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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루쇼프의 비밀연설과 스탈린주의



*이 글은 지난 8월 29일 ‘국제건달에 대한 4인터의 답변’의 연속이기도 하다.


1. 이데올로기의 재건을 위하여

2. 비밀연설, 흐루쇼프, 스탈린주의

3. 마리오 소사의 ‘쏘련 역사에 대한 거짓말’

4. 흐루쇼프의 비밀연설 A : 대숙청

5. 흐루쇼프의 비밀연설 B : 2차 세계대전과 스탈린

 

 

1. 이데올로기의 재건을 위하여

역사상 최대의 패배

1989~91년 동유럽과 소련의 몰락과 자본주의화는 마르크스주의 역사상 노동계급 최대의 패배였다. 노동계급의 사기를 심각하게 꺾어놓았다.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사회주의 국가들’은, 스탈린주의 관료화로 인해 심각하게 기형적 모습을 띠고 있었지만, 10월 혁명의 성과였고, 승리의 영감을 주는 상징물이었다. 이 ‘사회주의 국가들(퇴보한/기형적인 노동자국가)’에 물질적 의식적으로 의존해 있던 노동계급은 그 붕괴로 인해 물질적 의식적 탈진 상태에 빠졌다.

이데올로기적 탈진이 특히 심각했다. 부르주아 선전가들은 사회주의의 영원한 패배를 선언했고, 자본주의 이외에 대안이 없다는 사상을 대중화시켰다. 붕괴 이후, 노동계급 상층 대다수는 사민주의라는 매개물을 통해 부르주아 진영으로 넘어갔다. 그렇지 않고 노동계급 진영에 남아있는 상당수는 혁명적 전망을 상실하고, ‘지금 이곳에서 일어나는’, 소위 현장의 계급투쟁만이 소중하다는 사상으로 퇴행했다.

사상적 퇴행은 운동전반에 학습 경시 풍조를 불러왔다. 마르크스와 레닌 트로츠키의 고전들은 절판되었다. 인류의 역사적 실천은 무시되었고, 실천은 ‘자기 자신의, 지금의’ 행위를 의미하는 것으로만 천박하게 이해되었다. 각종 수정주의 사조들이 활개를 쳤다. 자기가 겪어본 것만 진리라는 경험주의와 현상적 모습에 굴종하는 인상주의가 만연했다.

당 역시 천박하게 이해되었다. 노동계급의 당은, 자본가계급과 전혀 다른 이해관계를 지닌 노동계급이, 자본가계급과는 전혀 다른 사회설계를 제시하며, 그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전략전술을 제시하고 이끄는 계급의 전위이다. 그러나 이 당은 별로 필요하지 않은 것이거나, 노동운동에 헌신적 인자들이 모여서 각급의 현장에서 벌어지는 이러저러한 자생적 투쟁들을 촉진하고 돕는 조직으로 인식되었다. 그리하여 어떠한 혁명전통 위에 자신을 위치시키든지 간에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이 당의 활동으로, 각급의 소위 계급투쟁이 (그 투쟁이 어디로 향하든지 간에) ‘활성화되면’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는 막연한 인식이 대세가 되었다.

반격의 개시

그러나 소련 동유럽 등의 자본주의적 붕괴로 인한 호황과 자본주의 이념의 우위는 영원히 지속될 수 없었다. ‘자본주의 영구불멸’이라는 부르주아지들의 의기양양한 자기도취는 불과 20년을 넘기지 못하고 자가당착에 부딪혔다. 2008년에 몰아닥친 경제 공황은 지난 20년간의 환상을 일거에 씻어냈다. 노동계급은 미래에 대한 근본적 물음을 다시 던지기 시작했다. 미 제국주의를 중심으로 하는 세계 자본가 계급은 한 동안 잊고 지냈던 공산주의 유령의 공포에 다시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친제국주의 식민정권의 우두머리였던 벤 알리와 호시니 무바라크를 대중적 투쟁으로 끌어내린 사건은, 반격의 개시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리고 그 반격의 불길은 그리스를 중심으로 유럽 전역에 옮겨 붙었고, 제국주의 초과이윤의 향연 속에서 한 동안 깨어날 줄 모르던 미국 노동계급도 급속히 각성하고 있다.

리비아 사태에 대한 좌익들의 기회주의적 혼란이 보여주는 것처럼 그 반격이 제대로 수행되기 위해선 가장 우선적으로 이데올로기적 혼란을 극복해야 한다. 이미 붕괴한 소련과 동유럽 그리고 아직 남아있는 북한, 중국, 쿠바, 베트남 등 퇴보한/기형적 노동자국가들에 대한 과학적 인식이 이데올로기적 혼란에서 벗어나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국가자본주의론과 스탈린주의

소련 등 소위 ‘현실 사회주의 국가’를 이해하는 데 있어 혼란을 부추기는 대표적인 이론틀은 국가자본주의론과 스탈린주의이다. 소련 붕괴 이후 노동계급 일부는 ‘소련이나 동유럽 등, 붕괴한 것은 특정한 자본주의일 뿐 노동자국가적 요소는 전혀 없는 사회였다.’는 자기 최면으로 탈진을 달래려 했다. 다른 일부는 붕괴의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인 노동자국가 지도부의 관료화문제와 그 물적 토대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을 외면한 채, ‘사적소유가 철폐되었다면, 생산력 수준이나 노동자 민주주의에 관계없이, 사회주의이다.’라는 반(反)마르크스적 정식을 고집했다. 이들은 ‘그런데, 왜?’라는 물음에 답하지 못한다. 소련의 붕괴 원인과 중국, 북한 등 남아있는 노동자국가의 성격과 진로에 대해 이들은 거의 분석해내지 못한다.

사물에 대한 왜곡된 이해를 방어하는 유력한 방법 중 하나는 극단적인 시점을 고집하는 것이다. 실제 사물은 여러 측면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들은 자신이 보고싶은 측면만을 완강하게 고집하는 방식으로 사물의 진상을 왜곡한다. 예를 들어 퇴보한 노동자국가 소련과 북한, 중국, 베트남 쿠바 등 기형적 노동자국가들의 사회성격을 논할 때 스탈린주의자와 국가자본주의론자는 각각 그 나라들의 한 측면만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는 수법을 쓴다. 즉, 스탈린주의자는 그 사회들에서 생산수단의 사적소유가 철폐되었다는 사실만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며 그 나라들의 생산력 수준 그리고 노동자민주주의 문제 등은 따지지도 않고 ‘사회주의’라고 규정한다. 반면 국가자본주의론자들은 그 나라들의 노동자민주주의가 관료집단에 의해 억압당하고 있다는 사실만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며, 생산수단의 소유형태는 부차적인 문제로 치부하고, 억압이 존재한다는 이유로 ‘자본주의’로 규정한다.

이런 식이라면, 두루마리 화장지는 어떻게 생겼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이들은 각각 ‘직사각형이다.’라거나 ‘단연코 동심원의 연속이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 대답들이 일면적 진실을 내포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총체적으로는 터무니없이 틀리다.

이렇기 때문에 사물을 총체적으로 살피려는 즉, 과학적 관점으로 그 사회들을 분석하려는 시도는 자신들의 극단화된 관점–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관료집단의 이해와 소부르주아적 이해에 기반한–인 스탈린주의와 국가자본주의론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된다. 그리하여 트로츠키(주의)는 스탈린주의와 국가자본주의론처럼 극단적 관점을 취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양쪽 모두의 비판 대상이 된다. 스탈린주의자들은 트로츠키(주의)가 마치 국가자본주의론처럼 소련 방어를 거부한 것처럼 왜곡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반동성을 방어하려 든다. 한편 국가자본주의론자들은 한편으로는 자신의 이론이 트로츠키(주의)에 기초해 있는 것처럼 호도하다가도, 자신들의 기회주의가 공격받을 때는 트로츠키(주의) 역시 스탈린주의와 다를 바 없는 것이라고 왜곡하며 자신의 반동성을 방어하려 든다.

2. 비밀연설, 흐루쇼프, 스탈린주의

흐루쇼프의 비밀연설(원제: ‘개인숭배와 그 결과들에 대하여’, 1956년 20차 당 대회 연설문)은 소련이라는 사회가 어떤 사회였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사료 가운데 하나이다. 이 연설문은 또한 반격을 위한 전제조건 즉, 이데올로기 재건을 위한 중요한 사료이다.

흐루쇼프는 1953년 철권통치를 펼쳐온 스탈린 죽음 이후의 스탈린주의관료집단을 대표하는 자였다. 그러므로 그의 연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속해 있는 스탈린주의관료집단이 지닌 일반성 그리고 스탈린 사후의 스탈린주의관료집단의 특수성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스탈린주의관료집단의 일반성과 특수성

스탈린주의관료집단은 두 가지 상반된 힘의 통일이다. 즉, 노동자국가를 방어하려는 경향과 그것을 해체하려는 경향. 관료집단은 생산수단이 국유화된 경제체제에서, 그 생산수단의 관리/통제권 독점을 통해 특권 집단이 되었다. 이 때문에 관료집단은 국유화된 생산수단을 방어하려 한다. 한편, 관료집단이 특권을 누리기는 하지만, 상속되지 않는 특권은 불안정하며 값어치가 떨어진다. 그러므로 특권은 상속되어야 한다. 상속되기 위해 생산수단은 사유화되어야 한다. 이 경향 때문에 관료집단은 국유화된 생산수단에 대한 충실한 방어자가 되지 못하며 자본주의 복귀 경향 또한 품고 있다. 러시아 공산당 서기였지만, 1989~91년 소련 자본주의 반혁명을 이끈 옐친은 바로 이 경향을 대표한 자이다.

관료는 혁명가가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특권을 제공하는 국유화된 생산수단 위에서 기생하며, 그 특권을 방어하는 한에서만 혁명의 이해와 일치할 뿐이다. 그리고 다만 그 특권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혁명가인 척할 뿐이다. 그런 점에서 그들의 시야는 대단히 근시안적이며 협소하다. 세계에 대한 근본적이고 과학적 분석에 기초하여 장기적 전망과 지침을 제시하지 못한다.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과학적 분석이 아니라, 그때그때 자신들에게 이익이 될 것으로 보이는 것을 즉흥적으로 선택할 뿐이다. 자신의 특권에 대한 방어 그리고 호전적인 제국주의 공포 속에서 스탈린주의관료집단은 지독한 근시가 되어 불안에 떨고 요동하면서 갈지자걸음을 반복한다. 그러다가 1989~91 같은 결정적인 순간, 사회에 축적된 모순이 더 이상 화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순간, 관료집단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두 경향으로 쪼개지며 해체된다.

흐루쇼프로 대표되는 스탈린 사후 관료집단은 스탈린주의관료집단의 일반성을 고스란히 자기 성격으로 가지고 있다. 하지만 스탈린 죽음 이후 형성된 정세를 대표한다는 점에서 이전의 관료집단과 구별되는 특수성도 지니고 있다. 스탈린 사후의 관료집단은 새롭게 조성된 두 가지 모순된 사회 압력 속에 존재했다. 즉, 흐루쇼프로 대표되는 관료집단은, 한편으로 스탈린집권 시기 심각하게 분열된 당과 사회를 통합하고 고조된 사회 불만을 잠재워야 한다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 그 움직임이 자신들이 포함된 관료집단의 특권을 위협하지는 않아야 한다는, 두 가지 상호 대립하는 압력 속에 존재했다. 달리 말해, 그들은 스탈린 시절 저질러진 관료집단의 해악에 대한 면죄부를 얻기 위해 스탈린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하지만, 자신들 역시 스탈린주의관료집단인 까닭에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는 선까지 그 자유를 밀고 나갈 수는 없다. 비유적으로 말해 흐루쇼프는 전두환을 법정에 세운 노태우였다. 전두환을 법정에 세우는 방식으로 과거 세탁을 하려 했던 노태우처럼, 새로운 만행을 위해 그들은 과거 만행의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했고, 자유로워지고 싶어했다.

1956년 러시아공산당 20차 당 대회에서 흐루쇼프가 행한 비공개 연설인 ‘개인숭배와 그 결과들에 대하여’는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스탈린이 저지른 황당하고 천인공노할 죄악상을 혹독하게 폭로하고 있지만, 너무나 당연하게도 혁명가로서 폭로한 것은 아니었다. 즉, 관료집단과 특권을 해체하고 노동자민주주의를 확립하며 국제혁명에 봉사하는 진정한 혁명전위의 복원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흐루쇼프는 ‘스탈린 이후의 관료집단’의 이해를 대표하는 자였고, 그 폭로는 자신과 자신이 속한 관료집단의 특권을 합리화하고 방어하기 위함이었다. 흐루쇼프는 스탈린 생전 관료집단의 일원이었을 뿐만 아니라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최고 권력자였다. 따라서 그는 스탈린이 행했던 죄악 거의 대부분에 대하여 상당한 책임이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연설은 스탈린관료집단과 스탈린 시절 소련 사회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중요한 사료의 하나이지만, 한계가 분명한 사료이다. 스탈린과 자신이 숙청한 정적인 베리야 등의 죄악을 폭로할 때는 사실을 대체로 온전히 전달하다가도, 자신과 자기가 대표하는 집단이 관련되면 자신들은 그 죄악들과 무관한 것처럼 위장한다는 점을 놓치면 안 된다.

스탈린주의 선전의 도그마들

이 연설이 의미 있는 점 가운데 하나는 그 동안의 스탈린주의 선전의 핵심 내용들을 스탈린관료집단의 핵심 인물이 스스로 통렬하게 논박한다는 점이다. 즉, 스탈린주의 이론가들은 다음과 같은 도그마를 신심으로 따르고 있다.

‘스탈린은 트로츠키라는 이단에 맞선 마르크스 레닌의 충실한 수호자이며 제자이다.’

‘숙청된 좌익반대파와 트로츠키주의자(스탈린관료집단에 의해 강제로 규정된 경우까지 포함하여)들은 쿠데타 모의 등 소련에 현실적 위해를 가했다.’

‘그러한 범죄행각은 ‘믿을만한(!) 증언들’에 의해 충분히 입증된 사실들이다.’

‘독일 파시즘이 소련을 공격할 때 스탈린은 소련 방어의 선두에 섰으며, 트로츠키는 소련 방어의 대의를 저버렸다.’

‘반(反)스탈린 선전은 제국주의 진영이 만들어낸 거짓말들이다.’ 등등

남한에서 스탈린주의 선전의 선두에 서 있는 단체는 노동사회과학연구소(노사과연)이다. 최근 노사과연이 ‘진실이 밝혀지다’라는 야심찬 제목으로 스웨덴 ‘공산주의자’ 마리오 소사의 ‘소련에 대한 거짓말’ 등의 출판과 그 출판의 의의를 역설하는 채만수 선생의 사자후는, 1956년의 연설문이 왜 2011년에도 여전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일깨워 주기에 손색이 없다. 그런 점에서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한 사회주의 투사들은 두 글을 비교하며 읽는 것도 좋을 것이다.

3. 마리오 소사의 ‘쏘련 역사에 대한 거짓말’

스탈린 집권 시기의 숙청에 대해 그 정당성을 전적으로 승인하는 마리오 소사는 그 숙청의 대상, 이유, 공정성 등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숙청 대상

-범죄자들이 어떤 죄로 유죄에 선고되었는지 전혀 보고되지 않았다. 자본주의의 정치적 프로파간다는 쏘련의 수용수를 항상 정치적 억압의 희생자로 여긴다. 이러한 의문은 절대로 연구되지 않는다.…쏘련의 형벌 체계에서 형에 선고된 자들 중 대다수가 도둑, 강도, 살인자, 강간범 등임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그들 모두를 희생자라고 부른다.

-우리는 1930년대 초반 유죄에 선고된 꿀라끄들과 1936년부터 38년 시기에 유죄에 선고된 암살자들 및 반혁명분자들을 이 자리에 기소한다.

-서방의 부르주아 매스미디어에서 그토록 동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지노비예프, 까메녜프, 뺘따꼬프, 라데끄, 스미르노프, 똠스끼(Tomsky), 부하린(Bukharin) 그리고 또 다른 자들은, 쏘비에뜨 인민과 당으로부터 부여된 직무를 이용하여, 해외에 있는 사회주의의 적들이 쏘련의 사회주의 사회를 흔들고, 쏘련 내에서 사보타지를 일으키고, 쏘련에 맞서 싸우는 데 사용하기 위한 자금을 국고로부터 훔친 자들이었던 것이다.

마리오 소사에 따르면 스탈린 집권 시기 숙청된(권력을 잃은 것뿐만 아니라, 목숨까지 잃어야 했던) 사람들은 “도둑, 강도, 살인자, 강간범, 꿀라끄, 암살자들 및 반혁명분자들”(“소련 내에서 사보타지를 일으키고, 소련에 맞서 싸우는 데 사용하기 위한 자금을 국고로부터 훔친 자들”)이다. 하지만 흐루쇼프는 같은 대상들에 대하여 전혀 다르게 평가한다. 뒤에서 설명할 것이다.

숙청의 구체적 계기와 혐의

-1934년 12월, 레닌그라드 당의장이자 중앙위원회의 가장 중요한 동지 중 한 사람인 끼로프(Kirov)가 암살되었고, 이로 인해 당의 지도와 국가의 통치권을 폭력적으로 탈취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던 비밀조직의 전모가 밝혀지기 시작했다. 1927년 투표를 통해 정치 투쟁에서 패배한 그들은, 이제 국가에 맞선 조직적 폭력을 통해 이 투쟁에서 승리하려고 하였다. 그들 조직은 전국 곳곳의 당과 군대 그리고 국가기구에 불순분자들을 심어놓았다. 그들의 활동은 산업 사보타지와 테러, 그리고 부정부패에 집중되었다. 그들의 위대한 교시자인 뜨로쯔끼는 해외에서 이 모든 일들을 조종했다.

-스딸린과 쏘련에 관한 다수의 책들을 집필한 뜨로쯔끼주의자인 아이작 도이처(Isaac Deutscher)에 따르면, 쿠데타는 끄레믈린에 대한, 그리고 모스끄바와 레닌그라드 같은 대도시들에 주둔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부대들에 대한 군사 행동으로 시작될 것이었다. 또 그에 따르면, 이 음모는 뚜하쳬프스끼와 함께, 군(軍) 정치 꼬미사르의 수장이었던 가마니끄(Gamarnik)와 레닌그라드의 사령관이었던 야끼르(Yakir) 장군, 모스끄바 군사학교의 사령관이었던 우보레비취(Ouborevitch) 장군 그리고 기병 부대의 수장 중 한 명이었던 쁘리마꼬프(Primakov) 장군 등이 이끌 것이었다.

1934년 12월에 발생했다고 하는 ‘키로프 암살사건’은 이후에 일어나는 피의 숙청의 빌미가 되었다. 그런데 이 사건은 의문투성이라는 것이 20차 전당대회 연설에서 흐루쇼프의 주장이다. 그에 따르면 이 사건은 마치 북베트남 침공을 위해 미제가 조작했던 통킹 만 사건이나, KAL기 폭파 사건이나, 천안함 침몰 사건과 유사한 성격의 사건이다.

마리오 소사는 트로츠키의 쿠데타 음모론을 제시한다. 진실을 추구하는 마리오 소사씨는 그 대단한 일이 몇 년도에 일어났는지,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지를 설명하지도, 구체적 증거를 제시하지도 않는다. 다만 ‘뜨로쯔끼주의자’ 아이작 도이처가 그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아이작 도이처의 어떤 책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이라고 썼다는지에 대해서는 역시 설명하지 않는다. 반면 흐루쇼프는 연설에서 스탈린이 고위급 군인사에 대한 무모한 숙청을 통해 2차 세계 대전과 전쟁 중 소련의 전력을 심각하게 저하시켰다고 폭로하고 있다.

1937년 공개 재판에서 부하린이 자백한 바에 따르면, 해외에 있는 뜨로쯔끼 반대파들은, 쏘련에서 반혁명 쿠데타가 성공한 후에 나찌독일에게 광대한 영토를, 특히 다른 무엇보다도 우끄라이나를 할양한다는 협정을 나찌독일과 맺었었다. 이것은 반혁명에 대한 지원 약속으로, 나찌독일이 요구한 대가였다. 부하린에 따르면, 그는 이 일에 관하여 뜨로쯔끼로부터 지시를 받은 라데끄에게서 이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이들 음모를 꾸민 자들 모두는 사회주의 사회에서 그 사회를 이끌고, 운영하고, 지키라고 고위직으로 선출된 자들이었지만, 그들은 이렇게 하는 대신에 그 사회를 무너뜨리기 위한 일에 종사했다.

어마어마한(!) 음모이다. 그런데 흐루쇼프는 이 어마어마한 음모의 존재에 대해 단 한 문장도 언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당의 사상적 반대자들이 이미 오래전에 정치적으로 괴멸되었을 때, 그들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습니다.”라고 증언한다. 그리고 이 어마어마한, 약간은 희극적인 음모들은 역시 ‘오로지’ “자백”과 “증언”에 의해 뒷받침된다. 흐루쇼프는 그런 얼토당토않은 음모에 대한 자백이 ‘어떤 공정’을 거쳐 만들어졌는지를 설명한다.

숙청의 증거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고, 러시아혁명의 성과를 심각하게 갉아먹고 존망을 위태롭게 만든 이 비극적 숙청 사건들의 공정성은 “‘모스끄바 재판’ 당시 모스끄바 주재 미국 대사나 스웨덴 대사, 당시 모스끄바를 방문했던 영국의 판사ㆍ의원 등등, 누가 보더라도 그리고 어떤 면에서도 명백히 스딸린이나 쏘련공산당, 쏘련정부 당국의 처사들을 옹호할 계급적 이해와 동기를 가질 수 없었던 서방측 인사들이 제공하고 있는 증언들 (채만수)”에 의해 명백하게 입증된다. 다음과 같은 식이다.

1939년에 이러한 당시 상황을 기술한 사람이 있는데, 미국인 엔지니어 존 리틀페이지(John Littlepage)이다.…“내가 러시아에 있을 때, 나는 이해하기 어려운 정치사상과 책략들에는 관심이 없었고, 가능하면 그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는 또한 그의 경험에 비추어보아, 정부를 전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광범위한 산업 사보타지를 이용한 해외에서 지도된 음모가 있었다는, 정부의 공식 발표는 확실한 것이라고 썼다. 1931년 우랄과 까자흐스딴에 있는 구리ㆍ납 광산에서 근무할 때, 그는 이미 이러한 사실들을 알 수밖에 없었다. 그 광산들은 거대한 구리-납 트러스트에 속해 있었고, 그곳의 최고 책임자는 중공업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인 뺘따꼬프였다. 광산의 상황들은 생산의 측면에서 보나, 노동자들의 복리 측면에서 보나 파국적이었다. 그 때 그는, 사보타지가 구리-납 트러스트의 최고위층으로부터 조직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또 외국 공장주들은 차액을 해외에 있는 뜨로쯔끼 조직에 주었다. 그리고 쏘련에 있는 공모자들에 의해, 쏘련 정부는 계속 같은 공장에서 상품을 구입했다.

마리오 소사에 따르면, “우랄과 까자흐스딴에 있는 구리ㆍ납 광산에서 근무”하던 “미국인 엔지니어 존 리틀페이지”는 “정부를 전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광범위한 산업 사보타지를 이용한 해외에서 지도된 음모가 있었다.”는 사실과 “사보타지가 구리-납 트러스트의 최고위층으로부터 조직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외국 공장주들은 차액을 해외에 있는 뜨로쯔끼 조직에 주었다.”는 사실 같은, 복잡하고 은밀하고 국제적인 사실 관계를, 개인이 그것도 러시아 사정에 어두운 외국인이, 더구나 정치가도 아닌 기술자가, 달랑 “그의 경험에” 비추어보는 통찰력만으로 알아냈다고 말한다. ‘그러하므로 스탈린의 숙청은 정당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왜? “명백히 스딸린이나 쏘련공산당, 쏘련정부 당국의 처사들을 옹호할 계급적 이해와 동기를 가질 수 없었던 서방측 인사들이 제공하고 있는 증언들”이기 때문(채만수)이다. 요즘의 어느 국회의원보다 윗길로 보이는 스웨덴과 남한 콤비의 코미디는 웃음 이전에 숨이 막히게 한다.

마리오 소사의 ‘명백한 증거대기’는 또 이어진다.

이제 마지막 질문이다. 1937-38년 재판은 기소된 자들에게 공정했는가?

부하린 재판을 예로 들어보자. 그는 비밀 반대파에서 활동한 최고위 당관료였다. 당시 모스끄바 주재 미국 대사는 조셉 데이비즈(Joseph Davies)였는데, 그는 평생을 재판으로 법정에서 보낸 유명한 변호사였다. 그에 따르면, 부하린은 재판이 진행되는 전 과정 동안 자유롭게 이야기했으며, 아무런 제재 없이 스스로 자신의 입장을 주장했었다.

조셉 데이비즈는 워싱턴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재판에서 밝혀진 사실들은 기소된 자가 “입증된 범죄들로” 유죄라는 것을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나아가: “매우 심각한 음모가 일어났다는 것을, 확실한 증거들이 입증하고 있다. 이것은 재판을 참관한 외교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구구히 말하지 말자. “확실한 증거들”이 있다면 그것을 ‘직접’ 제시하면 되는 것이다. 왜 마리오 소사는 그 “확실한 증거”는 보여주지 않고, 구구하게시리 “확실한 증거들이 입증하고 있다.”고 하는 “재판을 참관한 외교관들의 공통된 의견”이 있었다는 ‘증언’으로 입증하려 하는가. 역사 속에는 권력을 쥔 지배집단이, 증언으로만 입증되는 마녀 사냥을 통해 얼마나 손쉽게 반대자들을 제압했는지를 보여주는 수많은 사례들이 있다.


4. 흐루쇼프의 비밀연설 A: 대숙청

모두들 개인숭배가 실제로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당의 집단적 지도 원칙을 파괴함으로써 그리고 엄청난 무제한의 권력을 한 사람의 수중에 집중시킴으로써 어떤 막대한 손해를 초래했는지 아직 잘 모르고 있습니다. 따라서 당 중앙위원회는 소련 공산당 제20차 전당대회에서 이 문제들에 관한 자료들을 제시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합니다.

***

레닌은 대중의 지도자와 조직가의 역할에 큰 의미를 부여하면서도, 동시에 모든 개인숭배 현상을 가차 없이 꾸짖었고, 마르크스주의에 부합하지 않는 ‘영웅’과 ‘군중’이라는 사회혁명당적 시각에 맞서, 다시 말해 ‘영웅’을 대중, 즉 민중에 대비시키려는 시도에 맞서 비타협적인 투쟁을 수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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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이 살아있을 때 당 중앙위원회는 당과 국가에 대한 집단적 지도의 진정한 구현체였습니다. 레닌은 전투적인 마르크스주의자-혁명가였고 원칙 문제에서는 항상 비타협적이었지만, 동지들에게 자신의 견해를 힘으로 강요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설득했고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견해를 참을성 있게 설명했습니다. 레닌은 항상 당 생활의 규범이 실현되는지, 당의 규약이 지켜지는지, 전당대회와 중앙위원회 전체회의가 제때 소집되는지를 엄격하게 감독했습니다.

스탈린주의자들은 스탈린이 자신의 집권을 합리화하기 썼던 이미지화 트릭 즉, ‘레닌의 수제자 스탈린’이라는 등식을 믿는다. 스탈린이 레닌주의의 가장 충실한 체현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흐루쇼프는 ‘스탈린=레닌’이라는 신화를 부정하는 것으로 자신의 연설을 시작한다. 혁명적 관점에서 레닌과 스탈린의 차이는 수도 없겠지만 여기서 흐루쇼프는 개인숭배문제를 다룬다. 스탈린이 어떻게 당을 개인숭배집단으로 무력화시켰는지를 레닌과 스탈린을 대조하는 방식으로 폭로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 스탈린은 레닌주의의 파괴자였다. 물론 흐루쇼프가 ‘스탈린=레닌’의 등식을 파괴하는 이유는 ‘흐루쇼프(스탈린 사후의 스탈린주의관료집단)=레닌’이라는 새 등식을 제시하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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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과 소비에트 국가의 장래를 걱정하던 레닌은 스탈린의 성격을 매우 정확하게 평가하여, 스탈린이 지나치게 거칠고 동료들을 충분히 배려하지 않으며 변덕스럽고 권력을 남용하기 때문에 스탈린을 서기장직에서 해임하는 문제를 검토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블라디미르 일리치는 [유언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탈린은 너무도 무례합니다. 그리고 이 결점은 우리들 공산주의자들 속에서 사업을 할 때나 우리들 사이에서는 용인될 수 있을지라도, 서기장직을 맡는 데에서는 용납될 수 없습니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저는 동지들이 스탈린을 그 직위에서 해임하는 방법을 생각해 볼 것을 제안하는 바입니다. 다른 모든 측면에서 스탈린 동지와는 다른 사람을, 말하자면 보다 참을성 있고, 보다 성심 있으며, 보다 공손하고, 동지들에 대해 보다 세심하게 배려하며, 덜 변덕스러운 등등의 그런 사람을 그 대신 지명하도록 요청합니다. 이러한 구체적 제안이 하찮고 자질구레한 것으로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분열에 대한 안전장치를 마련한다는 견지에서 본다면, 또 제가 위에서 언급한, 스탈린과 트로츠키 사이의 관계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를 결코 자질구레한 이야기가 아닐뿐더러, 자질구레하다 하더라도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질 수 있는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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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루프스카야의 편지

레프 보리싀치

의사 허락 하에 블라디미르 일리치가 구술하고 제가 받아 적은 짧은 편지와 관련하여 스탈린은 어제 저에게 너무나도 무례한 언동을 했습니다. <중략>

제발 저를 난폭한 사생활 침해, 비열한 욕설과 협박으로부터 보호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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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 동지에게

제1급 비밀

친서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 동지에게도 복사본 전달됨.

친애하는 스탈린 동지,

동지가 제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심한 욕설을 퍼부었다니 정말 동지의 태도는 거칠기 짝이 없습니다. 비록 그녀가 그 일을 잊어버리기로 마음먹었다고 동지에게 말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은 이미 그녀의 입을 통해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에게도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저에게 퍼부어진 그와 같은 모욕을 결코 그렇게 쉽사리 잊어버릴 의향이 없습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저는 제 아내에게 퍼부어졌던 모욕은 제게 퍼부어진 것이나 다름없다고 여깁니다. 그러므로 저는 당신에게 당신이 했던 말을 취소하고 사과를 하든가 아니면 우리 사이의 관계를 파기하기를 택하든가 둘 중 하나를 심사숙고할 것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레닌 

1923년 3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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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의 사건들이 보여주듯이 레닌의 우려는 공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스탈린은 레닌이 죽자 처음에는 그의 교시들을 중시했지만, 나중에는 블라디미르 일리치의 심각한 경고를 무시하기 시작했습니다.

흐루쇼프가 말하는 ‘처음’과 ‘나중’은 단순히 시간 개념이 아니다. ‘처음’이란 ‘자신이 스탈린과 함께 할 때 즉, 반(反)트로츠키 캠페인을 통해 관료집단의 승리를 공고히 할 때’를 말하는 것이고, ‘나중’이란 ‘자신들의 권력에 부담스러운 스탈린과 결별해야 할 때’를 말하는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된 더 깊은 내용은레닌의 반스탈린 투쟁을 참고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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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설득과 해명, 다른 사람들과의 세심한 작업 등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방침을 강요하고 자신의 견해에 무조건 복종할 것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행동했습니다. 이에 저항하거나 자신의 관점을, 자신이 옳음을 주장하려는 사람은 지도 집단에서 배제되고 도덕적 그리고 육체적 파멸이 뒤따르는 운명에 처해졌습니다. 이는 제17차 전당대회 이후에 특히 두드러졌는데, 그 시기에 사회주의의 대의에 헌신한 양심적이고 뛰어난 많은 당 활동가와 일반 당일꾼들이 스탈린의 독재에 희생되었습니다.

우리 당은 트로츠키주의자, 우파, 부르주아 민족주의자에 반대하는 대대적인 투쟁을 수행했으며 사상적으로 레닌주의의 모든 적을 타도했다는 점을 언급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사상투쟁은 성공적으로 수행되었고 그 과정에서 당은 더욱 강화되었고 단련되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스탈린은 긍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이 두 단락 중 두 번째는 바로 위의 단락하고도 모순되는 이율배반적 진술이다. 그는 스탈린을 레닌주의의 파괴자로 말하다가 ‘자기가 포함된’ 투쟁에서 스탈린은 레닌주의 수호자가 된다. 그리고 “저항하거나 자신의 관점을, 자신이 옳음을 주장하려는 사람은 지도 집단에서 배제되고 도덕적 그리고 육체적 파멸이 뒤따르는 운명에 처”하고 “사회주의의 대의에 헌신한 양심적이고 뛰어난 많은 당 활동가와 일반 당일꾼들이 스탈린의 독재에 희생”하는 방식으로 진행된 “사상투쟁은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태도는 뒤에 이어지는 진술들과도 모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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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몇 년 후 우리나라에 이미 사회주의가 전반적으로 확립되었을 때, 착취 계급이 전반적으로 청산되었을 때, 소비에트 사회의 사회적 구조가 근본적으로 변화하여 적대적인 정당과 그룹들, 정치적 경향을 위한 사회적 기반이 급속히 줄어들었을 때, 당의 사상적 반대자들이 이미 오래전에 정치적으로 괴멸되었을 때, 그들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습니다.

마리오 소사 등 스탈린주의 선전을 그대로 따르는 자들은 “당의 사상적 반대자들이 이미 오래전에 정치적으로 괴멸되었을 때” 쿠데타 암살 등 모든 음모가 시작되었다는 앞뒤 안 맞는 주장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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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은 ‘인민의 적’이라는 개념을 도입했습니다. 이 말은 논쟁상대인 개인 또는 사람들의 사상적 잘못을 어떻게든 입증해야 할 필요성에서 단번에 벗어나게 해 주었습니다. 이 말은 무언가 스탈린과 견해가 다르거나 단지 적대적 의도를 가졌다고 의심되는 모든 사람을, 그리고 단순히 중상모략을 받은 모든 사람을 혁명적 준법성의 모든 규범을 위반하면서 매우 잔혹하게 탄압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했습니다. 사실 이런 ‘인민의 적’ 개념은 현실적으로 중요한 여러 가지 문제에 관해서 어떤 사상 투쟁을 전개하거나 자기 견해를 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이미 빼앗고 없애버렸습니다. 현대 법학의 모든 규범에 어긋나게도 범죄의 주요한, 아니 사실상 유일한 증거는 피고 자신의 ‘자백’이었고, 게다가 이 자백은, 나중의 조사에서 드러났듯이, 피고에게 육체적 제재를 가해 얻어낸 것이었습니다.

‘인민의 적’이라는 용어는 얼마나 편리한 개념인가. “스탈린이 도입한” ‘인민의 적’이라는 규정은 ‘마녀’ ‘유태인’ ‘빨갱이’ 같은 말처럼 엄청난 폭력을 통해 강철의 무게를 얻은 말이다. 이 말들 앞에서는 어떤 논리와 이성도 멈춘다. 규정을 받는 순간 모든 반론권은 차단당하며, 그를 변호하는 것조차 두렵게 만든다.

노사과연은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처럼 권력을 통해 그 용어가 강철의 무게를 갖게 하지는 못하지만, 그 정신만은 충실히 계승하려 한다. 철폐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지는 도통 모르겠으나, 성매매 반대 의사만큼은 단호하다는 노사과연은 그 문제와 관련하여 자신들의 정치적 견해를 비판하거나 반대되는 견해는 ‘자유’게시판에서조차 ‘자유’를 부여하지 않는 방식으로 선배의 정신을 계승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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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당 노선에 반대했던 사람들의 경우도, 그들을 육체적으로 제거해야 할 만큼 중요한 근거가 없었다는 점을 언급해야 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을 육체적으로 제거하기 위한 근거로서도 ‘인민의 적’ 개념이 도입되었습니다.

나중에 당과 인민의 적으로 선고받아 제거된 많은 사람이 레닌 생전에는 그와 함께 일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레닌 생전에도 잘못을 저질렀지만, 그럼에도 레닌은 그들에게 일을 시키고 그들을 바로잡았으며 그들이 당에 남아 있도록 하기 위해 노력하고 그들을 자기편으로 이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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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이 스탈린의 특징이었습니다. 스탈린은 사람들과 함께 인내가 필요한 일을 수행하고 끈질기고 세심하게 이들을 교육하는 것,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상적 입장을 지닌 조직원 전체로서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그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것 등과 같은 레닌의 특성들을 전혀 지니지 못했습니다. 그는 설득과 교육이라는 레닌의 방법을 던져버렸고, 사상투쟁에서 행정적 억압으로, 대규모 탄압으로, 테러로 넘어갔습니다. 그는 점점 더 광범위하고 집요하게 징벌기관들을 통해 행동했을 뿐만 아니라, 현존하는 모든 도덕적 규범과 소련 법률을 자주 위반했습니다.

한 사람의 전횡은 다른 사람들의 전횡을 조장하고 허용했습니다. 대규모 체포와 수천 명의 유형, 재판과 정상적인 심리를 거치지 않은 처벌은 사람들에 대한 불신을 낳았고 공포와 적의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이는 당연히 당 대열과 모든 근로 민중 계층의 단합에 기여하지 못했고, 오히려 정직하지만 스탈린의 마음에 들지 않는 일꾼들을 말살하고 당에서 제명하는 것으로 귀결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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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트로츠키주의자들을 예로 들어봅시다. 역사적 시간이 충분히 지나간 지금, 우리는 차분하게 트로츠키주의자들과의 투쟁에 대해 이야기하고 상당히 객관적으로 그 사건을 분석할 수 있습니다. 사실 트로츠키 주위에는 결코 부르주아 계층 출신이 아닌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당 인텔리겐치아였지만 또 다른 일부는 노동자 출신이었습니다. 한때 트로츠키주의에 가담했던 사람들을 모두 거명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도 혁명 이전의 노동운동에, 10월 사회주의 혁명의 진행 과정에, 그리고 이 위대한 혁명의 성과를 확고히 하는 데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그들 중 다수는 트로츠키주의와 결별했고 레닌의 입장으로 옮겨왔습니다. 정말 그러한 사람들을 물리적으로 제거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만약 레닌이 살아 있었다면, 그들 대다수에게 그런 극단적인 수단을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저는 깊이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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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은 동요하지 않고 적들에게 가장 단호한 조처를 취했습니다. 그러나 레닌은 그런 조치들을 실제적인 계급의 적들에게만 사용했지, 실수하거나 방황하는 사람들, 사상적 영향을 통해 자기편으로 끌어올 수 있고 심지어 지도부에 남겨둘 수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사용했던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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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정치적 정당성을 입장하여 대중을 동원하는 대신 그[스탈린]는 자주 실제적인 적들뿐 아니라 당과 소비에트 당국에 대한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탄압하고 육체적으로 말살하는 노선을 따랐습니다. 여기에서는 레닌이 그토록 우려했던 난폭한 힘의 과시 이외에 그 어떤 지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 인용구들을 보면 스탈린 집권 시절 얼마나 파렴치한 정치 테러가 행해졌는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육체적 말살”이 따르는 것이었다. “설득과 교육이라는 레닌의 방법”이 아닌 조직 지도부의 자의적 규정에 의한 “행정적 억압”을, 한때 ‘철의 규율’이라고 찬양했던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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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1918년, 이 나라에 제국주의적 간섭의 위협이 드리워져 있던 때를 기억해봅시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사활이 걸릴 만큼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인 강화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제7차 전당대회가 소집되었습니다. …

제18차 전당대회와 제19차 전당대회 사이에 13년 이상의 시간이 흘렀고, 그 기간에 우리 당과 우리나라가 무수한 사건들을 겪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정상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

중앙위원회 전체회의는 거의 소집되지 않았습니다. 대조국 전쟁 기간 내내 중앙위원회 전체회의는 사실상 단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고 말하면 충분할 것입니다. 사실 1941년 10월에 중앙위원회 전체회의를 소집하려는 시도가 있었는데, 그때 중앙위원회 위원들은 나라 전역에서 모스크바로 특별히 소집되었습니다. 그들은 이틀 동안 전체회의 개회를 기다렸지만 헛수고였습니다. 스탈린은 심지어 중앙위원회 위원들을 만나 대화하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사실은 스탈린이 전쟁 초기 몇 달 동안 얼마나 의기소침해 있었는지, 그리고 그가 중앙위원회 위원들을 얼마나 경멸하고 오만한 태도로 대했는지를 말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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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과 중앙위원회에 대한 스탈린의 전횡은 특히 1934년에 열렸던 제17차 전당대회 이후에 나타났습니다.

소위원회는 내무 인민위원부 문서고에 있는 막대한 분량의 자료와 여타 문서들을 검토한 후, 공산주의자에 대한 날조된 사건들, 거짓 고발, 사회주의적 준법성의 명백한 위반 사실이 수없이 많이 있었고 그 결과 죄 없는 사람들이 죽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1937~1938년에 ‘적’이라고 선언되었던 당, 소비에트, 경제계의 많은 일꾼이 실제로는 결코 적도, 스파이도, 유해세력 등도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사실상 언제나 정직한 공산주의자였지만 중상모략을 받았고 때로는 비인간적인 고문을 견디지 못해(날조전문가인 조사관들이 불러주는 대로) 갖가지 엄중하고 믿기 어려운 죄로 스스로를 고발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최근 노사과연이 출판한 “진실이 밝혀지다”의 저자 마리오 소사는 흐루쇼프와 전혀 상반되게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1937~1938년에 “육체를 말살하는” 방식으로 숙청된 사람들은, 죽어 마땅한 “도둑, 강도, 살인자, 강간범 등”이거나 “암살자들 및 반혁명분자들”이다. 그리고 그에 따르면, “중상모략”이나 “비인간적 고문”은 부르주아 진영의 일방적 모략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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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차 전당대회에서 선출된 당 중앙위원회 위원 및 후보위원 139명 중 98명 즉, 70%가 (주로 1937~38년에) 체포되어 총살당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대회장 분노로 웅성거림)

제17차 전당대회 대의원들의 구성은 어떠했습니까? 표결권을 지닌 제17차 전당대회 참석자의 80%가 1920년까지의 혁명적 지하 활동 및 내전 시기에 입당했음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사회적 지위로 분류한다면, 전당대회 대의원의 다수를 구성한 것은 노동자들이었습니다(표결권을 가진 대의원의 60%).

…17차 전당대회가 선출한 중앙위원회 위원 및 후보위원들의 70퍼센트가 당과 인민의 적이라고 선언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운명은 중앙위원회 위원들만이 아니라 제17차 전당대회의 많은 대의원에게도 닥쳤습니다. 표결권과 심의권을 가진 전당대회 대의원 1,966명 중에서 절반이 훨씬 넘는 1,108명이 반혁명 범죄로 고발되어 체포되었습니다.…

제17차 전당대회는 승리자들의 대회로 역사에 기록되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당대회 대의원으로 선출된 사람들은 우리 사회주의 국가 건설의 적극적인 참여자들이었고, 이들 중 많은 사람이 혁명 이전에는 지하에서, 그리고 내전 시기에는 전선에서 당의 과업을 위해 헌신적으로 투쟁했습니다. 이들은 용감하게 적과 싸웠고, 수차례 죽음에 직면했지만 겁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지노비예프 지지자, 트로츠키주의자, 우파 등의 정치적 파멸과 사회주의 건설의 위대한 승리 이후에 ‘양다리 걸친 자들’로 판명되었다는 것을, 사회주의의 적 진영으로 넘어갔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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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12월 1일 저녁 스탈린의 발의에 따라(정치국의 결의는 없었지만 이틀 후에야 설문조사로 형식을 갖추었다.) 중앙위원회 간부회 서기 예누키제는 다음과 같은 결의문에 서명했습니다.

1. 수사 당국에게–테러 행위의 준비 또는 실행으로 고발된 자의 사건을 신속한 절차로 처리할 것.

2. 재판기관들에게–해당 범주의 범죄자가 자비를 청원한다고 극형 판결의 집행을 보류하지 말 것. 소련 중앙집행위원회 간부회는 그러한 청원을 심의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음.

3. 내무 인민위원부의 기관들에게–위에서 언급한 범주의 범죄자들에 대한 극형 판결은 재판부의 판결이 나오면 즉각 집행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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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로프 동지의 죽음을 둘러싼 상황은 지금까지도 이해할 수 없는 많은 의문점을 지니고 있어 아주 면밀하게 조사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언급해야만 합니다. 키로프를 경호해야 하는 사람 중 누군가가 키로프의 살해범인 니콜라예프를 도와주었다고 생각할 만한 근거가 있습니다. 니콜라예프는 살해하기 한 달 반 전에 수상한 행동 때문에 체포되었지만 조사도 받지 않고 풀려났습니다. 키로프를 전담 경호했던 체카 요원이 1934년 12월 2일에 심문받기 위해 끌려가면서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는데 그때 그를 호송하던 사람들은 아무도 부상당하지 않았다는 상황도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키로프 암살 후 레닌그라드 내무 인민위원부의 지도적 요원들은 면직과 함께 아주 가벼운 처벌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1937년에 총살되었습니다. 키로프를 살해를 조직한 자들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그들을 총살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대회장 내 동요)

키로프 암살사건은 1930년대 대숙청의 중요한 빌미가 된 사건이었고, 앞에서 언급했지만, 우리의 마리오 소사씨는 의혹투성이 조작사건을 “뜨로쯔끼가 해외에서 이 모든 일들을 조종”한 사건이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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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대규모 탄압은 트로츠키주의자들과의 투쟁이라는 깃발 아래서 이루어졌습니다. 정말로 이 시기에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우리 당과 소비에트 국가에 그토록 위험했을까요? 1927년 제15차 전당대회 직전에 72만 4,000명이 당 노선에 지지표를 던졌을 때, 기껏해야 4,000명만이 트로츠키-지노비예프 반대파에 지지표를 던졌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제15차 전당대회와 2~3월의 중앙위원회 전체회의 사이에 놓여있는 10년 동안 트로츠키주의는 완전히 분쇄되었으며, 이전의 많은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옛 견해를 버리고 사회주의 건설의 여러 분야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사회주의가 승리한 우리나라 상황에서 대규모 테러가 행해질 근거가 없었음은 분명합니다.

“대규모 테러가 행해질 근거가 없었”기 때문에 그 분위기를 만들기 위하여 쿠데타 음모설이나, 키로프 암살 사건 같은 것이 필요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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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2~3월의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발표했던 ‘당사업의 결함과 트로츠키주의자 및 그 밖의 양다리 걸친 자들을 청산하는 방법’에 관한 보고문에서 스탈린은 우리가 사회주의에 접근하면 할수록 계급투쟁은 더욱더 격렬해진다는 핑계를 내세워 대규모 탄압 정책에 이론적 근거를 부여하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때 스탈린은 역사가 그렇게 가르치며, 레닌이 그렇게 가르친다고 주장했습니다.

스탈린은 이러한 방식으로 ‘레닌주의의 기초’를 작성하고, 레닌의 수제자가 되었다. 그리고 스탈린주의자들은 사제(司祭) 스탈린을 통해 레닌주의자 세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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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이러한 테러는 격퇴된 착취 계급의 잔존 세력이 아니라 당과 소비에트 국가의 성실한 기간요원들을 겨냥한 것이었음이 밝혀졌는데, 그들에게는 ‘양다리 걸치기’, ‘스파이 활동’, ‘적대 행위’, 조작된 어떤 ‘암살’의 준비 등 거짓되고 중상모략적인 말도 안 되는 비난이 가해졌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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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에 가까워질수록 더 많은 적이 생겨날 것이라는 스탈린의 교시를 이용하여, 예조프의 보고에 관한 중앙위원회의 2~3월 전체회의의 결의문을 이용하여, 국가 보안기관에 침투해 있던 관제 선동자들과 양심 없는 출세주의자들은 당과 소비에트 국가의 주요 간부들, 평범한 소련 시민들을 겨냥한 대규모 테러를 당의 이름으로 은폐했습니다. 1937년에 반혁명 범죄로 고발되어 체포된 사람들의 수가 1936년에 비해 열 배 이상 증가했다고 말한 것으로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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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중앙위원회 정치국 후보위원이었고 당과 소비에트 국가의 뛰어난 활동가 중 한 명이었으며 1905년부터 당원이었던 에이헤 동지 사건은 추악한 관제 선동, 악의에 찬 날조, 혁명적 준법성의 범죄적 위반 등의 사례입니다. (대회장 내 동요)

에이헤 동지는 중상모략하는 자료에 따라 소련 검사의 승인도 없이 1938년 4월 29일에 체포되었는데, 검사의 승인은 체포된지 15개월 후에야 받았습니다.

에이헤가 1939년 10월 27일에 스탈린에게 보낸 두 번째 성명서도 보관되어 있습니다. 그 성명서에서 에이헤는 자신을 겨냥한 중상모략적인 고발을 사실에 입각하여 설득력 있게 반박했으며, 또한 이러한 관제 선동적 고발은 한편으로는 서부 시베리아 지역 당위원회의 제1서기였던 자신의 승인 하에 체포되었던 진짜 트로츠키주의자들이 그에게 복수하려고 꾸민 사건이자, 다른 한편으로는 조사관들이 조작된 자료들을 비열하게 날조한 결과라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1940년 2월 2일에 에이헤는 재판에 회부되었습니다. 법정에서 에이헤는 자신의 범죄를 인정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 2월 4일 에이헤는 총살당했습니다. (대회장 분노로 웅성거림) 현재 에이헤 사건은 날조되었음이 명백히 확인되었고, 그는 사후 복권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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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부터 당원이었으며 차르 시대에 10년간 징역을 살았던 정치국 후보위원 루주타크 동지는 자신의 강요된 진술을 법정에서 모두 부인했습니다.

그들은 그를 중앙위원회 정치국으로 부르지도 않았으며 스탈린은 그와 대화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20분 만에 형을 선고받고 총살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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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코프스키는 만약 로젠블륨이 1937년에 내무 인민위원부가 조작했던 ‘적대 행위, 간첩활동, 교란, 테러 등을 위한 레닌그라드 중앙 조직에 관한 사건’과 관련된 거짓 증언을 해준다면 그를 풀어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이 사건은 4~5개월, 아니면 반년에 걸쳐 준비될 것이다. 이 기간 동안에 당신은 심리(審理)와 자신을 망치지 않도록 준비해야 한다. 이제 당신의 운명은 재판 과정과 그 결과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겁먹고 잘못하기 시작할 때 자신을 꾸짖어라. 제대로 해낸다면 대가리(머리)가 붙어있을 것이며, 죽을 때까지 국가의 돈으로 먹고 입게 될 것이다.–로젠블륨의 진술

고문과 회유를 통해 자백(자신의 저지르지 않은 죄에 대한)과 증언(다른 정치적 반대자를 향한)을 받아내는 장면이다. “죽을 때까지 국가의 돈으로 먹고 입게 될 것”이라는 것은, 관료집단이 왜 그리 악착같았고 잔인했는지를 짐작하게 해주고, 그리고 그들은 ‘계급이 아니라 기생집단’이라는 트로츠키 규정의 올바름을 시사해주는 진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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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조프는 제안된 처벌 조치를 승인받기 위해 이런 명단들을 스탈린에게 직접 보냈습니다. 1937~1938년에 당, 소비에트, 공산청년동맹, 군사 및 경제 분야의 일꾼 수천 명에 관한 그런 명단 383종이 스탈린에게 보내져 그의 승인을 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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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1937~1938년의 근거 없고 정당치 못한 대규모 탄압으로 야기된 간부요원들의 엄청난 손실이 없었더라면, 우리의 사회주의를 향한 전진과 국가 방위 태세는 훨씬 더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스탈린은 파시즘으로부터 ‘소련을 방어(?)’(스탈린주의자들의 믿음에 따르면)했다. 흐루쇼프는 뒤에서 더 집중적으로 이 문제를 언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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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에야 조사하여 코시오르, 루주타크, 포스티세프, 코사료프 등을 복권시켜주었습니다. 그들은 어떤 근거로 체포되어 형을 선고받았을까요? 자료를 검토해보았더니 어떤 근거도 없었음이 드러났습니다. 그들은 다른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검사의 승인도 받지 않고 체포되었습니다. 아니, 그 상황에서는 어떤 승인도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스탈린이 모든 것을 허락했는데 어떤 승인이 더 필요했겠습니까. 그는 이런 문제에서 주임 검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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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이 누군가를 체포해야 한다고 말하면, 그 사람을 ‘인민의 적’으로 믿고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 그런데 어떤 증거가 이용되었을까요? 바로 체포된 사람들의 자백이었습니다. 그리고 조사관들이 그러한 ‘자백’을 얻어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람들에게서 그들이 결코 저지른 적이 없는 범죄에 대한 자백을 받아낼 수 있었을 까요? 그것은 오직 한 가지 수단, 즉 물리적인 제재 수단을 사용함으로써, 고문, 의식 상실, 판단력 파괴, 인간적 긍지의 파괴 등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허위 ‘자백’을 얻어냈던 것입니다.

***

스탈린은 1939년 1월 10일에 … 등에게 암호 전보를 보냈습니다. 그 전보에는 이렇게 적혀있었습니다.

…전연방 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는 앞으로도 물리적 제재 수단이 투쟁을 포기하지 않는 명백한 인민의 적들에게는 예외로서, 완전히 정당하고 적합한 수단으로 반드시 사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위에서 보여준 것처럼 스탈린은 이런 방식으로 사회주의적 준법성의 가장 난폭한 파괴, 즉 죄없는 사람들의 거짓 고발과 거짓 자백을 초래했던 고문과 가혹 행위를 전연방 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의 이름으로 승인했습니다.

5. 흐루쇼프의 비밀연설 B: 2차 세계 대전과 스탈린주의관료집단

스탈린의 독재 권력은 대조국전쟁 기간에 특히 고통스러운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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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 국가의 군부대와 우리의 영웅적인 인민이 거둔 전 세계적이고 역사적인 승리가 이런 종류의 소설, 영화, ‘연구서’ 들에서는 전적으로 스탈린의 천재적인 지휘 덕분인 것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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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칠은 자신의 서한에서 ‘스탈린이 다가올 위험에 관심을 갖도록 그에게 경고할 것’을 요청하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처칠은 4월 18일자 및 그 이후의 전보들에서도 이것을 집요하게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스탈린은 이른바 군사행동을 도발하지 않기 위해서는 그와 유사한 종류의 정보를 믿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런 모든 극히 엄중한 경계 신호들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방어 태세를 잘 갖추어 기습 공격의 기회를 허용하지 않을 충분한 조치들은 취해지지 않았습니다.

만약 우리 산업이 군에 무기와 필요한 장비들을 제공할 수 있도록 제때 그리고 제대로 동원되었더라면, 우리는 그 힘든 전쟁에서 훨씬 적은 희생을 치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동원은 제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키예프 특별 군관구 사령관인 키르포노스는 스탈린에게 독일 군대가 부그 강 가까이에 와서 열심히 공격 준비를 하고 있으며 가까운 시일에 공세로 전환할 것 같다는 편지를 썼습니다. …등을 제안했습니다.

이런 제안에 대해 모스크바는 그것은 조작된 도발이며 국경에서 어떤 준비 작업도 해서는 안 되며 독일군이 우리에 대한 군사행동을 개시할 명분을 줘서는 안 된다는 답변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국경은 정말로 적을 격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파시스트 군대가 이미 소련 땅으로 쳐들어와서 군사행동을 시작했을 때, 사격에 대응하지 말라는 명령이 모스크바에서 계속 내려왔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그것은 스탈린이 명백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아직 전쟁이 아니라 독일군 내의 규율 잡혀 있지 않은 몇몇 부대의 도발이라고, 만약 우리가 독일군에 대응한다면 그것은 전쟁 개시를 위한 명분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보시다시피 모든 것, 몇몇 군사령관의 경고도, 투항자들의 증언도, 심지어는 적의 분명한 행동도 무시되었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그런 중대한 역사적 순간에 당과 국가의 지도자가 보여줄 통찰력이란 말입니까?

1937~1941년 사이에 스탈린의 의심 때문에 군의 지휘관 및 정치부 직원 중 수많은 핵심 요원이 중상모략적인 비난을 받아 괴멸되었던 상황 또한 특히 전쟁 초기에 심각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 기간 동안에 몇몇 군 간부 계층은 중대 및 대대에서 시작하여 군의 고위 기관에 이르기까지 탄압을 받았는데, 이때 에스파냐와 극동 지역에서 어느 정도 전쟁 수행 경험을 쌓았던 군 간부들이 거의 모두 제거되었습니다.

우리는 스탈린주의를 ‘제국주의의 군사적 압박으로 정치적 공황 상태에 빠진 관료들의 세계관’이라고 규정한다. 전쟁위기가 고조되고 있는데도 “어떤 준비 작업도 해서는 안 되며 독일군이 우리에 대한 군사행동을 개시할 명분을 줘서는 안 된다.”고 지시하고, “파시스트 군대가 이미 소련 땅으로 쳐들어와서 군사행동을 시작했을 때”에도, “사격에 대응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고, “전쟁 수행 경험을 쌓았던 군 간부들이 거의 모두 제거”한 행위는 과연 스탈린주의관료집단이 제국주의적 호전성에 대해 얼마나 심각한 공포에 휩싸였는지를 짐작케 해준다. 흐루쇼프가 진술하는 것이 맞다면, 스탈린은 단순히 무능력한 지도자인 것만이 아니라, 거의 내통의 수준으로 2차 세계대전에 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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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전에도 정말 우리나라에는 조국과 당에 전적으로 헌신하는 아주 뛰어난 군 간부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지휘관들 중 정말 많은 사람이 수용소와 감옥에서 죽어버려서 군은 그들을 볼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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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의에 빠진) 초기의 실패와 패배를 겪은 후 …스탈린은 실제로 오랫동안 군사작전을 지휘하지 않았고, 업무도 전혀 보지 않았으며, 몇몇 정치국 위원이 그에게 가서 지금 당장 전선 상황을 바로잡기 위한 특정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말했을 때에야 지도부에 복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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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이 전쟁 발발 후에 군사작전에 개입하면서 보여준 신경질과 히스테리는 우리 군대에 심각한 손실을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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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요청을 ‘다 들은 후에’ 스탈린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것을 그대로 놔둬라!”

그 결과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우리가 예상했던 것 중에 가장 나쁜 일이 일어났습니다. 독일군은 우리 집단군을 포위하게 되었고, 그 결과 우리는 수십만 명의 아군을 잃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스탈린의 군사적 ‘천재성’이며 이것이 바로 그것 때문에 우리가 지불해야 했던 대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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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수치스럽고 부도덕한 것은 우리가 매우 비싼 대가를 치르고 적들에게 위대한 승리를 거두게 되자 스탈린은 전선에서 이뤄진 업적이 자기 이외의 다른 사람에게 돌려질 가능성을 전혀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적에 대한 승리에 적지 않게 기여한 많은 지휘관을 공격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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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이 주도했던, 그리고 우리 소비에트 국가의 민족 정책에 관한 레닌의 기본 원칙을 거칠게 짓밟았던 행위는 더욱 경악스러운 것입니다. 지금 저는 모든 공산당원과 공산청년동맹원을 포함하여 어떤 예외도 허용하지 않은 채 여러 민족 전체를 그들의 고향에서 내몰았던 대규모 추방에 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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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레닌주의자뿐만 아니라 건전한 상식을 지닌 인간이라면 특정 개인 또는 집단의 적대적 행위에 대한 책임을 여성, 아이, 노인, 공산당원, 공산청년동맹원 등을 포함한 여러 민족 전체에 지워서 그들을 대규모로 탄압하고 궁핍과 고통에 시달리게 할 수 있다는 명제는 결코 생각해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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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전쟁이 끝난 후에 소련 국민은 커다란 희생과 믿기 어려운 노력의 대가로 얻어낸 영광스러운 승리를 자랑스러워했습니다. … 이런 상황에서 당 내에 어떤 음모가 진행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그 누구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시기에 이른바 ‘레닌그라드 사건’이 갑자기 발생했습니다.

흐루쇼프는 스탈린은 음모와 공포로만 존재가능한 자신의 정통성 없는 권력을 방어하기 위해 각종의 ‘사건’들이 필요했다는 증언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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밍그렐 민족주의자 조직 사건이 교훈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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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반역자 사건을 또한 떠올려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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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럽고 수치스러운 다양한 사건을 조직하는 역겨운 역할을 했던 인물은 우리 당의 악랄한 적이자 외국 정보기관의 첩자로서 스탈린의 신임을 얻었던 베리야입니다.

스탈린 생전 최고위 권력을 누리면서 스탈린의 죄악을 실행하는 행동대장 역할을 했던 흐루쇼프가 모든 죄과를 또 다른 행동대장인 베리야에게 넘기는 방식으로, 면죄부를 얻으려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흐루쇼프가 붙이는 베리야의 죄목을 보라. ‘외국정보기관의 첩자’이다. 흐루쇼프는 스탈린의 적자이다. 즉, 스탈린 사후의 스탈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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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이 직접 자기 손으로 써넣은(<간략한 전기>에) 자신의 활동에 관한 몇몇 표현은 이렇습니다.

레닌이 대열에서 물러난 이후에 우리 당의 지도적 핵심 세력은 결국 신념이 부족한 자, 쉽게 항복하는 자, 트로츠키주의자, 지노비예프 지지자, 부하린 지지자, 카메네프 지지자 등과의 그런 투쟁 과정에서 형성되었다. ……그들은 레닌의 위대한 깃발을 지키고, 레닌의 유언을 중심으로 당을 단합시키며 소련 국민을 국가 산업화와 농업 집단화의 넓은 길로 인도했다. 이런 핵심세력의 지도자이자 당과 정부의 주도 세력은 스탈린 동지였다.

스탈린 우상화를 위하여, ‘간략한 전기’라는 제목의 전기 출판 작업을 벌일 때, 스탈린이 직접 나서서 자신을 미화하는 작업을 했다는 폭로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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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의 교정쇄에는 이러한 구절이 있었습니다. “스탈린, 그는 오늘날의 레닌이다.” 이런 구절은 스탈린에게는 분명히 불충분한 것으로 보였을 것이며, 그래서 스탈린은 자필로 이것을 다음과 같이 고쳤습니다. “스탈린은 레닌이 하던 사업의 정당한 계승자이거나, 혹은 우리 당에서 이야기되듯 스탈린, 그는 오늘날의 레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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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혁명과 내전에 관련된 사건들을 설명할 때, 이 문제는 많은 경우 마치 주된 역할을 언제나 스탈린이 했던 것처럼, 스탈린이 어디에서나 레닌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려준 것처럼 묘사되었습니다.

이 대목에서 스탈린은 오히려 레닌에게 영감을 준 자이다. 어쩌면 혹시 스탈린이 레닌 스승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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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런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스탈린은 30년간 국가와 당의 수반이었고 그 시기에 커다란 승리를 거두지 않았던가, 과연 이것을 부정할 수 있을까? 저는 개인숭배에 눈이 멀고 완전히 빠져 버린 사람들만이 그런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고, 그들은 혁명과 소비에트 국가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소련 사회의 발전에서 당과 국민이 했던 역할을 제대로, 레닌주의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

이 모든 것은 스탈린이 노동계급의 이익을, 근로 인민의 이익을 옹호하고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의 승리를 위한다는 관점에서 고려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고지식한 사람의 행동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당과 근로 대중을 위해, 혁명의 성과를 지키기 위해 그렇게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에 진정한 비극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흐루쇼프가 말하는 “진정한 비극”이란, 자신들이 스탈린주의관료집단이면서, 스탈린주의관료집단이 아닌 것처럼 행동해야 하는 비극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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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 자신은 지극한 겸손을 몸으로 직접 보여주었습니다. 이런 문제에서 우리가 모든 면에서 레닌의 사례를 따른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수많은 도시, 공장과 작업장, 집단농장과 국영농장, 소비에트 단체 및 문화 단체 등에 여전히 건강하고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여러 국가 및 당 활동가의 이름을, 만약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면, 사유재산에 대한 우리의 권리인 것처럼 나눠서 붙이고 있다는 점을 말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다양한 도시, 지역, 기업, 집단농장 등에 자신의 이름을 붙이는 일에서 우리는 대부분 공범자입니다.

***

때때로 이런저런 지도자의 권위와 중요성을 우리나라에서는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얼마나 많은 도시, 공장과 작업장, 얼마나 많은 집단농장과 국영농장을 그의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가에 의해서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사유재산’을 청산하고 공장과 작업장, 집단농장과 국영농장의 ‘국유화’를 수행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웃음, 박수, ‘옳소’라는 함성)

관료들이 자신의 특권을 얼마나 애틋하게 여기고, 영속시키려는 충동을 강하게 느꼈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있다. 관료들은 집산화된 생산수단에 기생하는 사회집단이다. 하지만, 생산수단을 소유한, 계급은 아니다. 그런 이유로 특권을 영속시키기 위한 충동을 끝없이 느꼈다. “공장과 작업장, 집단농장과 국영농장” 등에 개인의 이름붙이는 방식을 통해 특권의 영속화를 도모했고, 그 충동을 표현했다. 국가자본주의론 경향을 가지고 있는 동지나 스탈린주의 동지들 모두 깊이 음미해야할 대목이다.

***

우리는 정말 신중하게 개인숭배 문제에 접근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당의 경계 밖으로 가져갈 수 없으며, 언론에는 더더욱 안 됩니다. 바로 이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전당대회의 비공개 회의에서 보고하는 것입니다. 한도를 알아야 하며, 적들에게 비난거리를 줘서는 안 되며, 그들에게 우리의 환부를 보여서도 안 됩니다. 저는 전당대회의 대의원들이 이런 모든 조치를 올바로 이해하고 평가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비밀이어야 하는가? 스탈린 사후의 관료집단이 벌이는 반(反)스탈린 캠페인은 예민하게 통제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캠페인은 양날의 검이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과거와 단절해야 하지만, 자칫 반(反)스탈린 캠페인은 관료집단 전체를 향해 번질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 캠페인은 엄밀한 통제 속에 있어야 한다. 통제를 벗어나서 스탈린주의관료집단의 과거만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까지 문제제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브레즈네프가 주도하여 흐루쇼프를 끌어내린 1964년의 쿠데타는, 반(反)스탈린 캠페인이 관료집단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로 번져가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확고히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2011년 12월 3일

(2013년 12월 24일 오타 등 부분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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