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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인터안 해설과 3인안과 5인안 비판

2011년 5월 제출

들어가며: 러시아혁명과 3개의 강령안

우리는 지금 강령 논의를 하고 있다. 강령은 노동계급과 인류의 역사적 실천의 정수이며, 세계에 대한 총체적이고 과학적 해석이다. 인류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고, 20세기 역사의 중심에는 러시아혁명이 있다. 우리의 강령은 20세기 최고의 역사적 실천인 러시아혁명에 대한 총체적이며 과학적 해석 위에 기초해야 한다.

러시아혁명은 세계 최초로 부르주아 체제를 타도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수립했다. 그 권력을 제국주의와 부르주아 세력으로부터 방어해내고 사적소유를 철폐하고 프롤레타리아적 소유를 최초로 수립했다. 그 기초 위에 피억압여성의 인권을 급속하게 신장시키고 무상교육, 의료, 주택 등 노동계급과 농민의 삶의 처지를 눈부시게 개선시켰다. 그러나 기대했던 서유럽의 추가혁명은 불발되었고 오랜 내전을 통해 혁명의 중핵은 손상되었다. 혁명은 주춤거렸고 전위는 관료집단이라는 후위에 포위되었다. 이들은 현실적 상황을 혁명적 원칙으로 끌어올렸다. ‘일국사회주의론’을 제창했다. 세계 노동계급의 투쟁역량이 아니라, 소련에 적대적인 일본과 독일 제국주의와 경쟁하는 다른 제국주의 나라들과의 협약 그리고 보다 온건한 부르주아 분파와의 연합인 인민전선에 의존하여 소련을 방어하려 했다. 장기적 이익과 혁명 원칙을 저버리고 단기적이고 임시방편적인 전술 운용에 급급했다. 중국 스페인 등 많은 혁명을 유실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자국가 소련의 존재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북한 중국 쿠바 베트남 등 각국의 반제국주의투쟁이 기형적인 형태로나마 노동자국가로 나아가게 했다. 그러나 결국 소련 자신은 그 자체의 모순으로 인해 1991년 붕괴되고 말았다.

노동계급의 강령은 이 문제를 해명해내어야 한다. 이 문제를 해명하는 관점은 크게 세 가지가 있다. 그것은 스탈린주의, 국가자본주의론, 트로츠키주의이다.

첫째, 스탈린주의는 스탈린을 정점으로 하는 관료집단이 트로츠키를 정점으로 하는 혁명전위(좌익반대파)를 물리치고 권력을 장악한 것을 승리로 인식한다. 그리고 관료집단의 본능적 세계관인 ‘일국사회주의’가 맑스/레닌의 전통을 잇는 혁명원칙의 하나라고 여긴다. 온건한 부르주아 분파와의 연합을 추구하는 스탈린관료집단(스탈린만이 아니라 그 이후의 집권자들 모두, 그리고 중국과 북한 등의 관료집단까지)의 인민전선 정책을 여전히 유효한 정책이라고 지지한다. 관료집단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이들은 결국 소련 붕괴 원인을 설명해내지 못한다. 이 관점은 사노위 내에 독립된 강령으로 제출되어 있지 않다.

둘째, 국가자본주의론은 스탈린주의 혐오증에 의지하는 정치적 태도이다. 이들은 스탈린주의 혐오증이라는 인기 있는 정서에 의지하여 노동자국가 방어를 거부하는 자신의 정치적 태도를 합리화한다. 이 이론의 신봉자들은 ‘사적소유가 철폐된 자본주의’라는 비(非)맑스주의 사상을 내세우며, 퇴보한 또는 기형적 노동자국가들의 사회성과 방어를 거부해 왔다. 이 소위 ‘이론’은 대표적으로 카우츠키, 버넘, 색트먼, 클리프 등으로 이어지며(그리고 다른 한편 서로가 서로를 ‘한사코’ 부정하며), 러시아 혁명 직후, 2차 대전 시기,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폴란드 자유연대노조, 소련 자본주의 반혁명 등 격렬한 계급투쟁이 벌어지는 사안들에서 제국주의나 자본주의 반혁명의 편을 들어왔다. 이 관점은 사노위 내에서 5인안으로 대표되고 있다.

강령은 유기적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구소련과 중국 북한 등 노동자국가들은 강령의 핵심 문제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국가자본주의론적 세계관을 지니고 있는 5인안은 맑스주의의 기본개념들을 심각하게 수정하고 역사를 냉소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민주적이지 않으면, 설령 사적소유가 철폐되어도 자본주의’라는 정식을 따르기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주의, 노동자국가, 프롤레타리아 독재, 제국주의 등의 개념을 수정하고, 제국주의와 식민지 전쟁 문제에 대해 강령적 후퇴가 불가피하며, 소련, 중국, 북한 등의 역사를 냉소적으로 왜곡하게 된다. 예를 들어 ‘국가자본주의 권력 아래 1930년대 농업의 집단화 등 사적소유 철폐가 이루어졌다.’ ‘1980년대 말과 90년 초에 벌어진 동유럽과 소련에서 일어난 사건은 별일 아니었다. 그저 국가자본주의에서 사적자본주의로 게걸음을 친 것뿐이었다.’ ‘1945년 이후 북한 그리고 1949년 이후 중국에서 일어난 것은 반제반봉건 혁명이었을 뿐이었다.’ 등

셋째, 레닌과 더불어 러시아혁명을 이끈 트로츠키는 관료집단의 혁명사상 수정에 맞서 맑스주의 전통을 계승하였다. 이미 레닌 생전 등장한 관료집단은 레닌 죽음 이후 볼셰비키를 노동계급의 후위에 굴복시키고 좌익반대파로 결집한 혁명전위를 탄압했다. 맑스주의 혁명가들에게 새로운 과제가 제기되었다. 관료집단이 장악한 노동자국가 즉, 노동계급 혁명이 성공했으나 연속혁명이 불발하여, 부르주아 사적소유는 철폐되었으나 권력은 관료집단에 장악되어 있는 사회를 어떻게 이해하고 대응할 것인가? 트로츠키와 국제좌익반대파는 스탈린관료집단과 자본가계급이라는 이중의 압력을 견디어내며 맑스주의 과학을 계승․발전시켰다. 그리고 그 과학성은 소련 붕괴와 중국 위기 등 일련의 역사적 실천을 통해 입증되었다. 이 관점은 사노위 내에서 제4인터안으로 대표되고 있다.

넷째, 사노위 내에서 가장 많은 지지를 받을 것으로 여겨지는 3인안은 이 세 범주에 들어있지 않다. 실례를 무릅쓰고 그 동안의 추측을 발언한다. ‘과거 스탈린주의에 기초해 있었으나 소련 붕괴로 정치적 진공 상태에 놓인 노동계급의 분파’를 이 3인안은 대표하고 있다. 위의 세 방향 어디로도 가지 않은 이 분파는 소련 붕괴 이후 정치적 진공상태에 놓였고 그 진공으로 페미니즘, 생태주의, 포스트 맑시즘 등 잡다한 사상이 스며들어왔다.

그래서 이 3인안을 보면 5인안과 4인터안에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설명법이 아주 자주 등장한다. 그것은 ‘계급모순으로 환원되지 않는’, ‘체제환원적인 입장’이란 표현이다. 이 표현은 여성문제, 환경문제(생태), 평화와 핵무기, ‘주체형성전략’ 등에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생산력주의’, ‘당․국가주도노선의 실패’, ‘가부장제’ 등의 모호한 말로 러시아혁명 등의 역사적 실천을 ‘복잡하고 애매하게’ 설명한다. 제기된 문제를 해명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앞으로의 계급투쟁 과정에서 3인안은 스탈린주의, 국가자본주의, 트로츠키주의 그리고 부르주아 진영 등 넷 중의 하나로 분화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자본과 노동의 적대는 단 한 뼘의 정치적 애매함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1. ‘이행강령’

이행강령이 중요한 쟁점이 되고 있다. 이행강령은 1938년 제4인터내셔널의 창립강령으로 제출/채택된 ‘자본주의의 단말마적 고통과 제4인터내셔널의 임무’의 별칭이다.

이행강령은 노동자들의 즉각적이고 부분적인 요구를 옹호하되 매몰되지 않으며, 노동계급의 최종적 정치목표를 추상적인 형태가 아니라 현실의 요구에 기초한 구체적 형태로 제기하는 것이다. 이행강령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실현되는 최소요구와 같은 것이 아니다. 현실적 요구에 기초하여 최종적 정치목표를 구체적 형태로 제기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행강령은 곧 우리가 건설할 사회주의 사회 상이기도 한 것이다.

이행강령의 관점에서 볼 때,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투쟁과 혁명으로 인한 권력 장악과 사회주의의 건설 작업은 분절적이지 않은 일련의 과정이다.

3인안보다 5인안이 이행강령에 대해 보다 적극적이고 깊이 있는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5인안의 인식에는 몇 가지 문제가 더 있다.

첫째, 트로츠키의 이행강령은 스탈린관료집단에 의해 혁명이 퇴보한 이후의 정세에서 노동계급의 임무를 밝힌 것이다. 따라서 그 강령의 핵심은 반스탈린투쟁과 더불어 러시아혁명 성과의 방어이다. 그런데 5인안은 이 후자를 저버리고 있다.

둘째, 5인안은 ‘노동자계급의 권력 장악 후 혁명적 방책들/ 우리가 건설할 사회주의’ 뒤에 ‘이행요구’를 배치함으로써 이행요구를 사민주의의 ‘최소요구’식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러한 체계는 두 강령안 앞에서 나온 내용이 뒤에서 또 반복되는 주된 원인이기도 하다. 다음과 같은 구절도 5인안이 이행요구를 ‘최소요구’식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보게 되는 근거이다.

사회주의자들은 이행요구를 모든 노동자 공투체의 강령으로, 모든 공동투쟁의 요구안으로 채택토록 하며, 그 요구안/강령의 실현을 위해 공동투쟁을 선두에서 조직하는 것을 항상적 임무로 한다.–5인안, 27쪽

5인안이 여기서 말하는 ‘이행요구’가 트로츠키의 전통 위에 있는 그것이라면 이행요구는 공동투쟁체의 강령이 아니라, 당의 강령이다. 따라서 이행요구에 동의하는 투사라면 응당 당의 일원이 되어 함께 싸워야 할 것이다.

2. 혁명전통의 계승과 국제주의

국제주의는 혁명적 사회주의자에게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적 원칙이다.

맑스주의는 그 시초부터 국제주의에 입각해 왔다.

세계 자본주의는 각 나라 자본주의의 집합체가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하나의 사물처럼 작동하는 유기체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각 나라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 속 하나의 고리로 사고해야 한다. 우리는 전 세계적 자본주의 질서에 맞서 싸우고 있다. 그러므로 전 세계의 노동계급과 사회주의 운동도 일사불란한 사상과 조직으로 대응해야 한다. G20 반대투쟁이나, 사회주의자 석방/국보법 철폐 투쟁에서 나타난 것과 같은 국제적 연대도 소중한 것이지만, 그러한 차원의 연대는 일시적이고 일관되지 않다. 우리의 국제주의는 그런 차원의 국제연대의 수준을 넘어서야 한다.

“혁명적 이론 없이 혁명적 실천 없다.”

과학적 인식이 없으면, 원하는 결과를 가장 효율적으로 얻어낼 수 있는 혁명적 실천도 불가능하다.

맑스주의는 사회와 역사에 대한 과학적 인식의 총화이다. 맑스주의는 종적으로는 인류의 역사 그리고 횡적으로는 전 세계적 차원에서 축적된 노동계급의 실천의 정수로 얻어진다. 그리고 그 정수는 각각 맑스 엥겔스 레닌 트로츠키 등의 이름으로 대표되고 있다. 마치 개인의 성과만이 아닌 인류의 역사적 실천의 산물인 상대성이론이 아인슈타인이라는 이름으로 대표되듯이.

그래야만 과학적일 수 있고, 그래야만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다. 즉, 역사적 실천의 총화로서의 이론을 무시하고 개인 각자의, 각국의 경험을 통해 그 교훈들을 얻으려 드는 것은 무모한 것이며, 수많은 시행착오를 낳을 수밖에 없다. 혁명은 사회에 대한 외과수술이고 이는 인류 특히 노동계급을 중심으로 하는 피억압인민의 목숨을 다루는 문제이다. 그런 점에서 혁명에서의 시행착오는 대단히 엄중한 무게로 다가오는 것이다.

따라서 일국의 당이 노동조합 분회나 선진노동자 조직의 총합이 아니라 인류와 노동계급의 역사적 실천의 총화인 강령을 중심으로 ‘위에서 아래로’ 건설되어야 하듯이, 국제당도 일국당의 총합이 아니라 강령을 중심으로 위에서 아래로 건설되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국제정당(속칭 인터내셔널)을 건설한다고 하거나 건설에 힘을 보탠다고 할 때, 그 국제정당은 과연 어떤 전통에 기초한 당인가 하는 점이 중요하다.

왜냐 하면, 그 자체로 각 인터내셔널은 사회와 혁명에 대한 특정한 인식과 태도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껏 존재했던 1, 2, 3, 4차 인터내셔널은 각각 그 시대의 사회발전과 인식 수준의 소산이었고 노동계급의 역사적 국제적 실천 속에서 기존의 조직이 비과학적임이 증명되고, 그러함에도 낡은 인식과 태도에 머물러 반동으로 될 때,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다.

어찌 보면 바로 이 문제 즉, “어떤 인터내셔널을 계승할 것인가? 또는 어떤 혁명전통을 계승할 것인가”의 물음은 그 자체로 강령의 대부분을 답해주는 문제이다.

우리는 1938년에 트로츠키의 지도 아래 창건된 제4차 인터내셔널의 전통을 계승하고자 한다.

제4인터내셔널 전통을 계승한다고 하는 것은, 요약하면 1917년 10월 혁명을 계승하자는 것이다.

첫째로 10월 혁명의 사회 물질적 성과를 방어–소련 퇴보한 노동자국가 방어 노선

둘째는 10월 혁명의 이론적 자산을 방어–스탈린주의에 대한 투쟁

그 노선에 입각한 혁명가들의 역사적 실천이 우리에게 제4인터내셔널과 트로츠키주의라는 이름의 유산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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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제를 3인안은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3인안은 뭔가 부정적인 예감에 시달리는 듯하다. 그리하여 다음처럼 경계하는 듯한 표현이 반복된다.

한국사회가 갖는 특유의 모순에 대한 분석과 대안이 빠진 강령이거나, 인터내셔널 강령 같은 일반적 강령은 한국사회주의노동자정당의 강령으로 될 수 없다.–해설, 3쪽

국제 사회주의운동의 특정경향을 담는 강령안이 될 경우, 이는 사회주의운동을 혁신하고 재구성하는 강령, 광범한 사회주의자들을 결집하는 강령이 될 수 없다.–해설, 13쪽

한국당의 강령안이 ‘한국사회가 갖는 특유의 모순에 대한 분석과 대안’을 빠뜨리지 말아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동시에 일국적 관점에 빠져서도 안 될 것이다. 그리고 ‘국제 사회주의운동의 특정경향을 담는 강령안’이 될까봐 우려할 필요가 없다.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 세계와 남한의 현실을 적실하게 설명해 내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모두 ‘특정경향’을 가지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과학적인지 그리고 노동계급적인지가 중요한 것이다. 또한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다. 지금 당장 우리는 광범한 사회주의자들을 결집하는 강령을 만들어야 하는가? 지금의 정세 속에서 혁명적 강령 아래 광범하게 모일 사회주의 세력이 있는가? 강령의 대중성은 어떻게 확보되는가라는 이 문제 역시 의미 있는 쟁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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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령을 중심으로 ‘위에서 아래로’ 건설되는 인터내셔널은 대중과 결합하고 국제적 투쟁과 함께 건설되는 인터내셔널이 될 수 없다는 점에서 그 한계가 명확하다.–해설, 13쪽

당의 건설은 혁명사상과 노동계급의 결합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강령을 중심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위에서 아래로’의 정신이다.

<참고>

레닌과 전위당

-촛불정국과 사노련에 녹아 있는 것

이행 강령(1938)

제4인터내셔널의 역사

3. 한국의 사회 성격

우리가 제출한 강령안인 <제4인터내셔널 남한사회주의노동자당강령안>(이하 ‘제4인터안’)은 한국 사회를 불균등결합발전 법칙이 가장 극명하게 실현되는 신식민지로 규정한다.

그것은 주로 다음과 같은 성격에 대한 인정을 의미한다.

첫째, 한국 사회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제국주의 초과착취 지역이라는 점

둘째, 그로 인해서 민주주의를 실현할 폭이 대단히 협소하여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억압해 왔고, 국내 부르주아 체제가 상대적으로 불안정하다는 점

셋째, 남한의 소위 토착 자본가계급은 식민지체제에 하위파트너로 편입되어 친제국주의(주로 친미)적 구도 속에서 움직인다는 점

넷째, 주한미군의 존재에서 특징되듯이 제국주의의 군사적 억압이 존재하며, 그것이 장차 사회주의 혁명 과정에서 주요한 걸림돌이 될 것이라는 점

다섯째, 제국주의 자본의 투입으로 남한의 자본주의가 급속히 발전되어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초과이윤을 수취하는 등 제국주의적 모습도 부분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이것이 남한 노동계급 내 특권층 형성과 노동운동 관료화의 물적 토대가 되고 있다는 점

이러한 인식은 남한은 물론 모든 식민지 사회의 경제 정치 사회 등을 올바로 설명하기 위해 필요하다.

즉, 민주주의 투쟁과 사회주의 투쟁의 관계, 반제국주의(반미) 투쟁과 사회주의 투쟁의 관계를 과학적으로 인식하고, 단계론으로 빠져드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제4인터안은 위의 두 가지 문제에 대해 트로츠키의 연속혁명론의 관점으로 접근한다. 즉, 민주주의 단계를 거쳐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를 통해서만 민주주의는 온전히 실현될 수 있다. 그리고 제국주의로부터의 진정한 해방은 자본주의적 고리를 끊어낼 때에만 가능하다는 인식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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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제를 3인안과 5인안은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두 강령안은 마치 ‘식민지’라는 용어에 트라우마가 있는 것처럼 강령안에 ‘식민지’라는 단어를 어떻게든 쓰지 않으려 한다. 3인안의 경우 단 한 번도 나오지 않고, 5인안의 경우 단 두 번 나오는데, 맑스주의 과학이 아니라 자본주의저널리즘 용어인 ‘제3세계’라는 표현이 훨씬 더 많이 나온다. 세계자본주의의 주된 현상 중 하나인 ‘식민지 문제’는 최소한 두 강령에서 해방되었다!

두 강령안은 저 상처 깊은 ‘식민지’라는 단어를 피해가려 전전긍긍한다. 그리하여 ‘제3세계’ ‘주변부’ ‘남반부’ 등 동음이의어로 보이는 모호한 말들이 총동원된다. 식민지라는 말은 맑스주의 과학에서 쓰이는 용어이다. 그것을 ‘제3세계’ 등으로 바꾸는 것은 마치 ‘제국주의’를 ‘선진국’으로 표현하는 것처럼 비맑스적이고 비과학적인 표현이 되는 것이다. 3인안은 아예 “2인안의 제국주의-(신)식민지 개념 설정에 동의하지 않는다.–쟁점요약”라고 말한다. ‘제국주의는 존재하는데 식민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밤은 있지만 낮은 존재하지 않는다’나 ‘착취자는 있으나 피착취자는 없다’처럼 비논리적인 인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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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인안의 한국사회규정의 핵심은 이제 “아류제국주의가 되었다”는 것이다.

1-2. 한국의 지배세력이 1997년 IMF 경제위기를 전후로 신자유주의를 적극 추진한 결과, 재벌을 중심으로 한 소수 독점자본의 힘이 강화되고 주요 산업과 금융부문에 대한 해외자본의 지배력이 강화되면서 국내외 독점자본의 지배력이 한층 강화된 반면, 대중빈곤은 강화되었다.

1-3. 한국자본주의는 고도성장의 결과 제국주의 자본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지배받지 않는 자본축적의 메카니즘을 형성하였으며, 중심(제국주의)-주변으로 편재된 세계자본주의의 사슬고리 안에서 주변부의 중상층 지위를 차지할 정도로까지 성장했다. 한국자본주의의 성장으로 한국자본주의는 미제국주의의 규정력을 받는 가운데 아류제국주의화하고 있다.

바로 앞뒤에 있는 두 단락이다. 자체로 모순이다. “1997년 IMF 경제위기를 전후로…주요 산업과 금융부문에 대한 해외자본의 지배력이 강화”되었는데 어떻게 “제국주의 자본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지배받지 않는 자본축적의 메카니즘을 형성”하여 “아류제국주의”가 되었을까? 혹시 3인안 동지는 ‘일방적으로’라는 말에 기대려 할지 모른다. ‘일방적으로’ 지배받지 않으면 피착취지역이 착취지역이 되는가? 자본가의 착취를 노동자 역시 ‘일방적으로’ 당하지는 않는다.

제국주의가 식민지를 경영할 전력의 심각한 손실(2차 대전 이후)이나 식민지 인민과의 투쟁 과정에서 패배(독립전쟁 이후의 미국, 이란/베네수엘라, 중국/북한/베트남/쿠바) 없이 식민지를 거저 놓아주는 법은 없다. 자신이 사냥해서 잡은 포획물을 포기하거나, 그 포획물을 사냥 파트너로 승격시켜주는 사냥꾼이 없는 것처럼.

제4인터안도 한국이 부분적으로 ‘제국주의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인정하지만, 3인안의 ‘아류제국주의론’과는 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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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초안에서 우리는 한국전쟁에 대한 5인안의 왜곡된 인식을 비판한 바 있다. 그 이후 초안에는 “계급사이 내전의 성격과 함께”라는 구절이 삽입되었다.

미국의 제국주의적 지배의 새로운 변방정책 무대인 남한과 스탈린주의적 조선노동당에 의해 시작된 ‘전쟁’을 지지한 소련의 결정은 결국 남북한 사이의 격렬한 내전을 벌이게 했다. 이 전쟁은 결과적으로 계급사이 내전의 성격과 함께, 세계 패권을 놓고 투쟁하는 강대국의 앞잡이 역할을 한 대리전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강령, 16쪽

하지만 이 계급 내전에서 어떤 편을 들어야 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5인안 쟁점요약

한국 자본주의는 (신)식민지 자본주의가 아니다.  1970년대 이래 이미 한국 자본주의는 자본축적의 자체 중심이 형성되었다. 삼성과 현대 같은 한국 국가에 기반을 둔 독점자본들이 지배하는 자본주의이다. 결코 미국을 비롯한 서방 제국주의 자본들이 지배하는 자본주의가 아니다.

<참고>

남한 17대 대선에 대한 IBT의 입장 (2007년 11월)

4인터안에 기초한 3인안과 5인안(초초안) 비판 (2011년 3월 12일)

4. 퇴보한 노동자국가 또는 기형적 노동자국가에 대한 인식과 태도

남한은 구소련, 중국, 북한 등 즉, 퇴보하거나 기형적인 노동자국가와 인접해 있는 나라이므로 이 문제에 대한 해명이 특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예를 들어 혁명 시기에, 중국과 북한이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가 남한 혁명의 사활에 결정적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동시에 남한혁명이 살아남아 사회주의 건설에 진입했을 때에도 이 문제에 대한 해명은 중요하다. 즉, 관료의 본질과 그에 대한 대응의 문제, 노동계급이 권력을 장악하고 사적소유철폐로 나아간 뒤의 사회의 경제체제와 정치체제에 대해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도 이 문제는 중요하다.

그리고 지금 아프리카와 중동 상황에서 보듯이, 남한은 중국이나 북한 사회의 변화에 크게 영향 받을 것인데, 앞으로의 중국이나 북한에서 일어날 격변에 제대로 대응하는 것 역시 남한혁명을 좌우하는 문제가 될 것이다. 즉, 장차 중국이나 북한에서 일어날 격변에 대해 중국과 북한 노동계급에게 어떠한 태도를 취하라고 말할 것인가, 그리고 남한 노동계급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

실천적인 형태로 이 문제를 요약하면, 미래의 그 상황에서 ‘중국판 또는 북한판 옐친 편을 들 것인가, 아니면 국유화, 무상의료 교육 주택 등 기존의 혁명성과를 방어하고 정치혁명으로 나아갈 것인가’의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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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인안 검토

지난 초초안토론 때에도 확인되었지만, 우리는 3인안의 다음과 같은 인식에 명확히 동의한다.

우리는 혁명의 성과부분까지 모조리 파괴하는 ‘체제 그 자체의 타도’를 주장하고, ‘그 어떤 비판적이고 조건부적인 변호와 방어’도 반대하는 입장(소련을 국가자본주의롤 규정하든 규정하지 않든)에 대해서는 비판적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해설, 8쪽


올바른 입장이다. 그러나 소련과 동유럽과 중국, 북한 등의 혁명의 성패를 평가하는 데에 있어서는 의견을 달리한다.

먼저, 3인안의 첫 문장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1-1. ‘전쟁과 혁명의 시대’였던 20c는 역사적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하고 전세계적으로 자본주의의 전일적 지배체제가 수립됨으로써 막을 내렸다.

이 문장은 탈자본주의 국가가 마치 소련만 있었다는 식이다. 이후 그러한 인식은 줄곧 이어지고, 중국이나 북한 사회에 대한 성격 규정은 애써 외면한다.

두 번째는 러시아혁명의 실패를 평가하는 부분이다.

2-3. 동시에 우리는 러시아혁명의 변질과 실패를 통해 소련으로 대표되는 역사적 사회주의를 발본적으로 평가한다.

(1) 스탈린이 권력을 장악한 1920년대 후반 이후 러시아혁명은 변질되었다. 노동자권력인 소비에트는 무력화되면서 프롤레타리아독재는 당독재로 변질되었다. 노동자계급이 생산의 주인이 되는 경제가 아닌 당-국가 관료의 명령경제 체제가 정착하였다. 노동자계급의 자치역량 강화에 따라 국가기구가 축소․소멸하는 방향이 아니라, 역으로 국가기구의 거대화와 관료층의 노동자계급으로부터의 자립화가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대중조직은 당과 대중을 연결하는 전달벨트로 되면서 자주성을 상실했다.

혁명 이후 여성해방을 위한 혁명적 조치에도 불구하고 아래로부터의 여성운동의 부재와 뿌리깊은 가부장제로, 성별분업구조가 유지되고 여성은 사회적 노동과 가사노동이라는 이중의 부담을 안게 되었다. 초기 공산당이 갖고 있었던 인간과 자연 간의 유기적 관계형성이라는 관점은 스탈린주의 반혁명 이후 유실되면서 생태파괴가 자행되었다. 공산당 내 분파활동 금지와 당내 민주주의의 결여로 혁명정당인 공산당은 관료화되고 보수화된 지배정당으로 변질되었다.

소련 등이 몰락한 붕괴 원인을 분석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리고 그 평가는 발본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3인안의 평가에는 붕괴 원인의 뿌리가 없다. 붕괴 원인에 대한 설명은 없고, 퇴보한 이후 소련의 결과적 현상에 대한 설명만 있다. 마치 결과적 현상이 원인인 것처럼 설명한다. 그리고는 ‘당과 국가주도노선의 실패’ ‘생산력주의’ ‘가부장제’ 등을 실패의 원인으로 언급한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런 대목이 3인안에 침투한 비과학적 비노동계급적 사상의 흔적 그리고 이론적 불철저함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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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회주의운동은 노동자계급의 자기해방으로, 아래로부터의 ‘노동자권력(대체권력)’의 창출과 유지를 위한 연속혁명 그 자체이다. 역사적 사회주의운동에서 나타난 ‘국가주의적 사회주의 건설전략’에 대한 비판적 평가에 근거해, 우리는 노동자계급의 국가권력 장악(대체)은 혁명의 출발점일 뿐임을, ‘노동자권력의 수립은 곧 국가의 소멸과정의 시작이어야 한다’는 점을 재확인한다.

마치 러시아의 실패가 권력 장악 이후 ‘국가의 소멸과정이 시작’되지 않아서라는 설명으로 보인다. 실제로 러시아혁명 이후 수립된 노동자국가는 소멸되기 시작하지 않았고 오히려 강화되었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붕괴의 원인이 아니다. 현실적 조건 속에서 소련 국가는 낮은 생산력으로 인한 부르주아적 분배와 선진자본주의 국가의 혁명의 불발로 인한 고립 그리고 계속 이어지는 제국주의적 반혁명 압박으로 인해 소멸될 수 없었다. 원인은 다른 데 있었다. 듣기에 그럴듯하나 무책임하고 관념적인 진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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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인안 검토

지난 초초안에서 지적되었던 부분들 중 많은 부분이 삭제되었다. 그리고 비판의 초점이던 ‘국가자본주의’라는 용어의 사용이 현격히 줄어들었다. 초초안에서 스무 번도 넘게 나오던 그 용어는 이제 달랑 2번만 나온다. 그러나 관점은 같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5인안은 이 문제만 만나면 일관성을 잃는다. 다음 두 문장은 5인안이 자본주의를 설명하는 내용이다.

(1-1) 자본주의는 시장을 위해 생산하는 경제인 상품경제를 기본으로 하는데, 소수 자본가계급이 생산수단을 독점해서 소유하고 있지만, 생산수단을 전혀 갖지 못한 노동자계급은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야 하는 임금노동을 특징으로 하는 사회체제이다.–강령, 2쪽

하자 없는 정의이다. 그러나 소련 등의 사회성격을 설명해야 하는 부분에 이르면, 그것은 “단순”하고 “경계해야 할 거친” 해석이 된다.

(1-2) 자본주의를 단순히 사유재산과 ‘시장의 무정부성’에 근거한 이윤추구체계로 보는 맑스주의에 대한 거친 해석은 경계하여야 한다. 자본주의의 핵심은 자본의 사회적 관계의 지배이다.–13쪽

이번엔 사회주의 혁명의 본질에 대한 설명이다.

(4-2) 사회주의 혁명의 본질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폐지하고 그것을 사회 전체의 공동 소유로 바꾸는 것이다.–5쪽

같은 이유로 “생산수단의 사적소유를 폐지하고…사회전체의 공동소유로 바꾸는” “사회주의 혁명의 본질”은 10쪽 뒤에 가서는 “단순”한 이해이며, 그것이 아니라 “생산수단의 사회화로 이해되어야”한다.

(2-2)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는 단순히 사적소유의 철폐, 생산수단의 국유화가 아닌 생산수단의 사회화로 이해되어야 하며, 생산수단의 사회화는 노동자평의회의 전 사회적 권력(정치, 경제, 무장력) 장악이 전제되어야 가능하다.–15쪽

앞에서는 사적소유의 폐지와 사회화(사회전체의 공동소유)가 대립하지 않지만, 뒤에서는 대립(“사적소유의 철폐, 생산수단의 국유화가 아닌 생산수단의 사회화”)하는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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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뿐만이 아니다.

사회주의는 생산 수단의 사적 소유와 양립할 수 없지만, 사적 소유의 부재(사회주의 경제의 창조를 위한 필요 불가결한 전제조건임에도)는 그것 자체로 사회주의와 동의어가 아니다.–14쪽

이처럼 “사적 소유의 부재”는 “사회주의 경제의 창조를 위한 필요 불가결한 전제조건”이 되다가도,

이 과정은 그 후 중국, 동유럽, 쿠바, 북한 등등에서 추진되었고, 이들 모든 국가들은 사회주의적인 요소는 말할 것도 없고 노동자계급적인 그 어떤 것도 찾아볼 수 없다.–14쪽

소련에서 일어났던 “이 과정”이 “추진되었”지만 그 “사회주의적인 요소는 말할 것도 없고 노동자계급적인 그 어떤 것도 찾아볼 수 없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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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노동계급독재에 대한 수정이다.

그렇다면 소련은 어떠한 사회였는가? 1917년 러시아에서 탄생한 사상 초유의 노동자국가는 1920년대 후반까지는 노동자권력 아래 국유화와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위한 시도들이 수행되었다. 하지만 스탈린주의 반혁명을 거친 이후 30년대부터는 사회주의 혁명과 이행의 주체인 노동자계급에게 더는 권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노동계급 권력에 대한 이런 식의 이해는 명백히 카우츠키의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스탈린주의 반혁명”이 “국유화와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위한 시도들”을 뒤집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노동계급의 독재와 노동자민주주의는 같은 것이 아니다.

사민주의자와 구별하기 위해 프롤레타리아독재라는 개념은 대단히 중요한 개념이다. 그러나 그 명기 여부보다 노동계급독재는 무엇이며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강령토론에서 쟁점이 되고 있는 퇴보한/기형적 노동자국가(‘현실 사회주의 국가’)의 성격과 태도와 관련으로 인해 더욱 그러하다.

“프롤레타리아는 국가권력을 잡고 나서는 먼저 생산수단을 국유화한다.”–엥겔스, 레닌 ‘국가와 혁명’에서

“현재 계급지배는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가? 지주와 자본가의 소유는 철폐되었다. 승리한 노동계급은 이 소유를 철폐하고 철저히 파괴시켰다. 바로 이 점에서 노동계급의 지배는 표현되고 있으며, 존재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소유문제가 우선이다. 현실에서 소유의 문제가 결정되면 계급지배는 확보된 것이다.”–레닌, 전집 제30권

“관료집단은 10월 혁명을 통해 노동계급이 달성한 사회적 성과를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지키기 위해 노동계급을 정치적으로 몰수했다. 사회의 성격은 사회의 경제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따라서 10월 혁명이 수립한 집단적 소유형태가 타도되지 않는 한 노동계급은 소련의 지배계급이다.”–트로츠키, 소련의 계급적 성격

“현재 국가와 자본가의 관료집단은 하나의 체제로 통합되었다.…이 체제는 지금까지 러시아가 겪었던 모든 형태의 전제 가운데 가장 억압적이다.…노동계급 독재의 핵심 특징은 노동 대중에 의한 정부의 민주적 통제이다.”–카우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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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인안의 인식은 북한 문제에서 절정에 이른다.

마지막으로 어떤 노동자혁명도, 노동자투쟁도 존재하지 않았던 북한 같은 최악의 착취체제에 대해서는 노동자혁명에 의해 타도되어야 할 체제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북한을 모종의 노동자국가나 사회주의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사회주의 선전선동과 노동자혁명 전략을 완전히 뒤죽박죽으로 만들어버릴 것이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사회주의가 북한 체제 같은 것이라고 노동자 대중들에게 제시한다면 이는 사회주의에 대한 거짓 선전을 하는 것이 된다. 이들 체제를 ‘가짜 사회주의’, ‘가짜 노동자국가’임을 분명히 하고, 노동자혁명에 의해 타도되어야 할 체제라는 실천적 결론을 명확히 하는 것은 절대로 회피해선 안 된다. ‘노동자계급의 해방은 노동자계급 자신의 과업’이라는 마르크스주의의 기본 정신을 되새겨야 한다.

먼저, 5인안 동지들이 애용하는 논리가 중국, 북한 등에서는 “노동자혁명도, 노동자투쟁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러한 나라들을 “모종의 노동자국가”라고 하는 것은 5인안에게 “‘노동자계급의 해방은 노동자계급 자신의 과업’이라는 마르크스주의의 기본 정신”을 파기하는 것이다. 이 동지들의 논리는 이런 식이다: ‘불은 반드시 나무막대기를 다른 나무에 비빈 후 가랑잎에 옮겨 붙여야만 한다.’ 의문이 든다. 꼭 그 과정을 다 밟아야 하나? 원시인들이 불을 처음 만들 때야 그렇게 해야 했겠지만, 이미 그 과정을 밟아서 불이 붙었을 때라면, 옆집은 그저 그 불을 자기 막대기에 옮기면 되는 것 아닌가? 그런 식의 불은 ‘신성한 불의 정신’을 모독하는 것이 되는가?

그런 점에서, 모든 나라는 먼저 해방된 다른 나라의 도움 없이, 반드시 표준화된(?) 혁명의 과정을 고스란히 거쳐야만 해방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5인안은 “마르크스주의 기본정신”의 강조가 아니라, ‘희화화’일 뿐이며 그 희화화는 스탈린의 일국적 사고와 맞닿아 있다.

혁명을 수출한다는 생각은 넌센스에 불과합니다. 혁명을 원하는 나라는 혁명을 성취하면 됩니다. 이 나라에 혁명이 발생하지 않으면 혁명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는 혁명을 원했고 혁명을 성취했습니다.–스탈린, <배반당한 혁명>에서 재인용

둘째, 누구도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사회주의가 북한 체제 같은 것이라고 노동자 대중들에게 제시”하지 않고 있다. 지난 초초안 때에도 지적했지만, 허수아비 공격일 뿐이다.

셋째, 아마도 5인안 동지들은 “북한 같은 최악의 착취 체제”를 두고 ‘북한은 노동자국가이다. 그러므로 제국주의의 자본주의 반혁명에 맞서 방어하자.’라고 주장했을 때, 대중들로부터 고립되어 우리의 “선전선동이…완전히 뒤죽박죽”이 될 것(즉 선전빨이 먹히지 않고 고립될 것)을 우려하는 것일 게다.

물론 그 우려는 개연성이 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역사와 세계자본주의 체제라는 횡적 종적 관점을 버리고, 단지 지금의 북한만을 보라고 자본주의 언론은 주문하고 다른 한편 국가보안법으로 으르대며 대다수 노동계급은 그러한 선전과 위협의 포로가 되어 있다. 그런 대중 앞에서 ‘북한에 방어할 성과가 있다.’고 주장한다면, 당장은 고립을 면치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회주의 혁명가인 우리가 대중의 그런 인식을 추종하거나 그것에 영합할 수는 없다. “현실을 직시하고, 최소 저항선을 찾지 않으며, 사물의 이름을 올바르게 부르며, 아무리 쓰디쓴 진실도 대중에게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이 ‘이행강령’의 정신이다.

<참고>

 -소부르주아 사회주의와 ‘국가와 혁명’

-소련 중국 북한 등 노동자국가의 사회성격 논쟁

소련의 계급적 성격(1933)

노동자국가, 테르미도르 그리고 보나파르티즘(1935)

배반당한 혁명(1936)

맑시즘을 옹호하며(1940)

중국은 어디로? : 정치혁명과 반혁명의 갈림길 (NO31, 2009)

붕괴의 벼랑으로 향하는 중국 (NO 26, 2004)

러시아: 자본주의 생지옥 (NO 24, 2002)

날조를 일삼는 스탈린 일당 재판(再版) (iSt)

5. 제국주의와 그로 인한 갈등에 대한 인식과 태도

이 문제는 남한과 미 제국주의의 관계에 대한 태도와 더불어,

제국주의-제국주의: 미국과 영국, 프랑스, 일본, 독일 등

제국주의-식민지국가: 최근의 중동 사태나 과거 이라크 전쟁 지금의 이란 베네수엘라와 미국의 갈등 문제 등

제국주의-노동자국가: 중국 북한 쿠바 베트남 등과 미국 등

의 갈등 문제에 대한 세계와 남한 노동계급의 입장과 대응 방식이 결정되는 문제이다.

제국주의는 독점화를 통해 국가권력을 장악한 금융자본이, 초과이윤을 수취하기 위해, 식민지를 경제 정치적으로, 다른 제국주의 경쟁자에 대해 배타적으로 독점하는 체제이다. 그리고 지금 전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다양한 갈등 등은 대부분 바로 이와 같은 제국주의 체제로 인한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의 해명은 중요하다.

각각의 갈등에 대한 입장은 제4인터안에 설명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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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제와 관련하여 ‘3. 한국사회의 성격’에서도 다루었지만, 제국주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인식부터 확인할 필요가 있다.

3인안은 “‘제국주의-(신)식민지’라는 개념 설정”에 동의하지 않고, 5인안은 다음처럼 말한다.

한국을 비롯하여 브라질, 인도 같은 나라들이 모두 신식민지라고 주장하는 2인안은 구 식민지 나라들 가운데서 전후 70, 80, 90년대 기간에 ‘신흥공업국’으로, 자본 수출국으로 발돋움한 나라들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다. 그래서 제국주의 국가가 아니면 모두 (신)식민지라는 것이다. 과거 종속이론, 또는 PD의 ‘신식국독자‘론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쟁점요약

브라질이나 인도나 한국처럼 ‘크고 인구도 많고 경제비중도 높고 국방비도 많이 쓰는’ 나라들을 신식민지라고 주장하니 어처구니없다는 투이다. 이 동지들은 모두 질이 아니라 양으로 제국주의와 (신)식민지를 구별하려 한다. 그 나라들이 “70, 80, 90년대 기간에 ‘신흥공업국’”으로 된 것은 틀림없겠고, 지금 자본을 일부 수출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으로 식민지에서 벗어났다라고 말하는 것은 인상주의적이고 개량주의적 인식이다. 마치 ‘노르웨이 노동자는 남한이나 중국 노동자에 비해서 열 배에서 수십 배 부유하므로 노동자가 아니다’라는 식이거나, 임금이 오르고 근무조건이 개선되어 집도 사고 자가용도 사면 노동자가 해방된다는 식의 인식인 것이다. 아무리 임금이 오르고 근무조건이 개선되어도 자본가의 이윤을 위해 노동력을 파는 처지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노동자이다.

문제는 초과이윤의 이동방향이며, 그 국가가 어떤 자본의 규정력을 받고 있는가이다. 먼저, 과연 한국이나, 브라질, 인도 등의 나라에서 자본의 구성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그리고 그 나라 노동자의 노동으로 생산된 잉여가치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즉, 그 가치보다 많은 가치가 (다른 나라로부터 들어와) 형성되는지, 아니면 다른 나라로 빠져나가는지를 따져보아야 하는 것이다. 둘째로 그 국가가 제국주의 금융자본으로부터 얼마나 자율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따져보아야 한다. 덩치가 작다고 식민지이고 크다고 제국주의가 되는 것이 아니다.

다음은 이 문제에 대한 선배혁명가들의 힌트이다.

작은 나라들뿐만 아니라, 심지어 러시아도 ‘부유한’ 부르주아 나라들의 제국주의 금융자본의 힘에 경제적으로 완전히 의존되어 있다. 발칸의 작은 나라들뿐만 아니라, 심지어 19세기 미국도 경제적으로 유럽의 식민지였다고 맑스가 자본론에서 지적했다.–레닌, 민족자결권

오랜 옛날부터 무역의 주도권은 외국 상업자본에게 있었다. 이 결과 러시아는 일종의 반(半)식민지가 되었고 러시아 무역인들은 서방 도시와 러시아 농촌 사이에 다리를 놓은 중개인에 불과했다. 이런 종류의 경제 관계는 자본주의 시대에 들어와 더욱 발전하여 제국주의 전쟁에서 그 특징을 가장 뚜렷하게 드러내었다.–러시아 혁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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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인안이 언급하는 “과거 종속이론”과 “PD의 신식국독자론”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들처럼 식민지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제국주의 금융자본을 매개로 세계적 차원의 착취-피착취 관계를 인식하는 것은 4인터안만이 아니라, 맑스, 레닌, 트로츠키도 마찬가지이다. 과학적 용어이며 인식이기 때문이다.

이 제국주의 개념이 불분명해지면, 제국주의가 동인이 되는 전쟁에 대해 기회주의적인 입장에 빠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 문제는 뒤에서 살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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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인안 검토

이 문제에 대해 3인안은 정식화한 설명을 내놓지 못한다. 한반도와 동북아를 중심으로 해서 왜 긴장관계가 형성되는지, 우리는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미 제국주의의 패권정책은 단지 정책인지? 이 지역에서 미 제국주의는 어떤 이해와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 어떻게 저지할 수 있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4인터안은 초초안 토론에서 3인안의 전쟁에 대한 ‘평화주의’적 태도를 비판한 바 있다. 여전히 ‘군축 투쟁’, ‘체제경쟁적 법조항 철폐 투쟁’, ‘평화협정투쟁’, ‘북한의 방어용 핵무기 반대’ 등을 3인안은 고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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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인안 검토

5인안의 초초안은 전쟁에 대해 레닌주의적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제국주의 나라들에서 노동자들은 단호히 자국 패전주의 입장을 취해야 한다. 미 제국주의와의 군사동맹 속에서 이라크와 아프간에 파병하여 침략 전쟁에 가담하고 있는 한국에서도 노동자들은 파병 반대 및 군대 철수 요구와 함께 한국 군대의 패전을 위해 투쟁해야 한다. …

북한이나 이란 같은 나라들에 대해 미 제국주의가 벌이고 있는 대결정책 및 전쟁위협 책동에 대해 노동자들은 이 제국주의의 적을 방어해야 한다. 이 나라들의 정권이 아무리 억압적인 정권이라 하더라도, 그리고 미 제국주의와의 대결에서 동원되고 있는 군사적 수단이 무엇이건 간에(핵무기든 생화학무기든 재래식 무기든) 노동자들은 제국주의 전쟁위협과 공격에 반대하여 북한과 이란을 방어하는 입장에 서야 한다. 우리가 방어하는 것은 이들 정권이 아니라 제국주의에 대한 이들 나라 인민들의 투쟁이다. 제국주의 전쟁위협을 분쇄하는 것은 북한과 이란에서 계급투쟁의 자유로운 발전을 촉진할 것이다.

초초안에서 5인안은 레닌주의의 혁명적 기개를 지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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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초안으로 오자 그 기개는 자취를 감추었다. 빈자리는 노동자주의와 평화주의가 차지했다.

자본주의 경제위기는 항상 전쟁 위협을 가져온다. 국가 간에 경쟁이 격화된다.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의 시선을 계급투쟁으로부터 떼어내 외부의 적에게로 돌려놓으려고 혈안이 된다.

군사주의와 빈번한 전쟁은 제국주의 시대 자본주의의 대표적 특징이다. 거의 대부분의 전쟁은 제국주의가 개입된 전쟁이며 그것은 초과이윤을 목표로 한 경쟁과 침략 때문에 발생한다. 계급투쟁은 공장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전쟁은 가장 격렬한 계급투쟁의 표현이다. 전쟁이 “노동자들의 시선을 계급투쟁으로부터 떼어내 외부의 적에게로 돌려놓으려” 발생한다고 이해하는 것은 노동계급은 ‘임금과 고용’만이 관심사라고 생각하는 노동자주의적 인식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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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초안에서는 ‘제국주의 세력의 패배’와 ‘저항세력의 승리’ 입장이 명확했다. 그런데 초안에는 전쟁의 원인에 대한 분석에서 나오는 혁명적 입장이 아니라, 전쟁의 현상적 공포에 질린 ‘평화주의’적 구호로 가득하다.

△제국주의 전쟁 ․ 침략 반대 △아프간, 이라크 점령 반대 △이란과 북한에 대한 미국의 도발 저지 △제국주의 군사개입 반대

거의 똑같은 내용의 반복이고, ‘나는 전쟁이 싫어요.’ 류의 구호들이다.

<참고>

떨쳐 일어선 이집트 민중: 혁명지도부의 위기

결말을 향해가는 이라크(NO29, 2007)

제국주의의 피비린내 나는 자취 (NO 24, 2002)

베네수엘라: 국가와 혁명(NO28, 2006)

6. 사회주의와 부문주의: 여성/환경/평화

1. 여성

자본주의적 핵가족은 여성억압 그리고 성소수자 억압의 근원이다.

노동력을 재생산하기 위한 가장 값싼 수단이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핵가족을 옹호한다. 현존하는 노동력의 보존과 미래 노동력의 재생산은 자본주의 유지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이다. 자본주의는 가사와 육아로 대표되는 노동력 재생산을 여성(노동계급의)이 해야 하는 일이라고 이데올로기와 사회체제를 통해 강요한다. 한편 성소수자는 그러한 핵가족 테두리 밖에 있기 때문에 억압당한다. 게다가 여성에 대한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그들의 노동력을 관리하기에도 편리하다. 즉, 호황기에 여성 노동력을 싸게 끌어다 이용하고, 불황기에는 바로 그 편견을 이용하여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처분할 수 있다. 바로 이런 이유로 남성우월주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옹호되고 재생산되어왔다.

진정한 사회주의자는 여성해방론자이며, 진정한 여성해방론자는 사회주의자이다.

노동자당은 모든 여성억압에 맞서 싸운다. 그 싸움은 가사와 육아의 사회화를 필연적으로 요구한다. 이렇게 사회복지가 실현되고 여성과 남성이 각각 경제적으로 자립할 때, 억압의 뿌리가 제거되고 매춘, 폭력, 고통스런 결혼의 지속 등 남녀차별과 억압현상이 급속히 사라져갈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러시아혁명이 보여준 것처럼, 노동계급이 권력을 장악할 때 최대로 실현될 것이다. 여성해방은 사회주의의 지향점 중 하나이고, 사회주의는 진정한 여성해방의 전제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사회주의자는 노동계급 여성해방운동의 첫째가는 투사가 된다.

이처럼 여성억압의 근원은 가사와 육아로 대표되는 노동력재생산을 여성(하층여성에게/ 상층여성은 우리가 알다시피 재생산노동을 돈으로 구매한다)에게 강요하는 핵가족이다. 그리고 그 핵가족의 원인은 자본주의 그 자체이다. 따라서 자본주의를 철폐하여 가사노동을 사회화하고 사회보장을 수립을 통해 여성의 경제적 자립을 확보하는 것이 여성해방의 근간이 된다. 남성우월주의로 인한 가정, 직장, 조직 등에 있는 남녀차별적 관행에 맞선 투쟁이 자본주의 철폐와 상관없이 병행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남녀분리주의 강령

그런데 3인안은 여성억압의 원인이 자본주의 핵가족과 핵가족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인류 대부분의 역사에서”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나아가 “노동자국가 수립과 자본주의 사적 소유 철폐”로도 남아 있을(!) “가부장제”라고 말한다(불멸의 불가사리 ‘가부장제’ 앞에 경배할진저!). 그리하여 3인안의 여성 문제와 관련된 “당면요구”에는 ‘가사노동의 사회화와 사회보장을 통한 여성의 경제적 자립에 대한 요구’들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계급해방과 재생산노동의 사회화만으로는 여성해방은 이뤄질 수 없다.”라며 3인안의 초점은 그것이 아니라고 거듭 강조한다. 그러면서 ‘폭력’이나 ‘성매매범죄자화로부터의 보호’ 그리고 ‘자기결정권’과 관련지어 ‘여성의 권리만’ 옹호하는 것을 통해, 실질적으로 “남성과 여성에 대한 이중적 규범(기준)을 강화”하는 남녀분리주의 강령이 되고 있다.

‘가사노동의 사회화와 사회보장의 광범한 실행’을 핵심과제로 내걸지 않는 강령, ‘이중적 규범에 근거한 분리주의 강령’은 노동계급과 하층여성들 그리고 같은 계층의 남성의 지지를 끌어낼 수 없으며, 그 둘의 단결도 이루어낼 수는 더욱 없다.

용어의 과학적/민주적 사용의 중요성

초초안이 제출된 이후 4인터안은 줄곧 3인안이 중요하다고 얘기하는 “가부장제”, “몸에 대한 자기결정권”, “성폭력” 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설명해 달라고 요청해 왔다. 하지만 강령이 제출된 지 7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이 문제에 대한 답변이 없다. 그리고 새롭게 듣게 된 “성인지적 관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설명도 추가로 요구한다. 무식하다고 너무 꾸짖지는 말고. (이 동지들은 말을 너무 어렵고 고상하게 하려고 한다.)

말은 과학적으로 그리고 민주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용어는 현실의 정확한 반영이어야 하며, 누구나 알아듣기 쉬워야 한다. 현실과 무관한 용어나 누구에게나 알 수 있도록 분명하게 정의되지 않는 용어를 사용하고 그것을 사용하도록 강제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렇게 되면 그 용어를 주도적으로 사용하는 집단이 그렇지 않은 집단에 대해 부당한 우위를 점하게 되며 부당한 권력을 행사하는 기반이 된다. 그 용어와 관련된 문제가 발생할 때, 모든 성원이 ‘같은 권위를 가지고, 민주적으로’ 그 문제를 평가하지 못하게 된다. 특정 상황에서, 그 용어에 대해 권위가 있다고 ‘여겨지는’ 몇몇의 ‘유권해석’이 그 용어의 뜻을 결정하게 된다. 여성문제와 관련해서는, 여성문제에 조예가 깊다고 정황적으로 인정받는 몇몇의 소위 ‘여성주의자’ 동지들이 부당한 권위를 가지게 될 것이다. 알 듯 모를 듯한 그 용어와 관련된 사안에 대해서, 그 동지들은 유일무이의 해석권을 지닌 사제(司祭)가 될 것이다. 4인터안은 그런 조직 그런 강령에 반대한다.

2. 환경

환경문제에 대한 4인터안의 핵심은 이러하다.

인간의 필요가 아니라, 자본의 이윤을 지상의 가치로 하는 자본주의 체제가 환경 파괴의 주범이다. 환경파괴의 가장 심각한 피해자라는 점에서 그리고 환경파괴의 원인이 다름 아닌 자본주의 그 자체라는 점에서 노동계급이 환경파괴를 종식시키는 일에서 또한 최선두에 선다. 자본주의 자체를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먼 미래의 일이므로,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선한 것’들을 실천해야 한다는 생태주의와 전혀 다른 관점으로 문제를 바라본다. 첫째, 이윤을 지상의 가치로 하는 자본주의를 철폐하는 것이 환경파괴를 저지하고 인류 전체의 복지를 위한 결정적인 첫걸음이다. 이것을 배제한 생활환경운동은 가망 없는 위선일 뿐이다. 둘째, 우리가 건설할 사회주의는 가장 발전한 자본주의적 생산력 위에 기초한 사회이다. 셋째, 사회주의는 발전된 과학기술에 기초해야 하며, 끊임없이 과학기술의 발전을 추구할 것이다.

“생태문제 역시 계급모순으로 환원할 수 없다!”

그런데 이 문제에 있어서 3인안은 여성문제, 핵과 평화문제에서와 마찬가지로 혁명허무주의 전도사가 된다. 해설서를 보면 처음엔 “생태재앙을 막기 위해서는 자본주의를 철폐해야 한다.”라고 운을 뗀다. 그러나 그 뜻을 음미하기도 전에 바로 다음 단락에서 “그러나 생태재앙은 자본주의 철폐 그 자체만으로는, 또는 생태재앙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은 기업이나 산업(예; 핵발전소)에 대한 노동자통제만으로는 극복될 수 없다.” 그리고 다음 단락에서 “생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철폐뿐만 아니라, 인간과 자연간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재설정해야 한다.” 그리고 또 바로 다음 단락에서 “생태문제 해결은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투쟁만으로는 온전히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등 거의 같은 내용을 계속 반복한다.

똑똑히 알아들으라고 못을 콱콱 박는다. 자본주의 철폐 투쟁과 ‘생태’문제는 별개라고! ‘생태’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있어 사회주의는 얼마나 무력한가!

환경문제의 근본원인이 자본주의이고 자본주의 철폐가 해결의 핵심적 첫걸음이라고 생각하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훈계한다. 그것이 아니라고.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나 환경파괴엔 매일반’이라고. 그리하여 중요한 것은 “생태사회 건설”이고 “생태주의적 전환”이라고! 우리는 끝없는 깊이를 지니고 있을 저 몽롱한 어휘들 앞에서 또 다시 납작 엎드려야 한다.

그리고는 총괄한다. “여성문제와 마찬가지로 생태문제 역시 노동자권력 수립 이후의 과제로 설정하는 한, 이는 당장의 생태재앙을 막는 투쟁을 먼 미래의 일로 미루는 것이 된다.”고. ‘여성문제와 마찬가지로! 생태문제 역시! 노동자권력 수립 이후의 과제로 설정하는 것은 당장의 생태재앙을 막는 투쟁을 먼 미래의 일로 미루는 것이 된다!’는 것이 3인안이 우리에게 정신이 번쩍 들게 전하는 메시지이다.

노동자권력과 여성/환경 문제의 관계

과연 그러한가? 자본주의 체재 내에서 여성문제나 ‘생태’문제의 고통과 재앙을 막을 수 있는가? 여성문제나 ‘생태’ 문제에는 노동자권력이나 자본가권력이나 비슷비슷한 것인가?

4인터안은 대답한다: ‘결코 그렇지 않다. 자본주의는 그러한 고통과 재앙의 근원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를 철폐해내지 못한다면, 노동자권력을 수립하지 못한다면 고통과 재앙은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노동자권력을 수립할 때, 그 고통과 재앙은 결정적으로 해결된다.’

물론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도, 그 통증(병인이 아니라)을 부분적으로 경감시킬 수는 있을 것이다. 동의한다. 미약하긴 하지만 그 통증을 경감시키려는 노력도 중요하다.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우리는 기꺼이 그 노력을 기울일 용의가 있다. 가정과 직장 그리고 조직 내의 모든 남녀차별 관행에 맞서 투쟁한다. 그리고 에너지 절약이나 환경보존을 위한 노력을 기울인다. 가치 있는 일들이라고 동의하고 그 투쟁을 결의한다. 사회주의자로서 너무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동시에 사회주의자로서 우리는, 환자에게 ‘잠깐의 통증 치료는 궁극적 대안이 아니며, 수술이 필요하다’라고 말해야 한다. ‘노동자권력을 수립하지 못한 상태로도, 사회 전체의 변화가 아니라 개인적인 변화로도 그 재앙을 막을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사기이며, 환상을 불어넣는다는 점에서 범죄이다. 민노당이나 진보신당이 부르주아 부관이 되어 하는 역할이 정확히 바로 그런 것이다.

‘시민운동’의 탄생배경

3인안은 자신들이 대변하고자 하는 또는 감싸 안고자 하는 운동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계급모순으로 환원되지 않는 다양한 모순에 맞선 이른바 사회운동(환경, 여성, 장애운동 등)이 1987년 이후 한국사회에도 등장하였다. 이 운동들의 많은 부분은 계급운동과 거리를 두거나 자본과 권력의 영향력 아래 포섭되고 제도화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자본과 국가권력의 탄압과 억압성이 강화되면서 이 운동주체들은 투쟁에 적극 나서기도 하며, 그 내에 급진적․변혁적인 흐름이 형성되어가고 있기도 하다.

이에 우리는 현 자본주의 모순의 반영인 다양한 사회적 모순에 맞선 운동들과 연대하고, 변혁적 사회운동을 형성․강화하기 위해 활동한다. 나아가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의 연대를 강화하고, 노동운동이 사회영역에서 발생하는 억압과 차별에 맞서 투쟁해 나갈 수 있도록 활동해 나간다.–15쪽

그런 운동들의 실제적 탄생 배경은 소련 붕괴 이후이다. 소련의 붕괴로 이른바 ‘운동권’의 사기는 곤두박질쳤다. 넓은 의미에서 자신들 스스로 ‘사회주의자’라고 생각해왔던 ‘운동권’은 소련의 붕괴로 소스라치게 놀라고 사기가 급격히 저하되었다. 광의의 사회주의로 묶일 수 있었던 운동권은 해체되었다. 사회주의로 묶을 수 있는 범주는 오그라들었다. 시대착오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극소수만 진영에 남았다. 많은 구‘운동권’은 부르주아 진영으로 투항하거나 운동에서 멀어진 일상인이 되었다. 나머지는 소련의 붕괴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타격에도 불구하고 의미 있는, 달리 말해 사회주의적 전망을 가지지 않고도 운동을 할 수 있는 노동자주의운동이나 부문운동 등으로 편입되었다. 노동자주의(조합주의) 운동이 대세가 되기 시작했다. ‘민중운동단체’라 불리던 것이 ‘시민운동단체’라 불리기 시작했다. 체제내적 운동으로 되었다.

부문운동과 소부르주아

이 시민운동의 계급적 자양분은 소부르주아이다. 부르주아는 운동이 필요 없다. 삶에 만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모순이 심화되어 감에 따라 극소수가 부르주아 사회로 편입되고 대다수는 프롤레타리아트로 전락하는 소부르주아는,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트의 경계에 존재한다. 그리고 양쪽에서 오는 정치적 압력을 모두 받으며 동요한다. 그때그때의 역관계에 따라 때로는 부르주아에 이끌리고 때로는 프롤레타리아트에 이끌리면서, 양쪽 모두에 의존하며 동시에 양쪽 모두를 의심하고 경계한다.

그들 역시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심각하게 겪고 있다. 소외 과잉경쟁 비인간화 불평등 환경오염 등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과 더불어 사회경제적으로 끊임없이 추락한다. 이 추락의 위기의식은 많은 소부르주아를 자본주의에 대해 혐오하게 하고 반자본주의 운동으로 나아가게 한다. 그 중 일부가 정치적으로 더욱 급진화하며 사회주의 혁명운동에 편입된다. 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신이 누리는 알량한 특권에 대한 애착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새 사회에서도 자신이 지금 누리고 있는 지위를 온전히 누릴 수 있기를 소망한다. 구 사회를 철폐하고 새 사회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할 수밖에 없는 우여곡절들 즉, 충돌, 피해, 희생 등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새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지불해야 할 대가와 지금의 사회로부터 받는 고통을 저울질하기 시작한다. 대가가 지금의 고통보다 더 크다면 차라리 지금의 사회를 감내하고 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나 매일반이 된다. 이 지점에서부터 정치적으로 후퇴하기 시작한다.

“많은 부분은 계급운동과 거리를 두거나 자본과 권력의 영향력 아래 포섭되고 제도화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자본과 국가권력의 탄압과 억압성이 강화되면서 이 운동주체들은 투쟁에 적극 나서기도 하며, 그 내에 급진적․변혁적인 흐름이 형성되어가고 있기도 하다.”라는 3인안의 설명은 바로 이러한 소부르주아 정치역학과 일치하는 묘사이다.

소부르주아의 혁명적 중요성과 노동계급의 대응

소부르주아에 대해 노동계급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계급운동과 거리를 두거나 자본과 권력의 영향력 아래 포섭되고 제도화”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우리의 자리를 버리고 그들 쪽으로 달려갈 것인가, 아니면 현실에 대한 과학적 이해와 사회주의를 향한 분명하고 단호한 신념을 보여주는 것을 통해 혁명의 우군으로 견인해 낼 것인가? 체제 안에 안주하려는 소부르주아의 반동성에 의존할 것인가, 아니면 자본주의 압착기 속에서 급진화하는 소부르주아의 혁명성에 의존할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 선배혁명가 트로츠키는 과학적인 분석과 현명한 대처법을 일러준 바 있다.

소부르주아 계급이 자신의 운명에 따라 파멸하도록 노동계급이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절대로 안 된다. …이것은 성공의 필요조건이다. …이 계급의 최상층은 대부르주아 계급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 최하층은 노동계급과 일치하고 심지어는 룸펜노동자의 지위와 맞닿는다. 따라서 소부르주아 계급은 독자적 정책을 가질 수 없다. 항상 대자본가 계급과 노동계급 사이에서 동요할 뿐이다. 최상층은 이 계급을 우로 밀치고 최하층의 억압받고 착취 받는 층은 특정 상황에서 좌로 급선회할 수 있다. …사람들의 속성을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의회 백치병 환자들이 있다. 이들은 이렇게 반복해서 외치는 것을 좋아한다: “혁명으로 중간 계급을 무섭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이들은 극단적인 것들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이들에게는 자신감을 불어 넣어줄 “지도자”가 필요하다. 이 개인적 또는 집단적 지도력은 개인이 되었든 정당이 되었든 대부르주아나 노동계급 중 하나만이 제시할 수 있다. …소부르주아 계급을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 노동계급은 이들의 신뢰를 얻어야 한다. 그리고 이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자신의 힘에 대한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명확한 행동 강령을 가지고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권력 장악을 위한 투쟁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이러한 신뢰감을 불어 넣기 위해서는 모든 애매모호함, 우유부단함, 공허한 미사여구 등을 공동전선에서 전부 몰아내야 한다. 상황을 이해하고 진지하게 혁명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 필요할 뿐이다.–프랑스 인민전선 비판

혁명적 상황을, 명확한 혁명적 이해를 가지지 못하고 우유부단한 지도부가 맞았던 경우 혁명이 유실되었다. 프랑스, 스페인, 칠레 등등이 그러했다. 우리의 강령은 심화되어 가는 자본주의 모순 속에서 초조해하는 중간계급 쪽으로 다가가 노동계급의 야성을 잃어버리고 순화되는 강령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 강령은 노동계급의 지지를 받을 수 없고, 결정적 순간에는 바로 그 중간계급으로부터도 버림받게 될 것이다. 소부르주아 세계관의 특징은 불명확함과 체제 내에 안주하려는 경향이다. 존재의 반영이다. 다종다기하여 자기정체성을 지니고 있지 않은 소부르주아의 현재적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강령을 순화(‘극단적으로’ 보이지 않게 하려)하면 개량주의 강령이 될 것이다. 그 우유부단한 강령은 결정적인 순간 중간계급으로부터도 패대기쳐질 것이다.

부르주아와 노동계급 사이에서 동요하는 중간계급은 격변의 시기 국면을 결정짓는 위치에 서게 된다. 이들의 지지를 우리 쪽으로 끌어오는 것은 성공의 필수조건이다. 그러나 그것은 “애매모호함, 우유부단함, 공허한 미사여구”가 아니라, “명확한 행동강령”을 제시하고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권력을 장악”하겠다는 혁명에 대한 단호한 투쟁자세를 보여줄 때에만 가능하다.

****

<참고>

맑스주의, 페미니즘, 여성 해방 (NO 19, 1997)

반동적인 낙태반대 운동을 분쇄하자!: 사회주의 혁명을 통한 여성해방을!(7호, 1990년 겨울)

-페미니즘과 소위 ‘성폭력론’ 논쟁

-노동계급의 여성해방운동을 위하여!

-성매매방지법과 노동계급

-매춘방지를 위한 제5차 국제회의(레닌)

※ <참고>와 링크된 문서는 ‘4인터안’이 지지하고 참고한 문서들이다. 이미 제출한 <제4인터내셔널 남한사회주의노동자당(제4인터안)>과 이 문서에서 다 설명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 보충자료로 안내하는 <참고> 자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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