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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출처 – 국제볼셰비키그룹(IBT)



러시아: 자본주의 생지옥

 <반혁명의 정치와 경제>



1991년 8월 모스크바의 쿠데타에서 보리스 옐친의 자본주의 복귀 세력이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의 잔당을 누르고 승리했다. 이때 이후 지금까지 10년 동안 구 소련의 절대다수 인민은 격심한 고통과 절망을 경험했다. 자본주의를 선전하는 자들은 입심 좋게 “번영”을 약속했다. 그러나 국가소유 재산의 큰 덩어리들을 자기 것으로 만든 자들만이 번영을 누렸을 뿐이었다. 구 소련 시절 상점에 늘어선 사람들의 긴 줄은 한때 경멸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너무 가난하여 생활필수품조차 구할 수 없는 수백만의 헐벗은 러시아 인민에게 이 긴 줄은 그나마 즐거운 추억으로 아련히 남아있다.

 

옐친은 1992년 “충격요법”을 도입하면서 짧은 순간의 고통은 몇 달 후 끝날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1996년 그는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여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러시아 인민을 이렇게 안심시켰다: “나는 확신합니다. 2000년에 러시아는 부강한 민주국가가 되어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부르주아 언론도 인정한다: 구 소련에 도입된 자유시장 경제체제는 사회적 대재앙을 불러 들였다.

 

범죄와 부패는 기승을 부리고 있다. 부자와 빽이 좋은 자들은 법을 무시하며 멋대로 행세한다. 자본주의로 복귀하면서 러시아는 선진 경제권 사상 가장 심각한 불황을 기록했다.

 

“러시아 경제는 거의 매년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해왔다. 거짓 수치로 악명이 높은 공식 통계를 보더라도 10년 동안 국민총생산은 약 53% 하락했다… 모스크바의 이름 있는 몇 개 건축 사업들을 제외하면 병원, 도로, 감옥, 학교, 철도 등 사회기반시설이 무너지고 있으며 열악한 상태에 있다. 러시아인들은 제대로 먹지도 입지도 못하고 있다. 이들의 주택은 형편없다. 이들은 제대로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러시아인들은 일찍 죽고 있으며 아기들은 너무 적게 태어나고 있다. 이것은 사회붕괴의 가장 명확한 증거이다. 10년 전에 비해 인구는 6백만 명이나 줄었다.”

<이코노미스트 지, 2000년 3월 30일>

 

소련의 업적

 

노동자 혁명이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하게 승리하면서 소련이 탄생했다. 레닌과 트로츠키가 지도한 나이 어린 이 노동자국가는 오래 지속된 내전에서 백군과 이들의 제국주의 동맹군을 물리쳤다. 국내외 자본의 몰수와 외국무역의 독점을 통해 볼세비키 정권은 초기에 계획경제의 기초를 세웠다. 그러나 1920년대 중반 스탈린이 대표한 반(反)노동계급적 특권층의 등장으로 경제 운영은 심각하게 기형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단 소유체제는 역동성을 발휘하여 농민이 절대 다수인 국가에서 현대화된 공업국으로 소련을 변모시켰다.

 

냉전 시대의 선전가들은 소련을 “자유세계”를 지배하려는 불길한 전체주의 강대국으로 묘사해왔다. 이제 이들은 소련이 70년을 지속하는 동안 항상 붕괴 직전의 위기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실은 이들의 주장과 매우 다르다. 관료적 기형화에도 불구하고 소련 경제는 상당 기간 급격히 성장했다. 제국주의 국가들이 경제 대공황으로 비척대던 1928년과 1938년 사이 소련의 공업생산은 무려 600%나 증가했다([초강대국들의 등장과 몰락], 폴 케네디).

 

할리우드 영화의 내용과는 달리 제 2차 세계대전의 결정적 전투는 동부 전선에서 벌어졌다. 이곳에서 히틀러의 정예 사단들은 적군에게 패배하여 베를린까지 후퇴했다. 전쟁의 대대적인 참상에서 회복된 소련은 급격한 경제성장을 계속했다. 역사상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가 1957년 성공리에 발사되자 제국주의 수뇌부는 경악했다. 미국 대통령 케네디의 1960년 대통령 선거유세 주제의 하나는 소련의 경제성장을 따라 잡자는 것이었다. 1950년대와 1960년대 초까지 소련은 “제 3 세계” 지도자들 다수가 흠모하는 모델이었다.

 

사기가 저하된 좌익분자들과 부르주아 정치학도들은 이렇게 주장했다: 스탈린 치하 러시아는 새로운 종류의 계급사회이다. 그러나 관료집단의 지배체제는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하다고 트로츠키는 인식했다:

 

“시간이 갈수록 관료집단은 노동자국가 내부에 존재하는 세계부르주아 계급의 기관이 된다. 이들이 집단적 소유체제를 타도하고 러시아를 자본주의로 복귀시키거나 노동계급이 이들을 타도하고 사회주의로 가는 길을 열거나 둘 중의 하나의 길이 있을 뿐이다.”

<이행 강령>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은 노동자국가의 생존에 장애가 되므로 타도되어야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그리고 사회주의 혁명가들이 자본주의 복귀에 반대하여 퇴보한 러시아 노동자국가를 방어할 임무가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이 임무를 노동계급의 정치혁명을 통해 관료집단을 타도하고 노동계급의 직접 민주주의 체제를 회복시킬 임무와 결합시켰다. 진정한 사회주의 체제는 이를 통해서만 수립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70년간 퇴보한 노동자국가 소련은 서방 제국주의의 헤게모니를 견제하는 세계적 차원의 대항 축이 되었다. 소련의 관료집단은 제국주의 세력과 “평화공존”을 원했으나 이 소망은 수포로 끝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반제국주의 운동의 결과 중국, 쿠바, 월남 등에서 탄생한 기형화된 노동자국가들의 중요한 물리적 버팀대 역할을 했다.

 

짜르 체제의 타도가 세계노동계급의 가장 커다란 승리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소련의 자본주의 복귀는 국제노동계급 운동의 가장 심각한 패배가 될 것이라고 트로츠키는 주장했다. 구 소련 인민에게 닥친 사회적 대재앙은 그의 견해가 올바르다는 사실을 충분히 증명했다.

 

 

 

페레스트로이카

 

1960년대 초반부터 소련의 경제성장은 뚜렷하게 둔화되기 시작했다. 사회 및 정치 생활의 모든 측면을 통제하려는 관료체제의 시도들이 대중의 창조성과 더욱 더 충돌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소련의 공업화가 절정에 달했던 1930년대에 러시아 혁명의 운명을 훌륭하게 연구한 [배반당한 혁명]에서 트로츠키는 이 상황을 이미 예측하고 있었다. 관료적 명령경제는 “창조적 자발성과 책임의식을 파괴하여 질적인 향상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다:

 

“관료의 명령으로 이미 존재하는 서구의 모델에 따라 거대한 공장들을 건설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렇게 할 경우 비용은 정상적인 경우보다 3배나 더 많아진다. 수준이 높아질수록 질적 수준을 유지하는데 더욱더 문제가 발생한다. 질적 우수성은 관료집단의 손아귀에서 소리 없이 사라진다. 소련의 제품들은 품질에 관심 없음이라는 잿빛 상표를 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국가소유 경제에서 품질이 향상되려면 생산자와 소비자의 민주주의, 비판과 창의성의 자유 등이 보장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들은 두려움, 거짓말, 아첨 등이 난무하는 전체주의 체제에서는 존재할 수가 없다.”

 

1960년대와 1970년대를 걸쳐 소련의 경제성장률은 꾸준히 하락하여 1980년대 초가 되면 거의 제로 상태가 되었다. 브레즈네프 치하에서 관료들은 국가의 미래를 비관하였으며 자신들이 공언하는 공식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조차 지극히 냉소하였다. 관료화된 계획경제가 즉시 제공할 수 없는 상품과 서비스가 규모가 커진 “지하경제”에 의해 제공되었다.

 

브레즈네프의 뒤를 이어 권력을 장악한 안드로포프는 한때 비밀경찰의 총수였다. 그는 경찰력을 동원하여 노동규율을 더욱 강화시키면서 사태를 역전시키려 하였다. 그의 노력과 몇 년간 지속된 풍작으로 1980년대 중반에는 경제성장률이 잠시 상승하였다. 그러나 관료적 명령경제의 구조적 문제들은 국가기구의 행정적 압력을 증대시키는 것으로 극복될 수 없었다.

 

1985년 소련 공산당 총서기가 되어 권력을 장악한 고르바초프는 소위 페레스트로이카를 표방했다. 이 정책은 계획경제 내에 시장경제 “개혁”을 도입하여 효율 증대, 품질 개선, 경제생산 촉진 등을 가져올 것이라고 선전되었다. 고르바초프는 관료집단의 보수적 분자들 특히 중앙기획부처들의 저항을 무력화시키려고 노력했다. 이 노력은 공개적으로 자본주의 복귀를 주창한 세력의 영향력을 가속화시켰다. 우리는 당시 이렇게 주장했다:

 

“시장 기제에 극도로 의존하고 중앙기획부처들의 역할을 질적으로 감소시키는 고르바초프의 정책은 그 자체로는 자본주의 복귀가 아니다. 그러나 `개혁정책’은 이미 수십 년의 관료적 실정으로 지극히 약화된 경제의 그나마 남은 힘을 소진시킬 위험이 있다. 따라서 이 정책은 소련 사회를 발작적인 반혁명에 더욱 가까이 다가서게 할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IBT 기관지 [1917년] 제 4호, 1987년 가을>

 

고르바초프 개혁의 첫 단계는 1986년 개인 “협동조합”을 합법화시키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자 협동조합은 국가의 자원을 즉각 개인적 용도로 유용하기 시작했다. 다음 해에 그는 행정 명령을 통해 관료기구에 의해 임명되었던 공장 관리자가 공장 종업원 투표로 선출되도록 강제했다. 이 조치로 공장 관리자들은 관료적 서열에 따른 명목상 상관의 통제에서 벗어나 운영의 자유를 대폭 보장받았다. 그러자 이들은 이 새로운 자유를 즉시 이용하여 기업의 자산을 사유화시켰다. 대개의 경우 이들은 대폭 할인된 가격으로 원자재나 완제품을 친척이나 친구가 운영하는 협동조합에 넘겼다. 그러자 협동조합은 이것들을 가장 높은 가격에 그리고 특히 현금으로 구입하는 자들에게 팔았다. 그리고 판매 이득을 공장 관리자들과 나누어 가졌다.

 

중앙부처의 권한 약화를 도모한 고르바초프의 정책은 농업, 주택, 소비재 생산 부문에서 지방정부의 권한 확대로 나타났다. 그리고 지역 당조직이 중앙당의 지시를 이행할 의무가 없다는 공식 발표가 1988년에 나왔다:

 

“기존에는 공장, 지구, 지역 단위의 당조직들이 중앙당의 최우선 정책들을 강제하는 핵심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들이 경제 영역에서 권한을 박탈당하자 개별 기업들은 이익 극대화를 추구할 자유를 얻었다. 예를 들어 이들은 생산량을 줄이고 가격을 올리는 수법을 동원했다. 새로 권한을 얻은 공화국 그리고 지방 자치단체들은 자신의 행정 이익을 옹호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외부’ 구역에 완제품 배달을 줄이는 단순한 편법을 동원했다.”

 <[소련경제체제의 붕괴], 엘먼과 콘트로포비치 공저>

 

개별 기업의 중앙 통제 해제와 동시에 진행된 외국무역 독점 완화는 즉시 국민총소득의 하락을 가져왔다. 소련 국가통계위원회의 1990년 제 4 분기 통계에 따르면 국민총소득은 1년 전에 비해 8.5% 하락했다. 1991년 제 1 분기에는 또 다시 10%가 하락했다([소련 경제 --- 위기에서 파국으로], 하닌 저, 앤더스 애쓸런드 편집자의 잡지 [소련 붕괴 이후의 경제]에서 재인용). 또한 이 때에 “민영화”가 처음 대대적으로 시행되었다:

 

“1988년에서 1992년까지 러시아는 두 경제체제의 중간단계에 있었다. 상업과 수출에 대한 국가 통제는 해제되고 있었으나 국내 상품가격은 대단히 낮은 수준으로 여전히 통제되고 있었다. 낮은 통제가격으로 석유, 다이어먼드, 금속 등을 루블화로 구입하고 이것들을 달러화로 외국에 판매할 수 있는 자들은 하룻밤 사이에 떼돈을 벌었다. 물론 허가증을 발급해주고 국경까지 안전한 수송 수단을 제공하는 국가 공무원들의 도움이 있어야 가능했다.”

 <[러시아식 자본주의], 테인 구스타프슨 저>

 

외국은행 구좌로 자금이 대대적으로 유출되자 수출액이 급락하고 외채가 급증했다. 이 결과 소련의 금 및 외환 보유고가 급속히 줄어들었다. 이 급격한 출혈을 막기 위해 당국은 1990년에서 1991년 사이 수입 규모를 45%나 줄였다. 그러자 원자재와 필요 부품의 부족으로 생산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이제 모든 것이 통제 불능 상태에 빠졌다는 인식이 광범위하게 퍼졌다.

 

중앙부처의 권한이 없어지자 중앙정부는 생산에 필요한 자원을 개별 기업에게 공급할 수가 없었다. 이제 물물교환을 통해 필요한 물품을 조달할 수밖에 없었다. 공장 관리자들은 완제품 소비자들로부터 차용증서를 받고 원자재 공급자들에게 이것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1988년 한해에 기업간 신용거래는 “156억 루블로 거의 4배가 증가했다”([이코노미스트]지, 1990년 10월 20일)

 

통제 불능 상태에 빠진 혼란스러운 민영화를 합법화하라는 압력이 증대했다. 그러자 옐친과 고르바초프는 시장경제로의 급격한 전환을 위한 “500일” 프로그램을 공동으로 승인했다. 이 프로그램은 샤탈린이 작성했다. 당시 저명한 자본주의 복귀 “급진” 경제학자였던 예브게니 야신은 이렇게 회고하였다:

 

“1990년 9월 이 프로그램은 소련과 러시아공화국연방 의회에서 심사되었다. 러시아 의회는 옐친의 압력으로 이 프로그램을 일주일 후에 승인했다. 소련 의회에서 이 프로그램은 당과 정부 기구 전체의 저항을 받고 계류되었다. 이들은 사태가 결정적인 국면에 이르렀음을 깨달았다: 자신들이 살아남지 않으면 `500일’ 개혁 프로그램이 살아남아야 했다.”

<[소련경제체제의 붕괴], 엘먼과 콘토로비치 공저>

 

이 상황에서 스탈린주의 보수파에 의해 고르바초프는 후퇴를 강요받았다. 반면 옐친은 저돌적으로 이 계획을 밀어붙였다. 그는 소련에 보내는 예산 기부금을 3분의 2 삭감하고 대신 러시아의 지출을 배로 늘리겠다고 선언했다. 다른 공화국들도 즉시 옐친의 조치를 모방했다. 야신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500일’ 프로그램이 계류되면서 개혁가 고르바초프는 마지막 기회를 상실했다. 그는 자기를 묵사발 낸 공산당 중앙이나 옐친에서 경제적 권한을 넘겨야했다. 이 두 세력간의 권력투쟁이 1991년 사태의 핵심이었다.”

 <앞의 책>

 

1991년 8월: 마지막 바리케이드

 

1991년 8월 전의를 상실한 스탈린주의 “강경파”를 옐친이 제압한 사건은 자본주의 반혁명 승리의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1933년 트로츠키는 이렇게 말했다:

 

“`비(非)노동계급적’ 성격을 이유로 들면서 소련을 가망이 없다고 포기하는 모든 정치 경향들은 수동적으로 제국주의의 하수인이 될 위험이 있다. 최초의 노동자국가가 관료집단에 의해 약화되어 내외 적들의 공격에 쓰러질 비극적인 가능성을 물론 배제할 수 없다. 그런데 이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경우 이후 혁명투쟁의 과정을 위해 대단히 중요한 질문은 다음과 같다: 이 재앙에 책임이 있는 자들은 어디에 있는가? 혁명적 국제주의자들은 조금의 오점도 남겨서는 안된다. 최악의 상황에서 이들은 마지막 바리케이드에 남아있어야 한다.”

<소련의 계급적 성격>

 

1991년 8월 쿠데타는 “마지막 바리케이드”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때 IBT는 트로츠키의 엄명에 따라 옐친 세력에 반대하여 전의를 상실한 스탈린주의 잔당들에게 군사적 지지를 표명했다. 당시 이 노선은 여타 모든 국제 “트로츠키주의” 조직들과 IBT를 뚜렷하게 구별시켰다. 제임스 라버츤의 [스파르타쿠스 동맹]은 이 결정적 대결 상황에서 중립 노선을 채택했다. 영국의 [노동자 권력], 만델의 [제 4 인터내셔널 통합서기국], 토니 클리프의 [국제사회주의자들]은 공개적으로 옐친의 반혁명 세력 편에 섰다. 이들이 스탈린주의자들보다 더 “민주적”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수십 년 동안 소련공산당의 온갖 좌충우돌 노선을 노예처럼 따랐던 각국 공산당들은 정말 필요한 때에 “사회주의 조국”을 방어하지 않았다. 1933년 독일의 나찌당이 권력을 장악할 때 싸움 한번 하지 않고 투항한 코민테른에 대해 트로츠키는 이렇게 예상한 바 있었다:

 

“히틀러에게 저항 한번 하지 못한 것과 똑같이 코민테른은 소련이 위기의 순간을 맞을 때 이 체제를 방어할 능력이 조금도 없을 것이다.”

 <앞의 책>

 

반혁명 상황 한가운데에 선 혁명가들의 임무에 대해 트로츠키는 절대적으로 확고했다:

 

“새로운 인터내셔널은 공동의 적에 대항해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에게 공동전선을 제안할 것이다. 우리 인터내셔널에게 상황을 좌우할 역량이 있을 경우 관료집단은 위험의 순간에 공동전선을 회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럴 경우 오랜 세월에 걸쳐 이들이 우리에게 퍼부었던 온갖 거짓말과 비방(예를 들어 제국주의 첩자니 반혁명 분자니 하는 말)은 하루아침에 그 정체를 드러낼 것이다.”

<앞의 책>

 

그러나 진정한 볼세비키주의 분자들에게는 “상황을 좌우할 역량”이 없었다. 따라서 옐친의 반혁명 세력에 대항하는 “공동전선”은 성립될 수 없었다. 이것은 비극이었다.

 

소련의 붕괴를 다룬 귀중한 저서의 저자들인 엘먼과 콘토로비치는 이렇게 주장했다:

 

“1980년대 말 선거, 대중매체, 거리에서 명백히 드러난 스탈린주의 체제에 대한 대중의 저항은 체제 붕괴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였다. 따라서 붕괴의 원인은 대중의 불만이 아니라 반혁명 지도세력의 행동에서 찾아야 한다.”

<소련경제체제의 붕괴>

 

고르바초프가 정치적 억압을 완화하자 대중의 불만은 즉시 광범위하게 표출되었다. 이 결과 스탈린주의 체제는 더욱 약화되었다. 이 사실은 소련공산당 통치에 대한 저항이 페레스트로이카 이전부터 존재했음을 말하고 있다. 더욱이 “반혁명 지도세력의 행동”은 생산 대중의 적극적 충성심을 끌어내지 못한 체제의 무능력에서 나왔다. 체제에 대한 생산 대중의 적극적 충성심만이 트로츠키가 소련의 붕괴 50년 전에 묘사한 “품질에 관심 없음이라는 잿빛 상표”를 극복할 수 있었다.

 

스탈린주의 독재자들의 거짓말과 정치 탄압이 수십 년을 지속하면서 러시아 노동계급의 자랑스러운 혁명전통은 거의 단절되었다. 당 간부급만이 사용하는 특별 상점과 특권적 삶의 양식으로 대표되는 관료집단의 명백한 부패상은 공식적으로 선전되었던 평등 사상을 쓰디쓴 농담으로 변질시켰다. 사회주의를 자신의 통치와 동일시하면서 냉소적인 소련공산당 관료들은 소련 노동계급을 정치적으로 무장 해제시켰다. 이들은 제국주의와 “평화공존”을 추구하면서 국제적으로 노동계급 혁명을 상황마다 배반하고 “일국 사회주의”라는 반동적 망상을 유포하였다. 이 결과 소련은 국제적으로 고립되었으며 자신의 기반을 잠식당했다. 소련 노동계급을 원자화시켜 정치적 몽매상태로 이끌고 해외의 혁명적 물결을 적극적으로 잠재운 스탈린주의자들은 이러한 행동을 통해 결국 자신의 통치기반을 파괴했다. 집단적 소유체제의 방어가 자신들에게 사활이 걸린 문제라는 노동 대중의 인식이야말로 노동자국가의 경제적 토대를 방어하는 강력한 힘이었기 때문이다.

 

1991년 8월 사태에서 “강경파”가 보인 무능력, 자신의 해체를 묵묵히 받아들인 소련공산당의 수동성, 모든 연줄을 활용하여 “기업가”로 변신하려는 수많은 전직 관료들의 이전투구 등은 스탈린주의 지배층에 널리 퍼진 냉소주의 그리고 어떤 형태이든 “사회주의”에 대한 이들의 무관심을 잘 드러내 주었다. 재창당된 러시아연방공산당이 공공연한 파시스트 세력과 악명 높은 “적색-갈색” 연합을 체결한 신속성은 이 진실을 확인시켜주었다.

 

 

‘공유지의 강탈’

 

1990년대에 러시아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자본주의의 “장밋빛 여명기”에 일어났던 자본의 “본원적 축적”과 아주 비슷했다:

 

“교회 재산의 약탈, 국유지의 사기적 전용, 공유지의 강탈, 봉건적 씨족적 재산의 몰수, 무자비한 테러 속에서 진행된 봉건적 소유의 근대적 소유로의 변모 등 이 모든 것들이 본원적 축적의 목가적 방식들의 다양한 모습들이었다.”

<자본론 제 1권, 맑스>

 

집단적 소유의 자산들을 개별 자본가의 소유 즉 자본으로 변모시켜야 자본주의로의 전환이 일어날 수 있었다. 1988년부터 1995년까지 러시아에는 연줄이 있는 자들이 수 천억 달러 어치의 국가소유 재산을 가로챌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었다. 이 결과 러시아 경제는 경영학 전문대학원 교과서가 “정상적”이라고 인정하는 부르주아 체제로 급격히 변화해갔다. 피라미드의 정점에는 극소수의 엄청난 부자들이 있었다. 이 밑에는 인구의 절대 다수를 구성하는 극도로 가난한 반실업 노동자들이 존재했다.

 

구 소련에서보다 “공유지의 강탈”이 더 공개적이고 거대한 규모로 급격히 진행된 경우는 역사상에 없었다. 똑똑하고 검약하며 근면한 소수의 사람들이 궁핍한 사람들에게 일자리와 지도력을 제공하기 위해 근면과 긴 안목을 바탕으로 사회의 지도자가 된다는 자본주의 신화가 있다. 그러나 이 신화는 지금 러시아 인민들에게 곱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외국무역에 대한 국가의 통제가 풀리면서 본원적 축적의 제 1 단계가 시작되었다. 제 2 단계는 1990년경에 시작된 대대적인 금융투기였다. 중앙 기획당국의 권한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1987년 고르바초프는 소련 중앙은행의 독점을 해제했다. 이 조치가 내려진 직후 금융투기의 거대한 물결이 일었다. 1991년까지 약 1천 6백 개의 개인 은행들이 설립되었다. 돈을 싸게 빌려 재빨리 부동산을 구입할 수 있는 자들은 단순간에 벼락부자가 될 수 있었다:

 

“과거에는 기업의 제품이 공장 문을 나서자마자 자동적으로 대금이 결제되었다. 구매자 계정에서 생산자 계정으로 대금이 간단히 이체되었다. 그러나 이 제도는 1990년과 1991년에 걸쳐 붕괴되었다. 이제 기업들은 유동성 유지를 위해 대금 결제의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했다. 신설된 개인은행이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주요한 방법이 하나 있었다. 현금 부족에 허덕이는 기업에게 국가의 신용 대출을 이용할 수 있게 알선하는 것이었다. 또한 개인은행 창업자들은 아직도 유효한 구 체제의 규제 조항들을 우회하여 단기 자본을 마련하였다. 이를 통해 주로 외국 무역 분야에서 새로운 이윤 획득에 나섰다. 은행들은 상품 거래나 수출입 거래에 돈을 대주거나 직접 거래 당사자가 되었다. 또한 고객들이 국가 소유의 자산을 현금으로 전환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불법적인 외환거래에도 개입하여 이윤을 해외로 빼돌렸다….”

<구스타프슨, 위의 책에서>

 

개인은행들은 국영기업과 지방자치단체가 자신들에게 맡긴 저리의 루블화를 현금 등 경화로 바꾸어 수출입 거래의 단기 금융자금으로 사용했다. 따라서 은행들은 거래의 양쪽에서 모두 이익을 보았다. 또한 달러화를 대출하여 높은 이자를 물리고 달러화가 평가 절하된 루블화로 전환되어 저축자의 계정으로 돌아오게 만들면서 이 두 과정에서 이윤을 챙겼다. 1992년 가격 통제가 해제되자 연간 인플레는 2500%로 치솟았다. 이제 며칠 만 금융거래를 지연시키면 막대한 불로소득이 생겼다. 애초에 은행가들에게 저리의 루블화를 대출해 준 관료들도 물론 이익의 일부를 챙겼다.

 

1992년 옐친은 국영기업의 대대적인 민영화를 통해 본원적 자본축적의 제 3 단계를 개시했다. 상품 거래와 은행 영업에서 나온 막대한 이익금으로 신흥 “족벌”들은 민영화된 자산의 대부분을 구입했다.

 

민영화는 처음부터 대단히 부패한 모습을 보였다. 이것은 유감스러운 현상이지만 계획경제를 해체하는 데 발생하는 불가피한 경상비용이라고 자유시장주의자들은 생각했다. 결국 자본가 없이 자본주의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옐친의 민영화 책임자는 에고르 가이다르였다. 그는 고르바초프 집권 당시 소련공산당의 주요한 이념잡지인 [공산주의자]의 경제 편집자였다. 그는 자신의 직책을 이용하여 시장경제로의 대대적인 전환을 주장했다. 크리스티아 프릴랜드에 의하면 가이다르의 중앙위원회 경제 책임자 임명은 다음을 의미했다:

 

“무신론을 전파하는 자에게 바티칸 시국을 위한 교리문답을 작성하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았다. 소련의 관료집단은 자기 입으로 한 말도 믿지 않는 냉소주의자들이다. 가이다르의 경제 책임자 임명도 이런 경우에 해당되는 또 다른 증거였다.”

<세기의 바겐세일>

 

관료집단의 보수파는 가이다르의 임명을 반대하지 않았다. 그가 고르바초프의 보호를 받아서가 아니라 그의 가문의 명성 때문이었다. 프릴랜드에 의하면 그의 조부는 적군 장교였으며 나중에 인기 있는 동화작가가 되었다. 말하자면 그는 “애국자와 인기 있는 동화 작가”의 짬뽕이었다. 가이다르의 부친은 1960년대 초 쿠바에 파견된 기자였다. 이 때 어린 에고르는 자주 집을 방문한 체 게바라를 보았다.

 

가이다르 경제 팀은 대대적인 민영화와 가격 통제의 즉각 해제를 내용으로 하는 충격요법을 실시했다. 이 결과 천문학적 인플레가 발생하여 소액 저축자들의 돈은 휴지조각이 되었고 연금 수령자 등 고정된 수입으로 생활하는 사람들은 거지가 되었다. 그러나 이 처참한 결과는 자본주의 신봉자들에게는 전혀 걱정거리가 아니었다:

 

“실업은 문제가 아니었다. 이것은 구조조정의 환영할만한 징조였다. 기업의 파산과 대대적으로 축소된 사회보장 서비스도 문제가 아니었다. 국제통화기금에서 이윤 창출을 위해 숫자를 가지고 노는 냉혈한들조차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인민의 고통을 미래의 번영을 위한 불가피한 희생이라고 강변하는 젊은 개혁가들의 능력에는 혀가 내둘러질 지경이다.’”

 <앞의 책>

 

반혁명의 정치와 경제

 

유엔개발프로그램의 1999년 보고서는 “개혁”에 대해 이렇게 요약했다:

 

“소련이 붕괴할 당시 가장 널리 주창된 개혁 전략은 `충격요법’ 또는 `빅뱅’으로 알려졌다…. 약간의 `고통’은 어쩔 수 없다고 모두 인정하였다. 그러나 고통은 오래가지 않을 것이며 이후의 성과가 상당할 것이라고 믿었다….빅뱅 전략은 크게 3개의 구성부분으로 나뉘어졌다. 첫째, 국영기업은 민영화되고 이 결과 자본주의의 선행 조건인 본원적 축적 없이 자본가 계급이 형성되어야 한다. 둘째, 모든 가격은 완전히 자유화되어야 한다… 이 결과 가격 원리가 자원을 배분하고 경제 효율을 증대시켜야 한다. 셋째, 하락하는 총생산과 총수입이 가져온 고통을 완화시키기 위해 외국자본을 도입해야 한다.”

<중동부 유럽과 독립국가연합의 인적자원 개발 보고서, 강조는 인용자>

 

시장 경제로의 이행은 될 수 있으면 급속히 진행되어야 한다고 “자유 시장”의 선전가들이 주장했다. 그리고 세계시장의 경쟁에 러시아 경제를 개방할 경우 특히 제조업 분야에서 초래될 대대적 구조조정에 대해 이들은 거창한 말을 늘어놓았다. 아담 스미쓰의 “보이지 않는 손” 때문에 러시아 기업가들은 “비교 경쟁력”이 있는 부문들에 투자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자연스러운” 경제의 등장은 집단주의의 억압에서 드디어 해방된 인구의 창조적 에너지를 자유롭게 발산시킬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이론에 불과했으며 실제로 상황은 상당히 다르게 전개되었다.

 

옐친과 그를 지원하는 제국주의자들은 중앙집중 경제체제의 파괴와 국가소유의 급격한 감축을 “빅뱅” 전략의 필수 목표로 간주했다. 중앙 계획 경제의 복귀를 어렵게 하고 자본주의 반혁명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소유자 계층이 형성되어야 했다. 따라서 위와 같은 조치들은 필요했다:

 

“1992년 개혁가들의 제 1차 목표는 중앙정부에서 정치인들과 관료들의 지배력을 와해시키는 것이었다. 이들은 경험을 통해 최대의 적은 중앙부처라는 사실을 알았다. 따라서 이것을 도려낼 결심을 굳혔다. 이와 대조적으로 공장 관리자들과 지역 정치인들은 지난 10년간 커다란 영향력을 획득했다….1991년과 1992년 개혁가들은 일을 성사시킬 기간은 아주 짧을 것이며 이 기간에 사적 소유를 합법적이며 역전시킬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믿었다.”

<구스타프슨, 앞의 책>

 

“빅뱅” 전략은 생산의 급격한 붕괴 그리고 광범위한 빈곤과 사회의 혼란상을 가져왔다. 그러나 신흥 러시아 부르주아 계급과 이들을 지지하는 제국주의자들은 이것을 조건적인 성공이라고 생각했다.

 

원래 계획은 민영화 대상 기업의 종업원들에게 기업 주식의 40%를 배당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직 외국인들과 지하경제 기업가들만이 이것들을 구입할 돈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을 개혁가들은 너무 명백하게 인식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이 상황은 수용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자산은 극도로 저평가 되어 적은 돈으로 구입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대부분의 기업들은 헐값에 노동자와 관리자들에게 주어졌다. 국영기업 자산의 약 20%는 증서의 형태로 모든 러시아 시민들에게 공짜로 배포되었다.”

<앞의 책>

 

증서 제도는 모든 러시아 노동자를 “주주”로 변화시킬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러나 이 제도는 연줄이 있는 내부 인사들과 구 시대 공장 관리인들을 부자로 만드는 술수에 지나지 않았다. 증서는 특별 경매를 통해서만 주식으로 전환될 수 있었다. 그러나 특별 경매는 의도적으로 일반 시민의 참여를 거의 불가능하게 조직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증서를 헐값으로 중간 상인에게 팔아야 했다. 경매를 조작한 “적색 관리자들”은 자기 회사의 자산 가치를 낮게 매기고 종업원들의 주식을 강제로 빼앗았다. 중대형 기업의 약 3분의 2는 이런 방식으로 이들의 소유가 되었다.

 

민영화는 새로운 세대의 역동적 기업가들을 탄생시킬 것으로 기대되었다. 이들은 외국 투자자들과 약삭빠르게 전략적 제휴관계를 맺을 것이었다. 그리고 러시아 산업의 국제 경쟁력 강화에 필요한 투자와 기술이전을 가져올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러나 계획경제의 무질서한 약탈은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왔다:

 

“공장 가동의 방식을 바꾸는 일은 등골이 휠 정도로 힘이 들었으며 엄청난 시간과 에너지를 필요로 했다. 따라서 재산을 불릴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러시아의 광대한 광물자원을 일부나마 가로채는 것이었다. 이 사실을 족벌들을 비롯한 러시아 기업가들은 곧 깨달았다….”

<프릴랜드, 앞의 책>

 

민영화 도박판에서 가장 크게 승리한 자들은 구 소련의 석유와 가스산업 경영자들이었다. 일반적으로 공장 관리인들은 제품의 생산, 판매, 수송, 원자재 수급 등에 골치를 썩여야 했다. 그러나 석유 및 가스산업의 큰 부분을 가로챈 구 관료들에게는 시장과 수송망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이들은 러시아의 연료 공급체계를 장악하고 수출시장에서 이윤을 챙겼다. 이 결과 이들은 국내 정치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획득했다.

 

“족벌”들은 러시아 산업의 운명에 별 관심이 없다:

 

“새로 정치적 영향력을 장악한 국가와 지역 차원의 `족벌’들은 `민영화’ 과정에서 대규모의 자산을 가로챘다. 이들 대부분은 경영에 관심이나 적성이 없었으며 투자와 구조조정을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았다. 대신 소유 기업의 현금을 해외로 빼돌렸다. 해외로 도피된 자본은 800억 달러에서 3,000억 달러의 범위로 추산되고 있다.”

<동서양 연구소, 1998년 11월 2일>

 

족벌들은 석유화학, 광물 등 원자재를 서방 제국주의 국가들에 제공하는 나라로 러시아가 탈바꿈하기를 원한다. 반면 구 소련의 공장 관리인 출신이었던 “적색 기업가들”은 녹슬고 낙후한 공장을 업그레이드할 자본의 축적을 위해 좀더 “애국적인” 보호무역 정책을 주창한다.

 

 

`세기의 바겐세일’

 

민영화의 제 1 단계는 세계 최대의 니켈 생산회사인 노일스크 니켈 등 가장 값비싼 전략 기업을 포함시키지 않았다. 이런 종류의 기업들은 1995년 “주식 대출”로 알려진 방식으로 시장에 매물로 나왔다:

 

“조작된 경매를 통해 정부는 거대 국영기업들을 단골 개인은행 그룹들에게 배분했다. 주식 대금은 은행이 정부에 제공한 `대출’의 보증금으로 분류되어 은행이 갚을 필요가 없었다.”

 <[이코노미스트]지, 1997년 7월 10일>

 

약 10억 달러의 “대출”을 은행들로부터 제공받은 옐친은 이보다 가치가 몇 배인 국영기업 자산을 주식의 형태로 은행에 제공했다. 족벌들은 “서로 짜고 정부에 로비공작을 펼치고 심지어는 포고령에 서명까지 했다”([외무], 2000년 11월-12월호). 이 군침 넘어가는 사업에 외국기업은 참여가 금지되었다. 이 거저 퍼주기는 1996년 대통령 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선심공세로 이루어졌다. 이때 옐친은 반유태인주의를 표방하며 구 소련 붕괴 이후 가장 대규모 정치 세력인 러시아공산당의 당수 게나디 주가노프에게 패배할 것처럼 보였다:

 

“주식 대출 정책을 통해 옐친은 다가올 대통령 선거에서 미래의 족벌이 될 기업가들로부터 정치적, 금융적, 전략적 지지를 얻어냈다. 이것은 러시아의 보물들을 헐값에 팔아 넘기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의 집권을 막기 위한 대가였기 때문에 젊은 개혁가들은 기꺼이 팔아 넘겼다. 가이다르는 이로부터 3년 후 비오는 어느 날 오후 그의 사무실에서 이렇게 나에게 말했다: `나는 당시 주식 대출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고 있었다. 이것은 정치적 협약을 창출했다. 이것으로 주가노프의 크렘린궁 입성은 확실히 저지되었다. 이것은 필요한 협약이었다.’”

<프릴랜드, 앞의 책>

 

러시아에서 “자유시장”은 민주주의, 투명성, 경쟁이라는 거창한 말이 반복되는 이면에 처음부터 조작극으로 일관했다. 물론 최상부에서 치열한 경쟁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금융 “족벌들”은 “주식 대출” 조작극으로 알짜 기업들을 대부분 차지했다. 그러나 매장량이 풍부한 루코일과 수르구트네프테가츠 석유기업들의 경우에는 “적색 기업가들”이 승리했다:

 

“이들은 지역의 모든 영향력을 동원하여 승리를 확보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수르구트네프테가츠 기업의 경매가 있던 날 가장 가까운 공항은 이유 없이 폐쇄되었고 시베리아의 외딴 도시인 수르구트로 가는 주요 도로의 검문소에는 무장 경비들이 배치되었다. 경매에 참여하는 일반인들은 경매가 열리는 이 도시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앞의 책>

 

1990년대 말까지 러시아의 급조된 부르주아 계급은 열 개 정도의 씨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의 대표는 외국의 “개발” 차관 등 국가의 자원과 기구를 장악하기 위해 서로 경쟁하는 족벌들이었다. 영국 금융자본의 주요 기관지인 [이코노미스트]지는 최근 음흉하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소련과 러시아에 빌려준 차관은 다 어디로 갔는가? 액수는 전부 합쳐서 1천5백억 달러가 넘는다. 이론적으로 이 돈은 식량 수입, 산업 현대화, 공공금융 부문 지원에 쓰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 엄청난 액수의 돈에 비해 이렇다하게 드러난 것이 없다. 경험이 풍부한 모스크바의 어느 투자은행가는 이 돈이 도난 당했다고 말한다.”

<[이코노미스트]지, 2001년 1월 11일>

 

1998년까지 서방 금융가들이 제공한 “차관”은 러시아 외채를 국내총생산의 30%로 끌어 올렸다. 최상부의 열댓 명에 불과한 연줄 좋은 기생충들이 이 돈을 전부 가로챈 것이었다. 이 차관은 러시아의 처참한 빈곤 근로계층인 수천만 명이 이자를 붙여 갚아야 할 돈으로 장부에 남아 있다.

 

 

대용(代用) 부르주아 국가

 

구 소련에서 이월된 인자들로 구성된 부르주아 국가 기구는 국영기업들을 민영화시킬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정상적인 부르주아 국가의 많은 기능들을 수행하기에는 능력과 권위가 부족했다. 족벌들 각자는 깡패를 동원하여 계약의 이행을 강제하고 빌려준 돈을 받았다. 또한 이들로 둘러싸여 신변을 보호받아야했다. 이 결과 러시아에 마피아가 등장하여 유약한 자본주의 체제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1994년 1월 30일자 [뉴욕타임즈]지 기사에 의하면 기업 특히 대기업 가운데 세금을 내는 곳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전체 기업의 70%에서 80%는 조직 폭력배에게 돈을 주어 경호를 맡겼다:

 

“조직 폭력배는 누구를 협박하여 어떤 액수의 돈을 요구할 지를 알고 있다. 경찰관, 은행 임원, 비밀요원들이 정보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검문소에서 차량을 검사하다가 트렁크에 귀중품이 발견되면 교통경찰은 전방 도로에 있는 폭력배에게 무전기로 연락한다. 그러면 기다리고 있던 폭력배가 차를 멈춘 후 트렁크의 귀중품을 강탈한다….공갈과 협박을 대항하기는 힘들다. 거의 모두가 숨겨야 할 비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세무서 직원에게 수입을 노출시킬까 두려워 조직 폭력배의 공갈과 협박을 신고하지 않는다…. 강도 건수의 80% 그리고 사기 건수의 90% 정도는 신고되지 않는다고 어느 러시아 소식통이 추산하고 있다.”

<구스타프슨, 앞의 책>

 

그러나 구스타프슨에 의하면 대부분의 사업가들은 복잡하며 서로 모순되는 규제 법규와 인허가 절차 등이 상업활동의 주요한 장애물이라고 간주한다: “범죄는 자신들이 알아서 처리할 수 있다고 이들은 말한다.” 옐친 집권기에 대부분의 대기업들은 인허가 절차 과정에서 돈을 쓰는 것보다 공무원들에게 뇌물과 떡값을 흥정하는 것이 더 쉽다는 것을 알았다. 많은 기업들이 세금 납부를 거부한 반면 일부 기업들은 팔리지 않은 물건과 차용 증서로 세금을 “납부했다”:

 

“국세청에 따르면 등록된 사업체의 16%만이 세금을 제때에 완납했으며 50%는 가끔 내고 34%는 세금 공무원들을 아예 무시한다.”

<앞의 책>

 

수만 개에 달하는 기업들은 세금을 내지 않기 위해 관청에 아예 등록도 하지 않았다. 일부 “기업가들”은 자신들에게 해당되는 기록문서를 파괴하기 위해 세무서에 불을 질렀다. 또는 청부살해업자를 고용하여 특히 골치 아픈 세무서 직원들을 살해했다.

 

 

고위 관료에서 부르주아 계급으로

 

급조된 부르주아 계급 가운데 상당수는 구 소련의 고위 관료 출신들이다. 반면 폴란드나 다른 동유럽 국가들의 경우 이들은 신흥 부르주아 계급의 극소수에 불과하다. 구스타프슨은 모스크바의 사회학자 올가 크리쉬타노프스카야의 연구를 인용하고 있다. 이 연구에 의하면 러시아의 자본가 엘리트 가운데 3분의 2 정도가 소련의 고위 관료 출신이다:

 

“이들 중 가장 부유하고 성공적인 부류들은 처음부터 국가기구 내부 세력의 도움을 받았다. 1990년대 최대 상업은행들의 창업자들은 국가기구 내부 세력의 인가된 대표들’에 지나지 않았다….간단히 말해서 이들은 진정한 자본가 계급이 아니었다. 국가와 개인의 이해를 결합시킨 새로운 금융-정치 족벌들이 내세운 앞잡이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몇몇 석유 및 가스 족벌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족벌들은 소련공산당 서열에 따라 지위를 획득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구체제에서 블라디미르 구신스키는 극장 감독이었고 보리스 베레조프스키는 수학자였으며 알파 그룹의 미하일 프리드만은 물리학자였다. 스탈린주의 지배집단 내부의 연줄은 각본에 없는 무질서한 민영화 진흙탕에서 성공하기 위한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었다.

 

브레즈네프 집권기에 소련공산당의 청년그룹인 콤소몰은 체제에 환멸을 느낀 자들의 피난처였다. 그러나 페레스트로이카의 시작과 함께 콤소몰은 새끼 기업가들의 훈련장이 되었다. 콤소몰은 여행사, 건축회사, 경기장, 스포츠클럽, 신문사, 소프트웨어 회사 등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 조직의 간부들은 1991년 8월의 결전에서 절대적으로 옐친의 편을 들었다. 이 결과 공산당이 불법화되었을 때도 콤소몰은 전혀 타격을 입지 않았다:

 

“현재 콤소몰 동창들은 러시아 사업가 집단 내에서 영향력이 가장 막강하다. 이런 측면에서 오늘날의 사업가들이 구체제 고위관료 출신들이며 콤소몰 연줄의 혜택을 입고 있다는 주장은 근거가 있다. 그러나 콤소몰 연줄은 주로 사업을 시작하는 수단을 제공했을 뿐이었다. 성공의 나머지 부분은 개개인의 재능과 활력에 달려 있었다.”

 <앞의 책>

 

일부 좌익은 구 고위관료집단과 신흥 부르주아 계급 사이의 계속성을 지나치게 과장한다. 예를 들어 지금은 고인이 된 토니 클리프의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은 소련이 이미 1928년부터 “국가자본주의 체제”였다고 오랫동안 주장해왔다. 이들은 옐친의 승리를 “한 형태의 자본주의에서 다른 형태의 자본주의로의 변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규정하였다. 자신이 쓴 마지막 책 가운데에서 클리프는 이렇게 주장했다:

 

“반혁명으로 소련이 자본주의로 복귀했다면 구 지배계급이 신 지배계급으로 완전한 교체가 되었어야했다. 그러나 사회 정점의 지배집단은 그대로 존속되었다. `사회주의’체제에서 경제, 사회, 국가를 운영했던 고위 관료집단은 지금 `시장’체제에서 똑같은 일을 하고 있다.”

<트로츠키 사후의 트로츠키주의>

 

그의 주장에는 일말의 진실이 있다. 다만 일말의 진실에 불과할 뿐이다. 예를 들어 옐친은 자본주의 반혁명의 역사적인 지도자이며 소련공산당 관료였다. 그러나 구 소련의 관리인, 경제전문가, 엔지니어 등이 자본주의 복귀 체제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현상은 짜르 치하의 관료, 행정가, 기술자, 군대의 장교 등 수천 명이 볼세비키 정권 초기에 고용된 현상과 별 차이가 없다.

 

한편 고위관료층의 최상부 인자 특히 중앙경제부처 책임자, 이론-선전가, 공산당 조직의 최고위 관료 대부분은 직책이 없어지면서 실업자가 되었다. 옐친의 집권과 함께 구체제의 “경제, 사회, 국가” 운영자들이 계속 권력을 유지했다는 주장을 엘먼과 콘토로비치는 일언지하에 거부한다:

 

“당과 국가기구 관료들이 국가소유를 자신의 개인 소유로 바꾸기 위하여 구체제를 타도했다는 이론이 요즘 유행한다. 그러나 이 주장을 지지할 증거는 아직까지 존재하지 않는다. 관료들은 고르바초프를 혐오했지만 체제 방어를 위한 집단행동을 주도할 능력이 없었다. 마찬가지로 이들에게는 체제 붕괴를 재촉할 능력도 없었다. 이들이 체제 붕괴 후 자기 자리를 찾았다면 이것은 거대한 음모의 결과가 아니라 개개인의 생존기술 덕분이었다.”

 

반혁명의 화려한 독버섯

 

1991년 이후 러시아 사회가 “게걸음처럼 한 형태의 자본주의 체제에서 또 다른 형태의 자본주의 체제로 옆 걸음을 쳤다”는 그럴듯한 주장이 있다. 그러나 이 주장은 근로인민이 자본주의 복귀로 인해 처참한 고통을 겪고 있다는 점을 무시하고 있다. [유엔개발프로그램]의 1999년 연구보고서는 이렇게 말했다:

 

“1990년대 이전에 중동부 유럽 그리고 구 소련(지금의 독립국가연합) 국가들은 높은 수준의 기본적 사회보장을 인민에게 제공하여 주목을 받았다…. 완전 평생 고용이 보장되었다. 현금 수입은 적었지만 안정적이고 변동이 없었다. 수많은 기본 소비재와 서비스는 국가 보조금을 받아 공급이 규칙적으로 유지되었다. 의식주 문제는 안정적으로 해결되었다. 교육과 의료는 무상으로 보장되었다. 퇴직자들에게 연금이 보장되었고 많은 종류의 사회보장 프로그램으로 이들은 정기적인 혜택을 누렸다.”

 

프릴랜드에 의해 “카지노 자본주의의 최대 승리자”로 묘사된 “족벌” 미하일 프리드먼은 1991년 이후 인민의 삶이 질적인 변화를 겪었음을 확실히 인정했다. 심지어 그는 구 소련 시절에 대한 향수를 토로했다:

 

“예전에 나의 생활은 소련의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아주 자유분방했다…. 물론 물질적으로 보면 사람들은 그리 잘 살지는 못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걱정거리가 없었다. 진짜 치열한 관심거리는 친구, 정신적 관심사, 책 등이었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지금보다 훨씬 더 열려있었다. 우리는 경쟁에 시달리지 않았다. 지금 존재하는 불평등과 시기심은 당시 존재하지 않았다. 요즘 사람들은 과거에 비해 훨씬 더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

<프릴랜드, 앞의 책>

 

자본주의하에서 인민은 생활하기가 더 힘들며 수명도 더 짧아진다. 1991년과 1995년 사이에 러시아 남성의 평균수명은 63세에서 58세로 급격히 떨어졌다. 인구증가율은 1990년의 2.4%에서 1996년의 마이너스 5.4%로 떨어졌다. (이 수치는 다른 나라로 이주한 수백만 명의 숙련 청년노동자들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

 

공공의료 체제는 거의 붕괴하였다. 현재 국내총생산의 1%가 공공의료 예산으로 책정되어 있는데 이 수치는 가장 가난한 신식민지 국가들에서나 볼 수 있다. 이 결과 결핵을 비롯해 과거에 근절되었던 전염병들이 다시 등장하고 있다:

 

“지금 다시 나타나는 질병들은 표준 예방주사로 통제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소아마비는 현재 서방 선진국에서는 거의 드문 병이 되었는데 다시 나타나고 있다….”

<[유엔개발프로그램]>

 

1989년과 1995년 사이에 에이즈 발생 건수는 급증했으며 매독 발생률은 40배나 증가했다:

 

“이런 문제들은 표준 예방주사나 성생활 보건프로그램 등 정상적인 공공의료 체제에 의해 해결되거나 최소한 통제될 수 있다. 그러나 이 문제들의 심각성은 자본주의 복귀로 국가의 주요 보건활동이 상당히 약화되었음을 나타낸다.”

<앞의 글>

 

계획경제의 파괴로 수백만 근로인민은 자신과 가족을 먹여 살릴 능력을 박탈당했다. 이 결과 마약 남용에서 배우자 폭행에 이르는 모든 종류의 사회 병리현상이 증가했다. 1991년에서 1995년까지 자살 건수는 거의 두 배로 늘었으며 타살의 비율도 급등했다:

 

“반실업 상태의 청년들은 생활 광고 난에 `높은 보수만 주면 어떤 위험도 감수한다’는 암호 표현을 사용하여 살인청부 광고를 냈다. 피라미 범죄자들은 사소한 이익을 위해 살해를 자행했다: 부동산 사기꾼들은 아파트를 상속받기 위해 잘 속아넘어가는 연금생활자들을 살해했다; 어느 범죄 조직은 자동차 보수공장을 위장하여 자동차 주인들을 죽이고 시체를 토막내었다.”

<프릴랜드, 앞의 책>

 

러시아의 사회 반혁명은 장애인, 연금생활자, 아동, 여성 등 사회의 약자들에게 특히 가혹했다. 유엔개발프로그램의 보고서 작성자들은 이념적 편향을 드러낸 채 놀라움을 표명했다:

 

“좀더 민주적인 자본주의 복귀는 역설적이게 여성의 고위직 진출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 여성들은 과거에 비해 공직에서 더 밀려나고 있다. 동시에 이들의 임금고용 기회가 줄어들었으며 가정과 직장 내에서 이들이 처리할 일의 비중은 전체적으로 늘어났다….여성 폭력은 배우자의 폭행과 함께 증가했으며 … 범죄에 희생되는 여성의 숫자도 증가했다. 직장과 더 좋은 생활을 필사적으로 원하는 여성들은 폭력배 조직에 의해 매춘을 강요당했다.”

 

프릴런드는 여기서 수치스러운 조사 결과를 인용하고 있다. 미국의 하버드 대학교나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교에 해당되는 러시아의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여학생들에게 최고로 선택되는 직업은 “달러 매춘”이었다.

 

자본주의 복귀는 제 2차 세계대전보다 더 많은 고아를 발생시켰다. 2001년 6월 1일자 [비비씨(BBC) 뉴스]는 이렇게 보도했다:

 

“2백 5십만 이상의 아동이 거리에서 생활하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양육할 능력이 없는 부모에 의해 버려졌다. 러시아 보건부의 보고서에 의하면 러시아 아동의 거의 전부는 초등학교를 졸업할 시기에 한 두 가지의 고질병을 앓고 있으며 다수는 알코올 중독자가 된다. 17세의 나이가 되면 10명 가운데 1명만이 건강한 것으로 평가된다.”

 

[유엔개발프로그램] 보고서는 자본주의 복귀의 결과를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러시아 인민은 꽤 좋은 교육, 건강한 생활, 적절한 영양 등을 더 이상 안정적으로 누릴 수 없다. 증가하는 사망률, 곧 닥칠 새롭고 파괴적인 유행병 등으로 생존 자체가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구 소련과 동구 국가들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은 실제로는 대공황의 완곡한 표현일 뿐이다. 생산의 붕괴와 치솟는 인플레는 사상 유례가 없다. 인간의 안정적 삶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보수적인 수치에 의하면 1억이 넘는 인민이 빈곤으로 추락했으며 이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인민은 불안하게 목숨을 부지하고 있을 뿐이다.”

 

`민주주의’와 반혁명

 

에르네스트 만델의 [제 4 인터내셔널 통합서기국]과 영국의 [노동자 권력] 등의 조직들은 소련 방어노선을 견지하는 “트로츠키주의” 조직을 자임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1991년 8월에 옐친을 지지했다. 자본주의 복귀세력의 “민주주의”가 집단적 소유체제의 보존보다 더 가치가 있다는 것이 이들의 변명이었다. 그런데 이들의 주장은 레닌과 트로츠키의 볼세비키 정권에 반대한 카우츠키의 논리와 유사하다. 그의 주장을 사회민주주의자들과 반공주의자들은 계속 되풀이하고 있다.

 

반혁명의 “민주적 권리”는 빈곤, 노숙, 기아와 질병 등에 시달리는 수천만 러시아 인민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러시아의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서로 다투고 있는 부르주아 씨족들의 경상비용 절감 장치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어느 순간에도 철회될 수 있는 종이 권리에 불과하다. 옐친은 자신의 회고록 제 3권에서 이 점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이 책에는 주가노프의 집권 가능성에 직면하여 1996년 대통령 선거를 취소하고 러시아공산당을 불법화시킬 조치를 거의 취할 뻔했던 자신의 심경이 잘 드러나 있다:

 

“숨길 이유가 없다: 나는 언제나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인 결정들을 선호해왔다. 알렉산더 대왕이 했던 것처럼 고르디우스 왕의 매듭을 칼로 끊어버리는 것은 이것을 풀기 위해 수년을 고생하는 것보다 쉬운 일로 나에게는 보였다….안보책임자 코르자코프 역시 승리할 선거전략을 찾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지지율이 3% 밖에 안될 때 애를 써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선거 게임에 몰두하느라 시간을 허비하면 어떤 좋은 결과가 나오겠습니까?’ 비상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자 나는 참모진에게 문서를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공산당 불법화, 의회 해산, 대통령 선거 연기 등을 내용으로 한 포고령이 작성되었다. 이 문서들은 헌법이 허용하는 조치로는 위기를 해결할 수 없다는 나의 판단을 명백히 했다. 공산당 불법화 등 초헌법적 조치는 나에 대한 대중의 신뢰를 크게 떨어뜨릴 것이라고 나는 예상했다. 맞다. 이것은 커다란 도박이다. 그러나 이 조치는 대통령 임기 초부터 존재했던 주요한 문제 하나를 해결할 수 있었다. 불법화되면 공산당은 러시아에서 영원히 사라질 것이었다.”

<밤 12시에 쓴 일기>

 

결국 옐친의 딸과 그의 핵심 친위 그룹의 여러 명이 그를 설득시켰다. 이런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경우” 내전이 일어날 것이라고 이들은 주장했다. 그러나 옐친은 거의 비상 조치를 취할 뻔했다.

 

[이코노미스트]지는 당시 러시아 의회선거 결선투표를 “지저분한 광경”이라고 적절하게 묘사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옐친과 그의 친구들은 국영 텔레비전방송의 도움을 받고 있다. 크렘린궁은 아양떠는 방송으로 지지자들을 모으고 비방 방송으로 반대세력을 제거할 수 있다.”

<[이코노미스트]지, 1999년 12월 16일>

 

지배 파벌에게 감히 덤비는 자들은 인생이 괴롭다:

 

“반정부 후보를 지원하는 주지사들은 낭패를 당할 수 있다. 자기 주 석유회사가 국가 의 파이프라인 시설을 이용하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신 이들이 정부를 지지하면 골치 아픈 반대 세력이 감옥에 갇히거나 직위에서 쫓겨날 수 있다. 또한 자기 주 소재 기업들이 짭짤한 세금 감면 혜택을 누릴 수도 있다.”

<앞의 잡지>

 

새로운 지배 집단은 인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정권의 불안정을 노출시킬 수 있다. 이것은 상당한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다:

 

“크게 성공해서 족벌이 된 몇몇 행운의 사나이들도 언제나 불안감을 안고 있었다: 어쩌면 공산주의자들이 다시 정권을 탈취할 수 있다…. 어쩌면 정적들이 정권을 장악한 후 나를 감옥에 가둘 수 있다. 어쩌면 감옥에서 심장마비가 일어날 수도 있다. 아니면 사업의 호적수가 자동차 폭탄 테러로 내가 죽으면 행운을 잡을 수 있다…. 돈과 보디가드가 아무리 많아도 안전하다고 느껴지지가 않는다.”

<프릴런드, 앞의 책>

 

제국주의 “민주주의 체제”는 권력을 조종하고 매수하는 세련된 방식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부르주아 계급의 안정감과 정치과정의 상대적 자율성이 국가기구에 신뢰성을 부여한다. 그러나 러시아에서는 모든 부가 정치적 연줄을 통해 공공소유에서 족벌들에게 넘어왔다. 소위 민주주의 체제의 실체가 좀더 투명하게 드러난다:

 

“족벌 기업들의 세금으로 정부는 겨우 버티고 있다. 이들이 바치는 뇌물로 권력자들은 안락한 생활과 안정된 노후를 누린다. 이에 대한 대가로 족벌 기업들은 국가와 그 하수인들이 자기 이권을 보호해 줄 것으로 기대한다. 예를 들어 국가는 외국기업을 몰아내고 허술한 법을 고치지 말고 경쟁을 배제시켜야 한다.”

<[이코노미스트]지, 2000년 3월 30일자>

 

자유시장 몽상가들의 장밋빛 전망과는 정반대로 러시아의 급조된 부르주아 계급은 시설 개선, 효율적 생산 방식의 도입, 생산 확대 등에 대해 놀랄 정도로 무관심하다:

 

“새 러시아에서 번영하는 자들은 초대형 부자들뿐이다…. 이들의 막대한 부는 새로운 기술, 좀더 효율적인 서비스, 좀더 생산성 있는 공장에서 나오지 않았다. 붕괴한 국가소유 즉 유전, 니켈 광산, 텔레비전 방송 채널, 수출 면허장, 심지어는 국가의 은행 계좌 등에서 나왔다. 그리고 일단 러시아의 매판자본가들이 전리품을 확보하자 이들은 이것을 가능한 빨리 더 안전한 해외로 도피시켰다. 1991년과 1999년 사이에 1천억 달러에서 1천5백억 달러의 자본이 러시아를 빠져나간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산했다. 러시아는 왜곡된 시장경제를 탄생시켰다. 10년간 지속된 경제불황, 죽어가면서 더욱 빈곤에 허덕이는 하층 계급, 호화로운 생활에 찌들어 있는 극소수 기생 계층 등으로 러시아는 일종의 자본주의 생지옥이 되었다. 구 소련의 선전가들이 `썩어 들어가는 서구 부르주아 사회’라고 불렀던 끔찍한 삶의 이미지가 러시아에서 현실로 등장했다.

<프릴런드, 앞의 책>

 

상당한 흑자, 브랜드 명성, 점점 커지는 시장점유율 등이 자본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제공한다고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러시아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사업의 규모와 성공은 특히 지역 차원에서 조직 폭력배들과 부패한 관료들의 관심을 끈다. 경쟁사를 도태시키면 자기 기업의 시장점유율이 점점 증가하는 즐거움을 목격해야한다. 그러나 러시아에서는 경쟁사와 관련된 정치꾼이나 조직 폭력배가 회사를 방문할 위험성이 있다. 상황이 좋으면 자의적이고 약탈적인 세무 경찰이 들이닥치고 상황이 좋지 않으면 자동차 폭탄 테러나 총탄 세례를 받는다. 이 때문에 아무리 능력 있는 경영자도 비용과 타협을 대가로 정치인의 보호를 거의 불가피하게 요청한다.”

<[이코노미스트]지, 2000년 3월 30일>

 

푸틴의 프로젝트

 

반혁명의 역사적 지도자 옐친도 블라디미르 푸틴에게 정권을 넘기기 전에 자신과 가족의 정치적 보호를 보장받아야 했다. 소련 비밀경찰(KGB)에서 잔뼈가 굵은 푸틴은 러시아 자본주의를 “정상화”시키고 나라의 국제적 위상을 회복할 인물로 기업 경영주, 국가기구, “애국적” 부르주아 계급의 지지를 받았다.

 

그는 지역에 대한 중앙정부의 권위를 다시 회복하고 세금 납부를 더욱 강제하고 족벌들의 전횡을 억제하는 일에 착수했다. 한때 막강했던 러시아 산업의 위력을 부흥시키기 위해 그는 해외 자본을 유치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를 위해 그는 외채를 제때에 갚도록 조치하였다. 그리고 주택, 대중교통을 비롯한 공공서비스에 대한 지원금을 삭감하고 자본에 유리한 노동법 “개혁”을 밀어붙였다. 또한 체첸에 대한 반동적 전쟁을 공격적으로 추진하면서 코커서스 지역, 우크라이나 등 구 소련 공화국들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을 다시 확립했다.

 

1999년에서 2000년 사이 러시아의 국내총생산은 10년의 하락 후에 증가세로 돌아섰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상품 특히 석유 가격의 급등 때문이었다. 그러나 주 요인은 1998년 금융위기에 뒤이어 단행된 75%에 달하는 루블화의 평가절하 때문이었다. 값싼 루블화는 러시아 수출상품의 국제 경쟁력을 강화시켰으며 식료품, 자동차, 섬유, 전자 등 국산 소비재에 대한 수요를 증대시켰다. 최근 몇 년간 러시아의 일부 대기업들은 소폭이나마 국내에 자본을 투자했으며 우크라이나 등 구 소련 공화국에서 공장을 구입했다.

 

루블화의 평가절하 이후 기업간의 거래는 물물교환에서 현금 거래로 대체되었으며 세수는 증대했다. 정부는 일련의 재정흑자를 기록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상황은 여전히 암울하다. 임금 수준은 평가절하 이전의 절반에 불과하며 구 소련에서 물려받은 인적 자원은 급속히 소진되고 있다. 교육 관련 예산은 삭감되었고 연구개발비는 고르바초프 치하의 3분의 1도 되지 않는다. 원자재와 일부 기본 화학재 외에 러시아는 군수, 핵발전, 우주항공기술 등 몇 분야에서만 국제 경쟁력을 갖추고 있으나 이 분야들에서도 서서히 기반을 잠식당하고 있다. 이것은 전혀 놀라운 현상이 아니다. 러시아 공장설비의 평균 연령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제국주의 국가들의 것보다 3배나 많다.

 

러시아의 도로, 교량, 전선, 상하수도 체제는 급속히 붕괴하고 있다. 지난 10년간 러시아 “기업가들”은 약탈한 자본재를 대체하거나 개선하지 않은 채 소모시키기만 했다:

 

“러시아 경제의 쇠퇴에 비해 투자는 더 빨리 쇠퇴했다. 전반적으로 고정투자 총액은 1989년 국내총생산의 45%에서 1996년의 21%로 떨어졌다. 같은 기간에 국내총생산 자체가 40% 넘게 하락했기 때문에 자본재 투자의 절대 액수는 4분의 3이나 하락한 셈이다. … 1995년 이후 순고정투자는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해왔다. 다른 말로 하면 러시아의 자본 기반은 전체적으로 축소되어왔다. 1997년 순고정투자는 국내총생산의 마이너스 10%를 기록했으며 계속 떨어지고 있다.”

<구스타프슨, 앞의 책>

 

러시아의 기술을 갱신하고 사회 인프라를 재건하기 위해서는 수천 억 달러가 소요될 것이다. 그러나 2000년의 무역 흑자 600억 달러의 약 절반은 족벌들에 의해 해외 은행계좌로 빠져나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심지어 외화 벌이의 가장 주요한 원천인 석유와 천연가스 부문에서조차 재투자가 이루어지지 않아 생산량이 감소해왔다. 구 소련 시대에 건설된 석유 파이프라인은 예상된 수명을 거의 다했으며 매년 2천만 톤으로 추산되는 석유가 새어나와 러시아의 숲, 토지, 강을 오염시키고 있다.

 

 

다시 한번 10월 혁명을!

 

현재 러시아는 짜르 시대와 마찬가지로 강대국과 반식민지의 특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근로인민의 혁명 지도부에 근접하는 정치조직은 존재하지 않는다. 레닌과 볼세비키당 대신 푸틴의 좌에는 반유태인주의와 친자본주의를 표방하는 국수주의적 러시아공산당이 있을 뿐이다.

 

현재 러시아 노동계급의 사회적 비중은 1917년에 비해 엄청나게 높아졌다. 또한 자본주의 민영화에 대한 끔찍한 경험은 시장의 마술에 대한 모든 환상을 날려버렸다:

 

“언어 자체가 거꾸로 뒤집혔다. `개혁’과 `시장’이란 말은 대다수 러시아인들에게 승리와 희망의 말에서 거의 욕으로 바뀌었다. 자본주의라는 단어 앞에는 야만적이라는 수식어가 점점 자주 붙었다. 따라서 `서방’은 찬탄과 모방의 대상에서 분노의 표적으로 변했다. 한편 `좌익’이라는 말이 다시 유행하고 있다.”

<[이코노미스트]지, 1998년 11월 19일>

 

러시아의 쇠퇴를 저지할 목적으로 푸틴은 그동안 반혁명이 뒤집어 쓰고 있던 민주주의 가면을 거의 다 벗어 던졌다. 국제시장의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러시아 자본가들은 정치적 권리와 노동조합의 자유를 더욱더 강력하게 공격할 것이다. 비록 십 년간 지속된 자본주의 반혁명으로 엄청난 고통을 당했지만 러시아 노동계급은 지금의 세계에서 잠재적으로 강력한 정치적 요인으로 남아있다. 혁명조직은 피억압 인민을 착취자들에게 화해시키려는 정치세력에 대해 비타협적으로 투쟁하고 강력한 계급투쟁 전술 구사해야 한다. 이럴 경우 이 조직은 지금 상황에서 기하급수적으로 세력을 확대할 수 있다.

 

구 소련의 공화국들은 엄청난 천연자원과 상당수의 숙련 노동자, 과학자, 엔지니어 등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자본주의 세계로의 재편입은 지금까지는 대대적인 궁핍과 기존 교육 인프라 및 산업 능력의 대대적인 파괴만을 낳았다. 스웨덴이나 독일보다 나이지리아가 자본주의 러시아의 미래상이 될 가능성이 더 크다.

 

러시아 근로인민이 전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본주의 기생충들에 대한 완전한 몰수와 연합 생산자들의 직접 통제에 의한 계획경제의 수립에 있다. 레닌과 트로츠키의 정치적 유산에 기초하며 강력한 러시아 노동운동의 지도력을 확보하는 투쟁에 헌신하는 새로운 볼세비키당의 중핵을 결집시키는 임무, 이것이야말로 이 시기 혁명가들의 가장 주요한 임무이다.

 

새로운 10월 혁명을 통해서만 러시아 노동자들은 제국주의 체제가 이들에게 강제해온 후진성과 궁핍에서 벗어날 수 있다. 새로이 상승하는 러시아 노동계급은 증오의 대상이었던 스탈린주의 체제를 복귀시키지 않을 것이다. 또한 일국 차원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려는 자립경제의 환상도 쫓지 않을 것이다. 오직 세계사회주의혁명의 거대한 질적 변화를 촉발시킬 촉매가 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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