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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정국과 <사노련>의 조합주의적 기회주의

 

<차례>

 

<사노련>에 녹아 있는 것

촛불 시위

촛불 정국과 <사노련>

<사노련>이 말하는 ‘현장’과 ‘노동자’

정세 일탈

조합주의

국가공기업의 성격

공기업 사유화 계획

사유화에 대한 <사노련>의 재정의

정치, 총, 파업

총파업의 구호들

통합민주당에 대한 면죄부

어지럼증을 느끼는 <가자! 노동해방> 8호

민주주의적 과제

노동자 정당

결론

*촛불 시위에 즈음한 노동자의 행동강령 (제안)*

 

<사노련>에 녹아 있는 것

<사회주의노동자연합(이하 <사노련>)>은 ‘<우리의 입장> 해설 1부’에서 <사노련>이 “여성, 장애인, 환경 등의 문제에 무관심하다”는 항간의 비판에 대해, 그것은 ‘연구와 검토의 부족과 실천 경험도 상대적으로 취약한’ 탓으로, 앞으로의 ‘연구와 실천을 통해 보완되어야 할 것’이라고 자인한다.

하지만, 몇 단락의 일반론적인 설명이 덧붙은 이후엔, 이내 ‘보완을 깨닫게 한 그 비판’들은 ‘착각’이라고 규정된다. 그러면서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지점에서’ 언급하지 않은 여러 ‘문제들에 대한 입장은 녹아 있다.’고 주장한다. (이하 모든 강조는 글쓴이)

“결국 이 점을 강조하고 싶다. 흔히들 많은 비판자들이 착각하는 것은 <우리의 입장>에 ‘장애인, 여성 문제’가 거의 담겨 있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부족하기는 하지만,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지점에서 그 문제들에 대한 입장은 <우리의 입장>에 녹아 있다 .”–최영익, ‘<우리의 입장> 해설 1부’, <사회주의자> 1호

기존에 활동해 오던 노동운동가들과 단체들이 결집하여 결성되긴 했지만, 출범한지는 몇 개월 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불비하고 있는 것을 지적하는 것은 의미 있겠지만, 이러저러한 쟁점에 대한 정치적 입장을 ‘완비’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사노련>의 충심을 깎아내리는 것은 결벽적인 비판일 것이다.

문제는, 그 이러저러한 정치적 지점들을 직접 얘기하지 않아도 능히 짐작하게 해 줄 ‘그 녹아 있는 것이 무엇인가’이다. <사노련>은 ‘ 녹아있는 그것은 혁명적 사회주의이다!’라고 말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최근 촛불 정국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그러한 주장을 믿기 어렵게 만든다. <사노련>이 노동자에 대한 충성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해할 수는 있지만, 그 ‘녹아있는 것’이 혁명적 사회주의로 보이지는 않는다.

 

촛불 시위

촛불시위의 성격을 다시 한 번 짚어보자.

‘쇠고기 협상 무효! 이명박 퇴진!’을 외치며 참여하고 있는 시위 군중들은 학생, 미조직 노동자, 개별적으로 참가한 조직 노동자, 영세상인, 농민, 실업자들이다. 그들은 모두 사회의 약자들이며, 지금 체제에서 고통 받고 있는 계층들이다. 그들은 그러한 고통과 분노 속에서 도대체 이 고통은 과연 무엇 때문인가를 추적해 왔다. 그들은 이번 광우병 파동을 통해 그 고통의 원인을 알아챘다. 그리곤 ‘저들이다! 한 줌밖에 되지 않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사회구성원들의 의사를 무시하고, 우리를 서슴없이 고통스럽게 하는 저들이 바로, 내가 그리고 우리들이 겪고 있는 고통의 원인이다!’하며 분노를 분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기동성이 좋은 10대가 가장 먼저 움직였다. 중고등학생들은 입시지옥의 희생자들이다. 우리 사회에선 생명력이 가장 아름답게 발산되는 10대들의 청춘을 오래전부터 박탈해왔다. 게다가 이 정부 들어서면서, 영어몰입 교육, 0교시 부활, 학교 시장화 등등 지옥의 강도를 높이고, 빈익빈부익부 교육을 실시하겠다는 정부의 시책들이 발표되었다. 그들은 광우병 파동을 보며, 입시지옥의 강화, 광우병 쇠고기 그리고 1%의 대리인인 이명박이 긴밀히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즉각 알아차렸고, 선배들의 경험을 살려 주저없이 행동에 나섰다.

시위군중은 일차적으로, 자신들에게가 아니라 부시에게 ‘머슴처럼’ 머리를 조아리며, 미국에서도 유통되기 힘든 쓰레기 쇠고기를 수입한 정부에 대해 분노하고 있다. 시위대는 묻는다. ‘과연 국민의 생존권과 의사 결정권이 아니라, 재벌과 미국 축산자본의 이익을 더 중요시하는 이 정부는 누구의 정부인가?’ 조금 더 급진화 된다면 시위대는 이렇게 묻게 될 것이다. ‘정권이 아무리 바뀌어도, 얼굴이 아무리 바뀌어도 한결같이 1%만을 위한 정책이 실행되는 이 나라는 도대체 누구의 나라인가?

그래서 우리 모두 알고 있듯이, 지금 촛불 시위에는 광우병 쇠고기 문제만 담겨 있지 않다. 견디기 힘든 고통에 대한 비명과 더불어, 그간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원인들, 그리고 더욱 고통스럽게 할 정책들 모두에 대한 저항이 담겨 있다.

“우리의 생존권과 의사결정권을 무시하고 체결된 미국과의 쇠고기 협상은 무효이다! 우리는 입시지옥에서 벗어나고 싶다! 학생들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인형들이 아니다. 우리의 의견을 무시하지 말라! 빈익빈 부익부를 대물림하는 학교 시장화를 막아야 한다! 1%의 이익 대변지 조중동을 없애자! 미국 농축산물이 쏟아져 들어오면 빚더미에 있는 우리들은 어찌 살란 말이냐! 지금도 먹고 살기 힘든데, 기본 생활비를 급격하게 상승시킬 공공서비스 사유화를 저지해야 한다! 그나마 감기보험이던 건강보험마저 없애서 민영화하고, 병원을 영리화한다면, 우리는 병들면 그냥 죽으란 말이냐!”

당연하게도 이런 요구들은 곧바로 노동계급의 요구이다. 그리하여 사회주의자라면, 인민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는 인민의 호민관이라면 응당 귀 기울여 반응해야 할 인민의 신음이자 호통소리인 것이다.

 

촛불 정국과 <사노련>

하지만 <사노련>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다. 서울에서만 최소 50만 명 이상이 모인 6월 10일 전야에 발표한 <총파업 특보 1호>에서 <사노련>은 이렇게 말한다.

“다음으로, 현장의 대중적 동력을 조직하려면 당연하게도 투쟁의 목표가 노동자다운 것이어야 한다. 미국산 쇠고기 반대를 위한 총파업, 대운하 반대를 위한 총파업을 내건다면 조합원들이 나름의 관심을 가질 수는 있을 것이다. 이명박 반대 압력을 강화하기 위해 그 요구들을 지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을 ‘자신의 요구’, ‘현장의 요구’로 받아들이고 대중행동에 나서야 할 필요를 느끼기는 어려울 것이다. 오히려 ‘물가 폭등과 실질 임금 삭감 때문에 못살겠다. 임금을 올려라!’ ‘노동시간(야간노동)을 줄이고 일자리를 늘려라!’ ‘인원감축 반대한다, 인원을 늘려라!’ 등의 요구 즉, 자본가 살리기에 맞서 노동자 살리기를 전면에 내세운 현장 요구를 중심으로 총파업을 조직해야 한다.”–공공부문 노동자 총파업을 앞당기는 길!, <총파업 특보 1호>, 6월 10일

<사노련>은 여기에서 ‘ 노동자다운 투쟁 목표’를 말한다. 촛불시위에서 외쳐지는 요구들은 노동자들이 ‘ 자신의 요구, 현장의 요구 라고 느끼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한다. 정신을 아찔하게 만드는 구절들이다.

촛불 시위에서 외쳐지는 절규를 자신의 요구로 느끼는 노동자가 ‘노동자다운’ 노동자가 아니라면, <사노련>이 생각하는 노동자는 과연 누구인가? 그리고 그곳이 ‘현장’이 아니라면 <사노련>이 생각하는 ‘현장’은 과연 어디인가?

구체적으로 통계가 제출되어 있지는 않지만, 사회의 구성비 그리고 시위의 성격으로 볼 때 우리는 시위현장의 대다수는 미조직노동자이건 조직된 개별 참가자이건 노동자가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이러한 사실을 <사노련>은 8호(6월 14일)에서야 비로소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청년 실업자도 다수 있을 것이다. 중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은 노동계급의 자식들일 가능성이 높고, 그렇지 않더라도 그들은 시위대의 의지와 자신의 의지가 일치되어 있는 참여자들이다.

 

<사노련>이 말하는 ‘현장’과 ‘노동자’

그렇다면, <사노련>의 노동자는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문맥으로 보아, <사노련>이 생각하는 노동자는 이렇게 추정된다. 즉, 조직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개별 사업장에 조직되어 있는 (또는 조직 가능성이 높은) 노동자’, 그리고 정치의식의 측면에서 볼 때는 ‘자신의 직접적인 경제적인 요구와 다른 정치적 사안, 그리고 다른 계급 계층과의 필연적 관련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그런 노동자.

노동자는 미래 사회의 주인이고, 동력이며, 유일한 지도 계급이다. 하지만 그것은 ‘현재, 있는 그대로의’ 노동자는 아니다. ‘ 현재 있는 그대로의 ’ 노동자는 정치적으로는 자본주의의 포로이며, 사회적 관계로는 임금노예일 뿐이다. 노동자들은 잠재력을 가지고 있되, 그 잠재력이 실현되기 위해선, ‘즉자적’인 노동자에서 ‘대자적’인 노동자 즉, 계급의식으로 각성된 노동자로 거듭나야 한다. ‘자신의, 자기 사업장의’ 이익만이 아니라, 자신의 운명이 세계 노동계급 전체 그리고 사회 전체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노동자는 거듭난다. 그리고 그 잠재력은 계급적 각성과 더불어 수정주의, 회의주의, 배신 등으로 결과 되는 자본주의의 정치적 압력에 맞서 싸울 혁명정당으로 자신의 일부를 응집시킬 때 비로소 발휘되기 시작한다.

그런데 <사노련>은 ‘현재 있는 그대로의’ 노동자를 ‘ 노동자다운 노동자’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촛불 시위에서 외쳐지는 모든 노동계급의 현 시기의 고통과 그 외침을 그 ‘노동자’는 ‘자기의 것이라고 느끼기 어려울 것’이라고 노동자를 모욕한다. <사노련>은 또 ‘개별 고용지’만을 ‘현장’(<사노련>만이 아니라, 우리의 경제주의자들이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이 ‘현장’이라는 말은, 때로 얼마나 혐오스럽게 쓰이고 있는가?)이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자기가 고용되어 있는 곳’이 아닌 곳은 ‘현장’이 아니게 된다. 이 얼마나 ‘대범한’ 경제주의, 조합주의의 극치인가?

지금으로부터 100년하고도 6년이 더 지난 러시아에서, 인터넷은커녕, 전화도 제대로 없어서 정보의 전달이 지금에 비해 수백 배는 느렸을 자본주의 변방에서도, 러시아 노동자들은 경제주의와의 투쟁을 전개했다. 그것은 ‘만국의 노동자는 하나이다. 나의 이익과 저 노동자의 이익은 일치한다. 나의 이익은 임금과 고용만이 아니다. 우리의 이익은 이 체제와 관련되어 있다. 우리는 새로운 체제를 위하여, 세계 노동자와 함께 단결해 싸울 것이다.’는 각성이었고, 조합주의와의 단절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100년하고도 6년이 더 지난 지금, 사회 대부분의 정보가 빛의 속도로 모이고 전달되는 이 시대에, 소위 ‘혁명적 사회주의를 체내에 녹여 가지고 있다’는 <사노련>은 이렇게 선언한다. ‘노동자들은 자기가 고용되어 있는 사업장의 직접적인 경제적 이익 외에 다른 것은 자신의 것으로 느끼지 못한다 . 자기가 몸담고 있는 사업장 외에는 현장이 아니다.’

 

정세 일탈

<사노련>은 그리하여 이 엄중한 정국에서 논점일탈과 정세일탈을 서슴지 않는다. 다음을 보자.

“비정규직을 없애라! 먹고살 수 있는 생활임금을 보장하라! 일자리를 확대하라! 는 요구가 (노동자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훌륭한 토양이다. 그러나 광우병 대책회의는 이런 요구를 담아내기 어렵다.”–‘촛불의 요구를 확대하자!’, 총파업 특보 1호, 6월 10일

‘촛불의 요구를 확대하자!’며 외치는 이 글은, 불행하게도 촛불의 요구를 예의 그 ‘자기 사업장의, 당면한 이익’의 문제로 축소하고 있다. 물론 비정규직의 철폐, 생활임금의 보장, 일자리 확대는 노동자의 절박한 요구이다. 촛불시위는 이미 그러한 요구들을 받아 안고 있다.

하지만 <사노련>과 그 촛불시위의 군중들 사이엔 다른 것이 있다. 그것은 시위대열에 참여한 군중들은 ‘각자의 고통이 하나로 응집 분출되어야 하고, 그래야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있지만, <사노련>은 군중들이 수십 차례의 시위와 토론을 통해서 끌어낸 그 결론을 무시하고, 그것을 다시 ‘각 사업장의 개별적 요구’로 흩어버리려 한다는 점이다.

개별 사업장의 요구는 촛불 시위와 결합되어야 한다. 그렇게 갈 것이고, 화물 파업이 보여주는 것처럼 그렇게 가고 있다. 이미 촛불 시위는 전체 노동자가 결합해야할 정치적 요구들을 외치고 있다. 낡아가는 느낌을 주는 쇠고기 재협상 구호뿐만 아니라, 공공기업 사유화, 병원 영리화, 학교 시장화 등 한미 FTA의 실제적인 내용들에 대한 저항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것들은 분명하게도 노동자들의 생존권에 대한 방어요구이다. 다만 단사의 시야에만 갇혀 있는 조합노동자만을 노동자라고 믿고 있는 조합주의자들에게만, 그것들은 ‘대담하게도!’ ‘노동자의 요구’가 아닐 뿐이다. 그리하여 <사노련>은 조합에 대한 지도는 하려들지언정, 계급 전체에 대한 지도는 포기한다. 나아가 자신의 당면 이익에만 주목하여, 정세에서 이탈할 것을 선동한다.

광우병 대책회의 형식 핑계를 대서는 안 된다. 내용과 형식은 투쟁의 역동성 속에서 얼마든지 바뀔 수 있고, 이미 바뀌고 있다. 촛불시위에서 외쳐지는 구호들은 이미 그 광우병 대책회의라는 이름을 넘어서고 있다. 광우병 대책회의는 ‘의료 및 공기업 민영화, 물 사유화, 교육, 대운하, 공영방송 사수 등 5대 의제를 결합’하고 있다. 노동계급의 전면적인 결합은 그러한 의제들을 중심 의제로 바꾸어낼 것이고, 내용에 맞는 형식의 변화 역시 이루어 낼 것이다.

 

조합주의

촛불 시위와 관련된 <총파업 특보>의 거의 모든 글들엔 그 ‘조합주의’가 끈적끈적할 정도로 농도 짙게 녹아있다. 다음은 토막글의 전문인데, 거의 모든 문장을 따져야 한다.

“공투단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서울지역 비정규-장기 투쟁 사업장 동지들이 a. 촛불 시위에 대거 참여하지 않는 이유는 촛불 시위와 내 사업장 문제 해결의 연관성을 찾지 못하기 때문 이다. 그러나 뒤집어 보자! 길게는 1,000일, 짧게는 1년을 싸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b.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이유는 뭔가? 너무 오랜 투쟁으로 지쳐, 각 단사의 사장에게 결정타를 먹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지 못해서 다. 노동자들이 c 자신의 요구와 이명박 퇴진이라는 정치적 요구를 결합시킬 때 투쟁의 전망과 폭이 넓어진다. 투쟁하고 있는 노동자들이 노동자계급의 생존권 요구를 제기하자! 그럴 때만이 d 사장들을 무릎 꿇릴 수 있는 힘을 발휘할 수 있다 . 이 기회를 놓치지 말자. 단사 현장 집회를 다시 강화하자! 그리고 거대한 이명박 반대 촛불 시위대에게 비정규직 철폐의 요구를 알려내고 함께 외치자! 아이들에게 미친 쇠고기를 못 먹인다! 아이들에게 비정규직의 고단한 삶을 물려줄 수 없다!” –크게 봐야 투쟁전망이 열린다, 총파업 특보 1호, 6월 10일, (기호는 인용자)

a. 굳이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를 들먹이거나 인용할 필요도 없이, 그 상호연관을 설명해 내고 결합시키는 것이 사회주의자라면 수행해야할 너무도 당연한 임무 아닌가?

b. ‘너무 오랜 투쟁으로 지친’ 탓이라면, 싸움의 초기에는? <사노련>은 지독하게도 대부분의 투쟁을 단사의 조합투쟁으로 환원시킨다.

물론 단사 노동자들의 강력한 싸움은 ‘단사에서’ 경제적 요구를 관철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투쟁을 지지한다. 하지만, 그 경우에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불행하게도 자본주의 사회는 고용과 임금과 관련된 문제를 ‘일시적이고 부분적으로 즉, 기만적으로만(그것도 단사 노동자들의 강력한 투쟁이 있을 때에만)’ 해결할 뿐, ‘장기적이고 전체적으로는’ 절대로 해결하지 않으며, 하지 못한다. 이것이 사회주의자가 되어야 하는 까닭 가운데 하나 아닌가?

c-d. ‘이명박 퇴진이라는 정치적 요구를 결합시켜’서, 고작해야 자기 사업장의 ‘사장들을 무릎꿇려(?)’ 경제적 이익을 따내겠다는 생각을 하는 노동자에게, 도대체 어떤 미조직 노동자가, 타사의 노동자가, 실업자가, 장래의 비정규직이거나 실업자가 될 학생이, 영세 상인이, 농민이 연대의식을 가질 수 있겠는가? 도대체 그들이 어떻게 그런 노동자들을 보며, ‘크게 보고, 투쟁전망을 열어내는’ 우군이라고 판단할 수 있겠는가?

<사노련>은 전국운수노조위원장에게 정세와 노동자를 바라보는 눈을 배워야 한다.

“현재 파업은 화물노동자 생존권 차원에서만 접근한 투쟁이 아니다 . 이명박 정권 기조를 바꾸는 투쟁이다. 다수 국민들이 반대하는 정책을 강행하려 한다면(광우병, 대운하, 공기업민영화 등) 결국 화물연대 요구가 받아들여진다 하더라도 바로 멈추지 않겠다.” 김종인, 6월 13일

설령 화물연대가 자신들의 요구를 쟁취하고 퇴각한다고 하더라도, 화물노동자들의 아픔을 십분 이해하고 있는 미조직 노동자들과 여타 계층들이 그들을 흘겨보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다수 국민들이 반대하는 정책을 강행하려 한다면(광우병, 대운하, 공기업민영화 등) 결국 화물연대 요구가 받아들여진다 하더라도 바로 멈추지 않겠다.”라는 선언 속에 우리는 비로소 벅찬 가슴으로 <사노련>과는 전혀 다른 ‘노동자다운 노동자’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국가공기업의 성격

<사노련>의 이러한 조합주의적 노동자관, 현장관은 공기업 사유화 문제를 바라보는 데에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먼저 국가공기업들의 성격을 간략히 살펴보자. 통신, 전기, 도로, 철도, 항만, 수자원 등의 공기업들은 사회의 필수재를 생산하는 사회 간접 자본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본의 특징은 전국적인 설비를 갖추어야 하며 초기에 막대한 자본이 투여된다. 그래서 독점적 지위를 갖는다. 또한 설비를 갖추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려 이윤을 뽑아내는 데에도 오랜 시간이 걸린다. 따라서 남한처럼 거대한 개별 자본이 형성되지 않은 나라의 경우 국가가 그 건설을 담당하게 된다.

남한의 경우 해방 후 일제가 남기고 간 기간 시설들을 몰수하는 것으로 사회 간접 자본은 건설되기 시작했다. 한국전쟁 이후 소련 등 노동자 국가의 견제 필요성 때문에 남한을 빠르게 자본주의화할 필요가 있었던 미국은, 원조라는 명목으로 남한의 개발을 지원했다. 개발 독재 시기 자본주의 발전에 필요한 시설들이 속도전으로 건설되었다. 물론 미국의 원조 등 투여된 자본금은 그 후의 인민에 대한 수탈을 통해 고스란히 회수되었다.

국가 공기업은 물, 교통, 전기, 통신 등 필수재를 생산하기 때문에, 그 가격을 값싸게 유지하는 것은 인민의 입장에서는 간접적인 사회보장이며, 생존을 위한 필수조건이다. 한편 전체 부르주아의 입장에서 볼 때, 그 가격을 값싸게 유지하는 것은 개별 자본가의 지불 부담, 즉 임금(노동력의 재생산 비용)을 낮게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초기 자본주의가 성장해 가는 데에 필수적인 요인이 된다.

 

공기업 사유화 계획

하지만 1980년대 이후 소위 ‘신자본주의’ 즉, 이윤율이 점점 하락해 가고, 초과 이윤을 뽑아낼 곳은 점점 축소되어가는 시기의 자본 즉, ‘더욱 쇠퇴해 가는 제국주의 시기’의 자본은, 그 동안 자본주의 전체를 지탱하는 기능을 담당하는 자본 영역 즉, 공기업으로 유보되어 있던 영역까지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레이건과 대처가 이끌던 사유화이고, 이제 그것은 1997년의 IMF와 2006년부터 FTA라는 이름으로 남한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그동안 유보되어 왔던 이윤 창출의 보고인 공기업에 입맛을 다시고 있는 남한의 재벌과 미국 금융자본은 이전과 다르게 말한다: “저 수 천억 원씩 적자를 내는 방만한 공기업들을 그냥 내버려 둘 수 없다!” 이 말은 이렇게 번역될 수 있을 것이다: “그 동안 자본주의 사회의 안정과 소규모 자본들의 생존을 위해 우리는 저 공기업들을 그냥 내버려 두어왔다. 하지만, 이제 자본은 넘치는데 이윤을 뽑아낼 곳이 없는 우리는 저거라도 먹어야 한다. 뒷일은 다음이다.”

사실 자본주의 사회의 안정을 위해 물, 교통, 전기, 통신, 의료 등의 필수재 서비스 접근 비용은 싸야하고, 그렇기 때문에 공기업들이 적자를 보는 것은, 이윤 창출을 지상의 가치로 여기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마저도 미덕이 된다. 그들의 언어로 말하면, 그러한 기업들의 경영은 ‘방만해야’ 된다.

이윤을 남기는 것으로 말한다면, 필수재를 전국적으로 독점 생산하는 공기업들에겐 일도 아니다. 요금을 올리면 되는 것이다. 아무리 비싸도 물, 교통, 전기, 통신, 의료 등을 사용하지 않고는 못 배기기 때문이다.

문제는 사회 안정성이다. 그렇게 되면, 가장 커다란 피해자인 노동자를 중심으로 하는 인민 전체의 불만도가 급상승하기 때문에 그 동안 주저해 왔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기존의 노동자 국가들의 몰락으로 기고만장해진, 그리고 잉여금은 계속 쌓여가는데 자본으로 투자할 곳은 점점 말라가는 자본가 계급은 그 짓을 하겠다는 것이다.

우선은 생존권을 위해서, 나아가 자본가계급은 이 체제를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다는 것을 폭로하기 위해서, 그리하여 그러한 필수재에 대한 모든 접근권이 자유로운 사회, 이윤이 아니라, 인간의 필요에 의해 생산이 조직되는 사회, 모든 노예적 노동을 해방시키고 나아가 그 착취자마저도 해방시킬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공기업을 사유화하려는 무모한 도전에 노동계급은 단호하게 응전해야한다.

 

사유화에 대한 <사노련>의 재정의

그런데, ‘혁명적 사회주의를 체내에 녹인’ <사노련>은 그 사유화를 전혀 다르게 바라본다.

이명박정부의 공격은 단지 공공부문 노동자만의 목을 노리는 것이 아니다. 국가가 직접 관할하는 공기업 분야에서 먼저 노동자의 저항을 분쇄한다면, 그것을 바탕으로 모든 산업 노동자의 목을 치기 위한 공세를 벌일 것이다. 그러므로 공공부문 사유화 반대투쟁은 곧 노동자 계급 전체의 생존을 지켜내기 위한 투쟁의 선봉이라는 중대한 의의를 가진다. 각각의 현장에서 투쟁을 준비하는 공공부문 노동자들은 자신의 투쟁을 다른 사업장 투쟁과 연결시켜, 전체 공공부문 공동투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사력을 다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노동자의 공공요구, 공동의 투쟁강령이 필요하다. 이와 관련해 우리는 <공공부문 사유화 반대 투쟁강령>을 제시한다.

이명박 정부와의대결은 피할 수 없다. 인원감축, 노동강도 강화, 실질임금 삭감, 외주화 비정규직 확대 등 여러 사업장들이 공통된 상황에 놓여 있다.그리고 여러 사업장들이 이명박 정부라는 공동의 적을 마주하고 있다. 저들과의 대결을 피할 수 없는 이상, 제대로 준비하고 싸우자. 공동투쟁의 깃발을 들고 결전의 시기를 맞이하자!”–’다가오는 공공부문 투쟁, 정면 돌파를 준비하자!’, <가자! 노동해방-사유화반대 특별호>

<사노련>이 해석하는 공기업의 사유화는 ‘공공부문 노동자의 목을 노리는 것’이다. 그래서 ‘공공부문 사유화 반대투쟁은 곧 노동자 계급 전체의 생존을 지켜내기 위한 투쟁의 선봉이라는 중대한 의의를 가진다.’라고 말한다.

공공부문 사유화 반대투쟁은 노동자 계급 전체의 투쟁의 선봉이 될 것이라는 말은 맞다. 앞에서 얘기한 것들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사노련>이 여기에서 말하는 사유화 반대 투쟁은 노동계급을 포함한 인민 전체의 공공서비스 접근권의 방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노련>이 ‘투쟁의 선봉’이라고 말하는 의미는 ‘다른 사업장에서도 인원 삭감을 한다. 그러므로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고용을 방어하기 위한 싸움을 잘하면, 다른 사업장 노동자들도 고무될 것이다.’라는 의미이다.

그들은 공공부문 사유화 저지 투쟁의 의미를 ‘공공부문에 고용되어 있는 노동자’들의 ‘인원감축, 노동강도 강화, 실질임금 삭감, 외주화 비정규직 확대’를 방어하기 위한 싸움으로 축소시킨다. <사노련>이 말하는 ‘공통된 상황’이라는 것은 개별 사업장을 넘어선 모든 노동자들의 공동의 이해(사유화 저지)가 아니라, ‘비슷한 처지에 있는 개별 사업장들의 총합’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또 다시 ‘대담하게도!’ ‘ 사유화의 실체는 매각과 소유권 ․ 경영권 이전에 있지 않다’라고 선언한다. 자신들도 똑같이 발음하는 사유화(민영화)를 실제의 말뜻과는 전혀 다르게 정의한다.

결국 민영화 공세의 실체란, 거듭 이야기하듯이 매각과 소유권·경영권 이전에 있지 않다. 민영화라는 형식을 통해서 노동자에 대한 착취의 강도를 한층 더 높이고, 이를 통해 자본가들의 돈주머니를 채워주는 것이 그 핵심이다. 그리고 이 점은 설사 매각·민영화가 유보되더라도 달라지지 않는다.

<중략>

그런데 노동조합의 일부 상층 지도부들은 이러한 현장의 절박한 요구를 추상적인 ‘사회공공성 강화’로 덮어버리거나, 매각 철회 그 자체로 국한시키는 경향을 보이곤 한다. 이런 경향은 투쟁의 진정한 표적을 흐릿하게 만들 위험이 크다. 현장의 선진활동가들이 앞장서서 이 점을 바로잡아야 한다.

감원계획에 맞서 공세적으로 제기하는 적정인력충원, 외주화·비정규직화 계획 전면 철회, 실질임금 삭감시도에 맞선 과감한 임금인상 등 현장의 요구를 전면에 내걸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올해 공공부문 투쟁의 실제 동력을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7호, 공공부문 투쟁-현장의 요구를 전면에 내걸자!, 오연홍

민영화는 구조조정의 중간역: 민영화는 미래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조정, 인력 감축, 외주화, 비정규직 확대의 이름으로 진행되고 있는 현재진행형이다.”–‘공공부문 투쟁-철도편’, <가자! 노동해방!-사유화 반대 특별호>, 5월 1일

결국 <사노련>에게 사유화는 이렇게 정의된다. 사유화란 ‘공기업의 매각과 소유권, 경영권 이전이 아니라 , 공기업에 고용되어 있는 노동자의 감원, 비정규직화, 임금 삭감’이다. <사노련>의 정의를 따른다면, ‘민영화(사유화)’는 ‘감원, 비정규직화, 임금 삭감’ 등의 불이익이 공기업 노동자에게 발생하지 않는다면, 별것 아닌 것이 된다. 공기업 노동자뿐만이 아니라 노동계급 전체, 인민 전체에게 재앙이 될 사유화는, 공기업 노동자에게 향해질 ‘구조조정의 중간역’일 뿐이라고 <사노련>은 주장한다. ‘배꼽이 배보다 더 크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다.

실로 뼛속까지 심각하게 조합주의가 녹아있지 않다면, 누가 감히 이런 주장을 할 수 있겠는가? 누가 ‘진정한 표적’을 흐리는가? 도대체 누가 ‘선진활동가’들인가?

<사노련>의 공기업 사유화에 대한 조합주의적 재정의는 그들의 ‘투쟁 강령’에서 그대로 반복된다.

” 2. 자본가의 이윤이 아니라 노동자 생존권 사수를 위해 투쟁하자!: 공공부문 사유화 공격의 본질 은 자본가들의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노동자에 대한 착취를 강화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유화란 이미 현장에 도입되고 있다. 철도에서는 상하분리에 따른 유지보수 분야 외주화로 수천 명이 고용불안에 휩싸일 가능성이 크다 .“–‘공공부문 사유화 반대 투쟁강령’, <가자! 노동해방!-사유화 반대 특별호>, 5월 1일

물론 당연하게도 구조조정, 인력 감축, 외주화, 비정규직 확대 저지라는 공공기업 노동자들의 투쟁은 지지되어야 하고 승리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매각 저지라는 노동계급 전체의 이익보다 더 중요한 것이라고 말하거나, 우선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재벌과 미국의 금융자본이 한국의 공기업을 매입하여 얻을 총이익 은, 공공기업에 고용되어 있는 노동자를 ‘구조조정, 인력 감축, 외주화, 비정규직 확대’ 등으로 공격하여 추가할 수 있는 이익보다 훨씬 크다. 그렇기 때문에, 가능성은 아주 낮지만, 공공부분 노동자들이 조합주의적 시각에 매몰되어 전체 노동계급의 시각으로부터 고립되어 있을 경우, 재벌과 금융자본이 매각 협조를 얻어내기 위해 구조조정, 인력 감축, 외주화, 비정규직 확대 등을 진행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럴 경우 <사노련>의 논리를 따른다면, 사유화 저지 투쟁을 철회해야 한다. 물론, 어떤 투쟁이건 투쟁이 있으면 환호하는 <사노련>이 자신의 논리를 따라 투쟁 철회를 주장할 가능성은 더욱 낮다. 그럴 경우 <사노련>은, ‘기만적이다! 철저한 검증을 통해 장기 약속을 얻어내자!’라고 주장하며 투쟁을 선동할 것인가? 악마에게 뿔을 떼어내라고?

 

정치, 총, 파업

<사노련>은 <가자! 노동해방> 7호 (5월 29일)를 통해 정치 총파업을 촉구했다.

“민주노총을 비롯한 노동자 대오는 이제 조직적으로 시위에 참석해야 한다. 그러나 가두정치시위가 더 큰 응집력으로, 이명박 정부에게 결정타를 날리기 위해서는 정치총파업으로 발전해야 한다. <중략> 노동자의 경제적 요구 투쟁과 이명박 정부에 맞선 정치적 요구 투쟁을 결합시키는 것은 이 토양을 더욱 비옥하게 가꾸어나가고 정치투쟁에서 노동자의 계급적 요구의 비중을 높여나가는 결정적인 수단이다.

<중략>

생존권 사수를 위한 파업을 모아나가고 확대하자! 그 결정타는 바로 가진 자의 정부, 자본가 정부, 이명박 정부 퇴진을 향한 조직된 노동자들의 정치총파업이다. 2MB, 꺼져! “–박준선, ‘가두 정치투쟁을 정치총파업 투쟁으로’

<사노련>은 개별 사업장들의 경제적 요구를 줄줄이 내걸고, ‘촛불 시위’ 군중들이 외치는 ‘이명박 퇴진’을 덤으로 얹으면 정치파업이 된다고 믿는다.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결국 이명박 퇴진 구호는 ‘협박용’이고, 결국 그 협박을 통해 ‘개별 사업장들의 사장들을 무릎꿇려’ 경제적 요구들을 성취하는 것이 목표이다. 이들은 노동자들을 ‘너무 끔찍이 생각하는’ <사노련>은, 노동자들이 ‘경제 투쟁’이라는 지면에서 떨어지는 순간, 마치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처럼 걱정한다. 그래서 그들에게 모든 정치는 경제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100년하고도 6년이 더 지난 지금, 촛불 시위(정국)에 ‘노동자는 한사코 노동자 고유의 요구를 들고서 비로소 참여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노련>에서, 우리는 ‘마르티노프’의 재현을 본다.

“경제투쟁 자체에 정치적 성격을 부여한다.”는 임무에 우리가 아무리 매진해도, 우리는 그러한 임무의 틀 안에서는 결코 노동자의 정치의식을 발전시킬(사회민주주의적인 정치의식의 수준에까지)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틀 자체가 협소하기 때문이다. 마르티노프의 정식화가 우리에게 가치 있는 것은, 그것이 갈팡질팡 헤매는 그의 능력을 잘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 결코 아니다. 마르티노프의 정식화가 우리에게 가치 있는 것은, 모든 “경제주의자”들의 근본적인 오류 즉, 노동자의 계급적 정치의식은 이른바 그들의 경제 투쟁 내부로부터, 말하자면 오로지(아니면 하다못해 주로) 경제 투쟁에만 의거해서, 오로지(아니면 주로) 이 투쟁에만 기반해서 발전시킬 수 있다는 그들의 확신을 그것이 선명하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레닌, <무엇을 할 것인가?>, 제 3장 5. 민주주의 전위투사로서의 노동계급

<사노련>은 개별 노동자의 산술적 총합이 노동자가 된다고 믿는 것처럼, 총파업도 ‘개별 사업장의 요구를 둘러싼 파업을 모으면’ 총파업이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개별 사업장의 요구를 내건 파업들이 비슷한 시기에 모인다고 해서 총파업이 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봄에 임금인상 투쟁과 파업이 집중적으로 벌어질 경우 우리는 그것을 춘투라고 부르지 총파업이라고 부르진 않는다. 1987년 7, 8, 9월, 대단히 많은 사업장에서 노동조합 건설과 임금 인상을 내걸고 벌인 동시다발적 투쟁을 우리는 ‘노동자 대투쟁’이라고는 부르지만, 1987년 총파업이라고 부르진 않는다.

총파업을 위해서는 행동과 요구의 일치가 필요하다. 개별 사업장과 개별 노동자의 요구를 일반화하여 응집된 노동계급 전체의 요구와 그 행동을 통일할 지도부가 있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개별 사업장들의 각각의 생존권 요구를 내건 투쟁들을 모아 총파업을 벌이자는 주장이 잘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이다.

이런 점들에서 과연 <사노련>이 정치총파업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아니면 ‘대담하게’ 말하기에 중독된 탓인가? <사노련>은 언어를 조금 덜 ‘대담하게’, 조금은 더 과학적으로,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진지하게’ 사용해야 한다.

총파업에 대한 선배혁명가의 말을 들어보자. 노동계급의 운명을 온몸으로 느끼는 혁명가의 언어는 과연 어떻게 다른지 느껴보도록 하자.

“모든 맑스주의자들이 알고 있듯이 총파업은 가장 혁명적 투쟁방식에 속한다. 계급투쟁이 특정 직종에 제한된 요구를 넘고 모든 직종과 지역의 경계를 넘어 노동조합과 정당, 합법과 비합법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노동계급 대다수를 부르주아 계급과 국가에 대한 적극적 반대투쟁으로 동원할 때만 총파업은 가능하다. 총파업보다 더 높은 수위의 계급투쟁은 무장봉기 밖에 없다. 모든 총파업은 그 구호가 무엇이든 공공연한 혁명적 격돌, 직접적 권력 장악 투쟁으로 변모하는 내적인 경향을 지니고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총파업은 극단적인 정치적 갈등 속에서만 가능하다. 총파업이 혁명적 상황을 논란의 여지없이 표현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노동계급 운동의 전체 역사가 이것을 증거하고 있다.”–트로츠키, ‘다시 한 번 프랑스는 어디로’

<사노련>은 바로 이러한 총파업을 얘기하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이명박 퇴진을 요구하고, 정치총파업을 동원하여 사장을 무릎 꿇리겠다’는 황당한 계획은 뭔가?

 

총파업의 구호들

<사노련>은 6월 10일 <총파업 특보>를 통해 정치총파업을 또다시 호소했다. 그 특보 전면의 ‘노동자의 요구를 내걸고 정치 총파업에 나서자!’에 실린 슬로건들을 살펴보자.

1. 도저히 못 살겠다. 생존권을 보장하라!

2. 물가폭등 해결하고 생활임금 보장하라!

3. 공공부문 사유화와 구조조정 중단하라!,

4. 노동시간 단축으로 일자리를 확대하라!

5. 최저임금 · 최저생계비 대폭 인상으로 기본생활 보장하라!

6. 비정규직 철폐하라! 정리해고 폐지하라!

7. 노동자 민중 다 죽이는 이명박은 퇴진하라! (번호는 인용자)

이 <특보>는 6월 10일 전야에 발표되었다. 자꾸 반복되지만, <사노련>은 정국의 상황을 이때까지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사노련>은 지금 정국이 미국의 쓰레기 쇠고기문제를 시작으로 조성되었다는 사실을 자꾸 무시하고 싶어 한다. 슬로건들엔 그 문제가 빠져 있다. 그러면서 ‘노동자의 요구를 내걸자’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미국 쇠고기 문제, 건강권, 주권의 문제 등은 노동자의 요구가 아니란 말인가?

1, 2, 5는 똑같은 내용의 반복이다. 임금 문제이다. 임금 문제 중요하다. 하지만, 노동자의 요구는 임금이나 고용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노동계급의 정당을 목표로 하는 사회주의자라면, 시위대가 되어 싸우고 있는 미조직 노동자, 실업자, 학생, 영세상인, 농민들의 요구가 무엇인지 새겨들어야 한다.

 

통합민주당에 대한 면죄부

촛불 정국에서 제기되고 있는 문제를 애써 외면하고, 슬로건을 자신들이 애정을 쏟는 조합주의적 요구들로 변화(정세 이탈)시키기 위해 사실을 왜곡하기까지 한다.

“민주노총은 ▲쇠고기 재협상 ▲시장화·사유화 정책 폐기 ▲대운하 반대 ▲기름값·물가폭등 저지를 내걸고 6월 10~14일 총파업 찬반투표를 가진 후, 15일 총파업 세부일정을 세우기로 결정했다. 민주노총이 지금이라도 총파업에 나서기로 한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민주노총의 4대 요구는 이제 막 표출되기 시작한 노동자들의 불만과 분노를 분출시킬 출구로서는 부족하기 짝이 없다. 노동자들의 생존권 요구를 전면에 담은 것이 아니라, 국민들 사이에 이명박의 가장 인기 없는 정책 1위에서 4위까지를 옮겨 온 수준이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4대 요구가 통합민주당의 현재 입장과 무엇이 다른지 헷갈릴 정도이다.”–같은 글

민주노총 상층부 관료들을 경계하는 것은 옳다. 기회 있을 때마다 투쟁하는 노동자들에게 그 점을 경고해야 한다. 관료들은 파도타기에 능하다. 상승하는 투쟁의 정점에 올라타서, 자신들의 정치적 입신을 꾀하려 한다. 심지어 요즘엔 한국노총도 한나라당 비판을 한다지 않는가? 하지만 그들은 투쟁이 계속 상승될 경우 현기증을 느끼고 몸을 피할 궁리를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막무가내로 주먹을 휘둘러서는 안 된다. <사노련>이 내세우는 요구들보다, 차라리 민주노총의 요구들이 더 정국을 잘 반영하고 있고, ‘노동자들의 불만과 분노를 분출시킬 출구’로 덜 부족하다. 그리고 그 민노총을 공격하기 위해 한미 FTA의 주역이며, 1년여의 줄기찬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미 FTA를 강행하던 통합민주당을 시장화, 사유화 정책 폐기를 주장하는 집단이라고 왜곡하는 것은 계급적 선까지 넘어버리는 범죄행위이다.

통합민주당은 이명박의 선배이며, 공범이다. 그들은 지금 이명박과 한나라당의 위기를 틈타, 정치적 재생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하지만, 혹시나 쇠고기 재협상이 아니라, FTA의 문제를 전면으로 제기할까봐 노심초사하고 있다. 시위 군중은 그들과 단호히 단절하는 수준으로까지 정치의식이 성장하지 않았다. 그런 사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던 통합민주당은 조금 떨어져 촛불시위의 태도를 살피다가, 부르주아 좌파에 대한 환상을 떨쳐버리지 못한 일부 시위대열의 협조를 얻어, 이제는 분신 사망한 이병렬 동지의 영정 옆에 통합민주당 휘장이 걸린 화환을 가져다 놓을 정도로 대범해졌다.

무릇 사회주의자라면 통합민주당에 대한 환상을 깨는 데에 나서야 한다. 노동계급 그리고 시위군중과 부르주아 정치를 단절시켜야 한다. 부르주아 좌우파가 정국의 상황에 따라 시이소 놀이하듯 번갈아 집권하게 허용해서는 안 된다. 이명박 퇴진이 현실화될수록 부르주아 좌파에 대한 환상이 되살아날 것이고, 인민전선으로 나아가려는 경향은 더욱 커질 것이다. 죽 쒀서 개 줘서는 안 된다. 그런데, 사실을 왜곡하면서까지 통합민주당에 면죄부를 주는 꼴은 도대체 뭔가?

 

어지럼증을 느끼는 <가자! 노동해방> 8호

6월 10일, 시위는 또 한 번의 분기점을 돌파했다. 서울에서만 50만~70만의 시위대가 모였다. 아직까지는 ‘쇠고기 재협상’이 주요 구호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의식이 지배적이고,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고조되었다. 상황은 조합주의 그릇으로는 도저히 담아낼 수 없게 발전해 버렸다.

그러자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노련>은 그만 어지럼증을 느끼고 있다. 롤러코스터에 억지로 올라탄 아이처럼, <총파업 특보> 1호에서 제기한 당면 요구들에 더해 이러저러한 구호들을 남발하기 시작했다.

“이 같은 당면 요구들(6월 10일에 발표한 요구들-인용자)과 함께 ▷노동자 생산통제권 쟁취/ 공장위원회 건설 ▷영업비밀 철폐/ 노동자 산업통제 ▷기간산업 국유화, 재벌 대기업 몰수 ․ 국유화 ▷노동자정부 수립 등 대중행동강령의 기치 하에 미조직노동자, 조직된 비정규직노동자, 정규직노동자를 하나로 결집시켜 <노동자 살리기/ 반자본주의 대투쟁>으로 나아가자.”–양효식, ‘노동자 살리기 총파업으로 전체 노동자 계급을 결집시키자!’, <가자! 노동해방> 8호, 6월 14일

요구는 7면 ‘치켜들어야 할 노동자의 당면 투쟁 요구’에서 또 추가된다.

1) 쇠고기 검역, 수입, 유통, 판매를 노동자와 시민이 구성하는 ‘쇠고기 통제위원회’가 담당케 하자!

2)정유사의 장부를 공개하라! 정유사를 국유화하자! 노동자 민중이 물가를 통제하자!

3)생활임금 쟁취하자! 다단계 하청제도 철폐하라! 안정된 일자리를 지키고 확대하자!

<사노련>은 이제 기존의 조합주의적이며 정세 일탈적인 요구들로는 이 정세를 감당할 수 없다고 느끼고 있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세와 관련 없이 이러저러한 요구들을 무기고(트로츠키의 <이행강령>)에서 다 끄집어내어 마구 휘둘러서는 안 된다. 일정한 정세에서 모든 요구를 외칠 수는 없다. 이행 강령은 ‘자본주의 현실 속에서 현실적 요구를 내걸고 싸우는 노동자들의 현실적 의식 수준을 사회주의적 의식 수준, 당면해서는 노동자의 권력 장악의 필요성에 대한 자각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강령이다. 따라서 그 요구들은 현실적 요구(경제적 요구만이 아니라) 그리고 노동자의 현실적 의식 수준과 결합해야 한다. 쥐를 잡으려면 쥐덫을 써야지, 뜬금없이 장팔사모를 휘두르면 쥐는 못 잡고, 자기나 애먼 사람이 다친다.

 

민주주의적 과제

촛불 시위, 사유화 등에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사노련>은 모든 문제를 조합주의적 시각으로 바라본다. 그것은 민주주의와 정당을 바라보는 시각에도 예외가 아니다.

먼저 민주주의에 대한 시각을 보자. <사노련>은 1987년 6월을 회상한다. 하지만 그 이유는 단지 그 뒤에 7, 8, 9월의 노동자 대투쟁이 있었기 때문이다. 1987년 6월 항쟁과 민주주의의 부분적 성취는, 그것이 자신이 신봉하는 노동자주의(조합주의, 경제주의)가 아니라는 이유로 폄하된다.

“진정 중요한 것 – 6월을 넘어서서 7, 8, 9월로!!: 87년이 노동자계급에게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졌던 것은 6월이 아니라 바로 7, 8, 9월 때문이다. 만약 ‘직선제 쟁취, 민주주의 획득’에 갇혀서 , 6월의 전장에서 더 나아가지 못한 채 멈춰버렸다면, 7, 8, 9월 노동자 대투쟁의 위대한 나날들은 없었을 것이다. <중략>

그렇다! 87년 6월은 철옹성 같았던 자본가 정부의 요새에 충격을 가했고, 이것은 노동자 투쟁이 터져나올 수 있었던 공간을 열어주었다는 점에서만 가치가 있었다. <중략>

추상적인 민주주의 요구 뒤에 숨어 있던 노동자계급의 요구들이 전면에 솟구쳤다.”–최영익, ‘노동자의 운명, 우리 스스로가 개척하자!’, 같은 호

그에게 민주주의적 과제는 노동자의(노동자다운) 과제가 아니다. 조합주의자인 그에게 직선제 쟁취와 민주주의의 획득은 성취가 아니라, 갇히는 이고, “경제주의자들의 근본적인 오류 즉, 노동자의 계급적 정치의식은 이른바 그들의 경제 투쟁 내부로부터, 말하자면 오로지(아니면 하다못해 주로) 경제 투쟁에만 의거해서, 오로지(아니면 주로) 이 투쟁에만 기반해서 발전시킬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레닌)” 그는 노동자의 직접적인 경제투쟁과 결합되지 않은 정치적 요구는 단지 추상적인 일 뿐이다. 그는 ‘노동자답지 않은’ 민주적 과제에 한눈팔지 말라는 듯이, 중요한 것은 경제투쟁일 뿐이라고 ‘그의 노동자들’을 거듭 세뇌한다.

다시 한 번 레닌을 인용해보자. 하지만 인용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이 답답한 것은, <사노련>의 지도부들은 아마도 거의 틀림없이,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를 ‘자신들도 여러 번 읽어보았다’고 자부할 것이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자는 모든 혁명 운동을 지지한다는 것, 따라서 우리에게는 한 순간이라도 자신의 사회주의적 신념을 감추지 않으면서 전 국민 앞에서 일반 민주주의적 과제를 표명하고 강조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사실상 잊고 있는 자는 사회민주주의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일반 민주주의의 문제들을 제기하고 첨예화시키며 해결하는 데서 자신이 만인의 앞에 서 있어야 한다는 의무를 사실상 잊고 있는 자는 사회민주주의자가 아니기 때문이다.”–<무엇을 할 것인가?>, 제3장 5. 민주주의를 위한 전위 투사로서의 노동자 계급

또는

“그런데 ‘경제주의’의 가장 특징적인 성격 중의 하나가 바로 이러한 관계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프롤레타리아트의 가장 절실한 요구(정치 선동과 정치 폭로를 통한 전면적 정치 교양)가 일반민주주의 운동의 요구와 일치하는 이 지점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같은 책, 같은 부분

 

노동자 정당

우리가 지금껏 확인해오는 것처럼 조합주의는 잠시의 착각이 아니라, 하나의 세계관이다. 그래서 모든 문제들을 그 세계관으로 바라보고 해석한다. 노동자정당을 바라보는 관점 역시 그러하다. 조합주의자들은 정당은 아래로부터 건설되어야 한다고 늘 주장한다. 즉, ‘경제투쟁을 통해 현장을 장악하고, 사회주의(?) 현장 소조를 건설하고 그것들이 결집되어 정당이 건설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들은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노동자 투쟁들을 보면서 노동자 의식을 배우고, 자기 현장에서 노동조합과 같은 노동자의 조직과 투쟁을 만들어낼 것이다. 이것들은 다시 조직된 노동자들을 자극하고, 이것들은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노동운동의 황금기를 열어낼 것이다. 그 속에서 진정한 혁명적 노동자 정당을 만들어낼 가장 비옥한 토양이 만들어질 것이다.”–최영익, ‘노동자의 운명, 우리 스스로가 개척하자!’, 같은 호

먼저 ‘노동자 의식을 배우고(수신(修身)하고)’, 다음으로 ‘현장에서 노동조합과 같은 노동자의 조직과 투쟁을 만들어낼 것’(제가(齊家)하며), 그 이후에야 ‘이것들은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노동운동의 황금기를 열어낼 것’(치국(治國)한 이후에야), 그런 연후에 ‘그 속에서 혁명적 노동자 정당을 만들어낼 가장 비옥한 토양이 만들어질 것’(비로소 평천하(治國平天下)할 수 있다)이라는 것이다. 조합주의자들은 늘 이렇게 질서정연하다.

조합주의자들은 모든 문제를 ‘전체는 부분의 총합’이라고 바라본다. 전체는 부분의 속성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전체를 이루기 위해, 그들은 늘 아래에서부터, 부분을 모아가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구조적인 틀(설계도) 없이 벽돌을 쌓는다고 집이 되지는 않는다. 물은 수소와 산소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물의 특성은 산소, 수소의 성질로 환원될 수 없다. 수소 두 개와 산소 하나를 모은다고 해서 물이 되지는 않는다. 집을 집이 되게 하는 것은 구조(그것이 실현되기 이전은 설계도)이다. 물을 물이 되게 하는 것은 원자들의 화학적 결합 형태이다. 생명체에게는 DNA가 될 것이다.

정당을 이루기 위해서는 물론 사람이 모여야 한다. 하지만 더 중요하게는 어떤 정치적 입장으로 모이는가이다. 그런 점에서 정당은 의지의 결집체이다. 쥐의 DNA를 가진 배아는 쥐로 성장하지, 절대로 사자가 될 수 없는 것처럼, 기회주의적인 정치적 입장으로는 절대 혁명 정당을 건설할 수 없다. 조합주의적 경제주의적 정당관은, 몇몇 조직된 사업장에 기반을 둔 ‘현장소조들의 연대체’를 건설하는 것이 그 최대일 것이고, 그것은 지금의 <사노련>처럼 자신들이 기반하고 있는(하려 하는) 단사의 시야에 갇혀, 노동계급에게 가장 절실한 정치의식의 발전을 자꾸 가로막게 될 것이다.

‘노동운동의 황금기’는 ‘진정한 혁명적 노동자 정당을 만들어낼 가장 비옥한 토양’이 아니다. ‘봇물처럼 터져나오는 노동투쟁’은 혁명정당 건설과 간접적으로만 연관이 있다. 1987년 노동운동은 유례없는 ‘황금기’를 맞았지만, 혁명정당은 건설되지 않았다. 1917년 2월 혁명은 러시아 노동운동에 황금기를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4월 레닌이 당을 정치적으로 재무장하기 이전까지 많은 볼셰비키들은 멘셰비키가 되어 있었다. 정치적 재무장이 없었더라면, 노동운동의 황금기에 당은 혁명을 성공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노동운동의 황금기에는 마땅히 혁명을 해야 한다. 반면 혁명정당은 황금기이든 철기이든 청동기든지에 상관없이 건설되어야 한다. 혁명정당 건설의 토양은 ‘단사의 경제투쟁→조합 건설→현장 소조→정당 건설’이라는 조합주의적 정당관과 단절할 때, 경제주의자들이 신주단지처럼 떠받드는 ‘현장 제일주의’, ‘실천 제일주의’와 단절할 때, 그 때 비로소 가장 비옥해질 것이다.

“학습하라! 선전하라! 조직하라!”는 독일 혁명가 리프크네히트의 구호는 혁명정당이 어떻게 건설되어야 하는지, 사회주의자의 임무가 무엇인지를 압축적으로 표현해주고 있다. 이것은 또한 우리의 구호이어야 한다.

 

결론

우리는 지금까지, 촛불 정국을 대하는 <사노련>의 태도 즉, 촛불 시위, 사유화, 총파업, 민주적 과제, 부르주아 좌파, 혁명 정당 등에 대한 정치적 태도를 통해서 <사노련>에 녹아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았다. 지금까지 읽어온 독자라면 그 결론이 무엇인지 능히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 <사노련>에 일관되게 녹아있는 그것은 혁명적 사회주의가 아니다. 조합주의 또는 경제주의이다. 최대로 말한다면, ‘전투적’인!

앞에서도 말했듯이, <사노련>에 몸담고 있는 동지들이 노동자에 대한 충성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강렬한 승부욕만으로 승부에서 이길 수 없듯이, 충성심만으로는 노동계급에 충성할 수 없다. 만국의 노동계급에 충성하기 위해선 마르티노프와 단절하여야 한다. 그리고 리프크네히트, 레닌, 트로츠키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

 

*촛불 시위에 즈음한 노동자의 행동강령 (제안)*

이 강령들은 모두 선전되어야 한다. 하지만 선동측면에서 우선순위는 정세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1. 미친 소는 부시와 이명박, 이 세상의 1%에게!

2. 노무현에 이은 재벌과 미국자본의 하수인, 이명박은 물러가라! : 이명박(부르주아 우파)에 대한 공격을 집중함과 동시에, 노무현(부르주아 좌파)에 대한 환상이 생기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정국의 상황에 따라 좌우가 번갈아 집권하면서 노동계급과 인민을 희롱한다는 것을 폭로해야 한다.

3. 미국자본과 재벌들만 살찌우는 한미 FTA 저지하자!

4. 수도, 철도, 도로 교통, 전기, 방송 등 모든 공기업에 대한 사유화를 저지하자! :이번 투쟁의 핵심적인 방어 목표이다. 1980년대 대처의 사유화에 맞선 영국노동자들의 투쟁은 패배하고 말았다. 그 이후 영국 노동운동은 소련의 몰락과 더불어 심각하게 후퇴했다. 우리는 훨씬 좋은 조건에서 싸우고 있다. 이 싸움에서 승리하여 세계 노동계급의 모범이 되자.

5. 사람 목숨도 돈벌이냐! 의료 영리화 저지하고, 무료 의료 쟁취하자! : 식코(Sicko)는 이 점에 대해 많은 선전을 해 내었다. 하지만, 캐나다 같은 사민주의 국가를 이상적인 사회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은 경계해야 한다.

6. 교육 시장화 저지하고, 무료교육 쟁취하자!

7. 교사, 학부모와 더불어 학생 대표가 참여하는 학교교육위원회를 구성하자! : 학생들은 학교의 주인 가운데 하나이다. 교사와 학교 당국으로부터 독립된 학생회를 구성할 것, 그리고 그 학생 대표가 학교교육위원회에 참가하여 복장, 학사일정, 학습 내용 등에 대해 논의하고, 부당할 경우에는 거부권을 행사할 권리를 지지한다.

8. 동일한 노동에 대해 동일한 권리와 임금을 쟁취하자! : 비정규직 노동자와 관련된 구호이다.

9. 생존의 벼랑에 몰린 실업자, 농민, 극빈생활자에게 적정한 정부 보조금을 지급하라!

10. 치솟는 물가인상 꽁꽁 묶인 임금. 물가인상에 연동하는 임금인상 쟁취하자!

11. 임금삭감 없는 노동시간 단축을 통해 실업을 해소하자!

12. 파업노동자, 시위대 공동투쟁위원회를 구성하자! : 파업이 벌어지는 각 거점도시와 전국 차원에서 노동자와 사유화를 반대하는 시위대가 함께 참여하는 공동투쟁위원회를 구성할 것, 서로의 공동 이해를 확인하고, 투쟁을 상호 지원하고, 공동투쟁할 것을 제안한다. 그를 위해서 파업노동자 시위 참여, 시위대 파업 현장 방문, 상호 지지와 공동투쟁 호소 연설, 공동신문 발간 등 이번 촛불 시위에서 보여준 것처럼 창조적이고, 다양한 방법을 동원할 것을 제안한다.

13. 노동자의 이익을 목숨 걸고 지켜낼, 진짜배기 노동자당을 건설하자!

 

2008년 6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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