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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저자 서문

1장: 그동안 무엇이 성취되었는가?

2장: 경제성장과 당 지도부의 좌충우돌

3장: 사회주의 체제와 국가

4장: 노동생산성을 향한 투쟁

5장: 소련에서의 테르미도르 반동

6장: 불평등과 사회적 적대관계의 증대

7장: 소련의 가족, 청년, 문화

8장: 소련의 대외정책과 군대

9장: 소련의 사회적 관계

10장: 새로운 헌법을 통해서 바라본 소련

11장: 소련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보론> "일국 사회주의"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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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서문

 

1. 이 저작의 목적

 

소련의 경제적 성공에 대해 자본주의 세계는 일단 모른 척 했다. 이런 행동을 보인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사회주의 체제가 인간의 머리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될 수 있다는 증거가 실험적으로나마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자본의 편에 붙은 박식한 경제학자들도 러시아 공업의 유례없는 빠른 발전속도의 의미를 깊이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내색을 하지 않은 채 이 현상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려한다. 또는 소련의 공업발전이 "농민에 대한 극도의 착취" 때문이라고 말하고 이것으로 자신들의 견해를 제한하려고 한다. 그러나 중국, 일본, 인도가 일상적으로 농민을 무자비하게 착취하는데도 소련의 공업발전 근처에도 가지 못하는 이유는 설명하지 못한다. 자기 견해를 밝힐 좋은 기회가 주어져도 이들의 계급적 한계는 어쩔수없다.

 

그러나 온갖 비방과 은폐에도 불구하고 객관적 사실은 언젠가 승리하게 마련이다. 모든 문명국들의 서점에는 소련에 관한 책들이 홍수를 이루고 있다. 이 현상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소련의 눈부신 경제발전과 같은 놀라운 현상은 그리 자주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소련에 대한 반동적인 증오심에 눈먼 저작들은 급속히 그 수가 감소하고 있다. 소련에 관한 최근의 저서들 가운데 상당수는 열광적이지는 않더라도 호의적인 어조를 보여주고 있다. 갑자기 성공한 소련이 국제적으로 명성을 회복하고 있다는 징표의 하나일 뿐이다. 따라서 소련에 대한 이 우호적인 저서들을 우리는 환영할 뿐이다. 더욱이 파시스트 이탈리아보다 소련을 이상적인 나라로 바라보는 것은 비교할 수 없이 좋은 일이다. 그리고 독자들은 이 저서들을 통해 10월 혁명의 나라에서 실제 벌어지고 있는 현상들에 대한 과학적 평가를 원한다. 그러나 이들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소련의 친구들"이 지은 저서들은 크게 세 부류로 분류될 수 있다. 우선 이들 논문과 저서의 대부분은 어느 정도 "좌익" 성향을 보이는 아마추어 저널리즘이나 르뽀 성격의 글들이다. 이 부류와 함께 권위를 인정받고자 더 허세를 부리는 저서의 부류가 바로 인도주의적, 서정적, 반전(反戰)주의 "공산주의" 저서들이다. 소련 경제에 대한 도식적인 내용의 저서들이 세 번째 부류에 속한다. 이것들은 과거 독일의 강단사회주의 풍을 이어받고 있다. 루이스 피셔(Louis Fisher)와 두란티(Duranty)는 첫 번째 부류의 저서를 지은 잘 알려진 인물이다. 이미 고인이 된 바르뷔스(Barbusse)와 로맹 롤랑(Romain Rolland)은 "인도주의적" 친구들에 속한다. 스탈린의 진영으로 넘어가기 전에 전자가 예수의 전기를 후지가 간디의 전기를 저술한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마지막으로 지칠 줄 모르는 페이비언(Fabian) 사회주의자 베어트리스 및 시드니 웹(Beatrice and Sidney Webb) 부부는 보수적 현학적 사회주의의 가장 대표적인 권위자들이다.

 

위에 열거한 서 부류의 저서들은 서로 약간의 차이를 가지고 있지만 이미 입증된 기정사실에 대해 머리를 조아리고 사람을 마취시키는 일반화를 유독 선호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자기 나라의 자본주의에 반기를 드는 것은 이들에게 너무 무리이다. 따라서 이들은 퇴조기에 접어든 외국의 혁명에 대해 입장을 표명하는 데에는 아주 적극적이다. 10월 혁명 이전과 이후 몇 년 동안 사회주의가 어떻게 현실로 나타날 것인지를 이들 중 어느 누구도 문제삼지 않았다. 따라서 이들이 소련의 지금 체제를 사회주의라고 인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들은 시대의 발전에 발맞추어 나가는 진보적 인물이 될 수 있고 어느 정도 도덕적 평온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하면 혁명에 대해 조금도 기여할 필요가 없다. 이 부류의 관조적이며 낙관적인 저서들은 자본주의에 결코 파괴적이지 않다. 모든 불쾌한 과거의 일을 멀리 밀쳐내어 독자들의 심기를 아주 편하게 해주는 효과가 있다. 그래서 즉시 독서시장에서 호평을 받는다. 교양있는 부르주아들을 위한 볼셰비키주의 또는 좀더 집약적으로 말해 급진파 여행객용 사회주의라고 명명될 수 있는 국제 학파가 이렇게 조용히 형성된다.

 

여기서 이 학파의 생산물을 가지고 논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학파에게는 논쟁의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이 학파의 인물들은 문제를 제기하는 듯 하다가 이내 슬그머니 꼬리를 감추는 그런 부류이다. 필자의 본 저서는 미래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현재를 파악하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미래를 투시하는데 도움이 되는 한에서만 과거를 언급할 것이다. 이 저서는 비판적이다. 단지 기정 사실을 숭배하는 자들은 미래를 준비할 능력이 없다.

 

소련의 경제적 문화적 발전과정은 이미 여러 단계들을 거쳤다. 그러나 체제 내적 균형을 이룰 단계에는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 인간의 연대의식과 모든 욕구의 조화로운 충족에 기초한 무계급 사회 건설, 이것이 바로 사회주의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사회주의의 근본적인 측면으로 보자면 소련에는 사회주의가 털끝만치도 없다. 물론 소련 사회의 모순들은 자본주의의 모순들과 현격히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모순들은 대단히 날카롭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물질적 문화적 불평등, 정부의 탄압, 정치조직들의 존재, 분파 투쟁 등을 통해 이것들이 드러나고 있다. 경찰의 탄압은 정치투쟁을 은폐하고 왜곡시킬 뿐 결코 제거하지는 못한다. 금지된 사상들은 정부의 모든 조치에 영향을 미치면서 그것의 시행을 촉진하기도 하고 방해하기도 한다. 이 상황에서 탄압을 받으며 전국에서 맹렬하게 전개되고 있는 정치투쟁의 사상과 구호들을 무시한 채 소련을 분석할 수는 없다. 여기서 역사는 살아 움직이는 정치와 직접 만난다.

 

편안히 앉아서 입만 놀리는 "좌익" 속물들은 이렇게 충고하는 것을 좋아한다: 소련에서 진행 중인 사회주의 건설에 해롭지 않을 정도로만 체제 비판을 해야한다. 그러나 우리는 소련이 그렇게 나약한 체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소련의 적들은 소련의 진정한 친구인 세계 노동자들보다 소련의 상황을 더 잘 파악하고 있다. 제국주의 정부의 총참모부는 소련의 장점과 단점을 정확하게 계산하고 있다. 그리고 이 계산은 이미 공개된 보도들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불행하게도 소련의 적들은 소련 노동자국가의 약점들을 이용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들이 노동자국가의 장점이라고 생각하는 소련의 발전 경향에 대한 비판은 결코 이용할 수 없다. 소련 정부가 공식적으로 소련의 "친구들"이라고 인정하는 인사들의 대다수는 소련에 대한 비판에 적대적이다. 그런데 이 적대감은 소련 체제의 허약성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오지 않는다. 소련에 대한 자신들의 공감이 허약하다는 사실을 숨기는 허세에 불과하다. 우리는 이 부류의 두려움과 경고를 모두 차분한 마음으로 무시할 것이다. 사태를 결정짓는 것은 환상이 아니라 진실이다. 우리는 가면이 아니라 진실을 밝히고자한다.

1936년 8월 4일

 

후기

 

"테러분자들"의 음모에 대한 재판이 모스크바에서 열린다는 소련 정부의 공식 발표가 있기 전에 이 저서는 완성되어 출판사에 보내졌다. 따라서 당연히 재판 과정을 평가할 시간이 없다. 이 저서 한쪽 한쪽은 "테러분자" 재판의 역사적 논리를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베일이 둘러진 재판의 비밀이 소련 당국의 의도적 술책이라는 사실 역시 폭로하고 있다. 이것이 이 저서의 의미를 더욱 값지게 하고 있지 않은가!

193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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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그동안 무엇이 성취되었는가

 

1. 공업 성장의 주요 지수들

 

러시아에서 자본가계급은 미약한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이 결과 전제군주제와 농민의 반봉건적 노예상태를 청산하는 과업 등 민주적 과제들은 노동계급 독재를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었다. 그러나 농민 대중의 선두에 서서 정치권력을 장악한 노동계급은 이 민주적 과제들을 성취하는 것에서 머무를 수 없었다. 부르주아 혁명은 사회주의 혁명의 초기 단계와 직접 연관되어 있었다. 이 사실은 우연한 것이 아니었다. 최근 몇십 년간의 역사는 자본주의가 쇠퇴 단계에 들어선 상황에서 후진국들이 자본주의 종주국들이 달성했던 생산력 수준으로 올라설 수 없다는 사실을 아주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막다른 골목에 들어선 선진 자본주의 문명국들은 문명화의 길을 걷고 있는 후진국들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 러시아 경제는 사회주의 혁명을 가능케 할 정도로 여타 국가들보다 먼저 성숙하지 않았다. 자본주의적 토대에서는 더 이상 발전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 맞는 말일 것이다. 이 때문에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났다. 생산수단의 사회화는 이 나라를 야만의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는 필요조건이었다. 이것이 후진국에서의 결합발전의 법칙(law of combined development)이다. 과거 차르의 제국이었던 이 나라는 레닌이 말한바 "자본주의의 가장 약한 고리"였기 때문에 사회주의 혁명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혁명이 성공한 후 19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나라는 유럽과 미국을 "따라잡고 추월하는" 과제에 직면하고 있다. 물론 따라잡아야 추월할 수 있으므로 따라잡는 일이 일차적 과제이다. 다시 말하면 러시아는 자본주의 선진국들이 오래 전에 해결한 기술과 생산력의 문제들을 우선 해결해야 한다.

 

이와 다른 방식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가? 구 지배계급의 타도는 야만 상태에서 문명상태로 진입해야 하는 이 나라의 과제를 해결할 것이 아니고 철저히 드러냈을 뿐이다. 이와 동시에 생산수단이 국가의 손에 집중되어 혁명은 새롭고 비교할 수 없이 효과적인 공업성장의 방법들을 가능케 하였다. 아주 짧은 기간에 제국주의 전쟁과 내전에 의해 파괴된 생산력을 회복하고 거대 기업들을 새로이 창출했을 뿐 아니라 새로운 생산방식들을 도입하고 새로운 산업분야들을 정착시킬 수 있게 된 것은 오직 계획경제 덕분이었다.

 

볼셰비키 당 지도부는 소련에 대한 국제혁명의 즉각적인 지원을 기대했다. 그러나 이 국제혁명이 대단히 늦어지면서 소련은 엄청난 곤란들을 겪게되었다. 그러나 이 상황은 동시에 소련의 내적 저력과 자원의 정도를 드러냈다. 그 동안의 성과가 위대했건 불충분했건 제대로 평가되기 위해서는 국제적 잣대가 필요하다. 이 저서는 소련의 공업발전 과정에 대한 통계를 수집할 뿐 아니라 역사적 사회학적 해석을 가할 것이다. 그러나 논의의 진전을 위해서 중요한 수학적 데이터를 어느 정도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자본주의 세계 거의 모든 곳에 드러나고 있는 침체와 쇠퇴의 모습과는 정반대로 소련의 공업은 대단한 규모로 발전하고 있다. 아래에 제시하는 거시적 지표들은 이에 대한 반박할 수 없는 명백한 증거이다. 현재 독일의 공업생산량은 열병에 걸린 듯이 급격히 진행된 전쟁 준비 때문에 1927년 수준으로 하락하고 있다. 영국은 보호주의 장벽을 치고 있는데 지난 6년 동안 기껏해야 3% 내지 4% 정도 생산량을 늘렸을 뿐이다. 미국의 공업생산량도 약 25% 정도 하락했고 프랑스의 경우는 30% 이상 저하했다. 자본주의 국가들 중 가장 높은 생산량 증가를 기록한 나라는 일본으로 현재 미친 듯이 전쟁 준비를 하고 있으며 이웃 나라들을 약탈하고 있다. 이 나라의 생산량은 거의 40%나 증가하였다! 그러나 이 예외적인 지수조차도 소련의 극적인 공업성장에 비하면 초라해 보인다. 이 나라의 생산량은 같은 기간에 3.5배 즉 250%나 증가하였다. 중공업은 1925년부터 1935년까지 10배 이상 증가하였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첫 1년 동안 자본투자량은 54억 루블이었고 1936년에는 320억 루블이 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루블화는 너무 불안정해 측정 단위로는 부적절하다. 따라서 화폐에 의한 추산은 그만두기로 하자. 그렇다 하더라도 반박의 여지가 전혀 없는 다른 기준들이 존재한다. 1913년 돈(Don) 지역의 석탄생산량은 277만 5천 톤이었는데 1935년에는 712만 5천 톤에 이르렀다. 지난 3년 동안 철강 생산은 2배로 증가하였고 강철과 압연은 거의 2.5배가 증가하였다. 석유, 석탄, 철강의 생산은 제1차 세계대전 이전과 비교하여 3배에서 3.5배 증가했다. 전기 공급에 대한 계획이 처음 입안된 1920년 당시 러시아 전역에는 10개의 지역발전소가 있었으며 총생산량은 27만 3천 킬로와트였다. 그런데 1935년에는 95개로 발전소의 수가 증가하였고 전기의 총생산량은 435만 5천 킬로와트에 달했다. 1925년 소련은 전기 생산량에서 세계 11위였다. 그러나 1935년에는 독일과 미국 다음으로 최대생산국이 되었다. 석탄생산의 경우에는 10위에서 4위로, 강철생산에 있어서는 6위에서 3위로 도약했다. 그리고 트랙터와 설탕 생산에서는 세계 제1위가 되었다. 공업에서의 엄청난 성취, 처음부터 아주 밝은 전망을 보여준 농업, 구 공업도시들의 비범한 성장과 새로운 도시들의 건설, 노동자 수의 급격한 증가, 문화적 수준의 향상과 문화적 수요의 증대 등은 모두 의심할 여지없이 10월 혁명의 결과였다. 구시대의 예언자들이 인류 문명의 종말을 알리는 징조라고 애써 주장했던 혁명이 이 성과를 올린 것이다. 따라서 부르주아 경제학자들과는 논쟁할 필요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주의는 승리했음을 증명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에서가 아니라 지구 표면의 6분의 1을 차지하는 공업지역에서 이것이 증명된 것이다. 그리고 유물론의 언어가 아니라 강철, 시멘트, 전기라는 언어로 승리를 표현하였다. 비록 체제 내부의 어려움, 제국주의 세력에 의한 공세, 지도부의 실책 등으로 소련이 붕괴한다고 할지라도 (이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우리는 진심으로 희망한다) 미래에 대한 전조(前兆)로서 다음과 같은 사실만은 파괴되지 않고 남을 것이다: 오직 노동계급 혁명 덕분에 어느 후진국이 10년 내에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업적을 달성했다.

 

이 사실은 또한 노동운동 내 개량주의자들과의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개량주의자들이 노동계급을 위해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이룬 하찮은 성과와 혁명으로 새로운 삶을 개척하겠다고 떨쳐 일어난 인민에 의해서 이루어진 거대한 과업을 비교할 가치가 있겠는가? 단 한순간도 그럴 필요가 없다. 1918년 독일에서 떨쳐 일어선 노동자들은 사회민주주의 지도자들에게 그들의 엄청난 힘을 위임하였다. 만약 이들이 자본주의의 구출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서 이 힘을 사용하였다면 현재 중부 및 동부 유럽 그리고 아시아의 상당한 부분으로 이루어진 사회주의 체제는 정복당할 수 없는 경제력을 보유했을 것이다. 이 점은 러시아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쉽게 추측할 수 있다. 전 세계 인민들은 새로운 전쟁과 혁명을 통해 개량주의자들이 저지른 역사적 범죄의 대가를 톡톡히 치를 것이다.

 

2. 소련이 이룩한 업적에 대한 비교 평가

 

소련 공업의 역동적 통계수치들은 역사상 유례가 없다. 그러나 아직도 발전할 여지는 얼마든지 있다. 소련은 지극히 낮은 수준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나고 있다. 반면에 자본주의 나라들은 아주 높은 수준에서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다. 지금 이 두 체제 사이의 역관계는 경제성장률로 결정되지 않는다. 물질적 축적, 기술, 문화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노동의 생산성 등에 의해서 표현된 두 진영의 총체적인 힘을 비교하는 것을 통해 결정된다. 지금 열거한 요인들의 통계를 통해 사태를 바라보면 상황은 즉시 바뀐다. 이제는 소련이 지극히 불리한 입장에 놓인다.

 

레닌이 제기한 문제 즉 어느 진영이 승리할 것인가의 문제는 한편으로는 소련과 전 세계 혁명적 노동자계급과 또 한편으로는 국제 자본과 소련 내의 반혁명세력간의 상호관계에 대한 문제이다. 경제 성공에 의해 소련은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에 대비하여 성곽을 구축하고, 공세를 취하고, 스스로를 무장하고, 필요할 경우 후퇴해서 기다릴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어느 진영이 승리할 것인가의 문제는 그 본질에 있어서 군사적 문제일 뿐 아니라 더 커다란 의미에서 경제적 문제이다. 지금 이 순간 소련은 이 문제를 전 세계적 차원에서 해결할 것을 강요받고 있다. 제국주의 세력에 의한 군사적 개입은 위험요소의 하나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가 생산하고 있는 값싼 상품들이 소련영토로 유입되면 그 위험은 더욱 클 수밖에 없다. 물론 서구의 한 나라에서 노동계급이 사회주의 혁명을 성취할 경우 상호 역관계는 급격히 그리고 근본적으로 변할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세계에 의한 소련의 고립이 지속되거나 유럽의 노동계급이 투쟁에서 패배하고 계속 후퇴하는 더 나쁜 상황이 전개될 경우 소련 체제의 생존가능성은 최종적으로 노동생산성에 의해 결정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것은 시장경제 하에서는 생산비용과 가격으로 표현된다. 동일 상품의 소련 국내 가격과 국제시장의 가격 차이는 이 상호 역관계를 측정하는 주요한 수단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소련 당국은 통계학자들이 이 문제에 접근하는 것조차 금지하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경기침체와 생산력의 정체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는 기술, 조직, 노동 숙련도에서 소련을 여전히 훨씬 앞서고 있기 때문이다.

 

소련 농업의 고질적 후진성은 너무도 잘 알려져 있다. 공업의 발전과 조금이라도 비교할 수 있는 상황은 농업의 어느 분야에도 없다. 예를 들어 몰로토프(Molotov)는 1935년 말 이렇게 불평을 늘어놓았다: "사탕무 생산에서 소련은 자본주의 나라들보다 아직 한참 뒤져 있다. 1934년 우리는 1헥타르당 8200파운드의 사탕무를 생산했다. 1935년에는 우크라이나의 대풍작으로 1헥타르당 1만 3100파운드를 생산했다. 그러나 체코슬로바키아와 독일은 2만 5000파운드 그리고 프랑스는 3만 파운드가 넘게 생산했다." 몰로토프의 이 불평은 농업의 모든 분야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곡물생산과 섬유생산 분야 뿐 아니라 특히 목축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적절한 윤작, 종자의 선택, 비료 투입, 트랙터, 콤바인, 우량종 축산농장 등을 통해 농업의 전 분야는 사회주의 농업의 도입으로 거대한 혁명을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혁명이 시간을 필요로 하는 곳은 바로 이 매우 보수적인 농업 분야이다. 집단화가 이루어졌으나 아직도 소련 농업의 과제는 서방 자본주의 농업을 따라잡는 것이다. 서방의 농업은 소농 경영의 약점에도 불구하고 높은 생산성을 보유한 농업체제이다.

 

공업에서 노동생산성을 높이는 투쟁은 선진 기술 채용과 노동력 효율의 제고 등 두 방면으로 진행된다. 단지 몇 년만에 소련이 가장 현대적인 거대 공장들을 건설한 요인은 한편으로는 서방 자본주의의 높은 기술수준의 채용과 또 한편으로는 국내의 계획경제 체제이다. 공업 분야에서 외국의 성과들이 수입되어 흡수되고 있다. 적군의 무장 뿐 아니라 소련의 공업 발전도 객관적 상황에 의해 강요되어 발전 속도가 가속화되었다. 이 상황은 엄청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공업이 영국과 프랑스처럼 구식으로 지지부진할 필요가 없어졌다. 군대는 구식 장비의 운명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동시에 이 급속한 성장은 부정적인 측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공업의 각기 다른 요소들 사이에 조화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특히 노동력 수준은 선진적인 기술 수준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계획경제의 지도부는 이 과업을 수행할 능력이 부족하다. 이 결과 제품의 생산비용은 대단히 높으며 제품의 품질은 떨어진다.

 

석유산업의 총책임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소련의 유전은 미국 장비를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천공(穿孔)에 필요한 생산조직은 뒤떨어져 있다. 노동자들의 숙련도가 충분치 못하다." 그는 천공장비가 자주 고장을 일으키는 현상을 "부주의, 숙련도의 부족, 기술감독의 부족"으로 설명한다. 몰로토프는 또다시 불평한다:" 건설산업의 생산조직은 대단히 낙후되어 있다‥‥ 도구와 장비들이 제대로 사용되고 있지 못하고 있으며 대개 구닥다리 방식으로 일이 진행된다." 이 고백은 소련의 언론에 널리 소개되고 있다. 소련에 도입된 자본주의 선진기술은 자본주의 국가들의 생산성을 전혀 발현하지 못하고 있다.

 

중공업의 전반적 성공은 대단한 성과이다. 이 성공을 토대로 해서만 산업이 현대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 공업의 성공은 기술적 일반적 문화수준을 요구하는 정밀기계의 생산에서 입증된다. 이 분야에서 소련은 아직 대단히 뒤떨어져 있다.

 

의심할 여지없이 질적 양적으로 가장 중요한 성과는 군수산업에서 달성되었다. 육군과 해군은 가장 영향력이 막강한 고객일 뿐 아니라 가장 만족시키기 힘든 고객이다. 그러나 일련의 공개 연설에서 전쟁성(War Department)의 책임자 중의 하나인 보로실로프(Voroshilov)는 끊임없이 불평하고 있다: "적군(赤軍)의 군수품 품질에 대해 항상 완전히 만족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조심스러운 발언 뒤에 숨어 있는 불안은 쉽게 감지된다.

 

공식 보고서에서 중공업의 총책임자는 이렇게 말한다: "생산된 기계는 품질이 좋아야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렇지 못하다." 그는 또 이렇게 말한다: "우리에게 기계의 가격은 너무 비싸다." 항상 그렇듯이 그는 기계 생산의 세계적 수준과 소련의 수준을 정확히 비교할 수 있는 데이터를 제시하지 않는다.

 

트랙터는 소련 공업의 자랑이다. 그러나 트랙터를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정도를 나타내는 지수는 상당히 낮다. 지난 산업회계년도에 무려 81%의 트랙터가 중대한 수리를 거쳐야 했다. 더욱이 이들의 상당수가 밭을 가는 절정기에 다시 고장이 났다. 어느 계산에 의하면 1헥타르당 곡물이 2000파운드 또는 2300파운드 생산되어야 기계 및 트랙터 정비소의 비용이 마련된다. 그러나 현재 평균 수확량은 이 수치의 반에도 못 미치고 있다. 결국 국가는 적자를 메우기 위해 수십억 루블을 지원해야 한다.

 

자동차 운송 분야의 상황은 더 나쁘다. 미국의 경우 트럭은 1년에 6만 킬로미터에서 8만 킬로미터 그리고 심지어는 10만 킬로미터를 주행한다. 소련의 경우는 이 수치가 2만 킬로미터에 지나지 않는다. 즉 미국의 3분의 1 또는 4분의 1에 불과하다. 매 100대의 기계 중에서 55대만 작동중이다. 나머지는 수리중이거나 수리를 기다리고 있다. 이 기계 수리비용은 생산비용의 두 배나 된다. 국가회계국이 다음과 같이 보고하는 것이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자동차 운송은 생산비용에 무거운 부담만 지운다."

 

국가 인민위원회(Council of People's Commissars) 의장에 따르면 철도운송량의 증가는 "수도 없이 많은 고장"을 가지고 온다. 이 문제들의 근본 원인은 동일하다: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낮은 노동숙련도 때문이다. 선로변환기를 잘 유지하기 위한 투쟁은 그 나름대로 영웅적인 행위이다. 선로변환기를 담당하고 있는 일급 여성노동자들은 크레믈린궁의 최고 권력층에 보고를 한다. 최근 몇 년간의 진전에도 불구하고 수로에 의한 운송은 철도운송에 많이 뒤져 있다. 정기적으로 신문들은 "해상운송의 끔찍한 운영", "선박수리의 지극히 낮은 수준" 등에 대한 통신문을 싣고 있다.

 

경공업은 중공업보다 상황이 더 나쁘다. 소련 공업의 특이한 법칙은 이렇게 표현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소비자 대중에 가까이 있는 제품일수록 품질이 더욱 나쁘다. 『프라우다』지에 의하면 섬유공업의 "불량품 비율은 부끄러울 정도이다. 선택할 수 있는 제품의 수는 빈약하다. 낮은 질의 제품이 압도적으로 생산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소비하는 제품의 나쁜 품질에 대한 불평은 언론에 주기적으로 등장한다: "엉성한 철제품", "조립이 잘못되었고 마무리 손질이 부주의한 흉칙한 가구", "제대로 된 단추가 없다", "식품공급체계가 절대적으로 불만족스럽다" 등등 끝이 없다.

 

공업 발전을 품질에 대한 고려 없이 양적 지수로만 규정짓는다면 그것은 사람의 신체를 가슴둘레는 무시하고 신장으로만 표현하는 것과 거의 같다. 더욱이 소련공업의 특성을 올바르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질적인 고려만으로는 부족하다. 어떤 분야는 급속히 발전하는 반면 다른 분야는 후진성이 여전하다. 이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거대한 자동차공장의 건설은 간선도로의 부족과 엉성한 관리의 대가를 치른다. "도로의 노후화는 끔찍하다. 가장 중요한 간선도로인 모스크바-야로슬라프 간선도로에서 자동차는 시속 10킬로미터밖에 달리지 못한다."[『이즈베스챠』지] 소련은 여전히 "도로 없이 살았던 원시인들의 관습"을 물려받고 있다고 국가계획위원회(State Planning Commission) 의장이 주장한다.

 

도시경제도 상황은 거의 비슷하다. 새로운 공업도시들이 짧은 기간에 건설되었다. 동시에 오래된 도시들은 수십 개나 쇠퇴하고 있다. 수도와 공업의 중심도시들은 성장하고 있으며 스스로를 치장하고 있다. 비싼 극장과 클럽들이 전국 여러 곳에서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거주지구의 부족은 참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주택들은 대체로 전혀 손길이 가지 않는다. "건물을 엉터리로 건축하면서 비용은 많이 든다. 우리 주택들은 소모될 뿐 개축되지 않고 있다. 수리는 거의 하지 않으며 하더라도 엉터리로 한다."(『이즈베스챠』지) 소련 경제 전체는 엄청나게 불균형을 드러내고 있다. 어떤 한계 내에서는 이 현상이 불가피하다. 가장 중요한 분야에서부터 발전될 필요가 있고 과거에도 이것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특정 분야의 후진성은 다른 분야의 효과적인 운영을 크게 해친다. 각 분야의 최대 발전이 아니라 경제 전체의 최대 효율을 보장할 이상적 계획경제의 관점에 의하면 제1차 공업발전의 통계지수는 낮게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통계지수가 낮아도 경제 전체 그리고 특히 소비자 대중은 더 많은 것을 얻을 것이다. 그리고 장기적으로 전체 산업의 역동성이 제고될 수 있을 것이다.

 

공식 통계에는 자동차의 생산과 수리가 총산업 생산량에 더해진다. 그러나 경제효율의 관점에서 보면 이 수치는 더할 것이 아니라 빼야한다. 이것은 대부분 산업 부문에도 해당된다. 이 때문에 총산업 생산량을 루블화로 추산하는 것은 상대적 의미 밖에 없다. 루블화의 가치가 무엇인지가 일단 확실치 않다. 이 화폐수치 뒤에 무엇이 진짜 도사리고 있는지가 언제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 기계 생산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아니면 이 기계의 너무 이른 고장이 일어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안정된" 루블화의 추산에 따라 주요산업의 총생산량이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이전과 비교하여 6배가 증가했다면 톤 단위로 측정된 석유, 석탄, 철강의 실제 생산량은 3배 또는 3배반 증가한 셈이다. 이렇게 생산량 지수가 큰 차이를 나타내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소련 산업이 차르 시대에는 없었던 새로운 공업 분야를 창조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차적인 이유는 통계를 조작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관료기구 단위는 사실들을 과장할 조직적 이유를 가지고 있다. 이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3. 인구 일인당 생산량

 

현재 소련의 일인당 평균 노동생산성은 여전히 매우 낮다. 가장 우수한 제련소의 공장 책임자에 의하면 노동자 일인당 강철과 선철 생산량은 미국 제련소의 평균 생산량의 3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 양국의 평균수치는 아마 1 대 5 또는 더 벌어질 것이다. 이 상황에서 소련이 자본주의 국가들보다 용광로를 "더 잘" 사용한다는 당국의 발표는 의미가 없다. 기술의 기능이란 인간 노동을 절약하는 것 이외의 다른 의미가 없다. 목재와 건설 산업은 금속 산업보다 상황이 더 나쁘다. 미국 채석장에서 노동자 일인당 채취량은 1년에 5000톤이며 소련은 500톤이다. 정확히 10 대 1의 비율이다. 이렇게 큰 차이가 나는 이유는 숙련 노동자의 부족과 노동의 낮은 조직 정도에 있다. 관료집단은 노동자에게 모든 힘을 다해 일하라고 독려하지만 자신들에게 할당된 노동력은 올바로 활용하지 못한다. 물론 농업은 공업보다 상황이 더욱 나쁘다. 노동생산성이 낮으면 국민소득이 낮고 결국 인민 대중의 생활수준이 낮아진다.

 

총공업생산량의 경우 1936년이 되면 소련이 유럽에서 선두를 기록할 것이라는 주장은 소련의 경제성장이 그 자체로도 대단하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그러나 제품의 질과 생산비용은 계산에서 제외되어 입고 인구의 규모도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나라의 일반적 발전수준과 대중의 생활수준은 최소한 추산으로 하더라도 소비자의 수에 제품의 총량을 나누어야 한다. 그러면 여기서 간단한 산수 계산을 해보자.

 

경제적 문화적 군사적 목적에 있어서 철도운송의 중요성은 말할 필요가 없다. 소련의 철도 총연장은 8만 3000킬로미터인데 독일의 5만 8000킬로미터, 프랑스의 6만 3000킬로미터, 미국의 41만 7000킬로미터와 비교된다. 이 수치에 의하면 독일은 인구 1만 명당 8.9킬로미터의 철도가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프랑스는 15.2킬로미터, 미국은 33.1킬로미터, 소련은 5.0킬로미터이다. 따라서 철도의 지수에 따르더라도 소련은 문명국 가운데 가장 낮은 수준에 있다. 지난 5년간 규모가 3배로 늘어난 상선 보유수는 덴마크 및 스페인과 같은 수준에 있다. 여기에다 포장도로의 지극히 낮은 수치를 덧붙여야 한다. 그리고 자동차 보유에서 소련은 인구 1000명당 0.6대의 자동차를 생산한다. 1934년 영국의 경우는 8대였으며 프랑스는 약 4.5대, 미국은 23대이다. 그리고 미국의 경우 1928년에 36.5대였는데 대공황에 의해 수치가 감소하였다. 그리고 소련은 도로 수로 자동차 운송의 극심한 후진성에도 불구하고 말의 보유에서도 프랑스나 미국을 능가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종자의 품질에서도 이들 나라에 한참 뒤지고 있다.

 

그리고 가장 뛰어난 성과를 올린 중공업에서도 비교 수치들은 소련이 여전히 불리한 상황에 놓여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1935년 소련의 석탄생산량은 일인당 0.7톤이었다. 영국은 거의 5톤, 미국은 1913년에 5.4톤이었다가 지금은 거의 3톤, 독일은 약 2톤이다. 강철의 경우 소련은 67킬로그램, 미국은 250킬로그램이다. 선철과 연철의 경우도 비율은 거의 비슷하다. 1935년 소련은 일인당 153킬로와트시의 전기를 생산했다. 1934년 영국은 73킬로와트시였으며 프랑스는 363킬로와트시, 독일은 472킬로와트시였다.

 

경공업의 일인당 지수는 일반적으로 중공업보다 수준이 더욱 떨어진다. 1935년 모직 일인당 생산량은 0.5미터였는데 이것은 미국이나 영국에 비해 8배 내지 10배가 뒤진다. 모직 옷은 소련의 특권층만 입을 수 있다. 날염용 회색 무명 옷감은 일인당 16미터가 생산되었는데 소련 인민은 이것으로 겨울옷을 만들어야한다. 신발의 생산은 일인당 0.5켤레인데 독일은 1켤레가 넘으며 프랑스는 1.5켤레, 미국은 3켤레이다. 그리고 이 수치는 품질 지수를 사상하고 있는데 이것까지 고려하면 소련이 선진 자본주의국가들에 비해 훨씬 뒤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여러 켤레의 신발을 보유한 사람의 비율이 소련보다 상당히 높다는 사실은 당연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소련은 여전히 맨발로 생활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들 중에 속한다.

 

식품생산에도 상황은 유사한데 부분적으로는 더 불리한 여건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의심할 여지없는 최근의 진전에도 불구하고 파이와 과자는 말할 것도 없고 잼, 소시지, 치즈 등을 소련 대중은 전혀 구할 수 없다. 유제품도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고 있다. 프랑스와 미국의 경우 인구 5명당 1마리의 암소가 있다. 독일은 인구 6명당 1마리이며, 소련은 인구 8명당 1마리이다. 그런데 우유생산에서 소련의 암소 두 마리는 실제로는 다른 나라의 거의 한 마리에 지나지 않는다. 곡류 중 특히 호밀과 감자에서만 소련은 서방 자본주의 국가 대부분이나 미국을 훨씬 능가하고 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가난의 상징인 호밀 빵과 감자가 소련 인구 절대다수의 주식이다.

 

종이 소비량은 문화수준을 나타내는 주요한 지수이다. 1935년 소련은 일인당 4킬로그램에 못 미치는 종이를 생산하였다. 미국은 1928년의 48킬로그램에서 현재는 34킬로그램 그리고 독일은 47킬로그램을 소비하고있다. 미국은 인구 일인당 1년에 12자루의 연필을 생산한다. 반면 소련은 4자루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 4자루마저 품질이 너무 나빠 품질이 좋은 연필 1자루 또는 기껏해야 2자루에도 미치지 못한다. 입문용 교과서, 종이, 연필의 부족이 학교교육을 마비시키고 있다는 불평이 신문에 곧잘 보도된다. 10월 혁명 10주년을 맞이하여 문맹을 완전히 퇴치하겠다는 소련 당국의 목표는 아직도 성취되지 않고 있다. 좀더 일반적인 고찰로부터 출발할 경우도 문제는 비슷한 정도로 해명될 수 있다. 소련의 일인당 국민소득은 서방에 훨씬 못 미친다. 소련에는 다른 어떤 나라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대규모의 자본투자가 진행되고 있다. 이 비율은 25%에서 30%에 이르는데 이 결과 대중이 누리는 소득수준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보다 훨씬 낮을 수밖에 없다.

 

물론 소련에는 유산계급이 없다. 유산계급의 사치는 일반대중의 과소 소비에 의해 상쇄된다. 그러나 유산계급이 없다고 해도 긍정적인 효과가 별로 발휘되지 못하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적인 해악은 자본가계급의 사치가 아니다. 물론 이 계급의 사치 행위는 그 자체로만 보아도 구역질나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사치를 부릴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자본가계급은 사적소유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이 결과 경제체제는 무정부성과 정체의 운명에 처해진다. 물론 사치제 소비를 자본가가 독점하고 있다. 그러나 생활필수품의 절대 다수 소비자는 노동대중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소련에는 유산계급이 없지만 특권 권력층은 여전히 존재하여 소비량의 대다수를 독점하고 있다. 이 사실은 나중에 좀더 자세하게 논의하게 될 것이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 비해 소련의 일인당 생활필수품 생산량이 낮기 때문에 소련 대중의 생활수준이 자본주의 국가들의 생활수준에 비해서 아직도 뒤떨어진다.

 

물론 이 상황의 역사적 책임은 러시아의 어둡고 암울한 과거, 무지와 빈곤의 유산에 있다. 따라서 러시아의 경우 진보의 길을 걷기 위해서는 자본주의를 타도하는 방법 이외의 다른 길이 없었다. 이점을 확신하고 싶다면 한때 차르 제국에서 가장 선진 지역이었던 발트해 국가들과 폴란드를 보면 된다. 이 국가들은 현재 후진의 수렁에서 아직도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소련 체제의 지을 수 없는 강점은 러시아의 천년이나 된 후진성에 대해 집요하게 그리고 성공적으로 투쟁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나 더 많은 진보를 위해서는 지금까지 달성된 성과를 올바르게 판단하는 것이 일차적 조건이다.

 

현재 소련은 서방의 기술적·문화적 성과들을 수입하고 빌리고 도용하는 가운데 사회주의 체제 건설의 준비 단계를 거치고 있다. 생산과 소비 수치의 비교 평가는 이 준비 단계가 끝나려면 아직 멀었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가 완전하게 정체하는 상황이 계속될 리는 없다. 그러나 이 상황이 계속되더라도 이 준비 단계는 아직도 역사 시기 전체를 필요로 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앞으로 연구를 진전시키는 데 우리에게 필요한 아주 중요한 첫 번째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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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경제성장과 당 지도부의 좌충우돌

 

1. "전시 공산주의", "신경제정책", 쿨락에 대한 정책

 

소련 경제의 성장곡선이 중단 없이 고르게 상승한 경우는 결코 없었다. 사회주의 정권 성립 후 첫 18년 동안 경제성장 단계를 구분 짓는 격심한 위기가 여러 번 나타났다. 현정권의 정책과 관련하여 소련 경제사를 간략하게 개괄하는 것은 소련 체제를 진단하고 그 미래를 예상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 후 첫 3년은 대단히 잔인한 내전의 시기였다. 이때의 경제활동은 전적으로 전선 유지의 필요성에 바쳐졌다. 문화생활은 구석에 숨어 좋은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신 지독한 물질적 결핍의 상황에서 창조적 지성들이 대담하게 자기 영역을 확장하였다. 특히 레닌의 사상은 이 시기의 전형적인 모범이었다. 이때가 소위 "전시 공산주의(1918∼21)" 시기였다. 이 시기의 경제형태는 자본주의 국가들의 "전시 사회주의"와 대단히 유사했다. 이 시기 소련 정부의 경제정책은 주로 군수산업 지원에 바쳐졌다. 그리고 부족한 자원을 군사적 목적을 위해 사용하고 도시인구를 생존시키는 데에 바쳐졌다. 전시 공산주의는 본질적으로 적에게 포위 당한 성(城)에서 소비를 체계적으로 통제하는 체제였다.

 

그러나 맨 처음 이 정책이 입안되었을 때에는 좀더 광범위한 목적이 있었다. 소련 정부는 이 극심한 통제 체제를 발전시켜 생산과 분배에서 계획경제를 직접 도입하려했다. 다른 말로 하면, "전시 공산주의"를 파괴시키지 않고 서서히 진짜 공산주의에 도달하기를 희망했다. 1919년 3월 채택된 볼셰비키당 강령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소련 정부의 현재 과업은 계획되고 조직된 국가 차원의 분배체제를 동요 없이 건설하는 것이다. 이렇게 될 경우 제품 분배가 상거래를 대체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전시 공산주의"의 강령과 점점 갈등을 일으켰다. 전쟁으로 인한 생산수단의 파괴 뿐 아니라 생산자의 이익 억압 때문에 생산은 계속 감소했다. 도시는 곡물과 원자재를 농촌에게 요구했다. 그러나 도시는 과거의 기억에 따라 화폐라고 불리는 얼룩덜룩한 종이쪽지 외에는 농촌에게 줄 것이 없었다. 따라서 농민은 자신의 생산물을 땅속에다 숨겼다. 정부는 이 상황에서 곡물을 징발하기 위해 노동자 무장파견대를 농촌으로 보냈다. 이에 농민은 파종 규모의 축소로 대항했다. 내전이 끝난 직후인 1921년에 산업생산량은 내전 이전의 5분의1로 떨어졌다. 강철 생산은 420만 톤에서 18만 3000톤으로 떨어졌는데 과거 생산량의 23분의 1에 불과했다. 곡물생산량은 801억 파운드에서 573억 파운드(1922년)로 줄었다. 이 해에는 끔찍한 기근이 일어났다. 동시에 외국무역은 27억 루블에서 3천만 루블로 급격히 감소하였다. 소련의 생산력 붕괴는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었다. 나라 전체와 국가기구는 멸망 일보직전이었다.

 

전시 공산주의의 유토피아적 희망은 이후 많은 측면에서 정당하고 무자비한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 모든 계산은 서방 자본주의 국가에서 노동자 혁명이 곧 승리할 것이라는 희망에 근거하였다. 이 전제를 고려하지 않을 경우 볼셰비키당의 이론적 오류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소련이 나중에 제공할 식량과 원자재를 신용담보로 사회주의혁명을 달성한 독일 노동자들이 생산기계 및 완제품 뿐 아니라 수만 명의 고도로 숙련된 노동자, 엔지니어, 조직가들을 소련에 제공할 것이다. 이 희망은 당연한 상식으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독일에서 노동자 혁명이 성공하였다면 독일 뿐 아니라 소련의 경제발전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너무도 대대적으로 진전되어 오늘날 유럽과 전 세계의 운명은 비교할 수 없이 전도가 양양했을 것이다. 그러나 독일사민당 지도자들이 이 역사의 진전을 혼자 힘으로 봉쇄하였다.(역자 주: 1918년 11월 혁명으로 독일의 노동자 병사 소비에트는 왕정을 무너뜨리고 인민위원회 정부를 수립했다. 그러나 이 혁명 정부의 각료들인 사민당 및 독립사민당 지도자들이 소비에트를 해체시키고 제헌의회를 수립시켜 부르주아 민주공화국을 수립했다.) 그러나 사회주의혁명이 독일에서 성공했더라도 국가 주도의 직접 분배체제가 폐기되고 상거래 분배 방식이 부활되어야 했다. 이 점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농촌에 고립적으로 분산된 수백만의 농민경제단위는 외부세계와 자신들의 경제 관계를 상거래 이외의 다른 방법으로 규정하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 이 사실을 지적하며 레닌은 시장 부활의 필요성을 설명했다. 상거래에 의한 물자 순환은 농민과 국유화 공업간에 소위 "연결고리"를 마련해줄 것이었다. 이 "연결고리"에 대한 이론적 정식은 아주 단순하다: 국가가 농민의 노동 생산물을 강제 징발하지 않도록 공업은 농촌이 원하는 공업생산물을 적절한 가격으로 공급한다.

 

농촌과의 경제 관계를 호전시키는 것이 신경제정책의 가장 본질적이고 시급한 과제였다. 이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전시 공산주의의 짧은 실험을 통해, 사회화된 공업부문 역시 자본주의적 화폐지불 방식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계획경제는 단순히 지적 데이터에만 의존할 수 없다. 수요 공급의 법칙은 상당한 기간에 걸쳐 필요한 물질적 기초로 남아 있을 것이며 경제정책의 오류를 교정하는 데 필수 불가결한 요소가 될 것이다. 신경제정책에 의해 합법화된 시장은 국가가 통제되는 화폐의 도움으로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농촌의 자극을 받아 1923년부터 공업이 소생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이 과정은 즉시 가속도가 붙어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1922년과 1923년에 산업생산량은 두 배로 늘어났고 1926년에 이미 내전 이전의 수준을 회복했다. 즉 1921년에 비해 생산량이 5배 이상 늘었다. 이 정도면 신경제정책이 공업에 미친 영향을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훨씬 느린 속도이기는 했지만 곡물수확량이 동시에 증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찍부터 볼셰비키당 내에 존재했던 공업과 농업의 관계에 대한 견해 차이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1923년부터 날카롭게 대립되기 시작했다. 모든 자원이 완전히 고갈된 나라에서 농민들로부터 곡물과 원자재를 빌리지 않고는 공업이 발전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농업생산물에 대한 너무도 무거운 "강제 채무"(역자 주: 도시의 생산력이 완전히 파괴된 상황에서 국가의 강제력을 동원하여 농민의 농업생산물을 일시적으로 징발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농민의 노동의욕을 죽여버렸다. 미래의 번영을 확신하지 못하자 농민은 도시에서 온 곡물 징발대에 대항하여 파종을 거부하는 것으로 저항했다. 그렇다고 곡물 징발을 완화할 수도 없었다. 농민의 생산물이 없이는 공업 발전이 지체될 뿐이었기 때문이다. 공업제품을 도시로부터 공급받지 못하자 농민은 스스로 수공업 노동에 종사하여 필요를 충족시키려 하였다. 이 결과 농촌 가내수공업이 부흥하였다. 농업과 공업간의 역동적 균형을 성취하는 시기를 앞당기기 위해 농촌에서 얼마나 많은 곡물을 징발할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 당내에는 이견이 발생하였다. 논쟁은 농촌의 복잡한 사회 구조에 의해 즉시 복잡하게 발전하였다.

 

1923년 봄에 열린 당 대회에서 아직도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분파인 "좌익 반대파"의 어느 대표가 불길한 도표의 형태로 공업제품과 농업생산물의 가격 차이를 설명하였다. 이 현상은 당시 처음으로 "가위"라고 이름지어졌다. 이 용어는 곧 거의 국제적 용어가 되었다.(역자 주: 국내에는 협상가격이라는 번역어로 탄생하여 좌익에 퍼졌다.) 공업이 계속 침체할 경우 가위의 날은 점점 벌어져 결국 도시와 농촌간의 관계는 불가피하게 단절될 것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볼셰비키당이 성취한 민주주의 농업혁명과 이 당이 사회주의의 기초를 구축하기 위해 시행한 정책을 농민은 명확히 구분해 바라보았다. 지주와 차르 소유의 토지를 몰수하여 볼셰비키당은 매년 금화 5억 루블이 넘는 혜택을 농민에게 선사했다. 그러나 국가가 생산하는 공업제품의 가격 때문에 농민은 선사 받은 것보다 훨씬 많은 액수의 생산물을 헌납하고 있었다. 10월 혁명의 단단한 매듭으로 결박된 민주주의 혁명과 사회주의 혁명의 대차대조표가 매년 수억 루블의 손실을 농민에게 전가했다. 그렇다면 노동계급과 농민의 관계는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과거의 유산인 농촌경제의 분산적 성격은 10월 혁명이 가져다준 내전의 파괴로 더욱 강화되었다. 혁명 후 10년에 걸쳐 자영농민의 수는 1,600만 명에서 2,500만 명으로 증가하였다. 이 현상은 자연스럽게 농민기업 다수의 순수 소비적 성격을 강화시켰다. 이 때문에 농업생산물이 도시로 충분히 유입되지 못했다.

 

소상품 경제는 불가피하게 착취자를 탄생시킨다. 농촌의 생산력이 회복되는 것에 비례하여 농민층의 분화가 가속화되었다. 이 사태는 이미 과거의 잘 알려진 전철을 밟았다. 쿨락(역자 주: 타인의 노동을 고용한 부유한 농민)의 성장은 농업의 전반적 성장을 훨씬 앞질렀다. "농촌으로 향하자"는 구호를 내건 정부의 정책은 실제로 쿨락을 위한 것이었다. 농업세는 부농보다 빈농에게 더 무겁게 매겨졌다. 그리고 부농은 국가의 신용 대부 가운데 알짜만 골라 차지했다. 잉여곡물은 주로 농촌의 상층부가 차지하여 빈농은 노예가 되었다. 그리고 투기 대상이 되어 도시 부르주아 분자들에게 판매되었다. 당시 당내 지도부의 이론가 부하린은 농민에게 "부자가 되시오"라는 유명한 구호를 던져주었다. 이 구호는 이론으로 표현하면 이렇다: 쿨락의 점진적 성장으로 사회주의가 도래한다. 그러나 실제로 이것은 절대 다수의 대중을 희생시켜 극소수 쿨락을 살찌우는 것이었다.

 

자신이 내세운 정책의 포로가 되어 당 지도부는 농촌 소부르주아 계급의 요구 앞에서 한 발 한 발 사회주의 건설 노선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25년 농업부문에서 노동력 고용과 토지 임대가 합법화되었다. 농민층은 소규모 자본가와 고용 노동자로 양극화되기 시작했다. 동시에 공업제품이 부족했기 때문에 국가부문은 농촌시장에서 밀려났다. 쿨락과 소규모 가내수공업자 사이에 마치 땅에서 솟은 것처럼 중간상인이 등장했다. 국영기업은 원자재를 구하기 위해 개인 상인들과 계약을 체결하는 빈도수가 높아졌다. 자본주의는 밀물처럼 상륙하여 모든 곳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소유형태의 혁명은 사회주의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단지 제기할 뿐이다. 이 사실을 지각 있는 사람들은 명백히 목격할 수 있었다.

 

1925년 쿨락 위주의 정책이 전면화되고 있을 때 스탈린은 토지 국유화를 철폐하기 시작했다. 소련의 어느 기자가 그의 계획에 대해 이렇게 질문했다: "농업 발전을 위해 개별 농민이 경작하는 토지의 재산권을 그에게 십 년간 양도하는 것이 더 수월하지 않을까요?" 이 질문에 대해 스탈린은 이렇게 답변하였다: "그렇습니다. 어쩌면 40년간 양도할 수도 있겠지요." 그루지아의 농업 인민위원은 스탈린의 제안에 따라 토지 국유화 철폐 법안을 상정하였다. 이 법의 목적은 농업의 미래에 대한 확신을 농민에게 심어주는 것이었다. 이 사태가 진행되는 동안 1926년 봄 시장에 나온 곡물의 거의 60%가 전체 농민 가운데 6% 밖에 되지 않는 토지 소유 농민의 손에 들어 있었다! 국가는 외국무역은 고사하고 국내소비용 곡물도 충분히 확보할 수 없었다. 수출 규모가 빈약했기 때문에 외국으로부터 공업제품 수입은 고사하고 꼭 필요한 기계류와 원자재도 한계선까지 수입을 감축시킬 수밖에 없었다.

 

공업화를 지체시키고 일반 농민 대다수에게 타격을 가한 쿨락 위주의 정책은 1924년부터 1926년 사이 그 정치적 결과를 뚜렷하게 드러내었다. 도시와 농촌의 소부르주아 계급이 자신의 정치적 파워를 크게 의식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하급 소비에트에서 다수를 장악하였다. 관료집단의 자신감과 파워도 증대하였다. 이들은 노동계급에게 점점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제 당과 소비에트의 민주주의가 완전히 억압당했다. 쿨락의 정치적 ·경제적 성장은 당 지도부의 두 지도적 인물인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를 경악시켰다. 이들은 당시 노동계급의 두 중심도시인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의 소비에트 의장이었다. 이들의 반응은 의미심장했다. 그러나 당과 국가기구의 관료층은 물론 지방에서도 스탈린에 대한 지지가 굳건했다. 쿨락 위주의 정책은 승리했다. 1926년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는 추종자들과 함께 1923년의 반대파(Opposition of 1923)에 합류하였다. 이 분파에게는 "트로츠키주의자"라는 딱지가 붙었다.

 

물론 당 지도부는 "원칙적으로는" 농업집단화 정책을 폐기하지 않았다. 단지 몇십 년간 이 정책을 연기시킨 것뿐이었다. 이후 농업인민위원이 된 야코블레프는 1927년 이렇게 적었다: "농촌의 사회주의적 재건은 오직 집단화를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 그러나 집단화는 1년, 2년, 3년 아니 10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달성될 수 없다. 이것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집단농장과 집단촌은 지금은 물론 앞으로도 상당히 오래 개인소유라는 바다에 떠 있는 작은 섬들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사실 당시 농민의 8%만이 집단화되어 있었다.

 

1923년에 수면 위로 떠오른 소위 "총노선"에 대한 당내 투쟁은 1925년에는 치열하고 열정적으로 전개되었다. 공업과 농업의 모든 문제들을 망라한 확대 강령에서 좌익반대파는 이렇게 선언했다: "노동계급 독재를 떠받치는 기둥의 하나인 토지 국유화를 폐기하고 침해하는 모든 정치 경향들에 대해 당은 저항해야 한다. 그리고 이들의 기도를 분쇄해야 한다." 이 문제에서 반대파는 승리했다. 토지 국유화에 대한 직접적 공세는 포기되었다. 그러나 역시 문제는 토지의 소유형태 이상을 내포하고 있었다.

 

"개인소유 농업의 성장을 억제하기 위해 집단농장의 좀더 빠른 성장을 도모해야 한다. 해마다 체계적인 방식으로 집단농장으로 조직되는 빈농들을 지원하기 위해 상당 액수의 예산이 따로 책정되어야 한다. 소규모 농장을 대규모 집단농장으로 바꾸기 위해 협동조합이 운영되어야 한다." 그러나 광범위한 집단화를 주창하는 강령은 이후 유토피아적이라고 끈질기게 비판되었다. 좌익반대파를 축출하기 위해 소집된 제15차 당 대회에서 이후 국가인민위원회 의장이 될 몰로토프는 거듭 이렇게 주장했다: "우리는 광범위한 농민 대중의 집단화에 관한 빈농의 환상에 빠져들면(!) 안된다. 지금 상황에서 농촌의 집단화는 가능하지 않다." 이 발언은 1927년 말에 나왔다. 당시 당 지도부의 농업 정책과 지금 정책은 하늘과 땅 차이이다!

 

1923년부터 1928년까지 당 지도부 구성을 위해 동맹한 스탈린, 몰로토프, 리코프, 톰스키, 부하린 등은 "초공업화(super-industrialization)"와 계획경제를 주장한 좌익반대파에 대해 투쟁했다. 1926년 초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는 반대파로 넘어왔다. 미래 역사가들은 사회주의 정부의 과감한 경제시책을 악의에 찬 불신으로 대했던 이때의 분위기를 적잖이 놀라면서 역사책에 기록할 것이다. 그러나 외부세계의 자극에 의해 공업화는 무계획적으로 급속히 진행되었다. 따라서 모든 경제적 계산은 완전히 무시되었고 이 결과 공업화에 따른 총비용은 엄청난 비율로 증가하였다. 1923년 반대파는 5개년 계획 시행을 지도부에 요구했었다. 그러나 "미지의 세계로 뛰어내리는" 행위에 공포를 느낀 당 지도부의 소부르주아적 감성은 이 요구를 조소했다. 1927년 4월까지만 해도 스탈린은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드니에페르스트로이(Dnieperstroy) 수력발전소를 건설하는 것은 농민이 암소 대신 전축을 사는 것과 같다. 이 의미심장한 비유는 당시 당 지도부의 강령을 집약해서 보여 주었다. 이 당시 전 세계의 부르주아 언론과 이들의 꽁무니를 쫓는 사회민주주의 언론은 당 지도부가 "좌익반대파"의 공업 낭만주의(industrial romanticism)를 공식적으로 비판한 것에 공감을 표했다. 이것은 주목할 만한 현상이었다.

 

당내에서 요란한 토론이 진행되는 동안 농민은 점점 더 대담한 파업으로 공업제품의 부족에 응답하고 있었다. 이들은 곡물을 시장에 내놓지도 않고 파종의 규모를 늘리지도 않았다. 당 지도부의 우익은 리코프, 톰스키, 부하린 이었는데 당시 지도부의 논의를 주도하고 있었다. 이들은 공업의 발전속도를 늦추는 한이 있어도 곡물 가격을 인상시켜 농촌의 자본주의적 경향을 더 확대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정책 기조 하에서 사태를 해결할 유일한 방식은 농업 원자재를 수출하고 이 대금으로 외국의 공산품을 수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방식은 농민경제와 사회주의 공업과의 "연결고리"를 확립하는 대신 쿨락과 세계자본주의 사이와 연결고리를 마련하는 행위였다. 이것을 위해 10월 혁명을 성공시킬 필요는 없었다.

 

1926년 당 협의회에서 좌익반대파를 대표하여 필자는 이렇게 응답했다: "특히 쿨락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시켜 공업화를 가속화시켜야 한다. 이렇게 하면 다량의 공업제품이 싼값으로 농민에게 공급될 수 있다. 이 방식을 통해 노동자와 농민 다수는 이익을 볼 것이다‥‥‥‥ 농촌으로 향하자는 구호는 공업에게 등을 돌리자는 의미가 아니다. 이 구호의 진정한 의미는 공업이 농촌을 향하게 하자는 것이다. 왜냐하면 농촌에게 필요한 것은 국가 주도의 공업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스탈린은 반대파의 "꿈처럼 황당한 계획"에 대해 호통을 쳤다. 공업이 "서둘러 발전되어 농업과 분리되고, 결국 나라의 경제적 축적의 적당한 속도를 파탄시키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당의 결정들은 계속해서 쿨락의 입지를 수동적으로 강화하는 격언들로 반복되었다. "초공업화론자"들을 최종적으로 분쇄하기 위해 1927년 12월에 열린 제15차 당대회는 "국가자본이 대규모 건설공사에 너무 많이 투입되는 위험"을 경고했다. 당시 당 지도부 분파는 반대파의 노선만을 위험요인으로 간주했다.

 

주로 혁명 이전의 기계류로 공장을 가동하고 낡은 도구로 농사를 짓던 소위 회복기가 1927-28년 회계년도에 끝나고 있었다. 앞으로 전진하기 위해서는 대규모의 독립적 공업 건설사업이 진행되어야 했다. 더 이상 어둠 속을 더듬으면서 계획 없이 전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1923년과 1925년 사이에 좌익반대파는 사회주의 공업화의 가능성들을 이미 분석한 후 이렇게 일반적 결론을 내렸었다: 자본가 계급으로부터 상속받은 장비를 다 소모시킨 후 소련의 공업은 사회주의 축적의 기반 하에 자본주의에서는 전적으로 불가능한 고도 성장을 성취할 수 있다. 좌익반대파가 15% 내지 18% 정도로 조심스럽게 성장수치를 예상한 것에 대해 당지도부는 미지의 미래를 알리는 황당한 음악이라고 공개적으로 조소하였다. 당시에는 이것이 "트로츠키주의"에 대한 투쟁의 본질이었다.

 

1927년에 드디어 완성된 5개년 계획의 첫 공식 초안은 구두쇠와 같은 쫀쫀한 계산으로 채워졌다. 공업성장률은 매년 9%에서 4%로 감소되도록 계획되었다. 인구 일인당 소비는 5년 동안 겨우 12%만 증가하도록 계획되었다! 5개년 마지막 해의 국가예산은 국민총소득의 16%에 지나지 않았다. 사회주의를 건설할 의도가 전혀 없었던 차르의 러시아에서도 국가예산이 국민총소득의 18%를 차지했었다! 이 사실은 5개년 계획의 첫 초안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소심하다는 점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이 계획을 입안하는 데 참여했던 공학자들과 경제학자들은 수년 후 외국 세력의 지시에 의해 의식적으로 태업을 했다는 혐의로 엄한 형벌을 받았다. 그들의 계획은 당시 정치국의 "총노선"에 완전히 부응하는 것이었고 상부의 명령으로 작성되었다고 피고인들은 재판 당시 당당하게 증언할 수도 있었다.

 

이제 당내 분파들의 투쟁은 5개년 계획 초안이 제출되는 시점에서 산술적 수치로 표현되었다. 좌익반대파의 강령은 이렇게 주장했다:"10월 혁명의 10주년에 하찮고 완전히 비관적인 계획을 제시하는 것은 사회주의 건설을 반대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부터 1년 후 정치국은 생산을 매년 9% 증가시키는 새로운 5개년 계획을 채택하였다. 결국 "초공업주의론자"의 성장수치에 근접하는 끈질긴 경향이 나타났다. 1년이 지난 후 정부의 계획이 또 한번 근본적으로 변화했을 때 국가계획위원회는 제3차 5개년 계획을 입안하였다. 이 계획은 1925년 좌익반대파의 전망과 아주 근접한 경제성장률을 제시하였다. 이 사태는 모든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하였다.

 

지금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현실에 근거하여 바라보면 소련의 경제정책사는 그 동안 공식적으로 발표된 전설과는 매우 다르다. 불행하게도 웹 부부와 같은 경건한 연구자들은 이 점에 대해 조금의 관심도 없다.

 

2. 급선회: "4년 내에 5개년 계획을 완수하자"와 "완벽한 집단화"

 

개별 농민기업에 대한 우유부단한 태도, 거대 계획에 대한 불신, 최소 경제개발 속도의 옹호, 국제정세에 대한 무관심과 방기 등이 전부 모여 "일국 사회주의" 이론의 핵심이 되었다. 이 이론은 1923년 가을 독일 노동계급의 사회주의 혁명이 패배한지 딱 1년 후 처음으로 스탈린이 제시했다. 공업화를 서두를 필요가 없다, 농민과 불화를 일으킬 필요가 없다, 세계혁명에 의존하지 말자, 그리고 무엇보다 당 관료집단의 권력을 비판으로부터 보호하라! 농민층의 분화는 좌익반대파의 발명품으로 비난되었다. 위에 언급한 야코블레프는 중앙통계국(Caltral Statistical Bureau)을 해체했다. 이 기구의 통계기록이 쿨락의 경제력에 많은 지면을 할애했기 때문에 당 지도부의 미움을 산 것이었다. 한편 당 지도부는 평온하게 이렇게 주장했다: 생산품의 기근은 끝날 때가 되었는데 아직도 질질 끌고 있다, "경제발전의 평온한 속도가 유지되고 있다", 앞으로 곡물은 좀더 "공평하게" 수매될 것이다 등등. 그러나 세력이 강화된 쿨락은 중농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고 도시에 대해 곡물봉쇄를 단행했다. 1928년 1월 소련의 노동계급에게 기근의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역사는 악의에 찬 농담을 할 줄 안다. 쿨락이 혁명의 목을 죄고 있던 바로 이때 좌익반대파 대표들은 감옥에 갇히거나 시베리아 각지로 유형 당했다. 죄목은 쿨락의 유령 앞에서 "공포에 떨었다"는 것이다.

 

정부는 쿨락의 곡물봉쇄가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노골적인 적대감의 표현에 불과한 것처럼 가장했다. 즉 보통의 정치적 동기가 작용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쿨락은 어디서 나타났는가? 그러나 쿨락은 당 지도부의 이런 "관념"에 대해 거의 관심이 없었다. 그가 곡물을 숨긴 이유는 자신에게 제시된 거래조건이 이윤을 가져다주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쿨락은 광범위한 농민층을 자신의 영향력 하에 둘 수 있었다. 쿨락의 태업을 탄압하는 것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사실이 명백했다. 정책을 변경해야 했다. 그러나 당 지도부는 정책 전환에 대해 동요하면서 적지 않은 시간을 허비했다.

 

당시 아직도 정부 수반이었던 리코프는 1928년 7월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개인 농장을 발전시키는 것은 ‥‥‥ 당의 주요한 과업이다." 그러자 스탈린은 그의 발언을 재청하였다: "개인농장은 이미 효용성을 상실했으며 더 이상 이들을 지원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우리 당의 노선과 아무 관련도 없다." 이로부터 1년이 채 안되어 당의 노선은 이 발언들과 아무런 관련이 없어졌다. "완벽한 집단화"의 먼동이 지평선에 떠오르고 있었다.

 

정책 전환은 이전의 정책과 마찬가지로 과학적 방법론에 근거하지 않은 채 역시 경험적으로 그리고 당 지도부 내부의 암투(暗鬪)를 통해 나타났다. 좌익반대파의 강령은 이보다 1년 전에 이미 이렇게 경고했다. "우파와 중앙파는 좌익반대파에 대한 일반적인 적대감에 기초해 연합했다. 좌익반대파가 제거될 경우 두 분파 사이의 투쟁은 반드시 가속화할 것이다." 사태는 예상했던 대로 전개되었다. 두 분파의 지도자들은 흔히 그렇듯이 좌익반대파의 예상이 적중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1928년 10월 19일이 되어야 스탈린은 이렇게 공식 발표했다. "우편향과 중앙위원회 정치국의 우편향에 대한 유화적 태도에 대해 잡담만 늘어놓을 것이 아니라 본격적으로 투쟁할 때가 되었다." 두 분파는 이제 당내에서 자신들의 지지도를 가늠하고 있었다. 민주주의가 억압당한 당은 어두운 소문과 추측으로 살고 있었다. 몇 달 지나지 않아 당의 공식 언론은 언제나 그랬듯이 당황한 빛은 하나도 없이 이렇게 발표했다: 정부수반 리코프는 "소련 정부의 경제적 난관을 투기대상으로 삼았다", 코민테른 의장 부하린은 "자유부르주아지의 끄나풀이었다" ; 전 러시아 노동조합중앙회 의장 톰스키는 애처로운 노동조합 활동가에 불과하다. 리코프, 부하린, 톰스키는 모두 정치국 정회원이었다. 지금까지 좌익반대파에 대한 투쟁은 전부 우파로부터 나왔었다. 이제 부하린은 스탈린을 이렇게 당당히 비난할 수 있었다: 우파에 대한 투쟁에서 빌어먹을 좌익반대파의 강령 일부가 동원되고 있다.

 

어쨌든 정책 전환은 시작되었다. "부자가 되시오"라는 구호와 쿨락의 고통 없는 점진적 성장이 사회주의 건설의 초석이라는 이론은 늦게나마 그러나 그만큼 더욱 단호하게 비난받았다. 이제 공업화는 대세가 되었다. 자기만족적인 정적주의(靜寂主意)는 공포에 질린 호들갑으로 바뀌었다. 레닌이 주창했던, "따라잡고 추월하시오"라는 반쯤 잊혀졌던 구호는 "가능하면 빠른 시간 내에"라는 어구가 붙여지면서 완벽한 문장이 되었다. 당 대회의 원칙으로 이미 확정된 5개년 계획은 목표를 최저 수준으로 잡고 있었다. 이제 이것은 분쇄된 좌익반대파 강령으로부터 전부 빌려온 새로운 계획으로 대체되었다. 어제만 하여도 드니에페르스트로이 발전소 건설은 전축에 비유되었었는데 이제는 가장 집중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계획의 일부가 성공적으로 완수되자 새로운 구호가 제출되었다: "5개년 계획을 4년만에 달성하자." 계획경제의 능력에 대해 깜짝 놀라버린 경험주의자들은 이제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결심했다. 인간의 역사에서 종종 나타나듯이 기회주의는 이제 모험주의로 바뀌었다. 1923년부터 1928년까지 정치국은 부하린의 "거북이 걸음" 철학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런데 이제는 매년 20% 내지 30%의 경제성장 목표치를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수용했다. 그리고 부분적이고 일시적인 성과를 당연히 완수해야 할 기준으로 설정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각 분야의 조건적인 상호관계를 인식하지 못했다. 재정적자는 지폐의 남발을 통해 메워졌다. 제1차 5개년 계획 기간 동안 유통된 은행지폐의 규모는17억 루블에서 55억 루블로 불어났다. 그리고 제2차 5개년 계획의 시작 시점에는 84억 루블로 증가했다. 강요된 공업화로 참을 수 없는 고통을 겪게 된 대중에게 당 지도부는 어떠한 정치적 설득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금화 1루블당 미화 5달러로 자동적으로 계산된 이론상의 화폐 액면가도 무시했다. 신경제정책이 시작될 때는 기초가 튼튼했던 통화체제는 이제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계획 완수 뿐 아니라 정권 유지에도 주요한 위험요소는 농민층이었다.

 

1928년 2월 15일 소련 인민은 『프라우다』의 사설을 통해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제 농촌은 그 순간까지 당국에 의해 묘사된 모습이 아니라 축출된 좌익반대파가 제시한 모습을 띠게 되었다. 어제까지도 쿨락의 존재를 부정했던 언론은 오늘 갑자기 상부 지시에 따라 쿨락을 농촌 뿐 아니라 당내에서도 발견했다. 정교한 기계류를 소유하고 고용노동을 부리고 정부로부터 수십만 푸드(역자 주: 소련의 중량단위로 16.38kg.)의 곡물을 숨기면서 "트로츠키주의" 정책을 끊임없이 비난했던 쿨락이 이제는 공산당 세포들을 아주 빈번히 장악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쿨락이 지방 비서직을 장악하여 빈농과 농업노동자의 당원 가입을 금지한 방식들에 대해서 언론은 경쟁하듯이 대서특필했다. 과거의 모든 조건들은 이제 그 성격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더하기와 빼기 부호의 위치가 서로 바뀌었다.

 

도시인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서는 즉시 쿨락의 곡물을 빼앗는 것이 필요했다. 이것은 오직 강제력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쿨락 뿐 아니라 중농의 비축된 곡물을 강탈하는 행위는 공식적으로 "특별조치"라고 불렸다. 이 말은 내일이면 만사가 과거처럼 평온해질 것이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농민은 이렇게 겉만 번지르르한 말을 믿지 않았다. 이들은 옳았다. 곡물을 강제로 징발 당하자 쿨락은 식량 증산의 동기를 가질 수 없었다. 고용 농업노동자들과 빈농들은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다. 농업은 다시 진퇴양난에 빠졌다. 이와 함께 국가의 존립이 다시 위태로워졌다. 이 상황에서 모든 수단을 써서라도 "총노선"을 개선할 필요가 있었다.

 

농민의 개별 영농을 여전히 주로 강조하면서도 스탈린과 몰로토프는 소비에트농장과 집단농장이 더욱 빨리 확립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급한 식량 확보 문제 때문에 노동자 무장대가 농촌에 파견되는 것을 그만둘 수 없었기 때문에 개별 영농에 대한 시책은 공중에 붕 떠 버렸다. 결국 집단화로 "퇴행"하는 것이 필요했다. 곡물 징발을 위한 일시적 "특별조치"는 예상 밖으로 "쿨락 계급을 일소"하는 시책으로 발전했다. 식량배급보다 횟수가 더 빈번한 정부의 모순적 지시들은 정부가 농민문제에 대해 5개년 계획은 고사하고 5개월 계획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증명했다. 식량위기에 의해 강요된 새로운 계획에 의하면 5년 후에 집단농장은 농민 토지의 70%를 차지하기로 계획되었다. 지난 10년 동안 농업집단화 작업이 농민의 1%에게도 미치지 못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새로운 계획의 규모는 엄청났다. 그러나 5개년 계획의 중간지점에서 집단화는 애초의 목표를 훨씬 밑돌았다. 1929년 11월 스탈린은 자신의 정책적 동요를 청산하면서 개별 영농은 끝났다고 선언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전국의 촌락, 군, 주에까지 전부" 집단농장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2년 전까지만 해도 야코블레프는 집단농장은 상당히 오랜 기간 "농민 개인소유라는 바다에 떠 있는 섬"에 불과할 것이라고 주장했었다. 그러던 그가 이제 농업인민위원이 되어 "쿨락 계급을 일소"하고 "가능한 한 일찍" 집단화를 완료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925년 집단농장의 비율은 1.7%에서 3.9%로 증가했다. 그리고 1930년에는 23.6%, 1931년에는 52.7% 1932년에는 61.5%로 증가했다.

 

자유주의자들은 농업 집단화가 전체적으로 노골적인 강제력에 의해서 달성되었다고 허튼 소리를 늘어놓는다. 현재 이 주장을 반복할 만큼 어리석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과거에 농민은 토지를 소유하기 위한 투쟁에서 한때는 지주에 대해서 봉기를 일으켰고 또 한때는 미경작 지역에 농장을 일구었다. 그리고 또 어떤 때에는 좁은 토지를 소유한 고통의 대가로 하늘 나라를 약속한 온갖 종파들에게 서둘러 귀의하였다. 대농장을 몰수하고 토지를 잘게 쪼갠 후에 이제 다시 이 조그만 땅뙈기를 커다란 농지로 통합하는 것은 농민, 농업, 사회 전체에게 생사가 걸린 중대한 문제였다. 그러나 이 일반적인 역사적 고찰에 의해 농민문제가 해결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집단화 성공의 진정한 가능성은 농촌 위기의 깊이나 정부의 행정적 열정이 아니라 생산자원에 따라 주로 결정된다. 즉 대규모 농업에 필요한 기계를 제공해줄 공업의 능력에 달린 문제이다. 이 물질적 조건을 당시 소련은 구비하지 못했다. 집단농장은 주로 소농경영에만 적합한 농기구로 갖추어졌다. 이 상황에서 무리하게 급히 추진된 집단화는 경제적 모험주의였다.

 

자신이 추진한 정책 전환의 급진적 성격을 나중에야 제대로 인식한 정부는 새로운 정책에 대비한 기초적인 정치적 준비가 없었고 준비를 할 수도 없었다. 농민대중은 말할 것도 없고 지방의 권력기관들조차 그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기 소유의 가축과 재산이 국가로 접수될 것이라는 소문을 듣자 농민들은 몸이 달아올랐다. 이 소문은 진실과 거리가 멀지도 않았다. 좌익반대파를 희화화하면서 관료집단은 "농촌 마을을 약탈하였다." 농민의 눈에는 집단화는 주로 자기 재산을 접수하는 형태로 진행되는 것 같았다. 정부는 말, 소, 양, 돼지 뿐 아니라 새로 부화된 병아리까지 집단화하였다. 어느 외국인의 관찰에 따르면, "정부는 어린애 발에서 모피신발까지 벗겨내면서 쿨락 일소 정책을 밀고 나갔다." 이러자 농민은 헐값에 소를 팔거나 고기와 가죽을 건지기 위해 가축을 도살했다. 이 현상은 유행병처럼 퍼져 나갔다.

 

1930년 1월 모스크바 당 대회에서 중앙위원 안드레예프는 집단화에 대해서 양면 그림을 제시했다: 한편으로는 소련 전역에서 강력하게 진행되고 있는 집단화운동은 "이 운동을 가로막고 있는 모든 장애물을 쓸어버릴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농민은 자신의 농기구와 가축 그리고 종자까지 집단농장에 들어오기 전에 약탈적으로 파는 행위는 "이제 정말 위기 수준에 도달했다." 이 두 일반화는 아무리 서로 모순된다 해도 부정적인 측면에서 집단화가 절망의 유행병을 확산시켰다는 사실을 올바르게 보여주고 있다. 위에 언급한 외국인 관찰자는 다시 이렇게 말한다: "완벽한 집단화는 마치 3년 전쟁이 스치고 지나간 것처럼 국가경제를 거의 유례가 없을 정도로 멸망까지 몰고 갔다." 어제까지만 해도 2500만 농민의 이기심은 늙은 농부의 낡은 말(馬)과 같았지만 여전히 하나의 세력으로 존재하면서 농업의 유일한 원동력이 되었었다. 이것을 관료집단은 한꺼번에 제거해 버리려 했다. 그것도 농업장비, 농업 지식, 농민의 지지 등 모든 것을 결여한 2만여 집단농장 행정사무실의 지시를 통해 일이 이루어졌다. 이 모험주의의 끔찍한 결과는 곧 모습을 드러냈으며 오랜 세월에 걸쳐 후유증을 남겼다. 1930년 835억 파운드에 달했던 곡물수확량은 다음 2년 동안 700억 파운드 이하로 떨어졌다. 이 차이는 그 자체로 보면 큰 재앙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 차이는 도시를 보통의 기근 수준으로라도 유지시킬 만큼의 곡물량이었다. 기술영농 분야에서는 상황이 더 나빴다. 집단화가 있기 바로 전에 설탕 생산량은 거의 109억 파운드에 달했다. 그런데 완벽한 집단화가 절정에 달하고 있을 때 사탕무 부족으로 이 수치는 48억 파운드로 떨어졌다. 즉 생산량이 과거의 반 수준에 그친 것이다. 그러나 가장 커다란 타격은 동물 보유에서 나타났다. 말의 수는 1929년의 3460만 두에서 1934년의 1560만 두로 55%나 감소했다. 뿔이 달린 소의 경우 3070만 두에서 1950만 두로 40%나 떨어졌다. 그리고 돼지의 수는 55%, 양의 수는 66% 감소했다. 기아, 추위, 전염병, 정부의 탄압 등에 의해 희생된 사람의 수는 불행하게 가축의 도살보다 부정확하게 집계되었지만 수백만에 이르렀다. 이 엄청난 손실에 대한 책임은 집단화 자체가 아니라 집단화 시행 과정에서 사용된 맹목적이고 폭력적일 모험주의에 있었다. 관료집단은 아무 것도 예상하지 못했다. 집단농장의 규약은 농민의 개인적 이해와 농장의 복지를 결합시키기 위해 작성되었는데 집단화 저항 촌락들이 잔인하게 황폐화된 이후에야 마침내 공표 되었다.

 

농업집단화 정책의 강제적인 성격은 1923∼28년 정책의 결과를 하루빨리 청산하고 새로운 정책을 통해 어느 정도의 위안을 찾으려는 필요에 의해 등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단화는 좀더 합리적 속도와 좀더 치밀한 형태로 진행될 수도 있었고 실제 그랬어야 했다. 권력과 산업을 한 손에 장악한 관료집단은 나라 전체를 재앙의 근처까지 인도하지 않고도 집단화 과정을 진척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나라의 물질적 ·도덕적 자원에 더욱 조응하는 속도를 채택할 수도 있었다. 1930년 "좌익반대파" 망명 기관지는 이렇게 주장했다: "소련 국내외 상황이 좋을 경우에 농업의 물질적·기술적 조건은 10년 내지 15년의 기간 동안 철저하게 변모되어 집단화에 필요한 생산기반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기간에 소련의 정권을 타도할 수 있는 기회는 한번 이상 주어질 것이다."

 

이 경고는 과장이 아니었다. 정권 전복의 숨결은 완벽한 집단화운동 기간에 10월 혁명의 영토에 가장 가까이 다가갔다. 불만, 불신, 원한이 나라 전체를 갉아먹고 있었다. 통화의 혼란, 안정되었기 때문에 ".관습처럼 자리잡았던" 자유시장 가격의 등귀, 곡물-고기-우유 등 식량에 대한 국가와 농민간 유사 상거래의 징발로의 전환, 집단적 소유 시설에 대한 대중의 약탈과 약탈의 광범위한 은폐에 대해 소련 당국이 벌인 목숨을 건 투쟁, 쿨락의 파괴행위에 대한 당의 순전히 군사적 동원, 식량카드와 기아적 배급제의 복귀, 여권제도의 부활 등은 소련 전역에 걸쳐 이미 오래 전에 끝난 내전 분위기를 부활시켰다. 도시의 공장에 대한 식량과 원자재의 공급은 계절이 바뀔수록 악화되기만 하였다. 참을 수 없이 열악한 작업환경은 노동력 이동, 꾀병, 부주의한 작업, 기계의 고장, 높은 비율의 불량품 생산 그리고 일반적으로 낮은 제품의 품질 등을 가져왔다. 1931년 평균노동생산성은 11.7% 감소했다. 소련 언론에 소개된 몰로토프의 우발적 시인에 의하면 1332년 공업생산력은 계획 목표인 26% 증가에 비해 겨우 8.5% 증가에 그쳤다. 그런데 이 시인이 있은 직후 전세계는 5개년 계획이 4년 3개월만에 완료되었다는 소식을 틀림없이 접했다. 그러나 이것은 통계수치와 여론을 조작하는 관료집단의 냉소주의가 무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할 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주요한 문제가 아니다. 5개년 계획의 운명이 아니라 소련의 체제 운명이 진짜 문제였다.

 

그러나 소련은 이 위기에서 살아남았다.

 

그러나 이 사실은 대중 속에 깊이 뿌리내린 체제 자체의 장점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리고 소련 외부의 상황도 마찬가지로 유리하였다. 농촌의 경제적 혼란과 내전 와중에서 소련은 외부의 적들을 사방에 두고 근본적으로 마비되어 있었다. 농민의 불만이 나라를 뒤덮고 있었다. 불신과 동요로 관료기구와 핵심 간부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져 있었다. 이때 소련의 동쪽이나 서쪽에서 적의 공격이 있었다면 이 나라는 치명적 손상을 입었을 것이다.

 

다행스럽게 무역과 공업 위기의 첫 몇 년간 자본주의 세계는 놀란 표정으로 소련의 상황이 악화되기만 기다렸다. 어느 누구도 전쟁을 일으킬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감히 전쟁을 일으킬 생각을 하지 못했다. 더욱이 어떤 적대국도 소련 내부의 심각한 사회적 격동의 정도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사실 이 사회적 격동은 "총노선"을 기념하여 연주된 어용 음악의 굉음 한가운데에서도 소비에트 연방을 뒤흔들고 있었다.

 

* * *

 

지금까지 소련 경제사에 대한 아주 간략한 개괄을 시도했다. 이 시도는 노동자국가의 실제 발전과정이 성과의 안정된 축적이라는 목가적 그림과 얼마나 거리가 먼지를 보여준다. 과거의 위기로부터 미래에 대한 중요한 징후를 끄집어낼 수 있다. 이외에도 소련 정부의 경제정책과 좌충우돌을 역사적으로 개괄하는 것을 통해 인위적으로 강요된 개인숭배를 분쇄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숭배는 실재와 가식의 성과가 지도자의 출중한 능력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노동계급 혁명으로 수립된 사회주의 소유체제야말로 그나마 존재하는 성과의 원천이다.

 

자본주의에 대비된 새로운 사회체제의 객관적 우월성은 물론 지도자들의 통치방식에서도 저절로 드러난다. 그러나 이 통치방식은 또한 소련의 경제적·문화적 후진성도 동일하게 반영한다. 더욱이 관료집단의 형성 조건인 소부르주아적 편협성도 반영한다. 그러나 이 결론을 통해 소련 지도부의 정책이 부차적으로만 중요하다고 추론하는 것은 아주 서투른 오류이다. 나라 전체의 운명이 소련의 경우만큼 정부의 손에 집중되어있는 체제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 자본가 개인의 성공과 실패는 전체는 아니지만 상당히 그리고 때때로 결정적으로 개인의 자질에 달려 있다. 변화된 상황을 감안해도 자본가가 자신의 기업과 맺는 관계를 소련 정부는 국가경제 전체에 대해 맺고 있다. 국가경제의 중앙집중화된 성격 때문에 국가권력은 엄청난 중요성을 부여받는다. 그러나 바로 이 때문에 정부의 정책은 성과의 요약이나 순수 통계수치가 아니라 이 성과들을 달성하는 데 동원된 의식적 예측과 계획된 지도력의 구체적인 역할에 비추어 판단되어야 한다.

 

소련 정부가 좌충우돌의 정책을 취한 이유는 상황의 객관적 모순 뿐 아니라 이 모순을 제때에 이해하고 이것을 사전에 예방할 지도력의 부족 때문이다. 당 지도부의 오류를 회계장부의 차원에서 정확히 평가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 좌충우돌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규명하면 당 지도부가 총경비의 측면에서 소련 경제에 엄청난 부담을 가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론적 내용이 가장 빈약하고 오류를 가장 많이 저지른 분파가 다른 분파들을 제치고 무제한 권력을 손에 넣게 된 이유와 방법은 이성을 통해 역사를 판단할 경우 이해될 수 없을 것이다. 앞으로 이 저서에서 전개될 더 많은 분석을 통해 이 문제에 대한 열쇠가 주어질 것이다. 동시에 전제적 지도부의 관료적 방식이 경제적·문화적 요구와 어떻게 더욱 날카로운 모순을 일으킬 것인지 그리고 어떤 필연에 의해 새로운 위기와 불안이 소련의 앞날에 돌출할 것인지를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적" 관료집단이라는 이중적 현상을 다루기 전에 이 문제에 답해야 한다: 지금까지 소련 체제가 달성한 성공의 순 이득은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가?; 소련에서 정말 사회주의가 달성되었는가? 아니면 더 조심스러운 질문을 이렇게 던질 수도 있다: 특정 발전단계에서 자본주의 사회는 그 동안 이룬 성과를 통해 농노제나 봉건제의 복귀를 완벽하게 봉쇄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이룩된 소련의 경제적·문화적 성과는 자본주의 복귀라는 위험을 확실히 봉쇄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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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사회주의 체제와 국가

 

1. 이행기 체제

 

소련 정부의 주장에 의하면 사회주의 체제는 소련에서 이미 실현되었다. 그런데 정말 사회주의 체제가 지구상에서 실현되었는가? 아니면 그 동안 달성된 경제적·정치적 성과에 의해 세계 정세와는 무관하게 소련에서 사회주의 체제 실현을 위한 조건이라도 최소한 마련되었는가? 앞서 이미 비판적으로 평가된 소련 경제의 주요 지표들이 이 문제에 대한 올바른 해답의 단초를 마련할 것이다. 그러나 이 해답을 구하기 전에 미리 이 문제에 대한 이론적 기준 점들을 점검하는 것이 필요하다.

 

마르크스주의는 기술 발전을 진보의 기본 도약대로 간주하고 있으며 생산력의 동학(動學)에 기초하여 공산주의 강령을 제시하고 있다. 우주의 어떤 재앙이 다가와 가까운 미래에 지구가 파괴된다고 가정하면 다른 많은 것들과 함께 당연히 공산주의적 전망도 포기해야 한다. 그러나 이 예외적 상황을 제외한다면 기술, 생산력, 문화의 발전에 한계를 설정하는 것은 과학적 근거가 전혀 없다. 마르크스주의는 인류 사회의 진보에 대한 낙관으로 가득한데 이것만으로도 종교와 화해할 수 없이 대립하고 있다.

 

생산적 노동이 인간에게 더 이상 부담이 되지 않으며 어떠한 자극이 없어도 생산적 노동이 인간 본성에 따라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정도로 높은 인간의 경제력 발전수준, 이것이 공산주의의 물질적 전제조건이다. 따라서 인간생활에 필요한 재화는 계속해서 풍부하여 부유한 가정이나 "수준이 있는" 하숙집의 경우와 같이 어떠한 통제도 없이 인간의 욕구가 충족될 것이다. 오직 교육, 습관, 사회적 여론에 대한 통제만이 계속 필요할 것이다. 솔직히 말해 진정 이렇게 소박한 전망을 "유토피아"로 간주하는 사람은 머리가 참으로 둔하다고 할 것이다.

 

자본주의는 선진 과학기술과 노동계급을 창조하여 사회주의혁명의 조건과 동력을 마련했다. 그러나 자본주의 뒤에 바로 공산주의가 이어지지는 않는다.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물질적·문화적 유산만을 가지고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공산주의로 가는 첫걸음인 노동자국가에서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 즉 각자가 일할 수 있고 일하기 원하는 정도에 따라 노동을 허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더욱이 일의 많고 적음과 무관하게 "각자의 필요에 따라" 모든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도 없다. 공산주의를 달성할 정도로 생산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우선 임금이라는 관습에 의존할 필요가 있다. 즉 개개인 노동의 질과 양에 비례하여 재화를 분배해야 한다.

 

마르크스는 새로운 사회를 향한 이 첫 단계를 "공산주의의 가장 낮은 단계"라고 불렀다. 그리고 결핍이라는 마지막 유령과 함께 물질적 불평등이 사라지는 공산주의의 가장 높은 단계와 이 단계를 대비시켰다. 소련당국은 현재 공식적으로 이렇게 선언하고 있다: "물론 우리는 완벽한 공산주의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공산주의의 가장 낮은 단계인 사회주의는 이미 달성되었다." 그리고 이 선언을 증명하기 위해 공업의 국가 관리, 농업의 집단화, 상업부문의 국영기업과 협동조합을 증거로 제시한다. 언뜻 보면 이 주장은 선험적인 따라서 가설적인 마르크스 이론과 일치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달성된 노동생산성과 무관하게 소유형태만 가지고는 이 문제가 완전히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이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견해이다. 마르크스에게 공산주의의 가장 낮은 단계란 처음부터 경제발전에서 가장 발전한 자본주의보다도 높은 수준에 도달한 사회를 의미했다. 이론적으로는 이 논리에 허점이 없다. 왜냐하면 최초의 낮은 단계에서도 세계적 차원에서 공산주의는 자본주의보다 더 발전한 체제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프랑스인들이 사회주의 혁명을 시작하고 독일인들이 이것을 계속 발전시키고 영국인들이 이것을 완성할 것이라고 마르크스는 예견했다. 그에 의하면 러시아인들은 혁명 대열의 한참 뒤에서 따라올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이 이론적 순서는 실제 사실에 의해 뒤집어졌다. 그의 역사적 보편 원리를 특정 발전단계를 경과하고 있는 소련에 기계적으로 적용시키려는 사람들은 모두 가망 없는 모순에 빠진다.

 

러시아는 자본주의의 가장 강한 고리이기는커녕 가장 약한 고리였다. 현재 소련은 세계의 경제수준을 능가하고 있기는커녕 자본주의 국가들을 따라잡으려고 노력하고 있을 뿐이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당대에 가장 발전한 자본주의의 생산력을 사회화시킨 기초에서 형성될 사회가 공산주의의 가장 낮은 단계 즉 사회주의 사회이다. 그렇다면 소련은 명백히 사회주의 사회가 아니다. 왜냐하면 소련은 자본주의 국가들보다 기술, 문화, 재화의 측면에서 상당히 뒤떨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 소련이 보여주고 있는 모든 모순적 요소들을 인정할 경우 이 체제는 사회주의가 아니다. 다만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예비적 체제(preparatory regime)로 보는 것이 더 진실에 가깝다.

 

용어를 정확히 사용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 현학자의 허세인 것은 아니다. 결국 모든 사회체제의 힘과 안정성은 이 체제의 상대적 노동생산성에 달려 있다. 자본주의보다 뛰어난 기술 수준을 보유한 사회주의 경제체제는 사회주의적 발전을 확실히 보장받을 것이다. 즉 자동적으로 사회주의 발전의 길을 걸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소련 경제는 그렇지 못하다. 소련의 현 상태를 속물적으로 옹호하는 자들 대부분은 대개 이렇게 논리를 전개한다: "현재 소련은 사회주의 사회가 아니다. 그러나 이렇게 인정하더라도 지금의 기반으로 생산력이 더 발전하면 조만간 사회주의가 완전히 승리할 것이다." 즉 소련이 사회주의를 성취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 엉터리 주장에 대해 왈가왈부할 필요가 있을까? 언뜻 보기에 이 논리는 승승장구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주장은 사실 대단히 피상적이다. 역사를 논할 때 시간은 부차적 요인이 결코 될 수 없다. 정치에서 현재시제와 미래시제를 혼동하는 것은 문법상 혼동보다 훨씬 위험하다. 시드니 웹과 같은 속류 진화론자들에게 진화는 꾸준한 축적과 계속적 "개선"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사실이 아니다. 진화는 양질전화, 위기, 도약, 후퇴로 점철되어 있다. 소련은 생산과 분배의 안정을 확보한 사회주의 첫 단계에 결코 도달하지 못했다. 이 중요한 사실 때문에 소련의 발전은 순조롭게 진행되기보다는 모순에 가득 찰 것이다. 경제적 모순은 사회갈등을 유발하고 이것은 다시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생산력 증대를 기다려 주지 않은 채 자기의 길을 간다. 이것은 쿨락의 경우를 통해 진실로 밝혀졌다. 쿨락은 사회주의의 진화적 "성장"을 원치 않았다. 관료집단과 그 이론가들을 놀라게 만들면서 새로운 보완적 혁명을 요구했다. 그러면 권력과 부를 한꺼번에 쥐고 있으면서 득의만면한 관료집단이 사회주의의 평화적 성장을 원할까? 이 점에 대해서는 확실히 많은 의문이 인정될 수 있다. 어쨌든 관료집단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는 것은 경솔할 것이다. 다음 3년 , 5년 또는 10년간 소련의 경제적 모순과 사회적 갈등이 진행할 방향에 대해 최종적으로 철회할 수 없이 단정짓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일국적 차원이 아니라 국제적 차원에서 살아 움직이는 사회 세력들간의 투쟁에 달려 있다. 따라서 매 단계마다 실제 관계들과 경향들의 연관성과 계속적 상호작용을 구체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필요하다.

 

2. 강령과 현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사상을 계승한 레닌은 노동계급 혁명의 첫 번째 두드러진 특징을 이렇게 보았다: 약탈자의 생산수단을 몰수했으므로 이 혁명은 인민 위에 군림하는 관료기구 특히 경찰과 상비군을 쓸어 없애버릴 것이다. 그는 1917년 혁명으로 정치권력을 장악하기 두 달 전에 이렇게 말했다: "노동계급에게는 국가가 필요하다. 모든 기회주의자들도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노동계급에게는 오직 사멸해 가는 국가(dying state) 즉, 즉시 사멸하기 시작하고 즉시 사멸할 수밖에 없는 국가만이 필요하다. 기회주의자들은 이 진실을 덧붙이는 것을 잊어먹는다."(『국가와 혁명』) 이 비판은 당시 러시아의 멘세비키, 영국의 페이비언 사회주의자 (Fabian socialist) 등 개량주의자들에게 향해졌다. 레닌의 이 비판은 지금 배가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사멸"할 의사가 전혀 없는 관료 국가를 숭배하면서 소련에 아첨하는 자들에게 향하고 있다.

 

격심한 사회적 갈등이 "순화되고", "조정되고", "통제되는" 것이 필요할 때마다 사회는 항상 특권층, 유산자 그리고 관료집단의 이익을 위해 관료집단을 요구한다. 따라서 아무리 민주적인 부르주아 혁명도 관료기구를 강화시키고 완성시켰다.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 "관료사회와 상비군은 부르주아 사회의 `기생충'이다. 이 기생충은 사회를 찢어 해치는 내부 모순에 의해 탄생되지만 살아 있는 숨구멍을 막는 데만 소용이 있는 기생충이다."

 

1917년 정치권력의 장악이 볼셰비키당에게 실제 문제로 대두되었을 때부터 레닌은 이 "기생충"을 일소하는 방안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했다. 그는 이 생각들을 『국가와 혁명』 전체에 걸쳐 설명하고 반복하고 있다. 착취계급이 타도된 후 노동계급은 낡은 관료기구를 쓸어버리고 대신 고용인과 노동자로 구성된 기구를 창조할 것이다. 그리고 이 기구는 이들이 관료화되는 것을 막을 조치들을 취하기 시작할 것이다. 이 조치들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의해 상세히 분석되었다: (1) 언제든지 선거와 선출자의 소환이 가능해야 한다; (2) 관리들은 노동자와 같은 수준의 봉급을 받는다; (3) 사회 성원 모두가 사회통제와 감독 기능을 수행하여 모두가 잠시 '관료'가 되어 어느 누구도 오랫동안 자리를 차지하는 '관료'가 되지 않을 체제로 즉시 이행해야 한다. 레닌이 10년 후에나 제기될 문제들을 다루고 있었다고 생각하면 오류이다. 이것들은 "노동계급 혁명을 완수한 직후 바로 시행해야 하는" 첫 조치들이었다.

 

노동계급 독재하의 국가에 대한 이같이 과감한 견해는 볼셰비키당이 정치권력을 장악한 1년 6개월 후에 볼셰비키 당강령의 형태로 완성되었다. 특히 군대에 대한 조항도 여기에 포함된다. 강력한 그러나 관료가 없는 국가, 무장력은 있으나 사무라이가 없는 군대체제! 군대와 국가관료기구는 국방의 임무를 위해서가 아니라 사회의 계급구조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며 이 계급구조가 국방 조직에 전이된 것에 불과하다. 군대는 사회관계의 모사에 불과하다. 물론 외부의 위험에 대한 투쟁은 노동자국가 뿐 아니라 다른 국가에도 전문화된 군대기구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노동자국가에게는 특권을 가진 장교집단이 필요하지 않다. 볼셰비키 당강령은 상비군을 민병대로 대체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따라서 노동계급 독재하의 국가는 인민의 대다수를 억압하는 특별한 기구라는 전통적 의미를 상실한다. 무기와 함께 물리력은 소비에트와 같은 노동자 조직으로 즉시 그리고 직접적으로 이관된다. 노동계급 독재가 시행되는 첫날부터 관료기구인 국가는 사멸을 시작한다. 바로 이것이 볼셰비키 당강령의 진짜 목소리이다. 그리고 이 목소리는 아직도 죽지 않았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이 목소리는 거대한 무덤에 있는 망령의 목소리와 같이 아득한 옛날의 목소리처럼 느껴진다.

 

현재 소련의 국가 성격을 어떻게 보든 의심할 수 없는 한 가지 사실이 있다: 존재한 지 20년이 다 된 시점에 소련의 국가는 사멸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사멸"을 시작하지도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이 국가기구는 유례없는 끔찍한 강제기구로 변했다. 관료집단은 대중에게 자리를 양도하면서 사라진 것이 아니라 대중을 지배하여 대중이 통제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군대는 민병대에 자리를 내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원수들을 정점으로 한 특권 장교집단을 낳았다. 반면 "노동계급 독재의 무기를 든 수호자"인 인민에게는 현재 비폭발성 무기 소지도 금지되어 있다. 아무리 상상의 날개를 펼쳐도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의 노동자국가 개념과 현재 스탈린이 지배하는 국가는 하늘과 땅 차이이다. 레닌의 저작들은 물론 검열관의 발췌와 왜곡을 통해 계속 발행되고 있다. 현재 소련 지도부와 그 이론적 대변자들은 당강령과 현실 사이의 놀라운 차이를 가져온 원인들을 연구하기는커녕 문제도 삼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들을 대신해서 우리가 문제를 제기해 보자.

 

3. 노동자국가의 이중적 성격

 

노동계급 독재는 자본주의 사회와 사회주의 사회를 이어주는 교량이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이 체제는 일시적이다. 노동계급 독재를 실현하는 국가의 우발적이면서 아주 핵심적인 임무는 자신의 해체를 준비하는 것이다. 이 "우발적" 임무를 실현하는 정도는 자신의 핵심적 임무를 실현하는 성공의 척도라고 말할 수 있다. 즉 계급이 없고 물질적 모순이 없는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임무의 내용이다. 관료화와 사회 평화는 서로 반비례 관계에 있다.

 

뒤링(Duehring)과의 유명한 논쟁에서 엥겔스는 이렇게 말했다: "계급지배 그리고 생산의 무계획성으로 야기되는 개인적 생존투쟁이 없어지고 이것들과 함께 나타났던 모든 분쟁과 잔악한 현상들이 없어지면 이때부터는 억압할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특별한 억압도구인 국가도 필요 없게 될 것이다." 속물들은 경찰기구가 영원히 존재하는 제도인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인간이 철저하게 자연을 통제하여 물질적 곤란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때 인민을 억압하는 경찰은 사라진다. 국가가 사라지기 위해서는 "계급지배와 개인적 생존투쟁"이 사라져야 한다. 엥겔스는 이 두 가지 조건을 분리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왜냐하면 사회체제를 변화시키는 전망을 갖게 되면 몇십 년의 세월 정도는 아주 짧은 시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혁명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는 세대에게는 전혀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생산의 자본주의적 무계획성이 개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가져온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곤란한 점이 있다. 생산수단의 사회화는 자동적으로 "개인적 생존투쟁"을 제거하지 못한다.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가장 발전한 자본주의 사회인 미국에 사회주의 국가가 성립되더라도 모든 사람에게 원하는 만큼의 재화를 즉시 제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모든 사람들에게 가능한 한 많은 재화를 생산하도록 독려할 수밖에 없다. 이 상황에서 독려하는 역할은 자연스럽게 국가의 몫이 된다. 그리고 이 상황은 다시 자본주의에서 확립된 임금노동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물론 다양한 상황에 따라 사정은 달라질 수 있다. 이 의미를 마르크스는 1875년에 이렇게 표현했다: "부르주아 법은 ‥‥‥ 오랜 분만의 고통을 겪은 후 자본주의의 태내에서 탄생하는 공산주의 체제의 초기단계에서 불가피하게 존재한다. 경제체제와 이것에 의해 조건 지워지는 사회의 문화적 발전을 법은 결코 초월할 수 없다."

 

마르크스의 이 주목할 만한 견해를 설명하면서 레닌은 이렇게 덧붙였다: "소비재 분배와 관련해 존재하는 부르주아 법은 당연히 부르주아 국가를 전제로 한다. 왜냐하면 규범의 준수를 강제할 수 있는 기구가 없이는 법은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산주의 체제하에서는 당분간 부르주아 법이 존재할 뿐 아니라 부르주아 계급이 없는 부르주아 국가도 존재한다!" 현재 소련의 공식 이론가들에 의해서 완전히 무시되고 있는 이 매우 의미 있는 결론은 소련의 국가 성격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소련이라는 국가를 이해하는 첫걸음을 내딛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사회주의 건설의 임무를 맡고 있는 국가가 강제력을 동원하여 불평등을 옹호할 수밖에 없다면 즉 소수의 물질적 특권을 옹호할 수밖에 없다면 이 국가는 부르주아 계급이 없는 "부르주아" 국가일 수밖에 없다. 이 주장에는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칭찬이나 비난이 전혀 없다. 다만 사물의 성격을 있는 그대로 부르는 것뿐이다.

 

부르주아 분배 규범은 물질적 생산력의 성장을 촉진하면서 사회주의 건설의 목적에 봉사해야 한다. 사회주의 국가는 시작부터 곧바로 이중적인 성격을 띤다: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형태를 옹호하는 한 사회주의 국가이다; 그러나 생필품의 분배가 자본주의 가치척도에 따라 이루어지고 이 모든 결과들을 바탕으로 국가를 운영하는 한 부르주아 국가이다.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이 모순적 성격 규정은 교조주의자들과 현학자들을 공포에 빠뜨릴 지도 모른다. 그러나 필자는 이들을 위로할 수 있을 뿐 현실을 바꿀 수는 없다. 노동자국가의 최종적 성격은 노동자국가 내부의 부르주아 경향과 사회주의 경향 사이의 변화하는 관계에 의해 결정될 수밖에 없다. 후자가 승리하면 경찰기구는 사실상 최종적으로 없어진다. 즉 국가가 자치 사회 내로 해소될 것이다. 소련의 관료집단이 그 자체로서 그리고 하나의 징후로서 제기하는 문제가 얼마나 의미심장한 가는 이 측면을 보더라도 충분히 이해가 갈 것이다!

 

레닌은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분석을 끝까지 진전시키지는 못했지만 미래 사회주의 건설의 문제들이 어디서 기인하는지를 드러내었다. 당대에 그는 이 문제들과 직접 씨름을 해야만 했다. 그가 이 분석에 성공한 이유는 바로 그의 지적 특성에 따라 마르크스의 개념을 지극히 날카로운 형태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부르주아 계급이 없는 부르주아국가"는 진정한 소비에트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없음이 증명되었다. 국가의 이중적 기능은 국가의 구조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경험은 이론이 명확하게 예상할 수 없는 일을 밝혀 주었다. 부르주아 반혁명으로부터 사회화된 소유형태를 방어하기 위해서는 "무장한 노동자들의 국가"가 아주 유효했다. 그러나 소비 영역에서 불평등을 규제하는 일은 성격이 전혀 다른 문제였다. 재산이 없는 사람들은 이것을 창조하고 방어할 생각이 없게 마련이다. 다수는 소수의 특권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가 없다. "부르주아 법" 을 옹호하기 위해 노동자국가는 "부르주아" 유형의 기구를 창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제복의 색깔은 다르지만 예나 다름없는 경찰기구가 필요했다.

 

이제 우리는 볼셰비키 당강령과 소련의 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근본 모순을 이해하는 첫걸음을 내디뎠다. 국가가 사멸하기는커녕 권력을 집중하여 전제군주 체제 상태에까지 이르렀고, 노동계급의 전권을 위임받은 대표들이 관료화되고, 관료집단이 새로운 사회 위에 군림한다. 이 현상의 원인은 과거의 심리적 유물에 있지 않다. 진정한 평등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이 지속되는 한 소수 특권층을 탄생시키고 옹호해야할 거부할 수 없는 필요가 만들어낸 결과일 뿐이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노동운동을 교살하는 관료화 경향은 노동계급 혁명 완수 후에도 모든 곳에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혁명으로 등장한 사회가 빈곤하면 할수록, 이 "법"의 표현은 더 엄격하고 노골적일 것이며 관료화에 의해 등장하는 통치 형태는 더욱 조야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새로운 사회의 사회주의적 발전에 더욱 위험한 장애물로 등장할 것이다. 소련 국가기구는 사멸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관료 기생집단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도 없었다. 이것은 스탈린주의 체제의 경찰관이 노골적으로 선언하듯이 구 지배계급의 "유물" 때문이 아니다. 왜냐하면 과거의 유물은 그 자체로는 아무 힘도 없기 때문이다. 이 현상은 물질적 결핍, 문화적 후진성 그리고 이 요인들에 의해 존재하는 "부르주아 법"의 지배 등 한없이 강력한 요인들 때문에 발생한다. 이 요인들은 개인의 생존 보장이라는 가장 직접적이고도 날카롭게 모든 인간을 강제하는 필요에서 등장하기 때문이다.

 

4. "일반화된 결핍" 과 경찰기구

 

『공산당 선언』을 발표하기 2년 전 청년 마르크스는 이렇게 썼다: "생산력 발전은 공산주의 사회 건설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전제조건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없이는 궁핍이 일반화될 것이며 이로 인해 생활필수품확보 투쟁이 다시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 상황이 되면 과거의 모든 넌센스가 다시 살아날 수밖에 없다." 이 사상을 마르크스는 더 이상 발전시키지 않았다. 여기에는 필연적 이유가 있었다: 그는 후진국에서는 노동계급 혁명이 결코 일어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레닌 역시 이 사상에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여기에도 필연적 이유가 있었다: 그는 소련이 오랜 기간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포위될 것이라고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위에서 인용한 마르크스의 사상은 그가 공산주의 체제 성립의 전제조건을 역으로 추론한 결과 도출한 추상적 사상이다. 그러나 이 사상은 현재 소련 체제의 구체적 난관과 질병 증세를 전체적으로 조명해주는 불가결한 이론적 열쇠이다. 제국주의 세력의 간섭과 내전에 의해 생산력이 파괴된 소련은 절대적 궁핍에 시달렸다. 이 조건 속에서 "개인적 생존을 위한 투쟁"은 부르주아 계급이 타도된 다음날 당장 사라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후 몇 년 동안 그 정도가 완화되지도 않았다. 이와 정반대로 때때로 유례없는 잔혹성을 드러내면서 그 정도가 더욱 심해졌다. 소련의 어떤 지역은 사람고기를 먹어야 할 상황이 두 번이나 있었다. 이 사실을 다시 회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지금에서야 겨우 차르 시대 러시아와 그 당시 서유럽 선진국 사이의 생산력 격차를 제대로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내부 혼란과 외부의 재앙이 없는 가장 좋은 상황을 상정하더라도, 소련은 자본주의를 처음 시작한 서방 선진국이 수세기 동안 누렸던 경제적·문화적 업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5개년 계획을 여러 번 완수해야 할 것이다. 전(前)사회주의적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사회주의적 방식을 적용하는 것--- 이것이 현재 소련이 직면하고 있는 경제적·문화적 과업의 핵심이다.

 

현재 소련은 마르크스 당대의 가장 발전한 자본주의 국가들보다 생산력이 확실히 앞서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두 체제의 경쟁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절대적 수치가 아니라 상대적 수준이다. 현재 소련 경제는 비스마르크, 파머스튼, 링컨 당시의 자본주의가 아니라 히틀러, 볼드윈(Baldwin), 루즈벨트의 자본주의와 경쟁하고 있다. 그리고 둘째로 기술수준의 세계적 발전으로 인간의 욕구 수준이 과거와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마르크스 당대의 사람들은 자동차, 라디오, 영화, 비행기 등을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이 재화들이 자유로이 향유되지 않는 사회주의 사회는 생각할 수도 없다.

 

마르크스의 용어를 빌리자면 "공산주의의 가장 낮은 단계"는 가장 발전한 자본주의가 달성한 생산력 수준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곧 실행에 옮겨질 소련의 새 5개년 계획의 표어는 "유럽과 미국을 따라잡자"이다. 소련의 광대한 영토에 자동차 도로와 아스팔트 고속도로 망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미국에서 자동차 공장을 이식해 오거나 미국의 기술을 획득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시간과 자원이 필요하다. 소련 시민 전부가 도중에 전혀 어려움 없이 휘발유 탱크를 채우고 사방팔방으로 자동차를 타고 가기 위해서는 앞으로 몇 년이 더 필요할까? 미개사회에는 말을 탄 계급과 맨땅에서 걷는 계급이 양분되어 있었다. 자동차는 말안장만큼 사회계층을 구분시킨다. 아주 평범한 "포드 승용차"조차 소수의 특권일 경우 부르주아 사회의 모든 관계와 관습은 그대로 살아남는다. 그리고 이것들은 불평등을 수호하는 국가와 함께 계속 존재한다.

 

마르크스의 노동계급독재 이론에 전적으로 기초하여 레닌은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룬 주요한 저서『국가와 혁명』을 완성하였다. 그리고 이에 기초하여 볼셰비키 당강령을 작성하였다. 그러나 이미 말했듯이 그는 러시아의 경제적 후진성과 제국주의에 의한 포위 상황에서 도출되는 국가의 성격과 관련하여 필요한 모든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당강령은 관료주의의 부활을 대중의 행정 경험 부족과 전쟁으로 인한 난관의 탓으로 돌렸다. 그리고 "관료주의적 왜곡"을 극복하기 위해 단순히 정치적 조치들만을 처방으로 제시했다. 즉 전권을 가진 모든 공직자의 선거와 소환이 언제나 가능해야 하며, 이들의 물질적 특권이 철폐되어야 하며, 대중이 국가기구를 적극적으로 통제해야 한다는 등의 일반적 처방만이 제시되었다. 시간이 지나면 관료는 높으신 양반으로부터 단순한 일시적 기술자로 전락할 것이며 국가는 서서히 그리고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현실에서 자취를 감출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런데 당 강령이 이렇게 임박한 난관을 명백히 과소 평가한 이유는 강령이 온전히 국제적 전망에 기초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10월 혁명은 노동계급 독재를 실현시켰다‥‥‥‥ 세계 노동계급에 의한 공산주의 혁명의 시대는 시작되었다." 이것이 당강령 서문의 일부이다. 물론 당강령 작성자들은 "일국사회주의"를 건설할 목표를 설정하지 않았다. 이 사고는 당시 스탈린은 물론이고 어느 누구의 머리에도 없었다. 그러나 당강령 작성자들은 자본주의 선진국들이 이미 오래 전에 해결한 경제적·문화적 문제들을 20년이나 되는 긴 기간 고립된 상태에서 해결하도록 강요당할 경우 소련 국가가 어떤 성격을 띨 것인가의 문제는 건드리지도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조성된 유럽의 혁명적 위기에도 불구하고 유럽에서 사회주의혁명은 승리하지 못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부르주아 계급을 구출하였다. 레닌과 그의 동료들에게 "숨쉴 틈"에 불과했던 혁명의 고립 기간이 역사적 시대의 길이로 연장되었다. 소련의 모순적 사회구조와 국가의 초관료주의적 성격은 이 특이하면서도 "예상하지 못한" 혁명 휴지기의 직접적 결과이다. 이 시기에 자본주의는 파시즘 또는 전(前) 파시즘의 반동기로 빠져들었다.

 

국가기구를 관료주의의 해악에서 구출하려는 첫 시도는 대중의 자치 경험의 부족, 사회주의에 헌신하는 능력 있는 노동자들의 부족 등으로 실패했다. 그러나 이 초기의 난관이 지난 후 곧 이어 좀더 근본적이고 심대한 난관이 닥쳤다. 강제의 역할이 점점 줄어들면서 "회계와 통제" 영역만으로 국가의 역할이 축소되어야 한다고 당강령은 주장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인민이 최소한 일반적인 물질적 만족을 누린다는 조건을 전제로 했다. 그러나 이 필요조건이 결여된 상태가 계속되었다. 서방의 노동자들이 혁명을 성공시키지 못하자 소련 노동자국가에 대한 구원의 손길은 오지 않았다. 국방, 공업, 기술, 과학 등의 분야에 종사하는 특권집단을 유지하는 것이 시급한 국가의 임무가 되었다. 이 임무에 나라의 모든 역량이 소모되었다. 그러자 민주적인 소비에트의 권한은 제한되고 심지어는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10명이 가진 재화를 빼앗아 한 특권층에게 주는 결코 "사회주의적"이지 못한 국가행정이 이루어졌다. 그러자 분배를 담당하는 강력한 전문가 집단이 형성되고 발전하였다.

 

그러나 최근의 엄청난 경제적 성과들은 왜 불평등을 완화시키지 못하고 더욱 심화시켰는가? 그리고 관료화는 왜 "비정상적 현상"에서 이제는 행정의 일상 체제로 굳어졌는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 소련 관료집단의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체제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잠시 알아보자.

 

5.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와 "노동계급 독재의 강화"

 

최근 몇 년간 소련 정부는 소련에서 사회주의가 "완전히 승리"했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여러 번 발표했다. 특히 "쿨락 계급의 일소"와 함께 사회주의가 완성되었다는 단언적인 성명서가 있었다. 1931년 1월 30일 『프라우다』는 스탈린의 연설을 해석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제 2차 5개년 계획 기간 중에 자본주의의 마지막 잔재들이 일소될 것이다."(강조는 인용자) 이 전망에 기초한다면 국가는 같은 기간에 결정적으로 소멸해야 한다. 자본주의의 "마지막 잔재들"이 없어지면 국가가 할 일은 더 이상 없기 때문이다. 이 주제에 대해 볼셰비키 당강령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회가 계급으로 나누어져 있고 따라서 국가권력이 사라지지 않는 한 소비에트 권력은 국가의 계급적 성격이 불가피하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인정한다." 그러나 일부 조심성 없는 모스크바의 이론가들이 자본주의의 "마지막 잔재"가 일소된다는 사실을 곧이곧대로 믿고 이로부터 국가의 사멸을 추론하자 관료집단은 즉시 이 이론을 "반혁명 노선"이라고 선언했다.

 

그렇다면 관료집단의 이론적 오류는 기본 전제에 있는가 아니면 결론 부분에 있는가? 답은 양쪽 모두에 있다.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가 처음으로 선언되었을 때 좌익반대파는 이렇게 응수하였다: 기본적 조건인 생산력 수준을 도외시한 채 사회적 법률적 관계들의 형태에 자신을 제한해서는 안된다. 이 형태는 성숙하지 않았으며 모순적이다. 그리고 농업에서는 아주 불안정하다. 법률적 형태들 자체는 기술수준에 따라 근본적으로 다른 사회적 내용을 가지고 있다. "경제 구조와 이것에 의해 조건 지워지는 문화적 수준을 능가하여 법률이 존재할 수는 없다."(마르크스) 가장 발전한 미국의 기술적 성과가 소련의 모든 경제 분야에 이식되고 이것에 기초하여 소비에트 소유형태가 존재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진정 사회주의의 첫 단계가 될 것이다. 낮은 노동생산성에 기초한 소비에트 소유형태는 이행적 체제(transitional regime)를 가져올 뿐이다. 이 체제의 운명에 대해 역사는 아직 최종적인 답변을 하지 않았다.

 

1932년 3월 우리는 이렇게 주장하였다: "끔찍하지 않은가? 이 나라는 재화의 기근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모든 단계에서 생필품 공급이 중단되고 있다. 어린이들은 우유를 마시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당국의 성명서는 이렇게 선언하고 있다: '이 나라는 사회주의 시기로 진입하였다!' 이보다 사회주의의 이름을 더 지독하게 훼손하는 것이 가능할까?" 현재 소련 지도부의 독보적 선전가 카를 라데크(Karl Radek)는 우리의 입장에 대해 독일 자유주의 신문 『베를린 일간』의 소련 특별호(1932년 5월)에 불멸의 명언을 남겼다: "우유는 암소에서 나오지 사회주의에서 나오지 않는다. 강이 우유로 넘치는 나라를 상상하면서 이것을 사회주의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다. 대중의 물질적 수준이 상당히 진척되지 않아도 나라는 당분간 더 높은 발전 단계에 도달할 수 있다." 이 견해는 소련이 끔찍한 기근에 시달리고 있을 때 나왔다.( 역자 주: 이 글은 1936년 8월 카를 라데크가 소련 지도자들에 대한 테러 음모를 꾸몄다는 죄목으로 체포되기 전에 쓰여졌다.)

 

사회주의는 인간의 욕구를 최선으로 만족시키기 위해 계획 생산을 도모하는 체제이다. 그렇지 않다면 사회주의라는 이름은 필요 없을 것이다. 암소가 사회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암소의 수가 너무 적거나 암소의 유방이 너무 왜소할 경우 불충분한 우유 공급 때문에 분쟁이 일어난다. 즉 도시와 농촌 사이의 분쟁, 집단농장과 농민 사이의 분쟁, 노동계급 내 다양한 계층 사이의 분쟁, 근로인민 전체와 관료집단 사이의 분쟁 등이 이것이다. 농민이 암소를 대량으로 살육하게 만든 것이 암소의 사회화 조치였다. 궁핍으로 인한 사회 내부의 분쟁은 다시 "과거의 모든 넌센스"를 부활시킨다. 이것이 소련 정부가 발표한 성명서에 대한 우리 답변의 요지였다.

 

코민테른 제7차 세계대회는 1935년 8월 20일 통과된 결의문을 통해 이렇게 엄숙히 선언했다: 공업 국유화의 성공, 농업 집단화의 달성, 자본주의적 요소와 쿨락 계급의 일소 등을 통해 "최종적이고 역전될 수 없는 사회주의의 승리와 노동계급 독재의 전면적인 강화가 소련에서 달성되었다." 단정적인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코민테른의 선언은 전적으로 자기모순에 빠져 있다. 이론적 원칙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회체제로서 사회주의가 "최종적이고 역전될 수 없이" 승리했다면 독재의 새로운 "강화"는 명백한 넌센스이다. 체제의 실제적 요구에 따라 독재가 강화되면 사회주의의 승리는 아직도 멀다. 독재 즉 정부의 억압이 "강화"될 필요성은 조화로운 무계급 사회의 승리가 아니라 새로운 사회적 갈등의 증대를 말할 뿐이다. 독재 강화의 근본적 원인은 무엇인가? 해답은 간단하다. 낮은 노동생산성으로 인한 생존수단이 부족이다.

 

한때 레닌은 "소비에트 권력 더하기 전기(電氣)화"로 사회주의의 특징을 설명했다. 이 경구(警句)의 일면적 측면이 당시의 선전 목적 때문에 부각되었다. 그는 최소한 자본주의 수준의 전기화를 사회주의 건설의 최소 출발점으로 간주하였다. 현재 소련 시민의 일인당 전기 배당량은 자본주의 선진국의 3분의 1 수준이다. 소비에트 정치체제는 대중의 통제로부터 독립한 독자적 정치체제로 바뀌었다. 이 점을 고려하면 코민테른은 관료집단의 권력 더하기 자본주의 수준 전기화의 3분의 1이 사회주의라고 선언하는 일만 남았다. 이 선언은 사진을 찍은 것만큼이나 정확할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1935년 11월 열린 스타하노프 운동 간부 회의에서 스탈린에게 연설의 기회가 주어졌다. 그는 이 회의의 실용적 목적에 부합하여 뜻밖에 이렇게 선언했다: "왜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를 정복할 수 있고 정복해야 하며 반드시 정복하고 말 것인가? 왜냐하면 사회주의는 ‥‥‥ 더 높은 노동생산성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선언은 같은 문제에 대한 코민테른의 3개월 전 결의문과 그 동안 자주 반복하여 선언되었던 자신의 견해를 우발적으로 거부하고 있다. 스탈린은 여기서 사회주의의 "승리"를 미래시제로 표현했다. 사회주의는 노동생산성에서 자본주의를 능가할 때 자본주의 체제를 정복할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동사의 시제 뿐 아니라 사회주의 건설의 사회적 조건도 관료집단에 의해 매순간 바뀐다. 소련 시민은 "총노선"을 따라 잡느라 고생이 많다.

 

1936년 3월 1일 로이 하워드(Roy Howard)와의 대담에서 스탈린은 소련 체제에 대해서 새로이 정의를 내렸다: "우리가 건설한 사회는 아직도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근본에 있어서 소비에트 사회주의 체제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규정한 발언에는 단어 수만큼이나 모순이 많이 숨어 있다. 그는 소련을 "소비에트 사회주의"라고 부른다. 그러나 소비에트는 국가형태이고 사회주의는 사회체제이다. 국가형태와 사회체제는 동일한 개념이 아닐 뿐더러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적대적인 개념이다. 사회체제가 사회주의적이라면 소비에트라는 국가형태는 마치 건물을 다 세운 후 발판이 제거되듯이 사라져야 한다. 스탈린은 자기 말을 이렇게 수정한다: 사회주의는 "아직도 온전히 완성된 것은 아니다." "온전하지 않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5% 정도 부족하다는 것인가 아니면 75% 정도 부족하다는 것인가? 이 점을 그는 말하지 않는다. "근본적으로 사회주의적"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근본적으로 사회주의라는 것이 소유형태를 지칭하는가 아니면 기술수준을 의미하는가? 그러나 이러한 정의의 애매함은 1931년에서 1935년까지 그들이 선언한 훨씬 단정적인 정식으로부터 후퇴했음을 의미한다. 그들의 논리가 좀더 철저하게 추구된다면 모든 사회체제의 "근본"은 생산력이라고 인정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현재 소비에트 체제의 근본은 인간의 복지를 지향하는 사회주의의 핵심에 충분히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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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노동생산성을 향한 투쟁

 

1. 화폐와 계획



지금까지 국가의 단면을 해부함으로써 소비에트 체제를 검토하려고 시도하였다. 화폐의 단면을 해부하는 것을 통해서도 이와 비슷한 작업을 할 수 있다. 국가와 화폐는 공통된 특징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이 두 존재는 결국 핵심적 문제인 노동생산성으로 귀착되기 때문이다. 화폐의 강제력과 마찬가지로 국가의 강제력도 계급사회의 유산이다. 계급사회는 교회나 세속사회에서 존재하는 물신(物神)의 형태를 통해서만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규정할 수 있다. 물신들을 수호하는 역할은 물신 중에서 가장 끔찍한 물신인 국가가 담당한다.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국가와 화폐가 자취를 감출 것이다. 따라서 이것들의 점진적인 사멸은 사회주의 사회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결국 국가가 반(半)국가로 변화하고 화폐가 마술 같은 힘을 잃기 시작하는 역사적 순간에만 사회주의의 실질적인 승리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의 온갖 물신들로부터 해방되어서 인간들 사이에 좀더 투명하고 자유로우며 가치있는 관계들을 만들기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화폐의 "철폐", 임금의 "철폐" 또는 국가와 가족의 "일소"와 같은 전형적인 무정부주의적 요구들은 기계적인 사고의 전형을 보여줄 뿐이다. 화폐는 우리 마음대로 "철폐"될 수 없으며 마찬가지로 국가와 오랜 관습인 가족도 우리 마음대로 "일소"할 수 없다. 이것들은 모두 역사적인 역할을 다하고 증발하거나 해체되어야 한다. 사회적 재화가 꾸준히 증가하면 일분 일초의 초과노동에 대한 혐오감과 공급되는 생활필수품의 적은 크기에 대한 굴욕적인 두려움 등을 가질 필요가 없는 때가 도래한다. 이때 화폐라는 물신은 마지막 일격을 받고 쓰러질 것이다. 인간에게 행복이나 불행을 가져다줄 능력을 잃어버린 후 화폐는 통계 종사자들의 편의를 위해 그리고 계획의 목적을 위해 필요한 장부 영수증에 불과한 존재가 될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더 지나면 이 영수증도 아마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와 관련된 문제는 우리보다 지능이 훨씬 뛰어난 후세에게 넘기자.



생산수단과 신용제도의 국유화, 국내 상업의 협동조합화 또는 국영화, 외국무역의 독점, 농업의 집단화, 상속재산에 대한 법률 등은 화폐의 개인적 축적에 엄격한 제한을 가한다. 그리고 화폐가 고리대금 자본, 상업자본, 공업자본 등으로 전환하는 것을 방해한다. 그러나 화폐의 기능이 착취와 진정으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시작되는 시점에 일소되지는 않는다. 다만 수정된 형태로 상인-채권자-실업가의 역할을 하는 국가로 이전될 뿐이다. 동시에 가치의 척도, 교환의 수단, 지불의 수단 등과 같은 화폐의 근본적인 기능들은 그대로 유지될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때보다 더 널리 활동의 장을 확대한다.

 

계획경제의 실행은 화폐의 위력을 충분히 과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위력의 한계도 드러내었다. 러시아는 1억 7천만이란 많은 인구를 보유하고 있으며 도시와 농촌간의 모순이 심각한 후진국이다. 따라서 이 나라에서 실시되는 선험적인 경제계획은 이미 효험이 입증된 복음이 아니다. 차라리 그 위력이 목표 달성 과정에서 확인되고 수정되어야 하는 대강의 실무적인 가정(假定)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계획경제에 대한 규칙을 정할 수는 있다. 즉 행정적 과업이 더 "정확하게" 달성되면 될수록 경제적 지도력이 무능하다는 사실이 더 많이 입증된다는 규칙 말이다. 계획을 통제하고 현실에 적용시키기 위해서는 두 개의 지렛대가 필요하다. 우선 정치적 지렛대가 있어야 한다. 이것은 생산에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대중들 스스로가 지도력을 확립하는 과정에 진정으로 참여하는 형태로 나타나는데 소비에트 민주주의가 없이는 상상할 수도 없다. 또한 재정적 지렛대가 있어야 한다. 이것은 보편적 등가물의 도움을 받아 선험적인 계산을 현실에서 검증하는 형태를 띤다. 그런데 이것은 안정적인 화폐가 없이는 생각도 할 수 없다.

 

소련 경제에서 화폐의 역할은 아직 다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미 얘기했듯이 아직도 담당해야 할 역할이 많다.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시기에는 상업과 무역이 축소되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크게 확대되어야 한다. 산업의 모든 부문은 변모하며 성장한다. 새로운 산업부문이 계속해서 등장한다. 그리고 모든 산업부문들은 질적으로 그리고 양적으로 서로의 관계를 규정하는 상황 속에 놓이게 된다. 자급자족을 위한 농민경제 그리고 이와 함께 존재하는 폐쇄된 가족생활이 일소된다는 것은 사회적 교환과정 즉 화폐의 실제 유통과정으로 모든 형태의 노동을 모아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거 농민의 안마당에서 또는 개인주택 안에서 발휘되었던 노동력이 이제는 사회의 모든 교환과정에서 합류한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모든 제품과 서비스가 하나의 교환과정의 영역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한편 계획경제 내부로 생산자와 소비자의 직접적인 개인적 이해 즉 이들의 이기심이 수용되지 않으면 성공적인 사회주의 건설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들의 이기심은 신뢰성과 융통성을 갖춘 화폐라는 도구가 있어야 결실을 맺을 수 있다. 자유롭게 모든 산업에 침투할 수 있는 정확한 가치 척도 즉 안정적인 통화체제가 없이는 노동생산성과 품질은 향상될 수가 없다. 따라서 자본주의에서와 마찬가지로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이행기 경제에 있어서도 금본위 화폐 즉 금 태환화폐만이 진정한 화폐가 될 수 있다. 이와 다른 형태의 화폐는 오직 대체화폐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소련 정부는 거대한 양의 상품을 소유하고 있으며 화폐를 인쇄할 수 있는 도구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상황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행정적 차원에서 상품가격을 국가가 멋대로 조작한다고 하더라도 국내 상업이나 외국무역을 위해서는 안정된 화폐가 있어야 한다. 소련의 화폐는 경제 당국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금본위 화폐가 아니다. 따라서 많은 자본주의 국가들의 화폐처럼 필연적으로 폐쇄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세계시장에서 루블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소련이 독일이나 이탈리아에 비해 좀더 용이하게 화폐의 부정적인 측면들을 극복할 수 있는 이유 중의 일부는 국가가 외국무역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요한 이유는 풍부한 천연자원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급자족 폐쇄경제라는 족쇄 하에서도 소련 경제가 질식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우리의 역사적 임무는 단순히 질식을 피하는 데에 있지 않다. 철저히 합리적이어서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높은 수준의 문화를 꽃피울 수 있게 하는 강력한 경제체제를 건설하는 데에 있다. 물론 이 경제체제는 자본주의 세계시장의 가장 높은 성과들을 접하고 흡수할 것이다.

 

기술혁명과 대규모의 실험들을 연속해서 경험하고 있는 역동적인 소련 경제는 안정된 가치척도를 수단으로 경제성과를 계속 측정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소련 경제가 금본위 루블화를 보유하고 있었다면 5개년 계획의 결과가 지금보다 비교할 수 없이 나을 것이라는 사실은 이론적으로 의심할 여지가 없다. 물론 불가능한 일을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때에 따라 닥치는 필요에 부응하기 위해 주먹구구식으로 경제를 운영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을 수도 없다. 이럴 경우 경제 영역에서 더 많은 오류와 손실이 발생할 뿐이다.



2. "사회주의적" 인플레



소련 통화체제의 역사는 경제적 난관, 성공, 실패의 역사일 뿐만 아니라 관료집단의 정책이 좌충우돌하는 역사이기도 하다.

 

신경제정책(NEP)이 시행되면서 1922년에서 24년에 걸쳐 루블화는 다시 등장하였다. 이것은 소비재의 분배에 있어서 "부르주아적 권리 규범"을 회복시키는 것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쿨락을 강화시키는 정책이 계속되는 동안 루블화는 정부 당국에 의해서 예의 주시되었다. 이와 반대로 5개년 계획의 초기에는 모든 인플레 요인들이 통제에서 해제되었다. 1925년 초에는 총통화량이 7억 루블이었으나 1928년 초에는 소폭으로 증가하여 17억 루블이 되었다. 이것은 제1차 세계대전 전야에 차르체제가 보유하고 있던 통화량과 대충 맞먹는 양이다. 물론 차르체제 하에서는 루블화가 금본위 화폐였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1928년 이후에는 총통화량이 열병에 걸린 것처럼 급속히 증가한다: 20억 루블 -> 28억 루블 -> 43억 루블 -> 55억 루블 -> 84억 루블! 84억 루블은 1933년 초의 총통화량이다. 이 해를 기점으로 통화정책이 다시 바뀌어 통화량이 줄어들었다: 69억 루블 -> 77억 루블 -> 79억 루블(1935년). 1924년에는 공식적으로 13프랑에 교환되었던 루블은 1935년 11월이 되자 3프랑으로 교환되었다. 과거에 비해 가치가 4분의 1 이하로 떨어졌는데 이것은 전쟁의 결과 프랑화가 평가절하된 정도와 비슷했다. 과거나 지금이나 루블화의 프랑화 환율은 매우 일시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현재 세계시장 가격으로 치자면 루블화의 구매력은 1.5프랑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평가절하의 규모는 소련의 통화가 1934년까지 현기증이 날 정도의 빠른 속도로 가치를 상실해 왔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경제적 모험주의에 한참 경도되고 있던 때에 스탈린은 신경제정책 즉 시장관계를 "악마에게나" 주어버리겠다고 약속하였다. 마치 1918년의 경우처럼 소련 언론은 모두 상거래가 "사회주의 직접 분배"로 최종적으로 바뀔 것이라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식량배급표가 발급되어 새로운 정책의 표상이 되었다. 동시에 인플레는 소련 체제와는 전혀 융합할 수 없는 현상이라며 완전히 배격되었다. 1933년 스탈린은 이렇게 말했다: "정부에 의해 상품이 대규모로 통제되어 안정된 가격으로 공급되기 때문에 소련의 화폐가치는 안정되고 있다." 이 정체를 파악하기 힘든 공언은 이후 전혀 상세히 설명되거나 정책으로 발전되지 않았다. 부분적으로는 발언의 본질이 파악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나타났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도 그의 발언은 소련 화폐이론의 기본법칙이 되었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그가 발언을 통해 거부한 인플레의 기본법칙이 되었다. 이후 루블화는 보편적 등가물이 아니라 "엄청나게" 많은 상품의 보편적 그림자가 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모든 그림자와 마찬가지로 루블화는 스스로를 짧게 하거나 길게 만들 권리를 보유하였다. 현실을 덮어놓은 채 자기위안에만 탐닉하는 스탈린의 화폐이론이 의미가 있다면 그 의미는 다음과 같았다: 소련의 화폐는 화폐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 더 이상 가치척도의 기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안정된 가격"은 국가권력에 의해서 정해진다; 체르보네츠 금화(Chervonetz, 역자 주: 10루블에 해당하는 금화로서 1922년에 제정되어 1936년에 폐지되었다)는 계획경제의 관습적인 이름에 불과한 허깨비이다; 다시 말하면 루블화는 보편적 배급표이다. 한마디로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제 사회주의는 "최종적으로 그리고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승리했다.

 

전시공산주의 시절에 횡행했던 가장 유토피아적인 견해는 이제 새로운 경제적 기반 위에 다시 등장하였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새로운 경제 기반의 수준은 과거보다는 약간 높아졌지만 화폐 유통을 일소하기에는 아직도 불충분했다. 소련의 지배층은 계획경제가 시행되고 있으므로 인플레는 하등 무서워할 것이 없다는 생각에 푹 빠졌다. 나침반을 가지고 있으면 배에 물이 새더라도 아무 위험이 없다는 생각과 비슷한 논리였다. 그러나 현실에서 통화 인플레는 필연적으로 신용 인플레를 초래하면서 가상의 수치들이 현실의 수치를 대체하는 끔찍한 결과를 초래한다. 결국 계획경제가 내부에서 삭아들어가는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인플레는 근로인민에게 끔찍히 무거운 세금이라는 사실은 말할 나위가 없다. 인플레의 도움으로 획득된 사회주의의 강점은 지극히 의심스럽다. 물론 산업은 계속해서 급격히 성장하였다. 그러나 거대한 건설사업의 경제적 효율은 통계에만 나타날 뿐 실물 경제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루블화에 대한 통제권을 행사하면서 관료집단은 특정 계층과 경제부문들에게 자기들 마음에 내키는 대로 다양한 정도의 구매력을 선사하였다. 이 결과 관료집단은 객관적으로 정책의 성공과 실패를 측정할 수 있는 중요한 도구를 스스로 박탈해 버렸다. "기존 루블화"와 합쳐져 서류상에만 올라 있는 수치들로 인해 정확한 회계는 실종되었다. 이로 인해 노동에 대한 노동자들의 관심이 저하되고 생산성이 낮아지고 제품의 품질은 더 낮아졌다.

 

제1차 5개년 계획 기간 동안 이 해악은 위협적인 수위까지 육박하였다. 1931년 7월 스탈린은 유명한 "6개 조건"을 들고 나왔다. 이것의 최고 목표는 공업제품의 생산비용을 낮추는 것이었다. 노동생산성에 따른 임금지불, 생산비용에 대한 회계 도입 등의 내용으로 이루어진 이 조건들은 새로운 내용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부르주아적 권리 규범"은 신경제정책이 시작될 즈음에 이미 제출되었고 1923년 초에 열린 제12차 당대회에서 더욱 발전되었다. 1931년이 되자 자본투자의 효율이 감소하기 시작하는 긴급상황이 발생하였다. 이 때가 되어서야 스탈린은 과거에 이미 실행되었던 정책을 새로운 것인양 다시 천명하였다. 이후 2년 동안 언론의 거의 모든 기사들은 이 "6개 조건"의 구원 능력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한편 인플레는 계속되었다. 그리고 인플레가 발생시킨 병의 증세도 당연히 치유될 수 없었다. 생산시설 파괴자들과 태업자들에 대한 엄한 탄압조치도 사태를 호전시키지는 못하였다.

 

"몰개성"과 "균등"은 익명의 "평균" 노동과 모두에게 비슷한 "평균" 임금을 의미한다. 그런데 소련 당국은 "몰개성"과 "균등"에 대한 투쟁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동시에 관료집단은 신경제정책을 "악마에게" 주어버렸다. 신경제정책은 노동력을 비롯한 모든 재화를 화폐를 기준으로 계산한다는 것을 의미하였는데 이것을 폐기하는 것은 "몰개성"과 "균등"에 대한 투쟁에 배치되는 것이었다. 당시 관료집단의 혼란스러운 방향감각은 지금 생각해도 믿을 수 없는 정도로 기이하였다. 한 손으로는 "부르주아적 분배 규범"을 회복시키면서 다른 손으로는 부르주아적 분배 규범을 시행하는 데 필요한 유일한 도구를 폐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부르주아적 분배 규범 대신 국가의 자의적 계산과 행정조치에 따라 분배가 시행되었다. 가격체계가 완전히 혼란에 빠지게 되자 노동량과 이에 따라 지급되는 임금 사이의 조응관계가 필연적으로 사라졌다. 이로써 노동자들의 노동에 대한 관심과 동기유발이 함께 사라졌다.

 

회계, 제품의 품질, 생산비용, 생산성 등에 대한 엄밀한 당국의 지시사항들도 이제 공중에 붕 뜬 비현실적인 것이 되었다. 그런데 소련의 지도자들은 모든 경제적 난관의 원인을 스탈린의 6개 조건을 악의적으로 시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선언하였다. 인플레에 대한 아주 조심스러운 언급도 반체제 범죄라고 이들은 못박았다. 학교 교사들에게 비누가 배급되지 않는 사실을 언급하지 말 것을 지시하면서 동시에 이들이 학교 위생규정을 어겼다고 가끔씩 비난했다.

 

루블화의 운명에 대한 문제는 당내 분파투쟁에서 아주 중요한 사안이 되었다. 좌익반대파(1927년)의 강령은 "화폐의 무조건적 안정을 보장"할 것을 요구했다. 이 요구는 이후 몇 년 동안 좌익반대파의 중심적 요구가 되었다. 1932년 좌익반대파의 망명 기관지는 이렇게 주장했다: "아주 엄격한 조치들을 통해 인플레 경향을 정지시키고 화폐 단위의 안정성을 회복시켜야 한다. 자본투자를 과감하게 축소하는 대가를 지불해서라도 통화는 안정되어야 한다." "거북이 걸음"을 옹호하는 자들과 초공업화론자들이 임시로 자리를 바꾼 것 같은 양상이 전개되었다. 당국이 시장관계를 "악마에게" 주어버리겠다고 허풍을 떤 것에 대해서 좌익반대파는 국가계획위원회가 다음과 같은 표어를 내세울 것을 권유하였다: "인플레는 계획경제의 매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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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의 경우에도 인플레의 해악은 극심했다.

 

농민에 대한 정책이 쿨락을 위주로 시행되고 있을 때는 농업의 사회주의화가 신경제정책의 기초 위에서 협동조합을 통해 수십 년에 걸쳐 완수될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협동조합은 구매, 판매, 신용의 기관이 되어 장기적으로 농업생산을 사회주의적으로 변모시킬 것이라고 가정되었다. 이것은 "레닌의 협동조합 계획"이라고 명명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실제 과정은 이와 완전히 다르게 그리고 거의 정반대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즉 국가의 폭력과 통합적 집단화를 통해 쿨락이 청산되었다. 농촌의 사회주의화를 위한 물질적 · 문화적 조건을 준비해 나감과 동시에 농업의 각 부문을 점진적으로 사회주의화하자는 예전의 정책은 더 이상 언급되지 않았다. 농업에서 공산주의가 즉각적으로 실현된 것처럼 집단화가 추진되었을 뿐이다.

 

강제적 농업집단화의 해악은 즉시 나타났다. 소련 전역에서 가축의 절반 이상이 도살되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커다란 해악이 닥쳤다. 집단농장 농민들이 사회주의 소유형태와 자기 노동의 결과에 완전한 무관심해졌다. 그러자 당국은 서둘러 기존 정책을 철회하기 시작했다. 농민에게 닭, 돼지, 양, 소 등을 제공하면서 이것들을 개인재산으로 인정해 주었다. 그리고 집단농장 옆에 농민이 개인적으로 소유하는 텃밭을 조성해 주었다. 집단화의 필름이 이제는 완전히 거꾸로 돌기 시작했다.

 

농민의 소규모 개인소유를 허용하면서 당국은 농민의 소위 개인주의 경향을 매수하기 위한 타협을 시행에 옮겼다. 집단농장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따라서 언뜻 보기에는 정책의 후퇴가 부차적인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이 후퇴가 심대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집단농장의 귀족들을 제외한다면 일반 농민들의 일상적 필요는 집단농장에 참여하는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텃밭의 소출을 통해 더 많이 충족되고 있다. 농민이 개인이 자기 농장에서 기술영농을 채용하고 과일농장, 가축종자농장을 경영할 경우 그의 수입은 집단농장에서 일하는 경우에 비해서 3배정도나 많아지는 일이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소련 언론에도 보도되고 있다. 정책의 후퇴를 통해 영세기업에서 일하는 여성들의 노동력을 포함하여 수천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의 노동력은 완전히 야만적으로 낭비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집단농장의 노동생산성은 지극히 낮은 수준에 머물고 있다.

 

대규모 집단농장의 생산성 향상을 위해서는 농민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말하는 것이 필요했다. 즉 시장의 존재를 인정해주고 현물세를 폐지하면서 상거래를 회복시키는 것이 필요했다. 다시 말하면 너무 일찍 악마에게 주어버린 신경제정책을 다시 빼앗아 오는 것이 필요했다. 따라서 어느 정도 안정된 통화회계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농업의 계속적인 발전을 위한 필요조건이 되었다.



3. 루블화의 복권



잘 알려져 있듯이 지혜의 부엉이는 해가 진 후에나 난다. "사회주의" 가격 및 화폐 이론은 인플레파의 환상이 사라진 후에나 개발되었다. 이미 언급했듯이 스탈린은 자신도 알 수 없는 내용의 "6개 조건"을 천명했었다. 이제 그의 의도를 고분고분한 교수님들이 하나의 이론으로 발전시키는 일이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시장가격에 대비되는 소비에트 가격이 계획적 또는 지시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전혀 새로운 이론이 탄생하였다. 즉 소비에트 가격은 경제적 범주가 아니라 행정적 범주이며 사회주의의 이익을 위해 인민의 수입을 재분배하는 데 더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진짜 생산비용을 알지 못한 채 어떻게 가격을 "지도"할 수 있으며 모든 가격이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량이 아니라 관료집단의 의지를 표현한다면 어떻게 진짜 생산비용을 계산할 수 있겠는가? 이 점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을 교수 양반들은 까먹어 버렸다. 당국은 인민의 수입을 재분배하기 위해 필요한 세금, 국가예산, 신용제도 등 아주 강력한 지렛대들을 실제로 보유하고 있다. 1936년 예산 지출에 의하면 경제의 여러 부문에 재정을 직접적인 방식으로 지원하기 위한 돈이 376억 루블 책정되어 있으며 간접적인 방식으로 지원할 수 있는 돈은 이보다 훨씬 많다. 인민의 소득을 계획적으로 분배하는 데 있어서 예산과 신용체제는 아주 유효하다. 그리고 존재하는 실제 경제관계들을 상품가격이 정직하게 표현하기 시작하면 할수록 사회주의의 대의에 더 훌륭하게 봉사할 것이다.



이 주제에 대해서 경험은 이미 최종 판결을 내렸다. "지도" 가격은 학자들의 책 속에서나 그럴듯해 보이지 실제 생활에서는 하잘 것 없었다. 같은 상품에 전혀 다른 범주의 가격들이 책정되었다. 그리고 이 범주들 사이의 널찍한 간격을 통해 모든 종류의 투기, 특혜, 기생행위 등을 비롯한 해악들이 판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해악들은 예외가 아니라 관행으로 자리잡았다. 동시에 체르보네츠 금화는 안정된 가격의 정직한 반영이 되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자기 자신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다시 정책을 급격하게 전환해야 할 필요가 생겼다. 이제는 계획경제가 성과를 거두면서 난관들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1935년 벽두에 빵 배급표는 폐지되었다. 같은 해 10월 다른 식량품목들에 대한 배급표가 사라졌다. 1936년 1월이 되자 일반 소비재 공업생산품이 배급에서 해제되었다. 도시와 농촌이 국가와 맺는 경제관계가 화폐로 매개되기 시작했다. 이제 루블화가 대중이 경제계획에 대해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도구가 되었다. 먼저 소비재의 질과 양을 통해서 이 영향력이 행사된다. 이와 다른 어떤 방식으로 소련 경제를 합리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1935년 12월 국가계획위원회 의장은 이렇게 발표했다: "은행과 산업 사이에 지금 존재하는 상호관계는 수정되어야 하며 은행은 루블화를 통해 경제에 대한 통제권을 실현해야 한다." 이로써 행정 계획에 대한 미신과 행정 가격에 대한 환상은 깨졌다. 루블화가 배급표로 바뀌는 것이 사회주의로 가는 길이라면 1935년의 개혁은 사회주의로부터의 이탈이라고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러한 관점은 어설픈 오류에 지나지 않는다. 루블화가 배급표를 대체하는 것은 허구(fiction)를 거부하는 것에 불과하다. 부르주아적 분배 규범을 부활시키는 것을 통해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전제조건 확보의 필요성이 공개적으로 인정되었을 뿐이다.



1936년 1월 중앙집행위원회 회의에서 재무인민위원은 이렇게 발표했다: "소련의 루블화는 세계 어느 통화보다 안정되어 있다." 이 발표를 순전 허풍으로만 간주할 수는 없다. 소련의 국가예산은 균형을 유지하고 있으며 매년 수입이 지출보다 증가하고 있다. 그 자체로는 불충분하지만 외국무역이 예산 균형에 적극적인 기여를 하고 있는 것도 틀림없다. 중앙은행의 금 보유고는 1926년 1억 6천 4백만에서 현재 10억 루블을 상회하고 있다. 소련의 금 산출량은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1936년에 소련의 금광산업은 세계 제1위를 기록하고 있다. 시장이 부활되면서 상품 유통은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지폐를 남발하여 발생한 인플레는 1934년에 정지되었다. 루블화의 안정을 나타내는 요소들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재무인민위원의 낙관적 분위기가 상당 정도 부풀려지면서 나왔다. 산업생산이 증가하면서 루블화의 가치가 크게 오르고 있다. 그러나 생산비용이 너무 높은 것이 여전히 치명적인 약점이다. 소련의 노동생산성이 세계에서 가장 높아져 결국 화폐가 필요없을 때가 가까워질 때에만 루블화는 가장 안정된 통화가 될 것이다.

 

회계를 기술적 측면에서 바라보면 루블화의 우수성에 대한 주장은 더욱 설득력이 약해진다. 금 보유고가 10억 루블에 달하고 있지만 은행이 발행한 지폐 80억 루블이 유통되고 있다. 따라서 금이 통화를 지지하는 비율은 12.5%에 불과하다. 그리고 중앙은행이 보유하고 있는 금은 통화의 기반이 아니라 전쟁을 위해 비축하고 있는 신성불가침의 존재이다. 소련 경제가 더 발전할 경우 국내 경제계획을 정확하게 확정하고 외국과의 경제관계를 단순화하기 위해 당국이 금을 통화로 사용하는 것이 이론적으로는 당연히 가능하다. 따라서 자신의 존재를 마감하기 전에 루블화는 다시 한번 순금의 광택을 빛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가까운 미래에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소련이 금본위제로 회귀하는 것은 당분간 불가능하다. 그러나 당국이 금 보유고를 늘리는 것을 통해 순수 이론적인 계산을 통해서나마 통화를 금으로 지지하는 비율을 늘릴 수 있다. 이 결과 은행의 지폐 발행 규모가 관료집단의 의지가 아니라 객관적 기준에 의해 제한된다면 최소한 루블화의 상대적 안정은 달성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만 되어도 소련 경제는 크게 이익을 볼 것이다. 미래에도 인플레를 계속해서 강력하게 억제한다면 루블화는 금본위제의 이점은 가지고 있지 못할지라도 지난 기간 동안 관료집단의 주관이 경제에 입힌 깊은 상처를 많은 부분 치유할 수 있을 것이다.

 

4. 스타하노프 운동

 

인류문명의 모든 단계에 걸쳐 진행된 인간의 자연에 대한 투쟁을 경제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모든 경제는 최종적으로는 시간의 경제를 달성하는 문제로 집약된다"고 마르크스는 말했다. 주요한 측면으로만 환원한다면 인간의 역사는 노동시간 절약을 위한 투쟁의 역사에 지나지 않는다. 사회주의는 착취의 철폐만을 가지고 스스로를 정당화시킬 수 없다.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자본주의보다 더 짧은 노동시간을 보장하는 사회가 되어야 진정한 사회주의는 실현된다. 이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착취의 근절은 한편의 드라마에 불과할 뿐 미래를 보장받을 수 없다. 사회주의적 생산방식을 적용한 첫 번째 역사적 실험은 사회주의가 대단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인류문화의 가장 소중한 원자재인 시간을 잘 활용하는 방식을 소련은 결코 배우지 못했다. 선진 자본주의 체제에서 수입한 기술은 시간의 경제를 달성하는 주요한 도구인데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만큼 많은 생산물을 소련 영토에서 생산해내지 못하고 있다. 모든 문명에서 결정적 요소인 시간의 경제를 달성하지 못했다는 의미에서 사회주의는 아직 승리하지 못했다. 다만 승리할 수 있고 승리해야한다는 점을 확실히 과시했을 뿐이다. 그러나 아직도 승리하지 못했다는 것은 틀림없는 기정 사실이다. 이와 반대되는 모든 주장들은 무지나 허풍스러운 사기에 불과하다.

 

올바르게 평가해서 몰로토프는 공식적으로 거짓 발언만을 일삼는 다른 소련의 지도자들보다 좀더 솔직하게 진실을 드러내는 경향이 있다. 그는 1936년 1월 중앙집행위원회 회의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의 평균 노동생산성 수준은 ‥‥‥ 미국과 유럽에 비해 아직도 상당히 뒤떨어져 있다." 이 말을 덧붙이면 그의 선언은 더욱 정확할 것이다: 유럽과 미국에 비해 소련의 노동생산성은 3배, 5배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10배나 뒤져 있다; 그리고 소련의 생산비용은 같은 정도로 더 높다. 그리고 같은 회의 석상에서 몰로토프는 좀더 일반적인 고백을 털어놓았다: "소련 노동자들의 평균 문화수준은 자본주의 국가들의 것보다 여전히 낮다." 이 발언에 다음 말을 덧붙여야한다: "평균 생활수준도 역시 낮다." 지나가면서 내뱉은 그의 말이 지닌 진실성은 수없이 많은 소련 정부기구의 자부에 찬 성명서와 소련의 외국"친구들"의 사탕발린 찬사의 분출을 가차없이 논박하고 있다!

 

국방에 대한 우려와 함께 노동생산성을 높이려는 투쟁이 소련 정부의 근본정책이다. 소련이 발전하는 단계마다 이 투쟁은 다양한 성격을 지녀왔다. 제1차 5개년 계획 기간 내내 그리고 제2차 기간의 초기에 주로 사용된 방식은 "돌격대" 방식이었다. 이것은 선동, 개인의 모범, 행정적 압력 그리고 모든 종류의 집단 포상과 특권을 동원한 방식이었다. 1931년 스탈린이 6개 조건을 교시한 이후 시도된 일종의 도급제(piecework payment)는 루블화의 허깨비 같은 성격과 가격체계의 이질성 때문에 실패했다. 관료집단의 변덕에 따라 운용된다고 말할 수 있는 소위 "프리미엄 체계"를 지닌 융통성 있는 노동평가제를 대신해서 생산품을 국가가 직접 분배하는 체제가 실행에 옮겨졌다. 그러자 엄청난 규모의 특권을 따내기 위해 돌격대의 대오에는 특별한 연줄을 가진 사기꾼들이 침투하여 그 수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 체제는 원래 목적과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오는 데 그쳤을 뿐이다.

 

물가를 안정시키고 통일시키는 조치는 배급표 제도의 철폐를 통해서만 시작되었다. 이로써 도급제 시행의 조건이 마련되었다. 이러한 기초 위에서 돌격대 방식은 소위 스타하노프 운동(Stakhanov movement)으로 바뀌었다. 이제 진짜 가치를 갖게 된 루블화를 손에 넣기 위해 노동자들은 자기들이 사용하는 기계에 좀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노동시간도 좀더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크게 보면 스타하노프 운동은 노동강도의 강화와 노동시간의 연장을 의미했다. 소위 "비(非)노동시간"에 스타하노프 운동원들은 작업장의 의자와 도구를 정리하고 원자재를 분류하였다. 그리고 조장들은 조원들에게 교육을 실시했다. 이런 일들이 진행되면서 7시간 노동일은 말뿐이고 실제 노동시간은 훨씬 길어졌다.

 

도급제의 비밀을 발명한 것은 소련 관료들이 아니었다. 이 제도는 외부적인 강제가 가해지지 않으면서 노동자를 옥죄는 제도인데 이것을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생산 방식에 가장 적합한 제도"라고 생각했다. 소련 노동자들은 도급제에 공감하기는커녕 적대감을 가지고 대했다. 이 반응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사회주의 건설에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 스타하노프 운동에 가담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특히 관리부문에 있어서 단순한 출세주의자나 사기꾼에 비해서 이들의 숫자가 얼마나 많은지에 대해서는 말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의 대부분은 새로운 임금체계를 봉급 차원에서 평가한다. 그런데 새로운 임금체계로 인해 월급 봉투가 점점 얇아지고 있다고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최종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사회주의의 승리" 후에 소련 정부가 도급제로 돌아선 현상은 언뜻 보면 자본주의 생산관계로의 후퇴인 것 같다. 그러나 실제로는 루블화의 복권에 대해 말한 것을 여기서도 되풀이할 필요가 있다: 사회주의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조야한 환상을 거부한 것에 불과하다. 변화된 임금 지불 형태는 소련의 현실에 적합하기 때문에 등장했을 뿐이다. "법은 경제체제를 결코 능가할 수 없다."

 

그러나 소련의 지배층은 사회현실을 치장하지 않고는 하루도 견딜 수 없다. 1936년 1월 중앙집행위원회에 제출된 보고서에서 국가계획위원회 의장 메쥴라우크(Mezhlauk)는 이렇게 말했다: "루블화는 노동에 대해 임금을 지불하는 사회주의(!) 원칙을 실현하는 유일한 수단이 되고 있다." 옛날 왕조 때는 심지어는 공공 화장실까지 왕립이라는 말이 붙었다. 그러나 노동자국가에서 모든 것이 자동적으로 사회주의적 성격을 띠지는 않는다. 루블화는 사회주의적 소유형태에 기초하여 노동에 대한 자본주의적 지불 원칙을 실현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이 모순은 이미 우리에게 낯이 익었다. "사회주의적" 도급제에 대해 새로운 미신을 만들면서 메쥴라우크는 이렇게 덧붙였다: "각자가 능력에 따라 일한 분량에 따라 돈을 받는 것이 사회주의의 기본 원칙이다." 이 신사 양반들은 이론을 조작하는 일에는 확실히 대단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 루블화를 더 많이 손에 넣기 위해 노동할 경우 사람들은 "능력에 따라" 즉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신경과 근육의 상태에 맞추어 노동하지 않는다. 차라리 자신의 몸을 망치면서 일하게 된다. 도급제 방식은 조건적으로 그리고 엄혹한 필요 상황에서만 정당화될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을 "사회주의의 기본 원칙"이라고 선언하는 것은 새롭고 높은 문화를 주창하는 사회주의 사상을 자본주의라는 낯익은 오물에 냉소적으로 짓이기는 것과 같다.

 

스타하노프 운동을 "사회주의에서 공산주의로 이행하는 조건을 마련하기 위한 준비"라고 치켜세우면서 스탈린은 한술 더 뜨고 있다. 행정적 편의에 따라 소련 지배층이 채용하고 있는 사고들을 과학적으로 규명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독자들은 알게 될 것이다. 공산주의의 가장 낮은 단계인 사회주의 체제에서 노동량과 소비량에 대한 엄격한 통제가 필요하다는 점은 확실하다. 반면 사회주의는 자본이라는 착취의 천재에 의해서 발명된 것보다 더 인간적인 통제 형태를 전제로 한다. 그러나 현재 소련에서는 자본주의에서 빌려온 기술에 낙후된 인적 자원을 가혹하게 끼워 맞추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유럽과 미국의 노동생산성을 성취하기 위해 도급제와 같은 고전적인 착취방식이 노골적이고도 조야한 형태로 도입되고 있다. 자본주의 국가의 개량주의 노동조합조차 이러한 착취형태는 인정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소련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노동한다는 말은 역사적 전망 속에서 파악할 때에만 진실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말이 진실성을 갖기 위해서는 한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즉 노동자가 전제적인 관료집단의 통제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조건이 존재해야 한다. 생산수단의 국가적 소유가 똥을 황금으로 바꾸어 놓을 수는 없다. 그리고 생산력 중에서 가장 거대한 생산력인 인간을 소모시키는 가혹한 착취체제를 성스럽게 만들지도 못한다. 스탈린이 말한바 "사회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을 준비하는 것은 정반대 방향에서 시작될 것이다. 즉 도급제를 도입하는 것이 아니라 야만적 착취방식의 유물인 이 제도를 철폐하는 것을 통해서 공산주의로의 이행은 시작될 것이다.

 

* * *

 

스타하노프 운동을 결산하기에는 아직 때가 너무 이르다. 그러나 이 운동의 특징뿐만 아니라 소련이라는 체제 전체의 특징을 파악하는 작업은 이미 가능하다. 개개 노동자들의 일부 업적들은 사회주의 체제에서나 가능한 현상이므로 의심의 여지없이 아주 흥미롭다. 그러나 경제전체의 차원에서 가능성이 현실로 전화하기 위해서는 갈 길이 아주 멀다. 생산과정들이 밀접하게 상호의존 관계에 있는 상황에서 계속적인 높은 생산량의 달성은 몇몇 개인적인 노력에 의해서 실현될 수 없다. 개별공장과 기업 사이의 관계에서 생산과정을 재구성하지 않으면 평균 노동생산성은 높아질 수 없다. 더욱이 수백만 노동자들의 기술수준을 소폭이나마 향상시키는 일은 몇천 명의 기록보유자들을 다그치는 일보다 한없이 더 힘들다.

 

이미 들은 바이지만 소련의 지배층조차 소련노동자들의 노동숙련도가 낮다고 가끔 불만을 늘어놓는다. 그러나 이것은 진실의 반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더 작은 반쪽일 뿐이다. 러시아 노동자는 주도성, 창발성, 타고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백 명의 러시아 노동자들을 미국 산업의 조건 속에 이식시키면 몇 개월 아니 몇 주만 지나도 미국 노동자들에 조금도 뒤지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전체적 차원에서 노동을 조직하는 일이다. 새로운 생산 과업 달성하는 데 있어서 노동자들보다 소련의 관리자 집단이 일반적으로 훨씬 더 능력이 뒤지고 있다.

 

자본주의 국가로부터 도입한 새로운 기술을 이용하면 도급제는 현재 매우 낮은 노동생산성을 체계적으로 높일 수 있다. 이것은 거역할 수 없는 현상이다. 그러나 공장의 십장에서 크렘린궁의 지도자에 이르기까지 관리 및 행정 분야가 생산성을 높여주어야 한다. 스타하노프 운동은 아주 적은 정도로만 이 점을 만족시키고 있을 뿐이다. 관료집단은 해결할 수 없는 난관을 뛰어넘으려고 무모하게 달려들고 있다. 도급제 시행이 그 자체로는 즉각적인 기적을 가져올 수 없으므로 관리집단은 생산성을 향상시키기 위해 온갖 압력을 가한다. 한편에서는 장려금과 허풍이 또 한편에서는 벌칙이 시행된다.

 

스타하노프 운동 초기에는 저항, 태업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스타하노프 운동원에 대한 살해를 이유로 기술직 요원들과 노동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있었다. 탄압의 가혹함은 저항의 정도가 강하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소위 "태업"을 관리자들은 정치적 저항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실제로 이 저항은 대개의 경우 기술적 · 경제적 · 문화적 어려움에 근원을 두고 있다. 특히 관료집단 자체가 어려움의 대부분을 초래하고 있다. "태업"은 곧 진압된 것처럼 보인다. 불평분자들은 위협을 받아 공포에 질렸고 말로 표현을 잘하는 자들은 침묵을 강요당했다. 여기저기에서 미증유의 성취를 알리는 전보가 날아다녔다. 운동의 선구자들이 나타나면 지방의 관리자들은 상부의 명령에 충실하여 이들의 작업을 배려해 주었다. 물론 광산이나 동업조합에 소속된 노동자들을 희생하면서 이런 배려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수십만 노동자들이 갑자기 "스타하노프 운동원"이 되자 관리자들은 완전한 혼란에 빠진다. 아주 짧은 시간에 생산체제를 정비하는 방법을 모르고 객관적으로 이러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한 상태에서 관리집단은 노동력과 기술을 모두 파괴하고 있다. 태엽장치가 고장나면 관리자들은 조그만 톱니바퀴에 못을 꽂아넣는다. "스타하노프" 주간과 10일 돌격작전 기간이 끝나자 많은 기업들은 엄청난 혼란에 빠졌다. 스타하노프 운동원의 증가가 기업의 생산성을 높이기는커녕 저하시키고 있다는 사실은 처음보면 놀랍지만 사태의 논리를 설명해주는 측면이 있다.

 

현재 이 운동의 "영웅적" 시기는 지난 것처럼 보인다. 이제 하루하루의 지겨운 일이 시작된다. 배을 필요가 있다.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배울 것이 더 많다. 그러나 이들이야말로 배우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 사람들이다. 소련 경제의 모든 동업조합을 저지하고 마비시키는 사회적 동업조합의 이름은 관료집단이다.

 

▲ 차례로 돌아가기

제5장 소련에서의 테르미도르 반동

 

1. 왜 스탈린은 승리했는가

 

소련 역사가들은 이렇게 결론 내릴 수밖에 없다: 중대한 문제들에 대해 관료지배층은 모순에 찬 좌충우돌의 정책을 계속했다. 이런 현상이 일어난 이유를 "변화하는 상황"으로 설명하거나 정당화해도 논리가 성립되지 않는다. 국정을 이끈다는 것은 최소한 어느 정도 예측력을 행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스탈린 분파는 불가피한 결과들을 조금도 예측하지 못하였다. 이들은 졸고 있다가 매번 당했다. 대신 행정적인 반사신경만으로 전개되는 상황에 대응했을 뿐이다. 정책이 전환될 때마다 등장한 이론들은 모두 상황이 전개된 후 창조되었으며 이전의 교시들을 완전히 무시하였다. 반박할 수없는 사실들과 문서들에 기초하여 역사가들은 소위 "좌익반대파"가 다수파 지도부보다 나라의 현안을 훨씬 더 정확하게 분석했으며 이후의 사태를 훨씬 정확하게 예측했다고 결론내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언뜻 모순된 것처럼 보인다. 한치의 앞도 내다볼수 없었던 분파가 승리한 반면 예리한 분석력을 지닌 분파는 패배에 패배를 거듭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합리론적으로만 사고하면서 정치를 논리적인 주장이나 장기 시합으로 바라볼 경우에만 이 모순은 설명될 수 없을 것이다. 정치투쟁은 근본적으로 이해집단과 사회세력 간의투쟁이며 단순한 논쟁이 아니다. 물론 지도부의 자질은 분쟁의 결과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결과의 유일한 요인도 아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분석하면 결정적 요인도 되지 못한다. 더욱이 투쟁하고 있는 세력들은 자기 특성에 맞는 지도부를 요구하게 마련이다.

 

1917년 2월 혁명은 케렌스키와 체레텔리를 권좌에 앉혔다. 이들이 당시 차르 지배집단보다 "더 영리하거나 통찰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최소한 일시적이나마 구체제에 대항해 들고 일어선 혁명 대중을 대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케렌스키는 레닌을 지하로 피신하게 만들고 다른 볼셰비키당 지도자들을 감옥에 집어넣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개인적 능력이 볼셰비키당 지도자들보다 뛰어났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직 당시 노동자와 병사 대다수가 여전히 애국적 소부르주아 계급을 추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월성"이란 말이 적절할지는 모르겠으나 케렌스키의 개인적 "우월성"은 그가 절대 다수의 대중보다 예측력이 부족했다는 사실에 있었다. 반면 볼셰비키 당원들은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을 결국 제압했는데 이것도 지도자들의 우월성 때문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세력 관계 때문에 가능했다. 노동계급은 불만에 찬 농민대중을 부르주아 계급에 대항하도록 지도하는 데 마침내 성공했다. 등장했다가 사라져간 혁명 "지도자들"과 "영웅들"의 위력은 이들을 지지한 계급 계층의 성격에 조응했다. 프랑스 대혁명의 연속 단계들이 이 사실을 웅변하고 있다. 구체적 상황과 무관한 개인의 우월성이 아니라 바로 이 계급적 조응이 특정한 역사적 시기에 이들의 개성을 부각시켰다. 미라보(Mirabeau), 브리쏘(Brissot), 로베스피에르(Robespierre), 바라(Barras), 보나파르트(Bonaparte) 등은 두각을 나타내면서 혁명의 무대에 등장하였다. 그러나 역사의 주연 배우인 이들의 특수한 개인적 자질과 성향에 비교할 수 없이 강력한 객관 법칙이 이들의 등뒤에서 작용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일어났던 모든 혁명 이후에는 반드시 반동이나 반혁명이 뒤따랐다. 이 사실을 우리는 충분히 잘 알고있다. 물론 반동이나 반혁명이 상황을 혁명 이전으로 완전히 후퇴시킨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항상 대중 혁명의 성과 대부분을 거두어 갔었다. 처음 몰아치는 반동의 희생자는 대개 혁명기에 대중의 선두에 섰던 선구자, 주도자, 선동가들이었다. 대신 투쟁의 제 2선에 머물렀던 분자들은 혁명 퇴조기에 혁명의 적들과 함께 선두로 떠밀려졌다. 그리고 반동적 대세를 이용하여 사회의 지배력을 장악했다. 공개된 정치 현장에서 "주연 무용수들"이 극적인 대결을 벌였지만 배후에는 이미 변화된 계급 역관계와 최근까지 혁명적이었던 대중의 심리 변화가 작용하고 있었다. 러시아 노동계급의 혁명적 주도성, 헌신성, 인민적 긍지, 볼셰비키당의 혁혁한 활동상은 어디가고 이 모든 것 대신 사악, 비겁, 무기력, 출세주의가 판치고 있는가? 어리둥절하여 이렇게 질문하는 많은 동지들에게 라코프스키(Rakovsky)는 18세기 프랑스 대혁명의 실화를 언급하면서 바뵈프(Babeuf)의 예를 전해준다. 그는 아바이(Abbaye) 감옥에서 풀려난 후 파리 교외의 영웅적 인민들의 변화된 모습에 의아해 했다. 혁명은 인간의 개인적 집단적 활력을 집어삼키는 엄청난 괴물이다. 혁명이 진행되는 동안 혁명 인민의 신경은 마모되어 소진된다. 의식은 흔들리고 배짱은 걸레조각이 된다. 혁명의 파도가 너무 급격하게 휘몰아치기 때문에 활력에 찬 새로운 세력이 혁명이 할퀴고 지나간 자리를 메울 시간이 없다. 기아, 실업, 혁명 중핵의 사망, 행정력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던져진 대중 등 모든 현상들이 파리 교외를 물질적 도덕적 폐허로 만들었다. 30년이 지나서야 파리 대중은 혁명의 소용돌이에서 회복되어 새로운 봉기를 준비하게 된다.

 

부르주아 혁명의 법칙들은 노동계급 혁명에 "적용될 수 없다"는 주장을 소련 언론은 표어처럼 늘어놓고 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전혀 과학적이지 않다. 러시아 10월 혁명의 노동계급적 성격은 세계 정세, 러시아 국내 세력들의 특수한 상호 관계에 의해 결정되었다. 그러나 사회계급들은 차르 체제와 후진적 자본주의의 등장이라는 야만적 상황속에서 형성되었다. 따라서 계급들은 결코 사회주의 혁명의 요구에 따라 주문되어 형성되지 않았다. 실제는 이와 정반대였다. 혁명에 대한 반동이 불가피하게 혁명 대중의 대오에서 일어난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많은 측면에서 여전히 후진적이었던 러시아 노동계급이 몇 개월 사이에 반봉건 왕조체제에서 사회주의 독재체제로 도약한 역사상 유례없는 상황 때문이었다. 이 반동은 파도를 타고 연속해서 진행되었다. 국외 상황과 사건들이 서로 앞을 다투어 반동의 조건을 성숙시켰다. 내전에 대한 제국주의 세력의 반동적 개입이 잇따르면서 혁명을 괴롭혔다. 혁명은 서구로부터 어떠한 직접적 도움도 구할수 없었다. 혁명 이후 농촌은 번영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불길한 궁핍이 아주 오랫동안 농촌을 지배했다. 더욱이 노동계급의 뛰어난 대표들은 내전 중에 전사하거나 관료사회의 사다리를 몇 번 오르더니 대중으로부터 멀어졌다. 결국 적대 세력들간의 유례없는 팽팽한 긴장, 희망, 환상 후에 피로, 위축, 혁명에 대한 실망감 등이 지배하는 긴 시기가 이어졌다. "인민적 긍지"가 썰물처럼 사라진 후 공백을 소심함과 출세주의의 밀물이 메웠다. 새로운 지배집단이 이 물결을 타고 권력을 장악했다.

 

5백만 붉은 군대의 동원 해제는 관료지배층의 형성에 적지 않은 역할을 하였다. 내전을 승리로 이끈 사령관들은 지역 소비에트, 경제, 교육 등의 분야에서 요직을 차지했다. 그리고 내전을 승리로 이끈 비상체제를 사회모든 분야에 도입했다. 이 결과 모든 분야에서 대중은 사회의 실질적 지도 역할에서 점차 배제되었다.

 

노동계급 내부의 반동의 물결은 도시와 농촌 소부르주아 계급에게 커다란 희망과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이들은 이미 신경제정책을 통해 상승하고 있었는데 이제 더욱 대담해졌다. 젊은 관료집단은 처음에는 노동계급의 대표로 등장했으나 이제 계급간 분쟁을 중재하는 역할을 스스로 떠맡기 시작했다. 한 달 두 달이 지나면서 관료집단의 독립성은 더욱 커져만 갔다.

 

국제정세는 소련 내부의 관료주의 경향을 강력하게 추동시켰다. 세계노동계급에게 가해지는 자본가계급의 철퇴가 무거울수록 소련 관료집단은 점점 자신감을 얻었다. 그러나 이 두 사실 사이에는 시기적 인과적 연관이 모두 존재하였다. 그리고 이 연관은 두가지 방향으로 작동하였다. 즉 관료지배층은 노동계급의 패배를 조장했으며 노동계급의 패배는 이들의 권력을 더욱 강화시켰다. 1923년 불가리아의 대중봉기가 진압되었으며 독일의 노동자 정당은 굴욕적으로 혁명에서 후퇴하였다. 1924년 에스토니아의 봉기 기도는 곧 붕괴했다. 1926년 영국 총파업은 노동관료들의 배신으로 끝났다. 폴란드에서는 필수드스키(Pilsudski) 독재정권의 등장 앞에 폴란드 노동자당이 굴욕적으로 항복했다. 1927년 중국혁명은 끔찍한 피의 학살로 끝났다. 마지막으로 최근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패배는 더욱 불길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이들 일련의 역사적 대재앙으로 세계혁명에 대한 소련 대중의 신념은 사라졌다. 이로써 관료집단은 구원의 유일한 빛으로 받아들여져 더욱 높은 고지를 점령했다.

 

지난 13년 동안 세계 노동계급이 패배한 이유를 필자는 여러 저서들을 통해 설명했다. 이 저서들에서 필자는 대중으로부터 고립된 지극히 보수적인 크렘린 궁의 지도부는 모든 나라의 혁명운동을 파멸시키는 역할을 수행했다는 사실을 밝히려고 노력했다. 유럽과 아시아에서 혁명이 연속해서 괘배하자 소련의 국제적 지위는 약화되었다. 그러나 소련 관료집단의 힘은 크게 강화되었다. 이 사실은 논박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이후 사태와 관련하여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금 얘기하고 있는 역사적 시기에서 두 사건은 특히 의미가 크다. 1923년 후반에 소련 노동자들의 주요 관심사는 독일로 향해 있었다. 독일의 노동계급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손을 뻗치고 있는 듯 했다. 그러나 독일공산당의 공포에 질린 후퇴는 소련의 근로대중에게 매우 커다란 실망을 안겨주었다. 소련의 관료집단은 즉시 "연속혁명(permanent revolution)"이론(역자 주: 이 용어는 그동안 영구혁명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같은 이름의 저서에서 이 용어가 중단없이 진행되는 혁명, uninterrupted revolution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즉 부르주아 혁명은 계속 사회주의 혁명으로 나아가야 하며 일국 사회주의혁명은 세계적 차원의 사회주의혁명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트로츠키는 이 용어를 통해 혁명이 영원히 진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없다.) 반대하는 캠페인을 시작하고 좌익반대파에게 첫번째 잔인한 타격을 가했다. 1926년과 1927년 사이에 소련의 대중은 다시 새로운 희망을 품었다. 모든 시선은 이제 중국혁명의 드라마가 펼쳐지는 동양으로 향했다. 한편 좌익반대파는 관료집단에 의해 가해진 이전의 타격으로부터 회복되었고 새로운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1927년 중국혁명은 장개석이라는 사형집행인에 의해 학살당했다. 코민테른은 그의 손아귀에 중국의 노동자 농민을 문자 그대로 갖다 바쳤다. 그러자 차가운 실망감이 소련 대중을 엄습했다. 언론과 집회를 통해 거리낌없이 도발을 자행하던 관료집단은 1928년 마침내 좌익반대파 구성원들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를 감행했다.

 

물론 수만 명의 혁명 투사들이 볼셰비키-레닌주의의 깃발 아래 모여들었다. 선진노동자들은 의심의 여지없이 좌익반대파에 공감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공감은 수동적이었다. 대중은 새로운 투쟁을 통해 상황이 크게 변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한편 관료지배층은 이렇게 주장했다: "좌익반대파는 국제혁명을 위해 우리를 혁명전쟁으로 끌어들이려 한다. 소동은 이제 그만! 우리는 휴식을 취할 권궈를 얻었다. 우리는 국내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할 것이다. 여러분의 지도자인 우리를 믿어라!" 이 휴식의 복음은 공산당, 군대, 국가기구 등에 포진한 관료들을 강력히 결속시켰고 피곤에 지친 노동자와 농민대중에게 당연히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들은 스스로 이렇게 물었다: 좌익반대파가 "연속혁명" 사상을 위해 소련을 팔아넘기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실제로 좌익반대파의 투쟁은 소련을 생존시키기 위한 투쟁 그 자체였다. 코민테른의 잘못된 독일 정책은 10년 후 히틀러의 승리를 가져왔다. 즉 전쟁 위험이 서구에서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코민테른의 똑같은 정도의 잘못된 중국 정책은 일본 제국주의를 강화시켰고 동방의 위협을 가까이 느낄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반동기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용기 있는 사상의 결여에 있다.

 

좌익반대파는 고립되었다. 관료지배층은 때를 놓치지 않고 노동자의 당혹감과 수동성을 최대한 활용했다. 이들은 노동계급의 후진 부위가 선진 부위에 대항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더욱 대담하게 쿨락과 소부르주아 동맹군에게 의존했다. 이후 몇 년에 걸쳐 관료지배층은 노동계급의 혁명 전위를 분쇄했다.

 

그 동안 대중에게 전혀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던 스탈린이 완벽한 전략으로 무장하여 권력의 무대 위에 등장했다고 상상하는 것은 너무 단순한 사고이다. 이런 일은 실제하지 않았다. 그가 나름의 노선을 모색하고 있을 때 관료지배층은 그를 모색하고 있었다. 그는 관료지배층이 원하는 모든 것들을 가지고 있었다: 고참 볼셰비키의 권위, 강인한 성격, 협소한 안목, 자신의 유일한 정치기반인 정치기구와의 밀접한 유대 등등. 그는 갑자기 자기에게 닥친 성공에 우선 놀랐다. 새 지배집단은 그에게 환영의 손길을 뻗쳤다. 과거의 혁명 원칙과 대중의 통제로부터 벗어나 자기들 집단 내부의 안정을 가져다줄 믿을 만한 조정자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대중의 눈에 그리고 혁명 과정에서 주변적 인물이었던 스탈린은 테르미도르 반동을 주도한 관료집단의 우두머리로 등장했다.

 

새 지배층은 자신의 사상, 감정 그리고 더 중요하게 자신의 이해관계를 곧 드러냈다. 현재 관료집단 중 구세대의 절대 다수는 10월 혁명기에 혁명 반대 진영에 있었다. 소련 대사들만을 예로 들 경우 트로야노프스키, 마이스키, 포템킨, 수리츠, 킨추크 등이 혁명에 반대했던 자들이었다. 혁명에 반대하지 않은 인물들은 기껏해야 투쟁에서 빠져나와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10월 당시 볼셰비키 진영에 있었던 현직 관료 대부분은 이렇다할 역할을 하지 않았다. 소장 관료들은 노땅들에 의해 선택되어 훈련을 받았다. 종종 부자관계도 있었다. 이런 부류의 인물들은 10월 혁명을 수행할 능력은 없었지만 혁명의 결과를 이용하는 일에는 커다란 수완을 발휘했다.

 

10월 혁명과 테르미도르 반동기 사이에 인물 개개인의 신변은 사태에 확실히 영향을 끼쳤다. 레닌의 병환과 사망은 의심의 여지없이 지금 상황을 재촉했다. 레닌이 좀더 오래 살았더라면 관료집단은 최소한 첫 몇 년간 좀더 서서히 세력을 확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1926년에 레닌의 미망인 크룹스카야는 좌익반대파 성원들과 모인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레닌이 살아 있다면 지금쯤 감옥에 있을 겁니다" 레닌 자신은 이미 앞으로 전개될 사태에 대해 두려움을 느껴 경각심을 고취시켰다. 그녀는 아직도 이것들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반동의 대세에는 레닌의 전지전능함도 소용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관료지배층은 좌익반대파보다 더 큰 재물인 볼셰비키당을 장악했다. 이들은 레닌의 강령을 패배시켰다. 그는 국가기구가 "사회의 하인에서 지배자"로 변모하는 것이 가장 위험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좌익반대파, 당, 레닌 등 모든 적들을 패배시컸다. 그리고 사상과 논쟁이 아니라 자신의 사회적 위력과 비중으로 승리했다. 관료집단의 납 엉덩이가 혁명의 머리보다 더 무게가 많이 나갔다. 이것이 소련에서 일어난 테르미도르 반동의 비밀이다.

 

2. 볼셰비키당의 퇴보

 

볼셰비키당은 10월 혁명을 준비하였고 노동자권력을 확고하게 장악했다. 또한 소련 국가기구를 창건하고 그 기구의 튼튼한 근간을 구성했다. 그러나 당의 퇴보(degeneration)가 이제 국가기구 관료화의 원인이자 결과가 되었다. 이 과정을 간략하게나마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볼셰비키당의 운영원리는 민주집중제(democratic centralism)였다. 민주주의와 집중제라는 두 개념의 결합에는 조금의 모순도 없다. 볼셰비키당은 당의 경계선을 항상 엄격하게 규정했다. 이것만이 아니었다. 일단 이 경계선 안에 들어온 당원에게는 당의 정책방향을 규정할 실질적 권리를 부여하는 면밀한 조치를 취했다. 당내부에서 자유롭게 당정책을 비판하고 지적인 투쟁을 수행하려면 당내 민주주의가 반드시 있어야한다. 볼셰비키당이 분파활동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지금의 사고는 혁명 퇴조기의 미신에 불과하다. 실제로 볼셰비키당의 역사는 분파투쟁의 역사였다. 자본주의 세계를 타도하고 자신의 깃발 아래 가장 대담한 투사와 반란자들을 결집시키는 임무를 가진 진정한 혁명조직이 지적 분쟁이나 일시적 분파 없이 살아 움직이고 발전할 수 있겠는가? 볼셰비키 지도부의 넓은 시야가 당내 분쟁을 최소화시켰고 분파투쟁의 기간을 단축시켰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였다. 끓어 오르는 당내 민주주의가 당 중앙위원회를 지탱하였다. 당 지도부는 이 지지에 기반하여 필요한 사안을 결정하고 명령을 하달하는 대담성을 발휘하였다. 모든 결정적 국면에서 명백하게 옳았으므로 당 지도부는 집중제의 한없이 값진 도덕적 자산인 높은 권위를 누렸다.

 

특히 권력 장악 이전 볼셰비키당의 내부 조직 체계는 현재 코민테른 지부인 각국 공산당의 체계와 완전히 정반대였다. 현재의 공산당에서 "지도자들"은 상부에서 임명되며 상부의 명령 한마디에 정책을 완전히 바꾼다. 그리고 평당원들이 통제하지 못하는 당기구는 이들 위에 거만하게 군림하며 크렘린궁 지도자들에게만 노예처럼 복종한다. 권력을 장악한 초기의 몇 년간 이미 당기구는 삐걱대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스탈린을 비롯한 모든 볼셰비키 당원들이 그로부터 10년 또는 15년이 지난 후 당의 모습을 담은 필름을 미리보았다면 이것이 어느 비방분자의 작품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레닌과 그의 동료들의 관심은 다수파 집권층의 악행으로부터 볼셰비키 평당원들을 보호하는 데 끊임없이 집중되었었다. 그러나 당과 국가기구의 대단히 밀접한 관계와 인적 구성의 중복 때문에 이미 초기 몇 년간 당의 자유와 유연성은 의심의 여지없이 손상당했다. 여러 난관들의 점점 심각해지면서 당내 민주주의는 이와 비례하여 축소되었다. 초기에 당은 소비에트의 틀 안에서 정치투쟁의 자유를 보존하려했다. 그러나 내전은 이 소망에 아주 준엄한 수정을 가했다. 야당들은 차례로 불법화되었다. 이 조치는 소비에트 민주주의의 정신에 명백히 위배되었다. 그러나 당지도부는 이 조치를 원칙이 아니라 자기방어를 위한 일시적 조치로 간주했다.

 

볼셰비키 당기구의 급속한 성장은 수행할 임무의 새로움과 거대함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당내 이견들을 표출시켰다. 노동자 권력에 도전하는 반동 지하조직들이 다양한 통로를 통해 당에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유일한 합법 정치조직인 볼셰비키당의 분파투쟁은 격렬해졌다. 내전이 끝날 무렵 이 투쟁은 너무 날카로와 국가권력을 위협할 지경에 이르렀다. 1921년 3월 크론슈타트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볼셰비키 당원들 상당수가 이 반란에 가담했는데 이때 열린 제10차 당대회는 분파를 금지하고 국가권력을 당으로 이전시켰다. 그러나 이 조치 역시 상황이 호전되자마자 폐기할 특별조치로 간주되었다. 동시에 중앙위원회는 이 새로운 결정으로 당내 활동이 질식되지 않도록 세심히 배려했다.

 

그러나 어려운 상황 속에서 필요한 후퇴로 간주되었던 애초의 조치는 관료집단의 취향에 아주 잘 들어맞았다. 관료집단은 당내 활동을 행정적 편의의 관점에서만 바라보기 시작했다. 레닌은 건강이 잠시 호전된 1922년에 이미 당 관료기구의 위협적 성장에 경악했다. 그리고 당기구를 핵심적으로 장악하면서 국가기구 탈취를 준비하고 있던 스탈린 분파에 대한 투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내 반동 세력에 대한 레닌의 투쟁은 그가 두 번째 뇌일혈을 일으키고 사망함으로써 중단되었다.

 

지노비에프, 카메네프와 동맹한 스탈린은 당기구를 평당원의 통제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 주력하였다. 중앙위원회의 "안정"을 위한 투쟁에서 스탈린은 동료들 중에서 가장 일관되고 믿을 만한 인물로 판명되었다. 그는 국제문제에서 손을 뗄 필요도 없었다. 애초에 이런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새 지배집단의 소부르주아 세계관은 그의 세계관이기도 했다. 사회주의 건설의 과업은 일국적 행정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코민테른을 가능하면 대외정책의 목적을 위해 사용할 필요악 정도로 간주했다. 그에게 당은 자신의 권력 기구를 수동적으로 지지하는 정도의 가치만 가지고 있었다.

 

일국사회주의 이론과 중앙위원회는 모든 것이고 당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상이 관료집단에 의해 유포되었다. 이 새로운 이론은 일국사회주의 이론보다 관료집단의 이해에 더 잘 복무했다. 레닌의 사망을 기화로 관료지배층은 "레닌의 소집(Lenin's levy)"을 선언하였다. 과거에 당의 문호는 항상 엄격하게 제한되었으나 이제는 완전히 개방되었다. 노동자, 점원, 하급관리 등이 떼를 지어 당으로 몰려들었다. 이 조치의 정치적 목적은 혁명 전위의 해체에 있었다. 조직 경험이나 독립성 등이 부족하지만 권위에 복종하는 구래의 습관이 있는 사람들은 이제 당원이 될 수 있었다. 이 조치는 성공했다. 관료집단을 노동계급 전위의 통제에서 해방시킴으로써 "레닌의 소집"은 레닌이 건설한 당에게 마지막 죽음의 일격이 되었다. 이제 당기구는 필요한 독자성을 얻었다. 민주집중제는 관료집중제로 바뀌었다. 상부와 하부를 막론하고 곧 대대적인 인사태풍이 불어닥쳤다. 볼셰비키 당원의 주요한 미덕은 복종이라고 선언되었다. 좌익반대파와 투쟁한다는 명분 하에 혁명가들은 당기구에서 축출되고 대신 전문관료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볼셰비키당의 역사는 이제 당의 급속한 퇴보의 역사로 돌변했다.

 

좌익반대파, 중앙파, 우파의 지도자들이 모두 정치국원이었기 때문에 분파투쟁의 정치적 의미는 베일에 가려졌었다. 피상적으로만 관찰하면 분파투쟁은 레닌의 "법통"을 차지하려는 개인적 경쟁이었다. 그러나 철의 독재체제에서는 사회적 갈등은 처음에는 권력을 장악한 당기구들을 통해서만 드러난다. 프랑스의 경우 테르미도르 반동에 가담한 인물 대다수는 자코뱅 클럽 출신이었다. 나폴레옹 역시 혁명 초기에는 이 클럽의 회원이었다. 제1집정관 시절과 이후 황제가 되었을 때 그가 가장 충성스러운 하수인들을 모집한 것도 바로 자코뱅 클럽 구회원들로부터였다. 시대는 변했고 자코뱅파도 변했다. 20세기의 자코뱅파인 볼셰비키당도 마찬가지이다.

 

레닌 생전의 정치국원들 중 스탈린 만이 아직도 그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는 오랜 망명시절 레닌과 함께 일했는데 저지르지 않은 죄를 뒤집어 쓰고 지금 10년 징역형을 살고 있다. 리코프, 부하린, 톰스키는 지도부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는데 복종의 대가로서 한가한 직책을 맡고 있다. 그리고 필자는 현재 망명 중이다. 레닌의 미망인 크룹스카야도 정치활동을 금지당했다. 모든 노력을 했으나 그녀도 테르미도르 반동에 제대로 적응할 수 없었다.

 

현직 정치국원들은 볼셰비키당 역사 내내 주변적 지위에 머물러 있었다. 혁명 초기 몇 년간 이들의 영전을 예상한 자가 있었다면 아마 그가 가장 이 현상을 놀랍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 놀라움에는 가식이 없었을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정치국은 언제나 옳으며 어느 누구도 정치국보다 옳을 수 없다는 규칙이 과거 어느 때보다 엄격히 준수되고있다. 그러나 정치국도 무오류의 스탈린보다 더 옳을 수는 없다.

 

당내 민주주의 회복 요구는 이 시기 내내 모든 반대세력의 구호였다. 그러나 실현될 수 없는 구호였기에 더욱더 끈질기게 제기되었다. 이미 언급한 좌익반대파 강령은 1927년에 "비판적 노동자를 직접적·간접적 방식으로 탄압하는 것을 중대한 국가적 범죄로 처벌"할 조항이 특별법으로 제정되어 형법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러자 좌익반대파의 정치활동을 금지하는 조항이 형법에 도입되었다.

 

이제 당내 민주주의는 구세대의 기억 속에나 남아 있다. 당내 민주주의의 실종은 소비에트, 노동조합, 협동조합, 문화단체, 체육단체 등의 민주주의 실종과 함께 진행되었다. 당 간부들의 무제한적 위계질서가 모든 기구들 위에 군림하고 있다. 이제 소련은 "전체주의" 체제가 되었으며 이 용어가 독일에서 건너오기 몇 년 전에 이미 현실이 되어 있었다. 라코프스키는 1928년 이렇게 썼다: "독자적 사고 능력이 있는 공산주의자의 의지, 용기, 존엄성이 파괴당해 이제 공산주의자는 기계가 되었다. 이 결과 관료지배층은 제거될 수 없는 과두제로 정착했다. 이제 당과 계급은 사라졌다." 분노에 찬 이 글이 나온 이래 당의 퇴보는 더욱 끝없이 진행되었다. 비밀경찰(GPU)은 당생활의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1936년 3월 몰로토프가 프랑스 기자에게 집권 여당 내부에는 분파투쟁이 없다고 자랑하였다. 그러나 이 현상은 당내 이견이 정치경찰의 자동적 개입으로 해소되기 때문에 나타난다. 이제 과거의 볼셰비키당은 죽었으며 어떤 힘도 이것을 부활시킬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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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의 정치적 퇴보와 함께 평당원의 통제를 받지 않는 당기구가 도덕적으로 부패했다. 소비에트 부르주아지라는 뜻의 "소브부어(sovbour)"는 특권 관료층을 의미했는데 노동자들의 어휘에 일찌감치 등장했다. 신경제정책의 등장과 함께 부르주아 경향은 활동영역을 더 넓혔다. 1922년 3월 제11차 당대회에서 레닌은 권력층의 타락 위험을 경고했다. 피정복자가 정복자보다 문화수준이 더 높을 경우 정복자는 피정복자의 문화를 받아들인다. 이 경우는 인류 역사에서 적어도 두번 이상 존재했다고 레닌은 말했다. 러시아 부르주아지와 차르 체제 관료집단의 문화는 확실히 형편없었다. 그러나 슬프게도 새로운 지배층은 종종 이 문화에 경의를 표해야 한다. 모스크바에서는 "4,700명의 책임감 있는 공산주의자들"이 국가기구를 운영하고 있다. "누가 누구를 지도하고 있는가? 공산주의자가 지도하고 있다고 말하기는 의심스럽다"고 레닌은 말했다. 이후의 당 대회에서 레닌은 병환으로 연설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활동적 삶의 최후의 몇개월간 그의 생각은 관료집단의 억압, 변덕, 타락을 노동자들에게 경고하고 이들의 저항을 촉구하는데 바쳐졌다. 그러나 그는 질병의 첫 징후만을 보았을 뿐이다.

 

크리스티안 라코프스키는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인민공화국 의장이었으며 이후 영국과 프랑스의 소련 대사를 지냈다. 그는 1928년 당시 유형 중에 있던 친구들에게 소련 관료집단에 대한 짤막한 조사보고서를 보내 주었다. 이것은 이미 이 책에서 여러 번 인용된 바 있는데 현재까지는 이 주제에 대한 가장 훌릉한 자료이다. 라코프스키는 이 조사보고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레닌과 우리 모두의 마음 속에는 당지도부의 임무가 아주 명확했다: (1) 권력층의 특권, 지위, 전용상점 등의 부패 (2) 구귀족계급 및 부르주아 잔존세력과 권력층의 화해 (3) 신경제정책의 부패적 영향력 (4) 부르주아지의 도덕과 이데올로기가 가하는 유혹 등 해악적 요인들로부터 당과 노동계급의 보호 ....... 그러나 당기구는 이 임무를 수행하지 못했으며 대중의 교육자 및 보호자라는 이중적 역할을 수행할 능력이 완전히 모자란다는 점을 우리는 정직하게 틀림없이 큰소리로 말해야 한다. 당 지도부는 실패했으며 파산했다."

 

라코프스키 자신이 관료집단의 억압에 굴복하여 자신의 비판적 판단을 철회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70세 노인 갈릴레오 역시 자기 신념을 철회했었다. 종교재판소의 탄압 때문에 이 과학자는 코페르니쿠스 우주 이론을 부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지구가 태양주위로 도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우리는 60세 노인 라코프스키가 진심으로 자기 신념을 철회했다고 믿지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최소한 두번 이상 강요된 전향을 날카롭게 분석했기 때문이다. 사태의 객관적 전개는 그의 정치비판들의 올바름을 주관적 지조보다 훨씬 설득력 있게 보여주었다.

 

노동계급은 국가권력을 장악하면서 여타 계급과의 역관계에 변화를 가져을 뿐 아니라 자기 내부에도 변화를 가져온다. 국가권력의 행사는 특정 사회집단의 전문영역이 된다. 이 경우 혜택받은 권력층은 우선 자신의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급급하게 된다. 특히 자신의 역사적 임무의 숭고함을 높이 자각할수록 이 경향은 더욱 강하다. "노동자국가는 집권당 성원의 자본주의적 축적을 금지한다. 이 경우 노동계급의 계층적 분화는 처음에는 각 집단의 기능에 따라 발생하지만 이후에는 사회적 성격을 띤다‥‥‥" 계속해서 라코프스키는 설명한다: "승용차, 고급 아파트, 정기 휴가 등의 특권을 누리면서 당 최고수준의 급료를 받는 공산주의자의 사회적 조건은 한달에 기껏해야 50 내지 60 루블을 받으며 석탄광산에서 일하는 공산주의자의 사회적 조건과 아주 다를 수밖에 없다." 재물 욕심, 정부 사업권 획득, 보급품 확보 등 자코뱅파가 권력을 잡은 후 타락한 이유들을 열거하면서 라코프스키는 바뵈프의 흥미 있는 발언을 인용한다. 권력을 장악한 자코뱅파의 타락은 이들과 아주 친한 관계를 유지했던 구귀족 계급의 젊은 여성들에 의해 크게 영향받았다고 그는 말했다. 바뵈프는 외쳤다: "소심한 인민의 자식이여,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귀족계급의 젊은 여성들이 오늘은 당신들을 포옹하지만 내일은 당신들을 목졸라 죽일 것이다." 소련 지배층 부인들에 대한 호구조사 통계는 이와 비슷한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아주 잘 알려진 소련의 언론인 소스노프스키(Sosnovsky)는 소련 관료집단의 도덕수준 형성에 특별한 역할을 한 "승용차-여자 요인"을 지적한다. 소스노프스키 역시 라코프스키와 마찬가지로 자기 발언을 철회하고 시베리아 유형에서 돌아왔다. 그렇다고 소련 관료집단의 도덕 수준이 향상된 것은 아니었다. 이와 반대로 과거 발언을 철회한 것 자체는 심화되고 있는 사기저하를 증거할 뿐이다.

 

소스노프스키의 오랜 신문기사들은 원고의 형태로 손에서 손으로 전해졌다. 그의 기사들은 새로운 지배층의 일상생활에 대한 잊지 못할 일화들을 싣고 있었다. 이 일화들은 현재 권력층이 과거 권력층의 도덕에 어느 정도 동화되었는지를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다. 그는 1934년 마침내 관료집단에게 굴복하였다. 그러므로 과거의 예를 찾을 것 없이 새로운 예들만을 소련 언론에서 발굴해보자. 그리고 권력 남용이나 소위 "비리"들보다 합법적이어서 소련 언론에 자주 소개되는 일상사들을 다루어 보자.

 

어느 모스크바 공장의 책임자는 아주 유명한 공산주의자인데 자기 공장의 문화 수준 개선 상황을 『프라우다』에서 자랑하고 있다. "어느 기계공이 전화를 건다: '책임자님, 지시의 내용이 무엇이십니까? 용광로를 즉시 확인할까요 아니면 기다릴까요?' 나는 대답했다 '기다려'" 기계공은 2인칭 복수를 쓰면서 책임자에게 아주 공경한 어조로 말한다. 이에 대해 책임자는 자신의 우수한 지위를 의식하여 2인칭 단수를 써서 기계공을 마치 하인처럼 대한다. 이 구역질나는 대화는 문화수준이 있는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아주 보통인 것처럼 책임자 자신이 『프라우다』에 소개하고있다! 그런데 신문 편집자는 이 어투에 반대하지 않는다. 자신도 그것이 보통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문 독자들도 반대하지 않는다. 이미 이런 대접에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역시 놀라지 않는다. 크렘린궁의 엄숙한 회의에서 "지도자들"과 인민위원들은 자신들의 부하인 공장 책임자들 그리고 훈장을 받기 위해 특별히 초대된 집단농장의 대표들, 십장, 여성들에게 똑같은 투로 말하기 때문이다. 차르시대 러시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혁명 구호는 사장이나 고위관료들이 하급자에게 쓰는 2인칭 단수 금지 요구였다. 이 사실을 어떻게 벌써 잊을 수가 있는가!

 

위에서 소개한 크렘린궁 지도자들의 "인민"에 대한 태도는 마치 주인이 하인에게 대하는 것처럼 오만불손함이 놀라울 지경이다. 그러나 이 사실은 10월 혁명의 승리, 생산수단의 국유화, 농업의 집단화, "쿨락 계급의 해체" 등의 조치에도 불구하고 인간 관계 특히 소비에트 위계질서 최상층부의 인간 관계가 사회주의에 걸맞게 높아지기는커녕 많은 측면에서 문화적으로 우수한 자본주의에 비교해도 여전히 훨씬 뒤쳐지고 있음을 실수의 여지없이 증명하고 있다.

 

문화의 영역에서 최근 커다란 후퇴가 있었다. 그리고 러시아 야만주의 부활의 진정한 원천은 당연히 소비에트판 테르미도르 반동이다. 이 계기를 통해서 세련된 문화를 갖지 못한 관료집단이 대중의 통제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여 사회에 군림하게 되었고 대중은 복종과 침묵이라는 잘 알려진 복음을 선사 받았다.

 

독재와 민주주의라는 추상적 반대 개념들을 비교하여 양자의 강점들을 순수이성에 기초하여 재어 볼 생각은 필자에게 결코 없다. 이 세계에서 모든 것은 상대적이며 변화만이 영원히 지속되는 요소이다. 볼셰비키당의 독재는 인류 진보의 가장 강력한 도구로 판명되었다. 그러나 여기서도 역시 어느 시인의 말대로, "이성은 비(非)이성이 되고 친절은 짐이 된다." 야당 금지는 분파활동 금지로 이어졌다. 분파활동 금지는 무오류 지도자들에 대한 반대를 금지하는 것으로 끝났다. 비밀경찰이 제조한 당의 통일성은 관료집단의 전횡을 낳았다. 이로부터 온갖 종류의 잔악함과 부패가 생겨났다.

 

3. 테르미도르 반동의 사회적 기반

 

우리는 소련의 테르미도르 반동을 대중에 대한 관료집단의 승리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이 사건의 역사적 조건들을 밝혔다. 노동계급의 혁명 전위 가운데 일부는 행정기구에 집어삼켜져 서서히 사기를 잃어갔고 또 일부는 내전으로 전몰하였으며 나머지 일부는 사회의 주요 영역에서 배제되어 압살되었다. 지치고 실망한 대중은 사회의 정점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들에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지금까지 열거한 조건들은 그 자체로 중요하지만 왜 관료집단이 사회로부터 독립하여 자신의 운명을 확고하게 장악했는 지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관료집단의 권력의지도 이 현상을 설명하는데 불충분하다. 새 지배층의 등장에는 깊은 사회적 원인들이 있다.

 

18세기 자코뱅파에 대한 테르미도르 반동도 대중의 피로와 혁명 중핵의 사기저하에 일부 원인이 있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부차적인 이 현상 밑에서는 깊은 유기적 과정이 진행되고 있었다. 자코뱅파는 거대한 혁명의 파도로 들어 올려진 하층 소부르주아 계급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18세기 프랑스 대혁명은 생산력의 발전에 조응하여 대부르주아 계급의 정치적 지배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테르미도르 반동은 이 불가피한 과정의 한 단계에 불과했다. 소련의 테르미도르 반동은 어떤 사회적 필연을 표현했는가? 경찰기구가 승리한 문제에 대해 필자는 이미 예비적으로나마 해답을 제시했었다. 이제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기적 조건과 이 과정에서 필요한 국가의 역할에 대한 기존의 분석을 확장시켜야 한다. 다시 한번 이론적 예언과 현실을 비교해보자. 국가권력을 장악한 직후 곧바로 개시될 시기에 대해 1917년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 "부르주아 계급과 이 계급의 저항을 억압할 필요가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억압의 주체는 -지금까지 언제나 그러했듯이- 인구의 소수가 아니라 다수이다‥‥‥‥ 이 경우 국가는 사멸을 시작한다." 그러면 국가 사멸의 과정은 어떻게 드러나는가? "특귄 관료, 상비군의 사령관 등 특권 소수 지배층의 특별한 기구들 대신 다수 대중이 직접 억압 기능들을 수행할 수 있다." 그리고 레닌은 곧이어 격언과도 같은 반박할 수 없는 사고를 개진한다: "국가권력의 기능이 다수에 의해 좀더 보편적으로 수행되면 될수록 이 권력에 대한 필요성은 점점 더 줄어든다." 생산수단의 사적소유가 철폐되면서 국가에게 주어진 주요한 역사적 임무 즉 절대 다수에 대한 소수의 특권적 소유를 방어할 임무가 없어진다.

 

레닌에 의하면 국가의 사멸은 착취자를 착취한 날 바로 다음 즉 새로운 체제가 경제적·문화적 문제들을 해결할 시간을 갖기 이전에 이미 시작된다. 이 문제들이 해결될 때마다 국가는 철폐되고 사회주의 체제 내로 해소된다. 이 해소의 정도는 사회주의 체제의 효율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지표가 된다. 대체로 이와 같은 사회학적 가설이 제시될 수 있다: 노동자국가에서 대중이 행사하는 강제력의 강도는 착취의 경향 즉 자본주의로의 복귀 위험과 정비례한다. 그리고 사회적 연대와 새로운 체제에 대한 대중의 충성심의 정도에 반비례한다. 따라서 특권 관료와 상비군 사령관을 포함한 관료집단의 역할을 대중은 맡을 수도 맡기를 원치도 않는다. 이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대중 자신을 억압한 강제력의 특수한 종류이기 때문이다.

 

민주적 소비에트가 원래의 위력과 독립성을 보존하고 있으면서 혁명 후 첫 몇 년간 사용했던 억압과 강제력을 지금도 사용해야한다면 이것은 심각한 우려를 제기할 만하다. 그런데 현재 대중 소비에트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으며 강제력의 기능을 스탈린, 야고다 등에게 넘겨주었다. 따라서 지금의 상황은 더욱더 심각하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이렇게 자문해야한다: 국가가 의연히 그 억압의 위력을 고수하면서 경찰국가의 모습을 띠고 있는 배경에는 어떤 사회적 원인이 버티고 있는가? 이 질문의 중요성은 명백하다. 이 질문에 대한 해답에 따라서 우리는 사회주의 사회 일반에 대한 기존 견해를 근본적으로 수정하든가 소련의 공식적 견해를 근본적으로 거부하든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이제 어느 모스크바 신문의 최신호에 소개된 소련에 대한 틀에 박힌 정의를 검토해보자. 이 정의 가운데 하나는 매일 소련 전국에서 반복되고 있으며 학교 어린이들이 외우고 있다: "소련에는 자본가, 지주, 쿨락 등 기생적 계급들이 완전히 일소되었고 인간의 인간에 대한 착취는 영원히 종식되었다. 전국 경제는 사회주의화되었고 발전하고 있는 스타하노프 운동은 사회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 조건들을 준비하고 있다." (『프라우다』 1936년 4월 4일자) 코민테른이 발행하는 세계신문도 이 주제를 똑같이 반복하고 있다. 그러나 착취가 "영원히 종식되었다"면 그리고 소련이 공산주의의 가장 낮은 단계인 사회주의에서 가장 높은 단계인 공산주의로 나아가고 있다면 국가라는 마지막 족쇄를 던져버리는 일만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 그런데 현재 소련은 전체주의적 관료체제이다. 이 엄청난 차이는 머리로 상상하고 이해하기조차 힘들다!

 

이 치명적 모순은 당 운영에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이 경우 문제는 대개 이렇게 정식화될 수 있다: 1917년부터 1921년까지 구 지배계급들은 손에 무기를 들고 혁명에 대항했으며 전세계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적극 지원 받고 있었다; 동시에 무기를 든 쿨락이 나라의 군대와 식량공급을 방해하고 있었다; 이 당시 정책의 가장 중요한 문제들을 당내에서 공개적으로 두려움 없이 논의하는 것이 가능했는가? 한편 제국주의 세력의 간섭이 끝나고 착취계급이 일소되었고 의심할 여지없이 공업화가 성공했으며 농민 절대다수에 대한 집단화가 시행되었다. 그런데 왜 민주적 절차에 의해 교체되지 않는 지도자들이 존재하며 이들에 대한 단 한마디의 비판도 허용되지 않는 것일까? 당헌에 따라 당 대회 소집을 요구하는 볼셰비키 당원이 왜 즉시 출당 조치를 당하며 스탈린의 무오류성에 대한 의구심을 크게 소리내어 표현한 시민이 왜 마치 테러 음모의 가담자인 것처럼 기소되어 유죄선고를 받는가? 어디서 이 끔찍하고 괴물 같으며 참을 수 없는 탄압과 경찰력의 강화 현상이 등장했는가?

 

이론은 언제나 현실에게 지불을 요구할 수 있는 어음이 아니다. 어떤 이론이 오류로 판명되면 그것을 수정하고 빈틈을 메워야 한다. 소련의 현실과 마르크스주의 사이의 현격한 차이를 가져온 진짜 사회세력을 우리는 찾아내야 한다. 현재 소련 지도자들의 권위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지만 살아 있는 현실의 뺨을 때리며 모욕하는 공 문구를 반복하면서 어둠 속을 헤맬 수는 없다. 이제 이 공문구의 설득력 있는 예를 찾아보자.

 

1936년 1월 당 중앙집행위원회 회의에서 인민위원회 의장 몰로토프는 이렇게 선언했다: "소련 경제는 사회주의화되었다. (박수)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계급을 일소시켰다. (박수)" 그러나 과거부터 "우리에게 적대적일 수밖에 없는 분자들"인 구 지배계급들의 잔당이 남아 있다. 더욱이 집단농장의 농부, 국가 공무원, 심지어는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가끔 "피라미 투기꾼들"이 발견된다. 이들은 "집단적 재산과 국가 재산을 뜯어먹는 사기꾼, 소련에 해악을 끼치는 수다장이 등"으로 불린다. 이 결과 독재를 더욱 강화해야한다. 엥겔스의 견해와는 반대로 노동자국가는 "잠들어서는" 안된다. 반대로 더욱더 경계를 단단히 해야한다.

 

소련 정부의 수반인 몰로토프가 제시한 소련의 현재 상황은 너무 참혹하게 자기모순에 빠지지만 않는다면 가장 안심스러운 내용일 것이다. 사회주의는 소련을 완전히 정복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계급은 철폐되었다.(그렇다면 다른 모든 경우에도 계급은 철폐되어 있다) 물론 사회 안정은 과거 유물들의 파편 때문에 여기저기에서 흔들리고 있다. 여기저기에 흩어진 자본주의 복귀파 몽상가들은 권력과 재산을 박탈당하고 있다. 따라서 비록 "(진짜 투기꾼이 아니라) 피라미 투기꾼들"이나 "수다장이"들과 연합해도 무계급 사회를 타도할 수는 없다. 모든 일이 최선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관료집단에 의한 철의 독재는 무슨 소용이 있을까?

 

반동적 몽상가들이 점차 소멸될 것이라고 우리는 믿어야 한다. "피라미 투기꾼들"과 "수다장이들"은 초(超)민주적 소비에트에 의해 우습게 제거될 것이다. 1917년 레닌은 관료주의적 국가의 부르주아 및 개량주의 이론가들에게 이렇게 응답했다: "우리는 유토피아를 꿈꾸고 있지 않다. 개개인의 비리나 권력남용 가능성과 불가피성을 결코 부인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남용들을 억압할 필요성 역시 마찬가지로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 이런 조치를 취하기 위한 특별한 억압기구는 필요 없다. 이것은 무장 인민들이 알아서 할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문명인이 싸움하는 사람들을 뜯어말리고 여성에 대한 폭행을 막는 것과 같이 아주 단순하고 쉴게 인민들은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 이 말은 마치 레닌이 몰로토프 같은 정부 수반들의 견해를 특별히 예상한 것처럼 느껴진다. 소련의 공립학교는 레닌 사상을 가르친다. 그러나 인민위원회는 이렇게 하지 않는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레닌이 날카로운 칼날을 들이대며 비판하는 엉터리 이론을 인민위원회 의장이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용감하게 말할 리가 없을 것이다. 소련의 창시자와 그의 아류 사이의 모순이 우리 앞에 드러났다! 레닌은 관료적 기구가 없이도 착취계급이 일소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반면 몰로토프는 계급의 일소 이후에도 왜 관료기구가 인민의 독립성을 질식하는지를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그저 일소된 계급의 "잔당"을 언급할 뿐이다.

 

그러나 "잔당"의 존재를 관료주의의 이유로 제시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왜냐하면 관료집단을 대표하는 인사들의 자백에 의하면 어제의 적들은 소련 사회에 이미 성공적으로 동화되었기 때문이다. 1936년 4월 당 중앙위원회 비서의 하나였던 포스티세프(Postyshev)는 공산주의 청년동맹 대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많은 수의 태업 분자들은 ‥‥ 진심으로 과오를 뉘우치고 소련 인민의 대열에 합류했다." 농업 집단화가 성공했으므로 "쿨락의 자식들이 자기 부모들의 과거를 책임질 수 없다." 그리고 이보다 더 확실한 발언도 있다: "과거 농촌의 착취자였던 쿨락은 다시 과거의 지위를 회복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출신 성분에 따른 사회활동 제한법을 정부는 철폐했다. 이 조치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몰로토프가 전적으로 동의한 포스티세프의 주장이 옳다면 그것은 오직 이 때문이다: 관료집단은 끔찍한 구시대의 유물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가의 강제력은 일반적으로 소련에서 전혀 인연이 없다. 그러나 몰로토프나 포스티세프는 이 거역할 수 없는 결론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들은 자기모순에 가득한 자신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권력을 휘두르는 것을 더 좋아한다.

 

또한 현실에서 이들은 권력을 거부할 수 없다. 이 사실을 객관적 언어로 옮기자면 이렇다: 지금 소련 사회는 국가기구 그리고 제한적인 의미에서 관료집단 없이 운영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과거의 불쌍한 잔당들 때문이 아니라 지금 존재하는 위력 있는 세력과 정치경향들 때문이다. 강제력의 기구인 국가가 소련에 존재하는 이유는 지금의 이행기 체제가 여전히 사회 모순으로 가득 차있기 때문이다. 사회 모순은 모든 사람들에 의해 가장 민감하게 느끼는 소비 영역에서 대단히 첨예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이 영역의 모순은 생산의 영역으로 옮겨갈 위험이 언제나 있다. 사회주의의 승리가 최종적이거나 역전될 수 없다고 말할 상황이 전혀 아니다.

 

소비재의 결핍과 이에 따른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관료집단의 통치 기반이다. 상점에 물품이 충분히 있으면 구매자는 원할 때는 언제든지 상점에 들러 물건을 살 수 있다. 그러나 물품이 거의 없을 때 구매자는 줄을 서야 한다. 이 줄이 아주 길면 질서 유지를 위해 경찰관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소련 관료집단이 누리는 권력의 출발점이다. 관료집단은 누가 어떤 물품을 가져야 하고 누가 줄에서 계속 기다려야 하는지를 "알고 있다."

 

언뜻 생각하면, 물질적·문화적 수준이 올라가면 특권, "부르주아 법"의 적용, 이 법의 옹호자들인 관료집단 등이 축소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이다: 생산력의 발전이 모든 형태의 불평등, 특권, 이권 등의 극단적인 발호와 관료주의의 성장을 초래했다. 그러나 이 현상은 전혀 우연이 아니다.

 

초기에 소련 체제는 의심할 여지없이 지금보다 훨씬 평등했고 관료주의가 덜 기승을 부렸다. 그러나 그것은 일반적 빈곤의 평등이었다. 나라의 자원이 너무 부족했기 때문에 대중과 광범위한 특권층이 분리될 수 없었다. 동시에 임금의 "평등적" 성격은 개인의 노동 의욕을 저하시키고 생산력 발전을 저해했다. 특권을 가능하게 하는 재화의 축적을 위해 소련 경제는 빈곤에서 벗어나 더 높이 성장해야 했다. 현재의 생산수준으로는 모두에게 모든 생활필수품을 보장할 수 없다. 그러나 소수에게 상당한 특권을 부여할 정도는 되었고 대중을 자극하기 위해 불평등을 채찍으로 사용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경제성장이 소련에서 사회주의적 요소보다 자본주의적 요소들을 훨씬 강화시킨 첫 번째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다른 이유들이 있다. 지금 단계에서 자본주의적 임금지불 방식을 강요하는 경제적 요인과 함께 정치적 요인이 같은 방향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리고 관료집단은 정치적 요인 그 자체이다. 불평등을 조장하고 옹호하는 것이 관료집단의 핵심 역할이다. 맨 처음 관료집단은 노동자국가의 부르주아적 기관으로 등장했다. 소수 특권층의 이익을 확립하고 옹호하면서 관료집단은 당연히 자신의 몫을 챙긴다. 분배할 재물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분배에서 자신을 제외시키는 경우는 결코 없다. 이렇게 사회적 필요에 의해 등장한 집단이 일정 시점을 경과하면 자신의 사회적 역할보다 더 커다란 권력을 휘두르며 사회 전체로부터 독립적인 암적 존재가 된다.

 

이제 소련판 테르미도르 반동의 사회적 의의가 명료해지기 시작하고 있다. 대중의 빈곤과 문화적 후진성이 손에 커다란 곤봉을 든 통치자의 흉악한 모습을 만들어 내었다. 자신의 역할을 다하였으나 여전히 권력을 휘두르는 관료집단은 전에는 사회의 종이었으나 이제는 사회의 주인이 되어 사회와 대중 위에 군림하고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대중으로부터 사회적 도덕적 독립성을 획득하였기 때문에 자신의 활동과 수입에 대한 어떤 통제도 허용하지 않는다.

 

관료집단이 "피라미, 투기꾼, 사기꾼, 수다장이"에 대해 의아할 정도로 두려움을 갖는 이유가 자연스럽게 설명될 수 있다. 인구 전체의 기본적 필요를 충족시킬 능력을 아직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소련 경제는 모든 요소 요소에 사기와 투기 경향을 조성한다. 한편 새로운 귀족계급이 누리는 특권은 현 체제에 적대적인 "수다장이들"의 말에 대중이 귀기울이게 만든다. 즉 귓속말로나마 탐욕스럽고 변덕스러운 지배층을 비판하는 자들에게 대중은 관심을 보인다. 따라서 과거의 유령이나 더 간단히 말해 지난 해에 내려 아직 녹지 않은 눈의 문제가 아니다. 개인적 축재에 눈먼 강력하고 지속적이며 재생산되는 현재의 세력과 정치경향이 문제이다. 현재 소련의 미미한 번영의 물결은 이 원심적 경향들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강화시켜 왔다. 한편 새로운 특권층의 탐욕스런 손에 매질을 가하려는 대중의 욕구가 동시에 성장하였다. 다시 사회적 갈등은 날카로워지고 있다. 관료집단이 휘두르는 권력의 원천은 바로 이 상황에 의해 조성되고 있다. 그러나 이와 똑같은 상황에 의해 관료집단의 권력을 위협하는 세력도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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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불평등과 사회적 갈등의 증대

 

1. 궁핍, 사치, 투기

 

소련 정부는 처음에 "사회주의적 분배"를 실시했으나 1921년 시장체제로 회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5개년 계획 기간에 물질적 수단들을 공업생산에 최대한 투입하면서 다시 국가분배 체제로 되돌아갔다. 과거의 "전시공산주의"를 다시 실험하는 셈이었다. 다만 이번에는 더 높은 물질적 기반을 바탕으로 실험을 했다. 그러나 이 기반도 불충분한 것으로 판명 났다. 1935년 계획적 분배체제는 다시 상거래 체제에 자리를 내주었다. 결국 현실적 분배방식은 소유형태보다는 기술수준과 물질적 자원에 의존한다는 사실이 다시 명백해졌다.

 

특히 도급제 도입을 통한 노동생산성 향상은 미래에 소비재가 증가하고 물가가 인하되어 생활수준이 향상될 것을 약속하고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물의 한 측면에 지나지 않는다. 번영했던 자본주의 체제에서도 이 현상이 일어났다. 그러나 사회적 현상 및 과정은 연관과 상호작용의 측면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상품생산에 기초한 노동생산성의 향상은 불평등을 증대시킨다. 사회 지배층의 번영은 대중의 생활수준 향상을 훨씬 앞지르기 시작한다. 국부가 증대됨에 따라 새로운 사회분화가 진행된다.

 

일상생활의 조건으로 보면 소련 사회는 안정되고 특권을 누리고 있는 소수와 궁핍 속에서 살아가는 다수로 이미 나누어져 있다. 더욱이 이 불평등의 수준은 극단적이 되어 노골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널리 유통되는 제품들은 일반적으로 값이 비싸면서도 질이 낮다. 그리고 주요 도시를 벗어날수록 구하기가 더 힘들다. 이 상황에서 소비재에 대한 투기나 노골적인 도둑질이 성행한다. 어제까지는 이 행위가 계획적 분배의 결손을 보충했다면 지금은 상거래의 결손을 교정한다.

 

소련의 "친구들"은 눈을 감고 솜으로 귀를 막은 후 인상에만 의존하여 소련의 상황을 판단하는 습성이 있다. 이 습성은 이들의 직업에 의해 단련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인상에 의존할 수 없다. 소련의 적들은 악의적 비방을 아주 빈번히 일삼고 있다. 따라서 관료집단에게 시선을 두어보자. 이들은 최소한 자신들에게는 적대적이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이들이 공식적으로 자기비판을 할 때는 항상 시급한 실제적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이들이 빈번히 지껄이는 시끄러운 자화자찬보다 자기비판이 신뢰성이 훨씬 크다.

 

잘 알려져 있듯이 1935년 계획은 초과 달성되었다. 그러나 주택의 경우는 목표의 55.7%만 달성되었다. 더욱이 노동자 주택 건설은 모든 사업 가운데 가장 천천히 그리고 가장 엉터리로 진행된다. 집단농장 농민들은 과거와 같이 낡은 오두막집에 가축, 바퀴벌레와 살고 있다. 반면 고위관료들은 자신들을 위해 건축된 모든 주택들에 "가정노동자 즉 하인이 쓸 방"이 없다고 신문에서 불평한다.

 

모든 정부와 사회체제는 건축물을 통해 자신의 기념비를 세운다. 지금 소련의 특징적 건축물은 각급 소비에트가 사용하는 수많은 궁전과 주택, 가끔 천만 루블까지 나가는 고위관료들의 진짜 궁전, 고급 극장, 장교의 클럽 하우스인 적군 주택, 요금이 아주 높은 호화 지하철 등이다. 그런데 노동자 주택은 군대 막사 모양에 옛날 그대로 아주 후진적이다.

 

국가소유 화물을 운송하는 철도 건설에는 상당한 발전이 있었다. 그러나 일반 시민은 이 발전의 성과를 전혀 누리지 못하고있다. 도로통신부 장관들은 객차와 철도역의 비위생적 상태, "참을 수 없는 서비스의 실종‥‥빈번한 열차표 남용, 도둑질, 사기 ‥‥ 빈 좌석에 대한 은폐와 투기, 뇌물 수수 ‥‥‥ 수화물에 대한 강도행위" 등을 불평하면서 수많은 개선명령을 하달한다. 이 사실들은 "사회주의 운송에 대한 치욕"이다! 그러나 이 행위들은 자본주의 운송체제에서도 범죄행위이다. 일반대중이 이용하기에 지극히 어려운 운송수단의 형편없는 수준, 운송 물품의 격심한 품귀, 일반 승객에 대한 철도 공무원들의 냉소적인 태도 등이 책임자들의 반복되는 불평에서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한편 관료집단은 땅, 바다, 하늘에서 가장 안락한 운송 서비스를 제공받는다. 특등객차, 특별 객차, 특별 기선 등의 수는 대단히 많으며 최고급 승용차와 비행기들이 현재 이것들을 대체하고 있다.

 

레닌그라드 중앙위원회 의장 즈다노프는 청중들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1년 후에 "당 활동가들이 지금의 평범한 포드 승용차가 아니라 리무진을 타고 회의장에 도착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을 약속했다. 그의 발언은 소련 산업의 발전 정도를 보여주고 있다. 소련의 기술은 인간 복지에 쓰일 경우 언제나 선택된 소수의 고급 수요를 만족시키는 데 주로 이용되고 있다. 그런데 일반 시민이 이용하는 전차는 운행이 되더라도 과거와 같이 숨이 막힐 정도로 혼잡스럽다.

 

식품산업 인민위원 미코얀은 이렇게 자랑하고 있다: 가장 높은 수준의 과자와 케이크 등이 생산되면서 저질품들은 급속히 없어지고 있다; "우리 여성들"은 질 좋은 향수를 원한다. 이것은 소련이 화폐경제로 전환하면서 수준 높은 소비자들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시장 법칙이다. 그래서 고위층 "부인들"은 가장 수준이 낮은 소비자가 결코 아니다. 그런데 1935년 우크라이나에서 조사된 95개 협동조합 상점 중 68곳에는 과자나 케이크 등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파이에 대한 수요는 15% 내지 20%까지만 충족되었다. 그것도 품질이 상당히 낮은 것들이 그랬다. 『이즈베스챠』지는 이렇게 불평한다: "공장은 소비자의 수요에 관계없이 생산하고 있다" 소비자가 힘이 없을 경우 이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이 문제들을 유기화학의 관점에서 다루고 있는 바크 교수는 "생산되는 빵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품질이 나쁜 경우가 자주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효모의 신비와 이것의 발효작용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 근로 남녀도 그와 똑같이 생각한다. 그러나 이 저명한 교수양반과는 달리 이들은 신문에 자신들의 생각을 표현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모스크바에서는 의류 복합기업(trust)이 특별 "패션점"에서 다양한 색상의 비단치마를 선전하고 있다. 그런데 지방이나 심지어 거대 공업도시에서도 줄을 서거나 화가 치미는 경험을 한 후에야 노동자들은 겨우 면셔츠를 구할 수 있다. 셔츠가 모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극소수에게 사치성 의류를 공급하는 것보다 다수에게 필요한 기본 의류를 공급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 인류 역사는 이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자신의 업적을 열거하면서 미코얀은 이렇게 밝히고 있다: "동물성 마가린 산업이 새로 생겼다." 물론 이 산업은 차르체제에는 없었다. 그렇다고 상황이 그때보다 더 나빠졌다고 성급하게 결론 내릴 필요는 없다. 당시에는 버터를 구경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체품이 등장한다는 사실은 소련에 최소한 두 종류의 소비자 즉 버터를 선호하는 소비자와 마가린으로 때우는 소비자가 있음을 드러낸다. 미코얀은 다시 자랑한다: "필요한 사람들에게 마호르카를 풍족하게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유럽이나 미국에는 이런 저질 담배가 없다는 사실을 그는 덧붙여야 했다.

 

불평등 현상이 아주 뚜렷하게 보이는 경우가 또 있다. 모스크바를 비롯한 대도시에는 특별상점이 개장되었다. "광채(Luxe)"라는 별로 러시아적이지 않지만 표현력 있는 이름을 가진 사치품 상점이다. 동시에 모스크바와 지방의 식품상점에는 강도행위가 잇따르고 있다는 불평이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누구나 배를 채워야하지만 소수만 필요를 충족하고 있음을 이러한 사건들을 통해 알 수 있다.

 

주부 노동자는 체제에 대해 나름의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아주 예민한 관료가 냉소적으로 표현하듯이 그녀의 "소비자" 지위 정도는 사회체제의 성격을 결정적으로 나타낸다. 근로여성과 관료간의 분쟁에서 마르크스와 레닌은 우리와 함께 근로여성의 편에 서 있다. 자신의 업적을 과장하고 모순을 호도하고 근로여성이 체제를 비판할 수 없도록 목을 조르는 관료집단을 우리는 반대한다.

 

마가린과 마호르카는 소련의 불행한 필수품이라고 인정하자. 그렇다고 현실을 치장하고 미화할 수는 없다. "당 활동가"를 위한 리무진 승용차, "고위관료 부인"을 위한 고급 향수, 노동자를 위한 마가린, 새로운 귀족계급을 위한 "광채 나는" 사치품 상점, 전시용 진열장으로만 볼 수 있는 고급 과자와 케이크 --- 이런 식의 사회주의는 대중에게 새로 치장한 자본주의로만 보일 것이다. 이들의 생각은 결코 잘못되지 않았다. "일반화된 궁핍" 상황에서는 생필품 투쟁이 "과거의 모든 넌센스"를 부활시키려고 위협한다. 그리고 이것은 사회생활의 구석구석에서 부분적으로 부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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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소련의 시장관계는 신경제정책 시기의 시장관계와 다르다. 현재의 시장관계는 국영 협동조합과 집단농장이 개별 시민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 이 사이에 중간상인은 직접 개입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원칙으로만 그렇다. 국영상점과 협동조합의 소매총매출액은 급속하게 증가하고 있으며 매매 명세서에 의하면 1936년 약 천억 루블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1935년 160억 루블이었던 집단농장의 총매출액은 올해 상당히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 과정에서 비합법 반합법 중간상인들이 어떤 역할을 할지는 확실히 계산할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것이다! 자영농민 뿐 아니라 집단농장과 이 농장의 농민들은 중간상인에 많이 의존한다. 가내수공업자, 협동조합 종사자, 농민의 수요를 충족시키는 지방 산업들이 존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때때로 광대한 지역의 고기, 버터, 계란 등이 "투기꾼들"에 의해 매점되는 경우도 예상과 달리 발생하고 있다. 소금, 성냥, 밀가루, 등유 등 일상적으로 가장 필요한 물품들은 국영 창고에 충분히 있지만 관료화된 지방 협동조합에 의해 몇 주일 또는 몇 달 공급되지 않는다. 이 상황에서 농민들이 다른 경로로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소련 언론은 중간상인을 당연한 현상이라고 종종 말하곤 한다.

 

기타 형태의 개인기업이나 개인적 자본축적은 경제에서 역할이 더 작은 것처럼 보인다. 개인 택시기사, 여관업자, 수공업자 등은 자영농민처럼 음성적으로 인정된 직업종사자들이다. 모스크바에도 자영 소기업과 정비소가 상당수에 이른다. 이들은 경제의 중요한 틈새를 메우고 있기 때문에 묵인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과 비교되지 않는 많은 수의 개인기업들이 협동조합의 이름을 빌어 영업행위를 하고있거나 집단농장과 건물을 같이 사용하고 있다. 마치 계획경제의 틈새를 강조하는 특별한 목적을 띠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가끔 모스크바의 형사들은 집에서 만든 베레모나 면셔츠를 거리에서 파는 배고픈 여성들을 악의에 찬 투기꾼으로 몰아 체포한다.

 

1935년 가을 스탈린은 이렇게 선언하였다: "소련에서는 투기의 기반이 모두 퇴치되었다. 그런데도 투기꾼이 있다면 이유는 오직 하나밖에 없다. 즉 각급 국가기구에서 투기꾼들에 대한 계급적 경계심이 결여되어 이들에 대한 자유주의적 태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발언이야말로 관료주의적 사고의 순수한 형태가 아닐 수 없다! 투기의 경제적 기반이 퇴치되었다고? 그렇다면 경계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예를 들어 국가가 대중에게 보통 수준의 머리쓰개를 충분히 공급해 준다면 불행한 노점상들을 체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들을 체포할 필요가 지금 존재하는지도 의심스럽다.

 

위에서 언급한 개인상인들의 수와 이들의 매출액 규모는 그 자체로는 하나도 경계할 이유가 없다. 국가소유의 숲 속에서 트럭 운전사, 베레모 상인, 시계 제조업자, 계란 매점자 등의 공격을 두려워 할 이유는 전혀 없다! 그러나 단순한 산술적 상호관계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마치 열병을 앓을 때 돋는 두드러기처럼 행정의 공백이 조금만 있으면 나타나는 투기꾼들의 다양성이나 규모는 소부르주아 경향이 계속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투기영역이 사회주의의 미래를 위협할 수위는 경제적·정치적 체제의 일반적 위력에 의해 전적으로 결정된다.

 

인구의 90%나 되는 노동자와 집단농장 농민의 분위기와 행위는 주로 이들의 실질임금의 변화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나 이들의 수입과 소수 특권층의 수입간의 격차 역시 중요한 요소이다. 상대성 원리는 인간의 소비영역에서 더 직접적으로 관철된다. 모든 사회관계를 화폐로 환산하면 사회의 다양한 계층들이 전체 국민총소득에서 어떤 몫을 차지하는지가 드러날 것이다. 장기간 불평등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역사적 필연을 인정하더라도 그것이 인정될 수 있는 한계와 특정 상황에서 불평등이 사회적 편의에 얼마나 부합하는지는 여전히 문제로 남아 있다. 국민총생산의 일정한 몫을 차지하려는 불가피한 투쟁은 정치투쟁으로 발전한다. 현 체제가 사회주의인지 아닌지는 관료집단의 공문구가 아니라 공업노동자 대중과 집단농장의 농민들의 관료집단에 대한 시각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2. 노동계급의 계층적 분화

 

노동자국가에서는 실질임금에 대한 자료가 특히 면밀하게 연구될 것이라고 생각되기 마련이다. 특히 인구 범주에 의한 임금 통계가 완전히 명료하게 현실을 해명해 줄 것이며 자료는 누구에게나 일반적으로 공개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될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근로인민의 가장 핵심적 이해를 반영하는 이 문제는 뚫을 수 없는 베일에 의해 완전히 가려져 있다. 믿기 힘들겠지만 소련 가정의 가계부는 자본주의 국가의 가계부보다 훨씬 더 신비에 싸여 있다. 심지어는 제2차 5개년 계획 기간에 노동계급 각 범주의 실질임금 곡선을 수립하려는 노력도 성과가 없었다. 이 문제에 대한 당국과 자료보유자들의 완고한 침묵은 이들이 무의미한 총수치(total) 를 인용하며 자랑을 늘어놓는 것과 똑같이 현실을 잘 보여준다.

 

중공업 인민위원 오르조니키제의 보고서에 따르면 1925년부터 1935년까지 노동자의 월간 생산량은 3.2배 그리고 명목임금은 4.5배 증가했다. 그러나 명목임금의 대단해 보이는 수치 가운데 노동계급의 상층부 전문가들의 몫이 어느 정도이며 이 명목임금으로부터 실질임금은 어느 정도인지 그의 보고서나 언론의 논평은 아무 단서도 제공하지 않는다. 1936년 4월 소련 청년대회에서 콤소몰 비서 코사로프는 이렇게 선언했다: "1931년 1월부터 1935년 12월까지 청년의 임금은 340%나 올랐다!" 그러나 치밀하게 선정된 젊은 훈장 포상자들이 박수에 대해서 너그러운 편인데도 그의 연설은 박수를 전혀 받지 못했다. 연설을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시장가격으로 경제가 이행하는 속도가 너무 빨라 노동자 대중의 경제 상황이 더 악화되었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복합기업의 사장까지 포함한다면 일인당 "평균"임금은 1935년에 약 2300루블이었다. 그리고 1936년에는 약 2500루블이 될 것이다. 즉 명목상으로는 7500프랑인데 실제 구매력은 3500에서 4000프랑을 거의 넘지 않을 것이다. 이 수치는 그 자체만으로도 지극히 낮다. 그런데 1936년의 임금 인상이 소비재에 대한 특별가격과 일련의 무상 서비스를 해제한 것에 대한 부분적 보상책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더 낮아진다. 그러나 1년에 2500루블 그리고 한달 208루블은 평균 임금에 불과하다. 이 점이 중요하다. 이 수치는 실제 임금 수준의 잔인한 불평등 현상을 감추기 위해 동원된 산술적 허구에 불과하다.

 

지난 한해 노동자 상층부 특히 소위 스타하노프 운동원들의 상황은 의심의 여지없이 상당히 개선되었다. 언론은 의복, 신발, 전축, 자전거, 잼 등 훈장 포상자들이 구입한 물건들을 열정적으로 보도하고 있는데 이것은 충분한 근거가 있다. 이 혜택들이 보통 노동자들에게는 별천지라는 사실이 입증된다. 스타하노프운동이 시작된 긴급한 상황을 언급하면서 스탈린은 이렇게 선언했다: "세상 살기가 더 쉬워졌다. 인생이 더 행복해졌다. 인생이 행복하면 일이 빨리 진행된다." 지배층은 도급제에 대해 대단히 낙관적인데 스탈린의 발언은 관료집단의 사고를 아주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그의 발언은 노동 귀족의 형성이 지난 시기 경제 성공 때문이라는 사실을 입증한다. 그러나 스타하노프 운동원들의 원동력은 "행복한" 분위기가 아니라 더 많은 돈을 벌려는 욕심에 있다. 몰로토프는 스탈린의 발언을 이렇게 교정했다: "스타하노프 운동원들이 높은 생산성을 추구하는 직접적 동인은 자기 수입을 늘리려는 단순한 계산에 있다." 이 말은 사실이다. 지난 몇 달간 새로운 노동자 계층이 등장했는데 이들은 "천 루블 노동자"라고 불리었다. 이들의 소득이 한 달에 1000루블을 넘었기 때문이다. 한 달에 2000루블 이상을 버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하층노동자들은 한 달에 100루블도 벌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임금 격차만으로도 "부유한" 노동자와 "부유하지 못한" 노동자의 구분이 충분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구분은 관료집단에게는 불충분한 것처럼 보인다. 이들은 스타하노프 운동원들에게 문자 그대로 소낙비처럼 특전을 퍼붓고 있다. 이 운동원들은 아파트를 새로 갖거나 살고 있는 아파트를 개조한다. 대기 기간이 전혀 없이 휴양 시설이나 요양소를 이용한다. 교사와 의사가 무료로 가정을 방문한다. 영화관의 무료 입장권을 받는다. 어떤 곳에서는 기다리는 노동자들을 재끼고 먼저 이발과 면도를 한다. 이 많은 특전들은 일반 노동자들을 괴롭히기 위해 고의적으로 계산된 것처럼 보인다. 관료집단의 간절하기까지 한 이 호의의 배경에는 출세주의와 함께 양심의 가책이 자리잡고 있다. 지방의 관료집단은 이 기회를 열심히 활용하여 노동자 상층부가 자신들의 특권을 동일하게 만든다. 이를 통해 관료들은 대중적 고립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이 결과 스타하노프 운동원들의 실질소득은 하층 노동자들의 소득보다 20배 내지 30배를 상회한다. 그리고 특히 운 좋은 전문가들의 경우 봉급은 많은 경우 비숙련 노동자 80명에서 100명의 봉급에 해당한다. 임금 불평등에서 소련은 자본주의 국가들을 따라잡았을 뿐 아니라 훨씬 앞지르고있다!

 

사회주의적 동기를 순수하게 간직하고 있는 가장 우수한 스타하노프 운동원들은 자신들의 특권에 대해 행복해 하기보다는 불편해 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일반적 궁핍 한가운데에서 모든 종류의 물품들을 개인적으로 즐길 경우 시기와 악의가 이들을 둘러싸 생활을 오염시킨다. 이런 종류의 인간관계는 자본주의 공장의 노동자들 관계와 유사할 뿐 착취에 대한 투쟁으로 하나가 된 이들의 사회주의적 도덕과는 거리가 멀다.

 

이 모든 것에 불구하고 숙련 노동자의 일상 생활은 쉽지 않다. 특히 지방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높은 노동생산성 때문에 7시간 노동일이 희생당하고 있을 뿐 아니라 생존을 위한 투쟁에 적지 않은 시간이 소비된다. 예를 들어 집단농장에서 높은 지위를 누리는 노동자들이 특별히 번영을 누리고 있는 징후가 하나 있다. 즉 트랙터 운전사나 콤바인 운전사 등이 소와 돼지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언론에서 거론된다. 그런데 이미 이들은 악명 높은 노동귀족으로 알려져 있다. 우유 없는 사회주의가 사회주의 없는 우유보다 더 좋다는 이론은 이미 포기되었다. 국영농장에는 소나 돼지가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자신의 생존을 보장받기 위해 주머니 경제를 운영해야한다. 이 사실은 이미 현실로 인정되고 있다. 또 하나 놀라운 사실이 있다. 하리코프에서 9만 6000명이나 되는 노동자들이 개인 텃밭을 소유하고있다는 사실을 소련 당국은 승리에 들떠 발표했다. 다른 도시가 하리코프의 기록에 도전하라고 부추기고 있다. "자기 소", "자기 텃밭"이란 말에는 인간 노동력에 대한 얼마나 끔찍한 강도행위가 암시되어 있는가! 그리고 노동자 뿐 아니라 그의 아내와 자식에게도 가해지는 중세식 거름주기와 땅파기는 얼마나 지독한 부담인가!

 

그러나 일반대중에게는 개인 소나 텃밭이 없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집도 없다. 비숙련 노동자의 임금은 1년에 1,200루블에서 1,500루블 이하이다. 이 임금으로는 궁핍을 면할 수 없다. 물질적·문화적 수준을 측정하는 가장 믿을 만한 지수인 생활조건은 지극히 열악할 뿐 아니라 종종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노동자 절대 다수는 공동주택에 모여 산다. 이곳의 장비와 관리 정도는 군대의 막사보다 훨씬 뒤떨어진다. 공업의 실패와 부진 그리고 제품의 품질 저하 등에 대해서 변명이 필요할 경우 소련 당국은 기자들을 통해 이렇게 생활조건을 공개한다: "노동자들은 마루에서 잔다. 침대에는 빈대가 들끓기 때문이다. 의자는 망가지고 물을 마실 컵도 없다." "두 가구가 단칸방에서 산다. 지붕은 비가 샌다. 비가 오면 그릇 가득히 빗물을 퍼서 밖으로 버린다." "옥외변소는 구역질이 날 정도로 더럽다." 이런 식의 묘사는 각 지방들의 상황을 제시하고 있는데 관료집단 마음대로 계속 이어질 수 있다. 석유산업의 책임자는 예를 들어 이렇게 적고 있다: 이런 참을 수 없는 생활 때문에 "이직률은 아주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 노동자가 없어서 많은 수의 시추공이 방치되어 있다." 특히 살기가 어려운 지역이 있다. 이곳에는 다른 지역에서 노동규율을 여러 번 어겨 해고되거나 면직된 사람들이 모여든다. 이렇게 노동계급 밑바닥에는 소외된 부랑자들이 층을 이루고 있다. 이들에게는 어떤 권리도 없다. 그러나 석유생산과 같은 중요한 산업분야는 이들을 끌어쓸 수밖에 없다.

 

아주 뻔뻔스러운 임금 격차와 자의적 특전을 통해 관료집단은 노동계급 내부에 날카로운 적대감을 심어놓는 데 성공했다. 스타하노프 운동에 대한 기록은 때때로 소규모 내전에 대한 묘사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어느 노동조합의 기관지는 이렇게 적고 있다: "기계들을 파괴하고 못쓰게 하는 것이 스타하노프 운동에 대한 좋은(!) 저항 방법이다." 계속해서 읽어보자: "계급투쟁이 모든 곳에서 느껴진다." 이 "계급"투쟁에서 노동자와 노동조합은 서로 적이다. 스타하노프 운동에 저항하는 자들은 "혼이 나야한다"고 스탈린은 공개적으로 협박했다. 당 중앙위원회 위원들은 지구상에서 "무례한 적"들을 몰아내야 한다고 두 번 이상 위협한 적이 있다. 스타하노프 운동이 당국과 노동계급 사이에 깊은 소외의 골을 파 놓았다는 사실은 아주 확연히 드러났다. 또한 자신이 발명하지 않은 격언을 관료집단은 열렬히 외치고 있다. 이 격언은, "나누어 통치하라!"이다. 더욱이 노동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강제 도급제 노동은 "사회주의적 경쟁"으로 불린다. 이 용어는 마치 사회주의를 조롱하는 것처럼 들린다!

 

경쟁의 근원은 타고난 생물적 불평등에 있다. 그러나 경쟁에서 탐욕, 시기, 특권 등과 같은 부정적 요인들을 제거할 경우 공산주의적 경쟁은 틀림없이 문화발전의 가장 중요한 원동력이 될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려면 현재 소련 정부가 사용하고 있는 후진 자본주의의 굴욕적 조치들이 아니라 해방된 인간에게 합당한 방식들이 사용되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사회주의 건설은 성취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관료집단의 채찍을 맞으면서 사회주의가 성취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채찍은 구 세계로부터 물려받은 가장 저주스러운 유산이기 때문이다. 조금의 수치도 없이 사회주의를 얘기하려면 이 채찍이 갈갈이 찢겨져야 한다. 그리고 대중이 보는 앞에서 모닥불에 던져져야 한다.

 

3. 집단화 농촌의 사회적 모순

 

공업 복합기업이 "원칙적으로" 사회주의적 기업이라면 집단농장은 그렇지 않다. 집단농장은 국가가 아니라 일정 수의 농민에 기초하고 있다. 물론 자영 농장의 분산성과 비교해 보면 커다란 진전이지만 집단농장이 사회주의로 이행할지의 여부는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농장 내부의 상황, 소련의 전반적 상황 그리고 세계정세에 따라 이 문제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농민과 국가 간의 투쟁이 끝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현재의 대단히 불안정한 농업 조직은 끔찍한 내전이 벌어진 후 체결된 양자간의 일시적 타협의 산물에 불과하다. 물론 농민이 경작하는 토지의 90%는 집단화되었다. 그리고 농업생산물의 94%는 집단농장에서 생산되었다. 실제로 개인소유농장이면서 집단농장으로 위장한 경우가 존재한다. 그러나 개인소유 농업에 대한 승리는 최소한 90% 완료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농촌에서 진행되고 있는 각 세력 사이의 투쟁은 개인소유 농장의 농민과 집단농장의 농민이라는 앙상한 대비만으로는 전혀 이해될 수 없다.

 

농민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국가는 재산을 개인적으로 소유하려는 농민의 개인주의 경향에 대단히 많은 양보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농민들은 자기가 경작하고 있던 토지를 집단농장에 엄숙히 양도하였다. 그리고 이 대가로 농민들은 "영원히" 토지사용권을 국가로부터 보장받았다. 이 조치의 핵심은 사회주의적 토지소유의 철폐였다. 그렇다면 이 조치는 법적인 허구 내지 속임수에 불과한 것일까? 각 세력의 역관계에 따라 농민의 토지사용권은 현실이 되어 아주 가까운 미래에 전국적 계획경제에 엄청난 난관을 조성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어쨌든 국가가 특히 작은 개인소유 농장을 다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훨씬 중요하다. 사회주의화를 침해하고 집단화를 제한한 대신 농민은 아직 마음이 썩 내키지 않지만 집단농장에서 일하는 것에 평온히 동의하고 있다. 집단농장 노동을 통해 농민은 국가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대신 개인적으로 농업 생산수단을 소유할 기회를 부여받았다. 이 새로운 관계는 아직 미성숙해서 소련의 통계가 좀더 정직하더라도 이것을 수치로 표현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농민 소유의 소규모 농장은 농민 개인의 생존에 있어서 집단농장만큼이나 커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결론을 내리게 하는 많은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다. 즉 농촌 전역에는 개인주의 경향과 집단주의 경향이 아직도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입증되고 있다. 그리고 이 과정은 아직 결말에 도달하지 않았다. 농민은 어느 경향으로 기울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해 농민 자신들도 아직 정확히 아는 것이 없다.

 

농업 인민위원은 1935년 말 이렇게 말했다: "현재까지 쿨락 분자들이 곡물 공급에 대한 국가 시책에 강력히 저항하고 있다." 다른 말로 바꾸면 이것은 집단농장의 농민 대다수가 "최근까지"(그리고 어쩌면 지금까지) 국가에 곡물을 양도하는 것을 자기들에게 불리한 조치라고 간주하여 개인적 상거래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점은 집단농장 농민들의 집단적 재산 약탈을 금지하는 엄한 법이 존재하는 것을 통해서도 증명된다. 집단농장 재산이 200억 루블 짜리 보험에 들어 있고 대신 집단농장 농민의 개인적 재산은 210억 루블 짜리 보험에 든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물론 농민 개개인이 전부 합쳐지면 반드시 집단농장보다 더 부자라는 것은 아니지만 농민이 자신의 재산을 공동 재산보다 더 귀중히 여긴다는 점은 확실하다. 목축의 경우도 이에 못지 않게 의미가 있다. 말의 수는 1935년까지 계속해서 감소하였고 지난 한해 정부의 일련의 조치를 통해서만 약간 증가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지난 한해 증가한 뿔 달린 소의 수는 이미 4백만 두에 달한다. 말의 목표량은 상황이 좋았던 1935년에도 94%밖에 달성되지 않은 반면 뿔 달린 소의 경우는 상당히 초과달성되었다. 이 데이터의 의미는 말이 집단농장의 재산인 반면 소는 집단농장 농민 대다수의 개인 소유물이라는 사실로 명확해진다. 초원 지역에서는 농민이 말을 개인적으로 소유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지역에서는 말의 증가가 집단농장의 경우보다 상당히 빠르다. 더욱이 집단농장은 국영농장보다 말의 수가 더 크게 증가하고 있다. 이 사실들로부터 개인소유의 소규모 영농이 대규모 사회주의 영농보다 생산성이 뛰어나다고 추론하면 안된다. 다만 전자에서 후자로의 이행은 야만에서 문명으로 가는 길이지만 도중에 많은 난관이 있으며 이 난관은 단순히 행정적 압력으로 제거되지 않는다는 추론이 가능할 뿐이다.

 

"법은 경제구조와 이것으로 조건 지워지는 문화발전 수준을 능가할 수 없다." 비록 법으로 금지되어 있지만 토지는 광범위하게 대여되고 있다. 더욱이 가장 지독한 착취 형태인 소작으로 널리 대여되고 있다. 한 집단농장이 다른 집단농장에게 토지를 대여한다. 또는 외부 사람에게 대여하기도 하고 마침내 재산 증식을 더 잘하는 집단농장 성원에게 대여하기도 한다. 믿기 힘들지만 "사회주의적" 기업인 국영농장도 농토를 농민에게 대여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특히 시사하는 바가 많은 사실이 하나 있다. 비밀경찰(GPU) 소유의 국영농장이 이런 짓을 하고 있다! 법을 수호하는 이 높은 기관의 보호 하에 국영농장의 책임자들은 과거 지주-농노간의 계약을 그대로 본뜬 조건을 임차 농민에게 강요한다. 결국 관료들이 농민을 착취하는 셈인데 이때 관료들은 국가의 기간원이 아니라 반합법적 지주이다.

 

이 추한 현상을 조금도 과장할 필요는 없다. 물론 이 현상은 통계에 반영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현상이 드러내는 엄청난 의미를 놓칠 수는 없다. 즉 인구의 절대 다수를 포괄하고 있으며 아직도 지극히 후진적인 이 경제 분야에서 부르주아 경향이 발휘하는 위력을 정확히 입증하고 있다. 한편 새로운 소유관계 구조에도 불구하고 시장관계는 불가피하게 개인주의 경향을 강화시키고 농촌의 사회적 분화를 심화시키고 있다.

 

집단농장의 평균소득은 약 4000루블이다. 그러나 농민에게 "평균"수치는 노동자의 경우보다 더 숨기는 것이 많다. 예를 들어 집단 어민은 1935년에 전해보다 두 배나 소득을 증대하여 일인당 1919루블을 벌었다고 크렘린궁에 보고되었다. 이 수치는 집단농장 농민의 소득보다 높다. 반면 소득이 가구당 3만 루블인 농장도 있다. 물론 개인소유에 의한 소득을 제외한 수치이다. 일반적으로 이들 대규모 집단농장 농민들의 소득은 "평균"노동자의 임금 그리고 낮은 수준으로 집단화된 농장의 농민 소득보다 10배 내지 15배 높다.

 

그런데 노동 숙련도나 근면성은 소득격차에 부분적으로만 영향을 미치고 있다. 집단농장과 개인소유 농장은 모두 극단적으로 서로 다른 조건에 있다. 기후, 토양, 곡물의 종류, 도시와 공업중심지로부터의 거리 등 각기 다르다. 도시와 농촌간의 격차는 5개년 기간에 감소하지 않았다. 반대로 도시와 새로운 공업지역의 급속한 성장 때문에 더 커졌을 뿐이다. 소련 사회의 근본적 사회 격차는 집단농장에 그리고 집단농장 내부에 파생적으로 모순들을 만들어 내고있다. 그런데 이 모순들의 주요한 요인은 차등지대의 존재이다.

 

한편 관료집단의 무제한적 권한은 사회적 분화에 상당히 강력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들은 임금, 가격, 세금, 예산, 신용 등의 지렛대를 장악하고 있다. 중앙아시아 집단농장들 사이의 아주 상이한 소득수준은 집단농장 농민들의 노동생산성보다는 정부에 의해 정해진 가격의 상호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한 계층의 다른 계층에 대한 착취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감추어졌을 뿐이다. 처음 조성된 수만 개의 "부유한" 집단농장들은 다른 집단농장들과 공업노동자들을 희생시켜 번영하였다. 그런데 모든 집단농장들을 번영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은 다수를 희생으로 소수에게 특권을 주는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이 어렵고 장기간의 시일이 요하는 과제이다. 1927년 좌익반대파는 이렇게 선언했다: "쿨락의 소득은 노동자의 소득에 비교할 수 없이 증가했다." 그리고 이 선언은 지금도 엄연히 진실이다. 다만 그 형태를 약간 달리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집단농장 농민 상층의 소득은 기본 농민과 노동자 소득보다 비교할 수 없이 증가했다. 현재 각 계층간 물질적 생활수준의 차이는 아마 쿨락을 일소하기 직전보다 상당히 더 커졌을 것이다.

 

집단농장의 기본 재산들은 사회주의 소유이다. 이 때문에 집단농장 내부의 계층적 분화는 개인 소비를 통해 일부 표현되고 있다. 그리고 또 다른 일부는 집단농장 옆에 붙어 있는 개인소유 기업에 의해 촉진되고 있다. 집단농장들 사이의 분화는 사회에 이미 깊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왜냐하면 부유한 집단농장들은 비료와 기계를 더 자주 제공받기 때문이다. 이 결과 이들은 빨리 부유해진다. 성공하는 집단농장들은 종종 가난한 집단농장으로부터 노동력을 고용하고 당국은 이것을 눈감아준다. 가치가 다른 농토들이 집단농장에 넘겨지면서 이들간의 분화는 더욱 증진되고 있다. 이 결과 부르주아적 집단농장 즉 소위 "백만장자 집단농장"들이 등장하고 있다.

 

물론 국가권력은 농민의 사회적 분화 과정에 개입하여 조정자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방향으로 그리고 어떤 한계 내에서 이 역할을 수행할 것인가? 쿨락 및 쿨락 집단농장을 공격하는 것은 좀더 "진보적" 농민층과 새로운 싸움을 시작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진보적 농민층은 지금에 와서야 정부의 고통스러운 개입에 저항하여 "행복한 삶"을 누리려는 큰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더욱이 더 중요한 것은 국가권력 자체가 사회주의적 통제력을 점차 상실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공업과 마찬가지로 농업에서도 국가권력은 강력하고 성공적인 백만장자 집단농장의 "스타하노프 현장 운동원"의 지지와 호의를 구하고 있다. 국가권력은 처음에는 생산력 발전에 관심을 갖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자기 이익에만 골몰한다. 집단화가 관료집단의 기생성을 부추기고 이 결과 관료집단이 집단농장의 상층부과 유착하는 현상이 소비가 생산과 밀접히 연관된 농업에서 발생한다. 집단농장 농민들이 크렘린궁의 엄숙한 기념식에서 지도자들에게 증정하는 감사 "선물"은 지방 권력층에게 주는 진짜 공물의 상징적 표현에 불과하다.

 

따라서 생산력의 낮은 수준은 공업의 경우보다 농업의 경우 훨씬 크게 사회주의적 그리고 협동조합적(집단농장) 소유형태와 계속 모순을 일으키고 있다. 이 모순 속에서 등장한 관료집단은 이 모순을 오히려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4. 관료지배층의 사회적 외관

 

소련의 정치서적들은 잘못된 사고방식이나 사업방식을 "관료주의"라고 비난한다.(그런데 이 비난은 항상 상부가 하부를 겨냥하기 때문에 상부의 자기방어용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관료집단을 지배층으로 보면서 연구한 내용은 어디에도 없다. 이 지배층의 숫자, 체계, 실제 인물, 특권과 취향, 국민총생산에서 이들이 차지하는 비율 등의 데이터는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 그러나 관료집단은 실제한다. 그런데 이들은 대단히 조심스럽게 자기 정체를 숨기고 있다. 이 사실은 이들이 지배 "계급"의 구체적 의식을 소유하고 있으나 자신들이 장악한 통치권에 대해 자신이 없다는 점을 증명한다.

 

소련 관료집단에 대한 정확한 수치를 입수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여기에는 두 가지 종류의 이유가 있다. 우선 국가가 거의 유일한 고용주인 나라에서 행정기구가 어디에서 끝나는지 말하기가 힘들다. 둘째로 이 문제에 대해서 소련의 통계 종사자, 경제학자, 선전가 등은 이미 말했듯이 특히 집중적으로 침묵한다. 그리고 서방의 소련 "친구들"도 같이 행동한다. 1,200쪽이나 되는 노동관계 자료집에서 웹 부부(the Webbs)는 관료집단을 사회적 범주로 언급한 경우는 한번도 없다. 이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왜냐하면 이 저명한 "사회주의자" 부부는 소련 관료집단의 명령에 따라서 행동했기 때문이다!

 

공식 수치에 의하면 1933년 11월 1일 현재 중앙 국가기구는 5만 5000명의 지휘 요원들을 두고 있다. 그러나 이 수치는 최근 극히 이례적으로 증가했는데 국방부, 비밀경찰기구 등은 제외되어 있다. 그리고 오소아비아킴(역자 주: 소련 국방 및 항공-화학산업 개발 그룹)과 같은 사회기관들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더욱이 각 공화국들도 각자 정부기구를 가지고 있다. 국가기구, 노동조합, 협동조합, 군대 총사령부 등과 함께 이중적으로 인적 구성을 공유하고 있는 당의 강력한 총참모부가 존재한다. 소련과 산하 공화국의 지배층을 40만 명으로 보는 것은 과장은 아닐 것이다. 현재 이 숫자가 이미 50만 명을 넘어섰을 가능성도 있다. 이 숫자에는 소위 "지도자", "요인" 등 엄밀한 의미에서 지도층을 포함하고있으며 직원들은 제외된다. 물론 아주 중요한 수평적 경계로 인해 위계질서가 확립되어 있다.

 

50만의 관료지배층은 광범위하고 다양한 기초를 가진 묵직한 행정 피라미드에 의해 지원 받고 있다. 지방 도시와 지구 소비에트의 집행위원회, 같은 급의 당 기구, 노동조합, 공산주의 청년동맹, 지방 운송기구, 육군과 해군의 사령부, 비밀경찰국 등은 거의 2백만 인원을 보유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60만 개의 도시 및 농촌마을의 소비에트 의장들도 잊으면 안된다.

 

기업의 직접 운영은 1933년에 1만 7000명의 책임자와 부책임자의 손에 집중되어 있었다.(이보다 최근 자료는 없다.) 공장, 광산, 제작소 등의 행정적·기술적 인원은 십장까지 포함해서 25만 명에 이르렀다.(그러나 물론 이들 중에 5만 4000명은 엄밀히 말하면 행정 기능과 무관한 전문가들이었다.) 여기에 각 공장의 당과 노동조합 기구를 포함시켜야 한다. 공장에서는 잘 알려져 있듯이 "삼각형" 방식으로 행정이 수행된다. 노동조합이 있는 기업의 행정을 위해 50만 인원이 종사하고 있다는 주장은 과장이 아닐 것이다. 여기에 각 공화국과 지방 소비에트 기구를 담당할 행정요원들을 더해야한다.

 

그리고 다른 공식 통계에 의하면 1933년 현재 소련 경제 전체에 86만 이상의 행정요원과 전문가들이 일하고 있다. 공업에는 48만, 운송에는 10만, 농업에는 9만 3천, 상업에는 2만 5천의 직원들이 있다. 물론 이 수치에는 행정 권한이 없는 전문가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집단농장과 협동조합은 이 수치에서 제외되어 있다. 그리고 이 수치들은 지난 2년 6개월 동안 진행된 숨가쁜 사회변화 이전의 데이터에 속한다.

 

25만 개의 집단농장 중에서 의장과 당 조직 담당자만 해도 그 수는 이미 50만을 헤아린다. 그러나 실제는 이 숫자보다 비교할 수 없이 많다. 국영농장과 트랙터-기계류 정비소 등을 합한다면 사회화된 농업분야의 책임자 총수는 백만 명을 훨씬 넘을 것이다.

 

1935년 소련에는 무역 관련 부서가 11만 3000개소, 협동조합이 20만 개소 있었다. 이들 부서의 지도자들은 상업 관련 종업원이 아닌 국가 직원이고 더욱이 특정 품목의 독점가들이다. 소련의 언론조차 때때로 "협동조합 임원들은 자신들이 집단농장 농민에 의해 선출된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불평한다. 마치 협동조합의 운영이 노동조합, 소비에트, 당의 운영과 질적으로 구별될 수 있는 것처럼 이들은 생각한다. 이 계층은 생산적 노동에 직접 종사하지 않는 대신 행정조치를 취하고, 명령을 내리며, 일을 지휘하고, 사면을 내리고 벌을 내리는데 약 5백만에서 6백만 명에 이를 것이 확실하다. 이 총 수치는, 그것을 구성하는 항목들과 마찬가지로 결코 정확하지 않다. 다만 관료집단 분석의 첫걸음으로 유용할 것이다. 이것은 소련 지도부의 "총노선"이 단순히 허깨비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신시키기에 충분하다.

 

이 거대한 지배체제의 각 단계에서 공산주의자들은 20%에서 90%를 차지하고 있다. 관료집단 전체에서 공산주의자들은 공산주의청년동맹의 회원들을 포함하여 150만에서 200만에 이르고 있다. 현재 숙청이 계속 중이므로 수치는 더 낮아질 것이다. 이들이 국가권력의 근간이다. 이 공산주의자들은 동시에 당과 공산주의 청년동맹의 근간이다. 볼셰비키당은 과거의 노동계급 전위가 아니라 이제 관료집단의 정치기구에 불과하다. 나머지 당원들과 청년동맹 회원들은 관료집단의 충원을 위한 예비부대 즉 "현역(active)의 저수지를 이루고 있다. 비당원 "현역"들도 같은 목적에 봉사한다. 노동 귀족, 집단농장 귀족, 스타하노프 운동원, 비당원 "현역", 신뢰받는 인물, 이들의 친지 등은 관료집단의 전체 숫자와 비슷한 500만에서 600만 명에 이를 것이다. 이들의 가족까지 합치면 인적 구성이 서로 겹치는 이 두 집단은 2000만에서 2500만 명에 이른다. 가족의 수를 비교적 낮게 잡고 있는 이유는 남편과 아내 그리고 가끔 아들과 딸들이 국가기구의 직책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지배층 부인들은 노동자 여성이나 농민 여성들보다 가족의 수를 제한하기가 훨씬 쉽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낙태 반대 캠페인은 관료집단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고위층 부인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전체 인구의 12%에서 15%가 전제 지배집단의 사회적 기초이다.

 

여러 개의 방, 충분한 식량, 단정한 의복이 아직도 인구의 극소수에게만 향유되는 상황에서 고위이든 하위이든 수백만의 관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을 주로 자신의 복지를 확보하는 데 이용한다. 따라서 이 집단의 지독한 이기주의, 공고한 내부 단합, 대중의 불만에 대한 두려움, 모든 비판을 압살하려는 끈질긴 집착, "지도자 동지"에 대한 위선적이면서도 종교의식에 가까운 복종 등이 특징으로 나타난다. 특히 "지도자 동지"는 이 새로운 지배집단의 권한과 특권을 확립하고 옹호하기 때문에 무조건적 충성을 누리고 있다.

 

관료집단은 노동계급이나 농민에 비해 내부 동질성이 여전히 대단히 낮다. 농촌 소비에트 의장과 크렘린궁의 고위관료 사이에는 커다란 격차가 있다. 다양한 범주의 하급관료들은 아주 원시적 생활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이들은 서방의 숙련 노동자들보다 생활수준이 낮다. 그러나 모든 것은 상대적인데 일반대중들의 생활수준은 하급관료들에 비해 대단히 낮다. 고위관료들과 마찬가지로 집단농장의 의장, 당 조직가, 협동조합의 하급관료 등의 운명은 소위 "선출자 대중"에게 전혀 의존하지 않는다. 직속상관 관료는 부하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서 하급관료들을 언제든지 희생시킬 수 있다. 그러나 가끔 이들은 모두 함께 한 단계 승진할 경우도 있다. 심각한 충격이 외부에서 처음으로 가해지기 전까지는 어쨌든 이 관료집단은 직위의 상호보장체제에 의해서 크렘린궁의 지도부와 같은 이해를 가지고 있다.

 

생활조건으로 보면 관료지배층은 시골구석의 소부르주아에서 대도시나 수도의 대부르주아까지 다양한 구성을 이루고 있다. 이 물질적 조건에 따라 습관, 이해관계, 사고방식 등이 조응한다. 현재 소련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심리적 특성은 서방 노동조합 관료들과 별로 다르지 않다. 표현방식은 다르지만 대중에 대한 거만한 자세, 이류 수준의 술책을 교활하게 구사하는 검은 마음, 보수성, 편협한 전망, 사회 평온에 대한 같은 정도의 강한 집착, 가장 유치한 형태의 부르주아 문화에 대한 숭배 등에서 이들은 동일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소련의 대령들과 장군들은 대개의 경우 지구상의 다른 대령들이나 장군들과 다른 점이 거의 없다. 소련의 외교관들은 서방의 외교관으로부터 연미복 뿐 아니라 사고방식도 그대로 모방한다. 소련의 기자들은 방식이야 특별하겠지만 외국의 기자들과 똑같이 독자들을 우롱한다.

 

관료집단의 숫자를 추산하는 것이 힘들다면 이들의 수입 수준을 알아내는 것은 더 힘들다. 이미 1927년에 좌익반대파는 "비대한 특권관료집단은 잉여가치의 상당한 몫을 집어삼키고 있다"고 항의했었다. 좌익반대파의 강령은 무역 관련 기구들의 경우만 해도 "국민총생산의 10분의 1 이상을 집어삼키고 있다"고 추산하였다. 그러자 당국은 추산이 불가능하도록 모든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바로 이 조치들로 인하여 총경비는 감소된 것이 아니라 늘어났을 뿐이다.

 

무역 분야나 다른 분야나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라코프스키가 1930년 어느 글에서 말했듯이, 4억 루블에 달하는 노동조합의 예산에서 8천만 루블이 직원의 봉급으로 나가는 사실을 신문에 싣는 문제로 당과 노동조합 관료들 사이에 가벼운 설전이 벌어졌다. 그런데 이 경우는 합법적 예산을 공개하는 문제였다. 이외에도 노동조합 관료들은 공업에 종사하는 관료들로부터 돈, 아파트, 운송수단 등 많은 선물들을 우정의 표시로 받는다. 라코프스키는 이렇게 묻는다: "당, 협동조합, 집단농장, 국영농장, 산업 및 행정기구의 기관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돈이 들어갈까?" 그는 스스로 자기 질문에 답했다: "가설을 세우기 위한 정보조차 구할 수 없다."

 

통제에서 벗어날 경우 기금 횡령을 포함한 권한 남용은 당연한 현상이다. 1935년 9월 25일 소련 정부는 협동조합의 무능을 문제로 제기하기 위해 몰로토프와 스탈린이 서명한 성명서를 발표했다: "농촌의 많은 소비자 단체들의 약탈과 낭비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런 성명서는 처음이 아니었다. 1936년 1월 중앙집행위원회 회의에서 재정인민위원은 지방의 집행위원회들이 국가기금을 완전히 자의적으로 지출하고 있다고 불평했다. 이 인민위원이 중앙기구들의 직권남용에 대해 침묵을 지킨 이유는 단 하나뿐이다: 자신이 중앙기구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관료집단 전체가 국민총소득의 얼마를 차지하는지는 추산할 가능성도 전혀 없다. 이들이 자신의 합법적 수입 수준마저 면밀히 감추거나 직권 남용을 통해 예상하지 못한 많은 기금을 전용하기 때문만도 아니다. 주요한 이유는 공공사업, 편의시설, 문화, 예술 등 사회복지 분야가 독점적으로는 아니라 할지라도 주로 상부 특권층을 위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관료집단을 소비자로 볼 경우 필요한 변경을 가하여 부르주아지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반복하면 될 것이다. 관료집단의 개인적 소비재 욕심을 과장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그러나 과거와 최신의 문명의 이기들을 관료집단이 거의 독점적으로 향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상황은 아주 달라진다. 과거에는 문명의 성과들이 물론 인구 전체에게 개방되었거나 아니면 최소한 도시의 인구에게 열려져 있었다. 그러나 이것도 특별한 경우에만 그랬다. 반면에 관료집단은 이것들을 개인소유인 것처럼 이용하고 있다. 봉급, 현물 서비스의 모든 형태, 반합법적 소득원의 모든 형태 뿐 아니라 극장, 휴양지, 병원, 요양소, 여름 별장, 박물관, 클럽, 체육기관 등을 계산하면 인구의 15% 내지 20%가 나머지 인구가 사용하는 재부를 똑같은 정도로 누린다고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서방의 소련 "친구들"은 우리가 제시한 수치에 대해서 이견이 있는가? 그렇다면 이들은 좀더 정확히 계산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에 대해 우리는 하등 개의치 않을 것이다. 이들이 관료집단에게 소련 사회의 소득과 지출 통계집을 발행하도록 설득하게 내버려두자. 그러나 이들이 이렇게 하기 전까지는 우리의 견해를 그대로 고수할 수밖에 없다. 소련의 소득분배는 차르 시대의 러시아나 서방의 가장 민주적인 국가의 경우보다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더 민주적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아직도 사회주의와는 공통점이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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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소련의 가족, 청년, 문화

 

1. 가족 관계의 테르미도르 반동

 

10월 혁명은 여성에 대한 자신의 의무를 정직하게 수행하였다. 갓 탄생한 소련 정부는 여성에게 남성과 동등한 모든 정치적·법적 권리를 부여했다.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유사이래 어떤 정부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능력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여성에게 모든 형태의 경제적 문화적 활동을 실질적으로 보장했다. 그러나 가장 대담한 혁명도 "전능한" 영국 의회와 마찬가지로 여성을 남성으로 바꾸어 놓을 수는 없다. 다시 말해 임신, 출산, 육아 등의 부담을 남성과 여성에게 동등하게 나누어 줄 수는 없다. 혁명은 소위 "가정" 즉 근로계급의 여성이 나서 죽을 때까지 노예처럼 일해야 하는 케케묵은 답답한 제도를 파괴하기 위해 영웅적으로 노력했다. 계획에 따르면 일종의 폐쇄 소기업인 가정 대신 산부인과 병원, 탁아소, 유치원, 학교, 공공 식당, 공공 세탁소, 보건소, 병원, 요양소, 체육단체, 영화관 등 완벽한 공공 서비스 체제가 가정의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다. 사회주의 사회의 기관들이 가정 내의 가사를 완전히 소화하여 모든 세대들을 연대와 상호부조의 틀로 통일시킬 경우 여성과 사랑하는 부부는 천 년이나 지속된 족쇄를 진짜 벗어 던질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문제들 중의 문제라고 할 수 있는 가족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4천만 소련 가정의 절대 다수는 중세적 반동, 여성노예제와 여성에 대한 히스테리, 아동에 대한 일상적 모욕, 여성과 아동의 미신 등이 자라는 어두운 소굴이다. 이 점에 대해 어떤 환상도 가지면 안된다. 따라서 가족문제 해결을 위해 소련 정부가 제시한 정책의 연속적 변천은 소련 사회의 현실과 소련 지배층의 진화 과정을 가장 특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오랜 가족제도를 단번에 일소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의지가 부족하거나 가족이 인간의 마음에 너무 확고하게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이와 반대로 정부가 건립한 탁아소, 유치원 등과 같은 기관을 처음에는 신뢰하지 않다가 근로여성과 이후 좀더 선진적 농민들은 가사의 사회화뿐만 아니라 아동을 집단적으로 돌보는 제도의 한없는 장점을 인정하게 되었다. 불행하게도 소련 사회는 너무 가난하고 문화수준이 낙후했다. 국가의 실제 자원은 공산당의 계획이나 의도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다. 가족은 "철폐"될 수는 없으며 더 좋은 형태로 대체되어야 한다. 여성의 실질적 해방은 "일반화된 궁핍" 하에서는 실현될 수 없다. 이미 80년 전에 마르크스가 정식화한 이 엄격한 진실은 경험에 의해 입증되었을 뿐이다.

 

상황이 아주 어려운 몇 년간 노동자와 그 가족들은 공장이나 공공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이행기 현상으로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혁명 이후 시기들 즉 전시공산주의, 신경제정책, 제1차 5개년 계획 시기 등의 특성에 대해서 다시 논의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식량배급표가 철폐된 1935년부터 상황이 좋은 노동자들은 가정의 식탁으로 돌아갔다. 이 후퇴현상을 대중의 사회주의 체제 거부로 간주하는 것은 부정확한 관찰이다. 왜냐하면 사회주의 체제는 시도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말 사태를 비관적으로 만든 것은 관료집단이 조직한 "공공 식단"에 대한 노동자들과 부인들의 판단이었다. 린네르 천이 세탁되는 양보다 찢겨지고 도난 당하는 양이 많은 공공 세탁소에 대해서도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다시 가정으로 돌아가자! 그러나 현재 웅변가들과 언론인들이 뻔뻔스럽게 찬양하고 있는 가정 취사와 세탁은 노동자 부인들이 다시 그릇과 냄비 즉 옛날 노예제도로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련 사회주의의 완벽하고 역전될 수 없는 승리"를 선언한 코민테른 결의문은 공장 여성들에게 전혀 설득력이 없다!

 

농촌 가정은 가내 수공업 뿐 아니라 농업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도시 가정보다 훨씬 안정적이고 보수적이다. 몇 되지 않는 지극히 빈곤한 농촌 공동체가 혁명의 초기 몇 년간 공공식당과 탁아소를 도입했다. 처음 발표된 담화문들은 농촌 집단화가 가족제도를 결정적으로 변화시킬 것이라고 선언했다. 농민의 닭과 소를 괜히 징발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어쨌든 소련 전국에서 공공식당의 당당한 진군을 선언한 담화문이 대단히 많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이 조치로부터 후퇴가 시작되었을 때 이 허풍의 그림자 속에서 현실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다. 농민은 집단농장을 통해 빵과 가축 사료만 얻을 수 있다. 육류, 유제품, 채소 등은 거의 집단농장 옆의 개인소유 텃밭에서만 나온다. 가장 중요한 생필품이 가족의 고립된 노력으로 얻어지는데 공공식당이 말이 되는가. 개인의 소규모 농장은 개인 가정의 새로운 물질적 기초가 되어 여성에게 이중의 부담이 되었다.

 

일상적으로 운영되는 탁아소 수용인원은 1932년에는 60만 명이었고 부모가 들판에서 일할 경우에만 아이를 맡는 계절적 탁아소 수용인원은 40만 명에 불과했다. 1935년에 어린이용 침대의 수는 560만 개였으나 일상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침대의 수는 전체 수의 아주 적은 비율에 불과했다. 더욱이 모스크바나 레닌그라드 같은 대도시에서조차 일반적 탁아 요구는 제대로 수용되지 못하였다. "아이가 집에 있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느끼는 탁아소는 탁아소가 아니라 형편없는 고아원에 불과하다"고 어느 주요 신문이 불평하고 있다. 상황이 좀더 좋은 노동자 가족이 탁아소를 기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일반대중에게는 "형편없는 고아원"도 그 수가 아주 적다. 최근 당 중앙집행위원회는 버려진 아동과 고아의 개인 입양을 촉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최고위 기관을 통해 가장 중요한 사회주의적 기능이 수행되지 못하는 현실을 관료집단은 인정하였다. 1930년부터 1935년의 5년간 유치원 아동의 수는 37만 명에서 118만 1천 명으로 늘었다. 1930년의 수치는 너무 빈약해 주목을 받을 만하고 1935년의 수치는 소련의 세대수에 비해 큰 바다의 물방울 하나에 불과해 보인다. 조금만 조사하면 유치원의 대다수나 거의 모두가 행정부, 기술요원, 스타하노프 운동원 자녀들만 받아들인다는 사실이 밝혀질 것이다.

 

당 중앙집행위원회는 얼마 전에 "버려진 아동과 고아를 일소하자는 내용의 결의문이 제대로 실천되지 않는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냉정한 자백에는 어떤 현실이 숨겨져 있을까? 조그만 활자로 인쇄된 신문을 통해서도 모스크바에서 1천 명 이상의 아동들이 "아주 어려운 가족상황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된다. 그리고 수도의 고아원에 수용된 약 1,500명 아동이 더 이상 갈곳이 없어 거리로 나앉는다. 그리고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서 1935년 가을 2개월 동안 "아동을 버린 죄로 7,500명의 부모들이 재판을 받았다." 이들을 재판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몇천 명의 부모가 재판을 모면했을까? "아주 어려운 상황에 놓인" 아동 중에서 얼마나 많은 수가 통계에 잡히지 않았을까? 아주 어려운 상황과 그냥 어려운 상황은 무슨 차이가 있을까? 이 질문들은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숨겨지거나 공개된 집 없는 아이들의 대단히 많은 수는 과거의 가정이 너무 빨리 해체되어 새로운 제도가 정착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했다. 이 현상은 거대한 사회 위기의 직접적 결과이다.

 

매춘은 돈을 지불하는 남자에 의해 여성이 극단적으로 타락하는 현상이다. 신문에 실린 우연한 발언이나 형사 사건을 통해 독자들은 이 현상이 소련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지난 해 가을 『이즈베스챠』는 "노동계급 수도의 거리에서 비밀리에 몸을 파는 1,700명의 여성들이" 체포되었다고 모스크바 발로 보도하였다. 체포된 여성 중에는 117명의 노동자, 92명의 점원, 5명의 대학생이 있었다. 누가 이들을 거리로 내몰았는가? 턱없이 부족한 임금, 궁핍, "옷이나 신발을 살 적은 돈을 벌기 위한" 필요 등이 원인이었다. 그러나 이 사회악의 만연 정도를 대충이나마 파악하려는 노력은 성과가 없을 것이다. 하급관료들이 통계요윈에게 침묵을 명령한다. 그러나 이 강요된 침묵은 소련에서 매춘부 "계급"의 수가 많다는 것을 오류의 여지없이 증언할 뿐이다. 이들이 "과거의 잔재"라는 주장은 근본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이들 대다수는 젊은 세대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성을 갖추고 있다면 문명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이 사회악 때문에 소련 체제를 비난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매춘이 존재하는 현실에서 사회주의의 승리를 말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 신문들은 이 난처한 주제를 언급할 허가를 받은 후 "매춘은 감소하고 있다"고 물론 주장한다. 기아와 피폐의 해인 1931년부터 1933년의 상황과 비교하면 이 말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때 이로 화폐경제가 회복되고 직접 배급제도가 철폐되었으므로 집 없는 아동과 매춘은 불가피하게 증가할 것이다. 특권층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버림받은 자들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집 없는 아동의 많은 수는 의심의 여지없이 여성의 어려운 상황을 가장 오류 없이 비극적으로 보여준다. 이 주제에 대해 낙관적인 『프라우다』까지도 가끔 쓰디쓴 자백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많은 여성에게 출산은 이들의 사회적 지위를 아주 심각하게 위협한다." 바로 이 때문에 혁명정부는 여성의 낙태의 권리를 인정했다. 애 못 낳는 남녀들과 노처녀들이 무슨 말을 하든 궁핍과 가족의 어려움 속에서 낙태는 여성의 가장 중요한 시민적·정치적·문화적 권리의 하나이다. 그러나 여성의 권리인 낙태 역시 지금의 사회적 불평등 체제에서 특권으로 변질되었다. 낙태의 관행에 대해 언론에 조금씩 흘러나오는 정보는 그야말로 충격적이다. 우랄 지방의 어느 지구에 있는 농촌 병원 한곳을 통해서만 1935년 "195명의 여성이 산파에 의해 몸을 상했다." 이중에는 33명의 근로여성, 28명의 사무직 노동자, 65명의 집단농장 여성, 58명의 주부가 포함되어 있었다. 낙태 정보가 언론으로 흘러들어 갔다는 점에서 이 지구는 대부분의 지구들과 차이가 있다.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매일 소련 전국에서 산파에 의해서 몸을 상하고 있을까?

 

여성들은 의학과 위생시설의 도움으로 낙태를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정부는 이 서비스를 제공할 수 없게 되자 갑자기 방침을 바꾸어 낙태를 금지시켰다. 그리고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정책 전환의 필요성을 강변하고 있다. 대법원 판사 솔츠(Soltz)는 결혼문제 전문가인데 곧 시행될 낙태금지 정책을 옹호하면서 실업자 없는 사회주의에서 여성은 "엄마가 될 기쁨"을 거부할 권리가 없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경찰의 권한을 가진 성직자의 철학이다. 바로 전에 당 중앙집행위원회는 많은 여성들에게 그리고 아마 절대 다수의 여성들에게 출산이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위협한다"고 말했었다. 그리고 소련의 최고기관은 "고아와 버려진 아동의 일소정책은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이것은 집 없는 아동의 수가 새로 증가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제 이 대법원 판사 양반은 "인생이 행복한" 나라에서 낙태는 징역형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인생이 슬플 뿐인 자본주의에서 정부는 이와 똑같은 정책을 펴고 있다. 서방과 마찬가지로 소련에서도 간수의 손아귀에서 고생할 사람들은 주로 근로여성, 하인, 농민의 부인 등인데 이들은 자신의 어려움을 숨기기 힘들다. 고급 향수와 기타 사치품의 수요층인 고위급 "우리여성들"은 관대한 법이 보는 앞에서 과거와 같이 자신들에게 필요한 일들을 한다. 집 없는 아동들을 한사코 모른 체 하면서 솔츠는 이렇게 결론 내린다: "우리는 사람이 많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직접 아이들을 낳으시지요"라고 수백만 근로여성들이 이 높으신 판사 양반에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도 물론 관료집단이 이들의 입을 꼭 봉해서 완전한 침묵을 강요하지 않을 때만 가능할 것이다. 사회주의는 여성에게 낙태를 강요하는 원인을 제거하는 체제이다. 모든 여성들의 가장 민감한 사안에 대해 불한당 같은 경찰을 동원하여 "엄마가 될 기쁨"을 강요하는 체제는 사회주의가 아니다. 이 사실을 이 높으신 양반들은 완전히 잊어먹은 것 같다.

 

낙태를 금지하는 법 초안이 소위 광범위한 대중적 논의를 위해 제출되었다. 그러나 언론의 가는 체를 통과했지만 강한 불만과 억눌린 저항이 터져 나왔다. 그러자 토론은 개시 때와 똑같이 갑자기 중단되었다. 6월 27일에는 당 중앙집행위원회에 의해 치욕스러운 초안이 세 배나 더 치욕스러운 법으로 전환되었다. 관료집단 가운데 낙태 금지에 대해 변명을 늘어놓는 자들도 일부는 낭패의 빛을 보였다. 루이스 피셔는 이 법이 통탄할만한 오해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통과되었다고 선언했다. 고위층 부인들을 제외한 모든 여성들에게 낙태의 권리를 박탈하는 이 새로운 법은 테르미도르 반동의 자연스럽고 논리적인 결과에 불과하다.

 

루블화의 복권과 동시에 가족도 복권되었다. 얼마나 은총이 가득한 우연의 일치인가! 그런데 이 복권은 국가의 물질적·문화적 파산을 통해 이루어졌다. "인간 사이에 사회주의적 관계를 창출하기에는 우리가 너무 가난하고 무지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우리의 자식들과 손자들은 이 목표를 실현할 것이다"라고 공식적으로 말하는 대신 소련의 지도자들은 깨진 가족의 외형을 다시 아교로 붙일 것을 강요하고있다. 이것만이 아니다. 극심한 벌칙으로 위협하면서 가족을 승리한 사회주의의 성스러운 중핵으로 바라볼 것을 강요하고 있다. 이 정책이 야기한 사회적 후퇴를 눈으로 측정하는 것은 어렵다.

 

입법자, 문학가, 법원과 민병대, 신문과 학교 교실 등 모든 사람과 사물이 새로운 정책 속으로 끈에 묶인 채 끌려들어오고 있다. 단순하고 정직한 어느 청년 공산주의자가 자신이 발행한 신문에 대담한 내용의 글을 실었다:"여성이 가족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는 방도에 골몰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런데 이 청년은 곧 뺨을 두세 차례 맞고 침묵을 지킨다. 공산주의의 기본 정책들이 "지나친 좌익적 노선"이라고 선언되었다. 문화적 소양이 없는 속물들의 어리석고 썩어빠진 편견이 새로운 도덕의 이름으로 소생하고 있다. 그리고 이 끝없이 광활한나라의 모든 구석에서는 어떤 일이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는가? 언론은 미세한 정도로만 가족 내의 테르미도르 반동을 반영하고 있다.

 

복음주의의 고상한 열정은 죄악의 증대와 함께 더 뜨거워진다. 따라서 십계명의 제7조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은 관료지배층의 대단한 인기를 누리고 있다. 소련의 도덕론자들은 문구를 약간만 고치면 된다. 너무 자주 쉽게 벌어지는 이혼을 반대하는 캠페인이 지금 시작되고있다. 소련 입법자들의 창조적 사고는 이혼을 신고할 때 신고료를 받고 이혼 반복자에게는 신고료를 인상하는 "사회주의" 조치를 이미 발명했었다. 가족의 복권이 루블화의 교육적 역할의 증대를 수반한다고 이미 말한 바 있다. 신고료 징수로 인해 돈이 없는 사람들은 당연히 이혼 신고를 꺼려한다. 상류층 인사에게 이 정도 세금은 조금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고급 아파트, 승용차, 기타 좋은 것들을 소유하고 있는 고위 인사들은 필요 없이 신상을 공개하지 않기 위해 이혼을 신고하지 않는다. 매춘의 무겁고 모욕적인 성격은 사회의 밑바닥 계층에게만 가해진다. 상류층에서는 권력이 안락함과 결합되는데 여기서 매춘은 소규모 상호 서비스라는 우아한 형태를 갖추거나 심지어 "사회주의 가족"의 탈을 뒤집어쓴다. 지배층의 타락 과정에서 "승용차-여자 요인"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이미 위에서 소스노프스키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서정적이며 학자풍인 서방의 "소련 친구들"은 아무 것도 보지 않기 위해 눈을 가지고 있다. 10월 혁명이 확립한 혼인법과 가족법은 당당한 긍지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제 부르주아 국가들의 법률창고에서 대대적인 차용을 하면서 고쳐지고 찢겨졌다. 경멸의 눈빛을 보이면서 배반이라는 도장을 고의로 찍기라도 하듯이 낙태와 이혼의 무조건적 자유를 옹호하기 위해 제출되었던 주장들 즉 "여성해방", "개성을 추구할 권리의 옹호", "모성보호" 등이 이제는 이 자유들을 제한하고 완전히 금지하기 위해 다시 되풀이되고 있다.

 

이러한 정책의 후퇴는 구역질나는 위선의 형태를 띠고 있을 뿐 아니라 경제적 필요의 철칙이 요구하는 선보다 한없이 더 나가고 있다. 이혼 여성에 대한 위자료 지급과 같은 부르주아 법이 부활하는 현상에는 객관적 원인이 있다. 그러나 또 한편 관료지배층이 부르주아 법을 더욱 많이 도입해야 하는 사회적 이해가 결부되어 있다. 현재 관료집단이 가족을 신성시하는 가장 주요한 이유는 사회관계의 위계질서를 안정적으로 확립할 필요가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권위와 권력을 지탱하는 4천만 기관들을 통해 청년들을 현 체제가 요구하는 규율로 묶어버릴 필요성도 작용했다.

 

새로운 세대의 교육을 국가의 손에 집중시키려는 희망을 소련 지배층은 아직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동시에 정부는 부모를 위시한 "어른들"의 권위를 지지하는 일에 관심이 없을 뿐 아니라 반대로 어린이들을 가족으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다. 정체된 생활 전통으로부터 어린이들을 격리시키려 했기 때문이었다. 제1차 5개년 계획이 시행되던 조금 전만 해도 학교와 공산주의 청년동맹은 어린이를 이용하여 술주정뱅이 부친과 종교를 가진 모친을 폭로하고 모욕하고 일반적으로 "재교육"시켰다. 이 방법은 부모의 권위를 뿌리째 흔들었다. 이 중요한 분야에서도 역시 정책이 급격히 전환되었다. 십계명의 제7조와 함께 제5조 "신을 모욕하지 말라"도 완전히 권위를 회복했다. 그렇다고 신을 부르는 단계까지 나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학교들은 십계명 제5조를 들먹이지 않으면서도 학생들에게 보수성과 판에 박힌 규율을 주입시키고 있다.

 

그런데 구세대의 권위에 대한 관심은 이미 종교 정책의 전환을 가져왔다. 신의 존재, 그의 도움, 그리고 그의 기적을 부정하여 혁명권력은 아동과 부모 사이에 가장 예리한 쐐기를 박았다. 그러나 문화의 발전, 진지한 선전, 과학에 입각한 교육보다 훨씬 앞선 반(反)종교 투쟁은 야로슬라브스키와 같은 인물의 지도아래 종종 익살과 장난으로 타락했다. 이제 가족에 대한 공격과 마찬가지로 하늘나라에 대한 공격도 갑자기 멈추었다. 품위에 대한 평판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는 관료집단은 젊은 "무신론자들"에게 종교에 대한 싸움을 멈추고 책상에 앉아 독서를 할 것을 명령했다. 종교에 대한 아이러니컬한 중립 정책이 이제 확립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 제1단계에 불과하다. 관료집단에 의해 모든 것이 좌우된다면 제2단계와 제3단계는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사회를 지배하는 견해가 드러내는 위선은 모든 곳에서 언제나 사회 모순의 기본 요소이다. 이것이 대체로 이데올로기의 역사적 법칙이다. 사회주의가 이름 값을 하려면 탐욕이 개입되지 않는 인간관계, 시기와 술책이 없는 우정, 저속한 계산이 없는 사랑이 실현되어야 한다. 소련의 공식 이데올로기는 이 이상적 규범이 이미 실현되었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현실이 이 선언에 대해 더 크게 항의할수록 더 힘주어 강변한다. 예를 들어 1936년 4월에 채택된 공산주의청년동맹의 새로운 강령은 이렇게 말한다: "남성과 여성의 진정한 평등에 기초하여 새로운 가족이 등장하였다. 이 새로운 가족을 번성시키는 것이 소련 정부의 관심사이다." 공식 논평은 이 강령을 이렇게 보완하고 있다: "청년들이 평생 친구가 될 아내나 남편을 선택할 때 사랑이 유일한 동기이자 충동이다. 자라는 세대에게 금전적 편의가 개입된 부르주아 결혼은 존재하지 않는다."(『프라우다』 1936년 4월 4일) 일반 노동자들에게 이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그러나 "돈을 위한 결혼"은 자본주의 세계의 노동자들에게도 비교적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소련의 중산층이나 상류층의 경우는 아주 다르다. 새로운 사회계층들은 자동적으로 인간관계에 자기 특성을 반영한다. 권력과 돈이 이성관계에 미치는 악행은 소련 관료집단 내에서 아주 흔하다. 마치 이들이 서방의 부르주아 계급을 능가하겠다는 목표를 정한 것 같다.

 

그런데 지금 인용된 『프라우다』의 기사 내용과 정반대로 "정략 결혼"은 소련 언론이 우연하게 또는 불가피하게 정직을 드러낼 때 자백하듯이 이제 완전히 부활했다. 자격요건, 임금, 고용, 계급 등이 점점 더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신발, 모피 외투, 아파트, 욕실 그리고 최종적 꿈인 승용차 구입 등의 문제와 관계 있기 때문이다. 단칸방을 구하려는 투쟁이 매년 모스크바에서 적지 않은 부부들을 결합하고 헤어지게 한다. 그리고 친척관계가 결혼에서 대단히 중요해졌다. 군사령관이나 파워가 있는 공산주의자를 장인으로 두거나 높은 관리의 여동생을 장모로 두는 것은 출세나 안락한 삶을 위해 필요하다. 이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와 다른 상황이 소련에서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소련을 다루는 두꺼운 단행본의 가장 극적인 장(章) 하나는 소련 가정의 해체와 붕괴 이야기일 것이다. 남편은 당원, 노동조합간부, 군 사령관, 행정가를 역임하면서 새로운 취향을 개발한다. 그러나 부인은 가족이라는 굴레에 묶여 과거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 소련 관료집단 두 세대가 걸어온 길은 부인들이 남편에 의해 거부되고 뒤쳐진 비극으로 가득하다. 같은 현상이 이제 새로운 세대에게도 나타나고있다. 가장 커다란 잔혹 행위는 아마 관료집단 상층부에 존재할 것이다. 이들 대부분은 교양이 거의 없는 벼락출세 꾼이고 모든 기회가 자기에게 열려 있다고 생각한다. 고문서 보관소의 비밀문서나 회고록이 공개되면 이들의 부인들 그리고 일반적으로 여성들에게 가해진 추악한 범죄들이 언젠가 드러날 것이다. 가족의 도덕과 강제적 "모성의 기쁨"을 복음주의자처럼 외치던 이들은 여성 및 가정 범죄를 저질러도 높은 지위 때문에 기소되지 않는다.

 

아니다. 소련 여성은 결코 자유롭지 않다. 법 앞의 완전한 평등은 노동자 여성이나 농촌 여성보다는 상류층 여성, 기술·관료·교육 등 일반적으로 지식 분야를 대표하는 여성들에게 한없이 많은 특권을 부여했다. 사회가 가족의 물질적 걱정을 직접 해결하지 못하는 이상 주부는 흰옷 입은 노예 즉 보모, 하인, 요리사 등을 부릴 수 있을 때에만 자기의 사회적 기능을 완수할 수 있다. 소련 인구를 구성하고 있는 4천만 가구 가운데 5% 또는 10%만이 가정의 노예노동에 직접 간접적으로 의존한다. 하인에 대한 정확한 인구조사 통계는 가장 진보적이라는 소련의 법률체계만큼이나 소련 여성의 지위를 사회주의적으로 평가하는데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때문에 소련의 통계는 "근로 여성" 또는 "기타 사람들"이란 항목으로 하인의 존재를 숨긴다! 저명한 공산주의자의 부인은 요리사, 상점에 주문할 수 있는 전화, 심부름용 승용차 등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상점에 뛰어 가야 하고 저녁을 준비해야 하고 유치원이 있을 경우 거기까지 걸어가서 아이를 집에 데리고 와야 하는 근로 여성과 공통점이 거의 없다. 사회주의라는 명찰로 이 사회적 격차를 은폐시킬 수는 없다. 이 격차는 서방의 부르주아 여성과 노동자 여성간의 격차만큼이나 크다.

 

참기 어렵고 모욕적인 가정생활의 어려움이 사회 전체의 노력에 의해서 제거된 진정한 사회주의 가족은 어떤 강제적 통제도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 자유로운 가정 내에서는 낙태법과 이혼법을 생각하는 것 자체가 매춘 굴이나 인간 제물 사원을 생각하는 것만큼 끔찍스러울 것이다. 10월 혁명의 법률들은 이러한가족을 창조하기 위해 대담한 첫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경제적·문화적 후진성은 잔악한 반동을 초래했다. 테르미도르 반동의 법률은 이제 부르주아 법 모델로 후퇴하고 있다. 그리고 이 후퇴는 "새로운" 가족의 성스러움에 대한 거짓 연설로 위장되어 있다. 이 문제에서도 사회주의 건설의 실패자인 소련 지배층은 위선적 품위로 자신을 위장하고 있다.

 

특히 아동문제에 대한 높은 원칙과 추악한 현실의 격차에 의해 충격 받은 진지한 관찰자들이 있다. 집 없는 아동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채택된 가혹한 형법 조치들은 여성과 아동을 옹호하는 사회주의 법률이 조야한 위선에 불과함을 충분히 암시한다. 법률과 행정기구로 거짓 치장된 사상들의 광범위함과 관대함에 속아버린 정반대 종류의 관찰자들도 있다. 궁핍한 주부, 창녀, 집 없는 아동들을 보면서 이 낙관주의자들은 물질적 부가 좀더 증대하면 사회주의 법률이 피와 살을 갖게 될 것이라고 스스로 말한다. 이 두 접근 방식 중 어느 것이 좀더 오류이고 해로운지는 판단하기 쉽지 않다. 역사 맹인증에 걸린 사람은 사회적 계획의 광범위함과 대담함, 이 계획 실행 초기 단계들의 중요성, 그리고 이것의 엄청난 가능성 등을 보지 못할 수도 있다. 반면에 소련에서 증대하는 사회적 모순에 눈을 감고 미래를 바라보면서 관료집단에게 존경을 표하며 미래의 열쇠를 맡기는 부류들이 있다. 이들은 불평등의 현실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위안하는 수동적이고 기본적으로 무관심한 낙관론자에 불과하다. 이들에 대해 분노를 느끼지 않는다면 이상한 일이다. 이들은 여성과 남성의 평등을 관료집단이 권리 박탈의 평등으로 전화시키지 않은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관료집단이 자유를 대신하여 새로운 억압을 도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성서의 지혜서(Book of Wisdom)가 확실히 약속하고 있는 것처럼 이들은 생각한다.

 

남성이 여성을 노예로 만든 방식, 착취자가 남성과 여성 모두를 지배한 방식, 근로인민이 피의 대가를 지불하고 노예상태에서 해방되려고 시도했으나 하나의 쇠사슬이 다른 쇠사슬로 바뀐 방식 등에 대해 역사는 많은 예를 제시하고 있다. 이것이 역사가 우리에게 말해줄 수 있는 전부이다. 그러면 어떻게 현실에서 아동, 여성, 인간이 스스로를 해방할 것인가? 이 문제를 해결할 믿을 만한 모델은 아직 없다. 모든 부정적 역사적 경험은 대중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억압체제의 수호자들과 모든 특권층을 근로인민이 확고히 불신할 것을 요구한다.

 

2. 청년에 대한 관료집단의 억압

 

상승하는 계급의 젊은 세대는 모든 혁명정당의 가장 주요한 지지층이다. 부패한 정치세력은 청년들의 지지를 구할 능력을 상실한다. 정치 전선에서 차례로 후퇴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정당들은 청년층을 혁명이나 파시즘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다. 지하에서 활동할 당시 볼셰비키당은 항상 청년 노동자들의 당이었다. 그러나 멘세비키당은 속물적 품위를 지키려는 노동자계급 상층부가 지지 기반이었다. 그리고 이 점에 대해서 항상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볼셰비키당을 경멸하였다. 혁명은 이들의 오류를 가차없이 드러내었다. 혁명의 결정적 국면에서 청년들은 성숙한 연령층 그리고 심지어 노년층도 이끌었다.

 

10월 혁명은 소련의 새로운 세대에게 역사적 진보를 향한 충동을 강렬하게 심어주었다. 혁명은 청년들이 단번에 보수적 생활양식의 사슬을 끊어버리고 자유로운 몸이 되게 만들었다. 그리고 지구상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인간 사회 역시 형태를 바꿀 수 있는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커다란 비밀 즉 변증법의 첫 비밀을 이들에게 보여주었다. 우리 시대의 사건들을 바라볼 때 불변적 인종유형 이론은 얼마나 어리석은 이론인가! 소련은 수십 인종들이 섞여 있는 거대한 인종 전시장이다. 따라서 "슬라브인의 영혼"이라는 신비주의는 소련의 현실 속에서 산산이 조각 난다.

 

그러나 청년의 진보를 향한 역사적 충동은 아직 제대로 꽃을 피우지 못하고 있다. 물론 경제 영역에서 청년의 활동은 아주 활발하다. 현재 소련에는 23세 이하의 청년 노동자가 7백만 명에 이른다. 공업에서 314만 명, 철도에서 70만 명, 건설업종에서 70만 명이 일하고 있다. 새로 건설된 대공장에는 노동자의 반수가 청년이다. 집단농장에는12만 명의 공산주의 청년동맹 회원들이 일하고 있다. 최근 건설공사장, 벌목현장, 석탄광산, 금광 등의 현장에는 공산주의 청년동맹 회원들이 수십만 명 동원되었다. 그리고 북극해, 사할린, 아무르 등지에는 이들의 이름을 딴 신도시들이 건설되고 있다. 새로운 세대는 돌격대원, 모범노동자, 스타하노프 운동원, 십장, 하급행정요원 등으로 일하고 있다. 청년세대는 공부에 열중하고 있으며 이중 많은 수가 아주 열정적으로 탐구활동에 종사하고 있다. 체육 분야에서도 이들은 경제 옆역에서와 마찬가지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특히 고공 낙하, 사격술 등 가장대담하고 호전적인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다. 진취적이며 대담한 청년들은 모든 종류의 위험한 원정에 나서고 있다.

 

잘 알려진 북극탐험가 슈미트(Schmidt)는 최근 이렇게 말했다:"우리 청년의 다수는 난관이 기다리는 곳에서 일할 용의가 있다." 이것은 의심의 여지없는 진실이다. 그러나 모든 분야에서 혁명 이후 세대들은 아직 구세대의 보호를 받고 있다. 이들은 작업대상, 작업방식 등과 관련하여 상부의 명령을 밭고 있다. 명령의 가장 높은 형태인 정치는 전적으로 소위 "고참세대(Old Guard)"의 손에 장악되어 있다. 그리고 청년들에 대한 열성적인 자화자찬의 연설을 통해 이 고참세대는 경계심을 풀지 않으면서 정치를 독점하고있다.

 

엥겔스는 국가가 사멸되지 않는 사회주의 사회를 구상한 적이 없다. 국가의 사멸은 경찰을 동원한 모든 종류의 억압을 교육받은 생산자와 소비자의 자치로 대체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이 과업을 젊은 세대들이 성취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청년들은 새롭고 자유로운 사회에서 성장하면서 모든 국가주의 쓰레기를 일소할 것이다." 레닌 역시 이 주제에 대해 이렇게 덧붙였다: "... (이들은) 민주공화정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국가주의를 제거할 것이다." 엥겔스와 레닌은 사회주의 건설의 전망을 대개 이렇게 제시했다: 국가권력을 정복한 "고참" 세대는 국가를 일소하는 작업을 시작할 것이고 다음 세대는 이 작업을 완료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소련 인구의 43%는 10월 혁명 이후 태어났다. 23세를 두 세대를 가르는 경계선 연령으로 본다면 소련 인구의 50% 이상은 아직도 이 경계선에 아래에 있다. 결국 인구의 반은 소비에트 체제 이외의 정치체제를 체험한 적이 없다. 그러나 바로 이 새로운 세대는 엥겔스의 말대로 "자유 상태에서" 자아를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 소련 정부는 관료지배층을 위대한 혁명세대라고 선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끊임없이 증대되는 억압 속에서 청년들은 숨쉬고 있다. 공장, 집단농장, 군대 막사, 대학, 교실 그리고 탁아소는 아니더라도 유치원에서마저 지도자에 대한 개인적 충성과 무조건적 복종이 소련 인민의 영광이라고 선언된다. 최근 발명된 교육 관련 격언들과 경구들은 나치의 선전상 괴벨스로부터 모방한 것처럼 들린다. 아니면 괴벨스 자신이 스탈린의 조수들에게 이것들을 대다수 모방했는지 모른다.

 

학생들의 학교 및 사회생활은 형식과 위선으로 가득 차 있다. 수많은 죽도록 따분한 모임들, 피할 수 없는 명예회장님의 훈화, 경애하는 지도자들을 칭송하는 구호 제창, 어른들과 똑같이 속과 전혀 다른 발언을 남발하는 미리 짜여진 목청 높은 토론회 등을 아동들은 참아내야 한다. 극소수 순수한 아동들은 엄하게 다스려진다. 비밀경찰은 소위 "사회주의 학교"에 끄나풀들을 들여보내 배움의 장에 배신과 밀고의 구역질나는 부패상을 도입하고 있다. 당국이 강요하는 낙관주의에도 불구하고 학교생활을 짓누르는 억압, 거짓, 지루함 속에서 생각이 깊은 교사들과 아동들은 글을 통해 몰래 일상적으로 느끼는 공포감을 표현하지 않을 수 없다. 계급투쟁과 혁명 경험이 없는 새로운 세대들은 소비에트 민주주의 속에서 과거의 경험들과 현재의 교훈들을 의식적으로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 이 과정을 통해서만 이들은 사회생활에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성숙할 것이다. 독립적 사고와 마찬가지로 독립적 성격은 비판 없이는 발전할 수 없다. 그러나 이들은 사고를 교환하고 오류를 범하고 노력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 뿐 아니라 타인의 오류도 교정하는 초보적인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다. 자신들의 문제들을 포함한 모든 문제들은 이들 대신 어디선가 미리 결정되어진다. 결정된 사항들을 실행에 옮기고 결정을 내린 사람들을 칭송하는 것이 이들이 할 수 있는 활동의 전부이다. 모든 비판적 언사는 관료집단에 의해 질식된다.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으며 권위에 복종하지 않는 모든 자들은 체계적으로 제거되거나 억압된다. 수백만 청년들 가운데 단한 명의 거물급도 탄생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공학, 과학, 문학, 스포츠, 체스게임 등에 몰입하면서 청년들은 미래의 거대한 행동들을 준비한다. 그리고 모든 분야에서 전혀 준비가 안된 구세대와 경쟁하면서 이들을 필적하거나 압도한다. 그러나 정치 영역에서는 구세대에게 짓눌려 지낸다. 따라서 이들의 미래는 세 가지 가능성 밖에 없다. 관료집단에 들어가 출세를 도모하던가 말 한마디 없이 억압을 감내하면서 경제, 과학, 또는 좁은 개인적 관심의 영역에 몰입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지하활동을 통해 미래를 준비하면서 자아를 단련할 수 있다. 그러나 관료의 길은 극소수에게만 열려 있다. 마찬가지로 극소수만이 저항운동에 참여할 수 있다.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중간층은 아주 다양하고 이질적이다. 그러나 엄혹한 억압상황 속에서 이 집단은 대단히 의미 있으면서 은폐된 과정을 밟게 되는데 크게 보아 이과정의 행방이 소련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내전의 시기는 금욕을 강요했는데 신경제정책을 거치면서 탐욕은 아닐지라도 쾌락을 추구하는 시기로 이행했다. 그러나 제1차 5개년 계획 시기에는 또다시 금욕주의가 강요되었다. 그러나 이 금욕주의는 청년과 대중에게만 강요되었다. 이미 지배층은 개인적 번영을 누릴 지위를 확고히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2차 5개년 계획 시기에는 금욕주의에 대한 급작스러운 거부반응이 당연히 나타났다. 개인주의적 출세욕이 대중 특히 청년에게 널리 퍼졌다. 그러나 개인적 복지와 번영은 대중과는 무관하며 지배층에 아부하는 아주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가능하다. 한편 관료집단은 의식적으로 거수기 정치인과 출세주의자들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솎아내기도 한다.

 

1935년 4월 공산주의청년동맹대회의 주요 연사는 이렇게 말했다: "이익에 대한 탐욕, 속물적인 인색함, 저열한 이기주의는 소련 청년의 속성이 아니다." 그러나 그의 이 발언은 도급제, 생산장려금, 훈장 등을 통한 "번영과 품위를 갖춘 생활"이라는 지배적 구호와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다. 사회주의는 금욕주의가 아니다. 정반대로 기독교의 금욕주의에 아주 적대적이다. 즉 현세에 집착하는 점에서 사회주의는 모든 종교에 대단히 적대적이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현세의 가치를 추구하는 여러 단계들을 가지고 있다. 사회주의는 번영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반대로 이러한 관심의 부재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어떤 세대도 자신의 처지를 뛰어넘어 비약할 수는 없다. 스타하노프 운동은 "저열한 이기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 성공의 척도인 바지와 넥타이 보유 수는 "속물적 인색함"만을 증명한다. 그러나 이 단계가 피할 수 없다고 가정하자. 좋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여전히 필요하기 때문이다. 시장관계의 부활은 개인적 번영의 기회를 당연히 열어놓고 있다. 공학에 대한 소련 청년들의 많은 관심은 사회주의 건설에 대한 관심 때문이 아니라 공학자들이 의사나 교사보다 비교할 수 없이 높은 소득을 누리기 때문이다. 이 경향이 지적인 억압, 사상적 반동, 상부의 출세주의 의식 장려와 결합되면 소위 "사회주의 문화"는 가장 극단적인 반사회적 이기주의를 가져온다.

 

그러나 청년들을 전적으로 또는 지배적으로 개인적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로 묘사하는 것은 이들에 대한 조야한 비방이 될 것이다. 실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일반적으로 이들은 관대함, 동정심, 진취성을 겸비하고 있다. 출세주의는 상부에서 이들에게 가해지는 압력에 불과하다. 이들의 깊은 내면에는 영웅주의에 기초한 정형화되지 않은 경향들이 숨쉬고 있으며 이것들이 발현될 때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즉 새로운 종류의 애국심이 자라는 토양을 이룬다. 이 심리적 분위기는 당연히 아주 깊으며 진지하고 역동적이다. 그러나 이 애국심에서도 젊은 세대와 구세대를 분리하는 골이 존재한다.

 

건강하고 젊은 허파는 테르미도르 반동과 결부된 위선의 공기를 숨쉬기 어렵다. 따라서 이 반동은 아직도 혁명의 옷을 입고 자신을 치장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사회주의 선전포스터와 일상 현실의 뚜렷한 격차는 공식 공산주의 경전에 대한 신념을 침식하고 있다. 상당수 청년들은 자신들이 표현하는 정치에 대한 경멸감과 반사회적 생활양식에서 긍지를 느낀다. 대개의 경우 이 무관심과 냉소는 현 체제에 대한 불만과 독립된 생활을 영위하려는 숨겨진 욕구의 첫 형태에 불과하다. 한편 수십만 청년 "백위군"과 "기회주의자" 그리고 또 한편으로 "볼셰비키∼레닌주의자"가 공산주의청년동맹과 당에서 제명되고 체포되고 유형 당하는 현상은 의식적인 정치적 저항의 샘이 좌우익을 막론하고 아직 고갈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특히 지난 몇 년간 이 샘물은 새로운 위력으로 분출하고 있다. 그러나 참을성이 없고 뜨거운 피가 흐르는 불안정한 부류들은 자신들의 이익과 감정이 유린되자 테러를 통한 복수를 생각하고 있다. 지금까지 말한 것이 대체로 소련 청년의 정치적 분위기이다.

 

개인적 테러의 역사는 소련의 발전과정의 특정 단계들을 명확하게 구별짓고 있다. 소비에트 권력의 초기, 아직 내전이 끝나지 않았을 때 백위군과 사회혁명당원들은 혁명정부에 대해 테러를 자행했다. 그러나 구지배계급이 구체제의 복귀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자 테러도 곧 사라졌다. 최근까지 충격적으로 기억되고 있는 쿨락의 테러는 언제나 지방에 한정되었고 소련 정부에 대한 게릴라 투쟁이 이것을 측면에서 지원하기 위해 벌어졌다. 최근 테러의 폭발은 구지배계급이나 쿨락이 아니라 전적으로 청년, 공산주의청년동맹, 당의 대오에서 발생하고 있다. 그리고 아주 빈번히 지배층의 자식들도 테러에 가담하고 있다. 문제 해결에는 완전히 무력하지만 개인적 테러는 아주 중요한 징후를 드러낸다. 관료집단과 대중 특히 청년 사이의 날카로운 모순이 이것을 통해 특징적으로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적 난관, 고공 낙하, 북극 탐험, 과시하는 듯한 무관심, "낭만적 깡패 행위", 테러 분위기, 개인적 테러 등은 모두 구세대의 참을 수 없는 억압에 대한 젊은 세대의 폭발을 준비하고 있다. 전쟁은 의심할 여지없이 증대되는 불만을 해소하기 위한 안전판이 된다. 그러나 이 안전판도 오래가지 못한다. 전쟁을 통해 청년들은 지금 완전히 결여된 투쟁적 성격과 자신의 사회적 권위를 획득하게 될 것이다. 동시에 "고참 세대" 대다수에 대한 평판은 회복할 수 없이 상처를 입을 것이다. 기껏해야 전쟁은 관료집단에게 어느 정도 유예기간을 줄 수 있을 뿐이다. 이후에 전개될 정치적 분쟁은 그만큼 더 날카로운 양상을 띨 것이다.

 

물론 소련에서 발생하고 있는 근본적 정치문제를 세대 문제로 환원하는 것은 일면적이다. 청년들 중에 수십만의 완벽한 예스맨이 존재하듯이 구세대에도 공개적이든 모습을 숨기고있든 관료집단에 대한 적대세력이 상당수 존재한다. 그러나 관료집단에 대한 공격이 좌익과 우익 어느 쪽에서 시작되든 정치적 권리를 박탈당한 억압받고 불만 높은 청년층이 주요한 지원세력으로 등장할 것이다. 물론 관료집단은 이것을 너무 잘 알고 있다. 자신의 지배적 지위를 위협하는 모든 것에 대해 일반적으로 대단히 민감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미리 자신의 진지를 확고히 구축하기 위해 이들은 젊은 세대의 공격을 막을 참호와 콘크리트 성곽을 구축한다.

 

이미 말했듯이 1936년 4월 크렘린궁에서 공산주의청년동맹 제10차 대회가 열렸다. 5년 동안 대회가 한번도 열리지 않은 사실이 규약 위반이라는 것을 설명할 필요를 물론 어느 누구도 느끼지 않았다. 더욱이 참석자가 엄선된 이 대회가 청년의 정치적 권리를 철저히 박탈하는 목적만을 위해서 열렸다는 사실이 명확해졌다. 새로 개정된 규약은 이 단체가 법적으로 소련의 사회생활에 참여할 권리조차 박탈했다. 따라서 이 단체의 유일한 활동영역은 교육과 문화 훈련 분야에 한정되었다. 이 단체의 총비서는 상부의 명령에 따라 연설을 통해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는 ‥‥ 산업과 재정에 대한 계획, 생산비 감소, 경제회계, 농산물 파종, 그리고 다른 중요한 국가적 문제들을 마치 우리가 결정하는 것처럼 수다 떠는 짓은 그만두어야 한다." 우리 모두는 이 마지막 말을 계속 되풀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마치 우리가 결정하는 것처럼!" "수다 떠는 행위를 그만 두어야 한다!"는 거만한 말투는 극도로 복종적인 대회 참석자들에게조차 전혀 열광적 반응을 끌어내지 못했다. 그런데 소련의 법률이 정치적 성숙에 도달하는 나이를 18세로 보고 이 나이의 청년 남녀에게 모든 선거권을 부여하고 있는 점에 비추어 이 조치는 너무도 충격적이다. 더욱이 공산주의청년동맹의 나이 제한이 규약에 의하면 23세로 되어 있으나 이 단체 회원의 3분의 1은 실제로 이보다 나이가 더 많다. 그런데 이들이 교육과 문화 영역에서만 활동을 펼쳐야 한다니! 그리고 이 단체의 마지막 대회가 된 이 대회는 두 개의 개혁안을 동시에 채택했다. 첫째, 나이 제한의 완화로 23세 이상의 사람도 회원이 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선거권을 가진 사람의 수가 늘어났다. 둘째, 일반적 정치사안뿐 아니라 현안 경제문제에 대해서도 단체가 개입할 권한을 박탈당했다. 과거에는 이 단체 회원일 경우 나이가 많아지면 자동적으로 당적이 옮겨졌으나 이제는 연령제한의 폐지로 이런 일은 가능하지 않다. 이 단체가 그나마 가지고 있던 정치적 권리도 완전히 박탈되었고 정치적 권리를 이 단체가 보유하고 있다는 허세마저 완전히 없어졌다. 이 조치가 내려진 주요한 이유는 이 단체를 이미 숙청이 적절히 진행된 당의 명령에 노예처럼 복종하게 만드는 데 있다. 이 조치들은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같은 근원에서 출발하였다: 젊은 세대에 대해 관료집단은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

 

토론의 가능성을 애초부터 배제하기 위해 자신들이 스탈린의 명확한 지시를 수행하고 있다고 스스로 공개했던 대회의 연사들은 놀라울 정도로 정직하게 개혁의 목적을 설명했다: "우리에게 제2의 당은 필요 없다."공산주의 청년동맹이 확실히 질식되지 않으면 제2의 당이 될 위험이 있다고 지배층이 보고 있음이 이 주장을 통해 드러났다. 이 위험 가능성을 의도적으로 내비치기 위해서 또 다른 연사가 경고조로 이렇게 선언하였다: "바로 트로츠키가 반레닌주의적 반볼셰비키적 제2당의 창설을 청년들에게 참주선동 하였다 등등." 이 연사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언급은 케케묵었다. 실제로 필자는 "당시" 정부의 관료화가 심화될 경우 청년층과의 단절이 불가피할 것이고 제2당이 탄생할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걱정할 것은 하나도 없다: 그간의 사태들은 이 경고의 올바름을 입증해 주었고 이 경고를 실제적 강령의 내용으로 격상시켰을 뿐이다. 타락하고 있는 당은 출세주의자들에게만 매력이 있다. 정직하고 독립적인 사고를 가진 청년들은 비잔틴제국 스타일의 노예근성, 허풍, 특권과 변덕에 대한 은폐, 별로 능력도 없는 관료들의 자화자찬 등에 대해 구역질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 관료들은 능력부족으로 하늘의 별을 딸 수 없어서 몸의 이곳저곳에 별을 달고 다닌다. 이제 청년에 의한 제2당의 건설은 12년이나 13년 전처럼 "위험요소"가 아니라 10월 혁명의 대의를 더욱 전진시킬 유일한 수단으로 역사적 필요성을 인정받았다. 공산주의청년동맹의 규약 개정은 경찰기구의 새로운 협박으로 개악되었지만 청년의 정치적 성숙을 제어할 수 없으며 관료집단에 대한 이들의 적대적 저항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거대한 정치적 소요가 발생할 경우 청년은 어느 쪽으로 방향을 잡아야 하는가? 어느 깃발 아래에서 이들은 자신의 대오를 형성할 것인가? 청년들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어느 누구도 이 질문에 대해서 확실한 해답을 제시할 수 없다. 모순적 경향들이 이들의 마음을 주름지게 하고 있다. 결국 주요 대중의 동맹관계는 세계적 중요성을 가진 역사적 사건들에 의해 판가름날 것이다. 즉 전쟁, 파시즘의 새로운 성공, 또는 이와 반대로 서방에서 노동계급 혁명의 승리 등이 사태를 결정할 것이다. 어쨌든 모든 권리들을 박탈당한 청년들이 거대한 폭발력을 가진 역사적 물결을 대표한다는 사실을 관료집단은 발견하게 될 것이다.

 

1894년 당시 젊은 차르 니콜라이 2세의 입을 빌어 러시아 전제체제는 젬스트보(역자 주: 토지 소유주들의 박탈된 권한을 일부 회복시키기 위해 1864년 알렉산드로 2세가 창설한 군 단위 의회)의 환상을 깨버렸다. 당시 젬스트보는 정치에 참여할 꿈을 소심하게 꾸고 있었는데 이들에 대해 차르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로 대답했다: "부질없는 환상!" 1936년 관료집단은 젊은 세대의 아직도 명확하지 않은 요구들에 대해 더 거만한 투로 고함질렀다: "수다 좀 그만 떨어라!" 이 발언 역시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니콜라이 2세 정권과 마찬가지로 스탈린 정권도 이 말에 대한 보답을 확실히 받을 것이다.

 

3. 민족과 문화

 

민족문제에 대한 볼셰비키당의 정책은 10월 혁명의 승리를 보장했을 뿐 아니라 이후 국내의 분열적 경향과 적대적인 환경 가운데에서도 소련 체제를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런데 국가의 관료주의적 퇴보는 민족문제에 맷돌처럼 짓누르는 부담으로 작용하였다. 레닌이 1923년 봄에 예정된 제12차 당 대회에서 관료집단과 특히 스탈린에 대해 첫 투쟁을 구상을 한 것도 바로 이 민족문제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대회가 열리기 전에 레닌은 병환으로 투쟁을 계속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가 당시 투쟁을 위해 준비했던 문서들은 아직도 검열관에 의해 공개되지 않고 있다.

 

혁명으로 떨쳐 일어난 민족들의 문화적 요구들은 가장 광범위한 자치를 통해서만 만족될 수 있다. 동시에 산업은 소련의 모든 구성 부분들을 일반적으로 중앙집중적 계획에 복종시키는 것을 통해서만 성공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경제와 문화는 장벽으로 분리되지 않는다. 문화적 자치의 경향과 경제적 중앙집중주의경향은 자연히 충돌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양자 사이의 모순이 화해 불가능한 것은 전혀 아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단 한번으로 족한 비법이 있을 수 없으나 이해 당사자인 대중은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끈질긴 의지를 가지고 있다.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는 통치과정에 대중이 실제로 참여하는 것을 통해서만 각각의 새로운 단계에서 경제적 중앙집중주의의 올바른 요구와 민족문화의 살아 있는 중력 사이에 필요한 한계를 설정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현재 각 민족의 의지가 관료집단의 의지로 완전히 대체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관료집단은 경제와 문화를 행정적 편의와 자신의 구체적 이해를 도모하는 방향에서 접근한다.

 

경제 영역과 마찬가지로 민족 정책의 영역에서도 소련의 관료집단은 계속해서 진보적 과업을 일부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과도한 비용을 낭비하고 있다. 특히 소련의 후진 민족들에 대한 사업이 이 경우에 해당된다. 이 후진 민족들은 현존하는 타민족들의 우수한 문화적 성과들을 필요에 의해 흡수, 모방, 동화해야한다. 관료집단은 이 후진 민족들을 위해 부르주아 그리고 심지어는 소부르주아 문화의 기본적 혜택들을 누리도록 다리를 놓아주고 있다. 많은 영역들과 민족들에 대해서 소련의 정권은 상당한 정도로 과거 피터 대제와 그의 동료들이 이룩한 역사적 과업을 수행하고 있다. 다만 피터 대제 당시 성립했던 구모스크바 공국과 다른 민족과의 관계가 이제는 대규모로 그리고 빠른 속도로 확립되고 있을 뿐이다.

 

소련의 각급 학교에서 수업은 현재 80개 이상의 언어로 진행되고 있다. 이들 다수를 위해서 새로운 알파베트를 개발하거나 지극히 귀족적인 아시아의 알파베트를 좀더 민주적인 라틴 알파베트로 대체하는 것이 필요했다. 신문도 같은 숫자의 언어로 각각 발행되고 있다. 신문은 사상 처음 농민과 유목민에게 인간 문화의 기본 개념을 전달해 주고 있다. 차르 제국의 광대한 영토 내에서 이제 토착산업이 등장하고 있다. 오래된 반(半)부족 문화는 트랙터에 의해 파괴되고있다. 문자해독이 가능해지면서 과학 영농과 의학이 발달하고 있다. 새로운 인간집단을 육성하는 이 작업의 의의는 진실로 대단하다. 혁명이 역사의 기관차라고 마르크스가 말했는데 그는 옳았다.

 

그러나 가장 강력한 기관차조차 기적을 이룩할 수는 없다. 공간의 법칙을 변화시킬 수 없으며 운동에 가속도를 붙일 수 있을 뿐이다. 수천만 성인들에게 알파베트와 신문이나 단순한 위생 법칙들을 도입시켜야 할 필요는 새로운 사회주의 문화를 건설하는 길이 멀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 서부 시베리아의 오이로트족은 목욕이 무엇인지를 몰랐다. 그러나 이제 "많은 마을에 목욕탕이 있어서 가끔 목욕을 하기 위해 30킬로미터를 여행한다"고 언론은 전하고 있다. 이 극단적인 예는 가장 낮은 수준의 문화를 소개하고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많은 문화적 성과들의 수준을 진실되게 표현하고 있다. 물론 후진 지역뿐 아니라 선진 지역에서도 혁명의 문화적 성과는 크다. 문화의 발전을 설명하기 위해 정부 대표는 집단농장에서 "쇠침대, 벽시계, 뜨개 속옷, 스웨터, 자전거 등"의 수요가 증가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농촌의 상층부가 이미 오래 전에 서방의 농민대중이 흔하게 사용하고 있던 물품들을 지금에야 사용하기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에 불과하다. 매일 연설과 신문을 통해서 "사회주의 문화교류"를 주제로 교시들이 발표되고 있다. 그러나 이 행동들은 그 핵심에 있어서 국영상점이 사람을 끌 수 있게 외관을 깨끗하게 치장하고, 필요한 도구와 충분한 종류의 물건을 구비하며, 사과를 썩지 않게 조치하고, 스타킹과 짜깁기 면을 갖추고, 점원에게 고객에게 깍듯하게 잘 대해주도록 교육하는 정도의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다른 말로 하면 자본주의 교역의 일상 방식들을 체득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아직도 이 대단히 중요한 문제를 결코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이 과정이 사회주의적 내용을 가지고 있다고는 전혀 말할 수 없다.

 

잠시 법과 제도 등을 제쳐두고 기본대중의 일상생활을 살펴보자. 그리고 의도적으로 자신은 물론 타인들을 속이지 말자. 그렇다면 관습이나 문화에 있어 차르시대 그리고 부르주아 러시아의 유산이 맹아적 사회주의의 성장을 압도하고 있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주제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는 대중 자신들인데 이들은 생활수준이 조금만 높아지면 서방의 모델을 모방하려고 모든 수를 쓴다. 소련의 젊은 점원 그리고 종종 노동자 역시 옷과 행동거지에서 공장에서 우연히 접촉하는 미국의 엔지니어와 기술자들을 모방하려고 애쓴다. 제조업과 사무직 여성 노동자들도 외국 여자 관광객을 뚫어지게 관찰하여 그녀의 양식이나 예절 등을 배우려고 애쓴다. 이 일에서 성공하는 운좋은 소녀는 완전히 모방의 대상이 된다. 처지가 괜찮은 여성 노동자는 구식단발머리보다는 "파마"를 좋아한다. 청소년들은 "서양댄스 써클"에 열성적으로 가입한다. 어떤 의미에서 이 모든 현상들은 진보에 속한다. 그러나 이 현상들이 드러내는 사실은 자본주의에 대한 사회주의의 우월성이 아니라 소부르주아 문화가 가부장적 생활양식을, 도시가 농촌을, 중심지가 벽촌을, 서방이 동방을 압도하는 현실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한편 소련의 특권층은 자본주의 국가의 상류층을 모방한다. 그리고 이 분야에서 유행을 선도하는 자들은 외교관, 복합기업의 책임자, 엔지니어 등이다. 이들은 업무 때문에 미국과 유럽에 자주 출장을 가야 하기 때문이다. 대중 사이에 유행하는 풍자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킨다. 상류층 "만 명"은 전혀 건드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소련에서 취향이 가장 고상한 대사들도 자본주의 문명 앞에 자신들의 고유한 스타일이나 독자적인 특징들을 조금이라도 선보일 수 없었다. 이들은 외적인 화려함을 경멸하고 초연함을 유치할 수 있을 만큼 내적 안정감이 없다. 이들의 주요한 야망은 가능하면 가장 완벽한 부르주아 속물을 닮는 것이다. 한마디로 이들은 대개의 경우 새로운 세계의 대표자가 아니며 단지 벼락부자처럼 느끼고 행동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선진국들이 이미 오래 전에 수행했던 문화적 과업을 소련이 이제 수행한다고 말하는 것은 진실의 반에 지나지 않는다. 혁명이 이루어낸 새로운 사회적 관계가 부적절한 것은 결코 아니다. 이것 덕분에 러시아라는 후진국이 가장 선진적인 나라의 수준에 도달할 가능성을 부여받았을 뿐 아니라 서방보다 훨씬 짧은 시간 동안 자본주의 선진국 수준에 도달할 수 있게 되었다. 문화수준이 가속도로 발전하는 것에 대한 설명은 간단하다. 부르주아 선구자들은 기술을 발명하고 이것을 경제와 문화 영역에 적용하는 것을 배워야 했다. 반면 소련은 이것들을 이미 완성된 형태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생산수단의 사회화 덕분에 이 성과들을 부분적으로 그리고 서서히 도입하는 것이 아니라 한꺼번에 그리고 대규모로 도입한다.

 

군사 당국은 특히 농민과의 관계에서 군대가 문화의 전달자가 된 것을 여러 번 기념하였다. 부르주아 군국주의가 주입하려는 "문화"의 특별한 종류에 대해 우리 자신을 속이지 않는다면 진보적 관습이 군대를 통해서 많이 대중에게 침투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과거에는 사병들과 하사관들이 혁명운동 특히 농민운동에서 대개 봉기의 선두에 섰다. 소련 정부는 군대뿐 아니라 국가기구 전체와 당, 공산주의청년동맹, 노동조합 등을 통해 인민의 일상생활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기술, 위생, 예술, 스포츠 등의 기존 모델들이 원산지에서 발전하는 데 필요한 시간보다 한없이 짧은 시간에 소련에서 이용되는 이유는 국가적 소유형태, 정치적 독재, 계획적 행정 방식 때문이다.

 

다른 것은 제쳐두고 가속화된 문화 발전을 성취한 것만 해도 10월 혁명의 역사적 정당성은 주장될 수 있다. 왜냐하면 지난 25년간 쇠퇴한 부르주아 체제는 지구상의 후진국 단 하나도 문화적으로 발전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러시아 노동계급은 훨씬 더 의미가 있는 과업들을 달성하면서 혁명을 성취하였다. 현재 노동계급은 아무리 정치적으로 억압을 받고 있어도 다수는 여전히 공산주의 강령을 버리지 않았고 강령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대규모의 희망도 버리지 않았다. 관료집단은 노동계급을 함부로 대할 수 없다. 그것은 자신이 추구하는 정책의 방향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모든 정책을 사회주의의 이름으로 선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제와 문화 영역의 모든 조치들은 실제 역사적 내용이나 대중의 생활에서의 진정한 의의에 관계없이 지금까지 해결되지 못한 "사회주의 문화"의 정복이라고 선포되고 있다. 어제까지만 해도 외모를 단정히 하는데 필요한 가장 간단한 물건들을 들어보지도 못했던 수백만 대중이 화장비누와 치솔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아주 위대한 문화사업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비누, 칫솔 그리고 고위층 "부인들"이 요구하는 향수가 사회주의 문화는 아니다. 특히 문명의 사소한 산물에 지나지 않는 이 물품들을 인구의 15%만이 이용할 수 있다. 이것을 사회주의 문화라고 하기에는 과장이 너무 심하다.

 

소련 언론에서 그렇게도 많이 떠드는 "인간 개조"는 현재 극에 달해 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인간이 발전해야 사회주의적 개조가 이루어지는 것일까? 러시아인들은 독일의 거대한 종교개혁이나 프랑스의 대혁명을 경험하지 못했다. 17세기 영국계 아일랜드인들의 개혁과 혁명을 잠시 논외로 하면 독일과 프랑스의 두 용광로로부터 부르주아 개성이 출현하였다. 그것은 인간성 일반의 발전에 매우 중요한 일보 진전이었다. 1905년과 1917년 혁명을 통해 러시아 대중의 개성은 처음 눈떴으며 낙후된 환경 속에서나마 응결되었다. 즉 러시아인은 압축된 형태와 가속화된 템포로 서방 부르주아 종교개혁과 혁명에 버금가는 인성교육을 거쳤다. 그러나 이 작업이 채 끝나기도 훨씬 전에 러시아 자본주의 태동기에 등장한 러시아 혁명은 계급투쟁의 과정 속에서 사회주의로 도약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현재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소련 문화의 모순들은 이 도약이 잉태한 경제적·사회적 모순들을 반영하고 굴절할 뿐이다. 이 상황에서 각성된 개성은 경제뿐 아니라 가족생활과 서정시에서도 어느 정도 소부르주아적 특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관료집단 자신은 가장 극단적이고 때때로 통제되지 않는 부르주아 개인주의의 담지자가 되었다. 도급제, 토지의 개인적 소유, 생산 장려금, 훈장수여 등을 통해 경제적 개인주의의 발전을 허용하고 권장하면서 동시에 관료집단은 정신문화 영역에 존재하는 개인주의의 진보적 측면들을 가차없이 억압하고 있다. 비판적 안목, 개인적 견해의 발전, 개인적 존엄성의 배양 등은 개인주의의 진보적 측면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이것들을 관료집단은 여지없이 질식시키고 있다.

 

특정 민족집단의 문화발전 수준이 상당하면 할수록 그리고 이 집단이 사회와 개인의 문제들을 좀더 밀접하게 다루면 다룰수록 이것들에 대한 관료집단의 억압은 더 무겁고 참을 수 없게 느껴진다. 색깔과 규격이 똑같은 경찰 곤봉이 소련 내 모든 민족의 지적 활동을 통제할 경우 민족문화의 고유성은 논의할 가치조차 없게 된다. 우크라이나, 백러시아, 그루지아, 티우르크 등의 신문이나 책들은 관료집단의 명령을 해당 언어로 번역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대중적 창조성의 모델이라는 미명 아래 모스크바 언론은 매일 러시아 언어로 관료집단 지도자들을 칭송하는 타민족 어용시인들의 송가를 출판하고 있다. 물론 이런 시들은 재능의 빈곤과 노예근성에 있어서만 차이가 있는 형편없는 시들이다.

다른 민족의 문화와 똑같이 경찰국가의 통치하에서 고통을 겪어온 대러시아 문화는 혁명 이전에 형성된 구세대의 업적에 주로 기대면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청년은 마치 쇠철판이 머리를 짓누르는 것처럼 억압당하고 있다. 따라서 문제는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중앙집권적 경찰기구가 대러시아 민족을 비롯해 모든 민족들을 억압하는 것에 있다. 그러나 소련 출판물의 90%가 러시아어라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다. 물론 이 비율이 대러시아 인구의 상대적 비중과 비교해 너무 크지만 또 한편 러시아 문화가 보유한 독자적 비중 그리고 후진 민족과 서방을 연결해주는 중재자로서 이 문화가 가지고 있는 일반적 영향력을 더 정확히 반영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측면들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다른 영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대러시아 출판사들의 과도하게 높은 비율은 대러시아인들이 다른 민족들을 희생시켜 전제적 특권을 실제로 누리고 있는 현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물론 그럴 가능성이 많다. 이 대단히 중요한 문제에 대해 아주 딱 잘라 명확하게 대답하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실제 현실에서 이 문제는 각기 다른 문화들간의 협력, 경쟁, 상호발전보다는 관료집단의 최종적 자의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크렘린궁이 모든 권한의 집합소이고 지방이 중앙과 보조를 맞출 수밖에 없기 때문에 관료주의는 불가피하게 전제적 대러시아 문화라는 외피를 쓸 수밖에 없다. 이 결과 다른 민족들은 이 중재자 문화를 자신의 언어로 칭송하는 문화적 권리만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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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당국의 문화정책은 경제정책의 좌충우돌과 행정적 편의에 의해 멋대로 바뀐다. 그러나 하나의 특징은 변함이 없다: 절대로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의 성격을 띠고 있다. "일국 사회주의" 이론과 동시에 이전에 눈살을 찌푸리게 했던 "노동자 문화" 이론이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이 이론의 반대자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노동계급 독재체제는 엄격한 의미에서 영구적 체제가 아니라 이행기 체제에 지나지 않는다; 부르주아 계급과는 달리 노동계급은 장기간 사회를 지배할 의도가 전혀 없다; 새로운 지배계급인 노동계급의 현세대는 부르주아 문화의 가치 있는 모든 것을 동화하는 과업에 자신의 임무를 주로 한정한다; 노동계급이 노동계급으로 남아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즉 노동계급이 과거 억압의 흔적들을 짊어지고 있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이 계급은 과거의 역사적 전통을 뚫고 새로운 천지를 창조할 가능성이 그만큼 적어진다; 새로운 창조력이 발현할 가능성은 노동계급이 사회주의 사회 내에 용해되어 사라질 때에만 활짝 열린다. 다른 말로 하면 부르주아 문화는 노동자 문화가 아니라 사회주의 문화에 의해 대체되어야 한다.

 

실험실의 방법을 통해 창조된 "노동자 예술" 이론에 대한 논쟁에서 필자는 이렇게 주장했다: "문화는 산업의 성과를 자양분으로 해서 자란다. 따라서 문화가 성장하고 세련되고 복잡성을 띠기 위해서는 물질적 여지가 넘쳐흘러야 한다." 기본적 경제문제들의 가장 성공적으로 해결되어도 "사회주의라는 새로운 역사적 원리가 완전히 승리한 것은 결코 아니다. 모든 민족들의 기초 하에 과학적 사상이 전진하고 새로운 예술이 발전할 때만 사회주의라는 역사적 씨앗은 줄기를 생성시킬 뿐만 아니라 꽃도 피운다. 이 의미에서 예술 발전은 모든 시대의 생존능력과 의의를 확증하는 가장 높은 시금석이다." 이 관점은 논쟁이 진행될 당시 지배적 견해였는데 당국의 담화문에서 갑자기 이것이 "적대 계급에 투항하는 내용을 가지고 있으며", 노동자계급의 창조력에 대한 "불신"을 표현한 것이라고 선언되었다. 이로써 스탈린과 부하린의 시대가 개막되었다. 후자는 오래지 않아 "노동자 문화"의 복음 선교자가 되었으나 전자는 이 문제들을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이 두 인물은 어쨌든 사회주의로의 길은 "거북이 걸음"으로 발전할 것이고 노동계급은 자신의 문화를 창조할 시간을 수십 년 갖게 될 것으로 생각했다. 이 문화의 성격에 대한 이들의 사고는 애매할 뿐 아니라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지도 못했다.

 

그러나 제1차 5개년 계획의 폭풍우는 거북이 걸음 전망을 뒤엎었다. 1931년 끔찍한 기근이 닥쳐오기 바로 전에 이 나라는 이미 "사회주의로 진입했다." 그래서 당국의 지원을 받고 있던 작가와 미술가들이 노동자 문화를 창조할 수 있기 전 또는 이 문화의 의미 있는 모델을 처음 수립하기도 전에 당국은 노동계급이 무계급 사회에 용해되어 사라졌다고 선언했다. 이제 노동계급이 자신의 문화를 창조할 가장 필요한 조건인 시간을 갖지 못했다는 사실을 어용 예술가들이 인정하는 것만이 남았다. 어제의 개념들은 즉시 망각의 늪으로 던져졌다. "사회주의 문화"가 즉시 모든 것을 지배했다. 이 문화의 끔찍한 내용 일부는 이미 앞에서 소개되었다.

 

정신적 창조력은 자유를 요구한다. 자연을 기술에 그리고 기술을 계획에 복종시켜 자연자원이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공산주의의 목적이다. 그리고 이 목적보다 훨씬 높은 목적이 있다: 인류의 창조력을 모든 억압, 한계, 굴욕적 의존으로부터 즉시 해방시키는 것이 인류 최고의 목적이다. 이 목적이 실현되면 개인간의 관계, 과학, 예술 등은 외부의 어떠한 "계획"이나 강제의 그림자도 알지 못할 것이다. 정신적 창조력이 어느 정도 개인적이고 어느 정도 집단적인가는 전적으로 예술의 창조 주체인 인간이 결정할 문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행기 체제는 이와 전혀 다르다. 노동계급 독재체제는 미래의 문화가 아니라 과거의 야만상태를 반영할 뿐이다. 따라서 반드시 정신적 창조활동에 대해서 뿐 아니라 모든 형태의 활동에 엄격한 제한을 가해야 한다. 혁명의 강령은 애초부터 이 한계들을 일시적 악이라고 간주했다. 새로운 체제가 강화되는 것과 비례하여 모든 제한들이 차례로 철폐되어 자유에 길을 내줄 의무가 있다. 어쨌든 내전이 가장 치열하게 전개되던 해에 혁명 지도부는 이 점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혁명정부는 정치적 고려에 따라 창조적 자유에 대해 제한을 가할 수는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과학, 문학, 예술 분야에서 사령관이 되어 명령을 내려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너무 잘 인식하고 있었다. 레닌은 "보수적" 예술 취향을 가지고 있었으나 예술 문제에 대해서는 정치적으로 아주 조심스러워했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한 자신의 무능력을 적극적으로 자백했다. 당시 예술 및 교육 인민위원이었던 루나차르스키(Lunacharsky)는 모든 종류의 모더니즘을 장려했는데 그의 행위에 대해 레닌은 종종 당혹스러움을 표현했다. 그러나 그는 사적인 대화를 통해 톡톡 쏘는 발언을 했을 뿐 자신의 예술 취향을 법으로 만들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새로운 시기가 전개될 1924년 필자는 다양한 예술 그룹 및 경향들과 맺는 국가의 관계를 이렇게 정식화했다: "이들 모두에게 혁명에 봉사하는 예술활동을 할 것이냐 아니면 혁명에 거역하는 예술활동을 할 것이냐를 절대절명의 조건으로 제시해야 한다. 그러나 예술적 자치의 영역에서는 완전한 자유가 부여되어야 한다."

 

노동계급 독재체제는 혁명의 열기에 사로잡힌 대중의 확고한 지지를 받고 있었고 세계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전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학교에서 진행되고 있던 실험, 모색, 투쟁 등에 대해서는 아무런 두려움도 갖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방식들을 통해서만 새로운 문화 시대가 준비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천 년의 역사 가운데 처음으로 대중은 모든 영역에서 활기를 띠고 있었으며 자유롭고 대담하게 사고하고 있었다. 예술의 모든 젊은 힘은 감동으로 떨리고 있었다. 이 첫 몇 년 동안 희망과 용기가 충천하면서 사회주의 입법의 완벽한 모델들이 수립되었을 뿐 아니라 혁명문학의 가장 위대한 작품들이 탄생했다. 동시에 기술수단이 빈약했지만 소련의 영화는 현실에 대한 접근방식의 신선함과 활력으로 전 세계의 상상력을 사로잡았다.

 

좌익반대파에 대한 투쟁 과정에서 문학 학교들은 하나하나 질식되어 죽었다. 그리고 문학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모든 이데올로기 영역에서 거세 과정이 반 이상 무의식적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그 정도는 더 심각했다. 현 지배층은 정신적 창조행위 뿐 아니라 이것의 발전과정마저 정치적 차원에서 금지할 임무가 있다고 생각했다. 명령을 내리되 동의는 구할 필요가 없다는 이 방식은 강제수용소, 과학 영농, 음악 분야 등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철학, 자연과학, 역사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건축, 문학, 극 예술, 발레 등에도 군대의 명령처럼 당 중앙기관의 지시 사항들이 익명으로 인쇄되어 배포되고 있다.

 

자기가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자신에게 직접 봉사하지 않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관료집단은 미신과 같은 공포심을 가지고있다. 이들이 자연과학과 생산영역을 연결시킬 것을 요구하는 것은 크게 보아서 틀린 것이 없다. 그러나 과학자들에게 단기적 실용성에만 주목하라고 명령하는 것은 실용성 있는 발견을 포함하여 발명의 가장귀중한 원천을 행정적 위협으로 봉쇄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모든 발명과 발견은 예상하지 못한 길을 헤매는 과정에서 가장 자주 나타나기 때문이다. 자연과학자, 수학자, 문헌학자, 군사이론가 등은 관료집단의 명령행정을 통해 쓰디쓴 경험을 체득하였다. 그래서 이제는 광범위한 일반화를 극구 피한다. 대개 무식한 출세주의자인 어떤 "공산주의 교수"가 레닌이나 심지어 스탈린의 저작에서 별 관계도 없는 문구를 인용하여 이들의 일반화된 결론을 불순한 것으로 위협하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자기 생각을 보호하고 과학의 존엄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머리 위에 강요되는 억압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회과학의 영역에서 관료집단의 정책은 한없이 더 큰 해악을 가져왔다. 언론인은 말할 것도 없고 경제학자, 역사학자, 심지어는 통계학자까지도 자신의 작업이 당 노선의 일시적인 좌충우돌과 간접적으로라도 모순을 일으키지 않도록 머리를 싸맨다. 소련 경제, 국내외 정책에 대해서는 "지도자"의 연설문에서 인용한 뻔한 말들로 모든 논지를 방어하고 난 후에야 글을 쓸 수 있다. 특히 글을 쓰기 전에 글의 모든 부분이 아무 문제가 없으며 당국이 좋다고 판단하도록 증명하는 일을 먼저 착수해야 한다. 당국의 견해에 100% 동조할 경우 이후에 발생할 불쾌한 사건들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결과 가장 무거운 벌을 받아야 한다: 글의 독창성이 거세되고 무미건조함이 글 전체를 지배한다.

 

마르크스주의가 소련의 공식 국가 사상임에도 불구하고 지난 12년 동안 경제학, 사회학, 역사학, 철학 등의 분야에서 세인의 관심을 끌고 외국어로 번역될 가치가 있는 저서는 단 한 권도 나오지 않았다. 소위 마르크스주의 저작이라는 것들이 미리 승인을 받은 케케묵은 생각들을 반복하고 현재의 통치 상황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 오래된 인용구들을 여기저기에 옮겨 놓은 형식적인 집적물에 불과하다. 이런 책들이 수백만 권 국가기구를 통해 배포된다.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으며 아교와 아첨과 기타 끈적거리는 물질로 제작된 책자들일 뿐이다. 뭔가 가치 있거나 독창적인 것을 말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감옥에 갇혀 있거나 침묵을 강요받고 있다. 한편 소련의 모든 사회 분야가 발전하면서 거대한 과학적 문제들이 속속 제기되어 창조적인 노력을 목마르게 찾고 있다! 이론 작업에 반드시 필요한 양심은 더럽혀지고 짓밟히고 있다. 심지어 레닌 전집의 주석까지도 수석 편집인들의 개인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판이 바뀔 때마다 내용이 근본적으로 달라진다. 예를 들어 "지도자들"의 이름은 확대되고 반대파 인사들의 이름은 비방 받으며 이들의 이론적·정치적 궤적은 은폐된다. 당사와 혁명사 교과서도 마찬가지이다. 사실은 왜곡되고 중요 문서는 은폐되거나 위조되며 명성은 창조되거나 파괴된다. 지난 12년 동안 지도자의 책이 계속해서 내용을 바꾸는 것만 비교 분석해도 관료지배층의 사고와 양심이 얼마나 타락해 왔는지를 한치의 오차 없이 추적할 수 있다.

 

이에 못지 않은 재앙이 예술 분야의 서적에서도 똑같이 일어나고 있다. 유파들의 투쟁은 지도자들의 의지에 따라 달리 해석되어 왔다. 이 유파들에게 일종의 강제수용소가 생겨났다. 세라피모비치나 글라드코프 같이 재능은 없으면서 "올바른 사상이 박힌" 작가들은 고전의 반열에 오른다. 예술적 양심 때문에 자신의 작품에 필요한 만큼의 흠집을 낼 수 없는 재능 있는 작가들은 부끄러움도 없이 지도자들의 인용구들을 외우고 있는 어용 교수나 강사들의 사냥감이 되고 있다. 가장 출중한 화가들은 자살하거나 아주 먼 옛날의 사건에서 소재를 찾거나 아예 침묵을 지킨다. 진실이 담긴 매우 훌륭한 내용의 책들은 밀수품 신세가 되어 책방 카운터 밑에서 불쑥 튀어나와 마치 우연하게 세상에 나온 것처럼 느껴진다.

 

소련 예술의 일대기는 일종의 순교자 열전이다. 『프라우다』 사설에서 "형식주의(formalism)"에 반대하는 교시가 실린 후 작가, 미술가, 무대감독, 심지어 오페라 가수들이 줄줄이 굴욕적인 참회를 마치 전염병이 돈 것처럼 해댔다. 차례차례 이들은 자신의 과거 죄를 참회하고 철회하였다. 그러나 갑자기 바뀔지도 모르는 상황에 대비하여 이 "형식주의"의 성격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규정하는 일은 피했다. 당국은 과거 예술행적을 철회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불편한 현상을 장기적으로 종식시키기 위해 새로운 명령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스탈린이 시인 마야코프스키에 대해 몇 마디 찬사를 늘어놓자 그의 문학적 평가가 몇 주 내로 바뀌었으며 교과서가 개정되고 거리의 이름이 바뀌었고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새로운 오페라에 대해 고위 청중이 소감을 말하자 이것이 즉시 작곡가들을 위한 지시사항으로 돌변했다. 어느 작가회의에서 공산주의청년동맹의 비서는 이렇게 말했다:. "스탈린 동지의 암시는 모두에게 법과 같다." 그러자 참석자 모두는 박수갈채를 보냈다. 물론 이중의 몇몇은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혔다. 문학에 대한 조롱을 완성하기라도 하듯 러시아어 작문도 제대로 못하는 스탈린이 문체의 고전이라고 선언되었다. 이 노예적 굴종과 경찰의 통치에 가끔 자발적이지 않은 코메디가 연출되기는 하지만 뭔가 지극히 비극적 구석이 있다. 당국의 공식 입장은 이렇다: 문화는 사회주의적 내용을 가지고 있되 민족적 형식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사회주의 문화의 내용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의 행복한(!) 추측만이 가능할 뿐이다. 어느 누구도 불충분한 경제적 토대를 가지고 문화를 발전시킬 수는 없다. 예술은 미래를 예측하는 힘이 과학보다 훨씬 뒤떨어진다. 어쨌든 "미래의 건설상을 묘사하라", "사회주의로 가는 길을 지적하라", "인류를 교정하라" 등의 당국의 주문은 철물점의 가격표나 기차시간표와 같은 정도로만 창조적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다.

 

예술은 민족적 형태를 띠면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고 접근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한다. 『프라우다』는 예술가들에게 이렇게 지시 내린다: "인민이 원하지 않는 것은 심미적 가치가 없다." 옛날 인민주의자들(Narodnik)은 대중을 혁명적으로 교육하는 과업에 기예를 발휘해야 할 임무를 거부한 채 테러에 의존했었다. 이들의 엘리트주의 공식은 인민이 어떤 예술을 원하고 원치 않는지를 결정할 권리가 관료집단에게 있는 상황에서 더욱 반동적 성격을 띤다. 관료집단은 자신이 선택하여 책을 출판하면서 독자들에게 선택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 결국 관료집단의 이해를 반영하고 이들이 인민대중에게 매력적 존재로 비치게 만드는 예술 형태를 찾아내는 것이 핵심 중에 핵심이다.

 

그러나 이것은 헛된 노력에 지나지 않는다! 관료집단 자신이 이렇게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제1차 5개년 계획도 제2차 5개년 계획도 10월 혁명이 촉발한 문학의 부흥을 재현하지 못하고있다." 이 말은 아주 온건한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개인적 몇몇 예외에도 불구하고 테르미도르 반동 시기는 예술사에 평범한 재능의 예술인, 어용 예술인, 아첨꾼 예술인이 판을 쳤던 시기로 뚜렷이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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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소련의 대외정책과 군대

 

1. "세계혁명"에서 "현상유지"로

 

대외정책은 언제 어디서나 국내정책의 연장이다. 왜냐하면 같은 지배계급이 이 정책을 실행에 옮길 뿐 아니라 똑같은 역사적 목표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소련의 지배세력인 관료집단의 퇴보는 국내정책 뿐 아니라 대외정책의 목적과 방법도 변화시켰다. 1924년 가을 처음 선언된 일국 사회주의 "이론"은 이미 소련의 대외정책을 국제혁명 강령으로부터 분리시켰다. 그러나 관료집단은 코민테른과 단절할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했을 경우 코민테른은 좌익반대파의 세계조직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련 내의 계급 역관계를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반대로 크렘린궁의 지배 파벌은 노동계급 국제주의를 포기하면 할수록 코민테른이라는 방향타를 더 확고히 장악했다. 조직의 이름은 그대로 이지만 새로운 목적에 봉사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로운 목적을 추구하려면 새로운 인물이 있어야 했다. 1923년 가을부터 코민테른의 역사는 일련의 궁정쿠데타, 위로부터의 숙청, 제명조치 등을 통해 소련 공산당은 물론 산하 각국 공산당의 진용을 완전히 물갈이하는 역사가 되었다. 현재 코민테른은 소련의 지도부가 언제 어떻게 우왕좌왕하든 소련의 대외정책에 봉사하는 충실한 하수인 기구로 전락했다.

 

소련 관료집단은 과거와 단절했을 뿐 아니라 과거의 가장 중요한 교훈들을 이해할 능력을 스스로 박탈했다. 국제 노동계급 특히 유럽 노동계급의 직접적 후원 없이 또 식민지 민족들의 혁명운동이 없이는 소련의 혁명정권은 12개월도 버티지 못했을 것이라는 사실이 가장 중요한 교훈의 하나이다. 군사 강대국인 오스트리아와 독일이 끝까지 소련을 공격하지 못한 오직 하나의 이유는 이 나라들의 노동계급이 뜨거운 혁명적 숨결을 지배계급의 등짝 바로 뒤에서 뿜었기 때문이다. 1919년 4월 흑해에 정박 중이던 프랑스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켜 프랑스 제3공화국 정부는 소련 남부의 군사개입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1919년 9월 영국 정부는 자국 노동운동의 직접적 압력에 직면하여 소련 북부에서 원정군을 철수시켰다. 1920년 적군이 바르샤바 근처에서 후퇴하는 풍전등화의 상황에서도 강력한 혁명적 파도는 연합국의 폴란드 지원과 적군 압살을 막아주었다. 커즌 경(Lord Curzon)은 1923년 소련에게 위협적인 최후통첩을 보냈다. 그러나 그의 손은 결정적 순간에 영국 노동자 조직들의 저항 때문에 묶이고 말았다. 이 명료한 사건들은 특이한 에피소드가 아니다. 소련이 직면했던 최초의 가장 어려운 시기의 정세를 전체적으로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러시아 국외에서 혁명이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으나 혁명 승리에 대한 희망은 일부 결실을 맺었다.

 

이 시기에 소련 정부는 부르주아 정부들과 일련의 조약을 체결했다. 1918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조약, 1920년 에스토니아와의 조약, 1920년 10월 폴란드와 체결한 리가 평화조약, 1922년 4월 독일과 체결한 라팔로 조약 등을 비롯해 부차적인 외교적 합의들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당시 소련 정부 지도부 전체나 일부 인사가 들 부르주아 정부들을 "평화의 친구들"이라고 선전하거나 독일, 폴란드, 에스토니아 공산당에게 이 조약들을 조인한 부르주아 정부들을 선거 때에 지지하도록 촉구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더욱이 이 문제는 대중을 혁명 의식으로 교육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소련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조인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마치 파업노동자들이 자본가가 강요하는 가장 잔악한 조건을 인정하고 협약문서에 조인할 수밖에 없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독일사회민주당은 이 조약을 조인한 독일 정부를 지지하는 표시로 위선적 선거 "불참"을 선언하였다. 이에 대해 볼셰비키당은 이 행위를 독일정부라는 산적의 약탈 행위를 지지하는 것으로 보고 독일사회민주당의 정치적 행동을 비난하였다. "동등한 권리"를 추구한다는 형식으로 소비에트 공화국은 4년 후에 부르주아 민주주의 독일 정부와 라팔로 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만약 독일공산당이 이 조약을 구실 삼아 독일 정부의 외교정책을 신임했다면 이 당은 즉시 코민테른으로부터 제명조치를 당했을 것이다. 불가피한 상황에서 소련정부가 제국주의 정부와 상업적·외교적·군사적 협상에 임하더라도 이것이 해당 자본주의 국가 노동계급의 투쟁을 제한하거나 약화시키면 안된다는 것이 볼셰비키당의 원칙이었다. 왜냐하면 소련 노동자국가의 안보를 세계혁명의 성장만이 보장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제네바 회의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외무 인민위원 치체린(Chicherin)은 미국 "여론"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소련의 헌법 일부를 "민주적"으로 개정할 것을 제안했다. 이 소식을 접한 레닌은 1922년 1월 23일자 공식 서한에서 치체린이 즉시 요양소에 입소할 수 있도록 그의 귀국을 긴급히 권유하였다. 예를 들어 당시 소련이 거짓과 허풍으로 가득한 켈로그 조약(Kellogg Pact)을 받아들이고 코민테른의 정책을 약화시켜 "민주적" 제국주의 국가들의 호의를 사자고 제안하는 자가 있었다면 레닌은 그를 즉시 정신병원에 수감하도록 조치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조치는 정치국에서 어떤 저항도 받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소련 지도부는 국제연맹, 집단안보체제, 중재재판소, 군축 등 모든 종류의 평화주의적 환상에 대해 특히 비타협적이었다. 이것들은 새로운 전쟁이 발발할 때 근로대중을 홀리는 방식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레닌이 초안을 마련하고 1919년 당대회에서 채택된 당강령은 이 주제에 대해 이렇게 단호하게 선언했다: "전세계 노동계급의 압력 특히 개별 국가에서 노동계급의 승리는 착취자들의 저항을 강화시킨다. 이 상황에서 착취자들은 국제연맹과 같은 기구를 통해 자본가 국제연대를 모색하지 않을 수 없다. 자본가 국제연대기구들은 전 세계적 차원에서 지구상 모든 인민의 착취를 체계적으로 조직하고 있다. 그리고 모든 나라에서 노동계급의 혁명운동을 즉각 탄압하려고 모든 역량을 집중한다. 이 결과 불가피하게 각국의 혁명전쟁은 내전이 된다. 그리고 노동자국가에서 노동자들은 자기 방어를 조직하고 피억압 인민들은 제국주의의 멍에에 저항해 투쟁한다. 따라서 평화주의 구호,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의 국제적 군비축소, 중재재판소 등은 반동적 유토피아일 뿐 아니라 근로인민에 대한 노골적 기만행위에 불과하다. 이 기만술을 통해 제국주의 세력은 노동계급의 무장을 해제시키려한다. 그리고 노동계급이 착취자들을 무장 해제시키는 임무로부터 등을 돌려 다른 일에 관심을 갖도록 유도한다." 볼셰비키당 강령의 이 구절들은 현재 소련의 대외정책과 코민테른 노선의 파멸적 결과를 미리 예상한 셈이다. 지구상의 구석구석에는 지금도 소련과 코민테른의 평화주의 "친구들"이 득실거리고 있다.

 

소련에 대한 제국주의 세력의 군사개입과 경제봉쇄가 실패로 끝나자 소련에 대한 자본주의 세계의 경제적 군사적 압력은 두려워했던 것보다 상당히 약하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미래에 일어날 전쟁이 아니라 과거에 일어난 제 1차 세계대전을 유럽은 아직도 생각하고 있었다. 전쟁의 참화로 인한 사회위기는 지배계급 모두를 정신 나가게 만들었다. 그리고 사상 유례없는 경제위기가 닥쳐 전세계 제국주의 지배계급은 의기소침하였다. 소련이 내전, 기근, 전염병에 다시 시달리는 와중에서 제1차 5개년 계획 시기의 시련들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전반적 정세 덕분이었다. 국내 상황이 명백히 좋아진 제2차 5개년 계획의 첫 몇 년간 자본주의 세계경제는 회복되었다. 그리고 이와 함께 전쟁에 대한 희망, 의욕, 열망, 준비가 새로이 힘을 얻었다. 이제 소련에 대한 제국주의 연합군의 공격 가능성은 너무도 확연히 느껴진다. 왜냐하면 소련은 고립되어 있을 뿐 아니라 낙후한 국가이기 때문이다. 또한 생산수단의 국유화에도 불구하고 노동생산성이 자본주의 국가들에 비해 아직도 훨씬 뒤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이유가 있다. 세계 노동계급의 주력부대는 전투에서 패배하여 자신감과 신뢰할 지도부 모두를 결여했기 때문이다. 10월 혁명을 통해 이 혁명의 지도자들은 세계혁명의 서곡을 보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 혁명의 전개과정은 일시적이며 독자적인 의의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이 새로운 역사적 단계에서 10월 혁명은 세계정세에 깊이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드러났다. 다시 한번 사태는 명확해졌다. "결국 누가 승리할 것인가?"라는 역사적 문제는 일국의 국경 내에서 결정될 수 없다. 그리고 일국 내의 혁명적 성공과 실패는 이 문제가 세계차원에서 결정될 조건을 준비할 뿐이다.

 

인민 대중을 통제하고, 잠에 빠지게 만들고, 분열시켜 약화시키고, 무제한 지배하기 위해 이들에 대해 새빨간 거짓말을 자행하는 등 소련의 관료지배층은 대단한 경험을 축적하였다. 이 측면에 대해 관료집단을 있는 그대로 평가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바로 이 때문에 이들은 대중을 혁명적으로 교육시킬 모든 능력을 상실했다. 국내 기층 인민의 독립성과 주도성을 목 졸라 죽인 관료집단은 대중으로부터 비판적 사고를 끌어낼 수도 없으며 세계 차윈에서 혁명을 수행할 용기를 이들에게 북돋을 수도 없다. 더욱이 특권 지배층이므로 자신과 사회적 성격이 유사한 서방의 부르주아 급진주의자, 개량주의 의회지도자, 노동조합 관료 등의 지원과 우정을 한없이 귀중히 여긴다. 대신 이들과 절연한 노동자들과는 상대적으로 친화력이 더 적다. 지금 여기서 코민테른의 쇠퇴와 퇴보를 논할 수는 없다. 독자적인 연구를 통해서 필자는 이 주제와 관련된 저서들을 출판했으며 이것들은 문명국의 거의 모든 언어로 번역되었다.(역자 주: 풀무질 출판사의 [트로츠키의 반파시즘 투쟁]과 [트로츠키의 프랑스 인민전선 비판]을 참조하시오.) 코민테른의 지도부인 소련 관료집단의 일국적 시야, 보수성, 무식, 무책임 등은 세계노동계급에게 불행만을 안겨다 주었다. 마치 역사에도 정의가 실현되는 것처럼 현재 소련의 국제적 지위는 고립된 사회주의 국가 건설의 성공보다 세계노동계급의 패배에 의해 훨씬 더 크게 결정된다. 1925년~1927년 중국혁명의 패배는 동양에서 일본 군국주의의 손을 자유롭게 하였고 독일 노동계급의 패배는 히틀러의 승리와 독일 군국주의의 미친 듯한 팽창을 가져왔다. 이 모든 것이 모두 코민테른 정책의 결과라는 점을 상기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관료집단은 세계혁명을 배반했으나 아직도 이것에 대해 충성심을 느끼고 있다. 이 때문에 이들은 부르주아 계급을 "중립화"시키는데 주요한 노력을 쏟아왔다. 따라서 자신들을 현 체재를 옹호하는 온건하고 품위가 있으며 진정한 세력인 것처럼 보일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효과적으로 자신의 정체를 위장할 수는 없다. 아예 모조품에서 정품으로 전환해야 한다. 관료지배층의 유기적 진화는 이 문제를 해결했다. 자신이 저지른 오류의 결과 앞에서 한 발 한 발 후퇴하면서 관료집단은 한 가지 생각에 도달했다: 유럽과 아시아의 현 체제 속에 소련을 편입시켜 소련의 신성함을 확보하자. 모든 것이 말해지고 행동에 옮겨진 이상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영원히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 외교 언어의 사용이 허락된 소련 외무부와 혁명 언어를 말할 것으로 기대되는 코민테른을 통해 널리 홍보된 소련 대외정책의 공식 내용은 이것이다: "우리는 한 뼘의 외국 영토도 원치 않는다. 그러나 우리 영토 역시 조금도 양보할 수 없다." 이것은 서로 화해할 수 없는 사회체제 사이의 전세계적 투쟁의 문제가 아니라 단순히 땅 조각에 대한 분쟁의 문제인 것 같다!

 

소련 지도부는 자신이 일본에게 동중 철도(Chinese-Eastern Railroad)를 양도하는 것이 분별있는 행위라고 생각했다. 이 이 허약한 행위는 이미 중국혁명의 붕괴로 준비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행위는 평화에 봉사하는 자신감의 표현으로 칭송되어졌다. 실제로는 적에게 아주 중요한 전략적 철도를 넘겨주는 것을 통해 소련 정부는 일본의 중국 북부지역 점령과 몽고 침략 기도를 부추기고 있을 뿐이었다. 이 강요된 희생은 위험을 "중립화"하는 것이 아니라 기껏해야 짧은 숨쉴 틈을 소련에게 제공하는 것에 불과했다. 동시에 일본 군국주의 지배파벌의 야욕을 대단히 자극하는 행위였을 뿐이었다.

 

몽고 문제는 벌써 소련에 대한 이후의 전쟁에서 일본이 전략 거점을 확보하는 문제가 되어 있다. 이제 소련 정부는 일본 군대가 몽고를 침략할 경우 선전포고로 대응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놓였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영토"에 대한 즉각적 방어의 문제가 아니다. 몽고는 독립국이다. 국경을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지 않을 때 수동적으로 이것을 방어하는 것만으로 충분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소련을 방어하는 진짜 방법은 제국주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전세계 노동계급과 식민지 인민들의 지위를 강화시키는 것이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조약, 리가 평화조약, 동중 철도의 양도 등에서 드러났듯이 불리한 역관계는 많은 영토를 넘겨줄 것을 강요한다. 동시에 세계 차원에서 역관계를 호전시키려는 투쟁을 전개할 경우 노동자국가는 다른 나라들의 해방운동을 계속 지원할 의무를 지게 된다. 그러나 이 기본적 임무는 현상유지라는 보수적 정책과 절대적으로 모순을 일으킨다.

 

2. 국제연맹과 코민테른

 

소련은 프랑스와 화해한 직후 전격적으로 군사협정을 체결하였다. 독일에서 나찌당이 승리한 후 인접국들을 위협하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는 당시 유럽의 현상유지를 가장 옹호할 처지에 있었다. 그러나 소련과 프랑스 사이의 화해조치는 소련보다는 프랑스에게 훨씬 유리하다. 체결된 군사협정에 의하면 프랑스가 군사적 위협을 당하면 소련은 무조건 프랑스를 지원해야한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소련이 위협을 당하면 프랑스는 영국, 이탈리아와 먼저 합의한 후 소련을 지원할 수 있다. 따라서 조약의 실제 내용은 프랑스가 소련에 대해 온갖 계략을 부릴 수 있게 여지를 만들어 놓았다. 최근 독일은 군대를 진주시켜 프랑스가 점령하고 있던 라인지방을 다시 빼앗았다. 이 사태를 보면 소련이 상황을 좀더 냉철하게 판단하고 좀더 절제력을 발휘했더라면 프랑스로부터 훨씬 더 확실한 안전보장을 받아낼 수 있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물론 군사적 블록의 새로운 형성, 계속되는 외교적 위기, 화해, 관계의 단절 등이 밥먹듯이 이루어지는 지금 시기에 조약이 무엇을 "보장"할 수는 없다. 그러나 소련의 관료집단이 부르주아 국가의 외교관들과 협상할 때보다 국내 선진노동자들의 투쟁을 억압할 때 더욱 단호한 모습을 보인다는 사실이 계속 명백해지고 있다.

 

소련은 독일과 국경을 맞대고 있지 않으므로 프랑스에 대한 소련의 지원이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이 주장은 틀렸다. 독일이 소련을 공격할 경우 독일군은 국경선이 어디인지를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독일이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프랑스를 공격할 경우 폴란드는 단 하루도 중립을 지킬 수 없다. 만약 폴란드가 프랑스에 대해 동맹국 의무를 이행하기로 작정한다면 소련군이 독일을 공격할 수 있도록 길을 터주어야 한다. 만약 폴란드가 프랑스와 맺은 기존의 조약을 파기한다면 독일의 협력자가 될 것이다. 후자의 경우 소련은 "공동 국경선" 즉 독일과 맞서는 전선을 형성할 것이다. 더욱이 앞으로 일어날 전쟁에서는 육지 뿐 아니라 바다와 하늘의 "국경선"도 중요할 것이다.

 

소련은 국제연맹에 가입하였다. 그리고 괴벨스에 버금가는 선전술을 동원하여 관료집단은 인민에게 소련의 국제연맹 가입이 사회주의의 승리이며 세계 노동계급의 "압력"으로 성사되었다고 선전했다. 그러나 제국주의 세력은 국제혁명의 위험이 매우 약화되었기 때문에 소련의 가입을 허용했을 뿐이다. 이 사건은 소련의 승리가 아니라 심각하게 손상입은 이 국제기구에게 테르미도르 관료집단이 항복한 것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앞에서 본 볼셰비키당 강령에서 확인된 바 있듯이 국제연맹은 "이후에 노동자 국제혁명운동을 억압하는 데 노력을 기울일 것이기 때문이다." 볼셰비키당의 강령이 작성된 때와 지금은 상황이 근본적으로 변했는가? 국제연맹의 성격, 자본주의 내 평화운동의 기능, 소련의 정책 등 어느 것이 바뀌었는가? 질문을 제기하는 것은 곧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후 경험은 소련의 국제연맹 가입이 소련에게 자본주의 국가들과 개별적으로 맺은 조약에 실제적인 이익보다는 심각한 한계와 의무를 부과할 뿐이라는 점을 입증했을 뿐이다. 그리고 소련은 새로 확보한 자신의 보수적 입지와 권위를 지키기 위해 가입국의 의무를 가장 성실하게 이행하고 있다. 국제연맹 내에서 프랑스 뿐 아니라 프랑스의 동맹국들에게도 비위를 맞출 필요가 있어서 소련은 이탈리아와 에티오피아 사이의 분쟁에서 지극히 애매한 입장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제연맹 회의장에서 소련 대사 리트비노프(Litvinov)는 프랑스의 외교관 라발(Laval)의 그림자에 불과했다. 그러면서도 "평화를 위해" 노력한 영국과 프랑스 외교관들에게 감사를 표시했다. 그러나 이들이 한 일이라고는 에티오피아의 참혹한 패배를 묵인한 것뿐이었다. 한편 소련 코커서스 지역의 석유는 계속해서 이탈리아 함대에게 공급되었다. 소련 정부는 이탈리아와 맺은 상업협정을 공개적으로 파기하는 데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이 사실을 이해한다면 소련 노동조합들은 무역 인민위원의 입장을 고려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소련 노동조합의 결정으로 이탈리아에 대한 석유수출이 실제로 중단될 경우 전 세계적으로 침략국 이탈리아에 대한 불매운동을 촉발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조치는 서방의 외교관들과 법학자들이 사전에 무솔리니와 협정을 맺었기 때문에 효력을 전혀 기대할수 없는 배신적인 "경제제재"보다 비교할 수 없이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의 경우 소련의 노동조합들이 손 하나 까딱하지 않은 이유는 소련 당국이 프랑스에게 아양을 떨기 위해 노동조합의 자발적 움직임을 봉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1925년 영국 총파업 당시 소련 노동조합이 공개적으로 수백만 루블을 모금하여 영국 노동자들에게 보낸 것과는 완전히 대조적인 상황이 발생했다. 그러나 앞으로 일어날 전쟁에서 소련은 아무리 훌릉한 군사동맹국을 가진다 하더라도 식민지 인민들과 근로대중으로부터 신뢰감을 상실한 것을 보상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사실을 크렘린궁이 모를 리 있을까? 소련의 관영신문은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독일 파시즘의 근본 목표는 소련을 국제적으로 고립시키는 데에 있다‥‥‥‥ 그런데 지금 어떤 일이 벌어지고있는가? 소련은 과거 어느 때에 비해서도 우방국을 많이 가지고 있다."(『이즈베스챠』 1935년 9월 17일자) 이탈리아 노동자들은 파시즘의 쇠사슬에 매여 있다. 중국혁명은 분쇄되었다. 일본은 중국에서 주인 노릇을 하고 있다. 독일 노동자들은 너무도 처참히 패배하여 히틀러의 국민투표 움직임은 어떠한 저항도 받지 않고 착착 진행되고 있다. 오스트리아 노동계급은 손과 발이 모두 묶여 있다. 발칸반도의 혁명정당들은 짓밟혔다. 프랑스와 스페인의 노동자들은 급진적 부르주아들의 꽁무니를 쫓고있다. 이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소련 정부는 국제연맹에 가입하면서 "과거 어느 때보다 많은 우방국을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고 있다. 이 자랑은 처음 들으면 너무 황당하지만 소련이 노동자국가라는 사실보다 관료지배층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면 진정한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 소련의 관료집단이 국내에서 정권을 장악하고 자본주의 국가들의 약간 호의적인 "여론"을 등에 업을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세계 노동계급의 처절한 패배 때문이 아닌가? 코민테른이 세계 자본주의를 위협할 능력이 적으면 적을수록 프랑스, 체코슬로바키아 그밖의 자본주의 국가들로부터 소련은 더 많은 정치적 신뢰를 받을 것이다. 국내외에서 소련 관료집단의 힘은 사회주의 국가이면서 노동자 혁명 전진기지의 측면을 지닌 소련의 힘과 반비례 관계에 놓여 있다. 그러나 이것은 동전의 일면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다른 면을 살펴보자.

 

때때로 놀라운 행위와 센세이션을 일으키면서 날카로운 직관력을 드러내는 영국의 로이드 조오지는 1934년 11월 영국 하원에서 독일 파시즘에 대해 비난을 하지 말 것을 경고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독일 파시즘은 유럽에서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가장 믿을 만한 성채가 될 수밖에 없다. "히틀러를 우리의 친구로 맞아들이게 될 것이다." 대단히 의미심장한 말이 아닐 수 없다! 세계 자본가 국가들이 크렘린궁에 대해서 반은 봐주는 듯 반은 비꼬는 듯한 어조로 찬사를 늘어놓는다고 평화가 조금이라도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전쟁 위험이 조금이라도 감소되는 것도 아니다. 자본주의 세계가 소련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결국 소련의 소유형태에 변화가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다. 나폴레옹은 자코뱅주의의 전통을 전격적으로 던져버리고 왕위에 올라 카톨릭교회를 부활시켰으나 당시 유럽을 지배하고 있던 반(半)봉건 세력의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왜냐하면 프랑스 혁명에 의해 성취된 새로운 소유체제를 그가 계속 옹호했기 때문이다. 소련의 관료지배층이 자본주의 세계에 대해 온갖 서비스를 베풀어도 스스로 외국무역의 독점을 해제하고 자본의 권리를 부활시키지 않는 한 소련은 이들에게 화해할 수 없는 적으로 남아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오늘은 아니지만 최소한 내일은 독일 국가사회주의(National Socialism 나치즘)가 자본주의 세계의 친구가 된다. 바르투(Barthou)와 라발을 대표로 내세운 프랑스 부르주아 계급이 모스크바에서 소련과 협상을 벌일 때 히틀러가 프랑스의 옆구리를 치명적으로 위협하고 있었다. 더욱이 프랑스 공산당은 애국주의로노선을 급선회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자본가들은 소련에 대한 도박을 한사코 거부하였다. 라발이 마침내 소련과 조약을 맺었을 때 그는 실제로는 소련에 대항해 독일 및 이탈리아와 화해를 추구하면서 겉으로는 소련을 카드로 독일을 협박한다는 비난을 프랑스 좌익으로부터 받았다.프랑스 좌익의 판단은 약간 시기상조인 측면이 있지만 사태의 자연스러운 전개과정과 결코 모순되지는 않는다.

 

프랑스와 소련의 협정이 가져올 장단점을 어떻게 판단하든, 진지한 혁명정치가라면 소련이 영토 보존을 위해 특정 제국주의 세력과 일시적 동맹을 맺어 안보를 강화하려는 권리를 부정할 수 없다. 다만 세력 역관계의 전체적 상황 속에서 이 부분적이고 일시적인 조약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대중에게 명확하고 공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 프랑스와 독일의 적대관계를 이용하려고 부르주아 동맹국과 국제연맹의 겉모습 뒤에 일시적으로 숨어 있는 제국주의 세력간의 동맹을 미화할 이유는 조금도 없다. 그러나 소련 뿐 아니라 소련의 행보를 한발 뒤에서 되풀이하는 코민테른은 소련의 일시적 동맹국들이 "평화의 친구들"이라고 체계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를 통해 노동자들을 "집단안보"나 "군비축소"라는 구호로 속이고 있다. 결국 노동계급 속에서 제국주의 세력의 앞잡이 역할을 실제적으로 하고 있는 셈이다.

 

1936년 3월 1일 스탈린은 스크립스-하워드(Scripps-Howard) 신문그룹의 사장 로이 하워드(Roy Howard)와 악명높은 인터뷰를 하였다. 이 인터뷰 내용은 중대한 세계정치 현안에 대한 관료집단의 무지와 관료집단과 세계 노동운동 사이의 거짓관계를 집약하여 보여주는 아주 귀중한 자료이다. 전쟁이 불가피하냐는 질문에 대해 스탈린은 이렇게 대답했다: "평화를 옹호하는 동맹국들의 지위가 갈수록 강화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공개적으로 활동할 수 있으며 여론의 힘을 등에 업고 있다. 그리고 예를 들어 국제연맹과 같은 기구들을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발언에는 현실감각이 조금도 없다. 부르주아 국가들은 평화의 "친구"와 "적"을 나누지 않는다. 왜냐하면 순수한 의미에서 "평화"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제국주의 국가들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평화에만 관심이 있으며 적대국과의 이해관계가 첨예하면 할수록 적대국이 추구하는 평화를 더욱 참지 못한다. "모든 국가들이 국제연맹에 가입하면 평화가 유지된다." 이것은 스탈린, 볼드윈, 레옹 블룸(Leon Blum)에게 공통되는 평화관이다. 이 평화관은 평화 위반의 원인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에만 평화가 보장된다는 의미이다. 이 사고는 틀린 것은 아니지만 정확히 말해 거의 무의미하다. 미국과 같이 국제연맹에 가입하지 않은 강대국들은 "평화"라는 추상적 개념을 마음대로 해석할 자유를 가지고 있다. 때가 되면 이들은 해석의 자유가 왜 필요한지를 보여줄 것이다. 국제연맹에서 탈퇴하는 일본이나 독일 그리고 일시적으로 "불참"하고 있는 이탈리아는 나름대로 이런 행동을 취할 물질적 근거를 충분히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국가들의 행동은 현존하는 적대관계의 외교적 형태를 바꿀 뿐 적대관계의 성격과 국제연맹의 성격을 바꾸지는 못한다. 국제연맹에게 영원히 충성하겠다고 맹세하는 국가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평화를 확립시키기 위해 이 국제기구를 활용하려고 더 날뛸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영국은 유럽과 아프리카의 프랑스 이익을 희생시키면서 평화의 시기를 연장하려고 한다. 한편 프랑스는 이탈리아를 지지하면서 영국 항로의 안전을 희생하려고 한다. 그러나 자기 이익을 지키기 위해 이 두 강대국은 전쟁에 뛰어들 준비가 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 중 가장 정의로운 나라가 모든 전쟁에 뛰어들 준비가 되어있다는 사실은 말할 필요도 없다. 마지막으로 약소국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으므로 국제연맹의 그림자를 피난처로 이용하려고 하면서 장기적으로는 "평화"가 아니라 가장 강력한 연합세력에게 붙을 것이다.

 

현상유지를 목적으로 창설된 국제연맹은 "평화"기구가 아니라 인류 절대다수에 대한 극소수 제국주의자들의 폭력기구이다. 이 기구가 추구하는 "질서"는 오늘은 식민지에서 내일은 강대국 사이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계속적인 전쟁을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 그리고 현상유지에 대한 제국주의 세력의 충성은 언제나 조건적, 일시적, 제한적 성격을 띠어 왔다. 이탈리아는 어제 유럽의 현상 지를 옹호하였다. 그러나 아프리카에서는 이것을 깨뜨렸다. 내일 이탈리아의 유럽정책이 어떻게 바필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미 아프리카 국경선은 바뀌었으며 유럽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무솔리니가 에티오피아를 공격했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히틀러는 군대를 라인지역으로 진주시켰다. 이제 이탈리아를 평화의 "친구"에 포함시키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는 소련보다 이탈리아와의 우정을 비교할 수 없이 더 귀중히 여기고 있다. 한편 영국은 독일과 우방이 되려고 한다. 동맹관계는 변화한다. 그러나 침략의 탐욕은 그대로 남아 있다. 소위 현상유지파 국가들의 핵심적 목표는 국제연맹 내에서 가장 좋은 연합세력을 구성하고 이 결과 미래 전쟁을 준비하는 가장 좋은 가림막을 치는 것이다. 누가 어떻게 전쟁을 시작할 것인가는 부차적 상황에 달려 있다. 누군가가 전쟁을 시작해야 한다. 왜냐하면 현상유지는 폭약이 가득 쌓인 지하실과 같기 때문이다.

 

"군비축소" 정책은 제국주의 세력간의 적대관계가 그대로 살아 있는이상 가장 해로운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일반적 합의를 통해 군비축소가 실현된다고 가정하는 것은 명백한 환상에 불과하며 결코 새로운 전쟁을 피할 수는 없다. 무기가 있기 때문에 전쟁이 발발하는 것이아니다. 이와 반대로 전쟁이 필요하기 때문에 무기가 생산되는 것이다. 현대기술은 새로운 무기를 매우 빠르게 생산할 수 있다. 협정, 규제, "군비축소"가 아무리 난무해도 무기고, 무기공장, 실험실 그리고 자본주의 산업은 그대로 힘을 유지하고 있다. 독일은 진정한 "군비축소"를 통해 가장 면밀한 통제 속에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들에게 무장해제 당했다. 그러나 강력한 산업의 위력 덕분에 다시 유럽 군국주의의 요새가 되고 있다. 독일은 이제 자기 차례가 되어 몇몇 이웃 나라들을 "무장해제"시키려 한다. 소위 "누진적 군비축소"는 평화시에 과도한 군사지출을 감축하려는 시도에 불과하다. 문제는 군사비에 있지 평화에 대한 사랑에 있지 않다. 그러나 군비축소나마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지리적 위치, 경제력, 식민지 경영의 완료 정도 등의 차이에 따라 군비축소의 기준은 불가피하게 역관계를 변화시켜 어느 세력에게는 불리하게 또 어느 세력에게는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다. 따라서 제네바에서 진행되어온 군비축소를 위한 온갖 협상과 회의는 결실을 맺을 수 없다. 거의 20년 동안 군비축소에 대한 협상과 대화가 진행되었지만 새로운 그리고 사상 유례없는 군비증강의 물결만을 초래했다. 노동계급의 혁명전략을 군비축소 정책의 기반 위에 건설하는 것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군국주의의 연막술 위에 집을 짓는 것이다.

 

제국주의적 살육의 과정이 막힘없이 진행되기 위해서는 계급투쟁이 질식되어야 한다. 이것은 노동자 대중조직 지도부의 매개를 통해서만 보장될 수 있다. 1914년에 이것이 성사되었을 때 제시된 구호는 "마지막 전쟁", "프로이센 군국주의에 대한 전쟁", "민주주의를 위한 전쟁" 등이었다. 그러나 이 구호들은 지난 20년의 역사 속에서 완전히 신뢰를 상실했다. "집단안보", "전반적 군비축소"가 이 헛된 구호들을 현재 대신하고 있다. 국제연맹의 평화노력을 지원한다는 구실 아래 유럽 노동자 조직의 지도자들은 "성스러운 연합"을 새로 실현시킬 준비를 하고 있다. 성스러운 연합은 탱크, 비행기, "금지된" 독가스만큼이나 전쟁 준비를 위해서 필요하다.

 

제3인터내셔널은 사회애국주의(social patriotism)(역자 주: 제 1차 세계대전 발발 당시 유럽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자국 지배계급의 전쟁노력을 조국방어 행위라고 치켜세웠다. 결국 이 정당들은 자기나라 노동계급을 제국주의 전쟁의 총알밥, 대포밥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말로는 사회주의를 외치면서 행동은 애국주의인 기회주의 노선을 사회애국주의 또는 사회국수주의라고 한다.) 에 대한 격렬한 항의를 통해 탄생했다. 그러나 러시아 10월 혁명에 의해 새로운 인터내셔널에 유립된 혁명적 활력은 소진된 지 이미 오래 되었다. 이제 코민테른은 제2인터내셔널과 마찬가지로 국제연맹의 깃발 밑에 있다. 다만 제2인터내셔널에 비해 혁명에 대한 냉소의 정도가 더욱 커졌을 뿐이다. 영국의 사회주의자 스태포드 크립스 경(Sir Stafford Cripps)이 여론을 경멸하며 정당하게 국제연맹을 강도들의 세계연합이라고 불렀을 때 『런던타임즈』는 역설적 어조로 이렇게 물었다: "그렇다면 소련이 국제연맹에 가입한 현상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이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쉽지 않다. 결국 소련의 관료지배층은 10월 혁명이 치명적인 타격을 가한 사회애국주의를 이제 강력하게 지지하는 세력이 되었다.

 

로이 하워드 역시 이 점에 대해 간간히 진실을 밝히려고 노력했다. 그는 스탈린에게 물었다: "세계혁명에 대한 계획과 견해를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현재 그러한 계획이나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오해가있는 것 같군요" "비극적인 오해입니까?" "아닙니다. 희극적 또는 뭐라고 할까 희비극적 오해입니다." 이 인용문은 인터뷰 내용을 글자 하나 빼지 않고 그대로 옮긴 것이다. 스탈린이 계속 이어서 말했다: "소련 인접국들이 정말 안전하게 평화를 유지하고 있다면 소련 인민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든 위험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에 대해 로이 하워드가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 국가들이 안전하게 평화를 누리고 있지 못하면 어떻게 하죠? 이에 대해 스탈린은 불안을 가라앉히는 주장을 하나 더 꺼냈다: "혁명을 수출한다는 생각은 넌센스에 불과합니다. 혁명을 원하는 나라는 혁명을 성취하면 됩니다. 이 나라에 혁명이 발생하지 않으면 혁명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 나라는 혁명을 원했고 혁명을 성취했습니다‥‥‥" 이 말도 인터뷰 내용을 글자 하나 빼지 않고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일국 사회주의 이론이 일국 혁명 이론으로 자연스러이 이행했다. 로이 하워드는 다시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터내셔널은 무슨 목적으로 존재합니까? 그러나 하워드는 호기심의 적절한 한도를 확실히 알고 있는 듯했다. 이 점에 대한 스탈린의 설명은, 자본가와 노동자 모두가 다 주목하고 있는데, 아주 안심되는 것이었다. 다만 논리가 엉망일 뿐이다. "우리 나라"는 혁명을 하고자 했을 때 외국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수입했고 외국의 혁명투쟁 경험을 연구했다. 수십 년 동안 해외 망명 지도부가 러시아 국내의 투쟁을 지도했다. 그리고 당시 유럽과 미국의 노동자 조직들로부터 우리는 도덕적·물질적 지원을 받았다. 혁명을 성취한 후 1919년에 우리는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코민테른)을 조직했다. 혁명을 성공시킨 나라의 노동계급이 타국의 피억압 저항 계급들을 사상 뿐 아니라 가능하면 무기를 가지고 지원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우리는 누차 선언했었다. 그리고 선언으로 만족하지도 않았다. 군대를 동원하여 핀란드,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그루지아 노동자들을 지원했다. 바르샤바에 적군이 진주하여 폴란드 노동자들의 봉기를 지원하려고 하기조차했다. 중국혁명을 돕기 위해 조직가와 사령관들을 보냈었다. 1926년 총파업을 벌이고 있던 영국 노동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수백만 루블을 모금하였다. 스탈린은 과거 노동자 국제연대의 모든 활동들이 오해로 인해 발생했다고 말하는 것 같다. 비극적인 오해라고? 아니다. 차라리 희극적인 오해이다. 소련에서 사는 것이 "즐거운" 일이라고 스탈린이 선언한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코민테른의 진지한 인물들은 이제 모두 희극적인 인물들로 교체되었다.

 

과거 소련 노동자들의 영웅적 행위들을 비방하는 대신 테르미도르 반동의 정책과 10월 혁명의 정책을 공개적으로 비교했다면 스탈린은 로이 하워드에게 더 강한 인상을 줄 수 있었을 것이다. 참으로 아쉽다. 그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레닌이 보기에 국제연맹은 새로운 제국주의 전쟁의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는 국제연맹을 평화의 도구라고 생각한다. 레닌은 혁명 전쟁의 불가피성을 말했다. 우리는 혁명을 수출한다는 사고가 넌센스라고 생각한다. 레닌은 제국주의 부르주아 계급과 노동계급이 연합하는 것을 반역이라고 비난하였다. 우리는 모든 힘을 동원하여 바로 이 연합의 길로 국제 노동계급을 인도할 것이다. 레닌은 자본주의 체제 하의 군비축소를 노동자에 대한 사기라고 맹비난하였다. 우리는 우리의 정책 전체를 군비축소에 기초하고 있다." 그리고 스탈린은 이렇게 결론내렸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볼세비즘의 무덤을 파는 우리를 볼세비즘의 계승자로 잘못 안 것에서 귀하의 희비극적 오해가 발생했다."

 

3. 적군(赤軍)과 그 군사이론

 

옛날 러시아 병사는 농촌공동체의 가부장적 문화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맹목적 무리 본능을 두드러지게 가지고 있었다. 예카테리나 2세와 파벨의 치세에 대원수였던 수보로프(Suvorov)는 농노군의 출중한 사령관이었다. 그러나 프랑스 대혁명은 과거 유럽과 차르시대 러시아의 군사술을 영원히 매장시켜 버렸다. 러시아 제국은 계속해서 광활한 영토를 정복했으나 문명국 군대에게 승리한 경우는 없었다. 일련의 원정에서의 패배와 뒤이은 국내의 사회적 격동이 진행되면서 군대의 국민적 특성이 변하였다. 적군은 새로운 사회적·심리적 기초 위에서만 형성될 수 있었다. 오랫동안 고통스럽게 병사를 괴롭혀 왔던 무리 본능과 자연에 대한 복종심은 젊은 세대의 담대한 기상과 기술 숭배로 바뀌었다. 개성에 대한 자각과 함께 문화수준이 급격히 상승했다. 글을 모르는 병사의 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적군은 글을 모르는 병사를 제대시키지 않는다. 모든 종류의 운동경기가 군 내부와 주위에서 급속히 발전하였다. 노동자, 관료, 학생들 사이에서 특등 사수 명찰은 커다란 인기를 누렸다. 겨을 스키는 지금까지 몰랐던 기동력을 제공했다. 고공 낙하, 글라이딩, 항공 분야에서 놀라운 성공들이 잇따랐다. 북극해와 성층권 비행이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이 절정기에 엄청난 업적들이 계속 성취되었다.

 

내전 기간 동안 보여주었던 적군의 조직과 전투력 수준을 이상적인 것으로 묘사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젊은 장교들은 이 시기를 통해 많은 경험을 쌓았다. 차르군대에서 복무했던 하사관과 상병들은 조직가와 군사지도자의 자질을 발휘하였고 대규모 전투에서 의지력을 단련시켰다. 이 자수성가한 병사들은 여러 번 전투에서 패배하였으나 결국에는 승리하였다. 이들 중 우수한 군인들은 열성적으로 공부에 몰입하였다. 내전이라는 학교를 거쳐간 현재의 사령관들 절대 다수가 군사학교나 특별 과정을 이수하였다. 고위장교들 약 반수 정도는 고등군사교육을 받았다. 나머지는 사관생도 과정을 거쳤다. 군사이론은 군인에게 필요한 사고방식을 훈련시켰다. 그러나 내전을 극적으로 이끌어가는 과정에서 획득된 과감한 기상은 파괴되지 않았다. 이 세대는 현재 40대와 50대가 되었다. 이 나이에는 육체적·정신적 힘이 균형을 이루며 경험에 의존하는 경향이 많지만 대담성이 사그러들지는 않는다.

 

당, 공산주의청년동맹, 노동조합, 국유화 산업 행정기구, 협동조합, 집단농장, 국영농장 등이 사회주의 건설과 경제적 과업을 어느 정도 성취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사회조직들은 수없이 많은 젊은 행정간부들을 훈련시키고 있다. 이들은 인적·물적 자원들을 운영하는 일에 익숙해져 있으며 자신들을 국가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들은 자연스럽게 전쟁시 군대 지휘부를 구성할 것이다. 입대 이전의 학생들 역시 높은 수준으로 미래를 준비하면서 미래에 군대 지휘부의 일원이 될 것이다. 학생들은 특별 훈련대대로 편성되어 있어 동원될 경우 지휘관을 훈련하는 임시학교로 발전할 수 있다. 고등교육기관을 졸업하는 학생이 매년 8만 명에 이르고 있으며 대학생은 50만 명을 넘고 있다는 사실이 전시에 동원 가능한 자원의 규모를 짐작케 한다. 더욱이 각급학교 학생은 모두 2천8백만 명에 접근하고 있다.

 

사회혁명은 경제와 특히 공업에서 차르시대 러시아가 꿈도 꿀 수 없었던 군수산업을 형성시켰다. 계획경제는 근본적으로 정부가 산업을 원하는 대로 계속해서 동원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새로운 공장을 건설하고 기계를 구비하면서도 국방의 목적에 부합할 수 있게 조치할 수 있다. 적군의 인적·기술적 능력의 상호관계는 서방의 가장 훌륭한 군대와 수준이 같다고 말할 수 있다. 포병 재무장도 제1차 5개년 계획 기간에 결정적 성공을 거두었다. 트럭, 장갑차, 탱크, 비행기 생산에 엄청난 규모의 자금이 투여되고 있다. 현재 소련에는 최소한 50만 대의 트랙터가 있다. 1936년에는 16만 대가 생산되어 850만 마력이 공급될 예정이다. 탱크 생산도 이와 비슷한 수준에서 진행되고 있다. 적군의 동원 계획에 의하면 전선 1킬로미터마다 30에서 45대의 탱크가 필요하다. 제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해군이 보유한 배의 총톤수는 1917년의 54만 8천 톤에서 1928년의 8만 2천 톤으로 감소되었다. 이 분야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1936년 1월 중앙집행위원회 회의에서 투하체프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현재 강력한 해군이 건설되고 있다. 특히 잠수함 함대를 개발하는 일에 주로 힘을 집중하고 있다." 이 분야의 성과에 대해서 일본 해군본부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발트해에서 활동중인 해군에 대해서도 이제 많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그러나 미래에도 해군은 해안전선의 방위에서 보조적인 역할만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행대는 위력적으로 성장했다. 2년 전, 언론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프랑스 항공기술 대표단이 "이 분야에서 소련이 거둔 성과가 놀라우면서도 기쁘다"고 했다. 특히 적군이 반경 1,200킬로미터에서 1,500킬로미터에 이르는 중폭격기를 점점 많이 생산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극동전쟁이 발발할 경우 일본의 정치적·군사적 중심지들이 소련 해안으로부터 직접 공격을 받게 될 것이다. 언론에 배포된 자료에 의하면 1935년이 되면 62개 비행연대가 동시에 5천 대의 비행기를 출격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계획은 이미 달성되었고 아마 초과달성되었을 것이 확실하다.

 

차르시대에는 존재하지도 않았으나 최근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화학산업은 항공기 제작과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다. 소련과 외국 정부들이 종종 되풀이되고 있는 독가스 사용 "금지" 선언을 단 1초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에티오피아에서 이탈리아 문명군대가 했던 일은 국제 강도들의 인도주의적 제한조치들이 아무 소용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명백히 보여주었다. 가장 의문스럽고 무시무시한 재앙들이 갑자기 벌어질 사태에 대비하여 적군은 군사화학과 군사세균학 분야에서 서방의 군대만큼 철저히 준비하고 있다고 생각해도 될 것이다.

 

군수물자 품질에 대한 의심은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생산도구들은 일상용품들보다 더 고급으로 생산되고 있다고 이미 말한 적이 있다. 물품 구매자가 지배 관료집단의 영향력 있는 그룹일 경우 품질은 보통의 수준보다 상당히 올라간다. 일반 소비재는 품질이 아직도 형편없다. 가장 입김이 센 고객은 전쟁성이다. 소비재와 생산도구보다 전쟁 도구들이 더 좋은 품질을 자랑한다는 사실은 놀라울 것이 없다. 그러나 군수산업은 산업 전체의 일부이고 다소간 산업 전체의 문제점들을 반영하고 있다. 보로쉴로프와 투하체프스키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산업지도자들에게 공개적으로 상기시킨다: "여러분이 적군에 공급하는 제품의 품질에 대해서 항상 완전히 만족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석에서는 군대 지도자들이 좀더 딱부러지게 표현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군대 매점에 공급되는 물품들은 무기보다 질이 더 나쁘다. 신발은 자동소총보다 질이 더 낮다. 그러나 비행기 엔진도 의심의 여지없는 진전에도 불구하고 가장 좋은 서방의 엔진에 비해 상당히 뒤쳐지고 있다. 전체적으로 군사장비의 경우 가능한 빨리 적국이 될지도 모르는 서방의 수준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과업이 여전히 달성되지 않고 있다.

 

농업의 상황은 더 나쁘다. 모스크바에서 얘기되는 말이 있다. 공업노동자의 수입이 농민의 수입을 이미 능가하고 있기 때문에 소련은 실제로 농공업국에서 공농업국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수입 격차는 공업발전의 상당한 진행과 함께 존재하는 농업의 지극히 낮은 수준때문에 나타난다. 몇 년 동안 소련의 외교정책이 일본에 대해 유난히 유화적이었던 이유는 다른 무엇보다 식량공급의 심각한 어려움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난 3년 동안 이 분야에 상당한 진전이 있었으며 특히 극동에서 군대용 식량공급기지가 건설될 수 있었다.

 

역설적이지만 말의 생산이 군대에서 가장 골치아픈 문제가 되고 있다. 완벽한 농업 집단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에서 소련의 말 숫자는 약 55% 감소했다. 더욱이 자동차의 이용이 일반화된 지금도 군대는 나폴레옹 시대와 마찬가지로 병사 세 명당 말 한 마리가 필요하다. 그러나 지난 한해 이 분야에서도 좋은 성과가 나타났다. 말의 숫자는 다시 증가 추세에 있다. 어쨌든 몇 달 뒤에 전쟁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1억 7천만 소련 인구는 언제나 필요한 식량과 말을 전선으로 동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인구 전체를 희생시키면서 이 과업이 진행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모든 나라의 인민들은 전쟁이 터지면 기아, 독가스, 전염병밖에 기대할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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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대혁명은 전선의 왕립 대대에 새로이 대형들을 추가시키면서 국민군대를 창설하였다. 10월 혁명은 차르의 군대를 완전히 해산하여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적군은 처음부터 새로 구성되었다. 소련 정권과 쌍동이인 군대는 크고 작은 일에서 국가와 운명을 같이했다. 위대한 혁명때문에 적군은 차르군대보다 비교할 수 없이 우수했다. 그러나 군대는 노동자국가의 퇴보를 가장 완성된 형태로 표현했다. 앞으로 일어날 전쟁에서 적군이 맡을 역할을 말하기 전에 군대의 지도사상과 체계의 변천을 잠시 살펴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1918년 1월 12일 인민위원 소비에트는 정규군의 토대를 마련하는 포고령에서 이렇게 군대의 목적을 규정하였다: "국가권력이 이제 근로 피착취 인민에게 넘어갔으므로 소비에트 권력의 요새가 될 새로운 군대를 창설할 필요가 생겼다 ‥‥‥ 그리고 이 군대는 유럽에서 곧 이어질 사회주의 혁명들의 지원군이 될 것이다." 1918년 이후 아직도 유지되고 있는 노동절의 "사회주의자 선서"에서 적군 병사는 "사회주의와 전 세계 인민들의 형제애를 위해 힘과 목숨조차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러시아와 전 세계 근로계급의 눈 앞에서" 약속한다. 스탈린이 혁명의 국제적 성격을 "희극적인 오해"와 "넌센스"로 묘사하는 것을 보면 그는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폐기되지 않고 있는 소비에트 정부의 기본 포고령들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군대는 당연히 당과 국가기구를 떠받치는 사상에 의해서 동시에 지탱되었다. 군대의 성문법, 언론, 구두선동 등도 실천 과업인 국제혁명을 위해 존재하였다. 전쟁성에서는 혁명적 국제주의 강령이 종종 과장된 지위를 부여받았다. 군대 정치국 의장이었으며 이후 스탈린의 밀접한 동맹자였던 구세프(Gussev)는 군대신문에 1921년 이렇게 썼다: "부르주아-지주의 반혁명을 막기 위해서 뿐 아니라 제국주의 세력에 대한 혁명전쟁을 위해서 ‥‥‥ 우리는 노동계급 군대를 양성하고 있다." 더욱이 그는 적군을 국제혁명 과업에 제대로 준비시키지 못한다고 당시 전쟁성을 지휘하고 있던 필자를 직접 비난했다. 이에 대해 필자는 신문을 통해 군사 강대국들은 혁명 과정에서 보조적 역할 밖에 수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환기시켰다. 오직 유리한 상황에서만 군사 강대국들은 혁명의 승리를 재촉할 수 있을 뿐이다. "군사적 개입은 의사의 족집게와 같다. 적절한 때에 사용하면 출산의 고통을 덜 수 있다. 그러나 너무 일찍 사용하면 사산을 자초할 뿐이다."(1921년 12월 5일) 불행하게 지금 이 중요한 문제를 충분히 논의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지금의 총사령관 투하체프스키는 1921년 코민테른에 편지를 보내 그가 주도하는 "국제 군지휘부" 구성을 제안했다. 그런데 이 흥미있는 편지는 "계급전쟁"이라는 그럴싸한 제목으로 그의 논문집에 실려 출판되었다. 이 재능 있지만 약간 성급한 사령관은 신문에 실린 필자의 "국제 군지휘부는 여러 노동자국가 군지휘부의 기초 하에서만 성립이 가능하다. 이것이 불가능할 경우 국제 군지휘부는 우스꽝스런 모양새가 될 뿐이다"라는 글을 읽었어야했다. 일반적으로 원칙의 문제들-특히 새로운 문제들-에서는 명확한 입장을 취하기를 회피하는 스탈린 자신은 그렇지 않았지만, 적어도 미래에 그의 측근이 될 인물들 다수가 그 당시에는 당과 군 지도부의 "좌익적" 입장을 취했었다. 그들의 사상에는 소박한 과장이나 혹은-이렇게 표현해도 좋다면-"희극적 오해"도 적지 않았다. 물론 이런 일들이 없이 위대한 혁명이 성취될 수는 없을 것이다. "일국 사회주의"에 연관된 극단적으로 황당한 이론에 대해 공격의 화살을 퍼붓는 것이 필요하기 아주 오래 전에 이미 국제주의에 대한 좌파의 이 "황당한 이론"에 대해 우리는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당시를 회상하는 회고담과는 달리 내전이 가장 엄중한 단계를 경과하고 있던 당시 볼셰비키당의 지적인 생활은 온천처럼 들끓고 있었다. 군대를 위시로 당과 국가기구의 모든 단위에서 모든 문제 그리고 특히 군사 문제들에 대해 토론이 격화되고 있었다. 지도부의 정책은 종종 격렬한 자유 비판에 직면하였다. 과도한 군사검열제도의 문제에 대해 당시 필자는 주요한 군사문제 잡지에서 이렇게 썼다: "검열이 산더미처럼 많은 오류를 범한 사실을 기꺼이 인정한다. 검열이 자기 분수를 아는 것이 아주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검열은 군사기밀을 방어해야 한다‥‥‥‥ 그리고 다른 어떤 일에 대해서도 간섭해서는 안된다."(1919년 2월 23일)

 

국제 군지휘부에 대한 문제는 지적 투쟁의 작은 에피소드에 불과했다. 투쟁은 행동통일이라는 규율에 의해 적절한 범위 내에서 벌어졌지만 최소한 군대 상층부에서 반대 분파의 성격을 띤 정치집단이 구성되기까지 했다. 프룬제, 투하체프스키, 구세프, 보로쉴로프 외에 다른 인사들이 속한 "노동계급 군사이론" 분파는 정치적 목적, 군대체계, 전략, 전술 등에서 적군은 자본주의 국가의 군대와 아무 공통점도 없다는 선험적 확신에서 출발하고 있었다. 새로운 지배계급은 모든 측면에서 이전의 군대와 뚜렷이 구별되는 군대체계를 가지고 있어야 하며 이제 이 군대를 창건하는 일만 남았다는 것이다. 내전 중에 이 분파의 활동은 차르군대의 장교들을 영입하는 문제에 대해 원칙적 항의서한을 제출하는 것으로 주로 제한되었다. 그리고 지역 전투에서 보여진 무원칙한 임기응변 방식과 특정 규율 위반에 대해서 투쟁하는 총사령부를 뒤에서 비방하는 정도에 그쳤다. 새로운 군사이론의 극단적 추종자들은 극단적으로 의미를 확대한 전략적 원칙, "기동주의(maneuverism)", "공격주의(offensivism)" 등의 이름 아래 군대의 중앙집중적 체계마저 거부하려했다. 앞으로 전개될 국제적 차원의 전투에서 중앙집중적 체계는 혁명적 주도성을 억제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핵심적으로 말해 이 이론은 내전 첫 몇 년간 수행되었던 게릴라 전투방식을 영원하고 보편적인 체계로 확대시키려는 시도였다. 많은 수의 혁명군 사령관들은 이 새로운 이론에 대해 더 적극적이었다. 왜냐하면 과거의 군사이론들을 연구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분위기의 주요 중심지는 부됸니와 보로쉴로프 그리고 이후 스탈린이 군사적 임무를 시작한 짜리친 즉 지금의 스탈린그라드였다.

 

내전이 끝난 후에야 이 새로운 고안물들을 완성된 이론으로 구축하려는 좀더 체계적인 시도가 진행되었다. 이 시도의 주창자는 내전 당시 출중한 사령관의 하나였던 프룬제였다. 그는 과거 중노동을 겪은 정치범이었는데 보로쉴로프 그리고 어느 정도 투하체프스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핵심적으로 말하면 노동계급 군사이론은 완전히 형이상학적 도식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노동계급 문화" 이론과 전적으로 유사하였다. 이 새로운 경향의 주창자들이 남긴 저작들을 보면 이러저러한 실제적 처방들은 전혀 새롭지 않으며 다만 노동계급을 국제적이며 전투적인 계급으로 보고 이 가정을 군사이론의 토대로 삼았을 뿐이다. 즉 노동계급을 현실에 존재하는 시간과 장소의 조건들로부터 고찰하지 않고 정태적인 심리적 추상으로 바라보았다. 이 저작들은 한줄 한줄마다 마르크스주의를 칭송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마르크스주의를 순수한 관념론으로 대체하고 있었다. 이 이론은 진지한 탐색을 동반하고 있지만 관료집단이 급속도로 발전시키고 있던 자만심의 맹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특별한 준비나 물질적 전제조건이 갖추어지지도 않은 가운데 모든 분야에서 역사적인 기적을 이를 수 있다는 사실을 관료집단은 믿고 싶어했고 또 다른 사람들이 믿도록 하고 싶었다.

 

당시 필자는 신문을 통해 프룬제에게 이렇게 답변했다: "발전한 사회주의 경제를 보유한 나라가 부르주아 국가와 전쟁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사회주의 국가의 전략은 지금의 전략과 완전히 다를 것이다. 이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지금 이 '노동계급 전략`을 바로 실천할 수 있다는 근거는 없다‥‥‥ 사회주의 경제를 발전시키고 대중의 문화수준을 높이는 것을 통해 ‥‥‥ 우리는 새로운 군사술을 풍부하게 발전시킬 수 있다." 그러나 지금부터 당분간 선진 자본주의국가들로부터 열심히 배우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노동계급의 혁명적 성격으로부터 사변적인 방법으로 새로운 전략을 유추" 하려는 시도는 필요없다(1922년 4월 1일). 아르키메데스는 받침대가 주어지면 지구를 움직이겠다고 약속했다. 이것은 잘못된 말은 아니다. 그러나 받침대가 주어졌다 해도 받침대를 가지고 지구를 움직일 수 있는 지렛대나 동력이 필요하다는 것이 증명되었을 것이다. 승리한 혁명은 새로운 받침대를 제공한다. 그러나 지구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지렛대들을 갖추어야 한다.

 

"노동계급 군사이론"은 그것의 자매 이론인 "노동계급 문화이론"과 같이 당시 볼셰비키당에 의해서 거부되었다. 그러나 이후 이 이론들의 운명은 달랐다. "노동계급 문화"의 깃발은 "일국 사회주의"와 모든 계급의 철폐가 선포되었던 1924년에서 1931년 동안 스탈린과 부하린에 의해 치켜 올려졌으나 별 성과없이 흐지부지되었다. 반면에 "노동계급 군사이론"은 이 이론의 주창자들이 국가기구를 장악하는 위치에 올랐지만 다시는 부활되지 않았다.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이 두 이론들이 다른 운명을 가진 이유는 소련 사회의 변화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노동계급 문화"는 추상적이어서 무게를 측량할 수 없는 문제들과 관련이 있었다. 따라서 관료집단은 노동계급을 권좌에서 거칠게 밀어내면 낼수록 도덕적 보상을 제시하는 이 이론에 대해서 그만큼 더 관대했다. 반면에 군사이론은 국방의 이해 뿐 아니라 지배층의 이해에도 아주 핵심적인 문제였다. 여기서는 이론적 장난을 허용할 여지가 없었다. 차르군대의 장교들을 군대로 영입하는 것에 반대한 자들이 이제 "장군"이 되었다. 국제 군지휘부를 예견한 이 선지자들은 "일국" 지휘부의 사열대 지붕 아래에서 조용해졌다. "계급 전쟁"은 "집단 안보" 이론으로 대체되었다. 세계혁명의 전망은 현상유지를 신격화하는 정책으로 바뀌었다. 이후에 동맹국이 될 수 있는 나라들의 신뢰를 얻고 지금의 적대국들을 가능하면 자극하지 않기 위해 어떠한 대가를 치루더라도 자본주의 국가의 군대들과 가능하면 차이가 없게 만드는 것이 필요했다. 이론과 겉모습의 변화 뒤에는 역사적 중요성을 가진 사회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1935년은 군대에게 일종의 이중혁명의 해였다. 민병대 체계 그리고 군지휘부에 관련하여 일어난 혁명이 이것이다.

 

4. 민병대의 해체와 장교계급의 부활

 

20년이 지난 지금 적군은 어느 정도 볼셰비키당의 군대 강령을 실현했는가?

 

노동계급 독제체제를 수호하는 군대는 강령에 따르면, "공공연하게 계급적 성격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즉 노동계급과 반(半)노동계급 농민층으로만 구성되어야 한다. 계급이 철폐되면 계급 군대가 사회주의 전국 민병대로 전환될 것이다." 전국적 성격의 군대를 미래의 일로 연기했으나 당은 민병대 체제를 결코 거부하지 알았다. 이와 반대로 1919년 3월 제8차 당 대회 결의문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민병대를 계급적 토대에 두면서 소비에트 민병대로 전환시킨다." "노동계급의 노동조건과 밀접한 방식으로" 군대를 서서히 창설하는 것이 군사사업의 목적이었다. 장기적으로 군대의 모든 단위는 "지역 단위의 지휘부, 무기와 보급품 창고를 보유하며" 지역적으로 공장, 광산, 마을, 농촌공동체, 그 밖의 다른 유기체 집단과 일치하게 될 것이다. 지역, 학교, 산업, 체육 등 각 단위에서 청년이 유기적으로 결합되면서 군대에서 각인되는 집단정신을 실천할 것이고 더욱이 직업장교단을 창설하지 않으면서 의식적 규율을 각인할 것이었다.

 

그러나 민병대가 사회주의 사회와 아무리 잘 조응된다 해도 민병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높은 수준의 경제적 기반이 조성되어야 한다. 정규군을 창설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상황이 존재해야 한다. 따라서 지역 군대는 나라의 실제 현실을 훨씬 더 직접적으로 반영한다. 문화의 수준이 낮을수록, 농촌과 도시의 구별이 날카로울수록, 민병대는 그만큼 불완전하고 이질적일 것이다. 자동차 및 도로가 부족하고 철도, 고속도로, 수로 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지역 군대는 전쟁의 아주 결정적인 첫 몇 주 또는 몇 달간 기동력이 매우 저조할 것이다. 자원이 동원되고 전략적으로 이동되고 병력이 집중되는 동안 전선을 확실히 방어하기 위해서는 지역군과 함께 정규군이 있어야 한다. 필요상 애초부터 이 두 체제를 절충하되 정규군에 강조점을 두고 적군은 창설되었다.

 

1924년 당시 전쟁성을 지휘한 필자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항상 두 가지 상황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소비에트 체제로 의해 민병대 체제로 전환할 가능성이 처음 대두되었지만 이 변화의 속도는 기술, 통신수단, 문자해독률 등 나라의 일반적 문화수준에 의해 결정된다. 민병대를 유지할 경제적·문화적 조건이 매우 낙후한 반면에 정치적 조건은 확고히 마련되었다." 필요한 물질적 조건이 마련 경우 지역군은 정규군보다 열등하지 않을 뿐 아니라 훨씬 우세할 것이다. 소련은 국방에 많은 자원을 투입해야 한다. 왜냐하면 저렴한 민병대 체제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충분한 자원을 보유하고 있지 않으므로 정규군에 자원을 투입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점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소련 사회가 아주 비용이 많이 드는 관료집단을 목에 걸고 있는 이유는 바로 사회의 빈곤 때문이다.

 

경제적 기반과 사회적 상부구조(정치체제) 사이의 불균형은 거의 모든 분야가 절대적으로 같은 수준으로 발전하게 강제하였다. 소련 내 모든 사회적 관계의 기초는 생산력의 낮은 수준과 원칙적으로 사회주의적인 소유형태 사이의 괴리이다. 새로운 사회주의적 사회관계는 문화수준을 높여준다. 그러나 불충분한 문화는 사회주의적 형태들을 갉아먹는다. 소련의 현실은 이 두 경향 사이의 균형에 의해 결정된다. 군대에서는 체계가 너무도 명확하기 때문에 결과는 충분히 정확한 수치를 통해 측정될 수 있다. 정규군과 민병대 사이의 상호관계는 사회주의로의 전진 정도를 현실적이고 공정하게 보여줄 수 있다.

 

자연 조건과 역사적 과정에 의해 소련은 낮은 인구밀도와 나쁜 도로를 사이에 두고 국경이 1만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국가가 되었다. 1924년 10월 15일 오래된 군지도부는 재임을 한 달 남겨 놓고 있었는데 다시 한번 현실을 상기시켰다: "앞으로 몇 년간은 민병대 창설을 준비하는 시기가 될 것이다. 이것은 필연이다. 이전의 성공이 앞으로의 정책을 밑받침할 수 있도록 정책의 성과가 면밀하게 입증되어야 한다." 그러나 1925년에 새로운 시대가 개막되었다. 과거 노동계급 군대이론을 주창했던 자들이 권력을 잡았다. "공격주의"와 "기동주의"는 지역군의 개념과 핵심적으로 매우 모순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이미 세계혁명의 과업을 잊어먹기 시작하고 있었다. 새로운 군지휘부는 세계 부르주아계급을 "중립화"하면서 전쟁을 피하려했다. 이후 몇 년 동안 군대의 74%는 민병대로 재조직되었다!

 

독일이 무장해제의 상태에 있을 뿐만 아니라 "우방"처럼 행동하는 한 소련군지휘부의 계산은 바로 인접국들의 군사력에 기초하고 있었다. 루마니아, 폴란드,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핀란드 등이 서쪽 인접국인데 이들은 가장 강력한 적대국인 프랑스의 물질적 지원을 받고 있는 것 같았다. 1933년에 끝난 이 시기에 프랑스는 불행하게 "평화의 친구"가 아니었다. 인접국들은 모두 합쳐 보병 120사단 즉 약 3백5십만 병력을 전쟁에 동원할 수 있었다. 적군의 동원 계획은 서부 전선에 같은 숫자의 일급 병력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극동전선의 경우는 수백만이 아니라 수십만의 병력으로 충분하였다. 대체로 1년 동안 100명의 병사에 대해 15명의 병사가 보충되어야 한다. 병원에서 회복되어 다시 현역으로 복귀하는 병사들을 제외하면 전쟁은 2년 동안 농촌으로부터 1천만 내지 1천2백만 명의 성인 남성을 데리고 간다. 1935년까지 적군에 소속된 병사의 수는 55만 2천 이었다. 그리고 비밀경찰에 딸린 병사까지 포함하면 전부 62만 명이었으며 장교는 4만 명이었다. 더욱이 1935년이 시작될 때 이미 말했듯이 74%는 지역 군에 편성되어 있었고 26%만이 정규군에 속해 있었다. 100%는 아니지만 최소한 74%가 민병대이므로 사회주의 민병대가 군대를 "최종적으로 그리고 역전시킬 수 없을 정도로" 장악한 것은 명확하지 않은가?

 

그러나 위에서 제시한 모든 계산은 그 자체로만 해도 조건적이었으나 히틀러가 독일에서 정권을 장악한 후 모두 허공으로 날아가 버렸다. 독일은 열정적으로 무장하기 시작했으며 특히 주로 소련에 대항하여 전쟁준비를 하고 있었다. 자본주의 세계와 평화적으로 동거하겠다는 전망은 즉시 사라졌다.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전쟁위험은 소련이 총병력을 1백30만 명으로 늘리고 적군의 체계를 근본적으로 바꾸도록 강요하였다. 현재 적군의 77%는 정규군이며 23%만이 지역 민병대이다. 지역군을 대대적으로 청산한 것은 민병대 체제의 포기인 것처럼 보인다. 물론 군대는 평화의 시기가 아니라 전쟁 위협의 시기에 필요하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이렇게 농담이 전혀 허용될 수 없는 분야의 역사적 경험은 사회의 생산적 기반에 의해 사회주의의 이 정도만이 "최종적으로 그리고 역전시킬 수 없이"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가차없이 보여주었다.

 

그러나 74%에서 23%로 민병대의 비율이 하락한 것은 과도한 것처럼 보인다. 이 과정은 프랑스 군지휘부의 "우정어린" 압력이 아니었다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편 관료집단이 이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했는데 갑자기 좋은 구실이 저절로 생겼다고 볼 수도 있다. 군대의 정규군화는 상당한 정도 정치적 고려에 의해 강제되었다. 민병대 조직은 그 성격 자체로 인해 대중에게 직접 의존할 수밖에 없다. 사회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이 측면은 민병대 체제의 주요한 장점이다. 그러나 크렘린궁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이야말로 위험 요소임에 틀림없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이 생산력 수준으로 보면 민병대를 조직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부하는 것은 민병대와 인민간의 밀접한 관계가 지배계급의 입장에서는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제1차 5개년 계획 기간 동안 적군이 당국에 대해 날카로운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점이 의심할 여지없이 지역 민병대를 해체하는 심각한 동기로 작용했다.

 

적군의 체계 개악 이전과 이후의 정확한 수치들을 보면 이 생각은 틀림없이 올바른 것으로 확인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자료는 없다. 그리고 자료가 입수되었다 하더라도 공개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해석을 전혀 허용하지 않는 사실이 하나 있다. 소련 정부가 민병대의 비중을 51%로 낮추었을 때 차르군대에서 유일한 민병대였던 카자크 기병대를 부활시켰다! 기병대는 언제나 군대의 특권보수집단이다. 그리고 카자크 부대는 모든 군대 내에서 가장 보수적이었다. 전쟁과 혁명 기간 중 카자크 부대는 처음에는 차르, 다음에는 케렌스키의 경찰병력이었다. 소비에트 권력 하에서도 이들은 언제나 반동적이었다. 더욱이 특별 폭력수단들이 동원되어 카자크족의 집단화가 강제되었으나 아직도 이들의 전통과 성격을 바꾸지 못했다. 더욱이 특별법에 의해 이들은 말을 개인적으로 보유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다른 특혜들도 한없이 많았다. 이 초원의 기마병사들이 다시 특권 억압층의 편이 된 것을 의심할 수 있을까? 청년노동자들의 체제 저항 경향을 끊임없이 억압하고 있는 와중에 카자크 기병대가 부활되었다. 이것은 테르미도르 반동의 가장 명확한 표현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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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적 분위기를 그대로 살린 장교단의 부활 포고령은 10월 혁명의 원칙에 대한 더욱 치명적인 타격이 되었다. 적군 지휘부는 불충분한 측면도 있고 측량할 수 없는 강점도 있지만 어쨌든 혁명과 내전을 통해 탄생했다. 독립적 정치활동이 봉쇄된 청년은 적군에게 능력있는 병사들을 적지 않이 공급하는 인구집단임에 틀림없다. 반면에 국가기구의 누진적 퇴보는 지휘부의 광범위한 층에서 반영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공개 회의에서 보로쉴로프는 지휘관이 병사들에게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당연한 말을 하면서 이렇게 자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불행하게도 나는 특히 자랑할 것이 없다"; "지도적 장교들이 뒤처지고 있는 동안" 하급장교들은 성장하고 있다.; "빈번하게 지휘관들은 새로운 문제들을 적절한 방식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등등. 최소한 공식적으로는 군대의 가장 책임있는 지도자가 한 고백인데 그 내용이 놀랍기보다는 차라리 경고를 담고 있다. 보로쉴로프가 지휘관들에 대해 하고 있는 말은 모든 관료들에게도 해당한다. 물론 발언자 자신은 관료집단의 상층부가 "뒤처지는" 축에 속한다고 감히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이들이 언제 어느 곳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고함을 지르고 화가 나서 발을 쿵쿵 구르면서 "최선을 다하라"고 명령을 내리는 현상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간단한 사실이지만 소련 사회의 후진성과 타성을 지속시키는 주요한 원인이며 보로쉴로프 자신이 속해 있는 집단은 바로 이 통제에서 벗어나 있는 "지도자" 집단이다.

 

군대는 사회의 복사판이며 사회의 질병을 더 고열로 앓고 있다. 전쟁을 수행하는 직업은 너무나 엄격한 것이어서 허구나 모방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군대는 비판이라는 신선한 공기가 필요하다. 지휘부는 민주적으로 통제되어야 한다. 적군 조직가들은 애초부터 이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지휘부의 선거 같은 절차들을 준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군사문제에 대한 당의 기본 결정사항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부대 내부의 단결을 도모하고 비판적 태도를 발전시키면 지휘부의 선거 원칙이 더욱 광범위하게 적용될 조건이 조성될 것이다." 이 결정이 채택된 후 이미 15년이 흘렀다. 이 정도 시간이면 단결과 비판정신이 충분히 성장했을 것이다. 그런데 관료지배층은 이와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

 

1935년 9월 소련의 우방과 적대국을 포함하여 문명세계는 깜짝 놀랄만한 소식을 들었다. 적군이 소위에서 총사령관까지 장교제도를 도입했다는 것이다. 전쟁성의 실제 지도자인 투하체프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장교 직위의 도입은 지휘 및 기술 분야의 간부들을 개발할 좀더 안정적인 기반을 제공한다." 그러나 이 설명은 고의적으로 애매하다. 지휘급 간부들은 무엇보다 병사들의 자신감에 의해 강화된다. 바로 이 때문에 적군은 장교단을 일소하기 시작했다. 위계 체제의 부활은 군대의 이해와 조금도 관계 없었다. 중요한 것은 계급이 아니라 지휘할 수 있는 위치이다. 엔지니어와 의사들은 계급이 없다. 그러나 사회는 이들을 필요한 위치에 배치시키는 수단을 찾아낸다. 지휘권은 연구, 자질, 성격, 경험 등에 의해 보장되며 더욱이 이에 대한 지속적이고 개별적인 평가가 필요하다. 소령 계급은 대대 지휘관에게 실제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5명의 고위 지휘관을 총사령관으로 승진시킨다고 해서 이들이 새로운 재능이나 보충적인 권한을 갖는 것은 아니다. "안정적인 기반"을 부여받는 것은 군대가 아니라 장교집단일 뿐이다. 더욱이 지휘관들은 병사 대중과의 유대감을 상실하는 대가를 치루어야 한다. 군대 체제의 개혁은 지휘관들의 중요성을 증대시킨다는 순전히 정치적 목적을 추구하고 있을 뿐이다. 더욱이 단순히 계급 제도를 도입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지휘관 사옥 건설이 더욱 빠른 속도로 진행된다. 1936년에 4만 7000채의 가옥이 건설되어야 한다. 그리고 지난 해에 비해 봉급 예산이 57% 증가해야 한다. "지휘관들의 중요성 신장"은 군대의 도덕적 유대를 약화시키면서 장교들을 지배집단과 더 밀접하게 유착하도록 한다.

 

군 개혁가들이 부활된 계급제도에 걸맞는 새로운 직위를 발명할 필요성을 생각하지 않는 점이 주목된다. 한편 이들은 서방 자본주의 군대와 보조를 맞추기를 원했다. 동시에 이들은 장군이란 직위를 감히 부활시키지 못하면서 자신들의 치명적인 약점을 드러냈다. 장군이란 이름은 러시아인에게 너무도 아이러니컬한 어감을 가지고있다. 5명의 군 요인들을 총사령관 직위로 승격시키는 사실을 알리면서 소련 언론은 독자들에게 차르시절 군대의 "계급과 직위에 대한 숭배 그리고 아첨"을 상기시키는 것을 잊지 않았다. 사실 5명이 총사령관으로 승진된 기준은 재능이나 헌신성보다 스탈린에 대한 충성심이었다. 그러면 왜 차르군대를 노예처럼 모방하는가? 새로운 특권층을 만들면서 관료집단은 언제나 구시대 특권 폐지 시 등장한 논거를 든다.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제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거만과 비겁이 돌아가며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위선의 수위는 점점 올라간다.

 

언뜻 보기에 "계급과 직위에 대한 숭배와 아첨"이 공식적으로 부활한다는 사실은 대단히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정부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개인적 자질에 의한 지휘관의 승진은 군대 내부의 자유로운 발의와 비판 그리고 군대에 대한 대중의 통제력이 존재할 때만 실현될 수 있다. 엄격한 규율은 광범위한 민주주의와 아주 잘 어울리며 사실 이것에 직접 의존하기조차 한다. 그러나 어떤 군대도 군대를 양성하는 사회체제보다 더 민주적일 수는 없다. 형식과 화려함으로 치장된 관료주의의 원천은 특별한 군사적 필요보다 지배층의 정치적 필요에 있다. 군대는 이 필요를 가장 완성된 형태로 표현할 뿐이다. 혁명에 의해 철폐된 지 18년 만에 부활된 장교제도는 통치자들과 피통치자들을 갈라놓고 있는 깊은 골을 잘 드러내고 있다. 또한 적군의 "적(赤)"자에 걸맞는 주요한 특성 즉 공산주의적 평등 원칙을 소련군이 상실했다는 사실과 타락의 결과들을 법으로 영구화하는 관료집단의 냉소성을 증명하고 있다.

 

한편 부르주아 언론들은 이 개악을 있는 그대로 평가하고 있다. 프랑스의 관영신문 『르땅』(Le Temps)은 1935년 9월 25일 이렇게 논평했다: "이 외적인 변모는 소련 전체가 겪고 있는 심대한 변화의 징후 가운데 하나이다. 이제 확고하게 구축된 체제는 점차 안정되고 있다. 혁명적 습관과 풍습은 소련 가족과 사회 내에서 소위 자본주의 국가에서 지배적인 감정과 풍습들로 대체되고 있다. 소련은 부르주아 국가가 되고 있다." 이 정확한 판단에 덧붙일 말은 거의 없을 것이다.

 

5. 전쟁 상황의 소련

 

군사적 위험은 소련이 나머지 세계에 의존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또 하나의 표현에 불과하다. 그리고 고립된 사회주의가 가능하다는 유토피아적 사고를 거부하는 주장이 된다. 그러나 이 불길한 "주장"은 바로 지금 제기되고 있다.

 

국가들 사이에 곧 다가올 치열한 싸움의 요인들을 미리 나열하는 것은 가망없는 일이다. 만약 이 선험적 계산이 가능하다면 이해관계의 충돌은 언제나 장부 정리인의 평온한 계산으로 끝날 것이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에는 미리 알 수 없는 요인들이 너무 많다. 어쨌든 소련은 과거로부터 물려받았거나 새로운 체제에 의해 창조된 유리한 요인들이 대단히 많이 보유하고 있다. 내전 기간에 제국주의 간섭전쟁이 야기한 경험은 러시아의 가장 커다란 장점이 광활한 영토였으며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라는 점을 증명하고 있다. 제국주의 세력은 소비에트 헝가리를 며칠 내로 전복시켰다. 물론 불쌍한 벨라 쿤(Bela Kun) 정부의 잘못된 정책도 이 결과에 일조했다. 소비에트 러시아는 애초부터 인접국들로부터 고립되었으나 3년 동안 제국주의의 개입에 대항하여 투쟁하였다. 어떤 시점에는 혁명정부의 영토가 옛날 모스크바 공국의 영토로 거의 축소되었었다. 그러나 이 좁은 땅도 러시아가 계속 버티는데 충분하다고 점이 입증되었다. 결국 제국주의 간섭전쟁은 패배했다.

 

러시아의 두 번째 커다란 장점은 인적 자원이다. 매년 인구는 300만 명 수준으로 늘어나면서 현재 총인구는 1억 7천만을 넘어섰다. 매년 130만 명이 징집대상이다. 신체적 정치적 제한으로 걸러내어도 40만 명 이상이 군대에 입대할 수 있다. 따라서 예비군은 이론상으로 1800만 명에서 2000만 명으로 추산되는데 실제로는 거의 무제한적인 자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연과 인간은 전쟁의 재료에 불과하다. 소위 군사적 "잠재력"은 주요하게 나라의 경제력에 의존한다. 이 점에서 옛날 러시아에 비해 소련이 갖는 장점은 어마어마하다. 이미 말했듯이 지금까지 계획경제는 군사적으로 거대한 장점이 되고 있다. 특히 시베리아 등 변방의 공업화는 초원과 삼림지역에 완전히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소련은 낙후한 나라이다. 낮은 노동생산성, 제품의 낮은 품질, 운송수단의 허약함 등은 영토의 크기, 풍부한 천연자원, 많은 인구에 의해서 부분적으로만 벌충되고 있을 뿐이다. 평화시 두 적대체제 사이의 경제력 측정은 정치제도에 의해 특히 외국무역의 독점으로 영원히는 아니더라도 비교적 장기간 연기될 수 있다. 그러나 전쟁이 터지면 누가 강한지는 싸움터에서 직접 판가름날 수밖에 없다. 여기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군사적 패배는 보통 거대한 정치적 변화를 동반하지만 반드시 사회의 경제적 토대에 혼란을 조성하는 것은 아니다. 부와 문화의 더 높은 발전을 보장하는 사회체제는 총칼에 의해 타도되지 않는다. 반대로 정복자는 정복된 자의 제도와 풍습을 물려받는다. 소유형태는 나라의 경제적 기반과 날카롭게 갈등을 일으킬 때에만 군사력에 의해 타도될 수 있다. 독일이 소련에게 패배할 경우 히틀러 뿐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가 필연적으로 압살될 것이다. 반면 소련이 패배할 경우 관료지배층 뿐 아니라 사회적 토대도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것이 틀림없다. 현재 독일의 불안정한 체제는 독일의 생산력이 자본주의 소유형태를 이미 오래 전에 능가했기 때문에 나타나고 있다. 반면 소련의 불안정한 체제는 소련의 생산력이 사회주의 소유형태에 걸맞지 않게 한참 뒤떨어지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고 있다. 소련의 사회적 기초가 평화시에 관료집단의 등장과 외국무역의 독점을 요구할 만큼 허약하기 때문에 군사적 패배는 소련의 사회적 토대를 위협한다.

 

그러나 소련이 다가올 세계대전에서 패배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을까? 이 솔직하게 제기된 질문에 대해 역시 솔직하게 대답해보자. 만약 전쟁이 전쟁으로만 수행된다면 소련의 패배는 불가피하다. 기술수준, 경제력, 군사력 등에서 제국주의 세력은 소련과 비교할 수 없이 강하다. 제국주의 세력이 노동계급 혁명에 의해 마비되지 않는다면 제국주의 세력은 10월 혁명에 의해 탄생한 체제를 쓸어버릴 것이다.

 

"제국주의"는 모순들로 갈갈이 찢겨져 있으므로 추상적 개념에 불과하다고 대답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이 대답은 대단히 올바르다. 이 모순들이 없었다면 소련은 이미 오래 전에 사라졌을 것이다. 소련의 외교적·군사적 협정들은 부분적으로 이 모순들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이 모순들이 가라앉는 한계점들을 보지 못한다면 치명적인 오류가 될 것이다. 가장 반동적인 정당에서 사회민주주의 정당에 이르기까지 부르주아 및 소부르주아 정당들의 암투가 임박한 노동계급 혁명의 위협 앞에서 가라앉듯이 제국주의 세력들간의 적대관계는 소련의 군사적 승리를 저지하기 위해 항상 타협안을 찾을 것이다.

 

어느 수상이 한때 이성적으로 말했듯이 외교적 합의는 "종이쪽지"에 불과하다. 전쟁 발발 시점까지 이것이 그대로 유지될 것이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유럽의 어느 곳이든 사회혁명의 임박한 위협이 있을 경우 소련이 자본주의 세력들과 맺은 어떠한 협정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프랑스는 제쳐놓더라도 스페인의 정치 위기가 혁명적 단계로 진입한다고 하자. "구세주 히틀러"라는 말로 로이드 조오지가 표명했던 희망이 모든 부르주아 정부들을 거역할 수 없이 사로잡을 것이다. 반면 스페인, 프랑스, 벨기에 등의 불안정한 상황이 반동의 승리로 끝날 경우에도 역시 소련과 맺은 협약은 흔적도 남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종이쪽지"가 전쟁 초기에 효력을 유지한다면 전쟁의 결정적 국면에서 세력연합 관계는 외교관들의 선서보다 비교할 수 없이 훨씬 강력한 요인들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거짓말을 밥먹듯이 해대는 것이 외교관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련이 전쟁의 참호 뿐 아니라 계급전쟁의 참호에서도 부르주아 동맹국들과 같은 편에 선다는 뚜렷한 보장이 있다면 물론 상황은 근본적으로 달라질 것이다. 소련이 제국주의 세력과 세계 노동자계급 사이의 포화에 끼여 있을 경우 물론 자본주의 "평화의 친구들"은 소련의 난관을 이용하여 소련의 외국무역 독점과 소유법에 균열을 내기위해 모든 조치를 다 취할 것이다. 프랑스와 체코슬로바키아의 러시아 반동 망명자들 사이에는 "조국방어" 운동이 점점 커지고 있는데 이 운동도 이 조치들을 최대한 이용하려 들 것이다. 만약 세계 차원의 투쟁이 군사적 수준에서만 진행된다면 연합국들은 자신들의 목표를 달성할 좋은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혁명이 제국주의 세력들을 방해하지 않는다면 소련의 사회적 토대는 소련이 패배할 경우 뿐 아니라 승리할 경우에도 압살당할 것이다.

 

지금부터 2년도 더 전에 발표된 강령 「제4인터내셔널과 전쟁」은 이 전망을 이렇게 개괄하고 있다: "필수품에 대한 국가의 급박한 필요 때문에 농민경제의 개인주의 경향은 상당히 지지받을 것이다. 그리고 집단농장 내의 원심적 경향은 달이 갈수록 증가할 것이다‥‥‥열띤 전쟁 분위기 속에서 소련은 ‥‥ 연합국 자본을 유치하고 외국무역 독점과 복합기업에 대한 국가의 통제를 완화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복합기업 사이에 또 복합기업과 노동자 사이에 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등등 ... 다른 말로 하면 전쟁이 장기화 되고 세계 노동계급이 수동적 태도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소련 내부의 사회모순들은 반드시 부르주아 보나파르트 반혁명을 낳을 것이다." 지난 2년간의 사건들은 이 예상의 설득력을 배가시켰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예상이 소위 "비관적" 결론을 이끄는 것은 결코 아니다. 자본주의 세계가 보유하고 있는 엄청난 물질적 우월성, 제국주의 "연합국들"의 소련에 대한 불가피한 배반, 소련 체제의 내적 모순 등에 대해 눈을 감기를 원치 않는다면 한편 자본주의 체제의 안정성을 과대평가하지도 않게 될 것이다. 전쟁이 지구전으로 들어가 경제력의 상호관계를 바닥까지 드러내기 오래 전에 각 체제의 상대적 안정성은 시험대에 오르게 될 것이다. 사람을 살육할 전쟁을 진지하게 연구하는 모든 이론가들은 혁명의 가능성 아니 어쩌면 불가피성을 전쟁의 결과로 고려하고 있다. 소수 "직업" 군인들의 집단들이 여러 차례 반복해서 제시한 생각들은 비록 다윗과 골리앗 같은 영웅들에 관한 생각만큼 비현실적이다. 그러나 무장한 인민에 대한 두려움은 이들의 생각이 갖는 환상성 속에서도 그 현실성을 드러낸다. 히틀러는 서방에 전쟁이 일어날 경우 볼셰비키주의의 새로운 폭풍이 몰아칠 수밖에 없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평화 애호" 정신을 더욱 강력하게 선전하고 있다. 당분간 전쟁의 열화를 억제하고 있는 힘은 국제연맹도 아니고 상호안전보장 조약들도 아니며 평화주의 국민투표도 아니다. 지배계급의 혁명에 대한 자기보호 본능적인 두려움만이 전쟁을 연기시키고 있다.

 

다른 모든 현상들과 마찬가지로 사회체제도 비교해서 고려해야 한다. 모든 모순에도 불구하고 소련 체제는 가상의 적대국들보다 더 안정적이다. 이것이 소련의 대단한 장점이다. 나치가 독일을 통치하는 이유는 독일 내부의 사회적 적대관계의 참을 수 없는 격화 때문이다. 이 적대관계들은 파시즘이라는 뚜껑에 의해 제거되거나 약화된 것이 아니라 억압되고 있을 뿐이다. 전쟁은 이 적대관계들을 표면으로 들어올릴 것이다. 히틀러는 빌헬름 2세보다 전쟁을 승리로 이끌 가능성이 훨씬 적다. 독일이 전쟁에 끼어들기 전에 발발하는 혁명만이 독일의 새로운 패배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

 

세계 언론은 최근 일본 장교들이 장관들을 유혈 낭자하게 공격한 사건에 대해 너무도 열화 같은 애국심이 신중하지 못하게 표현된 것 뿐이라고 논평하였다. 그러나 이 공격적 행동들은 이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차르 관료들에게 폭탄을 투척한 러시아 허무주의자들의 행동과역사적 유형이 같다. 일본 인민은 아시아식 농업주의와 초현대 자본주의의 결합된 멍에 아래 질식하고 있다. 조선, 만주, 중국 등은 군국주의의 세력이 약화되는 첫 순간에 일본의 학정에 대항하여 봉기할 것이다. 전쟁은 일본 천황 제국에게 가장 커다란 사회적 재앙을 안겨줄 것이다.

 

폴란드의 상황도 거의 마찬가지이다. 필수드스키(Pilsudski) 정권은 모든 정권 중에서 이룬 것이 정권인데 농민의 토지노예제를 약화시키는 조치조차 취할 수 없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서우크라이나(갈리시아)는 지독한 민족적 억압 속에서 살고 있다. 노동자들은 계속적인 파업과 봉기로 나라를 뒤흔들고 있다. 프랑스와 연합하고 독일과 우호조약을 체결하여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하려는 폴란드 부르주아 계급은 전쟁을 재촉하고 전쟁을 통해 즉사하는 것 이외에 다른 조치를 취할 능력이 없다.

 

전쟁의 위험과 소련의 패배는 현실로 다가왔다. 그러나 혁명 역시 현실로 다가왔다. 혁명이 발발하여 전쟁을 막지 못한다 할지라도 전쟁은 혁명을 도울 것이다. 두 번째 출산은 첫번째 출산보다 대체로 덜 고통스럽다. 새로운 전쟁에서 2년 6개월도 지나지 않아 첫번째 봉기가 일어날 것이다. 더욱이 혁명은 일단 시작되면 이번에는 도중에 멈추지 않을 것이다. 소련의 운명은 장기적으로 군지휘부의 지도 위에서가 아니라 계급투쟁의 지도 위에서 결정될 것이다. 자국의 부르주아 지배계급 그리고 "평화의 친구들"에 대해 사정없이 저항하고 있는 유럽의 노동계급만이 소련을 멸망이나 "연합국들"의 배신에서 보호할 수 있다. 다른 나라에서 노동계급이 승리할 경우 소련의 군사적 패배는 작은 에피소드에 불과할 것이다. 반면에 제국주의가 살아남는다면 어떤 군사적 승리도 10월 혁명의 남아 있는 성과를 보존할 수 없을 것이다.

 

소련 관료집단의 심복들은 우리가 소련의 내적 동력이나 적군의 위력을 "과소평가"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들은 우리가 일국에서 사회주의 건설 가능성을 "부인"한다고도 말한 적이 있다. 이 주장들은 너무도 수준이 낮아서 논쟁을 해도 결실을 맺기 힘들다. 적군이 없을 경우 소련은 중국처럼 압살당하고 분할될 것이다. 적군이 미래의 자본주의 적들과 완강하고 영웅적으로 저항할 경우에만 제국주의 진영 내의 계급투쟁이 발전할 호조건을 조성할 수 있다. 따라서 적군은 대단히 중요한 요인이다. 그러나 적군만이 유일한 역사적 요소라는 얘기는 아니다. 적군은 혁명에 강력한 자극을 줄 수 있을 뿐이다. 오직 혁명만이 주요한 과업을 성취할 수 있다. 이 과업을 적군 혼자 성취하려면 어림도 없을 것이다.

 

소련 정부가 국제적으로 모험을 하고 비합리적인 행동을 저지르며 무력을 통해 세계 정세의 전개과정을 강요하라고 어느 누구도 요구하지 않는다. 이와 반대로 이 시도들이 과거 불가리아, 에스토니아, 중국의 광동 등지에서 있었을 때마다 관료집단은 반동 세력에게 이용당했다. 그리고 좌익반대파로부터 제때에 비판을 받았다. 문제는 소련의 일반 노선이다. 소련의 대외정책과 세계 노동계급 및 식민지 인민의 이익 사이의 모순은 코민테른이 보수적 관료집단의 새로운 종교 즉 무기력증에 빠져 있는 현상에서 가장 재앙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유럽의 노동계급과 식민지 인민들은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그리고 전쟁 --- 이것은 다 자란 태아가 임신 상태를 깨뜨리는 것만큼 불가피하게 현 상황을 깨뜨리고 내팽개칠 것임에 틀림없다 --- 에 대항하여 봉기할 수 있다. 근로인민들은 자신들을 지배하는 부르주아 계급의 명령 하에서건 혹은 그들에 대항하는 혁명적 봉기 속에서건 현재의 국경선들 특히 유럽의 국경선들을 방어하는 데에 추호의 이해관계도 없다. 유럽의 침체는 거의 40개에 달하는 준국가들에 의해서 경제적으로 분할되어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각기 다른 관세제도, 여권, 화폐제도, 그리고 민족적 특성을 옹호하는 끔찍할 정도의 군대들이 인류의 경제적·문화적 발전의 길에 거대한 장애물이 되어왔다.

 

유럽 노동계급의 과업은 현재의 국경선을 영구화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이것들을 혁명으로 철폐하는 것이다. 그리고 현상유지의 옹호가 아니라 사회주의 유럽합중국 건설에 나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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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소련의 사회적 관계

 

소련의 공업 분야에서 국가 소유는 거의 지배적인 지위를 점하고 있다. 농업의 경우 국가 소유의 국영농장은 농지의 10%도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 집단농장에서는 협동조합이나 그룹소유(역자 주: group ownership, 몇몇 개인들이 집단을 이루어 토지를 공동으로 이용하는 소유형태.)가 국가 소유 및 개인 소유와 다양하게 혼재되어 있다. 토지는 법적으로 국가의 소유이지만 "영원히" 사용할 수 있도록 집단농장에 이전되어 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그룹소유가 지배적인 형태가 되어 있다. 트랙터를 비롯한 정밀기계들은 국가 소유이다. 그러나 소형 장비는 집단농장의 소유이다. 더욱이 집단농장의 농민들은 집단농장에서 일정 시간 노동한 후 개인적으로 농사를 짓고 있다. 마지막으로 농민의 10% 이상이 전적으로 개인소유 토지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1934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인구의 28.1%는 국영기업이나 국가기관에서 일하는 노동자였다. 가족을 제외한 공업 및 건설업 노동자는 1935년에 750만 명이었다. 인구조사가 진행될 당시 집단농장과 수공업 협동조합은 인구의 45.9%를 포괄하였다. 학생, 적군 병사, 연금생활자 그리고 기타 직접적으로 국가에 생계를 의존하는 인구는 3.4%였다. 모두 합쳐서 인구의 74%는 "사회주의 부문"에 속해 있었고 이 부문은 소련 내 생산수단의 95.8%를 장악하고 있었다. 1934년 개인소유 농민과 수공업자는 아직도 인구의 22.5%나 되었지만 4%를 약간 넘는 생산수단을 이용하고 있을 뿐이었다!

 

1934년 이후 인구조사는 실시되지 않았다. 다음 인구조사는 1937년에 실시될 계획이다. 그러나 의심의 여지없이 지난 2년 동안 개인소유 부문은 더욱더 "사회주의" 부문에 흡수되었다. 관변 경제학자들의 계산에 의하면 개인소유 농민과 수공업자는 약 1700만 명으로 인구의 10%를 차지하고 있다. 이들의 경제적 비중은 인구 비중보다 훨씬 더 낮아졌다. 1936년 4월 당 중앙위원회 비서 안드레예프(Andreyev)는 이렇게 밝혔다: "1936년 사회주의 생산의 비중은 98.5%에 이를 것이다. 즉 1.5%만이 아직도 비사회주의 생산부문에 속해 있다." 이 낙관적인 통계수치들은 언뜻 보면 사회주의의 "최종적이고 역전될 수 없는"승리에 대한 반박할 수 없는 증거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통계수치 뒤에 도사리고 있는 사회현실을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재앙이 닥칠지어다!

 

우선 이 수치들은 약간 과장되어 있다. 집단농장 옆에 조성된 개인 텃밭이 "사회주의" 부문으로 집계되어 있는 사실 하나만 지적해도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문제의 핵심은 아니다. 국가적·집단적 소유형태의 의심의 여지없는 절대 우세는 소련의 미래를 위해 중요하다. 그러나 더없이 중요한 또 다른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 즉 농업과 공업의 "사회주의" 부문 내에는 부르주아 경향이 아주 강력하게 위세를 떨치고 있다. 이미 성취된 물질적 수준은 모든 분야에서 많은 수요를 창출하고 있으나 이 수요는 충족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경제가 역동적으로 발전하면서 농민과 "정신"노동에 종사하는 인구 뿐 아니라 노동계급의 상층부도 소부르주아적 욕구를 표현하고 있다. 개인토지 소유자와 집단농장 그리고 농민, 개인 수공업자와 국영기업 등을 단순 대비시킬 경우 이 부르주아적 욕구의 폭발적 위력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욕구는 경제 전체를 뒤덮고 있다. 이 욕구는 각자가 가능한 선에서 가장 적게 사회에 기여하는 대신 가장 많은 것을 사회로부터 가지고 가겠다는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로 표현되고 있다.

 

따라서 말 그대로 사회주의 건설에 투여되는 만큼의 활력과 창의력이 개인 축재자와 소비자들을 통제하는 일에 투여되고 있다. 사회적 노동생산성이 매우 낮은 것도 부분적으로는 이것 때문이다. 국가 행정기구는 이 원심력적 경향의 팽창에 대해 계속 투쟁하고 있다. 그러나 지배층 자체가 합법적·불법적 개인 축재의 주요한 온상이다. 새로운 법과 규범들로 위장하고 있기 때문에 부르주아 경향이 통계에 잘 잡히지 않는 것은 물론이다. "사회주의" 관료집단이란 말은 노골적인 형용모순인데 괴물처럼 계속 커지고 있는 왜곡된 사회현상을 대표하는 말이 되었다. 사회악의 원천인 이 관료집단이야말로 부르주아 경향이 경제생활을 압도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현실을 뚜렷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뒤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새로운 헌법은 관료집단을 국가와 그리고 국가를 인민과 동일시하고 있는데 "‥‥‥국가소유 즉 전 인민의 소유"라는 구절을 보아도 명백히 이 점이 드러난다. 그런데 국가와 인민을 동일한 것으로 치부하는 것이야말로 관변 이론이 구사하는 궤변의 바탕이다. 마르크스를 필두로 해서 모든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노동자국가와 관련하여 국가 소유, 인민 소유, 사회주의 소유를 단순 동의어로 보고 있는 것은 완전히 사실이다. 물론 역사를 큰 범위로 바라보면 이 용법은 특히 불편할 일이 없다. 그러나 새로운 사회의 발전 과정에서 확실히 결과를 알 수 없는 미지의 첫 시기들을 단계로 설정할 때 그리고 특히 자본주의 국가들보다 경제적으로 낙후한 고립된 사회를 연구할 때 동의어를 무차별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조야한 오류의 원천이 될 뿐 아니라 엄연한 기만행위가 된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려면 번데기 단계를 거쳐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개인소유는 사회주의 소유가 되기 위해 국가 소유 단계를 필연적으로 거쳐야 한다. 그러나 번데기가 나비인 것은 아니다. 수많은 번데기들은 나비가 되기 전에 죽는다. 사회적 특권과 계층적 분화가 사라지고 국가가 필요 없을 때가 되어야 국가 소유는 "전체 인민"의 소유로 변화된다. 다시 말하면, 국가 소유는 국가 소유를 지양하는 만큼 사회주의 소유에 다가간다. 그리고 이것의 역도 성립한다: 소비에트 국가가 인민 위에 높이 군림하여 자신을 소유 체제의 수호자로 소유 체제의 탕진자인 인민에 더욱 첨예하게 대립시킬수록 이 국가는 국가 소유의 사회주의적 성격을 더욱 분명하게 부정한다.

 

도시와 농촌,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화가 여전히 존재하는 현실을 가리키며 관영 언론은 "계급이 완벽하게 철폐되려면 아직도 갈 길이 멀다"고 고백한다. 관료집단이 자신의 수입을 "정신"노동이라는 멋진 범주로 분류하여 그 실체를 숨긴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순수한 학문적 고백은 값어치가 있다. 소련에 우호적인 서방의 "친구들"에게는 진실보다 플라톤이 더 귀중한 존재이다. 그런데 이들도 옛날의 불평등이 아직 살아남아 있다고 학문적으로 인정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자주 들먹거려지는 "살아남아 있다"는 말은 소련의 현실을 설명하는 데 전혀 적합하지 못하다. 어떤 측면에서는 도시와 농촌의 차이가 완화되었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이 차이가 상당히 심화되었다. 도시가 팽창하고 있으며 도시에 거주하는 소수 인구의 안락을 도모하는 도시문화가 급속하게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중으로부터 과학 분야 간부들이 새로이 충원되었으나 육체노동과 정신노동 사이의 사회적 격차는 최근 몇 년 동안 좁혀지기는커녕 오히려 넓어졌다. 세련된 도시인과 거치른 농민, 과학의 초능력과 일용노동자의 미숙련 노동 등이 공존하고 있다. 동시에 모든 사람들의 일상을 규정하는 천 년이나 오래된 장벽들은 완화된 형태로 보존되어 왔을 뿐 아니라 상당한 정도로 새로이 발전하여 점점 더 완고한 성격을 띠고 있다.

 

"간부들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악명높은 구호는 스탈린이 원하는 것보다 소련 사회의 성격을 훨씬 더 솔직하게 나타내고 있다. 간부들은 근원적으로 지배와 명령의 기관이다. "간부" 숭배는 무엇보다 관료집단, 행정부, 기술 귀족층 등에 대한 숭배를 의미한다.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간부들을 치켜올리고 개발하는 일도 소비에트 체제는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이 이미 오래 전에 해결한 문제들을 이제야 해결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소비에트 간부들은 사회주의라는 깃발을 들고 당당하게 등장하면서 거의 신적인 존경과 높아만 가는 봉급을 요구한다. 따라서 "사회주의" 간부층의 개발은 부르주아 불평등을 새로 조장하면서 진행되고 있다.

 

생산수단 소유의 관점에서 보면 사령관과 가정부 소녀, 복합기업 책임자와 일용 노동자, 인민위원의 아들과 집없는 아동 사이의 차이는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전자는 호화 아파트에 살면서 나라의 여러 곳에 여름 별장을 여러 개 가지고 있으며 최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고 자기 구두 닦는 법을 잊은지 오래 되었다. 후자는 칸막이도 없는 나무로 된 막사에서 반 기아상태로 살면서 맨발로 다녀야 하기 때문에 구두를 닦을 필요가 없다. 관료들에게는 이 차이가 아무런 관심거리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일용 노동자에게 이 차이는 당연하게도 매우 중요하다.

 

물론 피상적인 "이론가들"은 부의 분배가 부의 생산에 비해 부차적인 요인이기 때문에 이 현실을 편안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다. 그러나 상호작용의 변증법은 이 경우에도 완전히 효력을 나타낸다. 장기적으로 보면 생활상의 차이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느냐에 따라 국가 소유 체제의 운명이 결정될 것이다. 여객선이 집단 소유라고 선언되었는데 승객들은 여전히 일등, 이등, 삼등으로 나누어질 경우 삼등 승객이 느끼는 생활상의 차이는 소유의 법적 변화보다 한없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반면 일등 승객은 커피와 시가(cigar)를 즐기면서 집단 소유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것이고 편안한 객실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계속 생각할 것이다. 이 현실에서 발생하는 적대관계는 불안한 집단 소유 체제를 당연히 해체시킬 것이다.

 

모스크바 동물원에서 어느 조그만 소년이 "저 코끼리는 누구 것이지요?"라는 질문에 "국가 소유예요"라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그러니까 일부는 내것이예요"라고 즉시 결론내렸다. 이 일화를 소련 언론은 만족스럽게 보도하고 있다. 그러나 코끼리가 실제로 분할된다면 값비싼 상아는 선택된 극소수에게 돌아갈 것이고 몇몇은 코끼리 햄을 즐길 것이고 다수는 발굽과 내장으로 만족할 것이다. 속아서 자기 몫도 챙기지 못한 소년들은 국가 소유를 자기 소유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집없는 아동들은 국가로부터 훔친 물건만을 "자기 것"으로 간주할 것이다. 고위 관료는 "짐은 곧 국가이다"라는 공식에서 "국가 소유는 곧 나 개인의 소유이다"라고 쉽게 결론을 내릴 것이다. 그렇다면 동물원의 조그만 "사회주의자" 소년은 아마 이 고위 관료의 아들일 것이다.

 

알기 쉽게 설명하기 위하여 사회주의적 관계를 시장의 언어로 번역해보자. 소련 인민은 나라의 재화 전체를 소유하고 있는 회사의 주주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회사의 재산이 모든 사람들의 것이라면 "주식"이 동등하게 분배되고 따라서 모든 "주주들"에게 같은 배당금이 분배될 권리가 주어질 것이다. 그러나 인민들은 국가기업에 "주주"로서만이 아니라 생산자로서도 참여한다. 사회주의라고 부르는 공산주의의 낮은 단계에서는 노동의 대가는 여전히 부르주아 규범에 따라 지불될 것이다. 즉 기술 숙련도, 노동강도 등에 따라 지불 액수가 다를 것이다. 따라서 인민 각자의 수입은 예를 들어 이론적으로 갑과 을의 두 부분으로 구성될 것이다. 갑은 주식에 대한 배당금이고 을은 임금이다. 기술수준이 높고 산업의 조직이 더 완벽하면 할수록 갑이 을보다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실생활에서 개인노동의 차이가 더 적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소련의 임금 격차는 자본주의 국가들보다 더 크다는 사실로부터 소련 인민의 몫이 균등하게 분배되지 못하고 있으며 배당금뿐만 아니라 임금도 균등하게 지불되지 않고 있다고 결론내릴 수 있다. 미숙련 노동자는 을만을 받을 것이며 이것은 자본주의 기업에서 같은 조건에 있을 경우 그가 받는 최저임금과 같을 것이다. 그러나 스타하노프 운동원이나 관료는 갑의 2배와 을, 또는 갑의 3배와 을을 받을 것이다. 더욱이 을도 2배나 3배를 받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수입 격차는 개인이 보유한 생산성뿐만 아니라 타인의 노동생산물을 은폐된 방식으로 전유하는 것에 의해서 결정된다. 소수 특권층 주주들은 다수의 가난한 주주들을 희생시켜 살고 있다.

 

소련의 비숙련 노동자가 기술과 문화수준이 비슷한 자본주의 기업에서 일할 경우보다 소련에서 더 많은 수입을 올리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즉 그가 여전히 소규모 주주라고 가정하면 그의 수입은 갑과 을을 합친 것이다. 그보다 높은 수준의 주주들은 갑의 3배와 을의 2배, 갑의 10배와 을의 15배 등을 받을 것이다. 즉 비숙련 노동자가 주식 1주, 스타하노프 운동원이 3주, 전문가가 10주를 갖게 되는 셈이다. 더욱이 임금의 비율도 1:2:15 정도가 될 것이다. 성스러운 사회주의 소유에 대한 찬가는 보통 노동자나 집단농장 농민보다 기업의 책임자나 스타하노프 운동원에게 더욱 감격스럽게 들릴 것이다. 그러나 보통 노동자들이 인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새로운 귀족층이 아니라 바로 이 다수 노동자들을 위해 고안된 것이 아닌가!

 

"소련의 노동자는 임금노예도 아니고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파는 자도 아니다. 그는 자유로운 일꾼이다."(『프라우다』) 이 번지르르한 말은 지금 전혀 인정할 수 없는 허풍에 불과하다. 공장이 국가 소유가 되면서 노동자의 현실은 법적으로만 바뀌었다. 그런데 실제로 그는 궁핍 속에서 생활하면서 주어진 임금을 받기 위해 주어진 시간에 일을 해야만 한다. 과거 노동자가 당과 노동조합에 대해 품었던 희망은 혁명이 성공한 후 그가 창조한 국가로 넘어갔다. 그러나 국가라는 도구의 유용한 기능은 기술과 문화수준에 의해 제한되고 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그런데 기술과 문화 수준을 올리기 위해 새로운 국가는 노동자의 근육과 신경을 혹사시키는 옛날 방식에 의존했다. 노동자를 노예로 부리는 집단이 등장했다. 산업의 관리는 초(超)관료적이 되었다. 노동자는 이제 공장 관리에 대한 모든 통제력을 상실했다. 도급제의 도입, 각박한 생존조건, 자유로운 거주이전의 금지, 모든 공장생활에 침투한 경찰의 탄압 등으로 노동자는 자기가 "자유로운 일꾼"이라고 느낄 수가 없다. 그에게 관료집단은 공장 책임자이며 국가는 고용주에 불과하다. 자유로운 노동은 관료적인 국가의 존재와 양립할 수 없다.

 

필요한 변화를 가하면 위에서 말한 것은 농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당국의 이론에 의하면 집단농장 소유는 사회주의 소유의 특별한 형태이다. 집단농장은 "근본적으로 국영기업과 같은 유형이며 따라서 사회주의 소유"라고 『프라우다』는 밝히고 있다. 그러나 곧 이어서 농업의 사회주의적 발전은 "볼셰비키당이 집단농장을 관리할" 때 보장된다고 덧붙인다. 즉 『프라우다』는 경제를 논하다가 갑자기 정치로 초점을 돌리고 있다. 결국 사회주의적 관계는 인간 사이의 현실 관계가 아니라 당국의 너그러운 마음 속에서 실현된 셈이다. 노동자들은 이 너그러운 마음을 경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실제로 집단농장은 개인경제와 국가경제의 중간단계이다. 그리고 여기에 존재하는 소부르주아 경향은 집단농장 농민이 가꾸는 개인 텃밭의 급속한 증대로 아주 만족스럽게 지지받고 있다.

 

개인적으로 경작되는 농지는 4백만 헥타르에 지나지 않고 집단농장의 1억 8백만 헥타르와 비교하면 전체 농지의 4%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집약농법과 특히 원예농법을 채택하면서 이 왜소한 규모의 농장은 농민에게 가장 중요한 소비재를 제공한다. 뿔 달린 소, 양, 돼지의 대다수는 집단농장이 아니라 농민 개인의 소유이다. 농민들은 종종 개인 텃밭을 중심 농장으로 변화시키고 이익이 되지 않는 집단농장을 부차적인 지위로 낮추어 버렸다. 반면에 다른 곳에 비해 노동의 대가를 후하게 지불하는 집단농장은 더 높은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면서 부유한 농민층을 탄생시키고 있다. 집단농장 내의 원심력은 사멸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강해지고 있다. 어쨌든 집단농장은 농촌의 경제관계 특히 수입의 분배방식을 법적으로만 변화시켰다. 옛날의 오두막집, 채소밭, 헛간 앞마당의 잡일, 농민의 과중한 노동 일과등은 거의 바뀐 것이 없다. 그리고 국가에 대한 오랜 관념도 상당한 정도 그대로 남아 있다. 물론 국가는 지주나 자본가를 위해 존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도시인들의 이익을 위해 너무 많은 것을 농촌에서 빼앗아가고 있으며 탐욕스러운 관료들이 너무 많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1937년 1월 6일 실시할 예정인 인구조사는 이렇게 범주를 설정하고 있다: 노동자; 사무직 노동자; 집단농장 농민; 개인소유 농민; 개인 수공업자; 자유직업 종사자; 종교인; 기타 비노동 분자 공식 논평에 의하면 소련에는 계급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번 인구조사는 다른 사회계급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로 이 방침은 특권 상류층과 극빈층을 숨기려는 직접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다. 인구조사가 정직하게 진행된다면 사회 범주는 이렇게 될 것이다: 부르주아처럼 생활하는 관료집단의 지배층과 전문가 등; 소부르주아에 해당하는 중하층; 소부르주아적 상층 노동자와 농업귀족; 중간 근로대중; 집단농장의 중간층; 개인소유 농민과 수공업자; 룸펜노동자로 이전하고 있는 하층 노동자와 농민; 집없는 아동, 창녀 등.

 

소련의 새로운 헌법은 소련에서 "인간의 인간에 대한 착취가 철폐되었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러나 물론 이것은 거짓말이다. 새로운 사회분화는 가장 야만스런 형태로 인간에 대한 착취를 부활시키고 있다. 이것은 개인 목적으로 인간을 노예로 매입하는 형태이다. 새로 실시되는 인구조사의 범주에는 하인이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다. 물론 하인은 "노동자"라는 일반 범주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해서 많은 의문들이 제기된다: 사회주의 시민이 하인(하녀, 요리사, 보모, 여자 가정교사, 자가용 운전사 등)을 부리고 있는가? 부리고 있다면 몇 명을 부리고 있는가? 자동차를 소유하고 있는가? 방은 몇 개나 소유하고 있는가? 등등 타인노동을 착취하는 자는 정치적 권리를 박탈당한다는 과거의 법규가 부활한다면 예상 밖으로 지배층의 최상층부가 소련헌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 하인과 주인 모두에게 완벽한 권리 평등이 확립되었다! 소비에트 체제의 심연 속에는 두 상반된 경향들이 성장하고 있다. 부패하고 있는 자본주의와는 달리 생산력이 발달하는 정도에 비례하여 사회주의의 경제 기반이 마련되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관료집단 상층부의 이익을 위해 부르주아 분배 규범을 극단적으로 표현하는 정도에 비례하여 자본주의로의 복귀가 준비되고 있다. 소유형태와 분배 규범 사이의 격차가 무한정 계속 벌어질 수는 없다. 부르주아 규범이 어떤 형태로든 생산수단을 지배하든가 아니면 분배 규범이 사회주의 소유체제와 일치하든가 둘 중의 하나로 결판이 날 것이다.

 

관료집단은 이 양자택일의 상황이 인민에게 던져지는 것을 끔찍히 두려워하고 있다. 언론, 연설, 통계, 관변문인의 소설과 시, 그리고 마지막으로 새로운 헌법 조항 등 모든 것을 동원하여 언제나 모든 곳에서 관료집단은 사회주의 사전에서 빌려온 추상적 낱말들을 활용하여 도시와 농촌의 실제 관계들을 공들여 은폐한다. 관변이론이 그렇게도 생동감과 재능이 결핍되어 있으며 거짓투성이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1. 소련이 국가자본주의 체제인가?

 

사람들은 종종 익숙하지 못한 현상들에 대해 익숙한 용어를 사용해 곤란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소련을 "국가자본주의" 체제라고 부르면서 이 체제가 드러내고 있는 미지의 현상들을 감추려는 시도가 있어 왔다. "국가자본주의"라는 용어는 아무도 그 뜻을 정확히 알지 못하는 이점(利點)을 가지고 있다. 원래 이 용어는 부르주아 국가가 운송수단이나 기업들을 직접 운영할 때 나타나는 모든 현상들을 가리키기 위해 등장했다. 이 조치들은 생산력이 자본주의 생산관계를 능가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자본주의가 현실에서 부분적으로 스스로를 부정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미 없어졌어야 할 자본주의 체제가 자신을 부정하는 요소와 함께 계속 존재하고 있다.

 

물론 자본가 계급 전체가 주식회사를 구성하여 국가를 수단으로 일국경제 전체를 운영하는 상황을 구상하는 것이 이론적으로 불가능하지는 않다. 이 체제의 경제 법칙에는 조금의 수수께끼도 없을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자본가는 자기 회사 노동자가 창출한 잉여가치를 직접 이윤으로 취하지 않는다. 다만 일국 경제 전체에서 창출된 총잉여가치 중 자신의 자본 크기에 비례하는 만큼의 잉여가치를 취할 뿐이다. "국가자본주의"가 경제 전체를 지배할 경우 이 이윤균등분배 법칙은 자본들간의 경쟁이라는 우회로가 아니라 국가 회계라는 방식을 통해 직접 그리고 즉시 실현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체제는 지금까지 존재해 본 적이 없으며 자본가들 사이에 존재하는 심대한 모순 때문에 결코 존재할 수 없다. 더욱이 국가가 자본주의 소유형태의 보편적 담지자가 되면 사회혁명의 대단히 매력적인 대상이 될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그리고 특히 파시즘 경제가 실험되고 있는 동안 "국가자본주의"라는 용어는 국가의 개입 및 통제 체제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프랑스인들은 이것에 대해 국가주의(etatism)라는 더 적당한 용어를 쓰고 있다. 의심의 여지없이 국가자본주의와 "국가주의(state-ism)"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체제로 보면 이 둘은 동일하기보다는 정반대의 존재이다. 국가자본주의는 사적 소유를 국가 소유가 대체했다는 의미이며 바로 이 때문에 부분적 성격을띠고 있다. 한편 국가주의는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독일의 히틀러, 미국의 루즈벨트, 프랑스의 블룸 등 어디에서 누가 실시하든 사적 소유를 보존하기 위해 사적 소유에 기초하여 국가가 개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부의 정책이 어떻든 국가주의는 부패하는 자본주의의 손실을 강자로부터 약자에게 필연적으로 전가한다. 국가주의는 대자본의 보존을 위해 필요한 정도까지만 소자본을 완벽한 파산으로부터 "구출한다". 국가주의의 계획경제 조치들은 생산력의 발전에 따른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 아니라 사적 소유에 반란을 일으키는 생산력을 희생하면서 사적 소유를 보존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국가주의는 기술수준의 발전에 제동을 걸고 생존능력이 없는 기업을 회생시키면서 기생적인 사회계층을 영구히 보호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국가주의는 완전히 반동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무솔리니가 한 말이 있다: "이탈리아 경제의 4분의 3은 국가의 손에 장악되어 있다."(1934년 5월 26일) 그러나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파시즘 국가는 기업의 소유자가 아니라 소유자들 사이의 중개자에 불과하다. 양자는 결코 동일하지 않다. 이탈리아의 『인민』지는 이 주제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조합주의 국가(corporative state)는 경제를 관리하고 통합할 뿐 직접 운영하지는 않는다. 이 체제는 생산을 독점할 경우 집단주의 체제에 지나지 않는다."(1936년 6월 11일)

 

농민과 소자본가 일반에 대해서 파시즘 관료집단은 하인을 협박하는 주인과 같이 군다. 그러나 대자본가에 대해서는 그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대사의 태도를 취한다. 이탈리아의 마르크스주의자 페로치(Feroci)는 올바르게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조합주의 국가는 독점자본의 점원에 지나지 않는다‥‥‥ 무솔리니는 기업의 위험부담을 전부 지면서 착취의 결과 발생하는 이윤은 자본가에게 넘겨준다." 그리고 히틀러 역시 무솔리니의 행위를 똑같이 반복하고 있다. 파시즘 국가는 대자본가 계급의 지배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계획경제의 실제 내용 뿐 아니라 원칙은 뚜렷이 한계가 그어져 있다. 이 체제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을 증가시키는 것이 아니라 극소수의 이해를 위해 사회 전체를 착취한다. 무솔리니는 이렇게 자랑한다: "내가 이탈리아에서 국가자본주의나 국가사회주의를 원한다면 필요하고 적절한 객관적 조건들은 전부 갖추어져 있다." 그러나 하나의 조건이 결여되어 있다. 즉 자본가계급 전체의 생산수단 전부를 국가는 아직 몰수하지 않았다. 이 조건을 실현하려면 파시즘은 계급투쟁의 바리케이드에서 노동자 편으로 넘어가야 한다. "그런데 실제 이런 일은 일어난 적이 없다." 이것은 무솔리니가 한 말이다. 물론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자본가 계급의 생산수단을 전부 몰수하는 일은 다른 사회 세력, 다른 지도자, 다른 중핵들을 필요로 한다.

 

생산수단을 국가의 손에 쥐어준 첫 역사적 경험은 사회혁명을 성취한 노동계급에 의해 현실로 나타났다. 국가에게 생산수단을 의탁하여 자본가 계급이 실현한 것이 결코 아니다. 이 간단한 분석을 통해 소련을 자본주의적 국가주의와 동일시하는 것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짓인지가 충분히 드러났다. 전자는 진보적이며 후자는 반동적이다.

 

2. 관료집단이 지배계급인가?

 

계급은 경제체제에서 차지하는 위치 그리고 생산수단과 맺는 관계에 의해 주로 결정된다. 문명 사회에서는 소유관계가 법에 의해 효력을 인정받는다. 토지와 공업 생산수단, 운송, 교환 등의 국유화 그리고 외국무역의 독점이 소련 사회체제의 기반이다. 노동계급 혁명에 의해 확립된 이 관계들을 통해 노동자국가인 소련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규정되었다.

 

중개 및 통제 기능, 위계질서 유지에 대한 관심, 개인적 목적을 위한 국가기구의 활용 등의 측면에서 소련 관료집단은 다른 모든 관료집단 특히 파시즘 관료집단과 비슷하다. 그러나 후자와 대단히 다른 측면도 가지고 있다. 관료집단이 소련의 경우 만큼 지배계급으로부터 독립한 체제는 존재한 적이 없다. 부르주아 사회에서 관료집단은 교육 받은 유산 지배계급의 이해를 대변한다. 지배계급은 관료집단의 행정 활동을 통제할 수 있는 일상적이며 수없이 많은 수단들을 장악하고 있다. 그러나 소련의 관료집단은 지배계급의 지배나 명령은 받은 적이 없다. 그리고 특히 궁핍과 몽매로부터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러시아 노동계급 위에 군림하고 있다. 파시즘 관료집단은 정권을 장악할 경우 공동의 이해, 친분, 결혼 등의 유대를 통해 대자본가들과 유착한다. 그러나 소련 관료집단은 토착 부르주아 계급이 없는 가운데에서 부르주아 관습을 습득한다. 이 의미에서 이들은 단순한 관료집단을 능가하는 무엇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말 그대로 소련 사회에서 유일한 특권 지배층이다.

 

또 다른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사회 정복의 성과를 자기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방어하기 위해 소련 관료집단은 노동계급을 정치적으로 타도했다. 그러나 주요 생산수단을 국가가 장악한 나라의 정치권력을 장악했기 때문에 관료집단과 소련의 재화 사이에는 새롭고 여태까지 알려지지 않은 관계가 성립한다. 생산수단은 국가에 속해 있다. 그러나 국가는 말하자면 관료집단에 의해 "장악되어 있다." 그런데 이렇게 완전히 새로운 관계들이 노동계급의 저항이 존재하든 안하든 공고히 정착되고 규범이 되어 법으로 고정된다면 장기적으로 이 관계는 노동계급 혁명의 사회적 성과들을 완전한 해체시킬 것이다. 그러나 결과가 이렇게 귀결될 것으로 예견하기에는 아직 때가 너무 이르다. 왜냐하면 노동계급이 최종적인 발언을 아직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 이래 지금까지 관료집단은 자신의 지배를 사회적으로 지탱할 특별한 소유형태를 창조한 적이 없다. 따라서 소련의 관료집단은 권력과 수입의 원천인 국가 소유를 방어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국가 소유를 옹호하는 한 관료집단은 아직도 노동계급 독재의 무기로 남아 있다. 왜냐하면 노동계급 독재의 토대를 옹호하기 때문이다.

 

소련 관료집단을 "국가자본주의" 계급으로 바라보려는 시도는 비판의 화살을 견뎌내지 못할 것이 뻔하다. 관료집단은 주식이나 채권을 가지고있지 않다. 자신에게 고유한 특별한 소유관계를 구비하지 못한 채 행정적 위계체계를 통하여 성원을 충원하고 갱신한다. 개별 관료는 자식들에게 국가기구를 활용할 권한을 물려줄 수 없다. 그리고 권한을 남용하는 형태로 자신의 특권을 누릴 뿐이다. 또한 자신의 수입을 은폐한다. 특별한 사회집단으로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애써 감춘다. 사회총생산 중 엄청난 양을 가로채는 행위는 사회적 기생행위(social parasitism)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 모든 특징들 때문에 이들이 권력을 완전히 독점하고 있고 자신의 정체를 숨기는 아첨의 연막술을 노동계급에게 구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지위는 극단적으로 모순에 차 있으며 애매모호하고 존엄성이 결여되어 있다.

 

부르주아 사회는 자신의 역사 전체를 통해 자신의 사회적 기초를 변화시키지 않으면서 수많은 정권과 관료주의 집단들을 갈아치워 왔다. 그리고 자본주의 생산방식의 우월성을 통해 봉건적·길드적 관계들의 복귀에 대항하여 자기 체제를 보존하여 왔다. 국가권력은 자본주의 발전에 협력하거나 제동을 걸 수 있었다. 그러나 대체로 사적 소유와 경쟁의 기초 위에서 자본주의 생산력은 자기 운명을 개척해왔다. 이에 반해 사회주의 혁명이 탄생시킨 소유관계는 이 소유관계의 담지자인 새로운 국가와 분리될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소부르주아 경향에 비하여 사회주의 경향이 우세하기 위해서는 경제의 자동적 작동이 아니라 노동계급 독재의 정치적 조치들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경제의 자동적 작동이 사회주의 경향을 강화시키려면 사회주의 체제가 안정적으로 확립되어야 하는데 이 시점에 도달하려면 한참 멀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제의 성격은 대체로 국가권력의 성격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소련 체제가 붕괴할 경우 필연적으로 계획경제가 붕괴할 것이며 국가 소유가 철폐될 것이다. 복합기업과 산하 공장 사이에 존재하는 강제적인 관계도 해체될 것이다. 좀더 채산성이 있는 기업들은 독립에 성공하여 일부는 주식회사로 될 것이고 일부는 예를 들어 노동자가 이윤 획득에 참여하는 이행기 소유형태가 될지도 모른다. 동시에 집단농장은 훨씬 쉽게 해체될 것이다. 따라서 관료집단의 독재체제가 사회주의 권력으로 대체되지 않는다면 소련 체제는 산업과 문화가 대규모로 쇠퇴하는 자본주의 복귀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계획경제의 보존과 발전을 위해 사회주의 정부는 절대로 필요하다. 그러나 현재 소련 정부의 세력 기반이 무엇이며 어떤 조치를 통해 당국의 사회주의적 정책이 보장되는가 하는 문제는 더욱 중요하다. 1922년 3월 제11차 당 대회에서 레닌은 실질적으로 당에게 작별인사를 고하면서 지도부에게 이렇게 말했다: "인류 역사는 온갖 종류의 변모들을 목격하였다. 따라서 확신, 헌신, 기타 훌륭한 정신적 자질 등에 의존하는 것 --- 이것은 정치 세계에서는 진지하게 고려될 필요가 없다."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 지난 15년간 소련 정부는 자신의 사상보다 구성인자들을 더 크게 바꾸었다. 소련 사회의 모든 계층 가운데 관료집단은 자기 문제를 가장 잘 해결해 왔고 현 상황에 완벽하게 만족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이 사회주의 정책을 주관적으로 고수할 것인지는 결코 보장할 수 없다. 관료집단은 노동계급을 두려워하는 정도로만 국가 소유를 계속 보존하고 있다. 자신의 존재를 보장하는 데 필요한 이 두려움은 볼셰비키-레닌주의 지하당의 존재에 의해 계속 유지되고 커지고 있다. 이 당은 테르미도르 관료집단의 부르주아 반동에 저항하는 사회주의 경향의 가장 의식적인 표현이다. 의식적인 정치세력으로서 관료집단은 혁명을 배신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승리한 혁명은 강령, 깃발, 정치제도만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의 체제이기도 하다. 혁명을 배신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혁명은 타도되어야 한다. 10월 혁명은 관료집단에 의해 배신당했으나 아직도 타도되지 않았다. 확립된 국가 소유, 노동계급의 살아 있는 힘, 노동계급 최상 분자의 의식, 세계 자본주의의 교착상태, 세계혁명의 불가피성 등과 함께 10월 혁명은 아직도 거대한 저항력을 보유하고 있다.

 

3. 소련의 사회 성격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현재 소련 사회의 성격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하여 두 가지 상이한 가정을 해보자. 구볼셰비키당의 모든 속성을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최근 세계적 투쟁의 경험에 의해 더 풍부해진 혁명정당에 의해 관료집단이 타도되었다고 우선 가정해보자. 이 당은 먼저 노동조합과 각급 소비에트에 민주주의를 회복시킬 것이다. 그리고 소비에트에 기초한 정당들의 활동을 보장할 수 있을 것이며 보장해야 한다. 대중과 함께 대중의 선두에 서서 국가기구를 가차없이 숙청할 것이다. 계급과 훈장 그리고 모든 종류의 특권을 철폐할 것이다. 경제와 국가기구 유지에 절대 필요한 경우 이외에는 임금의 불평등을 철폐할 것이다. 독립적으로 사고하고, 배우고, 비판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청년들에게 자유로운 기회를 부여할 것이다. 노동자와 농민 대중의 이익과 의지에 기반하여 소득분배 방식을 크게 바꿀 것이다. 그러나 소유관계에 대한 혁명적 조치는 필요 없을 것이다. 오직 계획경제의 실험을 계속하고 더욱 발전시킬 것이다. 관료집단을 타도하는 정치혁명 후 노동계급은 아주 중요한 일련의 경제개혁을 도입해야한다. 그러나 이때에 또 다른 사회혁명은 불필요하다.

 

그러나 부르주아 정당이 소련 지배층을 타도할 경우를 생각해보자. 그러면 현재의 관료, 행정가, 기술자, 책임자, 당 비서 그리고 일반적으로 특권 상층부에서 부르주아 체제의 적극적인 협조자들이 적지 않게 나타날 것이다. 물론 이 경우에도 국가기구의 숙청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혁명정당이 권력을 장악한 경우에 비해 훨씬 적은 수의 사람들만 숙청하면 될 것이다. 새 정치권력의 주요한 과업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회복시키는 일이다. 우선 허약한 집단농장으로부터 강력한 농민들을 양성하고 강력한 집단농장을 부르주아 유형의 생산자 협동조합과 농업 주식회사로 변화시킬 조건들을 조성해야할 것이다. 공업에서는 민영화가 경공업과 식품공업에서 시작될 것이다. 이행기 동안 국가권력과 개인 "기업들" (즉 소련의 공업 책임자, 망명한 구체제의 유산자, 외국 자본가 사이에 자본가가 될 가능성이 있는 자) 사이에 일련의 타협이 진행되면서 계획경제의 원칙이 사적 경제원칙으로 전환될 것이다. 관료집단이 자본주의 복귀를 준비하는 과정을 상당히 진척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새로 등장하는 부르주아 정권은 소유형태와 산업운영 방식에서 개혁이 아니라 사회혁명을 도입해야 한다.

 

그리고 세 번째로 사회주의 혁명정당이나 부르주아 반혁명정당 어느 누구도 권력을 장악하지 못할 경우를 생각해보자. 그럴 경우 관료집단은 계속해서 국가의 지배자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도 사회적 관계들은 굳어지지 않을 것이다. 사회주의적 평등을 위해 관료집단이 평화적으로 자의로 자신의 권력과 특권을 포기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현재 관료집단이 불편을 감수하고 계급과 훈장 제도를 도입했다면 미래에는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소유관계를 통한 지지기반을 구축해야 한다. 돈만 많이 들어온다면 대관료는 지배적인 소유형태에 신경쓰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주장은 관료가 휘두르는 권한의 불안정성 뿐 아니라 그의 후계자 문제를 무시하고 있다. 가족에 대한 새로운 숭배는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자식에게 상속되지 않는 특권은 값어치가 반으로 떨어진다. 그러나 유언장을 남길 권리는 소유권과 분리될 수 없다. 복합기업의 책임자가 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주주가 되는 것이 필요하다. 이 결정적인 싸움에서 관료집단이 승리한다면 이들은 새로운 소유계급으로 전환할 것이다. 반면 관료집단에 대해 노동계급이 승리할 경우 사회주의 혁명은 소생을 보장받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세 번째 가정은 명확성과 단순성을 위해 도입한 첫 두 가정들로 다시 환원된다.

 

* * *

 

소비에트 체제는 이행기 또는 과도적 체제이다. 즉 소련은 자본주의(따라서 "국가자본주의")나 사회주의라는 완결된 사회적 범주에 들어갈 수 없다. 이 두 범주를 소련에 적용하는 것은 그 자체로 완전히 불합리하다. 이 뿐이 아니다. 소련 사회가 사회주의로 이행할 수밖에 없다는 잘못된 생각을 이끌어낼 수 있다. 실제로 소련이 자본주의로 복귀하는 것은 전적으로 가능하다. 소련 사회를 좀더 완전하게 규정하려는 시도는 복잡하고 거북스러울 뿐이다.

 

소련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중간에 위치한 모순적 사회체제이다. 특징을 살펴보면 (1) 국가 소유에 사회주의적 성격을 부여하기에는 생산력이 아직 너무 낮다; (2) 궁핍에 의해 조성된 자본주의적 본원적 축적(primitive accumulation)의 경향이 계획경제의 수많은 숨구멍을 통해 솟아나고 있다; (3) 부르주아적 성격의 분배 규범이 새로운 사회분화의 기초가 되고 있다; (4) 경제성장은 근로인민의 상황을 호전시키고 있지만 특권층의 급속한 형성을 촉진하고 있다; (5) 사회적 적대관계를 활용하면서 관료집단은 사회주의에 적대적인 독립적 계층으로 전환했다; (6) 사회혁명은 지배정당에 의해 배신당했지만 소유관계와 근로대중의 의식 속에 여전히 남아 있다; (7) 모순이 더 축적될 경우 소련은 사회주의로 나아갈 수도 있고 자본주의로 다시 후퇴할 수도 있다; (8) 자본주의 복귀를 위한 반혁명은 노동자들의 저항으로 분쇄되어야 한다; (9) 사회주의로 나아갈 경우 노동자들은 관료집단을 타도해야한다. 결국 소련의 사회성격은 국내외의 살아 움직이는 사회세력들 간의 투쟁에 의해 최종 결정될 것이다.

 

물론 교조주의자들은 이 전제들이 도출하는 결론에 대해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이들은 딱부러지는 정식을 좋아한다: 옳으면 옳고 그르면 그른 것이지 뭐가 이리 복잡한가! 그러나 만약 사회현상들이 항상 완결된 성격을 가지고 있다면 사회학 문제들은 확실히 지금보다 더 단순하게 해결될 것이다. 논리적 완벽성을 추구하기 위해 판에 박힌 정식을 구상할 수는 있다. 그러나 오늘 이 정식의 내용을 훼손하고 또 내일 이 정식의 내용을 완전히 뒤집어 엎을 요인들을 현실 밖으로 던져버리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역사상 유례도 없고 유비(類比)도 존재하지 않는 소련 사회의 역동적 성격을 강제적으로 도식에 맞추면서 훼손하려는 시도를 무엇보다도 피했다. 정치적 과제와 더불어 과학적 과제는, 과정이 완료되지 않은 대상을 완벽하게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단계들을 예의 주시하면서 그 진보적인 경향을 반동적인 경향과 분리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양자의 상호관계를 드러내어 이후 전개될 사태의 다양한 측면들을 예측하며 이 예측을 통해 행동의 기초를 마련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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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장 새로운 헌법을 통해서 바라본 소련

 

1. "능력에 따른" 일과 개인 재산

 

1936년 6월 11일 당 중앙집행위원회는 새로운 소련 헌법의 초안을 승인하였다. 이 초안은 "세계에서 가장 민주적인 헌법"이라고 스탈린이 선언했다. 그리고 그의 선언은 일상적으로 모든 언론 매체를 통해 반복되었다. 물론 헌법 초안이 마련된 과정만 보아도 그의 선언에 대해 의구심을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 동안 언론이나 집회에서는 이 거대한 개혁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었다. 더욱이 1936년 3월 1일 이미 스탈린은 미국인 로이 하워드와 인터뷰를 하면서 이렇게 선언했다: "올해 말에는 반드시 새로운 헌법을 채택할 것이다." 이것을 보면 스탈린은 새로운 헌법이 언제 채택될지를 너무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까지 일반대중 가운데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세계에서 가장 민주적인 헌법"이 그다지 완전하지 못한 민주적 방식으로 마련된 셈이다. 물론 같은 해 6월에 소련 인민이 "숙고"할 수 있도록 초안이 공개되었다. 그러나 세계 육지의 6분의 1이나 되는 이 넓은 영토에서 중앙위원회의 설립을 감히 비판할 공산주의자나 당의 제안을 거부할 비당원 시민을 찾는 일은 헛수고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헌법에 대한 논의는 결국 "행복한 삶"을 가능하게 만든 스탈린에게 감사의 결의문을 보내는 것으로 모아졌다. 물론 결의문의 내용과 문체는 구헌법 체제 하에서 철저하게 준비되었다.

 

"사회구조"라고 제목이 달린 제1절은 이렇게 끝맺고 있다: "'각자 능력에 따라 일하고, 각자 노동한 만큼 소비한다'는 사회주의 원칙이 소련에서 실현되었다." 이 내적 논리도 갖추어지지 않은 넌센스는 스탈린의 연설과 신문 기고문에서 선정되어 면밀하게 준비된 국가기본법의 내용이 되었다. 믿거나 말거나 이것은 사실이다. 이 사실은 법초안자들의 이론적 수준이 완벽하게 낮다는 것과 지배층의 거짓된 모습이 헌법에 가득차 있다는 점을 증명하고 있다. 이 새로운 "원칙"의 기원을 추측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공산주의 사회를 특징적으로 말하기 위해 마르크스는 이 유명한 말을 했다: "각자의 능력에 따라 일하고, 각자의 필요에 따라 소비한다." 이 정식의 두 구성부분은 분리될 수 없다. 자본주의적이 아니라 공산주의적 의미에서 "각자 능력에 따라 일하는 것"은 일이 더 이상 괴로운 의무가 아니라 각 개인의 필요가 되었으며 사회는 개인에게 일을 하도록 어떤 강제도 행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병자나 장애인만이 일하기를 거부할 것이다. 스스로에게 어떤 폭력도 가하지 않고 가지고 있는 육체적·정신적 능력을 발휘하여 "각자 능력에 따라" 일하면 사회 성원들은 높은 기술수준 덕분에 사회가 필요한 재화를 충분히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사회는 모두에게 "각자의 필요에 따라" 굴욕적인 통제가 없이 관대하게 이 노동생산물을 나누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양면적인 그러나 분리할 수 없는 공산주의 정식은 풍요, 평등, 인격의 전면화, 높은 수준의 문화적 훈련을 전제로 하고 있다.

 

모든 사회적 관계에 있어서 소련은 공산주의 사회라기보다는 후진적인 자본주의 사회에 훨씬 가깝다. 따라서 재화를 "각자 필요에 따라" 모두에게 분배하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다. 바로 이 때문에 소련은 인민에게 "각자 능력에 따라" 일하도록 허용할 수가 없다. 따라서 도급제를 시행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다. 도급제의 원리는 이렇게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서 가능하면 많은 노동량을 빼내고 가능하면 적게 생산물을 나누어 주어라." 물론 소련에서 절대적 의미에서 자신의 "능력" 즉 육체적 정신적 잠재력을 능가하면서 일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이것은 자본주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가장 세련되고 잔인한 착취방식도 자연이 설정한 한계를 넘을 수는 없다. 채찍을 맞으며 일하는 나귀조차 "능력에 따라" 일한다. 그렇다고 채찍이 나귀의 사회적 원리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소련에서조차 임금노동은 굴욕스러운 노예의 징표를 달고 있다. "각자 노동한 만큼" 임금을 지불하는 것은 실제로는 육체노동 특히 미숙련 노동을 희생시키면서 정신노동이 이익을 보는 임금지불 방식인데 다수에게는 불공평, 억압, 강제를 극소수에게는 특권과 "행복한 삶"을 가져다 준다.

 

노동과 분배의 부르주아 규범이 아직도 소련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대신 헌법 기초자들은 이 공산주의 원칙을 둘로 잘라서 두 번째 구성부분을 시기가 정해지지않은 미래로 연기하고 첫 구성부분은 이미 성취되었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여기에다 기계적으로 자본주의 도급제 원리를 접합시켰다. 그리고 이것을 전부 "사회주의 원칙"이라고 이름붙이고 이 거짓에 근거하여 헌법을 만들었다!

 

경제와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조항은 의심의 여지없이 제10조이다. 이 조항은 대부분 조항들과 달리 관료집단의 침해에 대해 가정용품, 소비제품, 편의품, 일상용품 등 인민의 개인 재산을 보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가정용품"을 제외하고 이런 종류의 재산에 붙어 있는 탐욕과 시기심을 제거하면 이것은 공산주의에서 보호될 뿐 아니라 사상 유례없이 증대될 것이다. 물론 문화수준이 높은 사람이 부담을 느끼며 사치품을 좋아할 지는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안락을 보장하는 문명의 성과들을 그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공산주의의 첫 과제는 모든 사람에게 안락한 삶을 보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소련에서 개인 재산은 여전히 공산주의적 측면이 아니라 소부르주아적 측면을 가지고 있다. 농민과 가난한 도시인의 재산은 관료집단의 터무니 없는 자의적 행위의 표적이 되고 있다. 하급 관료들은 빈번하게 이 방식을 통해 자신들의 상대적 안락을 보장받는다. 농촌에서도 이제 물질적 상황이 개선되었으므로 개인의 재산을 몰수할 필요는 없어졌다. 그리고 정부는 노동생산성을 올리는 자극제인 개인의 재산 축적을 옹호하지 않을 수 없다. 동시에 농민, 노동자, 사무직 노동자의 오두막집, 소, 가재도구나 물품이 법으로 보호됨으로써 관료의 공회당, 여름 별장, 자동차, 그리고 기타 "개인 소비재와 편의품"이 합법화되고 있다. 이것은 관료집단에게는 사소한 일이 아니다. 물론 이 물품들은 모두 "각자 능력에 따라 일하고 각자 노동한 만큼 소비한다"는 "사회주의적" 원칙에 따라 관료 자신이 벌어들인 것이다. 관료의 승용차는 새로운 기본법에 의하여 농민의 마차보다 더 효과적으로 보호받을 것이 틀림없다.

 

2. 소비에트와 민주주의

 

정치분야에서 새로운 헌법이 구헌법에 비해 두드러지는 점은 계급과 산업그룹 별로 선거가 이루어진 기존의 소비에트 체제가, 원자화된 개인들이 소위 "보편, 평등, 직접"의 원칙에 기초하여 선거를 치르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체제로 회귀한 것이다. 이것은 간단히 말해 노동계급 독재를 법적으로 청산하는 것을 의미한다. 새로운 헌법의 기초자들에 의하면 자본가가 없으면 노동자도 없으며 따라서 국가도 노동자국가에서 전체 인민의 국가로 변모했다. 이 주장은 겉으로 보면 상당히 매력이 있는데 19년 늦었거나 시대에 대단히 앞선 생각이다. 자본가를 몰수하면서 노동계급은 계급으로서 자신을 해소하는 작업에 들어섰다. 그러나 원칙적인 청산이 아니라 실제로 사회 내부로 해소되는 과정은 좀더 긴 시간을 요하는 과업이다. 그리고 새로운 국가가 자본주의의 기본 사업들을 수행하지 않을 수 없을 때는 이 시간이 더욱 길어진다. 소련의 노동계급은 농민, 기술 인텔리, 관료집단과 아직까지 매우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더욱이 노동계급은 사회주의의 승리가 달성될 때까지 투쟁할 유일한 계급이다. 새로운 헌법은 노동계급이 경제적으로 사회 속에 해소되기 오래 전에 이미 정치적으로 "인민" 속으로 해소되기를 원한다.

 

헌법 기초자들은 물론 약간 동요하다가 국가를 전처럼 소비에트라고 부르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것은 나폴레옹 제국이 계속 공화국으로 불린 것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고려에서 나온 조야한 술수에 불과하다. 소비에트는 본래 계급지배의 기관이며 다른 어떤 것도 될 수 없다. 지방자치를 위해 민주적 선거에 의해 성립되는 단체들은 시, 듀마, 젬스트보, 아니면 무엇이든지 될 수 있다. 그러나 소비에트는 될 수 없다. 민주적 절차에 따라 성립된 의회는 한참 늦은 지각 의회이거나 그것의 우스꽝스런 형태에 지나지 않을 뿐 소비에트의 가장 높은 기관은 결코 아니다. 소비에트 제도의 역사적 권위를 빌리기 위해 헌법 기초자들은 새로운 행정 기본단위들이 원래 이름을 갖지않도록 조심하고 있다.

 

경제와 문화의 일반적 상태에 의해 노동계급이 나라 전체에 미치는 영향력이 충분히 보장되어 있다면 노동자와 농민이 정치적 권리를 평등하게 소유하고 있어도 국가의 사회적 성격은 파괴되지 않는다. 확실히 사회주의는 이 방향으로 발전해야 한다. 그러나 노동계급이 인구의 소수에 불과하고 정치적 지배력을 장악하지 않았는데도 정치체제가 사회주의로 발전한다면 이것은 국가의 강제력 자체가 소멸되고 대신 문화적 훈련이 사회주의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거의 불평등이 철폐되려면 국가의 강제적 기능들이 명확히 약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에 대해 새로운 헌법은 전혀 말이 없다. 더 중요한 것은 현실이 이것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국가의 강제적 기능들은 더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새로운 헌법은 인민에게 소위 표현, 언론, 집회, 시위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보장들의 각론에서는 무거운 재갈이나 족쇄가 채워져 있다. 언론의 자유는 선거에 의해 뽑히지 않은 중앙위원회 비서가 잔인한 사전 검열을 계속 유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물론 비잔틴 제국에 등장했던 비굴한 아양의 자유가 완전히 "보장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유언장'을 마지막으로 장식한 레닌의 수많은 논문, 연설, 편지들은 새로운 헌법 하에서도 계속 공개되지 않고 자물쇠가 채워진 금고 속에 낮잠을 자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레닌의 저작들은 새 지도자들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레닌의 경우에도 이러한데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과학, 문학, 예술에 대한 조야하고 무식한 통제는 계속될 것이다. "집회의 자유"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특정 집단들이 미리 준비된 결의문을 채택하도록 당국에 의해 소집될 자유를 의미할 것이다. 구헌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헌법에서도 수백 명의 외국 공산주의자들이 소련의 "망명권"을 믿고 국내에 들어왔다가 감옥과 집단수용소에 갇힐 것이다. 이들의 죄목은 지도자의 무오류에 대항한 범죄이다. "자유"에 관한 한 모든 것은 과거와 다름없을 것이다. 소련의 언론조차도 이 점에 대해서만은 어떠한 환상도 대중에게 유포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와 반대로 새로운 헌법의 주요 목표는 "독재를 더욱 강화하는 것"이라고 선언되고 있다. 그러나 누구의 독재이며 누구에 대한 독재인가?

 

당국이 이미 말했듯이 사회의 모든 구성원에게 정치적 평등이 주어질 조건은 계급모순의 철폐로 준비되었다. 이제 계급독재는 "인민"독재로 전환해야 한다. 그러나 독재의 담지자가 계급모순으로부터 해방된 인민이라면 독재는 해체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무엇보다도 관료집단의 해소를 의미한다. 이것이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내용이다. 어쩌면 당국이 실수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아주 조심스럽게 새로운 헌법의 기초자들은 레닌이 작성한 당 강령을 가리키며 자신들의 주장이 옳다고 말한다. 그러나 당 강령이 말하는 바는 바로 이것이다: "‥‥ 정치적 권리의 박탈과 자유에 대한 모든 제한 조치들은 일시적 조치일 뿐이다‥‥ 인간의 인간에 대한 착취가 사라질 객관적 가능성이 커질수록 이 임시조치들의 필요성도 같은 정도로 점점 사라질 것이다." 따라서 "정치적 권리의 박탈"을 철폐하여 정치적 권리를 회복시킨다는 것은 곧 "모든 자유에 대한 제한"을 철폐하는 것이다. 소련이 사회주의에 도달했다면 농민은 노동자와 평등하게 권리를 누리고 부르주아 출신의 시민 일부에게도 정치적 권리들이 회복되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구의 100%에게 실질적 자유가 주어져야 한다. 계급이 일소되면 관료집단과 독재 뿐 아니라 국가도 사멸한다. 그러나 신중하지 못한 누가 이 논리를 제시했다고 하자. 그러면 비밀경찰은 새로운 헌법에서 그를 수많은 강제수용소 가운데 한 곳에 보낼 적절한 근거를 찾을 것이다. 계급은 철폐되었다. 소비에트는 이름만 있을 뿐 실제하지 않는다. 그런데 관료집단은 아직도 있다. 노동자와 농민 사이의 정치적 권리의 평등은 실제로는 관료집단 앞에서 똑같이 권리를 박탈당하고 있는 현실을 달리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비밀투표의 도입도 역시 중요한 사항이다. 새로운 정치적 평등이 이미 달성된 사회적 평등과 조응한다고 생각한다면 풀리지 않는 문제가 하나 있다. 그렇다면 왜 투표가 앞으로는 비밀에 의해 보호받아야 하는가? 사회주의 국가의 인민은 정확히 누구를 두려워하고 있으며 누구의 모략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하는가? 소련의 구헌법은 선거권을 불평등하게 부여했을 뿐 아니라 공개투표를 실시하여 부르주아 및 소부르주아 적들을 통제하였다. 이제 반혁명분자 소수를 위해 비밀투표가 도입된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비밀투표 실시는 확실히 인민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취해진 조치이다. 그러나 차르, 귀족, 부르주아지를 최근에 타도한 사회주의 인민 때문에 누가 두려움에 떨고 있는가? 관료집단에게 아양을 떠는 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문제에는 바르뷔스, 루이스 피셔, 두란티, 웹(Webb) 등등의 모든 저술들보다 더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비밀투표는 피착취자들을 착취자의 테러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시행된다. 부르주아 계급은 대중의 압력을 받고 마침내 이 개혁을 시행하였다. 최소한 부분적으로는 자신의 국가를 보호하기 위해 부르주아 독재에 대한 대중의 두려움을 해소해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착취자의 테러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누구로부터 소련 인민을 보호하는 것이 필요한가? 대답은 명확하다: 관료집단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 필요하다. 스탈린은 정직하게 이 점을 인정했다. 왜 비밀선거가 필요한가 라는 질문에 그는 정확히 이렇게 대답했다: "소련 인민이 선출하고 싶은 사람에게 표를 던질 수 있는 안전한 자유를 부여하고 싶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 인류는 오늘날 "소련 인민"이 자신이 원하는 사람에게 표를 던질 권리가 없다는 것을 이 권위있는 인물의 말을 듣고 확실히 알았다. 이로부터 새로운 헌법이 소련 인민에게 장차 원하는 사람을 뽑을 수 있는 권리를 정말로 부여할 것이라고 결론내리는 것은 성급할 것이다. 그러나 바로 지금 우리는 이 문제의 다른 측면에 정신이 쏠려 있다. 정확히 누가 인민에게 자유로운 투표권을 주거나 빼앗을 수 있는가? 스탈린이 대표로서 말하고 행동하는 관료집단이 바로 소련 인민에게 이 권리를 주거나 빼앗을 수 있는 유일한 집단이다. 스탈린은 자신의 정체를 폭로함으로써 국가와 당의 정체 역시 폭로했다. 왜냐하면 인민이 원하는 사람을 뽑을 수 없게 하는 체제의 도움으로 당 총서기의 직위를 차지하고 있는 자가 바로 스탈린이기 때문이다. "소련 인민에게 선거의 자유를 부여하고 싶다"는 말은 구헌법과 새로운 헌법을 다 합친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이 더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왜냐하면 이 부주의한 말 한마디에 진짜 헌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헌법은 종이 위가 아니라 실제 살아 움직이는 세력들의 투쟁에 의해 작성된다.

 

3. 민주주의와 당

 

소련 인민에게 "선출하고 싶은 사람에게 표를 던질" 자유를 주겠다는 약속은 정치적 정식이라기보다는 시적인 수사에 지나지 않는다. 당의 중앙과 지방의 지도자들이 후보자들을 제시하고 이들 중에서 "대표"를 선출할 권리만 인민에게 있다. 물론 소비에트 정권 초기에 볼셰비키당도 정치활동을 독점했다. 그러나 이 두 현상을 동일하게 보는 것은 겉모습을 현실과 혼동하는 것과 같다. 야당의 활동을 금지한 것은 내전, 제국주의세력의 경제 봉쇄와 군사적 개입, 기아 등의 상황 때문에 강요된 것이었다. 집권당은 당시 노동계급의 진정한 전위부대였으며 당 내부에서는 제한없는 활발한 정치활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당내 그룹과 분파의 투쟁은 어느 정도 정당들 사이의 투쟁을 대신하고 있었다. 현재 사회주의가 "최종적으로 역전될 수 없이" 승리한 상황에서 분파를 구성하는 것은 집단수용소에 보내지거나 총살형에 처해지는 범죄가 되었다. 야당의 금지는 일시적인 필요조치에서 이제 하나의 원칙으로 격상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헌법이 출간되는 바로 그 순간에 공산주의 청년동맹은 정치 문제를 다룰 권리를 박탈당했다. 더욱이 소련 시민은 18세부터 참정권을 부여받지만 1936년까지 존재했던 공산주의 청년동맹의 가입 연령제한선(23세)은 이제 완전히 철폐되었다. 정치는 대중의 통제를 받지 않는 관료집단의 독점물이라고 최종 선언되었다.

 

새로운 헌법에 명시된 당의 역할에 대한 로이 하워드의 질문에 대해 스탈린은 이렇게 대답했다: "계급이 없고 계급 사이의 장벽이 사라지고 있는 상황에서 사회주의 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소규모 계층 사이의 차이는 근본적인 것이 아니다. (계급이 없다고 해놓고 계급 사이의 장벽이 사라지고 있다고 말하다니!) 정당들이 설립되고 서로 투쟁할 객관적 근거가 없다. 계급이 없는데 여러 개의 정당이 존재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정당은 계급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전부 틀리다. 스탈린에 의하면 계급은 모두 동질성을 갖추고 있다. 계급간의 경계는 아주 명확히 그리고 영원히 구분되어 있다. 계급의 의식은 자신의 사회적 위치에 엄격하게 조응한다 등등. 이렇게 해서 정당의 계급적 성격에 대한 마르크스의 가르침은 우스꽝스러운 몰골을 띠게 되었다. 행정 명령의 편의를 위해 정치의식이 역사 과정에서 배제되어 있다. 실제로 계급은 내부 구성이 이질적이다. 그리고 계급 내부의 적대에 의해서 찢겨져 있다. 경향, 그룹, 정당 등이 계급 내부에서 진행하는 투쟁을 통해서만 공동의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다. 약간의 유보조항을 달면 "당이 계급의 일부이다"라고 인정할 수는 있다. 그러나 계급은 많은 구성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미래를 바라보는 진보 그룹과 과거를 회상하는 반동 그룹이 있다. 따라서 같은 계급이 여러 개의 정당을 만들 수도 있다. 같은 이유 때문에 하나의 정당이 각기 다른 계급들의 부분들로 구성될 수도 있다. 하나의 계급에 조응하는 하나의 정당은 정치역사상 존재해 본 적이 없다. 물론 경찰이 강요하는 겉모습을 현실과 혼동하지 않을 경우에만 이 말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의해 노동계급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이질성이 적은 계급이다. 그러나 노동귀족이나 노동관료 등 "소규모 계층"의 존재로 인해 기회주의 정당들이 등장하여 부르주아 계급지배의 무기로 전화한다. 스탈린주의 사회학에서 노동귀족과 노동대중 사이의 차이가 "기본적"인지 아니면 "약간 그런 성격이 있는 것"인지는 알수 없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과 결별하여 제3인터내셔널을 창립할 필요성이 제기된 것은 바로 이 차이에서 나왔다. 소련 사회에서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 사회는 최소한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계급보다 비교할 수 없이 더 이질적이고 복잡한 구성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여러 정당들이 활동할 비옥한 토양을 제공할 수 있다. 신중하지 못하게 이론 영역에 뛰어들면서 스탈린은 자신이 원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입증했다. 그의 논지에 의하면 소련에는 다른 정당들이 존재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단 하나의 정당도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는 정치도 일반적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이 만든 법칙을 통해 스탈린은 자신이 총서기 직을 맡고 있는 정당을 옹호하는 "사회학적" 결론을 이끌고 있다.

 

부하린은 다른 각도에서 이 문제를 접근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소련이 자본주의로 다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사회주의로 전진할 것인가의 문제는 소련 내부에서는 논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이미 일소된 적대 세력들이 정당을 구성하는 것은 허용될 수 없다." 사회주의가 승리한 나라에서 자본주의 세력들은 정당을 구성할 능력이 없는 우스꽝스러운 돈키호테에 지나지 않을 뿐 아니라 현존하고 있는 정치세력들은 사회주의 지향 또는 자본주의 지향의 범주 속에 결코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물론 다른 문제들이 있다. 어떻게 사회주의로 나아갈 것이냐 그리고 어떤 속도로 나아갈 것이냐 등등. 길을 선택하는 것은 목표를 선택하는 것만큼 중요하다. 누가 길을 선택할 것인가? 정당이 성립할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이 정말로 사라졌다면 정당활동을 금지할 이유가 없다. 정말 당 강령에 따라 "자유에 대한 어떤 종류의 제한"도 철폐해야 할 때가 되었다.

 

로이 하워드가 가질 자연스런 의구심을 해소시키기 위해 스탈린은 새로운 제안을 내놓았다: "후보자 명단은 공산당 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사회단체들이 제출할 것이다. 그러면 후보는 수백 명이 됩니다‥‥그러면 수없이 많은 사회단체들을 통해 소규모 계층 하나하나가 자신의 특별한 이해를 반영할 수 있다( 혹시 표현한다는 말을 쓰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이 궤변은 다른 궤변만큼이나 설득력이 없다. 소련의 사회단체인 노동조합, 협동조합, 문화단체 등은 "소규모 계층"들의 이해를 조금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단체들은 모두 하나같이 똑같은 위계체제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노동조합이나 협동조합과 같이 대중의 이해를 대변하는 단체의 경우도 적극적 역할은 언제나 상층 특권집단이 독점적으로 행사하고 있으며 결국 최종 결정은 "당"이 내린다. 즉 관료집단이 이 단체들을 철저히 통제하고 있다. 헌법은 대중이 투표로 선택할 후보자를 폰티우스(Pontius)에서 빌라도(Pilate)로 바꾸었을 뿐이다. (역자 주: 폰티우스 빌라도는 예수의 처형을 승인한 유태인 출신 로마총독이었다.)

 

기본법은 당이 정치활동을 독점하는 체계에 완벽한 정밀성을 부여하였다. 정치체제와 관련된 헌법 조항인 126조는 모든 남성과 여성이 노동조합, 협동조합, 청년단체, 체육단체, 국방단체, 문화단체, 기술단체, 과학단체 등에 가입할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 그러나 권력 집중체인 당은 모든 인민의 권리에 속하는 문제가 아니라 소수가 누리는 특권에 속하는 문제이다. "‥‥‥‥ (관료지배층이 보기에) 가장 활동적이고 의식적인 시민들은 공산당으로 통일되어 있다‥‥‥‥당은 모든 사회 및 정부 기구의 지도적 중핵을 형성하고 있다." 이 놀라울 정도로 정직한 발언이 바로 헌법에 명시되어 있다. 결국 관료집단에게 철저히 통제되어있는 하부기관인 "사회단체"의 정치적 역할이 얼마나 허구에 지나지 않는 지를 이 문구가 전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정당들 사이의 투쟁이 존재할 필요가 없다고 해도 혹시 일당 내에 존재하는 분파들이 이러한 민주적 선거에 모습을 나타낼 수 있지 않을까? 당내 분파의 문제에 대한 어느 프랑스 언론인의 질문에 대해 몰로토프는 이렇게 대답했다: "당내에 ‥‥ 특별 분파들을 구성하려는시도가 있어 왔다‥‥‥‥그러나 상황이 근본적으로 변한 지 이미 몇년이 지났다. 그래서 공산당은 실제로 하나의 통일적인 단위가 되었다." 이 발언은 계속되는 숙청과 집단수용소의 존재에 의해 가장 잘 증명되었다. 몰로토프의 논평에 따르면 민주주의 절차는 완벽하게 명쾌하다. 빅토르 세르쥬(Victor Serge)가 묻는다: "요구를 제출하거나 비판적인 견해를 표현한 모든 노동자가 감옥에 갇힌다면 10월 혁명이 남긴 것이 무엇인가? 감옥에 다 집어놓고 나서 하고 싶은 대로 비밀투표를 실시하면 되겠지!" 사실이다. 히틀러조차 비밀투표를 침해하지는 않았다.

 

계급과 당의 관계에 대해 헌법 기초자들은 머리카락을 가르듯이 세세하게 이론적으로 논의했다. 그러나 이것은 사회학적 문제가 아니라 물질적 이해관계의 문제이다. 소련에서 모든 것을 독점하는 집권당은 관료집단의 정치기구이므로 관료집단은 이제 얻을 것은 하나도 없고 잃을 것 밖에 없다. 이들은 자기 혼자만을 위해 정당활동의 "비옥한 토양"을 보존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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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마그마가 아직 식지 않은 나라에서 특권을 소유하고 있는 자들은 마치 얼치기 도둑이 금시계를 훔쳐서 크게 당하는 것처럼 특권을 보유하면서 크게 당하고 있다. 소련의 지배층은 부르주아들이 대중을 두려워하는 것과 똑같이 대중에 대한 두려움을 배우고 있다. 스탈린은 코민테른의 도움을 받아 관료지배층의 점점 증대되는 특권을 "이론적으로" 합리화하고 있다. 그리고 대중의 불만을 강제수용소로 다스리고 있다. 이런 방식이 계속 작동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스탈린은 가끔 관료집단에 대항해 "인민"의 편에 서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관료집단은 그의 행위를 암묵적으로 승인하고 있다. 국가기구를 집어 삼키고 있는 부패를 최소한 부분적이나마 척결하기 위해 비밀투표에 의존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그는 배우고 있다.

 

이미 1928년에 라코프스키는 표면에 드러나고 있던 관료들의 조직적 부정에 대해 많은 예를 들고 있다: "비리 스캔들이 퍼지고 있는 가운데서 가장 특징적이며 가장 위험한 현상은 일반대중보다 특히 평당원들이 더 수동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권력층에 대한 두려움이나 단순히 정치적인 무관심으로 인해 이들은 이런 사건들에 대해 항의도 하지 않고 그냥 모른체 하고 있다. 아니면 단순히 흔자서 불평하는 것으로 그치고 있다." 이때 이후 이미 8년이 지났는데 상항은 비교할 수 없이 더 나빠졌다. 정치기구의 부패는 모든 곳에서 드러나고 있는데 이제 국가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 국가는 더 이상 사회주의 건설의 도구가 아니며 지배층의 권력, 수입, 특권의 원천에 불과하다. 스탈린은 개혁을 실시하는 동기를 암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로이 하워드에게 말했다. "전혀 효율성이 없는 기구들이 적지 않다‥‥‥‥ 소련의 비밀투표는 대단히 비효율적인 권력기구를 대중이 채찍질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가질 것이다." 대단히 놀라운 고백이다! 관료집단이 자신의 손으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했는데 이제 ‥‥‥ 채찍이 필요하다니! 이것이 헌법을 개정해야 하는 동기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동기가 또 있다.

 

소비에트를 해체함으로써 새로운 헌법은 노동자를 일반대중 속으로 해소시켜 버렸다. 물론 정치적으로 소비에트는 이미 오래 전에 의의를 상실했다. 그러나 새로운 사회적 적대관계가 증대하고 있으며 새로운 세대가 각성하고 있는 상황에서 소비에트는 다시 소생할지도 모른다. 활기차고 많은 것을 요구하는 공산주의자 청년들이 점점 많이 참여하고 있는 도시 소비에트가 관료집단에게는 물론 가장 큰 두려움의 대상이다. 도시에서는 사치와 결핍의 대비가 너무도 뚜렷하게 눈에 보인다. 관료집단의 첫번째 관심은 노동자와 적군 소비에트를 제거하는 것이다. 농촌에 흩어진 인구는 불만을 가지고 있어도 처리하기가 훨씬 쉽다. 집단농장의 농민들을 도시 노동자에게 대항하도록 부추길 수 있으며 어느 정도 성공을 기대할 수도 있다. 관료 반동집단이 도시와 투쟁하기 위해 농촌에 의존하는 경우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새로운 헌법은 대부분 부르주아 국가들의 민주헌법보다 정말 우월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 우월한 측면도 10월 혁명이 탄생시킨 기본 문서들에 물을 타서 멀겋게 만든 것에 불과하다. 그동안 성취된 경제적 성과들에 대한 평가도 현실을 왜곡하고 거짓 전망을 수립하거나 단순히 허풍을 떠는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유와 민주주의에 관한한 헌법 전체에는 월권과 냉소의 분위기가 철저히 스며들어 있다.

 

새로운 헌법은 사회주의 원칙에서 부르주아 원칙으로 엄청나게 후퇴하고 있는 현실을 나타내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관료지배층의 의도에 맞게 자르고 꿰맨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다. 국제연맹을 위해 세계혁명 전망을 포기하고, 부르주아 가족을 부활시키며, 민병대를 상비군으로 대체하고, 군대에서 계급과 훈장을 부활시키고, 불평등을 증대시키는 등 관료집단의 정치 궤적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특별 계급"인 관료집단의 절대주의를 법적으로 강화시키면서 새로운 헌법은 새로운 유산계급의 탄생을 위한 정치적 전제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 차례로 돌아가기

제11장 소련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1. 보나파르트 체제: 정치적 위기의 산물

 

이미 앞에서 이렇게 문제를 제기한 적이 있다: "수없이 많은 오류를 저지른 관료지배층이 어떻게 무소불위의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는가?" 이 문제를 다른 말로 표현해보자: "테르미도르 반동을 주도한 집단의 지적인 빈곤과 이들이 휘두르는 물질적 위력 사이의 모순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이제 이 문제에 대한 좀더 구체적이고 단정적인 대답을 시도해 보자. 소련 사회는 결코 평온하지 않다. 한 계급·계층에게 죄악이 되는 것은 그 적대 계급·계층에게는 미덕이 된다. 사회주의적 소유형태의 관점에서 보면 관료집단의 정책은 놀라우리만치 모순과 비일관성으로 가득차 있다. 그러나 이 똑같은 정책은 관료집단의 권력기반을 강화시키는 측면에서는 매우 일관성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1923년부터 1928년까지 당국은 쿨락 즉 부농을 지지했는데 이 정책은 사회주의의 미래를 위해서는 치명적인 위협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소부르주아 계급의 지원을 받은 관료집단은 노동계급 전위부대의 손과 발을 묶고 볼셰비키 좌익반대파를 탄압하는 데 성공했다. 사회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명백한 "오류"인 이 정책은 관료집단에게는 순도 100%의 승리였다. 그러나 급성장한 쿨락이 관료집단을 직접 위협하기 시작하자 관료집단은 쿨락에게 총칼을 들이대었다. 쿨락의 증대된 세력에 깜짝 놀란 관료집단은 반격을 가했는데 이 공격은 쿨락 뿐 아니라 중농도 타격대상으로 삼았다. 이 곁과 제국주의 세력의 개입에 의한 내전만큼이나 경제에 치명적인 손실이 발생했다. 그러나 관료집단은 자신의 정치적 요새를 지키는 데 성공했다. 과거의 동맹군을 전멸시키는 데 겨우 성공하자 이들은 모든 힘을 다해 새로운 귀족층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말한 일련의 사태는 사회주의 미래에 손상을 입히지 않았는가? 물론 그렇다. 그러나 어쨌든 관료지배층은 권력기반을 강화할 수 있었다. 소련의 관료집단은 다른 모든 지배계급과 동일하다. 정치 일반의 영역에서 이들은 자신의 지도자들이 가장 조야한 수준의 오류를 범해도 눈을 감아줄 용의가 있다. 이 오류투성이의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특권을 방어하는 데 무조건적인 충성을 바치기만 하면 만사형통인 것이다. 새로운 지배집단이 자신을 위협하는 세력에 대해 경계심을 곧추 세우면 세울수록 자신들이 정당하게 얻은 권리를 조금이라도 위협하는 세력들에 대한 가차없는 공격을 그만큼 더 좋아한다. 바로 이 가차없는 무자비함이야말로 새로운 지도자의 자질이 되어야 한다. 이제 스탈린이 정치적 성공을 거둔 비결이 어디에 있는 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관료집단의 권력과 자율성에도 한계가 있다. 총사령관이나 심지어는 총서기보다 더 강력한 역사적 요인들이 존재한다. 정확한 회계가 없는 합리적인 경제운영은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정확한 회계는 관료집단의 자의적 성격과 양립할 수 없다. 안정적인 루블화를 복권시키려면 "지도자들"의 자의가 통화정책에 개입되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관료집단의 전제정치는 생산력의 발전에 점점 커다란 모순으로 작용하고 있다. 유럽의 절대왕정이 당시 확립되고 있던 부르주아적 시장 질서와 화해할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루블화를 안정시켜야 한다는 절대적 필요가 관료집단의 정치를 억누르고 있다. 그러나 화폐 회계는 국민총생산의 분배를 둘러싼 다양한 세력들의 투쟁에 좀더 공개적인 성격을 부여하지 않을 수 없다. 식량배급표가 시행되던 시기에 무관심의 대상이었던 임금 수준은 이제 노동자들에게는 아주 결정적인 사안이 되고 있으며 이와 함께 노동조합의 문제도 새로 제기되고 있다. 노동조합 관료들을 상부에서 지명하는 관행은 일반 노동자들의 점점 더 커다란 저항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도급제 하에서는 노동자들이 공장 관리자들의 정확한 주문에 대해 직접적인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스타하노프 운동원들은 생산조직의 문제점들에 대해 더욱 크게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공장 책임자와 엔지니어를 임명하는 관행이었던 관료의 친·인척 등용은 더욱 참을 수 없는 일이 되고 있다. 협동조합과 국가의 상거래는 과거보다 더 크게 제품 구매자에게 의존하고있다. 집단농장과 개인소유 농민들은 꼼꼼한 계산을 통해 국가와 거래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지방 관료들과 친분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지도자가 상부에 의해 빈번하게 임명되는 현상을 이들은 더 이상 비굴하게 좌시하지 않는다. 그리고 화폐 회계를 통해 가장 비밀스러운 영역에 속하는 관료들의 합법적·불법적 수입 내역이 밝혀지고 있다. 따라서 정치활동이 철저하게 억압당하고 있는 나라에서 화폐 유통은 반체제 세력들을 동원하는 중요한 지렛대가 되고 있으며 소련판 "계몽" 절대주의(enlightened absolutism)의 종말 시점을 예측해주고 있다.

 

공업이 성장하고 농업이 국가계획 영역으로 들어오면서 당국의 과업은 대단히 복잡한 성격을 띠게 된다. 그리고 제품의 품질 문제가 전면에 제기된다. 그러나 관료주의는 품질의 개선을 가능하게 하는 창의성과 책임의식을 파괴한다. 관료주의의 궤양은 거대공업에서는 그리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협동조합, 경공업, 식품공업, 집단농장, 소규모 지방공업 등 인민의 생활에 가장 가까운 경제부문들을 파괴하고 있다.

 

자본주의 기술의 가장 중요한 요소들이 소련에 도입되는 과정에서 관료집단의 진보적인 역할이 모습을 드러냈다. 혁명이 다져 놓은 집단적 소유의 기반 위에 자본주의 선진 기술의 도입, 모방, 이전, 접목 등 거치른 작업이 수행되었다. 기술, 과학, 예술 분야에서 자본주의의 성과들이 이식되면서 소련은 신조어를 발명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관료적 명령으로 서방의 유형을 그대로 모방한 거대한 공장들이 건설 수 있다. 물론 자본주의 모국에 비교해서 이 공장들은 세 배나 더 많은 비용을 잡아먹는다. 그러나 경제발전이 진척되면 될수록 품질 문제가 점점 중대 사안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이 문제는 마치 그림자처럼 관료집단의 통제에서 벗어난다. 소련의 제품들은 (품질에 대한) 무관심이라는 회색 상표를 부착한 것처럼 보인다. 국유화 경제에서는 생산자와 소비자가 다 같이 민주주의, 비판의 자유, 창의성을 발휘해야 품질 개선이 가능하다. 그러나 당연히 이 필요조건들은 두려움, 거짓말, 아첨이 지배하는 전체주의 체제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

 

기술과 문화를 독창적으로 창조하는 문제는 품질 개선의 문제보다 더 복잡하고 규모가 크다. 투쟁은 모든 사물의 아버지라고 어느 고대 철학자가 말했다. 생각이 자유롭게 투쟁하는 것이 불가능한 곳에서는 어떠한 새로운 가치도 창조될 수 없다. 물론 자유를 엄격하게 제한하는 것이 혁명 독재의 핵심이다. 따라서 혁명의 시기에는 문화 창조의 좋은 여건이 마련되지 않았다. 다만 문화 창조의 장애물을 제거하고 새로운 환경을 제공했을 뿐이다. 노동계급 독재는 독재의 성격을 지양하는 정도에 따라 인간의 천재성에 더 넓은 공간을 마련해 준다. 국가가 사멸하는 것과 비례하여 사회주의 문화가 융성할 것이다. 그러나 이 단순하지만 제거될 수 없는 역사법칙은 현재 소련의 정치체제에게 사형선고를 내리고 있다. 소비에트 민주주의는 추상적인 정책적 요구가 아니며 추상적인 도덕률은 더욱 아니다. 이것은 사회 발전의 사활을 결정하는 문제이다.

 

새로운 국가가 사회 전체의 이익만을 추구한다면 국가의 강제력이 사멸하는 과정은 갈수록 고통스럽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나 국가는 단순한 귀신이 아니다. 특정 기능들이 특정 기구들을 만들었다. 대체로 관료집단은 국가의 기능보다는 이 기능이 가지고 오는 재물에만 관심이 있다. 따라서 관료지배층은 국가라는 강제기구를 강화시키고 영구화하려고 노력한다. 자신의 권력과 수입을 보장하기 위해 이들은 수단과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정세가 자신에게 불리할수록 이들은 인민의 선진층에 대해 더욱 가차없는 폭압을 자행한다. 카톨릭 교회처럼 관료집단은 자신의 권력이 쇠퇴하자 무오류의 교리를 제시했다. 그러나 로마교황이 꿈도 꾸지 못할 정도로 이 교리를 신격화시켰다.

 

끈질기게 도를 더해가는 스탈린의 신격화는 우스꽝스러운 모든 요소에도 불구하고 체제를 지탱하는데 더없이 필요한 요소이다. 오류를 범할 수 없는 초능력의 심판관 또는 황제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제1집정관이 관료집단에게 필요하다. 그리고 이 지배집단은 자신의 지배권력을 가장 잘 대변해주는 자를 지도자로 세운다. 지도자의 "강인한 성격"은 서방의 아마추어 문학 애호가들을 사로잡는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의 지위를 방어하기 위해서는 아무 것도 거리끼지 않는 계층의 집단적 압력을 전부 합한 것에 불과하다. 이들 각자는 "짐은 곧 국가이다(L'etat --- c'est moi)"라고 생각하고 있다. 스탈린에게서 이들은 자기 모습을 본다. 그러나 스탈린 역시 이들 하나 하나에게서 자기 모습의 일부를 본다. 스탈린은 관료집단의 인격화이다. 실제로 관료집단은 그의 정치적 성격을 규정하고 있다.

 

사회의 양대 계급이 사회의 지배권을 놓고 서로 우위를 가릴 수 없이 격렬한 투쟁을 벌이는 시기가 있다. 이때 국가권력은 사회 위에 군림하여 이 계급들로부터 완전한 독자성을 보유한 존재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이 국가권력은 특권계급을 방어하는 데 필요한 자유만을 부여받았다. 이 역사적 순간에 카이사르 체제(Caesarism) 또는 이것의 부르주아 형태인 보나파르트 체제가 등장한다. 정치적으로 원자화된 사회 위에 경찰과 장교집단을 버팀대로 삼아 군림하면서 어떤 세력의 통제도 받지 않는 스탈린 체제는 보나파르트 체제의 변종에 불과하다. 그러나 역사상 유례가 없는 새로운 유형의 보나파르트 체제이다.

 

카이사르 체제는 사회 내부의 투쟁으로 흔들리고 있던 노예제 사회에 기초하여 등장하였다. 보나파르트 체제는 자본주의 체제의 중대 국면에 등장하는 부르주아 계급의 정치적 무기 중의 하나이다. 스탈린 체제는 이 체제의 변종이다. 그리고 조직력과 무장력을 겸비한 소련의 지배층과 비무장 근로대중 사이의 적대관계로 분열된 노동자국가에 기초하고 있다.

 

역사가 증명하듯이 보나파르트 체제는 보통선거권이나 비밀선거권을 허용해도 아주 잘 운영된다. 이 체제의 민주적 의례는 국민투표이다. 때때로 시민들은 이렇게 질문받는다: 지도자를 지지할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 그리고 이 유권자들은 자신의 양 어깨 사이에 권총의 총구가 겨누어져 있음을 느낀다. 시골뜨기 출신의 정치 아마추어 같은 나폴레옹 3세 이래 이 방식은 대단히 발전했다. 국민투표에 기초한 보나파르트 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소련 관료지배층은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였다. 결국 이것은 이 체제의 모습을 완성하는 왕관인 셈이다.

 

소련의 보나파르트 체제는 노동계급의 세계혁명이 늑장을 부리는 바람에 등장했다. 그러나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똑같은 이유로 파시즘이 등장했다. 소련에서는 무제한적인 권력을 휘두르는 관료집단이 소비에트 민주주의를 압살하고 있으며 서방에서는 파시즘이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압살하고 있다. 이 두 현상은 동일한 원인의 산물이다. 즉 역사가 제기한 문제들을 세계 노동계급이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발생했다. 이 결론은 처음에는 예상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불가피할 뿐이다. 스탈린 체제와 파시즘 체제는 사회적 기초는 판이하지만 동일한 현상이다. 이 두 체제의 특징은 지독히 비슷하다. 유럽 혁명운동의 성공으로 이 두 체제는 즉시 뒤흔들릴 것이다. 국제혁명에 등을 돌린 스탈린 관료집단은 자기 이익에 일치하는 행동을 실행에 옮긴 것 뿐이다. 단지 자신을 보존해야 한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을 뿐이다.

 

2. "계급의 적"에 대한 관료집단의 투쟁

 

소비에트 정권 초기에 당은 관료주의에 대해 투쟁했다. 관료집단이 국가를 운영했지만 당은 여전히 관료집단을 통제했다. 불평등이 필요 이상으로 증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매우 경계하면서 당은 항상 관료집단과 공개적으로 또는 비공개적으로 투쟁하였다. 스탈린 분파의 역사적 역할은 이 이중 구조를 깨뜨리고 당을 관료집단의 휘하에 두고 이후 국가기구마저 장악하는 것이었다. 이 결과가 지금의 전체주의 체제이다. 관료집단에게 매우 중요한 이 역사적 역할을 스탈린 자신이 수행했기 때문에 스탈린의 정치적 승리는 보장되었다.

 

결성 후 10년 동안 좌익반대파는 당에 대항하여 권력을 장악하는 강령을 제출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당의 이념을 장악하는 강령을 버리지는 않았다. 이 분파의 구호는 혁명이 아니라 개혁이었다. 그러나 관료집단은 민주 개혁에 대항해 자기 이익을 방어하기 위해 어떤 혁명도 수행할 용의가 있었다. 1927년 투쟁이 특히 치열했을 때 당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스탈린은 좌익반대파에 대해 이렇게 선언하였다: "좌익반대파 간부들은 내전을 통해서만 제거될 수 있다!" 당시 스탈린의 이 협박은 유럽 노동계급의 패배 때문에 인해 역사적 사실이 되었다. 따라서 개혁의 길은 이제 혁명의 길로 바뀌었다.

 

당과 소비에트 조직에 대한 계속적인 숙청은 대중의 불만이 명확하게 정치 노선으로 표현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탄압은 사상을 죽일 수 없으며 단지 지하로 내몰 수 있을 뿐이다. 공산주의자 뿐 아니라 비당원 시민도 흔히 두 가지 사고체계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공식 사고체계이며 또 하나는 비밀 사고체계이다. 첩자질과 소문 퍼뜨리기로 소련 전역의 사회적 관계들은 침해당하고 있다. 관료집단은 자신의 적을 언제나 사회주의에 대한 적으로 포장한다. 법적 날조행위는 관행이 되었는데 이 방법을 동원하여 사람들에게 자의적으로 죄를 뒤집어 씌운다. 총살형에 처한다는 협박을 통해 나약한 사람들로부터 자백을 강제로 받아내고 이것을 토대로 좀더 강인한 사람들을 법정에 내세운다.

 

1936년 6월 5일 『프라우다』는 "세계에서 가장 민주적인 헌법"에 대해 논평하면서 우리에게 이렇게 설교하고 있다: "소련에서 계급은 철폐되었다. 그러나 사회주의에 적대적인 계급 세력들이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다고 가정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어리석음이며 동시에 범죄행위이다.‥‥‥ 투쟁은 계속되고 있다." 그러면 "적대적인 계급세력"은 누구인가? 여기에 대해 『프라우다』는 이렇게 답변한다: "반혁명 그룹들의 잔당, 모든 색조의 백위군, 특히 트로츠키-지노비에프 파벌이다." 트로츠키-지노비에프 파벌(!)이 저지른 "첩자질, 음모, 테러행위"를 불가피하게 언급한 후 이 스탈린의 기관지는 이렇게 약속한다: "인민의 적인 트로츠키 파벌의 파충류들과 포악한 자들을 미래에 반드시 때려누이고 제거할 것이다.이들이 아무리 변장을 잘해도 우리는 이 일을 해내고야 말 것이다." 이 위협은 소련의 언론에 일상적으로 반복되고 있는데 비밀경찰의 작업과 병행되고 있다. 1918년 이래 당원으로 있으면서 내전에 참여하였고 이후 소련의 농업전문가이자 우익반대파의 일원이었던 페트로프(Petrov)는 1936년 유형지에서 탈출하여 어느 자유주의자 망명신문에 글을 실었다. 그는 소위 트로츠키주의자들을 이렇게 특징짓고 있다: "좌익이라고? 심리적으로는 마지막 남은 진정한 열정적인 최후의 혁명가들이다. 음험한 협상을 하지 않으며 어떠한 타협도 거부하였다. 대단히 존경스러운 사람들이다. 그러나 바보 같은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 이들은 세상이 대난(大難)을 겪고 있다고 허풍떨고 있었다." 그들의 "사상"은 논외로 하자. 그러나 우익 인사가 좌익에 대해 내린 이 도덕적 정치적 평가는 아주 훌륭한 증거가 아닌가? 비밀경찰의 대령과 장군들이 제국주의 첩자이며 반혁명 분자라고 낙인찍으며 심문하고 있는 사람들은 바로 "진정하고 열정적인 최후의 혁명가들"이다.

 

볼셰비키 좌익반대파에 대한 관료집단의 증오심은 히스테리로 발전하였다. 이 히스테리는 부르주아 출신에 대한 사회적 제한을 해제하는 조치와 관련하여 특별히 날카로운 정치적 의미를 갖는다. 부르주아 출신들의 고용, 일, 교육과 관련된 유화적인 포고령은 구지배계급의 저항은 신질서가 안정되는 것과 비례하여 소멸한다는 당국의 사고에서 나왔다. 1936년 1월 당 중앙집행위원회 회의에서 몰로토프는 이들에 대한 제한 조치가 더 이상 필요없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동시에 가장 지독한 "계급의 적"은 평생 사회주의를 위해 투쟁한 사람들이란 사실이 드러났다. 그리고 특히 이들은 지노비에프나 카메네프와 같이 레닌의 가장 가까운 동료들로부터 시작된다. 부르주아 계급과 구별되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은 『프라우다』에 의하면 "무계급 사회주의 사회의 특징들이 더 뚜렷하게 드러날수록" 더 절망한다. 이 철학의 정신착란적 성격은 새로운 사회관계들을 낡은 정식으로 은폐해야 할 필요에서 나온다. 그러나 당연히 사회적 적대관계의 진정한 변화를 은폐할 수는 없다. 한편 "신사" 계층의 창조는 부르주아 계급의 좀더 야망있는 자식들에게 출세할 수 있는 넓은 기회를 제공해 준다. 따라서 이들에게 동등한 권리를 주는 것은 조금도 위험하지 않다. 반면 이 조치는 대중 특히 청년 노동자들 사이에서 대단히 위험스런 불만을 조성한다. 바로 이 때문에 "파충류와 포악한 자들"에 대한 일소 캠페인이 벌어지고 있다. 노동계급 독재의 칼날은 원래 구부르주아 계급의 특권을 부활시키려는 자들에게 가해졌으나 이제는 관료집단의 특권에 대항하는 사람들에게 가해지고 있다. 이제 공격을 당하는 쪽은 노동계급의 적들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전위부대이다. 과거 정치경찰은 볼셰비키 당원 가운데 특히 헌신적이고 자기희생적인 분자들로부터 충원되었으나 이제는 관료집단의 가장 타락한 분자들로 구성되고 있다.

 

혁명가들을 박해하는 과정에서 테르미도르 반동의 주동자들은 자신의 과거를 생각나게 하고 미래를 두렵게 만드는 사람들에게 모든 증오심을 퍼붓고 있다. 감옥,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의 벽촌, 급격히 늘어나는 강제 수용소 등은 볼셰비키당의 가장 강인하고 진실한 최우수 당원들을 가두고 있다. 심지어 시베리아의 독방 감옥에서도 좌익반대파 성원들은 여전히 수색, 우편물 금지, 굶주림 등의 박해를 받고 있다. 저항을 깨뜨리고 전향을 유도하려는 유일한 목적을 위해 유형중인 남편과 부인은 강제로 분리되고 있다. 그러나 전향하는 사람들도 구제되지는 않는다. 조금이라도 의심스럽거나 끄나풀이 암시만 주어도 이들은 갑절로 벌을 받아야 한다. 친척들이 유형수들을 도와주는 것조차 범죄이다. 상호부조는 모의죄로 처벌받는다.

 

이 상황에서 자기방어의 수단은 단식투쟁 밖에 없다. 비밀경찰은 이에 대해 강제 급식을 시키거나 아예 죽도록 내버려 둔다. 최근 수백 명의 러시아인 또는 좌익반대파의 외국인 성원들이 총살, 단식투쟁, 자살 등으로 사망하였다. 지난 12년 동안 당국은 좌익반대파가 마침내 근절되었다고 수십 번이나 전 세계에 선언했다. 그러나 1935년 12월과 1936년 상반기에 걸쳐 진행된 "숙청"에서 수십만 명의 당원들이 제명되었다. 이들 중에는 수만 명의 "트로츠키주의자"가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이들 중 가장 적극적인 분자들은 즉시 체포되어 감옥과 강제수용소에 처넣어졌다. 제명된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일자리를 제공하지 말라고 스탈린이 직접 『프라우다』 지면을 통해 지방 당국에게 조언했다. 국가가 유일한 고용주인 나라에서 일자리를 주지 말라는 것은 서서히 굶어 죽게 내버려두라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일하지 않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는 옛날의 원리는 당국에 의해 복종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새로운 원리로 바뀌었다. 보나파르트 체제가 시작된 1923년 이래 얼마나 많은 볼셰비키들이 제명, 체포, 유형, 사형 등에 처해졌는지는 스탈린 정치경찰의 문서들을 검토하면 그 정확한 숫자가 드러날 것이다. 그리고 관료집단이 붕괴하기 시작할 때 이들 중 얼마나 많은 숫자가 지하활동에 가담했는지가 드러날 것이다.

 

2백만의 당원을 거느린 당에서 2만 내지 3만의 반대파가 어느 정도의미가 있을까? 단순한 수치 비교는 이 문제의 경우 별 의미가 없다. 격화되는 정치 상황에서는 10명의 혁명가만 있어도 일개 연대가 인민의 편으로 넘어을 수 있다. 바로 이 때문에 군 당국은 아주 작은 지하서클이나 개인들도 지독히 두려워 한다. 이 반동적인 군당국의 두려움은 스탈린 관료집단 전체에 확산되어 있다. 이들이 자행하는 탄압과 가증스러운 비방의 광적인 성격이 이로써 충분히 설명된다.

 

소련에서 관료집단의 탄압을 끝까지 견디었던 빅토르 세르쥬는 혁명에 대한 충성과 혁명 파괴세력에 대한 적대감을 품으며 고문의 고통을 견디고 있는 혁명가들의 놀라운 소식을 서방에 전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조금도 과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단어 하나 하나를 조심스럽게 선택하고 있다. 내가 한 말 하나 하나의 진실을 비극적인 증거와 피해자의 이름으로 증명할 수 있다. 다수의 순교자들과 반대자들은 현재 대개의 경우 침묵을 강요받고 있다. 이들 중에서 특히 심정적으로 나에게 가까운 영웅적인 혁명가들이 소수 존재한다. 이들은 활력, 통찰력, 인내, 위대한 시대의 정치사상인 볼셰비키주의에 대한 헌신 등으로 다른 어떤 분자들보다 소중한 사람들이다. 소비에트 공화국의 창건자인 레닌과 트로츠키의 동지들인 수천 명의 혁명적 공산주의자들은 체제의 퇴보에 저항하며 사회주의의 원칙을 수호하고 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노동계급의 권리를 방어하고 있다. 이들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희생을 전부 치르고 있다. 이것만이 이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정치투쟁이다‥‥‥‥ 여러분들에게 감옥에 있는 사람들의 소식을 전한다. 이들은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끝까지 저항할 것이다. 이들이 혁명의 새로운 여명을 볼 수 없다고 하더라도 ‥‥ 서방의 혁명가들은 이들을 믿을 수 있다. 감옥 안에서나마 혁명의 불꽃은 계속 타오를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들은 여러분을 믿고 있다. 여러분과 우리는 세계에서 노동자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그리고 노동계급 독재의 해방 정신을 부활시키기 위해 이들을 방어해야 한다. 이 결과 미래에 소련은 도덕적 위대성과 노동자의 신뢰를 다시 회복할 것이다."

 

3. 새로운 혁명의 불가피성

 

국가의 사멸에 대해 논하면서 레닌은 "만약 분노, 저항, 봉기 등을 불러일으키는 요소가 사라져서 인민을 억압할 필요가 전혀 없다면" 사회생활의 규칙을 준수해야 한다는 관습은 모든 강제성을 완전히 상실할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이 "만약"에 있다. 현재 소련 체제는 모든 곳에서 저항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 저항은 억압당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격렬하다. 관료집단은 강제력 행사의 기구일 뿐 아니라 저항을 촉발하는 끊임없는 원천이다. 탐욕스러우며 거짓말을 예사로 하는 냉소적인 지배집단의 존재 자체가 불가피하게 인민의 분노를 은밀하게 불러일으키고 있다. 노동자의 물질적 상황이 개선되어도 당국에 대한 이들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는다. 이와 반대로 노동자들이 점점 더 긍지를 갖고 정치 일반의 문제에 대해 자신들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할 경우 이들은 관료집단과 공공연하게 투쟁하게 될 것이다.

 

"연구"와 "기술 획득"의 필요성, "교양의 자발적 습득" 그리고 다른 멋진 일들에 대해서 성명서를 발표하는 것을 "지도자들"은 아주 좋아한다. 더욱이 이들은 선거나 그밖의 방식으로 교체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들은 무식하고 교양이 전혀 없다. 진지하게 연구하지도 않으며 사회생활에서 거만하며 충실하지 못한 모습을 보인다. 이 집단이 사회생활의 모든 영역을 보호하는 듯이 생색을 내며 협동조합 상점뿐만 아니라 음악 작곡에 대해서까지 명령을 내리려고 설치는 것은 더욱 참을 수 없는 일이다. 자신의 권력을 빼앗은 이 집단의 굴욕적인 지배에서 해방되지 않으면 소련 인민은 더 높은 문화수준에 도달할 수 없다.

 

관료집단이 노동자국가를 집어삼킬 것인가 아니면 노동계급이 이들을 쓸어 없애 버릴 것인가? 이 문제에 소련의 운명이 달려 있다. 소련의 노동자 절대 다수는 아직까지도 관료집단에 대해 적대감을 품고 있다. 농민 대중 역시 이들에 대해 건강한 인민의 증오심을 품고 있다.농민과 달리 노동자들은 공개적으로 투쟁에 나서지 않을 수도 있다. 이 결과 저항하는 농촌 마을들을 혼란과 무기력 속에 빠뜨릴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억압 때문만은 아니다. 노동계급은 관료집단을 타도하면 자본주의를 복귀시킬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국가와 계급 사이의 관계는 속류 "민주주의자들"이 설명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 계획경제가 없다면 소련은 수십 년 후퇴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관료집단은 계속해서 필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이 체제를 붕괴시켜 혁명의 성과를 완전히 무위로 돌릴 수 있다는 데에 있다. 노동자들은 현실적이다. 관료지배층 그리고 최소한 자신들과 가까이 있는 하급 관료집단을 이들은 현실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즉 당분간 관료집단이 노동계급이 달성한 혁명의 성과 중 일부만이라도 지켜줄 것이라고 믿고 있다. 노동자들은 다른 대안을 찾아내는 순간 이 부정직하고, 버릇이 없으며, 믿을 수 없는 혁명의 파수꾼을 몰아낼 것이 틀림없다. 바로 이 때문에 서방이나 동방에서 혁명의 아침은 한번 더 도래해야 한다.

 

크렘린궁의 친구들이나 하수인들은 노동자의 정치투쟁이 눈에 드러나지 않으면 체제가 "안정"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 관료집단의 안정은 일시적일 뿐이다. 대중의 불만이 깊은 골을 파고 있는 상황에서 젊은 세대들은 이 "계몽 절대주의"의 멍에를 특히 괴롭게 느끼고 있다. 그리고 계몽의 성격보다는 절대주의의 성격이 더 강한 것이 소련의 관료집단이다. 관료집단의 히스테리는 비판적 사고가 조금이라도 느껴지면 점점 더 감시의 눈을 불길하게 치켜뜬다. 이와 동시에 "지도자"의 은덕에 대한 칭송의 노래가 참을 수 없이 커지고 있다. 이 현상은 국가기구와 사회가 점점 더 분리되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사회 내부의 모순이 꾸준하게 격화되어 국가에 대해 강한 압력이 가해지고 있다. 이것이 지금까지 살펴본 사실들에 의해 도출되는 결론이다. 대중의 체제 저항 압력이 분출되는 것은 필연적일 것이다.

 

권력층의 대표자들에 대한 테러행위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이 현상은 현재 상황을 올바르게 파악하는 데 아주 중요하다. 명석하지만 일말의 양심도 없는 레닌그라드의 독재자 키로프(Kirov)는 관료집단의 전형적인 인물이다. 그런데 그의 암살은 테러행위의 가장 잘 알려진 경우이다. 그러나 테러행위자들은 보나파르트 체제의 과두집단을 타도할 능력이 전혀 없다. 물론 개별 관료들은 테러주의자의 권총이 자기 심장을 겨누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테러행위를 빙자하여 관료들은 자신들의 폭력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으며 이 과정에서 정적들을 테러행위의 가담자로 몰아 제거할 음모를 꾸미기도 한다. 지노비에프, 카메네프 그리고 기타 볼셰비키 인사들이 바로 이렇게 제거되었다. 테러행위는 참을성이 없고 쉽게 절망하는 개인들의 무기이다. 그리고 관료집단의 자식 세대들 자신이 가장 자주 의거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차르시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정치적 암살은 의심할 여지없이 폭풍 전야의 징후이며 공공연한 정치적 위기의 시작을 예고한다.

 

관료집단은 이 위험을 느끼고 있으며 이에 대한 예방책을 강구하고 있다. 새로운 헌법의 도입이 이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흔히 역사에서 그렇듯이 관료주의적 독재체제는 "자유주의" 개혁을 통해 위기를 모면하려고 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을 약화시켰을 뿐이다. 새로운 헌법은 보나파르트 체제를 폭로하면서 동시에 이 체제에 대한 투쟁을 반합법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은폐물을 제공했다. 선거 시기에 관료집단의 분파들이 경쟁할 경우 정치투쟁의 가능성이 좀더 커질 수 있다. 스탈린에 의하면 새로운 헌법은 "비효율적으로 운영되는 권력기관"에 대한 채찍질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보나파르트 체제에 대한 채찍으로 변할 수도 있다. 지금까지의 모든 징후들은 문화수준이 높은 인민 세력과 과두 관료집단이 불가피하게 충돌할 것임을 똑같이 예견하고 있다. 이 위기에 대한 평화적인 해결책은 없다. 스스로 발톱을 자른 악마는 없었다. 소련의 관료집단은 자신의 지위를 싸우지 않고 선선히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사태의 진행은 명백히 혁명의 길로 나아가고 있다.

 

인민 대중에 의한 강력한 압력과 이 경우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국가기구의 이완으로 권력층의 저항은 생각보다 훨씬 약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가설만이 존재할 뿐이다. 어쨌든 관료집단은 혁명세력의 힘에 의해서만 타도될 수 있다. 그리고 혁명세력의 공세가 강하고 대담할수록 충돌과정에서 발생하는 희생자는 더 적을 것이다. 혁명을 준비하면서 유리한 역사적 상황에서 대중을 지도하는 과업은 바로 제4인터내셔널 소련 지부의 몫이다. 현재 이 지부는 매우 허약하며 지하활동을 강요받고 있다. 그러나 당의 비합법 존재도 존재인 것은 틀림없다. 다만 어려운 상황의 존재방식일 뿐이다. 정치무대에서 퇴장하고 있는 계급들에 대해서는 억압이 매우 효과적일 수 있다. 1917년에서 1923년까지의 혁명적 독재기가 이것을 완벽히 증명하였다. 그러나 소련의 일반 정세가 이런 식으로 지속될 경우 이미 존재이유가 소멸한 관료집단이 혁명적 전위에 대한 폭력적 탄압을 통해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관료집단이 자기 무덤을 파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혁명은 1917년 10월 혁명과 같은 사회혁명은 아니다. 사회의 경제적 토대를 변화시키고 특정 소유형태를 다른 소유형태로 대체하는 혁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역사를 보면 봉건체제를 대체하여 부르주아체제를 등장시킨 사회혁명 뿐 아니라 사회의 경제적 토대를 파괴시키지 않은 채 구지배집단을 일소한 정치혁명도 있었다. 1830년과 1848년의 프랑스 혁명과 1917년 2월의 러시아 혁명 등은 이런 예에 속한다. 보나파르트 관료집단의 타도는 사회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겠으나 그 자체로는 정치혁명의 테두리 내에 머물 것이다.

 

노동계급의 혁명에 의해 탄생한 국가가 생존한 경우는 소련이 처음이다. 따라서 이 국가가 거쳐야 할 발전 단계는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으므로 앞길을 전혀 알 수가 없다. 소련의 이론가들과 창건자들은 완전하게 대중에 의해 통제되고 신축성이 있는 소비에트 체제가 사회의 경제적·문화적 발전과 함께 평화적으로 해체와 사멸의 길을 걸을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했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다시 한번 현실은 이론보다 더욱 복잡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후진국의 노동계급이 첫 번째 사회주의 혁명을 성취할 운명을 타고 났다. 이 역사적 특권을 관료집단의 절대주의에 대항하는 제2차 보완 혁명으로 되갚아야 한다는 사실이 모든 증거들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새로운 혁명의 강령은 혁명 당시의 상황, 나라의 발전 수준, 국제 정세에 따라 주로 결정된다. 강령의 기본 내용들은 이미 명확해졌으며 이 책 전체를 통해 소련 체제의 모순을 분석하면서 객관적 추론으로 이미 제시되었다.

 

문제는 한 지배집단을 또 다른 지배집단으로 대체시키는 것이 아니라 나라의 경제와 문화를 운영하고 인도하는 방법 자체를 바꾸는 것이다. 관료적 전제체제는 소비에트 민주주의로 대체되어야 한다. 비판의 자유를 회복시키고 진정으로 자유로운 선거를 실시하는 것이 나라의 발전에 필요한 조건이다. 이것은 볼셰비키당을 비롯한 소비에트 내 정당들의 자유로운 활동을 회복시키고 노동조합을 부활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산업 활동에서 민주주의를 도입한다는 것은 근로대중의 이해에 부합하도록 기존 계획을 근본적으로 수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제문제를 자유로이 논의하는 것을 통해 관료적 오류와 좌충우돌의 결과 발생하는 전체비용이 감소될 수 있다. 소비에트 궁전, 새로운 극장, 전시용 지하철 등 실속은 없으면서 비용만 많이 드는 사업들은 노동자 주택단지를 건립하는 과정에서 점차 소멸되어야 한다. "부르주아 분배 규범"은 엄격하게 필요한 영역 내로 제한되고 사회적 부의 증대와 함께 사회주의적 평등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군대 내의 계급은 즉시 철폐되어야 한다. 훈장의 번쩍거리는 쇠조각은 도가니 속에 집어 넣어질 것이다. 청년은 자유롭게 숨쉬고 비판하고 오류를 범하면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을 것이다. 과학과 예술은 쇠사슬로부터 풀려날 것이다. 마지막으로 대외정책은 혁명적 국제주의의 전통으로 다시 돌아갈 것이다.

 

과거 어느 때보다도 지금 10월 혁명의 운명은 유럽 및 전세계의 운명과 밀접히 결부되어 있다. 소련의 문제는 이제 스페인 반도, 프랑스, 벨기에 등지에서 결정되고 있다. 이 책이 출판되는 시점에는 마드리드의 성벽 아래에서 내전이 벌어지고 있는 지금보다 상황이 비교할 수 없이 명확해질 것이다. 배신적인 "인민전선(people's front)" 정책을 통해 소련 관료집단이 스페인과 프랑스의 반동세력에게 승리를 보장할 경우 그리고 코민테른이 이 방향으로 모든 노력을 경주할 경우 소련은 파멸의 벼랑으로 내몰릴 것이다. 관료집단에 대한 노동자의 봉기가 아니라 부르주아 반혁명이 대세가 될 것이다. 개량주의자들과 공산주의 "지도자들"의 공동 사보타지에도 불구하고 서유럽의 노동계급이 권력으로 향하는 길을 찾을 경우 소련의 역사는 새로운 지평을 맞이할 것이다. 유럽 혁명의 첫 승리는 전기충격처럼 소련의 대중을 일깨워 이들의 독립적 정치행동을 고양시킬 것이다. 그리고 1905년과 1917년의 전통을 일깨우고 보나파르트 관료집단의 지위를 침식할 것이다. 10월 혁명이 제3인터내셔널에게 중요했던 만큼이나 이 새로운 상황은 제4인터내셔널에게 중요할 것이다. 오직 이 전망을 통해서만 인류 역사상 첫 노동자국가는 사회주의의 미래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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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론> "일국 사회주의" 이론

 

자급자족 경제(autarky)의 반동적 경향은 쇠잔한 자본주의가 자신에게 부여된 역사적 과업을 수행하지 못하면서 반사적으로 자신을 방어하는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즉 사적 소유와 일국적 차원의 경제운영이라는 족쇄로부터 경제를 해방시키고 전 세계적 차원의 계획을 통해 경제를 재조직하라는 역사적 과업에 대한 무기력한 반응인 것이다.

 

단명했던 제헌의회의 승인을 받기 위해 인민위원 소비에트가 제출한「피착취 근로 인민의 권리 선언문」에서 레닌은 새로운 소비에트 체제의"기본 과업"을 이렇게 규정했다: "사회주의 사회를 조직하고 모든 나라에 사회주의의 승리를 실현시킨다." 이로써 혁명의 국제적 성격이 새로운 정권의 기본 문서에 새겨졌다. 당시에 어느 누구도 이와 다른 방식으로 문제를 제기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1924년 4월 레닌이 죽은 지 3개월 후 스탈린은 「레닌주의의 기초」라는 팜플렛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부르주아 계급을 타도하는 일은 한 나라의 노력만 있으면 된다. 이 점은 우리 혁명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의 최종적인 승리, 사회주의 생산의 조직을 위해서는 어느 한 나라 특히 우리처럼 농민국가의 노력만으로는 부족하다. 이 과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여러 선진국 노동계급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 이 글에 대한 논평은 따로 필요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글이 실린 팜플렛은 시중에 유통되기도 전에 회수되었다.

 

유럽 노동계급의 대대적인 패배와 소련이 이룩한 아주 적은 첫 경제적 성공은 1924년 가을 스탈린의 머리 속에 이 생각을 불어 넣었다: 소련 관료집단의 역사적 임무는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논쟁이 진행되었는데 이것이 피상적인 사람들에게는 학구적인 것으로 보인 것 같다. 그러나 실제로 이 논쟁은 제3인터내셔널의 퇴보를 알렸으며 이후 제4인터내셔널을 준비하는 성격을 띠었다.

 

한때 공산주의자였으며 현재 백위군 망명객인 페트로프(Petrov)의 이름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그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소련이 국제혁명에 의존해야 한다는 이론을 행정기구의 젊은 세대들이 얼마나 격렬하게 반대했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 우리가 행복한 삶을 건설할 수 없다는 생각이 어떻게 가능한가?"; 마르크스가 우리와 견해가 다르다면 그것은 "우리가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 러시아 볼셰비키주의자라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등등. 1920년대 중반의 논쟁을 회상하면서 페트로프는 이렇게 덧붙인다: "지금 생각하면 일국 사회주의 이론은 스탈린의 발명품이 아니었다." 완전히 옳은 말이다! 이 이론은 당시 관료집단의 분위기를 잘 반영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들에게 사회주의의 승리는 곧 관료집단의 승리를 의미했다.

 

마르크스주의의 국제주의 전통과 단절하는 자신을 정당화하면서 스탈린은 자신의 무지를 드러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레닌이 발견한 것으로 알려진 자본주의의 불균등 발전 법칙(law of uneven development of capitalism)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알지 못했다.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어록에서 그의 이 말은 아주 상위에 놓여야 할 것이다. 발전의 불균등성은 인간 역사 전체에 걸쳐 특히 자본주의 역사에서 관철되고 있다. 솔른초프(Solntzev)는 러시아의 젊은 역사가이며 경제학자인데 좌익반대파의 일원이라는 죄목으로 소련 관료집단의 감옥에서 고문으로 죽었다. 대단한 재능과 도덕적 능력을 가졌던 그는 1926년 마르크스의 불균등 발전 이론에 대해 아주 훌륭한 이론 연구를 하였다. 물론 그의 연구 결과는 소련에서 출판될 수 없었다. 비록 정반대 이유이긴 하지만 역시 출판금지가 내려진 것은 죽은 지 이미 오래되었고 우리의 뇌리에 잊혀진 독일의 사회민주주의자 폴마르(Vollmar)의 저작이다. 그는 이미 1878년에 러시아가 아니라 독일에 "고립된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전망을 이론화했다. 스탈린에 의하면 레닌 이전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불균등 발전 "법칙"을 폴마르는 이미 언급하고 있었다.

 

게오르크 폴마르는 이렇게 주장한다: "사회주의는 무조건적으로 경제가 발전한 사회관계를 전제로 하고 있다. 이것만이 문제라면 사회주의는 경제발전 수준이 가장 높은 나라에서 가장 강력하게 발전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영국은 의심할 여지없이 경제적으로 가장 발전한 나라이다. 그러나 이 나라에서 사회주의는 아주 부차적일 뿐이다. 반면 경제적으로 영국에 비해 덜 발달한 독일에서는 사회주의가 이미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여 낡은 사회 전체가 이미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 사태의 발전을 결정하는 역사적 요인들의 다양함을 언급하면서 그는 계속 주장한다: "수많은 세력들의 상호관계가 작용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인간 운동은 두 나라의 경우에서도 시간과 형태가 동일할 수 없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모든 나라에 대해서 말한다면 너무도 당연한 결론이 나온다‥‥‥ 사회주의도 이와 똑같은 법칙을 존중한다‥‥‥‥ 모든 문명국에서 동시에 사회주의가 승리한다는 가정은 절대적으로 배제된다. 역시 같은 이유로 어느 사회주의 국가의 예를 나머지 모든 문명국이 즉시 그리고 불가피하게 모방한다는 가정은 성립될 수 없다‥‥‥“ 마지막으로 그는 결론을 내린다: "고립된 사회주의 국가의 건설로 논의가 결론 지워진다. 이 현상이 유일한 가능성은 아니더라도 가장 커다란 개연성(probability)을 가지고 있음을 지금까지 증명했다고 나는 믿는다." 레닌이 8세 아동이었을 때 나온 이 저작은 1924년 가을에 나오기 시작한 소련의 아류 이론가들의 글보다 불균등 발전 법칙에 대해 훨씬 더 정확한 해석을 내리고 있다. 폴마르는 사실 이류 이론가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 주제와 관련해서 엥겔스의 사상을 풀어서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엥겔스가 자본주의 불균등 발전 법칙을 "알지 못했다고" 스탈린은 말한다.

 

"고립된 사회주의 국가"는 더 이상 역사적 가정이 아니며 독일이 아닌 러시아에서 현실로 나타났다. 또한 사회주의 국가의 고립은 세계 자본주의의 상대적 우위와 세계 사회주의의 상대적 열세를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고립된 "사회주의" 국가에서 국가가 사멸한 사회주의 사회로 이행하려면 장구한 세월이 필요할 것이며 이 과정은 국제혁명의 과정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한편 베아트리스-시드니 웹 부부는 우리에게 이렇게 확인시켜 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고립된 사회주의 국가가 건설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과학적 사회주의의 시조인 두 사람 모두 외국무역의 독점과 같은 강력한 무기를 "생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노 부부의 글을 읽으면서 당혹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국가가 상업은행, 기업, 철도, 상선 등을 접수하는 것은 수출산업 부문을 포함한 생산수단을 국유화하는 것 만큼이나 사회주의 혁명에게 필요한 조치이기 때문이다. 외국무역의 독점은 수출과 수입의 물리적 도구들을 국가가 장악하는 것에 불과하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외국무역의 독점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은 이들이 사회주의 혁명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 문제를 매듭짓기 위해 덧붙이면 폴마르는 아주 올바르게 외국무역의 독점을 "고립된 사회주의국가"의 가장 중요한 수단 가운데 하나라고 주장한다. 웹 부부에 의하면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 비밀을 폴마르로부터 배웠음에 틀림없다. 물론 폴마르가 애초에 마르크스와 엥겔스로부터 이 비밀을 배우지 않았다면 말이다. 일국 사회주의 "이론"에 대해 사실 스탈린 자신도 상세히 설명하거나 이론적 기초를 제시하지 않았다. 이 이론은 무미건조하고 비역사적인 사고 방식이라고 결론내릴 수 있다. 천연자원이 풍부하기 때문에 사회주의 사회가 소련이라는 지리적 테두리 내에서 건설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천연자원이 풍부하다는 논지를 확대하면 지구의 인구가 현재보다 12분의 1로 줄어들면 사회주의가 전 세계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그러나 이 새로운 이론의 실제 목적은 인민의 의식 속에 훨씬 구체적인 사고체계를 주입시키는 것이었다. 즉 혁명은 완전히 완성되었다; 사회 내부의 모순들은 꾸준히 완화될 것이다;쿨락은 서서히 사회주의로 성장할 것이다; 외부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관계없이 사회 발전은 전반적으로 평화적이고 계획에 의거할 것이다 등등. 부하린은 이 이론에 기초를 제공하기 위해 다음 사실이 공고하게 증명되었다고 선언했다: "우리는 우리 조국 내부의 계급적 차이와 기술적 후진성 때문에 망하는 법은 없을 것이다; 이렇게 빈약한 기술적 기반을 가지고도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다; 사회주의 성장 속도는 대단히 느릴 것이다; 거북이 걸음처럼 기어갈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우리는 사회주의 체제를 건설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사회주의를 기필코 건설할 것이다." "사회주의를 이렇게 빈약한 기술적 기반을 가지고도 건설한다"는 사고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청년 마르크스의 천재적 직관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낮은 기술 수준으로는 "궁핍만이 일반화될 것이고 생활 필수품에 대한 투쟁이 다시 시작되며 모든 넌센스들이 부활할 수밖에 없다."

 

1926년 4월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좌익반대파는 거북이 걸음 이론에 대한 수정안을 이렇게 제출했다: "자본주의 세계체제에서 우리가 원하는 자의적인 속도를 가지고 소련이 사회주의로 나아갈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근본적 오류이다. 소련의 산업과 선진 자본주의 산업의 격차를 넓히는 것이 아니라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좁힐 경우에만 사회주의로의 전진은 보장될 것이다." 당연히 스탈린은 자신의 의도에 충실하여 이 수정안이 일국 사회주의 이론에 대한 "위장된" 공격이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국내 산업발전의 속도를 국제 산업발전 상황과 연결시키려는 의도 자체를 단도직입적으로 거부했다. 전원회의의 속기록에는 그가 한 말이 한 글자도 빠지지 않은 채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국제적 요인을 여기에 끌어들이려는 사람들은 모두 문제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만약 문제를 이해하지 못해 혼란된 경우가 아니라면 의식적으로 문제를 혼동시키려는 의도가 다분하다." 결국 좌익반대파의 수정안은 거부되었다.

 

그러나 강력한 적들이 포위하고 있는 상황에서 대단히 빈약한 기반을 가지고 거북이 걸음으로 사회주의를 건설하겠다는 환상은 비판의 화살을 오래 견디지 못하였다. 같은 해 제15차 당 대회는 언론에 귀뜸도 하지 않은 채 "상대적으로(?) 최단 시기 내에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의 산업발전 수준을 따라잡거나 추월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라고 시인했다. 이로써 좌익반대파의 논지는 "추월당했다." 그러나 어제 거북이 걸음 이론을 내놓았던 인물들은 이 구호를 제출함으로써 관료집단이 그렇게도 미신적인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국제적 요인의 포로가 되었다. 이렇게 8개월 만에 스탈린주의 이론의 최초이자 가장 순수한 버전이 파산했다.

 

1927년 3월 불법으로 배포된 좌익반대파의 문서는 이렇게 주장했다: 사회주의는 모든 영역에서 자본주의를 반드시 "추월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지금 문제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관계 일반이 아니라 독일, 영국, 미국과 비교한 소련의 경제발전이다; '최단 시기'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5개년 계획을 계속 실시해도 소련은 서방 선진국의 수준에 한참 못미칠 것이다;이 기간에 자본주의 세계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 자본주의가 수십 년의 기간 동안 새로이 호황을 누릴 가능성을 인정한다면 소련이라는 후진국에서 사회주의를 이야기하는 것은 농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 상황이 실제 벌어진다면 이 시대 전체를 자본주의 쇠퇴의 시대라고 진단한 우리가 오류를 범했다고 말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소비에트 공화국은 파리 코윈보다 더 광범위하고 더 큰 성과를 올렸으나 어쨌든 노동계급 독재의 제2차 실험에 지나지 않았다고 증명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우리 시대 전체를 결정적으로 재평가하고 국제혁명의 고리로서 10월 혁명의 의미를 재평가해야 할 심각한 근거가 존재하는가? 그렇지 않다! ‥‥‥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어느 정도 완결된 재건기를 경과한 후 ‥‥‥ 자본주의 국가들은 비교할 수 없이 더 날카로운 형태로 국내외에서 전쟁 이전의 모순들을 재생산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이 노동계급 혁명이 일어나야 할 근거이다; 우리가 사회주의를 건설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전체는 부분보다 일반적으로 더 크다; 따라서 더 작은 사실이 아니라 더 커다란 사실은 유럽과 세계혁명이 준비되고 있다는 것이다; 부분은 전체와 함께 갈 때에만 승리할 수 있다;‥‥‥ 유럽의 노동계급은 소련이 기술 수준에서 유럽과 미국을 따라잡는 데 필요한 시간보다 더 적은 시간으로 국가권력 장악으로 도약할 수 있다; ‥‥‥ 한편 우리는 소련의 노동생산성과 나머지 세계 노동생산성의 격차를 체계적으로 좁혀야 한다; 우리가 이 측면에서 전진할수록 낮은 가격의 제품과 결과적으로 군대를 동원한 서방 자본주의 세계의 개입 가능성을 줄일 수 있다; ‥‥‥ 소련 노동자와 농민의 생활수준을 더 높일수록 유럽의 노동자 혁명은 더 앞당겨질 것이며 이 혁명은 소련에게 세계적 수준의 기술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우 유럽과 세계 사회주의 건설의 일부분인 소련의 사회주의 건설은 더욱 가열차게 전진할 것이다." 당지도부는 다른 문서들과 마찬가지로 이 문서에 대해서도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다만 좌익반대파에 대한 제명과 체포가 뒤따랐을 뿐이다.

 

거북이 걸음 이론이 포기된 후 이 이론과 결부된 쿨락의 사회주의로의 전화 이론도 포기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국가 행정력을 동원한 쿨락의 일소는 일국 사회주의론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 넣었다. 계급들이 "근본적으로“ 일소되었으므로 사회주의도 "근본적으로” 달성되었다는 것이다(1931년). 핵심적으로 말하면 이 정식은 "대단히 빈약한 기초" 위에 사회주의를 건설한다는 사상을 부활시켰다. 우리의 기억으로는 바로 이때에 어느 관변 언론인이 어린애에게 줄 우유가 없는 것은 젖소가 부족하기 때문이지 사회주의 체제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노동생산성에 대한 관심은 더 이상 1931년의 마취제 같은 정식에 기댈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 정식은 완벽한 농촌 집단화에 의해 야기된 경제적 황폐를 보상하기 위한 도덕률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타하노프 운동과 관련하여 갑자기 스탈린이 이렇게 선언했다: "인민이 거지생활을 하면서라도 물질적 평등을 이루면 사회주의가 강화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실제로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보다 더 높은 노동생산성에 기반해서만 승리할 수 있다." 완전히 옳은 말이다! 그러나 바로 이때 공산주의청년동맹 대회가 1936년 4월에 개최되었다. 이 대회는 청년동맹이 그나마 가지고있던 정치적 권리마저 박탈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동시에 공산주의청년동맹의 새로운 강령이 채택되었는데 소련의 사회주의적 성격을 이렇게 단정적으로 규정하였다: "전국의 경제는 사회주의화되었다." 동시에 등장했으나 내용은 정반대인 두 선언들의 모순을 좁혀보려는 시도를 어느 누구도 하지 않았다. 선언 하나 하나는 순간의 요구에 부응하여 선포된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감히 비판할 엄두를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회의 대변인은 새로운 강령이 공산주의청년동맹에게 아주 필요하다는 주장을 이렇게 설명했다: "구(舊)강령은 러시아가 '세계 노동자 혁명을 통해서만 사회주의에 도달할 수 있다'는 반레닌주의적인 심대한 오류를 포함하고 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오류이다. 이것은 트로츠키주의자의 견해를 반영하고 있다." 그런데 스탈린은 이 반레닌주의적 트로츠키적 견해를 1924년 4월에 여전히 옹호하고 있었다. 이외에도 레닌이 참여한 정치국이 꼼꼼하게 검토한 후 부하린 명의로 제출된 1921년 강령이 15년이 지난 후에 "트로츠키주의자"의 견해로 돌변하여 정반대로 개정되어야 했다는 사실은 아직 해명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논리적인 주장도 이해관계가 개입되면 무기력하다. 자국 노동계급으로부터 독립한 관료집단은 소련이 세계 노동계급의 투쟁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다. 불균등 발전 법칙에 의하여 생산력과 자본주의 소유관계 사이의 모순이 세계에서 가장 약한 고리를 끊었다. 후진 러시아 자본주의는 세계 자본주의의 파산에 대해 맨 처음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불균등 발전 법칙은 역사 전체에 걸쳐서 결합 발전(combined development) 법칙으로 보완되었다. 러시아 부르주아 계급의 붕괴는 노동계급 독재를 가져왔다. 즉 후진국이 선진국을 멀찌감치 앞서서 혁명을 성취한 것이다. 그러나 후진국에서 사회주의적 소유형태가 확립되기 위해서는 기술과 문화의 낮은 수준을 극복해야 했다. 세계적 생산력의 높은 수준과 자본주의 소유형태 사이의 모순에 의해서 탄생한 10월 혁명은 러시아에서 낮은 일국적 생산력과 사회주의 소유형태 사이의 모순을 발생시켰다.

 

물론 소련의 고립은 우려한 것처럼 직접적으로 위험한 상황을 낳지는 않았다. 자본주의 세계는 너무도 무질서와 마비상태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잠재력을 완전히 활용할 수 없었다. “숨쉴 수 있는 여지”는 비판적인 낙관주의가 감히 희망할 수 있는 기간보다 더 긴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러나 소련은 제국주의 세력의 개입전쟁으로 인해 세계로부터 고립되었으며 1913년부터 외국무역량이 4배 또는 5배나 감소했기 때문에 자본주의 토대 위에서 세계 경제의 자원을 활용하는 것조차 불가능하였다. 따라서 내전에 의해 지출된 엄청난 군사비용 때문에 생산7?이 지극히 불리하게 할당되었고 대중의 생활수준은 매우 느리게 개선될 뿐이었다. 그러나 고립과 후진성의 더 극악한 결과는 관료주의라는 문어(octopus)로 나타났다.

 

혁명에 의해서 시행된 법적·정치적 조치들은 후진 경제에 진보적인 영향을 미쳤으나 또 한편 이 조치들은 후진성에 의해 효과가 더 적었다. 소련이 자본주의 세계에 의해 포위되는 상황이 길수록 사회체제의 퇴보는 더욱 깊이 진행된다. 소련이 계속 고립되면 일국적 공산주의로의 전진이 아니라 자본주의로의 후퇴가 불가피하다.

 

부르주아 계급이 평화적으로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로 성장할 수 없듯이 사회주의 국가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와 평화적으로 통합될 수 없다. “일국"이 평화적으로 사회주의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과 혁명이라는 세계적 차원의 격동이 오랜 기간 지속되면서 대세를 이루고 있다. 소련 내부에서도 격동은 불가피하다. 관료집단이 계획경제를 실현하기 위해 쿨락을 일소할 수밖에 없었듯이 노동계급은 사회주의를 향한 투쟁에서 관료집단을 일소하지 않을 수 없다. 관료집단의 묘비명은 "여기에 일국 사회주의가 편히 쉬고 있노라”가 될 것이다.

 

1. 소련의 "친구들"

 

사상 처음으로 어느 강력한 정부가 해외에서 품위있는 우익이 아니라 좌익과 극좌익 언론을 자극하고 있다. 위대한 혁명에 대한 인민 대중의 공감이 소련 관료집단에 의해 이용되도록 아주 능숙하게 요리되고 있다. 소련에 "공감하는" 서방의 언론은 자기도 모르게 소련 지배층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지도 모르는 내용을 퍼뜨릴 권리를 잃고 있다. 크렘린궁이 싫어할 책들은 악의적으로 언급이 회피되고 있다. 대신 요란하고 평범한 소련 옹호자들의 저작들이 많은 나라 언어로 번역되고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 책 전체에서 공식적인 소련의 "친구들"이생산한 저작들을 의도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세련된 외국의 아류보다는 조야한 러시아 원저작을 택해 비판했다. 코민테른의 저작을 비롯한 소련의 "친구들"의 저작들 중에서 가장 조야하고 저속한 부분을 양으로 따지면 엄청난 분량이다. 그리고 이 부분이 정치에서 담당하는 역할도 무시할 수는 없다. 이 주제에 대해 몇 페이지를 할애하고자 한다.

 

현재 사상의 보물창고에 주요하게 기여한 저작은 웹의 저서 『소비에트 공산주의』라고 선언되고 있다. 그 동안 소련이 성취한 결과와 이 결과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를 말하는 대신 웹 부부는 1,200 페이지에 걸쳐 소련 행정부서들이 계획하고 제시하는 내용들과 법전에서 상세하게 설명하는 것들을 주로 다루고 있다. 이들의 결론은 이렇다: 프로젝트, 계획, 법 등이 실행에 옮겨지면 공산주의는 소련에서 실현될 것이다. 이것이 이 저작의 내용인데 다 읽고 나면 우울한 느낌 밖에 남는 것이 없다. 소련 행정부서들의 보고서나 소련 언론의 기념식 기사들을 재탕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련 관료집단에 대한 우정은 노동계급 혁명에 대한 우정이 아니라 반대로 이 혁명에 대한 예방책이다. 물론 웹 부부는 공산주의 체제가 언젠가는 지구 전역에 확산될 것이라고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어떻게, 언제, 어디서, 어떤 형태로, 폭력혁명을 통해서 아니면 평화적인 침투를 통해서, 아니면 의식적인 모방을 통해서 등의 문제들은 우리들이 대답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이런 외교적 외양을 갖춘 응답 거부나 실제로 애매모호한 응답 등은 소련의 “친구들”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으며 이 우정의 실제 대가가 무엇인지를 말해주고 있다. 만약 혁명의 문제에 대해 대답하기가 지금보다 한없이 어려웠을 때인 1917년 이전에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을 모든 사람이 회피했다면 소비에트 국가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고 영국의 소련의"친구들"은 우정이 담긴 기금을 다른 대상에 할애했을 것이다.

 

웹 부부는 가까운 미래에 유럽 혁명을 기대하는 것을 뭔가 허영에 들뜬 망상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일국 사회주의 이론의 올바름을 편안하게 증명할 자료를 얻고 있다. 10월 혁명을 완벽하고 더욱이 불쾌한 놀라움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의 잘난 권위의식을 가지고 이들은 다른 전망이 없는 상황에서 소련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할 필요성에 대해 연설을 늘어놓고 있다. 이들의 주장에 대해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실제로 웹 부부와 우리의 논쟁은 소련에 공장을 건설하고 집단농장에 광물 비료를 주어야 할 필요성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영국에서 혁명을 준비할 필요가 있는가 그리고 어떻게 이 혁명이 진행될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 학식이 풍부한 이 노년 사회학자들은 대답한다:"우리도 모릅니다." 물론 이들은 이 문제 자체가 “과학"과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레닌은 스스로 사회주의자라고 생각하는 보수적 부르주아 특히 영국의 페이비언 사회주의자들(Fabians)에 대단히 적대적이었다. 그의 전집에 수록되어 있는 인명사전을 보면 그가 평생 웹 부부에 대해서 변함없는 격렬한 적대감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1907년 그는 웹 부부에 대해 처음 글을 쓰면서 이들을 “영국 노동운동의 혁명기에 탄생한 차티즘(Chartism)을 단순히 유치한 것으로 묘사하려고 애쓰는" "영국 속물주의의 난해한 찬양자들"로 보았다. 그러나 차티즘이 없었다면 파리 코뮌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두 역사적 사건이 없었다면 10월 혁명도 없었을 것이다. 웹 부부는 소련을 행정기구와 관료적 계획의 측면에서만 바라보고 있다. 이들은 차티즘, 공산주의, 10월 혁명을 소련에서 찾지 않았다. 오늘날 이들에게 혁명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정말 "단순히 유치한 행위"가 아니면 자신들에게 이질적이고 적대적인 사건에 불과하다.

 

기회주의자들에 대한 논쟁에서 레닌은 잘 알려져 있듯이 살롱의 예절에 대해 문제삼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그의 독설적인 형용사들 예를 들어 "부르주아 계급의 하수인들", "배신자들", "지배계급의 장화나 핥는 녀석들" 등은 페이비언 사회주의의 전도사였던 웹 부부에 대한 오랫동안 면밀하게 계산된 평가에 근거한 것이었다. 페이비언 사회주의는 현존하는 것에 대한 숭배와 전통적인 품위를 의미한다. 어쨌든 최근 몇 년간 이들의 견해가 갑자기 변화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자국의 부르주아 계급을 지지했고 나중에 왕으로부터 파스필드(Passfield) 경이란 칭호를 받은 웹은 단일한 그리고 외국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과정에서 아무 것도 버리지 않았으며 아무 것도 바꾸지 않았다. 시드니 웹은 식민지 장관 즉 영국 제국주의의 주요한 간수장이었는데 바로 이때 소련 관료집단과 친분을 갖게 되었으며 소련 행정부서의 자료들을 받아서 이것을 기초로 두권짜리 자료집을 만들었다.

 

1923년이 되어도 웹 부부는 볼셰비키주의와 차르주의 사이에서 별반 차이점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 문명의 쇠퇴](1923년)를 참고해보라. 그러나 이제 이들은 스탈린 정권의 "민주주의"를 완전히 인정했다. 이들의 모습에는 조금의 모순도 없다. 혁명적 노동자 계급이 "교육받은" 집단의 활동의 자유를 금지하자 페이비언 사회주의자들은 분노하였다. 그러나 소련 관료집단이 노동계급의 행동의 자유를 금지하자 이들은 이 조치를 당연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것이 사실 노동당의 노동관료 집단의 기능이 아니었던가! 예를 들어 웹 부부는 소련에서 자유로운 비판이 완벽히 허용되고 있다고 맹세한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로부터 유머 감각을 기대해서는 안된다. 공식적인 의무의 일부로서 법의 일부가 되었으며 그 방향과 한계를 정확하게 예상할 수 있는 악명높은 관료집단의 "자기비판"을 이들은 아주 진지하게 언급한다.

 

단순 소박함일까? 엥겔스나 레닌은 시드니 웹을 단순 소박하다고 보지 않았다. 차라리 품위라고 말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결국 이것은 이미 들어선 정권이 무엇이며 그곳의 주인들이 자신을 환대하는 문제이다. 웹 부부는 현존하는 것들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을 극단적으로 거부하였다. 이들은 좌익반대파의 파괴공작으로부터 10월 혁명의 유산을 보존하기 위해 자신들이 부름을 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그의 정체를 완전하게 드러내는 일화를 하나 소개하겠다. 파스필드 경인 시드니 웹은 노동당 정부 시절 장관으로 있으면서 필자가 영국 비자를 신청했을 때 이를 거부하였다. 그는 당시 소련에 대한 책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이론적으로는 소련을 외부 침략으로부터 방어하는 체 했지만 실제로는 대영제국을 방어하고 있었다. 이 두 가지 경우 모두 그는 자기 이익에 충실했다.

 

* * *

 

글이나 그림에 정통하지 못한 많은 소부르주아들에게 공식적으로 등록된 소련 "친선클럽"은 보다 고상한 정신적 이해관계를 과시하는 일종의 자격증이라고 할 수 있다. 프리메이슨(Freemason)지부나 평화주의자 회원 자격은 "소련의 친구들" 서클 회원자격과 아주 공통점이 많다. 왜냐하면 회원자격을 획득할 경우 동시에 두 가지 삶 즉 일상적 관심사를 다루는 서클 생활과 영혼을 고상하게 만드는 휴가생활이 모두 가능하다. 때때로 "친구들"은 소련을 방문한다. 이들은 트랙터, 탁아소, 공산주의 소년소녀단, 행진, 낙하산 소녀 등 한마디로 새로운 귀족층을 제외한 모든 것을 기억 속에 저장시킨다. 이들 중 가장 좋은 부류는 자본주의 반동에 대한 적대감으로 새로운 귀족층을 외면한다. 앙드레 지이드(Andre Gide)는 이 점을 솔직하게 시인한다: "소련에 대한 어리석고 부정직한 공격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소련을 완고하게 방어한다." 그러나 적들의 어리석음과 부정직 때문에 자기 눈을 맹목적으로 감는 것이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어쨌든 노동대중에게는 명확한 눈을 가진 친구들이 필요하다.

 

부르주아 급진주의자들과 사회주의적 부르주아들이 마치 전염병을 앓는 것처럼 소련 지배층에 공감하는 데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 강령상의 모든 차이에도 불구하고 직업 정치가들 대다수는 이미 성취된 또는 쉽게 성취될 수 있는 "진보"에 대해 우호적이다. 세상에는 혁명가들보다는 개량주의자들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이 있고 현실에 화해하지 않으려는 자들보다는 적응하려는 자들이 훨씬 많다. 대중이 운동에 나서는 예외적인 시기에만 혁명가들은 고립에서 벗어나 전면에 나서며 이때 개량주의자들은 물에서 나온 물고기 신세가 된다.

 

1917년 4월 이전이나 한참 뒤까지 노동계급 독재가 러시아에서 가능하다는 사고를 소련 지배층 모두는 황당하다고 간주했다. 당시에 이 "황당한 생각"은 ‥‥ 트로츠키주의로 불리웠다. 수십 년 동안 외국의 소련 "친구들" 구세대는 러시아 멘세비키들을 현실 정치가(Realpolitiker)라고 보았다. 멘세비키들은 자유부르주아지와 함께 하는 "인민전선"을 주창했으며 노동계급 독재를 터무니 없는 미친 생각으로 간주하여 거부했다. 그러나 노동계급 독재가 이미 성취되었고 심지어는 관료적으로 더럽혀졌을 때 이것을 인정하는 것은 --- 아주 다른 문제이다. 이 점은 소련 "친구들"에게 그대로 적용된다. 이들은 소비에트 국가에 경의를 표할 뿐 아니라 적들에 대해 이 국가를 옹호하기조차 한다. 물론 과거를 동경하는 자들에 대해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준비하는 세력에 대해 반대한다. 이 "친구들"이 프랑스인, 영국인, 벨기에인 그리고 다른 나라의 개량주의자들처럼 활발한 애국자일 경우 소련의 방어에 대해 관심을 표시하면서 자기들이 부르주아 계급과 연대하고 있는 사실을 아주 편리하게 숨긴다. 반면에 이들이 어제의 독일과 오스트리아 사회애국주의자들처럼 별 의도 없이 소련의 패배를 위해 일할 수밖에 없을 경우에는 소련과 프랑스의 동맹관계로 인해 자기들이 히틀러나 슈스니크(Schussnigg)와 한 패가 되기를 희망한다. 레옹 블룸은 볼셰비키주의가 영웅적 투쟁을 벌일 시기에 볼셰비키의 적이었으며 10월 혁명을 공개적으로 괴롭히려는 명확한 목적으로 『인민주의자』지(Le Populaire)를 창간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소련 관료집단의 진짜 범죄를 폭로하는데 단 한 줄도 할애하려 하지 않는다. 기독교 성서에 나오는 모세는 여호와의 얼굴을 보고 싶어 안달했는데 하느님의 뒷부분만 보면서 절을 하도록 허용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명예로운 개량주의자들은 이미 달성된 사실에 찬사를 보내는 사람들인지라 혁명의 성과 중에서 관료적으로 퇴보한 뒷 부분만을 이해하고 시인할 수 있다.

 

현재 공산주의 "지도자들"의 본질은 개량주의자들과 같다. 원숭이 춤과 얼굴 찡그리기를 오랫동안 실천한 후에 갑자기 이들은 기회주의의 엄청난 장점들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이들 특유의 무지에 합당한 활력을 가지고 기회주의를 부여잡았다. 크렘린궁 지배층에 대해 노예처럼 그리고 계산 속을 가지고 머리를 조아리는 바람에 이들은 혁명적 주도성을 발휘할 능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이들은 자신들에 대한 비판에 대해 이빨을 드러내고 짖는 것 밖에 할 수가 없다. 더욱이 주인의 채찍질을 받으면서도 꼬리를 흔들어댄다. 위험의 시간이 다가오면 사방으로 흩어질 가장 매력이 없는 이들은 우리를 노골적인 "반혁명분자"라고 간주한다. 그러나 이들에 대해 신경쓸 이유가 있을까? 역사는 비록 준엄하지만 가끔 웃기는 연극을 동반하는 법이다.

 

소련의 "친구들" 중 좀더 정직하고 눈이 열린 자들은 최소한 머리를 맞대고 대화를 나눌 때는 소련의 태양에 흑점이 있다는 것을 시인한다. 그러나 변증법적 분석 대신에 숙명적인 분석에 의존하는 이들은 주어진 상황 속에서 "어느 정도의" 관료적 타락은 역사적으로 불가피하다고 말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한다. 정말 그렇군! 그러나 이 타락에 대한 저항은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지지 않는다. 필연은 반동적인 결말과 진보적인 결말을 가지고 있다. 필연의 양끝에서 줄을 잡아당기는 인물들과 정당들은 결국 바리케이드의 반대편에서 서로 모습을 나타낸다고 역사는 가르치고 있다.

소련의 "친구들"의 마지막 주장은 반동 세력들이 소련에 대한 어떤 비판도 이용해 먹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당연하다! 이들은 심지어 필자가 쓴 이 책을 이용하여 뭔가를 해보려고 할 것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가 언제 있었던가? 『공산당 선언』은 봉건 반동세력들이 자유주의 세력에 대항하여 사회주의자들의 비판을 화살로 이용한다는 사실을 경멸조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반동세력들은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자기 길을 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 우리의 길도 막지 못할 것이다. 물론 코민테른의 신문은 소련에 대한 우리의 비판이 소련에 대한 제국주의 세력의 군사적 개입을 준비하고 있다고까지 주장한다. 자본주의 정부들은 우리의 저작으로부터 소련 관료집단의 타락상을 알고 짓밟힌 10월 혁명의 원칙들을 복수하기 위해 즉시 징벌 원정을 준비할 것이다! 코민테른의 논쟁가들은 날카로운 칼 대신 마차의 끌채나 더 무딘 도구로 무장하고 있을 뿐이다. 마르크스주의자의 비판은 사물의 이름을 그대로 부르는 것이다. 다만 이것은 부르주아 계급의 눈에 소련 외교의 보수적 성격을 더욱 부각시킬 따름이다.

 

그러나 노동계급과 노동계급을 진실로 옹호하는 지식인들은 소련에 대한 우리의 비판을 부르주아 계급과는 다르게 이해한다. 우리의 저작은 이들에게 혁명에 대한 의구심과 불신이 아니라 권력을 노동계급의 손에서 빼앗아 간 자들에 대한 의구심과 불신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바로 이것이 애초 우리의 목표이다. 진보의 원동력은 거짓말이 아니라 진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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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자 2013.01.04 02:17
    맨 위에 차례를 클릭해도 그 장으로 안가네요. 링크삽입이 안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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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볼셰비키-레닌주의자 2013.01.04 04:05
    장문의 다른 문서들도 지금 그런 상황인데요. 일단 글들을 기존 사이트에서 급하게 이전하다보니 신경을 쓰지 못한 것 같습니다. 조만간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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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자 2013.01.08 00:06
    링크삽입과 함께, 각 장의 맨 끝에 '맨 위로'를 넣어주시면 읽기 편할 것 같습니다. 전의 홈페이지에도 그것은 없었는데, 맨위로 하면 다시 각 장별로 읽기가 편하거든요. 요청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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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자 2013.01.20 05:37
    바뀌어서 좋네요. 또 지적을 하자면, 9장--저는 스탈린을 옹호합니다만 9장을 보라고 우선 봅니다만--을 보면 문단마침표가 없는게 눈에 거슬리네요. 마침표 없는게 너무 많아요. 9장뿐만이 아닌 것 같습니다. 좀 더 정성을 기울였으면 좋겠습니다. 독후감은 독서가 끝나고 나면 올리겠습니다. 아울러 폰트가 너무 작습니다. 좀 키우면 안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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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볼셰비키 2016.10.15 20:26

    http://www.sisapress.com/journal/article/90105
    [서평] 레온 트로츠키 지음 <배반당한 혁명>
    레온 트로츠키 지음<배반당한 혁명>/스탈린과 관료주의 맹비난
    정운영 (경기대 교수·경제학) 1996.01.25


    “이봐, 스탈린이 뭐 하는 작자야?” 그 자신이 스탈린을 아주 잘 알고 있는 스클리안스키가 내게 물었다. “우리 당의 가장 탁월한 얼치기 녀석이지.” 트로츠키의 자서전 <나의 생애>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 책의 프랑스어판(Gallimard·1953) 서문에서 알프레드 로스머는 ‘그에게 자서전은 30여 년의 정치 활동에서 한 번도 중단한 적이 없는 투쟁을 계속하는 수단이다’라고 썼다. 실로 집필이 정치 투쟁의 연장이라면, 여기 소개하는 트로츠키의 <배반당한 혁명> (갈무리)은 그 대표권을 주장할 만하다.

    24년 레닌이 죽고, 권력 투쟁에서 패한 트로츠키가 27년 당에서 쫓겨나기까지 스탈린은 이론이나 투쟁 경력에서 그의 적수가 아니었다. 부하린·카메네프·지노비에프가 시세에 따라 스탈린과 손잡았다가 대들었다가 하며 추태를 부렸지만, 트로츠키는 반스탈린 진영의 맹주 자리를 의연히 지켰다. 29년 소련에서 추방된 그는 터키와 프랑스를 거쳐 노르웨이로 망명했다. 36년 여름 부하린·카메노프·지노비에프를 위시하여 그의 아들 세도프를 처형할 ‘모스크바 재판’이 시작되기 직전 트로츠키는 오슬로에서 이 책을 탈고했다. 집필 시기로 보아 스탈린이 만들어낸 ‘얼치기 사회주의’에 대한 고발과 회한이 전편에 배어 있으리라는 점은 충분히 예상할 만하다.

    열한 장(章) 2백80여 쪽의 본문 가운데 관료라는 말이 빠진 페이지가 거의 한 곳도 없으리만큼 트로츠키는 배반당한 혁명의 암호를 푸는 열쇠로 관료주의를 지목한다. 유럽 혁명이 불발해 20년대의 국제 정세가 혁명의 휴지기에 접어들자 러시아만이라도 지키자는 ‘일국 사회주의’ 노선이 국가 기구 강화와 관료주의 확대를 가져왔다. 그리고 혁명 후의 공적 소유를 떠받치지 못하는 생산성 낙후 문제가 있다. 상점에 물건이 많으면 손님은 아무 때나 이용한다. 그러나 물품이 모자라면 줄을 서야 하고, 이 줄이 아주 길면 질서 유지를 위해 경관이 달려온다. 경관이나 그의 상사는 줄을 서지 않고도 물건을 사는 비결을 배우는데, 트로츠키는 이것이 관료 집단이 누리는 권력의 출발이라고 비판한다.


    관료주의는 온갖 무지·오류·부패의 온상

    그리고 사회주의, 경제 계획, 대외 정책, 사회적 관계, 문화와 예술에 이르기까지 소련 사회에 존재하는 온갖 무지와 오류와 부패를 모두 이 관료주의의 책임으로 돌린다. 과도기적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국가의 사멸을 독려하는 대신 관료 지배를 강화하고, 이 관료 집단이 ‘퇴보한 노동자 국가’의 안위를 위해서 세계 혁명의 대의를 제국주의 세력에 팔아 버렸다고 매도한다. 그 대안은 물론 소비에트 민주주의이고, ‘연속 혁명’이고, 제4 인터내셔널이다.

    60년 전에 집필된 이 책은 현재도 대단한 예지와 통찰력을 선사하는데, 사실 그런 매력 때문에 소련이 무너진 뒤에 트로츠키주의가 ‘자신감’을 회복한 것인지 모른다. 글쎄 탁월한 얼치기의 그 ‘탁월함’에 좀더 대비했더라면 과연 역사는 달리 흘렀을까. 더러 논리의 비약이 눈에 띄지만, 이것이 이론 서적이 아니라 투쟁으로 절절 끓는 혁명가의 정치 평론임을 감안하면 적당히 넘길 만도 하다. 트로츠키의 글을 읽는 ‘재미’는 시원한 레토릭에도 있는데, 이번 역시 ‘급진파 관광객을 위한 사회주의’ ‘고위 관리의 여동생을 장모로 두는 행동한 출세’ ‘경찰의 권한을 가진 성직자의 철학’ 등등 쉴새없이 야유와 독설을 뿜어낸다.

    번역은 두 번 읽지 않아도 뜻이 통할 정도로 아주 부드럽다. 다만 몇몇 용어는 낯이 설었는데, 이를테면 ‘유럽식 공산주의’나 ‘레닌주의자 의무금’따위는 ‘유러코뮤니즘’이나 ‘레닌 추모 입당’처럼 ‘구시대’의 역어가 낫지 않을까. 레옹 블랭은 레옹 블룸이 맞는다. 끝으로 평자 개인으로는 30여 쪽의 ‘역자 서문’이 특히 흥미로웠는데, 그 내용이 내부 비판이라면 아주 반가우나, 어떤 분열의 조짐이라면 무척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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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군병사 2017.03.18 13:19
    6장 3절에 "1977년 좌익반대파는 이렇게 선언했다.." 라는 문장이 나오는데 1927년과 착각해서 쓰신 것 같습니다. 수정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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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볼셰비키 2017.03.19 00:14
    그렇군요. 용케 찾아내셨습니다. 지적 고맙습니다. 수정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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