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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출처 – 국제볼셰비키그룹(IBT)



반동적인 낙태반대 운동을 분쇄하자!:

사회주의 혁명을 통한 여성해방을!


 

[   ]…역주

 

아이를 가질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미국 여성들의 권리가 공격 받고 있다. 공공의료시설의 낙태시술을 금지한 미주리법안을 지지한 7월 3번째 미국 대법원의 반동적 판결은 미국 전체의 낙태불법화로 향하는 전조이다. 웹스터 판결(Webster v. Reproductive Health Services)은, 낙태권리를 지지한 1973년의 로 판결(Roe v. Wade)을 뒤집지는 않았지만 조짐이 나쁘다.

웹스터 판결은 레이건파(派) 대법원 다수의 우익 의제 가운데 하나이다. 그 판결은 인종차별과 성차별에 대한 여성과 소수자의 권리를 제거하는 일련의 결정들과 맥이 닿아 있다. 동시에 법원은, 소수자우대정책(affirmative action programs)을 통해 여성이나 흑인들이 직장을 얻는 소위 ‘역차별’을 뒤집고자 하는 백인남성들의 손을 들어줬다.

지난 여름 캐나다에서 흥미로운 두 개의 사건이 있었다. 두 남성이 전 애인들의 낙태를 금지하는 법원 강제명령을 얻어낸 것이다. 7월, 바바라 도드는 항소법정에서 원심을 파기하기까지 1주일 동안 그 명령으로 낙태를 거부당했다. (딱한 뒷이야기에 따르면, 도드는 낙태반대 광신도들이 조직한 기자 회견에서 그녀의 결정을 부인하고 남자 친구와 화해하기로 밝혔다고 한다.) 다른 사건은 영웅적 퀘벡 여성 찬탈 데이글 이야기이다. 그녀는 법정에서 전 남자 친구와 그녀의 낙태권을 놓고 한 달 동안 논쟁해야 했다. 결국 캐나다 고등법원은 그녀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그 결정을 내리기 이전, 데이글은 이미 낙태를 했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모욕적이고 고통스런 경험 속에서 지켜낸 데이글의 용기와 자기 존엄은 대중적 지지물결을 일으켰고, 그로 인해 법정은 그녀를 비난하지 못했다.

미성년자가 낙태수술을 받기 위해서는 부모에게 미리 알려야 한다는 보건법을 통해, 여성의 권리에 대한 미국대법원의 공격이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 해 미국엔 백만이 넘는 십대 임신(14세 이하 3만 정도를 포함하여)이 있었다.

임신할 정도로 성숙한 여성은 누구든 낙태 문제를 부모와 의논할지 말지도 결정할 수 있다. 교제를 하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부모와 상의하는 젊은 여성은, 아마 앞으로도 계속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게 될 것이다. 부모고지법은 젊은 여성들의 성적 능동성을 제약하기 위해 고안된 법이다. 단지 임신중절뿐만 아니라 출산조절과 성병치료를 포함하는 의료행위에 대한 그들의 사적 자유를, 그 법은 총체적으로 침해하는 것이다.

낙태권은 이미 심각하게 제한되어 있다. 낙태 통계를 연구한 알란 거트마처 연구소의 발표에 따르면, 최근 미국 3,116개 군(郡: county) 가운데 82%에 낙태를 시술하는 의사나 의원 또는 병원이 없다. 그것은 1980년 이래 4% 증가한 수치이다. 몬태나 주(州) 전체에 단지 6명 정도의 의사만 아직 낙태시술을 하고, 북 미네소타 주의 24개 군이 있는 덜루스 시(市)엔 의원이 하나밖에 없다. 그리고 덜루스엔 시술할 의사가 없기 때문에 시술을 위해선 미니애폴리스에서 의사가 비행기를 타고 와야 한다.

낙태허용여부를 각 주에서 결정하도록 한 것은, 사적 의료를 받을 수 없는 여성들은 실제적으로 많은 주에서 낙태를 받을 수 없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대법원의 판결은 반동적인 반(反)낙태 공격에 맞선 선택존중(pro-choice)[낙태찬성] 정서를 자극했다. 이것은 강간이나 근친상간일 경우 낙태를 돕는 기금을 복원하도록 한 미국하원의 10월 투표(조지 부시 대통령이 거부했지만)로 반영되었다.

같은 주(週)에, 플로리다 주지사 봅 마르티네즈의 낙태 제한 시도는 거부되었다. “의원들은 그들의 행동이 선거구민들의 의견을 반영한 것이라고 말한다. 선거구민들은 낙태법을 더 강화하려는 연방대법원의 결정에 반발하고 있다.” (뉴욕 타임스, 10월 12일)

안전한 낙태는 지불능력이 있는 사람들에겐 항상 열려 있다. 그러나 개인 의사들에게 높은 의료비를 지급할 능력이 없는 십대와 빈곤층 그리고 노동계급 여성에게, 낙태거부는 생사의 문제가 될 수 있다. 그것은 뒷골목 낙태라는 과거의 위험한 상황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생명의 권리파(right-to-lifers)’[낙태반대파]: 자본의 이익에 봉사하는 선택권 반대 반동들

낙태 반대 운동은 노동계급과 피억압인민이 지난 5십 년간 따낸 권리를 빼앗기 위한 반동적 부르주아 공세의 일환이다. 이 운동을 이끄는 공화당은, 가톨릭 신자가 다수이고 전통적으로 민주당을 지지해 온 저임금 계층 중에서 지지기반을 구축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레이건 정부의 제국주의적 전쟁불사 정책은 이 선거권자들에게 먹혔다. 그러나 그것은 ‘세속적 인도주의’와, 그리고 공화당 우파와 기독교근본주의 사이를 돈독케 한 ‘전통적인 가족의 가치’를 방어하는 것과 충돌했다.

대부분의 사회적 반동처럼, 종교 우익의 부활은 부르주아지와 같은 근원을 가진 것은 아니다. 그것은 지난 25년간의 사회적 변화에 대한 소부르주아와 백인노동자 중 가장 후진적이고 무지한 계층의 신경질적인 반동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그 기원에 관계없이, 그러한 운동은 지배계급에게 대단히 유용하다. 사회에 대한 이성적 인식을 가로막는 모든 형태의 허위의식, 편협한 생각 그리고 몽매한 편견은 궁극적으로 당대의 사회 질서를 떠받치는 기둥으로 봉사하게 된다. 생계를 점점 어렵게 하는 것이 신의 뜻이라고 믿고 낙태 시술은 악마의 뜻이라고 믿는 노동자들은, 삶의 수준의 하락이 인간의 필요보다 이윤을 앞세우는 비이성적 경제체제 때문이라고 이해하는 노동자들보다, 자본가들 그리고 국가에 훨씬 덜 위험하다.

낙태를 원하는 여성을 가로막는 데에 헌신해 온 ‘구조작전(Operation Rescue)’이라는 조직이, ‘가족옹호’ 세력의 공격을 대부분 앞장 서 왔다. 이 사악한 광신도 집단은 1988년 민주당 전국총회 기간 낙태시술 병원에 대한 연이은 봉쇄 시도로 전국적 관심을 모았다. ‘가족옹호’를 지향하는 반동적 사회운동은 낙태불법화만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 평등권, 성소수자 권리, 성교육, 10대들을 위한 출산조절 그리고 노골적인 성 표현물(일명 ‘포르노’)의 출판 등도 역시 반대한다. 소위 행복추구권은 상대방의 의사 여부에만 오로지 제한되는 성적 자기결정권을 반드시 포함해야 한다.

자연스럽게 낙태반대운동은 학교에서의 ‘창조론’ 교육과 기도를 옹호하는 자들과 크게 겹친다. ‘생명옹호론자들(Pro-Lifers)’들은 본능적으로 과학과 의료의 진보가 그들의 적이라고 느낀다. 이것은 자신의 집에서 개인적으로 임신 중절할 수 있는 프랑스제 알약인 RU486에 대한 그들의 광적인 반대(지금까지 효과적인)로 입증되었다. 이 알약을 매달 2,000 명의 프랑스 여성들이 사용한다. 만약 미국에서 이 알약을 사용할 수 있다면, 낙태시술 병원을 실제적으로 사라지게 할 것이다.

그 약을 공급하는 프랑스 루셀우클라프 제약회사는 아직 프랑스 외의 나라에서 그 약을 시판하지 않고 있다. 그 북미 지사인 Hoechst-Roussel은 연방정부의 압력과 낙태 반대 고객층을 존중하여 판매허가조차 신청하지 않고 있다. 당분간 북미 여성들은 그 약을 암시장에서 구입할 수밖에 없다.

 

핵가족의 쇠락

반(反)선택 광신도들이 ‘삶의 고결함’을 소리 높여 외치는 것은 진짜 문제를 감추기 위한 종교적/이념적 위장일 뿐이다. 진짜 문제는 과거 몇 십 년 동안 핵가족이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난 세기 동안 승승장구해 온 미제국주의는 아빠는 일하러 가고, 엄마는 집에 머물러 아이를 키우는 식의 ‘전통적인’ 핵가족을 보존할 수 있었다. 노동계급의 경우 남자는 임금노예였고, 엥겔스에 따르면 여자는 “노예의 노예”였다–먼저 노동계급의 한 사람으로 그리고는 여자로.

집에 고립되고 갇혀서, 전통적 핵가족의 아내/엄마는 남성 임노동자를 위한 심리적 ․ 정서적 원조를, 그리고 자녀들에겐 안전하고 사랑스런 환경조성을 책임진다. 그러나 대부분의 여성들에게 가정은 안식처가 아니라 감옥이다. 맑스주의자는 항상 여성의 노동 참여를 권장해 왔다. 주부로서의 프롤레타리아 여성은 노동계급의 일부이긴 하지만 원자화되어 있고 무력하다. 오직 생산에 참여할 때에만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인 계급투쟁에 직접 참가할 수 있게 된다.

지금 노동자 가정의 딜레마는, 한편으론 맞벌이를 해야만 먹고 살 수 있는 정도로 임금 수준이 떨어지고 있는데, 자본주의 사회는 전통적인 노동분담이나 핵가족에 대한 대체물을 제공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점점 더 많은 여성들이 오늘날 전일제 직업을 가지고 있다. 고립된 집과 생계부양자인 남편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 많은 여성은 최소한, 억압적이고 행복하지 않은 결혼에서 탈피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이혼율 증가로 표현된다. 게다가 교육받은 전문직 여성의 경우, 결혼이 필수적인 일이 아니게 되었고, 피임의 광범한 사용과 낙태는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경력을 쌓을 수 있게 하였다.

이러한 남성에 대한 여성의 의존 약화는, 가족에 주입된 권위와 복종의 틀이 보다 큰 사회 계급 제도에 필수적이라는 것을 직관적으로 인식하는, 종교 우파들을 자극해 왔다. 가족의 소멸에 대한 신경질적 반응은, 1970년대 중반 이후 제리 파월의 <도덕적 다수파(Moral Majority)>와 그 유사한 운동단체들 같은 우익 근본주의자들에 의해 ‘여성을 작업 현장에서 내쫓고 가족으로 돌려보낼 것’을 주장하는 운동을 벌인 기초이다.

이 사회에서 여성 문제는 또한 인종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흑인(그리고 다른 소수자) 노동계급 여성은 세 겹으로 억압당한다. 노동자로, 흑인으로 그리고 여성으로. 평등한 교육기회의 박탈과 고용 차별은 흑인들의 대를 잇는 만성적 실업을 낳았고, 그 결과로서의 가난은 흑인 가정의 붕괴를 가속화했다. 유례없이 많은 수의 흑인 아이들이 홀부모 아래에서 그리고 가난에 찌든 가정에서 자라고 있다. 1950년엔 9%의 흑인 가정이 홀부모였으나, 1970년에는 이 수치가 3분의 1까지 치솟았다. 오늘날[이 글이 발표된 1990년]엔 아이가 있는 흑인 가정 전체의 반이 보통 엄마만 있는 홀부모 가정이다. 인종차별적인 미국 밑바닥의 가난한 삶은 기가 막히게 운이 좋은 몇을 제외하고는 빠져 나갈 수 없는 잔인한 덫이다. 점점 더 많은 수의 흑인 아이들이 그 속에서 살고 있다.

 

부르주아 페미니즘과 사이비 좌익

지난 4월 부르주아 여성조직인 전국여성기구(National Organization for Women: NOW)는 낙태권을 방어하는 대규모 행진을 워싱턴에서 조직했다. 그 행진 이후 NOW의 회원은 4만 명으로 늘었고 지금은 20만 명을 넘어선다. 이 사건은 시류에 편승할 기회를 늘 엿보는 여러 기회주의 좌익조직들의 관심을 끌었다. 국제사회주의조직(ISO)의 사회주의노동자(Socialist Worker) 8월 호의 “NOW는 이 기회를 날려버릴 것인가?”라는 머리기사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낙태권에 대한 사회주의자와 그리고 다른 지지자들은 NOW 회원의 급증을 환영해야 한다.….” 주관적인 맑스주의 조직인 ISO는 자신들의 역할이 NOW의 옆구리를 쿡쿡 찔러 좌측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조언을 했다. “만약 동맹을 건설하려 한다면, 그것은 NOW가 지금 추구하고 있는 부르주아 정치가들과 환경주의자들보다는 반인종차별주의자들 그리고 노동조합원들과 같이 해야 한다.”

동일한 이름의 조직이 펴내는 사이비 트로츠키주의 신문 사회주의행동(Socialist Action: SA)은 “여성운동의 지도자들”이라고 따뜻하게 치켜세우며, 다양한 부르주아 페미니스트들(NOW 지도자를 포함하여)의 연설과 인터뷰를 여러 달에 걸쳐 특집으로 내보냈다. 실제로 SA 회원들은 안에서 압력을 가하기 위해 NOW에 가입하고 있다. NOW의 몇몇 여성들이 그들의 동기를 “의심”하고 “만약 우리가 평등을 [이 체제 속에서] 성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 체제 속에서 평등을 위해 싸우는 NOW 같은 조직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사회주의행동, 1989년 7월)”고 묻는다고 그들은 보도한다. SA는 “우리는 NOW처럼 독립된 대중적 페미니스트 조직이 필요하다.”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SA는 NOW와 낙태권 운동에 중요한 공헌을 해왔다!”라고 선언한다. 동시에 SA는 매우 조심스럽게, NOW가 “오직 선거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위험한 착오이다.”라고 충고한다. 기회주의 좌익의 주관적 소망에도 불구하고, NOW는 1960년대 후반 급진 여성운동의 부활이 아니다. NOW의 목적은 오로지 여성의 분노를 부르주아 선거로 돌리고 정치에 압력을 가하는 데에 있다. NOW는 분명한 친자본주의 이념과 지도부를 가지고 있는 부르주아 조직이다. NOW의 강령과 지도부에 순응하는 것을 통해 선택존중(pro-choice)운동 여성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회원들을 모집하려고 하는 SA와 ISO의 기회주의자들만 그 단순한 사실을 인정하지 못할 뿐이다.

낙태권에 대한 반동적 공격에 맞서 NOW가 이끄는 시위에 사회주의자들이 참여하는 것은 완전히 원칙적이다. 그러나 부르주아 지도부를 향한 환상을 조장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여성운동에서 레닌주의자들의 임무는, 노동계급과 피억압인민으로 하여금 그들의 이해가 자본가계급의 그것과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여성은 NOW나 인종차별적이고 성차별적인 민주당의 여타의 조직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의 이해를 위해 투쟁하는 운동 즉, 혁명적 노동자당과 결합된 공산주의 여성운동이 필요하다.

NOW는 노골적인 반공주의 역사를 가진 조직이다. (SA가 갈라져 나온) 개량주의 사회주의노동자당(Socialist Workers’ Party: SWP)은, 스타이넘과 그 부류들을 지도자로 만들기 위해 보람도 없는 생고생을 몇 년이나 했다. 그러나 몇 년 후 1977년 그들은 NOW 10차 전국총회의 다음과 같은 동의안으로 빨갱이 사냥을 당하며 NOW에서 쫓겨난 바 있다.

“이 총회는 SWP가 NOW를 자기의 이슈를 대중에게 제시하는 수단으로 이용하고 페미니스트 운동을 이용하려는 시도에 저항한다. 우리는 그들의 행동을 불쾌하게 여기며, 페미니스트로서의 우리 목표를 이탈시키려는 어떤 조직의 시도도 관용하지 않을 것이다.”

들리는 바에 따르면, SWP 여성 회원들은 그들의 부르주아 ‘자매’들이 거칠게 절교 선언을 할 때 기겁했다고 한다. SA나 ISO가 그들의 소위 ‘사회주의’를 NOW에서 전도하려는 가망 없는 시도를 한다면, 아마도 비슷한 취급을 당할 것이다.

 

NOW와 여성해방의 정치

요즘, NOW 지도부는 부르주아 선거판에 대한 희망에 집중하고 있다. 7월 호 칼럼에서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지금은 선택존중운동의 힘을 투표와 투표참여로 전환해야 할 때이다…. 막연히 쌓여 있는 지금의 분노는 정치행동으로 표출되어야 한다.” NOW 의장인 몰리 야드와 스타이넘의 “정치행동”은 민주당 국회의원을 보다 많이 뽑아 의회로 보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웹스터 판결 자체가 이 같은 접근이 무익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민주당은 국회 상하 양원을 지난 20년 간 주도해 왔다. 그러나 웹스터 판결을 한 보수적 재판관은 모두 이 시기에 임명된 자들이다. 게다가 저소득층 의료보험의 낙태기금을 폐지한 것이 바로 전시기의 지미 카터 민주당 행정부였다.

공화당이 낙태권 반대에 보다 노골적이긴 하지만, 운동가들은 민주당과 공화당은 미국 자본주의를 집행하는 동반자라는 사실을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그들 사이엔 근본적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피억압인민을 위한 싸움을 민주당에 기대하는 것은 패배를 향한 보증수표이다. 여성, 흑인 또는 노동자들이 어떤 것이든 쟁취하기 위한 유일한 길은, 인종차별과 제국주의 전쟁의 쌍둥이 정당들의 자비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이익에 맞서 사회적 투쟁을 수행하는 것이다.

NOW의 지도부는 지금 멜서스 환경주의를 추구하고 있다. NOW 의장 몰리 야드는 최근 “환경과 인구의 폭증 그리고 인구증가 억제 필요는 직접적 관련이 있다…. 두 명만 낳는 것이 세계적으로 실현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를 위해서 우리는 가족계획과 출산조절을 해야 한다.” 하지만 문제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태어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아래서는 식량과 생필품의 생산과 분배가 오로지 이윤이라는 동기에 의해서만 결정된다는 것에 있다.

NOW는 노동계급 여성의 핵심 현안에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대졸자와 전문직 그리고 반(半)전문직 종사자들의 이해를 반영한다. 미국 노동계급 여성에겐 적정 임금과 좋은 일자리, 쾌적한 주거, 낙태만이 아니라 산전산후조리 출산조절 등 모두를 포괄하는 무상 의료, 24시간 무료 탁아소가 필요하다. 불평등과 억압의 뿌리인 인종차별적이고 계급으로 분화된 자본주의의 존속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NOW는 대다수 여성에게 제시할 것이 거의 없다.

자본주의 사회의 틀 안에서만 여성의 이익을 개진하려는 페미니스트들은 필연적으로 그들이 지적하고자 하는 많은 문제들에 대해 틀린 대답을 꺼내들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미국 거리를 다니는 여성들이 처한 위험에 맞서려는) ‘밤길 되찾기’ 운동은 보다 많은 경찰들을 배치하라는 요구로 종료되었다. 그러나 부르주아를 위해 봉사하는 인종차별적이고 호전적인 견찰(犬察)들은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맑스주의자는 점증하는 미국 사회의 병리 증상을 끝장내기 위해선, 그 뿌리를 뽑아야만 한다고 이해한다. 추구할 것도 잃어버릴 것도 없는 사회최하층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는 아귀다툼의 체제를 끝장내는 것 말이다.

또는 아동보호 문제를 보자. 페미니스트와 맑스주의자는 모두 이혼절차를 쉽게 하자는 것에 동의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페미니스트들은 자녀양육비 지급 명령에 경찰력을 강력히 수행하는 법안을 지지해 왔다. 이것은 곧 사회 기초단위로 핵가족의 필수불가결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반면 맑스주의자는 다음 세대의 양육은 사회책임이라는 원칙을 지지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자녀 양육비는 국가가 지불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페미니즘과 가족

부르주아 국가가 이념적으로 그리고 국가 개입을 통해 가족을 지탱하려 하지만, 가족임금을 개인생존임금으로 떨어뜨리려는 시장의 움직임은 가족의 기반을 허문다. 맞벌이를 해야만 살아갈 수 있게 되면서, 전문직종의 소부르주아들은 좀처럼 맞닥뜨리지 않는 각종 문제에, 노동계급 가족은 직면하게 된다. 식사는 준비되지 않고, 가사는 남겨지며, 아이들은 방과 후 돌봐지지 않는다. 아동 범죄와 가족 내 갈등이 증가한다. 우익 지식인들은 전통적인 ‘가족의 가치’로 돌아가자며 설교하고, 이 즉자적 불만을 ‘여성해방’을 향해, 특히 낙태시술을 향하게 하는 것을 통해 이 걱정거리를 누그러뜨리려 한다.

결혼과 자녀양육을 사회경제적 문제로 보기보다는 개인사로 치부하는 중간계층 페미니스트는 왜 가족 문제가 노동계급에게 그렇게 폭발 직전의 문제가 되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여성해방의 목적이 글로리아 스타이넘이나 베티 프리단 같은 상대적 특권층 여성들의 갈망과 같은 것으로 대중들에게 이해되는 한, 종교 우파는 현재의 가족 위기를 통해 가장 많이 혜택 받는 집단이 될 것이다. 몇몇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는 이러한 현실을 자각하고, ‘가족 문제’를 의제로 다루고 노동계급 여성들에게 페미니즘은 핵가족의 적이 아니라며 안심시키려 든다.

 

맑스주의 대 페미니즘

현재의 정치상황에 순응하는 것을 통해서는 여성 억압에 대항하여 싸울 수 없다. 역사유물론적 시각으로 사물을 이해하는 맑스주의자는, 가족문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억압의 중심에 있다고 항상 주장해 왔다. 여성을 보조적 역할에 묶어두는 가족 내의 성별분업은 두 말할 나위 없이 자본주의 사회보다 훨씬 오래된 것이다. 그러나 현대 핵가족(부르주아지의 등장과 더불어 기존의 대가족을 대체한)은 모든 가족 형태가 기초하고 있는 남성과 여성의 기본적 역할을 그대로 보존했다.

지난 몇 십 년 동안의 경제 변화가 심각하게 핵가족을 침식해 왔지만, 자본주의는 그 대체물을 창조해내지도 못하고 창조할 수도 없다. 지금 가족 내에서 수행되고 있는 가사와 자녀 양육이 사회화되는 것을 통해서만 가족은 극복될 수 있다. 오직 안정적인 물적 토대만이 섹스파트너나 자녀양육에 대한 결정을 모든 이들(특권층 소수만이 아니라)이 선택의 문제로 여길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이윤 극대화의 필요에 따라 운영되는 경제체제는 근본적으로, 이 같은 서비스를 모든 이에게 제공할 충분한 자원을 배치하지 못한다.

자본주의 사회에 만연해 있는 남녀차별은 풍운의 뜻을 품은 전문직 여성들을 포함하여 모든 여성의 앞길을 심각하게 가로막고 있다. 공장에서보다 회사 중역회의실이나 대학 강단에서 여성 평등권을 위한 저항은 위선적으로 감추어져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실재한다. 채용 차별의 법적 금지, 여성 승진 프로그램 그리고 동일노동 동일임금 강제 규정은 더욱 위로 나아가려는 여성들을 위해 대단히 중요한 것들이다.

지난 15년간 NOW의 의제들 중 가장 윗자리에 놓였던 이 주제들은 성공하지 못한 평등권수정조항(Equal Rights Amendment: ERA) 제정 운동에서 부각되었다. 남녀평등의 옹호자로서 맑스주의자들은 ERA 같은 법령의 통과를 지지한다. 하지만 동시에 자본주의 생산관계를 전복하지 않고도 여성 억압을 끝낼 수 있다는 환상을 경고한다.

인류의 미래를 궁극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남녀 간의 투쟁”이 아니라 계급투쟁이다. 그리고 오직 다양한 인종과 성이 섞여 있는 노동계급만이, 사회의 사회주의적 재건을 통해 모든 사회억압의 물질적 기초를 절멸시키고자 하는 객관적 이해와 사회적 힘을 가지고 있다.

여성해방을 위한 투쟁은 그리하여 사적 이윤이 아니라 인간의 필요에 의해 운영되는 새로운 사회질서를 위한 투쟁 즉,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그러한 투쟁은 자유주의적이든 급진적이든 이른바 ‘여성의 해방은 본질적으로 “여성 자신”의 과제이다’라는 페미니즘의 근본적 전제와 양립할 수 없다. 현존 사회질서의 근본적 변화에서, 보다 많은 특권을 가진 계층은 단지 사회적 힘을 결여하고 있는 것만이 아니라 객관적 이해관계도 가지고 있지 않다.

여성노동자는 사회에 만연된 남성우월주의의 독소와 투쟁함에 있어 특별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다. 노동계급은 여성과 모든 피억압인민의 이해와 요구를 앞장서서 옹호하지 않고는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을 수행할 수 없다. 또한 계급투쟁 속에서 여성평등을 위한 투쟁은 최고의 전투력과 기회를 얻을 수 있다.

낙태반대 광신자들을 향한 미대법원의 우호적 손짓은 낙태권방어를 최전선으로 만들었다. 이 투쟁이 전개되어야 할 싸움터는 법정이나 의회가 아니라 거리이다. 조직된 노동자들의 힘을 동원하는 것이 이 싸움에서 이기기 위한 관건이다. 생산현장 노동운동의 힘으로 지지되는 노동자 방어대의 조직과 파견은 구조작전(Operation Rescue)이나 여타의 낙태반대(“right-to-life”) 광신도들을 그들의 성경공부 교실로 쫓아버릴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위해선 노동조합의 새로운 계급투쟁 지도부가 필요하다. 오늘 그 지도부는 노동자와 피억압인민을 방어투쟁으로 조직하여 인종과 성차별에 맞서 싸우고, 그리고 내일 공세적 투쟁의 기초가 될 것이다.

 

무료 낙태를 쟁취하고, 낙태시술병원 방어를 위한 노동자 방어대를 조직하자!

무상의료, 무상 출산조절, 무상 24시간 탁아소를 쟁취하자!

한쪽 당사자의 요구에 따른 즉각적인 이혼을 실시하고, 자녀양육을 국가가 전적으로 책임져라!

정부는 우리의 잠자리에 간섭하지 말라!

동성애자에게 모든 민주적 권리를!

합의 하에 이루어지는 성관계에 대한 국가개입을 반대한다!

매춘을 비범죄화하라!

젊은이들이 가족으로부터 경제적으로 독립할 생활비를 국가가 지급하라!

사회주의혁명을 통한 여성의 해방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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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여성/소수자 해방운동 (스탈린주의와) 성매매특별법 관련 논쟁 볼셰비키-레닌주의자 2013.02.25 7107
11 여성/소수자 해방운동 매춘방지를 위한 제 5차 국제회의/레닌 볼셰비키-레닌주의자 2013.01.17 6758
10 여성/소수자 해방운동 (IBT) 박탈당한 아일랜드 여성의 선택권: 요구에 의한 무료 낙태를 즉각 허용하라!(31호, 2009) 볼셰비키-레닌주의자 2012.12.24 12461
» 여성/소수자 해방운동 (IBT) 반동적인 낙태반대 운동을 분쇄하자!: 사회주의 혁명을 통한 여성해방을!(7호, 1990년 겨울) 볼셰비키-레닌주의자 2012.12.24 13942
8 여성/소수자 해방운동 (IBT) 자본주의와 인종주의(12호, 1993) 볼셰비키-레닌주의자 2012.12.24 5889
7 여성/소수자 해방운동 (IBT) 자본주의와 동성애 억압(15호, 1995) 4 볼셰비키-레닌주의자 2012.12.24 15665
6 여성/소수자 해방운동 (IBT) 맑스주의, 페미니즘, 여성 해방(19호, 1997) 볼셰비키-레닌주의자 2012.12.24 14872
5 여성/소수자 해방운동 페미니즘과 소위 ‘성폭력론’에 대하여 볼셰비키-레닌주의자 2012.12.24 11756
4 여성/소수자 해방운동 (IBT) 성, 검열과 여성의 권리 file 볼셰비키-레닌주의자 2012.12.24 6990
3 여성/소수자 해방운동 노동계급의 여성해방운동을 위하여! 볼셰비키-레닌주의자 2012.12.24 7198
2 여성/소수자 해방운동 성매매방지법과 노동계급 볼셰비키-레닌주의자 2012.12.24 9435
1 여성/소수자 해방운동 ‘맑시즘 2012’ 참관기 2: ‘맑시즘, 페미니즘 그리고 여성해방’ 볼셰비키-레닌주의자 2012.12.24 8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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