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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군부독재와 노동계급

: 몇몇 좌익의 아주 해로운 인식

 

식민지 미얀마 / 민족해방투쟁과 일본 제국주의 / 종전 이후 민족해방투쟁의 격화와 노동자국가 지역의 확대 / 종전 이후 갈등 축의 변화 / 스탈린주의 지도부의 국제적 계급협조 / 미얀마 공산당의 혼란 / 미얀마 정치 양극화와 내전 / 리버럴과 극우: ‘같은 대가리에 돋아난 두 개의 뿔’ / 군부 독재: 자본주의 지킴이 / 네윈 쿠데타와 ‘버마식 사회주의’ / '군부 사회주의’의 배경 / 군부 '국유화'의 성격 / 군부의 마피아化 / 군부의 새 수도 / ‘신’식민지 시대 / 미얀마의 인민 항쟁 / 전국민주주의동맹(NLD)과 아웅산수치 / 노동자국제주의 vs 스탈린주의 / 중-소 분쟁 / 중국의 미얀마 정책 / 미얀마와 좌익 / 노동계급의 요구

 

 

식민지 미얀마

영토 분할 경쟁 속에서 아프리카, 아시아, 아메리카, 오세아니아 등 세계 전역은 제국주의 금융자본 손아귀에 차례차례 들어갔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영국 제국주의는 인도를 자기 세력권으로 편입한 후 동쪽으로 진격, 꼰바웅 왕조를 3차례의 전쟁 끝에 1886년 붕괴시키고, 미얀마 지역마저 접수했다.

군대를 파견하여 새로운 지역을 점령한 제국주의는 그 지역을 재편한다. 현지 인민의 필요와 이익이 아니라 제국주의 금융자본의 이익과 식민통치의 편리에 따라, 제멋대로 국경선을 긋고 토착민을 그 폭력적 구획선 안에 욱여넣는다.

미얀마 지역의 경우, 많게는 135개 적게 추산해도 30~40개 이상의 소수민족이 존재한다. 그들은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의 땅에서 고유한 언어와 문화를 누리며 살고 있었다. 그 소수민족들은 이제 제국주의가 제멋대로 그어놓은 그 국경선 안에 포획되어 영국 제국주의 폭력에 복속되었다.

나누어 다스리기는 지배자의 오래된 통치 방식이다. 특히, 소수의 제국주의 지배자가 다수의 식민지 인민을 효과적으로 지배하는 상투 수단이다. 영국 제국주의는 인도인, 벵갈인, 버마인 그리고 소수민족들 사이에 위계를 만들고, 서로 적대하게 만들었다. 이 방식으로 제국주의 분리통치 질서를 구축했다. 피지배 인민이 서로 다투게 만들고, 거기에 자신의 에너지를 소진시켜서, 저항이 제국주의 몸통에 직접 닿지 않도록 교란하는 전략이었다.

군사 정복 이후에는 미얀마 지역과 인민을 식민지 매판 경제로 편입했다. 미얀마는 자원이 풍부한 지역이다. 특히 쌀과 석유의 세계적 산지이다. 미얀마는 태국, 베트남과 더불어 세계 3대 쌀 산지 가운데 하나이다. 영국 제국주의는 미얀마 이라와디 강 유역을 논으로 개발하여 치솟는 국제 쌀 가격으로 큰돈을 벌었다. 그러나 미얀마 농민은 그 혜택을 받지 못했다. 수매가는 제국주의 정부가 결정했고, 농민은 고리대금으로 등가죽이 한번 더 벗겨졌다. 미얀마 유전은 이미 19세기 말에 발견되었다. 영국이 설립한 버마석유20세기 초 중동 석유개발의 모기업이 될 정도로 선구적 기업이었다. 버마석유는 훗날 브리티시페트롤륨(British Petroleum:BP)의 모기업이 되고, 지금도 BP의 소유이다.

 

민족해방투쟁과 일본 제국주의

착취가 있는 곳에 억압이 있고, 억압이 있는 곳에는 저항이 필연이다. 미얀마 지역 피억압 인민은 영국 제국주의에 맞선 민족해방 투쟁에 나섰고, 그 반영 해방투쟁의 중심엔 타킨당[버마의 타킨(Thakhin)은 버마인이다.”라는 말에서 유래. 타킨은 주인’, ‘지사’, ‘동지등으로 번역]이 있었다. 2차 대전이 발발한 1939, 무장투쟁을 결의했다. 여기엔 훗날 크게 분화하는 다양한 정치 성향이 혼재했다.

이 무렵 일본 제국주의는 이미 동아시아 맹주로 크게 성장했다. 조선 반도를 발판삼아 1937년엔 중국 본토를 침략하는 등 제국주의 영토 분할 경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제국주의 탐욕은 끝이 없고, 결국 다른 제국주의 국가의 탐욕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 독일과 일본 등 후발 제국주의 국가의 세력 확장은 영국 프랑스 미국 등 기존 세력과 부딪혔고, 이는 두 번째 제국주의 전쟁으로 이어졌다.

일본 입장에서도 미얀마는 요충지였다. 미얀마를 공략하게 되면, 영국의 성채 한 축을 허물고 인도로 나아갈 교두보를 구축할 수 있다. 그리고 연합군의 중국국민당 보급로를 끊고 중국 서부를 타격할 수 있다. 그리고 막대한 에너지와 식량을 손에 넣을 수도 있다. 그리하여 일본은 자신들의 군사작전에 호응할 현지 세력을 찾던 중이었다.

일제 스파이는, 무장투쟁에 필요한 군사 원조를 갈망하던 타킨당과 조우한다. 서로의 필요로 만난 이 두 세력은 공동의 군사작전을 계획한다. ‘아웅산, 우누, 네윈등 훗날 ‘30인의 타킨스라고 신화화되는 타킨당원 30명이 1941년 일본 군사기지로 탈출하여 훈련을 받는다. 이들은 버마독립의용군을 모집하여 세를 확대하고, 19423월 일본 황군과 함께 미얀마로 진격하여 전투를 벌였다. 영국군을 축출하고 미얀마를 영국 제국주의로부터 해방시킨다. 1차 독립 이후 194381, 이들은 아웅산을 사령관, 네윈을 부사령관으로 하는 버마군(Burma National Army)을 창설한다.

그러나 일본은 이제 해방의 조력자가 아니라, 새로운 점령자가 되었다. 영국으로부터 식민지 미얀마를 빼앗아, 자신의 제국주의 영향권 안에 편입시키고, 식민통치를 다시 구축했다. 독립을 원하는 미얀마 인민에게 저항의 목표는 이제 영국에서 일본으로 바뀌었다. 19448월 버마군, 버마공산당, 인민혁명당, 소수민족 단체 등이 망라되어 항일 투쟁 조직인 반파쇼인민자유동맹(AFPFL)’이 결성되었다. 때마침, 19443~7월 사이 인도 진격 작전인 임팔 전투에서 대패한 후, 일본군의 기세는 급속히 꺾였다. AFPFL19453월 반일본 봉기를 일으켰고, 5월에는 연합군과 함께 랑군으로 진격, 일본 제국주의 군대를 격퇴하였다.

이로써 미얀마는 두 번째로 해방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영미 제국주의 세력의 복귀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버마군은 연합군 지휘 아래에 들어갔다. 연합군이라고는 하지만 실질적으로 미국와 영국 휘하였다. 영국군이 군사고문단을 파견하여 버마군을 지도하고, 사관학교 우수자를 영연방에서 훈련시켰다. 미국은 사이판 CIA 기지에서 미얀마 군인사를 훈련시켜, 악명 높은 미얀마 군사정보국을 창설했다. ‘전자현미경이라는 별명을 가진 틴우 준장은 그 대표적 인물이었다.

 

종전 이후 민족해방투쟁의 격화와 노동자국가 지역의 확대

미얀마 인민은 온전히 자신의 힘만으로 독립을 성취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영국과 일본 제국주의에 능동적으로 맞서 승리한 자부심 강한 인민이었다. 종전을 전후하여, 미얀마 지역 노동자와 농민 그리고 소수민족은 제국주의로부터의 완전한 독립, 제국주의 자산의 국유화, 토지 재분배, 소수민족의 독립 등을 바랐다. 그리고 그 요구들은 사회주의로만 온전히 실현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미얀마 인민 다수는, 해방 전후의 한반도 인민이 그랬던 것처럼[1946년 8월 미 군정청 여론국이 실시한 체제 선호도 조사: 자본주의 14%, 사회주의 70%, 공산주의 7%, 모른다 8%], 사회주의를 이상적 정치체제로 여기고 있었다.

이는 미얀마뿐 아니라, 2차 대전 종전 이후 모든 식민지역에서 분출된 요구였다. 제국주의 경쟁 전쟁으로 기존 제국주의 침략자들의 세력은 약화된 반면, 현지 노동자 농민의 민족해방투쟁 역량은 강화되었다. 이 투쟁역량은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로부터 이미 해방된 소련과 결합하며 더욱 강력해졌다. 독일 제국주의와 일본 제국주의가 패배한 동유럽, 한반도 북부 등은 종전과 더불어 사적소유 철폐 지역이 되었다. 이와 유사한 격동이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아시아 할 것 없이 세계 모든 식민 지역 민족과 국가를 흔들었다.

미얀마 지역과 인접한 동아시아 정세만 살펴보자. 한반도 북부엔 노동자국가가 수립되었고, 미제국주의가 점령한 남쪽 지역은 내전 상태에 돌입하였다가 급기야 1950~1953년 전면전으로 확대되었다. 2차 대전 종전 무렵, 중국공산당과 국민당의 내전은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연합군의 총력 지원에도 불구하고 친제국주의적이고 반인민적인 국민당은 1949년 결국 패배하였고, 승리한 중국공산당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하였다. 인도차이나 반도의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인민도 제국주의 억압과 자본주의 착취로부터 해방되는 대안으로 사회주의를 지지했다. 베트남공산당은 2차 대전 이후 다시 돌아와 제국주의 상전 행세하는 프랑스를 격퇴하고 북부를 해방시켰다. 미국의 참전으로 전쟁은 베트남 전역으로 확대되었다가, 미 제국주의가 치욕적 패배를 겪으며 탈자본주의 노동자국가가 되었다. 라오스와 캄보디아에도 생산력이 낮고, 노동계급 비율이 적으며, 관료집단의 비민주적이고 전제적 통치 아래서였지만, 사적소유가 철폐된’ ‘기형적 노동자국가가 수립되었다.

제국주의 네덜란드는 종전 이후 자신의 옛 식민지인 인도네시아로 돌아오지 못했다. 미국의 견제 탓도 있었지만, 훌쩍 성장한 반제국주의 저항이 더욱 중요한 원인이었다. 반제국주의 세력을 대표하는 인도네시아 공산당은 1960년대 무렵 당원이 300만에 달했다. 인도네시아를 자본주의 틀 안에 묶어두기 위해서는 1965년 반공 친자본주의 친제국주의 쿠데타가 필요했다. 쿠데타는 수십 만 명의 학살로 이어졌다. 강력했던 인도네시아공산당은 참혹하게 패배했다. 이 패배는 스탈린주의 계급협조 노선의 결과였다(히말라야의 ‘인민전쟁’」 참조).

 

종전 이후 갈등 축의 변화

2차 대전 승리 이후, 세계 패권을 거머쥔 미국은 이제 세계 자본주의를 떠받치는 축이 되었다. 위기에 빠진 세계 자본주의 체제를 지탱하기 위해 미국은, 마샬플랜 등을 가동하여 어제의 적들을 일으켜 세웠다. 민족해방투쟁과 노동자국가 수립 등으로 이곳저곳 균열이 생겨 갈라지는 자본주의 댐을 지탱하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미얀마 지역도 마찬가지였다. 미얀마 전역을 자본주의 신식민지로 묶어두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토지재분배, 제국주의로부터의 완전한 독립, 제국주의 자산의 국유화, 소수민족의 독립등을 요구하는 미얀마의 노동자 농민과 그 정치적 의지의 구심인 공산당과 소수민족 정치세력을 제압해야 했다. 이는 현지 무력의 도움 없이는 이루기 어려운 목표였다.

공산당과 소수민족 단체를 중심으로 한 미얀마 지역의 노동자 농민과, 신식민지 초과착취 지역으로 묶어두려는 제국주의와 친자본주의 토착세력은 타협 불가능한 적대적 모순관계였다. 이 두 방향의 압력은 종전 이후 미얀마 사회를 양극단으로 잡아당겼고 그에 따라 정치세력은 빠르게 양극화되었다.

 

스탈린주의 지도부의 국제적 계급협조

종전 이전, 미얀마 민족해방투쟁에 참여했던 세력 거의 대부분은 1944년 창설된 반파쇼인민자유동맹(AFPFL)에 합류해 있었다. ‘파쇼는 주로 독일일본을 가리키는 표현이었다. 특히 2차 대전 발발 이후, 서부전선에서 독일, 동남부에서는 일본과 전투를 벌여야 했던 소련 지도부는 무엇보다도 대독일 대일본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중요했다. 두말할 나위 없이, 소련 방어는 세계 사회주의 혁명의 우선순위이다. 그러나 그 방식이 문제였다. 눈앞의 공포에 질려 시야가 극도로 좁아진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은 장기적이고 국제적인 전망을 상실했다.

()마르크스주의적이고 언 발에 오줌 누기식 정책이 남발되었다. 교전하고 있는 제국주의를 호전적인 파시스트제국주의로, 그와 적대하는 영국, 프랑스, 미국 제국주의를 우호적 제국주의로 나누고 이른바 우호적제국주의와의 동맹을 주장했다. 이는 민족자본가와 인민전선으로 단결하여 파시즘에 맞서자는 국내 정치의 연장이었다. ‘반파시즘 투쟁을 위해 각국의 계급투쟁은 자제되고 유보되었다. 이른바 계급협조주의 인민전선 전략이 주창되고, 코민테른을 통해 이 재앙적 전략이 지침으로 내려졌다. 연합국 소속 제국주의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노심초사하던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은 급기야, 2차 대전 중인 1943년 공산주의 세계 지도부인 코민테른마저 해산시켜 버렸다.

 

미얀마 공산당의 혼란

이러한 노선은 영국, 프랑스, 미국 치하 식민지 노동인민과 공산주의자를 혼란에 빠뜨렸고, 그 지역 공산당을 분열시켰다. 2차 대전이 발발하던 당시, 영국 식민지였던 미얀마 지역 역시 마찬가지였다. 코민테른의 지침을 따르자면, 미얀마 지역 노동인민은 자신을 도탄에 빠트린 제국주의 침략자 영국과 오히려 동맹을 맺고, 일본과 맞서 싸워야 했다.

적기 공산당 지도자 타킨소에는 1943년에 가서야 그 혼란에서 벗어나 영국 제국주의 역시 파시즘이기 때문에 영국과의 제휴는 전적으로 거부되어야한다는 입장에 도달했다. 미얀마 인민의 눈에 일본이 미얀마의 명백한 침략자가 된 1943~1945년 사이엔 이 혼란이 은폐될 수 있었다. 그러나 1945년 종전에서 승리한 영국이 복귀하여 옛 식민지 회복을 주장하면서 계급협조주의 혼란은 재개되었다. 이 혼란은 동맹 가능한 자본가우호적 제국주의에 대한 환상으로 공산주의자와 노동인민을 묶어두었다. 저항의 골든타임을 까먹고, 에너지를 분산시켰다. 백기 공산당과 사회당 일부 등이 인민전선체 AFPFL에 한동안 머물며 계급협조주의 환상에 빠지게 만든 것은 그 구체적 결과였다.

 

미얀마 정치 양극화와 내전

가장 급진적인 적기 공산당은 영국과 미국 제국주의 의도에 즉각 반발하여 친제국주의 친자본주의 조직인 AFPFL 참여를 거부하고 19462월 항영 투쟁을 개시하였다. 타킨 탄툰 지도 하의 백기 공산당은 이러한 적기 공산당을 좌익모험주의라고 비난하며 AFPFL에 머물며 인민전선 노선을 견지했다. 그러나 점점 더 극심해지는 반공주의 공세를 버티지 못하고 결국 쫓겨났다. 19483월 반우누 무장투쟁에 합류했다. 1950년 발발한 한반도전쟁에서 AFPFL 정권이 UN 편에 서자, 그에 반발하며 사회당 좌파도 AFPFL에서 이탈했다. 버마연방 합류를 거부하던 소수민족들도 1949년 무장투쟁에 합류했다. 이렇게 가장 왼쪽 진영부터 차례차례 떨어져 나가자, 이제 AFPFL 정부에는 자유주의 세력 우누가 이끄는 사회당 우파와 극우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은 네윈 세력만 남게 되었다.

미얀마 전 지역엔 계급 내전이 벌어졌다. 1949년에서 1952년 사이 버마공산당과 소수민족 반군은 미얀마 지역의 2/3를 장악했다. 우누와 네윈 정부는 바람 앞에 등불 신세가 되었다. 미얀마 지역 남단에 있던 수도 랑군에 고립되어 가까스로 버티고 있었다. 한반도와 마찬가지로, 미국 중심 제국주의 세력의 군사원조를 통해서야 전세를 겨우 만회할 수 있었다.

 

리버럴과 극우: ‘같은 대가리에 돋아난 두 개의 뿔'

최고 지휘관을 포함하여 버마군 상당수가 공산당과 소수민족 반군 세력에 합류한 이후, 네윈은 급부상한다. 미얀마 대부분의 지역을 잃고 랑군 정부로 불리던 1949, 네윈은 버마군 총사령관이 되었다가, 이후엔 국방부와 내무부까지 총괄하는 부총리가 된다.

우누와 네윈은 미얀마 친자본주의 지배계급의 두 분파이다. 이 둘은 제국주의 후원을 통해 존재하는 반민족 매판 정치세력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우누(이후 아웅산수치)는 자유주의적(리버럴) 태도를, 네윈은 전제적 태도를 표현한다. 현상적으로 이 둘은 상반되어 보인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이 둘은 같은 대가리에 돋아난 두 개의 뿔이다. 이 둘은 자본주의라는 근본적 이해를 공유한다. 하나의 인격체도 기분 좋을 때의 표정과 극도의 위기에 빠져 공격적일 때의 표정이 다른 것처럼, 이 둘은 지배계급의 두 표정에 지나지 않는다.

우누는 극단을 피하고 안정을 원하는 자본가 집단을 표현한다. 한국으로 치자면, 해방 직후의 한민당과 그 이후 민주당으로 유추될 수 있다. 반면 네윈은 극한의 위기에 몰린 자본가 집단을 표현한다.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는 세력을 무조건 때려잡자는 것이 이 세력의 행동지침이다. 한국으로 치자면, 해방 직후 서북청년단 같은 무도한 정치깡패를 부리던 자유당이나 군부독재 그리고 지금의 극우 정치세력에 유추할 수 있다.

 

군부 독재: 자본주의 지킴이

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과 토지재분배, 소수민족의 독립을 원하는 미얀마 지역 노동자 농민과 소수민족을 피투성이로 진압해 온 네윈 군부였기에, 그 인기는 형편없다. 그리하여 선거에서 네윈과 같은 군부 정치세력은 참패를 거듭한다. 국내외 압력에 밀려 마지못해 실시한 1960, 1990, 2015년 총선들에서 정치, 경제, , 군부, 언론, 교육 등거의 모든 공공기관을 장악하고, 각종 유리한 조건을 붙여 선거를 치름에도 불구하고 군부의 성적은 참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얀마에 군부통치가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미얀마 자본주의 체제가 한 뼘의 민주화도 감당해내기 힘들기 때문이다. 민주주의가 주어지면, 마치 한껏 달궈진 압력밥솥의 밸브가 열린 것처럼, 그 열린 공간으로 억눌렸던 노동인민의 요구가 쏟아져 나오고, 그로 인해 미얀마 자본주의는 즉각 위기에 처한다. 쿠데타를 떠나서라도, 대학 폐쇄와 민간인 학살이 걸핏하면 자행되는 미얀마 사회이다. 1958196219882021년 등의 쿠데타는 바로 그런 미얀마 자본주의 체제의 불안정성을 극단적으로 표현할 뿐이다.

한국도 19604·19혁명 이후, 노동운동이나 통일운동 등이 광장으로 쏟아져 나왔고, 한국 신식민지 자본주의 체제는 곧바로 위기에 처했다. 5·16쿠데타는 그 위기에 대한 응급처방이었다. 2013년 이집트 쿠데타도 비슷한 유추 사례이다. 2012년 이집트 혁명은 오랜 군사독재자 무바라크를 끌어내렸다. 그러자 이집트 노동인민은 크게 각성했고, 조직적 의식적으로 비약했다. 이집트 초과착취 체제는 위기를 맞았다.

세계 자본주의 질서 속에서 지배계급이 두려워하는 것은 1960년의 윤보선이나 1979년의 최규하 정부, 2012년 무슬림형제단 정부 같은 무능력하고 반동적인 민간정부따위가 아니다. 그들이 진정 두려워하는 것은 그 열린 공간으로 터져나온 노동계급의 조직적 의식적 각성이다. 그 각성의 문을 열면, 사회주의가 곧 다가오기 때문이다.

국제적으로, 미얀마는 기형적 노동자국가들에 인접해 있다. 그리고 국내적으로, 공산당 그리고 소수민족 반군과의 내전을 수십 년 동안 치르고 있다. 도탄에 빠진 삶으로 인해 목숨을 건 시위가 끊이지 않는다. 이러한 미얀마 체제는 아주 미약한 수준의 민주주의도 허용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런 점에서 부분적으로 평화주의적 태도를 취하고 노동인민에 양보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는 우누나 아웅산수치 같은 이른바 자유주의 정치세력은 늘 미덥지 못한 것이다. 게다가 군부는 오랜 집권으로 각종 이권을 독점하며 괴물처럼 성장했다. 전인민의 공적이 된 그들로서는 약간의 권력 이동이나 양보에도 아찔한 공포를 느낄 것이다.

 

네윈 쿠데타와 ‘버마식 사회주의’

195810월 네윈 군부는 자유주의 성향의 우누를 협박하여 정권을 빼앗았다. 공산당과 소수민족 반군에 대한 미온적 태도가 미덥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 사이 군부는 자신에게 유리한 각종 장치를 만들고 1960년 총선을 치렀다. 그러나 그 총선에서 군부는 참패하고, 쫓겨났던 우누가 압승을 거둔다. 극악한 반인민적 토벌을 일삼은 군부에 대한 미얀마 사회의 깊은 공포와 반감 때문이었다. 그러자 196232일 네윈은 쿠데타를 다시 일으켜 의회를 해산하고, 우누 총리를 투옥했다.

그 쿠데타 이후 네윈 군부는 뜬금없이 사회주의를 표방한다. 지금까지 노동인민의 사회주의 지향을 짓밟고 공산당과 소수민족을 잔인하게 진압한 군부였다. 74일 군부는 자신의 당을 만들었다. 그 당의 이름은 버마사회주의계획당이었다. 그 당은 노동인민의 환영을 받지 못했다. 창당 3일 뒤 77, 랑군대학 학생은 쿠데타를 비난하고 민주주의 회복을 요구하며 시위에 나섰다. 네윈은 군대를 대학에 풀어 수백 명을 살해했다.

12년 뒤 197414일엔 국명을 버마사회주의연방공화국으로 개칭했다. 이때도 마찬가지였다. ‘사회주의를 국명에 넣었지만, 노동자와 학생들은 네윈 군부의 사회주의에 일말의 기대도 없었다. 미얀마 노동인민은 굶주리고 있었다. 그 해 5, 식량부족 등으로 불만을 쌓아가던 노동자들이 먼저 파업에 나섰다. 이 파업에 학생들은 시위로 화답했다. 이 시위는 12월 말까지 이어졌다. 네윈 군부는 자신의 사회주의를 위해 수백 명의 노동자와 학생을 살해해야 했다.

이 네윈 군부 사회주의의 정체를 당시 백기 공산당을 지원하고 있던 중국 정부는 이미 알아차린 것으로 보인다. 미얀마 주재 중국 대사는 1967미얀마 정부는 부르주아처럼 행동하는 군부정당의 독재체제이며네윈을 중심으로 한 군부는 미얀마의 부르주아들 중 핵심 세력으로 미얀마 사회주의는 외형만 사회주의를 추종하는 관료적 자본주의이다(미얀마 외교정책의 변화와 주요국과의 관계).”라고 보고했다.

 

‘군부 사회주의’의 배경

사회주의 요구를 잔인하게 진압하던 네윈의 군부가 이제 생뚱맞게 사회주의를 내걸고 나온 것은 무엇보다도, 노동인민과 소수민족을 기만하기 위해서이다. 해방 직후 남한이 그러했던 것처럼, 종전 전후 미얀마 인민을 비롯 거의 대부분의 정치조직과 군 인사는 사회주의가 이상적 체제라는 데에 큰 이견이 없었다.

반정부 세력뿐만 아니라 정부 내 주요 정치인과 군부는 아웅산 장군의 정치 철학과 이념을 계승하는 차원에서 독립 이후 페이비언 성향의 사회주의를 국가이념으로 채택하는 대신, 영국의 자유주의와 자본주의는 공존할 수 없는 체제로 규정했다.”―「미얀마 외교정책의 변화와 주요국과의 관계

사회주의를 선호하는 이러한 분위기는 대영국 그리고 대일본 민족해방투쟁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었다. 미얀마 지역 인민은, ‘제국주의로부터의 진정한 해방은 곧 자본주의 극복이어야 한다.’라는 것을 투쟁 속에서 체득하였다.

미얀마 인민의 사회주의 지지는 내전을 통해서도 확인되었다. 공산당과 소수민족 무장단체는 게릴라 성격의 군대였고, 우누와 네윈의 군대는 미국과 영국의 지원을 받는 정규군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전 기간 동안, 자유주의자 우누와 극우 네윈의 정부는 남쪽 끄트머리 항구도시인 수도 랑군 지역에 고립되어 있었다. 이는 미얀마 지역 대부분의 노동인민이 공산당과 소수민족 반군을 지지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다.

 

군부 ‘국유화’의 성격

기만적인 버마식 사회주의선언 이후, 네윈 정부는 광공업, 전력, 건설, 통신 등 다양한 산업을 국유화했다. 사적자본의 이윤 몫이 없기 때문에, 국유화는 대부분, 심지어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라도, 친노동인민적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네윈 군부의 국유화는 그렇지 않다. 국유화는 군부의 배를 채우고 험한 일을 하는 모병 군인의 동요를 막기 위한 것일 뿐, 반노동인민적이고 인종주의적인 것이었다.

1982년 무렵 국유화 수준이 가장 높았는데 이때 38% 정도였다(버마현대사/소나무). 국유화된 모든 자산은 현직퇴직 군인으로 구성된 버마국방협회(나중에 버마경제발전공사)’가 관리했다. 그 자산은 인민의 복지가 아니라, 군부의 복지를 위한 것이었다. 군부는 각종 산업을 통해서 배를 불렸을 뿐 아니라, 국가 예산도 제 맘대로 가져다 썼다.

세계보건기구는 버마 성인 29명 중 1명이 HIV에 감염됐으며,말라리아 사망자는 이보다 훨씬 더 많아 2004년에 70만 명이 발병버마 군사정권이 국가 예산 대부분을 군대에 쏟아붓는 동안, 2004년 에이즈 억제 정책에 쓴 예산은 22,000달러에 불과했다. 버마는 국가 예산 중 3퍼센트를 보건에, 8퍼센트를 교육에 할당한 반면, 군대에는 50퍼센트의 예산을 쏟아붓고 있다.”―『아웅산수찌와 버마 군부

그리고 미얀마 국유 자산은 주로 인종주의적 약탈을 통해 조성된 것이었다. 해방 이후 소수 인종으로 전락한 인도인과 파키스탄인 그리고 미얀마 서부 무슬림 등의 자산이 군부에 의해 약탈되었다. 혹독한 약탈과 인종억압을 피해 64~66년 사이 십만 명 가량이 미얀마를 탈출했다. 이 인종분리와 소수민족 탄압은 미얀마 자본주의 통치의 주요 수단이다. 78년에도 미얀마 서부 무슬림 탄압으로 35만이 방글라데시 등으로 이주한 사건이 있었다. 2012년엔 로힝야족 학살과 대량 이주가 있었다. 이러한 소수 인종에 대한 억압과 약탈은, 2차 대전 전후 반유대 인종주의 광란을 부추겨 국내 계급 갈등을 호도하고 유대인 자산을 약탈한 나치의 행위와 비슷한 정치적 함의가 있다.

 

군부의 마피아化

이 과정에서 군대는 마피아화되었다. 미얀마 군부는 군대뿐 아니라, 경찰과 정보기관을 장악했고, 정치를 독점했으며, 국영공사 등 경제의 모든 기관을 소유하거나 통제한다. 교육이나 관공서 그리고 언론 등도 군 인사가 지배한다. 차라리 지엽적 일이지만, 미얀마 군대는, 마약 재배 · 판매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군인과 군인 가족을 합치면 40만 명 정도 되고, 군부 독재 종사자와 관련 인원을 전부 다하면 200만 정도라고 한다. 이들은 미얀마의 특권층이다. 군인들만 이용하는 학교, 병원 등이 따로 있고, 군인들만 드나들 수 있는 특별한 상점도 있다. 교통법규를 어겨도 경찰은 군인을 단속하지 못한다.

 

군부의 새 수도

미얀마 군부독재의 3기 수장 탄쉐(Than Shwe), 오랜 독재자 네윈과 2인자였던 정보방위국장 킨뉸을 차례차례 숙청하고 군부 마피아를 장악했다. 탄쉐는 2005, 오랜 수도 양곤(랑군)에서 내륙 쪽으로 400km 떨어진 네피도로 천도했다. 네피도는 각국의 외교관도 쉽게 접근하지 못할 만큼 외부와 격리된 성채이다. 기존 주민들은 다 내쫓고 군대와 군인 가족만을 위한 도시로 건설되었다. 미얀마 인구 다수가 모여사는 기존 수도 양곤(랑군)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 곳에 건설된 군부의 도시는, 무엇보다도, 수시로 벌어지는 대중 봉기의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함이다. 지금 시위에서 보는 것처럼, 민간인과 멀리 떨어져 존재하는 군인들은 시민들을 별개의 존재로 간주한다. 학살을 하면서도 가책을 덜 느낀다. 경찰 등 진압 병력 일부가 시위대 편에 붙었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하지만 군인 가운데는 극히 드물다. 각종 특권을 누리며 네피도에 사는 군인 가족들은 진압 병력의 인질 역할도 한다(미얀마 군 가족들 밤낮으로 점호 가족만 안전하면 탈영 속출할 것).

네피도는 미얀마 말로 왕의 집이라는 뜻이다. 미얀마 군부는 늘 자신들이 아웅산의 민족해방투쟁을 계승했고, 심지어 사회주의를 지향한다고 허세를 부린다. 그러나 네피도의 방대한 연병장에 세워진 3기의 거대 동상은 아웅산도 아니고 마르크스도 아니다. 군대를 사열하는 세 거대 동상은 주변국과 싸워 미얀마 왕국을 크게 확장한 중세의 왕들이다.

 

‘신’식민지 시대

2차 대전 종전 이후 제국주의의 식민지 직접 통치는 거의 사라지고 현지 하수인을 부리는 간접 통치 즉, ‘신식민지형태로 바뀌었다. 이는 제국주의의 탐욕이 누그러져서가 아니다. 정치 환경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다음 두 가지 요인에 의해 민족해방투쟁이 더욱 거세졌다. 하나는 제국주의가 주도한 자본주의화의 결과 식민지 내 노동계급의 성장이다. 다른 하나는 제국주의 상호 간에 벌어진 전면전에 의한 제국주의 세력의 약화이다. 노동계급의 성장은 제국주의 직접지배를 어렵게 했다. 제국주의 직접지배는 노동인민에게 지배-피지배 관계를 두드러지게 노출하고, 이는 제국주의에 맞선 직접적이고 격렬한 저항을 낳는다. 그리하여 식민지 통치 방식은 직접지배에서, 토착 세력과 매판 자본가를 제국주의 현지 하수인으로 이용하는 간접지배 방식으로 바뀌게 되었다.”―「이란, 민족주의, 제국주의, 볼셰비키그룹, 2018

신식민지 제3세계에서 군부독재는 흔한 일이다. 현지에 투자된 제국주의 금융자본을 지키고, 초과이윤과 약탈 자원을 제국주의 본국까지 안전하게 호송하는 역할을 맡는다. 3세계 군부독재는 2차 대전 직후 격렬해진 반제국주의 민족해방운동 제압 임무를 효율적으로 수행한다. 현지 노동계급이 공산주의와 결합하여 각성하고 반제국주의 반자본주의 투쟁으로 나아가는 것을 효과적으로 진압한다.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남미 아프리카 아시아 등 많은 나라에는 쿠데타가 빈발했고, 군부독재가 통치했다. 지금도 태국, 이집트, 인도네시아 등은 군부가 집권하고 있거나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다. 군부는 이렇게 반공주의 사냥개 역할을 한다. 사냥 임무가 어려울수록 사냥개는 더 우대되고 기름진 먹이를 먹는다. 이처럼 제3세계 식민지 군부 역시 권력과 더불어 부를 누리며, 상당한 발언권도 가지게 된다.

30년 장기 독재자 무바라크가 아랍의 봄으로 물러난 1년 뒤인 2013, 이집트엔 다시 쿠데타가 발생했다. 당시 집권당인 무슬림형제단 정부의 국방장관이자 총사령관 알시시는 쿠데타를 일으켜 아랍의 봄을 목 졸랐다. 다시 권력을 쥔 군부는 막대한 기업 역시 거느리고 있다. 이집트 군부의 자산은 GDP20% 이상이라고 알려져 있다(Egypt’s Armed Forces Cement Economic Power). 1961년 수하르토의 쿠데타 이후 집권을 시작한 인도네시아 군부 역시 정부기관, 기업, 의회, 해외 대사관 등 거의 모든 사회분야를 틀어쥐고 있다. 이런 현상은 아예 드위풍시(dwifungsi)’라는 단어가 되었다. 한국 역시 쿠데타로 등장한 군부 독재자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등이 천문학적 자산을 축적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들이 불법 행위로 긁어모은 자산은 아직도 환수하지 못하고 있다.

미얀마와 한국은 유사하면서 다른 현대사를 가지고 있다. 그 차이를 버마현대사/소나무는 이렇게 분석한다.

전후 자본주의 세계의 수호자로 등장한 미국은 일본과 영국을 대신해서 우리나라와 버마에 세력을 뻗쳤지만, 소를 겨냥한 전략 거점이면서 일본 방위의 요충인 우리나라가 미국의 세계 전략상 중요했기 때문에 훨씬 깊이 개입했다. 버마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반공정권인 버마 정부가 공산 반군이나 소수민족과의 내전에서 패배할 위험이 없는 한 약간의 군사 원조만을 제공하는 데 그쳤다. 따라서 버마 정부는 정책 결정상 상대적 자율성을 누리고 있었다.”

 

미얀마의 인민 항쟁

미얀마는 신식민지 제국주의 초과착취와 군부독재라는 이중적 억압이 끝날 줄을 모른다. 소수민족을 포함한 미얀마 지역 인민은 끔찍한 삶을 이어가야 한다. 격렬한 수준에 이르는 저항이 수시로 벌어지는 원인이다. 이 저항에서 학생운동은 아직도 큰 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도 1980~90년대까지 그러했듯, 상대적으로 농업 비중이 높고 노동자 비중이 낮은 사회에서는 학생이 정치적 선도 역할을 한다.

19879월 전격적인 화폐개혁이 있었다. 가뜩이나 생활고에 시달리던 미얀마 인민의 불만이 터져나왔고 이는 전국 각지의 학생시위로 이어졌다. 군부는 늘 하던 대로 살인진압, 체포, 대학 폐쇄로 대응했다. 19883월 학생 주도 시위가 재발되었다. 83일엔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88일 미얀마 전역에서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고 군부는 발포했다. 수천 명이 사망했다. 그러나 시위는 사그러들지 않았다. 918일 친위 쿠데타가 일어났다. 네윈 등이 권력에서 물러나고, 총선거가 실시된다는 발표가 있었다. 마치 6월 항쟁에 굴복했지만 동시에 그를 기만한, 노태우의 ‘6.29선언과 닮은꼴이다.

 

전국민주동맹(NLD)과 아웅산수치

924일 미얀마 전국민주동맹(National League for Democracy: NLD)이 결성되었다. 군부독재의 일원이었던 아웅지, 우틴우 등이 의장과 부의장을 맡았다. 모친 간호를 위해 미얀마에 돌아와 있던 아웅산수치가 사무총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전설적 영웅 아웅산의 딸이다.

199052730년만에 총선이 치러졌다. 아웅산수치는 연금되고, 93개나 되는 정당이 등록하고, 군부에 유리하게 조직된 선거였다. 그럼에도 NLD가 압승했다. 492개 의석 중 392개를 차지했다. 군부독재에 대한 미얀마 인민의 환멸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케 하는 결과였다. 깜짝 놀란 군부는 선거 결과를 부정하고 당선자를 체포했다.

아웅산수치와 NLD는 군부독재에 대한 지독한 혐오의 응고물이다. 오랜 군부 독재 통치 하에서 공산당을 비롯한 진짜 대안들은 집요하게 질식되었다. 그리하여 NLD는 미얀마 국내에 남은 군부독재의 유일한 대체물이 되었다. 그러나 NLD는 자본주의의 두 가지 카드 중 하나일 뿐, 미얀마 인민의 열망을 실현시켜주지 못한다. 아웅산수치는 군부에 맞선 대항마라는 사실 이외에, 그 스스로 이렇다 할 친인민 정책을 보여주지 못했다. 심지어 로힝야 탄압 때에는 군부와 동조하기도 했다.

NLD는 한국의 민주당처럼 진짜 대안을 가리는 장막 역할을 한다. 자본주의가 원인이 되어 생긴 상처에 바르는 또 다른 자본주의 연고일 뿐이다. NLD 같은 민주주의사기꾼들은 진짜 민주주의를 원하는 저항의 에너지를 분산시키고, 열기가 식을 때까지 시간을 벌어주는 역할을 한다. 마치 박근혜 퇴진을 이끌어낸 거대한 촛불항쟁을 참칭한 문재인 정권이 해체 직전까지 몰린 극우 정치세력을 훌륭히 되살려낸 것처럼.

미얀마 노동계급은 반군부독재 민주주의 투쟁에서 NLD 등과 함께 싸울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사기꾼이지, 대안이 아니다. 미얀마 노동계급을 대표하는 선진활동가들은 사회주의 대안을 스스로 건설해야 한다.

 

노동자국제주의 vs 스탈린주의

마르크스주의는 거시적 시간과 공간 즉, ‘역사적 그리고 세계적차원에서 자본주의 체제를 분석하고 사회주의 혁명을 조망한다. 국제적 관점에서 현지 노동계급의 사회주의 혁명과 민족해방투쟁을 설계하고 지원한다. 반면에, 스탈린주의는 당장의 제국주의 위협에 질식하여 장기적이고 국제적 안목을 상실한다. 공포에 질려 시야가 좁아져 일국적 관점에 갇힌다. 눈앞에 직면한 자국의 이해에만 급급해 한다.

2차 대전 직전 독일 파시즘이 집권하자, 공포에 질린 소련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은 소련 방어를 모든 가치에 앞세웠다. 그리하여 영국과 프랑스 제국주의와의 협력을 사는 값으로, ‘노동자 세계 혁명과 국제주의를 지불했다. 파시즘은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모습 중 하나일 뿐이다. 위기에 처한 자본주의의 발작적 모습일 뿐이다. 그런데 그 파시즘이라는 자본주의 현상에 맞선다면서, ‘민주적/민족적 자본가’ ‘우호적 제국주의와의 동맹을 추구했다. 계급협조주의 반파시즘통일전선이 그것이다.

소련 관료집단 지도 아래의 코민테른은 언 발에 오줌누기식 노선을 반복했다. 길을 잘 모르는 서툰 운전사가 운전대를 이리저리 급히 꺾어대는 것처럼 지그재그로 대응했다. 1927~8년 공산당을 국민당으로 해소하고 영국총연맹과 무비판적 공동전선을 유지하는 등, 계급협조주의 노선으로 중국혁명과 영국 총파업을 재앙으로 이끌었다. 그러자 이제는 갑자기 호기를 부려 공산주의 혁명이 임박했으니 개량주의와의 타협은 필요없다.’라는 초좌익 3기 노선을 채택했다. 사회민주당을 사회파시즘이라고 규정하며, 노동계급 개량주의 진영과의 반파시즘 공동전선을 거부했다. 그 틈을 타 파시스트 히틀러가 집권했다. 깜짝 놀란 스탈린주의 코민테른은 이번에는 꼬리를 말고 몸을 움츠렸다. 이제는 오른쪽으로 급히 운전대를 꺾으며 계급협조주의 반파시즘통일전선노선을 호소했다.

 

중-소 분쟁

사적소유를 철폐한 노동자국가라도 각 나라의 사정은 같지 않다. 일국의 사정은 각기 다르다. 그래서 일국적 시야에 갇히면 불화가 발생한다. -소 분쟁은 그로 인한 참혹한 결과였다.

소련의 사정: 독일과 일본 제국주의가 침공하자, 노동계급은 자기의 국가를 전력을 다해 방어했다. 그리하여 소련은 2차 대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인적 물적으로 막대한 희생을 치렀다. 소련은 미국과 같은 편이 되어 싸우면서, 미 제국주의의 가공할 경제력과 군사력을 목도했다. 종전 직후 미 제국주의는 소련 적대를 즉각 시작했지만, 소련 관료집단이 옛정에서 벗어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곧이어 발발한 한반도 전쟁에서도 미온적 자세를 취했다. 1953년 스탈린이 사망했다. 스탈린 이후의 소련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을 대표하는 흐루쇼프 정권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스탈린격하운동을 전개했다. 스탈린 당시의 죄과와 손절하기 위해서였다(흐루쇼프의 비밀연설과 스탈린주의참조). 제국주의와 날카롭게 맞서는 것은 피하고자 했다. 군비축소나 평화협정 등으로 제국주의와 공존할 수 있다는 환상이 노선으로 되었다.

중국의 사정: 1949, 중국공산당은 오랜 내전 끝에 국민당을 무찔렀다.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 그러나 갓 태어난 중국을 질식시키려는 미 제국주의와 국민당의 공세는 멈추지 않았다. 미얀마 접경이나 티베트 등에서 미국 지원 봉기가 빈발했다. 동쪽의 한반도에서는 1950년에 전쟁이 발발했다. 이 전쟁에 미온적인 소련에 불만이 싹텄다. 제국주의 군사 도발에 시달리고 있는데, 소련은 한 걸음 떨어져서 평화공존노선을 내세운다. 철천지원수인 미국과 관계 개선을 추진한다. 게다가 마오쩌둥의 스승이고 중국공산당의 영웅적 후원자로 알려진 스탈린을 격하한다. 이는 마오쩌둥과 중국공산당에 대한 모욕이다. 제국주의 위협에 맞선 자기방어에 절실한 핵기술도 이전해주지 않는다.

이러한 사정에서 두 나라의 갈등은 점점 격화된다. 중국을 방문한 흐루쇼프와 마오쩌둥의 1959년 대담을 끝으로 대화가 단절된다. 노동자 국제주의 즉, ‘만국 노동자의 단결 사상은 두 나라 스탈린주의 지도부들에 의해 실천적으로 폐기된다. 1962년 중국-인도의 국경 분쟁에서 소련은 놀랍게도 인도를 지원한다. 1969년 중국-소련 국경에서 무력 충돌이 발생한다. 1972년 마오쩌둥은 미국의 닉슨을 초청해 환담한다. 미제국주의의 반소련 봉쇄정책에 가담한다. 1978년 친소련 베트남이 친중국 캄보디아를 침공한다. 1979년 중국은 베트남을 침공한다. 1980년대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의 반군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중국은 미국과 더불어 아프간 무자헤딘 반군을 훈련하고 지원한다.

이 중-소 분쟁은 1991년 소련이 붕괴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노동자국가들 사이의 이 오랜 이전투구는 세계 노동계급을 심각하게 교란했다. 분열시키고 사기를 떨어뜨렸다. 각국의 노동자로 하여금, 자국 부르주아나 제국주의와 단결하여, 이웃한 노동자국가와 대결하도록 부추기는 모습을 보면서 세계 노동계급은 깊은 상처를 입었다. 계급의 적들은 노동자 국제주의를 조롱했다.

 

중국의 미얀마 정책

누가 되었든 자기편 늘리기에 골몰하는 중국과 소련의 정책은 미얀마에도 이어졌다. ‘누가 되었든미얀마 정권의 환심을 얻기 위해 서로 경쟁했다. 서로 좋은 조건을 제시하며 자기 편이 되어줄 것을 청했다. 미얀마 군부 입장에서는, 미국 영국 일본 등뿐만 아니라, 소련과 중국도 선물을 안기며 후하게 대접한다. 민간인 학살을 포함한 각종 범죄로 더럽혀진 반공주의 미얀마 군부는 양손에 떡을 든 형국이 되었다.

사적소유를 철폐했으나 중국의 생산력 수준은 매우 후진적이었다. 그러한 생산력 수준으로는 빈곤을 해결하지 못한다. 그럴 경우 계획경제도 원만하게 유지할 수 없으며 국가 권력 유지도 쉽지 않다. 소련과의 경제협력은 깨졌다. 중국은 서방에 시장을 열었다. 선진기술을 도입하여 경제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중국으로서도 미얀마는 매우 중요한 나라이다. 아프리카 유럽과 왕래하는 물자가 미얀마를 통할 경우 훨씬 경제적이다. 게다가 미국의 대중국 봉쇄로부터 조금 더 자유로워진다. 중국과 미얀마 사이 무역량도 상당하다. 이러한 지정학적 고려 때문에 중국은 미얀마가 소중하다. ‘누가 되었든미얀마 정권과 우호적 관계를 맺어야 한다.

한편, 중국공산당 정부는 버마공산당그 중에서도 특히 계급협조주의 노선을 견지했던 백기 공산당을 지원해왔다. 그러나 미얀마 실권자인 군부와의 관계 개선 필요 때문에 그 삼각관계는 매끄러울 수 없었다. 버마공산당에 대한 중국 정부의 지원은 점점 소극적이고 은밀한 성격을 띠었다. 그러다가 1979, 미얀마 군부가 소련 그리고 미국과 군사동맹을 하지 않는 조건으로, 중국도 버마공산당 지원을 중단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한다.

제국주의와 합작한 미얀마 군부의 오랜 토벌 작전과 고립, 국제적 분열과 내부분열로 버마공산주의 운동 규모는 점점 축소되었다. 소련과 동구권이 붕괴되던 1990년 초에는 거의 소멸 상태에 이르렀다. 미얀마와의 관계 때문에 중국공산당 정부는 1980년대 들어 미얀마 공산주의자들을 거추장스러워했다. 공산주의자들에게 망명을 제안했다. 중국에서 주택과 생활비를 보장해 주는 대신, 어떠한 정치활동도 포기하라는 굴욕적 단서가 붙은 제안이었다. 1989년 초 미얀마와의 무역루트를 안정시키기 위해 중국은 은퇴를 또 다시 제안한다. 버마공산당에는 민족해방투쟁 시기뿐 아니라, 종전 이후 내전 기간, 1988년 대투쟁 등 미얀마 내부의 격동기마다 군부의 탄압을 피해 탈출한 젊은이들이 합류했다. 민족해방투쟁 당시부터 공산주의자였던 원로투사일 경우 50년 가까이 투쟁하며 자신의 삶을 헌신했다. 19892, 은퇴 제안을 검토하기 위한 긴급모임에서 75세의 공산당 서기장 타킨바테인틴은 처음으로 중국을 비난했다(버마공산당의 흥망 The rise and fall of communist party of Burma). 실망과 모멸을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미얀마와 좌익

미얀마 군부의 쿠데타에 대해 한국과 국제 좌익 대부분은 반대하는 입장이다. 물론 다수라고 해서 늘 옳은 것은 아니다. 2019년과 2020년의 뜨거운 이슈인 홍콩 시위나 벨라루스 시위의 경우 대다수가 이른바 그 민주주의시위를 지지했다. 두 시위 모두 반동적 성격을 띠었지만, 대다수 좌익들은 홍콩 벨라루스의 민주주의시위를 지지하고 반중국 반러시아 캠페인에 동참했다(볼셰비키그룹의 홍콩, 벨라루스 입장 참조). 그러나 지난 310일의 성명서와 이번 글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우리는 반동적 군부의 타도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는 시위대 편에 선다.

그런 점에서, 속칭 ‘NL’ 경향에 속하는, <민플러스><4.27시대>쿠데타 군부 지지입장은 상당히 충격적이다. 한편 그를 비판하는 노동자혁명당(이하 노혁’)의 입장은 또 다른 의미에서 섬찟하다. 좌익조직들은 모두, ‘미얀마 군부의 대() 중국 미국 관계를 사실과 크게 다르게 인식한다. 이렇게 제 논에 물 대기 식으로 사실을 왜곡하면서, 서로 상반된 결론을 도출한다. 상반되지만 둘 다 세계 노동계급에게 해롭다는 점에서 같다.

1) 민플러스와 4.27시대의 군부 지지 입장

두 언론사는 미얀마 관련하여 여러 기사와 영상을 통해 자신들의 입장을 설명했다. 둘은 다른 언론사이지만, 같은 기사가 중복 게재되기도 한다(미얀마 쿠데타를 어떻게 볼 것인가? / 미얀마 사태에 대한 고찰 단순한 반독재 민주화 시위로만 볼 수 있는가?). 그리고 다른 기사와 영상 역시 내용이 거의 비슷하므로, 묶어서 요약한다.

미얀마 군부는 반영 반일 민족해방투쟁에 뿌리를 두고 있는 반제국주의 세력이다. 그리고 군부는 사회주의를 지향한다. 이런 미얀마 군부는 중국과 우호 관계를 유지해 왔고, 반면에 미국을 위시한 서방에게는 오랜 눈엣가시였다. 그런 점에서 제국주의 압박으로 고난의 행군을 극복해 나가는 북녘과 닮았다. 이번 시위는 1988년처럼 반공시위이고, 미국 등 제국주의가 배후에 있다. 아웅산수치는 아웅산의 생물학적 딸일 뿐, 반공 친미 인사이다.’

앞에서 우리는 미얀마 군부의 성격과 미국 등 제국주의와의 관계 그리고 중국과의 관계 등을 상세히 설명했다. 그 설명으로 민플러스나 4.27시대의 주장을 이미 충분히 반박했다고 본다. 하지만 관련 사실을 조금 더 소개하려 한다. 제시하는 내용들은 1) 1945년 이후 미국과 미얀마의 미묘한 관계 A Delicate Relationship: The United States and Burma/Myanmar since 1945(이하 미묘한 관계’) 2) 미 정부의 외교문서 Office of the Historian (이하 외교문서’) 3) 미얀마 외교정책의 변화와 주요국과의 관계,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이하 미얀마 외교’)에서 뽑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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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종전 이후 미국의 미얀마 정책의 개요를 엿볼 수 있는 설명이다.

“194910, 몇 가지 정책 제안이 국무부 장관 딘 애치슨에게 제출되었다. 버마에 대한 미국의 이해를 요약하자면, “해당 지역에서 공산주의 침입 저지, 미국 · 영연방과 친하고 안정적인 정부 수립, 그 정부는 내부 질서를 유지하고 공산주의의 외부 압력에 저항하며 사회와 경제를 재건할 것, 이의 성취 위해 미국은 재정적 · 기술적 지원 확대하고 군사원조 제공할 것, 반공 군사동맹 수립, 마지막으로 미국은 보다 적극적으로 정보국을 활용해선전을 강화하고 적절한비밀작전수행””미묘한 관계, 54

다음은 1958년 우누의 리버럴 정부를 끌어내린 네윈 군부의 무혈 쿠데타를 미국이 흡족해하는 대목이다.

무엇보다도 (네윈 정부의) 반공주의 노선 때문에 군사 쿠데타는 좋은 일이다.”라고 미 국무부는 결론내렸다.”미묘한 관계, 172

군부는 자신에 유리한 조건을 조성한 후 1960년에 총선을 치렀다. 그런데 우누 승리가 확실시되었다. 이에 대한 미국의 평가

“19601월이 되자 대사관 직원들은 [총선에서] 우누의 승리를 예견하면서 언짢아했다. 우누는 중국에 유화적일 가능성이 높고 네윈 정부보다 미국에 덜 우호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새로 부임한 미국 대사 윌리엄 P. 스노우는 이 집단[군부]은 강력한 공산주의 중국이 버마에 가하는 위험을 현실적으로 평가하고 반중노선을 취할 의지를 가지고 있다.”라고 말하면서 미국에게 최선은 군부와의 연계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제안했다.”미묘한 관계, 177~178

다음은 우누 재집권 이후 공산주의의 침투를 우려하며 네윈 군부의 반공주의를 신뢰하는 부분

우누에 대한 비관이 커져갔지만, 미국은 추가적 군사지원을 제공했다. 왜냐하면 J. 그레이엄 파슨스[국무부 극동 담당 부차관보]가 말했듯(19601029) “버마군은 버마에서 가장 강력하게 조직된 반공주의 세력일 뿐 아니라 안정을 가져올 세력이기 때문이다.””미묘한 관계, 183

우누 정권에 대한 미국의 우려를 알아들은 네윈은 196232일 쿠데타로 그 우려를 해소시켰다. 이번에는 우누와 그의 정당이 무사하지 못했다. 체포되고 해산되었다. 쿠데타 직후인 319일 미 대사는 국무부에 다음과 같은 전보를 보낸다.

[미얀마 주재 미국 대사]는 대통령의 축하 인사를 전하고, 네윈에게 7월 초 워싱턴 방문을 제안했다. 가능하면 빨리 미국을 방문해 대통령과 만나고 싶다고 네윈이 답하면서, 그렇게 빨리 가능할지 확답할 수는 없다고 덧붙였다.”외교문서

쿠데타 1년 뒤, 케네디 정부는 네윈 정부를 재차 신임하며, 미국은 미얀마 군부의 민주주의와 인권 침해를 문제삼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국무부는 1963911일 버마로 떠난 신임 대사, 헨리 A. 바이어드를 통해, 네윈과 개인적으로 만나고자 하는 케네디의 희망을 전달했다. 국무부는 바이어드가 중국의 (버마) 침공 시 미국이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을 것임을 네윈에게 확신시키길 원했다. 또한 미국이 버마의 민주주의 부재나 인권 침해를 문제삼지 않을 것이라는 점도 확신시키길 원했다.”미묘한 관계, 207

1963년 케네디 암살 뒤 대통령이 바뀌었지만, 미얀마 군부에 대한 미국의 신뢰는 그대로였다. 다음은 1964513, 국가안보보좌관 맥조지 번디(Mcgeorge Bundy)가 존슨 대통령과 통화한 내용

미얀마인들은 공산주의의 침투를 끝내주게 잘 막는다.”외교문서

한편, 중국공산당 정부는 미얀마 정부와의 안정적 경제협력을 바라는 것이지 꼭 군부여서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2010, 1990년 이후 20년 만에 다시 총선이 치러졌다. 어용이었지만 약간의 민주주의를 허용한 선거였고, 그렇게 등장한 새 정부는 2015NLD 정권으로 교체된다. 이 무렵 중국 정부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구절

중국은 미얀마 총선과 신정부 출범을 적극적으로 지지했지만, 그 이면에는 중국의 경제발전과 지역 패권을 견인하는 환경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미얀마가 방해 요소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라는 가정에 근거한다. 오히려 중국 입장에서는 미얀마가 신정부를 출범시킴에 따라 그동안 미얀마 문제로 인해 받았던 국제 사회의 비난을 일정수준 벗어남으로써 외교적 부담을 해소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미얀마 외교

* * *

이 문서들을 통해, 민플러스와 4.27시대의 생각 즉, ‘미얀마 군부는 반제국주의적이고 사회주의적이다.’가 얼마나 사실과 동떨어진 것인지 알 수 있다. 미얀마 군부는, 종전 이후 남한에 거듭 등장한 군사독재와 유사한, 반공주의 살인마 집단이다. 그런 점에서 민플러스/4.27시대의 인식은 끔찍할 정도이다.

이들은 미얀마 군부가 58년부터 지금까지 수십 년 동안 독재를 하고 있다는 것, 양민을 학살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지한다. 현실과 형편없이 동떨어지고 반동적이며 반노동인민적인 인식을 하는 원인을 우리는 이렇게 진단한다.

이분들은 스탈린주의 국가관을 가지고 있다. , 관료집단을 국가와 동일시한다. 그리하여 소련 · 중국 · 북조선 등 사적소유가 철폐된 퇴보한/기형적 노동자국가의 관료집단을 군사적 방어를 넘어 정치적으로까지 방어해 왔다. 스탈린주의 지도부를 무비판적이고 무조건적으로 지지해 왔다. 그러면서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이 자기 인민에게 행한 잔인하고 반동적이며 반민주적 행위까지도 정당하다고 인식하며 그를 옹호해 왔다. 그것이 몸에 배었다.’

 

2) 노동자혁명당(이하 노혁’)NL(자주파)의 이런 입장을 중국 제국주의의 벗이라며 비판한다.

국제적으로 RCIT(Revolutionary Communist International Tendency: 혁명적공산주의인터내셔널동맹)와 입장을 같이 하는 이분들은, 페이스북을 통해 미얀마 관련 글을 자주 발표해 왔다. 거의 4~5일에 한 편씩 낸다. 그런데 객관적 사실에 근거한 구체적 논증 없이, 비약적 논리로 모든 것을 자신의 반중국 입장으로 귀결시킨다. 여러 글이 있지만 논조가 거의 같으므로, 416일 글(국제적으로 필요한 것은 국제사회의 개입이 아니라 노동자·민중운동의 강력한 연대다!)을 주로 검토한다.

거의 모든 문장이 문제적이다. 글이 길지 않으므로 전문을 직접 읽어볼 것을 권한다. 그중 몇 가지를 순서대로 추려, 무엇이 문제인지 지적한다.

미얀마 혁명이 시리아 혁명처럼 안타깝게도 고통스런 장기 내전으로 빠져드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RCIT와 노혁은 2011년 리비아와 시리아에서 발생한 미국 주도의 정권교체 작전과 그 이후의 내전을 민주주의 혁명이라고 아직도 주장한다. 이번 미얀마 사태를 통해, 시리아를 은근슬쩍 복권시킨다. 이분들은 거의 사사건건, 미국의 적대자를 제국주의로 규정하거나, 부정적 성격을 부각시켜, ‘그 놈이 그 놈이라는 논리로 미 제국주의 행각에 물을 탄다. (노혁과의 2011년 리비아 관련 논쟁은 리비아 사태: 무지와 맹목, 혼돈에 빠진 사회주의자참조)

그 다음 문단에서,

"국제사회", 즉 제국주의 강대국들 (특히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미 중 EU 러시아 )이 지금 미얀마에 "개입"하지 않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국제사회"를 서방으로 한정할 때만 맞는 말이다. "국제사회"의 또 다른 일부인 중국과 러시아는 명백히 개입하고 있다. 미얀마 군부를 정치·군사적으로 지지, 후원하고 있다.반면 미국과 EU는 말로는 민주화 운동을 지지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유엔 안보리에서 중국과 러시아의 반대를 핑계로 그 이상의 아무 조치도 취하고 있지 않다. ·EU 제국주의가 중동과는 달리 미얀마에 개입해서 챙길 이권과 실익이 별로 없는 것이다.

미얀마 쿠데타 사태에 미국 비롯 서방은 관련이 없고, “중국과 러시아는 명백히 개입했다고 주장하는 대목이다. 이 정도의 서술이라면 거의 노골적인 부역이라고 생각될 정도이다. 명백하다고 노혁이 주장하는 개입, 지지, 후원에 대한 증거는? 없다. 이들은 10년 전 리비아 때도 그랬다. 그 당시에 그리고 그 이후 10년 동안 각종 증거로 뒷받침되고 있는 미 제국주의 정권교체, 증거 없이 아니라고 잡아떼고, 증거 없이 막무가내로 리비아와 시리아 반군이 민주주의 투사라고 주장했었다. 그들이 바라던 대로 카다피가 타도되고 민주주의 혁명이 성공한 리비아는 지금? 지옥이 되었다. 그들이 제국주의 정권교체가 아니라 민주주의 혁명이라고 주장하는 시리아는 지금? 지옥이다.

한국에서 우리는 서방 제국주의 정부들 중 하나인 문재인 제국주의 정부에게 요구한다.”

노혁은 한국을 제국주의라고 칭한다. 한국은 식민지이다. 2차 대전 이후 수백 만의 학살로 점철된 한반도 현대사의 비극은 미 제국주의와 직접 관련되었다. 그런데 그 한국을 노혁은 제국주의로 승격시킨다. ? 미 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을 얘기할 때 그놈이 그놈이다!’를 외치기 위해서. (이 문제를 조만간 깊이 다룰 계획이다.)

민족자주파는 미얀마 민중항쟁에 대해서도 시위자들이 미국의 자금 지원을 받는 미제의 대리인이라며 민중항쟁을 중상 비방하고 있다.”

노혁은 미국에 대한 혐의를 중상비방이라고 말한다. 노혁은 미얀마 최근의 글들에서 중상비방” “중상모략등의 말을 거듭 사용한다. 마치 억울하다는 듯이. 모두 미국의 무죄를 항변할 때이다. 노혁은 미 제국주의의 억울함에 지나치게 공감하는 것 아닌가?

* * *

노혁과 RCIT는 선전물을 자주 낸다. 그런데 최근 선전물 대부분은 반중국 · 반러시아 정서를 부추기는 글들이다. 알다시피, 미국의 반중국 · 반러시아 캠페인은 점점 고조되고 있다. 며칠 전 16일 미일정상회담에서는 대중국 견제를 공개선언했다. 그로 인해 미국 영국 등 제국주의 지역에서 반아시아 반중국 인종주의 광기가 일고 있다. 한국에서는 중국인 비하가 아무렇지도 않게 행해지고 있다. 노혁과 RCIT의 선전물들이 이 제국주의 캠페인에 동조하고 있다는 혐의를 우리는 가지고 있다.

RCIT와 노혁이 단골로 들고 나오는 것은, 레닌의 제국주의 상호 갈등에서 혁명적 패전주의(양쪽 모두의 패배)’ 노선이다. 그 노선을 적용하기 위해서 최근의 선전물은 중국, 러시아, 한국은 제국주의이다.’라는 것을 골자로 한다. 미 제국주의의 적대자들을 제국주의로 규정하여 반제국주의 전선을 흐리는 것이다. 그러면서 제국주의, 초과이윤등 레닌주의 핵심 개념을 왜곡한다. 노혁과 RCIT는 매우 위험하다.

 

노동계급의 요구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하수인 미얀마 군부를 타도하자!

총파업과 무장투쟁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한 투쟁에 노동자가 선봉에 서자!

집회, 표현, 사상, 결사의 자유등 정치적 권리를 쟁취하자!

아웅산수치 등 구속된 모든 정치범을 석방하라!

미얀마 폭정의 또 다른 카드일 뿐인, 아웅산수치 등 이른바 민주 세력에 대한 정치적 환상을 타도하자!

공산주의와 소수민족의 정치적 자유를 쟁취하자!

소수민족의 독립을 지지한다!

노동자권력 수립만이 제국주의 사슬을 끊을 수 있다. 사회주의 혁명 만세!

레닌과 트로츠키의 연속혁명 강령에 기초한 혁명정당을 건설하자!

 

2021420

볼셰비키그룹

 

관련논문:  미얀마 사태에 대한 입장: 군부독재 타도에 노동계급이 선봉에 서자! (2021년 3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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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스코프스키 2021.04.21 21:13
    제가 아는 어떤 도서의 제목도 '실패한 제국'이라고 일종의 구 소련을 제국주의로 규정했고 동시에 실패라는 형용의 부정적 규정을 한 후 소위 대항을 문제적으로 본 도서인데 하필 번역자가 한 시기 열령/레닌을 번역한 바 있었던 김남섭이었습니다. 그리고 노혁을 보니 그 예전의 노혁추랑 유사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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