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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혁명

레온 트로츠키

 

**이 전자문서는, 패스파인더(Pathfinder)출판사가 1973년 펴낸 『THE SPANISH REVOLUTION(1931-39), LEON TROTSKY』를 대본으로, 풀무질출판사가 2008년 번역 출간한 스페인 혁명을 복구한 것이다. 전체 서문 등 몇 부분은 생략하였다.**

 

<차례>

제1부 | 왕정에서 공화국까지

서문

스페인 공산주의자의 임무/ 스페인파시즘/ 소비에트의 창설/ 소비에트와 제헌의회/ 스페인혁명/ 공산주의자의 단결을 위하여/ 보이콧 전술/ 노동자공화국과 제헌의회/ 베렌게르의 사임 / 병사 훈타와 노동자 훈타/텔만과 ‘인민혁명’/ 있는 그대로를 말하는 것

제2부 | 공화국에서 내전까지

서문

스페인 공산주의자의 십계/ 공화주의 정부의 탄압 조치/ 카탈로니아연합/ 카탈로니아 민족주의의 진보성/체계적인 서술이 필요하다/ 스페인혁명과 이를 위협하는 위험/ 무정부적 조합주의와 카탈로니아연합/ 카탈로니아연합(노동자농민블록)의 강령/ 스페인혁명의 성격/ “사모라-마우라를 타도하자!”/ 마우린과 무정부적 조합주의 자들/ 선거 결과와 이것이 가리키는 전술/ 스페인 공산주의와 카탈로니아연합/ 혁명에서 파업의 역할/ 〈엘 소비에트〉지를 환영한다 / 스페인 청년에게/ 스페인의 ‘코르닐로프들’과 스페인의 ‘스탈린주의자’/ 스페인 좌익반대파의 문제들/ 스페인 좌익반대파의 모든 성원들에게 보내는 편지/ 통일노동자당의 배신/ 스페인에서 제4 인터내셔널의 임무

 

제3부 | 내전

서문

국제서기국에 보내는 편지/ 스페인의 교훈/ 장루에게 보내는 편지/ 아바스 통신사와의 인터뷰/ 〈노동자 투쟁〉편집부에 보내는 편지/ 스페인내전에서의 혁명전략/ 스페인에서 승리할 수 있는가?/ 바르셀로나봉기/ 게페우의 하수인에 의한 안드레스 닌의 암살/ 스페인의 경험을 통한 개인과 사상의 검증/ 스페인 정세에 대한 질문에 답하여/ 네그린 정부의 예산안에 찬성해야 하는가?/ 극좌 일반과 특히 구제불능의 극좌에 대해서/ 혁명적 일정에 대하여/ 스페인의 교훈 : 마지막 경고/ 다섯 번째 바퀴/ 고발자역을 하는 배반자/ 스페인의 비극/ 스페인, 스탈린, 예조프/ 제국주의의 미스터리/ 다시 한 번 스페인의 패배 원인에 대해서/ 계급, 당, 지도부一스페인 노동자계급은 왜 패배했는가?

부록 | 스페인 볼셰비키-레닌주의자의 강령

 

 

제1부 | 왕정에서 공화국까지

 

|서문|

1929년 금융공황의 충격 속에서 프리모 데 리베라 장군은 1930년 1월에 스페인 주둔군에 신임 투표를 붙였다. 그의 동료 장교들이 그에게 반대표를 던졌다. 독재자의 몰락으로 개시된 1주일간의 준(準)군사적 체제는 거의 곧바로 공화국에 길을 내주었다.

국왕 알폰소 13 세는 다마소 베 렌게르 푸스테[다마소 베렌게르 후스테 (Damaso Berenguer y Fuste, 1873-1953) : 스페인의 반동적 장군. 1930년 1월 프리모 데 리베라 독재정권이 붕괴한 직후, 알폰소 13세에 의해 임시정부의 수장에 임명된다.] 1931년 2월 국내 여론에 의해 사임했다. " 장군을 임시정부의 수반으로 임명했다. 국왕은 임시정부가 입헌군주제의 토대를 닦기를 바랐다. 이 모험의 성공 여부는 왕당파와 가톨릭 정당들의 조직적 능력과 대중적 토대에 달려 있었다. 그러나 프리모 데 리베라 체제 하에서는 모든 정당들이 불법이었기 때문에 부르주아 우익과 중도파 당 기구들은 혼란에 빠졌다. 오직 독재 아래에서도 불법활동을 해온 노동자계급 정당들만이 정치활동의 새로운 발전 기회를 이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무정부주의자는 이들의 전통대로 곧 실시될지도 모를 선거는 모두 보이콧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사회주의자들은 1930년 가을에 부르주아 공화파 정당의 대표들과 공동으로 선거활동할 것을 약속하는 산 세바스티안(San Sebastian) 협정에 서명했다.

12월에 하카 주둔군에 중심을 둔 공화주의 장교들이 왕정에 대항하여 군사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은 진압되고, 그 조직자들은 처형되었다.

그러나 뒤이어진 대중적 분노는 국왕으로 하여금 새 정부를 구성하고 선거를 공표하게 만들었다. 베렌게르가 사임하고, 1931 년 2월에 민간정부로 대체되었다.

우익 정당들이 국회 선거에서 다수파를 획득할 수 없을 것이라고 확신한 국왕은 대신에 4월 12 일 지방자치체 선거를 실시하자고 요구했다. 모든 대도시는 합심하여 공화주의와 사회주의 정당들에 투표했다. 왕당파들은 카시케(Caciques, 지방의 정치 실력자들) 조직을 통한 농촌 표의 기만적 통제로만 총득표수의 과반수를 유지했다. 거대한 군중이 왕정에 대한 적개심을 보이며 마드리드 거리에 모이기 시작하자, 알폰소는 퇴위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일요일 선거는 내가 더 이상 우리 국민의 사랑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고 선언했다.

4월 14일 공화국이 선포되었으며, 새 정부가 취임했다. 부르주아 정당들이 내각을 지배했다. 첫 수상은 알카라 사모라[니세토 알카라 자모라(Niceto Alcala Zamora, 1877-1949) : 대지주 출신의 보수 정치인. 진보당의 당수. 1931년 4월에 성립한 제1차 공화정권의 첫 수상. 1931년 6월부터 1936년 5월까지 스페인공화국대통령]였다. 그는 안달루시아의 변호사였으며, 프리모 데 리베라의 쿠데타 이전에 알폰소 국왕의 장관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 내무부 장관은 미구엘 마우라[미구엘 마우라(Miguel y Gamazo Maura, 1881-1971):스페인의 부르주아 정치인]가 맡았다. 그는 가톨릭교회의 유명한 옹호자였다. 보수적인 급진당의 알레한드로 레로욱스와 디 에고 마르티네스 바리오가 두 자리를 맡았다. 이 정도로 내각은 극우 정당들과 거의 구별될 수 없었다. 자유주의적 공화주의 ‘좌익’은 국방장관을 맡은 마누엘 아사냐, 카사레스 키로하, 알바로데 알보르노스(Alvaro de Albomoz), 니 콜라우 '드올웨르(Nicoldu d'Olwer), 페르난도 데 로스 리오스(Fernando de los.Rfos)가 대표했다. 데로스 리오스는 엄밀히 말하면 사회당원이었지만 실제로 사회당의 규율에 묶여 있지 않았다. 사회당의 실제 대표자는 라르고 카바예로와 인달레시오 프리에토였다. 이들은 압도적으로 부르주아적인 정부에서 2인의 소수파였다.

새 임시정부는 4월 15일에 자신의 계획이 포함된 ‘법률적 지위’를 발표했다. 임시정부는 신 헌법을 채택하고, 공식적으로 정식 정부를 선출하기 위해 제헌의회를 소집할 것을 제안했다. 종교의 자유를 맹세하고, 사유재산권을 보장하고, 농업개혁을 약속했다.

트로츠키의 망명에 대한 주석

독자들은 이 책에 담긴 여러 글을 썼을 때, 트로츠키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염두에 두는 것이 유용할 것이다. 트로츠키와 그의 가족은 1929년 2월, 스탈린의 명령에 의해 소련에서 강제로 추방되었으며, 1933년 7월까지 터키에서 살았다. 트로츠키의 지도 아래 국제좌익반대파(볼셰비키-레닌주의자)가 1930년 4월 빠리에서 조직되었다. 1930~31년에 트로츠키는『러시아혁명사』를 쓰느라고도 바빴지만 좌익반대파의 성장과 발전 문제에 대부분의 주의를 기울였다.

제 1부의 모든 글은 터키, 프린키포 섬이나 이스탄불 교외의 카디코이(Kadikoy)에서 작성되었다. 팸플릿 「스페인혁명」을 제외하면, 이 글들은 새로 조직된 국제좌익반대파 스페인 지부의 지도자들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썼다. 트로츠키는 이 편지들에서 출판할 부분을 직접 뽑아냈다. 이 글을 썼을 당시, 트로츠키와 좌익반대파는 코민테른과 그 지부들을 개혁한다는 전략을 따랐다는 점을 기억해두어야 한다.

 

 

스페인 공산주의자의 임무

一스페인 좌익반대파 기관지 〈시류에 저항하며〉 편집부에 보내는 편지

 

■ 이 글은 1930년 리베라 독재정권의 붕괴로 시작된 스페인혁명에 대해 트로츠키가 공식적으로 견해를 밝힌 첫 번째 글이다. 이 편지의 수신인〈시류에 저항하며〉(Contra la Corriente)는 리베라 독재를 피해 벨기에에 망명 중이던 스페인 좌익반대파가 창간한 첫 기관지이다. 이 편지에서 트로츠키는 혁명적 헤게모니를 확립하기 위해서 공산주의자는 민주주의 구호에 근거한 투쟁을 정력적이고, 대담하게 수행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카탈로니아 인민의 분리권을 포함한 자결권 보장을 위해 공산주의자의 전면적이고, 성실한 투쟁을 주장하고 있다.

 

친애하는 동지 여러분!

여러분의 기관지 첫 호 발행을 진심으로 환영한다. 스페인의 공산주의 좌익반대파는 특히 유리하고 결정적인 시기에 무대에 등장했다.

현 스페인의 위기는 놀랄 만큼 규칙적으로 전개되고 있는데, 그 때문에 노동자 전위는 마음의 태세를 갖추기 위한 일정한 시간적 여유가 있다, 그렇지만 이 시기가 오래 지속될 것인지 여부는 분명치 않다.

프리모 데 리베라 독재는 혁명 없이 내적 고갈로 붕괴했다. 바꿔 말하면, 문제가 처음에는 새로운 사회의 혁명적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낡은 사회의 병에 따라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말로 우연이 아니다. 한편, 자본가계급이 바라보는 바로는 독재체제가 더 이상 혁명적 대중을 분쇄하는 긴급한 필요에 따라서 정당화될 수 없으며 동시에, 이 체제가 경제, 금융, 정치, 문화 등 각 분야에서 자본가계급의 요구와 충돌했다. 그러나 자본가계급은 마지막 순간까지 전력을 다해 투쟁을 회피했다. 독재가 벌레 먹은 과일처럼 썩어 떨어지도록 내버려두었다.

이후, 다양한 정치집단을 대표하는 여러 계급은 대중 앞에서 선명한 입장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역설적 현상을 본다. 그 보수주의 때문에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군사독재에 대해 진지하게 투쟁하려고 하지 않던 부르주아 정당들이 이제 이 독재의 모든 책임을 왕정에 씌우고, 스스로를 공화주의자라고 선언했다. 리베라 독재가 존재한 내내 왕궁의 발코니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던 것처럼, 전력을 다해 소부르주아 계급의 행동을 마비시키고, 도시와 농촌의 노동자를 유린한 자본가계급의 가장 부유한 층의一때로는 적극적 이고, 때로는 소극적인一지지에 의해 결코 유지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그 결과는 어떠한가? 노동자, 농민, 도시의 소부르주아계급, 젊은 지식인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대자본가계급도 공화주의자를 자처하고 있는데도, 왕정은 계속 존재하며 기능하고 있다. 프리모 데 리베라가 왕정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을 뿐이라면, 이런 ‘공화주의적인’ 나라에서 왕정은 어떤 실에 매달려 있는 것인가? 얼핏 보아서는 풀 수 없는 수수께끼인 것 같다. 그러나 해답은 그리 복잡하지가 않다. 프리모 데 리베라를 ‘묵인하고’ 있었던 자본가계급은 사실상, 이용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 즉, 공화주의자를 자처하는 것을 통해, 따라서 소부르주아 계급의 심리에 맞춤으로써 이들을 더 능숙하게 속이고 마비시키는 것을 통해 현재도 왕정을 지지하고 있는 것처럼, 리베라를 지지하고 있었다.

그 강렬한 극적 효과에도 불구하고 이 사태를 구경꾼의 입장에서 보자면, 희극적인 측면이 없지 않다. 왕정은 공화주의 자본가계급의 등 위에 앉아 있는데, 자본가계급은 서둘러 몸을 일으킬 생각이 없다. 값비싼 짐을 짊어진 채, 가만히 있지 못하는 대중 속으로 살그머니 들어가 있는 자본가계급은 익살스런 코미디언의 목소리로 항의, 불평, 악담에 응한다: ‘내 등에 붙어 있는 이놈을 보십시오! 이놈은 내 불구대천의 원수입니다. 여러분에게 그 죄목을 일러줄 테니 자, 주목하세요!’ 등등. 그리고 이 구경거리를 즐기던 군중이 웃기 시작하자, 자본가계급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짐을 좀 더 앞으로 옮기는 것이다. 이것이 왕정에 반대하여 투쟁하는 것을 뜻한다면, 무엇이 왕정을 지지하는 투쟁인가?

학생의 맹렬한 시위는 프리모 데 리베라 독재에서 해방을 그 전제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본적 요소가 여전히 그대로 남아있는 절망에 빠진 나라의 불안정성에 대해서 해결책을 찾으려는 자본가계급, 특히 소부르주아 계급 젊은 세대의 시도일 뿐이다. 자본가계급이 부르주아 사회의 위기에서 생긴 문제를 의식적으로, 그리고 완강하게 해결하려고 하지 않을 때, 그리고 노동자계급이 아직 이 임무를 맡을 준비가 안 되어 있을 때, 흔히 학생이 무대의 전면에 나선다. 제1차 러시아혁명(1905년)의 발전 중에 이러한 현상을 여러 차례 볼 수 있었으며,우리는 그 징후적인 의의를 항상 높이 평가했다. 학생의 이런 혁명적이거나 준(準)혁명적인 활동은 부르주아사회가 극심한 위기를 겪고 있음을 뜻한다. 대중 사이에서 폭발적인 힘이 쌓이고 있음을 감지한 소부르주아 청년은 그 나름대로 교착 상태를 타개하고, 정치적 발전을 진척시키려는 것이다.

학생운동에 대해서 자본가계급은 반쯤은 찬성하고, 또 반쯤은 경계하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 만약 청년이 왕당파 관료집단에 약간의 타격을 가한다면, 이 ‘아이들’이 도를 넘어서지 않는 한, 특히 근로대중을 분기시키지 않는 한, 그리 나쁘지 않은 것이다.

학생운동을 지지하는 것을 통해 스페인 노동자는 완전히 올바른 혁명적 본능을 보여주었다. 물론 이들은 자신의 기치 아래, 그리고 독자적인 노동자 조직의 지도 아래 행동해야 한다. 스페인 공산주의는 이 과정을 보장해야하며, 때문에 올바른 정책이 절대 필요하다. 이것이 내가 전에 말한 것처럼, 여러분의 기관지 발간이 총체적 위기의 발전에서 이례적으로 중요하고 결정적인 시기에 부합하는 것이며,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혁명적 위기가 혁명으로 전화되는 시기에 부합하는 것이다.

노동자의 파업운동, 반(反)산업합리화, 반(反)실업 투쟁은 소부르주아 대중의 격렬한 불만과 체제 전체의 심각한 위기라는 맥락에서 평상시와 완전히 다른, 훨씬 더 의미심장한 중요성을 획득한다. 노동자의 투쟁은 국가적 위기에서 생기는 모든 문제와 밀접하게 결합되어야 한다. 노동자가 학생과 함께 시위에 나섰다는 사실은 혁명적 헤게모니를 향해 투쟁하고 있는 노동자전위의一아직 불충분하고 우유부단하지만一첫 걸음이다.

이 길은 공산주의자가 민주주의 구호를 위해 단호하게, 대담하게, 정력적으로 투쟁할 것을 전제로 한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가장 큰 종파주의적인 오류를 범하게 될 것이다. 혁명의 현 단계에서 노동자계급이 정치적 구호의 영역에서 모든 소부르주아 ‘좌익’집단과 구별되는 것은 무정부주의자나 조합주의자들이 하는 것처럼, 민주주의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소부르주아 계급의 우유부단함을 가차 없이 비난하는 동시에, 민주주의 구호를 위해서 단호하게, 공공연히 투쟁하는 것에 있다.

민주주의 구호를 제기함으로써 노동자계급은 스페인이 부르주아혁명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라는 암시를 줘서는 안 된다. 건방지고, 진부한 정식으로 가득 찬 어리석은 현학자만이 이렇게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스페인은 옛날에 부르주아혁명 단계를 지났다.

혁명적 위기가 혁명으로 전화된다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부르주아적 한계를 뛰어넘을 것이고, 혁명이 승리한 경우에 권력은 노동자계급의 수중으로 들어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 노동자계급이 혁명을 지도할 수 있는 것은一즉, 가장 광범위한 노동자와 피억압 대중을 자기 주위로 결집시키고, 그 지도자가 될 수 있는 것은一노동자계급이 지금 자신의 계급적 요구와 함께 모든 민주주의적 요구를 전면적으로 제기하는 경우뿐이다.

이런 구호는 무엇보다도 농민에게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게 될 것이다. 농민이 구두 맹세로 노동계급독재 구호를 받아들임으로써 노동자계급을 선험적으로 신뢰할 수는 없다. 다수의 피억압 계급인 농민은 특정 단계에서 불가피하게 민주주의 구호에서 피억압자가 억압자를 꺼꾸러뜨릴 가능성을 발견한다. 농민은 필연적으로 정치적 민주주의 구호를 토지의 급진적 재분배 구호와 결부시킨다. 노동자계급은 이 요구 모두를 공공연히 지지할 것이다. 공산주의자는 제때에 어떤 방법을 통해 이런 요구를 성취할 수 있는지 노동자전위에게 설명함으로써 미래의 소비에트 제도를 위한 씨를 뿌릴 것이다.

민족문제에서도 노동자계급은 다양한 민족 집단의 분리권, 심지어 자결권까지도 혁명적 수단을 통해 지지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선언함으로써 철저하게 민주주의 구호를 옹호한다.

그러나 노동자전위 자신이 카탈로니아의 분리라는 구호를 제기해야 하는가? 만약 그것이 카탈로니아 인민 대다수의 의지라면 그렇다. 그러나 이 의지는 어떻게 표현될 수 있는가? 자유로운 주민투표나 카탈로니아의 대표자회의, 또는 카탈로니아 인민이 명백하게 지지하는 정당을 통해서나 심지어 카탈로니아의 민족봉기를 통해서 분명히 표현되어야 한다. 말이 난 김에 좀 더 언급해보자.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노동자계급에게 민주주의 구호를 포기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얼마나 반동적인 탁상공론인지를 알고 있다. 동시에 소수민족의 의지가 표명되지 않는 동안, 노동자계급 자신은 분리 구호를 채택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이 구호가 카탈로니아 인민의 의지를 나타내는 경우에는 완전하고 성실하게 지지할 것이라고 미리 공공연하게 보증해야 한다.

말할 필요도 없이, 카탈로니아의 노동자가 이 문제에 대해 최종 결정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스페인 노동자계급에게 이렇게 광범위한 기회를 열어주고 있는 현재의 위기 상황에서 그 힘을 분열시키는 것이 현명하지 못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면, 카탈로니아의 노동자는 스페인의 한 지역인 카탈로니아를 이런저런 근거에서 지지하는 선전을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이다. 나로서는 정치적 판단이 이러한 해결책을 시사한다고 믿는다. 이러한 해결책은 가장 열렬한 분리주의자에게도 당분간은 받아들여질 것이다. 왜냐하면 혁명이 승리할 경우에는 지금이 카탈로니아나 다른 지역에게도 자결권을 획득하는 것이 어느 때보다 훨씬 더 쉬울 것이라는 점이 너무도 분명하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전위는 인민대중의 정말로 민주적이고 혁명적인 운동 모두를 지지함으로써 이른바 공화주의적 자본가계급에 대항하여 그 불성실과 배신과 반동성을 폭로하고, 근로대중을 자신의 영향력 하에 두려는 이들의 시도에 저항하는 비타협적인 투쟁을 이끌게 될 것이다.

공산주의자는 어떠한 조건 아래에서도 자신의 정치투쟁의 자유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혁명 중에 이런 종류의 유혹이 얼마나 큰가를 잊어서는 안 된다. 중국혁명의 비극적 역사는 이에 대한 반박할 수 없는 증거이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는 자신의 조직과 선전의 완전한 독자성을 비타협적으로 지키면서도, 혁명을 위해 거대한 싸움터를 제공하는 공동전선 정책을 가장 광범위한 방식으로 실천한다.

좌익반대파는 공식 공산당과 공동전선 정책의 적용에 착수하고 있다. 관료들이 좌익반대파가 공식 공산당의 기치를 추종하는 노동자에게 적대적이라는 인상을 조장하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 반대로 좌익반대파는 공산당 노동자의 모든 혁명적 행동에 참여하고, 이들과 함께 나란히 투쟁할 준비가 되어 있다. 만약 관료가 반대파와 함께 투쟁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노동자계급은 이 거부에 대한 전적인 책임을 관료가 져야 한다고 볼 것이다.

스페인의 위기 지속은 수백만 근로대중의 혁명적 각성을 의미한다. 이들이 돌연히 공산주의의 기치 아래 모일 것이라는 징후는 전혀 없다. 그보다 이들은 아마도 제일 먼저 급진적인 소부르주아 정당, 즉 주로 사회당, 특히 그 좌익을 강화시킬 것이다. 예를 들어, 1918-19년 독일혁명 중에 독립사회민주당에 대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이것이 대중의 광범하고 실질적인 급진화가 나타나게 될 방식이지, 결코 ‘사회파시즘’의 성장을 통해서 나타나지는 않는다. 파시즘이 다시 승리할 수 있다면,—그리고 이번에는 ‘군사적인’ 방식보다는 ‘사회적인’ 방식으로, 즉 무쏠리니의 ‘사회파시즘’과 같은 방식으로一혁명의 패배와 혁명을 믿었다가 배신당한 대중이 환멸을 느꼈을 때뿐이다. 그러나 최근의 부단한 사태 전개에도 불구하고 패배는 공산당 지도부의 어처구니없는 오류의 결과로 일어날 수밖에 없다.

계급역관계에 대한 기회주의적 평가와 결합된 말로만의 급진주의와 종파주의, 지그재그 정책, 관료적 지도一한마디로 말하면, 스탈린주의의 본질을 구성하는 모든 것一는 그 자체로 사회민주주의의 입장을 강화시킬 수 있다. 사회민주주의는 독일과 이탈리아 혁명가들의 경험처럼, 노동자계급의 가장 위험한적임을 각기 명료하게 보여주었다.

사회민주주의는 대중이 보기에도 정치적 신용이 떨어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것은 모욕을 통해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대중은 자신의 집단적 경험만을 믿는다. 대중은 혁명의 준비기 동안에 공산주의자의 정책과 사회민주주의자의 정책을 투쟁을 통해서 비교할 기회를 가져야만 한다.

공산주의자가 사회민주주의자와의 공동전선을 대중을 충분히 고려하여 주장한다면, 대중을 획득하기 위한 투쟁은 틀림없이 이를 위한 조건을 만들어낼 것이다. 리프크네히트는 많은 부분에서 독립사회민주당, 특히 그 좌익과 협정을 맺었다. 우리도 사회혁명당 좌파와 무조건적인 블록을 맺었다. 그리고 10월 봉기까지는 멘셰비키 국제주의자와 일련의 부분적 협정을 맺고, 다수의 공동전선을 제안했다. 우리가 이 정책으로 잃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당연하지만 영-러위원회 같은 공동전선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혁명적 총파업이 벌어지고 있을 때, 스탈린주의자는 파업 파괴자와 블록을 맺었다. 또한 국민당 식으로 공동전선에 관여하지도 않았다. 스탈린주의자는 노동자 농민의 동맹이라는 기만적인 구호 아래 노동자 농민에 대한 부르주아독재를 보증했다.

이상이 방관적 입장에서 생각해본 전망과 임무이다. 나는 이상의 설명이 얼마나 구체성이 결여되어 있는지 잘 알고 있다. 내가 매우 중요한 몇몇 사정을 다루지 못했다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고 정말로 그럴 것이다. 여러분은 직접 확인해볼 수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레닌주의 혁명 방법으로 무장한 여러분은 혼자 힘으로도 자신의 길을 찾을 것이다. 여러분은 노동자계급의 사고와 감정을 파악하고, 거기에 명확한 정치적 표현을 부여할 줄 알 것이다. 이 편지의 목적은 단지 세 번의 러시아혁명의 경험에 의해 확증된 혁명적 전략의 원칙을 일반적인 형태로 요약하는 것뿐이다.

진심으로 성공하기를 바란다.

 

L. 트로츠키 드림

1930년 5월 25일

 

 

스페인파시즘

 

■ 이 글은 팸플릿 ‘스페인혁명과 이를 위협하는 위험’의 부록으로 〈반대파 회보〉에 게재된 것으로, 트로츠키가 스페인 좌익반대파 앞으로 보낸 편지의 일부이다.

 

몇 년에 걸친 독재, 자본가계급의 반(反)정부운동, 공화주의자의 모든 피상적인 소동, 학생시위가 벌어진 뒤에 필연적으로 노동자가 행동할 것임에 틀림없으며, 게다가 노동자의 이러한 개입을 혁명정당이 눈치 채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이전 글[앞의 글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에서 매우 신중하게 표명했다. 나의 착각이 아니라면, 일부 스페인 동지들은 내가 학생시위의 징후적인 의의와 함께 노동자의 혁명운동 전망도 과대평가하고 있다고 간주했다. 그렇지만 그때 이래로 스페인에서는 파업투쟁이 거대한 규모를 띠고 있다. 이들 파업을 누가 지도하고 있는지 샅샅이 안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

1918-19년 이래 이탈리아가 경험한 것처럼, 소요, 파업, 총파업, 공장 점거, 지도력의 결여, 운동의 쇠퇴, 파시즘과 반(反)혁명적 독재의 성장 등을 스페인이 똑같이 겪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프리모 데 리베라 체제는 파시스트 독재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소부르주아 대중의 반동에 토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동자 전위정당이 예전처럼 여전히 수동적이고 무정견하다면, 현재 명백한 스페인의 혁명적 고양의 결과, 진짜 스페인의 파시즘을 위한 조건이 창출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다.

 

1930년 11월 21 일

 

 

소비에트의 창설

 

■ 이 글은 팸플릿 ‘스페인혁명과 이를 위협하는 위험’의 부록으로 〈반대파 회보〉에 게재된 것으로 트로츠키가 스페인 좌익반대파 앞으로 보낸 편지의 일부이다.

 

그렇다면 전망은 어떠한가? …당신의 최근 편지에서 알 수 있는 바로는, 모든 조직과 그룹이 시류에 떠 돈다는 것이다. 즉, 운동이 잡아끄는 정도까지만 운동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혁명적 행동강령이나 면밀한 전망을 가지고 있는 조직이 단 하나도 없다.…

소비에트 구호는 정세에 의해 제기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러시아에서 발생한 소비에트는 노동자평의회를 의미하지만, 처음에는 강력한 파업위원회였다. 초기에 참가한 사람 중에서 소비에트가 장차 권력기관이 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물론 소비에트는 인위적으로 창출될 수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직종을 망라하고 정치적 성격을 띤다면, 각각의 지역적 파업 중에도 소비에트의 창출을 촉진해야 한다. 주어진 상황에서 운동의 지도력을 장악하고, 혁명투쟁의 규율을 강제할 수 있는 유일한 조직 형태가 바로 소비에트이다.

솔직히 말해 나는 미래의 역사가가 이례적인 혁명정세를 놓쳤다고 스페인 혁명가들을 비난할지도 모를 사태가 벌어지지나 않을까 매우 염려하고 있다.

 

1930년 12월 12일

 

 

소비에트와 제헌의회

 

■ 이 글은 팸플릿 ‘스페인혁명과 이를 위협하는 위험’의 부록으로 〈반대파 회보〉에 게재된 것으로, 트로츠키가 스페인 좌익반대파 앞으로 보낸 편지의 일부이다.

 

정말로 3월 1일에 선거가 실시될 것인가?…

당면한 정세에서 보이콧 전술을 효과적으로 적용한다면, 틀림없이 베렌게르의 선거를 무용지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1905년에 우리도 짜르의 자문기관에 지나지 않은 불뤼긴 의회[불뤼긴 의회(Bulygin Duma): 1905년 2월, 내무장관 불뤼긴에 의해 구상되어 8월에 설치되었다. 이것은 말만 의회지, 사실상 짜르의 자문기관에 지나지 않았다. 이 국회는 사회민주주의 세력의 보이콧 전술에 의해 좌절했다.]선거를 무력화시킨 바 있었다. 이 문제에 대한 공산주의자의 정책은 무엇인가? 공산주의 자는 이에 대한 전단, 호소문, 성명서 등을 배포하고 있는가?

그러나 국회를 보이콧할 수 있다면, 무엇으로 대신할 것인가? 소비에트인가? 내 생각으로는 이런 식의 문제제기는 올바르지 않다. 현재, 도시와 농촌의 대중은 오직 민주주의 구호 아래에서만 단결할 것이다. 여기에는 보통 · 직접 · 평등 · 비밀선거에 근거한 제헌의회 선거도 포함된다. 현 상황에서 이 구호를 비켜갈 수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소비에트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스페인 노동자一 농민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一는 소비에트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한다. 적어도 자신의 경험에서 나오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가오는 시기에 국회를 둘러싼 투쟁이 스페인의 정치생활 전체를 이룰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비에트 구호를 국회 구호에 대립시키는 것은 옳지 않을 것이다. 이에 반해서, 소비에트는 가까운 장래에 민주주의 구호에 근거하여 대중을 결집할 때에만 건설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다음을 의미한다. 즉, 불성실하고, 기만적이며, 보수적인 국회를 왕정이 소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민주적인 제헌의회 소집을 보증하기 위해, 그리고 이 국회가 농민에게 토지를 인도하고, 그 밖의 많은 일을 하게 하려면, 근로대중의 견고한 진지로서 노동자 병사 농민소비에트가 건설되어야 한다.

 

1931년 1월 12일

 

 

스페인혁명

 

■ 이 글은 1931년 1월에 작성된 트로츠키의 첫 번째 본격적인 스페인 혁명론이다.

1930년에 프리모 데 리베라 독재가 붕괴하고, 새로운 혁명의 물결이 일어나기 시작한 스페인에 대해 트로츠키는 평범치 않은 관심을 두었다. 매우 후진적이면서도 사회주의 전통이 강한 스페인은 어떤 의미에서는 러시아와 같은 복합적인 사회 상황을 가진 연속혁명론의 고전적 국가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트로츠키는 제1차 세계대전 발발 뒤에 빈에서 스위스로 갔으며, 전시 중에는 주로 프랑스에서 활동했지만, 전황이 심각해짐에 따라 마침내 프랑스에서도 활동할 수 없게 되어 한때 스페인으로 추방된다. 이 짧은 스페인 체재기간에 대해 자서전인 『나의 생애』에서 자세하게 쓰고 있듯이, 의논 상대가 아무도 없었던 트로츠키는 도서관에 틀어박혀 스페인의 언어, 사회, 역사 등을 배운다. 이때의 경험이 이 글에서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연속혁명 도식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스페인의 생생한 현실에서 출발하여 스페인 공산주의자의 임무를 구체적으로 정식화하고 있는 트로츠키의 이 글은 사회분석의 견본이라 할만하다.

 

1. 구 스페인

자본주의의 사슬이 그 가장 약한 고리에서 다시 끊어질 징후를 보이고 있다. 이번은 스페인이다. 이 나라의 혁명운동은 이베리아반도에 질서가 신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는 전 세계 반동세 력의 희망을 사전에 앗아갈 만큼 강력하게 발전하고 있다.

스페인이 유럽에서 가장 후진국가들 가운데 하나인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그 후진성은 이 나라의 위대한 역사적 과거에 의해 부여된 특수성을 가지고 있다. 제정 러시아가 항상 서구의 근린제국에 훨씬 뒤처져서, 그리고 이들의 압력에 밀려 완만하게 발전한 반면에, 스페인은 유럽의 다른 국가들에 대한 우월성과 남아메리카에 대한 지배라는 최전성기를 경험했다. 국내 상업과 대외교역의 강력한 발전은 지방의 봉건적 분할과 민족의식이 강한 지역적 배타주의의 영향을 점점 더 압도했다. 수 세기에 걸친 스페인 왕정의 권력과 중요성의 증대는 상업자본의 중앙집중적 역할과 ‘스페인 국가’의 단계적 형성과 떼어내기 어렵게 결합되어 있었다.

처음에 스페인을 부강하게 한 미대륙의 발견은 나중에 스페인에 불리하게 작용했다. 이베리아반도가 중심인 거대한 통상로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부유해진 네덜란드가 스페인으로부터 떨어져나갔다. 네덜란드에 이어 영국이 오랫동안 유럽에 대해 압도적 지위를 누렸다. 16세기 후 반부 초에 스페인은 이미 쇠퇴하기 시작했다. 이 쇠퇴는 말하자면, 무적함대의 괴멸(1588년)과 함께 공식적인 성격을 띠었다. 마르크스가 “불명예스럽고 오랜 기간 쇠퇴”라고 부른 상태가 봉건적 부르주아 스페인을 침전시켰다.

낡은 지배계급과 새로운 지배계급一토지귀족, 가톨릭 성직자와 이들의 왕정, 자본가계급과 그 지식인一은 오랜 권리를 유지하려고 집요하게 시도했지만, 애석하게도 더 이상과거에 의지할 수 없었다. 1820년에 남아메리카의 식민지들이 마지막으로 떨어져나갔다. 1898년에 쿠바의 상실로 스페인은 식민지를 거의 완전히 잃어버렸다. 모로코의 모험은 이미 커질 대로 커진 인민의 불만을 더욱 부추기면서 나라를 황폐화시켰을 뿐이다.

스페인의 경제발전 지연은 불가피하게 자본주의 고유의 중앙집중적 경향을 약화시켰다. 도시의 상공업 생활과 도시들 사이의 경제적 유대의 쇠퇴는 불가피하게 개별 지방의 상호의존 약화로 이어졌다. 이것이 부르주아 스페인이 그 역사적인 지방분권적 경향을 오늘에 이르기까지 근절하지 못한 주된 이유이다. 국가경제의 자원 결핍과 전국에 걸친 불안감이 분리주의적 경향을 조장할 수밖에 없었다. 스페인에서 지역적 배타주의는, 특히 대혁명으로 마침내 낡은 봉건적 지방에 대해 단일하고 분리할 수 없는 부르주아 국가를 수립한 이웃나라 프랑스와 비교하면, 이례적인 힘으로 나타난다.

경제적 침체는 새로운 부르주아 사회 형성을 용납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구 지배계급도 좀먹었다. 잘난체하는 귀족도 자주 자신의 오만함을 누더기가 된 옷으로 감췄다. 교회는 농민을 수탈했지만, 가끔 왕정에 의해 수탈당했다. 마르크스가 말한 것처럼, 스페인 왕정은 유럽의 절대주의보다는 아시아적 전제주의와 공통점이 더 많았다.

이것은 어떤 뜻인가? 여러 차례 비교된 짜르체제와 아시아적 전제주의는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도 훨씬 더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러나 이 비교는 스페인에 관해서도 완전히 유효하다. 짜르체제가 귀족계급과 초기 도시 중심부의 극도로 완만한 발전에 근거하여 형성된 반면에, 스페인 왕정은 나라의 쇠퇴와 지배계급의 부패라는 조건 속에서 모습을 갖췄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유럽의 절대주의가 대체로 구 특권계급에 대한 강력해진 도시의 투쟁 덕분에만 부상할 수 있었다면, 스페인 왕정은 러시아의 짜르체제처럼, 낡은 신분제도와 도시의 무기력에서 상대적 장점을 끌어냈던 것이다. 이 점이 아시아적 전제주의와 분명한 유사성의 근거이다.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에서도 중앙집중적 경향에 대한 지방분권적 경향의 우위는 스페인 의회주의의 토대를 침식했다. 유권자에 대한 정부의 압력이 결정적이었다: 지난 세기 내내 선거는 항상 정부가 과반수를 차지했다. 국회(Cortes)가 일련의 내각에 의존하고 있었고, 이 내각은 선천적으로 왕정에 의존해 있었기 때문이다. 마드리드가 선거를 치렀지만 권력은 국왕이 차지했다.

독자적으로 나라를 통치할 능력이 없었던 분열되고 분권화된 지배계급에게 왕정은 이중으로 절실했다. 그리고 국가 전체의 허약성을 반영하는 이 왕정은一두 번의 격변 사이에一여전히 국민에 자신의 의지를 강제할 만큼 강력했다. 요컨대, 스페인의 국가체제는 “주기적인 군사쿠데타에 의해 제한된 타락한 절대주의”라고 부를 수 있다. 알폰소 13세라는 인물은 왕정의 타락과 절대주의적 경향, 그리고 쿠데타에 대한 왕정의 공포라는 견지에서 이 통치체제를 매우 잘 나타낸다. 국왕의 술책, 배신, 반역, 자신에게 적대적인 일시적 연합에 대한 승리 등은 알폰소 13세 자신의 성격에 원인이 있는 것이 결코 아니라 통치체제 전체의 성격에 원인이 있다. 알폰소 13세는 새로운 상황 속에서 증조부 페르디난드 7세[페르디난드 7세(1784-1833) : 스페인 국왕. 재위는 1808,1814-33년. 카를로스 4세의 아들. 나폴레옹 체제 붕괴 후, 반동정치를 실시했다.]의 불명예스러운 역사를 반복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왕정을 낀, 따라서 왕정과 동맹을 맺은 성직자는 또 하나의 중앙집중적 세력이다. 가톨릭은 오늘날까지도 국교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반동의 가장 견고한 주축인 성직자는 국가의 유지에서 큰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국가는 매년 교회를 지원하기 위해서 수천만 페세타를 쓴다.

성직자 수는 대단히 많다. 이들은 막대한 재산을 소유하고 있으며, 여전히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수도사와 수녀 수는 7만 명 에 달한 다. 이는 고등학생 수와 같고, 대학생 수의 2배가 넘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인구의 45%가 읽거나 쓸 수도 없다는 사실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물론 읽고 쓸 줄 모르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농촌에 집중되어 있다.

카를 5세(카를로스 1세)[카를 5세(카를로스 1세)(1500-1558):신성로마제국 황제(재위 1519~56년). 카스 1세로서 스페인 국왕(재위 1516~56년). 스페인 국왕에 즉위한 뒤, 1519년에 독일황제가 되어 스페인과 독일에 걸쳐 합스부르크 왕국을 건설했다.] 시대의 농민은 스페인제국의 강대함으로부터 얻은 것이 거의 없었지만, 나중에 제국 쇠퇴의 가장 무거운 짐을 져야 했다. 농민은 수세기 동안 비참한 생활을 했으며, 많은 지방에서는 주린 생활을 영위했다. 인구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농민은 지금도 국가 구조의 주요한 짐을 지고 있다. 토지나 물은 충분하지 않고, 소작료와 세금은 비싸다. 농기구는 낡고, 토지경작 방법은 원시적이다. 교회에 부역도 해야 한다. 공산품 가격은 비싸다. 농촌인구는 과잉이다. 부랑자, 거지, 탁발 수도사는 그 수가 엄청나다. 이것이 스페인 농촌의 모습이다. 상황이 이러하기 때문에 오래 전부터 농민은 수많은 봉기에 참여했다. 그러나 매우 다채롭고, 대개 아주 반동적인 색채를 띤 이런 유혈 낭자한 반란은 전국적이 아니라 지역적 사건이었다. 스페인혁명이 전체적으로 소규모 혁명인 것과 마찬가지로, 농민봉기는 소규모 전쟁 형태를 취했다. 스페인은 게릴라전의 고전적 나라이다.

 

2. 스페인의 정치와 군대

나폴레옹과의 전쟁[스페인 왕정은 1808년 나폴레옹에게 항복했다. 5월 마드리드 폭동 이후 민족적 단결을 이루며 독립전쟁을 벌였다. 1815년 웰링턴(Wellington) 대공이 이끄는 영국군이 스페인에서 나폴레옹 군대를 몰아냈으며, 페르디난드 7세가 왕위에 옹립되었다.]에 뒤이어, 스페인에 새로운 정치세력이 태어났다. 즉, 정치화한 장교집단이다. 이들은 대제국의 폐허를 상속했으며, 상당히 탈계급화한 지배계급의 젊은 세대이다.

지역적 배타주의와 분리주의가 팽배한 이 나라에서 군대는 필연적으로 중앙집중적 세력으로서 커다란 의의가 있었다. 군대는 왕정의 지주이자, 모든 지배계급 부위의 불만의 매개물이 되었다. 관료집단처럼, 장교도 국가에 우선해 자신의 호구지책을 요구하는 분자一이 수가 스페인에는 매우 많다一들 중에서 모집한다. 그리고 ‘교양 있는’ 사회의 다양한 그룹의 욕구는 국가, 의회와 그 밖의 관직의 총계를 훨씬 초과함에 따라 여기서 탈락한 자들의 불만은 공화주의 진영을 육성한다. 그러나 이 공화주의 진영도 스페인의 다른 모든 집단과 꼭 마찬가지로 불안정하다. 그러나 종종 이 불안정성 밑에 진정하고 격렬한 사회적 분노가 숨겨져 있기 때문에 가끔 공화주의 운동이 결연하고 용기 있는 혁명적 그룹을 낳기도 한다. 이들에게 공화국은 구원이라는 신비한 힘을 지닌 구호로 등장한다.

스페인 군대의 총 병력은 약 17만 명이며, 이 중 1만3천 명 이상이 장교이다. 여기에다 1만5천 명의 해군을 더해야 한다. 사령부는 지배계급의 무기이면서도 병사 대중을 자신의 음모에 끌어들인다. 이것에 의해 병사의 독자적인 운동 조건이 창출된다. 과거에 하사관들은 장교 없이, 그리고 장교에 대항하여 정치에 뛰어든 적이 있다. 1836년에 마드리드 주둔군의 하사관들이 반란을 일으켜 여왕(이자벨라 2세-옮긴이)으로 하여금 입헌주의에 동의하게 했다. 1866년에는 군대내의 귀족적 질서에 불만을 가진 포병 하사관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렇다 하더라도 과거에 지도적 역할은 결국 장교의 몫이었다. 정치적으로 의지할 곳 없었던 병사는 자신의 불만이 다른 것, 더 깊은 사회적 원인에 의해 조성되었더라도 불만을 가진 장교를 뒤따랐다.

군대 내의 모순은 보통 병과와 일치한다. 발전된 종류의 무기일수록 즉, 병사와 장교들의 이해력을 필요로 할수록 이들은 대체로 혁명사상을 받아들이기 쉽다. 기병은 통상 왕정으로 기운 반면에, 포병은 공화주의자가 두드러진 편이다. 최신의 전쟁기구(機構)를 조종하는 공군이 혁명의 편에 서고, 자기 직업의 개인주의적 모험주의 요소를 혁명에 끌고 들어온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결정권은 결국 보병의 수중에 있다.

스페인의 역사는 끊임없는 혁명적 격변의 역사이다. 군사쿠데타와 궁정혁명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19세기와 20세기의 3분의 1 동안, 정치 형태가 끊임없이 바뀌고, 각각의 정치 형태 속에서도 내각이 변화무쌍하게 바뀌었다. 스페인 왕정은 유산계급의 어떤 분파에서도一 이들 모두가 왕정을 필요로 했더라도一충분히 안정된 지지를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여러 차례 자신의 군대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러나 각 지방의 원자화는 군사적 음모의 성격에도 그 흔적을 새긴다. 음모단의 비열한 경쟁은 스페인혁명의 지도적 계급 부재를 외면적으로 나타낸 것에 지나지 않았다. 바로 이 때문에 왕정은 매번 새로운 혁명을 극복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질서를 회복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버릇이 된 격변이 다시 한 번 터졌다. 서로 찬탈한 여러 정치형태 가운데 어느 하나도 스페인 토양에 깊게 뿌리내리지 못했다. 이런 정치 형태들 모두가 지배계급의 욕구와 요구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던 세수 부족에서 발생하는 어려움과 싸우면서 금세 스스로를 소진시켰다. 우리는 특히 최근의 군사독재가 얼마나 꼴사납게 종말을 고했는지 보았다. 가혹한 프리모 데 리베라 체제는 새로운 군사쿠데타도 없었는데 몰락했다. 그는 단지 못이 박힌 타이어에서 공기가 빠지는 것처럼 쪼그라들었다.

지금까지의 스페인혁명은 모두 다른 소수파에 반대하는 한 소수파의 운동이었다: 지배계급과반(半)지배계급이 못 참겠다는 듯, 국가라는 파이를 서로의 손에서 낚아채고 있었다.

‘연속혁명’이라는 말을 가장 의지가 굳은 계급의 수중으로 권력을 이전시키고, 나중에 이 계급이 모든 계급의 폐지와 그 결과로서 새로운 혁명의 가능성 자체를 없애기 위해 이 권력을 행사하는 연속적인 사회혁명으로 이해한다면, 계속되고 있는 스페인혁명의 ‘연속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이 연속혁명과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것들은 오히려 퇴보한 국가의 고치기 어려운 질병을 나타내는 만성적 경련이다.

특히 젊은 지식인들로 상징되는 자본가계급의 좌익은 오래 전부터 스페인을 공화국으로 전환시키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은 것이 사실이다. 스페인 학생들은 주로 장교들과 같은 일반적 이유로 불만을 느낀 청년층에서 충원되었으며, 그 수에 비해 지나친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익숙해져 있었다. 가톨릭 반동세력의 지배는 반교권(反敎權)적 성격이 가미된 대학 내 반(反)정부세력을 더욱 부채질했다. 그렇지만 학생은 정권을 창출하지 못한다. 이들의 최상층에 있는 스페인 공화주의자는 지극히 보수적인 사회강령이 특징적이었다. 공화국과 함께 부(富)도 손에 넣을 작정을 하고 있는 이들은 오늘날의 반동적 프랑스를 자신의 이상으로 바라본다. 이들은 결코 프랑스 자코뱅당의 길을 갈 생각이 없으며, 그럴 능력도 없다. 대중에 대한 이들의 두려움이 왕정에 대한 적개심보다 훨씬 더 크기 때문이다.

부르주아 사회의 균열과 불일치가 몰락한 지배계급 분자, 관직과 수입을 노리는 엄청난 수의 인간으로 스페인을 가득 채우고 있다면, 토대의 균열로 사회의 밑바닥에는 엄청난 수의 룸펜 프롤레타리아, 몰락한 근로계급 분자가 있다. 누더기를 걸친 게으름뱅이나 잘 차려 입은 게으름뱅이나 모두 사회를 위험한 상태로 만든다. 혁명이 그 진정한 토대와 정치적 지도부를 찾지 못할 경우, 이들은 혁명에게 그만큼 더 위험한 존재가 된다.

6년간의 프리모 데 리베라 독재는 모든 불만과 반란을 때려눕히고 깔아뭉갰다. 그러나 이 독재도 스페인 왕정과 똑같이 고칠 수 없는 나쁜 버릇을 갖고 있었다. 즉, 분리된 계급 각자에 대해서는 강력했지만, 나라의 역사적 요구에 대해서는 변함없이 무기력했다. 이 무기력이 혁명의 첫 물결이 닿기도 전에 벌써 재정 부족 등의 어려움이라는 암초에 부딪힌 독재의 파멸을 초래했던 것이다. 프리모 데 리베라의 몰락은 온갖 불만과 희망을 불러 일으켰다. 이렇게 해서 베렌게르 장군이 혁명의 도어맨이 되었다.

 

3. 스페인 노동자계급과 새로운 혁명

이 새로운 혁명에서도 얼핏 보면, 이전의 일련의 혁명에서와 같은 요소를 찾아볼 수 있다. 즉, 배신적인 왕정, 국왕을 경멸하면서도 국왕 앞에서는 굽실거리는 보수주의와 자유주의의 분파, 언제라도 배신할 준비가 되어 있는 우익 공화주의자들과 언제라도 모험을 감행할 준비가 되어 있는 좌익 공화주의자들, 공화국 외에는 승진만을 바라는 음모적 장교들, 아버지들이 불안한 마음으로 보고 있는 들떠 있는 학생들, 마지막으로 여러 조직에 흩어져 있는 파업노동자들과 쇠스랑과 심지어 총을 집으려고 하는 농민 등이 바로 그러한 요소이다.

그렇지만 현재의 위기가 이전의 모든 위기에 준해서, 그것도 아주 비슷하게 전개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중대한 오류일 것이다. 최근 몇 십 년, 특히 세계대전 기간은 나라의 경제와 사회구조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물론 스페인은 여전히 유럽에서 가장 뒤떨어진 나라이다. 그러나 채취산업과 경공업 두 분야에서 독자적인 발전을 경험하고 있다. 또한 전쟁 중에 석탄산업, 섬유산업, 수력발전소 건설 등이 현저하게 발전했다. 산업중심지와 공업지대가 전국에 걸쳐 속속 들어섰다. 이로 인해 새로운 역관계가 조성되었으며, 새로운 전망이 열렸다.

공업화의 성공은 국내의 모순을 조금도 완화시키지 못했다. 거꾸로 중립국 스페인이 전쟁의 단비를 맞으며 산업을 발전시킨 사정은 종전(終 戰)에 따라 일시적으로 늘어난 외국의 수요가 사라지자, 새로운 곤란의 원인으로 바뀌어버렸다. 외국시장이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一현재 세계 무역에서 차지하는 스페인의 비율은 세계대전 전(1.2%)보다도 더 적다 (1.1%).一독재체제도 유럽에서 가장 높은 관세장벽의 도움으로 국내시장을 외국상품의 유입으로부터 지키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높은 관세는 물가 상승으로 이어졌다. 이로 인해 이미 낮은 국민의 구매력은 더욱 감소되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전후 산업이 한편으로는 만성적 실업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계급투쟁의 격렬한 폭발로 나타나는 무기력 상태에서 일어서지 못한 것이다.

지금 스페인 자본가계급이 일찍이 영국이나 프랑스 자본가계급이 수행한 역사적 역할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은 오히려 19세기보다도 더 어려운 일이다. 너무 늦게 등장했기 때문에 외국자본에 종속되어 인민의 몸에 거머리처럼 덥석 달려든 스페인의 거대 산업 자본가계급은 짧은 기간 동안이라도 낡은 계급에 대항하여 ‘국민’의 지도자로 나설 수 없다. 스페인 산업계의 거물들 즉, 내부에서 서로 맹렬하게 대립하고 있는 은행가, 실업가, 대지주, 왕정과 그 장군이나 관료 등은 인민을 적대시하는 가장 반동적인 블록을 형성하고 있다. 프리모 데 리베라 독재체제의 가장 중요한 지지자가 카탈로니아의 공장주들이었음을 밝히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산업의 발전은 노동자계급을 일어서게 했으며 단련시켰다. 2천3백만 명의 인구一이민이 아니라면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一중에서 대략 150만 명이 공업, 상업, 운수업 노동자이다. 여기에 거의 같은 수의 농업노동자를 더해야 한다. 스페인의 사회생활은 혁명의 문제를 직접 해결할 능력이 있는 계급이 없었던 동안은 악순환을 맴맴 돌 운명 이었다. 역사무대에 등장한 스페인 노동자계급은 이러한 상황을 근본적으로 바꿀 새로운 전망을 열어젖혔다. 이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대자본가계급의 경제적 지배 질서와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중요성의 증대가 나라의 정치생활에서 소부르주아 계급이 지도적 지위를 차지하지 못하게 한 것임을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 현재의 혁명적 경련이 국민생활의 토대 자체를 재구성할 수 있는 진정한 혁명을 낳을 수 있을 것인지 여부는 결과적으로 스페인 노동자계급이 국민생활을 직접 지도할 능력이 있는지 여부로 환원된다. 스페인 국민 중에서 이 역할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자는 노동자계급 외에는 없다. 더욱이 러시아의 역사적 경험은 반(半)봉건적 관계의 그물망에 걸린 후진적 농업국가에서 대공업으로 결집한 노동자계급의 비중을 충분히 명료하게 보여주었다.

스페인 노동자는 이미 19세기의 여러 혁명에 전투적으로 참가한 사실이 있다. 그러나 언제나 자본가계급에 매인 채, 언제나 보조적인 세력으로서 자본가계급을 지원하는 입장에서 참가했다. 노동자의 독자적인 혁명적 역할은 20세기의 첫 25년 사이에 증대되었다. 1909년의 바르셀로나 봉기[1909년 바르셀로나 봉기: 식민지 모로코로의 카탈로니아 예비역 병사 파병에 대한 항의로 발발한 봉기로, ‘비극의 일주일간’이라고 불린다. 결국, 중앙정부에 의해 분쇄되었다.]는 카탈로니아의 젊은 노동자계급의 힘이 얼마나 억제되어 왔는지를 보여주었다. 곧장 봉기로 발전한 수많은 파업이 다른 지방에서도 터져 나왔다. 1912년에는 철도노동자의 파업이 일어났다. 공업지대는 영웅적인 노동자 투쟁의 전장(戰場)이 되었다. 스페인 노동자는 자신이 어떠한 관례에서도 완전 자유로우며, 사태에 신속히 반응하여 자기 대오를 대담하게 공세로 결집할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전후 첫 몇 년, 더 정확히 말하면 러시아혁명 이후 첫 몇 년(1917-20년)은 스페인 노동자계급에게 격전의 세월이었다. 1917년은 혁명적 총파업의 무대가 되었다. 이 파업의 패배와 이후 일련의 운동 패배가 프리 모 데 리베라 독재를 위한 길을 닦았다. 독재의 붕괴로 다시 한 번 스페인 인민의 향후 운명이라는 가장 중요한 문제가 제기되자, 그리고 눈치나 살피는 구 도당과 무력한 비탄을 토해내는 소부르주아 급진주의자들에게서 구원의 원천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히 입증되자, 노동자는 일련의 용기 있는 파업을 통해 인민에게 이렇게 소리쳤다: ‘우리가 여기에 있다!’

유럽의 ‘좌익’ 부르주아 저널리스트와 이들을 뒤따르는 사회민주주의자는 자신의 전문 지식을 뽐내며 스페인은 거의 150년의 늑장부림 끝에 단지 프랑스대혁명을 재연시키려 하는 것일 뿐이라는 논지의 천박한 이론을 내세우기 좋아한다. 이런 사람들에게 혁명을 설명하는 것은 맹인과 색채를 논하는 것과 같다. 그 후진성에도 불구하고 스페인은 18세기의 프랑스를 훨씬 능가하고 있다. 대기업, 1만6천km의 철도, 5만km의 전신 등은 혁명에게 역사적 회상보다 더 중요한 요인임을 상징한다.

한발 앞서 나아가려는 영국의 유명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스페인 사태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1917년의 모스크바의 영향보다는 오히려 1848년이나 1871년의 빠리의 영향을 받고 있다.” 그러나 1871년의 빠리는 1848년에서 1917년에 이르는 한 단계이다. 따라 서 이런 대립은 무의미하다.

이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의미심장한 견해가 작년 〈계급투쟁〉지[(La Lutte de classes):프랑스 좌익반대파의 월간이론지.]에 게재되었다. 여기서 L. 타르킨[L. 타르킨: 안드레스 닌의 필명]이 이른 결론은 다음과 같다: “농민대중의 지지를 받는 (스페인의) 노동자계급은 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이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전망이 펼쳐져 있다: “혁명은 노동자계급의 독재를 이룩해야 한다. 이 독재는 부르주아혁명을 수행하고, 대담하게 사회주의적 재구성으로 가는 길을 열 것이다.” 지금은 이런 식으로, 그리고 이런 식으로만 문제를제기할 수 있다.

 

4. 혁명의 강령

공화국은 지금, 투쟁의 공식 구호이다. 그렇지만 혁명의 발전은 지배계급의 보수주의적이거나 자유주의적인 분파뿐만 아니라 공화주의 분파도 왕정을 지지하게 만들 것이다.

1854년의 혁명적 사태 중에 카노바스 델 카스티요[안토니오 카노바스 델 카스티요(Antonio Canovas del Castillo, 1828-1897): 역사가. 1854년 정계에 입문, 1860~68년에 각료 역임. 1875~95년에 걸쳐 총 7차례 수상 역임. 1897년 무정부주의자에게 암살되었다.]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왕권을 지키려고 애쓰고 있다. 다만, 왕권을 욕보일 (국왕의) 사설고문단은 없어야 한다.” 이제는 로마노네스 씨[알바로 로마노네스(Alvaro de Figueroa y Torres de Romanones, 1863~195?) : 왕당파 정치인, 스페인자유당의 지도자로 대지주. 1912-13년, 1915~17년, 1918~19년 수상] 등에 의해 이 원대한 사상이 발전되고 있다. 마치 사설고문단이 없는 왕정이 정말로, 특히 스페인에서 있을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물론 유산계급이 자신을 구하기 위해서(예를 들어, 독일!) 왕정을 희생시키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의 조합이 일어날 수도 있다. 그러나 시력이 아주 어두워져도 마드리드의 왕정은 노동계급독재 때까지 살아남을 것이다.

공화국 구호는 물론 노동자의 구호이기도 하다. 그러나 노동자에게 공화국을 수립하는 것은 국왕을 대통령으로 바꾸는 문제가 아닐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서 봉건제의 쓰레기를 철저히 일소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사항은 토지문제이다.

스페인 농촌의 관계는 반(半)봉건적 착취의 실상을 보여준다. 특히 안달루시아 지방과 카스티야 지방 농민의 빈곤, 지주 · 당국 · 촌장에 의한 억압은 이미 여러 차례 농업노동자와 빈농을 공공연한 반란의 길로 내몰았다. 이것은 혁명 중에 정말로 부르주아적 관계가 봉건주의를 벗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그렇지 않다. 이것은 스페인의 현재 조건 속에서 자본주의는 농민을 착취하기 위해 봉건적 방법을 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중세 스페인의 잔재에 대하여 혁명의 무기를 겨누는 것은 바로 부르주아 지배의 기초에 대해 혁명의 무기를 겨눈다는 것을 의미한다.

농민을 지방주의와 반동적 영향에서 분리시키기 위해서 노동자계급은 명확한 혁명적 민주주의 강령을 필요로 한다. 토지와 물 부족, 높은 소작료로 인한 농노 신세는 빈농을 위한 지주의 토지 몰수 문제를 날카롭게 제기한다. 국가재정의 부담, 과도한 국채, 관료의 약탈, 아프리카에서의 모험 등은 단출한 정부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이런 정부는 대농장소유자, 은행가, 기업가나 자유주의적 귀족에 의해서가 아니라 근로인민 스스로에 의해서만 이룩될 수 있다.

성직자의 지배와 교회의 부(富)는 교회와 국가의 분리, 교회재산의 인민으로의 이전을 통한 교회의 무장해제라는 민주주의적 과제를 제기한다. 정교 분리의 결과, 교회 자체의 재산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교회에 지급된 예산도 무신론적인 자유주의자들의 호주머니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피폐한 소작농을 교화하기 위해서 사용될 것이라는 점을 납득했을 때, 농민 가운데서 가장 미신에 사로잡힌 부위마저도 이런 단호한 조치를 지지할 것이다.

분리주의적 경향은 혁명에 민족자결이라는 민주주의적 과제를 제기한다. 이 경향은 언뜻 보기 에는 독재기간 중에 강화된 것 같다. 그러나 카탈로니아 자본가계급의 ‘분리주의’가 마드리드 정부와 함께 카탈로니아와 스페인 인민에게 대항하는 저당물로만 쓰인 반면에, 노동자 농민의 분리주의는 오직 사회적 저항의 외피였을 뿐이다. 이 두 가지 형태의 분리주의는 매우 엄밀하게 구별해야 한다. 그렇지만 정확히 민족적으로 억압받는 노동자 농민과 같은 처지의 자본가계급을 구분하기 위해서 노동자 전위는 민족자결 문제에 대해서 가장 대담하고 가장 진지한 입장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 노동자는 카탈로니아인과 바스크인의 대다수가 완전한 분리에 찬성을 표할 경우, 이들이 독자적으로 국가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권리를 충분히, 그리고 완전히 옹호할 것이다. 물론 이것은 선진 노동자가 카탈로니아인과 바스크인들에게 분리의 길을 가도록 다그쳐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거꾸로, 민족의식이 강한 지역들의 대규모 자치에 따른 나라의 경제적 통일은 경제와 문화의 관점에서 볼 때, 노동자 농민에게 엄청난 이익이 될 것이다.

새로운 군사독재의 도움으로 더 이상의 혁명 발전을 피하려는 왕정의 기도가 결코 불가능하지만은 않다. 그러나 정말로 불가능한 것은 이러한 기도의 진정한, 그리고 장기간에 걸친 성공이다. 아직도 생생한 프리모 데 리베라 독재의 교훈은 새로운 독재의 굴레가 낡은 독재의 굴레가 남긴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를 다시 건드리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신문의 긴급보도에 따르면, 국왕은 이 같은 실험을 할 마음이 있는 것 같다. 그는 초조하게 적당한 후보자를 찾고 있지만, 지원자가 없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새로운 군사독재의 몰락은 왕정과 그 품위 있는 대표인 국왕에게는 희생이 매우 클 것이지만, 혁명은 강력한 추진력을 얻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노동자는 지배계급에게 “신사양반들, 내기를 걸어라!(Faites vos jeux, messieurs)”고 말할 것이다.

스페인혁명이 의회주의 단계를 건너뛰리라고 기대할 수 있는가? 이론적으로는 불가능하지 않다. 비교적 단시간 안에 혁명운동이 지배계급에게 의회주의를 위한 시간과 공간을 주지 않을 만큼 강력해질 것이라고 생각해볼 수는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스페인 노동자계급은 그 전투성에도 불구하고 아직 자신의 것으로 인정되는 혁명정당이 없으며, 소비에트를 조직한 경험도 없다. 게다가 공산주의자 대오는 수도 적고, 통일되어 있지도 않다. 모두가 받아들이는 명확한 행동강령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회 문제는 이미 일정에 올라 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는 혁명이 의회주의 단계를 거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러시아 노동자들이 1905년에 불뤼긴의회를 성공적으로 보이콧하여 좌절시켰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베렌게르의 의사(疑似) 국회에 대한 보이콧전술이 결코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특정 목적을 가진 보이콧전술 문제는 해당 혁명단계의 역관계에 근거하여 결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선진 노동자는 베렌게르의 국회를 보이콧하는 동안에도 이것에 대해 혁명적 제헌의회 구호를 대치시켜야 한다. 우리는 ‘좌익’ 자본가 계급이 말하는 제헌의회 구호의 기만성을 가차 없이 폭로해야 한다. 좌익 자본가계급은 실제로 구 지배 특권 도당과 흥정하기 위해서 국왕과 베렌게르의 아량에 의한 화해주의 국회를 원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제헌의회는 노동자 병사 농민의 봉기가 승리를 거둔 결과로 수립된 혁명정부에 의해서만 소집될 수 있다.

우리는 화해주의 국회에 혁명국회를 대치시킬 수 있고, 또 대치시켜야 한다. 그러나 우리 생각에는 현 단계에서 혁명국회 구호에 전념하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노동계급독재 구호를 (공화국, 토지혁명, 정교 분리, 교회재산의 몰수, 민족자결, 혁명적 제헌의회) 혁명적 민주주의의 과제와 구호로 대치시키는 것은 가장 무익하고 보잘 것 없는 교조주의이다. 대중은 권력을 장악하기에 앞서 지도적인 노동자당 주위로 결집해야 한다. 민주적 대의제도를 위한 투쟁은 혁명의 어떤 단계에서 국회에 참여하는가와 같은 과제의 해결을 무한히 촉진할 것이다.

노동자 농민의 무장(노동자 농민 의용군의 창설) 구호는 필연적으로 투쟁 속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큰 중요성을 얻게 될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현 단계에서는 이 구호도 노동자 농민조직의 방어, 토지혁명, 자유선거의 보장, 반동적 군사쿠데타로부터 인민보호 등의 문제와 밀접하게 결합되지 않으면 안 된다.

사회입법에 대한 급진적 강령, 특히 실업보험, 조세 부담의 유산계급으로의 전가, 무상의 보통교육一이 모든 것과 본질적으로 부르주아 사회의 테두리를 넘지 않는 비슷한 조치들도 노동자당의 기치에 아로새겨져야 한다.

그러나 이와 함께 스페인에서는 바로 지금, 모두 사유재산인 철도와 광산과 은행의 국유화, 산업의 노동자통제, 마지막으로 경제에 대한 국가규제 등 이행적 성격의 요구들이 제출되어야 한다. 이 모든 요구는 모두 부르주아 체제로부터 노동자 체제로의 이행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러한 요구는 은행과 산업의 국유화 결과, 사회주의 사회의 길을 닦는 계획경제를 위한 일련의 조치의 일부가 되기 때문에 노동자 체제로의 이행을 준비할 수 있다.

오직 현학자들만이 민주주의 구호와 이행적 구호, 그리고 순전히 사회주의적인 구호와의 결합에서 모순을 발견할 것이다. 역사적 사회의 모순적 구조를 반영하는 이러한 복합적 강령은 과거로부터 계승된 과제의 다양성에서 불가피하게 생기는 것이다. 모든 모순과 과제를 하나의 최소 공통분모 즉, 노동계급독재로 약분하는 것은 불가피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노동자 전위가 노동계급독재만이 스페인을 더 이상의 쇠퇴로부터 구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예비적 과제一노동자계급의 이질적 부위와 한층 더 이질적인 농촌의 근로대중을 전위 주위로 결집시키는 것一는 여전히 완강하게 남아있을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노동계급독재 구호를 지금, 대중을 봉기의 길을 향해 나아가도록 하는 역사적으로 결정된 임무에 대립시키는 것은 사회혁명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바쿠닌의 사상으로 대체시키는 것이 될 것이다. 이것은 혁명을 파멸시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일 것이다.

민주주의 구호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결코 노동자계급을 공화주의 자본가계급에게 더 접근시킨다는 목적을 갖고 있지 않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거꾸로, 민주주의 구호는 좌익 자본가계급과의 투쟁에서 승리를 거두기 위한 토대를 마련하고, 이들의 반(反)민주성을 사사건건 폭로할 수 있게 한다. 노동자 전위가 민주주의 구호를 위해 대담하게, 결연하게, 그리고 가차 없이 싸울수록 전위는 더 수월하게 대중을 획득하고, 공화주의 자본가계급과 개량주의적 사회주의자의 토대를 침식할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가장 뛰어난 분자가 우리에게 신속히 결합 할수록, 대중의 마음속에서는 더 빠르게 민주주의 공화국을 노동자공화국과 동일시하게 될 것이다.

정확하게 이해된 이론적 정식이 생생한 역사적 사실로 바뀔 수 있기 위해서는 이 정식이 자신의 경험과 요구에 근거하여 대중의 의식에 스며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대중의 주의를 흐트러뜨리지 않아야 하는 만큼, 지엽적인 일에 빠지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혁명의 강령은 몇 개의 단순 명쾌한 구호로 표현되어야 하고, 이 구호는 투쟁의 역동성에 따라 변화할 수 있어야한다. 이것이 바로 혁명정책인 것이다.

 

 

5. 공산주의, 무정부적 조합주의, 사회민주주의

여느 때처럼, 코민테른 지도부는 스페인 사태를 보고도 못 본체하기 시작했다. 최근에 라틴계 국가들의 ‘지도자’인 마누일스키[디미트리 마누일스키(Dimitri Manuilski, 1883-1952):〈나세 슬로보KiVashe Siovo, 우리말)지의 편집자 가운데 한 사람. 1931~39년까지 코민테른의 서기. ‘제3기’ 정책을 적극 추진했다.]가 스페인 사태는 주목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말한 것이 고작이다. 그럼 그렇지! 이 사람들은 1928년에 프랑스가 노동자혁명의 전야에 있다고 단언했다. 혼례용 음악으로 장례식을 대충 치렀기 때문에, 이들은 결혼식을 장송곡으로 맞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에게 이와 다르게 행동하는 것은 스스로에 대한 배신을 의미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3기’ 일정표에 올라있지 않은 스페인 사태가 계속 발전하고 있음이 분명해지자, 코민테른의 지도자들은 그저 침묵을 지켰을 뿐이다. 어쨌든 이것은 굉장히 신중한 모습이다. 그러나 12월 사태[1930년 친(親)공화주의 장군들의 반란의 영향으로 하카(Jaca) 주둔군에서 12월 사태가 일어났다. 반란은 재빨리 분쇄되었지만 반란자들에 대한 보복에서 생겨난 공공연한 분노는 국왕으로 하여금 1931년 4월 선거를 소집하게 했다.]가 더 이상 침묵을 지킬 수 없게 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엄격한 전통에 따라 라틴계 국가들의 지도자는 180도로 방향을 틀어버렸다. 우리가 염두에 두는 것은〈프라우다〉지 12월 17 일자에 실린 그의 기사다,

이 기사는 프리모 데 리베라의 독재처럼, 베렌게르의 독재도 ‘파시스트 체제’라고 선언한다. 무쏠리니, 마테오티, 프리모 데 리베라, 맥도널드, 장개석, 베렌게르, 단[베니토 무쏠리니(Benito Mussolini, 1883-1945):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독재자. 1912년에 이탈리아사회당 기관지〈아방티!〉(Aranfi)의 편집장이 된다. 당내에서는 극좌파에 속했지만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극단적인 배외주의자로 변신, 이탈리아의 참전을 주장, 제명되었다. 1919년, 파시스트당을 결성. 1922년, 로마진군으로 수상의 지위를 획득했다. 1924년의 마테오티 암살사건으로 인한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고 1925년부터 파시스트 독재정치를 실시했다. 1945년 레지스탕스 유격대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지아코모 마테오티(Giacomo Matteoti,1885-1924): 이탈리아통일사회당의 서기, 의원. 1924년, 파시스트가 대승한 국회에서 파시스트의 부정선거와 테러리즘을 규탄했다. 이로 인해 무쏠리니의 하수인에게 암살되었다. 이 암살사건을 계기로 이탈리아의 반(反)파시스트운동이 일어났다.

램지 맥도널드(Ramsey MacDonald, 1866-1937): 영국노동당 지도자. 1924년에 제 1차 노동당 내각의 수상 겸 외무장관. 1929~31년에 제2차 노동당 내각의 수상.

장개석 (Chiang Kai-Shek, 1887-1975): 중국의 군벌 지도자, 국민당 우파 지도자. 1920년대에 코민테른은 공산주의자의 국민당 입당을 지시, 국민당을 중국혁명의 지도정당으로 간주했다. 1927년 4월, 상해에서 국민당내 공산주의자 탄압에 나서 많은 공산주의자를 살해했다.

페오도르 단(Feodor Dan, 1871-1947): 멘셰비키의 지도자.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사회애국주의자. 1922년 소련에서 추방되어 미국으로 망명했다.]―이들 모두는 파시스트의 변종이다. 바로 쓸 수 있는 수식어가 있는데, 왜 성가시게 다른 말을 생각해야 하는가?

이 목록이 완전해지려면, 아비시니아(에티오피아의 옛 이름-옮긴이)의 네구스[네구스(Negus): 에티오피아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 1세(Haile Selassie, 1892~1975)의 칭호. 재위 1930~74년.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점령하고 있던 1936-41년에 영국으로 망명했다.] ‘파시스트’ 체제를 포함시키기만 하면 된다. 〈프라우다>지는 스페인 노동자계급이 더욱 더 “스페인공산당의 강령과 구호를 받아들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미 “혁명에서 자신의 헤게모니 역할을 자각하게 되었다”고 알려준다. 동시에 빠리발(發) 공식 특전(特電)은 스페인의 농민 소비에트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스탈린주의 지도부 아래에서 소비에트 제도는 무엇보다도, 농민에 의해 채택되고 실현되었다고 알려져 있다(중국을 보라!). 공식 공산당의 지도 아래, 노동자계급이 이미 “자신의 헤게모니 역할을 자각하게 되었”고, 농민이 소비에트 건설에 착수했다면, 스페인혁명의 승리는 보증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적어도 마드리드의 대리인들이 일반적 방침을 잘못 적용했다고 스탈린과 마누일스키에게 비난받을 때까지 〈프라우다〉지의 지면에는 총체적 무지와 경솔함이 다시 등장할 것이다. 자신의 정책 때문에 철저하게 타락한 이 ‘지도자들’은 더 이상 아무것도 배울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투쟁의 강력한 발전에도 불구하고 혁명의 주체적 요인一당, 대중조직, 구호一은 운동의 임무에 한참이나 뒤져 있다. 그런데 이 후진성이야말로 오늘날의 주요한 위험이다.

희생과 패배를 초래하거나 아무런 득도 없이 끝난 파업의 반(半)자연 발생적 확산은 절대로 피할 수 없는 혁명의 한 단계이다. 대중의 각성과 그 결집, 투쟁 참가가 특징인 이 단계에서는 노동자의 최우수 집단만이 아니라 대중 전체가 운동에 참가한다. 또한 공장노동자뿐만 아니라 직공, 운전수, 제빵사, 건축노동자, 관개(權槪)노동자, 마지막으로 농업노동자들도 파업에 들어간다. 경험 많은 고참들은 기지개를 켜고, 신참들은 배운다. 이러한 파업을 통해서 계급은 스스로를 계급으로 자각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자생성一현 단계에서 운동의 장점인一은 앞으로 운동의 근원적 약점이 될지도 모른다. 운동이 명확한 강령 없이, 자신의 지도부도 없이 자체적으로 계속 왼쪽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가망 없는 전망을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문제는 바로 권력 장악이다. 아무 리 격렬한 파업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산발적인 파업의 경우는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만약 노동자계급 자신이 몇 개월 이내의 투쟁 중에 그 임무와 방법이 더 명확해지고 있다고 느끼지 못한다면, 그리고 자기 대오가 정비, 강화되고 있다고 느끼지 못한다면, 노동자계급 내부에서 분해과정이 시작될 것이다. 현재의 운동에 의해 처음으로 떨쳐 일어난 광범위한 부위는 다시 수동성에 빠질 것이다. 자신이 입각해 있던 입장에서 벗어난 정도에 따라 전위 안에서는 게릴라적 행동이나 모험주의 일반에 우호적인 분위기가 되살아나기 시작할 것이다. 이런 예기치 못한 사태 속에서는 농민이나 도시빈민 모두 믿을만한 지도부를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잠에서 깨어난 희망은 매우 빠르게 실망과 분노로 바뀔 것이다. 스페인에서도 1920년 가을 이후의 이탈리아 상황을 어느 정도 재현하는 상황이 조성될 것이다. 프리모 데 리베라 독재는 파시즘이 아니라 유산계급의 일정 부분에 토대한 일개 군벌의 독재로서, 스페인에서는 전형적인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지적한 조건들 즉, 혁명정당의 수동성과 우유부단, 대중운동의 자생성 때문에 진짜 파시즘이 스페인에 똬리를 틀 것이다. 대자본가계급은 불안정한, 실망한, 자포자기한 소부르주아 대중을 손아귀에 넣고, 이들의 조바심이 노동자계급을 겨누도록 할 것이다. 물론 아직까지는 이 지점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러나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 된다.

장교, 학생, 공화주의자 등 자본가계급의 좌익이 이끈 혁명운동이 승리에 이른다고 잠시 가정해보더라도 이 승리의 무익함은 결국 패배와 별 다르지 않음을 입증할 것이다. 이미 말한 것처럼, 스페인 공화주의자의 지지 기반은 철저하게 현재의 소유관계이기 때문이다. 이들에게는 대지주를 수탈하는 것도, 가톨릭교회의 특권을 없애는 것도, 문무 관료집단의 부패를 일소하는 것도 기대할 수 없다. 왕당파도당이 단지 공화파도당으로 대체될 뿐이다. 따라서 1873-74년의 단명한데다 결실도 맺지 못한 공화국[제1공화국(1873~1874): 알폰소 12세의 즉위로 막을 내렸다. 알폰소 12세(1857~1885)는 짧은 재위기간(1874-85)에도 불구하고 입헌군주제 실현의 희망을 불러일으켰으나 폐결핵으로 일찍 죽었다. 그의 아들이 알폰소 13세 이다.]의 신판이 될 것이다.

사회주의 지도자들이 공화주의 지도자들을 느릿느릿 따라가고 있다는 사실은 필연적이다. 어제, 사회민주주의는 프리모 데 리베라 독재의 오른팔을 껴안고 있었다. 오늘은 공화주의자의 왼팔을 껴안고 있다. 독자적인 정책이 없으며, 가질 수도 없는 사회주의자의 주요한 목표는 견고한 부르주아 정부에 참가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이들은 되기만 했다면, 정말로 왕당파와 화해하는 것도 거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무정부적 조합주의 우파가 같은 운명에 빠지지 않았다고 보증하는 것은 조금도 없다. 이 점에 대해서 12월 사태는 중대한 교훈이고, 준엄한 경고이다.

전국노동자연맹(CNT)은 분명히 노동자계급의 가장 전투적인 분자들을 포용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최근 몇 년 사이에 선발되었다. 전국노동자연합을 강화하고 진정한 대중조직으로 바꿔내는 것은 모든 선진 노동자, 특히 공산주의자의 의무이다. 이 일은 개량주의 노동조합 내부에서 그 지도자들의 배신행위를 끊임없이 폭로하고, 노동자들에게 단일한 노동조합연합으로 결집할 것을 요구하는 활동을 통해서도 촉진될 수 있다. 혁명의 조건은 이런 활동을 엄청나게 촉진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하나의 교의이자 하나의 혁명적 방식인 무정부적 조합주의의 운명에 대해 환상을 갖고 있지 않다. 무정부적 조합주의는 혁명강령의 결여와 당의 역할에 대한 몰이해로 인해 노동자계급을 무장해제 시킨다. 무정부주의자는 정치가 자신들의 목을 조를 때까지 ‘거부’하다가, 계급 적(敵)의 정치를 위한 사전준비를 한다. 이 같은 사태가 12월에 일어났다!

비록 사회당이 혁명 중에 노동자계급에 대해서 지도적인 지위를 획득했다고 하더라도, 사회당이 할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뿐이다. 즉, 혁명으로 획득한 권력을 공화주의의 체로 거르는 것이다. 그리고 이체에서 빠져나간 권력은 자동적으로 현재 권력을 소유하고 있는 자들에게 넘어갈 것이다. 거대한 가능성을 잉태한 혁명은 유산으로 끝나버릴 것이다.

무정부적 조합주의자들에 관한 한, 자신의 무정부주의적 편견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혁명을 이끌 수 없다. 우리의 의무는 이들이 무정부주의적 편견을 포기하도록 돕는 것이다. 실제로 조합주의 지도자들의 일부가 사회주의자로 전향하거나, 혁명에 의해 내쳐질 것이라고 가정할 수 있다. 진짜 혁명가가 우리와 함께 하게 될 것이다. 조합주의 대중은 공산주의자와 함께 할 것이다. 대다수의 사회당 노동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혁명적 상황의 이점은 대중이 빨리 배운다는 사실에 있다. 대중의 성장은 필연적으로 사회주의자뿐만 아니라 조합주의자들 사이에서도 분화와 분열을 일으킬 것이다. 혁명적 조합주의와 실천적 협정을 맺는 것은 혁명 중에 피할 수 없다. 우리는 이 협정을 성실하게 이행할 것이다. 그러나 이 협정에 이중성, 은폐, 기만 등의 요소를 끌어들이는 것은 정말로 치명적이다. 매일, 매시간 공산주의 노동자가 조합주의 노동자와 협력하여 싸워야 하는 경우에도 원칙에 의거한 논쟁을 결단내거나, 견해 차이를 은폐하거나, 원칙적으로 잘못된 동맹자의 입장에 대한 비판을 삼가거나 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조건 아래에서만 혁명의 연속적 발전이 보증될 것이다.

 

6. 혁명적 훈타와 당

대도시뿐만 아니라 외딴 지역의 노동자들도 일제히 일어선 12월 15 일 사태는 노동자계급 자신이 행동 통일을 위해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자신의 성능 좋은 신호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노동자 계급은 공화주의자의 신호를 이용했다. 이 운동의 실패는 털끝만큼의 자신감 상실도 야기하지 않았던 것 같다. 대중은 자신의 투쟁을 경험, 훈련, 준비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혁명적 고양’의 대단히 전형적인 특징이다.

혁명이라는 대로(大路)로 진입하기 위해서 노동자계급은 바로 지금, 자기 대오 내의 모든 정치적 · 민족적 · 지역적 · 직업적 구분을 뛰어넘는 조직, 혁명투쟁의 발전에 부응하는 조직을 필요로 한다. 공장, 제작소, 광산, 상사(商社), 철도, 해운노동자들, 도시와 농촌의 노동자들에 의해 민주적으로 선출되는 이런 조직은 오직 소비에트일 수밖에 없다. 스탈린주의 아류들은 소비에트가 무장봉기의 필요에 따라서만, 그리고 무장봉기 직전에만 건설될 수 있을 뿐이라는 편견을 수많은 사람들에게 주입함으로써 전 세계 혁명운동에 막대한 손상을 끼쳤다. 실제로 소비에트는 무장봉기와는 아직 거리가 멀더라도 노동자대중의 혁명운동이 다양한 기업과 직종을 동시에 포괄하는 경제적 · 정치적 투쟁을 지도할 능력이 있는 광범한, 믿을만한 조직의 필요성이 생기면 건설되는 것이다. 소비에트가 혁명 준비기 동안 노동자계급에 뿌리내린 경우에만, 소비에트는 직접적인 권력투쟁기에 지도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소비에트 체제가 13년간 존속하고 있는 지금, ‘소비에트’라는 말은 소비에트가 권력기관으로서가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투쟁조직으로서 등장한 1905년이나 1917년 초 무렵보다는 다소 다른 의미를 갖게 되었다. 스페인의 혁명사 전체에 직접 관련되어 있는 ‘훈타’라는 말은 이 사상을 다른 무엇보다도 잘 표현하고 있다. 스페인에서는 노동자 훈타의 창설이 일정에 오르고 있다.

노동자계급의 현재 상태 때문에 훈타 건설은 공산주의자, 무정부적 조합주의자, 사회민주주의자, 무당파 파업투쟁 지도자들의 참여를 전제로 한다. 무정부적 조합주의자와 사회민주주의자의 소비에트 참여는 어느 정도나 기대할 수 있는가? 이를 멀리서 예측할 수는 없다. 만일 공산주의자가 노동자 훈타 사상을 정력적으로 제기할 수 있다면, 운동의 발전은 반드시 많은 조합주의자와 어쩌면 일부 사회주의자들을 공산주의자가 바라는 것 이상으로 강제할 것이다. 소비에트 건설, 대표의 비율, 선거 시기와 방법 등의 실제적 문제들은 대중의 압력을 받은 모든 공산주의 분파들끼리는 물론이고 훈타 창설에 동의하는 조합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에게도 협정의 대상이 될 수 있고, 또 되어야 한다. 물론 공산주의자는 자신의 기치를 내걸고 투쟁의 모든 단계에 나선다.

가장 최근의 스탈린주의 이론에도 불구하고 선출기관인 농민 훈타가 노동자계급의 권력 장악 이전에 상당수 나타날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혁명 준비기에 농촌에서는 선거가 아니라 개인적 선택에 근거한 다른 조직형태 즉, 농민조합, 빈농위원회, 공산당 세포, 농업노동자조합 등이 빠르게 발전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혁명적 토지강령에 근거한 농민 훈타 구호의 선전은 바로 지금, 의제로 올릴 수 있다.

‘병사 훈타’ 문제를 올바로 제기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병사 소비에트는 군사조직의 성격상, 국가권력이 군대에 대한 통제력을 잃는 혁명적 위기의 최종 단계에서야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혁명 준비기에는 조직의 은밀한 성격, 혁명적 병사그룹, 당 세포문제, 따라서 많은 경우, 노동자가 병사 개개인과 맺는 개인적 관계가 문제가 될 것이다.

1930년 12월의 공화파 봉기는 혁명투쟁의 두 시대를 잇는 전환점으로서 역사에 기록될 것이 틀림없다. 공화주의 좌파는 행동통일을 이루기 위해 노동자 조직의 지도자들과 관계를 맺었던 것이 사실이다. 비무장 노동자들은 실행주체인 공화주의자를 응원하는 역할을 맡아야 했다. 이 연극은 장교의 음모와 혁명적 파업이 양립할 수 없음을 단번에 보여줄 만큼 제대로 공연되었다. 정부는 병무에 따라 서로 대립하고 있던 군대 내부에서 군사적 음모에 대항할 충분한 힘을 발견했다. 그리고 독자적 인 목적과 지도부도 갖지 못했던 파업은 군사적 봉기가 분쇄되자마자 불가피하게 무위로 돌아갔다.

장교의 실험도구로서가 아니라 인민의 무장부위로서 수행하는 군대의 혁명적 역할은 결국, 투쟁과정에서 노동자 농민대중이 수행하는 역할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혁명적 파업이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는 노동자와 군대의 대결이 불가피할 것이다. 이러한 충돌의 순(純)군사적 측면이 아무리 중요하더라도 정치보다 중요하지는 않다. 병사대중은 혁명의 사회적 과제를 명쾌하게 설명함으로써만 획득될 수 있다. 그러나 장교들은 바로 이 사회적 과제를 두려워한다. 노동자 혁명가는 바로 지금, 병사에게 주의를 돌려 군대 내에 의식적이고 대담한 혁명가 세포를 건설해야 한다. 노동자계급과 농민 사이의 활동에 정치적으로 종속되는 군대 안의 공산주의 활동은 명확한 강령에 근거해서만 발전될 수 있다. 그러나 결정적인 시기가 도래했을 때, 노동자는 절대적인 수적 우위와 그 공격력으로 군대의 대부분을 인민의 편으로 휩쓸거나, 적어도 중립화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이 폭넓게 혁명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총파업과 봉기 직전 시기에 노동자혁명에 동의하는 선진적 병사와 장교의 군사적 ‘음모’가 일어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음모’는 군사쿠데타와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 또 그 임무는 보조적 성격의 것이고, 노동자봉기의 승리를 확실히 하는 것에 있다.

이 모든 과제를 순조롭게 해결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조건은 당이고, 둘째 조건도 당이며, 셋째 조건 역시 당이다!

현존하는 여러 공산주의 조직이나 그룹 사이의 관계가 어떻게 정리 될 것인지, 또 이들의 장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멀리서 판단하기란 쉽지 않다. 경험이 가르쳐줄 것이다. 거대한 사태는 반드시 사상, 조직, 인간을 시험한다. 코민테른(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지도부가 스페인 노동자에게 그릇된 정책, 관료적 명령과 분열 외에는 아무것도 줄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지면, 진정한 스페인공산당은 코민테른의 공식 틀 밖에서 형성되고 단련될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당은 건설되어야 한다. 당은 통일적이고 중앙집중적이어야 한다.

노동자계급은 결코 연방주의 원리에 근거하여 자신의 정치조직을 건설해서는 안 된다. 공산당은 미래의 스페인 국가체제의 전형이 아니라 현 체제를 타파하기 위한 강철 지렛대로서 필요한 것이다. 공산당은 민주적 중앙집중주의 원칙에 근거해서만 조직될 수 있다.

노동자 훈타는 모든 정당과 그룹들이 광범한 대중의 눈앞에서 시험되고 천착될 주요한 투쟁무대가 될 것이다. 공산주의자는 자본가계급과 사회주의자, 그리고 일부 조합주의자 연합의 책략에 대해 노동자 공동전선 구호를 대치할 것이다. 혁명적 공동전선만이 농촌과 도시의 피억압 대중 사이에서 노동자계급에게 필수적인 신뢰를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공동전선의 실현은 오직 공산주의의 기치 아래에서만 생각할 수 있다. 훈타는 지도적인 정당을 필요로 한다. 확고한 지도부가 없다면, 훈타는 무의미한 조직형태에 그칠 것이며, 불가피하게 자본가계급에게 종속될 것이다.

스페인 공산주의자는 영예로운 역사적 임무를 앞에 두고 있다. 세계의 선진 노동자들은 이 위대한 혁명극의 경과를 열렬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것이다. 이 드라마는 조만간 세계 선진 노동자들의 공감뿐만 아니라 협력도 필요로 할 것이다.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프린키포,

1931년 1월 24일

 

 

 

공산주의자의 단결을 위하여

 

■이 글은 팸플릿 ‘스페인혁명과 이를 위협하는 위험’의 부록으로 〈반대파 회보〉에 게재된 것으로, 트로츠키가 스페인 좌익반대파 앞으로 보낸 편지의 일부이다.

 

스페인 공산주의자 대오의 통일 구호는 다가오는 시기에 거대한 흡인력을 가질 것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공산주의의 영향력 증대와 함께 대중적 평판도 높아질 것이다. 대중, 심지어 선진적 대중도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분열만을 받아들일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조합주의 와 사회주의 노동자에 대한 공동전선 구호는 (명확한 강령에 의거한) 공산주의자의 통일이라는 구호에 의해 보완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1931년 1월 31일

 

 

보이콧 전술

 

■ 이 글은 팸플릿 ‘스페인혁명과 이를 위협하는 위험’의 부록으로 〈반대파 회보〉에 게재된 것으로, 트로츠키가 스페인 좌익반대파 앞으로 보낸 편지의 일부이다.

 

…나는 혁명적 제헌의회 구호를 버릴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농민은 스페인 인구의 70% 이상을 차지한다. 농민이 ‘노동자공화국’ 구호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한편에서는 사회주의자와 공화주의자가, 다른 한편에서는 성직자들이 농민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노동자는 당 신들을 마음대로 조종하고 지배하기를 바란다. 이에 대해 뭐라고 응수할 것인가? 현 상황에서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응수는 이것이다: 우리는 노동자와 농민이 대체로 위로부터 임명된 관리나 억압자과 그 공범들 모두를 쫓아내고, 보통선거에 근거하여 자신의 자유의지를 표현하기를 바란다. 농민은 토지 등을 얻기 위한 투쟁 중에 노동자공화국 즉, 노동계급 독재에 이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농민에게 노동계급독재를 선험적 정식으로 제출할 수는 없다.

…공산주의자는 분명히 보이콧운동의 주도권을 잡지 못하는 오류를 범했다. 공산주의자만이 혁명적 노동자의 선두에 서서 보이콧운동에 대담성과 전투성을 부여할 수 있었다. 그렇더라도 보이콧 정서는 야당 사이에 매우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이것은 인민대중이 격렬하게 끓어오르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자 그 징후를 나타내는 것이다. 최근의 긴급보도는 공화주의자와 사회주의자도 보이콧을 지지하고 있음을 뒷받침하는 것 같다. 만약 공산주의자가 제때 이들을 활발하게 상대했다면, 공화주의자와 사회주의자는 보이콧 계획을 거부하기가 훨씬 더 어려웠을 것이다. 한편, 베렌게르와 그의 정부는 3월 1 일 선거에 매우 단단히 속박되어 있었다. 보이콧을 통해서 베렌게르에게 일종의 퇴각을 강제할 수 있었다면, 특히 공산주의자가 이 전술을 지도했다면, 대중의 혁명적 의식의 고양이라는 점에서 만만찮은 성과를 거뒀을 것이다.

1931년 2월 5일

 

 

노동자공화국과 제헌의회

 

■이 글은 팸플릿 ‘스페인혁명과 이를 위협하는 위험’의 부록으로〈반대파 회보〉에 게 재된 것으로, 트로츠키가 스페인 좌익반대파 앞으로 보낸 편지의 일부이다.

 

‘노동자공화국’과 관련하여 이 구호를 할 수 없이 포기하는 일은 결코 없다. 그러나 현재, 이 구호는 선동보다는 선전의 성격이 더 짙다. 우리는 선진 노동자들에게 우리가 노동자공화국을 향해 나아가고 있지만 우선 농민에게 이 개념을 설득해야 한다는 점을 설명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 노동계급독재를 의미할 노동자공화국에 대해 농민의 지지를 이 끌어내는 것은 의회주의적 성격의 경험을 포함하여 중간적 경험을 통하지 않고는 거의 불가능하다. 농민은 다른 가능성들이 모두 소진되고 나서야 비로소 노동계급독재를 받아들일 것이다. 스페인에서는 많은 가능성들이 벌써 다 소진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혁명적 수단으로 ‘완전하고’, ‘견고한’ 민주주의를 이룰 수 있는 기회가 아직 남아있다. 바로 제헌의회가 그것이다. 물론 우리는 이 구호를 물신화하지 않는다. 사태의 발전 템포가 더 급속해지면, 우리는 제때에 이 구호를 다른 구호로 대체할 시간이 있을 것이다.

1931년 2월 13일

 

 

베렌게르의 사임

 

■이 글은 팸플릿 ‘스페인혁명과 이를 위협하는 위험’의 부록으로〈반대파 회보〉에 게재된 것으로> 트로츠키가 스페인 좌익반대파 앞으로 보낸 편지의 일부이다.

 

나는 이전에 말하자면 ‘추론’으로 이렇게 말한 기억이 난다: 보이콧을 통해 강제로 왕정을 무릎 꿇게 하거나, 적어도 한쪽 무릎만이라도 꿇게 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지금은 이것이 기정사실이다.

베렌게르의 사임이 갖는 직접적인 정치적 의의는 그 자체로는 크지 않지만 그 징후적 의의는 엄청나다. 왕정의 무능력, 지배 도당의 타락, 이들의 자신감 부족, 인민에 대한 공포, 혁명에 대한 공포, 미래에 대한 공포, 극단적 양보를 통해 가장 끔찍한 결과를 액막이하려는 시도 등은 확실히 베렌게르의 사임과 왕정의 반(半)항복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근사한 일이다! 정말로 근사한 일이다! 이보다 더 나은 것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이다! 인민대중의 의식 속에 있던 권력에 대한 물신승배는 이 모든 것에 의해 무자비하게 손상될 것이다. 만족, 확신, 용기의 물결이 대중의 마음에 스며들어 이들에게 힘을 내게 하고, 활기를 띠게 하고, 박차를 가하게 할 것이다.

노동자당이 행동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되는 일반적 혁명정세는 현재, 대단히 유리하다. 지금의 문제는 바로 당 그 자체에 있다. 유감스럽게도 공산주의자는 보이콧주의자들의 공연에서 주역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난 2~3개월 동안의 보이콧운동에서 이들은 어떤 유의미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폭풍우 같은 혁명적 밀물 시기에 당의 권위는 마치 열병처럼 급속히 높아진다. 당이 결정적 전환점에서, 새로운 단계마다, 즉시 필요한 구호를 제출하고, 더욱이 사태에 의해 그 올바름이 곧 확인될 때 그렇다. …지난 몇 주, 몇 개월 사이에 기회가 사라지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러나 이제 뒤돌아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우리는 앞을 내다봐야 한다. 혁명은 이제 시작되었을 뿐이다. 우리 스스로 놓아버린 것을 백배로 되찾을 수 있다.

의회와 헌법 문제가 공식적 정치생활의 중심이 되고 있다. 이에 대해 무관심한 태도를 취할 수 없다. 내 생각에는 혁명적 제헌의회 구호를 지금, 갑절의 힘으로 제출해야 한다. 민주주의 정식의 활용을 덮어 놓고 혐오해서는 안 된다. 18세 이상의 모든 남녀에게 아무런 제한 없이 보통 선거권을 주는 문제를 예로 들어보자. 스페인 남부지방에서 18세는 너무 나이 많은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청년에게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공식 공산당을 포함한 모든 공산주의 분파의 공동전선 문제는 필연적으로 의사일정에 오를 것이다. 대중은 앞으로 몇 주 내지 몇 개월 안에 통일되고 진지한 혁명지도부의 필요성을 통감할 것이다. 대중은 공산주의자의 말다툼을 짜증스러워 할 것이다. 대중은 영원히는 아니더라도 통일을 강요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태는 다시 한 번 여러 분파를 각기 다른 방향으로 내동댕이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가오는 시기에 공산주의 분파들의 화해는 절대로 피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 밖의 모든 당면한 정치적 문제에서뿐만 아니라 보이콧 문제에서와 마찬가지로 공산주의 대오의 통일 문제에서도 각 분파는 주도권을 잡으려고 애쓸 것이다. 이 주도권을 잡을 수 있기 위해서는 우선, 공산주의 좌파 스스로가 통일되고 조직되어야 한다.

처음에는 아무리 소수일지라도 좌익반대파라는 잘 조직된 분파를 즉시 건설하고, 독자적인 회보와 이론 기관지를 창간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것은 좌익 공산주의자가 더 광범위한 조직에 참가하는 것을 배제하지 않으며, 거꾸로 그러한 참가를 당연시 한다. 그러나 동시에 좌익반대파를 조직하는 것이 이러한 참가의 필요불가결한 조건이다.

1931년 2월 15일

 

 

병사 훈타와 노동자 훈타

 

■이 글은 팸플릿 ‘스페인혁명과 이를 위협하는 위험’의 부록으로〈반대파 회보〉에 게재된 것으로> 트로츠키가 스페인 좌익반대파 앞으로 보낸 편지의 일부이다.

 

병사 훈타에 대해서 몇 마디하자. 이것이 독자적인 조직으로 일어서는 것을 보고 싶은가? 이것은 매우 중대한 문제이므로 처음부터 명확한 행동방침을 정해두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경험이 그 필요성을 말해줄 것이지만 교정을 가할 권리는 언제나 열려있다.

러시아의 1905년 혁명에서는 아직 병사 소비에트를 구성할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다. 노동자 소비에트에 병사 대의원들이 출석했지만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1917년에 병사 소비에트는 거대한 역할을 수행했다. 페테르부르크의 병사 소비에트는 처음부터 노동자 소비에트와 결합했다. 더욱이 병사들은 압도적 다수를 차지했다. 모스크바의 병사 소비에트는 노동자 농민 소비에트와 별개로 존재했지만, 이는 본질적으로 조직 기술상의 문제였다. 그 이유는 약 1천만 내지 1천200만의 농민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군대에 있었다.

스페인에서 평시의 군대는 총인구, 아니 심지어 노동자계급에 비해서도 보잘것없는 수준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막무가내로 독자적인 병사 소비에트를 세워야 하는가? 노동자정책의 견지에서 볼 때, 병사대표는 노동자훈타가 건설되었다면, 여기에 결집하는 편이 바람직하다. 병사들만의 훈타는 혁명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또는 혁명이 승리한 뒤에나 건설될 것이다. 노동자 훈타는 좀 더 일찍 파업이나 국회 보이콧에 근거하여, 아니면 그 뒤의 선거 참여에 근거하여 건설될 것이다(그리고 그래야 한다!). 그러므로 순수한 병사 훈타가 건설되기 훨씬 전에 병사대표를 노동자 훈타로 끌어들일 수 있다. 그러나 논의를 좀 더 해보자. 우리가 제때에 주도권을 잡고, 노동자훈타를 건설하고, 군대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한다면, 결과적으로 혁명적 노동자보다는 오히려 출세주의적 장교들의 영향을 받기 쉬운 독자적인 병사 훈타의 건설을 예방할 수 있을 것이다. 스페인 군대의 규모와 무게가 대단찮다는 사실은 이러한 전망에 유리하게 작용한다. 그러나 이에 반해서, 이 소규모 군대는 자신만의 혁명적인 정치전통을 가지고 있는데, 이 전통은 다른 어떤 나라보다 강력하다. 이것이 병사대표의 노동자 훈타로의 용해를 어느 정도는 방해할 것이다.

물론 이 문제에 대해서 나는 단정적으로 판단을 내리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사태에 밀착해 있는 동지들이 이 점에서 단정적 판단을 할 수 있을지 어떨지 의심스럽다. 나는 오히려 숙고할 문제를 제기하고 싶다. 광범한 선진 노동자 집단이 핵심문제를 빨리 논의하기 시작할수록, 그 해결이 보다 쉬워질 것이다. 어쨌든 병사대표를 노동자 훈타로 편입시키기 위한 방침을 취해야 한다. 이것이 일부만 성공을 거둔다할지라도 상당히 훌륭할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런 목표를 염두에 두고 군대와 여러 병과의 경향, 각기 다른 군무 형태 등을 제때에, 그리고 아주상세하게 연구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각 지역의 역관계, 각 지역들의 상호관계를 더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스페인의 정치지도를 총체적으로 작성하려고 해야 할 것 이다. 이 지도에는 노동자지구, 혁명의 중심지, 노동조합과 당조직, 군대 주둔지, 적색 지구와 백색 지구의 역관계, 활발한 농민운동 지역 등이 기입되어야 한다. 그 수가 얼마 되지 않더라도 좌익반대파는 여러 곳에서 다른 노동자 그룹의 뛰어난 대표들과 협력하여 이러한 연구를 주도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혁명의 참모부라는 요소가 나타날 것이다. 주요한 중핵이 이 일에 필요한 통일성과 응집력을 제공할 것이다. 처음에는 ‘아카데믹한’ 것처럼 보이는 이런 준비 작업은 장래에 거대한, 어쩌면 결정적인 의의를 얻게 될 것이다. 현재 스페인이 거치고 있는 것과 같은 시기에 가장 커다란 죄악은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다.

1931년 3월 13일

 

 

텔만과 ‘인민혁명’

 

■이 글은 팸플릿 ‘스페인혁명과 이를 위협하는 위험’의 부록으로〈반대파 회보〉에 게재된 것으로, 트로츠키가 스페인 좌익반대파 앞으로 보낸 편지의 일부이다.

원래 이 글은 영문판 『스페인혁명』에는 실려 있지 않지만 논의 내용의 연관성에 따라 싣게 되었다. 『트로츠키의 반파시즘 투쟁』(2001, 풀무질)에 실린 글을 좀 더 보완했다.

 

텔만[에른스트 텔만(Ernst Thalmann, 1886-1944): 독일의 스탈린주의자, 1920년대 중반 이후, 독일 공산당의 최고 지도자. 1932년 힌덴부르크, 히틀러에 대항하여 대통령선거에 입후보했다. 1933년 나찌에 체포되어 1944년 강제수용소에서 총살당했다.]의 연설에서 ‘인민’ 혁명에 관한 부분을 인용한 것에 감사한다. 죽 훑어보았다. 이보다 더 터무니없고, 고의적으로 당혹스럽게 하는 문제 제기 방식은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의 구호로서, 심지어 레닌과 관련지어 ‘인민혁명’을 제기하다니 상상하지도 못한 일이다. 게다가 파시스트인 슈트라써[오토 슈트라써(Otto Strasser, 1897-1974): 독일의 파시스트 정치가. 1925년 나찌당에 입당, 당 내 좌파로서 두각을 나타내며 히틀러와 대립, 1934년에 망명했다.]의 신문도 매호마다 계급 혁명이라는 마르크스주의 구호에 대립되는 것으로 인민혁명 구호를 윤색하고 있다. 모든 위대한 혁명은 그것이 혁명적 계급을 중심으로 국민의 강건하고 창조적인 세력 모두를 결집시킨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국민을 새로운 핵심을 중심으로 재구성한다는 의미에서 인민혁명, 또는 국민혁명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이것은 구호가 아니라 혁명의 사회학적 기술이다. 게다가 정확하고 구체적인 정의를 필요로 하는 기술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구호로서는 공허하고 허풍이다. 그것은 노동자의 사고방식에 혼란을 주입하는 대가를 치르고 파시스트와 서로 경쟁하는 것이다.

바로 이 문제에서 코민테른의 구호는 주목할 만한 변천을 하고 있다. 코민테른 제3차 대회 이후, ‘계급 대 계급’ 구호는 노동자공동전선 정책의 대중적 표현이 되었다. 이것은 전적으로 옳았다. 모든 노동자는 자본가계급에 대항하여 단결해야 한다. 그 이후에 이 구호는 노동자에 대항하여 개량주의적 관료와 동맹을 맺는 것으로 둔갑했다(영국 총파업의 경험). 그 다음에는 정반대의 극단으로 넘어가버렸다: 개량주의자와의 합의는 절대로 안 된다, ‘계급 대 계급’이다. 사회민주주의 노동자를 공산주의 노동자에게 더 가까이 끌어당기는 구실을 했을 이 구호가 ‘제3기’에는 다른 계급에 대항하는 것처럼, 사회민주주의 노동자에 대항하는 투쟁을 의미 하게 되었다. 이제 그 의미가 또다시 바뀌고 있다: 노동자혁명이 아니라 인민혁명이다. 파시스트인 슈트라써는 이렇게 말한다: 인민의 95%가 혁명에 관심이 있다. 따라서 이 혁명은 계급혁명이 아니라 인민혁명이다. 텔만도 그와 합창한다. 그러나 실제로 공산주의 노동자는 파시스트 노동자에게 이렇게 말해야 한다: 물론 98%는 아니지만 인민의 95%가 금융자본에 의해 착취되고 있다. 그러나 이 착취는 계층적으로 즉, 착취자, 하위 착취자, 하위의 하위 착취자 등으로 조직되어 있다. 오직 이 위계제도 덕분에 최상위 착취자는 인민의 대부분을 종속시키고 있다. 국민이 실제로 새로운 계급적 핵심을 중심으로 재구성될 수 있기 위해서는 이데올로기적으로도 재구성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것은 노동자계급이 ‘인민’이나 ‘국민’으로 용해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자신의 노동자혁명 강령을 발전시키고, 소부르주아 계급으로 하여금 두 체제 중에서 선택하게 하는 경우에만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인민혁명 구호는 광범한 노동자대중뿐만 아니라 소부르주아 계급도 잠재움으로써, 이들을 ‘인민’의 부르주아적 계층구조와 화해시키고, 그 해방을 지연시킨다. 그러나 독일의 현 상 황에서 ‘인민혁명’ 구호는 마르크스주의와 파시즘 사이의 이데올로기적 경계를 없앰으로써, 노동자 일부와 소부르주아 계급을 파시즘의 이데올로그와 화해시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민혁명이 어느 쪽에서도 문제라면, 무리하게 선택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할 여지를 주기 때문이다. 이런 가증스런 혁명가는 진짜 적과의 충돌에서 제일 먼저, 그를 흉내 내고, 그의 색깔로 자신을 위장하고, 혁명투쟁이 아니라 교활한 농간으로 대중을 획득할 방법을 생각한다. 정말이지 추잡한 문제 제기 방식이다! 만약 허약한 스페인 공산주의자가 이 방식을 채택한다면, 스페인판 국민당의 정책이 될 것이다.

1931년 4월 14일

 

 

있는 그대로를 말하는 것

一〈꼬뮤니스모〉 편집부에 보내는 편지

 

■이 글은 스페인 좌익반대파의 이론지인〈꼬뮤니스모〉(Comunismo) 편집부 앞으로 보낸 편지이다.

 

친애하는 동지 여러분,

나는 마침내 스페인의 공산주의 좌익반대파가 자신의 이론 기관지 〈꼬뮤니스모〉를 발행하기 시작했다는 손꼽아 기다려온 소식을 받았습니다. 나는 이 출판물이 대중의 호평을 받으리라는 것을 단 한순간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스페인은 혁명적 시기를 겪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기 에 노동자전위의 깨인 지성은 문제를 분리된 방식이 아니라 그 내적인 복잡성을 전체적으로 이해하려고 열심히 노력합니다. 혁명적 시기는 늘 역사적으로 진보적인 계급들 사이에서 이론적 호기심이 발전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마르크스주의 이외의 그 어떤 이론도 지금 스페인 공산주의자가 직면하고 있는 거대한 문제들에 답해줄 수 없습니다. 또한 완전히 단언적으로 다음과 같은 점을 지적해두어야겠습니다: 좌익반대파를 제외한 어떤 그룹도 현재, 스페인 노동자에게 혁명의 조건, 그 추진력, 그 전망과 목표에 대한 진정한 마르크스주의 해석을 제공해줄 수 없습니다. 노동자 혁명의 문제들을 관료적 특권계층의 이해와 필요에 종속시키고 있는 코민테른의 공식 중도주의 분파는 지금까지 너무나 심각하게 자신의 명예를 실추시켜 왔으며, 모든 문제에 대해서 비판적 토론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좌익반대파는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명석함, 이론적 정확성, 결과적으로 정치적 정직성이 혁명적 경향을 무적이 되게 합니다. 〈꼬뮤니스모〉가 이 기치 하에 성장하고 성공하기를 빕니다!

나는 효과적인 지원과 무엇보다도 가장 근면한 협력을 약속합니다. 그리고 모든 나라의 사상적 동지들도 이 같이 하도록 권합니다. 내가 며칠 전에 끝낸 소련에 대한 선언문 초안[소련에 대한 선언문 초안: ‘소련 발전의 문제들-소련문제에 관한 국제좌익반대파의 강령’, 〈반대파 회보〉 제 20호, 1931년 4월 4일]을 보냅니다. 스페인의 선진 공산주의자들이 첫 노동자국가의 국내문제에 대해서, 또 소련과 모든 나라의 공산주의자들이 스페인혁명의 문제들에 대해 같은 정도로 주목해주기를 바랍니다.

〈꼬뮤니스모〉만세!

스페인의 볼셰비키-레닌주의자 만세!

스페인의 혁명적 노동자계급 만세!

1931년 4월 12일

 

 

 

제2부 | 공화국에서 내전까지

 

|서문|

알카라 사모라 정부는 1931 년 6월 국회선거를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5월, 마드리드에서는 왕당파와 노동자 대중 사이에 격렬한 충돌이 발생 했다. 동시에 무정부주의자는 부패한 친(親)왕당파 성직자에 대한 보복으로 많은 교회를 불질렀다.

6월 선거는 친(親)정부 정당들이 휩쓸었다. 사회당이 단독으로 116석을 얻은 데 비해 여러 우익정당들은 다 합해서 겨우 60석만을 획득했다. 나머지 의석은 다음과 같이 나뉘었다: 급진사회당 60석, 아사냐의 공화주의행동당 30석, 레로욱스의 급진당 90석, 카탈로니아 좌익당 43석, 알 카라 사모라의 진보당 22석, 카사레스 키로하의 갈리시아 민족주의당 16석. 뒤에 거론된 이들 정당은 모두 공화국을 지지했다.

새로운 국회 내에서 가장 뜨겁게 달아오른 쟁점은 교회의 특권적 지위였다. 국회 밖의 급진화 노동자와 농업노동자 사이에서 쟁점은 토지개혁, 노동자통제, 임금 등이었다. 교권주의에 대한 부르주아 정당들 사이의 차이가 노동자운동에 대한 이들의 태도에서는 나타나지 않았다. 또한 공화주의 정부는 왕당파 전임자들과 같은 폭력적 탄압 방법을 썼다.

7월과 8월에 전국노동자연맹은 일련의 지역적 총파업을 조직했다. 가장 격렬한 파업투쟁 이 세비야에서 있었는데, 아사냐는 군대에 노동자 지구를 향해 대포를 쏘라고 명령했다.

노동자계급에 반대해 뭉친 공화주의 연립정부는 교회 문제를 둘러싸고 분열하기 시작했다. 10월, 알카라 사모라와 마우라는 교회의 성직자들을 지지하는 제스처로 사임했다. 아사냐가 수상이 된 반면에, 레로욱스와 그의 급진당은 처음에는 부르주아 중도파에서 결국에는 극우파로

나아가려는 공화주의 블록과 결별했다. 알카라 사모라는 정부를 완전 방치하지 않기로 결정했으며, 명의뿐인 공화국의 대통령 직책을 받아들였다.

6월 국회에서 통과된 헌법은 카탈로니아와 바스크 지방에 대해 특정 측면에서 지방 자치권을 허락하는 스페인연방의 결성을 규정했다. 이는 1932년 초에 통과된 카탈로니아 자치법령을 대체했다. 이 법령은 ‘헤네랄리타트’ 즉, 제한된 권한을 가진 카탈로니아의 지방통치 기관인 바르셀로나 지방정부의 개편을 규정했다. 이때 바스크도 자기 지역에 대한 비슷한 법령을 요구했다.

왕당파 장군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 아사냐는 공화주의 하급 장교들에 대한 이들의 박해를 지지했다. 그 사이에 장군들은 더 대담한 계획을 세웠다. 1932년 8월, 세관경비대장인 호세 산후르히[(1872-1936):1927년 모로코에서의 잔혹한 탄압으로 유명해졌다. 1932년 8월, 왕당파 장군들의 반란을 지도했으나 실패했다.]장군이 반란을 일으켰다. 쿠데타는 일부 왕당파와 발생기 에 있던 파시스트 운동의지지, 그리고 무쏠리니의 후원 약속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했으며, 그 주요 조직자들이 투옥되었다.

산후르호의 패배 이후, 잠시 주도권이 노동자 조직으로 넘어갔다. 무정부주의자는 1933년 1월, 카사스 비에하스시(市)를 장악했다. 이 반란에 대한 정부의 잔인한 진압으로 인해 많은 사회주의와 무정부주의 노동자가 정권과 순식간에 소원해졌다. 4월의 지방자치체 선거는 정부에 대한 지지가 뚜렷하게 하락했음을 보여주었다. 한여름에 아사냐는 사임하지 않을 수 없다고 느꼈으며, 11월에 새로운 선거가 실시되었다. 이번 선거는 공화주의자와 사회당에 대단히 불리했다.

1933년 11월 국회선거에서 사회당의 의석은 116석에서 58석으로 대폭 줄어들었다. 레로욱스의 급진당이 104석, 노골적인 우익정당들이 207석을 얻은 데 비해, 여당은 다 합해서 겨우 99석을 확보하는데 그쳤다. 국회의 최대 정당은 이제 힐 로블레스의 신생 초(ultra)반동적 세다(CEDA)당이었다. 공산당과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의 팔랑해당은 각각 단 한 석을 얻었다.

레로욱스가 수상이 되었다. 그는 즉시 주로 무정부주의자가 촉구한 일련의 격렬한 파업에 직면했다. 이런 파업을 진압하는 것 말고도 정부의 주된 관심사는 아사냐 치하에서 수행된 제한적인 개혁을 폐지하는 것이었다.

세다당 대표들을 정부에 포함시킨 레로욱스에 대한 항의에서 1934년 10월 4일 무정부주의자와 좌익 사회주의자들의 아스투리아스 봉기가 시작되었다. 이는 카탈로니아의 부르주아 민족주의자 루이스 콤파니스가 이끈 카탈로니아 반란을 동반했다. 이 두 봉기 모두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콤파니스와 라르고 카바예로는 아스투리아스 노동자의 패배 이후 정부의 보복 물결 속에서 투옥되었다.

아스투리아 꼬뮌의 진압에 이어 급진당 지도자가 직접 연루된 대형 금융스캔들에 의해 정점에 달한 일련의 정부 위기가 이어졌다. 결국 1936년 1월 4일, 알카라 사모라는 국회를 해산시켰으며, 2월 16일 새로운 선거를 실시했다. 무정부주의자와 국제좌익반대파의 소규모 스페인 지부를 제외한 좌익은 공동후보자 명부를 포함하여 인민전선 선거블록으로 결집했다. 우익정당들은 ‘민족전선’이라는 이름 아래 대항블록을 결성했다. 레로욱스의 부르주아 중도파는 몇 갈래로 분열했지만 그 구성 정당들은 전부 뚜렷한 지지 상실을 겪었다. 다음은 선거의 2차와 결선투표 결과이다.

 

1936년 2월 선거 결과

인민전선

사회당 99석

공화주의 좌익(아사냐) 87 석

공화주의 연합(마르티네스 바리오) 39 석

좌익당(카탈로니아 분리주의자) 36 석

공산당 17석

총278석

민족전선

세다(힐 로블레스) 88 석

농민당 (지주) 11 석

왕당파(칼보 소텔로가 이끈) 13석

독립당 10석

전통주의자(칼리스트) [페르디난드 국왕의 자손보다는 돈 카롤로스 자손의 왕위계승권을 옹호한 왕당파의 분파] 9 석

기타 3 석

총 134 석

중도파

중앙당(포르텔라 발라다레스가 이끈) 16석

리가(카탈로니아 산업가) 12석

급진당 (레로욱스) 4 석

진보당(알카라 사모라) 6 석

바스크(호세 안토니오 아키레가 이끈)[바스크 민족주의자는 곧 인민전선으로 넘어가버렸다.] 10석

기타 7 석

총55 석

아사냐가 수상이 되었다. 그는 공산당과 사회당에게서 받은 지지를 무시하고, 인민전선의 부르주아 파트너들과 주로 자기 정당에서 끌어온 인사들로 정부를 구성했다.

 

트로츠키의 망명에 대한 주석

스페인공화국이 출범한 1931 년에 트로츠키는 그와 그의 가족이 스페인으로 옮길 수 있도록 새로운 정부에 비자를 신청했다. 그러나 자칭 ‘노동자의 공화국’인 정부는 그렇게 자유주의적이지 않았다. 그는 결국 프랑스 정부가 비자를 내준 1933년 7월에 터키를 떠날 수 있었다.

그의 정세 판단의 근본적 변화와 동시에 일어난 이런 거주상의 변화는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한 직후인 당시 스탈린주의화된 코민테른의 범죄적으로 일탈한 정책 때문이었다. 그는 코민테른을 개혁하려는 전망을 포기했으며, 전 세계에 걸치는 제4인터내셔널과 새로운 혁명정당의 건설을 주창하기 시작했다. 그가 이런 문제들에 몰두하느라 다음 2~3년 사이에 스페인에 대한 글이 거의 발표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설명해줄 수 있다.

트로츠키가 프랑스에 도착한지 9개월이 지나자 정부는 그에게 떠날 것을 명령했지만, 노르웨이 정부가 그에게 비자를 내준 1935년 6월까지 그는 머물러 있지 않을 수 없었다. 스페인 내전이 시작된 1936년 6월에 트로츠키는 노르웨이에 있었으며, 며칠 뒤『배반당한 혁명』을 완성했다. ‘스페인 좌익반대파의 모든 성원들에게 보내는 편지’까지 제2부의 모든 글은 터키의 카디코이나 프린키포에서 작성되었다. ‘통일노동자당의 배신’과 ‘스페인 제4인터내셔널의 임무’는 노르웨이에서 작성되었다.

 

 

 

스페인 공산주의자의 십계

 

■ 이 글은 1931년 4월 혁명(왕정 붕괴와 공화국 수립) 이후의 스페인혁명의 기본 원칙에 대해서 간단히 밝힌 것이다. 이 글의 내용은 스페인뿐만 아니라 비슷한 나라들에도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원칙들이다.

 

1. 왕정은 권력을 잃었지만 되찾기를 바라고 있다. 유산계급은 여전히 확고하게 권력을 잡고 있다. 공화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블록은 사회주의혁명의 길에서 대중을 제지하기 위해 공화주의적 격변에 기초해 있다. 말을 믿지 마라! 필요한 것은 실천이다! 우선, 구체제의 가장 저명한 지도자와 지지자를 체포하고, 왕정과 가장 평판이 나쁜 그 심복의 재산을 몰수하라! 노동자를 무장시키자!

2. 공화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지지에 의지하고 있는 정부는 그 기반을 오른쪽으로, 즉 대자본가계급과 대지주 쪽으로 넓히려고 기를 쓸 것이고, 교회를 중립화하기 위해 투항조건을 찾으려 할 것이다. 이 정부는 피착취자로부터 착취자를 보호하기 위해 설립된 착취자의 정부이다. 노동자계급은 자본가계급의 ‘사회주의적’ 공화주의 대리인의 정부에 비타협적으로 반대한다.

3. 사회주의자의 정권참여는 노동자와 사회주의 지도자의 격렬한 충돌이 더욱 늘어날 것임을 의미한다. 이것은 혁명적 공동전선 정책에 커다란 가능성을 열어젖힌다. 모든 파업, 모든 시위, 노동자와 병사의 모든 접근, 나라의 진정한 민주화를 향한 대중의 모든 발걸음은 이제부터는 ‘질서’의 지지자 역할을 하는 사회주의 지도자의 저항에 부딪칠 것이다. 따라서 공산주의 노동자가 사회주의, 조합주의, 무당파 노동자와 함께 공동전선에 참여하여 자신의 지도하에 이들을 끌고 가는 것이 그만큼 더 중요하다.

4. 공산주의 노동자는 현재 스페인에서는 매우 작은 소수파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은 즉시 권력을 열망할 수 없다. 현 시점에서 이들은 공화주의-사회주의 정부의 폭력적 전복을 자신의 실천적 임무로 설정할 수 없다. 이러한 종류의 어떠한 시도도 파멸적 모험이 될 것이다. 노동자, 병사, 농민대중은 그만큼 더 철저하고 단호하게 이러한 환상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공화주의적-사회주의적 환상의 단계를 거쳐야 한다. 그 결과, 이들은 빈말에 속지 않고, 당면한 사실을 직시하고, 제2의 혁명인 노동자혁명을 단호히 준비할 수 있다.

5. 현 시기에 공산주의자의 임무는 노동자의 다수파, 병사의 다수파, 농민의 다수파를 획득하는 것이다. 어떻게 이를 수행할 것인가? 선동을 계속하고, 중핵을 훈련시키고, ‘끈기 있게 설명하고’(레닌의 표현을 쓰자면), 조직화를 통해 수행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은 대중의 경험과 이 경험에 공산주의자의 적극적인 참여 즉, 광범위하고 대담한 공동전선 정책에 근거해야 한다.

6. 공산주의자는 공산주의적 선동과 비판의 자유를 직간접적으로 제한하거나 약화시키는 공화주의자-사회주의자 블록이나 그 일부와는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 모든 곳의 공산주의자는 온갖 형태의 왕당파적 반(反)혁명에 대한 투쟁에서 최전선에 설 것이지만, 이 투쟁을 위해 공화주의자나 사회주의자와 동맹을 맺을 필요는 없다는 점을 끊임없이 인민대중에게 설명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의 정책은 필연적으로 반동 세력에 대한 양보에 바탕을 둘 것이고, 따라서 이 세력의 음모를 은폐하기 쉬울 것이기 때문이다.

7. 공산주의자는 가장 급진적인 민주주의 구호를 내건다: 노동자 조직의 완전한 자유, 지방자치의 자유, 국민에 의한 모든 공무원의 선출, 18세 이상 남녀에 대한 선거권 허용 등과 노동자 의용군의 창설과 추후로 농민 의용군의 창설, 인민을 위해서, 특히 실업자와 빈농, 그리고 병사의 상태를 개선하기 위해서 왕정과 교회의 모든 재산 몰수, 국가와 교회의 완전분리.

모든 시민권과 병사에 대한 정치적 특전, 군대에서 장교의 선출. 병사는 인민의 사형집행인이 아니며, 부자의 무장 용병도, 왕실의 근위병도 아닐 뿐더러 혁명적 시민이자, 노동자농민의 피를 나눈 형제이다.

8. 노동자계급의 중심적 구호는 노동자소비에트(훈타, Juntas)이다. 이 구호는 쉼 없이 선전되고, 끊임없이 보급되어야 하며, 기회 있는 대로 그 실현에 착수해야 한다. 노동자 소비에트는 즉각적인 권력투쟁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장래의 전망이지만, 대중이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만, 그리고 공산주의자의 계몽 활동의 도움으로 달성할 수 있는 전망이다. 오늘날, 노동자 소비에트는 노동자계급의 분산된 힘을 모으고, 노동자계급의 통일과 독자성을 위해서 투쟁하는 것을 의미한다. 노동자 소비에트는 파업 수당, 실업자 원조, 노동자와의 유혈 충돌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병사와의 접촉, 노동자와 빈농의 동맹을 확실하게 하기 위한 도시와 농촌의 접촉이라는 문제를 과제로 삼는다. 노동자 소비에트는 군대의 대표도 포괄한다. 이런 식으로, 그리고 이런 식으로만 소비에트는 노동자봉기의 기관이 될 것이며, 추후로 권력기관이 될 것이 다.

9. 공산주의자는 즉시 혁명적 농업강령을 작성해야 한다. 그 기초는 빈농과 병사를 위해서 왕정과 교회부터 시작하여 특권계급, 부유계급, 착취자의 토지몰수여야 한다. 이 강령은 각 지방의 상황에 따라 구체적으로 채택되어야 한다. 고유한 경제적 · 역사적 특수성에 따라서 각 지방에서는 그 지역의 혁명적 농민과 긴밀하게 협력하여 농업강령의 구체적 작성을 위한 위원회를 즉시 창설해야 한다. 우리는 강령을 명확하고 정확한 방식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농민의 의지를 이해할 줄 알아야 한다.

10. 이른바 사회당 좌파(이들 가운데에는 정직한 노동자가 많이 있다)는 블록을 만들고, 심지어 다양한 조직을 통일시키려고 공산주의자를 초청할 것이다. 이에 대해 공산주의자는 이렇게 대답한다: ‘우리는 노동자계급을 위해서, 그리고 명확한 구체적 임무의 해결을 위해서, 어떤 그룹, 어떤 노동자조직과도 손잡고 활동할 준비가 되어 있다. 바로 이 목적을 위해서 우리는 소비에트의 창설을 제안하는 것이다. 다른 정당에 속한 노동자 대표도 이 소비에트 안에서 모든 시기적 문제, 모든 당면한 임무를 토론할 것이다. 노동자 소비에트는 공통된 임무를 위한 동맹의 가장 자연스럽고, 가장 개방된, 가장 정직한, 가장 건전한 형태이다. 노동자 소비에트에서 우리 공산주의자는 우리의 구호와 우리의 해결책을 제의하고, 우리 방침의 올바름을 노동자에게 납득시키려고 노력할 것이다. 각 그룹은 노동자 소비에트에서 완전한 비판의 자유를 누려야 한다. 소비에트가 제기한 실천적 임무를 위한 투쟁에서 우리 공산주의자는 항상 최전선에 설 것이다.’ 이것이 공산주의자가 사회주의, 조합주의, 무당파 노동자에 대해 제의하는 협력의 형태이다.

자기 대오의 통일을 보증함으로써 공산주의자는 노동자계급과 농민 의 압도적 다수(빈농)의 신뢰를 획득할 것이다. 무장한 이들은 권력을 장악할 것이고, 사회주의혁명의 시대를 열어젖힐 것이다.

L. 트로츠키

카디코이

1931년 4월 15일

 

 

공화주의 정부의 탄압조치

 

■ 이 글은 팸플릿 '스페인혁명과 이를 위협하는 위험'의 부록으로〈반대파회보〉에 게재 된 것으로, 트로츠키가 스페인 좌익반대파 앞으로 보낸 편지의 일부이다.

 

러시아의 1917년 2월 체제와 스페인의 현 공화주의체제 사이에는 많은 유사점이 눈에 띈다. 그러나 중대한 차이점도 있다 : (ㄱ) 스페인은 전쟁 중이지 않기 때문에 평화를 위한 투쟁 구호가 없다. (ㄴ) 스페인에는 병사 소비에트는 말할 것도 없고 아직 노동자 소비에트도 없다. 이 구호가 대중에게 제출되었는지를 신문을 통해서는 알 수조차 없다. (ㄷ) 스페인의 공화주의 정부는 처음부터 좌익 노동자들에 대해 탄압조치를 쓰고 있지만, 러시아의 2월 체제에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무력은 자유주의 정부의 수중이 아니라 노동자 병사 소비에트가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마지막 사정은 우리의 선동에서 거대한 의의가 있었다. 러시아의 2월 체제는 정치 분야에서 즉시 충분하고 거의 완전한 형태의 민주주의를 실현했다. 자본가계급은 노동자와 병사대중의 호의 때문에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스페인의 자본가계급은 대중의 호의뿐만 아니라 구체제로부터 넘겨받은 조직적 폭력 때문에도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다. 스페인에는 집회⦁언론⦁출판 등의 완전하고 무조건적인 자유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새로운 지방자치체 선거 원칙은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한편, 혁명적 시기에 대중은 권리상의 모든 불평등, 모든 형태의 치안통치에 특히 예민하다. 이것을 이용해야 한다. 바꿔 말하면, 공산주의자는 이제야말로 자신이 가장 일관되게, 가장 단호하게, 가장 비타협적으로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정당으로 나설 필요가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 소비에트 결성에 즉시 착수해야 한다.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은 이를 위한 더할 나위없는 출발점이다. 이들에게는 자신의 지방자치 정부가 있다. 우리 노동자에게는 우리의 권리와 이해를 지키기 위한 우리만의 도시 훈타가 필요하다.

1931년 4월 20일

 

 

카탈로니아연합

 

■ 이 글은 팸플릿 '스페인혁명과 이를 위협하는 위험'의 부록으로〈반대파회보〉에 게재 된 것으로, 트로츠키가 스페인 좌익반대파 앞으로 보낸 편지의 일부이다.

 

카탈로니아연합[카탈로니아연합 : 부하린의 우익반대파를 지지하여 1929년 스페인공산당에서 추방되어 결성된 카탈로니아 지역 중심의 조직. 지도자는 호아킨 마우린. 이 조직은 1935년,안드레스 닌이 지도하는 스페인 좌익반대파와 통합하여 마르크스주의통일노동자당(POUM)을 결성했다.] 은 전체 스페인 공산주의 조직의 일원이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 카탈로니아는 전위이다. 그러나 이 전위가 스페인의 모든 노동자계급, 그 이후에 농민과 발맞추지 않을 것이라면, 카탈로니아의 운동은 기껏해야 빠리꼬뮌 식의 장엄한 에피소드로 끝나게 될 것이다. 카탈로니아 고유의 입장이 이러한 방향으로 몰고 있다. 카탈로니아의 폭발이 스페인의 전체 정세가 제2 혁명이 성숙되기 훨씬 전에 일어난다면, 민족분쟁이 격화될지도 모른다.

민족적 소요의 영향을 받아 카탈로니아의 노동자계급이 스페인의 모든 노동자계급과 결합할 기회를 갖기도 전에 결정적 투쟁에 말려들게 된다면, 그것은 가장 커다란 역사적 불행이 될 것이다. 마드리드뿐만 아니라 바르셀로나 좌익반대파의 장점은 이런 모든 문제를 역사적 수준에서 제기할 수 있고, 또 해야 한다는 사실에 있다. …

1931년 4월 23 일

 

 

카탈로니아 민족주의의 진보성

 

■ 이 글은 팸플릿 '스페인혁명과 이를 위협하는 위험'의 부록으로 (반대파회보〉에 게재 된 것으로, 트로츠키가 스페인 좌익반대파 앞으로 보낸 편지의 일부이다.

 

카탈로니아연합의 이른바 '민족주의'에 대하여, 이것은 매우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이다. 이 점에서 오류를 범하면, 치명적인 결과를 부를지도 모른다.

스페인혁명은 민족문제를 포함한 모든 문제를 새로운 기세로 제기했다. 민족적 경향이나 환상의 주요 보균자는 소부르주아 지식인이다. 이 들은 대자본의 탈(脫)민족적 역할과 국가 관료집단의 중앙집중화에 대항하여 농민 사이에서 지지를 얻으려고 한다. 모든 혁명적 민주주의운동 일반에서와 마찬가지로, 현 단계에서 민족해방운동의 지도적 역할을 맡고 있는 소부르주아 계급은 필연적으로 이 운동에 다양한 종류의 수많은 편견을 끌어들인다. 이러한 원천에서 나온 민족적 환상도 노동자들 사이에서 서서히 확산되고 있다. 이것이 아마 일반적이고 전체적인 카탈로니아와 카탈로니아연합의 현 상황일 것이다. 그러나 이상의 것들이 스페인의 대국수주의, 부르주아 제국주의, 관료적 중앙집중주의에 반대하는 카탈로니아 민족투쟁의 진보적, 혁명적 민주주의적 성격을 결코 손상시키지는 않는다.

스페인 전체, 특히 카탈로니아가 현재, 카탈로니아의 민족민주주의자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부르주아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사실을 단 한순간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부르주아 제국주의자들은 대지주, 구체제의 관료, 장군들과 동맹을 체결하고, 스페인의 국가사회주의자들의 지원을 받고 있다. 이 동업자들은 전부 한편으로 식민지의 계속적인 예속과, 다른 한편으로 스페인 본국의 최대한의 관료적 중앙집중화 즉, 스페인 자본가계급의 카탈로니아인, 바스크인, 그 밖의 민족에 대한 억압을 지지하고 있다. 계급세력의 현재적 조합과 운동발전의 현 단계에서 카탈로니아의 민족주의는 진보적, 혁명적 요인이다. 스페인의 민족주의는 반동적, 제국주의적 요인이다. 이런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무시하며, 전면에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그 의의를 은폐하는 공산주의자는 스페인 자본가계급의 무의식적인 하수인이 되어, 노동자혁명의 대의를 잃어버리게 될 위험이 있다.

소부르주아적인 민족적 환상의 위험은 무엇인가? 바로 스페인 노동자계급을 민족이라는 경계를 따라 분할시킬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이것은 매우 중대한 위험이다. 그러나 스페인 공산주의자는 단 한 가지 방식 즉, 지배민족 자본가계급에 의한 폭력을 가차 없이 폭로함으로써 피억압민족 노동자계급의 신뢰를 획득하는 방식으로만 이 위험에 맞서 성공적으로 싸울 수 있는 것이다. 다른 정책은 모두 피억압민족 소부르주아계급의 혁명적 민주주의적 민족주의에 대항하여 지배민족의 제국주의적 자본가계급의 반동적 민족주의를 지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일 것이다.

1931년 5월 17일

 

 

체계적인 서술이 필요하다

 

■ 이 글은 팸플릿 '스페인혁명과 이를 위협하는 위험'의 부록으로〈반대파회보〉에 게재 된 것으로, 트로츠키가 스페인 좌익반대파 앞으로 보낸 편지의 일부이다.

 

동지의 편지에 따르면, 〈위마니떼〉(L′Humanité, 인류 : 프랑스공산당 기관지)의 거짓말이 카탈로니아에서 분노를 야기하고 있다.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분노만으로는 부족하다. 좌익반대파 기관지는 스페인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태를 체계적으로 서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사태는 거대한 의의가 있다. 국제공산주의의 중핵은 스페인혁명 이라는 산 경험에 입각하여 재교육될 것이다. 규칙적이어야 하는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의 편지는 단순한 편지가 아니라 더 정확하게는 일급의 중요성을 가지는 정치적 문서이다.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스탈린주의자는 카탈로니아연합이 고립감이나 적개심 같은 분위기에 휩싸이도록 만들 수 있다. 이런 분위기만으로도 카탈로니아의 선진 노동자들을 모험과 파국의 길로 내몰지도 모른다.

 

1931년 5월 20일

 

 

스페인혁명과 이를 위협하는 위험

 

■ 이 글은 1931 년 4월, 공화주의혁명이 실현됨에 따라 스페인 공산주의자의 기본 방침을 명확히 한 강령적 논문이다.

1929년 세계공황의 영향으로 금융위기에 빠진 프리모 데 리베라 정권은 다음 해 일순간에 붕괴하고 알폰소 13세에 의해 임명된 베렌게르 장군의 반伴)군사독재 정권이 출범했다. 그러나 이 정권은 프리모 데 리베라 정권의 붕괴로 활발하게 활동을 전개한 반(反)체제 정당들이나 노동운동의 압력에 노출되었다. 1930년 12월, 공화주의 장교가 쿠데타를 일으켰지만 곧 진압되었다. 그러나 이 쿠데타 진압 직후 전국에서 전개된 대규모 대중운동은 정권의 안정을 위협했으며, 알폰소 국왕은 어쩔 수 없이 새로운 정부와 선거를 약속하며 베렌게르를 해임, 임시 문민정부가 출범했다.

국회선거에서 우익 정당의 다수파 획득을 장담할 수 없다고 생각한 알폰소는 4월 12일 지방자치체 선거 실시로 적당히 얼버무렸다. 이 선거에서 주요 대도시는 사회당과 공화주의 정당들을 지지했지만, 지방에서는 카시케제도 덕분에 왕당파 우익 정당이 다수를 차지하며 전체적으로는 과반수를 넘게 득표했다. 그러나 마드리드의 대규모 군중이 왕정 반대를 주창했기 때문에 알폰소는 어쩔 수 없이 퇴위를 선언했다. 4월 14일에 공화정이 선포되고 신정부가 수립되었다. 이것이 4월 혁명이다. 수상에는 사모라, 그 밖의 중요한 직책을 부르주아 중간파 정당(진보당, 급진당) 출신들이 차지했다. 이 내각에 좌익 공화주의 마누엘 아사냐, 사회당의 라르고 카바예로도 입각했다.

트로츠키는 이러한 정세 전개에 근거하여 이 정권이 민주주의혁명의 과제를 달성할 수 없으며, 따라서 공산주의자가 민주주의 구호를 내걸고 싸우는 것의 중요성을 주장했다. 특히 국회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공산당이 적극적으로 국회선거에 참여하여 국회를 혁명 발전의 수단으로 삼을 것을 호소했다. 또 트로츠키는 혁명의 템포 문제에 대해서 상당한 양을 할애하고 있다. 트로츠키는 스페인혁명의 발전 템포가 러시아혁명보다 훨씬 완만하다는 것, 따라서 지금은 소수파인 공산당도 올바른 정책만 있으면 결전을 치르기에 충분한 조직적⦁정치적 준비를 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스페인 사태에 직면한 코민테른 지도부

스페인혁명은 성장하고 있다. 투쟁의 과정에서 그 내적인 힘도 커지 고 있다. 그러나 이와 함께 위험도 커지고 있다. 지배계급과 그 정치적 종복인 공화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로부터 유래하는 위험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점에서 공공연한 적들과 이들에 대한 임무의 문제는 아주 명백하다. 그러나 내적 인 위험도 존재한다.

스페인 노동자는 10월 혁명으로 탄생한 소비에트 연방을 확신을 가지고 바라본다. 이런 분위기는 공산주의를 위한 귀중한 자본이다. 소비에트 연방의 방어는 모든 혁명적 노동자의 의무이다. 그러나 10월혁명에 대한 노동자의 신뢰가 10월 혁명의 교훈과 유산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정책을 이들에게 강요하기 위해 악용되는 것을 허락해서는 안 된다.

분명히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스페인과 전 세계의 노동자계급 전위가 들을 수 있도록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현재의 코민테른 지도부는 직접적인 위험으로 스페인의 노동자혁명을 위협한다. 어떠한 혁명도, 심지어 가장 전도유망한 혁명조차도 붕괴될 수 있다 : 이것은 1923년 독일혁명의 경험, 더 한층 뚜렷하게는 1925-27년 중국혁명의 경험에 의해서도 입증되었다. 이 두 경우, 혁명 붕괴의 직접적 원인은 잘못된 지도부에 있었다. 스페인이 다음 차례 이다. 코민테른의 지도자들은 자신의 오류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 과거의 오류를 은폐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더 심하게 그것들을 옹호하고, 화려하게 꾸미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에게 좌우된다면, 스페인혁명은 중국혁명과 같은 운명을 걷게 될 것이다.

2년 동안, 선진 노동자는 코민테른을 약화시키고 혼란에 빠뜨린 비참한 '제3기' 이론에 홀려왔다. 결국 코민테른 지도부는 퇴각을 알렸다. 그러나 언제? 세계적 위기가 정세의 급격한 전환을 일으키고, 혁명적 공세를 위한 첫 전제조건을 만들어낸 바로 그때이다. 그 사이에 스페인의 내적 발전은 코민테른의 주목을 받지 못한 채 일어났다. 마누일스키는 계속해서一그리고 마누일스키는 지금도 코민테른의 지도자로 행동한다!一스페인 사태는 대체로 주목할 가치가 없다고 선언했다.

(1931년) 4월 혁명 이전에 작성된 스페인혁명에 대한 초고[<반대파 회보> 제19호에 게재된 논문 「스페인혁명」을 말한다.]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취지를 밝혔다. 즉, 다양한 색조의 공화주의와 협력하고 있는 자본가계급은 전력을 다해,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왕정과의 동맹을 지키려고 할 것이다. '물론 유산계급이 자신을 구하기 위해서(예를 들어, 독일!) 왕정을 희생시키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의 조합이 일어날 수도 있다.' 이런 방침은 스탈린주의자에게 一 물론 사태 이후에 一 부정확한 예측에 대해 말할 구실을 제공했다.[저자 : 이 일에서 미국의 스탈린주의자들은 다른 모든 이들을 능가한다. 이 일을 위해 고용된 방자한 관료들의 천박함과 어리석함이야말로 헤라클레스의 두 기둥 같은 느낌 이 든다.] 스스로는 아무것도 예측하지 못하는 인간이 타인에게 마르크스주의적 예측이 아니라 사건이 일어날 일시와 형태에 대한 점술적(theosophic) 예측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무지하고. 미신에 사로잡힌 환자가 의학적 기적을 요구하는 것과 같다. 마르크스주의적 예측의 임무는 발전의 일반적 방향성에 맞게 생각을 바꾸고, '뜻밖의 일'에 대해 사전에 준비하도록 돕는 것이다.

스페인 자본가계급이 왕정을 포기하기로 결심했다는 사실은 같은 정도로 두 가지 중요한 이유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 대중적 분노의 격렬한 분출은 자본가계급으로 하여금 대체로 국민의 빈축을 산 알폰소를 희생양으로 삼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자본가계급이 중대한 위험을 수반하는 이러한 책략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대중이 공화주의자와 사회주의자를 신뢰했기 때문에, 그리고 4월 혁명 중에는 공산주의자의 위험을 무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페인에서 일어난 역사적 변형은 한편으로 대중적 압력의 기세와, 다른 한편으로 코민테른의 허약성에 따른 결과이다. 우선, 이런 사실을 시인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더 강해지고 싶다면, 자신의 힘에 대한 과대평가로부터 시작해서는 안 된다一이것이 전술의 기본적 규칙이다. 그러나 이 규칙 이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에게는 없다.

사태 직전에 마누일스키는 대체로 중대한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했었다. 그런데 혁명 다음날에 라틴계 국가들에 대한잘못 된 정보의 제공자로 비길 데 없는페리[가브리엘 페리(Gabriel Peri, 1902-1941) : 프랑스공산당 기관지〈위마니떼〉의 해외 편집부원. 그는 스페인 사태를 보도하는 글을 기고했지만, 그 내용이 거짓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스페인 독자들의 반감을 샀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나찌에 총살되었다.]는 스페인 노동자계급이 거의 만장일치로 공산당을 지지하고 있으며, 스페인 농민이 소비에트를 창설하고 있다는 전보를 잇달아 모스크바에 보내기 시작했다.〈프라우다〉지는 '트로츠키주의자'가 사모라 정부의 추종자라는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보태면서 이런 허튼소리를 게재했다. 동시에 사모라 정부가 좌익반대파를 투옥했으며, 지금도 계속 투옥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마침내, 5월 14일에 〈프라우다〉지는 '불타오르는 스페인'(Spain in Flames)이라는 강령적 사설을 게재했다. 이 사설은 스페인혁명의 말로 번역된 스탈린주의자의 두서없음과 오류의 정수(精髓)이다.

 

국회 (코르테스)를 어떻게 할 것인가

〈프라우다〉지는 추상적인 선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반박할 수 없는 진리를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으려고 한다: '공산당은 대중에게 지금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점에 대해서 〈프라우다〉지 자신이 제안하는 것은 무엇인가? '반동세력의 무장해제, 노동자계급의 무장, 공장위원회의 선거, 7시간 노동제의 실현 등을 위해서' 노동자를 조직하는 것. '등'―이것이 정말 말하려는 것이다. 위에 열거 된 구호는 어떠한 내적인 통일성도 나타나지 않고, 대중의 발전이라는 필연성에서 나오는 당연한 결론이 없더라도 논의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어이없는 것은 〈프라우다〉지의 사설이 국회 선거를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마치 이 정치적 사건이 스페인 국민의 생활에 존재 하지도 않는 것처럼, 또는 노동자가 그것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처럼 말이다. 이 침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외면적 양상을 볼 때, 공화혁명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지방자치체 선거를 매개로 일어났다. 물론 이 공화혁명에는 좀 더 깊은 원인이 깔려있으며, 우리는 이것과 관련하여 훨씬 전에 베렌게르 내각의 붕괴에 대해 말했다. 그러나 '의회주의적' 방식에 의한 왕정 타도는 오로지 부르주아 공화주의자와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의 이익이 되었다. 스페인의 매우 많은 노동자는 이제 사회생활의 기본적 문제가 투표로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 런 환상은 경험을 통해서만 일소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경험을 도울 방법을 알아야 한다. 어떻게 도울 것인가? 국회를 무시하는 것을 통해서인가, 아니면 거꾸로 선거에 참여하는 것을 통해서 인가? 이 물음에 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위에서 언급한 사설 외에도 〈프라우다〉지는 스페인혁명의 내재적 힘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과 그 전략의 볼셰비키적 결정을 주장하는 '이론적' 기사를 싣고 있다(〈프라우다〉 5월 7일자와 10일자). 이 기사도 국회에 대해서, 선거를 보이콧할 것인가 참여할 것인가에 대해서 말 한마디 하지 않는다.〈프라우다〉지는 이 혁명을 민주주의혁명이라고 부르지만, 대체로 정치적 민주주의의 구호와 과제에 대해서는 일절 침묵을 지키고 있다. 이 침묵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이들은 선거에 참여할 수도 있고, 보이콧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무시할 수는 없다.

베렌게르의 국회에 대한 보이콧 전술은 전적으로 옳았다. 알폰소가 일정 기간 동안 다시 군사독재적 방법에 의지하는데 성공할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운동이 베렌게르를 그의 국회와 함께 전복시킬 것인지는 사전에 분명했다. 이러한 상황 아래에서 공산주의자는 국회 보이콧 투쟁의 주도권을 잡아야 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마음대로 쓸 수 있던 얼마 안 되는 수단에 의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저자 주: 좌익반대파는 일간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 일간지 기사의 내용을 이루는 생각을 우리는 개인적 편지에서 전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의 부록으로 우리는 편년체로 이러한 편지-기사를 발췌해 싣는다.] 스페인 공산주의자가 보이콧을 단호하게, 그리고 제때에 표명했다면, 심지어 이에 관한 간결한 전단을 돌리기만 했더라도, 베렌게르 정부가 전복 되었을 때 공산주의자의 권위는 훨씬 더 커졌을 것이다. 선진 노동자는 '이 사람들은 사태를 예견하는 능력이 있다'고 혼잣말했을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코민테른 지도부에 따돌림 당한 스페인 공산주의자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선거에 참여할 준비를 했다. 게다가 어떠한 확신도 없었다. 사태는 공산주의자의 생각을 뛰어 넘었으며, 따라서 혁명의 첫 승리는 공산주의자의 영향력 증대를 거의 가져오지 않았다.

이제는 사모라 정부가 제헌의회를 소집하겠다고 약속하고 있다. 이 의회의 소집이 제2 혁명에 의해 방해받을 것이라고 생각할 근거가 있는가? 조금의 근거도 없다. 대중의 강력한 운동은 얼P}든지 가능하지만 강령도 당도 지도부도 없는 이 운동은 제2 혁명을 불러일으킬 수 없다. 지금 보이콧을 요구하는 것은 자기고립을 재촉하는 것이다. 지금은 가장 적극적으로 선거에 참가해야 한다.

 

개량주의자의 의회주의적 백치 병과 무정부주의자의 반(反)의회주의적 백치병

의회주의적 백치병은 역겨운 병이지만, 반(反)의회주의적 백치병도 더 나을 것은 없다. 이것은 스페인의 무정부적 조합주의의 운명에서 가장 뚜렷하게 확인된다. 혁명은 곧바로 정치적 문제를 제기하고, 현 단계에서 이것들에 의회주의적 형태를 부여한다. 노동자계급의 주의력이 국회에 집중될 수밖에 없다면, 무정부적 조합주의자도 남몰래 사회주의자나 어쩌면 공화주의자에 투표할 것이다.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 스페인에서는 무정부주의자의 반(反)의회주의적 형이상학과 동시에 투쟁하지 않고 의회주의적 환상과 투쟁할 수 없다.

우리는 일련의 기사나 편지에서 스페인혁명의 향후 발전에서 민주주의 요구가 얼마나 거대한 의의를 가지고 있는지를 설명했다. 실업자 구제, 1일 7시간 노동, 토지개혁, 민족자치一중대하고, 기본적인 이런 문제는 모두一무정부적 조합주의자를 포함해서一대다수 스페인 노동자의 의식 속에서 어떤 식으로든 장래의 국회와 결합되어 있다. 베렌게르 시대에는 혁명적 제헌의회를 위해 알폰소가 동의한 국회를 보이콧해야 했다. 처음부터 선거권 문제는 선동에서 제일 먼저 제기되어야 했다. 그렇다, 선거권이라는 평범한 문제가 말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소비에트 민주주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보다 훨씬 더 수준이 높다. 그러나 소비에트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는다. 소비에트 수립을 임무로 삼아야 한다.

예를 들면, 18세 이상 모든 남녀의 보통·평등·직접·비밀선거 구호를 거들떠보지도 않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있다. 그러나 만약 스페인 공산주의자가 이 구호를 제때에 제기하고, 연설, 기사, 팸플릿, 전단 등에서 이를 옹호했다면, 거대한 명성을 얻었을 것이다. 바로 스페인 인민이 국회의 창조적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고, 자각한 노동자나 혁명적 농민이 모두 선거 참여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순간도 대중의 환상을 공유하지 않고, 이 환상 안에 있는 진보적인 것은 모두 최대한 이용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혁명가가 아니라 한심한 현학자 일 것이다. 그런데 선거 연령을 낮추는 것만으로도 수많은 남녀 노동자, 농민 모두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어느 쪽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 젊고 능동적인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이 제2 혁명을 일으킬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 젊은 세대를 나이든 노동자에게 의지하려는 사회주의자에 대립시키는 것은 공산주의 전위의 거의 초보적이고 논의의 여지가 없는 임무이다.

게다가 사모라 정부는 국회 에서 양원제를 규정한 헌법을 통과시키려 하고 있다. 아주 막연하게 평등과 정의를 추구하고 있더라도 왕정을 이제 막 전복하고, 열정으로 충만한 혁명적 대중은 인민의 등에 '상원'을 슬그머니 앉히려는 자본가계급의 계획에 반대하는 공산주의자의 선동에 열렬히 호응할 것이다. 이런 대단찮은 문제도 선동에서 거대한 역할을 하고, 사회주의자들에게 막대한 어려움을 주고, 사회주의자와 공화주의자 사이를 이간시키고, 즉 노동자계급의 적을 한동안이라도 분열시키고一이것이 천배는 더 중요한 일이다一노동자대중과 사회주의자 사이를 이간시킬 수 있는 것이다.

〈프라우다〉지가 제기한 1일 7시간 노동 요구는 완전히 올바르고, 대단히 중요하며, 시의적절한 것이다. 그러나 정치상황이나 민주주의혁명의 과제를 무시하면서 이 요구를 적나라하게 제기할 수 있는가? 〈프라우다〉지는 단지 1일 7시간 노동, 공장위원회, 노동자의 무장이라는 말만을 통해, '정치' 무시를 통해, 그리고 모든 기사에서 국회 선거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 것을 통해 무정부적 조합주의에 전면적으로 동의하고, 이들을 육성하며, 그 실수를 감싸주고 있다. 한편, 사회주의자와 공화주의자에 의해 선거권을 빼앗긴 청년 노동자一부르주아 입법이 자본주의적 착취를 위해서 이들을 충분히 발전시키고, 하원을 짐 지우려고 하는一는 내일, 이러한 기만에 반대하는 투쟁에서 무정부주의에 등을 돌리고 소총을 집으려고 할 것이다. 대중의 핵심을 끌어당기는 현실의 정치적 과정에 대해 노동자의 무장이라는 구호를 대치시키는 것은 스스로를 대중으로부터 고립시키고, 따라서 대중을 무기와 분리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민족자결이라는 구호는 현재 스페인에서 예외적인 중요성을 띠고 있다. 그러나 이 구호도 민주주의 단계에 나타난다. 물론 우리는 카탈로니아인이나 바스크인에게 스페인으로부터 분리할 것을 요구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 다만, 그들 스스로가 원한다면 그럴 수 있다는 권리를 주장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그러나 그들이 바라고 있는지 어떤지는 어떻게 정해져야 하는가? 매우 간단하다. 해당 지역의 평등·직접·비밀·보통선거를 통해서 정하면 된다. 현재 그 이외의 방법은 없다. 앞으로 다른 모든 문제뿐만 아니라 민족문제도 노동계급독재 기관인 소비에트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원하는 순간에 노동자에게 소비에트를 강요할 수 없다. 우리는 오직 노동자를 소비에트로 이끌 수 있을 뿐이다. 하물며, 노동자계급이 미래에나 창설할 소비에트를 인민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 그동안에 현재의 문제에 답해야 한다. 5월, 카탈로니아의 지방자치 기관은 주(州)임시헌법을 준비하기 위한 대표 선출을 요청 받았다. 이 임시헌법은 카탈로니아와 스페인 전체의 관계를 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여느 때처럼 대자본에 예속되어 있는 소부르주아 민주주의가 비(非)민주적 선거로 카탈로니아 인민의 운명을 결정하려고 하는데 카탈로니아의 노동자가 무관심할 수 있는가? 민족자결 구호는 이것을 보완 하고 구체화하는 정치적 민주주의 구호 없이는 무의미한 정식에 불과하다. 아니 더 나쁘게는 사람들의 눈을 속이는 기만이다.

 

일정 기간 동안 스페인혁명의 모든 문제는 어떤 식으로든 의회주의라는 프리즘을 통해 굴절될 것이다. 농민은 애를 끓이며 농업문제에 대해 국회가 뭐라 할 것인지를 기다릴 것이다. 현재의 상황에서 공산주의자의 농업강령이 국회 토론장에서 발표되는 것이 의의 있는 일임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농업강령을 갖는 것과 국회 토론장에 접근할 수 있는 두 가지 조건을 필요로 한다. 국회가 토지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우리는 알고 있다. 토지문제는 농민대중 스스로의 전투적 주도권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대중이 이러한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는 강령과 지도부가 필요하다. 공산주의자는 대중과 관계를 맺는 하나의 고리로 국회 토론장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관계에서 발전할 행동은 국회를 보이지도 않게 할 것이다. 바로 여기에 의회에 대한 혁명적-변증법적 관계의 진수가 있다.

그런데도 이 문제에 대해 코민테른 지도부가 침묵하고 있다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그 이유는 단지 지도부가 자기 과거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스탈린주의자는 중국의 제헌의회 구호를 너무 소란스럽게 배격했다. 코민테른 제6차 대회는 식민지 국가들의 정치적 민주주의 구호를 '기회주의'라고 공식 비난했다. 중국이나 인도보다 훨씬 더 선진국인 스페인의 사례는 제6차 대회 결정의 모든 모순을 폭로한다. 그러나 스탈린주의자는 손발이 묶여 있다. 의회주의에 대한 보이콧을 감히 촉구하지도 못하는 이들은 그저 말없이 이를 무시할 뿐이다. 혁명은 죽게 두더라도 지도자의 무오류성에 대한 평판만은 영원히 합시다![저자주 : 이탈리아의 '프로메테오' 그룹(보르디가주의자들, Prometeo)은 대체로 모든 나라, 모든 인민을 위한 혁명적 민주주의 구호를 거부한다. 사실상 스탈린주의자의 입장과 일치'하는 이 종파적 교조주의는 볼셰비키-레닌주의자의 입장과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 국제좌익반대파는 이러한 초좌익적 소아병에 대한 책임을 털끝만큼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스페인의 최근 경험은 이탈리아에서 정치적 민주주의 구호가 파시스트 독재체제의 붕괴 과정에서 틀림없이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할 것 이라는 점을 정확히 중명하고 있다. '프로메테오' 그룹의 강령을 가지고 이탈리아나 스페인혁명에 참가하는 것은 양손을 뒤로 묶고 물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렇게 헤엄치는 사람은 늘 익사할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다.]

 

스페인의 전도에는 어떤 혁명이 놓여 있는가?

특히 머리를 혼란시키기 위해서 쓴 것 같은, 위에서 인용한 이론적 기사에서 〈프라우다〉지는

스페인혁명의 계급적 성격을 규정하려고 시도한 다음, 정말로 이렇게 말하고 있다 :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을 고려한다면(!), 현 단계에서 스페인혁명을 사회주의혁명으로 규정하려는 것은 잘못이다'(〈프라우다〉1931년 5월 10일자). 이 문장이 유일하게 분석을 개괄하고 있다. 정신병원에 갇힐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서 스페인혁명이 '현 단계에서' 사회주의혁명으로 규정될 수 있다고 감히 생각할 사람이 이 세상에 있는지 독자가 자문해봐야 하는가? 그렇다면 〈프라우다〉지는 어떤 점에서 이런 '구분'을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는가? 게다가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을 고려한다면, … 잘못이다"라는 너그럽고 조심스런 형태로 이해하게 되었는가?

이것은 불행하게도 스탈린주의자들이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사회주의혁명으로의 '성장 전화'라는 레닌의 말을 읽어 알고 있다는 사실로 설명된다. 레닌을 이해하지 않고, 러시아혁명의 경험을 잊거나 왜곡하고 있는 이들은 이 '성장 전화'라는 개념을 가장 철저한 기회주의적 미로의 근거로 삼는다. 이것은一솔직하게 말하자一아카데믹한 세밀한 구분의 문제가 아니라 노동자혁명의 생사가 걸린 문제이다.

아주 최근에서야 스탈린주의자들은 국민당의 독재가 노동자 농민의 독재로 '성장 전화'하고, 이것이 노동자계급의 사회주의 독재로 성장 전화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와 관련하여 이들은 一특히 스탈린은 이 주제를 깊이 있게 전개했다一혁명의 한 측면에서는 '우익분자'가 점차 분리되고 동시에, 다른 측면에서는 '좌익분자'가 더 강해질 것이라고 생각 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성장 전화'의 유기적 과정을 이룬다고 생각했다. 유감스럽게도 스탈린-마르티노프의 비할 데 없는 이론은 마르크스의 계급이론과 완전히 정반대다.

사회체제의 성격, 따라서 모든 혁명의 성격도 권력을 수중에 쥐고 있는 계급의 성격에 의해 좌우된다. 어느 계급으로부터 다른 계급으로의 권력의 이동은 혁명적 전복을 통해서만 일어날 수 있는 것이지, 결코 유기적인 '성장 전화'를 통해 일어나지 않는다. 이 기본적 진리는 스탈린주의자들에 의해 처음에는 중국에서, 지금은 스페인에서 유린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베레모로 자신의 머리를 가린 〈프라우다〉지의 박학다식한 천재들이 사모라의 혀 밑에 체온계를 두고 논쟁하는 모습을 본다: '성장 전화'의 과정이 스페인혁명을 벌써 사회주의 단계로 이행시켰다고 인정할 수 있는가 없는가? 그리고 이 현자들은一이들의 지혜를 공평하게 평가하자一결론에 이른다: 아니다, 아직까지는 인정할 수 없다.

〈프라우다〉지는 이런 귀중한 사회학적 개론을 제시하고 나서, 예측과 지도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스페인에서 사회주의혁명은 오늘의 당면한 임무가 될 수 없다. 가장 당면한 임무(!)는 지주와 자본가계급에 반대하는 노동자 농민혁명이다'(〈프라우다〉5월 10일자). 사회주의혁명이 스페인에서 '오늘의 당면한 임무'가 아니라는 것은 논의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에 의한 권력 장악을 목적으로 하는 무장봉기는 스페인에서 '오늘의 당면한 임무'가 아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더 낫고, 더 정확할 것이다. 왜 그런가? 바로 계급이 아직 분산된 노동자계급 전위를 뒤 따르지 않고 있으며, 농촌의 피억압 대중이 아직 계급을 뒤따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권력 획득을 위한 투쟁은 모험주의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정에서 '가장 당면한 임무는 지주와 자본가계급에 반대하는 노동자 농민혁명이다‘라는 보완적 문장의 의미는 무엇인가? 즉, 현재의 부르주아 공화주의 체제와 노동계급독재 사이에 '노동자 농민혁명'이라는 독특한 중간적 혁명이 불쑥 우리 앞에 나타난다는 것인가? 게다가 사회주의혁명과 구별되는 이 독특한 중간적 '노동자 농민혁명'이 스페인에서 '당면한 임무'라는 것인가? 새로운 전복을 오늘의 의제로 잡아야 한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무장봉기에 의해서인가, 아니면 다른 수단에 의해서인가? '지주와 자본가계급에 반대하는' 노동자 농민혁명은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노동자혁명과 구별되는가? 계급 세력의 어떠한 조합이 그 토대를 이룰 것인가? 제2 혁명과 대조를 이루어 제1 혁명을 어느 당이 지도할 것인가? 이 두 혁명의 강령과 방법은 어떤 점에서 차이가 있는가?

이러한 의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는 것은 헛수고일 것이다. '성장 전화'라는 말로 사상의 흐릿함과 혼란이 은폐되어 있다. 모든 모순을 은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람들은 부르주아혁명이 일련의 유기적 단계를 통해서 사회주의혁명으로 진화하는 과정을 꿈꾼다. 그리고 이 단계는 국민당, '민주주의독재', '노동자농민혁명', '인민혁명' 등 여러 가지 익명으로 위장되어 있다. 게다가 이 과정 중에서 결정적인 계기, 즉 어느 계급이 다른 계급으로부터 권력을 빼앗는다는 계기가 어느 사이에 사라져버린다.

 

연속혁명의 문제

물론 노동자혁명은 동시에 농민혁명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대의 조건에서 노동자혁명 없는 농민혁명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10 월혁명 이후 러시아의 노동자 독재정부를 '노동자 농민정부'라고 부른 것처럼, 우리의 목적이 노동자 농민공화국을 건설하는 것이라고 농민에게 말하는 것은 완전히 올바르다. 그러나 우리는 노동자 농민혁명을 노동자혁명 에 대치시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양자를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문제를 제기하는 유일하게 올바른 방식 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이른바 '연속혁명'이라는 문제의 핵심을 다루게 된다. 스탈린주의자들은 이 이론에 대한 투쟁에서 계급적 관점과 완전 결별하기에 이르렀다. 중국의 '4계급 블록'을 경험하고 나서 이들이 좀 더 신중해졌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로 인해 이들의 혼란은 더 심해졌을 뿐이며, 지금은 전력을 다해 다른 사람을 혼란시키고 있다.

그렇지만 다행스럽게도 현실의 제반사태가'지금 옛 문헌에 대한 철학적 설명을 전문으로 하는 '적색 교수들'의 영역에서 문제를 들어 내리고 있다. 더 이상 역사적 회상이나 인용문을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 눈앞에서 전개되고 있는 새로운, 장대한 역사적 경험의 문제이다. 여기에서는 두 가지 입장이 혁명투쟁의 전장에서 맞부딪치고 있다. 현실의 사태가 최종 결정할 것이다. 이로부터 빠져나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스페인 공산주의자는 '트로츠키주의'에 대한 투쟁과 결합된 문제의 본질을 제때에 고찰하지 않으면, 이론적으로 무장해제된 상태에서 스페인혁명의 기본적 문제들에 맞서게 될 것이다.

 

혁명의 '성장 전화'란 무엇인가?

분명히 레닌은 1905년에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부르주아 민주주의독재'라는 가설적 정식을 제기했다. 이제까지 노동자계급에 의한 권력 장악 이전에 독자적인 민주주의적 농업혁명을 기대할 수도 있는 나라가 있었다면, 그 나라는 바로 러시아였다. 이 나라에서는 농업문제가 국민의 전체 생활을 지배했으며, 농민의 혁명적 운동이 몇 십 년 동안 계속되었으며, 위대한 전통과 대중에 대한 폭넓은 영향력을 가진 독자적인 혁명적 농민정당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러시아에서조차 부르주아혁명과 노동자혁명 사이에 중간적 혁명이 일어날 여지가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1917년 4월, 레닌은 여전히 1905년의 낡은 볼셰비키 정식에 매달려 있던 스탈린, 카메네프 등을 향해 여러 차례 이렇게 반복했다 : 밀류코프-체레텔리-체르노프

의 독재 외에 '민주주의독재'는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할 수도 없다. 민주주의독재는 본질적으로 노동자계급에 대한 자본가계급의 독재이다. 이러한 '민주주의독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노동자계급의 독재뿐 이다. 중간적, 중용적 정식을 꾸며내는 사람은 모두 가엾은 환상가이거나 허풍선이다. 이것이 2월 혁명과 10월 혁명의 생생한 경험으로부터 레닌이 도출한 결론이다. 우리는 이런 경험과 결론에 전적으로 근거해 있다.

그렇지만 이런 조건에서 레닌의 민주주의 혁명의 사회주의혁명으로의 '성장 전화'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스탈린주의자나 적색 교수 같은 수다쟁이들이 상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실제로 노동계급독재는 사회주의혁명의 개념과 결코 기계적으로 일치하지 않는다. 노동자계급에 의한 권력 장악은 일정한 국가적 환경 속에서, 일정한 시기에, 그리고 일정한 임무를 해결하기 위해서 일어난다. 후진국에서 이러한 당면한 임무는 민주주의적 성격을 갖는다. 즉, 중국에서처럼, 제국주의적 예속으로부터의 민족해방과 토지혁명, 또는 러시아에서처럼, 토지혁명과 피억압 민족들의 해방이다. 조합은 다르지만 현재의 스페인도 같은 사정임을 알 수 있다. 레닌은 실제로 러시아의 노동자계급은 1917년 10월에 주로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의 집행자로서 정권을 잡았다고 말했다. 승리한 노동자계급은 우선 민주주의적 과제의 해결에 착수했으며, 지배의 논리에 따라 점진적으로만 사회주의적 과제를 처리했다. 노동자계급은 권력을 장 악한지 12년 만에 농업의 집단화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이것이 바로 레닌이 말한 민주주의혁명의 사회주의혁명으로의 성장 전화인 것이다.

부르주아권력이 노동자 농민권력으로 성장 전화한 다음에 노동자권력으로 성장 전화하는 것이 아니다. 절대 그렇지 않다, 어느 계급의 권력이 다른 계급의 권력에서 '성장 전화'하는 것이 아니라, 총을 들고 빼앗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이 권력을 장악한 뒤에 노동자체제의 민주주의적 과제는 필연적으로 사회주의적 과제로 성장 전화한다. 민주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진화적이고 유기적인 이행은 노동계급독재 아래에서만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이 레닌의 중심사상이다. 스탈린주의자들은 이 모든 것을 손상시키고, 혼란시키고, 왜곡시켰다. 지금 이들의 날조로 국제 노동자계급의 의식이 타락하고 있다.

 

두 가지 변종―기회주의와 모험주의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一반복하자一아카데믹한 세밀한 구분이 아니라 노동자계급 혁명전략의 생사가 걸린 문제이다. 현재 스페인에서 '노동자 농민혁명'이 일정에 올라 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새로운 혁명, 즉 즉각적인 권력투쟁이 현재 스페인에서 일반적 일정에 올라 있다 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 현재 일정에 올라 있는 문제는 대중을 공화주의자의 환상과 사회주의자에 대한 신뢰로부터 해방시키고, 이들의 혁명적 결집을 위해서 투쟁하는 것이다. 제2 혁명은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이는 빈농이 뒤따르는 노동자계급의 혁명이 될 것이다. 부르주아 체제와 노동계급독재 사이에는 어떤 독특한 '노동자 농민혁명'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이러한 혁명을 기대하고, 여기에 정책을 순응시키는 것은 노동자계급에게 국민당을 억지로 떠맡기는 것, 따라서 혁명을 파멸시키는 것이다.

〈프라우다〉지의 정신착란적 정식화는 이미 중국에서 끝까지 추구된 두 가지 길, 즉 기회주의의 길과 모험주의의 길을 다시 열고 있다. 현재 〈프라우다〉지는 아직 스페인혁명을 감히 노동자농민혁명으로 '규정'하지는 않지만, 내일 사모라-장개석이 충실한 왕정위[왕정위 (Wang Ching-wei, 1884-1944) : 본명은 왕조명. 중국국민당 좌파 지도자. 무한정부의 수반. 코민테른은 장개석의 1927년 4월 쿠데타 이후, 무한정부를 지지했으나 왕정위는 이 쿠데타로 부터 불과 6주 뒤에 노동자 탄압을 개시했다. 1940년, 일본의 괴뢰정권을 난징에 수립하고 그 주석 이 되었다.]로 대체된다면, 즉 좌파인 레로욱스[알레한드로 레로욱스 가르시아(Alejandro Lerroux Garcia, 1864-1949): 스페인급진당의 지도자. 1933~36년까지 수상]로 대체된다면, 그러한 사태에 직면하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알 것인가. 그때에 현명한 분석가들一마르티노프, 쿠시넨과 그 패거리들一은 이것이 노동자 농민공화국이고, '조건부로 지자해야 한다(1917년 3월의 스탈린의 정식)거나, '전면적으로 지지"해야 한다(1925-27년에 국민당에 대한 스탈린의 같은 정식)고 결정하지 않을 것인가?

그러나 오늘 어쩌면 중도주의자의 분위기에 더 적합한 모험주의적 가능성도 존재한다.〈프라우다〉지의 사설은 스페인대중은 '정부에도 반항하기 시작하고 있다'는 사실에 관해서 말한다. 그러나 스페인공산당은 이 정부의 타도 구호를 오늘의 임무로 제기할 수 있는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프라우다〉지는 그 박식한 기사에서 당면한 임무는 노동자농민혁명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단계'를 '성장 전화'의 의미에서가 아니라 권력 타도의 의미로 이해한다면, 모험주의적 변종은 완전히 분명해질 것이다. 허약한 공산당이 1927년 12월 광동에서 스스로에게 말한 것처럼(또는 이렇게 말하도록 명령받은 것처럼), 마드리드에서도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 '물론 우리는 아직 노동자독재가 준비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실제로 중간적 단계, 즉 노동자농민독재의 문제라면 우리의 힘이 허약한 단계라도 봉기를 시도해보자. 어쩌면 뭔가 나올 것이다.' 실제로 스페인혁명 1년 동안 경시된 범죄행위가 밝혀진 뒤에, 시간 낭비의 책임을 져야할 자들은 자신의 대리인을 아홉 가닥 채찍으로 매질을 하기 시작할 것이고, 이들을 광동형의 비극적 모험으로 이끌 수도 있다는 것을 예측하기는 어렵지 않다.

 

'7월시기'의 전망

이 위험은 얼마나 현실적인 것인가? 대단히 현실적이다. 이 위험은 혁명 자체의 내적인 조건에 원인이 있는 것으로, 지도자의 태만과 혼란에 불길한 성격을 더한다. 스페인의 현 상황에는 1917년 페테르부르크에서 일어난 전투와 어느 정도 일치하는 새로운 대중적 폭발이 일어날 가능성이 내재되어 있다. 역사에서, 일치시기'로 통하는 이 전투가 혁명의 붕괴로 끝나지 않았던 것은 전적으로 볼셰비키당 정책의 올바름 덕분이다. 스페인에게 화급을 요하는 이 문제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프랑스대혁명으로부터 시작하여 과거의 모든 혁명에서도 ‘7월 시기' 의 원형을 발견할 수 있다. 그 결과는 다양하지만 보통은 부정적이고, 대개는 파국적이다. 이런 단계는 부르주아혁명의 메커니즘 안에 내재되어 있다. 왜냐하면 혁명의 성공을 위해서 대부분의 희생을 치르고, 혁명에 가장 큰 기대를 건 계급이 혁명으로부터 얻는 것이 가장 적기 때문이다.

이 과정의 규칙성은 아주 분명하다. 혁명을 통해 정권을 잡은 유산계급은 이것으로 혁명은 그 사명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며, 따라서 무엇보다도 반동세력에 대해서 자신의 온건함을 증명하는데 관심을 기울인다. '혁명적' 자본가계급은 타도된 계급의 호의를 얻으려는 조 치 때문에 대중의 분노를 산다. 대중의 환멸은 그 전위의 혁명투쟁의 열기가 채 식기도 전에 매우 빠르게 일어난다. 운동의 선진부위에게는 새로운 공격에 의해 지난번에 충분히 단호하게 수행하지 못했던 것을 해치우거나 바로잡을 수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이것으로부터 준비도 없이, 강령도 없이, 예비대에 대한고려도 없이, 결과에 대한 염려도 없이 새로운 혁명에 대한 충동이 생기는 것이다. 이에 반해서 정권을 잡은 자본가 계급은 인민과의 관계 정리를 꾀하기 위해 이 아래로부터의 격렬한 봉기를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행동한다. 이것이 역사에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둔 반(反)혁명의 자극제가 된 보완적인 반(半)혁명의 사회적⦁심리적 기초이다.

1848년 6월에 일어난 프랑스의 '7월시기'는 1917년의 페테르부르크에서보다 훨씬 더 가공하고 비극적인 성격을 띠었다. 파리 노동자계급의 이른바 '6월시기'는 2월 혁명에서 생겨났다. 2월에 총을 들고 싸운 파리 노동자는 숭고한 강령과 비참한 현실 사이의 모순에 반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참기 어려운 현저한 차이는 이들의 위(胃)와 양심을 매일 공격했기 때문이다. 계획도, 강령도, 지도부도 없었던 1848년 6월시기는 노동자계급의 강력하고 억제할 수 없는 반사작용과 유사했다. 봉기한 노동자는 무자비하게 진압되었다. 그 결과, 민주주의자들은 보나파르트주의로 가는 길을 닦았다.

1870년 9월 혁명과 파리꼬뮌의 거대한 폭발과의 관계는 1848년 2월 혁명과 6월시기와의 관계와 같았다. 1871년 파리 노동자계급의 3월 봉가는 특히 전략적 예측의 요소가 거의 없었다. 상황의 비극적 조합에서 발생한 3월 봉기는 프랑스 자본가계급의 수많은 도발 가운데 하나에 의해 보완되었다. 프랑스 자본가계급은 두려움이 자신의 악의를 자극할 경우에는 그러한 도발에 남다른 재주를 보인다. 부르주아혁명의 속임수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반사적 항의는 파리꼬뒨에서 처음으로 노동자혁명의 수준으로까지 높아졌지만 결국 다시 주저앉았다.

현재, 스페인의 무혈, 평화, 명예혁명(이 일련의 형용사는 언제나 같다)은 바로 우리 눈앞에서 자신의 '6월시기'(프랑스 달력에 따르면 '6월시기', 러시아 달력에 따르면 '7월시기')를 준비하고 있다. 러시아어에서 번역된 것 같은 무의미한 글귀를 자주 남발하는 마드리드 정부는, 실업과 토지 부족에 대한 강력한 조치를 약속하지만, 사회적 병폐 가운데 어는 것 하나에도 손대려고 하지 않는다. 연립정부내의 사회주의자는 공화주의자가 혁명의 과제를 사보타지하는 것을 돕고 있다. 스페인에서 가장 공업화되고 가장 혁명적 지방인 카탈로니아의 우두머리는 피억압 민족과 피억압 계급이 없는 천년왕국을 설교하지만 이와 동시에, 실제로 가장 증오하는 과거의 속박을 일부라도 벗어던지려는 인민을 돕기 위해서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용기도 없다. 마시아[프란시스코 마시아 이 류사(Francisco Macia y Liusa, 1859-1933) : 군인이자 정치인. 바르셀로나의 하층 중간계급의 당인 카탈로니아 에스케라(좌익)당의 지도자. 1931~33년 카탈로니아 자치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었다.]는 마드리드 정부 뒤에 숨고, 다시 마드리드 정부는 제헌의회 뒤에 숨어 있다. 마치 삶이 이 의회를 기다리는 것인 양 말이다! 그리고 마치 장래의 국회가 주로 현 상태 (status quo)를 유지하는 것에 관심이 있는 공화주의자-사회주의자 블록의 확대 된 복제품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 사전에 드러나지 않는 것인 양 말이다!

노동자와 농민의 반란이 열병처럼 달아오르는 것을 예측하기가 어려운 일인가? 대중의 혁명적 발전과 새로운 지배계급의 정책 사이의 불일치一이것이 비타협적인 충돌의 원인이고, 이 충돌은 앞으로의 발전과 정에서 제1 혁명, 즉 4월 혁명을 장사지낼 것인지, 아니면 제2 혁명을 불러일으킬 것인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만약 볼셰비키당이 페테르부르크의 7월 운동을 '시기상조'라고 평가하고, 대중에게 등을 돌렸다면, 이 반件)봉기는 불가피하게 무정부주의자나 모험주의자, 대중의 반란을 우연히 표현하는 인물의 분산적이고 제 각각인 지도력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고, 따라서 어찌할 도리가 없는, 피 비린내 나는 경련으로 끝나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에 반해서, 운동의 선두에서 있는 당이 상황에 대한 전체적 평가를 포기하고, 결전을 치르도록 내버려두었다면, 봉기는 틀림없이 대담한 여지를 취했을 것이다. 노동자와 병사는 볼셰비키당의 지도 아래 7월에 페테르부르크에서 일시적으로 권력을 장악했을 것이다. 그러나 곧 이은 혁명의 궤멸을 준비하기 위해서만 그랬을 것이다. 볼셰비키당의 올바른 지도만이 두 가지 변종의 파멸적 위험―1848년 6월시기형의 위험과 1871년 파리꼬뮌형의 위험一을 피할 수 있게 했다. 1917년 7월에 대중과 당이 받은 타격은 매우 가혹했다. 그러나 결정적 타격은 아니었다. 몇 십 명의 희생자가 발생 했지만 몇 만 명은 아니었다. 노동자계급은 참수당하지도, 쇠약해지지도 않은 채 이 시련을 벗어났다. 노동자계급은 그 전투적 중핵을 거의 완전하게 유지했다. 이 중핵들은 많은 것을 배웠으며, 10월에 노동자계급을 승리로 이끌었다.

정확히 이 '7월시기'의 관점에서 볼 때, 스페인에서 일어날 것으로 생각되는 혁명이 '중간적‘, 중용적 혁명이라는 날조는 끔찍한 위험이다.

 

 

대중의 투쟁과 노동자 훈타

좌익 반대파의 의무는 부르주아혁명이나 노동자혁명과 구별되는 독특한 '노동자 농민혁명'이라는 정식의 정체를 가차 없이 폭로하고 웃음거리로 만들어 노동자 전위가 딱 부러지게 이를 믿지 않게 하는 것이다. 스페인의 공산주의자는 그것을 믿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환상이자 기만이다. 그것은 내일 여러분의 목을 멜 올가미로 바뀔 악마의 유혹이다. 스페인의 선진 노동자는 그것을 믿어서는 안 된다! 러시아혁명의 교훈과 스탈린주의자의 패배의 교훈을 살펴라.

여러분 앞에 노동계급독재를 위한 투쟁의 전망이 열려 있다. 이 임무를 이루기 위해서 여러분은 노동자계급을 중심으로 결집하고, 이 계급의 도움으로 수많은 빈농을 일어서게 해야 한다. 이것은 거대한 임무이다. 스페인 공산주의자 여러분은 거대한 혁명적 책임을 지고 있다. 자신의 약점에 눈감거나, 환상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혁명은 말을 믿지 않는다. 혁명은 모든 것을 검증하는데, 그것도 피의 검증을 한다. 자본가계급의 지배를 타도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노동계급독재뿐이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힘에 더 맞는, 더 '간단하고', 더 '경제적인' 어떤 '중간적' 혁명은 존재하지도 않고,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존재할 수도 없다. 역사는 여러분을 위해서 어떤 과도적 독재나 둘째 서열의 독재, 에누리 된 독재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이러한 독재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은 모두 여러분을 속이는 것이다. 여러분은 노동계급독재를 위해 진지하게, 완강하게, 끊임없이 준비해야한다!

그러나 스페인 공산주의자의 당면한 임무는 권력 획득 투쟁이 아니라 대중 획득 투쟁이다. 게다가 이 투쟁은 다가올 시기에 부르주아 공화국의 토대 위에서, 그리고 대체로 민주주의 구호 아래에서 전개될 것이다. 노동자 훈타(소비에트)의 창설은 오늘의 으뜸가는 임무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훈타를 민주주의 구호에 대립시키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짓이다. 교회의 특권이나 수도회·수도원의 전횡에 대한 투쟁一순수하게 민주주의적인 투쟁一은 5월에 대중적 폭발을 일으켰다. 이것은 노동자 대표 선출을 위한 절호의 조건을 창출 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기회를 놓쳐버렸다.

현 단계에서 훈타는 노동자 공동전선의 조직 형태이다一농민운동을 지원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파업, 예수회 추방, 국회선거 참여, 병사와의 관계 수립을 위해서다. 노동자계급의 기본적 중핵을 포괄하는 훈타를 통해서만 공산주의자는 노동자계급 내에서 자신의 헤게모니를 확보 할 수 있으며, 따라서 혁명의 헤게모니를 확보할 수가 있다. 노동자계급 사이에서 증대하는 공산주의자의 영향력 정도에 따라서만 훈타는 권력 획득을 위한 투쟁기관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다음 어느 단계에서一그것이 언제일지 아직은 모르지만一노동자계급의 권력기관이 된 훈타는 자본가계급의 민주주의적 제도와 충돌하게 될 것이다. 이때 비로소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조종이 울릴 것이다.

투쟁으로 끌릴 때마다 대중은 늘 당, 분파, 종파를 초월하여 공동행동을 위해 모든 노동자를 결집시킬 수 있는 권위 있는 조직의 필요성을 통감一그리고 통감하지 않을 수 없다一한다. 노동자에 의해 선출되는 훈타는 확실히 이러한 형태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적절한 기회에 대중에게 이 구호를 제기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기회는 지금 사사건건 생기고 있다. 그러나 노동계급독재 기관인 소비에트 구호를 현재의 실제 투쟁에 대립시킨다는 것은 소비에트 구호를 초역사적인 성체(聖 體), 초혁명적인 성상(聖像)으로 바꿔치우는 것을 의미한다. 개별적인 신자는 그러한 성상을 숭배할지 모르지만, 혁명적 대중은 결코 거기에 따르지 않을 것이다.

 

스페인혁명의 템포 문제

그러나 올바른 전술을 적용할 시간이 아직 남아 있는가? 너무 늦은 것은 아닌가? 모든 기회가 유실된 것은 아닌가?

전략의 기본적 노선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전술을 정하는 것 이라면, 혁명의 발전 템포를 정확하게 정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올바른 전술이 없으면, 뛰어난 전략도 파멸에 이를 수 있다. 물론 장기간에 걸친 템포를 미리 주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템포는 투쟁의 과정에서 매우 다양한 지표들을 이용하여 검토되어야 한다. 게다가 사태의 진행과정에서 템포가 매우 급격하게 바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경험을 하면서 필요한 교정을 가하기 위해 일정한 전망을 가시적으로 붙잡고 있어야 한다.

프랑스대혁명은 그 정점인 자코뱅 독재에 이르기까지 3년 이상 걸렸다. 러시아혁명은 8개월을 넘지 않고 볼셰비키 독재를 낳았다. 여기서 템포상의 거대한 차이가 확인된다. 만약 프랑스의 사태가 더 빠르게 진전 되었다면, 자코뱅당은 형태를 갖출 시간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혁명 직전에는 아직 당으로서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서, 자코뱅당이 혁 명 직전에 권력을 대표 했다면, 사태는 아마 좀 더 급속히 전개되었을 것이다. 이것이 템포를 결정하는 요인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다른 요인도 있으며, 아마 더 결정적일 것이다.

1917년 러시아혁명은 1905년 혁명을 앞세웠다. 레닌은 이를 (1917년 혁명의) 총 예행연습이라고 불렀다. 제2, 제3 혁명의 모든 요소가 미리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에 투쟁에 참가한 세력들은 마치 계획에 따른 것처럼 움직였다. 이것이 절정으로 치닫는 혁명의 상승기를 이례적으로 앞당겼던 것이다.

그러나 1917년 혁명의 템포와 관련한 결정적 요인은 전쟁이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 토지문제만으로 몇 개월, 어쩌면 1~2년을 끌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참호 속의 죽음이라는 문제가 더 이상의 지연을 허락하지 않았다. 병사들은 "내가 죽으면, 토지가 다 무슨 소용이냐?'고 말하고 있었다. 1,200만 병사대중의 압력이 혁명을 이례적으로 가속화시킨 요인이었다. 1905년의 '총 예행연습'과 볼셰비키당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없었다면, 혁명의 전(前)볼셰비키 시기는 8개월은커녕, 어쩌면 1~2년이나 그 이상 지속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일반적 고찰은 스페인에서 사태 발전의 가능한 템포를 정함에 있어서 확실한 의의가 있다. 스페인의 현재 세대는 혁명을 알지 못하고, 과거에 '총 예행연습'을 경험한 적도 없다. 공산당은 매우 허약한 상태로 사태에 뛰어들었다. 스페인이 벌이고 있는 전쟁은 없다. 스페인 농민은 막사나 참호에 몇 백만 명이 집결해 있지도 않고, 전멸당할 직접적인 위험에 노출되어 있지도 않다. 이 모든 상황은 우리로 하여금 사태의 더 완만한 발전을 예상하게 하며, 따라서 당이 권력 장악을 준비하는데 더 오랜 기간을 가질 수 있도록 허락한다..

그러나 반대 방향으로 끌어당기는 요인도 있으며, 혁명의 패배에 맞먹는 때 이른 결전 기도를 불러일으킬지도 모른다 : 당의 허약성이 운동에서 자생적 요소의 장점을 두드러지게 한다. 무정부적 조합주의의 전통은 같은 효과가 있다. 마지막으로 코민테른의 잘못된 상황 판단은 모험주의가 분출할 기회를 제공한다.

이런 역사적 유추에서 나오는 결론은 자명하다 : 스페인의 상황(가까운 과거에 혁명을 경험한 전통이 없고, 강력한 공산당이 없으며, 전쟁을 치르지도 않은)은 노동계급독재의 정상적 분만이 러시아에서보다 훨씬 더 오래 걸릴 것으로 판명됨에 따라 혁명의 유산 위험도 엄청나게 증대할 조건을 창출하고 있다.

잘못된 공식 정책의 결과인 스페인 공산주의의 허약성은 잘못된 지도에서 나오는 매우 위험천만한 결론을 받아들이기 쉽게 한다. 자신의 약점을 직시하기 싫어하는 허약한 사람은 뒤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신경과민이 되어 선수를 치려고 한다. 특히 스페인 공산주의자는 국회를 두려워할지도 모른다.

러시아에서 자본가계급에 의해 거듭 소집이 연기된 제헌의회는 결정적인 충돌 뒤에야 비로소 소집되었으며, 별 어려움 없이 해산했다. 스페인의 제헌의회는 혁명의 발전에서 좀 더 이른 단계에 소집될 것이다. 의석을 획득했다고 가정하더라도 공산주의자는 무시해도 좋을 소수파일 것이다. 이로부터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지나치지 않다: 대중의 일종의 자생적 공세를 이용하여 가능한 한 신속히 국회를 전복하려고 노력한다. 이러한 모험은 권력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혁명을 지연시킴에 따라 틀림없이 혁명을 파멸시킬 것이다. 노동자계급은 대다수 노동자가 권력을 얻으려고 열렬하게 노력할 경우에만, 그리고 대다수 피억압 인민이 노동자계급에 대한 신뢰를 갖게 될 경우에만 자본가계급의 수중에서 권력을 빼앗을 수 있을 것이다.

혁명의 의회제도에 대한 문제에서 스페인 동지들은 정확하게 러시아의 경험보다는 오히려 프랑스대혁명의 경험을 참고로 해야 할 것이다. 자코뱅당 독재에 앞서 의회가 세 차례나 존재했다. 이것은 대중이 자코뱅당 독재로까지 상승하는 세 단계에 상응한다. 마드리드의 공화주의자나 사회주의자가 하듯이, 국회가 실제로 혁명에 종지부를 찍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터무니없다. 그렇지 않다, 실제로 국회는 혁명의 발전에 새로운 자극을 주는 동시에 혁명에 대해서 좀 더 정리된 발전을 보장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전망은 사태를 파악하는 데서, 또 신경과민이나 모험주의를 교정하는 데서 매우 중요하다.

물론 이것은 공산주의자가 혁명에서 브레이크 역을 맡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물며 공산주의자가 도시와 농촌의 운동이나 대중의 고양으로부터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이러한 정책은 여전히 혁명적 대중의 신뢰를 얻는 과제에 직면해 있는 당을 파멸로 이끌 것이다. 오직 볼셰비키당만이 노동자와 병사의 모든 투쟁을 지도했기 때문에 7월에 대중을 파국으로부터 지킬 수 있었다.

만약 객관적 상황과 자본가계급의 배신이 노동자계급으로 하여금 불리한 조건 속에서 결전에 돌입하게 했다면, 물론 공산주의자는 투사들의 맨 앞에 설 것이다. 혁명정당은 언제나 옆으로 물러나 설교를 늘어놓거나, 노동자를 지도부도 없이 자본가계급의 총검 아래 방치하기보다는 오히려 대중과 함께 패배당하는 것을 선택할 것이다. 전투 중에 패배한 당은 대중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내릴 것이며, 조만간에 원수를 갚을 것이다. 그러나 위기의 순간에 자신의 계급을 버린 당은 결코 다시 소생할 수 없다. 그렇지만 스페인 공산주의자는 결코 이러한 비극적 딜레마에 직면 하지 않았다. 거꾸로 정권을 잡은 사회주의자의 수치스러운 정책과 무정부적 조합주의의 비참한 당혹감은 노동자를 더욱 더 공산주의로 밀어붙일 것이라고 생각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따라서 당一올바른 정책을 취한다면一은 노동자계급의 승리를 준비하고, 이끌 중분한 시간을 가질 것이다.

 

공산주의자 대오의 통일을 위해서!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의 가장 악의적인 범죄 가운데 하나는 허약한 스페인 공산주의자 대오를 체계적으로 분열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 분열은 스페인혁명의 제반 사태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의 투쟁에서 유래하는, 지시 형태로 사전에 주입된 것이었다. 혁명은 항상 노동자계급 안에서 좌익에 대한 강력한 흡인력을 만들어낸다. 1917년에 볼셰비키주의의 기풍에 가까웠던 모든 경향과 그룹이, 심지어 과거에 볼셰비키당과 싸웠던 그룹들도 볼셰비키당과 융합되었다. 당은 급속히 성장했을 뿐만 아니라 매우 격렬한 당내생활도 경험했다. 4월부터 10월까지, 그리고 그 이후의 내전 시기에 볼셰비키당내의 여러 경향과 그룹사이의 투쟁은 특정 시기에는 이례적인 첨예함에 이르렀다. 그러나 분열은 일어나지 않았다. 한 사람도 제명되지 않았다.

대중의 강력한 압력이 당을 결합시켰기 때문이다. 당내 투쟁은 당을 단련시키고, 당이 가야할 길을 분명히 했다. 이 투쟁에서 모든 당원은 당 정책의 올바름과 지도부의 혁명적 신뢰성에 대한 깊은 확신을 얻었다. 경험과 이데올로그 투쟁을 통해서 획득된 일반 볼셰비키 당원의 이러한 확신만이 지도부가 필요한 순간에 전당을 투쟁으로 이끌 수 있는 기회를 부여했다. 그리고 당 정책의 올바름에 대한 당 자체의 깊은 확신만이 노동자대중에게 당에 대한 신뢰를 북돋을 수 있는 것이다. 외부에서 강제된 인위적 분열, 자유롭고 정직한 이데올로그 투쟁의 부재, 동료를 적으로 낙인찍는 것, 공산주의자 대오를 분열시키는데 기여하는 신화의 창조一이것이 지금, 스페인공산당을 마비시키고 있다. 공산당은 자기를 무기력하게 하는 관료주의적 통제로부터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공산주의자 대오는 공공연하고 정직한 토론에 근거하여 결속되어야 한다. 스페인공산당의 단합대회를 준비해야 한다.

상황은 소수이고 허약한 스페인의 공식 스탈린주의 관료집단뿐만 아니라 형식적으로는 코민테른의 외부에 존재하는 반대파 조직들一카탈로니아연합, 마드리드의 독립그룹[마드리드의 독립그룹 : 1931년 스페인공산당의 관료주의적 방식에 반대해 제명된 그룹. 좌익반대파의 강령에는 찬성하지 않았지만 반대파와의 토론에는 동의했다.]一도 명확한 행동강령이 없으며, 설상가상으로 이 조직들의 상당수가 볼셰비키주의의 아류들이 지난 8년 동안 아낌없이 퍼뜨린 편견에 물들어 있다는 사실에 의해 복잡해지고 있다. '노동자농민'혁명, '민주주의독재', 심지어 '노동자농민당'에 대해서조차 카탈로니아의 반대파는 필요한 명확함을 갖고 있지 않다. 이것은 위험을 배가시킨다. 공산주의자 대오의 통일을 회복하기 위한 투쟁은 스탈린주의의 이데올로기적 타락과 날조에 대한 투쟁과 결합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좌익반대파의 임무이다. 그러나 이 점에서도 씁쓸한 진실을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스페인의 좌익반대파는 이 임무의 해결에 접근 하지도 못하고 있다. 좌익반대파를 고수하는 스페인 동지들은 아직 독자적인 기관지[편집자 주 : 이 글이 작성된 이후에 국제좌익반대파 스페인지부의 이론 기관지 〈꼬뮤니스모〉(Comunismo) 첫 호가 발행되었다. 이 첫 호에는 정치강령 초안과 노동조합 테제 등이 실려 있다.]를 창간하지 못하고 있다. 이 사실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시간의 손실이고, 혁명은 이 죄를 결코 간과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동지들 이 얼마나 곤란한 조건에 처해 있는지 우리도 알고 있다. 이들은 프리모 데 리베라 치하에서, 베 렌게르 치하에서, 사모라 치하에서 끊임없아 경찰의 박해를 받아왔다. 이를테면, 라크르와[앙리 라크르와(Henri Lacroix, 1901-1939) : 스페인의 좌익반대파. 프란시스코 가르시아 라비 드(Francisco Garcia Lavid)의 가명. 노동자 출신, 1925~27년, 소련 체재 중에 좌익반대파가 되었다. 스페인 좌익반대파조직이 벨기에에 망명한 시기의 중심적 지도자 가운데 한사람이다. 1930년 6월 스페인에서 체포되어 왕정 붕괴 뒤에 석방되었다. 1931년 6월의 제2회 대회에서 총서기가 되었다. 1932년 11월 이후, 닌과 결별, 스페인 좌익반대파에 대한 비판에서 트로츠키가 올바르다고 주장 하는 회보를 발행했다. 1933년에 '자금의 부정 유용'을 이유로 스페인지부에서 제명되었다. 그 후 사회당에 가입, 1939년 1월, 스탈린주의자 정보부장교에 의해 교수형되었다.] 동지는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다시 수감되었다. 혁명적 지도부가 되기에는 무기력한 코민테른의 기구는 박해와 중상의 영역에서는 대단한 솜씨를 보여준다.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임무를 대단히 곤란하게 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전국에 걸쳐서 좌익반대파의 힘을 결집하고, 잡지와 회보를 창간하고, 청년 노동자를 모아 그룹을 조직하고, 올바른 마르크스주의적 정책에 근거하여 공산주의자 대오의 통일을 위해 투쟁해야 한다.

L. 트로츠키 카디코이,

1931년 5월 28일

 

 

무정부적 조합주의와 카탈로니아 연합

 

■ 이 글은 팸플릿 '스페인혁명과 이를 위협하는 위험'의 부록으로 〈반대파 회보〉에 게재된 것으로, 트로츠키가 스페인 좌익반대파 앞으로 보낸 편지의 일부이다.

 

무정부적 조합주의자는 내가 여기서 판단할 수 있는 한, 마드리드 제국주의자들의 바르셀로나 하수인인 마시아대령의 비열한 관리체제에 대해서 화해주의 정책을 취하고 있다. 무정부적 조합주의 지도자들은 카탈로니아의 국내평화를 위한 부관이자, 사실상의 하수인이 되어버렸다.

내가 말할 수 있는 한, 카탈로니아연합은 무정부적 조합주의자에 대해서 화해주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즉, 공동전선이라는 혁명정책을 무정부적 조합주의자를 옹호하고 추켜세우는 기회주의 정책으로 대체시키고 있다. 그로 인해 마시아체제도 옹호하게 된다. 이 점이야말로 일정 단계에서 대단히 위험할 수 있는 자연발생적 폭발의 원천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노동자를 제지하는 것은 노동조합의 임무가 아니다. 반대로 공세를 위해 노동자를 결집하고 조직하는 것이다. 노동조합은 무엇보다도 카탈로니아와 그 밖의 후진적 지역의 노동자를 일으켜 세워야 한다. 카탈로니아연합의 임무는 무정부적 조합주의연합의 명성을 쌓아올리는 것이 아니라 차근차근한 비판을 흔들림 없이 수행하는 것이다. 노동자에게 이들이 마시아의 소부르주아적 반(反)혁명과 암묵적으로 연합하고 있음을 폭로하는 것이다.

조급하고 무리한 행동의 제지가 혁명에 대한 멘셰비키적 압살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명확한 전략적 노선이 있어야 하고, 선진 노동자가 이를 광범한 대중에게 정력적으로 설명할 수 있도록 충분히 이해해야 한다. 카탈로니아연합은 아무리 보아도 전략적 노선이 없다. 또한 그 지도자들은 혁명의 근본문제들에 대해 숙고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렇지 않다면 '트로츠키주의'에 대해 그토록 유치하고 어리석은 우려를 할 리 없다. 이러한 우려는 이들의 정치적 사고 수준의 한계를 나타낼 뿐이다.

 

1931년 5월 31일

 

 

카탈로니아연합(노동자농민블록)의 강령

 

친애하는 동지 여러분!

나는〈계급투쟁〉(La Lutte de dasses)지를 통해 카탈로니아연합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른바 노동자농민블록의 강령을 처음으로 읽어 보았다. 나는 이 문서가 〈계급투쟁〉지에 완전하고 정확하게 번역되어 있다고 인정한다. 이 문서는 전체적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불쾌한 인상을 준다.

내가 최근에 쓴 '스페인혁명과 이를 위협하는 위험'에서 스페인 문제에 관한 코민테른의 공식 정책을 비판했던 것은 카탈로니아연합에도 완전하게 들어맞는다. 그 뿐만 아니라 카탈로니아연합은 코민테른 지도부가 적어도 말로는 이미 폐기한 오류마저 범하고 있다.

 

1. 이 문서는 '노동자농민블록'이 발행했다. 노동자농민블록이란 무엇인가? 카탈로니아연합의 별명인가? 노동자농민블록 즉, 노동자 농민의 연합은 노동자 전위가 이룩해야 할 거대한 정치적 임무이다. 이 임무는 그 강령에 명백히 나타나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하지 않는데도 '노동자 농민블록'은 혁명조직의 이름이 되었다. 이것은 신판 노동자 농민당에 다름 아니다. 게다가 코민테른 제6차 대회도 좌익반대파의 비판으로 이런 반동사상을 폐기했다.

2. 문서 전체에서 '공산주의'라는 말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대중에게 자신의 공산주의를 숨기는 사람은 이미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3. 이들은 계급 분석을 전혀 시도하지 않은 채, 민주주의혁명, 민주공화국, 인민혁명에 대해 말한다. 정부는 우유부단하고 동요하고 있다는 등의 비난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 정부가 인민의 적인 자본가계급의 정부라고 그 어디에서도 지칭하지 않는다. 사모라 정부에 대한 이들의 비판은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이 르보프공(公)-케렌스키 내각에 대해 제기한 비판을 쏙 빼닮았다. 이들은 카탈로니아의 마시아정부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킨다.

4. 문서는 '사회의 합리적 구성'에 대해 말하지만 그 의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다. 이것은 1848년 이전의 '진정한' 사회주의자들의 어법이다. 게다가 '공화국은 새로운 사회를 조직하는 계기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떤 사회인가? 부르주아 체제인가 사회주의 체제인가? 이 강령은 자본주의와도, 사회주의와도 숨바꼭질을 하고 있다.

5. 알폰소에게 외국으로 도망칠 시간을 준 사실이 '임시정부의 첫 번째 심각한 오류'로 제시되어 있다. 오류라고? 이는 사모라가 자신의 혁명 정책을 충분히 '의식"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러시아 멘셰비키가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이 이러했다. 자본가계급의 의식적인 반(反)혁명 계획을 '오류라고 부르는 것은 대중에게 자본가계급의 결점을 호도하고 은폐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6.'공화국은 자본가계급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노동자를 위해서도 승리해야 한다.' 속류 민주주의적이고 완전히 잘못된 이 듣기 좋은 빈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자본가계급과 노동자의 이해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공화국이 언제, 어디에 존재했는가? 공화주의 자본가계급에게 우리는 민주주의적 권리와 사회개량을 요구할 수 있고, 요구해야 하지만 그와 동시에 심지어 초민주주의적인(arch-democratic) 부르주아 공화국도 노동자와 농민의 피와 땀을 짜내기 위해 자본가계급이 이용하는 기구라는 것을 끊임없이 폭로해야 한다.

7. 1873년 공화국에 대한 언급은 이런 믿기 어려운 교훈을 곁들이고 있다 : '따라서 권력과 인민 사이에 완전한 분열을 낳았다.' 추상적 인민이 추상적 권력으로부터 분리된 것이다. 혹시 자본가계급이 근로인민과 분리된 것인가? 1873년의 사례는 자본가계급이 더 부드럽고, 더 선량하고, 더 관대하고, 더 상냥해진 것이라고 주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부드럽고', ‘더 관대하고', '더 상냥해진' 자본가계급을 단 한순간도 믿지 말라고 대중에게 가르치기 위해서 언급되어야 한다. 이것이 마르크스주의자가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이다.

8. 이 강령은 '노동자대중은 모든 지방에서 혁명적 훈타에 근거하여 스스로를 조직'하라고 요구한다. 무엇 때문에? 강령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이러한 훈타가 노동자와 빈농의 수중으로 권력의 혁명적 이행을 보장할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1일 7시간 노동, 생산의 노동자통제, 혁명적 노동자 병사 훈타에 의한 농민봉기의 조직 등 이행적 요구 강령에 대해서도 한마디 말이 없다. 이들은 훈타가 권력을 잡고 있는 계급 즉, 자본가계급에 대항하는 노동자계급과 피억압 대중의 조직이라는 것을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여기서 훈타는 스페인의 소부르주아적 전통에 입각하는 혁명조직'으로 간주된다.

9. 강령은 농민봉기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면서 프랑스혁명과 러시아 혁명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코민테른 지도부에 의해 바로 우리 눈앞에서 압살당한 중국혁명의 경험에 대해서는 한마디 말이 없다. 코민테른은 중국의 농업문제를 올바르게 '해결'했는가? 이에 대해서도 말이 없다. 중국혁명의 교훈에서 배우지 못한 공산주의자는 대중을 가르치거나 대중에게 호소하기 위해 대중에게 말을 걸 권리가 없다. 특히 혁명이 한창인 나라에서는 더욱 그렇다.

10. 강령은 '우리는 각 민족의 국가수립을 지지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스페인에서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어떤 민족이 관련되어 있는가? 범(況)스페인 국가조직은 '이베리아공화국연합'이라고 규정되어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만약 연방제를 의미한다면, 그렇다고 말하 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11. '혁명의 방어는 최고의 법칙이어야 한다.' 누구로부터의 방어인가? 권력을 쥔 자본가계급은 노동자계급으로부터 자신의 혁명을 방어한다. 적들 일반에 대항하여 혁명 일반을 대체로 옹호하는 공허한 언사로 이런 사실을 은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본가계급이 혁명의 기치 하에 노동자계급을 목 졸라 죽이는 것을 돕는 것이다.

12. '노동자농민블록 '즉, 노동자 농민당은 강령끝 부분에서 '민주주의혁명의 완전한 실현을 위해서 전력을 다해 싸울' 것을 약속하고 있다. 이것은 민주주의적 의회제도에 근거하는 부르주아 공화국을 의미하는가? 그러면 그렇다고 말해야 하지만 이 경우에도 적어도 민주주의적인 선거권을 요구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베리아반도에서 '합리적인' 공화국이나 '사회의 합리적 구성'이 실현되기 이전에 사모라의 부르주아 공화국은 적어도 노동자와 농민 남녀 모두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것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13. 사회당이라는 이름은 이 강령에 나오지 않는다. 무정부적 조합주의에 대해서도 한마디 없다. 공식 스페인공산당도 나오지 않는다. '노동자농민블록' 은 진공 속에서 활동할 준비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상이〈계급투쟁〉지에 발표된 원문에 근거하여 필수적이라고 생각하는 직접적인 반론이다. 카탈로니아연합이 이미 그 강령에 어떤 변화나 교정 또는 수정을 가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나는 카탈로니아연합이 마르크스주의의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기꺼이 환영할 것이다. 그러 나 현 상태의 강령은 스페인의 토양에 옮겨진 완전한 '국민당주의'를 의미한다. 코민테른의 중국정책이 문제가 되었을 때, 좌익반대파가 비타협적으로 싸운 바로 그 사상과 방법이 이 문서에 가장 파멸적인 모습으로 나타나 있다.

내가 아는 한, 카탈로니아연합의 지도자들은 계획적으로 좌익반대파와 스스로를 분리시켜서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좌익반대파도 위에서 간략하게 분석한 문서 에서 카탈로니아연합의 지도자들이 표명하고 있는 사상이나 방법과 명확하고 엄격한 방식으로 스스로를 분리해야 한다. 혁명 중에 출발점이 옳지 못한 입장은 불가피하게 자연히 패배의 언어로 번역된다. 현재는 미약한 스페인의 좌익반대파가 노동자계급과 스페인혁명에 거대한 공헌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스페인의 좌익반대파는 자기 대오에 명확성, 성실성, 비타협성을 제도화해야 한다. 이것이 스페인 동지들에 대한 나의 호소이다.

L. 트로츠키

1931년 6월 12일

 

 

스페인혁명의 성격

 

■ 이 편지는 트로츠키가 스페인혁명의 문제를 국제좌익반대파 전체와 각국 지부의 중심적 문제로 삼게 하기 위해 작성한 것이다. 트로츠키는 스페인혁명의 기본적 문제들을 간결하게 요약하고, 이를 토대로 좌익반대파 각국 지부가 이루어야 할 과제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제안하고 있다.

 

현재의 사태 추이는 국제좌익반대파가 견해를 밝힐 수 있고, 또 밝혀야만 하는 하나의 중대한 문제를 의제로 올렸다. 나는 스페인혁명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의 문제는 나중에 회고조로 비판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파국을 미리 막기 위해서 국제좌익반대파가 사태에 적극 개입해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 세력은 소수이다. 그러나 혁명정세의 이점은 바로 소그룹도 올바로 예측하고 제때에 올바른 구호를 내건다면, 짧은 시간 동안에 거대 한 세력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있다. 나는 사태에 직접 관련된 스페인 지부뿐만 아니라 모든 지부에 대해서도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스페인 혁명이 발전하면 할수록 전 세계 노동자들의 더 많은 주목을 끌 것이기 때문이다. 세계의 노동자 전위 눈앞에서 정치노선이 검증될 것이다. 우리가 정말로 좌익이라면, 우리가 정말로 올바른 혁명사상으로 철저히 다져져 있다면, 우리는 이 힘을 특히 혁명정세에서 뚜렷하게 보여주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정말로 국제주의자라면, 우리는 이 일을 국제적 규모로 수행해야 한다.

두 가지 근본적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해야 한다: (1) 스페인혁명의 일반적 성격과 이로부터 나오는 전략적 방침의 문제, (2) 민주주의 구호의 올바른 전술적 활용과 의회주의와 혁명의 발전 가능성의 문제

나는 스페인에 관한 최근 저술[스페인혁명과 이를 위협하는 위험]을 통해 이런 문제들의 본질을 전부 말하려고 했다. 여기서는 단지 코민테른의 전체 노선에 대해 공세를 취해야 한다는 일반적인 문제에 대해서 간략하게 내 의견을 밝히고자 한다.

스페인에서 이미 완수된 공화주의혁명과 미래의 노동자혁명 사이에 중간적 혁명 즉, '민주주의독재'에 찬성하는 이른바 '노동자농민'혁명을 기대해야 하는가? 긍정인가 부정인가? 전체적인 전략적 방침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에 의해 결정된다. 공식 스페인공산당은 이 근본적 문제에 대해서 이데올로기적 혼란에 휘말려 있다. 이 혼란은 스탈린주의자들에 의해 유포되었으며 아직도 유포되고 있고, 코민테른강령에도 나타나 있다. 우리는 생생한 사실들에 비추어 날마다 이 중도적, 중간적 혁명이라는 허구로 대표되는 모든 공허함, 모든 어리석음을 폭로함과 동시에 그 끔찍한 위험을 폭로할 기회를 얻고 있다.

모든 지부의 지도적 동지들은 좌익인 우리야말로 견고한 과학적 토대 위에 서야 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상을 가지고 경솔하게 장난치거나, 란다우[쿠르트 란다우(Kurt Landau, 1903~1937) : 오스트리아의 좌익반대파, 후에 독일의 좌익반대파. 1931년 반대파와 결별하고, 독자적인 그룹을 결성했다. 스페인에서 직접 통일노동자당을 지원했다. 1937년 스탈린주의자에 납치되어 암살당했다.]와 그 동료들 식으로 신문에 대고 나불거리는 것은 혁명적 노동자 조직의 본질에 반하는 것이다. 혁명의 근본적 문제들은 기사가 물체의 저항을 조사하거나, 의사가 해부학이나 병리학을 연구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연구되어야 한다. 연속혁명의 문제는 스페인 사태 덕분에 지금 국제좌익반대파의 중심적 문제가 되고 있다.

민주주의 구호, 선거 활용, 추후의 국회 활용 등의 문제는 일반적 전략문제에 종속되는 혁명적 전술의 문제이다. 그러나 가장 올바른 전략적 정식도 해당 시기에 이들 정식에 대한 전술적 해결책이 없으면 아무런 가치도 없다.

그러나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스페인 사태는 매우 유감스러워 보인다. 프랑스 신문의 긴급보도에 따르면, 카탈로니아연합의 지도자인 마우린은 마드리드 연설에서 자신의 조직은 선거의 '진정성'을 믿지 않기 때문에 선거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전했다. 이것이 과연 사실인 것인가? 만약 사실이라면, 마우린은 노동자계급의 힘을 결집한다는 관점에서가 아니라 도덕과 소부르주아적 감상주의의 관점에서 혁명전술의 문제들에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2주전이라면 나는 부르주아신문이 허튼소리를 지껄이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카탈로니아연합의 강령을 알게 되고 나서는 터무니없어 보일지도 모르지만, 미리 배제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 소식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 노선에 대해 우리는 우리 대오 내에서 가차 없는 투쟁을 개시해야 한다. 다양한 그룹들과 원칙적으로 공통된 근거가 전혀 없을 때, 이들 그룹과 서기국의 기능, 권한, 특권 등에 대해서 말다툼하는 것은 완전히 어리석고 무가치하다.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프로메테오' 그룹['프로메테오'(Prometeo) 그룹: 이탈리아의 좌익 공산주의자들로 보르디가를 지지하는 그룹. 1929년에 트로츠키주의로 출발했다가 제명된 분자들이 모여 결성했다. 국제좌익반대파는 이 그룹과 항상적인 협력관계를 수립하려고 노력했지만, 공동전선 문제나 민주주의 구호 문제를 둘러싸고 근본적으로 의견을 달리했다.]이다. 이 그룹은 전략과 전술의 모든 근본적 문제에 대해서 볼셰비키-레닌주의자와 의견을 달리하고 있다. 그 누구도 이러한 심각한 견해 차이를 조직문제에 대한 떠들썩한 언쟁이나 막후에서 음모를 꾸미다 결국에는 타락해버리는 무원칙한 '블록'으로 입막음하도록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

러시아의 경험 이후, 혁명에서 민주주의 구호 문제는 중국의 투쟁과 정에서 다시 제기되었다. 그러나 유럽의 모든 지부가 이 투쟁의 모든 단계들을 자세히 검토할 기회를 갖지는 못했다. 이런 이유로 이 문제에 대한 토론은 일부 동지와 그룹들에게는 다소 아카데믹한 성격을 띠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 문제는 바로 투쟁, 따라서 생존 그 자체이다. 이러한 중대한 역사적 전환점에서 우리 스스로를 손발이 묶인 채로 내버려 둘 수 있는가? 전쟁이 발발할 우려가 있었던 중-소 분쟁 중에 소비에트 연방을 지지해야 할 것인지 장개석을 지지해야 할 것인지 여부를 둘러싼 토론에 넋을 잃을 수 없었던 것과 꼭 같이, 오늘날 스페인 사태에 직면하여 우리는 일부 그룹의 종파주의적이고 반(半)바쿠닌주의적인 미신에 대해 간접적인 책임도 져서는 안 된다.

 

나의 실천적 제안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모든 지부는 스페인혁명의 문제들을 의제로 삼지 않으면 안 된다.

2. 우리 지부의 지도자들은 문제를 깊게 파고들기 위한, 특히 공식 정당들의 활동과 이 정당들이 스페인혁명의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을 주의 깊게 연구하기 위한 자료 수집을 임무로 하는 특별위원회를 구성해야 한다.

3. (모든 경향의) 스페인 공산주의에 대한 중요 문서들 전부를 적어도 발췌한 형태로라도 우리의 각국 지부 모두가 참고할 수 있도록 정기적으로 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

4. 필요한 준비가 갖춰지면 좌익반대파의 각국 지부는 스페인혁명에서 코민테른이 취하고 있는 정책에 대한 공격을 개시해야 한다. 이 공격은 신문 기사, 비판적 결의문, 공개편지, 집회 참가, 개인과 그룹의 저술 등 여러 가지 형태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형태는 모두 엄밀하게 조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

5. 국제서기국뿐만 아니라 각국 지부의 일정한 준비활동에 뒤이어 스페인혁명에 대한 국제좌익반대파의 선언문을 필수적으로 작성해야 할 것이다. 이 선언문은 가능한 한 가장 구체적인 형태로, 그리고 스페인지부와의 긴밀한 협력에 기초하여 작성되어야 한다. 이 선언문은 가능한 한 광범위하게 배포되어야 한다.

 

이상이 나의 구체적인 제안이다. 이를 검토해줄 것을 바라는 동시에 토론이 모든 지부에서 병행되도록 이 편지의 복사본을 각국 지부에 보내 줄 것을 부탁한다.

1931년 6월 18일

 

 

"사모라-마우라를 타도하자!"

 

■ 이 글은 팸플릿 '스페인혁명과 이를 위협하는 위험'의 부록으로 〈반대파 회보〉에 게재된 것으로, 트로츠키가 스페인 좌익반대파 앞으로 보낸 편지의 일부이다.

 

라크르와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나는 스페인 정세에 대하여 약간의 보충적인 고려사항을 제안했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스페인 공산주의의 다양한 그룹들이 그날의 정치적 문제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지 충분한 정보가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혁명정세를 분석하는 것은 눈을 가린 채 체스를 두는 것보다도 더 어렵다. 때문에 모든 쟁점들에서 보완적인 검토를 필요로 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 동지에게, 그리고 동지를 통해서 스페인 공산주의자와 국제좌익반대파의 모든 지부에게 이런 문제를 제기하고 싶다.

스페인혁명을 위협하는 위험에 관한 내 기사의 주요한 부분은 올해 4월의 부르주아 공화주의 혁명과 다가올 노동자혁명 사이에 독특한 '노동 자 농민혁명'이 들어설 여지가 없음을 증명하는데 할애되었다. 말이 난 김에 다음과 같은 점을 지적해두고자 한다. 즉, 이것은 노동자계급의 당이 '최후의 결전'을 치를 때까지 평화적인 세력 규합에 몰두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속물들의 반(反)혁명적인 생각일 뿐이다. 중간적 혁명이나 중간적 체제는 있을 수 없지만 파업, 시위, 경찰이나 군대와의 충돌, 격렬한 혁명적 경련 등의 중간적 대중행동은 있을 수 있으며, 또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대중행동에서 공산주의자는 항상 맨 앞에 설 것이다. 이런 중간적 투쟁이 가질 수 있는 역사적 의의는 무엇인가? 한편으로는 부르주아공화국 체제의 민주주의적 변화를 이끌 지도 모르며,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 체제를 건설하기 위해 대중에게 권력 장악을 준비시킬 것이다.

공산주의자가 이런 투쟁에 참가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이런 투쟁을 지도하기 위해서 이다. 그러자면 공산주의자에게는 혁명 전체의 발전과정에 대한 명확한 이해뿐만 아니라 제때에 예리하고 명확하며 전투적인 구호를 제기할 능력도 요구된다. 이러한 구호는 '강령'에서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결정되어 대중을 전진시키는 것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1917년 러시아에서 화해주의 사회주의자들과 자유주의 자본가계급이 연립정부를 구성하고 있었을 당시에 채택된 '10명의 자본가 장관을 타도하라!'는 볼셰비키의 구호는 거대한 역할을 했다. 실제로 가장 믿음직한 대중은 늘 자본가계급, 착취자, 유산계급을 본능적으로 불신했지만 대중은 여전히 화해주의 사회주의자들을 신뢰하고 있었다. 이 특정한 시기에 볼셰비키당 전술은 바로 이 불신에 기초했다. 우리는 '사회주의 장관을 타도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당시의 투쟁구호인 '임시정부를 타도하라'는 구호도 제기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우리는 끊임없이 '10명의 자본가 장관을 타도하라!'는 구호를 반복하여 강조했다. 이 구호는 거대한 역할을 했다. 왜냐하면 화해주의 사회주의자들이 노동자 대중보다는 자본가 장관들을 훨씬 더 가깝게 생각한다는 것을 대중이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이런 유형의 구호가 스페인혁명의 현 단계에 가장 잘 들어맞는다. 노동자 전위는 스페인 사회주의자가 권력을 떠맡도록 강요하는데 온 관심을 쏟고 있다. 이 일을 위해서는 연립정부를 분열시켜야 한다. 당면한 임무는 연립정부에서 자본가 장관들을 내쫓기 위해 싸우는 것이다. 이 임무는 새로운 대중운동 등의 압력을 받은 중대한 정치적 사건과 결합되어야만 일부라도 이룰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한 예로, 러시아에서는 이러한 대중운동의 지속적인 압력을 받아 처음에는 구치코프와 밀류코프가, 그 다음에는 르보프공(公)[알렉산드르 구치코프(Alexandr Guchkov, 1862-1936) : 러시아 대자본가와 지주의 이해를 대변한 정당 옥토브리스트(10월 17일 동맹)의 지도자. 제3대 두마 의장. 2월 혁명으로 임시정부의 전쟁장관이 되어 제국주의 전쟁을 지속하지만 거센 반전시위로 사임했다.

파벨 밀류코프(Pavel Miliukov, 1859-1943) : 러시아의 역사학자. 입헌민주당(카데츠)의 지도자. 제3, 제4대 두마의원. 2월 혁명 후, 임시정부의 외상. 4월 18일, 연합국에 전쟁 지속을 약속하는 '각서'를 제출, 이에 항의하는 노동자 병사의 대규모 시위(4월사건)로 사임했다. 『제2차 러시아 혁명 사』(전 3권)를 저술했다.

게오르기 르보프(Georgi Lvov, 1861-1925) : 입헌민주당, 공작. 전러시아잼스트보동맹 의장. 1917년 2월 혁명 후, 7월까지 임시정부의 수상이었다.]이 연립정부에서 축출되었다. 또한 케렌스키가 정부수반에 올랐으며, 정부에서 '사회주의자' 수도 늘어났다. 레닌이 귀국하고 나서 볼셰비키당은 단 한순간도 케렌스키[알렉산드르 케렌스키(Alexandr Kerensky, 1881-1970) : 변호사 출신으로 저4대 두마의 트루도비키(근로자당) 지도자. 임시정부의 법무장관, 제 1차 연립정부의 전쟁장관으로 7월사건 이후 수상을 겸임. 제2차, 제3차 연립정부의 수상, 코르닐로프 쿠데타 이후 전 러시아 최고사령관. 10월혁명 직후, 크라스노프와 함께 볼셰비키 정부에 대한 무력반란을 기획하지만 실패하고 망명했다.]나 화해주의자들과 손을 잡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대중이 자본가계급을 권력에서 밀어내고, 화해주의자들의 정부를 실제로 검증하도록 도왔다. 이것은 볼셰비키당이 권력에 이르는 도정에서 피할 수 없는 한 단계였다.

멀리서 가능한대로 판단해보건대, 의회선거가 실시되면 사모라나 마우린 유형의 우익 공화주의자의 허약성이 극명하게 드러날 것이며, 급진당, 급진사회당, '사회당' 등 다양한 종류의 소부르주아 화해주의자들이 압도적 다수를 이룰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당이나 급진사회당은 전력을 다해 우익 동맹자들에게 매달릴 것이 거의 확실시된다. '사모라-마우라를 타도하라'는 구호는 완전히 시의적절하다. 다만, 다음 한 가지는 명확히 해둘 필요가 있다 : 공산주의자는 레로욱스내각 지지를 선동하지 않음은 물론 사회당 내각에 대해 그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때그때마다 가장 단호하고 일관된 계급 적(enemy)에 대해 가장 강력한 타격을 가한다. 그로 인해, 화해주의자들을 약화시키고 노동자계급의 진로를 열어젖힌다. 공산주의자는 사회당 노동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 "우리와 달리 여러분은 사회당 지도자를 신뢰한다. 그리고 이들에게 아무튼 권력을 잡으라고 강제한다. 이 점에서 우리는 여러분을 성 실하게 도울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정권을 잡는다면, 우리의 올바름이 실제로 확인될 것이다."

우리는 국회 구성과 관련하여 이 문제를 이미 다룬 적이 있다. 그러나 다른 사건 이를테면, 대중에 대한 탄압이 '사모라와 마우라를 타도하라'는 구호를 극도로 날카롭게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이 싸움에서의 승리 즉, 사모라의 사임으로 조성된 새로운 단계는 이후의 혁명발전에서 4월 알폰소의 퇴위와 거의 같은 의의를 가질 것이다. 이러한 구호를 제기하기 위해서는 추상적인 교의가 아니라 대중의 의식 상태와 대중이 여러 부분적 성공에 반응하는 방식에 따라야 한다. '노동계급독재"나 '노동자 농민공화국' 구호를 현 상황에 단순 대치시키는 것은 이런 구호가 대중을 움직이지 못하기 때문에 완전히 부적절하다.

이와 관련하여 사회파시즘 문제가 다시 제기된다. 극좌 관료집단의 어이없는 이 발명품은 현재 스페인에서 혁명으로 가는 길에 놓인 최대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 여기서 다시 러시아의 경험을 돌아보자. 권력을 장악하고 나서도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은 제국주의 전쟁을 수행하고, 자본가를 옹호하는 한편, 병사 농민 노동자를 박해하고, 체포했으며, 사형 제도를 도입했다. 또한 볼셰비키 살해를 묵인하고, 레닌에게 지하생활을 강제했으며, 다른 볼셰비키 지도자들을 감옥에 집어넣고, 이들에 대해서 가장 비열한 중상을 유포시켰다. 이런 일들은 모두 지금 생각해보면, 이들을 '사회파시스트'라고 부르기에 충분한 이유가 되고도 남는다. 그러나 이 말은 1917년 당시에는 존재하지도 않았으며, 주지하는 바와 같이 볼셰비키당이 권력에 이르는 것을 막지도 못했다. 7월과 8월의 끔찍한 박해를 받고서도 볼셰비키당은 ‘사회파시스트'와 함께 코르닐로프에 맞서 싸우기 위해 구성된 기구에 참여했다. 레닌은 9월초, 비밀은신처에서 러시아의 '사회파시스트'에게 다음과 같은 타협안을 제의했다 : "자본가 계급과 단절하고 권력을 잡아라. 그러면 우리 볼셰비키들은 소비에트 안에서 평화적으로 권력을 잡기 위해 투쟁할 것이다."

만약 화해주의자들과 당시의 진짜 '파시스트'인 코르닐로프주의자 사이에 아무런 차이도 없었다면, 코르닐로프주의자에 대항한 화해주의 자들과의 공동투쟁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게다가 이 투쟁은 반(反)혁명 장군의 공격을 물리치고, 대중을 화해주의자들에게서 단호하게 분리시키려는 볼셰비키당을 도움으로써 혁명의 발전에 거대한 역할을 했다.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본질은 바로 공산주의와 파시즘 사이에서 끊임없이 동요한다는 점이다. 혁명의 와중에서는 이러한 동요가 특히 격렬 해진다. 스페인의 사회주의자를 파시스트의 변종으로 간주하는 것은 이들의 불가피한 좌고우면에서 교훈을 얻을 가능성 일체를 미리 포기하고, 사회주의와 조합주의 노동자들을 우리 스스로 잘라내는 것을 의미한다.

결론적으로, 스페인의 무정부적 조합주의에 대한 무자비한 비판은 단 한순간도 늦출 수 없는 매우 긴급한 임무라는 점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무정부적 조합주의의 상층 지도부는 자본가계급에 찬성하는 가장 기만적이고 배신적이며 위험한 형태의 화해주의를 대표하며, 이에 굴종 한다. 일반적인 무정부적 조합주의자는 잠재적으로 매우 중대한 혁명세력이다. 이 점에서 우리의 기본적 임무는 사회주의자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평조합주의자가 그 지도부에 반대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임무는 노동조합 조직의 특수성과 무정부주의 특유의 기만성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 편지들에서 다루기로하자.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스페인의 혁명조직과 그룹들의 기사, 결의문, 강령 등을 모으고, 프랑스어로 번역해야 한다. 또한 다른 언어로 번역하기 위해 모든 지부에 보내야 한다.

1931년 6월 24일

 

 

마우린과 무정부적 조합주의자들

 

■ 이 글은 팸플릿 '스페인혁명과 이를 위협하는 위험'의 부록으로 〈반대파 회보〉에 게재된 것으로, 트로츠키가 스페인 좌익반대파 앞으로 보낸 편지의 일부이다.

 

마우린을 가차 없이, 그리고 쉴 새 없이 비판해야 한다. 사태 발전은 우리 비판의 올바름을 완전히 뒷받침할 것이다. 잠깐만 살펴보더라도 마우린이 단지 편협한 생각과 쇠잔한 교의와 유치한 구호를 가진 우스운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그가 성공할 것으로 알고 있다는데 있다. 카탈로니아에서 지도세력이 되지 못한다면, 좌익반대파는 스페인에서 지도세력이 될 수 없다.

두 번째 긴급한 문제는 무정부적 조합주의자들에 관한 문제이다. 무정부적 조합주의에 반대하는 팸플릿을 발행하여 스페인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들에도 널리 배포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여러분은 모나트[삐에르모나트(Pierre Monatte, 1881-1960) : 프랑스의 노동조합운동가로 조합주의 좌파. 1909년에 〈노동자의 생활〉을 창간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반전주의 입장을 견지했다. 1923년 프랑스공산당에 입당하지만 1년 뒤에 탈당했다. 1924년 [노동자혁명] 그룹을 조직하고, 1926년 [조합주의동맹]을 창설했다.]의 기사를 읽어 보았는가? 그는 이 기사에서 스페인의 무정부적 조합주의자들이 볼셰비키 국가를 진정으로 '무정부주의적인' 국가로 대치시킬 수 있다는 자신의 바람을 표현하고 있다. 세계 무정부주의의 운명, 더 정확하게는 러시아혁명에서 떨어져 나간 잔당들의 운명은 오늘날, 스페인 무정부적 조합주의의 운명과 불가분하게 결부되어 있다. 그리고 스페인의 무정부적 조합주의는 필연적으로 가장 비참하고 어쭙잖은 파산으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에 스페인혁명이 무정부주의의 묘지가 될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무정부적 조합주의의 묘지가 동시에 혁명의 묘지가 되지 않도록 확실히 해야 한다.

마우린이 스탈린주의자의 일시적인 방패역이라면, 무정부적 조합주의는 사회주의자와 공화주의자 즉, 자본가계급의 일시적인 방패역이다. 마우린이 카탈로니아의 선진 노동자를 중도주의 관료집단에게 넘겨줄 수 있는 것과 꼭 같이, 무정부적 조합주의자는 혁명 전체를 자본가계급에게 넘겨줄 수 있다.

지금 무정부적 조합주의에 대한 이론적⦁실천적 투쟁이 일정에 올라있다. 이 투쟁이 공동전선 정책, 노동조합의 단결 등에 근거하여 수행되어야 함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무정부적 조합주의 지도자들의 가면을 벗겨야 한다. 특히 한심한 세속신부인 페스타냐[앙헬 페스타냐(Angel Pestana, 1886-1937) : 시계직공 출신의 조합주의 지도자, 전국노동자연맹의 우파. 코민테른에 적대. '30인 선언'을 통해 개량주의로의 전향을 표명했으며, 1933년에 조합주의 당을 설립 했다.]를 폭로해야 한다. 그는 틀림없이 이후의 혁명발전에서 가장 악명 높고 비열한 역할을 수행할 것이다.

마우린의 연설을 살피는 것은 고통을 수반한다. 그는 우리와 달리 5개년 계획을 혁명의 성과로 간주한다! 그가 아무것도 읽은 것이 없다고 할 수 있는가?

덧붙이자면, 로이터 통신사를 위시해 다른 통신사들은 5개년 계획에 대한 나와의 인터뷰나 기사에 관하여 완전한 실패, 거짓말 등을 운운하면서 그릇된 전보를 유포시키고 있다. 이런 파렴치한 행위를 폭로하고 단호히 부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스탈린주의자에 반대하는 자본가 계급은 이 건(件)에서는 이들의 기만술과 중상을 이용하고 있다.

1931년 6월 29일

 

 

선거 결과와 이것이 가리키는 전술

 

■ 이 글은 팸플릿 '스페인혁명과 이를 위협하는 위험'의 부록으로 〈반대파 회보〉에 게재된 것으로, 트로츠키가 스페인 좌익반대파 앞으로 보낸 편지의 일부이다.

 

1. 스페인의 선거 결과 제1보가 게재된 7월 1일자 프랑스 지방신문을 앞에 두고 있다.[6월 국회선거에서 왕당파 정당들이 대패하고, 공화주의 좌파가 다수를 장악했다.] 지금까지는 정말로 모든 것이 정확하게 '계획'대로 사태가 전개되고 있다. 운동은 마치 계획에 따르는 듯이 왼쪽으로 나아가고 있다. 우리의 스페인 동지들이 모든 자료를 취합한 다음, 대단히 신중하게 선거 결과를 분석하기를 바라자. 노동자, 특히 무정부적 조합주의자들이 어떻게 투표했는지를 밝혀내야 한다. 그 답은 몇몇 선거구의 선거통계에서 아주 명확하게 나올 것이다. 물론 각 지방의 농민이 어떻게 투표했는지를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동시에 각 당이 전국 각지에서 제출한 '농업강령'을 모두 취합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은 매우 긴급하고도 중요한 일이다.

2. 예상했던 대로 사회당은 대승을 거둘 것 같다. 이는 의회주의 국면의 중심적 문제이다. 사회당 지도자들은 의회의 과반수를 얻지 못해서, 따라서 자본가계급과의 연립정부가 의석통계에 의해 정당화되기 때문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사회당이 권력을 잡고 싶지 않은 것은 당연히 사회당 정부가 단지 노동계급독재로 가는 길의 한 단계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프리에토의 연설을 뜯어보면, 사회당은 노동자계급을 제지할 수 있는 한, 연립정부를 지지할 작정이다. 그 다음에 노동자의 압력이 너무 거세지면, 일부 급진세력을 핑계 삼아 야당이 되어 노동자를 벌하거나 탄압하는 일을 자본가계급에게 맡겨버리려는 것이 분명하다. 바꿔 말하면, 우리는 에베르트와 체레텔리[프리드리히 에베르트(Friedrich Ebert, 1871-1925) : 독일사회민주당의 우파.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사회배외주의자. 1919년 독일의 대통령. 독일혁명을 탄압,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의 암살에 관여했다.

이라클리 체레텔리(Iraklii Tseretelli, 1881-1959) : 멘셰비키 지도자. 1917년 2월 혁명 후, 유형지로부터 돌아와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의 의장이 되었다. 5월, 우편전신장관으로 제1차 연립정부에 입각했다. 6월, 제1차 전러시아 소비에트대회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7월사건 후, 제1차 연립정부의 내무장관. 1918년 그루지야의 멘셰비키 정부 수반이었다.]의 변종을 맞닥뜨리고 있는 것 이다. 에베르트의 방침이 성공을 거둔 반면에 체레텔리는 실패했으며, 두 경우 모두 공산당의 능력과 그 정책이 결정적 요인이었음을 기억하자.

3. 우리는 사회당의 계획(자신들이 지는 역을 맡은 게임)을 각각의 개별적 문제들에서 이들이 쓰고 있는 가면을 벗기면서 즉시 폭로해야 한다. 물론 이것은 무엇보다도 스페인 좌익반대파의 일이다. 그러나 이들을 폭로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스페인혁명의 현 단계의 성격에 부응하는 명확한 정치적 구호가 있어야 한다. 선거 결과는 이런 구호를 완전히 명백히 한다 : 노동자는 자본가계급과의 연립정부를 분쇄하고, 사회당의 권력 장악을 강제해야 한다. 토지를 얻고 싶다면, 농민은 노동자를 도와야 한다.

4. 사회당은 자신이 의회의 과반수를 얻지 못해서 자본가계급과의 연립정부를 포기할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이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18세 이상 남녀의 진정한 평등·보통선거에 근거한 민주적인 국회선거를 요구하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비민주적이고 조작된 국회에 대해 현 단계에서 진실로 대중적이고, 민주주의적이며, 공정하게 선출된 국회를 대치시키는 것이다.

5. 만약 공산주의자가 현 단계에서 국회를 무시하고 소비에트나 노동계급독재 구호를 대립시킨다면, 단지 자신이 진지하게 여길 수 있는 세력이 아님을 스스로 증명하는 꼴이 될 것이다. (신문에 따르면) 국회에서는 단 한 명의 공산주의자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라 한다. 물론 혁명적 좌익은 언제나 대의제도에서 보다는 행동이나 투쟁 에서 더 강력한 영향력 을 발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혁명정당의 능력과 의회의 그 대표자 사이에는 일정한 관계가 존재한다. 스페인 공산주의의 허약성은 충분히 드러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계급독재에 의한 부르주아 의회제도의 타도를 말하는 것은 백치나 수다쟁이 노릇을 하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혁명의 의회주의적 단계에 근거하여 당세를 불리고, 주위로 대중을 결집시키는 것이 우리의 과제이다. 이것이 의회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러나 바로 이 때문에 지금 가장 결정적이고 급진적인 민주주의 구호 아래 격렬한 선동을 전개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6. 구호를 제기하는 기준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한편으로는 우리의 전략적 노선을 결정하는 혁명발전의 일반적 방향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중의 의식 수준이다. 이러한 요인을 고려하지 않는 공산주의자는 목이 부러질 위험을 무릅써야 할 것이다.

스페인 노동자가 현 상황을 총괄해서 조망하는 방식을 잠깐 검토해 보자. 이들의 지도자인 사회당은 권력을 갖고 있다. 이것은 노동자의 요구와 완강함을 증대시킨다. 모든 파업노동자는 정부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의 도움을 기대할 것이다. 공산주의자는 바로 이런 길로 노동자의 사고를 지도해야 한다 : "정부에 대해 모든 것을 요구하라. 여러분의 지도자들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사회당은 노동자 대표단에게 자신들이 아직 과반수를 얻은 것이 아니라고 대꾸할 것이다. 이에 대한 대답은 분명하다: 진정한 민주적 선거권 보장과 자본가계급과의 연립정부를 끝장내면, 과반수는 보장된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사회당이 원치 않는 것이다. 이들의 입장은 이들을 대담하고 민주주의적인 구호와 충돌에 처하게 한다. 만약 우리가 국회에 대해 노동계급독재나 소비에트를 단순 대치시킨다면, 노동자를 사회당으로 떠미는 꼴이 될 것이다. 왜냐 하면 노동자나 사회당 모두 공산주의자는 우리를 지배하고 싶어 한다고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주주의와 자본가계급과 사회당의 연립정부 종식 구호를 내건다면, 우리는 노동자와 사회당 사이에 쐐기를 박고, 혁명의 다음 단계를 준비할 수 있을 것이다.

7. 우리가 민주주의 구호를 단지 의회주의적 의미로만 한정시킨다면, 위에서 언급한 고려사항들은 모두 그 의미를 상실할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공산주의자는 모든 파업, 모든 항의 시위에 참가하여 수많은 계층을 더욱 더 분기시킨다. 공산주의자는 모든 투쟁에서 대중과 함께, 그리고 대중의 선두에 선다. 이러한 투쟁에 기초하여 공산주의자는 소비에트 구호를 제기하고, 기회가 닿는 대로 노동자 공동전선 조직인 소비에트를 건설한다. 현 단계에서 소비에트는 다른 것 일 수 없다. 그러나 소비에트가 노동자 공동전선의 전투조직으로 부상한다면, 일정 단계에서는 공산주의자의 지도 아래 불가피하게 봉기기관이 될 것이며, 그 다음에는 권력기관이 될 것이다.

8. 농업강령을 대담하게 전개하면서 우리는 농업노동자의 독자적 역할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이들은 농촌지역에서 노동자혁명의 가장 중요한 매개자이다. 노동자는 농민과 동맹을 맺지만, 농업노동자는 노동자계급 자신의 일부이다. 이런 중대한 차이를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9. 지주 토지의 즉각적 몰수에 내가 개인적으로 반대할 뿐만 아니라 좌익반대파 전체도 그렇다고 스탈린주의자가 비난하고 있다는 사실을 〈라베리테〉지[〈라베리테〉(La Verite, 진실) : 프랑스 좌익반대파의 기관지]를 통해 알게 되었다. 정말로 관료적 참주선동이 다음번에 어느 방향을 향할지 예측한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지주 토지의 '즉각적' 몰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누구에 의해? 어떤 조직에 의해? 타의 주중을 불허하는 페리는 4월에 스페인 농민이 소비에트를 건설하고, 노동자는 모두 공산주의자를 뒤따르고 있다고 주장했었다. 물론 우리는 소비에트(또는 훈타나 위원회)가 즉시 대지주의 토지를 탈취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러나 여전히 농민을 일으켜 세울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 때문에 노동자를 사회당의 영향에서 떼어낼 필요가 있다. 이 두 가지는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스탈린주의자는 어쩌면 우리의 이런 태도를 두고 우리가 지주의 토지 소유를 비호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중상에도 약간의 논리가 있어야 한다. 연속혁명의 입장에서 어떻게 지주의 토지 소유를 옹호하는 논리가 나올 수 있는가? 설명을 해보라.

중국의 스탈린주의자가 4계급 블록정책을 추구할 때, 스탈린 지도하의 정치국은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앞으로 전보를 보내, '혁명적 장군들'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기 위해서 농민운동에 브레이크를 걸라고 요구했음을 상기시키고자 한다. 스탈린과 몰로토프는 농업강령에 약간의 제한조건을 달았다 :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되, 장교의 토지는 제외한다. 그런데 지주와 그 아들과 조카가 모두 장개석 군대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혁명적' 장교를 제외한다는 조건은 결국 지주의 토지를 보호하는 조치였다.

스탈린주의자의 지도 경력에서 이 수치스런 사건을 말소시킬 수 없다. 당시, 정치국 회의록 안에서 이 전보의 복사본을 발견한 반대파는 농업혁명에 대한 이 파렴치한 배반을 폭로하고 규탄했다. 지금 이 신사양반들은 자신들이 중국에서 범한 범죄를 스페인에서 우리에게 뒤집어씌우려 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천만부당하기 때문에 결코 성공하지 못 할 것이다. 지금 거의 모든 나라에 지부를 가지고 있는 반대파는 이들이 우리에 대한 거짓말과 음담을 마구 유포시키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스페인혁명의 생생한 경험을 통해 좌익반대파는 모든 기본적인 과제들을 해결하고, 거대한 전진을 이룰 것이다. 혁명이 괜히 역사의 기관차인 것이 아니다.

 

1931년 7월 1일

 

 

스페인 공산주의와 카탈로니아연합

 

■ 이 글은 팸플릿 '스페인혁명과 이를 위협하는 위험'의 부록으로 〈반대파 회보〉에 게재된 것으로, 트로츠키가 스페인 좌익반대파 앞으로 보낸 편지의 일부이다.

 

가장 유해하고, 위험하며, 정말로 가장 불길한 사태는 카탈로니아, 스페인, 그리고 전 세계 노동자들의 마음속에 우리가 카탈로니아연합의 정책과 견해를 같이 한다거나, 이들을 책임지고 있다거나, 심지어 중도주의 그룹보다 카탈로니아연합에 더 가깝다는 생각을 조장하는 것이다. 스탈린주의자는 전력을 다해 이런 식의 주장을 펴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에 대한 투쟁을 단호하게 벌이지 않았다. 이러한 오해는 우리의 명예를 대단히 실추시키고, 카탈로니아와 스페인 노동자의 발전을 방해하기 때문에 이런 오해를 떨쳐버 리는 것은 그만큼 더 중요하고 긴급하다.

물론 카탈로니아연합에 대한 비판은 주로 카탈로니아의 우리 지지자들에게 달려있는 임무이다. 이들은 명확하고 공개적이며 정확한 비판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밝혀야 한다. 소부르주아적 편견과 무지, 편협한 '지식'과 정치적 왜곡의 혼합물인 우린의 정책을 남김없이 비판해야 한다.

국회선거에서 카탈로니아연합은 약 1만 표를 얻었다. 이것은 많은 것이 아니다. 물론 혁명적 시기에 진정한 혁명조직은 빠르게 성장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1만 표의 의의를 크게 떨어뜨리는 사정이 있다. 국회선거에서 카탈로니아연합은 바르셀로나一가장 중요한 혁명 중심지一에서 지방자치선거 때보다도 더 적은 표를 얻었다. 얼핏 사소하게 보이는 이 사실은 거대한 징후적 의의가 있다. 이것은 가장 외딴 지방에서도一매우 미약할지라도一카탈로니아연합으로 향하는 노동자의 움직임이 있는 반면에, 마우린의 혼란은 바르셀로나에서 노동자를 끌어당기기는커녕 쫓아내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물론 마시아의 필연적인 파산은 두 번째 차악(lesser evil)인 마우린을 도울 수도 있다. 그러나 카탈로니아연합 현 지도부의 무기력은 국회선거를 통해 완전하게 증명되었다. 혁명 3개월 동안 바르셀로나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키우지 않기 위해서는 정말로 머 리를 짜내는 특별한 '재능'이 필요하다!

혁명정치의 말로 카탈로니아연합을 표현하자면 어떻게 되는가? 공산주의 조직인가? 만약 그렇다면 정확하게 우파인가 좌파인가, 그도 아니면 중도주의인가? 혁명적 노동자, 잠재적 공산주의자가 카탈로니아연합에 표를 던진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들의 생각으로는 아직 명확치가 않다. 그리고 이런 노동자가 동요분자에 의해 지도되고 있다면, 명확성은 어디에서 나올 것인가? 이런 상황에서 가장 단호하고 대담하고 결연한 노동자는 불가피하게 공식 공산당에 의지하려고 할 것이다. 공식 공산당은 바르셀로나에서는 170표, 카탈로니아 전체에서도 약 1천 표 밖에 얻지 못했다. 그러나 이런 분자들이 더 나쁜 것 같지는 않다. 반대로, 이런 분자들의 대부분은 우리가 기치를 내걸면 우리와 함께 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될 것이다.

1917년 혁명 초에 러시아사회민주주의 조직의 대다수는 복합적 성격을 띠었으며, 대오 내에 볼셰비키, 멘셰비키, 화해주의자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모든 정파의 통합을 목표로 하는 경향은 레닌이 도착하기 며칠 전인 3월말에 열린 볼셰비키당 협의회에서 스탈린이 멘셰비키와의 통합을 선언했을 정도로 매우 현저했다. 일부 지방조직들은 10월 혁명 직전까지 여러 경향이 뒤섞여 있었다. 나는 카탈로니아연합을 이와 비슷한 종류의 복합적 조직, 미래의 볼셰비키와 미래의 멘셰비키를 모두 포함한 애매한 조직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카탈로니아연합 내의 정치적 분화를 일으키려는 방침을 정당화한다. 이 길로 내딛는 제1보는 마우린주의 의 정치적 천박함을 비판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사정을 봐줘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카탈로니아연합과 러시아의 통합조직 사이의 유사함은 중요한 점에서 제한적이다. 러시아의 통합조직은 기존의 사회민주주의 그룹을 배제하지 않았다. 모든 조직이 통합조직 안에서 자신의 소신을 위해 싸울 권리가 있었다. 카탈로니아연합 안에서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여기서 '트로츠키주의'는 금지되어 있다. 동요분자들은 자신의 혼란을 옹호할 권리가 있지만, 볼셰비키-레닌주의자는 공개적으로 항의할 수 없다. 따라서 이 복합적이고 절충적인 통합조직은 처음부터 좌익을 배제한다. 바로 이 사실로 인해 카탈로니아연합은 중도주의와 우익적 경향의 지리멸렬한 블록이 되었다. 중도주의는 좌익으로도 우익으로도 발전할 수 있다. 혁명 중에 좌익을 배격한 카탈로니아연합의 중도주의는 추잡한 파멸을 하게 되어있다. 좌익반대파의 임무는 가차 없는 비판으로 이 파멸을 앞당기는 것이다.

그러나 대단히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하는 사실이 한 가지 더 있다. 카탈로니아연합은 공식적으로는 모든 공산주의 조직과 그룹의 통합에 찬성한다. 이 구호에 대해 온갖 환상을 가지고 있더라도 일반 당원들이 이 통합을 진지하고 성실하게 바라고 있음은 확실하다. 우리는 이 런 환상을 조금도 공유하지 않는다. 우리는 통합을 위해 싸운다. 왜냐하면 통합당의 중핵들 사이에서 외부에서 억지로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라 스페인혁명 자체의 발전에서 생기는 문제와 임무에 근거한 이데올로기적 분화라는 진취적 활동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모든 점에서 공산주의자의 통합을 위한 투쟁을 지지한다. 이 통합의 기본적 조건은 통합조직의 중핵들 사이에서 우리의 입장과 구호를 위해 싸울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 투쟁에 끝까지 성실하게 임할 것을 약속할 수 있고, 또 약속해야 한다. 그러나 이 기본적 조건은 카탈로니아연합에 의해 처음부터 배제되고 있다. 즉, 이들은 통합의 기치를 내세우는 한편으로 볼셰비키-레닌주의자를 그 대오에서 추방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산주의 정당의 통합을 위한 투쟁에서 카탈로니아연합이 지도적 역할을 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우리 쪽에서 볼 때 제일 어리석은 짓이다. 통합대회에서 마우린은 제1 바이올린을 연주할 준비를 한다. 이 역겨운 위선에 침묵을 지킬 수 있는가? 마우린은 좌익반대파와 싸우면서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의 환심을 사기위해 이들을 흉내내고 있다. 사실, 그는 스탈린주의자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 다: "나에게 당신의 축복을 주세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보조금을 주세요. 그러면 억지 춘향이가 아니라 진심을 다해 볼셰비키-레닌주의자와 싸울 것을 약속합니다.“

마우린의 통합 활동은 스탈린주의자를 공갈 협박하는 한 형태일 뿐이다. 이에 대해 입을 다문다면, 우리는 혁명가가 아니라 정치적 공갈 협박의 수동적인 공범자가 될 것이다. 우리는 공산주의 대오의 진정한 통합을 위한 투쟁을 단 한순간도 소홀하지 않고, 또 공산주의 대오를 우리의 기치로 설득하기 위한 투쟁을 약화시키지 않고 마우린의 역할 즉, 그의 엉터리 '통합'활동을 가차 없이 비판해야 한다.

국제좌익반대파는 지금 곧 활동의 10분의 9를 스페인에 집중해야 한다. 스페인어 주간지와 카탈로니아어 '정기간행물을 발행할 수 있도록, 동시에 팸플릿을 대량으로 배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다른 모든 지출을 줄여야 한다. 스페인 좌익반대파를 최대한 지원하기 위해 예외 없이 다른 모든 지출에 대한 제한을 검토해야 한다.

내 생각으로는 국제서기국도 스페인혁명 문제에 90%의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이 세상에 온갖 종류의 란다우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정말로 잊혀져야만 한다. 단 1분도 허비하는 일 없이 모든 반목, 모든 음모와 음모자를 무시해야 한다.

스페인혁명이 일정에 올라 있다. 가장 중요한문서는 지체 없이 번역되고, 필요한 비판을 받아야 한다. 〈국제회보〉의 다음 호는 모조리 스페인혁명에 충당되어야 한다. 동시에 일련의 조직적 조치를 취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사람과 물질적 수단아 필요하다. 둘 다 모두 찾아내야 한다.

시간을 낭비하는 것보다 더 큰 죄악은 없으며, 있을 수도 없다.

 

1931년 7월 8일

 

 

혁명에서 파업의 역할

 

■ 이 글은 1943년 10월〈제4 인터내셔널〉지에 처음 게재되었다. 〈제4 인터내셔널〉은 미국사회주의 노동자당의 이론잡지이다.

 

이 편지의 목적은 스페인에서 일어나고 있는 폭풍 같은 파업 물결[친滅)공화주의 정당들이 압도적 다수를 획득한 1931년 6월의 국회선거 직후, 전국노동자연맹은 일련의 파업을 지령했다. 정부는 포병대를 출동시켜 파업을 진압하게 했다. 그 결과, 수많은 노동자가 사상 당했다.]에 즈음하여 우리의 견해를 나누려는 것이다. 스페인혁명에 관한 두 번째 팸플릿('스페인혁명과 이를 위협하는 위험')에서 나는 일어날 수 있는 전망 가운데 하나로, 혁명운동이 올바른 지도부 없이 맹렬히 발전하고, 노동자계급을 분쇄하기 위해 반(反)혁명세력이 이용할 수도 있는 폭발로 끝이 난다고 지적한 바 있다. 물론 이 전망은 팸플릿에서 지적한 것처럼, 공산주의자의 역할이 혁명운동을 제지시키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견해 차이가 없다고 확신하지만 나는 이 문제를 더 철저하게 분석하고 싶다. 왜냐하면 이 문제가 커다란 실천적 중요성을 갖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격렬한 힘으로 분출하는 현재의 파업은 어떤 의미로는 그 토대인 혁명 자체의 성격에서 나오는 불가피한 결과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스페인 노동자계급의 압도적 다수는 조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잘 모른다. 새로운 노동자 세대가 자란 독재시기에도 독자적안 정치적: 경험 없이 견뎠다. 혁명은 가장 후진적인, 혹사당하는, 가장 억압받는 근로대중一그리고 이 안에 있는 그 힘一을 각성시킨다. 파업은 근로대중 이 자각하는 형식이다. 파업을 통해 노동자계급의 다양한 층과 그룹 스스로가 서로에게 신호를 보내며 자신의 힘과 적의 힘을 확인한다. 한 계층이 자각하고, 다른 계층에 영향을 미친다. 이 모든 것이 다 절대로 피할 수 없는 현재의 파업 물결을 만든 것이다. 공산주의자는 특히 파업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파업이야말로 혁명의 창조력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오류에도 불구하고, 그 '과도'와 '과장'에도불구 하고 이런 파업을 통해서만 노동자계급은 스스로 일어서고, 스스로를 부대로 조직하고, 스스로를 하나의 계급으로, 살아있는 역사의 힘으로 생각하고, 느끼기 시작한다. 혁명은 결코 지휘자의 지휘봉에 따라 발전하지 않는다, 과도, 오류, 희생은 모든 혁명의 본질인 것이다.

공산당이 노동자에게 "나는 여러분을 지도하기에는 아직 힘이 너무 없다. 그러니까 조금 기다려라. 너무 압박하지 마라. 파업을 통해 싸움을 시작하지 마라. 더 강해지도록 내게 기회를 달라"고 말했다면, 당은 대책 없이 어리석은 짓을 한 것이며, 자각한 대중은 당을 지나쳐버릴 것이다. 따라서 당은 더 강해지기는커녕 오히려 약화될 뿐이다.

여러분이 역사적 위험을 올바르게 예측하더라도 이것은 여러분이 추론만으로 위험을 제거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위험은 여러분이 필요한 힘을 가질 경우에만 제거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힘을 갖기 위해서 공산당은 '초보적' 또는 준(準)초보적 파업운동이 발전하는 투쟁의 장에 진심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를 제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를 지도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 그리고 투쟁의 과정 자체에서 권위와 힘을 얻기 위해서 말이다.

현재의 운동이 무정부적 조합주의에 의해 야기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류일 것이다. 무정부적 조합주의는 아래로부터 조금도 굽히지 않는 압력을 받는다. 조합주의의 지도적 그룹은 운동을 늦추고 싶어 한다. 페스타냐 같은 개인들은 파업을 청산하는 가장 좋은 방법에 대해 고용주나 행정부와 막후에서 협상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이 신사양반들의 대다수는 내일 노동자의 사형집행인으로 판명될 것이며, 러시아 멘셰비키와 같이 자신들이 노동자를 불질한 '파업 열기에 반대하는 설교를 할 것이다.

이 방향을 따라 무정부적 조합주의자 사이에서 분화가 일어날 것이 확실하다. 더 나아가 가장 혁명적인 분파는 조합주의적 개량주의자와 점점 더 충돌할 것이다. 이로부터 좌익 폭동주의자, 영웅적 모험주의자, 개인적 테러리스트 등이 불가피하게 끓어오를 것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는 어떤 종류의 모험주의도 조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파업에 맞서 싸우는 우익이 아니라 혁명적 좌익 조합주의 자가 우리에게 더 가깝다는 것을 사전에 확실히 해야 한다. 이것은 온갖 종류의 모험주의적 요소의 극복을 그만큼 더 쉽게 할 것이고, 곧이어 혁명적 조합주의자가 공산주의자는 합리주의자가 아니라 투사임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

공식 당은 파업 중에 모험주의적 정책을 비난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정보 부족 때문에 이 문제에서 판단이 서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전 시기에 당의 일반적 태도는 이 비난을 아마도 정당화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손을 덴 적이 있는 당이 갑자기 우경화할지도 모른다는 위험이 있다. 가장 큰 불행은 노동자 대중이 페스타냐 같은 조합주의자와 꼭 마찬가지로 공산주의자도 위에서 아래로 노동자에게 독단적으로 지시하고 싶어 하며, 따라서 노동자를 아래로부터 위로 끌어올리려 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요약하면, 긴 안목에서 가장 중대한 6월시기의 위험이 아무런 의심도 없이 그대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산주의자에게 가장 당면한 위험은 추상적인 주장을 하고, '지식인처럼 보이려고하고', 추상적인 말로 구슬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혁명적 노동자는 이를 비관적인 불평으로 간주할 것이다.

좌익반대파는 혁명의 발전에서 생기는 위험은 주의 깊은 경계심에 의해서가 아니라 대담함, 대담함, 더 큰 대담함에 의해서 극복되어야 한다는 것을 단 한순간도 잊어서는 안 된다.

 

1931년 8월 2일

 

 

〈엘 소비에트〉지를 환영한다.

 

■ 이 글은 스페인 좌익반대파의 주간지〈엘 소비에트〉창간에 즈음하여 보낸 인사말이다. 이 주간지 자체는 단명으로 끝났다.

 

친애하는 동지들,

여러분은 주간지 발행을 준비하고 있다. 이것은 중대한 일보전진이다. 이 한 걸음에 뒤이어 즉시 몇 걸음 더 나아가기를 희망하자.

다른 곳에서처럼, 스페인의 공산주의도 우파, 중도파, 좌파 등 3개 분파로 나뉘어 있다. 우파는 그 나라의 조건에 따라 사회민주주의, 노동조합주의나 조합주의 등과 공산주의의 조합을 나타낸다. 다른 나라들에서처럼, 스페인에서도 코민테른의 공식 대표는 중도주의자들 즉,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와 '공산주의적' 기회주의의 여러 양상 사이에서 동요하는 자들 수중에 있다.

코민테른에서 중도주의의 힘은 그것이 소련 국가권력에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이런 현재 상황에서 중도주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적인 경향, 일개 분파일 뿐만 아니라 강력한 관료적 국가기구이기도 하다. 코민테른의 권위뿐만 아니라 그 물질적 자원까지 제멋대로 이용하여 형식적이고, 혼란스럽고, 모순된 정책을 수행함으로써 중도주의는 세계의 노동자계급 전위에게 참혹한 피해를 안겨 주었으며, 이미 몇 번의 혁명을 파국으로 이끌었다.

중도주의 관료집단의 비행 때문에 스페인공산당은 혁명 초에는 비참하기 이를 데 없는 극소수 세력에 지나지 않았다.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은 각국 지부에 잘못된 정책을 강요하는 동시에 자신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허락하지 않는다. 이로 인해 노동자전위와 교육을 방해하고, 독자 적이고 자신 있는 강력한 공산당 건설을 가로막고 있다. 바로 이것이 우리 눈앞에서 매우 강력하게 발전하고 있는 스페인혁명을 위협하는 주된 위험이다.

볼셰비키-레닌주의자(좌익반대파)의 원칙적 입장의 올바름은 거대한 국제적 사태 발전, 특히 스페인혁명의 전진 전체에 의해 강화되어왔다. 혁명의 발전에서 사사건건 허를 찔린 공식 공산당은 우리의 비판에 입각하여, 우리의 원칙적 노선을 이용하여 자신의 오류를 조금씩 교정하고 있다. 왜냐하면 중도주의 자체는 내용이 없고, 따라서 무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볼셰비키-레닌주의 분파에게는 올바른 원칙적 입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것을 매일의 사건에 올바르게 적용해야 한다. 혁명전략은 거기에 합당한 전술을 요구한다.

주간지의 중요성은 그것이 스페인의 좌익반대파로 하여금 현재 일어나고 있는 모든 사건을 대 면하게 하고, 그에 대한 전투적 대답을 즉시 제출하게 한다는데 있다. 주간지 창간으로 스페인의 좌익반대파는 더 높은 단계로 올라설 것이다.

특히 격렬한 격동기에 노동자계급은 일관된 혁명적 입장에 근거해서만 결집될 수 있다. 이것이 스페인 레닌주의자들인 여러분의 역사적 사명이다. 여러분은 2배, 3배, 10배로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볼셰비키-레닌주의자의 목소리가 나라 곳곳에서, 모든 대중집회에서 울려 퍼지도록 해야 한다. 여러분이 명예로 여겨야 할 임무이다. 혁명은 기다리지 않는다. 사태에 뒤처지는 자에게 재앙이 있을 지어다! 나는 여러분이 뒤처지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1931년 9월 29일

 

 

스페인청년에게

■ 이 글은 미국 공산주의자동맹(CLA)의 청년조직인 [청년 스파르타쿠스동맹]의 월간지〈영 스파르타쿠스〉(Young Spartacus) 1933년 3월호에 게재되었다.

 

친애하는 동지 여러분,

여러분이 독자적인 신문 발행에 착수하고 있음을 알게 되어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청년을 교육시키지 않는 혁명적 경향은 성공하지 못하고 사라질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공산주의는 모든 세대가 그 완전한 실현을 요구하는 대단히 중대한 유일무이한 과제입니다. 노동자혁명은 세대 간의 연속성을 필요로 합니다. 이 연속성을 보증하는 것은 청년의 사명입니다. 즉, 여러분의 사명입니다. 마르크스주의는 이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르크스주의의 힘은 과학적 이론과 혁명적 투쟁의 통일에 있습니다. 이 두 레일을 따라 청년 공산주의자의 교육이 진행되어야 합니다. 혁명적 투쟁의 외부에서 마르크스주의를 배운다면, 독서가는 될 수 있어도 혁명가는 될 수 없습니다. 혁명적 투쟁에 참여하더라도 마르크스주의를 배우지 않으면, 위험하고, 불확실하며, 애매모호한 상태에 빠지는 것을 모면하기 어렵습니다. 마르크스주의자로서 마르크스주의를 배운다는 것은 계급의 삶과 투쟁에 참여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한 것입니다. 혁명이론은 실천에 의해 검증되고, 실천은 이론에 의해 명확해집니다. 투쟁을 통해 획득된 마르크스주의의 진리만이 지력(知力)이 되고, 생명력을 갖게 됩니다.

며칠 전에 소비에트 연방으로부터 받은 편지에 따르면, 끔찍한 박해, 체포, 추방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조직과 새로운 좌익반대파(볼셰비키-레닌주의자)그룹이 모든 산업 중심지에서, 특히 청년 사이에 결성되고 있다고 합니다. 혁명이론에 의지하고 있는한, 어떠한 탄압도 혁명적 연속성을 단절시킬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신문이 이론과 실천의 통일이라는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기를 나는 진심으로 바라고 있습니다. 이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류를 저지를 것입니다. 그러나 약간의 혁명적 경험을 가진 노련하다는 우리 역시 필요 이상으로 자주 오류를 저지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오류로부터 배울 것입니다. 제2보, 제3보는 제1보보다 확실해질 것입니다.

나는 공장과 광산에서 투쟁을 전개하다 그 대부분이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의 감옥이나 유형수용소에 흩어져 있는 우리의 동지인 수많은 러시아 볼셰비키-레닌주의자들을 대표하여 스페인의 청년 노동자 공산주의자들에게 마음속에서 우러난 인사를 보냅니다.

L.D. 트로츠키 드림

1932년 6월 13일

 

 

스페인의 '코르닐로프들'과 스페인의 '스탈린주의자'

 

■ 이 글에서 트로츠키는 스페인혁명이 비교적 완만한 템포로 발전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실제로 스페인혁명이 정점으로 치달은 것은 이로부터 4년이 지난 뒤였다.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프라우다〉지는 독일에 대해서 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이를 만회하려고 9월 9일자에는 스페인에 관한 기사를 게재했다. 이 기사는 매우 교훈적이다. 분명히 이 기사는 스페인혁명을 간접적으로 밖에 조명하고 있지 않지만 그 대신에,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의 정치적 경련을 선명하게 비추고 있다.

이 기사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1월 총파업의 패배 뒤, 트로츠키주의자(여기에는 어떤 의식적(儀式的) 모욕이 담겨있다-트로츠키)는 혁명이 패배했으며, 퇴조의 시기가 왔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사실인가? 올해 1월에 혁명을 장사지낼 준비가 된 혁명가들이 스페인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들은 좌익반대파와 아무런 공통점도 없고, 또 있을 수도 없다. 혁명가는 객관적인 징후가 의문의 여지를 남기지 않게 될 때까지, 혁명기가 끝났음을 인정할 수 없다. 볼셰비키-레닌주의자가 아니라 가련한 인상주의자만이 의기소침해진 기분에 근거하여 비관적 예측을 할 수 있다.

우리는 '스페인혁명과 이를 위협하는 위험'이라는 팸플릿에서 스페인혁명의 일반적 발전 경로와 그 가능한 템포 문제를 검토했다. 1917년의 러시아혁명은 그 정점에 이르는데 8개월이 걸렸다. 그러나 스페인혁명도 이 정도의 지속기간이 필수적이라고 말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 프랑스대혁명의 경우, 거의 4년이 다 되어서야 비로소 자코뱅에게 권력을 부여했다. 프랑스혁명이 완만하게 발전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자코뱅 당 자체가 혁명의 불꽃 속에서만 형성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이러한 조건은 스페인에도 존재한다. 공화주의 혁명 시기에 공산당은 아직 유아기에 있었다. 다른 이유뿐만 아니라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스페인 혁명이 아마도 의회주의적 단계를 포함한 일련의 단계를 거쳐 완만하게 발전할 것으로 생각했다.

동시에 우리는 혁명의 조수는 밀물과 썰물이 있음을 상기시켰다. 덧붙이자면, 지도부의 수완은 혁명의 쇠퇴기에 공세를 명령하지 않는 것, 그리고 상승기에 퇴각을 명령하지 않는 것에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특히 혁명의 특수한 '국면적' 동요를 그 기본적인 리듬과 혼동하면 안 된다.

1월 총파업의 패배로 인해 스페인에서 혁명이 부분적인 쇠퇴기에 접어들었다는 것이 분명했다. 수다쟁이와 모험가만이 혁명의 쇠퇴를 무시할 수 있다. 그러나 겁쟁이와 도망자만이 부분적인 쇠퇴를 이유로 혁명의 청산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 혁명가는 마지막에 전장(戰場)을 떠난다. 아직 살아있는 혁명을 장사지내는 혁명가는 그 누구든 총살되어 마땅하다.

스페인혁명의 부분적인 퇴각과 소강상태가 반(反)혁명을 촉진했다. 중대한 투쟁에서 패배하고 나면 대중은 퇴각하여 사실상 침잠한다. 충분히 단련되지 않은 지도부는 대개 패배의 정도를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이 모든 것은 반(反)혁명 진영의 과격파를 부추긴다. 이것이 산후르호 장군이 기도한 왕당파 쿠데타의 정치적 메커니즘이다. 그러나 특히 날카로운 채찍질 소리처럼, 대중을 일깨우는 것은 인민의 불구대천의 원수가 불쑥 무대로 뛰어오르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 혁명적 지도부는 기습을 당하기 십상이다.

〈프라우다〉지는 '장군들의 반란이 신속하고 손쉽게 진압되었다는 것은 혁명의 힘이 약화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8월 10일의 사태에서 혁명적 고양은 새로운 추진력을 획득했다'고 쓰고 있다. 이것은 완벽한 사실이다. 이 기사 전체에서 이 구절만이 유일하게 올바르다고 말할 수도 있다.

스페인의 공산당은 이 사태에 기습당했는가? 〈프라우다〉지의 기사만을 놓고 볼 때, 긍정적으로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기사는 '노동자가 장군을 패배시키다'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왕당파의 쿠데타에 대한 노동자의 혁명적 개입이 없었다면, 분명히 산후르호가 아니라 사모라가 추방당했을 것이다. 바꿔 말하면, 노동자는 자신의 영웅적 행위와 생명을 희생하여 공화주의 자본가계급이 계속 권력을 유지하도록 도왔던 것이다. 〈프라우다〉지는 이를 못 본 체하면서 '공산당은… 현재의 반(反)혁명적 정부를 정말로 털끝만큼도 지지하지 않는 식으로 우익 쿠데타에 대항하여 싸웠다'고 쓰고 있다.

공산당이 무엇을 의도하고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이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 노력의 결과이다. 공화주의자가 왕당파를 자극하지 않으려고 애썼음에도 불구하고, 유산계급의 왕당파는 공화주의자를 제거하려고 했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이 등장했다. '노동자가 장군을 패배시켰다.' 왕당파가 추방되고, 공화주의 자본가계급이 권력에 머물렀다.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공산당은 어떻게 '현재의 반(反)혁명적 정부를 털끝만큼도 지지'하지 않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인가?

이상의 주장을 볼 때, 공산당은 왕당파와 공화주의 자본가계급의 충돌에서 손을 떼야 한다고 이해하는 것인가? 이러한 정책은 자살행위가 될 것이다. 예컨대,1923년에 불가리아 공산주의자들의 경험을 통해 이미 보았다.[반동 짠코프(Tsankov)가 스탐불리스키(Stambuliski)의 '농민' 정부를 전복한 1923년 9월에 불가리아공산당은 중립을 지켰다. 기회를 놓치고 난 뒤에 공산당은 짠코프에 대항하여 봉기를 일으켰지만 분쇄되었다.] 스페인 노동자스스로가 권력을 장악할 만큼 강력했을 경우에만 왕당파와의 결정적인 투쟁에 임하면서도, 자신의 적인 공화주의 자본가계급을 한순간도 돕지 않을 수 있다. 1917년 8월의 러시아 볼셰비키 당은 1932년 8월의 스페인공산당보다 훨씬 더 강력했다. 그러나 실제로 볼셰비키당은 아무리 해도 코르닐로프에 대한 투쟁에서 직접 권력을 획득할 수 없었다. 코르닐로프주의자에 대한 노동자의 승리 덕분에, 케렌스키 정부는 2개월 더 연명했다. 볼셰비키 수병 부대가 코르닐로프에 대항하여 케렌스키의 동궁을 지킨 것을 다시 한 번 상기하자.

스페인 노동자계급은 장군들의 반란을 압도할 만큼 강력했지만, 권력을 장악하기에는 너무도 약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자의 영웅적 투쟁은 공화주의 정부를一일시적일뿐일지라도一강화 시킬 수밖에 없다. 사태에 대한 분석을 상투적 어구로 대체하는 경망스 러운 주관주의자만이 감히 이를 부정할 것이다.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의 불행은 독일에서와 마찬가지로 스페인에서도 적(enemy) 진영 내에 존재하는 실제적 모순, 즉 살아있는 계급과 그 투쟁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파시스트' 프리모 데 리베라가 '사회파시스트'와 동맹을 맺고 있는 '파시스트' 사모라로 대체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론을 가지고 있으니까 왕당파와 공화주의자의 충돌과 관련한 대중의 개입이 스탈린주의자를 깜짝 놀라게 했던 것도 뜻밖의 일은 아니다. 고유한 본능에 따라 계급투쟁에 몸을 던진 대중은 공산당을 투쟁에 끌어들였다. 장군들에 대한 노동자의 승리 뒤에,〈프라우다〉지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조각들을 이어 붙이기 위해 자기 이론의 파편들을 긁어모으기 시작했다. 이것이 공산당은 부르주아 정부를 '털끝만큼도 지지'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어리석은 허장성세의 주요한 의도이다.

실제로 공산당은 정부를 객관적으로 지지했을 뿐만 아니라 기사 자체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주관적으로도 정부와 차별화 할 줄 몰랐다.. 이 점에 대해서 기사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모든 당 세포나 모든 지방조직에서, 공산당은 자신의 진면목을 충분히 보여주거나, 스스로를 사회파시스트나 공화주의자의 책략에 대치시키는 데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것이 성공했으면, 당은 왕당파뿐만 아니라 왕당파의 피난처인 "공화주의" 정부와도 싸우고 있음을 증명했을 것이다.' 모든 스탈린주의 문서에서 나타나는 '모든 세포에서는 아니다', '모든 조직에서는 아니다' 등의 말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이것들은 사상의 비겁함을 은폐하려고 고안된 것이다. 1928년 2월 15일, 스탈린은 처음으로 쿨락은 좌익반대파의 고안물이 아님을 인정했다. 그는 〈프라우다〉지에서 '일부 부문에서, 일정 지역에서....' 쿨락이 출현했다고 말했다.

오류는 명령을 실행하는 사람들에게서 발생하는 것으로 인정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분명히 '일부 지역에서'만 발생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당은 그 지방조직의 합과 같을 뿐이다.

실제로 방금 든 인용문은 그 관료적 발뺌을 제거해버리면, 다음을 의미한다 : 왕당파와의 투쟁에서 공산당은 '그 얼굴을 드러낼' 줄도 몰랐다. 당은 '사회파시스트'나 공화주의자에 대해서 스스로를 대치시킬 줄도 몰랐다. 바꿔 말하면, 당은 부르주아나 사회민주주의 정부에 대해 일시적인 군사적 지지를 보내는 것뿐만 아니라 투쟁 중에 정부를 희생시켜서 스스로를 강화시킬 줄도 몰랐다.

스페인 공산당의 허약함一코민테른 추종자의 정책으로 인한一은 1932년 8월 10일에 노동자계급이 권력에 이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동시에, 당은 일시적인 공동전선의 좌익으로서 투쟁에 참가하는 것을 피할 수 없게 했으며, 실제로 참가했다. 이 공동전선의 우익에는 공화주의 자본가계급이 참가하고 있었다. 이 연립의 지도부는 투쟁에 재갈을 물리고, 대중을 억누를 경우에는 그 '얼굴'을 드러내는 것을 단 한순간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장군들에 대해 승리를 거두자마자 공산당과의 투쟁으로 나아갔다. 스페인의 스탈린주의자에 관한 한, 러시아 스탈린주의자의 증언에 따르면, '당은 왕당파뿐만 아니라 "공화주의" 정부와도 싸우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없었다.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사태 직전에 당은 자신의 모든 적을 같은 색깔로 칠해버렸다. 투쟁의 최고점에서 당은 스스로 적의 색깔로 염색했으며, 공화주의자와 사회민주주의자에게 일시적으로 지도적 지위를 잃었다. 관료적 중도주의의 기원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만이 이것에 깜짝 놀랄 것이다. 이론적으로(여기서 이 말을 쓸 수 있다면), 관료적 중도주의는 정치적•계급적 구별을 하는 것에 대한 일반적 거부로 스스로를 기회주의적 일탈로부터 보호한다. 후버, 픈 파펜, 반더벨드[하버트 후버(Herbert Hoover, 1874-1964): 미국의 공화당 정치가. 1929~32년 미국대통령. 프란츠 폰 파펜(Franz von Papen, 1879-1969):프로이센의 토지귀족인 융커의 대표로, 가톨릭중앙당의 지도자. 1932년 6월 1일 힌덴부르크에 의해 수상에 임명되었다. 7월 20일 쿠데타를 강행, 프로이센의 브라운 사회민주당 정부를 해산시키고, 자신이 프로이센 총독으로 취임했다. 1933년 1월 히틀러 내각의 부수상이었다.

에밀 반더벨드(Emile Vandervelde, 1866-1938):벨기에노동당과 제2인터내셔널의 지도자. 전시 내각에 입각한 최초의 사회주의자로, 국무장관, 식량장관, 육군장관 등을 역임. 베르사유 조약의 서명자. 1925~27년에 외무장관으로 로카르노 조약 체결에 진력했다.]

간디, 라코프스키도 모두 '반(反)혁명가'이고, '파시스트'이고, '제국주의의 하수인'이다. 그러나 실제로 사태의 돌연한 전환이나 새로운 위험이 발생할 때마다, 스탈린주의자는 어떤 적에 대한 투쟁에 참가하고, 다른 '반(反)혁명가'나 '파시스트'에게 무릎 꿇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전쟁의 위험에 직면하자, 스탈린주의자는 암스테르담에서 외교적이고, 타산적이며, 줏대 없는 결의문에 찬성했다. 이 결의문은 폰 쇠나이히장군[파울 폰 쇠나이 히(Paul von Schoenaich, 1886~1954): 독일의 융커 출신 해군장교, 평화주의자로 변신해 소련에 호의적인 입장을 보였다.], 프랑스의 프리메이슨, 간디를 최고의 이상으로 삼고 있는 인도의 부르주아 파텔[V.J.파텔(Valabhbhai Patel,1877-1950):인도국민회의 의장. 인도의 독립운동을 지도했다. 1947년, 독립 후 네루정부의 내무장관.]이 제의했다. 독일 제국의회에서 공산당은 국가사회주의자(나찌) 대통령의 선출을 저지하기 위해서, '사회파시스트' 대통령에게 찬성 투표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느닷없이 선언했다. 즉, 공산당은 스스로를 완벽하게 '보다 작은 악'이라는 근거위에 위치 짓는다. 스페인에서는 위기의 순간에 공화주의 자본가계급에 저항할 수 없음을 드러냈다. 여기서 우리가 다루고 있는 것은 우발적인 오류나 "몇몇' 세포가 아니라 관료적 중도주의의 유전적 결함이라는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두 착취자 진영 사이의 충돌에 개입한 노동자대중은 스페인혁명의 중대한 전진을 촉진했다. 아사냐 정부는 대지주의 토지 몰수를 명령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몇 주 전에 이 조치는 은하수만큼이나 멀리 떨어진 것이었다. 만약 스페인공산당이 현실의 계급과 그 정치조직 사이의 차이를 주목했다면, 만약 사태의 실제적 발전을 예측했다면, 만약 적들의 진짜 죄와 범죄행위를 비판하고 폭로했다면, 대중은 아사냐 정부의 새로운 농지개혁을 공산당 정책의 영향으로 간주하고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우리는 공산당의 지도하에 틀림없이 더욱 힘차게 전진할 것이다.

만약 독일공산당이 정세 전체가 요구하고 있던 공동전선의 길로 확신을 갖고 단호하게 들어섰다면, 만약 사회민주당을 그 '파시즘'에 대해서가 아니라 보나파르트주의와 파시즘에 대한 투쟁에서 보인 그 취약함, 우유부단함, 비겁함에 대해서 비판했다면, 대중은 공동투쟁과 공산당의 비판으로부터 뭔가를 배워도 배웠을 것이며, 더욱 단호하게 공산당에 동조했을 것이다.

그러나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현재 정책에 비추어, 대중은 사태가 새로운 전환을 이룰 때마다, 계급 적(enemy)이 공산당의 예측대로 행동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결정적 순간에는 공산당도 자신이 가르쳐온 모든 것을 포기한다고 확신했다. 이것이 바로 공산당에 대한 신뢰가 증대되지 않은 이유이다. 그리고 아사냐의 우유부단한 농지개혁이 정치적으로 노동자계급이 아니라 자본가계급을 이롭게 할 뿐이라는 점에서 일부 위험을 불러일으키는 이유이다.

예외적으로 유리한 상황에서는 수준 미달의 지도부를 가진 노동자계급도 승리할 수 있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유리한 상황은 좀처럼 드물다. 노동자계급은 그만큼 유리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승리를 획득하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게다가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의 지도부는一 모든 나라의 경험이 보여주는 것처럼, 그리고 매월의 사태가 뒷받침하고 있는 것처럼一 공산당이 자기 대오를 강화하고, 능동적으로 일을 처리하고, 적(enemy)이나 준(準)적 (semi-enemy), 그리고 동맹세력을 올바르게 구별하도록 유리한 상황을 이용하지 못하게 한다. 바꿔 말하면,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은 노동자혁명의 승리로 가는 길에 놓인 가장 중대한 내부적 방해물이 되고 있다.

1932년 9월 20일

 

스페인 좌익반대파의 문제들

 

■ 이 글은 1933년 2월 4~8일 파리에서 열린 국제좌익반대파의 국제예비회의에서 채택된 '국제좌익반대파, 그 임무와 방법'(The International Left Opposition, Its Tasks and Methods)에 포함된 결의문의 일부이다. 1933년 3월 31일 미국공산주의자동맹(CLA)의 〈내부회보〉(제11호)에 처음 게재되었다. '국제좌익반대파, 그 임무와 방법' 전문은 레온 트로츠키 저작집(1932~33)에 실려 있다.

 

스페인혁명은 공산주의가 급속히 발전할 수 있는 대단히 유리한 객관적 조건을 창출했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든 훈련된 중핵의 부족은 공식 당은 물론이고 좌익반대파에게도 정말로 역사적인 사태의 이용을 매우 어렵게 했다. 비록 스페인 지부가 그 수에서 많은 다른 지부를 능가하지만一이는 틀림없이 (대중의) 혁명적 고양 덕분일 것이다一그 이데올로기적 통일성과 지도부의 성격은 가장 신통찮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이유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스페인 반대파의 지도적 중핵들의 가장 중요한 오류를 확인해야 한다.

노동자계급이 볼셰비키-레닌주의자의 영향력이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정상적인 환경을 제공하고 있는 카탈로니아에서 지도적 동지들은 변명할 도리가 없는 방식으로 시간을 낭비했다. 즉, 핵심적인 소수라도 공공연히 자신의 기치를 내걸고 입장을 분명히 밝히는 대신에, 이들은 혁명의 가장 결정적인 몇 달 동안 원칙과 숨바꼭질을 했다. 처음에는 소부르주아 민족주의자이자 치졸한 미사여구나 늘어놓는 P}우린과 외교적 흥정을 하다가 아예 그의 꽁무니를 붙들고 늘어졌다.

나머지 지역의 사정도 더 낫지 않았다. 좌익반대파는 공식 당을 무시하고, 중핵들의 마르크스주의 교육을 혁명적 감상주의로 대신한 반면에, 오랫동안 자신과 우익반대파 그룹 사이에 필요한 구별을 짓지 않았다.

참으로 유해한 것은 스페인의 혁명적 전통에서 가장 불완전한 측면의 영향력에 굴복한 지도적 동지들이 국제적 경험을 무시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말로는 좌익반대파와의 연대를 선언하면서도 실제로는 직간접적으로 모든 얼간이와 이탈자들(란다우, 로스메르, 밀[밀(M. Mill)은 주로 러시아어에 정통하다는 이유로 러시아 반대파가 국제좌익반대파의 행정서기로 발탁한 인물이었다. 책략과 개인적 음모 때문에 1932년 서기직에서 해임된 뒤, 스탈린주의의 첩자가 되었다. 아이작 도이처가 『추방당한 예언자』에서 그를 미국인이라고 했지만 그는 실제로 우크라이나인이었다. 그의 본명은 오훈(Okhun)이었다.]등)을 지지했다는 사실이다.

스페인 지부는 자신의 최근 협의회에서 분파나 독자적 정당 문제에 대해 모호한 입장을 취했다. 아무리 줄잡아 말하더라도 의회나 다른 선거에서 자신의 후보자명부 제기에 찬성한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결정은 좌익반대파의 정책과 반대되며, 실제로 여전히 이상적이지만 역시 유해한 시위에 전혀 대비하지도 않았다.

볼셰비키-레닌주의자와 소원한 길을 가고 있는 스페인 반대파의 지도자들은 자기 조직의 명칭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기까지 했다. '좌익 공산주의자'라는 명칭을 가정함으로써一이론의 관점에서 분명히 잘못된 명칭一스페인 동지들은 국제좌익반대파와 모순을 빚고 있으며, 동시에 레닌분트[레닌분트(Leninbund)는 1927년 독일공산당에서 제명된 루트 피셔, 아르카디 마슬로프, 후고 우르반스가 결성한 조직이다. 레닌분트는 우르반스가 반대파에 호의적인 사람들을 내쫓고 지도부를 장악한 1930년까지 좌익반대파에 가까운 입장을 취했다.]나 로스메르 그룹 등이 채택한 명칭과 거의 같다. 진정한 혁명가라면 이런 중요한 조치가 정치적 이유도 없이 우연히 취해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동시에 마르크스주의자라면 원칙적인 문제에 대한 자신의 계획을 솔직하게 밝히지 않지만 외교적 흥정이나 책략에서 위안을 구하는 정책에 찬성하지 않을 것이다.

국제협의회가 모든 그룹에게 분리나 제명을 포함하여 좌익반대파의 지지자임을 솔직하게 밝힐 것을 요구하자, 스페인 반대파는 좌익반대파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으며, 계속해서 국제좌익반대파의 진정한 발전과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따라서 좌익반대파의 내재적 논리에 얼마나 적게 흡수 동화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스페인 동지들은 자신의 비난에 대해 충분한 증거를 제시하려고도 않은 채, 다른 지부의 잘못된 조직적 방침을 비난하지만 동시에 사실상 자기 방식의 완전한 기만성을 증명한다. 중앙위원회 안의 두 그룹 사이에서 갑자기 일어난 투쟁은 스페인 지부를 분열 직전에 이르게 했다. 전체 조직은 두 경쟁 그룹의 어느 쪽도 이제까지 이 격렬한 투쟁[라크르와는 1932년 3월 스페인 좌익반대파의 총서기를 사임했다. 11월에 모든 관찰자에게 명확하지 않았던 쟁점을 둘러싸고 그와 닌 사이에 투쟁이 일어났다. 라크르와는 스페인지부 지도부에 대한 트로츠키의 비판을 옹호하는 회보를 발간하기 시작했다. 1933년 4월, 라크르와 그룹은 해산했다. 그리고 라크르와는 '공금 횡령'을 이유로 스페인 지부에서 제명되었다.]의 원칙적인 근거를 정식화할 수 없었기 때문에 완전히 허를 찔렸다.

자신의 현재 이데올로기적 토대에 근거하는 한, 스페인 지부는 더 이상 발전할 수 없다. 오류가 이미 교정된, 원칙적으로 확고하고 혁명적 방식으로 조직된 스페인 조직의 건설은 오랜, 그리고 체계적인 활동의 결과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분명한 주의를 기울이면서, 예비회의는 다음과 같은 즉각적인 조치를 제안한다.

ㄱ) 논쟁 중인 문제에 대한 모든 중요한 국제적 문서는 스페인어로 번역되어야 하며, 지부의 모든 성원들에게 숙지되어야 한다. 사실을 은폐하는 것은 중지되어야 한다. 여기서 설명하는 것은 특히 밀의 경우에 적용된다. 스페인 지부의 지도자들은 분명히 국제반대파에 반하여 부도덕한 인물을 지지했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국제반대파에 대한 천부당만부당한 암시에 동의한 오류를 옹호하고 있다.

ㄴ) 중앙위원회 안에서 경쟁하는 그룹들 모두 부도덕한 분리나 조직적인 대책에 대한 생각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논쟁되고 있는 문제에 대한 토론이 정상적인 경로를 통해 진행되고, 예외 없이 조직의 모든 성원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필요한 준비를 해야 한다.

ㄷ) 내부 토론은 회보를 통해 계속되어야 한다. 회보 편집부는 경쟁 그룹 각각에 대해 (공동 편집위원회를 통해) 가장 완전한 중립성을 보장해야 한다.

ㄹ) 국제좌익반대파의 모든 원칙적인 문제는 의제가 되어야 하며, 공감, 반감, 개인적 암시가 분명한 정치적 입장을 대신하게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

ㅁ) 종합적인 토론은 새로운 전국협의회의 기초를 마련해야 한다.

예비회의는 서기국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 스페인 지부의 내부적 전개과정을 지켜볼 것을 지시한다. 아울러 좌익반대파의 임무와 방법에 완전 일치하는 위에 명시된 조치와 다른 적절한 조치를 스페인 지부가 수행하도록 도울 것을 지시한다.

1932년 12월

 

 

스페인 좌익반대파의 모든 성원들에게 보내는 편지

 

친애하는 동지들,

나는 며칠 전에 전국 반(反)파시스트 회의 소집을 위한 조직위원회에 보내는 바르셀로나 중앙위원회의 답변서 사본을 받았습니다. 1933년 4월 5일자로 된 이 편지는 공산주의의 대의에 헌신하는 스페인 반대파의 모든 성원들이 검토해야 하는 문서입니다.

국제 반(反)파시스트 대회나 전국 반(反)파시스트 회의의 주안점은 무엇입니까? 좌익반대파(볼셰비키-레닌주의자)는 암스테르담 반전대회에 대한 문서나 기사들, 그리고 대회이후 발표한 다수의 선언문들에서 이 문제를 상세하게 설명했습니다.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은 특히 파시즘과 전쟁에 반대하는 노동자 공동전선을 불가능하게 한 잘못된 정책을 통해 공산주의 노동자 전위를 고립시켰습니다.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의 파산을 위장하기 위해 코민테른은 이따금 공동전선을 본뜬 가면극을 준비합니다. 무기력한 개인, 평화주의자, 좌익 민주주의자 등과 산재한 공산주의 노동자 그룹을 긁어모은 코민테른은 순전히 연극적인 대회, 협의회, 위원회를 '대중의 공동전선'과 같은 것이라고 상상합니다.

한때 우리 자신도 암스테르담 반전대회에 참여했지만 오직 이 대회의 위선을 폭로하기 위해, 따라서 공산주의 노동자의 주의를 올바른 방향으로 돌리기 위해서였을 뿐입니다. 말할 필요도 없이 다가올 반(反)파시스트 대회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이와 같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바르셀로나 중앙위원회는 볼셰비키-레닌주의자의 입장과 정반대되는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4월 5일자 편지는 마차 공동전선 정책의 모조품이 아니라 실제로 공동전선과 관련된 것처럼, 좌익반대파가 '공동전선'에 합류했다고 공식적으로 조직위원회에 알리고 있습니다.

스탈린주의자의 현실 미화를 거드는 바르셀로나 중앙위원회의 편지는 견해차이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반(反)파시즘 공동전선이 어떻게 실현될 것인지에 대해서 막연한 말만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노동자 대중조직과 관련하여 진실인 이런 기본적인 견해가 부르주아 개인들, 평화주의자, 민주주의적 작가 등과 관련해서는 그 의미를 상실합니다. 게다가 바르셀로나 중앙위원회의 편지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평화주의자는 정확히 혁명적 공산주의자가 할 수 있는 것만큼 전쟁에 반대 할 수 있으며,더 그럴 수도 있다. 이것은 이런 사람들이 자신의 적인 사람들에 대항하는 공공전선에서 발견되기 때문에 더할 나위 없이 논리적이다.“

이런 말이 스스로를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의해 작성되었으리라고 믿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마르크스주의자는 국제좌익반대파의 10년간의 활동, 특히 암스테르담 대회에 관한 그 선언문은 말할 것도 없고, 레닌의 정책과 코민테른의 첫 4개 대회의 결정에 대해 일종의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평화주의자가 어떻게 혁명적 공산주의자보다 전쟁에 대해 더 중대한 적일 수 있습니까?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정치적 경험은 우리에게 평화주의는 제국주의의 도구라는 점을 가르쳐줍니다. 평화주의자는 평화적인 시기 중에 전쟁을 비난합니다만 전쟁이 터지면 자신의 고립과 무기력에 몰려서 군국주의에 얌전하게 굴복합니다. 그리고 대개 그 추종자로 둔갑합니다. 같은 생각이 반(反)파시즘 투쟁에도 적용됩니다.

공동전선 정책의 목적은 사회민주주의와 조합주의 노동자를 계급 적에 대항하는 공동투쟁 과정을 통해 공산주의 노동자(그리고 공산주의)와 화해시키는 것입니다. 부르주아 진영에서 떨어져 나온 개인들에 관한 한, 공동전선은 중요성이 제일 떨어지는 문제입니다. 이들 가운데 가장 나은 사람은 노동자, 더 확실하게는 노동자 공동전선 정책이 올바르게 수행 되는 경우에, 따라서 대중이 굳건하게 단결될 경우에 노동자를 지지 할 것입니다. 개별 유명 인사를 얻고자 대중적 정책을 포기하는 것은 최악의 모험주의이자 정치적 사기입니다.

스탈린주의 관료집단과 개별 부르주아 사이의 동맹이라는 견해 자체를 폭로하는 대신에 바르셀로나 중앙위원회는 조직위원회가 중앙위원회와 꼭 같이 대회의 임무를 바라본다고 신뢰를 표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중앙위원회는 '기꺼이' 자신의 '충실한 협력'을 제공합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외교적 흥정입니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 동료와 우리와 생각을 공유하는 사람들은 속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왜 마르크스주의자가 최대한의 명료성을 요구하는 이와 같은 문제에 대해서 외교적 흥정에 말려들어야 합니까? 아닙니다. 누구라도 노동자 정책에서 중요한 이런 문제에 대해서 바르셀로나 중앙위원회가 마르크스주의와 완전히 반대되는 입장을 가진 것이라고 결론내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국제좌익반대파(볼셰비키-레닌주의자)의 기본적 견해와 원칙에 반대하는 지도적인 스페인 동지들의 투쟁은 어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지난 3년 동안 중요한 스페인 문제나 국제 문제에 대해 지도적인 스페인동지들이 올바른 입장을 지킨 적이 거의 없었다고 과장 없이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오류는 언제든 범할 수 있으며,청년조직에서는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조직, 무엇보다도 그 지도자들은 오류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이때 조직은 전진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불행한 일은 지금 스페인 반대파 중앙위원회 동지들이 쟁점에 대한 토론을 조직화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대신에 이들은 모든 경우에 견해 차이에 대한 원칙적인 토론을 개인적인 공격과 비열하고, 무의미한 비난으로 대신합니다. 물론 닌 동지 그룹과 라크르와 동지 그룹 사이의 투쟁은 자기 자신에게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닌, 페르센 등 그룹의 투쟁은 국제좌익반대파 전체에 대항하여 수행되고 있습니다. 닌 그룹이 사사건건 위반하고 있는 마르크스주의의 가장 근본적인 원칙은 (이들보다) 백배나 더 중요합니다.

어떤 분파투쟁에서도 개인적 갈등과 상호비난이 일어납니다. 즉, 피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순전히 개인적인 에피소드, 비난, 공감, 반감에 근거하여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결정하는 혁명가는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이러한 방식은 마르크스주의의 원칙 수준으로 올라설 능력이 없는 소부르주아 급진주의자의 전형적인 특징입니다. 소부르주아의 말다툼은 사태를 올바로 파악할 수 없도록 만들고, 따라서 대단히 유리한 객관적 조건에도 불구하고 전체 조직의 발전을 마비시키면서 오늘날까지 스페인 반대파 지도부를 타락시키고 있습니다.

진정한 볼셰비키-레닌주의자인 스페인 반대파의 일반 성원들이 이 막다른 골목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개인적 말다툼의 앙금을 털어버리고, 그 장점에 근거하여 정치적 견해 차이를 검토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견해 차이의 전체 역사를 검토해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먼저 부도덕한 중앙위원회의 1933년 4월 5일자 편지를 토론의 중심에 배치해야 합니다. 스페인 반대파의 모든 성원들이 한편으로 바르셀로나와, 다른 한편으로 파리, 브뤼셀, 베를린, 비엔나, 뉴욕 등등 사이의 끊임없는 갈등의 근원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바르셀로나 중앙위원회는 반(反)마르크스주의 입장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꿋꿋하게 포기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 편지를 포함하여 나는 스페인 지부의 모든 성원들에게 호소합니다. 왜냐하면 지난 3년에 걸친 지도적인 스페인 동지들과 상호 이해를 이루기 위한 나의 시도가 결과적으로 이룬 것이 전혀 없지 않기 때문입니다.

공산주의자의 인사를 보내며.

1933년 4월 24일

 

 

통일노동자당의 배신

 

■ 이 글은 1936년 2월 통일노동자당이 인민전선의 선거강령 협정에 참여한 것을 '정치적 배반'으로 간주하고 엄중하게 비판한 것이다. 이 선거강령은 혁명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애매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공산당부터 사회당, 부르주아 공화주의 정당까지 참여했다. 이는 분명히 러시아 2월 혁명 이후에 멘세비키가 범한 것과 같은 성질의 정치적 선택이었다. 아울러 제4 인터내셔널 스페인 지부는 트로츠키가 이 글에서 예상한 것과는 반대로 어떠한 대중적 기반도 획득하지 못했다.

 

언제나 어수선했던 스페인의 '좌익 공산주의자' 조직은 수없이 좌우로 동요한 끝에 우린의 카탈로니아연합과 중도주의적 강령에 의거한 '마르크스주의(?)통일'당으로 통합되었다. 이 명칭에 속은 우리의 일부 잡지는 이 당이 마치 제4 인터내셔널에 가까워지고 있던 것처럼 썼다. 어수룩한 상상력에…의지하여 자신의 힘을 과대평가하는 것만큼 위험한 것도 없다. 이 때문에 현실이 잔혹한 환멸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말리지 못하는 것이다!

신문보도에 따르면, 스페인의 모든 '좌익' 정당들一부르주아나 노동자계급 정당들 모두一이 공통된 강령에 근거하여 선거블록을 맺었다. 이 강령은 사실상 프랑스 인민전선의 강령이나 그 밖의 같은 유형의 사기 강령과 결코 다르지 않다. 강령에서는 '정치•경제제도의 영향으로부터 사법의 독립'(자본의 영향으로부터 자본주의적 사법의 독립!)이나 '판례 원칙'(!)의 엄격한 지지뿐만 아니라 현법상의 권리를 보장하는 재판소의 개혁'이라는 조항도 볼 수 있다. 이와 별 다를 바 없는 조항이 더 나열되어 있다. 강령은 선거블록의 공화주의 자본가계급이 토지의 국유화를 거부했지만 '그 대신에' 농민을 위하여 통상적인 값싼 약속(신용대부, 높은 농산물 가격 보장 등)에 협력하기로 했음을 알려준다. 또한 강령은 '산업의 부흥(!)'과 중소기업, 소상인의 보호를 선언하고 있다. 그 다음에 어김없이 '은행에 대한 통제'가 뒤를 잇고 있는데一 강령 원문에 따르면, 부르주아 공화주의자가 노동자 통제를 거부하기 때문에一이는 결국… 아사냐나 그와 비슷한 신사양반들 같은 의회의 대리인을 통하여 은행가 자신이 은행을 통제하는 것이 된다. 마지막으로, 스페인의 외교 정책은 '국제연맹의 원칙과 방법'에 준하여 규정된다. 누락된 것이 있는 가?

이 수치스런 문서에 서명한 것은 두 좌익 부르주아정당, 사회당, 노동자총연합, 공산당(물론!), 사회주의청년동맹(저런!), '조합주의당'(페스타냐),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르크스주의통일노동자당'(후안 안드라데)이다.

이 정당들의 대부분은 혁명 고양기 중에 스페인혁명의 선두에 서 있었으며, 혁명을 배신하고 유린하기 위해서 가능한 한의 일을 다 했다. 새로운 양상은 마우린-닌-안드라데의 당이 서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구 스페인 '좌익 공산주의자'는 '좌익' 자본가계급의 단순한 수행원이 되었다. 이보다 더 불명예스러운 몰락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몇 개월 전, 마드리드에서 후안 안드라데의 책 『개량주의적 관료와 노동운동』(The Reformist Bureaucracy and the Labor Movement)이 출판되었다. 이 책은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등의 저자들을 인용하면서 노동관료의 근본적 타락 원인을 분석하고 있다. 후안 안드라데는 자신의 책에서 나를 두 번 언급하면서 매번 열렬한 헌사를 보낸다. 그 중에는 나를 자신의 '지도자이자 교사'라고 부르기도 한다. 다른 상황에서는 나를 기쁘게 했을 이 사실이 현재는 나로 하여금 그만큼 더 단호하게 이렇게 공언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나는 누구한테도 정치적 배신을 가르친 적이 없다. 안드라데의 행위는 단지 자본가계급과의 동맹을 위하여 노동자 계급을 배신한 것일 뿐이다.

이와 관련하여 스페인 '좌익 공산주의자'는 바로 자신의 이름이 암시하는 것을 상기시키기 위해 기회 있을 때마다 청렴결백한 혁명가처럼 보이려고 애썼다. 특히 이들은 프랑스의 볼셰비키-레닌주의자가 사회당에 입당하는 것을 큰 소리로 비난했다. 당치도 않다! 어떤 일이 있어도 안 된다! 노동자혁명의 기치를 위해 그 대오에서 개량주의적 지도자들에 맞서 비타협적인 투쟁을 수행하기 위해 대중적 정치조직에 일시적으로 가입하는 것一이것은 기회주의다. 그러나 대중을 속이고, 자본가계급을 은폐하는 구실을 하는 고의적으로 부정직한 강령에 근거하여 개량주의 정당의 지도자와 동맹을 맺는 것一이것은 용감한 행위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이보다 더 큰 모독과 타락이 있을 수 있는가?

통일노동자당은 유명한 '혁명적 사회주의당'의 런던사무국(구 IAG)[런던사무국:정식명칭은 [혁 명적 사회주의당의 런던사무국]. 구 국제노동자협회(IAG), 제2 인터내셔널과 제3 인터내셔널에 속하지 않고, 제4 인터내셔널 결성에 반대하는 중도주의 좌익정당들의 연합체. 독일의 사회주의 노동자당(SAP), 영국의 독립노동당(ILP), 스페인의 마르크스주의 통일노동자당(POUM), 프랑스의 사회주의노동자농민당(PSOP)이 참가.]일원이다. 이 사무국의 지도부는 지금, 독립노동당(ILP)의 서기인 페너 브락웨이[페너 브락웨이(Fenner Brockway,1888/90-1988):영국의 사회주의 정치가. 영국독립노동당의 지도자. 런던사무국의 서기.]의 수중에 있다. 우리는 이미 맥스튼[제임스 맥스튼(James Maxton,1885-1946):1930년대 독립노동당의 지도자.]등의 고색창연하고 교정하기 어려운 평화주의적 편견에도 불구하고 독립노동당이 국제연맹과 그 제재 조치 문제에 관해서 정말로 혁명적인 입장을 취했다고 말한 바 있다. 우리는 서로〈뉴 리더〉지(New Reader, 독립노동당의 기관지)에 게재된 다수의 뛰어난 기사를 기쁘게 읽었다. 최근의 의회선거 중에 독립노동당은 노동당에 대한 선거 지지도 하지 않았다. 바로 노동당이 국제연맹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이 거부 자체는 전술적으로 잘못이다. 독립노동당이 독자적인 후보를 낼 수 없는 경우에는 언제나 토리당(자유당)에 반대하여 노동당 후보를 지지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부차적인 문제이다. 어쨌든 노동당과의 '공통된 강령'에 대해 말하는 것조차 배제되었다. 국제주의자는 일시적인 선거 지지와 함께 국제연맹과 그 '제재조치'에 대한 영국 사회애국주의자들의 아첨을 폭로할 것이다.

우리는 페너 브락웨이에게 실례를 무릅쓰고 이런 질문을 한다: 그가 서기를 맡고 있는 이 '인터내셔널'의 목적은 정확히 무엇인가? 이 '인터내셔널'의 영국 지부는 국제연맹을 지지하는 노동당 후보에 대한 단순한 선거 지지도 거부한다. 스페인 지부는 국제 연맹에 대한 지지라는 공통된 강령에 따라 부르주아 정당들과 블록을 맺고 있다. 이것은 모순, 혼란, 파산이 극에 달한 것 아닌가? 아직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런던 '인터내셔널'의 각 지부는 벌써 정반대 방향으로 끌려가고 있다. (전쟁이라는) 불길한 사태가 일어났을 경우에 이들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그러나 우리는 스페인의 '마르크스주의통일'당으로 되돌아가자. 자본가계급과의… '마르크스주의통일'이라는 이 이름은 얼마나 풍자적인가. 스페인의 '좌익 공산주의자'(안드레스 닌, 후안 안드라데 등)는 스페인의 '특수한 상황'에 대한 우리의 이해 부족을 거론하며 자신들의 협조주의 정책에 대한 우리의 비판을 여러 차례 받아넘겨왔다. 이것은 모든 기회주의자가 이용하는 통상적인 주장이다. 그러나 진정한 노동자 혁명가의 제일의 의무는 자기 나라의 특수한 상황을 마르크스주의의 국제 언어로 번역하는 것에 있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주의의 국제 언어는 정말로 일국의 범위를 넘어 이해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저자 주: 마우린과 닌은 자신들의 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해 새로운 정당이 독자적인 후보를 내세우기가 대단히 어렵게 되어 있는 스페인의 선거제도를 들이댄다(중앙위원회의 결의문, 〈라 바탈랴〉지 제234호를 보라). 그러나 이 주장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선거기법은 자본가계급과의 공동 강령과 같은 배신적 정책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이론적 주장이 필요하지 않다. 스페인 노동자계급의 지도자와 좌익 자본가계급과의 블록에는 '민족적인 것'이 조금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왜냐하면 이것은 프랑스, 체코슬로바키아, 브라질, 중국의 '인민전선'과 조금도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통일노동자당은 코민테른 제7차 대회가 모든 지부에 그 '민족적 특수성'과 완전히 별개로 강요하고 있는 것과 같은 정책을 비굴하게 수행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번에 스페인에 적용된 이 정책에서 진정한 차이는 오직 런던 인터내셔널의 한 지부도 공식적으로 자본가계급과의 블록에 충실했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나쁘다. 우리에 관해서 말하자면, 우리는 명확함을 좋아한다. 스페인에서 진정한 혁명가는 틀림없이 마우린, 닌, 안 드라데와 그 동료들의 배신을 가차 없이 폭로하고, 제4 인터내셔널 스페인 지부의 토대를 마련할 것이다!

1936년 1월 23일

 

 

스페인에서 제4 인터내셔널의 임무

 

■이 글은 스페인혁명의 새로운 발전에서 제4 인터내셔널의 임무를 제기한 것이다. 트로츠키는 통일노동자당을 준엄하게 비판하면서, 제4 인터내셔널의 임무를 간단한 항목으로 제기하고 있다. 덧붙여서 트로츠키가 '절충주의적인 잡탕'이라고 비난하는 마우린의 '민주적 사회주의 혁명론'은 기본적으로 노동자계급에 의한 권력 장악이 민주주의적 과제를 완수함과 동시에 사회주의혁명을 개시한다는 내용이었다.

 

스페인의 정세는 다시 혁명적으로 되었다.

스페인혁명의 발전은 그 템포가 완만하다. 이 때문에 혁명적 부위는 결정적 순간에 자신의 임무에 부합하기 위해 형태를 갖추고, 자기 주위로 전위를 결집시킬 수 있는 꽤 오랜 시간을 얻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스페인의 '좌익 공산주의자'가 이 예외적으로 유리한 막간을 그냥 놓쳐 버릴 것이며, 자신들이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배신자들보다 결코 더 낫지 않음을 드러내왔다고 솔직하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에 대한 경고는 결코 부족하지 않았다. 따라서 안드레스 닌, 후안 안드라데 등의 죄가 그만큼 더 크다. 제4 인터내셔널의 지부인 '좌익 공산주의자'가 올바른 정책을 견지했다면, 지금은 스페인 노동자계급의 선두에 서 있을지도 모른다. 대신에 이들은 강령이나 전망은 물론이고 어떤 정치적 의미도 없는 우린의 혼란스런 조직에서 하는 일 없이 지내고 있다. 스페인에서 마르크스주의적 투쟁은 안드레스 닌과 안드라데의 정책 전체에 대한 비타협적인 비판을 통해서만 시작할 수 있다. 이들의 정책은 잘못되었을 뿐만 아니라 범죄적이기까지 했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대통령 사모라의 해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정치적 발전이 다시 한 번 첨예한 단계에 돌입했음을 의미한다. 사모라는 말하자면, 지배계층의 '견실한 지주였다. 그는 힌덴부르크가 독일에서 일정 기간 수행한 것과 같은 역할을 다른 상황에서 수행했다. 즉, 이 기간은 한편으로 반동(심지어 나찌도)과, 다른 한편으로 사회민주당이 모두 힌덴부르크에 기대를 걸고 있었던 시기이다.

현대의 보나파르트주의는 계급대립이 아직 공공연한 투쟁에까지 이르지 않은 시기의 가장 극단적인 계급대립을 표현한다. 보나파르트주의는 사이비-의회주의 정부에서 뿐만 아니라 실제로는 '초당적' 대통령제에서도 고무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오로지 상황에 좌우된다. 사모라는 보나파르트적 균형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계급대립의 격화는 주요 진영이 모두 우선 사모라를 이용하려고 한 다음에 그를 제거하려는 사태를 불러왔다. 우익은 자기 세상일 때 이 일에 성공하지 못했지만 '인민전선'은 성공했다. 그렇지만 이것은 첨예한 혁명적 시기의 시작을 의미한다. 대중의 심각한 소동과 빈번하고 격렬한 시위의 급증은 모두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기만당해온 도시와 농촌의 노동자나 빈농이 혁명적 해결을 위해 계속 전력을 기울이고 있음을 증명한다. 그렇다면 이 강력한 운동에 직면하여 인민전선은 어떤 역할을 수행할 것인가? 인민전선은 배반자나 노예근성에 찌든 인간쓰레기들에 의해 조립되고 작동하는 거대한 브레이크역할을 할 것이다. 그리고 후안 안드라데는 바로 어제 이 인민전선의 철저히 비열한 강령에 서명했다!

사모라의 해임 뒤, 공화국의 새로운 대통령과 협력하여 아사냐는 견실한 보나파르트주의적 지주의 역할을 맡지 않으면 안 된다. 즉, 그는 자신의 권력 장악을 도운 혁명대중에 대해 국가의 무기를 더 잘 겨냥할 수 있기 위해서 스스로를 양 진영 위에 세우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만 노동자 조직은 인민전선의 그물에 완전하게 걸린 상태이다. 따라서 (강령과 신뢰할 만한 지도부도 없는) 혁명대중의 혼란은 반(反)혁명 독재에 이르는 길을 활짝 열어젖힐 우려가 있다!

노동자들이 혁명적 방향으로 전진하고 있는 것은 모든 노동자 조직의 발전에 의해, 특히 사회당과 그 청년조직인 사회주의청년동맹의 발전에 의해 입증되었다. 2년 전, 우리는 스페인 볼셰비키-레닌주의자의 사회당 입당 문제를 제기했다. 이 제안은 안드레스 닌과 보수적 속물들의 오만한 태도를 가진 안드라데에 의해 거부되었다. 이들은 한사코 "독립" 을 원했다. 왜냐하면 방해를 받지도 않고, 의무를 지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당 입당은 예를 들어, 프랑스의 경우에 비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더 나은 결과를 낳았을 것이다. (물론, 지도적인 프랑스 동지들이 범한 끔찍한 오류를 스페인에서는 피했어야 한다는 조건에서) 그러나 그 사이에 안드라데와 닌은 함께 인민전선을 총총걸음으로 뒤따르기 위해 갈팡질팡하는 마우린과 연합했다.[*저자 주 : 인민전선을 향한〈라 바탈랴〉지의 "전환'은 신뢰를 고취하지 못한다. 월요일에 국제연맹이 약탈자의 도당이라고 말하고, 화요일에는 유권자에게 국제 연맹의 강령에 찬성투표 할 것을 재촉하고(인민전선의 선거협정에는 "국제연맹의 원칙에 일치하여" 라는 말이 포함되어 있다), 수요일에는 '어제는 선거운동 문제에 한한 것이었고, 오늘은 독자강령을 다시 내걸지 않으면 안 된다'고 설명할 수는 없다. 진지한 노동자라면, 이렇게 물어보아야 한다.: 그러면, 이 작자들이 목요일과 금요일에는 어떤 말을 할 것인가? 마우린은 피상적이고, 머리 회전이 빠르고, 변덕스러운 소부르주아 혁명가의 화신 그 자체인 것 같다. 그는 아무것도 배우지 않고, 거의 이해하지도 않고, 자기 주위 사람들 모두에게 혼란을 퍼뜨린다.] 그러나 혁명적 명쾌함을 위해 매진하고 있던 사회주의 노동자들은 스탈린주의 사기꾼들에게 희생되었다. 두 청년조직(사회주의와 스탈린주의)의 통합은 더할 나위없는 혁명적 에너지가 코민테른의 용병들에 의해 악용되고 탕진될 것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위대한' 혁명가 안드레스 닌과 안드라데는 마우린과 함께 '민주적 사회주의'혁명 즉, 사회민주주의적 배신을 위한 완전히 무력한 선전을 계속하기 위해 여전히 방관자인 채로 있다.[**저자 주 : 마르크스는 1876년에 "사회민주주의자'라는 용어의 기만성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 사회주의는 민주주의에 종속될 수 없다. 우리에게는 사회주의(또는 공산주의)로 충분하다. "민주주의"는 사회주의와 아무 관계가 없다. 그때 이후 10월혁명은 사회주의혁명이 민주주의의 테두리 안에서 수행될 수 없음을 강력하게 입증했다. "민주주의"혁명과 사회주의혁명은 바리케이드의 정반대 편에 있다. 제3 인터내셔널은 이 경험을 이론적으로 확증했다. 스페인의 "민주주의"혁명은 이미 수행되었다. 인민전선은 이를 반복하는 것이다. 스페인의 "민주주의"혁명을 인격적으로 체현하고 있는 것은 카바예로가 있건 없건 간에 아사냐이다. 사회주의혁명은 앞으로 "민주주의"혁명과 인민전선에 대한 비타협적 투쟁으로 실현되어야한다. 이 "종합" 즉, "민주적 사회주의혁명"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절충주의적인 잡탕에 지나지 않는다.]

스페인의 다음 단계가 어떤 형태를 취할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쨌든 인민전선 파벌에 권력을 부여한 혁명적 고양은 짧은 시간 내에 너무 엄청나게 쇠퇴하여, 반동이 전장을 마음대로 휘젓게 내버려둘 것이다. 아직 어느 정도의 시간, 물론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을 가지고 있는 진정한 혁명적 부위는 스스로를 냉정하게 평가하고, 세력을 결집해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이것은 특히 스페인의 제4 인터내셔널 지지자에게 해당된다. 이들의 임무는 아주 명백하다.

1. 인민전선에 참여하고 있는 모든 지도자들의 정책을 대중 앞에서 무자비하게 비판하고 규탄할 것.

2. "마르크스주의통일노동자당", 특히 구 "좌익 공산주의자"의 지도자인 안드레스 닌이나 안드라데 등의 비열함을 충분히 이해하고, 모든 선진 노동자들이 보는 앞에서 이들을 분명하게 몰아붙일 것.

3. “공개서한"에 근거하여 제4 인터내셔널 기치를 중심으로 결집할 것.

4. 볼셰비키주의 기풍의 분파로 활동하기 위해 사회당과 통합청년조직에 가입할 것.

5. 노동조합 등의 대중조직 안에 분파를 위시한 다른 중핵을 건설할 것.

6. 자생적이거나 반(半)자생적인 대중운동을 예의주시하고, 그 일반적 특징을 연구할 것 즉, 의회주의 도당의 분위기가 아니라 대중의 분위기를 연구할 것.

7. 투쟁에 명확한 표현을 부여하기 위해 모든 투쟁에 참가할 것.

8. 대중에게 항상 전투 대형을 유지할 것을 촉구하고, 특별히 선출되는 행동위원회(훈타, 소비에트)를 지속적으로 확대할 것.

9. (카바예로나 마우린 식의) 모든 잡종 강령에 대해서 권력 장악, 노동계급독재, 사회주의혁명 강령을 대치시킬 것.

이것이 노동자혁명의 진정한 길이다. 그밖에 다른 길은 없다.

 

1936년 4월 12일

 

 

제3부 | 내전

 

|서문|

새로운 정부가 취임하자마자 장군들은 정부 전복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1934년 10월 오비에도에 대한 맹공격을 지휘했던 프랑코는 아사냐에 의해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카나리아 제도 사령부로 전근되었다. 그는 이 직책을 맡기 전에 이미 몰라 장군의 사령부에서 군대의 왕당파 음모론 자들과 동맹을 맺었다.

4월, 몰라 장군은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20일 정도 걸릴 쿠데타 준비를 촉구하는 비밀 회람장을 돌렸다. 몰라는 이렇게 말했다 : '이는 강력하고 잘 조직된 적을 가능한 한 신속하게 분쇄하기 위하여 매우 격렬할 수밖에 없을 군사행동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파시스트]

운동에 서약하지 않는 정당, 사회단체, 노동조합의 모든 지도자는 투옥될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반란이나 파업운동을 교살시키기 위해 일벌백계로 다스려질 것이다.‘

토지개혁의 느린 속도에 불만을 가진 에스트레마두라의 시골사람들은 넓은 면적의 토지를 점령하기 시작했다. 정부는 농민에 반대하여 치안대를 보냈다.

좌익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우익에 대해서도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려고 한 인민전선은 4월에 국회 표결을 통해 공화국 대통령인 알카라 사모라를 해임하고, 5월에 아사냐로 그를 대체했다. 동시에 카사레스 키로하가 수상이 되었다.

그 사이에 프랑코는 비밀리에 북아프리카로 가 쿠데타를 준비했다. 여기에서 모로코 용병을 지휘하고 파시스트 반란을 시작했다.

파시스트 반란은 7월 17일 시작되었다. 18일에서 21일 사이에 본토의 주둔군이 부화뇌동했다. 파시스트는 첫 주에 바스크 지방을 제외하고 대략스페인의 3분의 1一주로북서부지역一을장악했다.

카사레스 키로하와 그의 보수적 후임자인 마르티네스 바리오가 낙오하자, 아사냐는 내전에서 공화국을 이끌 수상 자리에 평범한 화학 교수인 호세 히랄(Jose Giral)을 앉혔다. 이 세 번째 정부도 지난날들과 마찬가지로 전부 부르주아 정당의 대표들로 구성되었다. 그런데도 사회당, 공산당, 무정부주의 연합의 주요 지도자들은 인민전선을 지지하기로 서약했다. 이 정권은 히랄이 타르고 카바예로로 대체되고, 사회당과 공산당이 직접 내각에 참여한 9월까지 지속되었다. 가르시아 올리베르, 페데 리카 몬체니(Federica Montseny), 후안 페이로(Juan Peiro), 후안 로페스 산체스(Juan Lopez Sanchez) 등으로 대표된 무정부주의자는 마드리드 포위공격 중인 11월에 정부에 입각했다. 동시에 공화주의 정부는 마드리드를 피해 수도를 발렌시아로 옮겼다.

무정부주의 노동자들로부터 바르셀로나 전화교환소를 빼앗으려고 공산당이 고무한 시도가 1937년 5월 2일 일어났다. 뒤이어 15일에 카바예로가 실각했으며, 17일에 후안 네그린이 수상으로 임명되었다. 통일노동자당이 진압된 뒤인 1937년 10월, 네그린은 중앙정부를 다시 바르셀로나로 옮겼다.

공산당은 공화주의 자유주의자와 사회민주주의자들이 굳이 시도하지 않았던 일, 즉 통일노동자당을 진압함에 따라 더 이상 부르주아 정부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네그린과 지금은 전쟁장관이 된 프리에토는 스탈린주의자가 여전히 정부기구에서 절대적으로 강력했지만 공산당 권력을 제한시키려는 책략을 쓰기 시작했다. 1937년 10월, 프리에토는 장교들의 정당 집회 참석을 금지시켰다. 그리고 주로 스탈린주의자가 차지하고 있던 군대의 인민위원 직책을 상당수 없애버렸다.

또한 네그린은 국회의원이 단지 16명뿐인 공산당이 요구한 새로운 국회선거를 거절했다.

1937년 12월부터 1938년 2월까지 테루엘(Teruel)에서는 계속 전투가 벌어졌다. 파시스트에게서 시(市)를 빼앗은 공화국 군대는 그 뒤 곧 흑독한 희생을 치르고 다시 시(市)를 내주었다. 파시스트는 마지막으로 시(市)에 재진입 했을 때, 1만 명의 공화주의자가 죽어 있었다고 주장했다. 공산당은 패배에 책임이 있는 프리에토의 축출 캠페인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프리에토는 4월 8일 해임되었지만 공산당은 카탈로니아와 발렌시아에서 파시스트의 진군을 막지 못했다. 동시에 파시스트인 알론소 베하 (Alonso Vega) 장군은 지중해 연안의 비나로스 시(市)를 점령했다. 이 승리는 6월 14일 카스텔론(Castellon)의 함락으로 공고화되었으며, 공화국은 오래도록 둘로 갈렸다.

공화국의 마지막 주요 공격인 에브로 전투는 7월 24~25 일 밤에 시작되었다. 공화파의 진격은 8월 2일 봉쇄되었다. 그 뒤 파시스트는 상실했던 기반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국제여단은 11월 이후에 스페인에서 철수했다.

1938년 말에 공화국의 산업생산은 붕괴하기 시작했다. 일부는 거의 완전한 파시스트 해군의 봉쇄 때문이지만, 대부분은 스탈린주의자가 통제한 경찰의 박해로 인해 무정부주의 노동자 대오가 사기저하에 빠졌기 때문이다.

살아남은 통일노동자당의 지도자들은 체포된 뒤 1년도 더 지난 10월에 재판에 회부되었다. 카바예로와 다른 저명한 인물들은 통일노동자당을 옹호하는 증언을 했지만, 스탈린주의자들은 정반대의 증언을 했다.

12월 23일, 파시스트는 1939년 1월 26일 바르셀로나를 장악한 카탈로니아에 대한 최후 공격을 시작했다. 대략 50만 명을 헤아리는 피난민이 프랑스 국경을 넘어 피신했다. 아사냐와 콤파니스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공화주의 정부 인사들은 이들과 함께 도망쳤다.

전쟁 내내 공화국에 무기를 팔려고 하지 않았던 프랑스와 영국은 2월 27일 프랑코 정부를 공식 인정했다. 그러나 공화주의자는 여전히 스페인의 3분의 1을 지키고 있었다.

바로 이때, 마드리드의 카사도(Casado) 대령이 이끈 '공화국' 장교단은 공화주의 정부 몰래 프랑코와 독자적인 화해에 나서기로 결정했다. 카사도는 계속 저항할 것을 주장하는 마드리드의 공산당 신문을 금지시켰다. 이때 공산당은 급진화된 노동자계급의 생명을 빼앗으며, 부르주아 군대가 공화주의 정부에 등을 돌렸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저항할 것을 주장한 소수세력이었다. 공산당이 특별 지원하기 위해 선발한 고참 직업장교인 호세미이하 메난트[호세 미아하 메난트(Jose Miaja Menant, 1878-1958): 공화파 장군, 스페인공산당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내전 종료 직전, 파시스트에 항복할 것을 호소하는 특별 성명을 발표했다.]장군은 마드리드에서 항복을 위한 새로운 정부를 수립해보려는 배신적 노력으로 카사도와 결합했다. 3월 4일 한밤중에 음모자들은 마드리드 라디오방송국에서 네그린 정부를 부정하고, 프랑코와의 화해를 제의하는 성명을 낭독했다. 카사도는 정부인사와 공산당에 대한 체포명령을 내렸다. 공산당의 최고지도자, 남아있던 러시아 고문단과 함께 네그린은 이 기회에 스페인에서 탈출하기로 결정했다. 이들은 3월 6일 프랑스로 도망쳤다.

그 사이에 마드리드에서는 카사도에 충성한 부대와 공산당이 지휘한 부대 사이에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공산당은 주도권을 상실한 지역의 지휘관들보다 우세했지만 지도자가 없었다. 그 결과, 카사도는 이들을 마드리드에서 축출했으며, 프랑코와 협상을 개시했다.

사기를 꺾는 이 마지막 배신은 공화국을 끝장냈다. 파시스트는 무더기로 해산되기 시작한 공화국 군대의 저항을 받지 않고 무혈의 마지막 진군을 시작했다. 이 진군은 1939년 3월 28일 끝났다.

 

트로츠키의 망명에 대한 주석

스페인 내전이 터진지 한 달 만에 소비에트 정부는 세 번의 대규모 모스크바 재판의 첫 무대를 통해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이 재판의 주요 피고(궐석한)는 제국주의자의 지원으로 소련에서 자본주의를 부활시키려 한다고 비난받은 트로츠키였다. 스스로를 변호하려는 트로츠키의 노력은 노르웨이 정부에 의해 재빠르게 억압되었다. 노르웨이 정부는 소비에트의 압력에 굴복했으며,1936년 말까지 트로츠키를 억류했다. 1937년 1월, 트로츠키는 마지막 망명지인 맥시코에 도착했다. 제3부의 '아바스통신사와의 인터뷰' 이후의 글은 모두 멕시코시 교외의 코요아칸에서 작성되었다. 1940년 8월 스탈린이 보낸 첩자에 의해 암살되기까지 트로츠키는 이곳에서 살았다. 제3부의 글들은 대부분 제4 인터내셔널 운동 내에서 일어난 스페인에 관한 내부논쟁을 촉진하려고 작성된 것이다.

 

 

국제서기국에 보내는 편지

一프랑스좌익반대파 기관지 〈시류에 저항하며〉 편집부에 보내는 편지

 

■ 이 글은 내전 발발로 스페인 정세가 급변하자 재차 스페인에서 제4 인터내셔널의 임무와 통일노동자당의 오류를 분명히 한 편지이다. 이 편지는 원래 내부용이었는데, 1936년 8월 프랑스의 주류파 트로츠키주의 기관지 〈노동자 투쟁〉에 게재되었으며, 이로 인해 트로츠키, 국제서기국과 통일노동자당 지도부와의 관계가 더욱 악화되었다.

 

친애하는 동지 여러분,

스페인 사태는 그 결과가 어떤 식이든(나는 바람직한 결과를 기대하고 있지만), 프랑스를 비롯한 모든 나라에서 제4 인터내셔널의 발전에 있어 역사적인 중요성을 갖게 될 것이다.

인민전선의 문제는 지금 모든 노동자 앞에 완전 명료하게 제시되어 있다. 많은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은 이렇게 자문하고 있다(예를 들어, 불쌍한 모리스 파즈[모리스 파즈(Maurice Paz, 1896-1985): 프랑스 변호사로 초창기 좌익반대파였다. 1927년부터 1929년까지 발행된 잡지〈시류에 저항하며〉에 관계했다. 1929년 터키에 망명 중인 트로츠키를 방문하기도 했지만, 반대파의 전망을 비현실적이라고 간주하며 반대파와 결별했다. 프랑스사회당에 입당, 그 지도자가 되었다.]가 쓴 〈르 포풀레르〉(Le Populaire, 프랑스사회당의 기관지)의 기사를 보라) : "2월 이래로 권력을 잡고 있는 스페인 인민전선의 지도자들은 왜 군대에 대처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인가? 이런 중대한 실수가 어디 있는가! 등." 이런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중대한 실수"의 문제가 아니라 완전히 계급적 이해의 문제인 것이다. 부르주아 좌익과 노동자 조직의 동맹 체결이 부득이하다면, 자본가계급은 그 대항세력인 장교집단을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이때 가장 중요한 문제 즉, 사유재산의 보호 문제가 제기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코 중대한 실수가 아니었다! 스페인의 인민전선 정부는 정부가 아니라 그저 내각에 지나지 않는다. 진짜 정부는 총사령부나 은행 등에 있었다. 프랑스급진당(프랑스의 소부르주아 정당)은 장교단에 손을 대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노동자계급과의 동맹 체결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노동자가 이들의 요구를 계속 억누름에 따라, 국가기구 전체는 마침내 그 머리를 조아릴 것이다. 독일사회주의노동자당(SAPists)은 인민전선이 노동자계급의 전술을 풍부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이 인민전선의 계급적 성격을 이해할 수 없다면, 그것은 이들이 아무짝에도 쓸모없기 때문이다. 급진당은 인민전선의 우익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 실제로 급진당은 프랑스에서는 지배계급을 대표하고 있다. 그리고 급진당을 통해서 프랑스의 금융자본은 인민전선 안에서 뿐만 아니라 노동자계급에 대해서도 그 지배를 유지하고 있는 이 문제는 스페인보다 프랑스에서 더 명확하고 더 첨예하게 제기되고 있다. 달라디에는 군대를 계속 자기의 보호 하에 두고 있다. 파시스트적 허풍을 떠는 6명의 장교를 해임시키는 문제가 아니다 : 장교단 전체가 철저하게 노동자계급에 적대적이다. 만약 이들을 해임시키기를 원하면, "군대를 혼란을 빠뜨릴 것이다." 그러나 히틀러가 바로 가까이에 와 있다! 급진 자본가계급을 포함한 자본가계급의 어느 누구도 자신의 장교단에 손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공산당"도 장교단에 손을 대려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장교단과 함께 소비에트 연방을 "방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일 이 장교단은 인민전선, 무엇보다도 노동자계급을 공격할 것이다. 그 다음에 군사독재를 수립하고, 소비에트 연방에 대항하여 히틀러와 동맹을 체결할 것이다. 재앙이 넘쳐나는 현대와 같은 시대에는 사태가 바뀔 때마다 기회주의 정책의 범죄적인 결과가 10배나 더 격렬하게 나타난다.

우리는 또한 올해 초, 통일노동자당 지도자인 마우린과 닌이 저지른 범죄행위를 좀 더 명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분별력 있는 노동자라면 이런 사람들에게 이렇게 물을 수 있고, 또 물을 것이다: "당신들은 아무것도 예측하지 못한 것인가? 어떻게 당신들은 급진 자본가계급을 철저히 불신하도록 가르치는 대신에, 인민전선 강령에 서명하고 우리의 신뢰를 아사냐와 그 동료들에게 줘버렸는가? 지금 당신들의 오류 때문에 우리의 피로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

노동자들은 닌과 그의 동료들에 대해 각별한 분노를 느껴야 한다. 왜냐하면 몇 년 전에 인민전선 정책에 대한 정확한 분석을 제공하고, 그 각 단계를 구체화하고 명백하게 설명한 경향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닌은 몰랐다는 핑계一모든 지도자의 가증스런 핑계一를 댈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는 적어도 한번은 문서를 읽고 서명해야 했었기 때문이다.

스페인 사태는 스페인과 프랑스는 물론이고 모든 지역의 제4 인터내셔널을 위해 새롭고 커다란 가능성을 열어젖힐 것이다一바로 중도주의 경향들을 제물로 삼으면서 말이다. 현재의 상황 속에서 런던사무국이 11월의 '평화대회'에 실제 소속 회원들만은 소집할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상당히 의심스럽다. 어쨌든 우리는 햇빛을 볼 일이 없을지도 모르는 이 대회에 참여를 약속하거나 대회에 어떠한 권위를 제공하는 것에도 흥미가 없다.

우리는 거대한 대중에게로 방향을 돌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어떠한 수단을 통해서라도, 그리고 보수적인 완고함에 영향을 받거나 마비되는 일 없이 대중조직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이 대중들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독자성을 지켜야 하며, 허영심 강한 중도주의자와의 어떠한 타협도 멀리하며, 이들과 우리 사이의 경계를 없애지도 않을 것이다. 요컨대, 범죄적인 화해는 일절 피해야 한다.

 

진심에서 우러난 인사를 담아

 

1936년 7월 27일

 

 

스페인의 교훈

 

■ 이 글은 1936년 7월 17~18일에 일어난 프랑코의 반란과 이에 대항하는 스페인 인민의 혁명적 폭발 직후에 썼다.

1936년 2월, 좌익 정당과 부르주아 공화주의 정당의 공동전선 정부인 스페인 인민전선 정부가 수립되었지만, 이 정부는 단호한 혁명정책을 실행할 수 없었으며, 장군•교회•자본가계급• 지주라는 반동연합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했다. 반동파는 인민전선 정부의 우유부단을 이용하여 당시 스페인의 식민지인 모로코와 본토 모두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며, 스페인의 절반을 지배하에 넣었다. 부르주아권력은 오른쪽으로부터는 프랑코의 반란, 왼쪽으로부터는 혁명적 노동자•인민의 반격에 협공을 받고 사실상 분쇄되었다. 부르주아 정당들은 망연자실, 우왕좌왕할 뿐이었다. 무정부주의자, 공산당, 사회당, 마르크스주의통일노동자당 등으로 결집한 노동자• 인민은 즉시 무장하여 주요 도시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들은 노동자권력을 수립하는 대신에, 부르주아 정당과 공동보조를 취했다. 혁명파의 중심세력인 무정부주의자들은 처음에는 직접 정부에 들어가는 것조차 기피하여 표면상으로 부르주아 정당에 의한 통치를 유지하려고 했다. 이에 트로츠키는 러시아혁명의 교훈에 의거하여 노동계급독재와 대담한 사회 혁명만이 스페인혁명을 구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 경고의 올바름은 중국혁명처럼, 가장 비참한 유혈패배에 의해 증명되었다.

 

유럽은 노동자계급에게 가혹하고 끔찍한 학교가 되었다. 각국에서는 노동자에게 극심하고 잔혹한 희생을 강요했지만 지금까지 모두 노동자 계급 적(enemies)들의 승리로 끝난(이탈리아, 독일, 오스트리아) 사태가 잇달아 전개되었다. 기존의 노동자정당의 정책은 이들이 왜 노동자계급을 지도할 수 없는지, 왜 승리를 준비할 능력이 없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이 글이 작성되고 있는 현재까지도 스페인의 내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전 세계의 노동자는 스페인 노동자계급의 승리 소식을 열렬히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확고하게 바라는 것처럼, 만약 이 승리가 획득된다면, 이렇게 말해야만 될 것이다 : 노동자는 그 지도부가 이들의 패배를 초래하기 위해서 모든 짓을 다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번 승리를 거뒀다. 스페인 노동자계급에게 그만큼 더 큰 명예와 영광이 돌아가야 한다!

스페인에서 인민전선에 속한 사회당과 공산당은 이미 한 차례 혁명을 배반했지만 노동자 농민 덕분에 다시 한 번 승리를 얻었으며, 2월에 '공화주의' 정부를 수립했다. 6개월 뒤, '공화국' 군대는 인민에 대한 전투를 시작했다. 요컨대, 인민전선 정부는 인민의 돈으로 군벌(military caste)을 유지하고, 이들에게 권위, 권력, 무기를 제공했으며, 젊은 노동자 농민에 대한 지휘권을 주었다. 그로 인해 노동자 농민에 대한 결정적인 공격 준비를 용이하게 해 주었다는 점이 분명해졌다.

그뿐만이 아니다. 내전이 한창인 지금도 인민전선 정부는 승리를 이 중으로 곤란하게 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한 모든 일을 다 하고 있다. 내전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군사적 무기뿐만 아니라 정치적 무기로도 수행된다. 순전히 군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스페인혁명은 그 적보다 훨씬 더 허약하다. 혁명의 세기는 거대한 대중을 분발하게 하는 그 능력에 있다. 혁명은 군대를 반동적 장교로부터 떼어놓을 수도 있다.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오직 사회주의혁명 강령을 진지하게, 그리고 대담하게 제출해야한다.

앞으로는 토지, 공장, 상점은 자본가의 수중에서 인민의 수중으로 옮아갈 것이라고 선언해야 한다. 노동자가 권력을 잡고 있는 지역에서는 즉시 이 강령의 실현으로 나아가야 한다. 파시스트 군대는 이러한 강령의 영향에 24시간도 저항할 수 없을 것이다. 병사는 장교의 손발을 묶어 가장 가까운 노동자 의용군 사령부에 넘길 것이다. 그러나 부르주아 장관들은 이러한 강령을 받아들일 수 없다. 사회혁명을 억제하는 부르주아들은 자신들이 내전에서 흘린 피보다 몇 십 배나 많은 피를 노동자와 농민에게 흘리게 한다. 그리고 결국에 가서 이 신사양반들은 승리를 거둔 뒤에 다시 노동자를 무장해제 시키고, 사적 소유의 신성한 법칙을 존중하도록 노동자에게 강제하기를 기대한다. 이것이야말로 인민전선 정책의 진정한 본질이다. 그 밖의 모든 것은 순전한 속임수이고, 헛소리이며, 거짓말이다!

인민전선의 많은 지지자들은 지금, 꾸짖듯이 마드리드의 지배자들에 대해 머리를 가로젓고 있다. 왜 이들은 이런 것을 예견하지 못했는가? 왜 이들은 제때에 군대를 숙청하지 않았는가? 왜 이들은 필요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는가? 다른 어느 곳 이상으로 이러한 비판의 소리가 프랑스에서 나오고 있다. 그렇지만 프랑스 인민전선 지도자들의 정책은 스페인에 있는 그 동료들의 정책과 전혀 구별되지 않는다. 스페인의 가혹한 교훈에도 불구하고 레옹 블룸 정부가 군대에 대한 진지한 숙청을 해내지 못할 것이라고 미리 단언할 수 있다. 어째서? 노동자 조직이 여전히 급진당과 제휴하고 있고, 따라서 블룸 정부는 자본가계급의 포로이기 때문이다.

스페인의 공화주의자나, 사회주의자 또는 공산주의자가 아무것도 예견하지 못했으며, 뭔가 중요한 것을 놓쳤다고 불평하는 것은 세상 물정 모르는 짓이다. 이런저런 장관이나 지도자의 통찰력 문제가 결코 아니라, 그 정책의 일반적 방향성의 문제인 것이다. 노동자당은 오직 자본가의 군국주의에 맞선 투쟁을 포기했을 때에만 급진 자본가 계급과 정치적 동맹관계를 맺는다. 부르주아 지배, 즉 생산수단의 사적소유제 유지는 착취자의 군대에 대한 지지 없이는 상상할 수도 없다. 장교단은 자본의 호위병을 대표한다. 이 호위병이 없다면, 자본가계급은 단 하루도 자신을 지킬 수 없다. 개별적인 선발, 그 특수한 교육과 훈련을 통해 장교는 사회주의에 대한 비타협적인 적으로서 특수한 집단을 이룬다. 단발적인 예외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모든 부르주아 국가들의 사정이 다 이러하다.

공공연히 파시스트를 자처하는 군사적 허풍선이나 참주선동가는 위험하지 않다. 비교도 안될 만큼 위협적인 것은 노동자혁명이 가까워옴에 따라 장교단이 노동자계급의 사형집행인이 된다는 사실이다. 군대로부터 400명 내지 500명의 반동적 선동가를 제거하는 것은 기본적으로는 지금도 모든 것을 예전 그대로 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민을 노예로 만드는 역사가 오래된 전통이 농축되어 있는 장교단은 뿌리와 가지가 완전히 해체되고, 꺾이고, 분쇄되어야 한다. 장교계급이 지휘하는 막사의 군대는 인민의용군, 즉 무장한 노동자 농민의 민주주의 조직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다른 해결책은 없다. 그러나 이러한 군대는 크고 작은 착취자의 지배와 양립할 수 없다. 공화주의자가 이러한 조치에 동의할 수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인민전선 정부 즉, 노동자와 자본가계급의 연립정부는 그 본질 자체에서 관료집단과 장교에 굴복하는 정부이다. 이것이야말로 지금, 수많은 인명으로 대가를 치르고 있는 스페인 사태의 커다란 교훈인 것이다'

노동자계급 지도자의 자본가계급과의 정치적 동맹은 '공화국' 수호로 둔갑되었다, 스페인의 경험은 이 공화국 수호가 실제로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민주주의자'라는 말처럼,'공화주의자'라는 말은 계급모순을 은폐하는데 도움이 되는 의도적인 속임수이다. 자본가계급은 공화국이 사적 소유를 보호하는 한은 공화주의자이다. 그리고 노동자는 사적 소유를 전복하기 위해 공화국을 이용한다. 바꿔 말하면, 공화국은 노동자에게 가치 있는 것아 되자마자, 자본가계급에게는 그 모든 가치를 상실한다. 프랑스의 급진당은 장교단의 지지를 확신하지 않고는 노동자당과 블륵을 맺을 수 없다. 달라디에가 프랑스 전시내각의 수장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프랑스 자본가계급은 몇 번이고 이 직책을 달라디에에게 맡겼으며, 그는 결코 이들을 배신한 적이 없었다. 모리스 파즈나 마르쏘 삐베르[마르쏘 삐베르(Marceau Pivert, 1895-1958):교사 출신. 1935년 프랑스사회당내에서 [혁명적 좌익]그룹을 조직. 1936년, 블룸의 인민전선 정부를 지원했다. 1937년 사회당 지도부가 [혁명적 좌익]그룹의 해산을 명하자 탈당. 1938년, 사회주의노동자농민당(PSOP)을 결성했으며, 전후 사회당에 복귀했다.] 같은 사람들만이 달라디에가 군대로부터의 반동분자나 파시스트 군대의 숙청, 바꿔 말하면 장교단을 해체시킬 수 있다고 믿을 수 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러한 사람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 이런 외침에 의해 방해받는다. '어떻게 장교단을 해체 시킬 수 있는가. 그것은 군대를 궤멸시키고, 파시즘에 직면한 나라를 무장해제 시키는 것 아닌가? 그것이야말로 히틀러와 무쏠리니가 고대하는 바이다!' 이러한 주장은 모두 해묵고 뻔뻔스러운 것이다. 이것이 1917년에 입헌민주당, 사회혁명당, 멘세비키가 추론한 방식이고, 지금 스페인 인민전선의 지도자들이 추론하고 있는 방식이다. 스페인 노동자는 파시스트에 가장 가까운 적이 스페인의 파시스트 군대 안에서 발견된 경험을 통해 확신할 때까지 이러한 추론을 반쯤 믿고 있었다. 우리의 오랜 친구인 카를 리프크네히트가 가르쳤던 것은 헛되지 않았다. '주적은 자기 나라 안에 있다!'

〈위마니 떼〉지는 군대는 파시스트를 숙청하라고 눈물로 간청한다. 그러나 이런 간청이 무슨 가치가 있는가? 장교단을 유지하기로 신임투표를 한다면, 달라디에와 그를 통해 금융자본과 동맹을 맺고, 군대를 달라디에에게 맡기는 동시에, 이 완전한 자본가 군대에게 자본이 아니라 '인민'에게 봉사할 것을 요구한다면, 완전 바보가 된 것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노동자대중을 의식적으로 속이는 것이다.

사회당과 공산당 지도자는 이렇게 되풀이하여 말한다 : '그러나 우리는 군대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민주주의와 이 민주주의로 히틀러에 대항하여 소비에트 연방을 방어해야 하기 때문이다.' 스페인의 교훈에 비추어, 이 정책이 소비에트 연방은 물론이고 민주주의에 가져올 결과를 예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장교단은 일단 유리한 순간을 간파하면, 해체된 파시스트 그룹과 손을 잡고 노동자 대중에게 공세를 취할 것이다. 그리고 승리를 거둔다면,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초라한 잔여물을 밟아 으깨고, 소련에 대한 공통투쟁을 위해 히틀러에게 손을 뻗칠 것이다.

스페인 사태에 관해 〈르 포풀레르〉와 〈위마니떼〉지에 실리고 있는 기사는 분노와 혐오감 없이 읽을 수 없다. 이 사람들은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 이들은 배우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들은 의식적으로 사실을 보지 않으려고 한다. 이들에게 주요한 교훈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인민전선의 '통일' 즉, 자본가계급과의 통일, 그리고 달라디에와의 우정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달라디에는 의심할 여지없이 위대한 '민주주의자'이다. 그러나 블룸 내각의 공무와 나란히 비공식적으로 장교단 총참모부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을 한순간이라도 의심할 수 있는가? 사실을 직시하는 진지한 사람들은 블룸이 하는 공허한 수사적 방식에 도취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은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사태에 각오가 되어 있다. 달라디에와 군사 지도자들은 노동자가 혁명의 길을 갈 경우에 취할 필요한 조치에 관해서 양해가 이루어지고 있음에 틀림없다. 물론 장군들은 자연히 달라디에보다 훨씬 유리한 입장이다. 그리고 장군들은 자기들끼리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노동자를 완전 정리할 때까지는 달라디에를 지지해주자. 그 다음에 그의 자리 에 좀 더 강력한 인물을 앉히자.' 동시에 사회당과 공산당 지도자들은 매일 이렇게 되풀이하여 말한다 : "달라디에는 우리의 친구이다.' 노동자는 이들에게 이렇게 대답해야 한다: '당신의 친구를 말해주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주겠다.' 자본의 오랜 대리인인 달라디에에게 군대를 맡긴 사람들은 노동자의 신뢰를 하찮게 생각한다.

프랑스 노동자계급처럼, 스페인 노동자계급은 틀림없이 무쏠리니와 히틀러 앞에서 무장해제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적들에 맞서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국 내의 적을 분쇄해야 한다. 장교단을 분쇄하지 않고 자본가계급을 타도할 수 없다. 또한 자본가계급을 타도하지 않고 장교단을 분쇄할 수 없다. 반(反)혁명이 승리를 거둔 모든 경우에 장교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깊은 사회적 성격을 가진 혁명이 승리를 거둔 모든 경우에는 장교단을 파괴했다. 18세기 말의 프랑스대혁명의 경우가 그랬고, 1917년 10월 혁명의 경우에도 그랬다.

이러한 조치를 취하기 위해서는 급진 자본가계급에게 굽실거리는 짓을 그만두어야 한다. 노동자 농민의 진정한 동맹은 급진주의자를 포함한 자본가계급에 대항하여 수립되어야 한다. 노동자계급의 힘, 주도력, 용기를 신뢰해야 한다. 그리고 노동자계급은 병사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일 방법을 알고 있다. 이것이 가짜가 아닌 진정한 노동자 농민 병사의 동맹이다. 바로 이런 동맹이 지금, 스페인 내전의 포화 속에서 수립되어 단련되고 있다. 인민의 승리는 인민전선의 종말과 소비에트 스페인의 시작을 의미한다. 스페인에서 승리한 사회혁명은 필연적으로 다른 유럽 국가들로 퍼질 것이다. 이탈리아와 독일의 파시스트 사형집행인에게 이는 어떤 외교협정이나 군사동맹도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무서운 것이 될 것이다.

 

1936년 7월 30일

 

 

장 루에게 보내는 편지

 

■ 이 글은 스페인의 국제서기국 대표인 장 루 앞으로 보낸 트로츠키의 매우 중요한 편지이다.

이 편지에서 트로츠키는 통일노동자당 지도자에 대해서 매우 화해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게다가 추신에서 이 편지를 닌에게 보여줘도 좋다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이 편지가 통일노동자당 지도자와의 화해를 요구하는 비공식적 타진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편자 직후(8월 18일), 빅토르 세르쥬에게도 화해적인 편지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통일노동자당에 대한 트로츠키의 태도가 8월 전후에 크게 변화했음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프랑코의 반란에 대한 스페인 인민의 열광적 반격(통일노동자당은 그 중심세력 가운데 하나였다) 소식이 트로츠키에 전해졌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나 이 편지는 루에게 전해지지 않았으며, 스페인에 있던 이탈리아 비밀경찰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게다가 이 편지를 쓴 직후, 트로츠키는 소비에트 정부의 압력에 굴복한 노르웨이 정부에 의해 가택연금 상태에 처하게 되고, 따라서 외부와 연락을 취할 수 없게 됨에 따라 이 결정적인 몇 개월 동안, 트로츠키는 스페인 정세에 개입할 수 없었다. 그 사이에 스페인의 주류파 볼셰비키一레닌주의자는 트로츠키의 이런 태도를 알지 못한 채, 통일노동자당에 대한 규탄과 폭로를 정력적으로 펼쳐 통일노동자당과의 관계를 더욱 더 악화시켰다. 그리고 통일노동자당은 9월말에 카탈로니아 정부에 입각해버린다. 트로츠키가 멕시코로 망명한 뒤, 다시 스페인 사태에 개입했을 때는 이미 사태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되어 있었다.

 

친애하는 동지[동지 : 장 루(Jean Lous, 1908-1985). 프랑스의 트로츠키주의자, 변호사. 프랑스의 국제주의노동자당을 지도. 국제서기국에서 스페인문제를 담당했다.]

당신의 전보는 나로서는 전혀 뜻밖이었습니다. 공교롭게도 당신의 전보는 바르셀로나행 비자를 취득할 수 있을지 어떨 지가一내가 아는 한一아직 결정되지 않은 이 시기에 내가 스페인 사태에 직접 개입한 증거로 해석될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물론 비자를 취득한다면 나는 매우 기쁠 것입니다. 그럴 수 있을까요?

내가 이 땅에서 겪은 상황 즉, 파시스트의 습격[파시스트의 습격 : 1936년 8월 4일, 노르웨이의 파시스트는 트로츠키의 집을 습격해 문서 일부를 강탈했다,]과 타스 통신의 악명 높은 성명[타스 통신의 악명 높은 성명 : 타스 통신은 모스크바 재판을 통해 트로츠키가 소련에 테러를 감행 하고 있다는 사실이 폭로되고 있다고 비난했다.]등에 대해서는 당신도 잘 알 것입니다. 노르웨이 정부가 어떤 입장을 취할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노르웨이 정부는 스탈린-야고다[겐리크 야고다(Genrikh Yagoda, 1891-1938):고참 볼셰비키, 게페우 간부. 1920년부터 체카의 주요 활동에 참가. 1924년에 게페우의 부장관. 1934년부터 1936년까지 내무 인민위원(NKVD). 1938년, 제3차 모스크바 재판의 피고로서 사형을 선고받고 총살당했다.] 일당의 범죄적 만행에 대해서 조금도 개의치 않는 듯 보입니다.

나탈랴와 나는 즉시 바르셀로나로 갈 준비를 완벽하게 갖출 것입니다.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최대한 신중하게 문제에 접근해야 합니다.

당신도 잘 알겠습니다만 이곳에서는 당신에게 어떠한 조언도 해줄 수 없습니다. 스페인에서는 지금 직접적인 무장투쟁이 진행 중이고, 상황은 매일 변화하고 있습니다. 나에게는 정보가 거의 전달되지 않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마우린의 행방불명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살해된 것이 아니기를 바랄 뿐입니다. 닌이나 안드라데 등이 지난 시기의 기억으로 지금 이 거대한 투쟁을 이끌려는 것은 범죄일 것입니다. 강령과 방법에서 견해 차이가 있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이런 차이는 진실하고 지속적인 화해를 결코 방해하지 않았습니다. 더욱 깊은 경험이 나머지 모두를 결정하겠지요. 개인적으로 나는 먼 곳의 일개 관찰자에 지나지 않지만 이 싸움을 도울 전적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내가 가장 크게 걱정하는 문제는 통일노동자당과 조합주의자들 사이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가 배타적으로 또는 주로 교의적인 고려에 이끌릴 위험이 대단히 클 것으로 생각됩니다.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조합주의자들의 모든 편견에도 불구하고 이들과의 관계를 개선할 필요가 있습니다. 공통된 적을 패배시켜야 합니다. 투쟁 속에서 가장 뛰어난 조합주의자들의 신뢰를 획득해야 합니다. 물론 이런 문제가 동지에게 진부해 보일지도 모릅니다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얘기하는 것이니 먼저 양해를 구합니다. 나는 상황을 충분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구체적인 조언을 할 수 없습니다. 다만 10월 혁명 이전에 우리는 가장 순수한 무정부주의자들과도 함께 일하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했다는 점을 지적해두고 싶습니다.

케렌스키 정부는 자주 볼셰비키와 무정부주의자의 대립을 이용하려고 했습니다. 레닌은 이에 단호히 맞섰습니다. 레닌은 그 같은 상황에서 한 명의 무정부주의 투사는 동요하는 100명의 멘셰비키보다 더 가치 있다고 말했습니다. 파시스트에 의해 여러분에게 강제된 내전에서 가장 커다란 위험은 과단성 결여, 애매모호한 정신, 한마디로 멘셰비키주의입니다.

재차 말하지만 이 모든 것은 썩 명료하지 않습니다. 나는 가능한 한 정확한 제안을 하기 위해서 뭐든지 할 작정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를 갈라놓고 있는 이 공간적 거리를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 나로서는 있을 수 있는 모든 견해 차이에도 불구하고 투쟁 중인 동지들과 상호 이해에 이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고 맹세할 수 있습니다. 현재와 미래가 공동투쟁의 길을 열고 있다면, 과거를 돌아보는 것은 꼴 사나울 것입니다.

나는 사전의 도움을 빌어 투쟁의 추이를 자세하게 쫓을 생각입니다. 그러나 4일 내지 5일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동료들뿐만 아니라 특히 나를 못마땅하게 생각할 이유를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 진심에서 우러난 인사를 보냅니다.

 

〈추신〉

친애하는 루,

당신이 그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면, 닌이나 그 밖의 사람들에게 이 편지를 보여줘도 괜찮습니다. 이 편지에서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은 결코 외교적인 술책이 아닙니다. 다시 한 번 말합니다만 유연성은 견고함과 결합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나는 손발이 묶여 있다는 느낌입니다. 나탈랴와 나의 성공을 빌며.

 

L.T. 씀

1936년 8월 16일

 

 

아바스 통신사와의 인터뷰

 

■ 이 인터뷰는 트로츠키가 멕시코로 망명한 뒤 처음 스페인내전에 대해서 논한 것이다. 아바스 통신사는 프랑스의 저널리스트인 샤를 아바스에 의해 1835년에 파리에서 설립된 최초의 통신사이다.

트로츠키는 이 인터뷰에서 스페인의 노동자 농민이 승리하면 유럽전쟁이 벌어진다는 자본가계급과 스탈린주의자의 예측을 단호히 부정하고, 거꾸로 프랑코의 승리야말로 유럽 전쟁을 앞당기게 된다고 단언했다. 역사는 트로츠키의 예측이 올발랐음을 입증했다. 스페인에 대해 불가침 정책을 취함으로써 프랑스 인민전선 정부는 몇 년 뒤, 공화제의 사형집행서에 서명했다.

 

내가 싫건 좋건 의용병들에게 공화파 전선을 도우라고 '지령'을 내렸다는 것인가? 나는 누구에게도 '지령'을 내린 적이 없으며, 대체로 '지령'을 내리지 않는다. 나는 기사를 통해 내 의견을 표명한다. 오직 겁쟁이, 배신자, 파시즘의 하수인들만이 스페인 공화군에 대한 지원을 거부할 수 있다. 모든 혁명가의 첫째 의무는 프랑코, 무쏠리니, 히틀러 도당에 맞서 투쟁하는 것이다.

통일노동자당은 스페인 연립정부의 좌익이면서 부분적으로는 야당이다. 이 정당은 '트로츠키주의자'가 아니다. 나는 이 정당의 당원들, 특히 청년들이 전선에서 투쟁하며 발휘한 영웅주의에 대해 열렬히 공감하면서도 이 정당의 정책을 많은 경우 비판해왔다. 통일노동자당은 '인민' 전선의 선거 연합에 참가하는 오류를 저질렀다. 이 연합의 엄호 하에 프랑코 장군은 몇 개월간 걸쳐 지금 스페인을 유린하고 있는 반란을 대담하게 준비했다. 혁명정당은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간에 무지와 범죄적 관용정책에 대해 어떠한 책임을 질 권리가 없었다. 혁명정당은 대중에게 경계를 촉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통일노동자당 지도부는 카탈로니아 연립정부에 입각하는 두 번째 오류를 저질렀다. 전선에서 다른 정당들과 서로 협력하여 싸우기 위해서는 이 정당들이 잘못된 정부정책에 대해 책임을 질 필요가 조금도 없다. 한순간도 군사적 전선을 약화시키는 일 없이, 대중을 혁명적 기치 하에 정치적으로 결집시킬 줄 알아야 한다.

내전에서는 통상의 전쟁에서보다 훨씬 더 정책이 전략을 좌우한다. 군대지휘관인 로버트 리[로버트 리(Robert E. Lee, 1807-1870):미국 남북전쟁의 남부연합 총사령관. 북군의 그란트 장군에게 항복했다.]는 틀림없이 그란트[율리시스 그란트(Ulysses S. Grant, 1822-1885):미국 남북전쟁의 북군 총사령관. 1868년, 군사적 영웅으로서 대통령에 당선(제 18대, 1869~77), 재건정책을 실시했다.] 보다 재능이 있었지만, 노예제 폐지라는 강령이 그란트의 승리를 보증했다. 러시아의 3년에 걸친 내전에서도 군사적 기법과 군사적 기술의 우위성은 대개 적에게 있었다. 그러나 결국, 승리한 것은 볼셰비키의 강령이었다. 노동자는 자신이 무엇을 위해서 싸우고 있는지 매우 잘 알고 있었다. 농민은 오랫동안 망설였지만 두 체제를 경험을 통해 비교해보고는 마침내 볼셰비키를 지지했다.

합창단을 고음에서부터 지도하고 있는 스탈린주의자는 스페인에서 내각의 수반인 카바예로에게도 우선 군사적인 승리를 거둔 다음에 사회 개혁을 고집하는 정식을 제기했다. 나는 이 정식이 스페인혁명에 치명적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두 강령 사이의 근본적 차이를 보지 못하는 근로대중, 특히 농민은 무관심해질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불가피하게 파시즘이 승리할 것이다. 왜냐하면 순수 군사적 강점이 파시스트 측에 있기 때문이다. 대담한 사회개혁은 내전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이고, 파시즘에 대한 승리의 근본적인 조건이다.

지금까지 항상 혁명적 상황에서 기회주의자임을 드러내온 스탈린의 정책은 프랑스의 자본가계급, 특히 인민전선에 대해서 서류상으로 오래전에 전쟁을 선언한 '200대 족벌'을 불안에 떨게 한 공포에 의해 지시되고 있다. 스페인에서 스탈린의 정책은 1917년 케렌스키의 정책보다는 오히려 1918년 독일혁명에서 에베르트와 샤이데만[필립 샤이데만(Philipp Scheidemann, 1865-1939):독일사회민주당 우파. 저1차 세계대전 당시 당내 배외주의파의 지도자. 1919년 수상이었으며, 독일혁명을 진압하고,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 암살에 관여했다.] 이 수행한 정책을 반복하는 것이다. 히틀러의 승리는 에베르트-샤이데만 정책에 대한 징벌이었다. 독일에서 이 징벌은 15년이나 뒤로 미뤄졌지만, 스페인에서는 15개월을 넘기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스페인 노동자 농민의 사회적•정치적 승리는 유럽전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가? 반동적 겁쟁이에게서 나온 이러한 예언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 만약 스페인에서 파시즘이 승리했다면, 프랑스는 결코 빠져나갈 수 없을 바이스에 몰렸을 것이다. 프랑코의 독재는 유럽전쟁을 불가피하게 촉진할 것이며, 프랑스로서는 가장 곤란한 상황에 처할 것이다. 새로운 유럽전쟁은 프랑스인민의 피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 쥐어짜고, 이들을 몰락으로 이끌고, 게다가 전 인류에 끔찍한 타격을 가할 것이라는 점은 덧붙일 필요도 없다.

이에 반해서, 스페인 노동자 농민의 승리는 틀림없이 무쏠리니와 히틀러체제를 뒤흔들 것이다. 파시스트체제는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는 전체주의적 성격 덕분에 흔들리지 않는 견고함을 가진 것 같은 인상을 풍긴다. 그러나 실제로 파시스트 체제는 최초의 진지한 시험에 노출되자마자 내부 폭발로 희생될 것이다. 승리한 러시아혁명은 호엔쫄레른 체제의 힘을 서서히 약화시켰다. 승리한 스페인혁명은 히틀러와 무쏠리니 체제의 토대를 침식할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스페인 노동자 농민의 승리만이 평화를 위한 강력한 힘임이 즉시 드러날 것이다.

진정한 스페인 혁명가의 임무는 군사적 전선을 보강하고 강화하며, 소비에트 관료집단의 정치적 후견을 뒤엎고, 대중에게 대담한 사회적 강령을 제시하고, 그로 인해 혁명의 승리를 확보하고, 바로 이런 식으로 평화의 대의를 지키는 것에 있다. 그 가운데에서만 유럽은 구제될 것이다!

 

1937년 2월 19일

 

 

〈노동자투쟁〉편집부에 보내는 편지

 

■ 이 글은 이미 스페인내전이 전면화 되고 있던 단계에서 트로츠키가 프랑스 트로츠키주의의 공식 기관지 〈노동자 투쟁〉(La Lutte Ouvriere) 편집부 앞으로 보낸 편지이다. 많은 점에서 트로츠키와 의견을 달리한 통일노동자당 지도부는 편지 등으로 격렬한 논쟁을 펼치고 있었다. 특히 안드레스 닌이 인민전선 정부에 법무장관으로 입각한 것은 트로츠키에게는 계급적 배신행위와 다름없었다. 그런데 통일노동자당과 닌은 국제좌익 반대파 사이에서 일정한 지지를 받고 있었으며, 이는 종종 통일노동자당의 국제기관지 〈스페인혁명〉의 기사가 각국의 좌익반대파 기관지에 게재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트로츠키는 이 편지에 나타나 있듯이, 그러한 비원칙적인 태도를 준엄하게 비판했다.

 

친애하는 동지 여러분,

동지들의 신문 제9호(1937년 2월 27일 토요일자)에 통일노동자당의 기관지 〈스페인혁명〉에서 인용한 기사가 동지들의 찬사서문과 함께 게재되어 있습니다. 숨김없게 말하겠습니다. 이것은 통일노동자당 노동자들의 투쟁과 여러분의 연대가 아니라 통일노동자당 지도부의 정책과의 연대이고, 이것은 단지 오류에 불과한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하나의 범죄로 생각됩니다. 때문에 나는 온힘을 다해 공개적으로 항의하고자 합니다.

여러분이 전재한 기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잘못되어 있습니다. 이 기사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은 닌과 그 동료들의 정책이 드러내고 있는 지극히 모호하고 다의적인 표현방식 때문입니다. 이들은 "부르주아적 반(反)파시즘"과 "부르주아적 신新)공화국"의 강령에 대해 논쟁을 재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도대체 왜 닌은 이 "부르주아적 신(新)공화국"의 장관이 되어야 했습니까? 그는 공개적으로 자신의 오류 즉, 진실을 말하자면 일종의 배신인데, 이를 인정했습니까? 부르주아 정부에 있으면서 어떻게 부르주아공화국과 투쟁할 수 있습니까? 부르주아 정부의 "법무"장관으로서 부르주아 국가를 대표하는 동시에, 어떻게 부르주아 국가 타도를 위해 노동자를 동원할 수 있습니까? 이것이 사태에 진지하게 임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노동자계급의 강령과 사상을 조롱하는 것입니까?

이 기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잘못되어 있습니다. 이 기사는 "독점자본주의의 소멸을 통해 소부르주아 계급의 지도자들이 대두했다"고 평하고 있습니다. 아사냐, 콤파니스 등의 역할에 대한 성격 규정은 완전히 잘못되어 있습니다. 이 신사양반들은 소부르주아 계급이 아닙니다. 몰락한, 탈 계급화 된 진짜 소부르주아 계급은 농민, 장인, 피고용인(사무직원)입니다. 아사냐와 그와 같은 부류들은 대자본가계급을 위해서 소자본가계급을 이용하고 있는 정치적 착취자들입니다. 이들은 허수아비처럼 인민대중 진영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리고 까마귀는 사회당의 지도자들, 개량주의자들, 그리고 애석하게도 통일노동자당인 것입니다. 이들은(아사냐 콤파니스등)은 감히 사유재산을 손대려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실제로 사유재산에 기초한 "정의"의 옹호자 역할을 수행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진실이고, 나머지는 모두 거짓말일 뿐입니다. "독점자본주의" 는 프랑코가 승리할 때까지 죽은 체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 사이에 아사냐와 콤파니스는 자신의 용무를 처리하고, 〈라 바탈랴〉(la Batalla, 전투)지는 "통일노동자당 없이 또는 통일노동자당에 반해서" 아사냐 등은 자신의 용무를 처리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기사는 모든 것이 잘못되어 있습니다. 회고도 그렇고, 전망도 그렇습니다. "권력 분담"(미안하지만 이는 계급들의 협력입니다)은 오직 "자유에 반대하는 전쟁덕분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권력 분담" 즉, 통일노동자당과 부르주아적 신(新)공화국 지도자들과의 협력은 노동자와 농민의 고양을 대단히 무력화시키고, 패배에 패배를 거듭하게 했습니다. 이들은 이에 대해 아무 할 말이 없자 이런 엉뚱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 "그러나 오늘, 심지어 전쟁의 수행도 취해야 할 방법에 대해서 결정을 (누구에 의한?) 내릴 필요가 있다." 왜 "오늘"일까요? 어제의 정책이 오늘 나락의 끝에 이르렀기 때문입니까? 그리고 나락의 끝에서도 통일노동자당은 배신적 지도자들에 대항하여 무장한 대중을 고무하는 대신에, 이들에게 계속 설교하고 있습니다.?

대중을 고무하여 배신적 지도자들에 대항하게 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볼셰비키주의의 출발점입니다. 부르주아적 신(新)공화국의 장관이라는 짧은 희극적 역을 연기할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 장관들을 내쫓기 위해서, 그리고 사회당이나 스탈린주의 장관들을 대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대담하고 공공연하게 노동자들을 동원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대중 안에서, 그리고 대중을 통해서 이 가차 없는 임무를 수행하는 대신에, 통일노동자당은 노동자국가 지지 입장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애매모호한 기사를 쓰고 있습니다.

"전쟁을 수행하는 것은 집산화와 사회화를 보장하는 것이다. …" 혁명적 용기의 완전한 결여를 은폐하려는 완전히 추상적인 삼단논법 입니다. 집산화 없이 전쟁을 수행하는 것은 패배를 의미한다. 승리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무장대중의 직접적 압력에 의해 자본가계급이 축출되어야 하고, 배신적 지도자들을 궁지에 몰아넣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추상적인 삼단논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행동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바로 이 점에서 스페인의 마르토프인 닌은 굴복하고 맙니다.

"강력한 군수산업을 자기 수중에 두고 있는 카탈로니아의 노동자계급은 군수품에 관해서 공화국의 중앙정부를 예속 상태(!)로 두고 있다." 부르주아적 신(新)공화국 정부에 대한 통일노동자당 지도자들이야말로 예속 상태에 있습니다. 이것이 진실입니다. 이 정책이 계속된다면, 카탈로니아의 노동자계급은 1871년 파리꼬뮌에 필적하는 끔찍한 재앙의 희생자가 될 것입니다.

닌은 6년 동안 오류만 저질러왔습니다. 그는 사상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며, 어려움을 피해 다녔습니다. 투쟁하는 대신에, 보잘것없는 연합에 종사해왔습니다. 스페인에서 혁명정당 건설을 지연시켜왔습니다 . 그를 추종하는 지도자들은 모두 같은 책임을 져야 합니다. 6년 동안 이들은 스페인의 정력적이고 영웅적인 노동자계급이 가장 끔찍한 패배를 당하도록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왔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모든 경험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애매한 태도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들은 악순환을 끊지 않습니다. 부르주아공화국에 대항하여 대중을 고무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부르주아공화국에 순응한 다음, 이를 보완하기 위해 이따금 노동자혁명에 대한 기사를 쓰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비참한 일입니까! 그런데도 여러분은 사이비 볼셰비키 정식으로 온몸을 감싸고 있는 멘셰비키 배신자들을 비난하는 대신에, 칭찬을 곁들여 이들의 기사를 전재하고 있습니다.

통일노동자당 노동자는 영웅적으로 싸우고 있다는 등의 바보 같은 말은 하지 말아주십시오. 나는 다른 누구보다도 이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진실을, 그리고 진실만을 말하게 하는 것은 바로 이들의 투쟁이고, 이들의 희생인 것입니다. 외교적 술수나 불장난, 애매함을 집어치웁시다. 전쟁과 혁명의 운명이 걸려 있을 때, 가장 가혹한 진실을 말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닌의 정책과 아무런 공통점도 없으며, 그의 정책을 비호하거나 위장시켜주거나 옹호하는 어떠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1937년 3월 23일

 

 

스페인내전에서의 혁명전략

 

■ 이 글은 모스크바 재판의 거짓말을 폭로하기 위해서 트로츠키와 그의 지지자들이 망명지 멕시코에서 조직한 대항재판(재판장은 듀이)의 일부(스페인혁명에 관한 질의응답 부분)이다.

 

빌스: [칼튼 빌스(Carleton Beals, 1893-1979) : 멕시코에서 교사, 저널리스트로 활동. 라틴 아메리카 전문가가 되어 미국으로 돌아온다. 듀이위원회의 위원이었지만, 나중에 사임, 트로츠키에 관해서 비방 중상을 흘렸다.] 이런 방침에 따라서 한 가지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계대전에 대해서 말하고 있고, 스페인에서의 전쟁이 세계대전의 가장 임박한 위험을 낳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스페인의 트로츠키주의자들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있습니까?

트로츠키: '스페인의 트로츠키주의자들'이란 무엇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빌스: 당신은 '트로츠키주의자'라는 명칭을 쓰고 있는 스페인의 여러 분파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있습니까?

트로츠키 : 트로츠키주의자는 없습니다. 지금은 코민테른의 정책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이 코민테른에 의해 '트로츠키주의자'라고 불리는 상황입니다. 왜냐하면 트로츠키주의자는 코민테른의 선전에서 파시즘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어리석은 주장입니다. 스페인에서 트로츠키주의자는 많지 않습니다一진정한 트로츠키주의자 말입니다. 나는 이를 유감으로 생각하지만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들은 많지 않습니다. (스페인에는) 통일노동자당이라는 강력한 정당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 당만이 내가 파시스트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 당의 청년은 우리의 사상에 공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당의 정책은 매우 기회주의적이고, 따라서 나는 이를 공공연하게 비판합니다.

빌스 : 그 당의 지도자는 누구입니까?

트로츠키: 닌입니다. 그는 나의 친구입니다. 그를 매우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를 매우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빌스 : 내가 이것을 거론하는 한 가지 이유는 트로츠키주의자 분파가 스페인의 공화파 운동을 사보타지한다는 비난이 있기 때문입니다.

트로츠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우리가 공화파 운동을 사보타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 나는 많은 인터뷰나 글을 통해 내 생각을 밝혔다고 봅니다. 스페인에서 승리를 확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농민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스페인의 토지는 여러분들의 것이다.' 그리고 노동자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스페인의 공장은 여러분들의 것이다.' 이것이 승리를 확보하는 유일한 가능성입니다. 프랑스 자본가계급을 겁주지 않기 위해 스탈린은 스페인에서 사적 소유의 호위병이 되었습니다. 스페인 농민은 고상한 정의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습니다. 농민은 이렇게 말합니다: '프랑코나, 카바예로나 그 놈이 그놈이다.' 왜냐하면 농민은 매우 현실적이기 때문입니다. 러시아 내전 중에 우리가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 주로 우리의 군사적 지식 때문이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가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의 혁명적 강령 때문입니다. 우리는 농민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들의 토지다.' 그리고 일찍이 우리에게서 멀어져 백군에게로 간 농민은 볼셰비키를 백군과 비교하여, '볼셰비키가 더 낫다'고 말했습니다. 당시 농민, 수백만의 러시아 농민이 볼셰비키가 더 낫다고 확신했기에, 우리가 승리했던 것입니다.

빌스 : 스탈린이 스페인에서 사적 소유의 호위병이 되었다는 점에 대해 좀 더 부연 설명해주시겠습니까?

트로츠키 : 스탈린과 코민테른은 스페인에 관해서 사회개혁은 승리 뒤에나 일어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전쟁이다. 지금 우리의 일은 전쟁이다.' 농민은 냉담해집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전쟁이 아니다. 어느 쪽 장군이 승리하든 관심이 없다. 장군들끼리 서로 싸우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농민의 견해입니다. 매우 소박한 말투지만, 농민이 올바른 것입니다. 나는 세련된 외교관들에 반대하여 이 소박한 스페인 농민에 찬성합니다.

빌스 : 그렇다면 당신은 스페인에서 어느 진영이 승리하는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어느 진영이 전쟁에서 승리해도 별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까?

트로츠키: 그렇지 않습니다. 노동자는 이 전쟁에서 이겨야만 합니다. 노동자가 승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당신에게 보증하건대, 코민테른과 스탈린의 정책이야말로 스페인혁명을 패배시키는 가장 확실한 방식이라는 점입니다. 이들은 이미 중국혁명과 독일혁명을 패배시켰으며, 이제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패배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노동자혁명은 단 한번밖에 승리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10월 혁명입니다. 그리고 10월 혁명은 스탈린의 방식과 정면으로 대립되었습니다.

빌스 : 그럼, 만약 당신이 스탈린의 지위에 있었다면, 지금 스페인의 경우에 어떤 조치를 취할 것입니까?

트로츠키: 그럴 리가 없습니다.

빌스 : 이를테면 말입니다. 만약 당신이 스탈린의 지위에 있었다면, 만약 당신이 소비에트 연방의 운명을 수중에 쥐고 있었다면, 스페인에서 당신은 어떤 행동을 취할 것입니까?

트로츠키: 그것은 소비에트 연방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코민테른의 혁명적 정당들의 문제이다. 그것은 당의 문제입니다. 물론 나는 여전히 모든 부르주아 정당들에 반대할 것입니다.

스톨베르그[벤자민 스톨베르그(Benjamin Stolberg, 1891-1951):미국의 작가, 저널리스트. 노동조합 운동 사가. 듀이위원회의 위원]: 트로츠키 씨, 칼튼 빌스의 질문과 관련된 질문을 해도 괜찮겠습니까? 당신이 1923년 이후에도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 경우에 당신의 관점에서 볼 때, 중국혁명은 구제되거나, 추가로 새로운 승리를 쟁취했을지도 모릅니다. 독일의 파시즘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룹니다. 즉, 1923년의 시점에서 당신의 입장이 승리를 거두었다면 말입니다. 그 경우, 스페인 사태는 현재와는 다른 식으로 전개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패배했습니다. 중국과 독일에서 코민테른의 정책은 패배를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스페인 사태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나는 단지 당신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바를 제시하고 있을 뿐 입니다. 그렇다면 질문하겠습니다. 지난 14년 동안 저지른 오류에 더하여 우리는 스페인 사태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스페인의 내전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순수하게 정통적이거나, 순수주의적인 입장에서는 꼭 문제에 답하지 않아도 됩니다. 현재 스페인에서 당신은 누구 편을 지지할 것입니까?

트로츠키 : 나는 많은 인터뷰나 글을 통해 이미 답변했습니다. 스페인의 모든 트로츠키주의자는 좌익 편에 선 믿을만한 병사임에 틀림없습니다. 물론 이것은 아주 간단한 문제입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이는 토론할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카바예로 정부의 지도자나 다른 참여인사 모두 배신자입니다. 노동자계급의 지도자는 부르주아 정부에 입각할 수 없습니다. 우리도 러시아에서 케렌스키 정부에 입각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코르닐로프에 대항하여 케렌스키를 방어하면서도, 그의 정부에는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이미 밝힌 것처럼, 나는 파시스트에 대항하여 스탈린과 동맹을 맺거나, 프랑스의 파시스트에 대항하여 주오[레옹 주오(Leon Jouhaux,1879-1954):프랑스의 노동운동 지도자, 무정부적 조합주의자, 노동총동맹(CGT)의 총서기. 1919년 이후 암스테르담 인터내셔널 지도자 가운데 한사람.]와 동맹을 맺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간단한 문제입니다.

피너티[존 피너티(John F.Finerty,1885-1967):미국의 변호사. 철도부설권의 전문가이지만, 사코와 반제티의 최종 공소심, 톰 무니의 변호를 담당했다. 1937년에는 듀이위원회의 고문 변호사.] : 트로츠키 씨, 만약 현재 당신이 러시아에서 권력을 잡고 있다면, 그리고 스페인의 공화주의자들이 당신의 도움을 요청했다면, 당신은 토지는 농민에게, 공장은 노동자에게 주어져야 한다는 조건으로 도와 줄 것입니까?

트로츠키: 그러한 조건은 붙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문제가 안 됩니다. 첫째 문제는 스페인 혁명정당의 태도일 것입니다. 나라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자본가계급과의 정치적 동맹은 절대 반대한다', 이것이 첫째 조건이다. 둘째 조건은 '여러분은 파시스트와 싸우는 가장 우수한 병사가 되어야 한다.' 셋째 조건은 '여러분은 다른 병사나 농민들에게 이렇게 말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들의 나라를 인민의 나라로 전화시켜야 한다. 동시에 우리가 대중을 획득할 경우, 자본가계급을 공직에서 내쫓은 다음, 권력을 잡고 사회혁명을 수행할 것이다."'

피너티 : 그렇다면, 효과적인 지원을 위해서는 스페인의 마르크스주의정당과 동맹을 맺어야만 한다는 것입니까?

트로츠키 : 물론, 나는 파시즘에 대항하여 모든 물질적 수단으로 카바예로를 지원할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공산당에게는 카바예로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고, 노동자혁명의 제2장을 준비하기 위해 정부에 입각하지 말 것을 조언할 것입니다.

빌스 : 아사냐가 최초로 정권을 잡았을 때(1931~33년), 아사냐 정부가 반동을 초래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러한 정책 때문이었던 것은 아닙니까?

트로츠키 : 아닙니다, 보수적인 부르주아 정책 때문입니다. 아사냐가 혁명을 반, 아니 3분의 1로 만들려고 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던 것입니다. 내 의견은 그러한 혁명은 차라리 시작하지 않는 편이 더 나을 것입니다. 혁명을 시작했다면, 끝까지 수행해야 합니다. 끝까지 수행하는 혁 명은 사회혁명을 의미합니다.

빌스 : 그러나 당신의 정책을 따르면, 아마도 프랑코가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트로츠키 : 프랑코의 승리는 현재 코민테른의 정책에 의해 보증되어 있습니다. 스페인혁명, 스페인 노동자계급과 농민은 지난 6년 동안 그 노력, 에너지, 헌신으로 다섯 번이나 여섯 번의 승리를 보장할 수 있었습니다. 매년 승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의 지배계층은 대중의 혁명적 힘을 방해하고, 사보타지하고, 배신하려고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습니다. 혁명은 노동자계급의 기본적인 힘과 그 지도자들의 정치적 지도에 근거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고, (이 점에서) 스페인의 지도부는 언제나 비참했습니다. 스페인의 노동자계급은 과거 10년 동안 가장 뛰어난 실체적 세력, 가장 뛰어난 혁명적 세력임을 입증했습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스페인혁명은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는 공산주의 인터내셔널과 제2 인터내셔널이 그 배신적 정책으로 승리를 방해해온 것을 비난합니다. 이러한 정책은 자본가계급의 기세에 밀린 비겁함, 자본가계급과 프랑코의 기세에 밀린 비겁함에 입각해 있습니다. 이들은 자본가계급과 함께 정부에 머물러 있습니다. 정부안의 자본가계급은 사적 소유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카바예로 자신은 사적 소유의 상징에 굴복합니다. 그렇지만 대중은 이 두 체제 사이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골드만[알버트 골드만(Albert Goldman,1897-1960):미국의 트로츠키주의자, 듀이위원회의 트로츠키 변호사. 1930년 소련을 여행, 트로츠키 관점의 올바름을 확신했다. 1933년 미국공산주의자동맹, 1934년, 사회당에 가입.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지도자였지만 1946년에 탈당했다.]: 당신은 승리의 가능성, 프랑코에 대한 카바예로의 군사적 승리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입니까?

트로츠키: 군사적 승리를 말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대중이 불만과 무관심에 빠져 있고, 승리에 의해 창출된 새로운 군사적 기구가 사회주의 기구가 아니라면, 군사적으로 승리했어도 승리한 체제는 매우 짧은 시간안에 파시스트체제로 바뀔 수 있습니다.

골드만: 그러나 스페인의 대중은 자신들이 실제로 프랑코와 파시스트에 맞서 투쟁하고 있으며, 실제로 고유한 노동자적 이해를 위해서 투쟁하고 있다는 환상 속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트로츠키: 유감스럽게도, 대중의 대다수는 모든 환상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내전의 질질 끄는 성격을 설명해줍니다. 왜냐하면 인민전선 정부는 프랑코를 지지하는 군대를 준비했기 때문입니다. 인민 전선에서, 선거 승리에서 비롯된 새로운 정부는 따라서 군대와 프랑코를 보호했습니다. 그 때문에 인민전선 정부 아래에서 군대는 봉기를 준비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내전이 시작되었으며, 자본가계급은 인민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틀림없이 승리를 기다릴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매우 관대해질 것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승리한 뒤의 일이다.'

골드만: 그런데, 당신은 30분전에 물어본 질문에 아직 답하지 않았습니다.

빌스 : 나도 완전히 마무리하지 못했습니다. 트로츠키 씨, 당신이나 스탈린 씨가 어떻게 스페인 사태를 구할 생각인지 나는 아직 알지 못합니다. 당신이 제시한 정책들 모두가 내게는 프랑코의 전쟁 승리라는 가장 직접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으로 생각됩니다. 개인적으로 나는 프랑코를 조금도 편들 생각이 없습니다. 나는 당신 이야기의 요점을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한편으로 내게는 프랑코 씨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둘 것으로 생각됩니다.

트로츠키: 그 점에 관해서는 내가 동료나 같은 확신을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 제시한 실마리, 약간의 실마리에 대해서 반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첫 번째 조언은 이제 카바예로 진영에서 가장 뛰어난 병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일 먼저 할 일입니다. 알다시피, 스페인에는 제4 인터내셔널 그룹이 존재하고, 참호에는 일단의 우리 동지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너무도 기본적이어서 강조하지 않을 것입니다. 필요한 것은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알다시피, 소총으로 싸우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올바른 생각을 갖고, 이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미래를 준비해야 합니다. 나는 소박한 농민과 함께 싸우지만, 농민은 정세에 대해서 거의 알지 못합니다. 그에게 설명해야 합니다. 나는 틀림없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 '당신이 프랑코와 싸우는 것은 옳은 일이다. 우리는 파시스트를 전멸시켜야 한다. 그러나 내전 전과 같은 스페인을 갖기 위해서가 아니다. 왜냐하면 프랑코는 내전 전의 스페인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프랑코의 기반을, 프랑코의 사회적 기반을 근절시켜야 한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사회적 시스템이다. 내 생각을 납득하겠는가?' 나는 이렇게 농민에게 묻습니다. 그는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 '그래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런 다음 같은 것을 노동자에게도 설명합니다.

빌스 : 프랑코와 싸울 병사는 보내면서, 왜 같은 목적에 도움이 될 카바예로 정부에 입각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까?

트로츠키 : 그 점은 벌써 설명했습니다. 우리는 케렌스키 정부에 들어가는 것을 딱 잘라 거절했지만, 볼셰비키는 코르닐로프에 대항한 가장 뛰어난 투사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가장 뛰어난 병사와 수병이 볼세비키였습니다. 코르닐로프가 반란을 일으킨 동안, 케렌스키는 발틱함대의 수병들에게 의지하여 동궁의 자신들을 지켜줄 것을 이들에게 요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당시 나는 옥중에 있었습니다. 수병들은 케렌스키를 지켜주기로 하고, 내게 대표단을 보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었습니다: 케렌스키를 체포할 것인가, 아니면 그를 보호할 것인가. 이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다, 지금은 케렌스키를 확실히 보호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내일은 그를 체포할 것이다'(웃음).

골드만: 끝났습니까?

빌스: 그렇습니다.

 

1937년 4월 14일

 

 

스페인에서 승리할 수 있는가?

 

■ 이 글은 스페인내전에서 혁명세력이 취해야 할 전략과 전술을 재차 정리한 글이다. 트로츠키는 사회주의혁명 없이는 공화주의 세력이 승리했더라도 프랑코 체제와 같은 파시즘 체제가 성립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러시아어판 〈반대파 회보〉 제56~57호 (1937년 7~8월)에 크룩스(Crux)라는 가명으로 게재되었다.

 

다시 한 번 기본적인 사실을 검토하자. 프랑코의 군대는 아사냐 즉, 사회주의자와 스탈린주의자를 비롯하여 나중에는 무정부주의 지도자까지도 포함한 인민전선의 직접적인 비호 하에 수립되었다.

전쟁의 장기적 성격은 인민전선 즉,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의 보수적인 부르주아 강령의 직접적 결과이다.

인민전선 정책이 나라와 혁명에 대해 지배력을 오랫동안 유지하면 유지할수록, 대중의 피폐와 환멸이라는 위험이, 그리고 파시즘의 군사적 승리라는 위험이 더욱 더 커진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스탈린주의자, 사회민주주의자, 무정부주의자,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자본가계급의 이해에 인민의 혁명을 종속시킨 케렌스키, 체레텔리, 에베르트, 샤이데만, 오토 바우어[오토 바우어(Otto Bauer, 1881-1938):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과 제2인터내셔널의 지도자. 오스트리아-마르크스주의의 대표적 이론가. 1918년의 오스트리아혁명 뒤에 외무장관으로 취임, 오스트리아의 독일 병합을 지지했다. 1921년에 사회주의노동자인터내셔널(2.5 인터내셔널)을 창설했다.] 등과 같은 자들을 모범으로 삼은 그 지도자들에게 있다.

이것은 현재의 정책이 계속된다면 프랑코에 대한 라르고 카바예로의 군사적 승리는 상상할 수도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두 적대 진영의 물질적 · 정신적 자원을 사전에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직 투쟁의 경과 자체만이 실질적인 세력관계를 검증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군사적 승리 그 자체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혁명의 승리, 즉 다른 계급에 대한 한 계급의 승리에 관심이 있다. 공화주의 군대를 전력을 다해 지원할 필요가 있지만, 프랑코 군대에 대한 라르고 카바예로 군대의 승리는 단연코 혁명의 승리를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인민전선의 속물들은 우리에게 질문한다 : ‘당신이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도대체 어떤 혁명인가, 민주주의혁명인가 사회주의혁명인가? 프랑코 군대에 대한 타르고 카바예로 군대의 승리는 파시즘에 대한 민주주의의 승리 즉, 반동에 대한 진보의 승리를 의미한다.’

쓴웃음을 짓지 않고는 이런 주장을 들어줄 수 없다. 1934년 이전에 우리는 제국주의 시대에는 민주주의조차도 지속적으로 파시즘을 선호하게 된다고 스탈린주의자들에게 끊임없이 설명했다. 즉, 양자 사이에서 적대적 충돌이 일어날 모든 경우에, 혁명적 노동자계급은 파시즘에 대항하여 민주주의를 지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만 우리는 항상 이렇게 덧붙였다 : 우리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수단을 통해서가 아니라, 계급투쟁이라는 방식을 통해 옹호할 수 있고, 또 옹호해야 한다. 이것이 차례로 부르주아민주주의의 노동계급독재로의 대체를 촉진한다. 이것은 특히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과정에서―심지어 무장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노동자계급 정당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해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으며, 그 정부에 입각하지도 않지만 인민전선의 모든 정당들에 대한 비판과 행동의 완전한 자유를 지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컨대, 다음의 단계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전복을 준비하는 것이다.

다른 어떤 정책도 범죄이며, 내전의 직접적 결과에 관계없이 필연적으로 붕괴할 운명인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결속시킬 시멘트로서 노동자의 피를 이용하려는 절망적인 시도이다.

1923∼29년에 제조된 비참한 코민테른의 편찬물을 잔뜩 읽은 일부 얼간이는 '그러나 당신은 농민을 무시하고 있다!'고 외친다. 가장 빠르게 농민을 '무시하고 있다'고 외치는 것은 공동전선을 대표하여 토지 소유자와 함께 농민의 혁명적 이해를 배신하고 있는 신사양반들이다. 스페인 농민은 노동자계급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싶은 자신의 열망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이 모든 것은 노동자계급에게 사실상 토지 착취자와 고리대금업자에 대한 몰수의 길로 접어들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이 혁명적 토지강령을 제시하는 것을 막아온 사람들은 바로 스탈린주의자와 그 새로운 제자인 '사회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이다.

스탈린-카바예로 정부는 자신의 군대에 사적 소유를 지키기 위한 '민주주의적' 호위병의 성격을 불어넣으려 전력을 다하고 있다. 이것이 인민전선의 본질이다. 나머지 것들은 모두 미사여구를 늘어놓은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인민전선은 파시즘의 승리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현실을 모르는 체하거나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자본의 민주주의적 수호자가 자본의 파시스트적 호위병에 대해서 군사적으로 승리할 수 있는가? 가능하다. 그러나 현 시기는 파시스트적 호위병이 자본의 요구에 훨씬 더 부합하기 때문에 스탈린-카바예로 정부가 군사적으로 승리하더라도 그 승리는 견고해지거나 지속될 수 없다. 노동자혁명이 없다면, '민주주의'의 승리는 똑같은 파시즘의 우회로를 의미할 뿐이다.

안드레스 닌은 스페인 노동자계급의 영웅적 투쟁으로 인해 혁명이 '지연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닌은 이런 지연이 통일노동자당 지도부의 직접적인 협력 때문이라는 사실을 덧붙이는 것을 잊고 있다. 통일노동자당은 혁명의 모든 단계에서 다른 모든 정당들에 대해서 자신의 당을 대치하고, 그로 인해 노동자계급의 승리를 준비하는 대신에, 사회주의자와 스탈린주의자, 즉 자본가계급에 '결정적으로' 순응했다. 동요와 순응이라는 이 치명적인 정책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에 대해서 우리는 혁명이 막 시작된 6년 전에 이미 닌에게 예언했었다. 우리는 분별력 있는 모든 노동자에게 수백 통의 편지와 글을 통해 전개된 닌과 우리의 논쟁을 다시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다. 닌의 현재의 동요는 완전히 지난날의 동요에서 비롯하고 있는 것이다.

닌은 '우리가 카탈로니아 정부에서 추방된 이래, 반동이 강화되었다'고 말한다. 실제로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 '우리의 카탈로니아 정부 참여는 자본가계급에게 우리를 내쫓고 스스로를 강화시킬 수 있는 기회와 노골적으로 반동의 길에 들어설 기회를 더 손쉽게 제공해주었다.' 통일노동자당은 실제로 지금도 부분적으로 인민전선에 머물러 있다. 통일노동자당의 지도자는 카탈로니아 정부에게 사회주의 혁명의 길을 갈 것을 하소연하듯이 설득하려고 한다. 통일노동자당 지도자는 국가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의 가르침을 어떻게든 전국노동자연맹 지도자에게 이해시키려고 공손하게 노력하고 있다. 통일노동자당 지도자는 스스로를 인민전선 지도자들에 대한 '혁명적' 조언자로 간주하고 있다. 생기가 없는 이런 입장은 혁명가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인민전선 정부에 대해서 대중을 공공연하고 대담하게 동원할 필요가 있다. 무정부주의자를 자처하지만 실제로는 보통의 자유주의자임이 드러난 이런 신사양반들의 배신을 조합주의와 무정부주의 노동자가 알 수 있게 폭로할 필요가 있다. 자본가계급의 가장 악질적 하수인인 스탈린주의자를 가차 없이 공격할 필요가 있다. 자신이 부르주아 정부의 조언자가 아니라, 혁명적 대중의 지도자임을 통절히 느낄 필요가 있다.

물론 부르주아적 스탈린-카바예로 체제의 민주주의 군대의 순전히 군사적인 승리는 가능하다. 그러나 그 직접적인 결과는 무엇일 것인가? '규율'과 '군대의 통일'이라는 명목으로 노동자 조직, 특히 그 좌익에 대해 가해지고 있는 현재의 폭력 행위는 바로 보나파르트주의의 각개훈련을 의미하는 것이다. 문제는 노동자 군대의 내적 규율이 아니라, 자본가계급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군사적 종속이다. 군사적 승리는 '공화국' 군대 지휘부의 자의식을 엄청난 정도로 끌어올리고, 속속들이 보나파르트주의적 경향으로 물들일 것이다. 이에 반해서, 노동자의 피를 대가로 치른 군사적 승리는 노동자계급 전위의 자의식과 결의를 드높일 것이다. 바꿔 말하면, 자본의 파시스트 군대에 대한 자본의 공화주의 군대의 승리는 필연적으로 공화주의 진영 내부의 내전을 일으킬 것이다.

이 새로운 내전에서 노동자계급은 노동자와 반(半)노동자적 농민 대 다수의 신뢰를 획득할 줄 아는 혁명정당을 지도부로 가진 경우에만 승리할 수 있다. 만약 결정적인 순간에 이러한 당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공화주의 진영 내부의 내전은 프랑코 장군의 독재와 성격상 거의 차이가 없는 보나파르트주의의 승리에 이르게 될 우려가 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인민전선의 정책은 똑같은 파시즘의 우회로인 것이다.

아사냐가 프랑코 군대를 준비시키고 무장시킨 것처럼, 사회주의자의 가면을 쓴 제2의 아사냐인 카바예로는 '공화주의' 장군의 가면을 쓴 제2의 프랑코 군대―스페인판 까베냑[루이 까베냑(Louis Cavaignac, 1802-1857) : 식민지 알제리 원주민의 반란을 토벌하여 이름을 알렸다. 1848년 2월 혁명 후 육군장관, 6월 혁명 진압군 총사령관, 12월 부르주아 공화파를 대표하여 대통령선거에 나섰으나 루이 나폴레옹에게 패배했다.]이나 갈리페[가스통 갈리페(Gaston Galliffet, 1830~1909) : 프랑스의 반동적 장군. 보불전쟁에서 아프리카 기병을 이끌고 활약. 베르사유군을 인솔하여 파리꼬뮌을 철저하게 탄압했다. 1899년, 발데크-루소 내각의 육군장관.]―를 준비할 것이다. 이것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은 경멸받아 마땅하다!

〈라 바탈랴〉지 4월 4일자에 '승리를 위한 13가지 주의사항'이라는 기사가 게재되어 있다. 모든 주의사항이 통일노동자당 중앙위원회가 당국에 제의하는 조언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통일노동자당은 '노동자와 농민조합, 그리고 병사 대표자 대회의 소집'을 요구하고 있다. 형식적으로는 노동자, 농민, 병사 대표자 대회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통일노동자당이 부르주아적 개량주의 정부에게 이러한 대회의 소집을 공손하게 제의하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 대회가 '평화적으로' 부르주아 정부를 대체해야 한다. 혁명적 구호가 공문구로 바뀐 것이다!

네 번째 주의사항은 이렇게 선언한다 : '노동자계급에 의해 통제되는 군대를 창설하자.' 개량주의자와 동맹한 자본가계급이 닌이 통제할 군대를 창설해야 한다는 것이다. 통일노동자당 지도자의 맥빠진 입장이 가장 결정적인 군대 문제에서 가장 치명적인 형태로 나타나 있다. 군대는 지배계급의 무기일 뿐, 그 밖의 다른 것이 될 수 없다. 군대는 그것을 지휘하는 사람에 의해, 즉 국가권력을 쥔 사람에 의해 통제된다. 노동자계급은 자본가계급과 그 개량주의적 추종자에 의해 만들어진 군대를 '통제'할 수 없다. 혁명정당은 이러한 군대에 자신의 세포를 건설하고, 군대안의 선진 부위가 노동자 편으로 넘어오도록 준비할 수 있고, 또 해야 한다. 이 기본적인 혁명적 임무는 자본가계급의 군대에 대한 노동자 '통제'라는 달콤한 공상을 꿈꾸는 통일노동자당 중앙위원회에 의해 호도되고 있다. 통일노동자당의 공식적 입장은 양면적인 태도로 가득 차 있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양면적인 태도야말로 중도주의의 진수이다.

닌은 ‘혁명은 후퇴한 상태다’라고 심각하게 선언하지만, 실제로는 그 자신이 후퇴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면 아마 닌은 내리막길로 가고 있는 혁명을 민주주의 단계에서 저지할 준비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아무리 보아도 허풍이라는 브레이크 말고는 도움 받을 것이 없다. 만약 닌이 자신의 말을 충분히 생각할 수 있었다면, 혁명이 노동계급독재로까지 고양되는 것을 이 지도자 양반들이 막고 있는 한, 혁명은 필연적으로 파시즘에 전복될 것이라는 점을 이해할 것이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그랬고, 스페인의 경우도 그렇게 될 것이다. 다만, 훨씬 더 짧은 시간 안에 그렇게 될 것이다. 스페인의 상황을 끝까지 충분히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닌이 지금도 여전히 스페인 노동자는 평화적 수단으로 권력을 장악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는 새빨간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직도 권력은 스탈린주의자와 무정부주의적 개량주의자와 동맹한 군사지도자와 관료의 수중에 있다. 이 신사양반들은 모두 노동자에 대한 투쟁에서 외국 자본가계급과 소비에트 관료집단에 의지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평화적인 권력 획득에 대해 말하는 것은 자신과 노동자계급을 속이는 것이다.

3월말에 한 같은 연설에서 닌은 이들이 노동자에게서 총을 빼앗고 싶어 한다고 말했으며, 무기를 포기하지 말라고 노동자에게 권고했다. 물론 이 조언은 올바르다. 그러나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무장해제 시키고 싶어 하고, 다른 계급, 즉 노동자계급이 자신의 무기를 포기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내전이 임박했음을 의미할 것이다. 평화적인 권력 획득이라는 잘못되고 감상적인 전망은 노동계급독재에 관한 닌의 모든 급진적 주장을 뒤엎는다. 게다가 닌의 정책의 본질은 바로 이 감상적인 전망에 있다. 이것이야말로 그가 자신의 급진적 주장에서 실천적 결론의 도출을 피할 수 있는 여지를 주고, 중도주의적 동요 정책을 계속하게 하는 것이다. 닌의 '트로츠키주의자', 즉 볼셰비키인 체하는 닌을 방해하는 진정한 혁명가들에 대한 반동적 박해는 그의 장밋빛 전망의 필요성에서 나오는 직접적 결과이다.

닌이 노동자에게서 무기를 빼앗고 싶어하는 자가 누구인지를 명백하고 정확하게 바로 말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대단히 상징적이다. 그러나 반(反)혁명 계획의 입안자를 거명하고, 그들과 그 당에 낙인을 찍고, 인민대중이 그들을 증오의 시선으로 보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혁명가의 직접적인 의무이다.

노동자에게 '당신의 무기를 포기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노동자에게서 무기를 빼앗으려는 자들을 무장해제 하도록 노동자를 가르칠 필요가 있다.

통일노동자당의 정책은 그 내용과 어조 모두에서 정세의 긴급성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통일노동자당 지도부는 다른 정당들에 비해 '좀 더 선진적'이라고 생각함으로써 자신을 위로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다른 정당들이 아니라, 사태와 계급투쟁의 경과와 비교해야 한다. 혁명의 결과는 결국, 음모와 도당을 일삼는 이런 거드름 피우는 장관들이나 당위원회에 의해서가 아니라, 한편으로 수많은 스페인의 노동자 농민과, 다른 한편으로 스페인과 세계의 자본가계급에 의해서 결정될 것이다.

닌의 국제정책은 그의 국내정책과 꼭 마찬가지로 틀렸다. 통일노동자당 지도자는 '우리는 제4인터내셔널을 지지하지 않는다. 우리는 트로츠키주의자가 아니다'라고 사사건건 맹세하고 변명한다. 동시에, 이들은 자신들이 마르크스와 레닌의 사상에 근거하고 있다고 선언한다. 거짓이다! 제4인터내셔널의 노선 외에는 스탈린-카바예로의 노선 밖에 없다. 통일노동자당 지도부는 이 두 노선 사이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 채 갈지자를 그리고 있다. 닌, 안드라데, 고르킨[훌리안 고르킨(Julian Gorkin, 1901-1987) : 스페인 내전 기간의 통일노동자당 총서기. 1938년 10월 열린 재판에서 5년 형을 선고받았다.]의 재주는ㅡ마르크스와 레닌의 가르침과는 정반대로―문제의 명확한 정식화, 정확한 분석, 비판에 대한 정직한 대응을 피하는 것에 있다. 바로 이 때문에 혁명의 모든 새로운 단계가 시작될 때마다 부주의가 이들을 잡아챈다. 그런데 최악의 경험은 아직 하지도 않았다!

당신의 친구를 말해주면 당신이 누구인지를 말해주겠다! 통일노동자당 지도부는 스탈린주의의 추종자 역을 하고 있는 독일사회주의노동자당(SAP)의 가련한 기회주의 도당이나, 존재 권리를 모두 상실한 영국독립노동당(ILP) 지도자, 그리고 그 밖의 강령, 혁명적 규율, 미래도 없는 얼치기 기회주의자, 얼치기 모험주의자와 결부되어 있다. 당신의 친구를 말해주면 당신이 누구인지를 말해주겠다. 통일노동자당 지도부의 국제 정책은 국내 수준에서 자신의 중도주의적 동요를 보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부르주아 여론의 탯줄을 급격하게, 단호하게, 대담하게 끊지 않으면 안된다. 조합주의 지도부를 포함하여 소부르주아 정당들과 단절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상황을 끝까지 충분히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대중에게로, 가장 낮고 가장 억압받는 계층에게로 내려가지 않으면 안 된다. 미래의 승리가 저절로 올 것이라는 환상으로 이들을 어르는 일을 그만두지 않으면 안 된다. 이들에게 아무리 쓰더라도 진실을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들에게 자본의 소부르주아적 하수인에 대한 불신을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들에게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가르치지 않으면 안된다. 모두의 운명을 그들의 운명과 불가분하게 연결 짓지 않으면 안 된다. 부르주아 국가에 반대하여 자신의 투쟁조직―소비에트―을 건설하도록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된다.

현재의 통일노동자당 지도부가 이러한 전환을 실행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는가? 애석하게도, 혁명 6년 동안의 경험은 이러한 기대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았다. 통일노동자당 안팎에 있는 혁명가가 만약 닌, 안드라데, 고르킨을 '설득'하고 '획득'하는 것으로ㅡ닌 등이 라르고 카바예로, 콤파니스 등을 획득하려고한 방식―그 역할을 제한한다면, 파산하고 말 것이다. 혁명가는 노동자가 마음속까지 닌의 동요와 주저에 반항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노동자전선의 통일은 중도주의에 대한 굴복을 의미하지 않는다. 혁명의 이해는 당의 형식적 통일보다 상위에 있다.

현재 통일노동자당의 당원은 얼마나 되는가? 어떤 사람은 2만 5천명 이라고 하고, 다른 사람은 4만 명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이 문제는 결정적인 의의를 가지지 않는다. 2만 5천 명도, 4만 명도 그 자체로는 승리를 보장할 수 없다. 문제는 한편으로 당과 노동자계급과, 다른 한편으로 노동자계급과 농촌의 피억압 대중과의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동요하고 주저하는 지도부를 가진 4만 명의 당은 노동자계급을 흩어지게 하고, 그로 인해 파국을 촉진할 수 있을 뿐이다. 견고하고 선견지명이 있는 지도부를 가진 1만 명의 당은 대중에게로 가는 길을 찾고, 스탈린주의자와 사회민주주의자, 사기꾼과 허풍선이의 영향력을 걷어내고, 파시스트 군대에 대한 공화주의 군대의 단지 일시적이고 불확실한 승리가 아니라, 착취자에 대한 근로자의 완전한 승리를 보증할 수 있다. 스페인 노동자계급은 이러한 승리를 성취할 수 있음을 세 번이나 보여주었다. 모든 문제는 지도부에 있다!

 

1937년 4월 23일

 

 

바르셀로나 봉기

―약간의 예비적 고찰

 

■ 이 글은 바르셀로나에서 일어난 5월 사태를 보고받은 직후에 트로츠키가 예비적 고찰로 쓴 소론이다.

카탈로니아 주(州)는 전통적으로 무정부주의자의 거점이고, 스페인혁명 중에도 파시스트 군대를 물리쳐 무정부주의자의 실질적인 지배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무정부주의자는 자본가계급과 타협, 부르주아 정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했다. 이 정부에 처음에는 스탈린주의 소수정당인 카탈로니아통일사회당도 참가했다. 이 통일사회당은 그 후 급속히 세력을 확장하여 무정부주의 세력과 대립했다. 1937년 5월 3일, 마침내 스탈린주의 부대는 전국노동자연맹의 거점인 바르셀로나 중앙전화국 습격을 시도했다. 이 공격에 바르셀로나 전역에서 무정부주의계 노동자가 자연발생적으로 대항하면서 바르셀로나 전역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

사태의 중대함을 이해한 통일노동자당 지도부는 곧바로 전국노동자연맹-무정부주의연합 지도부에 공동투쟁을 제의했지만, 전국노동자연맹-무정부주의연합 지도부는 이를 거부했다. 처음부터 사태의 조기 수습에 급급해한 무정부주의 지도부는 봉기 노동자를 설득하는데 성공했지만 바리케이드를 풀자마자, 스탈린주의자를 주력으로 하는 1만 2천 명의 군대가 카탈로니아에 파견되어 이 지방을 제압했다.

이 사태는 스페인혁명의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 통일노동자당은 반(反)혁명 봉기를 선동하고 실행했다는 죄를 뒤집어쓰고 비(非)합법화되었다. 통일노동자당의 최고지도자 닌은 얼마 뒤에 스탈린주의자에 의해 납치, 고문당한 끝에 학살되었다. 이로 인해 혁명세력이 결정적으로 약화되었으며, 결과적으로 프랑코 승리의 길을 열었다.

 

최근에 일어난 사태에 대해서 우리가 들은 소식은 불충분할 뿐만 아니라 고의적으로 왜곡되어 있다. 이러한 상황 아래에서 우리가 정식화하는 결론은 가설적이고 일시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이 봉기는 그 성격상 "자연발생적"인 것처럼 보인다. 즉, 봉기는 통일노동자당을 포함한 지도자들의 예상을 뛰어넘어 발발했다. 이 사실만큼 한 편의 무정부주의, 통일노동자당 지도자와 다른 한편의 노동자대중 사이에 깊이 파여 있는 심연을 설명해주는 것은 없다. 닌에 의해 선전된 "노동자계급은 평화적 수단을 통해 권력을 잡을 수 있다"는 생각이 완전히 잘못된 것임이 증명되었다. 우리는 봉기가 일어났을 때, 통일노동자당의 진짜 입장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 전혀 모르거나 거의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 이 결정적 순간에 통일노동자당 지도자들의 입장은 틀림없이 지금까지 이들이 보여준 입장의 단순한 연장일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바로 이 결정적 순간에 좌익 중도주의의 비일관성이 틀림없이 가장 뚜렷하게, 그리고 비극적인 방식으로 폭로되었을 것이다. 예를 들면, 1905년과 1917년의 사태 속에서 마르토프의 운명이 이러했다.

좌익 중도주의의 대표인 마르토프의 잘못된 생각이 우리 대오 안에서도 종종 표명된다. 마르토프는 케렌스키-체레텔리-단 체제를 비판하는 가운데에서 볼셰비키에 가까워졌다. 비판의 급진성과 전망의 원대함에서 마르토프는 〈라 바탈랴〉지의 편집자를 훨씬 능가했다. 그러나 마르토프의 의식 한 가운데에는 항상 적들을 설득하고 싶은 생각이 자리하고 있었으며, 노동자계급을 계급의 적에게 대립시키려 하지 않았다. 바로 이 때문에 마르토프는 노동자들이 투쟁으로 넘어가려는 순간, 투쟁의 무자비함에 잔뜩 겁을 집어먹고는 혁명투쟁의 지도자 역할이 아니라 패배한 대중의 대변자 역할을 하는 것으로 비켜섰던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마르토프의 왼편에는 대중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는 혁명정당이 있었다.

스페인의 정세는 매우 다르다. 통일노동자당 지도부는 어제까지만 해도 대중에게 가장 단호한 관점을 표현하는 것으로 비쳐졌다. 적어도 카탈로니아의 노동자계급 전위는 통일노동자당의 글을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대중이 이 비판을 투쟁을 통해 실현할 준비를 하자마자, 이들은 자기가 실질적으로 무력화되었음을 깨달았다. 최근의 봉기도 다르지 않은 것 아닌가? 걱정이 없지 않다.

아니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혹시 기적이 일어나 대중의 압력이 닌에게 볼셰비키 입장을 강제했다면? 그랬다면 정말로 멋질 것이며, 우리는 이 새로운 역사적 경험에 기초하여 닌과 공동 활동할 수 있음을 기뻐할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소식이 전해질 때까지는 통일노동자당의 공식 정책에 대한 우리의 평가를 바꾸어야 할 이유가 조금도 없다.

긴급보도가 언급하고 있는 바르셀로나의 휴전은 무슨 의미인가? 무엇보다 먼저 지도부의 비일관성에 의해 결정된 봉기의 패배인가, 아니면 대중의 압력에 겁을 집어먹은 지도자들의 직접적인 굴복인가? 우리는 아직 모르고 있다. 당장에는 투쟁이 바르셀로나 밖에서 계속될 것 같다. 바르셀로나에서 공세를 재개할 수 있는가? 스탈린주의-개량주의 인간쓰레기 측의 탄압이 대중의 투쟁에 새로운 자극을 주지 않을까? 정확한 정보가 없기 때문에 여기서 섣부르게 예측하는 것은 자제하겠다. 사태의 직접적 경과가 어떠하건 간에 어쨌든 지도부에 대한 비판은 그 결정적인 중요성을 잃지 않는다. 봉기의 여러 가지 오류와 약점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외부사회보다 먼저 패배한 노동자에 확고하게 결합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지도부를 용서하거나, 그 비일관성을 은폐하거나, 순전히 감상적인 연대를 구실 삼아 지도부의 오류에 대해 침묵을 지킨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런 인상적인 경험은 통일노동자당의 분열을 불러일으킬 개연성이 매우 커 보인다. 트로츠키주의자를 배격하고, 브란틀러주의자와―스탈린주의의 쓰레기를 버린―독일사회주의노동자당(SAP) 지도자들과 우호관계를 맺은 분자들은 분명히 자비를 구함으로써 혁명을 배신할 것이다. 그런 다음에 모스크바 관료집단에게 아첨할 것이다. 이에 반해서, 혁명분자들은 제4인터내셔널과 배신 사이에는 어떠한 매개물도 없음을 이해해야 한다. 이런 정치적 분화를 용이하게 하고 촉진하기 위해서 우리의 비판은 솔직하고 공공연하고 더 단호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우리 동지들 모두는 우리의 동료 빅토르 세르쥬[빅토르 세르쥬(Victor Serge, 1890-1947) : 처음에는 무정부주의자였으나 1917년 혁명에 매료되어 볼셰비키가 되었다. 코민테른에서 일했으며, 좌익반대파를 지지하여 투옥되었지만 프랑스 지식인들의 구명운동으로 풀려났다. 제4인터내셔널 운동과의 견해 차이, 특히 통일노동자당에 대한 견해 차이로 결별했다. 『레닌에서 스탈린까지』, 『어느 혁명가의 회고록』, 『러시아 : 20년 후』 등을 저술했다], 스네블리트[헨리쿠스 스네블리트(Henricus Sneevliet, 1883-1942) : 네덜란드 출신의 인도네시아 공산주의 운동의 창설자. 1914년 인도네시아사회민주동맹(인도네시아공산당의 전신)을 결성했으나 1918년에 추방되었다. 코민테른 제2차 세계대회에 참가, 아시아 운동의 중요성을 호소하고 그 책임자로 중국에 파견, 중국공산당의 창설에도 공헌했다. 혁명적사회주의노동자당(RSAP)을 창설. 1933년, '4자 선언'에 서명하고, 혁명적사회주의노동자당과 함께 국제공산주의자동맹에 가입했다. 1938년, 제4인터내셔널 운동에서 멀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중에 나찌에 체포, 처형되었다], 베레켄[조르쥬 베레켄(George Vereecken, 1894-1978) : 벨기에의 트로츠키주의자. 벨기에 공산당의 중앙위원으로 좌익반대파를 지지했다. 1930년대, 제4인터내셔널 벨기에 지부의 지도자. 1936~38년, 스페인혁명 문제를 둘러싸고 트로츠키와 논쟁했다. 전후 『트로츠키주의운동에서의 게페우』 등의 저서를 썼다]등에 의해 인정된 수동적인 관대함이라는 조령모개식 정책을 잘 알아야 한다. 우리는 거대한 사건으로부터 미래를 준비하는데 필요한 모든 결론을 도출해낼 줄 알아야 한다. 1917년 7월 사태와의 유사성은 우리에게 너무도 명백해서 자세하게 논할 필요도 없다. 무엇보다도 강조되어야 하는 것은 그 차이점이다. 통일노동자당은 여전히 카탈로니아의 조직에 지나지 않는다. 그 지도자들은 제때에 사회당에 가입할 기회를 막았으며, 무익한 비타협성으로 자신들의 근본적인 기회주의를 은폐하고 있다. 그러나 카탈로니아의 사태가 사회당과 노동자총연합(UGT) 대오 내에 균열과 분열을 낳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이 경우에 통일노동자당 중핵의 범위 안에서 한정되는 것은 치명적일 것이다. 더욱이 통일노동자당은 앞으로 몇 주 사이에 크게 위축될 것이다. 카탈로니아의 무정부주의 대중과 다른 지역의 사회당과 공산당 대중에게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 이것은 낡은 외적 형태를 지키는 문제가 아니라 미래를 위한 새로운 토대를 창출하는 문제이다.

비록 패배가 심각할지라도(그리고 우리는 여기에서 그 심각을 측정할 수 없다), 결코 결정적이지는 않다. 스페인 자체나 프랑스의 새로운 요소가 새로운 혁명적 고양을 결정할 것이다.

스페인의 10월이 언제 어떻게 올 것인지를, 특히 멀리 떨어진 곳에서 예측하는 것은 매우 어려울 수밖에 없다. 어쨌든 감탄할만한 스페인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힘이 소진되었다고 그 누구도 미리 단언할 수 없다. 그러나 10월을 준비하기 위해서 혁명적 전위는 노동자계급 상층의 애매모호, 혼란, 불분명 등에 대해 국내적으로 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미리 경고해두지 않으면 안된다. 제2인터내셔널과 제3인터내셔널에 대해 제4인터내셔널을 대치할 용기가 없는 사람들은 결정적인 투쟁에서 노동자를 결코 대담하게 이끌지 못할 것이다. 여전히 브란틀러, 독일사회주의노동자당, 맥스튼, 페너 브락웨이 패거리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은 투쟁 바로 직전이나 투쟁이 한창일 때 노동자계급을 배신할 수밖에 없다. 스페인 노동자들은 이제 제4인터내셔널이 사회주의혁명의 과학적 강령, 대중에 대한 신뢰, 모든 종류의 중도주의에 대한 불신, 투쟁을 끝까지 이끌려는 의지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이해했을 것이다.

 

1937년 5월 12일

 

 

게페우의 하수인에 의한 안드레스 닌의 암살

 

■ 이 글은 스페인 좌익반대파의 지도자이자 트로츠키의 오랜 친구인 통일노동자당의 지도자 안드레스 닌이 게페우에 의해 암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트로츠키가 쓴 추도문이다. 프랑스어로 처음 발표된 다음에 〈반대파 회보〉(1937년 9~10월, 58~59호)에 게재되었다.

1937년 5월 사건을 계기로 통일노동자당이 프랑코의 하수인이라는 스탈린주의자들의 대대적인 악선전이 자행되어 통일노동자당은 비 합법화되고, 기관지는 발행 금지되었으며, 지도자들이 차례로 체포되었다. 이는 바로 당시 러시아 국내에서 준동하고 있던 대숙청의 폭풍우가 스페인에까지 몰아친 것이었다. 안드레스 닌도 이 와중에 체포되어 게페우에게 지독한 고문을 받았지만, 닌은 이에 굴복하지 않았으며, 모스크바 재판의 피고들이 한 것 같은 '자백'은 결코 하지 않았다. 스탈린주의자들은 파시스트를 가장하여 바르셀로나의 감옥에서 닌을 데려가 총살시켜버렸다.

여러 사안에서 대립한 닌을 엄중 비판했지만 트로츠키는 이 글에서 대립의 역사를 숨김없이 밝히면서 성실하게 동지적인 추도를 하고 있다.

 

통일노동자당의 지도자 안드레스 닌이 바르셀로나에서 체포되었을 때, 게페우의 하수인들이 그를 살려두지 않을 것임은 조금도 의심할 수 없었다. 스페인 경찰을 수중에 틀어쥐고 있는 게페우가 닌과 통일노동자당 지도부 전체를 프랑코의 ‘하수인’이라고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을 때, 스탈린의 의도는 그 누가 봐도 명백히 드러났다.

이 비난이 터무니없다는 것은 스페인혁명에 관해 일자무식인 사람에게도 명백하다. 통일노동자당 당원은 스페인의 모든 전선에서 파시스트에 맞서 영웅적으로 싸웠다. 닌은 노련하고 청렴결백한 혁명가이다. 그는 소비에트 관료집단의 하수인들에 맞서 스페인과 카탈로니아 인민의 이해를 옹호했다. 이것이 게페우가 바르셀로나 감옥에 대해 잘 준비한 '습격'을 통해 그를 제거한 이유였다. 이 사태에서 공식 스페인 정부당국이 어떠한 역할을 수행했는가는 추측할 수 있을 따름이다. 게페우가 부추긴 신문의 긴급보도는 닌을 '트로츠키주의자'로 부르고 있다. 살해된 이 혁명가는 종종 이런 호칭에 항의했으며, 이 항의는 완전한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 마우린과 닌이 지도하는 동안 통일노동자당은 줄곧 제4인터내셔널에 적대적 태도를 취했다. 1931~33년 사이에 당시 아직 통일노동자당을 결성하지 않았던 닌은 나와 우호적인 서신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이미 1933년 초에 원칙문제에 대한 견해 차이로 우리 사이는 완전 결별에 이르렀다. 그리고 최근 4년 동안 우리는 논쟁적인 글만을 주고받았다. 통일노동자당은 자신의 대오에서 트로츠키주의자들을 쫓아냈다. 게페우는 소비에트 관료집단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을 트로츠키주의자라고 부른다. 이를 통해 이들의 잔혹한 복수가 쉬워진다.

나와 통일노동자당을 갈라놓은 견해 차이와는 완전 별개로, 나는 닌이 소비에트 관료집단에 대항하여 이끈 투쟁에서 옳았던 사람은 닌이었다는 점을 분명히 인정한다. 그는 모스크바에서 권력을 쥔 도당의 외교적 권모술수와 음모로부터 스페인 노동자계급의 독자성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그는 통일노동자당이 스탈린에게 맡겨진 도구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는 스페인 인민의 이해에 반하는 게페우와의 협력을 거부했다. 이것이 그의 유일한 죄였다. 그리고 이 죄 때문에 그는 자신의 목숨을 대가로 치렀다.

 

1937년 8월 8일

 

 

스페인의 경험을 통한 개인과 사상의 검증

 

■ 이 글은 스페인혁명에서 통일노동자당의 위치와 역할을 둘러싸고 트로츠키와 벨기에 지부의 베레켄 사이에 벌어진 논쟁이다. 스페인혁명에서 통일노동자당이 혁명정당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고 생각한 베레켄은 동지적 입장에서 통일노동자당에 대한 비판과 지원에 집중하며, 통일노동자당에 대한 비판적 타격을 반복한 국제서기국과 스페인의 볼셰비키-레닌주의자를 비판했다. 트로츠키는 국제서기국과 스페인의 볼셰비키-레닌주의자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논쟁에 개입하여 베레켄이 통일노동자당의 본질을 완전히 오인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트로츠키의 이 비판은 1907~17년 사이에 레닌의 트로츠키 비판을 방불케 한다. 스페인혁명에서 통일노동자당은 멘셰비키보다 훨씬 전투적이고 혁명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트로츠키는 사실상 통일노동자당을 좌익 중도주의로 단정하고, 극소수의 스페인 볼셰비키-레닌주의자에게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이 기대는 전혀 실현 가능성이 없었다. 대중적인 좌익 중도주의 세력에 유기적으로 개입할 방법을 배우지 않고 혁명정세를 이용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제4인터내셔널에 헌신하는 모든 조직들에게,

스페인혁명은 선진노동자가 보기에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서 뿐만 아니라, 혁명전략의 학교로도 거대한 의의를 가진다. 다양한 사상과 개인이 대단히 중요하고, 절대 틀림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검증을 받고 있다. 혁명의 중대 사태뿐만 아니라 스페인 사태에 대해서 다양한 그룹과 독립적 투사들이 자기 대오 안에서 취하고 있는 정치적 입장을 검토하는 것은 모든 진지한 마르크스주의자의 의무이다.

 

베레켄 동지와 스네블리트 동지

이 편지에서 나는 특수한 경우지만, 최고로 교훈적인 사례를 자세히 설명하고 싶다. 즉, 벨기에 지부의 지도적 위원 가운데 한 명인 베레켄 동지의 입장을 검토해 보고 싶다. 베레켄은 올해 6월말에 열린 혁명적사회당(RSP)의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스페인 문제에 대해 보고했다. 벨기에 지부의 내부 회보 6~7월호에 발표된 그의 연설 보고는 매우 짧다. 아마 많아야 25줄 정도일 것이다. 그런데도 베레켄 동지의 오류가 무엇인지 알 수 있도록 명확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 오류는 벨기에 지부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인터내셔널 전체에 대해서도 위험한 것이다.

네덜란드의 혁명적사회주의노동자당(RSAP) 지도자 스네블리트 동지는 주지하는 바와 같이, 통일노동자당의 정책과 완전한 일치를 보고 있으며, 그럼으로써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와 어느 정도나 절연한 것인지를 뚜렷이 보여주었다. 베레켄 동지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베레켄은 좀 더 신중하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현재도 그의 주장에는 '한편으로', '다른 한편으로'라는 유보조건이 섞여 있다. 통일노동자당에 대해서 그는 우리의 공통된 무기고에서 수많은 주장을 빌려와 '비판적'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스네블리트 동지의 입장보다 그의 중도주의적 입장이 우리의 대오 내에 훨씬 더 큰 혼란을 가져올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 때문에 베레켄의 생각을 주의 깊게 비판할 필요가 있다.

 

중도주의의 특징인 낙관적 숙명론

통일노동자당이 괴멸하기 전, 그리고 스페인에서 스탈린의 하수인(안토노프-오프셴코 등)에 의한 그 지도자의 비열한 학살이 일어나기 전에 베레켄의 보고가 있었다. 우리는 모스크바나 그 밖의 지역의 불한당들의 중상에 맞서 닌과 그의 동료들의 명성을 흔들림 없이 지킬 것이다. 그러나 닌의 비극적 운명도 우리의 정치적 판단을 바꿀 수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정치적 판단은 감상적 고려에 의해서가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역사적 이해에 의해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베레켄 동지는 사태의 압력을 받아 통일노동자당이 말하자면, '자동적으로' 왼쪽으로 발전할 것이며, 스페인에서의 우리의 정책이 통일노동자당에 대한 '비판적' 지지에 한정될 것이라고 생각함으로써 통일노동자당에 대한 자신의 평가에서 완전히 오류를 범했다. 사태는 이 숙명론적이고 낙관적인 예측一중도주의에는 매우 특징적이지만, 결코 마르크스주의적 사고는 아닌一을 단호하게 반박했다. 이 점에서는 통일노동자당의 정책 전체가 이 같은 숙명론적 낙관주의로 물들어 있었다는 점을 상기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베레켄이 통일노동자당 지도자들에게 순응했던 것과 꼭 같이, 통일노동자당 지도부는 무정부주의 지도자들이 노동자혁명의 길에 자동적으로 들어설 것이라는 기대 속에 이들에게 순응했다. 이런 모든 기대는 완전히 깨져버렸다. 사태는 통일노동자당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무정부주의 지도자들도 왼쪽이 아니라, 오른쪽으로 내팽개쳤다. 베레켄은 자기 정책의 오류를 솔직하게 인정하는 대신에, 훨씬 더 큰 혼란에 의해 전날까지의 정책과 구별되는 새로운 입장으로 몰래 넘어가려고 한다.

 

통일노동자당의 특성

베레켄은 이렇게 보고를 시작한다. '몇 십 년 동안 존속해온 전국노동자연맹-무정부주의연합과는 달리, 통일노동자당은 새롭고, 동질적이지 않으며, 그 좌익은 허약하다.' 이 설명은 스네블리트의 입장뿐만 아니라 베레켄 자신의 이전 입장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약속된 왼쪽으로의 발전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동시에, 통일노동자당의 이 특성은 고의로 애매해져있다. '좌익은 허약하다'고 할 때, '좌익'이라는 말은 이 문맥에서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그는 통일노동자당내의 마르크스주의 분파를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좌익 중도주의 분파를 말하는 것인가? 베레켄은 이 질문에 의도적으로 답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를 대신해 대답하겠다 : 통일노동자당내 존재했던 '트로츠키주의자'들이 배제된 이래로 중요성을 가진 마르크스주의 분파는 없다. 그러나 중도주의의 좌익 분파도 허약하다. 이 점에 대해서 베레켄은 올바르다. 그러나 이것은 혁명 6년 동안의 경험의 결과가 아닐 때에만 맞는 말이다. 통일노동자당의 정책은 우익 중도주의자에 의해 결정되었다. 이상이 있는 그대로의 진실이다.

 

베레켄 동지의 통일노동자당 ‘비판’

그렇다면, 베레켄이 통일노동자당을 어떻게 비판하고 있는지 들어보자 : '통일노동자당의 오류는 선거 때에 인민전선으로 결집한 것이다. 이들은 무장투쟁에 의해 7월 19일의 이 오류를 바로잡았다. 또 다른 오류는 (카탈로니아)정부에 참여하고, (지방)위원회를 해산시킨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정부에서 나왔기 때문에 통일노동자당내에서 정화가 된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얼핏 보기에는 마르크스주의적 비판 가운데 하나를 생각나게 한다. 실제로 베레켄은 통일노동자당과 그 자신의 기회주의적 전술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감추기 위해서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의 내용 없는 일부분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우리 비판자에게 이는 통일노동자당의 단발적인 '오류'의 문제이지, 통일노동자당의 정책 전체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평가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에 말문이 막힌다. 어떤 조직에도 '오류'가 있다. 마르크스와 레닌도 오류를 범했으며, 볼셰비키당 전체도 그렇다. 그러나 이런 오류는 근본적 노선의 정확성 덕분에 제때에 교정되었다. 통일노동자당에게 그것은 단발적인 '오류'의 문제가 아니라, 비(非)혁명적이고, 중도주의적인 근본 노선 즉, 본질적으로 기회주의적인 오류의 문제이다. 바꿔 말하면, 혁명정당에게 '오류'는 예외이다. 그러나 통일노동자당에게는 약간의 단발적인 교정 단계가 예외인 것이다.

 

1936년 7월 19일

베레켄은 우리에게 통일노동자당이 1936년 7월 19일에 무장투쟁에 참여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물론이다! 노동자계급 전체를 포함하여 이 투쟁에 참여하지 않는 것은 반(反)혁명 조직뿐이다. 분명히,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통일노동자당의 성격을 그렇게 규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시, 자신의 정책을 무정부주의자와 사회주의자뿐만 아니라 통일노동자당에게도 강제한 대중의 투쟁에 참여하는 것으로 어떻게 인민전선 참여라는 '오류를 바로잡을' 수 있는가? 혹시 통일노동자당이 자기 정책의 근본적 방향을 변경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7월 19일의 투쟁은 노동자의 실질적 승리에도 불구하고, 단지 꼭 필요한 명석함이나, 투쟁을 끝까지 지속할 용기를 가진 조직이 없었기 때문에 이중권력이라는 애매한 상황으로 끝나버렸다. 통일노동자당의 인민전선 참여는 우연한 '오류'가 아니라, 그 기회주의적 성격의 확실한 흔적이다. 7월 시기에 변화한 것은 당의 중도주의적 성격이 아니라, 외부 정세일 뿐이다. 통일노동자당은 인민전선의 선거기구에 순응했다. 중도주의의 왼쪽으로의 지그재그는 오른쪽으로의 지그재그를 보완하는 것일 뿐, 결코 그것을 바로잡지는 않았다. 그리고 왼쪽으로의 지그재그 중에 통일노동자당은 자신의 잡종적 입장을 전부 그대로 유지했으며, 바로 이렇게 하는 것을 통해 미래의 파국을 준비했던 것이다.

 

정부참여

베레켄은 '다른 오류는 (카탈로니아)정부에 참여하고, (지방)위원회를 해산시킨 것이다'라고 말한다. 만약 7월 봉기 참여가 이전의 잘못된 정책을 '바로잡았기' 때문이라면, 이 '다른 오류'는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실제로 (카탈로니아)정부 참여는 당의 중도주의적 성격에서 비롯된 새로운 지그재그였다. 스네블리트 동지는 이 참여를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애석하게도 이 애매한 정식은 스네블리트가 혁명의 시대에 계급투쟁의 법칙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줄 뿐이다. 1936년 7월 시기는 카탈로니아 노동자계급이 올바른 지도부를 가졌다면, 새로운 노력이나 희생을 치르지 않고도 권력을 장악하고, 스페인 전역에 걸쳐 노동계급독재의 시대를 열 수 있었을 것이지만, 주로 통일노동자당의 오류에 의해 그 추종자들(스탈린주의자, 무정부주의자, 사회주의 지도자들)로 대표되는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혁명위원회) 사이에 낀 정부를 결과하고 말았다. 노동자의 이해는 모든 권력을 혁명위원회 즉, 스페인 소비에트에 이양함으로써 불확실하고 위험한 정세를 가능한 한 빨리 없애는 것이었다. 이에 반해서, 자본가계급의 임무는 '권력의 통일'을 대신하여 혁명위원회를 없애는 것이었다. 닌의 정부 참여는 노동자계급에 적대하는 자본가계급의 공동계획의 일부였다. 만약 스네블리트가 이러한 것을 '이해한다'면, 그에게는 그만큼 더 나쁜 것이다. 베레켄은 좀 더 신중하다. 그는 정부 참여를 '다른 오류‘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게 나쁘지 않은 이 '오류'는 노동자위원회에 반대하여 자본가계급 정부를 직접 지지하는 것에 있었다!

베레켄은 자기비판의 핵심을 서둘러 이렇게 얼버무린다. '그러나 이들이 정부에서 나왔기 때문에 통일노동자당내에서 정화가 된 것이다: 이미 인용한 것처럼, 베레켄 자신이 좌익이 허약한 균질적이지 않은 당이라는 통일노동자당에 대한 자신의 성격 규정을 반박한다는 점에서 이것은 명백한 거짓이다. 그렇다면 심지어 좌익 중도주의자도 당내에서 연약한 소수파임에 비추어, 어떻게 오류가 '정화'된 것인가? 아니면 혹시 이 '정화'를 볼셰비키-레닌주의자의 배제로 ··· 이해해야 하는 것인가?

 

국제서기국에 대한 비판

베레켄은 중도주의의 입장을 옹호하면서 한층 더 나아간다. 그는 통일노동자당의 '오류'를 열거한 뒤, 균형을 잡기 위해 즉시 국제서기국의 '오류'를 열거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다시 한 번 그의 실제 말에 주의를 기울여보자.

'국제서기국의 오류 : 파리에 있는 이들은 7월 19일 이후 10일 동안 아무 입장이 없었다. 이들은 사태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들은 브뤼셀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이들은 파리 결의문을 너무 글자 그대로 적용했다. 이들은 이 기회를 이용해 통일노동자당을 혁명적 정책 쪽으로 밀어붙이는 것에서 득을 보아야 했다. 이들은 트로츠키의 편지를 공표함으로써 스스로 닌과의 관계를 끊어버렸다.'

이 많은 '죄상'을 읽고 있는 자기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국제서기국은 일정한 실천적 태만과 심지어 일정한 정치적 오류를 저질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들을 통일노동자당의 기회주의적 정책과 같은 수준에 놓는 것은 우리에게 적대적인 당과 우리 자신의 국제조직 사이에서 부적절한 중재자 역할을 맡으려는 것이다. 베레켄 동지는 이 점에서도 처음은 아니지만, 의기소침하게 하는 판단력의 결여를 드러내고 있다. 그렇지만 그의 고발을 좀 더 면밀하게 검토해보자.

7월 19일 이후 '10일 동안' 국제서기국은 아무 입장이 없었다! 이것이 올바르다는 점은 일단 인정하지만, 그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정보의 부족인가? 지나치게 신중하기 때문인가? 베레켄은 설명하지 않는다. 물론 즉시 '입장'을 갖는 것이 더 좋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다 : 그 입장이 올바르지 않으면 안 된다. 국제서기국은 최고 집행기관이다. 정치적 입장을 취함에 있어서 매우 신중을 기해야 했다. 실제로 스페인의 투쟁을 직접 지도하지도 않았고, 지도할 수도 없었던 만큼 더 신중해야 했다. 그러나 국제서기국이 '10일이 지나서도' 아무 입장이 없었다면, 7월 19일 이후 1년이 지나도록 베레켄 동지는 완전히 잘못된 입장에 빠져 있다. 이것은 비교도 안될 만큼 더 나쁘다.

 

브뤼셀 회의

베레켄은 '통일노동자당을 혁명적 정책 쪽으로 밀어붙이'기 위해, 브뤼셀에서 열린 가련하고 보잘것없는 중도주의자 회의에 다시 참가할 필요가 있었다고 말한다. 바르셀로나가 아니라 브뤼셀에서, 혁명적 대중 앞에서가 아니라 폐쇄된 회의실에서도 통일노동자당에 영향을 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마치 우리가 처음 통일노동자당 지도자를 만났던 것처럼! 마치 6년 동안 우리가 이들을 혁명적 정책의 길로 '밀어붙이'려고 시도하지 않았던 것처럼! 우리는 모든 방법과 수단을 썼다 : 넘칠 정도로 많은 편지 왕래, 대표 파견, 조직적 관계, 수많은 기사와 팸플릿, 마지막으로 공개적인 비판이 그것이다. 그런데도 통일노동자당 지도자는 마르크스주의 정책을 채택하는 대신에, 혁명의 가차 없는 요구에 겁을 집어먹고 분명히 중도주의 노선을 채택했다. 베레켄에게는 이 모든 것이 아무래도 중요성이 없는 오류인 것 같다. 겉보기에 굉장한 중요성을 가진 것은 브뤼셀의 중도주의자 회의이고, 거기서 베레켄은 통일노동자당 지도자 한두 명 앞에서 기껏해야 회의 이전에 이미 수백 번이나 말했고 썼던 것을 반복하는 발언을 했을 것이다. 게다가 이번에 베레켄 동지는 중도주의자를 종파주의로 둘러싼다. 종파주의의 존재에서 절정의 순간은 수많은 회의에서 자기를 과시할 때이다!

 

트로츠키의 편지

끝으로, 베레켄의 마지막 고발은 트로츠키의 편지를 공표한 것이다. 이 편지는 내가 아는 한, 공표를 예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통일노동자당은 우리와의 관계에서 중요한, 결정적 요소라고 생각하는 정치적 통찰력의 마지막 한 조각까지 정말로 이 편지의 공표로 잃어버렸음에 틀림없다. 이 편지는 자본가계급과 맺은 블록에 참여한 것은 노동자계급에 대한 배신이라고 설명했다. 이것이 옳은가? 그른가?

우리는 닌의 의도의 순수함을 결코 의심한 적이 없다. 그러나 그의 인민전선 참여를 배신행위라고 보는 정치적 평가는 절대로 올바르다. 따라서 이 편지의 공표를 닌과 '우리의 관계 단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가? 이 편지의 공표 이전에도 우리는 충분히 그와의 관계를 끊었다. 우연적으로 그랬던 것도 아니다 : 그의 정책 전체는 우리와 정반대 방향으로 나아갔다. 닌이 트로츠키의 편지 공표 3년 전에 우리와 단절했던 것은 어떤 일시적인 기분 때문이 아니었다. 그렇지 않다면 베레켄이 추측하는 것처럼, 선거 뒤에 닌이 우리 쪽으로 향하고 있었으며, 편지의 공표가 이 진전을 막았다는 것인가?

베레켄의 말은 실제로 약간의 의미를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그 밖의 의미를 지닐 수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사실상 닌과 그의 동료들은 계속해서 인민전선과 그 뒤의 정부참여가 올바르다고 생각했으며, 따라서 이들은 정말로 이 참여의 갱신을 요구했다. 이것은 또한 '오류'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 정치노선의 문제였다.

마지막으로, 정말로 통일노동자당이 인민전선에 참여한 것의 '오류'를 납득했다고 인정한다면, 이 오류에 대한 신랄한 분석을 포함한 이 편지의 공표가 어째서 통일노동자당의 발전을 방해할 수 있는가? 베레켄은 닌이 이 편지에 화가 났기 때문에, 이전의 옳지 않은 입장으로 돌아갔던 것이라고 말하려는(만약 그가 무엇인가를 말하려고 한다면!) 것인가?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사소한 개인적 자부심에 대한 고려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치사상에 의해 이끌려온 닌을 너무 모욕하는 것이다.

이상이 베레켄이 통일노동자당의 중도주의 정책과 같은 수준에서 제기한 국제서기국의 '오류'이다. 이를 통해 그는 자신이 단지 마르크스주의와 중도주의 사이에서 중개자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 뿐임을 보여준다.

 

1937년 5월시기의 예습

베레켄은 그 다음에 올해 5월 사태로 옮아간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 '통일노동자당은 이 사태를 예측하고 있었으며, 무장하고 있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사태의 범위는 당의 허를 찔렀다. 그러나 어떠한 당도 허를 찔렸을 것이다.'

모든 문장이 죄다 잘못되어 있다. 게다가 우연한 잘못이 아니라 잘못된 정치노선의 산물인 것이다. 5월 사태는 단 한 가지 방법으로만 '예측'할 수 있었고, 준비할 수 있었다. 즉, 카탈로니아와 스페인 정부에 대한 비타협적 투쟁을 선언함으로써, 이들 정부에 대한 모든 정치적 협력을 거부함으로써, 다른 모든 정당, 즉 그 지도 중심, 특히 전국노동자연맹 지도부에 대해 자기 당을 대치함으로써, 대중이 혁명의 지도자와 자본가계급의 추종자를 한순간도 혼동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음으로써 그럴 수 있었다! 물론 군사적 투쟁과 대중의 혁명적 행동에 적극 참여하는 것을 포함한 이런 종류의 비타협적 정책은 모든 노동자, 특히 카탈로니아 노동자계급의 압도적 다수를 이루는 무정부주의자 사이에서 흔들림 없는 권위를 통일노동자당에게 보증했을 것이다. 통일노동자당은 그렇게 하는 대신에, 그 지도자들의 반(反)혁명정부로의 재 입각을 요구했으며, 동시에 〈라 바탈랴〉지의 모든 호에서 노동자가 투쟁하지 않고도 권력을 잡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이 목표와 함께 통일노동자당은 노동자 농민에게 권력을 넘겨주기 위해 부르주아 정부에 의해 소집되는 특별대회라는 어린애 같은 계획에 착수했다. 이것이 바로 통일노동자당이 허를 찔렸으며, 5월 사태가 통일노동자당에게는 단지 파국을 향해 가는 또 하나의 단계일 뿐이었던 이유이다.

베레켄은 이렇게 외친다. '그러나 어떠한 당도 허를 찔렸을 것이다.' 이 믿을 수 없는 문장은 베레켄이 중도주의 당과 마르크스주의 당의 차이를 모른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진정한 대중봉기가 어떠한 혁명정당도 크건 작건 넘어선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차이는 바로 그 정도에 있다. 여기서도 또한 양은 질로 바뀐다. 중도주의 당은 사태에 넋을 잃어버리고 그 속에 빠져버리는 반면에, 혁명정당은 마지막 결전에서 사태를 지배하고 승리를 확보한다.

 

'공세가 아니라 방어'

베레켄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5월 4일과 5일에 (통일노동자당의) 정책은 올바르다 : 공세가 아니라 방어였다. 권력을 장악하려고 전진하는 것은 당시의 상황에서는 모험주의였을 것이다. 통일노동자당의 커다란 오류는 후퇴 중에 환상을 흩뿌리고, 패배를 승리로 얼렁뚱땅 넘긴 것이다.'

보는 바와 같이, 베레켄은 약제사의 정밀함으로 통일노동자당의 '올바른' 행동과 '오류'를 저울에 달아 비교 평가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의 주장 전체는 단지 오류일 따름이다.

5월에 권력 장악으로 나아가는 것이 모험주의였다고 누가, 어디에서 말했는가? 이것은 특히 통일노동자당 자신의 의견은 아니었다. 그 전날 까지도 통일노동자당은 만약 노동자가 하려고만 한다면, 싸우지 않고도 권력을 장악할 것이라고 노동자를 안심시키고 있었다. 노동자는 '하려고 했다.' 어떤 점에서 모험주의인가?

이 점에서 우리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관점에서 볼 때, 스탈린주의자 측의 비열한 도발의 요소는 부차적인 중요성밖에 없다. 사태 이후의 모든 보고는 진지함과 자신감을 가진 지도부가 있었다면, 5월봉기의 승리가 확보되었을 것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이런 의미에서 만약 노동자가 '하려고만 한다면' 권력을 장악할 수 있다고 한 통일노동자당의 주장은 올바른 것이다. 단, 이렇게 덧붙이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 유감스럽게도 노동자는 혁명적 지도부가 없었다.

이전의 통일노동자당의 모든 정책이 이러한 주도력을 허용하지 않게 했기 때문에一따라서 오직 이 때문에一통일노동자당은 카탈로니아의 노동자계급을 혁명적 공세로 이끌 수 없었다.

 

1917년 '7월시기'와 1937년 '5월시기'

그렇지만 이 점에서 베레켄 동지는 항변할 수 있다 : '그러나 1917년 7월에 볼셰비키도 권력을 장악하려고 결정하지 않았으며, 스스로를 방어투쟁에 한정하고, 할 수 있는 한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 대중을 사선(line of fire) 밖으로 끌어냈다. 그렇다면 왜 이 정책이 통일노동자당에는 적절하지 않은 것인가?'

이 주장을 검토해보자. 스네블리트와 베레켄 동지는 스페인이 '러시아는 아니다', '러시아적' 방식을 이 나라에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주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 이런 종류의 추상적 설교는 어떤 진지한 느낌을 주지 않는다. 잘 했건 못 했건 간에, 우리는 지난 6년 동안 스페인혁명의 구체적 조건을 분석하려고 노력해왔다. 실제로 그 시작 단계에서 우리는 1917년의 러시아와 같은 사태 발전의 급속한 템포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반대로, 우리는 프랑스대혁명과의 유추를 말했다. 프랑스혁명은 1789년에 시작해 1793년에 그 정점에 이르기 전에 일련의 단계를 거쳤다. 그러나 1917년 7월 페테르부르크의 볼셰비키 전술을 1937년 5월 카탈로니아의 사태에 그대로 옮길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은 것은 바로 우리가 역사적 사건을 결코 도식화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페인은 러시아가 아니다.' 양자의 다른 특징이 너무 명백하다.

페테르부르크 노동자계급의 무장시위는 혁명 개시 4개월 뒤에, 볼셰비키당이 진정한 볼셰비키 강령(레닌의 4월 테제)을 내놓은 3개월 뒤에 일어났다. 이 거대한 나라의 인민의 압도적 다수가 2월의 환상에서 이제 막 벗어나고 있었다. 전선에는 당시 볼셰비키당에 관한 첫 소문을 접했을 뿐인 1천 200만 명의 군대가 있었다. 이러한 조건들 속에서 페테르부르크 노동자계급의 독자적 봉기는 불가피하게 분쇄되고 말았을 것이다. 시간을 벌 필요가 있었다. 이런 것들이 볼셰비키당의 전술을 결정한 상황이었다.

스페인의 5월 사태는 혁명 4개월 뒤가 아니라 6년 뒤에 일어났다. 전국의 인민대중은 거대한 경험을 겪고 있었다. 훨씬 전에 대중은 인민전선의 재탕한 환상뿐만 아니라 1931년의 환상도 잃어버렸다. 대중은 끝까지 갈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모든 지역에서 거듭 보여주었다. 만약 1937년 5월에 카탈로니아 노동자계급이 권력을 장악했다면一실제로 1936년 7월에 장악했던 것처럼一이들은 스페인 전역에서 지원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부르주아-스탈린주의 반동세력은 카탈로니아 노동자 분쇄에 가담할 2개 연대도 찾지 못했을 것이다. 프랑코가 점령한 지역에서는 노동자뿐만 아니라 농민도 카탈로니아 노동자계급에게로 마음을 돌려, 파시스트 군대를 고립시키고 그 필연적인 해체를 가져왔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어떠한 외국정부가 불이 붙은 스페인 땅에 자국 군대를 투입하는 위험을 무릅쓸 것인지 의심스럽다. 군사적 간섭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할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매우 위험할 것이다.

당연히 모든 봉기에는 불확실성과 위험의 요소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후의 사태 추이는 심지어 패배한 경우에도 스페인 노동자계급의 상황이 현재보다 훨씬 더 유리해졌음을 입증했다. 물론 혁명정당이 존재했다면, 스페인 노동자계급의 미래를 보증했을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베레켄은 어떤 근거에서 당시 상황에서 카탈로니아의 권력 장악이 '모험주의'였을 것이라고 단언하는가? 아무런 근거도 없다. 다만, 중도주의의 무기력함을 정당화하려는 욕구, 동시에 중도주의의 좌익적 흔적밖에 없었고, 여전히 그런 자신의 정책에 근거하지 않는 한은 말이다.

 

베레켄은 볼셰비키-레닌주의자의 배제를 옹호한다.

끝맺는 말도 보고 전체와 같은 수준이다 : '통일노동자당내에는 민주주의가 없다고들 한다. 그러나 만약 보르디가주의자가 우리 당에 들어오려고 한다면, 우리는 분파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지만 틀림없이 받아들일 것이다.' 누가 이렇게 말하는가? 중도주의의 변호인인가,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볼셰비키-레닌주의자에 포함된다고 생각하는 혁명가인가? 분간하기가 어렵다. 베레켄은 통일노동자당의 민주주의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다. 기회주의자들은 자신의 당에서 혁명가들을 쫓아낸다. 베레켄은 이렇게 말한다 : 기회주의자들이 올바르다, 왜냐하면 버릇없는 혁명가들이 분파를 만들기 때문이다.

베레켄이 처음에 통일노동자당에 대해서 말한 것을 다시 한 번 상기해보자 : 그것(통일노동자당)은 '새롭고, 동질적이지 않으며, 그 좌익은 허약하다.' 이 동질적이지 않은, 본질적으로 완전히 다양한 분파와 소분파로 구성된 당으로부터 통일노동자당은 공공연한 개량주의자, 소부르주아적인 카탈로니아 민족주의자는 물론이고 중도주의자도 아닌 볼셰비키-레닌주의자만을 쫓아내고 있다. 이것은 명백하게 밝혀져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볼셰비키-레닌주의자'인 베레켄은 중도주의자의 탄압을 승인한다. 아시다시피, 그는 통일노동자당의 강령과 전술이라는 정치적 문제가 아니라 분파의 권리라는 법리적 문제에 몰두해 있다.

마르크스주의자가 보기에 중도주의 정당내의 혁명적 분파는 긍정적 사실이다. 혁명정당내의 종파주의나 기회주의 분파는 부정적 사실이다. 베레켄이 문제를 단순한 분파의 존재 권리로 환원시키는 것은 그가 중도주의와 마르크스주의 사이의 분계선을 완전히 없앴음을 보여줄 뿐이다. 이 점에서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자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 '통일노동자당내에는 민주주의가 없다고들 한다. 이것은 사실은 아니다. 민주주의는 존재한다. 우파, 중도주의자, 동요분자를 위한 민주주의가 존재한다. 다만, 볼셰비키-레닌주의자를 위한 민주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바꿔 말하면, 통일노동자당내의 민주주의의 정도는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에 근본적으로 적대하는 이 당의 중도주의 정책의 실제 내용에 의해 결정된다.

 

용납할 수 없는 돌출 행동

그러나 베레켄은 여기에 머물지 않는다. 통일노동자당을 옹호하기 위해 그는 카탈로니아의 우리 동지들에 대한 직접적인 중상(딱 들어맞는 표현이다!)에 의지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 '바르셀로나의 볼셰비키-레닌주의자 지부는 출세주의자나 모험주의자들로 구성되었다.' 이것을 읽은 사람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을 것이다! 누가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사회민주주의자인가? 스탈린주의자인가? 적인 자본가계급인가? 그렇지 않다, 이것은 우리 벨기에 지부의 책임있는 위원이 한 말이다. 이것은 사태의 전체 발전과정에 의해 폭로된 오류를 고수할 작정인 것이다! 만약 벨기에 지부의 회보가 바르셀로나 게페우의 하수인 손에 들어가면, 그들은 내일 이렇게 말할 것이다 : '베레켄 자신의 고백에 의하면, 볼셰비키-레닌주의자는 출세주의자나 모험주의자이다. 따라서 이들을 없애야만 한다!'

우리는 분노로 베레켄 동지의 이 용납할 수 없는 돌출 행동을 배격하고, 우리의 모든 국제적 권위를 동원하여 우리의 젊은 바르셀로나 조직을 지지한다고 선언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우리 지부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 이렇게 덧붙이겠다. : 바르셀로나의 우리 동지들은 올해 7월 19일의 그 강령적 호소에 따라 보여준 것처럼, 베레켄은 비교도 안될 만큼 더 깊고, 진지하게 혁명의 임무를 이해하고 있다. 국제서기국의 진짜 '오류'는 오히려 현 시점까지 그의 주장을 비난하지 않은 것이며, 우리 벨기에 지부가 그것을 비난하도록 강요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다시 한 번 우리는 베레켄 동지가 올바른 노선으로 복귀하도록 도와야 한다.

우리는 견해 차이를 더욱 악화시키려는 의도가 전혀 없다. 우리는 다양한 상황 속에서, 그리고 벨기에 지부와 국제조직의 각기 다른 발전 단계에서 베레켄 동지를 봐왔다. 우리 모두가 노동자계급의 대의에 대한 베레켄 동지의 헌신, 그 에너지, 이 대의에 자신의 모든 힘을 사심 없이 쏟으려는 그 열의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젊은 노동자는 이런 점을 베레켄 동지에게서 배워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 입장에 관한 한, 유감스럽게도 그는 훨씬 자주 마르크스주의 노선에서 몇 미터씩 오른쪽으로나 왼쪽으로 일탈한다. 그렇다고 해서 베레켄 동지가 마르크스주의 노선을 고수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관대한 편도 아니다. 과거에 우리는 특히 베레켄 동지의 종파주의 경향과 싸웠어야 했다. 그는 벨기에 지부에 적지 않은 해를 일으켰다. 그러나 심지어 그때에도 종파주의가 언제라도 기회주의라는 꽃이 활짝 필 수 있는 봉오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비밀이 아니었다. 지금 우리 앞에서 정치적 식물학의 이 법칙이 매우 두드러지게 확인되고 있다. 베레켄 동지는 부차적 중요성을 가진 문제나 조직의 형식적 문제에서 종파주의가 결국 거대한 역사적 중요성을 가진 정치적 문제에서 기회주의에 이를 뿐임을 입증했다.

제4인터내셔널의 내부 생활은 민주주의 원칙에 입각해 있다. 베레켄 동지는 이 민주주의를 매우 폭넓게, 때로는 무정부주의적으로도 이용한다. 그래도 민주주의 체제의 이점은 경험과 동지적 토론에 의지하는 압도적 다수가 권위 있는 의견을 자유롭게 정식화하고, 위험한 길에 발을 딛게 된 소수를 제때에 정상으로 되돌릴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이것이 현 시기에 우리 벨기에 지부와 동시에 네덜란드 지부에 대해서 해줄 수 있는 최선의 도움이다.

 

1937년 8월 24일

 

 

스페인 정세에 대한 질문에 답하여

一간결한 요약

 

■ 이 글은 스페인 내전에 대한 기본적 견해를 제시하며, 이른바 '혁명적 패배주의'에서 공화주의 세력의 패배를 바라거나 중립적 입장을 취하려는 극좌파를 비판한 것이다. 이 글에서 트로츠키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파시즘으로부터 방어할 것을 선언하고 있다.

 

1. 네그린과 프랑코 사이의 차이는 쇠퇴하고 있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파시즘 사이의 차이이다.

2. 어디에서나, 언제까지나, 어떤 곳에서나, 언제라도 혁명적 노동자가 부르주아 체제를 즉시 타도할 만큼 강력하지 않은 경우에는, 썩은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파시즘으로부터 방어하고, 특히 부르주아 민주주의 내부에서 자신의 지위를 방어한다.

3. 그렇지만 노동자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방식(인민전선, 선거블록, 연립정부 등)이 아니라, 자신의 방식, 즉 혁명적 계급투쟁의 방식에 의해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방어한다. 예를 들면, 파시즘에 대한 군사적 투쟁에 참가하면서도 노동자는 자신의 조직, 자신의 권리, 자신의 이해를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부로부터 계속 방어한다.

4.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그것을 낳은 자본주의와 함께 붕괴한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파시스트의 봉기 가능성은 바로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징후이다. 따라서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개혁'은 노동자계급의 강령이 될 수 없다. 파시즘에 대해서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방어하는 것은 우리의 노선 즉,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전복과 노동계급독재의 수립에 종속된 전술적 에피소드일 뿐이다.

5. 인민전선이라는 이름으로 자본가계급과 연합하는 것, 이 인민전선 정부에 참가하는 것, 이러한 정부를 정치적으로 지지하는 것, 부르주아 정부의 혁명적 전복을 위한 독자적 선동과 조직을 포기하는 것은 가장 유리한 경우에도,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단발마적 고통을 연장시킬 뿐이며, 파시즘의 승리를 더욱 쉽게 할 뿐이다. 반(反)혁명의 직접적 하수인인 스탈린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정책일 뿐만 아니라 전국노동자연맹과 통일노동자당 지도자의 정책이기도 한 인민전선 정책은 노동자계급 이해의 관점에서 볼 때, 파멸적이었으며, 지금도 그렇다.

6. 그러나 스탈린-네그린 정부와 프랑코의 정부가 어느 쪽이나 자본주의의 경비견(watchdogs)이라는 것이 사실이라고一그런데 사실이다一해도, 또 스탈린-네그린 정부의 정책이 필연적으로 파시즘의 승리에 이를 것임이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해도, 스탈린-네그린과 프랑코 군대 사이의 투쟁에서 노동자계급이 중립적 입장을 취해야 한다고 결론내리는 것은 절대적으로 잘못이다. 스페인 노동자계급과 세계의 노동자계급은 (ㄱ) 프랑코의 군사적 분쇄, (ㄴ) 내전 중에 최대한 빨리 스탈린-네그린 정부의 타도를 준비할 수 있는 정책에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다.

7. 이에 반대하여, 두 부르주아 국가 사이의 전쟁 중에 혁명적 노동자계급은 자국의 정치체제와 관계없이, '자국 정부의 패배는 보다 작은 악이다'라는 입장을 취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규칙을 서로 싸우고 있는 두 부르주아 정부 사이의 내전에도 적용할 수는 없는가?

적용되지 않는다. 두 부르주아 국가 사이의 전쟁에서 그 목적은 제국주의적 정복의 하나이지, 민주주의와 파시즘의 투쟁이 아니다. 스페인 내전에서 문제는 민주주의인가 파시즘인가이다.

자본가계급에게는 민주주의와 파시즘의 차이가 결정적이지 않다. 상황에 따라 민주주의나 파시즘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용한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소부르주아 대리인 一사회민주주의, 스탈린주의, 무정부주의의 지도자들一에게 민주주의는 자신의 존속과 영향력의 원천을 의미한다. 파시즘은 이들에게 붕괴와 파멸을 의미한다. 혁명적 노동자계급은 싸우고 있는 양 진영을 같은 가방에 넣어서는 안 된다. 이들의 투쟁을 자신의 이해를 위해서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 혁명가는 중립 정책을 통해서가 아니라, 제1의 적인 파시즘에 군사적 타격을 가하는 것을 통해서 성공을 거둘 수 있다.

8. 프랑코는 대다수 노동자와 농민이 증오하는 알기 쉬운, 직접적인, 불구대천의 적이다. 네그린, 스탈린, 카바예로 등등은 여전히 수많은 노동자 농민을 지도하는 덜 분명하고, 더 위장한 적이다. 프랑코와의 투쟁은 물리적인 투쟁일 수밖에 없다. 지금, 네그린과의 물리적 투쟁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혁명적 분자가 소수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머지않아 피할 수 없는 물리적 투쟁은 정치적으로 준비되어야 한다. 이 정치적 준비를 위한 가장 중요한 수단은 정부의 사악한 군사행동을 규탄하고 폭로하며, 이 사악한 군사행동의 이유가 자본의 이해에 대한 정부의 굴종 때문이라는 점을 대중에게 설명하는 것이다.

9. 이에 반대하여, 두 제국주의 진영(한편에는 독일과 이탈리아, 다른 한편에는 영국, 프랑스와 소련)이 이베리아반도에서 자신의 투쟁을 수행하는 것이고, 스페인전쟁은 이 투쟁의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 할 수도 있다.

역사적 가능성의 의미에서는 사실이다. 그러나 역사적 가능성을 오늘날, 내전의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과정과 동일시하는 것은 용납하기 어렵다. 제국주의 국가들의 개입이 스페인의 사태 발전에 큰 영향을 줄 것이라는 점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오늘까지 이것은 스페인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진영과 스페인의 파시즘 진영 사이의 투쟁인 이 사태의 기본적 성격을 바꾸지 못했다.

10. 같은 근거에서 전쟁이 계속된다면, 이 두 진영 사이의 정치적 차이는 제로(0)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단지 가능성일 뿐이다. 오늘 현재는 사실이 아니다. 따라서 현재 상황을 이용할 필요가 있다. 상황은 다른 방향으로도 바뀔 수 있다 : 프랑코의 군사적 타격에 영향을 받아 네그린 정부는 예컨대, 코르닐로프에게 타격을 받은 1917년 8월에 케렌스키 정부가 했던 것처럼, 노동자에게 더 많은 양보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런 양보도 네그린 정부 타도를 더 잘 준비하기 위해서 이용할 것이다.

11. 예를 들어, 카바예로가 많은 사람이 바랐던 것처럼, 네그린에 대항하는 투쟁에 착수할 수 있었다면, 우리는 카바예로에 대한 어떠한 정치적 책임도 지는 일 없이, 이 투쟁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가했을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이 투쟁에 필수적인 단호함과 혁명적 강령의 결여를 비난했을 것이다. 그러나 카바예로는 자신의 군대인 노동자총연합(UGT)과 그를 다그쳐 투쟁의 길에 몰아세운 무정부주의자 노동자(CNT)로부터도 비겁하게 도망쳤다. 이 희극적 영웅의 도망은 많은 환상을 쫓아버리고, 진정한 혁명가를 위한 더 많은 여지를 주고, 프랑코에 대한 군사적 투쟁 중에 대중을 네그린에 맞서 정치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

12. 하나의 예를 들자. 무기와 군수품을 실은 두 대의 배가 프랑스 또는 미국에서 한 대는 프랑코 측을 향해, 다른 한 대는 네그린 측을 향해 출발했다고 하자. 이 경우, 노동자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가? 양쪽 배 모두를 사보타지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프랑코 측을 향한 배만을 사보타지해야 하는가?

우리는 중립적이지 않다. 우리는 네그린 정부를 지지하는 군수품을 실은 배를 통과시킬 것이다. 우리는 어떤 환상도 없다 : 이 탄환들 가운데, 10발 중 9발은 파시스트에게 발사되겠지만, 적어도 1발은 우리 동지들에게 향할 것이다. 그러나 프랑코 지지 낙인이 찍힌 무기의 경우, 10발 모두가 우리 동지들에게 향할 것이다. 우리는 중립적이지 않다. 우리는 프랑코를 지지하는 군수품을 실은 배를 통과시키지 않을 것이다. 물론 스페인에서 무장봉기가 일어나면, 군수품을 실은 배가 봉기노동자의 수중으로 향하도록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강하지 않다면, 우리는 보다 작은 악을 선택할 것이다.

13. 혁명정당인 우리가 네그린을 위해 새로운 의용병을 동원할 수 있는가? 이것은 이들을 게페우의 수중으로 보내버리는 것이다. 네그린 정부를 위해서 돈을 모으는 것은? 당찮은 소리다! 우리는 스페인의 우리 동지들을 위해서 돈을 모을 것이다. 만약 국경 너머로 동지를 보낸다면, 우리 자신의 운동을 위한 공동모의로 그렇게 할 것이다.

14. 스페인의 민주주의를 위한 북미위원회(North American Committee for Spanish Democracy) 같은 위원회나 각종 회의, 노동조합 투쟁 등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어떠한 것인가?

우리는 노동조합은 정부를 위해서가 아니라 스페인 노동조합이나 노동자 조직을 위해서 투쟁자금을 모아야 한다는 생각을 옹호한다. 이에 반대하여, 스페인의 노동조합 지도자는 정부와 가깝고, 따라서 이들에게 투쟁자금을 보내는 것은 용납하기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간단한 한 가지 예를 드는 것으로 답하겠다. : 1926년, 영국의 광산노동자 파업 중에 우리는 그 지도자가 영국 정부와 밀접하게 관계를 맺고 있던 광산노동자조합에 투쟁자금을 보냈다. 파업위원회는 개량주의자들일 수 있었다. 경영자와 유착하고 있는 이들은 배신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노동자가 지도자를 바꿀 수 없는 동안은 이들을 피할 수 없었다. 따라서 우리는 이들이 노동자를 배신할 위험을 무릅쓰면서 이들에게 투쟁자금을 보냈던 것이다. 우리는 이 점을 노동자에게 경고했다. 따라서 배신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 '알다시피, 여러분의 지도자는 여러분들을 배신했습니다.'

15. 쌀렘므[아틸리오 쌀렘므(Attilio Salemme) : 미국사회당의 좌파인 [어필 어소시에이션]의 위원, 스페인 문제에 관해서 '부르주아 공화주의 정부에 대한 정치적, 물질적 지원 반대!' 입장을 취했다. 쌀렘므는 1937년에 트로츠키주의자로 제명당해 사회주의노동자당에 입당했다.]결의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 '"공화주의자의 승리를 선호한다"는 캐넌-샤흐트먼-골드먼의 노선은 스탈린주의자의 접근법에 공감하는 것이다. 이것은 물질적 원조는 정치적 지지를 뜻하지 않는다는 변명을 폭로하는 "보다 작은 악"인 인민전선 정책이라는 수렁으로의 공개적인 타락이다. ··· 무기를 포기하려고 하지 않는 노동자, 즉 스페인 정부에 군사적이거나 물질적 원조를 제공하려고 하지 않는 노동자는 정부의 스탈린주의자 체카에 의해 총살되고 있다.'

그렇다, 우리 동지가 정부의 체카에 의해 총살되고 있음을 알고 있지만 쌀렘므 그룹은 이로부터 어떤 결론을 끌어내는가? 공화파 군대로부터의 탈주인가, 아니면 군사봉기인가? 탈주한다면, 어디로 탈주하는가? 아무려면 프랑코 진영으로의 탈주이기야 하겠는가. 정부가 노동자와 농민을 동원했다면, 이 정부를 군사적으로 원조하는 것에 대한 거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탈주나 봉기를 의미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총파업을 의미하는가? 그러나 특히 전시의 총파업은 정부 타도를 목표로 하는, 즉 봉기의 서론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인민에게 봉기를 호소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는데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그렇게 할 수 있는가? 이 결의문이 작성자의 정치적 자기만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스페인을 위해서 작성되었다면, 도대체 쌀렘므의 부대가 스페인에 얼마나 있는지 알고 싶다. 우리가 병사에게 싸울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노동자(공화파 정부를 '물질적으로 원조'하는 군수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일할 것을 요구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권력을 장악할 만큼 강하지 않다면(사실이 그렇듯이), 세력관계에 의해 결정된 물질적 조건 속에서 프랑코에 맞서 군사적으로 싸우지 않으면 안된다. 동시에 우리는 네그린에 대한 봉기를 정치적으로 준비해야 한다.

16. 이들의 결의문은 더 나아가 이렇게 말하고 있다 : '혁명적 노동자는 부르주아 정부의 방어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들은 오직 노동자 정부만을 방어할 수 있다. 다른 한편, 이들은 오직 제국주의적 충돌에서만 혁명적 패배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스페인내전에서 노동자계급의 계급적 이해는 혁명파에게 혁명적 패배주의나 방어주의를 요구하는 모든 강령을 피할 뿐만 아니라, 그에 맞서 싸울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파시즘에 대한 전쟁은 네그린 정부의 방어 이상의 것이다. 우리에게는 노동자 조직이 있다. 스페인, 특히 카탈로니아에는 사회주의적 소유, 집산화된 농장이 있다. 네그린 정부는 이것에 적대적이지만, 지금까지 묵인하고 있다. 우리는 이 획득물을 프랑코로부터 방어해야 한다.

17. 쌀렘므의 결의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 '혁명파는 어떠한 경우에도 프랑코에 대한 군사적 투쟁의 사보타지를 요구하는 구호를 제기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렇게 하는 것은 혁명적 패배주의 입장에 빠지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성명은 자신을 변호한다. 이 '혁명파'는 너무도 혁명적이어서 자신의 입장에 의해 스스로가 비난받는 것처럼 생각되자, '프랑코에 대한 군사적 투쟁의 사보타지'를 요구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선언한다. 이런 언질은 이 '혁명파'에게 조금 … 굴욕적이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흥미로운 것은 결의문 작성자가 공화파 군대의 '사보타지'에 대해서만 반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프랑코 군대에 대한 사보타지를 지지하는가? 작성자는 파시스트 군대 안의 사보타지를 지지하는가? 여기에는 왜 침묵하고 있는가? 이 '생략'은 이 그룹의 입장 전체에서 대단히 특징적이다. 격렬한 표현과 무시무시하게 급진적인 정식의 엄호 아래, 이들은 스스로 에 대한 자신의 확신의 결여를 감추려고 한다. 이는 놀라운 것이 아니다. 순전히 형식적인 비타협파(school)는 현실을 보지 않으려고 사사건건 비난한다. 따라서 이러한 파의 문하생이 우연히 현실에 눈을 뜨면, 그는 기회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벨기에의 베레켄 동지를 통해 이런 놀랄만한 실례를 접하고 있다.

18. 쌀렘므의 결의문은 더 나아가 이렇게 말하고 있다. : '범죄적으로 히틀러에 대한 힌덴부르크의 승리를 선호했으며, 결과적으로 양쪽 모두를 손에 넣은 사회민주주의자나, 랜든[알프레드 랜든(Alfred Landon, 1887-1987) : 미국의 정치인, 실업가. 1912년부터 캔사스주에서 석유회사를 경영, 캔사스 주지사(1933~37). 1936년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였지만, 현직의 프랭클린 루즈벨트에 완패했다.]에 대한 루즈벨트의 승리를 선호한 스탈린주의자는 프랑코에 대한 네그린의 승리를 선호하고, 네그린의 군사독재나 네그린-프랑코의 휴전 둘 중 하나를 손에 넣을 캐넌, 샤흐트먼 일당과 마찬가지로 정치적으로 타락하고 있다.'

네그린과 프랑코의 내전은 힌덴부르크와 히틀러의 선거 경쟁과 같은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만약 힌덴부르크가 히틀러에 대해서 공개적인 군사적 투쟁에 착수했다면, 힌덴부르크는 '보다 작은 악'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보다 큰 악'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작은 악'을 선택한다. 그러나 힌덴부르크는 '보다 작은 악'이 아니었다. 그는 히틀러에 대한 공개적인 투쟁에 돌입하지 않았다. 사회민주주의자는 이러기를 바랐지만―그것은 어리석은 소망이었다一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스페인에서는 파시즘에 대해 사회민주주의자가 전쟁을 수행하고 있다. 히틀러에 대항하여 힌덴부르크를 지지하는 것은 정치적 독자성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했다. 스페인의 경우에서도 우리는 네그린을 정치적으로는 지지하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국회의원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는 네그린의 군사예산에 반대 투표했을 것이다.[저자 주 : 네그린 정부의 군사예산에 찬성 투표하는 것은 그에게 정치적 신임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일은 할 수 없다. 그것은 범죄이다. 우리의 투표를 무정부주의자 노동자에게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매우 간단하다. : 우리는 이 정부가 전쟁을 수행하고, 숭리를 보장할 능력이 있다는 데에서 조금도 신뢰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 정부가 부자를 옹호하고, 가난한 사람을 굶기고 있다는 것을 규탄한다. 이러한 정부는 분쇄되어야 한다. 우리가 이 정부를 대체할 만큼 강력하지 않은 동안, 우리는 그 지휘 아래 전투를 수행한다. 그러나 모든 경우에 이 정부에 대한 우리의 불신임을 공공연하게 밝힌다. 이것이 이 정부에 대항하여 대중을 정치적으로 동원하고, 그 타도를 준비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 밖의 어떠한 정책도 혁명에 대한 배신일 것이다. -크룩스(Crux, 트로츠키의 필명)] 우리는 군사행동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네그린에게 지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 스스로가 군사행동을 처리할 수 있을 때까지는 파시스트 도당을 격퇴해야 한다.

프랑코에 대항하여 네그린 군대와 함께 투쟁하는 것이 히틀러에 대항하여 힌덴부르크에게 찬성 투표하는 것과 같다고 주장하는 것은 유감스럽게도 의회백치병으로 알려져 있는 것의 한 표현이다. 반(反)파시즘 전쟁은 의회주의적 수단에 의해 해결될 수 없다. 왜냐하면 파시즘은 무력으로만 분쇄될 수 있는 반동의 군대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독일에서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정책一즉 히틀러에 반대하는 힌덴부르크와의 단순한 의회주의적 연합의 결성一에 반대한 이유였다. 우리는 노동자 의용군 창설 등을 요구했다. 그러나 스페인에서 우리는 파시즘에 대한 투쟁을 수행하고 있다. 분명히, '민주주의' 군대의 총사령부는 내일 프랑코와의 휴전에 합의할지도 모르지만, 오늘의 사실은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실제 사태를 간과할 수도 없다. 우리는 전술적으로 파시스트에 대한 공화주의자의 전쟁을 전략적 목적, 즉 자본주의 체제의 전복을 위해서 이용해야한다.

19. 쌀렘므의 결의문은 이렇게 밝히고 있다 : '캐넌과 샤흐트먼은 7월 30일의 총회 보고에서, "예를 들어, 파시스트에 대한 전쟁에서 공화파 군대 안에서 투쟁하는 것과 같은 물질적 원조로 정부를 지지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기본적인 노동자적 의무에 범죄적으로 태만한 사람일 것이다"(강조는 인용자)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캐넌-샤흐트먼에게 묻는다 : 부르주아적 군사규율의 침투에 맞서 싸운 카탈로니아의 혁명적 노동자는 자신의 기본적인 노동자적 의무에 태만했는가? 이들이 부르주아 공화파 군대에 무기를 인도하려고 하지 않았다면, 즉 물질적 원조를 거부했다면, 이들은 노동자적 의무에 태만했던 것인가?…우리가 인민전선을 군사적으로 원조하려고 하지 않았을 때, 번햄[제임스 번햄(James Burnham, 1905~1987) : 당시 미국사회주의노동자당 좌파의 지도자, 40년 당과 결별했다. 나중에 맥카시즘의 선전가가 되었다.]이 우리에게 퍼부은 비난처럼, 당시 이들이 제5열의 하수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것인가?

여기서는 모든 것이 같은 가방에 들어 있다. 카탈로니아의 노동자는 5월 3~7일에 정부에 대항하여 싸웠다. 이들은 의식적으로가 아니라 본능적으로 권력을 위해 싸웠다. 만약 권력을 획득했다면, 프랑코에 대항하는 전쟁을 더 잘 수행할 기회를 제공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필요한 혁명적 지도력을 빠뜨린 채로 권력을 장악하려고 했으며, 그 결과 패배했다. 이제, 이들은 5월 사태 전보다 10배는 더 약해져 있다. 노동자는 지금 이렇게 묻고 있다: 우리는 지금, 브롱크스나 맨하튼이 아니라 여기 스페인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봉기하여 네그린 정부를 타도하려고 해야 하는가? 그러나 우리는 너무 약하고, 지금은 무장해제 되어 있다. 쌀렘므 그룹은 우리의 말을 흉내 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 여러분은 장차 네그린 정부의 타도를 위해 대중을 정치적으로 준비시켜야 합니다. 좋다. 그러나 이것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 사이에 프랑코가 다가오고 있다. 우리는 프랑코를 분쇄하려고 해야 할 것 아닌가?

'승리도 패배도 아니다' 또는 '우리는 방어주의자도 패배주의자도 아니다'라는 구호는 원칙적 관점에서 잘못된 것이고, 정치적으로도 파멸적이다. 이는 어떠한 선동적 가치도 없다. 혁명가가 내전중인 양 진영 사이에서 '승리도 패배도 아니다'라는 깃발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이것은 폰티우스 필라투스[폰티우스 필라투스(Pontius Pilatus) : 그리스도를 처형한 유태의 로마총독으로, 처형 판결에 즈음해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는 표시로 손을 씻었다. 즉, 도덕적 책임을 회피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클럽의 구호이지, 혁명정당의 구호는 아니다. 우리는 노동자 조직의 방어에 찬성하고, 프랑코에 대한 혁명의 승리에 찬성한다. 우리는 '방어주의자'이다. '패배주의자'는 네그린-스탈린과 같은 패거리이다. 우리는 가장 뛰어난 투사로서 프랑코에 맞선 투쟁에 참가한다. 동시에, 파시즘에 대한 승리를 위해서 우리는 사회혁명을 선동하고, 네그린의 패배주의 정부를 타도할 준비를 한다. 이러한 태도만이 대중에게 접근할 기회를 줄 것이다.

 

1937년 9월 14일

 

 

네그린 정부의 예산안에 찬성해야 하는가?

一제임스 캐넌에게 보내는 편지

 

■ 1937년 5월 사태를 계기로 통일노동자당이나 무정부주의 좌파에 대한 탄압이 격렬해짐과 동시에, 중앙정부도 사회당 좌파인 카바예로에서 스탈린주의자와 관계가 깊은 우파 네그린으로 수상이 교체되었다. 이로써 중앙정부의 정책이 한층 더 우경화했으며, 스탈린주의자의 영향력이 결정적으로 높아졌다.

네그린 정부에 대한 이런 태도를 둘러싸고 트로츠키주의 대오 내에서 좌익과 우익의 견해 차이가 생겼다. 좌익 경향은 네그린 정부가 부르주아-스탈린주의자 정부이기 때문에 공화주의 정부에 대한 어떠한 지원에도 반대했다. 반면에, 우익 경향은 프랑코 군대에 대한 거의 유일한 군사적 세력이 된 네그린 정부의 예산안에 대해서 찬성 투표하는데 동의했다. 이러한 좌우익 경향의 기회주의에 관해서는 앞의 글 「스페인 정세에 대한 질문에 답하여」(1937년 9월 14일)에서 전반적으로 다뤄지고 있지만, 캐넌에게 보내는 이 편지는, 특히 예산안에 대한 찬성투표 문제에 한정해 논하고 있다. 제목은 내용에 입각해서 옮긴이가 붙인 것이다.

 

친애하는 캐넌 동지

어제 받은 샤흐트먼 동지의 편지로 인해 나는 조금 불안해졌습니다. 전국위원회에 의해 채택된 스페인에 관한 마지막 테제는 불충분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웨버[루이스 제이콥스 웨버(Lewis Jacobs Weber, 1896년생) : 별명은 잭. 고참 미국 공산당원, 좌익 반대파. 제2차 세계대전 말 무렵에 사회주의노동자당과 결별했다.]동지가 여기에 있을 때 그와 이 문제에 대해서 토론했었습니다. 네그린 정부에 대한 이른바 물질적 원조의 문제가 너무 일반적인 형태로 정식화됨에 따라 쌀렘므 등 "좌익"반대파에게 일정한 근거를 제공해줄 수 있습니다. 나는 이것은 근본적인 견해 차이의 문제가 아니라 불충분한 정식화의 문제일 뿐이라고 확신했었고, 지금도 그렇게 확신하고 있습니다. 나는 전국위원회의 테제를 좀 더 정확히 하기 위해서, 그리고 월러파[월러파(Oehlerites) : 미국노동자당의 종파주의 분파. 사회당 입당 전술에 반대. 지도자는 후고 월러(Hogo Oehler)]등의 입장에 대해서 마르크스주의 입장을 좀 더 구체적으로 대립시키기 위해서 로스엔젤리스의 딕 로레(Dick Lorre) 동지의 질문에 문서 형태로 회답했습니다. 그러나 샤흐트먼 동지의 편지는 약간의 의구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것이 기우이기를 바랍니다.

국회에서 예산안에 찬성 투표하는 것은 "물질적" 지원이 아니라 정치적 연대 행위입니다. 네그린의 예산안에 찬성표를 던질 수 있다면, 어째서 그의 정부에 우리의 대표를 파견할 수 없습니까? 이 또한 "물질적 지원"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프랑스의 스탈린주의자들은 자국의 인민전선 정부를 완전 신뢰하고 있지만 여기에 공식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이런 종류의 불참이 일종의 최악의, 가장 유해한 참여라고 생각합니다. 블룸과 쇼땅[까미유 쇼땅(Camille Chautemps, 1885~1963) : 프랑스 급진사회당의 지도자. 1930년, 1933~34년, 1937~38년에 수상을 역임했다.]에게 이들의 행동을 위해 필요한 모든 수단을 제공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연립정부에 참여한다는 의미입니다.

"전선에서 쓸 소총 구입에 100만 페세타를 사용한다는데 우리가 어떻게 거부할 수 있는가?"라는 샤흐트먼 동지의 문제제기는 개량주의자들이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지금까지 무수히 제기해왔습니다. "조국방어는 말할 것도 없고 학교나 도로 건설에 필요한 수백만의 예산에 대해 어떻게 반대 투표할 수 있는가?" 우리는 프랑코에 맞서 싸울 필요성에 못지않게 학교와 도로 건설의 필요성을 인정합니다. 우리는 "자본주의" 철도를 이용하고, 아이들을 "자본주의" 학교에 보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본주의 정부의 예산안에 찬성 투표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코르닐로프와 맞서 싸우면서 우리는 보기에 따라서는 케렌스키와의 정치적 연대로 해석될 수도 있는 찬성투표를 소비에트에서 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선동의 관점에서 볼 때, 지금 스페인에서 우리의 반대투표를 설명하면서 겪을 어려움은 조금도 없습니다. "우리는 소총 구입에 200만 페세타를 요구했지만 100만 페세타밖에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노동자 통제 하에 소총 분배를 요구했지만 거부되었습니다. 우리는 경찰을 무장해제 시키고 이들의 소총을 전선으로 보내야 한다고 요구했지만 이 역시 거부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러한 정부에 우리의 돈과 신뢰를 자발적으로 제공할 수 있습니까?" 모든 노동자는 우리의 행동을 이해하고 찬성할 것입니다.

네그린 정부의 행동은 모두 전시의 긴급한 필요를 내세우며 수행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전시의 긴급한 필요라는 이들의 술책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감수한다면, 정부의 모든 중대한 제안에 정치적으로 동의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같은 식으로 우리는 우리의 출판물이나 집회에서 이들을 칭찬하게 될 것입니다. 요컨대, 우리는 통일노동자당 식의 정부여당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어떻게 네그린 정부의 전복을 준비할 수 있습니까? 내 대답의 골자는 이것입니다 : 우리는 네그린 정부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군사적으로 프랑코에 맞서 싸우는 동시에, 정치적으로 네그린 정부의 전복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 근본원칙에 동의한다면, 실천적 결론에서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동지는 스페인문제에 관한 베레켄 동지에 반대하는 나의 논쟁적인 편지[「스페인의 경험을 통한 개인과 사상들의 검증」]를 받았습니까? 이 편지를 동지의 회보에도 게재할 것입니까? 이는 지금 이중의 의미에서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 (1) 베레켄의 완전히 기회주의적인 입장을 폭로하고 (2) 사소한 문제에서 극좌적인 사람들이 거대한 사건에 직면해서 얼마나 쉽게 기회주의자가 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최근 2주 동안에 국제서기국, 바르셀로나 조직, 프랑스지부와 독일지부 등에서 발행한 국제회보를 모두 읽었습니다. 그리고 특히 스페인 사태에 관한 수준 높은 분석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이 귀중한 자료가 모두 미국의 지도적 동지들에 의해 읽혀지고 연구되고 있는지 어떤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 가장 훌륭한 기사들은 영어로 번역되어 일부는 국내 회보에, 다른 것은 〈뉴 인터내셔널〉[〈뉴 인터내셔널〉(New International) : 미국사회주의노동자당이 발행한 마르크스주의 이론지.]지에 게재되어야 할 것입니다.

 

최선의 인사를 보내며

 

트로츠키

1937년 9월 21일

 

(다른 주제에 대해 캐넌과 샤흐트먼에게 보내는 편지의 추신에서)

추신 : 1936년 11월 1일자 〈사회주의자의 호소〉 첫 페이지에 게재된 사설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문장을 발견했습니다 : "혁명적 노동자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정부가 아니라 노동자와 농민들을 위해 무장할 것을 계속 선동해야 한다."

이것은 라르고 카바예로 정부 때 즉, 혁명적 노동자들에 대한 유혈 탄압 이전에 작성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네그린 정부의 군사예산에 찬성투표 할 수 있습니까?

 

L.T.

1937년 9월 25일

 

 

극좌 일반과 특히 구제불능의 극좌에 대해서

-약간의 이론적 고찰

 

■ 이 글은 스페인혁명을 둘러싼 극좌파의 오류를 다룬 중요한 글이다. 이 글에서 트로츠키는 특히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스탈린-네그린 정부는 사회주의로 가는 길에 놓인 사이비 민주주의적 장애물이다. 그러나 이 장애물은 또한 파시즘으로 가는 길에도 놓인 그다지 믿을만하거나 견고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애물이다. 내일이나 모레가 되면 스페인 노동자계급은 아마 이 장애물을 분쇄하고 권력을 장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비록 수동적이더라도 오늘 이 장애물을 파괴하는 것을 돕는다면, 이는 파시즘에 봉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사상은 구체적이다. 즉, 해당 문제에서 결정적이거나 중요한 요인들 모두를 그 상호관계뿐만 아니라 그 발전의 관점에서도 고찰한다. 또 일시적 정세를 일반적 전망의 범위 안에서 용해시키는 것이 결코 아니라, 일반적 전망을 통해 일시적 정세의 특수성 일체에 대한 분석을 가능하게 한다. 정치는 바로 이러한 구체적 분석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기회주의 사상과 종파주의 사상은 다음과 같은 공통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 상황과 세력의 복잡성에서 자기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처럼 생각되는(물론 가끔 그런 경우도 있다) 한두 가지 요인을 뽑아내고, 이것을 복잡한 현실과 분리시키고는, 이것들에 무조건적이고 무제한적인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세계대전 이전의 오랜 시기에 개량주의는 당시의 매우 중요하지만 일시적인 요인들 예를 들어, 자본주의의 강력한 발전이나 노동자계급의 생활수준 향상, 민주주의의 안정 등을 이용해왔다. 오늘날, 종파주의는 가장 중요한 요인과 경향으로 자본주의의 쇠퇴, 대중의 생활수준 하락, 민주주의의 해체 등을 이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전 시기의 개량주의처럼 종파주의도 역사적 경향을 전능하고 절대적인 요인으로 바꿔치고 있다. "극좌"는 사실은 분석이 시작되어야 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분석을 끝낸다. 이들은 현실에 대해 진부한 도식을 대치시킨다. 그러나 대중은 현실의 영역에 살고 있으므로 종파주의의 도식은 노동자의 심리에 조금도 영향을 주지 못한다. 종파주의는 바로 그 본질 때문에 아무런 결과도 얻지 못할 운명이다.

제국주의적 자본주의는 더 이상 인류의 생산력을 발전시킬 수 없다. 바로 이 때문에 노동자에게 물질적인 양보나 효과적인 사회개량도 허락할 수 없다. 이 모든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한 시대 전체를 척도로 할 때에만 올바르다. 생산의 전반적 수준이 전전(戰前)과 전시 중의 수준보다 상승하지 않았거나, 아주 조금 상승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전후, 놀랄만한 기세로 발전하고 있는 몇몇 산업부문(자동차, 비행기, 전기, 무선통신)이 있다. 더욱이 이 노쇠한 경제에도 썰물과 밀물이 있다. 노동자는 거의 끊임없이 잇따른 투쟁을 전개하고 있으며, 이따금 승리를 거두고 있다. 물론 자본주의는 왼손으로 노동자에게 준 것을 오른손으로 빼앗고 있다. 예를 들어, 물가 인상은 레옹 블룸시대의 커다란 획득물을 파괴하고 있다. 그러나 다양한 요인들의 개입에 의해 결정되는 이러한 결과는 이번에는 노동자를 투쟁의 길로 나아가게 한다. 우리 시대의 이런 강력한 변증법이야말로 혁명적 전망을 활짝 열어 젖히는 것이다.

모든 경제적 · 부분적 투쟁을 폐기하기 위해 쇠퇴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일반적 경향만을 따르려는 노동조합 지도자는 자신의 "혁명적" 생각과 상관없이 실제로는 반동의 하수인일 뿐이다. 마르크스주의 노동조합 지도자는 투쟁할 것인지, 주의 깊게 기다릴 것인지, 아니면 퇴각할 것인지를 제의하기 위해서 자본주의의 일반적 경향을 파악할 뿐만 아니라 상황의 고유한 특징, 국면, 심리적 요소를 포함한 지역적 조건들도 분석해야 한다. 거대한 대중의 경험과 밀접하게 결합된 이러한 실천적 활동에 근거해서만 노동조합 지도자는 분해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일반적 경향을 폭로할 수 있고, 노동자들을 혁명적으로 교육시킬 수 있다.

우리 시대를 정치적으로 특징짓는 것이 사회주의(공산주의)와 파시즘 사이의 무자비한 투쟁임은 자명한 이치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것은 노동자계급이 이미, 그리고 모든 곳에서 이러한 양자택일을 자각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한 일정 국가의 일정 시기에 노동자계급이 자신의 민주주의적 자유를 지키기 위해 부분적 투쟁을 무시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레닌에 의해 확립된 공산주의인가 파시즘인가 하는 근본적인 양자택일은 많은 사람들에게 공허한 정식이 되고 있다. 좌익 중도주의자는 유감스럽지만 대개 자신의 굴복을 숨기기 위해서, 종파주의자는 자신의 소극성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이 정식을 이용하고 있다.

카탈로니아 헤네랄리타트(자치정부)에 입각하면서 안드레스 닌은 불행하게도 라디오로 방송된 성명을 다음과 같은 테제로 시작했다 : "이제 막 시작된 투쟁은 일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파시즘의 투쟁이 아니라 파시즘과 사회주의의 투쟁이다." 더욱이 이 정식은 통일노동자당에 의해 습관적으로 사용되었다. 〈라 바탈랴〉지의 모든 기사는 이 테제의 해석이나 변종에 지나지 않았다. 일부 종파주의자들 예를 들어, 벨기에의 종파주의자들은 통일노동자당의 정책을 전적으로나 부분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이 정식에 매달렸다. 그러나 닌은 실제로 레닌주의 정식을 정반대로 바꿔버렸다. 즉, 그는 사회주의혁명 초기의 모든 획득물, 모든 버팀목의 약탈과 억압이 목적이었던 부르주아 정부에 입각했다. 그의 생각의 본질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 이 혁명은 "본질적으로" 사회주의혁명이기 때문에 우리의 정부 입각은 이 혁명을 촉진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사이비 혁명적 종파주의자는 이렇게 소리쳤다 : "닌의 정부 참여는 오류일지도 모르지만 그 의미를 과장하는 것은 범죄일 것이다. 닌은 혁명이 '본질적으로' 사회주의적인 것이라고 인정한 것 아닌가?" 그렇다. 그는 그렇게 선언했다. 그러나 그것은 혁명의 토대를 약화시킨 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해서였을 뿐이다.

스페인혁명의 사회주의적 성격은 우리 시대의 기본적인 사회적 요인들에 의해 결정되었다. 그러나 기성품으로 주어진 것도, 혁명적 발전의 시작 단계부터 완전하게 보증된 것도 아니다. 절대 그렇지 않다. 1931년 4월 이후, 스페인의 거대한 드라마는 "공화"혁명, "민주주의"혁명의 성격을 띠었다. 그 뒤 몇 년 동안, 공산주의인가 파시즘인가 하는 레닌주의적 양자택일이一요컨대一그 가치를 전혀 잃지 않았더라도 자본가계급은 제반 사태에 자신의 각인을 찍을 수 있었다. 좌익 중도주의자와 종파주의자들이 이 양자택일을 초역사적인 법칙으로 바꾸면 바꿀수록 그만큼 대중을 자본가계급의 지배에서 떼어낼 수 없게 된다. 더욱 나쁜 것은 이 지배를 강화시킬 뿐이라는 것이다. 통일노동자당은 이 경험 때문에 큰 대가를 치렀다. 게다가 더욱 유감스러운 것은 이로부터 필요한 교훈을 도출하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좌익 중도주의자들이 혁명을 그 본래의 구조 즉, 부르주아 민주주의 구조에 가둬두기 위해서 레닌을 이용한다면, 극좌파는 같은 레닌주의적 양자택일로부터 혁명의 실제적 발전과정을 모르는 체하거나 "보이콧"할 권리를 도출해내고 있다.

나는 미국의 동지들에게 답하여 이렇게 말했다. "네그린 정부와 프랑코 정부 사이의 차이는 쇠퇴하고 있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파시즘 사이의 차이다." 우리의 정치적 태도는 이런 기본적인 사고로부터 출발한다. 극좌파는 이렇게 외친다. 뭐라고! 우리를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파시즘 사이의 선택으로 한정하고 싶은 것인가? 그러나 이것은 순전한 기회주의이다! 스페인혁명은 기본적으로 사회주의와 파시즘 사이의 투쟁이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극히 사소한 해결책도 제공하지 못한다. … 등등.

사회주의인가 파시즘인가 하는 양자택일은 단지, 스페인혁명은 노동계급독재를 통해서만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그 승리가 미리 보증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문제는 여전히 그대로 남아있다. 따라서 절충적이고, 혼란스럽고, 반쯤 눈 멀고 반쯤 귀먹은 이 혁명을 사회주의혁명으로 전화시키는 것, 바로 이 점에 정치적 임무 전체가 놓여있다. 무슨 일인지 말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 "무슨 일"을 출발점으로 이용할 줄도 알아야 한다. 지도적인 정당들, 심지어 통일노동자당을 포함하여 사회주의에 관해 말하는 정당들조차도 약탈당하고 손상된 이 어중간한 혁명이 의식적이고 완전한 혁명으로 전화되는 것을 막으려고 전력을 다하고 있다. 혁명적 고양의 시기에 스페인 노동자계급은 계급적 본능에 의해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중요한 이정표를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이정표는 지도적 정당들에 의해 일축되어왔다. 약간의 사회학적 일반화에 만족함으로써 이런 모순적인 현실을 뛰어넘는 것은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발전을 털끝만큼도 촉진하지 못한다. 투쟁으로 즉, 현실과 조화되는 전술을 통해 물리적 어려움을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된다.

현재 스페인의 군사적 투쟁은 한편으로는 프랑코에 의해, 다른 한편으로는 스탈린-네그린에 의해 수행되고 있다. 프랑코는 파시즘을 대표하는 반면에, 스탈린-네그린은 결코 사회주의를 대표하지 않는다. 반대로 이들은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운동을 방해하는 "민주주의적" 제동기(brake)를 대표한다. 공산주의인가 파시즘인가 하는 역사적 양자택일은 아직까지 그 정치적 표현을 얻지 못했다. 어림도 없다. 1936년 7월 이후, 스페인혁명은 닌이 이해하지 못한 채 정식화한 목표에서도 크게 뒤떨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내전은 여전히 매우 중요한 실제적 의의를 가지고 있다. 이런 사실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한편으로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다른 한편으로 공공연한 파시즘에 종속된 두 진영 사이의 무장투쟁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내부로부터 노동계급독재를 위한 투쟁으로 전화시키기 위해서는 이 절충적 투쟁에 대해 올바른 태도를 갖는 것이 필수적이다.

스탈린-네그린 정부는 사회주의로 가는 길에 놓인 사이비 민주주의적 장애물이다. 그러나 이 장애물은 또한 파시즘으로 가는 길에도 놓인 그다지 믿을만하거나 견고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애물이다. 내일이나 모레가 되면 스페인 노동자계급은 아마 이 장애물을 분쇄 하고 권력을 장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비록 수동적이더라도 오늘 이 장애물을 파괴하는 것을 돕는 다면, 이는 파시즘에 봉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임무는 단지 양 진영을 이론적으로 그 진정한 가치에 따라 평가하는 것만이 아니라, 앞으로 도약하기 위해 실제로 이들의 투쟁을 활용하는 것이다.

구제불능의 극좌파뿐만 아니라 좌익 중도주의자도 종종 케렌스키-코르닐로프 충돌 시에 볼셰비키가 취한 정책을 예로 들지만 정작 이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이해하는 바가 없다. "그러나 볼셰비키당은 케렌스키와 함께 싸웠다"고 통일노동자당은 말한다. "그러나 볼셰비키당은 코르닐로프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케렌스키를 신뢰하려고 하지 않았다"고 극좌파는 대답한다. 양쪽 모두 … 절반만 올바르다. 즉, 양쪽 모두 완전히 틀렸다.

볼셰비키당은 케렌스키 진영과 코르닐로프 진영 사이에서 중립적 입장을 취하지 않았다. 볼셰비키들은 코르닐로프 진영에 맞서 케렌스키 진영에서 투쟁했다. 볼셰비키들은 케렌스키 정부를 전복할 수 있을 만큼 강하지 않은 동안 정부의 공식 명령을 받아들였다. 볼셰비키당의 경이적인 상승이 시작된 것은 바로 코르닐로프 반란이 일어난 8월중이었다. 이런 상승은 오직 이중의 목적을 가진 볼셰비키의 정책 때문에 가능했다. 즉, 볼셰비키는 코르닐로프와의 투쟁의 최전선에 서는 동시에, 케렌스키의 정책에 대해서는 조금도 책임지지 않았다. 반대로, 케렌스키에게는 반동세력의 공세에 대한 책임과 이를 무력화시킬 능력이 없다고 규탄했다. 이렇게 볼셰비키는 10월 혁명의 정치적 전제조건을 준비했다. 그리고 볼셰비키주의인가 반(反)혁명인가(공산주의인가 파시즘인가) 하는 양자택일은 역사적 경향으로부터 살아있는, 그리고 직접적인 현실로 변화되었다.

우리는 이 교훈을 청년에게 가르쳐야 한다. 이들에게 마르크스주의 방법을 열심히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취학연령을 몇 십 년 넘겨버린 사람들과 (이것도 우리에게서 빌린 것이지만) 똑같은 정식을 우리는 물론이고 현실에도 매번 대치시킬 것을 고집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들을 혁명정책을 정교화 하는 참모부로부터 거의 격리되어야만 하는 구제불능의 사람들로 공개적으로 인정할 필요가 있다.

 

1937년 9월 28일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에도 스페인에서 새로운 "숙청"이 대규모로 수행되고 있는 것 같다. 의도적으로 애매하게 작성된 신문기사를 추측해 보건대, 이번 타격은 특히 무정부적 조합주의를 겨냥하고 있는 것 같다. 이를 통해 스탈린-네그린과 프랑코 사이에 화해가 준비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게페우를 통해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모스크바 관료집단이 계속해서 새어나간 것 같은 "승리"를 이런 식으로 준비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이것은 프랑코의 승리나 프랑코의 독재와 쏙 빼닮은 "공화주의자" 미아하의 군사독재를 준비할 수 있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완전한 백치만이 스탈린주의 도당이나 네그린적 민주주의의 목적이나 방법에 대해서 환상을 가질 수 있다. 두 진영 사이의 투쟁은 눈 깜짝할 사이에 확실히 종결될 수 있다. 이렇게 조성된 새로운 정세는 같은 전략적 목표에 일치하는 새로운 전술을 지시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는 아직 네그린과 프랑코 사이에 군사적 투쟁이 계속되고 있다. 따라서 오늘의 전술은 오늘의 실제 상황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

 

1937년 9월 29일

 

 

혁명적 일정에 대하여

一장 루에게 보내는 편지

 

■ 이 편지는 1937년 5월 시기를 다룬 이론적 고찰이다. 트로츠키는 스페인혁명의 5월 시기를 러시아혁명의 7월 시기에 대비하면서 양자의 동일성과 차이를 고찰하고, 1937년 5월 시점에서 혁명진영의 권력 획득이 가능했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친애하는 친구에게,

5월 5일자(10월 5일자?-옮긴이) 편지에서 동지가 내 주의를 끌고 있는 것은 1937년 5월 12일자 룬드의 편지("카탈로니아의 봉기-약간의 예비적 고찰")와 1937년 8월 24일자 내 기사("스페인의 경험을 통한 개인과 사상의 검증") 사이에 바르셀로나의 5월 시기에 대한 평가에 모순이 가정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점이다.

이 추정상의 모순은 페테르부르크의 7월시기와 관계된 유추 때문이다. 게다가 동지는 친(親)통일노동자당파가 이 '모순'으로 도움을 입을 것 같다고 예측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것은 정말로 너무 경솔하기 때문이다. 나는 두 기사의 원문을 다시 읽었지만, 하찮은 모순도 발견하지 못했다. 거꾸로 이 두 기사는 서로를 보완한다.

 

역사적 유추

각각의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은 다수의 근본적이고 부차적인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 변증법은 해당 사건에서 두 번째, 세 번째, 열 번째 순위 요인에 결정적 중요성을 부여한다. 그 한 예로, 독일 노동자계급의 패배는 매우 낮은 생산력 수준이나 계급대립의 불충분한 발전 때문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그리고 오로지 노동자계급당의 파산 때문에 결정된 것이라고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다. 그 결과, 우리는 역사적 요인의 서열에서 당이 결정적 위치를 차지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만약 러시아의 7월 시기를 철저하게 분석한다면, 이 나라의 이전까지의 역사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결정하고 있던 모든 요인을 발견할 수 있다. 전쟁의 영향과 군대의 엄청난 비중은 말할 것도 없고 생산력 수준, 노동자계급의 특수한 비중, 농민의 역할, 국내생활에서 차지한 페테르부르크의 위치, 다양한 정당들의 역할 등이 그것이다. 따라서 7월 시기가 그 어디에서도 결코 그대로 반복될 수 없다는 것은 절대로 명백하다. 그렇다면 유추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단지 우리가 현재 실천적으로 가장 관심이 있는 견지에서 새로운 사건을 명확하게 설명하는데 도움이 될 뿐이다. 이렇게 나는 종종 7월 시기를 중대한 패배의 사례로 원용해왔다. 그렇지만 이 패배는 결정적인 것이 아니라 승리로 가는 길의 불가피한 단계로 간주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승리는 패배에 의해 '보증된' 것이 결코 아닐 뿐만 아니라 올바른 혁명정책을 포함하여 일정한 보완적 조건 하에서만 가능했다는 점을 덧붙이지 않으면 안 된다.

 

"강조되어야 하는 것"

룬드의 기사는 '불완전할 뿐만 아니라 고의로 왜곡되었다'는 급전에 근거하여 1937년 5월 12일 작성되었다. 이 기사에 따르면, "1917년 7월 사태와의 유추는 너무도 명백해서 자세하게 설명할 필요도 없다. 무엇보다도 강조되어야 하는 것은 그 차이점이다.' 따라서 필자는 유추에 만족하지 않는다. 반대로 독자에게 기사의 분석과 진단이 불충분함을 경고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 "무엇보다도 강조되어야하는 것은 그 차이점이다." 7월 시기와의 유추는 무엇보다도 당면한 선전 목적을 위해서이다. 가장 중요한 목적은 패배자의 용기를 북돋우는 것이었다. "러시아인도 7월의 패배로 고통 받았지만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이 경우에 유추는 바로 이렇게 환원된다.

그러니까 룬드가 자신의 편지에서 대중이 아니라 오히려 지도자들에게 직접적으로 말한 것은 본질적으로 다음과 같다 : '여러분은 당연히 노동자를 격려하려고 러시아의 7월 사례를 이용한다. 이는 너무도 당연해서 강조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당면한 선전에 그 중요성이 있는 매우 일반적인 이 유추와는 관계없이 양국의 상황이 전혀 다르다는 점을 잊으면 안된다. 따라서 우리의 분석과 진단은 공통된 특성보다는 오히려 그 차이점에 기초해야 한다는 점을 잊으면 안된다.' 룬드는 5월 운동을 '"자연 발생적" 즉, 통일노동자당 지도자를 포함하여 운동 지도자들에게는 느닷없이 발발한' 것으로 간주한다. (다시 한 번 러시아 7월 시기와의 유추가 확실해진다.) 그러나 같은 편지에서 룬드는 5월 운동을 올바른 명칭인 '봉기'라고 부르고 있다. 그는 결코 이 봉기를 '시기상조'라고 간주하지 않는다. 그는 바르셀로나의 '휴전' 소식에 불안을 느끼고 있지만, 1917년 7월의 페테르부르크 볼셰비키는 스스로 휴전을 모색했다.

여기서 이 문제에 대해 룬드가 말하고 있는 바는 이렇다 : "긴급보도가 전하고 있는 바르셀로나의 휴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주로 지도부의 지리멸렬에 의해 결정된 봉기의 패배인가, 그렇지 않으면 대중의 압력에 겁을 집어먹은 지도자들의 직접적인 굴복인가? 우리는 아직 모른다. 당장은 투쟁이 바르셀로나 밖에서 계속 이어질 것 같다. 바르셀로나에서 공세를 재개할 수 있을 것인가?' 요컨대, 룬드에게 문제는 그 출발점이 무엇이든 객관적 정세 전체에 의해, 권력 획득을 위한 이전까지의 혁명의 역사 전체에 의해 방향 지어진 봉기운동 자체인 것이다. 이런 정세에서 유일한 문제는 통일노동자당과 무정부주의자 등 좌익 조직의 태도였다. 이상이 사태와 동시에 제시된 룬드의 '예비적' 평가였다. 8월 24일의 내 기사는 주로 베레켄 동지를 직접 겨냥한 것이었다. 그의 잘못, 더 정확히 말하면, 매우 많은 그의 잘못들 가운데 하나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그는 7월시기와의 순(純)형식적 유추에 근거하여 5월 시기를 평가했다. 베레켄은 6년 이상의 혁명적 발전을 거쳐 1937년 5월에 제기된 그와 같은 정세를 연구하는 대신에, 도식적인 일정에서 역사와 정치의 모든 수수께끼를 푸는 마스터키를 찾아낸다. 바꿔 말하면, 룬드가 '무엇보다도 강조되어야 하는 것은 그 차이점'이라고 말했을 때, 그가 우리에게 조심하게 하려고 한 바로 그 잘못을 베레켄이 범하고 있는 것이다.

 

5월에 권력 획득은 가능했다

투쟁의 현장에서만 얻을 수 있는 정보를 입수하지 못한 채 여전히 수천km 떨어져 있다면, 5월에 권력 장악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는지를 물을 수 있다. 그러나 그때 이래 문서, 보고서, 셀 수 없이 많은 기사가 모든 경향의 신문에 실렸다. 모든 사실, 모든 자료, 모든 증언은 동일한 결론에 이른다 : 투쟁의 쟁점이 대체로 사전에 약속될 수 있는 것만큼이나 권력 장악은 가능했으며, 확실했다. 가장 중요한 증거는 무정부주의자에게서 나오고 있다. 5월 봉기 이후, 〈솔리다리닷 오브레라〉(Solidaridad Obrera, 전국노동자연맹 카탈로니아지부의 기관지)는 서글픈 곡조의 다음과 같은 말을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다 : "우리는 5월 반란의 주동자라고 비난받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반란에 완전 반대였다. 증거? 우리는 물론 우리의 적들도 이를 잘 알고 있다. 만약 우리가 권력을 장악하고자 했다면, 우리는 5월에 확실히 그렇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독재에 반대한다. 등등"

불행은 바로 전국노동자연맹이 권력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불행은 통일노동자당 지도부가 수동적으로 전국노동자연맹 지도부에 순응했던 것이다. (가장 소규모의) 불행은 베레켄, 스네블리트, 빅토르 세르쥬가 통일노동자당의 태도에 수동적으로 순응한 것이다. 이보다 더욱 나쁜 것은 우리가 통일노동자당의 치명적인 자기만족('자신의' 건물, '자신의' 라디오방송국, '자신의' 인쇄소, '자신의' 의용군)을 흔들어 깨우려는 결정적 순간에, 우리가 통일노동자당 지도자들에게 혁명은 어중간한 조치(게다가 스탈린주의자가 사회주의자나 무정부주의자를 대체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를 묵인하지 않는 무자비한 논리를 가지고 있음을 이해시키려는 결정적 순간에 베레켄, 스네블리트, 빅토르 세르쥬 같은 사람들이 자신의 곤봉을 차바퀴 살 사이에 쑤셔 넣은 것이다.

이들은 우리에 반대하여 통일노동자당 지도부를 지지하는 것 즉, 이들의 동요, 지리멸렬, 기회주의를 지지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알고 있다. 최근의 사태가 냉혹한 검증을 했다. 이른바 7월시기 이래, 통일노동자당은 강해지기는커녕 사실상, 괴멸되었다. 전국노동자연맹一통일노동자당은 그 그림자였다一은 지금 차례로 자신의 진지를 잃어버리고 있다. 아래로부터의 새로운 폭발에 의해 스페인혁명이 구제될 수 있을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전국노동자연맹과 통일노동자당은 스탈린주의자의 승리 즉, 반(反)혁명의 승리를 보증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뭐든지 다 했다. 그리고 베레켄, 스네블리트, 빅토르 세르쥬는 파멸의 길을 가는 통일노동자당을 지지하기 위해서 모든 일을 다 했다.

 

결정적 문제

우리의 모든 지부는 최대한 주의하여 스페인의 정세발전을 주시해왔다. 만약 지금, 우리의 국제신문이나 모든 내부 회보를 검토한다면, 조직의 대다수가 스페인 사태에 어떻게 레닌주의적 방법을 적용하고 있는가를 알게 될 것이라고 흡족하게 말할 수 있다. 클라트[클라트(Clart) : 장 루(Jean Loux)의 가명. 장 루는 1935년 9월 국제서기국을 대표하여 스페인으로 파견되었으며, 마르크스주의통일노동자당 결성에 관여했다. 1936년에도 스페인에 갔다.], 모우린[모우린(Moulin) : 체코슬로바키아 출신의 독일 트로츠키주의자인 빈테르(Winter)의 자명. 1936년 스페인으로 간 모우린은 [두루티의 친구들]과 긴밀하게 협력했으며, 〈레닌주의자의 소리〉(La Voz Leninista)라는 기관지를 편집했다. 1937년 8월 게페우에 체포되어 행방불명되었다.], 브라운[니콜 브라운(Nicolle Braun) : 체코슬로바키아 출신의 트로츠키주의자인 에르윈 볼프(Erwin Wolf)의 가명. 노르웨이 망명 당시의 트로츠키의 비서. 1937년 스페인에서 게페우에 의해 살해되었다.]이 보내온 편지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마르크스주의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우리 조직은 이렇게 역사적 규모의 문제에서 이론적 시험을 통과했다. 그리고 각 단계에서 빅토르 세르쥬에 의지하여 스네블리트와 베레켄 동지는 우리 입장一그리고 제4인터내셔널의 압도적 다수의 입장에 대해一에 대해 중도주의적 태도를 취하며 대립했다. 이러한 태도는 그 전망과 구호에서 막연했던 만큼이나 격렬하게 국제서기국에 반대했다.

스네블리트 동지가 우리 국제조직과 통상적인 관계를 모두 단절했을 때, 우리의 화해할 수 없는 적들과 협력했을 때, 그는 항상 국제서기국의 '수준 미달의 체제', '무능' 등을 핑계로 이용했다. 베레켄 동지는 그에게 특유한 다소 개인적인 편차를 가지고 같은 일을 했다. 당의 활동을 질식시키는 관료주의와 강령, 테제, 토론을 좋아하지 않는 지도자들의 선의는 사회주의혁명을 위한 세계당의 규범이 될 수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스네블리트 동지에게 '체제'와 문제에 대해서 우리도 몇 마디 해야겠다. 그러나 오늘날, 그것은 '체제'의 문제가 아니다. 스페인혁명에 대한 태도 가운데 하나의 문제인 것이다. 근본적인 차이점은 드러났다. 통일노동자당의 정책은 멘셰비키의 정책이었고, 지금도 여전히(조금이라도 남아있다면) 그렇다. 제4인터내셔널은 볼셰비키 전통을 계승 · 발전시키고 있다.

 

우리의 방법

제4인터내셔널은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이다. 제4인터내셔널은 교육이라는 거대한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 끈기가 있어야 한다. 지난 10년 동안의 우리 역사를 대충 돌아보더라도, 끈기와 참을성이 부족하다고 우리를 비난할 수 없다. 제명은 극히 드물었다. 한손으로 셀 수 있을 정도다. 우리 조직은 항상 토론과 설득의 방법, 대립되는 견해를 시간과 사태에 맡겨 검증하는 방법을 이용해왔다. 분열과 이탈은 우리의 선의와 교육적인 인내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경향'이 볼셰비키 조직과 양립할 수 없음을 스스로 인정한 분자나 그룹의 산물이었다. 제4인터내셔널의 '수준 미달의 체제'를 핑계 대며 우리에게서 분리되어나간 사람들은 차례로 무가치한 존재로 전락해버렸다. 란다우, 위테[위테(Witte) : 국제공산주의자동맹의 그리스 지부 대표로 국제서기국의 위원.], 몰리니에[레이몽 몰리니에(Raymond Molinier, 1904-1994) : 1920년, 프랑스 공산청년동맹. 1926년, 좌익 반대파. 1929년 프랑스공산주의자동맹과 그 기관지〈라 베리테〉(La Verite??)의 창설자의 한 사람. 1935년까지 트로츠키와 협력했다. 1935년, 국제주의공산당을 결성, 〈라 꼼뮨〉(La Commune)을 창간했다.], 월러[후고 월러(Hogo Oehler, 1903년생) : 가명은 에드워드 필링. 미국의 고참 공산당원이자 노동운동 활동가, 나중에 노동자당의 월러파 지도자. '프랑스 전환'에 반대했다.], 와이스보드[알버트 와이스보드(Albert Weisbord, 1900-1977) : 미국의 유태계 혁명가, 1920년 사회당에 입당. 1924년, 공산당. 1929년, 공산당에서 제명되어 1930년에 미국공산주의자동맹(미국의 좌익반대파)에 잠시 결합한 뒤, [공산주의투쟁동맹]이라는 소규모 종파주의 그룹을 결성하고, 〈계급투쟁〉지를 편집했다. 나중에 마르크스주의와 결별하고 미국노동총동맹(AFL)의 조직가가 되었다.], 필드[필드(B. J. Field, 1900-1977) : 가명은 막스 그루드. 경제학자. 미국 공산당원. 미국공산주의자동맹에서만 2번 제명. 제명기간 중에 트로츠키와 함께 활동했다. [혁명적노동자당 건설 준비동맹]을 결성하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등은 모두 12년 동안의 사태 발전, 위대한 역사적 전통, 마르크스주의 사상의 부단한 집단적 작업에 의해 역사적으로 결정된 노선 밖에서 하나의 경향을 급조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자신의 초라한 경험을 통해 확인해야 했다.

스네블리트 동지는 오래 전부터 자신의 당을 국제조직에서 탈퇴시키려고 생각했다. 그는 정말로 자신의 입장을 나타내기 위해서 항상 '4'라는 숫자를 이용해왔다. 그러나 근본원칙인 볼셰비키-레닌주의 강령의 범위 밖에서, 이 강령에 토대한 우리의 집단적 활동 밖에서 제4인터내셔널의 정식은 아무런 소용도 없는 공문구가 된다. 점점 더 애매해진 이런 상황은 거의 3년이나 계속되고 있다. 즉, '혁명적 일정'치고는 조금 긴 것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는 네덜란드 지부의 분리를 원치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네덜란드 지부가 실질적으로 우리의 국제적 구조에 들어오는 것, 실제로 우리의 집단적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다. 자신의 지부 가운데 하나가 완벽한 칸막이로 분리된 채 남아 있는 것을 허락할 국제조직은 없다. 스네블리트 동지가 볼셰비키-레닌주의자와의 근본적 차이를 감추기 위해서 우리의 '체제'나 우리의 '방식'에 대해 더욱 더 격렬하고, 더욱 더 이치에 맞지 않게 퍼부어대는 "비난'을 그대로 듣고 있을 수도 없다. 그리고 당연히 베레켄은 삐뚤어진 정책을 지지할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는다 : 이것이 우익적인가 좌익적인가를 따지는 것은 그에게는 쓸데없는 문제이다.

우리는 네덜란드의 자매조직과 철저한 토론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관료적으로 준비되고, 관료적으로 실현되는 비밀스런 분열을 막는 유일한 가능성이다. 우리의 벨기에 조직은 당연히 이 토론에 참여할 것이다. 이 토론은 다음 국제회의를 위한 준비여야 한다. 우리는 분열을 피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동시에 분열을 준비하고 있는 자들을 저지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이 토론을 통해 더 성숙하고, 더 단결될 것이다. 거대한 사태가 임박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2~3번이나 똑같은 오류를 반복할 권리가 없다. 스페인혁명은 그 의의가 어떠하건 간에 몇 배나 더 큰 사건을 위한 '총 예행연습'에 지나지 않는다. 새로운 세대가 체험한 이 경험으로부터 모든 교훈을 도출해내야 한다. 이것은 누군가 우리를 우리의 길에서 이탈시킬 수도 있다는 문제에 대한 이러저러한 궤변적 해석을 통해서는 할 수 없다. 사태가 말해준다. 국제회의는 이 소리를 어떻게 해석할지 알 것이다.

 

1937년 10월 22일

 

 

스페인의 교훈: 마지막 경고

 

■ 이 글은 이미 스페인 내전이 1년 이상 계속되면서 차츰 그 결과가 드러나고 있을 때 작성된 매우 총괄적인 스페인 내전 분석이다.

이 시기에 스탈린주의자는 후퇴하고 있던 부르주아 공화주의 세력과 손잡고 인민전선 내부에서 지배권을 획득하고 있었다. 스탈린주의자는 인민전선 내부의 혁명주의 세력, 특히 통일노동자당을 반(反)혁명 트로츠키주의자로 체계적으로 박해하고, 그 지도자를 체포하여 모스크바 재판과 같은 구경거리를 제공했다. 통일노동자당의 최고지도자 안드레스 닌은 스탈린주의자에 의해 고문당한 뒤 학살되었다. 무정부주의 지도자들은 이를 혐오하면서도 스탈린주의자들을 계속 추종했다.

스페인혁명의 가장 큰 교훈은 제국주의 시대에 혁명을 민주주의 단계에 국한시키는 것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조차 파괴하고 혁명세력을 피비린내 나는 탄압으로 내몰아 결국 혁명 자체를 결정적으로 약화시키고, 민주주의 체제의 붕괴와 군사적 파시스트 체제의 수립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아직 스페인 내전의 결과가 결정되지 않았지만 트로츠키는 이 씁쓸한 진실을 정확하게 예상하고, 그 교훈을 철저히 하려고 했다.

이와 함께 트로츠키는 '스페인에서 가장 정직한 정치조직인 중도주의 정당 통일노동자당의 붕괴가 주는 주요한 교훈'을 끊임없이 강조한다. 혁명의 격동적 과정에서는 정치적으로 성실하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실제로 혁명을 지도하고, 기회주의적 · 반동적 경향을 분쇄, 전선을 통일해야 한다. 불행하게도 통일노동자당에게는 이럴만한 의지와 능력이 없었다. 그 때문에 통일노동자당은 맨 먼저 스탈린주의에 희생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 트로츠키는 제4인터내셔널 스페인 지부에 대한 교훈을 분명히 하지 않았다. 스페인을 뒤흔든 거대한 혁명적 열광에도 불구하고 제4인터내셔널 스페인 지부는 대중적 기반을 획득하지 못하고, 스페인혁명에 거의 어떤 영향도 미칠 수 없었다. 혁명기에는 비록 소수파라도 올바른 강령을 가졌다면 급속히 다수파가 될 수 있다는 트로츠키의 확신은 스페인혁명에서는 전혀 실증되지 않았다. 이 문제는 나중에 트로츠키가 남긴 미완성 논문 '계급과 당과 지도부一왜 스페인 노동자계급은 패배했는가'의 주요 테마가 된다.

 

스페인의 볼셰비키주의와 멘셰비키주의

모든 총참모부는 미래의 거대한 전쟁에 대비하여 에티오피아, 스페인, 극동지역의 군사작전을 면밀히 연구하고 있다. 혁명의 참모부는 다가오는 세계혁명의 뜨거운 번갯불인 스페인 노동자계급의 투쟁을 주의 깊게 연구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만 우리는 다가오는 사태에 기습당하지 않을 것이다.

이른바 공화주의 진영 안에서一불균등한 힘을 가진一세 가지 이데올로그가 싸우고 있다. 멘셰비키주의, 볼셰비키주의, 무정부주의가 바로 그것이다. 부르주아 공화주의 정당들은 독자적인 사상이나 독자적인 정치적 의미도 없었으며, 개량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들의 등에 올라탐으로써만 스스로를 지킬 수 있었다. 게다가 스페인의 무정부주의적 조합주의 지도자들은 그 원칙을 거부하기 위해 별 짓을 다했으며, 사실상 그 원칙의 중요성을 무위로 돌려버렸다. 실제로는 이른바 공화주의 진영 안에서 두 가지 원칙이 우열을 다뤘다一멘셰비키주의와 볼셰비키주의가 바로 그것이다.

사회당과 스탈린주의자들, 즉 첫 번째와 두 번째 경우의 멘셰비키에 따르면, 스페인혁명은 오직 그 '민주주의적' 임무의 해결만을 요구했으며, 때문에 '민주주의적' 자본가계급과 공동전선을 맺는 것이 절대 필요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노동자계급의 시도는 죄다 미성숙할 뿐만 아니라 파멸적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의사일정에 오른 것은 혁명이 아니라 반란자 프랑코에 대항하는 투쟁이다.

그렇지만 파시즘은 봉건 반동이 아니라 부르주아 반동이다. 부르주아 반동에 대항하는 성공적인 투쟁은 노동자혁명의 힘과 방법에 따라서만 수행될 수 있다. 부르주아적 사상의 한 지류인 멘셰비키주의는 이런 사실을 어렴풋이도 알지 못하며, 알 수도 없다.

정력적인 제4인터내셔널 지부를 통해서만 뚜렷하게 표현되는 볼셰비키 관점은 연속혁명 이론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즉, 연속혁명 이론은 반(半)봉건적 토지 소유제의 청산처럼, 순전히 민주주의적인 문제들도 노동자계급의 권력 장악 없이는 해결될 수 없으며, 이것은 다시 사회주의혁명을 의제로 올려놓는다는 것이다. 더구나 바로 혁명의 첫 단계 중에 스페인 노동자는 스스로 민주주의적인 문제들뿐만 아니라 순전히 사회주의적 문제들도 실제로 제기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요구는 실제로 민주주의혁명의 방어가 아니라 거부를 의미한다. 인구의 대다수를 이루는 농민은 토지관계의 전복을 통해서만 파시즘에 대항하는 강력한 보루로 바뀔 수 있다. 그러나 지주는 상업, 산업, 은행 자본가들, 그리고 이들에 의지하는 부르주아 지식인들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노동자계급 정당은 농민대중과 행동을 같이할 것인가, 자유주의 자본가계급과 행동을 같이 할 것인가의 기로에 직면하게 된다. 농민과 자유주의 자본가계급을 동시에 동일한 연합 내에 포괄하는 데에는 한 가지 이유밖에 없다. 그것은 농민을 속이고, 결국 노동자를 고립시키는 자본가계급을 돕기 위해서이다. 토지혁명은 자본가계급에 대항해서만, 따라서 노동계급독재라는 수단을 통해서만 완수될 수 있다. 제3의 중간적 유형은 없다.

이론적 관점에서 볼 때, 스탈린의 스페인 정책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레닌주의의 기초를 완전히 무시한다는 점이다. 몇 십 년을 지체한 끝에一도대체 몇 십 년인가!ㅡ코민테른은 멘셰비키주의 이론을 완전히 복구시켰다. 그보다 더한 것은 코민테른이 이 이론을 더 '일관되게', 게다가 더 불합리하게 만들려고 기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1905년의 문턱에 있던 제정 러시아에서 '순전히 민주주의적인 혁명' 정식은 어쨌든 1937년의 스페인에서보다 그지없이 많은 주장들로 지지되었다. 멘셰비키주의의 ‘자유주의적 노동정책’[자유주의적 노동정책 : 레닌이 혁명 전의 반동기에 멘셰비키 청산주의자의 정책을 가리켜 빈번하게 사용한 말.]이 요즘 스페인에서 스탈린주의의 반동적인 반(反)노동정책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결코 놀랍지 않다. 동시에 마르크스주의의 희화화인 멘셰비키 이론은 자기 자신의 희화화로 바뀌었다.

 

인민전선 ‘이론’

그렇지만 코민테른의 스페인 정책이 이론적 ‘오류’에서 유래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세상물정 모르는 것이다. 스탈린주의는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따르지 않는다. 아니 실제로는 어떤 이론도 따르지 않는다. 다만, 소비에트 관료집단의 경험적 이해를 따를 뿐이다. 소비에트의 냉소주의자들은 자기들끼리 있을 때는 디미트로프[게오르기 디미트로프(Georgi Dimitrov, 1882~1949) : 조판공 출신의 불가리아공산당의 지도자. 코민테른 집행위원. 1933년, 독일여행 중에 나찌에 의해 국회의사당 방화사건의 범인으로 체포. 1934~43년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서기. 1935년 코민테른 제7차 세계대회 의장으로서 ‘반(反)파시즘 인민전선’을 제창했으며, 1946~49년 불가리아 수상이었다.]의 인민전선 ‘철학’을 비웃는다. 그러나 이들은 대중을 속이기 위해 제멋대로 쓸 수 있는 이런 신성한 정식을 선전할 다수의 중핵을 거느리고 있다. 이들 중에는 성실한 자가 있는가하면 사기꾼, 얼간이, 허풍선이들도 있다. 루이스 피셔[루이스 피셔(Louis Fischer, 1896-1970) : 미국에서 활약한 저널리스트. 〈이브닝 포스트〉, 〈네이션〉의 기자. 1923~36년, 소비에트 특파원으로서 소비에트에 관한 다수의 기사를 집필했다. 1920년대의 스탈린과 트로츠키의 논쟁에서 스탈린을 지지했다. 레닌에 관한 전기를 집필하기도 했다.]는 무지와 독선, 편협한 합리주의, 혁명에 대한 선천적인 무관심 때문에 이 본때 없는 무리들 가운데 가장 역겨운 대표자이다. “진보세력의 통합!”, “인민전선 사상의 승리!”, “반(反)파시스트 대오의 통일에 대한 트로츠키주의자의 맹공격!” … 『공산당 선언』이 90년 전에 쓰였다고 믿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할 수 있는가?

인민전선의 이론가들은 본질적으로 산수의 첫 번째 규칙, 즉 덧셈 이상을 넘어서지 못한다 :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 자유주의자들을 전부 다 더하면, 각각의 개별적인 숫자보다 더 크다. 이것이 이들이 알고 있는 지식의 전부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산수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적어도 역학 하나는 더 필요하다. 힘의 평행사변형의 법칙은 정치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우리가 알고 있다시피, 평행사변형에서 합력(合刀)은 분력(分刀)이 서로 다를수록 더 작아진다. 정치적 동맹자들이 반대 방향으로 끌어당기는 경향이 있다면, 합력은 0과 같아질지도 모른다.

노동자계급의 다양한 정치그룹들이 블록을 맺는 것은 공통의 실천적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때로는 꼭 필요하다. 일정한 역사적 상황에서 이러한 블록은 노동자계급의 이해에 가까운 이해관계를 가진 피억압 소부르주아 대중을 끌어당길 수 있다. 이러한 블록의 합력은 그 구성 부분들의 각각의 힘을 합한 것보다 훨씬 더 큰 것으로 입증될 수 있다. 반대로,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 사이의 정치적 동맹은 현 시대에 각자의 이해가 기본적인 문제들에서 180도로 다르기 때문에 보통은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힘을 마비시킬 수 있을 뿐이다.

노골적인 강제력이 거의 효과가 없는 내전은 참가자들에게 최고의 자기희생 정신을 요구한다. 노동자 농민은 자신의 해방을 위해 싸울 경우에만 승리를 확신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계급을 자본가계급의 지도부에 종속시키는 것은 내전에서 노동자계급의 패배를 지레 보증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단순한 진실은 결코 순수한 이론적 분석의 산물이 아니다. 반대로, 이것들은 적어도 1848년부터 시작된 역사적 경험 전체로부터 얻은, 논쟁의 여지가 없는 결론을 표현한다. 부르주아 사회의 현대사는 온갖 종류의 인민전선 즉, 근로자를 속이기 위한 매우 다양한 정치적 연합들로 가득 차 있다. 스페인의 경험은 이 범죄와 배신의 사슬에서 새로운 비극적 고리 일 뿐이다.

 

자본가계급의 그림자와 맺은 동맹

정치적으로 매우 놀라운 것은 스페인 인민전선은 실제로 힘의 평행사변형조차 없었다는 사실이다. 자본가계급의 자리에는 그 그림자뿐이었다. 스페인 자본가계급은 스탈린주의자,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를 매개로 인민전선에 참여하라고 귀찮게 조르지 않고도 노동자계급을 자신에게 종속시켰다. 온갖 정치적 색조를 띤 착취자들의 압도적 다수는 공공연하게 프랑코 진영으로 넘어갔다. ‘연속혁명’ 이론 없이도 스페인 자본가계급은 그 출발점이 어떻든 혁명적 대중운동이 토지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에 적대적으로 향하고, 따라서 민주주의적 조치로 이 운동에 전혀 대처할 수 없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이 때문에 공화주의 진영에는 아사냐 씨, 콤파니스 씨 등등 유산계급의 보잘것없는 부스러기들밖에 남지 않았다. 이들은 자본가계급의 정치적 변호인이지만 자본가계급 자체는 아니다. 유산계급은 모든 것을 군사독재에 걸고 나서도, 동시에 ‘공화주의’ 지역의 사회주의 대중운동을 마비시키고, 혼란에 빠뜨린 뒤에 교살하기 위해 어제까지의 자기의 정치적 대리인들을 이용할 수 있었다.

스페인 자본가계급을 조금도 대표하지 않는 좌익 공화주의자들은 노동자 농민은 더 더욱 대표하지 않았다. 이들은 자신들 외에는 아무도 대표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동맹자들一사회주의자, 스탈린주의자, 무정부주의자一덕분에 이 정치적 허깨비들은 혁명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어떻게? 매우 간단하다. ‘민주주의혁명’의 원칙, 즉 사적 소유의 신성불가침성을 구체화함으로써 그렇게 했다.

 

 

인민전선의 스탈린주의자들

스페인 인민전선의 출현 이유와 그 내적 역학은 아주 분명하다. 은퇴한 부르주아 좌파 지도자들의 임무는 대중의 혁명을 저지하고, 그 결과 잃어버린 착취자들의 신뢰를 자신의 힘으로 되찾는 것에 있었다 : “우리 공화주의자들이 똑같은 일을 할 수 있다면, 왜 프랑코를 필요로 하는가?” 아사냐와 콤파니스의 이해는 이런 중심점에서 스탈린의 이해와 완전히 일치했다. 당시 스탈린은 ‘무정부상태’로부터 ‘질서’를 지킬 능력이 있음을 행동으로 입증함으로써 프랑스와 영국 자본가계급의 신뢰를 얻을 필요가 있었다. 스탈린은 노동자를 앞서서 막아줄 엄호물로서 아사냐와 콤파니스가 필요했다 : 물론 스탈린 자신은 사회주의에 찬성하지만, 공화주의 자본가계급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아사냐와 콤파니스는 혁명가의 권위를 가진, 경험 많은 사형집행인으로서 스탈린이 필요했다. 그가 없었다면, 이 오합지졸들은 노동자를 공격할 능력도, 용기도 결코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오래 전에 계급투쟁의 진로에서 이탈한 제2 인터내셔널의 고전적 개량주의자들은 모스크바의 지원 덕분에 자신감을 되찾기 시작했다. 덧붙이자면, 이런 지원은 모든 개량주의자들이 아니라 가장 반동적인 개량주의자들에게만 주어졌다. 사회당의 얼굴마담인 카바예로는 노동귀족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네그린과 프리에토는 항상 자본가계급 쪽으로 기울어졌다. 네그린은 모스크바의 도움으로 카바예로를 자기편으로 삼았다. 인민전선의 포로인 좌익 사회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들은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는 것은 모두 지키려고 했다. 정말로 그랬다. 그러나 인민전선의 헌병들에 맞서 대담하게 대중을 동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의 노력은 결국 비탄과 통곡으로 되돌아왔다. 그 결과, 스탈린주의자들은 명백히 부르주아적인 사회당 극우파와 동맹을 맺었다. 이들은 좌익一통일노동자당, 무정부주의자, ‘좌익’ 사회주의자들一바꿔 말하면, 매우 미미하게라도 혁명적 대중의 압력을 반영했던 중도주의 그룹들에 대한 탄압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 자체로 매우 의미심장한 이런 정치적 사실은 동시에, 지난 몇 년 사이에 코민테른이 타락한 정도를 보여준다. 나는 일찍이 스탈린주의를 관료적 중도주의라고 규정했다. 객관적 사태는 이 규정의 올바름을 나타내는 일련의 확실한 증거들을 제시했다. 그러나 그것은 오늘날, 시대에 뒤떨어진 것임에 분명하다. 보나파르트주의적 관료집단의 이해는 이제 더 이상 중도주의자의 우유부단, 동요와 화해할 수 없게 되었다. 자본가 계급과의 화해를 모색하는 스탈린주의 도당은 국제 노동귀족 가운데서 가장 보수적인 그룹들과만 동맹을 맺을 수 있다. 이것은 국제무대 에서 스탈린주의의 반(反)혁명적 성격을 결정적으로 새기는 행위였다.

 

스탈린주의의 반(反)혁명적 오만

이것은 우리에게 비교도 안될 만큼 더 강력한 사회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의 조직이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수적으로나 지도부의 역량에서나 매우 보잘것없는 스페인공산당이 어떻게, 그리고 왜 권력의 모든 통제권을 좌지우지할 수 있었는가라는 수수께끼의 해답에 곧바로 이르게 한다. 스탈린주의자들이 권력을 소비에트의 무기들과 간단히 맞바꾼 것이라는 통상적인 설명은 너무나 피상적이다. 모스크바는 군수품의 답례로 스페인의 금괴를 받았다. 자본주의 시장법칙에 따르면, 이것으로 다 된 것이다. 그렇다면 스탈린은 권력을 얻기 위해 덤으로 어떤 일을 저질렀는가?

통상적인 대답은 군수물자 제공을 통해 대중이 보는 앞에서 자신의 권위를 높인 소비에트 정부가 ‘협력’의 조건으로 혁명가들에 대한 과감한 조치를 요구했고, 그 결과 자신의 진로를 방해할 위험한 적수들을 제거했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기는 하지만 문제의 한 측면, 그것도 가장 중요하지 않은 한 측면에 지나지 않는다.

소비에트의 군수물자 제공이 만들어낸 ‘권위’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공산당은 여전히 극소수파였으며, 계속 커져가는 노동자 측의 미움을 받았다. 다른 한편, 모스크바가 조건을 정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 발렌시아 정부가 이런 조건에 동의할 필요가 있었다. 여기에 문제의 핵심이 있다. 사모라, 콤파니스, 네그린뿐만 아니라 수상으로 재직 중인 카바예로도 모두 어느 정도는 모스크바의 요구에 동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왜? 바로 이 신사양반들 자신이 혁명을 부르주아적 범위 안에 붙들어 두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자도, 무정부주의자도 스탈린주의 강령에 진지하게 반대하지 않았다. 이들은 자본가계급과의 결별을 두려워했다. 이들은 노동자의 모든 혁명적 공격을 몹시 두려워했다.

군수품과 반(反)혁명적 최후통첩 때문에 스탈린은 이 모든 그룹들에게 구세주였다. 스탈린은 이들이 바랐던 대로 프랑코에 대한 군사적 승리를 보장해주는 동시에 혁명의 경과에 대한 모든 책임으로부터 이들을 해방시켜주었다. 이들은 모스크바가 자신들을 위해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복구시킨 다음에 이를 다시 이용하기를 바라면서 자신들이 썼던 사회주의자나 무정부주의자라는 가면을 서둘러 벽장 속에 넣어두었다. 끝마무리로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이 신사양반들은 이때부터 스탈린과 군사 협정을 맺을 필요성을 내세워 노동자에 대한 배신을 정당화할 수 있었다. 또, 스탈린의 입장에서는 공화주의 부르주아들과 동맹을 유지할 필요성을 내세워 자신의 반(反)혁명 정책을 정당화했다.

이런 폭넓은 관점에서만 우리는 아사냐, 네그린, 콤파니스, 카바예로, 가르시아 올리베르 등과 같은 정의와 자유의 옹호자들이 게페우(GPU)의 범죄에 대해 보여준 천사 같은 관용의 전모를 알 수 있게 된다. 이들의 단언처럼, 만약 이들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면, 그것은 혁명가들의 목숨과 노동자의 권리 말고는 비행기와 탱크의 대가를 치를 다른 수단이 없었기 때문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테러라는 수단을 제외하면 자신의 ‘순전히 민주주의적인’, 즉 반(反)사회주의적인 강령을 실현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노동자 농민이 자신의 혁명의 길에 들어서면,一공장과 토지를 장악하고, 옛 소유주들을 내쫓고, 각 지방에서 권력을 장악 하면一부르주아 반(反)혁명은一민주주의자나 스탈린주의자나 파시스트를 막론한一거짓말과 기만으로 보완된 철저한 유혈 탄압 외에는 이 운동을 저지할 다른 수단이 없다. 계속 이 방법을 밀어붙이는 스탈린주의 도당의 오만함은 아사냐, 콤파니스, 네그린과 이들의 좌익 동맹자들은 감당할 수 없는 방법을 주저 없이 적용할 수 있는 그 능력에 있다.

 

스탈린은 자기 나름대로 연속혁명론의 올바름을 뒷받침한다.

이렇게 화해할 수 없는 두 가지 강령이 공화주의세력 영역에서 서로 맞섰다. 한편에는, 노동자계급으로부터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사적 소유를 지키려는 강령, 프랑코로부터 가능한 한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강령이 있었다. 다른 한편에는, 노동자계급의 권력 장악에 의해 사적 소유를 철폐하려는 강령이 있었다. 첫 번째 강령은 노동귀족, 소부르주아 상층 집단, 특히 소비에트 관료집단을 매개로 해서 자본주의의 이해를 표현했다. 두 번째 강령은 혁명적 대중운동의 경향을 충분히 의식적이지는 않지만 강력하게 마르크스주의의 언어로 옮긴 것이다. 혁명 앞에는 유감스럽게도, 소수의 볼셰비키와 혁명적 노동자계급 사이에 인민전선이라는 반(反)혁명적 장벽이 버티고 있었다.

그렇다고 무기의 공급자인 스탈린의 공갈협박 때문에 인민전선 정책이 결정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물론 공갈협박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공갈협박이 먹힌 이유는 혁명 자체의 내적 조건에 내재해 있었다. 6년 동안, 혁명의 사회적 배경은 반(半)봉건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소유 체제에 대항하는 대중들의 증대하는 공격이었다. 자본가계급을 프랑코의 품으로 달려들게 만든 것은 가장 극단적인 방법으로라도 이 사적 소유를 지킬 필요성이었다. 공화주의 정부는 자본가계급에게 ‘민주주의적’ 방법으로 사적 소유를 지키겠다고 약속했지만, 특히 1936년 7월에 그 완전한 파산을 드러냈다. 소유 전선의 상황이 군사 전선의 상황보다 훨씬 더 위협적인 것이 되자, 무정부주의자를 포함한 모든 색조의 민주주의자들은 스탈린에게 굴복했다. 그리고 스탈린은 자신의 무기고에서 프랑코의 방식 외에는 다른 방식을 찾을 수 없었다.

‘트로츠키주의자’, 통일노동자당 당원, 혁명적 무정부주의자, 좌익 사회주의자 들들볶기; 추잡한 비방; 문서 위조; 스탈린주의 감옥에서 자행된 고문; 매복 살인들一이 모든 것이 없었다면 공화주의 깃발 아래에서 부르주아 체제는 두 달도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게페우(GPU)는 오 직 다른 세력들에 비해 더 일관되게, 즉 극도의 비열함과 잔인함으로 노동자계급에 대항하여 자본가계급의 이해를 방어했기 때문에 결국 상황의 지배자가 되었다.

‘민주주의자’ 케렌스키는 사회주의혁명과의 투쟁에서 처음에는 코르닐로프의 군사독재에서 지지를 얻으려고 했으며, 나중에는 왕당파 크라스노프 장군의 군용열차를 타고 페테르부르크에 입성하려고 했다. 이에 반해서, 볼셰비키들은 민주주의혁명을 끝까지 수행하기 위해 ‘민주주의적’ 허풍선이와 수다쟁이들의 정부를 타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로 인해 볼셰비키들은 이 과정에서 온갖 종류의 군사(또는 ‘파시스트’)독재 수립 기도를 끝장냈다.

스페인혁명은 혁명적 대중으로부터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파시스트 반동의 방식을 통하는 것 말고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보여준다. 거꾸로, 파시즘에 대항하는 진정한 투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노동자혁명의 방식을 통하는 것 말고는 불가능하다. 스탈린은 게페우라는 보나파르트적 수단으로 민주주의를 파괴하면서 ‘트로츠키주의’(노동자혁명)에 대한 전쟁을 수행했다. 이것은 코민테른이 채택한 낡은 멘셰비키 이론, 즉 민주주의혁명과 사회주의혁명을 시점이 따로 분리된 독립적인 두 역사적 사건으로 바꿔버리는 이론을 다시 한 번, 그리고 단호하게 논박하는 것이다. 모스크바 사형집행인들의 임무는 자기 나름대로 연속혁명론의 올바름을 확증한다.

 

무정부주의자의 역할

무정부주의자는 스페인혁명에서 어떤 독자적 입장도 갖고 있지 않았다. 이들 모두는 볼셰비키주의와 멘셰비키주의 사이에서 끊임없이 동요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무정부주의 노동자는 본능적으로 볼셰비키의 길(1936년 7월 19일과 1937년 5월시기)로 접어들고 싶어 했다. 반면에, 그 지도자들은 전력을 다해 대중을 인민전선 진영, 즉 부르주아체제 쪽으로 몰아갔다.

무정부주의자는 스스로를 자신의 노동조합 즉, 평화적 시기의 판에 박힌 일상에 절어 있던 조직 에 한정하려고 함으로써, 그리고 노동조합의 테두리 밖에서, 대중들 사이에서, 정당들 사이에서, 정부기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무시함으로써 혁명의 법칙과 그 임무에 대한 치명적인 몰이해를 드러냈다. 만약 무정부주의자가 혁명가였다면, 이들은 무엇보다도 노동조합을 접해본 적도 없는 가장 억압받는 계층을 포함하여, 도시와 농촌의 모든 근로자 대표를 접합시킬 소비에트의 창설을 촉구했을 것이다. 혁명적 노동자는 당연히 이 소비에트들 안에서 지도적 지위를 차지할 것이다. 스탈린주의자는 결국 보잘것없는 소수파가 되었을 것이며, 노동자계급은 자신이 가진 무적의 힘을 확신했을 것이다. 공중에 붕 떠버린 부르주아 국가기관은 강력한 일격만으로도 충분히 분쇄되었을 것이다. 사회주의혁명은 강력한 추진력을 얻었을 것이다. 프랑스 노동자계급은 레옹 블룸이 노동자혁명이 피레네 산맥을 넘어오는 것을 방해하도록 오랫동안 내버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모스크바의 관료집단도 그렇게 땅땅거릴 수 없었을 것이다. 이들이 제기한 가장 어려운 문제들은 이미 해결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하는 대신에, 노동조합 안에서 ‘정치‘를 은폐하려고 하는 무정부적 조합주의자는 결국 전 세계와 스스로의 허를 찌르면서 부르주아 민주주의라는 마차의 다섯 번째 바퀴임을 드러냈다. 그러나 다섯 번째 바퀴는 불필요하기 때문에 오래지 않아 용도 폐기될 것이다. 가르시아 올리베르와 그 패거리들이 스탈린과 그 똘마니들이 노동자에게서 권력을 빼앗는 것을 도왔음에도 불구하고 무정부주의자 자신이 인민전선 정부에서 쫓겨났다. 이때에도 이들은 승리자 쪽에 달라붙어 자신의 헌신을 확신시키는 것 이상을 하지 않았다. 대자본가계급에 대한 소부르주아 계급의 두려움, 힘센 관료에 대한 열등한 관료의 두려움을 이들은 공동전선(희생자와 사형집행인 사이의)의 신성함, 자신의 독재를 포함한 어떠한 독재도 용납하기 어렵다는 등의 애절한 말로 은폐했다. “어쨌든 우리는 1936년 7월에 권력을 장악할 수도 있었다. …”, “어쨌든 우리는 1937년 5월에 권력을 장악할 수도 있었다 …” 무정부주의자는 스탈린-네그린 일당에게 혁명에 대한자신들의 배신을 인정하고 그에 대해 보상할 것을 구걸했다. 이 얼마나 메스꺼운 광경인가!

“우리는 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어떠한 독재에도 반대했기 때문에 권력을 잡지 않았다”는 따위의 자기 합리화는 그 자체로 무정부주의가 완전히 반(反)혁명적 교의라는 최종적인 선고와 같다. 권력 장악을 포기하는 것은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착취자들에게 권력을 자진해서 맡기는 것이다. 모든 혁명의 핵심은 새로운 계급을 권력에 올려놓음으로써, 이 계급이 자신의 강령을 실현할 수 있게 한다는 데에 있었고 지금도 그렇다. 전쟁을 수행하고 나서 승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권력 장악을 준비하지 않고 대중을 봉기로 이끄는 것은 불가능하다.

무정부주의자가 권력을 장악한 다음 자신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체제를 수립하는 것을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물론 이들의 강령이 실현가능하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의 얘기지만 말이다. 그런데 무정부주의 지도자들 스스로가 자기 강령에 대한 신념을 잃어버렸다. 이들은 “어떠한 독재에도” 반대하기 때문이 아니라一실제로 이들은 불평을 늘어놓고 칭얼대면서 스탈린-네그린의 독재를 지지했고, 여전히 지지하고 있다一이들이 이제까지 가지고 있었더라도, 그 원칙과 용기를 완전히 잃어버렸기 때문에 권력을 외면했다. 이들은 모든 것, 즉 “고립”, “참여”, “파시즘”을 두려워했다. 이들은 스탈린도 두려워했다. 네그린도 두려워했다. 프랑스와 영국도 두려워했다. 이 떠버리들은 무엇보다도 혁명적 대중들을 무서워했다.

권력 장악의 포기는 필연적으로 모든 노동자 조직을 개량주의의 수렁에 처박고, 자본가계급의 장난감으로 바꿔버린다. 사회의 계급구조 때문에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권력 장악이라는 목표에 반대하는 무정부주의자는 결국 혁명이라는 수단에도 반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국노동자연맹(CNT)과 이베리아 무정부주의연합(FAI)의 지도자들은 자본가계급이 1936년 7월에 이름뿐인 권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왔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자본가계급이 일거에 잃어버렸던 것을 조금씩 되찾는 것도 도왔다. 1937년 5월에 이들은 노동자의 봉기를 방해함으로써 자본가계급의 독재를 구했다. 요컨대, 무정부주의는 완전히 비(非)정치적 이기를 바랐지만, 실제로는 비(非)혁명적이고, 더 결정적인 순간에는 반(反)혁명적 임이 드러났다.

1931~37년의 중대한 시험 뒤에도 크론슈타트에 대한 케케묵은 반동적 헛소리를 계속 되풀이하며, “스탈린주의는 마르크스주의와 볼셰비키주의의 필연적 결과”라고 단언하는 무정부주의 이론가들은 단지 이를 통해 자신들이 혁명에 영원히 쓸모없는 존재임을 보여줄 뿐이다.

마르크스주의는 본질적으로 사악한 것이고, 스탈린주의는 그 정통적 계승자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왜 우리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전 세계에서 스탈린주의와 사투를 벌이고 있는가? 왜 스탈린주의 깡패들은 트로츠키주의를 자신의 주적으로 간주하는가? 왜 우리의 견해나 행동방식 에 가까운 모든 사람들(두루티, 안드레스 닌, 란다우 등)에 대해 스탈린주의 깡패들은 잔혹한 보복을 취할 수밖에 없는가? 다른 한편, 왜 스페인 무정부주의 지도자들은 게페우(GPU)가 모스크바와 마드리드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있을 때, 카바예로-네그린 정부의 장관, 즉 자본가계급과 스탈린의 종복으로 복무했는가? 왜 지금도 무정부주의자는 파시즘과 싸운다는 핑계로 파시즘과 싸울 능력이 없음을 증명한 혁명의 사형집행인들인 스탈린-네그린의 자발적 포로로 남아 있는가?

무정부주의 의 변호인들은 크론슈타트와 마흐노[네스토르 마흐노(Nestor Makhno, 1884~1934) : 러시아의 무정부주의자, 내전 초기에 농민부대를 이끌고 우크라이나의 백군과 독일 점령군에 맞서 투쟁했다. 1921년, 적군에게 최종적으로 패배했다.]를 방패막이로 삼는 것을 통해서는 아무도 속일 수 없다. 크론슈타트 사건과 마흐노에 대한 투쟁에서 우리는 농민의 반(反)혁명으로부터 노동자혁명을 지켰다. 스페인 무정부주의자는 노동자혁명으로부터 부르주아 반(反)혁명을 지켰으며, 지금도 지키고 있다. 무정부주의와 스탈린주의는 스페인혁명에서 같은 편 바리케이드에 섰다. 반면에, 노동자대중은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와 함께 그 반대편에 섰다. 그 어떤 궤변도 이런 사실을 역사의 기록에서 지워버릴 수 없다. 이것이 노동자계급의 의식 속에 영원히 남아있을 진실이다!

 

통일노동자당의 역할

통일노동자당의 이력이라고 더 나은 것은 아니다. 확실히 이론적인 면에서 통일노동자당은 연속혁명 정식에 근거하려고 했다(이 때문에 스탈린주의자들이 통일노동자당 당원들을 트로츠키주의자라고 불렀다). 그러나 혁명은 이론적 고백에 만족하지 않는다. 무정부주의자를 포함하여 개량주의 지도자들에 맞서 대중을 동원하는 대신에, 통일노동자당은 이 신사양반들에게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보다 더 우월하다는 것을 납득시키려고 했다. 통일노동자당 지도자들의 모든 글과 연설은 이 소리굽쇠에 따라 조율되었다. 무정부주의 지도자들과 다투지 않기 위해 이들은 전국노동자연맹 내부에 독자적인 세포를 조직하지 않았으며, 통상 어떤 활동도 하지 않았다. 이들은 격렬한 충돌을 피하기 위해 공화국 군대 안에서 혁명적 활동을 수행하지 않았다. 대신에 ‘자신의’ 노동조합, ‘자신의’ 의용군을 조직했다. 이 의용군은 ‘자신의’ 건물들을 지키거나, ‘자신의’ 전선 구간만을 지켰다.

통일노동자당은 계급으로부터 혁명적 전위를 고립시킴으로써 전위를 무력화시키고, 계급을 지도부 없이 방치했다. 정치적으로 줄곧 볼셰비키주의보다 인민전선에 훨씬 더 가까웠던 통일노동자당은 인민전선에 좌익적 외피를 씌워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일노동자당이 잔혹하고 비열한 탄압에 희생된 것은 인민전선이 자신의 좌익을 서서히 내치는 것 이외에는, 사회주의혁명을 압살시킨다는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기 의도와는 반대로 통일노동자당은 결국 혁명정당 건설의 도중에 있어 주요한 장애물임이 판명되었다.

네덜란드 혁명적사회주의노동자당의 지도자인 스네블리트처럼, 관념적이고 외교적인 패거리들이 제4 인터내셔널에 대해 져야 하는 책임은 실로 막중하다. 이들은 어중간한 조치, 우유부단함, 애매함, 한마디로 자신의 중도주의로 통일노동자당을 노골적으로 지지했다. 혁명은 중도주의를 몹시 싫어한다. 혁명은 중도주의를 폭로하고 괴멸시킨다. 말이 난 김에 덧붙이자면, 혁명은 중도주의의 동료나 변호인들의 신용을 떨어뜨린다. 이것이 스페인혁명의 가장 중요한 교훈 가운데 하나이다.

 

무장의 문제

모스크바의 무기를 얻기 위해서는 원칙과 양심을 대가로 치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으로 스탈린에 대한 투항을 정당화하려는 사회주의자나 무정부주의자는 단지 거짓말을, 그것도 아주 서툴게 하는 것뿐이다.

물론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살인이나 날조 없이 빠져나오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목표는 그에 상응하는 수단을 요구한다. 1931년 4월 이래, 즉 모스크바가 군사적으로 개입하기 훨씬 전부터 사회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는 노동자혁명을 저지하기 위해 가능한 일을 다 했다. 스탈린은 이들에게 이 일을 끝까지 추진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쳤다. 이들은 스탈린과 같은 정치적 목적을 추구했다는 이유만으로 스탈린의 공범자가 되었다.

무정부주의 지도자들이 혁명가와 조금이나마 닮은 데가 있었다면, 모스크바의 최초 공갈협박에 사회주의적 공세를 계속할 뿐만 아니라 스탈린의 반(反)혁명적 조건을 세계 노동자계급 앞에 폭로하는 것으로 대답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모스크바 관료집단이 사회주의혁명이나 프랑코 독재 가운데 하나를 공개적으로 선택하도록 강제했을 것이다. 테르미도르 관료집단은 혁명을 두려워하고 증오한다. 그러나 파시스트 도당에 교살당하는 것도 무서워한다. 게다가 관료집단은 노동자에게 의존한다. 모든 징후가 모스크바는 무기를, 그것도 될 수 있는 한 더 적당한 가격으로 제공하지 않을 수 없음을 가리킨다.

그러나 세상은 스탈린주의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돌지 않는다. 1년 반에 걸친 내전 사이에 수많은 비(非)군수 공장들을 군수생산으로 전환시킴으로써 스페인의 군수산업을 강화시키고 발전시킬 수 있었으며,또 그렇게 해야 했다. 이 일은 스탈린과 그의 스페인 동맹자들이 똑같이 노동자 조직의 주도권을 두려워했다는 이유만으로 수행되지 않았다. 강력한 군수산업은 노동자에게 맡겨진 강력한 수단이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인민전선의 지도자들은 모스크바에 의지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바로 이 문제에서 인민전선의 배신적 역할이 매우 두드러지게 드러났다. 인민전선은 자본가계급이 스탈린과 한 배신 거래의 책임을 노동자 조직에게 떠넘겼다. 물론 무정부주의자가 소수파로 남아있는 한, 이들은 지배블록이 모스크바나 모스크바의 정신적 지도자인 런던과 파리를 기쁘게 하기 위해 어떠한 의무라도 지려는 것을 곧바로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여전히 전선에서 가장 뛰어난 투사였다면, 이들은 내놓고 배신행위나 배신자들과의 관계를 끊을 수 있었고, 또 그렇게 해야 했다. 이들은 대중에게 실제 상황을 설명하고, 부르주아 정부에 대항하여 대중을 동원하고, 마침내 권력을 장악하고, 게다가 모스크바의 무기를 수중에 넣기 위해 나날이 자신의 힘을 증가시킬 수 있었고, 또 그렇게 해야 했다.

그런데 인민전선이 없을 때에도 소비에트가 무기를 일절 제공하려고 하지 않았다면? 또 소비에트 연방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지금까지 무기를 제공한 외국의 서슬 푸른 후원자 덕택으로 혁명이 승리를 거둔 적은 단 한 번도 없다는 것이다. 대체로 반(反)혁명이 외국의 후원을 받았다. 소비에트에 대한 프랑스, 영국, 미국, 일본 등 군대의 간섭 경험을 상기시켜야겠는가? 러시아 노동자계급은 외부의 군사적 지원 없이도 국내의 반동세력과 외국의 간섭세력을 물리쳤다. 혁명은 무엇보다도 대담한 사회강령 덕택에 성공을 거두는 것이다. 이 강령이야말로 대중이 자기 세력권에서 무기를 몰수하고, 적의 군대를 해체시킬 가능성을 제공한다. 적군(赤軍)은 프랑스, 영국, 미국의 군수물자를 빼앗고, 외국 원정군을 바다로 쫓아버렸다. 벌써 이것을 잊어버렸는가?

만약 무장한 노동자와 농민의 선두에, 즉 이른바 공화주의 스페인의 선두에 자본가계급의 겁쟁이 하수인들이 아니라 혁명가들이 있었다면, 무장의 문제가 결코 최우선시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식민지 모로코의 리프족[리프족(Riffians) : 모로코 북부의 리프산맥에 살고 있는 베르베르인.]과 무쏠리니의 병사들을 포함한 프랑코의 군대는 혁명의 감화에 결코 면역되지 않았다. 사회주의혁명이라는 대화재에 둘러싸인 파시즘의 병사들은 그 수가 미미해졌을 것이다.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에 부족했던 것은 무기나 군사적 ‘천재’들이 아니다. 부족했던 것은 바로 혁명정당이었다!

 

승리의 조건

착취자들의 군대에 대항하는 내전에서 대중이 승리할 수 있는 조건은 그 본질에 있어서 지극히 단순하다.

 

1. 혁명 군대의 전사들은 케케묵은(‘민주주의적’) 착취형태의 재건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완전한 사회적 해방을 위해 투쟁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자각해야 한다.

2. 적의 후방뿐만 아니라 혁명 군대의 후방에 있는 노동자, 농민들도 같은 사실을 인식하고 이해해야 한다.

3. 적군의 최전선과 아군의 최전선, 그리고 양군 후방에서 선전은 사회혁명의 정신으로 완전히 충만해야 한다. ‘우선 승리하고, 그 다음에 개혁을!’이라는 구호는 성경에 나오는 왕부터 스탈린에 이르기까지 모든 억압자와 착취자의 구호이다.

4. 정책은 투쟁에 참가하는 계급과 계층에 의해 결정된다. 혁명적 대중은 자신의 의지를 직접적으로, 그리고 곧바로 표현하는 국가기구를 가져야 한다. 오직 노동자, 병사, 농민 대표들의 소비에트만이 그러한 기구 역할을 할 수 있다.

5. 혁명 군대는 자신이 장악한 지역에서 좀 더 긴급한 사회혁명 조치를 선포할 뿐만 아니라 즉시 실행해야 한다 : 수중에 있는 식량, 제품 등의 비축 분을 몰수하여 궁핍한 사람들에게 인도하고, 노동자, 특히 투사 가족들을 위해 은신처와 집을 재분배하고, 농민을 위해 토지와 농업 비축량을 몰수하고, 구 관료집단을 대신하여 노동자 통제와 소비에트 권력을 수립해야 한다.

6. 사회주의혁명의 적들, 즉 착취분자와 그 앞잡이들은 ‘민주주의자’, ‘공화주의자’,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로 가장하고 있더라도 군대에서 가차 없이 쫓아내야 한다.

7. 각 부대의 지휘부에는 혁명가와 투사로서 흠잡을 데 없는 권위를 가진 인민위원이 배치되어야한다.

8. 모든 부대에는 노동자 조직이 추천한 가장 헌신적인 투사들의 중핵이 굳게 결합되어 있어야 한다. 이들 중핵은 전투의 최전선에 선다는 단 하나의 특권을 갖는다.

9. 처음에는 사령부에 많은 이질적이고 신뢰할 수 없는 분자들이 포함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이들의 시험, 재시험, 체질(sifting)은 전투 경험, 인민위원의 추천, 동료 투사들의 증명에 근거하여 수행되어야 한다. 이와 동시에 혁명적 노동자의 대오에서 끌어올린 지휘관들의 맹훈련을 시작해야 한다.

10. 내전의 전략은 군사기술의 규칙을 사회혁명의 임무와 결합시킨 것이어야 한다. 선전에서만이 아니라 군사작전에서도 제각기 다른 적군(敵軍) 부대들의 사회적 구성(부르주아 의용병인가, 동원된 농민인가, 또는 프랑코 군대의 경우처럼 식민지 노예인가)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작전 수행 경로를 선택하면서는 해당 지역의 사회적 구조(산업지역인가, 혁명적인 농촌지역인가 아니면 반동적인 농촌지역인가, 피억압 민족의 지역인가 등)를 엄밀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 요컨대, 혁명적 정책이 전략을 좌우한다.

11. 혁명정부와 노동자, 농민의 집행위원회 모두 군대와 근로대중의 완전한 신뢰를 획득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

12. 대외정책의 주요한 목적은 전 세계의 노동자, 피착취 농민, 피억압 민족들의 혁명적 의식을 일깨우는 것이어야 한다.

 

 

스탈린이 패배의 조건을 보증했다

살펴본 것처럼, 승리의 조건은 아주 간단명료하다. 이것들을 통틀어 사회주의혁명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이런 조건들이 스페인에서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 기본적인 이유는 혁명정당의 부재 때문이다.

스탈린이 정치국, 인민위원, 세포, 게페우 등 볼셰비키주의의 외면적 경험을 스페인의 토양에 이식하려고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이런 형식들에서 그 사회적 내용을 없애버렸다. 그는 볼셰비키 강령을 폐기했으며, 게다가 대중의 혁명적 주도권의 필수적 형태인 소비에트도 폐기했다. 그는 볼셰비키주의의 기법을 부르주아 소유권을 위해 유용하게 사용했다. 그는 관료적 편협함에서 ‘인민위원’만으로도 승리를 보증할 수 있다고 상상했다. 그러나 사적 소유의 인민위원들은 오직 패배를 보증할 능력밖에 없음이 판명되었다.

스페인 노동자계급은 최상의 군사적 자질을 발휘했다. 나라의 경제 활동에서 차지하는 비중에서, 그리고 정치적, 문화적 수준에서 스페인 노동자계급은 혁명의 첫째 날, 1917년 초의 러시아 노동자계급을 능가하고 있었다. 승리로 가는 길에 노동자계급 자신의 조직이 주요 장애물 로 버티고서 있었다.

스탈린주의 지휘부는 자신의 반(反)혁명적 역할에 맞게 청부업자, 출세주의자, 탈계급분자 등 대체로 모든 유형의 사회적 쓰레기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다른 노동자 조직의 대표자들一구제불능의 개량주의자, 무정부주의 공론가, 통일노동자당의 무기력한 중도주의자들一은 툴툴거리고, 앓는 소리를 하고, 머뭇거리고, 술책을 썼지만 결국에는 스탈린주의자와 타협했다. 이들의 이런 행동이 합쳐진 결과, 사회혁명 진영一노동자와 농민一이 자본가계급, 더 정확히 말하면 그 그림자에 종속됐다는 것이 드러났다. 짜낼 수 있는 대로 다 짜낸 혁명은 그 성격이 완전히 탈각되었다.

대중들의 영웅적 행위도, 개별 혁명가들의 용기도 부족하지 않았다. 그러나 강령이나 행동계획도 없이 대중은 제멋대로 방치되었으며 동시에, 혁명가들은 여전히 분열되어 있었다. ‘공화주의’ 군대의 지휘관들은 군사적 승리를 거두는 것보다 사회혁명을 분쇄하는데 더 관심이 있었다. 병사들은 자기 지휘관들에 대한 신뢰를 상실했으며, 대중은 정부에 대한 신뢰를 상실했다. 농민은 옆으로 피했으며, 노동자들은 지쳐버렸다. 패배가 연이어졌으며, 급속도로 사기가 저하되었다. 이 모든 것은 내전 초기부터 어렵지 않게 예견되었다. 자본주의 체제의 구원을 자신의 임무로 삼음에 따라 인민전선은 스스로에게 군사적 패배를 선고했다. 볼셰비키주의를 거꾸로 세움에 따라 스탈린은 혁명의 무덤을 파는 자 역할을 완전하게 수행했다.

스페인의 경험은 스탈린이 10월 혁명이나 러시아 내전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음을 다시 한 번 증명한다는 것을 부연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의 굼뜨고 편협한 사고방식은 1917~21년의 격렬한 사태 전개에 구제불능일 정도로 뒤처졌다. 그가 자신의 생각을 밝힌 1917년의 연설이나 글에 그의 최근 테르미도르적 ‘교의’가 전부 박혀 있었다. 이 점에서 1937년 스페인의 스탈린은 볼셰비키당의 1917년 3월 협의회의 스탈린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1917년에 단지 혁명적 노동자를 두려워했을 뿐이지만 1937년에는 이들을 압살했다. 기회주의자가 사형집행인이 되었다.

 

 

‘후방의 내전’

그러나 결국 카바예로와 네그린 정부에 대해 승리를 거두려면, 공화주의 군대의 후방에서 내전을 치르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一민주주의적 속물은 공포에 떨며 이렇게 소리친다. 마치 여태까지 공화주의 스페인에서는 내전이 없었다는 듯이, 그것도 가장 비열하고 가장 배신적인 전쟁一노동자와 농민에 대항하는 소유자와 착취자들의 전쟁이 없었다는 듯이. 이 중단되지 않은 전쟁은 혁명가의 체포와 살해, 대중운동의 압살, 노동자의 무장해제, 부르주아 경찰의 무장, 노동자 파견대를 무기와 지원군 없이 전선에 유기하기, 마지막으로 군수산업의 발전에 대한 인위적 제한 등으로 나타난다.

전선에 잔혹한 타격을 준 각각의 이런 행위는 자본가계급의 계급적 이해에 따른 직접적인 군사적 반역이었다. 그러나 ‘민주주의적’ 속물들一스탈린주의자,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를 포함한一은 노동자계급에 대한 자본가계급의 내전을 ‘인민전선의 통일’을 지키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기 때문에 당연하고 불가피한 전쟁으로 간주했다. 심지어는 전선에 아주 가까이 인접해있는 지역에서도 그랬다. 반면에, ‘공화주의’ 반(反)혁명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내전은 같은 속물들의 눈에는 ‘반(反)파시스트세력의 통일’ …을 분열시키는 범죄적이고, ‘파시스트’적이며, 트로츠키주의적인 전쟁으로 비쳤다. 수많은 노만 토마스[노먼 토머스(Norman Thomas, 1884-1968/69) : 미국사회당 지도자. 1928~48년 미국사회당의 대통령후보.], 애틀리 수상[클레멘트 아틀리(Clement Attlee, 1883-1967) : 영국노동당의 지도자. 맥도날드의 뒤를 이어 1945~50년 수상 역임.], 오토 바우어, 지롬스키[장 지롬스키(Jean Zyromsky, 1890~?) : 프랑스사회당 좌파의 지도자, 친(親)스탈린주의적 당료그룹을 이끌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 공산당에 입당했다.], 말로[앙드레 말로(Andre Malraux, 1901-1976) : 프랑스의 작가. 1923년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로 이주. 그 후, 중국의 광동혁명에 참가. 1928년에 광동혁명을 그린 소설 〈정복자〉를 발표. 1933년에 상해쿠데타를 그린 〈인간의 조건〉을 발표. 1936년 스페인 내전에서 공화국 의용군 항공장교로 활약. 이를 바탕으로 1937년에 르포르타주 〈희망〉을 발표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드골(de Gaulle)파의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가. 전후, 드골과 협 력, 정보장관, 문화담당 국무장관을 역임했다.]나 듀란티[월터 듀란티(Walter Duranty, 1884-1957) : 〈뉴욕 타임즈〉의 모스크바 특파원. 스탈린에 의한 반대파 탄압을 호의적으로 보도했다.]와 루이스 피셔 같은 보잘것없는 거짓말쟁이 행상들은 이런 비열한 말들을 전 세계에 퍼뜨리고 있다. 그 사이에 인민전선 정부는 마드리드에서 발렌시아로, 다시 발렌시아에서 바르셀로나로 퇴각하고 있다.

사실이 증명하고 있는 것처럼, 사회주의혁명만이 파시즘을 분쇄할 수 있지만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노동자계급의 성공적인 봉기는 지배계급이 최악의 어려움에 꽉 잡혀 옴짝달싹못할 때에만 가능하다. 그렇지만 민주주의적 속물들은 노동자계급의 봉기를 용납할 수 없는 증거로 바로 이런 어려움을 끌어다댄다. 이 민주주의적 속물들이 자신의 해방시간을 알려주기를 기다리고 있다면, 노동자계급은 영원히 노예로 남을 것이다. 온갖 가면을 쓰고 있는 반동적 속물들을 곧 알아보고, 그 가면에 관계없이 그들을 경멸하도록 노동자에게 가르치는 것은 혁명가의 첫 번째 이자, 최고의 임무이다.

 

결과

공화주의 진영에 대한 스탈린주의자의 독재는 그 본질상 수명이 길지 않다. ‘인민전선’ 정책에서 유래하는 패배가 다시 한 번 스페인 노동자 계급으로 하여금 혁명적 공격에 나서게 하여 이번에야말로 성공을 거둔 다면, 스탈린주의 도당은 강철 빗자루로 일소될 것이다. 그러나 스탈린이 혁명의 무덤을 파는 일을 매듭짓는다면,一유감스럽게도 그 가능성 이 있다一이 경우에도 그는 감사받지 못할 것이다. 스페인 자본가계급은 사형집행인으로서의 그를 필요로 했던 것이지, 보호자나 가정교사로서 그를 필요로 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스페인 자본가계급의 눈에는 한편으로는 런던과 파리, 다른 한편으로는 베를린과 로마가 모스크바보다 훨씬 더 지불능력이 있는 회사로 보인다. 스탈린 자신은 결정적 파국에 앞서 스페인에서 자신의 흔적을 감추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따라서 그는 패배의 책임을 자신의 가장 가까운 동맹자들에게 떠넘기고 싶어 할 것이다. 이런 다음에 리트비노프가 프랑코에게 외교관계를 다시 맺자고 구걸할 것이다. 이런 것은 모두 이미 여러 차례 보아온 것이다.

그렇지만 프랑코 장군에 대한 이른바 공화주의 군대의 완전한 승리조차 ‘민주주의’의 승리를 의미하지 않을 것이다. 노동자와 농민은 두 번, 즉 1931년 4월과 1936년 2월에 부르주아 공화주의자와 그 좌익 대리인들을 권력에 앉혔다. 두 번 다 인민전선의 영웅들은 가장 반동적이고 가장 위험한 부르주아 대표들에게 인민의 승리를 넘겨주었다. 인민전선의 장군들이 쟁취한 세 번째 승리는 이들의 트레이드마크인 노동자와 농민 뒤에서 맺는 파시스트 자본가계급과의 협정을 의미할 것이다. 이러한 체제는 아마 왕정이나 가톨릭교회의 공공연한 지배는 없을지 모르지만 군사독재의 한 변종에 다름 아닐 것이다.

마지막으로, 공화주의의 부분적 승리는 영국-프랑스의 ‘사심 없는’ 중재를 통해 교전 중인 양 진영을 화해시킬 목적으로 이용될지도 모른다. 이러한 변종의 경우에도 ‘민주주의’의 마지막 단편들은 미아하(공산주의자!) 장군과 프랑코(파시스트!) 장군의 형제적 포옹에 억압당할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다시 한 번 반복하자 : 승리는 사회주의혁명이나 파시즘 둘 중 하나에 돌아갈 것이다.

그런데 비극이 마지막 순간에 희극에 길을 열어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인민전선의 영웅들이 자신의 마지막 수도를 버리지 않으면 안될 때, 이들은 증기선이나 비행기에 탑승하기 전에 인민에게 ‘좋은 추억’을 남기기 위해 일련의 ‘사회주의적’ 개혁 조치를 선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다. 전 세계의 노동자는 영웅적 혁명을 파멸시킨 당들을 증오하고 경멸하면서 기억할 것이다.

스페인의 비극적 경험은 훨씬 거대한 사태에 앞서 세계의 모든 선진 노동자에게 보내는 끔찍한一아마 마지막일지도 모르는一경고이다. 마르크스는 “혁명은 역사의 기관차”라고 말했다. 이 기관차는 반(半)혁명적 또는 1/4만 혁명적인 당들의 생각보다 더 빠르게 전진한다. 뒤처지는 자들은 누구든지 기관차 바퀴 밑으로 떨어진다. 그 결과一이것이 가장 큰 위험 이다一기관차 자체도 종종 파괴 된다.

혁명의 문제를 끝까지, 그 구체적인 최종 결론에 이를 때까지 심사숙고해야 한다. 정책은 혁명의 기본법칙, 즉 전투태세를 갖춘 계급의 운동에 맞춰야 한다. 스스로를 ‘인민’전선이나 그 밖의 온갖 종류의 전선이라 부르는, 겉만 번지르르한 소부르주아 그룹들의 선입견이나 두려움에 맞춰서는 안 된다. 혁명 중에 최소한의 저항노선은 최대한의 재앙노선이다. 자본가계급으로부터의 ‘고립’을 두려워하는 것은 대중으로부터의 고립을 초래할 뿐이다. 노동귀족들의 보수적 편견에 순응하는 것은 노동자와 혁명에 대한 배신이다. 지나친 ‘신중함’은 가장 파멸적인 경솔함이다. 이것이 스페인에서 가장 성실한 정치조직 즉, 중도주의 통일노동자당의 파멸이 가르쳐주는 주된 교훈이다. 런던사무국의 당과 그룹들은 역사의 마지막 경고로부터 필수적인 결론을 도출하고 싶어 하지 않거나, 그렇게 할 수 없다. 같은 이유로 이들은 스스로 파멸한다.

그 대신에 새로운 혁명가 세대가 지금 패배의 교훈을 배우고 있다. 이 세대는 투쟁 속에서 제2 인터내셔널의 수치스러운 명성을 확인했다. 이들은 제3 인터내셔널의 몰락의 깊이를 재봤다. 이들은 무정부주의자를 그 말이 아니라 행동을 통해 판단하는 법을 배웠다. 이것은 무수한 투사들의 희생을 대가로 치른 더할 나위 없이 귀한 위대한 수업이다! 혁명 중핵들은 지금, 오직 제4 인터내셔널의 기치 하에서만 결집하고 있다. 패배의 굉음 속에서 태어난 제4 인터내셔널은 노동자들을 승리로 이끌 것이다.

1937년 12월 17일

 

 

다섯 번째 바퀴

 

■ 이 글은 무정부주의 국제조직인 국제노동자협회의 파리대회를 비판적으로 논평한 것이다. 이 글에서 트로츠키는 무정부주의 지도자의 정치적 · 이론적 파산을 가차 없이 폭로하고 있다.

 

다양한 나라의 무정부적 조합주의 그룹을 대표하는 이른바 국제노동자협회[International Workers’ Association, 스페인어로는 AIT(Asociación Intermcional de los Trabajadores)]의 대회가 12월 8일부터 17일까지 파리에서 개최되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이 인터내셔널에서 제일 큰 지부는 스페인의 전국노동자연맹(CTN)이다. 그 밖의 조직(스웨덴, 포르투갈, 프랑스, 라틴 아메리카의 조직)은 모두 완전히 보잘것없는 규모이다.

물론 작은 조직이라도 미래의 계급투쟁의 발전을 기대하는 독자적인 혁명적 입장을 가지고 있다면, 꽤 중요한 존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국제노동자협회 소식지(〈보레틴 데 인포르마시온〉(Boletin de información)의 독일어판 67호)에 게재된 간략한 보고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빠리 특별대회는 가르시아 올리베르의 정책, 즉 자본가계급에 대한 굴복 정책의 전면적 승리로 끝났다.

지난 1년 동안 몇몇 무정부주의 출판물, 특히 프랑스의 출판물은 스페인 전국노동자연맹의 투쟁방식을 조심스럽게 비판해왔다. 이 비판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 : 전국노동자연맹의 지도자들은 국가 없는 공산주의를 건설하는 대신에 부르주아 국가의 장관이 되었다! 그렇지만 이런 사정도 국제노동자협회 파리대회가 ‘전국노동자연맹의 노선을 승인’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았다. 게다가 스페인의 무정부적 조합주의 지도자들은 대회에서 자신들이 자본가계급을 구하기 위해 사회주의혁명을 배신한 것은 완전히 ‘국제 노동자계급의 불충분한 연대’ 때문이었다고 설명했다.

이런 종류의 설명에 어떤 새로운 것은 없다. 모든 개량주의적 배신자들은 지금까지 항상 자신의 배신을 노동자계급 탓으로 돌렸다. 사회애국주의자들이 ‘자국의’ 군국주의를 지지한다면, 그것은 물론 자신들이 자본의 하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대중이 ‘아직 진정한 국제주의를 성숙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동조합의 지도자가 파업파괴자로 등장한다면, 그것은 대중이 투쟁을 ‘진전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소식지에 게재된 보고는 파리대회에 대한 혁명적 비판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다른 많은 점에서처럼, 이 점에서도 무정부주의 신사양반들은 부르주아 자유주의자를 고스란히 모방하고 있다. 왜 하층 집단에 상층부의 견해 차이를 들려주어야 하는가? 이것은 무정부적 부르주아 장관의 권위를 흔들 수밖에 없다. 프랑스 무정부주의자의 ‘좌익적’ 비판에 답하여 대회는 바로 이들이 지난 제국주의 전쟁에서 수행한 것을 상기시켰을 확률이 크다.

우리는 이미 전쟁이나 혁명과 같은 ‘예외적’ 상황 중에는 자기 강령의 원직을 포기해야 한다는 일부 무정부주의 이론가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러한 혁명가는 비가내릴 경우, 즉 ‘예외적’ 상황에서는 반드시 새지만, 비가 내리지 않을 경우에는 완벽하게 방수처리가 되는 레인코트와 놀랄 만큼 비슷하다.

파리대회의 결정은 가르시아 올리베르, 그리고 그와 같은 부류의 정책과 완전히 같은 수준에 있다. 국제노동자협회의 지도자들은 제2 인터내셔널, 제3 인터내셔널, 암스테르담 인터내셔널에 ‘국제 반(反)파시스트 공동전선’의 결성 제안을 호소하기로 결의했다. 자본주의에 맞선 투쟁에 대해서는 말 한마디 하지 않는다! 이런 투쟁 방법이 발표되었다 : 노동자계급을 해방시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파시스트 국가의 제품 보이콧’과 … ‘민주주의 정부에 압력을 가하는 것.’

제2 인터내셔널의 지도자 블룸은 분명히 ‘압력’을 행사하기 위해 ‘민주주의’ 프랑스의 수상이 되었으며, 프랑스 노동자계급의 혁명운동을 분쇄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다했다. 블룸은 스탈린과 함께, 그리고 가르시아 올리베르의 협력을 얻어 네그린과 프리에토가 스페인 노동자계급의 사회주의혁명을 압살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런 일련의 움직임에서 주오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이러한 움직임과 함께 혁명적 노동자계급과 싸우기 위한 3개 인터내셔널의 공동전선은 이미 오래전부터 가동되어왔다. 이 공동전선에서 전국노동자연맹의 지도자들은 눈부신 역할뿐만 아니라 꽤 추잡한 역할을 맡아왔다!

파리대회는 스페인 무정부주의자의 배신을 전 세계의 무정부주의에 전가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특히 국제노동자협회의 총서기가 앞으로는 스페인의 전국노동자연맹에 의해 임명될 것이라는 사실로 표현된다. 바꿔 말하면, 국제노동자협회의 총서기는 지금부터 스페인 부르주아 정부의 관리가 될 것이다.

무정부주의 신사양반들, 반(半)무정부주의 이론가들, 반(半)이론가들은 이런 사실에 대해 뭐라고 말할 것인가? 여러분은 스페인 무정부적 조합주의의 전례를 따라 부르주아 민주주의라는 수레의 다섯 번째 바퀴(무용지물이라는 뜻-옮긴이) 역할을 하는 것에 동의하는가?

물론 많은 무정부주의자는 마음이 전혀 편치 않다. 그러나 이들은 이 불쾌감을 극복하기 위해서 화제를 바꾼다. 왜 스페인이나 국제노동자협회 파리대회만을 말하는가 … 가장 뜨거운 쟁점인 … 크론슈타트나 마흐노에 대해서 … 말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아무래도 무정부주의 인터내셔널은 그 해체와 붕괴에서 제2, 제3 인터내셔널에 뒤지고 싶지 않은 것 같다. 정직한 무정부주의 노동자라면 그만큼 더 빨리 제4 인터내셔널을 발견할 것이다.

1938년 1월 27일

 

 

고발자역을 하는 배반자

 

■ 이 글은 스탈린주의자의 탄압에 협력한 무정부주의자의 위선을 폭로하고 있다. 〈반대파 회보〉(1938년 12월) 제72호에 게재되었다.

 

신문의 긴급보도는 〈솔리다리닷 오브레라〉지가 세계 노동자계급이 스페인혁명에 대한 충분한 지원을 하지 않았다고 비난했다는 것이다. 얼마나 위선적인가! 노동자혁명을 지지하려고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탄압에 간접적으로 참여하기도 한 바로 그 신사양반들이 이런 비난을 하고 있다. 이는 하나의 법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모든 혁명은 봉기한 대중에 의해 실현된 사회강령에 비례하여 국제적 흡인력을 드러내는 법이다. 전 세계의 노동자계급은 스페인혁명이 사회주의를 향한 대중의 진정한 운동인 한, 숨을 죽이고 그 과정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스탈린-네그린 일파가 〈솔리다리닷 오브레라〉 무정부주의자의 지지로 스페인혁명을 질식시키기 시작하자, 노동자의 공감은 경악, 분노, 한층 더 악화된 무관심으로 변해버렸다.

세계 노동자계급에게 돌린 이러한 비난의 위선성은 특히 통일노동자 당에 대한 바르셀로나 재판[1937년 중순에 스탈린주의 경찰에 체포된 통일노동자당 지도자들이 1938년 10월,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들은 반역죄와 스파이활동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1937년 5월봉기 에 참여한 죄로 유죄를 선고받았다.]에 비추어보면 더욱 명백해진다. 우리는 통일노동자당 지도자들이 파시스트와 관계가 있었다는 고발에 대해서 길게 얘기할 생각이 없다. 전 세계의 분별력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비열한 거짓말을 결코 믿지 않을 것이다! 검사의 발언 가운데 유일하게 진지한 혐의는 통일노동자당의 ‘극단적’ 혁명적 행동이 해외 즉, 영국과 프랑스의 민주주의가 보고 있는 데서 스페인혁명의 명예를 손상시켰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상 말하고 싶은 고발장이다. 이것은 바르셀로나 정부가 영국과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의 허락을 얻어 … 혁명을 수행하고 싶어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페우의 임무는 조지 왕(영국의 국왕), 체임벌린(영국의 수상), 르브룅 대통령(프랑스의 대통령)[알베르 르브룅(Albert Lebrun, 1871~1950) : 프랑스 제3 공화국의 마지막 대통령(1932~40년). 1940년, 페뗑에 정권을 양보했다. 독일에 체포, 억류되었다.] 등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한계를 대중이 넘지 못하게 막는 것이었다. 이 고상한 목표는 노동자 농민운동을 억압하고, 혁명당을 파괴하고, 사적 재판(kangaroo court)을 조직하는 것 없이는 달성될 수 없었다. 세계 노동자계급은 〈솔리다리닷(!) 오브레라〉의 고발자들에게 이렇게 대답할 수 있다 : ‘배신자는 입을 다물어라!’

1938년 10월 22일

 

 

스페인의 비극

 

■ 이 글은 바르셀로나 함락이 가까웠던 시기에 작성되었다. 트로츠키는 러시아 10월혁명의 승리 이후, 여러 차례 반복된 승리 가능성이 있었던 혁명의 패배, 그것도 혁명지도부의 치명적인 오류에 의한 패배라는 비극(1918~19년의 헝가리혁명, 독일혁명, 오스트리아혁명, 1923년의 독일혁명, 1926~27년의 중국혁명, 그리고 1936~39년의 스페인혁명)으로부터 교훈을 이끌어내고 있다.

 

현대사의 가장 비극적인 사건 가운데 하나가 지금 스페인에서 그 결론에 다가가고 있다. 프랑코 측에는 견고한 군대도, 인민의 지지도 없었다. 다만, 나머지 4분의 1에 대한 자신의 지배를 유지할 수만 있다면, 인민의 4분의 3을 피바다에 빠뜨릴 준비가 되어 있는 유산자들의 탐욕만이 있었다. 그렇지만 이 식인적인 만행조차도 영웅적인 스페인 노동자계급에 대한 승리를 얻는 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프랑코는 전선 반대편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그는 이 런 도움을 얻었다. 그의 주된 조력자는 볼셰비키당과 노동자혁명의 무덤을 파는 자인 스탈린이었으며, 지금도 그렇다. 노동자계급의 위대한 수도인 바르셀로나의 함락은 1937년 5월의 바르셀로나 노동자계급의 봉기 학살에 대한 직접적인 보상인 셈이다.

프랑코 자신이 보잘것없는 인물이고, 그의 도당이 명예, 양심, 군사적 재능도 없는 비열한 모험가들이었다고 하더라도, 프랑코에게는 단연 뛰어난 점이 있었다. 그는 명확하고 확실한 강령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즉, 자본주의적 소유, 착취자의 통치, 교회의 지배를 보호하고 안정시키는 것, 따라서 군주제를 부활시키는 것이었다.

모든 자본주의 국가들一파시스트 국가든 민주주의 국가든一의 유산계급은 당연히 프랑코를 지지했다. 스페인의 자본가계급은 완전히 프랑코 진영으로 넘어가버렸다. 공화주의 진영의 선두에는 버림받은 자본가계급의 ‘민주주의적’ 시종들만이 있었다. 이 신사양반들은 파시즘 진영에 투항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들의 영향력과 수입의 원천이 바로 부르주아 민주주의 제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그 정상적인 기능을 위해서 변호사, 의원, 저널리스트 간단히 말해, 자본주의의 민주주의적 옹호자들을 필요로(또는 필요로 했던!) 한다. 아사냐 일당의 강령은 과거에 대한 동경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아주 무력하다.

인민전선은 대중이 자기를 따르게 하기 위해서 참주선동과 환상에 의지했다. 이것은 일정기간 성공을 거뒀다. 지금까지의 혁명의 모든 성과를 확보하고 있던 대중은 혁명이 그 논리적 귀결, 즉 소유관계의 전복, 농민에게로 토지 인도, 노동자에게로 공장 양도에까지 이를 것이라고 계속 믿고 있었다. 혁명의 원동력은 바로 더 나은 미래에 대한 대중의 이런 희망에 있었다. 그러나 공화주의 신사양반들은 피억압 대중의 숙원을 짓밟고, 더럽히고, 아니 정말 피로물들이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다.

그 결과, 지난 2년 동안 공화주의 도당에 대한 농민과 노동자의 증대하는 불신과 증오를 목격했다. 절망이나 활력을 잃은 무관심이 차츰 혁명적 열정과 자기희생 정신을 대체했다. 대중은 자기를 속이고 유린한 자들에게서 등을 돌렸다. 이것이 공화국 군대가 패배한 근본적 원인이 다. 스페인의 혁명적 노동자에 대한 기만과 학살을 고무한 자는 스탈린 이었다. 스페인혁명의 패배는 이미 오점투성이인 크레믈린 일당에 지워지지 않는 새로운 오점을 하나 더 추가하는 것이다.

바르셀로나의 붕괴는 세계 노동자계급에게 끔찍한 타격을 가하는 것이지만, 중대한 교훈을 가르쳐주는 것이기도 하다. 피착취 대중에 대한 기만과 배신의 조직적 체계인 스페인 인민전선의 메커니즘은 철저하게 폭로되었다. ‘민주주의의 옹호’라는 구호는 다시 한 번 그 반동적 본질과 공허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자본가계급은 착취자의 지배를 영속시키고 싶어 한다. 반면에, 노동자는 착취로부터 해방되고 싶어 한다. 이것이 현대사회의 기본적 계급의 진정한 임무이다.

자본가계급의 신뢰와 보조금을 잃은 가련한 소부르주아 중개업자 도당은 미래에 대해 조금도 양보하지 않고 과거를 구출하려고 했다. 이들은 인민전선이라는 딱지를 붙인 정치적인 공동 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승리를 위한 모든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스탈린의 지도 아래, 가장 끔찍한 패배를 보증했다.

스페인 노동자계급은 주도권과 혁명적 영웅주의의 훌륭한 역량을 증명했다. 혁명은 보잘것없고, 비열하고, 철저히 타락한 ‘지도자’들에 의해 붕괴에 이르렀다. 바르셀로나의 함락은 무엇보다도 뼛속까지 썩은 무정부주의뿐만 아니라 제2, 제3 인터내셔널의 몰락도 의미한다.

노동자여, 새로운 길로 전진하자! 국제사회주의혁명의 길로 전진하자!

1939년 2월

 

 

스페인, 스탈린, 예조프

 

■ 이 글은 공화국 정부 붕괴 이후, 스페인혁명에서 저지른 스탈린주의자의 범죄 실태를 망명자들의 증언을 통해 분명히 하려는 목적에서 쓴 글이다. 스페인혁명 중에 게페우의 하수인은 통일노동자당의 지도자 안드레스 닌을 납치, 고문, 학살하는 등 온갖 비열한 범죄를 저지르며 혁명을 내부로부터 파괴하고, 도덕적으로 타락시켰다. 이러한 범죄는 혁명을 위협하는 트로츠키주의자를 숙청한다는 명목으로 이루어졌지만, 실제로는 가장 정직한 혁명가들을 매장하는 것으로 스페인혁명에 대한 최대의 타격이 되었다.

 

게페우의 이전 수장인 예조프[니콜라이 예조프(Nikolai Yezhov, 1895~1938) : 노동자출신으로, 1936~38년에 게페우의 수장으로서 대숙청을 진두지휘했다. 너무도 큰 악평을 샀기 때문에 1938년에 파면, 자살했다.]는 수많은 이유 때문에 치욕을 당했다. 그러나 그의 몰락은 의심할 여지없이 스페인 사태와 관련되어 있다. 공화주의 정부군의 참패는 게페우의 직접적 이고 가장 적극적인 관여로 일어났으며, 이는 게페우와 크레믈린에 있는 그 주인 모두에게 대단히 큰 위험이다.

스탈린이 고용한 국제적 불한당들에 의해 이베리아반도에서 저질러진 무수한 범죄는 지금 불가피하게 표면화되고 있다. 몇 십, 몇 백, 몇 천의 증언자, 희생자, 참가자가 지금 스페인을 벗어나 세계 각지로 피난하고 있다. 이들은 스페인에서 저지른 게페우의 범죄 행위에 관한 증언을 모든 곳에 전할 것이다. 진실은 모든 나라의 광범위한 주민들이 손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만약 공화주의자가 승리를 거두었다면, 많은 사람은 스탈린의 범죄를 묵인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을 것이다: ‘승자는 심판받지 않는다.’ 그러나 이제 혁명가에 대한 파렴치한 학살은 프랑코의 승리를 용이하게 하는데 도움이 되었을 뿐임이 완전히 분명해지고 있다. 눈가림당한 많은 사람들의 눈에서 안대가 떨어질 것이다.

자신의 전통적 방식에 따라 스탈린은 예조프를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늦지 않게 해임시키려고 했다 : ‘이 모든 것은 예조프가 범한 죄지, 나의 죄는 아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누가, 더욱 더 어리석어 보이기 시작 하는 이런 비열한 책략을 믿을 것인가? 스페인에서의 범죄행위에 대해, 스탈린 자신은 전 세계 노동자계급에게 개인적으로 책임이 있다. 코민테른의 배신적 정책과 게페우의 살인적 정책 모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에서 어떤 식으로든 게페우의 지배를 빠져나온 사람들이 있다. 스페인의 대학살 이후, 이러한 사람들의 수는 현저하게 증대했다. 꽉 움켜쥔 발톱에서 희생자를 풀어주지 않으면 안 되게 되자, 게페우의 하수인은 흔히 이렇게 말한다 : ‘우리가 멀리까지 미치는 손을 가지고 있음을 기억하라!’ 이런 협박에 대한 공포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입을 봉하고 있다.

우리는 이제 겁에 질린 이 사람들을 변호하는데 우리의 힘을 다 쏟아야 한다. 모든 나라의 우리의 동지들은 게페우의 모든 이전 희생자와 부분적 희생자들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말하는 것이 그들의 직접적인 의무라는 점을 설명해야 한다. 이들의 폭로가 대중적인 성격을 띠게 되면, 소련에 있는 이들의 친척이 고통을 당하지도 않을 것이다. 제4 인터내셔널의 조직은 이러한 폭로에 대중적 성격을 부여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한다. 현재, 이것이야말로 국제 스탈린주의 마피아에 대항하는 투쟁에서 대단히 긴급한 임무이다!

1939년 3월 4일

 

 

제국주의의 미스터리

 

■ 파시스트 프랑코와 내전을 벌이고 있던 공화주의 스페인에 대한 지원을 거부해온 영국과 프랑스 양국은 ‘민주주의의 친구’, ‘평화의 친구’를 자칭하며 프랑코의 승리 이후, 스페인에 독일과 이탈리아군이 계속 주둔하는 것에 맹렬히 반대했다. 이 글은 이런 제국주의적 민주주의 국가들의 위선과 음모를 폭로하고 있다.

 

같은 급의 ‘평화’의 친구인 사회주의자 레옹 블룸과 보수주의자 체임벌린은 스페인 사태에 대한 불간섭에 찬성했다. 전(ex)一볼셰비키 스탈린은 전(ex)一멘세비키 대사 마이스키[이반 마이스키(Ivan Maisky, 1884-1975) : 멘셰비키 출신 외교관. 1921년에 입당하여 1922년부터 외교관 생활을 했으며, 1932~43년까지 영국 대사를 지냈다.]를 통해서 이들과 손을 잡았다. 계획의 미묘한 차이는 이들이 똑같이 고상한 목적을 위해서 우호적으로 협력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체임벌린은 현재, 만약 프랑코의 승인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와 독일이 이른바 ‘의용병’을 철수시키지 않는다면, 영국은 전쟁에 버금가는 가장 중대한 조치를 취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선언하고 있다. ‘불간섭’ 정책의 유명한 지지자인 급진사회당의 달라디에도 이 문제에서 체임벌린을 전면 지지하고 있다. 이 신사양반들은 평화를 사랑하기 때문에 무력으로 민주주의를 옹호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것에는 한계가 있다. 심지어 이 경험 많은 인간애 지지자들의 평화 애호조차 한계가 있다. 체임벌린은 공공연하게 이렇게 말한다 : 이베리아반도에 이탈리아와 독일 병사들이 주둔하는 것은 지중해의 ‘균형’을 깨뜨릴 것이다. 이것은 절대로 허용될 수 없다! 영국과 프랑스는 결코 스페인의 민주주의를 지원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러나 이들이 프랑코를 도와 스페인의 민주주의를 압살할 수 있게 된 지금, 이들은 지중해의 ‘균형’을 무력으로 지지할 충분한 각오를 하고 있다. 이 불가사의한 전문용어(‘균형’)는 노예 소유자가 자신의 식민지 점령과 이 점령을 인도하는 해로를 방어하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제2 인터내셔널과 제3 인터내셔널의 신사양반들에게 삼가 질문한다. 전 세계의 민주주의 옹호를 약속한 위대한 동맹을 수립하려면 정확히 어떤 역사적, 정치적, 그 밖의 조건이 필요한가? 프랑스 정부는 ‘인민전선’에 의지했다. 스페인에서 ‘인민전선’의 투쟁은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수행되었다. 민주주의를 방어하는 의무가 더 단호한 형태로 나타날 다른 사례를 생각해낼 수 있는가? ‘인민전선’의 지지를 받는 ‘사회주의(사회당)’ 정부가 마찬가지로 ‘사회주의자(사회당)’가 이끄는 민주주의를 옹호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언제, 어디서나 제기되는 문제는 어떤 정부가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임무에 전념할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민주주의와 코민테른의 점쟁이들이 어쩌면 이를 잘 설명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실제로 이 두 제국주의적 민주주의 국가는 그 지배계급을 대표하여 처음부터 완전히 프랑코를 지지했다. 다만 프랑코의 승리 가능성을 처음에는 믿지 않았으며, 프랑코에 대한 자신의 공감이 너무 일찍 발각되어 체면을 깎아 먹지나 않을까 걱정했다. 그렇지만 프랑코의 승산이 높아짐에 따라, ‘위대한 민주주의 국가’의 지배계급의 진면목이 더욱 더 분명하게, 더욱 더 공공연하게, 더욱 더 파렴치하게 드러났다. 대영제국이나 프랑스는 모두 식민지, 반(半)식민지, 따라서 약소민족을 민주주의나 심지어 반(半)민주주의 체제를 통하는 것보다도 군사독재를 통해 지배하는 편이 훨씬 더 쉽다는 것을 매우 잘 알고 있다.

영국의 보수당 정권과 동맹을 맺는 것은 프랑스 하원의 극우 반동분자와 마찬가지로, ‘사회주의적’ 소부르주아인 블룸에게도 불변의 계율이다. 이 계율은 프랑스의 증권거래소로부터 나온다. 스페인에 대한 영국의 계획은 처음부터 확고했다. 이들을 싸우게 하자. 누가 승리하든 나라의 경제부흥을 위한 자금이 필요할 것이다. 독일도 이탈리아도 이 자금을 제공할 수 없을 것이다. 그 결과, 승자는 런던, 부분적으로는 파리에 의지할 것이다. 따라서 필요한 조건을 상대에게 명령할 수 있을 것이다.

블룸은 처음부터 영국의 계획을 완벽하게 전수받았다. 그는 자신의 계획을 가질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준(準)사회주의 정부는 전적으로 프랑스 자본가계급에 의존하고, 프랑스 자본가계급은 영국 자본가계급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블룸은 민주주의의 구제보다 세계평화의 유지가 훨씬 더 신성한 임무라고 외쳤다. 그러나 실제로 그는 영국 자본의 계략을 은폐하고 있었다. 이 더러운 임무를 일부 수행하고 나서 블룸은 프랑스 자본가계급에 의해 야당으로 전락했으며, 다시 스페인 공화주의를 돕는 신성한 의무에 대해서 외칠 기회를 얻었다. 값싼 좌익적 빈말이 없다면, 블룸은 결정적인 순간에 이 정도까지 배신적인 형태로 프랑스 자본가계급에 봉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모스크바의 외교관도 스페인 민주주의를 위하여 약간 이를 악문 것 같은 말투로 말한다. 이 스페인 민주주의야말로 모스크바의 정책이 파괴한 것이다. 그러나 모스크바는 지금 대단히 신중하게 자기 생각을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베를린으로 가는 길을 암중모색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스크바의 보나파르트주의자는 아마 자신들의 지배를 한 주(週)라도 더 연장시킬 수 있다면, 국제 노동자계급은 말할 것도 없고 세계의 모든 민주주의를 언제라도 배신할 수 있다. 스탈린이나 히틀러 모두 허세로부터 시작할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나 체임벌린, 달라디에, 심 지어 루즈벨트까지 겁을 주고 싶어 한다. 그러나 ‘민주주의적’ 제국주의자가 겁먹지 않는다면, 허세는 처음에 모스크바나 베를린에서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나아갈지도 모른다. 자신의 책략을 은폐하기 위해서 크레믈린도당은 제2 인터내셔널과 제3 인터내셔널 지도자의 도움이 필요하고, 이 도움이 값이 너무 비싸지 않다면 더욱 그렇다.

거칠게 말하면, 사회애국주의 신사양반들은 의식적인 악당과 얼마간 성실한 바보로 나눠질 수 있다. 그렇지만 중간적이거나 혼합적인 유형이 적지 않다. 일찍이 이 신사양반들은 ‘불간섭’이라는 추잡한 코미디를 견디며 스탈린이 노동자 스페인을 압살하는 것을 도왔다. 그러나 이와 함께 공화주의 스페인도 도살된 것으로 드러나자, 이들은 인민전선이나 ‘민주주의적 동맹’을 전혀 거부하지 않은 채, 항의의 표시로 자신의 손을 흔들기 시작했다. 제국주의의 의식(儀式)에서 이런 사람들은 불가피하게 가장 굴욕적이고 가장 파렴치한 소임을 다한다.

스페인 인민의 혈관에는 아직 내뿜지 않은 피가 남아있다. 누가 이것을 먹어치울 것인가? 히틀러一무쏠리니인가, 프랑스 공범자들과 작당한 체임벌린인가? 이 문제는 가까운 장래에 제국주의 국가들의 역관계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평화, 민주주의, 인종, 권위, 질서, 균형을 위한투쟁과 다른 다수의 고귀하고 무게를 달 수 없는 일을 위한 투쟁은 새로운 세계분할을 위한 투쟁을 의미한다. 스페인의 비극은 새로운 세계대전을 준비하는 길에서 닥친 한 에피소드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모든 색조의 지배계급은 새로운 세계대전을 두려워하면서도 전력을 다해 준비하고 있다. 인민전선의 허풍은 다른 악당이 혈통, 명예, 인종에 관한 공문구를 같은 목적을 위해서 이용하는 것처럼, 자신의 계략을 인민대중에게 은폐하려는 일부 제국주의자에게 도움이 된다. 소부르주아 수다쟁이나 미사여구를 늘어놓는 사람은 노동자가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직시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제국주의자의 전쟁 준비를 더 쉽게 해줄 뿐이다.

요컨대, 다양한 목적에서, 그리고 다양한 방법에 의해 새로운 인간 살육이 준비되고 있는 것이다. 노동자계급 전위를 제국주의와 그 추종자로부터 떼어놓음으로서만 인류는 파괴와 파멸로부터 구제될 수 있다. 노동자정치의 완전한 독립, 파시스트적이거나 민주주의적인 제국주의의 의식(儀式)에 대한 전면적인 불신, 제2 인터내셔널과 제3 인터내셔널에 대한 가차 없는 투쟁, 그리고 국제 노동자혁명의 완강한, 체계적인, 끈기 있는 준비에 의해서만 인류는 파괴와 파멸로부터 구제될 수 있다!

1939년 3월 4일

 

 

다시 한 번 스페인의 패배 원인에 대해서

 

■ 이 글은 스페인혁명의 패배 원인을 둘러싼 귈레르모 베가스 레온이라는 멕시코 필자의 서론을 비판하며, 혁명의 원칙적 문제를 다시 논한 글이다.

〈사회주의자의 호소〉 1939년 3월 21일자에 처음 게재되었다.

 

우산의 발명자

옛 프랑스의 유머작가는 일찍 이 어느 소부르주아가 어떻게 우산을 발명할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썼다. 비가 내리는 거리를 걷고 있던 그는 거리를 지붕으로 덮어버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 그러나 그러면 공기의 자유로운 순환을 방해할 것 이다. … 그렇다면 지붕을 이동식으로 해서 각자가 가리면 좋지 않을까. 하지만 어떻게 움직이게 하지? 일종의 지렛대를 쥐고 보행자가 지붕을 손으로 움직이게 해야 한다, 등등. 마침내 그 발명자는 소리쳤다. “흥! 이런, 우산이잖아!” 요즘도 이런 발명자를 ‘좌익’ 사이에서 매번 만날 수 있다!

옛날에 볼셰비키주의는 여러 해 동안 개량주의 정책의 신용을 떨어뜨렸다. 그러나 반동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함과 동시에, 스탈린주의자는 자신의 부하들 모두와 더불어 다시 개량주의의 우산을 발명하기 시작했다: ‘인민전선’(자본가계급과의 제휴), 민주적인 조국을 방어하는 노동자계급의 의무(사회애국주의) 등등. 그리고 이들은 이를 완전히 무지의 힘으로 수행하는 것이다!

 

새로 발명된 우산

그 학식의 깊이, 사상의 정직함, 정치적 입장의 혁명적 성격에서 거의 국제적인 명성을 떨치고 있는 멕시코의 신문 〈엘 포푸라르〉(El Popular, 대중)에서 우리 독자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은 궐레르모 베가스 레온(Guillermo Vegas León)은 새로 발명된 우산의 도움을 빌려 스페인의 ‘인민전선’ 정책을 옹호하고 나선다. 알다시피, 스페인의 전쟁은 사회주의를 위한 전쟁이 아니라 반(反)파시즘 전쟁이다. 반(反)파시즘 전쟁에서 공장이나 토지의 장악과 같은 모험에 관여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 이러한 계획은 파시즘의 지지자들만이 제의할 수 있다. 기타 등등. 역사적 사태는 값싼 신문 기삿거리의 왕국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이 분명하다.

레온 씨는 이것과 같은 우산이 러시아의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케렌스키의 당)에 의해 사용된 것을 모르고 있다. 이들은 당시, 러시아혁명은 ‘민주주의’혁명이며, 사회주의혁명은 아니라고 싫증 한번 내지 않고 반복하고 있었다. 신생 민주공화국을 위협하고 있는 독일과의 전쟁에서 생산수단의 몰수와 같은 모험에 착수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호엔쫄레른 가에 도움을 주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 사이에는 적지 않은 불한당들이 있다. 이들은 또한 볼셰비키가 어떤 말 못할 이유 때문에 이러한 일을 했던 것이라고 단언했다.

 

혁명의 계급적 성격

혁명이 ‘반(反)파시스트’적인가 노동자적인가, 부르주아적인가 사회주의적인가 하는 것은 정치적 레테르가 아니라 해당국가의 계급적 구조에 의해 결정된다. 레온에게 대체로 19세기 중반 이후의 사회발전 과정은 간과되었다. 그러나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이 발전과정은 중소 자본가 계급을 뒷전으로 밀어내고, 이들의 체면을 깎고 격하시켰으며, 휩쓸어버렸다. 스페인을 포함하여 현대사회의 주요한 계급은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이다. 소부르주아 계급은 권력을一여하튼 간에 오랜 기간에 걸쳐一장악할 수 없다. 권력은 틀림없이 자본가계급이나 노동자계급 둘 중 하나의 수중에 있을 것이다. 소유재산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스페인의 자본가계급은 파시즘 진영으로 완전히 넘어가버렸다. 파시즘에 대항하여 진지한 투쟁을 수행할 수 있는 유일한 계급은 노동자계급이다. 노동자계급만이 피억압 대중, 무엇보다도 스페인 농민을 결집시킬 수 있다. 그러나 노동자의 권력은 사회주의 권력이 될 수밖에 없다.

 

중국과 러시아의 예

그러나一레온 씨는 반대한다一당면한 목표는 반(反)파시즘 투쟁이다. 우리의 모든 힘을 이 당면한 목표에 집중시켜야 한다, 등등. 물론 아무렴 그렇고말고! 그러나 아무쪼록 우리에게 가르쳐주기를 바란다. 왜 반(反)파시즘 투쟁 중에는 토지가 지주의 것이어야 하며, 공장과 제작소가 자본가계급의 것이어야 하는가, 이들은 모두 프랑코 진영에 있는가? 혹시 농민과 노동자가 토지와 공장을 장악할 만큼 ‘성숙하지 않았기’ 때문인가? 그러나 이들은 자발적으로 토지와 공장을 장악함으로써 자신의 성숙도를 증명했다. 공화주의자를 자처하는 반동들은 스탈린주의자의 지도 아래, 들리는 바에 따르면 ‘반(反)파시즘’의 이름으로 이 강력한 운동을 분쇄할 수 있었지만, 실제로는 부르주아적 소유자를 위해서였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현재, 중국은 대(對)일본 전쟁에 참전하고 있다. 이 전쟁은 확실히 약탈자와 억압자에 대한 방어 전쟁이다. 이 전쟁을 구실로 스탈린 정권의 도움을 받은 장개석 정부는 모든 혁명투쟁, 특히 토지를 위한 농민투쟁을 분쇄했다. 착취자와 스탈린주의자는 ‘지금은 토지문제를 해결할 때가 아니다. 지금의 문제는 천황에 대한 공동의 투쟁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현재 바로 중국의 농민이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면, 이들은 토지를 지키기 위해서 사력을 다해 일본 제국주의자에 맞서 싸웠을 것이라는 점은 자명하다. 우리는 다시 한 번 10월 혁명의 경우를 상기해보아야 한다. 10월 혁명은 가장 강력한 제국주의 열강의 간섭 군을 포함하여 3년간에 걸친 전쟁에서 무수한 적을 물리치고 승리할 수 있었다. 이 승리는 무엇보다도 이 전쟁 내내 농민이 토지를 점유하고 있었고, 동시에 노동자가 제작소와 공장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의해 보장되었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다. 사회주의혁명과 내전의 융합만이 러시아혁명을 정복할 수 없게 했다.

레온 씨 같은 신사양반들은 부르주아 자유주의가 붙이는 이름에 따라 혁명의 성격을 결정한다. 그것이 현실의 계급투쟁에서 표현되는 방식이나, 혁명적 대중에 의해 어떻게 감지되고 있는지一비록 반드시 명확하게 이해되는 것은 아닐지라도一에 따라서는 결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스페인혁명을 자유주의적 속물인 아사냐의 시각을 통해서가 아니라, 바르셀로나와 아스투리아스의 노동자와 세빌랴의 농민의 시각을 통해서 바라본다. 이들은 결코 인민전선이라는 낡은 의회주의의 우산을 위해서가 아니라, 제작소와 공장, 토지,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서 싸우고 있다.

 

‘반(反)파시즘’이라는 공허한 추상

‘반(反)파시즘’과 ‘반(反)파시스트’라는 개념 자체는 허구이고 거짓말이다. 마르크스주의는 모든 현상을 계급적 관점에서 접근한다. 아사냐가 ‘반(反)파시스트’인 것은 부르주아 지식인이 의회주의적이거나 그 밖의 경력을 쌓는 것을 파시즘이 방해하는 경우뿐이다. 파시즘과 노동자혁명 중에서 선택해야 할 처지에 놓이면 아사냐는 항상 파시스트 편임이 드러날 것이다. 혁명 7년간에 걸친 그의 정책 전체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이에 반해서, ‘파시즘 반대, 민주주의 옹호!’ 구호는 전쟁 중에 공화주의 진영 내에는 어떠한 민주주의도 없었고, 또 지금도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수백, 수천만의 대중을 끌어당길 수 없다. 프랑코나 아사냐 진영 모두에는 지금까지 군사독재, 검열, 강제동원, 굶주림, 유혈, 죽음이 존재해 왔다. ‘민주주의 옹호!’라는 추상적 구호는 자유주의적 저널리스트에게는 충분한 것이지만, 피억압 노동자와 농민에게는 그렇지 않다. 이들은 노예상태와 가난 외에는 지킬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이들은 동시에 새롭고 더 나은 생활조건을 실현할 수 있을 경우에만 파시즘을 분쇄하는데 전력을 다할 것이다. 따라서 파시즘에 대한 노동자와 빈농의 투쟁은 사회적인 의미에서 방어적일 수 없으며, 오직 공격적일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 때문에 좀 더 ‘권위 있는’ 속물을 따라 우리에게 ‘마르크스주의는 유토피아를 거부한다, 따라서 반(反)파시즘 투쟁 중에 사회주의혁명을 수행한다는 생각은 공상적’이라는 레온의 설교가 얼토당토않은 것이다. 실제로 자본주의 경제를 전복하지 않고도 파시즘과 투쟁할 수 있다는 생각이야말로 최악의, 그리고 가장 반동적인 형태의 유토피아주의다.

 

승리는 가능했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이 신사양반들의 완전한 무지이다. 이들은 민주주의혁명이라는 개념 자체와 그 내적인 계급 구조가 분석一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착수하기 시작한一되어 있는 수많은 문헌이 있는지 낌새도 채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첫 4개 대회의 기본문서 나, 제4 인터내셔널의 이론적 탐구에 대해서도 읽어본 적이 없는 것이 분명하다. 이 문서들은 지금 상황에서 반(反)파시즘 투쟁은 권력을 위한 노동자계급의 계급투쟁 방식에 의하는 것 말고는 생각할 수 없다는 사실을 초보자도 잘 알 수 있게 증명하고 설명하고 있다.

이 신사양반들은 역사를 사회주의혁명을 위한 조건을 꼼꼼하게 준비하고, 역할을 배분하고, 승리의 개선문에 대문자로 ‘사회주의혁명의 입구’라고 새기고, 승리를 보증하고, 그 다음에 존경할만한 지도자들을 장관, 대사 등 중요 직책에 취임하도록 정중하게 초대하는 것으로 상상하고 있다. 전혀 그렇지 않다. 문제는 다소 다른 형태를 취하고 있다 : 훨씬 더 복잡하고, 까다롭고, 위험하다. 기회주의자, 반동적 얼간이, 소부르주아 겁쟁이들은 사회주의혁명이 일정에 오르는 상황이라는 것을 이해한 적도 없고, 앞으로도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 즉, 볼셰비키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의 이기적인 계급적 공포만을 반영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 ‘교양 있는’ 소부르주아 계급의 여론을 멸시할 수 있어야 한다.

 

노동자계급은 충분히 강했다

전국노동자연맹(CNT)과 무정부주의 연합(FAI)의 지도자들은 스스로 1937년 5월 봉기 이후에 이렇게 말했다 : ‘우리가 바라기만 했다면, 우리는 언제라도 권력을 잡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모든 세력이 우리 편이었지만 우리는 어떠한 독재도 바라지 않았다’ 등등. 자본가계급의 무정부주의자 하인이 무엇을 바랐는지 바라지 않았는지는 결국 부차적인 문제이다. 그렇지만 이들은 봉기한 노동자계급이 권력을 장악했을 정도로 강력했다고 인정했다. 만약 노동자계급이 배신적인 지도부가 아니라 혁명적인 지도부를 가졌다면, 아사냐의 모든 국가기구를 일소하고, 소비에트 권력을 수립하여 농민에게 토지를, 노동자에게 제작소와 공장을 맡겼을 것이다. 따라서 스페인혁명은 사회주의혁명이 되었을 것이며, 정복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스페인에는 혁명정당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대신에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나 무정부주의자라고 상상하는 수많은 반동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인민전선의 깃발 아래, 사회주의혁명을 질식시키고 프랑코의 승리를 확실하게 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 파시스트와 독일 나찌의 군사간섭과 영국과 프랑스 ‘민주주의’ 국가의 배신적 행위를 언급함으로써 패배를 정당화하려는 것은 정말로 터무니없는 소리다. 적은 언제나 적일뿐이다. 반동은 항상 할 수 있을 때는 언제나 간섭할 것이다. 제국주의적 ‘민주주의’는 항상 배신할 것 이다. 이것은 노동자혁명의 승리가 일반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파시즘의 승리 그 자체는 어떤가? 거기에서는 어떠한 간섭도 없었다. 그 대신에 우리는 독일의 경우에는 강력한 노동자계급과 매우 큰 사회주의 정당은 물론 거대한 공산당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왜 파시즘에 대해서 승리를 거둘 수 없었는가? 그것은 바로, 이들 나라 모두에서 지도적 정당들이 사회주의혁명만이 파시즘을 패배시킬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반(反)파시즘’ 투쟁으로 문제를 축소시키려고 했기 때문이다.

스페인혁명은 최상의 학교였다. 스페인혁명의 값비싼 교훈을 경솔하게 다루도록 내버려두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 속임수, 미사여구, 자기만족적 무지, 지적 기생을 집어치워라! 우리는 진지하게, 정직하게 배우고,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1939년 3월 4일

 

 

계급, 당, 지도부一스페인 노동자계급은 왜 패배했는가?

 

노동자계급운동이 얼마나 퇴보했는가는 대중조직의 상태뿐만 아니라 이데올로그 그룹과 매우 많은 그룹이 적극 관여하는 이론적 탐구 수준에 의해서도 측정될 수 있다. 파리에서 발행되고 있는 잡지 〈끄 페르〉(Que Faire, 무엇을 할 것인가)는 몇 가지 이유로 자신을 마르크스주의자로 간주하지만, 실제로는 좌익 부르주아 지식인과 지식인들의 모든 악습을 자기 것으로 소화한 고립된 노동자들의 경험주의 관점에 철저히 안주하고 있다.

강령이나 어떤 전통도 없으며, 과학적 근거를 결여하고 있는 모든 그룹들과 마찬가지로 이 작은 잡지도 통일노동자당에 편승하여 성공하려고 했다. 이들에게는 노동자당이 대중과 승리에 이르는 최단 길을 열어젖힐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스페인혁명과 맺은 이런 관계의 결과를 처음에는 전혀 예상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 이 잡지는 발전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이론적으로) 퇴보했다. 이것은 실제로 지극히 당연한 결과이다. 소부르주아 보수주의와 노동자혁명에 대한 요구 사이의 모순은 이미 극도로 발전해 있다. 따라서 노동자당의 정책을 옹호하거나 수용했던 사람들은 당연히 자신이 정치적, 이론적 영역 모두에서 아득히 퇴보했음을 깨달을 것이다.

〈끄 페르〉지 자체는 아무 중요성도 없다. 그러나 중요한 징후를 나타내고 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스페인혁명 붕괴의 원인에 대한 이 잡지의 평가가 현재 사이비 마르크스주의의 좌익 사이에 넓게 퍼져있는 기본적 특징을 매우 생생하게 폭로하는 한, 우리는 이 평가를 검토하는 것이 유익하다고 본다.

 

〈끄 페르〉지의 변명

먼저, 카사노바 동지가 쓴 팸플릿 ‘배반당한 스페인’(제4 인터내셔널 스페인지부의 지도자인 M. 카사노바가 혁명 패배 직후인 1939년 3월에 썼다.一옮긴이)에 대한 이 잡지의 논평을 그대로 인용하는 것부터 시작하자.

“왜 혁명이 분쇄되었는가? 필자(카사노바)는 이렇게 대답한다. ‘왜냐하면 불행하게도 공산당이 혁명적 대중이 따르지 않았던 그릇된 정책을 실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대체 왜 이전 지도자들과 결별한 혁명적 대중이 공산당의 기치로 결집했는가? 필자는 말한다. ‘왜냐하면 진정한 혁명정당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순전한 동어 반복이다. 대중의 그릇된 정책이나 당의 미성숙은 그 어느 쪽이든 간에 다 사회세력의 특정 상태(노동자계급의 미성숙, 농민의 독자성 결여)를 나타낸다. 이러한 상태는 사실에 따라 설명되어야 하고, 특히 카사노바 자신에 의해 제기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악의로 가득 찬 사람들이나 그런 사람들의 그룹이 저지른 행동의 산물이 될 것이다. 이런 행동은 유일하게 혁명을 구할 수 있는 ‘성실한 사람들’의 노력과 일치하지 않는다. 첫 번째로 마르크스주의적인 길을 모색한 후, 카사노바는 두 번째 길을 선택한다. 그는 우리를 순전한 악마학(demonology)의 영역으로 안내한다 : 패배에 책임이 있는 범죄자는 악마의 두목 스탈린이고, 무정부주의자나 그 밖의 다른 소악마가 스탈린을 부추겼다. 혁명가의 신(神)은 유감스럽게도 1917년에 러시아에서 했던 것처럼, 스페인에 레닌이나 트로츠키 같은 인물을 보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 “현실에 대해 교회가 경직된 정통적 신념을 기어코 강제하려는 것의 결과가 바로 이런 것이다.” 이런 이론적 오만함은 종(種)적으로 완전히 보수적인 속물들에게서 매우 많이 나타나는 진부함, 천박함, 오류가 어떻게 이렇게 짧은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는지 상상하기 어렵다는 사실에 의해 오히려 빛나고 있다.

위에 인용한 글의 필자는 스페인혁명의 패배에 대해서 어떠한 설명도 회피한다. 그는 단지 ‘사회세력의 상태’ 같은 깊이 있는 설명이 필요하다고 지적할 뿐이다. 모든 설명을 회피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볼셰비키주의에 대한 이런 비판자들은 모두 이론에 관한 겁쟁이다 : 왜냐하면 확고한 자기 의견이 없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의 파산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사실을 조작하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염탐한다. 이들은 단지 자신의 학식을 충분히 보여줄 시간이 없는 것처럼 암시와 애매한 생각을 말하는 선에서 그친다. 사실 이들은 뭔가 말해줄만한 학식이 없다. 이들의 오만함은 지식인들의 허풍으로 가득 차 있다.

이 필자의 암시와 애매한 생각을 하나하나 분석해보자. 그에 따르면, 대중의 그릇된 정책은 ‘사회세력의 상태를 나타내는’ 즉, 노동자계급의 미성숙과 농민의 독자성 결여로밖에 설명될 수 없다. 동어반복을 유심히 살펴본 사람이라면, 대체로 이보다 더 밋밋한 동어반복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대중의 그릇된 정책’이 대중의 ‘미성숙’에 의해 설명되고 있다. 그러나 대중의 ‘미성숙’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말할 필요도 없이 그릇된 정책에 빠지기 쉬운 경향이다. 그릇된 정책은 무엇으로 이루어져있는가, 그리고 누가 그것을 주창했는가, 대중인가 지도자인가? 이 점에 대해 필자는 침묵으로 일관한다. 동어반복을 통해 그는 대중에게 책임을 전가한다. 모든 배반자와 도망자, 그리고 그 변호인들의 이런 고전적인 수법은 스페인 노동자계급과 관련해서 특히 비위에 거슬린다.

 

 

배신자의 궤변

1936년 7월一이전 시기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一스페인의 노동자는 인민전선의 비호 하에 음모를 꾸민 장교들의 공격을 물리쳤다. 대중은 임시변통으로 의용군을 조직하고, 미래 노동자독재의 거점인 노동자위원회를 수립했다. 이에 반해서, 노동자계급의 지도적 조직은 자본가계급이 이 위원회를 파괴하고, 사적 소유에 대한 노동자의 공격을 일소하고, 노동자의용군을 자본가계급의 지휘에 따르도록 도왔다. 게다가 노동자 당은 카탈로니아정부에 참여함으로써, 이런 반(反)혁명 활동에 대한 책임을 직접 떠맡았다.

이 경우, 노동자계급의 ‘미성숙’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주지하듯 이것은 단 한 가지 사실만을 의미한다. 즉, 대중은 올바른 정치노선을 선택했음에도 불구하고 자본가계급과 사회주의자, 스탈린주의자, 무정부주의자, 노동자당의 연립정부를 분쇄시킬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궤변은 어떤 절대적인 성숙의 개념을 그 출발점으로 삼는다. 즉, 올바른 지도부를 필요로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자기 지도부에 대항하여 승리할 수 있는 대중의 완전무결한 상태를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성숙은 있지도 않고, 또 있을 수도 없다.

그러나 왜 이와 같은 올바른 혁명적 본능과 탁월한 투쟁자질을 발휘한 노동자가 배신적인 지도부에 복종했는가?一이 박식한 양반들은 이렇게 반론한다. 우리의 대답은 이렇다 : 털끝만한 복종도 없었다. 노동자의 진로는 언제나 지도부의 노선에 대해서 일정한 각도를 이룬다. 그리 고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이 각도는 180도를 이룬다. 그 결과, 지도부는 직간접적으로 노동자를 무력으로 제압하게 된다.

1937년 5월, 카탈로니아의 노동자들은 자신의 지도부를 가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지도부에 대항하여 봉기했다. 무정부주의 지도자들一애쓰지 않고 혁명가로 가장한 측은하고 한심한 부르주아들一은 자신의 신문을 통해 수백 번 반복했다 : 5월에 전국노동자연맹이 권력을 장악하고 독재를 수립하고자 했다면, 쉽게 그렇게 할 수 있었다. 이때 무정부주의 지도자들은 자신의 순수한 충정(衷情)을 표명한 것이다. 노동자당 지도부는 실제로 전국노동자연맹에 질질 끌려 다녔다. 아들은 단지 전국노동자연맹의 정책을 다른 용어로 완전히 감추어주었을 뿐이다. 자본가계급이 ‘미성숙한’ 노동자계급의 5월 봉기를 분쇄하는데 성공한 것은 이 덕분이었다. 다른 이유는 없다.

스페인 대중은 단지 자신의 지도자를 따랐을 뿐이라는 공허한 주장을 되풀이하는 것은 계급과 당, 대중과 지도자 사이의 상호관계에 대해서 전혀 이해하지 못한 사람일 것이다. 단 하나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언제나 올바른 길로의 돌파구를 열려고 노력해온 대중은 투쟁의 한가운데에서 혁명의 요구에 일치하는 새로운 지도부를 만들어내는 것은 자신의 능력이 미치지 않는 일임을 알게 된다는 점이다. 우리의 앞날은 혁명의 다양한 단계가 급속히 바뀌고, 지도부나 지도부의 다양한 부위가 재빨리 계급의 적 진영으로 도망치는 완전히 동적인 과정이다. 그런데도 이 박식한 양반들은 단지 정적인 논의에 사로잡혀 있다 : 왜 전체 노동자 계급은 수준 미달의 지도부를 따랐는가?

 

변증법적 접근

진화론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역사관에서 나온 오랜 경구가 있다 : 모든 국민은 그에 상응하는 정치체제를 갖는다. 그러나 역사는 동일한 국민이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 안에 매우 다른 정치체제를 가질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러시아, 이탈리아, 독일, 스페인 등). 게다가 이런 정치체제 의 순서가 동일한 방향으로 즉, 자유주의적 진화론자가 상상한 것처럼, 독재에서 자유로 나아가지도 않는다. 그 비밀은 국민이 적대적인 계급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계급 자체도 상이할 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는 각기 다른 지도를 받는 적대적인 계층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 있다. 게다가 모든 국민은 계급으로 이루어진 것과 마찬가지인 다른 나라 국민의 영향을 받는다. 정치체제는 ‘국민’의 체계적으로 증대하는 ‘성숙’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계급 사이의 투쟁과 동일한 계급 내부의 다른 계층 사이의 투쟁의 산물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외부세력의 행동 즉, 동맹, 대립, 전쟁 등의 산물이다. 여기에다 정치체제는 일단 수립되면, 그 자체로 정치체제를 만들어낸 세력들의 관계보다 훨씬 더 장기간에 걸쳐 지속된다는 점을 덧붙여야 한다. 바로 이런 역사적 모순에서 혁명이나 쿠데타, 반(反)혁명 등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변증법적 접근이야말로 한 계급의 지도부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것이다. 자유주의자인 체하는 〈끄 페르〉지의 박식한 양반들은 모든 계급은 그에 상응하는 지도부를 갖는다는 격언을 넌지시 받아들인다. 그러나 실제로 지도부는 계급의 단순한 ‘반영’이거나 계급 자신의 자유로운 창조물이 결코 아니다. 지도부는 다른 계급 사이의 충돌이나 해당 계급 안의 다른 계층 사이의 마찰이라는 과정을 통해 형성된다. 이렇게 해서 일단 지도부가 세워지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그 계급을 초월함으로써 다른 계급의 압력이나 영항을 받기 쉬워진다. 노동자 계급은 이미 완전한 내적 타락을 겪었지만 거대한 사태 속에서 아직까지 이 타락을 발현시킬 기회를 갖지 않은 지도부를 장기간에 걸쳐서 ‘묵인’할 수도 있다.

지도부와 계급 사이의 모순이 날카롭게 폭로되기 위해서는 거대한 역사적 충격이 필요하다. 가장 강력한 역사적 충격은 전쟁과 혁명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노동자계급은 종종 부지불식간에 전쟁과 혁명에 기습을 당하는 것이다. 그러나 구 지도부가 그 내적 타락을 드러낸 경우에도 해당 계급이 즉시 새로운 지도부를 임시변통으로 만들 수는 없다. 특히 해당 계급이 그 이전 시기부터 낡은 지도적 정당의 붕괴를 활용할 수 있는 강력한 혁명적 중핵을 물려받지 못한 경우에는 그렇다. 계급과 그 지도부 사이의 상호관계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인 해석 즉, 변증법적이고 스콜라적이지 않은 해석은 〈끄 페르〉지 필자의 형식에 치우친 궤변에 대한 유일한 처방이다.

 

러시아의 노동자는 성숙했는가.

그는 노동자계급의 성숙을 완전히 정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혁명의 와중에서 어느 계급의 의식은 혁명의 진로를 직접적으로 결정하는 가장 동적인 과정인 것이다. 1917년 1월이나 심지어 이미 짜르체제를 타도한 3월에 러시아 노동자계급이 향후 8~9개월 사이에 권력을 장악할 정도로 충분히 ‘성숙’했는지를 묻는 질문에 답할 수 있었는가?

노동자계급은 당시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도 대단히 이질적이었다. 전쟁 중에 벌써 노동자계급의 30~40%가 소부르주아 계급 출신들로 교체되었다. 이들은 대개 반동적이었으며, 후진적인 농민이나 여성, 청년 등이었다. 1917년 3월에 볼셰비키당을 지지했던 것은 노동자계급의 보잘것없는 소수에 지나지 않았으며, 게다가 당내에서는 여러 의견이 대립했다. 노동자의 압도적 다수는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 즉, 보수적인 사회애국주의자들을 지지했다. 군대와 농민에 관해서는 상황이 한층 더 불리했다. 여기에 다음과 같은 사실을 덧붙여야 한다 : 러시아의 전반적인 문화수준이 낮고, 농민이나 병사는 말할 것도 없고 노동자계급의 가장 광범한 계층에서도 정치적 경험이 부족했다. 특히 지방에서 그랬다.

볼셰비키주의의 강점은 무엇이었는가? 혁명 초에 명확하고 여러 모로 철저하게 생각한 혁명적 구상은 오직 레닌만이 품고 있었다. 당의 러시아 중핵은 분산되어 있었으며, 상당히 당황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은 선진 노동자 사이에 권위가 있었다. 레닌은 당의 중핵에 대해서 커다란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레닌의 정치적 구상은 현실의 혁명발전에 일치했으며, 매번 새로운 사태에 의해 강화되었다. 이러한 강점은 혁명정세 즉, 격렬한 계급투쟁의 상황 속에서 놀랄만한 성공을 거두었다. 당은 자신의 정책을 신속하게 레닌의 구상에 합치시켰다. 즉, 혁명의 실제적 진로에 합치시켰다. 이 덕분에 당은 수많은 선진 노동자들 사이에서 확고한 지지를 얻었다. 몇 개월 안에 당은 혁명의 발전 자체에 근거함으로써 다수의 노동자들에게 자신의 구호의 올바름을 확신시킬 수 있었다. 소비에트로 조직된 다수의 노동자들은 이번에는 자기가 병사와

농민을 끌어당길 수 있었다.

이런 동적이고 변증법적인 과정이 어떻게 노동자계급의 성숙이나 미성숙이라는 정식에 의해 망라될 수 있는가? 1917년 2월이나 3월에 러시아 노동자계급의 성숙에서 거대한 요인은 바로 레닌이었다. 그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러시아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전통을 체현 하고 있었다. 레닌의 구호가 대중에게 이르기 위해서는 처음에 비록 그 수가 작더라도 중핵이 존재해야 했다. 중핵과 지도부 사이에는 신뢰가 있어야 했으며, 이 신뢰관계는 과거의 경험 전체에 근거했다. 이런 요소를 미래에 대한 고려로부터 삭제하는 것은 정말로 살아있는 혁명을 묵살하고, ‘세력관계’를 추상으로 대체하려는 것이다. 왜냐하면 혁명의 발전은 바로 노동자계급의 의식의 변화 효과 속에서 세력관계의 끊임없는, 그리고 급속한 변화, 후진적 계층의 선진적 계층으로의 견인, 자신의 힘에 대한 계급의 점증하는 확신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당의 구조에서 결정적인 추진력이 지도부인 것과 꼭 마찬가지로 이 과정의 결정적 추진력은 당이다. 혁명적 시기에서 지도부의 역할과 책임은 거대하다.

 

‘성숙’의 상대성

10월의 승리는 러시아 노동자계급의 ‘성숙’을 나타내는 중대한 증거이다. 그러나 이 성숙은 상대적이다. 몇 년 뒤, 바로 같은 노동자계급은 자신의 대오에서 자라난 관료주의가 혁명을 질식시키도록 내버려두었다. 승리는 노동자계급의 ‘성숙’의 잘 익은 과실이 결코 아니다. 승리는 전략적 과제이다. 대중을 동원하기 위해서는 혁명적 위기의 유리한 조건을 잘 활용해야 한다. 대중의 ‘성숙’ 정도를 출발점으로 삼고, 이를 더욱 발전시켜서 적은 결코 전능하지 않다는 사실, 적은 자가당착에 의해 갈기갈기 찢겨 있다는 사실, 당당한 외관 뒤에는 공포가 만연해 있다는 사실을 대중이 이해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만약 볼셰비키당이 이 임무 수행에 실패했다면, 노동자혁명의 승리는 입 밖에도 꺼내지 못했을 것이다. 소비에트는 반(反)혁명에 의해 분쇄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모든 나라의 얄팍한 현자 양반들은 러시아에서 수적으로 너무 소수이고, 또 미성숙한 노동자계급의 독재를 꿈 꿀 수 있다는 것은 단지 환상에 지나지 않았다는 기조의 논문과 책을 썼을 것이다.

 

농민의 보조적 역할

(스페인혁명의 패배 원인으로서) 농민의 ‘독자성 결여’를 언급하는 것은 노동자계급의 미성숙과 마찬가지로 추상적이고 현학적이며 그릇된 것이다. 〈끄 페르〉지의 박식한 양반들은 자본주의사회에서 독자적으로 혁명적인 강령을 내걸거나 독자적으로 혁명을 주도할 역량을 가진 농민을 도대체 언제, 어디에서 목격했는가? 농민이 혁명에서 매우 중대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역할에 지나지 않는다.

대부분의 경우, 스페인 농민은 대담하게 행동했으며, 용감하게 싸웠다. 그러나 농민대중 전체를 각성시키기 위해서는 노동자계급이 자본가 계급에 대한 결정적 봉기로 본을 보여야 했다. 그리고 승리의 가능성에 대한 확신을 농민에게 불어넣어야 했다. 그 사이에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주도력 자체는 자신의 조직에 의해 차츰 마비되었다.

노동자계급의 ‘미성숙’, 농민의 ‘독자성 결여’는 역사적 사건에서 최종적이거나 기본적인 요인이 아니다. 계급의식의 기초를 이루는 것은 계급 자신, 그 수적인 힘, 경제활동에서의 그 역할이다. 그리고 계급의 기초를 이루는 것은 생산의 특수한 시스템이고, 이 시스템은 생산력의 발전 수준에 의해 결정된다. 그렇다면 왜 스페인 노동자계급의 패배는 낮은 기술 수준에 의해 결정되었다고 말할 수 없는가?

 

개인의 역할

〈끄 페르〉지의 필자는 역사발전 과정의 변증법적인 조건을 기계적 결정론으로 대체하고 있다. 이 때문에 선하거나 악한 개인의 역할을 우습게 여긴다. 역사는 계급투쟁의 과정이다. 그러나 계급이 자동적으로, 그리고 동시에 자신의 모든 힘을 쏟지는 않는다. 투쟁의 과정에서 계급 은 다양한 기관을 창출하는데, 이 기관은 중요하고 독자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변형을 겪는다. 이는 또한 역사에서 개인의 역할에 대한 근거를 제공한다. 물론 히틀러의 전제적 지배를 낳은 커다란 객관적 원인이 있지만, 오늘날 히틀러 개인의 극악한 역사적 역할을 부정할 수 있는 것은 ‘결정론’에 사로잡힌 머리 둔한 현학자들뿐이다. 1917년 4월 3일, 레닌이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덕분에 볼셰비키당은 제때에 방향을 바꿨으며, 혁명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끄 페르〉지의 박식한 양반들은 만약 레닌이 1917년 초에 해외에서 죽었다면 10월 혁명은 ‘어쨌든’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레닌은 역사발전 과정의 살아 움직이는 요소 가운데 하나였다. 레닌은 노동자계급 가운데 가장 적극적인 부위의 경험과 통찰력을 체현하고 있었다. 전위를 동원하고, 전위가 노동자계급과 농민 대중을 결집할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레닌이 혁명의 무대에 때맞춰 나타날 필요가 있었다. 역사적 전환의 결정적 순간에 정치적 지도부는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 전쟁의 결정적 순간에 최고 지휘관의 역할이 결정적 요인인 것과 꼭 마찬가지다. 역사는 자동적인 과정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지도자, 당, 강령, 이론 투쟁이 도대체 왜 필요한가?

 

스페인의 스탈린주의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끄 페르〉지의 필자는 이렇게 묻는다 : “그러나 도대체 왜 이전 지도자들과 결별한 혁명적 대중이 공산당의 기치로 결집했는가?” 문제가 잘못 제기되어 있다. 혁명적 대중이 이전 지도자들 전부와 결별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전부터 특정 조직과 연결되어 있던 노동자들은 계속 조직에 밀착하는 동시에 정세를 관찰, 확인하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대체로 자신의 의식생활을 일깨운 당과 쉽게 결별하지 않는다. 게다가 인민전선 안에서의 상호적 보호는 노동자들을 안심시켰다 : 모두의 의견이 일치하고 있는 이상, 틀림없이 모든 일이 다 잘될 것이다. 경험이 없지만 생기 넘치는 대중은 자연스럽게 코민테른에 의지했다. 왜냐하면 코민테른은 노동자혁명을 승리로 이끈 유일한 당이었으며, 스페인에 틀림없이 무기를 대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코민테른은 인민전선이라는 사상을 가장 열심히 옹호하고 있었다. 인민전선은 경험이 없는 노동자 계층 사이에서 공산당에 대한 신뢰를 고취시켰다. 코민테른은 인민전선 내부에서 혁명의 부르주아적 성격을 가장 열심히 옹호하고 있었다. 이것은 소부르주아 계급과 일부 중 간 자본가계급의 신뢰를 고취시켰다. 이런 이유 때문에 대중은 ‘공산당의 기치로 결집했던’ 것이다.

〈끄 페르〉지의 필자는 마치 노동자계급이 좋은 물건이 많은 구둣가게에서 새 신발을 선택하는 것처럼 사태를 그리고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이렇게 간단한 일조차도 언제나 결과가 좋은 것은 아니다. 하물며 새로운 지도부에 관해서는 이러한 선택이 극히 제한적이다. 대중의 광범위한 층이 새로운 지도부가 구 지도부보다 더 확고하고, 더 신뢰할 수 있으며, 더 충실하다는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은 점차적으로만, 그리고 여러 단계를 거친 자신의 경험에 근거해서만 가능하다. 물론 혁명이 진행되는 동안 즉, 사태가 신속히 진전된다면, 세력이 약한 당도 당이 혁명의 과정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다면, 빈말에 현혹되지 않고 탄압을 무서워하지 않는 견고한 중핵을 가지고 있다면, 강력한 당으로 급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중핵을 교육하는 과정은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하고, 혁명은 이런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는 까닭에 이러한 당은 혁명에 앞서 존재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통일노동자당의 배신

스페인의 다른 모든 정당들 가운데 왼쪽에 위치해 있던 통일노동자당은 혁명 전에 무정부주의에 견고하게 의지하지 않은 혁명적 노동자 분자들을 결집하고 있었다. 이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스페인혁명의 발전 속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던 것도 바로 이 당이었다. 통일노동자당이 대중정당이 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우선 기존 정당들을 꺼꾸러뜨려야 했으며, 이는 비타협적인 투쟁에 의해서만, 기존 정당들의 부르주아적 성격을 가차 없이 폭로하는 것에 의해서만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일노동자당은 기존 정당들을 비판하는 한편으로 모든 근본 문제들에서 자발적으로 기존 정당들을 따랐다. 통일노동자당은 ‘인민’선거연합에 참여했으며, 노동자위원회를 해체시킨 정부에 입각했으며, 이 연립정부를 재건하는 투쟁에 적극 관여했으며, 여러 번 무정부주의 지도부에 굴복했으며, 이와 관련하여 그릇된 노동조합 정책을 실시했다. 결국 통일노동자당은 1937년 5월의 봉기에 대해서 우유부단하고 비(排)혁명적인 태도를 취했다.

물론 일반적인 결정론의 입장에서 보면, 통일노동자당의 정책은 우연이 아니었다고 인정할 수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일은 다 그 원인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통일노동자당의 중도주의를 낳은 일련의 원인은 결코 스페인이나 카탈로니아 노동자계급의 상태에 대한 단순한 반영이 아니다. 서로 다른 각도로 접근하던 두 개의 인과관계가 어느 순간에 적대적 충돌을 일으킨 것이다.

그 이전의 국제적 경험, 모스크바의 영향력, 수많은 패배로부터 받은 영향 등을 고려하면 왜 통일노동자당이 중도주의 정당으로 발전했는지를 정치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통일노동자당의 중도주의적 성격이 바뀌지는 않는다. 또 중도주의 정당은 매번 혁명의 브레이크가 되어 매번 자충수를 두고, 경우에 따라서는 혁명을 붕괴시킬 수도 있다는 사실이 바뀌지도 않는다. 또한 카탈로니아 대중이 통일노동자당보다 훨씬 더 혁명적이었다는 사실, 통일노동자당 자신은 당 지도부보다 혁명적이었다는 사실이 바뀌지도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그릇된 정책의 책임을 대중의 ‘미성숙’에 전가하는 것은 정치적 파산자들이 흔히 의지하는 황당무계한 허풍을 떠는 것이다.

 

지도부의 책임

역사가 이렇게 날조되어 있다 : 스페인 대중의 패배에 대한 책임은 대중의 혁명운동을 마비시키거나 간단히 진압했던 정당들이 아니라 노동자 대중에게 있다. 노동자당의 변호인은 간단하게 지도자의 책임을 부정한다. 그는 자신이 책임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이렇게 한다. 보편적인 발전의 연쇄에서 빠뜨려서는 안 될 고리로서 패배를 감수하려는 이 무력한 철학은 강령, 당, 패배를 조직했던 개인들과 같은 구체적인 요인을 전혀 문제 삼지 않거나 문제 삼으려 하지 않는다. 이러한 운명론과 굴종의 철학은 혁명적 행동 이론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와 정반대 이다.

내전은 정치적 과제가 군사적 수단에 의해 해결되는 과정이다. 만약 이 전쟁의 결과가 ‘계급세력의 상태’에 의해 미리 결정되었다면, 전쟁 자체가 필요치 않을 것이다. 자신의 조직, 자신의 정책, 자신의 방식, 자신의 지도부를 가지고 있는 전쟁은 이것들에 의해 그 운명이 직접적으로 결정된다. 물론 ‘계급세력의 상태’는 다른 모든 정치적 요인들의 토대를 제공한다. 그러나 건축물의 토대가 벽, 창, 문, 지붕 등의 중요성을 감소시키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계급의 상태’는 당, 전략, 지도부의 중요성을 무용지물로 만들지 않는다. 구체적인 것을 추상적인 것으로 해소시킴으로써 〈끄 페르〉지의 박식한 양반들은 정말로 중도에서 멈춰버렸다. 문제를 가장 ‘완전하게’ 해결하기 위해서 이들은 스페인 노동자계급의 패배는 생산력의 불충분한 발전 때문이라고 선언해야만 했을 것이다. 이런 답은 멍청이라도 할 수 있다.

〈끄 페르〉지의 박식한 양반들은 당과 지도부의 중요성을 최하로 줄임으로써 대체로 혁명 승리의 가능성을 부정한다. 왜냐하면 더 유리한 상황을 기대할 근거가 조금도 없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전진을 멈췄다. 노동자계급은 수적으로 증대하지 않고 있지만 노동자계급의 전투능력을 증진시키는 것이 아니라 감소시키는데다가 계급의식에 부정적 영향을 주고 있는 실업자군대가 증대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체제 아래에서 농민이 고도의 혁명적 의식에 이를 수 있다고 믿을만한 근거도 전혀 없다. 따라서 〈끄 페르〉지 필자의 분석으로부터 나오는 결론은 완벽한 비관주의이며, 혁명적 전망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공정하게 말해서, 이들은 자신이 말하고 있는 것을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실제로 이들이 대중의 의식에 대해 제기하고 있는 요구는 완전히 공상적인 것이다. 스페인 노동자와 농민은 모두 혁명정세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것을 보여주었다. 우리가 잊지 않아야 하는 것은 바로 몇 백, 몇 천만의 계급이다.

계급투쟁의 발전과 반동의 내습으로 인해 충격을 받아 작은 잡지를 발행하며 대중운동은 물론이고 혁명사상의 실제적 발전으로부터도 떨어져 방관자로서 한쪽 구석에서 이론적 습작이나 하고 있는 소규모 서클이나 교회, 성당 등이 존재하는데, 〈끄 페르〉지는 그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스페인혁명의 압살

스페인 노동자계급은 제국주의자, 스페인 공화주의자,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 스탈린주의자와 좌익의 통일노동자당으로 구성된 연립정부의 희생물이 되었다. 이들은 실제로 스페인 노동자계급이 실현하기 시작했던 사회주의혁명을 완전 무력화시켰다. 그러나 사회주의혁명을 제거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아직까지 무자비한 탄압, 전위의 학살, 지도자의 처형 외에 다른 방법을 고안해낸 사람은 없다. 물론 통일노동자당은 이것들을 바라지 않았다. 통일노동자당은 한편으로는 공화국 정부에 참여하여 충실한 평화애호 야당으로서 지배정당들의 공동블록에 들어가려고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무자비한 내전이 쟁점이 되었을 때, 평화적인 동지적 관계를 수립하려고 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통일노동자당은 자기 정책의 모순의 희생물이 되었던 것이다.

지배블록 안에서 가장 일관된 정책을 폈던 것은 스탈린주의자였다. 이들은 부르주아 공화주의 반(反)혁명의 전투적 전위였다. 이들은 ‘민주주의’의 기치 아래 노동자혁명을 교살할 수 있음을 스페인과 전 세계 자본가계급에게 입증함으로써 파시즘의 필요성을 없애고 싶어 했다. 이것이 이들 정책의 골자이다. 이들은 현재, 스페인 인민전선의 파산 책임을 게페우의 탓으로 돌리고 있다. 우리도 게페우의 범죄에는 조금도 관대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사태를 명확히 파악하고, 노동자에게 솔직히 말한다 : 이번 경우, 게페우는 인민전선에 고용된 가장 결연한 부대로서 행동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점에서 게페우는 강점이 있었던 것이고, 스탈린의 역사적 역할이 있었던 것이다. 오직 무지한 속물들만이 악마의 두목에 대한 시시하고 어리석은 농담으로 이 사실을 요리조리 비켜갈 것 이다.

이런 양반들은 스페인혁명의 사회적 성격이라는 문제로 귀찮게 하지도 않는다. 영국과 프랑스를 위하여 모스크바의 아첨꾼들은 스페인혁명은 부르주아혁명이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이런 기만에 근거하여 인민전선의 배신적 정책을 세웠었다. 이 정책은 비록 스페인혁명이 정말로 부르주아혁명이었다고 하더라도 완전히 잘못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스페인혁명은 처음부터 러시아의 1917년 혁명보다 훨씬 더 생생하게 혁명의 노동자적 성격을 드러냈다. 최근 통일노동자당 지도부의 일원이었던 양반들은 안드레스 닌의 정책이 너무 ‘좌익적’이었으며, 정말로 올바른 정책은 인민전선의 좌익으로 남는 것이었다고 여기고 있다. 그러나 진짜 불행은 닌이 레닌과 10월 혁명의 권위를 한 몸에 누리면서, 인민전선과 결별할 결심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중대한 문제에 대해서 경솔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체면을 구기고 싶어 하는 빅토르 세르쥬는 닌이 오슬로나 코요아칸의 지령에 따르고 싶어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정말로 진지한 인간이라면 감히 혁명의 계급적 내용의 문제를 객쩍은 잡담으로 바꿀 수 있는가? 〈끄 페르〉지의 박식한 양반들은 이 물음에 대해 어떠한 답도 하지 않는다. 이들은 질문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다. 통일노동자당이 부르주아 공화주의자들은 물론이고 부르주아 사회주의자나 스탈린주의자와 동맹해 노동자혁명을 공격하고 교살한 부르주아 무정부주의자와 결별하지 않으려고 전력을 다해 노력했던 반면에, ‘미성숙한’ 노동자계급은 자신의 권력기관을 수립하고, 기업을 몰수하고, 생산을 통제하려고 애썼다. 정말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런 사실이다! 이러한 ‘잡담’은 단지 ‘경직된 정통적 신념’의 대표자에게나 흥미로운 것이다. 그 대신에 〈끄 페르〉지의 박식한 양반들은 혁명적 계급전략의 모든 문제와는 별개로 노동자계급의 성숙도와 세력관계를 측정하는 특별한 장치를 가지고 있다. … (여기서 중단됨)

1940년 8월 20일, 미완성

 

스페인 볼셰비키-레닌주의자의 강령

* (Revolutionary History)(Vol 1 No2, Summer 1988) -‘The Spanish Left in its own words’ 중에서

 

트로츠키주의자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1. 파시즘을 패배시키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무기는 노동자혁명이라는 무기이다. 자본가 민주주의라는 썩은 토양에서만 번성하는 파시즘과 그 뿌리를 파멸시키기 위해서는 착취자를 착취함으로써, 낡은 국가기구의 완전한 파괴를 통해서 가능하다. 이행기 중에 우리는 외국 자본주의 에 의지하여 혼자서 살아남은 자본가계급을 겨냥한 노동자계급의 독재를 수립하기를 바란다. 반면에, 자본가계급은 사적 소유와 부르주아 체 제를 복구시키려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시도의 대표적 사례는 현재 자본가계급, 특히 통일사회당(PSUC)의 부정직한 술책이다. 노동자계급의 독재야말로 진정한 노동자 민주주의 일 것이다. 왜냐하면 부의 특권은 사라 질 것이며, 자본주의 착취에서 해방된 노동자는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2. 노동자계급이 권력을 잡을 수 없는 동안, 우리는 오래가지 않을 자본주의 체제의 틀 내에서 노동자의 민주주의적 권리를 지킬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공개적으로, 그리고 어떠한 술책도 부리지 않고 전국노동자연맹-통일노동자당-무정부주의 연합 공동전선의 투쟁을 요구 했다. 우리는 절대로 계급 적이 노동자 조직을 파괴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설령 우리 정적의 문제라도 말이다. 어제 우리는 통일노동자당의 옹호를 요구했다. 오늘 우리는 인민재판소에서 무정부주의 연합을 배제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항의한다. 내일 우리는 무기를 들고 전국노동자연맹을 옹호할 것이다. 우리는 노동자 민주주의의 열렬한 지지자였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3. 우리는 노동자, 농민, 병사의 혁명위원회 구성을 지지한다. 이들 위원회는 각 공장, 마을, 부대에서 민주적으로 선출되어야 한다. 또한 대의원은 다수가 결정한다면 언제라도 소환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종류의 위원회는 7월 시기에 이미 구성되었다. 대중의 진정한 바람은 이들 위원회에서 가장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 위원회는 혁명의 승리, 공공질서의 유지, 경제와 분배의 통제 방어를 그 임무로 삼을 것이다. 각 당은 자신의 해결책을 제의할 것이고, 대중이 결정할 것이다.

4. 우리는 이른바 인민전선 정부에 반대한다. 이 정부는 실제로 인민의 절대다수를 대표하지 못한다. 우리는 계급협조에 반대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노동자계급 대표를 빠뜨릴 함정이기 때문이다. 이런 정부와의 타협은 필연적으로 배신으로 이어진다. 유일한 해결책은 국가의 관리를 떠맡을 혁명위원회를 도처에서 수립하는 것이다. 위원회의 모든 대의원들이 참석하는 대회를 소집하는 것이다. 노동자 농민 병사위원회 대의원 중에서 중앙위원회를 선출하는 것이다. 이러한 혁명위원회에서 배신이란 절대로 있을 수 없으며, 따라서 전쟁을 승리로 귀결지을 수 있을 것이다.

 

5. 우리의 목표는 자본가의 완전한 몰수이다. 지금까지 은행은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했으며, 교환수단은 부르주아 정부의 통제 하에 있다. 우리는 통일사회당이 열정적으로 요구한 ‘시유화’에 명확히 반대한다. 이것은 실제로 신디케이트로부터 기업을 빼앗아 반동정부의 통제 하에 두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구호는 완전한 사회화, 혁명위원회 내 경제 위원회의 지도하에 대외무역의 독점 수립이다.

6. 우리는 토지의 국유화 즉, 사적 지주제도의 폐지를 요구한다. 고리 대금업자는 더 이상 농민에게서 토지를 빼앗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농민이 스스럼없이 동의할 경우에만 농업기업의 집산화를 지지한다. 토지의 분배는 ‘일하는 사람을 위한 토지’라는 원칙에 따라 농민위원회에 의해 실시되어야한다.

7. 우리는 일원화된 지휘체계 하에 중앙집중화된 군대만이 군사적 승리를 확보할 수 있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혁명의 군대는 개개 병사들이 정치적 권리를 누리고, 장교는 병사집회에서 선출되고 소환될 수 있어야 한다. 급료는 모두가 같아야 한다. 일원화된 지휘체계는 혁명 위원회 내 전쟁위원회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 이러한 군대에서 병사의 열정과 그 혁명적 경계심은 물리적, 기술적 부족을 메울 것이다.

8. 우리는 소수민족이 스스로 자신의 거취를 정할 권리를 지지한다. 그리고 분리권을 포함하여 모로코 인민의 절대적 자유를 지지한다. ‘모로코인을 위한 모로코’라는 구호는 공개적으로 선언되자마자, 모로코의 피억압 대중 사이에 봉기를 촉진하고, 파시스트 외인부대에 분열을 일으킬 것이다. 우리는 사회주의공화국연방을 지지한다. 왜냐하면 이것이 노동자계급의 이해에 가장 잘 부합하기 때문이다. 또한 틀림없이 모든 노동자들의 자유롭고 형제다운 결합을 스스럼없이 만들어낼 것이다.

9. 우리는 러시아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체하는 동시에 스페인과 전 세계의 사회주의혁명을 사보타지하고 있는 스탈린주의 관료집단과 싸운다. 우리의 최종 목표는 세계혁명과 전 세계에 걸친 사회주의의 수립이다. 이것이 소비에트 연방에서 일어난 것과 같은 관료층에 의한 노동자 승리의 강탈을 막아낼 유일한 보장책이다. 우리는 제3 인터내셔널의 인민위원들과 제2 인터내셔널의 부르주아 장관들에게나 익숙한 불간섭주의에 반대한다. 우리는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개입과 스페인혁명의 유럽혁명으로의 전화를 요구한다.

10. 기존 조직은 우리를 궁지로 이끌고 있다. 파시스트 속물과 전체 자본가계급에 대한 승리는 전적으로 유능한 지도력에 달려있다고 깊이 확신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를 임무로 삼고 투쟁을 통해 건설될 새로운 혁명정당에 우리의 노력을 집중할 것이다. 그 단단한 기초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세우고, 레닌과 트로츠키로 이어진 과학적 사회주의의 강령일 것이다. 제2, 제3 인터내셔널의 굴욕적인 배신에 직면하여 우리는 사회주의혁명의 세계당일 새로운 제4 인터내셔널로 지조 있는 모든 혁명가를 다시 묶어세울 것이다. 제4 인터내셔널의 더렵혀지지 않은 사회주의의 기치 아래 승리할 것이다! 동지들! 우리는 우리의 첫째 임무가 프랑코 일당을 패주시키는 것임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여러분도 알다시피 군사적 승리는 사회혁명과 불가분의 관계이다. 우리는 공공연히, 술책 부리지 않고 재앙이 될 것 같은 정책에 맞서 싸울 것이다. 사회혁명의 심화는 참호의 공동전선을 약화시키기는커녕 우리 의용병의 투쟁정신을 북 돋울 것이다. 우리는 1936년 7월 정신이 되살아나가를 바란다. 당시의 열정과 지금의 전쟁과 경험을 통해 우리는 자본주의 굴레에서 해방된 사회주의 스페인에서 1936년 7월을 축하할 것이다.

우리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혁명가들에게 호소한다. 와서 함께 하자!

우호적인 토론을 통해서 견해 차이를 말끔히 없애고, 투쟁으로 단결합시다. 우리의 공통된 적을 패주시킵시다!

 

파시즘과 자본주의 타도하자!

스페인 노동자혁명 만세!

세계혁명만세!

 

1937년 7월 19 일 바르셀로나

볼셰비키-레닌주의자 스페인 지부(제4 인터내셔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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