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국가, 테르미도르 그리고 보나파르티즘(1935)

by 볼셰비키-레닌주의자 posted Dec 29, 2012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노동자국가, 테르미도르 그리고 보나파르티즘

스탈린주의 관료의 외교 정책들은, 일차적으로 외교 그리고 부차적으로 코민테른의 채널을 통해, 국가연합(UN의 전신), 현상 유지, 그리고 개량주의자들과 부르주아 민주주의와의 동맹 쪽으로 급선회해 왔다. 동시에, 국내 정책들은 시장과 “부유한 집산 농민들”쪽으로 선회해왔다. 반대자와 준반대자 그룹들, 뿐만 아니라 조금이라도 비판적인 인사들에 대한 최근의 대대적인 추방과 숙청은, 스탈린이 오른쪽으로 쉽게 나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것은 곧 (쿨락[부유한 농민], 국민당과의 동맹, 앵글로-러시아 위원회 등에 모든 것을 거는) 과거로의, 그러나 훨씬 큰 규모에서 그리고 헤아릴 수 없이 더 부담스러운 조건하에 있는, 복귀이다. 이 과정은 어디로 귀결되는가? “테르미도르”라는 말이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불행하게도, 이 단어는 사용하자마자 참신함을 잃었다. 그것은 자신의 구체적인 내용을 잃었고, 스탈린 관료가 어느 국면을 지나고 있는지, 어떤 재앙이 준비되고 있는지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의 용어를 정립해야만 한다.

“테르미도르”에 관한 문제는 소련 좌익반대파의 역사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누가 처음으로 테르미도르라는 역사적 비유를 사용했는지 밝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찌 되었건, 이 문제에 대한 1926년의 입장들은 다음과 같다. “민주주의적 중앙주의” 그룹(스탈린에 의한 유배에서 박해로 죽은 스미르노프, 사프로노프, 그리고 다른 이들)은 “테르미도르는 이미 실현된 사실!”이라고 선언했다. 한편 좌익반대파 강령 고수자들인, 볼세비키-레닌주의자들은 이러한 주장에 분명하게 반대했다. 그리고 이 주제와 관련하여 분리가 있었다. 어느 쪽이 올바른 것으로 판명되었는가?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하여, 우리는 각각의 그룹이 (역사적인 비유이기에 여러 가지 함의를 지닐 수 있고, 그래서 의미가 쉽게 훼손될 수도 있는) “테르미도르”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가에 관하여 상세히 밝혀야만 한다.

구 볼셰비키 학교의 가장 총명한 대표자 중 하나였던 스미르노프를 중심으로 하는 “민주주의적 중앙주의” 그룹의 입장은 다음과 같았다. ‘산업화의 지연, 쿨락과 네프맨(새로운 부르주아지)의 성장, 그들과 관료와의 결합, 그리고 최종적으로 당의 퇴행이 새로운 혁명 없이는 사회주의의 길로의 복귀가 불가능할 정도로까지 진행되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이미 권력을 상실했다. 좌익반대파를 분쇄함으로써, 관료는 다시 살아나고 있던 부르주아 정권의 이해들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10월 혁명의 근본적 성취들은 청산되었다.’

한편, 좌익반대파의 입장은 다음과 같았다. ‘비록 이중권력의 요소들이 의심의 여지없이 나라 안에서 성장하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요소들로부터 부르주아 헤게모니로의 이행은 반혁명적 전복이 없이는 발생할 수 없다. 관료가 이미 네프맨, 쿨락과 연결되어 있었으나, 관료의 주요한 뿌리들은 여전히 노동자계급 속으로 뻗어 있다. 좌익반대파에 대항한 투쟁에서 관료는 의심의 여지없이 네프맨과 쿨락이라는 무거운 꼬리를 자신의 뒤에 끌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다음에 이 꼬리는 머리, 다시 말하면 지배 관료를 강타할 것이다. 관료 대오의 내부의 새로운 분열은 필연적이다. 반혁명적 전복의 직접적 위험에 직면하여 중앙파 관료의 기본적인 핵심부위는 성장하는 지방 부르주아지에 대항하기 위해 노동자들에 의지하게 될 것이다. 싸움의 결과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10월 혁명을 매장하기에는 너무 이르다. 좌익반대파의 붕괴가 “테르미도르”를 촉진할 것이다. 그러나 “테르미도르”는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

이후 사태 전개를 통해 명백하게 드러난 볼셰비키-레닌주의자들의 입장의 올바름을 확인하기 위해, 1926-27년 논쟁의 요지를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1927년 초, 쿨락들이 자신들의 수중에 집중하여 관리하고 있던 빵 공급을 거부함으로써 관료에게 타격을 가했다. 1928년 관료 집단 내에 분열이 발생했다. 우익은 쿨락에게 더 양보하자는 입장이었다. 과거 우익들과 함께 자신들이 분쇄했던, 좌익반대파의 사상으로 무장한 중앙파들은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아 우익을 패배시키고 산업화, 이어서 집산화의 길을 택했다. 불필요하고도 수많은 희생들을 대가로 10월 혁명의 기본적인 사회적 성과들은 종국적으로 지켜지게 되었다.

볼셰비키-레닌주의자들의 예측이 완벽하게–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가장 최선의 결과로–입증되었다. 이 점에 관하여 오늘날 어떠한 논쟁도 있을 수 없다. 생산력의 발전이 사적 소유의 복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회화와 계획 경제에 의하여 진행되었다.

테르미도르의 실제 의미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는 테르미도르의 비유가, 문제를 명확하게 하기보다는 불분명하게 했다는 것에 동의할 수 있고, 동의할 수밖에 없다. 1794년 테르미도르는 국민공회[the Convention]의 특정 그룹들로부터 다른 그룹들로의 권력 이동 즉, 승리한 “민중”의 한 영역으로부터 다른 계층으로의 권력이동을 만들어냈다. 그 테르미도르는 반혁명적이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 상황과 관련해서 “반혁명”이라는 개념을 얼마나 넓게 해석하는가에 달려있다. 1789년에서 1793년의 전복은 부르주아적이었다. 본질적으로 위의 전복은 기존의 봉건적 소유를 “자유로운” 부르주아의 소유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이 혁명에 “대응하는” 반혁명은 봉건적 소유를 재건하는 것이어야 했다. 그러나 테르미도르는 그러한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았다. 로베스피에르는 숙련공[artisan]들에게서 지지를 얻고자 했고, 총재정부는 중간 부르주아지의 지지를 획득하고자 했다. 보나파르트는 은행들과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정치적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이기도 한 이러한 모든 이동들은 새로운 부르주아 사회와 국가의 기초 위에서 발생했다.

반동으로 가는 길에서 다음의 중요한 단계인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이 동일한 정도로 중요하다. 두 가지 경우 모두에서, 문제는 과거의 소유양식이나 과거 지배계층의 권력 복원이 아니라, 승리한 “제3계급”의 서로 다른 부위들 사이에서 새로운 사회 정권의 성과를 나누는 것이었다. 부르주아지는 점점 더 많은 재산과 권력을 전유했으나 (직접적으로 그리고 즉각적으로 혹은 보나파르트와 같은 특별한 대리인들을 통해서) 혁명의 사회적 성과들에 대항해서는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았다. 반대로, 부르주아지는 간절하게 혁명의 사회적 성과들을 강화하고 조직하고 안정시키려고 노력했다. 나폴레옹은 “하층계급”과 몰수당한 재산소유자들에 맞서 농민의 것을 포함하여 부르주아적 소유를 보호했다. 봉건적 유럽은 나폴레옹을 혁명의 살아 있는 화신으로 증오했으며, 이것은 그들 입장에서 올바른 것이었다.

오늘날의 소련이 1917년에 레닌이 묘사했던 소비에트 공화국(상비 관료와 상비군이 없는, 모든 선출된 관리에 대한 항시적 소환권, 그리고 “그 개인이 누구이건 간에” 대중에 의한 적극적인 통제 등)과의 유사성을 거의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국가에 대한 관료의 지배, 뿐만 아니라 관료에 대한 스탈린의 지배가 거의 완전하게 성취되었다. 그러나 이것으로부터 어떤 결론이 도출되는가?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부터 출현한 실제 국가가 기존의 이상적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이유로 그것으로부터 등을 돌려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평화 민주주의자들, 자유주의자(Libertarian), 무정부적 조합주의자 그리고 일반적으로 소부르주아 지식인들의 극좌 써클들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정치적 속물근성이다. 한편, 이 국가가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으로부터 등장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모든 비판은 신성모독이고 반혁명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것은 바로 그 소부르주아 지식인이나 노동자국가 관료 특정 그룹의 물질적 이해관계를 감춘 위선적 주장이다. 이들 두 종류 즉, 정치적 속물과 정치적 위선자는 개인적 환경에 따라서 얼마든지 서로 바뀔 수 있다. 이 들 두 종류의 인간들은 그냥 그렇게 살라고 내버려 두자.

어떤 맑스주의자는 현재의 소련이 분명하게 소비에트 국가의 기본적인 규범에 가깝지 않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강령적 규범을 만들어낼 때 예상하지 못한 것들을 찾아보자. 나아가 어떤 사회적 요소들이 노동자 국가를 왜곡했는지를 분석해 보자. 이들 왜곡이 국가의 경제적인 기초로까지 확대되었는지, 다시 말해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기본적인 사회적 성과들이 보존되어 있는지 검토해보자. 만약 그러하다면, 그것들이 어떤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그리고 발전의 영역에서 반동에 대해 진보적 경향의 우수성을 입증하는 요소들이 소련에 그리고 세계적 영역에 있는지 찾아보자.’ 이런 접근은 복잡하다. 이것은 노력 없이 얻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대신 이것은, 속물과 위선이라는 두 질병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할 수 있고, 소련의 미래에 적극적인 영향을 미칠 가능성을 우리에게 제공할 것이다.

1926년 “민주주의적 중앙주의” 그룹이 노동자 국가가 청산되었다고 말한 선언은, 혁명이 아직 살아있는 동안에 혁명을 매장하는 것이었다. 이것과 대조적으로, 좌익 반대파는 소비에트 정권 개혁을 위한 강령을 제출했다. 스탈린주의 관료는 특권화된 계층인 자신을 보호하고 강화하기 위하여 좌익반대파를 분쇄했다. 그러나 자기 지위를 지키기 위한 투쟁 과정에서, 스탈린주의 관료는 소비에트 국가의 사회적 기초를 지켜낼 수 있는 모든 방책들은 오직 좌익반대파로부터 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것은 너무나도 소중한 정치적 교훈이다! 이것은 후진적인 농민, 지친 프롤레타리아, 서구로부터의 결정적인 지원의 부족이라는 특수한 역사적 조건이, 보수적인 관료에 의한 프롤레타리아 전위에 대한 억압과 혁명적 국제주의의 분쇄라는 혁명의 “두 번째 장”으로 어떻게 나아가게 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바로 이 똑같은 예가 “두 번째 장”의 승자들이 “첫 번째 장”의 혁명가들을 짓밟았을 때조차도, 어떻게 올바른 정치적 노선이 맑스주의 조직으로 하여금 발전의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하는가를 보여주기도 한다.

살아있는 발전의 과정들을 이미 만들어진 규범들에 기계적으로 꿰어 맞추는 천박한 이상주의는 사람들을 쉽게 의기소침하게 만든다. 모든 존재를 발전 과정과 내부 모순의 투쟁 속에서 바라볼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는 변증법적 유물론만이, 사상과 실천에 필요한 안정성을 부여할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와 관료의 독재

과거 몇몇 저작들을 통해, 우리는 생산수단의 국유화로 인한 경제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생활 여건의 불평등과 관료의 특권들의 존재로 알 수 있는 것처럼 소비에트 사회는 완벽하게 모순적인 이행기적 성격을 보존하고 있으며, 여전히 미래의 공산주의보다는 자본주의 정권에 훨씬 가까이 서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동시에, 우리는 거대한 관료적 퇴행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국유화된 생산수단의 기초 위에서 경제와 문화의 발전을 담보하고, 바로 이것에 의해서 관료와 사회적 불평등을 철폐하여 노동자들의 진정한 해방으로 나아갈 조건을 준비하고 있는 한, 소비에트 국가는 여전히 노동계급의 역사적 기구로 남아있다는 사실 또한 입증했다.

이 두 가지 근본적인 명제들에 관하여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거나 이 명제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리고 1923년부터의 소련 문제에 대한 볼셰비키-레닌주의자들의 저작들을 공부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누구나, 새로운 사건을 만날 때마다 나아갈 방향을 잃어버리거나 비탄에 빠져 맑스주의적 분석을 포기할 위험이 있다.

소비에트 (보다 정확하게 反소비에트) 관료주의는, 도시와 지방,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이들 두 종류의 모순은 똑같지 않다), 전국에 걸친 공화국과 지역들, 농민의 서로 다른 그룹들, 노동 계급의 서로 다른 층들, 소비자의 서로 다른 그룹들, 그리고 최종적으로 소비에트 국가 전체와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자본주의 환경 사이의 모순으로 인한 산물이다. 모든 관계들이 화폐적 계산의 언어로 번역되는 오늘날, 경제적 모순들이 무엇보다도 날카롭게 부각된다.

관료는 노동 대중 위에 군림하면서 이러한 모순들을 규제하고 있다. 관료는 자신의 지배를 강화하기 위하여 이러한 기능을 사용한다. 통제받지 않고 어떠한 항의도 없는 무소불위의 지배를 통해서 관료는 새로운 모순들을 축적하고 있다. 새로운 모순들을 축적하면서 관료적 절대주의 정권을 만들어낸다.

관료 내부에 있는 모순들은 주요 직위에 앉힐 사람을 아주 조심스럽게 선택하게 만들었다. 특권층의 위계 질서를 잡기 위한 필요성은 일인 지배로 그리고 무오류의 지도자라는 우상숭배의 원인이 되었다. 하나의 그리고 똑같은 시스템이 공장, 콜호즈 [kolkhoz 집단생산농장], 대학 그리고 정부에 만연해 있다. 즉, 지도자는 자신에게 충성하는 부대의 꼭대기에 서 있고, 나머지는 지도자를 따른다. 스탈린은 결코 그의 성격상 대중의 지도자가 아니었으며 될 수도 없었다. 단지 그는 그 관료 “지도자들”의 지도자였으며, 그들의 완성이고, 화신이었다.

경제적 임무들이 더욱 복잡해질수록, 사람들의 요구와 이해관계가 커질수록, 관료정권과 사회주의적 발전의 요구들 사이의 모순이 더욱더 날카로워지고, 관료는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더욱 더 거칠게 투쟁하며, 관료는 더욱더 냉소적으로 폭력과 사기, 뇌물에 의존하게 된다.

경제와 문화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지속되는 정치권력의 악화, 이 슬픈 사실은 오로지 이것을 통해서만 설명된다. 즉, 억압, 박해 그리고 탄압은 오늘날 큰 틀에서 국가의 방어에 복무하는 것이 아니라 관료의 지배와 특권의 방어에 복무한다. 이것이 또한 억압을 위장하기 위해 사기와 기타 방법에 점점 더 의존하게 만드는 원인이다.

그래서 도덕주의자, 이상주의자, 그리고 “혁명적” 속물들은 분개해서 “도대체 이런 국가가 노동자 국가로 불릴 수 있는가?”라고 말한다. 약간 더 주의 깊은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아마도 이것은 노동자 국가일 것이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분석해보면, 여기에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흔적이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 [따라서] 이것은 관료의 독재 하에 있는 퇴보한 노동자국가이다.”

전반적으로 우리에게는 이 논쟁을 다시 시작할 만한 이유가 없다. 이것과 관련되어 이야기되었던 모든 것들은 우리 경향의 저작들과 공식문서들에서 논의되었다. 누구도 이 가장 중요한 문제에 관한 볼셰비키-레닌주의의 입장에 대하여 논박하거나 수정하거나 보충하려고 하지 않았다.

우리는 관료의 분파적 독재가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로 불릴 수 있는가 여부에 우리의 논의를 엄격하게 제한할 것이다.

독재라는 용어가 종종 제한적인 정치적 의미에서 사용되기도 하고, 보다 심오한 사회학적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는 사실로부터 용어상의 어려움이 발생한다. 우리는 “무솔리니의 독재”에 관하여 말하는 동시에, 파시즘은 금융자본의 기구일 뿐이라고 선언하기도 한다. 무엇이 올바른가? 둘 다 맞지만, 서로 다른 측면에서 그렇다. 모든 집행 권력이 무솔리니의 손아귀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에 관하여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국가 활동의 실질적 내용 전체가 금융자본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한 계급의 사회적 지배(그 계급의 독재)는 극도로 다양한 정치적 형식을 통해 실현된다. 이것은 중세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부르주아지의 전체 역사에 의해 증명된다.

소련의 경험은, 바로 그 사회 법칙을– 모든 필연적인 변화들과 함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로까지 확장하게 한다. 권력의 장악과 사회주의 사회에서 노동자 국가의 소멸 사이의 시기에, 프롤레타리아 지배의 형식과 수단들은 내외부적인 계급투쟁의 경로에 따라서 뚜렷하게 바뀔 수 있다.

그래서 지금의 스탈린 지배는 혁명 초기의 소비에트 지배와는 전혀 다르다. 한 정권의 다른 정권으로의 대체는 한 번의 타격이 아니라, 일련의 수단들을 통해서, 프롤레타리아트 전위에 대항하여 관료에 의해 수행되는 일련의 소규모 내전들을 통해서 발생한다. 최종적인 역사적 분석에 따르면, 소비에트 민주주의는 사회적 모순들의 압력에 의해 폭발했다. 사회적 모순들을 활용하여, 관료는 대중조직들의 손에 있던 권력을 찬탈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관료의 독재 그리고 심지어 스탈린 일인 독재에 관하여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권력은 오로지 관료 독재의 사회적 내용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의해 창출된 생산관계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가능했고, 스스로를 유지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관료 독재라는 형태로 즉, 왜곡되었지만 의심할 여지도 없는 형태로 실현되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러시아와 국제 반대파의 내부 논쟁에서, 우리는 노동자국가의 사회적 기초를 흔드는 부르주아 반혁명의 첫 번째 국면을 테르미도르라고 가정적으로 이해했다. 우리가 보아왔던 것과 같이, 논쟁의 내용이 과거의 논쟁에 의해 교란되지는 않았다.¹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역사적 비유는 순전히 가정적으로 그리고 실제적 성격을 가지지 않은 것으로 되었다. 그리고 이 가정적 성격으로 인해, 그 용어는 점점 더 소비에트 국가의 최근의 진화에 대한 분석의 필요성과 충돌하게 되었다. 우리는 종종 국민투표나 스탈린의 보나파르트 정권에 관하여 이야기해 왔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보나파르티즘은 테르미도르 뒤에 왔다. 만약 우리가 역사적 유추의 틀 내에 머무르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다음의 질문을 해야만 한다. 소비에트 “테르미도르”가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면, 어디서 보나파르티즘이 생겨난 것인가? 우리의 과거 평가에 본질적인 수정을 가하지 않는다면–그렇게 할 이유가 없다–우리는 역사적 비유를 근본적으로 수정해야만 한다. 이렇게 해야 특정한 과거 사실들에 대하여 보다 세밀하게 관찰할 수 있고, 새로운 사건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제 9 테르미도르의 전복은 부르주아 혁명의 기본적인 성과들을 청산하지 않았으나, 그것은 보다 온순하고 보수적인 자코뱅들, 부르주아 사회의 보다 부유한 부류들에게 권력을 이전시켰다. 훨씬 느린 템포와 위장된 형식이기는 하지만, 테르미도르와 전체적으로 유사한 우익으로의 이동이 소비에트 혁명에서도 또한 오래 전에 발생했었다는 것을 간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좌익에 대항한 소비에트 관료의 음모는, 즉흥적이었던 제 9 테르미도르보다 훨씬 더 조직적이고 총체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 초기에 상대적으로 “피를 덜 흘리고(dry)” 진행될 수 있었다.

사회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지보다 더 균일하다. 그러나 권력 장악에 뒤이어 관료와 그들과 연결된 노동귀족이 형태를 갖추기 시작하는 동안에, 그 자신의 내부에 모든 계층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가장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의미에서, 좌익반대파의 분쇄는 혁명적 전위에게서 관료와 노동계급 상층부의 보다 보수적인 인자들의 수중으로 권력이 옮겨진 것을 의미했다. 1924년, 그 해가 소비에트 테르미도르가 시작된 해였다.

물론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역사적 동일성이 아니라, 항상 서로 다른 사회 구조와 시대라는 한계를 갖는 역사적 유추의 문제이다. 그러나 주어진 유추는 피상적인 것도 아니고 우연적인 것도 아니다. 그 비유는 혁명과 반혁명의 시기를 지배하는 계급투쟁의 극도의 긴장감을 표현한다. 두 경우 모두 관료는 새로운 정권을 위한 승리를 보증했었던 인민 민주주의의 결과로 등장했다. 자코뱅 조직은 서서히 교살되었다. 1793년의 혁명가들은 전장에서 죽어갔거나, 외교관과 장군이 되었거나, 억압의 타격 아래 쓰러졌거나…혹은 지하로 갔다. 그 후, 다른 자코뱅들은 성공적으로 나폴레옹의 장관이 되었다. 그들의 대오는 과거 정당들의 배신자들, 구 귀족들, 그리고 아둔한 출세주의자들로 인해 끝없이 늘어났다. 그럼 러시아에서는? 그와 똑같은 퇴행의 그림이, 다만 보다 거대한 규모로 그리고 무르익은 배경 위에서, 130년에서 140년이 지난 후에 재생되고 있다. 소비에트들과 당 조직에 넘치던 활기는, 점차적으로 “열정적으로 추앙 받는 지도자”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당 서기들의 강요로 이행하고 있다.

프랑스에서, 테르미도르-보나파르트 정권이 오랫동안 안정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봉건주의의 구속으로부터 해방되었던 생산력의 발전 덕분이었다. 행운아들, 약탈자들, 관료의 친척과 동맹자들은 스스로 부자가 되었다. 환상에서 깨어난 대중들은 의기소침에 빠졌다.

1923년에 시작되었고 소비에트 관료 자신도 예상하지 못했던, 국유화로 인한 생산력의 급증은 관료의 안정을 위해 필요한 경제적 조건을 창출했다. 경제적 생활의 향상이 활동적이고 능력 있는 조직가들, 행정가들 그리고 기술자들의 에너지를 분출시켰다. 고위 지배계층에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광범위한 특권층이 만들어졌다. 하층의 대중은 희망으로 살거나 무관심으로 떨어졌다.

러시아 혁명의 다른 국면들을 18세기의 끄트머리에 발생했던 프랑스에서의 유사한 사건들에 꿰맞추려고 시도하는 것은 낡아빠진 현학일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소비에트 정치 정권과 제국의 시대를 앞둔 통령정부 말미의 제 1 통령 정권과의 유사성으로 인해 한 가지는 글자 그대로 강렬한 인상을 준다. 승리자의 눈부심은 없었지만, 적어도 조직된 충성파들의 정권이라는 점에서는 스탈린이 보나파르트 1세를 능가했다. 그러한 권력은 오로지 당과 소비에트들과 노동 계급 전체를 교살시킴으로써만 얻어질 수 있었다. 스탈린이 의지하고 있던 관료는 달성된 국내 혁명의 결과들에 물질적으로 얽혀 있으나, 세계 혁명의 발전과는 어떠한 연결점도 가지고 있지 않다. 나폴레옹의 장성들과 장관들이 혁명적 자코뱅과 다른 것 못지않게, 현재 소비에트 관료들의 삶의 방식, 이해관계 그리고 심리상태는 혁명적 볼셰비키의 그것과 다르다.

소비에트 런던 대사 마이스키는 최근 영국 노동조합의 한 대표에게 “반혁명분자” 지노비에프주의자들에 대한 스탈린주의 재판이 얼마나 필요하고 정당한 것인가에 대하여 설명했다. 이 황당한 일화는–수 천 가지 중에 하나이지만–우리를 문제의 핵심으로 인도한다. 우리는 지노비에프주의자들이 누구인지 안다. 그들의 실수와 동요가 어찌되었건 간에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하다. 그들 또한 “직업적 혁명가”의 대표자들이라는 점이다. 세계 노동 운동의 문제들을 그들은 온몸으로 추구했다. 마이스키는 누구인가? 콜차크의 보호 하에 있던 트랜스 우랄 백색 정부에 장관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우익으로 가면서, 1918년 자신의 당과 결별했었던 우익 멘셰비키였다. 오로지 콜차크가 절멸된 후에야, 마이스키는 자신의 얼굴을 소비에트 쪽으로 돌릴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나도 그랬지만, 레닌은 그런 부류에 대하여 경멸은 말할 것도 없고, 가장 큰 불신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날 대사의 직위에 있는 마이스키는 “지노비에프주의자들”과 “트로츠키주의자들”을 자본주의 복귀를 위해 군사적 선동을 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마이스키가 내전이라는 방식으로 우리에 맞서 방어하려 했었던 바로 그 자본주의 말이다.

현재 미국의 대사인 트로이야노프스키는 젊은 시절 볼셰비키에 가입했지만 그 직후 당을 떠났고, 전쟁기간 그는 애국주의자였다. 1917년에는 멘셰비키였다. 10월 혁명 때에 그는 멘셰비키 중앙위원회의 멤버였고, 여기에 더해서 그 후 수년 동안 트로이야노프스키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항하여 비합법 투쟁을 수행했다. 좌익 반대파가 분쇄된 후 그는 스탈린주의 당, 보다 정확하게는 외교부에 들어갔다.

파리 대사인 포템킨은 10월 혁명의 기간 동안 부르주아지 역사 교수였다. 승리 이후에 그는 볼셰비키에 가입했다. 구 베를린 대사 킨츄크는 10월 전복의 나날 동안 멘셰비키로서 반혁명적인 조국과 혁명을 구하기 위한 모스크바 위원회에 현재 재정 인민위원이며 우익 사회혁명당원인 그린코와 함께 참여했다. 베를린 후임대사 슈리츠는 소비에트 초대 의장 멘셰비키 츠하이졔의 정치비서였다. 그는 승리 후에 볼셰비키에 가입했다. 거의 모든 외교관들이 비슷한 부류들이다. 그리고 오로지 가장 의존적인 사람들만이–특히 베세오프스키, 디미트리에프스키, 아마베코프 등등의 경험이 있고 난 후–대사로 지명되고 있다.

얼마 전에 소비에트 금광 산업의 주요한 성공을 알리는 급보가 그 조직자인 엔지니어 세레브로프스키에 대한 언급과 함께 세계 언론에 실렸다. 오늘날 관료 상층부의 공식적인 대변인으로서 듀란티, 루이스 피셔와 성공적으로 경쟁하고 있는 <르 떵(Le Temps)>의 모스크바 특파원은 세레브로프스키가 1903년 이후로 볼셰비키이며, “친위대”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애썼다. 이것은 세레브로프스키의 당적 카드가 실제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그는 젊은 학생 시절 멘셰비키로서 1905년 혁명에 참여했고, 이후 오랜 기간 동안 부르주아지 진영으로 넘어갔었다. 1917년 2월 혁명기에 두 개의 군수품 공장의 정부 감독관의 직함을 가지고 있었으며, 무역국의 멤버였고, 금속 노동조합에 대항하는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자였다. 1917년 5월에 세레브로프스키는 레닌이 “독일의 첩자!”라고 선언했다. 볼셰비키의 승리 이후, 내가 세레브로프스키와 다른 전문인들[기술관련 전문가]을 기술적인 업무로 영입하였다. 레닌은 그를 전혀 믿지 않았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가 오늘날 당 중앙위원회 위원이다!

중앙위원회의 이론적 저널인 <볼셰비키>(1934년 12월 31일)에 “소련의 금광 산업에 관하여”라는 세레브로프스키의 기사가 실려 있다. 첫 번째 페이지를 보자. “…당과 노동계급의 가장 사랑하는 지도자 스탈린 동지의 지도하에…”, 세 줄 아래 “…미국 특파원 듀란티 씨와의 대화에서 스탈린 동지는…”, 다섯줄 아래 “…스탈린 동지의 간략하고 정확한 답변…”, 페이지의 가장 아래에 “그것이 스탈린 방식의 금을 위한 투쟁을 의미하는 것이다.”, 두 번째 페이지 “…우리의 위대한 지도자 스탈린 동지가 우리를 가르치는 바와 같이…”, 네 줄 아래 “그들(볼셰비키들)의 보고에 답하면서 스탈린 동지는 다음과 같이 썼다. ‘당신들의 성공을 축하한다’…”, 같은 페이지 더 아래에 “스탈린 동지의 영도에 영감을 받아…”, 한 줄 아래에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스탈린 동지와 함께 하는 당…”, 두 줄 아래에 “우리 당과 (!!)스탈린 동지의 영도…” 등. 이 기사의 결론을 보자. 페이지의 중간 정도를 보면, “당과 노동계급의 천재적 지도자 스탈린 동지의 영도…”, 그리고 세줄 아래에 “…우리의 가장 사랑받는 지도자 스탈린 동지의 말들…”

이런 아첨의 홍수 앞에서는 풍자라는 것 자체도 무력하다! 우리는, “사랑받는 지도자들”이 한 페이지에 다섯 번 씩이나 그에 대한 사랑의 선언이 있기를 바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게다가 그것도 지도자에 대한 축사가 아닌 금광에 관한 기사에서 말이다. 한편, 그런 아부로 가득 찬 기사의 저자는 분명히 혁명가의 어떠한 것도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이다. 과거 짜르 시절엔 대공장의 감독관, 부르주아지 그리고 애국자였고, 혁명기엔 노동자에 맞서 투쟁했으며, 그리고 지금은 정권의 보루요, 중앙위원회 위원이며, 100% 스탈린주의자가 되어 있는 이들이 바로 그런 인물들이다.

또 다른 예. 오늘날 <프라우다>의 중심인물 중 하나인 자스라프스키는 올해 1월에 도스토예프스키의 반혁명적 소설들을 출판하는 것은 “트로츠키, 지노비에프 그리고 카메네프의 반혁명적 저작들”을 출판하는 것만큼 허가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 자스라프스키는 누구인가? 아슴프레한 과거에는 분트주의자[유대인 분트의 멘셰비키]였고, 이후에는 1917년에 레닌과 트로츠키에 대항하여 독일의 첩자라고 가장 경멸적인 캠페인을 벌였던 자이다. 1917년 레닌의 글들에서, 자제된 표현으로, “자스라프스키와 그와 같은 다른 건달들”이라는 구절이 있다. 그래서 자스라프스키는 당 문헌에 극단적 타입의 부패한 부르주아 중상가로 들어가게 되었다. 오늘날 그는 반혁명분자 트로츠키, 지노비에프 그리고 카메네프로부터 스탈린주의를 사수하고 있다! 소련 내에서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스탈린의 언론은 이런 인간들로 채워져 있다.

구 볼셰비키 중핵들은 분쇄당했다. 혁명가들도 분쇄당했다. 혁명가들은 유연한 등뼈를 가진 관료들로 대체되었다. 맑스주의 사상은 공포와 아첨과 음모에 의해 제거되었다. 레닌의 정치국원들 가운데 오직 스탈린만이 남아있다. 정치국원 중 두 명은 정치적으로 파산했고, 머리를 땅에 조아리며 아첨하고 있다(리코프와 톰스키). 두 명은 감옥에 있다(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 한 명은 국외로 추방되어 시민권을 빼앗겼다(트로츠키). 크룹스카야가 말한 것처럼, 레닌은 오로지 그의 죽음 때문에 관료의 억압을 면할 수 있었다. 감옥에 가둘 기회가 없었던 레닌의 아류들은 그를 화려한 무덤 속에서 잠자코 있게 했다. 지배계층의 전체 토대가 퇴보했다. 자코뱅이 테르미도르와 보나파르티스트들에 의해 축출되었던 것처럼, 볼셰비키는 스탈린주의자들에 의해 대체되었다.

크건 중간이건 작건 간에 보수적이고 결코 청렴하지 않은 마이스키, 세리브로프스키, 자스라프스키 등의 광대한 계층에게 스탈린은 정의의 심판관이고, 모든 특혜의 원천이며, 있을 수 있는 반대로부터의 방어자였다. 이것에 대한 대가로, 관료는 가끔 스탈린에게 전국적인 국민투표에 의한 지지를 선물한다. 소비에트 대회와 마찬가지로 당 대회들은 단 하나의 기준에 따라서 조직된다. 즉, 스탈린에 찬성하는가 아니면 반대하는가? 오로지 “반혁명 분자들”만이 반대할 수 있으며, 그들은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렀다. 이것이 오늘날의 통치 방식, 곧 보나파르트식의 통치 방식이다. 이것 외에 어떠한 정의도 정치사전에서 아직 발견되지 않는다.

우리는 역사적 유추 없이 역사로부터 배우지 못한다. 그러나 유추는 구체적이어야만 한다. 우리는 유사성의 모습들 뒤에 있는 비유사성의 모습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두 혁명들 모두 봉건주의와 농노제도를 끝장냈다. 그러나 그들 중 하나는, 극단적 진영의 모습으로, 부르주아 사회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하여 헛되이 노력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다른 하나는 실제로 부르주아지를 타도하고 노동자국가를 건설했다. 유추에 필수적인 물질적 한계를 부여하는 이 근본적인 계급의 차이가 예측을 위한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농노제로부터 농민을 해방하고 그들에게 땅을 제공하는 심원한 민주주의 혁명 이후에, 봉건적 반혁명은 일반적으로 불가능하다. 물론 타도된 군주가 다시 권력을 장악하고, 중세의 낡은 관습을 유지하려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봉건주의 경제로 돌아갈 수는 없다. 일단 봉건적 구속으로부터 해방되는 순간, 부르주아적 관계가 자동적으로 성장한다. 그것들[부르주아적 관계]은 외부적 힘에 의해 정지될 수 없다. 그것들은 먼저 자기 자신의 매장자를 만들어내면서, 자신의 무덤을 스스로 팔 수밖에 없다.

사회주의적 관계의 발전은 이것과 다르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사적소유의 구속으로부터 생산력을 해방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스스로가 건설한 국가의 직접적 폐기로 나아간다. 혁명 이후 부르주아 국가가 시장을 그 자신의 법칙에 맡겨두면서 경찰의 역할에 스스로를 제한하는 반면, 노동자 국가는 경제가와 조직가의 직접적인 역할을 떠안는다. 한 정치 권력의 다른 것에 의한 대체는 오직 시장 경제에 간접적이고 피상적인 영향만을 미칠 뿐이다. 반대로, 부르주아 혹은 소부르주아 정부에 의한 노동자 정부의 대체는 필연적으로 계획화 초기단계의 청산, 그리고 이어서 사적 소유의 복구로 이어질 것이다. 자본주의와는 다르게, 사회주의는 자동적으로 건설되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건설되는 것이다. 사회주의를 향한 진보는 사회주의를 갈망하는 혹은 사회주의를 갈망하도록 강제되는 국가권력과 분리될 수 없다. 사회주의는 그 생산력이 자본주의를 훨씬 추월했거나, 개인과 모두의 욕구가 온전히 충족될 때, 그리고 국가가 사회 속에 해소되면서 완전히 사라지게 되는 그 발전의 매우 높은 단계에서만, 오직 불변의 성격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아직 먼 미래이다. 사회주의적 건설의 현재 발전 단계는 노동자 국가와 일치되는 정도이다. 부르주아(“무정부적인”)와 사회주의(“계획된”) 경제 형성의 법칙 사이의 차이에 대하여 충분히 숙고한 이후에야 비로소, 프랑스 대혁명의 유추로 이해할 수 있는 한계 너머를 이해할 수 있다.

1917년 10월 민주주의 혁명이 완수되었고 사회주의 혁명이 시작되었다. 세상의 어떠한 세력도 러시아에서의 농경-민주주의 혁명을 뒤로 돌릴 수 없다. 이 지점을 우리는 자코뱅 혁명의 유추를 통해 완벽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콜호즈[집단생산농장]의 전복은 그것에서 멈추지 않고 생산수단의 국유화 자체를 위협한다. 정치적 반혁명이 일어나 로마노프 왕조로 후퇴한다고 하더라도, 토지의 봉건적 소유를 재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의 동맹이 권력을 다시 장악한다면, 현재 이루어놓은 사회주의적 건설을 말살시킬 것이다.

두 혁명의 차이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들에 “조응하는” 반혁명들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는 스탈린 정권의 핵심을 이루는 반동적인 정치적 변화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농민 혁명은, 그에 의존했던 부르주아지와 더불어, 나폴레옹 정권과도 쉽게 평화적 관계를 맺을 수 있었고, 심지어 루이 18세 하에서도 유지될 수 있었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이미 지금의 스탈린 정권 하에서 치명적인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지금보다 더 오른쪽으로 나아간다면, 그 혁명은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소비에트 관료는–”볼셰비키”의 전통에서 나왔지만 현실에서는 오래 전부터 그 전통과 절연했었던, 그 구성과 정신에 있어서는 소부르주아인–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 사이, 노동자 국가와 세계 제국주의 사이의 적대를 통제하도록 소집되었다. 이것이 관료적 중도주의, 그 지그재그 행보들, 그 권력, 그 허약함 그리고 그토록 중요한 세계 프롤레타리아 운동에 대한 그들의 영향력의 사회적 기초이다.² 관료가 점점 더 독립적으로 될수록, 권력이 점점 더 한 사람의 손아귀에 집중될수록, 점점 더 관료적 중도주의는 보나파르티즘으로 바뀌어 간다.

너무도 넓게 이해되고 있는 보나파르티즘의 개념은 구체화가 필요하다. 지난 수년 동안 우리는 이 용어를, 프롤레타리아와 파시스트 진영 사이의 적대를 이용하면서 그리고 직접적으로 군-경찰 기구에 의존함으로써 “국가 통합”의 구세주로서 의회와 민주주의 위에 군림하는 자본주의 정부들에 적용했었다. 이 낡은 보나파르티즘과 부르주아 혁명의 정치적 원칙들의 매장자였을 뿐만 아니라 그 사회적 성과들의 방어자이기도 했던 젊고 전진하는 보나파르티즘을 우리는 항상 엄격하게 구분했다. 우리는 이 두 표현들에 같은 이름을 적용하는데 이것은 그들이 같은 자취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잔인한 세월의 자취가 남아 있지만, 80대에게서 그 청춘의 모습을 식별하는 것은 언제나 가능하다.

물론, 우리가 말하는 오늘날 크레믈린의 보나파르티즘은 쇠퇴하는 것이 아닌 상승하는 부르주아지의 보나파르티즘이다. 즉, 나폴레옹 3세, 더 나아가, 슐레이어[Kurt von Schleicher(1882-1934) 바이마르 공화국의 장군이자 수상 : 역주]나 도메르그[Gaston Doumergue(11863-1937) 프랑스 제3공화국의 수상 : 역주]가 아닌, 통령정부와 제1제국의 보나파르티즘이다. 이러한 유추를 한다고 해서, 스탈린이 나폴레옹 1세와 비슷하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사회적 상황이 요구하는 경우 언제든지, 보나파르티즘은 대단히 다양한 모습을 띨 수 있다.

우리의 관심사와 관련해서, 자코뱅과 초기 소비에트라는 보나파르티즘의 두 사회적 기초 차이는 훨씬 더 중요하다. 전자[자코뱅 이후에 등장한 나폴레옹의 보나파르티즘]의 경우는, 자신의 정치적 기구와 원칙 해체를 통한 부르주아 혁명 강화가 문제였다. 후자[소비에트에 기초한 스탈린의 보나파르티즘]의 경우는 자신의 국제 강령, 지도 정당, 소비에트 파괴를 통한 노동자-농민 혁명 강화가 문제였다. 테르미도르의 정책들을 더욱 더 수행하면서, 나폴레옹은 봉건적 세계에 대항하는 투쟁을 수행했을 뿐만 아니라, “하층계급”과 소부르주아, 중간부르주아의 민주주의적 써클들에 대항하는 투쟁도 수행했다. 이런 방법으로 그는 혁명으로부터 태어난 권력의 열매를 새로운 부르주아 상층계급의 손아귀에 집중시켰다. 한편, 스탈린은 봉건적-부르주아적 반혁명에 대항해서만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조바심과 불만 어린 주장들에 대항해서도 10월 혁명의 성과들을 방어한다. 스탈린은 특권이 없는 노동 대중들에게 부여된 역사적이고 진보적인 경향을 대표하는 좌익을 분쇄한다. 그는 임금과 특권, 서열 등이 극단적으로 다른 새로운 지배귀족을 창조한다. 최하층에 대항하여 새로운 지배계층의 최상층 부위에서 지지를 구하면서–때로는 그 반대로–스탈린은 자기 자신의 손에 권력을 완전히 집중시켰다. 소비에트 보나파르티즘이 아니라면. 이 정권을 다른 무엇으로 부를 수 있겠는가?

보나파르티즘은 본질적으로 오랫동안 유지될 수 없다. 피라미드의 꼭짓점 위에 올려진 공은 반드시 이쪽 또는 저쪽으로 굴러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보았던 것처럼,  역사적 유추가 자신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 정확하게 바로 이 지점이다. 물론 나폴레옹의 추락은 계급들 사이의 관계를 손대지 않은 채로 놔두지는 않았다. 그러나 프랑스의 사회적 피라미드는 본질적으로 부르주아적 성격을 계속 유지했다. 스탈린주의 보나파르티즘의 필연적 붕괴는 노동자 국가인 소련의 성격에 대한 문제를 그 즉시 제기할 것이다. 사회주의 경제는 사회주의 권력이 없이는 건설될 수 없다. 사회주의 국가로서의 소련의 운명은 스탈린주의 보나파르티즘을 대체하고 일어서게 될 정권의 성격에 달려있다. 오로지 다시 자기 주위에 도시와 농촌의 인민들을 결집시킨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 전위만이 소비에트 시스템을 재생시킬 수 있다.

우리의 분석으로부터 아래에 간략하게 적시하는 몇 가지 결론들이 도출된다.

● 러시아 대혁명의 테르미도르는 우리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훨씬 전에 있었다. 테르미도르들은 대략 10주년째 승리를 기념할 수 있을 것이다.

●소련의 현재의 정치적 정권은 통령정부보다는 제국의 형태에 더 가까운 “소비에트”(혹은 反 소비에트”) 보나파르티즘이다.

●그 사회적 기초와 경제적 경향에서, 소련은 노동자 국가로 남아 있다.

●보나파르티즘 정치권력과 사회주의적 발전 요구 사이의 모순이 내부적 위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며, 노동자 국가로서의 소련의 존재 자체에 직접적인 위험이 된다.

●여전히 낮은 생산력 수준과 자본주의적 환경 때문에, 현재 약화되기도 하고 강화되기도 하는 계급들과 계급모순들은, 세계의 중요한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완전한 승리가 있을 때까지, 불확정적으로 긴 기간 동안 소련 내에 여전히 존재하게 될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존재는 또한 미래 소련의 경제와 문화의 발전을 위한 필요조건으로 남아 있다. 따라서 독재의 보나파르트적 퇴행은 모든 프롤레타리아트의 사회적 성과들에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위협을 의미한다.

●공산당 청년 대오내의 테러주의적 경향들은, 보나파르티즘이 자신의 정치적 가능성을 모두 소진했으며 자신의 존재를 위한 가장 무자비한 투쟁의 시기에 들어섰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가장 유독한 증상들 중의 하나이다.

●오로지 프롤레타리아 전위의 의식적 실천으로 보나파르티즘을 제거하는 경우에만, 스탈린주의 정치권력의 필연적 붕괴는 소비에트 민주주의의 확립으로 귀결될 것이다. 다른 모든 경우, 파시스트-자본주의 반혁명이 스탈린 정권의 자리를 대신하게 될 것이다.

●어떠한 명분이 있건 간에, 개인적 테러리즘의 전술은, 특정 상황에서는, 프롤레타리아의 최악의 적들의 이익에 복무할 뿐이다.

●공산당 청년 대오 내에 테러주의가 나타나게 된 정치적 도덕적 책임은 당의 매장자인 스탈린에게 있다.

●보나파르티즘에 맞서는 투쟁에서 소련의 프롤레타리아 전위를 약화시키는 가장 중요한 원인은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계속되는 패배이다.

●세계 프롤레타리아트 패배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스탈린 보나파르티즘의 맹목적 추종자이며 동시에 개량주의 관료들의 최고의 동맹자이면서 방어자인, 코민테른의 범죄적 정책들이다.

●국제적 차원에서의 성공을 위한 첫 번째 조건은 사기를 저하시키는 소비에트 보나파르티즘으로부터, 즉 코민테른의 타락한 관료의 영향으로부터, 국제 프롤레타리아 전위를 해방시키는 것이다.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을 구원하기 위한 투쟁은, 제 4 인터내셔널을 위한 투쟁과 완전히 일치한다.

후기

우리의 반대자들은–그리고 그들은 환영하고 있다–우리의 “자기비판”을 이용할 것이다. 그래서! ‘너희들은 테르미도르라는 근본적인 문제에서 입장을 바꾸었다’고 그들은 소리지를 것이다. ‘지금까지 너희들은 테르미도르의 위험성에 대해서만 말했다. 이제 너희들은 갑자기 테르미도르는 이미 뒤쪽에 있다고 선언한다.’ 스탈린주의자들이 아마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덤으로 우리가 군사적 개입을 더 쉽게 유발하기 위하여 우리의 입장을 바꾸었다고 추가할 것이다. 한편으로 브랜들러와 러브스톤[미국공산당 지도자: 역주] 도당들과 다른 한편으로 “극좌”의 아는 체 하는 자들은 똑같은 음조로 말할 것이다. 그들은 테르미도르에 대한 비유에서 무엇이 잘못이었는가를 우리에게 결코 지적하지 못했다. 다만 그들은 우리가 오류를 우리 스스로 드러냈다고 목청껏 소리지를 뿐이다.

우리는 소련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평가에서 이 오류의 입장을 위에서 밝혔다. 그것은 여러 개의 공식문서들에서 공식화되었던 것처럼, 우리의 원칙적 입장 변화의 문제가 아니라, 단지 그것을 보다 정확하게 하는 문제이다. 우리의 “자기비판”은 소련의 계급적 성격에 대한 분석이나 소련 퇴보의 원인과 조건들을 향한 것이 아니라, 단지 잘 알려진 프랑스 대혁명의 단계들에 대한 유추를 분명하게 하여 이들 과정들을 역사적으로 규명하기 위한 것이다. 비록 중요한 것이더라도, 오류의 교정은 볼셰비키-레닌주의자들의 기본적 입장을 확고하게 할 뿐만 아니라, 보다 정확하고 현실성 있는 유추를 통해 그 입장을 보다 정확하고 구체적으로 만든다. 토론 중에, 바로 그 정치적 퇴보 과정을 훨씬 더 명확하게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에 오류를 발견할 수 있었다는 사실 또한 언급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 그룹은 무오류성을 결코 주장하지 않았다. 우리는 스탈린주의 고위 성직자들처럼 이미 만들어진 진실들을 섬기지 않는다. 현실에 비추어 우리의 결론을 학습하고, 토론하고, 체크하며, 실수들을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정정한다. 그리고 우리는 전진한다. 과학적 의식성과 개인적 엄격함이 맑스주의와 레닌주의의 최고의 전통이다. 우리는 우리 역시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Leon Trotsky

The Workers’ State, Thermidor and Bonapartism

(February 1935)

 

1) 멘셰비키 또한 테르미도르 반동에 관해 말한다. 그들이 이 말을 어떤 의미로 사용하는지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들의 집권은 프롤레타리아의 반대에 직면해야 했다. 심지어 지금, 멘셰비키의 견해에 따르면 소비에트는 노동자 국가가 아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미스터리이다). 과거에 그들은 자본주의로의 복귀를 요구했다. 오늘은 “민주주의”를 요구한다. 만약 그들 자신이 테르미도르 반동의 대표자가 아니라면, 도대체 그들의 “테르미도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자명하게 이것은 단지 유행하는 문학적 수사에 불과한 것이다.

 

2) 아직도 텔하이머[<독일공산당> 우익반대파의 지도자: 역주]의 제자로 남아있는, <독일사회주의노동자당(SAP)>의 지도자들과 브랜들러[<독일공산당> 우익반대파의 지도자: 역주]와 그 추종자는 코민테른의 정책 중 “초좌익” 정책만 본다. 그리고 관료적 중도주의의 의미는 계속 부정한다. 스탈린이 유럽 노동자 운동을 코민테른의 지령으로 개량주의로 진행시키고 있는 “제 4 기”는 텔하이머와 월처의 무리들의 정치 철학이 얼마나 협소하고 기회주의적인지를 보여준다. 이 사람들은 하나의 문제도 그 결론까지 도출해 낼 능력이 없는 이들이다. 모든 혁명 정책과 과학적인 분석의 원칙들을 혐오하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