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국가(소련/중국/북한 등)의 사회성격

(IBT) 소련의 사회성격에 대하여(6호, 1989)

by 볼셰비키-레닌주의자 posted Dec 24,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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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출처 – 국제볼셰비키그룹(IBT)



소련의 사회성격에 대하여



아 래의 글은 <1917> No 6 (1989년 여름)에 실린 “소련 사회성격에 대하여”(On the Nature of the USSR)란 기사를 부분 발췌하여 번역한 것으로서 당시 <볼셰비키그룹(Bolshevik Tendency: BT>이 소련 사회구성체의 성격에 관하여 <혁명적당건설을 위한 연맹(League for the Revolutionary Party): LRP>과 1988년 12월 10일 뉴욕에서 벌였던 논쟁을 담고 있다.



가치법칙 대 중앙화된 계획 경제

LRP: 성장률과 ‘자본주의’

LRP와 좌파 색트먼주의의 해결되지 못한 모순

짐 쿨렌 동지의 발제문

 

 

BT를 대표하여 발제 연설을 한 짐 쿨렌은 혁명가들이라면 마땅히 외부 자본가들의 공격과 내부의 반혁명에 대항하여 퇴보한 노동자국가인 소련을 방어하여야 한다는 레온 트로츠키의 입장을 열렬히 지지하는 것으로서 논쟁을 시작하였다.

이 와는 반대로 LRP를 대표하여 월터 달( Walter Dahl )은 중국이나 동유럽, 쿠바 그리고 베트남과 마찬가지로 소련에 존재하는 사회관계와 소유제 형태는 근본적으로 서방 자본주의와 동일하다고 답변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소 련이 자본주의인 이유는 그들이 임금노동이라는 방법으로 노동자들을 착취하기 때문이다. 맑스에게 모든 계급사회를 구분하는 근본적인 문제는 어떻게 생산자로부터 즉, 노동자로부터 잉여 생산물을 착취하느냐는 것이었다. 만일 잉여 생산물의 착취가 노예노동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면, 이것은 그 사회가 계급사회의 한 종류라는 의미이다. 만일 이것이 임금 노동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면 이는 또 다른 종류의 계급사회라는 의미로서 이를 토대로 하여 전 사회의 구조가 발전된다.”

소 련의 노동자들이 임금을 지급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 사회 잉여의 많은 부분이 소비재라는 형태로서 노동자들에게 되돌아가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소련에서의 “임금”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임금과는 달리 가변자본의 일부를 구성하지 않는다.

“고타강령비판”에서 맑스는 프롤레타리아독재 아래에서 그리고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 사회에서조차, 분배의 부르주아적 규범–노동의 양과 질에 따른 분배를 포함하여–이 실재로 작용할 것이라고 예측하였다. “개별 생산자는 사회에 그가 기여한 것을 –그 중 일부의 공제액이 감해진 후에–정확히 사회로부터 되돌려 받는다.”라고 맑스는 설명하였다. 그는 이를 “이와 똑같은 법칙이 상품 등가물의 교환에서도 적용된다. 즉, 한 형태의 주어진 노동량은 다른 형태의 동일한 노동량과 교환된다.”고 명확히 적고 있다.

소련에서 임금 지불 체제는, 노동자들에게 지불된 임금이 모든 상품의 보편적 등가물인 돈이 아니라는 점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임금과 구별된다. 소련 사회의 임금은 중앙계획에 의하여 통제되는 일정한 양의 소비재와 교환할 수 있는 배급표와 같은 것이다. 이러한 배급표로는 생산수단을 구매할 수 없다. 소비에트 경제의 이와 같은 성격은 자본론 제2권에 나오는 사회주의에 대한 맑스의 예측 부분에서 이미 예견되고 있다.

“집산화된 생산과 함께 자본금( money capital )은 완전히 필요 없게 된다. 사회는 산업의 여러 분야에 노동력과 생산수단을 분배한다. 생산자가 사회전체의 소비재로부터 자신의 노동시간에 조응하는 만큼의 소비재를 빼내도록 허락하는 종이표를 받지 말아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그러나 이 종이표는 돈이 아니다. 이 표는 유통되지 않는다.”

자본론(펭귄출판사) 제 2권

가치법칙 대 중앙화된 계획 경제

월터 달은 자신의 입장을 권위 있게 뒤받쳐 줄 수 있는 출처로 여러 스탈린주의 관료들의 말을 인용하면서, 소련경제가 지난 50여 년 동안 가치법칙에 의하여 지배되어 왔다고 주장한다. 만일 소련경제가 가치법칙에 의해 지배되어 왔다는 것을 부인한다면 우리는 “의식이 소련사회를 지배하고 있다고 주장해야만 할 텐데, 그 의식적인 계획 입안자들( 소련관료들 )은 자신들이 가치법칙에 의거하여 경제계획을 작성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결국 우리는 다시 가치법칙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라고 그는 주장한다.

그의 주장은 단지 스탈린주의 관료들이 시장경제의 자생적 균형법칙인 가치법칙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소련의 각 공장은 중앙 계획으로부터 받은 지시에 따라 생산한다. 그 생산물은 계획 입안자들에 의해 명시된 가격에 따라 판매된다. 생산물이 구매자들을 마침내 발견했는지 안 했는지의 여부는 미래의 기업 활동에 영향을 거의 끼치지 않는다. 미래에 필요할 기계류, 노동 그리고 원재료의 배정 또한 공급 계획에서 특별히 명시된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각 회사는 그 회사가 팔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만큼의 상품을 생산한다. 단지 이 상품생산은 투입 가능한 자본량에 의하여 제한된다. 시장은 각 기업에 각 상품을 생산해 내는 데 요구되는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이란 기준을 강요한다. 이 기준을 이행해 내는 데 실패한 기업은 수익성이 없는 것으로 증명될 것이고 따라서 결과적으로 파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실상 모든 경제학자들은 ‘명령’ 경제와 ‘자유’( 시장에 의해 강제 받는 ) 경제를 구분한다. 소련경제에 대한 연구로 명망이 있는 자유주의 경제사학자 알렉 노브(Alex Nove)는 1930년대 소련 경제가 어떻게 작동하였는지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모든 수위의 경제 단위에서 지배적인 요인은 당과 정부의 경제적 의지를 체화시킨 계획이었으며, 이는 이윤과 손실에 대한 고려에 토대를 둔 것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결정된 우선순위에 그 기반을 두었다. …

가격은 생산비용에 따라 결정되지 않고 비정기적으로 변화하였으며, 개념적으로도 공급의 부족과 연관되어 있지 않았다. 따라서 만일 이윤동기가 용납되었다 하더라도 이는 극도로 비이성적인 방식으로 작동되었을 것이다.”

소련경제사

스탈린이 1930년대 초에 목도하였듯이, 집산경제의 계획 입안자들이 경제를 계획하면서 사용할 수 있는 공급 총량을 무시하여 대규모의 경제 혼란을 불러왔다. 그러나 비록 균형을 잘 잡지 못했다 하더라도, 미리 결정된 계획에 따라 이용할 수 있는 경제 자원들을 배정하는 방식은 [자본주의와는 ] 전혀 다른 경제 조직 방식이다. 일반화된 상품생산 체제[ 자본주의 ]는, 가치법칙에 따라 즉, 서로 다른 이윤율에 토대를 두고 한 경제 부문에서 다른 경제 부문 등으로 자생적으로 투자가 진행된다.


LRP: 성장률과 ‘자본주의’

국가자본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모택동주의자들로부터 보르디가주의자( Bordigaist ) 그리고 여러 제3 진영 ‘트로츠키주의자’들–의 특징들 중 하나는, 그들 모두 소련을 ‘국가자본주의’라고 규정하면서도, 왜 소련이 자본주의사회라고 규정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서로 일치된 견해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각 정파들은 각자 그들 나름의 ‘이론’ 그리고 ‘자본주의’로의 전환이 일어났다고 추측되는 날짜를 고안해 내었다. LRP는 제3차 5개년 계획이 전개되고 있던 시기인 1939년경에 ‘자본주의’가 확립되었다고 주장한다. LRP에 따르면 제1차, 2차 계획 기간 동안 발생한 높은 경제 성장률은 소련이 그때까지 노동자국가였음에 틀림이 없었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한다.

LRP는 러시아혁명이 “생산수단을 국유화하고 무역에 국가독점을 가져오고 특히 신용대부금과 은행을 통제하는 등, 부르주아 계급이 결코 해낼 수 없는 방식으로 일들을 수행해 내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 노동자국가가 ‘자본주의’ 국가로 전환되었을 때에도 “이러한 성과물들은 스탈린주의 반혁명에 의해 일소된 것이 아니라 (스탈린주의자들에게 의해 ) 점령되어 프롤레타리아에게 대항하는 것으로 이용되어 변화되었다”(Exchange on State Capitalism”, Socialist Voice, No 6). 따라서 LRP에 따르면 1917년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의하여 성립된 소유제 형태에 토대를 둔 채(!) 자본주의가 소련을 반세기 동안 지배하여 왔다는 것이다. 이는 맑스주의의 가장 근본적 주장 중의 하나 즉, 역사상 이어져 온 계급사회들을 특징짓는 것은 바로 소유제 형태의 변화라는 명제에 대한 관념론적 왜곡이다.


LRP와 좌파 색트먼주의(Shachtmanism)의 해결되지 못한 모순

막스 색트먼은 미국 트로츠키주의 운동을 건설한 창건자들 중의 한 사람이다. 1939년 히틀러-스탈린 협정과 소련-핀란드 전쟁을 둘러싼 쁘띠부르주아지들의 분노에 조응하여 색트먼은 제4차 인터내셔널의 소련 방어주의라는 역사적 입장으로부터 멀어져가기 시작하였다. 그 다음 해에 치열한 분파 투쟁이 있은 후 색트먼과 그의 추종자들은 <사회주의노동자당: SWP>으로부터 분리하여 <노동자당: WP>을 설립하였다. WP에 따르면 소련이 더 이상 노동자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제국주의 세력에 대항하여 소련을 방어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색트먼에 의하면 소련은 새로운 형태의 계급사회로서 그는 이를 “관료적 집산주의(bureaucratic collectivism)”라고 명명하였다. 결과적으로 WP는 소련과 자본주의 양쪽 모두에 공평하게 반대하는 ‘제3 진영(third camp)’의 창건을 주장하였다.

그 후 15년 동안 WP는 외면상으로나마 맑스주의 ‘제3 진영’ 입장을 유지하였으나 색트먼의 정치적 변화는 계속해서 우익으로 향해갔다. 결국 그는 알버트 쉥커( Albert Shanker )와 같은 우익 노동조합 관료들 사이에서 그의 정치적 고향을 찾았다. 1962년 색트먼은 쿠바에 대한 미국의 피그만 침공을 지지하였고 더 나아가 베트남 전쟁에서 미제국주의의 충성스러운 지지자가 되었다.

재미있는 점은 색트먼이 이러한 반동적 입장을 수용하면서도 공식적으로는 그의 사회주의자로서의 과거를 비판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자신이 아직도 변함없는 사회주의자였을 것이다. WP로부터 발전해 온 LRP는 색트먼과 거리 두기를 원하는데, 이는 1960년대에 색트먼이 취한 공공연한 친제국주의적 입장들이 그가 SWP를 떠나자마자 발전시켰던 ‘제3 진영’ 입장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그들 또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관계는 이러하다. 만일 소련과 그리고 이와 유사한 경제체제들이 새로운 형태의 계급 사회를 이루고 있다고 말한다면 궁극적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에 반드시 대답을 해야만 한다. ‘그러한 새로운 사회체제는 자본주의와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 그 새로운 사회 체제는 자본주의에 비하여 진보적인 것인가, 아니면 그보다 후진적인 것인가?’ 만일 그 대답이 전자라면, 제국주의가 끊임없이 이들 나라들을 위협하고 있으므로,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소련과 그리고 다른 비자본주의적 사회들을 방어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반면에 소련은 역사적으로 후퇴한 것이라는 입장을 수용한다면, 논리적으로 소련과 소련의 동맹국들에 대항하는 제국주의를 지지할 의무를 갖게 될 수밖에 없다. 수년 동안 색트먼은 위와 같은 선택을 하기를 꺼려했었다. 그러나 결국에 그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그는 미제국주의의 편을 들었다. 그의 변명에 의하면 서방 자본주의 나라 노동자들은 적어도 소련에서 거부되고 있는 민주적 권리들을 누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LRP의 지도자 사이 랑디( Sy Landy )는 색트먼으로부터 정치적 훈육을 받았고, 색트먼 조직과 그의 후계조직의 궤도 내에서 거의 20여 년 동안 남아 있었다. LRP는, 1940년 미국 트로츠키주의 운동의 분열에서 아마도 색트먼에 대항하여 제임스 캐넌의 편을 들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당시 분파투쟁에서 근본적인 문제는 바로 러시아문제였는데, LRP도 색트먼과 마찬가지로 1936년경에 소련이 이미 더 이상 어떤 종류의 노동자국가도 아니게 되었다고 여기고 있다는 건 앞뒤가 안 맞는 태도이다.

LRP는 ‘새로운 계급’ 이론을 수용하고 전통적인 ‘국자자본주의자’의 입장을 취하는 것은, 현시대의 전반적 성격에 관한 트로츠키의 평가를 수정하는 것이고, 나아가 혁명적 사회주의 강령을 위한 투쟁을 무한정 연기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 LRP 동지들은 전통적인 제3 진영주의의 딜레마를 피하고 싶어하지만, 제3 진영주의에 대한 그들의 역사적 애착까지 버리는 대가를 치르고 싶어하진 않는다. 그래서 그 대신에 그들은 소련이 ‘자본주의’라는 주장을 덧붙임으로서 서로 모순되는 정치적 내용들을 봉합하려고 시도한다. 주관적 혁명가인 이 LRP가 왜 제3 진영의 정치논리로부터 거리를 두고 싶어하는지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알버트 쉥커와 CIA의 품으로 인도하는 길로부터 벗어나려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다. 그러나 LRP가 소련방어주의를 거부하는 한 그들은 결코 색트먼주의와 결별할 수가 없다.

이렇게 그들 자신의 뿌리에 관한 불분명한 태도는, 러시아 문제에 관한 LRP의 저작물에 왜 그렇게 많은 모순점들이 담겨 있는지 그 이유를 잘 설명해 준다. 그 모순점들 중의 하나는 제3 세계에서 자본주의적 소유제를 전복하려고 위협하고 있는 쁘띠부르주아 운동에 관한 그들의 태도이다. 뉴욕 논쟁에서 월터 달은 ‘단지 정치 체제를 운영하는 방법에서뿐만 아니라 사회 체제의 운영과 작동에 있어서 소련은 파시즘과 유사하다’고 주장하였다. “소련이 자본주의가 아니라는 대부분의 사이비 맑스주의적 주장은 히틀러 통치 하의 독일에도 동등하게 적용될 것이다.” 그런데 이와 동시에 LRP는 미국이 자금을 대주는 콘트라( contra: 산디니스타에 반대하는 반혁명군 )에 대항하여 소련에 의해 군사적으로 지지받는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를 옹호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만일 그 결과로 (쿠바나 베트남 같이 ‘국가화한 사회(statified society )’ 파시즘과 ‘유사한’ 사회를 낳게 된다면, 왜 그들 스스로 산디니스타 지지하는지에 대해 LRP는 그 이유를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가 없다.

비록 스탈린주의자들이 행한 60여 년 동안의 끝없는 배신과 소련이 겪어온 심각한 퇴보에도 불구하고,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은 그 의미가 너무도 중요해서 아직도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많은 영향력을 계속 끼치고 있다. 러시아 문제에 잘못된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있다면, 그 어느 누구도 현재 국제노동자 운동이 당면하고 있는 중요한 정치적 문제들에 올바르게 대처할 수 없다.


아래의 글은 BT를 대표하여 짐 쿨렌 동지가 발표한 발제문 중의 일부를 편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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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과 서방 세계 사이에 있어 왔던 충돌들은 7, 8년 전에 비해서는 현재 무척 잠잠해진 편이다. 왜냐하면 고르바초프가 국제적으로 미제국주의와 대치되는 문제들에서 계속해서– 아프가니스탄부터 캄보디아에 이르기까지 –미제국주의자들에게 자발적으로 항복해 왔기 때문이다. 소련의 이러한 후퇴는 페레스트로이카란 이름 아래 경제 개혁을 이루기 위하여 이루어졌다. “비용이 너무 많이 드는 외교적 부담”을 줄임으로써 그리고 제국주의를 달램으로써, 현 소련 지도부는 그들이 주요과제라고 생각하는 데에 좀 더 많은 자원과 에너지를 집중시키길 바란다. 그들이 생각하는 주요과제란 쇠약해져 가는 국내 경제를 현대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고르바초프는 시장경제에 좀 더 많은 자유를 주게 될 일련의 경제 개혁 조치들을 도입할 계획이다.

물론 서방세계의 소위 여론 주도세력들도 고르바초프처럼, 시장의 역할을 증대시키는 것이 소련의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에 마법과 같은 신비의 열쇠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미국 신문을 읽으면 고르바초프의 개혁 정책이 소련 대중들로부터 광범위하게 인기를 얻고 있다는 인상을 갖게 된다. 하지만 가끔씩 우리는 개혁을 반대하는 세력이 단지 소련 강경파 관료들만은 아니라는 보도를 접한다.

중국이 자유로운 시장경제를 허용하는 정도에 있어서는 소련보다 몇 발자국 앞서 있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하지만 몇 달 전부터 우리는 중국 정부가 개혁 정책의 속도를 아주 많이 늦추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있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단지 경제 계획부에 있는 관료 몇 명의 불만이 점점 커져 갔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개혁 정책이 수반하는 높은 물가, 증가하는 불평등과 잔인한 폭리 행위 등이 특히 도시에서 정권에 대항하는 대중적 분노를 불러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뉴욕타임스조차도 중국과 비슷하게 소련 내부에서 페레스트로이카에 반대하는 대중적 저항이 형성되고 있는 중임을 때때로 암시하는 기사를 싣기도 한다. 예를 들어 새로 생성된 소련 내 사회주의자 그룹들의 대변인인 보리스 카갈리츠키(Boris Kagalitsky)는 이렇게 쓰고 있다.

“당연히 보수적인 서구전문가들은 이 경제 개혁을 찬성한다. 그러나 소련 내의 우리도 찬성해야 할까? 독자투고나 여론조사 또는 이곳저곳에서 벌어지는 갈등은 그 개혁에 대해 대중적인 저항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자유경쟁’을 선전하는 자들은 단지 노동자들을 더욱 더 많이 일하게 만들려고 원하고 있으며, 예전에 받던 임금만큼이라도 받기 위해서는 예전보다 더욱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사실을 노동자들은 점점 더 잘 인식해 가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특권층인 과학자 및 관리자 엘리트들은 걱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엘리트를 위한 페레스트로이카는 대중들을 위한 페레스트로이카와 서로 충돌하게 될 것이다.”

1988년 5월 10일자 뉴욕타임스에 실린 다음과 같은 기사를 참고해 보자.

“(페레스트로이카의 문제점을 다룬 기사에서 기자는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고르바초프의 경제학자들은 그에게 말하길, 만일 고르바초프가 후진국인 러시아를 현대적 생활수준으로 높이고 또한 국제 시장에서 경쟁력이 있게 만들려면 소련은 여태까지 창의성을 억눌러온 값싼 물가, 보장된 직업 그리고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사회보장제도라는 안전망의 그물을 느슨하게 만들어야만 할 것이다.

원칙적으로 고르바초프는 이에 동의한다. 그는 사람들이 그들의 노동과 창의력에 대한 보상을 받아야지, 단지 직장에 출근한다는 이유만으로 보수를 받아서는 안 되며, 사회는 자기의 소임을 다하지 않는 자들의 응석을 절대로 받아주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시장경제의 무자비함은 70여 년 동안 소련 통치 하에서 강화되어 온 정의와 평등의식을 침해하고 있다.”

위의 보도기사는 우리에게 소련과 중국 사회의 중요한 한 측면을 말해주고 있다. 즉, 서방의 노동자들과는 달리, 러시아와 중국의 노동자들은 부자와 권력자들 덕택이 아니라, 자신들의 권리를 바탕으로 살아간다는 의식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믿음은 8년 동안 레이건 치하에서 살아온 사회에서는 마치 환상처럼 보이겠지만 이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 자신들은 그렇게 살 권리가 있다는 믿음과 의식은, 소련의 경우 환상이 아니라 경제적 현실에 기반을 둔 실재이다. 즉, 소련과 중국, 동유럽 그리고 북한이나 쿠바 같은 경우에 계획 경제를 구성하는 생산수단이 사적이 아니라 국가적 소유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더 나아가 경제계획을 작성하고 실행해야 할 책임을 진 관료들이, 아무리 무능하고 아무리 권력을 남용한다 하더라도, 이들은 여전히 필연적으로 대중이 기본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들을 제공해 주어야만 한다. 최소한 소련 경제는, 사적 이윤추구나 무정부적인 시장의 힘이 아니라, 인간의 요구와 필요라는 원칙에 기초하여 작동되고 있다.

이와 같은 계획경제의 원칙이 소련 경제 체제의 핵심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자본주의 점진적 복귀(그 완전한 복귀를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폭력적인 사회변동이 있을 터인데)를 위한 어떠한 시도에도 [퇴보한 또는 기형적 노동자국가의 노동자들이] 저항하는 것이다. 또한, 자본주의 강대국들이 끊임없이 소련을 가차없이 적대하는 이유는, 바로 소련에 이 계획경제 체제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볼셰비키그룹은 소련경제의 이러한 비자본주의적 토대를 방어할 가치가 있다고 여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확신한다. ‘레이건, 대처 그리고 고르바초프 추종자들의 지배적인 생각과는 반대로, 소련과 중국 노동자들의 권리 의식은 마땅한 것이고, 그러한 권리를 지탱해주는 경제 조건이 폐기되는 것이 아니라 보전되어야 한다. 오늘날 소련을 시달리게 하는 것은 관료들의 잘못된 관리로부터 비롯된 결과이지 계획경제의 원칙 자체가 잘못되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자유시장’ 체제를 도입하는 것은 올바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소련 노동자들이 국가의 주인으로서 자신들의 정당한 자리로 복귀될 때, 빈곤과 자본주의의 유혹에서 벗어나 더욱 능률적이고 책임감 있게 일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것들을 믿지 않는다면, 사회주의자 되기를 포기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소련과 이와 비슷한 사회들의 ‘계급 성격’에 관한 문제를 살펴볼 때 중요한 이론적 문제들이 있다. 고전적 맑스주의의 전통에 따르면, 현대 사회에서 자본주의를 전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유일한 계급은 바로 노동자계급이다. 고전적 시나리오에 의하면 일단 노동자 계급이 부르주아 계급에 대항하여 승리하게 되면 이들을 민주적이고 집단적인 통치 하에 경제를 관리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20세기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사회화된 생산수단 소유제와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지배 사이에 적어도 일시적인 균열이 존재하고 있음을 목격하고 있다. 비록 소련에 사회화된 소유제가 존재한다고는 하지만, 스탈린주의자들을 제외하고는 그 아무도 러시아 노동자들이 정치적 힘을 행사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는 못할 것이다. 모든 공적인 문제와 마찬가지로 경제에 관한 모든 결정은 강압적으로 자신들의 특권과 권력을 수호하는 국가 관료들과 소수의 공산당 간부들에 의해 내려진다. 이러한 관료층과 이들이 지배하는 사회의 성격을 우리는 어떻게 규정지을 수 있을까?

레온 트로츠키는 그의 생애 마지막까지 소련에서 비록 노동자들이 그들의 권리를 박탈당한 것이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소련이 아직도 노동자국가로서 남아있다고 주장하였다. 트로츠키는 어떠한 의미에서 소련이 비록 퇴보하였을지라도 노동자국가라고 주장한 것일까? 트로츠키에 따르면, 비록 스탈린주의자들이 노동자들을 정치적으로 탄압하고 혁명의 이념에 충실한 핵심 혁명가들을 숙청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10월 혁명의 성과물 중에서 그들이 제거해 버릴 수 없었던 한 가지는  바로 소련국가의 경제적 토대 즉, 생산수단의 국유화와 무역에 대한 국가 통제이다.

생산수단 국유화 같은 조치들 그리고 이와 연관된 여러 법적 제 장치들은 단지 혁명의 초기에 노동자들의 민주적 통치를 이루기 위한 물질적 기초가 될 수도 있지만 소련과 같은 경우에는 스탈린주의 관료와 같은 권력 강탈자들의 지배를 위한 토대가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스탈린주의자들은 때때로 자신들의 경제적 토대( 국유화된 생산수단 )를 자본주의자들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할 수밖에 없도록 강요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소련 방어를 위하여 스탈린주의자들이 사용하는 방법은 본질적으로 부적절하다고 트로츠키는 주장했다. 그는 궁극적으로 소비에트 권력은 오로지 노동자의 민주주의를 확대시키고 혁명의 국제적 확산과 전개를 통해서만 구제될 수 있다고 하였다. 스탈린 관료들은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를 침해하고 세계혁명을 목 졸라야만 자신들의 지배를 공고히 할 수 있기 때문에, 장기적 관점에서 소련을 방어할 능력이 그들에게 없음을 증명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스탈린 관료체제는 본성상 독자적으로 어떠한 역사적 역할도 수행해 낼 수 없는 불안정한 사회적 집단이다. 이 관료 체제는 국제 부르주아지나 아니면 러시아 노동자들 중, 둘 중 하나에 의해 전복 당하게 될 것이다. 만일 후자( 노동자들에 의한 )라면, 스탈린주의란 단지 사회주의로 가는 도중에 생긴 “끔찍한 퇴행” 정도로만 기억될 것이라고 트로츠키는 말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트로츠키는 2차 세계 대전이 결정적인 시험대를 제공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세계 2차 대전은 트로츠키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소련의 운명을 결정짓는 결정적 시험대가 되지 못했다. 스탈린주의 관료체제는 히틀러에 의해서도 아니면 러시아노동자들에 의해서도 전복되지 않았다. 더 나아가 전쟁 후에 스탈린의 러시아와 유사한 정권이 세계의 다른 나라들로 확대되었다. 이러한 사태 전개는 트로츠키 추종자들에게 다수의 이론적 문제들을 던져주었다. 트로츠키는 물론 사회화된 소유제를 실현시킬 유일한 사회계급이 프롤레타리아 계급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전후의 새로운 소비에트 스타일 정권들을 통치하지 않을 뿐만이 아니라 그러한 정권들을 탄생시키는 데 노동자 계급이 거의 아무런 역할도 수행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존재한다. 동유럽의 대부분 정권들은 러시아의 군사적 개입을 통해서 성립되었고, 중국과 유고슬라비아의 경우에는 스탈린주의자들에 의해 지도된 농민 군대의 승리에 의해 성립되었다. 그렇다면 어떠한 논리로 이러한 국가들을 아직도 노동자 국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일까?

이러한 전후의 상황 변화는 또한 위의 문제와 연결된 동등하게 중요한 하나의 문제를 제기했다. ‘만일 집산적 소유제가 비프롤레타리아 세력들에 의해 수립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이는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역할에 관한 전체 맑스주의 전통을 다시 평가해야할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닐까? 맑스주의자들이 노동자계급에게 항상 부여해 오던 역사적 임무를 소련 관료집단과 여러 제 3세계 농민 지도자들이 수행해 낼 적절한 능력이 있음을 증명한 것은 아닐까?’ 이와 같은 질문에 ‘그렇다’고 답을 내린 자들이 파블로주의라고 칭하는 정파를 구성하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들은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트로츠키주의자들을 당황케 하였으며, 그리고 계속해서 오늘날 수많은 자칭 트로츠키주의자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파블로주의에 맞서 정통 트로츠키주의자라고 주장할 수 있다면, 이는 우리가 전후에 전개된 상황으로 제기된 여러 문제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또는 트로츠키의 사망 이후 50여 년 동안 발생한 모든 어려움에 대한 해답이 트로츠키의 저작에 모두 담고 있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다. 진정한 이유는, 스탈린주의 관료제와 그 역사적 의미에 대한 트로츠키의 본질적 평가가, 구체적인 상세함까지는 아니더라도 전반적인 의미에서, 시대가 던지는 시험을 버텨내어 아직도 건재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의 토론 대상인 대부분의 국가들이 노동자계급의 적극적 개입 없이 수립되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제기되어야 할 올바른 질문은 과거에 이들 국가들이 노동자 혁명에 의해 수립되었는가의 여부가 아니라 미래에 이들 국가들이 노동자계급의 민주적 통치 없이도 계속해서 생존해 나갈 능력이 있는가의 여부에 대한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비록 스탈린주의 관료체제가 러시아에서 트로츠키가 추측한 것보다 더 오랫동안 유지되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스탈린주의자들이 관장하고 있는 집단소유제는 그들의 보호 하에서 본성적으로 불안정하고 불확실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사회주의적 토대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집단 소유제가 반드시 노동자가 민주적으로 통치하는 국가 권력에 의해 보완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노동자 민주주의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의 경건한 소원 정도가 아니라 집단 소유제의 생존에 불가결한 실질적 필요조건인 것이다. 집단 소유제의 미래는 정치혁명을 수행하여 경제를 노동자의 통제 하에 둘 수 있는 노동자 계급의 역량 여부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들 나라들은 기형적 노동자국가라고 불릴 수 있을 것이다. (단, 소련은 예외적 경우로서 퇴보한 노동자국가[역주--프롤레타리아혁명에 의해 건설된 노동자국가가 이후 스탈린주의 관료에 의해 변질되었다는 의미에서. 프롤레타리아혁명 없이 스탈린주의자들의 지도하에 이루어진 쁘띠부르주아 농민혁명을 통해 건설되거나, 소련 승전의 결과로 2차 대전 이후 건설된 다른 여러 계획경제 체제와 구별하기 위해 전자는 퇴보한 노동자국가, 후자는 기형적 노동자국가로 칭한다.]로 규정된다.)

이와 같은 관점은 집단 소유제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존재하는 의심의 여지없는 성과물과 아울러 그 한계점을 동시에 조명하고 있다. 이들 대부분의 나라들은 경제적으로 미발전국이다. 구 지배계급들을 몰아내고 경제의 주요부분을 장악함으로써 가장 소름끼치는 불평등의 일부를 청산해 내는 데 성공할 수 있었고 물질적 후진 상태를 개선하였다. 특히 의료, 주택, 교육, 그리고 여성의 지위 부분에서 광범한 개선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들 후진국들은 사회주의의 필요조건인 최고의 물질적 풍요 수준을 그들의 독자적 힘으로 달성하지 못하고 있다. 실제로 이들이 경제적으로 서방세계에 한참 뒤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나라들은 끊임없이 군사적 경제적 압력에 시달려왔다. 이들 국가들은 일시적으로 이와 같은 압력을 견뎌낼 능력이 있을지는 몰라도, 장기적 관점에서 볼 때 이들 나라들이 살아남고 더 나아가 사회주의로 가기 위한 유일한 희망은 (물질적 풍요 수준에 도달한 ) 서방 제국주의 나라들의 사회주의 혁명에 있다.

바로 정확히 이들 여러 스탈린주의 관료체제는 국제 혁명으로 가는 도정에서 장애물로서 작용하며, 반드시 1917년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들을 고무시켰던 그 국제주의로 무장된 노동자 계급의 정치혁명에 의해 제거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는 이미 성취된 성과물들을 보전하지 않고서는 일어날 수가 없다. 이 성과물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이다. 이 사회적 성과를 보전하기 위해서는 결국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이들 국가들을 무조건적으로 방어할 것을 요구한다. 바로 이것이 트로츠키가 제 4 인터내셔널의 강령에 반영시켰던 입장의 정수이며 또한 이를 우리는 오늘날 유효한 것으로서 옹호한다.

자, 그럼 오늘 토론에서 우리의 반대편에서 논쟁을 편 LRP의 정치적 입장을 살펴보기로 하자. LRP에 대해 논하기 전에 나는 트로츠키주의 운동의 역사에서 있었던 에피소드 하나를 먼저 얘기하고 싶다. 영국인 게리 힐리( Gerry Healy )는 수십 년 동안 트로츠키주의 운동의 정통파를 지도하였었다. 1961-62년경, 게리 힐리는 어떤 사건의 발생 이후 이론적 딜레마에 부딪히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쿠바혁명이었다. 카스트로는 아바나에서 막 권력을 장악하고 주요 생산수단을 국유화하였다. 아무리 평범한 사람도 이러한 사건 전개를 보고 나면 카리브해에 위치한 섬 쿠바에서 사회혁명이 막 일어났다고 결론내릴 것이다. 하지만 게리 힐리에게는 그렇게 결론내릴 수 없는 문제가 있었다. 그 문제란 바로 카스트로와 그가 이끈 게릴라들이 트로츠키주의자도 아니었고 스탈린주의자도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사실상 그들은 노동자 운동의 일부가 전혀 아니었으며, 단지 급진적 쁘띠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이었을 뿐이다. 트로츠키와 사회주의 고전에 따르면 쁘띠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은 결코 사회혁명을 이끌 수 없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와 같은 일이 쿠바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가 바로 게리 힐리의 딜레마였다.

한 동안의 심오한 이론적 고찰 후에 힐리 동지는 극히 단순 명료한 해결책에 도달하였다. 힐리에 따르면 쿠바에 혁명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카스트로가 아바나를 지배하기 이전처럼 쿠바는 현재에도 단순히 자본주의 국가로서 남아있을 뿐이라고 한다. 현재 마이애미에 거주( 망명 )하고 있는 쿠바의 부르주아지들이 이와 다른 견해를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전혀 힐리 동지를 걱정시키고 있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이 에피소드를 이야기하는 이유는 트로츠키주의 운동에 너무도 익숙해진 하나의 현상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나는 이를 부정( denial )에 의한 설명이라고 부르겠다. 이들의 방법이란 정말 아주 간단하다. 실재 세계에 발생한 어떤 현상이 그들의 이론에 도전을 해오는 경우, 그들은 단순히 그 현상의 존재 자체를 부정해 버린다. 이러한 방법으로 당황하게 만드는 문제를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힐리는 이 부정에 의한 설명이란 방법을 독점하지 못하였다. 사실상 이 방법론은 LRP 멤버들에게도 전수되었다. LRP 동지들에 의하면 쿠바에 사회혁명이 발생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지구상 어디에도 자본주의가 아닌 나라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들은 말하길 러시아가 자본주의로 전환된 것은 오래전의 일이고, 그 이후에 세계 어디에서도 사회혁명이란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소련이 자본주의국이란 주장을 들으면 우리들 중 몇몇은 소련이 독특한 형태의 자본주의 즉, 생산수단이 국가에 의해 소유된 국가자본주의를 대표한다고 거의 40여 년 전에 주장한 토니 클리프의 저작들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LRP는 이 평범한 국가자본주의 이론(토니 클리프의)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들은 자신들이 절대적으로 독특하고, 전례가 없고 완전히 그 어떤 것과도 비교될 수 없는 그러한 이론을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싶어한다. 그들의 이론은 소련이 특별한 형태의 자본주의도 아니며, 오히려 전적으로 평범한 경쟁 자본주의를 대표하고 있다고 결론내린다. 그들에 따르면 러시아 밖 어느 곳에서도 노동자혁명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동유럽, 중국, 북한 그리고 쿠바는 완전히 가치법칙에 의해 지배받는 자본주의 사회라고 한다.

내가 아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본주의를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 즉, 자본가계급의 존재 그리고 시장과 이윤을 위한 그들 사이의 경쟁 등과 같은 현상과 연관시킨다. 또한 내가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이 소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위와 같은 현상들이 소련에 그 어떠한 주요한 측면에서도 존재하지 않고 있다고 믿고 있다. 그 사람들 중 몇몇 이름을 들자면 예를 들어 레이건이나 대처가 확실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 중의 일부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우리 모두가 표면적으로 드러난 잘못된 현상에 의해 속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확실한 증거와 전반적으로 일치하는 의견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전격적으로 다른 주장을 내세울 수 있다면, 이를 뒷받침할 꽤 강경한 논리들을 그들이 생각해 내어야만 할 의무가 있는 것처럼 보이며 또 이 모든 것을 증명해낼 짐은 완전히 그들 자신들에 달려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입장을 뒷받침할 그 어떤 튼튼한 주장도 들어볼 수가 없다. 그 대신 우리는 다음과 같은 괴이하고 모순에 가득 찬 주장들만을 들을 수 있을 뿐이다. ‘러시아 혁명의 결과로서 소련의 산업과 은행은 국유화되었고, 대외 무역은 국가 통제 하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1930년대 중반 즈음 스탈린 관료체제는 국유제를 훔쳐서 이를 노동자 계급에 대항하는 것으로 전환시켜 결국 자본주의를 복구하게 되었다.’

첫째로, 이는 단순히 꽤 대담한 자기 단언일 뿐이지 역사적 증거물이나 이와 같은 것들로부터 추출된 객관적 주장은 아니라는 것이다. 둘째로, LRP는 어떻게 스탈린주의자들이 자본주의를 복구했는지에 대해 결코 제대로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정말 스탈린주의자들이 국가 재산을 사유화시켰는가? 만일 그랬다면 도대체 언제? 그리고 도대체 어떻게 LRP를 제외한 다른 어떤 이도 그 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는가? 보통 사회혁명과 반혁명은 사람들의 주의를 잘 끄는 경향이 있는데도 말이다. 만일 스탈린주의자들이 생산수단의 사적소유 제도를 복귀시키지 않고도 자본주의를 복구했다고 혹시 LRP가 주장하는 것이라면, 이는 자본가계급이나 자본주의소유제 없는 자본주의라는 해괴한 논리로 빠져 들어가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여러 이론들과 이의 실천적 결과들의 그릇됨을 증명해 줄 수 있는 실재 세계가 있다. 예를 들어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들은 미국의 꼭두각시 정권을 전복시켰다는 죄로 거의 십여 년 동안 미제국주의자들의 봉쇄 하에 지내야 했다. 산디니스타는 계급으로 분열된 사회에서 계급 중립적 입장을 취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만일 이들이 니카라과 부르주아지의 재산을 몰수하고 주요 농장과 공장들을 국유화했다면, 과연 LRP는 이러한 행동에 대해 어떠한 입장을 취했을까? LRP의 주장대로라면, 생산수단이 사적 소유자의 손아귀에 있든 아니면 국가 소유가 되든, 아무런 차이도 없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위의 두 가지 소유 양식이 똑같이 자본주의적이기 때문이다.

LRP는 지난 40년 동안 제국주의자들이 겪어온 패배들에 대하여 설명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비록 기형적이나마 중국의 혁명은 광범한 시장과 착취할 수 있는 노동력을 자본주의자들의 손이 닿을 수 없는 곳에 두었다. 이와 똑같은 일이 베트남 전쟁 이후에도 발생하였다.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듯이 미국 통치자들은 베트남 민중들의 ‘자유’에 대해서 전혀 관심도 없으며, 오로지 그 누구도 제국주의자들에 대항하여 사회혁명을 수행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LRP에 의하면 미국과 베트남 꼭두각시 정권에 의해 수행된 반혁명 전쟁은, 마치 [공산당에 맞선 ] 미국의 지원을 받던 국민당 정부나 [북한에 대한 ] 제국주의 연합국(UN)이나 [쿠바 정권에 대한 ] 피그만에서 구사노( gusano: 쿠바에서 반혁명분자를 일컫는 용어 )가 수행한 전쟁들처럼, 제국주의자가 뭔가 오해해서 발생한 결과일 뿐이다. 만일 제국주의자들이 LRP의 조언에 귀 기울였다면, 그들이 적이라고 생각했던 이들이 사실은 변장을 한 친구들이며 이들이 원하는 것은 약간 변형된 형태의 자본주의를 수립하려는 것 이외의 다른 어떤 목표도 없다는 그들의 진짜 의도를 알아차렸을 텐데 말이다.

제국주의자들은 베트남에서 쫓겨났다. 우리의 견해로는 이것은 지구상의 모든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자들의 승리이며 또한 착취자들에게는 패배를 의미한다. 비록 스탈린주의 지도부에 의해 베트남 사회가 기형적으로 발전되었다 하더라도, 바로 이 승리 때문에 포드 정권은 1976년 앙골라에 개입할 수가 없었으며 레이건은 그의 온갖 협박과 호언장담에도 불구하고 산디니스타 정권을 전복시키지 못한 채 백악관을 떠나야만 할 것이다. 이렇듯 인도차이나에서 제국주의 패배의 예는 세계의 모든 억압받는 자들에게 즉, 산디니스타로부터 필리핀의 신인민군에 이르기까지, 신식민지적 지배에 대항하는 다른 여러 세력들에게 영감을 제공하였다. 우리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지배가 베트남의 정글에서 때 이른 죽음을 맞은 것에 감사한다. 하지만 LRP 동지들에게 이 역사적 사건은 단지 국제자본주의적 지배의 테두리 안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다툼에 지나지 않을 뿐이며, 결국 이들은 그들의 당연한 논리적 귀결로서 베트남 전쟁에서 중립적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중립적이지 않았다. 지난 세기 동안 진행되어온 ‘동-서’ 진영의 충돌과 이것이 가져온 그 모든 위험 그리고 유혈 사태 배후에는 노동자계급에게 중요한 이슈가 존재하며, 그 이슈는 바로 인류가 자본주의적 길을 따라 계속 나아갈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 하는 문제라고 우리는 확신하였다. 이러한 투쟁 속에서 우리는 어느 한쪽의 편을 들 수밖에 없다. 그 편이란 자본의 지배로부터 결별해 나가고자 노력하는 세력과 이미 결별을 한 모든 세력들을 의미한다. 러시아 문제에 관한 LRP와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차이는 궁극적으로 바로 이 문제로 귀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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