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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 추도사

트로츠키

1919118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 사망 3일 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추모집회에서

<한글 번역의 원본인 Portraits Political & Personal by Trotsky(Pathfinder, 1976)편집자 서문>

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는 모두 1871년에 태어났다. 칼 리프크네히트는 독일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폴란드 러시아인 거주지에서 태어났고, 둘 모두 10대 때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세계 1차 대전이 일어나던 무렵, 그들은 당시에 강력했던 독일사회민주당(Social Democratic Party: SPD) 안에서 지배적 우익의 관료와 개량주의자들에 맞선 투쟁을 이끌던 당내 좌익분파 지도자였다. 리프크네히트는 독일의회(Reichstag)의 사회민주당 의원이었고 젊은이들과 병사들 사이에서 조직능력이 탁월한 사람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독일사민당을 포함한 소속 정당 대부분이 반전선언과 사회주의 원칙을 어기고 자기 나라 제국주의 정부를 지지하면서, 2차 인터내셔널은 붕괴되었다. 리프크네히트와 룩셈부르크는 스파르타쿠스동맹이라는, 작고 고립된 운동을 이끌었고, 그 조직은 전쟁과 SPD 지도부에 맞서서 비합법 선전물을 발간하였다. 1914, 리프크네히트는 독일의회에서 전쟁공채에 반대하여 SPD 당규를 위반하였다. 1916년 베를린 포츠담 광장에서 전쟁에 반대하는 노동절 시위를 주도하였고, 체포되어 4년 형을 언도받았다. 그로 인해 그의 이름은 제국주의 전쟁에 맞서는 혁명투쟁의 상징으로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룩셈부르크 역시 전쟁 반대 행동 때문에 대부분의 투쟁을 감옥에서 수행해야 했다.

그들은 서로 다른 감방 안에서, 191711월에 볼셰비키가 지도하는 (러시아 구력으로는 10월 혁명이라고 부르는) 소비에트의 러시아 국가권력 장악을 환호했다. 그로부터 1년 후 수병들이 들고 일어서고, 파업이 시작되고, 러시아 소비에트와 유사한 노동자/농민위원회가 대도시들에 번져가면서, 독일의 시간이 찾아왔다. 119일 총파업으로 정부가 물러났고, 군주제는 폐지되었으며 민주공화정이 선포되었다. 너무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하여, SPD 우익지도자인 프리드리히 에버트가 수상으로 추대되었다. 리프크네히트와 룩셈부르크는 석방되었고, 휴전협정이 체결되며 전쟁이 끝났다.

이어지는 몇 주 동안, 독일에 소비에트혁명이 임박한 것으로 보였다. 혁명을 위한 모든 조건이 존재했다. 다만 한 가지, 자본주의 전복으로 인도할 볼셰비키와 같은 당이 독일에는 없었다. 그 간극을 서둘러 메우기 위해 스파르타쿠스동맹은 1231일 전국 회의를 소집했고 룩셈부르크가 작성한 강령에 따라 공산당을 창설했다. 하지만 자본가와 군부의 지지를 받는 에버트 정부는 더 빨리 움직였다. 19191, 직접 조직하지는 않았지만 공산당이 지지한, 봉기에 가까운 파업이 시작되었을 때, 정부는 혁명가들에 대한 테러에 착수했다. 리프크네히트와 룩셈부르크는 115일 체포되었고, 정부군 유치장에 수감되었다가 감옥으로 이송하는 길 위에서 살해되었다.

이 소식은 볼셰비키에 커다란 타격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혁명이 세계 혁명의 첫 번째 발걸음일 뿐이며, 만약 독일과 같은 선진자본주의 국가의 후속 혁명이 이어지지 않는다면, 혁명은 실패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본주의 세력에 포위되어 절체절명의 내전을 치르고 있는 러시아 노동자들에게 119일 혁명은, 조만간 독일의 형제자매로부터 원조가 올 것이라는 희망이었다. 한편 1월에 닥쳐온 패배는 그 희망을 꺾었고 러시아 인민들에게 곧바로 설명되어야 했다. 대중적 추모집회가 여러 도시에서 열렸다. 가장 규모가 큰 것은 트로츠키와 지노비예프가 연설한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주최의 118일 집회였다.

당시 군사위원회 의장이었던 트로츠키가 연설한 것은, 전쟁 전 유배 생활을 할 때 리프크네히트와 룩셈부르크와 맺은 개인적 친분 때문이기도 했다. 혁명 순교자의 영웅적 행동을 일깨우고, 독일 혁명이 커다란 후퇴를 겪고 있지만, 최종 결론이 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러시아 청중들에게 확신시키는 것이 트로츠키 연설의 요체였다. 이 목적을 위해 그는, 청중들이 잘 알고 있고 쉽게 유사점을 포착해 낼 1917년 러시아혁명에 1918~19년 독일혁명을 비교하여 설명했다. 오늘날 독자들은 아마도 그 형식이 뭔가 좀 예스럽고, 리프크네히트와 룩셈부르크에 대한 평가가 지나치게 무비판적이라는 것을 유감스럽게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트로츠키가 연설하던 1919년은 표현형식이 요즘과 달랐다. 그리고 사건이 벌어지고 한참 지난 후 대학생들 앞에서 연설하는 것이 아니라, 살해당한 3일 후 내전의 한 가운데에서, 비극적 소식으로 충격을 받은 직후에, 간명한 설명을 바라는 노동인민을 상대로 한 연설이었다.

1919년에는 둘 가운데 리프크네히트가 더 알려져 있었지만, 룩셈부르크의 책자와 문건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상황이 점점 바뀌었다. 로자 룩셈부르크에 대한 영문전기로 로자 룩셈부르크: 삶과 저작(Rosa Ruxemburg: Her Life and Work)(Paul Frǒlich, 1940)로자 룩셈부르크(J.P. Nettle, 1966) 두 권이 있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연설(1970)은 가장 대표적인 정치 저작/연설문집이다. 리프크네히트의 군국주의와 반군국주의역시 출판되었다.

존 페얼리와 톰 스코트가 러시아어로부터 번역한 것이 칼 리프크네히트, 로자 룩셈부르크: 3인터내셔널의 순교자들이라는 제목으로 인터내셔널소셜리스트리뷰(International Socialist Review)에 의해 1971년 처음 출판되었다. 조지 손더스가 약간 수정하여 여기 다시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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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츠키 연설문>

[초록색 역주번역자]

우리는 지금 한 방의 심각한 타격을 당했습니다. 두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그것으로 우리는 아주 끔찍하고 크나큰 손실을 입었습니다. 두 명의 지도자가 우리 대열에서 사라졌습니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 그들의 이름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위대한 역사에 영원히 기록될 것입니다. 그들은 죽었습니다. 그들은 살해당했습니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우리 곁에 있지 않습니다.

일찍이 유명했던, 칼 리프크네히트라는 이름은 잔혹한 유럽 학살이 시작된 첫 몇 달 이후 즉각 무거운 의미를 얻었습니다. 미래의 승리를 약속하는 명예로운 혁명가의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독일 군국주의자들이 개전 초기 거둔 승리를 축하하는 그 몇 주 동안, 독일 군대가 벨기에를 가로질러 진격하고 벨기에 요새를 마치 종이집을 부수듯 쓸어버리던 그 몇 주 동안, 독일제 420mm 대포로 전 유럽을 위협하며 빌헬름 아래에 복종하여 노예가 될 것을 으르대던 그때, 샤이데만[Philipp Scheidemann: 1865~1939, SPD 지도자, 독일 군주제 붕괴하고 등장한 바이마르 공화국 2인자]과 에버트[Friedrich Ebert: 1871~1925, 베벨 사후 SPD 지도자, 1919~1925년 독일 대통령, 1차 대전 전 독일의 전쟁공채에 찬성하고, 전쟁 후 독일자본주의를 지키기 위해 자본가 우익/군부와 손을 잡고 공산주의 운동을 분쇄, 2017년 한국 촛불집회에 에버트상 수상]가 이끌던 독일사회민주당이 독일 군국주의 아래 무릎을 꿇어 애국을 다짐하던 그때, 국외로는 벨기에가 함락되고 프랑스 북부가 점령당한 때, 국내로는 독일 융커[독일의 토지귀족]나 독일 부르주아지나 국수주의에 빠져든 소부르주아뿐만 아니라, 공공연하게 독일 노동계급의 정당이라고 알려진 정당마저 굴복하던 그때, 그 어둡고 무섭고 땅끝 같던 그때였습니다. 바로 그때에, 일어나 저항하며 비분강개를 터뜨려 고발하는 칼 리프크네히트의 폭풍 같은 목소리가 독일을 흔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세계를 진동시켰습니다!

독일 침공으로 대중적 분위기가 가라앉고, 여당이던 프랑스 사회애국주의자들이 프롤레타리아에게,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기 위한 투쟁의 필요성을 선언하던 프랑스에서, 독일 나라 전부가 파리 점령을 위해 나서던 때였습니다. 프랑스에서조차 리프크네히트의 그 근엄한 경고의 목소리가, 거짓말과 비방과 공포의 벽을 찢어발기며, 울려퍼졌습니다. 억압받는 인민을 위해 마치 리프크네히트 혼자서 연설하는 것 같았습니다.

사실 그때 그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전쟁이 터지던 첫날부터 용감하고 주저하지 않는 영웅, 로자 룩셈부르크가 같이 있었습니다. 리프크네히트에게 기회가 주어졌던 것과 달리, 제멋대로인 독일 부르주아 의회가 그녀에게는 의회연단을 통한 저항 기회를 부여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투쟁은 그에 못지않았습니다. 독일 노동계급 최상의 인자들을 일깨우기 위한 투쟁과 그리고 그 죽음에서, 그녀는 전우였던 칼 리프크네히트에 뒤지지 않았습니다. 이 두 전사는 성격이 참으로 달랐지만, 한편으로 또 비슷했습니다. 서로를 보완했으며, 공동의 목표를 향해 치열하게 투쟁했고, 죽음을 같이했습니다. 그들은 또한 역사에 함께 기록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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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리프크네히트는 굽힐 줄 모르는 혁명가의 완전한 화신이었습니다. 그의 마지막 몇 달의 나날 동안 그에 관한 많은 전설이 생겨났습니다. 부르주아 언론이 만들어 낸 몇몇은 적의에 찬 것들이고, 노동계급에 회자되던 몇몇은 영웅적 이야기였습니다.

사생활에서 칼 리프크네히트는 친절과 소박함과 형제애의 화신이었습니다(아아, 우리는 벌써 그것을 과거시제로 말해야 합니다!). 15여년 전에 저는 그를 처음 만났습니다. 그는 우아한 사람이었고 사려 깊고 정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최상의 의미로, 그에겐 여성적 친절함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여성적 친절함과 더불어 그는, 정당하고 올바르다고 여기는 것에 대해서는 피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내어 싸울 준비가 된, 비범한 혁명가적 성정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의문의 여지없는 베벨의 권위에 맞서 그 자신의 의견을 감히 고집하곤 하던 청년 시절에, 이미 그는 자주적 태도를 보여준 바 있습니다. 호엔촐레른[Hohenzollern: 1918년 혁명으로 붕괴된 독일 황실] 군국주의에 맞선 투쟁에서와 마찬가지로, 젊은이들과 함께 한 사업은 그의 용기를 드러내 주었습니다. 마침내, 국수주의의 썩은 내가 진동하는 독일의회 연단에서, 호전적 부르주아지와 배신적인 사회민주당의 야합에 맞서 소리쳤을 때, 그의 진가가 드러났습니다. 베를린 포츠담 광장에서 부르주아와 군국주의에 맞서, 한 명의 병사로서, 공개적인 봉기를 촉구할 때 그의 진면목이 드러났습니다. 리프크네히트는 체포되었습니다. 그러나 감옥은 그의 영혼을 갉아먹지 못했습니다. 감방 안에서 그는 기다렸고 자신감 있게 승리를 예언했습니다. 작년 11월 혁명으로 그는 석방되었습니다. 리프크네히트는 즉시 독일 노동계급의 가장 결의에 찬 대열의 최선두에 섰습니다. 한 명의 스파르타쿠스가 스타르타쿠스동맹의 대열에 섰습니다. 그리고 그 깃발을 손에 쥔 채 죽어갔습니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이름은 이곳 러시아와 더불어 다른 나라엔 별로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녀의 천성은 어떤 점에서도 칼 리프크네히트의 그것에 비해 못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고귀한 얼굴과 지적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눈을 가진, 작고 연약한 그녀는 자기 사상에 대한 용기로 두드러졌습니다. 마치 그녀 몸의 일부라도 되는 것처럼 마르크스주의를 완벽하게 다루었습니다. 마르크스주의가 그녀의 핏방울에까지 스며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나는 지금 그 성격이 매우 다르지만 서로를 보완하는 두 명의 투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측면을 더 명확히 하려고 합니다. 만약 강직한 혁명가 리프크네히트가 개인적으로 사람을 대할 때는 여성적 친절함을 가졌다고 한다면, 이 연약한 여인은 사상에 대한 남성적 힘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퍼디난드 라살레는 언젠가 사상의 물리적 힘에 대해 말한 적 있습니다. 앞길에 놓인 물리적 장애물을 극복하는 듯한 그 힘 말입니다. 로자와 이야기를 나누거나 그녀의 논문을 읽거나 또는 적을 상대하는 그녀의 연설을 들으면 바로 그와 같은 인상을 동지들은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녀에겐 많은 적이 있었습니다. 나는 예나에서 열린 당 총회를 기억합니다. 바바리안(Bavarian), 바덴(Baden) 등 기회주의자의 강력한 항의를 가르며 울려퍼지던 마치 바이올린 소리 같은 높은 톤의 그 목소리를. 그들은 그녀를 얼마나 증오했던가요? 얼마나 경멸했던가요? 키가 작고 가냘프지만 그녀는 연단 위에서 총회를 지배했습니다. 마치 프롤레타리아 혁명사상의 화신처럼. 그녀는 논리와 야유의 힘으로 가장 고질적인 적들을 제압했습니다. 로자는 프롤레타리아의 적을 어떻게 증오하는지를 알고 있었고 바로 그 이유로 그녀는 그들의 증오를 샀습니다. 그녀는 그들로부터 배제되었습니다.

전쟁이 벌어진 첫날이 아니라, 첫 순간부터, 로자 룩셈부르크는 국수주의, 애국주의 광풍, 카우츠키[Karl Johann Kautsky: 1854~1938, 1차 대전 직전까지 마르크스주의의 가장 권위 있는 계승자로 알려졌으나, 전쟁으로 동요하며 중도기회주의자가 됨]와 하세(Haase)의 동요, 분명한 입장을 거부하는 중도주의에 맞서서,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독립과, 국제주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위한 행동을 개시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둘은 서로를 보완했습니다!

이론적 사고와 일반화 능력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그녀의 적들뿐 아니라, 동지들보다도 뛰어났습니다. 그녀는 천재였습니다. 야무지고, 꼼꼼하고, 영민하며, 인정사정없는 그녀의 스타일은 그녀가 가진 사상의 표현이었고, 표현일 것입니다.

리프크네히트는 이론가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직접 행동의 사나이었습니다. 충동적이고 열정적인 성품을 지닌 그는 탁월한 정치적 직관, 정세와 대중에 대한 감각, 비할 바 없이 용감한 혁명적 결단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918119일 이후 독일이 처한 국내외 정세에 대한 분석과 혁명적 진단은 무엇보다도 로자 룩셈부르크로부터 제기되었습니다. 직접 행동과 어떤 특정 순간에 무장봉기에 나서라는 호소는 아마도 리프크네히트가 처음 제기했을 것입니다. 이 두 명의 투사는 서로를 최상의 방식으로 보완했습니다.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는 지치지 않는 남성 혁명가와 결코 물러서지 않는 여성 혁명가 둘이 서로의 손을 잡고, 독일 노동계급의 최상의 분자들의 선두에 서서 함께 나아갔습니다. 새로운 전투와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향해. 이 첫 번째 발걸음을 뗄 때, 배신의 타격이 둘을 같은 날 쓰러뜨렸습니다.

참으로, 반동은 이보다 더 가치 있는 희생물을 고르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 얼마나 제대로 겨냥된 타격인가요? 의심의 여지 없이, 반동과 혁명은 서로를 잘 알고 있습니다. 반동은 과거에 노동계급의 당이었던 지도자 샤이데만과 에버트로 실현되었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이 반역적 살해에 대한 책임자라는 부끄러운 이름으로 흑역사에 영원히 기록될 것입니다.

리프크네히트와 룩셈부르크의 살해가 마치 오해로 인한 우연적 사고인 것처럼 묘사하는 독일 공식 언론을 접하고 있습니다. 격분한 군중으로 인해 경호원의 불충분한 경계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조사위원회가 열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동지들과 나는 혁명지도자들에 대한 이른바 자발적인공격이 반동에 의해 어떻게 준비되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러시아의 1917] 7월 시기를 기억합니다. 페트로그라드 울타리 안에서 우리가 겪었던, 케렌스키와 체레텔리가 소집한 정치깡패가 볼셰비키를 어떻게 공격했는지, 노동자들을 어떻게 체계적으로 소탕하려 했는지, 그 지도자들을 살해하려 했는지, 거리의 노동자들을 제거하면서. 이른바 오해로 인해 살해당한 노동자 보이노프(Voinov)를 우리 모두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광분한 정치깡패의 손에 붙들리는 것을 피했기 때문에 우리는 가까스로 레닌을 살릴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 심지어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의 충실한 당원들 가운데에서도 일부는, 독일 첩자라고 기소된 레닌과 지노비예프가 그 비방을 반박하기 위해 법정에 출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분개했습니다. 그들은 특히 그 점을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법정이었습니까? 리프크네히트처럼, 레닌을 탈출시킬 목적으로 마련된 법정이었나요? 만약 레닌이 총에 맞거나 칼에 찔렸다면, 케렌스키와 체레텔리의 공식 언론은 볼셰비키 지도자가 도망치다가 경비원에 살해당했다고 보도했을 것[115일 반동군에 잡힌 룩셈부르크는 고문당한 뒤 총살당했다. 그의 시신은 강에 던져졌다. 같은 날 생포된 리프크네히트는 감옥으로 이송 중 차에서 내리라는 명령을 받는다. 차에서 내리자, 뒤에서 총격을 받고 사망한다. 공식언론은 그가 탈출을 시도하다 사망했다고 발표했다.]입니다. 베를린 사건 이후 우리는 레닌이 조작 재판에 출석하지 않은 것이 얼마나 잘한 일이었는지, 그리고 그가 재판조차 없이 살해당할 뻔한 위험을 감수하지 않은 것이 얼마나 잘한 일인지 열 배나 분명한 근거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로자와 칼은 숨지 않았습니다. 적들은 그들을 잡아챘습니다. 그리고 그 손으로 그들을 목 졸랐습니다! 얼마나 큰 타격입니까! 이 얼마나 큰 불행입니까! 우리의 동지들, 독일공산주의 최고 지도자들은 더는 우리와 함께 있지 않습니다. 그 살인자들은 사회민주당이라는 깃발 아래 서 있고, 뻔뻔하게도 그들은 칼 마르크스의 후계자라고 합니다. 언어도단이며 조롱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동지들! 이 이른바 마르크스주의사회민주당, 2인터내셔널에서 지도적 역할을 하는, 전쟁이 벌어진 그 날부터 노동계급의 이해를 배신한 바로 그 당이며, 프랑스 북부지방과 벨기에를 침공하는 동안 독일 군국주의를 지지한 바로 그 당이고, 브레스트 평화조약 이후 10월 혁명이 아니라 독일 군국주의를 선택한 당이며, 그 당의 지도자인 샤이데만과 에버트는 지금 인터내셔널의 영웅인 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를 살해한 깡패집단을 조직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역사적인 언어도단입니까? 수백 년 동안을 돌이켜보면, 기독교의 역사적 운명과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노예, 어부, 노동인민, 피억압자 등, 노예제 사회로 인해 짓이겨지는 모든 자들의 복음그들의 역사에 뿌리를 둔 그들의 복음은 부자, , 귀족, 대주교, 사채업자, 족장(patriarch), 은행업자, 로마 교황에 탈취되어 억압자들의 범죄를 감추는 이념적 망토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의심의 여지 없이, 하층 계급의 의식으로부터 형성된 원래 기독교의 복음과 공식 카톨릭이나 정교회 사이엔, 혁명적 사상과 의지의 뿌리인 마르크스의 가르침과 모든 나라의 샤이데만과 에버트 같은 자들이 깃들어 즐기는 그 비루한 곁가지 사이와 같은, 근본적 차이가 없습니다. 사회민주당 지도부를 통해 부르주아는 프롤레타리아의 정신적 자산을 약탈했고, 그 약탈물은 마르크스주의라는 간판으로 감추어졌습니다. 그러나 동지들, 이 범죄가 샤이데만과 에버트 같은 자들이 저지른 최후의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독일 프롤레타리아는 그 머리 위에 올라탄 자들에 의해 오래 시달려왔지만, 앞으로는 이를 모른 척 넘어갈 수 없을 것입니다. 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의 피는 외칠 것입니다. 이 피는 리프크네히트가 전쟁과 자본에 맞선 봉기의 깃발을 처음으로 들어올린 포츠담 광장의 벽돌과 베를린의 도로가 소리치게 만들 것입니다. 그리고 조만간 베를린의 도로 위엔, 부르주아 사회의 참으로 비굴한 개들과 샤이데만과 에버트 같은 자들에 맞서, 그 벽돌로 바리케이드가 쌓아 올려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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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국주의, 자본주의, 대토지소유와 싸우는 스파르타쿠스당

베를린에서 도살자들이 독일 공산주의자인 스파르타쿠스 운동을 분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운동의 가장 뛰어난 두 명의 주동자를 살해했고, 아마 오늘 그들은 승리를 축하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짜 승리는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모든 것을 내건 전면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정치권력 장악을 내건 독일 프롤레타리아의 봉기는 아직 없었습니다. 지금 일어난 것은 단지 상대의 역량을 체크하려는 크고 깊은 규모의 탐색전이었습니다. 탐색전은 전면전을 이끕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전면전은 아닙니다. 독일 프롤레타리아는, 우리가 19177월 시기에 그랬던 것처럼, 탐색전이 필요했습니다. 불행한 것은 이 탐색전에서 두 명의 사령부를 잃었다는 것입니다. 참혹한 피해이지만, 그러나 패배는 아닙니다.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지난날 우리가 경험했던 정세를 살펴보면, 독일에서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동지들은 사건들이 나아가는 방향과 그 자체의 논리를 기억해야 합니다. 구력 2월 말에 대중은 차르를 끌어내렸습니다. 첫 몇 주 동안 마치 모든 것을 이루었다는 정서가 존재했습니다. 몇몇 야당 출신의 새 인물들이 나서서 인민대중의 신뢰 또는 부분적 신뢰를 누렸고, 이런 일은 이 나라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신뢰는 급속히 금이 갔습니다. 그러리라고 예상했던 것처럼, 페트로그라드는 혁명의 두 번째 단계 역시 주도했습니다. 2월에 그랬던 것처럼, 7월에, 페트로그라드는 혁명의 전위였고 나머지 지역을 훨씬 앞질렀습니다. 이 전위는 부르주아지와 화해주의자[멘셰비키 사회혁명당으로 구성된 부르주아 체제와의 협조주의자]에 맞선 전면전을 선포했고, 깊은 탐색전을 치렀습니다.

7월 시기 페트로그라드 전위는 케렌스키 정부와 충돌했습니다. 그것은 아직 10월에 있었던 것과 같은 봉기는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전위가 수행한 소규모 전투였고, 지방의 대다수 대중은 그 역사적 의미를 아직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 충돌에서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들은, 러시아뿐 아니라 모든 나라의 대중에게, 케렌스키 뒤에는 독립적 군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를 지지하는 세력은 부르주아지, 백위대, 반혁명 세력들이라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7월 시기에 우리는 패배를 경험했습니다. 레닌 동지는 피신했습니다. 우리 중 일부는 감옥에 갇혔습니다. 우리 신문들엔 재갈이 물렸습니다. 페트로그라드엔 집중 단속이 벌어졌습니다. 당과 소비에트 언론은 파괴되었고, 노동계급 건물은 봉쇄되었습니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지금 베를린 시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혁명가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7월 시기가 우리 승리의 전조일 뿐이라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지난 며칠 동안 독일에서 비슷한 정세가 펼쳐졌습니다. 이곳 페트로그라드에서 그랬던 것처럼, 베를린은 다른 지역 대중들보다 앞서 나갔습니다. 이곳에서 그랬던 것처럼, 독일 프롤레타리아의 모든 적들은 베를린의 독재는 용납될 수 없다고 울부짖었습니다. 스파르타쿠스의 베를린은 고립되었습니다. 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의 선전으로 오염된제헌의회는 반드시 소집되어야 하고 붉은 베를린에서 독일의 건강한 더 많은 도시들로 전파되어야 합니다. 적들이 행했던 모든 것들, 모든 더러운 선동, 우리가 들었던 모든 익숙한 비방들, 프롤레타리아와 그 지도자인 리프크네히트와 룩셈부르크를 향하여 독일어로 번역된 이 모든 비방들이 베를린 샤이데만과 에버트 같은 자들에 의해 고안되었습니다. 독일 프롤레타리아의 탐색전은 우리의 7월 시기보다 보다 넓고 깊게 전개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한번 겪었던 사건보다 독일인들이 더 많이 겪었다는 사실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그들의 부르주아지와 군대는 우리의 7월과 10월 경험으로부터 배웠습니다. 그러나 핵심은 독일의 계급 관계가 우리보다 비할 수 없이 뚜렷하게 구획되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독일 유산계급은 더 단단히 뭉쳐 있고, 더 지적이고, 보다 적극적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더욱 잔혹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동지들, 우리나라에서 2월 혁명과 7월 시기 사이엔 4개월이 있었습니다. 페트로그라드 프롤레타리아는 케렌스키-체레텔리 국가를 떠받친 기둥을 흔들어야 한다는 것, 그러기 위해 거리로 나서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논쟁의 여지없이 깨닫기 위해 필요한 4개월이었습니다. 7월 시기의 패배 이후 여타 지방들이 페트로그라드를 지지하기 위해 또 다른 4개월이 필요했습니다. 191710월 사적소유의 요새를 향한 직접 공격 선언에 대한 확신을 위해 필요한 시간이었습니다.

독일에서 군주제를 타도한 첫 혁명은 11월 초에서야 발생하였습니다. 우리의 7월 시기는 1월 초에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 혁명에서 독일 프롤레타리아가 축약된 일정을 밟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을까요? 우리는 4개월이 걸렸지만, 그들은 오직 2개월만 있으면 되었습니다. 이런 템포가 앞으로도 지속되리라 기대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독일 ‘7월 시기로부터 독일의 ‘10까지는 4개월이 채 걸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2개월이면 충분하거나 그보다 더 짧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건이 어떻게 전개되든, 한 가지 사실은 명백합니다. 칼 리프크네히트의 등에 가해진 총격은 독일 전역에 강력한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 반향은 독일과 다른 나라의 샤이데만과 에버트 같은 자들의 귀에 조종으로 울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스러져간 지도자 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를 향한 진혼곡을 부릅니다. 우리는 그들을 앞으로는 볼 수 없습니다. 동지들 가운데 실제로 그 둘을 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는 지난 몇 달과 몇 년 동안 우리들 가운데 살아있었습니다. (러시아에 한 번도 온 적이 없었으므로) 그 자신은 이곳에 없었지만, 그는 우리 가운데 있었습니다. 명예로운 손님으로 탁자 한 자리에 우리와 더불어 친근하게 앉아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단지 개인의 이름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우리 노동계급에게 모든 선하고, 용감하고, 고귀한 것을 가리키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강철처럼 단련되고, 적 앞에서 원칙을 조금도 굽히지 않고, 학대받는 인민들에 온전히 투신한 사람을 상상해야 한다면, 칼 리프크네히트라는 이름이 즉각 떠오를 것입니다. 그는 그 행동의 영웅성으로 인민의 기억과 의식에 영원히 각인되었습니다. 광분한 적 진영 내에서, 기세등등한 군국주의가 모든 것을 휩쓸고 분쇄할 때, 그에 저항해야 할 모든 이들이 침묵하고 있을 때, 어디에도 뭔가 신선한 공기가 존재하지 않을 때, 리프크네히트는 투사의 목소리를 내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당신들, 권력을 쥔 독재자, 군부 도살자, 침략자들. 당신들, 비굴한 아첨꾼들, 협조주의자들, 벨기에를 짓밟고 프랑스를 위협하는 당신들. 당신들은 전 세계를 부수고 싶어한다. 당신들은 정의를 피해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말하노니, 우리는, 소수이지만, 당신들이 두렵지 않다. 우리는 당신들을 향한 전쟁을 선포한다. 우리는 대중을 일으킬 것이고 이 전쟁을 끝장내기 위해 투쟁할 것이다.”

그와 같은 단호함, 그와 같은 영웅적 행동이라는 모습으로, 칼 리프크네히트는 세계 노동계급이 잊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정신을 공유한 또 한 명의 세계 프롤레타리아 투사인 로자가 그 옆에 서 있습니다. 전투 현장에서 맞이한 그 둘의 비극적 죽음은 끊어지지 않는 특별한 고리로 연결되었습니다. 지금부터 그들은 항상 같이 할 것입니다. 칼과 로자, 리프크네히트와 룩셈부르크!

성인의 영원한 삶에 관한 전설의 기초를 아십니까? 그것은 그들에 대한 기억을 보존하려는 인민들의 필요입니다. 인민을 어떤 길로 인도한 이들을 성스러운 기운 속에 영속하려는 노력입니다. 동지들, 우리에겐 전설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영웅을 성인으로 승화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에겐 우리가 살고 있는 진실 그 자체로 충분하고, 그 진실 자체가 전설입니다. 그것은 대중과 그 지도자들의 정신을 기적적 힘으로 일깨우고, 모든 인류 위에 우뚝 선 숭고한 인물들을 만들어냅니다.

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는 그와 같은 인물들입니다. 우리는 그 둘이 우리와 함께 거의 물리적으로 맞닿아 있다고 느낍니다. 이 비극적 순간에 우리는 독일의 최상의 노동자와 정신을 함께 합니다. 그리고 세계는 이 참혹한 소식으로 슬픔에 빠져 애도하고 있습니다. 우리 독일 노동자들처럼, 살을 에는 듯한 통렬함으로 충격을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가 투쟁에 임할 때와 마찬가지로, 비통과 애도 속에서 우리는 국제주의자입니다.

우리에게 리프크네히트는 단지 독일 지도자인 것만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로자 룩셈부르크는 단지 독일 노동자를 지도하는 폴란드 출신 사회주의자인 것만이 아닙니다. 아닙니다. 세계 프롤레타리아에게 그 둘은 모두 우리 친밀한 일부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들과 정신적으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둘의 모든 숨결은 한 나라가 아니라, 세계에 속한 것입니다!

리프크네히트와 룩셈부르크는 러시아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와 특히 긴밀했고, 가장 힘든 시기에도 그랬다는 것을 러시아 노동여성과 남성에게 알릴 필요가 있습니다. 리프크네히트가 살던 집은 베를린에 있던 러시아 망명자들의 본부였습니다. 독일 의회에서 독일 지배자들이 러시아의 반동에 제공한 서비스에 저항해야 했을 때, 우리는 맨 먼저 리프크네히트를 찾아갔습니다. 그러자 그는 모든 방을 두드렸고 샤이데만과 에버트를 포함한 모든 사람에 독일 정부의 범죄행위에 저항하라고 호소했습니다. 그리고 몇몇 동지에 물질적 원조가 필요할 때 우리는 언제나 리프크네히트에 의지했습니다. 리프크네히트는 러시아 혁명의 적십자활동에 지칠 줄 몰랐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예나에서 열린 독일 사회민주당 총회에, 저는 손님으로 참가했는데, 리프크네히트가 주도한 간부회의는 나에게 차르 정부가 핀란드에서 행한 폭력을 비난하는 결의문 낭독을 제안했습니다. 리프크네히트는 그 자신의 연설을 위해 사실과 통계를 수집하고 차르 러시아와 핀란드의 역사적 관계를 구체적으로 질문하면서 준비에 열중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연설 직전(나는 리프크네히트 다음에 연설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스톨리핀[Pyotr Arkadyevich Stolypin: 1862~1911, 1905혁명 이후 차르가 임명한 수상]이 키예프에서 암살당했다는 전보가 왔습니다. 이 전보로 총회는 술렁거렸습니다.

지도부가 제기한 첫 질문은, 러시아 혁명가 일부가 방금 러시아 수상을 암살한 지금, 러시아 혁명가에게 독일 총회에서 연설할 기회를 주는 것이 적절한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이러한 생각이 심지어 베벨[August Bebel: 1840~1913, SPD 창립자/지도자, 이 일화 당시 71]마저 흔들었습니다. 중앙위원회의 다른 회원들보다 머리 세 개 만큼이나 높이 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원로는 불필요한난관을 꺼렸습니다. 그는 즉시 나를 찾아내서는 추궁했습니다. ‘암살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 암살은 어떤 정당이 저지른 일인가? 지금 상황에서 내 연설은 독일 경찰로 하여금 나를 주목하도록 만들지는 않을지 생각해 보았는가?’ 등을 물었습니다. 저는 그 원로에게 조심스럽게 질문했습니다. “동지는 내 연설로 발생할지 모르는 어떤 난관이 두렵습니까?” 베벨은 그렇습니다. 나는 동지가 연설하지 않기를 바랍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물론 제 연설은 없을 것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게 헤어졌습니다.

일 분 뒤 리프크네히트가 제게 뛰어왔습니다. 그는 극도로 흥분해 있었습니다. “그들이 당신에게 연설하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 방금 베벨과 그 얘기를 끝냈습니다.”라고 나는 대답했습니다. “동의했어요?” “어떻게 동의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저는 이곳의 주인이 아니고, 손님일 뿐입니다.”라고 대답하며 자신을 합리화했습니다. “우리 간부회의가 그런 일을 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망신이에요. 듣도 보도 못한 추문입니다. 욕먹어 마땅한 비겁이에요!” 등등. 리프크네히트는 자신의 연설에서 비분을 토해내었습니다. 차르의 최고 존엄을 욕하는 식으로 불필요한어려움을 만들지 말라는 간부회의의 사전 경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차르 정부를 가차 없이 공격했습니다.

청소년 시절부터 로자 룩셈부르크는, 르위카(Lewica)라고 불리는 폴란드 사회당의 혁명 분파와 함께 공산당을 만든, 폴란드 사회민주당의 지도적 위치에 있었습니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러시아어는 훌륭했고 러시아 문학을 깊이 있게 이해했으며, 러시아 정치를 매일 접하고 있었습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러시아 혁명가들과 긴밀히 결합해 있었고, 독일 신문에 러시아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발걸음을 애정 어린 논조로 설명했습니다. 그의 두 번째 조국인 독일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그녀의 뛰어난 재능으로 독일어를 완벽히 습득했을 뿐만 아니라, 독일 정치를 온전히 습득했습니다. 그녀는 베벨 당시의 옛 사회민주당에서 가장 두드러진 위치의 인물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항상 극좌 분파에 있었습니다.

1905년 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는 말 그대로 러시아 혁명 속에서 살았습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1905년 베를린을 떠나 바르샤바로 이주했는데, 폴란드인이어서가 아니라 혁명가로서였습니다. 바르샤바의 감옥에서 보석으로 풀려난 뒤, 그녀는 1906년 법망을 피해 페트로그라드로 들어갔습니다. 가짜 이름으로 감옥에 갇힌 몇몇 친구들을 방문했습니다. 베를린으로 돌아간 그녀는 기회주의에 맞선 투쟁을 배가했습니다.

로자와 더불어 우리는 노동계급에 가해진 가장 커다란 불행을 겪은 바 있습니다. 저는 지금 19148월 제2인터내셔널의 부끄러운 파산에 관해 말하는 것입니다. 그녀와 더불어 우리는 제3인터내셔널의 깃발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지금 동지들, 우리는 일상적 사업을 벌이면서 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가 남긴 유산을 따라야 합니다. 만약 아직 춥고 굶주리고 있는 이곳 페트로그라드에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한다면 우리는 리프크네히트와 룩셈부르크의 정신으로 작업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군대가 전선으로 나아간다면, 그것은 우리의 피로 리프크네히트와 룩셈부르크의 유산을 방어하기 위함입니다. 그 둘을 직접 방어할 수 없다는 것은 얼마나 비통한 일입니까!

독일에는 적군(赤軍)이 없으며, 권력은 여전히 적들의 손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점점 더 성장하고 강해지고 있는 우리의 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칼과 로자의 깃발 아래 독일 프롤레타리아의 군대가 집결할 때, 우리 모두는 리프크네히트와 룩셈부르크가 누구였고, 그들이 무엇을 위해 죽었는지, 적군 병사와 노동자와 농민 모두가 왜 그들을 신성하게 기억해야 하는지, 적군에 환기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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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가해진 모든 타격 가운데 가장 견딜 수 없이 아픈 충격입니다. 여전히 우리는 희망만이 아니라 자신감을 가지고 기대합니다. 오늘 독일에서 반동이 물결치고 있음에도, 그곳에 붉은 시월이 등장할 것이라는 자신감을 우리는 한순간도 잃지 않습니다. 위대한 투사들은 헛되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죽음을 되갚을 것입니다. 그들의 정신은 충족될 것입니다. 친애하는 그 둘의 정신 앞에서, 우리는 이렇게 외칩니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트네히트여, 동지들은 더 이상 이승에 없다. 그러나 당신들은 우리와 함께 있다. 우리는 당신들의 강력한 정신을 함께 느낀다. 우리는 당신의 깃발 아래에서 싸울 것이다. 투쟁하는 우리 대열은 동지들의 숭고한 헌신에 감화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 각자는 맹세한다. 만약 때가 되어 혁명이 요구한다면, 주저함 없이 목숨을 걸 것이다. 동지들이 죽은 바로 그 깃발 아래에서! 친구이며 무장한 동지여, 로자 룩셈부르크여, 칼 리프크네히트여!”

  1919118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 사망 3일 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추모집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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