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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퇴진투쟁에 담긴 사회동학과 노동계급의 원칙

채만수의 굴종적이고 해로운 정세 인식 비판

 

[괄호]와 밑줄 등의 강조는 모두 작성자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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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사회과학연구소(이하 노사과연)의 채만수 선생의 글 박근혜 정권의 몰락과 재벌, 노동자계급<정세와 노동> 20172월 호에 실려 발표되었다.

몇 개월 동안 계속되고 있는 박근혜 퇴진 국면 이후 쏟아지듯 발표된 많은 글들 중에서 이 글이 특히 우리 눈에 띄었다. 그 까닭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박근혜 퇴진! 노동자 정부!(20161119)를 비판하며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편집위원이라는 소박한 직함으로 발표되었지만, 채만수 선생(이하 선생’)은 노사과연의 창립자이며 오랜 기간 소장 역할을 해 온 분이고, 자타가 공인하는 스탈린주의 신봉자인 것으로 유명하다. 그리하여 이른바 혁명적 사회주의 정치 조류내에서 일정한 지지자층을 거느린, 무시할 수 없는 하나의 경향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게다가 이 글은 다음과 같은 대단히 흥미로운 문제들을 제기하고 있다.

첫째, “이번 촛불혁명시민혁명을 기획하고 연출한 것은 결국 재벌인가?

둘째, ‘노동자정부’ ‘혁명정당 건설’ ‘노동인민 시국대책회의등은 사물 자체, 정세 자체, 역사 자체의 운동발전 법칙을 과학적으로 탐구하는 데에는 별반 관심도 능력도 없는” “현실과 상관없이 급진적혁명적으로 사고하는 자의 망상일 뿐인가?

셋째, 그러므로 현재의, 노동자계급의 정치적조직적 역량으로는 분명 언감생심 바랄 수 없는 목표들노동자정부’ ‘혁명정당등은 결코 제기해서는 안 되고, “당면의 과제요구는 오직 국가보안법을 위시한 반민주파쇼악법들과 그 제도기구관행인물들을 폐지척결하여 말 그대로의 민주주의, 특히 사상학문언론결사통신의 비밀의 자유를 획득, 요약하여 헌법 제37조의 개폐(改廢)를 요구하고 강요하는 것이어야 하는가?

넷째, “언론의 자유, 결사 및 집회의 자유가 없이는, 어떠한 노동자운동도 불가능하다(엥겔스, 1865).”의 인용은 적절한가? 1865년 엥겔스의 정신과 2017년 선생의 정신은 같은 것인가?

지금까지의 박근혜 퇴진 정국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탄핵이 인용된 지금, 앞으로의 정세를 헤쳐 나갈 원칙 확인을 위해, 이 문제들을 따져보는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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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이번 촛불혁명시민혁명을 기획하고 연출한 것은 결국 재벌인가?

지배집단의 기획과 연출이라고 결론짓는 선생의 생각을 요약해서 따라가 보자. 그는 박근혜 정권 몰락의 기획연출자 재벌이라는 소제목 아래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이번의 촛불혁명, 시민혁명에서는 저들[재벌족벌 언론과 공영방송들]의 행동거지, 저들의 대응이 평소의 그것들과는 확연히, 정말 판이하게 다르다! 우선, 혁명의 방아쇠를 당긴 공()이 극히 놀랍게도 분명 극우언론 중의 극우언론 조선일보와 그 계열사인 종편 TV조선에게 있다.이 상황을 사실상 격발한 조선일보를 비롯한 언론, 경찰, 검찰, 법원. 저들이 누구인가?그러한 저들이 갑자기 비선실세의 국정농단을 문제 삼으며 시민들의 시위를 선동하고 보호보장하고 있는 것이다.저들은 무엇 때문에 저렇게 평소와는 판이하게 움직이고 있고, 그 배후는 누구일까? 저들이 노리는 바는 과연 무엇일까?이렇게 보면, 이번 촛불혁명시민혁명을 기획하고 연출한 것은 결국 재벌이며, 촛불혁명시민혁명은 동시에 재벌의 반란이라고 할 수 있다.과도한 추론일까?”

하루 최대 2백만에 이르고 연인원 천만을 넘었던 인민의 격동이 결국 재벌의 기획과 연출에 의한 것이라고 선생은 결론짓는다. 자신의 생각이 박근혜 퇴진과 더불어 재벌 응징을 외쳤던 시위참여자들과 크게 달라 놀라울 테지만, 치밀한 사고의 결과라는 듯이 묻는다. “과도한 추론일까?”

선생으로서는 이 일련의 정치사태에 방아쇠를 당긴 것이 극우언론 중의 극우언론 조선일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지배계급 일부일 뿐 아니라, 중요 기둥 중 하나인 조선일보가, 이른바 촛불혁명이라는 인민의 격동을 불러오고 지배계급 전체의 이해에 반하여 행동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 불합리를 해소하기 위해 이리저리 궁리하다가, 스스로도 놀라운결론에 이른다: ‘이 촛불혁명은 지배계급이 기획하고 연출한 것이다!’

조선일보 등의 최순실 국정농단 보도가 이 정치사태를 격발했다는 것은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확실히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일상적 시기에는 거의 볼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20주에 이르는 인민의 격동과 박근혜 탄핵, 조윤선, 김기춘, 이재용 등의 구속, 노동계급을 포함한 이른바 국민의 상당한 정치의식의 성장과 조직화 등을, 재벌이 의도하여 기획하고 연출했다는 것은 틀렸을 뿐만 아니라 해로운 사고이다.

단지 지배계급은 지배계급, 피지배계급은 피지배계급이라는 단순하고 기계적인 사고로 선생은 이 사회를 분석한다. 그리하여 지배계급 일부가 (결과적으로)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해에 반하여 행동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자, ‘애초에 모든 것이 지배계급 기획과 연출이라는 음모론적이고 피해망상적인 결론에 이르는 것이다.

자본주의 세계는 생산수단의 사적소유를 둘러싼 자본가와 노동계급 사이의 모순이 가장 근본적이지만, 그 외에도 다층적이고 다각적으로 수십 갈래의 모순이 중첩되어 얽히고설킨 고도의 복잡계이다.

그리하여 사회구성원들은 자기정체성을 항상 착취계급과 피착취계급에서 찾지는 않는다. 사회구성원 모두가 일관되게 계급적으로 각성하고 그렇게 행동한다면, 계급 갈등은 일찌감치 역사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노동계급에 속했다 하더라도 일상적 개인 대부분은 몰계급적이거나 계급 배신적인 의식 속에 살아간다. 심지어 노동계급의 정치조직들마저도 계급의 역사적 대의를 거스르는 행위를 종종 한다. 이런 일들은 계급적 각성 정도가 상대적으로 더 높은 지배계급 내에서도 일어난다. 피지배계급의 도전 앞에서는 단일한 이해를 갖지만, 그들 내부는 다층적이고 다양한 이해관계로 갈라져 있고, 그들 나름 서로 치열하게 경쟁하고 다툰다.

조선시대 지배계급은 여러 파당으로 갈라져서 자기 목숨만이 아니라 삼족의 명운을 걸고 싸웠다. 여당 국회의원도 지내고 수 십 억을 뇌물로 쓸 정도로 재력가였던 성완종은 지배계급 내 이전투구에서 패배하자, 지배집단의 비밀을 폭로하여 상당한 타격을 입히고 본인은 자살했다. 트럼프의 당선 전후 미국 지배계급이 분열하고 서로 시끌벅적하게 싸우고 있다는 소식이 연일 뉴스에 오르고 있다. 이런 일들은 지배계급이 의도하고 기획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지배계급의 자기모순과 그로 인한 체제 불안이 일상적으로 흔히 일어나는 일은 아니지만, 역사적으로 상당히 많은 사례가 있었고 심지어 필연적인 것이다.

2월 혁명 직전, 지배계급 일파에 살해된 숨은 권력자 라스푸틴 이야기는 지금의 사태를 이해하는 데에 상당한 암시를 준다. 트로츠키 러시아 혁명사에서 묘사하는 다음 이야기에서, 라스푸틴을 최순실이나 우병우로, 짜르는 청와대로, 지배계급은 조선일보로 바꿔 읽어도 재미있을 것이다.

유산 지배계급은 이해관계, 관습, 비겁함의 측면에서 짜르 체제를 완전히 지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라스푸틴이 없는 짜르를 원했다. 그러자 짜르는 지금의 나를 그대로 인정할지어다.’라고 이들에게 응답했다.시베리아의 예수 라스푸틴 때문에 이 모든 고통을 겪고 있다고 이들은 느끼기 시작했다. 견디기 힘든 불길한 징조들이 파도처럼 지배계급을 덮쳤다.혁명 전에는 최상층 계급들조차 야당이 되었다. 호화 살롱과 클럽에서 정부의 정책은 가혹하고 적대적으로 비판되었다.그리고 이들의 지위 때문에 우스개 이야기들과 악의에 찬 과장된 이야기들을 일반인들은 대단히 권위 있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러한 과시성 행위가 위험하다는 생각은 마지막 순간이 되어서야 최상층 부위의 뇌리에 떠올랐다.”상권, 5장 무혈쿠데타에 대한 논의

자본주의는 그리고 체제 모순이 곪을 대로 곪은 이 제국주의 시대의 자본주의는 사회구성원들의 격동을 주기적으로 선동한다. 모순으로 인한 갈등의 축적과 그 폭발은 의도적 기획의 산물이 아니다. 지배계급의 의식에서 벗어난 객관적인 사회 현상이다. 이렇게 위기에 처하면 그 사회 지배집단 내의 갈등은 더욱 심화되어 분열이 노골화된다. 극심해진 압력에 못 견딘 지배 집단 일부는 (결과적으로) 자기 계급의 이해에 반하는 돌출적 행동을 하고, 그로 인해 스스로 큰 상처를 입히며 심지어 혁명이라는 역사의 전진에 기여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 점을 트로츠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로베스삐에르는 입법의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절대왕정에 대한 프랑스 귀족들의 반대는 왕정을 약화시키면서 부르주아 계급을 분기시키고 이후 인민대중을 분기시켰다.귀족계급에 저항하는 혁명은 첫 단계에서 비록 일관되지는 못하나마 귀족, 왕족 등 특권 최상층의 진정한 협력을 얻는다. 이 놀라운 역사 현상은 사회계급 이론에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이론의 조잡한 해석[채선생의 것과 같은]에 모순을 일으킬 뿐이다.사회의 모든 적대관계가 최고조에 도달했을 때 혁명은 터진다. 그러나 이 상황은 구체제의 계급들 즉 해체될 수밖에 없는 계급들에게도 참을 수 없는 상황이 된다.귀족계급은 자신이 모든 적대감의 초점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관료집단을 비난한다. 그러면 관료집단은 귀족계급을 비난하고 이 양자가 함께 또는 따로 자신들의 불만을 자기 권력의 원천인 왕정의 정점에 퍼붓는다.자신들이 겪는 모든 불행의 이유는 왕정의 맹목이나 이성 상실에 있다고 귀족계급은 생각한다. 구 사회를 새로운 사회와 화해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특권층은 믿을 수 없다. 다른 말로 하면, 귀족계급은 자신의 종말을 인정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죽을 것 같은 피로감을 구체제의 가장 성스러운 권력인 왕정에 대한 반대로 전환시킨다.귀족도 이런 식으로 체제 저항의 빛을 내고 사라진다. 이로써 이들은 자신의 철천지원수인 인민에게 커다란 봉사를 한다. 이것이 바로 구체제 붕괴의 변증법이다. 이 변증법은 사회계급 이론과 일치한다.”같은 책, 같은 장

이렇듯 지배계급의 분열과 갈등 그리고 계급 이반행위는 사회동학의 중요한 일부이고 게다가 혁명기의 중요 조건 가운데 하나이다. 레닌과 트로츠키는 그것을 첫 번째 조건으로 언급한다.

레닌,

결전이 무르익었다는 것은 첫째, 우리에게 적대적인 계급의 모든 세력이 충분히 혼란에 빠지고, 충분히 서로 치고 받고 있으며, 자신들의 힘에 부치는 투쟁으로 스스로 충분히 약해졌을 때, 둘째, 동요하고 흔들리고 불안정하며 어중간한 모든 분자들, 곧 부르주아지와는 다른 쁘띠부르주아지와 쁘띠부르주아지 민주주의가 인민 앞에서 충분히 폭로되고, 자신들의 실질적 파탄으로 충분히 창피를 당했을 때, 셋째, 부르주아지에 맞서 아주 단호하며 헌신적으로 대담한 혁명적 행동을 지지하는 대중적 분위기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에서 나타나 강력해지기 시작했을 때를 말한다. 바로 그때 혁명은 무르익은 것이며, 바로 그때 우리의 승리는, 만일 우리가 위에서 언급하고 위에서 간략하게 기술한 모든 조건을 올바로 고려하고 올바로 시기를 선택한다면, 우리의 승리는 확보된 것이다.”레닌과 좌익 공산주의 소아병10몇 가지 결론’, 1920

트로츠키,

노동자 혁명 승리의 기본 조건들은 다음과 같이 역사적 경험에 의해서 확립되었고 이론적으로 해명되었다: (1) 부르주아 체제의 위기와 지배계급의 혼란 (2) 금융자본가 계급의 지배를 위해서 그 지지가 필수적인 소자본가 계급의 격심한 불만과 사회변화에 대한 갈망 (3) 체제에 대한 인내력을 상실한 노동계급의 반체제 인식과 혁명적 행동에 대한 욕구 (4) 노동계급 전위당의 명확한 강령과 확고한 지도력. 이것들이 노동자혁명 승리의 4가지 조건이다.”―「전쟁과 프롤레타리아 세계 혁명에 대한 제4인터내셔널 선언, 1940

박근혜 정권 몰락의 기획연출자 재벌이라는 무고(誣告)’를 받고 있지만, 재벌 역시 이번 격동으로 인해 상당한 손실을 입고 위기에 처했다. 지켜보는 눈들을 따돌리고 은밀하게 진행되어야 할 상속 문제가 세상에 까발려지고, 지금까지 한 번도 구속된 적이 없는 삼성의 총수가 구속 수감되었다.

자신의 피해 망상적이고 수동적인 세계 인식에 도전하는 이런 사실에 대해, 그는 기업가 정신에 입각한 혁신과 모험일 뿐이라고, ‘아둔한독자들을 야단친다.

재벌 총수들이 곤혹을 치르고 있지 않느냐고? 그럼, 아무려면 설마, 생채기도 안 나고 대사를 치를 수 있다고 생각하나?재벌 총수들이 아무런 곤혹도 치르는 일 없이 마냥 꽃방석에만 앉아 있던가? 혁신과 모험이야말로 기업가 정신의 요체라 하지 않는가?”

재벌이 박근혜-최순실 체제의 피해자인 양 묘사하는 선생의 인식은 헌법재판소나 문재인 같은 체제 하수인들의 인식과 닮았다. “[최순실 비선실세에 의해] 이익이 농단(채만수)” 당한 재벌들이 조선일보 등을 앞세워 이번 거사에 나섰다고 선생은 설명한다. 하지만 특검에 따르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과정에서 이재용 등은 최소 1388억 원의 국민연금 손실을 포함하여 최소 8549억 원의 이득을 얻었다(TV조선, 2017.03.01.). 그런데 지금 그 일들이 다 들통 나서 그 이득들을 토해내어야 할 지경에 이르렀고, 자신은 감옥에 갇혔다.

그것마저 혁신과 모험이라는 기업가 정신의 발로라고 한다면,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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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퇴진 정국의 원인, 과정, 결과에 대한 미시(微視) 연구는 흥미로울 것이고 앞으로 누군가 해낼 것이라고 본다. 우리가 여기서 다룰 본론은 아니다. 다만 대강의 내용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강력한 지진은 엄청난 에너지를 집중 발산하며 지상에 커다란 피해를 입힌다. 지속 시간은 불과 30초미만이다. 순식간이긴 하지만 그 지진이 일어나는 수십 초는 수 년 또는 수십 년 동안 지하에 축적되어 온 모순과 에너지의 표현이다. 이번 박근혜 탄핵 정국도, 표면에 드러난 조선일보 보도가 그 첫 원인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현상적이다.

박근혜 퇴진정국으로 폭발하기까지 그 저변엔 한국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과 이 정권의 무능으로 인한 사회 갈등이 꾸준히 축적되고 있었다. 눈에 띄는 것만 열거해 보아도, 부정 대선, 세월호 학살, 국정원 감청, 사드 배치, 통합진보당 해산, 국정교과서 채택, 삼성반도체 희생자, 한일 위안부 합의, 국영기관 민영화, 성과연봉제, 백남기 농민 살해 등등. 이렇게나 많다. 사실 그 중 하나만으로도 정권타도의 방향으로 나아갈 만한 것들이었다. 다만 고도의 억압 체제 속에서 안으로 안으로만 사회 불만은 응집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한국사회는 폭발성 높은 인화물질이 차곡차곡 쌓였고 발화점 낮은 유증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밥그릇 싸움에 소외된 조선일보 등이 결국 분을 참지 못하고 불똥을 튀겼다. 지배집단 내에서만 내밀하게 전해지던 박근혜-최순실의 추문이 만천하에 알려졌다. 삶의 여유가 조금 더 있는 중산층은 이 사회를 비교적 잘 인내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추문은 그들의 인내의 둑마저도 터뜨렸다. 행동에 나서자, 반박근혜 정서는 압도적 다수가 되었고, 사회는 폭발했다.

그러나 노동계급은 미래의 지배계급이 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들의 혁명정당이 없었다. 박근혜는 끌어내려졌지만, 체제는 찰과상 정도만 입고 꿋꿋이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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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노동자정부’ ‘혁명정당 건설’ ‘노동인민 시국대책회의등은 사물 자체, 정세 자체, 역사 자체의 운동발전 법칙을 과학적으로 탐구하는 데에는 별반 관심도 능력도 없는” “현실과 상관없이 급진적혁명적으로 사고하는 자의 망상일 뿐인가?

선생은 자신의 신조 스탈린주의를 완강히 비판해 온 볼셰비키그룹을 이번 기회에 현실 감각이 없는 좌익적 몽상가집단으로 낙인찍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로서는 도저히 동의할 수 없는 노선을 가진, 인류해방을 위한 노동자계급의 전위 볼셰비키를 자처하는 한 뜨로츠끼주의 혁명가단체 볼셰비키그룹1119일에 배포한 전단(傳單)을 한번 들여다보자.아무튼 그렇게 시위를 3당과 시민단체가 주도하고 있다고 명언(明言)하면서도, 이 시점에서 박근혜 정권을 타도하고, 노동자 정부를 수립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과연 노동자계급의 전위 볼셰비키답다!사물 자체, 정세 자체, 역사 자체의 운동발전 법칙을 과학적으로 탐구하는 데에는 별반 관심도 능력도 없으면서 독점자본의 악질적 반공모략을 좌익적 언사로 포장하여 떠들어대는 데에는 유달리 유능한 혁명가들은 이러한 논의를 쓰딸린주의적 2단계 혁명론이라며 비난한다.”

사회주의자로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한다: ‘계급적 각성 즉, ‘이윤을 최고 가치로 여기는 이 자본주의 체제가 모든 고통의 근원이고, 노동자정부를 통해서만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혁명 과정이고 그것이 우리 사업의 요체이다.’

그래서 우리는 115, 1119, 1210일 등 세 차례에 걸쳐 박근혜 퇴진투쟁 선전물을 작성 배포하면서 그 점을 거듭거듭 강조했다.

모든 문제의 근원은 이 초과 착취와 초과 억압 체제에 있다. 이 체제 자체는 이미 예전부터 기형적이고 괴이한 모습을 띄어왔다. 박근혜와 최순실은 단지 그 가장 추한 모습을 드러냈을 뿐이다. 민주당을 포함하여 자본주의 정치인들은 여당과 야당을 막론하고 이 체제의 하수인들이다. 그들은 문제의 원인이지 해결사가 아니다. 오직 노동인민과 노동인민의 단결 그리고 가장 선두에 선 노동자혁명정당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아랍의 봄, 4.196월 항쟁 이후를 재탕해서는 안 된다. 사이비 민주화에 속지 말자!”115

이 착취와 억압 체제는 12일의 위력에도 전혀 위축되지 않고 멀쩡히 제 할 일을 하고 있다. ‘성과연봉제 폐지, 사유화 중단, 사드 철회, 국가보안법 철폐, 국정원해체, 세월호 진상규명, 핵발전소 저지 등노동인민의 삶을 개선할 당면 요구들은 결코 거저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박근혜가 퇴진하더라도, 민주당 등 야3당은 이 요구들에 대해서는 따로 셈하자며 낯빛을 바꿀 것이다.이 투쟁에서 제일 경계해야 할 것은 노동계급이 자본가 정당들의 들러리가 되는 것이다. 박근혜 타도와 더불어, 민주당 등 자본가 정당들이 이 헬조선의 원인이고 조력자이고 공범자라는 각성을 촉진하는 것이 이 싸움에서 노동계급의 주된 임무 중 하나이다.”1119

이 사회는 계급적대를 중심 갈등으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이다. 노동인민의 일터에서 나타나는 생존권만이 아니라, ‘민주주의투쟁 역시 마찬가지이다. 노동인민이 주도권을 놓지 않을 때라야만 자본가 정치인 일부가 따라오려는 시늉이라도 하는 것이다. 거듭되는 패배는 거의 대부분 바로 이점 때문이었다. 노동인민이 계급적으로 각성하지 않는 것, 그리고 노동, 혁명, 변혁등을 주장하는 정치조직들마저 그 각성을 흐리고 계급협조에 참여하거나 방조하는 것이다.”1210

우리는 소수의 사회주의 선전그룹이지만, 현실감각이 없는 무책임한 몽상가가 아니다. 우리는노동자정부혁명정당 건설을 지금의 역관계 속에서 당장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여 제기하는 것이 아니다. 노동계급의 계급적 각성의 중요성과 앞으로의 목표를 분명히 확인하기 위한 것이다. 그 점 역시 분명하게 이야기해 왔다.

노동자는 공동체, 환경, 성평등, 인종평등, 평화 등의 가치와 가장 친화적인 유일한 계급이다. 노동자 정부를 통해서만 박근혜·최순실 정권이 더욱 악화시킨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물론 그럴 기반은 지금 당장 갖추어져 있지 않다. 무엇보다도 그 정치노선을 지니고, 대중적 지지를 받는, 혁명적 노동자당이 우리에게 없다.1119

이윤이 아니라, 인간의 필요에 의해 작동되는 사회를 통해서만 인민의 평화롭고 유복한 삶이 보장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계급적 이해에 온전히 복무하는, 노동계급과 인류의 역사적 실천을 과학적으로 이해하고 계승한 노동자정당이 필요하다. 물론 그 길은 쉽지 않은 길이며 멀고 험난하다. 그러나 유일한 길이다.1210

당면 과제와 장차의 목표 사이에 괴리가 없도록 하기 위해, 달리 말해 시행착오를 최소화하고 그때그때 우리의 행위가 원칙과 목표에 이반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전자와 후자는 일직선의 시야 속에 함께 들어와야 한다. 마치 농구선수가 공과 골대를 일직선 위에 놓고 슛을 하듯이. 둘 중 하나에 치우쳐 근시나 원시가 되면, 양 극단의 기회주의에 빠지게 된다.

우리는 박근혜 퇴진과 더불어 성과연봉제 폐지, 사유화 중단, 사드 철회, 국가보안법 철폐, 국정원해체, 세월호 진상규명, 핵발전소 저지 등의 당면 과제를 놓치지 않았다. 동시에, 그것들이 노동계급적 이해와 전략에 복무해야 한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지금 시기에는 노동자정부, 혁명정당같은 요구를 결코 내걸지 않아야 하고, 다만 민주적 권리 요구로 우리의 투쟁을 제한하여야 한다고 선생은 믿는다. 이런 패배적이고 대중추수적 결론에 권위를 부여해 보려고 위대한 맑스주의 공동 창시자 엥겔스를 오종종한 민주주의자로 소환하여 인용하지만, 현재의 당면과제와 궁극적 목표의 일치라는 문제는 사실 너무도 기초적인 삶의 지혜이다. 독자들은 다음의 일화만으로도 이 문제를 충분히 이해하리라고 믿는다.

어린이는 눈 덮인 운동장을 꼿꼿하게 일직선으로 걸어가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 걸어가다가는 발을 멈추고 서서 자신이 걸어온 발자취가 어느 정도로 똑바른가를 검토해 보는 것임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이 어린이가 걸어간 발자국은 부분적으로는 곧았으나 전체적으로 보면 여러 곳에서 바른편으로 또는 왼편으로 굽어 있었다.저 어린이의 세심한 주의에도 불구하고, 발자국이 곳곳에서 구부러진 데에는 분명한 까닭이 있는 것이다. 저 어린이가 만일 운동장 저편에 서 있는 큰 포플러나무나 또는 전신주를 일정한 목표로 삼고 그것만을 향하여 한결같이 걸어갔더라면 저 어린이의 발자국의 줄은 매우 곧게 되었을 것이다.  어린이는 앞을 향하여 곧게 나가려고 치밀하게 주의를 했었지마는 먼 앞에 움직이지 않는 일정한 큰 목표를 세우는 슬기가 아직 그에게는 없었던 것이다.”―「초설에 붙여서, 류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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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현재의, 노동자계급의 정치적조직적 역량으로는 분명 언감생심 바랄 수 없는 목표들(선생)”노동자정부’ ‘혁명정당등은 결코 제기해서는 안 되고, 우리의 당면의 과제요구는 오직 국가보안법을 위시한 반민주파쇼악법들과 그 제도기구관행인물들을 폐지척결하여 말 그대로의 민주주의, 특히 사상학문언론결사통신의 비밀의 자유를 획득, “헌법 제37조의 개폐(改廢)를 요구하고 강요하는 것이어야 하는가?

물론 국가보안법 철폐로 대표되는 민주적 권리 획득 투쟁은 중요하다. 우리는 지난 십 수 년 동안 국가보안법 철폐를 쉼 없이 주장하였고, 1995년 남한국제사회주의자(현 노동자연대) 사건, 2006년 일심회 사건, 2013년 내란음모 조작사건과 통합진보당 해산 사건 등에서 그 피해자 편에 서서 국가폭력에 맞서 싸웠다. 201716<노동자의 책> 이진영 대표 구속 이후엔 국가보안법 철폐와 이진영대표 석방 투쟁에 상당한 역량을 투여하고 있다.

그러나 그 민주적 권리 획득투쟁 역시 전략적 목표 아래에 배치해야 한다. 이 자본주의 체제 자체가 민주적 권리를 제약하는 근본원인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 요구를 노동자정부혁명정당이라는 요구와 맞세우고, 전자가 성취된 뒤에나 비로소 제기할 수 있는 과제로 후자를 유보하는 것은 맑스주의가 아니며, 모든 악의 원흉인 자본주의 지배자들을 은폐하는 계급 이반이다. 게다가 부르주아 정치꾼들, 부르주아 정당들의 저러한 약속을, 민주주의를 철저화하겠다는 저러한 약속들을 가능한 한 많이 받아내야 하고, 그 약속들을 이행하도록 요구하고 강제하자는 선생의 주장은 결국 또 민주주의 파괴자인 자본가계급 정치인들을 민주주의 구원자로 만드는 것이다. 버릇처럼 반복되는 계급협조주의이다.

지배계급 입장에서는 참으로 고맙고 편리한 노선이다. “사상학문언론집회결사통신의 비밀의 자유 등을침해하면, 자신들의 명운을 위협하는 노동자정부요구나 혁명정당 건설작업을 미루고, ‘그럴 듯해 보이는자본가 정치인 꽁무니나 좇게 만들 수 있으니.

선생은 이런 노골적인 “2단계 혁명론비판에 대해 독점자본의 악질적 반공모략을 좌익적 언사로 포장하여 떠들어대는 데에는 유달리 유능한 혁명가들의 비난이라고 말한다.

어떤 근거로 그 비판이 독점자본의 악질적 반공모략이라는 것인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다. 하지만 그런 태도가 모든 비판을 종북’ ‘좌빨로 모는 어떤 지배집단의 행태와 상당히 닮았다는 것은 확실히 느껴진다. 더욱 분명한 것은, 이렇게까지 끓어오른 에너지가 문제의 근원으로 향하는 것을 한사코 가로막는 것을 보면서 그 독점자본이 상당히 기특해 할 것이라는 점이다. 이런 방식으로 쓰딸린주의적 2단계 혁명론이 해롭고 위험한 노선이라는 것을 본인 스스로 또 다시 증명하고 있다.

 

* * * * *

 

넷째, “언론의 자유, 결사 및 집회의 자유가 없이는, 어떠한 노동자운동도 불가능하다(프로이센의 군사 문제와 독일의 노동자당, 엥겔스, 1865).”의 인용은 적절한가? 1865년 엥겔스의 정신과 2017년 선생의 정신은 같은 것인가?

선생은 자신의 패배주의적 주장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엥겔스를 인용한다. 맑스주의의 위대한 창시자 엥겔스는 그렇게 불려 나와 스딸린주의 2단계 혁명론의 증인이 된다. 선생의 주장은 이렇다: ‘언론의 자유, 결사 및 집회의 자유가 없이는, 어떠한 노동자운동도 불가능하니, 지금 노동자정부나 혁명정당을 제기하는 것은 현실감각을 상실한 자들의 주장이다. 지금은 민주적 권리 획득에 전념해야 한다. 그 민주적 권리가 확보된 뒤에 노동자운동 즉, 노동자정부나 혁명정당 운동을 전개하자.’

엥겔스의 저 명제를 언론의 자유, 결사 및 집회의 자유 등 민주주의 투쟁은 노동계급에게도 중요하다.’라는 뜻으로 읽는 것은 틀리지 않다. 하지만, 선생의 해석처럼, ‘혁명정당 건설과 노동자정부 등 계급적 요구는 언론의 자유, 결사 및 집회의 자유의 확보 뒤에나 가능하다.’라는 뜻으로 읽는 것은 터무니없는 것이다. 선생의 해석은, 1865년 프로이센과 2017년 한국이라는, 사회구성체의 성격마저도 이질적인 전혀 다른 두 상황을 동일시하는 것이다.

엥겔스의 위 문장은 1865프로이센의 군사 문제와 독일의 노동자 당에서 인용한 것이다. 그 때는 프로이센 왕정시대였다. 사회의 주요계급은 자본가계급과 노동계급이 아니라, 봉건 반동과 자본가계급이었다. 봉건왕정이 지배하고 있었고, 부르주아적 권리인 언론의 자유, 결사 및 집회의 자유, 보통 선거권등이 제도화되지 않았던 시기였다. 이런 조건에서 부르주아는 새 시대를 열 진보적 계급이었다.

그리고 봉건체제의 분쇄는 노동계급이 자신의 계급적 주장을 분명히 하기 위한 시대적 과제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그 시기에 부르주아의 이해와 노동자의 이해는, 봉건 반동이라는 공적(公敵)과 아직 실현되지 않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보통 선거권, 공화제,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두고 서로 겹치는 부분이 있었다.

엥겔스는 그 점을 이렇게 설명한다.

반동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승리는 언제나 한편으로는 동시에 노동자들의 승리이기도 한 바, 그것은 자본가 지배의 종국적 붕괴에 기여하고 노동자들이 부르주아지에게 승리할 시기를 더욱 앞당긴다.”

그리고 이어서 엥겔스는 보통 선거권과 언론, 결사, 집회의 자유 등부르주아적 권리 투쟁 즉 민주적 권리투쟁을 둘러싼 부르주아와 노동계급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한다.

부르주아지가 자신의 정치적 지배권을 쟁취하고 그것을 헌법과 법률에 표현한다는 것은, 동시에 프롤레타리아트에게도 무기를 쥐어주는 것일 수밖에 없다. 부르주아지는, 태어날 때부터 과거의 신분들에 대립하여 인권을,보통 직접 선거권, 언론의 자유, 결사의 자유, 집회의 자유, 소수 주민 계급에 대한 일체의 예외법의 폐지 등을 요구해야 한다. 그러나 또한 이것이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지에게 요구할 필요가 있는 모든 것이기도 하다.그러나 만약 부르주아지가 자기 자신에 충실하지 않게 된다면, 자신의 계급적 이해와 그로부터 나오는 원칙을 배신한다면?하나의 길은, 부르주아지가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행동하도록 몰아붙이는 것, 즉 가능한 한 그들을 강제하여프롤레타리아트에게 제공하도록 하는 것이다.”

부르주아에게 요구하고 부르주아를 강제한다. ? 그 요구들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부르주아적요구이고 그 요구를 실현하는 것은 그들 부르주아의 계급적 필연이기 때문에. 1865년 프로이센에서 이러한 태도는 과학적이고 노동계급적이었다.

그런데 선생은 자본주의가 세계화된 지 100년도 더 넘어 썩어문드러져 있는 2017년 한국에서, 봉건왕정이 아직도 건재하던 시절의 태도를 반복하라고 가르친다.

부르주아 정치꾼들, 부르주아 정당들의 저러한 약속을, 민주주의를 철저화하겠다는 저러한 약속들을 가능한 한 많이 받아내야 하고, 그 약속들을 이행하도록 요구하고 강제해야 한다.저 헌법 제37조의 개폐(改廢)요구하고 강요해야 한다. 자신들이 헌법전에 써놓은 자유와 권리의 실질을 보장하도록 요구하고 강제해야 한다. 국가보안법을 위시한 일체의 반민주적파쇼적 법률의 개폐와 그 제도관행기구인물들의 폐지척결을 요구하고 강제해야 한다.저들은 자신들이 헌법전에 써놓은 사상학문언론집회결사통신의 비밀의 자유 등등을 문자 그대로, 철저하게 보장하라는 요구를 거부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그들 자유와 권리는 다름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요구일 뿐 아니라 본래 ()부르주아의 자유이고 권리이자 요구이기도 하기 때문일 뿐더러,이러한 조건들, 이러한 기간을 이용하여 노동자계급은 저들에게 민주주의를 보장하도록 요구하고 강요해야 하며, 선진노동자들은 반드시 민주주의를 획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식을 노동자들에게 기필코 각인시켜 내야 한다.”

헌법을 준수해달라고 부르주아들에게 얼마나 조아리는지 보기 민망할 정도이다. 150여 년 전의 엥겔스는, 봉건왕정 치하의, 부르주아가 새로운 시대의 아들(엥겔스)”이었을 때, ‘보통 선거권, 공화제, 민주적 제 권리는 아직 독일 사회에 등장하지 않았을 때조차도, 노동계급에게 자신의 계급적 요구를 숨기지 말 것을, “부르주아 뜻에 상관없이계급적 독립을 지키고 그것을 강화하며 부르주아지 앞에 당당할 것을 가르쳤다.

부르주아지가 저버린 선동을 부르주아 뜻에 상관없이 추진해 나가는 길밖에 없다.이러한 모든 경우들에 있어 노동자 당이 부르주아지의 단순한 꼬리로서가 아니라 그들과는 완전히 구별되는 독자적인 당파로서 행동하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노동자 당은, 노동자들의 계급 이해는 자본가들의 그것과 정면으로 대립한다는 것과 노동자들이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있다는 것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부르주아지에게 상기시킬 것이다. 노동자 당은 부르주아지의 당 조직에 맞서 자신의 조직을 확고히 유지하는 한편 계속 단련시킬 것이며, 하나의 권력이 다른 권력과 교섭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방식으로만 부르주아지의 당 조직과 교섭할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노동자 당은 당당한 지위를 확보하고 개별 노동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계급 이해에 눈뜨게 할 것이며, 혁명의 폭풍그리고 이 폭풍은 상업 공황이나 춘분추분 시 폭풍우와 마찬가지로 규칙적인 회귀를 하게끔 되어 있다이 불어올 때에는 행동 태세를 완비해 놓은 상태에 있게 될 것이다.”

엥겔스의 이런 계급적 각성과 기개(심지어 봉건시대에!)는 배우지 않고, 부르주아 정치인에게 그렇게 거듭 조아리던 선생이지만, 노동계급에게는 이렇게 매몰차게 세뇌한다:“반드시 민주주의를 획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식을 노동자들에게 기필코 각인시켜 내야 한다. 강조하거니와, “언론의 자유, 결사 및 집회의 자유가 없이는, 어떠한 노동자운동도 불가능하다.””

민주주의가 주어지지 않으면 한발자국도 전진하지 말라는 듯이! 이 부르주아 체제 속에 가만히 있으라!’.

민주주의는 아직 획득되지 않은 미래의 과제인가? 천만에! 1865년에 엥겔스가 말한 그 민주주의 즉, ‘부르주아 정치체제와 권리들은 이미 백년도 더 전에 획득되었다. 부르주아들은 이미 백 년도 더 전에 세계 모든 곳에서 자신들의 보통 선거권, 공화제,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쟁취하고 확립했다.

국가보안법이 있으니 한국은 아직 아니지 않느냐고? 천만에! “헌법전에 써 놓은것처럼 이 체제는 이미 민주공화국이다. 빛 좋은 개살구일지라도, 부르주아의!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는 자신들이 비위를 거스르지 않고, 참아줄 만한 수준만큼(엥겔스)” 보장되었다. 특히 부르주아에게! 지난 20주 동안 우리는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수십 년 이래 최고치로 누렸다. 그리고 마지못해서였지만, 이 체제는 그것을 합법이라고 인정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완전한 민주주의의 실현을 기대하고, 만족스러운 수준의 민주주의에 이르지 못하면 어떠한 노동자운동도 불가능하니 당장은 민주주의 투쟁에() 집중하라는 생각은 맑스주의가 아니다. 부르주아에 굴종하는 민주주의 물신론자의 생각일 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어느 나라건 예외 없이, 지배계급인 자본가계급의 통치 질서를 의미한다. 피억압인민에게는 어느 나라건 예외 없이 비위를 거스르지 않고, 참아줄 만한 수준만큼만 보장된다. 민주주의의 원조라 여겨지는 미국이, 자국에서조차 얼마나 심각하게 인민의 민주주의를 억압하고 침해하는지를 보라. 테러방지법이 대표적이다. 서유럽이나 북유럽 역시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마찬가지이다.

부르주아 지배가 확고할 때 그들은 여러 자유조치들을 내놓으며 민주주의를 확대한다. 왜냐 하면 갈등 조정 비용이 가장 싸게 드는 효율적 국가운영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기에 처할 경우 주저없이 거두어들인다. 파시즘은 그 극단의 형태이다. 그러면, 그럴 때마다 노동계급은 사회주의를 향한 계급의 근본적 이해 추구를 유보하고, 다시 민주주의자로 돌아가서 민주주의 회복(결국 자본주의의 회복)’을 위해 부르주아와 더불어 싸워야 한다는 것이 선생의 주장이다.

네 번째 논의를 매듭 짓자. “언론의 자유, 결사 및 집회의 자유가 없이는, 어떠한 노동자운동도 불가능하다.”라는 명제는 1865년 프로이센 봉건왕정시대의 노동계급에게 제기된 것이다. 그런데 150년도 더 지난 지금, 썩어문드러진 자본주의시대인 지금도 그 명제를 여전히 교조적으로 떠받들며, 전자가 충족되지 않으면 후자, 특히 노동자정부’ ‘혁명정당 건설등을 입에 올리지 말라는 것은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노동계급에 대한 배신행위이다.

 

* * * * *

 

지금까지의 논의를 요약하자.

첫째, ‘촛불혁명시민혁명을 지배계급의 일부가 촉발한 것은 맞지만, 그들이 의도적으로 기획 연출한 것은 아니다. 지배계급의 모순적 행위 역시 계급 사회 동학(動學)의 일부이다.

둘째, 박근혜 퇴진 투쟁의 요체는 계급적 각성이다. ‘노동자정부는 그 지향점이고, 그를 위해 노동자 혁명정당 건설은 지체할 수 없는 과제이다.

셋째, ‘당면 과제와 요구민주적 권리 획득으로() 한정하는 것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오해와 환상에 기초한 것이고, 결국 계급협조주의로 이끄는 해롭고 위험한 노선이다.

넷째, 채선생의 엥겔스 인용은 사회구성체마저도 이질적인 전혀 다른 두 상황을 동일시한 무모한 인용이고, 결국 지금은 민주주의, 사회주의는 나중이라는 계급 배신적 단계론을 합리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혁명적 사회주의 정치 조류 내 채선생 지지자층을 포함하여, 노동계급의 역사적 대의를 먼저 깨달은 선진활동가들이 이 문제들을 진지하게 연구해 주길 기대한다.

 

2017314

볼셰비키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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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혁명가 2017.05.01 18:59
    한국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어느정도 이뤄지고 있지 않냐고? 국제볼셰비키는 18대대선선거무효소송인단 카페(http://cafe.daum.net/electioncase)에 있는 자료들부터 읽고와라, 한국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조차도 지배계급들이 무너트리게 한지 오래다
  • ?
    볼셰비키 2017.05.04 12:30
    혁명가님//

    님은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몰역사적으로 보거나 대단히  이상적인 무엇인가로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요? 민주주의는 초역사적이거나,  생산관계 등 그 사회 하부구조와 무관하게 실현되는 초사회적인 것이 아닙니다.
    민주주의는 토지의 사적소유를 중심으로 사회구성원 사이의 관계가 규정되고 세습으로 권력이 유지되는 왕정 이후, 부르주아적 소유제에 기초해 선출에 의해 권력이 이양되는 정치형태입니다. 
    따라서 역사적/사회적으로, 선출제를 핵심으로 하는 '민주주의'는 곧 부르주아독재 형태의 하나일 뿐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왕정이 아니고 선출제와 그를 위한 기본적 권리인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가 있습니다. 노동계급은 잘 누리지 못하지만 부르주아지는 상당히 누리고 있죠.
    물론 이 사회에서 우리는 노동계급의 민주적 권리를 방어하고 그 확장을 위해 싸워야 합니다. 하지만, 노동계급에게도 충분하고도 풍성히 주어지는 민주주의는 자본주의 즉, 부르주아 독재사회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민주주의는 역사적이고 계급적이며 생산수단의 소유형태에 긴밀히 의존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를 확대하기 위해서는 생산수단 소유관계의 변화가 필수적입니다. 그런데 '노동자 정부를 제기하거나 자본주의 타도를 제기하는 것은 성급하고 지금은 민주주의 투쟁에 매진하고 그 이후 반자본주의 투쟁' 운운은 운동을 늘상 자본주의 틀 내에 묶어두는 결과를 낳는 겁니다.
    민주주의 확대를 위해서도 생산수단 사적소유를 철폐하고 이윤이 아니라 인간의 필요에 따라 운용되는 경제를 건설할 노동자정부가 필수적입니다.

    관련하여 <국가와 혁명> 연구를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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