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istory of American Trotskyism.pdf (PDF) 영문
<차례>
트로츠키주의의 정립 - 맑스주의 운동의 연속성 - 사회당 - 러시아혁명의 영향 - 좌파의 형성 - 언어별 연합 - 분파투쟁 - 두 개의 공산당 - 지하활동 - 합법화 투쟁 - 노동자당
공산당의 이데올로기적 우월성 - 노동조합의 획득 - 노동자 방어 - 분파투쟁 - 사회적 구성 - 지도력의 강화 - 코민테른의 역할 - 트로츠키주의 운동의 시작
맑스주의냐 스탈린주의냐 - 러시아 좌익반대파 - 미국 공산주의자들의 일국적 편협성 - 반트로츠키주의 캠페인 - 코민테른 6차 세계대회 - 캐넌과 스펙터가 트로츠키주의자가 되다 - ‘재판’ 그리고 캐넌, 샥트먼, 에이번의 추방 - 당을 향한 호소 - <투사>를 발행하다 - 분파가 성장하다
미국 공산주의의 부흥 - 편지를 통한 선전 - 캐나다의 스펙터 - 스탈린주의자들의 배척, 비방, 깡패짓 - 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 호소하다 - 공개 강연회 - 트로츠키주의 강령 발표 - 좌익반대파 1차 전국대회 - 미국공산주의자동맹 발족
강령과 임무 - 러브스톤 그룹 - 러시아 문제 - 노동조합 문제 - 당 분파와 코민
테른 - 앨버트 웨이스보드 - 스탈린주의자들의 ‘좌선회’ - 고립 - ‘극렬분자’ - 종파주의 - 발간물 - 빈곤 - 국제주의 - “끈기! 끈기! 끈기!”
국제주의 - 실업자운동 - 노동조합 - 독일 사건 - 독일공산당의 항복 - 제3인터내셔널의 파산 - 사회당 내 흐름 - 진보노동행동협회 - 대중활동으로 전환하다 - 종파적 반대파 - 미국노동자당 - 새로운 정당을 위한 캠페인
무엇을 할 것인가? - 패터슨 파업 - 호텔노동자 파업 - 필드 - 미니애폴리스 석탄야적장 파업 - 미국노동자당과 협상하다 - 러브스톤·캐넌 논쟁 – 진군하는 트로츠키주의
1934년의 파업물결 - 톨레도의 오토라이트 파업 - 실업자들의 역할 - 미니애폴리스 트럭기사들의 파업 - 빌 브라운 - ‘조직위원회’ - 패럴 답스 - ‘보안관 패주 전투’ - 7월 파업 - 연방 중재단 - <일간 조직가> - 플로이드 올슨 - 캐넌과 샥트먼의 체포 - 파업 본부에 대한 급습 - ‘하스·더니건 계획’ - 승리
미국노동자당과의 통합 협상 - 머스티 - 살루츠키(하드맨) - 루이스 뷰든즈 - 러드윅 로어 - 미국공산주의자동맹의 조직적 양보 - ‘원칙 선언’ - 국제공산주의 동맹 집행위원회 파리총회 - 트로츠키와 만나다 - ‘프랑스 전환’에 대한 올러·스탬 반대파 - 미국공산주의자동맹과 미국노동자당의 통합 - 노동자당 출범하다
사회당 ‘전투파’ - 스탈린주의자들의 압력 - 스페인의 경험 - 올러 그룹 - ‘범죄적 조합활동’ 재판 - 노동자 활동가 회의 - 조젭 잭 - 재정 위기 - 1935년 6월 총회 - 올러‧머스티‧에이번 분파 - 10월 총회와 올러 그룹 출당
정치냐 조직이냐 - 사회당의 내분 - ‘전투파’와의 협상 - 입당 조건 - 1936년 3월 당대회 - 앨런타운의 스탈린주의 요원들 - 사회당 입당
사회당 내 경향들 - 세계적 상황 - 스페인 내전, 모스크바 재판 그리고 프랑스 노동운동 - ‘트로츠키방어위원회’ - 캘리포니아의 사회당 - <사회주의자의 호소>와 <노동자행동> - <사회주의자의 호소> 전국 회의 - <사회주의자의 호소> 금지령 - ‘함구령’ -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출당 - 시카고 대회 - 사회주의노동자당 출범
이 책 <미국 트로츠키주의 역사>는 그 역사의 한복판에서 활동한 제임스 캐넌이 썼다. 이 책의 무대는 격동의 1920~30년대다. 1917년 러시아혁명과 그 뒤를 이은 세계 혁명의 물결, 1920년대 중반 이후 스탈린주의 권력의 타락, 1929년 대공황과 1933년 히틀러 집권, 1930년대 중반 새로운 노동자투쟁 물결의 등장과 급진화가 이 시기에 일어날 일들이다.
특히 이 책은 1917년 10월 러시아혁명의 영향을 받아 어떻게 미국에서 맑스레닌주의를 계승하는 혁명가들이 탄생했고, 러시아 스탈린 권력과 코민테른이 타락하면서 어떻게 미국에서도 스탈린주의와 트로츠키주의로 운동이 분화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올바른 강령을 가지고 노동자운동 속으로 파고들어 당시에 세계에서 가장 의미 있는 노동자계급 혁명정당을 건설했는지를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레닌 사후의 진정한 맑스레닌주의자들’인 트로츠키주의자들이 1920~30년대에 어떻게 활동했는지를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다룬 책은 세계적으로 별로 없다. 한국에 소개된 책은 더더욱 없다. 그래서 이 책은 매우 소중하다. 1920~30년대 격동기의 혁명운동사를 알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꼭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는 21세기 세계대공황이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시대다. 대기업들에서조차 인력 감축, 임금·복지 축소 공격을 벌이고 있다. 청년층(15~29세) 고용률이 3월에 38.7%로 29년 만에 최저일 정도로 고용불안이 심각해지면서 생존경쟁은 더 치열해지고 있다. 노조 관료들이 노동자 이익의 수호자가 아니라 줄어드는 자본가 이윤율의 파수꾼 역할을 하면서 노동자들을 노골적으로 배신하는 일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한반도를 둘러싼 전쟁위기가 커지고, 극우 세력은 더 극성을 부리고 있으며, 자본가정부는 탄압의 칼날을 곧추세우고 있다. 이처럼 야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는 대공황 상황에서 노동자계급은 무엇을 목표로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 노동자계급은 어떻게 전진할 수 있는가? 진정한 노동자당을 어떻게 건설해야 하는가? 이 책은 이런 고민을 해결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시사점과 실질적 교훈을 제공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책은 이론적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실천적 측면에서도 많은 투사들에게 유익할 것으로 생각한다.
2008년 세계 경제위기 이후, 많은 사람들이 맑스의 <자본>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현재의 세계대공황 국면에서 사람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왜 그런 일이 발생했는지를 알기 위해 맑스의 <자본>을 꺼내들고 있다. 그런 다음 그들 중에서 가장 의식적이고 용기 있는 이들은 ‘그렇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할 것이다. 그런 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이 책이 1930년대 대공황 국면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훌륭하게 실천했던 트로츠키주의자들의 활동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현재의 세계적 상황은 1930년대와 상당히 비슷하게 돌아가고 있다. 따라서 눈앞으로 다가온 거대한 격동의 현실을 이해하고 제대로 헤쳐 나가고자 한다면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있다.
한국에서 진정한 노동자계급 정당을 건설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미국 트로츠키주의 역사>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다음과 같다. 먼저 정치사상의 올바름이다. 레닌은 ‘혁명적 이론 없이 혁명적 실천 없다’고 말했다. 트로츠키는 ‘사상의 계승을 통해서만 혁명 전통이 수립된다. 혁명 전통이 없는 당은 바람에 나부끼는 갈대와 같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이 책은 전투적이었기에 급성장했지만 혁명이론이 취약해 결국 유명무실해진 세계산업노동자연맹(IWW)과 맑스-레닌주의를 포기해 타락해간 스탈린주의 공산당을 통해 혁명이론의 사활적 중요성을 보여준다.
둘째 명실상부한 노동자계급 당은 노동자계급의 거대한 투쟁과 급진화를 기반으로 할 때 제대로 건설할 수 있다. 1930년대 중후반의 계급투쟁 고양은 미국에서 노동자계급 당 건설을 추동하고 뒷받침한 중요한 배경이었다. 노동자운동이 상대적으로 침체해 있고, 투쟁이 분산적이고 수세적으로 펼쳐지는 상황이라면, 이러저러한 당 건설 시도가 무원칙한 대동단결과 분열, 환멸로 끝날 가능성이 많다.
셋째 노동자계급 당은 혁명가들의 의식적 노력 없이는 건설할 수 없다. 미국 트로츠키주의자들은 계급투쟁의 고양을 팔짱끼고 기다린 것이 아니다. 강령을 정교화하고, 미래 노동자계급 당의 골간대오를 육성하는 등 필요한 과업에 최선을 다함으로써 계급투쟁의 고양에 철저히 대비했다. 아무리 고양기라 해도, 아무리 노조 투쟁을 열심히 한다 해도 당이 저절로 건설되는 것은 아니다. 미국 트로츠키주의자들은 계급투쟁의 상승물결을 타고 노동자투쟁에 헌신적으로 결합하는 한편 당 건설을 위해 매우 의식적으로 분투했다. 머스티 그룹과 통합하고, 사회당에 입당해서 활동하고, 사회당에서 나와 사회주의노동자당을 창당하는 과정 하나하나가 의식적이고 체계적인 분투의 결과였다.
이 책에는 미국 트로츠키주의 운동이 힘겨운 초기 단계를 지난 뒤,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과정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미국 트로츠키주의 운동은 1940년대 이후 심각한 위기를 겪었고, 그 위기의 싹은 1930년대에도 존재했다.
미국 노동자계급에겐 정치적 전통이 약했기 때문에, 가장 선진적인 노동자들조차 자연스럽게 자기 투쟁을 노조 틀 안에 가두곤 했다. 1930년대 중후반에 거대한 노동자투쟁의 물결이 용솟음쳤을 때도 그런 경향이 꽤 강했다. 그래서 1938년에 사회주의노동자당 창당에 함께 한 많은 선진노동자들은 스스로를 사회주의에 호감을 가진 급진적 노조활동가로 보았을 뿐, 사회주의 정치활동가로 여기지 않았다. 즉 당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정치조직’으로서 노동자계급 속에서 활동하는 것이라고 바라보지 못하고, 노조체계 안에서 전투적 반대파로 활동하는 데 만족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 결과 사회주의노동자당은 스스로를 노조 좌파로 여기면서 점점 더 노조 내 상황에 수동적으로 적응하는 방향으로, 결국에는 미국 노총의 관료주의에 적응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런 약점을 우려한 트로츠키는 노조 상층 간부들을 향하지 말고 평조합원들을 향하라고, 특히 흑인처럼 가장 열악하고 억압받는 노동자들을 향하라고 여러 차례 주문했다. 그리고 좌파든 우파든 노조 관료들과 대결하면서, 그 영향력 아래 있는 노동자들을 조직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노조 관료들과 타협하는 기회주의 정책 때문에, 결국 사회주의노동자당은 많은 선진노동자들을 퇴보시켰고, 결국엔 노조 관료들에게 넘겨줬다. 그 결과 사회주의노동자당은 1960년대 초반에 이르면 100~200명 규모로 축소됐고, 뛰어난 트로츠키주의 노동자계급 정치조직이라는 정체성도 잃어버렸다.
이런 점을 고려해야 하지만, 어쨌든 이 책에서 설명하고 있는 1930년대 미국 트로츠키주의 운동은 여전히 전 세계 노동자계급에게 역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
2013년 5월 1일, 김현수
자연, 사회, 정신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해하려면, 무엇보다도 그 역사를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즉 그 사건이 어떻게 발생했고, 어떤 경로를 따라 성장했으며, 어떤 변화를 겪으며 발전했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것을 이해할 때만, 오직 그럴 때만, 참된 지식을 향한 길은 명확해질 수 있다. 물론 이것은 트로츠키가 대표하는 복잡하고 과학적인 사상체계를 이해하는 데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트로츠키주의 역사에 대한 이해는 지금까지도 부족하다. 그래서 미국 트로츠키주의 운동의 발생과 성장, 발전을 다룬 캐넌의 이 책은 오랫동안 절실했던 요구를 충족시켜준다. 게다가 캐넌은 정규 교육을 받은 학생만이 아니라, 배움의 의지와 열의를 가진 선진노동자라면 누구나 미국 트로츠키주의 역사에서 가장 핵심적인 측면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글을 썼다. 캐넌의 설명은 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공산주의 운동의 태동에서부터 시작된다. 그 뒤 1928년에 공산당에서 초기 트로츠키주의 중핵들이 제명당한 것에서부터 1938년에 사회주의노동자당을 만들 때까지, 트로츠키주의 운동의 여러 발전단계를 다룬다.
<미국 트로츠키주의 역사>는 원래 1942년 봄에 뉴욕에서 연속해서 강연했던 것이다. 현학자들이나 속물들은 이 책의 대화체 표현에 반감을 가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지한 사람이라면 그렇지 않을 것이다.
미국과 세계의 트로츠키주의 역사를 정확히 서술하고자 하는 미래의 역사가들은 역사 자료들을 더 탐구해 캐넌이 쓴 역사를 완성할 것이 틀림없다. 이 책이 철저한 조사에 기초해 광범위한 기록을 담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미래의 역사가들은 이 책을 자료로만이 아니라 안내서로도 크게 의존해야 할 것이다.
미국 공산주의 역사에 관한 몇 안 되는 과거의 글 중에서 객관적인 것은 하나도 없었다. 가령 벤자민 기틀로우의 책 <나는 고백한다>가 그렇다. 이 책은 미국 공산주의 운동의 창건자들에 대해, 미래 공산주의 사회에 대한 신앙고백을 가장하면서 개인적 지위와 분파적 이익을 위해 무원칙한 투쟁과 비도덕적 음모에 많은 에너지를 쏟아 부은 소부르주아들이라고 악의적으로 기술한다. 기틀로우는 미국에 뿌리를 둔 공산주의 운동을 창건한 것이 얼마나 진보적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다루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모든 진보적인 시대적 요구를 희생시키면서, 썩어 들어가는 자본주의 체제에 스스로를 팔아넘기고 봉사한 자들과, 자신을 포함한 공산주의 지도자들을 대비시키지도 않는다.
기틀로우나 다른 주관적인 자들이 피상적으로 접근한 것과는 달리, 캐넌은 초기 공산주의의 성장을 특징지은 치열한 내부투쟁에 대해 최초로 정치적 관점에서 합리적이고 타당하게 설명한다. 캐넌은 개인 간 충돌의 이면에 존재한 정치·이데올로기적 쟁점들을 밝혀낸다. 캐넌이 이런 사상적, 원칙적, 정치적 쟁점들에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에, 그의 관점은 완전히 객관적이고 돋보일 수 있다. 미국 공산주의의 발전과 퇴보가 특정 개인들의 좋고 나쁜 특성 때문이라고 말하는 피상적이고 잘못된 설명으로 빠져들지 않았던 것은, 그가 원칙적인 정치기준을 따랐기 때문이다.
캐넌은 한때 같이 일했거나 만났던 여러 저명한 노동자계급 정치활동가들의 특징을 설명할 때, “죄를 경감해주지도 말고, 그렇다고 적의를 품고 보지도 말라”는 오델로의 격언을 따랐다고 할 수 있다.
이른바 공산당에 지금도 남아있는 캐넌의 옛 동료들과 캐넌 자신 사이에는 피의 강이 흐른다. 그것은 이제 비밀이 아니다. 하지만 강연 초반부에 미국 공산주의 운동 초기를 다루면서, 캐넌은 그들을 경멸적으로 낙인찍지 않는다. 그들은 한때 캐넌이 높게 평가했던 공산주의 선구자들이다. 그 뒤에 많은 일이 있었지만, 캐넌은 그들에 대해 대충 평가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들을 평가하는 데서 주관적인 대목은 찾아볼 수 없다. 캐넌에 따르면, 미국 공산주의 운동을 창건하고 초창기를 돌파했던 사람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그 세대에서 가장 뛰어난 자질과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었다. 1920년대는 미국 자본주의의 전성기였다. 영리한 사람들은 떼돈을 벌고 있었지만, 미국 공산당의 분파 지도자들은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공장노동자보다도 열악한 생활조건을 견뎌내며 활동했다.
캐넌은 초기 공산당과 그 지도자들을 아주 정당하게 평가한다. 그가 보기에 모든 분파는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적절한 국제 지도부가 있었다면, 분파들은 하나로 통합될 수 있었다. 가령 레닌과 트로츠키 시절에는, 조언과 지도를 받기 위해 모스크바로 가져간 미국공산당 내부 문제들이 자연스럽게 해결됐다. 그 시절에 당은 더 단단하게 결속했고, 목표를 향해 눈에 띄게 전진했다. 내부 민주주의는 지켜졌다. 하지만 스탈린주의 체제는 신생 미국 공산당의 곤경과 성장통을 일부러 치명적 수준으로 증폭시켰다. 미국 공산당을 타락시킨 주된 책임은 미국 지도부 개개인의 특별한 허약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스탈린주의 사상과 실천 체계에 있었다.
캐넌은 초기 미국 공산주의 운동을 다루면서, 주요 이데올로기 경향들을 대표한 중요 인물들만을 언급한다. 당시 운동에서 저명했던 인물들은 이 역사책에서도 적절한 명성을 부여받는다. 뒤에 스탈린이 자신의 대리인으로 행동하도록 정치무대 위로 올린 우연적 인물들, 무명의 꼭두각시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왜냐면 미국 공산주의운동을 창건하는 영웅적 시기에는 아무도 그들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뒷부분에서 미국 트로츠키주의 운동의 성장에 악영향을 미쳤던 사회당의 특정 지도자들과 어떤 인물들을 다룰 때는 주저하지 않고 구체적으로 평가한다. 예를 들어 살루츠키(하드맨)에 대해 균형 있게 묘사한다. 이 인물에 대한 평가 근거는 전혀 모호하거나 주관적이지 않다. 미국 공산주의 창건자들은 많은 오류를 저질렀지만, 살루츠키보다 더 자세히 다룰 가치가 있다. 하지만, 캐넌은 살루츠키가 이도저도 아닌 인물의 전형이었기 때문에, 그에게 더 많은 시간을 쏟았다. 그를 가장 위험한 정치적 부류로 만든 심각한 약점에 대해 젊은 세대가 경계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다.
캐넌은 한때 좌파 정치에서 잠깐 두각을 나타낸 사회당 ‘전투파’의 지도자들도 자세히 다룬다. 그것은 젊은 세대가 취미 삼아 잠깐 운동에 발을 담그는 악성질병에 걸리지 않도록 예방주사를 놓기 위한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트로츠키주의를 배반했던 사회주의노동자당 내 소부르주아 반대파 지도자들에 대해서도 역사 속의 다른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세심하고 공평하게 다룬다.
이 역사에서 두드러진 인물들은 선구적 트로츠키주의자들이다. 트로츠키주의 역사는 종종 입에 풀칠조차 제대로 못하던 시절에 중앙 사무실을 지켰던 동지들과 미니애폴리스 동지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이런 흠 잡을 데 없는 투사들을 평가하면서, 캐넌은 그들이 전체 트로츠키주의 운동 속에서 획득한 지위를 인정한다.
미니애폴리스 동지들은 가난했지만, 당이 굳건히 설 수 있도록 모을 수 있는 모든 돈을 당에 기부했다. 그들의 정신적 지지도 높게 평가해야 한다. 당시는 의지가 가장 강한 사람들조차 격려와 지지 없이는, 전 세계의 반동적 압력을 견뎌낼 수 없는 어려운 시절이었다. 게다가, 무원칙한 파벌과 무책임한 분파가 당을 위협할 때마다, 그들은 항상 당을 지키기 위해 최선봉에 섰다.
캐넌을 포함해 17명의 트로츠키주의자들과 함께 신념 때문에 지금 감옥에 있는 빈센트 던에게 바친 헌사는, 가장 중요한 트로츠키주의 선구자 중 한 명에 대한 적절한 찬사다.
이 책은 이미 발간된 두 권의 자매편(트로츠키의 <맑스주의를 방어하며>와 캐넌의 <노동자계급 정당 건설을 위한 투쟁>)과 함께, 노동자계급의 해방과 사회의 사회주의적 재조직화를 위한 핵심 도구인 노동자계급 정당을 레닌의 방법에 따라 건설하고자 했던 미국의 역사적 경험을 근본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 세 권의 책은 분명히 미국의 당 창건자들과 조직가들을 위한 안내서가 됐다. 게다가 전 세계 도처에 있는 우리의 사상적 동지들은 가장 강력한 자본주의 요새에서 펼친 트로츠키주의 투쟁의 과정과 발전에서 가치 있는 결론을 이끌어낼 것이다. 마치 미국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중국, 서유럽, 남미, 그리고 특히 소련 등 다른 나라 제4인터내셔널의 경험으로부터 배웠듯이 말이다. 캐넌 동지가 책에 기록한 교훈들을 열린 마음과 풍부하게 이해하려는 의지로 연구한다면, 충분한 보상을 얻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1944년 6월 24일, 뉴욕에서 조셉 한센
캐넌은 1942년 뉴욕에서 열두 번의 공개강연을 통해 미국에서 공산당을 건설하기 위해 초기에 영웅적으로 노력했던 과정을 설명한다.
캐넌은 우선 1917년 10월 러시아혁명의 성공과 모범이 어떻게 미국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관점을 획기적으로 변화시켰는지를 1, 2, 3장에서 다룬다. 1917년 이후 몇 년 동안 그들이 볼셰비키를 따르는 노동자당을 건설하고 강화하기 위해 어떻게 노력했는지를 다룬다. 책의 나머지 부분은 1928년 이후의 10년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1928년은 공산당 지도부가 점점 더 스탈린주의로 기우는 것에 반대했던 베테랑 지도자들과 간부들이 당에서 쫓겨난 해다.
캐넌과 동료들은 미국공산주의자동맹을 건설하는 한편, 레닌의 정치노선과 지도 아래 발전한 코민테른의 세계혁명 강령을 국제적 차원에서 계속 실행해나가기 위해 볼셰비키 혁명 지도자인 트로츠키와 함께 한다. 오늘날에도 이 세계혁명 강령은 전 세계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을 위한 기초다.
대공황의 사회경제적 재앙과 제국주의 전쟁 책동에 맞서 처음으로 노동자들이 떨쳐나섰음을 보여주는 노조투쟁과 사회투쟁이 1930년대 초부터 벌어지기 시작한다. 캐넌은 이 투쟁에 공산주의자동맹 회원들이 어떻게 결합했는지를 서술한다. 미국 중서부 북부지방에서 당 활동가들이 계급투쟁적 노조지도부의 일원으로서 선진노동자들과 얼마나 성공적으로 결합했는지를 밝힌다. 이 결합 덕분에 노동자 대중운동의 고양기인 1934~38년에 일부 격렬한 계급투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캐넌은 이 노력에서 얻은 교훈을 제시한다. 그리고 미국 공산주의자들이 사회주의노동자당을 건설했던 1938년까지를 다룬다.
이 강연으로부터 20년 뒤, 캐넌은 <미국 공산주의 첫 10년>이라는 책을 통해 그 운동에 참가한 지도자의 관점에서 미국 맑스주의 운동의 초기 역사를 보다 자세히 다룬다. 1962년의 책을 통해, 볼셰비키가 이끈 1917년 러시아혁명부터 1928년까지 미국 공산주의자들의 활동과정을 추적한다. 그는 1942년의 강연[즉, 이 책]에서 처음으로 미국 공산주의 운동의 뿌리와 그 선구자들의 성격에 대해 요약해서 결론내렸다는 점을 확인한다.
캐넌은 1890년에 캔자스 주 로즈데일에서 태어났고, 18세에 사회당에 가입했다. 그는 1차 세계대전 이전과 세계대전 동안에 세계산업노동자연맹(IWW)의 순회 조직가이자 사회당 좌파의 지도자였다. 그 뒤, 미국 공산주의 운동의 창건 지도자가 됐다.
1922년 6월부터 1923년 1월까지 소련에서 보낸 7개월 동안, 캐넌은 코민테른 4차대회의 대표단이었고, 모스크바에 있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상임간부였다. 뒤에 그는 미국에서 국제노동자방어위원회의 사무총장으로 활동했다. 이 조직은 정치적 소속과 관계없이 노동자운동에서 전투적으로 싸우다 구속된 노동자계급 구속자들을 석방시키기 위해, ‘한 사람의 상처는 모두의 상처다’라는 노동자계급의 깃발을 들고 투쟁한 전국 조직이었다. 캐넌은 1929년에 미국공산주의자동맹의 창건을 이끌었다. 이 조직은 1938년에 사회주의노동자당으로 발전했다. 그는 1953년까지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사무총장으로 활동했고, 그 뒤 당 의장이 됐다. 그리고 1972년부터 1974년에 죽을 때까지 당의 명예 의장이었다.
이 강연이 있기 바로 몇 달 전인 1941년 12월 8일, 사회주의노동자당과 산별노조회의(CIO) 544지부(전 팀스터 544지부) 지도부와 중핵 17명과 함께 캐넌은 미네소타 주 미니애폴리스 연방법정에서 조작 재판을 받고 실형을 선고받았다. 2차 세계대전이라는 제국주의 학살에 미국이 참여하는 것을 미국 노동운동 안에서 적극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1940년에 만들어져 최초로 544지부와 사회주의노동자당 지도부를 기소한 스미스법이라는 사상탄압법 때문에, 그들은 유죄판결을 받았다. 사실상 1957년에 대법원이 뒤집긴 했지만, 그 법은 행동만이 아니라 특정 사상에 대한 옹호도 불법화했다. 어렵게 쟁취한 헌법의 권리장전(이것은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를 제한하는 법을 금지했다)을 위반한 것이다.
1943년 말에 미국 고등법원은[연방법원] 평결의 선고를 승인했다. 그래서 캐넌은 미네소타 주 샌드스톤에 있는 연방교도소에 16개월 동안 갇혀 있다가 1945년 초에 풀려났다. 고등법원은 다른 17명의 피고인에 대해서도 유죄 판결을 내렸다. 그래서 그들 모두가 비슷한 형량을 받고 감옥에 수감됐다.
<미국 트로츠키주의 역사>의 독자들은 이 책이 포괄하는 시기에 캐넌이 쓰고 말한 것을 담은 <미국 좌익반대파, 1928~1931년>, <미국공산주의자동맹, 1932~1934>에도 흥미를 느낄 것이다.
캐넌이 쓴 다른 저작으로 <노동자계급 정당 건설을 위한 투쟁>, <선동가 노트>, <재판대에 선 사회주의>, <감옥에서 보내는 편지>, <2차 세계대전기의 사회주의노동자당>, <당을 향한 연설>, <사회주의 연설> 등이 있다. 이 모든 저작과 <미국 공산주의의 첫 10년>, 조셉 한센이 쓴 <캐넌, 국제주의자>는 패스파인더 출판사를 통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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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트로츠키주의의 역사> 발간 50주년 기념판이 1995년에 출판됐다. 그때 우리는 사회주의노동자당 지도자인 조셉 한센이 쓴 1944년판 서문도 되살렸고, ‘한 참가자의 보고’라는 원래 부제도 복원했다. 책을 더 읽기 쉽고, 괜찮게 만들려고 본문과 색인을 꼼꼼히 검토해 새로 편집했다.
이 4판에는 최초로 24쪽 분량의 사진을 실었다. 이 사진들은 캐넌이 다룬 세계사의 대사건들과 노동자계급이 이끈 강력한 사회운동을 더 생생하게 느끼도록 해줄 것이다.
이번 판은 또 다른 측면에서 획기적이다. 패스파인더 출판사가 프랑스어판과 스페인어판을 동시에 출판했다. 캐넌의 강연이 있은 지 60년이 지난 지금, 미국과 전 세계에서 혁명의식을 가진 수백만의 비영어권 노동자들이 <미국 트로츠키주의 역사>를 통해 공산주의의 연속성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캐넌의 이 책은 동시대를 다룬 그의 다른 책들만이 아니라, 1983년에 잭 반즈가 맑스주의 정치이론지인 <새로운 인터내셔널>에 기고한 <그들의 트로츠키와 우리의 트로츠키:오늘날 공산주의의 연속성>과도 단짝이다. 패스파인더 출판사는 이 책의 신판도 새로운 서문을 담아 올해 영어판, 스페인어판, 불어판으로 발간했다.
이 모든 저작은 1928년에서부터 1938년까지의 10년 동안 캐넌과 그 동지들을 이끌었던 볼셰비키의 관점에서 출발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트로츠키주의는 새로운 운동이나 원칙이 아니다. 그것은 러시아혁명과 코민테른 초기에 상세히 설명하고 실천한 진정한 맑스주의를 복원하고 부활시킨 것이다.”
2002년 6월 1일. 잭 반즈
트로츠키주의의 정립
이 노조 회관은 미국 트로츠키주의 역사를 강연하기에 꽤 적절한 장소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역사적 투쟁을 시작했던 1928년에, 내가 처음으로 공개연설을 통해 트로츠키와 러시아 반대파를 방어했던 곳이 바로 이 강당이다. 당시 스탈린주의자들이 물리적 힘으로 우리 강연회를 깨려고 했기 때문에, 강연은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우리는 잘 이겨낼 수 있었다. 거의 14년 전에 우리가 공공연한 트로츠키주의자로서 공개강연 활동을 사실상 여기서 시작한 것이다.
미국 트로츠키주의 운동의 문헌을 살펴보면, 우리가 새로운 이론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고 거듭 말했다는 점을 틀림없이 확인할 것이다. 트로츠키주의는 새로운 운동이나 원칙이 아니다. 그것은 러시아혁명과 코민테른 초기에 상세히 설명하고 실천한 진정한 맑스주의를 복원하고 부활시킨 것이다.
맑스주의 운동의 연속성
볼셰비즘 자체도, 1914~1918년의 1차 세계대전에서 제2인터내셔널의 기회주의자들이 제국주의 정부들을 지지하면서 노동자계급을 결정적으로 배신하고 맑스주의를 오염시킨 뒤, 진정한 맑스주의를 복원하고 부활시킨 것이었다. 내가 강연에서 다루는 특정 시기(지난 13년)를 보든, 맑스와 엥겔스 사후의 어떤 시기를 보든, 하나의 사실을 목격할 수 있다. 그것은 혁명적 맑스주의 운동의 부단한 연속성이다.
진정한 맑스주의의 대표자들은 언제나 존재해왔다. 때때로 온갖 왜곡과 배신이 운동에 혼란을 초래하기도 했지만, 정통 맑스주의를 복원하고 운동을 바로 세우려는 세력이 항상 새롭게 등장했고, 전면에 나섰다. 이것은 우리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과거에 뿌리를 두고 있다. 지금 사회주의노동자당이라는 확고한 형태를 갖춘 트로츠키주의 운동은 갑자기 어디선가 완성된 형태로 불쑥 솟아난 것이 아니다. 이 운동은 미국 공산당으로부터 직접 등장했다. 미국 공산당 자체도 이전의 운동인 사회당과 세계산업노동자연맹(IWW)으로부터 등장했다. 세계산업노동자연맹은 전쟁 이전과 전쟁 시기에 미국의 혁명적 노동자운동으로부터 자라났다.
사회당
1919년에 조직적 형태를 갖춘 공산당은 처음에는 사회당 좌파로 출발했다. 공산주의자 대오의 대다수는 사회당 출신이었다. 사실, 1919년 9월에 공산당이 공식 출범한 것은 장기간에 걸친 사회당 내부투쟁이 조직적 정점에 이른 것일 뿐이다. 사회당 내부투쟁 과정에서 강령이 작성됐고, 공산당의 조직적 골간이 형성됐다. 결국 내부투쟁이 분열로 이어져 공산당이라는 독자 조직이 창건된 것이다.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난 1917년부터 미국 공산당이 창건될 때까지의 2년, 그 뒤 1~2년에 걸친 초기 공산주의 운동의 공고화 과정에서 주요 임무는 사회당으로 대표되는 기회주의에 맞선 분파투쟁이었다. 그것은 노동자정치조직이 타락하는 동시에 혁명적 분파가 탄생하는 경우에 거의 항상 벌어지는 일이다. 거의 예외 없이 새로운 운동은 공식 분열로 나아가기 전에, 다수를 획득하고 세력을 공고히 하기 위한 다소 협소한 당내 투쟁으로 초기 활동을 제한한다.
새로운 당은 계속해서 기존 정당에서 조직할 사람을 찾는다. 신생 정당이 제 발로 확고하게 서는 법을 배우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1919년에 공식적으로 분리한 뒤에도, 관성과 습관 때문에, 그리고 투쟁이 실제로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분파투쟁은 계속됐다. 아직 결단하지 못한 사람들과 새 당에 가입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들이 사회당에 남아 있었다. 공산당은 사상을 명료하게 다듬고 사회당원을 추가로 조직하는 작업에 1년 정도 힘을 집중했다. 그런 역사적 사건들에서 늘 그렇듯, 결국 분파의 단계는 계급투쟁에 직접 뛰어들어 활동하고, 새로운 부대를 충원하며, 새로운 조직을 완전히 독립적으로 발전시키는 단계로 이어졌다.
러시아혁명의 영향
나중에 공산당이 된 사회당 좌파는 1917년 볼셰비키 혁명으로부터 직접 고무받았다. 그 전에는 미국 투사들이 진정한 맑스주의 교육을 받을 기회가 거의 없었다. 사회당 지도부는 맑스주의자들이 아니었다.
미국에서 맑스주의 문헌은 아주 조금밖에 출판되지 않았다. 그것도 거의 경제서적들로 국한됐다. 사회당은 이질적 조직이었다. 사회당의 정치활동과 선전·선동 내용은 온갖 급진적, 혁명적, 개량적 사상들로 뒤범벅돼 있었다. 전쟁 이전은 물론이고 전쟁 시기에도, 명확한 강령적 지침을 찾아 당에 들어온 젊은 투사들은 원하던 것을 찾을 수 없었다. 미국 사회당의 저명한 지도부는 유럽 사회민주당들의 기회주의 지도부를 그대로 빼닮았다. 이론을 더 모르고, 더 무시했다는 점만 달랐다. 그 결과, 미국 운동의 수많은 젊은 투사들은 혁명적 본능과 충동을 갖고 있었지만, 혁명운동을 일관되게 펼치기 위해 필요한 맑스주의를 거의 배울 수 없었다.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은 거의 하룻밤 사이에 모든 것을 바꾸어놓았다. 러시아에서 노동자계급은 권력을 장악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다른 모든 국가에서와 마찬가지로, 노동자혁명 승리의 엄청난 충격파가 미국 운동을 뿌리까지 뒤흔들어놓았다. 러시아혁명에 고무받아 사회당의 혁명적 분파는 엄청나게 강화됐고, 노동자들은 새로운 희망으로 부풀었다. 전에는 혁명의 이론적 문제들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그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치솟았다.
좌파의 형성
곧바로 우리는 러시아혁명의 조직가들과 지도자들이 단지 실천적 혁명가가 아니라, 이론적으로도 진정한 맑스주의자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처음으로 우리에게 진정한 혁명적 맑스주의 정치를 설명해 준 것은 레닌과 트로츠키 등 러시아 지도자들이었다. 우리는 그들이 국제 노동운동에서 왜곡되지 않은 맑스주의를 부활시키기 위해 오랫동안 투쟁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제, 러시아의 승리가 가져다 준 엄청난 권위와 명성 덕분에, 그들은 마침내 모든 나라에서 청중을 갖게 됐다. 모든 진지한 투사들은 그들 주위로 결집했고, 전례 없는 관심과 열정으로 그들의 저작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설명한 사상은 실천적 입증 덕분에 열 배의 권위를 획득했다. 게다가, 세계 자본주의가 그들에 맞서 모든 힘을 동원했지만, 그들은 계속해서 위대한 혁명을 발전시키고, 적군(赤軍)을 창설하며,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힘을 보여줬다. 자연스럽게 우리를 포함해 전 세계 모든 노동자정치운동의 혁명서클들이 볼셰비즘을 권위 있는 사상으로 받아들였다.
그런 토대 위에서 사회당 좌파가 형성됐다. 사회당 좌파는 자체 기관지, 조직가, 강연자, 필진을 갖추고 있었다. 공산당이 공식 출범하기 4~5개월 전인 1919년 봄에, 우리는 뉴욕에서 사회당 좌파의 첫 전국회의를 열었다. 당시에 나는 캔자스 시 대표로 회의에 참석했다. 우리 분파가 미래의 분리를 준비하면서, 당내 당의 형태를 갖춘 것이 바로 이 회의에서였다. 공식 기관지의 이름은 <혁명시대>였다. 레닌과 트로츠키의 진짜 사상을 미국 노동자들에게 처음 소개한 것이 이 신문이었다. 바로 이 신문의 편집자가 미국에서 처음으로 볼셰비키 사상을 자세히 소개하고 대중화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미국 공산주의 창시자로 역사적으로 인정받아야 한다. 그의 이름은 루이스 프라이나다. 그의 심장은 그의 두뇌만큼 강하지 못해 투쟁과정에서 굴복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죽음의 고통 속으로 빠져들었을 때, 그는 뒤늦게 그쪽으로 전향했다. 하지만 그것은 개인적 불운일 뿐이다. 그가 초기에 했던 일은 모두 유효하다. 그 누구도 그것을 무효로 만들 수 없다.
당시 운동에서 또 한 명의 저명한 인물로 존 리드가 있었다. 그는 지도자도 정치가도 아니었지만, 도덕적 영향력이 매우 컸다. 존 리드는 미국 사회주의 언론인으로서 러시아로 건너가 혁명에 참여했고, 그것을 진실하게 보도했다. 그리고 <세계를 뒤흔든 열흘>이라는 위대한 책을 썼다.
언어별 연맹
초기 사회당 좌파의 대다수는 외국 출신이었다. 20년 전 당시에 미국에서 기층 노동자계급의 상당수는 외국 출신이었다. 전쟁 전에는 이민의 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그것은 거대한 노동력을 축적하려는 미국 자본의 필요를 충족시켰다. 이들 이민자의 다수는 자국에서 사회주의 정서를 안고 미국으로 건너왔다. 러시아혁명의 영향으로 외국어를 쓰는 사회주의운동이 급속히 늘어났다. 외국 출신들은 사용하는 언어별로 연맹을 조직했고, 사회당 안에서 자치권을 누렸다. 8~9천 명의 회원들이 가입한 러시아어 연맹, 5~6천 명이 가입한 폴란드어 연맹, 3~4천 명이 가입한 우크라이나어 연맹, 약 1만 2천 명이 가입한 핀란드어 연맹 등이 있었다. 이처럼 당에는 외국출신 당원이 매우 많았다. 이들 대다수는 러시아혁명의 깃발 아래 모였다. 사회당이 분열한 뒤 초기 공산당원의 대다수를 차지한 것이 이들이었다.
이 언어별 연맹의 지도자들은 새로운 정당을 통제하고자 했고, 실제로 통제했다. 자신이 대표하는 언어별 연맹 덕분에, 그들은 초기 공산주의 운동에서 영향력을 너무 많이 행사했다. 이것은 여러 측면에서 좋은 일이었다. 왜냐면 그들 대부분이 열렬한 공산주의자였고, 당에 볼셰비즘 사상을 불어넣는 데 기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지배는 다른 측면에서 심각한 악영향을 끼쳤다. 실제로 그들의 마음은 미국이 아니라 러시아에 있었다. 그들은 운동을 부자연스럽게 만들었다. 운동은 처음부터 외국에서 흘러들어온 종파주의에 시달렸다. 자기 뒤에 있는 조직원들 덕분에 실권을 가졌다는 점에서 당을 지배한 그 지도자들은 미국의 정치, 경제 상황에 전혀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미국 노동자들의 심리를 이해하지 못했고, 관심을 많이 기울이지도 않았다. 그 결과, 초기 운동은 비현실성의 과잉으로 고통받았다. 또한 많은 경우에 당을 미국의 실제 계급투쟁으로부터 분리시켜 사고하고 활동하는 낭만주의적 기운조차 존재했다. 기이하게도, 이 언어별 연맹 지도자의 다수는 자신이 구세주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그들은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운동을 통제하기로 했다.
분파투쟁
처음에는 사회당 좌파 안에서, 그리고 뒤에는 공산당 안에서, 미국 공산주의 운동은 이른바 ‘지도권을 둘러싼’ 엄청난 분파투쟁에 시달렸다. 외국출신 지도자들의 지배는 역설적인 상황을 낳았다. 모두가 알다시피, 일반적으로 미국과 같은 주요 제국주의 국가에서 외국어를 사용하는 이주노동자는 전체 인구의 소수로서 평등한 권리들을 위해 끊임없이 싸우지만 그 권리들을 결코 온전히 누리지 못한다. 하지만 사회당 좌파와 초기 공산당에서는 이 관계가 뒤바뀌었다. 슬라브계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이 지나치게 대변됐다. 러시아인, 리투아니아인, 폴란드인, 레트인[라트비아인], 핀란드인 등이 다수를 차지했다. 그들은 압도적 다수였고, 우리 운동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 생각하는 토박이 미국인은 소수였다. 처음부터 우리는 박해받는 소수파로서 투쟁했다. 처음에 우리는 거의 승리하지 못했다.
처음엔 사회당 좌파 안에서, 그 뒤 독립한 공산주의 운동 안에서, 나는 미국인 지도부와 미국에 맞는 길을 추구하는 분파에 속했다. 토박이 노동자들의 운동에 정통하고 긴밀하게 연결된 지도부를 세우지 않으면, 미국에서 어떤 운동도 건설할 수 없다고 확신했다. 마찬가지로 그들 다수는 미국인이 진정한 볼셰비키가 될 수 없다고 확신했다. 그들은 영어로 표현할 때는 우리를 원하고 인정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기회주의와 중도주의로부터 운동을 지키기 위해 계속 통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수년 동안 싸우느라 많은 시간을 허비한 뒤, 결국 언어별 연맹 지도자들은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운동은 미국 출신 지도부를 찾아야 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두 개의 공산당
지도권을 둘러싼 투쟁은 조직형태에 관한 투쟁으로 나타났다. 언어별 그룹들은 자율적 연맹으로 조직돼야 하는가 아니면 민족적 체계나 자율적 권리를 갖지 않는 지역 지부들로 조직돼야 하는가? 중앙집중적 당을 만들 것인가 아니면 연방정당을 만들 것인가? 당연히 중앙집중적 당이 볼셰비키의 구상이다. 하지만 중앙집중적 당에서는 언어별 그룹들을 단단한 블록으로 쉽게 결집시킬 수 없었다. 반면 연방정당에서 언어별 연맹 지도자들은 당대회 등에서 지지자 표를 확실히 통제함으로써 당에 맞설 수 있었다.
이 투쟁은 1919년 뉴욕에서 열린 사회당 좌파 회의를 교란시켰다. 사회당 전국대회에서 분열이 발생했을 때, 이미 좌파 세력은 자체적으로 분열돼 있었다. 그래서 사회당에서 분리해 나온 공산주의자들은 단일정당을 건설할 수 없었다. 며칠 뒤 하나가 아닌 두 개의 공산당이 건설됐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졌다. 언어별 연맹이 이끈 다수파는 미국공산당을 건설했고, 나머지 소수파는 공산주의노동자당을 건설했다. 후자는 주로 미국 출신과 미국화한 외국 출신들로 이뤄졌다. 당연히 다양한 변수와 개인적 부침이 있었지만, 주요 구분선은 그것이었다.
지하활동
독립적 공산주의 운동이 같은 강령을 갖고 있으면서도 둘로 갈라져 격렬히 싸운 것은 불길한 출발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갈라진 대오는 끔찍한 박해를 받았다. 미국에서 1919년은 전후 대반동의 해였다. 지배자들은 ‘민주세계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1차 대전을 치른 후, 미국의 안전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오픈숍’제도를 추가로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모든 노동자조직을 겨냥해 애국주의 광풍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했다. 전국에서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잡혀갔다. 새로운 공산당은 이 공격의 초점이 됐다. 연안 지방의 거의 모든 지역조직이 습격당했다. 전국지도부든 지방지도부든 사실상 모든 지도부가 잡혀갔고, 이런저런 이유로 기소됐다. 외국 출신 투사들은 대규모로 추방됐다. 탄압 때문에 운동은 지하로 내몰릴 수밖에 없었다. 두 당의 지도부는 공개적이고 합법적인 운동을 지속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미국 공산주의 운동의 첫 해에, 우리는 서로 갈라져 갈등하는 두 개의 공산당이라는 불명예, 추문, 조직적 재앙을 겪었을 뿐만 아니라, 몇 달 뒤에는 지하 그룹과 지부의 형태로 조직을 운영할 수밖에 없었다.
1919년부터 1922년 초까지 공산주의 운동은 비합법상태로 머물렀다. 탄압의 첫 충격이 가시고, 각 그룹과 지부가 지하에 안착했을 때, 운동은 대중의 삶과 노동조직들로부터 완전히 고립됐고, 비현실적 경향의 지도자들이 힘을 얻었다.
여전히 두 당은 서로간의 분파투쟁으로 엄청난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다. 교리를 다듬고, 사소한 트집을 잡는 것이 취미가 됐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초좌익주의가 매우 해롭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이 살아있는 노동운동으로부터 고립될수록, 대중운동과 관계가 약해질수록, 대중운동에서 영향을 받아 오류를 수정하는 것이 어려워질수록, 문구와 강령을 더욱 급진화하는 것이 고유의 법칙인 듯하다.
이 운동의 역사를 엄밀하게 연구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당시에 발간된 일부 당 출판물들을 검토해야 한다.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초좌익이 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우리는 공개모임을 갖지 못했다. 노동자들에게 얘기할 필요가 없었고, 우리 슬로건에 대한 반응을 살필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비공개 모임들에서 가장 큰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점점 더 운동의 지도부 자리를 차지했다. 미사여구를 늘어놓는 ‘급진주의’가 판을 쳤다. 초기 미국 공산주의 운동은 거의 초좌익주의가 지배했다.
1920년 대선 때, 운동은 여전히 비합법 상태에 있었고, 자신의 후보를 내세울 방법이 없었다. 당시 사회당은 유진 뎁스를 후보로 냈다. 하지만 우리는 사회당과의 격렬한 분파투쟁을 이유로 그를 지지할 수 없다는 잘못된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아주 급진적 방침을 정했다. 노동자들에게 선거 보이콧을 호소하는 단호한 입장을 발표한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다음과 같이 말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우리는 후보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선거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가령 1940년대에 사회주의노동자당(트로츠키주의자들)이 그렇게 말했다. 기술적, 재정적, 조직적 어려움 때문에, 우리는 후보를 낼 수 없었다. 또한 지지할 후보를 찾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사태가 흘러가도록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당시 공산당은 무슨 일에 대해서든 입장을 발표했다. 내가 종종 성명서에 관심이 없는 것은 공산당 초기에 성명서를 너무 많이 봤기 때문이다. 나는 항상 성명서를 내야 한다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 적게 내되 더 중요한 일에 성명서를 내는 것이 더 낫다. 그럴 때 성명서는 무게를 갖는다. 어쨌든 선거 보이콧을 호소한 1920년의 성명서로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운동에서 강력한 반(反)의회 경향이 성장했고, 선거에 대한 무관심을 극복하는 데는 수년이 걸렸다. 그러는 사이에 우리는 레닌의 <좌익 소아병>을 읽었고, 모두가 이론적으로는 선거 참여의 필요성을 인정했다. 하지만 선거 참여를 위해 실제로 역량을 투여하지는 않았다. 당이 선거활동에 진지하게 나서기까지는 수년이 흘러야 했다.
또 다른 초좌익적 견해도 초기 비합법 공산당에서 우세했다. 그것은 비합법 상태의 유지를 혁명적 원칙으로 여기는 시각이었다. 지난 20년 동안 우리는 합법성의 이점을 누려왔다. 사회주의노동자당 안에서 합법정당이 아닌 다른 존재방식을 아는 동지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래서 합법주의 편향이 자라날 가능성도 꽤 있다. 당은 지배계급의 태도와 무관하게 활동을 지속해 나갈 수 있어야 하기에, 탄압받는 시기에 그런 동지들은 어느 정도 큰 충격을 받을 수 있다. 혁명정당은 비합법 형태로도 활동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선택이 아니라, 필요에 따른 것이다.
비합법 정치조직과 공개 정치조직 모두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공개 정치조직이 훨씬 더 경제적이고 유리하다는 사실을 쉽게 납득할 것이다. 그것이 노동자들을 만나고, 당원으로 조직하는 가장 쉬운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정한 볼셰비키는 가장 혹독한 탄압의 시기에도 항상 가능한 모든 공개활동의 기회를 붙잡고 활용하고자 노력한다. 만약 말하고 싶은 것을 모두 공공연하게 말할 수 없다면, 가능한 최대로 말하고, 부족한 것은 다른 방식의 합법적 선전으로 보충할 것이다.
우리가 러시아혁명 지도자들의 저작과 가르침을 제대로 소화하기 전이었던 공산주의 운동초기에 비합법당을 원칙으로 여기는 경향이 자라났다. 시간이 흘러 반동의 물결이 가라앉자, 합법활동의 가능성이 열렸다. 하지만 당이 합법화를 향해 약간 전진하려 하자, 엄청난 분파투쟁이 벌어졌다. 1921년과 1922년 초까지 공산주의 운동의 다수는 비합법 상태가 아닌 당은 혁명적일 수 없다는 믿을 수 없는 견해를 공유했다.
노조 문제에서도 ‘급진주의’가 팽배했다. 이 끔찍한 초좌익주의적 병균은 고립된 운동에서 가장 잘 자란다. 운동이 대중으로부터 고립돼, 오류를 적절히 교정할 수 없는 최악의 상황에서는 언제나 초좌익주의가 자라난다. 트로츠키주의 운동에서 분리한 세력들에서 그런 초좌익주의를 발견할 수 있다. 사람들이 그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그들의 주장이 사회 흐름에 영향을 미치지 못할수록, 그들의 입장은 더 극단적이고, 더 비이성적이며, 더 우스꽝스럽게 변한다.
공산주의운동의 첫 비합법 대회에서 노조문제가 의제로 올랐다. 이 대회는 분열과 통합을 낳았다. 언어별 그룹들이 이끄는 공산당에서 루덴버그 분파가 분리했다. 그들은 공산주의노동자당과 함께 1920년 5월에 미시건 주 브릿지맨에서 열린 통합대회에 참여해 새로운 통합공산당을 선포했다(1922년 8월에 브릿지맨에서 경찰의 습격을 받은 또 다른 대회와 혼동해선 안 된다). 통합공산당은 우위에 섰고, 1년 뒤에는 공산당의 남은 절반과도 통합했다.
나는 1920년 대회에서 채택한 노조 문제에 관한 결의안을 또렷이 기억한다. 트로츠키주의 운동에서 배운 것에 비추어본다면, 그 결의안은 소름끼치는 것이다. 결의안은 미국노동총연맹(AFL)을 ‘배척’하라는 호소였다.
‘일자리를 얻고자 미국노총에 속해서 일해야만 하는’ 당원들은 부르주아 의회에서 공산당이 활동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활동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즉 미국노총을 강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부로부터 파괴하기 위해 활동하라는 것이었다. 다른 많은 오류처럼, 이 어리석은 오류는 뒤에 교정됐다. 이런 우스꽝스런 일들을 저지른 많은 이들이 뒤에는 그것을 깨닫고, 정치운동을 더 잘 해나갈 수 있었다.
러시아혁명을 따르는 젊은 세대는 사회민주당의 기회주의적 배신에 맞서면서 지나친 급진주의를 선택했다. 1921년 코민테른 3차 세계대회에서 레닌과 트로츠키는 공공연하게 ‘우파’의 입장에 섰다. 레닌은 의회 활동, 노조 활동과 관련해 독일의 초좌익주의를 겨냥하는 <좌익소아병>을 썼다. 대회 결의안과 함께 이 팜플렛은 초기 코민테른에서 초좌익주의 경향을 정리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나는 속물들이 미국 공산주의 운동의 건설 과정을 우스꽝스런 한바탕 소동으로 묘사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전혀 그렇지 않았다. 공산주의 운동은 부정적 측면보다 긍정적 측면이 많았다. 용기 있고 헌신적인 수천 명의 혁명가들이 운동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려 했고, 위험을 감수하려 했다. 그들은 오류를 많이 저질렀지만, 미국에서 전례 없는 당을 건설했다. 즉 맑스주의 강령, 뛰어난 지도부, 규율 잡힌 대오를 갖춘 당을 건설한 것이다. 비합법 시기를 견뎌낸 사람들은 규율을 습관화했고, 다음 시기에 위대한 역할을 할 방법을 배웠다. 당시에 우리는 그런 기초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우리는 강령을 진지하게 다루는 법을 배웠다. 소송을 처리하듯 사회주의를 다루는 사람들이 권력 장악을 목표로 혁명운동을 이끌 수 있다는 생각과 영원히 단절했다. 구 사회당의 전형적 지도자는 법을 다루는 변호사, 기도하는 목사, 작가 등 이러저러한 전문가들이었다. 그들은 가끔씩 나타나 거들먹거리며 연설하곤 했다. 상근자들은 실질적인 당내 영향력을 갖지 못하고, 궂은 일만 하는 실무자였을 뿐이다. 혁명적 충동과 열정을 가진 평당원들과 최상층 소부르주아 인사들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존재했다.
공산당은 초기에 소부르주아 인사들과 완전히 단절했다. 이 과거의 지도자 중 단 한 명도 러시아혁명을 진심으로 지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단절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평당원 중에서 새로운 지도자를 선출해야 했다. 새로운 지도자는 당을 위해 일하는 직업적 노동자여야 한다는 점을 처음부터 원칙으로 정했다. 지도자는 당을 위해 자신의 모든 시간과 삶을 바쳐야 한다. 노동자들을 이끌고 실제로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투쟁하는 당이라면, 다른 형태의 지도부란 생각할 가치도 없다.
비합법 상황에서 러시아 지도자들의 저작을 이해하기 위한 교육활동을 계속했다. 레닌, 트로츠키, 지노비에프, 라덱, 부하린이 우리의 스승이었다. 우리는 태만했던 옛 사회당에서와는 전혀 다른 정신으로 교육받기 시작했다. 사상과 강령을 매우 진지하게 대하는 혁명가의 정신으로 교육받은 것이다. 고립되고 쪼그라들수록 운동은 내부활동에 집중했고, 격렬한 분파투쟁이 오랫동안 계속됐다.
합법화 투쟁
지하의 막다른 골목에 갇힌 운동은 정체하기 시작했다. 우리 지도부 중 일부가 출구를 찾기 시작했다. 합법적 방식으로 미국 노동자들에게 다가갈 방법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그 시도는 격렬한 저항에 부딪혔다. 우리는 새로운 분파를 만들었고, 나와 러브스톤은 긴밀하게 협력했다. 1922년 봄에 루덴버그가 감옥에서 나온 뒤 우리와 함께했다.
운동의 합법화를 위한 투쟁은 1년 반에서 2년 동안 누그러지지 않고 계속됐다. 우리는 운동의 합법화를 단호하게 찬성했다. ‘운동의 합법화는 일종의 배신’이라고 확신한 사람들도 똑같이 단호하게 저항했다. 결국 1921년 12월에 우리는 중앙위원회에서 근소한 차이로 다수파가 됐고, 합법화를 향해 조심스럽게 한 걸음씩 나아가기 시작했다.
여전히 대오 내 저항이 너무도 강력했기 때문에, 당을 합법화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강연회를 열기 위한 몇몇 합법 그룹을 조직했다. 그 뒤 이 그룹들을 미국노동동맹이라는 중앙기구에 편제하기 위해 대회를 소집했고, 동맹을 선전조직으로 전환했다. 1921년 12월에 우리는 비합법 공산당을 해산하자고 제안하지는 않았다. 당시에는 그런 제안에 다수가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합법 공산당과 공존하는 공개적이고 합법적인 조직으로서 노동자당을 조직하자고 제안했다. 비합법 공산당을 유지하면서 외곽에 합법적 노동자당을 건설하기로 타협한 것이다. 2~3천명의 완고한 비합법 활동가들은 합법화를 위한 이런 임시조치에 대해서도 저항했다. 그들은 분리해서 별도의 조직을 만들었다.
노동자당
우리는 합법과 비합법에서 두 개의 당을 갖게 됐다. 노동자당은 매우 제한적인 강령을 가졌지만, 모든 합법적 대중 활동을 펼치는 매개체가 됐다. 통제권은 비합법 공산당에 있었다. 노동자당은 탄압받지 않았다. 워싱턴과 여타 지역에서 반동의 물결이 지나갔고, 자유주의 정치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우리는 공개 행사와 강연을 열 수 있었다. 신문 발간과 선거운동 등에도 참여할 수 있었다. 그러자 이렇게 불편한 두 개의 당을 계속 유지해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떠올랐다. 우리는 비합법 조직을 정리하고 모든 활동을 합법정당으로 집중하기를 원했고, 탄압을 받을지 시험해보고 싶었다. 우리는 새로운 반대에 부딪혔다.
투쟁은 중단 없이 계속됐고, 결국 우리는 1922년 코민테른 4차 대회에 이 문제를 다뤄달라고 호소했다. 대회에서 나는 이른바 ‘청산파’의 대표였다. 이 명칭은 볼셰비즘의 역사에서 따온 것이었다. 러시아에서 1905년 혁명이 패배한 뒤 언젠가, 한 멘셰비키 분파가 비합법 당을 청산하자고 제안하고 나섰다. 그들은 모든 활동을 짜르 전제군주의 ‘합법성’ 안으로 가두려 했다. 레닌은 그 제안의 지지자들에 맞서 무자비하게 싸웠다. 왜냐면 그것은 혁명활동과 혁명조직을 포기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레닌은 그들을 ‘청산주의자’라고 비난했다. 그리고 우리가 미국에서 비합법 당을 정리하자고 제안하고 나섰을 때, 러시아의 볼셰비즘을 기계적으로 받아들인 좌파는 자연스럽게 레닌의 표현을 빌려와 우리를 ‘청산주의자’라고 비난했다.
그래서 우리는 코민테른 대회에 앞서 결판을 보기 위해 모스크바로 갔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트로츠키를 만났다. 이 투쟁 과정에서 우리는 러시아 지도자 개개인에게서 지지를 얻고자 했다. 나는 1922년 여름과 가을의 몇 달을 러시아에서 보냈다. 청산주의에 맞선 캠페인이 우리를 능가했고, 러시아인들이 청산주의자들과 관계를 맺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오랫동안 외면당했다고 할 수 있다. 미국 상황을 잘 몰랐던 그들은 우리에 대해 선입견을 갖기 쉬웠다. 그들은 당이 실제로 금지돼 있다고 추정했고, 질문에 대해 곧바로 다음과 같이 답변하곤 했다. “만약 동지들이 합법적으로 활동할 수 없다면, 비합법적으로 활동해야 한다. 어쨌든 동지들은 활동해야 한다.”
하지만 미국의 실제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미국 정세에서는 합법 공산당이 가능했다. 그게 우리의 주장이었다. 그 올바름은 이후의 모든 경험을 통해 입증됐다. 결국 나와 몇몇 동지들이 트로츠키 동지를 만나 한 시간 동안 우리 견해를 설명할 수 있었다. 설명이 끝나자, 트로츠키는 몇 가지를 물은 뒤 이렇게 말했다.
“그 정도면 됐다. 나는 ‘청산주의자들’을 지지한다. 레닌한테 말하겠다. 레닌도 확실히 동지들을 지지할 것이다. 모든 러시아인이 당신들을 지지할 것이다. 그것은 단지 정세 판단의 문제일 뿐이다. 그럴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 스스로에게 비합법이라는 굴레를 씌우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우리는 레닌을 만나게 해줄 수 있는지를 물었다. 트로츠키는 지금 레닌이 아프지만, 만약 필요하다면, 만약 레닌이 자기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레닌을 만날 수 있게 해주겠다고 했다. 며칠 뒤 매듭이 풀리기 시작했다. 미국 문제를 다루기 위한 코민테른 위원회가 설치됐다. 우리는 논쟁하기 위해 위원회로 갔다. 트로츠키와 레닌이 ‘청산주의자들’ 편이라는 사실이 이미 알려졌다. 그래서 전반적 분위기가 우리에게 유리하게 바뀌었다.
위원회 토론에서 지노비에프는 러시아 볼셰비키의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합법 활동과 비합법 활동에 대해 뛰어나게 연설했다. 나는 지금까지도 그 연설을 잊지 못한다. 그 기억은 지금까지 우리 당에 큰 도움이 됐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확신한다. 라덱과 부하린도 같은 입장에서 연설했다. 이들 세 명은 당시 코민테른에 파견된 러시아 공산당의 대표들이었다. 철저하고 충분하게 토론한 다음, 다른 당의 대표들도 미국 공산당을 합법화한다는 견해를 전면 지지했다.
이런 결정을 내린 코민테른 세계대회의 권위 덕분에, 미국의 합법화 반대세력은 곧 잠잠해졌다. 1921년에 공산당의 외곽 합법조직으로 만들어진 노동자당은 대회를 열어 보다 명료한 강령을 채택했고, 비합법 조직을 완전히 대체했다. 1923년 이후의 모든 경험은 그 결정이 옳았음을 보여주었다. 미국 정세에서는 합법조직이 정당했다. 불필요한 때에 비합법 상태로 남았다면, 혁명활동에 끔찍한 재앙, 낭비, 치명적 손상을 초래했을 것이다. 피할 수 없는 위험을 감수하는 용기는 혁명가에게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불필요한 희생을 피하기 위해 최대한 신중한 것도 똑같이 중요하다. 중요한 것은 가능한 가장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방식으로 활동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마지막으로 덧붙이고자 한다. 당의 합법화에 동의하지 않은 한 작은 그룹이 있었다. 그들은 우리를 아랑곳하지 않고 비합법 상태로 머물렀다. 그들은 공산주의를 배신할 생각이 없었다. 본부를 보스턴에 두고, 클리블랜드에 지부 하나를 뒀다. 우리는 이 비합법 그룹이 몇 년 동안 이따금씩 일종의 입장을 발표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7년 후 우리가 공산당에서 쫓겨나 트로츠키주의 운동을 건설할 때, 이 보스턴 그룹이 트로츠키주의 사상에 어느 정도 우호적이라는 소식이 들려왔다. 당시 우리는 어떤 도움이든 아주 절실했기 때문에, 이 소식에 관심을 기울였다.
내가 보스턴에 갔을 때, 지역 동지들이 보스턴 그룹을 만날 수 있도록 도와줬다. 그들은 매우 음모적이었다. 옛 비합법 방식으로 나를 미팅 장소로 데려갔다. 나는 그 조직의 공식 위원회를 만났다. 서로 인사한 다음, 그 조직의 지도자가 나한테 말했다. “쿡 동지, 동지가 하려는 일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말해 봐요.”‘쿡’이란 이름은 비합법 당 시절에 내가 썼던 가명이었다. 그는 비합법 미팅에서 내 실제 이름을 쓰려하지 않았다. 나는 우리가 왜 당에서 쫓겨났고, 우리 강령이 무엇인지 등을 설명했다. 그들은 트로츠키주의 강령에 기초해 두 조직을 통합해 새 당을 만드는 문제에 관해 토론할 의향이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들은 먼저 한 가지 점에서 동의를 받고 싶어 했다. 건설하고자 하는 당은 비합법 당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들과 몇 가지 농담을 나눈 뒤 뉴욕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여전히 비합법 상태로 있는 것같다.
동지들, 지금까지 다룬 것은 우리 트로츠키주의 운동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한 일종의 배경이자 서론이다. 다음 주에는 우리가 당에서 쫓겨나 트로츠키주의 깃발 아래서 운동을 재건하기 전에 몇 년간 초기 공산당에서 어떻게 활동했는지를 다룰 것이다.
공산당의 이데올로기적 우월성
지난주에 나는 미국 공산주의의 초기 개척시대를 다뤘다. 비록 많은 것을 생략하고 중요한 부분만 다뤘지만, 비합법 공산주의 운동을 합법화하고 공개활동을 시작하기로 결정한 1922년 코민테른 4차 대회를 지나칠 수 없었고, 좌익소아병을 포함해 초기 운동의 부정적 측면들에 대해 다뤘다. 좌익소아병, 즉 초좌익주의의 악성 소아병은 운동이 미성숙한 상황에서 늘 등장하곤 한다.
하지만 여러 활동들에서 비현실적이었던 부정적 측면보다는 미국에서 최초로 볼셰비키의 원칙에 기초해 혁명정당을 창건했다는 긍정적 측면이 더 크다. 그것은 공산주의 선구자들의 위대한 공헌이다. 당을 건설한 일군의 사람들은 공산주의의 기본 저작 중 일부를 소화했고, 진지한 노동자당 건설의 필수조건 중 하나인 규율로 무장했다. 그것은 미국에서 전례 없는 일이었다. 마찬가지로 진지한 혁명정당의 가장 기본적인 요건 중 하나인 전문적인 지도기구를 창출했다.
초기 공산주의 운동은 다른 무엇보다도 사상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아주 강력하게 보여주었다. 이것은 세계산업노동자연맹(IWW)과 젊은 공산당 사이에서 벌어진 주도권 투쟁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1차 세계대전 이전에 IWW는 상당히 큰 전투적 노동자운동이었다. 전쟁이 터졌을 때, 이 조직은 명백히 가장 많은 노동자투사들을 포괄하고 있었다. 반면에 공산당 중핵은 사회당 출신들로서 상당수가 소부르주아 출신이었다. 젊은 공산주의자 다수는 계급투쟁을 경험해보지 못했다. 수천 명 규모의 젊은 공산주의자들은 미국에서 계급투쟁에 실질적으로 동화되지 못한 외국 출신 노동자들이었다.
인적 자원이라는 측면만 고려한다면, IWW가 훨씬 더 우세했다. 그 투사들은 많은 투쟁을 통해 검증돼 왔다. IWW의 수많은 투사들이 감옥에 있었다. 그들은 혁명적 어구를 자신 있게 말하며 갑자기 등장한 운동을 무시하듯이 바라보곤 했다. IWW는 이제까지 자신들이 보여준 행동과 희생이 새로운 혁명운동의 단순한 교리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공산주의 운동이 경쟁자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은 크게 오판했다.
몇 년도 채 지나지 않은 1922년에, 노동자계급 선진층을 주도하는 조직이라는 측면에서 공산당이 IWW를 대체했다는 사실이 정말 분명해졌다. IWW에는 노동자투사들이 아주 많았다. 그들은 영웅적 투쟁을 숱하게 전개해왔다. 그래도 공산당에 뒤처질 수밖에 없었다. 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혁명의 교훈을 통해 자기 사상을 벼려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상과 이론을 충분히 중시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조직은 퇴보했다. 반면 경험 없는 젊은이들로 구성된 새로운 조직은 기반이 취약했지만, 살아 움직이는 볼셰비키 사상을 붙잡았기 때문에, 몇 년 내에 IWW를 완전히 제치고 훨씬 멀리 나아갈 수 있었다.
이 경험의 위대한 교훈은 혁명정당의 건설에서 다른 것이 올바른 사상을 대체할 수 있다고 상상하며, 사상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어리석다는 것이다.
노동조합의 획득
당은 합법화 문제로 초좌익주의에 맞서 싸운 뒤, 공개 무대로 나왔다. 앞서 말했듯이, 이미 당은 미국 노동자계급 선진층에 대한 주도권을 완전히 확보했다. 적절하게도 미국 전역에서 공산당을 가장 선진적이고, 혁명적인 조직으로 평가했다. 당은 미국 출신 노조원 일부를 당원으로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철강파업에서 활약하며 유명해진 윌리엄 포스터와 여러 노조 활동가들(꽤 큰 그룹)이 외국 출신들로 구성돼 다소 이국적이지만 역동적인 공산당에 가입했다. 그렇게 당 전체의 방향이 바뀌기 시작했다. 골방에서 비현실적인 문제로 논쟁하고 말다툼하며 이론을 지나치게 갈고닦는 작업에서 대중운동으로 당의 활동방향을 바꿨다. 공산주의자들은 계급투쟁의 실제 문제들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당은 점점 더 ‘노조’처럼 변해갔다. 당시 미국에서 거의 유일한 노동조직이었고,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미국노동총연맹(AFL)을 향해 조심스럽게 첫걸음을 내디뎠다.
우리는 당의 합법화를 위해 투쟁하는 동시에, 당의 노조 정책을 올바로 교정하기 위해서도 투쟁했다. 이 투쟁도 성공적이어서 애초의 종파적 입장을 극복했다. 공산주의 선구자들은 독자 노조를 선호했던 초기의 종파적 선언을 수정했고, 이제 공산당의 역동적 힘을 반동적 노조에 쏟아 부었다. 이런 방향전환을 주되게 뒷받침한 것도 모스크바, 레닌, 코민테른이었다. 레닌의 훌륭한 팜플렛 <좌익소아병>은 이 문제를 결정적으로 정리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1922~23년에는 당이 노조운동으로 잘 파고들 수 있었고, 일부 지역의 몇몇 노조에서 의미 있는 영향력을 빠르게 획득하기 시작했다. 특히 광부 노조와 의류 노조에서 그랬다. 다른 노조들에서도 영향력을 확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렇게 실질적이고 전적으로 진보적인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당은 어느 정도 기회주의적인 모험에 빠져들었다. 어떤 당도 오류를 완벽하게 바로잡기는 어렵다. 오류를 지나치게 수정하려다가 종종 역편향에 빠지곤 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신생 정당은 정치운동, 소부르주아계급, 노조 관료들은 말할 것도 없고 노조운동과도 무관하게, 고립된 지하에서 이론을 정교화하는 데 몰두했다. 그런데 이제는 노동자․농민 정치의 영역에서 일련의 거친 모험 속으로 뛰어들었다. 노동자대중운동의 충분한 뒷받침이나 공산주의자들 자신의 충분한 힘이 없는 상태에서, 일련의 책략과 연합을 통해 갑작스럽게 광범위한 농민노동자당을 만들려 했던 당 지도부의 시도 때문에, 당은 혼란에 빠졌다. 새로운 내부 투쟁이 촉발됐다.
당의 합법화를 둘러싼 분파투쟁이 끝난 지 6개월쯤 지난 1923년에 새로운 분파투쟁이 시작됐다. 이 투쟁은 1928년에 우리 트로츠키주의자들이 당에서 쫓겨나기 전까지 거의 중단 없이 계속됐다. 우리를 내쫓을 당시 지도부였던 러브스톤 그룹이 쫓겨난 1929년 봄까지도 투쟁은 맹렬하게 계속됐다. 그 뒤, 스탈린주의화한 코민테른은 독립적 개성을 가진 모든 사람들을 쫓아냈고, 스탈린주의에 충성스런 지도부를 세움으로써 분파투쟁을 종식시켰다. 그들은 관료적 방식으로 당의 획일적 평화를 확보했다. 그리고 사상적 정체와 쇠퇴의 평화를 확보했다.
노동자 방어
당은 이 시기 내내 분파투쟁으로 요동쳤지만, 그 와중에도 여러 분야에서 자기 활동을 펼치며 계급투쟁에서 엄청난 일들을 해냈다. 당은 미국 최초로 혁명적 일간신문을 발간했다. 1,000~1,500명 규모의 당으로서는 상당한 성취였다. 선전활동을 광범위하게 펼쳤고, 전례 없는 규모로 노동자 방어 활동을 조직했으며, 노동운동에 많은 혁신적인 것들을 도입했다. 또한 사실상 거의 모든 중요한 파업을 지도했다.
특히, 전국에서 주목한 1926년의 위대한 퍼세이익 파업을 공산주의자들이 온전히 지도했다. 공산주의자들은 미국 노동계급 운동의 다른 어떤 진보적이고 전투적인 경향의 지도자들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점점 더 두각을 나타냈다.
분파투쟁
관망하는 많은 전문가들과 논평가들은 미국 공산주의 초기를 어리석음과 오류, 사기, 타락으로 가득찬 시기로 묘사하려 한다. 때로는 환멸을 느끼고 변절한 자들도 그렇다. 이것은 완전히 잘못되고, 너무나도 터무니없는 평가다. 초기 공산당 내 분파투쟁은 단지 개개인이 악의적으로 일으킨 것이 아니다. 만약 어느 정도 사실을 파악하고 주의 깊게 사태의 흐름을 연구한다면, 분파투쟁의 일정한 법칙을 도출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노동자정치조직에서, 특히 신생 조직에서 그 법칙에 따라 발생하는 분파주의에 대해 잘 이해하게 될 것이다.
짐짓 아는 체하는 사람들은 결코 그것을 말하지 않지만, 분파투쟁이 공산당에서만 있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정치가 시작된 이래, 모든 정치조직은 분파투쟁을 겪어왔다. 그런데도 초기 공산주의자들의 분파 문제가 유독 주목을 끌어왔다. 그것에는 속임수가 있다. 마치 다른 조직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특히 공산주의자들의 분파문제 중 일부 부정적 측면만을 끄집어내 얘기한다. 유진 라이온스와 맥스 이스트먼 같은 떠벌이들, 노동자계급의 실제 투쟁에 제대로 결합한 적이 없는 경솔한 사람들의 특기가 바로 역사 왜곡이다.
최근에는 벤자민 기틀로우처럼 과거를 반성하는 배신자들이 그쪽으로 합류했다. 아주 철저하게 좌절하고 환멸을 느낀 기틀로우는 젊었을 때 맞서 싸웠던 [부르주아]민주주의 품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자기 영혼을 파괴한 주인의 사상을 받아들이는 모습이 애처로울 뿐이다.
그들은 분파투쟁을 정말 기형적인 것으로 묘사한다. 도덕적 관점에서 전혀 칭찬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어떤 것을 발견할 때면, 그들은 특히 열광한다. 공화당이나 태머니홀의 윤리와 도덕, 그리고 우리가 사회당에서 봤던 부정부패와 역겨운 위선으로 점철된 파벌투쟁에 대해서는 눈감고 고려하지 않으려 한다. 오직 공산당 초기 기록에서 흠을 발견할 때만 신성한 공포감에 사로잡혀 비난을 퍼붓는다.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무의식적으로 공산주의 운동에 찬사를 바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부르주아나 소부르주아의 고착된 정치조직보다는, 갓 출발해 소아병을 앓고 있더라도 공산당한테 기대하는 것이 옳다.’ 그리고 여기에는 진실 이상의 것이 담겨 있다. 수단은 목적에 복무해야 한다. 혁명적 노동자계급 운동에서 진실을 속이고 명예롭게 처신하지 않는 것은 공산주의의 위대한 목표와 충돌한다. 그것은 적절하지 않으며, 눈에 도드라진다. 체계적인 거짓말, 속임수, 도적질, 표리부동 등 부르주아와 소부르주아 정치조직의 특성들은 그 조직들과 그런 환경에서는 태생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다.
공산주의 운동 초기 10년의 특징이었던 분파투쟁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었다. 그것은 서로 손잡았던 깡패들이 전리품을 놓고 싸우는 것과는 달랐다. 그것과는 전혀 달랐다. 여기에는 전리품이 없었다.
공산주의자들의 대다수는 세계 노동자계급 해방운동을 조직하겠다는 진지한 목적과 동기를 갖고, 공산주의를 개척했던 사람들이다.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희생할 각오가 돼 있었고, 또 그렇게 했다. 1917년 러시아혁명의 깃발을 들고 1919년 시카고 대회에서 5,000~6,000 명에 이르는 대규모 운동을 조직한 사람들은 정말 그랬다. 엄청난 탄압이 시작된 뒤, 체포와 추방, 비합법 활동의 고난, 재정적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당에 남았던 사람들은 특히 더 그랬다.
그 모든 칭얼대는 사람들(그런 희생과 위험을 감수할 수 없었기에 옆으로 비껴나 있던 사람들)이 공산주의 선구자들을 도덕적으로 타락한 분자로 묘사하려 한다. 그들은 그림 전체를 간단히 뒤집어버린다.
공산주의 운동 초기에 당에 매력을 느낀 최상의 분자들은 비합법 활동 시기의 탄압과 고난을 거치며 더 명확하게 걸러졌다. 분파투쟁은 몇몇 개인의 나쁜 의도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다. 물론 몇몇 악한이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진실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과상자에서도 썩은 사과 한두 개를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오랜 분파투쟁에는 보다 근본적인 원인이 있었다.
사회적 구성
나는 첫 강연에서 당의 구성에 내포된 엄청난 모순을 설명했다. 한편에는 아직 동화되지 못한 나라에서 운동을 만드는 문제에 대해 비현실적으로 접근하는, 대부분 외국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운동을 통제해야 한다고 맹신했다.
개인적 이익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들만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상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다른 한편에는 숫자가 더 적은 미국출신 그룹이 있었다. 이 미국 출신 그룹은 외국 출신들만큼 공산주의 사상을 이해하지는 못했을지라도(그것은 사실이다), 운동이 미국 지향성과 현지 출신 지도부를 가져야 한다고 확신했다. 바로 이 모순이 분파투쟁을 추동했다.
다른 요인도 있었다. 경험 많고, 권위 있는 지도자들이 없었다. 1917년 러시아혁명이 성공한 뒤, 운동은 거의 하룻밤 새에 급속히 커졌다. 나이 들고 권위 있는 사회당 지도부 전부는 볼셰비즘을 거부했고, 안전한 개량주의의 길을 꼭 붙들었다. 힐큇과 버거를 포함해 사회당의 모든 주요 인사들은 러시아 혁명과 청년 혁명가들에게 등을 돌렸다. 심지어는 그 열망에 공감했던 뎁스마저도 결정적 순간에는 힐큇과 버거의 당에 남았다.
새 운동은 새 지도자들을 찾아야 했다. 전면에 나선 사람들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경험도 많지 않았고, 개인적 권위도 갖지 못했다. 당이 더 자질 있는 지도자를 찾기 위해서는 일련의 오랜 분파투쟁을 벌여야 했다. 대회를 거치면서 집행부가 빠르게 바뀌었다. 이 격렬한 분파투쟁을 견디고 받아들이지 못했던 사람들은 거칠게 떠밀려 나가떨어졌다. 지도력이 있는 듯해서 첫 해에 선출됐던 많은 사람들이 다음 해에는 완전히 밀려났고, 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사람들로 대체됐다.
이 모든 과정은 투쟁 속에서 지도자를 선발하는 방식이었다. 지도자를 선발하는 다른 방법이 있는가? 내가 알기로는 다른 방법이란 없다. 당으로부터 확고하게 지지받고, 연속성을 유지할 권위를 갖춘 굳건한 지도부를 내부 투쟁 없이 건설한 사례는 없다. 언젠가 엥겔스는 내부 투쟁을 모든 정당 발전의 법칙이라고 썼다. 그것은 확실히 초기 미국 공산주의 운동의 발전법칙이었다. 공산당만이 아니라, 그 정통 계승자인 트로츠키주의 운동도 초기에 그랬다.
지도력의 강화
경험, 투쟁, 내부갈등을 통해 폭넓은 권위를 갖고, 서로 협력해서 일할 줄 알며, 정치적 신념이 어느 정도 일치하는 지도부를 구성할 정도로 운동이 성장하면, 분파투쟁은 줄어드는 경향이 있다. 분파투쟁은 더 드물어지고, 덜 파괴적이게 된다. 분파투쟁은 다른 형태를 띠게 된다. 더 분명한 이데올로기적 내용을 갖게 되고, 멤버들에게 더 유익하게 된다. 그런 지도부를 세우는 것은 분파투쟁을 줄이고, 때로는 중단시키는 강력한 힘이 된다.
우리는 결국 초기 공산주의 운동에서 꽤 안정적인 지도부를 세울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지도부는 당 구성의 모순을 다시 반영해 특별한 구조를 띠었다. 이렇게 4~5년 동안 우여곡절을 겪다가, 미국 공산주의 운동의 지도자는 누구인지가 모두에게 아주 분명해졌다. 그들은 1919~20년에 지도자였던 사람들이 아니었다. 초기 지도자 중 극소수만 이 투쟁에서 살아남았다.
초기 공산주의 운동에서 결국 전면에 서게 된 지도부는 하나의 단일그룹으로 세워진 것이 아니었다(이것이 그 역사에서 아주 흥미 있는 면이다). 당 자체가 동질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 전체에 권위와 영향력을 가진 단일 지도부 대신, 당 내 모순을 반영해 여러 분파의 지도자들이 당의 중요 지도자들이 됐다. 1923년에 주로 농민노동자운동 내 모험주의 문제를 둘러싸고 새로운 분파투쟁이 시작됐다. 그 다음에 이 분파투쟁은 미국 노동자들에 대한 우리의 관점, 노조 활동 방법 등 실제 활동의 모든 문제들로 확산됐다. 장기간에 걸친 이 투쟁은 당의 사회적 구성에 존재하는 모순, 그룹들의 서로 다른 기원 및 배경을 분명하게 반영한 것이었다.
루덴버그, 러브스톤, 페퍼 등 당시 다수파에 맞서 포스터와 내가 그 투쟁을 조직했다. 우리 그룹은 노조에 기반을 둔 노동자계급 분파라는 점이 곧 명백해졌다. 노조 활동가들, 경험 많은 미국 노동자들과 활동가들 그리고 더 미국화한 외국인의 대부분(사실상 전부)이 우리를 지지했다.
페퍼-루덴버그-러브스톤 그룹은 지식인 대부분과 덜 동화된 외국인 출신 노동자들로 구성돼 있었다. 2급 지도자들을 포함해 그 분파의 전형적 지도자들은 계급투쟁 경험이 없는 대학 청년과 젊은 지식인들이었다. 그들은 매우 영리했다. 대체로 그들은 다른 분파 지도자들보다 책에 대한 지식이 분명히 더 많았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 장점을 어떻게 최대한 이용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들은 다루기 힘든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우리도 책에서는 배울 수 없는 것을 포함해 한두 가지는 알고 있었다. 그들도 우리 때문에 많은 곤란을 겪었다. 당의 통제권을 둘러싼 이 투쟁은 격렬했다. 어느 쪽도 제어장치를 갖고 있지 않았다. 이 투쟁은 당시에 누가 다수인가와 관계없이 해마다 계속됐다. 때로는 중요해보이지 않은 이슈들에 초점을 맞춰 즉각 분파투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예를 들면, 당의 전국본부를 어디에 둘 것인가가 그런 이슈였다. 우리 분파는 시카고에 두자고 했다. 다른 분파는 뉴욕에 두자고 했다. 우리는 그 문제로 싸웠다. 하지만 쓸데없는 참견자들이 묘사하듯이, 우리가 어리석은 사람들이라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우리는 전국본부를 시카고로 옮기면, 당이 더 많은 미국 지향성을 가질 수 있고, 광산에 더 가까이 갈 수 있으며, 미국 노동자운동의 중심부에 더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당을 노동자화하고, 미국화하기를 원했다. 뉴욕에 본부를 두자는 그들의 주장도 마찬가지로 정치적 동기를 갖고 있었다. 뉴욕은 당 안에서 소부르주아 요소가 강했다. 그곳에서는 지식인들이 더 큰 역할을 했다. 정치적 측면에서 볼 때 그들은 그곳이 더 편했다. 그래서 당 본부의 위치를 둘러싼 투쟁은 문제를 끝까지 파고들어가 보면 실제로 꽤 이해할 만한 것이었다.
미래의 정직하고 객관적인 역사가들은 아마도 이렇게 오랫동안 벌어진 분파투쟁을 전반적으로 당 내 소부르주아 경향과 노동자계급 경향 사이의 투쟁이라고 묘사할 수 있다(그리고 나는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노동자계급 경향이 그 의미가 온전히 드러날 수 있도록 투쟁을 발전시킬 충분히 명료한 강령을 갖고 있지 않았지만 말이다. 당시에 우리 모두가 실제로는 신참내기들이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볼셰비즘 사상을 겨우 알기 시작했을 뿐이다(아주 잘 알지는 못했다). 우리는 정치적 경험이 부족했다. 우리를 가르칠 지도자가 없었다. 우리는 맨땅에 헤딩하면서 투쟁을 통해 모든 것을 배워야 했다. 비틀거린 노동자계급 경향은 실수를 많이 저질렀다. 그리고 투쟁의 열기 속에서 여러 모순을 드러냈다. 하지만 내 견해로는, 이 분파 운동의 정수는 역사적으로 올바르고 진보적이었다.
이 투쟁이 펼쳐지자, (포스터와 캐넌을 한편으로 하고, 루덴버그-러브스톤-페퍼를 다른 한편으로 하는) 두 개의 주요 분파가 더 많은 분할을 낳았다. 정말로, 포스터-캐넌 분파 안에도 똑같이 계열이 존재했기 때문에, 분할의 가능성은 처음부터 존재했다. 나와 아주 밀접하게 연결된 그룹은 공산주의 선구자들이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당원이었고, 포스터 분파보다 더 일찍 공산주의 원리를 채택했던 사람들이었다. 포스터파는 경험상 더 노동조합주의적이었고, 구상이 더 제한적이었으며, 이론적‧정치적 문제에 관심을 덜 가졌다. 끝없이 계속되는 분파투쟁 과정에서, 이 암묵적 분할은 공식적 분할로 이어졌다. 그래서 당은 세 개 분파로 나눠졌다. 포스터 분파, 러브스톤 분파(루덴버그는 1927년에 죽었다) 그리고 캐넌 분파. 이런 분할은 1928년에 그들이 나를 당에서 내쫓을 때까지 지속됐다.
이 모든 분파는 자신들에게 완전히 명료하지 않은 사상을 위해 끝없이 싸웠다. 내가 앞서 말했듯이, 우리는 일정한 경향이 있었고, 원하는 바를 대략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문제를 올바르게 해결할 수 있도록 아주 정확하게 강령을 정식화할 정치경험도, 이론교육이나 지식도 없었다. 여러분은 몇 년 전에 우리가 사회주의노동자당 안에서 소부르주아 반대파와 벌인 큰 투쟁을 기억할 것이다. 만약 여러분이 그 투쟁이 어떻게 전개됐는지를 연구해서 알고 있다면, 옛 공산당 안에서 벌어진 소부르주아 분파와 노동자계급 분파 사이의 더 원시적인 투쟁 경험으로부터 우리가 어떤 이익을 얻었는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때 이후로 우리는 더 많이 경험했고, 몇몇 책을 읽었으며, 이론과 정치지식을 더 많이 얻었다. 이 덕분에 우리는 쟁점들을 분명하게 밝힐 수 있었으며, 버넘과 샥트먼 등에 맞선 투쟁이 과거에 그랬듯이 무원칙한 다툼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내가 언급한 이 지도자들, 루덴버그, 러브스톤, 캐넌, 포스터 이 네 사람은 항상 당의 정치위원회 멤버들이었다. 이 4인이 항상 인정받고 권위를 지닌 당의 지도자들이었다. 그들은 분파 지도자였고 그 때문에 그들은 당 지도부의 일원이 되었다. 그리고 각 분파는 꽤 강하고, 비중도 서로 비슷했다. 그래서 어떤 분파도 분쇄하거나 제거할 수 없었다. 아주 많은 사람들, 아주 많은 당의 유능한 활동가들이 각 분파에 묶여 있었다. 그래서 예를 들어 러브스톤파가 코민테른의 지원과 강요로 당의 다수파가 됐을 때,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우리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특히 노조 활동과 대중활동을 다른 분파들이 사실상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당 조직가, 저술가, 활동가들이 나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었고, 대체될 수 없었다. 포스터 분파는 특히 노조 분야에서 훨씬 더 강했다. 그들은 우리를 제거할 수 없었다. 우리를 제거하면 당이 혼란에 빠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은 사실상 세 영역으로 나뉘게 됐다. 각 분파는 거의 무제한의 권위를 갖고, 최소한의 통제를 받으면서 특정 분야들에서 작업할 자유를 확보했다. 포스터 분파는 노조활동의 전 영역을 장악했다. 우리는 국제노동자방어위원회를 조직해서 우리가 거의 원하는 대로 운영했다. 그때는 러브스톤파가 근소한 차로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러브스톤파는 당 기구를 통제하고 있었다. 우리를 배제해도 될 정도로 통제권이 강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런 힘의 특수한 균형이 수년 동안 계속됐다. 당연히 볼셰비즘 의미에서 실제로 중앙집중화된 당은 아니었다. 그것은 세 분파의 연합이었다. 정확히 보자면, 그것이 바로 당의 실제 모습이었다.
우리는 문제를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없었다. 어떤 분파도 다른 분파들을 결정적으로 패배시킬 수 없었다. 어떤 분파도 당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어떤 분파도 당에서 실질적 다수를 장악하기 위해 자기 강령을 정식화할 정도로 유능하지 않았다. 우리는 교착상태에 빠졌고, 장기간의 힘 빠지는 분파투쟁을 끝없이, 어떤 전망도 없이 벌였다. 당시는 맥 빠지게 하는 시절이었다. 정상적인 혁명가들에게 단지 몇 주, 몇 달이 아니라 몇 해를 분파투쟁으로 보내야 한다는 것은 극도로 짜증나는 것이었다. 분파투쟁을 좋아하는 일부 사람들이 있다. 모든 분파에는 분파투쟁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전에는 깨어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살아남았다. 어느 정도 건설적인 활동(시위, 파업 피켓라인[파업 사수대], 신문 배포 범위를 넓히는 것, 계급투쟁을 하다 감옥에 간 구속자를 돕는 것)에 대해서 그들은 단조로운 일상활동이라 여기고 별로 흥미를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분파 간부회의를 소집하기만 하면, 그들은 항상 거기에 참가했고, 그것도 맨 앞자리에 앉았다.
모든 운동에는 어느 정도 비정상적인 형태가 있다. 우리한테는 그런 게 많았다. ‘내가 아는 분파투쟁 전문가’라는 하나의 주제로 여러 인물에 대해 강의할 수는 없다. 그런 사람들은 정치운동을 지도할 수 없다. 운동이 마침내 숨을 돌리고, 자기 길을 환하게 틔운 뒤에는, 분파투쟁 전문가들이 지도부에서 사라졌다. 우리 옛 분파들의 지도자들은 천사가 아니었다. 나는 그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정치적 의미에서 아주 거친 투사들이었다. 그들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활용해 싸웠다. 하지만 그들이 이기적인 악당이었는가? 유진 라이온스, 맥스 이스트먼 같은 떠벌이들, 운동에서 비켜서 있다가 추상적 도덕의 잣대로 운동을 평가하는 잘난 체하는 자들은 그렇게 묘사한다. 운동의 지도자들은 이기적 악당이 결코 아니었다. 뒤늦게 그 명제를 지지하고 나선 기틀로우조차도 처음부터 악당이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나는 그들 중 일부가 처음부터 싹이 안 좋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모든 분파 지도자의 대다수는 이상주의적 목표와 이유로 운동에 동참한 사람들이었다. 거기에는 나중에 타락한 스탈린주의자, 광신적 애국주의자가 된 사람들도 포함된다. 그들의 타락은 오랫동안에 걸친 진화, 압력, 실망, 기만, 환상 등의 결과였다. 1919년의 어려운 시절에 운동에 동참한 사람들, 더 정확히 말하면 전쟁 시기에 러시아혁명 주위로 결집한 사람들이 1919년에 당을 만들었고, 비합법 시절의 박해와 탄압을 견뎌냈다. 그들은 태머니홀이나 공화당 그리고 여러분이 이름을 댈 수 있는 다른 어떤 부르주아, 소부르주아 정치운동의 정치가들보다도 도덕적 측면에서 훨씬 더 뛰어났다.
코민테른의 역할
필요한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면, 우리는 우리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을 것이다. 즉 더 경험 많고 권위 있는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았더라면 말이다. 우리가 해결하기엔 문제가 너무 컸다. 중앙에서 쫓겨난 지방 그룹들이 말다툼에 빠지고, 그것이 분파투쟁과 파벌 형성으로 발전하며, 경험 부족 때문에 스스로는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는 일은 가장 선진적인 정치운동에서도 일어날 수 있고 또 일어난다. 만약 지혜롭고 공정하게 개입할 수 있는 현명하고, 정직하며 성숙한 전국 지도부가 있다면, 십중팔구 이런 지역적 교착상태는 결국 해결할 수 있고, 동지들은 공동활동의 토대를 찾을 수 있다. 만약 우리가 당시에 믿고 기대했던 코민테른과 러시아 지도자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면, 우리는 우리 문제를 분명하게 해결할 수 있었을 것이다. 모든 분파 지도자들이 선했다. 모두가 재능 있는 사람들이었다. 정상적인 조건에서 코민테른이 올바르게 지도하고 지원할 수 있었다면, 이 모든 분파의 지도자 대다수는 결국 함께했을 수 있으며, 단일 지도부를 세울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세 분파의 지도부가 뭉쳐서 더 경험 많은 국제 지도자들의 감독과 지도 아래 함께 활동했다면, 공산주의를 위한 강력한 힘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공산당은 크게 전진했을 것이다.
우리는 도움을 받기 위해 코민테른에 갔다. 하지만 그때까지 우리가 알지 못했지만, 문제의 실제 원천은 거기에 있었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코민테른은 타락의 과정을 거치기 시작하고 있었다. 1921년과 1922년에 우리는 노조 문제, 비합법 활동과 합법 활동 문제에 대해 레닌, 트로츠키, 코민테른 전체로부터 정직하고 유능한 도움을 받아 문제를 해결하고, 낡은 분파투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런 도움을 받는 대신, 우리가 코민테른의 타락 과정에, 코민테른의 스탈린주의화 초기과정에 빨려들어갔다. 코민테른 지도부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제를 지속시키기 위해 우리 당이나 다른 모든 당에 관심을 가졌다. 그들은 온순한 스탈린주의 정당을 만들기 위해 독립적인 모든 사람, 다루기 힘든 사람들을 제거할 음모를 이미 꾸미고 있었다. 우리는 해마다 모스크바에 가곤 했다. ‘미국 문제’는 항상 논의 안건에 올랐다. 코민테른에는 ‘미국위원회’가 항상 있었다. 그들은 우리가 위원회 전에 승부를 가리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자신들이 꾸미고 있는 음모에 이 사람들을 이용하기가 조금 어렵겠다고 곧 확신했다. 십중팔구 그들은 모든 분파에서 가장 뛰어난 지도자들을 제거하고, 스탈린의 도구 역할을 할 수 있는 새로운 분파를 빠르게 만들어낼 계획을 이미 세우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모스크바에 갈 때마다 ‘우리가 올바른 입장을 갖고 있고, 우리 제안이 올바르기 때문에, 이번에는 우리가 도움과 지지를 좀 얻겠지’라는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매번 실망했다. 끔찍하게 실망스러웠다. 코민테른은 우리에 맞선 소부르주아 분파를 언제나 지지했다. 항상 그들은 초기에 다수파였던 노동자계급 분파에 타격을 줬다. 우리는 처음으로 1923년 대회에서 끝까지 싸웠다. 그리고 분명히 다수를 차지했다. 당원 대다수가 노동자계급 분파의 지도부를 원한다는 것이 매우 분명했다. 포스터-캐넌 분파가 공식적으로 쪼개진 뒤에도, 우리는 여전히 러브스톤파에 맞서 대부분의 시기에 하나의 블록을 형성했다. 매번 당원들은 자기 생각을 표현할 기회를 보장받았다. 그리고 그들은 이 블록이 당의 제1 지도부가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코민테른은 안 된다고 했다. 그들은 이 블록을 깨고 싶어했다. 그리고 그들은 몇 가지 이유로 한 그룹(캐넌 그룹)을 깨는 데 특히 혈안이었다. 그들은 틀림없이 무언가를 의심했을 것이다. 그들은 나를 제거하려고 특별히 애를 썼다. 그들은 갑자기 1924년 코민테른 5차 대회까지 거슬러 올라가, 내가 했던 약간의 작은 실수를 결의안을 통해 비난했다(그때 나는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 당 지도부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모두 그런 실수나 더 나쁜 실수를 했다. 하지만 코민테른은 내 위신을 떨어뜨리기 위해 내가 직무를 유기했다고 몰아갔다.
그리고 해가 흘러 반트로츠키 캠페인이 증가했다. 모든 당에서 지도자의 자격은 이 캠페인에 가장 열심히 참여하는 것이었다. 즉 모스크바가 지도자를 판단하는 기준은 ‘트로츠키주의와 트로츠키를 누가 가장 소리 높여 비난했는가’였다. 우리는 러시아 당내 투쟁 사안에 대해 실질적 정보를 제공받지 못했다. 우리는 공식 문서들, 모든 종류의 비난과 비방에 압도당했다. 문제의 다른 측면에 대해서는 정보가 전혀 또는 거의 없었다. 그들은 평당원들의 신뢰를 악용했다. 마찬가지로, 코민테른에 대한 당 지도자들의 신뢰도 거듭 악용했다. 매번 우리는 모스크바에 갔지만, 해결책을 갖고 돌아오지는 못했다. 표면상 당 내 ‘평화’를 위해 준비된 결의안을 갖고 돌아왔다. 하지만 그것은 곧 분파투쟁을 이전보다 더 격렬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분파투쟁의 해결 같은 것은 없었다. 어떤 종류의 통일 선언에 사인하는 순간, 분파전쟁이 새롭게 불을 뿜었다. 냉소주의가 기층 당원 사이에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평화 합의’ 사인이 ‘이제 분파투쟁이 정말로 뜨거워질 것’이라는 점을 뜻한다는 것은 금언이 됐다. 적대적 분위기에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항상 조심하고, 모든 행보를 주의해야 하는 슬픈 상태가 됐다. 무언가에 동의할 때마다 의구심을 갖는 것이 필요해졌다. 아주 나쁜 도덕적 분위기가 안개처럼 당을 감싸기 시작했다.
많은 천박한 사람들은 코민테른의 타락이 우리 당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미국 운동의 비현실주의, 자기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무능함 등의 증거로 인용한다. 그렇게 칭얼대는 사람들은 국제혁명조직이란 무엇이며 어떠해야 하는지 전혀 모른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모스크바의 영향은 완전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미국의 젊은 당이 러시아 지도부를 신뢰한 것은 러시아인들이 혁명을 일으켰기 때문에 완전히 정당했다. 당연히 러시아 당의 영향력과 권위는 국제 운동에서 다른 당보다 더 크다. 더 현명하고, 더 경험 많은 쪽이 초보자를 이끈다. 어떤 국제조직에서도 그럴 것이며, 그래야 한다.
인터내셔널에서 모든 당이 균등 발전하는 일은 없다. 우리는 이 점을 트로츠키 생전에 제4인터내셔널에서 보았다. 트로츠키는 러시아혁명의 모든 경험과 스탈린에 맞선 투쟁을 체화하고 있었다. 트로츠키의 권위와 명망은 제4인터내셔널에서 절대적으로 두드러졌다. 그의 말은 관료적 명령의 힘을 갖지 않았다. 하지만 엄청난 도덕적 힘을 갖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모든 곤란과 모든 분쟁에서 자주 드러났듯이, 그는 인내심, 지혜, 지식을 생산적이고 정직하게 쏟아냈고, 그의 개입을 요청하는 모든 당과 그룹을 항상 도왔다.
우리의 공산당 활동 경험은 우리의 모든 일상활동에서, 그리고 제4인터내셔널 안에서 경험이 덜한 그룹들과 교통하고, 관계를 맺는 모든 활동에서 헤아릴 수 없이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바로 우리 당이 더 폭넓은 정치적 경험을 쌓아왔기 때문에, 트로츠키 동지가 더 이상 우리와 함께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다른 당보다 우리 당이 국제 운동에서 아마도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만약 가까운 장래에 제4인터내셔널의 어느 지부가 혁명적 상황을 맞고, 혁명을 성공시킬 역량이 충분히 있다는 지도력을 보여준다면, 그 당이 자연스럽게 뚜렷한 권위와 영향력을 갖게 될 것이다. 그것은 국제 정치운동 불균등 발전의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결과일 뿐이다.
코민테른 전반에 걸쳐 우리의 불행과 비극은 맑스주의 사상을 실제로 체화하고, 혁명을 실제로 완수한 러시아혁명의 위대한 지도자들이 러시아혁명에 맞선 반동과 러시아공산당의 관료적 타락 과정에서 떠밀려났다는 데 있다. 다른 나라 당들과 마찬가지로 미국 공산당은 위대한 투쟁의 복잡한 사안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는 오직 우리의 일국적 문제들만 생각하면서 어둠 속에서 싸웠다. 그것이 이 나라의 분파투쟁을 악화시켰다. 그 때문에 분파투쟁은 결국 무원칙한 말다툼과 주도권 다툼으로 타락해갔다. 오직 제때에 이해해 받아들인 국제 강령만이 미국의 젊은 공산당을 타락으로부터 구출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1928년에야 그런 기회를 붙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원래의 혁명적 목표를 위해 당의 다수를 구원하기에는 너무 늦은 때였다.
트로츠키주의 운동의 시작
1923년부터 1928년까지 당에 존재했던 세 분파는 각각 자체 진화과정을 거쳤다. 미국 트로츠키주의 운동의 창립 간부는 전적으로 캐넌 분파 출신들이었다. 좌익반대파의 모든 지도자, 사실상 거의 모든 초기멤버는 우리 분파에서 나왔다. 러브스톤파는 여러분도 알다시피 1929년 스탈린의 악랄한 법령에 따라 당에서 쫓겨났다. 러브스톤파는 1929년부터 1939년까지 독자적으로 활동하다가 ‘민주적’ 전쟁의 지지자가 되어 부르주아 편으로 넘어가면서 결국 해체됐다. 포스터 분파와 다른 일부 분파들의 2급 지도자들은 스탈린에게 맹목적으로 충성하고, 모든 독립성을 완전히 포기하면서 잡탕처럼 한데 뭉쳤다. 그들은 2열과 3열에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실제 투사들이 내팽개쳐질 때까지 그늘 속에서 기다려야 했다. 그 뒤 심부름꾼 소년들이 자기 자리를 차지할 때가 왔다. 그들은 미국 공산당의 공식 지도자들, 급하게 만들어진 지도자들이 됐다. 그 다음에 그들은 또 자연스런 진화 과정을 거쳤다. 지금 그들은 사회애국주의 운동의 전위가 됐다.
우리의 현대 트로츠키주의 운동이 다른 곳이 아니라 공산당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기억해야 한다. 초기 공산당이 여러 부정적 측면을 갖고 있었고(나는 그에 대해 남김없이 다 얘기했다), 약했고, 서툴렀으며, 소아병을 앓았고, 잘못을 저질렀을지라도, 그리고 분파투쟁과 그 궁극적 타락에 대해 뭐라고 회상하든, 이 나라 공산당의 타락에 대해 뭐라고 얘기하든 다음 사실을 반드시 인정해야 한다. 혁명운동을 재건할 세력은 공산당에서 나왔다. 미국 공산당에서 제4인터내셔널 미국지부의 중핵이 나왔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나라 공산주의 운동의 초기는 우리 것이라는 점을 말해야 한다. 우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끈으로 초기 공산주의 운동과 묶여 있다. 초기 공산주의 운동, 탄압에 맞선 영웅적 투쟁, 희생, 오류, 분파투쟁, 퇴보에서부터 트로츠키주의 깃발 아래 운동을 결국 부활시킨 것 사이에는 부단한 연속성이 있다.
정의와 진실을 따라 우리는 초기 미국 공산주의 운동의 전통을 포기해서도 안 되고, 포기할 수도 없다. 그것은 우리 것이다. 우리는 거기에 기초해 운동을 건설했다.
맑스주의냐 스탈린주의냐
지난 번 강연에서는 1927년까지의 미국 공산당 상황을 다뤘다. 맑스주의와 스탈린주의 사이의 근본적 투쟁이 이미 4년 동안 러시아 공산당 안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우리를 포함해 코민테른의 다른 지부들에서도 같은 투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정말 알지 못했다.
러시아 당에서 벌어진 대투쟁의 쟁점은 처음에는 아주 복잡한 러시아 문제들에 국한돼 있었다. 그런 쟁점 중 많은 것이 러시아 내부 문제들에 대해 거의 모르는 우리 미국인들에게는 새롭고 낯설었다. 그런 쟁점들은 심오한 이론적 성격 때문에 우리가 이해하기에는 매우 어려웠다(어쨌든 당시까지 우리는 정말로 진지한 이론교육을 받지 못했다). 우리가 정보를 충분히 듣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려움은 더 컸다. 우리는 러시아 반대파의 문서들을 받아보지 못했다. 그들의 주장은 우리에게 감춰졌다. 우리는 진실을 듣지 못했다. 반대로, 우리한테는 체계적으로 거짓말과 왜곡을 일삼았고, 일방적으로 문서를 전달했다.
내가 이렇게 설명하는 것은 “왜 트로츠키주의 깃발을 처음부터 들지 않았는가? 운동에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관심을 갖는 사람에게 문제가 무엇인지 지금 그렇게 분명하다면, 왜 초기에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는가?”라고 물을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다. 그런 큰 논쟁을 당 활동 방식에서 따로 떼어내 바라보는 사람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 어떤 책임도 지지 않는 사람들, 단지 학생이나 논평가 또는 뒤로 빠져 있는 관찰자는 주의하거나 자제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가 만약 의심하거나 불확실한 점을 느낀다면, 자기 의견을 완전히 자유롭게 발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혁명당원은 그렇지 않다. 혁명가는 자기 시간, 에너지, 돈, 심지어는 자기 생명까지도 바칠 강령에 기초해 노동자들에게 당에 참여하라고 호소해야 할 책임을 떠맡는다. 그래서 당에 대해 훨씬 더 진지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는 새로운 강령을 공들여 만들어내기 전까지는, 양심상 기존 강령의 폐기를 호소할 수 없다. 불만과 의심은 강령이 아니다. 그런 것을 기초로 사람들을 조직할 수는 없다. 1939년, 러시아 문제로 우리가 논쟁을 시작했을 때 트로츠키가 샥트먼을 가장 강력하게 비판했던 것 중 하나는 다음이었다. 우리 옛 강령의 올바름을 의심하기 시작했던 샥트먼은 새 강령을 분명하게 염두에 두지 않은 채, 자기 의심을 무책임하게 표현해서 당이 시련을 겪게 했다. 당은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트로츠키는 말했다. 의심으로 강령을 만들 수는 없다. 진지하고 책임 있는 혁명가들은 이러저러한 문제에 불만을 갖게 됐다는 이유만으로 당에 혼란을 초래해서는 안 된다. 구체적으로 다른 강령, 당에 대한 다른 대안을 준비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러시아 좌익반대파
그것이 그 초기에 내가 공산당 안에서 견지했던 태도다. 나는 크게 불만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러시아 당 내 투쟁에 정열적이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내부 투쟁이 점점 더 격해지고, 트로츠키, 지노비에프, 라덱, 라코프스키처럼 혁명의 위대한 지도자들이 대표한 러시아 좌익반대파에 대한 탄압도 증가하자, 내 마음 속에서 의심과 불만이 쌓여갔다. 공산당 안에서 끝없이 갈등하고 있던 상황에서 그렇게 의심하고 불만스러워 하는 것은 나와 우리 분파에게 불리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미국 차원에서 문제를 풀려고 하고 있었다. 그것은 흔히 있는 잘못이었다. 제4인터내셔널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가장 중요한 교훈 중 하나는 현대에 한 국가에 기초해서만 혁명정당을 건설할 수는 없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국제강령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토대로 국제운동의 일국 지부를 세워야 한다.
지나가는 길에 말하자면, 이것은 트로츠키주의자들과 브란틀러파, 런던 사무국 사람들, 삐베르 등 사이에서 벌어진 큰 논쟁 중 하나였다. 트로츠키주의자를 제외하고 다른 세력은 강력한 일국 정당들을 먼저 세우지 않고서는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얘기할 수 없다는 견해를 제출했다. 그들에 따르면, 여러 나라에서 아주 큰 대중정당을 만든 다음에만, 그 당들을 국제 조직으로 묶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트로츠키는 정반대의 입장을 취했다. 1929년 러시아에서 추방되고, 자유롭게 국제활동을 할 수 있게 됐을 때, 트로츠키는 국제강령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견해를 제기했다. 각 나라에 아무리 소수가 있을지라도, 국제강령에 기초해 사람들을 조직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각국 지부들을 점차 세워나가야 한다. 역사는 이 논쟁에 판결을 내렸다. 일국 관점에서 시작했고, 국제 조직 문제를 제쳐두고 싶어했던 당들은 모두 난파당했다. 이런 국제 시대에 협소한 일국 강령으로는 더 이상 살아남을 여지가 없기 때문에 일국 정당들은 뿌리를 내릴 수 없었다. 오직 제4인터내셔널만 국제강령에서 출발함으로써 각 나라에서 살아남았다.
미국 공산주의자들의 일국적 편협성
초기 공산당에서 우리는 이 원칙을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는 미국에서 일국 투쟁에 몰두해 있었다. 우리는 코민테른이 우리나라 문제에 도움을 주기를 기대했다. 우리는 코민테른의 다른 나라 문제들이나 코민테른 전체 문제들에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았다. 이런 치명적 오류, 이런 일국적 편협함 때문에 우리는 분파투쟁이라는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렸다.
사태가 우리에게 아주 안 좋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어떤 분파도 분리하거나 당을 떠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코민테른에 충성스러웠다. 열광적으로 충성스러웠다. 그리고 코민테른을 깰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맥빠지는 국내 상황은 점점 더 나빠졌고, 희망이 없어보였다. 분파들을 통합시킬 방법을 찾거나 한 분파가 우세해지거나 해야 한다는 점이 분명해졌다.
반트로츠키주의 캠페인
더 영리한 사람들 중 일부가, 아니 오히려 더 교활한 사람들 중 일부가 그리고 모스크바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이 코민테른으로부터 호의를 얻어서 자기 분파의 무게감을 높이는 방법은 정열적이고 적극적으로 반(反)트로츠키주의 투쟁에 나서는 것이라는 점을 깨닫기 시작했다. 모스크바가 세계 모든 당에 ‘트로츠키주의’에 맞선 캠페인을 벌이라고 명령했다. 1927년 가을에 트로츠키와 지노비에프를 당에서 쫓아낸 뒤, 즉시 입장을 취하라고 모든 당에 요구했다. 만약 어떤 개인이나 그룹이든 ‘올바른’ 입장, 즉 트로츠키와 지노비에프 제명에 찬성하지 않으면 모스크바가 보복할 것이라는 위협도 시사했다. ‘교육’ 운동도 지속했다. 러브스톤파가 반트로츠키 투쟁의 선봉에 섰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그 시기에 코민테른의 지지를 얻었고 그것을 누릴 수 있었다. 그들은 ‘교육’ 운동을 조직했다. 회원 모임, 지부 모임, 분파 모임이 당 곳곳에서 열렸다. 이런 모임에는 적군 조직자[트로츠키]와 코민테른 의장[지노비에프]을 제명할 필요성에 대해 회원들을 교육하기 위해 중앙위 대표들이 파견됐다.
러브스톤파처럼 빠르지도, 교활하지도 못했지만, 같은 의지를 갖고 있었던 포스터파가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은 누가 가장 나은 반트로츠키주의자인지를 보여주기 위해 러브스톤파와 경쟁을 벌였다. 그들은 이 주제에 대해 연설하면서 살았다.
그것을 지금 되돌아보면, 내가 이런 캠페인 중 어떤 것에도 참가하지 않았다는 점은 흥미로운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후 상황을 예고했다. 나는 판에 박은 결의안에 찬성 투표했다. 이 점을 나는 후회한다. 하지만 나는 트로츠키주의에 반대하는 말을 하거나 글을 쓰지 않았다. 내가 트로츠키주의자라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나는 러시아당과 코민테른 다수파의 방침에 반대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다만 쟁점들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반트로츠키주의 캠페인에 참가하기를 거부했다. 러브스톤의 주요 부관이었던 버트램 울프는 가장 열렬한 트로츠키주의 박해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걸핏하면 러시아 농업 문제에서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얼마나 잘못을 저질렀는지를 두 시간이나 설명하곤 했다. 나는 문제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도 문제를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에게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러브스톤파와 포스터파가 이렇게 연설하고, 이 캠페인에 참가한 진짜 목적은 모스크바 권력의 환심을 사려는 것이었다.
누군가 이렇게 물어볼지 모르겠다. “왜 트로츠키에 대해 우호적으로 연설하지 않았는가?” 나는 강령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그때 나는 의심하고 있었고, 만족하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누군가가 당에 대한 책임감을 갖고 있지 않다면, 만약 그가 단지 논평가나 관찰자라면, 의심나는 것을 얘기해버리고 끝내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진지한 정당에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모른다면, 아무 말 안 해도 된다. [그런 상황에서] 최선은 침묵하는 것이다.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2월에 총회를 열었다. 그것이 유명한 1928년 2월 총회다. 이 총회는 트로츠키와 지노비에프 그리고 다른 모든 러시아 반대파들이 제명되고 몇 달 뒤에 열린 총회였다. 스탈린 관료제를 지지하기 위해 세계 당들을 동원하려는 대대적 캠페인이 벌어지고 있었다. 우리는 이 총회에서 당 내 분파 쟁점들, 정세 평가, 노조 문제, 조직 문제로 싸우고 논쟁했다. 우리는 이 모든 문제로 격렬하게 싸웠다. 그것이 우리의 진짜 관심사였다. 그 다음에 우리는 마지막 안건인 러시아 문제를 다뤘다. 다수파인 러브스톤파의 보고자인 버트램 울프가 약 두 시간에 걸쳐 그것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그리고 그 문제가 공개토론에 부쳐졌다. 러브스톤파와 포스터파의 각 멤버들이 한 명씩 차례로 나가 보고에 동의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제명의 필요성을 이해하고, 제명에 동의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나는 말하지 않았다. 내가 침묵했기 때문에 당연히 캐넌파의 다른 멤버들도 말하기가 좀 곤란했다. 그들은 그 상황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한테 일종의 압력을 행사했다. 나는 그날 내가 홀 뒤쪽에서 어떻게 앉아있었는지 기억난다. 기분 나쁘고, 씁쓸하며 혼란스러웠다. 뭔가 감춰진 게 있다고 확신했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다. 빌 던은 당시에 정치위원회 멤버였고, 가장 가까운 내 동료였는데, 다른 두 명과 함께 나한테 왔다.
“짐, 동지는 이 문제에 대해 말해야 해요. 그것은 러시아 문제예요. 동지가 이 보고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그들이 우리 분파를 박살내버릴 거예요. 일어나서 보고에 찬성한다고 몇 마디만 해요.”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끈질기게 요구했다. 하지만 나는 단호했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겁니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 말하지 않을 겁니다.”
그 문제에 대해 말하는 것은 내 입장에서 볼 때 ‘현명한 정책’이 아니었다. 돌이켜 생각해볼 때, 말하는 것이 현명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말이다. 미래를 예측했던 것은 전혀 아니다. 그것은 단지 그 문제에 대해 내가 느낀 기분이었고, 완고한 개인적 느낌이었을 뿐이다. 우리한테는 제대로 된 정보가 전혀 없었다. 우리는 진실이 무엇인지 정말 몰랐다. 바로 그때(1927년), 러시아 당 내 논쟁이 중국 혁명과 영국·러시아 위원회[영러 위원회]라는 국제 문제들을 포함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우리 당의 거의 모든 멤버가 중국 혁명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말할 수 있다. 왜냐면 그때 이후 아주 많은 자료들이 출판됐기 때문이다. 우리는 중국 혁명의 교훈에 대해 젊은 동지들에게 교육해왔다. 하지만 1927년에 우리 미국인들은 중국 혁명에 대해 전혀 몰랐다. 중국은 너무 멀었다. 우리는 러시아 반대파의 테제를 하나도 보지 못했다. 우리는 식민지 문제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는 중국 혁명에 관한 심오한 이론적 문제들과 그에 따른 논쟁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솔직히 우리는 어떤 입장을 취할 수가 없었다.
영러위원회 문제는 나한테 좀더 명쾌해 보였다. 그것은 영러위원회 건설을 둘러싸고 러시아 반대파와 스탈린주의자들 사이에 벌어진 큰 투쟁 문제였다. 그 위원회는 영국과 러시아 노조 활동가들의 위원회로서 영국에서 독립적인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을 대체했다. 이 정책은 1926년 영국 총파업이라는 결정적 순간에 영국 공산당의 독자적 활동을 압살했다. 아주 우연히, 그해 여름에, 나는 그 문제에 대한 러시아 반대파의 문건 중 하나를 봤다. 그 글은 나한테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나는 적어도 영러위원회 문제에서는 반대파가 옳다고 느꼈다. 어쨌든 나는 그들이 스탈린주의자들이 묘사하듯 반혁명분자들은 아니라고 확신했다.
1928년 2월 총회 이후 나는 어느 정도 정기적으로 해왔던 전국순회에 나섰다. 나는 해마다 또는 2년마다 진짜 미국의 숨결을 느끼고, 미국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를 알기 위해 해안가를 따라 순회하는 습관이 있었다. 지금 되돌아보면, 여러분은 뉴욕에 있는 당 지도자 일부로부터 여러 비현실적인 견해와 오류, 많은 편협한 생각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맨해튼 섬에서 한평생을 살았고, 이 거대한 다양성의 나라를 정말로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국제노동자방어위원회의 후원을 받아 1928년에 넉 달 동안 전국을 순회했다. 나는 끝없이 이어지는 분파투쟁의 숨막히는 분위기에서 벗어나 대중운동에 몸을 담그고 싶었다. 나는 러시아 문제에 대해 몇 가지 생각할 기회를 얻고 싶었다. 그것이 다른 무엇보다도 나를 괴롭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빈센트 던은 나한테 다음 사실을 기억하게 해줬다. 내가 태평양연안에서 돌아오는 길에 미니애폴리스에 들렀을 때, 그와 스코글런드 동지가 트로츠키와 지노비에프의 제명에 대해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나는 “러시아혁명의 지도자들을 비난한다면 나는 누구겠는가?”라고 답했다. 이 말을 듣고 그들은 내가 트로츠키와 지노비에프의 제명에 아주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몇 달 뒤 공개투쟁이 벌어졌을 때 그 얘기를 나한테 들려주었다.
코민테른 6차 세계대회
1928년 늦봄과 이른 여름에, 코민테른 6차 대회가 모스크바에서 열렸다. 우리는 그런 경우에는 항상 그랬듯이 모든 분파를 대표하는 대규모 대표단을 모스크바로 떠나보냈다. 이런 말하기 미안하지만, 나는 거기에 갔을 때 국제운동의 문제들에 몰두하지 못했다. 한 지부의 대표자들로서 우리가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와야 할 책임이 있었지만 말이다. 대신 우리 모두는 주로 미국 당 안의 작은 투쟁에 어느 정도 매몰돼 있었다. 여기에서 편안하게 상대방을 요리하기 위해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 보려고 세계대회에 갔던 것이다. 불행하게도 그것이 사실상 모든 사람의 태도였다. 세계대회를 향해 떠났을 때, 나는 러시아문제, 좌익반대파와의 논쟁에 대해 해명을 명쾌하게 들을 수 있다는 어떤 희망도 갖고 있지 못했다. 그때는 반대파가 완전히 싹쓸이당한 것처럼 보였다. 지도자들은 쫓겨났다. 트로츠키는 알마아타로 추방당했다. 전 세계에서 지지자들이 당에서 내쫓겼다. 문제가 되살아날 가능성은 없어보였다. 그래도 그 문제가 나를 계속 괴롭혔다. 그 문제로 나는 너무 괴로워서, 모스크바에서 분파투쟁을 할 때 효과적으로 개입할 수가 없었다.
당연하게도, 우리가 거기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분파투쟁을 계속했다. 우리는 즉시 간부회의에 우리 대표들을 배치하고, 서로 상대방을 거꾸러뜨리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곳의 위원회 앞에서 서로 고발하고, 끝없이 논쟁했다. 나는 그런 일에 어느 정도 시무룩했다. 바로 그 즈음에 그들이 위원회들을 배정하기 시작했다. 각 대표단의 지도자들이 대회의 여러 위원회들에 참가하도록 배정됐다. 노조위원회, 정치위원회, 조직위원회 등에 배정됐다. 거기에 강령위원회도 있었다. 6차 대회는 최초로 강령을, 그것도 완결된 코민테른 강령을 채택하기로 돼 있었다. 코민테른은 1919년에 만들어졌다. 1928년에 이르기까지 9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강령을 완성하지 못했다. 코민테른 초기에 강령 문제에 주의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가장 위대한 맑스주의자들이 강령 문제를 얼마나 진지하게 다뤘는지 그리고 그들이 얼마나 강령을 정성들여 가다듬었는지를 보여줄 뿐이다. 그들은 1919년에 몇 가지 기본 결의안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어서 1920년, 21년, 22년에 또 다른 결의안들을 채택했다. 4차 대회 때 그들은 강령토론을 시작했다. 5차 대회는 강령 작업을 더 진척시키지 않았다. 그래서 1928년에 이르게 됐고, 우리는 부하린과 스탈린이 썼다는 강령 초안을 받게 됐다.
나는 강령위원회에 배정됐다. 부분적으로 그것은 다른 분파 지도자들이 강령에 큰 흥미를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강령은 부하린에게 맡겨라. 우리는 그런 문제로 골치 아프고 싶지 않다. 우리는 우리 분파투쟁을 결정할 정치위원회에 참가하고 싶다. 또는 우리를 괴롭히는 자잘하고 갑갑한 노조문제들을 결정할 노조위원회나 다른 어떤 실천적 위원회에 참가하고 싶다.”
그것이 미국 대표단의 일반적 정서였다. 나는 강령위원회에 떠밀려졌다. 그것은 일종의 실속 없는 명예였다. 그리고 진실을 말하자면, 나는 강령위원회에 큰 흥미를 느끼지 않았다.
캐넌과 스펙터가 트로츠키주의자가 되다
하지만 나를 강령위원회에 배정한 것은 그들의 큰 잘못이었다. 포스터, 러브스톤, 다른 분파 지도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스탈린도 골치가 꽤 아팠을 것이다. 왜냐면 알마아타로 추방됐고, 러시아당과 코민테른에서 제명된 트로츠키가 대회에 호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곧 볼 수 있듯이, 트로츠키는 당이 제명했다고 해서 곧바로 일어나 제 발로 걸어나가지 않았다. 그는 제명당한 뒤 곧 돌아왔다. 코민테른 6차 대회 소집이 그에게는 첫 번째 기회였다. 그는 이 대회에 자기 사건을 설명하는 문서를 제출했을 뿐만 아니라 부하린과 스탈린의 강령초안을 비판하는 글을 제출해 이론적으로 엄청나게 기여했다. 트로츠키가 쓴 문서의 제목은 ‘코민테른 강령 초안에 대한 근본적 비판’이었다. 원래 트로츠키의 이 문서는 관료적으로 은폐될 뻔했으나, 모크스바 조직이 조금 실수하는 바람에, 코민테른 번역실에 전달됐다. 그 번역실에는 열두 명 이상의 번역가와 속기사들이 있었다. 그들은 오직 번역과 속기 일만 했다. 그들은 트로츠키 문서를 집어들고 번역한 다음, 대표단장들과 강령위원회 대의원들에게 배포했다.
그래서 놀랍게도 그 영어번역본이 내 무릎에 놓였다! 캐나다 당 대표자인 모리스 스펙터도 나와 약간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강령위원회에 배정됐고, 트로츠키 강령 번역본을 받았다. 우리는 간부회의와 대회 회의들은 신경 쓰지 않고, 그 문서를 읽고 연구했다. 그러고 나서 나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았다. 그리고 모리스 스펙터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의심을 해결했다. 맑스주의 진실이 트로츠키 편에 있다는 것이 대낮같이 분명했다. 나와 스펙터는 고국에 돌아가 트로츠키주의 깃발 아래 투쟁을 벌이자고 거기에서 약속했다.
우리는 이미 철저히 확신하고 있었지만, 모스크바 대회에서 투쟁을 시작할 수 없었다. 그 문서를 읽은 날부터 나는 단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스스로를 트로츠키의 제자로 여겼다. 우리가 모스크바에서 투쟁을 시작하지 않았기 때문에, 관망하는 몇몇 순수주의자들은 이렇게 다시 요구할지도 모른다. “왜 6차 대회 때 연단에 올라가 트로츠키를 옹호한다고 발언하지 않았는가?” 답은 간단하다. 만약 그렇게 했다면, 우리는 우리의 정치적 목적을 가장 잘 실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무엇을 위해,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정치활동을 하는가의 문제다. 코민테른은 이미 꽤 많이 스탈린주의화 됐다. 대회는 통제되고 있었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완전한 입장을 대회에서 밝혔더라면, 아마 고국에서 극심하게 비난받고 고립될 때까지 모스크바 감옥에서 갇혀 지냈을 것이다. 나중에 러브스톤은 자기 차례가 왔을 때 이 모스크바의 덫에 걸렸다. 트로츠키 문서를 본 나의 의무, 나의 정치적 임무는 우리 당 안에서 러시아 반대파를 지지할 토대를 조직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 나는 우선 고국에 돌아가야 했다. 그래서 나는 스탈린주의화한 코민테른에서 침묵을 지켰다. 친구들 사이에서는 정직이 미덕이다. 하지만 부도덕한 적을 상대할 때 정직은 바보짓이다.
그때 우리가 우리 감정을 아주 철저하게 숨기지는 못했다. 나는 특히 점점 더 트로츠키주의를 ‘만지작거린다’고 여겨졌다. 기틀로우는 회개하는, 애처로운 대필 서적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소련 비밀경찰] 게페우는 캐넌이 모스크바에서 했던 활동을 조사했고, 러시아인들과 대화하면서 캐넌이 트로츠키주의 경향을 강하게 드러냈다고 코민테른에 보고했다.”
그들은 나를 의심했다. 하지만 너무 거칠게 다루는 것은 주저했다. 그들은 아마도 나를 바로잡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공공연한 스캔들을 일으키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공개투쟁으로 가면 내가 문제를 일으킬 것이라고 그들이 가정할 만도 했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고국으로 돌아왔다(내 생각으로는 그때가 9월이었다). 미국 당 내 분파투쟁에 관한 한 어떤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 상태였다. 러브스톤은 모스크바 투쟁에서 이익을 약간 얻었다. 하지만 당시에 스탈린은 나중에 러브스톤파를 제거할 토대가 된 몇 가지 단서를 결의안에 포함시켰다. 나는 트로츠키가 쓴 강령초안 비판을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몰래 가져왔다. 미국에 돌아오자마자 나는 즉시 트로츠키주의 분파를 조직하는 확고한 임무에 착수했다.
여러분은 그 일이 아주 간단했을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다음과 같은 상황에서 진행된 것이다. 트로츠키는 모든 코민테른 당에서, 그리고 6차 대회에서 다시 한 번 더 반혁명분자라고 비난받고 있었다. 당에서 트로츠키의 공공연한 지지자라고 알려진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다. 당 전체가 트로츠키주의에 엄격하게 반대했다. 그때 당은 질문하고 공정하게 토론할 수 있는 민주적 조직이 더 이상 아니었다. 트로츠키와 러시아 반대파를 옹호한다고 선언하면, 반혁명 배신자라고 비난당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어떤 토론도 없이 곧바로 제명당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는 불가피한 충돌이 오기 전에 비밀스럽게 새로운 분파를 조직해야 했다. 크든 작든 이 분파는 제명당할 것이며, 새로운 운동을 만들기 위해 스탈린주의자들과 전 세계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점이 분명했다.
처음부터 나는 임무가 막중하다는 점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만약 우리가 조금이라도 환상을 품었다면, 결과에 너무 실망해서 파산해버렸을지도 모른다. 나는 조용하게 개별 활동가들을 찾아서, 본심을 쉽게 드러내지 않으면서 얘기하기 시작했다. 로즈 카스너는 첫 번째로 나의 확고한 지지자가 됐다. 그녀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국제노동자방어위원회에서 나와 함께 활동했고, 정치위원회 멤버는 아니었지만 전국위원회 멤버였던 샥트먼과 에이번은 위대한 새 시도를 함께 하기로 했다. 다른 몇 사람도 결의했다. 우리는 항상 조심해서 활동했지만, 꽤 잘 해나가서 여기저기에서 약간씩 전진했다. 캐넌이 트로츠키주의자가 됐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공공연하게 얘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소문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당 상황에 약간의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도 우리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내가 언급했듯이 당은 세 분파로 쪼개져 있었다. 하지만 포스터파와 캐넌파는 블록을 형성해서 함께 활동했고, 당시에는 공동 간부회의도 열고 있었다. 이것이 포스터파를 진퇴양난에 빠뜨렸다. 만약 그들이 감춰진 트로츠키주의를 폭로하고 거기에 맞서 정열적으로 싸우지 않으면, 스탈린의 동조와 지지를 잃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그들이 우리를 거칠게 대해 우리 지지를 잃으면, 다가오는 대회에서 다수파 지위를 얻을 수 없다. 그들은 망설여서 곤란에 빠졌고, 우리는 그들의 모순을 충분히 이용했다.
우리의 임무는 어려웠다. 우리한테는 트로츠키의 문서가 한 부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을 복사할 방법이 없었다. 우리한테는 속기사가 없었다. 타자기도 없었다. 등사 기계도 없었다. 돈도 없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주의 깊게 선택한 사람을 만나, 충분히 흥미를 느끼게 만든 다음, 집에 가서 그 문서를 읽게 하는 것이었다. 길고 고된 과정이었다. 우리는 몇 사람을 획득했고, 그들은 복음서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돌리는 일을 도왔다.
‘재판’ 그리고 캐넌, 샥트먼, 에이번의 추방
결국 한 달쯤 뒤에, 우리 동지 중 한 명이 조금 경솔하게 행동해서 우리가 드러나고 말았다. 그래서 우리는 포스터-캐넌 분파의 합동 간부회의에서 일찍이 문제에 맞닥뜨려야 했다. 포스터파는 심문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그들은 이러저러한 얘기를 들었으므로 설명을 듣고 싶다고 했다. 그들이 크게 걱정하고 있고, 아직 결단하지 못했다는 것이 분명했다. 우리는 공세를 취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누군가가 나를 심문하는 것은 모욕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10년 동안 당에서 내 입장은 꽤 분명했다. 누군가가 그것을 의심하다니 화가 난다.”
우리는 그렇게 엄포를 놓고 한 주를 보냈다. 그리고 그 한 주 동안 우리는 이곳저곳에서 몇 사람을 우리쪽으로 조직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심문을 계속해보려고 또 다른 간부회의를 소집했다. 이때 해서웨이가 모스크바에서 돌아왔다. 그는 모스크바에서 이른바 레닌 학교에 다녔다. 사실 그것은 스탈린 학교였다. 그는 스탈린 학교에서 많은 경험을 쌓아서 ‘트로츠키주의’를 어떻게 고발해야 하는지를 지방 제화공들보다 훨씬 더 잘 알았다. 그는, 고발하는 방법은 “이 간부회의는 트로츠키주의가 반혁명적이라고 규탄한다”는 안을 제출해, 모두가 그 안에 동의하는지 확인하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그 방법에 대해 “트로츠키주의 문제는 오래 전에 결정됐으므로, 이 문제를 다시 꺼내드는 것은 의미가 전혀 없다”고 반대했다. 이것은 우리 스스로를 위장하기 위한 형식적 전술이었다. 그것은 경찰처럼 행동하려는 스탈린 학교 졸업생을 대하기 위해 필요한 전술이었다.
우리는 그 문제를 놓고 네다섯 시간 논쟁했다. 그들은 아직도 우리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다. 그들은 이런 딜레마에 빠졌다. 만약 그들이 ‘트로츠키주의’에 단호하게 맞서 싸우지 않았다는 이유로 평판을 잃는다면 모스크바의 지지를 잃을 것이다. 다른 한편 만약 그들이 우리와 분리한다면, 미국 공산당 안에서 다수파를 차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몹시 다수파가 되고 싶어했다. 그리고 그들은 캐넌 같은 똑똑한 친구가 결국 제정신을 차리고, 트로츠키를 방어하겠다는 무익한 투쟁에 이렇게 뒤늦게 나서지 않았으면 하는 희망을 키워왔다(오, 어떻게 키운 희망인가!). 우리는 그럴 것이라고 직접 얘기하지 않고, 그것이 가능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볼 여지를 그들에게 약간 주었다. 결정은 다시 미뤄졌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2주를 벌었다. 결국 포스터파는 사안이 너무 뜨거워지고 있다고 자기들끼리 결정했다. 캐넌, 샥트먼, 에이번이 당원들을 트로츠키주의로 전환시키고 있다는 소문을 점점 더 많이 듣고 있었다. 포스터파는 러브스톤파가 이 낌새를 알아차리고, 자신들을 공범으로 고발할까봐 몹시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들은 합동 간부회의에서 우리를 허둥지둥 쫓아냈다. 그리고 정치위원회 전에 우리를 고발했다.
당을 향한 호소
우리는 정치위원회와 중앙조정위원회의 합동회의 전에 재판을 받았다. 우리는 <투사> 초기 호들에서 그 재판을 다뤘다. 당연히 그것은 불법 재판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충분히 연설하고, 포스터파의 증인을 반대심문할 충분한 자유를 누렸다. 그 자유는 당 내 민주주의 때문에 준 것이 아니다. 정치위원회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러브스톤파가 포스터파와 타협하고 싶어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권리’를 준 것이다.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들은 우리에게 약간의 자유를 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자유를 충분히 이용했다. 재판은 날마다 계속됐다. 점점 더 많은 당 지도자들과 간부들이 참석하도록 초대됐다. 결국 청중이 100명가량 됐다. 그때까지 우리는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들의 증인을 반대심문하고, 포스터파 사람들의 명예를 떨어뜨리거나 그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정도로만 대응했다. 결국, 우리가 그 일에 지쳤을 때, 그리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한 보고가 당 전체로 퍼졌을 때, 우리는 싸우기로 결정했다. 나는 조용하고, 다소 겁먹은 당 간부들로 이뤄진 청중들에게 모든 원칙적 문제에서 우리가 트로츠키와 러시아 반대파를 100% 지지한다는 선언을 읽어주었다. 그리고 끝까지 그 노선에 따라 투쟁하겠다는 우리의 결의를 밝혔다. 정치위원회와 중앙조정위원회의 합동회의가 우리를 제명했다.
<투사>를 발행하다
바로 다음날 우리는 등사판으로 인쇄된 성명서를 당 전체에 배포했다. 우리는 제명을 예상했다. 우리는 제명에 대해 이미 준비가 돼 있었고, 그래서 곧바로 맞받아쳤다. 약 1주일 뒤, 우리가 <투사> 창간호를 발행해 한 방 먹이자 그들은 크게 질겁했다. 신문 기사는 준비돼 있었고, 우리가 재판을 끌 때 인쇄업자와 인쇄 협의를 했다. 우리는 1928년 10월 27일에 제명됐다. <투사>는 그 다음 주에 11월호로 나왔다. 러시아혁명 기념일을 경축하고, 우리 강령을 소개하는 기사 등이 실렸다. 그래서 미국 트로츠키주의를 위한 공개 투쟁을 시작했다.
확실히 우리가 처음부터 아주 밝은 전망을 가질 수는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올바른 입장으로 출발했기 때문에 첫 몇 주 동안 꾸준히 세를 불려나갔고, 처음부터 확고하게 설 수 있었다. 우리는 다이나마이트 폭탄으로 당 내 무원칙한 분파주의 더미를 폭파시켰다. 우리는 국제주의의 원칙적 강령에 기초를 둠으로써 미국 당 분파들의 모든 낡은 오류와 실수로부터 단번에 벗어났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에 대해 싸우고 있는지 확신했다. 낡은 말다툼 속에서는 그렇게 크게 보였던 모든 작은 조직적 술수들을 낡은 코트 버리듯 던져버렸다. 우리는 이 나라에서 진짜 볼셰비즘 운동을, 그리고 미국 공산주의의 재건투쟁을 시작했다.
숫자 측면에서 보면 미래가 아주 밝은 투쟁은 아니었다. 선언에 서명한 우리 세 사람, 에이번, 샥트먼 그리고 나는 미국에서 권력 장악을 목표로 한 새 당을 건설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려고 우리 집을 향해 걸어갈 때 약간 외로움을 느꼈다. 우리 셋 모두는 국제노동자방어위원회에서 일하고 있었다. 우리는 월급도 못 받고 거기에서 즉시 쫓겨났다. 우리한테는 돈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어디에서 조금이라도 돈을 구할 수 있을지 알지 못했다. 우리는 어떻게 인쇄비를 치를지 모르는 상태에서 <투사> 창간호를 계획했다. 하지만 우리는 창간호에 대해서는 외상으로 해주겠다고 인쇄업자한테 약속받았다. 우리는 시카고 친구 몇 명에게 편지를 썼는데, 그들이 돈을 좀 줘서 신문을 낼 수 있었다. 우리는 신문을 한 달에 두 번 발행할 것이라고 자랑스럽게 선언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분파가 성장하다
당에서 쫓겨난 직후, 우리는 1~2년 전에 분파투쟁 과정에서 여러 이유로 당에서 제명됐던 헝가리 동지들의 그룹을 발견했다. 우리와 별도로 그리고 우리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그들은 암토르그 무역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몇몇 러시아 반대파들과 접촉해서 트로츠키주의에 확신을 갖게 됐다. 그들은 확실히 우리에게 백만 대군처럼 보였다. 우리는 뉴욕에 있는 작은 이탈리아 반대파 그룹도 찾아냈다. 그들은 보르디가를 따랐는데, 정말로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잠시 우리와 함께 활동했다. 우리는 꽤 정열적으로 활동했다. 우리는 비난에 전투적으로 맞서고, <투사>를 통해 트로츠키의 강령 초안 비판 등 러시아 반대파의 새로운 글을 알리기 시작했다. 원칙에 입각한 명확한 강령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미래를 움켜쥔 분파가 곧 확고하게 다듬어지기 시작했다.
오랜 기간 소규모 분파였지만, 이 그룹은 아주 확신에 차고 열정적이고 단호한 분파였다. 우리는 전국에서 회원을 새로 조직하기 시작했다. 미니애폴리스에서 가장 중요한 대수확을 거뒀다. 미니애폴리스는 팀스터 파업투쟁에서만이 아니라 미국 트로츠키주의 건설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우리는 시카고에서도 지지자들을 조직했다.
우리는 여러 측면에서 크게 불리했다. 당에서 제명당하기 전에 뉴욕 밖의 당원들과 별로 소통하지 못했다. 공산당의 대다수 동지들은 우리가 제명당했다는 소식을 통해 우리 입장을 처음 알았다. 당 지도부의 조잡한 전술이 우리를 크게 도왔다. 그들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모든 위원회와 지부에 캐넌, 샥트먼, 에이번에 대한 제명을 승인하라고 밀어붙였다. 그리고 질문하거나 더 많이 알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트로츠키주의자라고 비난하고 곧 쫓아냈다. 그것이 우리한테 큰 도움이 됐다. 그들은 그런 동지들을 우리가 최소한 대화라도 할 수 있는 처지로 곧장 내몰았다. 우리가 오랫동안 관계를 맺어왔던 좋은 친구들이 있는 미니애폴리스에서 러브스톤파의 정치위원이 그들을 회의로 불러들여 우리의 제명을 승인하는 안에 즉시 투표하라고 요구했다. 그들은 거부했다. “우리는 이런 사태가 왜 일어났는지 알고 싶다. 그리고 이 동지들의 말을 듣고 싶다.” 그들은 즉시 쫓겨났고, 우리와 소통했다. 우리는 그들에게 <투사> 등 문서를 주었다. 결국 우리 제명을 승인하지 않아 쫓겨난 거의 모든 사람이 우리한테 동조했고, 그들 대부분이 우리와 함께했다.
우리는 처음부터 이것이 단지 민주주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문제는 맑스주의 강령이다. 우리가 만약 관료주의에 대한 반감만 가지고 사람들을 조직하려 했다면, 우리는 회원을 더 많이 조직했을 것이다. 하지만 반관료주의는 불충분한 기초였다. 우리는 민주주의 문제를 이용해 사람들이 호의적으로 귀를 기울이게 한 다음, 모든 정치문제에서 트로츠키주의가 옳다고 쏟아내기 시작했다.
여러분은 우리가 입장을 밝히고, 제명당한 것이 모든 당원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을지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트로츠키는 멘셰비키였다고 수년 동안 당원들은 주입받았다. 그는 ‘반혁명분자’로 낙인찍혀 제명당했다. 모든 것이 거꾸로 뒤집혀 있었다. 무력한 당원들의 마음은 트로츠키와 러시아 반대파에 대한 편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바로 그때, 마른하늘에서 날벼락이 떨어지듯, 세 명의 당 지도자가 자신들은 트로츠키주의자라고 선포하고 제명당했다. 그리고 그들은 즉시 당원을 만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서 이렇게 얘기했다. “모든 원칙적 문제에서 트로츠키가 옳다. 우리는 그것을 동지에게 입증해보이겠다.” 그런 상황에 많은 동지들이 맞닥뜨렸다. 우리 제명을 승인하지 않아 쫓겨난 사람 대부분은 당을 떠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들은 당시에 트로츠키주의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그리고 트로츠키는 반혁명적이라고 어느 정도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관료들이 그들을 어리석게 내쫓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과 얘기하고, 토론하며, 그들에게 문건을 줄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그것은 우리가 분파를 최초로 공고화할 수 있는 토대가 됐다.
그 시절엔 모든 개인이 엄청나게 중요하게 보였다. 처음 분파활동을 시작할 때 네 명뿐이었다면, 다섯 번째 사람이 올 경우 25% 증가한 셈이 된다. 전설에 따르면, 예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사회주의노동당이 텍사스 주에서 선거 득표수가 2배로 뛰었다고 자신만만하게 발표한 적이 있다. 알고 보니 평상시의 1% 대신에 2%를 얻었던 것이다.
필라델피아에서 최초로 사람을 조직했던 날을 잊을 수 없다. 우리가 쫓겨난 지 얼마 안 돼, 당에서 우리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드높아지고 있을 때, 어느 날 누군가 내 방문을 노크했다. 필라델피아에서 모건스턴이 온 것이다. 그는 젊지만 분파투쟁에서 ‘캐넌파’로 활동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말했다. “우리는 동지가 트로츠키주의를 옹호해서 제명당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하지만 우리는 믿을 수 없다. 진짜 내막을 알고 싶다.” 당시에는 같은 분파 사람한테서만 진실을 들을 수 있었다. 나는 그날 귀중한 트로츠키 글을 뒷방의 숨겨둔 장소에서 꺼내 그에게 건넨 것을 기억한다. 그는 침대에 앉아, 긴 ‘강령초안 비판’(그것은 한 권의 책이었다)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고개를 들지도 않고 읽었다. 다 읽고 난 뒤, 그는 결단했다. 우리는 필라델피아에서 중핵을 건설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우리는 같은 방식으로 다른 개별활동가들을 조직했다. 트로츠키 사상은 우리의 무기였다. 우리는 <투사>에 ‘강령초안 비판’을 시리즈로 실었다. 우리한테는 ‘강령초안 비판’이 한 부밖에 없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우리는 그것을 팜플렛 형태로 발간할 수 있었다. 그 분량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등사판으로 인쇄할 수 없었다. 우리한테는 등사기가 없었고, 타이핑할 사람도 없었고, 돈도 없었다. 돈은 심각한 문제였다. 우리 모두 당 직책을 박탈당했고, 어떤 수입도 없었다. 우리는 정치투쟁하느라 너무 바빠 생계활동을 할 수 없었다. 더구나 우리에겐 정치활동 자금도 문제였다. 우리는 사무실을 낼 수 없었다. 1년이 지난 뒤에야 겨우 3번가에 허술한, 창문에서 윙윙 소리가 나는 사무실 하나를 빌릴 수 있었다. 2년째 됐을 때, 우리는 최초로 등사기를 구했고, 그 다음부터는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미국 공산주의의 부흥
지난주에 우리는 결국 스탈린주의화한 공산당에서 쫓겨나, 트로츠키주의 분파를 만들고 미국 공산주의 재건을 위한 위대한 역사적 투쟁을 시작했다는 데에 이르렀다. 우리 행동은 미국운동 상황 전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기운 빠지게 하고, 운동을 퇴보시키는 일국적 분파투쟁을 국제적 목적을 지닌 위대한 역사적 투쟁으로 사실상 한 방에 탈바꿈시켰다. 이런 급격한 전환을 통해, 사상이, 이 경우에는 진실한 맑스주의 사상이 엄청나게 중요하다는 점을 다시 한 번 생생하게 알 수 있다.
이 사상은 이중의 장애물을 뚫고 나아갔다. 우선 내가 앞 장들에서 간단하게 설명한, 오랫동안 질질 끈 국내 분파투쟁이 우리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고 갔다. 우리는 사소한 조직문제에 빠져 있었고, 편협한 일국주의 관점 때문에 사기가 떨어져 있었다. 상황을 해결할 수 없는 듯 보였다. 다른 한편, 멀리 러시아에서 볼셰비키-레닌주의 반대파가 조직적으로 완전히 궤멸돼버렸다. 지도자들은 당에서 쫓겨나고, 입에 재갈이 물리고, 불법화되고, 기소당했다. 트로츠키는 멀리 알마아타로 추방당했다. 전 세계에서 그를 지지하는 단위들은 흩어져 있었고, 조직되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 일련의 국면을 거쳐, 상황이 바로잡혔다. 모든 것이 적절히 자리 잡기 시작했다. 트로츠키가 알마아타에서 맑스주의 문서 하나를 코민테른 6차 대회에 보냈다. 비서 기구의 빈틈을 뚫고 그 문서가 소수 대표자들에게, 특히 미국 당 대표자 한 명과 캐나다 당 대표자 한 명에게 갔다. 맑스주의 사상의 천하무적 같은 힘을 보여준 이 문서는 적절한 때에 적절한 사람들에게 떨어졌다. 그래서 지난주에 우리가 보았듯이 빠르고 커다란 전환을 불러일으켰다.
미국에서 시작된 운동은 전 세계에 영향을 미쳤다. 하룻밤 사이에 투쟁의 전체 그림, 전체 전망이 바뀌었다. 공식적으로는 죽었다고 선언된 트로츠키주의가 국제 무대에서 부활했고, 새로운 희망, 새로운 열정, 새로운 에너지를 얻었다. 미국 당 언론이 우리를 맹렬하게 비난했고, 그 기사를 모스크바의 프라우다를 비롯해 전 세계 스탈린주의 언론이 다시 실었다. 감옥과 망명지에 있던 러시아 반대파 활동가들이, 빠르든 늦든 도착하는 신문을 보고, 미국에서 우리가 활동하고 있고 저항하고 있다는 점을 알아챘다. 반대파 투쟁에서 가장 힘든 시기에 바다 건너 미국에서 신병들이 전투에 참가했다는 것을 그들이 알게 됐다. 미국이라는 나라 자체의 힘과 비중 때문에 미국 공산주의자들이 한 일은 그만큼 더 중요하고 비중이 컸다.
내가 말했듯이, 트로츠키는 알마아타라는 작은 아시아 마을에 고립돼 있었다. [좌익반대파들의] 세계운동은 가라앉아 있고, 지도자가 없으며, 탄압받고, 고립되고,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머나먼 미국에서도 반대파가 등장해 투쟁하고 있다는 이런 고무적 소식이 들려오자, 반대파 그룹들의 작은 신문, 기관지들이 다시 활력을 얻었다. 우리에게 가장 고무적이었던 것은 어려운 처지에 있는 러시아 동지들이 우리 목소리를 확실히 들었다는 것이다. 나는 1928년에 우리가 펼친 역사적 투쟁에서 가장 기뻤던 측면 중 하나로 항상 다음을 생각해왔다. 모든 감옥과 망명지에 있는 러시아 동지들이 우리 투쟁 소식을 듣고, 끈질기게 버틸 새로운 희망과 에너지를 얻었다는 것이다.
내가 말했듯이 우리는 어떤 어려움에 부딪칠지에 대해 꽤 분명한 통찰력을 갖고 투쟁을 시작했다. 우리는 적절한 생각이나 준비 없이 경솔하게 움직이지 않았다. 우리는 오랫동안 큰 곤란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예측했다. 그 때문에 우리는 빠르게 승리할 수 있다는 낙관적 희망을 조금도 갖지 않았다. 우리 신문 모든 호에서, 모든 성명서에서 우리는 투쟁의 근본성격을 강조했다. 우리 강령의 올바름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훨씬 멀리 내다봐야 하고, 인내와 끈기를 가져야 하며, 사태가 더 발전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가장 먼저 할 일은 우리 신문인 <투사>를 발간하는 것이었다. <투사>는 등사기로 인쇄해 몰래 배포하는 신문이 아니었다. 많은 작은 그룹은 그 정도에 만족한다. <투사>는 보통 크기의 신문이었다. 우리는 일에 착수했다. 그들은 우리 세 사람(에이번, 샥트먼, 캐넌)을 무시하듯이 ‘군대 없는 세 장군’이라고 불렀다. 그 명칭은 곧 유명해졌다. 우리는 그 명칭이 어느 정도 일리 있다고 인정해야 했다. 우리에게 군대가 없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신념이 흔들리지는 않았다. 우리는 강령을 갖고 있었고, 이 강령 덕분에 우리가 군대를 조직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편지를 통한 선전
우리는 편지 쓰기를 정력적으로 시작했다. 우리가 아는 사람이 있다면 어느 곳에서든, 흥미를 느끼는 누군가에 대해 들으면 언제든지, 우리는 장문의 편지를 쓰곤 했다. 우리의 선전선동 활동의 성격은 필연적으로 바뀌었다. 과거에 우리는, 특히 나는, 꽤 많은 청중에게 연설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제명당하기 얼마 전에 나는 수백 명, 때로는 수천 명의 사람들에게 연설하면서 전국을 순회했다.
이제 우리는 개인들에게 말해야 했다. 우리의 선전활동은 주로 공산당에서 또는 공산당 근처에서 우리 사상에 흥미를 느낄 만한 고립된 개인들의 이름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만날 약속을 잡고, 한 개인에게 몇 시간씩 얘기하고, 한 사람을 조직하기 위해 우리의 모든 원칙적 입장을 긴 편지로 설명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우리는 몇 백 혹은 몇 십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나 조직해야 했다.
캐나다의 스펙터
미국 운동에서 폭발이 발생하자마자 캐나다에서 스펙터가 제몫을 해냈다. 똑같은 일이 거기에서도 벌어졌다. 상당한 규모의 캐나다 그룹이 만들어져 우리와 협력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만나왔던 동지들이 시카고, 미니애폴리스, 캔자스시티, 필라델피아에서 우리 깃발로 모여들었다. 대체로 그룹 규모가 크지는 않았다. 내 생각으로는, 시카고가 20~30명 규모로 시작했다. 미니애폴리스도 비슷했다. 캔자스시티에는 3~4명이 있었다. 필라델피아에는 경외할 만한 모건스턴과 굿맨, 이렇게 2명이 있었다. 어떤 곳에서는 혼자서 우리 활동을 했다. 뉴욕 여기저기에서 몇 명을 건졌다. 클리블랜드, 세인트루이스, 일리노이 남부의 광산에서도 사람을 조직했다. 초기에 이 정도의 조직 연결망을 갖고 있었다.
스탈린주의자들의 배척, 비방, 깡패짓
우리가 한 사람씩을 대상으로 그들의 사상을 바꿔서 우리쪽으로 조직하는 작업(우리가 IWW에서 개별조직화 선동이라고 불렀던 것)에 열중하고 있을 때, 비교적 발행부수가 많았던 <일간 노동자>가 우리를 집중 공격했다. 날마다 신문 1면 전체에서, 때로는 2면에 걸쳐 우리를 비난했다. 이런 기사들은 우리가 미국 제국주의에 우리 신념을 팔아넘겼다고 장황하게 설명했다. 소련을 전복하려고 음모를 꾸미는 제국주의 강대국들, 노동자의 적들과 손을 잡은 반혁명 분자들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우리가 ‘반혁명 부르주아지의 선봉’이 됐다고 비난했다. 우리를 겨냥한 정치 테러와 비방 캠페인 차원에서 그런 기사들이 날마다 실렸다. 그것은 우리가 개별 당원들과 어떤 관계도 지속시키지 못하게 하려는 술책이었다. 우리와 길거리에서 얘기하거나, 우리를 방문하거나, 우리와 어떻게든 소통하는 것은 제명당할 범죄가 됐다. 사람들은 우리가 말하는 모임에 참석했다고, 유니온스퀘어에 있는 공산당 본부 앞 길거리에서 우리가 판매한 신문을 샀다고, 또는 과거에 우리와 일정한 관계가 있었다고 고발돼 공산당 재판대에 세워졌다. 그리고 그들은 더 이상 만나지 않겠다는 것을 입증해야 했다. 배척의 장벽이 우리와 당원들을 갈라놓았다. 우리가 수년 동안 알고 있었고, 함께 활동했던 사람들이 하룻밤 사이에 낯선 사람이 돼버렸다. 우리의 삶 전부가 공산당 운동과 그 주변에 있었다는 점을 여러분은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직업적인 당 활동가였다. 우리는 당 안팎 말고는 다른 곳에 관심도 없었고, 다른 사회단체와 연계도 없었다. 수년 동안 일상활동에서 우리의 모든 친구, 우리의 모든 동료, 우리의 모든 협력자들은 바로 그 층이었다. 그런데 하룻밤 사이에, 우리가 그 층에 다가갈 수 없게 됐다. 우리는 완전히 고립됐다.
그런 일은 충성하는 조직을 바꿀 때 흔히 일어난다. 대체로 그런 일은 그렇게 심각하지 않다. 왜냐면 정치적이고 개인적이며 사회적인 기존 연계망에서 떠날 때, 즉시 새로운 층으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친구들, 새로운 사람들, 새로운 동료들을 찾는다. 하지만 우리는 이 과정의 한 측면만 경험했다. 우리는 새로운 연계망을 갖지 못한 상태에서 기존 연계망과 단절됐다. 우리가 참가해서 새로운 친구들과 동료를 찾을 수 있는 그런 조직이 어디에도 없었다. 우리는 강령만 갖고 맨손으로 새 조직을 만들어야 했다.
우리는 초기에 여러 측면에서 가장 끔찍한 반인간적 압력 속에서 살았다. 그것은 사람들을 주변 사람들로부터 사회적으로 배척하는 것이다. 크게 보자면, 나는 과거 경험 덕분에 그런 시련에 개인적으로 준비돼 있었다. 1차 세계대전 때, 나는 고향에서 내가 평생 알아온 사람들한테서 버림받은 채로 살았다. 그 결과 두 번째 경험은 아마도 다른 사람들보다는 나한테 덜 가혹했던 것 같다. 우리한테 개인적으로 동조했던 많은 동지들은 과거에 우리의 친구였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우리 사상에 부분적으로 동조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그런 끔찍한 사회적 배척의 벌에 공포감을 느껴 우리와 함께하지 않고, 우리와 관계 맺지 않았다. 아주 작은 우리 트로츠키주의 그룹한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만큼 그것은 좋은 학교였다. 견지할 가치가 있는 사상은 그것을 위해 싸울 가치도 있다. 미국 좌익반대파 초기에 전국에서 젊은 우리 운동이 맞서 싸웠던 비방, 배척, 탄압은 2차 세계대전과 함께 다가올 사회적 압력과 고립을 견뎌내기 위해 준비하는 데 훌륭한 훈련이 됐다. 2차 세계대전 때는 자본주의 사회의 실제 중압이 완고한 반항자와 비판자를 겨냥해 빠르고 강하게 짓누르기 시작했다.
스탈린주의자들의 첫 번째 무기는 비방이었다. 우리를 겨눈 두 번째 무기는 배척이었다. 세 번째 무기는 깡패짓이었다.
여기에 수만 명의 당원과 주변층을 지닌 당이 있다고 상상해보자. 이 당은 일간지를 한 개가 아니라 자그마치 열 개나 갖고 있다. 주간지와 월간지는 수없이 많다. 돈도 많고, 능숙한 노동자들의 거대한 기구도 갖고 있다. 이렇게 꽤나 가공할 권력이 극소수의 사람들을 겨냥했다. 이들은 수단도, 연계도 없으며, 강령, 그리고 그 강령을 위해 싸울 의지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데 말이다. 그들은 우리를 비방했고 배척했다. 그것으로도 우리를 깨뜨리지 못하자, 물리적으로 우리를 때려눕히려 했다. 그들은 어떤 논쟁에도 답할 필요가 없게 만들려고 했다. 우리가 말하고, 쓰고, 존재하는 것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림으로써 말이다.
우리 신문은 공산당원들을 직접 겨냥했다. 우리는 전 세계인의 생각을 바꾸려고 하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가 전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우리 사상에 가장 관심을 기울일 만한 사람들에게 우리 메시지를 우선 전달했다. 우리는 그 대오에서 적어도 운동의 첫 번째 분대를 충원해야 한다는 점을 알았다.
우리의 작은 신문을 인쇄한 다음, 조직원들만이 아니라 편집자도 그 신문을 팔기 위해 밖으로 나가야 했다. 우리는 신문 기사를 썼다. 우리는 다음에 인쇄소로 갔다. 거기에서 첫 호가 나오기를 애타게 기다리면서, 마지막 오자를 교정할 때까지 인쇄업자 옆을 서성거렸다. <투사>의 새 호, 새 무기는 항상 스릴이 넘쳤다.
그런 다음 팔에 신문 꾸러미를 들고, 우리는 유니온스퀘어에 있는 도로 모퉁이로 신문을 팔러 갔다. 물론 세 명의 편집자가 세 명의 신문팔이 사내가 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우리한테는 일꾼이 부족했기에 그렇게 해야 했다. 항상은 아니지만 때때로 그렇게 해야 했다. 이게 다가 아니다. 유니온스퀘어에서 우리 신문을 팔기 위해 우리는 물리적 공격에도 맞서야 했다.
나는 오늘 당시의 몇 가지 사건을 떠올리면서 <투사> 합본호 1권을 훑어보았다. 나는 내게 퍼부어진 물리적 공격에 대한 첫 번째 기사를 읽었다. 그 공격은 우리가 쫓겨난 뒤 몇 주 만에 시작됐다. 스탈린주의자들은 처음에 크게 놀랐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그들이 알아차리기 전에 우리 동지들이 인쇄소에서 <투사>지를 가져와, 공산당 본부 앞에서 한 부에 5센트를 받고 팔고 있었다. 신문의 반향은 엄청났다. 몇 주 동안 그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 뒤 그들은 물리적 공격이라는 스탈린주의적 방법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투사>의 첫 번째 보도에서는 헝가리인 그룹의 두 여성 동지를 다룬다. 그들은 어느 날 밤 신문 뭉치를 들고 가서 팔려고 했다. 깡패들이 그녀들을 습격해, 밀치고, 발로 차고, 큰 도로에서 몰아내고, 신문은 찢어버렸다. <투사>가 이 사건을 우리를 겨냥한 첫 번째 깡패 폭력이라고 보도했다.
그 뒤 그런 깡패짓이 어느 정도 정기 행사가 됐다. 우리는 버텼다. 우리는 크게 시끌벅적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사건들을 도시 전체의 스캔들로 만들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세력을 다 동원해 토요일 오후 거기에 가, 편집자들을 지키는 정당방위대를 만들고 우리를 쫓아내려는 스탈린주의 깡패들에 맞서 싸웠다.
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 호소하다
이렇게 하는 데 처음 몇 주가 걸렸다. 12월 17일에 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가 뉴욕시에서 열렸다. 여기서 다시 나는 이 투쟁에서 우리가 구사한 전술의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을 지적하고 싶다. 즉, 우리는 당에 등을 돌리지 않았고, 오히려 당으로 곧장 되돌아갔다는 것이다. 10월 27일에 제명됐는데, 우리는 12월 17일 전원회의에 가서 문을 두드리고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제명에 대해 항소하려고 왔다.” 그들은 시간을 정해서 약 100에서 150명의 당 지도자 앞에서 우리가 항소할 수 있게 허락했다.
러브스톤파가 그렇게 한 것은 민주주의를 고려해서가 아니었다. 규약을 충실히 지키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그들은 분파적 이유 때문에 그렇게 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우리가 제명됐다고 해서 포스터파와 러브스톤파가 분파투쟁을 중단한 것은 아니다. 러브스톤파는 다수파가 됐는데, 그들은 우리한테 무대를 주는 것이 자신들이 포스터파를 ‘트로츠키주의자 중재자들’로 몰아가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교활하게 생각했다. 그 틈을 타 우리는 회의에 들어갈 수 있었다.
우리는 환상을 갖지 않았다. 우리는 그들을 납득시키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우리는 포스터파를 겨냥한 러브스톤파의 작은 좀도둑질 전략에 관심이 없었다. 우리는 공식적으로 호소하고, 우리의 연설을 <투사>에 인쇄해 널리 배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군대 없는 세 명의 장군’이 모든 제명자를 대표해 12월 전원회의에 나타났다. 내가 2시간가량 연설했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밖으로 나가도록 안내받았다. 다음날 우리는 <투사>의 다음 호에 싣기 위해 ‘당에 호소한다’는 제목의 연설문을 인쇄소에 넘겼다.
나는 스탈린주의자들이 우리를 겨냥해 쓴 비방, 배척, 깡패짓이라는 세 가지 무기를 언급했다. 미국 스탈린주의 지도자들이 무기고에서 꺼내든 네 번째 무기는 도둑질이었다. 그들은 트로츠키의 강령이라는 위대한 사상으로 무장한 이 작은 그룹이 아주 무서웠다. 그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그룹이 발언 기회를 얻기 전에 박살내버리고 싶었다.
어느 일요일 오후, 우리는 첫 번째 뉴욕 지부 미팅에서 돌아오는 중이었다.(이 미팅에서 우리는 12~13명이 모여 진지하게 조직을 구성하고, 미국 자본주의를 타도하기 위한 초석을 놓았다.) 내가 사는 아파트를 누군가가 천장부터 바닥까지 샅샅이 뒤진 것을 발견했다. 우리가 없는 사이에 그들이 자물쇠를 부수고 쳐들어온 것이다.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다. 내 신문, 문서, 기록, 편지 모두가, 그들이 손에 잡을 수 있었던 모든 것이 바닥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우리가 분명히 전에 그들을 놀라게 해서 그들이 도둑질해갔을 것이다. 내가 몇 주 후에 다른 곳에 가고 없을 때, 그들이 와서 도둑질을 마무리 지었다. 이번에는 모든 것을 가져갔다.
우리는 우리 방식으로 계속 투쟁했다. 우리는 그들을 가차 없이 폭로했다. 그들의 도둑질, 깡패짓에 대해 소리 높여 외치고, 신문에 알려서 그들이 우리의 폭로에 움찔하며 놀라게 만들었다. 그들은 우리를 파괴할 수 없었고, 침묵하게 할 수도 없었다. 물론 우리는 과거 경험을 아주 잘 이용했다. 우리는 고된 훈련 과정을 거쳤다. 우리는 아주 많은 투쟁에 참가했다. 그리고 그들은 몇 가지 도둑질이나 비방으로는 우리에게 엄포를 놓을 수 없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그들에 맞서 어떻게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지 알았다. 우리는 정치적 무기를 갖고 싸웠는데, 그 무기는 깡패들의 쇠몽둥이나 도둑의 쇠지렛대보다 더 강력했다. 우리는 당원들의 선의와 공산주의 양심에 호소했다. 그리고 처음에는 이런 스탈린주의 방법에 항의해 우리에게 오는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조직하기 시작했다.
공개 강연회
몇 주 뒤인 1929년 1월 8일에, 우리는 미국에서 최초로 트로츠키주의 공개 강연회를 열었다. 나는 <투사> 첫 번째 합본호를 오늘 훑어보다가 1929년 1월 1일자 신문 첫페이지에서 그 강연회 광고를 봤다. 우리가 뉴욕 좌파운동에 폭탄선언을 한 그때를 되돌아보니, 약간 감격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노조회관 앞에 ‘트로츠키와 러시아 반대파에 대한 진실’을 주제로 내가 연설할 것이라는 큰 광고문구가 걸려 있었다. 우리는 이 강연회를 방어할 준비를 하고 여기로 왔다. 이탈리가 보르디가주의자 그룹, 우리 헝가리 동지들, 언론의 자유를 중단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며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몇 명의 개별활동가들, 그리고 조직에 새로 들어온 용맹스런 우리 동지들이 강연회를 방어했다. 그들은 강연회가 방해받지 않는지 살피기 위해 노조회관 연단 주변과 문 근처에 배치됐다. 강연회는 방해 없이 진행됐다.
노조회관 강당은 꽉 찼다. 트로츠키주의로 입장을 바꾼 활동가들이나 지지자만 온 것이 아니다. 온갖 동기, 이해, 호기심 등으로 온갖 사람들이 강연회에 참석했다. 강연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우리 지지자들은 더 단단해졌고, 몇 명은 새로 조직됐다. 스탈린주의 진영도 더 크게 경각심을 느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를 겨냥해 폭력을 더 휘둘러댔다.
우리는 그 다음에 같은 주제로 전국순회를 계획했다. 나는 뉴헤이븐에서 연설하려고 했다. 하지만 거기에서 우리는 숫자상 완전히 열세였다. 스탈린주의자들이 우리를 에워싸 강연회를 완전히 망가뜨렸다. 나는 보스턴에서 연설했다. 거기에서는 우리가 더 잘 준비했다. 나는 며칠 전에 도착해서 나의 옛 IWW(세계산업노동자연맹) 친구들 몇몇을 만났고, 부둣가의 사내들을 불러와 우리가 자유롭게 연설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지를 알아봤다. 우리는 그런 친구 열 명을 연단 주변에 배치했다. 스탈린주의 깡패집단이 이미 거기에 와서 강연회를 박살내려고 벼르고 있었다. 하지만 분명하게도 만약 그렇게 시도했다가는 그들 머리가 박살나리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됐다. 보스턴 강연회는 성공했다. 말할 것도 없이, 이런 역사적 경우에 내 강연회 사회자는 코니코프였다. 보스턴에서 트로츠키 강령을 중심으로 여덟 명에서 열 명 규모의 한 그룹이 공고하게 만들어졌다.
클리블랜드에서 우리는 투쟁했다. 유명한 앰터는 클리블랜드 지역 책임자였다. 그는 강연회를 깨려고 한 소부대를 데려왔다. 우리한테도 우리쪽에 합류한 몇몇 사내가 있었다. 그들은 여러 명의 지지자와 공명정대한 행동과 언론의 자유를 원하는 좌파 및 다른 사람들을 데려왔다. 뉴헤이븐 경험에서 배워, 우리 세력은 연사 주위로 대오를 갖췄다. 내가 연설을 시작해 몇 마디 한 다음, 내 기억으로는 이렇게 얘기했다. “나는 이 투쟁의 혁명적 중요성을 여러분에게 설명하고 싶다.”
앰터가 일어나서 말했다. “그러니까 당신 말은 반혁명적 중요성이란 뜻이네.”
보아 하니 그것이 신호였다. 스탈린주의 깡패들이 소리를 지르고, 휘파람을 불면서 난리법석을 떨기 시작했다. “앉아라, 반혁명 분자야”, “반역자야”, “미제국주의의 앞잡이야” 등등. 약 15분 동안 계속 그렇게 하면서 큰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의 속셈은 소란을 일으켜 사람들이 내 연설을 못 듣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것은 내 말을 가로막아 문제를 정리하려는 그들의 방식이었다. 우리는 생각이 달랐다. 앰터 무리들은 필요하면 밤새 소란을 피우려 한다는 점이 분명해졌다. 우리 부대는 준비된 상태에서 내가 신호 보내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결국 “좋아, 해보자”고 말했다. 그러자 곧 그들이 앰터와 그 깡패들을 쫓아가 한 명씩 끄집어내 계단 아래로 던져버렸다. 이렇게 해서 강당을 깨끗하게 만들고, 스탈린주의 분위기를 쳐내버렸다. 그 다음에는 모든 것이 좋았다. 강연회는 더 이상 방해받지 않고 진행됐다. 우리는 가장 멋진 평화와 고요를 누렸다.
며칠 뒤, 시카고에서 스탈린주의자들은 깡패들을 조금 데려 왔지만, 투쟁을 시작할 건지 말 건지 자기 마음을 결정할 수 없었다. 우리는 강연을 성사시켰다.
내가 순회강연을 이어가고 있을 때, 여러 스탈린주의 활동가들이 성경 속 인물인 니코데모처럼 밤에 나한테 왔다. 그 중 한 명은 게버트였다. 그는 몇 년 뒤 공산당의 주요 인물이 됐고, 디트로이트 지역책임자 자리를 맡았다. 그는 나를 보러 시카고에 있는 호텔에 왔다. 그는 상심해 있었다. 그는 스탈린주의자들이 우리를 겨냥해 사용한 모든 방법을 경멸했다. 게버트는 양심적 공산주의자였고, 우리 투쟁에 동조적이었다. 하지만 당을 떠날 수는 없었다. 그는 자신이 살아온 일생과 단절하고 새 삶을 사는 것을 생각할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랬다. 여러 가지 강압이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일부는 물리적 공격을 두려워했다. 일부는 비방을 꺼렸다. 다른 일부는 배척을 무서워했다. 스탈린주의자들은 이런 방법을 모두 썼다. 그것이 누적돼 자유로운 분위기에서라면 이러저러하게 우리에게 동조하고, 우리를 지지했을 수백 명 심지어는 수천 명을 공포에 떨게 했다.
내가 몇 년 뒤 미네소타 북부지역 연방법정에서 진술했듯이, 미니애폴리스 강연회에서는 정당방위대가 없었다. 미니애폴리스에서 우리 세력은 꽤 강했다. 던, 스코글런드를 포함해 미니애폴리스 공산주의 운동에서 인정받는 지도자들이 모두 우리를 지지했다. 그들은 물리적으로도 꽤 강했다. 그래서 그들은 주의를 소홀히 했다. 스탈린주의 깡패들이 그곳에서는 어떤 바보짓도 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해, 강연회를 조직할 때 특별한 방어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그게 실수였다. 우리 사람들은 늦게 도착했다. 스탈린주의 깡패들이 먼저 와서 문에 있던 오스카 쿠버를 쇠몽둥이로 폭행하고, 안으로 쳐들어가 조금 작은 강당에서 앞자리를 차지했다. 내가 강연하려고 일어서자, 그들은 클리블랜드에서 앰터 무리들이 했던 방식대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몇 분 후 우리는 기세 좋게 달려들어 육박전을 벌였다. 그러자 경찰관이 들어와 강연회를 무산시켰다. 그 사건은 미니애폴리스에서는 어처구니없고 맥 빠지는 일이었다. 내가 더 머물러 강연회를 다시 열기로 결정했다. 우리는 IWW 회관에 가서 언론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한 공동전선을 제안했다. 그들, 몇 명의 지지자들, 개별활동가들과 함께 우리는 노동자방어대를 만들었다. 강연회는 IWW회관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노동자방어대가 이 강연회를 보호할 것이라고 광고전단을 통해 알렸다. 철물점에서 구입한 멋지고 편리한 곤봉과 큰 몽둥이를 가지고 정당방위대가 거기에 왔다. 정당방위대는 강연자 앞에 벽을 따라 정렬했다. 일부는 문에 배치됐다. 강연회 사회자가 질문과 토론은 허용하지만, 강연자가 연단에 있는 동안에는 누구도 방해해서는 안 된다고 차분하게 선언했다. 강연회는 아무 방해도 안 받고 순조롭게 끝났다. 미니애폴리스에서 우리 조직은 아주 잘 만들어졌다.
뉴욕에서는 우리가 보다 정기적으로 강연회를 열기 시작했기 때문에, 스탈린주의자들은 우리를 멈추게 하려는 시도를 강화했다. 여기 노조 회관에서 열린 한 강연회는 깨졌다. 그들의 상습적인 계획은 한 무리가 강연자한테 달려들어 강연자를 무대에서 끌어내고, 주도권을 장악해 강연회를 반트로츠키 시위로 전환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한 번도 그렇게 하지 못했다. 왜냐면 우리가 항상 필요한 도구를 갖춘 정당방위대를 연단에 배치해 두었기 때문이다. 스탈린주의자들은 연단으로 가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은 육박전을 시작해, 경찰이 대거 몰려와 강연회를 혼란에 빠뜨리게 했다. 이제 사태가 정말로 절정에 이르렀다. 우리 헝가리 그룹이 모임을 갖곤 했던 이스트사이드 북부의 회관에서 우리가 강연회를 열었다. 스탈린주의자들이 이 강연회를 깨기 위해 마지막 시도를 했다.
우리는 1929년 5월 1일(우리가 제명되고 난 다음해의 봄이다), 거기에서 메이데이 기념 집회를 열었다. 나는 오늘 <투사>를 훑어보면서 헝가리 회관에서 메이데이 집회를 한다는 광고를 봤다. 거기에는 노동자방어대가 집회를 보호할 것이라고 덧붙여져 있었다. 이 집회는 잘 방어됐다. 우리의 전략은 훼방꾼들의 집회 참가를 막는 것이었다. 우리 동지들, 지지자들 그리고 분명히 메이데이를 기념하기 위해 온 모든 사람은 집회에 참여할 수 있었다. 스탈린주의자들이 들어오려고 했을 때, 우리 노동자방어대가 계단에서 그들을 제지했다. 그들은 결국 그 계단으로 쳐들어올 수 없다고 판단하고 물러났다. 그래서 우리는 집회를 평화롭게 치를 수 있었다.
아마 그 다음 금요일이었을 것이다. 스탈린주의자들은 메이데이 집회를 깰 수 없었던 것에 대해 헝가리 그룹에게 복수하기로 마음먹었다. 헝가리 동지들 8~10명 정도가 비공개 회의를 하면서 조용하게 지부의 일상활동을 다루고 있었다. 참석자 중에는 베테랑 공산주의자인 루이스 바스키(약 50세 남자)와 그의 나이든 아버지(약 80세)도 있었다. 이 아버지는 자기 아들과 트로츠키주의 운동을 열렬히 지지하는 투사였다. 몇 명의 여성 동지도 거기에 있었다. 갑자기 스탈린주의 깡패들이 회관으로 쳐들어갔다. 그들은 곧바로 달려들어 남자 여자 가리지 않고, 바스키의 아버지까지 포함해 두들겨패기 시작했다. 우리 동지들은 의자와 의자 다리를 붙잡고 최선을 다해 스스로를 방어했다. 혈투가 벌어지고 있을 때, 두 명의 스탈린주의 깡패가 노인을 두들겨패는 것을 한 참석자가 보았다. 그 장면을 봤을 때 그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랐다. 그는 직업이 목공이었으며, 당시 그의 주머니에는 작업도구들 중 하나가 들어있었다. 그는 두 깡패 중 한 명을 손봐줬다. 그들은 스탈린주의 깡패를 병원에 데리고 갔다. 그는 3주 동안 병원신세를 졌다. 그런데도 의사는 그를 퇴원시켜도 될지 확신하지 못했다.
그 사건이 있고 나서 우리 집회를 공격하는 일이 중단됐다. 스탈린주의자들은 사태를 끔찍한 비극 수준으로 몰고 갔고, 전체 공산주의 운동을 스캔들에 휘말리게 했다. 그들은 우리가 모이고 말하는 권리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계속 저항할 것이므로 우리를 깰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뒤에는 우리를 겨냥한 폭력이 띄엄띄엄 있었을 뿐이다. 우리는 스탈린주의 깡패들로부터 언론의 자유를 쟁취했다. 그들이 마음을 바꿨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권리를 단호하고 전투적으로 지켰다.
그 사이에 우리는 우리가 보여준 투쟁 덕분에 새 회원과 지지자들을 조직했다. 우리는 극소수였을 뿐이다. 그리고 비방, 배척, 폭력 등 모든 무기가 우리에게 퍼부어졌다. 하지만 우리는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 우리는 신문을 정기적으로 발행했다. 투쟁할 때마다 우리는 더 강해졌다. 그래서 공감과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많은 뉴욕 좌파, 공산당 지지자들, 심지어는 일부 공산당원이 언론의 자유를 위해 우리 집회를 지키고자 집회에 오곤 했다. 그들은 우리의 투쟁, 우리의 용기에 마음이 끌렸고, 스탈린주의자들의 수법에 혐오감을 느꼈다. 그 뒤 그들은 우리 글을 읽고, 우리 강령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들을 한 명씩 끌어들이고, 트로츠키주의로 정치적 입장을 바꾸게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우리는 미국 트로츠키주의의 첫 중핵을 실제 투쟁의 한가운데에서 조직했다고 말할 수 있다. 주마다, 달마다 우리는 여러 도시에서 이런 작은 그룹을 만들었다. 그리고 곧 전국 조직의 골격을 세웠다.
<투사>는 2주마다 발간하고 있었다. 어떻게 그것을 해낼 수 있었는지, 지금은 다 말할 수 없다. 거기에 필요한 재정적 임무는 다시 맡고 싶지 않다. 우리는 그 문제를 충실한 친구들의 도움으로 해결했다. 우리는 꽤 큰 희생을 감수하면서 어떻게든 그 문제를 해결했다. 하지만 이런 희생보다 신문을 내 우리 메시지를 전파함으로써 우리의 위대한 임무를 의미 있게 하고 있다고 느끼면서 얻는 지적, 정신적 보상이 훨씬 더 컸다.
이 시기 내내 우리는 트로츠키 동지와 연락할 수 없었다. 우리는 그가 죽었는지 살아있는지도 몰랐다. 그가 아프다는 소식이 있었다. 우리는 그를 직접 보거나 어떻게든 직접 연락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없었다. 모스크바에서 내가 가져온 문서와 우리가 나중에 유럽 그룹한테서 받은 다른 문서들만이 우리와 그의 연결고리였다. <투사> 매호마다 우리는 1924년에서 1929년까지를 다 다루는 러시아 좌익반대파의 여러 문서와 주장들을 차례차례 싣기 시작했다. 우리는 트로츠키와 그 러시아 동료들의 사상에 대한 차단막을 부숴버렸다.
우리가 제명되고 나서 몇 달 뒤인 1929년 이른 봄에, 트로츠키가 러시아에서 추방됐다는 보도로 세계 언론이 크게 들썩였다. 이 보도는 그가 어디로 보내졌는지를 말하지 않았다. 날마다 언론은 온갖 추측성 기사들로 가득 찼다. 하지만 그의 행방에 대한 정보는 없었다. 이것이 1주일 넘게 지속됐다. 결국 그가 터키에 도착했다는 뉴스가 나올 때까지, 우리는 트로츠키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른 채 초조해했다. 우리는 1929년 봄에 터키에 있는 트로츠키와 처음으로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이것은 그의 이름을 걸고, 그의 사상에 기초한 운동을 우리가 시작한 뒤 4~5개월 만이었다. 나는 그에게 편지를 썼다. 우리는 곧 답장을 받았다. 그 이후 그가 노르웨이에 억류돼 있었을 때를 빼고는, 우리는 그가 죽을 때까지 우리 운동의 창시자이자 격려자인 그와 아주 긴밀하게 계속 연락했다.
트로츠키주의 강령 발표
우리가 제명되고 나서 약 4개월 뒤인 1929년 2월 15일에, 공산당이 전국대회를 준비하고 있었기에, 우리는 우리 분파의 ‘강령’을 발표했다. 이 강령은 당시의 국내외 문제들에 대해 우리의 원칙과 입장을 완전하게 밝힌 것이다.
이 강령을 우리가 일국적 분파투쟁을 벌이며 썼던 결의안과 주장, 그리고 다른 분파들의 글과 비교하면 제한된 영역에서 싸우는, 일국적 정신의 분파주의자들과 국제주의의 이론적 관점을 획득한 사람들 사이에 얼마나 깊은 골짜기가 가로놓여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우리의 강령은 국제적 차원에서 우리 원칙을 선언하고, 러시아 문제에 대한 우리의 관점, 러시아 당내 투쟁의 근본원인에 해당하는 거대한 이론적 문제들에 대한 우리의 입장에서부터 출발했다. 그 다음 강령은 일국적 문제들, 미국 노조 문제들, 당 조직의 세부 문제들 등으로 나아갔다. 미국 공산주의의 오랜 분파투쟁 역사에서 최초로 정말 균형 잡힌 국제주의 맑스주의 문서가 등장했다. 그것은 러시아 좌익반대파와 그 강령에 충실했기 때문에 나온 결과였다.
우리는 우선 공산당 대회에 대한 우리의 제안으로서 이 강령을 <투사>에 실었다. 왜냐면 비록 제명됐을지라도 우리는 공산당 내 분파라는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당에서 나가지 않았다. 우리는 다른 당 운동을 시작하지 않았다. 우리는 당원들에게 되돌아가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이 당에 속해 있습니다. 이것은 당 대회에 제출하는 우리의 강령입니다.” 당연히, 우리는 우리가 대회에서 그 강령을 옹호하도록 관료들이 허용하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그들이 그 강령을 채택하리라고 기대하지도 않았다. 우리는 공산주의자 평당원들을 겨냥하고 있었다. 이런 노선과 방법을 통해 우리는 우리 관점을 공산당 평당원들에게 제공할 수 있었다.
러브스톤과 포스터 일당이 그들에게 말했다. “이 친구들, 이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코민테른의 적이다. 그들은 당을 깨고 싶어 한다.”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었다. 우리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당원이다. 당에 더 분명한 원칙적 입장과 더 나은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 강령을 제출하려고 한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당에서 가장 나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갔다. 우리는 우리가 공산주의의 적이라는 비방을 반박했다. 그리고 우리는 공산주의의 충실한 방어자라는 점을 그들에게 납득시켰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그들의 관심을 끌었고, 결국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을 한 사람씩 우리 그룹으로 조직했다.
3월 19일, 우리는 소련이 트로츠키를 추방한 것에 항의하기 위해 노조회관에서 집회를 열었다. 내 노트에서 이것을 확인했다. 이 소식으로 전 세계가 한창 떠들석할 때, 우리가 이 노조회관에서 대중집회를 개최했다. 광고에 캐넌, 에이번, 샥트먼이 연설할 것이라고 나와 있었다. 우리는 이 추악한 행위에 항의했으며, 우리가 트로츠키를 지지한다는 점을 공개적으로 다시 선언했다.
좌익반대파 1차 전국대회
<투사>는 1929년 5월 17일에 미국 좌익반대파 전국대회 소집 공고를 냈다. 이 대회의 주요 임무는 소집 공고와 그 뒤의 관련 기사들이 알리고 있듯이 강령을 채택하는 것이었다. 캐넌, 에이번, 샥트먼이 작성하고, 공산당에 초안으로 제출한 이 강령은 우리 조직의 강령초안이 되어 우리의 첫 대회에 제출됐다.
대회의 또 다른 임무는 러시아문제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우리 동지들에게 보다 더 분명하게 설명하는 것이었다. 만약 여러분이 1917년부터 오늘날까지 미국 볼셰비즘의 역사를 연구한다면, 모든 단계에서, 모든 결정적 순간에, 모든 전환의 시기에, 논쟁을 지배했던 것이 러시아 문제였다는 점을 알게 될 것이다.
1917년부터 1919년 사회당 분열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충성도를, 즉 혁명가인지 개량주의자인지를 결정했던 것은 러시아문제였다. 1928년에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제명당했을 때, 그리고 1939년과 1940년에 사회주의노동자당 내 소부르주아 반대파와 싸웠을 때까지를 포함해 우리 스스로 성장하면서 다른 여러 분파 및 그룹에 맞섰던 수많은 투쟁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쟁점은 러시아 문제였다. 그것은 항상 제1의 쟁점이었다. 왜냐면 러시아 문제는 노동자계급 혁명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혁명 자체의 문제이며, 실제로 발생하고 여전히 살아있는 문제다. 어제처럼 그리고 처음처럼 오늘도 러시아혁명에 대한 태도는 정치그룹의 성격을 좌우하는 결정적 기준이다.
우리는 첫 대회에서 그 문제를 명확하게 정리해야 했다. 왜냐면 우리가 쫓겨나자마자 스탈린주의 관료제에 맞서 싸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온갖 사람이 ‘한 가지 작은 조건’만 충족된다면 우리 조직에 가입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소련과 공산당에 등을 돌리고, 다른 공산주의 조직을 건설해야 한다는 것이 그 조건이었다. 만약 우리가 그 조건을 받아들였다면, 초기에 수백 명의 회원을 조직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공산당 내 분파로 활동한다는 견해를 포기하고, 완전히 독자적인 공산주의 운동을 선언하고 싶어 했던 다른 사람들도 있었다. 우리 대회의 임무는 또한 그 사안들을 명료하게 정리하는 것이었다. 새로운 독자정당을 시작하고, 앞으로 공산당 안에서 활동하는 것을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를 계속 공산당 내 분파로 규정할 것인가? 그 문제에 분명하게 답해야 했다.
첫 전국대회에 상정된 또 다른 문제는 우리 전국조직의 성격과 형태를 정하고, 전국 지도부를 선출하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세 장군’이 지도부 역할을 해왔다. 단지 이들이 투쟁을 시작했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것은 처음에는 충분히 좋은 자격이었다. 처음 주도권을 쥔 사람들이 어떤 투표보다 더 중요한 도덕률에 따라 행동의 지도자들이 된다. 하지만 이런 관행을 무기한 지속할 수는 없다. 우리는 대회를 소집해 지도부를 뽑을 필요성이 있다는 점을 알았다. 다행히 우리는 이 대회와 관련해 우리가 보낸 편지에 대한 답장을 트로츠키로부터 적시에 받을 수 있었다. 그의 답변은, 그의 다른 모든 편지, 모든 글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지혜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우정 어린 조언이 우리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됐다.
미국공산주의자동맹 발족
<투사>에 따르면, 미국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첫 전국대회에 12개 도시에서 31명의 대표자와 17명의 예비후보가 참가했다. 이들은 전국을 모두 합쳐 약 100명의 회원들을 대표했다. 대회는 1929년 5월에 시카고에서 열렸다. 여러분은 내가 인용한 수치를 통해, 우리 젊은 조직의 회원 중 거의 절반가량이 이 역사적 대회를 치르기 위해 대표자 또는 예비후보로 참가했다는 점을 알았을 것이다. 대회장에는 우리의 위대한 미래에 대한 일치감, 열광, 무한한 확신이 가득했다. 대회를 준비하면서 우리는 먼저 스탈린주의 깡패들로부터 대회를 보호하기 위한 실무적 조치를 취했다. 총 48명의 대표자 모두가 정당방위대에 이름을 올렸다. 만약 스탈린주의자들이 대회를 방해하려 했다면, 우리가 그에 맞게 적절히 반격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우리를 가만히 내버려두기로 해 우리는 여러 날 동안 대회를 평화롭게 치렀다.
한 번 더 반복하겠다. 우리 전국조직에서 약 100명의 회원을 대표해, 12개 도시에서 31명의 대표자와 17명의 예비후보가 왔다. 우리는 우리를 ‘미국공산주의자동맹, 공산당 좌익반대파’라고 불렀다. 우리는 우리가 옳다고 확신했다. 우리 강령이 옳다고 확신했다. 노동자계급이 권력을 장악하고 사회주의 사회를 조직하기 시작할 때까지, 미국 공산주의 재건운동의 향후 발전 전체는 1929년 5월 시카고에서 미국 트로츠키주의자들이 개최한 최초의 전국대회에 그 기원을 둘 것이라는 점을 확신하면서 대회를 마쳤다.
강령과 임무
지난 번 강연에서 나는 1929년 5월에 있었던 좌익반대파의 첫 전국 대회까지 다뤘다. 우리는 첫 여섯 달 동안 어려운 투쟁을 해내고 살아남았다. 우리 힘을 유지한 채 몇몇 새로운 회원도 조직했다. 첫 대회에서 우리는 우리 세력을 전국 조직으로 응집시키고 지도부를 선출했으며, 우리 강령을 보다 명확하게 다듬었다. 우리 조직원들은 단호하고 확고했다. 우리는 숫자도 아주 적고 자원도 빈약했지만, 진실을 붙잡고 있기 때문에 결국 승리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우리는 미국 공산주의 재건을 위한 2단계 투쟁을 벌이기 위해 뉴욕으로 돌아왔다. 모든 정치 조직의 운명은, 다시 말해 활력 있게 성장할 것이냐 아니면 쇠퇴하다 사라질 것이냐는, 첫 출발 때 다음 두 가지 결정적 문제에 어떻게 답하는가에 달려 있다.
첫 번째는 올바른 정치 강령을 채택하는 것이다. 그러나 올바른 강령만으로는 승리할 수 없다. 두 번째는 정치운동 내 세력 관계, 계급투쟁의 발전 정도, 조직의 규모와 능력 등을 고려해 조직 활동의 성격과 임무를 올바로 결정하는 것이다.
만약 정치 조직의 강령이, 특히 작은 정치조직의 강령이 잘못됐다면, 그 조직은 절대 구원받을 수 없다. 전쟁에서처럼 정치에서도 속임수를 쓸 수 없다. 전쟁과 정치의 유일한 차이는 전시에는 모든 약점이 거의 즉시 드러난다는 데 있다. 이 점은 최근 제국주의 전쟁이 새로운 단계마다 잘 보여주고 있다. 정치 투쟁에서도 법칙은 가차 없이 작동한다. 속임수는 통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잠시 동안만 사람들을 속일 수 있다. 하지만 그럴 때조차 그 기만 때문에 주로 희생당하는 것은 바로 그 속임수를 쓰는 자들이다. 여러분은 확실한 것을 갖고 있어야 한다. 즉 여러분이 살아남아 노동자의 대의에 복무하려면 올바른 강령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러브스톤 그룹
강령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허세를 부리다 치명타를 입은 사례로 악명 높은 러브스톤 그룹을 들 수 있다. 혁명운동의 신참자인 여러분 중 일부는 한때 매우 중요했던 이 분파를 들어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만큼 이 그룹은 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당시에 러브스톤 그룹 사람들은 미국 공산당 지도자들이었다. 우리를 출당시킨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런데 바로 6개월 뒤에 그들 자신이 공산당에서 축출당했다. 그들은 우리보다 세력과 자원을 훨씬 더 많이 갖고 출발했다. 그들은 처음에 우리보다 훨씬 더 화려한 모습을 선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올바른 강령을 갖지 못했고, 그런 강령을 발전시키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역사를 약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원칙을 무시하고, 강령 문제에서 타협함으로써 세력을 더 크게 유지할 수 있었다. 그들은 한동안 그랬다. 그러나 이 그룹은 에너지와 능력이 풍부했고, 몇몇 매우 뛰어난 사람이 있었지만 결국엔 정치 투쟁 과정에서 완전히 파괴돼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됐다. 오늘날 이 그룹의 지도자 대다수가, 내가 아는 한 그들 모두가, 제국주의 전쟁에 편승했다. 그래서 그들이 정치 활동을 시작했을 때 복무했던 것과 완전히 정반대되는 목표에 기여하고 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강령은 결정적이다.
다른 한편 만약 한 그룹이 주어진 조건에 맞는 자기 임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리고 만약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인 다음에 무엇을 할 것인가에 올바로 답하지 못한다면, 얼마나 장점이 많은가와 무관하게 엉뚱하게 노력하고 헛되게 활동하다가 결국 완전히 실패할 것이다.
따라서 내가 서두에 말했듯이, 우리의 운명은 이 초기에 강령 문제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답하고, 당시 우리의 임무를 어떻게 분석해내는가에 따라 결정됐다. 미국 노동운동에서 새로 등장한 정치 세력으로서 우리 그룹의 장점은 바로 우리가 그 두 문제에 올바로 답했다는 데 있다. 그리고 그 장점 덕분에 우리 그룹은 진보, 안정성, 더 나은 성장을 보장받았다.
러시아 문제
대회에서는 당시 정세가 제기한 모든 정치적 문제를 다루진 않았다. 대회는 가장 중요한 문제들, 즉 가장 먼저 답해야 할 문제들만을 다뤘다. 이 문제 가운데 첫 번째는 러시아 문제, 즉 현존하는 혁명 문제였다. 내가 이전 강연에서 말했듯이, 1917년 이후 러시아 문제는 노동운동의 모든 정치경향을 시험하는 시금석이라는 점이 거듭 입증됐다. 러시아 문제를 잘못 판단한 사람들은 곧 혁명적 노선을 버렸다.
러시아 문제는 기사, 팜플렛, 책에서 수없이 다뤄왔다. 그러나 중요한 사태 전개가 있을 때마다 이 문제는 거듭 등장했다. 1939년과 40년에도 우리는 러시아 문제를 놓고 우리 운동 안의 소부르주아 경향과 거듭 싸워야 했다. 러시아 문제를 심오하게, 정확하게, 긴급하게 연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제4인터내셔널의 문헌 속에서 풍부한 자료를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오늘밤에 이 문제를 다시 자세하게 다룰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나는 단지 그 문제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만 다루겠다. 첫 대회에서 우리가 직면한 문제는 보수적이고 관료적인 카스트들이 장악하고 있는데도, 소비에트 국가, 즉 소련을 계속 지지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당시에 공산당과 단절한 사람 또는 공산당에서 축출된 사람 가운데 자기 자신을 혁명가라고 부르고 또 그렇게 생각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소련과 러시아혁명의 유산에 등을 돌리고, 반(反)소비에트 정당으로서 ‘새출발’하고 싶어 했다. 우리는 그런 강령과 우리에게 그것을 촉구하는 모든 사람을 거절했다. 만약 우리가 그 문제에서 타협했다면 회원을 더 늘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소련을 지지한다, 소련을 타도하는 것이 아니라 당과 코민테른을 통해 소련을 개혁한다는 입장을 확고하게 견지했다.
성급함 때문이든 무지나 주관성 때문이든, 즉 이유가 어떻든 러시아혁명은 죽었다고 조급하게 선언했던 모든 사람은 실제로는 자신의 혁명성이 죽었다고 선언하고 있었다는 점이 사태의 발전과정 속에서 입증됐다. 이런 그룹이나 경향의 사람들은 모두 퇴보하고 산산이 분열해서 옆으로 비켜났으며, 많은 경우 부르주아 진영으로 넘어갔다. 우리는 정치적 건강성과 혁명적 생명력을 보존했다. 무엇보다 우리가 소련에 대해 올바른 입장을 취했기 때문이다. 소련 정부를 장악한 개인들이 우리에게 했던 짓을 포함해 여러 범죄를 저질렀지만 말이다.
노동조합 문제
항상 그랬듯이 그때 노조 문제는 아주 중요했다. 특히 당시에는 매우 첨예했다. 코민테른과 그 영향력 아래 있던 공산당들은 오랫동안 우익 기회주의 정책들을 실험한 다음, 크게 좌선회해 초좌익주의 입장을 취했다. 이는 스탈린 분파의 관료적 중도주의에서 나타나는 특유의 현상이었다. 맑스주의라는 나침반을 잃어버렸기에, 그들은 극우에서 극좌로 또는 극좌에서 극우로 급선회했다. 그들은 마침내 소련과 그 관료들이 재앙 직전에 이를 때까지 쿨락, 네프맨들과 타협하면서 소련에서 오랫동안 우파정치를 펼쳐왔다. 국제 영역에서도 비슷한 정책들이 비슷한 결과를 낳았다. 그 반작용으로, 그리고 좌익반대파의 끊임없는 비판 때문에 그들은 모든 분야에서 역편향에 빠져 초좌익 정책을 도입했다. 노조 문제에서 그들은 미국노총(AFL)을 포함해 기존 노조에서 탈퇴하고, 공산당이 통제하고 공산당 입맛에 딱 맞는 노조 운동을 새로 시작하자는 입장으로 확 돌아섰다. “적색노조”를 건설한다는 ‘정신 나간’ 정책이 그 시대의 과제가 됐다.
우리는 첫 전국대회에서 이 정책을 단호하게 반대했고, 기존 노조 안에서 활동하고, 독립 노조는 미조직 분야에만 한정한다고 밝혔다. 우리는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이 ‘새로운 공산주의 노조운동 이론’이 분파주의를 부활시킨다고 가차 없이 비판했다. 이런 입장과 우리의 올바른 노조 정책 덕분에 우리는 대중운동에 개입할 때가 오면, 가장 빠른 길을 알아낼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후 사건들을 통해 첫 번째 대회에서 채택하고 그 이후에도 계속 견지했던 노조 정책이 옳았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당 분파와 코민테른
우리가 해결해야 하는 세 번째 중요한 문제는 새로운 독립 정당을 만들 것인가 아니면 여전히 공산당과 코민테른의 분파로 남아있을 것인가였다. 여기서 우리는 또다시 스스로 급진주의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즉 공산당에 완전히 환멸을 느끼고, 목욕물을 버리려다 아기까지 버리려 하는 구 공산당 당원들에게 포위됐다. 이들은 공산당에 대한 적대감 때문에 공산당에 반대하는 당이면 어떤 당을 만들려는 사람과도 손을 잡으려 하는 생디칼리스트들과 초좌익주의자들이었다. 게다가 우리 평조직원 중에는 우리에게 가해진 관료적 숙청, 비방, 폭력, 추방에 주관적으로 반응했던 사람이 일부 있었다. 이들 또한 공산당을 버리고 새 당을 만들길 원했다. 이런 태도는 얼핏 보면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생각에 저항하고 반대했다.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하게 사고하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말하곤 했다.
“당신들은 당에서 제명당했는데, 어떻게 그 당의 분파가 될 수 있는가?”
우리는 설명했다. 이것은 공산당 당원을 올바르게 평가하는 문제이고, 그들에게 다가가는 올바른 전술적 접근법을 찾는 문제라고 말이다. 만약 공산당과 그 당원들이 개선의 여지가 없이 타락했고, 보다 진보적인 노동자 그룹이 실제로 존재하거나 올바른 방향을 가진 잠재세력이 있다면, 그래서 우리가 그 그룹을 통해 더 나은 당을 새로 만들 수 있다면, 새 당을 만들자는 주장이 옳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그룹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고 말했다. 우리는 이 다양한 반대파, 개인, 경향 속에서 진정한 진보성, 전투성, 정치적 능력을 발견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들은 거의 모두 방관자적 비평가이자 종파주의자들이었다. 노동자계급의 진정한 전위는 러시아혁명이 각성시킨 수십만 노동자 속에 있다. 그들은 여전히 코민테른과 공산당에 충성하고 있다. 그들은 아직 점진적으로 타락하는 과정을 분명하게 밟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이 타락의 밑바닥에 놓인 이론적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했다. 만약 동지가 스스로를 당원으로 여기고 민주적 권리를 가진 채 재입당을 요구하면서, 당을 파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을 개혁하기 위해 애쓰지 않으면, 그들에게 말할 기회도 얻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공산당과 코민테른의 분파라고 선언함으로써 이 문제를 올바르게 해결했다. 우리는 우리 조직을 미국공산주의자동맹(반대파)이라고 불렀다. 이는 우리가 새 당이 아니라 공산당의 반대파라는 점을 가리키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 이 노선이 옳았다는 점을 풍부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공산당과 코민테른에 남아 당 상층부의 관료적 지도자들에게 반대하며, 평당원들을 옳게 평가하고 만나려고 함으로써 우리는 공산당의 노동자 평당원들로부터 새 회원을 계속 조직할 수 있었다. 우리가 존재한 첫 5년 동안 우리 조직원의 절대 다수는 공산당 출신이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공산주의 재건 운동의 토대를 쌓았다. 반(反)소비에트, 반(反)당 쪽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은 혼란뿐이었다.
앨버트 웨이스보드
당시에 새 당이 아니라 분파를 만든다고 결정하자 또 다른 중요하고 어려운 문제가 생겼다. 이는 1928~33년, 즉 우리의 첫 5년 동안 우리가 가장 오래 싸워야 했던 문제다. 문제는 다음과 같았다.
이 거대한 나라에 뿔뿔이 흩어져 있는 100명짜리 그룹의 임무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정할 것인가? 만약 우리가 독립 정당을 만든다면, 타락한 공산당으로부터는 등을 돌리고, 노동자계급에게 직접 호소하면서 대중 운동 속에서 일련의 활동을 펼쳐야 했다. 다른 한편 우리가 독립 정당이 아니라 분파가 되고자 한다면, 4천만 미국 노동자들이 아니라 공산당 안팎에 조직돼 있는 전위들에게 우리의 주요 노력, 호소, 활동을 집중해야 한다.
여러분은 이 두 문제가 어떻게 딱 들어맞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정치에서는 여러분이 ‘A’라고 말했다면 그 다음에는 ‘B’라고 해야 한다. 우리는 공산당을 향해 얼굴을 돌리거나, 아니면 공산당은 가만 놔두고 발전하지 못하고, 교육받지 못한 미조직 대중을 향해야 했다.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는 없다.
문제는 당시의 실제 상황과 발전 단계를 이해하는 것이었다. 물론 혁명을 이끌 당을 만들기 위해서는 대중한테 가는 길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대중한테는 전위들을 통해서 갈 수 있지, 전위를 건너뛰어 갈 수는 없다. 일부는 이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공산주의 노동자들을 거치지 않고, 바로 대중운동 한가운데로 뛰어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거기에서 가장 선진적이고 가장 이론적으로 발전해 있는 그룹, 즉 전위 중의 전위인 좌익반대파의 후보들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개념은 오류로서, 심사숙고하지 못하고 성급한 태도의 산물이었다. 이 대신에 우리는 주요 임무를 선동이 아닌 선전으로 잡았다.
우리는 말했다. 우리의 첫 번째 임무는 좌익반대파의 원칙을 전위들에게 알리는 것이다. 교육받지 못한 거대한 대중에게 우리가 지금 갈 수 있다고 스스로를 속이지 말자. 우리는 우선 수만의 공산당원과 그 지지자로 이뤄진 이 전위 그룹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을 얻어야 한다. 그들로부터 당을 개혁할 충분한 간부들을 확고하게 만들어내야 한다. 당을 개혁하기 위해 끝까지 진지하게 노력해보고 실패가 아주 분명해졌을 때만, 그렇게 노력해서 조직한 사람들과 함께 새 당을 건설해야 한다. 오직 이 방법을 통해서만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당을 재건할 수 있다.
그때 무대에 나타난 인물이 있다. 아마 여러분에게는 낯선 인물일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논란을 많이 일으킨 인물이다. 앨버트 웨이스보드는 한때 공산당원이었고, 1929년에 이런저런 이유로 당에서 제명됐는데, 제명의 이유가 아주 분명하지는 않다. 제명당한 뒤 웨이스보드는 뭔가를 연구하기로 결정했다. 알다시피 사람들은 타격받으면 그 원인이 뭔지 궁금해 한다. 웨이스보드는 곧 자기 연구를 통해 자신이 트로츠키주의자라고 선언하며 나타났다. 우리 같은 50퍼센트 트로츠키주의자가 아니라 진정한 100퍼센트 트로츠키주의자이며, 자기 소명은 우리를 교정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의 계시는 다음과 같았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선전 서클이어서는 안 되고, ‘대중활동’에 직접 뛰어들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는 당연히 당을 새로 건설하자고 제안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그럴 수 없었다. 왜냐면 그는 혼자였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는 전위, 즉 우리를 향해 먼저 다가오는 전술을 택했다. 개인적 친구 및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는 25~30명짜리의 작은 우리 뉴욕 그룹을 상대로 내부 와해 작업과 외부 파괴 작업이라는 열정적 캠페인을 벌이기 시작했다. 우리가 대중운동에 개입하기 위한 연결고리로서 공산당원들과 그 지지자들에게 선전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는 동안, 웨이스보드는 대중활동 프로그램을 주장하면서 자기 대중활동의 99퍼센트를 대중이나 공산당이 아니라 우리의 작은 트로츠키주의 그룹에게 쏟아부었다.
그는 모든 문제에서 우리와 의견이 달랐고, 우리가 트로츠키주의를 잘못 대표한다며 비난했다. 우리가 ‘맞소’라고 말하면, 그는 ‘확실히 맞소’라고 했다. 우리가 75를 말하면 그는 더 높은 수치를 불렀다. 우리가 ‘미국공산주의자동맹’이라고 말하면, 그는 자기 그룹을 더 강하게 보이게 만들려고 ‘공산주의자투쟁동맹’이라고 불렀다. 웨이스보드에 맞선 투쟁의 본질은 이처럼 우리 활동의 성격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였다. 그는 공산당을 건너뛰고 대중활동에 뛰어들 만큼 성급했다. 우리는 그의 프로그램에 반대했다. 그는 두꺼운 등사인쇄 회보를 통해 우리를 계속 비난했다.
여러분 가운데 일부는 우리 운동의 역사가가 되거나 적어도 우리 운동의 역사를 배우는 학생이 되려는 포부를 가질 수 있다. 그렇다면 비공식적인 내 강의가 가장 중요한 문제들과 전환점들에 대한 이정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문헌은 얼마든지 많다. 만약 당신이 그것들을 파고든다면, 그 등사 인쇄 회보들이 우리 운동 특히 나에 대한 비판과 비난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런 일이 너무 잦아, 나는 오래 전부터 그런 일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우리 운동에서 누군가가 미쳐갈 때마다, 그는 언제나 내가 어떻게 반발하든 전혀 관계없이 무조건 나를 목청껏 비난하기 시작한다. 웨이스보드도 우리, 특히 나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에 맞서 끝까지 싸웠다. 우리는 우리의 방침을 고수했다.
우리 대오 안에도 조급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웨이스보드의 처방전을 아주 작은 조직이 빠르게 세를 불릴 수 있는 방법으로 보고 시도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골방에 갇힌 사람들은 적정한 균형 감각, 분별력, 현실주의를 갖지 못하면 아주 급진적인 제안에 빠져들기가 매우 쉽다. 우리 동지 중 일부도 우리의 느린 성장에 실망해 밖으로 나가 대중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대중활동 프로그램만 필요하다는 생각에 현혹됐다. 이런 정서가 자라나자 결국 웨이스보드는 우리 조직 안에 조그만 분파를 만들었다. 우리는 공개 토론회를 열지 않을 수 없었다. 웨이스보드는 정식 회원이 아니었지만, 우리는 그에게 토론회에 와서 연설할 기회를 줬다. 우리는 그 문제로 맹렬히 토론했다. 결국 우리는 웨이스보드를 고립시켰다. 그는 뉴욕에서 13명 이상을 조직하지 못했다. 이 작은 그룹은 일련의 제명과 분열을 거쳐 결국 사라져버렸다.
우리는 이 문제로 토론하고 싸우느라 시간과 에너지를 엄청나게 썼다. 그러나 웨이스보드만 문제였던 것은 아니다. 당시에는 우리 대오 안에서 성급한 사람들이 우리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시대의 어려움이 우리를 무겁게 짓눌렀다. 몇 주 동안 그리고 몇 달 동안 우리는 단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실망이 싹트면서 더 빠르게 세를 키울 수 있는 방책과 비법에 대한 요구가 자라났다.
실망이 자리 잡았고, 이와 더불어 더 빨리 성장하고자 하는 계획, 무언가 마법 같은 정식에 대한 요구가 자라났다. 우리는 이를 격퇴하고, 설득해서 물리치고, 우리 그룹이 올바른 노선을 견지하면서 건전하게 성장할 수 있는 자원이 있는 곳, 즉 여전히 공산당의 영향력 아래 있는 공산주의 노동자들에게로 활동방향을 돌리게 했다.
스탈린주의자들의 ‘좌선회’
스탈린주의자들이 ‘좌선회’하자 우리는 새로운 어려움에 직면했다. 이 좌선회는 부분적으로는 좌익반대파의 기반을 무너뜨리려고 스탈린이 기획한 것이었다. 좌선회 때문에 스탈린주의자들은 트로츠키의 좌익반대파보다 더 급진적인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러브스톤 그룹을 ‘우파’라고 비판하며 당에서 제명했고, 당 지도부를 포스터 일당에게 넘겨주며 좌파 정책을 선언했다. 이 책략을 통해 그들은 우리에게 어마어마한 타격을 입혔다. 우리 쪽으로 기울어졌으며 러브스톤 그룹의 기회주의에 반대했던 공산당 내 불만세력이 당과 다시 화해했다. 그들은 우리에게 말하곤 했다.
“보다시피 당신들이 틀렸소. 스탈린은 모든 것을 바로잡고 있소. 그는 러시아, 미국 그리고 세계 어디에서나 급진적 입장을 취하고 있소.”
러시아에서 스탈린 관료체제는 쿨락[부유한 농민]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다. 전 세계에서 좌익반대파의 기반이 무너져 나갔다. 러시아에서 줄줄이 모두 굴복하는 일이 벌어졌다. 라덱과 다른 이들은 스탈린이 좌익반대파의 정책을 채택했다는 것을 핑계로 싸움을 포기했다. 과거에 우리쪽으로 기울어졌던 수백 명의 공산당원들이 ‘좌선회’ 시기에 똑같은 인상을 받고 스탈린주의로 돌아섰던 것 같다.
고립
당시는 좌익반대파에게 정말로 어려운 시기였다. 우리는 첫 6개월 동안 어느 정도 꾸준하게 성장해서 부푼 희망을 안고 우리의 첫 전국대회를 열었다. 그 뒤부터는 공산당으로부터 신입 회원을 조직하는 것이 갑자기 중단됐다. 공산당이 러브스톤 그룹을 제명한 다음, 환상의 물결이 당을 휩쓸었다. 스탈린주의와 화해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그것이 우리에겐 큰 걸림돌이었다. 그 이후 제1차 5개년계획이라는 빅뉴스가 들려왔다. 공산당원들은 5개년계획에 열광했다. 그런데 5개년 계획은 원래 좌익반대파가 고안하고 요구했던 것이다. 미국 공황 때문에 자본주의에 대한 환멸이 매우 컸다.
그런 상황에서 공산당은 미국에서 가장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세력으로 비춰졌다. 공산당은 성장해 회원과 지지자를 급속히 늘려갔다. 우리는 비판하고, 이론적으로 설명했지만, 그래도 모든 사람의 눈에 가망 없는 분열주의자, 잔소리꾼들로 비춰졌다. 우리는 일국사회주의 이론이 혁명 운동에 치명적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이해시키려 하고 있었다. 결국 우리는 이 이론적 문제를 기필코 명확히 정리해야 했다. 1차 5개년계획의 성공에 매혹된 그들은 우리를 보고 말하곤 했다.
“이 사람들은 미쳤어. 이 사람들은 이 세상에 살고 있지 않아.”
자본주의는 엉망진창이 돼가고 있는 듯한 반면, 수만 수십만의 새로운 사람들이 소련을 바라보면서 5개년계획을 지지하고 있는 바로 그 상황에서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자기 문건을 팔에 끼고 사람들에게 책을 읽고, 연구하며, 토론하자고 했다. 누구도 우리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런 고난기에 우리는 모든 접촉을 차단당했다. 우리 운동에서는 친구도 없고, 지지자도 없었으며, 주변부도 없었다. 우리한테는 대중 운동에 참여할 어떤 기회도 없었다. 노동자 조직에 들어가려고 할 때마다, 우리는 반혁명적 트로츠키주의자라며 쫓겨나곤 했다. 우리는 실업자 집회에 대표단을 보내려고 했다. 우리가 노동자계급의 적이라는 구실로, 우리의 추천장은 거부당했다. 우리는 완전히 고립됐다. 신입 회원은 거의 없었다. 공산당과 그 거대한 주변이 우리한테는 완전히 차단된 듯했다.
‘극렬분자’
그러자 새로운 정치 운동이 으레 그렇듯이, 우리는 그다지 건강하지 않은 부류 속에서 새로운 사람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만약 여러분이 또 다시 한줌의 소수로 줄어든다면, 맑스주의자들이 계급투쟁의 변화 과정에서 그랬듯이 상황이 나빠져서 또 다시 시작해야 한다면, 나는 여러분이 조금 골치 아플 것이라고 미리 말해두고 싶다.
모든 새로운 운동은 ‘극렬분자’라고 부르는 게 적절한 인자들을 끌어들이게 마련이다. 언제나 가장 극단적인 급진주의를 찾는 괴짜, 이런저런 조직에서 축출된 부적응자, 떠버리, 단골 반대파들이 고립된 우리에게 와서 “안녕하시오, 동지들” 하고 외치기 시작했다. 나는 언제나 이런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데 반대했다. 그러나 그 흐름이 너무 거셌다. 나는 공산주의자동맹 뉴욕 지부에서 이런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것에 맹렬히 반대했다. 근거는 그들의 외모와 옷차림이었다.
그들은 물었다. “당신은 왜 그를 반대하죠?”
나는 말했다. “그는 세련된 복장에 인조 콧수염과 긴 머리를 하고 그리니치빌리지를 왔다 갔다 합니다. 그게 바로 잘못입니다.”
내가 농담으로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은 미국의 평범한 노동자들에게 다가가기에 알맞지 않다고 말했다. 그들은 우리 조직을 미국 노동자들의 평범한 삶과 관련 없는 별나고, 비정상적이고, 낯선 조직으로 보이게 할 것이다. 내 말이 일반적으로 딱 맞았지만, 특히 이 경우엔 더 그랬다. 말쑥한 옷차림의 그 청년은 조직 안에서 온갖 문제를 일으킨 다음 결국 올러파가 됐다.
많은 사람이 공산당의 나쁜 점 때문이 아니라 좋은 점 때문에 우리한테 왔다. 즉 당 규율, 당면 활동을 할 때 당 결정에 개인이 따르는 것에 반기를 들고 우리한테 온 것이다. 운동을 취미 삼아 하는 많은 소부르주아 활동가들은 어떤 규율도 참지 못했다. 그들은 공산당을 떠났거나 제명당했다. 그리고 그들은 트로츠키주의자가 되고 싶었거나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들 가운데 일부가 우리 뉴욕 지부에 가입했다. 그들은 우리 조직의 규율에 대해 똑같은 편견을 갖고 들어왔다. 많은 신참자들이 민주주의를 맹목적으로 신봉했다. 그들은 공산당의 관료주의를 아주 혐오했기에 어떤 권위나 규율, 중앙집중성도 없는 조직을 열망했다.
이런 사람 모두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은 끝없이 토론하는 것을 좋아한다. 당시 트로츠키주의 운동의 뉴욕 지부는 끝없이 토론만 했다. 나는 그들 중에서 분명한 사람을 하나도 못 봤다. 나는 괜찮은 사람을 찾아보려 했으나 결코 찾지 못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말할 수 있었다. 아니 말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말하려고 했다. 모든 문제에 대해 끊임없이. 그들은 어떤 권위도, 운동의 역사에서 결정된 어떤 것도 인정하지 않는 우상파괴주의자들이었다.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을 처음부터 다시 검증하자고 했다.
공산주의 운동이 대표하는 노동자계급 전위로부터 차단당한 채, 그리고 노동자들의 살아있는 대중 운동과 접촉하지 못한 채, 우리는 우리 내부로 빠져들어갔고 그것을 감수해야 했다. 거기서 빠져나올 방법이 없었다. 우리는 오랫동안 생각하고 토론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나는 듣고만 있어야 했다. 그 때문에 흰머리가 이렇게 많아졌다. 나는 결코 종파주의자나 괴짜가 아니었다. 나는 단지 말이 많은 것을 정치 지도부의 자질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을 참아본 적이 없다. 그러나 몹시 괴로운 이 그룹에서 누구도 벗어날 수 없었다. 미래 혁명정당의 이 작고 약한 중핵은 하나로 뭉쳐야 했다. 이 경험을 겪어야 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다. 미래를 위해서는 참아야 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수다쟁이의 말을 들어주었다. 그것은 쉽지 않았다. 나는 여러 번 생각했다. 만약 내가 불신하더라도 그들이 미래에 대해 말하는 것에 무언가가 있다면, 내가 했던 것이 아니라 내가 들어야 했던 것에 대해 충분히 보상받을 것이라고 말이다.
종파주의
그때는 정말 어려운 시기였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운동은 내부적 어려움, 분열, 충돌의 시기로 불가피하게 미끄러져 들어갔다. 우리는 매우 자주 아주 작은 것들 때문에 격렬한 싸움과 다툼을 벌였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고립된 작은 운동은 결코 이런 상황을 피해갈 수 없다. 작은 고립된 그룹이 자기 안에 갇혀 자신을 짓누르는 전 세계의 무게를 느끼고, 노동자 대중 운동과 아무 접촉도 없고 그로부터 어떤 건강한 교정도 받지 못한다면 가장 나은 경우에도 어려운 시기를 겪을 수밖에 없다. 신입 회원들이 최상의 자질을 가진 이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우리는 더 어려웠다. 뉴욕 지부에 가입했던 많은 사람은 혁명조직원으로서 적절하지 않았다. 그들은 취미 삼아 운동하는 사람들이고, 무규율한 소부르주아 분자들로서 결국 혁명운동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게다가 운동은 계속해서 가난했다. 우리는 신문과 일련의 팜플렛을 발간하려 했다. 하지만 필요한 돈이 없었다. 우리가 얻은 돈은 모두 신문 발간비로 즉시 들어갔다. 우리한테 남는 돈이 한 푼도 없었다. 당시는 고립, 빈곤, 맥 빠지는 내부 투쟁 등으로 매우 어렵고, 진짜로 힘든 시기였다. 이런 시기가 단 몇 주 또는 몇 달이 아니라 수년 동안 지속됐다. 이런 가혹한 상황에서 한 개인이 지니고 있던 모든 약점이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작고, 이기적이고, 충실하지 못한 모든 것이 드러났다. 나는 상황이 좋았을 때 몇몇 개인과 알고 지냈다. 이제 나는 그들을 속속들이 알게 됐다. 그 끔찍한 시절에 나는 또한 벤 웹스터와 미니애폴리스 사람들을 알게 됐다. 그들은 언제나 나를 지지했고, 결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으며 내 손을 잡아주었다.
모든 인류를 해방시킨다는 원대한 프로그램과 가장 드넓은 역사적 전망을 가졌던 가장 위대한 운동이 당시에는 사소한 문제, 질투, 파벌 형성, 내부 투쟁으로 점철됐다. 가장 나빴던 것은 회원 전체가 이 분파투쟁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왜냐면 분파투쟁 속에 담긴 중요한 정치 문제들은 여전히 돌파구를 찾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파투쟁이 단순히 개인적 싸움은 아니었다. 자주 그렇게 보였을지라도 말이다. 그 투쟁의 의미는 이제 모두에게 분명해졌다. 그것은 1939~40년에 우리 운동 안에서 노동자계급 경향과 소부르주아 경향이 벌인 거대한, 결정적 투쟁의 전초전이었다.
1929년 시카고 대회부터 1933년까지는 내가 활동했던 시기 중 가장 혹독한 시기로, 끔찍한 고립과 그에 따른 모든 어려움이 존재했던 시기였다. 고립은 분파주의의 자연스런 서식처다. 하지만 대중운동에 대한 본능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는 가장 잔혹한 형벌이다.
발간물
이렇게 어려운 조건에서도 우리는 우리의 선전 임무를 계속해나갔고, 대체적으로 상당히 잘 해나갔다. 시카고 대회에서 우리는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러시아 좌익반대파의 메시지 전체를 출간하겠다고 결정했다. 그동안 출판이 금지당한 채 쌓여 있던 모든 문서와 트로츠키가 최근에 쓴 문건들을 이용할 수 있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혁명적인 일이 유니온스퀘어[광장]에 나가서 혁명을 주장하거나, 우리를 아직 모르는 수십만 노동자 앞에 우리를 곧장 드러내는 것은 아니라고 결정했다.
우리의 임무, 우리의 혁명적 의무는 가장 엄밀하고, 가장 집중적인 의미에서 선전활동을 하는 것이었다. 즉 이론적 문건을 출간하고 배포하는 것이었다. 이런 목적을 위해 우리는 중고 식자 인쇄기를 구입하고, 우리 인쇄소를 설립하기 위해 회원들로부터 돈을 모금했다. 당시에 이용할 수 있는 수단을 고려해본다면, 나는 우리 인쇄소가 자본주의 역사에서 만들어진 모든 기업 가운데 최상이었다고 생각한다. 만약 우리가 혁명에 관심이 없었다면 순전히 사업이라는 측면에서도 우리가 상당히 훌륭한 사업가의 자격을 갖추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확실히 우리는 사업을 지속하기 위서 작업을 많이 해야 했다. 우리는 이제 막 식자인쇄 학교를 마친 젊은 동지에게 기계 운영 책임을 맡겼다. 그는 당시에 일류 기계공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훌륭한 기계공이다. 뿐만 아니라 당 지도자이기도 하고 뉴욕사회과학학교의 강사진이기도 하다. 당시에 식자기를 돌리는 이 한 동지가 당 선전활동의 모든 무게를 짊어지고 있었다. 그 동지에 관한 이야기가 하나 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기계를 잘 알지 못했다. 그 기계는 오래된 폐물이었고, 우리가 속아서 산 중고품이었다. 기계를 돌릴 때마다 그 기계는 지친 노새처럼 작동을 멈추곤 했다. 찰리가 몇몇 장치를 조절해보곤 했다. 만약 그래도 안 되면 망치를 가지고 기계를 몇 번 내리쳤다. 그러면 다시 기계가 돌아가면서 새로운 호의 <투사>가 인쇄돼 나오곤 했다.
빈곤
시간이 좀 더 흐른 후 우리한테는 아마추어 인쇄업자들이 생겨났다. 뉴욕 지부 회원의 절반 정도가 인쇄소에서 한두 번은 일해야 했다. 페인트공, 벽돌공, 의류공, 서점 직원인 그들 모두가 아마추어 식자공으로 복무했다. 매우 비효율적이고 사람으로 꽉 들어찬 인쇄소에서 우리는 무보수 노동을 통해 조금씩 성과를 냈다. 이것이 트로츠키주의 인쇄 공장의 비밀 전부다. 인쇄소는 다른 어떤 관점에서도 효율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파라오 이래로 모든 노예주들이 알고 있었던 다음과 같은 비밀―노예가 있다면 돈이 별로 들지 않는다―을 통해 유지됐다. 우리한테는 노예가 없었다. 하지만 우리한테는 거의 아무 보상도 안 받고, 신문 편집 측면뿐만 아니라 기술적 측면에서도 밤낮으로 일하는 열정적이고 헌신적인 동지들이 있었다.
우리한테는 재정이 부족했다. 모든 결제 대금은 기한을 넘겼다. 채권자들은 돈을 즉시 달라고 압박했다. 우리가 신문 발간비를 겨우 갚고 나면, 건물 임대료를 내지 않을 경우 퇴거하겠다고 위협받는 상황이었다. 그 다음 가스 요금을 급하게 내야 했다. 왜냐면 가스가 없으면 식자기는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기 요금도 내야 했다. 전력과 전등이 없으면 인쇄소를 운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돈이 있든 없든 요금을 모두 내야 했다. 우리가 바랐던 것은 대부분 임대료를 내고, 신문을 발행하고, 할부금을 갚고, 식자기 수리비를 내고, 가스와 전기 요금을 내는 것이었다. ‘고용된 일꾼’ 즉, 인쇄소에서 일하는 동지들뿐만 아니라 사무실에서 일하는 우리 운동의 지도자들을 위해 남겨진 것은 거의 없었다.
우리 평회원들도 항상 엄청난 희생을 감내해야 했다. 하지만 지도부들이 감내해야 했던 것보다 크지는 않았다. 왜냐면 운동 지도부는 언제나 강한 도덕적 권위를 가지고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 당 지도자들은 언제나 평회원들에게 희생을 요구하는 위치에 있었다. 왜냐면 그들은 귀감이 됐고, 모두가 그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서든 신문이 나왔다. 팜플렛도 하나씩 인쇄했다. 각양각색의 그룹 동지들이 트로츠키가 쓴 새 팜플렛들을 후원하고 돈을 주고 신문을 샀다. 그 낡은 인쇄소에서 중국 혁명 문제에 관한 책 전체를 인쇄했다. 동양 문제를 알고 싶은 모든 동지는 뉴욕시 10번가 동부 84번지의 그 열악한 환경에서 출간한 이 책을 읽어야 한다.
이런 숱한 부정적 측면과 어려움이 있었지만, 우리는 조금 전진했다. 우리는 이 나라에서 예전에는 결코 알려진 적이 없던 위대한 볼셰비즘의 원칙들을 운동에 가르쳤다. 우리는 미국 노동운동에서 위대한 역할을 할 간부층을 교육시켰다. 우리는 부적응자의 일부를 걸러내고 좋은 사람들을 한 명씩 가입시켰다. 우리는 여기저기서 신입회원을 조직했다. 우리는 새로운 접촉망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공개 강연회를 열려고 했다. 당시에는 이 일이 매우 어려웠다. 왜냐면 누구도 우리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바로 이 방에서 대중 강연회를 열기 위해 안내문을 배포하려고 전체 조직을 동원하면서 엄청나게 노력했던 것을 기억한다. 우리 회원을 포함해 59명의 사람들이 참석했다. 우리 조직 전체는 열광적으로 고무됐다. 우리는 돌아다니며 서로서로 이렇게 말했다. “지난 밤 우리 강연회에 59명이 왔다. 우리는 성장하기 시작하고 있다.”
우리는 뉴욕 바깥으로부터도 도움을 받았다. 예를 들면 미니애폴리스가 그 경우다. 미니애폴리스의 우리 동지들은 나중에 노동운동 지도자로서 큰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다. 당시에 그들은 석탄야적장에서 하루에 10시간에서 12시간 동안 석탄을 들어올리는 석탄 하역 노동자였다. 그것은 가장 힘든 종류의 육체노동이었다.
그들은 <투사>가 계속 나올 수 있도록 한 주에 5~10달러나 뉴욕에 있는 우리에게 보내주었다. 우리는 여러 번 신문 낼 돈이 없었다. 그럴 때 미니애폴리스로 전보를 치면, 그들이 25달러 정도를 보내주곤 했다. 시카고와 다른 지역 동지들도 똑같이 했다. 전국에서 모두 이렇게 노력하고 희생했기에 우리가 살아남아서 신문을 계속 낼 수 있었다.
가끔 뜻밖의 소득도 있었다. 한 번인가 두 번, 지지자가 우리에게 25달러를 줬다. 그때는 우리 사무실이 축제분위기였다. 우리에게는 ‘임대료 돌려막기’라는 것이 있었다. 이것은 우리의 필사적인 재정방책에서 최후의 보루였다. 가령 15일에 지불해야 할 방세로 30달러나 40달러를 갖고 있는 한 동지가 있다고 하자. 우리가 인쇄비나 다른 돈을 갚을 수 있도록 그 동지가 우리에게 10일에 돈을 빌려준다. 그 다음 5일 후에 우리는 두 번째 동지의 방세를 빌려서 첫 번째 동지가 제때 집주인에게 방세를 내도록 돈을 갚는다. 그러면 두 번째 동지는 자기 집주인에게 방세 내는 것을 이러저러한 구실로 늦춘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두 번째 동지에게 돈을 갚기 위해 다른 동지의 방세를 빌린다. 이런 상황이 언제나 계속됐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난관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유동자본을 확보했다.
국제주의
당시는 매우 잔인하고 어려웠다. 그 시기를 통과하고 살아남았던 것은 우리가 우리 강령을 믿었고, 트로츠키 동지와 우리 국제 조직들이 우리를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트로츠키의 저작과 편지들은 우리를 고무했고, 우리가 이론과 정치적 이해의 완전히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국제서기국의 개입은 우리가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결정적 도움이 됐다. 우리는 그들의 조언을 구했고, 그들이 조언하면 거기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일 만큼 분별력이 있었다. 국제적 협력(‘국제주의’란 바로 이런 의미다)이 없다면 이 시대에 한 정치 그룹이 살아남아서 혁명노선을 발전시킬 수 없다. 그런 국제적 협력 덕분에 우리가 버티고 살아남을 수 있었고, 우리 조직을 굳게 뭉치게 만들 수 있었으며, 준비된 상태로 기회를 맞을 수 있었다.
“끈기! 끈기! 끈기!”
다음 강연에서 나는 여러분에게 기회가 왔을 때 우리가 준비돼 있었음을 보여줄 것이다. 이런 고립과 정체의 장벽에 첫 번째 틈이 나타났을 때, 우리는 분파주의 서클에서 벗어나 그 틈을 비집고 뛰쳐나갈 수 있었다. 우리는 정치적 노동운동에서 일정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이를 위한 전제 조건은 러시아에서 굴복이 일어나고, 전 세계 노동자들이 사기저하에 빠져 있던 시절에, 강령을 명확하게 만들고 용기를 강하게 하는 것이었다. 하나의 패배에 뒤이어 다른 패배가 전위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많은 이들이 질문하기 시작했다. 뭘 해야 하지? 무언가를 하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가? 사태가 좀 흘러가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낫지 않을까? 트로츠키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썼다. “끈기! 끈기! 끈기!” 이 기사는 라덱과 다른 이들이 굴복한 뒤 사기저하가 널리 퍼지고 있던 상황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버티고 서서 끝까지 싸우는 것. 그것은 혁명가의 수가 아무리 적을지라도, 그들이 아무리 고립돼 있을지라도 배워야 하는 것이다. 균열이 일어날 때까지 버티고 맞서 싸우라, 그러면 모든 기회를 이용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1933년까지 버텼다. 그 뒤에 우리는 여명을 보기 시작했다. 그때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이 나라의 정치 지도 위에 다시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다음 강연에서 나는 그 점을 여러분에게 말하겠다.
국제주의
지금까지 다섯 번 강연했다. 기억할 테지만, 지난주 다섯 번째 강연에서는 좌익반대파, 미국공산주의자동맹 초창기 5년에 해당하는 1928~1932년의 역사를 다뤘다. 지난주에 얘기했듯이, 이때는 새로운 운동이 끔찍한 고립과 고난을 겪어야 했다.
지난주에 나는 정체, 빈약한 세력과 물적 수단, 그런 일련의 상황이 만들어낸 불가피한 내적 곤란, 모든 새로운 급진운동을 괴롭혔듯이 우리를 괴롭혔던 극렬분자 등 그 시기 운동의 부정적 측면을 어쩌면 지나칠 정도로 강조했다. 이런 고립과 그에 따른 폐해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객관적 요인들 때문에 발생했다. 아무리 우리가 그것을 막으려고 최선을 다해도 어쩔 수 없었다. 그것은 시대적 조건이었다. 우리를 거의 절대적 고립에 빠뜨린 이 요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스탈린주의 운동의 고양이었다. 그것은 모든 자본주의 국가가 위기에 빠진 결과이자, 소련이 산업화 5개년 계획으로 약진한 결과였다. 소련과 스탈린주의의 위신은 높아졌다. 무비판적인 사람들(대다수 대중은 무비판적이다)에게 스탈린주의는 소련의 정통 대표자로 여겨졌다. 이런 상황이었기에 우리 반대파 운동은 무언가 이상하고 비현실적인 것으로 비춰졌다. 게다가 전반적으로 노동운동이 크게 침체해 있었다. 파업이 없었다. 노동자들은 조용했다. 그들은 어떤 이론적 문제에도 관심이 없었다. 심지어 당시에는 어떤 행동에도 관심이 없었다. 이 모든 것이 우리 작은 그룹한테는 불리했고, 우리를 궁지로 내몰았다.
그 어려운 시기에 우리의 임무는, 운동을 확대시킬 수 있는 객관적 조건이 올 때까지 견뎌내면서, 중요한 문제들을 명료화하고, 우리 중핵을 교육시키며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또한 당시에 사실상 미국과 세계 곳곳에서 모든 선진노동자를 포괄했던 공산당들과 코민테른을 개혁할 수 있는 가능성을 끝까지 시험해보는 것이었다. 1933년 초반에 세계 곳곳에서 터져 나오기 시작한 사건들은, 우리가 주요 임무를 훌륭하게 완수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상황이 변하기 시작하고, 고립에서 벗어날 기회가 왔을 때, 우리는 준비돼 있었다. 1933년 초에, 특히 1934년에 우리는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주어진 기회들을 움켜잡았다.
우리 운동은 위대한 국제주의 학교에서 트로츠키 동지의 지휘와 격려를 받으며 교육받았다. 우리 중핵은 가장 중요한 세계 문제들에 대해 뜨겁게 연구하고 토론하면서 함께 전진해왔다.
앞서 언급했듯이, 과거 미국공산주의 운동의 커다란 약점은 이론과 실천 모두에서 시야가 일국적이고, 국제 사건들에 무지하고 무관심하며, 이론에 대한 진지한 관심과 실제적 훈련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젊은 우리 운동은 그런 결점들을 교정했다. 우리는 일군의 사람들을 교육했는데, 이들은 이론에 대한 근본적 검토와 국제적 경험을 바탕으로 많은 질문을 계속 쏟아냈으며, 국제 사건들을 어떻게 분석해야 하는지를 배웠다. 우리 운동은 러시아 문제의 수수께끼를 풀었다. 트로츠키 동지는 여러 논문, 팜플렛, 책을 통해, 모든 질문에 대해 세계관을 펼쳐보여 주었다. 그는 우리에게 자본가계급에 포위된 노동자국가의 복잡성에 대해, 퇴보하며 반동적 관료체제를 만들어냈지만, 여전히 기본 토대를 유지하고 있는 노동자국가에 대해 명료하게 이해시켜주었다.
그때 이미 독일은 세계 문제의 중심이 돼 있었다. 트로츠키는 이미 1931년에 <독일, 국제정세의 열쇠>라는 팜플렛을 썼다. 그는 다른 누구보다도 먼저 파시즘이 위협적으로 성장하고 있고, 공산주의와 근본적으로 대결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감지했다. 누구보다도 먼저, 그리고 누구보다도 명료하게, 그는 독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분석했다.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도록 교육했고, 독일공산당과 독일노동자들이 그 운명적 시험대를 대비하도록 준비시키려 했다.
또한 젊은 우리 운동은 무엇보다도 트로츠키 동지의 저작과 해설에서 도움을 받으며, 1930년 12월에 터진 스페인혁명에 대해 연구하고 이해했다.
그 고립의 시절에 우리는 시간을 쏟아 중국문제를 연구했다. 지난 강연에서 다뤘듯이, 우리 운동은 가난하고 약했지만, 어떻게든 <중국 혁명의 문제>라는 정식 책자를 발간해냈다. 이 책은 중국 혁명의 결정적 시기인 1925~27년에 러시아 반대파가 썼으나, 출판 금지당한 논문, 기사, 설명을 담았다. 이 중요한 세계사적 전투는 눈이 가려진 코민테른 성원들의 등 뒤에서 펼쳐졌다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러시아 좌익반대파의 위대한 맑스주의 거인들이 중국 사건들에 대해 썼던 것을 배울 수 있도록 결코 허가받지 못했다. 우리는 금서들을 출판했다. 우리 동지들은 중국 혁명 문제들에 대해 교육받았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 당이 식민지 문제에 대해 분명하고 단호한 입장을 취하고, 중국 방어와 인도 독립투쟁에 대해 올바른 태도를 취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다.(사실 그것이 바로 중요한 이유다.) 우리 당은 이 아시아 민중의 위대한 봉기가 세계노동자혁명에서 갖는 의미를 명확하게 이해했다. 그것은 고립과 연구의 시절로부터 우리가 계승한 유산이다.
실업자운동
1933년 초반에 우리는 보다 활발하게 전체 노동운동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선전활동에 중심을 둔 오랜 준비기간을 끝내고, 대중활동으로 방향을 돌리기 시작했다. 중핵 교육, 강령 정교화, 선전활동 등을 미래로 돌리고, 말하자면 자기 역량을 뛰어넘어, 대중활동부터 시작하려 했던 일부 참을성 없는 이들과 조직 안에서 벌인 투쟁에 대해서는 앞에서 언급했다. 그것은 일을 거꾸로 하는 것이다.
우리는 강령을 정립했고, 중핵을 구성했으며, 먼저 예비적 선전활동을 했다. 그리고 노동운동에서 활동할 기회가 생겼을 때, 우리는 정확한 목적을 갖고 활동할 준비가 돼 있었다. 어느 재치 있는 사람이 운동만 있고 방향은 없다고 묘사했던, 활동을 위한 활동에 빠져들지 않았다. 우리는 명료하게 정립된 강령, 그리고 혁명운동에서 최소 활동으로 최대 효과를 얻을 수 있도록 계산된 방법론을 가지고, 대중운동 속으로 들어갈 준비가 돼 있었다.
우리 활동, 계획, 희망의 연대기를 담은 <투사> 합본호에는 1933년 1월 22일 뉴욕에서 열린 실업자대회에 대한 보고가 실려 있다. 물론 그 대회는 스탈린주의 조직이 주도해서 열린 것이지만, 우리를 배제했던 예전 대회들과는 조금 달랐다. 흔들리고 헤매면서 오른편에서 왼편으로 가던 그들은, 이제 몇몇 비스탈린주의 조직을 전체 실업자운동에 관여하게 하면서, 공동전선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그 목적으로 모든 조직에 대회 참가를 요청했다. 우리는 이것이 공동전선을 향한 올바른 방향전환이라고, 적어도 절반의 전환이라고 신문에 썼다. 그때 나는 이런 기사를 썼다.
그들은 ‘모든 조직’을 초대함으로써 결국 좌익반대파가 그 운동에 참가할 수 있도록 작은 틈을 열어주었다, 우리는 그 틈을 통해 전진할 것이며, 그 틈을 넓혀할 것이다. 그 대회에 참가한 샥트먼과 나는, 어떻게 실업에 맞서 투쟁해야 하는지에 대해 전체 노동자계급 앞에서 말할 준비가 돼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허튼 소리가 아니었다. 우리의 강령은 옳았고 우리는 그것을 상세히 설명했다. <투사>는 실업을 구제하기 위해 정당과 노조들이 공동전선을 맺자고 한 우리 연설을 자세히 다뤘다.
노동조합
1933년 1월 29일에 일리노이 주 길레스피에서는 새로운 노총 문제를 검토하기 위한 ‘진보광부연합’과 여러 독립적 노동단체의 토론회가 열렸다. 나는 진보광부연합의 초대를 받아 거기에 참가해 발언했다. 그 덕분에 나는 거의 5년 만에 처음으로 뉴욕을 벗어날 수 있었다. 또한 미국 좌익반대파를 대표해 누군가가 작은 급진 지식인서클을 뛰어넘어 노동자들에게 연설할 기회를 가진 것도 그것이 처음이었다. 우리는 그 기회를 잡았다. 나는 동맹의 결정에 따라 그곳에 가서, 광부들과 함께 며칠을 보냈고, 몇몇 중요한 관계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살아있는 노동자운동, 대중운동과 또 한 번 관계를 맺는 일은 정말 기분 좋은 일이었다.
독일사건
버스로 길레스피에서 시카고로 돌아가는 길에,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히틀러를 수상으로 임명했다는 신문기사를 읽었다. 나는 그것을 아주 또렷하게 기억한다. 그 순간 나는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는 점을 직감했다. 세계노동운동의 침체와 교착 상태에 균열이 크게 발생하고 있었다. 상황은 대결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우리는 새로운 상황에서 우리 역할을 할 준비가 완벽히 돼 있었다. 내가 이 강연을 준비하면서 며칠 전에 기록을 확인했듯이, 일리노이 주의 길레스피 노동자 토론회에 우리 동맹이 참가한 것, 최초로 대중행사에까지 우리가 갔던 것은 우리가 새로운 시기에 부응하고 있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의식하지는 못했지만 우리의 행동은 독일에서 교착상태가 깨지는 것과 동시에 이뤄졌다. 우리는 이런 새로운 변화, 즉 미국노동운동의 새로운 고양과 특히 독일 상황 변화에 매우 적극 대응했다. 우리는 훈련을 마치고 행동에 나설 태세를 갖췄지만, 외적 곤란 때문에 출전할 수 없던 운동선수와 같았다. 그런데 갑자기 새로운 기회가 열렸고, 우리는 그 위에 올라탔다.
독일 사태에 대한 첫 번째 대응으로 우리는 뉴욕에서 대중 강연회를 개최했다. 우리는 오랫동안 대중강연회를 고려하지 않았다. 왜냐면 대중이 참여하지 않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소규모 공개포럼, 강연, 서클모임 등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이번에 우리는 1933년 2월 5일에 스타이브선트 카지노에서 대중강연회를 개최해보았다. ‘독일 사건의 의미’를 주제로 샥트먼과 캐넌이 연사로 나섰다. <투사>에 따르면, 이 대중강연회에 500명이 참가했다.
우리는 독일에서 파시즘과 공산주의 사이에 결전이 임박했다고 경종을 울렸다. 그런 다음 매일매일 독일에서 새로운 상황이 벌어지고, 사안들이 매우 첨예할 때 우리는 작은 그룹으로서는 전례 없는 일을 했다. 당시에 주간지로 발행하던 <투사>를 일주일에 세 번 발행하는 것으로 바꾸었고, 매호마다 독일 사건에 대한 트로츠키주의의 입장을 쏟아냈다.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해나갔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설명하지 못할 것 같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해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트로츠키주의자들 사이에는 ‘위기의 시기에는 가능한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을 한다’는 격언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스탈린주의자들에 대한 판에 박힌 토론과 비판에서 벗어나, 독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어떻게 전 세계적으로 사활적 문제인지를 전체 노동운동이 깨닫도록 충격을 주는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특히 공산당 노동자들을 포함해 모든 노동자들의 관심을 촉구하고자 했다. 우리는 속도를 높였다. 경종을 울리기 위해 외치기 시작했다. 우리 동지들은 <투사> 한 묶음을 손에 들고, 모든 모임을 찾아다녔다. 아무리 작은 노동자 모임이라도 찾아가 큰 소리로 외쳤다.
“<투사>를 읽어보세요!” “독일에 대한 진실을 읽어보세요!” “트로츠키가 한 말을 읽어보세요!”
독일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 우리 슬로건은 다음과 같았다. “노동자조직의 공동전선과 결사투쟁!” “파시즘에 맞선 모든 노동자조직의 공동투쟁전선!” 독일에서 스탈린주의자들과 사민주의자들은 공동전선을 거부했다. 상황이 끝난 뒤, 그들 모두는 서로를 탓하면서 딴청을 피웠지만, 모두 거짓말쟁이들이고 배신자들이다. 그들은 노동자들을 분열시켰고, 싸울 의지가 조금도 없었다. 그런 분열을 통해 파시즘이라는 거대한 전염병은 독일에서 권력을 장악했고, 그 검은 그림자를 전 세계에 드리웠다.
그 운명의 몇 주 동안, 우리는 미국공산당 노동자들을 일깨우고, 교육하며, 분기시키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 앞서 언급한 대중강연회를 한 번이 아니라 계속해서 열었다. 맨해튼에서 연달아 열었고, 처음으로 다른 지구로까지 뻗어나갔다. 처음에는 그들이 우리를 에워싸고 고립시켰기 때문에, 우리는 14번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우리에게는 지부가 한 개뿐이었다. 지부를 나눌 만큼 인원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일은 급진적 노동자들이 모이는 작은 14번가와 유니온스퀘어로 집중됐다.
하지만 독일 위기 동안, 우리는 강연회를 부룩클린과 브롱크스 지구로까지 확대해 열었다. 미국공산주의자동맹의 지역 지부들이 전국 곳곳에서 대중 강연회를 개최했다고 <투사>가 보도했다. 당시 우리 조직의 회원이었던 휴고 올러는 독일에 대해 연설하기 위해 전국 순회를 떠났다. 스탈린주의자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매우 공세적이었다. 우리 목소리를 들으려 하는 사람에게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우리 입장을 전달하기로 결의했다. 심지어 브롱크스 지구에서는 형세를 역전시켜 스탈린주의자들의 대중집회에까지 쳐들어갔다. 샥트먼과 나는 몇몇 우리 동지들에게 호위를 받으며 스탈린주의자들의 대중집회장에 똑바로 걸어 들어가 발언권을 요청했다. 그 대담한 요구는 책임을 맡은 사기꾼들을 난처하게 만든 것 같았고, 청중 속에서 “발언권을 주시오!”라는 요구가 나왔다. 우리는 스탈린주의자 대중집회에서 발언권을 얻고 우리 입장을 전달했다.
전체 노동운동에서 새로운 활력이 싹트자, 우리는 새로운 활동에 참가할 수 있는 기회는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했다. 1933년 3월에 전국적으로 약 500명의 대표자가 참가하는 실업자대회가 스탈린주의자들의 주관 아래 열렸다. 우리가 뉴욕에서 열린 지역대회에 참가할 수 있었던 규정에 따라, 우리는 올버니에도 대표자들을 보낼 수 있었다. 나도 대회에 참가했고, 발언권을 얻어 500명의 대표자 앞에서 실업자운동 내 공동전선이라는 맑스주의 구상에 대해 연설했다. 이 연설은 1933년 3월 10일자 <투사>에 실렸다. 국내 사안과 국제 사안을 잘 조정했다. 우리는 독일에 대해 큰 목소리로 외치는 동시에, 시간을 내 뉴욕 주에서 열린 실업자대회에도 참여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트로츠키의 설명, 조언, 경고는 무시됐다. 모스크바의 스탈린과 그 패거리들이 직접 이끌고 통제했던 독일공산당은 독일에서 투쟁 없이 항복했다. 내전 비슷한 것도 없이, 거리 다툼조차 없이 파시즘은 승리를 거뒀다. 그리고 엥겔스에 이어 트로츠키가 수차례 설명했듯이, 그런 전투 없는 패배는 사기를 가장 크게 꺾는 최악의 패배였다. 그렇게 패배한 이들은 오랫동안 자신감을 잃기 때문이다. 어떤 당이 투쟁하다가 더 강력한 세력한테 크게 패배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 경우 전통과 도덕적 영감을 남긴다. 그래서 그것은 나중에 보다 유리한 순간에 노동자계급이 다시 일어서도록 활력을 불어넣는 엄청난 요인이 될 수 있다. 파리코뮌이 역사에서 바로 그 역할을 했다. 국제사회주의운동은 그 영광스런 기억을 먹고 자라났다.
1905년 러시아혁명은 1871년의 파리코뮌 전사들의 영웅적 투쟁에서 영감을 받았다. 마찬가지로 1905년 러시아혁명은 전투에서 패배했지만, 러시아 노동자계급의 거대한 정신적 자산으로 남았고, 1917년에 승리한 노동자혁명을 촉발시키는 데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볼셰비키들은 늘 1917년 혁명의 총연습으로서 1905년에 대해 말했다.
독일공산당의 항복
하지만 독일 사민주의자들과 스탈린주의자들의 참담한 항복이 역사에서 어떤 역할을 하겠는가? 독일에는 서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노동자계급이 존재했다. 마지막 선거에서 사민주의자들과 스탈린주의자들은 합쳐서 1천 2백만 표 이상 획득했다. 독일노동자들이 단결해 행동에 나섰다면, 한 번의 강한 타격으로 파시스트 쓰레기들을 산산이 박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지도부가 분열시키고 배신한 이 강력한 노동자계급은 단 한 번의 전투도 없이 정복당했다. 파시스트들은 그들에게 가장 끔찍하고 야만적인 정권을 강요했다. 이 일이 벌어지기 전에, 트로츠키는 투쟁하지 않는 것은 최악의 역사적 배신일 것이라고 말했다. 정말 그랬다. 트로츠키는 열 번 실패한 반란도 한 번의 전투도 없는 항복보다 더 노동자계급의 자신감을 빼앗고 사기를 꺾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항복으로 독일 상황이 비극으로 끝난 뒤, 노동자계급이 재앙을 피하게 하려고 트로츠키가 말하고 행동했던 모든 것에 대해 많은 사람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부정적인 측면에서지만, 결국 일어난 일들 때문에 트로츠키가 말하고 설명한 모든 것이 완벽하게 맞아 떨어졌다는 점이 많은 사람들 앞에 분명해지기 시작했다. 트로츠키와 트로츠키주의 운동의 명성과 권위는, 우리를 종파주의자와 분열주의자라고 무시했던 서클들 사이에서조차 엄청나게 치솟기 시작했다.
제3인터내셔널의 파산
하지만 다른 나라들에서와 마찬가지로 미국공산당에서도 진지한 반응은 없었다. 코민테른 전체가 그랬다. 가장 잔혹한 역사적 배신조차 그 대열 안에서 실질적 반란을 불러일으킬 수 없을 정도로, 이 정당들은 관료화되고 내부로부터 타락했으며, 사기가 꺾였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코민테른이 혁명에 무감각하며, 스탈린주의 때문에 파산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사회당 내 흐름
그런 다음 역사의 변증법에 따라 이상한 모순적 사태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1914~1918년에 국제사회민주주의는 제국주의 전쟁을 지원하면서 노동자계급을 배신했다. 사민주의 정당들은 국제주의를 거부했고, 자국 자본가계급에 봉사했다. 이 배신 때문에 혁명적 맑스주의자들은 1919년에 새로운 인터내셔널, 즉 코민테른을 만들었다. 배신자들에 맞선 투쟁과정에서 코민테른이 등장했고, 맑스주의 강령이 그 깃발로 재건됐으며, 레닌과 트로츠키가 그것을 이끌었다. 하지만 1919년부터 1933년까지 14년이라는 짧은 시기 동안 코민테른은 정반대로 전환해 세계노동운동에서 가장 큰 장애물이자 억제 요인이 돼버렸다. 스탈린의 코민테른은 1914년의 사민주의 제2인터내셔널보다 더 치졸하고 수치스럽게 노동자계급을 배신했다.
새로운 세대의 혁명적 노동자들은 스탈린주의를 역겨워했다. 사태가 더 발전하면서, 특히 독일 파시즘 등장을 필두로 세계적 사건들이 엄청난 압력을 가하면서, 사민주의 정당들에서는 온갖 좌파 경향과 중도주의 경향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런 현상이 발생한 이유는 많다. 관료들이 공산당 안에서는 어떤 독립적 사고나 혁명적 활동도 가로막았기에, 급진적 노동자들은 공산당을 혐오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노동자 중 다수는 혁명적 표현을 찾다가, 느슨한 체계의 사민주의 정당들에서 길을 발견한다. 또한 14년 전의 배신에 책임이 없고, 그 배신의 전통과 정신을 공유하지 않았던 젊은 세대의 사회민주당원들이 엄청난 사건들의 압력을 받고, 급진적 해법을 찾으면서 쉼 없이 성장하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사민당원 사이에서, 특히 청년 조직들을 중심으로 좌파 그룹들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세계적 추세에 따라 미국에서도 사회당이 급성장했다. 미국사회당은 1919년과 1921년의 두 번에 걸친 분열로 아수라장이 됐다. 텅 빈 선체 말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활력 있고 적극적인 저항 청년 모두는 신생 공산주의조직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몇 년 동안 사회당은 수천 명의 당원으로 근근이 유지됐다. 사회당의 주요 지지기반은 유대인 일간지 <전진>의 배신자 무리들, 그리고 자신들의 좌파노동자들에 맞선 보호막이자 사이비 급진주의 포장으로서 사회당이 필요했던 뉴욕 의류노조 간부들이었다. 수년 동안 사회당은 추잡한 정당의 전형이었다. 하지만 공산당이 점점 더 관료화돼 정직한 노동자들을 계속해서 추방하고, 다른 이들에게 문을 닫아걸면서, 사회당은 세를 회복해가기 시작했다. 그 느슨하고 민주적인 체계가 정치운동을 경험하지 못한 많은 새로운 노동자층을 끌어 모았다. 경제공황 때문에 급진주의에 눈 뜬 수천 명의 노동자가 사회당으로 몰려들었다. 1933년에 2만 5천 당원을 거느릴 정도로 당원 수가 급증한다. 또한 이 수혈과 젊은 세대의 성장으로, 사회당은 활력을 조금 보여주기 시작했고, 좌파 및 중도주의 경향들이 그 대열 안에서 만들어진다.
진보노동행동협회
마찬가지로, 다른 나라들에서처럼 미국에서도 이제껏 급진 정당들과 연관을 맺지 않았지만, 각자의 경험을 통해 급진주의에 눈 뜬 노동자들의 독립적 그룹들이 공산당 외부에서 형성됐다. 미국에서 그런 독특한 운동 중 하나가 ‘진보노동행동협회’였다. 이 운동은 머스티가 이끌었다. ‘진보노동행동협회’는 노조 안의 혁신운동으로 출발했다. 이 운동은 공황의 영향을 받아 점점 더 급진화했다. 1933년 말, 이 머스티 그룹은 느슨한 노조 활동가그룹에서 정당으로 전환하는 문제를 바쁘게 토론하고 있었다.
독일에서 코민테른이 굴복하자마자, 트로츠키는 전 세계 혁명적 맑스주의자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코민테른은 파산했다. 우리는 새로운 정당들과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건설해야 한다.” 공산당에서 추방당했는데도 공산당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분파로서 오랫동안 활동해왔던 노력은, 그 오랜 실험은 이제 끝났다. 공산당은 쇄신 가능성이 없다는 판정은 우리가 내린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가 증명한 것이다. 우리는 현실을 인정했을 뿐이다. 우리는 그것을 기초로 전략과 전술을 완전히 전환했다.
대중활동으로 전환하다
이제 우리는 코민테른의 한 분파가 아니라, 새로운 정당과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선구자라고 선언했다. 우리는 급진주의에 눈뜨고 있고, 정치적 소속이나 경험이 없는 노동자들에게 직접 호소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코민테른의 분파라는 지위를 유지하면서 오래 노력함으로써, 공산주의 선진대열에서 새로운 운동을 위한 소중한 중핵을 모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사회당과 독립그룹들, 그리고 그 안의 좌익 그룹들과 중도주의 그룹들로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다. 당시 <투사>는 사회당 내 좌익의 성장에 관한 보고와 분석을 많이 다뤘다. ‘진보노동행동협회’와 그들의 정당 전환계획에 관한 기사들도 담았다. ‘청년사회주의동맹’에 대해서도 호의적으로 접근했다. 그리고 트로츠키의 노선에 따라 우리가 미국에서 이렇게 했듯이, 세계적 차원에서 똑같은 활동이 펼쳐졌다. 모든 곳의 트로츠키주의 그룹들은 사민주의 안에서 새롭게 성장해 확실한 생명력을 갖춘 좌익과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우리의 활동 전체를 대중활동으로 전환할 시간이 왔다. 초창기에 우리는 인원이 극소수인데도 모든 것을 내던지고 대중운동으로 뛰어들자는 시기상조의 요구를 거부했다. 이제 1933년 말 경에는 사전작업을 마무리하고 우리 스스로 준비가 됐기에, ‘선전서클에서 대중활동으로 전환하자’는 구호를 채택했다.
종파적 반대파
그 제안은 새로운 내부 위기를 촉발했다. ‘전환’은 종파주의 문제를 공론화했다. 그것은 끝까지 싸워야할 문제였다. 정치는 적합한 시점에 올바른 결정을 내리는 기예다. 객관적 상황에 따른 고립을 조급하게 회피하려는 일부가 우리 조직의 초기 위기와 내부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이제 상황은 뒤바뀌었다. 객관적 조건들이 급변했다. 대중운동 속으로 들어가 노동자들과 관계를 맺고, 들끓는 사회당 좌파와 독립적 운동에 깊숙이 뚫고 들어갈 기회가 우리에게 찾아왔다. 지체 없이 그 기회를 움켜잡는 것이 필요했다. 그렇게 하겠다고 우리가 결정하려 하자 고립에 순응하고 안주해온 동지들이 강하게 저항했다. 고립에 순응하고 안주하는 분위기 속에서 일부 동지가 종파주의 심리를 강화시켜온 것이다. 트로츠키주의 운동이 고립에서 빠져나와 차갑고 요동치는 대중운동의 바다로 나아가려는 시도가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그들을 전율시킨 것이다. 그들은 이 전율을 ‘원칙’으로 합리화했다. 끝까지 고전적 형태로 수행된, 조직 내 반종파주의 투쟁은 초기에 그런 양상을 띠었다.
우리는 회원을 빠르게 늘리기 시작했다. 독일 사태를 선전해 우리는 관심을 크게 받았다. 예상외로 모르는 이들이 우리 문서들을 얻기 위해 찾아오기 시작했다. “트로츠키가 무슨 말을 했죠?” “그가 독일에 대해 뭐라고 썼죠?”
우리는 중요한 단계를 통과했다. 우리가 투쟁을 시작한 지 5년이 되어갈 즈음, 뉴욕 지부 회원수는 총 50명으로 늘었다. 조직 규약에 지부 규모를 50명으로 제한하는 규정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기억한다. 50명이 넘는 지부는 두 개로 분리할 것을 요구받았다. 1929년의 첫 총회 때 이 규정을 규약에 담았다. 당시에 우리는 전국 회원을 두 지부로 나눌 수도 있었지만, 좋은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이 점에서 처음으로 규약을 적용하는 문제가 1933년에 등장했다. 우리는 어떻게 지부를 분리할 것인가를 놓고 토론했다.
1933년 5월 1~2일에는 스탈린주의자들이 주관하지만, 많은 노조들이 참가하는 토마스 무니 석방을 위한 전국대회가 시카고에서 열렸다. 우리는 이 대회에 대표를 보냈고, 나는 수천 명 앞에서 연설할 기회를 얻었다. 그것은 오랫동안 서클 내부 논쟁에 갇혀 있다가 맛본 신선한 경험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아직 공산당원이지만 그 노선과 단절하는 중이던 앨버트 골드만과 정치적으로 협력하기 시작했다. 무니 대회에서 골드만이 했던 연설과 내가 공동전선에 대해 했던 연설은 스탈린주의 정책을 직접 타격했다. 이것은 골드만이 출당당하고, 나중에 우리 조직에 가입하는 토대가 됐다. 그것은 극히 유익한 협력의 시작이었다.
<투사>에 따르면, 나는 시카고에서부터 두 가지 주제로 순회강연에 나섰다. ‘독일 노동자계급의 비극’과 ‘미국에서 혁명의 길’이 그것이었다. 공산당에 속했거나 그 주변에서 활동해왔던 뉴욕의 한 스탈린주의 지식인 그룹이 독일 사건에서 드러난 스탈린주의 노선의 명백한 잘못에 대해 분통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결국 그들은 공산당과 단절했고, 우리에게 넘어왔다. 우리가 집단을 획득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그 전에는 한 사람씩 우리에게 합류해왔던 것이다. 이제 하나의 그룹, 하나의 지식인 그룹이 우리에게 합류했다. 그것은 중요했다. 지식인 운동은 어떤 조짐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매우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사상적 영역에서 그들은 노동자들보다 조금 빠르게 움직인다. 나무 꼭대기의 나뭇잎들처럼, 그들은 제일 먼저 흔들린다. 꽤 진지한 뉴욕 지식인 그룹이 스탈린주의와 단절하는 것을 보았을 때, 우리는 이것이 그 대열에서 곧 분명하게 드러날 운동의 시작임을, 그리고 더 많은 스탈린주의 노동자들이 우리에게 넘어올 것임을 깨달아야 했다.
미국노동자당
1933년의 마지막 몇 달 동안 ‘진보노동행동협회’가 벌인 행동은 중요한 발전이었다. 그들이 조직한 노동자대오가 점점 더 급진화하는 것에 자극받고, 공산당이 급진적 노동자들한테서 매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점을 확실하게 느끼며, ‘진보노동행동협회’는 피츠버그에서 총회를 열고, 새로운 정당의 건설을 잠정적으로 선언했다. ‘잠정적’이라고 한 것은 그 총회가 ‘미국노동자당’ 건설의 조직화 임무를 맡는 임시위원회를 선출했기 때문이다.
그 때 벤자민 기틀로우와 그의 작은 그룹이 러브스톤 그룹에서 분열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 시기엔 또한 사회당에서 중도주의 좌파가 급성장했고, 청년사회주의동맹이 점점 더 급진적 입장을 취해가고 있었다. 모든 노동자조직에서 동요와 변화가 일어났다. 정치적 안목을 가진 이들이라면 당시는 실제로 일이 벌어지고 있고, 원칙을 숙고하느라 도서관에 앉아 있어서는 안 되는 때임을 알 수 있었다. 당시는 그 원칙에 따라 행동에 나서야 할 때였다. 다른 조직과 운동 내부의 새로운 발전에 따른 모든 기회를 활용하기 위해, 사태의 한복판에 있어야 할 때였다.
새로운 정당을 위한 캠페인
우리가 그 중 어느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는 점을 짚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누가 찾아와주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우리가 그들에게 다가갔다. 우리는 <투사> 1면에 새로운 정당과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건설을 촉구하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새로운 혁명정당과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건설하는 데 관심을 갖고 있는 그룹이라면 어디든지 강령에 기초해 우리와 토론해보자고 모든 그룹에 초대장을 보냈다. 우리는 강령을 갖고 있지만, 그것을 최후통첩장으로 제시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것은 토론을 위해 우리가 제출하는 입장이었다. 강령에 대해 다른 입장이 있다면, 그것을 모두 꺼내놓고 동지적 방식으로 차분하게 토론하자고 말했다. 강령 차이를 해결하고, 힘을 모아 새로운 통합정당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자고 제안했다.
우리는 새로운 당을 위한 캠페인을 벌였다. 다른 그룹에 비해 우리가 가진 커다란 장점은 목적이 분명했다는 점이다. 이 장점 덕분에 우리가 주도할 수 있었다. 우리는 명료하게 정리된 강령을 갖고 있었고, 그 덕분에 우리는 확실히 적극적일 수 있었다. 다른 좌파 단위들은 주도권을 쥘 만큼 자신감이 충분하지 않았다. 그 몫은 우리에게 떨어졌다. 우리는 새 당을 위해 이들에게 편지를 보내고, 그들의 신문과 모든 결의안에 대해 호감어린 비판을 보내며, 매주 아니 쉴 새 없이 북을 울려댔다. 우리의 평회원 동지들은 다른 그룹의 평회원들과 관계를 맺고, 위아래 모든 방면에서 그들이 토론에 관심을 갖게 만들도록 지시받고 훈련됐다. 그렇게 해서 진지하고 정직한 혁명적 분자들이 하나의 당으로 융합할 길을 닦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동안 우리 조직은 관심, 호감, 존경을 점점 더 많이 받았다. 모든 급진 써클이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진정한 공산주의자들이라며 존경했고, 트로츠키는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했던 독일 사건을 유일하게 설명한 위대한 맑스주의 사상가라며 존경했다. 역경과 박해에 굴하지 않고, 무기를 버리지 않고 제자리를 지켰던 점 때문에 우리는 존경받았다. 우리 조직은 노동운동 여기저기서 존경받았다. 다양한 좌파그룹을 하나의 당으로 통합하는 일을 추진해야 했을 때, 그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자산이었다.
5년 동안 투쟁한 뒤, 우리 대오는 확고한 강령에 기초해 굳건해졌다. 중요한 원칙 문제들에 관해 교육받았고,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역량을 획득했으며, 원칙을 당대의 사건들에 적용할 수 있게 됐다. 과거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준비를 다 갖출 수 있었다. 많은 측면에서 그 경험은 다소 암울하고 부정적인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고립과 고난 속에서 이론적 사상을 연구하고 토론하며 흡수한 그 시기야말로 젊은 우리 운동이 사방팔방에서 운동이 터져 나오는 이 새로운 개화기를 준비한 시기였다. 그래서 우리는 매우 급격하게 전술을 전환할 준비가 돼 있었다. 당시 우리 대열은 새로운 희망과 드높은 열망에 휩싸여 있었다. 1933년 말에는, 미국에서 진정한 공산당을 재건하는 길로 들어섰다고 확신하게 됐다. 미래는 우리의 것이라고 자신했다. 아직 우리 앞에는 투쟁들이 많이 남아있었지만, 위기를 벗어나 본궤도로 들어섰다고 느꼈다. 역사에 따르면 그 판단은 옳았다. 그 뒤 상황은 우리에게 유리하게 빠르고 지속적으로 변화했다. 그때부터 우리는 사실상 중단 없이 전진했다.
무엇을 할 것인가?
강령을 정교하게 가다듬은 정치그룹이나 당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다음에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올바르게 답하는 것이라고 나는 말했다. 단순히 그 당이나 그 당 지도부의 일시적 기분이나 열망에 따라 그 질문에 답할 수는 없다. 객관적 상황과 그 상황에 담긴 가능성을 보고 결정해야 한다.
우리는 미국 트로츠키주의 조직으로서 첫 5년간 우리가 활동해왔던 것을 얘기했다. 그 기간에 우리 숫자가 적고, 노동자운동이 전반적으로 침체해 있고, 공산당이 모든 급진적 운동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공산당의 한 분파로서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 마찬가지로 이런 상황 때문에 우리는 주로 대중선동보다는 선전을 해야 했다. 이미 지적했듯이, 맑스주의 용어법에서는 선전과 선동 사이에 아주 날카로운 차이가 있다. 통속어에서는 그 차이가 간과된다. 사람들은 대개 선전을 어떤 종류의 광고, 선동, 가르침, 원칙의 설파 등으로 묘사한다.
플레하노프가 아주 엄밀하게 정의했듯이, 맑스주의 운동의 용어법에서 선동과 선전은 뚜렷하게 다른 2가지 활동 형태다. 플레하노프는 선전을 많은 근본적인 사상을 소수에게 보급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아마도 우리 미국인에게는 교육이란 말이 더 익숙할 것이다. 플레하노프는 선동을 몇 가지 사상 또는 단 하나의 사상을 많은 사람에게 보급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선전은 전위에게 하는 것이고, 선동은 대중에게 하는 것이다.
이전 강연의 끝부분에서 우리는 우리 당이 활동해왔던 객관적 상황이 급변했다는 것까지 이야기했다. 코민테른은 독일 사태로 산산이 부서졌다. 그리고 공산주의 운동의 주변부에서 코민테른은 권위를 잃어갔다. 이전에는 우리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던 많은 사람이 깨어나서 우리의 사상과 비판에 흥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다른 한편에서는, 대공황 첫 4년 동안 잠들고 침체돼 있던 대중이 다시 꿈틀대기 시작했다. 당시는 루즈벨트 정부 시기였다. 산업이 약간 되살아났다. 노동자들은 다시 공장으로 흘러들어갔고, 끔찍한 대량실업 기간에 크게 잃었던 자신감을 되찾고 있었다. 노조를 조직하기 위한 대대적 운동이 벌어졌다. 그리고 파업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객관적 상황이 전면적으로 바뀌자, 그때까지 우리 스스로를 미국공산주의자동맹, 좌익반대파라고 불렀던 트로츠키주의 운동이 완전히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았다. 독일 사태로 코민테른은 확실히 파산했다. 가장 선진적이고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노동자들 쪽에서 코민테른 탈퇴 운동이 시작됐다. 반대로, 청년 부문과 노동자 부문의 혁명적 경향 때문에 죽어가던 사민당 내 좌파 부위에서 새로운 생명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관료주의 때문에 공산당에서 분리했지만 아직 사회민주주의에 끌리지 않은 노동자들과 일부 지식인들로 이뤄진 급진적 경향의 독립적 운동이 자라나고 있었다. 미국 노동자 운동은 긴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고, 운동의 침체 뒤에 새로운 활력과 새 운동이 등장하고 있었다. 이 나라의 트로츠키주의 조직은 새로운 객관적 상황에 맞게 활동방향과 전술을 급진적으로 바꿀 기회를 얻었고, 또 그런 변화를 요구받았다. 내가 전에 말했듯이, 우리는 이런 기회를 맞을 준비를 완전히 해둔 상태였다.
우리는 한 시도 지체하지 않고 새로운 상황에 적응했다. 우리는 우리 활동의 모든 성격과 전망을 바꿨다. 우리 노선을 바꾸고 5년간의 고립을 끝내기 위해 지도부의 제안에 따라 우리의 모든 성원이 토론에 돌입했다. 우리의 힘과 자원은 부족했지만, 우리는 더 넓은 환경에서 활동하기 위해 모든 기회를 활용했다. 그 뒤부터 우리는 다음 슬로건에 구체적으로 나타난 하나의 보편적 개념에 따라 모든 활동을 펼쳤다. “선전 서클에서 대중 활동으로 전환하라.” 그리고 이것을 경제적 영역과 정치적 영역 둘 다에서 실행하라.
우리가 두 영역 모두에서 한결같고 균형 잡히게 전환한 것은 우리 운동의 생존능력과 그 확실한 원칙적 기초를 보여주는 위대한 증거 중 하나였다. 우리는 조합주의의 수렁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모든 기회마다 대중운동에 올라탔다. 우리는 노조 활동을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 다른 정치 운동에서 왼쪽으로 이동하는 모든 조짐과 추세에 관심을 기울였다. 정치 분야에서 우리의 으뜸 슬로건은 새로운 당과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호소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전에는 가깝게 접촉한 적이 없었고 단지 라이벌로만 맞닥뜨렸던 다른 정치 그룹들에 접근했다. 우리는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기 위해 그들의 신문을 읽고, 우리 회원들이 그들의 평회원과 개인적으로 만나도록 하는 등 다른 그룹을 신중하게 연구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런 다른 정치운동의 생각과 느낌을 모든 세세한 부분까지 알기 위해 노력했다.
우리는 이런저런 공동활동을 통해 그들과 더 가까워지고 협력하려 했다. 그리고 새로운 혁명적 노동자당 건설로 나아가기 위한 조직 통합을 얘기했다. 경제적 영역에서 우리는 5년 동안 애써왔던 올바른 노조 정책의 첫 성과를 거뒀다. 우리는 이 노조 정책을, 초좌익 시기였던 자멸적인 ‘제3기’ 동안 공산당이 지지했던 분열주의적이고 [기존 노조와 별개로 적색노조를 세운다는 점에서] 이중 조합적인 노조정책에 대치시켜왔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노조 간부 자리를 차지하려 하고, 현실적 영향력이 아닌 허구적 영향력을 추구하려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의 기회주의 정책에 반대했다. 대신 우리는 우리 신문을 따르는 모든 노조 운동 투사들에게 명확한 노선을 제공했다. 우리는 그 당시 미국노총(AFL)이 대표하던 노조의 주요 흐름으로 그들을 이끄는 데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미국노총이 매우 보수적이고 편협한 조합주의에 빠져 있으며 부패했지만, 그래도 우리는 투사들이 미국 노조운동의 이 주요 흐름에서 벗어나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항상 강조했다. 그리고 대중으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키게 될 인위적이고 이상적인 노조를 건설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우리가 정의했듯이, 혁명적 투사들의 임무는 존재하는 노동자 운동에 뛰어들어, 그 안에서 영향을 미치려고 노력하는 것이었다. 미국노총이 1933년 10월에 대회를 열었다. 이 대회는 여러 해 만에 처음으로 노동자들의 각성, 십중팔구 아래로부터 시작된 파업과 조직화 캠페인의 결과로 조합원 수가 엄청나게 늘었다고 밝혔다. 노동자들은 굳어버린 관료들의 격려나 지도 없이도 노총 산하의 다양한 노조들로 들어가고 있었다.
이 강연을 준비하면서, 나는 당시에 우리가 썼던 몇몇 기사와 사설을 살펴보았다. 우리는 단지 비판만 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미국노총 지도부가 얼마나 사기꾼이고 배신자인지를 설명하면서 옆으로 비껴나 있었던 것이 아니다. 비록 그들이 틀림없이 그런 자들이었지만 말이다. 1933년 미국노총 대회에 관한 사설에서 우리는 대중이 대대적으로 노조로 들어가고 있는 상황에서는 오직 그 안에서만 진지하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노조에 들어가라, 거기 머물러라, 그 안에서 활동하라.” 이 핵심사상은 우리의 모든 논평에 배어 있었다.
우리는 정치 영역에서 활동을 확대했다. 1933년 10~11월의 <투사>는 당시 우리 조직의 사무총장이었던 웹스터 동지의 순회를 다뤘다. 그는 독일 사태 뒤에 트로츠키 동지를 만나고, 좌익반대파 국제회의에 참석한 다음 유럽에서 돌아와 있었다. 그는 순회하려고 서쪽으로 멀리 캔자스시티와 미니애폴리스 같은 곳까지 가서 국제 회의에 대해 보고했고, 새로운 당과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메시지를 알렸다. 그리고 우리가 이전에 알고 있던 사람들보다 더 많은 청중 앞에서 연설했으며, 새로운 조직화 대상자를 확보했고, 새로 활력을 얻은 트로츠키주의 운동에 대해 널리 설명했다.
<투사>에 따르면, 우리는 11월에 스타이브선트 카지노에서 미국 트로츠키주의 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연회를 열었다. 이 연회에는 5년 전에 공산당에서 우리를 제명할 때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공산당 전 지도부 중 한 명이 초청연사로 참여했다. 그는 잘 알려진 벤자민 기틀로우였다. 그는 꽤 많이 제명했는데, 결국 자신도 제명당했다. 그는 다른 러브스톤파와 함께 축출당했다. 4년 반 뒤에 그는 러브스톤파와 갈라서고, 독립적 공산주의자로서 돌아다녔다. 1933년 11월 4일, 우리의 스타이브선트 카지노 연회에 그가 참석한 것처럼 말이다.
패터슨 파업
정치 전선에서 이렇게 발전하는 동안, 같은 해 10월에 패터슨 섬유노동자들이 총파업에 돌입했다. 작은 우리 조직은 이 파업에 뛰어들어 영향을 미치려고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일부 새로운 조직화 대상자들을 만들어냈다. 우리는 <투사> 특별호 전면을 할애해 패터슨 파업을 다뤘다. 이 사례를 든 것은 그 시기에 우리가 취한 방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다. 우리는 모든 기회를 활용해 트로츠키주의 사상을 전위들의 폐쇄적인 선전서클에서 끄집어내, 선동 형태로 미국 노동자대중에게 제공하려고 노력했다.
정치 전선에서, 11월에 <투사>는 진보노동행동협회에 보내는 사설을 실었다. 머스티 조직은 대회를 개최하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계획대로 대회에서 자기 조직을 노조위원회들의 네트워크에서 정치조직으로 전환하려 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 새로운 흐름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아주 친근한 어조로 사설을 썼다. 통합당을 건설하는 문제로 토론하기 위해 우리가 모든 독립적인 급진 정치그룹을 초대한 것에 대해 그들이 자기 대회에서 주목해주기를 요청했다. 그리고 특히 그들이 국제주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일 것을 제안했다. 진보노동행동협회는 정확히 노조 그룹이었을 뿐만 아니라 국제문제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고, 국제적 연계도 없는 순전히 일국적 그룹이었다. 이 사설에서 우리는 독립정당을 조직하고자 하는 모든 그룹은 반드시 기본요건으로 국제주의에 관심을 가져야 하며, 결정적인 국제문제들에 대해 입장을 밝혀야 한다고 말했다.
11월에 우리는 ‘폭력깡패에 맞선 공동전선’이라는 제목으로 사설을 실었다. 이것은 웹스터 동지가 순회 도중 시카고에서 강연했던 것에 대한 글이었다. 공산당은 초기의 폭력깡패 전술을 부활시켰다. 스탈린주의 깡패들이 그 강연회를 깨려고 했다. 다행히 우리 당은 대비하고 있었고, 그들이 한 것보다 더 많이 돌려줬다. 그들은 고작 정당방위대 동지들이 그들을 처리할 때까지 강연회를 방해했을 뿐이다.
이 사건과 관련해 우리는 모든 노동자조직이 우리와 협력해 노동자 정당방위대 공동전선을 조직하자고 사설에서 호소했다. 사설은 “노동자운동에서 표현의 자유를 방어하자. 그것을 방해하려는 자들에게 한 수 가르쳐주자”고 주장했다. 우리 조직이 활동해왔던 13년, 거의 14년 내내 스탈린주의자들은 우리를 침묵시키려고 이따금씩 깡패폭력을 휘둘렀다. 그때마다 우리는 맞서 싸웠을 뿐만 아니라, 공동방어를 위해 지원해달라고 다른 그룹에게 호소했다. 비록 우리는 영구적인 방어운동 공동전선을 만들어내지는 못했지만, 각각의 경우에 부분적인 성공을 거뒀다. 그것은 우리 권리를 지킬 정도로는 충분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지금까지 표현의 자유를 유지해왔다. 이 점은 국내의 한 지역에서 최근에 스탈린주의자들이 우리를 침묵시키려 하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현재 캘리포니아에서 그런 시도가 벌어지고 있다고 <투사>가 보도한다. 우리는 즉각 공동전선을 형성하고, 모든 방면에서 지원을 호소하며, 스탈린주의자들의 깡패짓을 도시 전체에 폭로해 그들을 물러나게 한다. 캘리포니아에서 우리는 스탈린주의자들이 배포를 막으려 하는 장소에서 여전히 신문을 배포하고 있다.
나는 <투사> 1933년 12월 16일자에 실린 성명서를 지금 보고 있다. 이 성명서는 공산당과 단절하겠다는 부룩클린 그룹 동지들의 선언인데, 스탈린주의자들의 깡패 전술과 그들의 잘못된 정책을 비난하면서, 미국공산주의자동맹과 함께 하겠다고 밝혔다. 이 특별 성명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이 그룹 지도자가 부룩클린 공산당 깡패단의 수장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좌익반대파의 거리집회를 깨기 위해 다른 이들과 함께 파견됐다. 싸움 과정에서 그는 우리 동지들이 공격에 맞서 자기 자리를 지키고, 반격하는 것을 봤다. 뿐만 아니라 우리 동지들이 무지하고 잘못 생각하고 있는 젊은 깡패들에게 연설하고, 정신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소책자를 주는 것을 봤다. 그는 바로 최선두에서 싸우다가 입장을 바꿨다. 그런 일이 계속 벌어졌다.
초기에 가장 활동적이었던 투사 중 많은 사람이 처음엔 무지한 청년 스탈린주의자였다. 마치 다마스쿠스로 가던 사울이 개종하고 사도 바울이 된 것처럼, 그들은 우리와 싸우러 나섰다가, 눈부신 빛에 충격을 받고 훌륭한 공산주의자, 즉 트로츠키주의자로 전환하고 개조됐다. 이것은 만약 여러분이 지금 노조 회관에서 스탈린주의자들한테 공격받는다면 기억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다. 우리를 공격하기 위해 파견된 이 무지한 청년 스탈린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른다. 만일 우리가 두 가지 교육 형태를 결합시킨다면, 그들 중 일부를 때늦지 않게 전환시킬 것이다. 알다시피, 질서가 잘 잡혀 있는 모든 노조에는 교육위원회와 ‘교육’위원회가 있다. 그리고 둘 모두 매우 쓸모가 있다. 하나는 조합원을 교육하는 기관이고, 다른 하나는 강좌를 듣지 않으려는 파업파괴자를 교육하는 기관이다.
몇 년 전에 시카고 이발사 노조의 교육활동에 대해 토론했던 전설적 얘기가 있다. 이 노조에는 ‘교육’위원회가 있었다. 이 위원회 성원들의 임무 중 하나는 파업파괴자 가게의 판 유리창을 손봐주는 것이었다. 그들은 자동차를 타고 돌아다녔다. 절약정신과 급진주의가 결합된 물결이 그 노조를 휩쓸었다. 한 서툰 급진주의자가 돈을 아끼기 위해서 ‘교육’위원회가 자동차를 타지 말아야 한다고 제기했다. 그는 말했다. “자전거를 타게 합시다.” 한 고참자가 화를 내며 물었다. “뭐라고? 어떻게 그들이 짱돌을 자전거에 싣고 다니겠는가?” 그래서 그들은 ‘교육’위원회가 계속 자동차를 타고 다닐 수 있게 했다. 그리고 교육위원회는 노조 집회에 좋은 강좌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모든 것이 잘 됐다.
호텔노동자 파업
다사다난했던 1933년에 접어들면서, 수년 동안 노조의 보호를 받지 못했던 힘겨운 뉴욕 호텔노동자들 속에서 조직화 운동이 시작됐다. 이 부문에서는 일련의 파업이 성공하지 못하고 스탈린주의자들이 방해책동을 벌인 뒤에, 노조의 조직 규모가 줄어들어 있었다. 그것은 소규모 독립노조로, 옛 시절의 유물로 쪼그라들어 있었다. 거기엔 몇 개 호텔노조와 스탈린주의자들의 특별한 ‘적색노조’밖에 없었다.
이 되살아난 조직화 운동이 1928년 이래 대중운동 속에서 우리에게 처음으로 큰 기회가 됐다. 우리는 처음부터 이 운동에 개입해, 그 발전을 계획하고, 결국 뉴욕 호텔 노동자들의 거대한 총파업을 지도할 기회를 잡았다. 그 일은 핵심 위치에 있던 우리 멤버 몇 명의 무능과 배신 때문에 수치스런 패배로 끝났다. 그러나 그렇게 비참하게 끝난 첫 번째 시도의 경험과 교훈 덕분에 우리는 노조 영역에서 많은 보상을 받았고, 나중에 성공할 수 있었다. 우리는 가장 최근까지도 첫 번째 경험의 자산을 노조 문제에 활용하고 있다.
호텔 조직화 캠페인이 시작됐다. 그리고 흔히 노조 성정 과정에서 나타나듯이 운도 따랐다. 운 좋게도, 조직화 캠페인의 수단이 될 이 독립 노조에 몇몇 우리 당원이 속해 있었다. 호텔 노동자들이 대규모로 노조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하자, 이 소수의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소용돌이치는 대중운동의 한가운데에 서게 됐다. 우리에겐 한 동지가 있었다. 그는 그 노조의 고참 투사였다. 수년간의 고립 후에 그는 갑자기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됐다. 그리고 당시 우리 당에는 필드라는 지식인이 있었다. 그는 전에 노조 활동에 참여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그에겐 지적 능력이 많았다. 우리는 대중운동 속으로 전면적으로 뛰어들어 대중운동과 결합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필드를 호텔 영역에 파견했다. 그가 우리 당원들을 돕고, 통계학자, 경제학자 그리고 언어학자로서 자신이 가진 재능을 노조에 보태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호텔에서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분야는 프랑스 요리사 그룹이었다. 모든 곳에서 가장 뛰어난 기술자들이 항상 그렇듯이, 그들은 이 부문에서 자신들이 가진 전략적 지위와 위신 덕분에 두드러진 역할을 했다. 이 프랑스 요리사의 다수는 영어로 말하거나 토론할 수 없었다. 우리 지식인은 그들과 프랑스어로 오래 대화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그들은 그를 아주 중요하게 여겼다. 나이든 사무장이 노조를 떠났다. 그러자 프랑스 요리사들은 재빠르게 필드가 이 유망한 노조의 사무장이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가 절차에 따라 당선됐다. 당연히 이것은 우리에게 기회였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책임을 지우는 것이기도 했다. 그때 조직화 운동은 맹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우리 동맹은 시작부터 총력 지원했다. 나 개인적으로도 아주 적극 결합했고, 대중 집회에서 몇 차례 연설했다. 5년 동안 고립된 뒤, 10번가와 16번가에서 열린 작은 포럼과 내부 모임에 가 수없이 연설했다. 나는 연설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연설자들의 얘기를 끝없이 들었다. 수많은 노동자들에게 노조의 기본 사상에 대해 말할 수 있어서 기뻤다.
휴고 올러가 이 노조를 지원하도록 파견됐다. 그는 나중에 꽤 유명한 분파주의자가 됐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는 뛰어난 노조 활동가였다. 게다가 그는 이 노조의 조합원이었다. 그리고 여러 다른 동지가 조직화 캠페인을 돕도록 배치됐다. 우리는 <투사>에서 그 캠페인을 홍보했다. 그리고 운동이 결국 1934년 1월 24일 뉴욕 호텔 노동자 총파업으로 발전할 때까지 우리 동지들에게 조언하고 방향을 제시해 주는 것을 포함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총파업이 선언된 날 밤에, 나는 노조위원회의 초청을 받아 호텔 노동자 대중집회에서 기조연설을 했다. 그 뒤 우리 동맹의 전국위원회는 내가 나의 모든 시간을 필드와 호텔 노조의 우리 당원들과 협력하고 지원하는 데 쓰게 했다. 열 명이 넘는 다른 많은 동지가 피켓팅[파업 사수대]에서부터 잔심부름까지, 선전물을 쓰는 것에서부터 선전물을 배포하고 노조 본부를 청소하는 것까지, 그 상황에서 할 필요가 있는 모든 일을 모든 방법으로 돕도록 배치됐다.
우리 동맹은 그 파업에 전력투구했다. 마치 1933년 초 독일 위기 때 우리가 했던 것처럼 말이다. 독일 사태가 한계점에 다다랐을 때, 우리는 그 사건을 선명하게 부각시키고, 우리의 공격력을 높이기 위해 <투사>를 일주일에 세 번 발행했다. 우리는 뉴욕 호텔 파업 때 똑같이 했다. 우리 동지들은 <투사>를 모든 집회와 피켓 라인에 배포했다. 그래서 그 산업의 모든 노동자는 <투사>가 이틀마다 파업상황을 널리 알리고, 파업노동자들을 편들며, 사장들의 거짓말을 폭로하고, 파업을 성공시킬 몇 가지 견해를 제기하는 것을 보았다. 전국에 걸쳐 우리 조직 전체는 뉴욕 파업 지원을 제1임무로 삼았다. 그 파업에서 노조가 승리하도록 돕고, 우리 동지들이 그 투쟁에서 트로츠키주의의 영향력과 위신을 확보할 수 있도록 말이다. 그것이 트로츠키주의의 특징 중 하나다. 트로츠키주의는 무엇이든 절대 대충 하지 않는다. 할 가치가 있는 일은 제대로 해야 할 가치도 있는 법이다. 트로츠키주의는 이 오래된 모토에 따라 행동한다. 우리는 호텔파업에서 그렇게 행동했다. 우리는 그 임무를 성공시키기 위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뉴욕 조직 전체가 동원됐다. 그들은 자기 주머니를 마지막 한 푼까지 탈탈 털어서 일주일에 세 번 <투사>를 발간하는 엄청난 비용을 감당했다. 전국의 모든 동지들이 똑같이 그렇게 했다. 우리는 그 파업을 돕기 위해 조직을 거의 한계치까지 쥐어짰다.
그러나 우리는 노조 물신주의자가 되지는 않았다. 호텔 파업에 집중하는 동시에, 우리는 정치 전선에서 결정적 조치를 취했다. 총파업에 대한 첫 번째 보고를 다룬 <투사> 1월 27일자는 진보노동행동협회가 한 달 전에 피츠버그 대회에서 만든 미국노동자당 임시조직위원회 앞으로 보낸 공개편지도 실었다. 이 공개편지에서 우리는 정당 건설로 나아가겠다는 그들 대회의 결정을 주목했다. 우리는 힘을 합쳐 정당을 건설할 수 있도록 강령을 합의하고, 그들과 우리가 하나의 조직으로 통합할 목적을 갖고 공개토론을 하자고 제안했다. 우리가 주도했다는 점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 징후였다. 트로츠키주의자들과 다른 정치그룹이 관계를 맺을 때는 항상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주도권을 쥐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우수하거나, 다른 이들보다 수줍음을 덜 타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언제나 충분히 겸손했다. 다만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언제나 알고 있었다. 우리는 더 명확하게 가다듬은 강령을 갖고 있었고,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언제나 확신하고 있었다. 적어도 우리는 우리가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 덕분에 우리는 자신감을 갖고 주도권을 쥘 수 있었다.
호텔 파업은 시작이 아주 좋았다. 일련의 큰 대중집회가 열렸다. 매디슨 스퀘어 가든의 별관에서 열린 대중집회에 10,000명 넘게 참가한 것이 절정이었다. 거기서 나는 파업위원회의 주요 연사 중 한 사람으로서 필드 및 다른 사람들과 같이 연설했다. 그 노조의 우리 동지들은 파업 정책에 가장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자리에 파업 시작부터 있었다. 비록 우리가 파업 지도부를 독점하려고 한 적은 없었지만 말이다. 우리 정책은 언제나 파업 지도부가 정말로 그 조합원들을 대표하고 조합원들에게 세심하게 반응하도록 모든 지도적 투사들과 협력하고, 그들과 책임을 공유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파업은 그 시기에 수많은 파업을 무산시킨 여러 어려움에 직면하기 시작했다. 특히 연방노동국의 교묘한 술책이 그랬다. 이런 정부기관들의 표면적인 ‘도움’이 파업을 옥죄는 올가미로 바뀌는 것을 막으려면 정치의식이 필요했다. 우리는 정치적 경험이 많았기에 정부 중재자들의 역할을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 그들을 다뤄야 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종파주의 방식으로 그들에게 등을 돌려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사장들을 협상에 데리고 나올 수 있는 가능성을 모두 활용하는 법을 알았다. 이들을 조금도 신뢰하지 않고, 그들에게 주도권을 넘겨주지 않으면서 그렇게 해내는 법을 알았다.
필드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총명한 젊은 지식인 영재인 필드에게 명심시키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 사이에 그는 확실히 변했다. 아무 것도 아닌 처지에서 갑작스럽게 가장 중요한 인물이 돼버렸다. 그의 사진이 뉴욕 신문에 다 실렸다. 그는 거대한 대중 운동의 지도자였다.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때때로 내면과 전혀 관계가 없는 순전히 표면적인 이런 것들이 자기 평가에 영향을 깊이 미친다. 불행하게도 필드가 바로 그랬다. 본래 그는 어느 정도 보수적이었다. 그리고 그는 소부르주아 감성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또한 그는 갑자기 정부 대표자들, 정치가들, 노조 관료 속으로 떠밀려 들어갔는데, 그들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는 이런 사람들과 협상하기 시작했고, 나폴레옹처럼 대체로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어린애처럼 행동했다. 그는 노조 내 자기 당원들을 무시했다. -이것은 이성을 잃은 사람들이 언제나 보이는 징후다. 하지만 이것은 노조에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갑작스레 올라간 당원들에게 자주 나타나는 일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당보다 크며, 더 이상 당이 필요하지 않다는 완전히 비이성적인 생각에 사로잡힌다. 필드는 그의 바로 옆에 있고, 모든 일을 함께 하고 있는 자기 당 분견대의 투사들을 무시하기 시작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미국공산주의자동맹의 전국위원회도 무시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를 많이 도와줄 수 있었다. 우리 위원회는 파업 경험을 한 번만이 아니라 여러 번 겪어서 체화하고 있었다. 당연히 노동부 사기꾼들도 많이 다뤄봤다. 따라서 우리는 그를 도와줄 수 있었다. 그가 그랬던 것만큼이나 우리도 그 상황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돕고 싶었다. 도시 전체에서 그리고 사실은 전국에서 모두가 트로츠키주의자들의 파업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우리는 미국 노동운동 앞에서 시험대에 올라있었다. 우리의 모든 적은 재앙을 원하고 있었다. 아무도 우리를 도우려 하지 않았다. 우리는 만일 파업이 잘못될 경우 트로츠키주의자 조직의 평판이 나빠지리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필드가 당의 정책에서 얼마나 멀어졌느냐와 관계없이, 패배자로 기억되고 비난받는 것은 필드가 아니라 트로츠키주의 운동이고 조직일 것이었다.
하루하루 갈수록, 우리의 경솔한 지식인은 우리로부터 더 멀어져갔다. 우리는 그 자신뿐만 아니라 파업을 파멸로 이끌어 가던, 그리고 우리 운동을 불신에 빠뜨리려 하던 이 콧대 높은 바보를 설득하기 위해 아주 동지적인 방식으로, 아주 겸손한 방식으로 최선을 다했다. 우리는 그에게 우리와 상의하자고 간곡히 요청했다. 잘못된 지도 때문에 약해지기 시작한 파업 정책에 대해 전국위원회에 와서 이야기하길 바랐다. 아래로부터 평조합원들의 투쟁의지를 조직한 후, 자기 뒤에 힘(막상 일이 닥치면 협상에서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을 갖추고 협상하는 대신, 그는 대중의 투쟁의지를 누그러뜨리고 있었다. 그리고 파업을 꺾으려고 혈안인 정부 사기꾼, 정치인, 그리고 노조 관료와 함께 이런저런 회의를 하는 데에 모든 시간을 쓰고 있었다.
필드는 점점 더 거만해졌다. 시간이 전혀 없는 그가 어찌 아래로 내려와서 우리를 만나겠는가? 좋다, 우리는 시간이 있다고 말했다. 우리가 점심시간에 노조 본부에서 한 블럭 떨어진 식당으로 당신을 만나러 가겠다고 했다. 그는 심지어 그 시간도 없다고 했다. 그는 우리를 얕보는 발언도 내뱉기 시작했다. 16번가에는 조그만 정치 그룹이 있는데, 그들이 가진 것이라곤 강령과 소수 몇 사람뿐이다. 그리고 여기 그는 10,000명의 파업 노동자들을 영향력 아래 두고 있다. 왜 그가 우리를 신경 써야 하겠는가? 그는 말했다. “내가 원한다고 할지라도, 나는 여러분과 연락할 수 없다. 당신들은 사무실에 전화도 없지 않은가.” 그건 사실이었다. 우리는 우리한테 전화가 없다는 비난에 정말로 놀랐다. 그런 결핍은 우리 고립의 유산이었다. 아무도 우리에게 전화하려 하지 않았고, 우리는 전화할 누군가가 없었기 때문에 전화가 필요하지 않던 과거의 자취였다. 게다가, 그때까지 우리는 전화를 마련할 형편이 안 됐다.
호텔파업은 결국 전투적 정책을 잃어버리고 수렁에 빠졌다. 파업을 파괴하려는 노동부에 굽실거리며 의존한 결과였다. 파업이 올바른 지도력의 부족으로 그 밑바닥에서부터 죽어가고 있는 동안, 시간은 라과르디아 시장과 쓸모없이 협상하느라 허비됐다. 한편 우리 적들은 이렇게 말하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가 말했잖아.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종파적 분열주의자들일 뿐이야. 걔들은 대중활동을 못해. 걔들은 파업을 지도하지 못해.” 그것은 우리에게 심각한 타격이었다. 우리가 파업 정책을 짜는 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 아니라 필드가 배신했기 때문에, 우리가 파업을 지도했다고 소문이 났다. 우리 운동이 위태로워질 위기에 처했다. 만일 우리가 필드와 그 그룹이 저지르고 있는 일들을 용납한다면, 우리 성원들은 사기저하에 빠졌을 것이다. 우리의 젊은 혁명그룹이 사회당의 우스운 복사판이 될 수도 있었다. 사회당은 모든 노조 운동에 자기 사람들이 있었지만, 어떤 진지한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했다. 왜냐면 사회당의 노조 활동가들은 당에 어떤 책임감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모든 혁명정당에 결정적인 근본 문제가 우리 앞에 놓여있었다. 노조 간부가 당의 방침을 결정하고 당을 강제하게 할 것인가? 아니면 당이 방침을 정하고, 노조 간부를 강제할 것인가? 그 문제는 이 파업 도중에 단도직입적으로 제기됐다. 우리는 그 문제를 회피하지 않았다. 당시에 우리가 취한 단호한 조치는 이후에 우리 당이 노조 영역에서 성장할 때마다 영향을 미쳤고, 우리 당의 특성을 만드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우리는 파업 도중에 필드를 심판대에 올렸다. 그가 컸지만, 우리는 당 정책과 당 규율 위반으로 그를 뉴욕 조직에 기소했다. 우리는 충분히 토론했다. 내 기억으로는, 두 번에 걸쳐 일요일 오후 내내 논의했다. 모든 동맹원에게 말할 기회를 줬다. 위대한 필드는 출석하지 않았다. 그는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그가 없는 상태에서 재판이 이뤄졌다. 이 당시에 그는 자신이 잘못 이끈 사람들, 16번가의 우리 정치그룹은 작지만 대중운동은 크다는 점에 현혹된 사람들과 함께 동맹 안에서 작은 분파를 만들었다. 그들이 필드의 대변인으로서 동맹 회의에 왔다. 그들은 아주 오만하고 뻔뻔스럽게 말했다. “당신들은 우리를 내쫓지 못한다. 당신들은 오직 노조 대중운동으로부터 당신들을 내쫓을 수 있을 뿐이다.”
자신들 이전의 많은 노조 활동가들처럼, 그들도 당보다 자신들이 크다고 여겼다. 그들은 당의 정책과 규율을 위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왜냐면 당이 감히 그들을 징계하려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회당에서는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그리고 그것은 사회당이 노조 영역에서 그렇게 비참하게 낭패를 본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 그 당의 도움으로 집행부를 장악했던 거대한 노조 지도자들은 모두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일단 지도부가 되자, 그들은 당과 그 정책에 주의를 전혀 기울이지 않았다. 노조 지도자들은 사회당 규율 위에 있었다. 사회당은 한 번도 용기를 내 그들 중 누군가를 제명하려고 하지 않았다. 왜냐면 그렇게 하면 대중운동과의 “연결고리”를 잃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는 필드 및 그와 결속한 자들을 단호하게 제명했다. 우리는 파업 도중에 그들을 우리 조직에서 내쳤다. 필드 분파의 멤버 중 당과 단절하고 싶지 않고, 당 규율을 받아들이는 데 동의한 사람들은 그렇게 할 기회를 받았다. 그들은 여전히 당의 멤버로 남아있다. 우리가 제명한 자들 중 일부는 몇 년간 정치적으로 고립돼 있었다. 그들은 결국 그 경험으로부터 교훈을 얻고 우리한테 돌아왔다.
파업 중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 조치는 매우 과감했다. 우리는 그 조치로 급진적 노동자 운동을 깜짝 놀라게 했다. 우리 조직 바깥의 누구도 우리 같은 작은 정치 조직이 1만 노동자운동의 선두에 있는 멤버에 대항해, 그의 사진이 모든 신문에 실리고 그가 우리 당보다 천 배는 더 커 보이며, 그의 명예가 절정에 있을 때 그를 제명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처음에 반응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다음과 같은 말로 요약된다. “트로츠키주의 운동은 끝났어. 그들은 노조 연결망과 노조 세력을 잃었어.” 그들은 틀렸다. 다른 반응은 중요한 것인데 이런 말로 요약된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한다면 한다.” 일부 사람들은 호텔 파업의 이런 불명예와 실패로부터 치명적 결과를 예상했지만, 그 예상은 곧 어긋났다. 이 작은 정치 조직이 큰 파업의 선두에 있는 ‘건드릴 수 없는’ 노조 지도자를 제명하자, 많은 사람이 트로츠키주의자들을 진짜로 존경했다.
미니애폴리스 석탄야적장 파업
진지한 사람들은 동맹에 이끌렸다. 그리고 우리 성원 모두가 조직에 대한 새로운 규율의식과 책임감으로 견고해졌다. 그런 다음 호텔 재앙 직후에 미니애폴리스 석탄야적장 파업이 터져나왔다. 호텔 파업이 차갑게 식어갈 때, 미니애폴리스에서 불꽃이 튀었고 석탄야적장 노동자들의 파업이 일어났다. 이 파업은 여러분도 잘 아는 미니애폴리스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이끌었고, 조직화와 전투성의 모범 역할을 했다. 여기서 우리 동지들의 당 규율(100퍼센트 효율적인)은 우리가 뉴욕에서 겪은 불행으로부터 부정적 영향을 받지 않았다. 당 규율은 오히려 더 강해졌다. 뉴욕 노조 지도자들의 성향은 당에서 사라진 반면, 미니애폴리스 지도자들은 당과 더 가까워졌고, 지역적으로든 전국적으로든 당과 아주 긴밀하게 결합해 파업을 이끌었다.
석탄야적장 파업은 기막히게 승리했다. 트로츠키주의 노조 정책을 유능하고 충성심 있는 사람들이 실행한 결과, 그 올바름이 석탄야적장 전투에서 뛰어나게 입증됐다. 그리고 그 파업은 뉴욕 호텔 파업의 나쁜 인상을 많이 상쇄시켰다.
미국노동자당과 협상하다
이 사건들 이후로, 우리는 미국노동자당에 그들과 통합을 논의하기 위해 위원회를 보내겠다고 제안하는 다른 편지를 보냈다. 그 조직의 회원 중에는 우리와 결코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 부류도 있었다. 그 부류는 우리와 통합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노동자당의 다른 사람들은 더 큰 당을 만들기 위해 우리와 합치는 것에 진지하게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접근을 비밀로 하지 않고, 미국노동자당의 당원들이 읽을 수 있는 신문에 항상 그 내용을 인쇄해 알렸기 때문에, 그 당 지도자들은 우리와 만나는 데 동의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했다. 공산주의자동맹과 미국노동자당의 통합을 위한 공식 협상이 1934년 봄에 시작됐다.
알다시피, 이 접근과 협상들은 결국 노동자당과 공산주의자동맹의 통합, 그리고 단일정당의 출범으로 이어졌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얘기하겠다. 이것은 정치적 노력 없이, 장애물과 곤란을 극복하지 않고 이뤄진 것이 아니다.
현재는 민주전선의 애국주의 지도자인 러드윅 로어, 그리고 다른 인물로는 살루츠키 하드맨과 같은 미국 노동자당 지도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면, 여러분은 우리 일이 쉽지 않았으리라는 점을 충분히 이해할 것이다. 시드니 힐먼의 문필 하인이자 의류노동자연합의 공식 기관지 편집자인 살루츠키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고, 그들과 관계를 맺고 싶어 하지 않았다. 미국노동자당에서 그의 역할은 그 당이 장난감 이상으로 발전하는 것을 막고, 특히 혁명적 방향으로 성장하는 것을 막고, 무엇보다도 혁명적 강령에 대해 대화할 때 진지한 트로츠키주의자들과는 어떤 접촉도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협상은 시작됐다.
러브스톤·캐넌 논쟁
우리는 정치 전선의 다른 분야에서도 적극적이었다. 1934년 3월 5일, 어빙플라자에서 내가 러브스톤과 역사적 논쟁을 벌였다. 서로 싸웠던 두 경향의 대표자들이 5년 후에 만나서 다시 싸웠다. 판세는 엇비슷했다. 그들은 공산당에서 우리를 ‘반혁명주의자’, 트로츠키주의자라고 하며 추방했다. 그러더니 그들 자신이 제명당한 후에는, 우리가 회원도 없고 영향력도 없는 작은 종파라며 비난했다. 반면 그들은 처음부터 상당히 큰 규모로 시작했다. 하지만 5년 동안, 우리는 꾸준히 그들을 우리 규모로 줄여나갔다. 우리가 성장하고, 강해져온 반면, 그들은 하락해왔다. 우리가 새 당을 제안하자 꽤 많은 관심이 쏟아졌다. 러브스톤 조직도 무관심할 수 없었다.
그 결과 러브스톤파는 그 주제로 토론하자고 우리가 초청하자 거기에 응할 필요를 느꼈다. “새로운 당과 새로운 인터내셔널로 힘차게 나아가자.” 이것이 그 토론에서 내가 제기한 입장이었다. 러브스톤의 입장은 “코민테른을 개혁하고 통일하자”였다. 당시는 독일 사태가 발생한 지 1년이 지났을 때였다. 러브스톤은 여전히 코민테른을 개혁하고 싶어 했다. 그것을 개혁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통일시키자고 했다. 어떻게? 우선 공산당이 러브스톤파를 다시 받아들인다. 그 다음에 가차 없이 쫓겨났던 우리 트로츠키주의자들을 공산당이 다시 받아들여야 한다. 국제적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다. [이것이 러브스톤의 구체적 입장이었다.]
하지만 그때 우리는 파산한 코민테른에는 등을 돌린 상태였다. 물이 풍차를 덮을 정도로 많았다. 너무 많은 잘못, 너무 많은 범죄와 배신이 저질러졌다. 스탈린주의 인터내셔널은 피를 너무 많이 흘리게 했다. 우리는 깨끗한 깃발의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호소했다. 나는 이 관점에서 토론했다. 그 토론에서 우리는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
관심이 많았고, 청중 규모가 매우 컸다. <투사>는 거기에 1,500명이 왔다고 보도했다. 내 생각에도 그 정도에 가깝게 많은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다. 우리가 공산당에서 제명당한 뒤 열었던 정치행사 중에서 그 행사에 가장 많은 청중이 왔다. 진짜 청중 앞에서 오랜 적대자와 다시 한 번 싸우는 옛날로 돌아간 듯했다. 비록 지금 싸움은 훨씬 다르고, 더 높은 차원에서 벌어지고 있지만 말이다. 청중 가운데는 토론자들이 대표하는 두 조직의 성원과 지지자 외에도, 많은 좌익 사회주의자와 청년사회주의동맹원들, 일부 스탈린주의자들과 상당수의 무당파 급진주의자와 미국노동자당 성원들이 있었다. 매우 중요한 기회였다. 스탈린주의자들과 결별한 많은 사람이 당시에 러브스톤파와 트로츠키주의자들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새로운 당, 새로운 인터내셔널이라는 우리의 슬로건은 현실과 필요에 더 잘 부합했다. 그래서 스탈린주의로부터 돌아선 사람 대다수가 거기에 공감했다. 우리 입장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었고, 훨씬 더 현실적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흔들리는 모든 사람을 우리 편으로 거의 다 끌어당길 수 있었다. 러브스톤파는 독일 배신 이후에 파산한 코민테른을 ‘재통일’시킨다는 철지난 입장 때문에 별 진전을 이뤄내지 못했다.
진군하는 트로츠키주의
이 토론에서 성공함으로써 우리는 제4인터내셔널 건설 계획에 대한 일련의 강좌를 마련할 수 있었다. 우리가 강좌를 위해 그 어느 때보다 큰 홀을 사용해야 했다는 점은 우리 운동의 급성장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우리는 어빙 플라자로 옮겨야 했다. 강좌의 청중은 우리가 최악의 고립을 겪은 5년간 익숙했던 청중의 3~4배에 달했다.
그 시절에 트로츠키주의는 정치 무대에 올라가 충만한 자신감으로 강하게 전진해갔다. 1934년 3, 4월에 <투사>는 처음으로 서부 해안 전반으로까지 확대된 샥트먼의 전국 순회를 보고한다. 그의 순회강연 주제는 ‘새로운 당과 새로운 인터내셔널’이었다. 1934년 3월 31일, <투사>는 1면 전체에 걸쳐 국제공산주의동맹(세계 트로츠키주의 조직)의 선언을 실었다. 이 선언은 제2, 제3 인터내셔널의 파산에 맞서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건설하기 위해 결집하자고 전 세계 혁명적 사회주의 당과 그룹에 호소했다.
세계적 규모에서 트로츠키주의는 진군 중이었다. 미국의 우리도 보조를 맞추었다. 진실로, 우리는 모든 기회를 붙잡고 모든 전선에서 자신감 있게 전진했다. 우리는 국제조직의 행진에서 선두에 서 있었다. 그리고 노조 운동에서, 특히 1934년 5월과 7,8월의 거대한 미니애폴리스 파업에서 기회를 얻었다. 그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줄 준비가 완전히 돼있었다. 그리고 해냈다.
1934년의 파업물결
미국에서 대공황이 4년째 지속되고 있던 1933년, 미국노동자들은 미국 역사상 전례 없는 규모로 노조 조직화 운동을 시작하며 깨어나고 있었다. 그것을 배경으로 온갖 다양한 정당과 그룹, 경향이 성장했다. 미국 노동자들의 운동은 원자화된 상태를 깨뜨리고, 노조를 통해 조직적으로 뭉쳐 자본가들과 대결하는 방향으로 맹렬하게 치달아갔다.
이 거대한 운동은 성난 파도처럼 발전해갔다. 루즈벨트 정부 첫 해[1933년]에 벌어진 첫 파업의 물결은 상당한 양보를 얻어냈다. 하지만 조직적 성과는 크지 않았다. 활력이 부족했고 적절한 지도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 노동자들의 분투는 정부의 ‘중재’나 잔혹한 탄압 때문에 좌절을 겪었다.
파업과 조직화의 두 번째 물결은 1934년에 펼쳐졌다. 뒤이어 1936~37년에는 더욱 더 강력한 운동이 등장했다. 자동차산업과 고무산업에서 점거파업이 벌어지고 산별노조회의(CIO)가 급성장한 것이 그 정점이었다.
오늘 강연에서 나는 미니애폴리스 파업으로 대표되는 1934년 파업물결을 다룰 것이다. 그것은 실제 파업을 조직하고 이끄는 데서 혁명적 맑스주의 그룹이 효과적으로 개입한 첫 번째 사례였다. 부분적 경제회복이 이런 파업물결과 조직화운동의 토대가 됐다.
이 점은 전에도 언급했지만, 거듭 말할 필요가 있다. 심각한 불황에 빠져 실업자가 넘쳐날 때, 노동자들은 자신감을 잃고 실업의 위협에 불안해하며 어떤 행동도 하기를 두려워한다. 하지만, 경제가 회복되면 노동자들은 새로운 자신감을 얻어 심각한 불황기에 박탈당한 것 중 일부를 되찾으려고 움직이기 시작한다.
톨레도의 오토라이트 파업
미국에서 트로츠키주의 운동의 대중활동을 위한 기반은 당연하게도 대중 스스로의 행동이 마련해주었다. 1934년 봄에 톨레도에서 벌어진 오토라이트 파업은 전국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는데, 이 파업에는 새로운 전투적 투쟁방식과 기법들이 도입됐다. 미국노동자당 건설을 위해 임시위원회를 설립한 ‘진보노동행동협회’라는 명칭의 정치적 또는 준정치적 그룹이 그들의 실업자동맹을 매개로 톨레도에서 이 엄청나게 중요한 파업을 이끌었다.
실업자들의 역할
이 파업은 전투적 활동가들이 이끈 실업자조직이 산업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얼마나 큰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처음으로 보여주었다. 머스티 그룹이 조직하고 지도한 톨레도의 실업자조직은 사실상 오토라이트 파업의 지도부가 되어, 보수적인 직종별노조 관료들이 제한하는 범위를 훨씬 뛰어넘는 수준의 대중적 피켓팅과 전투를 이끌었다.
미니애폴리스 트럭기사들의 파업
미니애폴리스 파업은 그 수준을 더 끌어올렸다. 정치적 지도의 결정적 역할, 파업이 가진 잠재력의 극대화 등 모든 척도에서, 미니애폴리스의 운전기사들, 보조기사들, 화물적재 노동자들이 1934년 5월과 7~8월에 한층 높은 규모로 벌인 파업은 1934년 파업물결의 최고 정점에 있었다. 이 파업이 미국 트로츠키주의를 중대한 시험에 들게 했다.
5년 동안 우리는 공산당을 비판하고, 매우 추상적인 이론적 문제들만 해명하면서 외롭게 외치고 있었다. 우리는 종파주의자이자 궤변론자들일 뿐이라는 비난을 수차례 들어왔다. 이제 미국 트로츠키주의가 미니애폴리스에서 대중운동에 개입할 기회를 얻으면서 정면으로 시험대에 섰다. 우리가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종파적 궤변론자들의 운동인지, 아니면 노동자대중운동에 실질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역동적 정치세력인지를 행동으로 증명해야 했다.
미니애폴리스의 우리 동지들은 먼저 석탄야적장에서 작업을 시작했고, 그 뒤 조직화 캠페인을 전체 기사들과 보조기사들로 확대했다. 우리 운동의 지도부가 미리 그것을 계획하지는 않았다. 미니애폴리스 운전기사들은 미국노동자계급에서 가장 단호한 부위가 전혀 아니었다. 우리는 우리에게 기회가 열려있는 그런 곳에서 실질적 노동운동을 시작했다. 선호도나 기분에 따라 인위적으로 계기를 선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누구든 문이 열려 있는 곳을 통해 대중운동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일련의 상황 때문에 미니애폴리스는 우리가 노조 영역에서 중요하게 첫 시도를 하고 성공을 거둔 중심지가 됐다. 우리에게는 검증받은 노련한 사회주의자 그룹이 미니애폴리스에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또한 경험 많은 노조 활동가들이었다. 그들은 그 지역에 뿌리를 내렸고, 잘 알려져 있었다. 불황기에 그들은 석탄야적장에서 함께 일했다. 현장을 조직할 기회가 열리자 그것을 움켜잡았고, 성공적인 3일간의 파업을 통해 자기 능력을 빠르게 증명했다. 그러고는 말할 것도 없이 조직화 작업을 운송산업 전반으로 확대했다.
미니애폴리스는 손쉬운 활동무대가 아니었다. 사실 이곳은 악명 높은 오픈숍 도시로, 전국에서 가장 어려운 곳 중 하나였다. 냉혹한 고용주들의 조직인 시민연맹이 15년에서 20년 동안 철권으로 미니애폴리스를 지배해왔다. 이 기간 동안에는 조금이라도 중요한 파업은 단 하나도 성공하지 못했다. 심지어 가장 안정적이고 효과적인 직종별 노조인 건설노조조차 미니애폴리스에서 쫓겨나면서, 가장 중요한 건설업이 방치됐다. 이곳은 파업이 일어나기 힘든 도시였고, 오픈숍, 끔찍한 저임금, 살인적인 노동시간, 그리고 허약하고 무능력한 직업별 조합운동의 도시였다.
우리가 지난주에 다뤘던 탄광파업은 거대한 전투 전에 치러진 예비 소전투였다. 이 파업의 결정적 승리와 그 전투성, 훌륭한 조직화와 재빠른 성공은, 당시까지 불황기 내내 조직의 이점을 누리지 못한 채 끔찍하게 착취당해 온 트럭 기사들과 보조기사들 전반을 조직하는 자극제가 됐다. 사실 이 산업에도 노조가 하나 있었지만, 거의 껍데기만 남은 상태였다. 한두 개 기업과 초라한 단체협약을 맺은 매우 적은 수의 조합원들이 있었을 뿐, 트럭기사들과 보조기사들의 진정한 대중조직은 이 도시에 없었다.
탄광파업의 성공은 트럭운송 노동자들을 고양시켰다. 임금은 너무 적고, 일은 너무 길게 했기 때문에, 이들은 불붙기 직전이었다. 그 오랜 기간 자본가들은 노조 없이 맘대로 탐욕을 부리면서 너무 멀리 나갔다(언제나 사장들은 너무 멀리 나간다). 그래서 밑바닥 노동자들은 노조를 만든다는 소식을 반겼다.
미니애폴리스에서 우리는 노조 활동을 처음부터 끝까지 정치적으로 지도했다. 우리의 전술은 <투사>가 끊임없이 강조한 일반적 정책에 따랐다. 그것은 미국노총(AFL)으로 대변되는 노동운동의 주요 흐름으로 혁명가들이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기존 노조운동에 합류하겠다는 대중 심리와 어긋나게 인위적으로 구상한 노조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대중이 나아가고 있는 조직화 노선을 따라가는 것이 우리 노선이었다. 5년 동안 우리는 공산당이 인위적으로 만든 ‘적색 노조’라는 극좌적 교리에 맞서 단호하게 투쟁했다. 노동자들이 적색노조 교리를 보이콧하자, 결국 선진부위는 고립됐다. 노동자대중은 조직적으로 뭉치려 하는 건강한 본능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도움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다른 조직 노동자들과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지, 말 많은 급진파들과 함께 따로 있고 싶어 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당연하다. 도움을 얻을 수도 없고, 조직돼 있지도 않은 노동자대중은 기존 노조들에 지나치게 기대를 건다. 이 노조들이 아무리 보수적이고 반동적일지라도 말이다. 노동자들은 고립을 두려워한다. 이 점에서 노동자들은 완벽한 노조 형태를 정확하고 세밀하게 지시하려는 종파주의자들이나 교조주의자들보다 현명하다.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미니애폴리스 노동자들은 삶을 너무도 고단하게 만드는 사장들에 맞선 싸움에서 지원받기를 기대하며 공인된 운동에 합류해야겠다고 강하게 희망했다. 우리는 노동자들의 전반적 경향을 따르면서, 주어진 기회를 이용해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면 쓸데없는 곤란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노동자들이 원하지 않는 새로운 조직화계획을 납득시키려고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노동자들의 경향에 적응하는 것이 훨씬 더 좋았다. 또한 기존의 공식적 노동운동으로부터 지원받을 가능성을 이용하는 것이 훨씬 더 좋았다.
미니애폴리스에서 우리 동지들이 미국노총에 가입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았다. 두 번이나 비난받고, 두 번이나 제명될 정도로 찍혀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투쟁과정에서 공산당뿐만 아니라 미국노총에서도 쫓겨났다. 1926~27년의 ‘빨갱이 사냥’ 기간에 미국노동운동에서 반동이 고조됐을 때, 미니애폴리스 노조들에서 활동하던 우리 동지들 모두가 사실상 제명됐다. 1년 뒤 공산당도 그들을 완전히 고립시키기 위해 제명절차를 밟았다.
빌 브라운
하지만 조직화를 향한 노동자들의 압력이 노조 관료들의 판결보다 더 강했다. 우리 동지들이 노동자들의 신뢰와 믿음을 얻었다는 점이 증명됐다. 그 덕분에 우리 동지들이 노동자들을 조직할 수 있었다. 안쓰러울 정도로 허약한 미니애폴리스 노조운동의 상태, 그리고 어느 정도 새로운 피가 필요하다고 느낀 직종별노조 조합원들의 심리 등이 모두 팀스터 노조를 통해 우리 동지들이 미국노총으로 복귀하는 데 유리했다. 또한 운 좋게도 빌 브라운이라는 전투적 노조활동가가 미니애폴리스의 팀스터노조 574지부 지부장이자 팀스터공동협의회 의장이었다. 그는 계급적 본능이 건강했고, 노동자들을 조직해 사장들과 제대로 싸우는 방법을 아는 이들과 협력해야 한다고 강하게 생각했다. 그것은 우리에게 행운이었다. 그런 일이 종종 발생했다. 행운은 신념 있는 자들의 편이다. 만일 바르게 살고 스스로 정당하게 행동한다면, 때때로 행운을 얻게 된다. 행운이 다가왔을 때는 그것을 부여잡고 최대한 이용해야 한다.
어떻게 노동자들을 조직해 투쟁으로 이끌 수 있는지를 아는 ‘새로운 사람들’에게 노조 문호를 개방한 빌 브라운이라는 훌륭한 인물이 팀스터 574지부장이라는 우연적인 환경을 우리는 정말 최대한 이용했다. 하지만 우리 동지들은 이 노조에서는 신참이었다. 직책을 맡을 만큼 충분히 오래 활동하지 못했고, 싸움이 터져 나온 상황에서도 단지 조합원일 뿐이었다. 그래서 세 차례 파업 동안 우리 동지들(트로츠키주의 그룹의 회원들)중 단 한 명도 노조 간부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파업을 조직하고 이끌었다. 그들은 조직화 캠페인을 이끌고 파업을 지도하려고 만든 일종의 법외기구인 ‘조직위원회’에 참여했다.
‘조직위원회’
조직화 캠페인과 파업은 노조 공식 지도부를 실질적으로 뛰어넘어 진행됐다. 파업의 실질적 지도부에 직접 참여한 정식 간부로는 조직위원회와 협력한 빌 브라운이 유일했다. 이 조직위원회는 초기에 하나의 가치를 입증했는데(다른 가치들은 그 뒤에 드러난다),그것은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법을 이해했다는 점이다. 분명하게도 미니애폴리스의 경직된 노조 관료들은 그것을 알지 못했고, 배울 수 없었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조직을 깨뜨릴 수 있는지를 알았다. 이런 자들은 어디서나 똑같았다. 그들은 종종 노동자들이 노조 문을 부수고 쳐들어올 때, 노동자들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알았다. 하지만 밖으로 나가 실제로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일으켜 세우며, 믿음과 확신으로 고무시켜야 할 때, 전통적 직종별노조 관료들은 그것을 할 수 없었다. 그것은 그들의 영역이 아니었고 그들의 역할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럴 의욕조차 없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이끈 조직위원회는 트럭운송산업 노동자들을 조직한 뒤, 노동운동의 다른 부위들이 이들을 지원하게 했다. 노동자투쟁이 고립되게 놔두지 않았다. 그들은 중앙노조를 통해 미니애폴리스의 전체 노동운동이 새로 조직된 트럭기사들을 지지하게 만드는 활동을 시작했다. 아래로부터 압력을 조직하는 한편 노조 관료들과도 논의했다. 중앙노조 간부들이 캠페인에 관여하고, 노동자들의 요구를 승인하는 결의안들을 통과시키며, 공식적으로 책임을 떠맡도록 만들기 위해 끈질기게 작업했다. 행동할 시간이 왔을 때, 미국노총의 공식 노조들로 대표되는 미니애폴리스 노동운동은 이미 요구들을 지지하고 결국은 파업도 지지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
5월에 총파업의 불길이 치솟았다. 오랫동안 지배력이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자만에 빠졌던 사장들은 몹시도 놀랐다. 탄광파업을 겪고도 미니애폴리스 노조운동에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는 점을 그들은 아직 확실히 깨닫지 못했다. 여전히 그들은 그 싹을 잘라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우리 동지들에게 술책을 부려 궁지로 몰고자 했으며, 또한 많은 노조를 해체시켰던 노동위원회와 협상하는 수렁 속으로 빠뜨리려 했다. 그들이 사업을 한창 벌이고 있을 때, 즉 그들이 노조에 협상의 올가미를 걸었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우리 동지들은 한 방에 그것을 뚫어냈다. 총파업으로 그들의 코를 납작하게 갈겨주었다. 트럭들은 발이 묶였고, ‘교섭’은 길거리에서 열렸다.
5월 총파업은 전례 없는 규모로 미니애폴리스를 뒤흔들었다. 또한 전혀 순종적이지 않은 파업양상은 전국에 충격을 줬다. 미국 전역을 울리는 강력한 타격과 함께 파업이 시작됐고, 사장들은 트로츠키주의자들이 파업을 지도하고 있다는 점을 광분하며 널리 광고했다. 급진적 노동자들은 뉴욕 호텔 파업과 필드 사건 때 우리가 단호하게 행동한 것에 주목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미니애폴리스에서 5월 파업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서 그들은 이렇게 느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한다면 한다. 어떤 일을 시작하면, 해내고 만다.” 더 이상 트로츠키주의자들을 ‘종파주의’라고 비웃을 수 없었다.
당시 전국 100군데에서 파업한 노동자들과 미니애폴리스에서 파업한 노동자들 사이에 어떤 중요하고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거의 모든 파업에서 노동자들은 최고의 전투성을 보여준다. 차이는 지도부와 정책에 있었다. 실제로 다른 모든 파업에서 일반 노동자들의 전투성은 위로부터 억제됐다. 지도부는 정부와 언론, 성직자 등 이런저런 것들에게 겁먹었다. 그들은 교섭을 위해 가두투쟁과 피켓라인에서 충돌하는 것을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미니애폴리스에서 일반노동자들의 전투성은 억압당하지 않았고, 오히려 위로부터 조직되고 유도됐다.
오늘날 모든 파업에는 정치적 지도가 필요하다. 당시 파업은 모든 상황의 한가운데로 정부와 그 대리인들, 기구들을 끌어들였다. 어떤 정치노선도 없는 파업지도부는 이미 1934년에 시대에 뒤떨어지게 됐다. 정부 개입 없이 사장들과 거래하곤 했던 낡은 노조운동은 구시대의 유물이 됐다. 오늘날의 노동운동은 항상 정부와 대결해야 하기에 정치적 지도가 필요하다. 우리 동지들은 정치활동가들이고 정치 신념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준비해두고 있었다. 우리 동지들은 계급투쟁 정책을 따랐다. 당시 다른 수많은 파업 지도부와는 달리, 파업을 방해하고 파괴하기 위한 체계인 전국노동위원회와 그 보조기구들의 책략에 속거나 휘둘리지 않았다. ‘노동자의 친구’로 자임했던 자유주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시급을 몇 센트 올리도록 해 노동자들을 돕겠다고 했지만, 우리 동지들은 루즈벨트의 어떤 제안에도 속지 않았고 노동위원회에 전혀 기대지 않았다. 심지어 노동자의 편으로 여겨졌던 농민노동자당 당원이 당시 미네소타 주지사로 있었지만, 그 사실에도 현혹되지 않았다.
우리 동지들은 노동자들의 힘과 단결로 승리하기 위해 계급투쟁 정책과 노동자들의 역량 말고는 그 어떤 것도, 그 누구도 믿지 않았다. 사장들은 노조를 전혀 인정하지 않을 것이고, 임금 인상이나 지독한 노동시간의 단축에 대한 그 어떤 양보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노동자들이 압력을 넣어야 하며, 노조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싸워야 한다는 점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계급전쟁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준비했다. 흥정이 아니라 힘이 결정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허풍쟁이들은 근본 문제들은 외면하고 부수적인 문제들에 매달린다. 계급적 이해가 충돌하는 문제들에서는 싸움을 준비해야 한다.
미니애폴리스의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과정에서 이런 전반적 구상에 따라 전투전략을 짰다. 독창적인 것이 처음으로 미니애폴리스에서 등장했다. 사전에 철저히 계획하고 세밀하게 준비한 파업이 그것이다. 이것은 마지막 병사의 마지막 군복 단추까지 철저히 점검했던 독일군의 특성과도 비슷했다. 파업돌입 시한이 다가왔을 때도 사장들은 여전히 책략과 허세를 부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 동지들은 행동을 위한 진지를 만들고 있었다. 사장들의 대변인과 미니애폴리스 트리뷴 신문은 파업을 하루 앞둔 마지막 순간에야 이렇게 보도했다.
“노조의 파업 준비를 보면, 미니애폴리스 트럭기사들의 파업은 엄청난 사건이 될 것이다……. 공식적 파업돌입 시간은 화요일 밤 11시 30분이지만, 이미 시카고 1900번가에 자리 잡은 ‘본부’는 군사조직처럼 정밀하게 움직이고 있다.”
우리 동지들은 완비된 식당을 갖추고 있었다. 우리는 파업노동자들이 배고플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파업을 위해 식당을 사전에 조직했다. 또한 파업이 벌어지기도 전에 파업 본부가 있는 차고에 응급실을 마련했고, 의사와 간호사를 준비시켰다. 왜 그랬을까? 사장들과 그들의 경찰, 그리고 깡패들과 보안관들이 다른 모든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파업을 두들겨 부수려 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만일 동료들이 부상당하더라도 병원에 갔다가 체포되는 일이 없도록 할 준비가 돼 있었다. 동료 노동자들이 피켓라인에서 다쳤을 때는 본부로 데려가서 치료했다.
우리 동지들은 사장들을 곤란에 빠뜨리려고 미국혁신광부연합을 본받아 가족대책위를 조직했다. 그리고 여성들은 곳곳에서 사장들과 시당국에 항의했고 그들을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가대위는 가장 중요한 정치적 무기 가운데 하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사측이 파업파괴자들을 얼마나 쓰고 있는지를 감시하고 계산하고 보고하는 임무를 한두 명에게 맡기는 것은 실제 투쟁에서는 효과가 없었다. 그들은 피켓팅을 하면서 어떤 비조합원도 출근하지 못하게 막았다. 파업 본부를 차고에 둔 것은 이런 피켓팅을 훨씬 쉽게 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피켓팅뿐만 아니라, 그것을 위한 차량단도 조직했다. 미니애폴리스의 파업노동자들, 지지자들, 노조 활동가들 모두에게 자기 차량을 쓸 수 있게 제공하라고 요청했다. 그렇게 해서 파업위원회는 언제든 사용할 수 있는 차량단을 보유했다. 그리고 차량 피켓대오들은 도시 전역의 전략 거점들에 배치됐다.
트럭에 시동이 걸리거나 트럭이 이동하려 한다는 보고가 들어오면 언제라도 ‘비상 차량배치 담당’은 차고에 있는 스피커로 밖으로 나가 파업 불참 트럭기사와 언쟁할 피켓 대오와 차량 수를 요청했다.
패럴 답스
5월 파업에서 ‘비상 차량배치 담당’을 맡은 건 젊은 노동자 패럴 답스였다. 그는 석탄야적장 출신으로 노조에 가입해 파업에 참가했으며, 그 뒤 당원이 됐다. 우리는 그를 차량단과 피켓대오를 출동시키는 ‘비상 차량배치 담당’으로 처음 알게 됐다. 처음에 피켓대오는 맨손으로 나갔다가 머리가 깨지고 여러 부상을 입은 채로 돌아왔다. 그 뒤 그들은 다음 출동을 위해 곤봉을 준비했다. 곤봉은 아일랜드 사람이라면 다 알 듯이 갑자기 다리를 절 때 기댈 수 있도록 산사나무로 만들었다. 물론, 다른 목적을 위해서도 휴대했다. 사장들과 경찰이 힘으로 파업을 분쇄하려는 시도는 유명한 ‘시장전투’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도시의 전략지역 중 한 곳인 도매시장을 개장하려면 트럭을 가동해야 했기에, 전 경찰병력으로도 모자라 수천 명의 특수보안관을 동원했다.
‘보안관 패주 전투’
도시의 소부르주아계급과 자본가계급, 그리고 전문직에서 모집된 보안관들은 일종의 축제를 즐기는 기분으로 시장에 왔다. 그들은 파업 노동자들을 두들겨 패면서 즐길 생각이었다. 어떤 특수보안관은 폴로 경기 모자를 쓰고 왔다. 이 경솔한 스포츠맨은 실수를 저질렀다. 이것은 폴로 경기가 아니었다. 다른 노조들과 실업자 조직들에서도 파업을 지지하러 왔다. 노조 피켓대오는 결연하게 조직돼 있었다. 그런데 이 대오를 향해 보안관과 경찰 깡패들이 달려들었다. 시장에서 피켓대오를 몰아내려는 시도는 결국 실패했다. 노동자들이 반격하자 그들은 도망쳐버렸다. 이 전투는 미니애폴리스의 역사에 ‘보안관 패주 전투’로 기록된다. 두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는데, 두 명 모두 죽었다. 이 전투는 각지의 노동자들이 미니애폴리스를 치켜세우며 평가하게 만든 이 파업의 모습 중 하나다. 그 무렵 연이은 파업에서 언론은 똑같은 줄거리를 단조롭게 반복했다. “두 명의 파업노동자가 죽었다. 네 명의 파업노동자가 총에 맞았다. 스무 명의 노동자가 체포됐다.” 이곳에서는 파업이 완전히 일방적으로 이루어졌다. 한 쪽 끝에서부터 다른 쪽 끝까지 노동운동 전체가 미니애폴리스 투사들의 전투성과 굳은 의지에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들은 판세를 뒤엎었고, 도처의 노동자투사들은 그들의 이름을 칭송했다.
조직화 캠페인이 진전되고 있을 때, 뉴욕의 우리 전국위원회는 모든 것을 보고받고 있었고, 편지를 통해 최대한 협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파업이 터져 나왔을 때, 우리는 더 많은 것을 해야 하며,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도와야 할 때임을 완전히 이해했다. 나는 동지들을 지원하기 위한 파견 결정에 따라, 특히 협상을 조정하기 위해 비행기로 미니애폴리스에 갔다. 당시에 우리는 사무실에 전화를 놓을 수 없을 정도로 너무 가난했다. 비행기 요금 같은 사치스런 지출은 전혀 할 수 없는 재정 상태였다. 하지만 필요하다면 몇 시간을 아끼기 위해 비행기 요금을 마련할 방법을 찾아낸 것은 우리가 이 투쟁을 어떻게 바라봤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다. 이처럼 우리의 일반적 지출을 훨씬 뛰어넘는 비용을 들여가며 활동한 것은 투쟁에 참여하고 있는 지역 동지들에게 가능한 모든 조언과 지원을 제공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동맹의 회원으로서 그런 지원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큼 중요한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우리 동맹은 미니애폴리스로 전국위원회 대표를 파견하면서, 그들의 활동을 책임지고자 했다. 만일 일이 잘못될 경우(파업에서 일이 잘못될 가능성은 항상 존재한다) 모든 책임이 지역 동지들에게 떠넘겨지지 않도록, 전국위원회가 그 책임을 지겠다는 것을 뜻했다. 우리는 늘 그렇게 해왔다. 우리 운동의 어느 지부가 행동에 개입할 때, 지역동지들이 자기 역량만으로 헤쳐 나가도록 방치하지 않았다. 전국지도부가 도와야 하며 결국은 책임져야 한다.
5월 파업은 단 6일 동안 지속됐고, 빠르게 합의에 도달했다. 사장들은 얼이 빠져있었고, 전국에서 합의를 끌어내라고 야단이었다. 루즈벨트 대통령과 올슨 주지사가 압력을 넣었다. 합의는 전면적 승리가 아니라 노조를 인정받는 부분적 승리이자 타협이었기 때문에, 스탈린주의 신문은 매우 급진적 입장으로 돌변해 합의를 격렬하게 공격했다. 우리는 우리 동지들이 결정한 합의에 전적으로 책임지고, 스탈린주의자들의 항의에 응대했다. 우리 신문은 이 논쟁에서 쉽게 스탈린주의자들을 물리칠 수 있었다. 우리는 미니애폴리스 파업의 합의문을 방어했고, 합의에 대해 악선전하면서 결국은 우리의 노조 활동을 악선전하려는 그들의 캠페인을 좌절시켰다. 급진적 노동운동가들은 이 파업의 진실을 확실히 알게 됐다. 우리는 파업의 모든 새로운 측면과 파업으로 가기 위한 준비들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한 <투사> 특별호를 발행했다. 파업을 주도했던 동지들 거의 모두 이것을 읽었다.
합의 타결에 대한 우리 설명의 요점은 이 시기 새로운 노조의 목표는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관한 것이었다. 우리는 미국노동자계급이 여전히 조직돼 있지 못하고 원자화돼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단지 숙련공 노동자 일부만이 직종별 노조로 조직돼 있어서, 이들이 거대한 미국노동자대중을 대표할 수는 없었다. 미국노동자들은 조직되지 못한 대중이었다. 그들의 첫 번째 바람과 요구는 다른 무언가를 할 수 있기 전에 먼저 첫걸음을 내딛는 것이었다. 그것은 노조를 건설하는 것이고 사장들이 그 노조를 인정하도록 강제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그 문제를 정식화했다.
첫 번째 전투에서 자신들의 노조를 승인받고 그것을 기반으로 입지를 만들고 강화할 수 있는 노동자 집단이 시의적절한 목표들을 달성하게 하고, 힘을 과신해 사기침체와 패배의 위험으로 돌진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우리가 계속해서 하고자 했던 것이며, 나는 그것이 완전히 정당했다고 생각한다. 그 합의가 옳다는 점이 증명됐다. 왜냐면 그 합의는 충분히 전진의 발판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노조는 안정성을 유지했다. 그것은 일시적 성공이 아니었다. 노조는 전진하기 시작했고, 새로운 조합원들을 모집하는 한편 새로운 지도 중핵을 교육하기 시작했다. 몇 주가 지나자, 트럭 기사들을 기만해 파업의 과실을 무력화하려 했던 사장들의 계획은 별 효과가 없는 것으로 분명하게 드러났다.
사장들은 자신들이 잘못 판단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미니애폴리스는 오픈숍 노예도시로서 노조는 존재할 수 없고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는 교훈을 노동자들에게 가르치기 위해서는 더 긴 싸움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누군가가 그들에게 나쁜 조언을 했다. 노동자를 혐오하는 자들과 자본가들의 총본부인 시민연맹은 협정을 깨기 위해, 자신들이 동의한 양보를 지연시키고 되돌리기 위해, 노동자들이 만들어 낸 성과를 잘라내기 위해 트럭운송산업 사장들을 쑤시고 부추겼다.
7월 파업
노조 지도부는 상황을 이해했다. 첫 번째 힘 대결만으로는 사장들을 충분히 승복시킬 수 없었다. 다시 한 번 힘을 보여주는 것이 필요했다. 그들은 한 번 더 파업을 준비했다. 트럭운송산업 노동자들은 다시 행동에 나설 준비를 했다. 미니애폴리스의 전체 노동운동 역시 그들을 지지하기 위해 재차 결집했는데, 그것은 그 어느 때보다 인상적이고 역동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팀스터 574지부를 지지하는 중앙노조와 그 가입 노조들의 결의안 채택 운동은 조직노동자들의 대행진에 초점을 맞춰 이뤄졌다. 시립극장에서 열릴 거대한 대중집회를 위해, 그리고 투쟁을 앞두고 있는 트럭기사들을 지지하고 뒷받침하기 위해, 다양한 노조에서 온 노동자들이 대대적으로 행진했다. 그것은 노동자들이 노동자 연대와 새로운 전투성을 움켜쥐었음을 분명하게 보여줬다.
사장들은 완강하게 버텼다. 그들은 신문에 선정적인 광고를 실어 ‘트로츠키파 공산주의자들’을 비난하면서 ‘적색 공포’를 대대적으로 불러일으켰다. 노조 측에서는 5월 파업과 마찬가지로 준비를 계속해 나갔는데, 훨씬 더 치밀하고 조직적으로 계획했다. 파업을 회피한다면 노조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 분명해졌을 때, 미국공산주의자동맹 전국위원회는 전폭 지원을 결정했다. 이때 우리는 그 문제가 감히 쉽게 손댈 수 없는 진정한 시험대임을 알았다. 이 전투가 앞으로 몇 년간 우리의 미래를 좌우할 것임을 이해했다. 만일 우리가 소극적으로 지원하거나, 우리가 할 수 있는 이런저런 조력을 아낀다면, 그것이 승패를 좌우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미니애폴리스의 우리 동지들을 최대한 많이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노조와 직접 연결된 사람들만 노동자운동을 지원할 수 있다는 어리석은 생각에 빠지지 않았다. 오늘날의 파업은 다른 무엇보다도 정치적 지도를 필요로 한다. 만일 우리 당이(당시 우리는 우리의 동맹을 그렇게 불렀다) 그 존재가치에 부합하려 한다면, 당연히 지역 동지들을 지원하러 가야 했다. 노조지도부라면 항상 그렇듯이, 특히 파업시기에는 수만 가지 긴급한 세부사항들로 압박과 스트레스를 받았다. 하지만 당은 그것을 초월해 주요 문제들을 종합한다. 교활한 장치들과 속임수들, 압력행사 수단들을 갖춘 사장들과 그 정부에 맞선 투쟁에서 정치적 조언을 거부하는 노조 지도부는 눈먼 장님에 다름 아니다. 미니애폴리스의 우리 동지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에게 도움을 구했다.
우리는 상당수의 부대를 그 상황에 투입했다. 나는 두 번째 파업이 시작되기 2주 전에 그곳으로 갔다. 그곳에 간 지 며칠 뒤, 우리는 더 많은 지원을(사실 상근자 전원을)요청하기로 결정했다. 신문 작업을 위해 샥트먼과 하버트 솔로, 이렇게 두 명이 추가로 뉴욕에서 왔다. 당시에 하버트 솔로는 우리 운동의 지지자였는데, 경험 많고 재능 있는 집필가였다. 우리는 톨레도 오토라이트 파업의 아이디어를 빌려 또 다른 동지를 불렀다. 그의 고유한 전술은 파업을 도울 수 있도록 실업자들을 조직하는 것이었다. 그는 매우 유능한 대중활동가이자 노조 활동가인 휴고 올러였다. 그가 전처럼 우리를 위해 훌륭한 역할을 했던 것은 미니애폴리스 투쟁이 마지막이었다. 그 뒤 그는 종파적 약점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당시까지 올러는 괜찮았고, 어느 정도 파업에 기여했다. 그 외에 노조의 책임 변호사로 앨버트 골드만을 불러왔다. 우리는 괜찮은 변호사를 구할 수 있다면, 그 변호사가 파업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과거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우리 자신의 ‘대변인’이자 법적 투쟁에서 우리의 이해를 보호하고 정직하게 조언할 수 있는 법률 대리인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격렬한 파업에서는 온갖 부침이 등장한다. 때로는 파업지도부에 대한 악평이 견디기 힘들 정도로 거셀 수 있다. 그럴 때면 언제라도 변호사가 나서서, 조용하게 “함께 지혜를 모아봅시다. 그리고 법이 뭐라고 말하는지 한번 봅시다.”라고 말할 수 있다. 특히 앨버트 골드만 같은 성실하고 뛰어난 변호사가 있다면, 매우 유용하다.
뉴욕에 자리한 우리의 조직 중앙은 앞서 언급했던 원칙에 따라, 파업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이런 문제에서는 진지한 당 또는 진지한 사람이라면 그런 원칙을 모든 종류의 활동에서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무언가를 하려고 한다면, 결코 중도에 중단하거나 대충 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쪼록 철저하고 올바르게 해내는 것이 원칙이다. 미지근함에 화가 있을지니! “네가 이같이 미지근해,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으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해 내치리라.”
파업은 1934년 7월 16일에 시작됐고, 5주 동안 지속됐다. 나는 어떤 과장도 없이 미니애폴리스 트럭기사들과 보조기사들의 7~8월 파업이 미국노동운동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가장 영웅적이며, 가장 잘 조직된 투쟁 가운데 하나였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게다가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노동운동은 불길 속에서 벼려진 파업과 노조를 노동자대중운동 속에서 활동하는 트로츠키주의와 동일시했다. 사회적으로 더 중요한 위치와 산업에서 더 많은 노동자가 참여했던 파업을 포함해 당시 100건에 달했던 다른 파업들과 미니애폴리스 파업이 큰 차이를 보일 수 있었던 것은, 이 파업에 트로츠키주의가 기여를 많이 했기 때문이다. 트로츠키주의는 조직화와 파업준비 과정에서 세세한 부분까지 기여했다. 그것이 새롭고, 특히 트로츠키주의다운 것이었다. 다음으로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모든 노조 계획을 세우고 파업준비를 할 때 처음부터 끝까지 계급투쟁 노선을 적용했다. 그것은 모든 파업에서 볼 수 있는 주관적 대응이 아니었다. 투쟁의지를 갖고 힘으로 쟁취하지 않으면 사장한테 아무것도 얻어낼 수 없다는 계급투쟁 이론에 기초한 계획적 정책이었다.
연방 중재단
미니애폴리스 파업에서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세 번째로 기여한 것은, 이것이 가장 흥미롭고 아마 가장 결정적일 것인데, 정부 중재자들에게 유리한 상황에서 우리가 그들에게 맞섰다는 것이다. 당시에 정말 가장 애처로운 일 가운데 하나는 파업노동자들이 ‘노동자의 친구’로 가장한 연방 중재자들의 책략에 넘어가 분열해, 결국 파업이 무너지는 일이 계속해서 벌어졌다는 것이다.
이 교활한 자들은 지부 지도부의 무지와 무경험, 정치적 약점을 이용해 친구인 양 가장했다. 그들의 역할은 분쟁을 가라앉히기 위해 약한 편에게 양보를 강요하는 것이었다. 경험이 없고 정치적으로 교육받지 못한 파업지도부는 그들의 먹잇감이었다. 그들은 지도부를 방심하게 만들려고 상투적인 표현을 썼다. “제가 여러분에게 요청 드리는 것은 사장들에게 양보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도울 수 있도록 제게 양보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도부가 속아서 어떤 것을 놓쳐버린 뒤에는 “사장들에게 그에 상응하는 양보를 얻으려 했지만, 그들이 거부했습니다. 여러분이 조금 더 양보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대중 정서가 돌아서고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압력을 넣고 협박한다. “만일 여러분이 보다 합리적으로 행동하지 못하면,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여러분에 반대해 신문에 무언가를 공표할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말하거나 “루즈벨트가 성명을 발표할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렇게 몇 시간이고 풋내기들을 회의실에 잡아두면서 협박한다. 이것이 이 고용된 냉혹한 깡패들의 상투적인 수법이다.
그들은 그 수법을 또 한 번 써먹기 위해 기름을 잔뜩 칠하고 미니애폴리스로 왔다. 우리는 그들을 기다리며 앉아 있었다. “자, 여러분은 협상을 원합니다. 그렇지 않소? 좋습니다. 그렇게 합시다.” 물론 우리 동지들은 협상의 외교적 언사로서 그렇게 말했을 뿐이지, 그것을 중심에 두지는 않았다. 그들은 결코 574지부의 트로츠키주의 지도부와는 다른 의견으로 협상할 수 없었다. 그들은 계속 재갈이 물린 채 협상과 외교를 했다. 마침내 파업이 매듭지어질 때까지 우리는 그들 중 세 명의 진을 다 빼버렸다.
당시 연방 중재단으로 알려진 이 사기꾼들이 선호한 술책은 풋내기 파업지도부를 방에 모아놓고, 그들의 허영심을 부추겨 그들에게는 권한이 없는 어떤 형태의 타협을 저지르도록 유도하는 것이었다. 연방 중재단은 풋내기 파업지도부들에게 자신들이 ‘책임 있는’ 태도를 취해야 하는 ‘거물들’이라고 확신시키려 했다. 그들은 교섭에서 지도부가 양보한 타협안을 되돌리는 것은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무리 많은 노동자가 반대해도, 지도부가 이미 공식적으로 타협해버렸다는 사실은 노조의 처지를 곤란하게 만들고 일반 조합원들의 사기를 떨어뜨린다.
당시에 이런 판에 박힌 수작으로 많은 파업이 파괴됐다. 하지만 미니애폴리스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우리 동지들은 협상의 거물들이 전혀 아니었다. 동지들은 자신의 권한이 극도로 제한적이고, 사실은 노조 안에서 상대적으로 온건하고 합리적인 편이며, 만일 선을 넘는다면 다른 쪽 교섭위원들로 교체될 것이라고 못 박았다. 이것은 순진한 양을 잡기 위해 칼을 꺼내들고 미니애폴리스로 온 파업도살자들에게는 정말 곤란한 문제였다. 가끔씩 그랜트 던이 교섭위원으로 추가되곤 했다. 그는 구석에서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다가, 양보 운운하는 얘기가 조금이라도 나오면 항상 험악하게 노려보았다. 파업은 힘들고 격렬한 싸움이었지만 우리는 노조 교섭단 회의에서 중재자들을 어떻게 다룰지에 대해 즐겁게 준비했다. 우리는 그들을 경멸했다. 그들의 교활한 책략과 속임수, 파업노동자들의 좋은 동료이자 친구인 체하는 위선적인 가면을 경멸했다. 사실 그들은 정부 대리인일 뿐이었고, 따라서 전체 자본가계급의 대리인일 뿐이었다. 맑스주의자에게 그것은 너무도 분명했다. 그들은 풋내기들에게 적용하는 방법들로 우리를 속일 수 있다고 여긴 것에 대해 곤욕을 치러야 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것을 시도했다. 다른 방법을 몰랐던 것이 분명하다. 그들은 일에 착수해 사장들을 압박함으로써 노조에 양보하게 만들기 전까지는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었다. 우리 운동의 집단적인 정치적 경험은 연방 중재단을 다루는 데서 매우 유용했다. 어리석은 종파주의자들과는 달리 우리는 그들을 무시하지 않았다. 때때로 우리는 토론을 이끌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이 우리를 이용하지 못하게 했다. 우리는 한 순간도 그들을 신뢰하지 않았다. 파업에서 우리의 일반적인 전략은 어떤 것을 공짜로 넘겨주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지키고 싸우는 것이었다. 이것이 트로츠키주의자들이 기여한 네 번째 지점이다. 이것은 매우 단순하고 명확한 처방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당시 파업 지도부의 대다수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일간 조직가>
트로츠키주의가 미니애폴리스 파업에서 기여한 다섯 번째 것이자 가장 중요한 것은 일간 파업신문인 <일간 조직가>를 발행한 것이다. 미국노동운동 역사상 처음으로 파업노동자들은 자본가언론에 의지하도록 방치되지 않았다. 그래서 언론 때문에 흔들리거나 압박을 받는 일은 없었고, 자본가들이 독점한 언론 때문에 여론이 방향감각을 잃는 일도 없었다. 미니애폴리스 파업노동자들이 스스로 일간 신문을 발행했다. 50만 명의 석탄광부노조나 10만 명의 자동차노조 또는 철강노조가 아니라, 5천 명 트럭기사들의 신생 지역노조가 트로츠키주의 지도부의 도움으로 발행한 것이다. 이 지도부는 홍보와 선전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이해했다. 그런 노조 지도부는 매우 드물었다. 이 일간신문의 막대한 효과를 대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신문은 단 2면의 타블로이드판으로 발행했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자본가 언론에 완벽하게 대항할 수 있었다. 하루 이틀 뒤, 우리는 사장들의 일간지들이 말하는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은 온갖 것을 다뤘지만 파업노동자들에게 별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노동자들은 자기 신문을 갖고 있었고, 그것이 보고하는 것들을 절대적으로 믿었다. <조직가>는 마치 담요처럼 도시를 뒤덮었다. 본부에 있는 파업노동자들은 모두 신문에서 확실한 정보를 얻곤 했다. 가족대책위는 노동자들이 이용하는 도시의 모든 식당에서 신문을 팔았다. 노동자계급 거주지에 있는 많은 술집에는 신문 뭉치와 함께 모금함을 놓아두었다. 그렇게 해서 1달러짜리 지폐가 많이 모금됐고, 우호적인 바텐더들이 그것을 살펴봐줬다.
이동 중에 사람들에게 배포할 신문 뭉치를 얻기 위해, 매일 밤 노조원들이 각 현장과 철도역에서 오곤 했다. 이 작은 신문이 노동자들에게 미친 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조직가> 말고 다른 신문은 믿지 않았다. 때때로 자본가언론이 어떤 새로운 파업상황을 기사로 실었지만, 노동자들은 그것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진실을 확인하기 위해 <조직가>를 기다렸다. 많은 파업의 사기를 꺾었던 언론의 왜곡과 노골적인 날조가 미니애폴리스에서는 먹혀들지 않았다. <조직가> 최신호를 발행했을 때, 언제나처럼 파업본부를 휘감고 있던 군중 사이에서 누군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몇 번이고 들을 수 있었다. “<조직가>에 뭐라고 쓰여 있는지 봤죠!” 이 강력한 수단을 위해 노조는 단 한 푼도 지불할 필요가 없었다. 반대로 <조직가>는 재정이 없던 상황에서 첫날부터 계속해서 수익을 남겼다. 신문에서 나온 수익금은 매일매일 식당 운영비로 사용했다. 신문은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무료로 배포했지만, 거의 모든 지지자가 5센트에서 1달러까지 신문값을 냈다. 그렇게 신문은 파업노동자들의 사기를 북돋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교육자 역할이었다. 매일매일 신문은 파업소식, 사장들에 대한 조롱, 노동운동 정보 등을 실었다. 지역 동지가 그린 만화도 날마다 실렸다. 또한 매일같이 지난 24시간의 교훈을 밝힌 사설, 앞으로의 방향에 대한 의견을 실었다. “이런 일이 있었다. 앞으로 이런 일이 있을 것이다. 우리의 입장은 이것이다.” 파업노동자들은 중재단과 올슨 주지사의 모든 움직임에 미리 대비했고 무장돼 있었다. 만일 24시간 뒤를 내다볼 수 없었다면, 우리는 무능력한 맑스주의자로 남았을 것이다. 우리 예측은 정말 많이 적중했고, 파업노동자들은 그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기 시작했으며, 그만큼 그것에 의지했다. <조직가>는 미니애폴리스 파업의 무기고에 있는 모든 무기 가운데 최고였다. 나는 우리가 기여한 모든 것 가운데 승리를 위한 가장 결정적인 지렛대는 일간신문 발행이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조직가>가 없었다면 파업은 승리하지 못했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 모든 기여는 파업지도부로 있었던 지역동지들과 중앙위원회에서 보낸 상근자들이 최고의 협력을 했기에 종합적으로 실행할 수 있었다. 자만과 불성실 때문에 통탄스런 경험을 했던 호텔파업의 교훈을 미니애폴리스에서는 완전히 체화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긴밀하게 협력했다.
플로이드 올슨
농민노동자당 주지사 플로이드 올슨에게 파업은 골칫거리였다. 우리는 그가 처한 모순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한편으로 이른바 노동자들의 대변자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가정부의 주지사였다. 여론을 걱정하면서도 고용주들을 두려워했다. 그는 노동자들을 위해 무언가를 하거나 하는 것으로 비춰져야만 한다는 의무감과 파업이 한도를 벗어나도록 만들 수도 있다는 두려움 사이에서 궁지에 몰렸다. 우리 정책은 이런 모순들을 폭로하고, 그가 노동자들의 주지사로서 마땅히 해야만 하는 것들을 요구하고,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요구하며 매일매일 소리치는 것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그의 모든 그릇된 행동에 대해 비판하고 공격했으며, 파업노동자들이 그의 충고에 따라야 한다는 입장에 대해서는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다.
플로이드 올슨은 미네소타 주에서 공식 노동운동의 틀림없는 지도자였지만, 우리는 그의 지도를 인정하지 않았다. 현재 산별노조회의(CIO)와 미국노총(AFL)의 관료들이 루즈벨트의 지도를 받는 것처럼, 당시 미니애폴리스의 노동관료들은 그의 지도를 받고 있었다. 현재의 루즈벨트처럼, 플로이드 올슨은 574지부를 제외한 미니애폴리스 전체 노동운동의 대부였다. 하지만 그는 우리의 대부는 아니었다. 우리는 주저하지 않고 가장 무자비하게 그를 공격했다. 이런 공격을 받고 그는 조금씩 물러서면서 한두 번 양보했다. 파업 지도부는 그 즉시 그것을 움켜쥐었다. 우리는 그에게 아무 감정도 없었다. 지역 노동관료들은 그의 정치적 이력을 망칠까봐 걱정하며 울부짖고 난리쳤다. 우리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것은 그의 문제지 우리의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의 관심은 그에게서 더 많은 양보를 얻어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우리의 요구를 외쳤다. 노조 관료들은 죽도록 두려워했다. “그렇게 하지 마세요. 그를 파국으로 몰지 마세요. 그가 곤란한 입장이란 걸 생각하세요.” 우리는 그것을 무시하고 우리 방식을 밀고 나갔다. 양쪽에서 압력과 공격을 받으며 파업노동자들을 돕지도 외면하지도 못하고 난처해하면서, 플로이드 올슨은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것은 미국 역사상 전례 없는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농민노동당 주지사가 계엄령을 선언했고 트럭 운행을 중단시켰다. 그것은 노동자들의 편에 서기 위한 조치였다. 하지만 그 뒤 올슨은 특별허가를 받은 트럭에 대해서는 운행을 허가했다. 그것은 사장들을 위한 조치였다. 당연하게도 피켓대오는 허가를 받았건 아니건 트럭들을 멈춰 세우기 위해 나섰다. 그리고 며칠 뒤 농민노동자당 주지사의 주 방위군이 파업본부를 급습했고, 지도부를 체포했다.
캐넌과 샥트먼의 체포
이야기를 조금 뛰어넘자. 계엄령 선포의 첫 희생자이자, 올슨과 주 방위군의 첫 군사범은 나와 샥트먼이었다. 나는 그들이 어떻게 그곳에서 우리를 찾아냈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공개적으로 별로 드러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어째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샥트먼이 그곳에서 구한 커다란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있었던 것은 눈길을 끌었다. 그것 때문에 우리를 찾아냈을 수도 있다. 그날 저녁에 샥트먼과 나는 기분전환을 위해 파업본부를 나서서 번화가를 거닐며 어떤 공연이 있는지 둘러보았다. 헤너핀 거리 아래쪽 끝에 이르러, 우리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한 쪽에서는 벌레스크 스트립쇼가 열리고 있었고, 다른 쪽에서는 영화를 상영하고 있었다. 물론 나는 영화를 보자고 했다. 우리의 뒤를 밟아온 몇 명의 형사가 그곳으로 따라와 우리를 체포했다. 벌레스크쇼에서 체포되지 않은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만일 그랬다면 얼마나 망신이었을까. 그것을 만회할 기회는 없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들은 우리를 48시간 가까이 가둔 뒤, 법정으로 데려갔다. 법정과 그 주변에는 너무도 많은 총검들이 있었는데, 살면서 한 장소에서 그렇게 많은 것을 본 적이 없다. 이 젊은 주 방위군들은 북부의 시골뜨기들과 화이트칼라 애송이들로 구성됐는데, 모두가 총검을 사용하고 싶어서 안달하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 친구 몇 명이 법정에서 그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결국 판사는 우리를 주 방위군에게 넘겼고, 샥트먼과 나는 총검을 움켜쥐고 2열로 도열해있는 주 방위군 사이로 복도와 계단을 따라 걸어갔다. 법원 밖에 이르렀을 때, 머리 위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빌 브라운과 믹 던이 3층 창틀에 편안히 앉아서 과정을 지켜보고 있다가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며 웃어보였다. “그 총검들 조심해!” 빌이 소리쳤다. 미니애폴리스에서는 모든 게 재밌었다. 며칠 뒤 빌과 믹도 주 방위군에게 체포됐는데, 그들은 그것을 속 편하게 받아들였다.
그들은 우리를 유치장에 집어넣었다. 두세 명의 겁먹은 신참병이 내내 총검을 들고 우리를 감시했다. 앨버트 골드만이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고 위협하며 우리를 보러왔다. 주 방위군 장교들은 우리를 풀어주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시카고에서 온 변호사와 말썽을 부리고 싶지 않은 듯했다. 우리는 우리를 구속 시범사례로 만드는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물론 나가서 노조 운영위원회를 도울 수 있기를 바랐다. 우리는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우리에게 도시에서 떠나기로 약속한다면 풀어줄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에 동의한 후, 강을 건너 세인트폴로 갔다. 그리고는 매일 밤 그곳에서 중앙위원회 회의를 열었다. 감옥에 있지 않은 지도적 동지들은 모두 참가했다. 빌이 참가하기도 했고 그렇지 못하기도 했던 파업중앙위원회는 차량을 이용해 그곳에서 모여 그날의 경험과 다음날 계획을 얘기했다. 파업 전체 과정에서 미리 계획하거나 준비하지 않고 취해진 중대 조치는 전혀 없었다.
파업 본부에 대한 급습
뒤이어 파업본부가 급습당했다. 그날 새벽 4시에 주 방위군 병력이 본부를 포위했고, 수백 명의 피켓대오와 붙잡을 수 있는 모든 파업지도부를 체포했다. 믹 던, 빈센트 던, 빌 브라운이 체포됐다. 어수선한 와중에 몇 명의 지도부는 놓쳤다. 패럴 답스, 그랜트 던과 몇몇은 빠져나왔다. 이들이 쉽게 또 다른 위원회를 세웠고, 친숙한 몇 개의 차고들에 새로운 본부를 꾸렸다. 지하에서 조직된 피켓팅이 대단한 활력 속에서 계속됐다.
‘하스·더니건 계획’
싸움은 지속됐고 중재단은 계속해서 속임수를 썼다. 그런 상황에 첫 번째로 파견된 인물은 더니건이라는 남성이었다. 그는 검은색 리본을 매단 코걸이 안경을 쓰고 비싼 담배를 물었던 멋진 외모의 사내였지만,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잠시 동안 그는 파업지도부에게 이래라 저래라 지시하려는 헛된 시도를 하더니, 상당한 임금인상을 조건으로 노동자들의 요구안 전부를 무시하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그러는 동안 연방정부 최고의 협상가 중 한 명인 천주교 신부 하스가 파견됐다. 그는 더니건의 제안에 자기 안을 조합시켰다. 그렇게 해서 ‘하스·더니건 계획’이 탄생했다. 파업노동자들은 즉시 그것을 받아들였다. 사장들은 시간을 끌 구실을 얻었다. 그들은 정부 제안을 반대한다고 했지만, 당황스러워 보이지는 않았다. 노동자들은 우호적인 대중 여론을 모아내면서 상황을 효과적으로 촉진시켰다. 그 뒤 몇 주가 지나서야 하스 신부는 사장들에게 아무 압력도 미칠 수 없었음을 깨닫고, 파업노동자들에게 압력을 넣기로 결정한다. 그는 노조 교섭위원들에게 형편없이 문제를 제기했다. “사장들은 굴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굴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파업은 마무리해야 합니다. 워싱턴[미국 정부]에서 강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파업지도부는 대답했다. “아니 그럴 수 없소. 약속은 약속이오. 우리는 하스-더니건 계획을 받아들였소. 우리는 당신의 계획을 위해 싸우고 있소. 당신의 명예가 여기에 달려 있소.” 그러자 하스 신부는 항상 파업지도부를 협박하는 데 사용해온 방식으로 말했다. “우리는 일반조합원들에게 미국정부의 이름으로 호소할 겁니다.” 보통 이 위협은 경험 없는 노동자 지도부를 겁주어 철저히 무너뜨리곤 했다. 하지만 미니애폴리스 파업지도부는 겁먹지 않았다. “좋소. 그렇게 하시죠.” 그리고는 그를 위해 집회를 잡았다. 저런! 그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집회연사로 나서게 됐다. 파업 동안에 있었던 다른 모든 중요한 활동처럼 그 집회도 미리 계획하고 준비했다. 하스 신부의 발언이 끝나자마자 그를 향한 비난의 목소리가 폭풍우처럼 빗발쳤다. 일반 파업노동자들은 차례로 일어나, 이미 간부회의에서 개략적으로 설명했던 그의 발언내용을 얼마나 잘 기억했는지를 보여줬다. 그들은 하스 신부를 집회에서 거의 좇아내다시피 했고, 병이 나도록 만들었다. 그는 두 손을 다 들고 도시를 떠났다. 파업노동자들은 파업을 파괴하고 결국은 노조까지 파괴하려 했던 그의 배신적 시도를 비난하는 입장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승리
더니건도 끝났고, 하스 신부도 끝났다. 뒤이어 세 번째 중앙정부 중재자가 파견됐다. 그는 다른 이들의 통탄할 경험으로부터 어떤 사기술도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배웠다. 도나휴라는 이름의 그 중재자는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고, 며칠 내로 사실상 노조의 승리였던 중재안을 이끌어냈다.
노동운동의 신성들이 북서쪽 하늘에서 반짝이며 이름을 빛내는 순간이었다. 윌리엄 브라운, 세 명의 형제인 빈센트 던, 마일즈 던, 그랜트 던, 칼 스코글런드, 패럴 답스, 켈리 포스탈, 해리 디보어, 레이 레인볼트, 조지 프로시그가 그들이었다.
긴장과 위험으로부터 단 한 시간도 자유롭지 못했던 5주간의 치열한 투쟁 끝에 위대한 파업이 마무리됐다. 파업 동안 두 명의 노동자가 죽었고, 피켓대오가 트럭 운행을 막기 위해 싸우는 과정에서 다수가 총에 맞거나 두들겨 맞아 부상당했다. 온갖 고난과 압박을 엄청나게 견뎌야 했지만, 결국 노조가 승리했다. 노조는 그 싸움의 결과로 단단한 지반 위에 건설돼 굳건하게 자리 잡았다. 나는 이 투쟁을 통해 트로츠키주의가 대중운동 속에서 스스로를 명예롭게 입증해냈다고 생각한다.
미니애폴리스는 산업부흥법(NRA) 아래에서 펼쳐진 두 번째 파업물결의 정점이었다. 세 번째 물결이 두 번째 물결을 능가해 산별노조회의(CIO)의 점거파업에서 절정으로 치달을 운명이었던 것처럼, 두 번째 물결도 첫 번째보다 높이 치솟았다. 미국 노동자계급이라는 거인이 이제 자신의 힘을 느끼며, 어마어마한 잠재력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미국 노동자계급 안에 있던 힘과 용기, 독창성이라는 자산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34년 7월에 나는 우리 기관지 <새로운 인터내셔널> 첫 호에 이 파업의 물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산업부흥법 아래서 두 번째 파업물결은 첫 번째보다 더 거세게 몰아쳤고, 미국 노동자계급의 전진을 향한 분투를 보여주었다. 미래의 성장을 향한 엄청난 잠재력이 이 전진 속에서 명확하게 표현됐다.”
“이러한 엄청난 투쟁들에서 미국 전역의 노동자들은 이제 막 깨어나기 시작한 억제되지 않은 계급적 전투성을 발휘하고 있다. 이들은 패배를 겪어본 적이 없는 새로운 세대다. 이제 막 스스로를 자각하고 그 힘을 느끼기 시작했을 뿐이다. 스스로를 시험하는 첫 격돌에서 이 거인은 미래를 위한 밝은 전망을 느끼게 해주었다. 노동자계급의 새로운 세대는 미국노동자들의 전통을 저버리지 않았고, 출발부터 대단히 공세적이고 맹렬했다. 이들은 겁쟁이가 아니었다. 미국에서 계급투쟁이 전진할수록 더 많은 싸움이 만들어질 것이다.”
점거파업으로 정점에 오른 세 번째 물결은 그 예견이 옳았음을 입증했고, 미국노동자들의 힘과 전투성이 보다 더 거대하고 웅장한 규모로 확인되기를 무한한 낙관으로 고대하게 만들었다. 미니애폴리스에서 우리는 노동자들의 본능적인 전투성을 정치적으로 의식적인 지도부가 촉발하는 것을 보았다. 미니애폴리스는 그처럼 지도부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이 덕분에 올바른 정치원칙에 입각하고, 미국 노동자대중과 밀접하게 결합하는 당을 건설할 위대한 전망이 매우 밝아졌다. 그런 결합을 통해 전 세계를 정복할 힘을 만들 수 있다.
파업기간에 우리는 일상적인 압력 속에서 매일매일 무수히 많은 일을 처리해나가면서도 운동의 정치적 측면을 잊지 않았다. 운영위원회에서는 당면 파업 문제에 대해 가능한 충분히 논의했을 뿐만 아니라, 미니애폴리스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도 계속 주목했다. 당시에 트로츠키는 그의 가장 대담한 전술 변화 중 하나에 공을 들이고 있었다. 그는 프랑스의 트로츠키주의자들이 프랑스사회민주당의 좌파로 전환해, 그곳에서 볼셰비키 분파로 활동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것이 유명한 ‘프랑스 전환’이었다. 우리는 미니애폴리스에서 파업이 한창인 가운데 이 제안에 대해 토론했다. 우리는 그것을 미국에서는 미국노동자당과 통합하는 것을 서두르라는 명령으로 해석했다. 미국노동자당이 우리와 가장 가까운 정치그룹이고, 왼쪽을 향해 이동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했다. 우리는 통합을 가속화해 한 해가 가기 전에 매듭지을 수 있도록 결정적 조치를 취할 것을 우리 동맹의 전국지도부에게 권고하기로 결정했다. 머스티 그룹은 톨레도에서 위대한 파업을 이끌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미니애폴리스에서 유명해졌다. 톨레도와 미니애폴리스는 노동자계급의 전투성과 의식적 지도부라는 두 정점의 쌍둥이 상징으로서 연결됐다. 이 두 파업은 각 전투를 거치며 투사들을 긴밀하게 결집시켰고, 서로가 더 많은 호감을 갖고 더 긴밀하게 협력하는 것을 희망하게 만들었다. 모든 상황으로 볼 때, 분명히 당시가 두 세력의 통합 신호를 보낼 적기였다. 우리는 이런 목표를 갖고 미니애폴리스에서 돌아와 트로츠키주의자들과 미국노동자당을 통합시키고, 제4인터내셔널 미국지부라는 새로운 당을 발족시키기 위해 단호하게 움직였다.
미국노동자당과의 통합 협상
지난 강연에서 우리는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기 위해 미니애폴리스를 떠나 뉴욕으로 돌아오는 순간까지를 다뤘다. 루즈벨트 정부 때 두 번째로 거대한 파업물결이었던 1934년 파업물결은 아직 그 힘을 완전히 발휘하지 않고 있었다. 파업 참가자 수 측면에서 보자면, 이 파업물결은 섬유노동자 총파업이 벌어진 9월에 최고조에 달했다. 1934년 9월 1일에 75만 명의 면방직 노동자가 파업에 돌입했다. 우리는 <투사>에서 그 파업을 다뤘다. 특히 파업노동자들이 당시 상황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제안들도 전면에 걸친 사설에서 다뤘다. 우리 정치조직은 노동자 대중운동의 물결을 타고 전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 작은 장애물, 즉 재정적 궁핍이 우리의 진군을 잠시 중단시켰다. 75만 섬유노동자 파업을 보도하고, 미니애폴리스 파업의 여파에 관한 몇 개의 기사를 담은 그 신문 1면에 다음과 같은 공지를 실었다. 당시 우리가 그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여러분이 느낄 수 있도록 오늘 사본을 가져왔다.
“우리는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 미니애폴리스 활동으로 우리 재정은 완전히 바닥났습니다. …… 사실을 말하겠습니다. 며칠이면 법원 집행관이 우리 사무실에 찾아와, 인쇄 장비들을 길바닥으로 들어낼 것입니다. 압수 통지서가 이미 발부됐습니다. 건물주가 며칠 온정을 베풀더라도, 어쨌든 우리는 운영을 중단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요금이 오랫동안 연체돼, 전기는 끊겼습니다. 가스회사와 종이회사, 그리고 다른 많은 수금원들이 요금납부를 독촉하고 있습니다. 후원을 바랍니다. 바로 지금 행동해 주십시오!”
그렇게 해서 재정비를 마치고, 우리는 또다시 통합 제안서를 미국노동자당에 보냈다. 세계를 장악할 새로운 당을 건설하기 위해 우리와 통합하자고 요청했다. 통합에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강령, 조직 세부 문제를 우리와 함께 토론할 위원회를 선출해달라고 요청한 9월 7일자 서신을 계기로 협상이 다시 열렸다. 이번에 미국노동자당은 신속하게 답변을 보내왔다. 그들의 편지는 양면적이었다. 사무총장 머스티가 서명한 미국노동자당의 서신은, 한편으로 피츠버그 총회에서 통합을 꽤 단호하게 찬성했던 평회원 활동가들의 영향을 받아 유화적 어조를 취했고, 만일 합의할 수 있다면 통합에 찬성한다고 말했다. 이것은 미국노동자당의 솔직하고 활동적인 분자들, 현장노동자들의 정서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나는 당시에 머스티 자신도 똑같은 성향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 편지는 소련에 대한 도발적 언급을 담고 있었다. 그것은 트로츠키주의자들과 통합하는 것을 격렬하게 반대했던 살루츠키와 뷰든즈의 영향 때문이었다.
미국노동자당은 동질적 조직이 아니었다. 이 당은 두 가지 요인 때문에 진보적이었다.
(1) 이 조직은 대중운동, 노조, 실업자운동 영역에서 열정적 활동을 통해, 자본주의에 맞서 헌신적으로 싸우는 일부 전투적 노동자대중을 조직했다. (2) 분명히 당시 미국노동자당은 전체적으로 혁명적 입장을 향해 왼편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이런 두 요인이 머스티 그룹 전반의 진보적 성격을 결정지었고, 우리가 그들에게 주목하게 만들었다. 또한, 앞서 언급했듯이 우리는 그 그룹이 동질적 조직이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사실 이 당은 온갖 정치적 입장을 포괄하고 있는 정치박람회장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미국노동자당은 노동자계급 혁명가들에서부터 반동적 악당들과 사기꾼들까지 모두 포괄했다.
머스티
미국노동자당에서 두드러진 인물은 머스티였다. 그는 항상 나한테 큰 흥미를 불러일으켰고, 아주 친밀감을 느끼게 만든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는 능력 있고 열정적인 사람으로, 자신의 대의와 활동에 정말 진지하고 헌신적이었다. 그의 약점은 과거의 경력에 있었다. 그는 기독교 목사로서 인생의 첫발을 내디뎠다. 그는 우선 목사로서 파업을 두 번 경험했다. 목사로서 뭔가를 얻기는 매우 힘들다. 이건 농담이 아니다. 화나는 일이라기보다는 슬픈 일이다. 나는 그런 시도를 여러 차례 보아왔지만, 결코 성공한 사례를 본 적이 없다. 목사로서 성공하는 것은 아마 머스티가 최후이자 최고의 가능성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가능성이 높았던 머스티도 교회라는 끔찍한 배경 때문에 결국 성공할 수 없었다. 이것이 인격 형성기에 그를 망쳐놓았다. 맑스가 올바르게 정의했듯이, 종교라는 아편에 빠지는 것은 그 자체로 매우 나쁘다. 하지만 목사들이 그렇듯이, 그 아편을 유포하는 것은 훨씬 더 나쁘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을 기형으로 만드는 직업이다. 미국 역사를 통틀어, 급진적 노동운동에 다가섰던 수많은 목사 가운데 훌륭하게 전진해 결국 진정한 혁명가가 된 사람이 한 명도 없다. 단 한 명도 말이다. 하지만 머스티는 이런 배경이 장애물이긴 했지만 가능성이 있었다. 그의 개인적 자질이 특출하고, 그가 자신과 관련된 사람들에 대해 막대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으며 명성, 평판이 좋았기 때문이다. 머스티가 새 당의 지도자로서 실세가 될 가능성이 있었다.
머스티가 미국노동자당의 유일한 지도자는 아니었다. 그는 서로 다투는 양측 사이에 서 있으면서, 모든 걸 조율하는 중재자이자 중앙 지도자였다고 말할 수 있다.
살루츠키(하드맨)
미국노동자당 전국위원회에는 정말 유능한 또 다른 인물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살루츠키로, 지난 강연에서 언급했다. 그 이름은 사회당과 미국공산주의 운동의 초창기에 그가 사용했던 이름이다. 지금은 하드맨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고, 화섬의류노동자연합의 공식 기관지인 <전진>의 편집인 자리를 지난 20년 동안 지켜오고 있다. 살루츠키는 어중간한 인물이었다. 지적으로 보자면 그는 사회주의자였다. 그는 러시아사회주의운동 시절에 ‘유대인 분트’에 속해 활동했다. 그리고 미국사회당 안에서 ‘유대인사회주의연맹’의 주요지도자가 되었다. 수년 동안 유대인연맹 기관지의 편집자였다. 그는 올긴 같은 이 운동의 다른 저명한 이들보다 월등히 뛰어난 매우 유능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정신적으로 보자면, 살루츠키는 나약하고 기회주의적으로 흔들리는 사람이었다. 그는 끝까지 계속하겠다고 확실히 결심하지 못했다. 그는 그렇게 하고 싶어 하기도 했고, 그렇지 않기도 했다. 항상 의지가 박약했으며, 어떤 방향에서 결정한 행동은 항상 이중인격적인 내적 모순 때문에 중단돼 다른 방향으로 이끌리곤 했다. 일요일에는 당에 소속돼 강연하고, 이론을 토론하며, 사람들과 사상적 관계를 맺고자 했다. 하지만 주중에 하드맨은 <전진>의 아첨꾼 편집자로서, 지식인 저격수로서, 화섬의류노동자연합의 대부였던 무식하고 비열한 시드니 힐만을 위해 온갖 더러운 일을 했다.
나는 살루츠키를 개인적으로 매우 잘 알았다. 1934년에 미국노동자당과 협상하는 과정에서 그와 마주쳤는데, 전에도 그런 적이 한 번 있었다. 13년 전인 1921년에 있었던 ‘노동자평의회’와 지하 공산당 간의 공동교섭위원회에서, 그와 나는 서로 상대편으로서 만났다. 1919년에 사회당에서 대규모 결정적 분열이 있은 지 2년 뒤인 1921년에는 사회당에서 좌익사회주의자들이 분리해 나와 ‘노동자평의회’를 만들었고, 합법 공산당을 기조로 우리와 통합하려 했다. 당시 그의 입장은 자신의 특성 그대로였다.
1919년에 주로 공산주의자들과 사민주의자들 사이에 분열이 벌어졌을 때, 살루츠키는 공산주의를 거부하고 사회당에 남았다. 하지만 그는 좌파적 경향과 사회주의적 학식 때문에 완전히 우파에 투항할 수 없었다. 그는 사회당에서 새로운 좌파그룹을 형성해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2선 공산주의자들, 2급 공산주의자들의 그룹이었다. 1921년에 살루츠키와 친구들, 그리고 그와 비슷한 이들은 사회당으로부터 새롭게 분열해, ‘노동자 평의회’라는 또 다른 조직을 건설했다.
1919년과 1921년에 그가 전면적이고 직접적으로 공산당에 합류하지 않았던 것은 살루츠키다운 행동이었다. 그는 지하 공산당에 참여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오직 그가 원했던 것은 온건하고 전적으로 ‘합법적인’ 강령을 가진 새로운 정당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1921년에 우리가 합법정당인 ‘노동자당’을 건설하기 위해 ‘노동자 평의회’와 통합했을 때, 말하자면 뒷문을 통해 우리와 함께 했다. 그 통합은 당시 우리의 목표에 부합하는 일이었다. 이미 내가 얘기했듯이, 미국공산당은 지하에 있었고, 점차 공개화를 시도하는 중이었다. 당시 우리는 하나의 완결된 정당으로서가 아니라, 지하운동의 위장막이자 합법화를 위한 투쟁의 첫걸음으로서 합법조직을 건설하고자 했다. 살루츠키가 참여한 ‘노동자 평의회’ 같은 어중간한 그룹들과 통합해, 공산주의자들이 확고한 다수를 차지하는 합법정당을 발족시킨 것은 우리 목적에 아주 잘 부응하는 일이었다. ‘노동자당’으로 알려진 이 합법정당은 공산당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그것이 공산당의 합법적 표현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엥달, 로어, 올긴 등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살루츠키도 지하 공산당이 아닌 합법정당에는 참여할 의지가 있었다. 살루츠키는 공산주의운동을 수줍게 지지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오래 머물지 않았다. 공산당의 지도와 영향 아래, 노동자당이 노조관료에 대항하는 캠페인을 시작했을 때, 그는 슬그머니 빠져나갔다. 살루츠키는 그런 일을 감당할 수 없었다.
일요일에 사회주의와 계급투쟁에 대해 강연하면서 자본주의의 모순과 혁명의 불가피성을 설명하는 것과 실제로 혁명적 행동에 참여해 노조 사기꾼들과 충돌함으로써 보수가 좋은 자리에서 그들에게 봉사할 기회를 잃어버리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다. 살루츠키는 이내 노동자당을 그만두었거나 아니면 당에서 쫓겨난 것이었을 텐데, 어느 쪽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살루츠키는 사회주의와 혁명의 사상을 만지작거리는 짓을 중단할 수 없었다. 그는 미국노동자당의 전신인 ‘진보노동행동협회’에 참여했다. 그는 진보노동행동협회가 일정한 정치적 방향을 갖도록 도왔고, 그 조직을 정당으로 전환한다는 구상을 지지했지만, 진짜 혁명정당이 아닌 가짜 혁명정당을 원했다. 노조 관료들과 충돌하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트로츠키주의자들과 통합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살루츠키는 통합을 방해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 다른 많은 이들처럼, 그도 우리 운동의 특성을 이해하고 있었다. 앞선 강연들에서 언급했듯이,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진지했다. 미국노동자당이 트로츠키주의자들과 통합하고 나면, 가짜 급진정당을 통해 사회주의자로 행세할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는 것을 살루츠키는 알고 있었다.
협상에서 살루츠키와 우리는 적으로 만났다. 물론 일반적인 협상의 관습대로, 속으로는 칼을 품었지만, 적어도 초기에는 간단한 인사와 몇 가지 농담을 나누며 온화한 태도로 임했다. 나는 머스티, 살루츠키, 시드니 훅과 약속해서 만난 그 첫날을 기억한다. 샥트먼과 나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에이번 또는 올러와 함께 미국노동자당 사무실로 걸어 들어갔다. 당시 시드니 훅은 뉴욕대학 교수로서 잠시 사회주의에 손을 대고 있었다. 회의를 시작하기 전에 사교적 인사를 건네고 있을 때, 살루츠키는 항상 그런 것 같은 억지미소를 보이며 나에게 말했다. “나는 늘 <투사>를 보고 있습니다. 트로츠키의 글을 즐겨 읽습니다.”
나도 [시드니] 힐만의 글을 즐겨 읽기 때문에 늘 <전진>을 보고 있다는 대답이 입안에서 맴돌았다. 하지만 그만두었다. 우리는 가능한 한 부수적인 것들로 마찰하지 않고 통합을 달성하기로 결심했기에 진중하게 행동했다. 살루츠키는 갖은 방법으로 통합을 방해하려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그는 미국노동자당을 트로츠키주의자들로부터 떼어놓지 못했다. 오히려 우리가 결국 그 당을 우리 쪽으로 끌어당겨 통합을 성사시켰고, 그는 낡은 행주처럼 내팽개쳐졌다. 그렇게 해서 ‘사회주의자’로서 살루츠키의 활동은 끝났다. 그는 탈당했고, 급진 정치에서도 이탈했다. 지금은 루즈벨트 진영에 있는데, 그곳이 그가 있어야할 자리다.
루이스 뷰든즈
당시 미국노동자당에서 두드러졌던 또 다른 인물로 루이스 뷰든즈가 있다. 처음에 그는 사회복지사였다. 그가 수년 동안 노동운동에 관심을 가진 것은 노동운동을 연구하고 관찰하는 입장에서였다. 또한, 노동자들에게 조언하지만 어떤 조직운동도 대변하지 않는, 보조금을 지급받는 잡지의 발행인으로서 노동운동에 관심을 기울였다. 결국 그는 ‘진보노동행동협회’를 매개로 대중운동에 처음으로 개입해, 틀림없이 상당한 재능을 발휘했다.
대중활동은 힘든 작업이고, 많은 이들을 집어삼킨다. 1934년 당시, 사회주의자로서 활동해본 경험도 없고 사회주의 교육도 받지 못했던 뷰든즈는 100% 애국주의자이자 75% 스탈린주의자로서, 지치고 다소 병든 상태에서 변절할 기회를 찾고 있었다. 그는 통합을 악랄하게 반대했다. 미국노동자당 조직의 상당한 부위가 실제로 그랬던 것처럼, 이미 당시에 그는 스탈린주의 정당으로 기울고 있었다. 당시에 스탈린주의 정당이 미국노동자당 대부분을 집어삼키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던 것은 트로츠키주의자들의 활발한 개입과 통합 협상의 압력뿐이었다. 덧붙이자면, 결국 뷰든즈는 변절할 기회를 찾았다. 그는 지금 <일간 노동자> 편집자다. 그는 스탈린주의자들한테 돈을 받으면서 수년 동안 온갖 더러운 일을 해오고 있다.
러드윅 로어
그 외의 인물로 오래전 공산당 시절부터 잘 알려진 러드윅 로어가 있었다. 로어는 미국에서 최초의 공산주의자 가운데 한 명으로, 첫 공산주의 잡지인 <계급투쟁>의 편집자로 참여했다. 그의 본심은 공산주의자라기보다는 좌파사회주의였다. 그는 점점 더 후퇴하면서 미국노동자당을 거쳐 부르주아민주주의와 완전히 타협하는 길을 걷고 있었다. 결국은 광신적 애국주의 기고가로서 <뉴욕 이브닝포스트>에 자리를 잡았다. 로어도 통합에 반대했다.
이들이 미국노동자당의 주도적 인물 중 일부였다. 우리는 조직 안에서 머스티 그룹과 통합하는 문제를 토론하는 과정에서 반대에 부딪혔다. 그것은 올러와 스탬이 이끌었는데, 우리 운동을 병들게 한 종파주의 분파의 시작이었다. 그들은 회원들이 아니라 공식지도부만을 보고 판단하는 종파주의자들의 오랜 상투적 주장을 펼쳤다. 그들은 물었다. “어떻게 우리가 살루츠키, 로어 같은 이들과 통합할 수 있는가?” 만일 미국노동자당에 살루츠키와 로어 같은 사람들밖에 없었다면, 그들의 반대는 일리가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이런 사기꾼들과 변절자들 뒤에 있는 일부 진지한 사람들, 투사들과 노동자들을 바라보았다. 앞서서 나는 톨레도 파업을 이끈 동지들을 언급했다. 미국노동자당에는 펜실베니아와 중서부 곳곳에 이런 유형의 분자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은 상당한 규모로 실업자조직을 건설했다. 이런 미국노동자당의 노동자계급 활동가들은 우리에게 흥미로웠고, 우리는 머스티와 함께 이들이 볼셰비키로 성장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미국노동자당이라는 이질적인 집단에는, 그 누구와도 다른 머스티 말고도, 또한 뷰든즈, 살루츠키, 로어 말고도 다른 이들이 있었다. 톨레도 지역 실업자운동의 기층투사들과 노조 기층활동가들이 있었다. 또한 미국노동자당의 당원 명부를 상세히 설명하자면, 일부 YWCA 여성, 성경연구회원들, 온갖 지식인, 대학 교수들 그리고 열린 문으로 그냥 들어와본 이러저러한 이들이 있었다.
우리의 정치적 임무는 가짜들과 사기꾼들을 고립시키고, 동화할 수 없는 분자들을 제외시키면서, 노동자계급 활동가들 및 진지한 사람들과 통합함으로써, 스탈린주의자들이 이 운동을 집어삼키지 못하게 막고, 우리 앞길에서 중도주의의 장애물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만만찮은 임무였지만, 우리는 결국 성공했다.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고, 꽤 많이 노력해야 했지만 말이다.
우리의 두 번째 협상제안에 대한 그들의 답장에는 러시아 문제에 대한 도발이 담겨 있었다고 나는 앞에서 언급했다. 그 도발은 틀림없이 살루츠키와 뷰든즈가 부추겼을 것이다. 그 도발에 담긴 생각이 무엇이었는지 보여주기 위해 편지 몇 줄을 인용하겠다.
“우리는 코민테른과 공산당 정책에 대한 우리의 비판이 소련에 대한 공격이어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그렇게 비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하지만, 소련의 특정 정책들에 대한 미국공산주의자동맹의 비판을 어떻게 정당화하더라도, 대중의 눈에 그것은 소련을 적대하는 표현으로 비쳐 왔습니다.”
이어서 그들은 우리와 통합할 때 자신들이 소련 반대의 입장에 서지 않는다는 점을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전국위원회 회의에서 이 편지를 읽고 격분했다. 당시 우리는 1917년 이래로 소련을 방어해왔다고 생각했다. 이 사람들 대부분은 이제 막 그것을 발견하고는, 우리에게 소련에 관한 의무를 강의하려 들었다. 열 받은 우리는 분을 삭이기 위해 그 자리에 앉아 신랄한 답변을 썼다. 그 무례함에 주의를 주는 답변을 쓰고서야, 우리는 침착해질 수 있었다. 우리는 그것이 도발임을 알았다. 우리가 그런 덫에 걸려 정치적 목표와 임무를 놓쳤다면, 그것은 멍청한 짓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전국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개요의 또 다른 답변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1) 소련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단호하게 설명한다. (2) 도발을 알아채지 못한 척한다. (3) 다시 한 번 통합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이것은 도발자들이 미국노동자당 안에서 통합의 추세를 막기 어렵게 만들기 위해 구상한 답변이었다.
우리가 뉴욕 2번가에 위치한 본부에서 이 개요의 요점들에 관해 토론하고 집필자를 결정하고 있을 때, 이 기막힌 미국노동자당 전국위원회의 위원으로 있었던 [시드니] 훅 교수와 버넘 교수가 방문했다. 그들은 통합에 찬성했다. 미국노동자당 전국위원회에 통합을 지지한 두 교수가 있었다는 것은, 그들의 진짜 동기가 무엇이건, 우리에게는 매우 유용했다. 훅은 미국노동자당에서 손을 떼고, 짧은 정당정치 모험을 끝내고자 통합을 원했다. 그는 운동 언저리로 물러나고 싶어 했다. 거기가 유일하게 그가 항상 편안함을 느낀 곳이었고, 벗어나지 말았어야 할 곳이었다. 버넘의 경우에는, 뒤의 일들에서 드러나듯이, 당시에 조금 더 급진적인 것을 추구하며 한 발을 내딛고 있었기 때문에, 트로츠키주의자들과 통합하기를 원했다. 그는 자본가계급의 땅 위에서 한쪽 발로 몸을 떠받친 채로, 다른 쪽 발가락을 노동자계급 정치라는 차가운 물속에 조금 더 깊게 담그고 싶어 했다. 이 두 대담한 교수들은 우리에게 도발을 주의하라고 말했다. 그들은 우리가 똑같은 식으로 대응하면서 통합을 망칠까봐 두려워했다. 그 때문에 우리를 만나러 온 것이었다. 그들은 우리의 두 번째 답변 초안 개요를 보고는 정말 기뻐하고 안심했다.
우리 진영에서 이런 일이 진행되는 동안, 여기저기 모든 조직에서 대중운동의 발전에 영향을 받아서 많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때 우리는 러브스톤 그룹과 다른 서클들에서 약간의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9월 8일자 <투사>에는 “러브스톤 그룹이 디트로이트에서 갈라져, 다섯 명이 동맹에 합류한다”는 소식이 실렸다. 같은 호 <투사>에 허버트 잼이 러브스톤 조직에서 탈퇴했고, 잼과 기틀로우가 사회당에 입당할 것이라는 소식이 실렸다. 9월 29일자 <투사>에는 “프랑스의 볼셰비키–레닌주의 그룹이 프랑스사회당에 분파로서 입당했다”는 소식이 실렸다. 이것은 트로츠키의 ‘프랑스 전환’ 노선을 실행하는 첫 번째 대규모 행동이었다. 이 노선에 따라, 우리 동지들은 가능한 모든 곳에서 문호가 열려있는 개량주의 사회주의조직들에 가입해야 했다. 그것은 성장하고 있는 좌익과 관계를 형성하면서 새 당의 기초를 놓기 위한 조치였다.
미국공산주의자동맹의 조직적 양보
세 번째 회의에서 우리가 미국노동자당에 제시한 조직 관련 제안들은 통합을 수월하게 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우리는 항상 강령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믿었다. 맑스주의 강령을 확실하게 채택한 조직이라면, 모든 세부 조직문제에 대해 너무 격하게 싸울 필요는 없다. 그것은 정치 경험이 없는 투사들이 조직 문제를 과장하거나 강령의 결정적 역할을 경시하면서 범하는 일반적 오류다. 미국공산주의 운동의 초창기에 벌어진 많은 싸움과 심지어 분열들은, 분파에 유리하다고 판단하는 조직 자리들을 놓고 분파들이 지나치게 신경을 써서 발생한 것이었다. 우리는 그 경험에서 배웠고, 이번에는 그것이 큰 도움이 됐다.
협상 과정에서 머스티 그룹이 강령 측면에서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점을 알았을 때, 우리는 통합의 조직적 측면과 관련해 하나의 완결된 안을 제시했다. 이 조직적 측면은 그들 중 많은 이들이 매우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위로부터 아래까지 모두 50 대 50의 배분을 제안했다. 당시에 우리는 머스티 그룹보다 숫자가 더 많았다. 회비를 내는 조직원 수를 비교하면, 우리의 세가 더 컸다. 어쩌면 그들의 운동은 모호한 형태로는 우리보다 더 규모가 컸고, 지지자들도 우리보다 더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실질적 회원은 우리가 더 많았다. 우리 조직이 더 견실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무시하고 당의 공식지위들을 양측이 동등하게 나누어 갖자고 제안했다. 게다가 두 자리가 비교적 동등한 중요성을 갖는 자리인 경우에는, 그들이 선택하게 했다. 가령, 두 개의 지도적 지위로서, 사무총장을 머스티가 맡고, 신문 편집인을 내가 맡는 것을 제안했다. 아니면 그들이 원한다면, 서로 바꾸어 내가 사무총장이 되고, 머스티가 편집인이 될 수 있었다. 그들이 그것을 거부하기는 정말 힘들었다.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당 사무총장이 당 체계를 통제하기 때문에 순수한 조직문제들을 매우 강조한 그들이 사무총장 자리를 가질 것이라는 점을 우리는 알았다. 우리는 운동의 이데올로기를 보다 직접적으로 구체화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편집인 자리에 더 관심이 있었다. 노동국장과 교육국장 자리도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후자를 맡고 전자를 주거나, 아니면 원한다면 반대로 하도록 제안했다.
전국위원회는 양측 동수로 구성하고, 일어날 수 있는 모든 다른 조직문제들도 동등성에 기초해서 해결하려 했다. 그것이 우리의 제안이었다. 그 분명한 공평성, 더 정확히 말하면 관대함을 보고 머스티와 그 동료들은 강하게 감명받았다. 우리의 ‘조직 제안’은 흔히 일어나는 충돌과 교착 대신 통합 촉진에 크게 기여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었고, 종종 넘어설 수 없는 장애물이었던 문제를 단번에 처리할 수 있었던 것은, 과거 공산당 시절의 조직투쟁에서 교훈을 배웠기 때문이다.
‘원칙 선언’
우리는 강령 문제에서는 비타협성을 유지한 채, 조직 문제에서는 관대하고 양보적인 태도를 취했다. 강령 초안을 작성하기 위한 합동위원회가 선출됐다. 두세 차례 초안을 작성한 뒤, 토론하고 수정했다. 압박과 충돌이 약간 있은 뒤, 결국 강령에 합의했다. 이 강령은 통합 대회에서 비준된 뒤, 미국노동자당(Workers Party of the United States)의 ‘원칙 선언’이 됐다. 트로츠키 동지는 이것을 원칙에 확고하게 기반한 강령이라고 묘사했다.
한편, 경멸당하던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작은 ‘종파주의’ 그룹이 당연히 자기 영역이라고 여겼던 분야까지 들어서는 동안 옆에서 잠들어 있었던 스탈린주의자들이 우리에게 충고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머스티 조직을 흡수하겠다고 작정하고 있었다. 그 측면에서 그들은 우리보다 성공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우리가 그들에게 한 방 먹였다. 우리는 적시에 행동했고(시간은 정치에서 핵심이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스탈린주의자들이 깨닫기 전에, 미국노동자당과 통합 협상을 상당히 진척시켰다. 잠에서 깨어난 그들은 신문에 충고와 조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다음은 10월 20일자 <투사>의 헤드라인이다. “스탈린주의 언론이 우리와의 통합을 반대하며 미국노동자당에 경고하다.” 관련 기사는 악명 높은 비틀만이 스탈린주의 공산당 일간지인 <일간 노동자>에 쓴 기사였다. 그는 “미국노동자당은 누구와 통합하는지 알고 있는가?”라는 기사에서 양측에 노골적으로 충고했다. 스탈린주의자들은 머스티 그룹한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머스티와 그의 미국노동자당을 따르는 노동자들에게, 자기 지도부가 파놓은 함정, 즉 반혁명적 트로츠키주의 함정을 조심하라고 경고한다.” 그러고는 같은 기사에서 자신들의 불편부당함을 보여주기 위해 방향을 돌려 말했다. “아직도 트로츠키주의를 따르며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노동자들에게 경고한다. 캐넌, 샥트먼 일당은 부르주아 민족주의의 대표자인 머스티와 통합하는 길로 당신들을 이끌고 있다.”
우리는 그들에게 답했다. “만일 트로츠키주의자들이 반혁명 분자들이고, 머스티 그룹이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이라면, 그들을 한 자루 안에 처넣어 버리는 것이 차라리 좋을 것이다. 통합해도 어느 쪽도 더 나빠질 수 없는데, 통합이 무슨 해를 끼치겠는가.” 공평한 듯하지만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그들의 충고에 감사해 하면서, 우리는 통합을 계속해나갔다. 두 조직은 실제 행동들에서 협력하기 시작했다. 통합 전에 우리는 합동회의들을 열었다. 뉴저지 주의 패터슨에서 열린 미국공산주의자동맹과 미국노동자당의 합동 대중 집회에서, 머스티와 캐넌이 파업의 교훈에 대해 300명의 섬유노동자들에게 연설한 내용이 10월 6일자 <투사>에 실렸다.
국제공산주의동맹 집행위원회 파리총회
그 무렵인 1934년 10월에, 전국위원회는 나를 국제공산주의동맹 집행위원회 총회가 열리는 파리로 파견했다. 트로츠키 동지를 만나기 위해, 나는 그곳에서 프랑스 남부의 그르노블로 갔다. 트로츠키 동지가 수년 전에 소련에서 추방당한 뒤, 그를 개별적으로 처음 만나게 된 것이었다. 수많은 미국인 동지들이 트로츠키를 만나러 해외에 다녀왔지만, 내가 그를 방문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샥트먼은 그곳에 두 번 갔다. 유럽여행 경비를 스스로 부담할 수 있었던 조직의 다른 많은 동지들도 그를 만났다. 당시 트로츠키 동지는 프랑스 파시스트들에게 쫓기고 있었다.
여러분 가운데 몇몇은, 1934년 당시 프랑스 파시스트 언론이 트로츠키가 프랑스에 있다고 큰 소리로 떠들기 시작했다는 점을 기억할 것이다. 그들은 스탈린주의자들과 함께 “프랑스에서 트로츠키를 추방하라!”는 공동의 구호를 내걸고 그의 비자를 취소시키라고 달라디에 정부를 압박했다. 그는 프랑스를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고, 그곳에 머물 권리를 박탈당했다. 하지만 전 세계 어디에서도 그의 입국을 허가할 자본주의 국가를 찾아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가 프랑스에 있도록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파시스트 언론과 스탈린주의자들은 항상 그를 뒤쫓고 있었다. 그는 어떤 실질적 보호나 합법적 권리도 없이, 극도로 불확실하고 위험한 환경에 처해 있었다. 하루하루를 근근이 살아가야 했기 때문에, 그에게는 어떤 조력자, 비서, 타자수도 없었다. 그는 모든 일을 직접 손으로 써서 해나갈 수밖에 없었다. 반동사냥개들 때문에 그는 이리저리 쫓겨 다녔다. 어느 지지자의 집에 자리를 마련하고 작업을 시작하자마자, 그 지역 파시스트들이 새로운 거주지에서 그를 찾아냈다. 다음날 아침에는 신문들이 선정적인 제목으로 그 사실을 다룬다. “러시아 살인마 트로츠키가 이 지역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러고는 비난 소동이 벌어졌다. 그는 목숨을 지키고 안전한 장소를 찾기 위해, 가능한 빨리 한밤중에 떠나야 했다. 똑같은 일이 계속해서 벌어졌다. 그러는 동안 트로츠키의 건강은 매우 나빠졌다. 거의 쓰러질 지경이었다. 당시 우리 모두 크게 걱정했다.
트로츠키와 만나다
파리에서 그가 있는 시골로 밤새 차를 타고 가서, 이른 아침 7시 경에 그의 생존을 확인하고자 그의 집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나에게 너무도 행복한 순간이었다. 아침식사 전에 그를 만났지만, 그는 자리에 앉아 곧바로 정치토론을 시작하고 싶어 했다. 그의 첫 번째 질문은 이것이었다. “총회는 어떻게 됐소? 그 결의안은 통과됐어요?” 나는 정중하게 음식을 조금 먹자고 제기했다. 그래서 나는 트로츠키, 나탈리와 함께 아침을 먹었다. 그리고서 나는 그 집의 규칙 가운데 하나를 깼는데, 뒤에 그것을 정말 후회했다. 나는 무지해서 실수했다. 나는 그가 자기 앞에서 담배 피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글로처와 다른 이들은 그 문제 때문에 크게 꾸지람을 듣고 돌아왔다. 나는 그것이 단지 트로츠키의 과민반응일 뿐이기에, 아주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당시 나는 아침 식사 뒤에 담배 피는 데 익숙해 있었다. 커피가 나오자(이때 담배가 가장 맛있다), 나는 담배를 꺼냈다. 그리고 담배 태우기 직전에 농담조로 물었다. “몇 사람이 흡연 때문에 쫓겨났다고 들었는데 사실인가요?” 그는 대답했다. “아니, 그렇지 않아요. 어서 담배 피세요.” 그러고는 덧붙였다. “글로처 같은 청년에게는 허락하지 않았지만, 확실한 동지라면 괜찮아요.” 그래서 나는 그 집에 머무는 내내 그가 있는 자리에서도 항상 담배를 피웠다. 몇 년이 지난 뒤에야, 흡연이 그에게 육체적으로 참기 힘들었고, 심지어 건강을 해치기까지 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깊이 후회했다.
오후에는 트로츠키의 집주인이 자기 차로 우리를 알프스 정상까지 여행시켜줬다. 우리는 산 정상에서 머스티 그룹과 통합하는 문제로 길게 토론했다. 이 나이든 대가는 소련에 관한 도발을 피한 것을 포함해, 우리가 했던 모든 일을 인정해주었다. 우리는 머스티 그룹과 더 수월하게 통합하기 위한 방법과 관련해, 그의 조언을 기다리며 잠시 중단시켜온 한두 가지 사항에 대해 의견일치를 보았다. 그는 그것에 전적으로 찬성했고, 머스티 개인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기울였다. 그에 대해 질문했고, 나중에 머스티가 진정한 볼셰비키로 성장할 것이라는 일정한 희망도 품었다.
국제공산주의동맹 총회는 1934년 10월에 파리에서 열렸다. 이 총회의 목적은 ‘프랑스 전환’ 실행을 최종 결정하는 것이었다. ‘프랑스 전환’ 실행은 이미 국제집행위가 동의했고, 각국 지부 총회에서도 통과시킨 것이었다. 그 전환이란 우리 프랑스 조직이 프랑스 사회당에 단체 차원에서 입당하기로 결정한 것을 뜻한다. 입당의 목적은 하나의 분파로서 개량주의 정당 안에서 활동하면서, 당내 좌파와 관계를 맺고,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통합해, 결국 프랑스에서 새로운 혁명정당 건설의 기초를 확대하는 것이었다. 총회는 이 노선을 지지했다. 이것은 우리가 전 세계에 걸쳐 전술방향을 새롭게 정했다는 것을 뜻한다. 이런 행동은 앞서 언급했던 일반적 구호 아래 이뤄졌다.
“혁명적 맑스주의의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는 살아있는 노동자운동과 결합하기 위해, 지난 5년간의 선전서클에서 대중 활동으로 전환하자!”
‘프랑스 전환’에 대한 올러·스탬 반대파
파리에서 돌아와 뉴욕에서 조직에 총회 결과를 보고하려 했을 때 우리는 반대에 부딪혔다. 반대파는 올러와 스탬이 이끌었고, 달변이고 좌익병에 걸린 독일인 망명자 아이펠이 가세했다. 그들은 제2인터내셔널의 어떤 지부와 통합하는 것도 원칙적으로 반대했다. 모든 종파주의자의 주장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주장은 매우 형식주의적이고, 무익하며, 당시 현실을 무시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제2인터내셔널에 대해 “세계 대전에서 노동자계급을 배신했다.”고 올바르게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제2인터내셔널을 ‘지독한 악취를 풍기는 시체’라며 비난했다. 코민테른은 제2인터내셔널에 맞서 싸워 1919년에 건설됐다. 그리고 1934년 지금, 당신들은 이 개량주의 배신자 조직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그것은 원칙에 대한 배신이다.”
우리는 1934년의 제2인터내셔널이 1914년이나 1919년의 그것과 똑같은 조직이 전혀 아니라고 설명했지만 허사였다. 코민테른의 관료화, 사회당들의 보다 느슨하고 민주적인 조직형태 때문에 새로운 층의 각성한 노동자들과 투사들이 각국 사회당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그래서 1914~1918년의 배신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새로운 세대의 젊은 사회주의자들이 그곳에서 성장하고 있었다. 코민테른이 우리의 참여를 완전히 금지했기 때문에, 우리는 새로운 세력을 찾아야 했다. 만일 우리가 새로운 혁명정당 건설을 원한다면, 제2인터내셔널에 뛰어들어, 그 새로운 좌파와 관계를 맺어야 했다.
그러자 종파주의 반대파는 새로운 주장을 내밀었다. “언제 어디서나 혁명정당의 독립성을 무조건 지키는 것이 맑스주의 원칙 중 하나이고, 트로츠키주의 운동 가입조건 중 하나가 아닙니까?”
“그렇소.” 우리는 대답했다.
“그것은 하나의 원칙이며, 영국·러시아위원회의 중요한 교훈입니다. 그것은 중국 혁명의 핵심 교훈입니다. 우리는 결코 혁명정당이 다른 정치조직과 통합하거나 다른 깃발과 섞여서는 안 되며, 고립되더라도 독립성을 지켜야 한다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 팜플렛과 책들을 출간해왔습니다. 헝가리혁명이 분쇄된 것은 부분적으로는 잘못된 동기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사민주의자들과 통합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전부 옳습니다.” 우리는 말했다. “하지만 여러분의 주장에는 작은 결함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 당이 아닙니다. 우리는 선전그룹일 뿐입니다. 당 건설이 우리의 과제입니다. 트로츠키가 제기했듯이, 우리는 뼈에 살을 붙여야 합니다. 만일 우리 프랑스 동지들이 사회당의 대중정치운동으로 파고들어가, 활력 있는 좌파를 끌어들여 그들과 통합할 수 있다면, 그때 그들은 당을 만들 수 있습니다. 모조품이 아니라 진짜 당을 말입니다. 그때 그들은 당의 독립성 원칙을 모든 조건에서 적용할 수 있고, 그 원칙은 나름의 의미를 갖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원칙이란 이름 아래 진짜 당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전술행동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그들은 끝내 의견을 바꾸지 않았다. 형식주의적 접근, 균형 감각의 부족, 현실 무시, 무익한 딴지 걸기는 폐쇄적 서클에서 나타나는 종파주의의 특성이다. 우리는 ‘프랑스 전환’을 프랑스에서와 똑같은 방식으로 미국에서 적용해야 하는 순간이 다가오기 1년 전에, 그 문제를 가지고 싸우기 시작했다. 머스티 그룹과 계획적으로 통합하는 것은 ‘프랑스 전환’과 형태는 다르지만 내용은 똑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올러 그룹은 그 형태가 달랐기 때문에 그 점을 정확히 인식하지 못했다. 그들은 우리가 머스티 그룹과 통합하는 것은 용서해줬다. 하지만 엄청나게 전전긍긍하고 두려워했으며, 낯선 이들과 섞이면서 나쁜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예언했다. 전에 우리 청년 중 한 명인 래리 터너가 편지에 썼듯이, 종파주의자들은 기회주의자가 되고픈 자신의 억눌린 욕구를 늘 두려워한다. 그들은 기회주의자들이 자신들을 타락시킬까봐 접촉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힘을 확신하면서 자신 있게 나아갔다. 1934년에 프랑스 전환에 대해 토론하면서 우리 조직 내 분열은 점점 더 깊어졌다. 다투고 있는 경향들은 결국 분파로 굳어졌다. 프랑스 동지들의 행동을 놓고 우리가 1934년에 논쟁했던 것은, 조직 내 올러파의 종파주의에 맞서 다음 해에 벌인 힘겹고 오랜 최종투쟁을 위한 예행연습이었다. 따라서 이 싸움에서 승리해야 우리는 더 멀리 전진할 수 있었다.
미국공산주의자동맹과 미국노동자당의 통합
우리는 날마다 협상하며, 통합을 향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우리는 여러 실천 활동에서 머스티 그룹과 협력했다. 두 조직의 통합은 전반적 추세였다. 결국 우리는 강령초안에 합의했다. 즉 양측 강령위원회가 합의를 본 것이다. 조직 제안들에 대해서도 합의했다. 남은 것은 각자의 조직 총회에 제출해 승인받는 것뿐이었다.
양측 모두 평회원들이 어찌 할지에 대해 여전히 의심이 약간 있었다. 우리는 뉴욕 바깥에서 올러 그룹이 얼마나 강할지 알 수 없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에이번은 계획을 망치기 위해 은밀하게 어둠속에서 책략을 부리고 있었다. 머스티는 이제 확고하게 통합을 옹호했지만, 자기 쪽 다수가 어떨지는 확신하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합동대회를 소집하는 대신, 먼저 두 조직 각자의 대회를 열었다. 대회는 각각 1934년 11월 26~30일에 열려, 각자가 가진 모든 내부문제를 처리했다. 결국 각 대회는 합동위원회가 작성한 ‘원칙 선언’을 승인했고, 조직 제안들도 승인했다.
노동자당 출범하다
그 뒤 우리는 각 조직의 결정을 기초로, 1934년 12월 1~2일(토요일과 일요일)에 합동 대회를 소집했다. <투사>는 다음 호에서 합동 대회를 보고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새로운 미국노동자당이 만들어졌다. …… 일요일 오후에 스타이브선트 카지노에서 열린 미국노동자당과 미국공산주의자동맹의 통합대회는 그 역사적 임무를 완수했다. …… 미국노동자계급의 새로운 전투성을 보여준 미니애폴리스와 톨레도가 이 탄생의 주역이었다. 새로운 정당은 미국에서 자본가계급의 지배를 뒤엎고 노동자국가를 건설하는 막대한 과업에 착수했다.”
미국노동자당과 공산주의자동맹의 공식 통합은 미국 운동에서 10년 넘게 만에 이뤄진 최초의 조직 통합이었다.
혁명적 노동운동은 직선로를 따라 순조롭게 성장하지 않는다. 지속적으로 내부투쟁 과정을 겪는다. 분열과 통합 모두 혁명정당을 성장시키는 방식이다. 각각은 주어진 상황에서 결과적으로 진보적일 수도, 반동적일 수도 있다. 순수주의 종파 그룹들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는 지속적 분열과정에 대한 선호보다 통합을 바라는 대중의 보편적 심리가 항상 더 정치적으로 가치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분열과 같은 문제에서 도덕주의 관점은 그야말로 어리석다. 강령적 입장을 명료화하고, 확고한 기반에서 세력을 선택해 새출발하기 위해서, 분열은 때때로 반드시 필요하다. 다른 한편, 주어진 상황에서 강령에 합의한 둘 이상의 그룹이 통합하는 것은 노동자 전위세력들을 재편하고 통합시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트로츠키주의 미국공산주의자동맹과 머스티 그룹의 통합은 분명히 진보적 행동이었다. 두 그룹은 서로 기원과 경험이 달랐지만, 최소한 공식적으로는 강령에 합의했다. 이 합의가 진정하고 철저한 것인지, 아니면 단지 형식적인 것인지를 시험하는 유일한 방법, 각 그룹에서 어떤 구성원들이 운동을 더 전진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유일한 방법은 두 그룹을 통합시켜 공동 경험 속에서 그 문제들을 시험하는 것이었다.
1928년부터 전 세계적으로 그랬듯이, 미국 운동에서도 분열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물론 러시아혁명이 세계적 압력에 포위당한 상태에서 코민테른이 퇴보한 것과 스탈린주의 관료체제가 그 포위에 순응하기 위해 국제주의 강령을 저버린 것에 그 근본원인이 있다. 코민테른의 퇴보는 혼란과 분열을 낳을 수밖에 없었다. 이 퇴보하고 있는 각국 정당에서, 진정한 맑스주의의 방어자들은 관료들에게 불화와 갈등의 원천이었다. 따라서 관료들이 이들을 제거할 방법은 관료적 추방 말고는 없었다. 1928년 10월에 우리는 미국공산당에서 축출됐다. 6개월 뒤인 1929년 봄에는 러브스톤파가 축출돼 미국에서 세 번째 공산주의 조직을 만들었다. 온갖 괴상함과 변덕스러움을 대변하는 개인과 그런 무리들의 종파와 파벌이 이 시기의 공통 양상이었다. 새로운 계급투쟁의 물결이 등장하고, 세계 경험들에 기반해 강령을 새로 검증하면서 다시 한 번 결집할 토대가 만들어지기 전까지, 운동은 분열과 원자화의 시기를 겪었다.
우리 분파와 러브스톤 분파가 있었다. 한 때 열 두세 명이 전부였지만, 위대한 역사적 흐름을 대변한다고 여기게 만들 만큼 소란스러웠던 웨이스보드의 작은 그룹도 있었다. 웨이스보드 그룹은 독립 조직을 만든 것으로도 모자라, 그렇게 인위적으로 탄생한 그룹들에서 자연법칙처럼 나타나듯이, 몇 번 더 내부 분열을 거쳤다. 호텔파업 때의 배신 때문에, 우리 운동에서 추방된 필드와 그의 몇몇 동료 등도 자연스럽게 자기 조직을 만들어 신문을 발행했고, 전체 노동자계급의 이름으로 발언했다.
러브스톤 그룹에서는 기틀로우 세력이 분리했고, 몇 달 뒤에는 잼 그룹도 분리했다. 미국에서 1919년 이래로 ‘프롤레타리아당’이라 불린 또 다른 공산주의그룹이 있었다. 이 그룹도 계속 고립돼 있었고, 주기적으로 분열을 겪었다.
이 시기에 운동의 사기저하는 지속적인 분열과 해체의 추세로 나타났다. 이 병은 자연스러운 진행과정을 거쳐야 했다. 이 시기 내내 우리 트로츠키주의자들은 결코 단결을 주창하지 않았다. 특히 우리가 고립돼 있던 초창기 5년 동안은 더욱 그랬다. 우리는 강령을 명료화하는 작업에 집중했다. 그때도 그렇게 생각했고 지금도 그런데, 모든 문제 가운데 가장 중요하다고 본 강령 문제에서 우리와 충분히 가깝지 않은 그룹과 조급하게 통합하기 위한 대화는 모두 거절했다. 1934년 10월에 우리가 통합한 것은 이 시기 전체에서 최초로 통합한 것이었다. 스탈린주의자들이 제3인터내셔널을 완전히 관료화하면서 혁명적이고 비판적 사고를 억압했을 때, 공산당에서 가장 먼저 추방당한 것은 진정한 트로츠키주의 그룹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통합과 재편 과정을 위한 정치적 전제조건들이 마련됐을 때, 그 시작을 주도했던 것도 트로츠키주의 그룹이었다. 그것은 분열, 해체, 붕괴의 추세를 역전시키려는 첫 번째 긍정적 신호였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이 머스티 그룹과 통합해 노동자당을 만든 것은 분명히 중요한 전진이었지만, 단지 첫걸음이었을 뿐이다. 혁명세력의 재편은 이제 시작됐을 뿐이라는 점이 곧 우리에게 분명해졌다. 최소한 공산주의자동맹의 주요 지도부에게는 그랬다. 지난 강연들에서 언급했듯이, 머스티 그룹이 급진화하는 동시에, 전 세계 사회민주주의 운동에서처럼 미국 사회당 안에서도 중요한 변화가 발생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현실적 태도를 취해야 했다.
사회당 ‘전투파’
과거의 배신들에 책임이 없는 새로운 노동자와 청년들이, 특히 독일노동운동의 분쇄와 파시즘의 권력 장악을 포함해, 세계적 사건들의 엄청난 충격에 영향을 받아 깨어났다. 이 노쇠한 사민주의 조직 안에서 새로운 바람이 일었다. 혁명적 강령을 찾는 많은 사람들의 충동을 반영해 좌파가 형성되고 있었다. 그것은 실제 사실이자 미국정치현실의 요소였기 때문에 무시할 수 없다고 우리는 생각했다. 설사 우리가 새로운 당을 만들고, 그것을 전위의 통합이라고 선언했더라도, 이 새로운 운동, 이렇게 강력하고 건강하며 혁명적 활력을 가진 새로운 이들을 무시하거나 인위적으로 외면할 수는 없다는 점을 깨달았다. 반대로 사회당 안에서 이제 막 떠오른 운동이 올바른 길을 찾도록 도울 의무가 우리에게 있었다. 우리가 돕지 않으면, 그들이 올바른 길을 찾을 수 없다고 확신했다. 그들에겐 맑스주의 지도부와 전통이 없었다. 또한 명확한 혁명적 강령을 전망으로 삼지 못하도록 길을 가로막는 세력들이 그들을 사방에서 포위한 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들의 궁극적 운명과 혁명적 발전의 가능성은 보다 경험 많고 시험대를 통과한 맑스주의 중핵들, 즉 새로 만든 우리 노동자당에 달려있었다. 사회당 안의 모호한 좌파 지도부는 스스로를 ‘전투파(Militants)’라고 불렀다. 어떻게 우리가 그것을 모를 수 있겠는가. 미국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처음부터 <투사(Militant)>를 공식 기관지의 명칭으로 사용해왔고, 모두가 그것이 우리 신문의 정확한 이름이라고 인정했다. ‘투사’는 노동자 당원, 당 활동가, 당 투사를 의미했다. 그런데 왜 진지한 의식도 전통도 아무것도 없는, 뼛속까지 속물적인 사회당 좌파지도부가 당시에 스스로를 ‘전투파’로 부를 수 있었는가? 그것은 앞으로 우리 운동의 역사 연구자들이 풀어야 할 문제다. 아직까지는 그 이유를 찾지 못했다. 적어도 나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 형편없는 지도부는 우리의 관심을 전혀 끌지 못했다. 그들은 사상을 위해 진정으로 희생하면서 투쟁할 수 없고, 진지하게 운동에 헌신할 수 없는 우연적 인물들이자, 수다쟁이들이었고, 투사인 척하는 자들이었다. 현재 이들 대부분은 정부를 위해 다양한 전쟁 업무를 맡고 있다. 우리의 관심을 끈 것은 사회당 상층의 거품 아래에 정말 살아있는 청년 운동과 상당수의 노동자 활동가들, 노조 활동가들, 실업운동 투사들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들은 혁명정당을 위한 훌륭한 자원일 수 있었다. 이 둘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당시나 지금이나, 좌파건 우파건 사회당 지도부와는 별로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진지한 기층 투사들, 노조 활동가들, 급진 청년들로는 혁명을 이끌 수 있는 당을 만들 수 있었다. 우리는 그들에게 가는 길을 찾고자 했다. 당시에 그 운동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특히 청년 사회당원들은 전혀 몰랐다. 그들은 사회당의 보수적 관료체제에 억압당했다. 그리고 이른바 ‘전투파’인 그들의 무가치한 지도부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우파 관료들에게 굴복하는 경향을 보였다.
스탈린주의자들의 압력
다른 한편, 강력한 언론과 조직, 풍부한 매수 자금을 가진 스탈린주의자들이 그들을 포위하고 있었다. 스탈린주의자들은 돈으로 그들을 타락시키는 짓을 주저 없이 했다. 당시 스탈린주의자들은 이 진보적 좌파운동을 장악해 스탈린주의 형태의 개량주의 방향으로 돌리고자 압력을 엄청나게 넣고 있었다.
스페인의 경험
스페인과 다른 많은 유럽 국가에서는 그것이 성공했다. 종파주의적 순수성에 사로잡힌 스페인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제4인터내셔널 사상을 자발적으로 지지했던 사회당 청년운동을 외면했고, 사회당 청년그룹에게 다가가기 위한 어떤 작업도 거부했다. 그들이 1914~1919년에 있었던 사민주의와 코민테른 사이의 분열을 의례적으로 읊조리는 데 만족하는 동안, 스탈린주의자들이 먼저 끼어들어 이 전도유망한 사회당 청년조직을 차지해 스탈린주의의 부속물로 만들어버렸다.
그것은 스페인 혁명이 패배한 결정적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 우리는 미국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랐다. 처음에는 스탈린주의자들이 우리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사회당 좌파 안에는 이미 스탈린주의와 화합하려는 강력한 정서가 존재했고, 스탈린주의자들은 ‘단결’이란 선동구호를 내걸고 전력을 다해 작업했다. 우리는 문제를 인식했다. 우리가 분투하지 않으면, 스페인에서 벌어진 일이 미국에서도 벌어질 것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우리는 이제 겨우 노동자당의 독립적 깃발을 들고 활동을 시작했을 뿐이지만, 그 과제를 미룰 수 없었다. 우리는 사회당과 그 좌파의 성장에 더 많은 관심을 쏟아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노선을 주장했다. 스탈린주의자들을 좌절시켜야 한다. 스탈린주의자들과 성장하는 사회당 좌파 운동 사이에 끼어들어, 그 운동을 진정한 맑스주의 방향으로 이끌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조직에 관한 모든 물신주의를 버려야 한다. “여기에 올바른 강령을 가진 노동자당이 있습니다. 당에 가입하세요!”라고 말하며 자족할 수는 없다. 그것은 종파주의 태도다. 수천 명의 느슨한 그룹인 사회당 좌파는 개념이 다소 모호하고 혼란을 겪고 잘못 이끌렸지만, 맑스주의 사상을 제대로 공급받는다면, 미래를 위해 매우 큰 가치를 가질 수 있었다.
올러 그룹
우리 입장은 캐넌‐샥트먼 결의안으로 공식화됐다. 이에 대해 올러와 머스티는 단호하게 반대했다. 올러 그룹은 교조적 종파주의자들의 근거들을 내세웠다. 그들은 사회당에 대한 어떤 개입도 거부했고, 원칙적으로 앞으로도 고려 대상에서 확실히 배제해야 한다고 고집했다. 올러 그룹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당을 건설했고, 그 당이 이렇게 존재합니다. 사회당 좌파가 우리 강령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당에 가입시킵시다.” 우리는 모하메드고 그들은 산이니, 산이 우리에게 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 당에 합류할 생각이 조금도 없는, 혼란 속에 있는 사회당 좌파 청년들에 대한 그들의 처방은 그게 전부였다. 우리는 말했다. “그것은 너무 단순한 주장입니다. 볼셰비키는 사회당 좌파가 올바른 강령을 찾도록 돕기 위해 정치적으로 충분히 주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그들과 하나의 조직으로 통합하는 문제는 쉽게 해결할 수 있습니다.”
머스티가 반대한 것은 원칙적 근거 때문이 아니라 조직 물신주의 때문이었다. 어쩌면 개인의 자존심 문제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감정은 정치에서 치명적이다. 자존심, 분노, 원한 등 어떤 종류든 주관적 감정이 정치적 방향에 영향을 미치도록 내맡기는 자들은 패배하고 파멸할 수밖에 없다.
‘남자다운 자기 방어기술’이라 불리는 프로권투에서 젊은 권투선수가 냉정한 트레이너로부터 첫 번째로 배우는 교훈 중 하나가 적수와 마주했을 때 침착성을 유지하라는 것이다. “결코 화를 내지 마라. 절대 이성을 잃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바닥에 꼬꾸라질 것이다.” 권투선수는 감정적으로가 아니라 계산적으로 싸워야 한다. 정치에서 그것은 두 배 더 진실이다. 머스티는 우리가 당을 만들고, 그 당을 유일한 당이라고 선언한 뒤에는 다른 어떤 당에도 관심을 보내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참을 수 없었다.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지켜보면서, 우리 길을 계속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만일 그들이 우리 쪽으로 오지 않으면, 그것은 그들의 잘못이라는 것이다. 머스티의 입장에는 심사숙고도, 필수적인 객관성도 없었다. 그 입장은 상황에 맞지 않았다. 만일 우리가 방관자로 머물렀다면, 스탈린주의자들이 사회당 좌파를 집어삼켰을 것이고, 스페인에서처럼 우리에 맞선 또 하나의 무기로 이용했을 것이다.
사회당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미국 전위당의 앞길에서 또 하나의 장애물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먼저 노동자당 안에서 문제를 결판지어야 했다. 종파주의자들과 원칙 문제를 결판지어야 했다. 만일 그들이 계속해서 입장을 굽히지 않고, 무규율한 태도를 보인다면, 당에서 축출해야 했다. 이것을 조금 강조하는 것은, 우리가 올러 그룹에 대해 그렇게 해야 했기 때문이다. 만약 1935년에 우리가 그렇게 하지 못했다면, 그래서 어리석은 형식주의로 우리의 정치적 전망을 망치고 있던 이들을 감상적으로 대했다면, 우리 운동은 1935년에 파괴됐을 것이다. 우리는 더 전진할 가능성을 잃어버렸을 것이고, 불가피하게 붕괴했을 것이다. 운동이 종파주의의 무능함이라는 막다른 골목에서 끝났을 것이다.
종파주의는 흥미로운 특이현상이 아니다. 제때 뿌리 뽑지 못해 굳어지면, 조직을 파괴할 수 있는 정치적 질병이 종파주의다. 우리 당이 지금까지 살아있고 확실히 건강할 수 있었던 것은, 1935년에 종파주의에 대해 내과, 외과 치료를 했기 때문이다. 그 중 보다 중요하며, 언제나 항상 우선 고려해야 하는 것은 내과 치료다. 우리의 내과 치료는 맑스주의 원칙들과 그 종파주의적 왜곡에 대해 철저하게 토론하고 끈기 있게 설명해 교육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런 방식들을 통해 나쁜 공기를 제거했고, 처음에는 소수였지만 결국에는 다수를 획득해 올러 그룹을 고립시켰다. 이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여러 달이 걸렸다. 패배한 올러 그룹이 당 규율을 계획적으로 위반하고 분리를 준비하기 시작했을 때만 외과 수술을 실시했다. 토론과 설명을 통해 우리는 대다수 당원을 교육했다. 우리 당은 치료됐고 건강해졌다. 새끼손가락 끝이 낫지 못하고 썩어 들어가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곧바로 그 부위를 잘라냈다. 그 덕분에 당은 지금 살아있고, 그 때를 말할 수 있다.
올러 그룹과 갈라선 뒤, 우리는 머스티 그룹과 보다 장기적인 분파투쟁을 전개해야 했다. 노동자당 첫해에 있었던 두 차례의 이 내부투쟁은 사회당 좌파 문제를 명료하게 해결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거의 처음부터 신생 정당의 활력을 낭비한 내부투쟁은 틀림없이 매우 곤란한 일이었다. 우리는 차이와 갈등, 내부 투쟁 때문에 방해받지 않고, 한두 해 동안 생산적인 작업을 해나가야 했다. 하지만 역사는 그렇지 못했다. 새 당을 만들자마자, 우리는 사회당 좌파 문제에 맞닥뜨렸다. 우리는 무엇을 할지 합의할 수 없었다. 그래서 결판을 보기 위해 1년을 써야 했다.
물론 이런 갈등이 곧바로 시작된 것은 아니다. 1934년 12월 초에 만든 새 당은 꽤 순조롭게 활동을 시작했다. 머스티와 내가 함께 한 전국 순회강연은 당의 정치활동을 보여주는 첫 번째 사례이자, 두 흐름의 통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려는 시도였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열렬하게 환영받았다. 장기간에 걸친 분열과 해체 뒤에, 통합 과정이 시작됐다는 점을 급진 노동운동이 전반적으로 높게 평가하는 분위기였다. 거의 모든 곳에서 우리 강연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순회강연은 미니애폴리스에서 정점에 이른다. 대파업이 승리하고 6개월 남짓 지난 뒤, 그곳에서 우리는 매우 크게 환대받았다. 우리는 정당에 관한 영역에서 기회를 방치할 정도로 경제파업에 매몰되지 않았는데, 이 점에 대해 미니애폴리스 동지들은 매우 만족스러워 했다. 실업자 운동과 톨레도 파업 등에서 한 역할 때문에 그들이 매우 높게 평가한 머스티그룹 투사들과 우리가 통합한 것에 대해, 미니애폴리스 동지들은 열렬한 갈채를 보냈다. 그들은 행사와 회의들을 잘 준비해 우리를 정성껏 맞이해 주었다. 자기 당의 사무총장[머스티]과 그들에게 정말 소중한 신문인 <투사>의 편집자[캐넌]를 위한 환영식이 그 절정이었다. 언제나 그들은 미니애폴리스에서 올바르게 활동해왔다.
우리가 그곳에 머무는 동안, 그들은 우리 지위에 어울리는 위엄 있는 옷을 입히기로 결정했다. 지도적인 동지들이 머스티와 나를 노조 회관에서 의류잡화점으로 데려갔다. 나는 당시 우리 모습이 조금은 지저분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새 옷을 쫙 빼입었다. 그 모습은 매우 멋졌다. 그 옷 한 벌이 헤져서 버린 뒤에도, 한참 동안 나는 그 모습을 선명하게 기억했다. 모두 알다시피 머스티는 1936년에 여러 가지 복잡하고 곤란한 문제들 때문에 방향을 잃었고, 유혈 낭자한 스페인 내전과 모스크바 재판에 압도돼, 애초의 종교인으로 복귀하며 교회로 돌아갔다. 빈센트 던은 사적 편지에서 그 소식을 듣고는 빌 브라운에게 말했다. “빌, 머스티가 교회로 돌아간 것을 어떻게 생각해요?” 빌은 놀랐다. “정말요?” 그러고는 잠시 후 이렇게 말했다. “빈센트, 그 옷 한 벌을 돌려받아야겠어요!” 하지만 목사들은 아무것도 돌려주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범죄적 조합활동’ 재판
우리는 미니애폴리스에서 갈라져서 순회를 계속했다. 머스티는 다른 지역을 맡아서 더 남쪽으로 갔다. 나는 캘리포니아로 갔고, 그곳에서 순회를 끝마칠 계획이었다. 그때 새크라멘토에서는 ‘범죄적 조합활동’ 혐의로 공산당원들을 재판하고 있었다. 우리 동지 노먼 미니가 피고인 가운데 한 명이었다. 스탈린주의자들은 그가 트로츠키주의자로 판명됐다는 이유로 방어를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재판이 이루어지는 동안 자기 언론을 통해 그가 ‘경찰 끄나풀’이라고 비난하기까지 했다. 우리는 그를 도우러 갔다. 비스탈린주의자들이 만든 ‘초당파 노동자 방어위원회’가 미니 동지를 방어하는 데서 매우 탁월한 역할을 했다. 우리는 이런 상황의 정치적 측면들을 최대한 활용했다.
두 달 일정으로 순회강연을 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종파주의 공론가들이 뉴욕에서 일으킨 첫 번째 소란을 들었다. 늘 그랬듯이, 소란은 뉴욕에서 시작됐다. 그들은 당이 쉬지 못하게 했다. 그들은 당이 좋게 출발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당시 우리는 전혀 다른 경험과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통합해 새로 조직을 만든 상황이었다. 이 당은 평화롭게 함께 활동할 시간이 어느 정도 필요했다. 그것이 처음 시기에 필요한 가장 합당하고 현실적인 계획이었다. 하지만 종파주의자들에게는 어떤 합리성이나 현실성도 없었다. 그들은 ‘볼셰비키화’ 계획에 따라, 뉴욕의 통합 조직을 분열시키고 있었다. 중도주의 머스티 그룹이 좋아하건 싫어하건 관계없이, 이 그룹을 장악하고 이들 가운데서 볼셰비키를 가려낼 계획이었다. 게다가 그것도 빠르게 추진할 생각이었다. 토론하자! 그들은 밤새도록 토론하고 설명하고 테제화하면서, 머스티 그룹 일부를 소스라치게 만들었다. 엄격한 교의에서 벗어나 보이는 이들 전부를 괴롭혔고, ‘쟁점들’을 찾아다녔다. 어떤 평화도, 어떤 애정 어린 공동작업도, 어떤 차분한 교육도 없었다. 신생 정당이 자연스럽고 유기적으로 전진하게 하려는 어떤 의지도 찾아볼 수 없었다. 무책임한 분파투쟁은 맨 처음부터 대부분 종파주의자들 때문에 벌어졌다.
노동자 활동가 회의
뉴욕의 싸움은 당이 제안해 1935년 3월에 피츠버그에서 열린 유명한 ‘노동자활동가회의’에서의 폭발을 예고했다. ‘노동자활동가회의’는 미국노동자당[머스티그룹]의 경험으로부터 끌어낸 굉장한 기구였다. 그 구상은 어떤 지역 또는 전국의 모든 당 활동가들을 중심지로 모이게 해, 구체적 활동을 토론하고, 경험을 보고하며 서로 친분을 맺기 위한 것이었다. 1940년과 1941년 우리가 시카고에서 경험해 알게 됐듯이, 그것은 놀라운 기구였다. 당이 조화로울 때는 그 기구가 잘 굴러갔고, 모두 함께 협력해 사업을 완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공식 당 대회만 해결할 수 있는 심각한 논쟁이 당 안에서 벌어졌을 경우, 특히 어떤 무책임한 분파가 활개 칠 때는, 논란을 결정짓는 데서 아무 합법적 권한도 갖지 못한 비공식적 ‘노동자활동가회의’는 생략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런 상황에서 비공식 회합은 종파주의를 부채질할 뿐이다. 우리는 그것을 피츠버그에서 깨달았다.
피츠버그에서 열린 ‘노동자활동가회의’는 시작할 때부터 심각한 실패작이었는데, 올러 그룹이 그 회의를 지도부의 ‘기회주의’에 맞선 분파투쟁의 장으로 이용했기 때문이다. 당 활동 경험이 처음이었던 머스티 그룹 출신의 현장동지들은 당의 대중활동에 대한 각자의 보고를 듣고, 대중활동을 어떻게 약간이라도 전진시킬 수 있을지 토론하겠다는 순진한 생각으로 왔다. 하지만 오히려 처음부터 무제한적인 분파투쟁에 휩싸였다. 올러 그룹은 의장 선출에서부터 싸움을 시작했고, 그 뒤에도 모든 문제에 대해 광신도처럼 사생결단의 태도로 싸움을 계속해나갔다. 나도 그런 자리에서는 처음 보았을 정도로, 상황은 종파주의자들의 난장판이었다. 신생정당으로부터 영감을 받고, 구체적 활동에 대한 현명한 안내를 기대하며 참가했던, 정당 활동 경험이 아예 없거나 별로 없는 40~50명의 순진한 현장노동자들은 밤낮으로 계속된 토론, 논쟁, 종파적 비난을 들어야 했다. 나는 그들 중 많은 이들이 놀라서 다음과 같이 생각했을 것이라고 본다. “지금 대체 어떤 상황이지? 트로츠키주의자들은 광적인 논쟁가들이고 타고난 종파주의자들이라는 말을 늘 들어왔는데, 그 얘기가 좀 일리 있네.” 그들은 그 자리에서 최악의 종파주의를 목격했다.
일반적으로 대중활동가들은 매우 간략한 토론만 원하고, 몇 가지 정말 필요한 사항을 정한 뒤, 실천으로 나아가는 경향이 있다. 피츠버그에서 그들이 원했던 것은 본론으로 들어가 노조 활동, 실업자 동맹, 당 지부의 역할, 재정 등 당의 구체적 활동경험을 교류하는 것이었으며, 우리 역시 그랬다. 종파주의자들은 그런 따분한 문제들에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에티오피아 문제, 중국 문제, 프랑스 전환과 같은 ‘원칙적 문제들’로 토론하자고 고집했다. 물론, 그 주제들은 매우 중요하지만, 회의 안건은 아니었다.
조젭 잭
올러와 스탬, 그리고 잭이 그것을 주도했다. 여러분 중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조젭 잭을 아는지는 모르겠다. 그는 그 무렵에 스탈린주의 진영에서 우리한테 넘어왔지만, 다른 목적지로 가던 도중 잠시 우리 진영에 머물렀을 뿐이다. 그는 스탈린주의 정당의 내부 관료 중 한 명이었고, 당의 부패와 관료적 퇴보에 상당한 책임이 있었다. 그 뒤 그는 몇 주 동안, 고작해야 몇 달 동안, 트로츠키주의자가 됐다. 우리 조직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왼쪽에서 우리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잠시 참았지만, 그가 당 규율을 무너뜨리기 시작했을 때는 그를 쫓아냈다. 그는 얼마동안 허공에 머물다가, 결국 정치적 불구자들이 모여 사는 늙은 배신자들의 거점인 15번가의 사민주의 신문 <뉴 리더>의 기고자가 되어 반공 ‘민주주의’ 진영에 가담했다.
피츠버그에서 머스티는 이 종파주의자들의 맹공격을 격퇴하기 위해 샥트먼-캐넌과 연합했다. 머스티는 그들의 행동이 파괴적이라는 점을 인식할 수 있었다. 그는 조직에 대한 태도에서는 언제나 매우 책임감 있고 적극적이었다. 이 제멋대로인 자들이 당 활동을 마비시키지 못하도록 그들을 격퇴하는 데에서 기꺼이 우리를 도왔고 우리와 협력했다. 또한 그도 우리의 도움이 확실히 필요했다. 머스티는 너무 신사적이어서 그들을 적절하게 다루지 못했다. 우리는 피츠버그에서 그들을 약간 밀어붙였지만, 어떤 것도 해결하지는 못했다. 우리는 이론적이고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결정적 투쟁이 우리 앞에 놓여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당이 잠시 숨을 돌리고, 대중 활동을 발전시키기 위해 화합하기를 바랐지만, 이런 기대는 무책임한 종파주의자들 때문에 산산이 부서졌다.
우리는 뉴욕으로 돌아오면서 소매를 걷어붙이고 그들과 결판 짓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에 이롭다. 우리는 치명적 병이 돼버린 종파주의를 하찮게 여기지 않았다. 올러 그룹을 공격하는 대대적인 캠페인을 준비했다. 그들이 토론을 원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쟁점이 되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전면토론을 그들에게 그리고 당에 제안했다. 우리의 목적은 종파주의 병균에 감염된 당원들을 재교육시키고, 만일 그 지도부를 교정할 수 없다고 판명나면, 그들을 당에서 고립시켜 운동을 저해하거나 활동을 마비시키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런 곤란에 빠져들자, 우리가 통합대회에서 품었던 커다란 희망은 자연스럽게 조금씩 시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치에서 직선로는 결코 없다. 갈등과 좌절을 겪을 때, 쉽게 풀이 죽어 의지가 꺾이는 사람은 혁명 정치로 나아갈 수 없다. 그것은 언제나 힘겨운 싸움이며, 결코 순탄한 항해가 보장되지 않는다. 전체 자본가 사회의 압력이 수백 또는 수천의 사람들[미국 노동자당]을 짓누르는 상황에서, 어떻게 그런 순탄함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만일 이들이 자기 자신의 신념으로도 뭉치지 못하고, 서로 간의 다툼으로 빠져든다면, 그것은 또한 노동자계급 전위에 대한, 특히 최전위에 대한 자본가 세상의 엄청난 압력을 반영하는 것이다. 자본가 사회의 영향은 때때로 혁명적 노동자당의 분파들 속에서 나타나기도 한다. 심각한 분파투쟁의 진짜 원인은 거기에 있다. 정치활동을 하려면 이 모든 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것들을 정치적 관점에서 명확하게 평가하고, 정치적 해법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올러 그룹에 대해 그렇게 했다. 우리는 포기하지도 않았고, 풀이 죽지도 않았다. 그 문제를 정치적으로 분석했고, 정치적으로 해결하기로 결심했다.
내부투쟁은 갓 탄생한 정당을 마비시키고 있었다. 노동자 대중운동의 객관적 조건은 새로운 회원들이 몰려들어 내부의 종파주의를 쓸어버릴 정도로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사회당 안에서 좌파가 등장한 것은, 사회당을 무시하고 순전히 독립적인 운동노선에 따라 우리를 성장시키는 데서 치명적인 것이었다. 사회당 안에서 좌파가 성장하고 있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급진적 노동자들은 수년 전보다 사회당에 더 매력을 느꼈다. 사회당은 우리 당보다 훨씬 더 큰 조직이었다. 우리는 모든 신호와 조짐을 주시하면서, 급진적 사상에 눈 뜨고 있는 노동자들과 정치운동에서 이탈했다가 다시 합류하려는 노동자들이 우리 당이 아니라 사회당에 가입하는 것을 목격하기 시작했다. 사회당 좌파가 성장하고 있기 때문에 결국은 사회당이 진정한 혁명정당이 될 거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이 때문에 미국노동자당의 당원 확대가 가로막혔다. 그것은 사회당 좌파로부터 우리를 격리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경고였다.
재정 위기
이런 복잡하고 곤란한 문제들에 직면하고 있는 가운데, 재정적 곤란이 더해졌다. ‘진보노동행동협회’와 그 뒤를 이은 미국노동자당이 성장할 수 있었던 주요 요인 가운데 하나는 머스티의 개별접촉자들과 후원자들, 그리고 그들로부터의 재정 지원이었다. 머스티는 1917년에 로렌스파업을 통해 노동운동에 발을 들여놓았고, 섬유노조에 결합해 그 저명한 지도부의 일원이 됐다. 그 뒤 뉴욕 카토나에 브룩우드 노동대학을 설립해, 수년 동안 엄청난 경비를 들이며 운영했다. 그는 아직 브룩우드에 있었던 1929년에 ‘진보노동행동협회’를 설립했다. 그 뒤 브룩우드 노동대학을 떠났고, 정치활동에 전념했다. 그 시기 내내, 개인적으로 자신을 신뢰했고 활동을 후원했던 다양한 부류의 재력가들에게서 상당한 금액의 돈을 모을 수 있었다. 그는 다양한 활동을 통해 이런 지원을 유지해나갔다. 그것은 ‘진보노동행동협회’와 미국노동자당의 재정에서 결정적 부분을 차지했다.
하지만, 머스티가 [새로운] 노동자당을 만들기 위해 트로츠키주의자들과 함께 하자, 이 기부자들은 떠나기 시작했다. 대체로 그가 접촉했던 사람, 친구, 동료의 다수는 과거에 그가 속했던 종교계의 성직자들, 기독교 사회사업가들, 공상적 박애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노조를 지원하고, 실업자에게 기부하며, 가난한 노동자들이 교육받을 수 있도록 노동자대학을 후원하고, ‘협회’가 어떤 의미에서든 ‘진보적인’ 일을 하도록 도울 의지가 있었다. 하지만 머스티를 통해서라도 트로츠키주의자들을 위해 기부할 수 있었을까? 물론 아니었다. 그것은 너무 멀리 나가는 일이었다. 그들에게 트로츠키주의는 정말 너무 심각한 문제였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한다면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통합정당의 더 폭넓은 활동에 대해서도 재정을 지원해줄 것이라고 머스티가 믿었던 그의 관대한 후원자 대다수가 차례로 떨어져나갔다.
우리는 정말 야심찬 계획을 갖고 당 활동을 시작했다. 통합대회의 열기 덕분에 여러 종류의 후원이 들어왔고, 우선 수중에 돈이 있었다. 머스티와 내가 외부에 있는 동안, 뉴욕에서는 최소한 그럴싸한 본부를 두는 것이 필요하다고 결정했다. 그들은 15번가와 5번가 사이의 모퉁이 건물에서 화려한 사무실을 빌렸다. 150달러 또는 175달러의 월세 사무실을 빌린 것으로 기억한다. 그곳에는 온갖 고위 간부와 인사들을 위한 사무실들이 있었다. 거기에는 전화 한 대가 아니라 전화교환대가 있었다. 그곳에서 고위간부, 편집자, 관료들이 수화기를 집어 들고 누군가와 통화할 때, 옆에 앉은 여성교환원이 전화 연결을 도와주고 있었다. 그 사무실을 유지하고 있는 동안은 좋아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한겨울의 예외적인 봄 날씨일 뿐, 진짜 봄은 아니었다. 1935년 여름, 우리는 월세를 못 내 쫓겨났다. 우리는 어떻게든 그 상황을 이겨내야 했다. 그래서 11번가에 낡은 사무실 하나를 빌렸다. 전화교환대를 없애고, 한 대의 전화만을 갖기로 결정했지만, 그마저도 몇 달 뒤 요금을 내지 못해 차단됐다. 하지만 우리는 살아남았다.
그 시기에 당은 대중활동을 발전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과거 머스티 그룹이 설립한 전국실업자동맹은 전국 각지로 확대됐다. 특히 오하이오, 펜실베니아, 웨스트버지니아 등에 지부들을 설립했다. 그 중요한 작업을 해 온 현장 노동자들에게 우리가 어느 정도 실질적 도움을 줬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 실업자 조직들을 통해, 수천 명의 노동자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하지만 더 많은 경험을 통해 우리는 대중활동 영역에서도 유익한 교훈들을 배웠다. 경제위기 상황에서 실업자 조직들은 빠르게 만들고 확대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조직들의 안정성과 혁명적 잠재력에 대해 환상을 갖기 쉬웠다. 하지만 가장 좋을 때도 실업자조직은 느슨했고, 대열이 쉽게 흩어졌다. 그들은 손가락 위의 모래처럼 미끄러졌다. 일자리를 갖자마자, 보통의 실업자들은 실업자조직을 잊고 싶어 했다. 비참한 과거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장기 실업자들이 쉽게 사기가 꺾이고 절망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혁명운동에서 이런 조직을 지켜나가는 임무보다 더 실망하고 좌절하게 만드는 임무는 없을 것이다. 혁명운동을 위해 무언가를 확고하고 안정적으로 만들겠다는 희망을 갖고 매달, 매년 활동을 지속하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그 시기의 경험에서 얻은 하나의 분명한 교훈은 공장 노동자들이야말로 혁명정당의 진정한 기반이라는 사실이다. 힘과 활력, 미래에 대한 자신감은 그들에게 있다. 실업자대중과 그 조직이, 고용된 공장노동자들 내의 기반을 결코 대신할 수 없다.
당시에 애크런의 고무 공장들에서 곧 파업이 벌어질 것처럼 불만의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우리 중 일부가 그곳으로 가서 몇몇 접촉자들을 통해 파업에 개입할 방법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파업은 미뤄졌다. 내가 그 사건을 언급하는 것은, 당시 우리가 모든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항상 대중활동을 지향했다는 점을 말하기 위해서다. 그 해 여름에 톨레도의 쉐보레 노동자들이 파업했다. 그 파업에서 우리 동지들은 대단히 활동적이었다. 머스티가 그곳에 가서 파업의 기층 지도부에게 상당히 영향을 미쳤다. 우리는 그의 활동 덕분에 많은 대중성을 획득했지만, 조직화 측면에서는 어떤 가시적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머스티의 방식이 가진 약점 중 하나였다. 일정 기간 그의 개인적 특성을 관찰할 수 있었다. 그는 매우 빠르게 노동자들의 신뢰를 얻는 훌륭한 집행가이자 대중활동가였다. 하지만 진정한 정치지도자가 할 수 있는 한도 이상으로 대중에게 순응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 결과 그는 영속적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강령에 기초해 단호한 중핵들을 형성하는 일을 좀처럼 할 수 없었다. 실제로 머스티가 대중활동을 훌륭하게 해냈던 모든 경우에, 그보다 덜 관대하고 덜 안이했던 다른 정치경향들이 결국은 성과를 남겼다.
당이 침체되고 내부 곤란을 겪었던 이 시기에 뷰든즈가 속셈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미국노동자당 지도부의 일원이었던 뷰든즈는 자동으로 새 당에 합류했지만, 어떤 열의도 없었다. 그는 통합에 반대했다. 당시에 그는 몸이 아팠고, 그 과정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그는 몇 달 동안 불만을 표출한 뒤, 독자적으로 공공연하게 반대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미국적 접근’을 하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그것은 머스티 그룹이 강조해왔던 점 중 하나였다. 미국노동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용어로 접근하고, 그들의 언어를 사용하며, 혁명적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는 미국의 역사적 사건들을 강조해야 한다 등등이 그것이었다.
우리 트로츠키주의자들은 항상 스탈린주의의 일국주의적 타락에 맞서 싸우면서 국제주의를 강조해왔다. 머스티 그룹은 우리와 처음 토론하기 시작했을 때, 우리가 ‘미국적 접근’을 받아들일 의지가 확고하다는 것을 알고는 정말 놀랐다. 사실 몇 년 전에 공산당에서 우리 분파는 바로 이 노선에 따라 싸웠다. 우리는 러시아혁명에 고무돼 늘 러시아를 바라보았던 공산당에게 미국을 보라고 요구했다. 당이 미국화해 가능한 모든 방식으로 미국노동자들의 심리, 습관, 전통에 적응하고, 가능한 언제나 미국의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 선전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그것에 완전히 동의했다. 우리가 최근 미니애폴리스 재판에서 그것을 조금 적용하려 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여러분 중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반대심문에서 [연방 재판관] 슈와인하트 씨는 나에게, 군대가 노동자농민정부에 등을 돌린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지를 말하라고 했다. 나는 미국 남북전쟁에서 링컨이 했던 일을 설명했다.
우리 모두는 미국화, 즉 미국 상황에 맞게 선전하는 것에 찬성했다. 그것은 물론 좋은 레닌주의다. 하지만 뷰든즈의 미국화는 조잡한 국수주의라는 점이 곧 드러났다. 그는 당 전국위원회에 와서 우리 강령 전체의 목표가 헌법을 수정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것은 우리의 혁명 강령을 의회주의적 목표로 축소하려는 것이었다. 그것은 심각한 굴종이었고, 가장 노골적인 속물적 강령이었다. 뷰든즈는 평당원의 무지와 편견을 악용해 말썽을 일으키려 했다. 그가 현장노동자 출신이었고, 현장노동자들에게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일으키는 반향에 대해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대중운동의 현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어떤 노동자 대중도 함께 무언가를 도모할 수 없는 사기꾼들이자 분열주의자들이라는 말이 끈질기게 퍼져나갔다. 우리를 겨냥한 이런 편견의 확산을 매우 주의해야 했다. 우리는 뷰든즈를 신경 쓰지는 않았다. 우리는 그를 꿰뚫어보았다. 하지만 머스티 그룹 출신의 현장노동자 가운데 그의 친구들에게는 크게 관심이 있었다. 우리는 뷰든즈에 맞서 매우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그를 위협하거나 추방하지 않았고, 매우 조심스럽게 토론을 시작했을 뿐이다. 우리는 매우 참을성 있게 설명하면서, 정치 토론과 교육을 진행했다.
그 시기에 뷰든즈 문제로 우리가 했던 정치교육은 우리 운동에서 모범일 것이다. 그 뒤 뷰든즈가 자신의 속물적 ‘미국화’ 강령으로부터 논리적 결론을 이끌어내고, 당시 기꺼이 성조기를 휘날리던 스탈린주의자들에게 투항했을 때, 그 결과가 드러났다. 그는 당을 분열시켜 경험 많고 가치 있는 현장투사들을 데리고 나가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는 중요한 것을 놓쳤다. 앞서 했던 참을성 있는 토론과 공동활동의 성과를 과소평가한 것이다. 결국 그는 고립됐고, 사실상 혼자 스탈린주의로 넘어갔다. 현장노동자들은 당에 계속 충실했고, 전투적 현장노동자에서 진정한 볼셰비키로 점점 더 변해갔다. 그것은 시간이 걸린다. 아무도 처음부터 볼셰비키로 태어나지 않는다. 배워야 한다. 혼자 책으로 배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오랜 시간에 걸쳐 현장활동, 투쟁, 개인적 희생, 시험, 연구와 토론 등을 결합해야 배울 수 있다. 한 명의 볼셰비키를 만드는 것은 긴 인내의 과정이다. 하지만 한 명의 볼셰비키를 획득하면, 그 보답으로 무언가를 얻게 된다. 우리는 이들을 충분히 확보할 때, 혁명을 포함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
1935년 6월 총회
우리는 여러 가지 곤란과 내부 다툼을 겪었다. 그 모두는 주로 사회당 좌파 문제에 관한 싸움에서 비롯됐다. 모든 관심의 초점이 거기에 있었다. 1935년 6월에 열린 전국위원회 총회에서, 우리는 그 쟁점에 관해 대전투를 벌였다. 이 ‘6월 총회’는 우리 당의 역사에서 중요하다. 그것은 3월에 피츠버그에서 벌어진 비조직적 다툼이 아니었다. 우리는 싸울 준비를 마치고 6월 총회에 참석했다. 쟁점을 명료화하고 당원을 교육시키는 당내 공개투쟁의 도약대로 총회를 활용하기 위해, 조직하고, 의지를 다지고, 결의안을 준비해서 총회에 참석했다.
우리는 사회당에 보다 큰 힘을 쏟자고 요구했다.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은 급진적 노동자들을 우리 당이 조직하고 있지 못하다는 증거가 우리 눈앞에 쌓이고 있었다. 소수는 획득했지만, 다수는 사회당 좌파로부터 미래의 혁명정당이 탄생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사회당에 가입하고 있었다. 더 큰 당에 가입할 수 있는 상황에서는 노동자들이 작은 당에 가입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것 때문에 그들을 탓할 수는 없다. 작다는 것 자체는 미덕이 아니다. 사회당이 그런 노동자들을 끌어들이면서, 미국노동자당의 당원 확장에는 빗장이 걸렸다. 사회당 좌파가 우리와 의식적으로 경쟁하지 않았을지라도, 사회당 좌파가 우리보다 더 컸기에 전도유망한 사람들을 사회당으로 끌어들이고 있었고, 그런 사람들이 우리 쪽으로 오지 못하게 했다. 사회당이 우리 앞길을 가로막았다. 우리는 그 장애물을 제거해야 했다.
올러‧머스티‧에이번 분파
6월 총회에서 과거의 대립구도는 깨졌다. 버넘은 사회당 문제에 대한 캐넌-샥트먼 결의안을 지지하면서 우리 쪽에 합류했다. 머스티와 올러는 함께 다른 편에 섰다. 3월의 노동자활동가회의에서 머스티는 우리와 같은 편이었지만, 당시에 정치 쟁점은 명확하지 않았다. 6월 총회가 가까워지면서, 머스티는 점점 더 사회당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노동자당의 조직적 순수성을 침해할지도 모른다고 의심했다. 그는 그것을 단호하게 반대해, 올러 그룹과 비공식적이지만 실제적인 동맹을 맺었다. 에이번 파벌의 압력도 그를 부추겨 이 잘못된 연합에 참가하게 만들었다. 에이번 파벌은 원칙이 없었기 때문에 분파라고 부를 만한 무게를 갖지 못했다. 이 무원칙한 파벌이 상황에 뛰어들어, 머스티 그룹, 올러 그룹, 에이번 그룹의 동맹이 6월 총회에서 다수파를 이뤘다.
우리는 지도부와 전체 당원 모두에서 소수파로서 종파주의에 맞서 대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우리 계획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았다. 사회당 좌파와 사회당의 변화에 주된 관심을 쏟자. 이 주된 관심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1) 우리 언론의 많은 기사를 통해 사회당의 동향을 분석하고, 좌파 노동자들에게 다가가 호의적인 방식으로 조언과 비판을 보낸다. (2) 당원들이 사회당 좌파와 개별적으로 접촉하고, 그들이 원칙 문제들에 관심을 갖도록 하며, 우리와 정치토론이나 공동 회합 등을 하게 만든다. (3) 사회당 안에 트로츠키주의 분파를 만든다. 30~40명의 우리 당원들이 사회당에 가입해, 좌파에게 볼셰비키 교육을 하기 위해 활동한다.
이 세 가지가 우리의 전반부 계획이었다. 후반부 계획은 당분간 조직적 전망을 열어두자는 것이었다. 이것은 어느 정도 소극적 입장인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사회당에 입당하자”고 말하지 않았다. 다른 한편,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사회당에 가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점과 관련해서는 열어두자. 미국노동자당을 유지하고, 독립적 작업을 통해 당을 강화해나가자. 하지만 사회당 좌파와 통합하는 것을 목표로 그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미래에 조직적 측면에서 무엇이 필요할지를 기다려보자.”
사실, 당시에 당 전체가 사회당 가입을 원했더라도,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뉴욕을 통제하고 있던 사회당 우파가 우리의 가입을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사회당이 크게 동요하고 있고, 갑자기 상황이 급변할 수 있다는 점을 알았다. 우리는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지든 거기에 대비해두고 싶었다. 우리는 이렇게 말했다.
“좌파가 사회당에서 쫓겨나 우리한테 합류하거나, 우리와 함께 새로운 당을 만들 수도 있다. 우파가 떨어져나가면서, 스탈린주의자들이 그 운동을 집어삼키지 못하게 우리가 사회당으로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그 문제는 열어두고 상황 전개를 지켜보자.”
그것이 반대파에게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종파주의자들이 늘 그렇듯, 올러 그룹은 매우 공세적이고 확고하고 제안했다. “원칙에 따라 지금이건 앞으로건 사회당에 가입하지 말자.” 왜 우리가 1935년 6월에 미래를 저당 잡혀야 하는가? 왜? “왜냐면 사회당은 1914년에 파산했고 로자 룩셈부르크와 레닌이 비난한 제2인터내셔널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제2인터내셔널이 파산했기 때문에, 공산주의인터내셔널을 조직했다. 만일 우리가 지금이건 미래건 사회당에 가입한다면, 그것은 사민주의를 강화해주는 것이고, 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를 죽인 샤이데만과 노스케 일당을 새로 인정하는 것이다.” 올러 그룹의 핵심 주장을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런 것이다. 엄청난 변화, 새로운 당원들, 새로운 요소들, 새로운 정치적 재편들에 대해 그들에게 설명한다? 종파주의자들에게 무언가를 설명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들은 프랑스 트로츠키주의자들이 프랑스 사회당에 입당하기로 한 ‘프랑스 전환’을 거부하자고 했다. 올러 그룹은 그 정책을 전 세계 모든 나라에 적용하는 것을 거부했다. 우리는 원칙 문제에서 그들과 싸웠다. 우리는 ‘프랑스 전환’을 옹호했다. 비슷한 상황이라면 미국에서도 똑같이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우리가 사회당 입당을 교묘하게 추진하면서도, 단계적으로 당원들을 움직이기 위해 목적을 숨기고 있다고 비난했다. 한동안 많은 당원이 이 비난을 믿었지만, 그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사회당 상황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에 보다 확실한 입장을 취할 수는 없었다. 우리는 당시에 사회당에 입당하자고 제안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회당 입당을 원칙적으로 반대함으로써 미래의 결정을 미리 차단하는 것도 거부했다. 혁명정당을 건설하고자 한다면, 당에 책략을 부려서는 안 된다. 당을 교육해야 한다. 나는 그렇게 책략을 부리는 지도부라면 신뢰받을 자격이 전혀 없다고 말해왔다. 나는 그따위 정치에 공감해본 적이 없다. 만일 무언가를 확신한다면, 해야 할 일은 가능한 한 빠르게 그것을 널리 교육시키려고 곧바로 선전에 돌입하는 것이다.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이며, 왜 그것을 해야 하는지를 충분히 이해하면서 의식적으로 활동하지 못하는 당이라면 별 가치가 없다. 침묵하면서 이런저런 방식으로 강령을 은근슬쩍 들이밀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은 맑스주의자의 정치가 아니다. 그것은 도덕주의자 버넘 교수가 뒤에 수차례 보여줬듯이, 소부르주아 정치다. 트로츠키주의의 관점에서 분파투쟁을 벌이는 온전한 목적은 단순히 잠시 동안 우위를 차지하고 다수를 획득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며, 우리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6월 총회는 모든 당원에게 개방됐다. 토론의 열기는 총회장 안으로 가둘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뜨거웠다. 모든 당원이 뜨거운 관심으로 들썩였고, 어떤 식으로든 총회를 지켜봤다. 우리는 밤낮으로 논쟁하며 결연하게 싸웠다. 트로츠키주의자들에게는 어떤 독특한 기질이 있다고 하는데,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다른 사람들보다 지구력이 더 좋다고 할 수 없다. 때로는 더 부족하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정치 투쟁에서 어떤 정치사상을 놓고 싸울 경우에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이 다른 어떤 정치활동가들보다 더 오래 깨어있고, 더 오래 더 자주 발언하는 것을 여러 번 봤다. 그 총회에서 우리 장점 중 하나가 육체적인 것이었다. 우리는 그들이 녹초가 되도록 만들었다. 결국 셋째 날 아침 4시 경에, 기진맥진한 다수파는 논쟁을 중단했다. 그들은 3시경에 토론을 끝내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한 시간 동안 민주주의의 침해에 대해 말했다. 당시 그들은 너무 지쳐서, 그것이 민주적이건 아니건 관심이 없었지만, 우리는 조금도 지치지 않고 싸웠다. 그들은 총회를 끝냈고, 우리는 소수파였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공세적이었다.
10월 총회와 올러 그룹 출당
총회 이후 토론은 평당원들로 확산됐다. 우리는 종파주의 정책을 물리치고, 그 분파를 고립시키기 위해 단호하게 싸웠다. 내부토론을 시작한 지 넉 달 뒤, 우리의 승리는 명백해졌다. 머스티와 올러의 연합은 강력한 토론 속에서 파산했고, 올러 그룹은 고립됐다. 내부투쟁이 더욱 진전되면서, 좌익 종파주의자들이 불성실하다는 점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그들은 당이 금지했는데도, 자기 발행물을 집회에서 배포하면서 당규를 어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나의 독립분파로서 신문을 가질 권리를 요구했다. 10월 총회는 그들의 요구를 허용하는 것이 현실적 관점에서 불가능하며, 볼셰비즘의 관점에서 원칙적으로 옳지 못함을 설명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왜 그들의 요구가 잘못됐고, 왜 우리가 그것을 허용할 수 없는지를 밝히는 결의안을 샥트먼이 작성했다. 뒤에 소부르주아 반대파로 싸웠을 때, 샥트먼은 자기 분파가 독립적이고 이중적인 기관지를 갖는 것이 왜 올바르고 필요한지를 밝히는 또 다른 결의안을 작성했다. 이 모순은 우리에게 낯설거나 새롭지 않았다. 언제나 샥트먼은 집필 능력에서 특별히 뛰어났다. 뿐만 아니라 하나의 문제에 대해 양쪽 입장에서 똑같이 글을 잘 쓸 수 있는 집필 능력에서도 그 이상으로 뛰어났다. 모든 사람을 공정하게 평가해야 하는데, 샥트먼은 그 찬사를 받을 자격이 있다.
10월 총회는 올러 그룹의 요구를 기각했다. 그리고 머스티가 발의해, 더 이상 당규를 위반하지 말라고 강력하게 경고했다. 그들은 경고를 무시했고, 체계적인 당규 위반을 계속해 나갔다. 그래서 올러 그룹은 얼마 뒤 당에서 제명됐다.
우리 대오 안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을 때, 사회당 안에서는 상황이 빠르게 무르익고 있었다. 랜드 스쿨, <일간 전진>, 노동조합 관료체계를 중심으로 뉴욕에 집중돼 있던 우파는 점점 더 공세적으로 싸웠고, 자신들이 소수파라는 것을 확인하면서, 1935년 12월에 스스로 분리해나갔다. 이 때문에 사회당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상황이 만들어졌다. 우파의 분리 덕분에 우리는 발전하고 있는 사회당 좌파와 직접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종파주의자들에게 결정적으로 승리한 덕분에, 당시 우리는 자유로웠고, 그 기회를 움켜쥘 준비가 돼 있었다.
정치냐 조직이냐
앞 장에서 1935년 10월 총회에서 올러파와 내부투쟁을 벌인 결과를 살펴보았다. 6월 총회의 세력관계는 토론과 분파투쟁이 진행된 넉 달 사이에 급변했다. 6월 총회의 소수파는 평당원 사이에서 다수를 획득했다. 6월 총회에서 우리와 맞섰던 극좌 올러 그룹과 머스티 그룹의 암묵적 동맹은 10월 총회에 이르러서는 깨져버렸다. 올러 그룹이 당에 남을 수 있는 조건을 정한 결의문을 머스티 그룹과 캐넌-샥트먼 그룹이 공동으로 작성해 제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머스티 자신이 느꼈기 때문이다. 올러 그룹이 취해온 불성실한 태도를 본다면, 이것을 계기로 그들이 당에서 이탈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랬다. 그들이 10월 총회의 규율 규정을 거부하면서, 제명으로 이어졌다.
머스티와 올러의 잘못된 연합을 경험하면서 일정한 정치적 교훈을 끌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정치그룹 사이에서 원칙적 노선들을 뛰어넘는 연합은 필연적으로 재난을 불러올 뿐이다. 그런 동맹은 유지할 수 없다. 머스티가 6월 총회에 이어 그 뒤에도 올러 그룹과 연합하는 잘못을 했기에, 그의 입지는 진지하게 정치강령을 받아들인 당원 사이에서 크게 약해졌다. 하지만 그가 뒤에 샥트먼이 버넘과 무원칙하게 동맹하면서 취했던 태도보다는 훨씬 더 신뢰할 만한 태도를 보이며, 방어할 수 없는 잘못된 입장에서 스스로 물러났다는 사실을 짚을 필요가 있다. 올러파가 당에 대한 충성을 거부하고 이탈 중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지자마자, 머스티는 그들과 관계를 간단히 끊었다. 그리고는 우리와 손을 잡고 그들과 선을 그었으며, 결국은 그들을 당에서 제명했다. [하지만 나중에] 샥트먼은 버넘이 그를 떨쳐버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종파주의자들이 이탈한 뒤, 에이번 그룹의 지지를 받는 머스티 그룹과 이제 전국위원회와 평당원 사이에서 다수파가 된 캐넌-샥트먼 그룹 사이에 불안정한 휴전 분위기가 당에 팽배했다. 그것은 당이 실제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놓고 일종의 가짜 합의를 하고 있는 불안정한 휴전 상태였다. 사회당 좌파라는 유령이 여전히 노동자당을 배회하고 있었다. 문제는 거기에 있었지만,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은 아직 성숙하지 못했다. 심지어 1935년의 10월 총회 뒤에도, 우리는 사회당 입당을 위한 어떤 안도 제출하지 않았다. 이것은 우리가 사회당 입당에 대해 당원들에게 알리거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숨기면서 책략을 부렸기 때문이 아니다(마치 우리가 그런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많이 비난받았고, 아마도 일부 동지들은 여전히 그렇게 믿고 있는 듯하지만 말이다.) 우리가 당시에 사회당에 입당하겠다고 공식적으로 제안하지 않은 것은 당시 사회당 안의 상황이 우리 그룹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회당 우익 ‘보수파’가 여전히 뉴욕을 통제하고 있는 상황에서,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입당은 자동적으로 배제됐다. ‘보수파’는 결코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제안을 하지 않았다.
비슷한 시점에 실제로 사회당 전국위원회가 열렸고, 우유부단한 ‘전투파’는 수치스럽게도 우파에게 굴복했다. ‘전투파’ 평당원들은 그 일에 대해 들고 일어났고, 그 압력이 다시금 지도부를 왼쪽으로 밀어붙였다. 아직은 사회당 안의 싸움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단지 지켜볼 수 있을 뿐이었다. 사회당 안의 상황이 아직 유동적이었기 때문에, 우리 입장에서는 사회당과 관련한 근본 문제를 여전히 해결할 수 없었다.
이 기간 내내 선진노동자들, 무소속이지만 다소 급진적이고 계급의식적인 노동자들의 관심은 상대적으로 규모가 큰 사회당에 집중됐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국의 급진적 운동의 계승자가 사회당일지 아니면 노동자당일지 지켜보자. 사회당이 정말로 왼쪽으로 움직이는지 지켜보자. 만일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노동자당보다는 규모가 큰 혁명정당에 입당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노동자당이 신규당원을 조직하는 것은 극도로 어려웠다.
노동자당 안에서는 끊임없이 마찰이 발생했다. 비록 당시에 한 분파가 다른 분파에 맞서 어떤 것을 제안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당시에는 노동자당의 독립적 선동 등을 하면서 당 자체를 강화해 가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 분파는 사회당 입당과 관련해 어떤 제안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들은 ‘프랑스 전환’을 지지했기 때문에, 원칙적 관점에서는 그런 제안에 반대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두 분파가 그 문제를 바라보는 데서 차이가 존재했다. 그들은 사회당 안의 동요를 피해야 할 성가신 일로 여겼다. 사회당 안의 분파투쟁에서 발생한 흥미로운 일들이 새로운 관심을 끌어 모을 때마다, 그들은 우리 조직에 대한 관심을 빼앗긴다는 이유로 그것에 분개했다. 그들은 사회당을 경쟁조직으로만 바라볼 뿐, 충돌하고 있는 경향과 흐름들 일부가 우리와 함께 행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것은 조직론상의 접근법이었다. 나는 그것이 당시 머스티의 접근법이 가진 특성에 들어맞는 방식이었다고 생각한다. “사회당에 어떤 관심도 주지마라. 그들은 우리 경쟁자 중 하나다.” 형식적으로는 그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사회당은 동질체가 아니었다. 그 구성원 중 일부는 화해할 수 없는 혁명의 적이었지만, 또 어떤 이들은 볼셰비키가 될 가능성이 있었다. 조직에 대한 충성과 자긍심은 혁명운동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자질이다. 하지만 조직상의 물신주의는, 특히 지도력을 아직 보여주지 못한 작은 조직에게는 길을 잃게 만드는 것일 수 있다. 이때가 그랬다.
우리는 다른 관점에서 그 문제에 접근했다. 주로 조직적 측면에서가 아니라 정치적 측면에서 접근했다. 우리가 보기에 사회당 안의 동요는 우리 자신의 정당을 건설하는 작업과 동떨어진 피해야할 문제가 아니었다. 결국 그것이 어떤 조직적 형태를 취하건 간에, 우리 운동의 전진을 위해 움켜쥐어야 하는 기회로 바라보았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영향을 미치기 위해 거기에 개입하려 했다. 앞서 말했듯이, 당시 두 그룹 사이에 실질적 제안들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사회당 문제에 접근하는 태도는 근본적으로 달랐고, 머지않아 충돌이 발생하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조직 문제는 중요하지만, 정치노선이 결정적이다. 조직 문제들보다 정치가 우선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은 혁명조직 건설에 성공할 수 없다. 조직 문제들은 정치노선과 정치 목표에 복무할 때만 중요하다. 조직 문제만 떼어놓으면 아무 가치도 없다. 사회당 내 쟁점이 해결되지 않은 특정한 시기 동안, 머스티의 입장은 우리 입장보다 적극적이고 명쾌해 보였다. 머스티의 단순한 처방은 일부 동지들에게 호소력이 있었다. “사회당과 거리를 두고, 우리 자신의 정당을 만들자.”는 주장은 명쾌하고 적극적인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머스티 공식이 우월해보인 것은 사건을 피상적으로 봤기 때문이다. 사회당 안에서 새로운 일이 발생할 때마다, 계속해서 머스티 그룹은 혼란에 빠졌다. 끓는 가마솥에서는 항상 어떤 일이든 벌어지기 마련이며, 우리는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며 우리 신문에 다루어야 했다.
사회당의 내분
그리고 어떤 중요한 일이 벌어졌다. 상황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면서, 우리로서는 모든 의문이 해소됐고, 사회당으로 입당할 것이냐 말 것이냐의 문제가 매우 직접적으로 제기됐다. 분파로 나뉜 사회당이 1935년 12월에 크게 갈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뉴욕 당기구를 통제하고 있던 우파는, 지부 대의원들의 기구인 시 중앙위원회에서 힘을 키워 다수파가 된 좌파에 맞섰다. 직업적인 사회당 ‘민주주의자들’이 그런 상황에서 늘 그렇게 하듯이, 우파는 다수파를 인정하고 민주주의가 작동하도록 놔두는 대신 이빨을 드러냈다. 당연하게도 우파는 여러 ‘전투파’ 지부들을 제명하고 재편하면서 분열을 촉진시켰다. 과거에도 그랬던 것처럼, 여기서 우리는 볼셰비키가 독재적이고 잔혹하다고 큰 소리로 비난해온 사회당과 모든 소부르주아 그룹들의 소위 민주주의가 어떤 것인지를 보게 된다. 민주주의에 관한 그들의 말은 모두 시험대에 오르는 순간 거짓과 위선임이 드러난다. 그들은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볼셰비즘에 반대했지만, 자신들의 이해와 통제가 문제가 될 때는 결코 민주적 평당원 다수파에게 양보하지 않는다. 이들은 조직에 대한 자신들의 통제가 어떤 식으로든 위협받지 않는 한에서만 대화와 비판을 인정하는 가짜 민주주의자들이다. 자신들의 지배가 도전받는 순간, 그들은 항상 다수를 가장 관료적으로 잔혹하게 억압한다. 조직 영역에서 볼셰비즘에 반대하는 모든 종류와 온갖 색조의 반대파가 다 그렇다. 심지어 충실한 민주주의자를 자임하는 노먼 토머스 역시도 예외가 아닌데, 뒤에서 그에 대해 설명할 것이다. 그런데 이 점에서는 트로츠키주의 운동에 민주주의가 부족하다고 격렬하게 비난하며, 제4인터내셔널에서 떨어져나간 모든 종파주의 그룹도 예외가 아니다. 그들은 스스로 조직을 건설하는 순간에 진짜 절대주의를 수립했다. 가령 올러 그룹이 독립적인 조직으로 설립되자마자, 트로츠키주의 조직의 심각한 관료주의에 반대하는 호소에 이끌렸던 이들은 끔찍한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가장 경직되고 전제적인 형태의 관료주의를 봐야 했다.
뉴욕에서 사회당 우파가 분리한 것은 전국적 분열을 예고했다. 우리가 보기에 그것은 분명했다. 자신들만의 이유로 사회당 우파는 혁명을 말하는 전투적인 평당원들과 청년당원들로부터 분리하기로 결심했다. 그들은 혁명이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고 여겼다. 1936년 대선을 염두에 두고 있었고, 이미 마음속으로 루즈벨트를 지지하기로 정한 것이 틀림없었다. 여전히 진지하게 사회주의를 말하는 전투파 평당원들, 청년들과 관계를 끊을 좋은 핑계로 여겼을 뿐이다. 뉴욕의 분열은 우리가 더 이상 기다리지 말고 행동해야 할 시간임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사회당 뉴욕조직에서 파열이 발생한 것은, 내가 미니애폴리스에 있을 때 벌어진 일이다. 미니애폴리스에서는 1934년 파업 기간에 열린 토론에서 미국노동자당[머스티 그룹]과 통합을 가속화하라는 강한 요구가 제기된 바 있었다. 이번에도 그 과정이 두드러지게 되풀이됐다. 정치 전환을 과감하게 할 수 있는 주도력이 미니애폴리스 지도자들과 비공식 회합을 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은 이것이 두 번째였다.
우리는 사회당에서 새로운 관료주의가 굳어지고 스탈린주의자들의 영향력이 공고화되기 전에, 쓸데없이 하루라도 낭비하지 말고 그 당이 아직 유동적일 때 입당하기 위해 움직여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우리 캐넌-샥트먼 그룹의 지도부 전원은 이 노선에 동의했다. 그룹의 평회원들은 오랜 내부투쟁을 통해 철저하게 준비되고 교육됐으며, 지도부의 정치노선을 완전히 받아들였다. 이들은 이 계획을 만장일치로 지지했다. ‘프랑스 전환’과 ‘독립성’의 원칙에 대한 편견 모두, 그리고 공문구를 늘어놓는 종파주의자들의 구호 모두를 이겨냈다. 정치적으로 유리한 전망을 제공하는 전환의 기회가 왔을 때, 그들은 움직일 준비가 돼 있었다. 그리고 행동의 순간이 다가왔다.
모든 것은 너무 늦지 않게, 어떤 우유부단함이나 망설임도 없이, 그리고 진지하게 행동하는 것에 달려있었다. 그동안 내내 수행해온 일상적인 선동만으로는 결코 당을 건설할 수 없고, 빠르게 성장시킬 수도 없다. 원칙을 판에 박히게 설명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정당이라면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아야 하고, 너무 늦지 않게 그것을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이처럼 노동운동의 선진부위가 엄청나게 유동적인 특수한 상황을 활용하고자 한다면,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지체 없이 사회당으로 들어가, 적어도 주관적으로는 혁명가가 되고픈 열망으로 우리 쪽으로 이동하고 있는 전투파 평당원들과 청년들을 우리의 트로츠키주의 노동자들과 융합시켜냄으로써 전진하는 것이었다.
쇠는 달구어졌을 때 때리라는 훌륭한 격언이 있다. 그것을 기술적 의미에서 이해하는 사람에게 이 표현이 얼마나 생생한 호소력을 갖는지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지 모르겠다. 내가 정치적 좌우명으로 늘 새기고 있는 이 표현은, 우리 소년들이 서성이곤 했던 집 뒤 대장간의 광경을 떠오르게 한다. 우리는 대장장이에게 매료됐다. 그는 우리에게 영웅이었다. 그는 아주 느긋하게 파이프 담배를 피워 물고는 사람들과 날씨와 국내정치에 대해 대화하며 여유를 부렸다. 편자를 갈기 위해 말이 도착하면, 대장장이는 여전히 여유를 부리며 불꽃이 확실히 백열상태가 되어 편자가 시뻘겋게 달구어질 때까지, 천천히 풀무로 노에 바람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이 왔을 때, 대장장이는 돌변했다. 나른한 태도는 완전히 버리고, 커다란 펜치로 편자를 집어 모루 위에 올리고는 시뻘겋게 달구어지는 동안에 쇠망치로 두들겼다. 그렇지 않으면 편자는 유연성을 잃어 적합한 모양으로 만들 수 없다. 만일 사회당 안의 호기가 식도록 내버려 두었다면, 우리에게 기회는 사라졌을 것이다. 우리는 쇠가 달구어졌을 때 때려야 했다. 사회당에 맹렬하게 달려들었던 스탈린주의자들이 우리 앞에 끼어들어, 스페인에서 보여준 재주를 다시 한 번 반복할 위험이 있었다. 중도주의 그 자체였기 때문에 정치적 친밀성에서 우리보다는 사회당에 훨씬 가까웠던 러브스톤 그룹이, 다음 신호를 알고는 우리보다 앞서서 사회당에 들어갈 위험이 있었다.
우리에게는 입당하기 전에 넘어야 하는 장애물이 두 개 있었다. 첫 번째는 그런 행동을 승인받기 위해 당 대회를 여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우리가 사회당에 가입할 수 있기 위해, 사회당 지도부로부터 승인받는 것이었다. 전자의 대회를 위해 우리는 머스티 그룹과 더욱 치열하게 분파투쟁을 벌여야 했다. 머스티 그룹은 자기 성원들에게 노동자당의 ‘독립성’과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최후의 저항을 벌이자고 했다. 그들은 주님의 교회를 해체하고 이단적인 사회당에 합류하려는 우리의 제안에 맞서 종교적 열정으로 싸웠다. 그들은 노동자당의 ‘독립성’을 마치 언약궤처럼 옹호했고, 마치 우리가 그것에 더러운 손을 얹고 있는 것처럼 여겼다. 그것은 정말이지 반(半)종교적 광신주의 분자들과 격렬하게 싸우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반종교적 광신주의도 그들에게 아무 쓸모가 없었다. 대다수 당원들은 처음부터 확실히 우리 편이었다.
‘전투파’와의 협상
우리는 사회당 입당조건에 대해 [사회당] ‘전투파’ 지도부와 협상하기 시작했다. 이들 가짜 영웅들과 협상하는 것은 정말이지 가관이었다. 나는 결코 그들을 잊지 못할 것이다. 길고도 어느 정도 다양한 경험 속에서 고상한 것에서부터 반대로 어이없는 일까지 많은 일을 겪었다고 생각하지만, 사회당의 ‘전투파’ 지도부들과 협상한 것처럼 터무니없고 괴상한 일을 겪었던 적은 없다. 그들 모두는 하루 동안만 중요한 임시적 인물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스스로를 왜곡된 거울로 바라보았고, 잠시 동안 자신들이 혁명의 지도부라도 된 것처럼 생각했다. 그들 자신의 상상 말고는, 그것을 뒷받침하는 어떤 기초도 없었다. 어떤 일이나 사람을 이끌 수 있는 자질이 전혀 없었고, 특히 다른 운동의 지도부와는 다른 자질과 특성을 요구받는 혁명정당을 이끌 수는 더더욱 없었다. 그들은 경험이 없었고 시험을 거치지 않았다. 무지하고, 재능 없고, 소심하고, 허약하며, 겁 많고, 믿을 수 없고, 허영심이 있는 것이 그들의 특징이었다. 게다가 그들에게는 또 다른 결점이 있었다. 우리가 그들 정당에 가입하겠다고 신청했는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그들은 우리가 당에 들어오기를 원했다. 우파의 영향력을 줄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들이 한편으로는 극도로 두려워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다가가려고 하는 스탈린주의자들을 막는 데 우리의 입당이 도움이 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들어가서 무엇을 할 것인지를 걱정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들은 정말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 확실하게 알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그들이 스스로 마음을 정하도록 도와야 했다.
그들 중 잼은 혁명적 사회주의를 배신하고 러브스톤 그룹에서 이탈해 사민주의로 돌아서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오른 편을 향하는 과정에서, 왼편을 향해 이동하고 있는 일부 청년사회당원들한테 합류했다. 그 순간 그들은 의견일치를 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단지 그들은 교차로에서 만났을 뿐이다.
거스 타일러는 정말 똑똑한 젊은 친구였다. 인성을 갖추지 못한 것이 유일한 문제였다. 그는 레닌의 관점에서 스탈린주의 지도부 가운데 한 명과 전쟁문제로 논쟁할 수 있었고, 레닌주의의 관점을 상당히 올바르게 설명할 수 있었다. 그는 전쟁강령을 포함해 그들의 강령을 위한 ‘교육사업’을 하면서, 봉제섬유노조 사기꾼들을 위해 일했다. 그런데 그는 그것에 대해 놀라거나 분개하는 것을 의아해했다. 인성이 없는 사람들은 지성이 없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다. 그들은 왜 그것이 문제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머리 배런은 마찬가지로 더빈스키의 묵인 아래 노조간부로 일하고 있는 총명한 대학생이었다. 그는 풍요롭게 잘 살았고, 계속해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동시에 그는 부업으로 취미활동을 하는 이들처럼, 혁명운동을 이끄는 임무에 잠깐 손대고 있었다.
위슨콘신 출신의 젊은 친구들인 비밀러와 포터는 1930년대 유럽 사민주의자들의 모든 노쇠함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들이 언젠가 한때 이상주의에 감화됐다 할지라도, 이제는 그 불꽃을 잃어버리고 이미 주중에는 노동자를 속이는 일에 전념하면서도 일요일에는 급진적인 체하고 있었다. 그들은 거의 모두가 똑같이 매우 좋지 않은 부류의 인물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사회당 좌파 지도부였기에, 우리는 그들 모두와 협상해야 했다. 그 지도부 중에는 명목상 당의 대표였던 노먼 토머스도 있었다. 트로츠키가 아주 잘 설명했듯이, 그는 오해해서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라고 불렀다.
우리 과제는 이들 오합지졸과 우리의 사회당 입당을 인정하는 협정을 맺는 것이었다. 그것을 위해 협상해야 했다. 그것은 어렵고 까다로운 일이었으며, 매우 불쾌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우리가 포기할 수는 없었다. 트로츠키주의자라면 당을 위해 어떤 일이라도 해야 했다. 설사 진창에 배를 대고 기어야만 할지라도 말이다. 우리는 그들과 협상에 들어갔고, 결국은 온갖 장치들과 혹독한 비용을 대가로 입당 허가를 얻어냈다. 그들에게 전화를 걸어 “화요일 두 시에 만나서, 문제에 대해 토론하자”고 말하는 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길고도 복잡하며 고통스런 과정이었다. 공식적이고 집단적인 교섭을 진행하면서도, 또한 다양하고 개별적인 작업도 해야 했다. 그들 중 한 명이 혁명적 사회주의로부터 변절한 잼이었는데, 그는 우리가 사회당 가입을 원한다고 하니까 우리 역시도 조금은 변절하고 있는 것으로 여겼다. 그는 개인적 이유에서 우리가 사회당에서 함께 하기를 원했고, 우리의 입당을 도왔다. 스탈린주의자들을 죽도록 두려워했는데, 우리가 그들에 대한 균형추와 해독제가 될 것으로 생각했다. 지도부와 공식적으로 토론하기 전에 항상 그와 사적으로 토론했다. 우리는 그들의 계획이 무엇인지를 항상 사전에 알고 있었다.
다른 무엇보다도 그들 사이에는 내적 결속력과 상호 존중이 없었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유익했다. 입당을 위한 또 다른 독립적인 측면 작업은 바로 토머스와의 작업이었다. 토머스와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은밀하게 만난 것은 시드니 훅의 삶과 경력에서 최후의 진보적 행동이었다. 그가 우리에게 한두 번 신세졌을 수도 있다. 어쩌면 혁명을 꽤 좋은 일로 생각했던 젊은 시절의 추억에 젖어 움직였을 수도 있다. 어쨌든, 그가 토머스와 우리의 회합을 주선한 결과 ‘전투파’ 간부들이 받는 압력이 커졌다. 결국 그들은 우리를 받아들이기로 동의했다. 하지만 우리한테 대가를 치르게 했다.
입당 조건
그들은 매우 혹독한 조건을 정했다. 어떤 분파건 자기 신문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사회당의 전통이었다. 그리고 <사회주의자의 외침>이 ‘전투파’의 기관지로 발간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리는 신문을 포기해야 했다. 사회당 안의 어떤 부문, 어떤 주, 어떤 지역의 조직이건 자기 신문을 자유롭게 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의 경우 신문을 낼 수 없다는 특별한 조건을 요구했다. 우리가 <투사> 신문과 <새로운 인터내셔널> 잡지를 포기하게 만들었다. 우리가 하나의 단체로 가입해 하나의 단체로 받아들여지는 명예와 존엄을 허용하지 않으려 했다. 오히려 모든 사회당 지역지부들에는 우리의 가입을 거부할 선택권을 남겨두면서, 우리에게는 개별 가입을 요구했다. 그것은 우리를 모욕하면서, 우리가 간단히 당을 해산하고, 과거와 겸허하게 단절하면서, 사회당 ‘전투파’ 간부들의 제자로서 새롭게 시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것은 꽤나 화나는 일이었지만, 우리는 개인적 감정 때문에 길에서 벗어나지는 않았다. 그러기에는 너무도 오랜 시간을 레닌의 학교에 몸담아왔다. 우리는 정치적 목표들에만 전념했다. 그 때문에 극히 과도한 조건이지만, 결코 협상을 깨지 않았고, 그들에게 협상을 중단할 핑계거리를 절대 주려 하지 않았다. 그들이 냉담한 반응이나 기피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우리는 그들을 끈질기게 붙들고 늘어져 협상이 깨지지 않게 했다.
1936년 3월 당대회
그러는 동안 우리 당은 당 대회를 향하고 있었다. 당의 결정적 다수가 캐넌-샥트먼 간부회의의 사회당 입당 제안을 지지한다는 것이 곧바로 드러났다. 또한 우리 제안은 트로츠키의 지지를 받았다. 이것은 사회당 입당이 올러 그룹의 주장과는 달리, 원칙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훌륭한 전술적 조치임을 평당원들에게 확신시키는 데서 중요했다. 결정 과정에 마침표를 찍어야 하는 1936년 3월의 당대회는 의례적 절차였다. 반대파는 정말 작은 그룹으로 축소됐고, 결정을 받아들이는 것 말고는 아무 대안도 실제로 갖지 못했으며, 규율에 따라 우리와 함께 사회당으로 들어가야 했다.
앨런타운의 스탈린주의 요원들
이 대회에서는 지난여름에 있었던 무원칙한 정치에 대한 응보, 그리고 무원칙한 연합에 대한 혹독한 형벌이 있었다. 그것은 우리 당의 역사에서 꽤 유명하고, 당시의 내부투쟁을 경험한 이들의 기억 속에 여전히 살아있는 ‘앨런타운 사건’의 여파였다. 앨런타운은 미국노동자당[머스티 그룹]의 주요 중심지 가운데 하나였다. 꽤 큰 규모이고, 전국실업자동맹으로 조직된 실업노동자들의 매우 중요한 운동을 이끌었던 그곳 조직은 모두 과거 머스티 그룹 출신들로 구성돼 있었다. 앨런타운의 당원 대부분은 운동 경험이 짧았다. 그들은 실업자운동을 통해 미국노동자당에 가입했다. 그들의 대중활동이 궁극적으로 정치적 성과로 바뀌어 그들이 당의 확고한 중핵이 되기 위해서는 맑스주의 정치교육을 받아야 했다. 이 점을 고려해 우리는 그들을 지원하려고 몇몇 동지들을 보냈다. 젊은 층을 위해 젊은 동지 스틸러가 파견됐다. 성인들의 운동을 위해서는 샘 고든이 파견됐다. 그들의 역할은 대중활동에 참가하는 한편, 조직적이고 사상적으로 우리와 완전히 융합하려는 의지가 강한 이 앨런타운 동지들에게 맑스주의를 교육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분파투쟁 때문에 이 계획을 실행할 수 없었다. 이 시기 내내 앨런타운은 분파투쟁의 중심지였다.
최악의 문제 중 하나는 스틸러가 배신하면서 발생했다. 그는 당의 신뢰를 받으며 그곳에 파견됐지만, 후진적 환경에 굴복했다. 그는 앨런타운에 지역 거점을 둔 미국노동자당의 최악의 분자들을 옹호하는 도구가 됐다. 라이쉬라는 남자와 핼릿이라는 또 다른 남자가, 머스티 그룹의 전국 지도부 중 한 명인 아놀드 존슨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었다. 그들은 앨런타운을 당 내 모든 진취적 경향을 반대하는 반대파의 기반으로 삼았다. 앨런타운 조직은 대중활동 과정에서 거듭해서 당 노선으로부터 스탈린주의 쪽으로 이탈했다. 샘 고든이 개입하면서 지역적으로 큰 싸움이 벌어지곤 했다. 그래서 그 문제를 토론하기 위해 전국위원회의 대표자들이 앨런타운으로 가거나, 대의원들이 뉴욕으로 오곤 했다. 우리는 문제를 명료화하고 앨런타운 동지들을 교육하기 위해, 쉬지 않고 몇 시간 동안 대화하고 설명하곤 했다. 처음에는 전혀 의심하지 않았지만, 사건들이 잇달아 터지면서 모든 논쟁이 하나같이 똑같은 독특한 특성을 갖는다는 사실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각각의 싸움이 어떻게 시작됐고 당장의 논쟁이 어떻게 끝나건 간에, 항상 앨런타운 동지들의 입장에는 스탈린주의의 흔적이 묻어있었다. 처음에 우리는 이탈이 단순한 경향일 수 있고, 스탈린주의 운동이 그들에게 영향을 미친 결과라고 생각했다. 진짜 스탈린주의 요원이 우리 대열 안에 들어와 계획적으로 작업한 결과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심지어 그들이 우리 노동자당의 규율과 행동통일을 깨뜨리고, 실업자동맹 안에서 그들 자신의 동지들에 맞서면서까지 스탈린주의 간부들과 협력하며, 조직에 충성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지만, 우리는 의심하기보다는 좋게 보려고 했다. 그들과 계속해서 싸워나갔지만, 우리는 목표를 순전히 교육적 측면에 한정시켰다.
우리의 정책은 이런 사건들을, 즉 당 원칙으로부터의 이탈과 오류들을 ‘범인을 색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맑스주의 원리를 구체적이고 세부적으로 설명함으로써 동지들을 교육하기 위해 활용하는 것이었다. 많은 당원이 이런저런 구체적 사건을 바탕으로 이런 교육토론을 함으로써 볼셰비즘의 의미에서 진정한 교육을 받아왔다. 이 경우에도 우리는 그렇게 하려고 했다.
우리는 앨런타운의 관련 동지들만이 아니라, 당 전체를 상대로 스탈린주의와 타협하는 것이 혁명적 의미에서 무엇을 뜻하는지를 교육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그들이 머스티의 사적인 친구들이었고, 머스티가 그들을 보호했다는 점 때문에 이 작업이 방해받았다. 그가 올바른 정치노선을 받아들이고 옹호했던 사람들에 맞서 자기 친구들을 보호한 것은 분파적 이유 때문이었다. 우리에게 분명한 입장을 밝히면서 함께 앨런타운 사람들에게 압력을 행사하는 대신, 우리와 그들 사이에 끼어들어 쟁점을 흐렸고, 너무도 명백한 위반 행위에 대해 어떤 징계도 못하게 했다. 격렬한 분파투쟁으로 눈이 먼 머스티는 친구들을 보호하면서 분파적으로 접근했다. 그것은 혁명정당을 아주 심각하게 공격하는 것이다. 당은 무엇보다도 볼셰비즘 원칙들을 지켜야 한다. 친구들이 잘못했을 때,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은 잘못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볼셰비즘 원칙을 가르치는 것이다. 친구들을 보호하는 것은 친구들만 지옥으로 보내는 짓이 아니라, 자신도 함께 지옥으로 가는 짓이다. 온정적 일처리는 사적 호의의 교환을 기초로 삼는 태머니홀에서나 적합하다. 친교는 사적인 삶에서 매우 중요하지만, 운동의 원칙과 이해에 종속시켜야 한다. 그런 광경 중 하나가 끝난 뒤 나는 머스티에게 말했다. “당신은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앨런타운의 스탈린주의 중핵이 당을 배신하려는 것을 보고는 심한 충격에 빠질 것입니다.”
그는 귀 기울이려 하지 않았고, 치명적인 길을 고집했다. 그리고 더 잘 이해하고 있는 이들이 그의 이 범죄를 지원했다. 머스티는 볼셰비즘의 원리와 전통을 길게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이었다. 정상을 참작하자면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에이번과 그의 작은 파벌은 분파적 이유에서 머스티가 스탈린주의 경향과 분자들을 보호하도록 지원하고 부추겼다. 에이번 파벌에 대해서는 내 책 <노동자계급 정당을 향한 투쟁>에서 필요한 내용을 전부 말했기 때문에,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다.
머스티와 에이번의 모험은 1936년 3월 대회에서 엄청난 반격을 받았다. <일간 노동자>는 대회 당일 기사를 통해 그동안 머스티가 앨런타운의 스탈린주의 경향들을 애지중지 감싸고 보호해준 것에 보답한다. 라이쉬와 핼릿, 존슨이 스탈린주의 공산당에 가입해버린 것이다! 우리 당 대회가 시작된 바로 그날 아침에 머스티의 ‘친구들’은 ‘반혁명적 트로츠키주의자들’을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결국 이것은 이미 충분히 신뢰를 잃어버린 머스티-에이번 분파에게 마지막 일격을 날렸다. 그들은 자신들이 분파적 이유에서 보호했던 사람들이 당 대회가 열리는 날 혼란과 분열을 불러일으키려는 스탈린주의 요원들로 판명나는 것을 지켜보면서, 마지막으로 치욕을 느껴야 했다. 운 좋게도 배신자들은 완전히 고립됐다. 그들의 행동은 개인사일 뿐이었고, 대회와 당을 조금도 혼란시키지 못했다. 지난 몇 달 동안 그렇게도 눈이 멀어 그들을 감싸주었던 [머스티-에이번] 분파를 불신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바꿔 말해, 이런 결말은 명확한 원칙적 노선을 따랐고 스캔들과는 아무 관련이 없었던 다수파의 권위를 더욱 강화시켰다.
사회당 입당
우리는 당 대회에서 압도적 다수를 차지했다. 이제 매우 작은 소수가 된 소수파는 결정을 받아들였다. 그들이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몇 주 뒤 클리블랜드 대회를 통해 사회당 우파와 좌파의 분열은 전국적 차원에서 마무리지어졌다. 전국의 모든 우리 당원은 전국지도부의 지시에 따라 개별적으로 사회당에 입당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때까지도 양다리를 걸치는 것으로 의심받았다. 우리는 항상 우리 동지들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했다. “서둘러라, 미루지 마라. 조건을 흥정하지 말고, 늦기 전에 사회당에 들어가라. 공식적 양보를 요구해서 그들이 그 문제를 다시 꺼내들고 마음을 바꿀 핑계를 주지 마라.”
우리는 환영도, 친절한 인사도, 사회당 신문의 주목도 전혀 받지 못했다. 우리는 아무 제안도 받지 못했다. 그 구두쇠들은 우리 당 지도부 가운데 단 한 명에게도 지역책임자 자리조차 제안하지 않았다. 스탈린주의자들은 큰 소리로 외쳐댔다. “이 트로츠키주의자들을 흡수 동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들은 트로츠키주의자들이 들어왔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 사회당에 경고했다. 그리고 ‘전투파’는 겁에 질려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들이 우리를 받아들인 방식은 낡은 수법이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위신을 고집하는 주관적인 사람들이었다면, “될 대로 되라지!”라고 말하고 떠나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정치적 목표에 복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가 했던 이 모든 수치스러운 양보를 중도주의자들과 화해하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았다. 우리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간단히 말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정치적 임무를 수행할 특권을 얻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협박에 응하는 것일 뿐이다.”
우리는 결국 승리할 수밖에 없는 강령과 규율 잡힌 그룹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확신을 가지고 사회당에 들어갔다. 얼마 뒤 사회당 지도부가 트로츠키주의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기를 바라며, 우리를 받아들이기로 한 결정을 재검토할 수 있기를 바라며, 전 과정을 후회하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 우리 사람들은 이미 사회당 안에 있었고, 지역 조직들에 뿌리내리는 작업을 시작하고 있었다. 우리는 1936년 6월에 발행한 <투사> 마지막 호에서, 우리가 사회당에 입당하고 있고 <투사> 발간을 중단한다고 선언했다. 우리는 입장을 매우 분명하게 밝혔기 때문에, 아무도 우리를 오해할 수 없었다. 우리가 굴복하거나 혁명적 사회주의를 배신하면서 입당하는 것으로 믿을 근거가 전혀 없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본 모습 그대로, 우리 사상을 간직하고 사회당에 들어간다.”
이처럼 세계를 장악한다는 사상은 다시 한 번 진군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 앞에는 사회당에서 의미 있게 활동할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시리즈의 마지막 장은 사회당에서 보낸 약 1년, 그리고 사회당 안팎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지만 또 다른 목적지를 향하던 6개월을 다룬다. 나는 이 강연을 하면서 당이 통제할 수 없는 정치적, 경제적 요인이 당의 전술을 좌우한다는 점을 거듭 강조해왔다. 정치 지도부의 임무는 주어진 상황에서 무엇이 가능하고 필요하며, 무엇이 불가능하고 불필요한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것이 정치 지도의 요체라고 할 수 있다. 혁명정당, 즉 맑스주의 정당의 활동은 객관적 상황이 좌우한다. 때로는 지도부와 당원들이 할 수 있는 것을 다해도, 객관적 상황 때문에 패배하고 고립되기도 한다. 다른 상황에서는 객관적 상황이 성공과 전진의 가능성을 열어주지만, 동시에 그것을 제한하기도 한다. 언제나 당은 스스로 만들지 않은 일련의 사회적 요인 속에서 움직인다. 이런 점들이 사회발전 과정의 특징이다.
최선의 지도부조차 당을 한 치도 전진시킬 수 없는 시대가 있다. 가령 우리 운동에서 가장 위대한 스승이자 지도부였던 맑스와 엥겔스는 사실상 일생 동안 고립돼 있었다. 심지어 그들이 원숙기에 살고 활동했던 영국에서 어떤 중요한 그룹도 만들어낼 수 없었다. 그들이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며, 그들이 무능력했기 때문은 더더욱 아니다. 그들이 어찌할 수 없는 외부 요인들 때문이었다. 당시 영국노동자들은 혁명적 주장에 귀 기울일 준비가 돼있지 않았다.
미국에서 우리가 트로츠키주의 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던 첫 몇 년, 즉 1928년부터 1934년까지는 반동과 공황이 오랫동안 세계노동운동을 짓눌렀던 시기다. 그때 우리는 고립을 피할 수 없었다. 그때는 세계 전체의 무게가 극소수 비타협파를 짓누르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는 용기 없는 사람들, 특히 현대 사회의 성격 그리고 공황이 혁명으로 이어질 수 있는 현대사회의 내적 법칙을 이론적으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 중도하차하는 시대였다. 이런 반동과 고립의 암흑시대에 새로운 고양이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고 예견하면서 미래를 의식적으로 준비한 이들은 트로츠키주의자들, 즉 진짜 맑스주의자들뿐이었다.
그들은 두 가지를 준비했다. 첫째 새로운 시대에 당의 무기가 될 강령을 정교하게 가다듬었다. 둘째 미래 혁명정당의 예비중핵을 모으고, 그들이 미래에 대한 믿음을 지켜나가도록 고무했다. 앞 강연들에서 보았듯이, 미래에 대한 이 믿음은 정당했다. 전 세계 노동운동은 정체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특히 1934년에 새로운 대중운동이 미국과 전 세계에서 등장했다. 새로운 상황이 왔을 때, 우리는 기회도 얻고 시험대에도 올랐다. 더 이상 고립된 상태에서 원칙을 명료화하는 데 안주할 수 없었다. 계급투쟁이 밀려오는 시기였으므로 스스로 분발해 그 원칙을 실천에 적용해야 했다. 우리가 그것을 하겠다고 결의하고, 우리 앞에 기회가 왔다고 판단하며, 그 기회를 움켜쥐겠다고 결심하자, 극좌 종파주의자들과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전진하기 위해 그들과 싸우고 승리해야 했다. 우리는 그렇게 했다. 우리는 미니애폴리스 파업을 통해 경제적 대중운동에서 한 걸음 전진했다. 미국노동자당과 통합한 것은 진정한 미국 맑스주의 정당을 건설하는 데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발걸음이었다. 하지만 이 진보적 행동들은 단지 몇 걸음 전진일 뿐이기에, 우리는 한계도 알아야 했다. 더 복잡한 정세에서 우리가 정치적으로 주도하고 단호하게 행동하는 것이 여전히 필요했다.
궁극적으로 미국 노동자계급을 사회주의혁명의 승리로 이끌 당을 건설하는 길고도 복잡하며 구불구불한 길을 내딛는 데서, 우리 그룹이 미국 사회당에 입당한 것은 한층 더 중요한 발걸음이었다. 우리는 정말 적시에 사회당에 입당하는 발걸음을 내딛었다. 정치에서 시간은 항상 중요하다.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것을 잊은 정치지도자들이란 얼마나 애처로운가! ‘시간은 계약의 핵심’이라는 법률 표현이 있다. 정치에서는 열배, 백배 더 그렇다. 무엇을 하는가만이 아니라 언제 그것을 하는가도, 즉 그것을 적시에 하는가도 결정적이다.
사회당 내 경향들
실제로 가입한 시점보다 이전이었다면 사회당 가입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시점 뒤에 시도했다면 너무 늦었을 것이다. 당시에 우리가 주목했던 이 이질적인 사회당은 어리석고 무기력한 뒤죽박죽의 중도주의 정당으로서, 외부사건들에 흔들리고 온갖 압력에 휘둘렸다. 사회당 자체로는 살아남을 수 없었다. 우리가 입당한 1936년에 이미, 심각한 동요와 분열의 단계에 있었다. 어쨌든 사회당은 갈기갈기 찢어질 운명이었다. 역사적으로 생존할 수 없는 당이 어떤 노선에 따라 어떻게 분열되고 최종적으로 해체되는가의 문제만 남아있었다.
루즈벨트 정부와 화해하고,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와도 화해하려는, 아직 완전히 의식적이지는 않지만 강력한 운동이 사회당 안에 존재했다. 부유한 공산당 기구가 선전과 물적 자원으로 지도부가 없는 사회당 노동자들을 강하게 압박했다. 문제는 다음이었다. 중도주의 당의 잠재적 혁명 요소인 노동자 활동가들과 저항적 청년들이 공산당 세력에게 삼켜질 것인가? 아니면 그들이 트로츠키주의 중핵들과 융합하면서 노동자혁명의 길로 이끌릴 것인가? 우리가 사회당에 입당함으로써만 이것을 시험할 수 있었다. 이 잠재적 혁명분자들은 우리 당에 가입할 기질을 보여주지 않았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우리가 그들과 접촉할 길은 사회당 가입밖에 없었다. 조직 물신주의는 던져버려야 했다. 언제나 조직적 고려보다 우선인 정치적 필요에 따라야 했다.
세계적 상황
국내외에서 엄청난 사건들이 펼쳐지는 속에서 우리가 사회당에 입당했다. 사회당 가입을 준비하고 있던 바로 그때, 프랑스에서는 진짜 혁명이라고 할 수 있는 점거파업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미국에서는 산별노조회의(CIO) 노동자들의 두 번째 대투쟁이 솟구쳐 올랐다. 이 거대한 운동은 수적인 힘과 대중의 전투성, 그리고 기층 노동자계급의 참여에서, 조직된 미국노동운동이 경험해보지 못한 훨씬 높은 곳까지 오를 운명이었다. 당시 1936년 봄에는 이 두 번째 대투쟁이 전진하기 시작했다. 틀림없이 CIO 반란은 프랑스 점거투쟁에서 부분적으로 영향을 받았다. 스페인 내전은 총력전이 벌어지기 직전이었다. 유럽에서 노동자혁명이 두 번째로 승리할 가능성이 매우 날카롭게 열리고 있었다. 스페인혁명이 승리하면, 유럽 전체의 얼굴을 바꿀 수 있었다. 몇 달 뒤에는 모스크바 재판이 전 세계를 뒤흔들었다.
세계를 뒤흔든 사건들의 이 웅장한 파노라마(나는 세계사의 관점에서 CIO 대투쟁이 다른 사건들보다 덜 중요하지는 않다고 판단한다)는 맑스주의 전위가 진군할 수 있는 최고의 조건을 만들어주었다. 우리가 사회당 안에서 활동하고 있던 당시에, 부족한 것은 정치적 관심도, 대중활동가도, 맑스주의 혁명가들이 활동할 무대도 아니었다. 그런 객관적 조건에서 우리가 제 몫을 다한다면, 성과를 얻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처럼 좋은 환경에서는 일부러 패배를 계획하는 최악의 지도부만 아니라면 성과를 남길 수밖에 없다.
돌이켜보면, 우리가 사회당 활동을 할 때 잘못하거나 기회를 놓친 적이 없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 운동의 지도부는 분명히 사회당의 중도주의 관료집단에게 조금 지나치게 타협했다. 조직 안에서 정상적으로 활동할 기회를 얻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공식적으로 타협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했다. 하지만 분명하게도 어떤 경우에는 이 타협이 너무 멀리 나갔고, 우리 운동의 일부 회원이 오해해 이탈하게 만들었다. 당내에서 아무런 실제 권한이 없고, 평당원들에 대한 실질적 영향력을 가진 자리가 아니라 임시 자리일 뿐인 요직을 차지했던 잼과 타일러 같은 난쟁이들의 집단, 즉 뉴욕 ‘전투파’ 지도부와 협상하고 잡담하느라 너무 시간을 많이 허비했다는 점이 입당 뒤에 매우 분명해졌다. 사회당에 입당하는 정치적 책략을 쓰고, 사회당 내 정치문제들에 집중하면서 할 수 있었던 대중활동을 분명히 방치했다. 틀림없이, 그런 오류와 기회 방치는 우리 책임일 수 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우리는 이 모든 활동에서 결정적 요소였던 트로츠키의 조언과 지도를 받으며 주요 임무를 완수했다.
우리는 매우 소중한 정치적 경험을 쌓았다. 사회당에 입당해서 1년 활동한 뒤 세력이 두 배 이상으로 늘어났다. 우리는 계획에 따라 매우 조심스럽게 작업하기 시작했다. 우리 사람들이 따라야 할 첫 번째 방침은 다음과 같았다. 조직에 파고들어 당과 융합하라. 실제 활동에 뛰어들어 평당원 사이에서 확실한 도덕적 권위를 수립하라. 특히 당 활동가이며 잠재적으로 유용한 당 분자들과 친밀한 개인적 관계를 맺어라. 우리 계획은 확실히 예견된 정치 쟁점들을 자연스럽게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토론을 억지로 강요하거나 분파투쟁을 주도할 필요가 없었다. 세계적 사건들의 충격 속에서, 우리는 정치 쟁점들을 어렵지 않게 펼쳐낼 수 있었다. 우리는 오래 기다리지 않았다.
스페인 내전, 모스크바 재판 그리고 프랑스 노동운동
전반적인 반동과 불황이 우리를 짓눌렀던 우리 운동의 초창기와는 상황이 전혀 달랐다. 이제 객관적 요인들이 혁명가들에게 유리하게 작동했고, 혁명가들이 전진하는 데 필요한 조건과 기회들이 만들어졌다. 1936년 7월에는 프랑코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노동자들이 크게 반격하면서 스페인 내전이 시작됐다. 우리가 사회당에 가입한 지 몇 달 뒤인 8월에는 모스크바 재판이 또다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이 사건들은 세계적으로 중요한 문제들이었고, 그래서 ‘트로츠키주의’ 쟁점들로 알려지게 되었다. 우리의 적들, 심지어 가장 무지한 적들까지도 트로츠키주의가 편협한 교의가 아니라는 점을 이미 1928년에 알아챘다. 트로츠키주의는 세계적 범위와 세계적 전망의 운동이었다. 트로츠키주의는 국제주의 관점에서 출발했고, 세계 모든 곳의 노동자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모순되게도 이런 트로츠키주의의 근본 특성에 대한 일반적 인식은, 1928년 10월의 공산당 정치위원회와 중앙조정위원회에 앞서 열린 우리에 대한 재판에서 드러났다. 우리가 긴 재판의 마지막 순간에 선언문을 읽으면서 모든 모호함에 종지부를 찍기 전까지, 그들은 수집할 수 있는 온갖 ‘정황적 증거’들을 통해 우리가 ‘트로츠키주의자’라는 점을 ‘입증’하려 했다.(앞서 설명했듯이, 우리는 당시에 전술적 이유에서 트로츠키주의 분파라는 사실을 시인하지 않았다). 그들은 얼마 전에 미니애폴리스에서 우리를 재판했던 바로 그 검찰의 태도로, 우리의 유죄를 입증하는 정황적 증거를 제시하려고 증인들을 많이 불러들였다. 어떤 별 볼일 없는 끄나풀이 출두해 자신이 들은 것을 증언했고, 또 다른 이도 그것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증인은 공산당 서점의 운영자였다. 그는 샥트먼이 트로츠키주의자임을 맹세할 수 있다고 말했다. 왜? 그가 어떻게 알았을까? “샥트먼은 항상 서점에 와서 중국 관련 책을 구하려 했고, 나는 중국이 트로츠키주의자의 쟁점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에 대해 이 쥐새끼 같은 자는 크게 틀리지 않았다. 세계적으로 중요한 다른 모든 문제와 마찬가지로, 중국은 정말 트로츠키주의 문제였다.
스페인 내전, 모스크바 재판, 그리고 프랑스 노동운동의 소요 같은 문제들이 사회당 내부활동 전반을 지배했다. 이 쟁점들을 놓고 매우 활기차게 토론했다. 이런 토론은 지도부의 의지에는 완전히 어긋나는 일이었지만 말이다. 그들은 스스로 실무, 즉 판에 박힌 일상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했다. “마음을 진정하고, 여기서 실용적인 일을 하자.” 하지만 이런 쟁점들에 대해 사회주의라는 단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모든 이가 관심을 기울였다. 우리는 평당원들에게 그 사건들의 의미를 교육하기 위해 세심한 캠페인을 조직했다.
매일매일 모스크바 재판이 보고되면서, 재판의 진짜 목적은 다시 한 번 트로츠키를 연루시켜, 가능하면 그를 러시아로 송환해 처형하고, 그렇지 않더라도 어쨌든 세계노동운동이 지켜보는 앞에서 그의 명예를 더럽히기 위한 것임이 명백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트로츠키주의자들은 결코 잠자코 있지 않았다. 우리는 대담하게 나서서 전례 없이 최선의 정치활동을 펼쳤다. 모스크바 조작재판을 폭로하면서 우리는 제4인터내셔널의 대의에 최선을 다해 복무했다. 결국 모스크바 재판을 전 세계적으로 타격하고, 망신시킨 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제4인터내셔널 미국지부가 존재했고 당시 우리가 사회당 당원이었다는 사실 덕분이었다.
‘트로츠키 방어위원회’
그런 결정적 순간에 사회당원이 되고, 그것을 통해 트로츠키 방어위원회라는 중대한 정치적 임무를 위해 필요한 자유주의자들, 지식인들, 반(半)급진적 정치인들에게 가깝게 접근하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역사적 임무였다. 1936년 여름 재판은 스탈린이 그 어느 때보다 스스로를 철저히 망신시킨 재판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당시 우리는 사회당 당원으로서 매우 유리했다. 우리는 반쯤은 어엿한 정당의 보호색으로 우리를 어느 정도 감쌀 수 있었다. 그들이 계획했듯이 습격해 폭행할 수 있는 작은 트로츠키주의 그룹으로 고립돼 있지 않았다. 우리는 재판을 폭로하고 트로츠키를 방어하기 위한 캠페인을 멋지게 해냈다. 기관, 언론, 꼭두각시 조직, 자금 등 자원이 막대했는데도, 스탈린주의자들은 처음부터 수세적 위치에 있었다. 모스크바 재판 조사운동을 승인하고 후원하는 작가, 예술가, 신문기자 등 온갖 전문직 인사들이 함께 하고, 존 듀이가 의장을 맡은 꽤나 거대한 트로츠키 방어위원회를 조직하는 데서, 뉴욕의 우리 동지들이 전국적 지원을 받으면서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이미 알려졌듯이, 결국 이 조사는 1937년 봄에 멕시코시티에서 열렸다. 재판을 면밀하게 조사했고, 그 결과물로 세계노동운동의 고전으로 영원히 남을 두 권의 위대한 책이 탄생했다. <레온 트로츠키 재판>과 위원회의 보고서 <무죄>가 그것이다. 의문의 여지없이 스탈린주의에 사상 최고의 타격을 가한 이 막대한 정치적 임무는 스페인 내전, 프랑스 노동운동 등이 만들어 낸 유리한 상황 때문에 달성할 수 있었다.
이처럼 트로츠키 방어위원회에서 역사적으로 진보적인 임무를 맡았던 이 소부르주아 분자들 다수는, 몇 달 뒤 또는 길어야 몇 년 뒤, 부르주아 사회에 완전히 굴복했고, 자본주의 체제의 비타협적 반대파 모두에게 등을 돌렸다. 이제 이들 중 최소한 90퍼센트는 ‘레온 트로츠키 방어를 위한 미국위원회’ 같은 운동에 적극 참여할 육체적, 정신적 가능성이 더 이상 없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특수한 국면에서 그들은 중대한 진보적 목표에 복무할 수 있었고, 그렇게 했다. 모스크바 재판을 폭로하고, 불신임시킨 것은 1936년에 우리가 정치적으로 전환해 사회당에 입당함으로써 거둔 중대한 성과 가운데 하나다.
우리가 사회당에서 했던 두 번째로 큰 정치캠페인은 스페인 내전과 혁명의 사건들에 관한 것이다. 이 작업의 결과로 중요한 보고서들과 책들을 냈다. 특히 펠릭스 머로우의 책 <스페인 혁명과 반혁명>, 그리고 팜플렛 <스페인 내전>에 관심을 갖기를 바란다. 이 책과 팜플렛은 사회당 안에서 우리가 펼친 훌륭한 정치투쟁을 요약해 정리한 것이다. 우리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스페인에서 벌어진 일들을 명료화하고 그 사건들의 의미를 미국정당의 중핵들에게 교육하고자 공개적으로 투쟁했다. 우리가 사회당에 입당했기에 이 캠페인을 수월하게 할 수 있었고, 당시 우리 당이었던 사회당 안에서 바로 곁에 청중을 두게 되었다. [사회당에 입당하기 전에는] 정말로 우리에게 청중이 없었다. 하지만 당비를 내는 대가로, 사회당의 모든 지부 모임에서 청중을 갖게 됐다.
캘리포니아의 사회당
당시 건강상의 이유로 나는 캘리포니아에 살면서, 대중운동 속에서 활동했다. 우리는 그곳에서 빠르게 당에 융합했고, 선거운동 과정에서 우리가 했던 활동, 연설, 정치적 작업 덕분에 지도적 영향력을 획득했다. 그 결과, 입당 후 6개월이 되기 전에 캘리포니아 사회당의 후원을 받아 주간신문을 발행하기 시작했고, 내가 편집인으로 임명됐다. 상황은 우리에게 매우 유리했다. 내가 신문편집인이고, 캘리포니아 주와 지역 조직에서 우리 동지들이 명성을 갖고 있었기에, 우리는 처음으로 항만 대중운동에 직접 개입할 수 있었다.
1936~37년의 항만 대파업은 우리에게 넓은 무대가 됐다. 동부의 우리 동지들이 모스크바 재판과 스페인 내전에 관해 캠페인을 펼치고 있을 때, 멀리 캘리포니아에서 우리는 1936~37년 항만 대파업의 진로에 영향을 미친 대중운동에서 맹렬히 활동함으로써 그 중대한 정치활동을 보충했다. 그곳에서 작업하고 그 과정에서 조직화 대상자를 만듦으로써, 우리는 트로츠키주의 분파의 최초 중핵을 조직할 수 있었다. 이 작업 덕분에 우리 당은 성과를 상당히 쟁취했다. 여전히 그것은 지속되고 있다. 그때부터 트로츠키주의자들은 항만노동자 운동에서 점점 더 강력해졌다. 미국에서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산업 가운데 하나에서 확고한 기반을 만든 것은 우리 당의 밝은 미래를 보증하는 최고의 증거 중 하나다.
<사회주의자의 호소>와 <노동자행동>
시카고에서 우리는 <사회주의자의 호소>라는 또 다른 기반을 확보했다. 애초에 이것은 앨버트 골드만과 몇몇 개인이 발행하는 작은 등사판 신문이었다. 골드만은 우리보다 1년 앞서 개별적으로 사회당에 입당했다. 그는 당의 결정을 기다리지 않고, 우리가 머스티 그룹과 통합하기 직전에 독단적으로 입당했다. 이 행동 때문에 날카로운 말들이 오갔다.
하지만, 골드만의 조직적 이탈이 우리와 원칙적으로 갈라서려는 의도가 아니라는 점이 곧 분명해졌다. 처음부터 그는 일관되게 우리 강령에 입각해 활동했다. 우리 당이 사회당 입당 쪽으로 방향을 틀자마자, 우리는 그와 다시 쉽게 협력할 수 있었다. 그래서 사회당 지도부의 요구에 따라 우리가 언론을 포기했을 때는, 이미 골드만과 우리가, 사회당에서 기관지로 인정받고 자리 잡은 <사회주의자의 호소>를 트로츠키주의 분파의 공식기관지로 만들기로 합의한 상태였다. 우리가 그렇게 빠르고 원활하게 다시 협력하자, 어떤 이들은 골드만이 트로츠키주의 조직에서 탈퇴한 다음 개별적으로 사회당에 입당하고, 우리와 논쟁한 것이 모두 완전히 꾸며진 것이 아닌지 물어볼 정도였다.
전혀 그렇지 않았다. 우리는 그 모든 걸 꾸밀 만큼 그렇게 엉큼하지 않다. 단지 일이 그렇게 됐을 뿐이다. 등사판 신문은 인쇄판 잡지로 바뀌었다. <사회주의자의 호소>라는 이름은 그대로 유지했다. 사회당의 ‘전투파’가 우리의 오랜 신문을 억압했지만, 우리는 곧 사회당 안에서 우리 강령을 옹호하는 합법적 월간 잡지를 낼 수 있었다. 늦가을에는 캘리포니아에서 <노동자행동>이라는 훌륭한 이름의 주간신문도 냈다. 이 이름이 최근에는 그리 좋게 대접받지 못하지만 말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사실상 우리 언론을 주간 선동지와 월간 잡지로 재편했다. <노동자행동>은 캘리포니아 사회당의 후원 아래 발행됐다. 하지만 만약 그것이 트로츠키주의 선동지가 아니었다면 나는 결코 거기에 결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그 신문을 활용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사회주의자의 호소>는 사회당에서 우리 분파를 ‘합법적으로’ 재건할 수 있는 매개체가 돼주었다.
<사회주의자의 호소> 전국회의
1937년 초에 우리는 <사회주의자의 호소> 전국회의를 조직했다. 당의 이익을 증진하는 방법과 수단에 대해 토론하기 위해 전국 각지의 사회당 당원을 시카고로 초대했다. 각자의 배경이나 소속 분파에 관계없이 모두 환영했다. 유일한 참가조건은 <사회주의자의 호소> 강령에 동의하는 것인데, 그 강령은 제4인터내셔널 강령과 일치했다. 그것을 기초로 하는 이런 방식의 토론회를 통해, 1937년 초 겨울에 시카고에서 우리는 사실상 사회당 내 새로운 전국좌파라 할 수 있는 것을 구성했다. 이번에 그것은 ‘전투파’ 잡탕 간부회의가 아니라, 진짜 좌파였다. 그것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분명히 알고, 그것을 위해 싸울 준비가 돼 있는 지도부, 그리고 뚜렷한 강령을 기반으로 결집한 당원들의 조직이었다.
사회당에서 활동하던 시기 내내 투쟁이 발전해 성과를 남기자, 스탈린주의자들은 우리에게 엄청난 공격을 퍼부었다. 우리가 사회당에서 더 많은 것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고 수천, 수만 달러를 썼다. 그들은 우리가 꽤 큰 그룹을 만들까봐 극히 두려워했다. 당장은 아무리 작더라도 트로츠키주의 운동이야말로 스탈린주의의 심장을 노리는 진정한 비수라는 점을 그들은 늘 이해하고 있었다. 사회당 지도부 일부가 이런 스탈린주의자들의 캠페인에 공감하며 화답했다. 그들은 미국 스탈린주의자들 뒤에 소련이라는 거대 국가권력이 있다는 점을 알았다. 그래서 그들은 트로츠키주의 강령의 원칙적 올바름보다는, 스탈린주의자들의 막강한 힘과 자원에 훨씬 더 깊은 인상을 받았다. 전원은 아니더라도 ‘전투파’ 일부가 스탈린주의자들과 협력하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우리가 방해하지 않았다면 스페인에서처럼 그들과 긴밀한 관계를 오래전에 형성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과 스탈린주의자들 사이에서 우리의 강령을 내걸고 비판했으며, 스탈린주의자들과 단결한다는 견해에 사회당 평당원들이 맞서게 했다. 이것으로 그들의 게임이 가로막히자, 그들은 우리에게 더 격분했다. 이미 알게 모르게 루즈벨트와 화해하는 쪽으로 가던, 사회당 지도부의 또 다른 일부는 우리를 실질적으로 공격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을 출당시키자.” 이 캠페인 뒤에는 많은 압력이 있었다. 한편으로는 스탈린주의자들이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르주아의 영향력이 있었다.
우리에 맞선 싸움을 이끌었던 이들 대다수는 뒤에 자본가계급과 타협했다. 잭 알트만은 그 중 한 명이었다. 폴 포터는 ‘전시노동위원회’의 첩자가 됐다. 그는 그런 수완으로 조선소노동자의 임금을 계약조건보다 더 낮게 삭감하는 더러운 일을 성사시켰다. 그는 당에서 우리를 축출하라고 요구하는 팜플렛을 쓰기까지 했던 사회당 지도부 가운데 한 명이었다. 노먼 토머스와 다른 최고 지도부들은, 나중에 다름 아닌 루즈벨트의 노무 관리인이 된 이런 자들을 우리보다 더 좋게 여겼다.
그들은 트로츠키주의자들을 출당시키려는 특별한 목적을 위해, 당헌에 따라 정당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당 특별대회를 소집하려 했다.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더 이상 스탈린주의자들로부터 비판받지 않기를 바랐던 것이다. 우리가 사회당에 주고 있던 혁명적 색채를 버리고자 했고, 부르주아 사회로부터 호의를 받으면서 사회당을 재건하고 싶어 했다.
사회당은 1차 세계대전 동안의 짧은 시기를 제외하고는 항상 ‘좋은 평판’을 받았다. 사회당은 사회주의에 찬성하지만, 아무 해도 끼치지 않는 사람들의 그룹으로 여겨졌다. 그런 부류의 당은 언제나 용인될 수 있지만, 어떤 실질적이고 진지한 영향력도 결코 획득할 수 없다. 노동운동 전체에서 사회당 지도자들과 회원들은 사회주의에 찬성하긴 하지만, 노동운동 사기꾼들, 모리배들, 배신자들과 다투지 않는 사람들로 인식됐다. 우리 입당이 그것을 바꾸어 놓았다. 우리는 사회당의 이름으로 말하면서, 스탈린주의자들과 싸워나갔고, 노동운동 사기꾼들과 싸워나갔으며, 대중이 사회당을 전과 다르게 보게 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를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1937년 3월에 열리는 이 대회에 대한 우리의 전략은 논쟁을 지연시키는 것이었다. 우리한테는 대의원이 될 자격이 없었다. 그래서 대회에서 제대로 싸울 수 없었다. 혁명가가 될 수 있는 사회당 노동자들과 청년들을 최대한 많이 교육하고 획득할 시간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약 6개월 이상 더 필요했다. 그래서 우리는 최후의 대결을 이 대회에서 치르지 않는 것으로 전략을 세웠다.
이 전략을 밀어가기 위해, 나는 당시 <노동자행동>을 편집하고 있던 샌프란시스코에서 뉴욕으로 소환돼 협상을 지원했다. 우리는 미니애폴리스의 빈센트 던도 불러들였다. 우리가 최후의 대결을 연기할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 알아보기 위해, ‘전투파’ 지도부, 그리고 노먼 토머스와 문제들에 대해 토론할 위원으로 그와 내가 지명됐다. 우리는 여러 번 회의했는데, 그 중 한 번은 노먼 토머스의 집에서 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을 대표해 던 동지와 나는 토머스, 타일러, 잭 알트만, 머리 배런, 그리고 나머지 젊은 풋내기 노동운동 사기꾼들과 마주 앉았다.
이 회의에서는 우리를 그렇게 가혹하게 대하게 만든 불만이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할지 등을 토론했다. 나는 큰 불만 가운데 토머스가 강조한 하나를 기억한다. 그것은 트로츠키주의자들이 특히 뉴욕 지부 모임들에서 말을 너무 많이 한다는 보고였다. 밤 11시 경에 이론적이고 정치적인 토론을 제기하고 끝없이 계속할 것을 고집한다는 것이다. 그는 트로츠키주의 간부들과 분파를 억제할 수 있는지, 가령 이런 토론을 합당한 시간으로 제한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어 했다. 나는 그것에 공감했다. 왜냐면 나는 그렇게 새벽 두 시까지 이어지는 토론에 불만이 쌓여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폭넓고 전면적인 의견 일치를 보았다. 할 수 있는 한 지부 모임을 11시까지 끝내는 규칙을 세우기로 했다. 또한 이런 종류의 양보를 많이 했다. 우리는 평화를 원했다. 자리 문제에서 이런저런 양보를 꽤 많이 했다. 전반적으로 우리가 꽤 타협적이고 비공격적 태도를 취했기에 결국 합의에 도달했다. 노먼 토머스는 그 자리에서 특히 <사회주의자의 호소> 같은 내부 기관지를 금지한다거나, 개인의 견해를 이유로 누군가를 제명하려는 어떤 안도 대회에 제출해서는 안 된다고 우리와 합의했다. 그것은 앞서 언급한 젊은 ‘전투파’들이 보는 자리에서 노먼 토머스가 우리와 맺은 협정이었다.
<사회주의자의 호소> 금지령
하지만 노먼 토머스는 이 협정을 지키지 않았다. 우리와 토론한 뒤 시카고에서 열린 대회에 참가했을 때, 그는 다른 압력을 받았다. 특히 보수적 사민주의의 아성이었던 밀워키[미국 위스콘신 주에서 가장 큰 도시]에서 압력이 밀려왔다. 보수적 사민주의는 2차 세계대전 때 사회애국주의로 변모했다. 밀워키 출신의 자기만족적이고 자본가정신을 가진 사민주의자들이 가한 압력, 그리고 머리 배런 같은 뉴욕의 풋내기 노동운동 사기꾼들이 가한 압력은 노먼 토머스의 명예가 걸린 약속보다 더 강했다. 그는 약속을 깨고 우리를 배신했다. 그 자신이 대회에서 일어나 당의 모든 내부 기관지를 금지하자고 제안했다. 모든 내부 기관지 금지는 <사회주의자의 호소> 금지를 뜻했을 뿐이다. 조직 안에 이렇다 할 다른 중요한 내부 기관지는 없었다.
대회가 끝났을 때, 곧바로 그 총구는 우리를 직접 겨냥했다. 다시 우리는 언론을 박탈당했다. 여전히 우리는 결정적 순간으로 나아가는 것을 주저하고 있었다. 우리가 전반적으로 준비를 덜 했을 뿐만 아니라, 아직 완결하지 않은 트로츠키 방어위원회 활동이 때 이른 분열로 위태로워질까봐 우려했기 때문이다. 이때 트로츠키는 완전한 객관성을 다시 보여주었다. 정치적 관점에서뿐만 아니라 개인적 차원에서도 모스크바 재판과 확실하게 관련이 있던 트로츠키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보냈다.
“물론 지금 분리하는 것이 조사위원회 활동을 조금은 곤란하게 만들겠지만, 그것을 고려해서는 안 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정치적으로 설명하는 작업입니다. 여러분의 앞길에 장애물을 놓아서는 안 됩니다.”
트로츠키는 우리를 격려했다. 심지어 우리 대열이 해체되고 우리가 그 길로 이끈 이들이 사기저하에 빠지지 않도록, 그들의 도전에 응수하고 그들이 우리를 더 몰아붙이지 못하게 전진하라고 부추기기까지 했다.
처음에 우리는 조심스럽게, ‘합법적’으로 일을 진행했다. 출판물 금지 조치를 위반하지 않으면서도, 상당히 유효한 언론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 사적 편지들과 지부 결의문들을 대량 복사해 활용하는 체계를 만들어냈다. 사적 편지의 형식을 빌린 대회 평가서를 어떤 동지가 서명해 다른 동지에게 전달했다. 그리고 그 편지는 등사기로 인쇄돼 조심스럽게 지부들에 배포됐다. 스페인 내전에서 새로운 쟁점이 발생하거나 새로운 발전단계로 접어들 때마다, 뉴욕 지부에서 어떤 동지가 개별적으로 결의문을 제안했고, 그 문제에 대한 그곳 고유의 결의문이라는 근거로 등사판으로 인쇄해 전국 각지의 우리 분파 모임들에 발송했다. 우리에게는 언론이 없었다. 그들에게는 당 기구 전체가 있었다. 그들에게는 사무총장, 편집인, 노동국장, 조직가들, 그리고 사용 가능한 모든 것이 있었지만, 우리에게는 강령과 등사기가 있었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이 증명됐다.
‘함구령’
모든 곳에서 우리 분파는 더 많이 알았고, 규율이 더 잘 잡혀 있었으며, 더 잘 조직돼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새로운 회원들을 분파로 빠르게 모집해나가고 있었다. 그러자 도덕군자인 체하는 우리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약간의 민주주의 처방전을 당에 제시했다. 그들은 ‘함구령’을 통과시켰다. 논란이 되는 문제들에 대해 지부에서 더 이상 어떤 결의안도 제출할 수 없게 하는 결정을 전국위원회가 내린 것이다. 그들은 특히 자신들이 보기에 사소한 스페인 내전을 염두에 두었다.
그래서 우리는 본격적으로 반기를 들었고, 함구령에 맞서 전국 캠페인을 시작했다. 이것은 결의문 채택 금지 결정[함구령]에 항의하는 결의문을 모든 지부에서 채택하는 방식이었다. 이전에는 사회당 관료들이 결의문을 너무 많이 받아보아야 했다면, ‘함구령’을 통과시킨 뒤에는 쏟아지는 결의문에 익사할 지경이었다.
우리는 더 이상 박해를 참지 않고 결판을 보기로 결정했다. 어떻게든 그 순간까지 모든 작업을 끝마쳤다. 대회 이후 몇 달간 격돌을 준비하면서, 노동자혁명가가 될 가능성을 가진 정말 진지한 좌파 활동가들과 청년들을 교육하고 조직하는 작업을 사실상 완결했다. 사회당은 주로 소부르주아계급으로 구성돼 있었다. 우리에게 온갖 제약이 가해지는 상황에서는, 당의 실질적 다수를 획득할 수 없다는 점이 분명해졌다. 우리의 공개신문을 다시 발간하고, 다시 한 번 주된 관심을 광대한 계급투쟁으로 돌리기 위해서는 자유를 확보해야 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출당
우리는 우리 분파의 전국위원회 회의를 6월에 뉴욕에서 갖고, 투쟁결의안을 채택하고 전국 규모에서 그 투쟁을 조직했다. 그들은 대규모 출당을 뉴욕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응수했다. 정당한 논쟁에서 우리를 이길 수 없음을 알고 이 위선적인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내가 본 것 중 가장 관료적이고 야만적으로 민주적 권리를 박탈하고 당헌을 위반했다. 그들은 우리를 모함하고 내쫓았다. 뉴욕에서 첫 번째 집단 출당이 있고 며칠 후, 우리는 이제 8면짜리 타블로이드판 주간지로 재편된 <사회주의자의 호소>를 통해 응수했다. ‘출당 지부들의 전국위원회’를 만들고, 이런 경험들을 평가하기 위한 출당 지부들의 대회를 소집했다. 트로츠키 동지가 긴밀하게 협력하고 심지어 감독하는 가운데, 우리는 이 모든 작업을 몇 달 안에 완료했다.
알다시피 당시 그는 멕시코에 있었고, 우리는 그와 개별적으로 접촉하거나 서신을 주고받았다. 그는 곤란을 많이 겪고 있었고, 모스크바 재판에 관한 자료를 준비하느라 바빴지만, 우리에게 편지를 자주 보내 우리 문제를 매우 긴밀하고 세심하게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가 도울 수 있는 일이면 다 했다.
시카고 대회
곧바로 우리의 캠페인은 12월의 마지막 날과 1938년 새해 첫날에 시카고에서 열린 사회당 출당지부 대회로 이어졌다. 대회에서 우리는 1년 6개월 동안 사회당에서 활동한 결과를 밝혔다. 모스크바 재판의 진실을 전 세계에 드러내는 수단이었던 트로츠키 방어위원회를 조직하는 데서, 그리고 스탈린주의에 대해 전례 없이 가장 강력하게 타격하는 데서, 그 활동은 분명히 효과적이었다. 우리의 사회당 입당은 노조 활동에서도 유용했다. 가령 캘리포니아 항만파업 때는 우리가 사회당원이라는 사실이 큰 도움이 됐다. 그때까지 가끔 만나는 것 이상을 할 수 없었던 자동차노조에서도 연결망을 넓힐 수 있었다. 자동차노조에서 트로츠키주의자들의 강력한 분파를 만들기 위한 기반을 닦았다.
“대회에서 드러난 정말 놀라운 일은, 우리가 사회당 안에서 이러한 내부 정치활동에 집중하면서도, 특히 중앙지도부의 어떤 지침 없이도, 전에는 다가가보지 못한 규모로 노조 활동을 발전시켜왔고, 적어도 당의 노동자계급화에 착수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사회주의의 원칙과 사회주의혁명에 진심으로 관심을 갖는 사회당 노동자들과 사회당 청년의 다수를 우리 편으로 획득했다.”
사회주의노동자당 출범
대회는 어떤 반대도 없이 제4인터내셔널의 강령을 채택했다. 이것은 우리의 교육활동이 철저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모든 성과는 사회당 입당이 정치적으로 현명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한 가지 더 중요한 것은, 사회당이 우리를 출당시키고 우리가 독립정당[사회주의노동자당]을 구성하는 것으로 맞받아쳤을 때, 사회당이 스스로 치명타를 입었다는 사실이다. 그때부터 사회당은 점점 더 해체됐고, 결국 사실상 외형적으로도 노동운동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정당이 돼버렸다. 사회당에서 우리가 활동한 것이 거기에 공헌했다. 뒤에 사회당 입당의 전체 결과와 이후 그 조직의 비참한 상태에 대해 우리와 대화하면서, 트로츠키 동지가 그 점을 언급했다. 그 점만으로도 사회당 입당을 정당화할 수 있다고 그가 말했다. 설사 우리가 새로운 회원을 단 한 명도 조직하지 못했을지라도 말이다.
부분적으로 우리가 사회당 안에서 활동하고 내부 투쟁을 벌였기에, 사회당은 변두리로 밀려났다. 혁명정당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사회당이 장애물이었기 때문에, 그것은 커다란 성취였다. 문제는 단지 혁명정당을 건설하는 것만이 아니다. 혁명정당 건설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장애물을 제거하는 것도 과제다. 다른 모든 당은 경쟁자고 장애물이다.
이런 성취와 결과를 종파주의 정책의 결과와 대비해보라(나는 성취를 과장하지 않았다). 그들은 사회당 입당을 원칙적으로 거부했다. 기권 정책을 통해 더 빠르고 훌륭하게 혁명정당을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1년 6개월이 지나고 2년이 흐른 뒤,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앞서 언급한 모든 성과 외에도, 우리는 회원을 두 배 이상 늘렸다. 올러 그룹은 사회당 청년이나 노동자를 단 한 명도 조직하지 못했다. 단 한 명도 말이다. 반대로 그 대열은 몇 차례 분열했을 뿐이다. 나는 이런 대비가 그들과 논쟁하면서 등장한 정치문제들을 확실하게 검증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치 논쟁을 검증하는 방식은 이후의 경험임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
정치는 종교가 아니다. 정치 논쟁은 영원히 미결 상태로 남지 않는다. 삶이 결정한다. 신학적인 논쟁은 지상의 삶 바깥에서 펼쳐지기 때문에 결코 해결할 수 없다. 그것은 계급투쟁, 정치적 격변, 폭풍, 홍수, 지진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는다. 중세시대에는 얼마나 많은 천사가 바늘 끝에서 춤출 수 있는지 논쟁하곤 했다. 몇 명이나 가능할까? 천 명? 만 명? 바늘 끝처럼 아주 한정된 공간에서 얼마나 많은 천사가 춤출 수 있는지를 세속적 경험으로 알 방법은 없기 때문에, 그 문제는 결코 풀 수 없었다. 우리가 많은 성과를 남기고, 종파주의자들은 아무 것도 남기지 못했다는 것이 입증된 뒤, 그들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주장은 다음과 같았다. “좋소. 당신들은 회원 수를 두 배로 늘렸지만, 강령을 희생시켰소.”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사회당 활동을 끝내고 시카고 대회를 열었을 때, 기존 강령에서 바뀐 것은 없었다. 우리는 제4인터내셔널 강령을 채택했다.
사회당 ‘왕복여행’은 많은 성과를 남겼다. 우리는 새해 첫날 시카고에서 사회주의노동자당을 건설했고, 밝은 전망과 희망 속에서 다시 한 번 독립적인 투쟁을 시작했다. 대회에 앞서 우리 대오가 벌였던 광범위한 토론에서, 앞으로 두드러지게 될 차이와 약점들이 나타났다. 우리는 러시아 문제로 대토론을 벌였다. 스탈린주의의 배신, 모스크바 재판, 스페인혁명의 압살 등 이 모든 처참한 경험에 압도돼, 당의 일부가 이미 1937년 가을에 러시아가 노동자국가라는 생각을 버리고, 그에 대한 방어를 포기하려고 했다. 1917년 이래로 누군가가 러시아문제를 잘못 판단하면서, 혁명운동에서 길을 잃는 일은 늘 있어왔다. 바로 러시아 문제는 눈앞에서 일어난 혁명의 문제였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1937년 가을에, 버넘이 의심하고 회의하는 이들을 대표했다. 아직 버넘은 소련을 조건부로 방어할 생각이었지만, 노동자국가는 존재한 적이 없다는, 그가 보기에 새로운 이론을 정교화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새로운 이론이 아니었다.] 1917년 이래 자세히 설명됐고 소련의 발전이 위기를 맞을 때마다 새로워진, 무정부주의자들과 멘셰비키들의 설익은 이론에 순응한 것일 뿐이었다. 게다가 버넘은 조직 문제에서 우리에 맞선 반대파를 이끌었다. 그는 볼셰비키의 조직방식, 규율, 중앙집중제, 그리고 도덕성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런 증상들은 유명하다. 방법론, 조직, ‘도덕성’의 문제에서 볼셰비즘에 반대하고 나서는 이들은 누구건 틀림없이 자기 피 속에 멘셰비즘이 들어 있다. 정치강령이 시금석이다. 하지만 정치토론보다 조직문제 토론에서 그런 증상이 종종 더 잘 드러난다. 그때 버넘이 보여준 이런 나약성과 반볼셰비키 경향들은 나중에 논리적 발전과정을 밟는다. 당시 나는 트로츠키 동지에게 긴 편지를 보내, 버넘의 입장을 솔직하게 묘사하고 어떻게 대응할지 조언을 구했다. 즉 어떻게 볼셰비즘을 매우 효과적으로 방어하면서도, 혁명을 위해 버넘을 지킬 수 있는지를 물었다. 그 당시 샥트먼은 볼셰비즘 편에서 싸우고 있었다. 그는 버넘을 이렇게 규정하는 것에 동의했고, 우리 투쟁을 도왔다. 하지만 샥트먼은 샥트먼이기에, 2년 뒤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훨씬 더 격렬한 형태로 똑같은 싸움이 벌어졌을 때, 샥트먼이 버넘과 손잡고 우리에 맞서 싸웠던 것은 아주 자연스런 일이었다.
1937년의 토론은 미래의 풍파를 미리 보여주었다. 또 다른 커다란 당내 투쟁, 우리 운동을 시작한 이래 가장 근본적이고 전면적인 내부투쟁을 아직 통과하지 않은 상태였다. 앞선 투쟁들과 더불어 이것을 완전히 통과해야만, 당은 다가올 전쟁의 시험대를 준비할 수 있었다. 우리는 그 싸움을 벌였고, 거기서 볼셰비즘이 승리했다. 그리고 볼셰비키 당은 더욱 강해졌다. 트로츠키 동지는 자신의 탁월한 정치적, 이론적 기여라 할 수 있는 문서들에서 이 투쟁의 역사를 기록했다. 그리고 일부 내 글이 조직 측면에서 그것을 다뤘다. 내가 여기서 다루지 않은 1938년 새해의 사회주의노동자당 창립시점부터 당의 역사를 추적하고자 하는 사람은 이 자료들을 보면 좋을 것이다. 소부르주아 반대파와 투쟁하고 분열한 뒤에 일어난 일들은 최근 역사라서 이 강의에서 평가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모두가 아는 일이다.
자, 소중한 동지들. 동지들이 괜찮다면, 나는 이 강의를 하면서 큰 행복과 만족을 느꼈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만일 대중연설을 공부하는 어떤 젊은 동지가 늙은 운동가인 나에게 ‘대중연설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에게는 좋은 청중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만일 나처럼 열두 번의 시리즈 강의를 하는 동안, 아주 따뜻하고, 함께 감응하고, 고마움을 보이며, 주제에 관심을 갖고 연사에게 친절한 그런 청중이 있다면, 그는 정말 행운일 것이다. [끝]
글로처(Albert Glotzer, 1908~1999). 전문 속기사였으며, 미국 트로츠키주의운동 창립멤버였다. 1940년 이후에는 샥트먼과 함께 활동하다가 사회당에 들어간다. p192
기틀로우(Benjamin Gitlow, 1891~1965). 1920년대 초에 저명한 사회주의 정치인이었고, 미국 공산당 창립멤버였다. 하지만 1930년대 말부터는 보수주의자로 변해 <나는 고백한다>는 책을 써 공산주의 운동을 비난하고, 지배계급의 공산주의자 탄압에도 적극 협력한다. p13
골드만(Albert Goldman, 1897~1960). 1919년에 재단사로 일하다가 세계산업노동자연맹(IWW)에 가입했으며, 1920년에 미국공산당에 입당했다. 1933년에 트로츠키주의에 호의적이라는 이유로 공산당에서 제명된 뒤, 주로 트로츠키주의 운동에 복무했다. 1940년대 후반에 스탈린주의를 패배시킬 수 있는 것은 자본주의뿐이라고 생각해 미국사회당에 합류했다. 유명한 여성 무정부주의자 엠마 골드만과는 다른 인물. p192
답스(Farrel Dobbs, 1907~1983). 젊었을 때 패럴 답스는 보수 공화파였으나 1930년대 대공황기에 자신을 포함해 노동자들이 겪는 곤경을 보면서 급진화해 팀스터 노조에 가입하고, 미국공산주의자동맹에도 합류한다. 나중에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신문 <투사>의 편집자가 됐으며, 1948년부터 1960년까지는 사회주의노동자당 대선후보였다. 캐넌의 뒤를 이어 1953년부터 1973년까지 당 사무총장으로도 활동했다. 1983년에 죽을 때까지 당에 남아 미국좌파운동과 미네소타 팀스터 활동을 기록하는 데 남은 생을 바쳤다. p160
던(Vincent Dunne). 트로츠키주의 던 3형제 중 1인이다. 미니애폴리스에서 패럴 답스, 칼 스코글런드 등과 함께 활동했다. 1937년에 사회당 좌파와 협상할 때 캐넌과 함께 협상대표단으로 참가했다. p16
뎁스(Eugene Debs, 1855~1926). 세계산업노동자연맹(IWW) 창립멤버였으며, 미국 사회당 대선후보로 여러 차례 출마했다. p31
디보어(Harry DeBoer, 1903~1992). 1934년 미니애폴리스 팀스터 파업의 지도자 중 1인이다. 나중에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지도자가 됐다. 새로운 세대의 사회주의자들을 위해 <어떻게 파업에서 승리할 것인가: 1934년 미니애폴리스 트럭노동자 파업의 교훈>을 썼다. p153
라덱(Karl Radek, 1885~1939). 폴란드에서 태어난 유대인 혁명가로, 볼셰비키이자 국제 공산주의 지도자였다. 1918년부터 20년까지 독일로 들어가 공산당 조직화를 하다가 러시아로 돌아가 코민테른 간부를 맡았다. 1923년 코민테른 대표 자격으로 독일에 가 2차혁명을 준비했으나 실패하자 주요 직책에서 해임당했다. 나중에 트로츠키주의자로 몰려 강제수용소로 추방됐으나 1930년에 스탈린한테 투항했다. 그러나 1930년대 대숙청 와중에 트로츠키파로 몰려 다시 실각했고, 강제수용소에 있다가 스탈린주의 요원한테 암살당했다. p35
라코프스키(Christian Rakovsky, 1873~1941). 불가리아 출신 공산주의자로서 제2, 제3인터내셔널의 저명한 지도자였다. 트로츠키와 함께 좌익반대파 활동을 했으며, 박해와 탄압 속에서도 죽을 때까지 스탈린주의에 타협하지 않고 트로츠키주의에 충실했다. p60
러브스톤(Jay Lovestone, 1897~1990). 1921년에 공산당 기관지 <공산주의자>의 편집자가 됐다. 러브스톤은 미국 공산당 안에서 부하린에 우호적인 분파의 지도자였다. 1929년에 스탈린이 부하린을 ‘우파’라며 당 정치국에서 쫓아낸 뒤, 러브스톤은 부하린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미국 공산당에서 제명당했다. 1930년대에는 부하린 계열의 국제우익반대파와 연계해 활동하다가, 2차 대전 때는 제국주의 전쟁을 지지하면서 부르주아 편으로 넘어갔다. p36
로어(Ludwig Lore, 1875~1942). 미국에서 최초의 공산주의자 가운데 한 명으로, 첫 공산주의 잡지인 <계급투쟁>의 편집자로 활동했다. 머스티 그룹의 지도자였다. 그는 점점 더 후퇴해 결국 부르주아민주주의와 완전히 타협했다. p148
루덴버그(Charles Ruthenberg, 1882~1927). 그는 1909년에 미국 사회당에 입당해, 오하이오 주에서 사회당 신문 <클리블랜드 사회주의자>(1911~1913)와 <사회주의자의 뉴스>(1914~1919)를 편집했다. 이후 사회당 좌파를 거쳐 미국 공산당 창립에 주도적으로 참여. 공산당 내 루덴버그-러브스톤 분파를 이끌었으나 1927년 3월에 병으로 사망했다. p33
머로우(Felix Morrow, 1906~1988). 1931년에 미국공산당에 가입하고, 1933년에 미국공산주의자동맹에 가입했다. <스페인 혁명과 반혁명>을 썼다. 소련에 대한 입장 차이로 1940년에 샥트먼이 탈당한 뒤, 1940년부터 45년까지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월간지 <제4인터내셔널>의 편집자로 활동했다. 1946년에 사회주의노동자당에서 제명당했고, 나중에는 우파로 전향해 출판 활동을 벌였다. p244
머스티(Braham Johannes Muste, 1885~1967). 머스티는 목사 출신이지만 노동운동에 적극 결합했다. 1919년에 처음으로 매사추세츠 주 로렌스에서 벌어진 16주 동안의 섬유노동자 파업에 참가했다. 그 뒤 미국섬유노동자연합의 서기로 활동했고, 뉴욕의 브룩우드 노동대학에서 초대 학장을 맡았으며, 1929년에는 보수적인 미국노총(AFL)에 반대해 진보노동행동협회(CPLA)를 조직했다. 1933년에 진보노동행동협회는 미국노동자당을 만들었으며, 1934년에는 톨레도 오토라이트 파업을 성공적으로 이끌고 트로츠키주의 조직과 통합해 미국노동자당을 건설했다. 머스티는 1936년에 노동자당에서 탈당하고, 원래 자신이 출발했던 기독교 평화주의로 되돌아갔다. p181
반즈(Jack Barnes, 1940~ ). 1960년대 초에 사회주의노동자당에 가입했고, 패럴 답스의 뒤를 이어 사회주의노동자당 사무총장이 됐다. p21
버넘(James Burnham, 1905~1987). 1930년대에는 트로츠키주의운동 지도자의 일원이었다. 소련에 대한 입장 차이로 1940년에 미국사회주의노동자당에서 탈당했으며, 이후 우파로 변신했다. p51
부하린(1888~1938). 16세부터 혁명운동을 시작했고, 20세에는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모스크바 위원회 위원이 됐다. 20대에 볼셰비키 이론가로 불릴 정도로 지식이 해박했다. 1917년 혁명이 성공한 다음에는 <프라우다> 편집자가 됐고, 1919년 3월에는 코민테른 실행위원회 위원이 됐다. 부하린은 스탈린과 손잡아 1926~29년에 소련 권력의 정점에 올랐다. 하지만 스탈린이 1920년대 말에 급진적 산업화, 강제 농업집단화를 추진하자, 거기에 반대한 부하린은 우파로 몰려 권력에서 내쫓겼다. 나중에 다시 잠깐 권력에 복귀했으나 결국 1930년대 말에 스탈린한테 처형당했다. p35
브라운(Bill Brown). 미니애폴리스의 팀스터 노조 574지부 지부장이자 팀스터공동협의회 의장이었다. 계급적 본능이 건강했다. 트로츠키주의자들과 협력해 팀스터 파업을 승리로 이끌었다. p156
살루츠키(하드맨). 머스티 그룹의 지도자였고, 의료노동자연합의 공식 기관지 편집자였다. 그는 머스티 그룹이 트로츠키주의 조직과 통합하는 것에 반대했다.p15
샥트먼(Max Shachtman, 1903~1972). 캐넌과 함께 미국 공산당에서 탈당해 미국 좌익반대파를 결성하고, <투사>(Militant)를 발간한 미국 트로츠키주의 선구자 중 1인이었다. 트로츠키 저작과 팸플릿 등을 편집하기도 했다. 소련에 대한 입장 차이로 1940년에 사회주의노동자당과 결별해 노동자당을 창당했다. 1958년에 사회당에 입당했다. p51
스펙터(Maurice Spector, 1898~1968). 캐나다 공산당 의장이자 그 기관지였던 <노동자>의 편집자였다. 1928년 코민테른 6차 대회를 계기로 트로츠키주의자가 됐고, 캐나다에서 트로츠키주의 조직을 건설해 활동했다. 1936년에 뉴욕에 와서 트로츠키주의 운동을 계속하다가 1939년에 그만두고, 이후에는 주로 유대교 활동을 했다. p68
스코글런드(Carl Skoglund, 1884~1960). 세계산업노동자연맹(IWW)에서 잠시 활동한 다음, 미국공산당 창건에 동참했다. 1934년 미니애폴리스 파업 지도자 중 1인이다. 나중에는 트로츠키주의자로서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창립멤버가 됐다. p66
앰터(Israel Amter, 1881~1954). 미국공산당 창립멤버였으며, 1927년에는 공산당의 클리블랜드 지부 책임자가 됐다. p88
에이번(Martin Abern, 1898~1949). 1920년대에 공산주의 청년운동의 중요 지도자였고, 미국트로츠키주의운동 창립자 중 1인이었다. 소련에 대한 입장 차이로 1940년에 샥트먼이 사회주의노동자당과 결별해 만든 노동자당에 합류했다. p70
울프(Bertram Wolfe, 1896~1977). 미국 공산당에서 러브스톤 분파의 지도자였다. 1927~28년에 미국 공산당 기관지 <공산주의자>의 편집자로 활동했다. 1930년대에는 러브스톤과 함께 부하린 계열의 국제우익반대파에서 주요 멤버로 활동했다. p63
웨이스보드(Albert Weisbord, 1900~1977). 그는 1926년 미국 뉴저지 주 퍼세이익 섬유노동자파업의 지도자였다. 1930년에 미국 공산당을 떠나 트로츠키주의 조직에 잠시 합류했다. 하지만 1931년 3월에 공산주의자투쟁동맹이라는 소규모 종파주의 그룹을 만들어 1937년까지 활동했다. 2차 대전이 벌어졌을 때 웨이스보드는 미국의 전쟁 개입에 찬성했다. p102
올러(Hugo Oehler, 1903~1983). 1927년에 미국 공산당에서 캔자스 지역책임자였다. 남부 섬유공장과 콜로라도 광산에서 노동자들을 조직했다. 미국 트로츠키주의운동에 합류했지만, 1930년대 중반에 미국공산주의자동맹이 사회당에 입당하는 전술에 격렬하게 반대한 다음, 1935년 11월에 <혁명적노동자동맹>이라는 소그룹을 만들어 활동했다. p108
올슨(Floyd Olson, 1891~1936). 젊었을 때 미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철도, 항만 노동자 등으로 일하다가 세계산업노동자연맹(IWW)에도 가입했다. 1913년에 고향 미네소타로 돌아와 법대를 졸업하고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농민노동자당 후보로 출마해 미네소타 주지사(1931~1936)가 됐다. 그는 포퓰리즘과 불분명한 사회주의 입장을 지녔다. p163
지노비에프(1883~1936). 1917년 혁명 이전까지 레닌의 가장 가까운 동료로 활동했다. 코민테른 의장을 역임했다. 1923~24년에 스탈린과 손잡고 반트로츠키 캠페인을 벌였고, 1925년에 스탈린과 결별한 다음, 1926~27년에 트로츠키와 손잡고 스탈린에 대항했지만, 1928~34년에 스탈린에게 굴종했다. 결국 1936년에 스탈린이 이끈 모스크바 각본 재판을 받고 처형됐다. p35
카스너(Rose Karsner, 1889~1968). 미국공산당, 미국공산주의자동맹, 미국사회주의노동자당의 창립자이자, 캐넌의 정치적 동반자였다. p70
코니코프(Konikow, 1869~1946). 코니코프는 미국 공산당의 창립멤버이며, 1928년에 트로츠키주의자라는 이유로 공산당에서 제명당한 뒤 미국 좌익반대파 활동을 했다. 미국 산아제한 운동의 선구자로도 유명하다. p88
트로츠키(Trotsky, 1879~1940). 레닌과 함께 1917년 10월 러시아 노동자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끌고, 그 뒤 내전 시기에는 적군(Red army)을 조직해 부르주아 반혁명을 격퇴했다. 관료적으로 타락한 스탈린이 트로츠키를 출당시키고, 러시아에서도 추방했지만 국제좌익반대파를 조직해 진정한 맑스레닌주의를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지속적으로 투쟁했다. <러시아혁명사>, <배반당한 혁명>, <독일 반파시즘 투쟁>, <프랑스 인민전선 비판>, <스페인혁명>, <레닌 사후 제3인터내셔널> 등 중요한 저작을 많이 남겼다.
페퍼(John Pepper, 1886~1938). 헝가리와 미국에서 공산주의 운동을 했다.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 간부로 활동하다가 1929년에 쫓겨남. 다시 소련 정부 관료가 됐지만, 1930년대 대숙청 때 처형당했다. p48
포스터(William Foster, 1881~1961). 포스터는 1917~1918년에 통조림공장 노동자들을 조직했고, 1919년에 철강 파업에서 재능을 보였다. 포스터는 미국 공산당에서 가장 대중적인 노동운동 지도자였다. 하지만 그는 나중에 스탈린주의자가 돼 트로츠키주의자들과 대립했다. p42
한센(Joseph Hansen, 1910~1979). 미국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창립 멤버이며, 멕시코에서 트로츠키 비서로도 활동했다. 1940년부터 1975년까지 사회주의노동자당 전국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p17
훅(Sidney Hook, 1902~1989). 처음에 훅은 소련을 열광적으로 지지했다. 1932년에는 스탈린주의자인 포스터가 대선후보로 나섰을 때 그를 지지했다. 하지만 1933년에 독일에서 나찌즘이 승리하자, 스탈린주의에 그 책임이 있다고 생각해 코민테른과 결별했다. 1933년에 머스티가 이끈 미국노동자당에 합류했다. 나중에 그는 반공주의자가 돼 미국의 베트남 철수를 반대하기도 했다. p184
힐만(Sidney Hillman, 1887~1946). 화섬의류노동자연합 위원장으로서 산별노조회의(CIO) 건설에서 핵심 역할을 했다. 그리고 노동자운동이 루즈벨트 정부와 민주당을 지지하도록 이끌었다. p182
국제노동자방어위원회(International Labor Defense). 정치적 소속과 관계없이 노동자운동에서 전투적으로 싸우다 구속된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활동한 조직이다. 국제공산주의동맹 트로츠키가 주도해서 만든 국제 좌익반대파 조직이다. 1938년에 제4인터내셔널로 전환한다.
공산주의노동자당. 1919년에 미국 사회당에서 공산주의자들이 분리할 때, 외국 출신 공산주의자들이 만든 다수파당이 공산당이고, 주로 미국 출신 공산주의자들이 만든 소수파당이 공산주의노동자당이다.
노동자당. 이 명칭은 여러 번 사용됐다. 1920년대 초반에 공산당은 합법 조직으로 ‘노동자당(Workers Party)’을 건설했다. 머스티 그룹도 ‘미국노동자당’(American Workers Party)이라는 명칭을 썼고, 미국 트로츠키주의 조직과 머스티 그룹이 통합해 만든 새 조직도 ‘미국노동자당’(Workers Party of the United States)이라는 명칭을 썼다. 1940년에 소련 성격 논쟁으로 샥트먼이 사회주의노동자당에서 분리해나와 만든 조직도 ‘노동자당’(Workers Party)이었다.
노동자평의회(Workers Council). 1919년에 혁명좌파가 사회당에서 분리해 공산당을 만들었을 때 합류하지 않았던 사회당 중도좌파들이 1921년에 사회당에서 나와서 만든 조직이다. 노동자평의회는 공산당의 외곽 합법조직이었던 노동자당에 합류한다. 살루츠키가 대표적 인물인데, 그는 노동자당이 노조 관료에 맞서 싸우자 노동자당을 그만두었다.
<노동자행동>. 트로츠키주의 조직이 사회당에 입당한 뒤 캘리포니아 사회당의 후원을 받아 발간한 주간 선동지
농민노동자당(Farmer-Labor Party). 1918년에 미국 미네소타 주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이후에 다른 지역 노동자조직과 협동조합 운동을 포괄해 조직이 확대됐다. 정치적으로는 사회민주주의적이고 민중주의적이었다.
미국공산주의자동맹. 1928년 10월에 캐넌 등이 공산당에서 제명당한 뒤 1929년 초에 건설한 미국 트로츠키주의 조직이다.
미국노동총동맹(AFL). 미국노총, 이 조직의 관료성과 보수성에 반발해 세계산업노동자연맹(IWW)과 산별노조회의(CIO)가 만들어졌다.
사회주의노동당(Socialist Labor Party). 1876년에 건설돼 한동안 국제사회주의 운동에서 의미 있는 역할을 했다. 이 당의 중심인물이었던 급진주의자 다니엘 드 레온은 1905년에 세계산업노동자연맹(IWW)을 건설하는 데 기여했다.
사회주의노동자당(Socialist Workers Party). 1938년에 창건된 미국 트로츠키주의 정당
<사회주의자의 외침>. 미국 사회당 전투파의 기관지
<사회주의자의 호소>(Socialist Appeal). 사회당에 입당해 있을 때 트로츠키주의 입장을 선전선동하는 수단이었으며, 1938년부터 1941년까지는 사회주의노동자당의 공식 신문이었다.
산별노조회의(CIO). 1930년대 대공황 국면의 거대한 파업물결을 바탕으로 미조직, 비숙련노동자들을 대규모로 조직한 새로운 전투적 산별노조들의 연합체.
<새로운 인터내셔널>(New International). 미국공산주의자동맹의 이론지로 1934년 7월에 창간호가 발간됐다. 1938년부터 1940년까지는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월간지였으며, 이후 <제4인터내셔널>, <국제사회주의평론>으로 이름이 각각 바뀌었다.
세계산업노동자연맹(IWW). 미국노동총연맹(AFL)의 보수성에 불만을 품고 등장한 급진적 노조운동 단체. 정치사상과 이념을 경시한 결과, 1920년대에 노동운동의 주도권을 공산당에게 넘겨주었고 1930년대에는 사실상 이름뿐인 조직으로 전락했다.
<전진>(Advance). 화섬의류노동자연합의 공식 기관지
진보노동행동협회. 급진정당과 직접 관계가 없는 급진적 노조활동가들이 만든 노동단체. 머스티가 주도했다. 이 조직은 나중에 노동자당으로 전환했고, 결국 트로츠키주의조직과 통합했다.
청년사회주의동맹. 미국 사회당의 청년조직
태머니홀. 1930년대까지 뉴욕 시정을 지배한 민주당 파벌 기구
<투사>(Militant). 미국 트로츠키주의 조직의 신문. 1928년 11월에 창간호가 나왔다.
‘전투파’(Militant). 1930년대 미국 사회당 좌파 그룹
│미국 혁명운동 연표(1919~1940)│
1919년 봄 미국 사회당 좌파가 전국대회를 개최하다.
1919년 9월 사회당 좌파가 사회당에서 분리하다. 외국 출신 중심의 다수파 공산당과 미국 출신 중심의 소수파 공산주의노동자당이 등장하다.
1920년 5월 루덴버그 분파가 공산당에서 분리해 공산주의노동자당과 통합해서 통합공산당을 건설하다.
1928년 7~8월 코민테른 6차 대회가 열려 캐넌이 트로츠키의 코민테른 강령초안 비판을 읽다.
1928년 10월 27일 캐넌, 샥트먼, 에이번이 공산당에서 제명당하다
1928년 11월 <투사> 창간호를 발간하다.
1929년 5월 미국 좌익반대파(공산주의자동맹)가 첫 전국대회를 열다.
1933년 초 독일 히틀러가 집권하다.
1933년 12월 머스티의 진보노동행동협회가 미국노동자당을 건설하다.
1934년 미니애폴리스 팀스터(트럭운전사)노조가 파업하고, 톨레도 오토라이트 자동차 부품공장 노동자들이 파업하다.
1934년 미국공산주의자동맹과 머스티 그룹(미국노동자당)이 통합해 새로운 ‘미국노동자당’을 건설하다.
1935년 10월 미국노동자당 전국위원회 총회에서 ‘사회당 가입 절대 금지’라는 올러파의 주장을 거부하다. 얼마 후 당 규율을 위반한 올러파가 제명당하다.
1936년 미국노동자당이 사회당에 입당하다.
1937년 초 <사회주의자의 호소> 전국회의를 열다.
1938년 1월 1일 사회주의노동자당을 창건하다.
1940년 소련사회의 성격 논쟁으로 샥트먼 등이 사회주의노동자당에서 분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