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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출처 – 국제볼셰비키그룹(IBT)



소련에서 반혁명이 승리하다

 

 

8월 19~21일 모스크바의 실패한 쿠데타는 그 계획과 실행이 너무도 엉성하여 이것을 쿠데타라고 부를 수 있을지 의문이 갈 정도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20세기의 결정적인 사건의 하나로 기억될 것이다. 옐친의 공공연한 자본주의 복귀 세력은 쿠데타를 제압한 후 1917년 10월 혁명으로 수립된 국가권력을 해체시켰다. 이것은 소련 뿐 아니라 전세계 노동계급에게 커다란 재앙이다.

 소련 권력층 내부와 나라 전체에서 그 동안 벌어진 계급투쟁의 절정이 8월 쿠데타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1920년대 중반부터 소련 노동자국가의 정치권력을 장악한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이 퇴보에 퇴보를 거듭하면서 마지막을 장식한 행위가 바로 이 사건이라고 넓게 이해할 수 있다. 1917년 민주적으로 선출된 노동자국가 기구를 스탈린주의자들은 권위주의적 경찰기구로 대체했다. 또한 레닌과 트로츠키의 노동자 국제주의를 “일국 사회주의” 노선으로 대체했다. 그리고 해외의 혁명투쟁들을 배신하고 대신 사소한 외교적 이득을 추구한 이들의 행위를 이 노선은 정당화시켰다. 그러나 이들의 범죄행위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은 10월 혁명으로 수립된 집단적 경제체제에 기초하고 있었다. 따라서 나름의 왜곡된 방식으로나마 국외의 제국주의 압력과 국내의 반혁명에 대해 10월 혁명의 성과인 집단적 경제체제를 방어하려는 시도를 빈번하게 보였다. 그러나 8월 쿠데타의 실패로 이 관료적 지배집단의 통치는 끝났다. 대신 국가소유를 해체하여 자본의 지배를 다시 정착시키려는 신생 민족주의 집단이 사회의 지배력을 장악했다.

 이미 50년도 더 전에 좌익반대파의 지도자 트로츠키는 이렇게 경고했다: 관료적 경찰 체제는 집단적 소유를 발전시킬 수도 없으며 방어할 수도 없다. 브레즈네프 통치기의 정체된 소련 경제는 이 예언을 확실히 입증시켰다. 경제 쇠퇴를 역전시키기 위해 고르바초프는 유명한 “시장 사회주의” 개혁을 시도했다. 그러나 페레스트로이카는 경제와 정치의 혼란을 극도로 증폭시켰다. 이 결과 관료집단은 양극의 두 분파로 분열되었다. 이 갈등은 지난 1년간 특히 격심했다. 한쪽에는 모스크바 공산당 총서기였던 옐친을 정점으로 자본주의 복귀를 환영하는 분파가 등장했다. 이 반대편에는 군부, 당, 국가기구의 관료들인 소위 강경파가 결집하여 시장경제 도입과 소련의 민족주의적 분열을 자신의 권력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했다. 고르바초프는 이 두 분파의 중재자가 되어 어떤 때는 “개혁파”에게 또 어떤 때에는 “강경파”에게 이끌렸다.

 

고르바초프의 지그재그

 1990년 10월부터 “강경파”는 당내에서 공세를 감행했다. 이들은 고르바초프에게 압력을 가하여 샤탈린의 민영화 500일 정책을 폐기시켰다. 그리고 “검은 베레” 부대를 발트해 연안국에 보내 친서방 분리주의 정부들을 탄압했다. 또한 당 최고위급의 숙청을 단행하여 당과 정부의 주요 직책에서 “개혁파” 인사들을 몰아냈다. 빈자리는 당연히 강경파 분자들이 메웠다. 이 결과 다수의 “개혁파” 분자들은 옐친의 진영에 합류했다. 고르바초프의 외무장관이었던 세바르드나제가 이의 가장 대표적 인물이었다. 이제 서방 언론은 고르바초프가 페레스트로이카에서 후퇴했다고 추측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항하여 옐친 진영은 작년 3월초 모스크바에서 대대적 시위를 벌였다. 또한 (제국주의) 서방국가들이 페레스트로이카의 후퇴에 항의해 소련에 대한 경제원조를 중단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제기되었다. 그러자 고르바초프는 다시 정책을 바꾸어 옐친 진영과 화해를 시도했다. 자본주의 복귀 및 분리 독립을 시도하던 발트해 연안국들에 대한 탄압을 그는 중단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시장 개혁을 추진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강경파”에게 가장 불길한 조치를 단행했다. 정부의 권한 대부분을 연방 내 15개 공화국들에게 위임하는 “아홉 더하기 하나” 협약을 받아들였다. 이제 개혁파에 대한 고르바초프의 유화 조치로 옐친은 더욱 기가 올랐다. 러시아 연방의 민선 대통령이었던 그는 연방 경찰조직과 공장에서 공산당을 불법화시키는 일련의 포고령을 발포했다. 그러자 “강경파”는 결론을 내렸다: 고르바초프의 중도적 입지는 급격히 소실되었으며 그는 더 이상 옐친을 저지할 수 없다. 결국 이들은 국가비상위원회를 수립하여 8월 19일 아침 소련 대통령 고르바초프를 휴양지에서 체포했다.

 

노동계급은 한쪽 편을 들어야 했다

 쿠데타가 볼품없이 실패한 지금 라이벌 분파들의 입장에 대한 논의는 이제 별 소득이 없는 학구적 노력에 불과한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노동계급은 과거의 사건들을 올바로 이해해야 한다. 이를 통해서만 미래의 투쟁을 올바로 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8월 쿠데타는 노동계급이 한쪽 편을 들어야 하는 정치적 격돌이었다. 쿠데타 지도자들은 이 투쟁에서 승리했어도 소련의 경제를 구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자본주의 복귀 세력의 위협도 제거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 일시적이나마 자본주의 복귀 세력의 움직임을 정지시키고 노동계급에게 소중한 시간을 벌어줄 수 있었다. 따라서 혁명적 맑스주의자들은 쿠데타 지도자들의 정치적 파산을 폭로하면서 동시에 이들의 편을 들어 옐친과 고르바초프에 맞서야 했다.

 한편 전세계 노동자 운동의 개량주의 및 중도주의 좌파 세력들은 이 격돌에서 대부분 고르바초프와 옐친을 지지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놀라운 현상이 아니다. 이 사이비 맑스주의자들은 부르주아 자유주의 여론에 거스르는 것을 너무 두려워하여 언제나 “민주주의” 편에 선다. 민주주의 구호들이 자본주의 반혁명의 위장술에 지나지 않을 경우에도 그렇다. 그런데 일부 중도주의 그룹들은 옐친이 반혁명 분자이며 따라서 그의 승리는 노동계급의 심각한 패배라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번 쿠데타에서 편을 들기를 어쨌든 거부했다. “싸우는 놈들은 다 뒈져라”라는 이 아리송한 입장은 미국의 스파르타쿠스 동맹과 이 그룹이 거느리는 국제공산주의동맹(International Communist League) 산하 각국 지부들에 의해 가장 뚜렷하게 주창되었다. 이 국제조직은 수년간 소련을 가장 열렬히 방어하는 정치세력이라고 자임해왔는데도 말이다.

 중립 노선 주창자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쿠데타 주동자들도 옐친이나 고르바초프와 똑같이 자본주의 복귀를 도모하는 자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의 일부는 국가비상위원회가 발표한 주요 선언문의 구절들을 지적한다. 이 구절들에서 쿠데타 주동자들은 제국주의 국가들과의 기존 조약들을 준수하고 개인 기업의 권리를 존중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스탈린주의자들의 공식 선언문이 아니라 사건들의 내적 논리에 기초해서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제시해왔다. 쿠데타 세력이나 옐친 세력이나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다음의 질문에 답하기가 대단히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쿠데타 주동자들은 왜 그렇게 필사적인 도박을 강행했는가? 관료집단의 한 분파가 연방 대통령을 체포하고 자본주의 복귀 세력에 대한 탄압을 시도하면서 거리로 탱크를 진주시켰다. 그리고 이 분파의 지도자들은 자기 부인들과 자살 서약을 하고 쿠데타가 실패하자 스스로 목을 멨다. 그렇다면 이 분파의 정치적 도박에는 자본주의 복귀에 대한 시시콜콜한 전술적 다툼 이상의 것이 걸려 있었음이 명확하다.

 쿠데타 지도자들이 이렇게 행동한 이유는 자명하다. 이들은 자본주의가 러시아에 복귀했을 때 잃을 것이 가장 많은 스탈린주의 분파를 대표했다. 옐친의 대담한 공세, 친서방 민족주의 세력의 성장, 이 세력들에 대한 고르바초프의 무기력 등은 중앙 집중화된 국가기구에 대한 치명적 위협이라는 것을 이들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특권과 권력이 이 국가기구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도 이들은 알고 있었다. 비록 마지못해 그것도 막판에 행동하기는 했지만 이들의 거사는 위험한 대세를 정지시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강경파” 분자들은 철저히 사기가 죽어 있었다. 이들은 어떤 종류의 사회주의에 대해서도 신념을 상실했다. 이들은 반대 분파와 똑같이 자본주의에 대한 우호적인 사고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권력을 계속 독점하기 위해 대러시아 국수주의와 유태인 배척운동에 기꺼이 굴복했다. 그러나 트로츠키주의자들은 관료집단 분자들의 의식이나 주관적 의도와는 관계없이 자본주의 복귀 위험으로부터 집단적 소유체제를 방어하는 노선을 주창해왔다. 아무리 무능하게나마 “강경파”는 현상 유지를 통해 생산수단의 국가적 소유를 방어하고자 했다. 국가적 소유체제는 자본주의 임금 노예제의 복귀 움직임 앞에 막아선 명백히 객관적인 장벽이었다. 중앙집중적 국가기구가 쿠데타의 실패로 무너지면서 이제 반동의 거대한 수레바퀴가 소련 전역을 짓밟고 있다. 무슨 이유이든 이 수레바퀴의 전진을 막고자 했던 관료집단의 분파에 대해 사회주의 혁명가들은 전술적으로 군사적 동맹을 맺었어야 했다.

 

반혁명을 분쇄하자!

 그렇다고 소련의 노동계급이 모든 것을 상실한 것은 결코 아니다. 쿠데타의 실패와 함께 등장한 자본주의 정권은 대단히 허약하여 자신의 억압적 국가기구를 아직 확고히 수립하지 못하고 있다. 경제의 대부분은 아직 국가의 소유이다. 또한 국내에는 자본가 계급이 존재하지 않아 옐친은 자신의 자본주의 복귀 정책을 지지할 막강한 원군을 국내에서 찾을 수 없다. 곧 닥칠 자본주의 복귀 정책에 대항하여 자신의 권리와 복지를 방어하기 위해 노동자들이 저항할 경우 이들은 사회경제적 현실 즉 집단적 소유체제의 많은 부분을 방어하는 투쟁을 수행하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을 갖춘 자본주의 국가들보다 지금 막 일어서려는 자본가 정권은 훨씬 쉽게 노동자 투쟁으로 제압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어느 것도 노동자들이 근본적으로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에서 투쟁해야 한다는 현실을 바꿀 수는 없다. 노동계급은 아직도 독립된 정치세력으로 결집되어 있지 않으며 대단한 혼란에 빠져있다. 집단적 소유체제를 방어할 객관적 이해를 가지고 있던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은 분쇄되었다. 스탈린주의자들이 미래에 투쟁에 나설 가능성은 극히 적다. 왜냐하면 결정적인 정치적 시험에서 패배했기 때문이다. 이미 투쟁에 나섰던 지도자들은 현재 명퇴를 당했거나 감옥에 있거나 사망했다. 간단히 말하면 부르주아 국가의 수립에 저항할 주요한 조직적 장애물은 효과적으로 제거되었다. 쿠데타 이전에 노동자들이 민영화에 반대해 대대적으로 투쟁에 나섰을 경우 스탈린 관료집단과 이들을 방어하는 무력 집단은 양분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자본주의 복귀 정책에 저항하는 노동자들은 서구 자본가들과 이들의 국내 동맹자의 목적에 봉사하는 “무장 단체” 즉 부르주아 국가기구에 대항해야 한다. 이 초기의 부르주아 국가권력은 노동자들에 의해 무장이 해제되고 파괴되어야한다.

 퇴보한 노동자국가에서 모든 것이 갖추어진 부르주아 국가로 이행하는 일은 한 달이나 일년만에 완수될 수 없다. 1937년 트로츠키는 이렇게 예측했다:

“소련에서 부르주아 반혁명이 성공하더라도 이 새 정권은 상당한 기간 국가 소유에 기초해야할 것이다. 그렇다면 집단적 소유체제의 토대와 부르주아 국가의 상부구조 사이에 존재하는 일시적 모순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혁명 또는 반혁명을 의미할 뿐이다. 한 계급이 다른 계급에 대해 승리할 경우 승리한 계급의 이해에 따라 경제는 재건될 것이다.”

[노동자국가도 부르주아 국가도 아니다?]

 트로츠키와 우리는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 노동자국가가 점차 침식당하는 과정의 결과로서만 위에서 얘기한 혁명 또는 반혁명이 존재한다. 분석을 통해 우리는 이 변화의 결정적 전환점 즉 국가권력이 파괴되지 않고는 지배적인 경향이 역전되지 않는 지점을 알아내야 한다. 자본주의 복귀 세력은 지난 몇 년간 소련에서 힘을 증대시켜왔다. 입수할 수 있는 모든 증거는 우리에게 이 결론을 강요한다: 쿠데타의 패배와 자본주의 경제 재건을 도모하는 분자들의 정치권력 장악은 러시아 사회 변화의 질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혁명활동은 즐거운 허구에 기초해 진행될 수 없다. 사회주의 미래를 위한 투쟁은 현실을 올바로 직면하고 “아무리 쓰디써도 대중에게 진실을 말하는” 능력을 요구한다. 옐친 진영의 승리는 노동계급에게는 거대한 패배이다. 소련에 자본주의를 다시 강요하기 위해서는 수천만 노동계급의 가장 기본적인 이익을 공격해야한다. 그러나 이 공격에 저항하면서 소련의 노동자들은 자신의 영웅적 전통을 재발견할 수 있다. 인류의 역사적 진보의 필요성에 부응할 수 있는 유일한 사상인 볼세비키 혁명사상은 어떠한 장애물도 극복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사상은 1917년 혁명을 지도한 것과 같은 당을 통해서만 역사를 변화시키는 요인이 될 수 있다. 이 당은 레닌과 트로츠키의 비타협적 혁명 정신으로 교육을 받아야 한다. 다시 태어나야 할 제 4 인터내셔널은 바로 이러한 당이다. 따라서 제 4 인터내셔널의 재건은 우리 시대의 중심 과제이다.

 

-끝-

 

<이 글은 1991년 8월 모스크바의 쿠데타에 즈음하여 국제볼세비키그룹(International Bolshevik Tendency)이 1991년 9월에 발표한 정치 성명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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