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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국가(소련/중국/북한 등)의 사회성격
2015.03.26 21:18

(IBT) 소련은 왜 자본주의 체제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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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출처 – 국제볼셰비키그룹(IBT) 웹사이트


<스파르타쿠스동맹(SL) 팜플렛>

*** 이 팜플렛은 1960년대와 1970년대 미국의 트로츠키주의 혁명조직이었던 스파르타쿠스동맹(SL)이 산하 청년조직인 스파르타쿠스청년동맹(Spartacus Youth League)을 위해 1977년 4월에 출판했으며 1982년 9월에 재판했다.***

  

소련은 왜 자본주의 체제가 아닌가?

<차례>

1. 서문

2. 모택동주의 경제학의 빈곤

3. 모택동주의자들이 소련에 "자본주의를 복귀"시킨 방식

4. [적색 신문]지 제 7호: 모택동주의의 미쳐 날뛰는 관념론

5. "국가 자본주의" 이론의 반(反)맑스주의

 

1.서문

 

1917년 10월 볼셰비키 혁명이 성공한 이래 소련의 사회성격을 둘러싼 이견들은 국제노동자운동 내부의 조직적 정치적 분립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어왔다. 10월 혁명 직후 사민주의자들은 레닌의 소비에트 정부를 부르주아 민주주의로부터의 역사적 후퇴라고 규정하면서 이 체제를 비난했다. 이미 1919년에 카우츠키는 소련을 관료들로 구성된 "새로운 계급"이 지배하는 "국가자본주의 체제"라고 선언했다.

이로부터 몇 년 후 특히 크론슈타트 봉기를 이유로 무정부주의자들은 볼셰비키 혁명에 대해 실망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레닌의 중앙집중주의 정권을 "당 독재"라고 비난하고 국가가 모든 사회적 억압의 근원이라는 바쿠닌의 명제를 반복했다. 그리고 1921년 신경제정책(New Economic Policy)이 도입되고 스탈린에 의해 당과 소비에트가 관료화되기 시작하자 제 3 인터내셔널(코민테른) 내부의 초좌파 분자들 특히 네덜란드의 고터/파네코크(Gorter/Pannekoek) 그리고 독일공산주의노동자당(KAPD) 등은 러시아에 자본주의가 복귀했다고 결론 내렸다.

1930년대에 레온 트로츠키는 소련이 관료적으로 퇴보한 노동자국가라고 규정했다. 집단적 계획경제는 노동계급적이며 반(反)자본주의적인 소련 국가의 성격을 나타낸다. 스탈린의 전체주의 테러 통치는 기생적 관료층에 기초하고 있다. 사회주의로의 길을 열기 위해서는 후자가 노동계급에 의해 타도되어야한다. 노동운동 내부에서 스탈린 체제에 반대하는 세력들 가운데 트로츠키주의자들만이 소련을 질적으로 기형화되기는 했지만 노동계급 독재의 계속된 표현으로 간주했다.

제 2차 제국주의 세계대전 직전에 "러시아 문제"를 둘러싼 국제좌익의 기본 정치지형은 각 경향들이 나름의 특징적인 이론을 동원한 가운데 좀 더 안정적으로 정착했다. 이로 인해 새로 형성된 정치 조직들은 기본 정치 경향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맥스 섁트먼과 토니 클리프 등 트로츠키주의 제 4 인터내셔널에서 우경화하면서 분립한 경향들은 사민주의 진영으로 표류해 들어갔다. 좌경화하면서 분립한 제이 알 잔슨과 그란디조 무니스 등은 이름만 제외하면 무정부주의적 조합주의자가 되었다.

러시아 문제를 둘러싸고 1930년대에 확립된 국제좌익의 정치적 이론적 분립은 소련이 "국가자본주의 체제"라는 주장을 지금 새로이 수용한 모택동주의자들에 의해 혼란스러워졌다. 1971년 이후 중국은 브레즈네프 치하의 소련에 맞서 실제적으로 미 제국주의와 동맹했다. 그러면서 소련이 "사회제국주의 초강대국"이 되어 자본주의 국가들보다 "더 위험하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정책을 정당화한다. 소련이 계급 착취에 기초한 사회라는 견해를 현재 가장 공격적이고 히스테리하게 주장하는 세력은 사민주의자나 무정부주의적 조합주의자가 아니라 정통 스탈린주의를 자처하는 모택동주의자이다.

소련을 "국가 자본주의 체제"라고 비난하는 모택동주의자들을 보면 아이러니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좌익 일부는 스스로가 스탈린주의의 가장 비타협적인 적이라고 자칭하면서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스탈린주의에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비난해왔다. 그런데 가장 강경한 스탈린 숭배자인 모택동주의자들이 이제 이들의 주장을 반복하고 있다. 모택동주의자들은 스탈린 체제를 비난한 카우츠키와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을 거의 그대로 본떠서 브레즈네프 치하의 소련을 공격하고 있다.

사실 좀 더 절충적인 신좌익(New Left) 모택동주의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빈약한 이론적 무기를 보강하기 위해 사민주의자들의 수정주의도 기꺼이 끌어들이려 한다. 안토니오 카를로는 "중국식 사회주의 건설의 길"을 추종하는 이탈리아인인데, 그는 스탈린 치하의 러시아가 "관료적 집산주의 체제"였다고 주장한다("소련의 사회-경제적 성격", [텔로스]지, 1974년 가을). 학술적이면서도 모택동주의에 어느 정도 동조하고 있는 [월간 평론](Monthly Review)지의 편집자 폴 스위지에 공감하는 어떤 이는 소련의 관료집단이 지배계급이기는 하지만 소련이 자본주의 체제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섁트먼과 루돌프 힐퍼딩의 분석이 좀 더 적절하다고 암시한다:

"소련과 동구권처럼 계층화되고 관료적 계획 경제가 실시되는 사회는 계급 사회이다. 맑스가 무덤에서 일어나 걸어 나오더라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맑스주의자들은 계획 경제가 실시되는 이 사회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규정해왔다. 관료적 집산주의(섁트먼), 전체주의 국가(힐퍼딩), 국가 사회주의(나빌) 등이 이것이다. 이 사회들에 대한 올바른 규정이 무엇이든 한 가지 특징은 명확하다 --- 관료집단은 계급이다."-- 로스 갠디, "소련의 사회 성격에 대해 더 언급하다", [월간 평론]지, 1976년 3월

소련이 계급 사회라고 주장하면서도 어떤 종류의 계급 사회인지를 모르는 저술가의 과학적 가치에 대해 우리는 논평할 생각이 없다.

소련의 사회성격에 대해 기존의 사민주의자와 무정부주의 조합주의자들이 모택동주의 스탈린주의자들과 이론적으로 수렴이 되는 현상은 트로츠키주의자들에게는 전혀 놀랍지 않다. 러시아 문제에 대한 다수의 논쟁적 글들에서 트로츠키는 스탈린과 그를 계급 착취 사회의 지배자로 비난하는 자들 사이에는 방법론적 유사성이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예를 들어 이 문제에 대해 트로츠키가 최후로 전개한 주장들 가운데 이런 대목이 있다:

"섁트먼은 제 4 인터내셔널의 현재 노선뿐 아니라 과거의 노선도 수정하고 있다. 우리가 스탈린에 반대하고 있으므로 소련에 대해서도 반대해야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스탈린이 오랫동안 우리를 공격한 논리이다. 다만 섁트먼은 아주 최근에야 이렇게 주장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스탈린의 정책을 거부하면서 섁트먼은 완전하고 분리될 수 없는 패배주의에 빠져 들어가고 있다."-- "긁힌 상처가 도져 몸이 썩어 들어가다", 1940년

스탈린과 섁트먼은 지배 정당이나 지배 집단의 정치적 성격과 국가로 대변되는 사회 지배계급을 동일시하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개별적으로 다른 점이 있으면서도 주장들이 서로 중첩되는 "국가 자본주의" 경향은 사민주의, 무정부주의적 조합주의, 그리고 이제 모택동식 스탈린주의로 명확히 구분된다.

 

사회민주주의적 자유주의와 경제주의

예상할 수 있듯이 소련이 "국가 자본주의 체제"라고 처음 주장한 세력은 사민주의자들이었다. 러시아가 너무 후진적이어서 자본주의보다 더 발전한 사회주의를 지탱할 수 없다는 카우츠키/멘세비키의 교조에서 이 주장은 논리적으로 도출되었다. 레닌 치하의 러시아가 자본주의 체제였다는 주장은 제 2 인터내셔널이 주창했던 개량주의 세계관의 필연적 부분이었다.

1919년에 저술된 카알 카우츠키의 논쟁적 저작 [테러주의와 공산주의]는 이후 사민주의자들이 펼친 기본 주장들을 전부 선보이고 있다. 이들은 소련이 부르주아 민주주의 체제보다 사회주의에서 더 멀어진 체제라고 비난했다. 카우츠키는 민주주의를 부르주아 의회주의와 동일시하면서 노동자 소비에트의 통치 체제 자체가 사회주의 원칙에 위배된다고 비난했다. 그는 레닌 치하의 러시아를 "국가 자본주의 체제"로 규정하고 이 체제가 짜르 체제보다 노동자들에게 더 해롭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산업을 구출하기 위해 관료들의 새로운 계급이 형성되어 노동자들을 지배해야했다. 이 새로운 계급은 모든 실질적인 통제력을 장악한 후 노동자들의 자유를 단순히 환상에서만 존재하는 자유로 변모시켰다....

구 관료집단의 절대주의는 새로운 그러나 결코 개선되지 않은 형태로 소생했다. 그리고 이 절대주의와 함께 자본주의의 새로운 씨앗들이 형성되고 있다....이 체제는 과거의 산업자본주의보다 훨씬 낮은 수준에 있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은 오랜 봉건적 장원일 뿐이다. 러시아의 현실은 이것을 철폐할 정도로는 무르익었다. 그러나 자본주의를 철폐할 정도로는 무르익지 않았다. 자본주의가 이제 소생하고 있다. 다만 자본주의의 이 형태는 과거의 형태보다 노동계급을 더 억압하고 더 해친다....산업자본주의는 민간 자본주의에서 이제 국가자본주의로 변모했다. 과거에 국가 관료들과 민간 자본의 관료들은 서로 직접 적대하지는 않았으나 종종 매우 비판적이었다....그러나 현재 국가와 자본가의 관료집단은 하나의 체제로 통합되었다. 이것은 볼셰비키당이 초래한 거대한 사회주의 격동의 최종적 결과이다. 이 체제는 지금까지 러시아가 겪었던 모든 형태의 전제 가운데 가장 억압적이다." (강조는 인용자)

볼셰비키당이 정권을 장악한 지 채 2년도 되지 않은 시점에서 "배신자 카우츠키"는 이렇게 주장했다. 이 주장에 기초해서 이후 국가자본주의의 모든 이론들이 구축되었다. 이 사실 자체는 "국가자본주의"이론이 가지고 있는 개량주의적 전제를 웅변하고 있다.

1929년 스탈린이 공업화 캠페인을 시작하자 사민주의 이론가들은 자신들의 "의회민주주의를 통한 사회주의의 길" 입장에 다른 내용을 하나 더 첨가시켰다. 스탈린이 생산재에 불균형적으로 자원을 집중시키고 공업화를 가속화시키자 러시아 대중의 생활수준은 급격히 하락했다. 그러자 사민주의 대변인들은 러시아를 "자본주의 체제"라고 선언했다. 노동자의 임금을 희생시켜 자본 축적을 최대화시켰다는 것이다.

"스탈린의 공업화가 곧 자본주의이다"라는 주장을 가장 먼저는 아니더라도 가장 두드러지게 주장한 자는 토니 클리프이다. 영국의 국제사회주의자그룹을 주도하고 있는 그는 트로츠키주의를 배신한 자이다. 그의 사기성이 농후하며 경제주의적인 국가자본주의 이론에 대한 포괄적인 설명은 이 팜플렛에 수록한 "반(反)맑스주의적 '국가 자본주의' 이론 --- 트로츠키주의에 입각한 비판"을 참고할 수 있다.

근본적으로 "축적이 곧 자본주의이다"라는 주장은 사적으로 소유되는 상품이자 생산수단인 자본과 물리적인 생산수단을 동일시하는 노동자주의 참주선동이다. 1875년에 저술된 맑스의 "고타강령 비판"은 노동자국가의 성격과 조직을 설명한 고전적 저작이다. 이 저작에는 "모든 노동자들은 '노동의 감소되지 않는 성과'를 분배받아야한다"는 라쌀레의 사고를 비판하는 부분이 있다. 여기에서 맑스는 명확히 설명했다: 생산물이 소비되고 난 후 남는 잉여물의 일부는 생산수단을 증대시키기 위해 투여될 것이다:

"노동생산물의 의미에서 '노동의 성과'라는 말을 우선 검토해보자. 그렇다면 협동을 통한 노동의 성과가 사회적 생산물 총량이다. 이로부터 다음이 공제되어야한다:

우선 사용된 생산수단의 감가상각 부분.

둘째 생산의 증대를 위한 생산수단 증가분." (강조는 인용자)

생산수단의 축적은 모델로 제시된 노동자국가의 강령적 규범이다. 그렇다면 제국주의 세력에 포위된 후진 노동자국가에게는 생산수단의 축적이 더욱 더 중요하고 급격하게 성취되어야할 당면 과제이다.

1930년대 후반에 스탈린은 잠재적 반대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당과 군부를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이 사건은 "전체주의 국가"의 등장에 초점을 맞춘 새로운 이론들을 촉발시켰다. 이 이념적 전통은 조오지 오월의 소설 [1984년]이 표현한 무한대의 역사 비관주의로 그 절정에 치달았다. 스탈린의 숙청은 합리적 경제 목표에 무관심한 전능하며 자의적인 국가권력의 존재를 대표하는 것처럼 보였다. 러시아는 거대한 강제수용소가 된 것 같았다.

제 1차 세계대전과 제 2차 세계대전 사이의 시기에 사민주의 진영의 가장 뛰어난 이론가였던 루돌프 힐퍼딩은 이렇게 주장했다: 스탈린 치하의 러시아는 기존의 맑스주의 이론과 범주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새로운 역사 현상이다. 1940년에 저술한 에세이(시론)에서 그는 소련이 "국가자본주의 체제"라는 주장을 멋지게 비판했다. 또한 그는 관료집단이 지배계급이라는 주장 역시 확실히 반박했다: 관료집단을 구성하는 관료 개개인은 생산 잉여의 명확한 부분을 전유하거나 심지어는 위계질서 내에서 자신이 누리는 지위를 유지할 제도적 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는 올바르게 이렇게 주장했다: 소련의 관료집단은 "나머지 인민들과 마찬가지 정도로 정부에 종속되어 있다."("국가 자본주의 경제인가 아니면 전체주의국가 경제인가?", 어빙 하우 편집, [사회주의에 대한 핵심 저작들], 1970년)

힐퍼딩은 기본적으로 무정부주의 국가관으로 퇴행했다. 그에 따르면 국가는 사회를 지배하는 독자적 기관이다. 그는 '국가권력은 경제생활의 핵심집단 즉 계급의 소유를 방어한다'라는 맑스주의 국가관을 거부하고 있다. 그는 아는 것도 많을 뿐더러 정직했기 때문에 맑스주의 국가관에 대한 자신의 수정주의 사고를 명확히 드러내었다:

"현재의 국가권력은 독자성을 성취했기 때문에 자기 나름의 법칙에 따라 자신의 엄청난 힘을 과시하면서 사회 세력들을 종속시키고 이들로 하여금 단기적이든 장기적이든 국가의 목적에 봉사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이 점을 맑스를 추종하는 종파주의자들은 이해할 수 없다.

따라서 러시아든 전체주의 일반이든 이들 체제의 성격은 경제적 성격에 의해 결정될 수 없다. 이와 반대로 지배 권력의 정책에 의해 결정되고 이 권력의 목적에 종속되는 것은 바로 경제이다. 부르주아 국가의 경우와는 달리 전체주의 권력은 경제나 이 경제를 지배하는 계급을 위해 존재하지 않으며 경제를 집어 삼키면서 이 위에 군림한다...."-- 같은 글

이 시기에 등장한 "관료적 집산주의" 이론도 힐퍼딩의 "전체주의 국가" 이론과 아주 유사한 논리를 가지고 있다. 1939년에 [세계의 관료화]를 저술한 이탈리아의 브루노 리찌는 한때 트로츠키주의자였는데 관료적 집산주의의 원조가 되었다. 힐퍼딩과 마찬가지로 리찌는 스탈린 체제를 파시즘의 등장과 동일시했으며 사민주의자 힐퍼딩과는 달리 스탈린 체제를 루즈벨트의 뉴딜 체제와 동일시했다. "관료적 집산주의"는 세계 역사적인 현상으로 자본주의 생산의 무계획성에 대한 합리적 해결책으로 간주되었다.

"관료적 집산주의"는 미국에서 트로츠키주의를 배신한 맥스 섁트먼에 의해 계승되었고 대중화되었다. 제 2차 세계대전을 통해 파시스트 강대국들이 패배하자 그는 갈수록 확신에 차 이렇게 결론지었다: "관료적 집산주의" 즉 스탈린 체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보다 사회주의 미래에 더 큰 위협이다. 따라서 그는 불가피하게 미국 공식 사민주의의 광신도적인 반공 노선으로 이끌려 들어갔다.

1930년대 후반에 등장한 전체주의국가 이론들은 스탈린의 러시아가 나치 독일처럼 가장 선진적인 부르주아 민주주의로부터 퇴행한 역사적 산물이라고 명시 내지 암시했다. 이 점에서 이 이론들은 모두 사민주의 전통 위에 서 있다.

 

무정부주의적 조합주의의 반동적 공상

소련에 대한 무정부주의적 조합주의의 입장을 논의해보자. 이때 고전적인 바쿠닌주의를 신봉하는 무정부주의 경향과 레닌의 코민테른을 지지하면서 맑스주의자를 자처한 초좌익 공산주의 경향을 구별하는 것이 유용하다.

전통적인 무정부주의적 조합주의자들은 볼셰비키당이 생산수단의 국가소유와 경제 중앙집중주의 등 맑스주의 노선을 이행하자 이를 비난했다. 1970년에 저술된 모리스 브린튼의 [볼셰비키당과 노동자에 의한 생산의 통제, 1917년-1921년]은 레닌 치하의 러시아에 반대한 무정부주의적 조합주의자들의 주장을 효과적으로 다시 표현한 최근 저작이다. 충실한 연구와 상당히 객관적인 시각을 장점으로 한 역사 시론인 이 저작에서 브린튼은 올바르게 이렇게 주장한다: 볼셰비키당은 언제나 중앙집중적 경제운영을 목표로 했으며 이들이 1917년과 1918년 시기에 노동자의 자주관리를 조심스럽게 수용한 것은 상황적 요인에 따른 전술적 목적 때문이었다.

그러나 브린튼은 기본적으로 맑스 이전의 사상적 조류에 공감하고 있기 때문에 소련 사회의 구체-특수성과 레닌, 스탈린, 브레즈네프로 이어지는 이 사회의 발전 상황에 무관심하다. 그와 그의 동료인 무정부주의적 조합주의자들은 계급을 정치적 경제적 행정가 집단으로 단순하게 규정한다. 달리 표현하면 이들에게 사회는 기본적으로 명령을 내리는 집단과 명령을 따르는 집단으로 구분되어 있다:

"또한 우리는 이렇게 주장한다: 생산관계를 혁명화하지 않고도 생산수단의 소유는 바뀔 수 있다; 예를 들어 개인 소유에서 집단적으로 이것을 소유하는 관료집단으로 생산수단이 이전될 수 있다. 이렇게 되면....사회는 여전히 계급사회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생산자들 자신이 아닌 대리인들에 의해 생산이 관리되기 때문이다."

브린튼과 그의 동료들의 최종 목표는 인류를 경제적 궁핍과 고된 노동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생산현장에서 위계적 관계를 제거하는 사소한 것이다:

"노동자의 생산 관리는 생산자들이 생산과정을 완전히 장악하는 것을 암시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주변적이고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우리 노선의 핵심이다. 이것은 생산에서 명령을 내리고 받는 권위주의적 관계가 극복되고 자유로운 공산주의 또는 무정부주의 사회가 도입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런 유형의 단순한 자유지상주의는 산업사회 이전 "자유로운" 장인의 지위로 되돌아가려는 공상적 소망에 불과하다. 볼셰비키주의에 대한 브린튼의 논쟁은 백년도 더 전에 엥겔스에 의해 완벽히 반박되었다. 그는 고전적인 반(反)무정부주의 논문 [권위에 대하여](1873년)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대규모 공업에서 권위를 없애려는 것은 공업 자체를 없애고 물레로 실을 잣는 시절로 돌아가기 위해 동력 직조기를 없애려는 것에 해당된다."

이 반박에 대해 우리가 새로 덧붙일 것은 정말이지 하나도 없다.

볼셰비키 혁명 직후 초좌익 공산주의 경향이 등장했다. 이들은 전통적인 무정부주의적 조합주의의 전제들을 다수 수용했다. 신경제정책의 자본주의적 성격과 스탈린 관료집단의 등장에 영향을 받아 이들은 코민테른에서 탈퇴한 후 러시아를 자본주의 체제라고 비난했다. 이 경향의 가장 중요한 인물은 이탈리아의 아마데오 보르디가와 독일의 후고 우르반스였다.

공장 책임자들이 큰 자동차를 몰고 있으므로 스탈린의 러시아가 자본주의 체제라는 참주선동적 노동자주의에 보르디가는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그의 주장도 단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관료집단은 이 상품들을 받고 자기 심장 가까이 가지고 있는 조그만 가죽 돈지갑 속에 접혀져 있는 직사각형 모양의 종이를 준다. 이 직사각형 종이는 돈이며 러시아어로 루블이다. 상황이 이렇다면 이것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관료집단이다."-- "트로츠키주의", [공산당 강령], 1972년 10월-12월

공산주의의 가장 낮은 단계인 사회주의가 소련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르디가는 증명한다: 계급, 상품생산, 화폐, 임노동 등은 계속 존재하고 있다; 이것은 사회주의 생산양식이 아니다; 따라서 자본주의 생산양식일 수밖에 없다.

부르주아 의회에 참여하는 것을 언제나 가장 극렬하게 반대한 보르디가는 자신이 노동계급 독재를 가장 열렬히 옹호하는 혁명가라고 상상했다. 그러나 그는 이 계급 독재에 어떠한 경제적 내용을 부여하는 것도 거부했다. 그에게 문제는 오직 누가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가에 있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 이행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노동계급의 혁명정당이 국가권력을 장악하여 사회를 통치하더라도 화폐, 임노동, 상품생산 등이 제거될 때까지 자본주의는 존재한다. 그는 이렇게 적었다: "러시아에 자본은 결코 파괴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소위 '전시 공산주의' 기간 동안 볼셰비키당 독재는 자본을 일시적으로 통제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자본은 볼셰비키당을 파괴했다." (강조는 인용자)

이 주장은 맑스주의 국가론을 정면으로 공격하고 있다. 국가가 경제적 내용을 가지고 있으며 국가권력이 특정 소유형태를 방어하는 무장 집단이라는 것을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철폐하고 계획경제를 시행하는 집단적 경제 체제는 보르디가에게 아무 의미도 없다. 따라서 보르디가가 스탈린 치하의 퇴보한 노동자국가에 대한 트로츠키의 이론을 거부하고 노동자국가라는 용어 자체를 혐오한 것도 하나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의 주장은 복잡하지만 논리는 단순하다. 소련에서 노동자들이 방어할 가치가 있는 것이 전혀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영어권 국가들에는 무정부주의적 조합주의나 초좌파 공산주의 그룹이 이렇다하게 존재하지 않는다. 남부 유럽이나 일본과는 크게 다르게 미국에서는 소련이 "국가자본주의 체제"라는 입장은 사민주의 그리고 지금은 모택동식 개량주의 더욱이 소련에 대항하여 미 제국주의를 차선책으로 지지하는 것과 연상된다.    

미국에서 "국가자본주의 체제"의 좌파적 시각을 명료하게 주장하는 인물은 라야 두나예프스카야이다. 러시아 출신인 그녀는 1930년대에 트로츠키주의 운동에 합류했다. 그리고 1940년대 후반에 서인도 제도 출신인 제이 알 잔슨이 주도한 조합주의 분파에 속했고 스페인의 그란디조 무니스와 관계를 느슨하게 맺으면서 제 4 인터내셔널에서 분립했다.

그녀의 입장을 일찍 간략하고 조리 있게 표현한 글은 "맑스주의 경제학에 대한 새로운 수정"이다. 이 글은 1944년 9월 [미국경제평론]지에 실렸다. 이 글에서 그녀는 "사회주의"에서도 가치법칙이 지배한다고 주장하는 러시아의 스탈린주의 경제학자를 반박하고 있다. 바로 이 때문에 그녀의 글의 제목이 선정되었다. 그녀가 개진한 입장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노동자를 한편으로 하고 공장 책임자, 집단농장의 백만장자 농민, 정치 지도자, 지식인 일반 등을 또 한편으로 하는 기능의 분화에 기초한 격심한 계급 분화가 러시아의 현실이다. 이 점을 증명하는 논란의 여지없는 증거들이 존재한다....지식인과 노동자 대중 사이의 구별은 다음과 같은 정식을 통해 경제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각자 자신의 능력에 따라 노동하고 노동의 결과에 따라 분배한다.' 이 정식은 전통적인 맑스주의 정식과 비교되어야한다: '각자 자신의 능력에 따라 노동하고 각자 자신의 필요에 따라 분배한다.' '각자 자신의 필요에 따라 분배한다.'는 명제는 가치법칙의 폐기를 의미하는 것으로 언제나 간주되어왔다. 그러나 스탈린주의 경제학자의 이 글은 '노동의 결과에 따른 분배'가 화폐를 매개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이 화폐는 쪽지나 회계적 용어가 아니라 가치의 가격적 표현이다."

그러나 두나예프스카야는 "각자 자신의 필요에 따라 분배한다."는 정식이 완벽한 공산주의 체제의 집약된 표현이라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는다. "고타강령 비판"에서 맑스가 명확히 언급했듯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의 이행기에는 경제적 궁핍과 이에 따른 차등 임노동이 특징적으로 존재한다. 노동자국가에서 임노동은 각기 다른 유형의 노동을 할당하고 부족한 소비재를 배급하고 노동에 대한 외적 강제력을 확보하기 위해 필요하다.

경제가 임노동에 기초하고 있다면 화폐로 계산되는 생산 비용은 경제 회계와 계산의 핵심 지수가 되어야 한다. 비록 매우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생산 비용을 화폐로 표현하는 것이 유일한 기준이 될 것이며 이를 통해 물리적으로 이질적인 재화와 서비스에 소모되는 각기 다른 종류의 자원들을 비교할 수 있다. 두나예프스카야의 주장과는 반대로, 화폐를 통해 노동 비용을 계산한다고 해서 경제에서 가치법칙이 지배하는 것은 아니다.

소련이 국가자본주의 체제라고 주장하는 무정부주의적 조합주의와 좌파 공산주의 경향은 그렇다면 어떤 강령을 제시하고 있는가? 전자는 시장관계를 통해 필요에 따라 연결되는 생산자 노동조합을 후자는 러시아에서 1918년부터 1921년까지 존재했던 "전시 공산주의"의 이상화된 유형으로 순수히 행정적인 경제체제를 강령으로 제시하고 있다. 물론 이것들은 모두 반동적이고 공상적인 강령들이다. 이것들은 안정적인 경제 체제로 존재할 수 없다. 이러한 강령들을 시도할 경우 경제는 붕괴할 것이다.            

생산자 협동조합을 근간으로 하는 경제체제는 곧 자본주의 착취체제로 퇴보할 것이다. 국가의 규제가 없을 경우 이윤을 많이 남기는 협동조합은 파산하는 협동조합을 매입하고 이 협동조합의 구성원들을 임노동자로 착취할 것이다. 시장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노동자 자주관리는 이윤을 산출하지 못하는 기업을 자본주의 착취 영역으로 포섭하는 내적 경향을 가지고 있다. 이 사실은 유고슬라비아에서 일반적으로 목격되고 있다. 티토 정권의 지도적 이론가인 에두아르드 카델리는 이렇게 설명한다: 엄격한 정부의 통제만이 이윤을 산출하는 기업이 그렇지 않은 기업을 접수하여 후자의 노동을 완전히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착취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카델리 저, "좀 더 높은 수준의 통합을 향하여", [사회주의 사상과 실천]지, 1967년 4월-6월).

생산자 협동조합이 자본주의를 복귀시킨다면 물질적 궁핍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화폐와 시장이 없이 완전히 행정적으로 운영되는 경제는 아주 순수한 형태의 반동적 공상이다. 스탈린 치하에서 노동의 군사화를 경험한 소련의 대중은 지금도 매주 공급이 달리는 물품을 구하기 위해 몇 시간 동안 줄을 선다. 이들은 행정적 명령에 의해 노동을 할당하고 무게나 크기를 기준으로 소비재를 배급하는 강령을 좋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초좌익 공산주의자들의 이 강령은 스탈린주의 정권에 대항하여 권력을 장악할 진지한 세력을 결코 결집시킬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이러한 강령이 가지고 있는 공상적 환상들은 혁명적 맑스주의 전위가 될 가능성이 있는 관념적 급진 청년들을 유혹할 수는 있을 것이다.

소련에 자본주의가 복귀했다는 모택동주의자들의 "이론" 아니 정확히 말해 교조는 주관적으로 사회 계급들을 재규정하는 특징이 있다. "수정주의자" 흐루시초프가 권력을 장악하여 소련공산당 제 20차 당 대회에서 유명한 "비밀 연설"을 했다. 모택동주의자들에 의하면 이때 스탈린의 "사회주의 국가"가 타도되고 자본주의가 회복되었다. 유혈 내전이 아니라 새로운 당 총서기와 연설을 통해 자본주의가 회복될 수 있다는 사고는 노골적인 관념주의이다. 그런데 이 황당한 사고를 모택동주의자들이 견지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스탈린, 흐루시초프, 브레즈네프 등을 통해 연속성을 지니고 있는 소련의 경제체제는 모택동주의자들을 제외한 모두들에 의해 경험적으로 논란의 여지없이 인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발전 수준은 대단히 다르지만 브레즈네프의 러시아와 모택동의 중국은 경제체제가 근본적으로 유사하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마튼 니컬러스와 같은 몇 되지 않는 모택동주의 지식인들은 전통적인 자본주의 기관들과 관계들이 브레즈네프 치하의 러시아에 회복되었다고 증명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 이들은 소련경제사를 완전히 조작해야한다. (니컬러스의 끝없는 조작들에 대한 폭로 글은 이 팜플렛에 수록된 "모택동주의자들이 '소련에서 자본주의를 회복시키는' 방법"을 참고하시오.) 다만 북경의 관료집단과 이들의 좀 더 조심스러운 추종자들은 소련에 자본주의가 회복되었음을 증명하기보다 그냥 주장하는 좀 더 안전한 방법을 선택해왔다.

반 정도 똑똑한 모택동주의자들은 소련에서 스탈린 치하에는 사회주의가 존재했고 지금은 자본주의가 존재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증명하려고할 경우 자신의 반대자들만이 승리할 것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미국에서 모택동주의 정통을 자처하는 혁명공산당은 니컬러스가 수정주의자이며 심지어는 트로츠키주의 방법론을 수용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왜냐하면 그는 상품-시장 관계가 경제 체제를 지배할 경우를 자본주의라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곧 시장이고 사회주의는 곧 계획이라는 '니컬러스'의 노선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사실 그의 노선은 자신의 경제가 계획을 통해 운영되고 있으므로 자본주의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소련 수정주의자들의 애호품이다....그의 노선은 트로츠키주의자도 채택하고 있다. 이들은 말로는 수정주의에 반대하면서도 사회주의의 주요 특징은 바로 중앙 계획이라고 언제나 주장해왔다.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에 대한 온갖 비판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소련과 사회주의 중국을 똑같이 '기형적 노동자국가'라고 규정하면서 자본가와 노동계급 통치 사이의 근본 차이를 완전히 무시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공산주의자]지, 1976년 10월

모택동주의 노선의 핵심은 위대한 조타수 모택동 자신의 언명에 함축되어 있다: "수정주의의 권력 장악은 곧 자본가 계급의 정권 장악이다." 그러나 수정주의는 교의와 사상의 영역에서 발생하는 반면에 부르주아 계급은 객관적으로 결정되는 사회집단이다. 이들은 생산수단을 시장에서 매매할 수 있는 상품으로 소유하고 있다. 모택동주의의 주관적 계급관은 당 주석 자신의 이 언명에서 뚜렷이 드러나고 있다.

모택동주의는 사회현실을 가장 순수하고 과장된 주관주의 시각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이 주관주의는 국가를 지배파벌/독재자와 동일시하는 모든 종류의 스탈린주의에 내재하고 있다. 국가는 지배적인 경제체제 즉 소유관계와 이것을 지키는 군사기구 사이에 역사적이고 객관적으로 조건 지워진 관계이다. 바로 이것이 맑스주의 국가관이고 국가의 현실이다. 지배집단 내부의 인물 교체가 아니라 이 집단 자체를 분쇄하는 것을 통해서만 국가의 계급적 성격이 변화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맑스주의를 옹호하며

소련이 "국가자본주의 체제" 또는 다른 형태의 계급착취 체제라는 입장은 기회주의 욕구의 이데올로기적 표현에 불과한 것만은 아니다. "국가자본주의"이론을 옹호하는 자들 가운데에는 카알 카우츠키와 토니 클리프 등과 같은 기회주의 배신자들 뿐 아니라 아마데오 보르디가와 그란디조 무니스와 같은 뛰어난 혁명적 지조를 가진 개인들도 있기 때문이다.

스탈린 치하 소련의 사회 성격은 맑스주의 운동의 이론적 문제들 가운데 가장 어려운 것에 속한다. 대대적인 농민 반란과 동맹하여 노동계급 혁명이 후진국 러시아에서 먼저 승리했다는 사실 자체는 전통적인 맑스주의 전망과 위배되었다. 그러나 레닌과 트로츠키는 볼셰비키 혁명을 자족적이며 일국 차원에서 제한된 사건이 아니라 유럽 전역에 임박한 노동계급 혁명의 도화선이라고 간주했다. 이후 제국주의 강대국들에게 포위된 채 경제적 후진국에서 노동자국가는 고립되었다. 맑스주의 전통은 이 현상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리고 노동자와 농민에 대한 대대적인 테러를 통해 절대주의적인 관료집단이 소련을 몇 십 년 동안 통치해왔다. 이 사실은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에 대하여 설명한 맑스나 레닌의 저작들을 모순에 빠뜨린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다수의 주관적 혁명가이자 자칭 맑스주의자들이 트로츠키의 '스탈린과 그의 후계자들이 통치해온 소련은 관료적으로 퇴보했을 지라도 노동자국가이다'라는 입장을 거부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니컬러스 식으로 증거를 조작하거나 고전적 맑스주의의 근본적인 요소들 특히 국가론을 거부해야만 소련을 자본주의 체제 또는 새로운 형태의 계급착취 체제라고 규정할 수 있다.     

맑스주의는 변화하는 현실과 무관한 교조가 아니라 경험적으로 입증이 가능한 과학적 분석이며 행동 지침 즉 정치 강령이다. 지금까지 발전해온 맑스주의 사상에 의해 전혀 예상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이 사상과 모순되는 것 같은 주요한 역사적 사건들을 어떻게 보아야하는가? 우선 맑스주의 세계관의 근간을 유지한 채 이론적 확장을 시도할 수 있다. 반면 노동계급에 입각한 공산주의 혁명 전망인 맑스주의 강령을 기각한 채 이것을 수정하려고 시도할 수 있다.

과학적 사회주의인 맑스주의는 두 가지 핵심 전제에 있어서 이 사상 이전에 존재했던 급진민주주의 지식인들의 공상적 사회주의 일반 그리고 특히 바뵈프주의, 생시몽주의, 오웬주의와 구별된다. 첫째, 생산수단의 사회화는 도덕적 이상의 현실화가 아니다; 자본주의는 생산력 발전을 정지시키므로 더 우수한 경제체제에 의해 대체되어야 한다; 이 때문에 생산수단의 사회화는 현실에서 가능하다. 둘째, 세계 역사적 규모에서 자본주의를 타도하는 동력은 조직된 노동계급이다; 무계급 무국가 체제인 사회주의로 가기 위해서는 노동계급 독재의 시기를 거쳐야한다.

10월 혁명에 의해 확립된 집단적 소유형태가 반혁명에 의해 청산되지 않았기 때문에 소련에는 노동계급 독재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트로츠키의 입장이다. 이것은 맑스주의의 중심 전제를 재확인한 입장이다. 노동계급 독재의 핵심 특징은 노동 대중에 의한 정부의 민주적 통제라고 카우츠키는 주장했다. 또는 지배집단의 노동계급적 지향이라고 모택동식 스탈린주의자들은 주장한다. 이 주장들은 모두 맑스주의 변증법을 거꾸로 뒤집어 놓은 것이다. 노동계급 독재가 역사의 진보적 단계인 이유는 이것이 사회주의의 물질적 전제를 구축하기 위해 필요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핵심은 물질적 전제 즉 집단적 소유이지 상부구조적 전제 즉 노동자 민주주의나 지배집단의 노동자 지향성이 아니다.

소련이 "국가자본주의 체제"이거나 다른 형태의 계급착취 사회라고 주장하는 진지한 자칭 맑스주의자는 이 질문에 대답해야한다: 이 사회의 형태는 진보적인 것인가 아니면 가장 선진적인 자본주의에서 역사적으로 퇴행한 것인가? 보르디가와 그의 추종자들은 소련의 경제구조가 전통적인 자본주의 경제구조와 같다는 경험적으로 옹호될 수 없는 입장을 제시한다. 이들만은 위 질문에 대답해야하는 이론적 책임으로부터 면제된다. "국가자본주의" 이론가들은 맑스주의의 변증법적 역사관에 입각하여 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다. 이것은 이들의 지적 천박성 그리고/또는 참주선동적 경향을 입증하는 증거이다. "러시아는 국가자본주의 체제이다"를 주장하는 문헌들은 무미건조한 용어상의 도식주의, 조야한 노동자주의 또는 무기력한 도덕주의를 압도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한 트로츠키의 언명을 들어보자:

"노동자국가는 무자비한 역사의 실험실에서 등장했을 뿐이며 손가락으로 코를 후비며 반성하듯이 후각을 의심하는 "사회주의자" 교수양반의 상상물이 아니다. 노동계급이 달성한 성과들은 적대 세력들의 압력에 의해 왜곡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들 모두를 방어하는 것이 혁명가의 임무이다. 이미 차지한 진지들을 방어할 수 없는 사람은 새로운 진지들을 결코 정복할 수 없다."-- 트로츠키, <맑스주의를 옹호하며> 중 31장 "핀란드 사태의 대차대조표", 1940년 6월

소련의 경제체제가 전통적인 자본주의에 비해 우월하다는 것은 경험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없다. 1920년대에 압도적으로 농민 중심의 경제체제였던 후진국 소련은 대대적인 관료적 기생주의와 관리부실에도 불구하고 현대적인 공업사회로 변모했다. 소련은 20세기 제국주의 시대에 이런 변모를 성취한 유일한 후진국이다. 더욱이 소련에는 자본주의의 경기순환에 따른 모순과 공황이 없다. 1930년대 대공황 시기나 1974년-75년 세계적 불황기에도 소련에서 공업생산은 급격히 팽창했다.

소련이 "국가자본주의 체제"이거나 "관료적 집산주의 체제"라고 주장하는 자들은 국가 관료집단이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모순들을 극복하고 생산력을 꾸준하고 급격하게 증대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이 대단히 수정주의적인 사고는 노동계급 혁명과 노동계급 통치의 진보적 성격과 역사적 필연을 의문시하고 있다.

한편 전체주의 정권의 민주주의 억압 때문에 소련이 가장 선진적인 자본주의 국가들보다 더 반동적인 체제라고 사민주의자들은 주장한다. 이 주장은 노동계급 독재와 공산주의가 공상적 환상이라고 암시한다. 사실 바로 이것이 사민주의 개량주의자들의 입장이다. 이에 따르면 스웨덴과 같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복지국가"는 사회조직의 최고 수준을 표현한다.

 

진보적인 관료적 통치의 시대?

소련이 진보적이며 새로운 형태의 계급착취 체제라고 명시적으로 주장하는 정치경향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이 견해는 트로츠키주의 운동권 내부의 수정주의자들에 의해 25년 전에 제시되었다. 이후 이 입장의 주창자들은 스탈린주의 통치에 대한 파렴치한 이런 변명에서 후퇴했다. 그러나 파블로의 청산주의는 한 시대 전체 즉 몇 백 년에 걸쳐 기형적 노동자국가들이 존재할 것이라는 대단히 반(反)맑스주의적인 강령을 처음 일반화시켰다.  

트로츠키는 이렇게 주장했다: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은 생산수단에 대해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지 않기 때문에 새로운 계급이 아니다; 따라서 이들의 통치는 기껏해야 역사상의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 현상은 선진 자본주의 세계가 노동계급 혁명에 늑장을 부리는 상황을 반영한다. 사민주의자들에 대항하여 트로츠키는 이렇게 주장했다: 관료적 보나파르트 체제에 의해 노동자 국가가 통치될 수는 있으나 이것은 세계적 차원에서 자본주의가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 의해 강요된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세계적 규모에서 노동계급 독재가 지배하는 시대에는 노동계급이 직접 통치계급이 될 것이고 소비에트 민주주의가 지배할 것이다. 따라서 사회주의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노동계급이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을 타도해야한다.

트로츠키의 이 입장은 1950년대 초반에 제 4 인터내셔널의 서기였던 미쉘 파블로의 수정주의 경향에 의해 도전받았다. "전쟁/혁명" 테제에서 그는 스탈린주의가 지배하는 소련 진영이 군사적 승리를 통해 세계 자본주의를 타도하는 전망을 상정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이 결과 관료화된 기형적 노동자국가들은 노동계급의 정치혁명이 아니라 점진적인 자기 개혁을 통해 민주화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파블로는 노동계급 지배의 시대를 진보적인 관료적 통치의 시대로 대체했다:

"최고 단계에 도달한 자본주의 체제는 균열을 일으키고 부패하면서 일련의 현상들을 허용한다. 이미 시작되었으며 상당히 진행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로의 이행 시대라는 일반적 틀 속에 이 현상들이 포함된다.

...이 변모는 수백 년의 역사 시대 전체를 요할 것이며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형태와 정권들에 의해 가득 채워질 것이다. 그리고 '순수한' 형태와 규범으로부터 필연적으로 일탈할 것이다." (강조는 인용자)-- 파블로,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1951년

실제로 파블로주의는 "관료적 집산주의 체제"의 긍정적 형태이다. 섁트먼과 파블로가 유사한 방법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 경향은 이미 오래 전에 인식했다. 스파르타쿠스 경향을 탄생시킨 문서 "혁명적 전망을 옹호하며"(1962년)는 이렇게 말했다:

"섁트먼-버넘의 이론과 마찬가지로 파블로의 이론은 우리 운동의 혁명적 전망을 부인하고 스탈린주의에서 세계 혁명 세력의 객관적 표현을 찾았다."-- [맑스주의 게시판]지 제 1호에 재수록

소련을 관료적으로 퇴보한 노동자국가로 이해하는 것이 진지한 혁명적 낙관주의에 왜 핵심적으로 중요한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트로츠키의 고전적 저작 "전쟁에 돌입한 소련"(1939년 9월)을 인용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그리고 트로츠키의 이 저작은 오늘날의 "국가자본주의"이론을 다루는 이 팜플렛을 위해 가장 좋은 서문이 될 것이다:

"자본주의와 부르주아 계급의 붕괴는 현재 극단까지 도달했다. 이 체제는 더 이상 존속할 수 없다. 생산력은 계획에 따라 조직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 임무를 누가 성취할 것인가? 노동계급일까 아니면 정치인, 행정가, 기술자들로 구성된 "정치위원(commissar)"이라는 새로운 지배계급일까? 노동계급에게 더 이상의 희망을 걸 수 없다는 것을 역사가 이미 증명했다고 좌익의 일부는 주장한다.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물질적인 전제조건은 이미 마련되었으나 노동계급은 제1차 세계대전을 저지할 "능력을 결여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후 파시스트들이 정치적으로 성공하고 있는 것도 노동계급이 자본주의 체제를 막다른 골목에서 구해낼 "능력을 결여"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소련의 관료화 역시 민주적 절차들을 통해 노동계급이 사회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결여한" 결과라는 것이다. 스페인 혁명은 세계노동계급이 보는 앞에서 파시스트들과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에 의해서 압살당했다. 이러한 사건들의 종착역은 새로운 제국주의 전쟁이다. 이 전쟁은 세계노동계급의 완전한 무능력에 의해서 공공연히 준비된 것이다. 이것이 이들의 논지이다. 만약 이 주장이 받아들여져서 노동계급이 사회주의혁명을 달성할 능력을 결여하고 있다는 것이 인정될 경우 생산력을 국유화하는 시급한 임무는 다른 누군가에 의해서 성취되어야할 것이다. 이것은 너무도 당연한 이치이다. 그러면 누가 이 임무를 성취할 것인가? 전 세계적으로 쇠퇴한 부르주아 계급 대신 지배계급이 될 신 관료집단이 이 임무를 성취할 것이다. 이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우리는 이 전쟁이 노동계급 혁명을 촉발할 것이라고 확고히 믿고 있다. 따라서 이 전쟁은 소련에서 관료집단을 타도시킬 것이며 1918년보다 훨씬 높은 경제적 문화적 기반을 토대로 소비에트 민주주의를 소생시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경우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이 "계급"인지 아니면 노동자국가의 기생적 혹인지는 자동적으로 판가름 날 것이다. 세계혁명의 과정 속에서 소련 관료집단은 일회적인 퇴행현상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모든 사람들에게 자명해질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전쟁이 혁명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쇠퇴를 가져온다면 다른 대안이 남아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즉 독점자본주의는 더욱 부패할 것이고 국가와 더욱 강력하게 융합할 것이다. 그리고 현재 민주주의가 그나마 남아 있는 곳도 전체주의로 대체될 것이다. 노동계급이 사회의 지도력을 장악할 능력이 없을 경우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보나파르트적 파시스트 관료집단으로부터 새로운 착취계급이 등장할 수도 있다. 이러한 사회체제는 모든 징후로 보아 문명의 쇠락을 의미할 것이다.

선진자본주의 국가의 노동계급이 정치권력을 장악한 후 소련과 같이 특권 관료집단에게 사회의 지배력을 넘겨주는 경우 이와 유사한 결과가 나타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관료적 퇴행현상은 러시아라는 특정 국가의 후진성이나 제국주의 세력에 의한 포위상태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회의 주도계급이 될 수 없는 노동계급의 선천적 무능력에 기인한다고 결론내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결론짓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현재의 소련은 자신의 근본적 특징들을 통해 국제적 규모의 새로운 착취체제의 등장을 알리는 선구자가 되었다.

논리를 끝까지 추구할 경우 결론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스탈린주의 체제는 자본주의 사회를 사회주의 사회로 변모시키는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나타난 끔찍한 퇴행의 결과가 아니면 새로운 착취사회의 첫 단계이다. 만약 후자의 경우라면 관료집단은 당연히 새로운 착취계급이 될 것이다. 이 예측이 아무리 당혹스러워도 어쩔 수 없다. 세계노동계급이 자신의 역사적 임무를 성취할 실제 능력을 보유하지 못할 경우 자본주의 사회의 내적 모순에 기초한 사회주의 강령은 허황된 공상(유토피아)에 지나지 않는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현재 사회주의혁명의 전망을 기각시킬 논란의 여지없고 인상에 깊이 남는 객관적 자료가 존재하는가? 이것이 가장 핵심 문제이다....

실망감과 피로감은 마땅히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아니다. 따라서 노동계급이 혁명적 잠재력을 박탈당했으며 당면한 시대에 사회 주도권을 장악할 모든 열망을 포기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릴 권리가 맑스주의자에게는 조금도 없다. 경제와 문화를 아주 철저하게 변화시키는 문제를 해결하는 경우 25년은 역사의 잣대로 보면 사람의 일생에 있어서 한 시간의 길이도 되지 않는다. 한 시간이나 하루에 걸쳐 실패한 경험을 가지고 평생의 경험과 분석을 통해 설정한 목표를 버리는 사람을 도대체 무엇에 써먹겠는가? 1907년에서 1917년까지 러시아의 가장 어두운 반동기에 우리는 1905년 러시아 노동계급이 보여준 혁명 잠재력을 출발점으로 삼아 미래를 준비했다. 세계적인 반동기에 우리는 1917년 러시아 노동계급이 보여준 혁명 잠재력을 출발점으로 삼아 미래 혁명을 준비해야 한다. 제4인터내셔널이 자신을 사회주의혁명을 위한 세계정당이라고 이름 붙인 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우리의 노선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세계혁명을 향해 나아가고 있으며 이 사실 자체를 통해 소련이 진정한 노동자국가로 소생하도록 정치행동을 조직해 나간다."    

 

2. 모택동주의 경제학의 빈곤

--- 베틀렝/스위지의 반동적 공상주의

 

                                            필자: 조지프 씨모어

 

모택동주의자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소련에 자본주의가 복귀했다; 소련은 "공격적이고 팽창하는 사회제국주의"국가가 되었다. 이를 통해 이들은 소련에 대항하여 미 제국주의와 더욱더 전면적이고 공개적으로 동맹하는 중국의 노선을 정당화시키고 있다. 최근 북경은 나토군을 더욱 강화해야한다고 계속 경고해왔으며 작년 겨울에는 미국이 지원하고 남아공 군대가 주도하는 앙골라 침공을 지지했다(역자 주: 1975년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한 앙골라에는 소련과 쿠바가 지원하는 게릴라 군대와 서방이 지원하는 게릴라 군대가 내전을 벌이고 있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중국의 반혁명 정책을 지지하는 서방의 모택동주의자들이 이렇게 믿고 있다는 사실이다: 중국은 현재 유일한 사회주의 국가이며 스탈린 치하 러시아보다 더 높은 수준의 사회주의를 구현하고 있다. 따라서 무엇이 공산주의로 나아가는 진보적 정책이냐는 언뜻 보기에 추상적인 문제는 스탈린주의자들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분파투쟁의 중요한 쟁점이 되고 있다. 모택동 지지자들은 중국이 어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이 급격히 소위 공산주의로 전진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중국의 대외정책을 무조건 지지하고 있다.

소련 스탈린주의자들의 "일국사회주의" 노선은 언제나 기술 발전의 역동성을 전제로 깔고 있었다. 후진국 러시아가 계획경제를 통해 한 두 세대 만에 선진 자본주의국가들을 따라잡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스탈린의 [레닌주의의 문제들](1933년 판본)은 이렇게 주장한다: "우리는 자본주의 선진국들에 비해 50년 또는 100년 뒤처져있다. 10년 만에 이 격차를 좁혀야한다."

사실 1930년대 러시아에 비해 모택동의 중국은 지금 경제적으로 훨씬 더 후진적이다. 중국과 미국의 생산력 격차는 너무 커서 정치적으로 의미 있는 기간 내에 이 격차를 좁히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다. 1950년대 후반에 모택동 정권이 소련 진영과 결별했을 때 중국의 스탈린주의자들은 자신들이 그동안 고수해온 스탈린주의를 근본적으로 수정해야했다. 이에 따라 "사회주의"는 지구상에서 가장 궁핍한 나라 가운데 하나인 중국에서도 즉시 성취될 수 있는 체제로 재규정되었다.

따라서 모택동식 스탈린주의는 소련의 스탈린주의보다 맑스주의의 다음과 같은 기본 전제를 더욱 심각하게 침해하고 있다: 가장 선진적인 자본주의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의 노동생산성을 통해 물질적 풍요를 성취해야 사회주의가 가능하다. 모택동주의는 계급사회를 주관주의적으로 재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사회주의적 관계들은 "문화혁명"으로 성취되고 소련의 자본주의 복귀는 니키타 흐루시초프의 두뇌 안에서 주로 일어났다.      

특히 "문화혁명"을 통해 드러난 모택동주의의 원시주의와 극단적 주지주의(主志主義)는 서방의 소부르주아 급진주의자들을 크게 매료시켰다. 이것은 지금 존재하는 소외된 노동을 인류의 기술적 문화적 수준을 높이는데 필요한 역사 시기 전체가 필요 없이 즉시 끝장낼 것이라는 약속이었다. 이로 인해 1960년대 후반에 다수의 마르쿠제 추종자들은 모택동 충성파로 변모했다. 카스트로의 쿠바나 호지명의 월남 등 "제 3 세계" 스탈린주의 정권들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모택동주의에 신비한 매력과 호소력을 부여한 것은 바로 중국이 소련 유형의 "경제주의"와 단절하고 진정한 "사회주의 인간상"을 실현했다는 믿음이다.

물론 중국의 경제 현실은 샤를르 베틀렝, 폴 스위지, 윌리엄 힌튼 등 서방 모택동주의자들이 중국을 이상화한 내용과는 매우 거리가 멀다. 현재 중국은 브레즈네프 치하의 러시아만큼이나 빈부격차가 심화되어 있으며 관료들의 부패와 암시장 행위가 만연되어 있다. 중국과 소련의 관료적으로 기형화된 노동자국가는 진정으로 혁명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자 정부의 경제 강령보다는 서로간의 공통점이 훨씬 많다.

특히 중국의 경제정책은 흐루시초프 후기(1958년-1964년)의 지방 분권화 정책과 대단히 유사하다. 두 나라 모두에서 지방 분권화는 관료집단 내부의 분파투쟁이 있은 후 경제자원에 대한 통제력을 중앙집중화된 행정적 기술적 중앙기구에서 지역 당 책임자들에게 이전하는 과정을 밟았다. 그러나 이 글의 목적은 중국의 타락한 관료적 현실을 서방의 모택동 미화자들의 "급진적" 모택동주의 이상에 대비시키는 것이 아니라 모택동주의에 내재한 이상주의 자체가 반동적 공상주의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폭로하고 비판하는 것이다.

 

원시 평등주의를 비판한 맑스

기술 발전에 대한 관심을 "자본주의 노선"과 동일시하는 것이 모택동주의 변호론의 근간이다. 예를 들어 베틀렝은 후진국들이 중국의 "자립" 노선을 따르되 수입된 선진기술에 기초하여 경제를 개발하면 안된다고 충고한다. 그는 선진기술이 태생적으로 자본주의적(!)이라고 규정한다:

"예를 들어 자본의 기술적 구성의 증대를 고려해보자. 이것은 생산비용을 줄이기 위해 생산단위의 규모를 '필연적으로' 증대시키는 것이다....'기술의 자연스러운 법칙'에 기초한 생산양식이기는커녕 이것은 아주 단순하게 말하여 사회 법칙이 아닌가?.... 이것은 자본주의 생산관계가 생산력을 지배하는 결과가 아닌가? 아주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것은 자본주의 집중과 집적 법칙의 결과가 아닌가? 그렇다고 생각할 이유는 많다." (강조는 원저자)-- 샤를르 베틀렝, [소유의 경제적 계산과 형태들], 1975년

소위 평등주의적이며 주지주의적인 "중국식 사회주의로의 길"과 소련 유형의 "경제주의" 사이의 대조를 폴 스위지는 명확히 표현하고 있다. 그는 모택동주의를 정통 맑스주의로 주장하는 일에 베틀렝보다는 관심이 덜하다:

"...중국혁명의 경험은...생산력의 낮은 수준이 사회주의 생산관계로의 변화에서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본원적 축적' 과정과 불평등의 심화를 반드시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또한 사회주의의 물질적 기초를 먼저 건설하고 나중에 이에 상응하는 사회관계를 구축하려는 시도가 스스로를 패배시키는 행위라는 것도 보여주었다....."-- "소련 사회의 성격, 제 1부", [월간 평론]지, 1974년 11월

그리고 스위지는 스스로가 믿기에 "중국식 사회주의로의 길"이 맑스주의에 독보적으로 기여했다고 강조한다:

"오직 중국만이 맑스주의로부터 부르주아 경제주의적 흔적을 마침내 일소할 수 있었다. 세계의 어느 나라보다도 이 나라에서 혁명을 성공시킬 조건은 가장 유리했다."-- "소련 사회의 성격, 제 2부", [월간 평론]지, 1975년 1월    

맑스주의가 비판했던 교조들과 사상들을 진리로 재발견하는 것이 수정주의의 운명이다. 모택동주의는 맑스주의 이전의 소부르주아적 공상적 사회주의로 명확히 회귀했다. 최초의 사회주의자 바뵈프, 오웬, 바이틀링, 까베 등이 구상한 강령적 모델은 화폐와 시장이 없는 자립적 생산단위였다. 여기에서는 중앙의 정치권력이 노동을 각 분야로 할당하고 생산물을 분배했다. 간단히 말하면, 중국의 대약진운동 시기에 등장한 "인민공사"의 순수한 유형이 공상적 사회주의들이 상정한 미래 사회의 모델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소련의 국가 소유보다 더 높은 형태의 사회주의라고 베틀렝은 주장한다.

바뵈프를 비롯한 초기 공산주의자들을 역사적으로 정당하게 평가해야한다. 이들이 상정한 정의로운 사회 모델은 유럽 대륙을 지배했던 산업혁명 이전의 기술수준에 의해 필연적으로 한계가 지워졌다. 대체로 엥겔스와 협력하여 영국 산업혁명의 의의를 동화한 결과 맑스는 공상적 사회주의의 원시 평등주의적 사고를 극복할 수 있었다.

1843년 파리에서 공산주의자가 된 순간부터 맑스는 바이틀링과 까베 등 당시 공산주의자들을 지배했던 "병영 사회주의" 편향을 격렬하게 비판했다:

"이런 유형의 공산주의는 모든 영역에서 인간의 개성을 부인하기 때문에 사적 소유의 논리적 표현에 불과하다. 사적 소유는 공산주의의 부정이다.... 인간 발전을 최소한의 수준에서 미리 상정한 후 물질적 풍요를 시기하고 인간 발전을 하향 평준화시키는 절정이 바로 조야한 공산주의이다. 이것은 명확하고 제한된 기준을 가지고 있다. 사적 소유 철폐의 성과 가운데 얼마나 적은 부분이 공공의 이익을 위해 사용되는 지는 문화와 문명의 세계 전체를 추상적으로 부정하고 가난한 자와 조야한 자들의 부자연스러운 단순성으로 퇴행하는 현상이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가난한 자들과 조야한 자들은 사적 소유를 극복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이에 도달하지도 못했다." (강조는 원저자)-- 맑스, [1844년의 경제 철학 수고]

맑스가 주도한 공산주의동맹은 1847년 9월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잡지 [공산주의 저널]지를 발행하고 사설을 실었다. 여기에서 이 조직은 자신의 선행조직이자 원시 평등주의를 제창한 의인동맹 그리고 당시의 공산주의 경향들과 자신을 이렇게 차별화했다:

"개인적 자유를 파괴하고 세계를 하나의 거대한 병영이나 거대한 구빈원으로 변모시키려는 공산주의자들과 우리는 다르다. 개인적 자유를 인정하지 않고 이것이 완벽한 조화에 방해된다고 생각하여 이것을 세계에서 몰아내려는 공산주의자들이 일부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자유를 평등과 교환할 생각이 우리에게는 조금도 없다. 공동 소유에 기초한 사회가 어떤 사회보다도 개인적 자유를 가장 많이 보장한다고 우리는 확신한다."-- 데이빗 리아자노프 편집, [맑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 1928년에서 인용

지금부터 130년 전에 유럽의 장인-노동자 전위였던 최초의 맑스주의자들은 모택동식 사회주의를 거부했다. 모택동주의의 반동적 성격을 이것보다 더 잘 드러내는 증거는 없을 것이다!

맑스주의 이전에 등장한 공상적 사회주의와 모택동주의의 "급진적" 이상은 둘 다 역사 과정에서 소멸할 운명을 지닌 사회집단의 이데올로기적 표현이다. 원시 평등주의인 "병영 사회주의"는 산업혁명의 등장으로 궁핍에 처한 장인들의 반사적 반응이었다. 자립적인 생산자 협동조합을 스스로 조직하여 자본주의의 적대적 환경에서 탈출하려는 장인(수공업자)들의 충동을 이데올로기적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이 경향이다.

선진 자본주의 강대국들이 지배하고 있는 세계에서 고립된 후진적 기형적 노동자국가의 관료집단은 나름의 허위의식을 가지고 있다. 이 허위의식을 표현한 것이 바로 "일국 사회주의"의 주지주의적 변종인 모택동주의이다. 노동계급의 국제혁명을 통해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타도될 경우 중국의 스탈린주의 정권은 한 칼에 타도될 것이다. 따라서 본능적으로 모택동주의 관료집단은 사회주의 미래의 핵심인 노동계급 국제혁명을 거부하고 중국 현실을 이상화한 공산주의로 상정한다.

1840년대의 맑스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그의 후계자인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의 생산력을 혁명적으로 전유해야 사회주의가 수립될 수 있다.

 

"제 2 질문: 공산주의자들의 목표는 무엇인가?

답변: 모든 사회 성원이 완전한 자유를 누리면서 사회의 기본조건을 침해하지 않는 가운데 자신의 능력을 전부 발휘할 수 있는 사회를 조직하는 것이다."-- 엥겔스, "공산주의 신념 고백 초안", 1847년

"국가 차원의 계획, 시장, 소비에트 민주주의 등 세 가지 요소들의 상호작용을 통해서만 이행기 경제의 올바른 방향을 잡을 수 있다."-- 트로츠키, "위험에 빠진 소련 경제", 1932년 10월

 

모택동의 주관주의에 봉사하는 반(反)계몽주의

샤를르 베틀렝은 프랑스의 오랜 정통 스탈린주의자였다가 1960년대 후반에 모택동주의자가 되었다. 그는 [북경 평론]지의 조야하고 심지어 당혹스러운 주관주의적 사설들을 맑스주의로 치장하는 아주 야심찬 노력을 해왔다. 그의 저작들은 반(反)계몽주의를 지겨울 정도로 강변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뒤틀린 용어상의 허세와 신랄한 논리의 비약을 구사한 후 베틀렝은 예상할 수 있는 결론에 도달한다: 사회의 계급적 성격은 지배 집단의 태도에 달려있다. 소련에 자본주의가 복귀했다고 베틀렝은 주장한다. 그리고 그의 중국인 스승인 모택동 일당은 유소기, 임표, 강청 등이 차례로 "자본주의 노선"을 걸었으며 그것도 오랫동안 이중첩자로 이렇게 했다고 주장한다. 이 두 주장들은 모두 똑같은 정도로 사회주의와 거리가 멀다.

베틀렝은 맑스주의자들이 다음과 같이 자본주의를 규정하는 것을 거부한다: 자본주의는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에 기초한 일반화된 상품생산체제이다. 대신 그는 "생산수단으로부터 직접 생산자가 분리된 체제"가 바로 자본주의라고 규정한다. 이것은 신좌익(New Left)의 자유지상주의와 무정부주의적 조합주의 냄새가 나는 애매한 규정이다. 그는 임노동을 자본주의의 핵심 요소로 보고 있다:

"자본주의 생산관계를 구성하고 있는 것은 바로 상품생산에 개입하고 있는 임노동 관계이다. 이 점을 특히 강조해야한다." (강조는 원저자)-- [소유의 경제적 계산과 형태들]

소련을 "국가자본주의 체제"라고 규정하는 모든 자들과 같이 베틀렝도 소련의 사회 성격에 대해 자기 나름의 독특한 이론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 그는 소련에 대해 두 가지 기본적으로 다른 정의를 내리고 있다. 그에게 국가자본주의는 노동계급 독재 내부의 상품 관계의 총합이거나 새로운 형태의 부르주아 생산양식이다. 대단히 혼란스러운 이 이중적 규정은 소련에 대항하여 중국 스탈린주의를 변호하는 그의 목적을 위해 매우 중요하다.

순수한 무정부주의적 조합주의와 베틀렝의 모택동주의를 비교하면 이 점은 명확해진다. 무정부주의적 조합주의자는 임노동을 특징으로 하는 경제체제가 자본주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베틀렝은 조합주의자가 아니라 스탈린주의자이다. 레닌주의 전위당의 가면을 쓴 스탈린주의 관료 엘리트 집단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폭력과 테러를 통해 노동자와 인민을 통치한다. 이 체제를 베틀렝은 철저히 신봉한다. 따라서 그는 무정부주의적 조합주의자들과 다른 점을 보여야한다.  

베틀렝의 이론에 따르면 진정한 노동계급 전위가 권력을 잡고 있으면 "국가자본주의 체제"는 사회주의 건설에 "종속 된다". 모택동의 중국이 이 경우이다. 그러나 권력이 진정한 전위에게 있지 않을 경우에는 "국가자본주의 체제"가 지배한다. 브레즈네프의 러시아가 이 경우이다:

"간단히 말해서 국가적 통제를 통해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는 국가기구가 대중과 떨어져 존재할 경우 그리고 더욱이 이 기구가 대중과 연결되어 이들이 생산수단의 사용에 대한 통제권를 확립하기 위해 투쟁하는 것을 지원하는 정당에 의해 통제되지 않을 경우, 생산수단으로부터 직접생산자가 분리되는 현상이 재생산된다. 이 조건 속에서 노동력과 생산수단의 관계가 임금 관계를 통해 표현된다면 이것은 자본주의적 관계이다. 그리고 중앙 및 관련된 국가기구의 지도적 직위를 차지하고 있는 자들은 집단적으로 자본가이며 국가 자본가이다....왜냐하면 지배정당이 노동계급의 정당이 아니라면 노동계급 독재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베틀렝/스위지, [사회주의로의 이행에 대하여], 1972년

전위당은 평화적이고 유기적인 과정을 통해 타락하면서 자신의 계급적 성격을 상실할 수 있다. 이것이 베틀렝의 주장이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폭력적인 반혁명이 없이도 노동자국가는 자본주의로 복귀할 수 있다. 따라서 레닌주의 국가관을 근본적으로 거부하고 주관주의적 주지주의를 수용하는 것이 모택동주의에 내재한 속성이다.

베틀렝은 경제계획의 성격과 수준 등의 객관적 척도를 제시하고 있는가? 집단적 경제 내부에서 상품관계는 지배적인가 아니면 부차적인가? 아니다, 그는 이런 객관적 척도를 부인한다. 브레즈네프 치하의 소련에 비해 중국에서 시장은 훨씬 더 큰 역할을 하고 있으며 기업의 자율성이 더 크지 않은가? 이 질문에 대해 베틀렝은 이렇게 외친다: 아니다, 이것은 환상이다! 경제계획의 권한은 오직 진정한 수제자들에게만 허용된다. 크렘린궁의 스승들이 사회주의에 대한 신념을 상실한 수정주의자들이므로 이들은 계획을 수립할 권한을 상실했다. 소련에서 경제계획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전위가 존재하지 않고 특히 집권 노동자정당이 노동계급 전위의 특징을 더 이상 가지고 있지 않다면 계획의 관계가 시장관계를 지배하게 만드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조건은 존재하지 않는다. 상황이 이렇다면 '계획'이라는 이름을 가진 문서가 공식적으로는 존재할 수 있지만 이것은 진정한 계획이 없다는 현실을 숨길 뿐이다." -- [소유의 경제적 계산과 형태들]

이 시점에서 베틀렝은 [북경 평론]지의 공공연한 주관주의자들과 재회한다: 객관적 경제관계가 아니라 정치권력을 휘두르는 자들의 태도에 의해 계급들이 존재한다. "진정한" 노동계급 전위가 "진정한" 경제계획을 실시하는 지를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 핵심 문제에 대해 베틀렝과 그의 모택동주의 동료들은 믿는 자만이 볼 수 있으며 최근의 숙청이 이 질문에 대한 답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 뿐이다. 중국공산당이 "진정한 전위"라는 베틀렝의 신념은 강청을 비롯한 문화혁명의 "급진파"가 숙청되면서 흔들린 것은 아닐까? 결국 베틀렝의 이론은 문화혁명에 의해 영감을 받았는데 이 혁명의 지도자들은 "자본주의 노선"을 걸은 배신자로 낙인찍힌 채 모두 사망하거나 감옥에 갇혀 있다.

 

소련에 화폐자본이 존재하는가?

소련과 중국에 지금 존재하고 있는 형태의 임노동이 자본주의적 관계라는 베틀렝의 주장은 좀 더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그를 사로잡고 있는 집착은 화폐 형태가 태생적으로 자본주의 관계라는 것이다. 그의 저작 [소유의 경제적 계산과 형태들]의 중심 주제는 각기 다른 유형의 노동 투입량을 포함한 다종다양한 물리적 단위에서 화폐적(자본주의적) 계산을 경제적(사회주의적) 계산과 대치시키는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임노동자는 노동시간을 투여한 대가로 자본가로부터 화폐를 받는다. 화폐는 때때로 상품과 교환할 수 있는 종이쪽지가 아니다. 배급표는 화폐가 아니다. 화폐는 교환가치의 일반화된 구현체이다. 맑스에 의하면 화폐는 "보편적인 지불수단, 보편적인 구입수단, 보편적인 재화의 구현체"로 존재한다([자본론] 제 1권, 제 3장). 다른 모든 형태의 금융에 비해 화폐는 일반화된 교환가치이다. 맑스는 주장했다: 궁극적으로 화폐는 정부의 명령이 아니라 노동의 산물이라는 내재적인 가치를 보유한 귀금속에만 기초하고 있다.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소비재를 판매할 경우 이것을 생산하고 유통시킨 특정 자본가들의 화폐자본은 직접 그리고 즉시 늘어난다. 이와 대조적으로 소련에서는 임금/소비와 연관된 금융의 흐름과 기업 간 거래와 연관된 금융의 흐름은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다. 이 경험적인 사실은 스탈린 자신(그의 저작 [소련 사회주의의 문제들]을 참조하시오) 뿐 아니라 소련경제에 대한 부르주아 전문가들 모두에 의해 인정되고 있다. 유독 베틀렝과 그의 모택동주의 동료들만이 소련 경제에서 화폐자본이 순환되고 있다고 믿고 있다.

소련에서는 특정 기업이 소비재를 판매하더라도 이것을 생산한 기업의 은행 잔고는 상부 경제부처의 중재를 통해 아주 간접적으로만 영향을 받는다. 더욱이 소련 기업들의 은행 구좌에 들어있는 화폐 액수 역시 화폐자본이 아니다. 기업 책임자는 "자신의" 은행 잔고에서 돈을 빼내 원하는 대로 물건을 살 수 없다. 공급계획에 명시되어 있거나 상부에서 이후 승인한 물건만을 살 수 있다. 소련의 금융체제를 묘사하기 위해 자본주의적 범주들을 사용해보자. 일반화된 배급표로 노동량은 지불되고 기업들은 화폐자본의 순환이 아니라 거래신용의 확대와 감축을 통해 서로 물건을 사고판다.

이 측면에서 보면 소련 경제는 맑스가 명확히 예상한대로 물질적 부족 상황에 놓여있는 사회화된 경제의 금융체제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

"사회화된 생산체제에서 화폐자본은 일소된다. 사회는 각기 다른 생산 분야로 노동력과 생산수단을 분배한다. 생산자들은 마침내 종이증서를 받는다. 이것으로 이들은 사회전체의 소비재에서 자신들이 투여한 노동시간에 해당되는 몫을 받는다. 이 종이증서는 화폐가 아니다. 이것은 순환되지 않는다.-- 맑스, [자본론] 제 2권, 제 18장

 

배급 대 시장 유통

예상할 수 있듯이 베틀렝은 생산에서 상품 형태를 일소하는 것이 사회주의의 목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는 주로 "이념의 혁명화"를 통해 이 목표에 가까이 간다고 생각한다:

"정치와 이념에 기초하여 사회주의 노동자들 사이에 단결이 이루어져야한다. 이러한 단결은 남아있는 시장관계를 결국 일소할 것이며 새로운 사회주의 관계의 등장을 예상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것은 중국공산당의 지도하에 전개되는 계급투쟁에 의해 성취되는 이념의 혁명화와 직접 연관되는 결과이다." (강조는 인용자)-- 베틀렝, [중국의 문화혁명과 산업조직], 1974년

차등 임금에 의한 노동이 공산주의로 이행하는 시기의 필연적인 특징이라고 맑스는 생각했다. 이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이 사상은 [고타강령 비판]과 [반뒤링론]에 명확히 표현되어 있다. 노동이 무시해도 좋을 정도의 시간과 에너지를 요할 때에만 개인은 이것을 사회 집단에 자유롭게 제공할 것이다. 임노동이 "이념의 혁명화"를 통해 일소될 수 있다는 사상을 맑스는 주관적 관념론이라고 비판하며 무자비하게 비웃었을 것이다. 중국 관료집단이 "물질적 동기"보다 "도덕적"동기를 선호한다는 주장은 국가의 강제에 의해 노동량을 할당하는 현실을 은폐하기 위한 것이다. 국가의 강제는 임노동보다 더욱 억압적인 동시에 경제적으로 더욱 비효율적이다.

"이념의 혁명화"로 위장된 국가의 강제를 사용하여 중국의 관료집단은 도시의 청년학생들을 무기한 농촌으로 내려 보내고 있다. 이 관행은 엄청난 사회적 불만을 초래할 뿐 아니라 아마도 중국 경제에 손실만을 끼칠 것이다. 농촌으로 이전된 청년들은 농사일에 무관심하고 게으르다. 농민들은 반항적이고 노동을 꺼리며 자신들이 감옥에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청년들을 일부 지원하고 이들과 연대해야하는 고역을 당연히 싫어한다.

또한 베틀렝은 주관주의적 편견으로 인해 소비재의 개인적 구매보다 배급제나 사회화된 배분을 선호한다. 그러나 사회주의의 목적은 하나의 생활양식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개인의 능력을 완벽하게 발전시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개인은 정신적인 요인이 아니라 물질적 재화를 필요로 한다. 예를 들어 유화와 조각 작품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재료들이 섬세한 색채로 제공되어야 한다. 전체적인 공급 한계 내에서 사회주의 경제정책은 소비재의 개인적 선택을 극대화시키려고 한다. 배급제나 공급이 달리는 소비재를 선착순으로 "무상" 분배하는 것은 이 목적을 파탄시킨다. 1960년대 초반에 카스트로와 게바라는 하룻밤 사이에 쿠바에 사회주의를 정착시키려고 전화 요금을 폐지했다. 이 결과 전화를 한 통화하기 위해 몇 시간을 기다려야했다! 가장 완벽하고 광범위한 노동자 민주주의가 시행되더라도 배급제, 차별 가격제, 사회화된 분배는 행정적인 자의성과 주관주의를 초래한다. 행정 관료들이 비이성적이며 파벌주의에 찌든 중국에서는 이 주관적인 자의성이 몇 배나 증폭되고 있다.

물론 전쟁이나 자연재해 시에는 경제의 모든 부문이 행정적으로 엄격히 통제되어야한다. 그러나 노동계급 독재가 일반적으로 시행되고 임금 구조가 최적일 경우 시장은 공급이 달리는 소비재와 서비스를 개인적 필요와 욕구에 맞추는 데에 가장 효율적이고 민감하며 민주적인 장치이다. 사회화된 분배는 특정 장점에 의해 정당화될 때에만 예외적으로 확대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노동자정부는 스포츠 시설을 이용할 수 있도록 무상이나 지원금 제도를 시행할 수 있다. 도시 내부의 대중교통처럼 가격에 의해 거의 영향을 받지 않는 필요 서비스를 무상으로 제공하는 것도 합리적이다. 그러나 필요 공급량이 완전히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사회화된 분배를 확대하는 것은 개인적 선택을 제약하면서 사회생활을 빈곤하게 만든다.

여기서도 맑스는 베틀렝의 "중국식 사회주의로의 길"을 명백히 반대한다. 물질적 부족이 존재하는 집단적 경제에서 소비재는 생산비용에 맞추어 가격이 정해지고 판매되어야 한다. 이것이 맑스의 생각이었다. 실제로 그는 이렇게 믿었다: 경제 계획이 실시될 경우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경기 변동은 사라질 것이며 소비재는 진정한 가치와 균형 수량으로 공급될 수 있다:

"생산이 실질적이고 미리 정해진 정도로 사회에 의해 통제될 때에만 사회는 특정 물건을 생산하는데 소모되는 사회적 노동시간의 양과 이 물건들에 의해 만족될 사회적 필요의 양 사이의 관계를 확립할 수 있다....그러나 특정 물건의 생산에 소모된 사회적 노동량이 이 물건에 대한 사회적 수요에 일치하고, 생산된 물건의 양이 재생산의 평상적 규모에 일치하고, 수요가 변동이 없을 때, 이 물건은 자신의 시장 가치에 의해 판매된다. 진정한 가치로 상품이 교환되거나 판매되는 것은 이성적 상황 즉 균형의 자연법칙이 될 것이다." (강조는 인용자)-- 맑스, [자본론] 제 3권, 제 10장

노동계급 독재의 시기에 시장은 개인적으로 소비되는 한정된 재화와 서비스의 존재하는 공급량에 따라 이것들을 분배하는 정상적 수단이 되어야한다. 그러나 특정 소비재의 생산능력을 확대하는 것은 중앙 집중화된 투자계획을 통해 결정되어야한다. 자동차산업의 정착과 같이 특정 소비재 산업에 대한 주요한 투자는 예상되는 시장의 수요 뿐 아니라 바람직한 사회적 이익과 관련된 집단적 정치적 결정에 의해 통제되어야한다.

 

일반적인 물질적 부족에서 풍요의 공산주의로 나아가는 맑스주의의 경로

어떤 의미에서는 모택동주의 선전가들의 조야한 반(反)맑스주의 노선은 이들이 말하는 것보다 말하지 않는 것에 의해 더 잘 표현되고 있다. 맑스와 엥겔스는 공산주의 사회와 그 경로를 말할 때마다 필요노동시간의 급격한 축소와 이것을 창조적이고 과학적인 작업으로 대체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생필품을 생산하는데 필요한 노동시간의 감소는 맑스에게 인간 진보의 중심적 척도였다. 이것만이 아니었다. 그는 특히 제 1 인터내셔널의 초기에 노동시간 단축을 선동했다.  

베틀렝, 스위지 등의 저작들은 사회주의의 전제조건인 노동시간 단축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노동의 양과 질은 거의 바뀌지 않은 채 기존의 기술수준에 기초하여 상품생산 관계가 일소되어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스위지는 이런 식의 공산주의를 집약해서 이렇게 표현했다:

"...공산주의에서 계급은 사라졌다: 국가는 사멸했다; 억압적인 분업형태들은 극복되었다; 도시와 농촌 그리고 정신노동과 육체노동 사이의 구별은 철폐되었다; 분배는 필요에 따라 이루어진다, 등등"-- [사회주의로의 이행]

"경제주의적인" 맑스주의를 퇴치하는 과정에서 이 모택동주의 선전가는 어떻게 사회주의 건설이 가능하고 이집트의 파라오 시대에는 왜 사회주의가 건설될 수 없었는지 등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노동과 경제학에 초점을 맞추느라 우리는 스탈린주의 "일국사회주의"이론에 내재한 민족주의 편향을 논의하지 못했다. 그러나 스위지의 공산주의 묘사는 민족주의 편향에 대한 비판을 크게 요구하고 있다. 스위지의 스탈린주의 이념은 너무도 그 뿌리가 깊어서 민족국가의 소멸이 맑스주의 공산주의 개념의 핵심 요소라는 점을 그는 인식하지 못한다.

[월간 평론]지 주위로 형성된 그룹이나 이보다 더욱 저속한 스탈린주의 선전가들로부터 "맑수주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공산주의 사회에 대한 맑스의 원래 사상을 충격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나중에 [공산당 선언]이 된 글의 첫 번째 초안을 작성하면서 엥겔스는 이렇게 주장했다:

"공동체 원칙에 따라 결합한 민족들은 이 결합을 통해 서로 통합을 이루고 자신들의 한계를 극복하도록 강요될 것이다. 이것은 신분과 계급들의 다양한 차이들이 이것들의 기초인 사적 소유의 극복을 통해 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공산주의 신념 고백의 초안", 1847년 6월

이 글의 주요 주제로 다시 돌아가자. 공산주의가 되면 "정신노동과 육체노동 사이의 차이들이 철폐 된다"는 스위지의 표현은 애매하면서도 오해를 낳고 있다. 맑스주의자들에게 이 "철폐"는 고되며 따분한 육체노동을 일소하고 이것을 창조적이고 과학적인 작업으로 대체하는 것을 통해 성취된다. 자본주의 공업화의 가장 진보적인 경향은 생산과정에서 직접적 육체노동을 일소하고 기계의 감독으로 이것을 대체하는 것에 있다고 맑스는 생각했다:

"중공업에서 드러나고 있듯이, 소모된 노동시간과 이 결과 생산된 제품 사이의 엄청난 불균형, 그리고 단순한 추상 수준으로 감소된 노동과 이 노동이 감독하는 생산과정의 동력 사이의 질적인 불균형을 통해 진정한 부는 훨씬 더 많이 축적된다. 노동은 더 이상 생산과정의 핵심 부분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생산과정에서 인간의 요인은 생산과정을 감시하고 감독하는 것에 한정된다....

노동자는 더 이상 변화된 자연물을 재료와 자신 사이의 중재자로 삽입하지 않는다. 그는 이제 자신과 무기적 자연 사이에 공업과정으로 변모된 자연과정을 삽입한다. 그리고 이 과정을 그는 통달했다. 그는 더 이상 생산과정의 주요 인자가 아니라 단지 이 과정과 함께 할 뿐이다."-- 맑스, [요강]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맑스는 공산주의를 지금 말로 하면 완전히 자동화된 사회로 간주했다. 그가 생산체제로서 자본주의에 반대한 것은 이것이 기술 진보를 정지시켰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에서 생산수단의 확대는 역사적으로 이윤율의 저하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국가를 혁명을 통해 타도할 경우 기존의 생산수단은 몰수되고 중앙집중적으로 통제될 것이다. 완벽하고 이성적인 경제자원의 활용 특히 가장 선진적인 기술을 체현하는 투자는 노동생산성을 비약적으로 증대시킬 것이다. 증대된 생산성은 부분적으로 소비수준을 높이기 위해 소비될 것이지만 대부분은 노동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하는데 사용될 것이다. 이렇게 해서 더 많이 남는 자유 시간은 노동 대중의 재교육에 사용되어 이들의 문화적 수준과 기술적 능력을 높일 것이다. 이 노동자들이 생산과정에 다시 투입되면 이들은 생산성을 더욱 증대시킬 것이다. 이렇게 노동생산성의 증대는 스스로를 영속화시키면서 스스로를 강화시키는 과정이 될 것이다:

"실물경제의 절약은 노동시간의 절약 즉 생산비용의 최소화에 있다. 그러나 이 절약은 생산성의 증대와 일치한다. 따라서 절약은 쾌락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힘과 생산능력의 증대를 뜻한다. 이 결과 쾌락의 능력과 수단이 발전한다.... 여가 뿐 아니라 수준 높은 활동까지 포함하는 자유 시간은 자연스럽게 이것을 즐기는 사람을 다른 사람으로 변화시킨다. 그리고 직접 생산과정에 투입되는 사람이 바로 이 다른 사람이다. 이렇게 형성되는 사람은 이 과정에서 규율을 갖게 된다. 반면에 이미 형성된 사람에게 이것은 연습, 실험적 과학, 물질적으로 창조적이며 스스로를 객관화시키는 지식이다. 그리고 그는 자기 머리 안에 사회의 축적된 지혜를 담는다." (강조는 인용자)-- 같은 글

필요 노동이 너무도 근소한 시간과 에너지를 흡수하여 개인이 자유롭게 이것을 사회 집단에 줄 때 이 과정은 끝난다. 이를 통해 생산력의 수준은 너무 높아서 개인의 물질적 전유는 무제한으로 허용 된다: "각자 자신의 능력에 따라 노동하고 각자 자신의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다."

임노동과 상품 유통은 자본주의 생산양식 하에서 물질적 부족과 노동 강제의 특징적 형태들에 불과하다. 공산주의의 진정한 목표는 물질적 부족과 노동 강제의 현실을 일소하는 것이다.

물질적 부족을 궁극적으로 해소하는데 기여하지 않는 상품관계의 일소는 전혀 진보적이지 않다. 물질적 후진성의 조건 속에서 임노동과 상품 유통을 일소하는 강령은 반동적 공상주의이다. 이런 강령을 실천하려는 시도들은 경제를 붕괴시킬 것이다. 중국의 대약진운동 직후인 1960년-61년에 이것은 현실로 드러났다. 그리고 이 결과 기형적 노동자국가에서 존재하는 임노동과 연관된 조건들보다 더 억압적인 조건들이 초래될 것이다.

<이 글은 1976년 11월 19일자 [노동자 전위]지 제 134호에 처음 실렸다.>

 

3. 모택동주의자들이 소련에 "자본주의를 복귀시킨" 방식

-- 마튼 니컬러스의 저서 [자본주의로 복귀한 소련]에 대한 비평

 

                                                      조지프 씨모어

 

모택동주의자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스탈린, 흐루시초프, 브레즈네프로 이어지는 소련의 경제체제가 근본적으로 연속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인정하는 것 같다. 사실 스탈린 사망 후 소련에 자본주의가 복귀했다는 모택동주의 도그마(교의)는 너무도 황당하다. 이 때문에 역사적으로 이렇게 중요한 사건이 언제 왜 어떻게 일어났는지에 대해 모택동주의 조직들도 의견이 제각각이다. 북경의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은 이에 대해 단 하나의 단서만을 제공하고 있다: 소련공산당 제 20차 당 대회에서 흐루시초프가 비밀 연설을 행한 것이 이 사건의 핵심 계기이다.

혁명적 연합(Revolutionary Union, RU)에서 혁명적 공산당(Revolutionary Communist Party, RCP)으로 이름을 바꾼 미국의 어느 모택동주의 조직은 자신의 기관지 [붉은 신문](Red Papers) 제 7호(1975년)에서 흐루시초프 집권과 동시에 소련이 자본주의 체제로 복귀했다고 주장했다. 이들에 따르면 소련에서 "자본주의"는 두 단계를 거쳐 진행되었는데 제 1 단계로 흐루시초프가 "사적, 경쟁적 자본주의"를 회복시켰으며 제 2 단계로 브레즈네프가 "국가독점 자본주의"를 정착시켰다. (이 신기한 "자본주의 복귀"이론에 대한 맑스주의적 분석은 "모택동주의의 미쳐 날뛰고 있는 관념론"이라는 제목으로 이 팜플렛에 소개되어 있다.)

혁명적 공산당(RCP)의 주요 경쟁조직이자 중국 스탈린주의자들에게 좀 더 굴종하는 10월 동맹(October League, OL)은 침묵을 지키는 것이 지혜롭다고 판단했다. 지금까지 OL은 소련에 자본주의가 복귀했다는 주장을 가장 간단하게 "설명하는 것"에 그치고 있다. 나중에 중국의 공식 선전이 자기의 주장과 충돌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새롭고 두려운 영역에 OL의 클란스키 일당은 발을 들여놓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RCP 그리고 신좌익(New Left) 경향의 [가디언]지 주위로 결집한 "비판적 모택동주의자들"이 국내에서 서로 잘났다고 설치고 있기 때문이다. OL의 기관지 [해방자 신문]은 마튼 니컬러스의 저서 [자본주의로 복귀한 소련]을 구성하고 있는 일련의 논문들을 출판했다.

스탈린 사후 러시아에 대한 모택동주의의 "분석"은 너무나 황당하여 지적으로 치장하기가 불가능하다. 니컬러스의 불행한 운명은 이 점을 증명하고 있다. 신좌익(New Left)의 저명한 학자인 그는 소부르주아 전위당 노선을 일반화하여 "새로운 노동계급"이론을 창안했다. 모택동주의 강경파로 전향하자마자 그는 소련의 "자본주의 복귀" 현상을 똑 부러지게 분석하려했다. 유행에 영합하는 이 노력은 일련의 논문이 되어 1975년에 친중(親中) [가디언]지에 실렸다. 그러나 이 잡지의 편집자들은 니컬러스의 이론에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았다. 다만 이 잡지의 지도자 어윈 실버는 그의 이론이 별로 설득력이 없다고 평했다.

이러던 중 지난 겨울 [가디언]지는 앙골라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반혁명 정책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그러자 니컬러스는 중국공산당에 충성하는 OL에 가입했다. 그러나 이로부터 9개월 후 OL은 "우파 수정주의자", "자본가 계급 옹호자"로 몰아 그를 축출했다. 당연히 OL은 그의 저서 [자본주의로 복귀한 소련]를 수정주의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이들은 이 저서의 논문들을 자기 기관지에 실었다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았다:

"이 저서는 노동계급 독재를 공격했다. 수정주의자 흐루시초프가 집권한 지 10년 이상이 지났지만 '소련의 실제 생산관계에는 심대한 변화'가 없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촉구]지, 11월 29일

OL의 기관지는 이 저서가 "자본주의 복귀의 위협을 은폐하고 그 원인들을 신비화했다"고 주장한다.

미국의 모택동주의 조직들은 모두 니컬러스의 저서를 비난했다. 더욱이 중국공산당도 이 저서를 좋게 평가하지 않을 것이다. 이 저서의 제 7장은 야오웬유안(요문원)이 저술한 논문 "린퍄오(임표) 파벌의 사회적 기반에 대하여"를 길게 발췌하고 있다. 야오는 "4인방"의 한 사람으로 현재 감옥에 있으며 "자본주의 이중첩자"로 비난받고 있다.

부끄러움이 전혀 없고 거만한 이 아마추어 지식인의 정치적 고초에 대해 우리는 특히 관심을 가질 일이 없다. 그러나 그의 저서는 "소련이 자본주의로 복귀했다"는 모택동주의 이론의 철저한 정치적 파산을 실물로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그의 저서는 논의할 필요가 있다. 니컬러스의 저작은 이론적으로 천박할 뿐 아니라 대단히 기만적이다. 그러나 소위 소련 "자본주의"에 대해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경제 자료들을 제시하는 장점이 있다.

1956년-57년 흐루시초프 "집권의 부르주아적 성격"과 1965년 코시긴 또는 소위 리베르만 개혁으로 인한 자본주의 경제관계의 "복귀"를 니컬러스는 구별하고 있다. 샤를르 베틀렝 같은 일부 모택동주의 선전가들과는 달리 니컬러스는 소련이 새로우며 역사적으로 독특한 "국가자본주의 체제"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새로 등장한 "소련 자본주의"가 서방 자본주의와 다른 점이 거의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소련의 자본주의 복귀를 증명하려는 니컬러스의 노력은 정반대를 증명하고 있을 뿐이다: 맑스주의자들이 이해해왔거나 노동 대중이 경험한 기준에 따르면 소련은 자본주의 체제가 아니다. 더욱이 지금 소련이 자본주의 체제라고 니컬러스가 제시하는 주장과 기준은 스탈린 치하의 러시아와 모택동 치하의 중국을 설명하는데 훨씬 더 적합하다!

 

공장 경영자가 맹아적 자본가인가?

소련의 자본주의 복귀를 주장하는 자칭 맑스주의자들이 직면하는 가장 명백한 어려움 가운데 하나는 스탈린 치하에서 새로운 자본가 계급이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이들이 어떻게 국가권력을 장악했는가를 설명하는 것이다. 유럽의 자본가 계급은 봉건제를 타도하기 위해 수백 년에 걸쳐 내전, 혁명, 반혁명을 반복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본가 계급에 대항한 노동계급의 투쟁은 100년이 넘게 자본주의를 뒤흔들어왔다. 그런데 소련의 자본주의 복귀는 무혈 궁정 쿠데타를 통해 일어났으며 몇 년이 지나도록 모택동을 비롯한 어느 누구도 이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이것이 이 세계 역사적 사건에 대한 모택동주의자들의 설명이다!  

소련의 "부르주아 반혁명"이 아무도 모르게 일어났다는 사실에 대해 "맑스-레닌주의자" 니컬러스는 확실히 괴로워하고 있다. 이것은 당연하다:

"권력을 장악한 자본가 계급 형성의 경제적 상황, 물질적 기초 등을 나타내는 개략적인 자료들이 일부 존재한다. 그러나 이들이 권력 장악을 시도하기 전에 자신을 계급으로 서서히 조직하고 자신의 연합체들을 구축하고 집단적 자의식을 획득한 과정은 거의 전적으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스탈린 치하 러시아가 겉으로 보인 강건함의 배후에서 반(反)맑스주의, 반(反)레닌주의 반혁명 강령으로 무장한 지도자 그룹이 아무 고통도 없이 이 사회주의의 보루를 접수한 과정이 진행되고 있었다."

소련의 부르주아 반혁명이 고통 없이 몰래 일어났다는 니컬러스의 모택동주의 사상은 공산주의자들이 음모적으로 짜르 정부를 타도하여 10월 혁명을 성공시켰다는 고(故) 에드거 후버의 견해와 맥을 같이한다.

[자본주의로 복귀한 소련]은 "새로운 자본가 계급"의 맹아가 스탈린 치하의 기업 경영자였다고 주장한다. 니컬러스의 주장에 따르면 기업 경영자의 지위는 골칫거리였다. 스탈린이 노동자들의 이해를 면밀하게 옹호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들을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은 없으면서도 책임은 막중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바로 이것이 스탈린 치하 러시아에서 부르주아 반혁명이 성공한 것에 대한 니컬러스의 사회학적 설명이다:

"소련의 기업 경영자들은 무겁고 엄격한 책임을 지고 있었으면서도 노동자에 대한 통제권은 자본주의 세계의 기업 경영자에 비해 대체로 훨씬 적었다....자본주의 세계의 기업 경영자들이 가지고 있던 가장 중요한 권한 즉 마음대로 노동자를 해고할 수 있는 권한이 이들에게는 없었다. 이들은 일자리에서 쫓겨나 굶주리는 고통을 겪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노동자들을 위협할 수 없었다....

전시를 제외하면 노동자들은 마음대로 직장을 그만둘 수 있었다. 그러나 기업 경영자들은 노동자가 형법상의 범죄를 저질렀다고 증명해야만 노동자를 해고할 수 있었다. 따라서 노동자에게 채찍질을 가할 수 없는 기업 경영자의 권한은 허약했다."

니컬러스의 주장에 따르면 소련의 기업 경영자들은 자본주의 복귀를 통해 자신의 "허약성"을 극복하려고 했다:

"한편으로 기업 경영자들은 노동자들의 권한들을 더 많이 자신에게 이전시키면서 동시에 계획경제가 자신에게 부과하는 책임을 줄였다. 그러나 스탈린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자본가의 본능에서 나온 이 두 경향들은 통제되고 억압되었다."

스탈린 치하에서 기업 경영자들이 노동자에게 "채찍질을 가할 수 없었다"는 주장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 이 주장은 잠시 후에 검토하기로 하자. 다만 니컬러스가 소련 경제정책사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 해도 그의 주장은 초보적인 맑스주의 사회학에 명백히 위배된다.

소련의 기업 경영자들은 고위 행정가 집단에 대항하여 단결의 기반을 갖춘 뚜렷한 사회집단이 아니다. 기업 경영은 행정 관료집단 내부의 분업에 불과하다. 기업 경영자의 진정한 성공은 "자기" 공장, 농장, 광산이 확장되는 것에 있지 않다. 기업 확장은 기술적으로 대단히 제한되어 있다. 이들의 진정한 성공은 행정 위계 속에서 승진하는 것이다.

중앙계획 당국과 산업부서의 최고 관리들 대부분은 기업 경영자로 시작하여 경력을 쌓았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지만 스탈린이 살아있을 때에도 관료의 개인 소득은 행정 위계 내부의 지위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기업 경영자와 고위 계획 관료들 사이에 이해관계가 마찰을 빚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새로운 자본가 계급을 형성시키지는 않는다. 이것은 소련의 군대 내에서 장군과 부관 사이에 마찰이 일어날 경우 부관이 새로운 자본가가 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스탈린의 노동계급 군사화

들리는 바에 의하면 스탈린은 이렇게 말했다: 종이 위에는 무엇이든 적을 수 있다. 그런데 니컬러스 역시 자기 상전인 스탈린과 같은 생각으로 저술에 임한다. 스탈린 치하에서 기업 책임자가 노동자에게 "채찍질을 가할 수 없었다"는 주장을 나이든 노동자가 접한다면 그는 먼저 어느 누가 그런 황당한 말을 할 수 있는가 의아해 하면서 곧 이어 쓰디 쓴 웃음을 지을 것이다. 바로 이 주장에서 니컬러스의 부정직은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이 때문에 독자들이 자신이 제시한 "사실들"을 확인하지 않기를 그는 희망할 수밖에 없다. 니컬러스 박사가 [자본주의로 복귀한 소련]을 대학원 논문으로 제출한다면 자료 날조로 퇴학당하지 않는다면 다행일 것이다.

예를 들어 스탈린 치하에서 노동자가 권리를 누렸다는 증거로 그는 "노동자들만 참여할 수 있으며 경영자는 피고로만 법정에 출두하고 재판 초기에는 아예 법정출두가 금지된 노동분쟁" 특별법정을 거론하고 있다. 또한 그는 노동자가 자유롭게 경영자들을 비판할 수 있는 생산회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