에 볼셰비즘은 “그것에 가장 가까운” 경향들 중에서 “가장 훌륭한 인자들 모두”를 자신의 대열 내로 끌어들였다. 이것이 전후사정에 대한 레닌의 평가이다. 나는 레닌과 논쟁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우리가 노동조합 문제에 대해 두 달 동안 논쟁을 벌였을 때(1920년과 1921년 사이의 겨울), 스탈린과 지노비예프는 또 다시 트로츠키의 비볼셰비키로서의 과거에 대한 언급을 유포시키려 시도했었다. 이에 응수하여 직선적인 성격의 반대파 지도자들이 지노비예프에게 10월 봉기 기간 중에 그 자신이 취했던 행동을 상기시켰다. 임종 시에 레닌은 자기가 없게 된 당내에 어떤 관계들이 정착될 것인지 모든 측면에서 고려해 보았을 때, 스탈린과 지노비예프가 나에 대항하여 고참 볼셰비키들을 동원하기 위해서 나의 비볼셰비키로서의 과거를 이용하려 할 것이라고 예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말하자면 유언장은 역시 이 위험에 대해 미리 선수를 치고자 하고 있다. 유언장이 스탈린과 트로츠키의 성격을 묘사한 직후에 한 말을 들어보자: “저는 중앙위원회의 다른 위원들의 개인적 자질에 대해 더 이상 특성묘사를 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단지, 여러분에게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의 10월의 일화가 물론 우연적인 것은 아니었음을 상기시키고자 합니다. 그러나 물론 그 사실은, 트로츠키의 비볼셰비키로서의 과거와 마찬가지로, 그들에게 개인적으로 대항하기 위해서 이용되지는 말아야 합니다.”

10월의 일화가 “우연적인 일이 아니다”는 이 지적은 완전히 특정한 목표를 추구하고 있다. 즉, 중차대한 상황에서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가 그들의 단호함 결여를 다시 드러낼 수도 있다는 점을 당에게 경고하기 위함이다, 이 경고는 그러나 트로츠키에 대한 지적과는 무관하다. 트로츠키와 관련한 레닌의 의중은 트로츠키의 비볼셰비키로서의 과거를 인신공격적 논거로 이용하지 말 것을 충고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라덱이 내게 돌리고 있는 그 문제를 제기할 아무런 동기도 없었다. 내 심장의 “고동이 멎었다”는 루드비히의 추측 역시 근거가 없는 것이 된다. 유언장이, 당 사업에서의 지침적 역할이 내게는 어려운 것이라고 암시하려 했던 것은 특히 아니었다. 우리가 나중에 살펴보게 되겠지만, 유언장은 정반대의 목적을 추구했다.

 

“스탈린과 트로츠키의 상호 관계”

두 페이지 분량의 타이핑된 유언장의 중심 부분은 “현재의 중앙위원회의 가장 유능한 두 지도자”인 트로츠키와 스탈린의 상호간의 관계에 대한 특징 묘사에 할애되어 있다. 트로츠키의 “비범한 능력” 관계에 대한 특징 묘사에 할애되어 있다. 트로츠키의 “비범한 능력” (“현재의 중앙위원회에서 가장 유능한 사람”)을 지적하면서 레닌은 즉시 그의 반대 특성들--“지나친 자신감”과 “사업의 순전히 운영적인 측면에 지나치게 이끌리는 경향”--을 지적하고 있다. 지적된 결함들은 그 자체로서 중대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 결함들은 말이 난 김에 하는 말이지만--“농민에 대한 과소평가”나 혹은 “혁명의 내부동력에 대한 신념 결여”나 혹은 최근에 레닌의 속물적 아류들이 꾸며낸 다른 어떤 날조된 것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반면에 레닌은, “서기장이 된 스탈린은 수중에 막대한 권력을 집중 했는데, 저는 그가 이 권력을 항상 충분히 신중하게 사용하는 법을 알고 있다고는 확신하지 않습니다”라고 쓰고 있다.

여기서의 문제는 당시에는 사소했던 스탈린의 정치적 영향력이 아니라 그가 “서기장이 되어” 수중에 집중시킨 행정력이다. 이것은 매우 정확하고 신중히 평가된 공식이다. 우리는 나중에 이 점으로 돌아갈 것이다.

정치국으로의 구심적 경향을 팽팽한 압력으로 억제하기 위해서 유언장은 중앙위원회의 위원 수를 50명 심지어 100명으로까지 증원시킬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조직 문제 상의 제안은 개인적인 갈등들에 대해 여전히 중립적인 보장의 외관을 띠고 있다. 그러나, 그 후 열흘도 채 안 되어 그 제안은 레닌에게 불충분한 것으로 보였고, 그래서 레닌은 그 문서 전체에 최종적인 인상을 부여하기도 한 보충 제안을 첨가했다: “...스탈린을 그의 지위로부터 해임시키고 단지 최고위직에 있을 뿐인 스탈린과는 다른 모든 면에서 다른,4) 즉 좀더 참을성 있고, 좀더 성심 있으며, 동지들에게 좀더 공손하고 친절하며, 덜 변덕스러운 등등의 자질을 갖춘 다른 사람을 그 자리에 임명할 방도를 찾을 것을 저는 동지들에게 제안합니다.”

유서가 구술되던 기간 동안 레닌은 여전히 가능한 한 자제된 표현으로 스탈린에 대한 비판적 평가를 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주가 차근차근 지나감에 따라, 그의 목소리가 영원히 멎어버린 마지막 시간까지 그의 어조는 갈수록 더욱더 날카롭게 되어갔다. 서기장의 교체에 대한 요구는, 그러나 유언장에서도 충분히 동기가 부여되었다. 무례함 및 변덕스러움과 아울러 스탈린은 성심이 결여되어 있다고 책망받고 있다. 이 지점에서 특성 묘사는 중압적인 고발이 되고 있다.

뒤에서 밝히겠지만, 유언장은 스탈린에게 놀랄 만한 것이 못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타격을 누그러뜨린 것은 아니었다. 스탈린이 그의 가장 가까운 동료들의 집단인 서기국에서 유언 기록을 최초로 접하게 되었을 때, 그 유언을 남긴 저자(레닌-역자)에 대한 그의 솔직한 심경이 담긴 노골적인 표현의 말을 내뱉었다. 이 발언이 광범위한 집단으로 퍼져 나가게 된 정황과 무엇보다도 그의 반응 그 자체의 비길 데 없는 성질은 내 눈에는 그 일화의 진실성에 대한 절대적인 보증으로 보인다. 불행히도 이 의미심장한 말을 활자로 인용할 수는 없다.

유언장의 마지막 문장은 레닌이 생각하기에 어느 쪽에 위험이 놓여 있는지를 명백히 보여 주고 있다. 스탈린을--바로 스탈린 그리고 그만을--해임시키는 것은 그를 당 기구로부터 절연시키는 것을 의미했으며, 그가 서기장의 직위를 통해 수중에 집중시킨 그 모든 권한을 그로부터 박탈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면 누가 서기장에 지명되어야 할까? 스탈린의 긍정적 자질들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그보다 더 참을성 있고 더 성심 있으며 덜 변덕스러운 사람, 바로 이 말이 스탈린의 속마음을 가장 날카롭게 찔렀던 구절이다. 레닌이 우리에게 스탈린의 자리에 더 적합한 인물을 찾으라고 제안한 것을 볼 때, 레닌은 분명히 스탈린을 대신할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자기의 사임을 형식의 문제로 제안하면서 서기장은 변덕스럽게 다음과 같은 말을 계속 반복했다: “그래, 나는 실제로 무례하다....일리치는 당신들에게 단지 더 정중하다는 점에서만 나와 다른 사람을 찾으라고 제안했소. 자, 그런 사람을 찾아 보시오.” 당시에 스탈린의 측근 중 한 사람의 목소리가: “걱정하지 마시오”라고 대답했다. “우리는 무례함을 우려하지는 않소. 우리 당 전체가 무례하며 프롤레타리아적이오.” 정중함에 대한 공식접견실식의 개념이 여기서 우회적으로 레닌 탓으로 돌려졌다. 성심이 불충분하다는 고발에 대해서는 스탈린도 그의 측근들도 할 말이 없었다. 당시 농업담당 인민위원이었으며 지금은 우익반대파(Right Oppositionist)로서 연금되어 있는 스미르노브(A.P. Smirnov)로부터 지지 발언이 나왔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정치란 아무 고마움도 모르는 모양이다.

당시 여전히 중앙위원회의 위원이던 라덱은 유서를 낭독하는 동안 내 곁에 앉아 있었다. 내적인 단련이 결여되어 순간의 위세에 거리낌 없이 자신을 내맡긴 그는 유언 내용에 즉각 흥분하여 나에게로 상체를 기울여 “이제 저들이 감히 당신에게 대항하지는 못할 거요”라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그와는 반대로 저들은 극한 상황까지, 더욱이 가능한 한 빨리 몰고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오”라고 대답했다. 그 제13차당 대회 직후의 수일 동안 일어난 일들은 내 판단이 전혀 과장된 것이 아님을 증명했다. 3두체제는 유언의 효력이 기정사실화되기 이전에 가능한 한 빨리 당을 정비함으로써 선수를 치지 않을 수 없었다. “외부인들”은 못 들어오게 한 채 지역 대의원들에게 유언 기록을 읽어준다는 것까지 나에 대한 노골적인 투쟁으로 바뀌어 버렸다. 대의원들의 지도자들은 유언장을 읽으면서 어떤 대목은 슬쩍 넘어가 버렸으며, 어떤 것들은 강조하고, 그 편지가 중병을 앓고 있으면서 책략과 음모의 영향력 하에서 씌어졌다는 취지의 주석을 달기도 했다. 당 기구는 이미 완전한 통제 하에 놓여졌다. 3두체제가 당대회에서 레닌의 편지를 읽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그의 유언을 어길 수 있었다는 단순한 사실만으로도 당대회의 구성과 그 분위기를 충분히 특징지어 준다. 유언장은 내부 투쟁을 약화시키거나 종식시키지 못하고, 그와는 정반대로 내부 투쟁에 재앙적인 가속도를 붙여 주었다.

 

스탈린에 대한 레닌의 태도

정치란 끈덕진 것이다. 그것은 공개적으로 정치에 등을 돌린 사람들까지도 정치적으로 봉사하도록 강요할 수 있다. 루드비히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스탈린은 레닌이 죽을 때까지 열렬히 그를 따랐다.” 만일 이 문구가 스탈린을 포함하여 레닌의 제자들에 대한 레닌의 강력한 영향력을 표현한 것일 뿐이라면 논쟁의 여지는 전혀 없다. 그러나 루드비히는 그 이상의 것을 의미하고 있다. 그는 스승에 대한 이 특별한 제자(스탈린-역자)의 예외적 긴밀성을 암시하고 싶어한다. 특히 귀중한 증거로서 루드비히는 이 부분에서 스탈린 자신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나는 레닌의 제자일 뿐이며 나의 목표는 그의 훌륭한 제자가 되는 것이다.” 본질적 내용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없는 진부한 관례적인 겸손의 발언을 가지고 전문적 심리학자가 무비판적으로 일한다면 그것은 참 딱한 일이다. 여기서 루드비히는 최근 몇 년 동안 날조된 공식 신화의 단순한 전달자가 된다. 자신이 사실들에 대해 무관심한 나머지 자가당착에 빠지게 되었다는 어렴풋한 생각이나마 그가 하고 있는지 나는 의심이 간다. 만일 스탈린이 실제로 레닌이 사망할 때까지 그를 따르고 있었다면, 그렇다면 레닌이 두 번째 뇌일혈로 쓰러지기 직전에 구술하여 작성된 마지막 기록이 스탈린과 모든 개인적이며 동지적인 관계들을 끓는 내용의, 그에게 보내는 전부 다해봐야 단 몇 줄에 불과한 무뚝뚝하게 간결한 편지였다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가까운 동료의 한 사람과의 모진 단절이라는, 레닌의 생애에서 그런 종류로서는 유일한 이 사건은 매우 심각한 심리적 요인을 가지고 있었음에 틀림없으며, 마지막까지 스승을 “열렬히” 따랐던 제자와 관련지어 본다면 최소한만을 말한다 하더라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에 대해서 루드비히로부터 단 한마디도 듣지 못한다.

스탈린과의 단절을 표명하고 있는 레닌의 편지가 그 당시 산산이 분열되어 있던 3두체제의 당 지도자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알려졌을 때, 스탈린과 그의 측근들은 레닌이 판단력이 흐려진 상태에서 유언을 구술했다는 판에 박힌 낡은 바로 그 똑같은 이야기를 재현하는 것밖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사실, 관계 단절을 담고 있는 편지와 마찬가지로 성숙된 결과물을 당에 제출했던 그 몇 달 동안(1922년 12월에서 1923년 3월 초까지)에 씌어졌다. 스탈린과의 단절 선언은 청천하늘의 날벼락이 아니다. 그것은 원칙과 실천 모두의 문제에 대한 일련의 많은 갈등들로부터 비롯됐으며, 비극적 양상으로 이러한 갈등들의 첨예함을 대표하고 있다.

레닌의  의심의 여지없이 스탈린의 특성 중 일정한 부분은 높이 평가했다: 그의 단호한 성격, 강인함, 완강함, 심지어는 냉혹함과 민첩함-전쟁에서 필요한 그리고 따라서 전쟁의 참모본부에서 필요한 특성들이다. 그러나 레닌은 이러한 재능들이 아무리 비범하다고 할지라도 결코 당과 국가를 지도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레닌은 스탈린을 혁명가로는 보았지만, 훌륭한 정치가로는 보지 않았다. 레닌에게 이론은 정치투쟁에서 너무도 중요했다. 아무도 스탈린을 이론가라고 여기지 않았으며, 그 자신도 1924년까지는 결코 이론가인 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빈약한 이론적 기반은 소규모 써클에서도 잘 알려져 있었다. 스탈린은 서구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한다: 그는 어떤 외국어도 모른다. 그는 국제 노동운동의 문제들에 대한 토론에 결코 참여한 적이 없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스탈린은--이것은 덜 중요한 문제이긴 하지만 중요한 측면이다--엄밀한 의미에서 저술가나 연사도 아니다. 그의 논설들은, 극도의 조심성에도 불구하고 이론적 오류들과 순진함뿐만 아니라 러시아어에 맞지 않는 조잡한 문체로 가득 차 있다. 레닌이 보기에 스탈린의 가치는 전적으로 당과 당 기구운용 분야에 있었다. 그러나 이 점에서조차도 레닌은 중요한 유보조항들을 표명했으며, 이 조항들은 마지막 단계에서 증가되었다.

레닌은 관념적 교화를 경멸했다. 그러나 이렇다고 해서 레닌이 혁명윤리를 엄격히 고수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혁명의 성공과 새로운 사회의 창조에 필요하다고 자신이 생각한 그러한 행동 법칙들에 관한 한 그는 엄격주의자였다. 레닌의 성격으로부터 거리낌없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엄격한 윤리에는 일말의 현학이나 편협함이나 완고함 따위는 티끌만큼도 없다. 그는 인민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으며 있는 그대로 파악하고 있었다. 레닌은 어떤 사람의 단점들을 다른 사람들의 장점들과 결합시키려 했고 때로는 다른 사람의 결점들과도 결합시키려 했으며, 그로부터 생긴 일들을 반드시 날카롭게 관찰했다. 그는 또한 시대는 변화하며 그와 함께 우리도 변화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당은 지하활동으로부터 권력장악이라는 높은 단계까지 비약해 솟아올랐다. 이것은 옛 혁명가들에게 개인적 상황 및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놀라울 정도로 뚜렷한 변화를 야기했다. 이러한 새로운 조건하에서 레닌이 스탈린에게서 발견한 것을 그는 신중하지만 분명하게 자신의 유언장에서 지적하고 있다: 성심의 부족과 권력 남용의 경향. 루드비히는 이러한 암시를 놓쳤다. 그렇지만 그 암시 속에서야 말로 최근의 레닌과 스탈린 사이의 관계에 대한 해답을 발견할 수 있다.

레닌은 혁명적 독재의 이론가 몇 전문가였을 뿐만 아니라 혁명적 독재의 도덕적 기초에 대한 빈틈없는 수호자였다. 개인의 이해관계를 위해 권력을 사용할 모든 징후가 그의 눈에 위험한 불씨로 비쳐졌다. 그는 숨 막힐 듯한 그의 의분을 좀더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개인적 권력남용이 부르주아 의회주의보다 조금이라도 나을 게 도대체 무엇인가?”라고 의문을 제기하곤 했다. 그리고 그는 종종 의회주의 문제에 대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풍부한 정의 중의 하나를 덧붙이고자했다. 그 동안 스탈린은 갈수록 더 광범위하고 무차별적으로 혁명적독재의 여러 가능성들을 자신에게 개인적으로 순종하고 헌신하는 사람들은 충원하는 데 이용하고 있었다. 서기장으로서의 그의 지위로 그는 호의와 행운의 시혜자가 되었다. 여기에서 피할 수 없는 갈등의 기초가 놓여졌다. 레닌은 점점 스탈린에 대한 도덕적 신뢰를 잃어 갔다. 만일 이 기본적인 사실을 이해한다면, 지난 기간 동안에 있었던 모든 개개의 일화들이 제대로 자리매김될 것이며, 스탈린에 대한 레닌의 태도의 그릇되지 않은 참된 모습을 알게 될 것이다.

 

조직가의 유형들로서의 스베르들로프와 스탈린

당의 발전에서 유언장이 차지하는 올바른 위상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여기서 잠시 딴 이야기로 넘어갈 필요가 있다. 1919년 봄까지는 당의 최고 조직가는 스베르들로프였다. 그는 서기장이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 때까지 아직 그 직책이 창안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그는 당 조직의 제1인자였다. 스베르들로프는 이른바 스페인 열병으로 1919녀 3월에 3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을 마구 쓰러져 죽게 했던 내전과 전염병의 확산 속에서, 당은 스베르들로프의 죽음의 심각성을 거의 깨닫지 못했다. 두 번의 장례연설에서 레닌은 자신과 스탈린 사이의 나중의 관계에 대해서도, 반사되긴 했지만 매우 분명한 조명을 비춰주는 스베르들로프에 대한 평가를 했다: “우리의 혁명 과정에서, 혁명의 승리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정수를 다른 어느 누구보다도 완전히 그리고 전체적으로 표현한 것은 바로 스베르들로프였다”고 레닌은 말했다. 스베르들로프는 “무엇보다도 조직가였다.” 이론가도 저술가도 아닌 평범한 지하활동가로부터 단시일 내에 “흠잡을 데 없는 권위를 획득한 조직가, 러시아의 전체 소비에트 권력의 조직가, 그리고 독특하게 당을 이해하고 있었던 당 활동의 조직가”가 성장했다. 레닌은 기념일이나 장례의 찬미사를 과장해서 표현하는 데에는 별로 취미가 없는 사람이다. 스베르들로프에 대한 레닌의 평가는 동시에 조직가의 임무를 규정하는 것이기도 했다: “우리가 스베르들로프와 같은 조직가를 보유하고 있었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우리는 내전 기간 동안에 마치 우리에게 이렇다 할만한 갈등이 단 하나도 없는 것처럼 사업을 추진할 수 있었다.”

사실이 실로 그랬다. 그 당시 레닌과의 대화 속에서 우리는 여러 번, 그리고 그 때마다 거듭 만족스럽게, 우리가 성공할 수 있었던 주요 조건들 중의 하나로서 다음의 것을 지적했다--즉, 통치 집단의 통일성과 연대성. 돌발사태와 난제의 무지막지한 압박, 처음 부딪혀 보는 문제들, 경우에 따라서는 폭발할 것 같은 실천상의 날카로운 의견 차이 등에도 불구하고, 사업은 매우 무난하고 우호적으로 그리고 중단 없이 진행되었다. 한두 마디 간단한 말만으로도 옛날의 혁명들의 일화를 회상해 볼수 있다: “아냐, 그것은 우리에게 더 나은 거야”: “이것만으로도 우리의 승리는 보장된다.” 중앙의 연대성은 볼셰비키의  전체역사에 걸쳐 갖춰져 왔었고, 지도자들, 무엇보다 레닌의 의심할 여지없는 권위에 의해 유지되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유례없는 단합의 내부 동력에는 스베르들로프라는 중요한 조직 운용가가 있었다. 스베르들로프의 조직술의 비결은 간단했다: 순리대로 하는 것 그것뿐이다. 당 활동가들 중 아무도 당 지도부로부터 은밀히 내려와 파고드는 음모의 소용돌이에 말려드는 것에 대한 공포를 느끼지 않았다. 스베르들로프가 갖고 있던 이러한 권위의 바탕은 성심이었다.

모든 당 지도자를 염두에 두고 레닌은 장례연설에서 실천적인 결론을 이끌어 냈다: “우리는 그러한 사람(스베르들로프와 같은 사람-역자)을 대신할 수 있는 인물을 결코 찾아볼 수 없다. 만일 찾게 된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러한 자질들을 갖춘 한 동지를 발굴하게 되는 셈이다. ... 그가 혼자서 수행한 과업은 이제 그의 발자취를 좇아서 그의 역할을 수행할 일단의 사람들 전체에 의해서만 완수될 수 있다.5) 이 말은 과장이 아니라 실천과 직결된 제안이었다. 그래서 그 제안은 실천에 옮겨졌다. 한 사람의 서기장 대신에 동등한 권한을 가진 세 사람의 자문위원단(collegium)이 임명되었다.

레닌의 이러한 말로 판단해 볼 때, 스베르들로프가 살아있는 동안에--10월 혁명 당시나 혹은 소비에트 국가의 기초를 닦고 뼈대를 세우는 기간 동안에--스탈린은 당 기구 내에서 지도적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당의 역사를 모르는 사람에게조차 분명하다. 스탈린은 또한 스베르들로프를 대신해서 구성된 최초의 서기국에 포함되지조차 않았다.

스베르들로프가 죽은 지 2년 후에 열린 제10차 당대회에서 지노비예프 등이 나에 대항한 투쟁을 벌이려는 은밀한 생각을 가지고 스탈린을 서기장 후보로 지지했을 때--즉, 스베르들로프가 사실상(de facto) 차지하고 있던 지위에 스탈린을 정식으로(de jure) 앉히려 했을 때--레닌은 이 계획에 반대하여 어느 작은 써클에서 연설하는 중에 그의 우려를 표현하여 “이 요리사는 후추 범벅이 된 요리만 만들 것이다”라고 말했다. 스베르들로프의 성격과 연관해 보면, 그 문구만으로도 우리는 두 가지 유형의 조직가 사이의 차이를 알 수 있다: 한 사람(스베르들로프)은 갈등을 무마하고 자문위원단의 사업을 원활히 하는 데 참을성 있게 대처하며, 다른 사람(스탈린)은 후추 범벅인 요리의 전문가이다--심지어 이 요리에 실제 독극물을 양념으로 치는 것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만일 레닌이 1921년 봄에 자신의 반대의사 표명을 끝까지 밀고 나가지 않았다면--즉, 스탈린의 후보로의 지명에 반대하여 공개적으로 당대회에 호소하지 않았다--그 이유는 권한과 영향력이 정치국(the Political Bureau)에 집중되어 있는, 당시 지배적인 조건 속에서 아무리 서기‘장’이라 해도 서기라는 지위가 엄격히 부차적인 중요성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마 레닌도 다른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장차의 위험을 충분히 깨닫지는 못했던 것 같다.

1921년 말경 레닌의 건강이 심각하게 악화되었다. 12월 7일 의사의 권고로 휴양지로 떠나면서 자신의 신체적 고통을 호소하길 좋아하지 않던 레닌이 정치국원들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저는 오늘 떠납니다. 비록 업무의 부담이 줄어들고 휴식할 시간이 늘어났지만 최근의 며칠 동안 불면증이 극심해졌습니다. 저는 당대회나 소비에트 대회에서 연설할 수 없을까봐 두렵습니다.”6)

다섯 달 동안 레닌은 지병과 끊임없이 투쟁하고 의사와 동료들의 만류로 업무에 반쯤 손을 놓은 채 정부와 당의 정책의 진로에 대해 끊임없이 경고하면서 쇠진해 갔다. 5월에 그는 첫 번째 뇌일혈을 일으킨다. 두 달 동안 레닌은 말할 수도 글을 쓸 수도 거동을 할 수도 없게 된다. 7월에 그는 서서히 회복되기 시작한다. 그는 시골에 남아서 조금씩 적극적인 서신왕래를 시작한다. 10월에 그는 크렘린으로 복귀하여 정식으로 업무를 수행한다.

“선용한 수 없는 재앙은 없다”라고 그는 어느 연설문의 초고에서 심경을 밝히고 있다. “저는 반 년 동안 조용히 앉아서 ‘장외에서’ 지켜보아 왔습니다.”7) 레닌은 다음과 같은 의미로 말했던 것이다: 나는 이전에 나의 직책에 너무 착실히 매달려 있었던 나머지 많은 것들을 관찰하지 못했다: 긴 휴지기 덕분에 이제 나는 많은 것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레닌을 가장 신경쓰이게 했던 것은 말할 나위도 없이 관료 권력의 엄청난 성장이었는데, 그 힘의 집중점은 중앙위원회의 조직국(the Organization Bureau)이었다.

후추 범벅의 요리를 만드는 데 전문가인 수령을 제거할 필요성은, 레닌이 업무에 복귀한 직후 분명하게 다가왔다. 그러나 이 인사문제는 특히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레닌은 자신이 떠나 있는 틈을 이용하여 스탈린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일방적인--그리고 흔히 대의에 정면으로 어긋난--인사권을 자행해 왔는지를 확연히 알 수 있었다. 서기장은 이제, 항상 지성적이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최소한 견고하기는 한 유대에 의해 함께 묶여져 있는 수많은 당내 분파들에 의존하고 있었다. 당 기구의 수뇌들의 교체는 심각한 정치 공세의 준비가 없이는 이미 불가능하게 되어 버렸다, 이때 레닌과 나 사이에 소비에트와 당의 관료주의에 대항하는 연대투쟁에 관해 “공동모의” 대화가 있었는데, 레닌은 스탈린의 당시 본거지인 조직국에 대항한 “블록”을 제안했다. 대화의 내용뿐만 아니라 그러한 대화가 있었다는 사실은 곧 문서에 반영되었는데, 이 문건들은 부정할 수 없는 그리고 아무도 부정하지 않는 당사의 한 일화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단 몇 주일 안에 레닌의 건강에 새로운 쇠약의 조짐이 나타났다. 일상 업무뿐 아니라 동지들과의 공무상 대화마저 의사에 의해 다시 금지당했다. 레닌은 사방의 벽 안에 갇혀 홀로 다른 투쟁 방도를 고안해 내야만 했다. 서기국의 막후 활동을 통제하기 위해서 레닌은 몇 가지 조직상의 일반적 조지들을 구상했다. 이리하여 믿을 만하고 경험 많은 당원으로 구성되는 통제위원회(Control Commission)의 형태로 고도의 권위를 갖는 당 중앙을 창출하는 계획을 세웠는데, 통제위원회는 위계적(서열적) 관점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이며--즉, 공무원도 아니고 행정관리도 아니다--동시에 법률 위반과 당내 및 소비에트 민주주의 위반 그리고 혁명적 도덕의 결핍에 대해 중앙 위원회 위원을 포함하여 당의 모든 관리뿐만 아니라 노농감찰부(Workers' and Peasants' Inspection: 라브크린-제4장을 보시오/역자 주)의 중재를 통해 국가의 고위 관리까지 예외 없이 소환할 권한이 부여된다.

1월 23일 레닌은 크룹스카야를 통해서 자기가 제안한 바 있는 중앙기구들의 재조직이라는 주제에 대한 논설8) 하나를 ‘프라우다’에 발표해 달라고 보냈다. 그의 질병으로부터의 배신적인 공격이 곧 밀어닥칠 것과 서기국의 그에 못지않게 배신적인 응답을 염려하여 레닌은 자기의 논설이 즉시 ‘프라우다’에 실리도록 요구하였다: 이것은 당에 직접 호소한다는 것을 뜻한다. 스탈린은 그 문제는 정치국에서 토의되어야 한다며 크룹스카야에게 이 요청을 거절하였다. 형식적으로는 이것은 단지 하루 동안의 연기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 기사를 정치국에 의한 논의에 회부한다는 절차 자체가 나쁜 징조였다. 레닌의 지시로 크룹스카야는 나에게 협조를 요청했다. 나는 정치국 회의의 즉각적인 소집을 요구했다. 레닌의 우려는 완전히 맞아 떨어졌다: 회의에 참석한 모든 정치국 정위원과 후보위원, 즉 스탈린과 몰로토프, 퀴브이셰프, 르이코프, 칼리닌, 부하린 등은 레닌이 제안한 개혁에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논설을 싣는 것에도 반대했다. 예리한 감정적 흥분은 환자(레닌-역자)에게 질병을 더욱 악화시킬 위험이 있으므로 환자를 위안하기 위하여, 장차 중앙통제위원회(Central Control commission)의 우두머리가 될 퀴브이셰프는 레닌의 논설이 실린 ‘프라우다’의 호외를 만들되 단 한 부만 찍자고 제안했다. 이런 식으로 “열렬히” 이 사람들은 자기들의 선생을 따랐던 것이다, 나는 분개하며, 레닌에게 눈가림하려는 그 제안을 거부하고 레닌이 제안한 개혁에 근본적으로 찬성하는 연설을 했으며, 레닌의 논설의 즉각적인 출판을 요구했다. 한 시간 늦게 들어온 카메네프가 나를 지지했다. 다수파의 태도는 레닌이 어떻게 하든 결국은 자기의 논설을 유포시킬 것이라는 주장에 의해 마침내 허물어졌다. 그 주장은 레닌의 논설이 타이프로 복사되어 오히려 관심이 더욱 배가되어 읽혀질 것이며, 그리하여 그만큼 더 첨예하게 정치국을 겨냥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 논설은 결국 다음날 아침인 1월 25일자 ‘프라우다’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일화는 또한 적절한 시기에 공식 기록문서들에 반영되었으며, 현재의 서술은 그것들에 기초하고 있다.

 나는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사실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즉, 나는 순수심리 학파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나는 기억 속에 감정적으로 반영된 사실보다는 확실하게 입증된 사실을 믿는 데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현재의 묘사 전체가, 특별히 지적된 일화들이 라는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나의 문서보관함에 있는 기록들에 기초하여 그리고 날짜와 증언 및 사실적 정황 일반에 대한 주의 깊은 검증과 함께 제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레닌과 스탈린 사이의 불일치

조직 정책이 레닌의 반(反)스탈린 투쟁의 유일한 분야는 아니었다. 중앙위원회 11월 전원회의(1922)9)는 레닌과 내가 불참한 상태에서 개최되어, 뜻밖에도 대외무역 체계에 근본적인 변화를 도입했는데, 이는 바로 국가독점의 기초 자체를 허무는 것이었다. 당시 대외무역 담당 인민위원인 크라신과의 대담에서 나는 중앙위원회의 이 결정에 대해 대체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그들은 아직 통을 완전히 망가뜨리지는 않았지만, 거기에 몇 개의 구멍을 뚫었다.” 레닌이 이 말을 전해 들었다. 그는 12월 13일 나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써 보냈다: “독점을 보존하고 강화할 무조건적 필요에 대한 우리의 공통된 견해를 차기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당신이 착임지고 방어해 주도록 당신에게 진지하게 간청합니다.…지난번 회의는 이 문제에서 대외무역의 독점과 전적으로 모순되게 결정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레닌은 어떠한 양보도 거부하면서 내가 중앙위원회와 당대회에 호소할 것을 주장했다. 공격은 주로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 문제들을 상정할 서기장으로서의 책임이 있는 스탈린에게로 돌려졌다. 그러나 당시에 그것은 공개 투쟁으로까지 가지는 않았다. 위기를 느낀 스탈린은 투쟁을 피해 양보를 했으며 그의 동료들도 그와 행동을 같이했다. 12월 전원회의에서 11월의 결정이 취소되었다. “총한 발 쏴보지 않고도 단순한 작전개시 시늉만으로도 고지를 탈환한 것 같다”라고 레닌은 12월 21일 나에게 농담조로 글을 써 보냈다.

민족정책 분야에서의 의견 차이는 훨씬 심각했다. 1922년 가을에 우리는 소비에트 국가를 민족별 공화국의 연합된 연방으로 전환시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레닌은, 오랫동안 압제 하에서 살아 여전히 그 후유증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민족주의자들의 요구와 주장을 가능한 한 많이 충족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반면에, 민족문제 담당 인민위원의 지위에서 준비 작업을 지도하고 있던 스탈린은, 이 분야에서 관료적 중앙집권제화 정책을 수행하고 있었다. 레닌은 거의 쾌유되어 모스크바 근교에서 요양하면서 정치국에 보낸 서신들에서 스탈린에게 논쟁을 던졌다. 연합된 연방을 위해 스탈린이 입안한 계획에 대한 첫 번째 지적에서 레닌은 지극히 점잖고 자제력이 있었다. 레닌은 그 당시, 즉 1922년 9월 하순경에는 갈등을 공개화하지 않고도 정치국을 통해 그 문제를 조정할 수 있기를 바랐다. 반면, 스탈린의 대답들에는 눈에 띌 만한 초조감이 담겨 있었다. 스탈린은 레닌에게 “성급하다”는 비난을 돌려댔으며, 아울러 “민주 자유주의”라는 비난도 첨가했다: 즉, 이방인들의 민족주의에 영합하는 것이라고. 이 편지는 그것이 비록 정치적으로 매우 흥미로운 것임에도 불구하고 당에 대해서는 비밀에 붙여졌다.

관료주의적 민족정책은 이미 그 당시에 그루지야에서 강력한 반대를 유발시켰으며, 스탈린과 그의 오른팔격인 오르조니키제에 반대한 그루지야 볼셰비즘의 최량부분을 단합시켰다. 크룹스카야를 통해서 레닌은 스탈린과 오르조니키제, 제르진스키 일파에 대항하는 그루지야 반대파의 지도자들(므지바니 * 마하라제 등)을 사적으로 접촉하기 시작했다. 변경 지방들에서의 투쟁이 너무 첨예했고 자신이 특정 집단과 너무나도 밀접히 연계되어 있었기 때문에, 스탈린은 대외무역의 독점 문제에 대해 그가 보여 주었던 조용한 양보를 민족 문제에서는 보여 주려 하지 않았다. 몇 주일 후에 레닌은 당에 호소할 필요가 있겠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12월 말경 레닌은 민족 문제에 관한 두툼한 편지를 하나 구술했는데, 이것은 병이 악화되어 당대회에 참석하지 못할 것에 대비하여 그의 연설에 대신하고자 함이었다.

 

레닌은 자신을 근거 없이 민족주의라고 몰아세우는 스탈린에 대항해 그의 충동적이며 악의적인 통치방식을 비난했다. “보통, 앙심은 있을 수 있는 최악의 역할을 정치에서 한다”고 레닌은 강조하여 썼다. 비록 처음에는 과장되게 제출된 요구일지라도 이전엔 억압받던 민족들의 정당한 요구에 반대하는 투쟁을 레닌은 대러시아 관료적인 표현이라고 불렀다. 레닌은 처음으로 그에 대한 반대자들의 이름을 거명하며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물론 스탈린과 제르진스키에게 이 모든 철두철미한 대러시아 민족주의 캠페인에 대한 책임을 지울 필요가 있다.” 대러시아인인 레닌이 그루지야인인 쥬가슈빌리(스탈린-역주)10)와 폴란드인인 제르진스키를 대러시아 민족주의라고 비난하는 것이 역설적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의 문제는 민족 감정과 민족적 편견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분야--민족 문제는 그 중 하나일 뿐이다--에서 차이가 드러나는 두 체계의 정치노선의 문제이다. 라꼬프스끼는 몇 년 후에 스탈린 분파의 방식을 가차없이 비난하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다른 모든 문제들과 마찬가지로 민족 문제에 대하여 관료들은 행정과 규제의 편의라는 관점으로부터 접근한다.”11) 이 이상 달리 더 좋은 표현은 없다.

스탈린의 말뿐인 양보는 전혀 레닌을 침묵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레닌의 의혹을 심화시켰다. “스탈린은 차후에 기만하기 위해서 추악한 타협을 하려고 한다”라고 레닌은 그의 비서를 통해 나에게 경고를 보내 왔다. 그런데 바로 그렇게 스탈린은 행동했다. 중앙과 변경 지방에서 자신의 분파의 지지가 약화되지 않는다면 스탈린은 차기 당대회에서 민족 정책에 대한 어떠한 이론적 정식화도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 있었다. 확실히 스탈린은 레닌이 자신의 계획을 완전히 꿰뚫어 보고 있다는 사실을 두려워해야 할 많은 근거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환자(레닌-역자)의 건강상태는 계속 악화되고 있었다. 스탈린은 이것을 그의 계산 속에 중요한 요소로 포함하고 있었다. 서기장의 실제적 정책이 단호하면 할수록 레닌의 건강도 그만큼 더 악화되어 갔다. 스탈린은 서기국과 그 동맹자들에 대한할 무기를 레닌에게 제공할지도 모를 모든 정보로부터 자신의 위험한 감독자(레닌-역자)를 격리시키려 했다. 이러한 봉쇄정책은 자연히 레닌의 가장 가까운 특근 인사들에 대해 맞추어졌다. 끄룹스까야는 환자가 서기국의 적대적 음모에 접촉되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해 그녀가 할 수 있는 조치를 취했다. 그러니 레닌은 우연적인 조짐들로부터 전체 상황을 추측할 수 있는 법을 알고 있었다. 레닌은 스탈린의 활동과 동기 및 계산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것들이 레닌의 마음 속에 어떤 반응을 유발시켰는지를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미 그때 레닌의 책상 위에는, 스탈린의 제거를 주장하는 유언장과 나란히, 레닌의 비서들인 포찌예바와 글랴쎄르가 자기들의 상관(레닌-역자)의 기분을 예리하게 표현하여 “스탈린을 향한 폭탄” 이라고 묘사한 바 있는 민족 문제에 대한 기록들 역시 놓여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한다.

 

투쟁이 첨예화되었던 반 년

그 전부터 몇 년간 스탈린이 책임을 맡아 왔던 노동자 ․ 농민 감찰인민위원회(Workers' and Peasants' Inspection: 라브끄린 Rabkrin)을 재조직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레닌은 당 규율과 당 통일성의 보호자격인 중앙통제위원회(Central Control Commission)의 역할에 대한 그의 생각을 발전시켰다. 1923년 3월 4일 『쁘라우다』는 당사(黨史)에 길이 남을 유명한 논설인 “적더라도 더 나은 것이 더 낫다”12)를 발표했다. 이 논설은 몇 번에 걸쳐서 씌었다. 레닌은 구술하여 받아쓰게 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바로 이 당시에 그에게는 실어증 증세가 있었다―역주) 그는 그 논설을 쓰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드디어 3월 2일 그는 그 논설이 확인 낭독되는 소리를 만족스럽게 듣게 되었다: “드디어 모든 게 잘 되는 것 같군.” 이 논설은, 국내적으로나 국제적으로나, 폭넓은 정치적 전망에 근거해 지도적 당기관의 개혁을 포괄하고 있다. 그러니 문제의 이러한 측면에 대해 우리는 여기서 그칠 수는 없다. 그러나 노동자 ․ 농민 감찰인민위원회에 대해 레닌이 내린 평가는 우리가 다루고 있는 주제를 위해서는 매우 중요하다. 레닌은 이렇게 쓰고 있다: “솔직히 이야기해 보자. 라브끄린(노농감찰부)은 현시점에서 권위라고는 티끌만큼도 보유하고 있지 않다. 라브끄린보다 더 나쁘게 조직된 기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과 현상황에서 여러분이 그 위원회로부터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정부 수반에 의해 인쇄물로 작성된, 가장 중요한 국가기관들 중의 하나에 대한 예사롭지 않게 날카로운 이 언급은 이 감찰부(노동자 ․ 농민 감찰인민위원회― 역자)의 조직가이며 수령으로서의 스탈린에 대한 직접적이고 거리낌 없는 공격이었다. 그렇게 했던 이유는 이제 분명해졌을 것이다. 감찰부는 주로 혁명독재의 관료적 왜곡에 대한 교정수단으로 기능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막중한 기능은 그 지도부의 완벽한 성심(誠心)이라는 조건 하에서 성공적으로 수행될 수 있을 것이나, 스탈린이 결여하고 있던 것이 바로 이 성심(誠心)이었다. 스탈린은 당 서기국을 변질시킨 것과 마찬가지로 감찰부도 “그의 심복들”을 위한 보호기구와 그의 반대자들에 대한 박해기구라는 도당적 음모의 도구로 전락시켰다. “적더라도 더 나은 것이 더 낫다”라는 논설 속에서 레닌은 얼마 전에 그 책임자가 츄루빠(Tsyurupa)로 바뀐 감찰부에 대해 그가 제안한 개혁이 “모든 관료, 즉 소비에트와 당 양자 모두의 관료들”의 저항을 받고야 말 것이라는 점을 공개적으로 지적했다. 레닌은 지나가는 길에 의미심장하게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다: “우리는 소비에트 기관들 안뿐만 아니라 당 내부에서도 관료주의와 직면하고 있다.” 이것은 서기장으로서의 스탈린에 대한 완전히 의도적인 공격이었다.

그러므로 레닌이 회복돼서 다시 병상에 눕게 되기까지 사이의 정치적 생활의 마지막 반 년 간은 스탈린에 반대한 첨예한 투쟁으로 점철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닐 것이다. 다시 한 번 주요한 날짜들을 상기해 보자. 1922년 9월에 레닌은 스탈린의 민족 정책에 대항해 포문을 열었다. 12월 초순에 레닌은 대외무역의 독점 문제에 관해 스탈린을 공격했다. 12월 25일에 레닌은 그의 유언장의 첫 부분을 썼다. 12월 30일에 그는 민족 문제 (“폭탄”)에 관해 편지를 썼다. 1923년 1월 4일 그는 스탈린을 서기장의 지위로부터 해임해야 할 필요에 대해 자신의 유언장에 후기를 덧붙였다. 1월 23일 레닌은 스탈린에 대항해 중화기를 배치했다: 통제위원회라는 계획이 그것이다. 3월 2일자 논설에서 레닌은, 감찰부의 조직가로서의 그리고 당서기장으로서의 스탈린에게 이중공격을 가했다. 3월 5일 레닌은 민족 문제에 대해 그가 작성한 메모의 주제에 관해 나에게 다음과 같이 써 보냈다: “만일 당신이 민족 문제를 옹호하는 데 동의한다면 나는 편히 쉴 수 있을 것이오.” 바로 그 날13) 최초로 공개적으로 레닌은, 스탈린과 화해할 수 없는 그루지야 반대파들과 협력하여, 자신이 입장을 “온 마음을 다하여” 후원하고 있으며 자신이 그들을 위해 스탈린 ․ 오르조니끼제 ․ 제르진스끼를 반대하는 문건들을 준비하고 있다는 특별 통지문을 그들에게 보냈다. “온 마음을 다하여”―-이 표현은 레닌에게는 흔한 표현이 아니었다.

“이 문제[민족 문제]는 레닌을 극도로 우려하게 했으며 그는 당대회에서 이 문제에 대해 연설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14)고 레닌의 비서인 포찌예바가 증언한다. 제12차 당대회의 원로회의의 간부회의에서 스탈린은 그의 특유의 말투로 레닌의 편지에 대해 “아녀자들”(즉, 끄룹스까야와 두 명의 여비서들)의 영항력 하에 있는 환자의 기록이라고 말할 만큼 이미 대담해졌다. 레닌의 실제 유언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는 핑계 하에 그 편지를 금고에 넣어 자물 쇠로 잠가 두기로 결정되었다. 그것은 오늘까지 거기에 남아 있다.

위에서 열거한 극적인 일화들은, 비록 그 자체로서 생생하긴 하지만, 레닌이 적극적으로 활동했던 마지막 몇 달 동안 당내 사건들을 거치면서 살았던 그의 정열을 조금도 전달하지 못한다. 편지와 논설 속에서 레닌은 보통 때처럼 매우 엄격히 자제하면서 썼다. 레닌은 자신이 첫 번째 뇌일혈로 자리에 누웠을 때부터 자기 병환의 성격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1922년 10월 그가 업무에 복귀한 이후, 거의 주목할 만하지 않지만 불길한 징조로 그리고 점점 잦은 빈도로 통증이 나타나, 레닌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뇌의 모세혈관을 걱정하게 만들었으며, 병세를 냉정하게 평가했다. 3월 초에 그가 다시 업무로부터 물러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을 때, 최소한 회합과 면담, 전화 대담이 불가능해 졌을 때, 그는 수많은 골치 아픈 관찰의 산물들과 두려운 것들을 그의 병실로 가지고 들어갔다. 관료 기구는 중앙위원회 서기국내의 스탈린 분파의 비밀음모적 참모부와 함께 큰 차원의 정치에서 하나의 독자적인 요인이 되었다. 레닌이 특별히 신중을 기할 것을 요구했던 민족 문제 분야에서는 제정(帝政)적 중앙집권주의의 이빨이 점점 더 공공연히 드러나고 있었다. 혁명의 이상과 원칙은 막후의 분파들의 이해관계에 속박되고 있었다. (혁명적-역자)독재의 권위는 점점 자주, 관리들이 명령을 내릴 때 써먹는 구실로서의 역할로 전락하고 있었다.

레닌은 정치적 위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예리하게 감지했으며 당기구가 당을 질식시킬 것을 염려하였다. 생애의 마지막 기간 동안의 레닌에게는 스탈린의 정책들이 관료주의라는 떠오르는 괴물의 화신이었다. 그 환자(레닌-역자)는 자신이 병환으로 두 번째 자리에 눕기 전에 나와 함께 이야기한 바 있는 당 기구의 개혁을 수행하는 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는 생각에 몇 번씩이나 진저리를 쳤음에 틀림없다. 그가 보기에는 무시무시한 위험이 자신의 전생애를 통한 업적을 위협하는 것으로 비쳤다.

그런데 스탈린은? 퇴각할 수 없을 만큼 너무 멀리 나아가 있었고, 자기 자신의 분파에 의해 고무되고, 자신의 두려운 적(레닌-역자)의 병상으로부터 발사되어 나오는 집중 포화에 공포심을 느낀 나머지, 스탈린은 이미 무턱대고 나아가고 있었으며, 당과 소비에트의 지위를 배분함으로써 열성적 추종자들을 공공연히 모집하고 있었고, 크룹스카야를 통해서 레닌에게 호소하는 사람들을 위협하고 있었으며, 레닌이 이미 자기 행동에 책임질 능력이 없다는 소문을 점점 더 줄기차게 유포시키고 있었다. 스탈린과 완전히 절연하겠다고 위협하는 레닌의 편지가 나오게 된 분위기는 이러하였다. 아니, 그 편지는 청천하늘의 날벼락이 아니었다. 그것인 단지 인내가 그 한계를 넘어섰다는 것을 뜻했을 뿐이다. 단지 연대순으로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그것은 스탈린에 대한 레닌의 태도에 하나의 마지막 선을 긋는 것이었다.

루드비히가 “임종 시까지” 선생(레닌-역자)에게 충실했던 제자(스탈린-역자)에 대한 공식적인 이야기를 감사해 하며 반복하면서도, 이 마지막 편지에 관해서나 혹은 현재의 크렘린 신화들과 일치하지 않는 그 밖의 다른 모든 상황들에 관해서는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닌가? 루드비히는 그가 전부터 알고 있었던 나의 자서전으로부터라도 최소한 편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는 나의 자서전에 대해 호의적인 서평을 한 바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루드비히는 내 증언의 참됨을 의심했나 보다. 그러나 편지의 존재도 편지의 내용도 어느 누군가에 의해 논박된 적이 결코 없다. 더군다나, 편지의 존재와 그 내용은 중앙위원회의 속기록에서 확인되는데도 말이다. 1926년 7월 전원회의에서 지노비예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23년 초에 블라디미르 일리치는 스탈린 동지에게 보내는 개인적 편지 속에서 스탈린과의 모든 동지적 관계들을 파기했다. (전원회의 속기록 제4권 32페이지)” 그리고 레닌의 누이인 M. I. 울랴노바를 포함한 다른 발언자들도 중앙위원회 내에서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로서 그 편지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그 당시에는 이러한 증거에 반대하려는 생각이 스탈린의 머리에는 떠오를 수조차 없었다. 과연 스탈린은, 내가 아는 한에서는, 심지어 그 후에조차도 직접적인 형태로는 이 증거에 반대하려는 모험을 감히 시도하지 않아 왔다.15)

공식역사가들이 근년에 이 부분을 다루는 역사의 한 장을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 없애려고 문자 그대로 막대한 노력을 수행해 온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청년 공산당원에 관한 한 이 노력은 일정한 성과를 달성했다. 그러나 탐구자들은 바로 자신들의 권리로 신화들을 파괴하고 실제 사실들을 확인할 목적으로 존재하는 것일 게다. 그렇지 않다면 이것이 심리학자들에게는 적용되지 않기라도 한단 말인가?

 

“2두 정치”라는 가설

우리는 앞에서 레닌과 스탈린 사이의 마지막 투쟁에 대해서 개관했다. 이 모든 국면들에서 레닌은 나의 지원을 구했으며 찾아냈다. 레닌의 연설들과 논설들 및 편지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사실에 대한 수많은 증거가 쉽사리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즉, 노동조합 문제16)에 대한 우리 사이의 일시적인 의견 불일치가 있은 후에, 1921년과 1922년 그리고 1923년 초에 걸쳐 레닌은 공개석상에서 항상 나와의 연대를 강조했고 나의 이러저러한 말을 인용했으며 내가 취한 방도를 지지했다. 우리는 그의 동기가 개인적인 데 있지 않고 정치적인 데 있었다는 것을 이해해야만 한다. 마지막 몇 달간 그를 놀라게 했고 슬프게 했음직한 것은 바로 스탈린에 대항한 그의 투쟁 방도에 대한 나의 미온적인 지원이었다. 그렇다, 이것이 그 당시 상황의 패러독스였다! 레닌은 장래에 있을지도 모를 스탈린과 트로츠키의 노선상의 분열을 염려하였고, 나에게 좀더 활기찬 반(反)스탈린 투쟁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보이는 모순은 단지 표면적일 뿐이다. 레닌이 당시 스탈린을 날카롭게 비난하고 그를 무장 해제시키고자 했던 것은 장차 당 지도력을 안정시키기 위해서였다. 내가 자제했던 이유는 레닌이 죽음과 싸우고 있던 바로 그 때에 지도집단 내에 어떤 날카로운 갈등이 생기게 되면 그것은 레닌의 망토를 차지하기 위한 제비뽑기로 당에 이해될는지도 모른다는 염려 때문이었다. 나는 여기서 그 경우에 내가 자제한 것이 옳았는지 틀렸는지에 관한 의문을 제기하지는 않겠으며, 또한 조직 개혁과 사람 교체로 점증하는 위험을 격퇴하는 것이 그 당시에 가능했을지에 관한 더 폭넓은 의문도 제기하지 않겠다. 그러나 모든 수수께끼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그렇게 가볍게  선택하는 이 독일인 대중작가가 우리에게 제시한 그림과 배우들의 모든 실제 배역들은 얼마나 거리가 먼가!

우리는 루드비히로부터 유언장이 “트로츠키의 운명을 결정했다”는 말을 들었다--즉, 유언장이 결국 트로츠키의 실권(失權)에 대한 원인으로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이것과 나란히, 트로츠키와 스탈린을 화해시키려는 시도조차 아닌 것을 가지고 루드비히가 상설(詳說)하는 또 다른 해석에 따르면, 레닌은 “트로츠키와 스탈린의 2두 정치”를 요구했다는 것이다. 역시 의심할 여지없이 라덱이 제안한 이 후자의 발상은 다음의 사실에 대한 훌륭한 증거이다: 즉, 심지어 지금도, 스탈린의 측근들 중에서조차, 대담을 위해 초청된 외국 작가의 편향적인 조작 속에서조차, 아무도 레닌이 스탈린을 자신의 후계자로 보았다고 감히 주장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유언장의 원문 및 일련의 다른 기록들 전체와의 너무 조야한 모순을 피하기 위해서는 2두 정치라는 이 발상을 사후적으로 제시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어떻게 서기장을 해임하라는 레닌의 조언과 조화시킬 수 있을까? 그것은 스탈린에게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모든 무기를 빼앗으라는 것을 뜻했을 것이다. 여러분은 2두 정치의 후보자를 이런 식으로 대하지는 않는다. 아니, 더욱이 이러한 라덱-루드비히의 두 번째 가설은 더 용의주도한 것이기는 하지만, 유서의 원문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는 없다. 그 문서의 목적은 그 저자에 의해 규정되었다: 즉, 중앙위원회의 안정을 보증하는 것이었다. 레닌은 이 목표에 이르는 길을 2두정치라는 인위적 짜맞추기가 아니라 지도자들의 활동에 대한 집단적 통제를 강화하는 것에서 찾았다. 레닌이 이렇게 할 때 집단 지도 체제의 개개구성원들의 상대적 영향력을 어떻게 생각했는지에 관해서는 독자가 앞에서 유언장으로부터 인용한 것들에 기초해서 자기 나름대로의 결론을 도출할 자유가 있다. 그러나 독자는, 유언장이 레닌의 최후의 말이 아니라는 사실과 레닌이 파국이 더 가까이 다가옴을 느끼면 느낄수록 그의 스탈린에 대한 태도는 갈수록 엄격해졌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만일 루드비히가 유언장이 그 후에 처해졌을 운명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기울였다면, 그는 유언장의 의미와 정신을 평가하는 데에서 그렇게 중대한 오류는 범하지 않았을 것이다. 스탈린과 그의 분파가 유언장을 숨기고 당에 공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언장은 반대파들(좌익반대파-역주)에 의해서만 재인쇄되고 재발간되었다--물론 비밀리에. 수백 명의 내 동료와 지지자들이 2페이지밖에 안 되는 그 작은 분량을 복사해서 배포했다는 이유로 체포되고 유형에 처해졌다. 1927년 11월 7일--10월 혁명 10주년 기념일--모스크바의 반대파들은 “레닌의 유언을 실행하라”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기념행진에 참가했다. 특별히 선발된 스탈린의 군대는 이 행렬을 깨뜨리고 들어와 그 ‘불법적인’ 플래카드를 낚아챘다. 2년 후 내가 국외로 추방당할 때, 1927년 11월 7일 ‘트로츠키주의자들’에 의해 반란이 준비되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날조되었다. “레닌의 유언을 실행하라”는 호소가 스탈린주의자 일당에 의해 반란에 대한 호소로 조작되다니! 그리고 심지어 지금도 코민테른의 어느 지부도 그 유언장을 출판하는 것이 금지되고 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좌익반대파는 사정이 허락하는 모든 경우에 모든 나라에서 유언장을 재발행하고 있다. 정치적으로 이러한 사실들이 문제의 성격을 남김없이 드러내 주고 있다.

 

정보제공자로서의 라덱

그러면, 유언장을 읽는 동안 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어떻게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는지에 대한--더욱이 유언장에는 있지도 않은 “여섯 마디”에 대해 “그게 무슨 소리냐?”고 의문을 제기하면서--기상천외한 이야기는 어디로부터 나왔을까? 이것에 대해 나로서는 한 가지 가상적인 설명만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이 설명이 얼마나 정확할지에 대해서는 독자들의 판단에 맡기겠다.

라덱은 탁월한 재치꾼이며 이야기꾼에 속한다. 이 말은 그가 다른 재능을 갖고 있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1918년 3월 8일 제 7차 당대회에서 평상시에 개인에 대한 논평을 극히 자제하는 레닌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라덱 동지에 대해 말하자면, 저는 여기서 우연히도 그가 진지한 말을 하는 데 성공해 왔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 후 다시 한 번 논평했다: “우연히 이번에 우리는 라덱에게서 매우 진지한 발언을 듣게 되었습니다.…”17)

단지 예외적으로만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현실을 윤색시키려는 유기적 경향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있는 그대로의 현실은 그들의 이야기에 항상 적합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나의 개인적 경험으로부터 나는 라덱의 증언들에 대해 매우 신중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는 사건들을 있는 그대로 설명하지 않고 그것들을 재치 있는 화법의 재료로 채택하는 버릇이 있다. 일화를 드는 논법을 포함하여 모든 기술이 종합되어 동원되기 때문에, 라덱은 다양한 사건들 혹은 다양한 일화들의 보다 재치 있는 특징들을, 그것들이 비록 서로 다른 시기와 다른 장소에서 발생했다 할지라도, 한데 뭉뚱그리는 경향이 있다. 이것에는 어떠한 악의도 없다. 그것은 그의 타고난 작품이다.

그리고 분명히 이번에도 그런 일이 벌어졌다. 모든 증거에 의하면, 라덱은 제13차 당대회 때의 원로회의 회의석상을 1926년의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회의석상과, 두 회의 사이에는 2년 이상의 간격이 있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혼동하고 있다. 당시 전원회의에서도 비밀 필사본들이 낭독되었는데, 그 가운데 유언장도 들어 있었다. 그 당시에 이미 반대파 자리에 나와 나란히 앉아 있던 카메네프가 아니라, 사실 이번에는 스탈린이 그것들을 낭독했다. 그 즈음에 자물쇠로 채워져 보관된 레닌의 유언장의 사본들과 민족 문제에 관한 편지 및 기타  다른 문서들이 이미 상당히 광범위하게 당내에 나돌고 있었다는 사실에 자극되어 그의 낭독이 이루어졌다. 당 기관은 초조해져서 레닌이 실제로 말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어했다. “반대파는 알고 있고 우리는 모른다”고 그들은 말하고 있었다. 스탈린은 오랫동안 거부하던 끝에 중앙위원회 회의석상에서 그 금지된 문서들을 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 기록들은 자동적으로 속기록에 옮겨졌고 당기관의 책임자들을 위한 비밀 메모에 인쇄되었다.

이때도 역시 유서가 낭독되는 동안에 아무런 감탄사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 문서는 중앙위원회 위원들에게는 오래전부터 너무도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스탈린이 민족 문제에 관한 편지를 읽는 중에 그의 낭독을 제지했다. 그 일화 자체는 그리 중요하지 않지만, 그것은 일정한 추측들을 추구하는 심리학자들에게는 아마 유용할 것이다.

레닌은 문필 수단과 방식에서 극도로 경제적이었다. 그는 전보통신상의 용어로 친근한 동료들과 업무상의 교신을 수행했다. 주소의 형태는 항상 T자(Tovarishch: 동지)와 함께 수취인의 성(姓)만 적은 것이었으며, 서명은 “레닌”이었다. 복잡한 설명 대신에 이중삼중으로 밑줄이 쳐진 낱개의 단어들과 특별한 감탄부호들 등으로 대체되었다. 우리 모두는 레닌의 문체의 특성을 잘 알고 있었으며, 그러므로 심지어 그가 자신의 간결하면서도 의미심장한 문체로부터 조금만 벗어나도 우리의 주의를 끌었다.

레닌은 3월 5일 민족문제에 관한 편지를 보내면서 나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존경하는 트로츠키 동지(Esteemed Comrade Trotsky):

저는 당신에게 당 중앙위원회에서 그루지야 문제에 대한 변론을 맡아줄 것을 진지하게 요청합니다. 그 문제는 지금 스탈린과 제르진스키의 수중에서 “검토” 중에 있는데, 저는 그들의 공정성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사실은 그와 정반대요! 만일 당신이 그 문제의 변론을 맡아줄 것에 동의한다면 저는 편히 쉴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어떤 이유로 당신이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 동안 받은 모든 관계서류를 돌려보내 주길 바랍니다. 저는 그것을 당신이 동의하지 않는 표시로 생각할 것이오.

최대의 동지적 인사를 보내며,

레닌

1923년 3월 5일

 

레닌의 정치적 생명이 유지되던 마지막 날 동안에 그에 의해 구술된 이 짧은 기록은 내용과 어조 모두가 유언장 못지않게 스탈린에게는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공정성”의 결여--이것은 사실 이미 지적한 바 있는 성심(誠心)의 결여를 의미하는 게 아닐까? 이 기록에서는 스탈린에 대한 신뢰감은 털끝만큼도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사실은 그와 정반대요”라고 표현되는--강조된 것은 나에 대한 신뢰감이다. 스탈린과 그의 분파에 대항한 레닌과 나 사이의 암묵적 연대의 확증은 바로 가까이에 있었다. 스탈린은 그것을 낭독하는 동안 거의 자제심을 잃을 지경이었다. 서명 부분을 읽어 내려갈 즈음, 그는 머뭇거렸다: “최대의 동지적 인사를 보내며”--그것은 레닌이 친히 쓴 표현으로서는 너무도 노골적인 것이었다. 스탈린은 “공산주의자의 인사를 보내며”라고 읽었다. 그것은 실제의 것보다 무미건조하고 형식적으로 들렸다. 그 순간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거기 뭐라고 쓰여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스탈린은 당황하여 레닌이 쓴 실제 문장을 읽을 수밖에 없었다. 스탈린의 측근 동료들 중 누군가가, 나는 단지 원문의 한 구절의 진위를 확인하려 했던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사건건 억지를 부리고 있다고 나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 하찮은 우발사태는 인상 깊은 것이었다. 당 지도자들 사이에 그것에 관한 이야기가 있었다. 당시에는 더 이상 중앙위원회 위원이 아니었던 라덱은 전원회의에서의 그 일에 대해 다른 사람들과 아마 나로부터 들었던 것 같다. 5년 후 라덱이 이미 스탈린 편에 서고 더 이상 나와 의견을 같이 하지 않게 되었을 때, 그는 그의 불확실한 기억에 기초해서 이러한 짜깁기식 일화를 지어냈는데, 이것이 루드비히로 하여금 그렇게도 효과적이고 그렇게도 그릇된 추측을 하도록 만들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듯이, 비록 레닌이 나의 비(非)볼셰비키로서의 과거가 “우연적인 것이 아니다”라고 그의 유언장에 천명할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나는 내 나름의 생각으로 그 말을 받아들일 용의가 있다. 정신세계의 인과법칙은 물질세계와 마찬가지로 확고하다. 그러한 일반적 의미에서 나의 정치적 경력은 물론 “우연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내가 볼셰비키가 되었다는 사실 또한 우연적인 것이 아니었다. 얼마나 진지하게 그리고 얼마나 영구적으로 내가 볼셰비즘 진영에 합류했는지에 대한 의문은 무미건조한 연대기적 기록이나 문학심리학의 추측에 의해서는 판명될 수 없다. 이론적이고 정치적인 분석이 필요하다. 이것은 물론 너무도 커다란 주제이므로 전적으로 현재의 이 논설의 주제를 넘는 문제이다. 우리가 이 논설에서 밝히려고 하는 바를 위해서는, 레닌이 1917년의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의 행동을 “우연적인 것이 아닌 것”으로 묘사하면서도 철학적으로 결정론의 법칙을 언급하지 않고 장래를 위해 정치적 경고만을 했다는 점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라덱이 루드비히를 빌어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에게 내려졌던 경고를 나에게로 옮겨놓을 필요가 있다고 느낀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트로츠키주의’라는 신화

이 문제의 주요한 단서들을 상기해 보자. 1917년부터 1924년까지는 트로츠키주의와 레닌주의 사이의 모순에 대해 단 한 마디도 이야기되지 않았다. 이 기긴 동안에 10월 혁명과 내전, 소비에트 국가의 건설, 적군의 창설, 당 강령의 수행, 코민테른의 창립, 코민테른의 핵심 그룹들의 구성, 코민테른 기본 문헌들의 작성 등이 있었다. 레닌이 중앙위원회의 핵심에서의 업무로부터 물러나게 된 후에 심각한 알력이 빚어졌다. 1923년에 ‘트로츠키주의’라는 유령이--막후에서 주의 깊게 준비된 후에--무대에 올려졌다. 전반적인 당 내부의 투쟁은 이  때부터 트로츠키주의와 레닌주의 사이의 대립이라는 틀 내에서 수행되었다. 다시 말해서, 새로운 환경과 새로운 과업들에 의해 야기된, 나와 스스로 레닌인 척하는 자들 사이의 알력은 과거에 나와 레닌 사이에 있었던 의견 차이의 연속인 것으로 제시되었다. 이 주제에 맞추어 방대한 문헌들이 창조되었다. 저격수는 항상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였다. 그들이 레닌의 오래되고 매우 가까운 동료라는 특성으로 인해 그들은 트로츠키주의에 대항한 ‘고참 볼셰비키’ 수호자의 선봉에 섰다. 그러나 심오한 사회변화 과정에 자극받아 이 그룹은 스스로 쪼개졌다.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소위 ‘트로츠키주의’가 근본적인 문제들에서는 옳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새로운 수천의 고참 볼셰비키들이 ‘트로츠키주의’를 따랐다.

1926년 7월 전원회의에서 지노비예프는 나에 대항한 그의 투쟁이 그의 생애에서 “1917년의 실수보다 더 위험한” 최대의 실수였다고 발표했다. 오르조니끼제가 그의 자리에서 지노비예프에게 다음과 같이 소리쳤는데 이는 전적으로 그릇된 말은 아니었다: “그러면 왜 당신은 당 전체를 속였습니까?(이미 인용한 바 있는 속기록을 보라.)” 이 괴로운 말대꾸에 대해 지노비예프는 공식적으로는 아무런 응답을 찾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1926년 10월 반대파 회의에서 비공식적으로 해명했다. 내가 있는 자리에서 그는 자기의 가장 가까운 동료들 즉, 트로츠키주의라는 신화를 곧이곧대로 믿고 있는 일부 레닌그라드 노동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러분은 그것이 권력투쟁이었다는 것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속임수는 바로 옛날의 견해 차이를 새로운 쟁점들과 결부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트로츠키주의’라는 것이 발명되었습니다.…”

반대파에 2년간 몸담고 있는 동안,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그들이 스탈린과 함께 음모적 방법으로 ‘트로츠키주의’라는 신화를 조작해 냈던 이전의 기간 동안의 막후 연락관계를 완전히 폭로하게 되었다. 1년 후 반대파가 주류에 대항하여 장구하고 고난에 찬 표류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결국 명백해졌을 때,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승리자(스탈린-역주)의 자비에 스스로를 내맡겼다. 당 복귀의 첫째 조건으로서, 그들에게는 트로츠키주의라는 신화를 재건할 것이 요구되었다. 그들은 동의했다. 그 당시 나는 일련의 신뢰할 만한 증거문서들18)을 통해 이 문제에 대한 그들 자신의 이전의 선언들을 보강하기로 결정했다. 다음과 같은 서면 진술서를 제출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라덱, 바로 칼 라덱이었다:

저는 카메네프와의 대담에 참석했는데, 그 때 L. B. [카메네프]는 어떻게 그들이 즉,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가 스탈린과 함께 레닌 서거 후에 트로츠키의 당 지도권을 봉쇄하기 위해, L.D. [트로츠키]와 레닌 사이의 해묵은 의견불일치들을 이용하기로 결정했는지를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공개적으로 천명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더욱이 저는 그들이 첫머리에 내걸 슬로건으로서 트로츠키주의를 어떻게 “발명했는지”에 대해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의입을 통해 반복해서 들었습니다.

칼 라덱

1927년 12월 25일

 

비슷한 서면 진술서들이 프레오브라젠스키와 피아타코프, 라코프스키, 옐친에 의해 제출되었다. 현직 국영은행 총재인 피아타코프는 지노비예프의 증언을 다음과 같은 말로 총괄했다: “‘트로츠키주의’는 실제의 의견 차이들을 허구적인 차이들로 대체시키기 위하여 즉, 현재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지만 앞에서 언급한 일정한 목적을 위해서 인위적으로 부활시킨 과거의 차이들을 이용하기 위하여 발명되었다.”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그리고 젊은 세대를 대표하는 V. 옐친은 다음과 같이 썼다: “참석했던 1925년 그룹(지노비예프 추종자들)의 지지자들 중 아무도 이것(트로츠키주의가 발명되었다는 사실-역주)에 대해 아무런 반대도 제기하지 않았다. 누구나 지노비예프가 제공한 이 정보를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로서 받아들였다.”

앞에서 인용한 라덱의 증언은 1927년 12월 25일 그에 의해 제출되었다. 몇 주일 후 그는 이미 망명 중에 있었으며, 몇 달 후 자오선이 지나는 톰스크 지방에서 일찍이 모스크바에서는 그에게 드러나 보이지 않았던 것 즉, 스탈린의 입장이 올바름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실권자들은 라덱에게도 ‘트로츠키주의’라는 바로 그 신화의 실제성을 승인할 것을 필수조건으로 요구했다. 라덱이 이것에 동의한 후, 그에게 남은 것은 지노비예프가 1926년에 스스로 보여주었던 낡은 공식을 반복해서 결국 1928년에 다시 그들에게 돌아가는 것뿐이었다. 라덱은 한술 더 떴다. 남의 말을 쉽게 믿는 한 외국인(루드비히-역자)과의 대담에서, 그는 ‘트로츠키주의’라는 속물아류들의 신화를 뒷받침할 만한 구절을 레닌의 유언장에서 찾아내기 위해서 그것을 변조시켰다.

전적으로 문서 자료에 의존하고 있는 이 짧은 역사적 논평으로부터 많은 결론들이 도출될지 모른다. 그 중의 하나가 혁명은 준엄한 과정이며 혁명적 인간에게 가혹한 짐을 지운다는 것이다.

크렘린과 소련에서 뒤이어 일어난 사건들의 궤적은 단일한 문서--비록 그것이 레닌의 유언장이라 할지라도--에 의해서가 아니라 훨씬 더 심오한 이치를 지닌 역사적 원인들에 의해 결정되었다. 봉기와 내전의 수년간의 막대한 노력 이후에 불어닥친 정치적 반동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여기서 반동이라는 개념은 반혁명이라는 개념과는 엄격히 구별되어야 한다. 반동이 반드시 사회적 전복--즉, 한 계급으로부터 다른 계급으로의 권력 이전이라는--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제정조차도 진보적 개혁의 시기와 반동의 시기를 가졌었다. 지배계급의 지향과 동향은 상황에 따라 변화한다. 이것은 노동계급에게도 적용된다. 소요에 진력이 난 쁘띠부르주아지의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압력은 프롤레타리아 계급 자체 내에 쁘띠부르주아적 경향을 수반하고, 또 스탈린이 지도하는 현재의 관료기구가 집권하게 해준 최초의 심각한 반동을 야기했다.

레닌이 스탈린의 장점이라고 평가한 것들--완강한 성격과 민첩함--은 물론 그 때까지도 남아 있었다. 그러나 스탈린의 그러한 장점들은 발휘되어야 할 새로운 분야와 적용되어야 할 새로운 대상을 찾아냈다. 과거에는 스탈린의 개성에서 단점으로 나타났던 그러한 특징들--시야의 협소함, 창조적 상상력의 결여, 경험주의--은 이제 최고로 중요한 효과적인 의의를 갖게 되었다. 이러한 특성들로 인해 스탈린은 소비에트 관료들의, 반쯤은 의식적으로 선택된 도구가 되었으며 스탈린의 그런 특성들은 관료집단이 스탈린을 영명한 지도자로 여기게끔 만들었다. 볼셰비키당의 지도자들 사이에 벌어졌던 이러한 10년간의 투쟁은, 혁명의 이와 같은 새로운 국면이라는 조건 하에서, 레닌이 그의 생애의 마지막 기간에 비타협적 투쟁을 벌였던 바로 그 정치적 특성의 기질들을 스탈린이 극도로 발전시켜 왔다는 것을 분명하게 증명했다. 그러나 지금도 소비에트 정치의 초점이 되고 있는 이 문제는 우리가 다루고 있는 역사적인 주제를 훨씬 벗어나는 것이다.

우리가 언급했던 사건들 이래 여러 해가 지나갔다. 만일 십 년 전에라도 레닌의 충고보다 훨씬 더 강력한 요인들이 작용했더라면, 효과 있는 정치적 문서로서의 유언장에 호소하는 것은 이제는 완전히 천진난만한 짓일 것이다. 볼셰비즘으로부터 성장해 나온 두 그룹 사이의 국제적 투쟁은 개인들의 운명 문제를 오래 전에 벗어나게 되었다. 레닌의 유언장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그의 편지는 지금부터는 주로 역사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감히 생각하건대, 역사는 자신의 권리들을 갖고 있으며, 더욱이 그것들이 정치적 이해관계들과 항상 배치되는 것도 아니다. 과학의 요구들 중 가장 기초적인 것--사실들을 올바로 확증하고 문헌에 의해 풍문의 진위를 밝히는 것--은 정치가와 역사가 모두에게 똑같이, 적어도 권고될 수 있다. 그리고 이 요구는 심지어 심리학자들에게까지 확대되어도 좋을 것이다.

 

1932년 12월 31일

 

 

1) 레닌, ‘전집’(Lenin's Collected Works ), p.593 이하에서 발표된 견해에 따르면, 유언장 의 첫 번째 부분은 1922년 12월 24일과 25일에 구술되었으며 M. 볼로지체바가 받아 적었다. 유언장 중 1923년 1월 4일에 추가로 구술된 부분은 레닌의 또 다른 비서인 포찌예바가 받아썼다.

2) 레닌은 1917년 11월 1일(새 달력 14일) 볼셰비키당의 뻬쩨르부르크 위원회의 회의석상에서 이런 말을 했다.(이 당시 러시아 사람들은 아직도 구식의 율리우스 달력을 사용했는데, 이것은 서구에서 사용되는 그레고리안 달력보다 13일 늦었다. 그래서 날짜를 이중으로 가입했다.) 이 회의의 회의록은 원래 1927년에 발간된 뻬트로그라트(뻬쩨르부르크) 위원회 회의록집에 포함되어 있었으나, 마지막 순간에 이 책에서 삭제되었다. 인쇄과정의 교정지들이 반대파(the Opposition)의 수중에 증거로 입수되었으며, 트로츠키는 그것들을 자신이 유형 중에 편집한 러시아어판 반대파 기관지 ‘반대파 회보’( Biulleten Oppozitsii )에 원본의 복사사진과 함께 게재했다(1929년 11월~12월 제7호 pp.31~37). 주석이 달린 영어본은 ‘스탈린 날조 학파’( The Stalin School of Falsification , 뉴욕 : Pathfinder Press, 1972) pp.101~123에서 찾아볼 수 있다. 레닌의 이 연설은 레닌 ‘전집’ 에는 실려 있지 않다.

3) “이태리 * 프랑스 * 독일의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인사,” ‘전집’ 제30권, pp.55~56을 보라. 강조는 트로츠키의 것임.

4) 우리는 유언이 구술되었으며 수정되지 않았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곳에 따라 문체상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있다 ; 그러나 그 사상은 완전히 명백하다.-L.트로츠키

5) 이것과 앞에서 인용한 것들을 찾아보려면 ‘전집’, 제29권, pp.89~94에 있는 “Y. M. 스베르들로프에 대한 추도 연설”을 보라. 강조는 트로츠키의 것임.

6) 현재의 논설에서 인용된 다른 많은 편지들과 마찬가지로 이것은 나의 문서보관함에 있는 자료들로부터 있는 그대로 인용되었다.-L.T. 이 편지는 얀 M. 마이어가 편집한 ‘트로츠키 논문집’ (The Trotsky Papers) (헤이그 : Mounton, 1972), 제2권, p.647에 실려 있다.

7) 이 문건은 어디에 실려 있는지 파악되지 않았다.

8) 이 책의 제4장에 게재된 “노농감찰부를 어떻게 재조직할 것인가”를 참조할 것.

9) 이 전원회의는 실제로는 1922년 10월 6일에 열렸다.

10) 쥬가슈빌리는 스탈린의 본명

11) 출처 미상 (라코프스끼는 모스크바개판 후 옥사했으므로 그의 저작은 매우 최근에야 그 일부가 발간되었다-역주).

12) 이 책의 제4장에 전개되었다.

13) 실제로는 다음날인 3월 6일.

14) 1923년 3월 16일자 편지에 들어 있는 포찌예바의 성명서 전문을 보려면, 뜨로츠끼가 쓴 『스탈린 날조학파』의 p.70을 보라. 레윈(Lewin)의 『레닌의 최후의 투쟁』(Lenin's Last Struggle) 의 pp.155~156에 의하면, 소련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 (the Institute of Marxism-Leninism)는 이 편지가 있다는 사실을 확증하고 있으며, 포찌예바가 1923년 4월 16일에 이 편지를 정치국에 보냈다고 언명하고 있다.

15) 1923년 3월 5일자로 되어 있는 이 편지는 소련에서 스탈린이 죽은 뒤 처음으로 출판되었다. 그것은 이 책의 제 2장에 재수록되었다.

16) 전시공산주의 시기 동안에 볼셰비키당은 노동의 군대화를 도입했다. 이 정책은 경제의 사활적인 부문들의 기능을 복구시키기 위하여 군사적 규율 하에서 노동자들을 동원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었는데, 1920년 트로츠키의 지도로 수행된 철도수송기관의 재조직에서처럼 몇 가지 괄목할 만한 성공을 이룩했다. 그러나 이 정책은 노동조합의 권리들을 유보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노동조합 활동가들의 큰 원망을 샀다. 1920년 가을 러시아-폴란드 전쟁이 종결된 후, 레닌과 트로츠키는 이 정책을 어느 정도까지 추구해야 할지에 대해 상호 이견이 있었다. 트로츠키는 전시공산주의 체제에서 노동조합의 독자적 역할을 인정하지 않았다. 비록 트로츠키는 전시공산주의 체제 전반에 대해 반대하여 그 해 2월에 신경제정책(NEP)과 매우 흡사한 체제로 전시공산주의체제를 바꾸자고 제안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시공산주의가 계속되는 한 그것은 일관되게 집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레닌은 노동조합 정책이 인기가 없다는 것을 감지하고 제한조치들을 완화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전시공산주의가 NEP로 대체되었던 1921년 3월에 논쟁은 종결되었다.

17) 『전집』, 제27권, 110페이지를 보라. 거기에서 레닌은 라덱보다는 오히려 랴자노프를 반대하여 지적하고 있다. 이 인용문에 대한 다음과 같은 주석은 듀이위원회(Dewey Commission)의 조사보고서에 나타나 있는데, 이 위원회는 모스크바 재판에 회부된 트로츠키의 혐의내용을 조사해서 1938년 <무죄 Not Guilty>에 실었다: “이 인용문을 검토하면서 우리는 그것이 트로츠키가 레닌, 『전집』, 국영출판사, 1924(제15권, pp131~132)에 제출했던 대로임을 발견했다. 1935년에 출판된 레닌, 『전집』, 러시아어 제3판에서는 랴자노프의 이름의 라덱의 이름 자리에 대신 들어갔다(제22권, p331). 편집자들은 그러한 변경에 대해 설명하지 않고 있으며, 하다못해 이전의 판에서 랴자노프의 이름이 들어가야 할 자리에 라덱의 이름이 잘못 들어갔었다는 설명조차도 없다.

18) 이 진술서의 전문은 러시아어 원본의 복사사진과 함께 트로츠키가 지은 <스탈린 날조 학파> pp92~96에 실려있다.

 

 

제 4 장 관료제

 

배경

 

관료제에 대한 레닌의 이론적인 발정과정 및 이 문제에 관한 레닌과 트로츠키 사이의 차이점들은 서문에서 다루어졌다.

여기에 실린 문서들은 1922년 3월의 제11차 당대회와 1923년 4월의 제12차 당대회 사이의 13개월이라는 기간을 포괄하고 있다.

첫 번째 글은 레닌이 참석할 수 있었던 마지막 당대회인 제11차 당대회에서 행한 레닌의 정치보고를 발췌한 것이다. 여기서 레닌은 NEP(네프 : 신경제 정책)실시 첫 해의 경험을 총괄하면서 정치ㆍ경제적 상황을 개괄하고 있다. 사정은 전에 없이 독특한 것이었다: “역사상 이전의 어떤 시기에도 조성된 적이 결코 없는 유일무이한 상황, 즉 혁명적 전위인 프롤레타리아가 국가권력을 확실하게 장악하고 그들 주위에 국가자본주의(state capitalism)가 존재하는 상황이 전개되었습니다.” 자본주의 경제와 자본주의적 교환의 관례적인 운용은 필수불가결하다. “그것[국가자본주의-역자] 없이는 생존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국가자본주의는 일정한 범위내로 제한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으며,……우리는 아직 그러한 범위내로 국가자본주의를 제한하지 못했습니다.”

레닌은 또한 당의 수중에 권력이 집중된 데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국가자본주의는 국가와 연결되어 있는데, 국가는 노동자들, 노동자들의 선진적 부분, 즉 전위입니다. 한마디로 우리가 국가입니다.”

이 시점에서 레닌은 관료 집단이 당 외부의 국가기구에 집중되어 있는 것으로 보았다. 문제는 “직접적으로 지도ㆍ감독의 임무를 수행하는 최전선의 위치에 배치된 노동계급의 전위가 …그에 합당한 충분한 능력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에 있었다. 이 때문에 경제와 국가기구가 처음에 의도했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지도하기는 커녕 오히려 지도받고 있었던 것이다. 문제의 해결은 "결의안에 있지도 않으며, 부서들을 정리하는 데에 있지도 않으며, 재조직화에 있지도 않습니다. …해결은 오직 적합한 사람을 선발해서 실질적인 통제를 확립하는 데 있습니다."

1922년 4월 11일 레닌이 정치국에 제출한 "부의장(인민위원평의회와 노동ㆍ국방 평의회 부의장)의 직무에 관한 조정령(調整令)"도 이러한 정신에 따랐던 것이었다. 이 제안은 각급 기구가 제대로 기능하고 있는지를 감독할 "부의장"제도의 확립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었다. "부의장들이 특별히 책임져야 할, 그것에 비하면 그밖에 다른 모든 것은 부수적이라 할 만한 그들의 기본 업무는, 포고와 법률 및 조정령들이 실제로 집행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또 소비에트 기관들의 상비(常備) 편제를 감축시키고 그 기관들의 사무 절차를 조정하여 간소화시키도록 감독하며; 그리고 그 기관들내에서의 관료주의와 형식주의에 대항하여 싸우는 것입니다."(『트로츠키 논문집』, 얀 마이어 Jan Meijer 편집 [Hague : Momton, 1971], 제2권, pp. 712~713)

여기에 실린 두 번째 문서는 레닌의 조정령에 대한 트로츠키의 논평이다. 트로츠키는 세 가지 이유를 들어 레닌의 제안에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첫째로, 그는 문제의 본질이 명령이 제대로 수행되고 있는지를 "확인"하거나 그러도록 실질적인 통제를 하는 데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관리들에게 적절한 업무방식과 업무습관을 철저히 훈련시키는 것이 문제였다. 둘째로, 그는 노농감찰부(Rabkrin)는 행정기구를 활성화시키는 임무를 감당하기에 부적합하다고 논박하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로 "그 밖의 다양한 분야에서 실패한" 관리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음모에 의해 파탄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셋째로, 그는 "체계와 계획의 부재로 인해 휘청거리는 경제위기"를 초래하게 하였던 경제적 무질서라는 일반적인 문제를 다시 한 번 강조하였다. 국가계획위원회(고스플란: Gosplan)의 통제하의 중앙집권화된 경제계획 없이는 다양한 경제계획소위원회들은 불가피하게 상충되는 목적을 갖고 사업을 진행시키게 될 것이며, 조정되고 시의적절한 계획 하에서라면 피할 수 있었을 위기들에 직면하여 임기응변적으로 대응하지 않을 수 없게 되리라는 것이다.

이 두 개의 글은, 1922년 봄 당시 관료제 문제에 대한 레닌과 트로츠키의 접근방식상의 차이점을 보여 주고 있다. 그 이후에 쓰인 뒷부분의 글들은 레닌이 트로츠키의 견해를 지지하는 쪽으로 기울게 됨에 따라 견해일치를 보여 주고 있다.

1922년 12월 27~29일 사이에 레닌은 "국가계획위원회에 입법기능을 부여하는 것에 관하여"라는 짧은 편지를 구술하였다. 그는 "이 구상은 트로츠키 동지에 의해 제안되었던 것입니다. 아주 오래전의 일인 것 같습니다. 그 당시 저는 그 제안에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를 좀 더 면밀히 숙고하고 나서, 저는 실제로는 그러한 구상에 견실한 생각이 담겨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라고 썼다.

1923년 1월 15일 정치국에 보낸 서한에서, 트로츠키는 국가계획위원회의 기능을 확대시켜야 한다는 자신의 주장을 다시 천명하였다. "통일적인 계획과 통일된 운영 없이는 어떠한 경제활동도 불가능합니다." 이러한 주장은 2년 이상 트로츠키가 고수해 온 견해의 핵심적인 내용이었다. 경제발전 없이는 관료제를 극복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경제발전은 중앙집권화된 계획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1922년 1월 23일 레닌은 그의 논설 "우리는 어떻게 노농 감찰부를 재조직해야 하는가"를 구술하였다. 그는 이 논설을 『프라우다』에 발표하여 당대회 직전의 예비토의에 부치고자 하였다. 이 논설에서 그는 재조직될 라브크린(노농 감찰부: Rabkrin)과 당 중앙통제위원회를 결합시킬 것을 제안하였다. 논설의 기조는 긍정적인 것이었지만, 논설이 제안하고 있는 개혁조치들은 관료 분파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이었다. 중앙통제위원회의 위원들은 정치국의 회합에 참석해야하며, 중앙통제위원들은 "그들이 … 모든 일에 관해 항상 충분한 정보를 얻고 문제의 올바른 처리를 위해 엄격한 통제를 가하는 것을 방해하려는 시도가 있을 때는 그것이 서기장의 권위이건 아니면 그 밖의 중앙위원회 위원의 권위이건 간에 어떠한 예외도 없이 그러한 권위를"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는 실로 당의 최고 정책결정기구 위에 사나운 감시견을 한 마리 올려놓는 셈이었다. 이에 덧붙여 레닌은, 덩치만 커져 버린 라브크린의 간부진을 300~400명 정도로 감축할 것을 제안하였다. 실제로 이러한 제안은 관료집단의 요새들 중 하나에 대한 전면적인 대청소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처음에 스탈린 파는 이 논설의 발표를 거부하였다. 정치국의 특별회합에서 날카로운 논쟁이 벌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이 논설은 『프라우다』편집부에 보내졌으며, 마침내 1월 25일 발표되었다.

라브크린에 관한 레닌의 두 번째 논설, "적더라도 더 나은 것이 더 낫다"(Better Fewer, But Better)의 논조는 훨씬 더 날카로운 것이었다. 한 달(2월 2일부터 3월 2일까지)이나 걸려 작성된 이 논설에서 레닌은, 라브크린에 대한 트로츠키의 비판을 그대로 되풀이한 다음, 관료제의 문제는 국가기관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님을 처음으로 공공연하게 선언하고 있다. "그런데 관료들은 소비에트의 사무실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당의 사무실내에도 존재한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레닌은 국가관료와 싸우는 데에서의 관권은 바로 당관료와 싸워 이들을 확실한 통제 하에 두는 것이라고 인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가 재조직될 노농감찰부(국가기관)를 당의 중앙통제위원회와 결합시킬 것을 제안했던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목적을 염두에 둔 때문이었다.

제4장의 마지막 글은 트로츠키의 연설 "러시아공산당 제12차대회의 과제"에서 발췌한 것이다. 이 연설은 1923년 4월 5일 우크라이나 공산당 회의석상에서 행해졌으며, 『러시아공산당 제12차대회의 과제』라는 제목의 팸플릿으로 발간되었다. 여기에 실린 연설의 발췌문에서 트로츠키는 "국가기관"문제를 다루고 있다. 제시된 견해는 레닌의 논설 "적더라도 더 나은 것이 더 낫다"에서 제시된 견해와 동일한데, 트로츠키는 지나가는 길에 레닌의 이 논설을 인용한다. 국가기구는 "제정시대의 국가기구와 거의 다를 바 없는 유사한 것입니다.…" 이러한 국가기구는 "볼셰비키가 물려받아야 했던 물질적 조건으로부터 비롯된 역사의 필요의 압력에 의해" 볼셰비키에 의해 창출된 것이었다. 요구되는 것은 바로 "국가기구의 체계적이고도 계획적인 재조직" 인 것이다(강조는 원저자의 것).

연설의 결론 부분에 해당하는 두 번째 발췌문은 국제적 환경이 호전될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국내에서 실제적인 조치들을 취해야 함을 지적하고 있다. 레닌주의적 관점의 핵심은 마지막 문장에 잘 요약되어있다: "우리는 농민과 쁘띠부르주아지와의 조화를 이루며 앞으로 나아갑니다. 우리는 네프맨[신경제정책으로 이득을 보고 있던 소생산자ㆍ소상인 계층들-역자]들을 허용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당내에서 결코 어떠한 네프맨적ㆍ쁘띠부르주아적 경향도 허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우리는 이러한 경향을 황산과 벌겋게 달군 쇳덩어리로써 당 밖으로 완전히 몰아낼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서구로부터[혁명의-역자]신호가 들려온다면ㅡ들려올 것입니다ㅡ, 비록 그때 우리가 각종 계산서나 대차대조표 따위, 그리고 일반적으로는 신경제정책 그 자체에 목까지 푹 잠겨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과감하게 어떠한 동요나 유보도 없이 즉각 이에 호응할 것입니다.…"

스탈린의 지도하에 있던 관료 분파는 정반대의 프로그램을 채택하였다. 신경제정책의 허용과 국가기구의 관료화된 성격을 체계적이고 계획된 재조직화로써 극복해야 할 필요악으로 인식하지 않고 그들은 이러한 현실적 필요를 미덕으로까지 미화시켰으며 그것이 사회주의 건설의 기초라고 선언하였다. 소련의 고립과 후진성을 극복하기 위한 방도로써 서구에서의 혁명을 북돋을 생각을 하지 않고, 그들은 그 중요성을 깎아내리고는 마침내 그것을 자본가 정부와의 동맹을 헛되이 추구하기 위한 외교적 협상 요령 정도로 환원시켜 버렸다.

역사적 조건에 의해 러시아 혁명에 부과된 곤경에 대처하는 데서 제시된 이들 두 가지 상반된 접근방식은, 러시아공산당과 세계 공산주의 운동을 "스탈린주의"와 "트로츠키주의"라는 상반된 진영으로 분열시키는 기초가 되었다.

 

 

제11차 당대회에 보내는 정치보고

모든 경제학 서적들에서 논의되고 있는 국가자본주의(state capitalism)는 국가가 특정 자본주의 기업을 직접적인 통제 하에 두는 자본주의 체제를 지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프롤레타리아 국가입니다. 즉, 우리 국가는 프롤레타리아에 기초하고 있으며 프롤레타리아에게 모든 정치적 특권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또한 프롤레타리아는 매개를 통해 농민의 하층을 자신에게로 끌어들이고 있습니다.(동지 여러분은 우리가 빈농위원회를 통해 이러한 사업을 개시했다는 것을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이러한 사정들로 인해 많은 사람들은 국가자본주의라는 용어로 인해 상당한 혼동을 겪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태를 피하기 위해, 우리는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형태의 국가자본주의가 그 어떤 이론이나 문헌에서도 취급된 바 없다는 극히 기본적인 사실을 기억해 두어야 합니다. 이는 오로지 이 용어와 관련된 모든 통상적인 개념들이 자본주의사회의 부르주아 지배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비록 자본주의의 궤도로부터 벗어나기는 했지만 아직 새로운 궤도로 진입하지는 못하고 있는 그런 사회입니다. 이 사회의 국가는 부르주아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에 의해서 지배됩니다. 우리는 "국가"라고 말할 때 그것이 곧 우리 자신, 즉 노동계급의 전위인 프롤레타리아를 의미한다고 이해하기를 마다합니다. 국가자본주의는 우리가 억제할 수도 있고 그 한계를 일정한 범위내로 한정시킬 수도 있는 그런 자본주의입니다. 이 국가자본주의는 국가와 연결되어 있고 국가는 노동자들, 특히 노동자의 선진적 부분, 즉 노동계급의 전위입니다. 우리 자신이 곧 국가인 것입니다.

국가자본주의는 우리가 반드시 일정한 범위내로 제한해야 할 자본주의입니다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아직 그것을 그러한 범위내로 제한시키지 못했습니다. 바로 이 점이 문제의 전부입니다. 그리고 국가자본주의가 앞으로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있습니다. 우리는 충분한, 아주 충분한 정치권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경제적 가용(可用) 자원도 넉넉히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치권력과 경제적 자원을 직접적으로 감독하고, 그 한계를 결정하며, 분야를 나누고, 지배당하는 게 아니라 지배하도록 최전선에 배치된 노동계급의 전위가 그에 합당한 충분한 능력을 결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필요한 모든 것은 능력인데, 우리는 바로 그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역사상 이전의 어떤 시기에도 지금과 같은 상황, 즉 혁명적 전위인 프롤레타리아트가 충분한 정치권력을 보유하고 그들 주위에 국가자본주의가 존재하는 상황은 결코 없었습니다. 모든 문제는 그것이 우리가 허용할 수 있으며 허용해야만 하는 자본주의, 그러나 일정한 범위 내에서 제한할 수 있으며 제한해야만 하는 자본주의라는 점을 우리가 인식하는 데에 달려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자본주의는 광범위한 농민대중과, 그들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방식으로 상거래를 담당해야 하는 사적 자본에게 필수불가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본주의 경제와 자본주의적 교환의 관례적인 운용을 가능케 하는 그러한 방식으로 매사를 조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인민대중에게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그것 없이는 생존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그 밖의 모든 문제들은 우리에게 절체절명의 문제인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그 모든 것에 우리 자신을 맡길 수 있습니다. 여러분 공산주의자들, 여러분 노동자들, 국가를 통치하는 데 착수한 정치적으로 각성된 프롤레타리아트의 선진부분인 동지 여러분은, 여러분의 손아귀에 장악된 국가권력이 여러분들이 원하는 대로 기능할 수 있도록 국가를 조정ㆍ배치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 우리는 지난 1년간 우리의 손에 국가권력을 움켜쥔 채로 잘 견뎌왔습니다. 그러나 그 국가권력이 지난 1년 동안 신경제정책을 우리의 생각대로 운용했습니까? 결코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국가를 우리가 원하던 대로 신경제정책을 운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를 마다합니다. 실제로는 어떻게 돌아갔습니까? 기관(국가기구-역자)은 자신을 운전하는 사람들의 의지에 따르기를 거부하였습니다. 그것은 운전수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고 다른 어느 누가 원하는 방향으로 달리는 자동차와 같았습니다. 마치 신만이 알고 있는 어떤 신비하고 초법칙적인 손에 의해 운전되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 어떤 손이란 아마도 모리배거나 사적 자본가, 아니면 그 둘 모두의 손일 것입니다. 조종자가 누구이든 간에 그 자동차는 핸들을 쥐고 있는 사람이 생각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기는커녕 흔히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가곤 합니다. 이 점이 국가자본주의와 관련하여 우리가 기억해 두어야만 하는 중요한 점입니다. 이 중요한 분야에서 우리는 맨 처음부터 새로 배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런 사정을 완전히 인식하고 이해해야 비로소 우리는…배울 것이라고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경제력의 가장 주요한 부분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모든 대규모 기간산업, 철도 등이 우리의 손아귀에 있습니다. 임대기업의 숫자는, 비록 곳곳에 널려 있다고는 해도, 전체적으로 보아 대단치 않습니다. 그 비중에 있어서도 모두 합쳐 봐야 여타 부분에 비해 극히 미미한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 국가가 장악하고 있는 경제력은 실로 공산주의로의 이행을 보장하기에 충분합니다. 그렇다면 결여된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분명히, 결여된 것은 바로 공산주의자들 가운데 행정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사람들의 문화입니다. 우리가 책임 있는 지위에 있는 4,700명의 공산당원들을 통해서 모스크바를 통치하고 있다면, 또한 우리 당이 저 거대한 관료기구, 저 커다란 괴물을 붙잡고 있다면, 우리는 누가 누구를 지도하고 있는지 물어야 합니다. 본인은 공산주의자들이 저 괴물을 지도하고 있다는 것이 참말인지 대단히 의심스럽게 생각합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들은 지도하고 있는 게 아니라 지도되고 있는 것입니다. 비유를 들어 말하자면, 우리가 어렸을 때 역사수업 시간에 듣던 다음과 같은 이야기와 유사한 일이 벌어졌다 할 것입니다 : 즉,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정복할 때 정복한 나라는 종주국이 되고 정복당한 나라는 속국이 된다. 이는 누구에게나 단순명료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 나라의 문화 사이에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이 문제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만일 정복국의 문화가 피정복국의 문화보다 우수할 때는, 정복국이 자신의 문화를 피정복국에 강요한다. 그러나 만일 그 반대의 경우에는, 피정복국이 자신의 문화를 정복자에게 강제한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이와 비슷한 일이 러시아소비에트연방사회주의공화국의 수도 한복판에서 벌어진 것은 아닙니까? 4,700명의 공산주의자들(거의 1개 여단 병력에 가까운, 그것도 모두 가장 우수한 자들입니다)이 외래문화의 영향 하에 들어가 버린 것은 아닙니까? 실제로, 정복당한 자들의 문화수준이 높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진실이 아닙니다. 그들의 문화는 천박하고 저질스럽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문화보다 더 높은 수준에 있습니다. 비록 천박하고 저급하지만 그들의 문화는 신뢰할 만한 우리 공산당원들의 문화보다 더 수준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공산주의자 행정관리들이 행정능력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각 부서의 장을 맡고 있는 공산주의자들은ㅡ때때로 교묘한 훼방꾼들이 그들을 방패막이로 이용하기 위해 고의로 그들에게 그러한 직위를 맡기기도 했습니다ㅡ곧잘 속임수에 넘어가곤 합니다. 이러한 사정을 인정하는 것은 매우 불쾌한 일이거나 적어도 유쾌하지 못한 일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가 이런 실정을 솔직히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현재로서는 이것이야말로 가장 두드러진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문제야말로 지난 1년간의 경험이 제공해 준 정치적 교훈이며, 또한 1922년에는 바로 이 문제를 둘러싸고 투쟁이 전개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러시아소비에트연방사회주의공화국과 러시아공산당의 신뢰할 만한 공산주의자들이, 스스로가 행정능력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과 자신들이 지도하고 있다는 상상을 하고 있을 뿐 실제로는 지도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인가? 만일 그들이 이 점을 깨닫게 된다면, 그들은 물론 배우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배우기 위해서는 매우 열심히 학습해야만 합니다. 우리의 공산주의자들은 지금 그렇게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시서나 포고문 등을 남발하고 있지만, 그들이 원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결과가 초래되고 있는 형편입니다.

우리가 신경제정책을 선언하고부터 거의 유행이 되다시피 한 경쟁과 라이벌 의식은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모든 정부기관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화해할 수 없이 적대적인 두 계급들 사이의 또 다른 투쟁형태입니다. 즉,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 사이의 또 다른 형태의 투쟁인 것입니다. 그것은 아직 전면에 제기된 바 없는 투쟁이며, 모스크바의 중앙정부 부서 내에서조차 아직 해결되지 못한 투쟁입니다. 부르주아 관리들이 우리의 가장 뛰어난 공산주의자들, 권위와 온갖 기회를 부여받고는 있으나 그 권리와 권한을 조금도 활용하지 못하는 공산주의자들보다 업무를 더 잘 아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

… 신경제정책과 관련하여 우리의 정부 부서들을 재조직하여 새로운 형태를 갖춰야 한다고 안달하며 제안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주장은 모두 유해하고 어리석은 소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현 상황에서는 관건은 바로 인물, 즉 적합한 인재를 발굴해 내는 일입니다. 좀스러운 개량주의자들과 사회사업가들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데 익숙한 혁명가로서는 이 점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냉정히 평가해 보건대, 현 상황으로부터 도출되어야 할 정치적 결론은 우리가 너무 앞서 나간 나머지 모든 직위를 다 차지할 수도 없거니와 또 그럴 필요도 없다는 점입니다.

국제적으로 볼 때, 최근 몇 년간의 우리의 지위는 크게 강화되었습니다. 소비에트 유형의 국가 창설이 우리의 성과입니다. 그것은 인류의 진보를 향한 진일보입니다. 코민테른이 매일같이 각국으로부터 접수하고 있는 정보가 이 사실을 확증시켜 주고 있습니다. 아무도 그 사실에 대해 추호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인 사업의 견지에서 볼 때, 공산주의자들은 농민대중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주지 못할 경우 조만간 그들의 지지를 잃게 될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법률을 제정하고 보다 나은 포고령을 만드는 등등의 일은 이제 더 이상 우리의 주요 관심사가 되지 못합니다. 한때는 포고령을 제정하는 것 자체가 선전의 한 형태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볼셰비키가 자기들의 포고령이 이행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고 말하며 우리를 비웃곤 했습니다. 모든 백위군의 신문은 온통 그와 같은 조롱으로 지면을 가득 메우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그렇게 포고령을 통과시키는 것은 전적으로 올바른 처사였습니다. 우리 볼셰비키는 막 권력을 장악했을 뿐이었으며, 따라서 노동자와 농민에게 "여기 포고령이 있소. 이것이 우리가 어떻게 국가를 운용해 나가려고 하는가요. 이대로 노력해 보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애초부터 우리는 평범한 노동자와 농민에게 우리의 정책을 포고령의 형태로 이해시켰던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인민대중으로부터 광범한 신뢰를 얻어냈으며 또한 지금도 그러한 신뢰를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은 시기는 혁명의 초기에는 불가피하였습니다. 그러한 시기가 없었다면, 우리는 혁명의 파도 위에 올라설 수 없었을 것이며 그 밑에 깔려 허우적거리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노력이 없었다면, 우리는 새로운 길을 따라 삶을 설계하고자 했던 모든 노동자와 농민의 신뢰를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시기는 이미 지나갔는데도, 우리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아직도 이러저러한 정부 부서가 설치되어야 한다거나 재조직되어야 한다고 훈계하려든다면 이제는 농민과 노동자들이 우리를 비웃게 될 것입니다. 평범한 노동자나 농민들은 이제는 그러한 훈계에 어떠한 관심도 보이지 않을 것이며, 그러한 일들이 오늘날 당면한 핵심적 과제가 아니라는 점에서 그들의 그와 같은 태도는 당연한 일이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 공산주의자들이 인민대중에게로 가지고 가야 할 것은 그러한 주장이 아닙니다. 비록 정부기관에 종사하고 있는 우리들이 항상 산더미 같은 잡무에 짓눌려 있다지만, 그런 방침은 우리가 움켜쥐어야 할 고리가 아니며 핵심 사인도 못 됩니다. 우리가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될 핵심적인 문제는 바로, 우리가 적합한 사람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지 못하였다는 점, 혁명 기간 동안에는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던 신뢰할 만한 공산주의자들에게 그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상공업 분야의 임무들이 주어졌다는 점, 그리고 그들 몰래 기막히게 숨어서 행동하는 협잡꾼들과 불한당들 때문에 우리가 진상을 파악하는 데 그들이 방해자가 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곤란을 겪고 있는 것은, 일의 진행과정에 대한 이를테면 실제적인 통제를 전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매우 단조롭고도 사소한 일입니다. 그러나 역사상 최대의 정치적 변동 후에, 우리가 일정 기간 동안은 자본주의 체제에 둘러싸인 가운데 살아 나가야 한다는 점을 유념한다면, 현재의 핵심적 문제는 좁은 의미에서의 정치(우리가 신문지상에서 접하게 되는 일들은 단지 정치적 폭죽에 불과하며, 그 안에는 사회주의적인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습니다)가 아닙니다. 결의안이나 이러저러한 부서의 설치나 재조직도 아닙니다. 그런 일들이 필요한 이상 그 일들을 하겠지만, 그 짐을 인민대중에게 지워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임무에 적합한 사람들을 선택해야 하며, 실제적인 통제를 확립해야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인민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길일 것입니다……

[레닌,『전집』, 제33권, pp. 278~280, 288~289, 303~304]

 

부의장들의 활동에 관한 레닌의 제안에 대한 논평

 

1)제기된 문제들은 너무 일반적인 것들이어서 이는 결국 아무런 문제도 제기하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부의장들은 모든 분야와 모든 측면에서 매사가 잘 돌아가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 바로 이것이 결의안 초안의 요지입니다. 여러 가지 지적들은,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어떻게 하면 각 분야에서 모든 일들이ㅡ심지어는 『경제생활』(Economicheskaya Zhizn) 지의 올바른 편집 문제에 관해서까지ㅡ잘 돌아가도록 만들 것인지에 대한 지침들을 주고 있습니다.

2)이러한 일반적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 고안된 기구는 라브크린(Rabkrin : 노농감찰부-역자)입니다. 그러나 라브크린은 그 본성상 그런 일에 적합하지도 않을뿐더러 적합하게 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감찰부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이 주로 그 밖의 여러 분야에서 실패한 관리들이라는 사실을 외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사실로 말미암아, 감찰부의 각급기관 내에는 각종 비리가 급격히 창궐하는 결과가 초래되고 있는데, 이는 오래전부터 전국적으로 잘 알려져 있는 사실입니다. 이런 기구가(그 수뇌부가 아니라 전체로서의 조직이) 강화되거나 건강하게 쇄신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할 만한 근거는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훌륭한 노동자라면 앞으로도 계속해서 필수불가결한 사업에 배치될 것이지 감찰부원과 같은 일자리를 할당받게 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감찰부를 지렛대로 삼아 소비에트 국가기구를 갱신하겠다는 계획은 명백히 환상입니다.

3)마찬가지로, 저는 감찰부를 통해 당원이 아닌 노동자와 농민들 가운데서 행정관리와 경제관리들을 육성할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목적을 위해서는 학교체계와 강좌체계, 특히 경제활동 및 국가사업의 구체적인 분야들과 연관된 강좌들의 체계가 필요합니다.

4)저는 부의장들 간의 관계가 곤란의 원인이 되지 않을까 심히 우려됩니다. 그렇게 되면 속기용 구술 녹음기도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반일 부의장이 두 명이라면, 그들 간의 관계에서는 완벽한 조정이 이루어져야만 할 것입니다.

5)주된 문제는, 전에도 그랬듯이 제가 매일매일의 경제활동을 실제로 운영할 수 있는 그런 기관을 상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중앙통계국이 학술적인 기구라는 것이 잘못되었다면, 고스플란(국가계획위원회-역자)이 학술적인 기구라는 것은 백번 더 잘못된, 솔직히 말해서 매우 불행스러운 일입니다. 지난 해 초만 해도 실제적인 통제력을 행사하는 통일적인 경제기관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현재와 같은, 고스플란의 모습대로 발전해 가고 있긴 하지만, 그것은 단지 외관에 있어서만 그럴 뿐입니다. 근본적으로 아직까지 책임이 분산되어 있을뿐더러, 실제로 누가 연료정책, 교통정책, 원료정책, 통화정책을 통제하는지 전혀 불명확하고 모호합니다. 부서 간에 분쟁이 발생할 때, 이러한 문제들은 노동 및 방위 평의회(STO : Council od Labor and Defense)나 정치국에 제출되어 발등에 불이 떨어져서야 허겁지겁 되는대로 결정이 내려지고 있습니다. 적어도 다음해의 경제일정표를 벽에 걸어놓고 사업계획들을 작성하며 그에 따라 통제조정할 수 있는 기구가 마련되어야 합니다. 고스플란이 바로 그와 같은 기구여야 합니다. 제 생각에는 부의장 중 1인에게, 고스플란의 의장직은 결의안에서 논의되고 있는 그 어떤 직무보다도 훨씬 더 현실적인 직무일 것입니다.

1922년 4월 19일

L. 트로츠키

 

부의장들의 직무에 관한 어제 날짜의 본인의 논평에 덧붙여서:

1)훌륭한 기구가 만들어지는 것은, 오직 일관되고도 지속적이며 일상적인 노력과 압력, 지시와 교정 등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이러한 일은 이따금씩 들여다보고 필요한 모든 일을 지시하는 외부의 특별부서를 통해서 수행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생각은 공상에 불과합니다. 그러한 부서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존재한 바 없으며, 사물의 논리를 고려해 봐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신경제정책의 경우, 소비에트 법률과 회계실무에 관한 지식을 필요로 하는 제한적이지만 명확한 임무를 제시할 수 있는 국가통제를 확립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라브크린(Rabkrin)이 그러한 임무에 집중하고 그것에 전문화되면 될수록, 우리의 전체 소비에트 기구를 정비하고 또한 주로 예산편정 및 따라서 재정구조를 체계화시키는 데 대한 라브크린의 도움은 그만큼 더 커질 것입니다.

2)결의안 초안이 주요한 실천적 임무라고 주장하고 있는 "집행의 확인"은 실제로는 주요임무라고 보이지 않습니다 : 적어도 우리가 1918년, 1919년, 1920년에 사용했던 의미에서는 현재의 주요임무라 할 수 없습니다. 당시에 지시사항들은 (부주의, 무능력, 건망증, 무질서 등으로 인해)수행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가장 "박애적인" 부서에서만 그런 사태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아무런 결과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시사항이 수행되는 과정에서, 한편으로는 자원의 부족 때문에, 또 다른 한편에서는 좋게 보아 무지와 무능력 때문에, 그것들은 사실상 한낱 휴지쪼가리가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심사숙고된 것일지라도, 밖으로부터 상명하달된 지령은 다만 매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줄 따름입니다. 타이피스트에게는 더 잘 치도록(오자ㆍ탈자 없이), 전화교환원에게는 번호를 헷갈리게 연결하지 않도록, 장부정리하는 사람에게는 수입과 지출을 빠짐없이 꼼꼼하고 정확하게 기재하도록 하는 것 등을 훈련시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관청과 각 부서와 생산현장 및 교역기구들의 관리들을 위한 야간복습강좌를 개설해야 합니다. 그밖에 달리 어떤 게 있겠습니까? 이들을 대신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의 주의를 그들의 업무로부터 다른 데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자질을 향상시켜야 합니다. 이는 매우 어려운 과정이긴 하나 다른 대안은 없습니다.

3)무릇 일을 하는 데는 어떤 체계가 있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체계부재의 선례는ㅡ체계의 부재는 가장 중요하고도 가장 위험한 것입니다ㅡ바로 위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다. 모든 경제문제들은 아무렇게나 되는 대로, 그것도 항상 뒤늦게 결정되곤 합니다. 중단 없이 앞을 보고 사업을 진행시키며 그 사업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는 경제분야의 통제기관이 없습니다. 모두가 이 점을 감지하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위기는 상당한 정도, 예측할 수도 있었던 원인들에서 기인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는 환상적이기도 하고 임시방편적인, 그러나 절실한 필요에 부응하는 각종 제안들을 내놓고 있는 것입니다. 프레오브라젠스키는 중앙위원회 경제국(Econburo)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크라신ㅡ모든 면에서 독특한 동지ㅡ도 이미 동일한 내용, 즉 중앙위원회 최고 경제위원회를 제안하였습니다. 그리고 중앙위원회 경제국(CC Econburo)을 설치하자는 제안조차 현 상황, 즉 중앙위원회가 경제위원회(Economics Commission), 예산위원회(Budget Commission), 통화위원회(Gold Commission) 등등을 설치하고 있는 현 상황에 비하면 진일보 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모든 사정은 전망을 가지고 통제업무를 수행할 경제기관이 부재한 결과입니다. 처음의 발상대로 고스플란은 그러한 기관이었어야 했습니다. 그 구성으로 보나, 사업방식으로 보나, 그리고 이념적인 방향에 있어서나, 현재의 고스플란은 그렇게 되어 본 적도 없고, 그렇게 될 수도 없으며, 그렇게 되지도 않을 것입니다.

고스플란을 경제질서를 정비하기 위한 도구로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핵심적인 문제와 관련하여 임기응변과 예측부재로 말미암아 초래된 경제의 지속되는 해체상태에 종지부를 찍어야만 합니다. 체계와 계획도 없이 경제가 모든 방면에서 붕괴되는 한, 선전주의적이고 응징주의적인 조치들로 성취할 수 있는 일은 경제분야에서 아무 것도 없습니다.

L. 트로츠키

[트로츠키 논문집, 얀 마이어 편(헤이그, Mouton, 1971), 제2권, pp.730~34. 러시아어판으로부터 편집자 편역]

 

국가계획위원회에 입법기능을 부여하는 것에 관하여

이 구상은 트로츠키 동지에 의해 제안되었던 것입니다. 아주 오래전의 일인 것 같습니다. 그 당시 저는 그 제안에 반대했는데, 그렇게 되면 우리의 입법기구들의 체계에 상호조정이 기본적으로 결핍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를 좀 더 면밀히 숙고하고 나서, 저는 실제로는 그러한 구상에 견실한 생각이 담겨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즉, 국가계획위원회가 비록 우리의 입법기구들과 어느 정도 분리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경험 있는 사람들과 전문가 및 과학기술계의 대표자들로 이루어진 기구라는 점에서, 실제로는 사태에 대해 보다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국가계획위원회가 국가에게 비판적으로 분석된 자료를 제공하고 그에 따라 국가기관들은 국가사업에 대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원칙에서 출발해서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현재의 상황, 즉 사정이 전에 없이 복잡해져 버렸으며 문제를 해결하는 데 국가계획위원회 위원들의 전문가적 견해가 거듭거듭 요구되고 있는 상황에서는, 국가계획위원회의 권한을 확대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 조치가 국가계획위원회의 결정사항들이 소비에트 기구의 일상적인 절차에 의해서는 거부될 수 없고 어떤 특별한 절차가 재고될 필요가 있는 그러한 것이라고 상정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특별한 지침에 따라 재고할 준비가 되어 있는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 회가 중에 문제를 제출토록하고, 그러한 특별 지침에는 국가계획위원회의 결정이 뒤집어질 수 있는지를 검토하기 위해 특별한 규칙 하에 비망록을 작성하는 것이 포함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국가계획위원회의 결정 등의 재심에는 특정한 시한이 설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점에서 저는 우리가 트로츠키 동지의 요구에 응할 수 있을 뿐더러 응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말은 구체적으로 우리의 정치지도자들 중 누군가가 또는 최고경제평의회(the Supreme Economic Council) 의장 등이 국가계획위원회의 의장이 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저는 현재 개인적 문제들이 원칙의 문제와 너무 밀접하게 뒤엉켜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국가계획위원회 의장 크르지쟈노프스키 동지와 그의 보좌관인 피야타코프 동지에 대해 행해지고 있는 비판들은 두 가지 방향에 초점이 맞추어지고 있는데, 하나는 그들이 지나치게 관대하고 독자적인 판단력이 없으며 줏대 없다는 비난이며, 다른 하나는 그들이 지나치게 거칠고 훈련조교 같은 방식으로 사람들을 다루며 확고한 과학적 배경지식을 결여하고 있다는 등의 비난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이러한 비난들은 문제의 두 측면을 극단적으로 과장시켜 표현하고 있는 것 같은데, 사실 우리는 그와 같은 두 가지 유형의 성격을 국가계획위원회 내에서 기술적으로 조화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한 가지 유형의 성격은 피야타코프 동지가 예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고 다른 한 가지 유형의 성격은 크르지쟈노프스키 동지가 예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국가계획위원회가 과학적인 교육, 즉 기술과학이나 농업경제학에 관한 교육을 받음과 동시에 기술과학이나 농업경제학 분야에서의 수십 년간의 실천적 활동 경험을 쌀은 사람에 의해 지도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행정가적 자질은 다소 적더라도 풍부한 경험과 다른 사람들의 협조를 얻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레닌

1922. 12. 27.

M. 볼로지체바 기록

 

국가계획위원회의 결정이 갖는 입법적 성격에 관한 서한의 계속(1922년 12월 28일)

저는 사태의 진전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우리 동지들 가운데 몇 사람이 일의 행정적 측면을 과장하는 경향이 있음에 주목해 왔습니다. 물론 때와 장소에 따라 그렇게 하는 것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과학적인 측면이나 많은 사실을 총괄하는 것 또는 사람을 충원하는 능력 등과 혼동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모든 국가기구, 특히 국가계획위원회에서는 이들 두 가지 유형의 자질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 필수적으로 요청됩니다. 크르지쟈노프스키가 제게 찾아와 위원회 일을 위해 피야타코프 동지의 보좌를 받게 되었으며 함께 일하기로 합의했다고 말했을 때, 저는 이에 동의하면서 한편으로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게 함으로써 두 유형의 정치가들 사이에 조화가 이루어지길 희망해 보았습니다. 그러한 희망이 정당한 것이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지금은 기다리며 좀 더 경험을 쌓는 것의 강점을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저는 국가기구들이 올바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서로 다른 기질과 유형(인물에 있어서나 자질에 있어서나)들 사이의 그와 같은 결합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여기서 그 어떠한 측면을 과장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행정"을 과장하는 것도 유해하다고 생각합니다. 국가기관의 장(長)은 개인적으로 매우 호감이 가는 인물이어야 할뿐더러 사람들의 업무를 점검할 수 있을 만큼 확고한 과학기술상의 지식도 충분히 갖추고 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적어도 그것만큼은 기본적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업이 올바르게 수행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행정적으로 유능하며 사업을 운영하는 데에서 조력과 조력자를 얻을 수 있어야만 한다는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한 사람이 이들 두 가지 자질을 결합시킨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며 또 그럴 필요도 별로 없습니다.

레닌

L. 포티에바 기록

1922. 12. 28.

 

국가계획위원회에 관한 주석의 계속(1922년 12월 29일)

국가계획위원회는 분명히 모든 점에서 전문가들의 위원회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그런 기구는 풍부한 경험과 함께 모든 과학 기술 분야에 걸쳐 두루 과학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에 의해서만 지도될 수 있습니다. 행정적인 요인은 근본적으로 부차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국가계획위원회에 일정한 독립성과 자율성을 부여하는 것은 이 과학적인 기구의 신망을 위해서는 필수불가결하며, 그것은 이 기구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양심과 우리의 경제 및 사회 발전계획을 현실로 만들려는 그들의 성실한 열망에 달려있습니다.

마지막에 언급한 이와 같은 자질은 현재는 단지 예외적으로만 나타날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자연스럽게 이 위원회를 구성하고 있는 압도적인 다수의 과학자들은 불가피하게도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와 부르주아적 편견에 물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관점에 입각해서 그들을 감독하는 일은 위원회의 상임간부회의를 구성하고 있는 몇몇 사람들의 업무이어야만 합니다. 이들은 부르주아 과학자들이 업무의 전(全)과정에서 우리의 대의에 얼마나 헌신적인지를 매일매일 점검하고 그들이 부르주아적 편견을 버리고 점차 사회주의적 관점을 받아들이도록 배려하는 공산주의자들이어야만 합니다. 과학적인 점검과 순수한 행정이라는 쌍둥이 노선에 입각하여 이러한 사업을 진행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공화국의 국가계획위원회를 운영하는 사람들의 이상이어야만 합니다.

레닌

M. 볼로지체바 기록

1922년 12월 29일

 

국가계획위원회의 사업을 따로따로 분리된 업무들로 쪼개는 것이 합리적인가? 아니면, 그와 반대로, 위원회의 상임간부회의에 의해 체계적으로 점검받으며 주어진 범위 내에서 문제 전체를 해결할 수 있는 항구적인 전문가들의 집단을 구축하도록 노력해야 하는가? 저는 후자가 훨씬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그때그때의 긴급한 과제들의 숫자를 줄이도록 노력해야만 할 것입니다.

레닌

1922. 12. 29.

M. 볼로지체바 기록

[레닌, 『전집』제36권, pp. 598~602.]

 

정치국에 보내는 1923년 1월 15일자 서한(발췌)

트로츠키

스탈린 동지는, 저를 부의장에 지명하는 제안을 제출하면서(그런데 이 제안은 결코 정치국이나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 제출된 바 없으며 거기에서 토의된 바도 없다), 베쎙하(Vesenkha : the Supreme Council of the National Economy ; 최고국가경제위원회)를 "저의 특별한 지도하에 둘 것"을 제의하였습니다. 문제를 이런 방식으로 제기하는 것은 …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베쎙하에 대한 특별한 관리는 베쎙하의 의장에게 속해야만 합니다. 특별한 "행정가"로서의 역할은 단지 책임소재를 분산시킬 뿐이며, 분명함과 확실성이 소중하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이 분야에서 불확실성과 혼동만을 야기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경제부서의 사업에 대한 올바르고도 실제적인 조정을 필요로 하고 있으며, 각 부서에 대한 결코 이원화되지 아니한 관리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

통일적인 계획과 통합된 관리 없이는 어떠한 경제사업도 불가능합니다. 이러한 계획은 학술적이어서는 안 되며 실천적이어야 합니다. 계획을 그 계획의 집행에 대한 감독과 분리시킨다는 것은 불가능 합니다. 우리의 계획기관은 고스플란이며, 그 밖의 다른 기구들(STO[노동 및 방위 평의회], 소브나르콤[Sobnarkom : 인민위원평의회], 핀코미테트[Finkomitet : 재정위원회], 보좌관단, 중앙위원회)은 어쩔수없이 고스플란에 의지하거나 아니면 즉흥적으로 무수한 위원회들을 설치하거나 둘 중 하나일 수밖에 없습니다. 현 상황으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고스플란을 통제하는 것, 즉 신뢰할 만한 관리들을 정규 일상활동을 위한 상임간부진으로 배치하고 적절한 비율에 따라 그들과 전문가들을 결합시키는 것입니다. 상급기관들이 고스플란으로부터 질 좋고 잘 정리되어 있으며 대조확인되어 있는, 그리고 두말할 필요도 없이 무엇보다도 소비에트적, 공산주의적 관점과 배치되지 않는 자료들을 제공받는 것이 필요합니다.

고스플란이 그와 같이 적절하게 기능하게 될 때는 원칙과 관련된 큰 문제들, 입법적 결정이나 원칙상의 방향수정을 필요로 하는 문제들만이 상급기관에 회부되게 될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고스플란은 총참모부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고 STO는 군사혁명평의회(Military revolutionary Council)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트로츠키 논문집』, 제2권, pp.820~822. 편집자의 번역]

 

노농감찰부를 어떻게 재조직할 것인가

제12차 당대회에 보내는 권고

노농감찰부(라브크린, 즉 감찰 인민위원-역자)는 의심할 바 없이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커다란 난제 중의 하나이며, 이 난제는 아직도 해결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노농감찰부의 유용성과 필요성을 부정함으로써 이 어려움을 해결하고자 하는 동지들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의 국가기구가 야기한 이 문제와 그 국가기구를 개선시켜야 한다는 과제가 매우 어렵고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지금에 와서는 매우 긴급한 것이 되고 있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외무인민위원회를 제외하고는 우리의 국가기구는 상당한 정도로 과거의 잔재인 셈이며, 심대한 변화를 거의 겪지 않았습니다. 단지 표면적으로만 약간 손질되었을 뿐, 다른 모든 측면에서 우리의 국가기구는 구시대의 국가기관의 가장 전형적인 유물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진정으로 쇄신시킬 방도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과거 내전시기의 경험을 되돌이켜 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내전이라는 더욱 위급한 시기에 우리는 어떻게 행동했었습니까? 우리는 우리 당의 가장 훌륭한 역량을 적군(赤軍)에 집중시켰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노동자들 중 가장 우수한 부분을 동원하였으며 우리 독재권력의 가장 심원한 근원에 있는 새로운 세력을 찾아내려고 노력했습니다.

저는 우리가 노농감찰부를 재조직하기 위한 수단을 찾기 위해서도 동일한 원천에게로 가야만 한다고 확신합니다. 저는 우리 당의 제12차 당대회가, 중앙통제위원회를 다소간 확대하는 것에 기초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재조직계획을 채택하도록 권고합니다.

우리당의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는 이미 일종의 당 최고회의로 발전하는 경향을 드러내 보이고 있습니다.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는 평균해서 고작해야 두 달에 한 번 열리고 있는 한편으로 일상적인 사업은 우리가 알고 있는 바대로 중앙위원회를 대표해서 정치국ㆍ조직국ㆍ서기국 등에 의해 수행되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가 이러한 방향으로 걸어 온 길을 계속 따라가,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중앙통제위원회와 합동으로 두 달에 한 번씩 개최하는 당 최고회의로 명확히 전환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동시에 중앙통제위원회는 재조직될 노농감찰부의 주요기구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융합되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대회가 75~100명에 이르는 새로운 중앙통제위원회 위원들을 선출할 것을 제안합니다. 그들은 반드시 노동자와 농민이어야 하며 일반 중앙위원회 위원들과 마찬가지로 당의 심사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중앙위원회 위원들과 동등한 권리를 누릴 수 있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반면, 노농 감찰부의 참모진은 양심적이고 우리의 국가기구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인지 여부의 특별심사를 거친 300~400명 정도로 그 규모가 축소되어야 합니다. 또한 그들은 특히 과학적인 노농조직 원리 일반, 행정업무, 사무 등등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에 대해 별도의 특별심사를 거쳐야만 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그와 같이 노농감찰부를 중앙통제위원회와 융합시키는 것이 양 기구 모두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노농감찰부는 한편으로 결코 외무인민위원회보다 낮은 지위로 떨어지지 않을 만큼의 높은 권위를 획득하게 될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중앙통제위원회와 더불어 우리 중앙위원회는 명백히 당의 최고 회의가 될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그렇게 되는 길을 이미 택한 셈입니다.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중앙위원회는 두 가지 측면에서 자신의 임무들을 철저하게 수행할 수 있게 되어야 할 것입니다 : 첫째로는 엄격하고도 적절하며 체계적으로 조직과 사업을 벌여야 하는 중앙위원회 자신의 임무라는 측면에서, 그리고 둘째로는 우리 노동자 농민의 가장 선진적인 부분을 매개로 하여 광범위한 대중과 접촉을 유지한다는 측면에서 요구되는 역할을 완수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저의 이러한 제안에 대해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나 우리의 국가기구를 구태의연하게 만들고 있는 세력들, 즉 우리의 현재 국가가구에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꼴사나운 전(前)혁명적인 형태가 보전되도록 압력을 가하는 자들로부터 반대가 제기될 것으로 예상합니다.(그런데 우리는 지금 급진적인 사회변혁을 야기시키는 데 필요한 시간을 확보할, 역사상 흔치 않은 기회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5년이라는 기간 동안에는 무엇이 이루어질 수 있으며 그 이상의 시간을 요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확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제안하고 있는 변화란 혼란밖에는 아무런 결과도 가져오지 못할 것이라는 반론이 예상됩니다. 중앙통제위원회의 위원들이 어디에서, 왜, 누구에게 조회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 가는 곳마다 조직의 해체를 야기하고 직원들의 일상적인 업무를 방해하면서 모든 기구들 주변을 어슬렁거리게 될 것이라는 등등의 입장입니다.

저는 이러한 반론들은 그 악랄한 저의가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에 답변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중앙통제위원회의 상임간부회의와 노농감찰부의 인민위원 및 위원단은(적절한 경우에는, 우리 중앙위원회 서기국 역시) 인민위원회가 올바르게 조직되도록, 또한 인민위원회가 중앙통제위원회와의 연계 하에 순조롭게 기능하도록 수년간에 걸친 지속적인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노농감찰부의 인민위원이ㅡ전체 위원단도 물론ㅡ존속되어, 그의 "휘하에 있게 될" 중앙통제위원회의 모든 위원들의 사업을 포함하여 전체 노농감찰부의 사업을 인도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합니다. 제 계획에 따르면, 300~400명 규모로 유지하게 되어 있는 노농 감찰부의 직원들은 한편으로는 노농감찰부의 다른 위원들과 중앙통제위원회의 보조위원들을 위해 순전히 비서적인 임무를 수행해야 할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고도로 숙달되고 특별한 심사를 거치며 특별히 신뢰할 만하고 높은 보수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노농감찰부 관리들의 참으로 불유쾌한(최소한만을 말해도) 현재의 위치로부터 그들이 벗어날 수 있도록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제가 지적했던 수(數)로 간부의 수를 감축하는 것이 노농감찰부 직원의 능률과 그 기관 사업 전체의 질을 크게 높임으로써 인민위원들과 위원단의 위원들로 하여금 모든 노력을 사업을 조직하고 체계적이고도 지속적으로 그 능률을 제고시키는 데 기울일 수 있게 해주리라고 확신합니다. 이 일은 우리 노동자ㆍ농민의 정부 및 우리의 소비에트 체제를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필수불가결한 것입니다.

다른 한편, 저는 또한 노농감찰부의 인민위원은 노동의 조직화를 도모하는 상급기관들(중앙노동연구소, 노동의 과학적 조직화를 위한 연구소)을 부분적으로는 통합하고 부분적으로는 조정하는 사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우리 공화국에는 그러한 기구들이 열두 개나 됩니다. 지나친 획일화나 그에 따른 통합에의 열망은 해로울 것입니다. 오히려, 여기에서 요구되는 바는 이 모든 기관들을 통합시키는 것과 각각의 기관에 일정한 자유를 허용하면서도 적절한 한계를 설정하는 것 사이에서 합리적이고도 유용한 중용을 취하는 것입니다.

우리 중앙위원회도 이와 같은 재조직화를 통해 노농감찰부 못지않게 이득을 얻게 되리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중앙위원회는 대중과의 접촉이 한층 확대됨으로써, 또한 중앙위원회의 정규성과 효율성이 증대될 것임으로 해서, 이익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정치국의 회합을 준비하기 위한 더욱 엄격하고도 책임감 있는 절차를 마련하는 일이 가능해질 것입니다(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렇게 마련되는 절차에 따라 소집된 정치국에는 한시적(限時的)으로 또는 어떤 조직계획에 따라 참여가 결정된 일정 수의 중앙통제위원들이 참가해야 할 것입니다.

중앙통제위원회 위원들에게 사업을 배분할 때, 노농감찰부의 인민위원은 중앙통제위원회 상임간부회와 연계하여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의무를 부여해야 할 것입니다 : 정치국이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다루는 문제들에 관한 문서들을 빠짐없이 검토하기 위하여 정치국 회합에 참석해야 하거나, 아니면 이론적 연구, 즉 과학적 노동조직방법을 연구하는 데 업무시간을 다 할애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고위 국가기관에서부터 하급 지방 행정기관 등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모든 국가기구를 감독하고 개선하는 작업에 실질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임무를 부과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개혁을 결과로서, 중앙위원회 위원들 및 중앙통제위원회 위원들이 훨씬 더 많은 정보를 얻게 될 뿐만 아니라 정치국 회합을 보다 잘 준비할 수 있게 된다는 사실로부터 비롯되는 정치적 이점 외에도(정치국의 회합에서 토의되어야 할 사안과 관련된 모든 문서는 늦어도 그 회합이 열리기 전날까지는 모든 중앙위원회 및 중앙통제위원회 위원들 앞으로 보내져야 할 것입니다. 물론 절대적으로 긴급한 경우는 예외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중앙위원회 및 중앙통제위원회 위원들에게 정보를 제공할 특별한 방도와 이 문제들을 처리하기 위한 특별한 방도가 강구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우리 중앙위원회가 순전히 개인적이거나 우연적인 요인들에 의해 영향 받게 될 위험성이 감소하고 따라서 분열의 위험도 감소하게 되리라는 이점도 있으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 중앙위원회는 엄격하게 중앙집권화되고 높은 권위를 인정받는 집단으로 성장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 집단이 일을 해 나가고 있는 조건들은 그 권위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제가 관고하고 있는 개혁은 이 결점을 제거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일정한 수의 범위 내에서 정치국의 모든 회합에 참석해야 하게 될 중앙통제위원회 위원들은, 그들이 문제를 제기하고 문서검증을 하며 일반적으로는 모든 일에 관해 항상 충분한 정보를 얻고 문제의 올바른 처리를 위해 엄격한 통제를 가하는 것을 방해하는 시도가 있을 때는, 그것이 서기장의 권위이건 그 밖의 중앙위원회 위원의 권위이건 간에 어떠한 예외도 없이, 그러한 권위를 용인하지 않을 만큼 잘 짜이고 탄탄한 그룹을 형성해야만 할 것입니다.

물론 우리 소비에트 공화국의 사회질서는 노동자와 농민이라는 두 계급의 협력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질서에서 "네프맨(신경제정책의 수혜자)", 즉 부르주아지는 일정 조건하에 참여가 허용되고 있습니다. 만일 이 계급들 간에 심각한 계급적 불화가 발생한다면, 분열은 불가피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사회체제에서는 그와 같은 분열의 근거는 불가피한 것이 아닙니다. 분열을 야기할 수도 있는 그러한 상황을 주의 깊게 감시하며 그런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중앙위원회와 중앙통제위원회는 물론 우리 당 전체의 주요한 과업입니다. 왜냐하면, 결국 우리 공화국의 운명은 농민대중이 계속 노동자 계급을 지지하여 그들의 동맹자에게 충실할 것인가 아니면 그들이 "네프맨", 즉 새로운 부르주아지가 농민들과 노동계급 사이를 이간시켜 그들을 노동계급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을 허용하게 될 것인가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선택에 대해 더욱 명확히 인식하면 할수록, 또한 모든 노동자와 농민들이 이를 더욱 분명히 인식하면 할수록, 우리가 소비에트 공화국에 치명타가 될 수 있는 분열을 피할 가능성은 더욱 커질 것입니다.

1923년 1월 23일

[레닌, 『전집』, 제33권, pp. 481~486]

 

적더라도 더 나은 것이 더 낫다

우리 국가기구를 개선하는 문제에서 노농감찰부는 양을 늘리는 것을 추구하거나 서두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 국가기구의 효율성을 제고시키는 데에 거의 아무런 생각이나 주의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이제는 국가기구의 철저한 조직화를 확보하는 일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고 노농감찰부에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는 노동자들, 즉 서구에서 가장 우수하다는 노동자들보다 결코 뒤지지 않는 노동자들을 간부로 집중 투입하기에 매우 적절한 때가 되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조건은 사회주의 공화국에게는 결코 대단한 것이 아닌 너무나 분수에 맞는 것이다; 그러나 혁명 이후 지난 첫 5년간의 경험은 꽤나 우리의 머릿속을 의혹과 회의로 가득 채워 버렸다. 이와 같은 상태는, 예컨대 우리가 사람들이 "프롤레타리아" 문화에 대해 지나치게 장황하고 경박스럽게 설명해 대고 있는 모습을 볼 때 분명히 드러납니다. 이제 시작하는 입장에서 우리는 실제로 부르주아 문화로 만족해야 합니다. 이제 시작하는 입장에서 우리는 조야한 형태의 전자본주의 문화, 즉 관료문화나 농노문화 등을 불필요하게 만들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뻐해야 합니다. 문화와 관련된 문제들에서는 졸속과 도매금으로 처리해버리는 조치가 가장 해롭습니다. 우리의 많은 젊은 작가들과 공산주의자들은 이 점에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국가기구 문제에 관한 한 우리는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제 보다 천천히 나아가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려야 합니다.

우리의 국가기구는 비참하다 못해 매우 한심한 상태에 있으므로, 우선 우리는 매우 조심스럽게 어떻게 그것의 결함을 극복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때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이러한 결함들이 과거로부터 비롯되었고 그 과거는 비록 전복되어 버리기는 했지만 아직 극복되지는 못했으며 먼 과거로 물러나 희미해진 문화적 단계에는 아직 이르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문화에 대해서 저는 아주 신중히 말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이 분야에서 우리는 우리 문화ㆍ사회생활ㆍ관습의 본질적인 일부분이 되어 버린 것은 성취된 것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 우리 사회체제의 장점은 아직 올바로 연구된 적도 없고, 이해되어 본 적도 없으며, 또한 깊이 생각되어져 본 적도 없다 ; 서둘러 감(感)만 잡았을 뿐이다; 입증되거나 검증되어 보지도 않았고, 경험에 의해 확증된 적도 없으며, 지속적인 것으로 만들어져 본 적도 없다…등등. 물론, 혁명적 시기처럼 발전이 하도 가공할 속도로 진행되어 단 5년 만에 제정(帝政) 체제로부터 소비에트 체제로 이행했던 때에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는 뭔가를 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는 지나치게 빠른 전진과 허풍 등에 대해 건강한 회의를 나타내야만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시간마다 선포하고 매분마다 취하여 매초마다 그 취약성과 피상성 및 그에 대한 몰이해를 입증하는 전진적 조치들을 검증하는 것을 생각해보아야만 합니다. 여기에서 가장 해로운 것은 조급함입니다. 사회주의 또는 소비에트 등의 이름에 값하는 진실로 새로운 국가기구를 수립하는 데 필요한 뭔가를 그래도 알고 있다든지, 그에 필요한 상당수의 요소들을 갖추고 있다든지 하는 따위의 가정에 의존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해로운 태도일 것입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우리는 그러한 기구를 우스우리만치 결여하고 있으며, 그런 기구의 요소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런 국가기구를 수립하는 데 시간을 아까워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며 그러는 데에는 상당히 여러 해가 걸리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국가기구를 구축하기 위한 요소들 가운데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오직 두 가지 요소를 갖고 있을 뿐입니다. 첫째는, 사회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에 전력투구하고 있는 노동자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충분히 교육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더 나은 기구를 만들고 싶어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그런 기구를 하나도 만들 수 없습니다. 그들은 이 일에 요구되는 문화를 아직 충분히 계발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필요한 것은 바로 문화입니다. 이 과업을 수행하는 데에서, 무턱대고 '돌격 앞으로 하든 정력과 활기로 하든 간에, 일반적으로 그 어떤 가장 훌륭한 인간적 자질로써조차도 졸속으로 일을 처리해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지식과 교육 및 훈련이라는 요소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요소는 다른 나라와 비교해 볼 때, 턱없이 불충분합니다.

이 점과 관련하여 우리는 우리에게 열의나 서두름 따위로 우리의 지식의 결여를 대신하려는(혹은 그럴 수 있다고 상정하는) 경향이 농후하다는 점을 유념해야만 합니다.

우리의 국가기구를 쇄신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우선 배우고, 또 배우며, 또 배우는 일에 착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또한 학습이 죽은 지식이나 반짝했다가 사라지는 캐치프레이즈로 전락하지 않도록 주의해야만 합니다(우리에게는 이 같은 일이 매우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는 점을 솔직히 시인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학습이 실제로 그리고 완벽하게 바로 우리 삶의 일부분, 즉 우리 사회생활의 한 구성요소가 되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서구의 부르주아 사회가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 국가로의 발전을 이제 막 시작한 나라에 적합하고 적절한 그런 요구를 제출해야 합니다.

이상으로부터 내려지는 결론은 이러합니다: 우리는 노농감찰부를 우리의 국가기구를 개선하기 위한 도구로, 실로 가장 모범적인 기관으로 만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 기관이 우리가 바라는 그러한 높은 수준에 도달할 수 있게 하려면, 우리는 "천을 자르기 전에 일곱 번 재어보라"는 원칙을 따라야만 합니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 사회체제에 내재하는 요소 중 최상의 것을 활용해야 할 것이며, 그것도 최대의 주의와 사려 깊음, 그리고 새로운 인민위원회를 구축하기 위한 지식 등을 갖추고 활용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 사회체제내의 가장 우수한 요소들ㅡ첫째로 선진노동자들, 둘째로 공치사를 들으려 하지 않으며 양심에 거리끼는 말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으리라고 우리가 보증할 수 있는 진실로 각성된 부분ㅡ이 스스로가 진지하게 설정한 목표를 성취함에 있어서 그 어떤 어려움으로부터도 도피해서는 안 되며 그 어떤 투쟁도 회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5년간 우리 국가기구를 개선하기 위하여 매우 분주하게 움직여 왔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은 단지 법석 그 자체에 지나지 않았으며, 5년이 지난 후에 그와 같은 법석은 무용하거나 심지어는 헛수고가 아니면 해롭기까지 하다는 사실이 입증되었습니다. 그와 같은 법석은 우리가 뭔가 하고 있다는 인상을 자아냈지만, 실제로는 단지 우리의 기구들과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이제는 사태가 변화되지 않으면 안 될 때입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원칙을 따라야만 할 것입니다; 적더라도 더 나은 것이 더 낫습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원칙, 즉 2년이든 3년이든 간에 훌륭한 인적자원을 확보하는 것이 아무런 그러한 희망도 없이 조급하게 사업을 벌이는 것보다는 더 낫다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처해 있는 조건에서는 이러한 원칙을 견지하고 실제로 적용한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압니다. 이와 상반되는 원칙이 수많은 허점을 비집고 들어와 관철될 수도 있으리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엄청난 저항이 야기될 것이며 극도의 인내심이 요구될 것임을, 적어도 초기의 몇 년간은 이 분야에서 일한다는 것이 지긋지긋할 만큼 어려울 것임을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바로 그러한 노력을 통해서만 우리가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며 그 목표를 달성해야만 우리가 소비에트라든가 사회주의 등등의 이름에 진정으로 값하는 공화국을 건설할 수 있으리라고 확신합니다.

많은 독자들은 아마도 제가 쓴 첫 번째 논설에서 예증으로서 제시된 (라브크린의-역자)인원수가 너무 적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 수가 너무 적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라면 많은 계산법들이 동원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중요한 한 가지, 즉 진실로 모범적인 질을 획득하고자 하는 열망이 그 모든 이러저러한 계산들보다도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마침내 우리가 성심성의껏 국가기구를 개선시킬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될 때가 도래하였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하는 데에서 조급함보다 더 해로운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인원수를 부풀리려는 것에 반대하여 엄중한 경고를 발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저는 그와 정반대로 이 문제에서는 수치에 대해 특별히 인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노농감찰인민위원회가 현재로서는 아무런 권위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합시다. 노농감찰부의 조직상태가 그 어떤 다른 기관보다도 나쁘다는 점과 현 상황에서 이 인민위원회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점을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가장 모범적인 기관, 모든 사람들로부터 절대적인 신뢰를 받는 기관, 그리고 실로 중앙통제위원회와 같은 상급기관의 사업의 정당성을 입증했음을 만민에게 증명해 줄 그러한 기관을 몇 년 안에 창설해 내기를 진정으로 원한다면, 우리는 이 점을 깊이 유념해야만 할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간부직원의 규모에 대한 잡다한 수치들을 즉각 단호하게 배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엄격한 테스트를 통해서, 그리고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 노농감찰부 직원을 선발해야만 합니다. 그저 적당히 임무를 수행하고, 아무런 신뢰도 받지 못하며, 그리하여 그 명령이 아무런 강제력도 갖지 못하는 그러한 인민위원회를 설치한다는 게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저는 지금 우리가 염두에 두고 있는 재구성 과업을 시작하는 데에서 우리의 주된 목표는 바로 그와 같은 사태를 피하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중앙통제위원회 위원으로 발탁하고자 하는 노동자들은 흠잡을 데 없는 공산당원들이어야 합니다. 또한 저는 그들이 자신들이 맡게 될 과업의 목적과 과업의 수행방식들을 배울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조치들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더 나아가서, 이러한 과업을 수행하는 데 도움을 줄 일정 수의 비서도 필요할 것인데, 그 비서들은 그 직위에 임명되기 전에 세 가지 테스트를 치르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끝으로, 우리가 특별 케이스로서 노농감찰부 직원으로 직접 발탁하게 될 관리들은 반드시 다음과 같은 요건들을 갖추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

첫째, 몇 사람의 공산당원들의 추천을 받을 것.

둘째, 우리 국가기구에 대한 지식을 점검하기 위한 테스트를 통과할 것.

셋째, 우리 국가기구의 기본활동들, 즉 관리의 일상업무 등의 근본원리들을 점검하기 위한 테스트를 통과할 것.

넷째, 중앙통제위원회 위원 및 자신의 비서와 긴밀한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활동함으로써 전체기구의 원활한 과업수행을 보증할 수 있는 자일 것.

이러한 요건들이 유별나게 엄격한 것이라는 점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또한 노농감찰부에서 일하고 있는 대다수의 "현실적인" 노동자들이 이러한 요건들을 비현실적이라고 주장하거나 코웃음 쳐 버리지 않을까 심히 걱정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현재의 노농감찰부 책임자 어느 누구에게나, 또는 이 기구와 관련된 어느 누구에게라도, 그들이 노농감찰부와 같은 인민위원회의 실제 목적이 무엇인지를 저에게 솔직히 말해줄 수 있는가라고 묻고 싶습니다. 저는 이 질문이 그들로 하여금 평형감각을 되찾을 수 있게 도와주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시도해 왔던 바, 즉 노농감찰부라는 이 구제불능의 사업을 재조직해 보려는 노력에 단지 하나를 더 보태는 것은 무가치한 일입니다. 그렇지 않고 진실로 모범적인 뭔가를, 즉 그 지위와 명칭만이 아니라 그 강점 때문에도 만민의 존경을 받게 될 그 어떤 기구를 창설하기 위해서라면, 우리는 반드시 완만하고 까다로우며 이례적인 방식으로써, 도 그러한 방법들을 몇 번이고 시험해 가면서 일해 나가기 시작해야만 할 것입니다.

대단한 인내심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또한 이러한 과업에 몇 해씩이나 투입할 각오가 없다면, 우리는 차라리 이 일에 덤벼들지 않는 게 나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그렇게도 성급했던 지원했던 고급 노동연구소 같은 기관들 가운데 최소한을 선별하여 그러한 기관들이 올바르게 조직되었는지 살펴보고 그것들이 계속 운영되도록 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현대과학의 높은 수준에 걸맞게, 그리고 우리에게 그것의 모든 이점을 제공할 수 있게끔 운용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몇 년 안으로 자신의 임무, 즉 우리 국가기구의 개선을 체계적이고 꾸준하게 추구하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기관, 노동자 계급과 러시아공산당 및 우리 공화국 전인민의 신뢰로 지탱되는 그런 기관을 보유하기를 희망하는 것이 공상은 아니게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한 정지작업은 즉각 개시될 수도 있습니다. 만일 노농감찰인민위원회가 현재의 재조직 계획을 받아들인다면, 이제 위원회는 서두름 없이, 또한 기존에 행해진 바들을 변경시키는 데 머뭇거리는 일 없이, 재조직 과업을 완수할 때까지 사전 예비조치들을 취하고 계몽적으로 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문제에 있어서 마지못한 해결책은 극히 유해할 것입니다. 노농감찰부의 직원규모를 정하는 데에서 여타의 사항을 고려하는 기초 위에 기준이 세워진다면, 그것은 사실 이미 오래전부터 저주받아 왔고 누구에게나 비웃음을 사 왔던 낡은 관료적 사고와 구시대적 편견에 기초하고 있음에 다름 아닙니다.

요약하면, 문제의 본질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이제 우리가 국가권력의 조직화에 관해 진실로 무엇인가를 배웠다는 점을 증명해 보이든가(우리는 지난 5년 동안에도 무엇인가를 배웠어야 했다), 아니면 우리가 아직도 그 일을 감당할 만큼 충분히 성숙하지 못하였음을 증명해 보이든가 해야 합니다. 만일 후자의 경우라면, 우리는 차라리 이 과업에 달려들지 않는 게 더 낫습니다.

쓸 만한 인적 자원만 있다면, 우리가 적어도 하나의 인민위원회쯤은 체계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배웠다고 가정하는 것도 뻔뻔스러운 것은 아닐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참말이지, 이 하나의 인민위원회는 우리의 전(全) 국가기구의 모범이 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우리는 노동의 조직화 일반과 특히 관리에 관한 두 권 이상의 교재를 편찬하는 경쟁을 즉각 선포해야 합니다. 기초자료로서는 이전에 예르만스키(Yermansky)가 출판한 책을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할 때에는, 그가 분명히 멘셰비즘에 동조적이며 따라서 소비에트 체제에 요구되는 교과서를 편찬하는 데에는 적합지 않은 인물이라는 사실이 덧붙여지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또한 최근에 케르젠치에프(Kerzhentsev)가 펴낸 책도 기초자료로 채택될 수 있을 것이며, 그 밖에 다른 불완전한 교과서들 가운데에도 도움이 될 만한 것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몇몇 유능하고 양심적인 사람들을 독일이나 영국 등지에 보내 문헌들을 수집하고 이 문제를 연구하게 해야 합니다. 저는 방금 영국을 언급했는데, 이는 미국이나 캐나다에 사람을 보내는 것이 불가능 할 경우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장래의 노농감찰부 직원을 선발하는 시험을 위한 예비 계획을 작성할 소위원회 위원들을 지명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제반 조치들은 노농감찰부 인민위원이나 위원단 또는 중앙통제위원회 상임간부회의에 어떠한 어려움도 야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 동시에 중앙통제위원회 위원 후보를 선정하기 위한 예비소위원회도 임명되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그런 직책에 임명될 후보를 뽑는 데에서 이제는 우리 소비에트의 고급학교 과정의 학생들 가운데에서는 물론 모든 부서에서 일하고 있는 경험 있는 노동자들 가운데에서도 충분하고도 남는 인원을 확보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위에 언급한 범주 가운데 어느 한 쪽을 미리 배제하는 것은 옳지 못할 것입니다. 이 기구는 상이한 자질과 장점을 가진 다양한 인물들을 혼합하여 구성하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그러한 다양한 특질들은 하나로 결합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후보자들의 명단을 작성하는 임무는 상당한 정도의 작업을 요하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 새로운 인민위원회의 직원이 오직 한 가지 유형의 사람들, 예컨대 관리들만으로 이루어진다거나 선전가형의 인물이나 사교성이 뛰어난 사람이나 이 분야의 관리들에게 그리 일상적이지 않은 영역에 침투하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 등이 배제된다면, 별로 바람직스럽지 못한 일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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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계획을 학술연구기관의 계획과 비교해 본다면 제 구상이 가장 확연해질 것 같습니다. 제 계획에 따르면, 중앙통제위원회 위원들은 상임간부회의의 지도하에 정치국의 모든 문서와 기록들을 체계적으로 조사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아주 조그마한 개인 소유 사무실에서 최고 국가기관에 이루기까지 우리의 모든 기관들의 일상업무를 조사하는 일에서의 다양한 직무들 사이에 정확히 시간을 배분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들의 역할 속에는 그들 자신이 전념하고자 하는 사업의 조직화에 관한 이론의 연구 및 고참 동지들이나 노동의 조직화를 연구하는 고급 연구소 교사들의 지도하에 실제로 수행되는 실천적 사업까지 포함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들이 이런 종류의 학술적 활동에만 파묻혀 있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에 덧붙여 그들은, 모리배는 아니더라도 그와 유사한 자들을 적발하는 훈련이라고 제가 서슴없이 부르는 활동과 그들의 움직임과 접근 등등을 차단할 수 있는 묘책을 강구해 내는 일을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그와 같은 제안들이 서구의 정부기관들에서 제기된다면, 아마도 엄청난 원성과 도덕적 의분 등을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가 아직 그럴 수 있을 정도로 관료제화되지도 못했다고 믿습니다. 신경제정책은 아직까지 충분한 존중을 받고 있지 못하고 있어서, 어떤 사람이 적발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우리들 중 누군가가 충격을 받게 되지는 ㅇ낳을 것입니다. 우리 소비에트 공화국은 이제 막 건설되었을 뿐이며, 따라서 도처에 가직까지 구시대의 낡은 잡동사니들이 산더미처럼 널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모종의 계책을 쓰건, 때로는 꽤나 먼 근원을 향한 조사에 의해서든 도는 우회적인 방식에 의해서든, 우리가 그러한 잡동사니들을 심층탐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충격 받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만일 이런 일로 누군가가 충격을 받게 되는 사태가 벌어진다면 틀림없이 그 사람 자신이 웃음거리가 되어 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새로운 노농감찰부가 프랑스어의 pruderie(얌전빼기), 즉 우리말로는 우스꽝스러운 새침데기 또는 우스꽝스러운 허세 따위를 벗어던져 버리기를 희망해 봅시다. 그러한 태도는 오로지 우리 소비에트와 당의 관료집단에게 이익이 될 뿐입니다. 말이 난 김에 관료들은 소비에트의 사무실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당의 사무실에도 있다는 사실을 지적해 둡시다.

앞에서 노동의 보다 고차원적인 조직화 등을 연구하는 연구기관에서 우리가 연구, 그것도 열심히 연구해야 한다고 제가 말했을 때, 그것은 학교 강의실형(型)의 "연구"를 의미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학교 강의실 수업 방식의 연구라는 관념에 매몰되어 본 적이 없습니다. 이 경우 제가 모종의 반(半)장난조의 속임수나 묘안이나 계략 또는 그런 종류의 것에 의존하는 것이 "연구"에 포함되는 걸로 이해하길 거부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는 사람이 진정한 혁명가 중에는 단 한 명도 없기를 바랍니다. 서구의 차분하고 성실한 국가(states)에서라면 이러한 구상은 사람들을 두렵게 할 것이며, 훌륭한 관리라면 그 누구도 이를 용납하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가 아직은 그 정도로 관료제화되지 않았길 바라며, 우리들 사이에서 이러한 구상을 토론하는 것이 유쾌함만을 유발시키길 바랍니다.

참말이지, 쾌락을 유용성과 결합시키지 못할 게 어디 있습니까? 우스꽝스러운 것, 유해한 것, 우습지도 않은 것, 어느 정도만 해로운 것 등등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 어떤 해학적이거나 장난조의 속임수에 의존 못할 게 어디 있습니까?

제게는 우리 노농감찰부가 이러한 구상들을 검토한다면 많은 것을 얻을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우리의 중앙통제위원회와 노농감찰부에 소속된 그 기관의 동지들이 성취하게 될 몇 안 되는 가장 빛나는 전과의 목록표가 점잖고 차분한 교과서에는 온전히 언급될 수 없는 곳에서 장래의 노농감찰부 및 중앙통제위원회 위원들의 결코 적지 않은 공적들에 의해 더욱 풍부해질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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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의 기관이 어떻게 소비에트의 기관과 융합될 수 있겠습니까? 이 제안에는 뭔가 부적절한 것이 담겨 있지 않습니까?

제가 이러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소비에트의 기관들뿐만 아니라 우리 당의 기관들에도 관료들이 있다고 앞에서 제가 말했을 때 암시했던 바로 그 사람들을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참말이지, 왜 우리는 우리의 사업에 이익이 되는데도 이 둘을 융합시켜서는 안 됩니까? 외무 인민위원회의 경우 애당초부터 융합이 이루어졌는데도 오히려 그게 유익했었음을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정치국은 당의 관점에서 외국 열강들의 "조치"에 대응하여 기선을 제압하고 막말로 그들을 초전박살 내기 위하여 우리가 취해야 할 "조치"에 관한 여러 사소하거나 중요한 문제들을 논의하지 않습니까? 소비에트 기관과 당 기관의 이러한 유연한 융합이 우리의 강력한 정치력의 원천이 아닙니까? 저는 그 유용성이 입증된 바, 즉 우리의 대외정책에서 명확히 채택되어 이 분야에서는 더 이상 의심할 바 없게 관행이 되어 버린 이와 같은 상호결합이 우리의 국가기구 전체에 대해서도 역시 잘 어울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사실 저는 훨씬 잘 어울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노농감찰부의 임무는 우리의 국가기구 전체를 망라해야 하며, 그 활동들은 예외 없이 우리의 모든 국가기관에 영향을 미쳐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지방기관이든 중앙기관이든, 상업부문이든, 순수 행정기관이든, 교육기관이든, 문서 보관소든, 공연예술기관이든 등등ㅡ한마디로 어떠한 예외도 없이 모든 기관에 영향을 미쳐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광범위한 활동을 수행하는 기관, 더구나 그처럼 특별히 유연한 형태들이 필요한 기관에게 당 통제 기관과 소비에트 통제 기관의 이러한 독특한 융합을 채택하는 것이 허용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저는 그렇게 하는 데 아무런 장애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오히려, 그와 같은 융합이야말로 우리 사업의 성공을 위한 유일한 보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점에 대한 일체의 의심은 우리 정부기관 사무실의 가장 지저분한 구석에서나 생겨날 뿐이며 오직 조롱이나 받아 마땅할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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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의문 : 교육활동을 공부와 결합시키는 것이 편리하지 않습니까? 저는 그것이 편리할 뿐만 아니라, 필요하다고까지 생각합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서구 형태의 국가에 대한 우리의 혁명적 태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서구 국가의 가장 해롭고도 터무니없는 수많은 편견들에 상당히 물들어 왔습니다. 더구나 어느 정도까지는 우리의 관료주의자 동지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물들여져 왔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 같은 편견의 진흙탕 속에서 거듭하여 고기를 낚을 수 있었던 데에 의존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러한 진흙탕 속에서 너무 열심히 낚시질을 한 나머지, 그와 같은 낚시질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누구나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회ㆍ경제ㆍ정치 관계의 모든 분야에서 우리는 "무서우리만치" 혁명적입니다. 그러나 지난날을 돌이켜보건대, 관공서의 운영상태나 사무절차를 보면, 종종 우리의 "혁명성"은 어디론가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판에 박혀 케케묵은 일상성이 그것을 대신하곤 합니다. 사회생활에서 위대한 도약이 이루어지고 난 뒤에, 극히 미미한 변화만 제기되어도 놀랄 만한 소심함이 뒤따르는 매우 흥미로운 현상을 우리는 여러 차례 목도해 왔습니다.

어찌 보면 그러한 현상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장 대담한 진보적 조치들이, 오랫동안 이론적 연구의 대상으로만 되어 왔던 분야, 주로, 아니 거의 전적으로 이론적으로만 모색되어 온 분야에서 취해졌기 때문입니다. 러시아인들은, 활동으로부터 손을 떼게 되면, 침울한 관료제적 현실로부터 위안을 얻으려고 비상할 정도로 대담한 이론적 설명에 탐닉합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우리 설명이 비상하리만치 일면적인 성격을 띠게 됩니다. 일반적 설명에서의 이론적 대담성은 일상 업무에서의 아주 조그마한 개혁에 대한 놀랄만한 소심함과 병행했습니다.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대담한 농업혁명이 훌륭히 보편적으로 수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동시에 일상 업무에서 최저 수준의 개혁을 수행하는 문제에서는 그 같은 창조력은 발휘되지 못하였습니다. 일반적인 문제들에 적용되었을 대는 그토록 빛나는 성과를 가져왔던 일반적인 명제들을 이 분야의 개혁에 적용할 창의력도 인내심도 결여되었던 것입니다.

이 점이야말로 우리의 현재 생활에서 무모한 대담성이 사소한 변화에 대해서도 두려워하는 소심함과 놀랍게도 병행하여 나타나는 이유인 것입니다.

저는 모든 진실로 위대한 혁명들 속에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났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위대한 혁명들이란 낡은 것 또는 낡은 것을 발전시키는 데로 향하는 것과, 매우 이상적으로 추구하려는 새로운 것, 너무 새로운 나머지 낡은 것의 극히 작은 쪼가리도 포함하지 않는 전혀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것 사이의 모순으로부터 성장해 나왔기 때문입니다.

혁명이 예기치 않게 이루어질수록, 이러한 모순들 가운데 많은 것이 그만큼 오랫동안 지속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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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현재 생활을 일반적으로 특징짓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 우리는 자본주의적 공업을 파괴하였으며 최선을 다해 봉건적 기구들을 그 근저에서부터 무너뜨렸고 지주 소유제를 해체시켜 소농을 창출하였습니다. 이들 소농은 프롤레타리아가 이룩한 혁명적 과업의 결실을 믿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에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보다 발전된 나라들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승리할 때까지는, 단지 이러한 확신에 의지해서만 계속 나아가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경제적 필연성은, 특히 신경제정책 하에서는, 이들 소농의 노동생산성을 극히 낮은 수준으로 동결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국제정세 역시 러시아를 후진상태로 몰아넣고 있으며, 대체로 보아 인민의 노동생산성을 전전(戰前)의 수준이하로 떨어뜨렸습니다. 서구 자본주의 열강들은, 의도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나, 우리를 곤궁에 몰아넣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했으며, 러시아의 내전을 부추겨 가능한 한 최대의 재앙을 전국에 확산시키고자 하였습니다. 우리가 많은 이점을 가져다주리라는 생각에서 제국주의 전쟁으로부터 발을 빼는 길을 택한 것은 바로 이러한 사정 때문이었습니다. 그들 제국주의자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떠들어댔습니다: "만일 우리가 러시아의 혁명적 체제를 붕괴시키는 데는 실패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좌우지간 러시아가 사회주의를 향해 나아가는 것만은 필사적으로 막을 것이다." 그들의 견지에서 볼 때, 그들로서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마침내 그들의 문제 중 절반은 해결되었습니다. 그들은 혁명에 의해 창출된 새로운 체제를 전복시키는 데는 실패했지만, 이 새로운 체제가 즉각 다음의 일보를 내딛는 것은 방해하였습니다. 모든 사회주의자들이 예언하였던 바가 정당하였음을 입증시켜 주었을 조치, 그리하여 엄청난 속도로 생산력을 발전시키고 모든 잠재력을 끌어내 발전시킴으로써 사회주의를 창출할 수 있었을 한 걸음을 내딛지 못하도록 방해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않았다면, 사회주의자들은 사회주의가 자체 내에 거대한 힘을 내포하고 있으며 그리하여 인류는 이제 찬란하게 빛나는 전망을 지닌 새로운 발전단계에 들어서게 되었음을 어느 누구에게나 증명해 보였을 터인데 말입니다.

지금 형성되어 있는 국제관계는 이제 독일이라는 유럽 국가가 승전국의 지배를 받는 그런 체계입니다. 더구나 서구의 수많은 낡은 국가들은 승리한 덕택에 자국의 피억압 계급에게 어느 정도의 그리 중요하지 않은 양보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양보는, 비록 미미하다 하더라도, 그 나라들에서의 혁명운동을 지체시키면서 외형상으로는 일종의 "계급간 휴전" 상태를 연출하고 있습니다.

이와 동시에, 지난 제국주의 전쟁의 결과, 인도와 중국 등 동양의 많은 나라들은 이전의 판에 박힌 듯한 정치생활로부터 격동을 겪게 되었습니다. 명백히 그들의 발전은 유럽의 일반적인 자본주의적 경로를 따라 나아가고 있습니다. 유럽의 전반적인 동요가 그 나라들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였으며, 이제 그 나라들 역시 세계자본주의 전체(the whole of world capitalism)의 위기로 귀착될 발전과정에 끌려 들어오고 있다는 사실은 이제는 누구에게나 명백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부딪히게 되었습니다: 서구의 자본주의 국가들이 사회주의로 발전할 때까지, 우리가 현재의 파국상태에서 소농생산으로써 현재의 위치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서구의 자본주의 국가들은 우리가 전에 기대했던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회주의의 점진적인 "성숙"을 통해 사회주의로의 발전을 달성하는 것이 아니라,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착취하는 것, 제국주의 전쟁에서 패배한 최초의 나라에 대한 착취와 더불어 동양 전체에 대한 착취를 통해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 바로 제1차 제국주의 전쟁의 결과로서, 동양은 세계 혁명운동의 전반적인 소용돌이 속으로 확실히 휘말려 들어왔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나라로 하여금 어떠한 전술을 채택하도록 요구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분명히 다음과 같은 내용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노동자 정부를 보전하고 그 지도와 권위 하에 소농을 존속시키기 위하여 극도의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지금 전 세계가 세계 사회주의 혁명을 초래할 운동을 향해 나아고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유리한 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제국주의자들이 세계를 두 개의 진영으로 갈라놓는 데 성공하였다는 불리한 조건 속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두 진영으로의 분열은, 선진 문명의 자본주의 발전을 이룩한 나라인 독일이 분기(奮起)하는 데 극도의 어려움을 안겨 주고 있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더 복잡해지고 있습니다. 서구의 모든 자본주의는 독일 들들 볶아 부흥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수억의 피착취 근로인민대중이 인간이 감내할 수 있는 모든 고통의 한계선상에서 신음하고 있는 동양의 모든 국가들은, 물리력이나 자원 또는 국방력에서, 서구의 훨씬 작은 국가들과도 비교가 안 될 정도의 위치로 내몰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들 제국주의 국가들과의 임박한 대결로부터 우리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서양의 번영하는 제국주의 국가들과 동양의 번영하는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의 내부적 반목과 갈등이, 처음에 러시아의 반혁명을 지지하기 위한 서구의 반혁명 캠페인이 동ㆍ서양의 반혁명주의자 진영, 동ㆍ서양의 착취자들 진영, 일본과 미국 진영 내부의 반목 때문에 와해되었을 때 그러했듯이,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유예기간을 가져다주길 희망해 볼 수 있을까요?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이렇게 될 것입니다. 즉, 그 문제는 너무나 많은 요인들에 달려 있으며, 다만 궁극적으로는 자본주의 자체가 지구상의 광범위한 인민대중에게 투쟁하도록 가르치며 훈련시키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투쟁의 최종적인 결과가 전체적으로는 예측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투쟁의 결과는 러시아, 인도, 중국 등이 지구상의 인류의 압도적 다수를 포함하고 있다는 단순한 사실에 의해 결정될 것입니다. 지난 몇 년간 비상하게 빠른 속도로 해방을 향한 투쟁에 이끌려 들어왔던 것은 바로 이 압도적 다수의 인민대중이었으며, 그리하여 이 점에서 세계적인 투쟁의 최종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추호도 의심의 여지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는 전적으로 또한 절대적으로 확실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사회주의의 이러한 완전한 승리의 불가피성이 아니라 우리 러시아공산당이, 우리 러시아 소비에트 정부가 서구의 반혁명적인 국가들이 우리를 분쇄하려 드는 것을 막기 위해서 취하지 않으면 안 될 전술이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반혁명적 제국주의 서구와 혁명적 민족주의 동양 사이에, 세계에서 가장 문명화된 나라들과 동양적 후진상태에 빠져있는, 그러나 다수를 포함하고 있는 나라들 사이에 벌어지게 될 다음번의 군사적 대결까지 우리가 확실히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 절대다수의 인민대중이 문명화되어야만 합니다. 우리 역시, 비록 즉시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데 필요한 정치적 전제조건을 갖추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문명화 되어 있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구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전술들을 채택하거나 다음과 같은 정책들을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노동자가 농민에 대한 지도력을 통해 농민들로부터의 신뢰를 유지할 수 있는 국가를 건설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또한 최대한으로 근검절약하여 우리의 사회관계로부터 일체의 사치풍조를 근절시켜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국가기구를 최대한으로 축소정비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국가기구로부터 일체의 사치풍조를 추방시켜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사치풍조를 제정 러시아의 관료제적 자본가 국가기구로부터 물려받았습니다.

이것은 농민주권의 한계는 아닐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노동계급이 농민에 대해 지도력을 유지하도록 신경을 쓴다면, 우리는 우리 국가의 경제생활에서 가능한 한 최대의 근검절약을 실천함으로써 우리가 절약하는 모든 자원을 대규모 기계공업의 발전에, 전력화(電力化)에, 수압에 의한 이탄(泥炭) 채굴의 발전에, 폴호프 발전소 계획의 완성에 배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바로 여기에만 우리의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성취해 냈을 때에만 비로소 우리는,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말을 갈아 탈 수 있을 것입니다. 가난과 궁핍에 찌든 무지랭이 농사꾼의 말로부터, 피폐화된 농민국가에 적합하게 고안된 경제라는 말로부터, 프롤레타리아가 찾고 있으며 반드시 찾아내야만 하는 튼튼한 말, 즉 대규모 기계공업과 전력화, 폴호프 발전소 등 새로운 말로 갈아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사업, 우리의 정책, 우리의 전략과 전술의 전반적인 계획을 재조직된 노농감찰부의 임무와 결합시킬 수 있다고 저는 마음속으로 상정하고 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바로 이 같은 사정이, 노농감찰부를 특별한 상급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거기에 중앙위원회의 권한에 버금가는 지도력을 부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를 잘 설명해주리라 보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정부기구를 전면적으로 숙정하고 절대적으로 필수불가결하지는 않은 모든 것을 최대한으로 축소시킴으로써만, 비로소 우리는 잘 해 나갈 수 있으리라 확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잘해 나간다는 것이 단지 낙후된 소농 국가의 수준, 보편적인 한계의 수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대규모 기계공업을 꾸준히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정도의 것이 되려면, 그렇게 하는 것은 너무나 정당합니다.

이러한 내용들은 우리의 노농감찰부를 위해서 제가 꿈꾸고 있는 지고(至高)의 과업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이의 실현을 위해서 당의 가장 권위 있는 기구들을 "평범한" 인민위원회와 융합시키는 것을 제안하고 있는 것입니다.

1923년 3월 2일

[레닌, 『전집』, 제33권, pp. 487~502]

 

제12차 당대회의 과제

이제 당과 국가기구간의 관계라는 가장 중요한 문제로 나아가 봅시다. 제가 여러 번 언급했던 레닌 동지의 가장 최근의 논문에서 레닌 동지는 국가기구에 관해 쓰고 있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하는 말이지만, 딱 까놓고 말하면, 그 밖의 그 어느 누구도 그런 발언ㅡ누구도 그리 쉽게 되풀이하지 않는 발언ㅡ을 감히 하지 못할 것입니다(웃음). 레닌은 우리들의 국가기구가 소비에트 스타일로 "거룩함"이 부여되고 덧칠해졌을 뿐 사실은 제정(帝政) 국가기구와 매우 유사하다고 쓴 바 있는데, 면밀히 살펴보면 그 국가기구는 아닌 게 아니라 바로 그 똑같은 옛 관료기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듣기 거북합니까? 그것은 사실 국제 멘셰비즘을 위한 부활절 달걀(Easter egg)입니다(웃음). 그것은 어쩔 줄 모르고 우왕좌왕 운영되고 있는 산업보다는 훨씬 더 "낫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물론 여기서 우리는 레닌이 특별히 강조한 정식 가운데 하나를 알고 있습니다. 보다 확고하게 그리고 가능한 한 깊이 당의 사고(思考)에 이것을 각인시키기 위해, 레닌은 누구에게라도 충격적으로 들릴 과감한 말을 삼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유일한 해석은 아닙니다. 우리는 보다 철저하게 그 문제를 검토해야만 합니다. 우리의 국가기구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갑자기 하늘로부터 우리에게 떨어진 것입니까?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누가 그것을 세웠습니까? 그것은 노동자, 농민, 적군병사, 그리고 코사크 민족의 대표자들의 소비에트의 토대 위에서 성장했습니다. 누가 이들 소비에트를 지도했습니까? 공산당입니다. 당이 무엇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물론 소비에트가 무엇인지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소비에트야말로 노동대중의 이익을 위한 최선의 정부형태라고 과거에도 말했고 지금도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당은 최고의 당입니다. 우리의 당은 코민테른에 가입한 다른 당들의 귀감인 것입니다. 이 사실은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소비에트로부터, 즉 코민테른 내에서 최고의 당인 우리 당의 지도를 받는 노동대중의 최상의 대표기관인 소비에트로부터 옛 제정의 기관과 별로 다를 바 없다고(레닌에 의해서ㅡ역자 첨가) 말해진 국가기관이 생겨나고 있음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아마 약간 단순한 친구들, 말하자면 소위 '노동자의 진실' 그룹과 같은 친구들은 여기에서 이런 결론을 끄집어내려 할 것입니다 ; 우리는 망치를 사용해ㅡ낫은 아니고 망치만(웃음)ㅡ이 기관에 역학적인 수술을 가하면 안 되는가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결론은 근거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우리는 쪼가리를 주워 모아 다시 시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왜일까요? 이 국가기구는 비록 실로 형편없는 것이라 해도 저절로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역사적 필연의 압력 아래 우리가 넘겨받아야만 했던 재료들을 가지고 우리들이 창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책임 있습니까? 우리들 모두이며, 우리는 그것에 책임져야 할 것입니다.

국가기구의 이러한 "질"은 어디로부터 비롯된 것입니까? 바로 다음과 같은 상황으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즉, 우리는 어찌 해야 할지 잘 몰랐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일을 잘 알거나 반쯤만이나마 알고 있으면서도 일의 4분의 1조차도 제대로 해내길 원하지 않거나 때로는 전혀 그런 일을 하고 싶어하지 않거나 심지어는 일을 망쳐 놓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협력을 요청했던 적이 종종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사정으로 말미암아 우리 국가기관이 구각(舊殼)을 벗어던지지 못했던 것입니다. 국가기구를 운영하면서 우리는 과학과 마술을 구별할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국가기구 내에는 의도적으로 마술을 과학으로 호도하려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처음에는 젊고 사심 없이 헌신적인, 그러나 경험이 없는 공산주의자로 출발해서 점차 무관심한 사무서기로 때워 가다가 마침내는 사보타지하는 데 비할 데 없이 탁월한 능력을 과시하는 늙은 전문관료로 끝맺음하게 되는 국가기구를 건설해 왔던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우리는 이것을 즉각 폐기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이 국가기구 없이 때워나갈 수 있을까요? 물론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만 하겠습니까? 우리의 과업은 현존하는 이 형편없는 기관을 떠맡아 계통적으로 개조해 나가는 것입니다. 아무렇게나 무턱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계획된 방법으로, 장기간에 걸쳐 계산된 방식에 따라 극복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이제까지는 국가기구는 그때그때마다 임시방편의 원리에 따라 건설되어 왔습니다. 먼저 우리는 재료를 수집했고, 그런 다음 그것을 복위(復位)했습니다. 어떤 기구가 과도하게 성장했다면, 우리는 그것을 잘라냈습니다. 우리가 지난 5년간 무언가 배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레닌 동지가 자신의 논설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시간들을 저울질하는 것일 터입니다. 즉, 낡은 것을 버리고 새 것을 취하는 데에서 왜 지난 5년간 아주 적은 것밖에 이룰 수 없었는지를 평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 따라 우리가 우리의 막중한 과업에 얼마나 체계적으로 접근해야만 하는지를 추산해 보는 것입니다.

동지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생각입니다. 권력을 장악하는 것은 하나의 중요한 일인데, 거기에는 민중을 재교육하고 그들을 새로운 노동방식으로 훈련시키며 (사고 전체가 전환되는 것을 전제로 하는)아주 사소한 것조차 가르쳐야 하는 일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소한 일이란, 말하자면, 크고 천장이 높은 사무실에 들어와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땅에 닿을 정도로 머리를 숙여대고 책상 앞에서 어쩔 줄 모르는 늙고 무식한 농촌 아낙네에게 소비에트의 관리들이 주의 깊고 공손하게 행동해야만 하는 것과 같은 일을 말합니다. 그러나 사무실에는 실상 그녀에게 손가락 끝으로 이래라 저래라 지시하는 관료주의자들이 앉아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농촌 아낙네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는 그러저러한 관리들 앞에서 이럴까 저럴까를 망설이다가는 아무런 것도 얻지 못하고 사무실을 떠나 버리고 맙니다.

만일 그 부인이 자신의 생각을 일목요연하게 표현할 수 있다면, 제가 생각건대 그녀는 레닌의 표현을 빌어 7~8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녀는 예전과 같은 방법으로 사무실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이전과 마찬가지로 얻고자 하는 바를 얻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관리들이 그 부인을 도와주려 하지 않고, 오히려 그녀를 돌려보내기 위해 그녀가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그녀가 이해할 수 없는 것에 관해 말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일이 언제 어디서나 계속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만일 이것이 우리 사회에 관한 진실의 3분의 1만이라도 된다면, 그것은 국가기구와 노동대중 간에 커다란 심연이 가로놓여 있음을 뜻합니다. 저는 최근에 '이 심각한 문제'에 관한 논문을 서서 신문사에 전화해서 전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소비에트의 기술이 여전히 낙후된 탓에, 그 논문이 신문에 실렸을 때 절반 정도만 내용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웃음). 물론 그 논문의 요점은 바로 제가 방금 표현한 그대로입니다.

동지들, 지금 이미 당에서 압도적 다수에 의해 채택된 레닌 동지의 계획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그 계획은 국가기구의 계획적인 재건을 뜻합니다. 우리 당은 국가기구를 창조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이 국가기구를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창조한 국가기구를 바라봤습니다. …성서가 뭐라고 말하고 있는지 기억하시죠? 신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피조물을 바라보면서 보기 좋다고 했던 것 말입니다(웃음). 그러나 당은 자신이 창조한 것을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습니다(웃음, 그리고 오랜 박수). 고개만 조용히 가로젓고 있던 차에 이제 한 사람[레닌-역자]이 나타나서 지금껏 이루어 놓은 것이 어떤지 보라고 감히, 그것도 목청껏 외쳤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절망의 목소리가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이러한 상황으로부터 끌어낸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즉, 우리가 지난 5년간 상당한 정도로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닌,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은 꼴사납고 삐걱거리는 국가기구를 창조해 왔지만, 이제 우리는 최소한 5년간을 다시는 국가기관에 대해 그처럼 분통을 터뜨릴 이유가 없도록 그것을 변화시키고 재건하는 데 바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레닌 동지가 지나가는 김에 언급한 구절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이제 처음으로 우리의 노력을 제한하는 시간의 "권능"을 평가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수행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것은 단지 교정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물론 앞으로 하나하나 고쳐나갈 터이지만,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근본적인 과제는 국가기구를 체계적이고 계획적으로 재건하는 일입니다.

그 일의 행위주체는 누구일까요? 그것[국가기구-역자]을 세운 것, 즉 당입니다. 그리고 이 당에도 국가기관을 조사하는 신선하고 개선된 기관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조사는 윤리적 성격의 것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이고 실천적인 성격의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미 파탄이 난 것으로 판명된 형식적인 국정감사의 차원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사업분야에서 선발과정을 수행하기 위해 당이 문제의 핵심을 꿰뚫는다는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조사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기관의 첫모습이 어떤 것일지, 어떻게 중앙통제위원회가 노농감찰부와 공동으로 움직일지 하는 문제들은 보다 많은 경험을 필요로 하는 문제일 것이며, 진지하게 생각하는 노동자들은 급속한 변화의 가능성에 대해 조금도 환상을 품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그 문제에 이처럼 계획적으로 접근한다 해도 별볼일없을 것이다'라는 둥, '귀란 이마보다 더 높이 자랄 수는 없다'는 둥 하면서 보고한다면, 그것은 비열한 짓일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대단히 어려운 과업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그때그때의 사안별 해결 방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체계적이고 계획적인 방법으로 처리되어야 합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국가기관의 일반적인 효율성이라는 관점과 단순한 문맹의 늙은 부인에게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라는 관점에 입각해서 그것을 새로운 방식으로 조사할 수 있는, 당의 기관이자 소비에트의 기관인 권위 있는 중앙기관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이 모든 것은 중앙통제위원회와 노농감찰부의 통합기관에 의해 가능할 것입니다. 그 통합기관은 노농감찰부ㅡ이는 통합기관내의 최선의 중핵이다ㅡ의 방식들과 국영사업의 관행들을 결합하여 가장 훌륭한 노동자들을 선발하여 조직적으로 교육시킨다는 원칙 하에서 일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실험이 행해져야 하며, 우리는 지금 행하고 있습니다.

동지들! 우리의 사업은, 비록 훌륭한 계획의 틀 안에서 수행된다고는 하지만, 매우 느린 속도로 그리고 매우 불완전하게 추진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사업방식들은 평범합니다: 수지(收支) 계산, 식료품 관세와 곡물 수출ㅡ이 모든 것들을 우리는 차근차근, 조금씩 조금씩 추진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을 하다 보면, 당이 하찮은 문제들을 너무 꼬치꼬치 따지다가 타락하게 될 위험이 있지 않을까요? 우리는 아무리 사소한 당의 행동통일의 붕괴도 허용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현 시기가 꽤 상당한 기간 동안 심각하게 지속될 수는 있겠지만 영원히 계속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아마 상당기간 지속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유럽에서의 혁명의 개시와 같은 대규모의 혁명적 분출이 현재 우리들 중 많은 사람들이 예상하는 것보다 일찍 도래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특별히 확고하게 기억해 두어야 할, 전략 문제에 관한 레닌의 가르침 하나를 들자면, 그것은 레닌이 급변의 정치학이라고 칭한 것입니다: 오늘은 바리케이드전을 하고 내일은 제3차 두마에 참가하고, 오늘은 세계혁명, 세계의 '10월'을 호소하는 것으로부터 내일은 쿨만 및 체르닌과 추잡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협상하는 것이 그것이지요.

상황은 변했고, 우리는 새로운 방식ㅡ"바르샤바를 장악하자"라는 '서방 진격'ㅡ으로 새롭게 상황을 평가했습니다. 상황은 다시 새롭게 평가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역시 마찬가지로 더러운 평화인 리가(Riga) 강화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바꾸기 힘든 노동, 조금씩에 불과한 진전, 그리고 그 후 기구 축소, 방해ㅡ우리가 전화교환수를 5명 또는 단지 3명만 필요하다고 할 때, 3명으로 충분하다면 굳이 5명을 고용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농민들이 그들에게 별도로 몇 부셸(2말 정도)의 곡식을 공급해야 하기 때문입니다ㅡ매일 사소한 일들을 까다롭게 따져야 하는 하찮은 일들ㅡ그러나 보십시오! 루르지방에서 타오르는 혁명의 불길을 말입니다. 우리를 타락의 단계에 빠뜨릴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동지들! 어떤 것도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타락하고 있지 않으며, 사업의 방식과 절차를 바꾸어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의 혁명적 보수주의 경향은 그 어느 것보다도 더 짙게 우리에게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대차대조표를 작성하는 것을 배우고 있으며, 동시에 날카로운 시선으로 동서양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기치 못한 사태들로 더 이상 좌지우지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정화하고, 노동계급적 토대를 확대시킴으로써 스스로를 강화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농민 및 쁘띠부르주아지와 합의하여 사업을 추진하고 있으며, 신경제정책(NEP) 수혜자[네프맨이라고 불린다-역자]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내에서는 네프맨식 사고(思考), 즉 쁘띠부르주아 사상을 결코 허용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허용하기는커녕 황산과 시뻘겋게 달군 쇠를 가지고 지지고 태워 당 밖으로 몰아내야만 할 것입니다(박수). 그리고 제12차 당대회ㅡ이 대회는 10월 혁명 이후 레닌이 불참한 최초의 대회이며 당 역사상 레닌이 참석하지 않은 채 치러진 몇 안 되는 대회 중 하나이다ㅡ에서 우리는 우리의 머릿속에 날카롭게 아로새겨져 있어야 할 기본적인 교훈들 가운데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고 서로서로에게 말할 것입니다. 즉, 경직되지 말 것, 유연한 전술변화의 기술을 염두에 둘 것, 다양한 변화에도 스스로를 잃지 말 것, 일시적 또는 장기간의 동맹을 맺더라도 그들이 당 속으로 파고드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 세계혁명의 전위로서의 자신의 존재를 잊지 말 것 등과 같은 사항들이 우리의 골수에 사무쳐야 할 것이라는 점을 서로서로에게 확인시켜 줘야 할 것입니다. 서구로부터의 혁명의 신호는 언젠가는 반드시 올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주저말고 지체 없이 응답해야 할 것입니다. 비록 그때 우리가 계산과 대차대조표, 그리고 일반적으로 말해 NEP에 '내 코가 석 자'이더라도 말입니다. 우리는 철저하게 혁명가입니다. 우리는 과거에도 그랬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끝까지 혁명가일 것입니다(우레와 같은 박수갈채, 전원 기립박수).

[『레온 트로츠키 연설집』(뉴욕 : Pathfinder, 1972), pp.155~158, 72~73, 철자법ㆍ대문자ㆍ방점은 약간 수정됨.]  

 

제5장 대외 무역의 독점에 대하여

 

배경

대외 무역의 독점은 신경제정책의 초석 가운데 하나였다. 소련 산업을 활성화시킬 목적으로, 국가독점이 수출입에서의 ‘매개자’로 설정되었다. 이것이 어떻게 작용했는지는 이 책 첫 장에서 설명한 바 있는, 레닌이 든 예에서 찾아질 수 있을 것이다.

소련에서는 일정한 양의 아마 가격이 4.5루블이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같은 양의 아마가 14루블에 팔린다. 농민들로부터 아마를 4.5루블에 구입하여 영국에 14루블로 수출한다면, 대외무역 독점을 통하여 아마 매 단위당 9.5루블의 이익을 올릴 수 있다. 이 수익금은 소련의 산업, 수송, 전화(電化)계획 등에 투자될 수 있을 것이다.

수입관계도 수출과 비슷한 작용을 했는데, 이들은 이익을 올리는 것에 덧붙여 발전 도상의 소련 산업을 보호하는 역할까지 하였다. 예컨대, 소련의 공장에서는 1,000루블에 트랙터 1대를 생산한다고 치자. 그리고 높은 수준의 노동생산성을 자랑하는 미국의 공장에서는 트랙터가 한 대당 500루블에 생산된다고 가정해 보자. 대외무역을 독점할 경우, 미국에서 트랙터를 수입해서 농민협동조합에 대당 1,000루블로 판매함으로써 500루블의 수익을 올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미국산 트랙터가 소련산 트랙터보다 싸게 팔리는 것을 막아 유치기(幼稚期)의 소련 트랙터 산업의 붕괴를 막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제도는 소련의 발전에서의 장기적으로는 이익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농민들의 직접적인 이익과는 정면으로 대립했다. 왜냐하면, 농민들은 농산품은 세계시장에서의 높은 가격으로 팔고, 공산품은 세계시장에서의 낮을 가격으로 사들이고자 했기 때문이다.

국내 가격과 세계시장 가격 간의 불균형으로 말미암아 밀수는 이문이 많이 남는 사업이 되었고, 따라서 널리 성행하였다. 레닌은 독점을 약화시키려는 모든 시도에 대해 단호하게 반대하였다. 레닌은 “국경지대에서 직접적인 밀수꾼들을 적발하는 것이 문제라면, 농민들, 당국이 ‘그들 몫의’ 이윤을 가로채려 들면 모조리 들고 일어나 하소연하며 당국에 맞설 모든 농민들을 다루는 것도 골칫거리이다”라고 말했다(강조는 원문대로임).

1922년 10월 6일,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독점을 약화시킬 동의안이 레닌과 트로츠키가 참석하지 않은 가운데 통과되었다. 레닌은 그 소식에 접하자 그러한 결정이, 그것도 조급하게 내려진 것을 비판하는, 분노에 찬 편지를 스탈린에게 써보냈다. 레닌은 그 편지에서 10월에 열릴 차기 전원회의 때까지 그 결정을 보류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스탈린은 레닌의 편지에 자신의 의견이 적힌 메모를 첨부하여 그것을 회람시켰다. 그 메모에는, 레닌의 편지에도 불구하고 그 결정을 번복할 생각은 없지만, 그것의 법제화를 늦추는 문제를 투표에 부치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스탈린의 메모는 레윈이 저술한 『레닌의 최후의 투쟁』[pp.151~152]에 전재되어 있다.)

12월 총회가 다가오자, 레닌은 건강이 안 좋아 총회에 출석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12월 12일, 레닌은 트로츠키에게 총회에서 독점을 옹호할 것인지를 묻는 짤막한 편지를 보냈다. 같은 날, 트로츠키는 “대외무역의 독점을 유지하고 나아가 강화하는 것은 지상명령(至上命令)”임을 분명히 하는 내용의 다소 긴 답장을 썼다(강조는 원문 그대로임). 며칠 후 레닌은 대외무역 담당위원보(補) 프룸킨과 베를린 주재 소련 무역대표 스토모냐코프에게 편지를 썼다. 이 편지에서는 트로츠키 편지의 복사본이 동봉되어 있었고, 레닌이 트로츠키에게 총회에서 자신의 입장을 옹호해줄 것을 요청했음을 알리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안타깝게도 이 편지는 『레닌전집』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다. 『레닌전집』네 번째 영어판의 편집자들은 레닌의 그 이후 편지 속에 앞에 든 편지가 언급되어 있다고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다 : “이 편지는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전집』제45권, p.601의 주). 사실 트로츠키는 1927년 10월에 당사 편찬국에 이 편지의 복사본을 맡겼었다.

12월 13일, 레닌은 트로츠키의 편지에 답장을 보냈는데, 거기에는 “대외무역의 독점을 유지ㆍ강화해야 할 명백한 필요성에 대한 공통의 입장”을 수호하고 국가계획위원회의 역할에 관한 심의를 연기하도록 촉구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레닌은 또한 중앙위원회의 스탈린에게도 무역독점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서한을 보냈다(『전집』제33권, pp.455~459). 그날 밤 레닌은 두 번이나 심각한 발작을 일으켰다.

12월 15일, 레닌은 다시 일에 착수하여 세 통의 편지를 구술하였다. 레닌은 스탈린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에서 기회만 주어진다면 12월 말경 개최될 전 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에서 연설하고 싶다는 의지를 표명하였다. 레닌은 자신이 자신의 견해를 수호하는 데 있어 트로츠키의 힘을 빌 작정이며 자신은 중앙위원회의 몇몇 동지들이 그들의 소신을 바꾼 것으로 알고 있노라고 서술하면서, 그 문제는 어떤 이유로도 해결이 미루어져서는 안 된다고 쓰고 있다. 같은 날에 쓴 나머지 두 편지는 트로츠키에게 보낸 것이었는데, 거기에는 이 투쟁과 관련한 전술이 서술되어 있다. 레닌은 트로츠키에게 총회에서 그 문제에 관해 결정을 내리도록 압력을 넣으라고 요청하였다. 또한 레닌은 서로가 받아들일 수 있는 타협책은 당분간 독점을 확실하게 유지하면서 전당대회에서 그 문제를 다시 제기하는 안(案)밖에 없을 것이라고 쓰고 있다. 12월 15일자의 이 두 번째 편지의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다. “저(레닌)는, 우리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나 대의(大義)를 위해서나, 우리가 어떠한 타협이든 다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고는 믿지 않습니다.”(강조점 추가.) 이 문장은 전에 레닌과 트로츠키가 짧은 개인적인 만남에서 결론내린 바 있는 “관료제에 반대하여 블록을 형성하자”는 것을 에둘러 표현했다는 인상을 준다.

12월 18일에 당중앙위원회가 열려, 10월에 통과되었던 결의가 폐기되고 대외 무역의 독점에 관한 원칙이 다시 승인되었다. 3일 후(12월 21일), 레닌은 트로츠키에게 승리의 편지를 썼다. “어찌보면, 단 한방의 총도 쏘지 않고 그저 시늉만으로도 우리의 입장을 관철시킬 수 있었던 듯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가 멈추지 말고 공격을 계속해야만 한다고 제안하는 바입니다….” 비록 총회에서 그 입장이 관철되었다 하더라도 당 대회에서 공격을 계속 해야 한다는 주장은 음미할만한 가치가 있다. 이러한 일련의 편지들에 제시된 전술적 책략들은, 레닌이 당과 국가에서 결코 후일(後日)의 스탈린처럼 신성불가침한 절대권력자였던 것은 아니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 편지들에서 우리는 레닌이 고참 볼셰비키들 중 가장 탁월한 인물들인 스탈린, 부하린, 지노비에프, 카메네프 등에 반대하여 투쟁을 벌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정치국에서 레닌의 유일한 동맹자는 트로츠키였다. 레닌은 대외 무역에 관한 수많은 전문가들—프룸킨, 크레스친스키, 스토모냐코프, 아바네소프—을 이 투쟁 속으로 끌어들였는데, 이들은 모두 정치국이나 중앙위원회에 소속되어 있지 않았다. 그 후, 1927년 트로츠키는 레닌이 (분파가 금지되어 있었음을 고려할 때) 당 중앙위원회에 대항하여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는 다소 심술기 어린 논평을 하곤 했다(『스탈린 날조학파』, p.59).

레닌은 일단 승리를 하면 그만이었지 그것을 빌미삼아 패배한 상대를 “두고두고 괴롭히는” 법이 없었다. 레닌이 관심을 가졌던 것은 지도자들의 인격을 짓밟거나 그들의 권위를 깎아내리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결과를 얻어내는 것이었다. 레닌은 전당에 걸쳐서 독점의 원칙을 재차 확인시켜야 할 필요성을 느꼈음이 분명했다. 레닌은 너무 쉽게 승리가 이루어진 탓에 의심을 품고 있었고, 스탈린과 그 동조자들이 스스로 합의했던 결정을 수행하리라고 확신할 수 없었다. 민족문제에 관한 논쟁을 통해 레닌의 의심은 더욱 굳어졌다.

 

대외 무역 독점에 관해 러시아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위원들을 위하여 스탈린에게 보내는 편지

중앙위원회 서기 스탈린 동지에게

1922. 10. 13

10월 6일의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의 다음과 같은 결정(의사록 7의 3항)은 사소하고 부분적인 수정인 듯한 인상을 줍니다. 즉 “노동과 방위 위원회(the Council of Labor and Defense)에 사적인 상품수출입 임시허가 또는 특정 국경지역에서의 상품교역 허가에 관한 약간의 독자적 결정권을 부여한다.”는 내용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상 대외 무역 독점을 파기하는 것입니다. 소콜니코프 동지가 그렇게 되도록 애써왔고 또 그것에 성공했다고 해서 놀랄 것은 없습니다. 그는 줄곧 그러한 태도를 취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는 궤변을 즐기면서 독점이 우리에게 이익이 되지 않음을 입증하려고 애써 왔습니다. 그러나 원칙적으로는 독점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교역 담당 부서들에게 좀더 상세한 보고를 요청하지 않고 그러한 제안에 찬성표를 던졌다니 놀라운 일입니다.

채택된 결정이 뜻하는 바는 무엇이겠습니까?

수출입 거래를 위한 구매사무소들(purchasing offices)이 개설되고 있습니다. 그러한 사무소의 소유자들은 오직 특정 물품만을 거래할 권리를 지닌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디서 이것을 통제하고 있습니까? 통제의 수단은 무엇입니까?

아마포는 러시아에서는 4루블 50코페이카인데 영국에서는 14루블입니다. 우리 모두는 『자본론』에서 이자율과 이윤이 급격히 상승할 때 자본주의가 내부적으로 어떻게 변화하며, 얼마나 더욱 대담무쌍해지는가를 배웠습니다. 자본주의가 목숨을 건 모험도 불사한다는 것을 상기합시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이미 전쟁 훨씬 이전에, 자본주의가 ‘도약’을 시작하기 이전에, 이것을 인식하고 있었음을 우리 모두 기억합시다.

지금의 상황은 어떠합니까? 아주 이문이 많이 남는 거래를 하려는 농민과 상인들을 무슨 수로 막을 수 있겠습니까? 온 러시아를 감독관으로 꽉 채우시렵니까? 구매사무소에서 이웃들을 잡아다가 아마포를 외국으로 밀수출했다고 자백을 시키시렵니까?

소콜니코프 동지의 궤변은 언제나 능란합니다. 그러나 궤변과 엄연한 진실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지금 러시아 국내에서 그러한 문제에 대해 ‘적법성’을 찾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밀수 일반과 비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흔히들 “어쨌든, 독점에도 불구하고 밀수는 번성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국경에서 전문 밀수꾼들을 단속하는 것과 모든 농민들을 상대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입니다. 만약 당국이 “그들 몫의” 이익을 가로채려 한다면, 농민들 모두가 들고 일어나 자기변호를 하면서 당국과 맞서 싸울 것입니다. 이제 겨우 수백만 루블의 이익을 안겨주기 시작한(그리고 앞으로 수천만 루블의 이익을 안겨 주기 시작한(그리고 앞으로 수천만 루블의 이익을 안겨 줄) 독점제도를 미처 시험해 볼 기회도 갖기 전에, 우리는 완전한 혼란을 자초하고 있습니다. 이제 겨우 다져지기 시작한 바로 그 토대를 우리 스스로가 무너뜨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제도는 걸음마 단계에 있습니다. 대외 무역 독점과 협업화 모두가 이제 겨우 체계가 잡히기 시작했을 뿐입니다. 1, 2년 내에 몇 가지 성과가 나타날 것입니다. 대외무역으로부터의 이윤이 수백 퍼센트 상승하고 있고, 우리는 수백, 수천만 루블을 벌어들이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합작회사가 설립되기 시작했고, 우리는 거기에서 생기는(엄청난)이윤의 절반을 수취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우리는 매우 엄청난 국가이익의 징표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이윤과는 전혀 비교도 안 될 정도의 관세를 바라고 이것을 포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망령을 좇고 있는 것입니다!

전원회의에서 그 문제는 너무 성급하게 제기되었습니다. 이렇다 할 진지한 토론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서두를 이유가 없습니다. 사업 담당자들은 이제 겨우 그 일을 연구하기 시작했을 따름입니다. 무역정책에 관한 주요한 문제들을 적절한 자료를 수집하지도 않고 서류와 도표를 놓고 찬반 양론을 가늠질해 보지도 않은 채 경솔하게 결정한다면, 그것을 어찌 올바른 접근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싫증이 난 사람들은 단지 몇 분 만에 투표했고, 그러고는 끝이었습니다. 우리는 보다 덜 복잡한 정치문제에 대해서도 재삼재사 심사숙고했고, 결정에 이르기까지 수개월을 보낸 젓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저는 그날 병 때문에 회의에 참석하지 못한 것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고, 규칙에 대한 예외를 찾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문제는 충분히 연구되고 비중 있게 다뤄져야 하며, 성급함은 해롭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 문제에 관한 결정을 2개월 동안, 즉 다음 전원회의 때까지 연기할 것을 제안합니다. 그 기간 동안 우리는 우리의 무역정책에 관한 정보와 검증된 자료들을 수집해야 할 것입니다.

V. 울리야노프(레닌)

 

추신 : 어제 스탈린 동지와 대화하던 중에(저는 전원회의에 참석하지 못했지만, 참석했던 동지들로부터 많은 정보를 얻고자 힘썼습니다), 우연히 페트로그라드와 노보로시스크 항을 임시로 개방하자는 제안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러나 둘 모두, 극히 제한된 품목의 상품들에 한정한다 하더라도, 매우 위험한 시도라고 여겨집니다. 페트로그라드 항을 개방한다면 핀란드 국경을 넘는 아마포 밀수출이 엄청나게 늘어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전문 밀수꾼들과 싸우는 대신에 아마포 재배지의 모든 농민과 싸워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싸움에서 패배할 것이 거의 확실하며, 그것도 만회할 길 없는 패배를 당할 것입니다. 노보로시스크 항을 개방하면 신속하게 잉여곡물을 처분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시용(戰時用) 비축량이 얼마 안 되는 마당에 이것이 과연 사려 깊은 정책이겠습니까? 비축량을 증가시키기 위한 일련의 체계적인 조치들이 아직 성과를 보이지 못한 시점이 아닙니까?

따라서 다음과 같은 점들이 고려되어야 합니다. 대외 무역 독점은 러시아로의 금의 유입을 촉진시키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이제 겨우 계산이 가능해졌을 따름입니다. 어떤 상인은 불과 6개월 동안의 단 한 번의 러시아 여행을 통해 수백 퍼센트의 이윤을 얻었습니다. 그는 대외무역위원회에 지불하는 그러한 권리에 대한 대가를 25%에서 50%로 올렸습니다. 더욱이, 이제 우리는 그러한 이윤을 얻을 줄 알고 그것을 늘리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그런데 이제-역자)모든 것이 일시에 붕괴되고 모든 일이 멈춰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조만간 여러 항구들이 개방된다면 그 어떤 상인도 그러한 ‘독점’을 위해 돈을 내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명백합니다. 그러한 위험을 무릅쓰기 전에 여러 가지 점들을 심사숙고해야 하며 몇 번이고 저울질해 보아야 합니다. 게다가, 우리가 이름을 일일이 확인한 외국 상인들만이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쁘띠 부르주아지가 온통 몰려들어올 정치적 위험도 있습니다.

대외 무역의 개시와 더불어 우리는 금의 유입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주류 독점 말고는 대안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매우 윤리적인 고려가 있어야 하며, 소콜니코프는 몇 가지 실무적인 이유를 들어 그것을 반대하고 있기도 합니다.

레닌

추신 : 지금 막(오전 1시 30분) 몇몇 교역담당자들이 연기 신청서를 제출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아직 제안서를 읽지는 못했지만 진심으로 그것을 지지합니다. 그것은 단지 2개월 동안의 문제일 뿐입니다.

레닌

[『레닌전집』, 제33권, pp.375~378]

 

L. D. 트로츠키에게

트로츠키 동지,

크레스친스키의 편지를 동봉합니다. 가능한 한 빨리 당신의 의견을 알려 주십시오. 전원회의에서 독점을 위해 싸울 생각입니다.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레닌

추신 : 빨리 회답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1922. 12. 22

[『레닌전집』, 제45권, p.601]

 

레닌 동지에게

V. I,

대외 무역의 독점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것은 지상명령(至上命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대외무역의 반대자들은 사실상 그것에 대해 정면공격을 감행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우회를 통한 측면공작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한편, 대외 무역 독점 수단의 변경과 개선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독점을 집행하는 방법을 개선하는 시늉만 해서는, 그 조치들이 빗나가서 독점을 근본적으로 훼손시킬 위험이 있습니다.

오늘 아바네소프 동지가 들러서, 그가 속한 위원회가 내린 기본적인 결론에 대해 일러주었습니다. 제가 이해하기로는, 그는 대외 무역인민위원회(People's Commissariat of Foreign Trade)가 무역 독점을 직접 수행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 듯합니다. 오히려, 그는 대외 무역 위원회의 통제 아래 대규모 경제단위(신디케이트, 콘체른)가 그것을 행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스토모냐코프와 의견을 같이 하고 있음이 명백한 크레스친스키는 중요한 경제단위들(다시 한 번 말씀드리자면 신디케이트와 콘체른,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매장(賣場)들)은 거래처에 상임대표자를 두고, 그들 대표자들이 무역대표부의 지부 노릇을 해야한다고 제안하고 있습니다. 이 계획은 몇 가지 점에서 아바네소프의 계획과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나 매우 중요한 차이점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크레스친스키는 무역대표부를 기지(基地)로, 즉 공화국의 직접 교역(구매와 판매)기관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적 경제단위는 무역대표부의 지부를 통해서 운용될 것입니다. 한편, 이들 지부들은 그에 상응하는 경제단위들을 좇아서 조직됩니다. 반면에, 아바네소프는 이들 신디케이트의 대표체를 곧바로 무역대표부로서의 통제기능을 갖는 기본 무역기관으로 설정합니다.

이러한 논의를 진전시키다 보면 아마도 어떤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분간은 무역대표부를 기본으로 삼는 것이 보다 안전할 듯합니다. 하기는 제가 아바네소프 위원회의 계획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는 내일 서면으로 된 제안을 보내주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전반적인 경제활동과 연계하여 어떻게 소련의 대외 무역을 조절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가장 중요한 문제로 남아 있습니다. 무엇이 수입되어도 좋고 금지되어야 할 것은 무엇인지, 무엇이 수출될 수 있고 금지되어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누군가가 잘 알고 결정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요구되는 결정들은 법적 규제 장치나 고정된 리스트 같은 것이 아니라 전체 경제의 필요에 따라 언제든 조정될 수 있는 실제적이고 탄력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이것은 명백히 국가계획위원회(Gosplan)의 임무이어야 하며, 그것은 국가산업의 발전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문제이고, 저는 그것에 대해 몇 번 언급했던 적이 있습니다. 아바네소프 위원회는 수출입에 대한 이런 종류의 계산이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확증해 왔을 뿐입니다.

[『트로츠키 논문집』, 제2권, pp.778~780. 러시아어 번역은 편집자]

 

프룸킨 동지와 스토모냐코프 동지에게

(트로츠키의 편지 사본 재중)

병이 깊어져서 전원회의에 참가할 수 없습니다. 제가 당신들과의 관계에서 얼마나 꼴사납게, 아니 그것보다 훨씬 나쁘게 행동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저는 말하기조차 힘든 상태입니다.

오늘 트로츠키 동지로부터 봉함 편지를 받았습니다. 아마도 마지막 행에 쓰여있었던 듯한 국가계획위원회에 관한 부분만 제외하고는 모든 본질적 사항에서 그에게 동의합니다. 저는 트로츠키에게 편지를 보내 그와 의견이 같음을 알리고 병 때문에 빠질 수 밖에 없는 전원회의에서 제 입장을 옹호해 달라고 요청할 예정입니다.

제 입장에 대한 수호는 세 부분으로 나뉘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대외 무역 독점의 기본원리 수호, 그것의 완전하고도 최종적인 확인, 둘째, 적어도 반 이상의 성원이 대외 무역 인민위원회의 대표로 구성되는 특별위원회로 하여금 아바네소프가 제기한, 독점을 실현하기 위한 실제 계획을 보다 구체적으로 검토하게 하는 것. 셋째, 국가계획위원회의 임무에 관한 문제는 따로 고려해야 한다는 것. 그런데, 만일 트로츠키가 국가산업 발전의 기초 위에서 수행되는 국가계획위원회의 과업은 대외 무역인민위원회의 모든 부문의 활동이라면, 그와 저 사이에 의견이 일치되지 않는 대목은 없다고 생각됩니다.

오늘이나 내일쯤 다시 편지를 써서,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의 당면 문제의 본질에 대한 제 분명한 견해를 당신들께 밝히고자 합니다. 어쨌든 이 문제는 기본적으로 매우 중요한 문제이며, 따라서 전원회의에서 동의를 얻지 못한다면 저는 그 문제를 당대회로 이관할 작정이며, 그에 앞서 다가오는 소비에트 대회에서 우리 당의 일각에 존재하는 의견불일치를 공표할 생각입니다.

레닌

L. F에게 구술

1922. 12. 12

[트로츠키, 『스탈린 날조학파』(The Stalin School of Falsifications), pp.59~60. 철자법, 구두점은 약간 수정했음. 이 편지는 전집에 포함되어 있지 않음]

 

L. D. 트로츠키 동지에게

(프룸킨과 스토모냐코프에게 보내는 편지 사본 재중)

 

트로츠키 동지,

크레스친스키의 편지와 아바네소프의 계획에 대한 당신의 견해를 담은 편지를 받았습니다. 당신과 저는 더할 나위 없이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번에 제기된 국가계획위원회 문제에 관한 한, 저는 국가계획위원회가 모종의 행정적 권한을 가질 필요가 있겠는가에 관한 어떤 토론도 배제(또는 연기)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어쨌든 다음번 전원회의에서 당신께서, 절대적으로 대외무역 독점을 유지하고 공고화할 필요가 있다는 우리의 공통된 입장을 수호하는 일을 맡아야 한다는 것이 제 요구입니다. 지난번 전원회의가 대외무역 독점과 전적으로 배치되는 결정을 통과시켰고, 이 문제에 대한 양보는 있을 수 없기 때문에, 프룸킨과 스토모냐코프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야기 했듯이 이 문제를 당대회에 제기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러자면 다가오는 소비에트 대회에 참가할 당그룹 앞에 차이점들을 간략하게 밝힐 필요가 있습니다. 시간이 있다면 저는 그것을 쓸 생각이며, 당신께서도 그렇게 해 주신다면 매우 기쁜 일이겠습니다. 이 문제를 놓고 주저하는 것은 우리에게 전례 없는 해를 안겨주고 있으며, 반대파들의 논의는 전적으로 기구상의 결점을 비난하는 데에 집중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구란 어디든 결함이 있게 마련일진대, 기구가 불완전하다는 핑계로 독점을 포기한다면 그것은 ‘목욕물을 버리려다 아기까지 함께 내버리는’ 꼴이 될 것입니다.

레닌

1922. 12. 13

[『레닌전집』, 제45권, pp.601~602 ]

 

러시아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위원들을 위하여 J. V. 스탈린에게 보내는 편지

저는 업무 정리를 방금 마치고 이제 걱정 없이 떠날 참입니다. 또한 대외 무역 독점에 관한 제 견해를 수호하기 위한 트로츠키와의 협의를 마쳤습니다. 제가 몹시 걱정하고 있는 것이 딱 하나 있는데, 그것은 소비에트 대회에서 연설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화요일에 의사를 불러 진찰을 받고, 혹시 제가 연설을 할 수 있을지 협의할 작정입니다. 그 기회를 놓치는 것은 더 이상 어떻게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몹시 안타까운 일입니다. 연설 개요는 이미 며칠 전에 써 놓았습니다. 그러므로 저 대신에 몇몇 다른 연설자를 준비시키되, 평소보다 훨씬 짧은 약 45분가량의 개인 연설을 제가 직접 하게 될 가능성을 수요일까지는 열어 두셨으면 합니다. 제가 연설을 한다고 해서 대리인(당신이 그것을 누구에게 위임하든)이 연설을 못하게 될 리도 없겠지만, 그래도 그렇게 하는 것이 정치적으로든 개인적으로든 유용하리라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한다면 큰 동요가 야기될 소지가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 유의해 주시고, 대회 개최가 더 연기되겠거든 제 비서를 통해 곧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레닌

1922. 12. 15

저는 대외 무역 독점 문제의 해결을 조금이라도 지연시키는 것에 단호히 반대합니다. 만에 하나, 도대체 어떤 이유로든지(그 문제에 대한 결정에 제가 참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제안을 포함하여) 차기 전원회의까지 그 문제의 해결을 미룬다는 발상이 제기된다면, 저는 그것에 더할 나위 없이 단호하게 반대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 자신은 물론 트로츠키 역시 제 견해를 옹호할 수 있으리라고 제가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이유이고, 두 번째 이유는 당신의 발언과 지노비에프의 발언, 그리고 소문으로는 카메네프의 발언 역시 어떤 중앙위원들이 벌써 자기들의 처음 견해를 바꾸었다는 점을 확언해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 극도로 중요한 문제에 대한 의결을 조금이라도 주저하는 행위는 결단코 용납될 수 없는, 그 어떤 사업도 좌절시킬 수 있는 처사라는 것입니다.

레닌

1922년 12월 15일

[『레닌전집』, 제45권, pp.602~603]

 

L. D. 트로츠키에게

 

트로츠키 동지,

우리는 완전한 합의에 도달했다고 생각합니다. 전원회의에서 우리의 연대를 선언하시기 바랍니다. 10월에 반대표를 던졌던 몇몇 사람들이 지금은 부분적으로 또는 완전히 우리 편으로 돌아섰으니, 우리의 결정이 통과되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몇 가지 이유들 때문에 우리의 결정이 통과되지 않는다면 소비에트 대회의 그룹에 요청하셔야 하고, 당대회에 그 문제를 제기하겠노라고 선언하셔야 합니다.

그럴 경우, 제게 연락해 주십시오. 제 성명서를 보내 드리겠습니다.

레닌

추신 : 만약 이 문제가 이번 전원회의 의제에서 배제된다면(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며, 물론 당신께서는 우리 공동의 대표자로서 가능한 한 강력하게 그것에 항의하실 것으로 믿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이 문제가 전소비에트 대회의 그룹에 제기되도록 하셔야 하며 당대회에 제기되도록 요구하셔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의 망설임은 절대로 용납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전원회의가 끝날 때까지 제가 당신에게 보낸 모든 자료들을 보관하십시오.

[『레닌전집』,제45권, p.604]

 

L. D. 트로츠키에게

 

트로츠키 동지,

오늘 받은 프룸킨의 편지를 동봉합니다. 저 또한 이 문제를 이번으로 끝내버리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 문제로 인해 몹시 걱정하고 있고 그것 때문에 제 건강이 악화되지 않을까 염려하고 계시다면, 그것은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결정이 지연되어 가장 기본적인 문제들 중의 하나인 우리의 정책이 매우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있는 것을 오히려 더 크게 걱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당신에게 동봉된 편지에 주의를 기울이시도록 요청하는 이유이며, 이 문제에 관하여 즉각적인 토론을 벌이는 것을 지지해 주십사 하고 요청하는 이유입니다. 만약 우리가 패배할 위험이 있다면, 대회 후에 패배하기보다는 당대회 전에 패배해서 대회의 그룹에 즉시 문제를 제기할 수 있게 되는 편이 훨씬 더 낫다고 확신합니다. 지금 즉시 독점을 공고히 하는 결정을 통과시키되 곧바로 이 문제를 당대회에 상정해 조정을 한다는 절충안이라면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요. 저는, 우리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나 대의(大義)를 위해서나, 우리가 어떤 타협이든 다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고는 믿지 않습니다.

레닌

1922. 12. 15

[『레닌전집』, 제45권, pp.604~605]

 

L. D. 트로츠키에게

 

어찌 보면, 단 한 방의 총도 쏘지 않고 그저 시늉만으로도 우리의 입장을 관철시킬 수 있었던 듯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가 멈추지 말고 공격을 계속해야 한다고 제안하는 바입니다. 이를 위해 대외무역을 공고히 하고 그 실행을 개선하기 위한 조치들과 관련된 문제를 당대회에 제기하는 제안을 관철시켜야 한다고 제안합니다. 이것은 소비에트 대회의 그룹에서 공표되어야 합니다. 당신이 이에 반대하지 않을 것이며, 그룹에 보고서를 제출하리라 믿습니다.

N. 레닌

1922. 12. 21

[『레닌전집』, 제45권, p.606]





 

제 6 장 민족문제

배경

민족 문제에 대한 논쟁은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을 수립하는 계획과, 스탈린과 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원회 사이의 투쟁에 집중되었다.

일찍이 제정 러시아의 한 주(州)였던 그루지야는 서쪽으로는 흑해에, 북쪽으로는 코카서스 산맥에 둘러싸여 있다. 1918년부터 1921년까지는 멘셰비키 치하에 있었고, 영국군과 프랑스군의 전진기지 역할을 했다. 1921년 2월 적군이 그루지야를 공격하여 그루지야 볼셰비키의 도움으로 볼셰비키 지배를 확립하였다. 민족문제 인민위원 스탈린과 코카서스 전선 군 사령관 오르조니키제의 지도에 따라 움직이던 정치국은, 대중의 강력한 지지를 예상하고서 봉기한 볼셰비키를 지원하기 위한 침공을 승인했다. 그러나 현실은 조금 달라서, 적군은 강력한 저항에 직면했다.

따라서 이전에 억압받던 민족으로서 그루지야인의 권리를 엄밀히 존중함으로써 자신들의 통치에 정통성을 부여받으려는 그 지방 볼셰비키와 스탈린을 배경으로 총독처럼 행동하는 오르조니키제 사이의 관계는 처음부터 긴장된 것이었다.

소비에트 연방을 수립하려는 계획에 이르러서 그 차이는 극에 달하였다. 스탈린의 자치(공화국)화 계획은 비러시아계 공화국들이 모스크바에 귀속되는, 중앙집권제로 통제되는 러시아소비에트연방사회주의공화국(이화 RSFSR)에 먼저 “편입”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루지야는 예전에 억압받던 민족의 자결권을 침해하는 이 계획에 대한 저항의 중심지가 되었다.

제6장의 첫 번째 문서는 “자치(공화국)화”를 비판하면서 그것에 대비시켜 모든 공화국 사이의 평등에 기초한 연방을 제안하는 1922년 9월 26일자 레닌의 편지이다.

두 번째 문서, 즉 “대러시아 국수주의를 끝장내는 전쟁”을 선언하고 연방 중앙집행위원회 의장직의 윤번제 실시를 요구하는, 카메네프에게 보낸 레닌의 편지의 구체적인 동기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 때쯤 레닌은 냉대에 대한 그루지야인들의 불만을 잘 알고 있었으며, 비록 논쟁에서 아직도 스탈린과 오르조니키제를 지지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랴 하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즉, 러시아인 또는 러시아화된 지도부의 둔감함이 논쟁을 악화시키고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여기서 소개하는 세 번째 문서는 레닌이 스탈린과 그 일파에 대해 가장 강력하게 비난한 문서이다. 9월에서와 같은 외교적인 언사는 없어졌다. 이제는 더 이상, 스탈린은 “지나치게 서두르는” 것이 아닌 것으로 되었고, 스탈린에 대한 그루지야인 반대파들의 지도자인 므지바니는 “분리주의적 감상”의 혐의를 받지 않게 되었다. 자치(공화국)화 계획과 그루지야 상황에 대한 처리방식이 이제는 “진정한 대(大)러시아 민족주의 켐페인”으로 간주되었으며, 레닌은 그에 대해 스탈린·오르조니키제·제르진스키에게 책임을 묻고 있다. 레닌의 비서 포티에바에 따르면, 레닌은 이 편지를 공표하려 했으나 그것을 쓴 직후에 생각을 바꾸었다. (The Stalin School of Falsification, p.70을 보라.) 그는 편지의 사본을 3월 5일자로 된 쪽지와 함께 트로츠키에게 보냈고, 므지바니와 그 밖의 다른 그루지야인 반대파들에게 보낸 3월 6일자의 편지에서 이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는 그가 4월의 제12차 당대회에 대비해 스탈린에 대항해 준비하고 있던 “폭탄”의 일부분이었다. 트로츠키는 당사(黨史) 편집국에 보낸 편지(1927.10)에서 그 문서의 몇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 거기에서 그는 편지의 전문(全文)이 1926년 6월의 당 전원회의 속기록에 포함되어 있으나(The Stalin School of Falsification, p.65를 보라), 1937년 The Stalin School of Falsification의 영어판이 출판될 때 자신이 그 편지의 사본을 가지고 있지는 못했다고 썼다. 그리하여 완전한 원문이 햇빛을 보게 된 것은 1956년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격하운동”의 일부로서 그것이 출판된 이후였다.

그밖에도 레닌의 마지막 정치행위였던 3월 5일과 6일의 두 개의 짧은 편지와 트로츠키의 논설 “민족 문제와 청년 당원의 교육 문제에 대하여”를 실었다. 이 논설은 “당에 관한 소고小考”(“Thoughts on the Party”)라는 연재물의 일부로서 1923년 3월 20일자 프라우다에 실렸던 것이다. 이 연재물의 처음 두 논설은 트로츠키의 연설문인 “제12차 당대회의 과제”와 함께 “러시아공산당 제12차 당대회의 과제”라는 제목의 소책자로 재출판되었고, 대회 이전에 15,000부가 간행되었다. “제12차 당대회의 과제”란 제목으로 출판된 다른 논설과 마찬가지로, 이 논설은 레닌의 정치활동의 마지막 수개월 동안 레닌과 트로츠키가 도달했던 공동의 계획을 대중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논문은 일반 평당원들과 광범위한 대중에게 그루지야에 대한 소비에트 정책의 기본 골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 “우리에게 설득력을 가지는 유일한 정책은 과거에는 너무나 자주 모멸당해 왔던, 그루지야 농민의 민족문화에 대한 관심, 민족 감정, 민족적 자존심이 이제는 객관적 상황 속에서 충족될 수 있음을 그들에게 행동으로 보여 주는 정책일 것입니다.” 트로츠키는 대러시아 국수주의에 맞서기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요구한다 : “민족 문제에 관해 당 전체가 재교육 과정과 청년 당원을 위한 입문 과정을 의심할 나위 없이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은, 수렁에 빠질 위험을 무릅쓰고 민족 문제를 무시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적절한 시기에, 매우 엄격한 프로그램에 따라서, 시행되어야 합니다.”(강조는 트로츠키 자신의 것)

불행하게도, 새롭게 부상하고 있던 관료 집단은 다른 과정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여기에 포함된 마지막 두 편지를 쓴 후 레닌은 침묵에 빠졌다. 스탈린·지노비에프·카메네프 3인조는 트로츠키가 제기한 화해에 동의했고, 당대회에서 다툼은 일어나지 않았다. 스탈린은 타락한 타협을 했고, 그러고 나서는 레닌이 이미 예견했던 바와 같이 그것을 배반했다. 1923년 10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일반 평당원들 사이에서 투쟁이 시작됐고, 트로츠키는 좌익반대파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러시아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정치국원들을 위하여

L.B. 카메네프에게 보내는 편지

1922년 9월 29일

카메네프 동지! 당신은 독립된 공화국들을 RSFSR(러시아 사회주의연방소비에트공화국 : Russian Socialist Federated Soviet Republic)로 통합하는 데 대한 스탈린의 위원회의 결의안을 그로부터 이미 받았으리라 믿습니다.

만약 받지 못했다면, 즉시 비서에게 가져오게 하여 읽어 보십시오. 저는 어제 소콜니코프와, 오늘은 스탈린과 그것에 대해 토론했습니다. 내일은 므지바니(“분리주의적” 감상가로 의심받고 있는 그루지야 출신 공산당원)를 만날 것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이 문제는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스탈린은 너무 서두르고 있습니다. 당신은 한때 이 문제를 담당하고자 했었고, 그에 대해 상당히 연구한 바 있기 때문에 이 문제를 더욱 확실하고 더욱 철저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지노비에프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스탈린은 이미 한 가지를 양보하는 데 동의했습니다. 그것은 1절에서 “RSFSR로 편입”이라는 표현 대신에 “유럽·아시아 소비에트공화국 연방내에서 RSFSR과 형식상 연합”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입니다.

이러한 양보의 정신은 명백합니다. 우리 스스로를 우크라이나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 및 그 밖의 다른 공화국들과 법률상 동등하게 보고, 그들과 함께 “유럽·아시아 소비에트공화국연방”이라는 새로운 연방, 새로운 연합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2절도 또한 수정되어야 합니다. “유럽·아시아 소비에트공화국연방의 전연방 중앙집행위원회”를 창설하여 RSFSR의 중앙집행위원회와 나란히 회합을 갖도록 하는 것입니다.

앞의 것을 1주일에 1회, 후자의 것도 1주일에 1회 연다면(2주일에 1회일지라도), 이것을 조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독립”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이롭게 하거나 그 독립성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평등한 권리를 가진 공화국들의 연방이라는 새로운 단계를 확립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2절의 둘째 부분은 현재 그대로 둘 수 있습니다. 즉, 모든 불만(STO[노동과 방위 위원회 Council of Labor and Defence]와 SNK[인민위원회의]의 결정에 대한)은 집행이 유보됨 없이 전연방 중앙집행위원회에 소청될 것이다(RSFSR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통용된다)라는 부분입니다.

3절은 편집상의 수정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즉, “[외교, 대외무역, 방위, 통신, 공화국들의 우편과 전신··· 등의 공공사업]은 모스크바에 본부를 둔 전연방 인민위원회의로 통합될 것이며, 그에 상응하는 RSFSR 인민위원회의는 유럽·아시아 공화국연방에 속하는 모든 공화국들에 소규모 직원을 가진 공식 대표부를 둘 것이다.”

3절의 두 번째 부분은 다음과 같이 하는 것이 보다 공정할 것입니다. “이들 대표자들은 유럽·아시아 소비에트공화국연방의 각 공화국 중앙집행위원회와 합의를 거쳐 임명될 것이다.”

셋째 부분, [“외교 및 대외무역 인민위원회에 관련 공화국의 대표자가 참석하는 것은 유용할 것이다”]는 좀더 신중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유용하다”를 “의무적이다”로 바꿔야 하지 않을까요? 또는 질의의 형식을 취하되 특별히 긴급한 중요성을 갖는 문제에 대해서만은 질의 없이 결정을 받아들인다는 조건부 의무조항을 삽입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4절, [“공화국의 재정, 식량, 노동 및 경제 인민위원회는 RSFSR의 관련 위원회의 지시에 절대 복종한다”]는 아마도 “각 공화국 중앙집행위원회의 동의에 의해”를 첨가해야 하지 않을까요?

5절, [“각 공화국의 기타 인민위원회는 독립된 것으로 간주된다”]는 “순수히 협의적 성격을 갖는(또는 단지 협의적 성격의) 연석회의 또는 총회 설치와 함께”를 첨가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첫째·둘째 부록에 있는 몇 가지 사항도 위의 변경에 따라 바뀌어야 합니다.

스탈린은 제가 도착할 때까지 중앙위원회 정치국에 이 결의안을 제출하는 것을 연기하겠다고 동의했습니다. 저는 10월 2일 월요일에 도착할 것입니다. 아침에 두 시간 또는 12시에서 2시 사이에, 또는 필요하다면 저녁 5시에서 7시 사이에 또는 6시에서 8시 사이에 리코프와 함께 당신을 만나고 싶습니다.

이것이 저의 첫 번째 제안입니다. 저는 므지바니와 그 밖의 다른 동지들과의 토론을 기초로 하여 그것을 보충하거나 수정할 것입니다. 당신도 그렇게 해 주시고 답장해 주시기 바랍니다.

당신의 레닌

추신 : 모든 정치국원들에게 사본을 보내 주십시오

[레닌, 전집(Sochineniya), 제5판, 제45권 (모스크바:Izdatelstvo Politcheskoi Literatury, 1970), pp.211~213. 영어판 편집자가 러시아어로부터 번역함. 이 문서는 영문판 전집에는 빠져있다. 스탈린의 “자치공화국화 계획”의 본문은 Lewin의 『레닌의 마지막 투쟁』, pp.146~147에 있다. 레닌의 말을 분명히 하기 위해 적절한 구절을 괄호 속에 보충해 넣었다.]

 

대러시아 국수주의와의 투쟁에 관해 L.B. 카메네프에게 보내는 메모

카메네프 동지 :

저는 대러시아 국수주의를 끝장 내자는 전쟁을 선언합니다. 저는 이 몹쓸 썩은 치아를 빼버리고 건강한 치아로 그것을 먹어치울 것입니다.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그루지야인 등등이

교대로 연방 중앙집행위원회의 의장직을 맡아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합니다.

강력히!

당신의 레닌

1922. 10.6

[레닌, 『전집』, 제33권, p.372. 그리고 Sochinenya 제45권, p.214. 영어판의 번역은 틀린데가 많다. 제목에서 L.B. 카메네프 대신에 “정치국”으로 바뀌어져 있고, 첫머리의 인사말이 생략되어 있다. 또한 Velikorusskii shocinizm(대러시아 국수주의)이 “지배 민족의 국수주의(dominant nation chauvinism)”로 되어있다.]

 

민족 문제 또는 자치공화국화 문제에 대해

저는 러시아의 노동자들에 대해 몹시 태만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공식적으로는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 수립에 관한 문제로 불리는 것으로 보이는 악명 높은 자치공화국화 문제에 정력적이고 결단력 있게 개입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지난 여름 이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저는 와병 중에 있었습니다. 가을까지는 몸을 회복하여 10월과 12월의 전원회의에서는 이 문제에 관여할 수 있기를 너무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10월의 전원회의(이 문제가 상정되었을 때인)나 12월의 회의에 참석할 수조차 없었고, 따라서 저는 이 문제에 대해 거의 전적으로 관여할 수 없었습니다.

제르진스키 동지와 잠시 이야기할 시간을 가졌을 뿐인데, 그는 코카서스에서 돌아와 이 문제가 그루지야에서 어떤 상태에 있는지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저는 또한 지노비에프 동지와 몇 마디를 나눌 수 있었는데, 그에게 이 문제에 대한 저의 우려를 표명했습니다. 중앙위원회가 그루지야 사태를 “조사하기” 위해 파견한 위원회의 위원장이었던 제르진스키 동지의 이야기를 듣고 매우 심각한 우려만 들 뿐이었습니다. 제르진스키 동지가 저에게 전한 대로, 오르조니키제가 물리적인 폭력을 사용할 정도로 사태가 그렇게 극단적인 지경에 이르렀다면 우리 자신이 어떤 혼란에 처하게 되었는지를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명백히 “자치공화국화”라는 문제는 전적으로, 그리고 근본적으로 잘못되었고, 시기적으로도 나빴습니다.

흔히들 통합된 기관이 필요했다고 얘기합니다. 그러한 확신은 어디로부터 나오는 것입니까? 저의 일기의 앞 부분 중 한 곳에서 지적했듯이, 제정으로부터 인계받아서 소비에트 기름을 조금 부은 바로 그 똑같은 러시아 기구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기관이 우리 자신의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 때까지 그 조치는 얼마간 연기되었어야 한다는 데에는 의심이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서는 확실히 우리는 반대의 것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즉, 사실 우리의 것이라고 여겼던 기관은 아직도 우리에게는 완전히 낯선 것입니다. 그것은 부르주아와 짜르주의자의 뒤범벅이며, 다른 나라들의 도움이 없이 지난 5년간에 그것을 제거할 가능성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전쟁과 기아에 대한 투쟁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바쁘게 보냈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정당화시켰던 “연방으로부터의 탈퇴의 자유”는 단지 휴지조각에 불과할 것이며, 전형적인 러시아 관료가 그러하듯이 실제로는 악당이며 폭군인 진정으로 러시아적인 남자, 즉 그 대(大)러시아 국수주의자(스탈린을 가리킴-역자)의 맹공격으로부터 비러시아인을 방어할 수 없으리라는 점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소비에트와 소비에트화된 노동자들 중의 극소수만이 우유에 빠진 파리처럼 대러시아 국수주의 쓰레기의 물살에 휩쓸릴 것이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 조치를 옹호하기 위해, 민족 심리 및 민족 교육과 직접적으로 관계된 인민위원회가 별개의 분리된 기구로 설치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이들 인민위원회가 완전히 독립적으로 될 수 있습니까? 그리고 둘째로, 비러시아인들이 그 참으로 러시아적인 골목대장(bully)으로부터 진정한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조치를 취하는 데 충분히 주의를 기울였습니까?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고 또 했어야 했지만 그런 조치를 취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스탈린의 성급함과 순수 행정에 대한 심취, 그리고 소위 악명 높은 “민족주의적 사회주의”에 품은 적의가 여기서 치명적인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으로 정치에서 악의를 품는 것처럼 천박한 역할을 하는 것은 없습니다.

저는 또한, “민족주의적 사회주의자들”의 “죄악”을 조사하기 위해 코카서스에 갔던 제르진스키 동지가 거기서 참으로 러시아적인 사고방식으로 두각을 나타냈으며(다른 민족 출신의 러시아화된 사람들이 이러한 러시아인적 기질을 지나치게 표줄시킨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그의 조사위원회 전체가 얼마나 공정했는가는 오르조니키제의 거칠기 짝이 없는 취급방식에 의해 충분히 예시되었다는 점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어떤 도발이나 모욕을 당했다 해도 그러한 러시아식의 학대를 정당화할 수 없으며, 제르진스키 동지도 그에 대해 태평스러운 태도를 취함으로써 변명의 여지 없이 유죄라고 생각합니다.

코카서스의 모든 공민들에게 오르조니키제는 권력 그 자체였습니다. 오르조니키제는 그와 제르진스키가 말한 바처럼 그렇게 흥분할 아무런 권리도 없었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오르조니키제는 “정치범”으로 비난받는 사람에 대하여는 말할 나위도 없고 어떤 일반인에게도 요구될 수 없는 자제심을 가지고 행동했어야 했습니다. 사실 그들 민족주의적 사회주의자들은 정치범으로 비난받은 시민들이며, 비난의 표현들이 하도 심한 나머지 비난이란 말 말고는 달리 어떻게 묘사될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국제주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라는 중요한 원칙상의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레닌

1922. 12.30.

M. V.가 기록.

 

메모는 다음과 같이 계속된다.

 

1922. 12. 31.

저는 이미 민족 문제에 관한 저술 속에서 일반적으로 민족 문제에 대한 추상적 표현은 전혀 불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억압 민족의 민족주의와 피억압 민족의 민족주의, 큰 민족의 민족주의와 작은 민족의 민족주의는 반드시 구별되어야 합니다.

두 번째 부류의 민족주의(피억압 민족의 민족주의-역자)의 관점에서 볼 때, 큰 민족의 국민인 우리는 역사적으로 거의 언제나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폭력 사용의 과오를 범해 왔습니다. 더욱이 우리는 수차례에 걸쳐 사전예고도 없이 폭력과 무례행위를 저질렀습니다. 비러시아인들이 어떻게 취급되었는가는 저의 볼가(Volga)의 추억을 상기해 보면 잘 알수 있을 것입니다. 참으로 폴란드인들은 언제나 “뽈랴치스카(Polychiska : 들에 거주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폴란드를 야만족으로 경멸하는 말-역자 주)”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타타르인은 “프린스(Prince)”로, 우크라이나인은 “호홀스(Khokhols)”로, 그루지야인과 다른 코카서스인들은 언제나 “카프카스인(Kapkasian)”으로 불렸습니다.

그것이 바로, 억압 민족 혹은 소위 “위대한” 민족(비록 폭력행위에 있어서만, 폭력배로서만 위대할지라도)의 입장에서 본 국제주의는 민족간의 형식적 평등의 준수(遵守)만이 아니라 실제로 행해지는 불평등을 벌충하기 위한 억압 민족과 위대한 민족에 대한 불평등에 기초해 있는 이유입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민족 문제에 대해 진정한 프롤레타리아적 태도를 취할 수 없으며, 근본적으로는 아직도 쁘띠부르주아적 관점을 지니고 있는 것이고, 부르주아적 관점으로 빠져들고 말 것이 확실합니다.

프롤레타리아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프롤레타리아에게는 비러시아인들이 프롤레타리아 계급 투쟁을 한껏 신뢰하고 있음을 확신하는 것이 중요할 뿐만 아니라 절대적으로 필수적인 것입니다. 이것을 확보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합니까? 단지 형식적인 평등만으로는 안 됩니다.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태도로써, 양보 조치로써, 과거에 “지배 민족”의 정부가 비러시아인에게 가했던 불신과 의심과 모욕에 대한 보상을 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

이 점을 볼셰비키와 공산주의자들에게 더 상세히 설명하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그루지야 민족 문제에 관한 현상황에서 우리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문제로서 진정으로 프롤레타리아적인 태도는 철저한 주의와 사려깊음과 중재를 받아들일 자세를 요구하고 있는 전형적인 경우에 처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제의 이러한 측면을 무시하거나 “민족주의적 사회주의”라는 비난을 아무데나 내뱉어 버리는 그 그루지야인(사실, 그 자신이 진정으로 그리고 참으로 “민족주의적 사회주의자”이며 심지어는 통속적인 대러시아적 골목대장입니다)은 실질적으로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연대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민족적 불평등만큼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단결의 강화와 발전을 방해하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감정이 상한 민족”은, 설사 무관심이나 농담이라 하더라도 평등감과 그러한 평등에 대한 침해, 그리고 같은 프롤레타리아 동료들에 의해 저질러진 평등에 대한 침해에 대해 다른 어떤 것에 대해서보다도 민감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 경우에 소수 민족에 대해 오히려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양보와 관용이 차라리 더 나은 이유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경우에 프롤레타리아의 연대, 따라서 프롤레타리아 계급 투쟁의 근본적인 이익을 위해서는, 민족문제에 대해 형식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억압(大) 민족에 대한 피억압(小) 민족의 프롤레타리아의 구체적인 태도를 항상 고려해야만 하는 이유입니다.

레닌

M. V.가 기록

1922. 12. 31.

 

편지의 계속

 

1922. 12. 31.

현재의 상황에서 어떤 실제적인 조치를 취해야 하겠습니까?

첫째로,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을 유지·강화시켜야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어떤 의심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조치는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세계 부르주아지에 대한 세계 공산주의 프롤레타리아의 투쟁과 부르주아의 음모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것입니다.

둘째로,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은 그 외교 기관 때문에 존속되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이 기관은 우리 국가기관의 예외적인 구성요소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구 제정(帝政) 기관에 있던 어떤 영향력 있는 개인도 그 기관에 들어오게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조금이라도 권위를 행사하는 부서는 모두 공산당원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사회주의 공화국들의 연방외교기구는 그 밖에 다른 인민위원회들이 사용해야 했던 기구보다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구 제정 및 부르주아·쁘띠부르주아 요소들이 숙정된, 신뢰할 만한 공산주의 기구라는 평판을 이미 받았던 것입니다(라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셋째로, 오르조니키제 동지에 대한 시범적인 징계가 내려져야 하며(그가 제 개인적인 친구이며 외국에서 함께 일했던 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만큼 더 유감스럽게 생각하며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제르진스키 위원회가 수집한 모든 자료들에 대한 조사가 완료되어, 그것들이 포함하고 있음에 틀림없는 수많은 편파적 판단들과 부당한 대우들이 수정되어야 합니다. 이 모든, 실로 대러시아 민족주의 캠페인의 정치적 책임이 스탈린과 제르진스키에게 있음은 물론입니다.

넷째로, 우리 연방의 비러시아 공화국에서 민족 언어를 사용하는 데 대해서 엄격하기 이를 데 없는 규정이 채택되어야 하며, 이러한 규정은 특별히 주의 깊게 점검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기관이 현상태에 머물러 있는 한 공공철도 사업의 통합, 재정 업무의 통합 등등을 빌미로 대대적인 러시아적 횡포가 행해지고 있으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들 횡포에 대한 투쟁을 위해 특별한 창의성이 필요하며, 이 투쟁을 수행하는 사람들에게는 각별한 진지함이 요구된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세세한 법 조항이 요구될 것이며, 문제의 공화국에 살고 있는 민족만이 이것을 성공적으로 작성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작업의 결과로 다음번 소비에트 대회에서 우리가 일보 후퇴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미리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즉,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은 단지 국방과 외교를 담당하고, 그 밖의 다른 모든 분야에서는 각각의 인민위원회에 완전한 독립성을 되돌려 주게 될지 예단(豫斷)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모스크바와 다른 중심 도시에서는 당의 권한이 아주 신중하고 공명정대하게 운용된다는 전제 하에 인민위원회의 분권화와 업무 조정의 부재는 당의 권위에 의해 충분히 보완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민족적 기관들과 러시아적 기관들 사이의 통일성의 결여로 인해 우리 국가에 미치게 될 해악은, 우리뿐만 아니라 전체 인터내셔널, 그리고 머지않은 장래에 역사의 무대에서 우리를 뒤따르게 될 수억의 아시아 인민들과 전세계 인민들에게 끼칠 해악에 비해서는 오히려 훨씬 작은 것입니다. 동양이 이제 막 깨어나서 역사의 무대로 등단하려는 이 때, 아주 미미한 것이라 할지라도 비러시아 민족들에 대한 우리의 조야하고 부당한 처사 때문에 우리가 아시아의 민족들로부터 신뢰를 잃게 된다면, 그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기회주의가 될 것입니다. 자본주의 세계를 수호하고 있는 서방의 제국주의자들에 대항하여 재결집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있을 수 없으며, 제가 그것에 대한 저의 무조건적인 승인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하는 것이 불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비록 하찮은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피억압 민족에 대해 제국주의적 태도에 빠져듦으로써 우리의 근본적 성실성과 반제국주의 투쟁에 대한 우리의 원칙상의 옹호를 손상시키게 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그러나 세계사의 미래는 제국주의에 의해 억압받던 피억압 인민들이 각성하여 끝내 일어나서 해방을 향한 멀고 험한 투쟁을 단호히 시작하는 바로 그 날이 될 것입니다.

레닌

1922. 12. 31.

M. V.에 의해 기록됨.

[레닌, 『전집』, 제36권, pp.605~611.]

 

L.D. 트로츠키에게

극비 사신(私信)

친애하는 트로츠키 동지 :

당신이 당 중앙위원회에서 그루지야인의 입장을 옹호할 임무를 맡아야 한다는 것이 저의 간절한 요청입니다. 지금 스탈린과 제르진스키는 그루지야인의 입장을 “박해”하고 있으며, 따라서 저는 그들이 공명정대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정반대라 생각합니다. 당신이 이 임무를 맡는다면 저는 안심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이유로든 당신이 그렇게 하기를 거절한다면, 그 동안 제게서 받은 모든 자료들을 돌려보내 주십시오. 그러면 당신이 받아들이지 않는 표시로 알겠습니다.

가장 동지적인 인사와 함께

레닌

1923. 3. 5.

[레닌, 『전집』, 제45권, pp.607.]

 

P.G 므지바니, F.Y 마하라제, 그 밖의 다른 동지들에게

극비

트로츠키 및 카메네프 동지에게 사본 보냄

동지들 :

저는 진심으로 당신들의 입장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르조니키제의 무례함과, 스탈린과 제르진스키의 묵계에 대해 분개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에게 보내는 편지와 연설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삼가 레닌 드림.

1923. 3. 6.

[레닌, 『전집』, 제45권, pp.608.]

 

당에 관한 소고 : 민족 문제와 청년 당원의 교육 문제에 대하여

오래전에 괴테는 낡은 진리는 계속해서 새롭게 정화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각 개인, 당 그리고 모든 계급에게 적용됩니다. 우리 당은 스스로 새롭게 거듭나야 합니다. 즉, 국가 발전 계획에 대해 새로이 사고하고, 실천적 경험 속에서 의식적으로 그것을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 당의 국내 정책과 대외정책은 모두 2개의 기본 축, 즉 서유럽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계급운동과 동양의 혁명적 민족운동에 의해 결정됩니다. 청년 당원의─사실은 당 전체의─교육과 전세계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실제적 과정을 강력하고 생생하게 연결지어 나가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서는 이미 밝힌 바 있습니다.(개인에 대한 교육과 마찬가지로, 당에 대한 교육도 결코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우리는 배웁니다.) 여기서 민족 문제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당의 방향성과 자기교육을 위해 적잖이 유용한 정치적 훈련이 된다는 것을 강조해 두고자 합니다. “적잖이”라고 말하는 것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습니다. 결국 서유럽에서 진행되고 있는 투쟁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투쟁인 데 반해, 동양에서는, 일반적으로, 문제는 농민이 지배적 다수인 민족을 외국의 멍에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과업입니다. 물론 추상적으로 생각하면 이들 두 개의 운동은 상이한 사회발전단계에 속합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이들은 같이 연결된 것이며, 단일한 강력한 적─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의 두 측면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민족 혁명 부분의 엄청난 중요성과 폭발력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영원히는 아닐지라도 긴 세월 동안 서유럽의 혁명운동 및 그와 함께 우리 자신에 대한 신뢰를 절망적으로 손상시킬 위험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혁명의 경험으로부터 우리는 프롤레타리아와 농민의 올바른 관계, 즉 그들 계급의 역량과 전세계적인 혁명운동의 발전과정에 조응하는 그런 관계의 중요성을 완전히 파악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조건에서도 연대(smychka)라는 개념을 적용시키는 것을 배웠는데, 이는 결코 우연적인 것이 아닙니다─때때로 아주 부적절한 곳에서도 우리가 이 개념을 적용시켜 왔다는 것도 인정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본적인 문제를 완전히 파악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정부가 까닭없이 노동자와 농민의 정부라 불리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혁명이 성공할 것인가의 여부가 프롤레타리아와 농민의 올바른 동맹관계에 달려 있는 문제라면, 세계 혁명의 성공여부는 무엇보다도 서유럽 프롤레타리아와 동양의 민족혁명적 농민과의 올바른 연대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러시아는 프롤레타리아의 서구와 농민의 동양과의 사이의 거대한 접합점인 동시에 실험장입니다.

그러나 러시아 자체에서는, 프롤레타리아와 농민 사이의 관계 문제는 전혀 동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문제의 한 측면은 대러시아 프롤레타리아와 대러시아 농민 사이의 관계입니다. 여기서 문제는 순전히 계급적 내용에 있습니다. 이것은 과제를 추상시키고 단순화시킴으로써 그 해결을 쉽게 만듭니다. 그러나 우리 연방 국가에서 주역을 맡고 있는 대러시아 프롤레타리아와, 아제르바이잔·투르키스탄·그루지야·우크라이나 농민 사이의 관계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옛날에 억압받던 “변경지대”에서는 모든 사회적·계급적·경제적·행정적·문화적 문제들이 민족적 프리즘을 통해 첨예하게 굴절되어 나타납니다. 그곳에서 프롤레타리아와 농민의 불화(지난 수년간 우리가 적잖이 보아 왔듯이)는 불가피하게 민족적 색채를 띠고 있습니다. 이것은 또한 예전에 억압받던 민족의 프롤레타리아에게도 상당한 정도로 적용됩니다. 모스크바나 페트로그라드에서 보면, 중앙과 지방, 도시와 농촌, 섬유 노동자와 금속 노동자들 사이의 단순하고 실무적인 갈등으로 이해되곤 하는 것들이, 그루지야, 아제르바이잔, 심지어는 우크라이나에서는 “막강한 권력”의 모스크바와 작고 보다 약한 민족의 요구 사이의 갈등이라는 형태를 띨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사실 그대로이며, 또 다른 경우에는 사실로 보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임무는 첫째로, 그것이 사실이 되는 것을 막는 일이며, 둘째로 사실처럼 보이는 것을 막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법과 행정적인 수단, 무엇보다도 당적인 수단을 써서,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완수해야만 하는 매우 중대한 임무입니다.

농민에 대한 잘못된 정책이 가져올 위험스러운 결과는 어떤 것입니까? 농민이 프롤레타리아에 의해 지도받기를 그만두고, 부르주아지의 지도력 아래로 빠져들 것이라는 사실에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위험은 제정으로부터 억압받던 작고 후진적인 민족의 농민 대중(그리고 상당한 정도의, 아직 미성숙하고 유약한 프롤레타리아까지도 포함하여)의 문제일 때에는 열 배나 더 가중됩니다. 각 계급들 사이의 민족적 연계도 또한 연대이며, 그것은 종종 역사상 매우 강력하고 완강한 연대로서 그 모습을 드러내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루지야 멘셰비키, 우크라이나의 페틀류라 파, 아르메니아의 다쉬나크 당원들(Dashnaks), 아제르바이잔의 무사바트 당원, 그 외 다른 당파들에 의해 흔히 악용되어 왔던, 고대로부터의 원한을 가진 인민들의 민족적 요구에 대해 우리가 올바르고 정중하며 예의바른 태도를 취함으로써 그 당파들을 하찮은 존재로 전락시켰습니다. 반대로 전에 억압받던 민족의 완전하고 무조건적인 신뢰를 획득하는 것의 거대한 역사적 중요성에 대한 몰이해와 불충분한 이해는, 토착 노동 대중의 모든 요구, 모든 원한과 모든 불만이 민족적 저항의 색채를 띠게 할 것입니다. 그러한 기초 위에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는 부르주아와 노동자 사이의 강한 “연대”를 창조했고, 더 정확히는 재창조했으며, 혁명에 대항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했습니다.

노동자 계급의 독재는 역사상 처음으로 민족 문제에 올바른 해결의 가능성을 열어 놓았습니다. 소비에트 체제는 이를 위해 아주 유리한 국가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소비에트 국가구조는 매우 탄력적이며 강력한 복원력을 가진 동시에, 언제나 수없이 많은 화해할 수 없는 적들에게 포위되어 있는 우리 혁명의 구심력이자 사회주의 경제 계획의 필요성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민족 문제를 이미 해결했다고 자만한다면 조잡한 자기기만에 빠져들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종종 이러한 자만에는 강대국의 국수주의가 감추어져 있습니다.(심지어 그것은 우리 당의 일반 평당원들 가운데서도 발견됩니다.) 그것은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고 잠재되어 있으며 그 상태를 유지하려고 합니다. 민족문제는, 모든 민족이 스스로 모국어라고 생각하는 언어로 세계 문화에 전혀 제약 없이 접근할 수 있게 보장해 줌으로써만 그 해결이 보장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연방 전체의 거대한 물질적·문화적 진보를 전제로 하며, 우리는 아직도 그러한 전제에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러한 진보가 이룩되는 시간을 자의적으로 단축하는 것은 우리 능력 밖의 일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만약 과거에 제정에 의해 억압받던 약하고 후진적이며 소수인 모든 민족들의 중요하고 무시할 수 없는 요구들이 충족되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결코 무관심과 강대국적인 이기심 때문이 아니라, 전체 연방에 공통적인 객관적 조건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을 그들에게 입증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강령적인 선언 속에서가 아니라 일상의 국가 사업 속에서 행해져야 합니다. 이러한 과제, 즉 약소 민족들로부터 전적이고 무조건적인 신뢰를 획득─이것은 약소민족의 경험에 의해 확증된다─하는 일은 우리 당의 최대 과업입니다.

소비에트에 살고 있는 수백만 인민의 의식 속에는 내전으로 말미암아 깊고 선명한 골이 패이게 되었습니다. 우리 당으로 말하자며, 이 전쟁의 동기나 목적에 민족주의 혹은 “제국주의”의 요소라고는 털끝만큼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계급의 혁명전쟁이었으며, 이런 형태로 구 짜르 제국의 전국토와 때로는 심지어는 옛 국경을 넘어선 지역을 포괄하였습니다. 내전은 다른 각도에서 그리고 다른 방향으로 민족적 집단을 구획했고, 때로는 현재의 연방의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심한 고통을 가하기도 했습니다. 혁명을 수호하기 위한 이 매우 격렬한 투쟁 기간 동안, 전쟁의 법칙이 다른 모든 법칙들에 우선하였습니다. 경제 생활에 어떤 손상을 가져올 것인가에 관계없이 다리가 파괴되었습니다. 건물들은 군사령부와 병영으로 접수되었고, 학생들과 교사들을 그곳에서 퇴거시켰습니다. 엄격한 군사체계는 문화 생활 일반, 특히 민족 문화에 대해 심한 고통을 가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특별한 경우에 적군(赤軍) 부대의 후진성과 그러한 부대내의 공산주의자 조직의 일부 불순한 의도를 가진 분자들, 관련 인민위원회의 부적절한 조치들이 민족 감정과 정서를 무시하거나 심지어는 짓뭉개 버렸던 사실에 힘입은 바가 큽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부분적인 것일뿐더러 지나간 일입니다. 내전은 억압 계급에 대한 공동의 투쟁을 통해 모든 민족의 근로 인민을 피로써 굳게 맺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내전은 그 본질상 일상적인 공존과 협력의 학교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내전을 통해서는, 형식적·“입법적” 원리들을 넘어서, 소비에트 연방에 속함으로써 확보될 수 있고 확보되어야만 하는 유형 무형의 그 모든 혜택들을 누리는 데에서 예전의 지배 민족의 공민과 후진 소수민족의 공민과의 실제적·물질적·정신적 평등으로까지 나아갈 수는 없었습니다. 피억압 민족의 민족적 원한과 분노는 과거 수십 년, 수세기를 두고 누적되어 온 것입니다. 따라서 여성들의 억압적 지위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유산은 단지 선언에 의해서만은─그것이 아무리 진실되고 법적으로 보장된다 하더라도─처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여성들에게는 일상의 생활 속에서, 매일매일의 경험 속에서, 여성에 대한 외적인 제한과 제약이 없어졌으며, 주위에서 여성에 대한 겉으로는 존중해 주는 척하지만 속으로는 경멸하는 태도가 사라졌음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여성들은 “권리”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그녀를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돕는 형제애적 협력이 그녀에게 주어지고 있음을 느껴야만 합니다. 예전 “지배” 민족의 의식 속에 근본적이며 돌이킬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났음을 약소 민족이 느끼게 해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지배” 민족의 구성원이 실제적이며 도덕적인 평등으로부터, 생생하게 살아있는 민족적 형제애로부터 일탈할 때에는 언제나, “지배” 민족 스스로에 의해, 즉 그 민족의 지배계급에 의해 파괴와 배신 행위로 간주되어 처벌될 것이라고 약소 민족이 느껴야만 합니다. 경제적·문화적인 면에서 보다 조직적인 사업들이 착수됨과 함께, 약소민족들은 틀림없이 소비에트 연방정부의 일반적인 경제·정치·법률·문화 정책들이 자신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 즉 이 문제에 대한 우리 당의 기본 방침이 어떻게 실행되고 있는가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주의 깊게 지켜볼 것입니다.

우리의 적들은 이 영역에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기회를 잡고자 애쓰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그러할 것입니다. 그루지야로부터 멘셰비키를 축출한 것을 그루지야 민족에 대한 억압으로 묘사하며 맹렬한 국제적 캠페인을 벌여 왔고 여전히 벌이고 있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을 보십시오! 우리는 그루지야에서 제국주의의 하수인 멘셰비키를 추방하는 것이 우리 혁명 전체의 생사를 가르는 문제이며, 또한 완전히 정당한 것임을 보았습니다. 우리에게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그 목적과 결과에서 약소 피억압 인민의 이익과 전적으로 일치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계속 진행 중에 있으며 아직 완성되지 않은 혁명은, 우리의 소망과 무관하게, 그 진행과정에서 민족적 이익과 감정에 상충되기도, 이것들을 일거에 날려 버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루지야의 봉기를 지원하기 위한 적군의 그루지야 침공은 국제 멘셰비키 허풍장이들에 의해 소비에트 국가의 약탈 정책으로 해석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부 그루지야 농민, 심지어는 노동자들에게조차 그러한 의미로 이해될 수 있었으며, 실제로 그렇게 이해되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와 견해들에 맞서 투쟁할 때, 혁명을 가장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던 세계 제국주의의 개입을 그루지야 멘셰비키가 정력적으로 추진했다는 증거자료를 내보이는 것만으로는 절대적으로 불충분합니다. 적군에 대한 민족적 불신에 사로잡힌 그루지야 근로 인민의 후진적인 계층은 유럽 및 전세계적 맥락에서의 혁명적 사건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에서 구별됩니다. 우리가 취해야 할 유일하게 설득력있는 정책은, 과거에는 너무나도 자주 모욕당해 왔던 그루지야 농민의 민족문화적 관심과 민족 감정, 민족적 자존심이 오늘날의 객관적인 상황에서는 완전히 충족될 수 있음을 그들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과거에 억압받아 와 혁명을 요구하고 미래에는 어떤 종료의 민족적 불평등으로도 되돌아가지 않을 것을 보장하라고 요구하는─이는 완전히 정당합니다─제 민족들간에 민족적 감수성과 불신이 악화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예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약소 민족의 공산주의자들 속에서 민족주의적 경향(대체로 방어적 민족주의)이 침투하거나 강화될 가능성도 높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그러한 현상은 독립된 성격을 띠고 나타난 것이 아니라 반영적이며 징후적인 것입니다. 노동계급의 일각에서 표출되곤 하는 무정부주의적·모험주의적 경향이 노동자 조직 지도자들의 기회주의적 성격의 표징이며 결과였던 것과 같이, 소수민족의 공산주의자들 속에서의 민족주의적 경향도 일반 국가기구에서 그리고 심지어는 집권 정당 일각에서조차도 강대국주의(great-powerism)가 아직 근절되지 않고 남아 있다는 표징입니다.

대체로 당원 중 젊은 세대가 민족 문제에 대해 정치적으로 슬기롭게 대처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위험은 그만큼 더 큽니다. 제정 러시아 당시 이 문제는 혁명 정당에게 불가피하게 민족적 억압이라는 형태로 제기되었으며, 우리의 일상적인 선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당은 민족 문제에 중대한 위치를 부여했습니다. 습관적인 위반의 사례가 드물지는 않았지만 “고참 당원”들은 이 모든 것을 겪었습니다. 청년 당원들은 민족적 억압이 없는 나라에서 정치적 삶을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공화국의 군사방위 문제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다. 경제 문제에 대해서도 그러합니다. 그러나 민족 문제는 실제로 거의 직면한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민족 문제가 종교 문제와 같이 이미 해결된 것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들은 그 문제에 대해 다시 거론하고 생각해 볼 어떤 것이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후진적인 소수민족 자체내에서도, 프롤레타리아를 포함한 보다 혁명적인 분자들조차 민족 문제에 대해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젊고 성실하며 열렬한 이들 혁명가들은 러시아 공산당을 중심으로 집결하여 자신의 지평을 확대해 왔는데, 자신의 목전에 다가온 민족 문제를 해결해야 할 문제로 보지 않고, 뛰어 넘어야 할 단순한 장애물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체내 민족주의와의 투쟁은, 그것이 비록 이전의 억압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지라도, 모든 곳의 혁명가들이 수행해야 할 중요한 과제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예전의 억압에 의해 배양되어 온 문제라는 점에서 이 투쟁은 끈기 있는 선전전의 성격을 띠어야 하며, 민족적 요구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신중하게 그 요구들을 충족시키는 데 의거해야만 합니다.

우리의 오랜 동지들 사이에는 민족 문제가 소위 우리의 “나로드니끄” 농업강령 혹은 NEP(신경제정책)처럼 일시적인 양보에 불과하다는 이유로 민족 문제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비교는 조건부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민족 문제에서 “양보”를 할 필요가 없다면, 물론 사회주의 건설이 보다 용이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즉, 과거에 억압이 없었다면, 현재에 언어와 민족문화의 차이가 없다면 말입니다. 또한 수백만의 농민이 없다면 또한 사회주의 건설이 보다 용이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유럽처럼 아시아도 자본주의적 계급투쟁의 격전장이 되어 있다면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훨씬 유리할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를 그렇게 바라보는 것은 현실과는 전혀 동떨어진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민족문제에 대한 무관심이나 경멸적인 태도는 역사에 대한 혼란되고 현실과 동떨어진 합리주의적 태도를 은폐하고 있습니다. 이와는 정반대로, 우리 당의 빛나는 혁명적 현실주의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포착하고, 그것들을 실천적으로 혁명의 이익에 결합시키는 데 있습니다.

10월혁명 직전에 우리가 농민에게 눈을 돌리지 않았다면, 오늘날 사회주의에 더 이상 접근할 수도 없었을 것이고, 소비에트 권력도 세우지 못했을 것입니다. 10월혁명 후 몇 년을 겪고서야 비로소 우리당은 농민의 중요성을 완전히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고참 당원”들은 이론적으로만 알았던 문제들을 실천적으로 이해하게 되었고, 실천적으로 그 문제에 직면했던 청년 당원들은 이제는 이론적으로 그 경험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민족 문제 분야에서 당 전체가 재교육 과정과 청년 당원을 위한 입문 과정을 의심할 나위 없이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은 적절한 시기에, 매우 엄격한 프로그램에 따라서 실시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민족문제를 무시하는 사람은 누구나 민족 문제의 수렁에 빠지게 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민족적 요구에 대한 주의 깊은 태도가 물론 결코 경제적 분리를 장려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지방(“민족”) 관료에게는 유리할 수 있지만 대중에게 유리한 것은 아닙니다. 연방 전체에 걸친 집중화된 철도행정이 철도와 관련된 일상생활에서 민족 언어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아님은 아주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자치의 요구와 계획을 평가할 때, 정부 상급관리의 순진히 관료적인 위신·서열·겉치례와, 일상생활상의 사활적인 이해가 걸린 대중의 참된 요구는 엄격하고 주의 깊게 구별되어야 마땅합니다. 전자는 지방 주민에 대해서는 극도로 러시아화된 사람들이며, 동시에 중앙에 대해서는 분리주의자들입니다.

민족적·생산기술적 조건이 집중화를 필요로 하는 한에서는, 민족문화 영역에서의 가장 광범위한 독립성의 유지는 원리상 경제 집중화와 완전히 양립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민족문화의 분권화와 경제의 집중화를 국가 차원에서 조정하는 일은 실제로는─삶에서는─대단히 크고 복잡한 임무입니다. 이것을 집행하는 데는 심사숙고와 자제가 필요합니다. 과거에 억압받았고, 지금도 그 흔적이 깊이 아로새겨져 있는 민족들은 민족적 독립에 아무런 해도 없고 모두에게 행정적·경제적 이익을 가져다 주면서도 본질적으로 집중화될 수 있는 분야들에서 자체를 지지하는 태도를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듯 불투명한 문제를 다루는 데는 최소한 후진 소수민족의 지도자들만이라도 집중화의 장점과 이익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대중으로 하여금 문제의 조치들이 중앙의 어떤 압력이 아니라, 모두에게 이익이 되고 모든 사람의 동의 하에 실시되는 조치로 인식할 수 있도록 도울 것입니다. 정치적인 문제를 합리주의적으로 사고해서는 안 됩니다. 더욱이 민족 문제는 다른 무엇보다도 더욱 그러합니다.

결론적으로 두 가지만 더 이야기합시다. 최근에 그렇게 어리지는 않은 어떤 공산당원으로부터, 혁명에서 민족적인 요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곤혹스럽기는 하나 고백하건대) 멘셰비즘이요 자유주의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여기서 사물과 개념이 완전히 전도되었음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민족 문제에 대한 멘셰비키의 태도는 바로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 멘셰비키는 권력에서 배제된 동안에는 문제를 날카롭게 파악하지 못하고 민족적 감상주의에 빠지고 민주주의적 호소에 탐닉해 피억압 민족의 폭동을 부추깁니다 ; 민족 부르주아지가 위험에 빠지거나 멘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했을 때는, 부르주아지에 의해 위탁된 강대국적 사명의 중요성과 책임성에 대한 의식으로 충만해 피억압 민족에 대해 민족주의라고 비난하면서 억압적인 중앙집권화 정책을 계속합니다. 반면에, 볼셰비키는 계급적 관점에서 민족적 요인이 지닌 거대한 혁명적 의의를 잘 인식함으로써 민족 문제에 대한 혁명적 통찰력을 보여 주었습니다. 볼셰비키는 이러한 정신과 방침을 따라 앞으로도 계속 우리의 청년들을 교육해 나갈 것입니다.

1923. 3. 19.

[트로츠키, Pokolenie Oktyabrya(10월 세대) (모스크바, 1924), pp. 2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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