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 이후의 제3 인터내셔널

by 볼셰비키 posted Jun 07,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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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 이후의 제3 인터내셔널


레온 트로츠키


**이 전자문서는, 레닌 사후, 러시아공산당과 코민테른의 스탈린주의적 퇴보를 분석 비판한 저작으로, 1928년 코민테른 6차 대회에 제출된 논문 모음입니다. 이 전자문서는, 『The Third International After Lenin(1931-39), Leon Trotsky(New Park, 1974)』를 대본으로, 풀무질출판사가 2009년 번역 출간한 『레닌 이후의 제3인터내셔널』을 복구한 것입니다.**

 

< 차례 >

제1부 코민테른 강령 초안-근본적 비판

서문

1장 I 국제혁명의 강령인가 일국사회주의의 강령인가?
강령의 일반적 구조 / 미국과 유럽 / 유럽소비에트합중국 슬로건 / 국제주의의 기준 / 당의 이론적 전통 / 어떤 점에서 사회민주주의적 일탈인가? / 세계경제에 대한 소련의 의존 / '일국사회주의'라는 반동적 유토피아 이론의 원인으로서 생산력과 일국적 경계 사이의 모순 / 문제는 오직 세계혁명의 무대에서만 풀 수 있다 / 일련의 사회애국주의적 중대 실수인 일국사회주의 이론

2장 I 제국주의 시대의 전략과 전술
강령 초안 중심 장(章)의 완전한 파산 / 혁명적 시대의 전략에 고유한 근본적 특성들과 당의 역할 / 제3차 대회와 레닌과 부하린 각각의 혁명적 과정의 영속성 문제 / 1923년의 독일 사태와 
10월의 교훈 / 제5차 대회의 기본적인 전략적 오류 / '민주적 평화주의 시대'와 파시즘 / 극좌 정책의 우익적 효모(酵母) / 우익 중도주의적 퇴보의 시기 / 혁명전략의 책략적 성격 / 내전의 전략 / 당내 제도의 문제 / 반대파 패배의 원인과 그 전망

3장 I 중국혁명의 개괄과 전망-동방의 나라들과 코민테른 전체를 위한 그 교훈
식민지 자본가계급의 본질에 대하여 / 중국혁명의 단계 / 민주주의 독재인가, 노동자계급의 독재인가? / 기회주의의 산물인 모험주의 / 소비에트와 혁명 / 다가오는 중국혁명의 성격 문제 / 동방을 위한 '노동자 농민의 두 계급 당'이라는 반동적 관념에 대하여 / 농민인터내셔널을 지킨 강점이 규명되어야 한다 / 결론

 

제2부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이 편지의 목적 / 왜 4년 이상 코민테른 대회가 소집되지 않았는가? / 1923~27년의 정책 / 대중의 급진화와 지도부의 문제 / 소련공산당의 현 좌경화는 어떻게 준비되었는가 / 일보전진, 반보후퇴 / 책략인가 새로운 노선인가? / 현 위기의 사회적 기초 / 당의 위기

 

제3부 통합반대파의 강령-당의 위기와 그 극복을 위한 방법

서론 / 노동자계급과 노동조합의 상태 / 농민-농업문제와 사회주의 건설 / 국영기업과 사회주의 건설 / 소비에트 / 민족문제 /  / 콤소몰(공산주의 청년동맹) / 국제정세와 전쟁의 위험 / 적군(Red Amy)과 해군논쟁의 진짜 쟁점과 가짜 쟁점 / 기회주의 반대!-당의 단결을 위하여

 

 

 

코민테른 강령 초안-근본적 비판


서문

강령 초안 즉, 앞으로 여러 해 동안 코민테른의 전체 활동을 확정할 기본 문서가 제5차 대회 이후 4년이 지나 열리는 제6차 대회 소집을 불과 몇 주 앞두고 발표되었다. 첫 번째 초안이 바로 제5차 대회 이전에 발표 되었다는 사실을 언급하는 것으로 강령 초안 발표의 이런 지연이 정당화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제5차 대회 이후 벌써 몇 년이 흘러버렸기 때문이다. 두 번째 초안은 그 전체 구조에서 첫 번째 초안과 다르다. 또 최근 몇 년의 발전을 개괄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제6차 대회에서 이 초안을 채택하는 것보다 더 경솔하고 무모한 짓은 없을 것이다. 사전에 신문지상을 통한 진지하고 과학적인 비판이나, 코민테른의 모든 정당들 내에서 광범한 토론도 거치지 않은 이 초안에는 급히, 게다가 무성의하게 쓴 흔적이 명백히 나타나 있다.

초안을 받고 이 글을 보내기까지 우리에게 주어진 며칠 동안, 우리는 강령에서 반드시 다루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몇 가지 문제들만을 숙고했다.

시간 부족 때문에, 우리는 강령에서 언급된 많은 중요한 문제들, 즉 지금은 화급을 다투는 문제가 아닌 것 같지만 미래에는 이례적으로 중요해질지도 모르는 문제들을 전혀 고찰하지도 못한 채 그대로 남겨둘 수밖에 없었다. 이는 현재 전념하고 있는 강령의 이 부분들에 비해 이 문제들을 비판할 필요성이 적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또한 우리는 꼭 필요한 정보를 얻는 것이 불가능한 조건에서 새로운 초안을 연구할 수밖에 없다는 점도 덧붙여야 한다. 우리가 강령의 첫 번 째 초안조차 입수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언급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따라서 두세 가지 다른 경우에서처럼, 초안을 다루면서 우리는 기억에 의존해야만 했다. 모든 인용은 원문에서 따왔으며, 주의 깊게 검토되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1장 I 국제혁명의 강령인가 일국사회주의의 강령인가?


제6차 대회의 안건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강령 채택 건이다. 강령의 성격은 오랫동안 인터내셔널의 상(相)을 결정하고 확립시킬 것이다. 강령의 중요성은 강령이 일반적인 이론적 개념을 정식화하는 방식에 있지 않다(결국, 강령은 ‘성문화’(成文化)의 문제, 즉 확고하게, 그리고 결정적으로 획득해온 진실과 일반 법칙에 대한 간결한 해설로 귀결된다). 강령의 중요성은 훨씬 더 큰 정도로 지난 시기, 특히 매우 많은 사건과 오류가 있었던 지난 5년간의 혁명투쟁이라는 정치적 경험과 세계경제에 대한 대차대조표를 작성하는 문제이다. 앞으로 몇 년 동안, 코민테른의 운명은一말 그대로의 의미에서一이런 사건, 오류, 논쟁들이 강령에서 해석되고 판단되는 방식에 달려 있다.


1. 강령의 일반적 구조

세계경제와 세계정치가 금융자본의 헤게모니 아래에 있는 제국주의의 시대인 우리 시대에는 단 하나의 공산당도 오로지 또는 주로 자국의 조건과 발전 경향에서 유래하는 것으로부터 자신의 강령을 마련할 수 없다. 이것은 소련이라는 영역 안에서 국가권력을 행사하는 당에게도 완전히 적용할 수 있다. 1914년 8월 4일, 일국적 강령의 영원한 죽음을 알리는 조종이 울렸다.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당은 자본주의의 최고의 발전과 붕괴의 시대인 현 시대의 성격에 일치하는 국제적 강령에만 기초를 둘 수 있다. 국제공산주의 강령은 결코 일국적 강령의 총합이 아니며, 그 공통된 특징의 혼합물도 아니다. 국제적 강령은 그 모든 관계와 모순을 전체적으로 볼 때, 즉 그 개별적 부분들이 서로 적대적으로 상호의존하고 있는 세계경제와 세계정치체제의 조건과 경향에 대한 분석에서 직접 나와야 한다. 현 시대에 노동자계급의 일국적 정세 판단은 과거에 비해 훨씬 더 큰 정도로 세계적 정세 판단에서 나와야 하고, 또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며, 그 반대의 경우는 아니다. 여기에 공산주의의 국제주의와 온갖 종류의 민족적 사회주의 사이의 기본적이고 주요한 차이가 있다.

이런 생각에 입각하여 우리는 올해 1월에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코민테른의 강령을 기초하는 임무에 착수해야 한다(부하린의 강령은 코민테른의 일국 지부의 조악한 강령이지 세계 공산당의 강령이 아니다).’(〈프라브다〉지, 1928년 1월 15일자)

우리는 미국 문제가 충분한 규모로 세계와 용어의 가장 직접적인 의미에서 유럽 정치의 문제로 나타난 1923-24년 이래로 이런 생각을 계속 주장해왔다.

새로운 강령을 제시하면서 〈프라브다〉지는 공산주의 강령은 ‘중심 원리의 취지에서뿐만 아니라 구조상의 특색인 국제주의에서도 국제 사회민주주의의 강령과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말했다(〈프라브다〉지, 1928년 5월 29일자).

이 다소 애매한 정식화에는 분명히 우리가 앞에서 말했으며, 이전에는 단호히 거부된 생각이 표현되어 있다. 부하린이 제출한 첫 번째 강령 초안을 파기한 것은 환영받을 수밖에 없다. 진지한 의견 교환을 불러일으키지도 못했으며, 실제로 강령의 근거를 하나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초안은 사회주의를 향한 한 나라의 추상적인 발전을 단조로운 도식적 방식으로 기술했다. 반면에, 새로운 초안은 불행히도 앞으로 살펴볼 것처럼, 일관성이나 연속성 없이 세계경제 전체를 그 개별적 부분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기초로 간주하려고 한다.

발전 수준이 서로 다른 나라와 대륙을 상호의존과 적대의 체제로 연결하면서, 발전의 서로 다른 단계를 평준화하는, 동시에 즉시 이들 사이의 차이를 부추기면서, 그리고 한 나라를 다른 나라에 가차 없이 대치시키면서 세계경제는 개별 국가와 대륙의 경제생활을 지배하는 강력한 실체가 되어왔다. 이 기본적 사실만으로도 세계 공산당이라는 생각은 최고의 현실성을 지닌다. 초안이 서문에서 아주 정확히 밝히고 있는 것처럼, 세계경제 전체를 사적 소유에 기초하여 일반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발전 단계로 이끌면서, 제국주의는 ‘세계경제의 생산력 발전과 민족-국가적 장벽 사이의 모순을 극도로 긴박하게 악화시킨다.’

지난 제국주의 전쟁 중에 처음으로 인류에게 생생하게 드러난 이 명제의 의미를 파악하지 않은 채, 우리는 세계정치와 혁명투쟁의 주요한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향해 단 한 걸음도 내딛을 수 없다.

유일하게 올바른 이 입장을 정반대 성격을 가진 경향과 화해시키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초안은 가장 끔찍한 모순들의 각축장으로 바뀌어버렸다. 따라서 그 근본적인 측면에서 문제에 접근하는 새로운 방식의 원칙적 의의가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 버렸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는 새로운 초안에서 강령의 축 자체가 급진적으로 이동한 것을 환영했을 것이다.


2. 미국과 유럽

다행히도 폐기된 첫 번째 초안을 특징짓자면, 우리가 기억하는 한은 첫 번째 초안에서 미국이라는 이름이 언급조차 되지 않았음을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제국주의 시대의 핵심적 문제들은一바로 이 시대의 성격 때문에, 그 추상적, 이론적 단면에서뿐만 아니라 그 구체적, 역사적 단면에서도 검토되어야 한다一첫 번째 초안에서 자본주의 국가 ‘일반’에 대한 생기 없는 도식으로 해소되어 버렸다. 그러나 새로운 초안은一물론 이것은 중요한 일보전진이다一이제 ‘세계의 경제적 중심이 미국으로 이동했다’, ‘“달러공화국”이 세계의 착취자로 변모했다’, 마지막으로 북미와 유럽 자본주의, 주로 영국자본주의 사이의 경쟁(초안은 막연하게 ‘갈등’이라고 말한다)이 ‘세계적 갈등의 축이 되고 있다’고 말한다. 세계정세의 이런 기본적 사실과 요인들에 대해 분명하고 정확한 규정을 담고 있지 않는 강령이 국제 혁명당의 강령과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는 것은 오늘날 이미 아주 분명하다.

불행히도, 우리가 방금 지적한 현대 시대에 세계 발전의 본질적인 사실과 경향들은 초안 원문에서는 단지 개별적으로만 언급되어 있다. 말하자면, 초안의 전체 구조와 어떤 본질적인 관련도 없이, 그리고 전망 또는 전략에 대한 어떤 결론에도 이르지 못한 채 이론적 위로로서 초안에 접붙여져 있다.

독일공산당의 항복, 따라서 독일 노동자계급이 패배한 1923년 이후, 유럽에서 하고 있는 미국의 새로운 역할은 전혀 평가되지 않았다. 사회 민주주의의 ‘부활’뿐만 아니라 유럽의 ‘안정화’, ‘정상화’, ‘평온화’의 시기도 미국이 유럽 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한 첫 번째 조치와 밀접한 물질적, 이데올로기적 관련 속에서 진행되었다는 것을 설명하려는 시도도 하지 않는다.

게다가 불가피하게 더욱 진전될 미국의 확장적 발전, 유럽의 시장 자체를 포함하여 유럽의 자본시장 축소가 과거의 모든 격동을 무색하게 만드는 것은 물론이고, 가장 극심한 군사적, 경제적, 혁명적 격동을 수반한다는 것도 보여주지 않는다.

또한 미국의 더욱 냉혹한 압력이 자본주의 유럽을 세계경제에서 끊임없이 협소화시킬 것이라는 점도 분명히 하지 않는다. 물론 이는 유럽에서 국가들 사이의 관계를 완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군사적 충돌이라는 격렬한 발작을 동반하며 엄청나게 격화시킬 것임을 암시한다. 왜냐하면 계급들뿐만 아니라 국가들도 배급량이 충분하게 늘어나는 경우보다는 불충분하게 줄어드는 경우, 훨씬 더 격렬하게 싸우기 때문이다.

초안은 국가적 적대라는 유럽의 내적 혼란이 끊임없이 더욱 중앙집중화하는 북미공화국에 대한 일체의 진지하고 성공적인 저항도 가망 없게 만든다는 것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리고 유럽소비에트 합중국 건설을 통해 유럽의 혼란을 해결하는 것이 노동자혁명의 첫 번째 임무 가운데 하나라는 것도 설명하지 않는다. 노동자혁명은(명확하게 장벽이 존재하기 때문에) 미국에서보다는 유럽에서 훨씬 더 바짝 다가와 있다. 따라서 노동자혁명은 북미 자본가계급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해야 할 가능성이 크다.

반면에, 미국의 국제적 권력과 여기에서 비롯하는 불가항력적인 팽창이야말로 미국이 자기 구조의 토대 안에 세계 전체의 화약고, 즉 동방과 서방 사이의 모든 적대, 기존 유럽의 계급투쟁, 식민지 대중의 봉기, 그리고 모든 전쟁과 혁명을 포함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그리고 이것은 동일한 세계 문제의 중요한 양상이기도 하다)도 언급한 적이 없다. 한편으로, 이것은 지구 곳곳의 ‘질서’ 유지에 언제나 더 많은 관심을 가진 북미 자본주의를 현대의 기본적인 반(反)혁명 세력으로 변모시킨다. 다른 한편으로, 이것은 이미 지배적이며 여전히 확장하고 있는 세계 제국주의 열강 속에서 거대한 혁명적 폭발의 토대를 닦는다. 세계 관계의 논리는 이런 폭발의 시기가 유럽 노동자혁명의 폭발에 크게 뒤처질 수 없음을 가리킨다.

미국-유럽의 상호관계의 변증법에 대한 우리의 설명은 최근에 아주 다양한 비난의 대상이 되어왔다. 우리는 유럽에 존재하는 모순을 평화주의적으로 부정하고, 카우츠키의 초제국주의 이론을 수용함에 따라, 다른 많은 죄를 지었다는 비난을 받았다. 여기서 기껏해야 실제 사태의 진전과 그에 대한 우리의 견해를 전혀 모르는 데서 기인하는 이런 ‘비난’을 자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문제에 대한 우리의 정식화에 반대하는 그 비열한 싸움에 (말이 나서 하는 말인데, 강령 초안의 기초자가) 힘을 허비한 것보다, 가장 중요한 이 세계 문제를 혼란스럽게 하고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데 더 많은 노력을 허비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의 정식화는 사태의 경과를 통해 완전히 확증되었다.

최근에도 주요한 공산주의 기관지들에서 미국의 임박한 상업, 산업 위기를 언급하면서 미국 헤게모니의 의미를一신문지상에서一최소화 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져왔다. 우리는 여기에서 미국의 위기가 얼마나 지속될 것이며, 얼마나 심각할 것인가라는 특별한 문제를 검토할 수 없다. 이것은 국면의 문제이지 강령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보기에 위기의 불가피성은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는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또한 현재 미국 자본주의의 세계적 규모를 고려할 때, 바로 다음번의 위기가 대단히 극심하고 격렬할 것이라는 것이 어림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로부터 미국의 헤게모니가 제한되거나 약화될 것이라고 결론 내리려는 어떠한 시도도 정당화될 수 없다. 이러한 결론은 결국 가장 엄청난 전략적 오류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사실은 정반대다. 위기의 시대에 미국의 헤게모니는 급성장기에 비해 더 철저하게, 더 노골적으로, 더 무자비하게 작동할 것이다. 미국은 주로 유럽을 희생하여 자신의 병폐와 곤경을 모면하고 극복하려고 할 것이다. 이 곤경과 병폐가 아시아, 캐나다, 남미, 호주에서 발생하든 유럽 자체에서 발생하든, 또는 평화적으로 일어나든 전쟁을 통해 일어나든가를 불문하고 말이다.

만약 미국이 개입한 첫 시기에 유럽에 안정과 평화를 가져오는 효과를 발휘했으며, 그 효력이 현재에도 상당정도 남아있음에 따라 일시적으로 반복되거나 더 강해질 수도 있다면(특히 노동자계급이 또 다시 패배하는 경우에는), 미국의 정책, 특히 자국이 경제적 어려움과 위기에 처한 때의 전반적인 노선은 전 세계적으로 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가장 심원한 격동을 낳을 것이라는 점을 우리는 명확히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로부터 우리는 앞으로 10년 사이에도 지난 10년 사이 에 못지않게 혁명적 상황이 있을 것이라는 중요한 결론을 끌어낸다. 이런 이유로 우리가 알지 못한 채 그 움직임에 속지 않기 위해 사태발전의 원동력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지난 10년 사이에 혁명적 상황의 주요한 원천이 제국주의 전쟁의 직접적 결과에 있었다면, 전후의 두 번째 10년 사이에 일어난 혁명적 격변의 가장 중요한 원천은 유럽과 미국의 상호관계일 것이다. 미국 내의 주요한 위기가 새로운 전쟁과 혁명의 경보를 알릴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한다: 혁명적 상황은 많이 있을 것이다. 모든 문제는 노동자계급의 국제당인 코민테른의 성숙도와 투쟁 역량, 그 전략적 입장과 전술적 방법의 올바름에 달려 있다.

코민테른의 강령 초안에서는 이런 경향의 생각을 밝히는 표현을 전혀 볼 수가 없다. ‘세계경제의 중심이 미국으로 이동하고 있다’와 같은 매우 중요한 사실을 저널리스트가 무심결에 한 말로 은근슬쩍 넘기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당연히 지면 부족을 구실로 이를 정당화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 근본적인 문제들이 아니라면, 강령의 어떤 것에 지면을 허용해야 하는가? 게다가 강령 초안에서는 삭제하면 강령을 적어도 3분의 1로 줄일 수 있는 전반적인 문필의 산만함과 수많은 반복은 말할 것도 없고, 지나치게 많은 지면이 2차적이거나 3차적인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는 것을 덧붙여야 한다.


3. 유럽소비에트합중국 슬로건

새로운 강령 초안에서 유럽소비에트합중국 슬로건을 생략한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 이 슬로건은 꽤 오랜 내부 투쟁을 거친 뒤에 1923년 코민테른의 지지로 채택되었다. 혹시 강령 기초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 바로 1915년 레닌의 입장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것인가?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들은 먼저 레닌의 입장을 정확히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레닌은 전쟁 초기에 유럽합중국슬로건에 대해 주저했다. 슬로건은 본래 당시 당의 중앙기관지인 〈소치알 데모크라트〉(Sotsial Demokrat, 사회민주주의자)의 테제에 포함되었다가 레닌에 의해 거부되었다. 이런 사실 자체는 여기에 관련된 문제가 원칙에 따라 그 슬로건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단지 전술적 판단의 문 제, 즉 주어진 상황에 입각하여 그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을 비교 검토하는 문제 일 뿐임을 나타낸다. 말할 필요도 없이, 레닌은 자본주의 유럽합중국이 현실화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부정했다. 나 또한 오로지 유럽에서 노동자 독재의 미래 국가 형태로 유럽합중국 슬로건을 제출하면서 이 문제 에 접근했다.

나는 당시 이렇게 말했다 : ‘자본가 정부들 사이의 합의를 통해 위로부터 어느 정도 완성된 유럽의 경제적 통합을 이룬다는 것은 공상이다. 이 길을 따라서는 사태가 부분적인 타협이나 미봉책을 뛰어넘어 진척될 수 없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생산자와 소비자, 그리고 문화 일반의 발전을 위해서도 놀랄만한 이익이 따를 유럽의 경제적 통합만이 제국주의의 보호무역주의와 그 도구인 군국주의에 대항하는 투쟁에서 유럽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임무가 되고 있다.’(트로츠키, ‘평화 강령’(The Peace Program), 《전집》, 제3권 제1부, 85쪽, 러시아어판)

더 나아가 ‘유럽합중국은 무엇보다도 유럽에서 노동자계급 독재一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형태 一의 한 형태를 의미한다.’(앞의 책, 92쪽)

그러나 당시에 레닌은 쟁점에 대한 이런 정식화에서도 일정한 위험을 간파했다. 단 한 나라에서도 노동자 독재를 경험한 적이 없고, 심지어 사회민주주의의 좌익 내에서도 이 쟁점에 대해 이론적으로 명료하지 않은 당시에, 유럽합중국 슬로건은 적어도 유럽 대륙 전체에서 동시에 노동자 혁명을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을 불러 일으켰을지도 모른다. 레닌은 바로 이런 위험에 대해 경고했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해서 레닌과 나 사이에는 근소한 차이도 없었다. 당시에 나는 이렇게 말했다: ‘단 한 나라도 그 투쟁에서 다른 나라들의 투쟁을 기대하며 “기다려서는” 안 된다. 국제적 차원의 기회주의적인 나태 행위가 이에 견줄 만한 국제적 차원의 행동을 대체하지 못하도록 이 기본적 생각을 되풀이해서 말하는 것이 유익하고 또 필요한 일일 것이다. 다른 나라들의 투쟁을 기대하며 기다리지 않고, 우리는 우리의 선도적 행동이 다른 나라들의 투쟁을 촉진할 것이라는 충분한 확신을 가지고 일국적 근거에 입각하여 투쟁을 시작하고 계속해야 한다.’(앞의 책, 89~90쪽)

그 뒤에 나오는 내 말을 스탈린은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제7차 전원회의에서 ‘트로츠키주의’의 가장 불합리한 점, 즉 혁명의 내적인 힘과 외부의 지원 가능성에 대한 ‘신념 부족’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만약 이것이(다른 나라들에서 혁명의 진전이一트로츠키) 일어나지 않는다면, 예컨대, 혁명 러시아가 보수적인 유럽에 직면해 버틸 수 있다거나, 사회주의 독일이 자본주의 세계에 고립된 채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가망이 없을 것이다(이는 역사적 경험과 이론적 고찰을 통해 모두 입증된다).’(앞의 책, 90쪽)

이것과 두세 가지 유사한 인용에 기초하여, 제7차 전원회의는 이 ‘근본적 문제’에 대해 ‘레닌주의와 아무런 공통점도 없는’ 입장을 고수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는 ‘트로츠키주의’를 규탄하는 선언을 작성했다. 따라서 잠깐 멈추고, 레닌 자신의 말을 들어보자.

1918년 3월 7일, 그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조약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 ‘독일에서 혁명이 일어나지 않으면 우리가 멸망할 것이라는 점은 절대적 진실이기 때문에 이것은 우리에게 교훈이 된다.’(레닌, 《전집》, 제15권, 132쪽, 러시아어(구)판)

1주일 뒤 그는 이렇게 말했다 : ‘세계 제국주의는 승리를 거두며 전진 하는 사회주의 혁명과 공존할 수 없다.’ (앞의 책, 175쪽)

몇 주 뒤인 4월 23일, 레닌은 또 이렇게 말했다 : ‘우리의 후진성이 우리를 앞으로 나서게 한 것이다. 만약 우리가 봉기한 다른 나라 노동자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을 때까지 버틸 수 없다면, 우리는 멸망할 것이다.’(앞의 책, 187쪽, 트로츠키의 강조)

그러나 이런 말은 모두 혹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위기의 예외적인 영향에 따른 것은 아닐까? 결코 아니다! 1919년 3월에 레닌은 또다시 이렇게 반복했다: ‘우리는 단지 한 국가 속에서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일련의 국가들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제국주의 국가와 소비에트 공화국의 병존이 어느 정도 갈 것인지는 상상할 수도 없다. 결국 어느 한 쪽이 승리할 것임에 틀림없다.’(레닌, 《전집》, 제16권, 102쪽)

1년 뒤인 1920년 4월 7일, 레닌은 이렇게 반복한다 : ‘국제적 차원에 서 보자면, 자본주의는 지금도 군사적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경제적 의미에서도 소비에트 권력보다 더 강하다. 우리는 이런 기본적인 고려에서 시작해야하며, 이를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레닌, 《전집》, 제17권, 102쪽)

레닌은 1920년 11월 27일, 이권 문제를 다루면서 이렇게 말했다 : ‘우리는 지금 전쟁 이라는 무대에서 평화라는 무대로 옮겨왔다. 그런데도 우리는 전쟁이 다시 일어날 것을 잊은 적이 없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나란히 존재하는 한, 우리는 평온하게 살아갈 수 없다一결국 어느 한쪽 이 승리자가 될 것이다. 세계 자본주의나 소비에트공화국이나 둘 중 하나의 부고가 울리게 될 것이다. 지금은 전쟁 중의 일시적 소강상태에 지나지 않는다.’(앞의 책, 398쪽)

그러나 계속된 소비에트공화국의 생존이 혹시 레닌으로 하여금 ‘자신의 오류를 시인’하고, 10월 혁명의 ‘내적인 힘에 대한 자신의 신뢰 부족’을 단념하게 한 것인가?

1921년 7월에 열린 코민테른 제3차 대회에서 레닌은 러시아공산당의 전술에 대한 테제 속에서 이렇게 천명했다 : ‘극도로 위태롭고 불안정하지만, 그렇더라도 사회주의공화국이 자본주의의 포위 속에서 자신의 생존을 유지할 수 있는 균형상태가 조성되었다. 물론 오랫동안은 아니지만 말이다.’

게다가 1921년 7월 5일, 레닌은 대회의 한 회의에서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밝혔다 : ‘세계혁명의 지원이 없다면 노동자혁명의 승리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혁명 이후는 물론이고 심지어 혁명 이전에도, 우리는 혁명이 즉시 또는 적어도 빠른 시일 내에 다른 후진국들과 좀 더 고도로 발전한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도 일어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멸망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확신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소비에트 체제를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보존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국제혁명을 위해서도 일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레닌, 《전집》, 제18권 제1부, 321쪽)

이 말들은 얼마나 간단명료하고 국제주의 정신에 충만한가! 그리고 아류들의 잘난 체하는 거짓말들과 얼마나 판이하게 다른가!

어쨌든 우리는 이렇게 물을 권리가 있다 : 레닌의 이 모든 말이 다가오는 러시아의 혁명 또는 다가오는 사회주의 독일이 ‘자본주의 세계에 고립되어 있다면’ 홀로 버틸 수 없다는 1915년의 내 신념과 어떤 점에서 다른가? 시간이라는 요인은 내 가정은 물론이고 레닌의 예상과도 다른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러나 기본적인 생각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강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一일정한 순간에는 아마 더욱 더 그럴 것이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제7차 전원회의가 부적격하고 파렴치한 발언에 기초하여 처리한 것처럼, 이 생각을 비난하기보다는 코민테른 강령에 포함시켜야 한다.

우리는 1915년에 유럽소비에트합중국 슬로건을 옹호하면서 이렇게 지적했다 : 불균등 발전법칙은 본질적으로 이 슬로건과 충돌하는 주장이 아니다. 왜냐하면 서로 다른 나라와 대륙들의 역사적 발전의 불균등성본질적으로 들쭉날쭉하기 때문이다. 유럽 국가들은 서로에 대해 불균등하게 발전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절대적인 역사적 확신을 가지고 이렇게 주장할 수 있다 : 적어도 검토되고 있는 역사적 시기 중에, 미국이 유럽을 능가한 것처럼, 유럽 국가들 가운데 단 한 나라도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 아주 월등히 앞서 나아가도록 운명 지어져 있지 않다. 미국이 불균등성에 관한 하나의 척도라면, 유럽은 다른 하나의 척도다. 지리적, 역사적 조건들이 유럽 국가들 사이의 긴밀한 유기적 관계를 미리 결정했기 때문에 유럽 각국이 이를 뿌리칠 길이 없다. 현대의 유럽 부르주아 정부들은 한 대의 수레에 쇠사슬로 묶여 있는 살인자들 같다. 이미 말한 것처럼, 유럽의 혁명은 결국에는 미국에도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당면한 역사의 전진에서 직접적으로는 독일의 혁명이 미국에 비해 프랑스에 훨씬 더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런 역사적으로 발전된 관계에서 유럽소비에트연방 슬로건의 정치적 생명력이 나온다. 우리는 그 상대적 생명력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연방은 소비에트연방 이라는 대교(大橋)를 가로질러 아시아로 확대된 다음, 세계사회주의공화국연방을 이룰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제국주의 시대의 제2의 획기적 사건이나 제국주의 시대 이후의 위대한 사건이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에 더 가까이 다가간다면, 우리는 그에 일치하는 정식도 찾아낼 것이다.

유럽합중국문제에 대한 1915년 레닌과 우리의 차이가 제한적, 전술적인 것이었으며, 따라서 본질적으로 일시적인 성격의 것이었음을 더 많은 인용을 통해 별 어려움 없이 증명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후에 전개된 사태의 경과가 이를 가장 잘 증명한다. 1923년에 코민테른은 논쟁의 여지가 있는 슬로건을 채택했다. 지금 강령 초안의 기초자가 주장하려는 것처럼, 유럽합중국 슬로건이 1915년에 원칙적 입장에서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코민테른이 1923년에는 도저히 이를 채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누가 보더라도 불균등 발전법칙은 이 몇 년 사이에 그 유효성을 잃지 않았다.

앞에서 요약한 대로, 이 문제에 대한 완전한 설명은 혁명과정의 역학 관계를 전체적으로 볼 때 나온다. 국제혁명은 그 모든 구체성, 말하자면, 그 발생 순서를 예측할 수는 없지만, 그 일반적인 역사적 개요로 완전히 선명해지는 상호 연관된 과정으로 간주된다. 이 일반적인 역사적 개요가 이해되지 않으면, 올바른 정치적 대응은 완전히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의 발전이 일어나고, 심지어 완성된다는 신념에서 시작하면, 문제는 상당히 다르게 나타난다. 현재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를 완벽하게 수립할 수 있으며, 자본주의 세계와 이 나라의 상호관계가 세계 자본가계급의 ‘중립화’에 기초하여 수립될 수 있다고 가르치는 ‘이론’이 있다(스탈린). 만약 혁명적-국제주의가 아니라 이런 본질적으로 개량주의적-일국적 관점이 채택된다면, 유럽합중국 슬로건의 필요성은 사라지거나, 아니 적어도 줄어든다. 그러나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슬로건은 중요하고 절대로 필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 슬로건에는 사회주의가 고립된 상태에서도 발전할 수 있다는 생각에 대한 비판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모든 유럽 국가의 노동자계급에게는 정말로 소련에 비해 더 큰 정도로一그러나 그 차이는 단지 정도의 차이 일 뿐이다一혁명을 이웃 나라로 전파하고, 무기를 들고 이웃 나라의 봉기를 지지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해질 것이다. 왜 그런가? 그 자체로는 계급을 움직일 수 없는 이런 국제적 연대는 어떤 추상적 배려에서가 아니라, 레닌이 수백 번이나 밝힌 사활적 중요성一 즉, 적시에 국제혁명의 지원이 없다면, 우리는 버틸 수 없을 것이다一때문에 필요한 것이다. 소비에트합중국 슬로건은 노동자혁명의 역학관계에 일치한다. 노동자혁명은 모든 나라에서 동시에 일어나지는 않지만, 이웃 나라로 전해지며, 특히 유럽 무대에서는 가장 강력한 외부의 적으로부터 혁명을 방어하고, 경제를 재구성하기 위해서도 이웃 나라들 사이의 가장 긴밀한 유대를 필요로 한다.

물론 어떤 사람은 가장 최근에 이 슬로건을 채택하도록 자극을 준 루르 위기 시기 이후에도 이 슬로건이 유럽 공산당들의 선동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지 못했다고, 말하자면,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고 주장함으로써 이의를 제기하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슬로건은 노동자 국가, 소비에트 등과 같은 슬로건, 즉 혁명 직전 시기의 모든 슬로건과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이에 대한 해명은 제5차 대회의 잘못된 정치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1923년 말 이후, 유럽대륙에서 혁명운동이 쇠퇴해왔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나 이것은 바로 전체적으로든 부분적으로든 단지 그 시기 동안에만 받은 인상에 강령의 기초를 두는 것이 왜 치명적인가 하는 이유이다. 모든 편견에도 불구하고, 유럽소비에트합중국 슬로건이 바로 1923년에 채택된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당시에 독일에서는 혁명적 폭발이 예견되었으며, 유럽 국가의 상호관계 문제가 대단히 긴급한 성격을 띠었다. 유럽, 좀 더 확실히 말하면, 세계 위기의 모든 새로운 격화는 주요한 정치적 문제들을 표면화시키고, 유럽합중국 슬로건이 흡인력을 지니기에 충분할 만큼 가파르다. 따라서 이 슬로건을 거부하지 않은 채, 강령에서 한마디 말없이 무시하는 것, 즉 ‘비상시에’ 쓰기 위해 어딘가에 보관해두는 것은 기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원칙의 문제가 관련되어 있는 경우, 유보조항을 다는 정책은 쓸데없는 짓이다.


4. 국제주의의 기준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초안은 세계경제와 그 내적 경향에 입각하여 설명을 시작하려고 한다一이는 인정받을 만한 시도이다. 이런 까닭에 〈프라브다〉지가 우리와 민족적-애국주의적 사회민주주의 사이에 원칙 상의 기본적 차이가 있다고 말한 것은 전적으로 올바르다. 노동자계급 국제당의 강령은 그 개별적 부분들을 지배하는 세계경제를 출발점으로 삼는 경우에만 마련될 수 있다. 그러나 바로 세계 발전의 주요한 경향을 분석하는 데서, 초안은 이미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자신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부적절함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대단히 일면적이어서 중대한 실수를 저지르기에 이른다.

초안은 자본주의의 불균등 발전법칙을 자본주의 발전의 주요하고 거 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법칙으로 자주, 그것도 항상 적절하지 않은 곳에서 언급한다. 하나의 근본적인 오류를 포함하여 초안의 많은 오류는 이론적으로 불균등 발전법칙에 대한 일면적이고 잘못된 비(非)마르크스주의적, 비(非)레닌주의적 해석에 기초를 두고 있다.

초안은 첫째 장에서 ‘경제적, 정치적 발전의 불균등성은 자본주의의 무조건적인 법칙이다. 이 불균등성이 제국주의 시대에는 더욱 더 가속화 되고 심화된다’고 밝히고 있다.

이것은 올바르다. 이런 설명은 문제에 대한 스탈린의 최근 설명을 부분적으로 배격한다. 스탈린의 최근 설명에 따르면, 레닌이 처음 발견한 것으로 추정되는 불균등 발전법칙에 대해 마르크스와 앵겔스 모두 몰랐다. 1925년 9월 15일, 스탈린은 앵겔스가 ‘자본주의 국가들의 불균등 발전법칙을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없었을(!!) 때’에 쓴 것이기 때문에 트로츠키가 엥겔스의 어떠한 말을 인용할지라도 근거가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이 아무리 믿기 힘들지라도, 초안 기초자 가운데 한 사람인 스탈린은 여러 번 반복했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초안의 내용은 이 점에서는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지만 만약 우리가 이 기본적 오류의 교정을 차치한다면, 불균등 발전법칙 에 대해 초안이 말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일 면적 이고 부적절한 채로 계속 남아있을 것이다.

우선, 인류의 전체 역사가 불균등 발전법칙의 지배를 받는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자본주의는 각각 심각한 내적 모순을 지닌, 다른 발전 단계에 있는 인류의 다양한 부위를 발견한다. 도달한 수준에서 매우 차이가 심하고, 다양한 시기를 거치는 동안 인류의 서로 다른 부위에서 나타나는 발전 속도상의 현저한 불균등성은 자본주의의 출발점 구실을 한다, 자본주의는 대물림된 불균등성에 대해 점진적으로만 지배력을 얻는 데, 독자적인 수단과 방법을 사용하여 이를 깨뜨리고 개조한다. 선행한 경제체제와 대조적으로 자본주의는 선천적으로, 그리고 끊임없이 경제적 확장을 목표로 한다. 새로운 영토로 침투하고, 경제적 차이를 극복하며, 자급자족적인 지역적, 일국적 경제를 금융상의 상호관계 체계로 개조시키려고 한다. 이 때문에 자본주의는 이들의 화해를 가져오며, 가장 발달한 국가와 가장 후진적인 국가의 경제적, 문화적 수준을 균일화한다. 이런 주요한 과정이 없다면, 처음엔 영국과 유럽, 그 다음엔 유럽과 미국의 상대적 평준화를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식민지의 산업화, 인도와 영국사이의 격차 축소, 코민테른 강령뿐만 아니라 그 존재 자체도 기초를 두고 있는, 앞에서 열거한 과정에서 발생하는 모든 결과도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자본주의는 여러 나라들을 서로 경제적으로 더욱 밀접하게 끌어당기고, 그 발전 단계를 평준화함으로써 자신만의 방식, 즉 항상 자신의 성과를 해치는 무정부적 방식으로 작동한다. 한 나라를 다른 나라에, 산업의 한 부문을 다른 부문에 대립시키며, 세계경제의 몇몇 부분을 발전시키는 반면에, 다른 부분의 발전을 방해하고 지연시킨다. 이 두 기본적인 경향의 상호관계一둘 다 자본주의의 본질에서 생긴다一야말 로 우리에게 역사적 과정의 현존하는 구조를 설명해준다.

제국주의는 보편성, 침투성, 기동성, 그리고 제국주의의 추진력인 금융자본을 아주 빠른 속도로 구성하는 덕분에 이 두 경향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제국주의는 비할 데 없이 더 빠르게, 더 철저히 개별 국가와 대륙을 하나의 실체로 잇는다. 그러면서 서로 가장 긴밀하고 가장 불가결한 의존관계에 이르게 하고, 그 경제적 방식, 사회 형태, 발전 수준을 더욱 동일하게 만든다. 동시에 대단히 적대적인 방식으로, 호랑이가 달려들 듯, 후진국과 후진지역을 급습하는 방식으로 이 ‘목표’를 달성한다. 그 결과인 세계경제의 통합과 평준화는 이전 시대보다 훨씬 더 격렬하게, 그리고 발작적으로 탈이 난다. 불균등 발전법칙에 대한 이러한 변증법적이고 전적으로 기계적이지 않은 이해야말로 제6차 대회에 제출된 강령 초안이 피하지 못한 근본적 오류를 피할 수 있게 해준다.

우리가 불균등 발전법칙에 대한 강령 초안의 일면적 평가를 지적한 직후, 기초자는 이렇게 주장한다: ‘따라서 국제 노동자혁명을 반드시 하나의, 동시다발적인, 보편적 행동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이 사실에서 사회주의의 승리가 처음에는 몇몇 나라, 아니 심지어 고립된 일개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실현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노동자계급의 국제혁명은 동시다발적인 행동일 수 없다. 당연히 10월혁명을 겪고 성숙한 사람들 사이에서 이는 논쟁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10월혁명은 후진국의 노동자계급이 선진국 노동자계급이 ‘실제로 전면에 나서기를’ 조금도 기다리지 않고, 역사적 필연성의 압력을 받아 쟁취한 것이다. 이런 한계 안에서 불균등 발전법칙을 언급하는 것은 완전히 올바르며 아주 적절하다. 그러나 결론의 후반부一즉, 사회주의의 승리가 ‘고립된 일개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실현가능하다는 공허한 주장과는 전혀 다르다. 자신의 요점을 입증하기 위해 강령 초안은 단순히 이렇게 주장한다: ‘이 사실에서 … 결론 이 나오는 것이다.’ 사람들은 불균등 발전법칙에서 당연히 이런 결론이 나온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러나 이런 결론이 당연히 나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 사실에서’ 정반대의 결론이 ‘나온다.’ 만약 역사적 과정이 몇몇 나라가 불균등한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서로 독립적으로, 서로 격리된 채 발전하는 그런 것이었다면, 불균등 발전법칙에서 일개 자본주의 국가에서一처음에는 가장 발전된 나라에서, 그 다음에는 발달 정도에 따라, 더 후진적인 나라들에서一의 사회주의 건설 가능성은 의문의 여지없이 당연한 결론이 될 것이다. 이러한 것은 관습적인 생각, 이를테면, 전전(戰前) 사회민주주의 대오 속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에 대해 보통 가지고 있던 생각이었다. 이것이 바로 사회 애국주의의 이론적 토대를 이루는 생각이다. 물론 강령 초안은 이런 견해를 지니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쪽으로 기울고 있다.

강령 초안의 이론적 오류는 불균등 발전법칙에서 이 법칙이 뜻하지도 않고, 또 뜻할 수도 없는 것을 추론하려고 한다는 사실에 있다. 다양한 나라들의 불균등하거나 산발적인 발전은 이 나라들 사이에서 증대하는 경제적 유대와 상호의존성을 끊임없이 교란시키지만 어떤 경우에도 제거하지는 않는다. 이 나라들은 4년간의 지옥 같은 대학살(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바로 다음날, 석탄, 빵, 석유, 화약, 바지 멜빵을 서로 교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점에서 강령 초안은 문제를 마치 역사적 발전이 산발적 도약에 기초해서만 나아가는 것처럼 가정한다. 반면에, 이런 도약을 일으키고, 이런 도약이 나타나는 경제적 토대는 초안 기초자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거나, 강제적으로 제거된다. 이들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일국사회주의 이론을 옹호할 유일한 목적으로 이렇게 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심지어 제국주의 시대 이전에도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 한편으로, 불균등성, 즉 산발적인 역사적 발전은 시대 전체 내내 여러 국가가 잇따라 혁명적 흐름에 가담하는 과정을 통해 노동자혁명을 확산시킨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몇몇 나라의 유기적 상호의존은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의 건설 가능성을 배제하는 국제적 분업을 향해 발전해간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이 말이 문제에 대한 유일하게 올바른 정식화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이것은 사회주의 혁명이 일국적 토대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지만,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가정하는 마르크스주의 원칙이 이중삼중으로 옳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국주의가 이런 적대적 경향들 모두를 발전시키고, 심화시키며, 격화시키는 현대 시대에서는 더욱 더 그렇다. 이 점에서 레닌은 단지 이 문제에 대해 마르크스 자신이 정식화하고 답한 것을 발전시키고 구체화했을 뿐이다.

우리 당의 강령은 10월혁명과 사회주의 건설을 뒷받침한 국제적 조건에 전적으로 기초를 두고 있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우리 강령의 이론적 부분 전체를 발췌하기만 하면 된다. 이 점에서 우리는 다음을 지적하는 선에서 그칠 것이다. 우리 당의 제8차 대회 중에, 지금은 고인이 된 포드벨스키(Podbelsky)가 강령의 몇몇 정식이 러시아혁명에만 관계 된 것이라고 암시하자, 레닌은 당 강령 문제에 대한 결론적인 발언(1919년 3월 19일)에서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 ‘포드벨스키는 임박한 사회혁명에 대해 말한 단락에 이의를 제기했다. … 그의 주장은 명백히 근거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 강령은 사회혁명을 세계적 규모로 다루기 때문이다.’(레닌, 《전집》, 제16권, 131쪽)

여기서 레닌이 거의 같은 때에 우리 당이 국제혁명의 당이라는 것을 더욱 강조하기 위하여 그 이름을 러시아공산당에서 공산당으로 바꾸자고 제안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도 부적절하지는 않을 것이다. 중앙위원회에서는 내가 유일하게 레닌의 제안에 찬성했다. 그렇지만 그는 제3 인터내셔널 창설을 고려하여 이 문제를 대회에 상정하지는 않았다. 이런 입장이 당시에는 일국사회주의에 대한 암시조차도 없었다는 사실의 증거다. 이것이 당강령이 이 ‘이론’을 비난하지 않고 단지 배제하는 유일한 이유이다. 그러나 2년 뒤에 채택된 공산주의청년동맹의 강령은 청년들을 국제주의 정신으로 교육시키기 위해 노동자혁명 문제에 대한 세상물정 모르는 환상과 일국적 편협함을 직접 경고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뒤에서 더 얘기할 것이다.

새로운 코민테른 강령 초안은 문제를 아주 다르게 제기한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1924년 이후 강령 기초자들의 수정주의적 진화와 조화를 이뤄, 초안은 정반대의 길을 선택한다. 그러나 일국사회주의 문제가 설명되는 방식은 초안 전체의 성격을 마르크스주의 문서로 볼 것인지 수정주의 문서로 볼 것인지를 결정한다.

물론 강령 초안은 문제에 대한 공산주의적 정식화와 개량주의적 정식화의 차이를 조심스럽게, 고집스럽게, 따로따로 제시하고, 강조하며, 설명한다. 그러나 이런 보증이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 이 점에서 우리는 수많은 마르크스주의 기계 장치와 설비를 갖췄으며, 심지어 과적재 하기까지 했지만, 주(主)돛은 일부러 모든 수정주의와 개량주의의 바람으로 부풀어 오르도록 세워져 있는 배 위 에 있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지난 30년 동안의 경험, 특히 최근 몇 년 동안 중국의 어처구니없는 경험으로부터 배운 사람이라면 누구나 계급투쟁과 당의 강령적 문서 사이의 강력한 변증법적 상호의존을 이해한다. 그리고 새로운 수정주의 돛은 마르크스주의와 레닌주의의 모든 안전장치를 쓸모없게 만든다는 우리의 주장을 이해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오랫동안 코민테른의 발전과 운명을 결정할 이 기본적인 문제를 훨씬 더 자세하게 다룰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5. 당의 이론적 전통

앞서의 인용문에서 강령 초안은 초안의 원문과 1915년 레닌의 글 사이의 표면상의, 그리고 순전히 어구상의 유사점을 보증하기 위해 ‘한 나 라에서 사회주의의 승리’라는 표현을 의도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레닌의 이 글은 일국에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문제에 대한 토론 중에 범죄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대단히 무자비하게 악용되었다. 초안은 다른 곳에서도 레닌의 말을 인증이라고 ‘일컬으며’ 같은 방법에 의지한다. 이것이 과학적인 ‘초안의 방법론’이다.

마르크스주의 문헌의 풍부한 자원과 보배 같은 레닌의 저작에서一초안 기초자들은 레닌이 말하고, 쓰고, 수행한 모든 것을 전적으로 무시하면서, 당 강령과 공산주의 청년동맹의 강령도 무시하면서, 문제가 명확히 제기된 10월혁명(얼마나 명확한가!) 시기 중에 모든 당 지도자들이 예외 없이 표명한 견해들도 무시하면서, 강령의 기초자인 스탈린과 부하린 스스로가 1924년까지 말한 것도 무시하면서一1924년 말이나 1925년 초에 이른바 ‘트로츠키주의’에 반대하는 급박한 투쟁에 대처하려고 만들어낸 민족사회주의 이론을 두둔하기 위해 통틀어 두 인용문만이 레닌에게서 인용되고 있다. 하나는 레닌이 1915년에 쓴 유럽합중국에 대한 글에서, 다른 하나는 1923년에 쓴 협동조합에 대한 미완성 유저(遺著)에서 인용한 것이다. 각각 몇 줄의 이 두 인용문에 모순되는 모든 것一마르크스주의와 레닌주의의 총체一은 간단히 파기해버렸다. 인위적으로 발췌되었으며, 조잡하게, 그것도 모방적으로 곡해한 이 두 인용문은 그 정치적 결과라는 관점에서 볼 때 속박 받지 않는 새롭고 완전히 수정주의적인 이론의 기초로 받아들여진다. 우리는 지금 마르크스주의의 나무줄기에 만약 접붙여지면, 가차 없이 해독을 끼쳐 나무 전체를 죽일 완전히 이질적인 가지를 스콜라 철학과 궤변이라는 방법을 통해 접붙이려는 시도를 목격하고 있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제7차 전원회의에서 스탈린은 이렇게 선언했다 (처음이 아니다) :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 경제를 건설하는 문제는 1915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레닌이 처음으로 당에 제기했다.’(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제7차 전원회의 의사록, 14쪽, 트로츠키의 강조)

따라서 이것은 일국사회주의의 문제가 1915년 이전에는 언급된 적이 없었다는 자백이다. 그런고로 스탈린과 부하린은 노동자혁명의 국제적 성격 문제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와 당의 전통 전체를 감히 침해하지는 않는다. 이를 명심하자.

그렇지만 마르크스, 엥겔스 그리고 레닌 자신이 이전에 말했던 것과 대비해서 레닌이 1915년에 ‘처음으로’ 무엇을 말했는지 살펴보자. 
1915년에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 : ‘경제적, 정치적 불균등 발전은 자본주의의 절대법칙이다. 따라서 우선 몇몇, 아니 심지어 일개 자본주의 나라에서도 사회주의의 승리가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그 나라의 승리 한 노동자계급은 자본가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자국에서 사회주의적 생산을 조직하고 나서, 다른 나라의 피억압 계급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 그 나라들에서 자본가에 대항한 봉기를 일으키며, 만일의 경우에는 착취 계급과 이들의 정부에 대항하여 군사력도 불사하면서 나머지 자본주의 세계에 반기를 들 것이다.’(레닌, 《전집》, 제13권, 133쪽, 1915년 8월 23일. 트로츠키의 강조)

레닌이 염두에 둔 것은 무엇이었는가? 노동자계급의 독재를 수립한다는 의미에서만 사회주의는 일단 한 나라에서 승리할 수 있으며,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자본주의 세계와 대립될 것이다. 노동자 국가는 공격을 격퇴하고, 자신의 혁명적 공세를 취할 수 있기 위해 먼저 ‘자국에서 사회주의적 생산을 조직’해야 할 것이다. 즉, 자본가들에게서 빼앗은 공장들의 운영을 조직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전부다. 이미 입증된 것처럼, 이러한 ‘사회주의의 승리’는 러시아에서 처음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세계의 간섭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최초의 노동자 국가는 무엇보다도 먼저 ‘자국에서 사회주의적 생산을 조직’하거나, ‘일관되게 사회주의적 유형’의 신뢰를 창출해야 했다. 따라서 레닌은 일국에서 사회주의의 승리로 자급자족적인 사회주의 사회를, 그것도 후진국에서 건설할 수 있다는 환상을 품지 않았다. 다만 그는 훨씬 더 현실적인 것, 즉 노동자 국가가 존재한 그 첫 시기 중에 10월혁명이 우리나라에서 성취한 것을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이것은 혹시 증거를 필요로 하는가? 댈 수 있는 증거가 너무 많아서 가장 알맞은 증거를 고르는 것이 유일한 어려움이다.

전쟁과 평화에 관한 테제(1918년 1월 7일)에서 레닌은 ‘러시아에서 사회주의의 승리를 위해서는 일정 기간, 적어도 몇 달이 필요하다…’(레닌, 《전집》, 제15권, 64쪽)고 말했다. 

같은 해, 즉 1918년 초에 레닌은 부하린을 겨냥한 ‘좌익적 유치함과 소부르주아적 경향에 대하여’(On Left Wing Childishness and Petty Bourgeois Tendencies)라는 제목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이를 테면, 국가자본주의가 우리나라에서 6개월 안에 수립될 수 있다면, 그것은 엄청난 성취이자 사회주의가 1년 안에 확실히 수립되어 무적이 될 것이라는 가장 확실한 보장일 것이다.’(레닌, 《전집》, 제15권 제2부, 263쪽, 트로츠키의 강조)

레닌은 어떻게 ‘사회주의의 확실한 수립’을 위한 기간을 그렇게 짧게 정할 수 있었는가? 그가 이런 말로 표현한 물질-생산적이고 사회적인 내용은 무엇인가?

우리가 만약 1918년 4월 29일에 레닌이 소비에트정부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에 대한 보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을 떠올린다면, 이 문제는 즉시 다른 양상으로 나타날 것이다 : ‘더 고도로 발전할 우리의 다음 세대가 사회주의로의 완전한 이행을 이룰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좀처럼 어렵다.’(앞의 책, 240쪽)

1919년 12월 3일, 농촌꼬뮌/아르텔(Artel:촌락공동체) 대회에서 레닌은 훨씬 더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 ‘우리는 우리가 지금 사회주의 체제를 수립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 자식들, 아마도 우리 손자들이 사회주의를 수립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레닌, 《전집》, 제16권, 398쪽)

이 두 경우 중 어느 쪽의 레닌이 옳았는가? 그가 1년 안에 ‘사회주의의 확실한 수립’에 대해 말했을 때인가, 아니면 그가 ‘사회주의 체제 수립’을 우리 자식들이 아니라 우리 손자들에게 맡겼을 때인가?

레닌은 두 경우 모두에서 옳았다. 왜냐하면 그는 완전히 다르고, 비교할 수도 없는 사회주의 건설의 두 단계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 경우에 ‘사회주의의 확실한 수립’을 통해 레닌이 의도한 것은 1년, 심지어 ‘몇 달’ 안에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한다는 것이 아니었다. 즉 그는 계급이 폐지되고, 도시와 농촌 사이의 모순이 제거될 것이라는 뜻으로 얘기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노동자국가에 맡겨진 공장과 제분소의 생산을 회복하고, 그 결과 도시와 농촌 사이의 생산물을 교환할 가능성을 확신한다는 뜻으로 얘기한 것이었다. 기간의 짧음 자체는 본질적으로 온전한 견해를 이해하기 위한 확실한 수단이다.

물론 이 기본적 임무를 위해서도 1918년 초에는 기간이 너무 짧게 설정되었다. 이것은 레닌이 코민테른 제4차 대회 때 ‘우리는 그때 지금보다 더 어리석었다’고 말하면서 자조했던 순전히 실무적인 ‘오판’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총체적 전망에 대한 올바른 관점을 가졌지만, 12개월 안에, 그것도 후진국에서 완전한 ‘사회주의 체제’를 세울 수 있다고 잠시도 믿지 않았다.’ 이 주요 목표이자 최종 목표一사회주의 사회의 건설一의 달성을 레닌은 우리 자신, 우리의 자식들, 우리의 손자들 세 세대에게 맡겼다.

레닌이 1915년의 글에서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이 아니라 소련에서 이미 실현된 훨씬 더 기본적인 임무로 ‘사회주의적 생산’의 조직화를 말했다는 것이 명백하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면, 사람들은 레닌의 말대로 권력을 장악한 노동자당이 3대에 이를 때까지 혁명전쟁을 ‘연기’한다는 우스꽝스러운 결론에 도달해야 했을 것이다.

1915년의 인용문에 관한 한, 이것이 새로운 이론의 주요 지주인 것은 유감스러운 상황이다. 그러나 더욱 더 애석한 것은 레닌이 이 구절을 러시아에 적용해 말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는 러시아와 대조를 이루는 유럽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이는 유럽합중국 문제를 다룬 인용 글의 내용뿐만 아니라 당시 레닌의 입장 전체에서 나온 것이다. 몇 달 뒤인 1915년 11월 20일, 레닌은 특별히 러시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노동자계급의 임무는 명백히 실제 상황으로부터 나온다. 이 임무는 전제정권에 대항하는 대담하고 영웅적이며 혁명적인 투쟁이다(1912년 1월 [프라하]협의회의 슬로건들一‘세 마리의 고래’: 민주공화국, 8시간노동일, 농민을 위한 토지 몰수一옮긴이). 이 투쟁은 모든 민주적인 대중들, 즉 맨 먼저 농민을 끌어들일 것이다. 동시에, 국수주의에 반대하여 수행되어야 하는 가 차 없는 투쟁은 유럽의 노동자계급과 동맹하여 유럽의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 싸우는 투쟁이다. … 전쟁 국면은 농민을 포함하여 소부르주아 계급을 왼쪽으로 밀어내는 경제적, 정치적 요소들을 강화시켰다. 그러는 가운데 러시아에서 민주주의 혁명이 승리할 수 있는 절대적 가능성의 객관적 토대가 마련되었다. 서유럽에서 사회주의 혁명의 객관적 조건이 충분히 무르익었다는 점은 전쟁 이전에 모든 선진국들의 영향력 있는 사회주의자들 모두가 인정 했던 것이다. (레닌, 《전집》, 제13권, 212쪽 이하, 트로츠키의 강조)

이렇게 레닌은 1915년에 분명히 러시아의 민주주의 혁명과 서유럽의 사회주의 혁명에 대해 말했다. 레닌은 소탈하게 마치 자명한 것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러시아와 다른 서유럽에서는 러시아와 대조적으로 사회주의 혁명의 조건이 ‘충분히 무르익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강령 초안 기초자들인 새로운 이론의 창시자들은 자신들이 다른 수많은 구절과 레닌 저작 모두를 무시한 것과 꼭 마찬가지로, 러시아를 정직하게, 그리고 직접적으로 언급한 이 인용문一많은 것 가운데 하나인一을 간단히 무시 한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이들은 이를 알아차리지도 못한 채, 서유럽을 언급한 다른 구절을 냉큼 붙들고, 이 구절이 담을 수도 없고 담지도 않은 의미를 이 구절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이 구절이 언급하지도 않은 러시아에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이것에 ‘근거’하여 자신의 새로운 이론을 세운다.

10월혁명 직전에 이 문제에 대한 레닌의 입장은 무엇이었는가? 1917년 2월혁명 뒤 스위스를 떠나면서 레닌은 스위스 노동자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선언했다.

러시아는 농민국가이며, 유럽에서 가장 후진적인 나라들 가운데 하나이다. 사회주의가 러시아에서 즉시 승리할 수는 없다. 그러나 봉건 귀족과 지주들에게 광대한 토지가 맡겨져 있는 나라의 농민적 특성은 1905년 혁명의 경험에 기초하여 러시아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의 거대한 전진을 보여줄 수 있다. 그리고 우리 혁명을 세계사회주의 혁명의 서막으로, 세계사회주의 혁명을 향한 일보로 만들 수 있다. … 러시아 노동자계급은 자신의 힘만으로 승리를 거둬 사회주의 혁명을 성취할 수 없다. 그러나 러시아혁명은 세계사회주의 혁명에 가장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내고, 어떤 점에서는 세계사회주의 혁명의 개시 같은 요소를 제공할 수 있다. 러시아혁명은 자신의 주요하고 가장 믿을만한 동맹세력인 유럽과 미국의 사회주의 노동자계급이 결정적인 전투로 들어서는 문제를 촉진할 수 있다. (레닌, 《전집》, 제14권 제2부, 407쪽 이하)

이 몇 줄에 문제의 모든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들이 지금 우리에게 납득시키려는 것처럼, 만약 전쟁과 반동의 시기인 1915년에 레닌이 러시아 노동자계급이 이 임무를 성취하고 나서 부르주아 국가들에 대해 선전포고할 수 있도록 단독으로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1917년 초, 즉 2월혁명 이후에 레닌이 어떻게 후진적 농민국가 러시아가 자신의 힘만으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그렇게 단언적으로 말할 수 있었겠는가? 사람이라면 적어도 어느 정도는 조리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레닌에 대해 일말의 존경심이라도 가져야 한다.

더 많은 인용문을 덧붙이는 것은 불필요할 것이다. 사회주의 혁명의 국제적 성격에 의해 결정된 레닌의 정치적, 경제적 견해의 전체적 개요를 말하기 위해서는 여러 주제들을 다룰 별책(別冊)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한 나라에서 자급자족적인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레닌은 이런 주제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레닌의 또 다른 글인 ‘협동조합에 대하여’(On Cooperation)를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강령 초안이 레닌의 이 유작을 광범하게 인용, 즉 이 글의 목적과 전혀 다른 목적을 위해 몇몇 표현을 이용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우리는 소비에트공화국의 노동자들이 ‘자국에서 … 사회주의의 완전한 건설을 위해 필요 충분한 모든 물질적 전제조건을 가지고 있다’고 밝히고 있는(트로츠키의 강조) 강령 초안의 5장을 염두에 두고 있다.

와병 중에 레닌이 구술하고 그의 사후에 출판된 글이 정말로 소비에트 국가가 독자적으로 완전한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해 필수적이고 물질적인 전제조건, 즉 무엇보다도 생산적인 전제조건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면, 사람들은 레닌이 무심결에 잘못 구술했거나, 속기사가 레닌의 말을 옮겨 적는 과정에서 실수했다고 추측해야만 할 것이다. 어쨌든 어느 쪽의 추측도 레닌이 급속한 두 번의 발작으로 마르크스주의나 자신이 평생에 걸쳐 설파한 사상을 포기했다는 추측보다는 더 그럴 듯하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렇게 설명할 필요가 전혀 없다. 미완성 글이지만 뛰어난 ‘협동조합에 대하여’는 마찬가지로 뛰어난 그의 마지막 시기의 다른 글들과 사상적으로 일관되어 있다. 말하자면, 이 글은 서방과 동방의 혁명 사슬에서 10월혁명이 차지하고 있는 지위를 논하고 있는 미완성 책의 한 장을 이루고 있다. 이 글은 레닌주의를 수정하려는 자들이 너무도 경솔하게 레닌주의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에 대해 전혀 말하지 않는다.

이 글에서 레닌은 ‘상업에 종사하는’ 협동조합들은 노동자 국가에서 자신의 사회적 역할을 완전히 바꿀 수 있고, 또 바꿔야 한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올바른 정책을 통해 사적인 농민의 이해를 사회주의의 경로를 따라 보편적인 국가적 이해와의 융합을 지도할 수도 있다고 설명한다. 레닌은 이 반박의 여지가 없는 생각을 다음과 같이 구체화한다.

모든 대규모 생산수단을 지배하는 국가권력, 노동자계급의 수중에 있는 국가권력, 수백만 영세소농들과 노동자계급의 동맹, 농민과의 관계에서 노동자계급의 지도력 담보 등一실제로 이것이 우리가 이전에는 장사꾼으로만 취급하고, 어떤 관점에서 보면 신경제정책 하에서 지금도우리가 이렇게 대하는 것이 정당하기도 한 협동조합, 오로지 협동조합들에게만 필요한 전부 가 아닐까? 이것이 완전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필요한 전부가 아닐까? 이것이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은 아직 아니지만, 이를 위해 필요 충분한 전부이다. (레닌, 《전집》, 제18권 제2부, 140쪽)

최종적으로 완성되지 않은 문구[‘오로지 협동조합들에게만’(?)]가 포함된 구절의 원문은 우리에게 이 글이 구술 작성된 교정되지 않은 초안임을 반박할 수 없이 증명한다. 글의 대의를 이해하려고 애쓰기보다 원문의 몇몇 단발적인 단어들에 매달리는 것은 그만큼 더 용납할 수 없다. 그렇지만 다행히도, 이 글의 정신만이 아니라 인용된 구절의 자구(字句)도 강령 초안의 기초자들이 오용하고 있는 것처럼, 이를 오용할 권리를 누구에게도 부여하지 않는다. ‘필요 충분한’ 전제조건에 대해 말하면서, 레닌은 이 글에서 자신의 주제를 엄격히 한정한다. 글에서 그는 우리의 토대인 소비에트 체제를 전제조건으로 하면서, 새로운 계급적 격변 없이 원자화되고 분산된 농민 기업을 통해 사회주의에 이를 수 있는 수단과 방법에 대한 문제만을 다루고 있다. 글은 전적으로 소규모 사적 상품경제에서 집단경제로 이행하는 사회-조직적 형태를 다루고 있지, 그 이행의 물질적-생산적 조건을 다루고 있지 않다. 유럽의 노동자계급이 오늘 승리를 거두고 그 공업기술로 우리를 도우러 왔더라도, 레닌이 사적 이해와 사회적 이해를 조화시키는 사회-조직적 방법으로 제기한 협동조합의 문제는 여전히 그 중요성을 충분히 지니고 있을 것이다. 소비에트 체제가 존재하기만 하면, 협동조합은 전기를 포함하여 선진 기술을 통해 수많은 농민 기업을 재조직하고 통합시킬 수 있는 길을 가리켜준다. 그러나 협동조합은 기술을 대체할 수 없고, 그런 기술을 창출하지도 못한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레닌은 단지 필요 충분한 전제조건 일반에 대해 말한 것이 아니라 조건들을 명확히 열거했다. (1) ‘모든 대규모 생산수단을 지배하는 국가권력’(교정되지 않은 구절) (2) ‘노동자계급의 수중에 있는 국가권력’ (3) ‘수많은 … 농민들과 노동자계급의 동맹’ (4) ‘농민과의 관계에서 노동자계급의 지도력 담보’가 그것이다. 이런 순전히 정치적인 조건들을 열거한 뒤에서야一여기서 물질적 조건들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一레닌은 자신의 결론에 이른다. 즉 ‘이것’(앞서 말한 모든 것)이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을 위해 ‘필요 충분한 전부’라는 것이다. 정치적 측면에서 ‘필요 충분한 전부’지만, 그 이상은 아니다. 그러나 레닌은 곧바로 이렇게 덧붙인다. ‘이것이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은 아직 아니다.’ 왜 아닌가? 비록 이것이 충분하다고 할지라도, 정치적 조건들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문화적 문제가 아직 남아 있다. 레닌은 ‘단지’ 이것이라고 말한다. 우리에게 부족한 전제조건의 커다란 중요성을 보여주기 위해 ‘단지’라는 말을 강조하면서 말이다. 우리뿐만 아니라 레닌도 문화가 기술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문화적이기 위해서는一그는 수정주의자들을 현실로 돌아오게 한다一일정한 물질적 토대가 필수적이다.’(앞의 책, 145쪽) 덧붙여 말하자면, 레닌이 특별히 국제사회주의 혁명 문제와 연결지어 전력 사용 문제를 언급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만약 쇠퇴하고 있지만 기술적으로 강력한 세계자본주의에 대항하여 후진적인 토대 위에서 사회주의 사회 건설에 나선 나라의 부단하고 비타협적인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 문화적 투쟁의 문제가 아니었다면, ‘필요 충분한’ 정치적(이지만 물질적이지는 않은) 전제조건을 고려하면, 우리는 문화투쟁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만약 국제적 차원에서 우리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투쟁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가 아니라면, 나는 우리의 무게중심을 문화 사업으로 옮겨야 할 것이라고 밝힐 준비가 되어 있다.[레닌은 이 글 끝 부분에서 각별한 역점을 두어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앞의 책, 144쪽)

정말로 그의 모든 다른 저작을 제쳐놓고 ‘협동조합에 대하여’만 분석 해보더라도, 이것이 레닌의 실제 생각이다. 우리가 ‘필요 충분한’ 전제조건을 지니고 있다는 레닌의 말을 의식적으로 따온 다음, 여기에다 기본적인 물질적 전제조건을 덧붙이는 강령 초안 기초자들의 방식이 조작이 아니라면, 달리 뭐라고 할 수 있는가? 정확히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지만, ‘국제적 차원에서 우리의 지위를 지키기 위한’ 투쟁 중에, 즉 국제 노동자혁명과의 관련 속에서 여전히 획득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레닌은 분명히 삽입구로 물질적 전제조건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이것이 새로운 이론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지주가 처한 실정이다.

우리는 여기서 1905년부터 1923년까지 레닌이 매우 단정적으로 주장하고 되풀이한 수많은 글과 연설들을 일부러 다루지 않았다 : 세계혁명이 승리를 거두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 한 나라, 특히 후진국에서 자본가계급을 경제적으로 패배시킬 수는 없다,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임무는 본질적으로 국제적인 임무이다一이로부터 레닌은 새로운 일국적 반동적 유토피아를 보급하는 자들에게는 ‘비관적’일지 모르지만, 혁명적 국제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는 충분히 낙관적인 결론을 끌어냈다. 우리는 이 점에서 초안 기초자들이 자신들의 유토피아를 위해 ‘필요 충분한’ 전제조건을 만들어낼 목적으로 직접 선택한 구절들에만 논의를 집중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들의 구조 전체가 손을 대자마자 산산이 무너지는 것을 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떠한 논평도 필요치 않고, 잘못된 해석도 허락지 않을, 레닌의 논점에 대한 단도직입적인 진술 가운데 적어도 하나를 제시 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러시아의 상황이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과 같지 않으며, 러시아에는 소수의 산업노동자들과 압도적 다수의 소농이 있다고 우리의 많은 저술, 모든 연설, 출판물 전체에서 강조해왔다. 이러한 나라에서 사회혁명은 두 가지 조건에 따라서만 최종적으로 성공할 수 있다. 첫째 조건은 적시에 하나 이상의 선진국들의 사회혁명으로 지원을 받는 것이다. … 둘째 조건은 독재를 수립하거나, 국가권력을 수중에 장악하고 있는 노동자계급과 대다수 농민 사이의 합의이다. … 우리는 다른 나라들에서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 한, 농민과의 합의만이 러시아의 사회주의 혁명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레닌, 《전집》, 제18권 제1부, 137쪽 이하, 트로츠키의 강조)

우리는 이 구절이 충분히 교훈적이기를 바란다. 첫째, 레닌은 자신이 제기한 견해가 ‘우리의 많은 저술, 모든 연설, 출판물 전체에서’ 발전해온 것이라고 글에서 스스로 강조하고 있다. 둘째, 레닌이 이런 관점을 파악한 것은 10월혁명 2년 전인 1915년이 아니라, 4년 뒤인 1921년이었다.

레닌에 관한 한, 우리는 감히 문제가 충분히 명확하다고 생각한다. 결국 물어볼 것은 이것이다 : 지금 우리가 직면한 기본적인 문제에 대해 강령 초안 기초자들의 과거 견해는 무엇이었는가?

이 점에 대해, 스탈린은 1926년 11월에 이렇게 말했다 : ‘일국사회주의의 승리는 그 나라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는 가능성을 뜻하며, 이 임무는 한 나라의 힘으로 이뤄질 수 있다는 생각을 당은 항상 출발점으로 삼았다.’(〈프라브다>지, 1926년 11월 12일자)

우리는 당이 결코 이를 출발점으로 삼지 않았음을 이미 알고 있다. 반대로 레닌이 말한 것처럼, ‘우리의 많은 저술, 모든 연설, 출판물 전체에서’ 당은 반대 입장에서 시작했다. 반대 입장은 소련공산당 강령에 가장 잘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적어도 스탈린 자신은 ‘사회주의가 한 나라의 힘으로 건설될 수 있다’는 이런 잘못된 관점에서 ‘항상’ 시작했다고 생각 할 수 있다. 확인해보자. 

1905년 또는 1915년에 이 문제에 대한 스탈린의 견해가 무엇이었는지 우리가 알 길은 전혀 없다. 이에 대한 어떠한 문서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1924년에 스탈린은 사회주의 건설에 대한 레닌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한 나라에서 자본가계급의 권력을 타도하고 노동자 정부를 세우는 것은 아직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를 보장하지 않는다. 사회주의의 주요한 임무一사회주의적 생산의 조직화一는 여전히 우리 앞에 남아 있다. 몇몇 선진국 노동자계급의 협력 없이도 이 임무를 성취할 수 있는가?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가 최종적 승리 에 이를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이는 불가능하다. 자본가계급을 타도하는 것은 한 나라의 노력으로도 충분하다一우리 혁명의 역사가 이를 확증한다. 사회주의의 최종적 승리를 위해서는, 사회주의적 생산의 조직화를 위해서는 한 나라의 노력, 특히 러시아 같은 농업국가의 노력으로는 불충분하다. 이를 위해서는 몇몇 선진국 노동자계급의 노력이 필수적이다. … 대체로 이것이 노동자혁명에 대한 레닌주의 이론의 전형적인 특징이다.(스탈린, 《레닌과 레닌주의》, 40쪽 이하, 러시아어판, 1924) *영국공산당(CPGB)이 영어로 출판한 《레닌주의의 이론과 실제》, 45~46쪽

‘레닌주의 이론의 전형적인 특징’이 여기서 꽤 정확히 설명되었다고 인정해야 한다. 스탈린 책의 이 구절은 그 이후 판에서 정반대로 읽히도록 바뀌었다. 즉 ‘레닌주의 이론의 전형적인 특징’은 1년도 안 돼 … 트로츠키주의로 선포되었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제7차 전원회의는 1924년판이 아니라 1926년 판에 기초하여 자신의 결정을 통과시켰다.

이것이 스탈린의 실정이다. 이보다 더 유감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다. 물론 사태가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제7차 전원회의에 대해서만큼 유감스럽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를 감수했을지도 모른다.

희망이 하나 남아 있다. 그것은 적어도 강령 초안의 실제 기초자인 부하린은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의 실현 가능성으로부터 ‘항상 시작했다’는 것이다. 확인해보자.

이것이 이 문제에 대해 부하린이 1917년에 말한 것이다 : ‘혁명은 역사의 기관차다. 후진국 러시아에서도 이 기관차에 없어서는 안 될 기관사는 노동자계급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은 더 이상 부르주아 사회의 소유관계라는 틀 안에 머물 수 없다. 이들은 권력과 사회주의를 향해 나아간다. 그러나 러시아에서 ‘일정에 올라 있는’ 이 임무는 ‘일국의 경계 안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 여기서 노동자계급은 오직 세계 노동자 혁명이라는 파성퇴(破城槌)로만 부술 수 있는 극복할 수 없는 장벽(‘극복 할 수 없는 장벽’임을 주의하라一트로츠키)과 부딪친다.
(부하린, 〈러시아의 계급투쟁과 혁명〉, 3쪽 이하, 러시아어판, 1917) 

그는 이렇게 좀 더 분명하게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었다. 이것이 레닌의 입장이 1915년에 ‘바뀐’ 것으로 주장된 2년 뒤인 1917년에 부하린이 신봉한 견해였다. 그러나 혹시 10월혁 명이 부하린을 다르게 가르친 것은 아닐까? 다시 확인해보자.

1919년에 부하린은 코민테른의 이론지에 ‘러시아의 노동자 독재와 세계혁명’이라는 주제로 이렇게 썼다.

다양한 나라의 부르주아 그룹들의 상호의존과 함께 현존하는 세계경제와 그 부분들 사이의 관련 때문에, 몇몇 문명국가들에서 어느 쪽의 결정적 승리가 없다면 한 나라의 투쟁도 끝날 수 없다는 것이 자명하다(트로츠키의 강조)

당시에는 이것이 ‘자명하기’까지 했다.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의 승리가 가능할지 어떨지 하는 문제가 마르크스주의와 사이비 마르크스주의의 전전(戰前) 문헌에서 여러 번 제기되었다. 필자들 대부분은 이 질문에 부정적으로 답했다. [그럼 1915년에 레닌은 어떠했는가? - 트로츠키] 이로부터 누구도 결코 한 나라에서 혁명을 시작하고 권력을 잡는 것이 불가능하거나 용납할 수 없다고 결론 내리지는 않는다.

바로 그렇다! 같은 글에는 또 이렇게 쓰여 있다.

생산력의 상승기는 몇몇 주요 국가들에서 노동자계급의 승리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세계혁명의 전면적인 진전과 소비에트 러시아와 산업국가들의 강력한 경제적 동맹의 결성이 필수적이라는 결론이 나온다.(부하린, ‘러시아의 노동자 독재와 세계혁명’, 〈공산주의인터내셔널〉, 제5권, 614쪽, 1919년)

생산력의 상승, 즉 진정한 사회주의의 발전은 유럽의 선진국들에서 노동자계급이 승리한 뒤에야 비로소 우리나라에서 시작될 것이라는 부하린의 주장은 실제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제7차 전원회의의 비난을 포함하여, ‘트로츠키주의’에 대한 모든 비난이 근거로 들고 있는 주장과 똑 같다. 다만 한 가지 특이한 것은 부하린이 자신의 건망증을 구세주 삼아 고발자로 나섰다는 것이다. 이 우스꽝스러운 상황과 나란히 또 다른, 그것도 비극적인 상황이 있다. 즉 비난당한 사람들 가운데에는 똑같은 기본사상을 수십 차례 표명한 레닌도 있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레닌의 입장이 1915년에 ‘바뀐’ 것으로 주장된 6년 뒤이자, 10월혁명 4년 뒤인 1921년에 레닌이 이끈 중앙위원회는 부하린이 지도한 위원회가 작성한 공산주의청년동맹의 강령을 승인했다. 이 강령의 4절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소련에서 국가권력은 이미 노동자계급의 수중에 있다. 세계자본주의에 맞서 영웅적 투쟁을 벌인 3년 동안 노동자계급은 소비에트 정부를 유지, 강화해 왔다. 러시아는 엄청난 천연 자원을 소유하고 있지만, 산업의 관점에서 보면 소부르주아 인구가 우세한 후진국이다. 우리는 지금 발전기에 들어선 세계 노동자혁명을 통해서만 사회주의에 이를 수 있다.

공산주의청년동맹 강령(우연한 글이 아니라 강령이다!)의 이 한 단락은 당이 ‘항상’ 사회주의 사회 건설이 한 나라에서, 게다가 바로 러시아에서 실현가능하다고 생각했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초안 기초자들의 시도를 우스꽝스럽고 정말 파렴치하게 만든다. 만약 당이 ‘항상’ 그렇게 생각 했다면, 부하린은 왜 공산주의청년동맹의 강령에 이러한 단락을 끼워 넣었는가? 이때 스탈린은 어디를 바라보고 있었는가? 레닌과 중앙위원회 전체는 어떻게 이러한 이론(異論)을 승인할 수 있었는가? 어떻게 당내의 누구도 이런 ‘실없는 말’을 알아채거나, 이에 항의하지 않았는가? 이것은 당, 당의 역사, 코민테른을 철저히 조롱하는 사악한 농담 같지 않은가? 이제 이를 멈추게 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수정주의자들에게 이렇게 말 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당신들이 감히 레닌과 당의 이론적 전통 뒤에 숨겠다는 것인가!

‘트로츠키주의’를 비난하는 결의문의 근거를 제공하기 위해,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제7차 전원회의에서 자신의 짧은 기억력을 안전판으로 삼은 부하린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 ‘트로츠키 동지의 연속혁명론에서는一트로츠키 동지는 현재도 이 이론을 제기한다一우리 경제의 후진성 때문에 세계혁명이 없다면 우리가 불가피하게 붕괴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도 발견된다.’
(의사록, 115쪽)

나는 제7차 전원회의에서 내가 1905~06년에 정식화한 연속혁명론의 결함에 대해 말했다. 그러나 당연히 나는 근본적이고, 레닌적이었으며, 나를 레닌에게로 이끈 데다, 내가 레닌주의에 대한 현재의 수정을 전혀 받아들일 수 없게 한 이 이론의 어느 것도 포기할 생각을 해본 적 이 없다.

연속혁명론에는 두 가지 기본적 명제가 있었다. 첫째, 러시아는 역사적으로 후진적 이지만, 러시아 노동자계급의 수중으로 권력을 이전시킬 수 있는 혁명을 선진국 노동자계급에 앞서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수많은 자본주의 적들에게 포위된 후진국의 노동자 독재에 들이닥칠 모순에서 벗어날 방법은 세계혁명의 무대에서 발견될 것이다. 첫 번째 명제는 불균등 발전법칙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 기초를 두고 있다. 두 번째 명제는 자본주의 국가들 사이의 떼려야 뗄 수 없는 경제적, 정치적 관계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 의존한다. 내가 지금도 연속혁명론의 이 두 기본적 명제를 여전히 고수하고 있다는 부하린의 말은 옳다. 오늘날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그렇다. 왜냐하면 내 생각에는 이 명제들이 이론적으로는 마르크스와 레닌의 저작을 통해, 실천적으로는 10월혁명의 경험을 통해 완전히 확인 검증되었기 때문이다.

 

6. 어떤 점에서 사회민주주의적 일탈인가?

예로 든 인용문들로도 과거와 현재의 스탈린과 부하린의 이론적 입장을 충분히 규정하고도 남는다. 그러나 이들의 정치적 방식의 특성을 측정하기 위해서는 이들 자신이 1925년까지 했던 말(이 경우에는 레닌과도 완전히 일치한다)과 대단히 비슷한 주장을 반대파가 작성한 문건에서 선택하고 나서, 스탈린과 부하린이 이런 인용문에 기초하여 ‘사회민주주의적 일탈’ 이론을 구축했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10월혁명과 국제혁명의 관계라는 중심적 문제에서 반대파는 러시아에서 사회주의의 건설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은 오토 바우어(Otto Bauer)와 같은 견해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은 정말로 1924년에서야 인쇄기가 발명되었으며, 1924년 이전에 일어난 모든 일은 결국 잊혀질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도박은 건망증에 모든 것을 걸고 있다!

그러나 코민테른은 제4차 대회에서 10월혁명의 본질 문제에 대해 오토 바우어와 제2인터내셔널의 다른 속물들에게 앙갚음을 했다. 중앙위원회가 승인한, 신경제정책(New Economic Policy, NEP)과 세계혁명의 전망에 대한 보고에서 나는 당시 우리 중앙위원회의 견해를 표현하는 방식으로 오토 바우어의 입장을 평가했다. 이 보고는 대회에서 어떤 반대에도 부딪치지 않았으며, 나는 이것이 오늘날에도 충분히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부하린 자신에 관한 한, 그는 ‘레닌과 트로츠키를 포함하여 많은 동지들이 이에 대해 이미 말했기’ 때문에 문제의 정치적 측면을 명백히 하기를 거부했다. 바꿔 말하면, 부하린은 당시 내 연설에 동의했다. 이것이 제4차 대회에서 내가 오토 바우어에 대해 말한 것이다.

사회민주주의 이론가들은 한편으로 격식을 차린 글에서는 자본주의가, 특히 유럽에서는 그 유용성을 잃었으며, 역사 발전의 제동기가 되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다른 한편으로 이들은 소비에트 러시아의 발전이 필연적으로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승리에 이를 것이라는 확신을 표한다. 이런 어리석고 우쭐대기 좋아하는 정신 착란자들이 가장 비참하고 진부한 모순에 처하는 것은 아주 당연한 것이다. 신경제정책은 특정한 시공간이라는 명확한 상황에 맞게 고안된 것이다. 이는 자본주의의 포위 속에 있으며, 분명히 유럽의 혁명적 발전에 의지하는 노동자 국가의 조치다. … 시간과 같은 요소는 정치적 예측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자본주의가 실제로 유럽에서 앞으로 100년이나 50년 동안 지속될 수 있을 것이라고 인정하면, 따라서 소비에트 러시아가 자신의 경제정책에서 이에 적응해야 할 것이라고 인정하면, 문제는 자동적으로 해결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를 인정한다는 것은 우리가 유럽에서 노동자 혁명이 붕괴하고, 자본주의 부활의 새 시대가 등장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근거에서 이것이 인정되어야 하는가? 만약 오토 바우어가 오스트리아의 현대생활에서 자본주의 부활의 어떤 기적적인 징후를 발견했다면, 러시아의 운명은 이미 결정되었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는 어떤 기적도 보지 못했고, 기적을 믿지도 않는다.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만약 유럽의 자본가계급이 몇 십 년 동안 권력을 유지할 수 있다면, 그것은 현재의 세계적 상황에서 자본주의의 새로운 전성기가 아니라, 유럽의 경제적 정체와 문화적 쇠퇴를 의미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이러한 과정이 소비에트 러시아를 나락으로 끌어당길지도 모른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이때 소비에트 러시아가 ‘민주주의’ 단계를 거쳐야 할지, 다른 어떤 형태로 퇴락할지는 부차적인 문제다. 그러나 우리가 슈펭글러(Spengler)의 철학을 채택할 이유는 없다. 우리는 명확히 유럽의 혁명적 발전을 기대한다. 신경제정책은 단지 그 발전 속도에 맞추는 것일 뿐이다. (레온 트로츠키, ‘사회민주주의 비판에 대하여’, 《코민테른의 첫 5년》, 491쪽.)

문제에 대한 이런 정식화는 우리를 강령 초안을 평가 한 출발점으로 되돌아가게 한다. 즉 제국주의 시대에는 그 민족적 특수성에도 불구하고, 개별 국가를 포괄하고 종속시키는 세계의 발전 경향 전체를 출발점으로 삼는 것 외에, 다른 어떤 방법으로 한 나라의 운명을 다루는 것은 불가능하다. 제2인터내셔널의 이론가들은 세계 전체로부터, 그리고 제국주의 시대로부터 소련을 제외한다. 이들은 고립된 국가인 소련에 경제적 ‘성숙도’라는 단조로운 기준을 적용한다. 이들은 소련이 독자적으로 사회주의 건설에 나설 준비가 안 되어 있으며, 이 때문에 노동자 국가는 자본주의로 퇴보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강령 초안 기초자들은 사회민주주의 이론가들과 같은 이론적 입장을 채택하고, 이들의 형이상학적 방법론을 고스란히 인계한다. 이들은 또한 실재하는 세계와 제국주의 시대를 ‘추상한다.’ 이들은 고립적 발전이라는 허구에서 시작한다. 이들은 단조로운 경제적 기준을 세계혁명의 일국적 양상에 적용한다. 그러나 이들이 내리는 ‘평결’은 사회민주주의 이론가들과 다르다. 강령 기초자들의 ‘좌익주의’는 이들이 사회민주주의적 평가를 거꾸로 뒤집는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나 아무리 개조하더라도 제2인터내셔널 이론가들의 입장은 여전히 쓸모가 없다. 사람들은 유치원의 실습 같은 바우어의 평가나 예언을 정말 무시하고 있는 레닌의 입장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이 ‘사회민주주의적 일탈’이 처한 실정 이다. 우리가 아니라 강령 초안 기초자들이야말로 자신들이 바우어와 관련된 것으로 여겨야 한다.

 

7. 세계경제에 대한 소련의 의존

일국사회주의 사회에 대한 현 예언자들의 선구자는 다름 아닌 헤르 폴마르(Herr Vollmar)였다. 1878년에 폴마르는 ‘고립된 사회주의 국가’(The Isolated Socialist State)라는 제목의 글에서 선진국 영국의 노동자계급보다 훨씬 더 원숙한 노동자계급을 거느린 독일에서 독자적인 사회주의 건설 전망을 서술했다. 이 글에서 그는 스탈린에 따르면,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잘 몰랐던 불균등 발전법칙에 대해 여러 군데에서 단호하고도 꽤 분명하게 언급한다. 이 법칙에 기초하여 폴마르는 1878년에 반박할 수 없는 이런 결론에 이르렀다.

‘미래에도 그 효력을 유지하고 있을 지배 적인 조건 속에서, 모든 문명국들에서 사회주의가 동시에 승리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고 예견 할 수 있다.’

폴마르는 이 생각을 더욱 진전시키면서 이렇게 말한다 : ‘따라서 우리는 고립된 국가에 이르게 된다. 이것은 비록 유일한 방법은 아닐지라도, 내가 가장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증명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점에서 우리가 ‘고립된 국가’라는 용어를 노동자 독재 아래에 있는 국가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면, 폴마르는 마르크스와 앵겔스에게 잘 알려져 있었고, 앞서 인용한 1915년 글에서 레닌이 표명한 반박할 수 없는 생각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순전히 폴마르 자신의 생각이 전개된다. 그런데 이 생각은 우리의 일국사회주의 이론 주창자들의 설명처럼 그렇게 일방적이고 그릇되게 정식화된 것은 결코 아니다. 자신의 설명에서, 폴마르는 동시에 훨씬 더 고도로 발달한 과학 기술과 훨씬 더 낮은 생산비를 갖추고 있다는 이점 때문에 사회주의 독일이 세계자본주의 경제와 활발하게 경제적 관계를 맺을 것이라는 명제를 출발점으로 삼았다. 이 설명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체제의 평화공존이라는 전망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발전할수록 꾸준히 자신의 놀랄 만한 생산적 우수성을 드러내야만 하는 까닭에, 세계혁명의 필요성은 저절로 줄어들 것이다 : 사회주의는 시장에서 상품을 더 싼 값으로 판매함으로써 자본주의에 승리할 것이다.

첫 번째 강령 초안의 기초자이자, 두 번째 초안의 기초자 가운데 한 명인 부하린은 일국사회주의에 대한 설명에서, 완전히 고립된 자급자족 경제라는 생각에서 시작한다. 궤변으로 점철된 스콜라주의의 결정판인 ‘우리 혁명의 성격과 소련에서 성공적인 사회주의의 건설 가능성에 대하여’(〈볼셰비키〉, 19~20호, 1926년)라는 제목의 부하린의 글에서는 모든 추론이 고립된 경제의 범위 내에서 수행 된다. 중요한 논거 이자, 유일한 논거는 다음과 같다.

‘따라서 우리가 사회주의의 건설을 위해 “필요 충분한 전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중에는 사회주의 건설이 더 나아 갈 수 없는 그런 순간이 있을 리 없다. 만약 우리가 우리나라 안에서 매해 전년도와 비교해 사회주의 경제 부문이 현저한 우위를 점하며 발전하고, 사회화된 경제 부문이 사적 자본주의 부문보다 더 빠르게 성장하는 이러한 원동력을 겸비한다면, 우리는 힘의 우위 속에서 매번 다음 새해를 시작할 것이다.’

이런 추론은 나무랄 데 없다 : 따라서 ‘우리가 필요 충분한 전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있다. 입증되어야 하는 점에서 부터 시작하는 부하린은 들어가는 입구도 나오는 출구도 없는 완전한 자급자족적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세운다. 스탈린뿐만 아니라 부하린도 외부 환경, 즉 세계 전체에 관한 한, 간섭의 각도에서만 이를 생각하고 있다. 부하린이 자신의 글에서 국제적 요인을 ‘추상’할 필요성에 대해 말하는 경우, 그는 세계시장이 아니라 군사적 간섭을 염두에 둔다. 부하린은 자신의 설명 전체에서 정말로 세계시장을 잊어버리고 있기 때문에 세계 시장을 추상할 필요가 없다. 이 도식에 맞게 부하린은 제14차 러시아 당 대회에서 만약 우리가 간섭 때문에 방해받지 않는다면, ‘비록 거북이의 속도로라도’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옹호했다. 두 체제 사이의 부단한 투쟁의 문제, 사회주의는 오직 최고의 생산력에만 기초할 수 있다는 사실, 한마디로 증대하는 생산력에 기초하여 한 사회 구조의 다른 사회구조로의 대체라는 마르크스주의의 역학一이 모든 것이 완전히 말소되었다. 혁명적, 역사적 변증법은 낮은 기술체계 위에 세운, 일국적 경계 안에서 ‘거북이의 속도로’ 발전하며, 오직 간섭에 대한 두려움으로만 외부 세계와 연결되어 있는 자급자족적 사회주의라는 아주 인색한 반동적 유토피아로 대체되었다. 마르크스와 레닌의 이론에 대한 이런 파렴치한 희화화를 인정하지 않는 행위는 ‘사회민주주의적 일탈’이라는 선고를 받았다. 우리의 견해에 대한 이런 규정이 앞서 인용된 부하린의 글에서 처음으로 일반적으로 제기되고 ‘구체화되었다.’ 역사는 우리가 폴마르의 일국사회주의 이론의 조악한 재탕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사회민주주의적 일탈’에 빠졌다고 기록할 것이다. 

만약 러시아가 세계경제의 사슬에서 하나의 고리一가장 약한 고리지만 그렇더라도 하나의 고리인一가 아니었다면, 제정 러시아의 노동자계급은 10월에 권력을 장악하지 못했을 것이다. 노동자계급의 권력 장악은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국제적 분업 체계로부터 소비에트공화국을 차단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땅거미가 질 때에야 날아오르는 영리한 올빼미처럼, 우리 산업의 세계 산업에 대한 의존이 고정자본의 3분의 2로 구체화되어 있는 상황에서, 기존 고정자본을 어느 때보다도 많이 소진한 우리 산업이 세계시장과의 관계를 다시 맺고 확대하는 것이 긴급히 필요하다는 조짐을 보인 순간에, 또 대외무역 문제가 우리의 경제 지도자들에게 최고의 문제로 떠오른 순간에 일국사회주의 이론이 불쑥 나타났다.

레닌이 당에 말할 기회를 가진 마지막 대회인 제11차 대회에서 그는 당이 또 다른 시험에 견뎌야 할 것이라고 시기적절하게 경고했다 : ‘우리가 종속되어 있고, 결부되어 있으며, 따라서 벗어날 수 없는 러시아와 세계시장이 가할 시험…’

가장 최근의 우리 대외무역 수치가 우리의 경제계획을 위한 수치의 중심이 되었다는 단순한 사실만큼 고립된 ‘완전한 사회주의’ 이론에 치명타를 가하는 것은 없다. 산업을 포함하여 우리 경제의 ‘가장 골치 아픈 약점’은 수출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수입 무역이다. 사슬의 저항력은 언제나 그 가장 약한 고리를 통해 측정되기 때문에, 우리의 경제계획 규모는 수입의 규모에 맞춰진다.

〈계획경제〉(국가계획위원회의 이론지)에서 우리는 계획의 체계를 다룬 기사를 볼 수 있다

…올해 우리의 관리 수치를 작성하는 데서, 우리는 방법론적으로 수줄과 수입 계획을 전체 계획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했다 : 우리는 다양한 산업 부문, 결과적으로 산업 일반과 특히 신규 산업체 건립 등등에 대한 우리의 계획에서 이에 맞추지 않으면 안 되었다.(1927년 1월, 27쪽)

이런 방법론적 접근에 대해 국가계획위원회는 들을 수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관리 수치는 경제 발전의 방향과 속도를 결정하지만 이런 관리 수치는 이미 세계경제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 이는 우리가 더 강해져서 고립의 악순환으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이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한다.

자본주의 세계는 우리에게 그 수출입 수치를 통해 자신들이 군사적 간섭과는 다른 설득 수단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노동 생산성과 사회체제 전체의 생산성이 시장에서 가격의 상관관계로 측정된다는 점에서, 아마도 소비에트 경제에 가장 큰 직접적 위협이 될 것은 군사적 간섭이라기보다는 값이 더 싼 자본주의 상품의 침략일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사회주의 혁명은 단지 ‘자국’ 자본가계급에 대한 고립된 경제적 승리의 문제가 결코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 ‘전 세계에 임박한 사회주의 혁명은 결코 단지 자국 자본가계급에 대한 각국 노동자계급의 승리에 있지 않을 것이다.’(레닌, 《전집》, 제16권, 388쪽, ‘1919년’) 여기에는 두 사회체제 사이 의 경쟁과 사활적 투쟁이 관련되어 있다. 한 체제는 후진적인 생산력을 바탕으로 이제 막 건설에 나선 반면에, 다른 체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훨씬 더 위력적인 생산력에 기초를 두고 있다.

세계시장에 대한 우리의 의존을 고백(레닌은 세계시장에 우리가 종속되어 있다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하는 속에서 ‘비관주의’를 발견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에 따라 세계시장에 직면해 자신의 옹졸한 소부르주아적 소심함과, 세계경제를 피해 덤불 뒤에 숨거나 자신만의 자원으로 어떻게든 해보고 싶어 하는 세상모르는 낙관주의의 비참한 꼴을 드러내고 만다.

새로운 이론은 소련이 군사적 간섭 때문에 붕괴할 수는 있지만, 자신의 경제적 후진성 때문에 붕괴하는 일은 결코 없다는 괴상한 생각을 으레 존중해왔다. 그러나 사회주의 사회에서 자국을 방어하려는 근로대중의 준비성은 이 국가를 공격하려는 자본주의 노예들의 준비성보다 훨씬 더 클 것이므로, ‘군사적 간섭이 왜 우리를 재앙적 위험에 처하게 하는가?’라는 의문이 생긴다. 왜냐하면 적(enemy)은 기술에서 우리보다 훨씬 더 강하기 때문이다. 부하린은 오직 군사 기술적 측면에서만 생산력의 우위를 인정한다. 그는 포드(Ford)사의 트랙터가 크뢰조(Creusot)사의 총과 마찬가지로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총은 가끔씩만 작 동할 것이지만, 트랙터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압력을 가한다는 점이 유일한 차이다. 게다가 트랙터는 최후의 수단으로서 총이 자기를 후원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최초의 노동자 국가이자, 세계 노동자계급의 일부이며, 세계 노동자계급과 함께 세계 자본에 의존해 있다. ‘관계들’이라는 특별히 좋지도 나쁘지도 않고, 중립적이며, 관료적으로 거세당한 단어는 몹시 번거롭고 위험한 이런 ‘관계들’의 성격을 숨길 목적에서만 유포되고 있다. 만약 우리가 세계시장 가격으로 생산하고 있었다면, 세계시장에 대한 우리의 의존은 이미 의존이라고 할 것도 없이 지금보다 훨씬 모질지 않은 성격의 의존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는 사실이 아니다. 우리의 대외무역 독점 자체는 우리 의존의 심각성과 위험성의 증거이다. 우리의 사회주의 건설에서 독점의 결정적 중요성은 바로 우리에게 불리한 현재의 역관계 때문이다. 그러나 대외무역의 독점은 단지 세계시장에 대한 우리의 의존을 통제할 뿐 제거하지 않는다는 것을 한 순간도 잊어서는 안된다.

[레닌은 이렇게 말한다] ‘소비에트공화국이 자본주의 세계 전체에 포위되어 있는 고립된 변방으로 남아 있는 한, 우리의 완전한 경제적 독립과 우리에게 닥친 위험의 소멸을 상상하는 것은 정말로 터무니없는 환상이고 유토피아주의 일 것이다.’(레닌, 《전집》, 제17권, 409쪽. 트로츠키의 강조)

따라서 주요한 위험은 우리에게 적대적인 자본주의 경제 안의 ‘고립된 변방’이라는 소련의 객관적 처지로부터 발생한다. 그렇지만 이런 위험은 줄어들 수도 있고 늘어날 수도 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우리의 사회주의 건설과,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주의 경제의 발달이라는 두 가지 요소의 작용에 달려 있다. 물론 궁극에 가서는 두 번째 요소, 즉 세계경제 전체의 운명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우리 사회주의 체제의 생산성이 자본주의 체제의 생산성에 항상 뒤처지는 일, 그래서 결국에는 틀림없이 사회주의공화국의 붕괴로 이어지는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일어난다면 어떤 특별한 경우에 일어날 수 있는가? 만약 우리가 어느 때보다도 더 크게 요구되는 지도력을 발휘하여 독자적으로 산업적 기반을 조성할 필요성이 있는 이런 새로운 국면에서 우리 경제를 훌륭히 꾸려나간다면, 우리의 노동생산성도 증대할 것이다. 그렇지만 자본주의 국가들, 아니 더 정확하게는 유력한 자본주의 국가들의 노동생산성이 우리나라에서보다 더 빨리 증대할 것이라고 상상도 할 수 없는가? 이 문제에 대해 똑똑히 대답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속도가 ‘그 자체로’ 충분하다(‘거북이의 속도’라는 어처구니없는 철학은 고사하고)는 맥 빠진 주장을 위한 어떠한 근거도 없다. 그러나 두 체제의 경쟁이 라는 문제에 답을 제시하려는 시도 자체야말로 우리를 세계경제와 세계 정치의 무대, 즉 소비에트공화국(이따금 인터내셔널에 대한 지원을 보증하는 자급자족적인 소비에트공화국은 절대로 아닌)을 포함하여 혁명적 인터내셔널의 행동과 결정을 위한 무대로 이끈다.

소련의 국가경제를 평하면서 강령 초안은 소련의 국가경제가 ‘자본주의 국가들의 발전 속도를 능가하는 속도로 대규모 산업을 발전시키고 있다’고 말한다. 두 체제의 발전 속도를 병치하려는 이런 시도를 우리는 강령 기초자들이 우리의 발전과 세계의 발전 사이의 비교지수라는 문제 자체를 딱 잘라 거부했던 시기와 비교해볼 때 원칙적인 진일보라고 인정해야 한다. 스탈린은 ‘국제적 요소를 억지로 개입시킬’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부하린은 ‘거북이의 속도로라도’ 사회주의를 건설하자고 말했다. 바로 이 노선에 따라 몇 년 동안에 걸쳐 원칙적인 논쟁이 일어났다. 형식적으로는 이 노선에 따라 우리가 승리를 얻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단지 경제 발전 속도사이의 비교를 본문에 끼워 넣는 것이 아니라, 문제의 근원을 꿰뚫어 보려고 한다면, 초안의 다른 부분에서 자본주의 세계와 어떠한 관련도 없이 국내 관계만을 출발점으로 삼으면서 ‘산업의 충분한 최소한도’에 대해 말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질 것이다. 또한 어떤 나라가 독자적으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것이 ‘가능한지 가능하지 않은지’에 대해 결정을 내리는 것은 물론이고 이렇게 문제를 제기하는 것조차도 똑같이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질 것이다. 문제는 두 체제 사이, 두 세계계급 사이의 투쟁의 역학관계에 따라 결정된다. 그리고 이 투쟁에는 우리의 복구 기간의 높은 성장률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명백하고 기본적인 사실이 그대로 남아있다. 즉,

국제적 차원에서 보자면, 자본주의는 지금도 군사적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경제적 의미에서도 소비에트 권력보다 더 강하다, 우리는 이런 기본적인 고려에서 시작해야하며, 이를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레닌, 《전집》, 제17권, 102쪽)

서로 다른 발전 속도 사이의 상호관계라는 문제는 미래의 미해결 문제로 남는다. 이것은 오직 실제로 스미치카(smychka:노농동맹 또는 농민과의 제휴-옮긴이)를 이루려는, 곡물 수집을 확실히 하려는, 수출입을 증대시키려는 우리의 능력에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바꿔 말하면, 이 투쟁에서 대단히 중요한 요인인 우리의 내부적 성공은 물론이고 세계 자본주의의 운명, 그 침체, 고양, 붕괴, 즉 세계경제와 세계혁명의 추이에도 달려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일국적 틀 안에서가 아니라 세계의 경제적, 정치적 투쟁의 무대에서 결정된다.

 

8. ‘일국사회주의’라는 반동적 유토피아 이론의 원인으로서 생산력과 일국적 경계 사이의 모순

앞서 살펴본 것처럼, 일국사회주의 이론의 기초는 한편으로 레닌의 글 몇 줄에 대한 궤변적 해석과, 다른 한편으로 ‘불균등발전법칙’에 대한 형식적 해석으로 요약된다. 문제의 인용문뿐만 아니라 역사법칙에 대한 올바른 해석을 제시함으로써 우리는 정반대의 결론, 즉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그리고 1925년까지의 스탈린과 부하린을 포함하여 우리 모두가 다다른 결론에 이른다.

자본주의의 불균등하고 산발적인 발전으로부터 사회주의 혁명의 비(非)동시적이고, 불균등하며 산발적인 성격이 나온다. 그리고 서로에 대한 여러 나라들의 극심한 상호의존의 긴장상태로부터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것이 정치적으로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가능하지 않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런 각도에서 다시 한 번 강령의 내용을 좀 더 면밀히 검토해보자. 우리는 이미 서문에서 이런 글을 읽어 알고 있다: ‘제국주의는 … 세계경제의 일국적 생산력 발전과 민족-국가적 장벽 사이의 모순을 이례적인 정도로 악화시킨다.’

우리는 이미 이 명제가 국제 강령의 근본 원리라기보다 정확히는 근본 원리가 될 예정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반동적 이론인 일국사회주의 이론을 선험적으로 배제, 거부, 일소하는 것이 바로 이 명제다. 왜냐하면 일국사회주의 이론은 생산력 발전의 기본적 경향뿐만 아니라 이 발전을 통해 이미 달성한 물질적 성과도 비타협적으로 반대하기 때문이다. 생산력은 일국적 경계에 저촉한다. 이 때문에 대외무역, 사람과 자본의 수출, 영토의 점령, 식민지 정책, 지난 제국주의 전쟁이 발생한 것이고, 또 경제적으로 자급자족적인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이 가능하지 않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자본주의 국가들의 생산력은 오래 전에 일국적 경계를 넘어섰다. 그러나 사회주의 사회는 가장 발달한 생산력, 농업을 포함하여 생산과정에 전력과 화학을 응용하고, 현대 과학기술의 최고 요소들을 결합, 일반화하고, 최대한 발전시키는 것에 입각해서만 건설할 수 있다. 마르크스 이후 우리들은 항상 자본주의는 자신이 낳았으며, 1914년 전쟁이 보여준 것처럼, 부르주아 사적 소유권의 외피뿐만 아니라 부르주아 국가의 민족적 틀도 갈기갈기 찢으려는 새로운 과학기술의 경향에 대처 할 수 없다는 것을 거듭 말해왔다. 그렇지만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로부터 최고로 발달한 생산력을 인계받아야 할 뿐만 아니라 즉시 이를 진척시켜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려야하며, 자본주의 아래에서는 경험해본적이 없는 발전 상태를 보여주어야 한다. 이런 의문이 생긴다 : 그렇다면 어떻게 사회주의가 자본주의 아래에서 맹렬히 극복하려고 한 일국적 범위로 생산력을 후진시킬 수 있는가? 아니면 혹시 일국적 경계가 너무 좁고, 결과적으로 일국사회주의 이론의 한계도 너무 제한적이라서 이것에 맞게 우리가 ‘구속받지 않는’ 생산력 이라는 견해를 포기해야 하는 것인가? 또한 우리 스스로를 이를테면, 억제되고 길들여진 생산력, 즉 경제적으로 후진적인 공업기술 수준으로 한정해야 하는가?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여러 산업 부문에서 우리는 즉시 발전을 방해받을 것이고, 현재의 보잘것없는 기술 수준보다 훨씬 더 낮은 수준으로 급락할 것이다. 현재의 기술 수준은 부르주아 러시아를 분리할 수 없는 결합력으로 세계경제와 연결시키고, 국경을 탈피해버린 생산력을 위해 자신의 영토 확장을 노린 부르주아 러시아를 결국 제국주의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뜨렸다.

이런 생산력을 물려받고 복구시키느라 노동자 국가는 수입과 수출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강령 초안이 현대 자본주의의 기술이 일국적 경계에 저촉한다는 테제를 기계적으로 내용에 집어넣은 다음, 마치 이런 저촉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계속해서 주장하는 것이 문제다. 초안 전체는 본질적으로 마르크스와 레닌으로부터 취한 기존의 혁명적 테제들과 이런 혁명적 테제들과는 절대로 양립할 수 없는 기회주의자와 중도주의자들의 결론을 혼합시킨 것이다. 이것이 바로 초안에 담겨있는 유리된 혁명적 문구에 현혹되지 않고 그 주요 경향이 어디로 이끌고 있는지를 면밀하게 지켜볼 필요가 있는 이유다.

우리는 이미 ‘고립된 일개 자본주의 국가에서’ 사회주의의 승리 가능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 강령 초안 1장의 일부분을 인용한 바 있다. 이 생각은 4장에서 더욱 더 조야하고 뚜렷하게 정식화된다. 

‘세계 노동자계급의 독재(?)는 … 개별 국가들에서 사회주의의 승리(?) 결과로서만 실현될 수 있다. 이 무렵에는 새로 수립된 노동자공화국이 이미 존재하는 노동자공화국들과 연방을 이룰 것이다.’

만약 우리가 ‘사회주의의 승리’라는 말을 단순히 노동자계급 독재의 또 다른 표현으로 해석해야 한다면, 우리는 누구도 반박할 수 없고, 불분명하지 않게 정식화되어야 하는 일반적인 주장에 이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초안 기초자들이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들에게 사회주의의 승리는 정말로 권력 장악과 생산수단의 국유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한다는 의미다. 우리가 이 해석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국제적 분업에 기초한 세계사회주의 경제가 아니라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무정부주의적 경향의 자급자족적 사회주의 공동체들의 연방에 도달할 것이다. 여기서 유일한 차이는 이 공동체들이 현재의 민족국가 규모로 확대될 것이라는 점이다.

낡고 통상적인 문구를 써서 절충적으로 새로운 정식을 감추려는 혼란한 충동에서, 강령 초안은 다음과 같은 테제에 의지한다.

‘노동자계급의 완전한 세계적 승리와 그 세계 권력을 강화시킨 뒤에만, 세계사회주의 경제의 집중적 건설을 위한 긴 시대가 이어질 것이다.’
(4장)

이론적 차폐물로 사용된 이 가정은 실제로는 단지 기본적인 모순을 폭로하는 데 도움이 될 뿐이다. 만약 우리가 이 테제를 진정한 사회주의 건설의 시대가 적어도 몇몇 선진국에서 노동자계급의 승리 이후에만 시작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면, 이는 정말로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한다는 이론에 대한 거부이며, 따라서 마르크스와 레닌의 입장으로 되돌아간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강령 초안의 여러 부분에 깃들어 있는 스탈린과 부하린의 새 이론을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견해에 도달할 것이다 : 세계 노동자계급의 완전한 세계적 승리까지, 수많은 개별 국가들은 각국에서 완전한 사회주의를 건설하고, 그 결과로 아이들이 이미 만들어져 있는 블록으로 구조물을 쌓는 방식을 본떠, 이 사회주의 국가들로 세계사회주의 경제를 건설할 것이다. 실제로 세계사회주의 경제는 일국사회주의 경제들의 총합이 결코 아닐 것이다. 세계사회주의 경제는 그 기본적 측면에서 앞선 자본주의의 발전 전체가 만들어온 세계적 분업의 토양 위에서만 구체화할 것이다. 본질적으로, 세계사회주의 경제는 많은 개별 국가들에서 ‘완전한 사회주의’를 건설한 다음이 아니라, 수십 년이 걸릴 세계 노동자혁명의 폭발과 격동 속에서 만들어지고 세워질 것이다.

최초의 노동자 독재 국가들의 경제적 성공은 자급자족적인 ‘완전한 사회주의’에 어느 정도나 가까운가가 아니라 독재 자체의 정치적 안정성과 미래의 세계사회주의 경제의 요소를 준비하는 데서 거둔 성공에 의해 측정될 것이다.

이 수정주의적 견해는 5장에서 되도록이면 더욱 더 분명하게, 따라서 더욱 더 조잡하게 표현된다. 이 5장에서 초안 기초자는 자신들이 왜곡하고 있는 레닌의 유고한 줄 반 뒤에 숨어서 소련에 대해 이렇게 선언한다 : ‘… 나라 안에 봉건 지주와 자본가계급의 타도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의 완전한 건설을 위해 필요 충분한 물질적 전제조건을 가지고 있다.’ 

도대체 어떤 환경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예사롭지 않은 역사적 이점을 획득했는가? 이 점에 대한 답을 우리는 초안 2장에서 찾을 수 있다 : ‘제국주의 전선은 그 가장 약한 고리인 제정러시아에서 [1917년 혁명에 의해] 끊어졌다.’(트로츠키의 강조)

이것은 레닌의 뛰어난 정식이다. 그 의미는 러시아가 모든 제국주의 국가들 가운데 가장 후진적이고 경제적으로 가장 약했다는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러시아의 지배계급은 나라의 불충분한 생산력에 견딜 수 없는 짐을 지움에 따라 맨 먼저 붕괴하게 되었다. 따라서 불균등하고 산발적인 발전은 가장 후진적인 제국주의 국가의 노동자계급이 맨 먼저 권력을 잡게 했다. 우리는 이전에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가장 약한 고리’의 노동자계급은 선진국 노동자계급에 비해 사회주의를 향한 전진에서 가장 커다란 어려움에 직면할 것이라고 배웠다. 권력을 잡기가 갈수록 어렵다는 것을 깨닫지만, 우리가 우리의 후진성을 극복하기 훨씬 전에 권력을 잡는다면 선진국의 노동자계급은 우리를 능가하는 것은 물론이고 세계 최고의 과학기술과 국제적 분업에 기초하여 진정한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지점으로 우리를 이끌기 위해 우리를 격려할 것이다. 이것이 과감히 10월혁명에 나섰을 때의 우리의 생각이었다. 당은 이런 생각을 신문과 집회를 통해 수십 번, 아니 수천 번 밝혔다. 그러나 1925년부터 이와 정반대되는 생각으로 대체시키려는 시도가 있어왔다. 이제 우리는 과거 제정러시아가 ‘가장 약한 고리’였다는 사실이 제정러시아의 상속인인 소련 노동자계급에게 모든 약점과 함께 더도 덜도 말고 ‘사회주의의 완전한 건설’을 위한 자국적 전제조건을 가진 더할 나위 없는 이점을 제공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불행한 영국은 필요한 원료를 공급하고, 생산품을 처분하기 위해 거의 전 세계를 필요로 하는 생산력의 과잉 발전 때문에 이런 이점을 가지고 있지 않다. 영국의 생산력이 좀 더 ‘절제’되고, 산업과 농업의 상대적 균형이 유지되었다면, 영국의 노동자계급은 해군을 통해 외국의 간섭으로부터 보호를 받으며, 자신의 ‘고립된’ 섬 에서 완전한 사회주의를 건설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강령 초안은 4장에서 자본주의 국가들을 세 그룹으로 나눈다 : 1) ‘고도로 발전한 자본주의 국가들(미국, 독일, 영국 등)’ 2) ‘자본주의가 중간 정도 발전한 국가들(1917년 이전의 러시아, 폴란드 등)’ 3) ‘식민지와 반(半)식민지 국가들(중국, 인도 등)’

‘1917년 이전의 러시아’가 현재의 미국보다 현재의 중국에 훨씬 더 가깝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만약 초안의 다른 부분과 관련하여 이 부분이 잘못된 결론의 근원 구실을 한다는 사실만 아니었더라면, 이 도식적 구분에 대해 어떤 진지한 반대도 삼갔을 것이다. 초안에서는 ‘중간 수준’의 나라들이 독자적으로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는 ‘산업의 충분한 최소한도’를 가지고 있다고 선언되고 있으므로, 이것은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한 나라들에 대해서는 그만큼 더 사실이다. 외부의 지원을 필요로 하는 것은 식민지와 반(半)식민지 국가들뿐이다. 나중에 살펴볼 것처럼, 이는 바로 강령 초안이 다른 장에서 이 나라들을 특징 짓는 것이다.

그렇지만 만약 우리가 국가의 천연자원, 국가 안에서 산업과 농업의 상호관계, 세계경제 체제에서 차지하는 지위와 같은 다른 조건들을 떼어낸 채, 이 기준으로만 사회주의 건설 문제에 접근한다면, 우리는 새로운, 틀림없이 엄청난 오류와 모순에 빠질 것이다. 우리는 방금 영국에 대해 말했다. 고도로 발전한 자본주의 나라라는 점이 틀림없는 영국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자기 섬의 경계 안에서 성공적으로 사회주의를 건설할 가능성이 없다. 만약 봉쇄된다면 영국은 정말 몇 달 안에 질식당할 것이다.

확실히 다른 모든 조건이 똑같다면, 더 고도로 발달한 생산력은 사회주의 건설을 위해 엄청난 이점이다. 전쟁 중에 부르주아 독일이 입증한 것처럼, 고도로 발달한 생산력은 경제 활동이 봉쇄망으로 포위되어 있을 때조차도 그에 예외적인 유연성을 부여한다. 그러나 일국적 토대 위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것은 이 선진국들에게 전반적인 퇴보, 생산력의 대대적인 축소 즉, 사회주의의 임무와 정반대되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강령 초안은 현재의 생산력과 일국적 경계 사이의 양립불가능성이라는 기본적 테제를 잊고 있다. 그런데 이 테제로부터 고도로 발전한 생산력이 낮은 생산력보다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데 더 작은 장애인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비록 상반되는 이유, 즉 낮은 생산력이 사회주의 건설의 토대 구실을 하기에는 불충분하지만, 이 토대가 고도로 발전한 생산력에는 부적합할 것이라는 이유에서 일지라도 말이다. 불균등 발전법칙은 바로 가장 필요하고 가장 중요한 지점에서 잊혀진다.

사회주의의 건설 문제는 단지 한 나라의 산업적 ‘성숙’이나 ‘미성숙’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이 미성숙은 불균등 그 자체다. 소련에서 몇몇 산업 부문은 가장 기본적인 국내의 필요를 만족시키기에도 대단히 불충분 하다(특히 기계 제작). 반대로 다른 산업 부문은 대규모의 수출 증진 없이는 현재의 조건 아래에서 발전할 수 없다. 농업은 말할 것도 없고 목재, 석유, 망간 같은 가장 중요한 산업 부문들이 후자에 속한다. 반면에, 만약 ‘과잉’(상대적으로) 부문이 수출할 수 없다면, ‘불충분한’ 산업 부문조차 진정으로 발전할 수 없다. 유토피아나 아틀란티스에서가 아니라 현세의 우리 경제라는 구체적인 지리적, 역사적 조건에서 고립된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다른 부문의 ‘과잉’ 발전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몇몇 부문의 불충분한 발전에 의해서도 여러 나라에 걸쳐 서로 다른 방식으로 결정된다. 이것은 대체로 현대의 생산력이 일국적 경계와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국주의 전쟁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소유의 부르주아적 형태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국가들의 경계에 대한 생산력의 반란이었다. 제국주의 전쟁은 생산력이 민족국가의 한계 안에 배길 수 없게 속박되어 있다는 사실을 표현했다. 우리는 항상 자본주의가 자체 발전하는 생산력을 통제할 수 없으며, 오직 사회주의만이 자본주의 국가의 경계를 벗어난 생산력을 더 고도의 경제적 연합체 속에 결합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고립된 국가로 되돌아가는 모든 길은 막혀 있다. …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제7차 전원회의 의사록, 트로츠키의 연설, 100쪽)

일국사회주의 이론을 증명하려고 시도하면서 강령 초안은 이중, 삼중, 사중의 오류를 저지른다. 초안은 소련의 생산력을 과장한다. 또한 다양한 산업 부문의 불균등 발전법칙에 눈을 감고, 국제적 분업을 무시하며, 결정적으로 제국주의 시대에 고유한 가장 중요한 모순인 생산력과 민족-국가적 장벽 사이의 모순을 잊고 있다.

분석되지 않은 주장을 하나도 남겨두지 않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새로운 이론을 옹호하는 부하린의 또 하나의 명제일 뿐만 아니라 일반화된 명제를 상기하는 일이 남아 있다.

부하린은 세계적 차원에서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상호관계는 소련에 현존하는 관계보다 더 양호한 것도 없다고 말한다. 결과적으로 만약 후진성이라는 이유 때문에 소련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마찬가지로 세계경제 차원에서도 실현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 주장은 형식적 사고의 고전적 예로 변증법에 관한 모든 교과서에 실릴만하다.

우선, 세계적 차원에서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세력관계가 소련 내부의 상호관계와 그리 많이 다르지 않다는 것은 꽤 그럴 듯하다. 그러나 세계혁명은 산술 평균 방식에 따라서 이뤄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덧붙여 말하자면, 일국혁명도 마찬가지다. 그 한 예로, 10월혁명은 노동자와 농민의 상호관계가 러시아 전체의 평균과 일치하는 지역을 선택한 것이 아 니라, 노동자들의 페테르부르크에서 맨 먼저 일어났으며, 자기 입장을 견고히 지켰다. 페테르부르크에 뒤이어 모스크바가 혁명정부와 혁명군대를 수립한 다음, 몇 년 동안 변경의 자본가계급을 타도해야 했다. 그리고 혁명이라고 불리는 이 과정의 결과로서만, 소련의 경계 안에서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현재의 상호관계가 수립되었다. 혁명은 산술 평균 방식에 따라서 발생하지 않는다. 혁명은 덜 양호한 부문에서 시작할 수 있지만 일국적, 세계적 영역 모두의 결정적 부문에서 스스로를 견고히 할 때 까지는 자신의 완전한 승리에 대해 말할 수 없다.

둘째로, ‘평균적인’ 과학기술 수준을 고려하면,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상호관계는 문제의 해결을 위한 유일한 요소가 아니다. 뿐만 아니라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 사이의 계급전쟁이 존재한다. 소련은 노동자 농민의 세상이 아니라 자본주의 세계에 포위되어 있다. 자본가계급이 전 세계적으로 타도된다고 하더라도, 이 사실만으로는 아직 소련 내에서, 그리고 전 세계 에서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상호관계도, 평균적인 과학기술 수준도 변화시킬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에서 사회주의 건설은 즉시 완전히 다른 가능성과 다른 비중을 획득할 것이고, 이는 현재의 가능성, 비중과 정말로 비교가 안 될 것이다.

셋째로, 모든 선진국의 생산력이 어느 정도 일국적 경계를 벗어났더라도, 부하린에 따르면, 모든 나라의 생산력을 전체적으로 고려해볼 때 지구의 한계를 넘어서고, 따라서 사회주의는 태양계 차원에서만 건설되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노동자와 농민의 평균적인 비율에 근거한 부하린식의 주장이 모든 정치 입문서 에 실려야 한다고 반복한다. 물론 지금과 같이 일국사회주의 이론을 옹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형식적 궤변과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의 완전한 대립의 증거로 실려야 한다는 것이다.

 

9. 문제는 오직 세계혁명의 무대에서만 풀 수 있다

새로운 이론은 간섭만 없다면 사회주의가 민족국가에 기초하여 건설될 수 있다고 선언한다. 이로부터 (강령 초안의 모든 화려한 선언에도 불구하고) 간섭을 피할 목적으로 외국 자본가계급에 대한 협력 정책을 추구할 수 있고, 또 추구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것이 사회주의 건설을 보증할, 즉 주요한 역사적 문제를 해결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코민테른에 속한 당들의 임무는 보조적인 성격을 띤다. 이들의 임무는 소련을 간섭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지, 권력 장악을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이것은 주관적인 의도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사고의 객관적 타당성의 문제다.

[스탈린은 이렇게 말한다] 견해 차이는 당이 이런 [내부] 모순과 있을 수 있는 대립을 우리 혁명의 내적인 힘에 기초하여 완전히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반면에, 트로츠키와 반대파 동지들은 이런 모순과 대립을 ‘오직 세계적 차원에서만, 세계 노동자혁명의 무대에서만’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에 있다.(〈프라브다〉지, 262호, 1926년 12월 12일자)

그렇다. 이것이 바로 차이다. 민족적 개량주의와 혁명적 국제주의 사이의 차이를 이보다 더 잘, 그리고 더 정확하게 표현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만약 기본적으로 세계적 모순의 반영인 우리의 내부적 어려움, 장애물, 모순들이 ‘세계 노동자혁명의 무대’에 등장하는 일 없이 ‘우리 혁명의 내적인 힘’으로 그냥 해결될 수 있다면, 인터내셔널은 얼마간은 보조적 기구이자 얼마간은 장식적 기구일 것이다. 또 그 대회는 4년마다 한번, 10년마다 한번, 또는 아예 안 열릴지도 모른다. 비록 우리가 다른 나라의 노동자계급이 우리의 사회주의 건설을 군사적 간섭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고 덧붙여 말했더라도, 이 도식에 따르면, 인터내셔널은 평화주의의 도구 역할을 해야 한다. 그렇다면 세계혁명의 기구라는 인터내셔널의 주요한 역할은 불가피하게 뒷전으로 밀려난다. 그런데 반복하건대, 이것은 누군가의 계획적인 의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반대로, 강령의 여러 대목들은 그 기초자들의 의도를 가장 잘 나타내고 있다.) 가장 나쁜 주관적인 의도보다 수천 배나 더 위험한 새로운 이론적 입장의 내적 논리로 부터 나온다.

실제로 스탈린은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제7차 전원회의에서도 다음과 같은 생각을 밝히고, 옹호할 만큼 대담해졌다.

우리 당은 노동자계급을 희롱할(!) 권리가 없다. 당은 우리나라에서 사회주의의 건설 가능성에 대한 확신 부족(!)은 권력의 포기와 집권당인 우리 당의 입장으로부터 야당의 입장으로 넘어가는 것임을 공개적으로 선언해야 한다.(의사록, 제2권, 10쪽, 트로츠키의 강조)

이것은 우리가 일국적 경제의 빈약한 자원에 대해 확신할 권리만 있을 뿐, 감히 국제 노동자계급이라는 무한한 자원에 대해서는 어떠한 확신을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우리가 국제혁명 없이 꾸려 나갈 수 없다면, 권력을, 그것도 우리가 국제혁명을 위해 장악한 10월 권력을 넘겨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철저하게 잘못된 정식에서 시작할 경우 보게 될 일종의 이론적 붕괴다!

소련의 경제적 성공이 세계 노동자혁명의 분리할 수 없는 일부를 이룬다고 말하는 경우, 강령 초안은 부정할 수 없는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이론의 정치적 위험은 세계사회주의의 두 가지 수단, 즉 우리의 경제적 성공과 세계 노동자혁명에 대한 잘못된 비교 평가에 있다. 승리를 거둔 노동자혁명이 없다면, 우리는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없을 것이다. 유럽과 전 세계의 노동자들은 이것을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 경제 건설이라는 수단은 엄청난 의미가 있다. 올바른 지도부가 없다면, 노동자 독재는 약해질 것이다. 그리고 그 몰락은 국제혁명에 꽤 오랫동안 회복하지 못할 타격을 줄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 세계와 자본주의 세계 사이의 주요한 역사적 투쟁의 결론은 두 번째 수단, 즉 세계 노동자혁명에 달려 있다. 소련의 거대한 중요성은 세계혁명의 저항 기지라는 데 있는 것이지, 세계혁명과 관계없이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다는 추정에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더 없이 오만한 어조로, 전혀 근거도 없이 부하린은 여러 차례 우리에 게 이렇게 물었다.

‘만약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과업의 전제조건, 출발점, 충분한 토대, 심지어 일정한 성공이 이미 존재한다면, 이를 넘어 모든 것을 ‘뒤죽박죽 되게 할’ 한계가 어디에 있는가? 그런 한계는 없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제7차 전원회의 의사록, 116쪽)

이것은 틀린 기하학이지 역사적 변증법이 아니다. 몇몇 경우 그런 ‘한계’가 있을 수 있다. 국제적일 뿐만 아니라 국내적인 한계, 경제적이고 군사적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한계가 바로 그것이다. 가장 중요하고 끔찍한 ‘한계’는 세계자본주의의 진지하고 장기적인 안정화와 새로운 호황으로 판가름이 날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세계무대로 이동한다. 자본가계급이 혼자 힘으로 자본주의의 성장과 자본가권력의 새로운 시대를 보증할 수 있을 것인가? 자본주의가 처해 있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상황’에 의지한 채, 이러한 가능성을 단순히 부정하는 것은 혁명적 수다에 불과할 것이다. ‘정말로 어찌할 도리가 없는 상황은 없다’(레닌). 유럽 국가들에서 지금의 불안정한 계급 균형은 바로 그 불안정성 때문에 무기한 계속될 수 없다.

스탈린과 부하린이 현재 노동자 대중의 적극적인 공감이 우리를 간섭으로부터 보호해주기 때문에, 다른 나라 노동자계급의 ‘국가적’ 원조 없이도, 즉 자본가계급에 대한 그 나라 노동자계급의 승리 없이도 소련을 꾸려나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이들은 자신들의 원칙적인 오류의 결과 전체가 보여주는 것과 같은 무지를 드러낼 뿐이다.

사회민주주의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자본가계급에 대항하는 유럽노동자계급의 봉기를 방해했기 때문에, 노동자 대중의 적극적인 공감이 소비에트공화국을 구했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시기 동안, 유럽의 자본가계급은 노동자 국가에 대한 전쟁을 대규모로 수행할 수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이런 세력관계가 여러 해 동안, 이를테면 소련에서 사회주의가 수립될 때까지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 하는 것은 발전 곡선 전체를 그 작은 부분 가운데 하나를 통해 판단하려는 것과 마찬가지로 완전히 근시안적인 것이다. 자본가계급이 자기 나라를 확고하게 지배하고 있다고 충분히 느끼지 못하는 동시에 노동자계급이 권력을 잡을 수 없을 만큼 불안정한 상황은 조만간에 어떤 식으로든 급격히 해결되어야 한다. 즉, 노동자독재에 유리하게든, 아니면 인민대중의 등을 타고, 식민지 인민의 뼛골을 빼고 … 아마도 우리 자신의 뼛골을 빼내 진지하고 장기적인 자본주의의 안정화에 유리하게든 말이다. ‘정말로 어찌할 도리가 없는 상황은 없다!’ 유럽의 자본가계급은 노동자 계급의 패배와 혁명 지도부의 오류를 통해서만 자신의 중대한 모순에서 벗어나는 영속적인 길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역도 마찬가지로 사실이다. 노동자계급이 혁명 중에 현재의 불안정한 균형에서 벗어나는 길을 발견할 수 있을 경우에만(물론 거대한 격변의 새로운 시대에 대한 전망을 포함하여) 세계자본주의의 새로운 호황이 없게 될 것이다.

1920년 7월 19일, 코민테른 제2차 세계대회에서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 : ‘이제는 혁명정당들이 충분히 의식적이고, 조직적이며, 피착취 대중과의 충분한 접촉과 혁명의 성공과 승리를 위해 위기를 활용할 수 있는 결단력과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실천 활동을 통해 “입증할” 필요가 있다.’(레닌, 《전집》, 제17권, 264쪽)

그렇지만 유럽과 세계의 투쟁 추세에 직접 좌우되는 우리의 내적 모순들은 마르크스주의의 전망에 기초한 올바른 국내 정책에 의해 합리적으로 조절되고 완화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계급 모순을 극복할 경우에만 최종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데, 이는 유럽의 혁명이 승리를 거두지 못한다면 불가능하다. 스탈린의 말이 맞다. 차이는 바로 이 점에 있다. 그리고 이것은 민족적 개량주의와 혁명적 국제주의 사이의 근본적 차이다.

 

10. 일련의 사회애국주의적 중대 실수인 일국사회주의 이론

일국사회주의 이론은 집요하게 극복해야 하는 어려움을 과소평가하고, 획득한 성과를 과대평가한다. ‘소련에서 사회주의는 이미 90% 실현되었다’라는 뜻의 스탈린의 진술보다 더 반(反)사회주의적이고 반(反)혁명적인 주장을 발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진술은 특별히 자기도취적인 관료들에게 한 말 같다. 이런 식이면 근로대중이 보는 사회주의 사회에 대한 인식은 구제불능으로 나빠질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이들이 차지해온 종속적 지위와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낮은 문화적 수준을 고려한다면, 소련의 노동자계급은 웅대한 성공을 쟁취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의 이상이라는 척도로 보면 이런 업적은 극히 작은 규모이다. 혁명 11년 동안에 가난, 불행, 실업, 빵 배급 줄, 문맹, 갈 곳 없는 아이들, 주벽, 매춘이 자기들 주위에서 줄어들지 않고 있음을 아는 노동자, 농업 노동자, 빈농의 기운을 북돋기 위해서는 달콤한 거짓말이 아니라 냉혹한 진실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이들에게 사회주의가 90% 실현되었다고 거짓말을 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경제적 수준, 우리의 사회적, 문화적 상황이 사회주의보다는 오늘날의 자본주의, 그것도 후진적 이고 비(非)문화적인 자본주의에 훨씬 더 가깝다고 말해야 한다. 우리는 이들에게 가장 발달한 나라들의 노동자계급이 권력을 장악할 때에만 우리가 진정한 사회주의 건설의 길에 접어들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또한 이를 위해서는 우리 내부의 경제적 노력이라는 단기적 수단과 국제 노동자투쟁이라는 장기적 수단 두 가지를 다 사용하여 끈기 있게 노력할 필요가 있다.

요컨대, 우리는 이미 90% 실현되었다는 사회주의에 대한 스탈린주의자의 빈말 대신에 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레닌의 말을 전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모든 비관주의와 미사여구를 늘어놓는 짓을 팽개친다면, 만약 우리가 이를 악물고, 우리의 있는 힘을 다 모으고, 전력을 쏟는다면, 만약 우리가 구원은 우리가 들어서 있는 국제사회주의 혁명의 길을 따라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러시아(가난의 땅)는 그러한 땅(풍요의 땅)이 될 것 이다.(레닌, 《전집》, 제15권, 165쪽)

우리는 코민테른의 저명한 지도자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주장을 들어야 했다 : 물론 일국사회주의 이론은 근거가 없지만, 힘든 조건 속에서 애 쓰고 있는 러시아 노동자들에게 전망을 제공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이들에게 용기를 준다. 강령에서 그 계급적 태도 결정의 과학적 근거가 아니라 도덕적 위안을 찾으려는 사람들의 이론적 파탄의 깊이를 재기는 어렵다. 모순된 사실에서 위안을 받는 이론은 과학이 아니라 종교권에나 어울린다. 그런데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우리 당은 일국사회주의가 아니라 전적으로 국제혁명에 방향을 맞춘 강령을 가지고 영웅적 시기를 지나왔다. 공산주의청년동맹은 후진적인 러시아 혼자서, 자신만의 힘으로 사회주의를 건설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밝힌 강령적 기치 아래 내전, 기아, 추위, 힘겨운 주말노동, 전염병, 보잘 것 없는 배급량에 대한 배려, 그리고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치른 수많은 희생의 가장 힘든 시기를 지나왔다. 당과 공산주의청년동맹원들은 전선에서 싸우거나 원목을 철도역으로 힘들여 운반했다. 이런 원목으로 일국 사회주의를 건설하기를 바랐기 때문이 아니라 국제혁명의 대의에 복무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소비에트 요새가 굴복하지 않는 것이 국제혁명에서 불가결해졌으며, 모든 추가 원목은 소비에트 요새에 중요했다. 이것이 우리가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 쓴 방법이다. 시대가 변했고, 상황이 바뀌었지만(아직까지 그리 급격하지는 않지만), 원칙적인 접근은 지금도 충분한 효력을 지니고 있다. 노동자, 빈농, 열성당원, 청년 공산주의자들은 새로운 진리가 처음으로 선포된 1925년 이전까지 자신들의 모든 행동을 통해 자신들에게는 새로운 진리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위에 앉아 대중을 깔보는 관리, 혼란을 원치 않는 말단 관리자, 모든 것을 덜어주고 위로하는 방책의 엄호 하에 군림하려는 기구 신봉자들은 새로운 진리가 필요하다. 이 사람들은 무지한 인민들에게는 ‘기쁜 소식’이 필요하고, 위안이 되는 교리 없이는 인민들을 대할 수 없다고 생각 한다. 이 사람들은 또한 특권적인 지위, 군림하고 명령할 권리, ‘회의론자들’과 ‘신념이 부족한’ 자들의 비판을 면할 필요 때문에 ‘90%의 사회주의’라는 거짓말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할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이 기를 죽이고 열정을 앗아간다는 취지의 불평과 비난은 완전히 다른 조건에서 기인하는 것이지만, 개량주의자들이 항상 혁명가들에게 퍼부어온 비난과 이론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밀접한 관련이 있다. 개량주의자들은 이렇게 말 했다 : ‘당신들은 노동자들에게 자본주의 사회의 틀 안에서는 그 운명을 실제로 개선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만으로도 당신은 투쟁하려는 노동자들의 의욕을 앗아간다.’ 노동자들이 실제로 경제적 이익과 의회주의적 개량을 위해 싸운 것은 정말로 혁명주의자들의 지도를 받을 때뿐이었다.

세계자본주의의 생지옥 속에서 오아시스 같은 사회주의 낙원을 건설 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소비에트공화국의 운명, 따라서 자신의 운명도 전적으로 국제혁명에 달려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노동자는 우리가 이미 90%로 추정되는 사회주의를 획득했다고 말하는 노동자보다 훨씬 더 효과적으로 소련에 대한 자신의 의무를 수행할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사회주의를 위해 노력할 가치가 있는가?’ 여기에서도 개량주의적 태도는 언제나처럼 혁명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개량에 대해서도 반대한다. 

이미 인용한 유럽합중국 슬로건을 다루고 있는 1915년의 글에서 우리는 이렇게 말했다.

일국적 경계 안에서 사회혁명이라는 전망에 접근하는 것은 사회애국주의의 본질을 이루고 있는 동일한 일국적 협소함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바이앙(Vaillant)은 죽는 날까지 프랑스가 사회혁명의 약속된 땅이라고 여겼는데, 바로 이런 관점에서 그는 끝까지 조국 방어를 표방했다. 렌쉬(Lensch) 일당(일부는 위선적으로, 나머지는 진심으로)은 독일의 패배는 무엇보다도 사회혁명의 토대 파괴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 대체로 사회애국주의에는 가장 저속한 개량주의와 함께, 자국의 산업적 수준 때문이든 ‘민주적’ 형태나 혁명적 승리 때문이든, 자국이 인류를 사회주의 또는 ‘민주주의’ 쪽으로 인도할 요구를 받았다고 여기는 민족적, 혁명적 메시아주의가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만약 더 발전한 일개 국가의 경계 안에서 실제로 승리를 거둔 혁명을 상상할 수 있다면, 조국 방어 강령과 함께 이 메시아주의도 다소 상대적인 역사적 정당성을 지닐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이는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다. 노동자계급의 국제적 유대를 약화시키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혁명의 일국적 토대를 보존하기 위해 싸우는 것은 실제로 혁명 자체를 약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혁명은 일국적 토대 위에서 시작할 수 있지만, 현재의 전쟁에서처럼 그렇게 극적으로 드러난 적이 없는 지금의 유럽 국가들의 경제적, 군사적, 정치적 상호의존 아래에서는 혁명이 일국적 토대 위에서 완료될 수 없다. 혁명에서 유럽 노동자계급 쪽의 공동 행동을 직접적으로, 그리고 즉시 결정할 이 상호의존은 유럽합중국 슬로건으로 표현된다.(트로츠키, (전집》, 제3권 제1부, 90쪽 이하)

1915년 논쟁에 대한 잘못된 해석에서 시작하는 스탈린은 내가 이 점 에서 레닌이 ‘일국적 편협함’에 지배를 받고 있다고 암시하는 것을 보여 주려고 여러 번 시도했다. 이보다 더 어리석은 짓을 상상할 수는 없을 것이다. 레닌과 논쟁하면서 나는 항상 오직 이데올로기적 고려에 따랐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주장했다. 위의 경우는 레닌과 전혀 관계가 없다. 1915년 글이 실명까지 거론하며 이런 비난을 퍼부은 대상들은 바이앙, 렌쉬 등이다. 1915년은 사회애국주의가 법석을 떨고, 이에 대항하는 우리의 투쟁이 압박을 가한 해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이 모든 문제에 대한 우리의 기준이었다.

앞서 말한 구절에서 제기된 근본적 문제는 의심할 여지없이 올바르게 정식화되었다 : 일국사회주의의 건설 구상은 사회애국주의의 구상이다. 

독일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애국주의는 제2인터내셔널에서 가장 강력한 당인 자신들의 당에 대한 정당한 충성심으로서 시작되었다. 고도로 발전한 독일의 과학 기술, 독일 인민의 뛰어난 조직적 자질에 기초하여 독일 사회민주주의는 ‘자신의’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할 준비를 했다. 우리가 대체로 완고한 관료들, 출세주의자들, 의회주의 사기꾼들, 정치적 도둑놈들을 제쳐 놓는다면, 일반적인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사회애국주의는 바로 독일 사회주의의 건설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되었다. 수많은 일반적인 사회민주주의자들(수백만의 일반적인 노동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이 호엔쫄레른 왕가나 자본가계급을 방어하기를 원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렇지 않다. 이들은 사회주의를 위한 일국적 차원의 ‘필요 충분한’ 전제조건으로서 독일의 산업, 독일의 철도와 고속도로, 독일의 과학 기술과 문화, 특히 독일 노동자계급의 조직을 보호하고 싶어 했다.

비슷한 과정이 프랑스에서도 발생했다. 게드(Guesde), 바이앙, 그리고 이들과 함께 가장 뛰어난 수천 명의 평당원들, 수많은 평범한 노동자들은 혁명적 전통, 영웅적 노동자계급, 고도로 문명화되고 유연하며 재능 있는 인민을 가진 프랑스가 바로 사회주의의 약속된 땅이라고 믿었다. 노련한 게드와 파리꼬뮌 전사 바이앙, 그리고 이들과 함께 수많은 진지한 노동자들은 은행가나 불로소득자를 보호하려고 싸우지 않았다. 이들은 자신들이 미래의 사회주의 사회의 창조력과 토양을 방어하고 있다고 진지하게 믿었다. 이들은 전적으로 일국사회주의 이론에서 시작했으며, 이런 생각을 위해 자신들이 희생시킨 국제적 연대가 ‘일시적’일 것이라고 믿었다.

물론 사회애국주의자들과 이렇게 비교하면 자본가 국가에 대한 애국주의는 배신인 반면에, 소비에트 국가에 대한 애국주의는 혁명적 의무라고 주장하는 대답을 듣게 될 것이다. 맞는 말이다. 성숙한 혁명주의자들 사이에서 이 문제에 대해 어떤 논쟁이 있을 수 있는가? 그러나 말을 하면 할수록, 이 명백한 가정은 점점 더 계획적인 거짓말의 형식적 차단막으로 변한다.

혁명적 애국주의는 계급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이는 당 조직과 노동조합에 대한 충성심으로 시작해서 노동자계급이 국가권력을 장악하면, 국가에 대한 충성심으로 상승한다. 권력이 노동자의 수중에 있을 때에는 언제나 애국주의가 혁명적 의무가 된다. 그러나 이 애국주의는 혁명적 국제주의의 분리될 수 없는 일부여야 한다. 마르크스주의는 항상 노동자들에게 임금인상과 노동시간 단축을 위한 투쟁도 국제적 투쟁으로서 수행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고 가르쳤다. 그런데 이제 와서 느닷없이 사회주의 사회의 목표가 한 나라의 힘만으로 이루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는 인터내셔널에 대한 치명적 타격이다.

계급의 근본적 목표는 부분적인 목표에 비해 훨씬 더 일국적 수단을 통해서나 일국적 경계 안에서 실현될 수 없다는 불요불굴의 신념이 바로 혁명적 국제주의의 핵심을 이룬다. 그렇지만 만약 궁극적 목표가 한 나라 노동자계급의 노력으로 일국적 경계 안에서 실현될 수 있다면, 국제주의의 중추는 꺾여버렸을 것이다.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는 이론은 승리를 거둔 노동자계급의 애국주의와 부르주아 국가 노동자계급의 패배주의 사이의 내적 관련성을 훼손한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자계급은 여전히 권력을 향해 가고 있는 중이다.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권력을 향해 나아가느냐는 사회주의 사회 건설의 임무를 일국적 임무로 보는가 국제적 임무로 보는가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

만약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를 실현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사람들은 권력 장악 이후는 물론이고 그 이전에도 그런 이론을 믿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사회주의가 후진적인 러시아의 일국적 경계 안에서 실현될 수 있다면, 선진국 독일에서 사회주의가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더 믿을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내일 독일공산당 지도자들은 이 이론을 제기할 것이다. 강령 초안이 이들에게 그렇게 할 권한을 준다. 모레는 프랑스당이 자기 차례라고 나설 것이다. 사회애국주의의 노선을 따라서 코민테른의 붕괴가 시작될 것이다. 특정 자본주의 국가가 ‘완전한 사회주의 사회’의 독자적 건설을 위해 ‘필요 충분한’ 전제조건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될 몇몇 자본주의 국가의 공산당은 노스케(Noske)로부터 시작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결정적으로 1914년 8월 4일에 바로 이와 똑같은 문제에 빠진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와 본질적인 의미에서 조금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노동자공화국과 관련한 애국주의는 혁명적 의무이기 때문에 소련의 존재 자체가 사회애국주의에 대비한 보장책이라는 주장을 낳는 경우, 이런 올바른 생각의 일면적 적용에서는 일국적 편협함이 나타난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전 세계 노동자계급에 대해서는 눈을 감은 채, 오직 소련만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이 중심적 문제에 대해 강령에서는 국제적 태도를 통해서만, 또한 아직까지 감춰져 있지만 레닌의 인터내셔널 강령에 자신의 이론적 둥지를 틀려고 하는 사회애국주의의 불법거래에 대한 가차 없는 거부를 통해서만 부르주아 국가와 관련된 노동자계급을 패배주의의 입장으로 이끌 수 있다.

마르크스와 레닌의 길로 복귀하는 것이 아직까지는 너무 늦지 않다. 이 복귀는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발전의 길을 열어준다. 우리는 구원으로 통할 이런 복귀를 현실화시킬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코민테른 제6차 대회에 이 강령 초안 비판을 제출한다.

 

2장 I 제국주의 시대의 전략과 전술


1. 강령 초안 중심 장(章)의 완전한 파산

코민테른의 강령 초안에는 혁명 전략 문제를 다룬 장이 있다. 그 의도는 매우 올바르고, 제국주의 시대에 노동자계급의 국제 강령의 목표와 정신에 부합한다고 인정받아야 한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야 정착된 혁명 전략 개념은 처음에는 의심할 여지없이 군사 용어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이 개념은 결코 우연히 정착하지 않았다. 전쟁 전에 우리는 노동자당의 전술에 관해서만 말했다. 이런 생각은 일상적 요구와 임무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 당시의 일반적인 노동조합, 의회주의적 방식에 그만그만할 정도로 들어맞는 것이었다. 전술 개념은 계급투쟁의 각각의 당면 임무나 각 부문에 복무하는 체계적인 방법이라고 생각된다. 이에 반하여 혁명 전략은 각 행동의 결합, 일관 성, 성장을 통해 반드시 노동자계급을 권력 장악으로 이끌 통합적인 행동체계를 포함한다.

혁명 전략의 기본적 원칙은 마르크스주의가 계급투쟁에 기초하여 권력을 장악하는 임무를 노동자계급의 혁명정당에 처음으로 제시한 이래 자연스럽게 정식화되었다. 그렇지만 제1인터내셔널은 이런 원칙들을 정확히 말하면, 이론적으로만 정식화하는 데 성공했으며, 그것도 여러 나라의 경험 속에서 부분적으로만 검증할 수 있었다. 제2인터내셔널의 시대는 ‘운동이 전부이며, 궁극적 목표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베른슈타인의 악명 높은 표현을 좇는 방식과 전망으로 지도되었다. 바꿔 말하면, 전략적 임무는 당시의 문제를 다룬 부분적 전술들과 함께 일상적 ‘운동’ 속에서 용해되어 사라져버렸다. 오직 제3인터내셔널만이 공산주의를 위한 혁명 전략을 제대로 복구시켰으며, 전술 체계를 이에 완전히 종속시켰다. 제3인터내셔널이 어깨를 기대고 있는 앞선 두 인터내셔널의 매우 귀중한 경험 덕분에, 그리고 현 시대의 혁명적 성격과 10월혁명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경험 덕분에, 제3인터내셔널의 전략은 곧바로 정력적인 전투성과 가장 광범한 역사적 시야를 획득했다. 동시에,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첫 번째 10년은 우리에게 위대한 승리뿐만 아니라 1918년부터 시작된 노동자계급의 가장 큰 패배의 파노라마도 보여준다. 이것이 바로 전략과 전술 문제가 어떤 의미에서는 코민테른 강령에서 중심점이 되어야 하는 이유다. 그렇지만 실제로 강령 초안에서 ‘노동자계급의 독재로 가는 길’이라는 부제 아래 코민테른의 전략과 전술을 다룬 장은 거의 의미도 없는 가장 근거가 박약한 장 가운데 하나다. 동양을 다루고 있는 6장의 한 절은 정말로 단지 이미 저지른 오류를 일반화하고, 새로운 오류에 대한 준비로만 이루어져 있다.

6장을 소개하는 절은 무정부주의, 혁명적 조합주의, 구조적 사회주의, 길드 사회주의 등에 대한 비판을 다룬다. 여기에서는 순전히 《공산당 선언》을 문학적으로 모방하고 있다. 《공산당 선언》은 당시에 공상적 사회주의의 가장 중요한 변종들에 대한 재치 있고 간결한 설명을 통해 노동자계급의 정책을 과학적으로 수립하는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코민테른의 10주년을 맞은 지금, 코르넬리센(Comelissen), 아르투로 라브리올라(Arturo Labriola), 버나드 쇼(Bernard Shaw) 또는 좀 덜 알려진 길드 사회주의자들의 ‘이론’에 대한 산만하고 무기력한 비판에 착수하는 것은 정치적 요구에 답하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문학적인 박식함의 포로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류의 마음의 안정은 아마도 강령이 아니라 선전물 분야에서나 적합할 것이다.

그 말의 본래 의미에서, 전략적 문제에 관한 한, 강령 초안은 다음과 같은 초보적 지식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자기 계급의 대다수에 대하여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 …
근로대중 일반의 광범한 부위 에 대하여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 …
특히 노동조합을 획득하는 일상적 활동이 매우 중요하다…
가장 광범한 부위의 빈농을 획득하는 것 또한(?) 커다란 중요성이 있다 …

그 자체로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이런 평범한 말들은 여기서 그냥 돌아가며 적시될 뿐이다. 즉, 이 말들은 역사적 시대의 특성과 어떤 관련도 없이 제시된 것이다. 따라서 지금의 추상적이고 현학적인 형태로도 별 어려움 없이 제2인터내셔널의 결의문에 끼워 넣을 수 있다. 여기서 강령의 중심 문제는 ‘구조적’ 사회주의와 ‘길드’ 사회주의를 다루는 구절에 비해 훨씬 더 짧은 도식적인 단 한 구절에서 아주 무미건조하고 대수롭지 않게 검토되고 있다. 이것은 혁명적 전복 전략, 무장봉기 그 자체로 가는 조건과 방법, 그리고 권력 장악 一 이 모든 것이 우리 시대의 생생한 경험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고 추상적으로, 현학적으로 제시되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여기서 핀란드,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소비에트공화국 노동자계급의 위대한 투쟁, 이탈리아의 9월시기, 독일의 1923년 사태, 영국 총파업 등등이 단조로운 연대순 형태로 열거된 것에 지나지 않은 언급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조차도 노동자계급의 전략을 다룬 6장에서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일반적 위기와 세계혁명 발전의 첫 단계’를 다룬 2장에서 볼 수 있다. 바꿔 말하면, 여기서 노동자계급의 위대한 투쟁을 노동자계급의 전략적 경험이 아니라 단지 ‘자본주의의 일반적 위기’의 표현으로, 객관적 사건으로서만 접근한 것이다. 그 자체로 필요한 혁명적 모험주의(폭동주의)에 대한 거부가 예컨대, 에스토니아의 봉기, 또는 1924년 소피아 대성당 폭격, 또는 최근의 광동(廣東) 봉기 등은 혁명적 모험주의의 영웅적 발현인가, 아니면 거꾸로 노동자계급의 혁명 전략에서 나온 계획된 행동인지 여부에 답하려는 어떤 시도도 없이 강령에 나와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폭동주의’ 문제를 다루면서 이 초미의 문제에 대해 답하지 않는 강령 초안은 외교관의 직분에 충실한 것일 뿐, 공산주의 전략에 관계되는 문서가 아니다. 

강령 초안이 노동자계급의 혁명 투쟁 문제를 이렇게 추상적이고 초역사적으로 정식화한 것은 분명 우연이 아니다. 여기에는 대단히 적극적인 혁명적 방식이 아니라 문제를 대체로 학문적이고, 현학적이며, 설교적으로 다루는 부하린 식의 방법 외에도 또 다른 이유가 있다 : 쉽게 이해되는 이유 때문에 강령 초안 기초자들은 대체로 지난 5년간의 전략적 교훈들을 너무 중실하게 다루지 않는 것을 더 좋아한다.

그러나 당연히 혁명적인 행동강령은 이런 아주 중요한 시기에 일어난 모든 사태와 아무 관련도 없는 정언명제들을 모은 것일 뿐인 것이라고 접근해서는 안 된다. 물론 강령이 과거의 사태를 일일이 언급할 수는 없다. 그러나 강령은 이런 사태로부터 시작해야 하고, 이런 사태에 그 기초를 두어야 하며, 이런 사태를 망라해야 하고, 이런 사태와 관계를 맺어야 한다. 그 위상 때문에 강령은 노동자계급 투쟁의 모든 주요한 사실과 코민테른 내부의 이데올로기 투쟁과 관련한 중요한 사실 모두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만일 이것이 강령 전체에 대해서도사실이라면, 특히 전략과 전술 문제를 다루는 부분에 대해서는 그만큼 더 사실일 것 이다. 이 점에서 레닌의 말 속에서 이미 획득한 것 외 에도, 지금까지 놓쳐 왔지만 만약 이해하고 자기 것으로 받아들였다면 ‘획득한 것’으로 바뀔 수 있는 것도 반드시 기록해야 한다. 노동자계급 전위에게는 진부한 문구의 목록이 아니라 행동 교범이 필요하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전후 시대, 특히 지도부의 비참한 오류로 점철된 최근 5년의 투쟁 경험에 밀착하여 ‘전략’을 다룬 장의 문제들을 검토할 것이다.

 

2. 혁명적 시대의 전략에 고유한 근본적 특성들과 당의 역할

전략과 전술을 다루고 있는 장은 어느 정도 일관되게 제국주의 시대를 전전(戰前) 시대와 대비하여 노동자혁명의 시대라고 ‘전략적’으로 성격 규정하려고도 않는다.

물론 강령 초안 1장에서 산업자본주의 시대 전체를 ‘자본주의가 아직 점령되지 않은 식민지의 분할과 무력 점령을 통해 전 세계에 걸쳐 상대적으로 지속적인 발전과 확대를 이룬 시대’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런 성격 규정은 분명 매우 모순적이며, 산업자본주의 시대 전체를 명백하게 이상화하는 것이다. 산업자본주의 시대는 거대한 격동의 시대였으며, 지구상에서 앞선 인류 역사 전체를 훨씬 능가하는 전쟁과 혁명의 시대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시대에는 불균등 발전법칙에 대해 ‘아직 아무것도 말할 수 없었다’는 최근 강령 초안 기초자들의 어리석은 주장에 적어도 부분적으로나마 정당성을 제공하기 위해 이런 목가적인 성격 규정이 필요했던 것 같다. 그러나 산업자본주의의 전체 역사를 ‘지속적인 발전’으로 규정하는 것은 잘못이지만, 1871년부터 1914년까지, 아니 적어도 1905년까지 포함하여 예외적인 유럽의 시대를 구별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때는 모순이 체계적으로 누적된 시기였다. 유럽의 내적 계급관계에 관한 한, 합법적 투쟁의 한계를 거의 넘은 적이 없었으며, 국제관계에 관한 한, 무장 평화라는 틀에 순응한 시기였다. 이때는 제2인터내셔널이 태어나고 발전하여 틀을 갖춘 시대였다. 이 제2인터내셔널의 진보적인 역사적 역할은 제국주의 전쟁의 발발과 함께 완전히 끝장나버렸다.

거대한 역사적 힘으로 간주되는 정치는 항상 경제에 뒤처진다. 그 한 예로, 금융자본과 트러스트 독점의 지배는 이미 19세기 말 무렵에 시작 되었지만, 이 사실을 반영하는 국제정치의 새로운 시대는 제국주의 전쟁, 10월혁명, 그리고 제3인터내셔널의 창립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정치적 부침의 갑작스런 변화, 파시즘과 공산주의 사이의 끊임없는 발작적 계급투쟁을 포함하는 이 새로운 시대의 폭발적 성격은 국제자본주의 체제가 이미 지쳐버렸으며, 전체적으로 볼 때, 더 이상 발전할 수 없다는 사실에 있다. 이것은 개별 산업 부문이나 개별 국가들이 더 이상 성장할 수 없거나, 그것도 정말 기록적인 속도로 성장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발전은 계속해서 다른 산업 부문과 다른 국가들의 성장을 희생시키고 있고, 또 희생시켜야 할 것이다. 세계자본주의 생산체제 때문에 치른 지출은 끊임없이 늘어나면서 세계의 수입을 삼켜버린다. 세계 지배에 익숙한 유럽은 전전(戰前) 시기에 거의 방해받지 않는 빠른 성장으로 관성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지금 새로운 역관계, 세계시장의 새로운 분할, 전쟁으로 심화된 모순에 의해 다른 대륙보다 더욱 격렬하게 충돌하고 있다. ‘일원화된’ 시대에서 혁명적 시대로의 이행이 특히 가파른 곳이 바로 유럽이다. 

물론 이론적으로는 가장 강력하고, 유력하며, 지도적인 나라들에서 일반적인 자본주의 발전의 새로운 장이 열리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 자본주의는 먼저 국가 간의 장벽뿐만 아니라 계급이라는 엄청난 장벽도 넘어서야 할 것이다. 또 오랫동안 노동자혁명을 억압해야 할 것이다. 중국을 완전히 노예화하고, 소비에트공화국 등을 타도해야 할 것이다 등등. 우리는 아직 이 모든 것으로부터 훨씬 벗어나 있다. 이론적 예측의 결말은 특히 정치적 가능성과 일치하지 않는다. 게다가 당연히 많은 부분은 우리에게, 즉 코민테른의 혁명 전략에 달려 있다. 결국, 이 문제는 국제적 세력들의 투쟁 속에서 해결될 것이다. 그렇지만 이 강령이 작성된 현 시대의 자본주의 발전은 대체적으로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과 모순, 그리고 이에 거세게 부딪치는 발작 상태에 처해 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시대에 혁명적 성격을 부여하고, 혁명에 영구적 성격을 부여하는 것이다.

시대의 혁명적 성격은 주어진 모든 경우에 혁명을 성취할, 즉 권력을 장악할 기회를 준다는 것에 있지 않다. 시대의 혁명적 성격은 심각하고 급격한 변동과 갑작스럽고 빈번한 이행에 있다. 즉 혁명적 상황, 바꿔 말하면 예컨대, 공산당이 권력을 얻기 위해 분투할 수 있는 상황으로부터 즉시 파시스트나 반(半)파시스트 반(反)혁명의 승리로 이행하고, 여기서 그 직후 다시 지배자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시키고 권력 문제를 날카롭게 제기하게 하는 임시 중도체제(‘좌익블록’, 사회민주주의의 연립정부 참여, 맥도널드 당으로의 권력 이동 등등)로 이행한다.

전쟁 이전 최근 몇 십 년 동안에 유럽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경제 분야에서는 위기의 ‘정상적인’ 파동과 함께 생산력의 거대한 발전이 있었다. 정치 분야에서는 아주 보잘것없는 변동과 함께 사회민주주의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희생시키면서 성장했다. 바꿔 말하면, 경제적, 정치적 모순의 체계적 강화 과정이자, 이런 의미에서 노동자혁명을 위한 전제조건을 창출하는 과정이었다.
전쟁 이후에 유럽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경제 분야에서는 생산이 불규칙적이고 발작적으로 감축되고 확대되었다. 특정 산업 부문들에서 커다란 기술적 성과를 거뒀음에도 대체로 전전(戰前) 수준에서 오르락내리락한 불규칙하고, 발작적인 생산의 단축과 확대가 있었다. 정치 분야에서는 좌익이나 우익 쪽을 향해 미친 듯 널뛴 정세의 동요가 있었다. 1~2년이나 3년 중에 일어나는 정세의 급격한 전환은 기본적인 경제적 요소의 어떤 변화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상부구조적 특성을 지닌 원인과 욕구 때문에 초래되는 것이 아주 명백하다. 따라서 이것은 그 토대가 화해할 수 없는 모순들에 의해 침식되고 있는 체제 전체의 극도의 불안정성을 나타낸다.

이것이 전술과 대비해 혁명 전략의 틀림없는 중요성이 솟아나오는 유일한 원천이다. 이에 따라 당과 당 지도부의 새로운 의미도 나오는 것이다.

초안은 당에 대해 순전히 형식적인 정의를 말하는 선에서 그치고 있다(전위, 마르크스주의 이론, 경험의 구체화 등등). 이런 정의는 전쟁 이전 사회민주주의 좌익의 강령에서 볼 때, 기분 나쁘게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런 정의는 완전히 부적절하다.

자본주의가 성장하는 시기에는 최고의 당 지도부조차도 단지 노동자 당의 창당을 촉진시킬 수 있을 뿐이었다. 거꾸로 지도부의 오류는 이 과정을 방해할 수도 있었다. 노동자혁명의 객관적 전제조건은 단지 서서히 무르익었을 뿐이며, 당 활동은 예비적 성격을 유지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다시 왼쪽으로 급변하고 있는 오늘날의 정세는 혁명정당에게 그 결정을 맡긴다. 결정적 상황을 놓치면, 상황은 그 반대로 바뀐다. 이런 상황에서 당 지도부의 역할은 각별한 중요성을 지닌다. 2~3일이 세계혁명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는 취지의 레닌의 말은 제2인터내셔널 시대에는 거의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을 것이다. 반면에, 우리 시대에 이런 말은10월혁명을 제외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자주, 그러나 늘 부정적인 측면에서 확인되었다. 이런 일반적 조건에서만 현재라는 역사적 시대의 역학 전체와 관련해 코민테른과 그 지도부가 차지하고 있는 이례적인 지위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이른바 ‘안정화’의 최초의, 기본적 원인이 한편으로 자본주의 유럽과 식민지 동양의 경제적, 사회적 지위의 전반적인 혼란, 다른 한편으로 공산당의 나약함, 준비부족, 우유부단함과 당 지도부의 비난받을 만한 오류 사이의 모순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

1918~19년이나 최근 몇 년 동안의 혁명적 상황의 발전을 저지한 것은 불쑥 나타나는 이른바 안정화가 아니다. 이에 반해서 이용되지 못한 혁명적 상황은 정반대로 바뀌었으며, 따라서 자본가계급에게 안정화의 상대적인 성공을 위해 싸울 수 있는 기회를 보증했다. ‘안정화’를 위한 이런 투쟁, 더 정확히 말하면 자본주의의 계속적인 생존과 발전을 위한 투쟁의 첨예화하는 모순은 각각의 새로운 단계마다 새로운 국제적, 계급적 격변을 위한 전제조건, 즉 새로운 혁명적 상황과 전적으로 노동자당에 달려 있는 이러한 상황의 발전을 위한 전제조건을 만들어낸다.

완만하고 유기적인 발전의 시기에 주체적 요인의 역할은 상당히 부차적인 것에 그칠 수 있다. 이때 다양한 점진주의의 격언 예컨대, ‘느리지만 확실하게’나 ‘쓸데없는 저항을 해서 다쳐서는 안 된다’ 등등이 등장한다. 이것은 ‘단계를 뛰어넘는 것’이 죽기보다 싫은 유기적인 시대의 모든 전술적 지혜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객관적인 전제조건이 무르익자마자, 역사적 과정 전체의 열쇠는 주체적 요인, 즉 당의 손으로 넘어 간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지난 시대의 영감에서 활기를 얻는 기회주의는 항상 주체적 요인의 역할, 즉 당과 혁명적 지도부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이 모든 것은 독일의 10월 경험, 영-러위원회, 중국혁명에 대해 토론하는 동안 충분히 드러났다. 중요성이 덜한 다른 경우에서뿐만 아니라, 이 모든 경우에서도 기회주의적 경향은 오직 ‘대중’에게만 의지하는 방침을 취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최고의’ 혁명적 지도력 이라는 문제를 철저히 경멸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했다. 총체적으로 잘못된 이러한 태도는 제국주의 시대에 단연코 파멸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

10월혁명은 러시아와 전 세계의 특수한 계급역관계의 결과였으며, 이 특수한 계급역관계는 제국주의 전쟁 과정에서 발전했다. 이런 일반적인 명제는 마르크스주의자에게 기본 원칙이다. 그렇지만 마르크스주의와 이를테면, 다음과 같이 문제를 제기하는 것 사이에는 약간의 모순도 없다 : 레닌이 제때에 러시아에 도착하지 못했다면 우리가 10월에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을까? 우리가 권력을 잡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들이 많이 있다. 당 수뇌부一덧붙여 말하자면, 이들 대부분이 오늘날 정책을 결정하고 있는 바로 그 사람들이다一의 저항은 심지어 레닌의 지도 아래에서도 매우 거셌다. 그런데 레닌이 없었다면 저항은 틀림없이 훨씬 더 컸을 것이다. 당은 제때에 필요한 방침을 취하지 못했을 수도 있으며, 우리에게 남은 시간도 그리 많지 않았다. 이러한 시기에는 때로 며칠이 결정적이다. 노동자 대중은 정말 아주 영웅적으로 밑에서부터 위로 압박을 가했지만, 스스로를 확신하며 의식적으로 목표로 이끄는 지도부가 없었다면 승리는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사이에 자본가계급은 페테르부르크를 독일에 넘겨주고, 노동자 봉기를 진압한 다음, 독일과의 단독 강화나 다른 조치를 통해 자신의 권력을, 모르긴 몰라도 보나파르트주의로 다시 공고히 할 수도 있었다. 그랬다면 몇 년 동안 사태의 전체 과정은 다른 방향을 취했을 것이다.

1918년 독일혁명에서, 1919년 헝가리혁명에서, 1920년 이탈리아 노동자계급의 9월 운동에서, 1926년 영국 총파업에서, 1927년 빈 봉기에서, 그리고 1925~27년 중국혁명에서 一 이 모든 곳에서 비록 다른 단계에서, 다른 형태일지라도 지난 10년 내내 동일한 정치적 모순이 나타났다. 객관적으로는 혁명적 상황이 무르익었다. 그 사회적 토대뿐만 아니라 종종 대중의 투쟁 분위기와 관련해서도 무르익었다. 그러나 주체적 요인, 즉 혁명적 대중정당이 없었거나 그렇지 않으면 이 당에 선견지명이나 대담성을 갖춘 지도부가 없었다.

물론 공산당과 그 지도부들의 나약함은 느닷없이 나타난 것이라기보다는 유럽의 과거 전체의 산물이다. 그러나 공산당은 혁명적 모순이 지금과 같이 객관적으로 무르익고 있다면 빠른 속도로 발전할 수도 있었다. 물론 이런 발전과정을 저지하는 것이 아니라 가속화하는 코민테른의 정확한 지도가 있었다면 말이다. 모순이 대체로 진보의 가장 중요한 원동력이라면, 객관적 상황의 전반적인 혁명적 성숙(썰물과 밀물이 있지만)과 노동자계급 국제당의 미성숙 사이의 모순에 대한 명확한 이해는 지금쯤 적어도 코민테른의 유럽 지부를 전진시키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급격한 전환의 시대인 현 시대에 대한 포괄적이고 일반화된 변증법적 이해가 없다면, 미숙한 신생 공산당에 대한 실제적인 교육도, 계급투쟁에 대한 올바른 전략적 지도도, 전술의 올바른 결합도 불가능하다. 무엇보다도 계속되는 일촉즉발의 상황 때마다 기민하고 대담하며 결정적 인 재무장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앞으로 여러 해 동안, 때로 국제혁명의 운명을 2~3일이 결정한다면, 바로 이러한 느닷없는 일촉즉발의 상황인 것이다. 

전략과 전술을 다룬 강령 초안의 장은 노동자계급 당의 투쟁 일반에 대해 말한다. 총파업과 무장봉기 일반에 대해서도 말한다. 그러나 현시대의 고유한 성격과 내적인 리듬을 조금도 분석하지 않는다. 이런 것들을 이론적으로 이해하고, 정치적으로 ‘감지하지’ 못한다면 실제적인 혁명적 지도력은 있을 수 없다.

바로 이런 이유로 이 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매우 현학적이고, 내용이 없으며, 파탄을 드러내는 것이다.

 

3. 제3차 대회와 레닌과 부하린 각각의 혁명적 과정의 영속성 문제

전후 유럽의 정치적 발전은 세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 시기는 1917년부터 1921년까지이고, 두 번째 시기는 1921년 3월부터 1923년 10월까지이며, 세 번째 시기는 1923년 10월부터 영국총파업(1926년) 까지 또는 현재(1928년)까지이다.

전후 대중의 혁명적 운동은 자본가계급을 꺼꾸러뜨릴 정도로 강했다. 그렇지만 이를 마무리 지을 수 없었다. 노동자계급의 전통적 조직들에서 지도부를 장악한 사회민주주의는 자본주의 체제를 구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당시 우리가 노동자계급의 즉각적인 권력 장악을 기대했을 때, 우리는 혁명정당이 내전의 시련 속에서 빠르게 성숙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두 기간이 일치하지 않았다. 봉기의 지도권을 떠맡기 위해 공산당이 사회민주주의와 투쟁하면서 충분히 성장해 성숙해 지기 전에 전후의 혁명적 물결이 빠지기 시작했다.

1921년 3월, 독일공산당은 부르주아 국가를 일격에 꺼꾸러뜨리기 위해 쇠퇴하는 물결을 이용하려고 시도했다. 이때 독일당 중앙위원회를 이끈 생각은 소비에트공화국을 구하는 것이었다(당시에는 일국사회주의 이론이 아직 선포되지 않았다). 그러나 지도부의 결단력과 대중의 불만이 승리를 얻기에는 충분치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다른 여러 조건들, 무엇보다도 지도부와 대중의 긴밀한 결속과 지도부에 대한 대중의 신뢰를 획득해야 했다. 당시에는 이런 조건이 마련되지 않았다.

코민테른 제3차 대회는 첫 번째 시기와 두 번째 시기를 구별하는 획기적 사건이었다. 대회는 공산당의 힘이 조직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권력을 장악하기에는 충분치 않았다는 사실을 적시하고 있다. 대회는 일상생활과 일상투쟁에 기초하여 먼저 대중을 획득하고 권력 장악으로 나아간다는 ‘대중 속으로!’라는 슬로건을 제출했다. 왜냐하면 대중은 혁명적 시기에도, 비록 조금 다른 방식일지라도 일상생활을 계속 영위하기 때문이다. 

문제에 대한 이런 정식화는 제3차 대회에서 격렬한 저항에 부딪쳤다. 부하린은 이 저항을 이론적으로 부채질했다. 당시 그는 마르크스의 연속혁명이 아니라 자신만의 연속혁명 관점을 고수했다. ‘자본주의가 피폐해졌다. 따라서 중단 없는 혁명적 공세를 통해 승리를 쟁취해야한다.’ 부하린의 입장은 늘 이와 같은 삼단논법으로 정리된다. 

당연히 나는 부하린 판 ‘연속’혁명론을 공유한 적이 없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혁명 과정에서 중단이나 침체기, 후퇴, 이행기 요구 등은 상상 할 수도 없다. 도리어 나는 10월혁명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연속혁명의 이런 희화화에 맞서 싸웠다.

레닌과 마찬가지로 내가 소비에트 러시아와 제국주의 세계의 양립불가능성에 대해 말했을 때, 나는 그 전술적 굴곡이 아니라 큰 전략적 곡선 운동을 염두에 두었다. 반면에, 부하린은 스스로 정반대 입장으로 바꾸기 전에는 늘 연속혁명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개념을 현학적으로 희화화하여 설명했다. 부하린은 ‘좌익 공산주의’ 시절에 혁명은 후퇴도 적과의 일시적인 타협도 허락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부하린의 입장과 내 입장 간에 공통점이 하나도 없었던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조약을 둘러 싼 논쟁이 끝나고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당시 코민테른의 초좌익과 일체가 된 부하린은 독일의 1921년 3월시기 노선을 주창했다. 즉 유럽의 노동자계급이 ‘자극받지’ 않으면, 앞으로 새로운 혁명적 분출이 일어나지 않으면, 소비에트 권력은 확실한 파괴 위험에 처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진짜 위험이 실제로 소비에트 권력을 위협하고 있다는 의식은 마르크스주의의 연속혁명 개념에 대한 이런 폭동주의적 모방에 맞서 내가 제3차 대회에서 레닌과 서로 협력하여 전개한 비타협적인 투쟁을 막지 못했다. 제3차 대회 중에 우리는 조급한 좌익들에게 몇 십 번 이상 이렇게 표명했다 :‘우리를 구하겠다고 너무 급하게 서두르지 마라. 그렇게 하면 여러분은 자멸하는 길밖에 없으며, 결과적으로 우리 또한 파멸시킬 것이다. 요컨대, 권력 투쟁에 이르기 위해 대중투쟁의 길을 체계적으로 수행하라. 우리는 불리한 조건에서도 기꺼이 싸우려는 여러분의 의향이 아니라 여러분의 승리가 필요하다. 우리는 소비에트공화국에서 신경제정책(NEP)에 의지하여 스스로 어떻게든 꾸려나갈 것이며, 더욱 전진할 것이다. 만약 여러분이 여러분들의 힘을 모으고 유리한 상황을 활용해갈 수 있다면, 여러분들은 여전히 제때에 우리를 돕게 될 기회를 가질 것이다.’

이 일이 비록 분파를 금지한 제10차 당 대회 이후에 일어났지만, 레닌은 당시 강력했던 극좌익에 맞서 싸울 새로운 분파의 중핵을 세워내기 위해 선도적인 역할을 떠맡았다. 우리의 사적인 협의에서 레닌은 제3차 대회가 부하린의 입장을 받아들인다면 그 뒤에 어떠한 투쟁을 수행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단호하게 제기했다. 당시 우리 ‘분파’는 오직 대회 중에 우리 정적들의 상당수가 ‘손을 들었기’ 때문에 더 이상 발전하지 않았다.

물론 부하린은 다른 누구보다도 마르크스주의 좌익에게 더욱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게다가 제3차 대회와 그 뒤에도 그는 유럽의 경제적 위기는 불가피할 것이라는 내 견해에 대항하는 투쟁을 이끌었다. 그리고 노동자계급의 일련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런 불가피한 위기의 발생이 혁명에 타격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혁명 투쟁을 새롭게 자극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부하린은 평소대로 현실이 결국 자신이 틀렸음을 아주 뒤늦게나마 시인하지 않을 수 없게 했을 때까지, 이런 내 견해에 대해 오랫동안 투쟁을 전개했으며, 경제 위기와 혁명 모두에 대해 대체적으로 현학적 영속성을 지닌 자신의 견해를 고수했다.

제3, 4차대회에서 부하린은 혁명적 과정의 영속성에 대한 자신의 기계적 이해에 따라 공동전선과 이행적 요구 정책에 맞서 싸웠다.

이런 두 경향, 즉 노동자혁명의 연속적 성격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종합적 개념과 결코 부하린의 개인적 기벽이 아닌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현학적 모방 사이의 투쟁은 크고 작은 일련의 다른 문제들을 통해서도 계속될 수 있다. 그러나 그래봐야 쓸데없다. 오늘날 부하린의 입장은 본질적으로 ‘연속혁명’에 대한 극좌적 현학주의와 똑같은 것이다. 단지 이번에 방향을 바꿨을 뿐이다. 예컨대, 만약 부하린이 유럽에서 항구적인 경제위기와 항구적인 내전이 없다면 소비에트공화국은 멸망할 것이라고 1923년까지 생각했다면, 그는 오늘날 국제혁명이 전혀 없어도 사회주의를 건설할 비책을 발견했을 것이다. 물론 부하린 식의 전도된 영속성은 코민테른의 현재 지도자들이 너무도 자주 과거 자신들의 모험주의를 현재 자신들의 기회주의적 입장에 접목시키거나 그 반대로 한다는 사실 때문에 조금도 개선되지 않았다.

제3차 대회는 큰 지침이 되었다. 그 가르침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생명력을 가지고 있으며 유익하다. 제4차 대회는 이런 가르침을 구체화시 켰을 뿐이다. 제3차 대회의 슬로건은 단지 ‘대중 속으로!’가 아니라 ‘먼저 대중을 획득하고 권력 장악으로!’라고 해석해야 한다. 레닌이 이끈 분파(그는 이 분파를 ‘우파’라고 노골적으로 규정했다)가 대회 기간 전체에 걸쳐 비타협적으로 통제해야 했기 때문에, 레닌은 대회 끝 무렵에 비공식 회의를 주선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예언적으로 이렇게 경고했다 : ‘기억하십시오, 이것은 단지 혁명적 도약을 위해 충분한 도움닫기를 하는 문제일 뿐입니다. 대중을 획득하는 투쟁은 권력을 획득하는 투쟁입니다.’ 

1923년 사태는 ‘지도받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많은 지도자들도 이런 레닌주의 입장을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4. 1923년의 독일 사태와 10월의 교훈

1923년의 독일 사태는 코민테른의 발전에서 새로운 레닌주의의 후기를 개막하는 구분점이 된다. 1923년 초, 프랑스군대의 루르 점령은 유럽이 다시 전쟁의 혼란 속으로 빠져드는 것을 의미했다. 비록 이 질병의 두 번째 발작이 첫 번째에 비교도 안 될 만큼 약했지만, 시작부터 극단적인 혁명적 결과가 예견되었다. 왜냐하면 이 질병이 이미 완전히 쇠약해진 독일이라는 유기체를 덮쳤기 때문이다. 코민테른 지도부는 제때에 이를 고려하지 않았다. 독일공산당은 여전히 폭동주의에 이를 우려가 있는 길로부터 단호하게 빠져나온 제3차 대회의 슬로건을 계속해서 일면적으로 해석했다. 우리는 이미 앞에서 급격한 전환의 시대에 혁명적 지도부에게 가장 큰 어려움은 뜻밖의 사고를 감지하고 제때에 키를 돌리기 위해 적절한 순간에 정세의 맥을 짚을 수 있는 것에 있다고 말했다. 혁명적 지도부의 이러한 자질은 단지 코민테른의 최근 회람장에 충성을 맹세한다고 습득되는 것이 아니다. 만약 필요한 이론적 전제조건이 존재한다면, 이러한 자질은 개인적으로 습득한 경험과 진정한 자기비판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 1921년 3월시기의 전술로부터 신문, 모임, 노동조합, 의회에서 조직적인 혁명적 활동으로 급격한 전환을 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런 전환의 위기를 겪었기 때문에, 정반대 성격의 일면적 편향이 다시 성장하는 위험이 나타났다. 대중을 획득하는 일상투쟁이 모든 주의력을 빼앗고, 자신의 전술적 관행을 만들어냈으며, 객관적 상황 변화에서 나오는 전략적 임무들로부터 주의를 딴 데로 돌려버렸다.

1923년 여름, 독일의 국내 상황은 특히 소극적 저항 전술의 좌절과 관련하여 파국적 성격을 띠었다. 공산당이 자본가계급의 처지가 ‘절망적’이라는 것을 제때에 이해하지 못할 경우에만, 공산당이 필요한 모든 혁명적 결론을 끌어내지 못할 경우에만 독일 자본가계급은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 아주 명백해졌다. 그러나 자기 손에 쥐어 있는 열쇠를 자본가계급이 사용하도록 기회를 준 것은 바로 공산당이었다.

독일혁명은 왜 승리에 이르지 못했는가? 그 이유는 현존하는 조건에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전술에서 찾아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놓친 혁명적 상황의 전형적 본보기였다. 요컨대, 독일 노동자계급은 최근에 이번에는 문제가 결정적으로 해결될 것이며, 공산당이 투쟁할 준비가 되어있고,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했을 경우에만 단호한 투쟁을 이끌 수 있었다는 것을 경험했다. 그러나 공산당은 아주 오랫동안 지체한 끝에, 그것도 대단히 우유부단하게 방향을 전환했다. 서로 아주 격렬하게 싸웠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우익뿐만 아니라 좌익도, 1923년 9~10월까지 혁명의 발전과정을 다소 운명론적으로 바라보았다.

혁명가가 아닌 공론가만이 사태가 끝난 지금, 올바른 정책이 있었다면 권력 장악을 어느 정도까지 ‘확신했을’ 것인지 알아볼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 점과 관계가 있는 〈프라브다〉지의 주목할 만한 증거를 인용하는 선에서 그칠 것이다. 이런 증거는 이 기관지의 다른 모든 발표문과 모순되기 때문에 순전히 우발적이고 특이한 것이다.

중간계급과 소부르주아 계급이 민족주의자로 전향했기 때문에, 당이 심각한 위기를 겪었기 때문에, 노동자계급이 중대한 패배를 당했기 때문에, 1924년 5월에 징후가 비교적 안정되었으며, 자본가계급이 어느 정도 정비되었다면, 이런데도 공산주의자들이 370만 표를 규합할 수 있었다면, 이는 분명 1923년 10월에, 즉 전례 없는 경제적 위기, 중간계급의 완전한 분해, 자본가계급 자체 내의 강력하고 날카로운 모순과 산업 중심지 노동자대중의 전례 없는 전투적 분위기에서 비롯하는 사회민주주의 대오 내의 끔찍한 혼란 중에 공산당이 인구 대다수의 마음에 들었다는 것이다. 공산당은 싸울 수 있었고 싸웠어야 했으며, 성공할 모든 기회를 갖고 있었다. (〈프라브다〉지, 1924년 5월 25일자)

그리고 이것은 제5차 세계대회에 참석한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느 독일 대의원의 말이다.

독일에는 당이 전투에 참가했어야 하고, 이를 피해서는 안 되었다는 것을 모르는 계급의식 있는 노동자는 단 한 명도 없다.
독일공산당의 지도자들은 당의 독자적 역할에 대해 깡그리 잊어버렸다. 이는 10월 패배의 주된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프라브다〉지, 1924년 6월 24일자)

1923년, 특히 이 해 후반 중에 독일당 상층 지도부와 코민테른 안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토론에는 이미 많은 것이 설명되어 있다. 비록 대부분의 말이 실제로 일어난 것과 대단히 어긋났지만 말이다. 특히 쿠지넨 (Kimsinen)은 이런 문제에 상당한 혼란을 초래했다. 쿠지넨은 1926년 어느 날부터 지노비예프의 지도가 파멸적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 열중한 것과 마찬가지로, 1924년부터 1926년까지는 지노비예프의 지도력에만 구제책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이러한 책임 있는 판단을 퍼뜨리기 위해 필요한 권한이 어쩌면 1918년에 그 스스로 핀란드 노동자계급의 혁명을 파멸시키기 위해 자신의 온건한 방책들을 모두 동원한 사실 때문에 쿠지넨에게 주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이 사태 뒤에, 내가 브란틀러 노선과 일치하는 속성을 지닌 것으로 보이게 하려는 시도가 여러 차례 있었다. 소련에서는 이런 시도가 감춰졌는데, 현장에 있던 너무 많은 사람들이 그 실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독일에서는 이런 시도가 공공연했다. 이런 실정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주 우연히, 나는 내 소지품에서 독일혁명 문제에 대해 당시 우리 중앙위원회에서 일어난 이데올로기 투쟁에 관계된 인쇄물 일부를 발견했다. 1924년 1월 협의회의 문서에서 정치국은 내가 독일공산당이 항복하기 이전 시기에 독일공산당 중앙위원회에 대해 적대적이고 불신하는 태도를 취했다면서 정면으로 비난했다. 이 문서에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아보자.

… 중앙위원회(1923년 9월의 전원회의) 회의장을 떠나기 전에 트로츠키 동지는 중앙위원 전원이 크게 동요한 연설을 했다. 그는 독일공산당 지도부가 쓸모없으며, 독일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체념, 몽롱함 등으로 물들어 있다고 단언했다. 곧이어, 트로츠키 동지는 독일혁명은 결국 실패하게 되어 있었다고 밝혔다. 이 연설은 참석자 모두를 침울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동지들은 이 격렬한 공격적 연설이 한 에피소드(?!) 때문에 야기되었으며,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중에 일어난 독일혁명과는 전혀 무관하며, 이 연설은 객관적인 실정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1924년 1월, 소련공산 당 협의회 문서, 14쪽, 트로츠키의 강조)

중앙위원들이 내 경고를 어떻게 설명하려고 애쓰는지는 몰라도, 그것은 첫 번째 경고도 아니었으며, 나는 오직 독일혁명의 운명에 대한 우려에서만 말했던 것이다. 불행히도 사태는 내 입장을 충분히 확인시켜주었다. 이는 부분적으로 이들 자신의 고백에 따르면, 지도 정당의 중앙위원회 대다수가 내 경고가 충분히 ‘객관적 사태에 부합했다’는 것을 제때에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브란틀러의 중앙위원회를 다른 것으로 대체하자고(결정적 사태 직전에 이러한 변화는 가장 완전한 모험주의였을 것이다) 경솔하게 제안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1923년 여름부터 무장봉기를 준비하고, 독일 중앙위원회를 지지하는 세력 결집의 필요성 문제에 대해 훨씬 더 시기적절하고, 단호한 입장을 취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독일 중앙위원회의 오류는 단지 코민테른 지도부의 전반적 오류를 반영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이 브란틀러주의 중앙위원회의 노선과 일치한다고 뒤집어씌우려는 훗날의 시도는 주로 독일당의 항복 이후, 내가 브란틀러를 희생양으로 삼는 것에 반대했다는 사실 때문에 나왔다. 비록, 아니 더 정확히는, 내가 독일의 패배를 중앙위원회 대다수에 비해 훨씬 더 심각한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에 나왔다. 다른 경우에서뿐만 아니라 이 경우에서도, 나는 지부 지도부를 주기적으로 제거함으로써, 즉 무지막지한 박해를 겪게 하거나, 심지어 당에서 제명함으로써, 단지 중앙 지도부의 무오류성을 주장하려는 것일 뿐인 용납할 수 없는 방식에 대항해 싸웠다.

독일 중앙위원회의 항복이 주는 영향 때문에 쓴 〈10월의 교훈〉에서 나는 현재의 시대적 조건 속에서는 몇 년 만에 맞은 혁명적 상황도 며칠 사이에 놓쳐버릴 수 있다는 생각을 개진했다. 믿기 힘들지 모르지만, 이 견해는 ‘
블랑키주의’이자 ‘개인주의’라고 낙인찍혔다. 〈10월의 교훈〉에 반대하여 쓰인 수많은 글들은 10월혁명의 경험이 얼마나 철저히 잊혔는지, 그 교훈이 얼마나 불철저하게 의식되고 있는지 보여준다. 이것은 지도자들의 오류에 대한 책임을 ‘대중’에게 전가하거나, 결과적으로 그 죄를 줄이기 위해 지도부 일반의 중요성을 최소화하려는 전형적인 멘셰비키주의자의 속임수다. 이것은 ‘상층’ 일반, 즉 계급의 상층인 당, 따라서 그 중앙 지도부로서의 당의 상층에 대한 변증법적 이해에 이를 수 없는 완전한 무능력에서 비롯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조차 역사의 발전을 한 치도 밀고 나갈 수 없는 시대가 있다. 또 훨씬 변변찮은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지배적인 지위에 서서 몇 년 동안 국제혁명의 발전을 방해할 수 있는 다른 시대도 있다. 

마치 내가 〈10월의 교훈〉을 부정한 것처럼 사태를 묘사한 최근의 기도는 아주 터무니없다. 물론 나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한 가지 ‘실수’를 ‘인정’했다. 〈10월의 교훈〉을 썼을 때인 1924년 여름에 내게는 스탈린이 1923년 가을의 지노비예프보다 더 좌익(즉, 좌익 중도주의)적인 입장을 갖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나는 다수파의 비밀 중앙기구 역할을 한 그룹의 내부 사정에 그다지 정통하지 않았다. 이 파벌 그룹의 분열 이후 공표된 문서, 특히 스탈린이 지노비예프와 부하린에게 보낸 순전히 브란틀러주의적인 편지를 보고, 이런 사적인 그룹들에 대한 나의 부정확한 평가를 수긍했다. 그렇지만 이런 평가는 제기된 문제의 본질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물비평에 대한 이런 오류도 중요한 것은 아니다. 지노비예프의 ‘진화’가 다시 한 번 보여준 것처럼, 중도주의는 큰 갈지자를 그리며 분명히 좌익 쪽으로 나아갈 수 있다. 사실이다. 그러나 체계도 없이 혁명적 방침을 수행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10월의 교훈〉에서 내가 개진한 생각은 오늘날에도 충분한 효력을 지니고 있다. 게다가 이런 생각은 1924년 이후 계속해서 확인되었다.

노동자혁명의 수많은 어려움 가운데에는 특수하고 구체적이며 분명한 어려움이 있다. 이 어려움은 사태의 급격한 전환 중에 혁명정당 지도부의 처지와 임무에서 기인한다. 가장 혁명적인 정당도 사태 발전에 뒤처져 과거의 슬로건과 투쟁방법들을 새로운 임무와 새로운 요구에 대치시킬 위험이 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노동자계급의 무장봉기의 필요성을 빚어내는 것보다 더 급격한 사태의 전환은 있을 수 없다. 여기서 당 지도부와 당 전체의 정책이 계급의 행동과 상황의 요구에 부합하지 못할 위험이 발생한다. 상대적으로 침체된 정치생활 중에는 이런 불일치가 비록 손실은 있더라도 큰 불행 없이 치유된다. 그러나 심각한 혁명적 위기 상황에서 이런 불일치를 없애고, 이를테면 공격받는 전선을 구제하는 데 부족한 것이 바로 시간이다. 혁명적 위기가 최대한으로 격화되는 시기는 본질적으로 일시적이다. 객관적 임무와 혁명 지도부 사이의 불일치(망설임, 동요, 자본가계급의 격렬한 공격에 직면하여 일시적으로 쓰는 미봉책)는 몇 주나 심지어 며칠 만에 파국에 이르게 하고, 준비하는 데 몇 년이 걸린 일을 수포로 돌릴 수 있다. 

물론 지도부와 당의 불일치 또는 당과 계급의 불일치는 반대 성격을 지닌 것일 수도 있다. 말하자면, 지도부가 혁명의 발전을 앞질러 임신 5개월을 9개월로 헷갈려하는 경우다. 이러한 불일치의 가장 명백한 사례는 1921년 3월 독일에서 목격되었다. 독일당에는 ‘좌익주의라는 소아병’이 비정상적으로 퍼져 있었으며, 그 결과는 폭동주의(혁명적 모험주의)였다. 이런 위험은 앞으로도 적잖이 실재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코민테른 제3차 대회의 교문이 그 충분한 효력을 계속 지니고 있는 이유다. 그러나 1923년 독일의 경험은 가혹한 현실 속에서 정반대의 위험을 우리 앞에 제기했다 : 상황이 무르익었는데도 지도부는 뒤처져 있다. 지도부가 상황 적응에 성공할 때쯤이면, 상황은 이미 바뀌어, 대중은 후퇴하고, 세력관계는 급격히 악화된다.

물론 1923년 독일의 패배에는 여러 가지 일국적 특수성이 있었지만, 일반적 위험을 보여주는 완전히 전형적인 특징들도 있었다. 이 위험은 무장봉기로 이행하기 직전의 혁명 지도부의 위기라고 부를 수도 있다. 노동자당의 평당원들은 본래 부르주아 여론의 압력에 훨씬 덜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당 상층부와 중간층의 일정 부위는 결정적 순간에 자본가 계급의 물리적, 이데올로기적 테러에 크든 작든 틀림없이 굴복할 것이다. 이 위험을 망각하는 것은 위험에 대처하는 것이 아니다. 확실히 위험에 대비하여 모든 경우에 타당한 만병통치약은 없다. 그러나 위험에 맞서 싸우는 데서 필요한 첫 번째 조치는 위험의 근원과 성격을 이해하는 것이다. ‘10월 이전’ 시기에 모든 공산당에서 우익 그룹의 출현이나 발달이 불가피한 것은 한편으로 이 ‘도약’에 내재하는 거대한 객관적 어려움과 위험들을 반영하며, 다른 한편으로 부르주아 여론의 거센 압력을 반영한다. 이 속에 우익 그룹 형성의 요점과 의미가 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가장 위태로운 바로 그때 공산당에서 불가피하게 우유부단과 동요가 발생하는 이유다. 1917년에 우리 당에서는 상층의 소수만이 동요했으며, 레닌의 엄격한 지도력 덕분에 이 동요를 극복했다. 독일에서는 지도부 전체가 동요했으며, 이 우유부단이 당으로 전해졌으며, 당을 통해 계급에게까지 전해졌다. 그 때문에 혁명적 상황이 유실되었다. 노동자와 빈농이 권력 장악을 위해 투쟁하고 있던 중국에서는 중앙 지도부가 이 투쟁에 반대했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이 가장 결정적인 역사적 순간에 나타난 지도부 위기의 마지막 사례는 아니다. 이런 불가피한 위기를 최소로 줄이는 것이 각 공산당과 코민테른 전체의 가장 중요한 임무 가운데 하나이다. 이 임무는 1923년 독일당의 경험과 대조를 이루는 1917년 10월의 경험과 당시 우리 당내 우익반대파의 정치적 내용을 완전히 이해해야만 달성할 수 있다.

바로 여기에 〈10월의 교훈〉의 요점이 있다.


5. 제5차 대회의 기본적인 전략적 오류

우리는 1923년 가을에 범한 ‘템포상의 오류’라는 주제에 대해 1923년 말부터 시작된 코민테른 지도자들의 고백뿐만 아니라 코민테른의 일련의 문서들을 가지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은 어김없이 마르크스를 언급하고 있는데, 알다시피 마르크스도 자신의 시대에 대해 잘못 판단했다. 동시에 이 모든 것들은 코민테른의 ‘템포상의 오류’가 권력을 장악할 결정적 순간에 근접했는지를 과소평가하는지, 아니면 거꾸로 과대평가하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고의적인 침묵으로 무시했다. 이 문제는 최근에 지도부의 전통이 된 복식부기 제도에 따라, 전자나 후자 어느 쪽으로도 해석 가능한 빈 칸으로 남겨졌다.

그렇지만 이 시기 중에 코민테른의 정책 전체로부터 1924년 전부와 1925년 대부분동안 코민테른 지도부가 독일 위기의 중대한 시점이 아직 지나지 않았다는 견해를 고수했다는 결론을 도출하기는 어렵지 않다. 결과적으로 마르크스를 언급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왜냐하면 자신의 전망에 따라 마르크스도 때때로 임박한 혁명이 실제보다 더 가까이에 와 있다고 파악했지만, 그는 혁명에 직면했을 때 혁명의 특징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따라서 혁명이 이미 뒤로 돌아선 뒤에, 혁명의 후면을 정면이라고 억지를 부린 경우는 없었기 때문이다.

소련공산당 제13차 협의회에서 지노비예프는 ‘템포상의 오류’에 대한 애매모호한 정식을 유포시키면서 이렇게 선언했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여러분들에게 비슷한 사태가 반복된다면, 그와 똑같은 상황에서는 똑같이 할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프라브다>지, 1924년 1월 25일자)

이 약속은 협박 티가 났다. 

1924년 2월 20일에 지노비예프는 국제적색원조협회 회의에서 유럽 전체의 상황이 이렇다고 선언했다.

우리는 아무리 짧더라도 현 시기에 대해 외면적인 평화의 회복이나 어떤 소강상태라도 기대해서는 안 된다. … 유럽은 사태의 결정적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 독일은 분명히 첨예한 내전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프라브다〉지, 1924년 2월 2일자)

1924년 2월 초에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상임간부회의는 독일 사태의 교훈에 대한 결의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독일공산당은 안건에서 봉기와 권력 장악 문제를 삭제해서는 안 된다. 반대로(!) 이 문제는 그 구체성과 긴급성 모두에서 우리 앞에 놓여 있음에 틀림없다. …(〈프라브다〉지, 1924년 2월 7일자)

1924년 3월 26일,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독일공산당에 이렇게 말했다.

1923년 10월에 사태의 템포를 평가하는 데서 범한 오류[어떤 종류의 오류인가?―트로츠키]는 당에 커다란 어려움을 초래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하나의 에피소드일 뿐이다. 기본적인 평가는 예전 그대로다. (〈프라브다〉지, 1924년 4월 20일자, 트로츠키의 강조)

이 모든 것에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끌어냈다.

독일공산당은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계속해서 노동자계급을 무장시키는 활동에 온 힘을 다해야한다. …(〈프라브다〉지, 1924년 4월 19일자)

1923년의 커다란 역사적 비극―중요한 혁명의 진지를 싸움 한 번 없이 넘겨준―은 6개월 뒤에 하나의 에피소드로 평가되었다. ‘하나의 에피소드일 뿐’이라니! 유럽은 지금까지도 이 ‘에피소드’의 가장 심각한 결과로 고통을 겪고 있다. 코민테른의 각 당에서 차례로 좌익이 궤멸된 사실과 마찬가지로, 코민테른이 소집해야 할 대회를 4년 동안 소집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똑같이 이 1923년의 ‘에피소드’ 때문이다.

제5차 대회는 독일 노동자계급이 패배하고 나서 8개월 뒤 열렸다. 이 때는 이 파멸의 모든 결과가 이미 명백해진 뒤였다. 이 점에서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측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를 알아보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제5차 대회의 기본 임무는 첫째로, 이 패배를 분명하고 준엄하게 그 이름대로 부르고, 누구도 객관적 조건이라는 핑계 뒤에 숨지 못하게 하면서 패배의 ‘주체적’ 원인을 숨김없이 밝히는 것이었다. 둘째로, 대중이 일시적으로 표류하고, 사회민주주의가 성장하여, 공산당이 영향력을 상실하고 있을 때를 새로운 단계의 시작으로 설정하는 것이었다. 셋째로, 코민테른이 불의의 습격을 당하지 않기 위해 이 모든 것에 대비하고, 상황의 새로운 변화가 올 때까지 필요한 방어투쟁의 방식과 조직적 통일을 갖추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문제들에서 대회는 정반대의 태도를 취했다.

지노비예프는 대회에서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독일 사태의 의미를 규정했다 : ‘우리는 독일혁명을 기대했지만,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다.’(〈프라브다〉지, 1924년 6월 22일자)

그렇지만 실제로 혁명은 ‘나는 왔는데, 신사 여러분께서 회합 장소에 너무 늦게 왔소’라고 답할 권리가 있었다.

대회의 지도자들은 브란틀러와 함께 우리가 상황을 ‘과대평가’했다고 판단했는데, 실제로 ‘우리’는 너무나 경솔하게, 그것도 너무 늦게 평가 했다. 지노비예프는 자신의 이런 소위 ‘과대평가’에 너무 쉽게 만족해했다. 그는 주요한 악이 다른 곳에 있다고 보았다.

‘상황을 과대평가한 것이 최악은 아니었다. 훨씬 더 나쁜 것은, 작센(Saxony)의 사례가 보여준 것처럼, 우리 당 대오에 아직도 많은 사회민주주의적 잔재가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프라브다〉지, 1924년 6월 24일자) 

지노비예프는 파멸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만 그랬던 것도 아니었다. 그와 함께 제5차 대회 전체가 이 세계혁명의 가장 중대한 패배를 간단히 무시해버렸다. 독일 사태는 주로 작센 주의회(Landtag)에서 … 공산주의자들의 정책이라는 견지에서 분석되었다. 결의문에서 대회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를 칭송했다 : ‘… 독일 중앙위원회의 기회주의적 행동을 비난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작센 주정부라는 실험 중에 공동전선 전술을 왜곡한 행동을 비난했다.’(〈프라브다〉지, 1924년 6월 29일자) 

이것은 ‘무엇보다도’ 희생자의 집에 들어가면서 모자를 벗지 않았다는 이유로 살인자를 비난하는 것과 약간 비슷하다.

지노비예프는 ‘작센의 경험은 새로운 상황을 조성했다. 코민테른의 혁명적 전술을 청산하기 시작할 위험을 수반했다’고 주장했다.(〈프라브다〉지, 1924년 6월 24일자) 

‘작센의 경험’이 비난받았으며, 브란틀러가 실각했기 때문에, 다음 의사일정으로 넘어가는 것을 제외하면 달리 검토할 것이 전혀 없었다.

지노비예프는 대회의 지지를 받아 이렇게 말했다 : ‘일반적인 정치적 전망은 본질적으로 예전 그대로다. 상황은 혁명을 잉태하고 있다. 이미 새로운 계급투쟁이 다시 전개되고 있다. 거대한 투쟁이 발전하고 있다. …’ 등등. (〈프라브다〉지, 1924년 6월 24일자) 

작은 일에 구애되어 큰일을 소홀히 하는 ‘좌익주의’는 정말로 천박하며 신뢰할 수 없다.

상황을 잘 알고 있으며, 10월 패배의 의미를 두드러지게 강조한 사람들, 불가피하게 뒤따를 장기간에 걸친 혁명적 쇠퇴기와 (그에 뒤이어 일어나는 모든 정치적 결과와 함께) 자본주의의 일시적 강화(‘안정’)를 지적한 사람들을 제5차 대회 지도부는 기회주의자들이며, 혁명을 청산하는 자들로 낙인찍으려고 애썼다. 지노비예프와 부하린은 이것을 자신들의 주요한 임무로 설정했다. 이들과 함께 전년도의 패배를 과소평가한 루트 피셔(Ruth Fischer)는 러시아 반대파가 ‘세계혁명의 전망을 상실하고, 독일과 유럽혁명이 가까웠다는 것을 믿지 못하며, 절망적인 비관주의에 빠져 유럽혁명이 파산한 것으로 생각한다, 등’으로 이해했다.(〈프라브다〉지, 1924년 6월 25일자) 

패배에 대해 가장 직접적으로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 ‘청산주의자들’, 즉, 패배를 승리라고 부르기를 거부한 사람들에 대해 가장 큰 소리로 악 쓰는 것은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 한 예로, 콜라로프(Kolarov)는 불가리아당의 패배를 낯 두껍게도 결정적인 것으로 간주한 라데크(Radek)를 격렬히 비난했다.

‘당의 패배는 6월에도 9월에도 결정적이지 않았다. 불가리아공산당은 굳건하며, 새로운 전투를 준비하고 있다.’(제5차 대회에서 콜라로프 동지가 한 발언) 

패배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 대신에 도처에서 승리를 축하하는 무책임한 관료적 허장성세가 판치고 있다. 그러나 볼셰비키의 전략은 잘난 체하고 비열하기 그지없는 콜라로프주의와는 양립할 수 없다.

제5차 세계대회의 임무 대부분은 올바르고 필요한 것이었다. 머리를 쳐들려고 했던 우익적 경향에 대한 투쟁이 정말로 긴급했다. 그러나 이 투쟁은 상황에 대한 근본적으로 잘못된 평가 때문에 주제에서 벗어났고, 갈팡질팡했으며, 왜곡되었다. 그 결과, 모든 것이 뒤범벅되었으며, 과거, 현재, 미래의 사태를 더 분명하고,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 우익 진영으로 분류되었다. 만약당시 좌익이 제3차 대회에서 승리했다면, 동일한 근거에서 레닌은 레비(Levi), 클라라 체트킨 등과 함께 우익으로 분류되었을 것이다. 제5차 대회의 잘못된 정치적 태도 때문에 발생한 이데올로기적 혼란은 그에 뒤이은 새로운 거대한 불행의 원천이 되었다.

대회가 정치 분야에서 채택한 평가는 마찬가지로 철저히 경제 영역에까지 미쳤다. 이미 나타난 독일 자본가계급의 경제적 통합 조짐이 인정되지 않거나 무시되지는 않았다. 항상 최신의 지배적인 정치적 경향과 일치하는 경제적 사실을 그럴 듯하게 늘어놓는 바르가(Varga)는 이때도 다음과 같은 보고를 제출했다 : ‘… 자본주의가 회복될 가망은 전혀 없다.’(〈프라브다〉지, 1924년 6월 28일자)

그러나 1년 뒤, ‘회복’에 뒤늦게 ‘안정’이라는 새 이름이 붙었기 때문에, 바르가는 전개된 사태를 고생스럽게 뒤쫓았다. 이때쯤에 반대파는 이미 안정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비난에 굴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반대파는 대담하게도 1년 반 전에 안정의 시작을 입증한 반면에, 1925 년에는 이미 이 안정을 악화시키는 경향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영국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제5차 대회는 자신이 잘못된 태도라는 일그러진 거울에 비친 대로 정치적 과정과 이데올로기적 배치를 파악했다. 이것은 또한 러시아 반대파를 ‘소부르주아적 일탈’로 분류하는 결의문을 낳았다. 역사는 이 오류를 제5차 대회의 주임검사인 지노비예프가 2년 뒤에 1923년 반대파의 중핵이 논쟁 중인 모든 근본적인 문제들에서 옳았다고 공개적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함으로써 자신만의 방식으로 바로잡았다.

제5차 대회의 기본적인 전략적 오류로부터 부득이하게 독일과 국제사회민주주의 안에서 일어나는 과정에 대한 인식 부족도 생겼다. 대회에서는 오직 사회민주주의의 쇠퇴, 분해, 붕괴에 대한 연설만 있었다. 지노비예프는 독일공산당이 370만 표를 얻은 최근 제국의회 선거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우리가 독일의 의회 분야에서 사회민주주의자 100명에 공산주의자 62명의 비율을 가진다면, 이것은 대다수의 독일 노동자계급 획득에 우리가 얼마나 접근해 있는지를 모든 사람에게 입증하는 증거가 될 것이다.’(〈프라브다〉지, 1924년 6월 22일자) 

지노비예프는 과정의 역학관계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1924년과 1925년 동안 독일공산당의 영향은 커진 것이 아니라 약해졌다. 370만 표는 단지 1923년 말 무렵에 당이 독일 노동자계급의 대다수에 끼쳤던 결정적인 영향력의 인상적인 자취를 나타냈을 뿐이다. 이 숫자는 틀림없이 그 다음 선거에서 줄어들 것이다. 

한편, 1923년에 짚으로 만든 썩은 거적처럼 결딴난 사회민주주의는 1923년 말에 혁명이 패배한 뒤 조직적으로 회복하기 시작했으며, 벌떡 일어나 주로 공산주의를 희생시키면서 성장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이를 예견했기 때문에―어떻게 이를 예견하지 못할 수 있는가?―우리의 예측은 우리의 ‘비관주의’ 탓으로 돌려졌다. 1928년 5월에 치른 최근 선거에서 사회민주주의자들은 900만 표를 넘게 얻었다. 이런데도 1924년 초에 틀림없이 일정 기간 동안 불가피하게 사회민주주의의 부활이 뒤따를 것이라고 쓰고 말했던 우리가 옳았던 반면에, 이미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진혼곡을 노래한 ‘낙관주의자들’이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직도 필요한가? 무엇보다도 코민테른 제5차 대회가 크게 잘못되었다.

물론 비실거리는 노쇠화의 특성을 전부 보이고 있기에 사회민주주의의 제2의 청춘은 오래 가지 않는다. 사회민주주의의 사망은 필연적이다. 그러나 죽기 전에 얼마나 갈 것인지는 정해진 곳이 어디에도 없다. 이 또한 우리에게 달려 있다. 이를 더 앞당기기 위해서 우리는 사실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하며, 정세의 전환점을 제때에 알아볼 수 있어야하며, 패배를 패배라고 부를 수 있어야 하며, 앞을 내다보는 법을 배울 수 있어야 한다.

오늘날에도 독일 사회민주주의가 여전히 수백만 세력을 대표한다면, 그것도 노동자계급 안에서라면, 여기에는 두 가지 직접적 원인이 있다. 첫째는 1923년 가을에 항복한 독일당의 패배이며, 둘째는 제5차 대회의 잘못된 전략적 상황 판단이다.

1924년 1월에 공산주의와 사회민주주의 유권자들의 비율은 거의 2대 3이었다. 그러나 4개월 뒤, 이 비율은 1대 3을 약간 넘는 정도로 형편없이 떨어졌다. 바꿔 말하면, 전체적으로 볼 때, 이 기간 중에 우리는 노동자 계급의 대다수 획득에 더 가까워진 것이 아니라 그 이상으로 멀어진 것이다. 따라서 지난해에 우리 당이 강화된 것은 의심할 나위 없지만, 이것은 올바른 정책으로 대다수를 획득하기 위한 진정한 출발점이 될 수 있고, 또 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나중에 제5차 대회가 채택한 입장의 정치적 결과를 자세히 설명할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시대 전체의 기본적 곡선과 그 개별적 부분, 즉 철도의 곡면이 기관사에게 중요한 것처럼, 모든 주어진 순간에 당 지도부에게 똑같이 중요한 개별적 부분 모두를 살펴볼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볼셰비키 전략에 대해 진지한 대화를 나눌 수 없다는 것이 이미 명백하지 않은가? 가파르게 경사진 곡면에서 조절판을 크게 열면 기차는 틀림없이 제방 너머로 달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몇 달 전에야 〈프라브다〉지는 우리가 이미 1923년 말에 내린 평가의 올바름을 어느 정도 명백하게 인정해야 했다. 1928년 1월 28일자 〈프라브다〉지는 이렇게 말했다.

‘1923년의 패배 이후 시작되어, 독일 자본에게 그 지위를 강화할 수 있게 해준 일정한[!] 무관심과 침체 국면이 지나기 시작하고 있다.’ 

1923년 가을에 시작된 ‘일정한’ 침체가 1928년에야 처음으로 지나기 시작하고 있다. 4년간의 지체 뒤에 발표된 이런 언질은 제5차 대회에서 정해진 잘못된 방침, 그리고 저지른 실수를 털어놓고 해명하는 것이 아니라 은폐함으로써 이데올로기적 혼란의 범위를 확대하는 지도부의 방식 모두에 대한 가차 없는 비난이다.

1923년의 사태나 제5차 대회의 기본적 오류를 평가하지 않고 넘어가는 강령 초안은 제국주의 시대에 노동자계급 혁명 전략의 실질적 문제들에 간단히 등을 돌린다
.


6. ‘민주적 평화주의 시대‘와 파시즘

1923년 가을, 독일 공산주의의 항복은 최소한의 내전으로 위협적인 노동자의 위험을 제거했는데, 이는 필연적으로 공산당뿐만 아니라 파시즘의 입장도 약화시켰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자본가계급이 승리를 거둔 내전조차도 자본가의 착취 조건을 침해하기 때문이다. 이미 이 당시, 즉 1923년 말에 우리는 독일 파시즘의 힘과 위험을 과대평가하는 것에 맞서 싸웠다. 우리는 전 유럽의 정치 무대가 프랑스의 좌익블록, 영국의 노동당 등 일정 기간 민주적이고 평화주의적인 그룹에 의해 장악되어 있는 동안, 파시즘은 무대 뒤로 밀려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이들 그룹의 세력 보강이 이번에는 독일 사회민주주의의 새로운 성장을 위한 자극제가 될 것이다. 이런 불가피한 과정을 이해하고, 이에 맞서 새로운 전선을 따라 투쟁을 조직하는 대신에 공식 지도부는 계속해서 파시즘을 사회민주주의와 동일시하고, 임박한 내전에서 이들의 동반몰락을 예단했다.

미국과 유럽 사이의 상호관계 문제는 파시즘, 그리고 사회민주주의의 문제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오직 1923년 독일혁명의 패배만이 미국 자본에게 (일시적으로) 유럽을 ‘평화적으로’ 종속시키려는 미국의 계획 실현에 착수할 수 있게 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문제는 최고로 중요하게 고려해야 한다. 그런데 제5차 대회의 지도부는 오히려 이 문제를 간단히 무시해버렸다. 이것은 장기간에 걸친 유럽혁명의 지연이 국제관계의 축을 유럽에 대한 미국의 공세 쪽으로 즉시 바꾸게 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도 못한 유럽의 내부 상황에서 전적으로 유래했다. 이 공세는 유럽의 경제적 ‘강화’, 그 정상화와 평온화, 그리고 민주주의 원칙의 ‘회복’이라는 외양을 취했다. 몰락한 소부르주아 계급뿐만 아니라 보통의 노동자도 이렇게 혼잣말을 했다 : 공산당이 승리를 거두지 못했으니까, 그럼 아마도 사회민주주의가 우리에게 승리는 아니지만(누구도 승리를 기대하지 않는다) 미국 금의 도움으로 산업을 부활시켜 빵 한 조각이라도 가져다줄 것이다. 달러를 안감으로 댄 미국 평화주의의 졸렬한 거짓말―독일혁명의 패배 뒤에―은 유럽의 생존에서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될 것이고, 또 되었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 독일 사회민주주의뿐만 아니라 프랑스급진당과 영국노동당도 상당 정도 이 기운 덕분에 다시 일어섰다.

이런 새로운 대적 전선의 효과가 상쇄될수록, 부르주아 유럽은 단지 미국의 재정적 종속자로서만 살며, 스스로를 건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 그리고 미국의 평화주의는 허기진 유럽을 할당 배급받게 하려는 시도와 같다는 점을 지적해야 했다. 바로 이 관점을 미국주의라는 새로운 종교를 가진 사회민주주의에 대항하는 새로운 투쟁의 출발점으로 삼는 대신에, 코민테른 지도부는 자신의 포화를 정반대 방향으로 돌렸다. 이들은 전쟁이나 혁명도 없이 미국의 배급량으로 평가되는 정상화된 제국주의라는 어리석은 이론이 우리에게 있다고 믿었다.

무장봉기가 독일당의 일정에 ‘구체적으로, 그리고 시급하게 올랐다’고 선언한 바로 그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상임간부회의―제5차 대회 4개월 전―2월 회기 중에 당시 ‘좌익적’ 의회 선거를 앞두고 있던 프랑스의 상황에 대한 다음과 같은 평가도 제출되었다.

이 선거 직전의 흥분도 단지 가장 하찮고 가장 미약한 당, 그리고 생명력 없는 정치 그룹들에게만 영향을 미친다. 사회당은 다가오는 선거의 서광을 받고 자극되었으며, 다시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프라브다〉지, 1924년 2월 7일자)

프랑스에서 광범위한 노동자 부위를 들뜨게 하고, 노동자계급의 당과 자본의 파시스트 분견대 모두를 약화시키면서 소부르주아 평화주의적 좌익주의의 물결이 아주 명백하게 상승한 시기, 요컨대, ‘좌익블록’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코민테른 지도부는 정반대의 관점에서 나아갔다. 코민테른 지도부는 평화주의적 국면이 전개될 가능성을 딱 잘라 부정했다. 또한 1924년 5월 선거 직전에 소부르주아 평화주의의 좌익 기수(旗手)인 프랑스사회당에 대해 이미 ‘생명력 없는 정치 그룹’이라고 평했다. 당시 우리는 소련공산당 대표단 앞으로 보낸 특별 편지에서 사회 애국주의 정당에 대한 이런 경솔한 평가에 항의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헛수고였다. 코민테른 지도부는 이런 사실들에 대한 자신의 무시를 ‘좌익주의’로 생각한다고 완강히 버텼다. 이 때문에 최근 몇 년 동안에 그랬던 것과 마찬 가지로, 코민테른의 당들을 대단히 혼란시킨 민주적 평화주의에 대한 왜곡되고 추잡한 논쟁이 일어났다. 반대파의 대변인들은 평화주의적 편견을 가지고 있다는 비난을 받았다. 단지 이들이 코민테른 지도부의 편견을 공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이 독일 노동자계급이 투쟁 한 번 없이 당한 패배는 (파시스트적 경향을 잠시 강화시킨 뒤) 필연적으로 소부르주아 정당들을 전면에 떠오르게 할 것이며, 사회민주주의를 강화시킬 것이라고 제때에 예견했기 때문이다.

영국의 노동당과 프랑스의 좌익블록이 승리하기 3~4개월 전에 국제 적색원조협회 회의에서 지노비예프가 내게 대항하는 노골적인 논쟁을 통해 이렇게 선언한 것을 우리는 이미 앞에서 언급했다.

실질적으로 전 유럽의 상황은 아무리 짧더라도 우리가 현 시기에 대해 외면적인 평화주의나 어떤 소강상태라도 기대할 수 없는 그런 것이다. … 유럽은 사태의 결정적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 독일은 분명히 격렬한 내전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프라브다〉지, 1924년 2월 2일자)

지난 1922년 제4차 대회에서 나는 지노비예프와 부하린의 꽤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회 결의문에 대한 수정안(상당히 수정되었지만 사실이다)을 위원회에 제출하는데 성공했는데, 지노비예프는 어느 모로 보나 이를 완전히 잊어버렸다. 이 수정안은 ‘민주적 평화주의’의 시대가 임박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계속적인 부르주아 국가의 정치적 쇠퇴가 충분히 가능한 단계이자, 공산주의 또는 파시즘의 지배로 가는 첫걸음이라고 평하고 있다.

영국과 프랑스에서 이미 ‘좌익’ 정부가 등장한 뒤에 열린 제5차 대회에서 나의 이 수정안을―아주 적절하게―생각해낸 지노비예프는 다음과 같이 큰 소리로 선언했다.

현 시기의 국제정세는 파시즘, 계엄령, 노동자계급에 대해 증대하고 있는 백색테러의 물결로 특징지어진다. 그러나 이것이 가까운 장래에 자본가계급의 공공연한 반동이 가장 중요한 나라들에서 ‘민주적 평화주의의 시대’로 대체 될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게다가 지노비예프는 만족스럽게 이런 말을 덧붙였다.

이것은 1922년에 주장되었다, 따라서 1년 반 전에 코민테른은 민주적 평화주의의 시대를 확실히 예견했다.(〈프라브다〉지, 1924년 6월 22일자)

사실이다. 그토록 오랫동안 ‘평화주의적’ 일탈이라고(역사발전 과정의 일탈이 아니라 나의 일탈이라고) 비난받아온 내 예측은 맥도널드(MacDonald)와 에리오(Herriot) 내각의 몇 주 동안의 밀월기에 열린 제5차 대회에서 대단히 편리하게 쓰였다. 불행히도 이것은 일반적으로 예측된 상황이었다.

우리는 지노비예프와 제5차 대회의 다수파가 ‘민주적 평화주의의 시대’라는 낡은 전망을 쇠퇴중인 자본주의의 한 단계라고 너무 글자 그대로 해석했다는 것을 덧붙여야 한다. 그래서 지노비예프는 제5차 대회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 ‘민주적 평화주의의 시대는 자본주의 쇠퇴의 징조이다.’

게다가 그는 결론에서 다시 한 번 이렇게 주장했다 : ‘나는 바로 민주적 평화주의의 시대가 [자본주의의] 쇠퇴와 치유할 수 없는 위기의 징후라는 것을 거듭해서 말한다.’(〈프라브다지〉, 1924년 7월 1일자) 

루르 위기가 없었고, 만약 사태 전개가 이러한 역사적 ‘비약’ 없이 더 부드럽게 진행되었다면, 이것이 옳았을 것이다. 독일 노동자계급이 1923년에 승리를 거뒀다면, 이것이 이중 삼중으로 옳았을 것이다. 이 경우에 맥도널드와 에리오 체제는 단지 영국과 프랑스의 ‘케렌스키 시기’만을 의미했을 것이다. 그러나 루르 위기가 발생하여 누가 집주인이 될 것인가 라는 단도직입적인 질문을 던졌다. 독일 노동자계급은 승리를 거둔 것이 아니라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다. 그것도 분명히 독일 자본가계급을 최고로 고무하고 강화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말이다. 혁명에 대한 신념은 몇 년 동안 유럽 전역에서 산산이 깨졌다. 이러한 조건에서 맥도널드와 에리오 정부는 케렌스키 시기나 자본가계급의 일반적 쇠퇴를 결코 의미하지 않았다. 반대로, 이들 정부는 오직 더 진지하고, 더 견고하며, 더 자신감 있는 부르주아 정부의 덧없는 선구자가 될 것이었고, 또 될 수 있었다. 제5차 대회는 독일 대재앙의 정도를 추정하지 못하고, 이 재앙을 단지 작센주의회의 코미디 문제로 축소시켰기 때문에 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또 유럽의 노동자계급이 이미 모든 전선에서 정치적으로 퇴각했으며, 따라서 우리의 임무는 무장봉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노동조합에서 새로운 방침의 결정에, 후방의 전투에, 당의 조직적 진지 강화에 있었다는 사실을 여전히 알지 못했다.

‘시대’ 문제와 관련하여 파시즘에 대한 논쟁이, 마찬가지로 왜곡되고 파렴치한 방식으로 일어났다. 반대파는 즉각적인 혁명적 위험이 부르주아 체제의 기초를 위협하고, 부르주아 국가의 정상적 기관들이 부적당하다고 입증될 때에만 자본가계급이 자신의 파시스트 어깨를 내밀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의미에서 능동적인 파시즘은 반항적인 노동자계급에 맞서 자본가 집단 측에서 벌이는 내전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반대로, 노동자계급을 속이고, 달래고, 사기를 꺾기 위해 내전이 벌어지기 전 시기나, 노동자계급에 대한 중대하고, 항구적인 승리에 뒤이은 시기, 즉 정상적인 체제를 재건하기 위해 혁명에 실망한 노동자들을 포함하여 광범한 인민대중을 의회 체제에 붙들어놓지 않을 수 없을 때에 자본가계급은 자신의 좌익, 즉 사회민주주의적인 어깨를 내밀지 않을 수 없다. 이론적으로 절대 반박할 수 없으며, 투쟁의 전 과정을 통해 확증된 이런 분석에 반대하여, 코민테른 지도부는 사회민주주의와 파시즘이 동일하다는 어리석고 지나치게 단순화된 주장을 제기했다. 부르주아 사회의 기초에 대해 사회민주주의는 파시즘 못지않게 맹목적이며, 위험한 순간에 자발적으로 자신의 노스케를 제공할 준비가 언제나 되어 있다는 논쟁의 여지가 없는 사실에서부터 시작하여 코민테른 지도부는 사회민주주의와 파시즘 사이의 정치적 차이를 완전히 없애는 데까지 나아갔다. 여기에 더해 공공연한 내전 시기와 계급투쟁의 ‘정상적’ 시기 사이의 차이도 완전히 없애버렸다. 한마디로, 단지 내전의 직접적 전개에 대한 태도를 계속 가장하기 위해서 모든 것이 거꾸로 되었고, 뒤얽혔으며, 엉망이 되었다. 1923년 가을에 마치 독일과 유럽에서 평상시와 다른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에피소드였을 뿐이다!

이 논쟁의 과정과 수준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스탈린의 글 ‘국제 정세에 대하여’(〈프라브다〉지, 1924년 9월 20일자)를 인용해야 한다. 

나와 논쟁을 벌이면서 스탈린은 이렇게 말했다.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자유의지, 말하자면, 자청해서 자본가계급이 ‘평화주의’와 ‘민주주의’에 이르게 된다고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다.’

자세히 설명하기에는 아주 곤란한 이 기본적인 역사철학적 테제에는 주요한 두 가지 결론이 뒤따른다.

‘첫째, 파시즘이 단지 자본가계급의 전투기관일 뿐이라는 것은 거짓이다. 파시즘은 단순히 군사-기술적 범주[?!]가 아니다.’

왜 부르주아 사회의 전투기관이 정치적 ‘범주’가 아니라 기술적 ‘범주’로 간주되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렇지만 파시즘이 무엇인가? 스탈린의 에두르는 대답은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 : ‘사회민주주의는 객관적으로 파시즘의 온건파다.’

누군가는 사회민주주의가 부르주아 사회의 좌익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 정의는 이를 지나치게 단순화시켜 해석하지 않는다면, 따라서 사회민주주의는 아직도 자기 뒤에 수많은 노동자들을 거느리고 있으며, 일정한 한도 내에서는 어쩔 수 없이 부르주아 주인의 의지뿐만 아니라 현혹된 노동자 유권자의 이해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상당히 올바른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를 ‘파시즘의 온건파’라고 규정하는 것은 완전히 몰상식한 것이다. 이 경우에 부르주아 사회 자체는 어떻게 되는가? 정치활동의 가장 기본적인 방식에서 태도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한 덩어리로 만들면 안 된다. 그 대신에 부르주아 전선의 두 기둥을 나타내지만―위험한 순간에 결합한다―그렇다 하더라도 두 기둥인 사회민주주의와 파시즘을 구별해야 한다. 파시즘의 쇠퇴와 사회민주주의의 성장을 동시에 보여준 1928년 5월 선거가 지난 지금, 이를 아직도 강조할 필요가 있는가? 덧붙여 말하자면, 이때 공산당은 사회민주주의에 노동자계급의 공동전선을 제안하기도 했다. 

스탈린의 글은 이렇게 계속되고 있다. ‘둘째로, 결정적 전투가 이미 일어났다는 것은 거짓이다. 노동자계급이 이 전투들에서 패배를 당했으며, 그 결과 자본가계급이 강화되었다는 것도 거짓이다. 비록 아직까지 진짜 볼셰비키 대중정당들이 없었다는 것 때문일 뿐일지라도[?], 결정적 전투는 아직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따라서 아직까지 전투가 없었기 때문에 자본가계급은 자신을 강화할 수 없었다. 그리고 ‘비록’ 볼셰비키당이 아직 없었다는 것 때문일 ‘뿐일지라도’ 전투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자본가계급이 자신을 강화하는 것을 가로막은 것은 … 볼셰비키당의 부재이다. 그렇지만 실제로 자본가계급이 자신을 강화하는 것을 도운 것은 바로 이 부재―당의 부재라기보다는 오히려 볼셰비키 지도부의 부재―였다. 

만약 군대가 결정적 상황에서 전투 한번 없이 적에게 항복한다면, 이 항복은 완전히 ‘결정적 전투’를 대신할 것이다. 이는 전쟁에서와 마찬가지로 정치에서도 그렇다. 185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엥겔스는 혁명적 상황을 놓친 당은 오랫동안 무대 에서 사라진다고 가르쳤다. ‘제국주의 이전에’ 살았던 엥겔스가 오늘날에는 진부하다는 것을 아직도 모르는 사람이 있는가? 그래서 스탈린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이러한 [볼셰비키] 당이 없다면, 제국주의의 조건 아래에서는 독재를 위한 투쟁이 가능하지 않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러한 투쟁이 불균등 발전법칙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던 엥겔스의 시대에는 상당히 가능성이 있었다고 추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일련의 사고 전체는 꽤 적절하게 다음과 같은 정치적 예언으로 덮여있다.

‘결국, 이 ‘평화주의’에서 자본가계급의 권력 강화와 혁명의 무기한 연기가 비롯된다는 것 또한 거짓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러한 연기는 사실 스탈린이 아니라 엥겔스 나름의 결과였다. 1년 뒤, 자본가계급의 입장이 더 강경해졌으며, 혁명이 무기한 연기되었다는 것이 눈먼 사람들에게도 분명해졌을 때, 스탈린은 우리에게 안정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이 비난은 ‘안정’에 벌써 새로 금이 가기 시작했을 때, 영국과 중국에서 새로운 혁명 물결이 다가왔을 때, 특히 두드러졌다. 그리고 이런 완전히 가망 없는 혼란이 지도노선의 역할을 다했다! (과거에 옭아매기 위해) 일부러 애매모호하게 끌어들여졌음에도 불구하고 초안(2장)에 포함된 파시즘의 정의, 그리고 파시즘과 사회민주주의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제5차 대회의 도식인 앞에서 인용한 스탈린의 도식보다는 훨씬 더 합리적이고 올바르다고 말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미미한 진전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지난 10년의 경험에 비추어, 코민테른의 강령이 혁명적 상황, 그 근원과 소멸을 설명하지 않은 채, 이러한 상황을 평가하면서 저지른 전형적인 잘못들을 지적하지 않을 수는 없으며, 기관사가 곡선 길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설명하지 않은 채, 세계혁명의 결과가 2~3일의 투쟁에 달려 있는 이러한 상황이 있다는 진실을 각국 당들에게 되풀이해서 가르치지 않을 수는 없다.


7. 극좌 정책의 우익적 효모

1923년에 최고조에 이른 격동기가 지나자, 장기간에 걸친 쇠퇴기가 시작되었다. 전략적 용어로 이것은 질서정연한 퇴각, 방어적 전투, 대중 조직들 안에서 우리의 진지를 강화하는 것, 우리 대오의 재점검, 우리의 이론적, 정치적 무기를 닦고 날카롭게 다듬는 것을 의미했다. 이 입장은 청산주의라는 낙인이 찍혔다. 최근에 볼셰비키 어록의 다른 개념들뿐만 아니라 청산주의라는 개념도 아주 지독하게 오용되었다. 더 이상 어떤 것을 가르치거나 훈련시키는 것이 아니라 단지 혼란과 오류를 홑뿌리는 것뿐이었다. 청산주의는 혁명의 포기이며, 개량주의적 길과 방법으로 혁명적 길과 방법을 대신하려는 기도다. 레닌주의 정책은 청산주의와 전혀 공통점이 없다. 마찬가지로 객관적 상황의 변화를 무시하는 것과도 거의 관계가 없다. 또한 혁명이 이미 우리에게 등을 돌린 뒤에, 그래서 새로운 혁명을 앞당기려고 당을 준비시키기 위해 대중들 사이에서 장기간에 걸친 완강하고 체계적이며, 힘겨운 활동을 다시 시작할 필요가 있을 때, 무장봉기 방침을 구두로 옹호하는 것과도 거의 관계가 없다.

계단을 오르는 중에는 계단을 내려가기 위해 필요한 것과는 다른 유형의 운동이 요구된다. 불이 나간 경우, 내려가는 계단 앞에선 어떤 사람이 올라서려 할 때의 상황이 가장 위험하다. 이때 추락, 부상, 탈구가 일어나는 것은 피하기 어렵다. 1924년에 코민테른 지도부는 독일의 10월 경험에 대한 비판과 일반적 비판 모두를 억누르기 위해 가능한 한 모든 일을 다 했다. 그리고 고집스럽게 계속 이렇게 반복했다 : 노동자들은 혁명을 향해 곧장 나아가고 있다―계단은 위로 통해 있다. 혁명의 퇴조기 중에 적용된 제5차 대회의 지침들이 참혹한 정치적 몰락과 혼란에 이르게 한 것은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다!

1927년 3월 1일자〈독일 반대파 통보(通報)〉 5~6호는 이렇게 설명했다.

이 당 대회 [이들이 지도부를 장악한 1924년 봄의 프랑크푸르트 대회]에서 좌익의 가장 큰 실수는 이들이 당에게 1923년 패배의 중대함을 냉혹할 정도로 말하지 못한 데에 있었다. 또 필요한 결론을 도출하지 못하고, 당에게 진지하게, 그리고 꾸밈없이 자본주의의 상대적 안정화 경향을 설명하지 못한 데에 있었다. 게다가 곧 다가올 시기에 적합한 강령을 그 투쟁형태, 슬로건들과 함께 정식화하지 못한 데에 있었다. 올바르고 절대로 필요했던 만큼, 이렇게 하는 것, 그리고 강령의 테제들을 선명하게 강조하는 것은 전적으로 가능했다.(트로츠키의 강조)

이런 방침은 제5차 대회 중에 우리의 ‘청산주의’ 혐의에 맞선 투쟁에 참가한 당시 독일 좌익의 한 분파가 1924~25년의 교훈을 진지하게 이해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조였다. 그리고 이것은 그 뒤에 우리를 원칙에 기초하여 좀 더 가까워지게 했다.

급격한 정세 전환의 기조가 된 해는 1924년이었다. 그러나 이런 급격한 전환이 일어났음(‘안정’)을 인정한 것은 1년 반이나 지나서였다. 따라서 1924~25년이 좌익적 오류와 폭동주의 실험의 해였다는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1924년 12월의 에스토니아 무장봉기의 비극적 역사와 마찬가지로, 불가리아의 폭력적 모험은 잘못된 정세 판단에서 비롯된 절망감의 폭발이었다. 역사적 과정을 폭동으로 능욕하려는 이런 시도들이 비판적 검토 없이 방치되어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1927년 말 무렵 광동(廣東)에서 재발하게 되었다. 정치에서는 아주 사소한 실수라도 묵과 되지 않는다. 하물며 큰 실수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리고 가장 큰 실수는 실수에 대한 비판과 올바른 마르크스주의적 평가를 기계적으로 억누르려 하면서 실수를 감추는 것이다.

우리는 최근 5년 동안의 코민테른의 역사를 쓰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여기서 단지 이 시기의 기본적 단계에서 두 가지 전략적 방침에 대해 사실에 입각한 예를 제시할 뿐이다. 동시에 이 모든 문제들이 나타나 있지도 않은 강령 초안의 생기 없음을 설명하려는 것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아무리 개괄적이라고 하더라도 코민테른의 당들을 강타한, 한편으로 제5차 대회 지침들과 다른 한편으로 정치적 현실 사이에 놓인 해결할 수 없는 모순들을 묘사할 수 없다. 물론 모든 곳에서 모순들이 1924년 불가리아나 에스토니아의 경우와 같은 파멸적인 격변으로 해결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언제나, 그리고 모든 곳에서 당들은 자신들이 속박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으며, 대중의 열망에 부응하지 못했으며, 눈가리개를 한 채로 돌아다녔으며 발부리가 걸렸다. 순전히 당의 선전선동에서, 노동조합 안의 활동에서, 의회 연단에서, 즉 모든 곳에서 공산주의자들은 제5차 대회의 잘못된 입장이라는 무거운 족쇄를 끌고 다녀야 했다. 크고 작은 정도로 당은 제각기 잘못된 출발점의 희생양이 되었다. 제각기 허깨비를 뒤쫓았으며, 실제 과정을 무시했으며, 혁명적 슬로건을 요란한 공문구로 둔갑시켰으며, 대중의 눈앞에서 자기 체면을 구기고, 지지기반 모두를 잃어버렸다. 이 모든 것의 마지막을 장식하기 위해, 코민테른의 출판물은 지금처럼 이때에도 최근 공산당들의 활동에 대한 사실과 수치를 모으고, 정리하고, 발표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박탈해버렸다. 패배, 오류, 태만의 결과, 아류 지도부는 후퇴하기를 더 좋아하고, 모든 불빛을 차단한 채 적들과 타협하는 것을 선호한다.

실제 요인들과의 모순이 무자비하게, 그리고 끊임없이 증가하고 있음을 알게 된 지도부는 더욱 더 허구적 요인에 매달려야 했다. 지지기반을 잃고 있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아무런 흔적도 없는 곳에서 혁명세력과 징후를 발견하려고 억지를 부렸다.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썩은 밧줄을 꽉 붙잡아야 했다.

노동자계급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분명하고도 증가하는 우경향에 비례하여, 코민테른에서는 농민을 이상화하는 국면이 시작되었다. 코민테른은 부르주아 사회와 ‘단절’하려는 농민의 모든 징후를 완전히 무비판적으로 과장하고, 단명한 모든 농민조직을 미화하고, ‘농민’ 선동가들에게 노골적으로 아첨하기 시작했다. 

가장 많이 빼앗긴 층인 빈농에게 영향을 미치기 위해 자본가계급과 사이비 농민선동가에 대항하는 노동자 전위의 장기간에 걸친 완강한 투쟁 임무는 점점 더 농민이 국제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일국적 차원에서도 직접적이고 독자적인 혁명적 역할을 수행할 것이라는 희망으로 대체되고 있었다.

1924년 내내, 즉 ‘안정’의 기준연도 중에, 공산당출판물은 최근에 조직된 농민인터내셔널의 힘에 대해 완전히 터무니없는 자료들로 채워졌다. 대표인 돔발(Dombal)은 결성 6개월 뒤, 농민인터내셔널이 벌써 수백만 회원을 끌어들였다고 보고했다.

이 무렵 라디치[스테판 라디치(Stjepan Radic, 1871~1928):크로아티아농민당의 창립자] 때문에 수치스러운 사건이 일어났다. 크로아티아 ‘농민’당의 지도자인 라디치는 녹색 자그레브(Zagreb)에서 오는 도중에, 마침 자신이 백색 베오그라드(Belgrade)의 장관이 될 가능성을 굳히기 위해 적색 모스크바에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1924년 7월 9일, 지노비예프는 레닌그라드 노동자 당원들에게 제5차 대회의 결과를 보고하면서, 그의 새로운 ‘승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바로 지금, 농민 내에서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여러분 모두는 아마 라디치의 크로아티아농민당에 대해 들어보았을 것이다. 라디치는 지금 모스크바에 있다. 그는 인민의 진정한 지도자다. … 라디치 뒤에는 크로아티아의 빈농과 중농 전부가 결집해 있다. … 라디치는 지금 자기 당을 대표하여 농민인터내셔널에 가입하기로 결정했다. 우리는 이것이 매우 중요한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 농민인터내셔널의 결성은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어떤 동지들은 이로부터 거대조직이 생길 것이라는 점을 믿지 않았다. … 지금 우리는 다수의 보조적 대중인 농민을 획득하고 있다. …(〈프라브다〉지, 1924년 7월 22일자)

기타 등등이며, 게다가 더 나아갔다.

바다 건너편의 지도자 라폴레트[로버트 라폴레트(Robert LaFollette, 1855~1925):1924년 미국 진보당의 대통령 후보, 1906-25년 공화당의 위스콘신주 상원의원]는 ‘진정한 인민의 지도자’ 라디치에 해당하는 사람이었다. ‘보조적 대중’―미국 농민들―을 가속도로 움직이게 할 목적으로 코민테른의 대표인 페퍼[존 페퍼(John Pepper, 1886-1937):본명은 요제프 포가니(Joseph Pogany). 헝가리의 공산주의자. 1919년, 헝가리소비에트공화국의 일원. 정권 붕괴 후, 소련으로 망명하여 코민테른에서 활동. 반(反)트로츠키주의 투쟁에 참여했다.]는 미국 자본주의를 신속히 타도하기 위해 라폴레트 중심으로 ‘농민-노동자당’을 창설하는 어리석고 악명 높은 모험에 젊고 미약한 미국공산당을 끌어들였다.

농민들에 기초한 미국의 혁명이 목전에 있다는 기쁜 소식이 당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공식 지도자들의 연설과 글을 가득 채웠다. 제5차 대회의 한 회의에서 콜라로프는 이렇게 보고했다.

‘미국에서 소농들은 농민-노동자당을 결성했다. 이 당은 더욱 급진적으로 되고 있으며, 공산주의자들에게 더 가까이 끌리고 있다. 더욱이 미국에서 노동자 농민의 정부건설이라는 생각으로 속속들이 물들고 있다.’(〈프라브다〉지, 1924년 7월 6일자)

이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네브래스카 출신의 그린(Green)―라폴레트 조직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 모스크바에서 열린 농민대회에 참석했다. 그린도 어딘가에 ‘끼었으며’, 그 다음에는 관례에 따라 나중에 세인트폴 협의회에서 공산당이 페퍼의 원대한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무기력한 시도에 나서자, 공산당이 패배하는 것을 도왔다. 페퍼는 제3차 대회에서 극좌파의 일원이자, 마르크스주의를 개량하려고 했으며, 헝가리혁명의 목을 벤 사람 가운데 하나인 카롤리(Karolyi) 백작의 상담역이기도 했다.

1924년 8월 29일자에서〈프라브다〉지는 이렇게 불평했다.

‘미국의 모든 노동자계급은 심지어 영국노동당만큼 협조주의적인 당에 필요한 의식 수준에도 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약 한달 반전에 지노비예프는 레닌그라드 노동자 당원들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수백만 농민들은 농업 위기에 의해 자발적 또는 비자발적으로 일시에(!) 노동자계급 쪽으로 내몰리고 있다.’(〈프라브다〉지, 1924년 7월 22일자)

콜라로프는 곧바로 ‘그리고 노동자 농민 정부를 위하여!’라고 덧붙였다.

출판물은 농민-노동자당이 미국에서 곧 결성될 것이라고 계속 반복했다. 이 당은 자본주의를 타도하기 위한 ‘순수한 노동자당은 아니지만 계급적인’ 농민-노동자당이라고 한다. ‘노동자당은 아니지만 계급적인’이라는 특성이 무슨 뜻인지, 아마 바다 양쪽에 있는 어느 점성술사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그것은 ‘노동자 농민의 두 계급 당’이라는 생각의 페퍼화 된 판일 뿐이었다. 우리는 이에 대해 중국혁명의 교훈과 관련하여 다시 아주 상세하게 이야기할 기회를 가질 것이다. 여기서는 비(非)노동자적이지만 계급적인 당이라는 이런 반동적인 생각은 코민테른이 지지기반을 잃으면서 라디치, 라폴레트, 그리고 농민인터내셔널의 우쭐해진 인물들을 부여잡은 1924년의 사이비 ‘좌익’ 정책에서 전적으로 비롯되었다고만 말해두자.

진부한 문구를 존중하는 밀류틴(Miliutin)은 이런 말을 퍼뜨렸다. ‘우리는 지금 엄청나게 중요하고 의미 있는 과정을 목격하고 있다. 자본가 계급으로부터 농민 대중의 분리 과정, 농민이 자본가계급에 대항하여 전진하고 있는 과정, 자본주의 체제에 맞선 투쟁에서 자본주의 나라들의 농민과 노동자계급 사이에 공동전선이 더욱 강화되는 과정을 목격하고 있는 것이다.’(〈프라브다>지, 1924년 7월 27일자)

1924년 한 해 동안, 코민테른의 출판물은 지친 기색 없이 전반적인 ‘농민 대중의 급진화’에 대해 얘기했다. 마치 이로부터 뭔가 독자적인 것을 기대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노동자들이 분명히 우경화하고 있고, 사회민주주의가 세력을 키웠으며, 자본가계급의 지위가 강화된 시기에 농민의 급진화는 단지 상상일 뿐이다!

우리는 1927년 말과 1928년 초 무렵에 중국에 관해 동일한 정치적 비전의 부재에 직면한다. 모든 중대하고, 근본적인 혁명적 위기 이후에, 노동자계급이 결정적이고 장기간에 걸친 패배를 당한 가운데서도 반(半)노동자계급적인 도시와 농촌의 대중 사이에서는 오랫동안 소요가 계속해서 분출한다. 마치 돌이 떨어진 다음 수면에 파문이 퍼져나가는 것처럼 말이다. 지도부가 이런 파문에 독자적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할 때마다, 노동자계급 내의 변화와는 달리 이를 다가오는 혁명의 징후로 해석할 때마다, 이것은 1924년의 에스토니아나 불가리아, 또는 1927년의 광동에서와 비슷하게 지도부가 모험주의로 가고 있다는 확실한 징후임을 명심해야 한다.

같은 극좌주의 시기에 중국공산당은 몇 년 동안 국민당에 박혀 있었다. 제5차 대회는 국민당의 계급적 성격을 규정하려는 어떤 진지한 시도도 없이 국민당을 ‘동조적인 당’(〈프라브다〉지, 1924년 6월 25일자)으로 간주했다. 더 나아가면, 우리는 ‘혁명적 민족자본가계급’에 대한 이상화가 점점 더 현저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잘못된 좌익 노선은 동양의 사정도 모르면서 초조함에 안달을 내다 뒤이어 기회주의의 발판을 놓았던 것이다. 기회주의 노선을 정식화할 것을 요구한 것은 바로 마르티노프(Martinov)였다. 마르티노프는 스스로 세 번의 러시아혁명 중에 소부르주아 계급을 뒤따라 다녔기 때문에 그만큼 더 중국 노동자계급의 믿을 만한 상담자였다.

라디치, 라폴레트, 돔발의 수많은 농민대중, 심지어 페퍼도 시대를 인위적으로 촉진시킬 기회를 잡으려 들었다. 뿐만 아니라 영국에 대해서도 근본적으로 잘못된 전망이 수립되었다. 영국공산당의 허약함은 당시에 가능한 한 빨리 더 당당한 요인으로 대체할 필요성의 원인이 되었다. 바로 이때, 영국 노동조합주의 내 여러 경향들에 대한 잘못된 평가가 제시되었다. 지노비예프는 영국공산당이라는 좁은 문이 아니라 노동조합이라는 널따란 정문을 통해서 혁명이 출구를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는 뜻을 넌지시 내비쳤다.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대중을 공산당을 통해 획득하기 위한 투쟁은 혁명을 위해 기존의 노동조합 기구를 가능한 한 가장 발 빠르게 이용하려는 바람으로 대체되었다. 이 잘못된 입장으로부터 나중에 영-러위원회라는 정책이 튀어나왔다. 이 영-러위원회는 영국의 노동자계급뿐만 아니라 소비에트연방에도 타격을 주었다. 이 타격을 능가한 것은 오직 중국의 패배뿐이었다.

이미 1924년 여름에 작성된〈10월의 교훈〉에서 가속화된 수단이라는 생각―이 생각이 더욱 발전하여 보여준 것처럼, 퍼셀[알버트 퍼셀(Albert Purcell, 1872-1935):영국의 노동조합 활동가, 영국 총평의회의 지도자. 영-러위원회의 중심적 인물로 1926년 총파업을 배반했다.], 쿡(Cook)과 친선을 통해 가속화된―은 다음과 같이 반박되었다.

‘당 없이, 당으로부터 독립하여, 당을 뛰어넘어, 당의 대용품으로는 노동자 혁명이 절대로 승리할 수 없다. 이것이 지난 10년의 주요한 교훈이다. 물론 영국의 노동조합은 노동자혁명의 강력한 지렛대가 될 수 있다. 예를 들면, 특정한 상황에서, 그리고 특정한 기간 동안 노동조합은 심지어 노동자 소비에트를 대체할 수도 있다. 그러나 노동조합은 공산당이 없는 경우는 물론이고, 공산당에 대항해서는 이러한 역할을 할 수 없다. 단, 노동조합 속에서 공산주의자의 영향력이 결정적이라면 이러한 역할을 할 수 있다. 노동자혁명에서 당의 역할과 중요성에 대한 이런 결론을 얻기 위해 우리는 당을 너무 쉽게 포기하거나 심지어 약화시키는 대단히 큰 대가를 치른 것이다.’ (트로츠키, 《전집》, 제3권 제1부, 9쪽)

나는 똑같은 문제를 《영국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Where is Britain Going?라는 책에서 더 폭넓게 제기했다.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음과 같은 생각을 증명하는 데 열중해 있다 : 영국혁명 역시 공산주의의 입구를 거치지 않을 수 없으며, 우회로에 대한 어떠한 환상도 갖지 않는 올바르고, 대담하며, 비타협적 정책을 가진다면 영국공산당은 비약적인 발전을 할 수 있으며, 몇 년 사이에 자기 앞에 놓인 임무를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할 것이다.

1924년의 좌익적 환상은 우익적 효모로 인해 생겨났다. 1923년 실수와 패배의 의미를 스스로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감추기 위하여, 노동자계급 안에서 일어나고 있던 우경화 과정은 부정하고, 다른 계급 내의 혁명적 과정을 낙관적으로 과장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것이 노동자 노선으로부터 중도주의, 즉 소부르주아 노선으로. 퇴보하는 것의 시작이었다. 자본주의의 안정성이 증대하는 과정에서 이 소부르주아 노선은 그 극좌적 껍데기를 스스로 벗어던졌으며, 소련, 중국, 영국, 독일과 다른 모든 곳에서 노골적인 타협주의 노선을 드러냈다.


8. 우익 중도주의적 퇴보의 시기

제5차 대회에 맞춘 가장 중요한 공산당들의 정책은 곧 그 완전한 비효율성을 드러냈다. 공산당들의 발전을 저해한 사이비 ‘좌익주의’의 오류는 나중에 새로운 경험적 우왕좌왕, 즉 가속화된 우익적 퇴보를 촉진했다. 뜨거운 우유에 덴 고양이는 차가운 물을 꺼린다. 많은 당들의 ‘좌익적’ 중앙위원회는 자신들이 제5차 대회 전에 급조된 것과 마찬가지로 몹시 급하게 축출되었다. 모험적 좌익주의는 우익 중도주의 유형의 공공연한 기회주의에 자리를 내주었다. 이 조직적인 우향우의 성격과 속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전환의 지휘자인 스탈린이 이미 1924년 9월에 마슬로프[아르카디 마슬로프(Arkady Maslow, 1891~1941):1924년 이후, 브란틀러파를 대신해 독일공산당을 지도한 그룹(마슬로프, 피셔, 우르반스)의 한 사람. 당초, 지노비예프를 추종해 트로츠키에 반대했지만, 1926년에 통합반대파를 지지해 제명당했다. 1928년에 지노비예프와 함께 굴복했으며. 피셔, 우르반스와 함께 레닌분트를 결성했다.], 루트 피셔, 트렝[트랭(A. Treint, 1889~1972) : 프랑스공산당의 지도자, 러시아의 레닌그라드 반대파를 지지했으며, 1927년 제명되었다.], 수잔 지로[수잔 지로(Suzanne Girault, 1882~1973):트렝과 함께 프랑스공산당을 이끌었다.] 등에게 당 지도부를 넘기는 것을 당의 볼셰비키화의 표현이자, 혁명을 향해 진군하고 있으며, ‘혁명적 지도자를 원하는’ 볼셰비키 노동자들의 요구에 대한 응답으로 평가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스탈린은 이렇게 말했다.

‘최근 6개월은 서구 공산당들의 일생에서 근본적인 전환점을 제공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사회민주주의의 잔재가 단호하게 청산되고, 당 중핵들이 볼셰비키화되고, 기회주의적 분자들이 고립되었다는 의미에서 주목할 만하다.’(〈프라브다>지, 1924년 9월 20일자)

그러나 10개월 뒤 진정한 ‘볼셰비키’이자 ‘혁명의 지도자들’은 사회민주주의자이자 배신자들로 선언되었고, 지도부에서 쫓겨났으며, 당에서 추방되었다.

흔히 당 기구의 투박하고 불성실한 기계적 조치에 의지하여 이루어지는 이런 지도자들의 변화는 사람들을 겁에 질리게 한다. 그러나 극좌 정책 시기와 그 뒤를 잇는 기회주의적 퇴보 시기 사이에 어떤 엄밀한 이데올로기적 경계선을 긋는 것은 불가능하다.

소련에서 공업과 농민의 문제, 식민지 자본가계급의 문제,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농민’당의 문제, 일국사회주의의 문제, 노동자혁명에서 당의 역할 문제들에서 수정주의 경향들은 이미 1924~25년에 반(反)‘트로츠키주의’ 투쟁이라는 기치를 두르고 만개하여 나타났다. 그리고 1925년 4월에 열린 소련공산당 협의회의 결의문에서 자신의 가장 뚜렷한 기회주의적 표현을 발견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우경화는 1923년의 패배로 야기된 혁명적 발전의 좌절에 반쯤 분별력을 잃어, 순전히 경험적으로, 그것도 뒤늦게 적응하려는 시도였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부하린의 첫 번째 정식은 글자그대로, 그리고 용어의 기계적 의미에서 혁명의 ‘연속적’ 발전에 기초하고 있었다. 부하린은 ‘숨 쉴 공간’, 중단, 어떤 종류의 퇴각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어떤 경우에도 ‘공격’을 계속하는 것이 혁명적 의무라고 생각했다.

앞에서 인용한 스탈린의 글, ‘국제정세에 대하여’는 일종의 강령이며, 국제 문제에 대한 스탈린의 데뷔작이다. 이 글은 강령 초안의 두 번째 기초자도 반(反)‘트로츠키주의’ 투쟁 초기에 똑같은 순전히 기계적인 ‘좌익적’ 구상을 표명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이 구상은 상존했으며, 사회민주주의는 영구불변으로 ‘붕괴하고’ 있었을 뿐이며, 노동자들은 ‘급진화’되고 있었고, 공산당들은 ‘성장하고’ 있었으며, 혁명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위를 둘러보고, 사태를 분간하려고 애쓴 사람들은 누구든지 ‘청산인’이다.

이 ‘경향’이 1923년에 유럽의 상황이 급변한 뒤에 겁을 집어먹고 스스로를 정반대로 바꾸기 위해 뭔가 새로운 것의 필요성을 감지하는 데 1년 반이 걸렸다. 지도부는 우리 시대와 그 내적 경향에 대한 어떤 종합적인 이해도 없이, 단지 손으로 더듬기만 하거나(스탈린), 결과적으로 이미 획득한 단편적인 결론을 각각의 경우에 맞게 손본 현학적 도식으로 보충하면서(부하린) 사태를 파악했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볼 때, 지도부의 정치 노선은 지그재그의 연속을 나타낸다. 또 이데올로기적 노선은 스탈린주의적 지그재그의 모든 조각을 불합리한 것으로 몰고 가는 데 도움이 되는 도식들의 만화경 같다.

제6차 대회가 만약 부하린이 만들어낸, 그것도 말하자면, 영-러위원회의 모든 단계에서 논거로 쓸 요량으로 만들어낸 이론을 전부 수집하기 위해 특별위원회를 선출하기로 결정했다면, 그것은 바른 행동이었을 것이다. 이 이론들은 그 안에 담긴 생각의 체온표(a fever chart)를 얻기 위해, 연대순으로 수집하여, 체계적으로 배열해야 했을 것이다. 그것은 매우 교훈적인 전략적 도표였을 것이다. 중국혁명, 소련의 경제 발전, 그리고 덜 중요한 다른 모든 문제들에 대해서도 똑같은 도표가 준비되어 있다. 스콜라주의로 배가된 맹목적 경험주의―이것이 여전히 무자비한 비난을 기다리고 있는 노선이다. 소련의 국내 문제에 관한 퇴보 정책에 대해서는 《볼셰비키-레닌주의자(반대파)의 강령》Platform of the Bolshevik-Leninists(Opposition)에서 대단히 철저하게 평가했다. 우리는 여기에서 단지 다음을 언급하는 선에서 그칠 것이다. 《강령》은 지금 외관상으로는 아주 예상 밖의 승인을 얻고 있다. 1923~28년 정책의 결과에서 벗어나기 위한 소련공산당 현 지도부의 모든 시도가 거의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 《강령》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그러나 《강령》의 기초자와 지지자들은 감옥이나 유형지로 쫓겨나 있다. 그렇지만 현 지도자들이 《강령》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지 않고, 단지 편파적으로만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새로운 좌선회를 극도로 불안정하고 불확실하게 만든다. 그러나 동시에 진짜 레닌주의 노선의 일반화된 표현으로서 《강령》에 전에 없이 더 큰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강령》에서 중국혁명의 문제는 아주 불충분하게, 불완전하게,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지노비예프에 의해 절대적으로 부당하게 취급되어 있다. 코민테른에서 이 문제가 지닌 결정적 중요성 때문에 우리는 별도의 장(이 책 3장을 보시오)에서 이 문제를 좀 더 자세하게 검토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코민테른의 전략적 경험에서 나온 세 번째로 가장 중요한 문제인 영-러위원회에 대해 반대파는 일련의 글, 연설, 테제를 통해 이미 말 했지만 아직도 짧게 요약할 것이 남아 있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영-러위원회의 출발점은 미숙하고, 발전이 너무 더딘 공산당을 건너뛰려는 조급한 충동이었다. 이것은 심지어 총파업이 일어나기도 전에 전체 경험에 잘못된 특징을 부여했다.

영-러위원회는 총평의회와 타협하기 위해 맨 먼저 진지한 검증을 차단시켜야 했으며, 불가피하게, 그리고 여봐란듯이 차단시킨 상층의 일시적 블록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아니, 그렀기는커녕 스탈린, 부하린, 톰스키(Tomsky) 등은 물론이고 지노비예프도 거기에서 장기간에 걸친 ‘협력 관계’―영국 노동자 대중을 체계적으로 혁명화시킬 도구, 영국 노동자 계급의 혁명을 발전시킬 관문이 아니긴 하지만, 적어도 관문으로 통하는 진입로―를 보았다. 한층 더 나아간 영-러위원회는 일시적 동맹에서 실제 계급투쟁을 초월하는 신성한 방침으로 바뀌었다. 이것이 총파업이 일어날 즈음 판명되었다.


대중운동의 공공연한 혁명적 단계로의 전환은 약간 좌경화된 자유주의적 노동자 정치인들을 부르주아 반동진영으로 되돌려 보냈다. 이들은 공공연하게, 그리고 계획적으로 총파업을 배신했다. 그 다음에 이들은 광부들의 파업을 와해시키고 배신했다. 개량주의는 항상 배신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개량주의와 배신이 언제나 같은 것이라는 말이 아니다. 꼭 그렇지는 않다. 개량주의자들이 일보 전진할 때는 언제나 그들과 일시적인 협정을 맺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운동의 발전에 겁을 집어먹고 배신할 때, 그들과의 블록을 유지하는 것은 배신자에게 범죄적 관용을 베풀고, 배신을 감추는 것과 같다.

총파업은 500만 노동자들의 힘으로 고용주와 국가에 대해 일치된 압력을 가하는 것이 임무였다. 왜냐하면 탄광업의 문제는 국가 정책의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지도부의 배신 때문에 총파업은 초기 단계에서 파괴되었다. 광부들의 고립된 경제파업이 홀로 총파업이 쟁취하지 못한 것을 획득할 것이라는 믿음을 지킨다는 것은 크나큰 환상이었다. 총평의회의 힘이 겨눈 곳이 바로 이것이다. 총평의회는 냉정하게 계산하여 광부들의 패배를 겨냥했다. 그 결과, 노동자들의 상당 부분이 총평의회의 배신적 지침을 ‘올바르며, 합리적’이라고 확신하게 되었을 것이다.

총평의회와 우호적인 블록을 유지하는 것, 동시에 총평의회가 반대하고 나선 광부들의 장기적이고 고립된 경제파업을 지지하는 것은 말하자면, 노동조합 우두머리들이 이런 가혹한 시험에서 가능한 한 가장 적은손실을 입고 빠져나오도록 미리 계산된 것처럼 생각되었다.

혁명적 관점에서 볼 때, 여기서 러시아노동조합들의 역할은 아주 유해하고 단연코 한심스러운 것으로 드러났다. 틀림없이 고립된 파업일지라도 경제파업에 대한 지지는 무조건 필요했다. 혁명가들에게 이에 대한 두 가지 견해는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지지는 재정뿐만 아니라 혁명적-정치적 성격도 띠어야만 했다. 전러시아노동조합 중앙평의회는 영국광부노동조합과 전체 영국 노동자계급에게 광부들의 파업은 그 완강함, 끈기, 범위를 통해 새로운 총파업을 일으킬 토대를 닦을 수 있을 경우에만, 진지하게 승리를 기대할 수 있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해야 했다. 이것은 정부와 광산 소유자들의 대리인인 총평의회에 대항하는 공개적이고 직접적인 투쟁을 통해서만 쟁취할 수 있었다. 따라서 경제파업을 정치파업으로 전환하려는 투쟁은 총평의회에 대항하는 맹렬한 정치적, 조직적 전쟁을 의미했을 것이다. 이러한 전쟁을 위한 첫걸음은 이미 반동적 장애물이자 노동자계급의 족쇄가 된 영-러위원회와 단절하는 것이어야 했다. 

신중하게 말하는 혁명가라면 그 누구도 이 노선을 따라 나아가면 승리가 보장될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승리는 이 길을 따를 때만 가능했다. 이 길을 가는 도중의 패배는 나중에 승리에 이를 수 있는 길에서의 패배였다. 이러한 패배는 노동자계급에게 혁명적 사상을 가르친다, 즉 견고히 한다. 한편, 우물쭈물하고 희망을 잃은 노동조합의 파업(그 방법에서는 노동조합의 파업이고, 그 목표에서는 혁명적-정치적인)에 대한 단순한 재정 지원은 단지 파업이 굶주림 때문에 와해될 때까지 조용히 기다림으로써 자신의 ‘올바름’을 입증한 총평의회의 이익을 의미했을 것이다. 물론 총평의회가 공공연한 파업파괴자의 역할을 위해 몇 달 동안 기회를 엿보기는 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바로 이런 결정적인 시기에 총평의회는 대중들로부터 가릴 자신의 정치적 차단막으로 영-러위원회를 필요로 했다. 따라서 영국 자본과 노동자계급 사이의, 총평의회와 광부들 사이의 사활적인 계급투쟁의 문제는 영국 총평의회와 전러시아노동조합 중앙평의회라는 말하자면, 같은 블록 안의 동맹자들 사이의 우호적인 토론의 문제로 바뀌었다. 이 토론의 주제는 이때 두 가지 길―타협의 길, 아니면 고립된 경제파업의 길―가운데 어느 것이 더 나았는가였다. 파업의 불가피한 결과는 협정으로 이어졌다. 즉, 총평의 회를 지지하는 우호적인 ‘토론’은 비극적으로 매듭지어졌다.

처음부터 끝까지 영-러위원회의 모든 정책은 잘못된 방침 때문에 총평의회에게만 도움이 되었다. 러시아 노동자계급의 위대한 자기희생 때문에 재정적으로 파업이 장기간 지속되었다는 사실조차도 광부들이나 영국공산당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총평의회에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차티즘시대이래 영국에서 가장 커다란 혁명운동의 결과 때문에, 총평의회가 총파업 이전보다 훨씬 더 확고하게 권력에 앉아 있던 반면에, 영국공산당은 거의 성장하지 못했다.

이것이 이런 비길 바 없는 ‘전략적 술책’의 결과이다. 

1927년 4월의 수치스러운 베를린회의에서 철저히 비굴하게 군총평의회와의 블록 유지를 밝힌 완고함은 똑같은 ‘안정’에 대한 언급을 줄곧 되풀이함으로써 정당화되었다. 만약 혁명의 발전이 퇴보한다면, 여러분도 알다시피, 사람들은 퍼셀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소비에트의 관료 또는 멜니찬스키[그레고리 멜니찬스키(Gregory Melnichansky, 1886~1937):1917년 5월에 트로츠키 등과 함께 혁명러시아로 귀국한 이후 노동조합 분야에서 활동. 1918~21년, 전러시아노동조합 중앙평의회 위원, 프로핀테른 임원. 1925~30년, 중앙위원 후보. 1929~31년, 국가경제최고회의 임원. 1931~34년, 국가계획위원회 위원. 1937년에 총살되었다.] 같은 유형의 노동조합주의자에게나 매우 심오하게 보였을 이런 주장은 실제로 맹목적 경험주의―스콜라주의 때문에 그 정도로 더욱 심해진―의 완벽한 본보기다. 특히 1926~27년에 영국의 정치, 경제와 관련하여 ‘안정’의 의미는 무엇이었는가? 생산력의 발전을 의미했는가? 경제 상황의 개선이었는가? 미래에 대한 더 나은 바람이었는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영국자본주의의 이른바 안정 전체는 영국공산당의 미약함과 우유부단함으로 인해 모든 경향과 색조를 지닌 낡은 노동자 조직의 보수적 세력에 의존해서만 유지되었다. 영국의 경제적, 사회적 관계 분야에서 혁명은 이미 충분히 성숙해 있다. 문제는 전적으로 정치에 있다. 안정의 기본적인 버팀목은 노동당과 노동조합의 우두머리들이다. 이들은 영국에서 한 개의 단위를 이루지만 분업을 통해 움직인다.

총파업과 같은 상황이라면, 자본주의의 안정화 메커니즘에서 최고 지위를 차지하는 것은 더 이상 맥도널드나 토머스(Thomas)가 아니라 퓨(Pugh), 퍼셀, 쿡 일당이다. 이들이 일을 하고, 토머스가 마지막 손질을 덧붙인다. 퍼셀이 없다면, 토머스는 공중에 매달려 있을 것이며, 토머스와 함께 볼드윈[스탠리 볼드윈(Stanley Baldwin, 1867~1947) : 1923년에 총리가 되어 탄광파업을 분쇄한 보수당 정치인]도 그럴 것이다. 영국혁명을 억제하는 주요한 제동장치는 기만적이며, 외교적인 체하는 퍼셀의 ‘좌익주의’다. 때로는 돌아가며, 때로는 동시에 목사나 볼셰비키들과 친하게 사귀며, 항상 퇴각뿐만 아니라 배신할 준비도 되어 있는 것이 바로 퍼셀의 좌익주의다. 안정은 퍼셀주의다.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퍼셀과의 정치적 블록을 정당화하기 위해 ‘안정’의 실재와 관련하여 이론적 모순과 맹목적 기회주의가 어떻게 표현되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바로 ‘안정’을 분쇄하기 위해서는 퍼셀주의가 맨 먼저 파괴되어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총평의회와 연대한 흔적조차도 노동자 대중에 대한 가장 큰 범죄이자 파렴치한 행위였다.

가장 올바른 전략도, 그것만으로는 매번 승리로 이끌 수 없다. 전략적 계획의 올바름은 전략적 계획이 계급역관계의 실제 발전 방향을 따르는지, 그리고 이런 발전의 요소들을 현실적으로 평가하는지에 따라 검증된다. 운동에 가장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가장 중대하고, 가장 수치스러운 패배는 계급에 대한 잘못된 평가, 혁명적 요인에 대한 과소평가, 적의 힘에 대한 이상화 탓에 당한 전형적으로 멘셰비키적인 패배다. 우리가 중국과 영국에서 당한 패배가 이러한 것이었다.

소련은 영-러위원회에 무엇을 기대했는가?

1926년 7월에 스탈린은 중앙위원회와 중앙통제위원회의 합동총회에서 우리들에게 다음과 같이 강연했다.

이 블록[영-러위원회]의 임무는 새로운 제국주의 전쟁에 맞서, 또한 대체로 유럽의 가장 강력한 제국주의 열강들, 특히 영국 측의 (주로) 우리나라에 대한 간섭에 맞서 광범한 노동자계급의 운동을 조직하는 데 있다.

우리 반대파에게 ‘간섭에 맞서 세계 최초의 노동자공화국을 방어하기 위해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취지로 지시했다고는 하나 (물론 우리는 이에 대해 알지 못한다), 스탈린은 이렇게 덧붙였다.

만약 영국의 반동적 노동조합들이 자국의 반(反)혁명적 제국주의자들에 맞서 기꺼이 우리나라의 혁명적 노동조합들과 블록을 맺으려 한다면, 우리가 왜 이러한 블록을 환호해서는 안 되는가?

만약 ‘반동적 노동조합들’이 자국의 제국주의자들에 대항하여 투쟁할 수 있었다면, 이들은 반동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스탈린은 반동적이란 개념과 혁명적이란 개념을 더 이상 구분할 수 없다. 그는 관례에 따라 영국의 노동조합들을 반동적이라고 규정하지만, 실제로 그는 이들의 ‘혁명적 정신‘에 대해 가엾은 환상을 가지고 있다.
스탈린에 뒤이어, 우리 당의 모스크바위원회가 모스크바 노동자들에게 이렇게 설교했다.

영-러위원회는 소련을 겨냥한 있을 수 있는 모든 개입에 맞선 투쟁에서 의심의 여지없이 엄청난 역할을 할 수 있고, 해야 하며, 할 것이다. 또한 새로운 전쟁을 일으키려는 국제 자본가계급의 모든 시도에 맞선 투쟁에서 국제 노동자계급 세력의 조직적 중심이 될 것이다.(모스크바위원회의 테제)

반대파는 어떻게 응답했는가? 우리는 이렇게 말했다.

국제 정세가 더욱 첨예해질수록, 영-러위원회는 영국과 세계 제국주의의 무기로 바뀔 것이다.

퍼셀을 노동자 국가의 수호천사로 믿는 스탈린주의에 대한 이런 비판은 스탈린에 의해 바로 그 합동총회에서 ‘레닌주의로부터 트로츠키주의로의’ 일탈로 규정되었다.

      보로실로프: ‘옳소.’
      어떤 목소리: ‘보로실로프가 그것을 보증했다,’
      트로츠키: ‘다행히 이 모든 것이 회의록에 남을 것이다.’

    그렇다, 이 모든 것이 맹목적이고, 투박하며, 불성실한 기회주의자들이 감히 반대파를 ‘패배주의’라고 비난한 7월 총회 회의록에서 발견될 것이다.

    내가 예전에 작성한 글, 〈우리가 준 것은 무엇이고, 얻은 것은 무엇인가〉What We Gave and What We Got에서 짧게 인용하지 않으면 안 된 이 대화는 강령 초안의 전략에 관해 완전 미숙한 장보다 전략적 교훈으로서 훨씬 더 유용하다. 우리가 준 것은 무엇이고(그리고 기대했으며), 얻은 것은 무엇인가?―이 질문은 일반적으로 전략에서 원칙적인 기준이다. 제6차 대회에서는 최근의 의제였던 모든 문제들에 이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 그러면 특히 1926년 이후,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전략이 가상적인 판단, 잘못된 예측, 적에 대한 환상, 가장 믿음직하고 동요하지 않는 투사들에 대한 박해의 전략이었다는 것이 결정적으로 드러날 것이다. 한마디로, 우익 중도주의의 타락한 전략이었다.


    9. 혁명 전략의 책략적 성격

    첫눈에도 왜 볼셰비키 전략의 ‘책략‘과 ‘유연성‘이 강령 초안에서 완전한 침묵으로 불문에 부쳐졌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 엄청난 문제 전체로부터 단 한 가지 쟁점만을 뽑아내자면, 그것은 바로 식민지 자본가계급과의 협정 문제다.

    그러나 훨씬 더 깊숙이 오른쪽으로 지그재그하고 있는 최근의 기회주의는 주로 책략(maneuver) 전술의 기치 아래 나아가고 있다.

    실천적으로 해롭다는 이런 사실 자체 때문에 무원칙한 타협에 동의하지 않은 것은 ‘유연성’의 부족으로 간주되었다. 다수파는 자신의 근본 원칙이 책략적인 것이라고 선언했다. 지노비예프는 이미 1925년에 라디치, 라폴레트와 책략을 꾸몄다. 그 후 스탈린과 부하린이 장개석[장개석(雜介石 Chlang Kai-shek, 1887~1975):중국의 군벌, 국민당의 우익 지도자. 1920년대에 코민테른은 공산주의자의 국민당 입당을 지시, 국민당을 중국혁명의 지도적 당으로 간주했다. 1926년 3월 20일, 광동쿠데타로 지도권을 잡고, 7월에 북벌을 개시했다. 코민테른은 이 쿠데타를 은폐하며, 장개석을 옹호했다. 1927년4월 12일, 장개석은 상해에서 국민당내 공산주의자탄압에 나서 많은 공산주의자를 살육했다(4.12 상해쿠데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원조 아래 공산당과 내전을 수행했다.], 퍼셀 그리고 쿨락과 책략을 꾸몄다. 당 기구는 끊임없이 당과 책략을 꾸몄다.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지금 당 기구와 책략을 꾸미고 있다. 

    책략을 전문으로 다루는 부대는 모두 다 관료적 요구를 위해 생겨났다. 이 부대는 혁명적 투사가 결코 아닌 사람들, 이미 권력을 장악했기 때문에 지금은 혁명 앞에 그만큼 더 열렬히 머리를 조아리는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보로딘[미하일 보로딘(Mikhail Borodin, 1884~1951) : 본명은 미하일 그루젠베르크, 1923~27년 코민테른의 중국국민당 정부의 고문]은 광동에서, 라페스[모이셰 라페스(Moishe Rafes, 1883~1942):러시아의 분트 활동가. 1917~18년, 우크라이나의 페트룰라 반(反)혁명 정부에 참가했다. 1919년 볼셰비키당에 입당, 코민테른에서 활동했으며, 1920년대 중국공산당의 지도에도 참여했다.]는 북경에서, 페트롭스키[페트롭스키(D. Petrovsky):러시아의 고참 사회민주주의자, 분트 활동가. 10월혁명 후에 볼셰비키당에 입당. 1920년대에 코민테른에서 영국 문제를 담당했다.]는 영국 해협을 중심으로 책략을 꾸민다. 페퍼는 미국에서 책략을 꾸미지만, 폴리네시아에서도 책략을 꾸밀 수 있다. 마르티노프는 먼 곳에서 책략을 꾸미지만, 이를 만회하기 위해 지구 구석구석에서 책략을 꾸민다. 책략에 종사하는 일단의 학생 무리가 키워졌는데, 이들은 주로 각자 자기 근성의 적응성에 따라 볼셰비키의 유연성에 가까워지고 있다. 이런 전략연구소의 임무는 오직 혁명적 계급의 힘을 통해서만 획득할 수 있는 것을 책략을 통해 얻는데 있다. 중세시대의 모든 연금술사가 다른 사람들은 실패했지만 자신은 금을 만들기를 바란 것처럼, 오늘날의 책략 전술가들도 각자 자기 지역에서 역사를 현혹시키고 싶어 한다. 물론 본질적으로 이들은 전술가가 아니며, 거물을 제외하면 단지 온갖 수준의 관료적 혼합주의자들일 뿐이다. 선생이 사소한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했는지 관찰하고 나서, 이들 가운데 일부는 자신이 전술의 비밀을 통달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아류주의의 본질이다. 게다가 다른 사람들도 혼합주의의 비밀을 여러 과정을 거쳐 획득한다. 그리고 이와 함께 사소한 일에서 때때로 놀라운 성과를 얻었다고 확신하게 되었기 때문에, 이들은 이런 방법이 중요한 일에 그만큼 더 잘 들어맞는다고 결론짓는다. 그러나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혁명적 투쟁에 견주어 ‘더 경제적’이라고 생각하고 관료적 혼합의 방법을 적용하려는 모든 시도는 늘 굴욕적인 패배로 이어졌다. 게다가 당과 국가 기구로 무장한 혼합주의는 매번 혈기왕성한 당과 혁명의 등뼈를 부러뜨렸다. 장개석, 왕정위[왕정위(在精衛, WangChing-wei, 1884~1944) : 본명은 왕조명. 국민당좌파 지도자. 무한정부의 수반. 코민테른은 장개석의 1927년 3월 쿠데타 이후, 왕정위의 무한정부를 지지했으나 왕정위는 불과 6주 뒤에 노동자 탄압을 개시했다. 1940년 일본의 괴뢰정권을 난징에 수립, 그 주석이 된다.], 퍼셀, 쿨락―‘책략’을 통해 이들을 다루려는 시도에서 이들 모두가 지금까지 승리자로 판명되었다.

    물론 이것은 책략이 일반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이라는 말이 아니다. 즉 노동자계급의 혁명 전략과 양립할 수 없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혁명투쟁의 기본적 방식과 관련하여 책략은 단지 종속적이고, 보조적이며, 편의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는 것을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 책략은 중요한 일에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을 확실히 이해해야 한다. 만약 혼합주의가 사소한 일들에서 뭔가를 해결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항상 중요한 일을 희생한 것이다. 올바른 책략은 시간을 벌거나 더 적은 힘으로 더 큰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으로써 문제 해결을 촉진할 수 있을 뿐이다.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 사이의 모순은 근본적인 모순이다. 이러한 이유로 중국 자본가계급을 조직적, 개인적 책략으로 제어하여, 억지로 혼합주의자의 계획에 따르게 하려는 시도는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다고 할지라도 책략이 아니라 한심한 자기기만인 것이다. 계급은 현혹되지 않는다. 역사를 고찰해보면, 이것은 모든 계급들에 적용된다. 특히 지배하고, 소유하며, 착취하고 교육받은 계급들에게 즉시 적용된다. 교육받은 계급의 세계적 경험은 매우 의의 깊고, 이들의 계급적 본능은 매우 세련되었으며, 이들의 첩보기관은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인 체해서 이들을 속이려는 시도는 실제로 반드시 적이 아니라 자기 동료들을 계략에 걸려들게 한다.

    소련과 자본주의 세계 사이의 모순은 근본적인 모순이다. 책략을 통해 이 모순을 피할 수는 없다. 명백하고 솔직하게 인정하는 자본에 대한 양보를 통해, 그리고 그 다양한 분파들 사이의 모순을 이용함으로써 생각할 기회가 늘어날 수 있으며, 시간을 벌 수 있다. 그러나 이조차도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서나 가능할 뿐, 모든 상황에서 가능한 것이 결코 아니다. 사회주의를 건설할 때까지 국제 자본가계급이 ‘중립화‘될 수 있다고, 즉 근본적 모순이 책략의 도움으로 극복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엄청난 자기기만이다. 이러한 자기기만은 소비에트공화국의 지도적 지위를 잃게 할지도 모른다. 오직 국제 노동자혁명만이 우리를 근본적 모순에서 해방시킬 수 있다.

    책략은 적에 대한 양보나 일시적인, 따라서 항상 미심쩍은 동맹세력과의 협정이나, 적 진영을 분열시키기 위해 의도된 시기적절한 퇴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이것들이 책략의 주요 변종이다. 다른 것들은 부차적인 것으로 언급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책략은 그 본질상 투쟁의 근본적인 전략 노선과 비교하면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는다. 국민당이나 영-러위원회와 꾸민 책략들은 볼셰비키적 책략이 아니라 전형적인 멘셰비키적 책략의 본보기임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 일어난 일은 정반대였다. 단지 전술적 에피소드였을 것이 전략적 노선으로 발전했으며, 진짜 전략적 임무(자본가계급과 개량주의자들에 맞선 투쟁)는 일련의 평범하고 사소한, 게다가 장식적 성격이었을 뿐인 전술적 에피소드로 개별화되었다.

    책략에서는 양보할 상대나, 협정을 맺을 믿을 수 없는 동맹세력에 관해서는 항상 최선의 가정이 아니라 최악의 가정에서 시작해야 한다. 동맹세력이 내일 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 이것은 심지어 농민 같은 동맹세력에게도 해당된다.

    ‘우리는 농민에 대해 쉽게 의심을 거둬서는 안 된다. 항상 우리 자신을 농민과는 따로 조직해야 한다. 농민이 반동적이거나 반(反)노동자적인 모습을 보이는 한, 그들과 맞서 싸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레닌, 《전집》, 제6권, 113쪽) 

    이것은 레닌이 천부적일 정도의 심오함으로 실천적으로뿐만 아니라 이론적으로도 처음으로 제기한 노동자계급의 커다란 전략적 임무, 즉 피착취 계층인 빈농을 자본가계급의 영향으로부터 떼어내 우리를 뒤따르게 하는 임무와 결코 모순되지 않는다. 그러나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동맹은 결코 역사에 의해 미리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또한 매끄러운 책략, 감언이설로 꾀려는 비열한 시도, 감상적인 장광설을 통해서는 수립될 수 없다.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동맹은 정치적 역관계의 문제다. 따라서 다른 모든 계급들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완전한 독자성의 문제다. 동맹세력은 먼저 교육받아야 한다. 이것은 한편으로 모든 진보적, 역사적 요구에 커다란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다른 한편으로 동맹세력에 대해 조직화된 불신을 보여주고, 모든 반(反)노동자적 경향과 관습에 맞서 끊임없이, 그리고 가차 없이 싸움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 

    책략의 의미와 한계는 항상 명확하게 고려해서 구별해야 한다. 양보는 양보라고 부르고, 퇴각은 퇴각이라고 불러야 한다. 자신의 양보와 퇴각을 과장해서 말하는 것이 과소평가하는 것보다는 훨씬 덜 위험하다. 계급의 경계심과 우리 당의 체계화된 불신은 반드시 유지해야 하며, 멈춰서는 안 된다.

    노동자계급 일반의 모든 역사적 행동에서처럼, 책략의 필수적 도구는 당이다. 그러나 당은 단지 책략에 ‘능통한자들’의 손에 달려있는 순종적 도구가 아니라, 노동자의 자주적 행동 일반을 최고로 표현하는 의식적이고 자주적으로 행동하는 도구다. 따라서 모든 책략은 그것을 적용하는 내내 당 스스로 명백히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물론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외교적, 군사적 또는 음모적 비밀, 즉 노동자국가 또는 자본주의 상황에서 노동자당의 투쟁 기술이 아니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책략의 정치적 내용이다. 이런 이유로 쿨락에 대한 1924년에서 1928년까지의 방침이 거대한 책략이었다는 취지의 속닥거리는 설명이 불합리하고 범죄적이라는 것이다. 쿨락을 속일 수는 없다. 쿨락은 말이 아니라 행동, 세금, 가격, 순이익으로 판단한다. 그렇지만 자신의 당―노동자계급과 빈농―은 확실히 속여 넘길 수 있다. 무원칙한 책략과 그 배후의 혼합주의만큼 노동자당의 혁명적 정신을 쇠약하게 하는 것은 없다.

    모든 책략에 꼭 들어맞도록 가장 잘 수립된 제일 중요하고, 변경할 수 없는 규칙을 읽어보면 이렇다 : 여러분 자신의 당 조직을 이질적인 조직과 절대로 통합시키거나, 섞거나, 결합시켜서는 안 된다. 비록 이질적인 조직이 오늘날 가장 ‘동조적‘일지라도 말이다.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으로, 공개적으로나 은폐된 채로 여러분의 당을 다른 당들 또는 다른 계급의 조직들로 이끄는 그러한 조치를 취하지 말라. 비록 부분적일지라도 다른 당들의 정치노선에 대한 자유나 여러분 자신의 선동을 제한하고, 여러분의 책임을 위축시키는 그러한 조치를 취하지 말라. 여러분은 다른 기치에 무릎 꿇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기치를 혼동해서도 안 된다.

    만약 책략이 반대 방향으로 끌어당기는 조직과 분자들을 병합과 속임수를 통해 표면적으로, 기만적으로, 외교적으로 묶고, 결합시키며, 일체가 되게 함으로써 자기 당의 발전을 앞지르려 하고, 그 발전에 필요한 단계들을 뛰어넘으려는(바로 이 점에서 단계를 뛰어넘어서는 안 된다) 성급한 기회주의적 시도에서 비롯하는 것이라면, 가장 해롭고 가장 위험한 것이다.

    전투에서처럼 책략에서도 결정적인 것은 전략적인 지혜만이 아니라 (혼합주의자들의 잔꾀는 더욱 아니다) 역관계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혁명정당이 적, 동맹세력, 준(準)동맹세력에 비해 더 미숙하고 더 약할수록, 올바로 꾀한 책략조차도 혁명정당에 그만큼 더 위험하다. 이런 이유로―우리는 여기에서 코민테른에 가장 중요한 지점에 이른다―볼셰비키당은 결국 그렇게 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결코 책략을 만병통치약으로 쓰면서 활동을 시작하지 않았으며, 노동자계급에 깊숙이 그 뿌리를 내려 정치적으로 강해지고 이데올로기적으로 성숙해지는 조치로 성장한 것이다. 

    볼셰비키 전략의 아류들은 미숙한 공산당들에게 책략과 유연성을 볼셰비키 전략의 정수라고 격찬함으로써 이들을 그 역사적 주축과 원칙적 기초로부터 떼어내 무원칙한 혼합으로 돌려세운다. 이것은 유감스럽지만 흔히 우리 안에서 쳇바퀴 도는 다람쥐를 닮아 있다. 볼셰비키주의의 기본적 특성 역할을 한 것은 유연성이 아니라(오늘날에도 그런 역할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돌 같은 단단함이었다. 적과 반대자들이 이를 비난하는 동안, 볼셰비키주의가 늘 정당하게 자랑스러워한 것이 바로 이 자질이었다. 더없이 행복한 ‘낙관주의’가아니라 비타협성, 경계심, 혁명적 의심, 모든 노동자의 독자성을 키우기 위한투쟁―이것들이 볼셰비키주의의 본질적 특성이다. 동방과 서방의 모든 공산당들은 이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들은 우선 진짜 책략을 실현하기 위한 정치적, 물질적 가능성, 즉 자기조직의 힘, 충실함, 견고함을 준비함으로써 책략을 실행할 수 있는 권리를 얻어야 한다.

    국민당과 총평의회에 대한 멘셰비키적 책략은 10배나 범죄적이다. 왜냐하면 이런 책략이 아직 연약한 중국과 영국 공산당들의 어깨에 매달렸기 때문이다. 이런 책략은 혁명과 노동자계급에게 패배를 안겼을 뿐만 아니라, 미래의 투쟁을 위한 근본적 도구가 될 미숙한 공산당들을 오랫동안 짜부라뜨리고, 약화시켰으며, 그 토대를 침식시키기까지 했다. 동시에 이런 책략은 코민테른 가운데에서 가장 오래된 정당인 소련공산당의 대오로 정치적 타락의 요소들을 끌어들이기도 했다.

    전략을 다루고 있는 강령 초안의 장은―최근의 장기인―책략에 대해 완고하게 침묵을 지키고 있다. 마치 입에 물을 가득 머금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관대한 비평가는 ‘침묵도 그런대로 괜찮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합리화는 큰 오산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미 수많은 사례들에서 보았고, 또 나중에 볼 것처럼, 강령 초안 자체가 나쁜 뜻, 즉 혼합주의라는 뜻에서 책략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사실에 불행이 존재한다. 초안은 자기 당에 대해 책략을 꾸민다. 몇몇 약한 지점에서 초안은 ‘레닌에 따르면’이라는 정식으로 가장한다. 다른 지점들에서는 침묵으로 회피한다. 이것이 오늘날 초안이 책략 전술을 다루는 방식이다. 중국과 영국의 새로운 경험을 언급하지 않은 채, 이 주제에 대해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책략에 대한 언급 자체는 장개석과 퍼셀이라는 인물을 떠오르게 할 것이다. 강령 초안의 기초자들은 이것을 바라지 않는다. 이들은 인기 있는 주제에 대해 침묵을 지키는 것을 더 좋아하고, 코민테른 지도부를 자유재량에 맡겨두고 싶어 한다.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허용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혼합주의자와 그 지원자들의 손을 묶을 필요가 있다. 이것이 바로 강령이 이바지해야 할 목적이다. 그렇지 않다면, 강령은 불필요할 것이다.

    전략에 관한 장에는 사활이 걸린 투쟁일 수밖에 없는 계급의 적에 대한 혁명적 투쟁 중 책략을 보조적 방법으로 한정하고 그 한계를 정하는 근본적 규칙에 대한 부분이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앞에서 지적했으며, 마르크스와 레닌의 가르침에 입각한 규칙들은 의심의 여지없이 더 간결하고 정확한 형태로 제시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반드시 코민테른 강령에 나타나야 한다.


    10. 내전의 전략

    무장봉기 문제와 관련하여 강령 초안은 아무 생각 없이 이렇게 말한다.

    ‘이 투쟁은 전술규칙에 따른다. 이것은 군사계획, 전투작전의 공격적 성격, 노동자계급의 무한한 희생과 영웅주의를 전제로 한다.‘

    이 점에서 강령 초안은 일찍이 마르크스가 한 몇 마디 통상적인 발언을 짧게 반복하는 수준을 넘지 않는다. 그동안 우리는 한편으로 10월 혁명을 경험했고, 다른 한편으로 헝가리와 바바리아혁명의 패배, 1920년 이탈리아 투쟁, 1923년 9월의 불가리아 봉기, 1923년 독일의 사태 전개, 1924년 에스토니아, 1926년 영국총파업, 1927년 빈 노동자계급의 봉기, 1925~27년 제2차 중국혁명을 경험했다. 코민테른의 강령은 승리를 보장 할 수 있는 무장봉기의 군사적, 전략적 조건과 방법뿐만 아니라 무장봉기의 사회적, 정치적 전제조건 모두에 대한 훨씬 더 명쾌하고 구체적인 설명을 담아야 한다. 혁명 전략을 다룬 장이 코르넬리센과 길드 사회주의자들[오라쥬(Orage), 홉슨(Hobson), 콜(G.D.H. Cole) 둥의 이름이 전부 열거된]로 채워져 있을 뿐, 제국주의 시대에 노동자계급의 전략에 대한 일반적 설명도, 생생한 역사적 자료를 바탕으로 한 결정적인 권력 장악 투쟁의 방법을 설명하지도 않는다는 사실만큼 이 문서의 피상성과 현학성을 드러내는 것은 없다. 

    독일에서 비극적 경험을 겪고 난 1924년에 우리는 코민테른에 무장 봉기와 내전 일반의 전략과 전술 문제를 의제로 삼아 충분히 논의할 것을 요구하면서 이 문제를 새롭게 제기했다.

    무장봉기의 기간 문제는 흔히 오늘날 혁명의 근본적 임무에 대해서 스스로 수동적이고 숙명적인 접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매우 많은 서유럽 공산주의자들의 혁명 의식을 시험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터놓고 말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접근은 로자 룩셈부르크에게서 가장 심오하고 재능 있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심리학적으로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다. 그녀는 주로 독일 사회민주당과 노동조합들의 관료적 기구에 대항하는 투쟁 속에서 성격 형성기를 보냈다. 그녀는 쉼 없이 이 기구들이 대중의 창의력을 질식시킨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모든 사회민주주의적 장애물과 장벽을 전복시키기 위한 아래로부터의 자발적 운동에서 탈출구와 해결책을 찾아냈다. 자본주의 사회의 모든 둑을 넘쳐흐르는 혁명적 총파업은 룩셈부르크에게 노동자혁명의 동의어가 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대중적 힘에 의해 구별될지라도 총파업은 아직 권력 문제를 제기할 뿐 결정하지 못한다.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총파업을 기반으로 무장봉기를 조직해야 한다. 물론 로자룩셈부르크의 전체적 발전은 이런 방향으로 향해 있다 : 그녀는 마지막 말, 또는 끝에서 두 번째 음절도 끝맺지 못하고 무대를 떠났다. 그렇지만 아주 최근까지 독일공산당 내에서는 매우 강한 혁명적 숙명주의 경향이 퍼져 있었다. 혁명이 다가오고 있다. 혁명이 가까이에 있다. 무장봉기를 불러일으킬 혁명은 우리에게 권력과 당을 가져다줄 것이다 … 그동안 혁명적 선동을 계속하고 결과를 기다릴 것이다. 이러한 조건에서 봉기의 날짜라는 단도직입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당을 숙명적 수동성에서 깨워 기본적인 혁명적 임무 즉, 적의 수중에서 권력을 낚아채기 위해 무장봉기의 의식적 조직화로 돌려세우는 것이다.(1924년 7월 29일 군사학회 위원회 회의에서 행한 트로츠키의 연설-〈프라브다〉지, 1924년 9월 6일자)

    우리는 1871년 빠리꼬뮌에 상당한 시간과 이론적 노력을 쏟았지만 이미 내전에서 귀중한 경험을 얻은 독일 노동자계급의 투쟁을 완전히 무시했다. 예컨대, 우리는 작년 9월 불가리아의 봉기 경험에 거의 전념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장 놀라운 것은 결국 10월혁명의 경험을 기록보관소에 완전히 맡겨버렸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승리를 거둔 유일한 노동자혁명인 10월혁명의 경험을 정성들여 연구해야 한다. 10월의 전략적, 전술적 일람표를 만들어야 한다. 사태가 어떻게 발전했으며, 당, 소비에트, 중앙위원회, 군사조직에 어떻게 반영되었는가를 물결 흐르는 대로 보여주어야 한다. 당내의 동요는 무엇을 의미했는가? 사태의 전반적 흐름 속에서 그 특정한 영향력은 무엇이었는가? 군사조직의 역할은 어떤 것이었는가? 이는 무한히 중요한 연구일 것이다. 이를 더 뒤로 미루는 것은 단연코 범죄일 것이다.(위의 글)

    그렇다면 정확히 말해 임무는 무엇인가? 임무는 내전 문제, 따라서 무엇보다도 혁명의 최고점인 무장봉기에 관한 일반적인 참고서, 지침서, 편람, 법령집을 만드는 것이다. 여러 경험과 예비조건을 철저히 분석하고, 오류를 검토하고, 가장 올바른 작전을 골라내고, 도출해낸 필요한 결론으로부터 대차 대조표가 작성되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과학, 즉 역사의 발전 법칙에 대한 지식을 풍부하게 할 것인가? 아니면 경험에서 도출한 행동규칙의 총체인 기예를 풍부하게 할 것인가? 나는 전자와 후자 모두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목표는 확실히 실천적인 것, 즉 혁명의 군사적 기예를 풍부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위의 글)

    이러한 ‘규칙’은 불가피하게 구조적으로 매우 복잡할 것이다. 첫째로, 노동자계급의 권력 장악을 위한 근본전제가 설명되어야한다. 이 점에서 우리는 아직 혁명 정치의 현장에 머물러 있다. 왜냐하면 봉기는 정치의 연속―단지 특별한 수단에 의한―이기 때문이다. 무장봉기의 전제에 대한 분석은 다양한 유형의 나라들에 적합하게 해야 한다. 노동자가 인구의 다수인 나라도 있고, 노동자계급은 미미한 소수이며, 농민이 절대 다수인 나라들도 있다. 이 양극단사이에는 과도적 유형의 나라들이 있다. 따라서 적어도 ‘상징적인’ 세 나라, 즉 공업국, 농업국, 그리고 중간에 있는 국가를 분석의 기초로 삼아야 한다. 서문(혁명의 전제와 조건들을 다루는)은 내전의 관점에서 이 세 유형 각각의 특수성에 대한 설명을 담아야 한다. 우리는 봉기를 이중의 각도, 즉 한편으로 역사발전 과정의 명확한 단계이자, 계급투쟁의 객관적 법칙의 명확한 반영으로서, 다른 한편으로 주체적 또는 능동적 관점 : 봉기의 승리를 가장 잘 보장하기 위해 봉기를 어떻게 준비하고 실행할 것인가라는 관점에서 고찰한다.
    (위의 글)

    1924년에 내전 지침, 즉 계급의 공공연한 충돌과 독재를 위한 무장투쟁 문제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자의 지침을 정교화하려는 집단적 연구가 군사학회를 중심으로 모인 개인들의 큰 써클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연구는 곧 코민테른 측의 반대에 부딪혔다―이 반대는 이른바 반(反)트로츠키주의 투쟁이라는 총체적 시스템의 일환이었다. 그리고 이 연구는 나중에 완전히 청산되었다. 이보다 더 경솔하고 범죄적인 조치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다. 급격한 전환의 시대에, 앞서 제시한 의미에서 내전의 규칙은 당 지도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혁명적 중핵 전체의 확고한 자산 목록의 일부여야 한다. 이런 ‘규칙’은 끊임없이 연구되어야하며, 자국의 새로운 경험으로 확대되어야 한다. 이러한 연구만이 최고의 용기와 결단력이 요구되는 순간에 공포나 투항에 반하여, 마찬가지로 신중함과 참을성이 필요한 시기에 모험주의적 도약에 반하여 확실한 보증을 해줄 수 있다.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의 근본 사상을 이해한 모든 공산주의자의 의무만큼이나 진지한 연구인 이러한 규칙을 많은 책 속에 담았더라면, 우리는 당연히 최근에 당한 것과 같은 패배는 피할 수 있었다. 이 패배는 결코 불가피한 것이 아니었다. 어리석을 정도의 경솔함으로 초래한 광동봉기는 특히 더 그렇다. 강령 초안은 이런 문제들을 거의 인도의 간디주의에 대해 말하는 것만큼이나 아까운 듯이 단 몇 줄로 처리한다. 물론 강령이 세부적인 것에 몰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강령은 가장 중요한 성과와 오류들을 예로 들면서 문제를 충분한 범위에서 제출해야 하며, 그 기본 정식을 제시해야 한다.

    우리가 보기에는 이것과 전혀 무관하게 제6차 대회는 특별 결의로 지난 승리와 패배의 경험들에 기초하여 내전의 규칙을 편람으로 작성할 것을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에 명령해야 한다.


    11. 당내 제도의 문제

    볼셰비키주의의 조직적 문제들은 강령, 전술의 문제와 떼려야 뗄 수없이 관련되어 있다. 강령 초안은 이 문제를 ‘민주집중제의 가장 엄격한 혁명적 규율을 유지’할 필요성을 언급함으로써 단지 스치듯 다룰 뿐이다. 이것이 당내 제도를 규정하는 유일한 정식이다. 게다가 꽤 새로운 정식이다. 우리는 당 체제가 민주집중제의 원칙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은 이론상으로(그리고 실제로도 실행되었다) 다음을 전제로 삼는다 : 민주집중제는 선출 해임할 수 있는 지도기관의 전권을 위임받은 지도부 아래 행동에서 철의 규율을 지키는 것처럼, 당에 대해 토론하고, 비판하고, 불만을 표출하고, 선출하고, 해임할 충분한 기회를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민주주의가 모든 기관들에 대한 당의 통치권으로 이해되었다면, 집중주의는 당의 투쟁능력을 보증한 의식적 규율의 올바른 확립을 의미했다. 그렇지만 이제 과거의 모든 시련을 견뎌낸 당내 제도에 대한 이 정식에 ‘가장 엄격한 혁명적 규율’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기준이 덧붙여졌다. 단순한 민주집중제는 더 이상 당을 만족시키지 못하며, 이제 당은 민주집중제의 확실한 혁명적 규율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정식은 ‘혁명적 규율’이라는 아직 익숙지 않은 자기만족적 개념을 민주집중제, 즉 당 위에 간단히 올려놓는다.

    민주주의와 집중주의라는 개념 위에 세운 혁명적 규율―그것도 ‘가장 엄격한’ 규율―이라는 이 개념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것은 당 기구가 당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는 것, 또는 이러한 독립에 대한 열망을 의미한다. 즉, 당원 대중과 관계없이 ‘규율’을 지키기로 되어 있으며, 당의 의지를 유예하거나 교란시킬 수 있는 자기만족적인 관료집단이 당규를 깔아뭉개고, 당 대회를 연기하거나 ‘규율’이 필요할 때마다 이 규율을 단순한 날조로 바꿔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당기구는 민주주의와 집중주의 위에 올려진 ‘혁명적 규율’과 같은 정식을 오랫동안, 그것도 우회로를 통해 목표로 삼아왔다. 지난 2년 동안, 당 지도부의 가장 책임 있는 대표자들은 당내 민주주의에 대한 일련의 규정을 제시해왔다. 이런 규정은 본질적으로 민주주의와 집중주의가 단지 상급기관에 대한 복종을 의미하는 것으로 축소시켰을 뿐이다. 실제로 처리된 모든 일이 이런 방향으로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질식시키고 공동화시키는 집중주의는 관료적 집중주의다. 물론 이러한 ‘규율’은 당연히 민주주의의 형식과 관례에 따라 위장되어야 했다. 앞에서 나온 회람장을 통해 격려하고, 형법 제58조를 위협 삼아 ‘자기비판’할 것을 명령해야 했다. 따라서 민주주의에 대한 모독은 지도 중앙이 아니라 이른바 ‘집행자들’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끊임없이 증명해야 한다. 그러나 집행자들을 기소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모든 ‘집행자’가 다 자기 부하들의 지도자로 판명날 것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새로운 정식은 이론적으로 완전히 불합리하다. 이 정식의 생소함과 불합리는 이것이 단지 농익은 특정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만 만들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정식은 이를 만든 관료기구를 신성화한다.

    이 문제는 분파나 집단화 문제와 확고하게 관련되어 있다. 모든 논쟁적 문제와 모든 견해 차이에서 소련공산당뿐만 아니라 코민테른과 그 전 지부의 지도부와 공식 기관지는 논쟁의 방향을 곧바로 분파나 집단화 문제로 돌렸다. 일시적인 이데올로기적 집단화가 없다면, 당의 이데올로기적 생명은 감히 생각할 수도 없다. 지금까지 다른 어떤 조치를 목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이를 알아보려고 한 사람들은 단지 자신의 처방이 당의 이데올로기적 생명을 질식시키는 것과 같음을 보여주었을 뿐이다.

    물론 견해 차이뿐만 아니라 집단화도 ‘악’이다. 그러나 이 악은 독소가 인간과 같은 유기체의 생명에 끼치는 것만큼이나 변증법적인 당 발전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 부분을 이룬다.

    집단화의 조직화로의 변모, 게다가 폐쇄적인 분파로의 변모는 훨씬 더 큰 악이다. 당 지도부의 기예는 바로 이러한 발전을 막는 데에 있다. 단순한 금지로는 이를 성취할 수 없다. 소련공산당의 경험은 이를 가장 잘 증명하고 있다.

    크론슈타트 봉기와 쿨락의 반란 여운 속에서 치른 제10차 당 대회에서 레닌은 분파와 집단화를 금지하는 결의문을 가결시켰다. 제10차 당 대회에서 집단화는 당이 존재하는 동안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일시적 경향이 아니라, 스스로 집단으로 행세한 분파와 똑같은 것으로 이해되었다. 당원 대중은 이때의 치명적인 위험을 명확히 이해했으며, 그 형태에서 분파와 분파주의를 금지시키는 엄격하고 단호한 결의문을 채택함으로써 당 지도자들을 지지했다. 그러나 당은 이 처방이 레닌이 지도하는 중앙위원회에 의해 해석될 것이라는 사실, 따라서 어설프거나 불성실한 해석은 없을 것이며, 더욱이 어떠한 권력 남용도 없을 것(레닌의 ‘유언장’을 보시오)이라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당은 정확히 1년 뒤에, 또는 한 달 뒤에라도 당의 3분의 1이 요구한다면, 새로운 당 대회에서 그간의 경험을 검토하고, 필요한 유보조건을 달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제10차 당 대회의 결정은 전시공산주의로부터 신경제정책(NEP)으로의 매우 위태로운 전환에서 지배정당의 어려운 처지를 환기시킨 아주 가혹한 조치였다. 이 가혹한 조치는 단지 올바르고 현명한 정책을 보완하고, 신경제정책으로 이행하기 전에 나타난 집단화의 의표를 찔렀을 뿐이기 때문에 충분히 납득이 되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당시에도 사려 깊은 해석과 적용이 요구된 분파와 집단화에 관한 제10차 당 대회의 결정은 결코 나라, 상황, 시대와 관계없이 당 발전의 다른 모든 요구들에 앞서는 절대적인 원칙이 아니다.

    레닌의 사망 이후, 당 지도부가 모든 비판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분파와 집단화에 관한 제10차 당 대회의 결정에 의례적으로 입각한 것은 당 민주주의를 더욱 억압하기 위해서였지만, 동시에 그 실제 목적, 즉 분파주의의 제거를 달성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분파를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없애는 것에 임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레닌의 지도부 이탈 이후, 분파가 그렇게 당을 황폐화시키고, 당의 단결을 붕괴시킨 경우는 결코 없었다. 동시에 완전히 기만적이며, 결국 당의 명을 죄는 방법을 감추는 데 기여할 뿐인 100% 획일주의가 전에는 당을 지배한 적이 없었다.

    당으로부터 비밀을 지킨 당 기구 분파가 제12차 당 대회 이전에도 소련공산당 안에서 생겨났다. 나중에 이 분파는 자체적인 통문, 요원, 암호 등을 포함하여 자신의 비합법 중앙위원회[7인조‘(the Septumvirate)]를 거느린 음모 조직의 성격을 띠었다. 당 기구는 당 대오 가운데에서 폐쇄적 집단을 엄선하는데, 이 집단은 통제받지 않으며, 당뿐만 아니라 국가기구의 엄청난 자원을 먹어치운다. 

    또한 당원 대중을 자신의 혼합적 책략을 위한 단순한 구실이나 보조적 도구로 바꿔버린다.

    그러나 이 폐쇄적인 당 기구 안의 분파가 더 대담하게 당원 대중의 통제―온갖 ‘동기’에 의해 더욱 희석된―에서 벗어날수록, 분파의 분열 과정은 아래쪽에서뿐만 아니라 당 기구 자체 안에서도 더 뿌리 깊고, 더 급격하게 진행된다. 제13차 당 대회에 즈음하여 이미 완료된 당에 대한 당 기구의 완전하고 무제한적인 지배 속에서, 기구 자체 안에서 일어나는 견해 차이는 타개책을 찾을 수 없다. 왜냐하면 실제 결정을 위해 당에 호소하는 것은 기구를 다시 당에 종속시키는 것을 의미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전에 다수파임을 확신한 당 기구만이 기구 민주주의의 방식, 즉 비밀 분파 성원들의 투표에 의지함으로써 논쟁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 한다. 그 결과는 지배적인 기구 분파 안에서 적대적인 분파가 생겨나, 공통의 분파 안에서 다수파를 장악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국가 기구의 제도 속에서 지지를 구하려는 것이다. 당 대회의 다수파에 대해 말하면, 당 대회 자체가 자동적으로 보증한다. 왜냐하면 당 대회는 가장 형편이 좋고 적합한 준비가 되어 있을 때 언제든 소집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당과 노동자계급 독재 모두에 가장 끔찍한 위험이 되는 기구의 권력 찬탈이 전개되는 것이다.

    1923~24년의 첫 번째 ‘반(反)트로츠키주의’ 캠페인이 이 기구분파의 도움으로 수행된 뒤, 7인조가 이끈 비밀 분파 안에서 심각한 분열이 일어났다. 이 분열의 근본적 원인은 국제 정책뿐만 아니라 국내 문제에서도 시작된 퇴보에 대하여 레닌그라드 노동자 전위가 가진 계급적 불만이었다. 1923년에 모스크바의 선진 노동자들이 시작한 활동을 레닌그라드의 선진 노동자들은 1925년에도 계속했다. 그러나 이런 뿌리 깊은 계급적 경향은 당에서 공공연하게 자신을 드러낼 수 없었다. 이런 경향은 기구 분파 내부의 소리를 죽인 투쟁에 반영되었다.

    1925년 4월에 중앙위원회는 ‘트로츠키주의자’(!!)가 퍼뜨린 것으로 추정되는, ‘레닌주의자들’의 중핵 즉, 7인조 분파 안에 농민에 대한 견해 차이가 존재했다는 소문을 부정하는 회람장을 당 전체에 돌렸다. 더 광범위한 당 중핵들이 이러한 견해 차이가 실제로 존재했다는 것을 안 것은 이 회람장을 통해서였을 뿐이다. 그러나 이는 지도적 중핵이 ‘반대파’가 ‘레닌주의 호위대’의 일체감을 분열시키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는 주장으로 당원들을 계속 속이는 것을 결코 막지 못했다. 이 선전은 지배적인 분파에 속하는 두 부위 사이의 애매하고 혼란한 차이, 그러나 그 계급적 기원에서 뿌리 깊은 차이가 돌연 당을 당황케 한 제14차 당 대회에서 본격적으로 퍼부어졌다. 당 대회 직전에 당의 주요한 두 요새인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 조직은 지구협의회에서 정반대 성격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둘 다 만장일치로 채택 되었다고 들었다. 모스크바는 레닌그라드 당 기구의 실력 행사를 비난함으로써 이런 ‘혁명적 규율’의 기적을 설명 했다. 그리고 레닌그라드는 모스크바를 비난하는 것으로 답했다. 마치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 조직 사이에 뭔가 꿰뚫을 수 없는 장벽이 존재한 것처럼 말이다! 두 경우 모두, 당 활동의 모든 근본적 문제에서 당이 없음을 완전 획일적으로 증명하면서 당 기구가 어김없이 결정했다. 

    제14차 당 대회는 여러 기본적 문제들에 관한 새로운 견해 차이를 해결하고, 무시당한 당의 등 뒤에서 새로운 지도부 구성을 결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대회는 이 결정을 용의주도하게 엄선된 당 서기 계층에 즉시 위임하는 것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 제14차 당 대회는 ‘규율’의 방식 즉, 가면을 쓴 기구 분파의 독단적 권력에 따라 당내 민주주의의 청산을 향해 가고 있는 새로운 이정표였다. 투쟁의 다음 단계는 조금 전에야 시작되었다. 지배 분파의 기교는 항상 이미 채택된 결정, 돌이킬 수 없는 상황, 기정사실을 당 앞에 들이대는 데 있다.

    그렇지만 이 ‘혁명적 규율’의 새롭고 더 높은 단계는 결코 분파나 집단의 해체를 의미하지 않았다. 반대로 이들은 당 기구 안에서뿐만 아니라 당원 대중 안에서도 과도하고 뚜렷한 발전을 이뤘다. 당에 관한 한, ‘집단화’에 대한 관료적 응징은 브란겔(Wrangel) 장교의 파렴치한 행위 때문에 형법 제58조로 경사되면서 훨씬 더 격렬해졌으며, 이 점에서 그 무능을 드러냈다. 동시에, 지배 분파자체 내에서 새로운 분열이 일어났으며, 이 과정은 지금도 계속해서 발전하고 있다. 확실히 지금도 최상층의 완전한 의견일치를 보증하는 회람장과 부정직한 일체감의 과시가 많다. 실제로 그 극복 불가능성 때문에 격렬한 폐쇄적인 기구 분파 내부의 소리 죽인 투쟁을 암시하는 것은 모두 매우 긴장된 성격을 띠고 있으며, 당을 어떤 새로운 폭발로 몰고 가고 있다.

    이것이 불가피하게 권력 찬탈의 이론과 실천으로 바뀌어버린 ‘혁명적 규율’의 이론과 실천이다. 

    그렇지만 이런 일은 소련에 국한되지 않았다. 1923년에 분파주의에 대한 캠페인은 주로 분파들이 새로운 당의 맹아를 의미한다는 주장에서 유래했다. 그리고 농민이 압도적 다수이고 자본주의에 둘러싸인 나라에서 노동자계급의 독재는 당의 자유를 허용할 수 없다는 주장에서도 유래했다. 이 가정은 그 자체로는 절대적으로 옳다. 그러나 올바른 정책과 올바른 체제를 필요로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문제의 정식화가 지배적인 소련공산당의 제10차 당 대회에서 채택된 결의문을 부르주아 국가의 공산당들로 일체 확대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관료적 체제는 나름의 게걸스러운 논리를 가지고 있다. 만약 소련 당내에서 민주적 통제를 허용할 수 없다면, 공식적으로 소련공산당 위에 있는 코민테른 내에서는 더욱 허용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지도부가 제10차 당 대회의 결정―이것은 당시에 소련의 특수한 요구를 충족시켰다―을 조잡하고 불성실하게 해석 적용하여 보편적 원칙을 만들고, 이를 전 세계의 모든 공산주의 조직에게로 확대시킨 이유다.

    볼셰비키주의는 조직 형태를 만들어내는 데에서 역사적으로 구체적이었기에 항상 강했다. 무미건조한 계획은 없었다. 볼셰비키는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가는 모든 이행기에 그 조직 구조를 철저하게 바꾸었다. 그러나 오늘날 ‘혁명적 규율’이라는 똑같은 원리가 중요한 정치세력을 대표하는 독일공산당, 곧바로 혁명투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간 미숙한 중국공산당, 소규모 선전집단일 뿐인 미국의 당은 물론이고, 강력한 노동자 독재의 당에게도 적용되고 있다. 미국의 당에서는 당시 지도를 맡은 페퍼가 당에 들이댄 방식의 올바름에 대해 의구심이 일자마자, ‘의심하는 자들’은 분파주의로 징계를 받았다. 대중과 어떤 실질적인 접촉도 없고, 혁명적 지도의 경험도 없으며, 이론적인 훈련도 되어 있지 않은 완전히 맹아 단계의 정치적 조직체를 의미하는 미숙한 당이 이미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혁명적 규율’의 모든 속성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이는 여섯 살짜리 아이에게 그 아버지의 옷을 입히고 꼭 맞는다고 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데올로기와 혁명의 분야에서 소련공산당은 가장 거대한 경험적 자산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최근 5년에 입증된 것처럼, 소련공산당조차 할 수 없이 자산을 보충하고, 끊임없이 늘리는 것 외에 그 자산의 이자만으로는 단 하루도 무사히 지낼 수 없었다. 따라서 이 일은 당의 의지를 집단적으로 움직임으로써만 가능했다. 그렇다면 몇 년 전에 수립되었으며, 이론적 지식과 실천적 능력을 축적하는 초기 단계를 막 통과하고 있는 다른 나라의 공산당들에 대해서는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당 생활의 진정한 자유, 토론의 자유, 자신의 방침을 집단적으로, 그리고 집단화를 통해 수립할 자유가 없다면, 이 당들은 결코 결정적인 혁명세력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분파 결성을 금지한 제10차 당 대회 이전에, 소련공산당은 이러한 금지 없이 20년 동안 존재했다. 그리고 바로 이 20년 동안 훈련되고 준비했기에 소련공산당은 매우 힘든 전환에 즈음하여 제10차 당 대회의 엄격한 결정을 받아들이고, 견딜 수 있었다. 그렇지만 서구의 공산당들은 처음부터 이 지점에서 시작했다.

    레닌과 함께 우리는 국가의 강력한 자원으로 무장한 소련공산당이 이제 막 조직되고 있는 서구의 미숙한 당들에게 과도하고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을 무엇보다도 우려했다. 레닌은 중앙집중주의의 길을 따라 조급한 발걸음을 성큼 내딛는 것에 대해, 이 방향으로 지나치게 경도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와 상임간부회의의 경향에 대해, 특히 의견을 묻지도 않고 직접 지휘로 전환하는 것과 같은 지원 형식과 방법에 대해 끊임없이 경고했다.

    1924년에 ‘볼셰비키화’라는 이름으로 변화가 시작되었다. 만약 볼셰비키화를 이질적인 요소와 습관, 자리에 집착하는 사회민주주의적 관료, 프리메이슨, 평화주의적 민주주의자, 관념적 바보 등을 당에서 제거하는 것으로 이해했다면, 이 임무는 코민테른이 존재한 첫날부터 이미 수행되고 있었다. 제4차 대회에서 프랑스 당과 관련한 이 임무는 매우 과격한 전투 형태를 띠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전에 진정한 볼셰비키화는 코민테른 각국 지부의 개별적 경험들과 불가분하게 결합되어 있었으며, 이런 경험들로부터 생겨났다. 이것은 국제적 임무가 될 정도로 커진 국내정책의 문제들을 자신의 시금석으로 갖고 있었다. 1924년의 ‘볼셰비키화’는 완전히 희화적인 성격을 띠었다. 공산당의 지도기관들은 관자놀이에 권총이 겨눠진 채 어떤 정보나 토론도 없이 소련공산당의 내부 논쟁에 근거한 최종적 입장을 즉시 채택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게다가 공산당들은 코민테른에 머물 수 있는지 없는지는 자신들이 취하는 입장에 달려 있다는 것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 그러나 유럽의 공산당들은 1924년에는 러시아에서 논의 중인 문제들에 대해 재빠르게 결정할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바로 이때, 러시아에서는 노동자 독재의 새로운 단계로부터 생겨난 두 가지 원칙적 경향이 형성 단계에 있었다. 물론 숙청작업은 1924년 이후에도 필요했으며, 이질적 요소들은 많은 지부들에서 꽤 올바르게 제거되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볼셰비키화’는 이것에 있었다 : 국가기구를 강타하면서 위로부터 추진된 러시아의 논쟁이라는 쐐기로 인해 바로 이때 서유럽의 공산당들에서 구성되고 있던 지도부는 거푸 와해되었다. 이 모든 것이 반(反)분파주의 투쟁의 기치 아래 진행되었다. 

    만약 오랫동안 투쟁능력을 마비시킬 위험이 있는 분파가 노동자 전위당 안에서 형성된다면, 물론 당은 어느 경우나 추가적 재검토에 더 많은 시간을 배분할 것인지 아니면 곧바로 분열이 불가피하다고 인정할 것인지 결정할 필요성에 직면할 것이다. 전투정당은 결코 반대 방향으로 잡아당기는 분파들의 총합일 수 없다. 일반적인 형식을 따르더라도, 이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분열을 견해 차이에 대한 예방책으로 쓰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는 모든 그룹과 집단화를 잘라내는 것은 당내 활동을 일련의 조직적 낙태로 바꿔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종(種)의 존속과 발전을 촉진하지 못하며, 단지 모체인 당을 지치게 만들 뿐이다. 반(反)분파주의 투쟁은 분파 결성 자체보다 훨씬 더 위험하게 된다. 

    현재 우리는 세계의 거의 모든 공산당들의 실제 창시자와 설립자들 이 인터내셔널과 분리된 상황에 있다. 코민테른의 전 의장도 예외가 아니다. 당 발전에서 연속적인 두 단계의 지도적 그룹은 거의 모든 당에서 제명되거나 지도부에서 쫓겨난 상태다. 독일의 브란틀러 그룹은 오늘날 까지 준(準)당원 상태에 있다. 마슬로프 그룹은 당 밖에 있다. 프랑스에서는 로스메르(Roamer), 모나트(Monatte), 로리오(Loriot), 수바린(Souvarine)의 고참 그룹은 물론이고 뒤이은 시기의 지도그룹인 지로-트렘 그룹도 제명되었다. 벨기에에서는 판 오버스트라에텐[바르 판 오버스트라에텐(War Van Overstraeten):벨기에공산당의 지도자]의 기본 그룹이 제명되었다. 만약 이탈리아공산당의 창립자인 보르디가(Bordiga) 그룹이 반쯤 제명되었다면, 이는 파시스트 체제라는 상황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체코슬로바키아, 스웨덴, 노르웨이, 미국에서, 한마디로 세계의 거의 모든 당에서 우리는 탈(脫)레닌주의 시기에 일어난 것과 다소 비슷한 현상을 보고 있다.

    제명당한 많은 사람들이 아주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이 점을 지적하는데서 뒤늦은 적이 없다. 제명당한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 코민테른으로부터 버림받은 뒤, 자신의 이전 출발점, 즉 좌익 사회민주주의 또는 조합주의로 되돌아갔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코민테른 지도부의 임무가 각국 공산당의 미숙한 지도부들을 매번 막다른 골목으로 몰고, 결과적으로 그 개별 대표자들에게 이데올로기적 타락을 선고하는 데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관료적 지도부의 ‘혁명적 규율’은 코민테른의 모든 당들의 발전 도상에서 끔찍한 장애물이다.

    조직적인 문제는 강령, 전술 문제와 분리할 수 없다. 우리는 코민테른에서 기회주의의 가장 중요한 원천 가운데 하나는 지도정당뿐만 아니라 코민테른 자체에서도 기구의 관료적 체제라는 사실을 분명히 고려해야 한다. 1923~28년의 경험을 겪고 나서, 소련에서 관료주의는 비(非)노동자계급이 노동자계급에게 가한 압력의 표현이자 수단이라는 점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코민테른의 강령 초안이 관료적 왜곡은 ‘대중의 불충분한 문화적 수준과 노동자계급에게 이질적인 계급적 영향력이라는 토양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한다’고 말하는 경우라면, 이 점 에서는 올바른 정식을 담고 있다. 여기에 우리가 관료주의 일반은 물론이고 최근 5년 사이의 그 놀랄만한 성장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가 있다. 불충분하다고는 하지만 대중의 문화적 수준은 이 시기에도 지속적으로 상승하고 있었다(이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관료주의의 성장 원인은 노동자계급에게 이질적인 계급적 영향력의 증대에서만 찾을 수 있다. 유럽의 공산당들, 즉 주로 그 지도기관들이 소련공산당 기구 내의 변화와 재편에 조직적으로 동조함에 따라, 해외 공산당들의 관료주의는 대부분 소련공산당 내 관료주의를 반영하거나 보충했을 뿐이다.

    공산당에서 지도적 분자의 선발은 주로 이들이 가장 최근에 일어난 소련공산당내 기구의 [개별]집단화를 수용하거나 승인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하는 점에서 진행되어왔으며,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순전히 행정적인 태도로 조직을 개편하거나 재편성하는 것에 따르지 않으려고 한 해외 공산당 지도부 안의 더 자주적이고 책임 있는 분자들은 당에서 완전히 제명되거나, 우익(대개 사이비 우익)으로 쫓겨 가거나, 아니면 결국 좌익반대파 대오에 가담했다. 이런 식으로 코민테른의 지도를 받는 노동자 투쟁에 기초하여 혁명적 중핵을 선발하고 접합시키는 유기적 과정은 중단되고, 변경되었으며, 왜곡되었다.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행정적이고 관료적인 위로부터의 선별로 직접 대체되기도 했다. 당연히 이미 난 결정을 받아들이고, 어떠한 결의도 승인할 최선의 준비가 된 이런 지도적 공산주의자들은 흔히 혁명에 대한 책임감으로 고취된 당원들에 비해 우위를 점했다. 검증받고 동요하지 않는 혁명가를 선발하는 대신에, 흔히 가장 잘 순응한 관료들이 선발되었다.

    국내와 국제 정책의 모든 문제들은 늘 우리를 당내 제도의 문제로 돌아오게 한다. 확실히 중국혁명과 영국노동운동의 문제, 소련의 경제, 임금, 세금 등의 문제에서 계급 노선으로부터의 일탈은 중대한 위험을 자초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위험은 관료체제가 당의 손발을 묶고, 정상적인 방법으로 당의 최상층 지도부의 노선을 교정할 기회를 일체 박탈하기 때문에 10배로 높아진다. 동일한 것이 코민테른에도 적용된다. 더 민주적이고, 더 집단적인 코민테른 지도부의 필요성에 대한 소련공산당 제14차 당 대회의 결의는 실제로 그 안티테제로 바뀌어버렸다. 코민테른의 내부 체제상의 변화는 국제 혁명운동에 사활적인 문제가 되고 있다. 이 변화는 두 방향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소련공산당의 내부 체제상의 변화와 나란히 하거나, 코민테른에서 소련공산당의 지도적 역할에 맞서 투쟁하는 것이 그것이다. 첫째 방식의 채택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는 온갖 노력을 다 해야 한다. 소련공산당의 내부 체제상의 변화를 위한 투쟁은 코민테른의 체제를 혁신하려는 투쟁이며, 코민테른에서 우리 당의 지도적인 이데올로기적 역할을 유지하려는 투쟁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살아 있는 당, 활기 있는 당이 종신통치적 당 관료집단의 ‘혁명적 규율’이라는 통제에 종속될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강령에서 가차 없이 삭제할 필요가 있다. 당 자신은 자기 권리를 회복해야 한다. 당은 다시 한 번 당이 되어야한다. 이것은 강령에서 관료주의에 대한 이론적 정당화나 권력 찬탈 경향에 여지를 주지 않을 그런 말로 지지되어야 한다.


    12. 반대파 패배의 원인과 그 전망

    많은 문서―그 가운데 가장 주요한 것은《볼셰비키-레닌주의자(반대파)의 강령》이다―를 통해 자신의 의견을 낸 당의 좌익 노동자는 1923년 가을부터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전멸 캠페인을 겪었다. 당내 제도의 성격에 따라 결정된 탄압 방식은 비(非)노동자계급이 노동자계급에 가한 압력이 더 강해진 정도만큼 더 관료적으로 되었다. 이러한 방식이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 것은 공산당 내에서 중도주의적 기회주의 경향이 더 강해지고, 게다가 최근 몇 달까지 중도주의가 체계적으로 우경화한 사이에, 노동자계급이 가장 큰 패배를 겪고, 사회민주주의가 다시 소생한 시기의 일반적인 정치적 성격 때문이었다. 반대파에 대한 최초의 공격은 독일혁명의 패배 직후에 자행되었다. 말하자면, 이 패배를 벌충하는 역할을 했다. 이 공격은 독일 노동자계급이 승리했다면 전혀 불가능했을 것이다. 독일 노동자계급의 승리는 소련 노동자계급의 자신감을 엄청나게 드높이고, 따라서 내외적으로 자본가계급의 압력과 이 압력을 전달하는 당 관료집단에 대한 저항력도 증대시켰을 것이다. 

    1923년 말부터 코민테른에서 일어난 재편의 의미를 더욱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는 지도그룹이 반대파가 퇴보한 여러 단계에서 반대파를 상대로 거둔 조직적인 ‘승리’를 어떻게 설명했는지 차근차근 검토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할 것이다. 강령 조안을 비판하는 틀 내에서는 이렇게 할 처지가 못 된다. 그러나 1924년 9월에 반대파에 대한 첫 번째 ‘승리’가 어떻게 생각되고 설명되었는지를 검토하는 것은 우리의 목적에 부합한다. 국제 정책 문제에 관한 데뷔 글에서 스탈린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산당 내에서 혁명적 분파의 결정적 승리는 지금 노동자계급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가장 심원한 혁명적 발전 과정의 가장 확실한 징후다.…’

    같은 글의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우리가 이것에 소련공산당 내 기회주의적 경향의 완전한 고립이라는 사실을 덧붙인다면, 그림은 완벽할 것이다. 제5차 대회는 단지 코민테른의 기초를 이루는 지부들에서 혁명적 분파의 승리를 공고히 했을 뿐이다.’(〈프라브다〉지, 1924년 9월 20일자. 트로츠키의 강조) 

    따라서 소련공산당 내 반대파의 패배는 왼쪽으로 나아가고 있던 유럽 노동자계급이 혁명을 향해 곧장 행진하고, 코민테른의 모든 지부들에서 혁명파가 기회주의자들보다 우세해지고 있었다는 사실의 결과라고 선언되었다. 국제 노동자계급이 1923년 가을에 가장 큰 패배를 겪은 뒤로 대략 5년이 지난 지금, 〈프라브다〉지는 ‘1923년의 패배 뒤에 시작되어, 독일 자본이 그 지위를 공고히 하도록 내버려둔 일정한 무관심과 실의의 물결’(〈프라브다〉지, 1928년 1월 28일자)이 이제야 사라지기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이런 경우, 우리에게는 새롭지 않지만 코민테른의 현 지도부에게는 새로운 문제가 발생한다 : 그렇다면 1923년과 뒤이은 수년 동안의 반대파의 패배는 노동자계급의 좌선회가 아니라 우선회를 통해 설명 되어야하는 것 아닌가?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은 결정적이다.

    1924년의 제5차 대회와 그 뒤 여러 글과 연설에서 제시된 대답은 분명하고 단정적이었다 : 유럽의 노동운동 내에서 혁명적 요소들의 강화, 새로운 상승 물결, 다가오는 노동자혁명―이 모든 것이 반대파의 ‘완패’를 낳았다.

    그렇지만 이제, 1923년 이후 정치적 국면이 왼쪽이 아니라 오른쪽을 향해 뚜렷하지만 장기간에 걸쳐 전환했다는 것은 이미 주지의, 일반적으로 인정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 따라서 다른 사실, 즉 반대파에 대한 투쟁이 시작되어 격화되고, 이 투쟁이 반대파를 제명하고 유형에 처할 정도로까지 고조된 것은 유럽에서 진행된 부르주아적 안정의 정치적 과정과 아주 긴밀히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도 똑같이 부정할 수 없다. 확실히 최근 4년 동안의 주요한 혁명적 사태는 이 과정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1923년 독일에서 범한 오류보다 더 쓰라린 지도부의 새로운 오류는 노동자계급과 공산당에게 있을 수 있는 최악의 조건 속에서 매번 적에게 승리를 가져다줌으로써 부르주아적 안정의 지속을 위한 새로운 원천을 만들어냈다. 국제 혁명운동은 패배를 겪었으며, 이와 함께 소련 공산당과 코민테른의 좌익적, 노동자적, 레닌주의 분파는 패배 속으로 빠져들었다.

    우리가 세계정세에서 기인하는 소련의 경제, 정치생활상의 내적 변화과정을 간과한 것은 이런 설명을 불완전하게 한다 : 즉, 신경제정책(NEP)에 근거한 모순이 증대하고 있었는데, 불균형과 산업화의 임무를 과소평가하고, 도시와 농촌 사이의 경제적 ‘노농동맹’(smychka) 문제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지도부는 계획경제 등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다. 

    유럽과 아시아 노동자혁명의 패배에 기초하여 국내에서 관료와 소부르주아 계층의 경제적, 정치적 압력이 증대했다―이것이 이 4년 동안 반대파의 목을 죈 역사적 굴레였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다.

    * * *

    이 분석에서 우리는 중요한 거의 모든 각각의 단계에서 트로츠키주의라는 명목으로 거부된 노선을 실제로 관철된 노선에 대비시켜야 했다. 일반적 측면에서 이 투쟁의 의미는 모든 마르크스주의자에게 아주 명확하다. 만약 지난 25년 동안의 실제적이거나 가공적인 수많은 인용문 제시로 보강된 ‘트로츠키주의’에 대한 간헐적이고 부분적인 비난이 일시적으로 혼동을 일으킬 수 있었다면, 이 점에서 지난 5년의 이데올로기 투쟁에 대한 응집력 있고 일반화된 평가는 두 노선이 준비되어 있었다는 사실의 증거일 것이다. 그 가운데 하나는 의식적이고 일관된 노선이었다. 이 노선은 소련의 내부 문제와 세계혁명의 문제들에 대한 적용에서 레닌의 이론적, 전략적 원칙을 확대 발전시킨 것이었고, 반대파의 노선이었다. 두 번째 노선은 무의식적이고, 모순적이며 동요하는 노선이었다. 이 노선은 국제 정치의 퇴조기에 적대적인 계급역관계의 압력을 받아 레닌주의로부터 갈지자로 퇴보한 공식 지도부의 노선이었다. 거대한 전환점에서 인간은 흔히 습관적인 말투보다도 자신의 생각을 포기하는 것이 더 쉽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는 특히 이데올로기적 색채가 바란 사람들의 일반적 법칙이다. 본질적인 점에서 거의 전부 레닌을 수정함과 동시에, 지도부는 이 수정주의를 레닌주의의 발전인 체하는 한편, 레닌주의의 국제혁명적 본질을 트로츠키주의로 간주했다. 이들은 표면상으로나 내면적으로 모두 자신을 감추기 위해서는 물론이고 자신의 퇴보 과정에 더 쉽게 적응하기 위해서도 이렇게 했다.

    이것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우리가 강령 초안에 대한 비판을 트로츠키주의의 전설을 드러내는 것과 관련지어 생각했다는 저속한 비난을 퍼 붓지 않을 것이다. 현재의 강령 초안은 이 전설로 속속들이 물든 이데올로기적 시기의 산물이다. 강령 초안의 기초자들은 이 전설의 대부분을 키운 사람들이다. 늘 이 전설로부터 시작했으며, 모든 것을 측정하는 요술지팡이로 이 전설을 이용했다. 초안 전체는 바로 이 시기를 반영한 것이다.

    정치사는 새롭고 이례적으로 교훈적인 한 장(章) 때문에 풍부해졌다. 이 장에는 신화의 힘, 아니면 더 간단하게 정치적 무기로서의 이데올로기적 비방에 대한 장이라는 제목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경험은 이 무기를 과소평가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우리가 ‘필연의 왕국에서 자유의 왕국으로의 도약’을 이루기에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우리는 여전히 반(反)계몽주의, 편견, 미신 없이는 상상할 수도 없는 계급사회에 살고 있다. 특정한 이해관계나 전통적 관습에 부합하는 신화는 항상 계급사회에서 거대한 권력을 휘두를 수 있다. 그러나 설사 신화가 계획적으로 만들어졌으며, 국가권력의 모든 자원을 임의로 쓸 수 있다고 할지라도, 이 신화에만 기초해서는 특히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는 우리 시대에는 탁월한 정책, 무엇보다도 혁명적 정책을 결코 수행할 수 없다. 신화는 불가피하게 자기모순이라는 덫에 걸려들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런 모순의 가장 중요한 부분일지도 모르긴 하지만 이미 작은 부분을 언급했다. 외부 환경이 우리의 분석을 끝까지 수행하게 내버려둘 것인지 여부와 완전 무관하게, 우리는 우리의 주체적 분석이 역사적 사태가 제공할 객관적 분석에 의해 지지될 것이라는 생각을 확고히 가지고 있다.

    최근 의회 선거에서 나타난 유럽 노동자 대중의 급진화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급진화는 이제 막 초기 단계를 통과하고 있을 뿐이다. 중국혁명의 최근 패배와 같은 요소는 급진화를 방해하며, 대체로 사회민주주의적 경로로 몰아간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과정이 가까운 장래에 어느 정도의 템포로 진행될 것인지 예측할 생각이 전혀 없다. 그러나 어쨌든 이 급진화는 공산당 쪽으로 끌리는 경향이 사회민주주의의 거대한 예비군을 희생시키면서 증대하기 시작하는 순간에만 새로운 혁명적 상황의 전조가 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아직까지는 이러한 상황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강철 같은 필연성으로 반드시 일어 날것이다.

    체제 전체를 바꾸지도 않고, 가장 경험이 풍부한 혁명적 분자들에 대한 조직적 투쟁을 그만두지도 않은 채, 키를 왼쪽으로 돌리려는 내부적으로 일치하지 않는 노력을 하고 있는 코민테른 지도부의 애매한 현재태도―이 모순적 태도는 반대파의 예측을 완전히 확증해준, 소련 내부의 경제적 어려움에 타격을 받아서만 생긴 것이 아니다. 이것은 또한 유럽 노동자 대중의 급진화의  단계에 완전히 부합하는 것이기도 하다. 코민테른 지도부 정책의 절충주의, 강령 초안의 절충주의는 말하자면, 국제 노동자계급의 현재 상황을 찍은 스냅사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국제 노동자계급은 사태발전 과정에 의해 왼쪽으로 내몰렸지만 독일 사회민주의의에 9백만 표 이상을 투표하면서 아직까지 자기 진로를 결정하지 못했다.

    그 이상의 진짜 혁명적 고양은 노동자계급 내에서, 코민테른을 포함하여 모든 노동자계급 조직들 속에서 일어날 어마어마한 재편을 의미할 것이다. 이 과정의 속도는 아직 명확하지 않지만 어느 노선을 따라 구체화가 일어날지는 확실히 분간할 수 있다. 노동자 대중은 사회민주주의로부터 공산당으로 한 부위씩 옮겨갈 것이다. 공산주의 정책의 축은 오른 쪽에서 왼쪽으로 더욱 이동할 것이다. 동시에, 1923년 말 독일 노동자계급의 패배 이후 쏟아지는 비난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시류를 거스를 수 있는 그룹에 대해 견실히 볼셰비키 노선을 지키라는 요구가 점점 더 커질 것이다.

    조작되지 않은 진짜 레닌주의 사상으로 코민테른에서 승리를 거두고, 그 결과 전 세계 노동자계급 속에서 승리를 거둘 조직적 방식은 대부분 코민테른의 현 지도부, 따라서 직접적으로는 제6차 대회에 달려 있다.
    그렇지만 이 대회의 결정이 어떠한 것이 되던―우리는 최악의 경우를 각오하고 있다―현 시대와 그 내적 경향들에 대한 전반적 평가, 특히 지난 5년간의 경험에 대한 평가는 반대파에게는 다름 아닌 코민테른이라는 수로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누구도 우리를 코민테른으로부터 떼어놓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방어하는 사상이 코민테른의 사상이 될 것이다. 이 사상은 코민테른의 강령에서 그 모습을 나타낼 것이다.

     

    3장 I 중국혁명의 개괄과 전망 
    동방의 나라들과 코민테른 전체를 위한 그 교훈


    볼셰비키주의와 멘셰비키주의, 독일의 좌익과 국제 사회민주주의는 1905년 혁명의 경험, 오류, 경향에 대한 분석에서 명확히 구체화되었다. 오늘날 국제 노동자계급에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중국혁명의 경험에 대한 분석이다.

    그렇지만 이 분석은 시작되지도 않았다.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공식 문헌은 허둥지둥 사실에 맞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결의문을 고르는 일에 착수했다. 이로써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불성실함이 완전히 드러났다. 강령 초안은 가능하면 가장 첨예한 중국 문제의 핵심을 무디게 한다. 그러나 중국 문제에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가 따른 치명적 노선의 요지를 승인한다. 거대한 역사적 과정에 대한 분석은 파산한 도식에 대한 문필적 방어로 대체되어 있다.


    1. 식민지 자본가계급의 본질에 대하여

    강령 초안은 이렇게 밝히고 있다 : ‘[식민지 민족 자본가계급과의] 일시적 협정은 자본가계급이 노동자 농민의 혁명적 조직을 방해하지 않고, 진정한 반(反)제국주의 투쟁을 수행하는 한에서만 받아들일 수 있다.’ 설사 심사숙고하여 부수적인 제안으로 덧붙인다고 하더라도 이 정식은 어쨌든 동방의 나라들을 위한 초안의 중심적 선결조건 가운데 하나이다. 물론 주요한 제안은 ‘민족 자본가계급의 영향력으로부터 [노동자 농민의] 해방’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입문서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게다가 경험에 기초하여 평가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 여기서 주요한 제안은 단지 부수적 제안에 지나지 않은 반면에, 부수적 제안은 가장 본질적인 것을 담고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동방의 노동자계급에게 이 정식은 전형적인 멘셰비키적 올가미다.

    여기서 ‘일시적 협정‘이 의미한 것은 무엇인가? 자연에서와 마찬가지로 정치에서도 모든 것이 ‘일시적이다.’ 우리가 여기서 검토하고 있는 것이 혹시 이번부터 다음번까지의 순전히 실무적인 협정인가? 우리가 매번 아주 명확한 목적에 기여하는 엄격하게 범위를 정한 협정이나, 실무에 한정된 그런 협정을 미리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를테면, 반(反)제국주의 시위를 조직하거나, 외국 조차지의 파업자를 위해 중국 상인들의 도움을 얻으려고 국민당의 청년 학생과 맺는 협정 같은 경우가 그렇다. 이러한 경우는 중국에서도 앞으로 결코 배제되지 않는, 그러나 이 경우에 왜 여기서 ‘자본가계급이 노동자 농민의 혁명적 조직을 방해하지 않고, 진정한(!) 반(反)제국주의 투쟁을 수행하는 한, …’이라는 일반적인 정치적 조건이 제시되는가? 자본가계급과의 모든 협정, 즉 주어진 각각의 경우에 적합한 서로 연관이 없고, 실무적이며, 편의주의적인 협정의 유일한 ‘조건’은 조직이나 깃발이 단 하루나 단 한 시 간도 직간접적으로 뒤범벅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것에 있다. 또한 빨강과 파랑을 구별하고, 진정한 반(反)제국주의 투쟁을 이끌거나 노동자 농민을 방해하지 않는 자본가계급의 역량 또는 준비성을 일순간도 믿지 않는 것에 있다. 실무적이며, 편의주의적인 협정을 위해 앞서 인용한 것과 같은 조건은 전혀 쓸모가 없다. 거꾸로 이러한 조건은 짧은 ‘협정’ 기간 중에도 중단할 수 없는 우리의 반(反)자본주의 투쟁에 대한 일반적 노선에 위배되는 것으로, 우리에게 해를 입힐 수밖에 없다. 오래 전에 말한 것처럼, 우리를 전혀 구속하지 않고, 우리에게 정치적으로 그 어떤 것도 강요하지 않는 그런 순전히 실무적인 협정은 해당 시기에 유리하다면, 악마와도 맺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 악마에게 통상 기독교로 개종해야 되고, 그 뿔을 노동자 농민에 대해서가 아니라 칭찬할 만한 행위에만 사용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일 것이다. 이러한 조건을 제시하는 것은 우리가 실제로 악마의 옹호자로 처신하는 것이며, 그의 후견인이 되게 해달라고 악마에게 구걸하는 것이다.

    미리 자본가계급을 격찬하는 구실을 하는 터무니없는 조건에 따라 강령 초안은 (그 테제의 외교적이고 부수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분명하고 확실하게 밝히고 있다 : 여기에 관련된 것은 바로 장기적인 정치블록이지, 실제적 이유와 엄격히 제한된 실제적 목표가 필요한 특수한 경우의 협정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 자본가계급이 ‘진정한‘ 투쟁을 수행하고, 노동자를 ‘방해하지 않는다’는 요구가 의미한 것은 무엇인가? 이런 조건을 자본가계급에게 제시하고, 이들의 공적인 약속을 요구하는 것인가? 자본가계급은 당신이 원하면 어떠한 약속도 할 것이다! 자본가계급은 ‘동조적인’ 당으로 코민테른에 들러붙어 농민인터내셔널에 가입하고, 심지어 적색노동조합인터내셔널 안을 들여다볼 자신의 대의원을 모스크바에 파견할 것이다. 요컨대, 노동자 농민을 더 효과적으로, 더 손쉽게, 더 완벽하게 속일 기회(우리의 도움을 포함하여)를 줄 것은 무엇이든 약속할 것이다―기회가 닿을 때까지 상해에서 시도된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지금, 다시 말하지만, 이렇게 노동자 대중 앞에서 우리를 자신의 보증인으로 둔갑시킬 목적으로 즉시 동의할 자본가계급에게 정치적 의무를 강요하는 문제가 아니잖은가? 선험적인 ‘사회학적’ 예측, 말하자면, 투쟁하고 방해하지 않을 역량이 있는 전문가인 해당 민족 자본가계급에 대한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평가가 지금의 문제인가? 유감스럽게도 가장 최근의, 그리고 가장 새로운 경험이 증명하는 것처럼, 이러한 선험적 예측은 대체로 전문가를 바보로 만든다. 그리고 이들만이 관련된 경우라면, 그렇게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

    원문이 다루고 있는 문제가 바로 장기적인 정치블록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추호도 의심할 수 없다. 임시적인 실무협정 문제를 강령에 포함시키는 것은 전적으로 불필요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무미건조한 전술적 결의문 ‘우리의 현재 임무에 대하여’ 하나면 족할 것이다. 이 결의문은 제2차 중국혁명을 파멸시킬 운명이었으며, 미래의 혁명을 파괴시킬 수 있는 국민당에 대한 어제의 태도를 정당화하고 강령적으로 승인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초안의 실제 기초자인 부하린이 제시한 견해에 따르면, 모든 관심을 두어야 할 곳은 바로 식민지 자본가계급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이다. 투쟁 역량이 있고 방해하지 않는 식민지 자본가계급은 자신의 맹세가 아니라 엄격한 ‘사회학적’ 방식으로, 즉 기회주의적 목적에 적합한 수많은 현학적 도식에 의해 검증되어야한다는 것이다.

    이를 좀 더 분명히 하기 위해 식민지 자본가계급에 대한 부하린의 평가로 되돌아가보자. 식민지혁명의 ‘반(反)제국주의적 내용’을 인용하고 나서 (어떠한 변명도 하지 않은 채) 레닌을 인용하겠다. 부하린은 이렇게 선언한다.

    중국의 자유 자본가계급은 객관적으로 몇 달이 아니라 여러 해에 걸쳐서 혁명적 역할을 했다. 그래서 이 계급이 지칠 대로 지쳤다. 이것은 1905년 러시아의 자유주의 혁명 유형의 ‘24시간’짜리 정치적 휴가가 결코 아니었다.

    이 모든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틀렸다.

    레닌은 실제로 피억압 민족과 부르주아 압제민족을 엄격하게 구별하라고 가르쳤다. 이로부터 이례적으로 중요한 결론이 나온다. 이를테면, 제국주의 국가와 식민지 국가의 전쟁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그것이다. 평화주의자에게 이러한 전쟁은 다른 전쟁과 마찬가지다. 공산주의자에게 제국주의 국가에 대한 식민지 국가의 전쟁은 부르주아 혁명전쟁이다.

    따라서 레닌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특히 러시아 1905년 혁명의 수준에서 민족해방운동, 식민지 봉기, 피억압 민족의 전쟁을 제기했다. 그러나 레닌은 현재 180도로 돌변한 부하린이 한 것처럼, 결코 민족해방 전쟁을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위에 두지 않았다. 레닌은 피억압 부르주아 국가와 부르주아 압제국가의 차이를 강조했다. 그러나 레닌은 마치 민족해방투쟁 중에 있는 식민지 또는 반伴)식민지 국가의 자본가계급이 틀림없이 민주주의 혁명 중에 있는 비(非)식민지 국가의 자본가계급보다 더 진보적이며, 더 혁명적인 것처럼 어디서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으며, 또 제기할 수도 없었다. 이것은 이론에서 나온 것이 결코 아니다. 이것에 대한 역사상의 증거도 없다. 예를 들면, 러시아의 자유주의처럼 비참하고, 그 좌익의 절반인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 사회혁명당, 멘셰비키처럼 잡종이었다고 하더라도 중국의 자유주의와 중국의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더 높은 수준이었다거나 그 러시아 원형보다 혁명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민족자본가계급의 혁명적 성격이 마치 식민지 억압에서 불가피하게 나올 수밖에 없는 것처럼 사태를 묘사하는 것은 멘셰비키주의의 근본적 오류를 뒤집어 재연하는 것이다. 멘셰비키주의는 러시아 자본가계급의 혁명적 성격이 봉건주의와 전제주의의 억압에서 나온다고 생각했다.

    자본가계급의 본질과 정책에 대한 문제는 혁명투쟁을 수행하는 민족의 내적 계급구조 전체에 의해 결정된다. 또한 혁명투쟁이 발전하는 역사적 시기, 세계 제국주의 전체 또는 그 특정 분파에 대한 민족 자본가계급의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 의존 정도, 마지막으로, 그리고 이것이 가장 중요한데, 토착 노동자계급의 계급적 행동 정도와 이 계급의 국제 혁명 운동과의 결합상태에 의해 결정된다.

    민주적 또는 민족적 해방운동은 자본가계급에게 그 착취 가능성을 강화 확대시킬 기회를 제공할지도 모른다. 혁명 전장(戰場)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독자적 개입은 자본가계급이 착취할 가능성 전체를 빼앗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것이다.

    몇몇 사실을 좀 더 면밀히 관찰해보자.

    현재 코민테른을 부추기는 자들은 케렌스키가 제국주의자들과 협력으로 나아간 반면에, 장개석은 ‘반(反)제국주의’ 전쟁을 수행했다고 끈질기게 반복하고 있다. 그런고로 케렌스키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투쟁해야 했지만, 장개석은 지지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케렌스키주의와 제국주의의 유대는 논란의 여지가 없었다.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가 러시아 자본가계급이 영국과 프랑스 제국주의의 찬성을 얻어 니콜라이 2세를 ‘폐위’시켰다는 것을 지적할 수도 있다. 밀류코프-케렌스키는 로이드조지-푸앵카레가 수행한 전쟁을 지지했을 뿐만 아니라 로이드조지-푸앵카레도 먼저 짜르에 대한, 그리고 나중에는 노동자농민에 대한 밀류코프-케렌스키의 혁명을 지지했다. 이것은 절대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런 점에서 중국의 상황은 어떠했는가? 중국의 ‘2월’혁명은 1911년에 일어났다. 이 혁명은 비록 제국주의자들의 직접적인 참여로 이루어지긴 했지만, 거대하고 진보적인 사건이었다. 손문(孫文, Sun Yat-sen)은 회고록에서 자신의 조직이 모든 일에서 얼마나 일본, 프랑스, 미국 등 제국주의 국가의 ‘지지’에 의지했는지 이야기하고 있다. 1917년에 케렌스키가 계속 제국주의 전쟁에 참전했다면, 대단히 ‘민족적’이고, 대단히 ‘혁명적’인 중국의 자본가계급은 협상국이 중국의 해방을 도울 것이라는 희망으로 윌슨의 전쟁 개입을 지지했다.

    1918년에 손문은 협상국 정부들에 중국의 경제적 발전과 정치적 해방을 원하는 자신의 계획을 전했다. 청(淸) 왕조에 대항하는 투쟁에서 중국의 자본가계급이 짜르체제에 대항하는 투쟁에 나선 러시아 자본가계급보다 더 빼어난 혁명적 자질을 보여주었다는 주장은 아무런 근거도 없다. 또한 제국주의에 대한 장개석과 케렌스키의 태도 사이에 원칙적 차이가 있다는 주장도 근거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그래도 장개석은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전쟁을 수행했다고 말한다. 이런 식으로 상황을 묘사하는 것은 사실의 외양을 너무 조잡하게 꾸미는 것이다. 제국주의 열강들 가운데 하나의 대리인인 장개석은 중국의 특정 군벌에 대항하는 전쟁을 수행했다.

    이것은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전쟁을 수행하는 것과 결코 같지 않다. 담평산(譯平山, Tang Ping-shan)도 이를 이해했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제7차 전원회의 보고에서 담평산은 장개석이 이끈 국민당 중앙의 정책을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국제정책 분야에서는 그 말의 완전한 의미에서 볼 때, 수동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 국민당은 영국 제국주의에 대항해서만 싸우고 싶어 한다. 그렇지만 일본 제국주의자들에 관한 한, 특정 조건 아래에서 이들과 타협할 준비가 되어 있다.(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제7차 전원회의 회의록, 제1권, 406쪽)

    제국주의에 대한 국민당의 태도는 처음부터 혁명적이 아니라 완전히 기회주의적이었다. 국민당은 중국 자본가계급에게 더 유리한 조건에 같은 또는 다른 제국주의 열강들과 협정을 맺기 위해 특정 제국주의 열강의 대리인들을 분쇄하고 고립시키려고 애썼다. 이것이 전부다. 그러나 핵심은 문제에 대한 정식 전체가 틀렸다는 사실에 있다.

    제국주의 ‘일반’에 대한 해당 민족 자본가계급 모두의 태도가 아니라 자국의 당면한 혁명적 역사적 임무에 대한 이 계급의 태도를 측정해야 한다. 러시아 자본가계급은 제국주의 압제국가의 자본가계급이었다. 중국의 자본가계급은 피억압 식민국가의 자본가계급이다. 봉건적 짜르체제의 타도는 구 러시아에서 진보적인 임무였다. 중국에서 제국주의의 굴레를 타도하는 것은 진보적인 역사적 임무이다. 그렇지만 제국주의, 노동자계급, 농민에 대한 중국 자본가계급의 행동은 짜르체제와 혁명적 계급에 대한 러시아자본가계급의 태도보다 더 혁명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더 비열하고 더 반동적이었다. 이것이 문제를 제기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중국의 자본가계급은 충분히 현실적이고, 실제로 세계 제국주의에 맞서는 진지한 투쟁은 주로 자본가계급 자신에 대한 위협이 될 혁명적 대중의 격변 같은 것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이해할 정도로 세계 제국주의의 본질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만약 청 왕조에 대한 투쟁이 짜르체제의 타도보다 더 작은 역사적 비중의 임무였다면, 세계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은 훨씬 더 큰 규모의 임무이다. 그리고 우리가 짜르체제를 타도하고 봉건주의를 파괴하려는 자유주의의 준비성과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능력을 믿지 말라고 처음부터 러시아 노동자를 가르쳤다면, 우리는 처음부터 정력적으로 중국 노동자를 똑같은 불신감으로 속속 물들였을 것이다. 식민지 자본가계급의 ‘내재적인’ 혁명적 기질에 대해 스탈린-부하린이 퍼뜨린 생소하고 완전히 잘못된 이론은 본질적으로 중국 정치의 용어로 바꾸어놓은 멘셰비키주의이다. 이것은 억압받는 중국의 처지를 중국 자본가계급의 내적인 정치적 덤으로 바꾸는 데 기여할 뿐이다. 또한 3중으로 억압받는 중국 노동자계급에게 자본가계급의 짐을 추가로 지우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강령 초안의 기초자인 스탈린과 부하린은 장개석의 북벌이 노동자와 농민대중 사이에서 강력한 운동을 불러 일으켰다고 말했다. 이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구치코프(Guchkov)와 슬긴(Shulgin)이 니콜라이 2세의 퇴위각서를 페테르부르크로 가져온 사실이 혁명적 역할을 하지 않았는가? 이것이 대중의 가장 핍박받는, 피폐한, 겁이 많은 계층을 일깨우지 않았는가? 얼마 전에는 트루도비키(Tmdovik)였지만 각료회의 의장과 총사령관이 된 케렌스키가 병사 대중을 고무하지 못했는가? 이런 사실이 병사 대중을 집회장으로 이끌지 못했는가? 또 농촌이 지주에 대항하여 일어서도록 고무하지 못했는가? 한층 더 광범하게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었다. 《공산당선언》의 표현을 쓰자면, 자본주의의 전체적 활력이 대중을 고무하지도 못하고, 우매한 농촌 생활에서 대중을 구제하지도 못했는가? 또한 노동자부대로 하여금 투쟁에 나서도록 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자본주의 전체 또는 특히 자본가계급의 특정 행동의 객관적 역할에 대한 우리의 역사적 평가가 자본주의 또는 자본가계급의 행동에 대한 능동적 계급의 혁명적 태도를 대신할 수 있는가? 기회주의 정책은 언제나 이런 비(非)변증법적이고, 보수적이며, 추수주의적인 ‘객관주의’에 기초해 있다. 거꾸로 마르크스주의는 노동자 전위가 자본가계급에 대해서 더 독자적 일수록, 또 자본가계급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거나, ‘공동전선’이나 반(反)제국주의 투쟁에 대한 그 준비성이나 혁명적 정신을 과대평가하거나, 자본가계급의 턱 사이에 자신의 손가락을 두려고 하지 않을수록, 자본가계급이 그 위치 때문에 하지 않을 수 없는 이런저런 행동의 혁명적 결과가 더 풍성해지고, 더 결정적이게 되며, 덜 의심스럽고, 더 확고해질 것이라고 늘 가르쳤다.

    식민지 자본가계급에 대한 스탈린주의와 부하린주의의 평가는 이론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또 정치적으로도 비판을 견딜 수 없다. 그러나 이미 살펴본 것처럼, 강령 초안이 신성시하려는 것이 바로 이런 평가다.

    * * *

    드러나지 않고 비난받지 않은 오류는 언제나 또 다른 오류에 이르거나, 아니면 이를 위한 기초를 닦는다.

    어제의 중국 자본가계급이 혁명적 공동전선에 편입했다면, 오늘의 중국 자본가계급은 ‘분명히 반(反)혁명 진영으로 넘어갔다’고 선언될 것이다. 진지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도 한번 없이 순전히 행정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 이런 편입과 변질이 얼마나 근거 없는 것인지 들춰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자본가계급이 혁명 진영에 합류하는 것은 경솔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독자적인 계급이해 때문이지 무심결에 그러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도 자명하다. 따라서 대중을 두려워하는 자본가계급은 혁명을 유기하거나 혁명에 대해 숨겨온 자신의 증오심을 공공연히 드러낸다. 그러나 자본가계급은 ‘분명히 반(反)혁명 진영으로’ 넘어갈 수 있다. 즉, 그 근본적인 계급적 열망이 혁명적 수단이나 다른 방법(이를테면, 비스마르크처럼 강경한 방법)으로 만족한 경우에만, 다시 한 번 혁명을 ‘지지’, 아니 적어도 불장난할 필요성에서 벗어날 수 있다. 1848~71년 시기의 역사를 상기해보자. 러시아 자본가계급은 혁명이 단지 국가두마, 즉 관료집단에 직접적인 압력을 가해 협정을 맺을 수 있게 하는 수단을 부여했기 때문에 기탄없이 1905년 혁명에 등을 돌릴 수 있었다는 것을 상기해보자. 그렇다 하더라도 1914~17년 전쟁이 자본가계급의 기본적 이해를 지키기 위한 ‘현대화된’ 체제의 무능력을 폭로하자, 자본가계급은 다시 혁명 쪽으로 방향을 바꿨으며, 이번에는 1905년보다 더 급격했다.

    누가 중국의 1925~27년 혁명이 적어도 부분적으로 중국 자본주의의 기본적 이해를 만족시켰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오늘날 중국은 1925년 이전과 마찬가지로 정말 실질적인 민족적 단결과 관세 자주권에서 동떨어져 있다. 그러나 통합된 국내시장의 창출과 값싼 외국상품으로부터 국내시장의 보호는 중국 자본가계급에게 사활이 걸린 문제이다. 이 문제는 노동자계급과 빈농에 대한 계급지배의 기초를 유지하는 것에 버금간다. 그러나 일본이나 영국 자본가계급에게 중국의 식민지 지위 유지는 마찬가지로 중국 자본가계급에게도 경제 자주권 못지않게 중요한 문제이다. 이런 이유로 중국 자본가계급의 정책에서 왼쪽으로 향한 지그재그가 적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민족공동전선’을 예찬하는 자들의 많은 유혹이 있을 것이다. 오늘날 중국 공산주의자들에게 1924년부터 1927년 말까지 자본가계급과 맺은 동맹은 옳았지만 이제 자본가계급이 분명히 반(反)혁명 진영으로 넘어갔기 때문에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말 하는 것은 다시 한 번 다가오는 상황의 객관적 변화와 불가피한 중국 자본가계급의 왼쪽으로 향한 지그재그에 직면해 있는 중국 공산주의자들을 무장해제시키는 것이다. 이제 전쟁은 이미 강령 초안 기초자들의 기계적 도식을 완전히 뒤집어엎은 장개석의 북벌에 의해 수행되고 있다.

    * * *

    그러나 우리의 마음속에 아직도 생생하고, 적지 않은 중요성을 가진 사실, 다시 말해서 짜르 러시아가 억압 민족과 피억압 민족, 즉 대 러시아인과 완전히 식민지 또는 반(半)식민지 지위에 있던 수많은 ‘이방인들’의 조합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문제에 대한 공식적 설명의 원칙적 오류가 더 역력하게, 더 설득력 있게, 더 명백하게 드러날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레닌은 짜르 러시아 인민의 민족문제에 가장 큰 주의를 기울일 것을 요구했을 뿐만 아니라 (부하린 등에 반하여) 자결권과 나란히 분리권을 포함하는 피억압 민족의 투쟁을 지지하는 것은 지배민족 노동자계급의 기초적 의무이기도 하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당은 이것으로부터 짜르체제에 억압받는 민족(폴란드인, 우크라이나인, 타타르인, 유태인, 아르메니아인 등)의 자본가계급이 러시아 자본가계급보다 더 진보적이고, 더 급진적이며, 더 혁명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역사적 경험은 폴란드 자본가계급―전제주의의 속박과 민족적 억압을 받았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이 러시아 자본가계급보다 더 반동적이며, 국가두마에서 언제나 입헌민주당이 아니라 10월당 쪽으로 끌렸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

    같은 사실이 타타르 자본가계급에게도 적용된다. 유태인은 정말 아무런 권리도 없었다는 사실도 유태인 자본가계급이 러시아 자본가계급보다 훨씬 더 겁이 많고, 더 반동적이며, 더 비열해지는 것을 막지 못했다. 아니면 에스토니아인, 레트인, 그루지야인, 아르메니아인 자본가계급이 대 러시아인 자본가계급보다 더 혁명적이었을 것인가? 누가 이러한 역사적 교훈을 잊을 수 있는가!

    아니면 사태가 지난 지금, 볼셰비키주의가―분트(Bund)[분트의 정식 명칭은 리투아니아/폴란드/러시아의 유태인 노동자조합이다.-옮긴이], 아르메니아 혁명연합(Dashnakes), 폴란드사회당(PPS), 그루지야와 다른 지역의 멘셰비키와는 대조적으로―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터지려는 바로 그때, 모든 피억압 민족과 짜르 러시아의 식민지 노동자들에게 자유주의 자본가계급뿐만 아니라 혁명적 소부르주아 정당들과의 모든 조직적 관계를 끊고, 분리하여 자신만의 자주적인 계급조직을 만들고, 이런 정당들에 맞서 투쟁으로 노동자계급을 획득하고, 노동자들을 통해 농민에게 미치는 이 정당들의 영향력에 맞서 싸우라고 촉구한 것이 잘못이었다고 인정해야 하는가? 이 점에서 우리가 ‘트로츠키주의적’ 오류를 범하지 않았는가? 이런 피억압민족, 그리고 많은 경우 아주 후진적인 민족들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국민당에 상응하는 발전 단계를 뛰어넘지 않았는가?

    실제로 폴란드사회당, 아르메니아혁명연합, 분트 등이 전제주의와 민족적 억압에 대항하는 투쟁에서 필수적인 다양한 계급의 협력을 위한 ‘독특한’ 형태였다는 이론을 어떻게 쉽게 만들어낼 수 있는가! 이러한 역사적 교훈을 어떻게 잊을 수 있는가?

    마르크스주의자에게 지난 3년의 중국사태―그리고 이것은 지금 심지어 장님도 분명히 알 수 있어야 한다―이전에도 중국의 국내 상황에서 결정적 요인인 외국 제국주의가 중국의 밀류코프와 케렌스키를 결국 그 러시아 원형보다 훨씬 더 비열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우리 당이 발표한 맨 처음 선언이 자본가계급이 더 저급하고 더 비열해지는 더 먼 동쪽으로 갈수록 더 큰 임무가 노동자계급에게 떨어진다고 선언한 것은 이유가 없지 않다. 이 역사적 ‘법칙’은 중국에도 완전히 적용된다.

    청산주의자 진영의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정치인은 우리의 혁명이 부르주아 혁명이고, 노동자는 자본가계급을 지지해야 한다고 말한다. 마르크스주의자인 우리도 우리의 혁명이 부르주아 혁명이라고 말한다. 노동자는 부르주아 정치인의 사기에 대해 인민이 알게 해야 한다. 이들의 약속을 믿지 말 것과 오직 자신의 힘, 자신의 조직, 자신의 단결, 자신의 무기만을 믿으라고 가르쳐야한다.(레닌, 《전집》, 제14권 1부, 11쪽)

    이 레닌주의 테제는 동방 전체에 필수적인 것이다. 반드시 코민테른의 강령에서 찾아볼 수 있어야 한다.


    2. 중국혁명의 단계

    국민당의 첫 번째 단계는 민족 자본가계급이 '4계급 블록'을 옹호하는 꼬리표를 달고 지배한 시기였다. 장개석의 쿠데타 뒤인, 두 번째 단계는 '좌익' 왕정위의 무한(武漢)정부 형태로 중국의 케렌스키주의가 유사하면서도 '독자적인' 지배를 실험한 시기였다. 멘셰비키와 함께 러시아인민주의자들(Narodniks)이 자신의 단명한 '독재'로 공개적인 이중권력을 형성하는데 일조한 반면에, 중국의 '혁명적 민주주의'는 아직 이 단계에 이르지도 못했다. 역사일반이 명령으로 작동하지 않는 한, 우리에게는 1925년 이후 국민당이 휘두른 독재 외에는 다른 어떤 '민주주의 독재'도 없으며, 또 없을 것임을 이해하는 것만 남는다. 마찬가지로 이것은 국민당이 성취한 중국의 반(半)통일이 조만간 지지를 받든, 다시 나라가 분리 되든 지와 무관하게 사실로 남는다. 그러나 자신의 다른 모든 자원을 소비하고 나서 혁명의 계급적 변증법이 도시와 농촌의 억압받는, 권리를 빼앗긴 수많은 인민들을 지도할 노동자계급의 독재를 명확히, 그리고 결정적으로 일정에 올린 바로 그때,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노동자 농민의 민주주의(즉, 부르주아 민주주의) 독재 슬로건을 제기했다. 이 상투적 처방에 대한 답이 광동備東)봉기였다. 광동봉기는 미성숙, 지도부의 모험주의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단계, 아니 더 정확히는 다가오는 제3차 중국혁명의 막을 걷어 올렸다. 이 점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있다.

    자신의 과거 죄악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려고 하는 지도부는 작년 말에 극악무도하게 사태를 밀어붙였으며, 광동봉기를 유산시켰다. 그렇지만 이 유산조차 우리에게 어머니라는 유기체와 잉태과정에 관해 많은 것을 가르쳐줄 수 있다. 이론의 관점에서 볼 때, 중국혁명의 근본적 문제들에서 광동사태가 갖는 엄청나고, 정말로 결정적인 의의는 바로 우리가 지금 사실상 거대한 규모로 실시되고 있는 실험실에서의 실험인 역사와 정치에서 보기 드문 현상을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을 조건으로 한다. 우리는 이것에 큰 대가를 치렀지만,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만큼 더 그 교훈을 잘 흡수하게 한다.

    〈프라브다〉지(제31호)지의 설명에 따르면, 광동봉기의 전투적 슬로 건 가운데 하나는 '국민당을 타도하라!'는 함성이었다. 국민당의 깃발과 휘장은 찢겼으며, 짓밟혔다. 그러나 장개석의 '배신'과 뒤이은 왕정위의 '배신'(자기 계급에 대한 배신이 아니라 우리의 … 환상에 대한 배신) 뒤 에도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엄숙한 서약을 발표했다 : '우 리는 국민당의 깃발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광동의 노동자는 국민당의 모든 성향을 불법이라고 선언하면서 국민당을 금지시켰다. 이것은 기본적인 민족적 임무를 해결하기 위해 대자본가계급은 물론이고 소부르주아 계급도 노동자계급의 당과 함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과제를 해결할 수 있을 정치세력, 당 또는 분파도 만들어낼 수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국면을 지배하는 열쇠는 바로 빈농의 운동을 획득하는 임무가 이미 전적으로 노동자계급의 어깨 위에 떨어졌으며, 따라서 직접적으로는 공산당에게 떨어졌다는 사실에 있다. 그리고 혁명의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과제를 진정으로 해결하는 길은 노동자계급의 수중으로 모든 권력을 집중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프라브다〉지는 단명한 광동소비에트정부의 정책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실었다.

    '노동자를 위해 광동 소비에트는 공장위원회를 통해 산업에 대한 노동자 통제를 수립하고 … 대기업, 운송, 은행 에 대한 국유화 포고령을 공표했다.'

    이러한 조치에서 더 나아가 '… 노동자들을 위한 모든 대자본가계급의 가옥몰수' 같은 조치도 언급했다.
    따라서 권력을 장악한 것은 광동의 노동자였으며, 더욱이 그 정부는 실제로 공산당의 수중에 있었다. 새로운 국가권력의 강령은 광동성 전체에 걸친 모든 봉건재산의 몰수, 생산에 대한 노동자 통제의 수립뿐만 아니라 대기업, 은행, 운송의 국유화, 심지어 노동자들을 위해 자본가의 집과 모든 재산을 몰수하는 것이었다. 이런 의문이 든다: 만약 이런 것이 부르주아 혁명의 방식이라면, 중국의 노동자혁명은 어떨 것 같은가?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지시가 노동자 독재나 사회주의적 조치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며, 광동이 상해, 한구(漢沽)나 다른 산업 중심지보다 소부르주아적 성격이 더 짙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국민당에 대항하여 일어난 혁명적 전복은 자동적으로 첫 단계 에서부터 상황 전체가 10월혁명이 시작한 것보다 더 급진적인 조치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음을 깨달은 노동자계급의 독재로 이어졌다. 따라서 그 역설적 등장에도 불구하고 이 사실은 혁명의 전체적 발전에서뿐만 아니라 중국의 사회관계 에 서도 아주 합법적으로 나온다.

    (예컨대, 중국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대규모나 중간 규모의 지주계급은 외국자본을 포함하여 도시자본과 매우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중국에서 자본가계급에 대항하는 봉건 지주계급은 없다. 농촌에서 가장 일반적이고, 공통적이며, 미움을 받는 착취자는 도시 금융자본의 하수인인 쿨락-고리대금업자다. 따라서 토지혁명은 그 성격에서 반(反)부르주아적인 만큼이나 반(反)봉건적이다. 중국에서는 쿨락이 지주에 대항하여 흔히 그 선두에 서서 중농, 빈농과 함께 나아간 우리 10월혁명의 첫 번째 단계와 같은 단계는 사실상 없을 것이다. 중국의 토지혁명은 그 결과가 뜻할 것처럼, 처음부터 소수의 진짜 봉건지주와 관료집단뿐만 아니라 쿨락과 고리대금업자에게도 대항하여 일어날 봉기를 의미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빈농위원회가 10월혁명의 두 번째 단계인 1918년 중반에야 무대에 나타났다면, 반대로 중국에서는 토지혁명이 다시 기운을 차리자마자 이런저런 형태로 무대에 나타날 것이다. 부농에 대한 공세는 중국 10월혁명의 두 번째 단계가 아니라 첫 번째 단계에 나타날 것이다.

    그렇지만 토지혁명은 현재 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역사적 투쟁의 유일한 내용이 아니다. 토지의 일괄 분배(당연히 공산당이 끝까지 지지 할 토지혁명)라는 가장 극단적인 토지혁명은 그것만으로는 막다른 골목에 이른 경제의 탈출구가 되지 못할 것이다. 중국은 바로 민족적 단결과 경제적 주권, 즉 전통적인 자주성, 더 정확히는 대외무역의 독점을 절실히 필요로 한다. 따라서 이것은 세계 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제국주의 에게 중국은 여전히 오늘의 유럽 자본주의와 내일의 미국 자본주의의 내적 폭발에 대한 안전판을 이루면서, 제국주의의 강화와 현존을 위한 가장 중요한 미래의 자원인 것이다. 이것이 중국의 대중이 직면하고 있는 투쟁의 거대한 범위와 엄청난 격렬함을 미리 결정한다. 그만큼 더 이제는 투쟁 기류의 농도를 빨리 측정했으며, 투쟁 참가자 모두가 느꼈다.

    중국 산업에서 차지하는 외국자본의 거대한 역할과 그 약탈을 지키기 위해 '자국'의 무력에 직접적으로 의존하는 방식[중국에 대한 총 외국인 투자는 1931년 현재, 33억 달러로 추정되었다. 이 가운데 78.1%는 기업과 무역회사에 직접 투자되었으며, 21.9%는 중국정부에 차관으로 제공되었다. 외국자본은 중국 면직업의 거의 절반을 통제했다. 또한 철도에 총 6억4,130만 달러를 투자함에 따라 중국 철도의 약 3분 의 1을 직접 통제하고, 나머지에 대해서는 2억 달러 이상의 저당권을 갖고 있었다. 외국 선박은 중국 해외/연안무역의 81.31%를 운반했다. 무역 수치는 1902년 이후 총 30억 달러 이상의 무역역조를 보여준다. 19세기의 아편무역으로 인해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엄청난 양의 은이 유출되었다.(C. F. Remer: Foreign Investments in China, 뉴욕, 1933년, 58쪽; H. D. Fong: Cotton Industry and Trade In China, 북경, 1932\i; H. D. Fong: China's Industrialization, 1931\i; China Year Book을 보라) 제 1차 세계대전 직전에 러시아에 대한 총 외국인 투자가 38억8,200만 달러였다는 것은 흥미 있는 일이다. 제국주의 열강들은 이런 투자를 보호하기 위해 1927년에 미국, 영국,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는 총 11,880명에 이르는 해군과 병사들을 주둔시켰다. 또한 미국, 영국,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 함대가 연안과 강을 순찰하면서 정기적으로 주둔했다. 여기에는 순양함, 항공모함, 구축함, 잠수함, 포함이 들어 있었다. 또한 외국 조차지에는 다수의 경찰병력이 있었다. 이런 세력이 1926-27년 중에 모두 증강되었다.]은 중국에서 노동자 통제 강령의 실현 가능성을 우리나라에서보다 더 낮게 만든다. 먼저 외국자본주의 기업, 그 다음에 중국 자본주의 기업에 대한 직접적 몰수는 십중팔구 봉기가 승리를 거둔 뒤 어느 날, 투쟁 경과에 따라 피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러시아혁명의 "10월' 성과를 미리 결정지은 이런 객관적인 사회-역사적 원인이 중국에서는 더욱 더 두드러진 형태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한편으로, 중국의 자본가계급은 외국 제국주의와 그 군사기구에 직접적으로 의존해 있고, 다른 한편으로, 중국의 노동자계급은 처음부터 코민테른, 소비에트연방과 긴밀한 유대를 맺어왔기 때문에 중국민족의 양극인 자본가와 노동자는 적어도 러시아에서 그랬던 것보다 훨씬 더 비타협적으로 서로 대치해 있다. 중국 농민은 수적으로 러시아 농민보다 훨씬 더 압도적인 다수를 이루고 있다.[출처가 분명하고 완전한 중국의 인구통계가 없어서 추정이나 부분적인 연구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1931년에 9성(省), 29개 시(市)의 공장노동자수는 총 1,204,318명이었다. 운수, 부두, 건설, 탄광 노동자를 포함한 다른 추정은 총 275만 명을 제시했다. 노동자계급과 반(半)노동자계급을 합쳐 약 1, 500만 명에 가까운 1927년에 중국 전역에 걸쳐 수공업자, 잡 노동에 종사하는 하급 노동자, 심부름꾼, 상점직원, 견습생, 직공은 1,196만 명으로 추정되었다. 이는 1905년에 러시아의 공장 인구가 약 1천만 명으로 추정된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저명한 농업경제학자인 진한생(陳翰空)은 전체 인구 가운데 4분의 3을 이루는 농민의 계급 분열에 대해 가장 뛰어난 추정과 연구를 수행했다. 그는 남부의 대표적인 광동지역에서 인구의 74%가 빈농이며, 이들이 토지의 19%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중국 중부의 무석(無親)에서는 전체의 68.9%가 빈농가였으며, 토지의 14.2%를 보유했다. 북부의 보정(保定)에서는 빈농이 65.2%였으며, 25.9%의 토지를 보유했다. 진 교수는 중국 농업 인구의 65%가 토지 기근에 시달렸다고 간주한다. 관련 통계표와 다른 추정은 Chen Han-seng, The Present Agrarian Problem in China, 상해 , 1933년; H. D. Fong, China's Industrialization, 상해, 1931년; Fang Fu-an, Chinese Labour, 1931\i; Lowe Chun-hwa, Facing Labor Issues in China, 상해, 1933년; Proceedings of the Pan-Pacific Trade Union Conference, 한구, 1927년을 보라. ] 그러나 이런저런 방식으로 그 운명의 해결을 좌우하는 세계적 모순의 결함에 짓눌린 중국농민은 러시아 농민보다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없다. 이것은 현재, 더 이상 이론적 예측의 문제가 아니라 그 모든 측면에서 완벽하게 검증된 사실이다.

    제3차 중국혁명의 근본적인 동시에 논쟁의 여지가 없는 이런 사회적, 정치적 전제조건은 민주주의 독재 정식이 그 유용성을 속절없이 잃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극심한 후진성에도 불구하고, 아니 더 정확히는 러시아에 비해 극심한 이 후진성 때문에도 제3차 중국혁명은 '민주주의' 시기를 겪지 않을 것이고, 심지어 10월혁명이 경험한 것과 같은 6개월[러시아 볼셰비키혁명의 이른바 민주주의 시기와 사회주의 시기 사이의 차이를 레닌은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 '처음에는 군주제, 지주, 중세적 관습에 대항하여, 그리고 혁명이 여전히 부르주아,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인 한, 전체 농민과 함께 나아갔다. 그 다음에는 부농, 사기꾼, 투기꾼을 포함 하여, 그리고 혁명이 사회주의적인 것이 되는 한, 자본주의에 대항하여 빈농, 반(半)노동자계급, 모든 피착취자와 함께 나아갔다. 이 두 단계 사이에 인위적으로 만리장성을 쌓으려는 것, 노동자계급의 준비 정도, 빈농과의 단결 정도와 다른 어떤 요인으로 이 두 단계를 분리시키려는 것은 마르크스주의를 완전히 왜곡하고 속류화 시키며, 자유주의로 대체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중세적 관습에 비교하여 자본가계급의 진보적 성격을 언급하는 사이비 학구적 구실 아래 사회주의 노동자계급에 대항하여 반동적 자본가계급을 몰래 옹호하는 것을 의미한다.'(레닌, 〈노동자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 《전집》, 제28권)](1917년 11월부터 1918년 7월까지)조차도 겪지 않을 것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제3차 중국혁명은 처음부터 도시와 농촌에서 부르주아적 소유권을 가장 결정적으로 뒤흔들고 폐지시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이런 전망은 경제와 정치 사이의 상호관계에 관한 현학적이고 도식적인 개념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새로 뿌리를 내렸으며, 이미 10월혁명에 적지 않은 타격을 가한 편견을 대단히 교란시키는 이 불일치에 대한 책임은 '트로츠키주의'가 아니라 불균등 발전 법칙에 지웠어야 한다. 특히 이 경우에는 이 법칙이 주로 적용된다.

    볼셰비키 정책을 1925-27년 혁명에 적용했다면, 중국공산당은 확실히 권력을 장악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은 현학적 태도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야비한 속물주의다. 노동자 농민의 대중운동은 규모면에서 권력을 장악하기에 충분했다.[중국의 조직노동자는 1923년 23만 명에서 1925년 57만 명, 1926년 126만4천 명, 1927년 280 만 명으로 중대했다.(〈범태평양 노동자〉, 제2호, 한구, 1927년 7월 15일자) 1925년 5월 30일 상해에서 영국 경찰의 중국인 학생 학살에 뒤이어 일어난 파업 물결에 80만 명 이상의 노동자가 직접 참여했다. 총파업은 상해와 홍콩을 완전히 마비시켰으며, 홍콩의 파업은 6개월간 지속되었다. 1922년에서야 현대적 조직 형태를 취한 농민운동은 1927년 3월에 972만 명의 농민을 직접 포괄했다. 1926년에 광동성, 호남성, 강서성, 호북성에서 시작된 농민의 독자적인 토지 장악은 1927년 봄에 특히 호남성에서 대규모로 수행되었다.] 마찬가지로 지배계급을 분열시키기에도 충분했다. 민족 자본가계급은 외교사절로 자신의 장개석과 왕정위를 모스크바에 보냈다. 그리고 자신의 호한민[호한민(胡漢民, 1879-1936) : 손문이 지도하는 중국혁명동맹회 창립에 참가했으며, 손문이 북상(北上)한 후 대원수(大元師)의 직권을 대행했다. 1927년 장개석과 함께 4.12쿠데타를 일으켰으며, 장개석과 쌍벽을 이루는 국민당의 중진이었으나, 의견 충돌로 장개석 에 의해 남경에 감금당했다.]을 통해 코민테른의 문을 두드렸다. 바로 혁명적 대중에 직면한 자신이 구제 불능일 정도로 약했으며, 이런 자신의 약점을 깨닫고는 스스로를 지키려고 했기 때문이다. 우리 스스로가 민족 자본가계급을 밧줄로 끌어당기지 않았다면, 노동자도 농민도 이들을 따르지 않았을 것이다. 코민테른이 올바른 정책을 추구했다면, 대중을 획득하기 위한 공산당의 투쟁 결과는 미리 결정되었을 것이다. 즉, 농민전쟁이 혁명적 노동자계급을 지지했을 것이고, 또 중국 노동자계급이 공산주의자들을 지지했을 것이다.

    만약 북벌 초기에 우리가 해방된 지역에서 소비에트를 조직하기 시작했다면(그리고 대중은 본능적으로 혼신의 힘을 기울여 해방을 열망하고 있었다), 우리는 필요한 기반과 혁명 초기의 호조건을 확보했을 것이고, 우리를 농민봉기를 중심으로 규합시켰을 것이고, 우리 자신의 군대를 조직했을 것이며, 우리는 적군을 붕괴시켰을 것이다. 또한 초기지만 중국공산당은 코민테른의 적절한 지도 덕분에 이런 이례적인 시기에 성숙할 수 있었을 것이고, 중국 전역에서 당장은 아니지만 적어도 상당한 지역에서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는 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끔찍한 일 一 틀림없는 역사적 재앙 一 은 바로 지도부 내에서 일어났다. 소비에트연방, 볼셰비키당, 코민테른의 권위는 먼저 공산당의 독자적 정책에 반하여 장개석을 지지하는 데, 그 다음에는 토지혁명의 지도자인 왕정위를 지지하는 데에나 도움이 되었을 뿐이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가 레닌주의 정책의 근거 자체를 짓밟고, 미숙한 중국 공산당의 등뼈를 부러뜨린 뒤였기 때문에, 볼셰비키주의에 대한 중국 케렌스키주의의 승리, 중국 케렌스키에 대한 중국 밀류코프의 승리, 그리고 중국 밀류코프에 대한 영국과 일본 제국주의의 승리가 미리 결정되어 버렸다.

    이것과 오직 이것에만 1925-27년 사이에 중국에서 일어난 사태의 의미가 있다.

     

    3. 민주주의 독재인가, 노동자계급의 독재인가?

    그러나 지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전원회의는 광동봉기 경험을 포함하여 중국혁명의 경험을 어떻게 평가했는가? 향후 전망을 설명했는가? 이 문제에 대해 강령 초안의 상응하는 부분을 해독하는 열쇠인 1928년 2월 전원회의의 결의문은 중국혁명에 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를 '연속'혁명으로 규정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전형적 입장]. 혁명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단계를 뛰어 넘으려는 경향과 동시에 혁명을 '연속'혁명으로 평가하는 것은 1905년에 트로츠키가 범한 오류와 비슷하다.

    레닌이 지도부를 떠난(1923년) 이후, 코민테른의 이데올로기적 활동은 주로 이른바 반(反)'트로츠키주의' 투쟁, 특히 '연속혁명'에 반대하는 투쟁으로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중국혁명의 근본적 문제에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뿐만 아니라 코민테른의 공식 대표, 즉 특별지시를 받고 파견된 지도자도 어떻게 해서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시베리아로 추방되고, 투옥당하는 것과 똑같은 '오류'를 저지른 것인가? 중국 문제를 둘러싼 투쟁은 약 2년 반 동안 맹위를 떨치고 있다. 반대파가 코민테른의 잘못된 지시에 영향을 받은 중국공산당 구 중앙위원회(진독수[진독수(陳獨秀 Chen Du-hsiu, 1879-1942) : 중국공산당의 창립자이자 지도자. 신해혁명에 참 가했으며, 1915년에 잡지〈신청년〉을 창간했다. 1917년, 신문화운동의 선두에 섰으며, 5.4운동 중에 마르크스주의로 기울었다. 1921년, 중국공산당을 창설하고 총서기에 취임했다. 1925~27년 중국혁명에서 코민테른의 노선을 마지못해 따랐다. 1929년, 좌익반대파를 지지하는 공개편지를 발표하여 제명되었다.])사가 기회주의 정책을 실시했다고 선언하자, 이 평가는 '비방'이라는 선고를 받았다.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잘못이 없다고 선언되었다. 유명한 담평산은 코민테른 집행위원 회 제7차 전원회의의 대체적인 찬성 속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 '트로츠키주의가 출현하자마자, 중국공산당과 공산주의청년동맹은 즉시 트로츠키주의에 반대하는 결의문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의사록, 205쪽)

    그러나 이런 '성과'에도 불구하고 사태가 1차, 2차로 갈수록 더욱 끔찍한 혁명의 붕괴로 이어진 그 비극적 논리를 펼치자, 이전에는 흠잡을 데 없던 중국공산당 지도부에게 멘셰비키라는 새 이름을 지어주었으며, 이들은 24시간 사이에 면직되었다. 동시에 새로운 지도부는 코민테른의 노선을 충분히 반영했다는 포고령이 공포되었다. 그러나 새롭고 진지한 시련이 발생하자마자 중국공산당의 신임 중앙위원회는 이른바 '연속혁명'의 입장으로 빗나가는 죄(이미 살펴본 것처럼,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를 지었음이 드러났다. 코민테른의 대표도 똑같은 방침을 취했다. 이 놀랍고 정말로 이해하기 어려운 사실은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지시와 혁명의 진정한 역학관계 사이의 크게 벌어진 '협상가격차'를 통해서만 설명될 수 있다.

    혼란과 당혹감을 흩뿌리기 위해 1924년에 유포된 1905년의 '연속혁명'이라는 신파를 여기서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신화가 중국혁명 문제에서 어떻게 파괴되었는지 검토하는 선에서 그칠 것이다.

    앞서 인용한 구절을 담은 2월 결의문의 첫 단락은 이른바 '연속혁명' 에 대한 그 부정적 태도의 동기를 보여준다.

    중국혁명의 현 시기는 경제적 관점(토지혁명과 봉건적 관계의 폐지)에서든,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민족투쟁의 관점(중국의 통일과 민족독립의 확립)에서든, 국가의 계급적 본질의 관점(노동자계급과 농민의 독재)에서든 아직 끝나지 않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시기다. …

    여기에 제시된 동기는 오류와 모순의 연속이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중국혁명이 중국이 사회주의의 길을 따라 발전할 기회를 보증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 목표는 혁명이 단지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과제의 해결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계속 전개되어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즉 중단 없이 (또는 연속적으로) 계속 발전한 결과, 중국을 사회주의의 발전 쪽으로 이끄는 경우에만 이룩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가 '연속혁명'이라는 용어로 해석한 것이다. 그렇다면 한편으로 중국의 비(非)자본주의적 발전의 길에 대해 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혁명 일반의 연속적 성격을 부정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러나 一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결의문의 주장에 따르면 一 혁명은 토지혁명의 관점에서든,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민족투쟁의 관점에서든 아직 끝나지 않았다. 따라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현 시기 중국혁명' 의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성격에 대해 결론을 내린다. 실제로 '현 시기'는 반(反)혁명의 시기이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필시 중국혁명의 새로운 부활, 또는 제3차 중국혁명은 1925-27년의 제2차 중국혁명이 토지 문제도 민족 문제도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성격을 열 것이라고 말할 심산이다. 그렇지만 결국 수정되더라도 이 추론은 중국혁명과 러시아혁명 모두의 경험과 교훈에 대한 총체적 몰이해에 기초해 있다.

    러시아의 1917년 2월 혁명은 혁명으로 이끈 국내, 국제 문제 一 농촌의 농노제, 구 관료집단, 전쟁, 경제적 붕괴 一 를 전부 해결하지 못했다.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뿐만 아니라 우리당 지도부의 상당부위도 이를 출발점으로 삼고, 레닌에게 혁명의 현 시기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시기임을 입증하려고 했다. 그 기본적 동기에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결의문은 단지 1917년에 레닌이 수행한 노동자계급의 독재를 위한 투쟁에 반대한 기회주의자들을 모방한 것일 뿐이다.

    더욱이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은 분명히 경제적, 민족적 관점에서 뿐만 아니라 '국가의 계급적 본질의 관점(노동자계급과 농민의 독재)'에서도 여전히 성취되지 않은 것 같다. 이것은 단 한 가지만을 의미할 것이다 : 중국에서 '진정한' 민주정부가 실권을 잡지 않는 한, 중국 노동자계급은 권력 장악 투쟁에 나서면 안 된다. 불행히도 이것을 어떻게 획득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나와 있지 않다.

    소비에트의 수립은 아마도 노동자혁명으로의 이행 중에만 허용될 것 (스탈린의 '이론')이라는 핑계로 소비에트슬로건이 2년 동안 중국에서 거부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혼란이 더욱 증대되 었다. 그러나 소비에트혁명이 갑자기 광동에서 일어났으며, 참가자들이 바로 이것이 노동자혁명으로의 이행이라는 결론을 내렸는데, 이들은 '트로츠키주의'로 기소되었다. 당이 이러한 방식으로 교육받아야 하는가? 최고의 임무를 해결하는데서 이런 방식이 도움이 되는가?

    (자기 생각의 전체적 방향과 아무런 관련도 없이)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결의문은 가망 없는 입장을 구하기 위해 제국주의에 대한 자신의 최근 주장을 급히 꺼내든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단계를 뛰어넘으려는 경향은 문제에 대한 이러한 정식화가 반(半)식민지 혁명인 중국혁명의 가장 중요한 민족적 특수성을 무시하기(?) 때문에 그만큼 더(!) 해로운 것처럼 보인다.

    이런 무의미한 말이 의미할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제국주의의 굴레가 일종의 비(非)노동자 독재에 의해 타도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중국 민족 자본가계급이나 소부르주아 계급의 '민주주의'를 격찬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민족적 특수성'을 마지막 순간에 끌어들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주장은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없다. 그러나 이 주장의 단 한 가지 '의미'는 이 책의 '식민지 자본가계급의 본질에 대하여'에서 충분히 검토되었다. 이 주제로 다시 돌아갈 필요가 없다.

    중국은 여전히 가장 '아시아적인' 형태의 노예제 타파, 민족해방, 조국통일과 같은 기초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거대하고, 격렬하고, 잔혹하며, 장기간에 걸친 투쟁에 직면해 있다. 그러나 사태의 추이가 보여 준 것처럼, 이것은 바로 앞으로 혁명에서 소부르주아 지도부나 준(準)지도부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늘날 중국의 통일과 해방은 소련의 생존과 마찬가지로 국제적 임무이다. 이 임무는 노동자 전위의 직접적 지도 아래 학대받는, 굶주린, 혹사당한 대중의 一 반(反)세계 제국주의 투쟁뿐만 아니라 중국에 있는 세계 제국주의의 경제적, 정치적 하수인, '민족' 자본가계급과 그 모든 민주적 사대주의자들을 포함하여 자본 가 계급에 반대하는 一 결사적 투쟁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 그리고 이것만이 노동자계급의 독재로 향하는 길이다.

    1917년 4월부터 레닌은 '연속혁명' 입장을 채택했다고 자신을 비난한 적수들에게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독재는 부분적으로 이중권력 시기에 실현되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나중에 이 독재는 노동자계급이 아직 제작소와 공장의 몰수로 나아가지 못했지만 노동자 통제를 실험한 동시에, 농민 전체가 노동자와 함께 토지혁명을 이룬 소비에트 권력의 첫 번째 시기(1917년 11월부터 1918년 7월까지) 중에 더욱 확대되었다고 설명했다. '국가의 계급적 본질'에 관한 한, 사회혁명당-멘셰비키의 민주주의 '독재'는 그것이 줄 수 있는 모든 것 - 이중권력의 유산(流産)을 주었다. 토지 전복에 관하여 혁명은 더할 나위 없이 건강하고 튼튼한 아이를 낳았지만, 산파 역할을 한 것은 노동자 독재였다. 바꿔 말하면,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독재라는 이론적 정식이 결합시킨 것은 실제 계급투쟁 중에 분리되었다. 속이 텅 빈 반(半)권력의 껍데기는 일시적으로 케렌스키 채레텔리에게 맡긴 반면에, 토지-민주주의 혁명의 실제 핵심은 승리를 거둔 노동자계급의 몫이 되었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지도자들은 민주주의 독재의 이런 변증법적 분리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들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단계를 뛰어넘으려는 것'은 무엇이든 비난함으로써, 또 회람장에 준거하여 역사적 과정을 지도하려고 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정치적으로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었다. 만약 '민주주의 독재'를 통한 토지 혁명의 완수를 부르주아 민주주의 단계로 이해할 수 있다면, 10월 혁명도 대담하게 부르주아 민주주의 단계를 '뛰어넘었다'고 할 것이다. 어째서 이것은 비난하면 안 되는가?

    그렇다면 러시아 볼셰비키주의에서 최고로 표현된 역사적으로 불가피한 사태 추이가 중국에서는 왜 '트로츠키주의'로 드러날 수밖에 없는 가? 의심의 여지없이 러시아에서 20년 동안 볼셰비키주의에 맞서 싸운 마르티노프 같은 자들의 이론을 중국에 적합한 것으로 선언한 똑같은 논리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러시아와의 유사점을 끌어내는 것이 전혀 허용되지 않는가? 우리의 대답은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지도자들이 유추법에 따라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 슬로건을 배타적으로, 또 통째로 짜 맞췄지만, 유물론적, 역사적 유추가 아니라 형식적, 문필적 유추였다는 것이다. 중국과 러시아의 유사점은 만약 이것에 접근하는 적절한 길을 발견한다면, 완전히 받아들일 수 있다. 레닌은 이러한 유추를 뛰어나게 사용했다. 게다가 마치 그가 미래 아류들의 중대한 실수를 예측한 것처럼, 사태가 벌어진 가 아니라 그 전에 유추했다. 레닌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임무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대담하게 권력을 장악한 노동자계급의 10월 혁명을 수백 번이나 옹호해야 했다. 바로 이것 때문에, 바로 이걸 하기 위해가 레닌의 대답이었다. 사회주의를 위한 러시아의 경제적 미성숙을 탓하며 권력 장악에 반대한 현학자들에게 말을 걸어보면, 이들에게 이러한 미성숙은 '논쟁의 여지가 없었다.'(레닌, 《전집》, 제18권 2부, 119쪽) 레닌은 1923년 1월 16일, 이렇게 말했다.

    이를테면, 이들에게 러시아는 문명국과 분명히 처음으로 이 전쟁 때문에 문명의 소용돌이 속에 말려든 나라들, 동방의 모든 나라들, 비(非)유럽 국가들 사이의 경계선에 서 있던 적도 없다. 一 결과적으로 러시아는 물론 세계 발전의 일반적 노선을 따라 약해지지만 서유럽 국가들의 선행한 모든 혁명과 다른 혁명을 이루고, 동방의 나라들과 비슷한 점에서 어떤 부분적인 혁신을 낳는 일정한 특이성을 나타낼 수 있으며, 또 나타낼 것이다.(앞의 책, 118쪽)

    레닌이 파악한 러시아를 동방의 나라들에 더 가깝게 하는 '특이성'은 바로 초기 단계에 있는 젊은 노동자계급이 사회주의로 향하는 길에서 봉건적 야만주의를 일소하고, 온갖 쓰레기를 치워버려야 한다는 것을 이해해야만 했다는 사실에 있었다.

    그 결과로, 만약 우리가 중국과 러시아 사이의 유사점을 레닌주의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면,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 '국가의 정치적 본질'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중국에서 민주주의 독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처음에는 손문의 광동에서, 그 다음에는 광동에서 상해로 가는 도중에 전부 다 검증되었다. 이 검증은 상해 쿠데타에 뒤이어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지시에 따르면 토지혁명의 조직자이지만, 실제로는 그 사형집행인인 국민당 좌익이 화학적으로 순수한 형태로 나타난 무한에서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사회적 내용은 다가오는 중국 노동자계급과 빈농의 독재 초기에 채워질 것이다. 지금 중국 자본가계급 뿐만 아니라 중국 '민주주의'의 역할에 맞춰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 슬로건을 제기한다면, 이것은 '민주주의'가 다가오는 전투에서 과거에 비해 훨씬 더 중요한 사형집행인의 역할을 할 것이라는 점이 정말로 논쟁의 여지가 없어진 다음에나 철저히 검증될 것이다 一 지금 이 슬로건을 제기하는 것은 단지 국민당주의의 새로운 변종들을 감추는 수단을 만들어내고, 노동자계급을 교수형에 처할 준비를 하는 것일 뿐이다.

    완벽을 기하기 위해 사회혁명당-멘셰비키의 경험에 '진정한' 민주주의 독재 슬로건을 대치시키자고 주장한 볼셰비키에 대해 레닌이 간결하게 말한 것을 상기해보자.

    지금단지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만을 말하는 사람은 시류에 뒤떨어진 것이고, 이런 사정에 의해 실제로 노동자의 계급투쟁에 대항하여 소부르주아 계급에게 붙어버린다. 이런 사람은 혁명 이전의 고대인 '볼셰비키' 박물관에 처박아야 한다(아니면 누구는 '고참 볼셰비키'의 박물관이라고 부를지도 모르지만).(레닌, 《전집X 제14권 1부, 29쪽)

    이 말은 마치 이들이 정말로 방금 말한 것처럼 들리는 듯하다.

    물론 이것은 중국공산당에게 권력 장악을 위해 즉각 봉기하라고 촉구하는 문제가 결코 아니다. 템포는 전적으로 주위 상황에 달려 있다. 단지 전술을 바꾸는 것만으로는 패배의 결과를 제거할 수 없다. 혁명은 이제 가라앉고 있다. 중국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처형 되었으며, 무시무시한 상업/산업공황이 기승을 부리는 반면에, 임박한 혁명적 총공세에 관해 호언장담하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적당히 감춘 결의문은 범죄적인 경솔함일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세 차례의 주요한 패배 때문에 경제 위기가 발생한 것은 아니지만, 반대로 처형은 단지 정치적으로 약화된 당을 파괴하는 동시에 실제로 이미 짜낼 대로 짜낸 노동자계급을 의기소침하게 했다. 우리는 중국에서 퇴조기, 따라서 당은 그 이론적 기초를 깊이 하고, 스스로를 비판적으로 교육하며, 노동자계급 운동의 전 분야에 확고한 조직적 연결망을 세우고 강화하며, 농촌 세포를 조직하고, 처음에는 방어적이지만 나중에는 공격적인 노동자 빈농의 전투를 이끌고 부분적으로 결합시킬 시기로 접어들고 있다.

    무엇이 대중운동의 형세를 변화시킬 것인가? 어떤 상황이 수백만 대중을 선두에 서서 이끌 노동자 전위에게 필요한 혁명적 자극을 줄 것인가? 이것은 예측할 수 없다. 미래가 내적인 과정만으로도 충분할 것인지, 아니면 외부로부터 추가적인 자극이 와야 할 것인지 가르쳐줄 것이다.

    직접적으로는 잘못된 지도력에 기인하는 중국혁명의 분쇄가 중국과 외국 자본가계급으로 하여금 지금 중국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는 끔찍한 경제 위기를 크든 적든 극복하게 할 것이라고 가정할 만한 충분한 근거 가 있다. 물론 이것은 노동자농민의 등에 업혀 수행될 것이다. 이런 '안정' 국면은 그 결과로 한층 더 격렬하지만 더 높은 역사적 무대에서 적과의 충돌로 노동자를 이끌기 위해 그 계급적 자신감을 회복한 노동자를 다시 한 번 모으고 융합시킬 것이다. 새롭게 솟구치는 노동자운동의 물결이 공세를 취할 것이라는 조건에서만 토지혁명의 전망에 대해 진지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가오는 제3차 혁명의 첫 단계는 이미 지난 단계를 축약 수정한 형태, 이를테면 약간 새로운 '민족공동전선'의 모방이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형태로 재현할 수도 있다는 것을 배제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첫 단계는 결과적으로 공산당에게 자신의 '4월'테제, 즉 인민대중 앞에 권력 장악을 위한 자신의 강령과 전술을 제출하고 알릴 기회를 충분히 제공할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강령 초안은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여기[중국]에서 노동자 독재로의 이행은 오직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사회주의 혁명으로 성장하는(??) 전 과정을 거친 경우, 일련의 예비적 단계(?)를 지나야만 가능하다.'

    바꿔 말하면, 이미 다 겪어온 모든 '단계'는 안중에도 없다. 강령 초안은 여전히 이미 뒤처져있는 것을 유리한 입장에 있는 것으로 본다. 이것은 바로 꽁무니주의자의 정식을 뜻한다. 이것은 국민당 방침의 기조 속에서 새로운 실험을 위해 문을 활짝 열어놓는 것이다. 따라서 기존의 잘못을 숨기는 행위는 불가피하게 새로운 오류의 길을 닦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미 그 유용성을 잃어버린 '민주주의 독재'라는 청사진을 가지고 지난 시기에 비해 훨씬 더 빠른 템포로 발전할 새로운 혁명적 고양에 접어든다면, 2차와 마찬가지로 제3차 중국혁명이 파멸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4.기회주의의 산물인 모험주의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2월 전원회의 결의문의 두 번째 단락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대체로 공산당의 슬로건 아래, 또 상당한 정도로 공산당의 지도 아래 진행된 노동자 농민의 광범한 혁명운동의 첫 물결은 끝났다. 혁명운동의 몇몇 중심지에서는 노동자 농민운동 일반의 혁명적 중핵과 공산주의자들의 물리적 소멸이라는 노동자 농민에게 가장 가혹한 패배를 안기며 끝났다. (트로츠키의 강조)

    '물결'이 높이일자,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전체 운동이 심지어 소비에트를 대신한 국민당의 푸른 깃발과 지도력에 완전히 제압되었다고 말했다. 공산당이 국민당에 종속되었다는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정확히 혁명운동이 가장 가혹한 패배'로 끝난 이유이다. 이 패배를 인정한 바로 지금, 마치 존재한 적이 없는 것처럼, 마치 코민테른 집행위원회가 국민당의 푸른 깃발을 자신의 것이라고 선언한 적이 없는 것처럼, 과거로부터 국민당을 지우려는 시도가 벌어지고 있다.

    과거에 상해든 무한에서든 패배한 적이 없다. 단지 혁명의 '더 높은 단계로의' 이행이 있었을 뿐이다 一 이것이 우리가 배워온 것이다. 이제 이런 이행 전체가 갑자기 '노동자 농민에게 가장 가혹한 패배'인 것이라고 선언되었다. 그렇지만 이런 전례가 없는 예측과 평가의 정치적 파산을 어느 정도 감추기 위해 결의문의 결론적인 단락은 이렇게 밝히고 있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중국혁명이 청산(?)되었다는 취지의 허위선전을 일삼는 사회민주주의와 트로츠키주의에 맞서 싸우는 것이야말로 모든 코민테른 지부들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결의문의 첫 번째 단락에서 '트로츠키주의'가 연속적인 중국혁명의 사상, 즉 부르주아 단계에서 사회주의 단계로 성장하는 바로 이때의 혁명 사상이었다고 들었다. 또 마지막 단락에서는 '트로츠키주의자 들'에 따르면, '중국혁명이 청산되었다'는 것을 듣게 된다. 어떻게 '청산된' 혁명이 연속혁명일수 있는가? 이 점에서 부하린은 의기양양해 있다.

    이러한 모순의 전적인, 그리고 맹목적인 무책임성은 단지 모든 혁명적 사상을 그 근저에서 좀먹기만 할뿐이다.

    만약 우리가 혁명의 '청산'을 노동자 농민의 공세가 격퇴되어 유혈진압 당했으며, 대중이 퇴각과 침체 상태에 있으며, 다른 많은 주위 사정과는 별도로 또 다른 공격에 앞서 틀림없이 일정한 시간을 필요로 하는 분자적 과정이 대중사이에서 진행 중일 것이며, 전쟁지속 기간이 미리 결정될 수 없다는 사실로 이해할 수 있다면, 만약 '청산'이 이런 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면, 코민테른 집행위원회가 결국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가장 가혹한 패배'와 조금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니면 청산을 글자그대로 중국혁명의 사실상의 제거, 즉 새로운 수준에서 부활할 가능성과 필연성 자체의 실제적 제거로 해해야 하는가? 누구나 이러한 전망에 대해 진지하게 말할 수 있으며, 단두가지 경우에만 혼란이 생기지 않도록 할 수 있다 一 중국이 절단되어 완전히 절멸할 운명이었다는 가정은 어떠한 근거도 없는 억측이다. 다른 경우는 중국의 자본가계급이 자신의 비(非)혁명적인 방식으로 중국의 기본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입증할 것이라는 가정이다. 이것은 자본가계급의 굴레 속으로 공산당을 직접 떠밀었으며, 지금 우리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는 '4계급블록' 이론가들의 최신 변종이 아닌가?

    역사는 되풀이된다. 1923년 패배의 범위를 이해하지 못한 장님은 1 년 반 동안 우리에게 독일혁명에 대한 '청산주의"라고 비난을 퍼부었다. 그러나 인터내셔널에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한 이 교훈도 이들을 전혀 가르치지 못했다. 현재 이들은 이번에 독일을 중국으로 대체하기 위해 자신의 오랜 거수기들을 동원하고 있다. 물론 '청산주의자들'을 찾아야 할 이들의 필요성은 4년 전에 비해 지금 더 급박하다. 왜냐하면 누가 제2차 중국혁명을 '청산'했다면, 그것은 '국민당' 노선의 기초자들일 것이라는 점이 이번에는 너무도 두드러져 보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의 강점은 예측하는 능력에 있다. 이런 의미에서 반대파는 예측의 올바름을 경험해본 절대적 증거를 지적할 수 있다. 처음에는 국민당 전체에 대해, 그 다음에는 국민당 '좌익'과 무한정부에 대해, 마지막으로 제3차 혁명의 '예탁금', 즉 광동봉기에 대해 반대파는 올바르게 예측했다. 반대파가 한 예측의 이론적 정확성을 더 이상 어떻게 확증할 수 있는가?

    자본가계급에 대한 항복정책을 통해 이미 1, 2단계 중에 혁명에 가장 가혹한 패배를 초래한 똑같은 기회주의 노선이 제3 단계에 자본가계급에 대한 모험적인 기습정책으로 '성장한' 결과, 결정적 패배의 원인이 되었다.

    지도부가 스스로 초래한 패배를 뛰어넘으려고 급히 서두르지 않았다면, 제일 먼저 중국공산당에게 승리는 단숨에 얻지 못하며, 무장봉기로 향하는 도중은 여전히 노동자농민에게 정치적 영향력을 끼치기 위해 격렬한, 끊임없는, 가차 없는 투쟁을 전개해야 하는 시기임을 설명했을 것이다.

    1927년 9월 27일 열린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상임간부회의에서 우리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자 신문은 혁명군이 스바토프를 점령했다고 전한다. 화룡(和龍)과 엽정(德潮)의 군대가 진군하고 있다는 것이 몇 주 전이다.〈프라브다〉지는 이 군대를 혁명군이라고 부른다. … 그러나 한 가지 묻겠다 : 스바토프를 점령한 혁명군의 행동은 중국혁명 앞에 어떤 전망을 제기하는가? 이 행동의 슬로건은 무엇인가? 그 강령은? 그 조직적 형태는 어떠해야 하는가?〈프라브다〉지가 느닷없이 7월 중에 단 하루 제기한 중국 소비에트 슬로건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우선 국민당 전체에 공산당을 대립시키지 않고, 소비에트와 소비에트 정부를 획득하기 위해 당이 대중 사이에서 선동하지도 않고, 토지혁명과 민족해방 슬로건 아래 대중을 독자적으로 결집시키지도 않고, 지역의 노동자 병사 농민대표 소비에트를 조직하고, 확대하고, 강화하지도 않은 화룡(Ho Lung)과 엽정(Yeh Ting)의 봉기는 그 기회주의적 정책은 제쳐놓더라도, 단지 사이비 공산주의자 마흐노(Makhno)의 재주인 고립된 모험일 수밖에 없었다. 또한 자신의 고립과도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봉기는 실패했다.

    훨씬 더 비극적인 결과만 아니라면 광동봉기는 화룡-엽정 모험의 더 범위가 넓고, 더 심원한 반복이었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2월 결의문은 중국공산당 내의 폭동주의적 분위기, 즉 무장봉기 경향과 싸운다. 그렇지만 이 경향이 1925-27년의 기회주의 정책 전체에 대한 반응이며, 수행한 모든 것을 평가하지도 않고, 전술의 근거를 공개적으로 재평가하지도 않고, 분명한 전망도 없이 기회주의뿐만 아니라 폭동주의에 대한 진정한 해독제는 노동자 빈농의 무장봉기에 대한 지도, 권력 장악, 혁명적 독재의 수립이 이제부터 전적으로 중국공산당의 어깨에 걸려있다는 사실에 대한 분명한 이해일 수밖에 없다. 만약 중국공산당이 이런 전망에 대한 이해로 철저히 물든다면, 적의 깃발을 공손히 뒤쫓는 것도, 도시에 대한 즉흥적인 군사적 기습이나 무장봉기를 함정에 빠뜨리는 일도 전혀 없을 것이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결의문은 단계를 뛰어넘는 것을 용납하기 어렵다는 점과 폭동주의의 유해성에 관해 매우 추상적으로 주장하면서, 광동봉기의 계급적 내용을 완전히 무시하고, 광동봉기를 낳은 소비에트 체제를 단명케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자신의 철저한 무기력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우리 반대파는 광동봉기가 자신의 '명성'을 지키려는 노력 속에서 나온 지도자들의 모험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모험조차도 사회 환경 구조가 결정되는 법칙에 따라 발전한다는 것이 명확하다. 이런 이유에서 우리는 중국혁명의 앞으로의 양상을 특징적으로 보여주는 광동봉기를 주시하는 것이다. 이런 특징은 광동봉기 이전에 제출한 위에서 '발 바꾸라'고 내린 순전히 군사적인 명령의 불가피한 결과라는 점을 말하지 않는다. 화룡의 캠페인과 광동봉기 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러한 사정 때문에 一 는 폭동주의의 양육자였다.

    우리의 이론적 분석과 완전히 일치한다. 그러나 광동봉기가 연속적인 투쟁의 올바르고 정상적인 고리였다고 생각하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에게 광동봉기의 계급적 성격 규명을 분명히 하는 것은 더 이상 피할 수 없다. 그렇지만 광동 사태 직후에 전원회의가 열리긴 했지만, 이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결의문에 대해서는 한 마디 말이 없다. 이것은 잘못된 정책을 고집스레 따랐기 때문에 코민테른의 현 지도부가 강령 초안에서 제시한 동방혁명의 청사진을 완전히 뒤엎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1927년 광동봉기는 감히 다루지도 못하고 1905년이나 다른 해의 가상적 오류들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다는 가장 설득력 있는 증거가 아닌가?

     

    5.소비에트와 혁명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2월 결의문에 등장하는 코민테른 대표 '엔(N) 동지 등'은 '광동에서 봉기 기관으로 선출된 소비에트가 없다'는 점에 대해 책임을 졌다(원문의 강조- 트로츠키). 실제로 이런 책임 뒤에는 아연실색할 승인이 있다.

    직접 얻은 문서에 기초하여 작성된 〈프라브다〉지(제31호)의 기사는 소비에트 정부가 광동에서 수립되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광동소비에트는 선출된 기관이 아니었다, 즉 소비에트가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언급은 단 한 마디도 없었다 一 왜냐하면 선출되지 않은 소비에트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결의문에서 이를 알 수 있다. 이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우리에게 소비에트는 무장봉기를 수행할 필요가 있지만, 때가 되기 전에는 결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자, 보시라! 봉기 날짜가 정해졌는데도 소비에트는 없다. 선출된 소비에트를 수립하는 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다. 대중은 소비에트가 무엇인지 경험으로부터 알고, 그 형태를 이해하며, 선출된 소비에트조직에 익숙해지기 위해 과거에서 어느 정도 배울 필요가 있다. 중국에서는 이런 징후도 없었다. 왜냐하면 소비에트 슬로건이 전체 운동의 중추 신경이 되어야 하는 바로 그 시기에 트로츠키주의의 슬로건이라고 선언되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자신의 패배를 건너뛰기 위해 봉기 날짜를 허둥지둥 정하는 동시에 이들은 소비에트도 설립해야 했다. 만약 이 오류가 속속들이 폭로되지 않는다면, 소비에트 슬로건은 혁명의 목을 죄는 올가미로 둔갑할 수 있을 것이다.

    생전에 레닌은 멘셰비키에게 소비에트의 근본적, 역사적 임무는 권력 장악을 조직하거나 조직하는 것을 돕는 것이기 때문에 승리한 뒤로는 권력기관이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아류들 一 추종자도 아닌 一 은 이 로부터 봉기가 정각에 시작될 경우에만 소비에트가 조직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레닌의 폭넓은 일반화를 이들은 사후(事後)에 혁명의 이해를 돕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위태롭게 하는 어설픈 처방으로 둔갑시킨다.

    1917년 10월에 볼셰비키 소비에트가 권력을 장악하기에 앞서 사회혁명당-멘셰비키 소비에트가 9개월 동안 존속했었다. 12년 전, 혁명적 소비에트가 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와 다른 많은 도시들에서 처음으로 나타났다. 1905년 소비에트가 수도의 제작소와 공장들을 포괄하기 전에 파업 중에 인쇄노동자대표 소비에트가 모스크바에서 수립되었다. 이보다 몇 달 전인 1905년 5월에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공장의 대중파업은 이미 노동자대표 소비에트의 본질적 특징을 전부 가진 지도기관을 수립했다. 노동자대표 소비에트를 수립하는 첫 번째 실험과 소비에트 정부를 수립 하는 거대한 실험 사이에서 12년 이상의 세월이 흘러갔다. 물론 이러한 기간이 중국을 포함하여 다른 모든 나라들에 필요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중국 노동자들이 레닌의 폭넓은 일반화를 대체한 어설픈 처방에 기초하여 소비에트를 건설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혁명적 행동의 변증법을 무력하지만 성가시게 졸라대는 현학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소비에트는 봉기 직전에 수립되어서는 안 된다. 또 직접적인 권력 장악을 슬로건으로 내걸어서도 안 된다 一 왜냐하면 만일 사태가 권력을 장악할 시점에 이른다면, 대중이 소비에트 없이도 무장봉기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이것은 봉기의 성공을 보증할 예비적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다른 조직 형태나 방법이 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소비에트 문제는 부차적인 중요성을 갖게 되고, 조직상의 방법 문제나 단지 명칭의 문제에 불과한 것으로 축소된다. 소비에트의 임무는 단지 봉기를 촉구하거나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을 필요한 단계를 거쳐 봉기로 이끄는 것이다. 나중에 대중을 거리에 분산시키지 않고, 또 전위가 계급으로부터 고립되는 일 없이 대중이 점차로 봉기 슬로건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 소비에트는 처음에 무장봉기 슬로건이 아니라 부분적인 슬로건으로 대중을 규합한다. 소비에트는 대개, 그리고 주로 파업투쟁과 관련하여 나타난다. 파업투쟁은 혁명적으로 발전할 전망이 있지만 해당 시기에는 단지 경제적 요구에 한정한다. 대중은 소비에트가 자신의 조직이며, 투쟁, 저항, 자기방어, 공격을 위해 집결한 부대임을 감각과 동시에 행동으로 이해해야 한다. 대중은 대체로 하루나 한 번의 행동이 아니라 중단 여부와 관계없이 몇 주, 몇 달, 어쩌면 몇 년의 경험에 근거하여 이를 감지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나라가 혁명적 격변기를 거치고 있으며, 노동자계급과 빈농이 권력을 장악할 전망 一 비록 이것이 다음 단계 중의 전망이라고 할지라도, 또 이 전망이 해당 국면에서 소수에 의해서만 파악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一 을 앞둔 상황에서 아류나 관료적 지도부는 자각하여 떨쳐 일어서는 대중이 소비에트를 수립하지 못하게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소비에트에 대한 우리의 한결같은 생각이었다. 우리는 소비에트를 폭넓고 유연한 조직형태라고 평가했다. 소비에트는 혁명적 고양의 맨 첫 단계에서 막 깨어난 대중이 접근하기 쉽고, 해당 시기에 이미 권력 장악 임무를 이해할 정도까지 성숙한 노동자 부위의 규모와도 무관하게 노동자계급을 전체로서 결합시킬 수 있는 조직 형태이다.

    정말로 문서적 증거가 필요한 것인가? 예를 들면, 이것은 제2차 혁명기 중에 레닌이 소비에트에 대해 말한 것이다.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이 당시의 당명]은 노동자계급에 대한 사회민주주의자의 영향력을 키우고, 사회민주주의 노동운동을 강화하기 위해 노동자대표 소비에트 유형의 일정 정도 비(非)당적인 조직을 크든 적든 혁명적 고양의 순간에 활용하는 것을 결코 마다하지 않는다.(레닌, 《전집》, 제8권, 215쪽)

    이런 유형의 문헌적, 역사적 증거는 누구든 풍부하게 인용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증거 없이도 문제가 충분히 명확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아류들은 소비에트를 당이 권력 장악 직전에 단지 노동자계급을 정렬시킨 것 같은 모양의 열병식 조직으로 개조시킨다. 그러나 바로 이때 우리는 소비에트가 무장봉기라는 직접적 목적을 위해 명령에 따라 24시간 내에 급조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실험은 불가피하게 허구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그리고 권력 장악을 위한 가장 필수적인 조건을 결여하고 있다는 것은 소비에트 제도의 외면적 의례로 감춰진다. 이것이 소비에트가 단지 의례를 지키기 위해 설립된 광동에서 벌어진 일이다. 이것이 아류가 끌려가는 문제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다. 

    중국 사태에 대한 논쟁 중에 반대파는 명백한 모순으로 추정되는 다음과 같은 비난을 받았다 : 반대파는 1926년부터 중국에서 소비에트 슬로건을 제기한 반면에, 그 대표는 1923년 가을에 독일에서 소비에트 슬로건에 반대했다. 현학적 정치사상이 이런 비난에서 만큼 자기 생각을 분명하게 드러낸 대목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중국에서 적시에, 즉 혁명적 고양의 물결이 상승하고 있을 때, 노동자 농민의 독자적 조직인 소비에트수립에 착수할 것을 요구했다.

    소비에트의 주요한 의미는 노동자 농민을 국민당 자본가계급과 그 좌익 하수인에 대립시키는 것이었다. 중국에서 소비에트 슬로건은 무엇보다도 자멸적이고 수치스러운 '4계급 블록'과 단절하고, 공산당이 국민당으로부터 철수하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무게중심은 조직형태가 아니라 계급노선에 있음이 드러났다.

    1923년 가을, 독일에서는 조직 형태가 유일한 문제였다. 코민테른과 독일공산당 지도부의 극도의 수동성, 후진성, 굼뜸으로 인해 소비에트의 조직을 제때에 촉구할 기회를 잃어버렸다. 아래로부터의 압력에 의해, 그리고 자발적으로 공장위원회가 1923년 가을 독일의 노동운동을 장악했다. 공산당의 올바르고 대담한 정책이 있었다면, 틀림없이 소비에트가 훨씬 더 성공적으로 장악했을 것이다. 그 사이에 상황의 심각성은 가장 예리한 지점에 이르렀다. 시간을 더 지체한다는 것은 결정적으로 혁명적 상황을 놓친다는 것을 의미했다. 마침내 봉기가 시간적 여유 없이 일정에 올랐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비에트 슬로건을 제기하는 것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심각한 현학적 어리석음이었을 것이다. 소비에트는 구원의 전능한 힘을 가진 부적이 아니다. 이때 전개된 것과 같은 상황에서 급히 소비에트를 수립하는 것은 단지 공장위원회의 복제였을 것이다. 이 소비에트는 공장위원회의 혁명적 역할을 빼앗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고, 공장위원회는 새로 수립되었지만 여전히 전혀 권위 없는 소비에트에 권리를 양도해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그날그날의 상황이 중요했다. [만약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이것은 혁명적 행동을 겉만 번드르르한 조직상의 가장 유해한 경쟁으로 대체한다는 것을 의미했을 것이다.

    소비에트라는 조직 형태가 대단히 중요할 수 있다는 것은 논쟁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소비에트가 올바른 정치노선을 제때에 반영할 때에만 그렇다. 거꾸로, 소비에트가 날조, 맹목적 숭배의 대상, 하찮은 것으로 바뀐다면, 그만큼이나 쓸모없는 의미만을 지니게 될 것이다. 1923년 가을 막바지에 수립된 독일소비에트는 정치적으로 전혀 보템이 되지 않았을 것이며, 단지 조직적 혼란만을 일으켰을 것이다. 그러나 광동의 상황은 훨씬 더 나빴다. 의례를 지키려고 급히 수립된 소비에트는 모험주의적 폭동을 위한 겉치레일 뿐이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모든 일이 끝난 뒤, 광동 소비에트는 단지 종이위에 그려진 고대 중국용을 닮았을 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썩은 줄을 잡아당기는 정책과 종이용은 우리의 정책이 아니다. 우리는 1923년 9월, 독일로 전보를 보내 소비에트를 급조하는 것에 반대했다. 우리는 1926년 중국에서 소비에트를 수립하는 것에 찬성했다. 우리는 1927년 광동에서 소비에트를 가장하는 것에 반대했다. 이점에서 털끝만한 모순도 없다. 우리는 반대로 혁명운동의 역학관계와 그 조직 형태에 대한 생각을 심도 있게 일치시키고 있다.

    최근의 이론과 실천으로 왜곡되고, 혼란스러워졌으며, 흐릿해진 소비에트의 역할과 중요성 문제는 강령 초안에서 조금도 조명되지 않았다.

     

    6. 다가오는 중국혁명의 성격 문제

    빈농의 지지를 받는 노동자계급의 독재 슬로건은 다가오는 제3차 중국혁명의 사회주의적 성격 문제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런데 역사가 되풀이되는 것뿐만 아니라 역사의 요구에 대치되는 사람들의 오류 때문에 우리는 벌써부터 중국이 아직까지 사회주의 혁명을 이룰 만큼 성숙하지 않았다는 항의를 듣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문제에 대한 추상적이고 생기 없는 설명이다. 러시아는 저절로 사회주의를 이룰 만큼 성숙했는가? 레닌에 따르면, 결코 그렇지 않다! 러시아는 늦출 수 없는 국가적 임무를 해결하기 위한 단 하나의 방법으로 노동자계급의 독재에 공을 들였다. 그러나 독재 전체의 운명은 결국 세계의 발전 경향에 따라 결정되었다. 물론 이것은 노동자독재의 올바른 정책, 즉 한편으로 노동자농민동맹의 강화와 발전, 국가가 처한 상황에의 전면적 적응, 다른 한편으로 세계의 발전 경향에의 전면적 적응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제로 한다. 이것이 중국에게도 완전한 사실이라고 확신한다.

    '우리의 혁명에 대하여'(1923년 1월 16일)라는 제목의 글에서 레닌은 러시아의 특이성은 동방국가들 특유의 발전경향을 따라 나아간다는 것을 입증한다. 그는 '일부 "박식한" 신사양반들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사회주의를 이룰 만큼 성숙하지 않다, 우리는 사회주의를 위한 객관적인 경제적 전제조건을 결여하고 있다'는 취지의 유럽사회민주주의의 주장을 '대단히 고리타분한 것'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레닌은 자신이 사회주의를 위한 경제적 전제조건이 러시아에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이 아니라 권력 장악에 대한 거부가 현학자나 속물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독자적인 사회주의 건설에 필요한 이런 전제조건의 결여에서 결코 나오지 않는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박식한' 신사양반들을 조롱한다. 이 글에서 레닌은 101번째,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10001번째로 저 인터내셔널 영웅들의 궤변에 답한다 : '이런 움직일 수 없는 생각[러시아는 사회주의를 이룰 만큼 성숙하지 않다]은 … 우리 혁명에 대한 결정적 평가가 아니다.'(레닌, (전집》, 제18권 2부, 118쪽 이하) 이것은 강령 초안의 기초자들이 거부하는 것이며, 따라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러시아뿐만 아니라 중국도 경제적, 문화적으로 미성숙하다 一 물론 러시아에 비해 중국이 더 미성숙하다 一 는 테제는 그 자체로 논쟁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 사실에서 나라의 전체적인 역사적 맥락과 혁명적 상황이 권력 장악을 지시하는데도, 노동자계급은 권력 장악을 포기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구체적, 역사적, 정치적, 실제적 문제는 중국이 '자신의' 사회주의를 이룰 만큼 경제적으로 성숙했는지의 여부가 아니라, 중국이 노동자 독재를 이룰 만큼 정치적으로 성숙했는지 여부로 정리될 수 있다. 이 두 가지 문제는 결코 동일하지 않다. 불균등발전법칙이 없다면 이런 문제는 동일한 것으로 간주될지도 모른다. 이 점에서 이 법칙이 존재할 여지가 있는 것이며, 따라서 경제와 정치의 상호관계에 충분히 적용된다. 당시 중국은 노동자독재를 이룰 만큼 성숙했는가? 투쟁의 경험만이 이 문제에 단 정적인 답을 제공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투쟁만이 중국의 실제적 통일, 해방, 부활이 언제, 어떤 조건에서 일어날 것인지에 관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누구나 중국이 노동자 독재를 이룰 만큼 성숙하지 않다고 말함에 따라 제3차 중국혁명이 수년간 늦춰졌다고 단언하고 있다.

    물론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결의문이 주장한 것처럼, 봉건적 잔재가 실제로 중국의 경제생활을 지배했다면, 사태는 아주 가망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잔재 일반이 지배적이지는 않았다. 이 점에서도 강령 초안은 저지른 오류를 시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회적이고 불명료한 방식을 되풀이하고 있다. 초안은 "나라의 경제와 정치적 상부구조 모두에서 중세적, 봉건적 관계의 우세 …'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것은 속속들이 잘못되었다. 우세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많은 사람이 관련된 문제라는 것인가? 아니면 나라의 경제에서 지배적이고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인가? 상업자본과 은행자본의 포괄적 역할에 기초한 국내 산업의 이례적인 급성장, 시장에 대한 가장 중요한 농업지역의 완전한 의존, 어느 때보다 크게 증대하고 있는 대외무역의 역할, 도시에 대한 농촌의 전면적 종속 一 이 모든 것은 중국에서 자본주의 관계의 절대적 우세, 직접적 지배를 나타낸다. 농노제와 반(半)농노제라는 사회적 관계가 매우 강력하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이것들은 부분적으로 봉건주의 시대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또 부분적으로는 새로 구성 一 생산력의 더딘 발전에 따른 과거의 부활, 농촌의 과잉인구, 상인자본과 고리대자본의 활동 등 一 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봉건적'(더 정확히는 농노이며, 대체로 전(前)자본주의적인) 관계가 아니라 자본주의 관계가 지배적이다. 오직 이런 자본주의 관계의 지배적 역할 덕분에 우리가 민족혁명에서 노동자 헤게모니의 가능성에 대해 진지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수지를 맞출 수 없다.

    어떤 자본주의 나라에서도 노동자계급의 힘은 노동자계급이 전체 인구 중에서 차지하는 비중보다 훨씬 더 크다. 이것은 노동자계급이 경제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 경제의 전체적인 자본주의적 체계의 신경중추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노동자계급이 자본주의의 지배를 받는 절대다수의 임금노동자의 실제적 이해를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표현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이유로 노동자계급은 비록 인구의 소수를 이룰지라도 (또는 의식적이고 정말로 혁명적인 노동자계급의 전위가 인구의 소수를 이루는 경우에) 자본가계급을 타도하고, 그 결과로 반(半)노동자 대중과 소부르주아 사이에서 많은 동맹자를 자기편으로 끌어당길 수 있는 것이다. 이들은 노동자계급의 지배를 위해 결코 미리 앞으로 나서지 않을 것이며, 이 지배의 조건과 임무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 노동자독재의 필연성, 정당성, 합법성에 대한 직접적 경험을 통해서만이 지배를 확신할 것이다.
    (레닌,《전집》, 제16권, '1919년', 458쪽)

    생산에서 차지하는 중국 노동자계급의 역할은 이미 매우 크다. 다음 몇 년 사이에 이 역할은 더욱 커지기만 할 것이다. 사태가 입증한 것처럼,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역할은 거대해질 것이다. 그러나 지도부의 모든 방침은 노동자계급이 지도적 역할을 획득하는 것에 대해 반대했다.

    강령 초안은 중국에서 성공적인 사회주의 건설은 '노동자 독재 아래 있는 나라들이 직접적으로 지원한다는 조건에서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따라서 당이 항상 러시아와 관련해 인정한 원칙을 지금 중국과 관련해서도 동일하게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중국이 독자적인 사회주의사회 건설을 위한 내적인 힘이 충분하지 않다면, 스탈린-부하린의 이론에 따르면, 중국의 노동자계급은 혁명의 어느 단계에서도 권력을 장악해서는 안 된다. 아니면 정반대의 의미에서 소련이라는 존재가 문제를 해결해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의 기술체계가 소련은 물론이고 중국에서도, 즉 합해서 6억의 인구를 거느린 경제적으로 가장 후진적인 두 나라에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할 정도는 된다는 것이 당연시 된다. 아니면 혹시 독재가 전 세계 사회주의 혁명의 연쇄에 포함될 것이기 때문에, 따라서 그 고리이자 추동력이 될 것이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노동자계급의 독재가 중국에서는 '인정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인가? 그러나 이것이 바로 러시아의 '특이성'은 정확히 동방국가들의 발전경향을 따라간다는 10 혁명에 대한 레닌의 기본적 정식이다. 따라서 우리는 반(反)트로츠키주의 투쟁을 수행하기 위해 1925년에 도출한 수정주의적 일국사회주의 이론이 새롭고 주요한 혁명적 문제를 다룰 때 마다 사태를 어떻게 왜곡하고 혼란시키는지 알 수 있다.

    강령 초안은 이 같은 길을 따라 더 나아간다. 중국과 인도를 '1917년 이전의 러시아'에 대치시키고, '성공적인 사회주의 건설에 충분한 최소한의 산업'을 보유한 나라, 또는 (다른 곳에서 더 분명히, 따라서 더 틀리 게 말한 것처럼) '완전한 사회주의 건설에 … 필요 충분한 물질적 전제조건'을 가지고 있는 나라로 폴란드('등'?)를 든다.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이것은 단지 '필요 충분한' 전제조건이라는 레닌의 표현을 희롱한 것이다. 또한 레닌은 분명히 기술적, 문화적, 국제적 전제조건을 포함하여 정치적, 조직적 전제조건을 열거하기 때문에 이는 기만적이고 용납할 수 없는 사기다. 그러나 주요한 문제가 남아 있다: 이것이 두 경제체제, 두 사회질서 사이의 연속된 세계적 투쟁, 게다가 우리의 경제적 토대가 훨씬 더 약한 투쟁의 문제라면, 완전한 사회주의 건설에 충분한 '최소한의 산업'을 어떻게 선험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가?

    만약 경제적 지렛대만을 고려한다면, 우리는 소련에서, 그리고 중국과 인도에서는 그만큼 더 세계 자본주의에 비해 훨씬 더 짧은 지렛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모든 문제는 세계적 규모로 전개되는 두 체제의 혁명투쟁으로 결정된다. 정치투쟁에서 긴 지렛대는 우리의 것이다. 아니 더 정확히 설명하자면, 우리의 정책이 올바르다면, 우리가 손에 쥐고 있음을 입증할 수 있고, 반드시 입증할 것이다.

    게다가 레닌은 '우리의 혁명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일정한 문화적 수준'이 '사회주의' 건설에 필수적이라 말한 뒤에 이렇게 덧붙이고 있다: '비록 이 일정한 문화적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더라도 말이다.' 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가? 왜냐하면 세계적 규모로 전개되는 두 사회체계, 두 문화 사이의 경쟁, 투쟁으로 결정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문제의 본질 자체에서 나오는 레닌의 이런 생각과 완전히 결별하면서 강령 초안은 1917년에 러시아는 정확히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기술 체계', 따라서 문화도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초안의 기초자들은 선험적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강령에서 말하려고 한다.

    모든 문제가 국제적 역학관계에 의해 결정된다면, 국민국가('1917년 이전의 러시아') 안에서 '최소한으로 충분한' 기준을 찾으려는 것은 용납 할 수 없고, 불가능하며, 어리석은 짓이다. 이런 잘못되고, 자의적이며, 고립적인 일국적 기준에 정치상의 일국적 협소함, 피할 수 없는 일국-개량주의적이고 사회 애국주의적인 미래의 중대한 실수를 위한 전제조건의 이론적 토대가 존재한다.

     

    7. 동방을 위한 '노동자 농민의 두 계급 당'이라는 반동적 관념에 대하여

    제2차 중국혁명의 교훈은 코민테른 전체의 교훈이지만, 주로 동방의 모든 나라들을 위한 교훈이다.

    중국혁명에서 멘셰비키 노선을 옹호하기 위해 제시된 모든 주장은 우리가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인도에게는 틀림없이 3배로 효력이 있을 것이다. 고전적 식민지인 인도에서 제국주의의 굴레는 중국에서 보다 훨씬 더 직접적이고 뚜렷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인도에 잔재하는 봉건적, 노예적 관계는 그지없이 더 뿌리 깊고 현저하다. 그렇다하더라도, 아니 바로 이런 이유로 혁명을 와해시킨 중국에 적용된 방법은 틀림없이 인도에서 더욱 더 치명적인 결과로 나타날 것이다. 인도 봉건주의, 영국-인도 관료집단, 영국 군국주의의 타도는 인민대중의 거대하고 굳건한 운동에 의해서만 성취할 수 있다. 대중운동은 바로 강력한 발전, 억누를 수 없는 성질, 국제적 목표와 유대 때문에 지도부의 불명확하고 타협적인 기회주의적 조치를 용인할 수 없다.

    코민테른 지도부는 이미 인도에서 적지 않은 오류를 저질렀다. 이런 오류가 중국에서와 같은 규모로 나타날 수 있게 하는 조건이 아직까지 마련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누구나 중국사태의 교훈이 인도와 동방의 다른 나라들에서 주요 정책의 방향을 더 적시에 수정할 여지를 줄 것이 라고 기대할 수 있다.

    모든 곳에서, 그리고 언제나처럼, 여기서 우리에게 핵심적 문제는 공산당, 당의 완전한 독립, 당의 비타협적인 계급적 성격의 문제이다. 이런 방침에서 가장 큰 위험은 동방의 나라들에서 이른바 '노동자 농민의 당'을 조직하는 것이다.

    마르크스와 레닌의 수많은 근본적 테제를 공공연히 수정한 해로 기록될 1924년부터 스탈린은 '동방국가들을 위한 노동자 농민의 두 계급 당'이라는 정식을 제출했다. 이 정식은 서방에서 '안정'이 한 것처럼, 동방에서 기만적 기회주의에 기여한 것과 똑같은 민족적 억압에 근거해 있었다. 최근에 민족적 억압이 없는 일본뿐만 아니라 인도에서 온 전보도 코민테른에 가깝고 우호적인 조직이라고 부르면서 지방적인 '노동자 농민당'의 활동을 자주 언급했다. 마치 이들 당이 거의 우리 '자신의' 조직인 것처럼, 그러나 그 정치적 특징에 대한 어떤 구체적 정의도 제시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한 마디로, 불과 조금 전에 국민당에 대해 한 것과 같은 식으로 이들에 대해 쓰고 말한다.

    지난 1924년〈프라브다〉지는 이렇게 보도했다 : '한국의 민족해방운동이 서서히 노동자 농민당 수립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는 징후가 있다.'(〈프라브다〉지,1924년 3월 2일자)

    한편 스탈린은 동방의 공산주의자들에게 이렇게 설교했다.

    공산주의자는 민족공동전선에서 노동자와 소부르주아 계급 사이의 혁명적 블록 정책으로 넘어가야 한다. 이러한 나라들에서 이 블록은 국민당과 유사한 단일정당, 즉 노동자 농민당의 형태를 취할 수 있다.(스탈린,《레닌주의의 문제》,264쪽)

    공산당의 독자성(분명히 고래 배 속의 예언자 요나의 그런 '독자성')문제에 대해 아주 작은 '유보조항'을 지키는 것은 기만이라는 목적을 위해서만 쓸모가 있었다. 우리는 제6차 대회가 이 분야에서 가장 가벼운 애매함도 치명적이며, 따라서 거부될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을 깊이 확신하고 있다.

    지금 이것은 당과 자기 계급이나 다른 계급과 당의 관계라는 근본적 문제에 대한 완전히 새롭고, 전적으로 잘못된, 철저히 반(反)마르크스주의적인 정식의 문제이다.

    국민당에 입당할 중국공산당의 필요성은 그 사회적 구성에서 국민당은 노동자 농민의 당이며, 국민당의 10분의 9一이 비율은 수백 번 되풀이되었다一는 혁명적 경향에 속하고,공산당과 협력할 준비가 되어있었다는 근거에서 옹호되었다. 그렇지만 상해와 무한 쿠데타 중에나 그 이후에 국민당의 이런 혁명적 10분의 9가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이들의 흔적을 발견한 사람조차 없다. 그리고 스탈린, 부하린 등 중국에서 계급 협조를 주장한 이론가들은 국민당원의 10분의 9一노동자와 농민, 혁명가, 동조자, 따라서 전적으로 우리 '자신의' 10분의 9一가 어떻게 되었는지 설명하는 것을 귀찮아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만약 우리가 스탈린이 설교한 이 '두 계급' 당들 전부의 운명을 이해한다면, 만약 우리가 1919년 러시아공산당 강령은 물론이고 1847년 《공산당 선언》으로부터도 우리를 훨씬 뒤로 내모는 바로 그 개념 자체를 명백히 해야 한다면 말이다.

    유명한 10분의 9가 사라진 곳의 문제는 우리가 먼저, 이중합성, 즉 서로 용납되지 않는 두 가지 역사적 노선一노동자 노선과 소부르주아 노선一을 동시 에 표현하는 두 계급 당의 불가능성을 이해하는 경우에만, 둘째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독자적인 농민당, 즉 농민의 이해를 표현하는 당인 동시에 노동자계급이나 자본가계급과도 무관한 당의 실현 불가능성을 이해하는 경우에만, 분명해질 수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언제나 농민과 노동자계급은 별개의 두 계급이며,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떤 식으로든 이들의 이해를 동일시하는 것은 잘못이며, 농민은 소유권의 관점에서 볼 때, 노동자계급의 견해를 받아들일 경우에만 공산당에 결합할 수 있다고 가르쳤으며, 볼셰비키주의 역시 이를 받아들였으며, 이렇게 가르쳤다. 노동자계급의 독재 아래에서 노동자 농민의 동맹은 이 테제를 무용지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식으로, 다른 상황에서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다. 만약 서로 다른 이해를 가진 별개의 계급이 없었다면, 동맹에 대해서도 말할 것이 없을 것이다. 이러한 동맹은 강철 같은 노동자계급의 독재의 틀 속에 들어가는 정도로만 사회주의 혁명과 양립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독재는 이른바 농민동맹이라는 존재와 양립할 수 없다. 바로 국가적인 온갖 정치 문제해결에 뜻을 두고 있는 모든 '독자적인' 농민 조직은 필연적으로 자본가계급에게 완전히 장악된 도구로 밝혀질 것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나라에서 스스로를 농민당이라고 부르는 이런 조직들은 실제로 부르주아 정당의 변종들 가운데 하나이다. 노동자의 입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이 소유주라는 심리를 포기하지 않는 모든 농민은 근본적인 정치 문제에 닥치면 불가피하게 자본가계급을 따를 것이다. 물론 농민에 의존하고 있거나 의존하려고 하며, 가능하다면, 노동자에게도 의존하려고 하는 모든 부르주아 정당은 자신을 위장, 즉 자기에게 적합한 두세 가지 입장을 취하지 않을 수 없다. 유명한 '노동자 농민의 당'이라는 개념은 농민의 지지를 구하지 않을 수 없지만 노동자를 자기대오로 흡수할 준비가 되어 있기도 한 기만적인 부르주아 정당들을 위해 일부러 만든 것처럼 보인다. 국민당은 이러한 당의 전형적 유형으로 영구히 역사에 기록되었다.

    알려진 것처럼, 부르주아 사회는 재산 없고, 불만을 품은, 속아 넘어간 대중이 밑바닥에 있고, 위에는 만족스러운 사기꾼들이 머물도록 지어졌다. 모든 부르주아 정당이 진짜 당이라면, 즉 상당수의 대중을 포용하고 있다면, 똑같은 원칙 위에 세워졌을 것이다. 계급사회에서 착취자, 사기꾼, 독재자는 소수를 이룬다. 따라서 모든 자본가 정당은 그 내적 관계에서 이런저런 방식으로 부르주아사회 전체의 관계를 재현하고 반영할 수밖에 없다. 이에 따라 모든 대중적 부르주아 정당의 하층은 상층보다 더 민주적이고 한층 더 '좌익적'이다. 이는 독일중앙당, 프랑스급진당, 특히 사회민주주의에 들어맞는다. 이런 이유로 '좌익적인' 국민당 일반당원, '압도적 다수',"10분의 9' 등의 정서를 반영하지 못하는 상층은 매우 고지식하고, 용납할 수 없다고 스탈린, 부하린 등이 항상 불평을 나타낸 것이다. 조직적 수단, 지시, 회람장을 통해 제거되어야 할 일시적인, 불쾌한 오해에 대해 이들이 자신의 기괴한 불평을 표출한 것은 실제로 특히 혁명적 시대에 부르주아 정당의 핵심적이고 기본적 특징이다.

    이런 관점에서 온갖 기회주의 블록 일반一영국과 중국 모두에서一을 옹호하는 강령 초안 작성자들의 기본적 주장이 판단되어야 한다. 이들에 따르면, 상층과의 우애적 교제는 일반당원을 위해 배타적으로 수행된다. 알려진 것처럼, 반대파는 국민당으로부터 당의 철수를 주장했다.

    부하린은 이렇게 말한다. '"왜 문제가 발생하는가? 국민당 지도자들이 우유부단하기 때문인가? 국민당 대중은 어떠한가, 이들은 단지 '짐승 같은 놈들'일 뿐인가? 언제부터 대중조직에 대한 태도가 "최고" 수뇌부에서 일어나는 일에 따라 결정되었는가!"'(중국혁명의 현 상황)

    이러한 주장의 실현성이야말로 혁명정당에서는 불가능해 보인다. 부하린은 이렇게 묻는다 : '국민당 대중은 어떠한가, 이들은 단지 짐승 같은 놈들일 뿐인가?' 물론 이들은 짐승 같은 놈들이다. 어떤 부르주아 정당의 대중도 늘 짐승 같은 놈들이다. 비록 정도가 다르긴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대중은 짐승 같은 놈들이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노동자 농민당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자본가계급을 감추면서 대중을 자본가계급의 지배로 내모는 것을 금지시킨 이유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노동자당을 부르주아 정당에 종속시키는 것을 금지시킨 이유이다. 거꾸로 우리는 전 단계에 걸쳐 노동자당을 부르주아 정당에 대비시켜야한다. 부하린이 부차적, 우발적, 일시적인 것처럼, 역설적으로 말하는 국민당의 '최고' 수뇌부는 실제로 그 사회적 본질에서 국민당의 정수이다. 물론 자본가계급은 사회에서뿐만 아니라 당에서도 '수뇌부'에만 속한다. 그러나 이 수뇌부는 자금력, 판단력, 결합력이 강하다. 언제든 제국주의자들의 지원에 의지할 수 있으며,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당 내 지도부와 밀접히 결합한 실제 정치력과 군사력에 언제든 의지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이 수뇌부가 파업에 반대하는 법률에 서명하고, 농민 봉기를 질식시키고, 공산주의자들을 어두운 구석으로 떠밀고, 기껏해야 소부르주아 손문주의가 마르크스주의에 우선한다는 맹세를 강요한 당의 3분의 1만을 인정했다. 이 수뇌부가 고르고 갑옷을 입힌 일반당원은 장군, 매판 자본가, 제국주의자들이 우익의 지주역할을 한 것과 꼭 마찬가지로, 모스크바처럼 '좌익'의 지주 역할을 했다. 국민당을 부르주아 정당이 아니라 대중투쟁의 중립적 무대로 여기는 것은 진짜 지배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의문을 감추기 위해서 좌익 일반당원의 10분의 9에 대해 말장난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수뇌부의 힘과 권력을 더해주고, 더 광범한 대중을 '짐승 같은 놈들'로 개조시키려는 수뇌부를 거들고, 가장 유리한 조건에서 상해쿠데타를 준비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두 계급 당이라는 반동적 관념에 기초를 두면서 스탈린과 부하린은 중국의 권력이 국민당의 수중에 있기 때문에 '좌익'과 함께 공산주의자들이 국민당의 다수파를 획득함으로써 나라의 권력을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바꿔 말하면,이들은 국민당 대회에서 보통선거를 통해 자본가계급의 수중에서 노동자계급으로 권력이 넘어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부르주아 정당에서 … 더 관계적이고 이상적인 '당내 민주주의'의 우상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 정말로 군대, 관료집단, 언론, 자본이 모두 자본가계급의 수중에 있다. 바로 이것 때문에, 그리고 이것만이 지배정당의 실권을 잡고 있다. 부르주아 '수뇌부'는 감히 군대, 관료집단, 언론, 자본에 반대하지 않는 한에서만 좌익(그리고 이런 부류의 좌익)의 ‘10분의 9’를 용인하거나 용인했다. 이런 강력한 수단을 통해 부르주아 수뇌부는 이른바 '좌익'당원의 10분의 9뿐만 아니라 대중전체도 계속 종속시켰다. 이런 계급블록이론, 국민당이 노동자 농민의 당이라는 이론은 자본가계급을 최상으로 도와준다. 자본가계급이 나중에 대중과 적대적으로 충돌하여 이들을 사살하게 되면, 진정한 두 세력一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一사이의 이 충돌에서 유명한 10분의 9는 그 울음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보잘것없는 민주적 날조는 피비린내 나는 계급투쟁의 현실에 직면하여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이것이 '동방을 위한 노동자 농민의 두 계급 당'의 진짜, 그리고 유일무이한 정치적 메커니즘이다. 다른 것은 없으며,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 * *

    마르크스의 계급적 원칙을 폐기한 것으로 추정되는 두 계급 당이라는 개념이 민족적 억압에 자극받은 것일지라도, 우리는 이미 민족적 억압이 전혀 없는 일본에서 '노동자농민의' 잡종에 대해 듣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다가 아니다. 사태는 동방에 국한되지 않고 있다. '두 계급' 관념은 보편적 견지에 이르려고 한다. 앞에서 언급한 미국공산당은 이 영역에서 가장 기괴한 특징을 띠었다. 미국공산당은 이런 수단을 통해 사회혁명의 전차를 몰려는 미국 농부들을 매어두기 위해 부르주아 대통령 후보一'믿을 수 없는' 상원의원 라폴레트一를 지원하려고 노력했다. 이런 책략의 이론가이자 헝가리 농민을 도외시했기 때문에 헝가리혁명을 결딴낸 사람 가운데 하나인 페퍼는 농부들 사이에서 용해시킴으로써 미국공산당을 파멸시키려고 엄청난 노력(아마도 보상을 통해)을 기울였다. 페퍼의 이론은 농업 위기가 농부를 몰락시키고, 이들을 사회혁명의 길로 내모는 반면에, 미국 자본주의의 초과이윤이 미국 노동자계급을 세계의 노동귀족으로 전환시킨다는 것이었다. 페퍼의 개념에 따르면, 주로 이민자로 이루어진 수천 명의 당은 부르주아 정당을 매개로 하여, 따라서 초과이윤 때문에 타락한 노동자계급의 수동성이나 중립성에 직면하여 사회주의혁명을 보증할 두 계급 당을 수립함으로써 농부들과 융합해야 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이 코민테른 상층지도부 사이에서 지지자와 얼치기 지지자를 얻었다. 결국 양보가 마르크스주의의 기본 원칙이 될 때까지 몇 주 동안 쟁점이 어느 쪽으로도 결정이 나지 않은 채 동요했다 (막후의 논평은 트로츠키주의자의 편견이라는 것이었다). 그 창립자가 죽기 전부터 라폴레트 당에서 당을 떼어내기 위해 미국공산당을 올가미밧줄로 잡을 필요가 있었다.

    동방을 위해 현대 수정주의가 고안한 모든 것은 나중에 서방에까지 미쳤다. 만약 대서양 한편에서 페퍼가 두 계급 당을 통해 역사에 박차를 가하려고 했다면, 가장 최근에 실린 신문의 긴급보도는 국민당의 경험이 '노동자 농민위원회 에 기초(?!)한 공화국 의회'라는 기괴한 슬로건을 우리 당의 것이라고 속이려 시도한 이탈리아에서 분명히 그 모방자를 발견했다는 것을 알려줄 것이다. 이 슬로건에서 장개석의 진의는 힐퍼딩의 진의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우리가 정말로 그렇게 될 것인가?

    * * *

    끝으로 우리가 상기할 것이 하나 남아있다. 그것은 바로 인민주의자(나로드니키)에 대한 볼셰비키주의의 전체 투쟁사에서 노동자농민당이라는 개념을 쓸어버리는 것이다. 이 투쟁이 없다면 볼셰비키당은 없었을 것이다. 이 역사적 투쟁의 의의는 무엇이었는가? 1909년에 레닌은 사회 혁명당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들 강령의 근본 개념은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무력동맹'이 필수적이라는 것이 결코 아니라 노동자계급과 농민사이에 계급적 심연은 없으며, 이들 사이의 계급적 구별을 명백히 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노동자계급과 구별되는 농민의 소부르주아적 본질에 대한 사회민주주의적 개념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레닌,《전집》,제11권,1부,198쪽)

    바꿔 말하면, 노동자 농민의 두 계급 당은 러시아 나로드니키의 중심 개념이다. 이 개념에 대한 투쟁 속에서만 농민 가운데에서 노동자전위당이 발전할 수 있었다.

    레닌은 1905년 혁명기에 끈기 있게, 그리고 꾸준히 이렇게 반복했다.

    농민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쉽게 의심을 거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농민과 따로 조직해야 한다. 농민이 반동 또는 반(反)노동자적 세력으로 표면에 나선다면, 이들과 맞서 싸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레닌,《전집》, 제6 권,113쪽. 트로츠키의 강조》

    1906년에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마지막 충고는 이것이다 : 도시와 농촌의 노동자와 반(半)노동자는 스스로를 따로 조직하라! 하찮은 정도의 소유자도, 소(小)소유자도, '일하는' 소유자도 믿지 말라 … 우리는 끝까지 농민운동을 지지하지만, 다른 계급의 운동이 사회주의 혁명을 이룰 수 있거나 이룰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해야한다.(레닌,《전집》,제9권,410쪽)

    이런 생각은 레닌의 수많은 크고 작은 저작에서 다시 나타난다. 1908년에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동맹이 다른 계급의 융합이나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당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해서는 결코 안 된다. 융합뿐만 아니라 어떠한 종류의 지속적인 협정도 노동자계급의 사회주의당에게는 치명적일 것이며, 혁명적 민주주의 투쟁을 약화시킬 것이다.(레닌, 전집》,제11권,1부,79쪽.트로츠키의 강조)

    누가 노동자농민의 당이라는 개념 자체를 이보다 더 엄하게, 더 가차 없이, 더 통렬하게 비판할 수 있는가?

    이에 반해 스탈린은 이렇게 가르친다.

    매번[!]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혁명적 반(反)제국주의 블록은 … 틀림없이 공식적으로[?] 단일한 강령으로 묶인 노동자농민의 단일정당이라는 형태를 취할 것이다.(스탈린,《레닌주의의 문제》,265쪽)

    레닌은 노동자와 농민의 동맹은 어떠한 경우에도, 그리고 절대로 당의 융합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스탈린은 레닌에게 단 한 가지를 양보한다 : 스탈린에 따르면, 계급블록은 틀림없이 국민당 같은 노동자농민의 당, '단일정당의 형태'를 취할 것이지만 언제나 의무적인 것은 아니다. 우리는 적어도 이 양보에 대해 그에게 감사해야 한다.

    레닌은 10월 혁명기에 이 문제를 비타협적인 태도로 제기했다. 1918년부터 세 차례의 러시아혁명의 경험을 일반화하면서 레닌은 자본주의 관계가 우세한 사회에서는 두 결정적 세력 一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 一 이 있다는 것을 반복할 기회를 단 한 번도 놓치지 않았다.

    '만약 농민이 노동자를 따르지 않는다면, 그는 자본가계급을 뒤따를 것이다. 중간노선은 있지도 않고, 있을 수도 없다.'(레닌,집》,제16권,'1919 년',219쪽)

    그러나 '노동자 농민의 당'은 바로 중간노선을 만들어내려는 것이다.

    러시아 노동자계급의 전위가 자신을 농민에 대립시키지 못했다면, 농민의 게걸스러운 소부르주아적 무정형성에 대해 가차 없는 투쟁을 수행하지 못했다면, 불가피하게 사회혁명당이나 약간 다른 '두 계급 당'을 통해 소부르주아 분자들 사이에서 용해되었을 것이다. 동시에 전위는 불가피하게 부르주아 지도부에 종속되었을 것이다. 농민과 혁명적 동맹을 맺기 위해서는 一 이는 까닭 없이 나오지 않는다 一 무엇보다도 먼저 노동자전위, 따라서 노동자계급 전체를 소부르주아 대중과 분리시킬 필요가 있다. 이것은 흔들리지 않는 계급적 비타협성의 정신으로 노동자당을 훈련시킴으로써만 이루어질 수 있다.

    젊은 노동자계급, 더 생생하고 더 직접적인 농민과의 '혈연적 유대', 인구 전체에서 차지하는 농민의 더 큰 비율은 '두 계급'이라는 형태의 정치적 연금술에 대한 투쟁의 중요성을 더욱 크게 한다. 서방에서 노동자 농민의 당이라는 개념은 정말로 터무니없는 소리에 불과하다. 동방에서는 치명적이다. 중국, 인도, 일본에서 이 개념은 혁명에서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 뿐만 아니라 노동자전위의 가장 초보적인 독자성에도 치명적으로 적대적이다. 노동자농민의 당은 자본가계급의 지지기반, 보호막, 도약판 구실을 할 수밖에 없다.

    동방 전체에 근본적인 이 문제에서 현대 수정주의가 단지 혁명 이전시기 구 사회민주주의적 기회주의의 오류를 반복한다는 것은 치명적이다. 유럽 사회민주주의의 지도자들 대부분은 사회혁명당에 대한 우리당의 투쟁을 잘못이라고 생각했으며, '동방' 러시아에게는 노동자 농민의 두 계급 당이 꼭 맞았다고 확신하며, 두 당의 융합을 끈질기게 주장했다. 우리가 이들의 충고를 마음에 두었다면,우리는 노동자와 농민의 동맹이나 노동자계급의 독재를 절대로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사회혁명당이라는 노동자농민의 '두 계급' 당은 제국주의 자본가계급의 하수인이 되었지만, 우리나라가 그렇게 되는 것을 도울 수는 없었다. 즉, 이것은 볼셰비키주의의 수정주의자들 덕분에 다른 식으로, 그리고 '특유한' 중국의 방식으로 국민당이 중국에서 성공적으로 수행한 것과 똑같은 역사적 역할을 완수하려는 실패한 시도였다. 동방을 위한 노동자농민의 당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가차 없는 비판이 없다면, 코민테른의 강령이 아니며, 강령이 될 수도 없다.

     

    8. 농민인터내셔널을 지킨 강점이 규명되어야 한다.


    주요하지 않지만, 반대파에게 퍼부은 주요한 비난 가운데 하나는 농민에 대한 '과소평가'였다. 이 점에서도 반대파는 국내, 국제적 방침에 따라 자신의 판단을 내리고, 검증을 받았다. 공식 지도자들은 모든 경우에 농민과 관련한 노동자계급의 역할과 중요성을 과소평가하고 있다는 유죄를 입증했다. 이 와중에 가장 중대한 전환과 오류가 경제와 정치 분야에서, 그것도 국제적으로 발생했다. 1923년 이후 국내적 오류의 근저에는 국민경제 전체, 그리고 농민과의 동맹의 중요성, 노동자계급의 관리 아래 있는 국영기업에 대한 과소평가가 자리하고 있다. 중국에서 혁명은 토지혁명에서 노동자계급의 지도적, 결정적 역할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파멸했다.

    같은 관점에서 처음부터 실험에 지나지 않은 크레스틴테른(Krestintern, 농민인터내셔널의 러시아 약어 : 옮긴이)의 전체 활동을 검토하고 평가할 필요가 있다. 게다가 이 실험은 최대한의 주의와 원칙의 엄수가 요구 되었다. 이런 이유를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 전체 역사와 생존조건에 의해 농민은 가장 국제적이지 않은 계급이다. 속칭 국민성이라는 것은 바로 농민 속에 그 주요한 원천을 가지고 있다. 농민 가운데서 국제주의의 길을 따라 지도될 수 있는 빈농만이 반(半)노동자 대중이며, 따라서 노동자계급은 이들만을 지도할 수 있다. 지름길로 가려는 어떠한 시도도 계급을 희롱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시도는 언제나 노동자계급에게 손해를 끼칠 뿐이다. 농민은 노동자계급이 자본가계급의 영향력으로부터 떼어낼 경우에만, 노동자계급이 자신의 동맹세력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지도자임을 인정하는 경우에만, 국제주의 정책으로 이끌릴 수 있다. 거꾸로, 노동자계급을 따돌리고, 각국 공산당에 관계없이 다양한 나라의 농민을 독자적인 국제조직으로 조직하려는 시도는 미리 실패하게 되어있다. 결국 이러한 시도는 각국에서 벌어지는 노동자계급의 농업노동자와 빈농에 대한 헤게모니 투쟁을 해칠 수밖에 없다.

    16세기나 그 이전부터 농민은 전쟁을 일으켰으며, 반(反)혁명뿐만 아니라 모든 부르주아 혁명에서 다양한 농민계층은 거대하고, 이따금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독자적인 역할을 수행한 적은 없다. 직간접적으로 농민은 언제나 한 정치세력에 대하여 다른 정치세력을 지지했다. 농민만으로는 국가적인 정치적 임무를 해결할 수 있는 독자적 세력을 구성한 적이 없다. 금융자본 시대에 자본주의 사회의 분열과정은 자본주의 발전의 초기 단계와 비교해 볼 때 엄청나게 가속화되었다. 이것은 농민의 비중이 증대된 것이 아니라 감소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경우에도 농민은 국제적 차원은 고사하고 국내적 차원에서도 산업자본주의 시대에 한 것만큼 제국주의 시대에 독자적인 정치적 행동을 할 수 없다. 오늘날 미국의 농부들은 인민주의 운동경험이 보여주는 것처럼, 독자적인 전국정당을 결성할 수 없으며, 또 결성하지도 못한 4~5년 전보다 비교도 안 될 만큼 독자적인 정치적 행동을 할 수 없다.

    전쟁이 야기한 경제적 쇠퇴에서 유래하는 유럽농업에 대한 일시적이지만 강렬한 자극은 '농민', 즉 자신을 선동적으로 부르주아정당에 대립시키는 부르주아 사이비 농민당의 있을 법한 역할에 관해 환상을 낳았다. 만약 전후 격렬한 농민의 불안정기에 노동자계급과 농민, 농민과 자본가계급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시험하기 위해 농민인터내셔널을 조직하는 실험을 여전히 감행할 수 있었다면, 지금은 그 잘못된 결점을 들춰내고, 긍정적 측면을 지적하려고 노력하기 위해 5년간의 농민인터내셔널의 경험에 대한 이론적, 정치적 대차대조표를 작성할 적기이다.

    어쨌든 한 가지 결론은 명백하다. 불가리아, 폴란드,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즉, 하고많은 나라들 가운데 하필 후진국들)의 '농민'당 경험, 러시아 사회혁명당의 오랜 경험, 국민당의 새로운 경험(아직도 그 피가 식지 않은),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의 삽화적 실험, 특히 미국의 라폴레트-페퍼 실험-이 모든 것은 자본주의 쇠퇴기에 독자적, 혁명적, 반(反) 부르주아적 농민당을 기대하는 것은 자본주의 상승기에 비해 훨씬 더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의심할 여지없이 보여준다.

    현 시대의 역사적 상황에서 도시는 농촌을 동일시할 수 없고, 농촌은 도시를 동일시할 수 없다. 도시는 불가피하게 농촌을 이끌고, 농촌은 불가피하게 도시를 따른다. 유일한 문제는 도시계급의 문제가 농촌을 이끌 것이라는 점이다.(레닌, (전집》, 제16권, '1919년', 442쪽)

    동방의 혁명에서 농민은 전과 마찬가지로 다시 한 번 결정적 역할을 할 것이지만, 이 역할은 지도적이지도 독자적이지도 않을 것이다. 호북성(湖北省), 광동성(廣東省), 또는 뱅골지역의 빈농은 국내는 물론이고 국제적 차원에서 역할을 할 수 있다. 단 상해, 광동, 한구(漢沽), 그리고 캘커타 노동자를 지지할 경우에만 그렇다. 이것이 세계로 향하는 혁명적 농민의 유일한 탈출구이다. 호북성의 농민과 갈리치아(Galicia)나 도브루자(Dobrudja)의 농민, 이집트농부와 미국농부사이의 직접적 결합을 벼리려고 시도하는 것은 가망 없는 짓이다.

    정치의 본질에서 직접적 목표에 아무런 도움도 안 되는 것은 불가피하게 흔히 직접적 목표가 추구한 것의 반대인 다른 목표의 도구가 된다. 우리가 농민에 의지하고 있거나 의지하려고 하는 부르주아정당의 사례를 몰랐다면, 자국 공산당의 타격으로부터 보호를 확실히 하기 위해 코민테른 안에서 그렇게 할 수 없다면, 농민인터내셔널 안에서 길든 짧든 자신을 위해 보험에 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야 하는가? 노동조합 분야에서는 퍼셀처럼 영-러위원회를 통해 자신을 지켜야 했는가? 만약 라폴레트가 농민인터내셔널에 등재하려고 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단 하나 미국공산당이 끔찍할 정도로 약했다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는 농민인터내셔널에 등재하지 않았다. 초대받거나 부탁받지도 않은 페퍼는 등재하지도 않은 라폴레트를 얼싸안았다. 그러나 크로아티아 부농의 은행가이자 지도자인 라디치는 자신의 입각에 농민인터내셔널의 출입허가증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훨씬 더 멀리 나아간 국민당은 농민인터내셔널과 반(反)제국주의동맹에서 자신만의 자리를 확보했을 뿐만 아니라,심지어 코민테른의 문을 두드렸으며, 단 한 표의 반대가 먹칠을 했지만 소련공산당 정치국의 축복어린 환영을 받기까지 했다.

    이것은 프로핀테른[적색노동조합인터내셔널]의 청산을 지지하는 경향이 매우 강한 시기(그 명칭 자체가 소비에트 노동조합의 규약에서 삭제되었다)인 최근의 주요한 정치적 흐름을 크게 특징짓고 있다. 우리가 기억하는 바로는 크레스틴테른[농민인터내셔널]의 명확한 승리에 대해 공식기관지 어디에서도 문제가 제기된 적이 없다.

    제6차 대회는 노동자국제주의의 관점에서 농민'인터내셔널'의 활동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 지금이 이 길게 이어지는 실험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대차대조표를 작성할 적기이다. 이런저런 형태의 대차대조표는 코민테른 강령에 포함되어야 한다. 현재의 초안은 농민인터내셔널의 '대중'에 대해서든, 실제로 그 존재 자체에 대해서든 일언반구도하지 않는다.

     

    결론

    우리는 강령 초안의 어느 정도 근본적인 테제들에 대한 비판을 제출했다. 극도의 시간적 압박 때문에 우리는 강령 초안을 다 다루지 못했다.

    이 임무를 위해 우리에게 허용된 시간은 불과 2주뿐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가장 긴급한 문제로 제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문제는 최근 당내 투쟁과 혁명에 가장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이른바 '토론'에 대한 이전의 경험 덕분에 우리는 그 맥락에서 분리되어 잘못 쓰이고 있는 문구가 '트로츠키주의'를 격파하는 새로운 이론의 강렬한 원천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사전에 알았다. 지금까지 줄곧 이런 유형의 의기양양한 성공이 계속되어왔다. 그러나 우리는 이번에도 우리를 엄습할지 모르는 저속한 이론적 전갈채찍을 휘두를 가능성을 최대한 침착하게 살피고 있다.

    덧붙여 말하자면, 강령 초안의 기초자들은 새로운 비판적, 설명적 글을 배포하는 대신에 낡은 형법 제58조를 더 다듬는 것이 나을 것이라 생각할 확률이 크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이와 같은 주장은 우리에게 더욱 더 타당하지 못하다.

    제6차 세계대회는 강령을 채택하는 임무에 직면해 있다. 우리는 강령의 기초로서 부하린과 스탈린이 다듬은 초안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조금도 없다는 것을 이글 전체에 걸쳐 입증하려고 했다.

    현 시기는 소련공산당과 코민테른 전체의 생존에서 전환점이다. 이것은 우리당 중앙집행위원회와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2월 전원회의의 최근 모든 결정과 조치로 증명된다. 이런 조치는 완전히 불충분하고, 결의문도 모순적이다. 그리고 이것들 가운데 일부는 중국혁명에 대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2월 결의문처럼 철저하게 잘못된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모든 결의문의 구석구석에는 좌선회 하려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이를 과대평가할 어떠한 근거도 없다. 우익 분파는 보호하는 반면에, 그 만큼 더 혁명 분파에 대한 절멸 캠페인을 계속 협력해서 벌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구 노선이 야기한 곤경 때문에 강제된 이런 좌익화 경향을 무시할 생각은 잠시도 품지 않는다. 모든 진정한 혁명가는 맡은 자리에서 혁명적 레닌주의 노선 쪽으로 향하는 이런 좌익적 지그재그의 징후를 발전시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힘을 다할 것이다. 이를 촉진하는 과정은 당에 최소한의 어려움과 경련을 동반할 것이 다. 그러나 우리는 현재 이로부터 훨씬 더 멀리 떨어져 있다. 코민테른은 현재 가장 격심한 발전기一신노선이 이질적 요소를 폭발시키는 반면에, 구 노선이 청산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시기一를 겪고 있는지도 모른다. 강령 초안은 이런 이행적 상황을 전체적으로든 부분적으로든 반영한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이러한 시기는 많은 세월 우리 국제당의 활동을 앞서 결정해야 하는 문서를 정교화하기에 그다지 유리하지 않다. 어려울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때를 기다려야 한다. 우리는 흐려진 물을 맑게 할 수 있어야 한다. 혼란을 넘어서야 하며, 모순을 없애야 하며, 신 노선을 명확히 해야 한다.

    4년 동안 대회가 소집되지 않았다. 9년 동안 코민테른은 명확한 강령도 없이 지냈다. 현재 유일한 탈출구는 이것이다 : 코민테른 전체의 최고 권한을 빼앗으려는 시도를 단호하게 종식시키기 위해, 강령 초안에 대한 진정한 토론을 인정하고, 절충적 강령에 대비되는 다른 강령, 즉 마르크스-레닌주의 강령에 동의할 수 있게 하는 정상적 체제를 다시 수립하기 위해 오늘부터 1년 안에 제7차 세계대회가 소집되어야 한다. 코민테른, 각국 지부의 모임이나 협의회, 그리고 그 기관지에 대한 질문을 금지해서는 안 된다. 올해 중에 마르크스주의의 쟁기로 경작지 전체를 깊이 일궈야 한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만 노동자계급의 국제 당은 통찰력 있는 빛으로 밝게 비추고, 멀리 미래로 믿을 수 있는 빛을 던지는 지침인 강령을 얻을 수 있다.

    1928년 6월 알마아타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1. 이 편지의 목적

    이 편지의 목적은 아무것도 감추거나 과장하지 않고 명쾌함을 획득하는 것이다. 명쾌함은 혁명정책의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상호이해에 이르려는 이런 시도는 침묵, 표리부동, 외교적 수완의 모든 흔적으로부터 자유로울 경우에만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이것은 당에 매우 불쾌하고 고통을 주는 일을 포함하여 모든 것은 그 이름대로 불리어야 한다는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경우에 적이 비판을 포착해 이용할 것이라고 고함치는 것이 관례였다. 현재, 계급의 적이 중국혁명을 가장 추악한 패배로 이끈 지도부의 정책에서, 아니면 무오류성이라는 잘못된 명성을 뒤흔든 반대파의 억눌린 경고에서 가장 큰 이득을 볼 수 있는지 여부를 묻는 것은 어쭙잖은 짓일 것이다.

    영-러위원회, 곡물 징수, 쿨락 일반, 그리고 모든 공산당 지도부가 따른 방침의 문제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반대파는 최근 5년 동안 코민테른의 더딘 성장을 비판하지 않는다. 사회민주주의가 많은 경우 반대파의 비판으로부터 약간 이득을 보려고 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지금도 필요한 만큼 염탐하며, 약삭빠르게 굴고 있다. 이렇게 하지 못했다면 그것도 이상했을 것이다. 용어의 넓은 역사적 의미에서 볼 때, 현재의 사회민주주의는 기생적 당이다. 전후, 특히 분명히 영(0)으로 환원된 1923년 이후에 아래로부터 부르주아사회를 보증하는, 말하자면, 본질적 측면에서 부르주아사회를 보호하는 임무를 수행하면서, 사회민주주의는 공산당의 오류나 부주의 ,결정적 순간에 저지른 이들의 항복, 아니면 이에 반해서 이미 지나간 혁명적 상황을 되살리려는 이들의 모험주의적 시도에 편승하여 번창해왔다. 1923년 가을 코민테른의 항복과 사후에도 이 거대한 패배의 의미를 통 깨닫지 못한 지도부,1924~25년의 모험주의적 초 좌익노선,1926-27년의 철저한 기회주의 정책 一 이것들이 사회민주주의의 부활을 야기한 것이며, 최근 독일 선거에서 사회민주주의가 9백만 표 이상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회민주주의가 가끔 반대파의 이런 저런 비판적 견해를 그 맥락에서 떼어내 칭찬을 늘어놓은 다음 노동자에게 제시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정말로 사소한일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다. 사회민주주의가 그 좌익一사회민주주의 정당이 부르주아사회의 필수적 안전판인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민주주의 좌익은 사회민주주의 정당에서 필수적 안전판 구실을 한다一을 가장하여 이따금씩 반대파에게 마음에도 없는 '공감' 을 표하지 않았더라도, 사회민주주의가 더 멀리 나아가지 않았더라도 현재의 모습은 아니었을 것이다. 더구나 사회민주주의는 반대파가 얼마 되지도 않고 탄압받는 소수파로 머무는 경우에만, 그리고 이러한 '공감'이 사회민주주의자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동시에 노동자의 동정적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경우에만, 마음에도 없는 '공감'을 표했다.

    현재 사회민주주의는 근본 문제에 대한 자신의 노선이 없으며, 또 가질 수도 없다. 이 영역에서 사회민주주의의 노선은 자본가계급에게서 나온다. 그러나 만약 사회민주주의가 부르주아 정당이 말한 모든 것을 단순히 되풀이만 했다면, 자본가계급에게 더 이상 유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부차적인, 막연한, 또는 요원한 문제에 대해 사회민주주의는 선홍색을 포함하여 온갖 빛깔로 장난을 칠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장난을 쳐야 한다. 게다가 반대파의 이런저런 판단을 이용함으로써 사회민주주의는 공산당의 분열을 일으키고 싶어 한다. 이러한 메커니즘의 작동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보기에, 사회민주주의의 일부 우익 사기꾼이나 좌익 풋내기가 우리 비판에 찬성하여 문장을 인용한다는 사실을 언급함으로써 반대파의 평판을 떨어뜨리려는 시도는 틀림없이 가엾은 이데올로기적 견해로 나타날 것이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모든 정치적 문제에서, 특히 중국과 영-러위원회 문제에서는 조금도 진지하지 않다. 국제 사회민주주의의 공감은 지도부의 '현실적' 정책을 편들었지만 우리의 정책에 대해서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소비에트연방과 코민테른의 틀 내에서 투쟁하는 경향들에 대해 자본가계급 자신이 내리는 일반적 평가이다. 자본가계급은 이 문제에 대해 발뺌하거나 시치미 뗄 이유가 없다. 그리고 이 점에서 바다 양편에 있는 세계 제국주의의 모든一별것 아닌 것까지도一진지하고, 중요하고, 권위 있는 기관들은 반대파를 자신의 불구대천의 적으로 생각한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내내 이들은 공식 지도부가 취한 수많은 조치에 대해 제한적이고, 신중한 공감을 직접적으로 표하거나, 반대파의 총체적 청산, 그 완전한 물리적 절멸(심지어 오스틴 체임벌린[오스틴 체임벌린(Austen Chamberlain, 1863-1937) : 1924-29년 볼드윈 내각의 외무장관, 1925년 로카르노조약 체결, 나중에 영국총리가 된 네빌 체임벌린의 이복형이다.])은 총살형을 요구했다)이 부르주아 체제에 공헌하는 소비에트 권력의 '정상적 발전' 을 위한 필수적 전제라는 취지의 자기 생각을 말했다. 심지어 우리가 참고할 만한 어떠한 근거자료 없이도 우리는 기억을 더듬어 이런 유형의 수많은 선언을 지적할 수 있다: 프랑스중공업 통보(通報)Information Bulletin[1927년 1월], 런던과 뉴욕〈타임즈〉Times의 선언, 미국 주간지〈더 네이션>The Nation을 포함하여 많은 출판물에 전재된 오스틴 체임벌린의 선언 등. 이런 사실만으로도 우리 당이 지난 몇 달 동안 겪었으며, 여전히 겪고 있는 위기에 대해 우리 계급의 적이 내린 판단을 우리당 기관지가 (초기였으며, 그것도 전적으로 성공적인 시도가 아니었음에 비추어) 통째로 재인쇄하는 것을 막도록 강제하기에 충분했다. 이런 선언들은 반대파의 혁명적, 계급적 본질을 지나치게 날카롭게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 대부분은 제6차 대회가 소집될 때까지 양심적으로 교정을 본 두 권의 책이 출판된다면, 명쾌함의 근거를 얻게 될 것이라고 생각 한다 : 코민테른의 논쟁에 대한 진지한 자본주의 출판사의 판단을 담은 백서(White Book)와 이에 필적하는 사회민주주의의 판단을 포함한 황서(Yellow Book)가 그것이다.

    어쨌든 우리 논쟁에 직접 참여하려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시도가 허무맹랑한 거짓말이라면, 우리가 코민테른의 정책에 치명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그리고 우리가 보기에 건전한 것을 분명하게, 그리고 정확히 지적하는 것을 잠시도 방해하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는 외교적 수완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숨바꼭질 놀이를 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정교화 해야 할 올바른 혁명정책을 통해서 이를 분쇄시킬 수 있을 것이다.

    * * *

    강령초안이 출판된 지금, 이와 함께 국제 노동자혁명의 모든 근본적인 이론적 실천적 문제는 당연히 새로운 초안에 비추어 검토해야 한다. 실제로 새로운 초안의 임무는 고려해야할 문제를 다루는 이론적 방법과 함께, 이미 코민테른이 겪은 모든 경험에 대한 일반화된 검증과 평가를 제공하는 것에 있다. 이런 식으로 문제를 검토함으로써만 우리는 원칙, 초안의 완성도, 실행가능성에 대한 초안의 정확성 정도를 확인하면서, 초안 자체를 검토하여 초안에 대한 현명한 판단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허용된 아주 제한된 시간 안에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강령 초안을 다룬 특별문서에서 이런 비판을 정식화했다. 우리의 비판을 명백히 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된 것은 근본적 문제였다. 우리는 이를 다음과 같은 3개 장(章)으로 나누었다.

    1.국제혁명의 강령인가 일국사회주의의 강령인가?
    2.제국주의 시대의 전략과 전술
    3.중국혁명의 개괄과 전망, 동방의 나라들과 코민테른 전체를 위한 그 교훈

    우리는 국제 노동운동의 생생한 경험과 특히 지난 5년 동안의 코민테른의 경험을 검토함으로써 이런 문제들을 분석하려고 했다. 이로부터 우리는 새로운 초안이 전혀 일관성이 없고, 그 원칙적 테제에 절충주의가 섞여 있으며, 체계적이지 못하고, 불완전하며, 설명에서도 누덕누덕 기우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전략을 다루는 절은 주로 최근 몇 년의 혁명적 경험에 대한 심오하고 비극적인 질문을 피하는 경향이 특징적이다.

    우리는 여기서 이미 대회에 보낸 문서에서 검토한 문제로 되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위에서 말한 것에서 즉시 알 수 있는 것처럼, 이 편지의 목적은 완전히 다르다. 이를테면, 위기와 정책을 다루어야 했다. 일반적 전망에서 우리는 어제까지 갈수록 소원해지고 있던 소련공산당과 코민테른 내에 존재하는 경향들의 화해를 위한 출발점으로 삼기위해 이제 공식적으로 이뤄진 좌선회가 정확히 어느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알아야만 한다. 분명히 사상의 완전한 명쾌함에 기초하여 구한 화해나 결코 아첨이나 관료적 권모술수(Byzantinism)의 화해가 아니라면 문제될 것이 없다.

    이 전환은 이것을 낳은 자극이 형성된 소련의 국내문제에서 가장 지독하게 나타났다. 따라서 우리는 이 편지에서 주로 소비에트 혁명의 위기로 인한 소련공산당의 위기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그러나 우리가 노동자국가의 발전이라는 핵심적 문제를 검토하는 동시에 어떤 식으로든 우리의 국내적 발전과 문제 모두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국제적 요인에서 우리 자신을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이 편지에서도 강령 초안을 다룬 우리의 일부 테제를 되풀이함으로써 코민테른의 활동 상황과 방식을 간략하게 특징 짓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예비적 소견의 결론으로 나는 대회에 보내는 이 편지뿐만 아니라 강령 초안에 대한 비판도 대회 모든 대의원들의 주의를 환기시킬 것이라는 나의 확신을 표하고 싶다. 나는 제5차 대회가 나를 집행위원회의 교체위원으로 선출했기 때문에라도 이렇게 할 파기할 수 없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 공식적이라고 간주될 이 편지는 코민테른 최고위층의 명령으로 내게서 권리와 의무를 빼앗아간 부당한 결정에 대한 나의 항소이유서다.

     

    2. 왜 4년 이상 코민테른 대회가 소집되지 않았는가?

    제5차 대회 이후 4년 넘는 세월이 흘렀다. 이 시기에 코민테른 전체뿐만 아니라 각국 지부 지도부의 구성과 함께 지도부의 노선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제5차 대회가 선출한 의장은 면직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에서 제명되기까지 했으며, 제6차 대회 직전에 복당되었다. 이 모든 것은 대회와 아무런 관련도 없이 이뤄졌다. 대회소집을 방해한 객관적 장애물이 전혀 없었는데도 말이다. 세계노동자계급운동과 소비에트공화국의 대단히 중요한 문제들에서 코민테른 대회는 불필요한 것으로 드러났다. 해마다 장애물이나 무거운 짐 때문에 연기되었다. 대회가 기정사실만을 대면하게 될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을 때만 소집되었다.

    자의(字義)와 민주집중제의 정신에 따르면, 대회는 당 활동에서 결정적인 위치를 차지해야 한다. 당 활동은 언제나 대회의 준비와 그 임무에서 최고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현재, 대회는 무거운 짐이자 귀찮은 의례가 되어있다. 소련공산당 제15차 당대회는 1년 이상 독단적으로 연기되었다. 코민테른 대회는 4년을 경과한 뒤에 소집되었다. 이 얼마만인가! 가장 거대한 역사적 사건과 가장 심각한 견해 차이로 점철된 이 4년 동안에 셀 수 없이 많은 관료적 대회와 협의회, 완전히 썩어빠진 영-러위원회협의회, 장식적 반(反)제국주의투쟁동맹의 대회, 소련 우방들의 과장된 기념대회를 위한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오직 세 차례의 코민테른 정기대회를 위한 시간과 공간만을 발견할 수 없었다. 외국의 대의원들이 전례 없는 어려움을 이겨내야 했으며, 이들 가운데 일부가 도중에 목숨을 잃기도 한 내전과 경제봉쇄 중에도 소련공산당과 코민테른 대회는 혁명당의 규약과 정신에 따라 정기적으로 소집되었다. 이것이 지금 어떤 이유로 용납되지 않는 것인가? 우리가 지금 '실천적' 임무로 너무 바쁘다고 사칭하는 것은 단지 당의 정신과 의지가 지도부의 일을 방해하고, 대회가 매우 진지하고 중요한 일에 족쇄를 채우는 것이라고 인정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당을 관료적으로 청산하는 길이다.

    최근 4년 이상 공식적으로 모든 문제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나 상임간부회의가 결정했다. 그렇지만 실상은 소련공산당 정치국,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단연코 당 기구에 기초를 두고 있는 서기국이 결정했다. 물론 이 점에서 쟁점은 소련공산당의 이데올로기적 영향력이 아니다. 이 영향력은 오늘날의 그것보다 레닌 아래에서 훨씬 더 컸으며, 대단히 건설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었다.

    그렇다. 이 점에서 쟁점은 전적으로 막후에서 기능하는一레닌 아래에서 징후조차 없었으며, 레닌이 당에 한 마지막 충고에서 엄중히 경고한 현상一전지전능한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서기국이다.

    코민테른은 모든 지부들이 완전히 복종해야 하는 유일한 국제 당이라고 선언했다. 이 문제에서 레닌은 일평생 중재자 역할을 했다. 그는 정치적 준비가 부족하다면, 중도주의가 관료주의로 타락하지나 않을까 우려하는 지도부의 중도주의 편애에 대해 여러 차례 경고했다. 공산당의 정치적 발전과 이데올로기적 성숙은 자신의 경험에 기초를 둔 나름의 내적인 리듬을 가지고 있다. 코민테른의 경험과 소련공산당이 그 안에서 수행한 결정적 역할은 이 리듬을 촉진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촉진은 어느 정도 강제적인 제한 속에서만 시작될 수 있다. 이 촉진이 자주적 활동, 자기비판, 자기적응 능력을 엄중한 행정적 조치로 대체하려는 시도로 도를 넘어서면, 정반대의 결과를 얻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일련의 경우, 이러한 정반대의 결과에 이르기도 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레닌이 활동을 중단했다면, 문제를 다루는 초(起)중도주의 방식이 승리를 거두었을 것이다. 집행위원회는 결국 세계당 대회를 책임져야할 단일한 세계당의 전권을 가진 중앙위원회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우리가 실제로 확인한 것은 무엇인가? 대회는 정작 가장 필요했을 때, 소집되지 않았다: 중국혁명만으로도 두 차례의 대회소집이 정당화될 수 있다. 이론적으로는 집행위원회가 세계 노동자운동의 강력한 중심이다. 실제로 지난 몇 년 동안 집행위원회는 냉혹한 방식으로 여러 차례 개편되었다. 제5차 대회에서 선출되어 집행위원회 내에서 지도적 역할을 수행한 일부 집행위원은 면직 되었다. 같은 일이 코민테른의 모든 지부들에서, 아니 적어도 가장 중요한 지부들에서 일어났다. 그렇다면 대회가 소집되지 않았다면, 결국 대회를 책임져야 할 것은 개편된 집행위원회 아닌가? 대답은 아주 명백하다. 사람들이 바뀐 소련공산당의 지도적 중핵은 코민테른의 규약과 제5차 대회의 결정을 완전 무시하면서 매번 집행위원회 위원을 새로이 선출했다.

    마찬가지로 소련공산당의 지도적 중핵 내에서 이뤄진 변화는 대회 사이의 휴지기에, 따라서 대회와 무관하게, 기구 쪽의 물리력을 통해, 늘 상당히 예기치 않은 방식一코민테른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소련공산당 자체에 대해서도 막후에서一으로 나타났다.

    지도부의 '기예'는 당을 기정사실과 대면시키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막후에서 조종하는 메커니즘의 작동에 따라 연기된 대회는 지도부의 새로운 구성에 엄격히 부합하는 식으로 선택되었다. 동시에 전 대회에서 선출된 이전의 지도적 중핵은 그저 '반(反)당 수뇌부'라고 지칭 했을 뿐이다.

    이런 과정의 가장 중요한 단계를 전부 열거하는 것은 너무 오래 걸릴 것이다. 나는 한 가지 사실을 인용하는 데 그칠 것이지만, 이것은 한 다스의 가치가 있다. 공식적 입장에서나 실제로도 제5차 대회는 지노비예프 그룹이 이끌었다. 이것은 바로 이 그룹이 이른바 반(反)'트로츠키주의' 투쟁을 통해 이 대회의 근본적 색조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막후에서 생긴 필요와 이 투쟁의 음모는 전체적 방향에서 대회의 일탈을 낳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것은 뒤이은 시기에 범한 가장 큰 오류의 원천이었다. 이들 오류는 다른 곳에서 자세히 검토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코민테른의 어느 당에서도 제5차 대회의 지도적 분파가 제6차 대회까지 분파 자체를 유지할 수 없었다는 사실 한 가지만은 추릴 필요가 있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소콜니코프 등으로 대표되는 이 분파의 중심 그룹은 1926년 7월 선언에서 이렇게 단언했다 : '1923년 반대파의 주요 중핵들이 노동자 노선으로부터 일탈할 위험, 기구 체제의 위협적인 성장에 대해 올바르게 경고했다는 것은 현재 더 이상 의심할 것이 조금도 없다.'

    그러나 이것이 다가 아니다.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와 중앙통제위원회 합동회의 때(1926년 7월 14-24일), 제5차 대회의 지휘자이자 고무자인 지노비예프는 1917년 오류와 1923년 반대파에 대항한 투쟁을 '자기 생애 중에 범한 주요한 오류'로 생각한다一속기록에 담긴 이 선언은 제 15 차 당 대회전에 중앙위원회가 다시 출판했다一고 밝혔다.

    지노비예프는 이렇게 말했다 : '내가 더 위험한 것으로 간주하는 두 번째 오류, 즉 레닌 생전에 범한 1917년 오류는 레닌에 의해 교정되었다. … 반면에 1923년의 내 오류는 사실에 … 있었다.'

        오르조니키제: ‘그렇다면 당신은 왜 당내 모든 사람들의 이성을 틀어막았는가?...’

        지노비예프: '기구로 인한 일탈 문제에서, 또 관료적 억압문제에서 그렇다, 여러분에 비해 트로츠키가 올바른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퇴보의 문제, 즉 정치노선의 퇴보, 당체제의 퇴보 문제가 견해 차이의 골자를 이룬다. 1926년에 지노비예프는 이 문제에 대해 1923년 반대파가 옳았으며, 자신이 10월 전복에 저항한 것보다 훨씬 더 큰, 자기생애 가장 큰 오류는 1923~25년에 자신이 수행한 반(反)'트로츠키주의' 투쟁이었다고 결론지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최근 며칠 동안 신문은 지노비예프 등을 복당시킨 중앙통제위원회의 결정을 게재했다. 이들이 '자신의 트로츠키주의적 바보짓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절대로 믿을 수 없는 에피소드인 이 모든 일은 우리 손자나 증손자들에게 몇몇 풍자가가 한 것처럼 보일 것이다. 비록 문서로 완벽하게 입증될 것이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런 일이 단지 일개인이나 한 그룹만 관련된 것이었다면, 지난 몇 년 동안 코민테른 내에서 수행된 이데올로기 투쟁과 밀접한 관계가 없는 사태였다면, 이 사태가 말하자면, 관료적 방식의 무제한적인 힘에 의해 4년 동안 대회를 불필요하게 만든 동일한 조건에서 유기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었다면, 이 편지에서 언급하는 것은 옳지 않을지도 모른다.

      현재, 코민테른의 이데올로기는 지침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만들어 낸 것이다. 더 이상 인식과 전망의 수단이 아닌 이론은 행정적, 기술적 도구가 된다. 어떤 견해는 반대파에 따른 것이고, 이런 '견해'에 기초하여 반대파는 판단된다. '트로츠키주의'와 관련된 어떤 개인은 뒤이어 마치 이것이 장관실 직원을 임명하는 공무원 문제인 것처럼 소환된다. 지노비예프의 경우는 결코 예외가 아니다. 단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더 눈에 부각될 뿐이다. 어쨌든 제5차 대회를 지휘하고 고무한 바로 코민테른 전임 의장이라는 사람이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유형의 이데올로기적 격변은 매번 위에서 일어나고, 어떤 면에서 소련공산당뿐만 아니라 코민테른의 다른 정당들에서도 정상적 체제를 이루며 이미 체계화된 조직적 격변을 불가피하게 동반한다. 바람직하지 못한 지도부를 면직하는 공식 이유는 진정한 동기와 좀처럼 일치하지 않는다. 사상의 분야에서 표리부동이 낳은 피할 수 없는 결과가 체제의 완전한 관료화이다. 이런 시기에 독일, 프랑스, 영국, 미국, 폴란드 등 공산당의 주요 분자들은 여러 차례 끔찍한 기회주의적 조치에 의지했다. 그러나 이들은 전혀 처벌받지 않았다. 왜냐하면 소련공산당 내부 문제에 대해 이들이 취한 입장이 이들을 보호했기 때문이다. 반대파에 반대 투표하는 것은 물론이고, 여기에 더해 큰소리로 짖어대는 것은 아래로부터의 타격에 대하여 스스로를 지키는 것이다. 아래로부터 나올지도 모르는 타격으로부터 이들을 보증하는 것은 기구가 어떠한 통제로부터도 자유롭다는 사실에 의해 제공된다.

      가장 최근의 사례는 아직도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대단히 생생하다. 아주 최근까지 철저히 멘셰비키적인 진독수, 담평산 등의 중국 지도부는 반대파에 대한 비판에 비해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전폭적인 지지를 누렸다. 이들의 비판에서 놀랄 만한 것은 전혀 없다. 코민테른 집행 위원회 제7차 전원회의 당시에 담평산은 이렇게 증언했다 : '트로츠키주의가 출현하자마자, 중국공산당과 공산주의청년동맹은 즉시 트로츠키주의에 반대하는 결의문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의사록, 205쪽)

      러시아, 핀란드, 독일, 불가리아, 헝가리, 폴란드와 다른 나라들의 노동자혁명에 저항하고 훼방을 놓은 분자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자체에서, 그리고 그 기구 내에서 매우 큰 역할을 했다. 때마침 이들은 반(反)'트로츠키주의' 투쟁에서 자신의 적성을 드러냄으로써 이에 대한 보상을 받았다. 담평산은 단지 이런 분자들의 제자일 뿐이다. 그의 스승이 욕지거리를 피할 능력이 있는 반면에, 그에게 욕지거리가 쌓인 것이라면, 이는 이따금씩 희생양을 필요로 하는 체제가 무책임하기 때문이다.

      최근 5년 동안에 가장 눈에 띄고, 가장 일반적이면서도 가장 위험한 특성은 소련공산당에서는 물론이고 코민테른 전체에서도 점차적으로, 그리고 점점 더 가속적으로 관료주의가 성장하고, 이와 관련된 전횡이 증대해왔다는 것이다. 불행히도 이런 공식적인 주장에 대해 토론하는 것은 물론이고, 완화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규약 무시와 유린, 조직과 사상 분야에서 연속적인 격변발생, 대회연기, 매번 기정 사실과대면한 협의회, 전횡의 증대一이 모든 것은 우연일 수 없으며, 심각한 원인을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다.

      파벌들의 권력투쟁 등처럼, 오로지 또는 주로 개인적 이유에 입각한 이런 현상을 설명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에 적합하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은 모든 요인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레닌의 유언장을 보라). 그러나 여기에 관련된 것은 대단히 심각하고 장기간에 걸친 과정이기 때문에 그 원인은 틀림없이 심리적일뿐만 아니라 정치적이기도 할 것이다. 따라서 대단히 사실적이다.

      소련공산당과 코민테른체제 전체의 관료화의 주요 원천은 지도부의 정치적 노선과 노동자계급의 역사적 노선 사이의 커지기만 하는 격차에 있다. 이 두 노선이 일치하지 않을수록, 지도부의 노선이 사태에 의해 논박될수록, 비판에 노출됨에 따라 당의 조치에 의지함으로써 노선을 적용하기가 더 힘들어지고, 그만큼 더 기구나 심지어 국가의 조치를 통해 위에서 당에 강제되어야 했다.

      그러나 지도부의 노선과 노동자계급의 역사적 노선, 즉 볼셰비키 노선 사이의 격차 증대는 비(非)노동자계급의 압력을 받을 때만 일어날 수 있다. 일반적이라고 생각되는 이 압력은 소련 내부에서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도 격렬한 진동이 두 방향으로 가로지르면서 최근 5년 동안에 예사롭지 않은 비율로 증대했다. 기구가 비판과 자기 당의 통제로부터 자유로워질수록, 지도부는 그만큼 더 기구를 통해 전해지는 비(非)노동자계급의 염원과 제안에 영향 받기 쉽고, 따라서 양보하게 되었다. 이것은 정치적 노선을 더욱 오른쪽으로 이동시켰으며, 이를 노동자전위에 강제하기 위해 결과적으로 더욱 더 가혹한 관료적 조치를 필요로 했다.

      따라서 정치적 퇴보과정은 불가피하게 조직적인 억압조치로 완성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도부는 더 이상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을 절대로 허용하려고하지 않았다. 관료적 체제는 '형식주의적'이고, 여기에 가장 적합한 이데올로기는 스콜라주의이다. 최근 5년은 완전히 마르크스주의와 레닌주의에 대한 현학적 왜곡, 정치적 퇴보의 요구와 관료적 권력 찬탈의 정신에 대한 비열한 적응에 전념한 시기이다. '쿨락이 사회주의에 익숙해지게 하라', '부자가 되라!'는 권고, '단계를 뛰어넘지 않는', '4계급 블록', '두 계급 당', '일국사회주의'一오른쪽으로 이동하는 이 모든 중도주의 사상과 슬로건은 불가피하게 마르크스와 레닌의 진정한 제자에 대해 형법 조항의 적용을 낳았다.

      현학적 피폐의 원인, 관료주의와 전횡의 증대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해석은 지도부의 개인적 책임을 조금도 면제하지 않으며, 거꾸로 더욱 더 큰 책임을 지운다.

       

      3. 1923~27년의 정책

      의심할 나위 없이, 제6차 대회소집의 거듭된 지연 이면에 있는 주요한 동기가운데 하나는 상당한 국제적 승리를 기다리려는 바람이었다. 이러한 경우에 사람들은 최근의 패배를 더 쉽게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어떠한 승리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으며, 이 또한 우연이 아니다.

      이 시기에 유럽과 세계 자본주의는 새롭고 진지한 일시적 모면이 허용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사회민주주의는 1923년 이후 상당히 강화되었다. 공산당의 성장은 지지부진했다一어쨌든 제5차 대회를 고무한 예측보다는 훨씬 낮은 조짐을 보였다. 우리는 이것이 코민테른조직과 대중에 대한 그 영향력 모두에 해당한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전체적으로 볼 때, 대중은 1923년 가을부터 하향곡선을 그리기 시작했으며, 시대 전체를 검토 중에 있었다. 만약 누군가 대담하게도 이 4~5년 동안 공산당 지도부가 연속성과 안정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주장할 수 있다면,그 것은 의심스러울 것이다. 거꾸로 이런 입장은 이전에 가장 보증된 소련공산당에서조차 완전히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소비에트공화국은 경과기간 중에 사회주의적 관리 방식의 효능과 중요성, 특히 이 속에 깃든 거대한 가능성을 처음으로 세계에 보여주면서 경제적, 문화적 견지에서 중대한 발전을 이뤘다. 그러나 이런 성공은 이른바 자본주의의 안정에 기초하여 발전했는데, 이 자본주의의 안정 자체는 세계혁명의 일련의 패배의 결과였다. 이는 소비에트공화국의 외부적 상황을 상당히 악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계급에게 적대적인 방향으로 그 내적 역관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레닌의 표현에 따르면, 소련이 '완전히 자본주의 세계에 고립된 변방'으로 계속 생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잘못된 지도에 의해 자본주의 세력과 경향이 중대해진, 아니 더 정확히는 심상치 않아진 국민경제의 발달에 이르게 되었다. 낙관적 주장과는 반대로 경제와 정치의 내적 역관계는 노동자계급에게 불리하게 바뀌었다. 따라서 일련의 고통스러운 위기가 소련공산당에서 나타나지 않았다.

      10월 혁명의 위기를 낳은 근본적 원인은 노동자계급의 일련의 참혹한 패배로 야기된 세계혁명의 지연이다. 공산당이 존재하지 않은 상황에서 전후 초의 운동과 봉기는 1923년까지 패배를 맞았다. 그 결과로 공산당은 발달 초기에 있었으며, 아직은 힘이 미약했다. 1923년부터 상황이 급변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더 이상 노동자계급만의 패배가 아니라 코민테른 정책의 참패였다. 독일, 영국, 중국에서 이 정책이 범한 큰 실수나 일련의 다른 나라들에서 저지른 더 소규모의 실수는 볼셰비키당의 역사에서 두 번 되풀이될 수 없는 것과 같은 성질의 것이다. 1905-17년 시기의 멘셰비키주의의 역사나 그 이전 몇 십 년의 역사를 검토해본 사람이라면, 이런 크고 작은 실수들이 되풀이되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코민테른의 더딘 성장은 최근 5년 동안 잘못된 정책의 직접적 결과이다. 코민테른은 안정의 본질을 순전히 현학적인 방식으로 이해함으로써, 특히 책임을 피하려고 함으로써 구한 '안정'에 책임이 없다고 생각한다. 안정은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세계 자본주의 경제의 현존하는 조건이 자동적으로 바뀐 결과가 아니다. 정치적 계급역관계가 불리하게 바뀐 결과다. 노동자계급은 1923년 독일에서 지도부가 항복했기 때문에 진이 빠져버렸다. 1926년에는 코민테른 지도부가 블록을 계속 유지했기 때문에 영국에서 농락당하고 배신당했다. 1925-27년 중국에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정책은 노동자계급을 국민당의 덫에 빠뜨렸다. 이것이 패배의 직접적이고 부정할 수 없는 원인이다.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이것이 이런 실패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성격의 근거라는 것이다. 비록 뒤이은 정책이 옳았더라도 패배가 불가피했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은 타락한 숙명론으로 떨어지는 것이며, 혁명적 지도부의 역할과 중요성에 대한 볼셰비키의 개념을 포기하는 것이다.

      잘못된 정책에 의해 좌우된 노동자계급의 참패는 정치적 관점에서 볼 때 자본가계급에게 숨 돌릴 틈을 제공했다. 자본가계급은 자신의 경제적 지위를 강화하기 위해 이 틈을 이용했다. 이것이 독일공산당이 항복한 1923년 10월 시기에 시작된 안정기의 출발점을 제공한 원인이다. 물론 자본가계급이 얻은 경제적 지위의 강화는 다시 정치적 환경을 '안정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최근 5년의 안정기에 자본주의가 우세를 차지한 근본적 원인은 코민테른 지도부가 사태에 대해 어떠한 견지에서도 대처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있다. 혁명적 상황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지도자들은 이를 장기간에 걸쳐 이용할 수 없었다. 이런 약점은 개인적이거나 우연적인 성격의 것이 아니다. 중도주의 노선의 필연적인 결과다. 중도주의 노선은 일시적 소강기에 자가당착을 감출 수도 있지만, 혁명기의 격변 중에는 불가피하게 재앙을 불러일으킨다.

      소련과 지배정당의 내적 발전은 국제적 상황의 변화를 완벽하게 반영했다. 따라서 이것은 생소하고 반동적인 일국사회주의 이론과 고립적 발전론을 반박하는 본보기였다. 소련 안에서 지도부의 노선一오른쪽으로 이동하는 중도주의一은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노선과 같았다. 국제무대에서 뿐만 아니라 국내정책에서도 지도부의 노선은 노동자계급의 경제적, 정치적 지위를 약화시키면서 똑같이 심각한 해악을 끼쳤다.

      이제 이뤄진 좌선회의 중요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926-27년에 완전히 폭로된 우익 중도주의로 일탈한 일반적 노선뿐만 아니라 이전시기에 퇴보를 준비한 1923-25년의 초좌익주의 노선을 완벽하고 뚜렷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이것은 레닌 사후 5년에 대한 일시적 평가의 문제이다. 이 시기에 적대적인 계급세력의 압력을 받았으며, 지도부의 불안정성과 근시안 때문에 국내, 국제문제 모두에서 레닌주의에 대한 교정, 변경, 실제적 수정이 일어났다.

      이미 소련공산당 제12차 당 대회(1923년 봄)에서 소비에트연방의 경제적 문제에 대해 두 가지 입장이 뚜렷하게 눈에 띄었다. 두 입장은 그 다음 5년 동안 발전했으며, 작년 겨울에 벌어진 곡물징수의 위기에 비추어 점검되었을지도 모른다. 중앙위원회는 농민과의 동맹을 위협하는 주요한 위험이 산업의 미성숙한 발전에서 비롯되었다고 확신했다. 1923년 가을의 상상적인 '판매위기'에서 이런 입장이 확인되었다. 이 위기의 일시적 성격에도불구하고 이런 입장은 공식 지도부의 경제정책에 대해 깊은 인상을 남겼다. 내가 제 12차 당 대회에서 밝힌 입장은 상반된 평가를 내 놓았다. 즉, '노농동맹'과 노동자계급의 독재를 위협하는 본질적 위험은 산업의 후진성을 반영하는 농산물과 공산물의 가격차를 상징하는 '협상가격차'에 있다. 또한 이 불균형의 지속과 고조는 불가피하게 농업과 수공업의 분화, 자본주의 세력의 일반적 성장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나는 이미 제12차 당 대회에서 이런 입장을 매우 분명하게 밝혔다. 아울러 이때 나는 무엇보다도 만약 산업이 계속 후진상태에 머문다면, 풍년은 사회주의적 경향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원동력이 될 것이고, 이것은 사회주의 경제를 와해시키는 도구를 자본주의 분자들의 수중으로 넘겨줄 것이라는 견해를 내놓았다.

      결과적으로 이런 근본적 정식은 다음 5년의 투쟁을 가로질러 두 가지 면에서 나타났다. 이 시기에 그 본질에서 모순적이고 반동적인 반대파에 대한 비난一'농민을 두려워한다', '풍년을 걱정한다', '농촌의 부유(富裕)화를 우려한다', 아니 차라리 '농민을 약탈하고 싶어 한다'고 선언하는一이 쉴 새 없이 울려 퍼졌다. 그 한 예로, 제12차 당 대회 초에, 특히 1923년 가을의 토론 중에 공식분파는 계급적 기준을 거부했으며,'농민' 일반과 같은 개념을 교묘히 다뤘다. 문제를 이런 식으로 다루는 것은 이미 새로운 부르주아 계층의 압력이 주변에 영향을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계층은 신경제정책에 기초하여 형성되고 있었으며, 국가기구와 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억압에 저항하며, 레닌주의의 탐조등 빛을 피하려고 했다.

      이 과정에서 국제적 경향의 사태가 결정적인 중요성을 얻게 되었다. 1923년 후반부는 독일에서 노동자혁명에 대한 기대감이 팽팽한 시기였다.

      상황은 너무 늦게, 그것도 우유부단한 방식으로 평가되었다. 공식 스탈린-지노비예프 지도부 내에서 거대한 충돌이 발생했다. 사실이다. 이 충돌은 공통된 중도주의노선의 틀 내에 머물렀다. 모든 전조에도 불구하고 템포상의 변화는 마지막 순간에서야 일어났다. 모든 일이 싸움 한 번 하지 않고 적에게 결정적 진지를 넘겨준 독일공산당 지도부의 꼴사나운 항복으로 끝났다.

      이것은 그 자체로 우려할 만한 성격의 패배였다. 그러나 사태의 꽁무니를 쫓는 정책으로 이 패배를 대부분 야기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지도부는 참패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 심각성을 파악하지도 못했으며, 단지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을 뿐이기 때문에 훨씬 더 고통스러운 의미를 얻게 되었다.

      지도부는 혁명적 상황이 계속 발전하고 있었으며, 결정적 전투가 곧 수행될 예정이었다고 고집스레 주장했다. 이런 근본적으로 잘못된 평가에 기초하여 제5차 대회는 1924년 중반 무렵 자신의 방침을 세웠다.

      이에 비해 반대파는 1923년 후반부에 다가오고 있는 정치적 대단원에 대해 경보를 발했으며, 정확하게 무장봉기를 지향하는 노선을 요구했으며, 이러한 역사적 순간에는 몇 주, 때로는 며칠이 앞으로 여러 해 동안 영향을 미칠 혁명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끈질기게 경고했다. 반면에, 제5차대회가 열리기 전인 다음 6개월 동안 반대파는 혁명적 상황은 이미 유실되었다; 배에 탈수 있으려면 맞바람이 불기를 기대해야하며, 봉기가 의제가 아닌 지금은 노동조합 속에 거점을 만들고, 부분적 요구로 대중을 결합시키는 등 공세를 취하는 적에 대항하여 방어투쟁을 조직해야한다고 지속적으로 반복했다.

      그러나 무슨 일이 일어났으며, 무엇이 박두했는지에 대한 분명한 이해는 '트로츠키주의'라는 낙인이 찍혔으며,'청산주의'라고 비난받았다. 제5차 대회는 정치적 쇠퇴기에 직면하여 여봐란듯이 봉기를 지향했다. 제5차 대회는 단 한방에 공산당들 사이에 혼란을 유포시킴으로써 모든 공산당들을 어리둥절케 했다.

      비약적이며 분명한 안정화 경향의 해인 1924년은 점점 더 큰 힘으로 사태의 진전에 역행한 불가리아와 에스토니아에서의 모험, 극좌 노선이 일반적인 해가 되었다. 이때부터 라디치와 라폴레트에 대한 일시적 관심, 적색노동조합인터내셔널을 손상시키는 농민인터내셔널의 역할 과장, 영국 노동조합 지도부에 대한 잘못된 평가, 국민당 상층계급과의 우호 등, 사이비 농민당을 이상화하는 여러 나라들에서 노동자계급 외부에 존재하는 준비된 혁명세력에 대한 요구가 나오기 시작했다. 자신을 엄호하기 위해 극좌 노선이 모험적으로 구한 이 모든 버팀목은 그 후에 분명히 우익노선의 주요한 지주가 되었다. 이 우익노선은 극좌주의자들이 1924~25년의 안정화 과정과 충돌한 상황을 이제 더 이상 마주할 수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에 극좌노선을 대체할 수 있었다.

      충격적인 독일노동자계급의 패배는 소련공산당 공식지도부의 개념에 따르면, 자연스러운 경제발전에 대한 수동적 적응과정인 국내정책 ('초산업화'에 대한 투쟁, 계획 원칙에 대한 조롱 등)을 승인하는 것을 그 임무로 삼은 1923년 가을의 토론을 촉진시켰다. 국제 문제에 관한 한, 가장 중요한 일은 가장 확실한 혁명적 상황이 유실되었다는 사실을 숨기는 것이었다.

      그러나 독일 노동자계급이 참패한 사실은 1923년의 불안한 기다림으로 긴장이 고조되어 있었던 대중의 의식에 꽂혔다. 독일에서뿐만 아니라 소련과 다른 나라들에서도 독일 지도부의 항복은 세계혁명 일반에 대한 비통한 회의론적 요소들을 노동자 대오에 끌어들였다. 그 뒤 곧 이 사태에 불가리아와 에스토니아의 패배가 더해졌다. 1925년 중반 무렵, 결국 안정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안정이 눈에 띄기 시작한 지 1년 반 뒤에). 또한 이미 심각한 균열이 생기고 있을 때에 이뤄졌다(영국과 중국에서). 게다가 부분적으로 대중을 사로잡은 세계혁명에 대한 일정한 실망감은 중도주의 지도부를 완전히 일국적인 전망으로 밀어냈다. 이 실망감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일국사회주의이론으로 지독하게 보답 받게 되었다.

      상황을 이해할 능력이 없는 1924~25년의 초극좌주의는 그만큼 더 잔인하게 우경화로 대체되었다. '단계를 뛰어넘지 않는' 이론의 성공 아래 식민지 자본가계급에 적용된 우경화정책은 소부르주아민주주의와 노동조합관료집단, '강한 중농'으로 명명된 쿨락, '질서'와 '규율'을 대표하는 관료를 이끌었다.

      부차적인 문제에서 볼셰비키주의로 체면치레를 한 우익 중도주의 정책은 거대한 사태의 밀물에 넋을 잃어버렸으며, 중국혁명과 영-러위원회 문제에서 단연코 멘셰비키적이며, 대단히 곤혹스러운 대관식을 치렀다. 이때까지 어떤 혁명사에서도 중도주의 만큼 이렇게 완벽하게 상승과 하강의 곡선을 그린 경우는 없었다. 중도주의가 언젠가 다시 똑같은 곡선을 그릴 수 있을 것인지는 의문시된다. 왜냐하면 이런 경우에 중도주의는 물질적 분야와 사상의 분야에서 코민테른의 강력한 자원을 마음대로 써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중도주의는 어떠한 저항에 대해서도, 그리고 모든 비판에 대해서도 노동자국가가 임의로 쓸 수 있는 모든 자원으로 미리 빈틈없이 대비할 수 있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정책의 객관적 결과는 혁명을 더욱 지연시켰으며, 소련의 국제적 입장을 대단히 악화시킨 안정을 부양한 새로운 원동력을 제공했다.

      * * *

      이론의 견지에서 사회주의 건설의 템포 문제를 국내, 국제 문제에 대한 견해 차이와 견고한 매듭으로 동여맨 것은 1923년 시작된 두 경향의 투쟁 과정 중에서였다.

      자본가계급에게서 빼앗은 바로 쓸 수 있는 자본을 근거로 이루어진 재건기(1923~27년)의 환상에 속아 넘어간 공식지도부는 고립된 경제발전을 목표 그 자체로 여기는 입장으로 점점 더 빠져들었다. 나중에 일국사회주의이론이 국제적 패배가 가한 타격에 힘입어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가장 지독한 오류에 근거한 것이다. 재건기의 결론이 세계경제와의 연관 필요성을 점점 더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든 바로 그 시기에 세계경제와의 단절을 설교했다.

      우리 경제발전의 템포 문제는 공식 지도부가 제기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공식 지도부는 소비에트 경제가 수출입을 통해 세계시장과 연결되지 않을 수 없음에 따라 그만큼 더 세계시장에 의해 엄밀하게 통제된다는 것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가 소비에트사회 건설의 템포는 세계경제와 세계정치에 좌우된다는 것을 끈질기게 지적하자, 공식 노선을 지휘하고 고무한 사람들은 우리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 '우리의 사회주의 발전에 국제적 요인을 주입할 필요가 없다'(스탈린),다른 한편에서는 '아주 느린 속도일지라도 우리는 사회주의를 건설할 것이다.'(부하린) 이런 생각을 논리적으로 그 결론까지 따를 만한 용기가 있는 사람이라면, 즉 우리 경제발전의 템포 문제에 '국제적 요인을 주입할 필요가 없다'면, 이것은 단지 10월 혁명의 운명에 코민테른을 '주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왜냐하면 코민테른은 '국제적 요인'의 혁명적 표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핵심은 중도주의가 자신의 생각을 목표를 이룰 때까지 추구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템포 문제는 분명히 경제에서 뿐만 아니라 특히 '응축된 경제'인 정치에서도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만약 발전을 너무 두려워한 나머지 어느 때보다도 더 크게 뒤처져 있는 경제에 접근하는 잘못된 방식 때문에 우리의 국내 상황이 낙후된 것이었다면, 거꾸로 국제혁명의 문제에 직면하여 고질적인 템포 상실은 혁명적 상황을 자세히 평가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이를 이용할 능력이 없는 중도주의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론 올바른 지도부가 이끌었다면, 독일 노동자계급은 확실히 권력을 장악하고 지켰을 것이라거나, 지도부가 정확히 살펴보았다면, 영국 노동자계급은 확실히 총평의회를 타도하고, 따라서 노동자 승리의 시간을 상당히 앞당겼을 것이라거나, 강제된 국민당의 기치에 속지 않았다면, 중국노동자계급은 확실히 토지혁명을 성공적인 결말로 이끌고, 자기를 따르는 빈농을 지도하여 권력을 장악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공허한 현학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세 차례의 만일의 사태에 이르는 길은 열려 있었다. 독일에서는 활짝 열려있었다. 이에 비해 계급투쟁에 역행한 지도부는 자기계급을 희생시켜 적을 강화시켜 줌으로써 핵심적으로 패배를 보증했다.

      템포 문제는 모든 투쟁에서 결정적이며, 세계적 차원의 투쟁에서는 더욱더 그렇다. 소비에트공화국의 운명은 세계혁명의 운명과 분리될 수 없다. 몇 백 년 아니 몇 십 년도 마음대로 쓸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쓰려고 하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각각의 큰 실수, 각각의 부주의가 적에게 득이 되고, 무방비의 영역을 빠짐없이 점령하는 투쟁의 역학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올바른 경제정책이 없다면, 소련에서 노동자독재는 붕괴할 것이며, 외부로부터 구제될 때까지 견딜 수 없을 것이고, 따라서 국제노동자계급에게 막대한 손상을 끼칠 것이다. 코민테른의 올바른 정책이 없다면, 세계혁명은 정해져 있지 않은 역사적 시기 동안 지연될 것이다. 지금이 이를 결정할 때이다. 자본가계급이 얻은 것은 국제혁명이 잃어버린 것이다. 사회주의건설은 소비에트국가와 국내자본가계급 뿐만 아니라 세계자본가계급 사이의 경쟁이기도하다. 이 경쟁은 전 세계 계급투쟁에 기초하여 수행된다. 만약 자본가계급이 다시 세계노동자계급으로부터 상당한 역사적 시기를 빼앗을 수 있다면,기술, 부, 육군과 해군의 월등한 우세에 기초하여 소비에트 독재를 무너뜨릴 것이다. 경제적, 정치적 수단이나 군사적 수단, 또는 이 세 가지 수단을 짜 맞춰서 이를 이룰 것인지 여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시간은 단지 중요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결정적 요인이다. 만약 코민테른이 1923년 독일당의 항복, 1924년 에스토니아의 폭동, 1924~25년의 극좌적 오류, 1926년의 영-러위원회라는 악명 높은 코미디, 1925~27 년의 중국혁명을 파멸시킨 연속된 일련의 중대한 실수로 나타난 정책을 계속 고수한다면, 우리가 '완전한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은 사실이 아닐 것이다. 일국사회주의이론은 우리가 이런 오류를 관대하게 대하는 것이 전혀 낯설지 않게 만든다. 마치 우리가 그동안 줄곧 우리가 원하면 뜻대로 된 것처럼 말이다. 심각한 오류가 아닐 수 없다! 시간은 정치, 특히 두 체제 사이의 목숨을 건 투쟁이 전개되고 있는 격렬한 역사적 전환기에서 결정적 요인이다. 우리는 경제에 가장 큰 시간을 할당해야 한다. 코민테른은 1923년 이후 지도부가 저지른 것과 같은 오류를 범한다면 5년을 버티지 못할 것이다. 코민테른은 10월혁명이 대중에게 발휘하는 흡인력 덕분에 마르크스와 레닌의 기치를 붙들고 있다. 지난 시기 동안 코민테른은 자신의 기본 자산에 의지해 연명하고 있다. 코민테른은 같은 오류를 범한다면 5년 이상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코민테른이 붕괴한다면, 소련도 오래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주의가 우리나라에서 10분의 9는 실현되었다(스탈린)고 알리는 관료의 성가(聖歌)는 따분한 장황처럼 보일 것이다. 물론 이 경우에도 노동자 혁명은 결국 승리에 이르는 새로운 길을 개척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언제? 그리고 어떤 희생을 대가로, 얼마나 많은 희생을 대가로? 국제적 혁명가의 새로운 세대는 끊긴 연속성의 실을 다시 묶고,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기치로 대중의 신뢰를 다시 획득해야 할 것이다. 이 기치는 사상의 분야에서 오류, 격변, 날조의 연속적인 고리 때문에 타협할지도 모른다.

      이런 말은 현실을 보지 않기 위해 눈을 감아버린 겁쟁이이기 때문에 살아남은 낙관주의자들의 피할 수 없는 울부짖음, 비명소리, 박해를 조금도 두려워하지 말고 국제적 노동자전위에게 분명하게, 그리고 한 점의 의혹도 없이 전해져야 한다.

      이런 이유로 우리에게 코민테른의 정책은 다른 모든 문제들을 좌우한다. 올바른 국제정책이 없다면, 소련에서 가능한 모든 경제적 성공도 10월혁명을 구하지 못할 것이며, 사회주의로 이끌지 못할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올바른 국제정책이 없다면, 국내 상황에 대한 올바른 정책도 없다. 왜냐하면 노선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소비에트 지구위원회의장이 쿨락에게 아첨하는 잘못된 방식은 단지 쇠사슬의 작은 고리일 뿐이다. 총평의회에 대한 적색노동조합의 태도, 또는 장개석과 퍼셀에 대한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의 태도는 가장 큰 고리에 해당한다.

      유럽 자본가계급의 안정, 사회민주주의의 강화, 공산당의 더딘 성장, 소련에서 자본주의적 경향의 강화, 소련공산당과 코민테른 지도부의 우경화 정책, 체제전체의 관료화, 반대파를 궁지로 내몬 좌익에 대한 광포한 캠페인一이 모든 과정은 확실히 일시적이지만 기본적으로 노동자혁명의 입장을 약화시키는 시기, 노동자전위에 대해 적대 세력이 압력을 가한 시기를 특징짓는 것과 확고하게 결합되어 있다.

       

      4. 대중의 급진화와 지도부의 문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2월 전원회의(1928년)는 부정할 수 없는 좌선회를 시도했다. 즉, 가장 중요한 두 문제一영국공산당과 프랑스공산당의 정책一에 대해 반대파가 옹호한 견해 쪽으로 좌선회를 시도했다. 앞뒤가 맞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레닌의 전략의 근본적 규칙一올바른 정책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잘못된 정책을 비판한다一을 적용하고 있었다면, 이 전환은 단지 징후적 중요성만이 아니라 결정적 중요성이 있다고 생각될 지도 모른다. 프랑스, 독일이나 다른 나라들에서 공동전선은 영-러위원회의 방침을 따랐다. 영-러위원회의 노선은 중국공산당에 대한 국민당의 노선처럼 영국공산당에게는 거의 재앙과 같았다.

      중국 문제에 대한 결의문에 관한 한, 이것은 저지른 모든 오류를 정당화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마찬가지로 끔찍한 새로운 오류를 준비하고 있다.

      러시아 문제에 대한 2월 전원회의의 결의문은 어떤 정치노선보다도 코민테른의 체제를 훨씬 더 잘 반영한다. 이는 이 결의문이 담고 있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명시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사회민주주의와 함께 트로츠키주의자는 소비에트 권력의 전복에 기대를 걸고 있다.'(〈프라브다〉지, 1928년 2월 19일자)

      (반대파가 소비에트 권력의 전복에 기대를 걸고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는 완전한 천치만을 위해) 믿을만한 말 한 마디도 없는 이러한 단언에 찬성하기 위해 손을 드는 온순함을 잃은 사람, 경험이 입증하는 것처럼, 이러한 사람도 계급의 적에 대한 단호한 투쟁에 손을 들기 위해 매번 용기를 내지는 않는다.

      전체적으로 볼 때, 2월 전원회의는 모순적인 좌선회 시도를 상징한다. 정치적 관점에서 볼 때, 이런 시도는 주로 유럽, 특히 독일의 거대한 노동자계급 대중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부정할 수 없는 정서상의 변화에 좌우된다. 이 변화와 이것이 열어젖힌 전망의 성격을 분명히 이해하지 않고는 올바른 지도를 이야기할 수 없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2월 전원회의에서 텔만은 연설, 아니 반대파를 악담한 모욕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트로츠키주의자는 국제 노동자계급의 급진화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상황이 점점 더 혁명적으로 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하지 않는다.'(〈프라브다〉지, 1928년 2월 17일자)

      따라서 그는 관례에 따라 힐퍼딩과 함께 우리가 세계혁명을 매장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의식(儀式)적 논증으로 넘어간다. 여기에 관련된 것이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에서 텔만이 대표한 코민테른에서 두 번째로 가장 큰 당이 아니었다면, 이런 치기어린 험담을 무시했을지도 모른다. 반대파가 이해하지 못한 이 노동자계급의 급진화는 무엇인가? 이것은 다름 아닌 텔만과 다른 많은 사람들이 1921년, 1925년, 1926년, 1927년의 '급진화'라고 칭한 것이다. 이들에게 1923년의 항복 이후 공산당의 영향력 쇠퇴와 사회민주주의의 성장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이들은 이런 현상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자문해 보지도 않았다. 정치적 알파벳의 첫 글자를 배우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불행히도 이것은 텔만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 혼자만이라면 아무런 문제도 안 된다. 세마르(Semard)도 마찬가지다. 제3차 대회는 혁명 전략의 진정한 학교였다. 구별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어떤 일이든지 이것이 첫째 조건이다. 고조기와 쇠퇴기가 있다. 그러나 고조기와 쇠퇴기는 차례로 발전의 다양한 단계를 거친다. 이런 각각의 단계의 정책은 이미 경험한 전술의 관점에서 채택할 필요가 있다. 동시에 급격한 상황 변화에 허를 찔리지 않기 위해 이전부터 준비된 방침과 권력 장악을 위한 방침을 수행하는 일반적 노선을 유지할 필요도 있다. 제5차대회는 제3차대회의 교훈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버렸다. 객관적 상황에 등을 돌렸으며, 선동적인 승인이 사태에 대한 분석을 대체했다: '노동자계급은 점점 더 급진화되고 있으며, 상황은 점점 더 혁명적으로 되고 있다.'

      실제로 독일 노동자계급은 작년에서야 비로소 1923년 패배의 결과에서 회복하기 시작했다. 반대파는 맨 먼저 이것에 주목했다. 우리가 발표한 문서에서 텔만이 인용한 부분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유럽 노동자계급 사이에서 부정할 수 없는 좌경화가 일어나고 있다. 이는 파업투쟁의 격화와 공산당의 득표수 증대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변화의 첫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공산당의 득표수 증대와 나란히 사회민주주의 투표자 수도 늘어나고 있다. 이는 부분적으로 공산당의 득표수의 증대를 능가한다. 만약 이 과정이 발전하여 심화하면, 우리는 사회민주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변화가 시작될 다음 단계에 들어설 것이다.(트로츠키, 새로운 단계에 대하여)

      독일과 프랑스의 가장 최근 선거에 관한 자료에 한해 판단해보자면, 유럽, 특히 독일 노동자계급의 상황에 대한 위의 평가는 거의 논쟁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불행히도 소련공산당을 포함하여 코민테른의 기관지는 노동자계급 속에 존재하는 분위기나 경향에 대해 진지하고, 면밀한, 문서화되고, 도해화된 분석을 전혀 제공하지 않는다. 제시된 통계자료는 단지 지도부의 '명성' 유지를 목적으로 하는 특수한 경향에 적합한 것뿐이다. 이것들은 이런 자료가 잘못된 판단이나 지시를 반박 하더라도 1923~28년 시기에 노동자운동의 곡선을 결정한 이례적으로 중요한 실제적 자료를 줄곧 아무 말 없이 무시한다. 이 모든 것은 대중의 급진화의 역학관계, 그 템포, 범위, 가능성을 판단하기 대단히 어렵게 한다.

      텔만은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2월 전원회의에서 '… 트로츠키주의자는 국제노동자계급의 급진화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할 권리가 조금도 없었다. 우리는 유럽 노동자계급의 급진화를 이해했을 뿐만 아니라 이 점에 대해 이미 작년에 위기에 대한 우리의 평가를 밝혔다. 위기는 5월 제국의회 선거(1928년)에 의해 완전히 확증되었다. 급진화는 여전히 대중을 사회민주주의의 경로로 이끌면서 그 첫 단계를 통과하고 있다. 이를 살펴보려고 하지 않은 텔만은 2월에 이렇게 주장했다 : '상황은 점점 더 혁명적으로 되고 있다.' 이런 일반적 형태의 주장은 공문구에 지나지 않는다. 부르주아체제의 주요 버팀목인 사회민주주의가 성장하고 있는데도 '상황이 점점 더(?) 혁명적으로 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혁명적 상황에 가까워지기 위해서 대중의 '급진화'는 어쨌든 노동자가 사회민주주의에서 공산당으로 모여들 예비단계를 여전히 거쳐야 한다. 확실히 부분적 현상이지만, 이것은 이미 지금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흐름의 주요방향은 아직까지 그렇지 못하다. 아직 반(半)평화주의적 이고, 반(半)협조주의적인 급진화의 초기단계를 혁명적 단계와 혼동하는 것은 끔찍한 중대 실수로 나아가는 것이다. 구별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해마다 단지 '대중이 급진화되고 있으며, 상황은 혁명적이다'라고 되풀이하는 사람이라면 볼셰비키지도자가 아니다. 거창한 선동가일 뿐이다. 이 사람은 실제로 혁명이 다가오는 경우에도 이를 인지하지 못할 것이 틀림없다.

      사회민주주의는 부르주아 체제의 주요한 버팀목이다. 그러나 이 버팀목은 자체 내에 모순을 포함하고 있다. 만약 노동자가 공산당에서 사회민주주의로 넘어가고 있었다면, 전적인 확신을 가지고 부르주아 체제가 공고화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924년에 그랬다. 당시 텔만과 제5차 대회의 다른 지도자들은 이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런 이유로 이들은 우리의 주장과 충고에 모욕으로 답했다. 현재의 상황은 다르다. 공산당은 사회민주주의와 나란히 성장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사회민주주의를 직접적으로 잠식하지 못하고 있다. 대중은 두 정당으로 평행하게 흐르고 있다: 지금까지는 사회민주주의로 향하는 흐름이 더 크다. 이런 과정의 근저에 있는 노동자의 부르주아 정당에 대한 단념과 정치적 무관심으로부터의 자각은 분명히 자본가계급을 강화시키지 않는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의 성장도 혁명적 상황을 만들어내지는 않는다. 구별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그렇다면 현재의 상황은 어떻게 한정되어야 하는가? 모순을 포함하고 있으며, 아직까지 구별되지 않는 이행적 상황은 여전히 다양한 가능성을 비치고 있다. 이 과정의 뒤이은 발전은 무미건조한 말에 취하는 일 없이, 언제나 급격한 상황 변화에 준비를 갖추고 주의 깊게 지켜보아야한다.

      사회민주주의는 투표자 수 증대에 마냥 흐뭇해하지만은 않는다. 사회민주주의는 아주 근심스럽게 노동자의 쇄도를 주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노동자는 사회민주주의에 큰 어려움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노동자가 사회민주주의에서 공산당으로 대거 넘어오기 시작하기 전에(그리고 이러한 시기의 도래는 피할 수 없다) 우리는 사회민주주의 자체 내에서 새롭고 커다란 갈등 一 더욱 근본적인 그룹의 형성과 분열 등 一 이 일어날 것을 예상해야 한다. 이것은 십중팔구 대중의 혁명적 분화 과정을 촉진하기 위해, 즉 주로 노동자를 사회민주주의에서 떼어놓기 위해 '공동전선' 노선을 따라서 공산당의 적극적, 공격적, 전술적 작전을 위한 전장을 열어젖힐 것이다. 그러나 만약 '좌익'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철들기를 기다리는 동안, 공산당이 다시 이들의 입을 바라볼 수도 있는(이들이 훨씬 더 왼쪽으로 나아갈지도 모른다) 것으로 '책략'을 격하시킨다면 우리에게는 화가 될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책략'이 1923년 작센에서 소규모로, 그리고 1925-27년 영국과 중국에서 대규모로 실행되는 것을 목격했다. 이 모든 경우에 책략은 혁명적 상황을 유실시키고, 참패를 불러일으켰다.

      텔만의 판단은 그 자신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강령 초안에서 볼 수 있다.

      '대중의 급진화 과정이 심화되고 있으며, 공산당의 영향력과 권위증대 … 이 모든 것은 제국주의 국가들에서 새로운 혁명적 물결이 일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것이 강령적 일반화라면, 이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지금이 제국주의와 노동자혁명의 시대인 것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이며, 앞으로 '심화하는 급진화 과정'뿐만 아니라 대중이 오른쪽으로 나아가는 시기도 겪을 것을 알고 있다. 또한 공산당의 영향력이 증대할 뿐만 아니라 특히 오류 또는 중대 실수를 저지르거나, 항복하는 경우에는 일시적으로 영향력이 하락하는 시기도 겪을 것이다. 만약 이것이 해당 시기에 어떤 나라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사실이지만, 전 세계에 대해서는 결코 그렇지 않은 위기의 견지에서 판단할 문제라면, 이런 판단이 어울리는 자리는 결의문이지 강령이 아니다. 강령은 노동자혁명의 시대 전체를 위해 작성된 것이다. 불행히도 이 5년 동안 코민테른 지도부가 혁명적 상황의 발전과 소멸에 대해 변증법적으로 이해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이런 문제에 대해 코민테른 지도부는 여전히 세계 노동자계급 투쟁의 현 단계를 근본적으로 검토하지 않고 '급진화'를 다루는 퇴색하지 않는 스콜라주의에 머물러 있다.

      독일의 정치생활이 그 위기의 특수한 성격으로 두드러져 보인 것은 제1차 대전 중에 경험한 패배 때문이다. 독일의 노동자전위는 책임감이 따르는 상황에 직면하여 이를 알아차렸다. 전후 5년 내내 독일 노동자계급이 패배한 것은 직접적으로는 혁명정당의 이례적인 허약함 때문이었다. 뒤 이은 5년 동안 독일노동자계급이 패배한 것은 지도부의 오류 때문이었다.

      1918~19년의 혁명적 상황은 혁명적 노동자당을 완전 결여하고 있었다. 쇠퇴가 시작된 1921년에 벌써 상당히 강해진 공산당은 혁명의 직접적인 전제가 없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혁명을 불러일으키려고 시도했다. 이때 이후 예비활동('대중을 획득하기 위한 투쟁')은 당의 우익적 일탈로 끝났다. 혁명적 시야와 주도력을 뺏긴 지도부는 전체 상황(1923 년 가을)의 급격한 좌선회에 난파당했다. 우익은 이미 혁명의 쇠퇴와 맞물려 있었지만 우위를 점한 좌익에 의해 보완되었다. 그러나 좌익은 이를 납득하지 못했으며, 완고하게 '봉기를 향한 노선'을 견지했다. 이로부터 좌익지도부를 파멸시키고, 당을 약화시킨 새로운 오류가 생겨났다. 은밀히 '우익'에 의지하고 있는 현 중앙위원회는 그동안 줄곧 무자비하게 좌익과 싸웠다. 좌익은 그동안 줄곧 대중이 급진화되고 있으며, 혁명이 가까이 와 있다고 기계적으로 되풀이했다.

      독일공산당의 발전사는 정치적 곡선의 변동에 의지하면서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분파의 갑작스런 교체를 보여준다. 각각의 지도 그룹은 정치적 곡선의 갑작스런 상향적 또는 하향적 전환이 일어날 때, 즉 일시적 '안정'을 향하든, 반대로 혁명적 위기를 향하든 난파당해 경쟁 그룹에 자리를 내준다. 상황이 바뀌면, 권력 장악을 위한 혁명적 투쟁의 열차로 갈아타기 위해 모든 활동을 집중할 수 없는 무능력을 자신의 약점으로 가진 우익그룹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다. 이에 비해 좌익그룹의 약점은 준비기에 객관적 상황에서 나오는 이행적 요구로 대중을 결집할 필요성을 인정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한 그룹의 약점은 다른 그룹의 약점으로 보완되었다. 지도부가 상황이 급변할 때마다 대체되었기 때문에 당의 지도적 중핵은 발전과 쇠퇴, 밀물과 썰물, 공격과 후퇴를 통해 넓어지는 더 광범한 경험을 습득할 수 없었다. 진정으로 혁명적인 지도부는 우리 시대를 갑작스런 변화와 급격한 전환의 시대로 이해하지 않으면, 교육될 수 없다. 지명으로 선발하는 무작위 방식의 지도자 선발은 불가피하게 맨 처음의 주요한 사회적 위기에 지도부의 새로운 파산이라는 잠재적인 위험을 자체에 내포하고 있다.

      지도하는 것은 예측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유 있는 휴지기에 텔만은 알랑거리는 짓을 멈출 필요가 있었다. 오로지 반대파에 퍼부으려는 가장 야비한 욕설을 찾기 위해 하수도를 샅샅이 뒤져야 했기 때문이다. 담평산이 단지 텔만의 모욕을 중국어로 번역했기 때문에 제7차 전원회의에서 귀여움을 받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독일 당은 텔만이 2월에 정치적 상황에 대해 통과시킨 견해가 야비하고, 독단적이며, 잘못된 것이라고 말해 야 한다. 최근 5년 동안 저지른 전략적, 전술적 중대 실수를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이들로 인해 입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시간을 보내기에 앞서 이를 의식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 전략적 교훈은 이들이 착실히 사태를 따라갈 경우에만 정착할 수 있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가 저지른 오류나 벨기에의 노동자 혁명가들을 처벌하려는 게페우에 찬성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들을 응징하기 위해 당지도자들을 대체하는 일은 중지되어야 한다. 젊은 중핵들이 자립심을 갖도록 이들에게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도와야 한다. 단지 선행에 대한 자신의 증명서 (즉, 이들이 반대파에 반대한다면)에 기초하여 지도적 지위에 '임명하는 일'은 중지되어야 한다. 보호를 위한 중앙위원회의 체계는 단호하게 포기해야 한다.


      5. 소련공산당의 현 좌경화는 어떻게 준비되었는가

      지도부의 좌경화에 부합하는 정확한 지점을 알아보기 위해 코민테른의 정책과 체제를 개괄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다. 이 좌경화는 소련에서 경제적 위기를 야기한 조건에서 직접 유래했기 때문에, 또한 특히 국내 문제를 다루는 방침에 따라 발전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과거는 물론이고 최근까지 어떻게 나타났으며, 이에 대한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가장 최근의 새로운 결의문과 조치는 무엇인지 더 면밀하게, 그리고 더 자세하게 검토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다. 이런 식으로만 뒤이어 계속될 정책의 올바른 방향이 우리 앞에 윤곽을 드러낼 것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올해(1928년) 곡물 징수에서 경험한 이례적인 어려움은 경제뿐만 아니라 당과 정치 분야에서도 커다란 중요성을 갖는다. 이런 어려움이 좌선회를 부추긴 것은 우연이 아니다. 다른 한편, 이런 어려움만으로도 경제와 일반적 정책의 대주기에 대한 대차대조표를 입증할 수 있다.

      전시공산주의에서 사회주의 경제로의 이행은 노동자혁명이 즉시 선진 국가들로 확대되는 경우에만 거대한 후퇴를 동반하지 않고 실현될 수 있었다. 이 확대가 몇 년 동안 지체되었다는 사실은 1921년 봄에 신경제 정책이라는 거대한 후퇴一깊고 지속적인 후퇴一로 우리를 이끌었다. 피할 수 없는 후퇴의 규모는 이론적으로뿐만 아니라 실천적으로도 근거를 신중히 검토함으로써 결정되었다. 1921년 가을에는 이미 더욱 심각한 후퇴가 불가피했다.

      1921년 10월 29일, 즉 신경제정책으로 전환한 7개월 뒤, 레닌은 모스크바 지구협의회에서 이렇게 밝혔다.

      봄에 이뤄진 신경제정책으로의 전환, 이런 우리 쪽의 후퇴는 … 우리가 후퇴하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공세를 취할 준비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충분한 것으로 입증되었는가? 그렇지 않다, 아직 불충분한 것으로 드러났다. … 따라서 우리가 타조 식으로 머리를 감추고 싶어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처럼 보이고 싶지 않다면, 우리가 우리에게 닥친 위험을 인정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이제 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후퇴가 불충분한 것으로 드러났다는 것을, 즉 우리가 국가자본주의에서 국가가 통제하는 구입, 판매, 화폐 유통의 창출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더욱 후퇴할 추가적 후퇴를 실행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 이런 이유로 우리는 결국 뒤이은 단계에서 공세로 나아가기 위해 계속 후퇴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의 처지에 있는 것이다. (레닌,《전집》, 제18권, 397쪽 이하)

      같은 연설의 뒤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1921년 봄과 1921~22년 가을에서 겨울로 가는 현재에도 우리가 경제 분야에서 계속 후퇴하고 있다는 것을 자기 자신에게, 노동자계급에게, 대중에게 숨기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완전한 인사불성이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또한 상황을 정정당당하게 직시할 용기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활동하고 투쟁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앞의 책, 399쪽 이하)

      다음해(1922년) 봄에서야 레닌은 후퇴를 중지시킬 신호를 보내기로 결심했다. 그는 1922년 3월 6일에 열린 금속노동자 대회 분파 회의에서 처음으로 이에 대해 말했다.

      우리는 이제 우리가 자본가들에게 양보했다는 의미의 이런 후퇴가 끝났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바라건대, 당 대회는 러시아의 지도 정당의 권위로도 공식적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앞의 책, 2부, 13쪽)

      그리고 곧바로 언제나처럼 진정으로 레닌주의적인 솔직하고 정직한 설명을 덧붙였다.

      후퇴의 중지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우리가 이미 새로운 경제의 토대를 구축했으며, 따라서 우리가 평온하게 나아갈 수 있다는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 토대는 아직까지 구축되지 않았다. (앞의 책, 2부, 13쪽)

      레닌의 보고에 기초하여 제11차 당 대회는 이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결의문을 채택했다.

      대회는 당이 작년에 사적 자본주의에 대해 필요한 양보조치를 취하기로 결정하고 적용한 조치들이 전부 한계에 이르고, 이런 의미에서 후퇴가 끝난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의사록, 143쪽)

      깊이 심사숙고한 이 결의문은 이미 살펴본 것처럼, 주의 깊게 준비되었으며, 결과적으로 당이 잡은 새로운 출발점이 느리지만 새로운 후퇴의 움직임 없이 사회주의적 공세에 착수할 가능성을 제공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레닌이 이끈 지난 대회의 기대는 이 점에서 정확히 입증되지 않았다. 1925년 봄에 새로운 후퇴를 실행할 필요성이 생겼다 : 농촌의 부유층에게 노동자를 고용하고 토지를 임대함으로써 하층을 착취할 권리를 부여하는 것.

      1922년 레닌의 전략적 계획이 예측하지 못했으며, 그 결과가 엄청난 이 새로운 후퇴의 필요성은 단지 후퇴의 한계를 ‘너무 줄여’ 잡았다는 사실 때문에만 생긴 것이 아니었다(가장 기초적인 신중함도 이를 피할 수 없게 했다). 또한 1923~24년 중에 지도부가 상황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자기가 책임진 임무도 이해하지도 못한 채, 시간을 '벌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시간을 허비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이 다가 아니다. 1925년 4월의 새롭고 고통스러운 후퇴는 레닌이 예상한 것처럼, 심각한 패배와 후퇴로 간주되지 않았다. 이것은 노농동맹이 승리를 거둔 단계이자, 사회주의 건설의 일반적 메커니즘에 단순 연결된 것처럼 보였다. 레닌은 바로 이러한 바람직스럽지 못한 사태 진전에 대해 죽을 때까지 경고했다. 봄에 시작된 불가피한 후퇴가 계속해서 깊어진 1921년 가을에 특히 그랬다.

      (레닌은 앞에서 인용한 모스크바 지구협의회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패배를 인정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이로부터 모든 결론을 끌어내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같은 위험스런 패배가 아니다. … 우리는 패배를 인정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패배의 경험으로부터 배워야 한다. 만약 우리가 패배를 인정함으로써 진지를 포기하는 것과 비슷한 의기소침을 유발하고, 투쟁의 에너지를 약화시키는 견해를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이러한 혁명가들이 땡전 한 푼의 가치도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의 우리 강점은 미래에도 여전할 것이기 때문에, 우리 행동에서 바뀌어야 하는 것을 경험에서 배우면서, 가장 가혹한 패배도 더할 나위없는 냉철함으로 고려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이를 솔직히 말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이론적 정확성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실천적 관점에서도 대단히 중요하다. 만약 어제의 경험이 우리를 놀라게 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기존 방식이 어떤 점에서 잘못되었는지 알아보기 위해 새로운 방식으로 오늘날의 문제를 해결하는 법을 배울 수 없을 것이다. (레닌,《전집》, 제18권, 1부, 396쪽)

      그러나 이런 주목할 만한 경고는 레닌이 지도부에서 물러난 이후 완전히 잊혀졌다. 정말로 이제까지 단 한 번도 기억되지 않았다.

      1925년 4월의 결정이 발전하고 있는 농촌의 분화를 합법화하고, 그 수문을 연 것인 한, 노농동맹은 노동자국가와 쿨락 사이의 상품 교환이 앞으로도 계속 증가할 것임을 뜻했다. 이 끔찍한 위험을 인정하는 대신에 쿨락을 사회주의로 흡수한다는 맹목적 이론이 즉시 만들어졌다. 이 과정의 완전한 형태가 세계경제, 세계혁명과 상관없이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것'으로서 당의 이름으로 당 협의회에 처음 제출되었다. 요컨대, 이 소부르주아적, 반동적 이론의 출현 자체는 사회주의 건설의 진정한 성공 때문이 아니다. 사회주의 건설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 이론은 바로 사회주의 건설을 방해하는 것, 그에 따라 지도자들 사이에 생겨난 필요를 위해 자본주의에 허용한 새로운 물리적 양보에 대한 평형추로서 노동자계급에게 '도덕적' 위안을 주는 것이다.


      산업화에 대한 제14차 당 대회(1926년 1월)의 결의문은 반대파가 1923-25년에 이 문제에 대해 발전시킨 일부 견해를 거의 글자 그대로 반복하면서 올바른 일련의 테제를 선언했다. 그러나 이 결의문과 나란히 '초산업주의자'라고 부른 좌익, 즉 단지 문서상에나 남아있을 결정을 채택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캠페인이 수행되었다. 쿨락의 위험에 대한 우리의 경고는 어리석은 '공포'를 지칭하는 것으로 제시되었다. 농촌에서 계급의 분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사실로 가정하는 것은 반(反)소비에트 선전으로 처벌되었다. 산업의 이점으로 쿨락에게 더 강한 압력을 가하자는 요구는 '농민을 약탈하는' 경향이라는 딱지가 붙었다(스탈린-리코프-퀴비셰프 선언). 결국 이 산업화에 대한 결의문은 당내 민주주의와 코민테른의 집단적 지도부에 대한 제14차 당 대회의 다른 일부 결의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실제 경제 과정에 거의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1926년에 반대파는 1923년 봄 훨씬 전에 시작된 노농동맹에 대한 논쟁을 다음과 같은 식으로 정식화했다.

      질문: 반대파의 정책이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노농동맹을 분열시킬 우려가 있다는 것이 사실인가?

      대답: 이런 비난은 철저히 잘못된 것이다. 노농동맹은 현재 한편으로 산업의 뒤처짐에 의해, 다른 한편으로 쿨락의 성장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 부족한 산업생산은 농촌과 도시 사이를 이간시키고 있다. 정치와 경제 분야에서 쿨락은 중농과 빈농을 노동자계급에게 대립시키면서 이들을 지배하기 시작하고 있다. 이런 사태 전개는 아직 그 초기 단계에 있다. 이것이 바로 노농동맹을 위협하는 것이다. 산업의 뒤처짐과 쿨락의 성장에 대한 과소평가는 우리나라의 상황에서 독재의 토대인 두 계급 사이의 동맹에 대한 올바른 레닌주의 지도력을 혼란시킨다. (질문과 대답)

      우리가 1926년에 밝힌 '아직 그 초기 단계에' 있는 쿨락의 위험은 우리를 자본주의로 흡수할 길을 닦는데 적합할 뿐이며, 이런 쿨락을 사회주의로 흡수한다는 배신적 이론에 반대하여 상승하고 있는 투쟁이 격렬하겠지만 이 문제에서도 반대파가 과장한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을 여기서 강조하자. 우리는 1923년 이후 위험이 다가오고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우리는 각각의 새로운 단계에서 위험이 커지는 모습을 묘사했다. 제때에, 즉 아직 '그 초기 단계에' 있으며, 그 이상의 발전 가능성을 막을 위험을 파악할 수 없다면, 지도부의 기예는 다른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인가? 지도하는 것은 예측하는 것이다一예측할 수 있는 사람을 박해하는 것이 아니다.

      당을 가장 불행하게 한 것은 앞에서 인용한 노선을 공표하는 것도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이를 퍼뜨렸기 때문에 가장 뛰어난 투사들이 공상을 품지 않은 관료들에 의해 당에서 제명되었다. 관료들은 내일을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았으며, 게다가 그렇게 할 능력도 없었다.

      1926년 12월 9일에 열린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제7차 전원회의에서 부하린은 노농동맹과 곡물 징수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로 반대파를 비난했다.

      우리의 반대파가 당 중앙위원회에 대항하여 동원한 가장 강력한 주장은 무엇이었는가?(내가 여기서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1925년 가을이다) 당시 이들은 이렇게 말했다 : 모순이 무섭게 증가하고 있으며, 당 중앙위원회는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또 이렇게 말했다 : 잉여곡물의 거의 전부를 수중에 집중시킨 쿨락은 우리에 대항하여 '곡물파업'을 조직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곡물이 대단히 부족해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이런 말을 들었다. … 반대파는 나머지는 모두 이 근본적 현상의 정치적 표현일 뿐이라고 평가했다. 뒤이어 같은 반대파 동지가 이런 말로 끼어들었다 : 쿨락은 더욱 부유해지고 있으며, 위험은 더욱 증대되고 있다. 동지 여러분, 만약 첫 번째와 두 번째 단언이 옳았다면, 올해 노동자계급에 대한 '쿨락의 파업'은 훨씬 더 강할 것이다. … 반대파는 우리가 쿨락의 성장에 기여하고 있으며, 우리가 계속해서 양보를 하고 있으며, 우리가 곡물파업을 조직하려는 쿨락을 돕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우리를 중상한다. 실제 결과는 정반대의 증거뿐이다. … (의사록, 제2권, 118쪽)

      부하린에게서 인용한 이 단문만으로도 우리 경제정책의 핵심 문제에 대한 지도부의 완전한 무지가 드러나지 않는가?

      그렇지만 부하린에게는 예외가 없었다. 그는 지도부의 무지를 이론적으로 '일반화했을' 뿐이다. 당과 경제의 가장 책임 있는 지도자들은 우리는 위기를 극복했다(리코프), 우리는 농민시장을 지배하고 있으며, 곡물 징수의 문제는 엄밀히 말하면 소비에트 기구의 순전히 조직적인 문제가 되었다(미코얀)고 선언하면서 서로 다뤘다. 1927년 중앙위원회 7월 전원회의의 결의문은 1927년 동안 경제활동의 발전은 전체적으로 볼 때, 어떠한 위기도 없이 이루어졌다고 발표했다. 동시에 공식 기관지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지만, 적어도 상당히 좋아진 농촌의 상품이 품귀를 빚고 있다고 일제히 주장했다.

      이 모든 것을 상쇄하기 위해 반대파는 제15차 당 대회를 위해 쓴 테제에서 다시 이렇게 말했다.

      한편으로 곡물 징수의 총량 감소는 도시와 농촌 사이의 관계에 존재하는 심각한 혼란의 직접적 증거이고, 다른 한편으로 우리를 위협하는 새로운 어려움의 원천이다.

      우리 어려움의 근원은 어디에 있는가? 반대파는 이렇게 대답했다.

      최근에 산업은 국민경제 전체의 발전에 뒤처져서 대단히 완만하게 발전했다. 이 때문에 쿨락에 대한 국가경제의 의존과 원료, 수출, 식료품 분야에서 자본주의적 요소가 증대하고 있다.

      반대파의 가장 날카로운 개입이 1927년 11월 7일의 10월혁명 기념 시위 중에 있었다는 점도 상기하도록 하자. 이 개입에서 정식화된 가장 날카로운 슬로건은 이것이었다 : '우리의 총구를 쿨락, 중개상, 관료 등 우익에게로 돌리자, 곡물 징수를 사보타주하는 쿨락과 중개상에게로 돌리자, 도네츠 재판 중에 조직적으로 단결하거나 손 놓고 쉰 관료에게로 돌리자.' 경미하지 않았으며, 어떤 점에서는 혁명의 두뇌가 걸린 논쟁은 게페우 첩자의 협박에 따라 1927~28년 겨울에 끝났다. 반대파에게는 형법 제58조에 따라 서둘러 유형에 처하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이것은 특히 부하린의 무지는 일반적인 중도주의적 무지와도 다른 '일탈'이었다.

      이것이 1923년 테제로부터 시작하여 1927년 11월 7일의 플래카드로 끝난 반대파의 이전 활동 전체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면, 반대파가 미리 올바른 예측을 제시하지 않았다면, 반대파가 당과 노동자계급 대오에 충분히 이유 있는 경종을 울리지 않았다면, 곡물 징수의 위기는 단지 자본주의 세력을 더욱 부추기는 방향으로 우익 노선의 발전을 재촉했을 것이다.

      이전 역사에서 노동자전위, 아니 전위의 전위도 여러 차례 자기 계급의 전진을 위해 또는 적의 공격을 격퇴하기 위해 자신의 파멸로 대가를 치렀다.

       

      6, 일보전진, 반보후퇴

      중국, 영-러위원회, 기타 위기와 달리 곡물 징수의 위기는 조용히 지나칠 수 없었으며, 정책상의 새로운 국면을 향한 자극이 되었다. 전체 경제뿐만 아니라 노동자 각자의 일상생활에서도 곡물 징수 위기의 직접적 파문이 일었다. 이런 이유로 새로운 정치적 시기가 곡물 징수로부터 비롯한 것이다.

      과거와 어떠한 관련도 없이 당은 1928년 2월 15일자 〈프라브다〉지에 바꿔 말하기 위해 필요했는지도 모르는 논설을 실었다. 그런데 이 글은 부분적으로 제15차 당 대회에 제출된 《반대파의 강령》을 거의 문자 그대로 복제하고 있다.

      곡물 징수 위기의 직접적 압력에 따라 작성된 이 예기치 않은 글은 이렇게 공표했다.

      곡물 징수에서 경험한 어려움을 결정지은 많은 원인들 가운데서 다음에 말하는 것을 추려낼 필요가 있다. 농촌은 발전하여, 부유해졌다. 무엇보다도 쿨락이 발전하여, 부유해졌다. 3년간의 풍작은 그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것이 아니다.

      요컨대, 농촌이 도시에 곡물을 주려고 하지 않는 것은 ‘농촌이 부유해 졌다’는 사실 때문이다. 즉, 이를 가장 잘 보여준 것은 부하린의 슬로건 ‘부자가 되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노농동맹을 강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침해하는 농촌의 부유화 이유는 무엇인가? 이 글은 이렇게 답한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쿨락이 발전하여, 부유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기에 쿨락과 빈농을 희생하여 중농이 발전했다고 단언하는 이론은 단지 쓸모없는 쓰레기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무엇보다도 쿨락이 발전하여, 부유해졌다.’

      그렇지만 농촌에서 쿨락이 부유해진 것도 도시와 농촌 사이의 교환 붕괴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쿨락과의 동맹은 사회주의적 동맹이 아니다. 그러나 곡물 위기는 심지어 이런 노농동맹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다. 그래서 쿨락이 발전하여, 부유해진 것이 아니라, 단지 체르보네츠(chervonetz : 10루블 금화)를 위해 자신이 저장해둔 천연산물을 교환할 필요를 깨닫지도 못한 것뿐이다. 자신이 원하지만 도시에서 구할 수 있는 상품에 대해서 쿨락은 도시 에는 절대적으로 불충분한 양의 곡물로 대가를 치른 것뿐이다. 〈프라브다〉지는 곡물 위기의 근본적 원인 밑에 있는 두 번째 원인도 설명한다.

      ‘상대적으로 낙후된 공산품 공급에 직면한 … 농민의 수입 증대는 농민 일반, 특히 쿨락의 곡물 저장을 가능케 한다.’

      이제 전체적인 상황이 분명해진다. 근본적 원인은 뒤떨어진 산업이며, 공산품의 부족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협동조합에 속해 있는 빈농, 중농과 사회주의적 노농동맹을 맺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쿨락과의 자본주의적 노농동맹도 맺을 수 없다. 방금 언급한 〈프라브다〉지의 두 인용문을 이전 장에 제시된 반대파 문서의 인용문과 비교해보면, 〈프라브다〉지가 나의〈〈질문과 대답〉〉의 표현과 견해를 사실상 축어적으로 되풀이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이 글은 당에서 나를 내치는 형벌의 상징이 되었다.

      그렇지만 〈프라브다〉지의 논설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여전히 쿨락이 ‘주요한 곡물 저장자’는 아니라는 유보조항을 달면서 글은 쿨락이 농촌의 경제 권력자이며, ‘더 높은 곡물 가격을 치르는 도시의 투기꾼과 노농동맹을 수립했으며’, ‘중농을 자기 뒤로 끌어당길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인정한다. 농촌에 존재하는 관계를 정확하게 특징짓고 있는 이런 묘사는 중농의 경제적 역할이 지배적이며, 계속해서 증대하고 있다는 최근의 공식적 전설과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 그러나 이것은 반(反)당적 문서로 간주된 우리 강령과 전적으로 일치한다. 노동자 독재가 수립된 11년 뒤에 쿨락이 ‘농촌의 경제 권력자’이자 ‘중농을 자기 뒤로 끌어당길 가능성을 가진’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중농은 수적인 견지에서 계속 농촌의 중심적 인물이었지만, 쿨락에 경제적으로 속박되어 있음을 알았다. 쿨락이 ‘주요한 곡물 저장자’가 아니라는 취지의 유보조항은 전체적인 상황을 부드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더 음침하게 한다. 만약 우리가 현재 쿨락의 덕분으로 여겨지는 곡물 무역의 몫으로 약간 의심스러운 20%라는 수치를 받아들인다면, 쿨락이 시장에서 중농을 ‘자기 뒤로 끌어당길’ 수 있다는 사실, 즉 국가의 곡물 징수를 사보타지하게 한다는 사실은 그 만큼 더 선명하게 튀어 보일 것이다. 뉴욕은행은 유통되는 상품 전체를 소유하지도 않지만 이를 지배한다. 누가 이 ‘적당한’ 20%를 증거로 간주하려고 시도하든 그렇게 함으로써 곡물시장에서 지배적 역할을 장악하기 위해 쿨락이 곡물의 5분의 1을 자기 수중에 두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강조할 뿐이다. 이렇게 해서 산업이 뒤처져 있는 상황에서 국가가 농촌경제에 행사하는 영향력이 약화되는 것이다.

      쿨락의 ‘지도적’ 역할이 전체 지역에서가 아니라 몇몇 지역에서만 기록되었을 뿐이라는 취지의 또 다른 불가피한 유보조항은 변명도 아니다. 반대로 일어나고 있는 일의 심상치 않은 의미를 확실히 하기까지 한다. 이런 ‘몇몇’ 지역은 이미 도시와 농촌의 노농동맹을 그 토대에서부터 뒤흔들기에 충분하다. 이 과정이 같은 정도로 전 지역으로 확대되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 것인가?

      우리가 여기서 다루는 것은 생생한 경제적 과정이지 안정된 통계적 수단이 아니다. 이 가장 복잡하고 포괄적인 과정은 우리가 따라 나아간 것처럼, 양적으로, 그리고 정확하게 측정하는 문제가 결코 아니다. 그 질을 결정해야 한다. 즉, 현상이 어떤 방향으로 발전하는지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20%를 가지고 있다. 내일은 더 많이 가질지도 모른다. 일부 지 역은 앞서 나아갔다. 다른 지역은 뒤처져 있다. 실제로 농촌에서 쿨락의 권위와 쿨락이 중농을 자기 뒤로 끌어당길 가능성은 과거의 직접적인 잔재가 아니다. 그렇다, 과거에 우리는 쿨락 탄압에 뒤이어 일어난 신경제정책의 토대에서 비롯한 새로운 사실을 알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현상이 더 뚜렷해 보이는 지역은 단지 더 ‘후진적인’ 지역으로 가는 길을 가리키고 있을 뿐이다. 물론 5년 동안, 특히 1925년 4월 이후를 지배한 경제정책 노선이라면,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누구의 희생으로 새로운 ‘소비에트’ 쿨락이 농촌에서 권위를 얻었는가? 노동자국가와 지배적인 그 기관, 국영기업, 협동조합을 희생시킨 결과다. 만약 쿨락이 중농을 자기 뒤로 끌어당길 가능성을 얻게 된다면, 그가 누구에게 대항할 것인가? 바로 노동자국가다! 여기에 중대하고 심각한 경제적 노농동맹의 분열, 또 다른 전제인 훨씬 더 큰 위험, 즉 정치적 동맹의 분열이 있다.

      이것은 1923년 봄의 경우처럼, 더 이상 오늘날 사태를 예측하는 문제나 이론적 고려의 문제가 아니라 혹독하게 검증된 사실의 문제다. 노동자계급의 독재에도 불구하고, 토지의 국유화에도 불구하고, 국가가 보호하는 협동조합에도 불구하고 산업의 더딘 발전은 농촌을 몇 년 동안 사회주의 건설의 불구대천의 적의 지배 아래 두었다. 이것은 1928년 2월 15일자 〈프라브다〉지가 처음으로 인증했다. 

      이 모든 것에서 절망적인 결론을 끌어낼 필요는 전혀 없다. 그러나 다른 모든 것에 앞서 분명하고 완전한 사실이 당에 제시되어야 한다. 조금도 과소평가하거나 윤색해서는 안 된다. 이런 이유로 〈프라브다〉지의 논설은 그 인색함, 확실치 않은 유보조항에도 불구하고 중대한 일보전진을 이루는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이 문제에 대해 지난 5년 동안 지도부가 따른 노선과 반대파의 노선을 분리시키고 있는 거리를 상당히 줄인다. 모든 반대파 동지들은 이를 환영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일보전진 다음에 적어도 반보후퇴가 뒤따랐다. 곡물 징수 견지에서 긴급한 행정적 조치 덕분에 심각한 상황이 조금 진정되자마자, 공식적 낙관주의라는 장치가 다시 작동하기 시작했다.

      최근(1928년 6월 3일) 중앙위원회의 강령적 선언은 이렇게 밝히고 있다.

      사회주의적 경제 부문의 훨씬 더 큰 성장에도 불구하고 농촌의 전반적인 생산력 증대에 기초하여 쿨락의 저항이 증대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것이 진짜라면, 경보를 울릴 여지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행동방침을 혼란시키지 않고도 계속해서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를 조용히 건설하는 일만 남을 것이다. 만약 자본주의적 요소, 즉 특히 쿨락의 비중이 경제 안에서 해마다 하락하고 있다면, 쿨락의 기세에 밀려 매우 갑작스런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무엇인가? 문제는 투쟁하고 있는 두 세력, 즉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의 역학관계에 의해 해결된다 一 누가누구를 패배시킬 것인가? ‘끔찍하든’ ‘해롭지 않든’ 쿨락은 이 관계가 바뀌는 방향에 전적으로 의지한다. 이 부분에서 중앙위원회의 선언은 경제에서 자본주의적 요소에 대해 사회주의적 요소의 우위가 끊임없이 증가하고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한 제15차당대회의 결정을 헛되이 구하려고 한다. 그러나 정말로 〈프라브다〉지 2월 15일자 논설은 곡물 징수 중에 필요했던 전체 작전 과정에 의해 실제로 반증된 이 부정확한 테제에 대한 공공연한 반박이다. 어떻게 이것이 논리적으로 일치하는가?

      풍작을 거둔 3년 동안 비(非)사회주의적 부문에 비해 사회주의적 부문이 더 빨리 성장했다면, 우리는 아마 국영기업의 잉여생산물 一 농업에서는 상당하는 것을 발견할 수 없는 一 로 나타나는 상업이나 산업공황을 겪었을지도 모른다. 대신에 우리는 곡물 징수에서 위기를 겪었다. 〈프라브다〉지 2월 15일자는 농민, 특히 쿨락의 농산품 一 공산품에서는 상당하는 것이 없는 제품 一 축적의 결과를 정확히 설명하고 있다. 3년간의 풍년의 결과인 곡물 징수의 위기, 즉 노농동맹의 위기와 악화는 경제적 과정의 일반적 역학관계에서 사회주의적 부문이 자본주의적, 사적 상품 부문 일반에 비해 더 약해졌다는 것을 의미할 수밖에 없다.

      지도부가 앞뒤 분간 못하는 것으로 드러나자마자 불가피해진 행정적 압력으로 이 관계에 도입된 조정은 어떤 식으로든 근본적 결론을 바꾸지 못한다. 우리가 여기서 다루는 것은 부분적일 뿐일지라도 쿨락이 이미 가담하고 있는 정치세력의 문제이다. 그렇지만 전시공산주의의 무기고에 있는 긴급한 방식에 의지할 필요성 자체는 바로 경제생활 분야를 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세력관계가 불리하게 바뀐 증거이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결정적이며 심지어 더 중요한 또 다른 기준이 있다. 노동자계급의 물질적 조건이 그것이다. 만약 국민경제가 성장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사실이다), 사회주의적 축적이 사적 축적에 비해 더 빨리 성장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현실에 반하는 중앙위원회의 선언처럼), 노동자계급의 상황이 최근에 왜 더 나빠졌는지, 최근의 공동약정이 왜 심상치 않은 충돌과 치열한 투쟁의 원천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비(非)노동자부위의 생활수준이 올라가고 있는 반면에, 노동자 부위의 생활수준이 떨어지고 있다면, 이와 같은 커지고 있는 자본주의적 요소에 대한 사회주의적 요소의 '우위'를 사실로 가정할 노동자는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노동자에게 치명적으로 악영향을 끼치는 이런 실천적 기준은 이론적 기준과 완전히 조화를 이루며, 피상적이고 형식적인 중앙위원회의 낙관주의를 반박한다. 경제와 생활 자체에 의해 제시된 이런 객관적 증거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적 부문의 성장이 우위에 있다는 것을 ‘통계적으로’ 입증하려는 모든 시도는 얼토당토않은 것이다. 이것은 중요한 진지를 넘겨준 데다 전투에서 입은 손실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는 군대 지휘관이 자기편이 우위에 있었다는 것을 교묘한 통계적 계수로 입증하려는 시도와 같은 것이다. 아니 쿨락은 경제적 무기를 가지고 수행된 경우에 한해, 매우 중요한 이런 전투에서 쿨락 쪽에 있는 것으로 드러난 우위를 입증했다(그리고 낙관주의를 받아들이게 한 통계적 조합보다는 그의 주장이 더 설득력 있다). 여성 노동자의 가계비도 이것의 증거이다. 누가 누구를 패배시킬 것인가의 문제는 경제의 생생한 역학관계에 의해 해결된다. 만약 수치가 투쟁의 명백한 결과이자, 생활 자체의 증언을 부정한다면, 수치는 사기일 것이다, 아니 기껏해야 전혀 다른 문제에 관련된 답을 제공할 것이다.

      정말로 우리는 1927년 사례에서 곡물 징수에 완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행정적인 개입을 했을 뿐만 아니라 통계에 완전히 받아들일 수 없는 개입을 경험하기도 했다. 제14차 당 대회 직전에 통계자료는 쿨락에 거의 완전히 ‘동화된’ 중앙위원회 서기국에 의해 갱신되었다. 이런 사회주의의 승리를 위해서는 단지 며칠이 필요했을 뿐이다.

      그러나 기구의 전횡으로 상처 입은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설사 우리가 통계의 융통성 있는 성질을 제쳐 놓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특히 우리 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과정을 극도로 세분화한 통계는 언제나 뒤늦다는 사실이 여전히 남아 있다. 통계는 그 경향에 물들지 않은 채, 과정의 순간적인 횡단면을 제공한다. 이런 사실에서 이론이 우리를 도와야 한다. 과정의 역학관계에 대한 우리의 올바른 이론적 평가는 산업의 뒤처짐은 심지어 풍년도 사회주의 건설에 적의를 품을 것이며, 농촌에서 쿨락의 성장과 도시에서 더욱 길어진 식량배급 열을 낳을 것이라고 미리 예측했다. 이 예측은 사실이 되었으며, 부정할 수 없는 증거를 제공했다.

      〈프라브다〉지 2월 논설에서 개괄한 곡물 징수 위기의 교훈에서 우리는 강제를 행사하고, 결과적으로 국가경제면에서 적자, 즉 노동자 독재의 경제적 토대의 비중 감소와 함께 증가하는 불균형을 그만큼 더 명백하게 확인한다. 이와 함께 우리는 중농을 자기 뒤로 끌어당기는 쿨락의 당면하고 직접적인 통제 아래 곡물 징수의 운명, 바꿔 말하면 노농동맹의 운명을 결정할 정도로 이미 심각한 농민의 분화를 확인하고 있다.

      만약 도시와 농촌 사이의 불균형이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면, 만약 자본주의 세력의 일정한 성장이 불가피하게 우리의 현재 경제의 본질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작년의 불균형 악화와 쿨락 쪽으로 세력 관계가 바뀐 것은 전적으로 지도부의 잘못된 계급정책의 결과일 것이다. 지도부는 통제수단을 완전히 자유롭게 풀어주거나 이를 발작적으로 억제하면서 국민소득의 분배를 조직적으로 통제하지 못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반대파는 1923년 이후 전년 대비 체계적인 불균형 극복에 기초를 둔 확고한 계획노선만이 농촌에 대한 실질적인 지도적 역할을 국영기업에 부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더욱이 이에 반해서 산업의 뒤처짐은 불가피하게 농촌의 계급모순을 심화시키고, 노동자 독재의 경제 수뇌부의 비중을 낮출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따라서 우리는 제14차 당 대회 중에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가 하려고 한 것처럼, 단발적인 현상으로서가 아니라 국영기업과 농촌경제 전체의 사적 상품 형태 사이의 결정적 관계에 기초하여 쿨락을 다뤘다. 농촌 경제의 범위 안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단발적인 현상으로서가 아니라 중농의 더 부유한 계층과 농촌 전체에 대한 그 경제적 영향력과 관련하여 쿨락을 다뤘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단발적으로가 아니라 세계시장과 관련하여 이런 근본적인 두 가지 내적 과정을 다뤘다. 세계시장은 수출입을 통해 우리의 경제 발전 템포에 대해 언제나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 모든 것을 우리의 출발점으로 삼으면서 우리는 제15차 당 대회에 제출한 테제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주로 농촌의 부유한 계층으로부터 수출 무역을 위한 잉여곡물과 원료를 획득하는 한, 그리고 바로 이런 계층이 대부분의 곡물을 저장하고 있는 한, 우리는 주로 쿨락과 부유한 농민에 의한 수출무역을 통해 ‘통제되는’ 것으로 드러날 것이다.

      그러나 지도부가 앞으로 얼마 동안 이미 날짜를 정했기 때문에 반대파가 문제를 제기하는 데서 ‘미숙’했다는 이의가 제기될지도 모른다. 이러쿵저러쿵 해도 잃어버린 시간을 보상하기 위해 가장 중요해진 것을 매번 당에 공급한 이런 철없는 스탈린주의의 주장을 자세히 설명할 필요는 거의 없다. 인상적인 증거 한 가지를 제시해보자. 1928년 3월 9일에 열린 모스크바 소비에트 회의에서 리코프는 곡물 징수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캠페인은 의심의 여지없이 특별작업대(shock-brigade) 활동의 뚜렷이 구별되는 모든 특징을 띠고 있다. 만약 내가 곡물 징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더 정상적인 방법, 즉 이러한 특별작업대 캠페인에 의지하지 않고는 더 잘해내지 못했을 것인지 물었다면, 나는 더 잘했을 것이라고 솔직하게 대답할 것이다. 우리는 시간을 허비했다, 우리는 곡물 징수의 어려움을 초기에 소홀히 했다, 우리는 곡물 징수 캠페인의 성공적 발전을 위해 필요한 일련의 조치를 제때에 취하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프라브다〉지, 1928년 3월 11일자)

      만약 지연이 주로 행정적 관점에서 이런 말로 인식된다면, 정치적으로 이를 보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제때에 필요 불가결한 행정적 조치를 적용하기 위해 국가기구를 고무하고 지도하는 당은 〈프라브다〉지 2월 15일자 논설에서 제시된 것과 같은 적어도 일반적 방침을 위한 개략적인 자료를 제때에 제공해야 한다. 따라서 지연은 행정적인 성격이 아니라 당적-정치적 성격을 띠는 것이다. 반대파의 원칙적 경고는 제때에 귀 기울여 경청되어야 하며, 그 실천적 조치는 능률적으로 검토되어야 한다.

      작년에 반대파는 부분적으로 가장 부유한 농민기업 10% 중에서 1억5천에서 2억 푸드의 곡물을 강제 대출할 것을 제안했다. 이때 이 제안은 전시공산주의의 조치라는 혹평을 받았다. 당은 중농을 해치지 않는 쿨락을 짜내는 것은 불가능하다(제14차 당 대회의 스탈린)거나, 알다시피 쿨락은 노동자 독재의 틀 내에서 선험적으로 제약받고 있다(부하린)고 가르쳤다. 그러나 올해는 형법 제107조(즉, 곡물을 징수하는 억압 조치)에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 뒤 중앙위원회는 전시공산주의에 대한 이야기는 반(反)혁명적 중상이라고 설명해야 했다. 비록 중앙위원회 자신이 바로 직전에 훨씬 더 신중하고 조직적인 반대파의 제안에 전시공산주의라는 딱지를 붙였지만 말이다.

      흰 것이 흰 것으로 불리고, 검은 것이 검은 것으로 불리는 한, 올바른 관점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한 이해와 미래를 예측할 가능성을 제공할 것이다. 반대파의 관점은 이런 규정 아래서 나온 것이지만, 공식 지도부의 관점은 그런 적이 없다. 결국 사실은 최고기관보다 위에 있는 것이다. 작년 겨울의 곡물 징수 캠페인 이후, 공식 정책과 이데올로기의 심각한 위기를 낳으면서 권력층이 일으킨 히스테리 발작을 이제야 누구나 캐물을 수 있다. 반대파는 그 ‘오류’를 인정한다. 이러한 상황은 아직까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여기서 문제는 누가 옳았는가 하는 점이 아니다. 이 문제는 어느 노선이 옳았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해서만 의미가 있다. 지도부의 방향 전환을 알리는 첫 번째 징후에 비추어 이 마지막 문제를 간과하는 것은 당에 대한 가장 비열하고 악명 높은 범죄일 것이다. 당은 아직까지 이를 알아볼 기회를 갖지 못하고 있다. 모든 조치, 논쟁, 단계는 당 자신이 투명해졌는가 그렇지 않은가 여부에 의지해야만 진정한 가치를 가진다. 원칙적 입장은 아직까지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미래는 보장되지 않았다. 일보 전진할 때마다 반보 후퇴가 뒤따랐기 때문이다.

       

      7. 책략인가 새로운 노선인가?

      현재의 좌선회는 어떻게 평가되어야 하는가? 우리는 이를 결합주의적 책략 아니면 진지한 새로운 노선, 즉 노동자노선과 국제정책의 부활로 볼 수 있는가? 불신이 완전히 만연해 있다.

      단지 당의 관심을 분산시키기 위해 결정을 채택하는 것 一 이것이 현 지도부의 근본적 방식이 되고 있다. 산업화, 빈농, 중국혁명 문제에 대해 이들이 잇따라 채택한 결의문은 명백히 하고, 설명하고,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현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시치미 떼고 감추는 것이다. 레닌은 정치에서 멍청이만이 말을 믿는다고 말했다. 탈(脫)레닌주의 시기는 이 우매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멍청이도 가르쳐야 한다.
      이것이 책략인지 새로운 노선인지 여부는 계급의 내적 관계와 이것이 소련공산당에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가를 포함하는 문제이다. 나라의 유일한 당인 소련공산당은 내부에 존재하는 다양한 그룹을 통해 다양한 계급의 압력에 다르게 반응한다.

      앞에서 인용한 ‘역사적인’ 〈프라브다〉지의 2월 15일자 논설은 이 문제에 관한 주목할 만한 고백을 담고 있다. 즉, 우리 당내에서 새로운 계급이 그룹화하고 있음을 반영한다. 이것은 어쩌면 이 논설의 가장 인상적인 부분일지도 모른다. 그 문구는 다음과 같다.

      당이나 다른 곳의 우리 조직 모두에서 당에 이질적인 특정분자가 최근에 나타났다. 농촌에서 계급을 보지 않는 사람, 우리 계급정책의 기초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농촌에서 아무도 해치지 않고, 쿨락과 평화롭게 살고, 대체로 농촌의 ‘모든 계층’에서 평판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려는 사람이다.

      여기서 언급한 것이 당원이기는 하지만, 위 이야기는 공산주의자와 대조를 이루는 신(新)부르주아, 테르미도르파(Thermidorian) 현실주의 정치인에 대해 거의 완전한 서술을 제공한다. 그렇지만 〈프라브다〉지는 이들 분자가 어떻게 당에 들어왔는지에 대한 설명을 단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이들이 ‘나타났다’一이것이 전부다! 이들은 어디서 왔으며, 어떤 문을 통해 들어왔는가? 이들이 외부로부터 당에 잠입했는가? 게다가 어떻게 비집고 들어왔는가? 아니면 이들이 내부에서 싹텄는가, 그렇다면 어떤 토양에서 싹튼 것인가? 그런데 잘 들어두라, 이 모든 것이 농민 문제라는 노선을 따라 중단 없는 당의 ‘볼셰비키화’라는 조건 속에서 일어났다. 논설은 거듭된 경고에도 불구하고 당이 어떻게 우스트리얄로프주의자(Ustrialovists)[니콜라이 우스트리얄로프(Nikolai Ustrialov, 1880-1937):입헌민주당 출신으로 모스크바 대학 교수였으며, 민족적 볼셰비키주의를 주창했다.]나 테르미도르파가 곡물 징수 정책에서 자신의 행정적 힘을 드러낸 순간까지도, 또 당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고 인정한 쿨락一중농을 자기 뒤로 끌어당기고, 곡물 징수를 사보타주한 一 이 어떻게 권력을 획득한 순간까지도 이들을 못보고 지나칠 수 있었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프라브다〉지는 이 이상의 설명을 사양한다. 왜 귀찮게 해! 1928년 2월에 우리는 중앙기관지로부터 우리가 오래 전에 알고 있던 것, 그리고 우리가 여러 차례 밝힌 것이 무엇인지 처음으로 전해 들었다. 다시 말하자면, 새로운 신경제정책 쪽으로, 즉 서서히 자본주의로 끌어당기는 강력한 우익이 레닌의 당에서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구체화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1927년 말 무렵에 이 문제에 대해 내가 말한 것이다.

      반대파에 대한 공식적 투쟁은 두 개의 기본적 슬로건 아래 수행되고 있다. 두 당 반대와 '트로츠키주의' 반대가 그것이다. 두 당 반대 투쟁이라는 스탈린주의의 사기는 전국적인 이중권력의 성장과 그 기치의 엄호 아래 소련공산당의 우익으로 결성한 부르주아당을 위장한 것이다. 일련의 장관 집무실에서, 서기국 회의실에서 반대파에 대한 투쟁 방법과 슬로건을 다듬기 위해 당기구의 추종자와 전문가, 우스트리얄로프주의 교수들 사이의 비밀협의회가 개최되었다. 이것이 진짜 두 번째 당을 결성하는 것이다. 이 두 번째 당은 전력을 다해 그 자체에 복종하려고 애쓰며, 부분적으로 복종하는 우리 당의 노동자 중핵과 그 좌익을 몰살시키려고 한다. 이 두 번째 당의 결성을 감싸는 동시에 기구는 반대파가 두 번째 당을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다고 비난했다. 一 바로 반대파가 증가하는 부르주아적 영향력과 압력 밑에서 당의 노동자 중핵을 떼어놓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실패한다면, 볼셰비키당의 단결을 전혀 지킬 수 없다. 노동자계급의 독재가 분할할 수 없는 당에 대한 주문으로 지켜 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순전한 환상이다. 하나의 당 또는 두 당의 문제(말뿐인, 선동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유물론적, 계급적 의미에서)는 바로 당과 노동자계급 내부의 저항세력을 불러일으키고 결집할 수 있을 조치에 따라 결정된다. (새로운 노선에 대하여)

      6월에 스탈린은 두 번째 당 문제에 대해 모스크바의 고등연구소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쿨락경제의 발전과 전개에서 쿨락경제로 되돌아가 상황의 탈출구를 찾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분명히 우리 시대에 이러한 것에 대해 쓸데없는 말을 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감히 지주경제로의 복귀에 대해 말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들은 소비에트 권력을 위해 … 쿨락경제의 전면적 발전의 필요성에 대해 그만큼 더 손쉽게 말한다. 이런 사람들은 소비에트 권력이 동시에 상반된 두 계급, 즉 경제적 원칙이 노동자계급을 착취하는 것인 쿨락이라는 계급과 경제적 원칙이 모든 착취를 격파하는 것인 노동자라는 계급에 입각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것은 반동들에게나 가치 있는 주문이다. 이런 반동적 계획은 노동자계급의 이해, 마르크스주의의 원칙, 레닌주의의 임무와 전혀 공통점이 없다는 것을 입증할 가치도 없다.

      이런 이야기는 《반대파 강령》의 첫째 장 도입부를 어느 정도 간소화한 설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기에 스탈린이 아직 이것 때문에 유형에 처하겠다고 협박하지 않았다고 해서 이 비밀을 지키지는 않는다. 물론 스탈린의 연설에서 두 번째 당 결성에 대한 노골적인 언급은 없다. 그러나 노동자당내에 쿨락의 자본주의 경제 쪽으로 노선을 돌리는 ‘사람들’(어느 쪽 사람들?)이 있다면, 단지 신중함 때문에 대규모 지주경제에 대해 말하는 것을 자제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만약 호칭도 정해지지 않은 이런 '사람들'이 이와 같은 강령으로 서로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사이라면, 곡물 징수 중에, 산업계획, 임금체계 등등을 다듬는 중에 이 강령으로 지도되었다면, 이것은 바로 신(新)부르주아의 중핵, 즉 테르미도르파의 당일 것이다. 이는 장개석, 퍼셀, 쿨락, 관료 쪽으로 노선을 돌리지 않고도 볼셰비키당에서 가능하다. 아니, 이것은 단지 볼세비키당에서 있을 수 있는 조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볼셰비키당에서 자본주의의 발전 쪽으로 노선을 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우리의 문서 ‘새로운 노선에 대하여’에서 꾸밈없이 표현되었다.

      따라서 알 수 없는 원인에서 ‘나타나고 있는’ 우익이 곡물 징수 중에 처음 공식적으로 확인되었다. 다시 한 번 100% 이질적 분자가 없음을 입증한 제15차 당 대회 이후, 다른 무엇보다도 장개석의 궁정 철학자인 대계도(載季陶, Tai Chi-tao)의 가르침에 따라 모든 계급과 평화롭게 지내기를 바라는 영향력 있는 당내 그룹이 있기 때문에 자신의 곡물을 시장에 가져오지 않는 쿨락을 발견했다. 이런 내재적 국민당주의자는 이른바 토론 중이나 당 대회에서 자기 생각을 들려주지 않았다. 물론 이런 영웅적인 ‘당원들’은 맨 먼저 ‘사회민주주의’로 일탈한 반대파의 제명에 찬성 투표했다. 또한 이들은 좌익의 모든 결의문에도 찬성 투표했다. 왜냐하면 결의문을 이해하는 법을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내의 테르미도르파는 미사여구를 늘어놓는 사람이 아니라 행동가다. 이들은 새로운 소유자, 소부르주아 지식인, 관료집단과 나름의 고유한 노농동맹을 맺는다. 또한 가장 중요한 경제, 문화 부문과 심지어 ‘국민국가’의 관점에서 당 활동까지도 지휘한다. 그러나 이들에 맞서 싸울 필요가 없을 만큼 우익이 약해질 수 있는가?

      이 문제에 대한 분명한 대답은 현 좌선회 전체의 운명에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먼저 드는 생각은 우익이 대단히 약하다는 것이다. 위에서 나온 외침은 곡물 징수와 부분적으로 일반적인 농민정책을 즉시 ‘좌익적’ 경로를 따라 지도할 필요가 있음을 충분히 입증했다. 그러나 바로 이 놀랄 만한 용이함은 그 결과로 우익의 약점에 대한 지나치게 성급한 결론을 경계하는 경고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을 얻었다.

      우익은 소부르주아적, 기회주의적, 관료적, 멘셰비키적이며, 자본가계급 쪽으로 끌어당기는 화해주의 분파다. 당내에 볼셰비키주의의 혁명적 중핵과 수많은 노동자가 있는데도 우익이 독자적 세력이 될 수 있고, 그 경향을 노골적으로 적용하여, 노동자계급 대중을 결집시킬 수 있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현상일 것이다. 물론 이러한 상황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익은 노동자계급에 대한 비(非)노동자계급의 압력을 기구에 전달할 만큼 강하다. 이것은 당내 우익의 힘이 당의 범위를 넘어 당 바깥에 위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관료기구, 새로운 소유자, 세계 자본가계급의 세력이다. 따라서 거대한 세력이다. 그러나 바로 우익이 당내에서 다른 계급의 압력을 반영하기 때문에 아직 그 강령을 노골적으로 제시할 수 없고, 당의 여론을 결집할 수 없는 것이다. 은폐물을 필요로 하는 당내 우익은 당 노동자 중핵의 경계를 잠재워야 한다. 당내 우익과 노동자 중핵 모두 기구 체제를 갖춘다. 당의 과장된 단일성 아래 기구는 혁명적 노동자의 견해로부터 우익을 덮어 싸는 동시에 반대파에 일격을 가함으로써 노동자를 겁먹게 한다. 반대파는 노동자계급 독재의 운명에 대해 노동자계급에게 경보를 울리는 의식적 표현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기구와 우익 사이에 존재하는 틈은 우익으로 하여금 잠정적으로 후퇴하여 때를 기다리는 반면에, 운동이나 파업을 줄이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우익은 만약 기구가 테르미도르파 제거를 통한 자체 정화를 위해 당에게 진지하게 상황 분석을 청했다면, 우익은 일반당원에 의해 완전히 일소되었을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일반당원은 파괴분자나 폭력단원 무리에 의지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더 이상 국내 자본가계급과 전 세계 자본가계급에 기댈 수 있는 당 내부의 지렛대가 없을 것이다. 물론 자본가계급의 총공격이 즉시 사라지거나 줄어들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당에 대항해야 한다면, 적을 마주 보고 적의 세력과 의도를 냉철하게 판단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당과 소비에트 권력에 대한 침투를 통해 작동하는 자본가계급의 은밀한 지하 방식의 압력은 불가능해질 것이다. 이것은 그 자체로 절반의 승리일 것이다.

      우익은 자신이 처해 있는 입장을 이해한다. 그러나 이들은 다른 사실, 즉 당에게 사상과 대오를 진지하게 정화할 것을 요구할 수 없다는 것도 고려하고 있다. 당의 사상과 대오는 지금까지 볼셰비키-레닌주의자(반대파)가 제시한 것과 다른 목표를 추구하고, 다른 슬로건을 채택함으로써 최근에 상당히 엉겨 붙어버렸다. 그러나 우익은 이때 반대파 자체에 대한 태도를 급격하게 바꿀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중도주의 기구의 냉소적인 원칙 결여가 노골적으로 알려질 것이다. 우익이 중도주의가 대담하게 그 활동을 바꿀 용기가 없을 것이라고 믿는 것은 까닭이 없지 않다. 우익분자들이 이를 갈면서 후퇴함으로써 이들은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중도주의에게도 위험한 싸움을 결코 바라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동시에 중도주의에게 자신의 요구를 제시한다 : 당내의 현 상태를 바꾸지 마라, 즉 좌익에 반대하는 우익과 중도주의의 블록을 깨지 마라, 현재의 긴급사태가 무조건적으로 요구하는 것에 비해 그 이상으로 좌익에게 다가가지 마라, 바꿔 말하면, 기존 방침으로 되돌아갈 가능성을 예비로 남겨두고, 즉시 신(新)신경제정책의 길로 나아가자는 것이다.

      우익분자들은 자신들이 잠시 동안 될 수 있는 대로 조용히 좌선회를 인정해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어쨌든 이들에게는 간단한 책략일 뿐이다. 이들은 조용히 있으면서 마음의 준비를 한다. 이들은 외부로부터의 계급적 반응 덕분에, 내분, 관료기구의 은밀한 저항 덕분에, 무엇보다도 중도주의의 선천적인 지그재그 경향 덕분에 좌익적 실험이 실패하기를 기대한다. 우익은 자기 동맹세력을 잘 알고 있다. 한편에서 우익은 중도주의가 고안한 것이 아니라 단지 처음부터 반대파가 말한 것을 되풀이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좌우로 보여주면서 중도주의와 열심히 타협한다. 난처한 입장에 처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 위해 중도주의에 관한 한, 우익은 계속해서 반대파를 감옥에 처넣는다. 우익은 기구가 좌익에게 더한 타격을 가하려면, 자기들에게 더욱 의지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들은 방어에서 공격으로 나아가는 것이 목표이며, 좌익적 실험이 패배(그리고 현재의 상황에서 우익은 이 패배에 확고히 의지한다)로 마무리될 때 복수하는 것이 목표다.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인가? 이러한 만일의 사태는 결코 배제되지 않는다. 방향 전환이 당내의 현상유지에 기초를 두는 한 일어날 수 있다.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아마도 일어날 것이라는 것이 더 불가피해 보인다.

      이것은 현재의 지그재그가 좌익 노선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고려해 넣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솔직해지자: 최근에 지도부가 추구한 정책뿐만 아니라 현재의 지도도 우리로 하여금 틀림없이 사태가 지도부의 통찰력과 일관성에 의지하는 한, 위 문제에 대해 회의적으로 답변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의 요지는 바로 당의 훨씬 더 광범한 집단과 더 광범한 계급계층을 바이스로 죄면서 초기의 책략이 심각한 정치적 지그재그로 발전했다는 사실에 있다. 더 광범한 계급계층은 기예를 위해 지도부가 구사한 지도력의 기예에서 책략의 역학에 관심이 없다. 오히려 방향 전환에서 비롯되는 객관적인 경제적, 정치적 결과에 관심이 있다. 이런 영역의 문제는 방향 전환을 주창한 사람들의 선의, 일관성, 그리고 대개는 의도 자체가 훨씬 더 거대한 집단의 의지와 이해로 진지하게 바뀐 것을 깨닫는 경우 핵심에 이른다. 이런 이유로 현재의 지그재그가 일관된 노동자 노선 방향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은 온당치 못할 것이다.

      어쨌든 그 견해와 경향에 의해 반대파는 현재의 지그재그가 레닌주의의 길로 가는 중대한 전환으로 확대되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전력을 다해야 한다. 이러한 결과가 말하자면, 당과 독재를 위해 가장 적은 혼란을 포함하는 가장 건전한 결과일 것이다. 이것이 소비에트 국가의 개혁을 위해 필요 불가결한 전제인 당의 완전한 개혁의 길일 것이다.

       

      8. 현 위기의 사회적 기초

      당내 투쟁의 소음은 훨씬 더 심각한 혼란으로 반복될 뿐이다. 계급 속에 축적된 변화가 제때에 볼셰비키주의의 언어로 번역되지 않으면, 10월 혁명 전체가 고통스런 위기 앞에 놓일 것이다.

      제15차 당 대회 이후 두 달도 안 되어 서둘러서 대회 시점에 올바른 것으로 간주된 노선과 결별한 지도부는 그 자체로 국제적 상황 전체와 관련하여 농촌에서 계급의 변화 과정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의 틀림없는 징후이다. 국제적 상황은 경제적 양이 정치적 질로 바뀌고 있다는 점에서 중대한 단계에 이르렀다. 이런 점에서 예측은 1923년 이후 몇 차례나 제출되었다. 이것은 제15차 당 대회 시점에 반대파의 테제에서 다음과 같은 식으로 표현되었다.

      작고 왜소하기까지 한 농민과 소(小)소유자 일반이 압도적 다수를 이루는 나라에서 뒤이어서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갑자기 나타나기 위해서만 원자화되고 비밀스런 방식으로 어느 순간까지 가장 중요한 과정이 진행된다.

      분명히 아직 발전 초기에 있는 경우, 진행되고 있는 과정에 대해 마르크스주의적 평가를 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나 '예기치 않다.'

      중농을 자기 뒤로 끌어당긴 쿨락의 곡물파업, 자본가와 샤흐티(Sha- khty:사회주의적 생산을 사보타주하는 부르주아적 전문가)의 결탁, 국가나 당 기구의 영향력 있는 부위에 의한 쿨락 파업의 보호 또는 반(半)보호, 공산주의자가 기술자나 관료의 은밀한 반(反)혁명적 술책을 보고도 못 본 체할 수 있었다는 사실, 스몰렌스크나 다른 곳에서 '철의 규율'이라는 구실 아래 악당들에게 내준 타락한 면허 一 이 모든 것은 이미 가장 중요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건전한 방식으로 추론하는 공산주의자라면 감히 이것이 경제적, 정치적 과정 덕분에, 그리고 지난 5년 동안 당 지도부의 정책 덕분에 증대되지 않고, 특징이 되지도 않은 우연한 현상이라고 주장하지 못할 것이다. 이런 사실은 예측할 수 있고, 예측되어야한다. 누구나가 이용가능한 제15차 당 대회에서 반대파가 발표한 테제는 이렇게 밝히고 있다.

      한편으로 쿨락, 소유자, 부르주아 지식인과 다른 한편으로 수많은 고리를 가진 국가와 당 관료집단 사이의 융합은 가장 명백하지만 동시에 우리의 사회적 생활에 대한 가장 우려할 만한 과정을 이룬다. 이 때문에 노동자계급의 독재를 위협하는 이중권력의 싹이 생긴 것이다.

      1928년 6월 3일 중앙위원회가 배포한 선언이나 회람장은 당과 노동조합뿐만 아니라 국가기구에서도 '가장 타락한 관료주의'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했다. 회람장은 이 관료주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려고 한다 : (1) 과거 관료적 유산의 잔재, (2) 대중의 후진성과 몽매주의의 산물, (3) 대중의 '통치에 대한 불충분한 이해', (4) 대중을 빠르게 국가통치로 끌어들이지 못한 점. 이 네 가지 사정은 실제로 존재한다. 이것들은 모두 어떤 식으로든 관료주의를 설명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관료주의의 거칠고 거리낌 없는 성장을 이해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 지난 5년 동안 대중의 문화적 수준은 높아져야 했다. 당 기구는 더 월등한 속도로 대중을 통치 임무로 끌어들이는 법을 배워야 했다. 소비에트의 상황에서 자란 신세대는 오래된 관료들을 상당한 비율로 대체해야 했다. 그렇다면 그 결과로 관료주의는 쇠퇴해야 했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바로 관료주의가 거대하게 성장한 사실에 있다. 관료주의는 '가장 타락한 관료주의'가 되었다. 관료주의는 위로부터의 명령에 따른 은폐, 협박, 경제적 조치에 의한 억압, 편애, 상호 협정을 통한 관료들의 결탁, 강자에 대한 양보, 약자에 대한 억압과 같은 통치방식을 체계로 구축했다. 소비에트 경제의 성장과 대중의 문화적 발전에도 불구하고 기존 계급기구에서 이런 경향의 지나치게 빠른 부활은 계급적 원인, 즉 소유자의 사회적 강화, 국가기구와의 얽힘, 기구를 통해 당에 행사한 이들의 압력 때문이다. 증대하는 체제의 관료화의 계급적 원인을 이해하지 않으면, 악폐에 대한 투쟁은 곧잘 날개를 펄럭이지만 어떤 곡물도 빻지 못하는 풍차에 비길 수 있다.

      산업의 더딘 성장은 가격에서 배길 수 없는 '협상가격차'를 낳았다. 낮은 가격을 위한 관료적 투쟁은 농민에게 아무것도 주는 것 없이 노동자를 속여 빼앗으면서 시장을 요동치게 했을 뿐이다. 10월혁명으로 성취한 토지혁명에서 농민이 얻은 거대한 이익은 공산품 가격이 먹어치우고 있다. 노농동맹을 좀먹는 이것은 농촌의 광범한 계층을 내면적으로나 대외적으로 자유무역이라는 슬로건을 가진 쿨락 쪽으로 밀어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국내 무역업자는 유리한 경작지와 덮개를 찾는 반면에, 자본가계급은 해외에 기지를 취득한다.

      당연히 노동자계급은 크나큰 환상을 가진 압도적 대중 가운데서 훨씬 거대한 희망을 안고 혁명으로 나아갔다. 따라서 발전의 더딘 템포, 그리고 대단히 낮은 물질적 생활수준을 고려하면, 어느 정도 가까운 장래에 전체 사회체계를 완전히 바꾸려는 소비에트 권력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 불가피하게 적어졌을 것임에 틀림없다.

      특히 지도부가 이미 코민테른을 장악한 지난 몇 년 동안 세계혁명의 패배는 같은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들은 세계혁명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태도에 새로운 분위기를 이입할 수 없었다: 희망의 현저한 유보, 지친 부위들 사이의 회의론, 미성숙한 부위 사이의 노골적인 의심과 적의를 지니기까지 한 분노.

      이런 새로운 사고와 새로운 평가는 그 표현을 찾았다. 만약 이것이 당에서 발견되었다면, 가장 선진적인 층은 아마 국제혁명, 특히 자국의 혁명에 대해 다른 태도를 취했을지도 모른다. 이 태도는 덜 고지식하고, 숭고하며, 더 비판적이지만 그 대신에 더 균형 잡히고, 견실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새로운 사고, 판단, 포부, 열망은 안쪽으로 내몰렸다. 5년 동안은 오래되고 잘 알려진 슬로건 아래서 살았다: '생각하지 마라! 상층부가 당신보다 머리가 더 좋다.' 처음에 이것은 분노를 낳고, 그 다음에는 수동성, 마지막에는 사람들로 하여금 정치적으로 침묵하게 하는 제약받는 생존을 낳았다. 본인 스스로 끝났다고 말하기 전까지 노동자는 사방에서 '이봐, 자네! 지금은 1918년이 아니야'라는 말을 들었다.

      노동자계급에 적대적인 또는 반(半)적대적인 계급과 집단은 국가기구나 노동조합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경제생활, 그리고 일상생활을 통해서도 느낀 노동자계급의 비중 감소를 감안한다. 따라서 증가하는 중간부르주아 계급과 정치적으로 적극적인 소부르주아 계급 사이에서 나타난 넘치는 자신감이 나온다. 중간부르주아 계급은 우호관계를 회복했으며, 전체 ‘기구’와 긴밀하고 가족적인 유대를 재건했다. 그리고 자기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는 확고한 견해를 가졌다.

      소련의 국제적 지위 악화, 가장 노련하고 광신적인 영국 자본가계급의 지도 아래 세계 자본주의의 적대적 압력 증가一이 모든 것은 국내 자본가계급의 가장 비타협적 부위가 다시 머리를 쳐들게 할 수 있다.

      이것이 10월혁명의 위기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이는 최근 쿨락과 관료의 곡물 파업에서 부분적인 징후를 보였다. 당내 위기는 그 가장 일반적이고 위험한 반영이다.

      어쨌든 아직 반(半)비밀인 이중권력을 향한 이런 과정이 언제, 어떤 형태로 공개적인 정치적 형식을 띠려고 할지 멀리서 예측하는 것이 아직까지 불가능하다는 것은 당연하다. 이 과정은 국내정책뿐만 아니라 국제적 상황에도 크게 의존한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혁명적 노선은 늘어가기만 하는 적이 공세를 취할 유리한 순간을 포착할 때까지 기다리거나 추정하는 것이 아니라 독일의 속담처럼, 나무보다 훨씬 높은 적에 직면하여 우리가 공세를 취하는 것에 있다. 잃어버린 세월을 되돌릴 수는 없다. 중앙위원회가 결국 대부분 자신의 정책에서 기인하는 불길한 사실에 대해 경보를 울린 것은 다행이다. 그러나 경보를 울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보편적인 호소문을 내야 한다. 쿨락을 짜내자는 슬로건이 아직 지도적 분파에 의해 순전히 문필적 성격을 지녔을 때인 제15차 당 대회 이전에도 반대파는 그 테제에서 이렇게 말했다.

      쿨락과 네프맨을 짜내자는 슬로건은 … "만약 진지하게 받아들여진다면, 모든 국가기관의 정책 전체의 변화, 새로운 방침을 전제로 한다. 지금 바로 분명하게 말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한편으로 쿨락도, 다른 한편으로 빈농도 2년 동안(제14차와 제15차 당 대회 사이) 중앙위원회가 완전히 다른 정책을 수행했다는 것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앙위원회의 이전 입장에 대해 잠자코 있음으로써 테제의 기초자들이 정책의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 아마 새로운 칙령을 공포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라는 생각에서 출발했다는 것은 완전히 명백하다. 그러나 일부 계급의 격렬한 저항을 극복하지 않고, 또한 다른 계급세력을 결집시키지 않은 채,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새로운 슬로건을 인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말은 현재에도 충분한 효력을 지니고 있다. 레닌주의의 길에서 우익 중도주의의 길로 당을 변화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볼셰비키 당내에서 계급을 '인정'하지 않는 영향력 있는 분파를 만들고 강화하기 위해서, 당이 이 분파의 존재에 공적인 주의를 기울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지도부에게 몇 년 동안 그 존재를 부정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제15차 당 대회가 폭로하지 않은 이 분파에게 당을 통해서가 아니라 곡물교환을 … 통해서 공식적으로 알려지도록 하기 위해서一이 모든 것에 더하여 쿨락의 사회주의로의 통합을 바탕으로 하여, 그리고 굶주린 사람의 기생적 심리를 모방하여 수많은 스탈린주의자와 부하린주의자를 밀어 넣은 것에 더하여, 단지 이들이 쿨락의 존재를 알아차렸기 때문에 통계국을 파괴한 것에 더하여, 전선(全線)에 걸친 지각없는 관료들의 승리에 더하여, 마르크스주의와 다른 많은 것에서 궤변을 늘어놓는 강단사회주의자(Katheder-Sozialisten)라는 새로운 선전가 양성소 수립 등 새로운 방침을 지지하는 쉴 새 없는 선전에 5년이 걸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좌익 노동자에 대한 악의적인, 분별없는, 막돼먹은, 배신적인, 독단적인 박해가 가해졌다. 그 사이에 당내의 모든 테르미도르파(〈프라브다〉지의 의미심장한 표현에 따르면, '나타난' 사람)가 모습을 갖추고 통합되어 연줄, 유대, 공감을 갖게 되었으며, 당의 범위를 훨씬 뛰어넘어 거대한 대중이라는 토양에 깊숙이 그 뿌리를 뻗쳤다. 이 모든 것은 그 표현방식이 아무리 기운차더라도 조그만 회람장을 통해 제거될 수 없다. 재교육할 필요가 있다. 교정할 필요가 있다. 재편성할 필요가 있다. 마르크스주의의 두꺼운 쟁기로 잡초가 무성한 밭을 갈 필요가 있다.

      반대파는 허약하고, 무능력하다는 생각으로 자기 자신과 당을 달래려는 시도는 반대파에 대한 격렬한 투쟁과 융합될 수 없다. 반대파는 박해의 포화 속에서 달궈졌으며, 당에 대한 충성심에서 흔들림이 없는 중핵과 사태에서 검증된 행동강령을 가지고 있다. 상승하는 역사적 노선을 표현하는 이러한 중핵은 제거되거나 파괴될 수 없다. 반대파는 당이라는 검의 칼날이다. 이 날카로움을 약화시키는 것은 적에 대항하여 들어 올린 칼을 무디게 하는 것이다. 반대파의 문제는 전체 좌익 노선의 중심점이다.

      세계혁명의 당당한 발전만이 대외적 위기뿐만 아니라 국내의 위기로부터도 진정한, 완전한 해방을 이끌 것이다. 이것은 마르크스주의의 기초이다. 그러나 이것과 부하린주의자의 스콜라주의가 우리에게 그럴듯하게 늘어놓은 공허한 숙명론 사이에는 다리를 놓을 수 없는 거대한 공간이 벌어져 있다. 위기가 계속되고 있다. 본질적으로 자본주의 사회는 위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것은 지배적인 자본가계급의 정책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올바른 정책은 부르주아 국가를 일으켜 세우고, 잘못된 정책은 파괴시키거나 지체시킨다.

      공식적 스콜라주의는 기계적 결정론(숙명론)과 주체적인 자기의지 사이에 유물변증법이 있다는 것을 전혀 이해할 수 없다. 숙명론은 '이러한 후진성에 직면하여 되는 일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속류 주관주의는 '이것은 식은 죽 먹기다! 우리는 그럴 의지가 있으며, 따라서 우리는 사회주의를 건설한다!'라고 말한다. 마르크스주의는 ‘만약 여러분이 세계의 상황과 국내의 후진성에 의존해 있음을 자각하고 있다면, 올바른 정책으로 일어서 자기 입장을 견고히 하고, 당당히 세계혁명으로 여러분 스스로를 통합시킬 것이다’라고 말한다.

      선진국 노동자계급이 확고하게, 그리고 결정적으로 권력을 장악할 때까지 위기는 이행기 소비에트 체제에서 불가피하다. 그러나 지배적인 정책의 임무는 소비에트 체제 내의 위기가 체제 전체의 위기가 될 정도로 축적되는 것을 막는 데 있다. 이를 위한 첫째 조건은 지배계급인 노동자계급의 입장과 자각이 유지, 발전, 강화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한 유일한 도구는 자주적으로 행동하고, 유연성이 있으며, 능동적인 노동자 당이다.

       

      9. 당의 위기

      일반적 정책뿐만 아니라 올바른 경제정책은 1923년 이후 얻지 못한 올바른 정식화만으로는 보증되지 않는다. 노동자 독재의 정책은 사회의 모든 계급층이 줄곧 신중히 검토한 것에 기초해서만 생각할 수 있다. 게다가 이런 정책은 굼뜨고, 많은 점에서 부적절한, 유연성이 없는, 둔감한 관료적 기구를 통해 수행될 수 없다. 노동자 독재의 정책은 살아 있으며 능동적인 노동자당을 통해, 공산주의의 척후병, 선봉자, 사회주의의 건설자를 통해 수행되어야 한다. 증대하는 쿨락의 역할이 통계적으로 기록될 수 있기 전에, 이론가가 이를 일반화할 수 있기 전에, 정치인이 이를 명령어로 옮기기 전에 당은 무수한 촉수를 통해 이를 감지할 수 있어야 하며, 경보를 울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위해 당 전체의 대중은 예민하고 유연해져야 하며, 무엇보다도 관찰하고, 이해하고, 분명하게 말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우리 국영기업의 사회주의적 성격은 실제로 상당히 원자화되어 있다. 다양한 트러스트와 공장들 사이의 경쟁, 노동자 대중의 어려운 물질적 상황, 중요한 임금노동자 집단의 불충분한 문화적 수준 때문이다. 산업의 사회주의적 성격은 당의 역할, 노동자 전위의 자발적인 내적 응집력, 관리자, 노동조합 관료, 공장세포원들 등의 의식적 규율에 따라 취한 결정적 조치로 결정되고 보증된다. 만약 우리가 이 망이 약해지고, 부서지고, 찢어지고 있음을 인정한다면, 짧은 기간 안에 국영기업, 운송수단 등의 사회주의적 성격이 전혀 남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무조건 자명해질 것이다. 트러스트와 개별 공장은 독립생활을 살기 시작할 것이다. 현재도 대단히 미약한 초기의 계획은 그 흔적조차 남지 않을 것이다. 노동자의 경제투쟁은 세력관계가 자유롭게 남겨둔 영역을 얻을 것이다. 생산수단의 국가 소유는 처음에는 법률상의 의제(換制)로 바뀔 것이고, 나중에는 법률상의 의제까지도 폐지될 것이다. 따라서 이 점에서도 문제는 노동자 전위의 의식적인 응집력, 관료주의의 녹과 우스트리얄로프주의의 고름으로부터 노동자 전위의 보호로 정리된다.

      하나의 체계처럼, 올바른 정치노선은 이를 정교화하여 적용하기 위한 올바른 방법이 당에 없다면 전혀 상상할 수도 없다. 어떤 자극에 영향 받아 이 문제나 다른 문제에 대해 관료적 지도부가 올바른 노선의 자국에 발부리를 채일지도 모르지만, 이 노선이 실제로 계속 수행되었을지, 아니면 내일 다시 중단되지 않았을지는 전혀 보장할 수 없다. 당 독재라는 상황에서 인류 역사에서 어떤 정치조직도 행사한 적이 없는 거대한 권력이 지도부의 수중에 집중되어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지도부가 노동자적, 공산주의적 방식을 유지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각각의 관료적 왜곡, 각각의 잘못된 조치는 전체 노동자계급에게 즉각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 사이에 탈(脫)레닌주의 지도부는 의식적인 노동자 민주주의를 사활을 걸고 보증하는 것에 우선하여 부르주아 사이비 민주주의를 위해 노동자 독재를 더욱 적대시하는 것이 습관화되었다.

      이것은 레닌이 마지막 생애 중에 가장 관심을 기울인 것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충분한 역사적 범위에서, 그리고 그 모든 구체적인 일상적 양상 속에서 이 문제를 심사숙고했다. 첫 번째 와병을 이기고 복귀한 레닌은 특히 당내에서 성장한 관료주의에 섬뜩해했다. 이런 이유로 그는 중앙통제위원회를 제안했다. 레닌이 기대했던 것의 정반대를 의미한 중앙통제위원회는 이제 존재하지도 않는다. 레닌은 승리자의 역사에서 패배자의 도덕을 타락시키거나 채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는 점을 당에 상기시켰다. 그는 힘 있는 자리에 있는 공산주의자가 하급자에 대해 난폭한 행동을 하거나(오르조니키제의 주먹다짐 사건), 계획적인 불법을 다룬 모든 기사에 불같이 화를 냈다. 그는 스탈린의 무례함에 대해, 배반행위의 의형제이자, 모든 권력을 휘두르면서 당을 파괴하는 끔찍한 도구가 된 내부의 도덕적 야만성에 대해 당에 경고했다. 이것은 레닌이 문화나 문화적 발전 一 부하린이 제시하는 저속하고 어리석은 계획이 아니라 아시아적 도덕, 봉건주의와 야성의 유산, 대중의 무지와 지각없는 관료들의 착취에 대한 공산주의자의 투쟁이라는 의미에서 一 에 대해 열정적으로 호소한 이유이기도 하다.

      한편, 최근 5년 동안 정반대 노선을 추구한 당 기구는 부르주아 의회 '민주주의'에 의해 정교화된一사기, 위장, 표리부동 一 특정한 왜곡을 국가기구에 첨가하면서 국가기구를 속속들이 관료적으로 변형시켰다, 그 결과, 지도부는 의식적인 당내 민주주의 대신에 당 관료집단을 강화하기 위해 고안된 레닌주의의 날조와 각색, 공산주의자와 노동자에 대한 끔찍하고 과도한 권력 남용, 당의 선거기관에 대한 기만적인 조작, 부르주아 파시스트 권력이라고 허풍 떨었는지도 모르지만 결코 노동자당이라고 자랑하지는 않은 토론에 적용된 방식(폭력배 선발, 명령에 따라 휘파람 불고 야유하기, 연설자를 연단에서 끌어내리기, 이와 비슷한 혐오 행위), 특히 최근 기구와 당 사이의 관계에서 전선(全線)에 걸친 동지적인 결속과 의식의 부재를 낳고 형성시켰다.

      당 기관지는 흥미를 끄는 폭로를 가장하여 아르테몹스크, 스몰렌스크 등지의 사례를 발표했다. 중앙위원회는 반(反)부패 투쟁을 호소했다. 그리고 이것은 문제를 소멸시킨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실제로 여태껏 논의된 적조차 없다.

      처음부터 광범위한 당 서클은 단지 일부만이 발표되었다는 것을 알 수밖에 없었다一일반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드러난 것만 다뤘다. 거의 모든 지역이 크든 적든 나름의 '스몰렌스크' 사건을 겪고 있었다. 게다가 사건이 일어난 첫째 날도, 심지어 첫해도 아니었다. '자기비판' 시기 훨씬 전에 치타, 헤르손, 블라디미르, 그리고 다른 많은 지역에서 결국 즉시 사라졌을 뿐인 사건이 터졌다. 어떠한 감시도 받지 않고, 암암리에 드러난 지역위원회의 서기들 100%가 자기 가족과 수행원 유지비에 거액을 낭비했다. 매번 이러한 사건이 폭로되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아주 잘 알려진 범죄가 명백히 자리를 잡았다. 때로는 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 천 명의 당원이 잠자코 있었다. 이들은 대개 1~2년이나 3년까지 침묵을 지켰다. 이런 상황이 신문에서 평범하게 언급되었다. 그러나 결론을 내린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반대파의 문서에서 매우 사려 깊게, 그리고 조심스럽게 언급된 것을 정말로 반복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필요한 결론을 끌어내지도 않고 스몰렌스크 등지의 폭로는 당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신이 흐트러진 당을 환기시키는 센세이션에 그쳤다.

      사태의 핵심은 기구가 당에서 독립하면 할수록 기구 추종자들은 서로 더욱 의지한다는 사실에 있다. 상호보험은 국부적 '지엽적인 것'이 아니라 관료체제의 기본적 특성이다. 일부 기구 추종자는 혐오감을 주는 행위에 빠지지만 나머지는 침묵을 지킨다. 그렇다면 당의 대중은 어떠한가? 당의 대중은 겁을 집어먹었다. 그렇다, 10월혁명을 성취한 레닌의 당에서 노동자 공산주의자는 이러한 것을 숨김없이 큰소리로 말하는 것을 꺼리고, 이러한 100% 기구 추종자는 건달, 착복자, 불량배다. 이것이 '스몰렌스크' 폭로의 근본적 교훈이다. 이 교훈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혁명가가 아니다.

      용어의 사회적 의미에서 아르테몹스크, 스몰렌스크 등 사건의 영웅은 누구인가? 그는 당의 적극적 통제로부터 자유로워졌으며, 더 이상 노동자 독재의 기수가 아닌 관료다. 이데올로기적으로 그는 고갈되었으며, 도덕적으로 거리낌이 없다. 그는 특권이 있으며, 대개의 경우 아주 교양 없으며, 술고래, 방탕자, 불량배인 책임을 지지 않는 관료다. 요컨대, 오래 전부터 잘 알려진 조사관(데리모르다[Derjimorda]) 타입의 사람이다(당에서 계속 숨긴 민족문제에 대한 레닌의 편지를 보라). 그러나 우리의 영웅은 나름의 '특이한 버릇'이 있다 : 빗발치는 발길질과 구타, 국가자원을 낭비하거나 뇌물 받기, 소비에트 조사관은 '신의 뜻'이 아니라 '사회주의의 건설'을 두고 맹세한다. 아래로부터 그에게 지시하려고 시도한 경우, 그는 오래된 고함 '반란이다!' 대신에 '트로츠키주의자다!'라는 고함을 지른다. 그리고 승리를 거둔다.

      〈프라브다〉지 5월 16일자에 실린 중앙통제위원회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기사는 스몰렌스크 사건에서 끌어낸 다음과 같은 교훈을 담고 있다.

      우리는 당원과 악폐를 알고도 침묵을 지키는 계급의식적인 노동자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단호하게 바꿔야 한다.

      '우리의 태도를 바꾼다?' 그렇다면 문제에 대해 서로 다른 두 가지 태도를 가질 수 있는가? 그렇다. 이것은 중앙통제위원회 상임간부회의 위원이자, 노동자 농민 감찰기구의 부(副)인민위원인 야코블레프(Yakov-lev)가 인정했다. 범죄에 대해 알고 침묵을 지킨 사람은 그들 자신이 범죄자라고 생각한다. 그 죄책감의 유일한 정상 참작은 자신의 무지에 있거나, 겁을 집어먹은 것에 있다. 그러나 야코블레프는 무지한 사람들이 아니라 '당원과 계급의식적인 노동자'를 언급한다. 어떤 압력과 어떤 공포가 노동자 당원으로 하여금 아마도 그들 자신이 선출하고 이들에 대해 책임이 있는 개인들의 범죄에 대해 비열하게 침묵을 지키게 하는 것인가? 이것이 정말로 노동자 독재의 무서움일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이 공포는 당과 노동자계급의 이해를 겨냥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다른 계급의 압력과 공포라고 말하려는 것인가? 분명히 그렇다. 왜냐하면 초계급적인 사회적 압력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우리 당을 압박하는 억압의 계급적 성격을 규정한 바 있다 : 당 기구 추종자들의 결탁; 국가 관료집단, 부르주아 지식인, 소부르주아 계급, 농촌의 쿨락과 당 기구 사이의 무수한 고리의 융합; 국내의 세력 역학에 가해지는 세계 자본가계급의 압력一이 모든 것은 당 기구를 통해 당에 가해지는 압력인 사회적 이중권력을 창출한다. 바로 이것이 최근에 증대되었으며, 당의 노동자 중핵을 위협하기 위해, 반대파를 몰아세우기 위해, 따라서 조직적 방식에 의해 물리적으로 반대파를 몰살시키기 위해 기구가 이용한 사회적 압력이다. 이 과정은 하나이며, 분리할 수 없다.

      일정한 한계 안에서 이질적인 계급적 압력은 당보다는 오히려 기구를 고조시키고, 강화하고, 자신감을 심어준다. 기구는 자기 '권력'의 원동력을 번거롭게 설명하려고 하지 않았다. 기구는 당에 대한 승리, 레닌주의 노선에 대한 승리를 자신의 현명함 때문이라고 자기도취적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저항에 부닥친 적이 없기 때문에 강해지는 압력은 단지 기구의 지배를 위협할 뿐인 곳에서 한계를 뛰어넘어버렸다. 위협은 훨씬 더 영향력 있는 것이다. 꼬리가 머리를 치기 시작하고 있다.

      당원과 계급의식적인 노동자가 압도적 대중 속에서 당 기구 추종자들의 범죄에 대해 말하는 것을 꺼리게 하는 이와 같은 상황은 하룻밤 사이나, 일격에 제거될 수도 없고, 우연적으로 생긴 것도 아니다. 우리는 강력한 기구 관료주의의 판에 박힌 수법뿐만 아니라 기구를 중심으로 하여 꽉 달라붙은 거대한 이해관계와 연줄에도 직면해 있다. 게다가 우리는 자기 기구 앞에서 무기력한 지도부를 가지고 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역사의 법칙과 비슷한 것도 가지고 있다 : 당에 덜 의지하는 지도부는 더욱 기구의 포로가 된다. 반대파가 중앙집중화된 지도부를 약화시키고 싶어 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취지의 모든 소문은 터무니없고 근거 없는 것이다. 노동자 노선은 철의 중앙집중주의 없이는 생각할 수도 없다. 그러나 불행은 바로 현 지도부가 당의 관료 세력이라는 이유에서만 전능하다는 사실에 있다. 즉, 인위적으로 원자화된 당 대중에 대해서는 강력하지만 자신의 기구에 대해서는 무기력하다.

      자신의 중도주의 정책의 결과에서 도피하려는 시도는 '자기비판'이라는 동종요법을 표면화시켰다. 스탈린은 돌연 '노동자혁명을 강화하는 방법인 자기비판'에 대해 말한 마르크스에 의지했다. 그러나 이 문제에서 스탈린은 자신이 무단 침입하는 것을 금지시킨 경계에 접근한다. 왜냐하면 실제로 마르크스의 자기비판이 의미한 것은 무엇보다도 잘못된 환상으로부터 자기해방해야 하는 노동자계급이 이를 완전히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4계급 블록', 일국사회주의, 보수적인 노동조합 지도자, '우리는 자본가계급을 놀라게 해서는 안 된다'는 슬로건, 동방을 위한 '두 계급' 당, 결국 자신들이 궤멸시킬 때까지 멘세비키주의의 낫으로 중국혁명을 난도질한 최근 3년 동안 스탈린과 부하린이 떠맡긴 다른 반동적 쓰레기가 그것이다. 마르크스주의의 메스인 자기비판이 실제로 적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점에서 바로 종전처럼, 자기비판을 적용하는 것이 금지된다. 스탈린은 다시 한 번 '전력을 다해, 그리고 쓸 수 있는 모든 수단으로' 이와 같은 자기비판과 싸우겠다고 위협한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이 국제 노동자 전위의 대오에서 승리를 거두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것과 같은 세력이나 수단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 * *


      1927년 전원회의 중에 반대파는 지도부에 반대하여 당에 호소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밝힌 반대파의 연설에 답하여 몰로토프는 '이것은 반란이다!'라고 말했으며, 스탈린은 '이런 중핵은 내전을 통해서만 제거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자기 말을 이해시켰다. 이것은 '초당', '초계급', 지배적 기구의 오만한 성격에 대한 투쟁이 한창일 때 대부분 완성된 편견 없는 정식이었다. 이런 생각은 우리 당과 소비에트 체제의 토대에 깃들어 있는 생각과 정반대다. 관료적 초인의 생각은 현재의 소규모 권력찬탈의 원천이며, 대규모 권력찬탈을 가능하게 할 무의식적인 준비의 원천이다. 이 이데올로기는 최근 5년 동안 위에서 단단히 죄고, 위에서 지명하고, 위에서 부추기고, 선거를 조작하고, 대회와 협의회를 1~2년 또는 4년 동안 일축하고 끝없이 날조하는 '재평가' 과정에서 모습을 갖췄다. 요컨대, '전력을 다해, 그리고 쓸 수 있는 모든 수단으로' 싸우는 중에 구체화했다. 수뇌부에서 이것은 생존 자체와 더욱 크게 충돌하게 된 견해에 대한 필사적 투쟁이었다. 이 투쟁의 근저에서는 대개 자리, 명령할 권리, 특권적 지위를 위한 광신적 도박이 벌어졌다. 그러나 적은 어떤 경우든 같다. 즉 반대파다. 주장과 방법도 같다 : '전력을 다해, 그리고 쓸 수 있는 모든 수단으로.' 말할 필요도 없이, 당 기구의 추종자 대부분은 자기 희생할 수 있는 정직하고 헌신적인 사람들이다. 그러나 모든 것은 체제에 있다. 그리고 체제는 그 불가피한 결과로 스몰렌스크 같은 사건을 생산한다.

      선의의 관료는 가장 큰 역사적 임무에 대한 해결책을 '우리는 단호하게 바꿔야 한다'는 정식에서 찾는다. 당은 답하여 이렇게 말해야 한다 : '반드시 바뀌어야 하는 사람이 당신은 아니지만, 단호하게 바뀌어야 하는 사람은 당신 자신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제거하고 대체해야 한다.'

      1928년 7월 12일

       


      통합반대파 강령
      - 당의 위기와 그 극복을 위한 방법

        ■ [옮긴이 해설] 이 글은 1927년에 작성된 통합반대파의 강령 초안이다. 1927년 8월에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라데크, 프레오브라젠스키, 파타코프 등을 중심으로 작성되어 9월 3일, 당 정치국에 제출되었다. 반대파는 당 규약에 따라 토론의 기본 자료로 전체 당원에게 인쇄, 배포할 것을 호소했지만 정치국은 9월 8일, 이를 분파주의의 산물로 간주하여 반대파의 요구를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독자적으로 인쇄, 배포하는 것도 금지했다. 반대파는 이러한 금지령이 당 규약은 물론이고, 분파 금지를 통과시킨 제10차 당 대회의 결정에도 반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독자적인 인쇄소를 마련하고 비밀리에 인쇄해 당원들에게 배포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은 당 주류파에 의한 대규모 반대파 탄압의 구실로 이용되어 9~10월에는 프레오브라젠스키 등 고참 볼셰비키인 반대파 간부가 차례로 제명되었다. 이 2개월 동안에만 600명 이상의 반대파 당원이 당에서 축출되었다.

      소비에트연방공산당 제15차 당 대회 볼셰비키-레닌주의자(반대파)의 강령 초안 : 당의 위기와 그 극복을 위한 방법

      중앙위원회와 중앙통제위원회의 13명의 위원은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에 제15차 당 대회를 위해 볼셰비키-레닌주의자(반대파)의 강령 초안을 제출한다.
      이 13명은 인쇄물이나 당 집회에서의 의견 교환에 따라 대회 직전까지 이 강령을 수정할 권리를 보유한다.

        서명자 : 무랄로프(Muralov), 옙도키모프(Yevdokimov), 라코프스키(Rakovsky), 파타코프(Piatakov), 스밀가(Smilga), 지노비예프(Zinoviev), 트로츠키(Trotsky), 카메네프(Kamenev), 페테르손(Peterson), 바카예프(Bakaev), 솔로비요프(Solovyov), 리진(Lizdin), 압데예프(Avdeev)

       

      제1장 서론

      마지막으로 참석한 당 대회(1922년) 연설에서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그런데 우리는 (신경제정책[NEP] 도입 이후) 1년을 견뎌왔다. 국가는 우리 수중에 있다. 그러나 이 국가는 지난 1년 동안 우리가 원한대로 신경제정책(NEP)을 운영해왔는가?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국가가 우리가 원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럼 국가는 어떻게 작동했는가? 기계가 운전자의 유도대로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운전자가 바라는 방향으로 가지 않는 자동차와도 같았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누군가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었는데, 마치 수상하고 무법적인 운전자, 누군지 모르지만 아마도 부당 이득자나 사적 자본가, 또는 이들 모두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자동차는 그 자동차의 핸들을 잡고 있는 사람이 생각하는 방향으로만 가지 않고, 종종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레닌, '러시아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정치보고', (《전집》, 제33권, 279쪽)

      우리는 이 말이 제시한 기준을 우리의 근본적 정치 문제를 검토하는데 적용해야 한다. 자동차一정부, 국가권력一는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노동자와 거대한 농민대중의 이해와 의지를 표현하는 우리 공산주의자가 바라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그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는 것인가? 아니면 그 방향과 '약간 다른' 것인가?

      레닌 사후 몇 년 동안 우리는 여러 차례 당의 중앙기관에, 그리고 나중에는 당 전체에 다음과 같은 사실에 주의를 갖도록 노력해왔다. 즉, 레닌이 지적한 위험이 잘못된 지도부 때문에 크게 증대되었다. 자동차는 노동자와 농민의 이해가 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고 있다. 우리는 새로운 당 대회를 앞두고 우리가 겪고 있는 모든 박해에도 불구하고 가일층 힘을 내 이 사실에 당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상황이 교정될 수 있고, 당 스스로 바로잡을 수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레닌이 자동차가 종종 우리에게 적대적인 세력들이 바라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말했을 때, 그는 대단히 중요한 두 가지 사실에 대해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킨 것이다. 첫째, 우리 사회에는 우리의 대의에 적대적인 세력들 一 쿨락, 네프맨, 관료 一 이 존재하는데, 이들은 우리의 후진성과 정치적 오류를 이용함으로써, 실제로 국제자본주의의 지원에 의지하고 있다. 둘째, 이들 세력은 매우 강력해서 우리 정부와 경제 기구를 잘못된 방향으로 밀어붙일 수 있으며, 결국에는 자동차의 핸들을 빼앗으려고一처음에는 은밀한 식으로一시도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레닌의 말은 우리 모두에게 다음과 같은 의무를 부과한다.

      1. 쿨락, 네프맨, 관료 一 이 적대세력들의 성장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것.

      2. 나라의 전반적인 회복에 따라 이들 세력은 결속하고, 우리의 계획에 자신의 '수정안'을 끼워 넣고, 우리의 정책에 점점 더 큰 압력을 행사하려고 애쓸 것이다. 그 결과, 우리 기구를 통해 자신의 이익을 채우려 할 것이라는 점을 기억할 것.

      3. 이 적대세력들의 성장, 결속, 압력을 약화시킬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해, 보이지는 않지만 이들이 열망하는 사실상의 이중권력 체제를 수립하지 못하게 할 것.

      4. 산업노동자와 모든 근로인민에게 이들 계급이 우리 사회에서 준비하고 있는 과정에 대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솔직하게 말할 것. 이것이 '테르미도르 반동'의 위험과 이에 대항하여 싸우는 문제를 푸는 열쇠이다.

      레닌이 이 경고를 발한 이래로, 우리는 많은 것을 개선했지만 악화된 것도 많다. 국가기구의 영향력이 증대하고 있지만 그와 더불어 노동자국가의 관료적 왜곡도 증대하고 있다. 농촌에서 자본주의의 절대적이고 또 상대적인 성장과 도시에서의 절대적인 성장은 우리나라 부르주아 분자들의 정치적 자각을 낳기 시작하고 있다. 이 분자들은 일이나 사회적 교류에서 접촉하는 일부 공산주의자들을一매번 실패하지는 않는一타락시키려 하고 있다. 제14차 당 대회에서 스탈린이 내건 '좌익을 향해 발포하라!'는 슬로건은 당내의 우익 분자와 국내의 부르주아-우스트리얄로프 분자와의 결합을 촉진할 수밖에 없다.

      '누가 누구를 패배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는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전선의 모든 부문에 걸친 끊임없는 계급투쟁 즉, 사회주의적 발전과정인가 자본주의적 발전과정인가, 이 두 과정 가운데 어느 것에 부합하는 국민소득의 분배인가, 노동자계급의 견고한 정치권력인가, 아니면 새로운 자본가계급과 이 권력을 나눌 것인가 하는 투쟁으로 결정될 것이다. 대체로 소농, 영세소농, 소(小)소유자가 압도적 다수인 나라에서는 이 투쟁의 가장 중요한 과정이 한동안 단편적이고 은밀한 방식으로 계속되다가 결국 일시에 '느닷없이' 표면화된다.

      자본주의적 요소는 농촌의 계급 분화와 도시의 사적 무역업자의 증대에서 그 최초 모습을 나타낸다. 농촌의 상층과 도시의 부르주아 분자는 우리의 국가-경제 기구의 다양한 부문과 더욱 더 밀접하게 뒤섞이고 있다. 그리고 이 기구는 새로운 자본가계급이 국민소득에서 자기 몫을 늘리려는 성공적인 노력을 통계상의 불확실함으로 뒤덮는 것을 심심찮게 돕고 있다.

      상업 기관一국영, 협동조합이 운영하는 기관, 사영一은 국민총생산의 10분의 1 이상인 국민소득의 막대한 부분을 삼켜버리고 있다. 게다가 상업 중개인의 자격으로 사적 자본은 최근 몇 년 동안 모든 거래의 5분의 1 이상을 훨씬 상회하여(절대적 액수로는 연 50억 루블 이상) 처리해왔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소비자는 필요로 하는 제품의 50% 이상을 사적 무역업자로부터 입수했다. 사적 자본가에게 이것은 이윤과 축적의 근본적 원천이다. 농산물 가격과 공산물 가격의 '협상가격차'(불비례), 도매가격과 소매가격의 '협상가격차', 여러 농업 부문이나 지역이나 계절에 따른 가격 '차이', 마지막으로 국내가격과 국제가격의 '협상가격차' (밀수)가 사적 이득의 항상적 원천이다.

      사적 자본은 대부로 고리를 거두고 있으며, 국채로 돈을 벌고 있다.

      산업에서도 사적 자본가의 역할은 매우 크다. 비록 최근에 상대적으로는 줄어들었더라도 여전히 절대적으로는 증대하고 있다. 공인된 사적 자본주의 산업의 총생산은 연 4억 루블을 가리키고 있다. 소규모 공업, 가내공업, 수공업은 18억 루블 이상을 생산하고 있다. 다 합하면, 비(非)국영 공업의 생산은 총 상품생산의 5분의 1 이상, 일반시장에서 매매되는 상품의 약 40%를 이루고 있다. 이런 산업의 대부분은 어떻게든 사적 자본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 상업자본과 가내기업 자본에 의한 수공업 노동자 대중에 대한 공개되거나 은폐된 형태의 다양한 착취는 대단히 중요하며, 게다가 새로운 자본가계급의 더욱 더 커지고 있는 축적의 원천이다.

      세금, 임금, 물가, 신용은 국민소득을 분배하고, 특정 계급을 강화하고, 다른 계급을 약화시키는 주요한 수단이다.

      농촌에서 농지세는 대체로 역급수적으로 빈농에게는 무겁고, 경제력이 있는 농민과 쿨락에게는 더 가볍게 부과되고 있다. 대략적인 추정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북부 코카서스, 시베리아와 같은 계급 분화가 고도로 진행되고 있는 지역을 빼더라도) 소비에트연방에서 34%의 빈농가가 순소득의 약 18%를 차지하고 있다. 꼭 같은 18%의 총소득을 농가 전체의 겨우 7.5%에 지나지 않는 최상층이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도 이 두 그룹이 거의 같은 세금을 즉, 총 조세액의 각각 20%를 내고 있다. 이것으로부터 각 개별 빈농가에 대한 과세액이 쿨락이나 '경제력이 있는' 농가 일반에 대한 과세액보다 훨씬 더 무겁다는 것이 분명하다. 제14차 당 대회 지도자들의 우려와는 반대로, 우리의 조세정책은 결코 쿨락을 '약탈'하지 않는다. 쿨락이 끊임없이 더 많은 화폐와 현물을 자기 수중에 집중시키는 것을 조금도 방해하지 않는다. 

      우리의 예산에서 간접세가 차지하는 비율은 점점 더 놀랄 만큼 직접세의 부담을 줄이고 있다. 이것만으로도 세 부담은 부유층으로부터 빈곤층으로 자동적으로 옮아간다. 1925~26년도에 노동자에 대한 과세는 전년도의 2배까지 높아졌지만, 나머지 도시 주민에 대한 과세는 6%나 감소되었다.(〈재정통보〉 Vestnik Finansov, 1927년, 제2호, 52쪽) 주세(酒親)야말로 산업지대에서는 더욱 더 견딜 수 없는 부담이 되고 있다. 1925년과 비교하여 1926년에 1인당 소득 증대는一어느 정도 대략적인 추정에 따르면一계층별로 농민이 19%, 노동자가 26%, 상인과 기업가가 46%였다. 만약 '농민'을 3개의 주요 그룹으로 나누면, 쿨락의 소득이 노동자의 소득은 비교도 안될 만큼 크게 증가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확인될 것이다. 과세 자료에 기초하여 추정한 상인과 기업가의 소득은 쿨락의 소득에 확실히 못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렇지만 이런 조작된 수치마저도 계급적 차이의 증대를 뚜렷하게 말해주고 있다.

      농산물 가격과 공산물 가격의 '협상가격차'는 지난 1년 반 사이에 더욱 더 벌어졌다. 농민은 그 생산물을 팔아 전전(戰前) 가격의 1.25배 이상을 받지 못했지만, 공산품을 사는데 전전(戰前) 가격의 2.2배 이상을 지출했다. 농민, 그것도 대부분 하층 농민이 부담하고 있는 이런 초과 지불(over-payment)은 작년에 약 10억 루블에 달했다. 이것은 농업과 공업의 갈등을 증대시킬 뿐만 아니라 농촌의 계급 분화를 크게 격화시킨다.

      도매가격과 소매가격의 협상가격차는 국영기업은 물론 소비자에게도 손해를 주고 있다. 이것은 제3자가 이득을 보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런 이득을 보고 있는 사람은 바로 사적 자본가이고, 따라서 자본주의인 것이다.

      1927년의 실질임금은 기껏해야 1925년 가을과 같은 수준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이 2년 사이에 러시아는 부유해졌고, 국민총소득도 증대했으며, 농촌의 최상층 쿨락은 엄청난 속도로 자신의 축적을 늘렸다. 그 결과, 사적 자본가, 상인, 투기꾼의 부 축적이 급속도로 늘어났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러시아의 총소득에서 노동자계급이 차지하는 몫이 떨어진 반면에, 다른 계급의 몫이 증대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것은 우리의 전체 상황을 평가하는데서 가장 중요한 사실이다.

      우리의 발전에서 나타나는 이런 모순과 적대세력의 성장에 대한 솔직한 설명이 공포심에 사로잡히거나 비관주의에 빠진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내심으로는 우리의 노동자계급과 우리 당이 이러한 어려움과 위험에 대처할 수 없다고 믿는 사람들뿐이다. 우리는 이런 견해를 인정하지 않는다. 위험을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이 위험을 극복하고, 좀 더 효과적으로 맞서 싸우기 위해서 우리는 이 위험을 엄밀하고 정확하게 지적하는 것이다.

      적대세력一쿨락, 네프맨, 관료一의 일정한 성장은 신경제정책(NEP) 아래에서는 불가피하다. 단순한 행정적 명령이나 간단한 경제적 압력으로 이들 세력을 파멸시킬 수 없다. 신경제정책(NEP)을 도입하고 수행하면서 우리 자신은 우리나라에서 자본주의적 관계에 얼마간 양보하고, 앞으로도 상당 기간 이를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레닌은 단지 노동자가 알아야 하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키기 위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소농의 나라에서 살고 있는 한, 러시아에는 공산주의보다도 자본주의에 부합하는 더 견고한 기반이 있을 것이다. 이것을 명심해야 한다. … 우리는 자본주의의 밑동을 뿌리째 뽑지 않고 있으며, 국내 적(enemy)의 토대와 근거지를 와해시키지 않고 있다.'(레닌, '제8차 전러시아소비에트 대회-인민위원협의회의 활동보고'(12월 22일), 《전집》, 제31권, 518쪽)

      이미 말한 것처럼, 이 점에서 레닌이 지적한 더없이 중요한 사회적 사실은 간단히 제거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빈농에 의지하고 중농과 동맹한 노동자계급의 올바른, 계획적, 체계적 정책을 통해 이런 사실에 맞서 싸울 수 있고, 또 극복할 수 있다. 이 정책은 기본적으로 노동자계급의 모든 사회적 진지를 전면적으로 강화하고, 세계 노동자혁명의 준비, 발전과정에 가능한 한 가장 밀착하며, 사회주의의 통제고지를 가능한 한 가장 신속하게 수립하고 확장시키는 것에 있다.

      올바른 레닌주의 정책에는 책략을 쓰는 것도 포함된다. 자본주의 세력에 대항하는 투쟁에서 레닌은 자주 적의 의표를 찌르기 위해 부분적으로 양보하거나, 다음에 좀 더 성공적으로 전진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후퇴하는 방식을 썼다. 책략을 쓰는 것은 지금도 필요하다. 그러나 직접적인 공격으로 꺼꾸러뜨릴 수 없는 적에 대항하여 급히 몸을 피하거나 책략을 쓰는 경우에도 레닌은 변함없이 노동자혁명 노선을 견지했다. 레닌 아래서 당은 항상 각 책략의 이유, 그 의미와 한계, 그 이상 넘어서는 안 되는 경계를 알고 있었으며, 따라서 노동자가 다시 전진을 시작해야 할 지점을 알고 있었다. 레닌이 지도한 시대에는 후퇴는 후퇴로, 양보는 양보로 불렸다. 그 덕분에 책략을 쓰는 중에도 노동자군대는 항상 단결, 투쟁정신, 명확한 목표의식을 유지했던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 지도부는 이런 레닌주의 방식으로부터 결정적으로 일탈했다. 스탈린 그룹은 당을 맹목적으로 지도하고 있다. 적의 힘을 비밀에 부치고, 어디서나, 그리고 모든 것에서 성공이라는 공식적 외양을 만들어내고 있는 이 그룹은 노동자계급에게 아무런 전망도 제시하지 않는다. 아니 설상가상으로 잘못된 전망을 제시하고 있다. 이 그룹은 지그재그로 움직이며, 적대분자들에 순응하거나 비위를 맞춘다. 그 결과, 노동자군대의 힘을 약화시키거나 혼란시키고 있으며, 수동성의 증대, 지도부에 대한 불신, 혁명세력에 대한 불신임을 조장하고 있다. 레닌주의적 책략을 쓰는 것에 관해 스탈린 그룹은 처음의 방향에서 그 다음에는 다른 방향으로 급히 옮아가는 줏대 없는 경향으로 꾸미고 있다. 이런 전환은 언제나 당을 놀라게 한다. 이해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매번 당을 약화시켰다. 그 유일한 결과는 시간을 번 적의 전진이었다. 스탈린-부하린-리코프 측의 이러한 책략의 '고전적' 실례는 국제무대에서는 중국 정책과 영-러위원회 정책이고, 국내에서는 쿨락에 대한 정책이다. 이런 모든 문제에서 당과 노동자계급이 진실이나 진실의 일부를 알게 된 것은 철저히 잘못된 정책의 중대한 결과가 당과 노동자계급의 머리 위로 떨어진 뒤일 뿐이다.

      이런 2년의 끝 무렵에 스탈린 그룹은 실제로 당 중앙기관의 정책을 결정했다. 이 그룹은 다음과 같은 사태가 벌어지는 것을 막을 능력이 없음이 충분히 입증되었다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⑴ 우리나라의 발전을 자본주의의 방향으로 바꾸고 싶어 하는 세력의 지나친 성장, ⑵ 쿨락, 네프맨, 관료의 증대하는 힘에 대비되는 노동자계급과 빈농의 지위 약화, (3) 세계자본주의와의 투쟁에서 노동자국가의 전반적인 지위 약화, 소비에트연방의 국제적 지위 악화.

      스탈린 그룹은 당, 노동자계급, 농민에게 상황에 대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알리는 대신에 사실을 은폐하고, 적대세력의 성장을 경시했으며, 진실을 요구하고 이를 털어놓은 사람들의 입을 막아왔기 때문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

      전체적 상황이 우익의 위험을 나타내고 있을 무렵, 좌익을 향해 포화를 집중하고, 노동자혁명의 운명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정당한 경고를 표현하는 모든 비판을 투박하게 기계적으로 억압하고, 우익적 일탈과 노골적으로 결탁하고, 당의 노동자와 고참 볼셰비키 중핵의 영향력을 점차로 약화시키는 것 一 이 모든 것은 무엇보다도 노동자계급의 활력, 당의 경계태세와 결속, 레닌주의의 진짜 유산에 대한 헌신이 요구되는 순간에 노동자계급을 약화시키고 무장해제시키고 있다.

      당 지도자들은 오류를 범할 때마다 은폐할 필요에 따라서 레닌을 왜곡, 개조, (재)해석, 보충한다. 레닌 사후, 일련의 새로운 이론이 고안되었는데, 그 의도는 단지 국제 노동자혁명의 정책으로부터 스탈린 그룹의 퇴보를 이론적으로 정당화하는 것뿐이다. 이를 멘셰비키, 스메나베히파(Smenovekhovtsy) [잡지〈표지(機制)의 변화〉(Smenavekh)를 중심으로 러시아 망명그룹 내에서 전개된 운동으로 대부분이 멘세비키, 입헌민주당, 10월당출신이었다. 이 그룹의 지도자인 우스트리얄로프는 민족적 볼셰비키주의를 주장했다.-옮긴이] 그리고 결정적으로 부르주아 언론까지도 스탈린-부하린-마르티노프의 정책과 새로운 이론을 ‘레닌에게서 멀어지는’ 움직임(우스트리얄로프), '정치인다운 현명함', "현실주의', 혁명적 볼셰비키주의의 '유토피아' 포기로 보고 환영한다. 또 많은 볼셰비키一레닌의 전우一를 당 지도부에서 제거하는 것을 당의 근본적 노선을 바꾸기 위한 실제적인 조치로 보고 공공연하게 환영한다.

      그 사이에 확고한 계급정책에 의해 억제도 지도도 되지 않은 신경제정책(NEP)의 기본적인 과정이 한층 더 위험한 전환의 근거를 쌓고 있다.

      러시아에서는 2500만의 소농 경영이 자본주의적 경향의 근본적 원천을 이룬다. 이 집단에서 점차 벗어나고 있는 쿨락층은 자본의 본원적 축적과정을 실현하며, 사회주의의 진지를 광범위하게 침식하고 있다. 이 과정의 운명은 결국 국가경제의 성장과 사적 경제의 성장 사이의 관계에 달려있다. 산업발전의 뒤처짐은 농민 사이에서 계급 분화의 속도를 크게 증가시키고, 여기에서 비롯하는 정치적 위험을 몇 배로 증대시킨다.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 : 쿨락은 '다른 나라의 역사에서 여러 차례 지주, 전제군주(짜르), 성직자, 자본가의 권력을 부활시켜왔다. 이전의 모든 유럽혁명의 경우가 그랬다. 노동자가 허약했기 때문에 쿨락은 공화제에서 다시 군주제로, 근로인민의 정치에서 다시 착취자, 부자, 기생자의 전제정치로 되돌리는데 성공했다.' 마지막으로 ‘비록 쿨락이 지주, 짜르, 성직자와 다퉜을지라도 쉽게 타협할 수 있지만, 노동자계급과는 결코할 수 없다.’ (레닌, '노동자 동지들, 마지막으로 결전에 나서자!', 《전집》, 제28권, 55~56쪽)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사회주의로 성장하는 쿨락'을 믿는 사람은 딱 한 가지에만 알맞다一혁명을 좌초시키는 것 말이다.

      우리나라에는 서로 배타적인 두 가지 근본적인 입장이 있다. 하나는 사회주의를 건설하고 있는 노동자계급의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의 발전을 자본주의의 방향으로 돌리고 싶어 하는 자본가계급의 입장이다.

      자본가계급 진영과 자본가계급의 전철을 밟는 소부르주아 계층은 상품생산자의 사적인 주도권과 개인적인 이해관계에 모든 희망을 걸고 있다. '경제력이 있는' 농민에게 내기를 거는 이 진영은 협동조합, 공업, 대외무역이 이런 농민의 이해관계를 충족시키게 하려고 애쓰고 있다. 이 진영은 사회주의 공업은 국가예산에 의지해서는 안 되며, 공업의 발전은 이를테면 농업 자본가의 축적을 해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노동생산성 향상을 위한 투쟁은 영향력이 증대하고 있는 소부르주아가 노동자에 대해 육체적 정신적 압력을 가하는 것을 의미한다. 가격인하를 위한 투쟁은 이들에게는 상업자본을 위해 사회주의 공업의 축적을 줄이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관료주의에 대한 투쟁은 공업의 분리 분산, 계획 원칙의 약화를 의미한다. 이것은 중공업 우선 정책의 포기를 의미한다. 즉, 대외무역의 독점 폐기를 가까운 전망으로 가지고, 경제력이 있는 농민의 이익이 되도록 다시 조정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우스트리얄로프의 노선이다. 이 노선의 명칭은 할부 자본주의이다. 우리나라에서 강력한 이 경향은 우리 당의 특정 그룹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레닌은 다음과 같은 말로 노동자의 노선을 설명했다 : '자본주의에 대한 사회주의의 승리와 사회주의의 공고화는 착취자의 모든 저항을 완전히 진압하고, 이들의 완전한 복종과 권력의 안정성을 확신한 노동자국가 권력이 대규모 집단적 생산과 최신 기술(전체 경제의 전화(電化)에 기초를 둔)에 기초하여 산업 전체를 재조직할 경우에만 보증된 것으로 여길 수 있다. 이 경우에만 도시로 하여금 후진적이고 흩어져 있는 농촌 주민에게 농업과 농업노동 일반의 생산성을 증대시키기 위해 필요한 물질적 기초를 창출할 정도의 근본적인 기술적 사회적 원조를 해줄 수 있게 할 것이다. 나아가 본보기의 힘과 자기 자신의 이해에 따라 집단적이고 기계화된 대규모 농업을 받아들이도록 소농을 격려할 것이다.' (레닌, '코민테른 제2차 대회 결의문 - 농업문제에 대한 테제의 최초 초안', 《전집》, 제31권, 161~162쪽)

      우리 당의 모든 정책(예산, 조세, 공업, 농업, 대내외무역 등 일체)은 이런 접근방법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 이것이 반대파의 근본적인 입장이다. 이것이 사회주의로 가는 길이다.

      이 두 입장 사이에서一매일 첫 번째 입장에 좀 더 가까워지면서一스탈린주의자는 왼쪽으로 짧게 지그재그한 다음에 오른쪽으로 깊게 지그재그하는 것으로 이루어진 노선을 따라가고 있다. 레닌주의 노선은 자본주의 요소와의 끊임없는 투쟁 속에서 생산력을 사회주의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이다. 우스트리얄로프의 노선은 10월혁명의 획득물을 차츰 침식함으로써 자본주의의 토대 위에서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스탈린의 노선은 생산력 발전의 지체, 사회주의적 요소의 상대적 비중 하락을 이끈다. 따라서 우스트리얄로프 노선의 승리를 용이하게 한다. 스탈린의 노선은 익숙한 말과 표현을 빙자하여 실질적인 퇴보를 은폐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 위험하고 파멸적이다. 경제복구 과정의 완료는 이제 우리 경제발전의 모든 결정적 문제가 단도직입적으로 제기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는 스탈린주의의 정치노선을 침식시킨다. 왜냐하면 이것이 중국의 혁명이든, 소비에트연방에서 기초적 자본의 재구성을 수반하든 간에 주요한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완전히 부적당하기 때문이다.

      현 지도부의 미숙한 오류로 상황의 긴박감이 극도로 높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사태를 바로잡을 수 있다. 그러나 당 지도부의 노선을 바꿔야 한다, 그것도 기민하게 레닌이 지시한 방향으로 바꿔야 한다.

       

      제2장 노동자계급과 노동조합의 상태

      10월혁명은 역사상 처음으로 노동자계급을 거대한 국가의 지배계급으로 만들었다. 생산수단의 국유화는 다른 사람에 대한 일부의 착취에 바탕을 둔 사회체계 전체를 사회주의적으로 재구성하기 위한 결정적인 조치였다. 8시간 노동제의 도입은 노동자계급 생존의 물질적, 문화적 조건을 모든 면에서 총체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첫 조치였다. 나라의 빈곤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노동법은 노동자를 위해一예전에는 집단적 방어수단 일체를 박탈당한 가장 후진적인 노동자까지 포함하여一가장 부유한 자본주의 국가도 제공한 적이 없고, 결코 제공하지 못할 법률적 보장을 정착시켰다. 지배계급에게 맡겨진 가장 중요한 사회적 도구라는 지위로 격상된 노동조합은 한편으로 다른 상황에서는 전혀 접근할 수 없었을 대중을 조직하고, 다른 한편으로 노동자국가의 모든 정치적 방침에 직접 영향을 미칠 기회를 주었다.

      당의 임무는 이런 가장 중요한 역사적 획득물의 더 나은 발전을 보장하는 것, 즉 이것들을 진정한 사회주의적 내용으로 채워가는 것이다. 이 길에서 우리의 성공 여부는 국내외의 객관적 조건뿐만 아니라 우리 노선의 올바름과 지도부의 실제적 역량에 의해서도 결정될 것이다.

      우리나라가 사회주의적 재구성의 길을 따라 얼마나 전진했는지를 평가하는데서 결정적 요인은 생산력의 증대와 자본주의적 요소에 대한 사회주의적 요소의 우위여야 한다. 이는 전반적인 노동자계급의 생활형편 개선을 동반해야 한다. 이 개선은 물질적 영역(산업에 고용된 노동자의 수, 실질임금의 수준, 노동자의 필요를 위해 지출할 예산의 종류, 주거 상태, 의료서비스 등), 정치적 영역(당, 노동조합, 소비에트, 콤소몰), 마지막으로 문화적 영역(학교, 서적, 신문, 극장)에서 분명히 나타나야 한다. 노동자의 생사가 걸린 이해를 뒷전으로 제쳐놓으려는 것, '편협한 수공업적 직업의식'이라는 경멸적인 욕설에 편승하여 이를 노동자계급의 일반적인 역사적 이해에 대치시키려는 것은 이론적으로 틀린 것이며, 정치적으로도 위험한 것이다.

      물론 노동자국가가 잉여가치를 전유하는 것은 착취가 아니다. 그러나 첫째로, 우리는 관료적으로 왜곡된 노동자국가를 가지고 있다. 비대하고 특권적인 행정기구는 잉여가치의 상당 부분을 삼켜버리고 있다. 둘째로, 상업을 통해서, 그리고 협상가격차를 이용하여 성장하고 있는 자본가계급은 국영기업이 창출한 잉여가치의 일부를 착복하고 있다.

      대체로 이 경제회복기에 노동자 수와 그 생활수준이 다른 계급의 발전 정도와 비교해 볼 때 절대적으로뿐만 아니라 상대적으로도 향상되었다. 그렇지만 최근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다. 노동자계급의 수적 성장과 그 상황의 개선은 거의 멈춘 반면에, 적(enemy) 계급의 성장은 계속되고 있으며, 그것도 빠른 속도로 계속되고 있다. 이것은 불가피하게 공장 노동자의 상태 악화뿐만 아니라 소비에트 사회에서 노동자계급의 상대적인 비중 저하를 일으키고 있다.

      노동자 사이에서 자본가계급을 대리하고 있는 멘셰비키는 노동자의 물질적 초라함을 악의적으로 즐기며 지적한다. 이들은 노동자계급을 소비에트국가에 대항케 하고, 부르주아-멘셰비키 슬로건인 '자본주의로 돌아가자'를 노동자가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려 하고 있다. 노동자의 물질적 상태를 개선하자는 반대파의 주장에서 '멘셰비키주의'를 발견하는 자기만족적인 관료들은 멘셰비키주의에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상의 봉사를 하고 있는 것이고, 멘셰비키의 저속한 기치로 노동자를 내모는 것이다.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우리의 성패 여부를 노동자 대중의 실제 상황과 관련하여 정확하고 정직하게 판단해야 한다.

      노동자들의 상태

      경제회복기인 1925년 가을까지 임금은 가파를 정도로 상승했다. 그러나 1926년에 시작된 실질임금의 상당한 감소는 1927년 초가 되어서야 겨우 회복되었다. 1925년 가을에 대규모 기업 평균 월 임금은 모스크바 루블로 환산해 29루블 68코페이카에 비해, 1926~27회계연도의 제1/4분기에는 30루블 67코페이카, 제2/4분기에는 30루블 33코페이카였다. 제 3/4분기에 一 잠정적 추정에 따르면 一 임금은 31루블 62코페이카였다. 결과적으로 올해의 실질임금은 대략 1925년 가을 수준을 유지했다.

      물론 개별적 범주의 노동자나 개별 지역一특히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一의 임금과 전반적인 물질적 수준이 이런 평균 수준보다 더 높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노동자계급의 다른 매우 광범한 층의 물질적 수준은 이런 평균치에 상당히 못 미친다.

      게다가 모든 자료는 임금의 증대가 노동생산성의 증대에 뒤처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노동 강도는 세지고 있는데, 열악한 노동조건은 여전히 예전과 같다.

      노동 강도를 증대시켜야 할 요건은 더욱 더 임금인상을 필요조건으로 한다. 중앙위원회는 사회주의 정책과 일치되지 않는 이 새로운 경향을 합리화에 관한 그 유명한 결의문에서 천명했다(〈프라브다〉, 1927년 3월 25일 자). 제4차 소비에트 대회도 이와 같은 결의문을 채택했다. 이러한 정책은 기술 발전(노동생산성의 증대)에서 유래하는 사회적 부의 증대도 그 자체로는 임금인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노동자 수가 얼마 늘어나지 않은 것은 각 가정에서 일하는 구성원 수가 줄어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루블의 실질가치로 환산하면, 1924-25년 이후 노동자계급의 가계비 지출은 줄어들었다. 집세가 올랐기 때문에 노동자는 집의 일부를 임대할 수밖에 없다. 실업도 직간접적으로 노동자 가계에 부담을 주고 있다. 급증하는 주류 소비도 노동자계급 가계를 축내고 있다. 그 결과, 노동자의 생활수준이 분명하게 하락하고 있다. 이제 도입되고 있는 생산의 합리화는 해고된 노동자를 흡수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공업과 수송 분야의 발전을 동반하지 않는다면, 불가피하게 노동자계급의 상태를 한층 더 악화시킬 것이다. 실제로 '합리화'는 흔히 일부 노동자를 '내쫓고', 다른 노동자의 물질적 상태도 악화시키게 된다. 이것은 불가피하게 노동자 대중을 합리화 자체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 채운다.

      노동자의 생활수준이 압박을 받으면, 항상 가장 약한 그룹인 미숙련 노동자, 계절노동자, 여성노동자, 청년노동자 대부분이 고통을 겪는다.

      1926년에 거의 전 산업 부문에서 여성노동자의 임금은 남성노동자에 비해 분명 낮았다. 서로 다른 세 산업 부문 미숙련노동자 사이에서 1926년 3월 현재 여성의 임금은 각각 남성 임금의 51.8%, 61.7%, 83%였다. 토탄산업이나 짐을 싣고 내리는 작업 등과 같은 부문에서 여성의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는 아직 취해지지 않았다. 청년노동자의 평균 임금은 노동자 전체의 임금과 비교해 볼 때, 꾸준히 감소하고 있다. 1923년에 그 비율은 47.1%, 1924년에 45%, 1925년에 43.4%, 1926년에 40.5%, 1927년에 39.5%였다(1924~25년도와 1925~26년도의 청년의 경제적 상황개관').

      1926년 3월에 청년노동자의 49.5%는 20루블 이하의 보수를 받았다 (중앙노동통계국). 모든 산업시설에 노동자 수가 지정되어있다 하더라도 일정한 수의 청년노동자 고용을 규정하고 있는 법규의 폐지는 청년노동자와 노동자계급 가정에 중대한 타격이었다. 청년실업자수는 크게 증가하고 있다.

      농장노동

      대략 350만의 농촌 임금노동자 가운데 160만 명의 남녀가 농장노동자이다. 이 농장노동자의 20%만이 노동조합으로 조직되어 있다. 대개 완전히 노예상태와 같은 조항을 담고 있는 임금협약의 등록이 가까스로 시작되고 있다. 농장노동자의 임금은 통상 법정 최저액을 밑도는데, 이는 국영농장에서도 다를 바 없다. 대체로 실질임금은 전전(戰前) 수준의 63%를 넘지 않는다. 노동시간은 10시간 이하인 경우가 좀처럼 드물며, 사실상 무제한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임금은 불규칙하게 지불되고, 그것도 지나치게 지체된 뒤에야 지불된다. 고용노동자의 비참한 상황은 후진적인 농민국가에서 부닥치는 사회주의 건설의 어려움 때문만은 아니다. 이것이 또한 실제로一실생활에서一농촌의 하층이 아니라 상층에 각별히 유의하는 잘못된 노선의 결과라는 것은 의심할 나위 없다. 우리는 쿨락뿐만 아니라 이른바 경제력이 있는 중농에 대항해서도 고용노동자를 전면적, 체계적으로 옹호해야 한다.

      주택문제

      노동자의 표준적인 거주공간은 대체로 도시주민 전체의 평균 거주공간보다 꽤 좁다. 이 점에서 거대한 산업도시의 노동자는 주민 중에서 가장 적은 혜택을 받았다. 조사된 일련의 도시들에서 사회 그룹별 거주공간 분포는 다음과 같았다.

      공장 노동자는 1인당 5.6평방미터, 사무직 노동자는 6.9평방미터, 수공업 노동자는 7.6평방미터, 전문직 노동자는 10.9평방미터, 비(非)노동자 분자는 7.1평방미터였다. 노동자가 최하위를 차지하고 있다. 게다가 노동자의 거주 면적은 해마다 좁아지고 있지만, 비(非)노동자 분자의 면적은 넓어지고 있다. 주택 건설과 관련한 전반적 상황은 산업의 더 나은 발전을 위협하고 있다. 이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국가계획위원회(고스플란)의 5개년 계획은 5개년 계획이 끝난 뒤에도 주택 사정이 지금보다 더 악화될 것이라는 전망을 제시하고 있다. 위원회도 이것에 일치하는 고백을 하고 있다. 5개년 계획에 따르면, 표준 거주 면적은 1926년 말의 11.3평방아르신(8.1평방미터, 1아르신은 약 7lcm)에서 1931년 말에는 10.6평방 아르신(7.6 평방미터)으로 줄어들 것이다.

      실업

      산업화의 완만한 성장은 무엇보다도 실업 분야에서 가장 병적인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이 실업은 산업노동자계급의 기본적 대오도 공격하고 있다. 1927년 4월에 등록한 공식 실업자 수는 147만 8천 명이었다(〈트루드〉[Trud, 노동], 1927년 8월 27일자). 실제 실업자 수는 약 200만 명에 달한다. 실업자 수는 취업노동자 총수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산업노동자의 실업자 수도 일시적으로 급속히 증대하고 있다. 국가계획위원회의 5개년 계획에 따르면, 공업은 5년 내내 40만 명 약간 넘는 취업노동자를 흡수할 것이다. 이것은 농촌으로부터 노동자가 지속적으로 유입됨에 따라 실업자 수가 1931년 말에는 무려 300만 명으로 늘어날 것임을 의미한다. 이런 사태의 결과, 부랑아, 거지, 매춘부 수가 증대할 것이다. 실직자에 대한 변변찮은 실업보험 지급은 실직자의 정당한 분노를 야기하고 있다. 평균 실업수당은 11.9루블(즉, 전전(戰前)의 약 5루블)이다. 노동조합의 보조금은 평균 6.5~7루블이다. 그리고 이런 보조금은 실직한 조합원의 약 20%에게만 지불될 뿐이다.

      노동법전은 법전 조항 수의 몇 배를 넘어설 정도로 수많은 판독을 거쳤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조항을 폐지했다. 특히 임시노동자나 계절노동자에 대한 법적 보호는 개악되어왔다.

      최근 전개된 단체협약 캠페인은 법률적 보장의 거의 보편적인 개악과 임금기준과 임금체계에 대한 하향 조정 압력이 특징적이었다. 정부 경제기관에 강제적인 중재권을 주는 것은 협약의 표리부동한 면을 행정 명령으로 바꾸면서 단체협약 자체를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린다(〈트루드〉, 1927년 8월 4일자). 노동자 보상에 대한 기업 측의 분담금은 전체적으로 불충분하다. 노동인민위원회의 자료에 따르면, 1925~26년도에 대기업에서 노동능력의 상실로 이어진 재해가 노동자 1,000명당 97.6건이나 있었다. 매년 10명의 노동자가 심각한 부상을 입고 있다.

      최근 급증한 노동쟁의의 대부분은 화해적 조치가 아니라 강제적 조치에 의해 해결되었다는 것이 특징적이었다.

      공장 안의 관리체제는 변질되었다. 관리기관은 공장 내에서 자신의 무제한적인 권력을 수립하려고 더욱 더 애쓰고 있다. 노동자의 고용과 해고는 실제로 오직 관리기관에게만 맡겨져 있다. 공장 감독과 노동자 사이의 관계가 혁명 이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광경이 자주 발견된다.

      생산협의회[생산협의회는 생산현장의 문제를 서로 이야기하는 종업원 회의-옮긴이]는 점차로 무용지물이 되고 있다. 노동자가 채택한 실용적인 제안 대부분은 실행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새로 도입한 개선안이 흔히 노동자 수 감소로 귀결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많은 노동자들 사이에서 생산협의회에 대한 혐오감이 조장되고 있다. 그 결과, 생산협의회에는 거의 참석하지 않는다.

      문화적 영역에서는 학교문제를 강조할 필요가 있다. 노동자가 자녀에게 직업훈련은 말할 것도 없고 초등교육을 받게 하는 것마저도 더욱 더 곤란해지고 있다. 거의 모든 노동자계급 지구에서는 줄곧 학교 부족 현상이 늘어나고 있다. 학교가 지출할 비용을 부모에게 요구하는 것은 사실상 무상교육을 폐지하는 것이다. 학교의 부족과 불충분한 유치원 설비는 노동자 자녀의 상당수를 길거리로 내모는 것이다.

      노동조합과 노동자

      제11차 당 대회 결의문에서 지적된 '공장에서 노동조건 문제를 둘러싼 일정한 이해의 충돌'은 최근에 상당히 늘어났다. 그렇다 하더라도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활동을 포함하여 지난 몇 년 동안 노동조합운동에 대한 당의 모든 실제적 활동은 제14차 당 대회도 인정한 것처럼, 노동조합에 다음과 같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 '노동조합은 자주 편파성을 보이면서 자신의 활동을 통제할 수 없다. 가끔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대중의 경제적 이익을 옹호하고, 노동자 대중의 물질적, 정신적 수준을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끌어올린다는 자신의 원칙과 가장 중요한 임무를 뒷전으로 밀쳐놓고 있다.'

      제14차 당 대회 이후에도 상황은 개선되지 않고 오히려 더 악화되었다. 노동조합의 관료주의화가 한층 더 진전되었다.

      10개 산별노동조합의 선출직 집행기구에서 현장 출신 노동자나 전투적인 무당파 노동자의 비율은 극히 적다(12~13%). 노동조합협의회 대의원의 압도적 다수는 조직적 노동과 완전히 분리된 사람들이다(〈프라브다〉, 1927년 7월 23일자). 지금처럼 노동조합과 평조합원 노동자가 사회주의적 산업 관리에서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던 적은 일찍이 없었다.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노동자 대중의 자주적 행동은 당 그룹의 서기, 공장 관리자, 그리고 공장위원회 의장('3인조') 사이의 협정으로 대체되고 있다. 공장/직장위원회에 대해 노동자는 불신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총회 출석자 수가 낮다.

      노동조합에서 출구를 찾지 못한 노동자의 불만은 마음속에 쌓였다. '너무 적극적이어서는 안 된다. 한 입의 빵을 원하면, 말을 너무 많이 하지 말라.' 아주 흔히 이러한 말을 한다(모스크바위원회의 자료, 노동자총회에 대한 보고, 〈정보평론지>, 30쪽 등을 보라). 이런 상황에서는 불가피하게 노동자가 노동조합 조직의 범위를 넘는 행동으로 자신의 상황을 개선하려는 시도가 더욱 빈번해진다. 이것만으로도 현 노동조합 체제의 근본적 변화를 단호하게 명령한다.

      가장 중요한 실천적 제안

      가. 노동자의 물질적 상황에 대해서

      1. 1일 8시간 노동을 연장하려는 모든 편향을 근본적으로 중단할 것. 절대적으로 불가피한 경우에만 시간외 노동을 허용할 것. 비정규직 노동자의 고용을 남용하거나 정규직 노동자를 '계절노동자'로 취급하는 것을 용납하지 말 것. 이전 규정을 어기며 도입한 불건전한 업계의 노동시간 연장을 모두 취소할 것.

      2. 가장 당면한 임무는 임금을 적어도 달성된 노동생산성 증대에 부합하도록 끌어올리는 것이다. 향후 방침은 가능한 한 노동생산성 증대에 부합하도록 실질임금을 체계적으로 향상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다양한 노동자 집단의 임금을 상향 즉, 고임금 집단의 임금을 인하하는 것이 아니라, 저임금 집단의 임금을 체계적으로 끌어올리는 것을 통해서 균등화 시켜야 한다.

      3. 합리화 조치의 관료적 남용을 철저히 종식시켜야 한다. 합리화는 공업의 적절한 발전, 노동력의 계획적 배분, 그리고 노동자계급, 특히 숙련노동자 중핵을 활용하지 못하는 생산력 낭비에 대한 투쟁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어야한다.

      4. 실업의 악영향을 완화하기 위해서 (ㄱ) 실업수당은 실제로 해당 지역의 평균 임금에 부합하도록 조정되어야 한다. (ㄴ) 실업의 장기화를 예상해서, 수당의 지급기간을 1년에서 1년 6개월로 늘려야 한다. (ㄷ) 사회 보험기금에 대한 기업의 분담금 축소가 더 이상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사실상의 분담금 지불거부에 대해서는 실질적인 투쟁이 수행되어야 한다. (ㄹ) 사회보험기금을 공중보건위생 법령에 따라 쓰는 것은 중지되어야 한다. (ㅁ) '피보험자에 대해 돈을 아끼려는' 성향과 정력적으로 투쟁해야 한다. (ㅂ) 실제로 실직한 노동자들이 실업수당을 받고 직업안정소에 등록할 권리를 다양한 구실로 박탈하는 모든 규정을 폐기해야 한다. (ㅅ) 산업노동자부터 시작하여 실업수당의 증액을 우리의 방침으로 삼아야 한다. 실업자가 우리나라의 경제적, 문화적 발전을 위해 최대한 유리하게 활용될 수 있도록 장기적인 공공사업 계획을 폭넓게 구상하고 신중하게 세워야 한다.

      5. 노동자의 주거 상황을 계획적으로 개선해야 한다. 모든 주택문제에서 확고한 계급정책을 수행할 것. 노동자를 희생하여 비(非)노동자 분자의 주거 상황을 개선해서는 안 된다. 해고된 노동자와 주간 노동시간과 임금이 줄어든 노동자를 퇴거시켜서는 안 된다.

      주택협동조합의 더욱 건전한 발전을 위해서 효과적인 조치를 취해야 한다. 주택협동조합은 저임금 노동자가 접근하기 쉬어야 한다. 사무직노동자 상층이 산업노동자용으로 예정된 아파트를 양도받는 것이 허락되어서는 안 된다.

      사회주의 정책과 명백히 상반되는 국가계획위원회의 주택건설 계획은 거부되어야 한다. 다음 5년에 노동자 주택문제의 확실한 개선을 볼 수 있기 위해서는 기업으로 하여금 주택건설 비용, 가계보조수당, 신용대부를 충분히 늘리도록 강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6. 단체협약은 노동자 모임에서 가짜가 아니라 진짜 토론을 거친 다음 체결되어야 한다. 다가오는 당 대회는 공장 경영진에 강제적 중재권을 주고 있는 제14차 당 대회의 결정을 폐기시켜야 한다. 노동법은 노동자의 최대한이 아니라 최소한의 요구 권리를 규정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단체협약은 협약기간 내내 산업노동자와 사무직노동자 수를 축소하지 않는다는 보장을 포함해야 한다(허용할 수 있는 예외는 명확히 규정되어야 한다). 생산 기준은 우수한 노동자가 아니라 평균적인 노동자에 기초하여, 그리고 임금협약의 전 기간에 대해서 산정되어야 한다. 어쨌든 이전 협약과 비교하여 노동자의 상황을 악화시키는 단체협약의 모든 변경은 용납할 수 없다고 선언해야 한다.

      7. 임금표준국(The Bureau of Wages and Standards)은 노동조합과 노동자에 의해 좀 더 효과적인 통제를 받아야 한다. 임금과 작업 기준의 계속적인 변경은 중지되어야한다.

      8. 안전설비와 노동조건의 개선을 위한 지출이 증액되어야 한다. 노동자의 안전 규정을 지키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중형이 부과되어야 한다.

      9. 노동법에 대한 모든 해석은 재검토되어야 하며, 노동조건의 악화를 결과한 해석은 폐지되어야 한다.

      10. 여성노동자에게 '동일노동 동일임금'이 적용되어야 한다. 여성 노동자가 숙련된 기술을 배울 준비를 시켜야 한다.

      11. 무보수 실습노동은 금지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청년노동자의 임금을 줄이려는 기도도 금지되어야 한다. 이들의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

      12. 어떠한 경우에도 효율적 체제를 위해 노동자의 생활수준을 희생시켜서는 안 된다. 노동자에게서 가져간 '사소한 것'(탁아소, 전차 무료티켓, 장기 휴가 등)은 반환되어야 한다.

      13. 노동조합은 계절노동자 문제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14. 노동자를 위한 공장의 의료서비스(공장 부속 의무실이나 진료소 등)를 늘려야 한다.

      15. 노동자계급 지구에서 노동자 자녀를 위한 학교 수를 늘려야 한다.

      16. 노동자 소비협동조합을 강화하기 위한 일련의 국가적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

      나. 노동조합 활동에 대해서

      1. 노동조합의 활동은 주로 노동조합이 현존하는 경제적 한계 내에서 노동자의 경제적, 문화적 이해를 보호하는 정도에 따라 평가되어야 한다.

      2. 노동자 대중의 경제적, 문화적 이해에 영향을 미치는 조치를 검토함에 있어서 당 조직은 이런 문제에 대한 노동조합 내 공산당 분파의 보고를 먼저 경청해야한다.

      3. 노동조합의 활동은 모든 수준에서 조합원에 대한 진정한 선거, 공개, 신뢰, 책임에 토대해야 한다.

      4. 산업의 모든 관리기관은 해당 노동조합 조직과 가짜가 아닌 진짜로 합의하여 구성되어야 한다.

      5. 모든 노동조합 대회(전연방 대회를 포함하여)와 노동조합의 선거 기관(전연방노동조합 중앙평의회를 포함하여)에서 생산에 직접 종사하는 노동자가 과반수는 되어야 한다. 이런 기관들에서 무당파 노동자의 비율은 적어도 3분의 1로 늘어나야 한다. 

      노동조합 기구 관료의 일정한 수는 정기적으로 생산 활동으로 복귀해야 한다.

      노동조합 활동에서 자발적인 활동을 좀 더 이용할 것, 자발적인 활동 원칙을 더 광범하게 적용할 것, 이러한 활동에 공장 노동자를 좀 더 끌어들일 것.

      6. 당내의 견해 차이 때문에 노동조합 조직의 선출직 공산당원의 해임이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7. 관리기관으로부터 공장위원회와 지방 노동조합위원회의 완전한 독립이 보장되어야 한다. 노동자의 고용과 해고, 그리고 2주 이상 노동자를 다른 일로 전환 배치하는 것 一 이 모든 것은 공장위원회에 알린 다음에야 실행되어야 한다. 이런 영역의 악폐에 맞서 싸우면서 공장위원회는 경영진의 결정에 대해서 해당 노동조합과 고충처리위원회에 호소하는 자신의 권리를 행사해야 한다.

      8. 노동자신문 통신원에게는 명확한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 그리고 부정행위를 폭로했다는 이유로 노동자 통신원을 박해하는 사람들은 엄격하게 처벌되어야 한다.

      비판하거나, 독자적인 제안을 하거나, 독자적인 투표를 한 노동자를 직간접으로, 공개적이거나 은폐된 형태로 박해하는 것을 국가에 대한 중죄로 처벌하는 조항을 형법에 삽입시켜야 한다.

      9. 생산협의회의 통제위원회 역할은 생산협의회의 결정이 어떻게 실행되고 있는지 감시하고, 이 과정에서 노동자의 이해가 보호되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도 포함하여 확대되어야 한다.

      10. 국영기업의 파업 문제에 대해 레닌이 제안한 제11차 당 대회의 (파업을 합법화한) 결정은 여전히 유효하다. 파업에 관한 한, 이권기업도 다른 개인기업과 같은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11. 노동통계의 시스템 전체가 개정되어야 한다. 지금과 같은 방식의 통계는 노동자계급의 경제적, 문화적 상태에 대해 그릇되고 명백히 수정된 상을 보여준다. 따라서 노동자계급의 경제적, 문화적 이해를 옹호하는 모든 활동을 적지 않게 방해한다.

      물론 10월혁명 10주년을 맞은 노동자계급이 처한 가혹한 상황은 결국 나라의 빈곤, 외국의 간섭과 봉쇄 결과, 최초의 노동자국가를 둘러싸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의 끊임없는 투쟁에 의해 설명된다. 이 상황은 일거에 바뀔 수 없다. 그러나 올바른 정책을 따른다면, 바뀔 수 있고, 또 바꿔져야 한다. 볼셰비키의 임무는 우리의 성과 一 물론 진짜 실재하는 성과 一 를 격찬하거나 자기만족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수행 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지, 무엇이 수행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올바른 정책을 따라 무엇을 수행할 수 있는지 하는 문제를 단호하게, 그리고 명확하게 제기하는 것이다.

       

      제3장 농민 - 농업문제와 사회주의 건설

      '소규모 생산은 … 자본주의와 자본가계급을 끊임없이, 매일, 매시간, 자연발생적으로, 대규모로 낳고 있다.' (레닌, 〈'좌익' 공산주의 - 유아적 혼란〉, 《전집》, 제31권, 24쪽)

      노동자국가가 산업의 고도한 발전과 전화(電化)에 의지하여 수백만의 소농과 영세소농 경영의 기술적 후진성을 극복하고, 대규모 생산과 집단화에 기초하여 이들을 조직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자본주의가 농촌에 거점을 마련하여 도시에서도 사회주의의 토대를 침식할 것인가 둘 중 하나이다.

      레닌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농민一즉, 타인의 노동을 착취하지 않는 본래의 농민 대중一은 핵심 동맹세력이고, 이 동맹세력과의 올바른 관계는 노동자 독재의 안전, 따라서 사회주의 혁명의 운명에 결정적이다. 우리가 현재 통과하고 있는 단계에 대해서 레닌은 다음과 같은 말로 농민에 대한 우리의 임무를 가장 정확하게 정식화했다 : '중농과 합의에 이르기 위해서는 쿨락에 대한 투쟁을 한시도 포기하지 않는 동시에, 빈농에게만 굳게 의지하는 것이다.'(레닌, '피티림 소로킨의 귀중한 고백', 《전집》, 제28권, 191쪽)

      스탈린-부하린 그룹은 다음과 같은 주요 방향을 따라 농민 문제에 대한 레닌주의의 수정을 실행에 옮기고 있다.

      1. 강력한 사회주의적 산업만이 집산주의 노선에 따라 농민이 농업을 변화시키는 것을 도울 수 있다는 마르크스주의의 중심 원리 가운데 하나를 포기하는 것.

      2. 농촌에서 노동자 독재의 사회적 기반인 농장노동자와 빈농을 경시하는 것.

      3. 농업정책에서 이른바 '경제력이 있는' 농민 즉, 실제로는 쿨락에게 기대를 걸고 있는 것.

      4. 농민적 소유와 농경의 소부르주아적 성격을 무시하거나 아니면 직접적으로 부정하는 것. 이것은 마르크스주의 입장에서 사회혁명당 이론으로의 일탈이다.

      5. 현재 농촌의 발전에서 자본주의적 요소를 과소평가하고, 농민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계급 분화를 쉬쉬하는 것.

      6. '쿨락과 쿨락 조직은 어차피 가망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의 전반적인 발전 구조는 노동자 독재의 구조에 의해 미리 결정되어 있기 때문이다.'(부하린, '사회주의로 가는 길과 노농동맹', 49쪽)라는 취지로 사람들을 달래는 이론을 만들어내는 것.

      7. '쿨락의 협조적 중핵이 우리 시스템에 접목될 수 있다'(부하린, 앞의 글, 49쪽). '문제는 이렇게 표현될 수도 있다. 즉, 부유한 농민의 경제적 발전 가능성, 쿨락의 경제적 발전 가능성을 열어줄 필요가 있다'(〈프라브다〉, 1925년 4월 24일자)는 정책적 판단.

      8. 레닌의 '협동조합 계획'을 그의 전화(電化) 계획에 대립시키려는 시도. 레닌 자신의 생각에 따르면, 이 두 계획의 결합만이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보증할 수 있다.

      공식 정책의 이런 수정주의 경향에 의지하여 새로운 자본가계급의 대표자들은 국가기구의 특정 부문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공공연하게 농촌에 대한 우리의 정책 전체를 자본주의의 길로 돌리려고 열망하고 있다. 동시에 쿨락과 그 이데올로기적 옹호자들은 자신의 야망을 생산력 발전이나 상품생산 '일반'의 양적 증대 등을 걱정하는 체하며 은폐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생산력의 쿨락적 발전과 상품생산의 쿨락적 증대는 나머지 대다수 농민 경영 전체의 생산력 발전을 억누르고 방해하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신속한 농업의 재건 과정에도 불구하고 농경의 제1차 상품 생산은 매우 뒤떨어진다. 1925~26년에 시장에 출하한 상품의 총량은 전전(戰前) 수준의 64%에 불과하고, 수출량은 1913년 수출의 24%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의 원인은 농촌 자체의 총 소비량이 증가한 것은 제쳐 놓고(인구 증가와 농경지 분할 때문이며, 곡물생산지 농가의 38%가 추가로 곡물을 산 결과이기도 하다.), 농산물 가격과 공산물 가격의 협상가 격차와 쿨락의 재빠른 식량 축적에 있다. 국가계획위원회의 5개년 계획도 '대체로 공산품의 부족이 도시와 농촌 사이의 상품 등가교환에 명확한 한계를 짓고 있으며, 시장에 내놓을 농산품의 양을 가능한 한 줄이게 하고 있다'(117쪽)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산업의 낙후가 농업의 성장과 특히 농업의 제1차 상품 생산의 증대를 더디게 하고 있다. 이것은 도시와 농촌의 결속(스미치카)을 침해하고, 농민 사이의 급속한 계급 분화를 이끌고 있다.

      농민정책의 논쟁점에 대한 반대파의 견해는 그 올바름이 포괄적으로, 그리고 절대적으로 확증되었다. 반대파의 날카로운 비판에 몰려서 가해진 '일반적 방침'의 부분적 수정은 공식 정책이 '경제력이 있는 농민' 쪽으로 계속해서 일탈하는 것을 저지하지 못했다. 이를 증명하는 것은 제4차 소비에트 대회가 칼리닌의 보고에 근거한 결의문에서 농촌의 계급 분화나 쿨락의 성장에 대해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상기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러한 정책의 결과는 빈농의 지지를 잃고, 중농을 획득하지도 못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농민 사이의 계급 분화

      최근에 농촌지역에서는 자본주의적 방향의 분화가 상당히 진척되었다.

      지난 4년 동안에 경작지가 아예 없거나 얼마 안 되는 농민 그룹은 35~45%가 감소했다. 6~10데샤틴(17~28에이커)의 경작지를 가진 그룹은 같은 기간에 100-120% 증가했다. 10데샤틴 이상의 경작지를 가진 그룹은 150~200%나 증가했다. 경작지가 아예 없거나 얼마 안 되는 농민 그룹의 비율이 감소한 것은 주로 이들이 파산 용해되었기 때문이다. 그 한 예로, 시베리아에서는 1년 동안 경작지가 없는 농가의 15.8%와 경작지가 2데샤틴 미만 농가의 3.8%가 사라졌다. 북부 코카서스에서는 경작지가 없는 농가의 14.1%와 경작지가 2데샤틴 미만 농가의 3.8%가 사라졌다.

      말도 농기구도 없는 농가가 중농의 하층으로 출세하는 과정은 대단히 완만하게 진행되고 있다. 소비에트연방 전체에서 오늘날까지 말도 농기구도 없는 농가는 30-40%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 대부분은 정말 얼마 안 되는 경작지를 가진 농민 그룹으로 분류된다.

      북부 코카서스에서 주요한 생산기구의 분포는 다음과 같다 : 50%의 영세농가에 생산수단의 15%가 속해 있다. 35%의 중농 그룹에 생산수단의 35%가 속해 있으며, 15%의 최상층 그룹에 생산수단의 50%가 속해 있다. 이와 똑같은 생산수단 분포 실태를 다른 지역에서도 볼 수 있다(시베리아, 우크라이나 등).

      경작지와 생산수단 분포의 이런 불균등성은 각 농민 그룹 사이의 불균등한 곡물 저장 분포에서도 다시 확인된다. 1926년 4월 1일 현재 농촌에서 전 잉여곡물의 58%가 6%의 농가 수중에 있었다(〈통계평론〉, 1927년 제4호, 15쪽).

      토지 임대는 매년 그 면적이 더욱 더 커지는 양상이다. 토지를 임대하는 농가는 대개,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는 대경작지 농민이다. 대부분의 경우, 이들은 세금을 피하기 위해서 토지를 임대한 사실을 은폐하고 있다. 농기구와 가축이 없는, 경작지가 얼마 안 되는 농가는 대부분 농기구와 가축을 빌려 토지를 경작한다. 토지의 임대조건과 농기구, 가축의 임대조건 모두 거의 노예와 같은 수준이다. 현물 갈취와 나란히 고리대금업도 팽창하고 있다.

      농가의 계속적인 분리는 계급분화 과정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강화시킨다. 농기계와 신용대부는 농업의 사회화를 위한 지렛대 구실을 하기는커녕 거의 언제나 쿨락과 부유한 농민 수중에 들어감으로써 농장 노동자, 빈농, 하층 중농을 착취하는 데 기여한다.

      최상층 농민 그룹의 수중에 경작지와 생산수단의 이러한 집중 외에도 이 최상층이 고용노동자를 쓰는 정도도 꾸준하게 증대하고 있다.

      이에 반해서, 빈농과 일부 중농 그룹의 점점 더 많은 수가 고용노동자로 탈바꿈하고 있다. 이는 가구의 완전한 파산과 용해나, 개별 가족 구성원의 강제적 분리의 결과이다. 이런 잉여 농장노동자는 쿨락이나 '강한' 중농에게 예속되거나, 상당수가 도시로 떠나지만 일자리를 전혀 찾지 못한다.

      이런 과정이 상당히 진척되고 있으며, 따라서 중농이 차지하는 경제적 비중의 상대적인 감소로 이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농은 여전히 수적으로는 농촌에서 가장 큰 그룹이다. 농업에서 중농을 사회주의 정책 쪽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노동자 독재의 가장 중요한 임무 가운데 하나이다. 한편으로 '더 강한 농민에게 기대를 거는 것'은 실제로 이 중농층의 한층 더한 붕괴에 기대를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농장노동자에게 적절한 주의를 기울이고, 중농과 동맹하여 빈농에게로 향하고, 쿨락과 단호하게 싸우고, 농촌에서 산업화, 계급적 협동조합, 계급적 신용대부 체계를 향한 진로를 정함으로써만 중농을 농업의 사회주의적 전환 임무로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다.

      실천적 제안

      지금 농촌에서 벌어지고 있는 계급투쟁에서 당은 말로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농장노동자, 빈농, 본래의 중농 대중의 선두에 서서 이들을 쿨락의 착취 의도에 대항해 조직해야 한다.

      농업 노동자계급一노동자계급의 일부이다一의 계급적 입장을 강화하고 확고히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산업노동자의 상태에 관한 절에서 지적한 것과 같은 일련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

      농업 신용대부가 대부분의 농촌에서 부유한 그룹의 특권이 되어있는 사태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우리는 지금도 미미한 수준인 빈농 부조기금이 자주 원래 목적을 위해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부농과 중농 그룹에 도움이 되고 있는 현재의 상황을 끝장내야 한다.

      농촌에서 개인농장의 증대는 집단농장의 더 급속한 발전으로 상쇄되어야 한다. 집단농장으로 조직된 빈농을 해마다 체계적으로 도울 기금을 예산에 계상(計上)할 필요가 있다.

      동시에 집단농장에 속하지 않은 빈농에 대해서도 과세의 완전 면제, 적당한 구획의 토지할당과 농기구 구입을 위한 신용 제공, 농업협동조합 참여 유도를 통해 좀 더 체계적인 도움을 주어야 한다. 계급적 내용을 완전 결여하고 있으며, 실제로 농촌 상층부의 지배적 역할의 강화시킬 '소비에트를 활성화시킴으로써 무당파 농민활동가 중핵을 창출하라'는 슬로건(스탈린-몰로토프) 대신에 우리는 농장노동자, 빈농, 그리고 빈농에 가까운 중농 사이에서 무당파 활동가 중핵을 형성하라는 슬로건을 채택해야 한다.

      우리는 선거, 조세 캠페인, 신용이나 농기계 등의 분배 조정, 토지 구획과 그 이용, 협동조합 수립, 빈농에 할당된 협동조합 수립을 위한 기금의 활용 등과 같은 대단히 중요한 정치적, 경제적 문제들에 집중한 실질적, 계획적, 보편적, 영속적 빈농조직이 있어야한다.

      당은 모든 수단을 통해, 즉 사려 깊은 곡물 가격정책을 실시하고, 중농이 접근하기 쉬운 신용대부와 협동조합을 조직하고, 가장 수가 많은 이 농민층에게 기계화된 대규모 집단농업의 이로움을 체계적, 점진적으로 알리는 것을 통해 중농의 경제적 향상을 촉진해야 한다.

      증대하고 있는 쿨락 계층과 관련한 당의 임무는 이들의 착취 시도를 모든 측면에서 제한하는 것이어야 한다. 착취 분자들에게서 소비에트 선거권을 박탈하고 있는 헌법조항으로부터 어떠한 일탈도 허용돼서는 안 된다. 다음과 같은 조치가 필요하다 : 대폭적인 누진과세 제도, 농촌의 고용노동자 보호와 농업노동자의 임금을 조정하기 위한 입법 조치, 토지 구획과 이용과 관련한 올바른 계급적 정책, 농촌에 트랙터나 다른 생산기구를 공급하는 것에 대해서도 같은 정책이 필요하다.

      농촌에서 증대하고 있는 토지 임대제도, 현재의 토지이용 방식, 농촌공동체一더욱 더 쿨락의 영향을 받고 있으며, 소비에트의 지도와 통제범위 밖에 있는一에 의한 토지의 처분, 토지 재분할시의 '배상금'에 대한 제4차 소비에트 대회가 채택한 결의문一이 모든 것은 토지 국유화의 토대를 침식하고 있다.

      토지 국유화를 강화하기 위한 가장 본질적인 조치 가운데 하나는 이런 농촌공동체를 국가의 지방기관에 종속시키고, 토지구획, 이용과 관련한 모든 문제에 대해 쿨락이 제거된 지방소비에트의 확고한 통제권을 확립하는 것이다. 이 통제의 목적은 쿨락의 발호로부터 빈농과 하층 중농의 이해를 최대한 옹호하는 것이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경험에 기초하여 우리는 농촌공동체에 대한 쿨락의 지배를 없애기 위해서 일련의 보완 조치를 강구해야 한다. 특히 지주인 쿨락을 농촌에서 소비에트 권력기관의 감독과 통제에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전면적이고 무조건적으로 복종시킬 수 있는 조치가 필요하다.

      당은 노동자계급 독재의 대들보 가운데 하나인 토지 국유화의 폐기 또는 침식시키는 기미가 있는 모든 경향에 대해서 충격적인 타격을 퍼부어야 한다.

      단일 농지세(a single agricultural tax)라는 현행 제도는 대부분의 중농에게 추가적인 세금을 부과하는 일 없이, 극빈농가와 영세농가의 40-50%에 대한 모든 과세를 면제하는 방향으로 바뀌어야 한다. 세금 징수일은 하층 납세자 그룹의 사정(私情)에 맞춰야 한다.

      국영농장과 집단농장을 설립하기 위해서는 상당히 많은 금액이 예산에 계상되어야 한다. 신설된 집단농장이나 그 밖의 집산주의 형태에 대해서 최대한의 편의가 제공되어야 한다. 선거권을 박탈당한 사람들이 집단농장의 구성원이 되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 협동조합의 모든 활동은 소규모 생산을 집단적 대규모 생산으로 전환시킨다는 목표를 세워야 한다. 농기계 공급 분야에서 확고한 계급적 정책이 수행되어야하며, 농기계 공급을 미끼로 사기 치는 집단에 대한 각별한 투쟁이 수행되어야한다.

      토지 구획에는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무엇보다도 토지는 집단농장과 빈농가에 할당되어야 한다. 이들의 이해가 최대한 보호되어야한다.

      곡물이나 다른 농산품의 가격은 빈농과 본래의 중농 대중에게 적어도 현재 수준을 유지하면서 서서히 이를 개선할 가능성을 보증해야 한다. 가을과 봄 사이에 곡물 가격의 불균형을 없애기 위한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 이 불균형은 빈농에게 크게 불리해서 상층에게만 득이 되기 때문이다.

      빈농기금의 지출을 대폭 증액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빈농과 하층 중농에게 저리 장기 신용대부를 제공하고, 담보와 신원보증인을 요구하는 현행 제도를 철폐하도록 농업신용의 목표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

      협동조합에 대하여

      농촌에서 사회주의의 건설 임무는 기계화된 대규모 집단적 생산 노선을 따라 농업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대부분의 농민에게 이를 위한 가장 간단한 길은 레닌이 ‘협동조합에 대하여’(On Cooperation)라는 글에서 서술한 것처럼, 협동조합이다. 이것은 노동자 독재와 소비에트체제 전체가 농민에게 제공하는 거대한 이점이다. 증대하는 농업의 산업화 과정만이 이러한 사회주의적 협동조합(또는 집산주의)의 광범한 토대를 놓을 수 있다. 생산방식의 기술혁명 없이 즉, 농기계 없이, 윤작(輪作) 없이, 인조비료 없이 농업의 진정한 집산주의 쪽으로는 좋은 결과나 주요한 성과를 거둘 수 없다.

      구입/판매 협동조합은 다음과 같은 경우에만 사회주의로 가는 길이 될 것이다 : (1) 이 과정은 특히 대공업과 노동조합의 사회주의자 부위의 직접적인 경제적, 정치적 영향을 받아 전개된다. (2) 농업협동조합의 판매 기능을 하는 이 과정은 서서히 농업 자체의 집산주의를 이끈다. 농업 협동조합의 계급적 성격은 협동조합에 속하는 다양한 농민 그룹의 수적 비중뿐만 아니라 특히 이 그룹들의 상대적인 경제적 비중에 따라서도 결정될 것이다. 당의 임무는 농업협동조합이 빈농과 중농 그룹의 진정한 조합이 되도록 조치하는 것이며, 이 조합이 증대하는 쿨락의 경제력에 대항하는 투쟁에서 이들 부위의 무기가 되도록 조치하는 것이다. 우리는 농업 노동자계급을 협동조합을 수립하는 임무에 체계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성공적인 협동조합의 조직화는 참여자가 자주적 진취성을 최대한 누리는 경우에만 생각할 수 있다. 대공업, 노동자국가와 협동조합의 적절한 관계는 관료적인 규제 방식을 제외한 협동조합 조직의 정상적 체제를 전제로 한다.

      농촌에 대한 볼셰비키주의의 근본 방침으로부터 당 지도부의 명백한 일탈, 즉 부유한 농민과 쿨락에 의지하는 그 경향 때문에, '빈농의 환상', '식객 근성', '무사안일주의', 따라서 빈농은 소비에트연방을 방어하는 것을 내켜하지 않는 것으로 추정하는 반(反)노동자적 발언으로 이 정책을 은폐하고 있기 때문에一이런 사정 때문에, 우리 당 강령의 약속을 상기하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하다. 강령은 우리에게 중농과의 동맹이 가지는 결정적 중요성을 모호하지 않게 주장하는 동시에, 다음과 같이 뚜렷하고 간결하게 밝히고 있다 : '농촌에 대한 활동에서 러시아공산당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농촌의 노동자, 반(半)노동자 집단의 지지를 구한다. 무엇보다도 이들을 독자적인 세력으로 조직하고, 농촌에서 당 세포, 빈농 조직, 농촌의 노동자와 반(半)노동자를 위한 특수한 유형의 노동조합 등을 창출하며, 이들을 더욱 도시 노동자계급과 접촉시키고, 농촌 자본가계급과 소(小)소유자적 이해관계의 영향으로부터 해방시킨다.'

       

      제4장 국영기업과 사회주의 건설

      산업 발전의 속도

      '농업을 개혁할 수 있는 기계제 대공업이 사회주의를 실행할 수 있는 유일한 물질적 기초이다.'(레닌, '공산주의인터내셔널 제3차 대회 - 러시아공산당의 전술 보고를 위한 테제', 《전집》, 제32권, 459쪽)

      현재 초기 단계에 있으며, 현재 처한 역사적 상황一자본주의의 포위와 세계혁명의 지연一에서 사회주의 발전의 기본적 조건은 가까운 장래에 적어도 다음과 같은 문제의 해결을 보장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급속한 산업화의 속도이다.

      1. 국내에서 노동자계급의 물질적 지위는 절대적으로나 상대적으로도 강화되어야 한다(취업 노동자 수의 증대, 실업자 수의 감소, 노동자계급의 물질적 수준의 개선, 특히 기본적 후생 기준에 맞도록 1인당 주거 공간을 늘리는 것).

      2. 공업, 운수, 발전소는 성장하는 경제적 잠재력에 뒤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나라 전체의 증대하는 수요와 보조를 맞추기 위해 작동을 늘려야 한다.

      3. 농업은 공업에 원료를 확대 공급할 수 있도록 더 높은 기술 수준에 이를 수 있어야 한다.

      4. 생산력의 발전, 기술적 진보, 노동자계급과 근로대중의 더 높은 생활수준과 관련하여 소비에트연방은 앞으로 자본주의 국가들에 점점 더 뒤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따라잡아야 한다.

      5. 산업화는 국가의 방어, 특히 군수산업의 적절한 성장을 보증할 정도로 충분해야한다.

      6. 사회주의, 국가소유, 협동조합 요소들은 전(前)사회주의적 경제 요소(자본주의적 요소와 전(前)자본주의적 요소)들을 일부는 밀쳐내고, 다른 일부는 종속시키고 전환시키면서 체계적으로 강화되어야 한다.

      공업 전화(電化) 운수 분야의 상당한 성공에도 불구하고 산업화는 필수적이고 가능한 발전 수준에는 훨씬 못 미치고 있다. 산업화의 현재 속도와 다가올 몇 년 동안 예시된 속도는 분명히 불충분하다.

      물론 우리에게 우리의 모든 어려움을 일거에 해결할 기회를 주거나, 우리의 경제적, 문화적 수준의 체계적인 향상을 단기간에 끝낼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은 있지도 않고, 또 있을 수도 없다. 그러나 우리의 경제적, 문화적 후진성이야말로 우리나라의 가능한 한 가장 빠른 산업화를 위해서 우리의 축적된 모든 여력의 합리적이고 시기적절한 동원, 우리가 가진 모든 자원의 올바른 활용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인구 증가, 경제, 사회시스템 전체의 필요와 요구에 대한 운수 전화(電化) 건설뿐만 아니라 공업의 만성적 뒤처짐은 나라의 경제적 순환 전체를 무시무시한 바이스처럼 꽉 죄고 있다. 시장성이 있는 일부 농업 생산물의 판매와 수출이 줄고 있다. 수입은 아주 좁은 범위로 제한되어, 물가와 생산원가를 끌어올린다. 또한 체르보네츠(chervonetz)의 불안정성을 초래하고, 생산력 발전을 더디게 한다. 노동자와 농민 대중의 물질적 상태의 모든 개선을 지연시킨다. 실업의 위험한 증대와 주택 사정의 악화를 초래한다. 공업과 농업의 유대를 위태롭게 하고, 나라의 방어능력을 약화시킨다.

      불충분한 공업 발전의 템포는 동시에 농업의 성장 지연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농업에서 생산력 수준을 결정적으로 끌어올리고, 시장에 내다 팔 농업 생산물을 늘리지 않고는 어떠한 산업화도 불가능하다.

      물가

      공산품의 생산원가와 도매, 소매가격을 체계적이고 단호하게 낮추고, 세계시장 가격에 보다 접근시키지 않고는 산업화에 필요한 가속도가 붙을 수 없다. 이것은 더 높은 기술적 수준에서 우리의 생산을 촉진하고, 노동자 대중의 요구를 더 잘 만족시킨다는 의미 모두에서의 진정한 발전을 의미할 것이다.

      반대파가 물가를 올리고 싶어 하는 것으로 추정하는 무의미하고 볼썽사나운 항의에 종지부를 찍어야 할 때가 되었다. 물가를 낮추고 싶어 하는 점에서 당은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바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정책은 그 의도가 아니라 결과로 판단되어야 한다. 물가를 낮추려는 현재 투쟁의 결과는 지도부의 관록 있는 위원조차 이 정책으로 거액의 돈을 날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을 여러 차례 제기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올해 1월에 부하린은 ‘10억 루블이 어디로 갔는가?’라고 캐물었다. 같은 주제에 대해 그에 뒤이어 발언한 루주타크는 '도매가격과 소매가격의 차이는 어떻게 되는가?'라고 물었다(1927년 3월 3일 정치국 의사록, 20~21쪽). 상품의 만성적 부족을 고려하면, 도매가격을 대폭, 그것도 관료적으로 투박하게 인하해도 그 혜택은 대부분의 경우 노동자와 농민에게까지 미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국영기업이 몇 억 루블씩 손실을 입는 것으로 끝난다. 도매가격과 소매가격의 협상가격차, 특히 사적 무역업자가 관련된 곳에서 필연적으로 확대되는 협상가격차는 너무 어처구니없기 때문에 올바른 정책을 따른다면 이 상업 이윤의 일부를 국영기업이 통제하는 것은 전적으로 가능할 것이다. 지난 몇 년 동안의 경제적 경험 전체에서 나오는 부정할 수 없는 결론은 가격 불균형을 가능한 한 신속히 극복하고, 공산품의 생산량을 늘리고, 공업의 발전 속도를 늘려야 할 필요성이다. 이것이 도매가격과 소매가격을 실질적으로 낮추는, 특히 최근에 하강보다는 상승 경향을 나타낸 생산원가 인하에 이르는 주요한 길인 것이다.

      국가계획위원회의 5개년 계획(1926~27년도에서 1930~31년도)

      다가오는 제15차 당 대회의 의제인 국민경제 발전 5개년 계획의 문제는 당연히 당의 주의를 끄는 초점이 되어야 한다. 국가계획위원회의 5개년 계획은 아직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않은 문서이며, 현재 형태로는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문서는 현 경제지도부의 주요 방침에 대한 가장 체계적이고 완성된 표현을 제공하고 있다.

      이 계획에 따르면, 공업에 대한 자본투자는 매년 거의 증가하지 않을 것이다(내년에 11억4,200만 루블, 1931년에는 12억500만 루블). 그 결과, 국민경제에 대한 총 투자액에 비례하여 36.4%에서 27.8%로 하락할 것이다. 이 계획에 따르면, 국가예산에서 공업에 대한 순 투자액은 같은 기간에 대략 2억 루블에서 9,000만 루블로 하락할 것이다. 연간 생산 증가율은 전해에 비해 해마다 4~9%로 정해져 있다. 이는 자본주의 국가들의 벼락경기 중에 볼 수 있는 성장률이다. 토지 · 생산수단 · 은행의 국유화와 중앙집중적인 관리에서 비롯하는 거대한 이점一즉, 사회주의 혁명에서 나오는 이점一이 5개년 계획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다.

      현재도 빈약한 공산품의 개인적 소비는 5개년 내내 12%밖에 늘어나지 않는다. 1931년에 면직물의 소비는 전전(戰前) 수준의 97%에 이르는 데, 이는 1923년에 미국이 소비한 수준의 5분의 1 정도일 것이다. 석탄 소비는 1926년 독일 소비량의 7분의 1, 1923년 미국 소비량의 17분의 1 정도일 것이다. 선철 소비는 독일 소비량의 4분의 1보다 약간 많은 정도, 미국 소비량의 11분의 1 정도일 것이다. 전력 생산은 독일의 3분의 1, 미국의 7분의 1 정도일 것이다. 종이 소비는 5개년 계획의 마지막 해에 전전(戰前) 수준의 83%에 이를 것이다. 이 모든 것이 10월혁명 15년 뒤의 일이다! 10월혁명 10주년 기념일에 즈음하여 이렇게 빈약하고 철저하게 비관적인 계획을 제출하는 것은 정말로 사회주의에 역행하는 것이다. 5개년 계획이 예상한 것처럼, 17%의 소매가격 인하가 실현되더라도 우리나라의 가격과 세계시장의 가격(우리나라의 가격보다 2.5배에서 3배 낮다)사이의 관계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미미한 가격 인하에도 불구하고(게다가 아직까지는 추정에 지나지 않는다) 5개년 계획은 국내의 유효수요와 관련하여 매년 4억 루블의 값어치가 있는 공산품의 부족을 예측한다. 만약 현재의 소름 끼치는 도매가격이 5개년에 걸쳐 22% 인하될 것이라고 추정하면,一적당한 인하 폭 이상이다ㅡ이것만으로도 전부 10억 루블에 달하는 상품 부족을 낳을 것이다. 따라서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은 잘 지켜져, 소매가격을 다시 상승시킬 지속적인 원천이 될 것이다. 5개년 계획은 농민에게 1931년까지 대략 전전(戰前) 분량의 공산품을 1.5배 높은 가격에 제공할 것이라고 약속한다. 대기업 노동자에게는 가격 인하에 대한 근거 없는 기대를 제외하고는, 5개년에 걸쳐 명목임금의 33% 인상을 약속한다. 국가계획위원회의 계획에 따르면,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은 노동자가 현재 지불하는 집세를 2~2.5배, 대략 연 4억 루블 인상하는 것으로 극복할 수 있다. 주민의 부유한 계층이 어느 정도 초과적인 구매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국계획위원회의 관료들은 노동자의 실질임금 삭감으로 상황을 반전시키려 하고 있다. 노동자국가의 책임 있는 기관이 시장의 균형을 이루기 위해 이러한 방식을 제안했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이런 완전히 잘못된 전망이 소비자로 하여금 대외무역의 독점을 폐기하는 파멸적인 방식을 통해 우격다짐으로 해결책을 찾게 하는 것이다.

      5개년 계획에서 예측한 6,000~7,000베르스타(1베르스타는 1.067km)의 새로운 철도 부설은一예를 들면, 1895~1900년 5년 동안 1만4,000베르스타가 부설된 것에 비해一사회주의적 산업화의 관점에서뿐만 아니라 주요지역의 가장 기본적인 경제적 요구의 관점에서도 위태로울 정도로 불충분할 것이다.

      이런저런 방향에서 약간의 조정을 감안하더라도 이것이 우리 경제를 맡고 있는 정부기관의 근본적 방침이다. 실제로 조사해본 현 지도부의 정치노선이란 이런 것이다.

      소비에트연방과 세계자본주의 경제

      화해 불가능한 적대적 두 사회체제一자본주의와 사회주의一사이의 장기간에 걸친 투쟁의 결과는 결국 각 체제에 상관적인 노동생산성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그리고 시장 상황에 영향을 받는 이 노동생산성은 국내가격과 세계가격 사이의 관계로 측정된다. 레닌이 마지막 연설 가운데 하나에서 '우리가 종속되어 있고, 관련되어 있으며, 우리 스스로 끊을 수 없는 국제시장과 러시아시장'에 의해 부과될 '시험'(레닌, '러시아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정치보고'(제11차 당 대회), 《전집》, 제33권, 276-277쪽)에 대해 당에 경고 했을 때, 그가 염두에 둔 것은 이런 기본적인 사실이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가 어떤 속도로든, 심지어 '달팽이의 속도'로라도 사회주의를 향해 나아간다는 부하린의 견해는 진부하고 생기가 없는 소부르주아적 환상이다.

      우리는 일국에 한정된 경제에 틀어박힘으로써 자본주의의 포위에서 벗어날 수 없다. 바로 그 폐쇄성 때문에 이러한 경제는 대단히 완만한 속도로 발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결과, 자본주의 육군과 해군('간섭')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값싼 자본주의 상품의 더 약해진 것이 아니라 더 강해진 압력에 부닥칠 것이다.

      자본주의 국가들의 기술 수준이 더 높은 상황에서, 대외무역의 독점은 사회주의 건설의 사활에 관계될 만큼 필수적인 수단이다. 그러나 지금 건설 중인 사회주의 경제는 오직 이 사회주의 경제가 기술, 생산원가, 생산품의 질과 가격 면에서 끊임없이 세계경제의 일반적인 수준에 더 가까워질 경우에만 이 독점에 의해 방어될 수 있다. 경제 관리의 목표는 불가피하게 낮은 수준과 발전 속도를 대가로 치르고 폐쇄적이고 자급자족적인 경제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우리의 발전 속도를 최대한 높임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으로,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우리의 상대적 비중을 모든 면에서 늘리는 것이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다음의 것이 필요하다.

      1. 수출의 크나큰 의의를 이해하는 것. 수출은 현재, 우리의 경제발전 전체를 위태롭게 할 정도로 뒤처져 있다(세계무역에서 차지하는 소련의 시장점유율은 1913년의 4.2%에서 1926년에는 0.97%로 떨어졌다).

      2. 특히 쿨락에 대한 우리의 정책을 바꾸는 것. 이 정책은 쿨락으로 하여금 생산물을 고리대금업자 같이 축적하게 함으로써 사회주의적 수출의 기초를 위태롭게 할 수 있다.

      3. 모든 방식으로 산업화를 촉진하고, 우리 경제의 자본주의적 요소에 대립하는 것으로서 사회주의적 요소를 강화함으로써 세계경제와 우리의 관계를 발전시키는 것.

      4. 앞으로 우리의 빈약한 축적여분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필요하고 가장 손쉽게 획득한 새로운 유형의 기계 생산一특히 대량생산ㅡ에 서서히, 그리고 신중한 계획을 가지고 투자하는 것.

      5. 세계자본주의의 기술적 성과를 체계적으로 이용함으로써 우리의 산업을 능숙하고 슬기롭게 보완하고 자극하는 것.

      사회주의의 고립적 발전이나 세계경제와 무관한 발전 속도를 지향하는 것은 전체 전망을 왜곡한다. 이는 우리의 계획적인 노력을 탈선시켜 세계경제와 우리의 관계를 올바르게 관리하기 위한 어떠한 지침도 제공해주지 못한다. 그 결과, 우리 스스로 생산할 것과 외국에서 들여와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결정할 다른 방도가 없게 된다. 고립된 사회주의 경제 이론에 대한 단호한 거부는 다음 몇 년 사이에 비교도 안될 만큼 더 합리적인 자원의 이용, 더 급속한 산업화, 우리나라 기계공업의 더욱 더 계획적이고 강력한 성장을 의미할 것이다. 이는 취업노동자 수의 더 급속한 증가와 물가의 실질적인 저하를 의미할 것이다. 요컨대, 자본주의의 포위에도 불구하고 소비에트연방을 진정으로 강화시킬 것이다.

      세계자본주의와 우리의 관계가 증진되면 봉쇄나 전쟁이 일어날 위험을 앉게 되는 것은 아닌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앞에서 말해온 모든 것에서 나온다.

      물론 전쟁 준비는 해외 원료의 전략적 비축과 예를 들면, 알루미늄 생산 등과 같은 절대로 필요한 새로운 산업의 적시(適時) 구축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장기간에 걸친 심각한 전쟁의 경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산업을 최고도로 발전시키고, 대량생산 능력과 한 가지 생산으로부터 다른 생산으로 기민하게 전환하는 능력 모두를 보유하는 것이다. 최근 역사가 입증한 것처럼, 세계시장에 수천가닥으로 묶여있던 독일 같은 고도로 산업화된 나라는 비록 전쟁과 봉쇄가 전 세계와의 관계를 일거에 끊어버렸더라도 대단한 생명력과 저항력을 보여주었다.

      만약 우리 사회체제의 비길 바 없는 이점으로 인해 이 '평화로운' 시기에 우리의 산업발전을 촉진하기 위해 세계시장을 이용할 수 있다면, 우리는 훨씬 더 잘 준비되고 더 잘 무장한 어떠한 봉쇄나 간섭에도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국내정책만으로는 자본주의가 둘러싸고 있는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킬 수 없다. 국내의 과제는 진정한 계급 정책 즉,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진정한 관계에 따라 우리 스스로를 강화시킴으로써 사회주의 건설의 길을 가능한 한 앞당기는 것이다. 소비에트 연방의 국내 자원은 엄청나서 이를 전적으로 가능하게 한다. 이런 목적에서 우리는 세계자본주의 시장을 이용함과 동시에 우리의 근본적인 역사적 예측을 향후 세계 노동자혁명의 발전과 계속 결부시키는 것이다. 선진국에서 노동자혁명의 승리는 자본주의의 포위망을 깨뜨리고, 우리를 견디기 힘든 군사적 부담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우리를 기술적으로 엄청나게 강화시키고, 도시와 농촌, 공장과 학교 등에서 우리의 모든 발전을 가속화시킬 것이다. 그리고 사회주의一즉, 최고의 기술 수준, 그리고 노동과 이 노동의 성과를 누리는 것 모두에서 모든 사회 구성원의 진정한 평등에 기초한 무계급사회一를 실제로 건설할 가능성을 우리에게 제공할 것이다.

      어디에서 수단을 찾을 것인가

      진정한 산업화 문제의 더 대담하고 더 혁명적인 해결, 대중의 문화적 수준의 더 급속한 향상 一이 두 문제의 해결이야말로 사회주의 독재의 운명을 좌우한다一을 위한 수단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반대파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근본적 원천은 예산, 신용, 물가의 적절한 운용을 통해서 국민소득을 재분배하는 것이다. 보완적 원천은 세계경제와 우리의 관계를 적절히 활용하는 것이다.

      1. 5개년 계획에 따르면, 국가와 지방 모두 예산은 5년에 60억 루블에서 89억 루블로 증가하고, 1931년에는 국민소득의 16%에 이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전전(戰前) 제정시대의 예산이 국민소득에서 차지한 비율(18%)보다 더 적다. 노동자국가의 예산은 부르주아국가의 예산보다 국민소득에서 더 큰 위치를 차지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차지해서도 안 된다. 물론 이것은 예산이 실제로 사회주의적이며, 보통교육을 위한 지출 증대와 함께 우리나라의 산업화에 대해서 훨씬 더 많은 금액의 책정을 당연시한다. 산업화 필요를 위한 예산에서 순 충당금은 다음 5년 동안 연 5~10억 루블에 이를 수 있고, 또 그렇게 될 것이다.

      2. 조세제도는 농민 상층과 새로운 자본가계급 일반의 축적 증대를 따라가지 못한다. 필요한 것은 (ㄱ) 사기업의 모든 초과이득에 과세하여 현재처럼 500만 루블이 아니라, 적어도 1억5,000만~2억 루블까지 징수하는 것. (ㄴ) 수출을 강화하기 위해 전 농가의 약 10%를 이루고 있는 부유한 쿨락 계층으로부터 적어도 1억5,000만푸드(1푸드는 16.38kg, 270만 
      톤)의 곡물을 징수하는 것. 이는 1926~27년도에 8~9억 푸드(1,440만 톤 에서 1,620만 톤)에 이른 곡물 비축분에서 대부(貨付) 형태로 징수되어야 한다. 이 비축분의 대부분은 농민 상층의 수중에 집중되어 있다.

      3. 도-소매가격의 체계적이고 꾸준한 인하, 도-소매가격의 '협상가격차'를 줄이는 단호한 정책이 실제로 실시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물가 인하가 무엇보다도 노동자와 농민 대중이 필요로 하는 소비재에 적용되는 방향으로 수행되어야 한다(이것은 현재의 관행과는 달리 이미 충분히 낮은 품질을 떨어뜨리는 일 없이 수행되어야 한다). 이 물가 인하는 국영기업이 필요로 하는 축적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 주로 상품 생산량의 증대, 생산원가의 인하, 간접비의 축소, 관료기구의 축소를 통해서 수행 되어야 한다. 더 탄력적이고, 시장 상황에 더 적합하며, 더 특화된一즉, 각 상품의 시장 지위를 더욱 고려하는一물가 인하 정책은 현재 대체로 사적 자본과 상업적 기생주의를 조장하는 상당한 금액을 국영기업의 수중에 계속 놓아둘 것이다.

      4. 작년에 스탈린과 리코프가 발표한 바에 따르면, 연 3~4억 루블을 절감시킬 것으로 추정된 효율적 체제는 실제로 완전히 보잘것없는 결과를 낳았다. 효율적 체제는 계급정책의 문제이고, 대중의 직접적인 압력을 받아야만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노동자는 대담하게 이런 압력을 행사해야 한다. 비(非)생산적 지출을 연 4억 루블 줄이는 것은 전적으로 가능하다.

      5. 대외무역의 독점, 대외채권, 이권, 기술 원조를 보장하는 협약등과 같은 수단의 능숙한 이용은 추가적인 밑천이 될 수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자체 지출의 효율성을 크게 높이고, 최신 기술을 통해 그 효과를 배가시키고, 우리의 발전과정 전체를 가속화시킬 수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포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진정한 사회주의적 독자성을 강화시킬 것이다.

      6. 인원 선발一머리부터 발끝까지一과 이들 사이의 적절한 관계 문제는 어느 정도는 재정적인 문제이다. 인선이 잘못되면 그만큼 더 많은 자금이 필요해진다. 관료체제는 적절한 인원 선발과 이들 사이의 적절한 관계와 배치된다.

      7. 현 경제 지도부의 '추종주의'는 실제로 수 천만 루블의 손실을 의미 한다. 이는 통찰력 결여, 불협화음, 좀스러움, 꾸물거림에 대한 대가이다.

      8. 세금 수입만으로는 계속 성장하고 있는 우리 경제의 수요를 감당할 수 없다. 신용은 사회주의 건설 목표에 맞게 국민소득을 재분배하려는 더욱 더 중요한 지렛대가 되어야 한다. 이는 무엇보다도 안정된 통화와 건전한 화폐 유통을 가정한다.

      9. 투기와 고리대금의 범위를 제한하는 것과 같은 경제에 대한 더 확고한 계급정책은 국가기관과 신용기관의 개인저축 동원을 더 쉽게 할 것 이다. 이는 공업에 장기신용으로 현재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더 폭넓은 자금조달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10. 보드카의 국가 전매는 원래는 전매 수입의 대부분을 산업화, 주로 금속산업의 복구에 충당하려는 목적을 가진 하나의 실험으로 도입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보드카의 국가 전매를 통한 산업화는 결과적으로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 실험이 완전히 실패한 것으로 판명되었음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소비에트체제에서 보드카의 국가 전매는一짜르체제에서도 그랬던 것처럼一개별 가계의 관점에서 뿐만 아니라 주로 국영 기업의 관점에서도 반작용적인 요인이다. 결근, 불량품, 낭비, 사고, 화재, 싸움, 부상 등의 증가ㅡ이런 것들이 연간 몇 억 루블의 손실을 더하고 있다. 보드카로 인한 국영기업의 손해는 보드카로 인한 세입에 못지않고, 공업이 배정받는 예산보다 몇 배 더 많다. 되도록 빨리(2~3년 안에) 보드카의 국가 전매를 폐지하는 것이 산업화의 물질적, 정신적 자원을 자동적으로 증대시킬 것이다.

      이것이 수단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대답이다. 산업화의 완만한 속도가 자원 부족에서 직접적으로 기인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수단이 부족하지만 존재한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올바른 정책이다.

      국가계획위원회의 5개년 계획은 '신경제정책(NEP)의 러시아를 사회주의 러시아로 바꾸는' 임무와 근본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명확히 거부되고, 규탄 받아 마땅하다. 우리는 계급 사이에서 실제로 조세 부담의 재분배ㅡ쿨락과 네프맨에게는 더 무거운 부담을 지우고, 노동자와 빈농은 부담을 덜도록ㅡ를 수행해야 한다.

      간접세의 상대적 비중을 축소시켜야 한다. 가까운 장래에 보드카의 국가 전매를 폐지해야 한다.

      철도 수송서비스의 재정을 개선해야 한다.

      산업의 재정을 개선해야 한다.

      등한시한 임업의 활력을 회복시켜야 한다. 임업은 거대한 수입원이 될 수 있고, 또 될 것임에 틀림없다.

      기본적인 통화 단위의 무조건적인 안정을 보증해야 한다. 체르보네츠의 안정화는 한편으로 물가 인하와, 다른 한편으로 균형 예산을 필요로 한다. 예산 결손을 메우기 위한 지폐 발행이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예산은 결손 없이, 엄격히 목적이 정해져 있어야 하며, 불필요하거나 우연적인 것은 모두 가차 없이 용납하지 않아야한다.

      1927~28년도 예산에서 국방(주로 군수산업을 위한), 산업 일반, 전화(電化), 운수, 주택 건설, 농업 집단화로 이어질 조치를 위한 지출을 훨씬 증액해야 한다.

      대외무역의 독점을 손상시키려는 모든 기도에 단호히 반대해야 한다.

      경제를 기술적으로 더 강력하게 만들고, 대중의 물질적 상태를 개선시킨다는 목표로 산업화, 전화(電化), 합리화를 위한 확고한 방침을 정해야 한다.

       

      제5장 소비에트

      그 국가 형태와 무관하게 모든 부르주아 국가의 관료기구는 주민 위에 우뚝 서서, 지배계급 특유의 상호 보호체제를 통해 관료집단을 묶고, 노동자 사이에 지배자에 대한 공포와 복종을 체계적으로 조장한다. 구 국가기관을 노동자 농민 병사 소비에트로 대체시킨 10월혁명은 관료국가의 오랜 우상에 역사상 가장 강력한 타격을 가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우리 당의 강령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관료주의에 대해 가장 단호한 투쟁을 수행하는 러시아공산당은 이 폐해를 완전히 극복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조치를 취한다. (1) 소비에트의 모든 구성원을 국가를 통치하는 특정한 임무의 수행에 의무적으로 참여시키는 것. ⑵ 결국 모든 통치 부문을 책임지기 위해 이러한 임무를 정기적으로 돌아가며 수행하는 것. (3)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모든 근로 주민을 국가를 통치하는 임무에 점진적으로 참여시키는 것. 이 모든 조치의 완전하고 철저한 실현一빠리꼬뮌이 타오른 자국을 따라 한걸음 더 나아가는 것을 의미하는ㅡ모든 노동자의 문화적 수준의 향상과 더불어 모든 통치 기능의 간소화는 국가의 폐지를 가져올 것이다.' 소비에트 관료주의의 문제는 단지 형식적 절차나 비대해진 인원의 문제가 아니다. 근본적으로는 관료집단이 수행한 계급적 역할의 문제이다. 즉, 관료집단의 사회적 유대와 공감, 그 권한과 특권적 지위, 관료가 네프맨과 미숙련노동자, 지식인과 문맹자, 소비에트 고관의 부인과 가장 무지한 농촌여성 등에 대해 맺고 있는 관계의 문제인 것이다. 관료는 누구의 손을 잡고 있는가? 이것이 수많은 근로인민이 매일 겪는 생활 속에서 검증하고 있는 근본적 문제인 것이다.

      10월혁명 직전에 레닌은 빠리꼬뮌에 대한 마르크스의 분석을 언급(〈국가와 혁명〉, 제6장 기회주의자들에 의한 마르크스주의의 속류화를 보라)하면서 다음과 같은 생각을 확고하게 강조했다.

      '사회주의에서 공무원들은 이미 "관료"나 "관리"(chinovniks : 짜르 시대의 고위관리)가 아닐 것이다. 이들은 선거가 즉각적인 소환권으로 보완되는 한, 이밖에도, 이들의 급료를 노동자의 평균임금 수준으로 끌어내린다면, 이밖에도, 의회기관이 "활동하는 기관", 즉 법률을 통과시키고 이를 실행에 옮기는 것 둘 다를 하는 기관으로 대체된다면, 그렇게 될 것이다.'(레닌,〈국가와 혁명〉,《전집》, 제25권, 492쪽의 번역은 적절하지 않다)

      소비에트 국가의 기구는 최근에 어떤 방향으로 발전해왔는가? 간소화와 비용을 낮추는 방향인가? 노동자화의 방향인가? 도시와 농촌의 근로대중에게 가까워지고 있는가?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격차를 줄이고 있는가? 생활조건, 권리와 의무에서 더 많은 평등을 도입하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하겠다는 입장인가? 이런 범위에서 우리는 전진하고 있는가? 이런 질문 가운데 어느 것 하나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답변할 수 없다는 것은 아주 명확하다.

      물론 실제적이고 완전한 평등은 계급이 폐지되는 경우에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신경제정책(NEP) 시기에 평등화 임무는 저지되고 지연되기는 했지만 폐기되지는 않았다. 우리에게 신경제정책(NEP)은 자본주의로 가는 길이 아니라 사회주의로 가는 길이다. 따라서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모든 근로주민을 국가를 통치하는 임무에 점진적으로 참여시키는 것이나 더 많은 평등을 위한 체계적인 투쟁은 신경제정책(NEP) 아래에서도 여전히 당의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임무이다. 이 투쟁은 나라의 증대하는 산업화와 모든 물질적, 문화적 건설 부문에서 노동자계급의 지도적인 역할 증대에 기초해서만 성공을 거둘 수 있다. 더 많은 평등을 위한 투쟁은 이행기에 부르주아 국가들에서보다 숙련노동자에게 더 높은 임금을 지급하고, 전문가의 보수를 인상하며, 교사들에 대해 더 많은 급료를 주는 것 등을 배제하지 않는다.

      관료집단이 최근 몇 년 사이에 그 수가 늘어났다는 것을 숙지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스스로를 공고히 하고, 일반주민 위로 발돋움하여, 도시와 농촌의 부유한 분자들과 긴밀하게 맞물리고 있다. 많은 착취분자에 선거권을 부여한 1925년의 '훈령'은 그 최상층까지 관료기구가 부를 축재하고 있는 부유해진 상층 분자들의 집요한 요구에 민감해졌다는 사실의 가장 명백한 표현의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실제로 소비에트 헌법을 위반한 이 훈령이 취소된 것은 반대파의 비판 때문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훈령에 따라서 실시된 첫 선거에서는 선거권을 박탈당한 부유한 그룹의 인원수를 가능한 한 많이 줄이려는 의도가 위로부터 조장되었다는 것이 많은 지역에서 벌써부터 나타났다. 그러나 이것도 문제의 핵심이 아니다. 새로운 자본가계급과 쿨락의 상대적 비중이 계속 높아지고, 관료 집단과 이들이 서로 협력함에 따라, 그리고 대개의 경우 지도부의 잘못된 정책에 따라, 심지어 선거권을 박탈당한 쿨락과 네프맨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배후에서지만 적어도 소비에트 하급기관의 구성과 정책에 여전히 영향을 미칠 수 있다.

      1925년에 시작되었으며, 부분적으로 반대파의 공격으로 저지된 하층 쿨락, '준(準)쿨락' 분자, 도시 자본가계급의 소비에트 침투 사태는 이를 무시하거나 얼버무린다면, 아주 끔찍한 결과로 인해 노동자 독재를 위협할 수도 있는 심각한 정치적 과정이다.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산업노동자와 모든 근로인민을 국가를 통치하는 임무에 참여시키기 위한 기본적 수단인 시(市)소비에트는 최근에 그 중요한 지위를 잃고 있다. 이것은 계급역관계가 노동자계급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바뀐 것을 반영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소비에트의 단순한 행정적 '재건'을 통해서 이런 현상에 대항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새로운 착취자를 단호히 격퇴하고, 예외 없이 소비에트 국가의 모든 제도와 기관에서 노동자계급과 빈농의 활력과 비중을 증진시키는 확고한 계급정책만이 이런 현상에 대항할 수 있다.

      우리 국가는 이미 그 자체로 노동자국가이기 때문에 국가가 노동자에게 바싹 다가설 것을 요구할 수 없다는 몰로토프의 '이론'(〈프라브다〉,1925년 12월 13일자)은 상상할 수 있는 관료주의의 가장 악의에 찬 정식이다. 이것은 있을 수 있는 모든 관료적 왜곡을 미리 승인하는 것이다. 소비에트 관료사회의 폭넓은 집단의 공개적이거나 암묵적 공감을 누리는 몰로토프의 이 반(反)레닌주의적 '이론'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현 지도부 아래에서는 사회민주주의적 일탈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이 '이론'과 비숫한 모든 '이론'에 대한 호된 비판은 관료적 왜곡에 대한 진정한 투쟁의 필요불가결한 조건이다. 이러한 투쟁은 단지 일정한 수의 노동자를 관료로 둔갑시키는 것이 아니라, 국가기구 전체가 일상의 모든 활동에서 노동자와 빈농에게 더 가까이 다가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관료주의에 대한 현재의 공식적 투쟁一노동자의 계급적 활동에 입각하는 것이 아니라 기구 자체의 노력으로 이를 대체하려고一은 어떤 본질적인 성과를 낳지도, 또 낳을 수도 없다. 오히려 많은 경우, 현존하는 관료주의를 촉진하고 강화한다.

      최근 각급 소비에트의 내부 생활에서도 분명히 부정적인 여러 과정이 목격되었다. 소비에트는 근본적인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문제의 해결과 점점 더 관련이 없어지고 있다. 집행위원회나 상임간부회의의 단순한 부속기관이 되고 있다. 통치 업무는 집행위원회나 상임간부회의 수중에 완전히 집중되어 있다. 각급 소비에트의 총회에서 문제에 대한 토론은 순전히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동시에 소비에트 기구의 선거 사이 기간은 점점 길어지고 있으며, 따라서 소비에트 기관의 독립성은 노동자 대중의 통제로부터 더욱 더 멀어지고 있다. 이것은 모두 모든 문제에 대한 결정에서 관료들의 영향력이 크게 확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방자치체의 중요한 행정 부문 업무는 대개 1~2명의 공산주의자 수중에 있다. 이들은 각자의 전문가와 부원을 선발하고, 대개는 이들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게 된다. 소비에트의 구성원을 올바르게 훈련시킬 수 없다. 업무를 상향식으로 이끈 적도 없다. 이 때문에 소비에트 기구들에는 숙련 노동자가 부족하다는 불평이 끊임없이 나오고, 따라서 더욱 더 관료사회로 권력이 이동하는 것이다.

      소비에트의 중요한 행정 분야에 선출된 지도자도 소비에트 의장과 충돌하자마자 해임된다. 이들이 당의 지역위원회 서기와 충돌한 경우에는 훨씬 더 빨리 해임된다. 그 결과, 선거원칙은 무용지물이 되고, 선거인에 대한 책임도 모두 의미를 잃어버린다.

      다음의 조치가 필요하다.

      1. 반(反)관료주의(chinovnichestvo) 투쟁[치놉니체스트보는 구 러시아의 매우 유해한 형태의 관료주의를 일컫는다.ㅡ옮긴이]에 대해 확고한 정책을 채택하는 것. 즉, 새로운 자본가계급과 쿨락의 착취 권력을 저지하기 위한 진정한 투쟁에 기초하여 당, 노동조합, 소비에트에서 노동자 민주주의의 견실한 발전을 위해 레닌처럼 이 투쟁을 수행하는 것.

      2. 노동자국가가一쿨락에 반대하는一노동자, 농장노동자, 빈농, 중농에 더 가까워지고, 국가기구를 근로대중의 근본적 이익에 무조건 종속시킨다는 것을 우리의 슬로건으로 삼는 것.

      3. 소비에트를 되살리기 위한 기초로서, 노동자 · 농장노동자 · 빈농 · 중농의 계급적 활동을 증진시키는 것.

      4. 시(市)소비에트를 진정한 노동자 권력 기관으로 전환시키는 것, 그리고 광범한 근로인민 대중을 사회주의 건설을 관리하는 임무로 끌어들이기 위한 도구로 전환시키는 것.一지역 집행위원회와 여기에 종속되는 기관의 활동에 대한 시(市)소비에트의 통제를 말이 아니라 실제로 실현시키는 것.

      5. 객관적, 절대적으로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면, 선출된 소비에트 관리의 해임을 완전 종식시키는 것. 해임시킬 경우에도 그 이유가 선거인들에게 이해되어야한다.

      6. 가장 후진적인 미숙련노동자와 가장 무지한 농촌여성이 어느 국가기관에서도 친절한 배려, 조언, 가능한 모든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확신할 수 있도록 조치해야 한다.

       

      제6장 민족문제

      사회주의 발전 속도의 전반적인 지체, 도시와 농촌에서 새로운 자본가계급의 성장, 부르주아 지식인의 영향력 강화, 국가기관들에서 관료주의의 증대, 개악된 당내 제도, 그리고 이것들 모두와 결부된 대국주의(great-power chauvinism)의 성장과 민족주의 일반의 활기一이 모든 것은 각 민족지역과 공화국들에서 가장 병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전(前)자본주의적 경제형태가 잔존하는 일부 공화국들에서 이런 어려움이 배가되고 있다. 신경제정책(NEP) 아래에서 사적 자본의 역할은 특히 산업적으로 낙후된 변경지역에서 빠르게 증대하고 있다. 이런 지역에서 경제기관은 대개 사적 자본가에게 전적으로 의지한다. 이들은 빈농과 중농 대중의 실정을 고려하지 않고 가격을 정한다. 농장노동자의 임금을 인위적으로 낮춘다. 공업과 원료를 공급하는 농민 사이의 사적, 관료적 중개제도를 지나칠 정도로 확장시킨다. 협동조합을 농촌의 부유한 분자들에 매우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변화시킨다. 특히 후진적 그룹인 목축업자나 부분적으로 목축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이해를 경시한다. 각 민족지역에서 산업 건설 계획 一특히 농업 원료의 가공을 기업화하기 위한 계획一을 실행하는 매우 중요한 임무는 완전히 뒷전으로 밀려나 있다. 대국주의 풍조에 의해 고무된 관료주의는 소비에트의 중앙집중화를 각 민족들 사이에서 관리직 할당에 관한 싸움의 원천으로 둔갑시키는 데 성공했다(코카서스연방). 또한 중앙과 변경지역의 관계를 엉망으로 만들고, 실제로 민족회의(Soviet of the Nationalities)의 의의를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렸다[민족회의는 연방회의(Soviet of the Union)와 함께 최고소비에트 회의의 한 축을 이뤘다.ㅡ옮긴이]. 자치공화국에 대한 관료적 후견은 현지인과 러시아인 주민 사이의 토지 분쟁을 해결할 권리를 자치공화국에서 박탈할 정도까지 이르렀다. 오늘날까지, 특히 국가기구를 통해서 자기 생각을 말해온 것처럼, 이 대국주의는 여전히 다양한 민족 노동자의 통합과 단결을 방해하는 주요한 적이다.

      빈농에 대한 실질적 지원, 중농 대부분이 빈농, 농장노동자와 더 긴밀한 관계를 맺도록 하는 것, 빈농과 농장노동자를 독자적인 계급 세력으로 조직하는 것一이 모든 것이 각 민족지역과 공화국에서는 특별히 중요하다. 농장노동자를 실제로 조직화하지 않는다면, 협동조합을 구성하고 빈농을 조직화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전통적 예속상태에 있는 동부지역을 후진적 농촌으로 남겨두고, 이들 지역에서 우리 당 조직은 근로인민과의 진정한 관계를 전부 잃어버릴 위험을 무릅써야 할 것이다.

      더 후진적이며, 최근 깨어나고 있는 민족들에서 공산주의자의 임무는 민족적 각성 과정이 소비에트 사회주의적 경로를 따르도록 지도하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특히 각 지방의 언어와 학교의 발전, 소비에트 기관의 '민족화'를 촉진함으로써 근로대중을 경제적, 문화적 건설 임무로 끌어들여야한다.

      다른 민족들이나 소수민족 사이에 알력이 존재하는 지역에서 부르주아 분자들의 성장을 곁들이는 민족주의는 대개 상당히 공격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지방기구의 '민족화'는 소수민족을 희생시키면서 진행된다. 국경 분쟁은 민족적 원한의 원천이 된다. 당, 소비에트, 노동조합 활동을 둘러싼 상황은 민족주의로 오염된다.

      우크라이나화, 투르크화 등은 소비에트연방의 제도, 기관들에서 관료적, 대국적 습성을 극복하는 것에 의해서만 올바르게 진척될 수 있다. 이것이 문제의 한쪽 측면이다. 다른 측면은 민족공화국에서 노동자계급의 지도적 역할이 유지되는 경우에만, 우리 스스로 농촌 하층에 입각하여 쿨락이나 국수주의 분자에 대한 지속적이고 비타협적인 투쟁을 수행하는 경우에만 이 과정이 올바르게 진척될 수 있다.

      이런 문제는 도네츠 분지나 바쿠 같은 산업 중심지에서 특히 중요하다. 농촌에 둘러싸인 이곳의 노동자 주민은 대부분이 다양한 민족 출신이다. 이런 경우에는 도시와 농촌의 올바른 문화적, 정치적 관계가 요구된다. (1) 출신 민족이 다른 농촌의 물질적, 정신적 요구에 대해서, 특히 도시 쪽의 주의 깊고 진정으로 형제적인 태도 (2) 농촌지역에 대한 관료적 오만을 키우든, 도시에 대한 반동적 쿨락의 적의를 기르든 간에 도시와 농촌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모든 부르주아에 대한 단호한 저항

      우리의 관료체제는 지방 행정기구의 '민족화'에 대한 표면적 과시의 실제적 수행을 관료, 부르주아 전문가, 소부르주아 교사에게 맡기고 있다. 이들은 도시와 농촌의 상층과 무수한 사회적 관계로 결합되어 있으며, 자신의 정책을 이런 상층의 이해에 맞게 적응시키고 있다. 이는 당이나 소비에트 권력에서 지역의 빈농을 쫓아냄에 따라 이들로 하여금 상업 자본가계급, 고리대금업자, 반동적 신부, 봉건적 가부장 분자의 품으로 뛰어들게 한다. 동시에 이 관료체제는 각 민족의 진정한 공산주의 분자를 대개 '일탈자'라고 비난하면서, 가능한 모든 방식으로 괴롭히며 뒷전으로 밀어낸다. 예를 들면, 그루지야의 영향력 있는 고참 볼셰비키 그룹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다. 이들은 스탈린 그룹의 불만을 샀지만, 생애 마지막 시기의 레닌에 의해 열렬히 옹호되었다.

      민족공화국과 민족지역 근로대중이 실제적인(사회주의) 건설 임무에 직접적, 자주적으로 참여하기를 열망한 이유는 10월혁명이 이들을 앙양시켰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의 관료체제는 지역민족주의라고 고함치면서 대중을 겁먹게 함으로써 이 열망을 마비시키려 하고 있다.

      우리 당의 제12차 대회는 '대국주의의 잔재', '소비에트연방 내 민족들의 경제적, 문화적 불평등', '민족적 억압의 가혹한 멍에를 짊어지고 있는 수많은 인민 속에 잔재하는 민족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의 필요성을 인정했다. 각 민족공화국과 지역의 책임 있는 지도자가 참석한 민족문제 제4차 협의회(1923년)는 '당의 기본적 임무 가운데 하나는 각 민족공화국과 지역에서 지역 주민의 노동자, 반(半)노동자 부위 사이에서 공산주의 조직을 양성하고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협의회는 중앙에서 후진적인 민족공화국과 지역으로 가는 공산주의자는 '교사나 유모가 아니라 협력자'(레닌)['사이드-갈리예프[S.G. Said-Galiev]에게 보내는 편지, (1921년 7월 20일자), 《전집》, 제36권, 541쪽, 사이드-갈리예프는 타타르자치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 중앙 집행위원회 의장이다. - 옮긴이]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만장일치로 선언했다. 그런데 최근에 사태는 정확히 반대 방향으로 전개되어왔다.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서기국이 임명한 각 민족 당 기구의 수장들은 당과 소비에트의 모든 문제에 대한 실질적 결정을 떠맡고 있다. 이들은 비(非)러시아 민족 출신의 적극적 노동자들을 단지 형식적 '대표 역할'을 수행하는 임무로 끌어들여 2류 공산주의자 정도로 끌어내리고 있다(크리미아, 카자흐 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타타르, 북부 코카서스의 산악지대 등). 모든 지역 당 노동자를 위에서 인위적으로 '우익'과 '좌익'으로 구분하는 것은 중앙이 임명한 서기가 양 그룹을 제멋대로 지배할 수 있도록 규칙적으로 수행되고 있다.

      다른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민족정책 분야에서도 다음과 같은 레닌주의 입장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1. 서로 다른 민족 출신 노동자 사이의 민족적 차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비할 데 없이 더 체계적으로, 더 일관되게, 더 활발하게 수행하는 것一특히 새로 동원된 '소수민족' 노동자에 대해서 배려하는 태도로 이들에게 숙련된 기술을 가르치고, 이들의 생활과 문화적 상황을 개선시켜야 한다. 각 민족지역의 후진적 농촌을 소비에트 건설 임무로 끌어들이기 위한 실질적 지렛대는 지역 주민 속에서 노동자 중핵을 형성하고 성장시키는 것임을 확고하게 기억해야 한다.

      2. 후진적인 주변지역에서 산업화의 속도를 높이기 위해 경제 5개년 계획을 재검토하는 것. 그리고 민족공화국과 지역의 이해를 고려하여 15년 계획을 세우는 것. 빈농과 중농의 특산물(중앙아시아의 면화, 크리미아 · 압하지야[압하지야(Abkhazia):1992년 그루지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자치공화국{압하스공화국)이지만 국제 사회의 승인을 얻지 못한 상태다. - 옮긴이] 의 담배 등) 개발을 위해서 국가가 수매하는 정책을 채택하는 것. 협동조합의 신용정책과 토지개량정책(중앙아시아, 트랜스코카서스 등에서)도 철저히 계급적 방침에 근거하여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근본적 임무와 조화를 이루며 수행되어야 한다. 축산협동조합의 발전에 더 많은 주의를 쏟는 것. 농업 원료의 가공을 기업화하는 정책을 지역 실정에 적합한 방식으로 수행하는 것. 더 낙후된 지역에 새로운 주민을 이주시키는 우리의 정책을 민족문제에 대한 올바른 정책의 목적에 맞게 개정하는 것.

      3. 당, 노동조합, 협동조합 기구들뿐만 아니라 각급 소비에트 기구의 민족화 정책도 계급관계와 민족관계를 진지하게 고려하여 꼼꼼히 수행하는 것. 정부, 협동조합, 그 외 기관들의 활동에서 '식민주의적' 일탈에 대항하여 진정한 투쟁을 수행하는 것. 중앙과 주변지역 사이의 관료적 중개를 폐지하는 것. 코카서스연방의 경험을 관련 민족들의 산업적, 문화적 발전을 촉진시켰느냐는 관점에서 검토하는 것.

      4. 소비에트연방 내 다양한 민족의 근로인민이 사회주의 건설과 국제 혁명에 기초하여 최대한 결속하고 협력하여 모든 장애물을 체계적으로 없애는 것. 다른 민족의 노동자 농민에게 주류민족의 언어를 기계적으로 강요하는 것에 대항하여 단호한 투쟁을 수행하는 것. 이 문제에서 근로 대중은 완전한 선택의 자유를 가져야 한다. 모든 민족공화국과 지역의 경계 안에서 모든 소수민족의 진정한 권리가 보증되어야 한다. 이 모든 임무에서 예전의 피억압 민족과 예전에 이들의 압제자였던 억압 민족 사이에서 발생하는 이례적인 상황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5. 모든 민족공화국과 지역에서 당내 민주주의를 일관되게 실행하는 것. 비(非)러시아인에 대해 명령하는 태도나 위로부터의 임명과 전임에 대한 단호한 거부. 비(非)러시아인 공산주의자를 인위적으로 '우익'과 '좌익'으로 구분하는 정책을 거부하는 것. 지역의 노동자, 반(半)노동자, 농업노동자, (반[反]쿨락)농민 활동가에 대한 가장 세심한 진작과 훈련.

      6. 특히 중앙의 인민위원회와 국가기관 일반에서 우스트리얄로프적 경향, 따라서 온갖 대국주의적 경향에 대한 거부. 민족문제에 대한 명확하고 일관된 계급정책에 기초하여 지역 민족주의에 대해 교육적 투쟁을 전개하는 것.

       7. 민족회의를 각 민족공화국과 지역의 생활과 긴밀한 관계가 있는 실제로 작동하는 기구, 실제로 이들의 이해를 옹호할 수 있는 기관으로 전환시키는 것.

      8. 노동조합 활동에서 민족문제에 대해 그리고 현지 노동자 중핵을 형성하는 임무에 대해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 이런 노동조합들에서 업무는 지역의 언어로 처리되어야 하며, 모든 민족과 소수민족의 이해가 보호되어야 한다.

      9. 어떤 일이 있더라도 착취분자에게 선거권을 줘서는 안 된다.

      10. 민족문제에 대한 제5차 협의회는 평당원의 진정한 대표에 기초하여 소집되어야 한다.

      11. 민족문제에 대한 스탈린의 노선을 비판하고 있는 레닌의 민족문제에 대한 편지(레닌, 《전집》, 제36권, 605~611쪽을 보라.)를 신문에 공표해야 한다.

       

      제7장 당

      이제까지 우리 당처럼 거대한 승리를 거둔 당은 역사상 단 하나도 없다. 우리 당은 지금까지 10년 동안 노동자계급의 선두에 서서 노동자 독재를 실행에 옮겨왔다. 러시아공산당은 노동자혁명의 근본적 도구이다. 러시아공산당은 코민테른의 지도적 당이다. 우리 당처럼 전 세계적인 역사적 책임을 진 당은 이제까지 단 하나도 없다. 그러나 정확히 이런 이유 때문에, 그리고 권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당은 대담무쌍하게 자신의 오류를 비판해야 한다. 당은 자신이 처한 상황의 어두운 면을 감춰서는 안 된다. 이를 예방하려는 조치를 제때에 취하기 위해서 당은 현실적인 퇴보 위험을 분명히 직시해야 한다. 레닌의 시대에는 항상 그랬다. 레닌은 무엇보다도 당이 '자만'해지는 것(레닌, '레닌의 50회 생일을 축하하여 러시아공산당 모스크바위원회가 개최한 집회에서 한 연설',《전집》, 제30권, 528쪽)에 대해 경고했다. 그 어두운 면에도 불구하고, 우리 당의 현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면서, 우리 반대파는 당이 올바른 레닌주의 노선에 따라 그 약점을 극복하고, 역사적 임무의 정점에 오를 것이라는 확고한 기대를 표하는 바이다.

      1. 당의 사회적 구성은 지난 몇 년 동안에 더욱 더 악화되어왔다.

      1927년 1월 1일 현재, 당원은 대략 다음과 같다.

      산업과 운수에 실제로 종사하고 있는 노동자 430,000명
      농업노동자 15,700명
      농민(절반 이상이 현재는 관청직원) 303,000명
      관청직원(절반 이상이 이전에는 산업노동자) 462,000명

      이렇게 1927년 1월 1일 현재, 우리 당의 3분의 1만이 현장노동자(실제로 겨우 31%일뿐이다)이고, 3분의 2는 농민, 관청직원, 구 산업노동자, '기타'였다.

      지난 1년 반 동안 우리 당은 약 10만 명의 현장노동자를 잃었다. 1926년 동안 당에서 '자동 감소'[일반적으로 당원은 매년 당적을 갱신하게 되어 있으며, 갱신하지 않는 경우는 자동적으로 당적을 잃는다.-옮긴이]한 일반 공산주의자는 2만 5,000명에 이르고, 이 가운데 76.5%가 공장 노동자였다(〈중앙위원회 소식〉, 제24, 25호). 이렇게 단순한 당적 갱신을 동반한 최근의 이른바 '감별' 과정의 결과, 공식 자료에 따르면(의심할 여지없이 사실을 최소화한), 약 8만 명의 당원이 당적을 잃었는데, 이들 대다수는 산업노동자였다. '올해 초에 수치상으로 당원의 93.5%가 당적을 갱신했다'(〈중앙위원회 소식〉, 제24, 25호). 이렇게 단순한 당적 갱신에 의해 당원의 6.5%(약 8만 명)가 '걸러졌다.' 이렇게 '걸러진' 당원의 약 50%가 숙련노동자이고, 3분의 1 이상이 반(半)숙련노동자였다. 이미 충분히 최소화된 이런 자료를 최소화하려는 중앙위원회 기구의 시도는 분명히 실패했다. 레닌의 동원을 이제 스탈린의 '감별'이 대신하고 있다.

      이에 반해서, 제 14차 당 대회 이후 10만 명의 농민에게 입당이 허락되었는데, 이들 대부분은 중농이고, 농업노동자의 비율은 전체적으로 미미하다.

      2. 당 지도기관의 사회적 구성은 훨씬 더 악화되었다. 군(uyezd, 郡) 위원회의 29.5%가 농민(출신에서)이고, 사무직 노동자등이 24.4%이며, 군위원회 위원의 81.6%가 관청을 위해 일한다. 당 지도기관에 현장노동자는 거의 없다. 주(gubernia, 州) 위원회에서는 13.2%, 군위원회에서는 9.8~16.1%이다(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통계국의〈통계평론〉, 1927년 6월 10일자를 보라).

      당 자체에서는 당원의 약 3분의 1이 산업노동자이며, 당의 의사결정 기관에서 산업노동자는 단지 10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당에 중대한 위험이다. 노동조합도 같은 길을 가고 있다(제2장 '노동자계급과 노동조합의 상태'를 보라). 이것은 소부르주아 계층과 '노동귀족' 출신 '관리자'가 우리에게서 얼마나 큰 권력을 빼앗아왔는지를 보여준다. 이것은 당의 '탈(賊:)노동자화'(deproletarianization)로 가는 가장 확실한 길이다.

      3. 당 기구와 지도적인 직책 일반에서 구 사회혁명당-멘세비키의 역할이 증대해왔다. 제14차 당 대회 당시에 당 출판부의 책임 있는, 지도적인 직책의 38%를 다른 정당 출신이 차지하고 있었다(제14차 당 대회 의사록, 83쪽). 현재는 상황이 더욱 악화되고 있다. 볼셰비키당 출판부의 실제적 지도는 '청년' 수정주의 학파(슬렙코프[알렉산드르 슬렙코프(Aleksandr Slepkov, 1891-1937):부하린주의의 대표적인 이론가. 1917년에 콤소몰을 지도했다.〈콤소모르스카야 프라보다〉지의 초대 편집장, 1920년대 중반에는 반(反) 트로츠키주의 캠페인에 종사했으며. 1920년대 말, 부하린주의자로 탄압받아 1930년에 제명, 1937 년에 총살되었다. 1959년에 명예 회복.], 스테츠키[알렉세이 스테츠키(Aleksey Stetsky, 1896-1938):부하린 학파의 젊은 이론가 가운데 한 사람. 1924-27년, 중앙통제위원. 1925년부터〈콤소모르스카야 프라브다〉지 편집장. 1927년에 당 중앙위원. 부하린 실각 이후 스탈린주의로 전향했지만 1938년에 체포되어 총살되었다. 1956년에 명예 회복.], 마레츠키[마레츠키(Maretsky, 1901~1937):적색교수 양성학원 출신의 역사가, 경제학자. 부하린 학파에서 가장 우수한 인물의 가운데 한 사람. 1937년 5월에 총살되었다. 1958년에 명예 회복.] 등)나 구 사회혁명당-멘셰비키 둘 중 하나에 맡겨져 있다. 당 활동가의 상급중핵 가운데 약4분의 1이 구사회혁명당-멘세비키로 이루어져 있다.

      4. 관료주의는 모든 분야에서 성장하고 있지만, 특히 당내에서의 성장은 파괴적이다. 오늘날의 '지도적인' 당 관료는 사태를 다음과 같이 보고 있다.

      '우리 당에는 당 자체,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이 아직도 불충분한 당원이 존재한다. 이들은 당이 세포나 지역 단위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세포는 기초 단위이다. 그 다음에 지구위원회 등이 있고, 중앙위원회에 이르기까지 계속 위로 올라간다는 것이다. 이는 잘못된 것이다(!!!). 우리 당은 위에서 아래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런 시각이 당의 모든 실천적 관계와 전체 활동에서 고수되어야 한다.'(〈몰로로트〉(Molot, 망치) 1927년 5월 27일자, 러시아공산당 북부코카서스 지방위원회 제2서기의 연설).

      우글라노프, 몰로토프, 카가노비치 같은 고위직에 있는 동지들이 제시한 당내 민주주의의 정의도 본질적으로는 결국 마찬가지인 것이다(〈프라브다>, 1926년 6월 4일자를 보라).

      이 '새로운' 생각은 극도로 위험하다. 만약 우리 당이 '위에서 아래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실제로 인정한다면, 레닌주의 당, 노동자 대중의 당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5. 지난 몇 년간 당내 민주주의는 볼셰비키당의 전통에 반하여, 일련의 당 대회의 결정에 직접 반하여 체계적으로 폐지되어왔다. 실제로 관리에 대한 진짜 선거는 사라지고 있다. 볼셰비키주의의 조직 원칙은 사사건건 왜곡되고 있다. 당 규약은 상부의 권한을 확대하고, 당 기초 단위의 권리를 축소하는 방향으로 체계적으로 바뀌고 있다. 군위원회, 지구위원회, 지방위원회의 권한 위임은 중앙위원회에 의해 1년, 2년, 그리고 그 이상으로 연장되어왔다.

      지방위원회, 지방 집행위원회, 지방 노동조합협의회 등의 지도부는 사실상 해임할 수 없다(3~5년이나 그 이상 동안). '근본적인 견해 차이를 전체 당의 여론에 호소'(레닌)하는 모든 당원, 모든 당원 그룹의 권리는 사실상 폐기되고 있다. 당 대회나 당 협의회는 모든 문제에 대한 전당의 자유로운 사전 토론 없이(레닌 시대에는 항상 이와 같은 토론이 열렸다) 소집된다. 이러한 토론을 요구하면, 당기 위반으로 간주된다. '볼셰비키 "총참모부"는 자신의 총참모부를 따름과 동시에 지도하는 군대의 믿음직하고 의식적인 의지에 의해 실제로 뒷받침되어야한다'(레닌, '〈이스크라〉에 보내는 편지', 《전집》, 제7권, 116쪽)는 레닌의 경구는 완전히 잊혀졌다. 

      당내에서는ㅡ일반적인 방침의 자연스러운 부속물처럼ㅡ경험 많은 당원을 내쫓는 대단히 의미심장한 과정이 진행되고 있다. 이들은 제정시대에 지하활동을 경험했거나, 아니면 적어도 내전을 겪었으며, 자존심이 강하고 자신의 견해를 옹호할 능력이 있다. 이들은 주로 무조건적인 복종이 특징적인 신입 분자들로 대체되고 있다. 혁명적 규율이라는 이름으로 위로부터 조장된 이런 복종은 정말로 혁명적 규율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줄곧 혁명 이전의 낡은 권위에 굴종하는 것이 특징인 노동자 중에서 선발된 신참 공산주의자가 이제는 심심찮게 노동자계급 세포나 행정기관에서 지도적인 지위에 올라서고 있다. 이들은 혁명이 가장 곤란한 상황에 처한 시기에 노동자계급의 지도자인 고참 노동자 당원에 대해서 노골적이고 발악적인 적대감을 표하는 것으로 시류에 영합하고 있다.

      이와 비슷한 변화가 국가기구에서 훨씬 더 추악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 '당의' 소비에트 관료의 완성된 모습을 보는 것은 더 이상 드문 일이 아니다. 이런 관료는 엄숙한 경우에는 10월혁명에 맹세하지만, 자신의 임무에 대한 완전한 무관심으로 유명하다. 또한 철저하게 소부르주아적 속물근성으로 살고 있으며, 사생활에서는 지도부를 매도하고, 당의 모임에서는 반대파를 '철저하게 문초하고 있다.'

      당 상부에 있는 한 당원(특히 서기)의 실질적 권리는 하부 당원 백 명이 가진 실질적 권리보다 몇 배나 더 크다. 당에 대한 기구의 이런 증대하는 대체는 볼셰비키라면 침범할 수 없는 레닌주의의 원칙一노동자계급의 독재는 당의 독재를 통해서만 실현되고, 또 실현될 수 있다一을 부정하는 스탈린의 ‘이론’에 의해 조장되고 있다. ['(당이 아니라) 당 간부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스탈린의 이론. 스탈린은 당의 독재를 대신하는 당 기구의 독재를 이론화했다.]

      당내 민주주의의 쇠퇴는 대체로 노동조합이나 다른 모든 무당파 대중조직들에서 노동자민주주의의 쇠퇴로 이어지고 있다.

      당내의 견해 차이는 왜곡되고 있다. '반대파'로 비난받는 볼셰비키의 견해에 대한 광포한 논쟁이 몇 달, 몇 년 동안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이 볼셰비키들에게는 자신의 진정한 견해를 당 출판물을 통해 설명하는 것도 허락되지 않고 있다. 어제의 멘셰비키, 사회혁명당, 입헌민주당, 분트, 유태민족주의자가 그 위원들이 자신의 중앙위원회에 제출한 문서를 〈프라브다〉지의 지면 위에서 공격하고 비난한다. 이들은 이런 문서에서 전후 관계없이 몇몇 문장만을 떼어내 왜곡시킨다. 그러나 문서 자체는 결코 게재되지 않는다. 당의 구성단위는 이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은 문서에 대해 '탄핵' 투표할 것을 강제당하고 있다.

      당은 대부분이 저속하고 새빨간 거짓말인 반대파를 '철저하게 조사하고 있는' 예외 없이 경멸적인 공식 일람, 또는 개요 조사, 연설에 기초하여 우리의 견해 차이를 판단하도록 강제당하고 있다. '단지 다른 누군가의 말만 믿고 사태를 판단하는 사람은 어쩔 수 없는 바보다'라는 레닌의 경구는 '공식 주장을 믿지 않는 사람은 반대파다'라는 새로운 정식으로 대체되어왔다. 반대파에 가까운 현장노동자는 자신의 견해 때문에 실업이라는 대가를 치르도록 강제당하고 있다. 평당원은 자신의 견해를 소리 내어 말할 수 없다. 경험 많은 당 활동가도 출판물에서든 모임에서든 자신의 견해를 표명할 권리를 박탈당하고 있다.

      레닌의 사상을 옹호하는 볼셰비키는 '당내에 또 다른 당'(two party) 을 만들고 싶어 한다고 중상적인 비난을 받고 있다. 이런 비난은 당연히 당의 통일을 열렬하게 옹호하는 노동자를 반대파에 대항하게 하기 위해서 고의적으로 꾸며냈다. 스탈린의 노골적인 멘셰비키적 오류(중국혁명이나 영-러위원회 등의 문제에 대한)에 대한 단 한마디의 비판도 "당에 대항하는 투쟁'이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스탈린은 중국에 대한 자신의 정책이나 다른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서도 사전에 당에 물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반대파가 '당내 에 또 다른 당'을 만들고 싶어 한다는 이런 비난은 자신의 기회주의 정책을 수행함에 있어서 자유재량권을 갖기 위해 볼셰비키-레닌주의자를 당에서 내쫓는 것이 목적인 자들에 의해 매일 반복되고 있다.

      6. 당의 거의 모든 고급교육 활동과 모든 초보적인 정치교육 활동은 이제 반대파를 못살게 구는 과정으로 바뀌었다. 설득의 방법은 대대적인 규모로 강제의 방법으로 대체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을 기만하는 방법으로도 보완되고 있다. 당의 교육이 단순한 공식 선전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그 일반적 경향은 교육을 적당히 얼버무리는 것이다. 반대파를 못살게 구는 것에 몰두하는 집회, 당 학교, 학습 써클의 참석자 수는 엄청나게 줄어들었다. 당은 현재 당 기구의 잘못된 방침에 대해서 수동적 저항을 채택하고 있다.

      7. 최근 당내에서는 출세주의, 관료주의, 불평등이 성장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예를 들면, 반(反)유태주의 같은 계급적으로 이질적이고 적대적인 원천을 가진 흙탕물이 당으로 흘러들고 있다. 그저 당의 자기보존도 이러한 모욕에 대한 가차 없는 투쟁을 요구한다.

      8. 이런 사실들에도 불구하고, 탄압의 포화는 오로지 좌익만을 겨냥하고 있다. 세포회의에서 연설하거나, 날카로운 대답을 하거나, 레닌의 유언장을 읽으려 했다는 것만으로도 반대파를 제명하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 되었다. 제명된 사람들은 흔히 정치적 이해력의 수준에서, 더 중요한 것은 당의 대의에 대한 헌신에서 제명한 자들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다. 당밖에 있는一장개석, 퍼셀이나 자기 관료들에 대한 '신뢰 부족'과 '비관주의' 때문에一이런 동지들은 계속해서 당의 중심인물로서 지내고 있다. 이들은 수많은 출세주의자나 속물들보다 훨씬 더 충실하게 당에 봉사하고 있다.

      9. 제15차 당 대회가 가까워짐에 따라 현재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는 빗발치는 탄압과 협박은 그 어느 때보다도 당을 위협하기 위한 조치다. 이것은 자신의 정치적 오류를 은폐하기 위해 스탈린-리코프 연합 분파가 가장 극단적 조치에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 매순간 당을 기정사실과 대면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10. 중앙위원회의 정치노선('스탈린과의 연대' 원칙에 의해 제14차 당 대회에서 정식화된 노선)은 정도를 벗어나 있다. 중앙위원회의 현 중핵은 동요하면서도 계속해서 오른쪽으로 나아가고 있다.[이 문장은 타이프 원고에는 없다. - 편집자] 당내 민주주의의 폐기는 정치노선이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의 불가피한 결과이다. 이 노선이 소부르주아 분자들의 압력과 우리 당을 포위한 비(非)노동자 계층의 영향을 반영하는 한, 이 노선은 불가피하게 위에서 완력으로 관철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이론 분야에서는 이른바 '청년학파'가 독점권을 가지고 있다. 이 학파는 기구의 문필 명령을 어느 때라도 실행할 준비가 되어 있는 수정주의자들이다. 볼셰비키당의 진정한 전통에 고무된 볼셰비키 청년의 가장 우수한 분자는 내쫓겼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박해받고 있다.

      조직 분야에서는 서기국에 대한 정치국의 사실상의 종속, 서기장에 대한 서기국의 사실상의 종속은 오래 전에 기정사실이 되었다. 레닌이 유언장에서 밝힌 최악의 우려一스탈린은 충분히 성실하지 않고, '자신의 수중에 집중된 무제한적인 권력'을 공동으로 쓰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1922년 12월 24일자와 1923년 1월 4일자 레닌의 편지)一는 정당성이 입증되었다.

      현재 중앙위원회, 당과 국가 일반의 지도기관에는 세 가지 근본적 경향이 존재한다.

      첫 번째 경힘은 공공연한 우익적 경향이다. 한편 이 경향은 두 그룹으로구성된다. 하나는, 그 기회주의와 적응성으로 대부분 '경제력이 있는' 중농의 이해를 반영한다. 이들은 중농의 방침을 따르고, 그 이상에 의해 고무된다. 이 그룹에는 리코프, 스미르노프[알렉산드르 스미르노프(Aleksandr Smirnov, 1878-1938):1896년에 페테르부르크의 '노동자 계급해방투쟁동맹'에 참가. 농업문제 전문가. 1907~17년, 중앙위원 후보. 1917년 10월부터 내무인민위원회 임원. 1922년부터 당 중앙위원. 1923년부터 농업인민위원회 부의장, 농민인터내셔널 서기장. 1930년부터 국가경제최고회의(Vesenkha, 베센하)의 임원. 1934년에 제명, 1938년에 총살되었다. 1956년에 명예 회복.], 칼리닌[미하일 칼리닌(Mikhail Kalinin, 1875-1946):노동자 출신의 고참 볼셰비키. 1919년에 사망한 스베르들로프를 대신하여 소비에트 중앙집행위원회 의장에 선출되어 죽을때까지 소련의 형식상 원수 지위에 있었다.], 페트롭스키[그례고리 페트롭스키(Gregory Petrovsky, 1878-1958) : 고참 볼셰비키. 1897년부터 '노동자계급 해방투쟁동맹'에 참가. 1912년에 제4대 두마 의원에 선출. 1918년, 브레스트-리토프스크강화조약 대표단의 한 사람. 1919-1938년, 우크라이나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1921년부터 당 중앙위원, 1922년부터 중앙통제위원. 1926년에 정치국 위원 후보.], 추바르[브라스 추바르(Vlas Chubar, 1891-1939):우크라이나의 농민 출신 기사, 고참 볼셰비키. 1918-23년, 국가경제최고회의 임원. 1920-22년, 우크라이나 경제회의 의장. 1921년부터 중앙위원. 1923~ 34년, 우크라이나 인민위원회 의장. 1939년에 총살되었다. 1955년에 명예 회복.], 카민스키[그례고리 카민스키(Gregory Kaminsky, 1895-1938) : 1913년부터 볼셰비키. 1923~29년, 전 러시아농업협동조합연합 중앙위원회 부의장. 1925년부터 중앙위원회 후보. 1930년부터 모스크바위원회 당 서기. 1938년에 총살되었다. 1955년에 명예 회복.] 동지 등이 있다. 이들을 둘러싸고, 그리고 이들 부근에서 다소 공공연하게 우스트리얄로프의 학설을 설교하는 '무당파' 정치인인 콘드라티예프[니콜라이 콘드라티예프(Nikolai Kondratiev, 1892-1938):1905년에 사회혁명당에 입당. 1917년 볼셰비키 혁명에 극렬 반대하며, 볼셰비키 규탄 문서를 많이 썼다. 1919년에 사회혁명당을 탈당. 1920년에 농업인민위원회에서 일했다. 1920년부터 경기 연구소 소장이 되어, 경기순환과 장기파동을 연구하여 '콘드라티예프 파'라고 불리는 50년 주기의 대순환이 존재한다고 지적, 국제적으로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조작된 '근로농민당' 사건에 연루되어 1930년 체포, 1938년에 총살되었다. 1987년에 명예 회복.], 사디린[안드레이 사디린(Andrei Sadyrin):국영은행 이사회 위원.], 차야노프[알렉산드르 차야노프(Aleksandr Chayanov, 1888-1937) : 경제학자, 농업경제의 전문가. 협동조합운동에 적극 참가. 1917년, 임시정부 부(副)농업장관. 1919년, 농업경제과학조사연구소 소장. 1923년, 주요 저서 인 《농업경제의 조직화》를 베를린에서 출판했다. 1930년, 친구인 콘드라티예프 와 함께 '근로농민당사건'에 연루되어 1937년 총살되었다.]등 같은 부농의 '실무 대리인들'이 활동하고 있다. 모든 주(州)에, 그리고 대개 모든 군(郡)에도 자신의 보잘것없는 실권과 영향력을 누리는 작은 콘드라티예프나 사디린을 발견할 
      수 있다. 일반적인 이 첫 번째 경향의 다른 그룹은 보수가 더 나은 산업노동자와 사무직 노동자계급을 대표하는 노동조합 지도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그룹은 특히 암스테르담 인터내셔널과 더 친밀한 관계를 맺고 싶어 한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이 그룹의 지도자는 톰스키, 멜니찬스키, 도가도프[알렉산드르 도가도프(Aleksandr Dogadov, 1888-1937 : 고참 볼셰비키, 노동조합운동 활동가. 1921년부터, 전러시아노동조합협의회 중앙위원, 서기, 1929년부터는 제1서기. 1924~1930년, 중앙위원과 조직국 위원. 1937년 총살되었다. 1956년에 명예 회복.] 동지 등이다. 이 두 그룹 사이에는 일정한 알력도 있지만, 국내외 정책 모두에서 당과 소비에트 국가의 경로를 오른쪽으로 돌리고 싶어 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이 두 그룹은 레닌주의 이론에 대한 경멸과 세계혁명에 대한 방침을 포기하는 경향이 특징이다.

      두 번째 경향은 공식 기구의 '중도주의'이다. 이 경향의 지도자는 스탈린, 몰로토프, 우글라노프[니콜라이 우글라노프(Nikolai Uglanov, 1886-1937):고참 볼셰비키. 1905년 혁명에 참여했다. 1921년 페테르부르크위원회 서기. 1921-22년, 당 중앙위원 후보. 1923~30년, 당 중앙위원. 1924년 모스크바위원회 서기. 반(反)트로츠키주의 캠페인으로 출세. 1924년 중앙위원회 조직국과 서기국 위원. 1926년 정치국 위원 후보. 1928년 부하린의 우익반대파를 지지했다. 1937년에 총살되었다. 1989년에 명예 회복.], 카가노비치[라자르 카가노비치(Lazar Kaganovich, 1893-1991):1924년, 중앙위원. 1930~52년, 정치국 위원. 스탈린의 오랜 친구로 정부와 당의 다양한 직책을 역임했으며, 대숙청의 주역 가운데 하나로 흐루시초프가 집권하면서 반당분자로 낙인찍혀 1956년 모든 직책에서 해임되었다.], 미코얀[아나스타스 미코얀(Anastas Mikoyan, 1895-1978):1915년부터 볼셰비키. 1918년, 26명의 인민 위원과 함께 영국 간섭군에 체포되었지만, 기적적으로 총살을 면했다. 1926~30년, 통상인민위원. 1930~34년, 보급인민위원. 1934~38년, 식량공업인민위원. 1937-46년, 대외무역인민위원. 1946~65년, 부수상. 1956년 제20차 당 대회에서 '스탈린의 개인숭배'를 비판했다.], 키로프[세르게이 키로프(Sergei Kirov, 1886-1934):고참 볼셰비키, 스탈린주의자. 1921년에 중앙위원 후보. 1923년부터 당 중앙위원. 1926년, 레닌그라드위원회 제1서기로서 지노비예프파를 축출했다. 1930년부터 정치국 위원. 1934년 12월, 지노비예프주의자를 자처하는 청년에 의해 크레믈린에서 암살당했다. 키로프 암살은 대숙청기의 개막을 알린 사건이었다.] 동지이다. 사실상의 현 정치국이다. 양쪽 사이에서 동요하면서도 부하린은 이 그룹의 정책을 '일반화하고 있다.' 이 중도주의ㅡ공식 그룹은 본질적으로 광범한 대중의 어떠한 견해도 전혀 표현하지 않지만 자신이 당을 대체ㅡ성공을 거둔 것이 없지 않은一하려고 한다. '관리자' 계급一당, 노동조합, 산업기관, 협동조합, 국가기구에서一은 이제 몇 만 명을 헤아린다. 이들 중에는 한때 노동자인 즉, 노동자 대중과의 관계를 모두 포기한 '노동자' 관료 수가 적지 않다.

      혁명의 운명에 엄청나게 중요한 관리-지도기관에서 수많은 불굴의 노동자 혁명가가 발견되고 있다는 것은 덧붙일 필요도 없다. 이들은 대중과의 관계를 유지하며, 노동자의 대의를 위해서 몸과 마음을 다 바치고 있다. 이들이야말로 이런 기관들에서 진정한 공산주의 활동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정치노선과 당 체제의 타락이 진짜 거대한 관료계급을 낳고 있다는 사실을 바꾸지 못한다.

      이 계급의 실제 권한은 어마어마하다. 바로 이 '관리자'그룹이 '조용하게' '본무에 힘쓰고', 특히 '토론 반대'를 역설하는 것이다. 바로 이 그룹이 우리가 이미 '거의 사회주의에 도달했다', 사회주의 혁명 '강령의 10분의 9'가 이미 완수되었다고 자기만족적으로 선언한다(때로는 진심으로 그렇게 믿기도 한다). 당 전체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이 그룹에게 미숙련노동자, 실업자, 농장노동자는 안중에도 없다. 이 그룹은 좌익 즉, 혁명적 레닌주의자 사이에서 주적을 찾으며, '좌익을 향해 발포하라'고 촉구했다.

      우선은 이 우익과 '중도파' 경향이 반대파에 대한 공통의 적의로 뭉쳐 있다. 반대파의 제거는 불가피하게 두 그룹 사이의 갈등을 촉진할 것이다.

      세 번째 경향이 이른바 반대파이다. 반대파는 당의 레닌주의 분파이다. 우익에서 반대파인 체하려는 애처로운 시도(반대파를 '사회민주주의적 일탈'로 고발하는 등)는 자신의 기회주의를 은폐하려는 지배그룹의 소망에서 비롯된다. 반대파는 당의 통일을 지지한다. 스탈린은 반대파가 '또 하나의 당'을 만들고 싶어 한다는 무고한 죄로一반대파를 왕따시키기 위해一자신의 강령을 유포시킨다. 이에 대해 반대파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레닌주의 러시아공산당의 통일을'이라는 슬로건으로 대답한다. 반대파의 강령은 이 문서에서 설명하고 있다. 당의 노동자계급 부위와 모든 진정한 레닌주의 볼셰비키는 이에 찬성할 것이다.

      반대파의 개인적 이탈은 반대파가 레닌의 대의를 위해 투쟁하지 않을 수 없는 현재의 힘겨운 상황에서 불가피한 것이다. 앞으로도 이 세 경향의 지도자들 사이에서 서로 연관 없는 사사로운 재편이 일어나겠지만, 그것은 사태의 근본적 진상을 바꾸지 못할 것이다.

      11. 이상의 모든 사실이 합쳐져 당의 위기를 야기하고 있다. 당내의 견해 차이는 어려운 문제들이 점점 더 광범위하게 속출하면서 레닌 사후 계속해서 심화되어왔다. 당 대오의 기본적 정서는 단결을 지지한다. 그렇지만 현 체제는 당의 단결을 위협하는 진정한 위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당이 이해하지 못하게 방해한다. 스탈린의 권모술수는 모두 예리하거나 중대한 문제가 생길 때마다, 당원 대중에게 이런 딜레마를 제기하기 위한 것이다: 당신의 견해를 포기하거나, 아니면 당의 분열을 돕는다는 비난을 감수하거나 둘 중 하나다.

      우리의 임무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당의 단결을 지키는 것, 분열, 추방, 제명 등의 정책에 단호히 저항하는 것, 그러나 동시에 당의 단결이라는 틀 안에서 논쟁 중인 모든 문제에 대해서 자유롭게 토론하고 결정할 권리를 당에 보증하는 것이다.

      당이 처한 현 상황의 오류와 비정상을 폭로하면서도 반대파는 당의 노동자계급 부위의 토대가 되는 대중이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당을 레닌주의의 길로 되돌릴 수 있는 능력을 입증할 것이라고 깊이 확신한다. 이 과정을 돕는 것이야말로 반대파의 본질적인 임무이다.

       

      실천적 제안

      1. 레닌 시대에 그랬던 것처럼, 진정한 당내 민주주의에 기초하여 제15차 당 대회를 준비해야 한다.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 : '모든 당원은 첫째, 견해 차이의 본질 둘째, 당내의 논쟁 경과를 정말 냉철하게, 그리고 최대한의 성실함으로 검토하기 시작해야 한다. … 가장 정확하고, 그 어떤 검증도 받아들일 수 있는 인쇄된 문서를 확실히 요구하여 양쪽 모두의 견해를 검토해야 한다.'(레닌, '당의 위기', 《전집》, 제32권, 43~47쪽, 새로 번역했다.) 중앙위원회는 모든 당원이 현 당내 견해 차이의 본질과 현 논쟁의 경과 모두를 검토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하려면, 지금까지 당에서 숨겨온 모든 문서를 신문, 특별논집, 팸플릿을 통해 공표해야 한다.

      모든 동지와 당원 그룹은 신문이나 집회 등에서 당에 자신의 견해를 주장할 기회를 가져야 한다. 중앙위원회 · 지방조직 · 개별 당원 · 당원 그룹에 대한 테제(강령) 초안은 적어도 제15차 당 대회 두 달 전에〈프라브다〉지(또는 〈프라브다〉지 증보판에)는 물론 지방의 당 기관지에도 게재되어야 한다.

      논쟁은 인신공격이나 과장하는 일 없이, 실무적이고 정확히 동지적인 방식으로 수행되어야 한다. 제15차 당 대회 준비를 위한 주요 슬로건은 겉치레가 아닌 진정한 러시아공산당과 코민테른 전체의 레닌주의적 단결이어야 한다.

      2. 당과 그 지도기관의 사회적 구성을 개선하기 위한 일련의 조치를 즉시 채택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제13차 당 대회의 결정을 재확인해야 한다 : '가까운 장래에 당원의 압도적 다수는 산업에 직접 종사하는 노동자로 구성되어야 한다.' 대체로 다음 2~3년 사이에 당은 오직 현장의 남녀 노동자와 농장에 고용된 남녀 노동자만을 받아들여야 한다. 다른 사회 그룹 출신은 엄격한 개인 선발로만 당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 적군(Red) 병사와 수병을 노동자계급 · 농업노동자 · 빈농 출신으로만 한정하고, 빈농이나 경제력이 미약한 농민은 최소 2년간의 사회ㅡ정치 활동을 통해 검증한 뒤에야 받아들여야 한다. 다른 당 출신자의 입당은 중지되어야 한다.

      지구위원회, 지역위원회 등에는 현장노동자가 50% 이상 되어야 한다는 취지의 제13차 당 대회의 결정一제14차 당 대회가 사실상 폐기시킨(반대파의 의지에 반하여)一을 실행에 옮겨야 한다. 산업 중심지에서 우리는 현장노동자의 확고한 다수(적어도 전체의 4분의 3)를 손에 넣어야 한다. 군위원회에서도 노동자, 농장노동자, 빈농이 비슷한 정도로 다수를 차지해야 한다.

      3. 제10차 당 대회가 채택하고, 1923년 12월 5일에 중앙위원회와 중앙통제위원회, 그리고 제12차와 제13차 당 대회가 재확인한 당내 민주주의에 관한 결의문을 실제로 승인하고 실행에 옮기는 것.

      우글라노프, 몰로토프, 카가노비치, 지보프(Zhivov) 등이 고안하고 유포시킨 당내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반(反)레닌주의적 정의와 달리, 우리는 '노동자 민주주의는 모든 당원이 당 생활의 가장 중요한 문제들을 솔직하게 토론할 자유, 이런 문제들에 관한 토론을 조직할 수 있는 자유, 당의 모든 지도적 관리와 위원회에 대한 상향식 선출을 의미한다'(제 13차 당 대회, 트로츠키, '신노선 결의문', 1923년 12월 5일)는 것을 당 전체의 이름으로 단언해야 한다.

      우리는 모든 당원의 이런 기본적 권리를 실제로 침해하는 사람에 대해 징벌조치를 취해야한다.

      일반적으로 모든 원칙 문제에 관한 당내 소수파의 견해는 당 기관지 등을 통해서 모든 당원의 주목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예외는 토론 중인 사태가 비밀을 요할 경우에만 허용되어야 한다. 결정이 채택된 뒤 볼셰비키의 철의 규율로 실행되어야 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당의 토론클럽 망이 확대되고, 당 지도부의 오류에 대한 진정한 비판이 당 기관지(토론용 회보, 평론집 등)를 통해 가능해져야 한다.

      제14차 당 대회 이후, 당 규약에 삽입되어온 개악된 모든 조항(제25조, 33조, 37조, 42조, 50조 등)은 폐지되어야 한다.

      4. 당 기구 전체의 노동자화를 위한 확고한 방침을 채택해야 한다. 현장노동자, 당내외 노동자 대중에게 평판이 좋은 선진적인 공산주의 노동자가 당 기구 전체의 결정적 다수파를 이루어야 한다. 당 기구가 완전히 유급 직원으로 구성되어서는 결코 안되며, 정기적으로 노동자계급 당원들로 충원되어야 한다. 지방조직(지역조직도 빠뜨리지 않고)의 예산은 대부분 당비가 되어야 한다. 지방조직은 당원 대중에게 그 수입과 지출을 정기적으로, 그리고 실제로 결산 보고해야 한다. 유급 기구의 몸집뿐만 아니라 현재 당의 팽창예산은 강력하게 삭감되어야 한다. 당 활동의 꽤 많은 부분은 산업 활동이나 다른 활동 이외의 여유시간에 무상으로 당원에 의해 수행되어야 한다. 정기적으로 당 기구에 활기를 다시 불어 넣기 위한 한 가지 조치는 기구에서 일하는 동지들의 일부를 산업 활동이나 다른 일반 활동으로 체계적으로 내려 보내는 것이다. 우리는 서기들이 자신을 면직시킬 수 없게 하려는 경향에 맞서 투쟁해야 한다. 서기나 다른 책임있는 직책의 명확한 재직기간을 설정해야 한다. 최상층 그룹의 실제적 타락과 부패, 임명권, '관료끼리의 상호 두둔' 등에 대해 비타협적으로 투쟁해야 한다(예를 들면, 시즈란 [시즈란은 사마라 주(州)의 볼가강 연안 도시이다.], 헤르손, 이르쿠츠쿠, 치타 등).

      5. 레닌의 지도아래, 일찍이 제10차 당 대회에서 당내와 노동자대중 사이에서 더 많은 평등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일련의 결의문이 통과되었다. 이미 제12차 당 대회는 신경제정책(NEP) 아래에서 자본가계급과 접촉하는 당 활동가 일부의 타락 위험을 경고했다. 따라서 '한편으로 부르주아 전문가와 관료, 다른 한편으로 노동자 대중 사이의 불평등(생활조건이나 임금 등에서)一이 불평등이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당의 부패와 공산주의자의 권위를 하락시키는 원천이 되고 있는 한ㅡ을 제거하기에 완전히 적합한 실천적 조치를 마련'(제10차 당 협의회의 결의문, 18쪽)해야 한다.

      최근에 불평등이 터무니없이 빠른 속도로 확대되어온 사실에 비추어, 혁명주의자인 우리는 이 문제를 다시 제기하고 해결해야 한다.

      6. 당내 교육을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의 저작 연구에 따라 재편성하고, 현재 대량생산되고 있는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한 잘못된 해석의 유포를 배격해야 한다.

      7. 제명된 반대파의 당원 자격을 즉시 회복시켜야 한다.

      8. 레닌이 권고한 진의에 따라 중앙통제위원회를 재건해야 한다. 중앙통제위원회의 위원은 (ㄱ) 대중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고 (ㄴ) 기구와 무관하며 (ㄷ) 당내에 권위를 가진 인물이어야 한다.

      이럴 때에만 중앙통제위원회에 대한 진정한 신뢰가 회복되고, 그 권위를 필요한 수준까지 높일 수 있는 것이다.

      9. 중앙위원회, 중앙통제위원회와 그 기관을 구성함에 있어서 우리는 레닌이 1922년 12월 25~26일과 1923년 1월 4일자 편지(유서)에서 제시한 권고를 지침으로 삼아야 한다. 이들 편지는 자료용으로 모든 중앙위원에게 공표되어야 한다.

      레닌은 1922년 12월 26일자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 '노동자계급 출신 중앙위원회 위원들은 주로 지난 5년 사이에 소비에트 기관에서 진급한 사람들보다 더 낮은 지위에 속한 노동자여야 합니다. 이들은 일반 노동자 농민에 더 가까운, 그러나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도 착취자 범주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내가 보기에는 중앙위원회에 들어간 노동자는 되도록이면 소비에트 기관에서 오래 근무해온 사람들 중에서 나와서는 안됩니다. … 왜냐하면 이런 노동자는 투쟁대상인 진짜 전통과 진짜 편견을 이미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레닌, '대회에 보내는 편지', 《전집》, 제36권, 593-611 쪽)

      레닌의 이 편지들은 그가 혁명의 근본문제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그리고 가장 정성들여 심사숙고한 조언을 당에 제시한 시기에 작성되었다 ('보다 더 적게, 그러나 더 낫게', '노동자농민감찰기관을 어떻게 재조직 할 것인가', '협동조합에 대하여').

      우리 당의 제15차 대회는 바로 위에서 인용한 레닌의 조언의 관점에서 중앙위원회를 선출해야 한다.

       

      제8장 공산주의청년동맹(콤소몰)

      잘못된 정치노선과 조직적 억압은 충분한 위력으로, 때로는 더욱 강화된 위력으로 공산주의청년동맹(콤소몰)에게까지 미친다. 청년노동자에 대한 국제주의 교육은 점점 더 뒷전으로 밀려나 있다. 모든 비판적 사고는 억제되고 박해받는다. 공산주의 청년조직의 지도적 지위에 대해서 당 기구는 무엇보다도 '복종'과 자진해서 반대파를 못살게 굴 것을 요구한다. 일반 활동가들 사이의 노동자 부위, 기본적으로 건강한 이 부위는 이런 체제의 어떠한 자극도 거부한다. 상부에서 추진한 잘못된 정책은 당내에서보다도 여기에서 훨씬 더 많이 소부르주아적 영향력에 길을 내 준다.

      최근에 콤소몰은 수적으로 급성장했지만, 그 사회적 구성의 악화라는 대가를 치렀다. 제13차 당 대회 이후, 이 조직 내의 노동자 중핵은 40.1%에서 34.4%로 줄어들었으며, 산업에 종사하는 청년노동자의 가입률은 49.8%에서 47%로 떨어졌다. 청년노동자 일반의 정치 활동도 쇠퇴했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의 여러 결정(견습기간 결원 총수의 축소, 견습생에 대한 예외적 임금률 적용, 실업학교의 견습생 수 제한, 또 견습기간의 무급제를 도입하려는 시도도 여기에 속한다)은 결국 콤소몰과 청년 노동자계급 대중 사이의 틈을 넓힐 수밖에 없는 대단히 미숙한 오류가 된다. 왜냐하면 어느 때보다도 청년노동자의 상황을 악화시켰으며, 그것도 제 14차 당 대회의 결의를 어기면서까지 그렇게 하기 때문이다.

      농촌에서 콤소몰은 농업노동자와 빈농의 지지 기반을 더욱 더 잃고 있다. 농촌에서 콤소몰의 문화적, 경제적 활동은 주로 단일 농장경영의 발전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농촌 당 세포의 전반적 구성, 적극적인 동맹원, 동맹 내 핵심당원들에서 빈농의 상대적 비중이 체계적으로 줄어들고 있다. 도시 청년노동자의 유입이 계속 감소하는 것과 더불어 콤소몰은 농촌의 중농과 부농 청년으로 채워지고 있다.

      도시와 농촌 모두에서 소부르주아 분자가 콤소몰의 지도권을 장악하려는 경향이 심해지고 있다. 동맹에서, 특히 농촌 조직에서 사무직 노동자와 '기타' 범주의 그룹이 더욱 더 주목할 만한 역할을 하고 있다.

      전체 신입당원의 36%가 콤소몰 대오에서 배출되고 있다(〈프라브다〉 1927년 7월 14일자). 그렇지만 콤소몰의 당 중핵 내에서 4분의 1에서 3분의 1이 비(非)노동자 계층이다. 농촌 콤소몰의 당 중핵에서는 중농이 농장노동자와 빈농을 희생시켜 급속히 늘어나고 있다(1925년에 20%였던 중농은 1927년에는 32.5%를 차지하고 있다). 이렇게 콤소몰은 차츰 소부르주아 분자에 의한 당의 희석화의 또 다른 원천으로 바뀌고 있다. 노동자 중핵의 지도적 역할이 계속 약화되고, 지식인, 사무직 노동자, 농촌의 부유층 출신 신참에 의한 노동자 중핵의 좌천은 불가피하게 콤소몰의 소부르주아적 타락을 가져올 것이다. 이러한 사태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조치들이 필요하다.

      1. 청년노동자의 노동과 교육 분야에서 우리가 거둔 혁명적 성과의 점진적 파기를 즉시 중지시키는 것一이들의 상황을 악화시킨 최근의 모든 조치를 폐지하는 것. 이것은 콤소몰의 병적인 성향(취태, 비행(非行) 등)에 대한 투쟁의 주요한 전제조건 가운데 하나다.

      2. 노동자계급의 일반적인 생활수준 향상에 따라 청년노동자의 물질적, 문화적 수준을 임금 인상, 실업학교와 직업교육과정의 계통적 확장 등을 통해 체계적으로, 그리고 단호히 향상시켜야 한다.

      3. 다음 몇 년에 걸쳐 도시와 농촌 청년노동자의 100%를 콤소몰에 가입시키기 위해서 이전 당 대회와 콤소몰 대회의 결정을 실행하는 것.

      4. 빈농 청년을 동맹으로 끌어들이는 임무를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강화하는 것.

      5. 경제력이 미약한 중농을 동맹으로 끌어들이는 것. 그리고 나머지 중농 중에서는 공적인 임무, 특히 쿨락에 맞서 투쟁하는 임무에서 검증된 사람만을 끌어들이는 것.

      6. 개인적 치부를 통해서가 아니라 협동조합과 농업의 집산화를 통한 새로운 농촌사회의 건설을 자신의 임무로 하면서, 빈농의 이해에 대한 콤소몰의 옹호를 강화하는 것.

      7. 다음 2년 동안 노동자, 농장노동자, 빈농에게서만 충원하게 함으로써 콤소몰내 당 중핵의 사회적 구성을 개선하는 것.

      8. 청년 농장노동자와 빈농을 지도부의 지위로 체계적으로, 그리고 단호히 진급시킴으로써 콤소몰의 지도기관을 근본적으로 노동자화하는 것. 대규모 노동자 중심지에서 콤소몰 지역위원회와 지구위원회를 수립하는 것, 그리고 이들 위원회의 사무국은 압도적 다수의 현장노동자로 구성해야 하며, 이때 현장노동자를 실제로 지도적 임무로 끌어들여야 한다.

      9. 관료주의에 대해 진지한 투쟁을 수행하는 것. 절대 필요한 최소인원으로 줄임으로써 유급 관료를 단호히 축소하는 것. 동맹 활동의 적어도 반, 산업 중심지에서는 4분의 3을 동맹원의 무급 노력으로 수행하는 것. 동맹의 임무 수행에 더 많은 일반 동맹원을 끌어들이는 것.

      10. 콤소몰의 문화, 교육 활동은 동맹이 끊임없이 일반적인 정치활동(소비에트, 노동조합, 협동조합)과 당에 적극 참여하는 것과 긴밀히 결합되어야 한다.

      11. 거수기 체제, 위로부터의 명령을 무감각하게 하는 체제, 거짓말투성이이며 유치한 '개요 학습'을 끝내라. 그 대신에 활기찬 토론, 동지적인 의견 교환, 가짜가 아닌 진짜 지식의 습득에 기초하여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한 진지한 학습을 실시하라.

      12. 말이 아니라 실제로 민주적인 제도를 도입하라. 행정적 압력 술책을 폐기하라. 당과 콤소몰의 문제에 관해 독자적 견해를 가진 사람에 대한 박해와 제명을 중단하라. 지구, 군, 주 등의 협의회와 대회의 소집을 규약에 규정된 일정표에 따라 엄격하게 준수하라.

       

      제9장 국제정세와 전쟁의 위험

      세계무대에서 소비에트연방의 위상

      소비에트연방에 대한 제국주의자들의 전쟁은 개연성이 높을 뿐만 아니라 불가피하다.

      이 전쟁의 위험을 지연시키고, 소비에트연방을 강화시키고 세계의 혁명적 노동자계급을 결속시키기 위해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시간을 버는 것은 우리의 가장 중요한 실천적 임무 가운데 하나가 되어야 한다. 결정적인 국가들에서 노동자혁명이 승리를 거두어야만 이 위험을 제거할 수 있다.

      세계대전의 위험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증대되고 있다.

      1. 스스로를 강화하기 위해 자본주의가 지난 몇 년 동안 수행한 투쟁과 이 투쟁에서 얻은 부분적인 성공은 모든 주요 자본주의 국가들에게 시장의 문제를 초미의 문제로 만들었다.

      2. 제국주의 자본가계급은 소비에트연방의 경제력이 성장하고 있음을 의심할 여지없이 확신하고 있으며, 대외무역의 독점으로 보호되고 있는 노동자 독재는 결코 자본가에게 러시아에서 '자유'시장을 제공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다.

      3. 제국주의 자본가계급은 소비에트연방의 당내 어려움을 추측하고 있다.

      4. 영국 총파업의 패배에 뒤이은 중국혁명의 패배는 제국주의자에게 소비에트연방을 뭉개버릴 수도 있다는 희망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영국과 소비에트연방의 외교관계 단절(1927년 5월)은 훨씬 전에 준비되었지만 중국혁명의 패배가 이를 재촉했다. 이런 의미에서 단교는 러시아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중국에서 진정한 볼셰비키 정책을 취하지 않은 것에 대한 보답이었다. 이런 사태를 영국과 우리 사이의 교역 형식이 단순하게 변화한 것이라고 상상하는('우리는 우리가 미국과 교역하는 것처럼 교역할 것이다') 것은 커다란 오류일 것이다. 영국 제국주의가 더 광범한 행동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지금 더할 나위 없이 명백하다. 영국은 소비에트연방에 대한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 다른 몇몇 국가 자본가계급의 '도의적 위임장'을 가지고, 폴란드, 루마니아, 발트해 연안국가들, 그리고 아마 유고슬라비아, 이탈리아, 헝가리 등도 어떤 식으로든 우리와의 전쟁에 끌어들이려고 기도하고 있다.

      폴란드는 우리와의 전쟁 준비에 영국보다 더 긴 기간을 갖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영국이 폴란드를 조기에 전쟁으로 끌어들일 가능성도 있다.

      프랑스에서는 반소(反蘇)공동전선을 위한 영국의 압력이 유력한 자본가계급 부위의 지지를 얻고 있다. 이들은 자신의 요구에 점점 더 완고해지고 있으며, 물론 유리한 순간에는 외교관계를 단절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최근 더 갈피를 못 잡고 있는 독일의 외교는 그 일반적 '방향'이 서구를 향해 있음이 더 뚜렷해지고 있다. 독일의 자본가계급은 이미 소비에트연방과의 전쟁에서 독일은 처음에는(1914년의 미국이 한 식으로) 아마 '중립'을 지킬 것이라고 공언하고 있다. 이는 전쟁에서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득을 보기 위해, 또 나중에 서구 제국주의자들에게 자신의 중립을 비싼 가격으로 거리낌 없이 팔려는 것이다. 독일 자본가계급이 서구로의 이런 방향 전환을 그럴듯하게 얼버무리는 것보다 소비에트연방의 근본적 이해에 더 나쁜 것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독일 자본가계급의 불의의 일격이 결정적인 의의를 가질 것이라는 점을 우리가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완전히 터놓고 '사태에 대해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만이, 소비에트연방의 노동자와 독일 노동자의 경계심을 일깨우는 것만이 이러한 타격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할 수 있고, 아니 적어도 타격을 가하려는 독일 자본가계급을 곤란하게 할 수 있다.

      일본의 자본가계급은 독일 자본가계급과 마찬가지로 교묘하게 소비에트연방과의 관계에서 술책을 부리고 있다. 이들은 매우 교활하게 그 흔적을 은폐하고, '우호적인' 체 하고 있다. 이들은 잠시 동안 장작림[장작림(Chang Tso-lin, 1873-1928) : 만주를 지배한(19l6~19년) 중국의 군벌]의 중국동부철도회사(Chinese Eastern railroad) 장악을 지연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은밀하게 중국에서 실권을 잡고 있는 이들은 곧 우리에 대해서 그 가면을 벗어던질 것이다.

      근동(터키, 페르시아)에서 우리는 줄잡아 말하더라도 제국주의자들이 우리를 공격할 경우, 근동국가의 확고한 중립을 보증하는 상황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이러한 경우, 제국주의자들의 압력을 받고 있는 이들 국가의 정부가 제국주의자들이 필요로 하는 일을 하게 되기 쉬울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우리가 공격 받을 경우, 소비에트연방에 대해 완전히 비타협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있는 미국은 제국주의의 '배후' 역할을 수행할 것이다. 이 역할의 의미는 바로 미국이 대소(對蘇)전쟁의 자금을 조달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클 것이다.

      요약하면, 1923-25년 시기가 일련의 부르주아 국가들이 소비에트연방을 외교적으로 승인한 시기인 반면에, 지금은 외교적 단절의 시기가 시작되었다. 1923-25년의 승인이 반드시 평화가 보장되거나, 믿을 수 있고 장기간에 걸쳐 숨 쉴 시간을 주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현재의 외교적 단절도 그 자체로는 반드시 가까운 장래에 전쟁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소비에트연방에 대한 공격 가능성이 있는 국제정세의 긴장감이 극도로 팽팽한 새로운 시기에 접어 든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자본주의 세계의 내부 모순은 매우 크다. 세계 자본가계급이 장기간에 걸쳐 우리에 대항하는 공동전선을 지탱하는 것은 대단히 힘들 것이다. 그러나 일정 기간 우리에 대항하는 몇몇 부르주아 국가의 부분적 연합은 전적으로 가능하다.

      이 모든 것이 우리 당으로 하여금 다음의 조치를 취하도록 다그치고 있음에 틀림없다.

      (1) 국제정세가 위험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2) 광범한 대중이 국제정치의 여러 문제에 다시 주의를 갖도록 하는 것.
      (3) 전쟁이 일어나면 방어를 위한 소비에트연방의 준비를 가장 열성적이고 모든 측면에 걸쳐 수행하는 것.

      공식 사회민주주의를 포함하여 자본가계급의 정당들은 제국주의가 소비에트연방에 대해 준비하고 있는 전쟁의 진정한 성격에 대해서 자국 국민을 속이려고 모든 방면에서 노력할 것이다. 우리의 임무는 지금 가장 광범한 전 세계의 인민대중에게 이 전쟁이 최초의 노동자 독재 국가에 대한 제국주의자와 노예소유자의 전쟁이자, 사회주의에 대한 자본주의의 전쟁임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 전쟁에서 제국주의 자본가계급은 본질적으로 자본주의적 임금 노예제를 유지하기 위해 싸울 것이다. 그러나 소비에트연방은 국제 노동자계급과 모든 식민지, 반(半)식민지, 종속국가들의 이해를 위해서, 국제혁명과 사회주의를 위해서 싸울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의 모든 활동은 다음과 같은 기치에서 전개되어왔음에 틀림없다. (1) 노동자 독재 국가에 대한 제국주의자의 전쟁을 집어치워라. ⑵ 소비에트연방을 공격하는 모든 나라에서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환하라. (3) 소비에트연방에 대해 전쟁을 일으키는 모든 부르주아 국가에 패배를. 자본주의 국가의 모든 정직한 노동자들은 '자국' 정부의 패배를 위해서 적극적으로 활동해야 한다. (4) '자국의' 노예소유자를 돕고 싶지 않은 모든 외국 병사는 적군에 투항해야 한다. 소비에트연방은 모든 노동자의 조국이다. (5) '조국 방어' 슬로건은 제국주의자들에 대항하여 민족혁명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식민지, 반(半)식민지 국가들을 제외한 모든 부르주아 국가들에서 제국주의의 이해에 봉사하는 거짓 핑계이다. 그러나 소비에트연방에서 '조국방어' 슬로건은 올바르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회주의의 조국과 전 세계 노동자계급 운동의 근거지를 방어하고 있기 때문이다. (6) 우리는 1917년 10월 25일 이후부터 조국방어주의자이다. 우리의 애국 전쟁은 '세계 사회주의 군대의 부대 가운데 하나인 소비에트공화국을 위한' 전쟁일 것이다. '우리의 "애국" 전쟁은 부르주아 국가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국제사회주의 혁명으로 나아가는 것이다.'(레닌, '우리 시대의 주요한 임무, 《전집》, 제27권, 163쪽) 우리의 조국방어는 노동자독재의 방어이다. 우리의 전쟁은 '자국의' 쿨락, 새로운 자본가계급, 관료, 우스트리얄로프 학파의 전문가, 백군 망명자에 대해서 빈농의 지지를 받으며 중농과 동맹한 노동자와 농장노동자에 의해 수행될 것이다. 우리의 전쟁은 진정으로 정의로운 전쟁일 것이다. 소비에트연방을 방어 하지 않는 자는 그 누구든 의심할 여지없이 국제 노동자계급을 배반한 자이다.

       

      중국혁명의 패배와 그 원인

      중국혁명의 패배는 실제 세력관계를一물론 일시적일뿐이지만一 제국주의에 유리하게 변화시켰다. 중국에서 새로운 혁명, 새로운 혁명투쟁은 불가피하다. 이것은 상황 전체가 보증하고 있다.

      기회주의적 지도자는 사태가 지난 뒤에 이른바 '객관적인 세력관계'로 자신의 실패를 설명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은 바로 어제, 이와 똑같은 세력관계에 기초하여 중국의 즉각적인 사회주의 혁명을 예측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현 시점에서 중국혁명의 불행한 결과를 가져온 결정적 원인은 러시아공산당과 코민테른 지도부의 근본적으로 잘못된 정책이었다. 그 최종 결과는 결정적인 시기에 중국에는 실제로 진정한 볼셰비키당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제 와서 중국 공산주의자들에게만 책임을 지우는 것은 천박하고 비열한 행위이다.

      우리가 중국에서 경험한 것은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에 멘셰비키 전술을 적용한 전형적 시도이다. 이런 이유로 중국 노동자계급은 승리를 거둔 자신의 '1905년'(레닌)에 이르지 못했음은 물론 지금까지 1848년 혁명에서 유럽 노동자계급이 수행한 것과 본질적으로 똑같은 역할을 한 것이다. 현 국제정세에서 중국혁명의 특이성은 스탈린-마르티노프-부하린의 전체 정책이 기대를 걸었던 이른바 '헉명적' 자유 자본가계급이 중국에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다. 중국혁명의 특이성은 다음과 같다.

      (1) 짜르체제 하의 러시아 농민보다 더 억압받고, 국내뿐만 아니라 외국 압제자의 멍에에 짓눌려 신음하고 있던 중국 농민은 1905년 혁명의 러시아 농민보다 더 강력하게 봉기할 수 있고, 또 봉기했다.

      (2) 레닌이 이미 1920년에 중국에 대해 제기한 '소비에트' 슬로건은 1926-27년의 상황에서도 그 정당성을 완전히 입증했다. 중국에 소비에트가 존재했다면, 노동자계급의 지도 아래 농민세력을 결집시킬 수 있는 형태가 제공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의 진정한 기관이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부르주아 정당인 국민당과 여기서 나오는 중국의 까베냑[루이 까베냑(Louis Cavaignac, 1802~1857 : 프랑스의 공화파 군인. 1848년 2월혁명 이후 육군 장관. 6월, 빠리 노동자 봉기 진압군 총사령관이었다. 12월의 대통령선거에 부르주아 공화파 대표로 출마했지만 루이 나폴레옹(보나파르트)에게 패배했다.]들에 대한 실제적 저항을 조직하는 기관이 되었을 것이다.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은 자본가계급에 대항하는(노동자계급의 지도 아래)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동맹에 의해서만 관철될 수 있다는 레닌의 가르침은 중국과 이와 비슷한 식민지, 반(半)식민지 국가들에 적용 가능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이런 국가들에서 승리로 가는 유일한 길을 가리킨다.

      (3)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즉,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는 제국주의 전쟁과 노동자혁명의 현 시대에 중국에서는 소비에트의 형태를 취했을 것이다. 그리고 소비에트연방의 존재를 고려하면, 비교적 급속히 사회주의 혁명으로 발전할 수 있는 모든 기회를 가졌을 것이다.

      대안적 전망이 없다면, 불가불 노동자계급을 패배로 이끄는 자유 자본가계급과의 동맹이라는 멘셰비키적 길뿐이다. 바로 이것이 1927년 중국에서 일어난 일이다.

      동방의 소비에트, 민족혁명운동이 존재하는 국가들에서 공산주의노동자당의 완전한 독립, '자국의' 자본가계급과 외국의 제국주의자들에 대항하는 :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동맹에 대한 결정一레닌 시대에 코민테른 제2차~4차 대회에서 내린 이 모든 결정은 완전히 잊혀져버렸다.

      코민테른 제7차 확대집행위원회 전원회의(1926년 11월)의 결의문은 중국에서 이미 강력하게 전개 중인 사태에 대해 올바른 레닌주의적 평가를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마르티노프가 주장한 멘셰비키 방침으로 아주 완전히 전향했다. 믿을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이 결의문은 1926년 3월의 장개석의 첫 반(反)혁명 쿠데타에 대해서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1926년 여름부터 가을에 걸쳐 광동 정부가 일련의 지방에서 집행한 노동자 농민의 사살이나 그 밖의 탄압조치에 대해서도, 노동자계급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이뤄진 강제적 중재 조치에 대해서도, 광동 정부의 노동자계급 파업 분쇄에 대해서도, 광동 정부가 고용주 측의 황색 어용노동조합을 보호해준 것에 대해서도, 광동 정부가 농민운동을 억압하고, 모욕하고, 그 확대 발전을 저지하기 위해 기울인 노력에 대해서도 일체 말하지 않는다. 제7차 전원회의의 결의문에는 노동자를 무장시키거나, 반(反)혁명 총참모부에 대해 투쟁하자는 요구도 없다. 이 결의문에서 장개석의 군대는 혁명군으로 묘사되어 있다. 결의문은 공산당 일간지의 창간을 촉구하지도 않으며, 중국공산당이 진정으로 독자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에 대해서도 의심할 여지없이 명확하게 말하지도 않는다. 이 모든 것을 마무르려고 제7차 전원회의는 공산주의자에게 국민당 정부에 들어갈 것을 재촉했다. 이는 지금의 상황에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큰 재앙을 가져올 수밖에 없는 조치였다. 코민테른의 결의문은 '민족혁명정부(즉, 장개석 정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