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연락처 :
bolle1917@gmail.com

노동자국가(소련/중국/북한 등)의 사회성격
2015.03.26 21:18

(IBT) 소련은 왜 자본주의 체제가 아닌가?

조회 수 7940 댓글 0

* 원출처 – 국제볼셰비키그룹(IBT) 웹사이트


<스파르타쿠스동맹(SL) 팜플렛>

*** 이 팜플렛은 1960년대와 1970년대 미국의 트로츠키주의 혁명조직이었던 스파르타쿠스동맹(SL)이 산하 청년조직인 스파르타쿠스청년동맹(Spartacus Youth League)을 위해 1977년 4월에 출판했으며 1982년 9월에 재판했다.***

  

소련은 왜 자본주의 체제가 아닌가?

<차례>

1. 서문

2. 모택동주의 경제학의 빈곤

3. 모택동주의자들이 소련에 "자본주의를 복귀"시킨 방식

4. [적색 신문]지 제 7호: 모택동주의의 미쳐 날뛰는 관념론

5. "국가 자본주의" 이론의 반(反)맑스주의

 

1.서문

 

1917년 10월 볼셰비키 혁명이 성공한 이래 소련의 사회성격을 둘러싼 이견들은 국제노동자운동 내부의 조직적 정치적 분립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어왔다. 10월 혁명 직후 사민주의자들은 레닌의 소비에트 정부를 부르주아 민주주의로부터의 역사적 후퇴라고 규정하면서 이 체제를 비난했다. 이미 1919년에 카우츠키는 소련을 관료들로 구성된 "새로운 계급"이 지배하는 "국가자본주의 체제"라고 선언했다.

이로부터 몇 년 후 특히 크론슈타트 봉기를 이유로 무정부주의자들은 볼셰비키 혁명에 대해 실망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레닌의 중앙집중주의 정권을 "당 독재"라고 비난하고 국가가 모든 사회적 억압의 근원이라는 바쿠닌의 명제를 반복했다. 그리고 1921년 신경제정책(New Economic Policy)이 도입되고 스탈린에 의해 당과 소비에트가 관료화되기 시작하자 제 3 인터내셔널(코민테른) 내부의 초좌파 분자들 특히 네덜란드의 고터/파네코크(Gorter/Pannekoek) 그리고 독일공산주의노동자당(KAPD) 등은 러시아에 자본주의가 복귀했다고 결론 내렸다.

1930년대에 레온 트로츠키는 소련이 관료적으로 퇴보한 노동자국가라고 규정했다. 집단적 계획경제는 노동계급적이며 반(反)자본주의적인 소련 국가의 성격을 나타낸다. 스탈린의 전체주의 테러 통치는 기생적 관료층에 기초하고 있다. 사회주의로의 길을 열기 위해서는 후자가 노동계급에 의해 타도되어야한다. 노동운동 내부에서 스탈린 체제에 반대하는 세력들 가운데 트로츠키주의자들만이 소련을 질적으로 기형화되기는 했지만 노동계급 독재의 계속된 표현으로 간주했다.

제 2차 제국주의 세계대전 직전에 "러시아 문제"를 둘러싼 국제좌익의 기본 정치지형은 각 경향들이 나름의 특징적인 이론을 동원한 가운데 좀 더 안정적으로 정착했다. 이로 인해 새로 형성된 정치 조직들은 기본 정치 경향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맥스 섁트먼과 토니 클리프 등 트로츠키주의 제 4 인터내셔널에서 우경화하면서 분립한 경향들은 사민주의 진영으로 표류해 들어갔다. 좌경화하면서 분립한 제이 알 잔슨과 그란디조 무니스 등은 이름만 제외하면 무정부주의적 조합주의자가 되었다.

러시아 문제를 둘러싸고 1930년대에 확립된 국제좌익의 정치적 이론적 분립은 소련이 "국가자본주의 체제"라는 주장을 지금 새로이 수용한 모택동주의자들에 의해 혼란스러워졌다. 1971년 이후 중국은 브레즈네프 치하의 소련에 맞서 실제적으로 미 제국주의와 동맹했다. 그러면서 소련이 "사회제국주의 초강대국"이 되어 자본주의 국가들보다 "더 위험하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정책을 정당화한다. 소련이 계급 착취에 기초한 사회라는 견해를 현재 가장 공격적이고 히스테리하게 주장하는 세력은 사민주의자나 무정부주의적 조합주의자가 아니라 정통 스탈린주의를 자처하는 모택동주의자이다.

소련을 "국가 자본주의 체제"라고 비난하는 모택동주의자들을 보면 아이러니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좌익 일부는 스스로가 스탈린주의의 가장 비타협적인 적이라고 자칭하면서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스탈린주의에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비난해왔다. 그런데 가장 강경한 스탈린 숭배자인 모택동주의자들이 이제 이들의 주장을 반복하고 있다. 모택동주의자들은 스탈린 체제를 비난한 카우츠키와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을 거의 그대로 본떠서 브레즈네프 치하의 소련을 공격하고 있다.

사실 좀 더 절충적인 신좌익(New Left) 모택동주의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빈약한 이론적 무기를 보강하기 위해 사민주의자들의 수정주의도 기꺼이 끌어들이려 한다. 안토니오 카를로는 "중국식 사회주의 건설의 길"을 추종하는 이탈리아인인데, 그는 스탈린 치하의 러시아가 "관료적 집산주의 체제"였다고 주장한다("소련의 사회-경제적 성격", [텔로스]지, 1974년 가을). 학술적이면서도 모택동주의에 어느 정도 동조하고 있는 [월간 평론](Monthly Review)지의 편집자 폴 스위지에 공감하는 어떤 이는 소련의 관료집단이 지배계급이기는 하지만 소련이 자본주의 체제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섁트먼과 루돌프 힐퍼딩의 분석이 좀 더 적절하다고 암시한다:

"소련과 동구권처럼 계층화되고 관료적 계획 경제가 실시되는 사회는 계급 사회이다. 맑스가 무덤에서 일어나 걸어 나오더라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맑스주의자들은 계획 경제가 실시되는 이 사회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규정해왔다. 관료적 집산주의(섁트먼), 전체주의 국가(힐퍼딩), 국가 사회주의(나빌) 등이 이것이다. 이 사회들에 대한 올바른 규정이 무엇이든 한 가지 특징은 명확하다 --- 관료집단은 계급이다."-- 로스 갠디, "소련의 사회 성격에 대해 더 언급하다", [월간 평론]지, 1976년 3월

소련이 계급 사회라고 주장하면서도 어떤 종류의 계급 사회인지를 모르는 저술가의 과학적 가치에 대해 우리는 논평할 생각이 없다.

소련의 사회성격에 대해 기존의 사민주의자와 무정부주의 조합주의자들이 모택동주의 스탈린주의자들과 이론적으로 수렴이 되는 현상은 트로츠키주의자들에게는 전혀 놀랍지 않다. 러시아 문제에 대한 다수의 논쟁적 글들에서 트로츠키는 스탈린과 그를 계급 착취 사회의 지배자로 비난하는 자들 사이에는 방법론적 유사성이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예를 들어 이 문제에 대해 트로츠키가 최후로 전개한 주장들 가운데 이런 대목이 있다:

"섁트먼은 제 4 인터내셔널의 현재 노선뿐 아니라 과거의 노선도 수정하고 있다. 우리가 스탈린에 반대하고 있으므로 소련에 대해서도 반대해야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스탈린이 오랫동안 우리를 공격한 논리이다. 다만 섁트먼은 아주 최근에야 이렇게 주장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스탈린의 정책을 거부하면서 섁트먼은 완전하고 분리될 수 없는 패배주의에 빠져 들어가고 있다."-- "긁힌 상처가 도져 몸이 썩어 들어가다", 1940년

스탈린과 섁트먼은 지배 정당이나 지배 집단의 정치적 성격과 국가로 대변되는 사회 지배계급을 동일시하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개별적으로 다른 점이 있으면서도 주장들이 서로 중첩되는 "국가 자본주의" 경향은 사민주의, 무정부주의적 조합주의, 그리고 이제 모택동식 스탈린주의로 명확히 구분된다.

 

사회민주주의적 자유주의와 경제주의

예상할 수 있듯이 소련이 "국가 자본주의 체제"라고 처음 주장한 세력은 사민주의자들이었다. 러시아가 너무 후진적이어서 자본주의보다 더 발전한 사회주의를 지탱할 수 없다는 카우츠키/멘세비키의 교조에서 이 주장은 논리적으로 도출되었다. 레닌 치하의 러시아가 자본주의 체제였다는 주장은 제 2 인터내셔널이 주창했던 개량주의 세계관의 필연적 부분이었다.

1919년에 저술된 카알 카우츠키의 논쟁적 저작 [테러주의와 공산주의]는 이후 사민주의자들이 펼친 기본 주장들을 전부 선보이고 있다. 이들은 소련이 부르주아 민주주의 체제보다 사회주의에서 더 멀어진 체제라고 비난했다. 카우츠키는 민주주의를 부르주아 의회주의와 동일시하면서 노동자 소비에트의 통치 체제 자체가 사회주의 원칙에 위배된다고 비난했다. 그는 레닌 치하의 러시아를 "국가 자본주의 체제"로 규정하고 이 체제가 짜르 체제보다 노동자들에게 더 해롭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산업을 구출하기 위해 관료들의 새로운 계급이 형성되어 노동자들을 지배해야했다. 이 새로운 계급은 모든 실질적인 통제력을 장악한 후 노동자들의 자유를 단순히 환상에서만 존재하는 자유로 변모시켰다....

구 관료집단의 절대주의는 새로운 그러나 결코 개선되지 않은 형태로 소생했다. 그리고 이 절대주의와 함께 자본주의의 새로운 씨앗들이 형성되고 있다....이 체제는 과거의 산업자본주의보다 훨씬 낮은 수준에 있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은 오랜 봉건적 장원일 뿐이다. 러시아의 현실은 이것을 철폐할 정도로는 무르익었다. 그러나 자본주의를 철폐할 정도로는 무르익지 않았다. 자본주의가 이제 소생하고 있다. 다만 자본주의의 이 형태는 과거의 형태보다 노동계급을 더 억압하고 더 해친다....산업자본주의는 민간 자본주의에서 이제 국가자본주의로 변모했다. 과거에 국가 관료들과 민간 자본의 관료들은 서로 직접 적대하지는 않았으나 종종 매우 비판적이었다....그러나 현재 국가와 자본가의 관료집단은 하나의 체제로 통합되었다. 이것은 볼셰비키당이 초래한 거대한 사회주의 격동의 최종적 결과이다. 이 체제는 지금까지 러시아가 겪었던 모든 형태의 전제 가운데 가장 억압적이다." (강조는 인용자)

볼셰비키당이 정권을 장악한 지 채 2년도 되지 않은 시점에서 "배신자 카우츠키"는 이렇게 주장했다. 이 주장에 기초해서 이후 국가자본주의의 모든 이론들이 구축되었다. 이 사실 자체는 "국가자본주의"이론이 가지고 있는 개량주의적 전제를 웅변하고 있다.

1929년 스탈린이 공업화 캠페인을 시작하자 사민주의 이론가들은 자신들의 "의회민주주의를 통한 사회주의의 길" 입장에 다른 내용을 하나 더 첨가시켰다. 스탈린이 생산재에 불균형적으로 자원을 집중시키고 공업화를 가속화시키자 러시아 대중의 생활수준은 급격히 하락했다. 그러자 사민주의 대변인들은 러시아를 "자본주의 체제"라고 선언했다. 노동자의 임금을 희생시켜 자본 축적을 최대화시켰다는 것이다.

"스탈린의 공업화가 곧 자본주의이다"라는 주장을 가장 먼저는 아니더라도 가장 두드러지게 주장한 자는 토니 클리프이다. 영국의 국제사회주의자그룹을 주도하고 있는 그는 트로츠키주의를 배신한 자이다. 그의 사기성이 농후하며 경제주의적인 국가자본주의 이론에 대한 포괄적인 설명은 이 팜플렛에 수록한 "반(反)맑스주의적 '국가 자본주의' 이론 --- 트로츠키주의에 입각한 비판"을 참고할 수 있다.

근본적으로 "축적이 곧 자본주의이다"라는 주장은 사적으로 소유되는 상품이자 생산수단인 자본과 물리적인 생산수단을 동일시하는 노동자주의 참주선동이다. 1875년에 저술된 맑스의 "고타강령 비판"은 노동자국가의 성격과 조직을 설명한 고전적 저작이다. 이 저작에는 "모든 노동자들은 '노동의 감소되지 않는 성과'를 분배받아야한다"는 라쌀레의 사고를 비판하는 부분이 있다. 여기에서 맑스는 명확히 설명했다: 생산물이 소비되고 난 후 남는 잉여물의 일부는 생산수단을 증대시키기 위해 투여될 것이다:

"노동생산물의 의미에서 '노동의 성과'라는 말을 우선 검토해보자. 그렇다면 협동을 통한 노동의 성과가 사회적 생산물 총량이다. 이로부터 다음이 공제되어야한다:

우선 사용된 생산수단의 감가상각 부분.

둘째 생산의 증대를 위한 생산수단 증가분." (강조는 인용자)

생산수단의 축적은 모델로 제시된 노동자국가의 강령적 규범이다. 그렇다면 제국주의 세력에 포위된 후진 노동자국가에게는 생산수단의 축적이 더욱 더 중요하고 급격하게 성취되어야할 당면 과제이다.

1930년대 후반에 스탈린은 잠재적 반대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당과 군부를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이 사건은 "전체주의 국가"의 등장에 초점을 맞춘 새로운 이론들을 촉발시켰다. 이 이념적 전통은 조오지 오월의 소설 [1984년]이 표현한 무한대의 역사 비관주의로 그 절정에 치달았다. 스탈린의 숙청은 합리적 경제 목표에 무관심한 전능하며 자의적인 국가권력의 존재를 대표하는 것처럼 보였다. 러시아는 거대한 강제수용소가 된 것 같았다.

제 1차 세계대전과 제 2차 세계대전 사이의 시기에 사민주의 진영의 가장 뛰어난 이론가였던 루돌프 힐퍼딩은 이렇게 주장했다: 스탈린 치하의 러시아는 기존의 맑스주의 이론과 범주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새로운 역사 현상이다. 1940년에 저술한 에세이(시론)에서 그는 소련이 "국가자본주의 체제"라는 주장을 멋지게 비판했다. 또한 그는 관료집단이 지배계급이라는 주장 역시 확실히 반박했다: 관료집단을 구성하는 관료 개개인은 생산 잉여의 명확한 부분을 전유하거나 심지어는 위계질서 내에서 자신이 누리는 지위를 유지할 제도적 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는 올바르게 이렇게 주장했다: 소련의 관료집단은 "나머지 인민들과 마찬가지 정도로 정부에 종속되어 있다."("국가 자본주의 경제인가 아니면 전체주의국가 경제인가?", 어빙 하우 편집, [사회주의에 대한 핵심 저작들], 1970년)

힐퍼딩은 기본적으로 무정부주의 국가관으로 퇴행했다. 그에 따르면 국가는 사회를 지배하는 독자적 기관이다. 그는 '국가권력은 경제생활의 핵심집단 즉 계급의 소유를 방어한다'라는 맑스주의 국가관을 거부하고 있다. 그는 아는 것도 많을 뿐더러 정직했기 때문에 맑스주의 국가관에 대한 자신의 수정주의 사고를 명확히 드러내었다:

"현재의 국가권력은 독자성을 성취했기 때문에 자기 나름의 법칙에 따라 자신의 엄청난 힘을 과시하면서 사회 세력들을 종속시키고 이들로 하여금 단기적이든 장기적이든 국가의 목적에 봉사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이 점을 맑스를 추종하는 종파주의자들은 이해할 수 없다.

따라서 러시아든 전체주의 일반이든 이들 체제의 성격은 경제적 성격에 의해 결정될 수 없다. 이와 반대로 지배 권력의 정책에 의해 결정되고 이 권력의 목적에 종속되는 것은 바로 경제이다. 부르주아 국가의 경우와는 달리 전체주의 권력은 경제나 이 경제를 지배하는 계급을 위해 존재하지 않으며 경제를 집어 삼키면서 이 위에 군림한다...."-- 같은 글

이 시기에 등장한 "관료적 집산주의" 이론도 힐퍼딩의 "전체주의 국가" 이론과 아주 유사한 논리를 가지고 있다. 1939년에 [세계의 관료화]를 저술한 이탈리아의 브루노 리찌는 한때 트로츠키주의자였는데 관료적 집산주의의 원조가 되었다. 힐퍼딩과 마찬가지로 리찌는 스탈린 체제를 파시즘의 등장과 동일시했으며 사민주의자 힐퍼딩과는 달리 스탈린 체제를 루즈벨트의 뉴딜 체제와 동일시했다. "관료적 집산주의"는 세계 역사적인 현상으로 자본주의 생산의 무계획성에 대한 합리적 해결책으로 간주되었다.

"관료적 집산주의"는 미국에서 트로츠키주의를 배신한 맥스 섁트먼에 의해 계승되었고 대중화되었다. 제 2차 세계대전을 통해 파시스트 강대국들이 패배하자 그는 갈수록 확신에 차 이렇게 결론지었다: "관료적 집산주의" 즉 스탈린 체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보다 사회주의 미래에 더 큰 위협이다. 따라서 그는 불가피하게 미국 공식 사민주의의 광신도적인 반공 노선으로 이끌려 들어갔다.

1930년대 후반에 등장한 전체주의국가 이론들은 스탈린의 러시아가 나치 독일처럼 가장 선진적인 부르주아 민주주의로부터 퇴행한 역사적 산물이라고 명시 내지 암시했다. 이 점에서 이 이론들은 모두 사민주의 전통 위에 서 있다.

 

무정부주의적 조합주의의 반동적 공상

소련에 대한 무정부주의적 조합주의의 입장을 논의해보자. 이때 고전적인 바쿠닌주의를 신봉하는 무정부주의 경향과 레닌의 코민테른을 지지하면서 맑스주의자를 자처한 초좌익 공산주의 경향을 구별하는 것이 유용하다.

전통적인 무정부주의적 조합주의자들은 볼셰비키당이 생산수단의 국가소유와 경제 중앙집중주의 등 맑스주의 노선을 이행하자 이를 비난했다. 1970년에 저술된 모리스 브린튼의 [볼셰비키당과 노동자에 의한 생산의 통제, 1917년-1921년]은 레닌 치하의 러시아에 반대한 무정부주의적 조합주의자들의 주장을 효과적으로 다시 표현한 최근 저작이다. 충실한 연구와 상당히 객관적인 시각을 장점으로 한 역사 시론인 이 저작에서 브린튼은 올바르게 이렇게 주장한다: 볼셰비키당은 언제나 중앙집중적 경제운영을 목표로 했으며 이들이 1917년과 1918년 시기에 노동자의 자주관리를 조심스럽게 수용한 것은 상황적 요인에 따른 전술적 목적 때문이었다.

그러나 브린튼은 기본적으로 맑스 이전의 사상적 조류에 공감하고 있기 때문에 소련 사회의 구체-특수성과 레닌, 스탈린, 브레즈네프로 이어지는 이 사회의 발전 상황에 무관심하다. 그와 그의 동료인 무정부주의적 조합주의자들은 계급을 정치적 경제적 행정가 집단으로 단순하게 규정한다. 달리 표현하면 이들에게 사회는 기본적으로 명령을 내리는 집단과 명령을 따르는 집단으로 구분되어 있다:

"또한 우리는 이렇게 주장한다: 생산관계를 혁명화하지 않고도 생산수단의 소유는 바뀔 수 있다; 예를 들어 개인 소유에서 집단적으로 이것을 소유하는 관료집단으로 생산수단이 이전될 수 있다. 이렇게 되면....사회는 여전히 계급사회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생산자들 자신이 아닌 대리인들에 의해 생산이 관리되기 때문이다."

브린튼과 그의 동료들의 최종 목표는 인류를 경제적 궁핍과 고된 노동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생산현장에서 위계적 관계를 제거하는 사소한 것이다:

"노동자의 생산 관리는 생산자들이 생산과정을 완전히 장악하는 것을 암시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주변적이고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우리 노선의 핵심이다. 이것은 생산에서 명령을 내리고 받는 권위주의적 관계가 극복되고 자유로운 공산주의 또는 무정부주의 사회가 도입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런 유형의 단순한 자유지상주의는 산업사회 이전 "자유로운" 장인의 지위로 되돌아가려는 공상적 소망에 불과하다. 볼셰비키주의에 대한 브린튼의 논쟁은 백년도 더 전에 엥겔스에 의해 완벽히 반박되었다. 그는 고전적인 반(反)무정부주의 논문 [권위에 대하여](1873년)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대규모 공업에서 권위를 없애려는 것은 공업 자체를 없애고 물레로 실을 잣는 시절로 돌아가기 위해 동력 직조기를 없애려는 것에 해당된다."

이 반박에 대해 우리가 새로 덧붙일 것은 정말이지 하나도 없다.

볼셰비키 혁명 직후 초좌익 공산주의 경향이 등장했다. 이들은 전통적인 무정부주의적 조합주의의 전제들을 다수 수용했다. 신경제정책의 자본주의적 성격과 스탈린 관료집단의 등장에 영향을 받아 이들은 코민테른에서 탈퇴한 후 러시아를 자본주의 체제라고 비난했다. 이 경향의 가장 중요한 인물은 이탈리아의 아마데오 보르디가와 독일의 후고 우르반스였다.

공장 책임자들이 큰 자동차를 몰고 있으므로 스탈린의 러시아가 자본주의 체제라는 참주선동적 노동자주의에 보르디가는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그의 주장도 단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관료집단은 이 상품들을 받고 자기 심장 가까이 가지고 있는 조그만 가죽 돈지갑 속에 접혀져 있는 직사각형 모양의 종이를 준다. 이 직사각형 종이는 돈이며 러시아어로 루블이다. 상황이 이렇다면 이것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관료집단이다."-- "트로츠키주의", [공산당 강령], 1972년 10월-12월

공산주의의 가장 낮은 단계인 사회주의가 소련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르디가는 증명한다: 계급, 상품생산, 화폐, 임노동 등은 계속 존재하고 있다; 이것은 사회주의 생산양식이 아니다; 따라서 자본주의 생산양식일 수밖에 없다.

부르주아 의회에 참여하는 것을 언제나 가장 극렬하게 반대한 보르디가는 자신이 노동계급 독재를 가장 열렬히 옹호하는 혁명가라고 상상했다. 그러나 그는 이 계급 독재에 어떠한 경제적 내용을 부여하는 것도 거부했다. 그에게 문제는 오직 누가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가에 있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 이행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노동계급의 혁명정당이 국가권력을 장악하여 사회를 통치하더라도 화폐, 임노동, 상품생산 등이 제거될 때까지 자본주의는 존재한다. 그는 이렇게 적었다: "러시아에 자본은 결코 파괴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소위 '전시 공산주의' 기간 동안 볼셰비키당 독재는 자본을 일시적으로 통제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자본은 볼셰비키당을 파괴했다." (강조는 인용자)

이 주장은 맑스주의 국가론을 정면으로 공격하고 있다. 국가가 경제적 내용을 가지고 있으며 국가권력이 특정 소유형태를 방어하는 무장 집단이라는 것을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철폐하고 계획경제를 시행하는 집단적 경제 체제는 보르디가에게 아무 의미도 없다. 따라서 보르디가가 스탈린 치하의 퇴보한 노동자국가에 대한 트로츠키의 이론을 거부하고 노동자국가라는 용어 자체를 혐오한 것도 하나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의 주장은 복잡하지만 논리는 단순하다. 소련에서 노동자들이 방어할 가치가 있는 것이 전혀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영어권 국가들에는 무정부주의적 조합주의나 초좌파 공산주의 그룹이 이렇다하게 존재하지 않는다. 남부 유럽이나 일본과는 크게 다르게 미국에서는 소련이 "국가자본주의 체제"라는 입장은 사민주의 그리고 지금은 모택동식 개량주의 더욱이 소련에 대항하여 미 제국주의를 차선책으로 지지하는 것과 연상된다.    

미국에서 "국가자본주의 체제"의 좌파적 시각을 명료하게 주장하는 인물은 라야 두나예프스카야이다. 러시아 출신인 그녀는 1930년대에 트로츠키주의 운동에 합류했다. 그리고 1940년대 후반에 서인도 제도 출신인 제이 알 잔슨이 주도한 조합주의 분파에 속했고 스페인의 그란디조 무니스와 관계를 느슨하게 맺으면서 제 4 인터내셔널에서 분립했다.

그녀의 입장을 일찍 간략하고 조리 있게 표현한 글은 "맑스주의 경제학에 대한 새로운 수정"이다. 이 글은 1944년 9월 [미국경제평론]지에 실렸다. 이 글에서 그녀는 "사회주의"에서도 가치법칙이 지배한다고 주장하는 러시아의 스탈린주의 경제학자를 반박하고 있다. 바로 이 때문에 그녀의 글의 제목이 선정되었다. 그녀가 개진한 입장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노동자를 한편으로 하고 공장 책임자, 집단농장의 백만장자 농민, 정치 지도자, 지식인 일반 등을 또 한편으로 하는 기능의 분화에 기초한 격심한 계급 분화가 러시아의 현실이다. 이 점을 증명하는 논란의 여지없는 증거들이 존재한다....지식인과 노동자 대중 사이의 구별은 다음과 같은 정식을 통해 경제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각자 자신의 능력에 따라 노동하고 노동의 결과에 따라 분배한다.' 이 정식은 전통적인 맑스주의 정식과 비교되어야한다: '각자 자신의 능력에 따라 노동하고 각자 자신의 필요에 따라 분배한다.' '각자 자신의 필요에 따라 분배한다.'는 명제는 가치법칙의 폐기를 의미하는 것으로 언제나 간주되어왔다. 그러나 스탈린주의 경제학자의 이 글은 '노동의 결과에 따른 분배'가 화폐를 매개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이 화폐는 쪽지나 회계적 용어가 아니라 가치의 가격적 표현이다."

그러나 두나예프스카야는 "각자 자신의 필요에 따라 분배한다."는 정식이 완벽한 공산주의 체제의 집약된 표현이라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는다. "고타강령 비판"에서 맑스가 명확히 언급했듯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의 이행기에는 경제적 궁핍과 이에 따른 차등 임노동이 특징적으로 존재한다. 노동자국가에서 임노동은 각기 다른 유형의 노동을 할당하고 부족한 소비재를 배급하고 노동에 대한 외적 강제력을 확보하기 위해 필요하다.

경제가 임노동에 기초하고 있다면 화폐로 계산되는 생산 비용은 경제 회계와 계산의 핵심 지수가 되어야 한다. 비록 매우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생산 비용을 화폐로 표현하는 것이 유일한 기준이 될 것이며 이를 통해 물리적으로 이질적인 재화와 서비스에 소모되는 각기 다른 종류의 자원들을 비교할 수 있다. 두나예프스카야의 주장과는 반대로, 화폐를 통해 노동 비용을 계산한다고 해서 경제에서 가치법칙이 지배하는 것은 아니다.

소련이 국가자본주의 체제라고 주장하는 무정부주의적 조합주의와 좌파 공산주의 경향은 그렇다면 어떤 강령을 제시하고 있는가? 전자는 시장관계를 통해 필요에 따라 연결되는 생산자 노동조합을 후자는 러시아에서 1918년부터 1921년까지 존재했던 "전시 공산주의"의 이상화된 유형으로 순수히 행정적인 경제체제를 강령으로 제시하고 있다. 물론 이것들은 모두 반동적이고 공상적인 강령들이다. 이것들은 안정적인 경제 체제로 존재할 수 없다. 이러한 강령들을 시도할 경우 경제는 붕괴할 것이다.            

생산자 협동조합을 근간으로 하는 경제체제는 곧 자본주의 착취체제로 퇴보할 것이다. 국가의 규제가 없을 경우 이윤을 많이 남기는 협동조합은 파산하는 협동조합을 매입하고 이 협동조합의 구성원들을 임노동자로 착취할 것이다. 시장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노동자 자주관리는 이윤을 산출하지 못하는 기업을 자본주의 착취 영역으로 포섭하는 내적 경향을 가지고 있다. 이 사실은 유고슬라비아에서 일반적으로 목격되고 있다. 티토 정권의 지도적 이론가인 에두아르드 카델리는 이렇게 설명한다: 엄격한 정부의 통제만이 이윤을 산출하는 기업이 그렇지 않은 기업을 접수하여 후자의 노동을 완전히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착취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카델리 저, "좀 더 높은 수준의 통합을 향하여", [사회주의 사상과 실천]지, 1967년 4월-6월).

생산자 협동조합이 자본주의를 복귀시킨다면 물질적 궁핍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화폐와 시장이 없이 완전히 행정적으로 운영되는 경제는 아주 순수한 형태의 반동적 공상이다. 스탈린 치하에서 노동의 군사화를 경험한 소련의 대중은 지금도 매주 공급이 달리는 물품을 구하기 위해 몇 시간 동안 줄을 선다. 이들은 행정적 명령에 의해 노동을 할당하고 무게나 크기를 기준으로 소비재를 배급하는 강령을 좋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초좌익 공산주의자들의 이 강령은 스탈린주의 정권에 대항하여 권력을 장악할 진지한 세력을 결코 결집시킬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이러한 강령이 가지고 있는 공상적 환상들은 혁명적 맑스주의 전위가 될 가능성이 있는 관념적 급진 청년들을 유혹할 수는 있을 것이다.

소련에 자본주의가 복귀했다는 모택동주의자들의 "이론" 아니 정확히 말해 교조는 주관적으로 사회 계급들을 재규정하는 특징이 있다. "수정주의자" 흐루시초프가 권력을 장악하여 소련공산당 제 20차 당 대회에서 유명한 "비밀 연설"을 했다. 모택동주의자들에 의하면 이때 스탈린의 "사회주의 국가"가 타도되고 자본주의가 회복되었다. 유혈 내전이 아니라 새로운 당 총서기와 연설을 통해 자본주의가 회복될 수 있다는 사고는 노골적인 관념주의이다. 그런데 이 황당한 사고를 모택동주의자들이 견지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스탈린, 흐루시초프, 브레즈네프 등을 통해 연속성을 지니고 있는 소련의 경제체제는 모택동주의자들을 제외한 모두들에 의해 경험적으로 논란의 여지없이 인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발전 수준은 대단히 다르지만 브레즈네프의 러시아와 모택동의 중국은 경제체제가 근본적으로 유사하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마튼 니컬러스와 같은 몇 되지 않는 모택동주의 지식인들은 전통적인 자본주의 기관들과 관계들이 브레즈네프 치하의 러시아에 회복되었다고 증명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 이들은 소련경제사를 완전히 조작해야한다. (니컬러스의 끝없는 조작들에 대한 폭로 글은 이 팜플렛에 수록된 "모택동주의자들이 '소련에서 자본주의를 회복시키는' 방법"을 참고하시오.) 다만 북경의 관료집단과 이들의 좀 더 조심스러운 추종자들은 소련에 자본주의가 회복되었음을 증명하기보다 그냥 주장하는 좀 더 안전한 방법을 선택해왔다.

반 정도 똑똑한 모택동주의자들은 소련에서 스탈린 치하에는 사회주의가 존재했고 지금은 자본주의가 존재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증명하려고할 경우 자신의 반대자들만이 승리할 것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미국에서 모택동주의 정통을 자처하는 혁명공산당은 니컬러스가 수정주의자이며 심지어는 트로츠키주의 방법론을 수용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왜냐하면 그는 상품-시장 관계가 경제 체제를 지배할 경우를 자본주의라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곧 시장이고 사회주의는 곧 계획이라는 '니컬러스'의 노선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사실 그의 노선은 자신의 경제가 계획을 통해 운영되고 있으므로 자본주의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소련 수정주의자들의 애호품이다....그의 노선은 트로츠키주의자도 채택하고 있다. 이들은 말로는 수정주의에 반대하면서도 사회주의의 주요 특징은 바로 중앙 계획이라고 언제나 주장해왔다.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에 대한 온갖 비판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소련과 사회주의 중국을 똑같이 '기형적 노동자국가'라고 규정하면서 자본가와 노동계급 통치 사이의 근본 차이를 완전히 무시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공산주의자]지, 1976년 10월

모택동주의 노선의 핵심은 위대한 조타수 모택동 자신의 언명에 함축되어 있다: "수정주의의 권력 장악은 곧 자본가 계급의 정권 장악이다." 그러나 수정주의는 교의와 사상의 영역에서 발생하는 반면에 부르주아 계급은 객관적으로 결정되는 사회집단이다. 이들은 생산수단을 시장에서 매매할 수 있는 상품으로 소유하고 있다. 모택동주의의 주관적 계급관은 당 주석 자신의 이 언명에서 뚜렷이 드러나고 있다.

모택동주의는 사회현실을 가장 순수하고 과장된 주관주의 시각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이 주관주의는 국가를 지배파벌/독재자와 동일시하는 모든 종류의 스탈린주의에 내재하고 있다. 국가는 지배적인 경제체제 즉 소유관계와 이것을 지키는 군사기구 사이에 역사적이고 객관적으로 조건 지워진 관계이다. 바로 이것이 맑스주의 국가관이고 국가의 현실이다. 지배집단 내부의 인물 교체가 아니라 이 집단 자체를 분쇄하는 것을 통해서만 국가의 계급적 성격이 변화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맑스주의를 옹호하며

소련이 "국가자본주의 체제" 또는 다른 형태의 계급착취 체제라는 입장은 기회주의 욕구의 이데올로기적 표현에 불과한 것만은 아니다. "국가자본주의"이론을 옹호하는 자들 가운데에는 카알 카우츠키와 토니 클리프 등과 같은 기회주의 배신자들 뿐 아니라 아마데오 보르디가와 그란디조 무니스와 같은 뛰어난 혁명적 지조를 가진 개인들도 있기 때문이다.

스탈린 치하 소련의 사회 성격은 맑스주의 운동의 이론적 문제들 가운데 가장 어려운 것에 속한다. 대대적인 농민 반란과 동맹하여 노동계급 혁명이 후진국 러시아에서 먼저 승리했다는 사실 자체는 전통적인 맑스주의 전망과 위배되었다. 그러나 레닌과 트로츠키는 볼셰비키 혁명을 자족적이며 일국 차원에서 제한된 사건이 아니라 유럽 전역에 임박한 노동계급 혁명의 도화선이라고 간주했다. 이후 제국주의 강대국들에게 포위된 채 경제적 후진국에서 노동자국가는 고립되었다. 맑스주의 전통은 이 현상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리고 노동자와 농민에 대한 대대적인 테러를 통해 절대주의적인 관료집단이 소련을 몇 십 년 동안 통치해왔다. 이 사실은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에 대하여 설명한 맑스나 레닌의 저작들을 모순에 빠뜨린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다수의 주관적 혁명가이자 자칭 맑스주의자들이 트로츠키의 '스탈린과 그의 후계자들이 통치해온 소련은 관료적으로 퇴보했을 지라도 노동자국가이다'라는 입장을 거부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니컬러스 식으로 증거를 조작하거나 고전적 맑스주의의 근본적인 요소들 특히 국가론을 거부해야만 소련을 자본주의 체제 또는 새로운 형태의 계급착취 체제라고 규정할 수 있다.     

맑스주의는 변화하는 현실과 무관한 교조가 아니라 경험적으로 입증이 가능한 과학적 분석이며 행동 지침 즉 정치 강령이다. 지금까지 발전해온 맑스주의 사상에 의해 전혀 예상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이 사상과 모순되는 것 같은 주요한 역사적 사건들을 어떻게 보아야하는가? 우선 맑스주의 세계관의 근간을 유지한 채 이론적 확장을 시도할 수 있다. 반면 노동계급에 입각한 공산주의 혁명 전망인 맑스주의 강령을 기각한 채 이것을 수정하려고 시도할 수 있다.

과학적 사회주의인 맑스주의는 두 가지 핵심 전제에 있어서 이 사상 이전에 존재했던 급진민주주의 지식인들의 공상적 사회주의 일반 그리고 특히 바뵈프주의, 생시몽주의, 오웬주의와 구별된다. 첫째, 생산수단의 사회화는 도덕적 이상의 현실화가 아니다; 자본주의는 생산력 발전을 정지시키므로 더 우수한 경제체제에 의해 대체되어야 한다; 이 때문에 생산수단의 사회화는 현실에서 가능하다. 둘째, 세계 역사적 규모에서 자본주의를 타도하는 동력은 조직된 노동계급이다; 무계급 무국가 체제인 사회주의로 가기 위해서는 노동계급 독재의 시기를 거쳐야한다.

10월 혁명에 의해 확립된 집단적 소유형태가 반혁명에 의해 청산되지 않았기 때문에 소련에는 노동계급 독재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트로츠키의 입장이다. 이것은 맑스주의의 중심 전제를 재확인한 입장이다. 노동계급 독재의 핵심 특징은 노동 대중에 의한 정부의 민주적 통제라고 카우츠키는 주장했다. 또는 지배집단의 노동계급적 지향이라고 모택동식 스탈린주의자들은 주장한다. 이 주장들은 모두 맑스주의 변증법을 거꾸로 뒤집어 놓은 것이다. 노동계급 독재가 역사의 진보적 단계인 이유는 이것이 사회주의의 물질적 전제를 구축하기 위해 필요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핵심은 물질적 전제 즉 집단적 소유이지 상부구조적 전제 즉 노동자 민주주의나 지배집단의 노동자 지향성이 아니다.

소련이 "국가자본주의 체제"이거나 다른 형태의 계급착취 사회라고 주장하는 진지한 자칭 맑스주의자는 이 질문에 대답해야한다: 이 사회의 형태는 진보적인 것인가 아니면 가장 선진적인 자본주의에서 역사적으로 퇴행한 것인가? 보르디가와 그의 추종자들은 소련의 경제구조가 전통적인 자본주의 경제구조와 같다는 경험적으로 옹호될 수 없는 입장을 제시한다. 이들만은 위 질문에 대답해야하는 이론적 책임으로부터 면제된다. "국가자본주의" 이론가들은 맑스주의의 변증법적 역사관에 입각하여 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다. 이것은 이들의 지적 천박성 그리고/또는 참주선동적 경향을 입증하는 증거이다. "러시아는 국가자본주의 체제이다"를 주장하는 문헌들은 무미건조한 용어상의 도식주의, 조야한 노동자주의 또는 무기력한 도덕주의를 압도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한 트로츠키의 언명을 들어보자:

"노동자국가는 무자비한 역사의 실험실에서 등장했을 뿐이며 손가락으로 코를 후비며 반성하듯이 후각을 의심하는 "사회주의자" 교수양반의 상상물이 아니다. 노동계급이 달성한 성과들은 적대 세력들의 압력에 의해 왜곡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들 모두를 방어하는 것이 혁명가의 임무이다. 이미 차지한 진지들을 방어할 수 없는 사람은 새로운 진지들을 결코 정복할 수 없다."-- 트로츠키, <맑스주의를 옹호하며> 중 31장 "핀란드 사태의 대차대조표", 1940년 6월

소련의 경제체제가 전통적인 자본주의에 비해 우월하다는 것은 경험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없다. 1920년대에 압도적으로 농민 중심의 경제체제였던 후진국 소련은 대대적인 관료적 기생주의와 관리부실에도 불구하고 현대적인 공업사회로 변모했다. 소련은 20세기 제국주의 시대에 이런 변모를 성취한 유일한 후진국이다. 더욱이 소련에는 자본주의의 경기순환에 따른 모순과 공황이 없다. 1930년대 대공황 시기나 1974년-75년 세계적 불황기에도 소련에서 공업생산은 급격히 팽창했다.

소련이 "국가자본주의 체제"이거나 "관료적 집산주의 체제"라고 주장하는 자들은 국가 관료집단이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모순들을 극복하고 생산력을 꾸준하고 급격하게 증대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이 대단히 수정주의적인 사고는 노동계급 혁명과 노동계급 통치의 진보적 성격과 역사적 필연을 의문시하고 있다.

한편 전체주의 정권의 민주주의 억압 때문에 소련이 가장 선진적인 자본주의 국가들보다 더 반동적인 체제라고 사민주의자들은 주장한다. 이 주장은 노동계급 독재와 공산주의가 공상적 환상이라고 암시한다. 사실 바로 이것이 사민주의 개량주의자들의 입장이다. 이에 따르면 스웨덴과 같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복지국가"는 사회조직의 최고 수준을 표현한다.

 

진보적인 관료적 통치의 시대?

소련이 진보적이며 새로운 형태의 계급착취 체제라고 명시적으로 주장하는 정치경향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이 견해는 트로츠키주의 운동권 내부의 수정주의자들에 의해 25년 전에 제시되었다. 이후 이 입장의 주창자들은 스탈린주의 통치에 대한 파렴치한 이런 변명에서 후퇴했다. 그러나 파블로의 청산주의는 한 시대 전체 즉 몇 백 년에 걸쳐 기형적 노동자국가들이 존재할 것이라는 대단히 반(反)맑스주의적인 강령을 처음 일반화시켰다.  

트로츠키는 이렇게 주장했다: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은 생산수단에 대해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지 않기 때문에 새로운 계급이 아니다; 따라서 이들의 통치는 기껏해야 역사상의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 현상은 선진 자본주의 세계가 노동계급 혁명에 늑장을 부리는 상황을 반영한다. 사민주의자들에 대항하여 트로츠키는 이렇게 주장했다: 관료적 보나파르트 체제에 의해 노동자 국가가 통치될 수는 있으나 이것은 세계적 차원에서 자본주의가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 의해 강요된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세계적 규모에서 노동계급 독재가 지배하는 시대에는 노동계급이 직접 통치계급이 될 것이고 소비에트 민주주의가 지배할 것이다. 따라서 사회주의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노동계급이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을 타도해야한다.

트로츠키의 이 입장은 1950년대 초반에 제 4 인터내셔널의 서기였던 미쉘 파블로의 수정주의 경향에 의해 도전받았다. "전쟁/혁명" 테제에서 그는 스탈린주의가 지배하는 소련 진영이 군사적 승리를 통해 세계 자본주의를 타도하는 전망을 상정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이 결과 관료화된 기형적 노동자국가들은 노동계급의 정치혁명이 아니라 점진적인 자기 개혁을 통해 민주화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파블로는 노동계급 지배의 시대를 진보적인 관료적 통치의 시대로 대체했다:

"최고 단계에 도달한 자본주의 체제는 균열을 일으키고 부패하면서 일련의 현상들을 허용한다. 이미 시작되었으며 상당히 진행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로의 이행 시대라는 일반적 틀 속에 이 현상들이 포함된다.

...이 변모는 수백 년의 역사 시대 전체를 요할 것이며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형태와 정권들에 의해 가득 채워질 것이다. 그리고 '순수한' 형태와 규범으로부터 필연적으로 일탈할 것이다." (강조는 인용자)-- 파블로,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1951년

실제로 파블로주의는 "관료적 집산주의 체제"의 긍정적 형태이다. 섁트먼과 파블로가 유사한 방법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 경향은 이미 오래 전에 인식했다. 스파르타쿠스 경향을 탄생시킨 문서 "혁명적 전망을 옹호하며"(1962년)는 이렇게 말했다:

"섁트먼-버넘의 이론과 마찬가지로 파블로의 이론은 우리 운동의 혁명적 전망을 부인하고 스탈린주의에서 세계 혁명 세력의 객관적 표현을 찾았다."-- [맑스주의 게시판]지 제 1호에 재수록

소련을 관료적으로 퇴보한 노동자국가로 이해하는 것이 진지한 혁명적 낙관주의에 왜 핵심적으로 중요한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트로츠키의 고전적 저작 "전쟁에 돌입한 소련"(1939년 9월)을 인용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그리고 트로츠키의 이 저작은 오늘날의 "국가자본주의"이론을 다루는 이 팜플렛을 위해 가장 좋은 서문이 될 것이다:

"자본주의와 부르주아 계급의 붕괴는 현재 극단까지 도달했다. 이 체제는 더 이상 존속할 수 없다. 생산력은 계획에 따라 조직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 임무를 누가 성취할 것인가? 노동계급일까 아니면 정치인, 행정가, 기술자들로 구성된 "정치위원(commissar)"이라는 새로운 지배계급일까? 노동계급에게 더 이상의 희망을 걸 수 없다는 것을 역사가 이미 증명했다고 좌익의 일부는 주장한다.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물질적인 전제조건은 이미 마련되었으나 노동계급은 제1차 세계대전을 저지할 "능력을 결여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후 파시스트들이 정치적으로 성공하고 있는 것도 노동계급이 자본주의 체제를 막다른 골목에서 구해낼 "능력을 결여"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소련의 관료화 역시 민주적 절차들을 통해 노동계급이 사회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결여한" 결과라는 것이다. 스페인 혁명은 세계노동계급이 보는 앞에서 파시스트들과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에 의해서 압살당했다. 이러한 사건들의 종착역은 새로운 제국주의 전쟁이다. 이 전쟁은 세계노동계급의 완전한 무능력에 의해서 공공연히 준비된 것이다. 이것이 이들의 논지이다. 만약 이 주장이 받아들여져서 노동계급이 사회주의혁명을 달성할 능력을 결여하고 있다는 것이 인정될 경우 생산력을 국유화하는 시급한 임무는 다른 누군가에 의해서 성취되어야할 것이다. 이것은 너무도 당연한 이치이다. 그러면 누가 이 임무를 성취할 것인가? 전 세계적으로 쇠퇴한 부르주아 계급 대신 지배계급이 될 신 관료집단이 이 임무를 성취할 것이다. 이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우리는 이 전쟁이 노동계급 혁명을 촉발할 것이라고 확고히 믿고 있다. 따라서 이 전쟁은 소련에서 관료집단을 타도시킬 것이며 1918년보다 훨씬 높은 경제적 문화적 기반을 토대로 소비에트 민주주의를 소생시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경우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이 "계급"인지 아니면 노동자국가의 기생적 혹인지는 자동적으로 판가름 날 것이다. 세계혁명의 과정 속에서 소련 관료집단은 일회적인 퇴행현상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모든 사람들에게 자명해질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전쟁이 혁명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쇠퇴를 가져온다면 다른 대안이 남아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즉 독점자본주의는 더욱 부패할 것이고 국가와 더욱 강력하게 융합할 것이다. 그리고 현재 민주주의가 그나마 남아 있는 곳도 전체주의로 대체될 것이다. 노동계급이 사회의 지도력을 장악할 능력이 없을 경우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보나파르트적 파시스트 관료집단으로부터 새로운 착취계급이 등장할 수도 있다. 이러한 사회체제는 모든 징후로 보아 문명의 쇠락을 의미할 것이다.

선진자본주의 국가의 노동계급이 정치권력을 장악한 후 소련과 같이 특권 관료집단에게 사회의 지배력을 넘겨주는 경우 이와 유사한 결과가 나타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관료적 퇴행현상은 러시아라는 특정 국가의 후진성이나 제국주의 세력에 의한 포위상태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회의 주도계급이 될 수 없는 노동계급의 선천적 무능력에 기인한다고 결론내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결론짓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현재의 소련은 자신의 근본적 특징들을 통해 국제적 규모의 새로운 착취체제의 등장을 알리는 선구자가 되었다.

논리를 끝까지 추구할 경우 결론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스탈린주의 체제는 자본주의 사회를 사회주의 사회로 변모시키는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나타난 끔찍한 퇴행의 결과가 아니면 새로운 착취사회의 첫 단계이다. 만약 후자의 경우라면 관료집단은 당연히 새로운 착취계급이 될 것이다. 이 예측이 아무리 당혹스러워도 어쩔 수 없다. 세계노동계급이 자신의 역사적 임무를 성취할 실제 능력을 보유하지 못할 경우 자본주의 사회의 내적 모순에 기초한 사회주의 강령은 허황된 공상(유토피아)에 지나지 않는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현재 사회주의혁명의 전망을 기각시킬 논란의 여지없고 인상에 깊이 남는 객관적 자료가 존재하는가? 이것이 가장 핵심 문제이다....

실망감과 피로감은 마땅히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아니다. 따라서 노동계급이 혁명적 잠재력을 박탈당했으며 당면한 시대에 사회 주도권을 장악할 모든 열망을 포기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릴 권리가 맑스주의자에게는 조금도 없다. 경제와 문화를 아주 철저하게 변화시키는 문제를 해결하는 경우 25년은 역사의 잣대로 보면 사람의 일생에 있어서 한 시간의 길이도 되지 않는다. 한 시간이나 하루에 걸쳐 실패한 경험을 가지고 평생의 경험과 분석을 통해 설정한 목표를 버리는 사람을 도대체 무엇에 써먹겠는가? 1907년에서 1917년까지 러시아의 가장 어두운 반동기에 우리는 1905년 러시아 노동계급이 보여준 혁명 잠재력을 출발점으로 삼아 미래를 준비했다. 세계적인 반동기에 우리는 1917년 러시아 노동계급이 보여준 혁명 잠재력을 출발점으로 삼아 미래 혁명을 준비해야 한다. 제4인터내셔널이 자신을 사회주의혁명을 위한 세계정당이라고 이름 붙인 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우리의 노선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세계혁명을 향해 나아가고 있으며 이 사실 자체를 통해 소련이 진정한 노동자국가로 소생하도록 정치행동을 조직해 나간다."    

 

2. 모택동주의 경제학의 빈곤

--- 베틀렝/스위지의 반동적 공상주의

 

                                            필자: 조지프 씨모어

 

모택동주의자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소련에 자본주의가 복귀했다; 소련은 "공격적이고 팽창하는 사회제국주의"국가가 되었다. 이를 통해 이들은 소련에 대항하여 미 제국주의와 더욱더 전면적이고 공개적으로 동맹하는 중국의 노선을 정당화시키고 있다. 최근 북경은 나토군을 더욱 강화해야한다고 계속 경고해왔으며 작년 겨울에는 미국이 지원하고 남아공 군대가 주도하는 앙골라 침공을 지지했다(역자 주: 1975년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한 앙골라에는 소련과 쿠바가 지원하는 게릴라 군대와 서방이 지원하는 게릴라 군대가 내전을 벌이고 있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중국의 반혁명 정책을 지지하는 서방의 모택동주의자들이 이렇게 믿고 있다는 사실이다: 중국은 현재 유일한 사회주의 국가이며 스탈린 치하 러시아보다 더 높은 수준의 사회주의를 구현하고 있다. 따라서 무엇이 공산주의로 나아가는 진보적 정책이냐는 언뜻 보기에 추상적인 문제는 스탈린주의자들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분파투쟁의 중요한 쟁점이 되고 있다. 모택동 지지자들은 중국이 어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이 급격히 소위 공산주의로 전진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중국의 대외정책을 무조건 지지하고 있다.

소련 스탈린주의자들의 "일국사회주의" 노선은 언제나 기술 발전의 역동성을 전제로 깔고 있었다. 후진국 러시아가 계획경제를 통해 한 두 세대 만에 선진 자본주의국가들을 따라잡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스탈린의 [레닌주의의 문제들](1933년 판본)은 이렇게 주장한다: "우리는 자본주의 선진국들에 비해 50년 또는 100년 뒤처져있다. 10년 만에 이 격차를 좁혀야한다."

사실 1930년대 러시아에 비해 모택동의 중국은 지금 경제적으로 훨씬 더 후진적이다. 중국과 미국의 생산력 격차는 너무 커서 정치적으로 의미 있는 기간 내에 이 격차를 좁히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다. 1950년대 후반에 모택동 정권이 소련 진영과 결별했을 때 중국의 스탈린주의자들은 자신들이 그동안 고수해온 스탈린주의를 근본적으로 수정해야했다. 이에 따라 "사회주의"는 지구상에서 가장 궁핍한 나라 가운데 하나인 중국에서도 즉시 성취될 수 있는 체제로 재규정되었다.

따라서 모택동식 스탈린주의는 소련의 스탈린주의보다 맑스주의의 다음과 같은 기본 전제를 더욱 심각하게 침해하고 있다: 가장 선진적인 자본주의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의 노동생산성을 통해 물질적 풍요를 성취해야 사회주의가 가능하다. 모택동주의는 계급사회를 주관주의적으로 재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사회주의적 관계들은 "문화혁명"으로 성취되고 소련의 자본주의 복귀는 니키타 흐루시초프의 두뇌 안에서 주로 일어났다.      

특히 "문화혁명"을 통해 드러난 모택동주의의 원시주의와 극단적 주지주의(主志主義)는 서방의 소부르주아 급진주의자들을 크게 매료시켰다. 이것은 지금 존재하는 소외된 노동을 인류의 기술적 문화적 수준을 높이는데 필요한 역사 시기 전체가 필요 없이 즉시 끝장낼 것이라는 약속이었다. 이로 인해 1960년대 후반에 다수의 마르쿠제 추종자들은 모택동 충성파로 변모했다. 카스트로의 쿠바나 호지명의 월남 등 "제 3 세계" 스탈린주의 정권들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모택동주의에 신비한 매력과 호소력을 부여한 것은 바로 중국이 소련 유형의 "경제주의"와 단절하고 진정한 "사회주의 인간상"을 실현했다는 믿음이다.

물론 중국의 경제 현실은 샤를르 베틀렝, 폴 스위지, 윌리엄 힌튼 등 서방 모택동주의자들이 중국을 이상화한 내용과는 매우 거리가 멀다. 현재 중국은 브레즈네프 치하의 러시아만큼이나 빈부격차가 심화되어 있으며 관료들의 부패와 암시장 행위가 만연되어 있다. 중국과 소련의 관료적으로 기형화된 노동자국가는 진정으로 혁명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자 정부의 경제 강령보다는 서로간의 공통점이 훨씬 많다.

특히 중국의 경제정책은 흐루시초프 후기(1958년-1964년)의 지방 분권화 정책과 대단히 유사하다. 두 나라 모두에서 지방 분권화는 관료집단 내부의 분파투쟁이 있은 후 경제자원에 대한 통제력을 중앙집중화된 행정적 기술적 중앙기구에서 지역 당 책임자들에게 이전하는 과정을 밟았다. 그러나 이 글의 목적은 중국의 타락한 관료적 현실을 서방의 모택동 미화자들의 "급진적" 모택동주의 이상에 대비시키는 것이 아니라 모택동주의에 내재한 이상주의 자체가 반동적 공상주의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폭로하고 비판하는 것이다.

 

원시 평등주의를 비판한 맑스

기술 발전에 대한 관심을 "자본주의 노선"과 동일시하는 것이 모택동주의 변호론의 근간이다. 예를 들어 베틀렝은 후진국들이 중국의 "자립" 노선을 따르되 수입된 선진기술에 기초하여 경제를 개발하면 안된다고 충고한다. 그는 선진기술이 태생적으로 자본주의적(!)이라고 규정한다:

"예를 들어 자본의 기술적 구성의 증대를 고려해보자. 이것은 생산비용을 줄이기 위해 생산단위의 규모를 '필연적으로' 증대시키는 것이다....'기술의 자연스러운 법칙'에 기초한 생산양식이기는커녕 이것은 아주 단순하게 말하여 사회 법칙이 아닌가?.... 이것은 자본주의 생산관계가 생산력을 지배하는 결과가 아닌가? 아주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것은 자본주의 집중과 집적 법칙의 결과가 아닌가? 그렇다고 생각할 이유는 많다." (강조는 원저자)-- 샤를르 베틀렝, [소유의 경제적 계산과 형태들], 1975년

소위 평등주의적이며 주지주의적인 "중국식 사회주의로의 길"과 소련 유형의 "경제주의" 사이의 대조를 폴 스위지는 명확히 표현하고 있다. 그는 모택동주의를 정통 맑스주의로 주장하는 일에 베틀렝보다는 관심이 덜하다:

"...중국혁명의 경험은...생산력의 낮은 수준이 사회주의 생산관계로의 변화에서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본원적 축적' 과정과 불평등의 심화를 반드시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또한 사회주의의 물질적 기초를 먼저 건설하고 나중에 이에 상응하는 사회관계를 구축하려는 시도가 스스로를 패배시키는 행위라는 것도 보여주었다....."-- "소련 사회의 성격, 제 1부", [월간 평론]지, 1974년 11월

그리고 스위지는 스스로가 믿기에 "중국식 사회주의로의 길"이 맑스주의에 독보적으로 기여했다고 강조한다:

"오직 중국만이 맑스주의로부터 부르주아 경제주의적 흔적을 마침내 일소할 수 있었다. 세계의 어느 나라보다도 이 나라에서 혁명을 성공시킬 조건은 가장 유리했다."-- "소련 사회의 성격, 제 2부", [월간 평론]지, 1975년 1월    

맑스주의가 비판했던 교조들과 사상들을 진리로 재발견하는 것이 수정주의의 운명이다. 모택동주의는 맑스주의 이전의 소부르주아적 공상적 사회주의로 명확히 회귀했다. 최초의 사회주의자 바뵈프, 오웬, 바이틀링, 까베 등이 구상한 강령적 모델은 화폐와 시장이 없는 자립적 생산단위였다. 여기에서는 중앙의 정치권력이 노동을 각 분야로 할당하고 생산물을 분배했다. 간단히 말하면, 중국의 대약진운동 시기에 등장한 "인민공사"의 순수한 유형이 공상적 사회주의들이 상정한 미래 사회의 모델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소련의 국가 소유보다 더 높은 형태의 사회주의라고 베틀렝은 주장한다.

바뵈프를 비롯한 초기 공산주의자들을 역사적으로 정당하게 평가해야한다. 이들이 상정한 정의로운 사회 모델은 유럽 대륙을 지배했던 산업혁명 이전의 기술수준에 의해 필연적으로 한계가 지워졌다. 대체로 엥겔스와 협력하여 영국 산업혁명의 의의를 동화한 결과 맑스는 공상적 사회주의의 원시 평등주의적 사고를 극복할 수 있었다.

1843년 파리에서 공산주의자가 된 순간부터 맑스는 바이틀링과 까베 등 당시 공산주의자들을 지배했던 "병영 사회주의" 편향을 격렬하게 비판했다:

"이런 유형의 공산주의는 모든 영역에서 인간의 개성을 부인하기 때문에 사적 소유의 논리적 표현에 불과하다. 사적 소유는 공산주의의 부정이다.... 인간 발전을 최소한의 수준에서 미리 상정한 후 물질적 풍요를 시기하고 인간 발전을 하향 평준화시키는 절정이 바로 조야한 공산주의이다. 이것은 명확하고 제한된 기준을 가지고 있다. 사적 소유 철폐의 성과 가운데 얼마나 적은 부분이 공공의 이익을 위해 사용되는 지는 문화와 문명의 세계 전체를 추상적으로 부정하고 가난한 자와 조야한 자들의 부자연스러운 단순성으로 퇴행하는 현상이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가난한 자들과 조야한 자들은 사적 소유를 극복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이에 도달하지도 못했다." (강조는 원저자)-- 맑스, [1844년의 경제 철학 수고]

맑스가 주도한 공산주의동맹은 1847년 9월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잡지 [공산주의 저널]지를 발행하고 사설을 실었다. 여기에서 이 조직은 자신의 선행조직이자 원시 평등주의를 제창한 의인동맹 그리고 당시의 공산주의 경향들과 자신을 이렇게 차별화했다:

"개인적 자유를 파괴하고 세계를 하나의 거대한 병영이나 거대한 구빈원으로 변모시키려는 공산주의자들과 우리는 다르다. 개인적 자유를 인정하지 않고 이것이 완벽한 조화에 방해된다고 생각하여 이것을 세계에서 몰아내려는 공산주의자들이 일부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자유를 평등과 교환할 생각이 우리에게는 조금도 없다. 공동 소유에 기초한 사회가 어떤 사회보다도 개인적 자유를 가장 많이 보장한다고 우리는 확신한다."-- 데이빗 리아자노프 편집, [맑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 1928년에서 인용

지금부터 130년 전에 유럽의 장인-노동자 전위였던 최초의 맑스주의자들은 모택동식 사회주의를 거부했다. 모택동주의의 반동적 성격을 이것보다 더 잘 드러내는 증거는 없을 것이다!

맑스주의 이전에 등장한 공상적 사회주의와 모택동주의의 "급진적" 이상은 둘 다 역사 과정에서 소멸할 운명을 지닌 사회집단의 이데올로기적 표현이다. 원시 평등주의인 "병영 사회주의"는 산업혁명의 등장으로 궁핍에 처한 장인들의 반사적 반응이었다. 자립적인 생산자 협동조합을 스스로 조직하여 자본주의의 적대적 환경에서 탈출하려는 장인(수공업자)들의 충동을 이데올로기적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이 경향이다.

선진 자본주의 강대국들이 지배하고 있는 세계에서 고립된 후진적 기형적 노동자국가의 관료집단은 나름의 허위의식을 가지고 있다. 이 허위의식을 표현한 것이 바로 "일국 사회주의"의 주지주의적 변종인 모택동주의이다. 노동계급의 국제혁명을 통해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타도될 경우 중국의 스탈린주의 정권은 한 칼에 타도될 것이다. 따라서 본능적으로 모택동주의 관료집단은 사회주의 미래의 핵심인 노동계급 국제혁명을 거부하고 중국 현실을 이상화한 공산주의로 상정한다.

1840년대의 맑스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그의 후계자인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의 생산력을 혁명적으로 전유해야 사회주의가 수립될 수 있다.

 

"제 2 질문: 공산주의자들의 목표는 무엇인가?

답변: 모든 사회 성원이 완전한 자유를 누리면서 사회의 기본조건을 침해하지 않는 가운데 자신의 능력을 전부 발휘할 수 있는 사회를 조직하는 것이다."-- 엥겔스, "공산주의 신념 고백 초안", 1847년

"국가 차원의 계획, 시장, 소비에트 민주주의 등 세 가지 요소들의 상호작용을 통해서만 이행기 경제의 올바른 방향을 잡을 수 있다."-- 트로츠키, "위험에 빠진 소련 경제", 1932년 10월

 

모택동의 주관주의에 봉사하는 반(反)계몽주의

샤를르 베틀렝은 프랑스의 오랜 정통 스탈린주의자였다가 1960년대 후반에 모택동주의자가 되었다. 그는 [북경 평론]지의 조야하고 심지어 당혹스러운 주관주의적 사설들을 맑스주의로 치장하는 아주 야심찬 노력을 해왔다. 그의 저작들은 반(反)계몽주의를 지겨울 정도로 강변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뒤틀린 용어상의 허세와 신랄한 논리의 비약을 구사한 후 베틀렝은 예상할 수 있는 결론에 도달한다: 사회의 계급적 성격은 지배 집단의 태도에 달려있다. 소련에 자본주의가 복귀했다고 베틀렝은 주장한다. 그리고 그의 중국인 스승인 모택동 일당은 유소기, 임표, 강청 등이 차례로 "자본주의 노선"을 걸었으며 그것도 오랫동안 이중첩자로 이렇게 했다고 주장한다. 이 두 주장들은 모두 똑같은 정도로 사회주의와 거리가 멀다.

베틀렝은 맑스주의자들이 다음과 같이 자본주의를 규정하는 것을 거부한다: 자본주의는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에 기초한 일반화된 상품생산체제이다. 대신 그는 "생산수단으로부터 직접 생산자가 분리된 체제"가 바로 자본주의라고 규정한다. 이것은 신좌익(New Left)의 자유지상주의와 무정부주의적 조합주의 냄새가 나는 애매한 규정이다. 그는 임노동을 자본주의의 핵심 요소로 보고 있다:

"자본주의 생산관계를 구성하고 있는 것은 바로 상품생산에 개입하고 있는 임노동 관계이다. 이 점을 특히 강조해야한다." (강조는 원저자)-- [소유의 경제적 계산과 형태들]

소련을 "국가자본주의 체제"라고 규정하는 모든 자들과 같이 베틀렝도 소련의 사회 성격에 대해 자기 나름의 독특한 이론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 그는 소련에 대해 두 가지 기본적으로 다른 정의를 내리고 있다. 그에게 국가자본주의는 노동계급 독재 내부의 상품 관계의 총합이거나 새로운 형태의 부르주아 생산양식이다. 대단히 혼란스러운 이 이중적 규정은 소련에 대항하여 중국 스탈린주의를 변호하는 그의 목적을 위해 매우 중요하다.

순수한 무정부주의적 조합주의와 베틀렝의 모택동주의를 비교하면 이 점은 명확해진다. 무정부주의적 조합주의자는 임노동을 특징으로 하는 경제체제가 자본주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베틀렝은 조합주의자가 아니라 스탈린주의자이다. 레닌주의 전위당의 가면을 쓴 스탈린주의 관료 엘리트 집단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폭력과 테러를 통해 노동자와 인민을 통치한다. 이 체제를 베틀렝은 철저히 신봉한다. 따라서 그는 무정부주의적 조합주의자들과 다른 점을 보여야한다.  

베틀렝의 이론에 따르면 진정한 노동계급 전위가 권력을 잡고 있으면 "국가자본주의 체제"는 사회주의 건설에 "종속 된다". 모택동의 중국이 이 경우이다. 그러나 권력이 진정한 전위에게 있지 않을 경우에는 "국가자본주의 체제"가 지배한다. 브레즈네프의 러시아가 이 경우이다:

"간단히 말해서 국가적 통제를 통해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는 국가기구가 대중과 떨어져 존재할 경우 그리고 더욱이 이 기구가 대중과 연결되어 이들이 생산수단의 사용에 대한 통제권를 확립하기 위해 투쟁하는 것을 지원하는 정당에 의해 통제되지 않을 경우, 생산수단으로부터 직접생산자가 분리되는 현상이 재생산된다. 이 조건 속에서 노동력과 생산수단의 관계가 임금 관계를 통해 표현된다면 이것은 자본주의적 관계이다. 그리고 중앙 및 관련된 국가기구의 지도적 직위를 차지하고 있는 자들은 집단적으로 자본가이며 국가 자본가이다....왜냐하면 지배정당이 노동계급의 정당이 아니라면 노동계급 독재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베틀렝/스위지, [사회주의로의 이행에 대하여], 1972년

전위당은 평화적이고 유기적인 과정을 통해 타락하면서 자신의 계급적 성격을 상실할 수 있다. 이것이 베틀렝의 주장이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폭력적인 반혁명이 없이도 노동자국가는 자본주의로 복귀할 수 있다. 따라서 레닌주의 국가관을 근본적으로 거부하고 주관주의적 주지주의를 수용하는 것이 모택동주의에 내재한 속성이다.

베틀렝은 경제계획의 성격과 수준 등의 객관적 척도를 제시하고 있는가? 집단적 경제 내부에서 상품관계는 지배적인가 아니면 부차적인가? 아니다, 그는 이런 객관적 척도를 부인한다. 브레즈네프 치하의 소련에 비해 중국에서 시장은 훨씬 더 큰 역할을 하고 있으며 기업의 자율성이 더 크지 않은가? 이 질문에 대해 베틀렝은 이렇게 외친다: 아니다, 이것은 환상이다! 경제계획의 권한은 오직 진정한 수제자들에게만 허용된다. 크렘린궁의 스승들이 사회주의에 대한 신념을 상실한 수정주의자들이므로 이들은 계획을 수립할 권한을 상실했다. 소련에서 경제계획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전위가 존재하지 않고 특히 집권 노동자정당이 노동계급 전위의 특징을 더 이상 가지고 있지 않다면 계획의 관계가 시장관계를 지배하게 만드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조건은 존재하지 않는다. 상황이 이렇다면 '계획'이라는 이름을 가진 문서가 공식적으로는 존재할 수 있지만 이것은 진정한 계획이 없다는 현실을 숨길 뿐이다." -- [소유의 경제적 계산과 형태들]

이 시점에서 베틀렝은 [북경 평론]지의 공공연한 주관주의자들과 재회한다: 객관적 경제관계가 아니라 정치권력을 휘두르는 자들의 태도에 의해 계급들이 존재한다. "진정한" 노동계급 전위가 "진정한" 경제계획을 실시하는 지를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 핵심 문제에 대해 베틀렝과 그의 모택동주의 동료들은 믿는 자만이 볼 수 있으며 최근의 숙청이 이 질문에 대한 답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 뿐이다. 중국공산당이 "진정한 전위"라는 베틀렝의 신념은 강청을 비롯한 문화혁명의 "급진파"가 숙청되면서 흔들린 것은 아닐까? 결국 베틀렝의 이론은 문화혁명에 의해 영감을 받았는데 이 혁명의 지도자들은 "자본주의 노선"을 걸은 배신자로 낙인찍힌 채 모두 사망하거나 감옥에 갇혀 있다.

 

소련에 화폐자본이 존재하는가?

소련과 중국에 지금 존재하고 있는 형태의 임노동이 자본주의적 관계라는 베틀렝의 주장은 좀 더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그를 사로잡고 있는 집착은 화폐 형태가 태생적으로 자본주의 관계라는 것이다. 그의 저작 [소유의 경제적 계산과 형태들]의 중심 주제는 각기 다른 유형의 노동 투입량을 포함한 다종다양한 물리적 단위에서 화폐적(자본주의적) 계산을 경제적(사회주의적) 계산과 대치시키는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임노동자는 노동시간을 투여한 대가로 자본가로부터 화폐를 받는다. 화폐는 때때로 상품과 교환할 수 있는 종이쪽지가 아니다. 배급표는 화폐가 아니다. 화폐는 교환가치의 일반화된 구현체이다. 맑스에 의하면 화폐는 "보편적인 지불수단, 보편적인 구입수단, 보편적인 재화의 구현체"로 존재한다([자본론] 제 1권, 제 3장). 다른 모든 형태의 금융에 비해 화폐는 일반화된 교환가치이다. 맑스는 주장했다: 궁극적으로 화폐는 정부의 명령이 아니라 노동의 산물이라는 내재적인 가치를 보유한 귀금속에만 기초하고 있다.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소비재를 판매할 경우 이것을 생산하고 유통시킨 특정 자본가들의 화폐자본은 직접 그리고 즉시 늘어난다. 이와 대조적으로 소련에서는 임금/소비와 연관된 금융의 흐름과 기업 간 거래와 연관된 금융의 흐름은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다. 이 경험적인 사실은 스탈린 자신(그의 저작 [소련 사회주의의 문제들]을 참조하시오) 뿐 아니라 소련경제에 대한 부르주아 전문가들 모두에 의해 인정되고 있다. 유독 베틀렝과 그의 모택동주의 동료들만이 소련 경제에서 화폐자본이 순환되고 있다고 믿고 있다.

소련에서는 특정 기업이 소비재를 판매하더라도 이것을 생산한 기업의 은행 잔고는 상부 경제부처의 중재를 통해 아주 간접적으로만 영향을 받는다. 더욱이 소련 기업들의 은행 구좌에 들어있는 화폐 액수 역시 화폐자본이 아니다. 기업 책임자는 "자신의" 은행 잔고에서 돈을 빼내 원하는 대로 물건을 살 수 없다. 공급계획에 명시되어 있거나 상부에서 이후 승인한 물건만을 살 수 있다. 소련의 금융체제를 묘사하기 위해 자본주의적 범주들을 사용해보자. 일반화된 배급표로 노동량은 지불되고 기업들은 화폐자본의 순환이 아니라 거래신용의 확대와 감축을 통해 서로 물건을 사고판다.

이 측면에서 보면 소련 경제는 맑스가 명확히 예상한대로 물질적 부족 상황에 놓여있는 사회화된 경제의 금융체제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

"사회화된 생산체제에서 화폐자본은 일소된다. 사회는 각기 다른 생산 분야로 노동력과 생산수단을 분배한다. 생산자들은 마침내 종이증서를 받는다. 이것으로 이들은 사회전체의 소비재에서 자신들이 투여한 노동시간에 해당되는 몫을 받는다. 이 종이증서는 화폐가 아니다. 이것은 순환되지 않는다.-- 맑스, [자본론] 제 2권, 제 18장

 

배급 대 시장 유통

예상할 수 있듯이 베틀렝은 생산에서 상품 형태를 일소하는 것이 사회주의의 목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는 주로 "이념의 혁명화"를 통해 이 목표에 가까이 간다고 생각한다:

"정치와 이념에 기초하여 사회주의 노동자들 사이에 단결이 이루어져야한다. 이러한 단결은 남아있는 시장관계를 결국 일소할 것이며 새로운 사회주의 관계의 등장을 예상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것은 중국공산당의 지도하에 전개되는 계급투쟁에 의해 성취되는 이념의 혁명화와 직접 연관되는 결과이다." (강조는 인용자)-- 베틀렝, [중국의 문화혁명과 산업조직], 1974년

차등 임금에 의한 노동이 공산주의로 이행하는 시기의 필연적인 특징이라고 맑스는 생각했다. 이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이 사상은 [고타강령 비판]과 [반뒤링론]에 명확히 표현되어 있다. 노동이 무시해도 좋을 정도의 시간과 에너지를 요할 때에만 개인은 이것을 사회 집단에 자유롭게 제공할 것이다. 임노동이 "이념의 혁명화"를 통해 일소될 수 있다는 사상을 맑스는 주관적 관념론이라고 비판하며 무자비하게 비웃었을 것이다. 중국 관료집단이 "물질적 동기"보다 "도덕적"동기를 선호한다는 주장은 국가의 강제에 의해 노동량을 할당하는 현실을 은폐하기 위한 것이다. 국가의 강제는 임노동보다 더욱 억압적인 동시에 경제적으로 더욱 비효율적이다.

"이념의 혁명화"로 위장된 국가의 강제를 사용하여 중국의 관료집단은 도시의 청년학생들을 무기한 농촌으로 내려 보내고 있다. 이 관행은 엄청난 사회적 불만을 초래할 뿐 아니라 아마도 중국 경제에 손실만을 끼칠 것이다. 농촌으로 이전된 청년들은 농사일에 무관심하고 게으르다. 농민들은 반항적이고 노동을 꺼리며 자신들이 감옥에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청년들을 일부 지원하고 이들과 연대해야하는 고역을 당연히 싫어한다.

또한 베틀렝은 주관주의적 편견으로 인해 소비재의 개인적 구매보다 배급제나 사회화된 배분을 선호한다. 그러나 사회주의의 목적은 하나의 생활양식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개인의 능력을 완벽하게 발전시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개인은 정신적인 요인이 아니라 물질적 재화를 필요로 한다. 예를 들어 유화와 조각 작품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재료들이 섬세한 색채로 제공되어야 한다. 전체적인 공급 한계 내에서 사회주의 경제정책은 소비재의 개인적 선택을 극대화시키려고 한다. 배급제나 공급이 달리는 소비재를 선착순으로 "무상" 분배하는 것은 이 목적을 파탄시킨다. 1960년대 초반에 카스트로와 게바라는 하룻밤 사이에 쿠바에 사회주의를 정착시키려고 전화 요금을 폐지했다. 이 결과 전화를 한 통화하기 위해 몇 시간을 기다려야했다! 가장 완벽하고 광범위한 노동자 민주주의가 시행되더라도 배급제, 차별 가격제, 사회화된 분배는 행정적인 자의성과 주관주의를 초래한다. 행정 관료들이 비이성적이며 파벌주의에 찌든 중국에서는 이 주관적인 자의성이 몇 배나 증폭되고 있다.

물론 전쟁이나 자연재해 시에는 경제의 모든 부문이 행정적으로 엄격히 통제되어야한다. 그러나 노동계급 독재가 일반적으로 시행되고 임금 구조가 최적일 경우 시장은 공급이 달리는 소비재와 서비스를 개인적 필요와 욕구에 맞추는 데에 가장 효율적이고 민감하며 민주적인 장치이다. 사회화된 분배는 특정 장점에 의해 정당화될 때에만 예외적으로 확대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노동자정부는 스포츠 시설을 이용할 수 있도록 무상이나 지원금 제도를 시행할 수 있다. 도시 내부의 대중교통처럼 가격에 의해 거의 영향을 받지 않는 필요 서비스를 무상으로 제공하는 것도 합리적이다. 그러나 필요 공급량이 완전히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사회화된 분배를 확대하는 것은 개인적 선택을 제약하면서 사회생활을 빈곤하게 만든다.

여기서도 맑스는 베틀렝의 "중국식 사회주의로의 길"을 명백히 반대한다. 물질적 부족이 존재하는 집단적 경제에서 소비재는 생산비용에 맞추어 가격이 정해지고 판매되어야 한다. 이것이 맑스의 생각이었다. 실제로 그는 이렇게 믿었다: 경제 계획이 실시될 경우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경기 변동은 사라질 것이며 소비재는 진정한 가치와 균형 수량으로 공급될 수 있다:

"생산이 실질적이고 미리 정해진 정도로 사회에 의해 통제될 때에만 사회는 특정 물건을 생산하는데 소모되는 사회적 노동시간의 양과 이 물건들에 의해 만족될 사회적 필요의 양 사이의 관계를 확립할 수 있다....그러나 특정 물건의 생산에 소모된 사회적 노동량이 이 물건에 대한 사회적 수요에 일치하고, 생산된 물건의 양이 재생산의 평상적 규모에 일치하고, 수요가 변동이 없을 때, 이 물건은 자신의 시장 가치에 의해 판매된다. 진정한 가치로 상품이 교환되거나 판매되는 것은 이성적 상황 즉 균형의 자연법칙이 될 것이다." (강조는 인용자)-- 맑스, [자본론] 제 3권, 제 10장

노동계급 독재의 시기에 시장은 개인적으로 소비되는 한정된 재화와 서비스의 존재하는 공급량에 따라 이것들을 분배하는 정상적 수단이 되어야한다. 그러나 특정 소비재의 생산능력을 확대하는 것은 중앙 집중화된 투자계획을 통해 결정되어야한다. 자동차산업의 정착과 같이 특정 소비재 산업에 대한 주요한 투자는 예상되는 시장의 수요 뿐 아니라 바람직한 사회적 이익과 관련된 집단적 정치적 결정에 의해 통제되어야한다.

 

일반적인 물질적 부족에서 풍요의 공산주의로 나아가는 맑스주의의 경로

어떤 의미에서는 모택동주의 선전가들의 조야한 반(反)맑스주의 노선은 이들이 말하는 것보다 말하지 않는 것에 의해 더 잘 표현되고 있다. 맑스와 엥겔스는 공산주의 사회와 그 경로를 말할 때마다 필요노동시간의 급격한 축소와 이것을 창조적이고 과학적인 작업으로 대체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생필품을 생산하는데 필요한 노동시간의 감소는 맑스에게 인간 진보의 중심적 척도였다. 이것만이 아니었다. 그는 특히 제 1 인터내셔널의 초기에 노동시간 단축을 선동했다.  

베틀렝, 스위지 등의 저작들은 사회주의의 전제조건인 노동시간 단축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노동의 양과 질은 거의 바뀌지 않은 채 기존의 기술수준에 기초하여 상품생산 관계가 일소되어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스위지는 이런 식의 공산주의를 집약해서 이렇게 표현했다:

"...공산주의에서 계급은 사라졌다: 국가는 사멸했다; 억압적인 분업형태들은 극복되었다; 도시와 농촌 그리고 정신노동과 육체노동 사이의 구별은 철폐되었다; 분배는 필요에 따라 이루어진다, 등등"-- [사회주의로의 이행]

"경제주의적인" 맑스주의를 퇴치하는 과정에서 이 모택동주의 선전가는 어떻게 사회주의 건설이 가능하고 이집트의 파라오 시대에는 왜 사회주의가 건설될 수 없었는지 등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노동과 경제학에 초점을 맞추느라 우리는 스탈린주의 "일국사회주의"이론에 내재한 민족주의 편향을 논의하지 못했다. 그러나 스위지의 공산주의 묘사는 민족주의 편향에 대한 비판을 크게 요구하고 있다. 스위지의 스탈린주의 이념은 너무도 그 뿌리가 깊어서 민족국가의 소멸이 맑스주의 공산주의 개념의 핵심 요소라는 점을 그는 인식하지 못한다.

[월간 평론]지 주위로 형성된 그룹이나 이보다 더욱 저속한 스탈린주의 선전가들로부터 "맑스주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공산주의 사회에 대한 맑스의 원래 사상을 충격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나중에 [공산당 선언]이 된 글의 첫 번째 초안을 작성하면서 엥겔스는 이렇게 주장했다:

"공동체 원칙에 따라 결합한 민족들은 이 결합을 통해 서로 통합을 이루고 자신들의 한계를 극복하도록 강요될 것이다. 이것은 신분과 계급들의 다양한 차이들이 이것들의 기초인 사적 소유의 극복을 통해 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공산주의 신념 고백의 초안", 1847년 6월

이 글의 주요 주제로 다시 돌아가자. 공산주의가 되면 "정신노동과 육체노동 사이의 차이들이 철폐 된다"는 스위지의 표현은 애매하면서도 오해를 낳고 있다. 맑스주의자들에게 이 "철폐"는 고되며 따분한 육체노동을 일소하고 이것을 창조적이고 과학적인 작업으로 대체하는 것을 통해 성취된다. 자본주의 공업화의 가장 진보적인 경향은 생산과정에서 직접적 육체노동을 일소하고 기계의 감독으로 이것을 대체하는 것에 있다고 맑스는 생각했다:

"중공업에서 드러나고 있듯이, 소모된 노동시간과 이 결과 생산된 제품 사이의 엄청난 불균형, 그리고 단순한 추상 수준으로 감소된 노동과 이 노동이 감독하는 생산과정의 동력 사이의 질적인 불균형을 통해 진정한 부는 훨씬 더 많이 축적된다. 노동은 더 이상 생산과정의 핵심 부분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생산과정에서 인간의 요인은 생산과정을 감시하고 감독하는 것에 한정된다....

노동자는 더 이상 변화된 자연물을 재료와 자신 사이의 중재자로 삽입하지 않는다. 그는 이제 자신과 무기적 자연 사이에 공업과정으로 변모된 자연과정을 삽입한다. 그리고 이 과정을 그는 통달했다. 그는 더 이상 생산과정의 주요 인자가 아니라 단지 이 과정과 함께 할 뿐이다."-- 맑스, [요강]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맑스는 공산주의를 지금 말로 하면 완전히 자동화된 사회로 간주했다. 그가 생산체제로서 자본주의에 반대한 것은 이것이 기술 진보를 정지시켰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에서 생산수단의 확대는 역사적으로 이윤율의 저하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국가를 혁명을 통해 타도할 경우 기존의 생산수단은 몰수되고 중앙집중적으로 통제될 것이다. 완벽하고 이성적인 경제자원의 활용 특히 가장 선진적인 기술을 체현하는 투자는 노동생산성을 비약적으로 증대시킬 것이다. 증대된 생산성은 부분적으로 소비수준을 높이기 위해 소비될 것이지만 대부분은 노동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하는데 사용될 것이다. 이렇게 해서 더 많이 남는 자유 시간은 노동 대중의 재교육에 사용되어 이들의 문화적 수준과 기술적 능력을 높일 것이다. 이 노동자들이 생산과정에 다시 투입되면 이들은 생산성을 더욱 증대시킬 것이다. 이렇게 노동생산성의 증대는 스스로를 영속화시키면서 스스로를 강화시키는 과정이 될 것이다:

"실물경제의 절약은 노동시간의 절약 즉 생산비용의 최소화에 있다. 그러나 이 절약은 생산성의 증대와 일치한다. 따라서 절약은 쾌락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힘과 생산능력의 증대를 뜻한다. 이 결과 쾌락의 능력과 수단이 발전한다.... 여가 뿐 아니라 수준 높은 활동까지 포함하는 자유 시간은 자연스럽게 이것을 즐기는 사람을 다른 사람으로 변화시킨다. 그리고 직접 생산과정에 투입되는 사람이 바로 이 다른 사람이다. 이렇게 형성되는 사람은 이 과정에서 규율을 갖게 된다. 반면에 이미 형성된 사람에게 이것은 연습, 실험적 과학, 물질적으로 창조적이며 스스로를 객관화시키는 지식이다. 그리고 그는 자기 머리 안에 사회의 축적된 지혜를 담는다." (강조는 인용자)-- 같은 글

필요 노동이 너무도 근소한 시간과 에너지를 흡수하여 개인이 자유롭게 이것을 사회 집단에 줄 때 이 과정은 끝난다. 이를 통해 생산력의 수준은 너무 높아서 개인의 물질적 전유는 무제한으로 허용 된다: "각자 자신의 능력에 따라 노동하고 각자 자신의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다."

임노동과 상품 유통은 자본주의 생산양식 하에서 물질적 부족과 노동 강제의 특징적 형태들에 불과하다. 공산주의의 진정한 목표는 물질적 부족과 노동 강제의 현실을 일소하는 것이다.

물질적 부족을 궁극적으로 해소하는데 기여하지 않는 상품관계의 일소는 전혀 진보적이지 않다. 물질적 후진성의 조건 속에서 임노동과 상품 유통을 일소하는 강령은 반동적 공상주의이다. 이런 강령을 실천하려는 시도들은 경제를 붕괴시킬 것이다. 중국의 대약진운동 직후인 1960년-61년에 이것은 현실로 드러났다. 그리고 이 결과 기형적 노동자국가에서 존재하는 임노동과 연관된 조건들보다 더 억압적인 조건들이 초래될 것이다.

<이 글은 1976년 11월 19일자 [노동자 전위]지 제 134호에 처음 실렸다.>

 

3. 모택동주의자들이 소련에 "자본주의를 복귀시킨" 방식

-- 마튼 니컬러스의 저서 [자본주의로 복귀한 소련]에 대한 비평

 

                                                      조지프 씨모어

 

모택동주의자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스탈린, 흐루시초프, 브레즈네프로 이어지는 소련의 경제체제가 근본적으로 연속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인정하는 것 같다. 사실 스탈린 사망 후 소련에 자본주의가 복귀했다는 모택동주의 도그마(교의)는 너무도 황당하다. 이 때문에 역사적으로 이렇게 중요한 사건이 언제 왜 어떻게 일어났는지에 대해 모택동주의 조직들도 의견이 제각각이다. 북경의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은 이에 대해 단 하나의 단서만을 제공하고 있다: 소련공산당 제 20차 당 대회에서 흐루시초프가 비밀 연설을 행한 것이 이 사건의 핵심 계기이다.

혁명적 연합(Revolutionary Union, RU)에서 혁명적 공산당(Revolutionary Communist Party, RCP)으로 이름을 바꾼 미국의 어느 모택동주의 조직은 자신의 기관지 [붉은 신문](Red Papers) 제 7호(1975년)에서 흐루시초프 집권과 동시에 소련이 자본주의 체제로 복귀했다고 주장했다. 이들에 따르면 소련에서 "자본주의"는 두 단계를 거쳐 진행되었는데 제 1 단계로 흐루시초프가 "사적, 경쟁적 자본주의"를 회복시켰으며 제 2 단계로 브레즈네프가 "국가독점 자본주의"를 정착시켰다. (이 신기한 "자본주의 복귀"이론에 대한 맑스주의적 분석은 "모택동주의의 미쳐 날뛰고 있는 관념론"이라는 제목으로 이 팜플렛에 소개되어 있다.)

혁명적 공산당(RCP)의 주요 경쟁조직이자 중국 스탈린주의자들에게 좀 더 굴종하는 10월 동맹(October League, OL)은 침묵을 지키는 것이 지혜롭다고 판단했다. 지금까지 OL은 소련에 자본주의가 복귀했다는 주장을 가장 간단하게 "설명하는 것"에 그치고 있다. 나중에 중국의 공식 선전이 자기의 주장과 충돌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새롭고 두려운 영역에 OL의 클란스키 일당은 발을 들여놓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RCP 그리고 신좌익(New Left) 경향의 [가디언]지 주위로 결집한 "비판적 모택동주의자들"이 국내에서 서로 잘났다고 설치고 있기 때문이다. OL의 기관지 [해방자 신문]은 마튼 니컬러스의 저서 [자본주의로 복귀한 소련]을 구성하고 있는 일련의 논문들을 출판했다.

스탈린 사후 러시아에 대한 모택동주의의 "분석"은 너무나 황당하여 지적으로 치장하기가 불가능하다. 니컬러스의 불행한 운명은 이 점을 증명하고 있다. 신좌익(New Left)의 저명한 학자인 그는 소부르주아 전위당 노선을 일반화하여 "새로운 노동계급"이론을 창안했다. 모택동주의 강경파로 전향하자마자 그는 소련의 "자본주의 복귀" 현상을 똑 부러지게 분석하려했다. 유행에 영합하는 이 노력은 일련의 논문이 되어 1975년에 친중(親中) [가디언]지에 실렸다. 그러나 이 잡지의 편집자들은 니컬러스의 이론에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았다. 다만 이 잡지의 지도자 어윈 실버는 그의 이론이 별로 설득력이 없다고 평했다.

이러던 중 지난 겨울 [가디언]지는 앙골라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반혁명 정책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그러자 니컬러스는 중국공산당에 충성하는 OL에 가입했다. 그러나 이로부터 9개월 후 OL은 "우파 수정주의자", "자본가 계급 옹호자"로 몰아 그를 축출했다. 당연히 OL은 그의 저서 [자본주의로 복귀한 소련]를 수정주의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이들은 이 저서의 논문들을 자기 기관지에 실었다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았다:

"이 저서는 노동계급 독재를 공격했다. 수정주의자 흐루시초프가 집권한 지 10년 이상이 지났지만 '소련의 실제 생산관계에는 심대한 변화'가 없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촉구]지, 11월 29일

OL의 기관지는 이 저서가 "자본주의 복귀의 위협을 은폐하고 그 원인들을 신비화했다"고 주장한다.

미국의 모택동주의 조직들은 모두 니컬러스의 저서를 비난했다. 더욱이 중국공산당도 이 저서를 좋게 평가하지 않을 것이다. 이 저서의 제 7장은 야오웬유안(요문원)이 저술한 논문 "린퍄오(임표) 파벌의 사회적 기반에 대하여"를 길게 발췌하고 있다. 야오는 "4인방"의 한 사람으로 현재 감옥에 있으며 "자본주의 이중첩자"로 비난받고 있다.

부끄러움이 전혀 없고 거만한 이 아마추어 지식인의 정치적 고초에 대해 우리는 특히 관심을 가질 일이 없다. 그러나 그의 저서는 "소련이 자본주의로 복귀했다"는 모택동주의 이론의 철저한 정치적 파산을 실물로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그의 저서는 논의할 필요가 있다. 니컬러스의 저작은 이론적으로 천박할 뿐 아니라 대단히 기만적이다. 그러나 소위 소련 "자본주의"에 대해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경제 자료들을 제시하는 장점이 있다.

1956년-57년 흐루시초프 "집권의 부르주아적 성격"과 1965년 코시긴 또는 소위 리베르만 개혁으로 인한 자본주의 경제관계의 "복귀"를 니컬러스는 구별하고 있다. 샤를르 베틀렝 같은 일부 모택동주의 선전가들과는 달리 니컬러스는 소련이 새로우며 역사적으로 독특한 "국가자본주의 체제"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새로 등장한 "소련 자본주의"가 서방 자본주의와 다른 점이 거의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소련의 자본주의 복귀를 증명하려는 니컬러스의 노력은 정반대를 증명하고 있을 뿐이다: 맑스주의자들이 이해해왔거나 노동 대중이 경험한 기준에 따르면 소련은 자본주의 체제가 아니다. 더욱이 지금 소련이 자본주의 체제라고 니컬러스가 제시하는 주장과 기준은 스탈린 치하의 러시아와 모택동 치하의 중국을 설명하는데 훨씬 더 적합하다!

 

공장 경영자가 맹아적 자본가인가?

소련의 자본주의 복귀를 주장하는 자칭 맑스주의자들이 직면하는 가장 명백한 어려움 가운데 하나는 스탈린 치하에서 새로운 자본가 계급이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이들이 어떻게 국가권력을 장악했는가를 설명하는 것이다. 유럽의 자본가 계급은 봉건제를 타도하기 위해 수백 년에 걸쳐 내전, 혁명, 반혁명을 반복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본가 계급에 대항한 노동계급의 투쟁은 100년이 넘게 자본주의를 뒤흔들어왔다. 그런데 소련의 자본주의 복귀는 무혈 궁정 쿠데타를 통해 일어났으며 몇 년이 지나도록 모택동을 비롯한 어느 누구도 이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이것이 이 세계 역사적 사건에 대한 모택동주의자들의 설명이다!  

소련의 "부르주아 반혁명"이 아무도 모르게 일어났다는 사실에 대해 "맑스-레닌주의자" 니컬러스는 확실히 괴로워하고 있다. 이것은 당연하다:

"권력을 장악한 자본가 계급 형성의 경제적 상황, 물질적 기초 등을 나타내는 개략적인 자료들이 일부 존재한다. 그러나 이들이 권력 장악을 시도하기 전에 자신을 계급으로 서서히 조직하고 자신의 연합체들을 구축하고 집단적 자의식을 획득한 과정은 거의 전적으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스탈린 치하 러시아가 겉으로 보인 강건함의 배후에서 반(反)맑스주의, 반(反)레닌주의 반혁명 강령으로 무장한 지도자 그룹이 아무 고통도 없이 이 사회주의의 보루를 접수한 과정이 진행되고 있었다."

소련의 부르주아 반혁명이 고통 없이 몰래 일어났다는 니컬러스의 모택동주의 사상은 공산주의자들이 음모적으로 짜르 정부를 타도하여 10월 혁명을 성공시켰다는 고(故) 에드거 후버의 견해와 맥을 같이한다.

[자본주의로 복귀한 소련]은 "새로운 자본가 계급"의 맹아가 스탈린 치하의 기업 경영자였다고 주장한다. 니컬러스의 주장에 따르면 기업 경영자의 지위는 골칫거리였다. 스탈린이 노동자들의 이해를 면밀하게 옹호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들을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은 없으면서도 책임은 막중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바로 이것이 스탈린 치하 러시아에서 부르주아 반혁명이 성공한 것에 대한 니컬러스의 사회학적 설명이다:

"소련의 기업 경영자들은 무겁고 엄격한 책임을 지고 있었으면서도 노동자에 대한 통제권은 자본주의 세계의 기업 경영자에 비해 대체로 훨씬 적었다....자본주의 세계의 기업 경영자들이 가지고 있던 가장 중요한 권한 즉 마음대로 노동자를 해고할 수 있는 권한이 이들에게는 없었다. 이들은 일자리에서 쫓겨나 굶주리는 고통을 겪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노동자들을 위협할 수 없었다....

전시를 제외하면 노동자들은 마음대로 직장을 그만둘 수 있었다. 그러나 기업 경영자들은 노동자가 형법상의 범죄를 저질렀다고 증명해야만 노동자를 해고할 수 있었다. 따라서 노동자에게 채찍질을 가할 수 없는 기업 경영자의 권한은 허약했다."

니컬러스의 주장에 따르면 소련의 기업 경영자들은 자본주의 복귀를 통해 자신의 "허약성"을 극복하려고 했다:

"한편으로 기업 경영자들은 노동자들의 권한들을 더 많이 자신에게 이전시키면서 동시에 계획경제가 자신에게 부과하는 책임을 줄였다. 그러나 스탈린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자본가의 본능에서 나온 이 두 경향들은 통제되고 억압되었다."

스탈린 치하에서 기업 경영자들이 노동자에게 "채찍질을 가할 수 없었다"는 주장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 이 주장은 잠시 후에 검토하기로 하자. 다만 니컬러스가 소련 경제정책사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 해도 그의 주장은 초보적인 맑스주의 사회학에 명백히 위배된다.

소련의 기업 경영자들은 고위 행정가 집단에 대항하여 단결의 기반을 갖춘 뚜렷한 사회집단이 아니다. 기업 경영은 행정 관료집단 내부의 분업에 불과하다. 기업 경영자의 진정한 성공은 "자기" 공장, 농장, 광산이 확장되는 것에 있지 않다. 기업 확장은 기술적으로 대단히 제한되어 있다. 이들의 진정한 성공은 행정 위계 속에서 승진하는 것이다.

중앙계획 당국과 산업부서의 최고 관리들 대부분은 기업 경영자로 시작하여 경력을 쌓았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지만 스탈린이 살아있을 때에도 관료의 개인 소득은 행정 위계 내부의 지위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기업 경영자와 고위 계획 관료들 사이에 이해관계가 마찰을 빚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새로운 자본가 계급을 형성시키지는 않는다. 이것은 소련의 군대 내에서 장군과 부관 사이에 마찰이 일어날 경우 부관이 새로운 자본가가 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스탈린의 노동계급 군사화

들리는 바에 의하면 스탈린은 이렇게 말했다: 종이 위에는 무엇이든 적을 수 있다. 그런데 니컬러스 역시 자기 상전인 스탈린과 같은 생각으로 저술에 임한다. 스탈린 치하에서 기업 책임자가 노동자에게 "채찍질을 가할 수 없었다"는 주장을 나이든 노동자가 접한다면 그는 먼저 어느 누가 그런 황당한 말을 할 수 있는가 의아해 하면서 곧 이어 쓰디 쓴 웃음을 지을 것이다. 바로 이 주장에서 니컬러스의 부정직은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이 때문에 독자들이 자신이 제시한 "사실들"을 확인하지 않기를 그는 희망할 수밖에 없다. 니컬러스 박사가 [자본주의로 복귀한 소련]을 대학원 논문으로 제출한다면 자료 날조로 퇴학당하지 않는다면 다행일 것이다.

예를 들어 스탈린 치하에서 노동자가 권리를 누렸다는 증거로 그는 "노동자들만 참여할 수 있으며 경영자는 피고로만 법정에 출두하고 재판 초기에는 아예 법정출두가 금지된 노동분쟁" 특별법정을 거론하고 있다. 또한 그는 노동자가 자유롭게 경영자들을 비판할 수 있는 생산회의를 언급하고 있다. 우선 이 증거는 즉시 의심이 간다. 왜냐하면 그는 자료의 출처로 스탈린 사후의 러시아에 대한 저작들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메리 매컬리의 [소련의 노동 분쟁, 1957년-1965년](1969년)과 데이빗 그래니크의 [적색 경영자들](1960년)이 이것들이다.

노동자들로만 구성된 법정에서 노동자가 자기 상관을 고소한다면 이것은 진정으로 노동자 통제의 강력한 보루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법정은 니컬러스의 모택동주의 선전물에만 등장할 뿐 소련에는 존재해본 적이 없다. 노동 분쟁에 대한 매컬리의 저서에 따르면 1922년에 특별법정이 존재했는데 여기서 노동자들은 경영진의 불리한 조치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있었을 뿐이며 경영진은 위법행위로 고소될 수 없었다. 매컬리에 따르면 이 법정은 "경영진-노동조합 합동위원회로 노사 동수의 대표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편 생산회의는 노동자에 의한 생산 통제의 주요 수단으로 1920년대 초에 수립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제 1차 5개년 계획이 실시되면서 실제적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1958년에 흐루시초프는 100인 이상의 모든 기업에 생산회의를 재도입했다. 그러나 이것도 특히 악질적이거나 무능한 경영자를 곤혹스럽게 하는 것 이외에 이렇다 할 활동이 없었다. 스탈린과 비교했을 때 흐루시초프는 최소한 겉으로나마 노동자에 의한 생산 통제를 수립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 조치에 대한 최상의 찬사는 이 정도일 것이다.

노동자 국가에서 노동자와 경제 행정 당국 사이에 즉시 이해가 충돌할 것이라고 레닌의 볼셰비키당은 인식하고 있었다. 따라서 1922년에 제정된 소련노동법은 임금과 노동조건이 노동조합과 경영진에 의해 협의되어야 한다고 명시했다. 그러나 스탈린이 집권하자 노동조건은 가능한 한 모든 측면에서 더욱 억압성을 띠었다. 임금과 노동조건을 노동조합과 경영진이 협상한다는 조항은 1933년에 폐지되었다. 이후 소련의 노동조합은 노동규율을 더 강력하게 강제하는 복지기구/선전부서에 불과했다.

노동 투입량을 합리적으로 배치하기 위해서는 때때로 실업 기간이 불가피한 자발적 직업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을 1920년대 초 볼셰비키당은 인식하고 있었다. 1923년 7월에 발효된 포고령은 노동 유동성을 촉진하고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직업교환소와 실업보험을 시행했다. 그런데 1932년에 스탈린은 이 둘을 모두 폐지시켰다. 이 조치 이후 실업 노동자의 임금은 큰 폭으로 삭감되었고 비숙련인 동시에 자신의 직업분야와 무관한 직장을 제공받는 대로 다녀야 했다. 복지 수혜자를 없애려고 미국 부르주아 반동들이 주장하는 방식으로 스탈린은 "실업을 없앴다."

어쨌든 실업을 일소했다는 1930년대 스탈린의 주장은 완전히 거짓이었다. 지금의 중국과 마찬가지로 스탈린 치하 러시아에서 농민들은 태어날 때부터 법적으로 집단농장에 매여 있었다. 도시로 나갔다가 일자리를 찾지 못한 농민들은 체포되어 다시 농촌으로 추방되었다. 그리고 이에 저항하면 시베리아의 강제 노동수용소에 보내졌다.

니컬러스의 주장과는 반대로 스탈린 치하 러시아의 공장 경영자들은 노동규율을 강제하는 수단으로 노동자를 해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도 온건히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1922년에 레닌이 제정한 노동법에 따르면 한 달에 이유 없이 6번 결근한 노동자는 해고될 수 있었다. 1927년에 이것은 3번으로 줄어들었고 1932년에는 경영자들이 하루라도 무단결근하는 노동자를 해고해야했다. 또한 기준 생산량을 계속 달성하지 못하는 노동자도 해고될 수 있었다. 해고될 경우 노동자는 식량 배급표를 즉시 박탈당하고 통상 그랬듯이 회사가 제공하는 주택에서 퇴거당했다. 그러나 니컬러스는 뻔뻔하게도 스탈린 치하에서 기업 경영자가 "일자리에 쫓겨나고 굶주리는 고통을 겪을 수 있다고 노동자에게 위협"할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이 "맑스-레닌주의자"는 선량한 노동자를 속이는 스탈린의 하수인일 뿐이다.

스탈린 관료집단은 1930년대에 노동자들을 아주 가혹하게 대했다. 그러나 이것도 1940년 6월의 포고령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이 포고령은 아마 나치 독일의 것을 모방했을 것이다. 이에 따르면 노동 규율을 위반할 경우 국가의 테러를 노골적으로 당한다. 경영자의 허가 없이 일자리를 바꿀 경우 2개월에서 4개월까지 감옥에 갇힐 수 있었다. 단 하루 무단결근을 하거나 20분 지각을 했을 경우 노동자는 직장에서 6개월까지 교정 노동에 시달려야했으며 임금은 25%까지 삭감되어야했다. 노동자를 억압하는 이 간악한 법은 너무나 불만을 많이 사서 공장 경영자는 위법 노동자를 비호한 죄로 기소되기까지 했다!

1940년의 포고령은 전시의 특별조치가 아니었다. 이 법은 1956년까지 존속되었고 이것의 기본원칙은 "사회주의 사회"의 규범이라고 공식 선언되었다. 이 가짜 "노동자 천국"에서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이 노동자에게 보인 태도는 도가도프가 1949년에 완성한 저작 [소련노동법 발전사]에 잘 요약되어 있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직장을 얻어 자발적으로 노동관계에 들어서는 노동자 그리고 강제노동을 해야 하는 징집 노동자 사이에는 원칙과 질에 있어서 조금의 차이도 없다...." (강조는 인용자)-- [월간 노동평론]지(1951년 3월)에서 인용

 

스탈린의 극단적인 반(反)평등주의

니컬러스의 엄청난 거짓말과 달리 일부 스탈린 변호자들은 이렇게 인정한다: 스탈린은 1920년대에 노동자들이 누린 자유를 짓밟았다. 그러나 이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자유 노동시장이 일소되면서 소련 노동자들은 경제적으로 안정되었고 수입이 평등해졌다. 그러나 평등주의자 스탈린은 경영진에 대항하여 노동자 권리를 옹호한 스탈린만큼과 똑같은 정도로 거짓 선전에 불과하다.

1920년대에 소비에트 정부는 임금에 대한 풍부한 통계들을 출판했다. 1950년대 중반부터 실질임금이 꾸준히 오르자 소련 당국은 이 사실을 공개했다. 그러나 생활비의 변화와 실질임금에 대한 포괄적인 공식 수치들은 스탈린 치하에 하나도 공개되지 않았다. 이 자체는 생활수준이 뚜렷이 하락했음을 나타내주고 있다. 이에 대한 가장 면밀한 서구의 연구는 재닛 챕먼의 저서 [1928년 이후 소련의 실질임금](1963년)이다. 이 저서는 1928년부터 1940년까지 소련 국영 노동자의 실질임금이 최소한 22% 하락했으며 1928년의 수준은 1953년-54년이 되어야 회복되었다고 추산하고 있다. 연간 노동시간이 1930년대에 크게 확대되었기 때문에 시간당 임금은 더 크게 떨어졌다.

소득 분배에 대해 말하자면 스탈린 시기는 1920년대 그리고 흐루시초프/브레즈네프 시기와 비교했을 경우 극단적으로 불평등했다. 1932년에 엔지니어와 기술자는 생산직 노동자보다 임금을 평균 2.6배 높게 받았다. 1960년에 엔지니어와 기술자는 생산직 노동자보다 임금을 50%만 더 받았다. 그리고 1972년이 되면 이 차이는 30%로 떨어졌다(피터 와일즈, "소련의 소득 분배에 대한 최근 자료", [조사]지, 1975년 여름). 현재 브레즈네프 치하에서 소득 차이는 모택동 정권이 평등에 대해 거짓 선전을 많이 하고 있지만 중국과 아주 유사하다.

스탈린 치하 당과 정부 최고위 관료들의 소득에 대한 포괄적인 자료는 없다. 화폐 임금과 함께 최고위 관료들은 모든 종류의 특권을 공짜로 누려왔다. 그리고 스탈린 치하에서 이들은 만연한 빈곤 속에서도 상대적인 풍요를 누렸다고 믿을만한 이유는 얼마든지 있다.

일반적 궁핍이 존재하는 상황 속에서 집단적 경제가 각기 다른 직업, 산업, 지역 사이에 노동자원을 배분하기 위해서는 임금 격차가 존재해야한다. 맑스주의자는 이 점을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노동규율을 강화시키는 수단으로 도급제 등 개인적으로 임금을 차별시키는 수단을 동원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소비에트 민주주의와 밀접히 관련된 사회주의 의식은 노동이 양심적으로 수행되는 것을 보장하는 힘이다. "자본주의 생산양식과 가장 잘 조화되는 임금 형태"([자본론] 제 1권, 제 21장)라고 맑스가 규정한 도급제는 사회주의 의식과 노동계급의 단결을 해친다.

러시아 전역을 파괴한 내전 시기에 노동계급 대부분은 전선으로 동원되었고 공장은 농민들로 채워졌다. 내전 직후 경제가 붕괴한 시기에 레닌은 도급제를 적법한 것으로 간주했다. "전시 공산주의"시기에 도급제는 공업노동자의 규범이었다. 그러나 1922년 노동법이 발효되자 임금은 노동조합과 경영진의 협상을 통해 정해졌고 1928년이 되면 도급제는 공업노동력의 34%에만 시행되었다(드워, [1917년-1928년 소련의 노동정책]).

1931년에 스탈린은 "소부르주아 평등주의"에 대한 그 유명한 공격을 시작했다. 이 해에 당 협의회는 다음과 같은 결의문을 통과시켰다:

"임금에 대한 썩어빠진 평등주의 관행을 완전히 일소하고 노동생산성 증대 투쟁의 가장 중요한 요인인 도급제와 성과급제를 시행해야한다...."-- 쿨스키, [소비에트 체제](1963년)에서 인용

이후 도급제는 가능한 곳에서는 언제나 적용되었으며 이 때문에 1920년대의 러시아나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 비해 임금 격차는 훨씬 컸다. 이것은 소위 "누진적" 도급제로 임금은 생산량보다 더 빨리 증대하고 하락했다.

1935년 스타하노프 운동이 개시되면서 평등주의와 노동계급 단결에 대한 스탈린의 공격은 절정에 달했다. "노동자 돌격대"가 선전되었는데 이 특별 집단의 목표는 확립된 생산 규범을 깨고 증폭된 도급제를 노동계급 전체에 시행하는 기초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이 돌격대원들은 관료집단만 누리는 대단히 높은 임금과 다른 물질적 특권을 누렸다. 이 용병 임금제도 파괴자들에 대해 노동자들이 격렬히 저항하자 이 운동은 서서히 소멸했다.

스탈린의 도급제는 너무 불만을 많이 사서 흐루시초프는 집권과 함께 이 제도를 축소하는 주요한 양보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56년에 소련 노동자의 73%가 도급제를 겪었고 27%는 "누진적" 도급제를 강요당했다. 그러나 1965년이 되면 "누진적" 도급제는 완전히 철폐되었고 전체 노동력에 대한 도급제 강요 비율은 58%로 떨어졌다(레너드 조울 커쉬, [소련의 임금: 1956년 이후 그 구조와 행정의 변화들], 1970년).

 

흐루시초프: 모택동주의 경제학의 선구자

니컬러스와 모택동주의자들이 그 의의를 완전히 오판하고 있지만 1958년 흐루시초프의 권력 장악은 소련의 경제계획 구조를 상당히 변화시켰다. 스탈린 치하에서 계획경제를 시행한 기본 행정단위는 전국단위의 수직적 위계구조를 가진 산업부서 예를 들어 항공산업부, 농업기계부 등이었다. 흐루시초프의 권력 장악을 반대했던 스탈린 추종 "구 친위대" 가운데에는 소위 "반(反)당 그룹"이 있었다. 몰로토프, 말렌코프, 카가노비치 등으로 구성된 이 그룹은 모스크바에 중심을 둔 경제행정 관료들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반면 흐루시초프의 추종 세력은 지방 당 지도자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스탈린의 초(超)중앙집중주의가 지역 경제에 대한 자신들의 영향력을 박탈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원한을 품고 있었다.

몰로토프 그룹을 축출한 후 흐루시초프는 부서체계를 철폐하고 지방분권화를 실시하여 자신의 지지자들에 보답한 반면 반대자들을 심판했다. 1958년부터 흐루시초프가 실각한 1964년까지 경제행정의 기본 단위는 지역위원회(소브나호즈)였다.

쉽게 예상할 수 있듯이 니컬러스는 흐루시초프가 지방분권화를 통해 스탈린의 "사회주의"를 전복하고 자본주의를 복귀시켰다고 주장한다:

"산업 분야에서 레닌과 스탈린 통치 하에 수년에 걸쳐 면밀하게 수립된 중앙경제계획 부서들을 단 한 번에 철폐하려는 계획이 작성되었다. 경제계획 부서들의 기능과 권한은 100개가 넘는 지역 경제위원회로 이전되고 중앙은 느슨한 감독만 할 예정이었다....

중앙집중화된 사회주의 계획 부서들에 대한 흐루시초프의 공격은 상품-화폐 교환관계를 즉시 그리고 널리 확산시켰다."

모택동주의 선전가 니컬러스는 흐루시초프의 경제 지방분권화 정책을 "자본주의 노선"으로 비난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중국의 경제정책에 대해 대단히 무지하다는 것 또는 참주선동을 일삼고 있다는 것 또는 둘 다를 증명하고 있다.

경제의 지방분권화와 "자립(자급경제)"은 "급진" 모택동주의 경제학의 중심 교리가 되어왔다. 문화혁명 이후 중국 경제의 가장 중요한 변화 가운데 하나는 지역 당국의 경제적 권한이 크게 강화되었다는 것이다. 1965년에 산업체의 약 20%가 군이나 그 이하 행정단위에 의해 운영되었던 반면 1969년-71년에 이 비율은 약 50%로 상승했다(스튜어트 슈램 편집, [중국의 권한, 참여, 문화적 변화], 1973년). 1971년 조우언라이(주은래)는 에드거 스노우에게 이렇게 말했다: 중앙정부의 직원 수는 문화혁명 이전의 6만 명에 비교하여 1만 명밖에 되지 않는다([새로운 공화국]지, 1971년 3월 27일).       

1971년 9월 25일자 [북경 평론]지의 어느 기사는 경제의 지방분권화가 모택동주의의 특징이라고 확인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대약진운동과 문화혁명은 "지방이 더 많은 사업을 추진하게 내버려두는 것이 중국 산업을 발전시키는 유일하게 올바른 원칙이다...."라는 것을 입증했다. 프랑스의 모택동주의 선전가 샤를르 베틀렝은 자신의 저서 [중국의 문화혁명과 산업조직](1974년)에서 중국 경제의 지방분권화를 전통적인 소련의 중앙 집중화보다 더 우수한 것으로 비교하고 있다:

"성, 지구, 시 등 지방 당국은 계획과 경영에서 상당한 역할을 실제로 하고 있다. 이 분권화는 성이나 시가 다양한 지역 생산 단위들 사이의 밀접한 협동을 가능하게 만든다. 성 차원의 경영은 각 성마다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산업생산이라는 광범위한 개념을 통해 진행된다....

지방분권화로 인해 중국 경제는 예외적인 역동성을 발휘하고 있으며 행정기구는 급격히 축소되었다. 이 현상은 모든 곳에서 관찰된다. 더욱이 이러한 분권화는 사회주의 경영의 발전과 노동자 경영 참여의 조건 가운데 하나이다."

1971년 후반부 린퍄오(임표)의 실각 이후 중국 경제를 다시 중앙 집중화하려는 조치들이 취해졌다. 특히 등샤오핑(등소평)은 소련과 같은 중앙 경제계획을 좀 더 강화하는 조치들을 지지했다. 그러나 현재 소련에 복귀한 산업부서 체계와는 대조적으로 중국의 경제 행정의 기본단위는 성 정부이다.

모택동주의자 니컬러스는 러시아의 "사회주의"를 스탈린의 초(超)중앙 집중화와 동일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흐루시초프의 지역위원회(소브나호즈) 체제보다 더 극단적인 중국 경제의 지방분권화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는다.

코시긴의 개혁이 소련에 "자본주의를 복귀시켰다"고 니컬러스는 선언한다. 그러나 그의 생각에 동의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그의 모택동주의 경력을 위해서는 불행하지만 북경의 공식 노선은 흐루시초프의 집권과 함께 소련이 자본주의로 복귀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경제학자 리베르만과 관련된 1965년의 소련 개혁이 자본주의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다수의 평론가들이 간주하는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이 개혁은 기업 "수익성"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타임]지는 잡지 커버에 리베르만의 사진을 싣고 "자본가들로부터 빌리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그리고 이로부터 10년 후에 미국의 모택동주의 조직인 혁명적 연합(지금은 혁명적 공산당)은 이렇게 선언했다: 코시긴의 개혁은 "이윤 동기를 소련 경제의 주요한 지표로 만들었다."([적색 신문]지, 제 7호)

리베르만은 반(反)맑스주의 수정주의자라는 비난에 대해 자신을 방어하면서 이렇게 지적한다: 1921년 이래로 소련의 기업들은 "이윤"을 창출하거나 최소한 손실을 피해야했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전통적인 소련 경제계획의 최우선 목표는 계획과 관련된 다른 지수들을 포함하여 여타 고려사항들을 희생하더라도 목표 생산량을 초과달성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1965년 개혁의 목표는 만연한 그리고 다면적인 경영 기생주의에 의해 야기된 자원의 낭비를 제거하는 선에서 그치고 있었다.

금전상의 소득과 높은 직책으로의 승진은 목표 생산량을 초과달성하는데 달려있었기 때문에 기업 경영자들은 달성하기 쉬운 목표 생산량을 할당받기 위해 기업의 생산능력을 보통 축소하여 보고했다. 더욱이 잔 머리를 굴리는 공장 책임자는 목표 생산량을 너무 초과달성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럴 경우 다음 해에 그만큼 더 높은 목표 생산량을 할당받기 때문이었다. 리베르만은 1962년에 발표한 자신의 유명한 논문 "계획, 이윤, 보너스"에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현재 기업들의 목표 생산량은 실제 생산능력보다 훨씬 낮은데 어떻게 이들이 올바르게 계획을 세우도록 위임받을 수 있는가?

이것은 기업들이 자신의 생산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는 데에 물질적 도덕적 동기가 최대치로 주어질 경우 가능할 것이다...."-- 마이런 샤프 편집, [소련의 계획, 이윤, 동기 유인] 제 1권(1966년)에서 재수록

물론 계획 당국은 기업 경영자들이 체계적으로 생산능력을 축소 보고한다는 것을 언제나 알고 있었으며 이것을 교정하려고 시도했다. 이 결과 공장 경영자들과 중앙계획부(고스플란) 당국은 서로 술래잡기를 했으며 정해진 목표 생산량은 실제 생산능력과 대충 관련이 있을 뿐이었다.

기업 경영자들은 제품의 효용성이나 수요와 무관하게 최종 생산량에 따라 보상을 받았기 때문에 생산량을 극대화하기 위해 제품의 품질이나 다양성을 희생시키는 경향이 있었다. 예를 들어 은 공예품은 킬로그램으로 옷감은 평방미터 등 물리적 단위로 목표량이 정해졌기 때문에 기업 경영자들은 제품이 사용가치가 전혀 없을지라도 이 물리적 수치를 극대화하는 제품을 선택하여 생산했다. 소련의 유머 잡지 [악어]지의 유명한 만화는 무게로 측정되는 못의 경우 공장의 연간 생산량을 하나의 초대형 못으로 그려냈다. 또 다른 예는 소련 판유리의 악명 높은 강도 미달이었다. 판유리의 목표 생산량이 평방미터로 계산되었기 때문에 공장 경영자들은 지나치게 얇은 유리를 생산하면서 생산량을 극대화한다. 새로운 경제체제를 도입하는 1965년 9월 연설에서 코시긴은 이 문제를 솔직하게 언급했다:

"경험에 따르면 총생산량 지수는 국가경제와 일반인들이 정말 필요로 하는 제품을 생산하도록 기업을 자극하지 않는다. 그리고 많은 경우 지수는 제품 다양성과 품질의 개선을 제한하는 경향이 있다. 빈번하게 우리 기업들은 소비자가 원치 않고 따라서 팔리지도 않는 낮은 품질의 제품을 생산한다."-- "산업 경영을 개선하는 것에 대해....", 같은 책

기존 체제의 또 다른 문제는 생산량이 기업의 부가가치가 아니라 총 가치로 계산되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기업 경영자들은 "자기" 생산량의 가치를 극대화시키도록 가장 비싼 투입 자원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비용을 최소화해야할 동기 유인이 없었기 때문에 이들은 노동자원을 몰래 비축하고 생산 투입 물품의 재고를 엄청나게 높게 유지하는 것이 관례였다. 특히 공장과 장비를 절약하는 물질적 동기 유인이 없었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상환할 필요가 없는 예산 혜택에서 나왔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공짜"였기 때문에 경영자들은 새로운 장비에 대한 필요를 일관되게 높여서 보고했다.

지금까지 묘사한 것은 기업 차원의 관료적 기생주의(bureaucratic parasitism)에 불과하다. 이 점은 아주 명확하다. 쉬운 목표량을 얻기 위해 실제 생산능력을 축소 보고하거나 목표 생산량을 좀 더 쉽게 달성하기 위해 낮은 품질의 제품을 생산하는 공장 경영자는 자신이 반(反)사회적 방식으로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일부 경영자들은 개인적으로는 정직하지만 목표 생산량을 초과 달성하지 못할 경우 수입과 승진에서 희생당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더욱이 소련 관료집단의 모든 대변인들은 이런 종류의 정직하지 못한 경영행태를 체제의 생리상 필요한 생존전략으로 간주하고 있다.

리베르만의 개혁은 좀 더 정교한 계획 지수들을 동원하여 경영 기생주의를 극복하려는 시도였으나 별 효과를 보지 못했다. 계획의 기법들이 아무리 정교해도 정직하지 못한 경영자들이 계획 당국의 의도를 왜곡하고 자원을 낭비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곧 검토하겠지만 1965년의 개혁은 오랜 문제들의 일부를 영속화시키고 새로운 형태의 부정직한 경영행태와 자원 낭비를 초래했다.

경제의 최하부와 최상부의 관료적 기생주의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소비에트 민주주의가 철저히 확립되어야한다. 한편 소비에트 민주주의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노동계급이 정치혁명을 통해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을 타도해야한다. 특히 양심적인 경영을 위해서는 두 가지 요건이 필요하다: 사회주의 의식에 투철한 것으로 입증된 경영자들을 책임 있는 직책에 선정하는 것이 하나이고 노동자들이 생산을 통제하는 것이 또 하나이다.

10월 혁명에 뒤이어 그리고 1920년대에 걸쳐 소비에트 정부는 경제를 운영하기 위해 높은 급료를 주면서 부르주아 전문가들을 이용해야했다. 레닌의 볼셰비키당은 이 상황이 필요악이라고 생각했으며 노동자에 의한 생산 통제로는 문제가 부분적으로만 극복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사회혁명을 통해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수립되는 노동자 혁명정부 또는 정치혁명을 통해 소련과 동구에 수립되는 혁명정부는 이와 같은 상황에 놓이지 않을 것이다. 기업 경영자들은 숙련 노동자의 급료에 해당되는 보수를 받을 것이며 공장위원회의 중심 임무는 경영진의 자원 낭비를 막는 데에 집중될 것이다. 개선의 여지가 없이 무능하거나 낭비를 일삼거나 정직하지 못한 경영자들은 노동자들의 면밀한 감시를 통해 직위 해제될 것이다.

 

경제 개혁을 강제한 객관적 요인들

경영 기생주의와 이의 결과인 자원 낭비는 오랫동안 스탈린주의식 명령 계획경제의 특징이 되어왔다. 그렇다면 1960년대 초에 개혁에 대한 압력이 증대하여 브레즈네프/코시긴 신임 정권의 개혁이 시행된 이유는 어디에 있었는가?

흐루시초프 정권의 마지막 몇 년 동안 객관적 요인들이 작용하여 관료집단은 미시 경제적 비효율에 대해 더욱 우려하게 되었다. 1950년대 후반부에 생활수준이 상승하자 소비자들은 좀 더 선택적이 되어 엉성하거나 기타 바람직하지 못한 제품을 기피하였다. 또한 스탈린 치하에서 경제 당국의 계획을 너무 빨리 완수하거나 대충 완수한 기업 경영자가 있을 경우 그의 상관들은 진짜 고초를 당할 수 있었다. 그런데 1956년 이후 전체주의 국가의 테러가 완화되자 경영자들이 부정을 저지르고 계획과 관련된 지시들을 어기는 정도가 상승했다.

그러나 1965년 개혁을 초래한 근본 동기는 소련 경제의 커다란 변화였다. 흐루시초프 정권 후반부(1958년-1964년)에 경제 성장은 큰 폭으로 하락했다. 특히 새로운 투자로 인한 생산성 증대가 크게 둔화되었다. 경제 상황이 이렇게 악화된 이유의 일부는 자신의 권력 강화만을 위해 흐루시초프가 지방분권화를 추진한 데에 있었다. 더욱 중요한 원인은 노동력 부족 때문에 스탈린식 급격한 공업화가 불가능한 현실에 있었다.

스탈린 시기의 경제개발은 외형적 성장에 맞추어져 있어서 투자의 거의 대부분은 농촌의 노동력을 무제한 소모하는 새로운 공장들에 집중되었다. 그러나 1960년경에 관료집단 의 가장 거시적 안목을 가진 분파는 경제성장을 계속하려면 내실을 기하여 기존의 생산 단위들을 현대화하여 노동생산성을 증대시키는 쪽으로 역량을 집중해야한다고 판단했다. 이 상황에서 기존의 경영 기생주의와 보수주의는 경제 성장의 심각한 장애요인이 되었다.

리베르만 개혁은 일부 부르주아 평론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소위 중앙 집중화된 계획에 내재한 비효율을 해소하려는 시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이것은 당연히 자본주의를 복귀시키는 조치도 아니었다. 다만 스탈린주의 체제에게 해악이 증대하고 있던 특정 유형의 관료적 기생주의를 개선하려는 허약하고도 모순적인 시도에 불과했다.

1965년의 코시긴 개혁은 네 가지 주요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첫째 흐루시초프의 지방분권화는 중지되고 다시 중앙 집중화가 강화되었다. 둘째 기업의 실적과 경영의 성공을 측정하는 핵심 지수들이 바뀌었다. 셋째 기업에 자금을 제공하고 투자하는 방식이 바뀌었다. 넷째 도매가격을 산정하는 방식이 바뀌었다.

종종 간과되고 있는 1965년 개혁 조치의 중요한 영향은 기존의 산업부서 체계의 부활이었다. 하나의 중요한 측면에서 1965 이후의 경제구조는 산업부서들이 독자성을 누리며 "도전받지 않는 제국"을 지향했던 스탈린 시대보다 더 중앙 집중화 되었다. 중간재의 중복 생산 내지 투자로 인한 낭비를 막기 위해 코시긴 개혁은 자재-기술공급 국가위원회(고스납)를 수립했다. 이것은 중간재를 생산단위에 배분하는 중앙 집중화된 기구였다.

   니컬러스의 저서는 코시긴 개혁을 핵심 주제로 삼고 있으면서도 고스납의 존재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이것은 그의 지적 사기의 정도를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가 고스납을 언급하지 않는 이유는 너무도 뻔하다: 고스납의 존재 자체가 1965년 이후 기업 간의 경쟁에 의해 생산재 시장이 존재했다는 그의 주장을 반박하기 때문이다. 1960년대 후반부에 고스납은 1만6천 종의 중간재를 배분했으며 1971년이 되면 기업 간 거래 전체의 3분의 2를 통제했다([소련학]지, 1972년 7월에서 인용). 그런데도 1965년 개혁이 기업에 대한 중앙의 통제를 종식시켰으며 이후 기업은 무제한적인 이윤 극대화에 기초하여 운영되었다고 니컬러스는 주장한다:

"이 개혁의 핵심은...중앙 계획 관료들에게 전체적으로 경제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경제 단위 즉 기업이 이윤 극대화를 위해 총력을 집중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이 주장은 노골적인 사실 날조이다.

 

소련 경제에 "이윤"이 존재했는가?

1930년대 초반부터 소련의 기업들은 목표 생산량 계획과 기타 지수들을 포함하여 "이윤" 계획도 가지고 있었다. 이 사실에 기초하여 30년도 더 전에 무정부주의적 조합주의자인 라야 두나예프스카야는 이렇게 주장했다: 소련이 기업들이 "이윤"을 창출하므로 소련은 자본주의 체제이다(그녀의 논문 "맑스주의 경제학에 대한 새로운 수정", [미국경제평론]지, 1944년 9월을 참조하시오). 그러나 실제로는 기업 "이윤"은 생산현장에서 징수하는 세금에 불과하다. 이 세금의 일부는 엄격한 지침과 지시를 받는 기업들에게 제공된다.

이윤 계획은 스탈린과 흐루시초프 치하에서는 부차적으로 간주되어 종종 무시된 목표였다. 그러나 코시긴 개혁으로 이것은 기업 경영자의 보너스를 결정하는 핵심 지수가 되었다. (사용할 수 없는 제품 생산을 근절하기 위해 실제로 팔린 제품만 인정되어 계산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목표 생산량 계획은 존재하며 이것은 물리적 단위로 계산되고 달성되어야한다. 이 계획을 달성하지 못하는 책임자는 이윤과는 무관하게 보너스를 받지 못하고 국가경제에 대한 책임을 지고 행정적으로 처벌받을 수도 있다!

현 경제정책에 대해 소련에서 출판된 표준적 저작은 [소련의 경제개혁: 전개과정과 문제점들](1972년)인데 이것은 기업 생산과 계획 당국과의 관계를 이렇게 묘사한다:

"상부에서 정한 가격, 생산비용, 완제품 판매 가능성 등에 의존하여 기업들은 독자적으로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생산 품목을 결정한다. 그러나 오류의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 개별 기업은 초기에 주요 생산 품목에 대해 행정적으로 목표량을 할당받는다." (강조는 인용자)

소련 경제에 대한 영국의 주요한 부르주아 전문가는 이 공식 저작의 내용을 올바른 것으로 확인했다:

"경영자의 보너스는 목표 생산량에서 이윤으로 관심을 돌리도록 했다. 그러나 이것도 목표 생산량이 초과 달성되었을 때에만 가능하다. 목표 생산량이 달성되지 못할 경우 이윤은 거의 무의미하다."-- 피터 와일즈, "소련의 소득분배에 대한 최근 자료" [조사]지, 1975년 여름

자본주의의 기업들과 달리 소련의 기업은 이윤 극대화 또는 투자 자본에 대한 이율 극대화를 목표로 하지 않는다. 기업 경영자들은 목표 생산량을 초과 달성하고 계획 이윤과 실제 이윤의 차이를 극대화해야한다. 이 결과 "개혁된" 경제체제는 구체제의 중심적 약점을 다른 방식으로 영속화 한다: 목표 달성이 쉬운 계획을 승인받기 위해 생산능력을 축소 보고하는 대신 경영자들은 이윤 창출 능력을 축소 보고한다. 따라서 이들의 정직하지 못한 보고를 상쇄하기 위해 상부 당국이 개입해야한다.

1965년 개혁의 결과를 누구보다도 잘 알아야할 위치에 있는 리베르만은 코시긴 개혁에 대해 실망감을 표현하고 있다:

"기업들에게 실현 불가능한 판매 실적을 산업부서가 강요하면서 근본 문제점들이 또 다시 드러나고 있다. 기업들이 자율적으로 자신의 생산능력을 충분히 활용하고 예비 자산을 솔직하게 밝힐 수 있을 지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산업부서는 개별 기업을 압박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제품들의 생산 품목을 적절히 계산하여 생산하는 문제'는 명확히 해결되어야한다. 현재 이 문제는 산업부서들에게 주로 맡겨져 있다. 그러나 산업부서들은 생산 품목의 적정한 종류를 줄이기보다는 늘리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를 통해 더 많은 통제권을 허용하는 구체제를 유지하려는 것이다...."-- 리베르만, [경제 방식들과 생산의 효율성] (1971년)

리베르만의 이 저서가 출판된 이래 기업의 자율성을 규제하려는 경향이 더욱 강화되어왔다.

1965년 개혁으로 등장한 경제체제를 계속 유지하면서 기존의 계획 방식을 고수하려는 경향이 관료집단 내부에 존재하고 있다. 이 점을 이 분야의 지도적 부르주아 전문가인 앨릭 노브는 힘주어 강조하고 있다. "허깨비 개혁"이라는 부제를 가진 자신의 저서에서 노브는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자원을 배분하고 생산과 관련된 결정들을 내릴 권한은 여전히 중앙 경제당국에 있다. 상부 당기구의 총감독 아래 재건된 산업부서, 고스플란, 고스납 사이에서 경제정책이 결정되고 있다....현 경제정책은 생산 품목이나 투입량의 변화로 인해 증대되는 이윤을 어느 정도 부당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이 때문에 산업부서나 그 하위 부서에서 입안되고 승인되는 계획에 의해 생산 품목과 투입량이 결정되고 있다. 이 결과 중앙 당국에서 입안한 공급 계획이 산업 생산의 주요 부분을 책임지고 있다. 정해진 소비 단위에 제품을 생산해서 배달하는 임무는 상부에서 작성되고 무조건 따라야 하는 계획-지시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다. 이것이 구체제의 핵심이고 지금도 살아남아 있다." (강조는 인용자) -- "소련과 헝가리의 경제개혁: 비교 연구", 노브/누티 편집, [사회주의 경제학] (1972년)

 

소련에서 생산수단은 상품인가?

니컬러스의 주장에 따르면 1965년의 개혁은 생산수단을 매매 가능한 상품으로 변모시켰다:

"요약하면 1965년 개혁은 흐루시초프 시기에 등장하고 있던 생산수단 시장을 지하로 묶어 놓은 법적 재정적 장벽을 철폐시켰다. 생산수단을 상품으로 교환하는 행위는 적법하고 보편적인 현상이 되었고 유동 자산을 풍부히 공급받았다."

이것 역시 엄청난 날조가 아닐 수 없다! 그가 소련 경제에 대해서 실제로 제대로 아는 것이 있다고 가정할 경우 이것은 의식적인 기만이 될 것이다. 기업이 구입하는 모든 생산 투입량은 공급 계획에 의해 승인을 받아야 한다. 이 점을 우리는 곧 증명해 보일 것이다. 하여간 생산수단은 결코 상품으로 변모하지 않았다. 기업의 "자율 투자"는 공장 설비 및 장비에 대한 전체 지출의 적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기업의 자금은 기술-생산 단위의 내재적으로 협소한 기반을 벗어나 외부에서 소비될 수 없다.

목표 생산량이 상부에서 정해지는 것과 똑같이 생산에 필요한 투입 물량도 자세한 연간 계획에 의해 배분된다. 유고슬라비아, 헝가리 그리고 중국의 경우와 달리 소련의 기업들은 어느 정도 자유로운 시장에서 생산 투입 물량을 얻을 수 없다. 거의 모든 주요 투입량은 고스납에 의해 직접 또는 고스납을 통해 생산기업과 소비기업 사이의 장기 계약을 통해 배분된다. 생산 투입 물량은 값을 가장 높게 부르는 기업에게 팔리지도 않고 선착순에 의해 제공되지도 않는다. 예를 들어 트럭 한 대를 구입하기 위해 공식 가격의 세 배를 지불할 용의가 있는 기업은 트럭을 구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돈이 훨씬 부족한 기업은 계획에 따라 트럭을 공급받을 수밖에 없다.

소련 경제에 대한 영국의 어느 전문가는 이렇게 표현했다:

"생산을 위해 기업이 필요한 투입 물량은 자유 시장처럼 생산 기업으로부터 구입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공급기관에 의해 배분받는다. 실제로 이것은 생산재의 배급제이다."-- 마이클 엘먼, [소련 경제계획의 문제들] (1973년)

이 측면을 강조하기 위해 엘먼은 1969년 소련 언론에 보도된 한 사건을 예로 들고 있다. 어느 국영농장의 부책임자는 중앙에서 배분되는 물품인 나무를 작업 중에 베어낸 채석장으로부터 구입했다. 이 때문에 국영농장과 채석장의 경영진 모두는 경제 범죄자로 기소되어 실형을 선고받았다!

소련 기업들 사이의 관계가 시장에 의해 지배된다는 니컬러스의 사기성 주장을 우리는 폭로하고 있다. 그렇다고 우리가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의 경제계획 방식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생산이 시작되기 일 년 전에 미리 중간재를 세세하게 배급하는 것은 사회주의 원칙의 장점은 물론 경제적 합리성도 결여하고 있다. 수십만 건의 거래를 포괄하는 공급 계획은 언제나 필연적으로 일관되지 못할 수밖에 없다. 이 결과 수많은 공급부족과 공급과다 현상이 초래된다. 소련의 기업 경영자들은 주기적으로 매점매석, 암시장 행위, 관료집단의 부패 등을 이용하여 자기 나름대로 세운 "계획에 따라" 생산 투입 물량을 확보한다. 합리적인 사회주의 계획 경제는 중앙 집중화된 도매시장을 수립하여 기업들이 생산 투입 물량을 마음대로 구입하게 만들 것이다. 이렇게 할 경우 생산과정에 필요한 융통성이 확보되고 기업 간의 원자화된 경쟁이 초래할 비효율과 위험들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기업의 입장에서 보면 1965년 개혁에 의해 초래된 가장 중요한 변화는 투자 재원의 확보에 있었다. 기존의 제도에 따르면 모든 새로운 공장시설과 장비 등은 정부의 예산에서 나왔다. 그러나 개혁 후에는 이러한 투자는 대체로 기업이 거둔 이윤 실적에 따라 제공되었다. 1967년에 도매가격은 상향 조정되어 기업 이윤이 증대할 수 있었다. 그리고 1966년에 기업은 자신이 창출한 이윤의 26%를 자기 자금으로 확보할 수 있었으나 1969년이 되면 이 수치는 40%로 상승했다([소련의 경제개혁....]).

당연히 니컬러스는 이 현상을 "자본주의 복귀"의 핵심 증거로 제시한다:

"기업 경영자들은 생산과정 뿐 아니라 상당한 규모의 화폐도 좌지우지할 권한을 가졌다. 이들은 성공하려는 욕망에 가득 차 눈을 부라리는 자본주의 투자가들의 입장에 섰다."

이 주장에 대해 소련의 기업 경영자는 모두 헛소리라고 반박할 것이다.

니컬러스 자신의 수치에 따르면 1969년-79년에 기업 투자의 약 25% 정도만이 연간 계획의 영역 밖에서 기업 경영자의 재량에 따라 운용되었다. 이것은 기업이 자금을 소비하는데 상부의 승인을 받을 필요가 없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온대로 생산재는 시장에서 구할 수가 없고 중앙기구에 의해 배급될 뿐이다. 따라서 실제로 "재량 투자"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여전히 고스납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이 때문에 1965년의 개혁은 모순이 있었다: 수요는 일부 자유화되었으나 생산재의 배분은 여전히 중앙의 계획에 구속되었다. 이 모순의 결과 기업은 실제 필요한 생산수단을 구입하기 위해 "자신이 창출한 이윤"을 언제나 소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기업의 은행 잔고는 점점 늘고 있다.

니컬러스는 이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이윤을 창출할 수 있는 투자 기회의 부족 때문이라고 오리발을 내민다:

"...일부 기업들은 '자기' 자금 전부를 이윤 창출을 위해 투자할 수 없다. 대신 '자유 이윤 잔고'를 축적한다. 이 경우 이들은 '정부가 정한 이자율에 따라 중앙은행에서 대부를 받을 권리를 누린다.'"

미국, 서유럽, 일본 등의 기업은 여유 자금이 있을 경우 얼마 되지도 않는 이자나 받기 위해 자기 화폐자본을 은행에 맡기지는 않을 것이다. 지사를 설립하거나 새로운 공장을 짓거나 다른 기업을 구입하거나 주식/채권 등을 구매하거나 최고의 이자를 받고 직접 돈을 빌려주는 등 자본에 대한 최대한의 이익을 노릴 것이다. 소련에 존재한다는 "자본가들"은 왜 이렇게 행동하지 않을까? 왜냐하면 이들은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생산수단은 시장에서 구입할 수 있는 사적 소유물 즉 상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업의 자금은 맑스의 표현에 따르면 "구입의 보편적 수단"인 화폐 자본이 아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소련은 자본주의 체제가 아니다.

 

브레즈네프 치하의 러시아에서 실업이 증대하고 있다?

스탈린 치하의 기업 경영자들이 노동자들을 "채찍질"하지 못했다는 억지 주장에다 니컬러스는 1965년부터 소련에 실업이 다시 등장했다는 주장까지 덧붙인다. 이 주장은 그의 끝없는 사기성 주장 가운데 가장 명백하고 믿을 수 없이 황당한 경우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관료들의 위선 때문에 실업자들은 물질적으로 희생당하고 있다. 경제와 관련된 이유로 기업 경영자들이 단행하는 정리해고는 1936년에 제정된 스탈린 헌법에 따른 실정법에 명백히 어긋난다. 이것은 안 그래도 분노하는 실업자들을 더욱 분노케 하고 있다."

지금 소련의 실업 문제를 다루기 전에 스탈린의 "노동자 천국" 미신을 다시 한 번 폭로해야한다. 우리가 위에서 보았듯이 1930년대에는 노동규율의 위반과 관련된 강제해고가 만연했다. 그리고 집단농장에는 대량 실업이 은폐된 채 존재했다. 스탈린 헌법의 "일할 권리"에도 불구하고 소련 노동자는 취업의 권리를 법으로 보장받은 적이 결코 없었다.

계획 체제 때문에 기업 경영자는 노동력을 여분으로 확보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노동규율이 아니라 경제와 관련된 이유로 노동자를 해고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반(反)사회적 행위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해고는 계속해서 드물었다. 그러나 법적인 경영자 권리에 대해 말하자면 1970년에 제정된 노동입법 원칙은 스탈린의 전례를 영속화시키고 있다. 경영자들은 해고해야할 노동자에게 유사한 수준의 일자리를 찾아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경영진이 노력을 했지만 어쩔 수 없다는 것에 노동조합이 동의할 경우어떤 노동자든지 봉급 2주일 치에 해당하는 퇴직금을 받고 해고될 수 있다.

현재 소련 사회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노동력 부족이 심각하며 이에 대해 관료집단이 크게 우려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1960년에 노동 가능 인구의 78%가 일자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965년이 되면 이 비율은 87%로 상승했고 1970년에는 91%가 되었다(비 코스타코프, [경제 문제들], 1974년 11월). 이와 비교하여 미국의 경우 1975년에 16세 이상 노동가능 인구의 61.8%만이 취업 상태에 있었다([월간 노동평론]지, 1976년 11월).

대단히 높은 비율의 인구가 취업하고 있기 때문에 소련의 관료집단이 직면한 문제점들을 소련의 노동력 전문가 마네비치는 아주 명확히 표현하고 있다:

"노동력 부족의 경제적 결과는 매우 중대하다. 다수의 경우 새로 설립된 기업에 인력을 제공하는데 어려움이 크다. 2교대로 공장을 중단 없이 돌리는 것이 어렵다.... 직장 이동이 증대하고 있다. 다수의 일자리가 채워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집단적 노동규율을 강제하기가 어렵다. 이 때문에 여분의 인력을 계속 비축해야 하는 동인이 존재한다. 이 현상은 전반적인 노동력 부족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 "노동력 활용을 개선하는 방안들", [경제 문제들], 1974년 6월

그러나 소련의 경제 관련 문헌은 일자리를 찾고 있는 실업자들을 언급하고 있다. 이것을 니컬러스는 쉽게 찾아낼 수 있다. 마네비치가 지적하고 있듯이 노동력 부족은 직장 이동률을 높인다. 국가의 테러로 인해 소련에서는 파업과 기타 형태의 집단적 계급투쟁이 억압되어 있다. 이 때문에 소련 노동자들은 개인적 노력으로 자신의 처지를 개선하려고 한다. 더욱더 노동자들은 포화상태의 노동시장을 이용하여 일자리를 빈번히 바꾼다. 이로 인해 형식적이고 통계적인 의미에서만 특정 시점에 실업자 수가 증가한다.

대량 해고의 제물이 되는 것과 더 좋은 직장을 구하기 위해 지금 일자리를 그만두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이 점을 니컬러스 박사에게 설명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경제학자가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해도 노동자들은 모두 이 점을 이해한다. 더욱이 진정한 직장 이동과 실업 사이의 차이는 통계로 측정할 수 있다. 소련의 문헌에서 흔히 제시하고 있지만 기존의 직장을 그만두고 새로운 직장을 찾는데 걸리는 시간은 약 3주일이다. 현재 미국에서 실업 지속 평균시간은 약 15.5일이다([월간 노동평론]지, 1976년 11월).

자본주의에서 대량 실업은 기계가 사람을 대체하는 기술 발전이 아니라 경기 후퇴, 불황, 경기 침체 등 생산의 모순 때문에 주로 발생한다. 니컬러스는 브레즈네프 치하의 러시아에서 증대하는 실업현상을 발명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돌팔이 학자도 소련 경제에서 경기 순환의 모순을 발명할 수는 없다. 1956년 이후 또는 그 이전에도 소련의 산업생산은 대단히 불균등한 비율이나마 매년 증대해왔다.

따라서 "소련 자본주의"를 상정하고 있는 모택동주의자들과 기타 분자들은 경기 변동이 없는 자본주의를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맑스가 이해하고 있는 자본주의와는 아주 대비된다. 소련이 자본주의 체제라고 주장하려면 실제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맑스의 분석을 필연적으로 수정해야한다. 실제로 모택동주의자, 무정부적 조합주의자, "제 3 진영" 사회민주주의자 등은 현재 서방의 "국가독점 자본주의"가 격심한 경기 축소와 경기 변동에 따른 공황을 억제할 수 있다고 믿는다.

아주 최근까지 이들은 이렇게 주장해왔다: 지난 10년에 걸쳐 소련의 경제 실적은 일본이나 프랑스 등 일부 "전통적인" 자본주의 국가들보다 나은 것이 없다. 1974년에 이 인상주의적 주장은 정면으로 반박되었다. 1974년 중반부터 1975년 중반까지 선진자본주의 세계의 산업생산은 19.5%가 하락했다. 1974년-75년의 불황은 주요 자본주의국가들을 전부 강타하여 영국은 13.5%나 생산이 하락했으며 일본의 경우 이 수치는 33%에 달했다(경제협력개발기구 발행, [경제 전망]지, 1975년 12월과 1976년 7월). 그러나 소련의 경우 실제 생산은 18% 증가했다(유엔 발행, [통계 연감], 1975년).

이 경험적인 사실들에 기초할 경우 진지하고 정직한 맑스주의자는 두 가지 결론 가운데 하나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소련은 자본주의 체제가 아니다; 또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필연적이라고 맑스가 말한 경기 모순을 극복한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 체제이다.

후자는 수정주의적 결론인데 이것은 지금이 자본주의 반동과 쇠퇴의 시대라는 레닌의 근본 입장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다. 사회억압, 계급 착취, 불평등 등에 대한 도덕적인 혐오감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생산력 발전을 정지시키며 우월한 경제체제에 의해 대체되어야 한다는 객관적 조건에 맑스주의 혁명 강령은 기초하고 있다. 따라서 생산력의 급격하고도 꾸준한 증대를 보장하는 자본주의 체제가 지금 존재한다면 노동계급에 의한 혁명과 사회 통치는 불필요할 것이며 이것의 진보적 성격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복귀는 어떤 모습일까?

소련 경제에 대한 니컬러스의 경험적 묘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날조로 일관하고 있다. 니컬러스는 "사회제국주의" 소련에서 기업이 이윤 극대화에 기초하여 생산량을 결정하고 생산재를 위한 시장이 존재하고 있으며 해고가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등 헛소리를 일삼고 있다. 그러나 그가 소련에 잘못 전가하고 있는 "자본주의적" 특성들은 다른 기형적 노동자국가들 특히 유고슬라비아, 헝가리 그리고 중국에는 어느 정도 존재한다.

"급진" 모택동주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중국 경제는 소련보다 상당한 정도 시장에 더 크게 의존하고 있으며 기업의 자율성을 인정하고 있다. (중국 경제의 지방분권화가 이미 상당히 진행되어왔으며 이것이 불평등을 조장하는 또 하나의 요인이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지적한 바 있다.) 미국의 자유주의 경제학자 로이드 레널즈는 1973년에 중국을 방문한 후 이렇게 말했다:

"제품을 유통시키는 영업부서의 판단에 따라 공장은 어떤 종류의 시계나 카펫을 생산할 지를 결정한다. 이런 의미에서 '시장 지향성'은 소련의 기존 경제계획보다 중국의 경제계획에 더 중요한 것처럼 보인다."-- "중국 경제: 기층민중의 시각" [중국경제 연구]지, 1975년 봄

중국 기업의 시장 지향성에 대한 레널즈의 말은 수출용 폭죽을 만드는 공장에 대한 [미국-중국 사업 평론]지(1976년 5월-6월)의 보도에 의해 확인되고 있다:

"공장 노동자들은 월급으로 평균 72 유안을 받았다. 이것은 농촌에서는 높은 소득이다. 이들의 봉급은 최소한 부분적으로는 폭죽 가격을 책정하는 방법의 결과이다. 일반적으로 기업의 일방적 결정으로 또는 외국무역부와 기업 사이의 협상을 통해 제품 가격이 결정된다....폭죽은 협상을 통해 가격이 정해진다. 세계시장에서 폭죽 가격이 상승해왔기 때문에 중국 내의 협상 가능성은 더 높은 폭죽 가격을 초래했으며 이 결과 폭죽 공장 노동자들의 소득도 더 높아졌다." (강조는 인용자)     

브레즈네프 치하 소련에서는 세계시장 제품 가격의 변동에 따라 노동자 임금이 영향을 받는 정도의 비합리적으로 자본주의적이며 불평등한 현상은 전혀 없다.

어쨌든 소련, 헝가리, 중국의 기업 경영자는 이익이 되기 때문에 더 많은 컵을 생산하도록 명령을 내릴 것이다. 또는 그가 자발적으로 새로운 가마를 구입하고 하지 않고는 자본주의와 아무 관련이 없다. 이 현상은 집단적 경제의 중앙 집중화 정도를 나타낼 뿐이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특징은 생산수단이 상품이라는 점이다. 이 특징은 주식시장을 통해 최고 수준으로 표현된다. 기형적 노동자국가들 내부에서 생산재 시장은 부분적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생산의 기본 단위인 기업은 상품이 아니다. 유고슬라비아는 1965년부터 1971년 사이에 기업의 자율성과 시장관계를 극도로 허용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기업 자체는 매매될 수 없었다. 유고의 어느 기업이 다른 기업에 투자를 하더라도 이것은 일정 기간에 걸쳐 완전 변제되는 대부처럼 처리되었다.

소련과 동유럽의 기업들이 상품이 아니라는 현실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법률적 원칙이 아니다. 이것은 집단적 소유의 필수적 요소이다. 아무리 자율성을 누리더라도 기업은 경영자의 소유물이 아니며 경제체제의 하위 단위일 뿐이다. 상품은 독립적 소유주들 사이에서 교환될 수 있어야한다. "자본은 다수의 자본으로만 존재하며 존재할 수 있다"([정치경제학 요강], 노트 제 4권)고 맑스가 말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기형적 노동자국가에서 기업의 권한과 존재 자체는 정부에 의해 결정된다. 1973년에 브레즈네프/코시긴 정권은 기술적 생산단위에 대개 조응하여 경영과 책임성의 단위로서 기업의 수준을 낮추고 이것을 연합체로 대체했다. 1971년에 유고의 티토 정권은 기업의 자율성을 크게 축소하고 시장 지향성을 역전시켰다. 이 "보수적" 정책 전환은 유고가 유기적이고 평화적인 방식으로 서서히 자본주의로 되돌아갈 것이라고 예상한 폴 스위지와 같은 인상주의적 좌익분자들의 사고를 반박했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등장한 관료적인 기형적 노동자국가들이나 소련에서 자본주의는 복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체제들은 자본주의로 복귀할 수도 있다. 제국주의와 화해하려는 관료집단의 시도 때문에 이 국가들의 내외에서 자본주의 복귀 세력이 힘을 얻고 있다. 그리고 수십 년에 걸쳐 엄청나게 산업이 발전했지만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은 가장 선진적인 자본주의 국가들에 훨씬 뒤처져 있다.

기형적 노동자국가나 퇴보한 노동자국가 소련에서 자본주의가 복귀하기 위해서는 외부에서 제국주의 국가들이 이 나라들을 다시 점령하거나 내부에서 반혁명이 일어나야한다. 다만 자본주의 복귀는 점진적인 과정이나 정권의 교체만을 통해서는 불가능하고 폭력적인 반혁명이 반드시 수반되어야한다.

자본주의 복귀 세력을 고무시킨 객관적 조건들은 1965년-71년 시기에 유고에서 가장 유사하게 모습을 보였다. 이 시기에 부농, 임노동을 착취하는 소규모 상점주인, 화폐자본을 굴리는 거간꾼/고리대금업자 등 소 자본가들이 확산되었으며 국가 경제에 외국자본이 더욱 활발하게 개입했으며 외국무역의 국가독점이 폐지되어 세계시장이 국가 경제에 최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시장의 원리에 의해 지배되는 기업들 사이의 관계로 인해 중앙 집중적 경제계획이 빈사상태에 빠졌으며 기업 경영자들이 국가 관료집단과 분리되어 자본가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더욱이 이 경제 "자유화"는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의 발호와 밀접히 관련이 있었다. 이로 인해 학생들은 항의 시위에 나섰고 당 지도자들은 더욱더 독자적 권력을 추구했으며 파시스트 집단인 우스타쉬가 활동을 증대했다.

이 객관적 조건들 속에서 국내에는 언제든지 자본주의 복귀 운동이 등장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모택동주의자들이 상상하여 유포한 "흐루시초프의 자본주의 복귀 음모" 같은 궁정 쿠데타 시도는 아닐 것이다. 이것은 정권에 도전하고 사회를 양극화시키는 공개적이고 공격적인 운동이 될 것이다. 이러한 운동은 폴란드의 카톨릭 교회처럼 대중의 지지를 획득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와 조직을 필요로 할 것이다.

강력한 자본주의 복귀 세력의 등장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보존하려는 스탈린주의 관료들 사이에 "보수적" 반응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리고 관료집단 내부에는 트로츠키가 "부텐코 분파"로 이름 부른 반혁명 분파가 결집될 것이다. 그러나 반동의 점증하는 위협에 맞서 노동자들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이해를 방어하기 위해 움직일 것이다. 이 과정에서 사회주의로 이행하기 위한 경제적 기반인 집단적 소유를 방어하기 위해 계급의식을 가진 노동자들은 처절한 내전을 벌일 것이다. 자본주의 복귀는 노동자들의 저항적 내전이 분쇄될 때에만 성공할 수 있다.

 

정치혁명을 통해 10월 혁명의 성과를 방어하자!

모택동식 스탈린주의자들은 1936년 스탈린 헌법이 소련에 사회주의를 정착시켰다고 환호했다. 그러다가 이제는 스탈린 후계자들이 비밀리에 평화적으로 반혁명을 성공시켰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런데 세계 역사적으로 중요한 이 반혁명은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으며 중국의 스탈린주의자들은 이 반혁명이 왜 그리고 어떻게 일어났는지에 대해 공개적으로 분석하지도 않았다. 더욱이 서구의 모택동주의자들은 이 사건이 일어난 시점에 대해서 의견이 제각각이다. 만약 궁정 쿠데타를 통해서 자본주의가 회복될 수 있다면 똑같은 방식으로 사회주의는 다시 회복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는 흐루시초프 같은 작자가 나타나 다시 자본주의를 복귀시키는 등의 과정이 무한정 계속되어 맑스주의보다는 불교의 "윤회설"에 더 가까운 순환 과정이 계속될 것이다.

역사에 대한 이 관념적인 음모론에 대항하여 트로츠키는 러시아 혁명이 스탈린주의자들에 의해 퇴보되는 과정을 유물론에 입각하여 분석했다. 그는 1936년에 이렇게 말했다: "10월 혁명은 지배집단에 의해 배반당했지만 아직도 타도되지는 않았다." 그는 지금까지도 유효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분석을 통해 스탈린주의 체제의 성격을 간단히 요약했다:

"소련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중간에 위치한 모순적 사회체제이다. 그 특징을 살펴보면 (1) 국가 소유에 사회주의적 성격을 부여하기에는 생산력이 아직 너무 낮다; (2) 궁핍에 의해 조성된 자본주의의 본원적 축적(primitive accumulation) 경향이 계획경제의 수많은 숨구멍을 통해 솟아나고 있다; (3 )부르주아적 성격의 분배 규범이 새로운 사회분화의 기초가 되고 있다; (4) 경제성장은 근로인민의 상황을 호전시키고 있지만 특권층의 급속한 형성을 촉진하고 있다; (5) 사회적 적대관계를 활용하면서 관료집단은 사회주의에 적대적인 독자적 계층으로 전환했다; (6) 사회혁명은 지배정당에 의해 배신당했지만 소유관계와 근로대중의 의식 속에 여전히 남아 있다; (7) 모순이 더 축적될 경우 소련은 사회주의로 나아갈 수도 있고 자본주의로 다시 후퇴할 수도 있다; (8) 자본주의 복귀를 위한 반혁명은 노동자들의 저항을 분쇄해야한다; (9) 사회주의로 나아갈 경우 노동자들은 관료집단을 타도해야한다. 결국 소련의 사회성격은 국내외의 살아 움직이는 사회세력들 간의 투쟁에 의해 최종 결정될 것이다."-- [배반당한 혁명]

소련에 자본주의가 복귀했다는 모택동주의자들의 환상은 틀렸을 뿐 아니라 맑스주의에도 크게 위배된다. 그러나 이 환상은 소련에 대항하여 중국 관료집단이 미 제국주의와 반혁명적 동맹을 더욱더 공개적으로 추구하는 정책을 정당화시키고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러시아의 좌익반대파 성원들은 1938년-41년에 북극해의 강제수용소에서 끌려나와 총살될 때에도 제국주의 공격에 대해 소련을 무조건 방어하겠다고 맹세했다. 이들의 투쟁은 관료집단 파벌들의 이해를 도모하는 관료적 음모가 아니었다. 이 기생적 권력 찬탈자들을 타도하여 10월 혁명의 세계 역사적 성과를 방어하고 확산시키기 위한 투쟁이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노동자들의 과거 투쟁 성과들을 방어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바로 이 때문에 러시아의 좌익반대파는 잿더미 속에서 다시 살아 일어날 것이다. 반면에 소련에서는 의미 있는 모택동주의 반대 분파가 존재해본 적도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노동자 전위]지 제 138호, 140호(1976년 12월 24일, 1977년 1월 14일)에서 재수록>

 

 

4. [적색 신문]지 제 7호: 모택동주의의 미쳐 날뛰는 관념론

 

[적색 신문]지 제 7호(Red Papers 7, RP7)는 다음과 같은 모택동의 언명에 전적으로 기초해 있다: "사회주의로의 길과 자본주의로의 길 사이의 투쟁"이 사회주의의 특징이다.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론자들"은 소위 "구 부르주아 사상의 강력한 무기"에 기초하고 있다. 이 때문에 노동계급과 "자본주의론자" 사이의 투쟁은 무엇보다 이념적-정치적 성격을 띤다. 따라서 "'사회주의의 길과 자본주의의 길 사이의 투쟁'에서 당과 대중 간의 관계는 결정적이다." RP7은 이렇게 결론 내린다: 수정주의가 우세하면 "'내가 먼저'라는 이념"에 의해 오염된 "몇 줌의 자본주의론자들과 부르주아 출세주의자들"이 "어느 정도 평화로운 자본주의 복귀 과정을 통해 상대적으로 피를 흘리지 않고" 사회주의를 파괴할 것이다!

혁명적 연합(Revolutionary Union) 그룹의 스승 스탈린은 "맑스-레닌주의"를 옹호했다. 그러나 그의 결함은 "사회주의에서 계급투쟁이 계속되는 방식을 이론적으로 인식하지 못한 점"이었다. "완벽한 기술을 가진 정치공작원"인 은밀한 자본가들이 "자본주의론자"의 무리가 되어 사회주의 체제의 "권위 있는 직책에 슬쩍 올라앉았다." 이 점을 스탈린은 인식하지 못했다. 스탈린을 숭배하는 컬트 그룹인 혁명적 연합은 이렇게 주장한다: 스탈린의 "명성"은 교묘하게 위장한 "자본주의론자들"의 밀려드는 파도를 막기 위해 제방의 빈틈에 집어넣은 엄지손가락이 되었다.     

스탈린의 사망 후 "제 때에 알맞은 장소에 나타난 적임자" 흐루시초프가....잘못된 사상으로 무장한 채 등장했다. 마침내 사회주의의 가면을 벗어 던지고 그는 "번갯불과 같은 속도로" 소위 "부르주아 지휘본부"를 설립했다. RP7에 따르면 흐루시초프는 1956년 제 20차 소련공산당 대회에서 스탈린을 비판하는 연설 하나 만으로 "쿠데타"를 성공시켰다. 이 연설은 "동료 자본주의론자들과 부르주아 계급 대중에게 대세가 바뀌었으므로 은신처에서 기어 나와도 안전하다는 신호"였다!

흐루시초프의 투쟁 신호가 울려 퍼지자 "자본주의 대로(大路)"는 즉시 부르주아 대중으로 가득 찼다:

"흐루시초프가 주도한 부르주아 지휘본부는 1956년-57년에 권력을 장악했다. 이 사건은 자본주의 복귀의 결정적 전환점이었다. 노동계급의 손에서 자본가 계급의 손으로 정치권력이 넘어간 것은 바로 이 순간이었다. 완전한 자본주의 생산관계가 다시 정착하는 것은 이제 불가피했다. 왜냐하면 부르주아 정치노선이 사회를 자본주의 이외로 이끄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RP7의 기본 전제는 이것이다: 노동자국가에서 노동계급의 통치는 이념투쟁에 의해서만 보존되거나 역전될 수 있다. 이 전제는 맑스주의와 레닌주의를 심각하게 수정하고 있다. 레닌은 [국가와 혁명]에서 너무도 명확히 설명했다: 국가는 계급 지배의 기관으로 이를 통해 지배계급은 "자신의 외적 생산조건"(엥겔스)을 방어한다. 따라서 계급 지배를 강제하는 국가의 핵심은 이념이 아니라 억압기구 즉 "무장기관들"(사법 체계, 감옥, 관료집단 등에 의해 지지를 받는 군대와 경찰)에 있다. 국가의 계급적 성격은 지배적 이념이 아니라 국가가 방어하는 생산수단의 소유 형태에 의해 결정된다.

 

국가와 사회주의에 대하여: 모택동 대 맑스

레닌과 트로츠키가 지도한 볼셰비키당은 10월 혁명을 통해 부르주아 국가를 분쇄하고 노동계급 독재체제를 확립했다. 이 체제는 "모든 자본을 점차 자본가의 손에서 빼앗고 국가의 손에 모든 생산 도구들을 집중시키는 임무"(맑스)를 시작했다. 소련에 자본주의를 복귀시키려는 반혁명은 노동자 국가 즉 핵심적으로는 적군과 경찰을 분쇄해야한다. 그리고 주요 생산수단의 국유화와 계획 경제를 특징으로 하는 사회주의 건설의 토대 즉 노동계급의 생산관계를 결국 타도해야한다.

자본주의를 파괴하고 노동계급 독재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혁명이 필요하다. 반면에 노동계급 독재를 파괴하고 자본주의를 복귀시키기 위해서는 반혁명이 필요하다. 이 점을 맑스주의자들은 인식하고 있다. "사회주의로의 평화적 이행"은 개량주의 사상이다. 그렇다면 혁명적 연합 그룹의 "피를 흘리지도 않고 평화로운 자본주의 복귀" 노선은 개량주의가 정확히 앞뒤만 바뀐 것이다! 이 두 사상은 모두 국가기구를 분쇄해야할 혁명의 필요성을 부인한다.

사회주의 하에서 계급과 계급투쟁이 계속 존재한다는 모택동의 "발견"은 맑스주의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공산주의의 낮은 단계인 사회주의는 "계급 분화와 계급 적대가 모두 종식되는 상태"(엥겔스)를 의미한다. 그러나 사회주의를 확립하기 위한 노동계급 독재체제에서는 계급 갈등 그리고 이 갈등을 폭력적으로 해결하려는 국가기구가 계속 존재한다. 이 점을 레닌은 [노동계급 독재 시기의 경제와 정치]에서 너무도 명확하게 말하고 있다:

"사회주의는 계급 철폐를 의미한다. 노동계급 독재는 계급을 철폐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계급은 단 한 번에 철폐될 수 없다. 따라서 노동계급 독재 시기에 계급은 존재하며 또한 존재할 것이다. 계급들이 사라지면 독재는 필요 없게 될 것이다." (강조는 원저자)

그러나 모택동은 "사회주의"(실제로는 노동계급 독재)에서 계급 갈등을 "발견"하면서도 국가기구를 소멸시킨다! RP7은 단호히 이렇게 주장한다: "사회주의에서 계급투쟁의 중심점은 당 자체 특히 당의 최고 부위에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 복귀는 평화적일 수도 있고 분파 투쟁을 통할 수도 있고 은밀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모택동주의 관념론은 지배계급의 독재를 강제하는 공권력인 국가를 청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국가기구가 노동계급의 소유 형태에 기초하여 이것을 방어하는 한 소련은 그 계급적 성격 상 노동자국가이다. 레닌은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명확히 제기했다:

"현재 계급 지배는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가? 지주와 자본가의 소유는 철폐되었다. 승리한 노동계급은 이 소유를 철폐하고 철저히 파괴시켰다. 바로 이 점에서 노동계급의 지배는 표현되고 있으며 존재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소유의 문제가 우선이다. 현실에서 소유의 문제가 결정되면 계급 지배는 확보된 것이다....지배 계급들이 서로 뒤바뀌었을 때 이들은 소유관계도 뒤바꾸었다."-- 레닌 전집 제 4판, 제 30권, 426-427쪽

 

관료적 퇴보 대 자본주의 복귀

레닌과 트로츠키는 "일개 국가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것에 대해 말해본 적이 없다. 다만 러시아 소비에트 정권의 운명은 서구 혁명의 승리에 달려있다고 선언했을 뿐이었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 하나나 여럿에서 혁명이 승리하면 이들은 후진적이고 파괴당한 러시아 노동자국가를 보호하고 지원하여 사회주의 건설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그렇지 못할 경우 러시아의 노동계급 독재는 관료적으로 퇴보하고 결국 반혁명으로 타도될 것이다. 레닌 생전에 볼셰비키당에는 노동자 민주주의가 존재했다. 그러나 이때에도 소비에트 국가기구에는 관료집단이 등장했다. 이에 대해 레닌은 1921년 이렇게 경고했다: "우리 국가는 관료적으로 왜곡된 노동자국가이다" ([레닌 전집] 제 32권, 6쪽). 그러나 관료집단은 아직도 확고히 정착하지 않았고 자신의 권력을 의식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레닌의 사망 직후 1924년에 스탈린-카메네프-지노비에프 삼두체제는 혁명 전위를 목 졸라 죽이고 소비에트를 파괴하여 노동계급을 정치적으로 거세했다. 이 당시 러시아 노동계급은 가혹한 사회의 붕괴로 원자화되고 무력화되었으며 독일 혁명의 패배로 사기가 죽어 있었다. 물질적 이해를 가진 당/국가 관료집단의 등장은 경제적 궁핍, 사회 불안, 노동자 국가에 대한 세계 제국주의의 물질적 이념적 압력 등의 상황 속에서 특히 소부르주아 계급이 혁명에 저항하고 있음을 의미했다. 일반화된 궁핍의 조건 속에서 일어난 개인 소비와 사회주의 축적 사이의 투쟁에서 관료집단은 중재자가 되었다. 정치적 반혁명을 통해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은 노동계급으로부터 권력을 빼앗아 노동계급 소유 형태의 기초 위에 관료적 통치체제를 구축했다.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은 이중적 성격을 띠고 있다. 한편으로 노동계급 소유형태에 기생하는 이들은 자신에게 물질적 특권을 제공하는 이 소유 형태를 방어해야한다. 따라서 자본가들의 반동이 자신들의 사회적 기초를 박탈할 위험성이 있을 경우 이들은 제국주의에 대항할 것이다. 반면에 이들은 제국주의와의 "평화공존"이라는 불가능한 목표를 추구하면서 소비에트 정부를 진정으로 방어하는 유일한 방법인 국제 혁명을 파탄시킨다. 따라서 안정적이고 독자성을 지닌 지배계급이기는커녕 관료집단은 자신의 통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노동계급과 국제 부르주아 계급의 이해 사이에서 줄타기 곡예를 하고 있다.

따라서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은 모순 속에 갇혀있다. 자본주의로 체제가 복귀할 경우 자신의 권력과 부를 제공하는 계획 경제가 파괴된다. 사회주의로 전진할 경우 노동계급에게 정치권력을 넘겨주어야한다. 따라서 이들은 노동계급에게 적대적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관료집단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지만 노동계급의 소유형태가 그대로 있기 때문에 소련은 관료적으로 퇴보한 노동자국가이다.

따라서 트로츠키주의 강령은 내부 반혁명과 제국주의 공격으로부터 중국과 소련 등 집단적 소유체제를 무조건 방어할 것을 촉구한다. 그리고 이 국가들의 국유화 경제체제가 노동계급 통치의 사회적 기초와 일치한다는 점을 인정한다. 우리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에 대항하여 바르샤바조약기구를 강화하는 것을 지지한다. 그리고 중국과 월남을 제국주의의 핵무기 위협으로부터 방어할 것을 소련 관료집단에 요구한다.

동시에 반동적인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을 타도하고 소비에트 권력과 노동계급 국제주의를 부활시키기 위한 노동자 정치혁명을 촉구한다.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의 통치는 근본적으로 불안정하고 취약하다. 왜냐하면 관료집단은 자신에게 고유한 소유체제에 기초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체제에서는 경제 발전을 위한 요구들, 노동계급의 계급적 지위, 공식 이념 등이 노동자 권력의 문제를 계속 제기하고 있다. 민족주의적-개량주의적 관료집단을 제거하는 노동자 정치혁명은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노동자국가들의 강력한 국제적 공동전선을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국가 자본주의" 헛소리

소련의 계급적 성격이 자본주의라는 입장은 맑스주의 기본 개념들을 무시하고 있다. 맑스가 밝혔듯이 자본주의는 사적 소유에 기초한 생산양식이다. 그리고 상품 생산이 일반화되어 노동력, 노동수단, 토지 등 생산을 결정하는 요소들이 상품이 되는 체제이다. 일반화된 상품생산은 익명의 시장에서 진행되는 경쟁에 기초하고 있다. 개별 자본가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 경쟁은 노동 가치 법칙을 발생시키며 자본 축적 과정의 원동력이 된다.

자본가 계급의 생산수단을 몰수하고 국유화하는 것을 통해 노동자국가는 계획 경제를 수립하고 자본주의적 경쟁을 제거한다. 시장 경제가 사라지면 생산수단은 상품 즉 자본이 되지 못하고 노동가치 법칙은 더 이상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작동하지 못한다.

RP7은 이렇게 주장한다: 소련에서 생산수단은 "국가독점자본가들"이 공동으로 소유하는 단 하나의 자본이다. 그러나 이것도 맑스주의에 대한 수정에 불과하다. 이 주제에 대해 맑스는 이렇게 말했다:

"경쟁에서 자본의 이 내적 경향은 이 자본에 대해 다른 자본이 강요하는 강제력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 자본이 행진하라, 행진하라! 라는 계속되는 구령 속에 자신의 적절한 한계를 극복하도록 몰아낸다....개념적으로 말하면 경쟁은 자본의 내적 속성, 핵심적 성격에 불과하며 다수 자본가들이 서로에 대해 상호작용하는 것을 통해 그 모습이 드러나고 실현된다. 이 내적 경향은 외적인 필연이 된다. 자본은 오직 다수의 자본들로만 존재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존재할 수 있다. 따라서 자본의 자기 결정은 다수의 자본들이 서로에 대해 상호작용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강조는 원저자)-- [정치경제학비판 요강], 로헨투르프 출판사, 1857년-58년, 316-317쪽

"자본은 오직 다수의 자본들로만 존재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존재할 수 있다"는 바로 이 이유 때문에 레닌은 이렇게 주장했다: 독점은 경쟁을 완전히 제거하는 완벽한 형태가 결코 될 수 없다:

"이와 반대로 여러 산업분야들에서 발생하는 독점은 자본주의 생산체제 전체를 특징짓는 혼란상을 강화시키고 격화시킨다." (강조는 원저자)-- [레닌 전집] 제 22권, 196쪽

자본가 계급은 합리적 계획에 따라 생산을 조직할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계획 경제의 기초 하에 등장한 관료집단("자본주의론자" 집단)은 계획 경제를 청산시키지 않고서는 스스로를 자본가 계급으로 변모시킬 수 없다.

 

사회주의를 개혁하여 자본주의로 만들기

RP7은 자본주의 복귀를 일관된 경제이론이 아니라 소위 리베르만 개혁 논쟁 가운데 표현된 사상(아니 용어)에 기초하여 비난한다. 혁명적 연합 그룹은 브레즈네프 치하의 수정주의 경제학자들이 사용한 경제학 범주인 "이윤", "자본", "임금" 등을 언급하면서 이 범주들이야말로 소련과 동구권에 자본주의가 복귀한 논란의 여지 없는 증거라고 주장한다....

자본주의에서 이윤은 다양한 생산 분야들에서 자본이 투입되고 철수되는 현상을 결정한다. 그러나 소련에서 자원의 배분은 계획에 따라 이루어진다. 그리고 리베르만 개혁의 "시장" 방식은 계획을 통해 미리 정해진 자원 배분의 효율성을 추구할 뿐이다. 소련에서 다수의 핵심 기업들은 정해진 계획에 따라 손실을 보면서도 운영된다. 즉 관료집단은 의식적으로 생산비용 이하로 가격을 책정한다.

리베르만의 회계 방식은 "사회주의" 중국에도 사용되고 있다. 이에 의하면 "투입 자본에 부과하는 자본사용료"는 "이윤"은 물론 시장에서 실현된 잉여가치도 아니다. 이것은 국영부문 내부의 자원 흐름을 나타내는 지수에 불과하다. RP7은 주장한다: 국가는....자기에게 자본을 임대하기 때문에 "이윤"동기에 묶여 있다!

자본주의를 복귀시키기는커녕 리베르만 개혁은 효율성을 기한다는 원래의 요란하게 선전된 목표도 달성하지 못했다.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리베르만 개혁을 "마지못해 하다마는 식으로 그리고 방해받은 채 진행된 경제개혁"으로 평가하면서 "실패작"이라고 진단했다. 이렇게 결과가 나온 이유는 바로 관료집단이 스탈린의 방식인 "정치적 압력", "사회주의적 경쟁", "'도덕적' 동기부여" 등에 다시 기대면서 개혁을 추진했기 때문이다([공산주의의 문제들], 1971년 7월-8월). 이로부터 혁명적 연합 그룹은 이렇게 결론 내려야 마땅하다: 브레즈네프 정권이 또다시 "사회주의 노선을 확실히 틀어잡았으므로" 소련은 다시 "사회주의의 길"로 복귀했다!

스탈린이 시행했던 기업 이윤율 체제와 마찬가지로 리베르만 개혁은 계획경제가 관료주의에 의해 질식되고 있다는 것을 폭로하고 있다. 러시아 경제의 고질적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노동계급에게 정치권력을 다시 회복시키는 정치혁명이다.

 

혁명적 연합 그룹이 카우츠키주의를 부활시키는 방식

계획에 따라 생산재 부문에 자원이 투입되기 때문에 소련 경제는 "자본 수출"의 압력을 받지 않는다. 국영부문에서 자본주의적 경쟁이 제거되었기 때문에 소련 경제는 "이윤율 저하" 경향에 구애받지 않으며 "평균이윤율" 자체도 성립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윤율이 더 높은 시장으로 자본을 수출해야하는 경제적 강제에서 해방되어 있다.

RP7은 주장한다: 인도에 대한 소련의 원조와 투자는 "소련 사회제국주의"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그러나 인도에 대한 소련의 차관, 무상원조, 공동 건설사업 등은 경제적이 아니라 주로 정치적인 동기에 따른 것이다. 소련의 외국무역 총액은 국내 총생산량의 1%를 넘지 못한다. 이것은 소련이 투자자원 잉여가 아니라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소련은 세계자본주의의 평균 이자에 훨씬 못 미치며 자의적으로 책정된 고정이자를 받고 차관을 제공한다. 그리고 인도의 건설 사업에 투여되는 자원은 소련 국내에 투입될 경우 훨씬 좋은 경제적 효과를 낼 것이다.

더욱이 인도 정부는 폴란드, 동독 뿐 아니라 소련에서 제품을 수입하고 차관을 제공받으면서 세계시장에서 바꿀 수 없는 인도 화폐로 결제한다. 따라서 "사회제국주의 국가들"이 인도에서 자신들의 "약탈물"을 소비하도록 강제한다. "인도의 종속"에 대한 소련 관료집단의 관심은 이윤율과 전혀 관계가 없다. 대신 친소 부르주아 정권이 인도에 들어설 경우 소련은 아시아의 역관계에서 유리한 입장에 놓인다. 낮은 이자를 받고 내주는 차관과 명성이 높은 사업 등은 "평화공존"을 추구하는 소련 관료집단의 경상비용에 불과하다.

RP7은 "소련 사회제국주의"를 비난한다. 그러면서도 이에 대해 제시하는 "증거"는 소련의 수정주의 대외정책을 자신이 비난하는 것 밖에 없다. 소련이 외국 원조와 외교적 지원 등을 통해 대외적인 영향력을 확대하려 한다고 이 그룹은 비난할 뿐이다. 캄보디아의 론놀 정권에 대한 소련의 원조와 1973년까지만 발효된 외교관계 수립이 "소련 사회제국주의의 가장 노골적인 예"라고 이 그룹은 주장한다. 이 관료적 배신행위가 "사회제국주의"라면 모택동이 실론의 반다라나이케와 수단의 니메이리 정권들에 대해 경제 원조를 하고 이란과 이디오피아 국왕들에게 아양 떨듯이 외교적으로 지원하고 알제리와 칠레의 반혁명 군사쿠데타 정권을 즉시 인정하는 것은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혁명적 연합 그룹이 미쳐 날뛰듯이 드러내고 있는 모택동주의 관념론은 곧장 카우츠키주의로 나아간다. 카우츠키는 제국주의를 자본주의가 선호하는 일련의 정책으로만 간주한다.

 

코메콘(동유럽경제상호원조회의)

인도에서와 마찬가지로 동구에 대해서도 RP7은 소련의 "사회제국주의"를 주장만 할뿐 증거를 제시하지 못한다.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동유럽을 점령한 후 스탈린이 관료적으로 이 지역의 생산수단을 약탈한 행위를 혁명적 연합 그룹은 은근슬쩍 넘겨버린다. 스탈린은 이때 산업기계류, 원자재, 심지어 노동자들까지 대대적으로 이 지역에서 소련으로 옮겼으며 전쟁 배상금을 엄청나게 갈취했고 합작회사들까지 설립했다. 제국주의 약탈이기는커녕 자본을 수입하는 이 패턴은 동구 노동자국가들의 물질적 사회적 기반을 희생시켜 소련을 재건하려는 스탈린의 정책이었다. 그리고 이 행위는 "일국 사회주의" 노선으로 정당화되었다. 이 잔인한 관료적 약탈행위를 RP7은 이렇게 선언하는 뻔뻔함을 보인다: "스탈린은 협력, 지원, 상호교류를 권장했다"!

수정주의 "맑스주의자들"은 코메콘을 통해 소련이 동구권을 "착취"한 악랄한 냉전 정책을 지금도 칭송하고 있다. 그런데 이 정책은 자유부르주아 학계의 경제학자들조차 비난하고 있다(프랭클린 홀츠먼, "소련의 외국무역 가격정책과 차별의 문제", [경제통계평론]지 제 44권, 1962년).

생산력이 떨어지는 후진 노동자국가를 세계 자본주의가 공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하나 있다. 자신의 높은 생산력으로 인해 가격이 낮아진 제품을 이 국가에 범람시키고 이 국가의 경제를 파탄시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외국무역의 국가독점은 이러한 노동자국가의 생존에 필수적이다. 그런데 코메콘은 일국 차원을 넘어 블록 경제권까지 외국무역 독점을 확대하려는 불충분하고도 내적으로 모순적인 시도이다.

코메콘 회원국들은 지리적으로 제한된 동구권보다 세계시장을 통해 거의 언제나 더 싼 제품을 구입할 수도 있고 더 좋은 수출조건을 확보할 수도 있다. 바로 여기에 코메콘의 모순이 있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소련을 포함하여 코메콘 국가들 모두에게는 세계시장 무역으로 전환하려는 강력한 원심력이 존재한다....소련이 주도하는 코메콘 내부로 무역을 제한하는 것은 코메콘 회원국들 모두에게 불리한 결과를 가져온다. 이것은 중소 분쟁 그리고 유고-소련 분쟁의 중요한 요인이었다.

경제계획이 일국 차원에서 결정되는 한 코메콘의 무역 가격은 세계시장 가격, 국내 생산비용, 정치적 압력 등의 상호작용에 의해 자의적으로 결정될 수밖에 없다. 코메콘 회원국들 대부분은 생산의 평균비용에 따라 제품의 도매가격을 결정한다. 이 평균비용보다 낮은 비용으로 제품을 생산하는 새로운 공장들은 "이윤"을 남기지만 이것은 대개 세금으로 징수된다. 반대로 더 높은 비용으로 제품을 생산하는 공장들은 손실을 보지만 이것은 계획에 따른 지원금에 의해 상쇄된다. 총비용은 중앙 계획 당국이 통제하기 때문에 너무 높은 것으로 간주되는 지원금으로 운영되는 공장들은 현대화되어 다른 생산 라인으로 전환되거나 아예 폐쇄될 수도 있다.

코메콘 회원국 내부에서 가격과 비용을 이렇게 통제하는 장치는 다른 회원국들과의 무역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폴란드의 관료집단은 자신이 수입하는 소련산 강철의 비용에 전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으며 소련의 관료집단은 자신이 수입하는 폴란드 농산물의 비용에 대해 전혀 통제력을 발휘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코메콘의 무역 가격은 세계시장 가격과 코메콘 회원국의 수출가격 사이에서 등락을 거듭하면서 코메콘 회원국들 사이에 격렬한 갈등을 야기 시킨다.            

한 회원국의 수출 가격이 체계적으로 사용된다면 수입국은 이 회원국의 수출산업에 무제한의 지원금을 제공하는 셈이 될 것이다. 이 때문에 다른 회원국들을 가격을 통해 가장 일관되게 차별하는 코메콘 회원국은 소련이 아니라...바로 불가리아이다. 왜냐하면 불가리아의 제품 생산비용이 가장 높기 때문이다. 세계시장 가격보다 높은 수출가격 때문에 수입국들은 코메콘을 이탈하여 세계시장에서 싼 물건을 수입하려는 충동을 느낀다.

세계시장 가격이 체계적으로 사용된다면 코메콘 회원국 각자는 순전히 자본주의 세계시장에서 무역을 하는 셈이 될 것이다. 체코슬로바키아와 동독의 기계류 일부는 세계시장 가격으로 수출되어 판매될 경우 인건비도 건지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이집트의 면화나 호주의 양모 가격과 경쟁할 경우 소련의 집단농장 농민들은 굶어죽을 것이다. 이 결과 세계 제국주의의 압력에 의해 코메콘은 붕괴할 것이다. 그리고 제국주의로부터 동유럽 노동자국가들을 방어하는 임무는 재앙을 맞을 것이다. 정치혁명을 통해 회복되는 노동자 민주주의만이 위험한 일국적-자급적-관료적 갈등들을 제거하고 동베를린에서 하노이까지 노동자국가들을 경제적 군사적 정치적으로 통합시킬 수 있을 것이다....

 

노동자 혁명투쟁의 성과를 방어하고 관료집단을 타도하자!

소련, 중국, 동구, 유고슬라비아, 쿠바, 북한, 월남, 캄보디아 등 노동자국가의 계급적 성격을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혁명적 전망의 시금석이다. 그리고 트로츠키주의 운동은 언제나 이렇게 주장해왔다. 노동자국가들과 세계 제국주의 사이의 계급적 분리선을 인정하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않을 경우 맑스주의 이론에서 질적으로 이탈하여 노동계급의 이해를 부르주아 계급의 이해에 종속시키는 개량주의 노선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맑스주의와 레닌주의를 계승하고 있는 트로츠키주의만이 일관된 맑스주의 방법론 및 혁명 강령적 결론을 통해 소련 노동자국가를 올바로 분석해왔다.

모택동주의를 수정주의에 대한 혁명적 대안으로 잘못 알고 있는 주관적 혁명투사들에게 우리는 이렇게 권고 한다: "사회제국주의"의 잘못된 이론이 초래하는 정치적 결과를 주시해야한다! 미국이 소련을 패배시키고 10월 혁명의 성과를 자본주의 착취체제로 돌려놓는다면 제국주의는 엄청나게 강화되어 그 생명이 새로 연장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세계 노동계급의 역사적 패배를 의미할 것이다. 소련이 패배할 경우 중화인민공화국 역시 즉시 공격을 받아 거의 확실히 패배할 것이다. 러시아 혁명의 성과를 방어하려고 하지 않는 것은 세계노동계급의 계급적 이해에 대한 심각한 배신임과 동시에 제국주의에 대한 사회애국주의적 굴종이 될 것이다. 혁명적 연합 그룹은 "소련의 사회애국주의가 최대의 적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반공주의와 노동계급의 후진적 의식에 대한 객관적 투항 행위이다.

노동계급 국제주의자로서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선언한다.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소련, 중국 등 노동자국가들을 무조건 방어하자!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을 타도하고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국제공산주의운동의 단결을 성취하기 위해 노동자 정치혁명을 수행하자! 제 4 인터내셔널의 재건을 위해 투쟁하자!                       

---- 이 글은 [청년 스파르타쿠스단]지 제 32호(1975년 5월)에 실린 "[적색 신문]지 제 7호: 혁명적 연합 그룹이 기구(나토)와 '공동전선'을 결성하다"를 발췌한 것임.

       

                                   

5. "국가 자본주의" 이론의 반(反)맑스주의

--- 트로츠키주의에 입각한 비판

<편집자 주: 이하의 논문은 스파르타쿠스동맹의 중앙위원 조지프 씨모어가 1975년 12월 스파르타쿠스 청년동맹의 미국 동해안 연수회에서 행한 강연 내용을 편집한 것이다.>

일부 정치 경향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소련의 집단적 경제체제는 "국가 자본주의"체제이며 소련의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은 "자본가 계급"이다. 오늘 강연은 이들이 제시하는 이론적 주장들의 일부에 초점을 맞추겠다. 특히 소련 경제가 자본주의 운동법칙에 지배되고 있음을 증명하려는 주요한 주장들을 논의해 보겠다.

"국가 자본주의" 이론들의 최소한 일부는 경제주의 그리고 유사(類似)무정부주의에 입각하여 노동계급 독재 체제를 반대하고 있다. 따라서 "국가 자본주의" 이론은 레닌 치하 러시아 노동자국가의 경제정책을 반대하고 있다. 또한 스탈린 치하에서 진행된 혁명의 관료적 퇴보에 대항하여 트로츠키주의 좌익반대파가 주창한 경제정책에도 반대한다. 이 점을 나는 오늘 강연에서 드러내 보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소련에서 정치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을 일소하고 노동자 민주주의와 소비에트 기관들을 소생시킬 정치혁명 이후 트로츠키주의 정당이 취할 경제 조치들에 대해 논의해 볼 것이다.

우선 소련의 퇴보한 노동자국가가 실제로 드러내고 있는 경제구조를 간략히 그리고 경험에 입각하여 묘사해보겠다. 소련에서 현재 중앙 경제계획을 입안하고 감독하는 관료기구는 고스플란(Gosplan)이란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이 기구는 국가 최고의 기구인 국무회의(Council of Ministers)에 직속되어 있다.

흐루시초프 정권 말기(1958년-64년)에는 경제의 지방분권화가 순전히 분파적 목적으로 도입되었다. 이 시기를 제외하면 소련경제는 전국 차원의 수직적으로 통합된 "산업부서 체제" 예를 들어 비철금속부, 식량산업부, 섬유부 등을 통해 운영되어왔다. 이 부서들은 강력한 권한과 어느 정도의 독자성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코시긴은 1930년대에 섬유부 장관이 되어 처음으로 주요한 정치적 역할을 수행했다. 이 체제의 최하 단위는 기업이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생산의 기술적 단위이다. 공장, 국영농장, 광산 등이 여기에 속한다.     

1973년에 행정 관료들이 수없이 교체되면서 동시에 경제체제의 최하 단위는 기업에서 여러 연관기업들로 구성된 기업연합으로 바뀌었다. 이 변화의 의의가 지금 시점에서는 분명하지 않으므로 기업을 경영과 회계의 기본 단위로 인정하고 얘기를 해나가겠다.

고스플란이 산업부서들에게 하달하는 경제계획은 물리적 단위로 표현된다. 강철이나 석탄 몇 톤, 판유리나 옷감 몇 평방미터 등등이다. 관료적으로 퇴보한 소련을 비롯하여 어떤 노동자국가에서도 경제는 임노동에 기초해야한다. 따라서 물리적 단위로 표현되는 계획과 연관되는 것이 바로 제품의 생산비와 가격을 반영하는 일련의 재정적 흐름이다.

소련 경제에서 모든 제품의 가격은 시장의 작동방식이 아니라 관료집단에 의해 행정적으로 결정된다. 가격에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가 있다. 기업이 자기가 생산한 제품을 판매하거나 생산 투입 물품에 대해 지불하는 도매가격이 있으며 최종 소비자를 위한 책정한 소매가격이 있다. 기업가격(도매가격)은 평균생산비용에다 이윤을 덧붙인 것이다.

1967년 이전에 이윤은 생산비용에 연동되어 덧붙여졌으며 가격 전체의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이윤 가운데 25%는 기업이 가지고 가고 나머지는 관련된 산업부서와 정부예산에 귀속되었다. 1976년 이후에는 이윤은 고정자산의 가치에 연동되어 덧붙여졌기 때문에 이전보다 비중이 더 커졌다. 이 결과 이윤의 40%가 기업의 몫이 되었다.

 

소련의 "이윤"

소련을 "국가 자본주의" 체제라고 주장하는 다수의 논객들은 소련 경제에 존재하는 이윤을 대단히 중요하게 보고 있다. 특히 모택동주의자들의 조야하고 주관주의적-관념주의적 "국가 자본주의" 이론은 소련 경제의 "이윤"을 "자본주의"와 동일시한다. 예를 들어 미국의 혁명공산당(Revolutionary Communist Party)은 자신의 소책자 [소련에서 자본주의가 복귀한 방식]에서 소련의 1966년 포스터를 실으면서 독자들을 놀라게 했다. 이 그림에는 소련의 노동자가 루블화 다발을 들고 있는데 이 다발에는 "이윤"이라고 크게 글씨가 박혀 있다.

그러나 소련에서 기업이윤은 기업이 원하는 대로 쓸 수 있는 교환의 보편적 수단(화폐자본)이 아니다. 단지 기업이 고객 기업에게 자신이 생산한 제품을 넘겨준 후 받는 세금일 뿐이다. 이렇게 창출된 이윤의 일부는 제품을 생산한 기업에게 할당된다. 그러나 이것을 지출하기 위해서는 기업은 상부 경제기관에서 작성한 아주 엄격한 지침과 지시에 따라야한다.

제품을 생산한 기업이 책정하여 제시하는 제품 도매가와 소비자의 소매가 사이의 차액은 판매세인데 이것은 소련 경제에서 규모가 매우 크다. 이 판매세와 기업 이윤은 소련 정부가 교육, 보건, 군사, 투자 등의 분야에 쓰는 자금의 주요 원천이다.

중앙에서 계획하는 경제의 외부에 존재하는 유일한 주요 부문은 농업이다. 소련 농업의 총생산량 가운데 4분의 1은 국영농장에서 나온다. 국영농장은 공식적으로 기업과 같은 방식으로 운영된다. 집단 농장은 중앙의 통제를 받지 않으며 곡물을 주로 생산한다. 곡물은 국가가 정해진 가격을 주고 강제로 징발한다. 농업 총생산물의 30%는 주로 과일, 채소, 육류, 가금류 등에 집중되어 있으며 농민의 개인적 소유인 텃밭에서 나온다. 이 가운데 약 50%는 농민의 개인시장을 통해 소비자에게 공급된다.

집단농장의 농민을 제외하면 소련에서 노동자들은 법적으로는 어느 곳에서든지 일할 수 있다. 행정적 또는 강제적 수단이 아니라 임금의 차이에 따라 노동자들은 직장을 선택한다. 이를 통해 각 분야에 필요한 노동량이 주로 할당된다. 법에 따르면 소련 시민은 태어날 때부터 집단농장에 소속되어 당국의 허가가 없으면 여기를 떠날 수 없다. 그러나 1953년에 스탈린이 사망한 이후 이 법은 강제된 적이 없어서 죽은 법이 되었다.

배급되는 주택을 제외하면 소비자들은 소매점에서 제공되는 제품을 마음대로 선착순에 따라 구매할 수 있다. 소비 제품을 매매하는 차원에서만 화폐는 일반적 교환가치를 가지고 있다.

 

가치법칙은 무엇인가?

좀 더 정교한 "국가 자본주의" 이론들은 소련 경제가 노동 가치 법칙에 지배되고 있으므로 소련이 자본주의 체제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모택동주의자들이 소련의 "이윤"에 대해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이 이론들 역시 "가치법칙"을 "자본주의"와 동일시한다.

가치법칙은 생산에 필요한 자원(궁극적으로는 노동)과 교환조건 사이에 존재하는 엄격한 양적 관계이다. 가치법칙은 단순히 교환을 지배하는 관계만이 아니다. 이것은 재생산의 조건에 교환 조건을 연계시킨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만 가치법칙은 온전히 발휘된다. 왜 그런가? 자본주의 사회에서만 상품 교환은 재생산 과정에 완전히 침투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이전이나 이후의 모든 사회에서는 생산의 핵심 요소들이 그 자체로 상품이 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유럽의 봉건제에서 노동과 토지는 상품이 아니었다. 시장에서 교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특징은 고립된 개별 생산자들의 존재이다. 이들은 자기의 생산품을 보편적 교환수단(화폐)로 바꾸어 생산의 모든 요소들을 구입해야한다. 예를 들어 가치법칙은 화폐가 없는 물물교환 경제에서는 작동할 수가 없다. 이 경우는 교환의 조건은 우연한 공급/수요 조건이나 관습에 지배된다.

교환조건이 생산비용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자본주의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교환조건이 재생산비용보다 낮을 경우 자본가는 같은 규모의 생산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자원들을 구입할 수 없을 것이다. 이 결과 기업이나 산업 생산은 축소되어야한다. 교환조건이 재생산비용보다 높을 경우 자본가는 비정상적으로 많은 이윤을 챙길 것이다. 이 현상은 더 많은 자본을 끌어들여 기업이나 산업의 생산은 확대될 것이다.

맑스는 단호하게 이렇게 주장했다: 자본주의 생산양식과 가치법칙은 고립된 생산자들 사이의 경쟁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이 점에 대해 잘못 해석할 여지가 거의 없는 주장을 맑스로부터 직접 인용해보겠다:

"개념적으로 말하면 경쟁은 자본의 내적 속성, 핵심적 성격에 불과하며 다수 자본가들이 서로에 대해 상호작용하는 것을 통해 그 모습이 드러나고 실현된다. 이 내적 경향은 외적인 필연이 된다. 자본은 오직 다수의 자본들로만 존재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다. 따라서 자본의 자기 결정은 다수의 자본들이 서로에 대해 상호작용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강조는 원저자)-- [정치경제학비판 요강], [청년 스파르타쿠스단]지(1975년 5월)의 번역

따라서 시장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 가치법칙은 성립할 수 없다. 왜냐하면 가치법칙은 시장에서의 경쟁에 의해 작동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치법칙이 작동하지 않는 시장은 존재할 수 있다. 자본주의 이전의 사회들에서 교환은 재생산 조건과 충분히 분리되어 있어서 가치법칙은 작동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로마제국은 사치품들을 대규모로 중국에서 수입했지만 이 무역은 가치법칙과 무관했다. 로마제국의 붕괴로 이 무역은 소멸했지만 고대 중국의 사치품 생산은 전혀 지장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련의 시장과 가치법칙

맑스주의 경제학의 범주들을 대단히 왜곡할 경우에만 이렇게 주장할 수 있다: 소련의 생산재 부문에서 가치법칙은 작동한다. 소련 경제에서 생산재는 경제 단위의 구체적 사용가치로 할당된다. 이것은 자본주의적 관계와는 정반대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교환가치를 획득하기 위해 특정 사용가치를 생산하기 때문이다. 즉 특정 사용가치는 이윤을 가져다줄 경우에만 생산된다.

소련에서 가격과 이윤은 관료집단에 의해 정해진다. 그래야 생산과 관련된 재정적 흐름이 구체적 사용가치의 계획 생산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기업 이윤은 부분적으로는 회계 장치이다. 또한 부분적으로 그러나 큰 효과 없이 경제 관료들의 양심적인 경영을 자극한다.

소련에서 가치법칙에 대한 논의는 농민의 개인시장, 노동시장, 소비재 시장에 한정되어야한다. 왜냐하면 시장의 존재는 가치법칙의 필요조건이기 때문이다.

농민의 개인시장은 진짜 시장이다. 고립된 생산자들이 고립된 소비자들을 만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농민의 텃밭에서 생산조건은 집단농장의 법규 따라서 정부에 의해서 전적으로 결정된다. 개인 시장에서 번 돈은 텃밭의 기계화나 자본화를 위해 사용될 수 없다. 그리고 이 돈으로 다른 텃밭을 살 수도 없다.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이 농민의 텃밭을 엄격히 규제하고 있기 때문에 개인의 자본축적을 자극할 조건은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교환조건과 재생산조건 사이의 관계가 아주 미약하기 때문에 농민의 개인시장에서 가치법칙이 온전히 작동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소련에서 노동시장의 사정은 어떠한가? 노동자들 사이에게 제공되는 임금이 수요와 공급에 의해 결정되므로 가치법칙 비슷한 것이 존재한다.

그러나 자본주의에서 가치법칙은 노동자들 사이에 임금을 배분하는 것만 결정하지 않는다. 사회총생산물을 소비재와 다른 용도 예를 들어 투자와 군비 등으로 나누는 것도 결정한다. 산업예비군(실업자들)이 자본주의에 핵심적으로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점 때문이다. 높은 임금이 적절한 이윤 확보에 방해가 될 경우 실업이 증대하여 임금 수준을 낮춘다.

그러나 소련에서는 노동시장이 아니라 계획에 의한 소비재 총생산량이 임금 총량을 결정한다. 여기서도 소련 경제는 자본주의 노동시장과 정반대로 작동한다. 초기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들처럼 일자리가 계획된 것보다 많을 경우에는 임금이 떨어진다. 노동시장의 이러한 조건 때문에 노동력 부족이 임금 상승을 초래하고 이 결과 소비재 수요와 생산을 증대시키는 자본주의적 현상은 발생하지 않는다. 이와 반대로 스탈린 관료집단이 계획한 것보다 전체 일자리 수가 적을 경우에는 임금이 상승한다. 어느 정도 고정된 소비재 공급이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노동자들에게 골고루 퍼지기 때문이다. 소련에는 실업자들(산업예비군)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소비재 시장은 어떠한가? 맑스에 따르면 일반적 결핍이 존재하는 노동자국가에서 소비재 가격은 일반적으로 생산비용과 연동되어야한다. 이 때문에 시장 경쟁이 자동적으로 작동하여 발생하는 법칙이 아니라 계획에 의한 규범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관료적으로 퇴보한 소련 노동자국가에서 이 규범은 침해된다. 소련에서 소비재 가격은 생산비용과 조응하지 않는다. 수요와 공급의 차이를 나타내는 지수인 판매세가 일부 품목에서 특히 높게 나타나더라도 이 품목의 생산을 증대시키는 장치가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소련의 3개 시장들에는 가치법칙이 질적으로 완화되어 나타난다. 이 때문에 이 시장들은 자본주의와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토니 클리프의 "국가 자본주의" 이론

이 강연의 나머지 부분은 영국 국제사회주의자들(IS)의 "국가 자본주의" 이론을 분석하는데 할애하겠다. IS는 한때 트로츠키주의자였던 토니 클리프가 주도하고 있으며 사민주의 경향의 미국 IS 그룹과 느슨하게 연계되어 있는 비교적 덩치가 큰 "제 3 진영" 개량주의 경향이다. 모택동주의 조직들을 제외하면 클리프의 조직은 현재 우리가 정치적으로 대면해야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국가 자본주의" 경향이다.

그러나 클리프의 "국가 자본주의"이론과 같은 엉터리 이론에 대해 논쟁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좀 당혹스럽다. 그의 주요 저서 [스탈린주의 러시아: 맑스주의적 분석]은 맑스주의 경제학 이론에 대한 좌익의 전반적인 무지를 조야하고 참주 선동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그의 "이론"은 맑스의 과학적 용어들을 노골적으로 그리고 자기 멋대로 왜곡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맑스주의 경제용어들의 명확한 의미들 대신 클리프는 일반적인 경제용어들을 사용하고 있다. 더욱이 그는 경제학 범주들을 멋대로 뒤섞어 사용하고 있으며 특히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체계적으로 혼동하고 있다.

 

돌팔이식 용어 사용

클리프의 "국가 자본주의" 이론은 경제적 경쟁과 축적 등 맑스주의 경제학 용어의 의미들을 핵심적으로 왜곡하고 있다. 자본주의 경제관계와 관련지어 맑스가 말한 경쟁은 그 의미가 명확하다: 시장에서 상품의 교환가치를 놓고 개별 자본들이 각축을 벌이는 현상.

맑스는 "다수 자본들의 상호작용"을 경쟁의 "핵심 성격"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소련에서 이 현상을 증명할 수 없는 클리프는 "경쟁"을 자기 멋대로 다시 규정하고 있다. 그래서 이렇게 재규정된 경쟁은 모든 종류의 정치적-경제적 라이벌 관계나 갈등을 의미한다. "국가 자본주의" 이론을 주요하게 설명한 저서에서 그는 이렇게 선언한다:

"다른 나라들과의 경쟁이 주로 군사 분야에서 발생하므로, 소비자로서 국가는 탱크, 비행기 등 특정 사용가치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가치는 개별 생산자들 사이의 경쟁을 표현하고 있다...." (강조는 인용자)-- [스탈린주의 러시아: 맑스주의적 분석](1955년)

그러나 이 주장은 용어의 의미를 엉성하게 바꿔치기하는 술수에 불과하다. 맑스주의 경제학 이론에서 "개별 생산자"는 민족 국가가 아니라 사적 자본가를 의미하며 "경쟁"은 군비 경쟁이 아니라 시장에서 교환가치를 획득하기 위한 경쟁이다.

클리프는 계속해서 오류에 오류를 거듭하고 있다:

"전 세계와 러시아 사이의 경쟁은 사용가치를 목적으로 격상시키고 있으며 경쟁에서 승리하는 궁극적 목표에 봉사한다."

물론 경제적 궁핍이 지배하는 모든 사회는 재화와 생산자원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을 언제나 발생시킨다. 그러나 사용가치를 획득하기 위한 일반화된 경쟁 체제로 자본주의를 규정할 경우 즉시 황당한 결론에 도달한다. 예를 들어 아메리카 인디언의 샤이엔 부족과 수 부족은 사냥터를 서로 차지하기 위해 빈번하게 서로 경쟁했다. 그리고 유럽 봉건제의 지주들은 딸들을 왕과 결혼시키기 위해 결혼 지참금을 경쟁적으로 올렸다. 클리프의 "이론"에 따르면 자본주의 이전의 이러한 경제 현상들도 "제국주의 세력들 사이의 전쟁"이요 "자본주의 경쟁"이 될 것이다! 결국 그가 소련의 "자본주의적 경쟁"에 대해 떠벌이는 헛소리는 철저히 계산된 용어상의 혼란에 불과하다.

클리프가 맑스주의 용어를 재규정하는 또 하나의 핵심적 경우는 경제적 축적이다. 여기서도 교환가치와 사용가치가 대단히 혼동되어 사용되고 있다. 클리프 경향의 주요 이론가인 마이클 키드런의 말을 들어보자:

"소련의 관료들은 자신들과 유사한 사회적 위치를 가진 어떤 계급만큼이나 급격히 경제를 성장시켜야 한다는 강제적 압력을 받고 있다. 이들은 외국의 관료들만큼이나 경제성장을 확보하려는 확고한 동기 부여가 필요하다. 이들의 성공 기준이 화폐 이윤이 아니라 물리적 총생산량이라 하더라도 이 차이는 핵심적인 것이 아니라 세부적인 것일 뿐이다." (강조는 인용자)-- "마지노 맑스주의: 만델의 경제학", [국제 사회주의]지, 1969년 4월-5월

경제 잉여는 화폐 이윤과 화폐 자본 등 교환가치로 실현되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자본주의의 핵심이다. 이 점을 증명하기 위해 나는 이 자리에 앉아서 말 그대로 며칠 동안 맑스의 저서들을 인용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 생산의 강제적 동기 --- 화폐 벌기"를 분석하면서 맑스는 이렇게 말했다:

"...자본의 순환은 다음과 같은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1. 자본의 순환은 화폐자본의 순환으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자신의 화폐형태 즉 화폐 자본으로서 공업자본은 이 순환 전체 과정의 출발점인 동시에 종착점이기 때문이다....더욱이 이것은 사용가치가 아니라 교환가치가 이 운동의 결정적 목표라는 사실을 표현한다." (강조는 인용자) -- [자본론] 제 2권, 제 1부, 제 1장

더욱이 클리프는 사용가치의 극대화("물리적 총생산량")를 교환가치의 극대화와 동일시한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생각이다. 자본주의에서 생산수단의 교환가치를 극대화하려는 노력은 진정한 경제성장과 주기적으로 갈등을 일으킨다. 자본가들은 교환가치의 총량이 아니라 이윤율을 극대화하려고 노력한다. 이윤율은 생산수단의 가치에 대한 잉여가치의 비율이다. 자본주의에서 이윤율 저하가 생산력 발전을 정지시키는 중심적 요인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클리프나 키드런의 저서들을 읽으면 자본주의가 진정한 경제성장을 언제나 극대화한다는 인상을 받는다. 맑스는 불황과 공황을 "자본가치의 도살"이라고 불렀다. 이 현상은 주식 가격의 하락을 통해 구체적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클리프 경향의 자본주의 이론에는 이것이 설 자리가 없다.

 

계급투쟁: 노동자와 축적자의 대결?

관료적으로 퇴보하거나 기형화된 노동자국가들에 대한 "제 3 진영" 조직들의 분석은 지적으로는 엉성하기 그지없지만 나름의 매력이 있다. 미국 국제사회주의자들의 "관료적 집산주의"이론만큼 클리프의 "국가 자본주의"이론은 진짜 매력이 있다. 왜냐하면 조합주의의 관점에 입각한 분석이기 때문이다. 영어권 나라들에서는 계급투쟁이 상대적으로 가라앉으면서 노동조합의 경제주의가 지배적 조류가 되었으며 자본가 계급에 대항하는 무기로서 노동자국가에 대한 개념은 멀어 보이기만 한다. 이 상황 속에서 클리프나 섁트먼 등 제 3 진영 경향들의 이론은 노동운동권 내부에서 나름의 중요성을 획득할 수 있었다.

클리프와 섁트먼 이론의 진정한 정치적 내용은 이렇게 표현 된다: 사회의 근본 갈등은 직접 생산자들과 이들의 소비 욕구를 한편으로 하고 행정가들과 이들의 축적 욕구를 또 한편으로 하여 발생한다. 달리 표현하면 지금 더 많은 임금을 받으려 하는 노동자들의 욕구와 지금의 욕구 불만을 감내하고 미래에 투자하여 경제적 축적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행정가들의 욕구 사이의 갈등이다. 클리프와 섁트먼의 전망과 호소력의 원초적 근원은 이렇게 표현될 수 있다: "이놈들이 내 임금을 빼앗아 이것으로 공장을 짓는다. 이들이 누구이고 어떤 사회를 위해 일하든 나는 상관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이놈들이 나를 더 가난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클리프와 섁트먼의 글들을 각각 인용하여 다양한 "제 3 진영" 이론들이 가지고 있는 매력이 무엇인지를 보여 보겠다. 또한 클리프의 "국가 자본주의" 주장과 섁트먼의 비(非)자본주의 "관료적 집산주의" 주장을 구별할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게 될 것이다.

클리프는 이렇게 말한다:

"러시아에서는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율이 증가하고 있으며 생산수단에 대한 노동자들의 종속도 증가하고 있다. 이 현상은 버터가 아니라 총포를 거대한 규모로 생산하는 현상과 함께 일어나고 있다. 이 현상들은 모두 인민에 대한 억압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다."-- [스탈린주의 러시아: 맑스주의적 분석]

그리고 섁트먼은 이렇게 말한다:

"과거에 그리고 다른 곳에서 노동을 착취한 결과 발생한 자본의 도움을 통해서가 아니라 들판과 공장의 살아있는 토착민 노동을 특히 잔인하게 착취하는 것을 통해 현대화가 진행되었다. 이것은 생산자로부터 조금의 저항도 허용하지 않는 정권을 요구한다....

러시아가 보여주었듯이 이 방법을 통해 경제를 공업화시키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에 대한 대가는 사회 정상부에 전제적 특권계급을 유지시키는 것과 최하층 인민을 착취하고 무권리 상태로 만드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 상황은 체제에 대한 반대와 저항을 위해 필요한 어떤 권리가 존재하더라도 완화되지 않는다."-- "트로츠키의 [중국혁명의 문제들]에 붙여"(1967년)

클리프와 섁트먼 이론의 핵심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후진국의 공업화는 노동자 민주주의 체제에서 노동자들이 인정할 수 없는 축적률을 요구한다; 따라서 공업화는 전체주의 체제를 요구한다;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은 위에서 노동자들에게 강요되는 가속화된 축적의 앞잡이들이다; 따라서 이들은 착취계급이다.

 

레닌의 볼셰비키당에 대항하는 "제 3 진영" 경제주의

"제 3 진영"주의는 트로츠키주의로부터 이탈한 최초의 가장 강력한 스탈린주의 관료집단 혐오증 노선이다. 그러나 이 사고는 역사적 관점에서는 정확하지만 이 진영과 혁명 진영 사이의 엄청난 정치적 차이들을 너무 협소하게 바라보는 관점이다.

클리프와 섁트먼의 정치노선을 러시아 혁명 당시에 대입한다면 이들은 혁명 초기부터 레닌과 트로츠키의 정책을 반대했을 것이다. 1921년 이들은 조합주의적인 노동자 반대파에 가담하여 레닌과 트로츠키에 대항했을 것이며 1920년대 후반부 스탈린의 정치적 반혁명 이후에는 부하린 분파의 톰스키 파벌에 가담했을 것이다. 클리프의 노선을 견지할 경우 좌익반대파의 경제정책을 지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1920년대 후반부에 부하린의 우익반대파는 트로츠키주의 좌익반대파를 "초(超)공업화론자"라고 규정했다. 국가의 경제적 축적을 희생하여 노동자 임금을 극대화시키는 정책을 트로츠키주의자들은 결코 지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927년 스탈린/부하린 정권이 좌익반대파에 대항하는 참주선동적 정책을 펴서 노동일을 8시간에서 7시간으로 줄였을 때 트로츠키와 좌익반대파는 이 조치가 소비에트 경제에 해를 끼친다고 반대했다.

잠시 상황을 미래로 돌려 트로츠키주의 정당들이 소련 진영에서 관료집단에 대한 정치혁명들을 통해 집권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리고 이 정치혁명들이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의 사회주의 혁명을 즉시 초래하지 않았다고 가정해보자. 상황이 이렇다면 고립되어 있지만 상대적으로 강력한 혁명적 노동자국가들의 동맹이 수립되어 있을 것이다. 이 상황에서도 "러시아 문제"를 둘러싼 우리와 "제 3 진영" 사이의 정치적 차이들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이 차이들의 형태는 다르겠지만 결정적인 차이들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 왜 그런가?

"제 3 진영" 수정주의 이론의 근저에는 국가권력이 노동계급의 중요한 무기라는 사고를 거부하는 반(半)무정부주의적 경향이 놓여있다. 따라서 이 경향은 노동자국가가 활용할 수 있는 경제 자원도 거부한다. 바로 이것이 우리와 이 경향 사이의 핵심적 차이이며 이 차이는 스탈린주의 체제의 성격에 대한 구체적 문제를 초월한다.

클리프 경향의 지도자 크리스 하먼은 이 경향의 정치적 특성을 가장 명확하게 주장했다. 제 1차 5개년 계획의 시행으로 소련이 "국가 자본주의"체제가 되었다는 클리프의 주장을 그는 옹호한다. 그리고 고립되었으며 후진적인 노동자국가는 대중의 소비수준을 높이고 경제 축적 수준을 낮추는 정책을 통해 다가올 세계혁명을 무시할 수 있다고 강력히 암시하고 있다:

"1924년까지는 서방과의 경제적 군사적 경쟁이 아니라 혁명을 확산시키는 것이 러시아에서 사회주의를 확립하는 기초라고 간주되었다."-- "에르네스트 만델의 비일관성", [국가 자본주의 이론에 대한 독서 자료들], 영국의 국제맑스주의그룹에서 출판

레닌은 결코 이렇게 입장을 표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소련의 경제적 군사적 역량을 국제적으로 혁명을 확산시키는 것에 대치시킨 적이 결코 없었기 때문이다. 이와는 반대로 러시아 노동자국가 초기에 볼셰비키당 내 가장 격렬한 분파투쟁들 그리고 러시아 노동운동 내 볼셰비키당과 다른 경향들 사이의 투쟁들은 중앙 집중화 되고 효율적인 경제기구를 수립하려는 레닌의 일관된 노력 때문에 촉발되었다. 상당한 반대를 무릅쓰고 레닌은 노동자에게 위임된 경영체제를 일인 경영체제로 대체시키고 높은 임금을 받는 부르주아 전문 경영인을 고용하고 도급제를 광범위하게 사용하는 정책을 위해 투쟁했다.

이 당시 레닌의 가장 우선적인 관심사 가운데 하나는 이것 이었다: 내전과 소비에트 노동자국가의 고립 때문에 소련 산업이 해체되고 이 결과 러시아 노동계급이 소부르주아로 변모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 1922년 코민테른 제 4차 세계대회 때 그가 행한 연설을 들어보자:

"...우리의 중공업은 아직도 대단히 어려운 처지에 있다....종종 대중을 희생시키기는 하지만 우리는 절약해야한다....우리는 이렇게 해야 한다. 왜냐하면 중공업을 구하고 회복시키지 않는 한 산업을 건설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가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산업이 없이는 독립국으로 제대로 서지도 못하고 망할 것이라는 점을 우리는 아주 잘 인식하고 있다.

러시아의 구원은 농장의 풍작에만 달려있지 않다. 이것으로는 불충분하다. 경공업의 좋은 상태에 달려있지도 않다. 이것은 농민에게 소비재를 제공할 뿐이다. 이것으로도 불충분하다. 우리는 중공업도 필요하다." (강조는 인용자)-- "러시아 혁명의 5년과 세계혁명의 전망", [레닌 전집] 제 33권, (1966년 판본)

 

공업화: 노동계급의 혁명 정책

왜 레닌과 트로츠키는 러시아의 공업 발전을 국제 혁명의 전망과 전혀 대치되지 않는 필요한 요소라고 생각했는가? 이 질문을 통해 "국가 자본주의" 이론들과 우리 사이에 가로 놓인 근본적인 정치적 차이의 핵심에 다가갈 수 있다. 실제로 레닌과 트로츠키가 이렇게 생각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레닌과 트로츠키는 평화주의자가 아니었다. 적군의 원수 투하체프스키가 적군을 동원하여 유럽을 정복하자고 주장했을 때 이들은 그의 생각에 격렬히 반대했다. 그러나 이들은 유럽 특히 독일 혁명이 일국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독일 혁명이 성공했을 경우 프랑스와 영국의 부르주아 정권들은 독일 혁명에 개입했을 것이고 미국은 이들을 지원했을 것이다. 따라서 유럽 차원의 혁명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었고 이때 소련의 군사적 개입은 사태를 결정지을 수도 있었다. 이 때문에 1920년에 레닌은 독일 혁명에 좀 더 유리한 군사적 상황을 조성하기 위해 폴란드를 점령할 용의를 보였다.

1920년대 초반부에 독일 혁명이 성공했으나 제국주의 국가들의 군사적 개입으로 혁명이 더 이상 다른 나라로 확산되지 못했다고 가정해보자. 독일과 러시아의 소비에트 동맹은 고립되었을 것이고 혁명을 확산시킬 필요는 그만큼 시급했을 것이다. 소비와 축적 사이의 긴장과 갈등은 고립되고 후진적인 러시아의 경우보다는 훨씬 덜 했겠지만 여전히 존재했을 것이다. (흥미롭게도 프레오브라젠스키는 자신의 저서 [신경제학]에서 바로 이런 상황이 초래할 경제적 문제들을 논의했다.) 의심의 여지없이 독일 노동계급의 후진층은 경제자원이 대대적으로 러시아의 농민에게 수혈되는 것을 거부했을 것이다(1924년에 독일은 그 이전에 비교해 더 궁핍해 있었다).

반면에 실제 벌어진 사태대로 독일 혁명이 실패했으나 1925년-27년의 중국 혁명이 성공했다고 가정해보자. 이 상황에서 러시아보다 더욱 경제적으로 낙후한 중국에 러시아의 상당한 공업자원이 수혈되지 않았을 경우 단기적으로라도 중국의 노동자국가는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제국주의 국가들의 군사적 개입을 무시하더라도 소련-중국 노동자국가 동맹에 대한 무역 금수조치가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에 체결되었을 것이다. 이 상황에서 소련은 중국 노동자국가를 경제적으로 지탱시켜야했을 것이다. 따라서 소련의 경제적 군사적 역량은 진지한 세계혁명 전략에서 핵심적인 부분이었다.

더욱이 소련의 공업화가 중요했던 여러 가지 방어적 이유들이 있었다. 공업화는 단순히 공장을 더 많이 세우고 기계를 더 많이 설치하는 것 뿐 아니라 다른 계급들에 비해 노동계급이 증가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함께 노동 대중의 문화수준도 일반적으로 상승한다. 1920년대에 소련의 노동계급 독재 체제가 고임금 저축적 정책을 취했다면 그 결과는 어떠했을까?

부하린/톰스키의 정책이 소련을 지배했다면 상대적으로 농민보다 임금 수준이 훨씬 높은 소규모의 공업 노동자층이 존재했을 것이다. 이 결과 농민들은 느리게 성장하고 있던 공업부문이 흡수할 수 있는 수보다 훨씬 더 많이 도시 지역으로 몰려들었을 것이다. 1920년대 중반에 러시아에는 도시 빈민의 문제가 이미 등장하고 있었다. 신경제정책 시기에 도시 빈민의 환경을 묘사한 레오니드 레오노프의 멋진 소설 [도둑]을 읽어보면 이 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1920년대 러시아에서 사회구조는 현재의 소련보다 자본주의로 복귀할 요인이 훨씬 많았다.

마지막으로 이 시기에는 러시아 농민들에게 잘 알려진 문제가 하나 더 있었다. 당시 소비에트 체제의 공업이 농민에게 공업제품과 소비제품을 짜르 체제의 경우와 비슷하게 제공하지 못했을 경우 농민들은 국가의 외국무역 독점을 무시하고 소규모 무역상들과 거래하려는 강력한 용의를 보였을 것이다. 이 결과 소련에는 한편으로는 농민 대중과 또 한편으로는 외국자본과 연결된 상업 자본가계급이 성장했을 것이다. 이들은 당연히 반혁명의 구심점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좌익반대파의 가속화된 공업화 강령은 부분적으로는 스탈린/부하린 정권 하에 반동 계급들의 성장을 저지하는 목적이 있었다. 초기 단계부터 10월 혁명의 역사적 성과를 방어하고 이것을 유럽 전역에 확대시키는 전망은 클리프와 섁트먼의 경제주의에 의해서만 전복될 수 있었을 것이다.

소련의 성격에 대해 우리가 클리프의 "국가 자본주의" 경향과 가지고 있는 정치적 차이는 다음과 같은 상호 관련된 질문들의 형태로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소련의 계획경제는 임금을 희생시켜 축적률을 극대화하는 경제법칙에 따라 작동하고 있는가?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을 분쇄하고 소비에트 민주주의를 소생시키는 노동계급 정치혁명이 성공할 경우 소련의 공업화 속도는 질적으로 바뀔 것인가? 고립된 노동자국가의 경제는 축적률을 지배하는 경제법칙에 의해 작동될 것인가?

 

"스탈린주의 궁핍화 법칙"은 어디에 있는가?

돌팔이식 용어 사용을 논외로 할 경우 클리프의 "국가 자본주의" 이론은 다음과 같은 주장에 의존하고 있다: 스탈린 치하의 소련에서 실질 임금은 크게 하락했다. 예상할 수 있듯이 클리프는 과도한 단순화에 기대면서 단순한 "사실들"을 경멸한다. 제 1차 5개년 계획 기간에 임금은 진짜 크게 하락했다. 그러다가 1930년대 후반부에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가 제 2차 세계대전 동안 다시 하락했다.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할 때쯤에는 임금은 1928년 수준으로 회복되었다.

그러나 스탈린 사후 소위 "스탈린주의 궁핍화 법칙"은 어떻게 되었는가? 스탈린이 죽은 지 몇 년 내에 확실한 스탈린주의자인 베리아와 몰로토프는 소위 "신노선"을 시행하면서 소비재 가격을 내렸다. 그러나 이 정책은 소비재의 극심한 부족을 더 악화시키기만 했다. 그러나 스탈린 바로 뒤의 후계자들은 소비를 진작시켜 소득 재분배를 시행하기는 했다. 왜냐하면 대중의 불만은 높은데 자신들이 "위대한 지도자" 스탈린의 권위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1955년과 1968년 사이에 소련의 일인당 실질임금은 56% 증가했다(슈뢰더, "소련의 소비에 대한 조사", 모리스 보온슈타인/데이니얼 퍼스필드 저 [소련의 경제]). 이것은 총생산량 성장분 즉 트로츠키주의 정부가 임금을 인상했을 정도에 비하면 적지만 그래도 상당한 임금인상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1970년-75년의 5개년 계획은 생산재 부문이 소비재 부문보다 더 빨리 성장해야 한다는 기존의 스탈린주의 정책을 역전시켰다. 농업 부문의 목표량 미달로 이 계획은 성취되지 못했다. 그러나 의도는 역시 대중의 소비생활을 신장시키자는 것이었다. 따라서 정통 클리프주의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러시아는 덜 "자본주의화" 되고 있다고 인정해야한다. 왜냐하면 "착취율"이 하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연한 실업 현상은 어디로 갔는가?

노동자 일인당 실질 임금 이외에 또 다른 임금 문제가 있다. 스탈린주의 정책이 임금 총량을 희생시켜 축적을 극대화하고 있는가? "국가 자본주의" 주창자들이 묘사하는 현실과 매우 다른 현실이 이 점과 관련해서도 존재한다.

자본주의의 지배계급과 달리 소련의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은 정치적 불안을 두려워하여 실업자(산업예비군)의 등장을 막으려고 언제나 애써왔다. 1930년대에는 도시에서 일자리를 구할 수 없는 농민들은 다시 소속 집단농장으로 강제 귀환되었다. 스탈린주의 경제계획은 제품 당 비용을 극소화하는 데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물리적 생산량을 극대화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이 때문에 기업 경영자들은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수의 노동자들을 고용하여 노동력을 비축하지 않을 수 없다. 소련의 기업에는 노동자들이 너무 많다. 이들이 다른 곳에서 일하면 훨씬 생산성이 증대될 것이다. 그렇다면 소련의 경영자들은 전형적인 자본주의 경영자들과 아주 비슷한가? 대답은 "결코 아니올시다"이다.

1930년대 초반에 소련의 실질임금은 급격히 하락했다. 그러나 이 현상은 스탈린 정권의 의도가 아니었으며 단지 소비재 생산계획의 예상치보다 더 많은 노동자들을 경영자들이 고용한 결과였다. 그러나 특권층이 관료적으로 통치하는 사회에서 스탈린주의 공업화는 중요한 평등주의적 측면을 하나 가지고 있었다: 소련은 지금의 브라질이나 인도와는 전혀 모습이 달랐다. 이 자본주의 후진국들에는 공업 노동자들보다 낮은 수준에서 생활하는 거대한 도시빈민층이 존재하고 있다.

 

경제 정책: 트로츠키 대 스탈린

이제 두 번째 문제로 넘어가자. 정치혁명을 통해 관료집단을 타도한 소비에트 정권이 스탈린주의 정권보다 질적으로 낮은 축적률을 기록할 수 있는가? "국가 자본주의" 주창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트로츠키주의와 스탈린주의의 근본 갈등이 축적과 노동자 소비를 중심에 놓고 일어나고 있는가?

[배반당한 혁명], [이행 강령] 등은 러시아의 정치혁명에 대한 주요한 강령적 발언이다. 그러나 이 저서들 어디에서도 축적에서 소비로 국민총생산을 근본적으로 재분배하거나 반드시 성장률을 낮추어야 한다는 주장은 없다. 특히 1930년대 초반에 트로츠키 그리고 심지어는 프레오브라젠스키도 실질임금의 재앙적 하락에 대해 대단히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정책의 우선순위를 다시 정할 것을 요구했다. 예를 들어 1932년에 트로츠키는 5개년 계획을 일 년 유예하고 경제를 다시 조정하여 생활수준을 회복시킬 것을 촉구했다. 따라서 클리프/섁트먼의 노선과 트로츠키의 노선 사이에는 피상적인 유사성이 있다.

"국가 자본주의" 경향들은 기본적으로 이렇게 인정한다: 스탈린주의 경제정책은 그 자체로 보면 합리적이고 성공적이었다. 이들은 중공업에 투자를 더 많이 할수록 전반적인 경제성장률은 더 높아질 것이라고 가정한다.

그러나 노동자들을 희생시키는 가운데 스탈린이 진정한 경제성장을 극대화했다고 트로츠키가 인정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제 1차 5개년 계획에 대한 트로츠키의 대안은 더 많은 소비와 더 낮은 공업화율이 아니었다. 그는 더 높은 소비수준을 통한 좀 더 균형 있는 경제성장이 비슷한 수준의 경제성장률을 보장할 것이라고 보았다.  

 

스탈린 공업화의 파괴적 작용

우선 1930년대에 스탈린이 추구했던 것과 같은 규모로 불균형 투자와 강제적 경제성장을 시도하는 것은 미시경제 차원에서 자원의 대규모 낭비를 초래한다. 당시 소련에는 엄청난 병목현상과 격심한 자원부족이 경제 곳곳에 드러났다. 반만 세운 공장들은 무너져 내렸다. 무분별한 모험주의적 경제 프로젝트는 수없이 많았다. 생산량 수치에 최우선 순위를 두었기 때문에 제품의 품질은 엄청나게 하락했다.

스탈린 공업화가 불러온 파괴적 작용의 측면으로 더 잘 알려진 경우는 강제로 진행된 농업 집단화였다. 이로 인해 농업 생산량은 재앙적 수준으로 하락했다. 지금도 신문만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1929년 스탈린이 강제 집단화를 통해 소련 경제에 가한 충격은 아직도 해소되지 않고 있다.  

이와 함께 소련의 급격한 실질임금 하락은 관료집단의 전체주의적 테러통치와 결합하여 노동 창조성과 규율을 사정없이 무너뜨렸다. 기술/행정 수준과 직접 생산자 수준 모두에서 노동에 대한 열성은 완전히 사라졌다.

특정 수준 이하에서는 중공업 투자 재원을 마련하기 위한 임금 억제 정책은 경제성장을 가속화시키기는커녕 정지시킨다. 스탈린은 이 수준 이하로 임금을 억제했다. 공업화는 단순히 공장을 더 많이 짓고 노동자 일인당 장비를 더 많이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 규율을 갖춘 기술적으로 유능한 창조적 노동자원을 증진하기 위해서는 대중의 문화 수준을 끌어 올려야 한다. 이 중요한 요소가 공업화에 포함되어 있다.

단수가 높은 부르주아 정부는 잘 알고 있다: 농촌에서 갓 배출된 문맹 농민들을 과도하게 착취하는 것은 최상의 정책이 아니다. 프랑스에서는 특히 북아프리카 출신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다수 불법으로 이주하여 판자촌에서 살고 있다. 이들은 최저임금도 받지 못한다. 그러나 스웨덴에 도착한 유고슬라비아나 알제리 노동자는 먼저 스웨덴어를 배우고 다음에 기술을 익히도록 한 달에 300 달러를 지급받는다. 프랑스 자본가들보다 스웨덴 자본가들이 훨씬 더 고도로 외국인 노동자들을 착취한다.

 

노동자 민주주의와 경제정책

좌익반대파가 주창한 경제정책은 급격한 공업화를 반대하고 노동자의 생활수준을 높이는 것에 있지 않았다. 소비 수준을 높이는 것을 포함한 좀 더 균형적인 경제정책이 스탈린이 초래한 엄청난 자원 낭비를 막고 적정한 수준의 공업화를 달성할 수 있다고 트로츠키는 주장했다.

1932년에 트로츠키는 이렇게 강조했다: 노동자 농민에게 관료적 테러를 대대적으로 가하면서 강제로 실시되는 공업화는 소련 경제의 합리적이고 급격한 성장에 해악이 될 뿐이다:

"그렇다면 공업화와 집단화의 속도를 늦추어야 하는가? 의심의 여지없이 일정 기간 이 조치는 불가피하다. 그러나 이 기간은 오래 끌지 못할 것이다. 노동자 자신이 정치 경제 활동에 참여하고 관료집단을 실제로 통제해야 된다. 그리고 상부 단위가 대중에 대해 더 깊은 책임을 느껴야한다. 이 모든 조치들은 생산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다. 이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결과 체제 내부 갈등이 줄어들고 낭비적인 경제적 좌충우돌이 최소한으로 줄어들 것이다. 그리고 노동력과 장비가 좀 더 효율적으로 배분될 것이고 궁극적으로 경제성장 계수들은 상승할 것이다. 소비에트 민주주의는 국가 경제 운영의 필수 요건이다." (강조는 인용자)-- [다음에는 무엇이? 독일 노동계급의 사활이 걸린 문제들]

 

부하린의 경제정책과 "평화공존"

이 문제에는 또 다른 측면이 있다. "제 3 진영" 경향들은 스탈린/부하린 동맹의 스탈린과 제 1차 5개년 계획의 스탈린 사이에 근본적인 단절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이들의 특징적인 측면이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이렇게 생각해본 적이 결코 없었다. 트로츠키와 좌익반대파는 스탈린이 경제적 군사적 수단을 통해 제국주의 서방을 패배시킬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제국주의 위협에 대한 스탈린의 반응은 "평화공존"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 정책은 국제적 차원에서 계급협조가 가능하다는 환상에 불과했다.

부하린의 경제정책과 제국주의와의 화해 정책 사이에 존재하는 연관은 두브체크의 "자유주의적" 스탈린주의로 다시 드러났다. 제국주의자들에게 좀 더 유화적으로 나오면 소련 진영은 군비를 감축하고 중공업에 투여되는 자원을 소비재 생산으로 전환시킬 수 있으리라고 두브체크는 가정했다.

예를 들어 소련의 경제학자 베르만은 중앙계획의 철폐, 무제한적인 노동자 경영, 시장 사회주의 등 근본적으로 조합주의 강령을 주창하고 있다. 그가 "긴장완화(데탕트)"를 열렬히 지지하는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상당한 정도의 외부 위협이 없을 때에만 소련은 그가 원하는 경제체제를 건설할 수 있다고 베르만은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련 진영이 개방되면 서방과의 화해를 주창하는 온갖 경향들이 난무할 것이다. 이들은 군사화를 반대하고 중공업 성장을 반대하고 소비수준 진작을 지지할 것이다. 1968년 프라하의 봄은 이 점에서 암시하는 바가 아주 많다. 그리고 이 경향들은 나름대로 대중적 지지를 얻을 것이다. 부하린은 다수의 "자유주의적" 스탈린주의자들로부터 존경받고 있다. 그는 일종의 선구자 취급을 받고 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소련 진영에서 정치혁명을 위해 투쟁하고 있을 때 다음과 같은 진실이 곧 드러날 것이다: 아주 다른 상황에서 그리고 아주 다른 역사적 맥락에서 트로츠키가 부하린/톰스키에 대해 벌인 투쟁은 다시 되풀이 될 것이다; 이때 서로 투쟁하는 핵심 강령들은 과거와 동일할 것이다.

 

노동계급의 국가권력: 계급투쟁의 무기

이제 마지막 문제에 대답하면서 이 강연을 끝마칠 때가 되었다. 고립된 노동자국가에서 정치적 고려와 무관하게 작동하는 고유한 경제법칙이 존재하는가?

대답은 "아니다"이다. 노동자국가는 계급투쟁의 무기이다. 이것은 당과는 다르지만 그래도 당만큼이나 강력한 무기이다. 노동자국가가 군사, 중공업, 농민 소득, 노동자 임금 등에 가용자원을 할당할 때에는 중요한 전략적 전술적 고려가 반드시 개입한다. 끊임없이 변하는 정치적 필요와 압력에 대응하여 노동자국가는 자원들을 적절히 할당해야한다. 따라서 고립된 노동자국가에는 고유한 축적법칙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노동자 정당과 노동자국가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당연히 있다. 당은 자발적 조직이지만 노동자국가는 그렇지 않다.

정권을 장악한 혁명정당은 노동계급과 소부르주아 계급 전체의 물질적 문화적 요구와 관심을 고려해야한다. 전시라는 명백한 예외를 제외하면 노동자국가의 경제정책은 노동자 민주주의의 한계 내에서 대중의 생활수준을 꾸준히 높여야한다. 그러나 생산성이 충분히 급격하게 상승하고 있다면 노동자의 임금과 농민의 소득을 상승시키면서 동시에 투자나 군비에 들어가는 자원을 증가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지금까지 강연을 통해 말한 주제들은 강령적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이 중요성은 "국가 자본주의" 이론을 주창하는 선전그룹들에 대한 현재의 정치적 경쟁의 차원을 넘어선다. 소련 진영에서 국가권력을 장악하려는 투쟁 과정에서 그리고 심지어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이 권력을 장악한 이후에도 이 나라들의 노동자 운동 내부에서 우리는 훨씬 더 위험한 형태로 클리프/섁트먼 경향들과 대결할 것이다. 노동자국가의 산업 역량을 발전시키는 것이 최우선이 아니라는 입장은 세계혁명의 전망에 결정적인 요소이기는커녕 진정으로 반(反)혁명성을 내포하고 있다.

--- [청년 스파르타쿠스단]지 제 51-53호 (1977년 2월, 3월, 4월)에서 재수록

?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24 노동자국가(소련/중국/북한 등)의 사회성격 소련 중국 북한 등 노동자국가들의 사회성격 논쟁 볼셰비키-레닌주의자 2012.12.24 8529
23 노동자국가(소련/중국/북한 등)의 사회성격 소부르주아 사회주의와 ‘국가와 혁명’: 국가자본주의론 비판 2 볼셰비키-레닌주의자 2012.12.24 7182
22 노동자국가(소련/중국/북한 등)의 사회성격 (IBT) 남한의 구속된 사회주의자들을 모두 석방하라!(15호, 1995) 볼셰비키-레닌주의자 2012.12.24 5354
21 노동자국가(소련/중국/북한 등)의 사회성격 (IBT) 소련에서 반혁명이 승리하다(11호, 1992) 볼셰비키-레닌주의자 2012.12.24 5015
20 노동자국가(소련/중국/북한 등)의 사회성격 (IBT) 죽음의 고통에 처한 스탈린주의: 동유럽 국가의 몰락과 클리프파의 정치적 오도(8호, 1990) 볼셰비키-레닌주의자 2012.12.24 4716
19 노동자국가(소련/중국/북한 등)의 사회성격 (IBT) 소련의 사회성격에 대하여(6호, 1989) 볼셰비키-레닌주의자 2012.12.24 4290
18 노동자국가(소련/중국/북한 등)의 사회성격 (IBT) 중국은 어디로? : 정치혁명과 반혁명의 갈림길(31호, 2009) 볼셰비키-레닌주의자 2012.12.24 5349
17 노동자국가(소련/중국/북한 등)의 사회성격 중국 사회성격에 대한 메모: 중국은 이미 자본주의가 되었는가? 볼셰비키-레닌주의자 2012.12.24 6287
16 노동자국가(소련/중국/북한 등)의 사회성격 (IBT) 붕괴의 벼랑으로 향하는 중국(26호, 2004) 볼셰비키-레닌주의자 2012.12.24 5800
15 노동자국가(소련/중국/북한 등)의 사회성격 (IBT) 소련의 관료지배층은 계급이 아니었다(24호, 2002) 볼셰비키-레닌주의자 2012.12.24 5991
14 노동자국가(소련/중국/북한 등)의 사회성격 (IBT) 러시아: 자본주의 생지옥(24호, 2002) 볼셰비키-레닌주의자 2012.12.24 6269
» 노동자국가(소련/중국/북한 등)의 사회성격 (IBT) 소련은 왜 자본주의 체제가 아닌가? 볼셰비키 2015.03.26 7940
12 노동자국가(소련/중국/북한 등)의 사회성격 소련 붕괴에 대한 맑스주의적 분석 2 file 볼셰비키 2015.06.04 6359
11 노동자국가(소련/중국/북한 등)의 사회성격 '소련 붕괴에 대한 맑스주의적 분석' 청중토론 볼셰비키 2015.06.16 3919
10 노동자국가(소련/중국/북한 등)의 사회성격 (IBT) 1989년 사태 25년 후 볼셰비키 2015.07.25 2582
Board Pagination Prev 1 2 Next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