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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유기적 지식인>의 온라인 월간신문 「붉은 헤게모니」 12호가 발행되었습니다.

 

죽음의 시선이 향한 곳- 바리케이트 그 너머




 

열사라는 말

 

오늘 우리, 대한민국을 죽음의 공장이라고 부르자. 자살의 바람이 부는 곳, 제정신으로 살기는 몹시 힘든 곳, 행복이 메말라 버린 버림받은 자들의 땅 바로 이곳이 , 대한민국이다! 자고 일어나면 죽음이라는 단어와 만나는 곳, 우리는 죽음과 너무도 친숙한 곳, 죽음의 시대를 살고 있다. 어제 또 한 동지가 우리의 곁을 떠나갔다. 내일은 또 어떤 동지가 우리의 곁을 떠나갈지 모른다. 아 미치겠다! 언제까지 이렇게 허망하고 어이없게 동지들을 떠나보내야 하는가? 열사라고 부른들 죽음의 무게가 가벼워지고 아름다워지겠는가? 열사라고 부른들 죽음의 고통과 슬픔을 달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열사라고 부르는 것은 동지들의 목숨의 무게로 우리에게 알리고 남긴 것을 헛되게 하지 않겠다는 것, 열사가 아닌 투사를 부르는 정세를 만들겠다는 것, 열사라는 말이 역사책에 나오는 시대를 만들겠다는 산자들의 각오이고 결의다. 과연 우리는 죽어간 동지들을 열사라고 부를 자격이 있는가? 열사만 있고 전사는 보기 힘든 오늘 우리는 과연 동지들을 열사라고 불러도 되는 것인가?

 

누군가 얼마 전 한 동지의 죽음 후에 이런 말을 했다. “열사라고 부르는 것을 동지가 원할까?” 동지가 죽음을 앞에 두고 처절하게 망설이고 온갖 상념 덩어리를 부여잡고 번뇌하였던 수많은 실존의 이야기가 관성적인 열사라는 말로 치장되고 상품화되고 도구가 되는 것이 아닌가라는 반발심리가 담긴 말이었을 것이다. 그렇다. 열사라는 말로 동지들의 죽음의 이야기를 다 담기에는 그 언어가 너무 짧고 그 무게가 너무 가볍다.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그 언어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열사라는 역사적 언어를 대체할 수 있는 말이 없지 않는가? 또한 그 죽음이 능동적인 죽음이 아니라 방어적이고 온힘을 쥐어짜내는 삶의 마지막 발악 같은 죽음이었을지라도 자본과 정권의 무자비한 억압과 잔인한 탄압에 맞서서 자신의 신념과 의지의 마지막 불꽃이었음에 틀림없지 않은가?

 

하지만 우리는 동지들을 열사라고 부르기에 앞서 그들의 번뇌와 절망의 어둠과 하얗게 모든 것을 태우는 분노를 치열하게 이해하고 기억해야 한다. 그리하여 연대의 바다를 만들어서 열사가 계급의 복수의 파도로 살아나서 자본의 성채를 사정없이 때리도록 해야 한다.

 

방어적이고 수세적인 동지들의 죽음과 투쟁의 모습

 

동지들의 죽음은 전국적인 노동자와 학생의 분노의 함성이 되고 투쟁의 파도가 되었던 때가 엊그제 같은 데 이미 옛말이 되었다. 죽으면 그 현장이나 지역에서 추모하고 장례식을 치른다. 그 장례식조차 부르주아가 주도하는 정세의 영향을 받는다. 12월에 연쇄적으로 발생한 동지들의 죽음도 박근혜의 대통령 당선과 인수위 준비라는 시기와 맞물려서, 박근혜의 당선에 대한 반발여론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시기와 맞물려서, 한겨레와 경향, 한국일보의 보도의 영향으로 열사정국이 만들어졌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열사정국을 만든 것은 살아있는 전사들이 아니라 부르주아 정치와 자유주의 부르주아 언론이 만든 측면이 크다.

 

과거에는 열사는 투쟁의 과정에서 적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든지 분노해서 능동적인 저항의 몸짓으로 자결을 했다. 그리고 그 죽음은 정세의 국면을 바꾸거나 템포를 바꾸었다. 그러나 오늘의 열사는 정치적 신념과 실천능력 사이의 거대한 간극에 갇혀서 고통 받고 몸부림치다가 정치적 신념을 지키고 표현하는 최후의 방법이자 유일한 방법으로 죽음을 선택한다. 죽음을 부른 것은 구조적인 면에서는 같지만 그 형태는 방어적이고 개인적이고 외롭고 쓸쓸하다. 그리고 동지들의 죽음의 비명소리에 답하는 전사들의 계급적 복수의 행동은 찾아보기 어렵다. 추모하고 끈질기고 극한적인 소수의 투쟁이 뒤따른다. 더러운 타협주의의 노예가 된 노조관료, 이기주의 영혼에 사로잡힌 조합원, 식물인간이 된 민주노총, 희망버스를 타지만 연대파업의 열정과 자신감을 상실한 전투적 활동가, 민주당에 기대는 노조집행부와 대다수 활동가들이 만든 쓸쓸한 장례투쟁의 풍경이다.

 

죽음으로 정세를 돌파하여 전진하는 것이 아니라 억압과 탄압의 강도를 완화하고 속도를 줄이고 있다. 그저 열사의 죽음으로 이런 일이 이루어지고 죽음에 기대서 고통이 완화되는 혜택을 받고 있다.

 

그런 일이 있는지 몰랐다

 

우리주변의 동지들을 외롭게 하지 말자. 우리들 자신을 외롭게 하지말자. 동지들이 외롭고 쓸쓸하게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때 유서나 일기 또는 메모의 내용, 한 둘의 지인의 이야기가 공개됐을 때 그런 줄 몰랐다는 이야기를 자주 접하고 분노한다. 자랑이 아니다. 아니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다. 그런데 이런 일이 반복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죽음도 함께하는 동지라고 하면서 인생을 바쳐서 함께 노동해방의 미래를 여는 동지라고 하면서 내면의 고통도 모른다는 것, 자신의 고민을 말하지 못한다는 것, 진심으로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투사는 떨림도 없고 번뇌도 없고 망설임도 없는 강철이고 바위여야 하는가? 나약함을 인정하고 흔들림을 동지적 교류와 포옹을 통해 깊은 성숙함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 아닌가? 그냥 참고 견디고 자신은 강해야 하고 강하다고 스스로 기만하는 행위는 겉으로는 강하지만 내적으로는 깊은 병에 빠지게 만들고 자신의 숨긴 내면이 드러날 것이 두려워서 공포에 시달린다.

 

노동자는 투쟁할 때 건강하고 아름답다.

 

자신들의 욕구와 감정을 거침없는 열정의 언어와 분노의 계급적 행동으로 표현할 때 노동자는 건강하고 활기차고 미래를 향한 눈동자는 빛난다. 계급적 본능을 자본과 정권과 노조관료에 억압당하고 스스로 검열하고 자제하고 억누르면 불안과 뒤틀린 감정과 조급증과 자신감 상실이 생긴다.

 

계급적 처지와 본능을 파업으로 분출하여 억압의 대상을 공격하고 후퇴시키고 굴복시켜 두려움을 몰아내고 억압을 걷어내어 자유로움을 느끼고 존재에 대한 자부심과 자신감을 느끼는 것, 역동적인 투쟁의 몸짓을 통해 동지의 연대감을 느끼는 것, 이것보다 더 즐겁고 행복하고 건강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이제 동지들의 죽음 앞에서 추모만 하고 투쟁하지 않아서 동지들의 죽음을 방조하는 공범자가 되지 말자. 연대하여 외치고 연대하여 투쟁하고 연대하여 파업하자. 동지들의 죽음에 대한 미칠 듯한 분노와 떨림과 한없는 공포를 기억한다면, 다시는 동지들의 외로운 죽음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필사적 결의에 불탄다면 무엇을 못하겠는가? 변명하지 말자. 그리고 정면을 바라보고 당당하게 걸어가자.

 

 

     

 

「붉은 헤게모니」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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