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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출처 – 국제볼셰비키그룹(IBT)


히말라야의 ‘인민전쟁’

 

연속혁명인가, 마오주의 ‘신민주주의’인가?




차례

 

네팔공산당의 역사적 타협

 

Ⅰ. 불균등 결합발전: 네팔, 중국 그리고 인도네시아

 

단계론 대 연속혁명 / 국민당 재앙의 교훈 / 마오주의와 인도네시아 공산주의의 파괴 / 네팔 자본가계급의 형성

 

Ⅱ. 네팔 마오주의: '인민전쟁'에서 '다당제주의'로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향한 긴 행군 / ‘인민전쟁’의 역학 / 마오주의 근거지의 사회적 성과 / 네팔공산당의 ‘인민전쟁’과 도시 봉기에 대한 태도 /

 

2006년 4월: ‘프라찬다 노선’의 종결 / CPN(M) 의 ‘예비 단계’: 자본주의 정부의 운영 / 네팔 지배계급이 ‘수하르토 식 해법’ 을 숙고하다

 

Ⅲ. 마오주의 형이상학: '신민주주의'라는 수수께끼

 

중국식 인민전선인 ‘신민주주의’ / 멘셰비키 단계론과 경제적 주의주의 /

 

바타라이: 스탈린주의보다 트로츠키주의가 네팔에 ‘더 적절하다’ / 볼셰비키-레닌주의가 유일한 길이다.



 


1996년 2월 13일, 네팔공산당(마오주의)(이하 CPN(M))은 세계에서 가장 낙후하고 빈곤한 나라 중 하나에서 “인민전쟁”을 시작했다. “인민 대표들에 의한 새 헌법”과 “왕과 왕족의 특권” 폐지를 포함하여 마오주의 네팔통일전선(United People's Front of Nepal)이 제기한 40개항의 요구조건을, 네팔공화당이 이끄는 연립정부가 거부한 것이 개전의 이유였다.

 

24시간 동안 마오주의 전사들과 그 동조자들은 전국의 다양한 목표물을 공격했다. 고르카 지방(유명한 ‘구르카’ 용병들의 역사적 본산지 )에 있는 국가소유 농업개발은행이 기습당했다. 수백만 루피에 달하는 채무증서가 소각되었다. 서부 롤파와 루쿰 지방의 마오주의 거점에 있는 경찰서들은 습격당했고 무기를 빼앗겼다. CPN(M)에 따르면 수도인 카트만두의 펩시콜라 공장은 부분적으로 “불에 탔고”, 고르카의 “매판자본” 소유의 음료공장은 “폭파”되었다. 그리고 동부 네팔에 있는 “악명 높은 봉건 고리대금업자”의 집에 들이닥쳐 현금 1백3십만 루피를 강탈했고 채무증서를 파기했다. (‘노동자’ 2호, 1996년 6월, ‘포위된 왕국: 네팔의 마오주의 봉기’, 1996년에서 2003년에 재인용)

 

“인민전쟁” 선언 한 주 뒤, 내무장관 쿰 바하두르 카드카는 “우리는 4~5일 이내에 상황을 정리할 자신이 있다(마이클 허트 『히말라야 인민전쟁: 네팔 마오주의 반란군』에 수록된, 수디르 샤르마의 「마오주의 운동: 진화적 전망」) .”고 공언했다. 두 번째 주까지, 경찰서 습격에서 지주 재산 몰수에 이르는 거의 5천 건 가량의 사건이 발생했다. 카드카는 곧 교체되었다. 하지만 6년 뒤 재임명되었다. 그 무렵 네팔 지방의 60에서 70%가 마오주의 치하에 놓였고, 2005년에는 80%에 이르렀다.

 

게릴라 봉기의 성공은 네팔의 산악지대와 접근하기 까다로운 지역 그리고 정권의 경험 없고 지독하게 규율 없고 난잡한 보안군 그리고 지배계급의 근시안과 무능력, 부패에 힘입은 것이었다. 그러나 억압에 맞선 인민 투쟁 조직에 나선 마오주의자들의 헌신이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트로츠키주의자는 농촌지역의 “인민전쟁”보다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봉기 전략을 지지하지만, 우리는 주저없이 네팔 부르주아지에 군사적으로 맞선 마오주의 봉기 편에 선다.

 

CPN(M)의 전략은 “인민전쟁” 첫날 네팔 전역에 뿌려진 성명서에 표현되어 있다. 그 성명서는 “봉건적이고 매판적이고 관료적인 자본주의 지배자들”이 네팔의 후진성과 비민주적 정치구조의 주범이라고 비난한다.

 

“인민의 아들과 딸들의 프롤레타리아 정당 CPN(M)은 이 반동적 국가를 무력으로 파괴하고 신민주주의 국가를 수립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은 계급착취의 굴레로부터 인간을 영원히 해방해야 한다는 위대한 맑스-레닌-마오주의 사상에 대한 신념과 그러한 관점에 입각한 네팔 역사 고찰에 근거하여, 인민을 향한 헌신과 봉사의 정신에 기초한 것이다.…이 길은 네팔의 역사적 발전 단계와 일치하는 것이고 원칙적으로 우리가 계속 주장해왔던 농촌에 기초하여 도시를 포위하는 전략에 따른 것이다. 이것은 농촌 혁명을 축으로 삼으면서 그것을 도시의 계급투쟁과 결합하는 전략이다.”-「반동적 국가를 깨부수고 신민주주의 국가를 수립하는 길에 나서자!」, 카르키&세돈


 

마오주의자의 계급투쟁 호소는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지주의 토지가 재분배되고 농민 부채가 탕감되고, 농촌공동체가 수립되고 도로와 관제시설이 건설되고 정부기관이 수립되는 등 도시 지역에 커다란 사회-경제적 변화가 진행되었다. 수 세기에 걸친 억압 끝에 여성, 하층민과 소수 민족은 처음으로 법적 평등을 획득했다. 아직 낮은 수준이지만 의미있는 사회 개혁의 성과를 나누어 가졌다.

 

네팔 마오주의자의 성공은, 소련 붕괴 직후 “공산주의는 끝났다.”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공세를 거스르고, 세계의 신세대 투사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사건이었다. 소련과 동유럽의 반혁명 그리고 가장 반항적인 제3세계 좌익민족주의 운동의 전향과 패배 이후, 많은 젊은 좌익들은 “반(反)세계화”, 무정부주의 그리고 신식민지의 “단결”과 같은 모호하거나 때론 노골적인 개량주의 정치를 수용해 왔었다. 그러나 네팔 마오주의 게릴라운동은 인도와 필리핀에서 “맑스-레닌-마오쩌둥 사상”을 부활시켰다. 파이낸셜타임스(2006년 2월 21일)는 “마오주의의 공포가 되살아나고 있다.”고 경고했다.

 

 

 

네팔공산당(CPN(M))의 역사적 타협

 

2006년은 네팔 “인민전쟁”의 전환점이 되었다. 4월 카트만두와 다른 도시들에서 벌어진 총파업과 19일 동안의 대중시위는 독재 권력을 마비시켰다. 성공적으로 “농촌으로부터 도시를 포위”한 마오주의자들은, 그 파업에 대해서는 주변적인 역할만을 수행했다. 자본가와 의회에 진출한 스탈린주의 정당과 여러 차례 협상한 끝에, CPN(M)은 “반봉건과 반제국주의 헌법 기초라는 틀 내에서 다른 당과의 경쟁”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Economic and Political Weekly, 2006년 7월 22일). 2년 뒤 헌법제정의회 총선에서 과반수를 얻은 후 마오주의자는 한때 “반동진영”의 일원이라고 비난했던 자들과 같이 연립정부를 구성했다.

 

부르주아 정치 입장료는 모질게 비쌌다. 지주와 자본가들로부터 몰수한 토지와 공장을 되돌려주었다. “인민법정”과 “인민위원회”는 해산되고 인민해방군 게릴라는 해체되었다. 2009년 5월 CPN(M)이 헌법논쟁 이후 끝내 쫓겨날 때, “인민전쟁” 동안 수천 명이 목숨을 바치기도 한 수많은 지지자들의 희생과 맞바꾼 성과는 보잘 것 없었다. 반면 네팔의 지배층은 전보다 강력하게 결집되었다.

 

네팔 지배계급에 대한 CPN(M)의 화해정책 결과는 국제적으로 마오주의자들 사이에 불화와 혼란을 낳았다. 많은 마오주의자들이 CPN(M)의 연합정책을 전술적 유연성의 사례라고 옹호한다. 한편 그보다 더 많은 좌익들은 그것이 “진보적” 자본가들과의 “신민주주의” 동맹을 건설하지 못하고 부르주아 반동에 순응한 “우익기회주의 노선”에 따른 “배신”이라고 규정한다.

 

결국 CPN(M)의 마오주의 좌파 논평가들은, 우익 옹호자들처럼, 마오쩌둥 신민주주의의 핵심인 계급협조주의의 필연적 결과가 부르주아와의 화해정책이라는 근본적 사실을 무시한다. 신민주주의는, 식민지국가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정에 오르기 전 반드시 자본주의적 발전을 일정 기간 추구해야 한다는 스탈린/멘셰비키 노선의 변종일 뿐이다. “민족부르주아지”(나쁜 “매판” 자본가들과 대조되는)는 노동계급과 농민의 동맹자라는 사고는, 사회주의 혁명 “이 단계” 이론의 필연적 결과물이다. CPN(M)의 1996년 2월 성명은 이 점을 분명히 했다.

 

“모든 노동자, 농민, 여성, 교사, 학생, 소상인, 하급공무원, 의사, 교수 또는 민족자본가를 포함한 다른 계급의 구성원들은 모두 관료적이고 매판적 자본가와 봉건귀족 국가의 희생자들이다.”


 

이 같은 소부르주아 이상주의는 농민에 기초한 농촌중심 세계관으로부터 나온다. 마오 자신이 그러했듯이, CPN(M)에게 노동자투쟁은 기본적으로 “농촌지역”으로 도시를 에워싸는 전략을 위한 보조수단으로 여겨진다. 마오주의자로부터 독립하여 프롤레타리아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자, 심지어 가장 지독한 군주제주의자들조차도 지배계급의 자산을 지키기 위해 공화정이 유일한 길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CPN(M)의 2 단계론에 대한 신념은, 노동계급과 빈농을 실체가 없는 소위 “반(反)봉건” 민족부르주아지에게 종속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노동자와 피억압인민이 2 단계 혁명의 재단에 희생당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러나 1963년의 이라크 1965년 인도네시아나 1973년의 칠레와 달리, 네팔 지배자들은 노동계급의 뿌리를 뽑아 좌익을 지하로 숨게 하는 데에 성공하지 못했다. 2006년 4월에 보인 힘과 부르주아민주주의의 일정한 부활로 활기를 띤 네팔 프롤레타리아는 가장 전투적이고, 정치의식으로 무장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부르주아는 위험한 이 전투성을 반드시 분쇄하려 들 것이다. 반동의 먹구름이 몰려드는 동안, 네팔 노동자들은 국가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혁명 투쟁에서 모든 피억압인민을 이끈다는 전망 속에 반드시 자신의 독립적 정치 조직을 건설해야 한다.

 

 

 

I. 불균등 결합 발전: 네팔, 중국 그리고 인도네시아

 

마이클 허트가 2004년 설명한 것처럼, 서방 관광 전문가들은 네팔을 “상반성의 땅”이라고 소개한다.

 

“관광안내책자는 네팔을 축축한 정글과 공기가 희박한 만년설 봉우리들, 카트만두의 현대적이고 도시적 혼잡과 외지에 있는 소수 공동체의 ‘전통적’ 삶의 방식이라는 상반성을 부각한다. 그러나 그곳엔 책자에 묘사되지 않는 많은 다른 상반성과 모순이 존재한다. 힌두국가라는 헌법규정과 많은 소수 종교의 존재, 입헌군주제 아래 다당제 민주주의와 오랫동안 견고히 버티고 있는 공산주의 운동의 존재, 하나의 공식어에 의한 단일 국가와 수십 가지 다른 언어를 구사하는 변방의 다양한 민족 집단, 가장 원조를 많이 받는 ‘개발도상국’이라는 사실과 다수의 빈곤과 소외, 평화의 땅이라는 평판과 역사적으로 서너 번 벌어졌던 국가권력 장악을 둘러싼 무자비한 폭력.”—「네팔의 군주제, 민주주의 그리고 마오주의」


 

3천만의 네팔 인구 중 85%는 농촌지역에 산다. 75%는 임노동자나 소작인 또는 영세농 등으로 토지를 이용하여 살아간다. 네팔인은 세 개의 지리적으로 구별되는 지역에 흩어져있다.

 

“인도에 인접한 남쪽 타라이 지역은 비옥한 저지대의 길쭉한 땅인데 주로 마드헤시스를 중심으로 48%의 인구가 산다. 카트만두를 포함하는 중앙의 고지대—해발 600에서 4000미터 이상—는 오랜 기간 네팔 정치를 지배해 왔는데, 이곳엔 44%의 인구가 산다. 끝으로 북쪽엔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경을 따라 가파른 봉우리들—에베레스트 등—이 있다. 서쪽의 산악지대엔 제일 가난한 지역으로 공산당을 가장 강력히 지지하는 지역들이 있다.”—New Left Review No. 49, 2008년 1/2월


 

미 국무성에 따르면, 2009년 네팔 평균 수입은 470달러였다. 그리고 66%는 하루에 2달러 이하로 살았다. 한 사람당 의료비 지출은 지독히 낮다. ‘인민전쟁’이 시작되기 전 롤파와 루쿰 지방엔 병원이 없었다. 60세라는 기대 수명은 남아시아에서 가장 낮은 수치이고, 영아 사망률은 가장 높다. 단 62%의 남자와 26%의 여자만 글을 안다. 많은 마을은 전기, 수도, 도로 시설이 없다.

 

부의 분배는 극도로 불평등하다. 가장 최근(2001년)의 농업통계에 따르면, 하층 10%의 가구가 1%를 가지고 있는 반면, 상위 10%는 50% 이상을 소유하고 있다. 25%의 가구는 땅이 없고(소수 민족일 경우 비율이 더 높다), 28%는 1 헥타르[3025평] 미만의 토지를 경작하는 ‘영세농’이다. 20%는 1~2 헥타르를 경작하는 ‘소농’으로 분류된다. 종종 이 영세농과 소농 가족은 대지주의 농장에서 임금을 받거나 수확물을 나눠갖기 위해 일을 해야 한다. 또는 운반 등의 일거리를 잡아 일용직으로 일을 하기도 한다. 네팔의 도시나 이웃한 나라에서 많은 이들이 임노동자로 일한다. 사실 10%의 네팔 사람들이 해외에서 일하고 있고, 2008년엔 그들의 송금액이 국가수입의 17%를 차지할 정도이다(이코노미스트, 2009년 8월 1일).

 

땅 없는 농민과 임차농은 타라이 남부의 평원지역에 특히 많다. 그곳은 카마이야[ kamaiya: 전통적으로, 땅을 소유하지 못하거나 직업이 없는 사람은 토지소유주로부터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돈을 빌린다. 대신 그들은 거의 노예처럼 토지소유주의 땅에서 살고 일해야 한다.--역주, Wikipedia 참고 ]가 지속되고 있다. 역사적으로 상위 계층인 브라민(Brahmins)과 체트리(Chetris)에 무임금 노동을 제공하는 데에서 나온 이 카마이야 제도는, 지금도 빈농으로 하여금 부채(종종 가짜인)를 이유로 대지주를 위해 봉사하도록 한다. 공식적으로 카마이야 제도는, 2000년 7월 마오주의 압력으로 중앙정부가 재분배 정책을 도입할 때 사라졌다. 그러나 가난한 카마이야들이 다시 빚을 지게 되자, 채무농민에게 나누어진 토지는 다시 지주들의 수중으로 빠르게 회수되었다.

 

언론인들과 대학교수들은 토지소유의 현격한 불평등, 소작의 지속, 채무농과 원시적인 농업기술(손으로 쓰는 농기구와 가축을 동력으로 하는 농업) 등의 존재를 네팔 경제의 봉건성 또는 반(半)봉건성의 증거라고 지적해 왔다. 네팔의 후진성을 부패한 정치경제 엘리트와 세계 경제로부터의 고립 탓으로 돌리고, 만약 ‘봉건성’이 문제라면, (더 많은) 자본주의와 세계 시장으로 깊숙한 편입이 그 해결책이 될 것이라고 보는 경향이 있다.

 

계급착취와 제국주의의 역할에 초점을 맞추는 마오주의 지식인들은, 네팔의 저개발에 대한 보다 쓸모 있고 정교한 분석을 제공해 왔다. CPN(M)의 지도적 이론가이며 (‘프라찬다’로 통하는 ‘푸쉬파 카말 다할’에 이어) 제2인자인 바부람 바타라이는 인도 네루대학에서 1980년대에 박사학위 논문을 썼고, 그것은 후에 ‘네팔 저개발의 성격과 지역적 구조: 맑스주의 분석’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바타라이의 연구는 네팔 정치경제를 사적유물론적으로 분석한 의미 있는 시도이다. 그의 기본 사상은 CPN(M)의 핵심 문건 중 하나에 잘 요약되어 있다.

 

“자본주의 발전의 고유 속성인 중앙집중화로 나타난 제국주의라는 자본주의 최고 단계의 등장 이후, 어떤 사회도 제국주의 개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 사회가 원시적이고 후진적일수록, 그 사회 내부의 발전은 제국주의로부터 더 강력한 영향을 받게 된다. 특히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이행하기 직전의 사회일 경우, 그 자체의 산업자본주의가 아니라, 매판적 관료적 자본주의(생산적 역할보다는 금융과 상업에 치중하고, 국가에 의존하여 그 탄생부터 독점적 성격을 지니고, 외국 독점자본주의의 하수인 노릇을 하는 자본주의)의 성장을 촉진하면서, 제국주의는 내부의 생산관계를 크게 변형시킨다. 이것이 바로 혁명적 조치를 통해 ‘내부의’ 생산관계에서 진보적 변혁을 도입하면서 한편으로 제국주의와의 관계를 파괴해야 하는 이유이다.”—바타라이, 「인민전쟁의 정치경제」


 

후진적인 토착 국가기구에 대한 금융자본의 이용과 제국주의 하수인 노릇을 하는 ‘매판’ 자본의 역할 등, 세계 자본주의의 지배에 대한 바타라이의 강조는 위대한 러시아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의 불균등결합발전법칙의 내용과 상당히 유사하다. 제4차 인터내셔널 창립대회에서 채택된 1938년 이행강령에서, 트로츠키는 다음과 같은 지적을 했다.

 

“식민지 반식민지 나라들은 후진국이라는 근본 성격을 갖는다. 그러나 후진국들은 제국주의 지배 세계의 일부분이다. 따라서 이 나라들의 발전은 결합적 성격을 갖는다. 즉 가장 원시적 경제형태들이 최신의 자본주의 기술 및 문화와 결합된다.…


 

“식민지 반식민지 나라들의 중심 과제는 봉건적 유산들을 일소하는 농업혁명과 제국주의 지배의 멍에를 벗어 던지는 민족 독립에 있다. 이 두 과제는 서로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트로츠키와 바타라이의 분석에는 두 가지 핵심적 차이가 있다.

 

첫째, 트로츠키는 “원시적인 경제 형태”의 지속만이 아니라 “최신의 자본주의 기술 및 문화” 또한 강조했다. 바타라이와 마오주의자들은 농업에서 임노동 성장의 역동성과 카트만두 계곡과 타라이 지역의 작지만 전략적으로 중요한 산업부문을 무시하거나 간과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둘째, 트로츠키는 민주주의 과제와 민족적 독립은 제국주의와 “민족자본가”에 맞서 사회주의(프롤레타리아적이고 국제주의적인) 혁명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반면, CPN(M)은 “제국주의와의 관계를 파괴”하는 투쟁을 대단히 다르게 이해한다. 바타라이는 “반(半)봉건적 관계는 질과 양 모든 면에서 우선적이고 결정적 관계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마오쩌둥의 1945년 주장을 떠올리게 한다: “지금 중국에 넘치는 것은 토착 자본주의가 아니라, 외국 제국주의와 토착 봉건주의이다. 실제로 자본주의는 너무 덜 발전해 있다(「연립정부에 대하여」).” 바타라이와 그의 당은 네팔에 대해 똑같은 주장을 한다.

 

“후진적 반(半)봉건 국가와 매우 낮은 수준의 생산력 발전으로 인해, 혁명 초기 새로운 생산관계의 기본 형태는 사회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적인 것이 될 것이다. 이 이행단계를 통과한 뒤에야 사회주의적 변혁이 수행될 수 있다. 신민주주의 단계에서 핵심 기간산업과 금융회사는 국가의 사회적 소유 아래 놓일 것이고, 규모가 큰 생산수단은 국가와 사기업의 공동소유가 될 것이며, 가장 큰 경제부문인 농업에서는 농민들에 의한 사적 소유가 지배적이 될 것이다. 중소기업과 무역은 사적 산업가와 무역상들이 소유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 네팔에 존재하는 “반(半)봉건제”와 달리, CPN(M)의 신민주주의 자본주의는 “제국주의와 패권주의의 억압과 착취로부터 자유로운 독립적이고 자립적 발전”을 낳을 것으로 기대된다. 그것은 또한 “평등, 상호이익 그리고 국가적 필요에 기초한” 국제무역을 수행하고, “토지를 경작자에게” 줄 것이고, 농민의 부채를 탕감할 것이다. 사회 갈등의 중심축을 (착취와 피착취 계급이 아니라) “반동적” 계급과 “진보적” 계급에 두면서 CPN(M)은—스탈린이 “4계급 동맹”이라고 지칭한 것처럼—노동자, 농민, 소부르주아 그리고 “민족자본가”의 “동참”을 호소한다.

 

 

 

단계론 대 연속혁명

 

1926년 3월, 산업노동자가 미래 중국혁명에서 지도적 역할을 할 것이라는 립서비스를 여전히 지속하면서, 마오는 “누가 우리의 적이고, 누가 우리의 친구인가? 이것은 혁명을 위한 가장 중요한 물음이다(「중국사회 계급분석」).”라고 말한다. “진보적” 자본가들과의 신민주주의 동맹을 변호하며 마오주의자들이 즐겨 내세우는 구절이다. 그러나 네팔 마오주의자들은 노동계급과 빈농의 부르주아 “친구들”이 누구를 의미하는지 구체적으로 적시하지 못한다. 실제로 마오주의 정치경제의 핵심에는 심대한 모순이 존재한다. 한편으로, 제국주의 지배가 의미 있는 민주주의 개혁과 토착 산업발전을 수행할 민족부르주아지의 성장을 옥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2단계 혁명 전략은, 토착 부르주아지의 사회적 역량과 정치적 권위가 강력하여 자본주의 사적소유라는 착취 체제 전체를 전복할 가능성이 없다는 전제에 기초해 있다.

 

네팔의 저개발에 대한 500쪽에 달하는 그의 저서를 통해, 바타라이는 대지주와 고리대금업자, 상인과 “관료적” 자본과 제국주의 사이의 뒤엉킨 상호의존과 “반동” 계급의 역사적 발전에 대한 복잡한 설명을 한다. 그러나 소위 “민족자본가”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고, 노동자와 빈농의 “친구”라 할 만하거나 어떤 종류의 소위 “진보적” 혁명에 대한 지지자라고 할 만한 어떤 행동에 대한 묘사도 없다. 왜냐하면 제국주의 시대에, 네팔 그리고 다른 어디에도 진보적 민족자본가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2단계 혁명의 중심 전제—식민지와 반(半)식민지 나라는 사회주의 혁명이 무르익기 전에 반드시 먼저 자본주의적 발전 단계를 거쳐야 한다는—는 부끄러운 계보를 가지고 있다. 1917년 10월 혁명 이전 멘셰비키는, 러시아 노동계급은 자유 부르주아지의 민주공화국을 위한 시도에 보조적 역할만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06년 멘셰비키 지도자인 파벨 악셀로드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러시아의 사회관계는 부르주아 혁명 지점 이상으로 무르익지 않았다. 역사는 노동자와 혁명가들로 하여금 보다 강력하게 부르주아 혁명으로 나아갈 것을 요구한다. 프롤레타리아가 전술적 그리고 조직적으로 정치권력 장악을 준비하고, 진정한 사회주의 혁명을 향한 길에 서게 하기 보다는, [역사는] 그들로 하여금 부르주아지의 무의식적인 정치적 하수인 노릇을 하게 한다….


 

“전제주의 러시아에서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 사이의 ‘정치적 협력’이라는 역사적이고 객관적 요구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무시할 수 없다.”—‘악셀로드의 4차 당대회 연설’, 아브라함 아셔의 책, 『러시아 혁명의 멘셰비키』


 

레닌은 멘셰비키의 계급협조주의 전략을 거부했다. 부르주아 전체는 대지주들과 완전히 결합되어 있으며 그로 인해 노동계급을 두려워하고 그 방어를 위해 차르 독재에 의존적이다. 그 때문에 러시아 부르주아는 1789년 프랑스에서 일어난 ‘고전적’ 부르주아 혁명과 비슷한 어떠한 혁명도 수행할 능력이 없다고 레닌은 지적했다. 1917년 2월 대중파업과 거리시위는 차르를 퇴위시켰고 소비에트(노동자평의회)—새 국가권력의 정치적 핵심—를 수립했다. 그러나 소비에트의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 지도자들은 새로 구성된 부르주아 임시정부에 충성을 선언했다. 스탈린을 비롯한 ‘고참 볼셰비키’ 역시 이 임시정부를 “노동계급과 농민의 민주적 독재—레닌의 정식이지만 부르주아지와의 동맹을 의미하는 것은 전혀 아닌”의 표현이라고 여기고 조건부 지지를 보냈다. 레닌은 (그 유명한 「4월 테제」를 통해) 전력을 다해 이 정책을 돌려세웠고, 그것으로 볼셰비키는 6개월 후 노동계급을 권력 장악의 길로 인도할 수 있었다.

 

 

 

국민당 재앙의 교훈

 

1917년 10월 혁명은, 영국과 프랑스의 경험을 사회역사적발전의 보편적 법칙으로 확장했던 2단계 혁명론을 반박하는 생생한 증거물이다. 그러나 혁명 이후 레닌과 트로츠키 또는 공산주의인터내셔널(코민테른)의 다른 지도자들은, 볼셰비키 전략을 대체로 러시아보다 후진적이고 러시아보다 적은 수의 노동계급이 존재하는 식민지 또는 반(半)식민지에도 적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 확신하지 못했다. 그 결과 1920년대 초 코민테른은 중국공산당이 부르주아 민족주의 정당인 국민당과 동맹을 맺는 것을 승인하였다.

 

국민당에 입당하는 청산적 노선에 대하여, 볼셰비키 지도부 내 트로츠키 주도 그룹의 우려는 점점 더 커져갔다. 반면 그 전략을 “4계급 동맹”이라고 규정하는 다수의 스탈린 분파는 점점 더 멘셰비키 2단계 혁명론을 재탕하기 시작했다. 국민당을 향한 노선은 중국 내 계급투쟁의 논리보다는, 지속되는 러시아공산당의 내부 분파투쟁과 소련 외교 정책의 절박한 사정으로 인해 형성된 것이다.

 

중국공산당과 국민당의 동맹은 공산주의자가 자기를 납치할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착각하여 1926년 3월 장개석이 광동에서 일으킨 소규모 쿠데타 이후 거의 파산되었다.

 

“장개석은 즉각 군사지도자로서의 자신의 힘에 호소했다. …광동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충성스런 사관생도와 경찰을 주요 건물에 배치했다. 파업노동자들을 무장해제하고 도시에 있던 30명이 넘는 러시아 고문관들을 체포했다. 중국공산당 정치위원들은 ‘재교육’을 구실로 황포에 갇혔다. 중국공산당 신문들은 발행 금지되었다. 며칠 후 장개석은 압력을 느슨하게 했고 4월 초 그는 소련과의 동맹을 여전히 신뢰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 발표를 어떻게 해석해야할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코민테른 특사인 미하일] 보로딘은 러시아 동료들과 코민테른 전략을 논의하는 북경의 비밀회의 참석으로 인해 2월 이후 광동에 없었다. 4월 말 그가 돌아왔다. 며칠 동안 그와 장개석은 다음과 같은 합의를 도출했다. ‘앞으로 중국공산당 당원은 국민당과 정부부처의 지도적 위치에 오를 수 없다. 손문[쑨원]의 ‘삼민정책’에 대해 중국공산당의 비판은 허용하지 않는다. 국민당 당원은 공산당에 가입할 수 없다. 중국공산당에 대한 코민테른의 지도는 국민당 위원회와 함께 수행한다. 현재 중국공산당 당원명부를 국민당 집행위원회에 넘긴다.’ 보로딘은 이 같은 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왜냐 하면, 당시 스탈린은 모스크바에서 결정적 권력투쟁에 진입하였고 그래서 자칫 광동에서 중국공산당과 소련 고문관이 쫓겨나는 사태가 일어나서 자신의 신망이 손상될 것을 저어했기 때문이었다.”—조나단 스펜스, 「현대 중국 탐구」


 

‘반(反)제국주의’적(的)이라 가정된 부르주아지와의 우호를 유지하기 위해, 모스크바는 중국공산당으로 하여금 도시의 계급투쟁을 가라앉히고 농촌의 농민 소요를 완화시키게 했다. 트로츠키는 신랄하게 비판했다.

 

“부르주아 지도부에 대한 공산당의 공식적 굴종과 소비에트 수립의 공식적 금지(스탈린과 부하린은 국민당이 소비에트를 ‘대체했다’고 가르쳤다)는 멘셰비키가 1905년에서 1917년까지 수행했던 맑스주의에 대한 배신보다 더 추하고 심각한 것이다.”—『연속혁명』


 

1927년 초 트로츠키는, 장개석이 성장하고 있는 노동운동의 궤멸을 준비하고 있다고 경고하고 그와 같은 시도에 저항하기 위해 노동자평의회 건설을 촉구했다. 스탈린은 이 주장을 “운동의 혁명적-민주주의 단계를 건너뛰는” 것이라고 일축하고, 장개석과 그 밖의 국민당 지도자들을 “그 끝까지 활용한 뒤에 레몬처럼 쥐어짜서 던져버리면 된다(트로츠키, 「중국혁명의 문제」에서 인용).”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진행되지 않았다. 국민당의 반동적인 군벌 소탕 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전통적으로 중국노동운동의 중심인) 상하이의 노동자들은 장개석 군대의 진격에 앞서 봉기했고 도시를 장악했다. 중국공산당은 지도력을 발휘하여, 봉기한 노동자들을 무장해제하고 도시를 장개석에게 넘겨주었다. 장개석은 이 기회를 활용했다. 지역 우익 준(準)무장단체들과 협력하여 공산당원, 전투적 노동자 그리고 학생 등 수 만 명을 학살하였다.

 

이 심각한 패배 이후 트로츠키는, 연속혁명 이론을 일반화했고 10년 전 4월 테제를 통해 레닌이 뼈대를 세운 정책이 보편적으로 적용가능하다고 결론내렸다.

 

“자본주의적 발전이 늦춰진 나라들, 특히 식민지 그리고 반(半)식민지 나라에서 연속혁명론은, 민주주의와 민족해방이라는 과제는 오직 종속된 민족, 특히 농민 대중의 지도자인 프롤레타리아의 독재를 통해서만 순수하고 완전히 성취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연속혁명』


 

맑스에 이어 트로츠키는, 그 수적 우위에 관계없이, 농민은 혁명에서 독립적 역할을 수행할 수 없다고 인식했다. 이것은 부르주아지와 그 제국주의 후원자들에 맞선 투쟁에서, 혁명적 노동자가 농민(또는 더 억압당하는 계층)의 지지를 획득하는 것이 결정적이고 전략적 중요성을 갖는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여러 층으로 구성되고 자산을 소유한(최소한 갈망하는) 소부르주아 대중은 필연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라는 자본주의 사회의 두 기본 (그리고 상호적대적인) 계급을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역사는 반복적으로 보여줬다.

 

“현대사 전체—특히 최근 25년 동안의 러시아의 경험—가 입증하고 있는 바와 같이, 농민 정당의 창출 과정에서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은 소부르주아지가 정치적 ․ 경제적 독자성을 결여하고 있고 그 내부도 심각하게 분화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소부르주아지(농민)의 상층은 모든 결정적 시기마다, 특히 전쟁이나 혁명의 시기에 대부르주아지와 보조를 같이 한다. 하층은 프롤레타리아와 함께 나아간다. 따라서 중간층은 양극단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는다. 케렌스키 체제와 볼셰비키 권력 사이에, 국민당과 프롤레타리아 독재 사이에는 어떠한 중간적 단계도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할 수도 없다. 다시 말해서 노동자와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는 존재하지 않는다.”—같은 책


 

마오는 코민테른과 중국공산당을 흔든 국민당 관련 논쟁에서 특별한 역할을 하지 않았다. 빈농투쟁에 대한 열의가 담긴 1927년 2월 그의 유명한 ‘허난 보고서’를 코민테른은 관심 깊게 보지 않았다. 1925년 초, 즉 상하이 학살 훨씬 전, 마오는 도시 노동계급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서 허난 성의 농민을 조직하는 데에 열중했다. 실패한 허난 성의 ‘가을 추수 폭동’과 1926~27년의 소용돌이를 평가하며 마오는 “농촌 혁명의 농민들이 7할의 중요성이 있는 반면, 도시 거주자와 군대는 3할의 중요성만 가진다.”고 썼다. 1927년 패배 이후, 공산당 전체는 도시 중심부를 포기하고 국민당의 영향력이 거의 미치지 못하는 지방의 농민 기지를 건설하는 데 집중했다. 신민주주의론은 이 같은 상황에 잘 들어맞게 2단계 혁명론을 재구성한 정식이었다. 공산당은 한편으로 당시 코민테른의 ‘제3기’론[ 중국혁명의 패배 이후 코민테른은 1923년까지를 전후 혁명 상승기, 1928년까지를 자본주의 상대적 안정기 그리고 그 이후를 자본주의가 즉시 그리고 최종적으로 붕괴하는 새로운 시기(‘3기’)라고 규정하고, 대중적노동조합에 대한 ‘적색노조’ 정책, 사민주의를 ‘사회파시스트’라고 규정하는 정책 등을 펼쳤다.--역주 ]의 핵심 구호인 “계급 대 계급”을 따라, 공식적으로는 프롤레타리아 중심성을 승인했지만, 실제로는 노동계급에 접근하기 위한 노력을 거의 기울이지 않았다.

 

 

 

마오주의와 인도네시아 공산주의의 파괴

 

이른바 ‘진보적’ 부르주아지를 고립시키지 않도록 스탈린주의 정당들이 대중투쟁을 제한함에 따라, 1927년 4월 중국 노동운동이 겪었던 재앙적 패배는 20세기에 다양한 나라와 정세에서 반복되었다. 실제로, 1965년 인도네시아에서 벌어진 대량학살에 대해 마오와 중국공산당은 특별한 책임을 지고 있다. 3백만의 당원과 자매조직인 인도네시아농민협회(Indonesian Peasants Association) 회원 9백만을 거느린 인도네시아공산당(PKI)는 자본주의 세계에서 가장 큰 공산당이었다.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객관적 힘과 대중의 명확한 친사회주의적 분투에도 불구하고 PKI 지도부는, 중국공산당의 적극적 지지와 격려 속에서, 수카르노 대통령의 부르주아 정당인 인도네시아국민당(Indonesian Nationalist Party)과의 단일화라는 환상을 추구했다.

 

북경주보(Peking Review) 1965년 5월 28일자는, PKI 45주년 기념일을 축하하고 “맑스-레닌주의에 대한 충심으로 현대 수정주의를 단호히 배격하는 국제적 공산주의운동의 특수부대”에 경의를 표하는 마오쩌둥의 편지를 실었다.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맑스-레닌주의 노선의 위대한 승리”라는 제목을 단 다음 호(1965년 6월 4일)는 자카르타의 대규모 집회에서 행한 (수카르노의 연설과 더불어) 중국공산당 대표와 인도네시아공산당 의장 아이디트(Aidit)의 연설을 실었다. 아이디트는 “훌륭한 인도네시아 공화국 대통령이자 인도네시아 혁명의 위대한 지도자인 친애하는 붕 카르노[수카르노의 별칭]”에 대한 경의를 표하며 연설을 시작했다. 이어서 아이디트는 “인도네시아공산당 45주년 기념식을 진행하는 동안, 수카르노의 초상화가 맑스, 엥겔스, 레닌과 스탈린의 초상화와 같이 걸려 있다.”라고 투덜거렸던 “제국주의자와 그 하수인들”을 반박했다. 아이디트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수카르노 대통령과 인도네시아공산주의자의 관계는 비밀스럽거나 불법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맑스주의의 진실을 이해하고 혁명의 대의에 복무하는 혁명가들 사이의—적절하고 정당한—부끄럼 없는 관계이다.”


 

“제국주의 침략” 위험성을 지적하며, 아이디트는 “잘 훈련된 군대와 무장 인민의 조화”가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그리고 그것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아이디트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 인민과 군대 사이의 관계는 인도네시아 혁명 과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날마다 더 가까워지고 있다.

 

“나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필요할 경우 노동자와 농민으로 하여금 무장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한 수카르노 대통령께 감사를 표하고 싶다.”


 

이보다 더 비겁하고 더 자멸적인 짓을 상상하는 것은 쉽지 않다. 물론 그 “친애하는 붕 카르노”는 인도네시아공산당의 무장이 “필요한” 경우를 전혀 고려사항에 넣지 않았다. “기회주의에 맞선 투쟁”을 의례적으로 호소한 다음, 인도네시아공산당 당원들에게 “용감하고, 당규율과 국가규율 모두에 강철처럼 단련된 공산주의자가 될 것”을 아이디트는 주문했다.

 

수카르노 앞에서 아이디트가 머리를 조아리는 동안, CIA는 인도네시아공산당을 “규율로 단련”시키기 위해(전멸시키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1965년 10월 군 수뇌인 수하르토 장군은 인도네시아공산당의 신문들을 정지시키고, 관련 조직들의 활동을 금지하고 대량 체포를 명령했다. 당 지도부는 아무런 저항을 하지 못한 채 측은하게도 수카르노에 대한 충성을 거듭 맹세했다. 고립된 인도네시아공산당 투사들이 자발적으로 스스로의 방어를 시도했지만, 당은 쉽게 패배했고 5십만 명가량의 좌익투사 노동자 빈농들이 학살당했다. 인도네시아 좌익들은 이 패배로부터 회복되지 못했고, 이 나라는 수하르토의 우익 군사독재 속에서 수십 년 동안 신음해야 했다.

 

인도네시아공산당이 파괴된 이후, 중국공산당은 냉소적으로 아이디트 일파를 “프롤레타리아의 독립적 역할을 방기하고 민족부르주아지의 부속물로 전락시켰다.”고 비판했다(북경주보, 1967년 7월 14일). 살아남은 인도네시아공산당 지도자들은 이후 망명지에서 ‘자기비판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부르주아지와의 “단결” 전략은 중국 지도자들의 승인 아래 여전히 옹호되었다.

 

“민족자본가와의 통일전선에서 당에 의해 저질러진 잘못에 대해 교정한다고 해서, 이 계급과 단결할 필요가 이제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노동계급의 지도 아래 노동자 농민 동맹의 기초 위에서, 우리의 당은 반드시 민족자본가 계급을 혁명의 우군으로 전취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북경주보, 1967년 7월 21일


 

마오주의 이론에서, 민족자본가를 혁명의 우군으로 전취해야 한다는 사상은 2단계 전략의 근본적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혁명전 러시아의 자유주의 부르주아 입헌민주당처럼, 수카르노가 대표하는 민족주의자들은 단지 지배계급의 더 노골적인 우익 분파들과 다른 정책을 추구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자본주의 질서를 안정시키기 위해 일정한 개량을 준비하고 있었다. 반면에 수하르토와 그 지지자들은 노동자 농민 조직들과 함께 하기보다는 분쇄하기를 원했다. 그 같은 [지배계급 내부의] 좌/우의 존재는 모든 자본주의 나라들에 그 구체적 모습만 달리하며 존재하는 것이다. 전술에 관해 지배분파들이 서로 논쟁을 벌이기도 하지만, 자본주의 소유구조가 심각히 위협당할 때는 그들은 하나가 되어 막아선다. 자본주의 사회관계 철폐를 목적으로 하는 정권에 참여할, 일정 규모의 부르주아는 존재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중국에서 신민주주의가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자본주의 국가가 내전을 통해 분쇄되고 대자본가들이 사라져서 중국공산당이 완전한 통제권을 거머쥔 특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네팔 자본가계급의 형성

 

네팔 지배계급은 지극히 반동적이고 후진적이다. 이점이 뭔가 ‘진보적’ 부르주아를 찾아나서는 함정에 빠지게 되는 중요 요인이다.

 

17, 18세기 동안 지금의 네팔을 포함하는 영토는 여러 개의 작은 고지대국가들로 나뉘어 있었다. 그 지배자들은 자신들이 인도 곳곳을 오랫동안 다스려온 상류계급인 라지푸트족(Rajput)의 후손이라 주장했다. 11세기 이후부터 상위계층(브라민&체트리)의 전사와 인도아리안 혈통은 토착 소수종족들을 정복하며 인도에서 네팔 고원지대로 이동했다. 새 지배자들은 고지대 종족들을 하위계층으로 귀속시키며 합병하였다. 그들에게 병역과 조세의무를 부과했다. 인도아리안은 이주한 전사에 딸린 낮은 계층의 공예가와 농민으로 차등화되었다. 현 네팔의 복잡한 사회 구성(60~70개의 종족과 계층 그리고 70개의 언어와 방언)은 이와 같은 정복과 사회 분화의 결과이다.

 

네팔 국가의 기원은 보통 여러 이웃 나라들을 정복한 고지대 국가의 지배자 구르카[네팔 중부의 도시]의 프리트비 나리얀 샤로 소급된다. ‘구르카 정벌’은 월등한 무기와 이웃한 무굴 제국 (그 당시 프랑스와 영국의 쟁탈지였던)의 약세 그리고 샤[Shah: 황제]가 그 경쟁자들의 신하에게 땅을 나눠주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한 의지로 촉진되었다. 18세기 말, 샤 왕조는 현 네팔의 영토 거의 대부분을 통치했다. 이 정벌은 1814~16년 사이 벌어졌던 영국 동인도회사와의 전쟁으로 마침내 저지되었다. 당시 동인도회사는 인도 대륙 전체를 장악하고 있었다.

 

네팔이 공식적인 식민지화를 면하긴 했지만, 인도의 통치를 통해 영국과 반(半)식민지 관계가 되었다. 이집트 에티오피아 아프가니스탄 페르시아처럼, 대영제국의 참모들은 네팔에 대해, 외교정책과 교역권은 가지면서 자치권은 허용하는 방법으로 총비용을 줄이고자 했다. 1923년까지 효력을 발휘했던 1816년의 수고울리 조약은, 네팔이 그 어떤 외국세력과도 직접 대화하는 것을 금지했다.

 

“거의 1세기 동안, 영국과 네팔 지배자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협정 위에서, 네팔은 대영제국에 정치적으로 의존해 있었다. 영국은 북쪽의 잠재적인 적대 세력으로부터 방어할 완충지역, 네팔 고지대(유명한 구르카)로부터의 안정적 병사 공급, 대량생산 제품을 팔아먹을 수 있는 작지만 성장하는 독점시장, 그리고 보다 중요하게 네팔과 티베트의 천연자원과 1차 산품을 얻었다. 한편 네팔은 최소한도의 지지와 후원 그리고 보다 중요하게 변화를 강요할 외부세력으로부터의 보호막을 얻었다.”—Piers Blaikie, John Cameron and David Seddon, 「위기의 네팔: 성장과 정체’」


 

외부의 정복을 통한 확장이 불가능해지자, 네팔 귀족가문들은 농민 착취를 강화하고 국가 통치권을 둘러싸고 자기끼리 싸웠다. 1846년 코트 학살 때, 쿤와르 가문(훗날 ‘라나(Ranas)’라고 칭한)은 영국의 도움을 통해 정권을 장악하여 주요 정적들을 제거하고 쇠약해진 샤 왕조를 굴복시켰다.

 

라나 왕조는 점진적으로 세계 자본주의 시장에 편입되어가는(즉, 종속되어가는) 시기의 네팔을 1세기 가량 지배했다. 라나 왕조는, 고지대 종족(janajati)이 살고 있는 공동소유의 일정 토지를 제외한, 모든 토지는 원칙적으로 국가가 통제하는 토지소유제를 계승 강화했다. 국가소유의 땅덩이들—그리고 거기서 일하는 농민들—은 귀족 집안, 병사, 종교 지도자들과 수도승들에게 정권에 충성하는 대가로 할당되었다. 대부분의 토지는 라나 왕가나 귀족집안과 관련된 상층집단에게 돌아갔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농민들은 지주들에게 소작료를 내고, 무임금의 노력봉사를 하고 토지세를 납부해야 했다. 소작료나 세금을 내기 위해 농민들은 지주들로부터 돈을 꾸어야 했고, 그것은 현실적으로 채무 노예로 전락하는 길이었다.

 

인구가 증가하자 토지 수요도 증가했다. 지주들은 보다 높은 소작료와 이자를 짜낼 수 있었다. 국가 운영자로서 지주들은 ‘사법’을 관장한다는 명목 아래, 벌금과 지역시장 통제권 등 새로운 수입원을 발견했다. 그러나 할당된 토지소유권을 국가가 갖고 있었기 때문에 유럽과 같은 봉건영주는 탄생하지 않았다.

 

영국은 라나 왕조에 국내시장 독점권을 어쩔 수 없이 허용했다. 시장도시와 전국적 유통망이 형성되었다. 네팔 상인들은 세계시장과 국내 농민과 가내수공업자들을 연결하는 중개자가 되었다. 상인들은 공업생산품을 국내로 들여오는 데 중요 역할을 했고, 이것은 농민과 대지주 모두를 파탄시켰다.

 

“[상인들은] 특히 방직 분야에서 농민수공업자와 가내수공업을 파괴했다. 그리고 고리대금업으로 가난한 자들을 털었다. 그들은 기존 지주들을 파산시키거나 기존 지주들이 소작료를 공업생산품과 이윤 유통과정에 편입시키는 새로운 계급으로 거듭나게 했다. 그들은 그리하여 변혁하기보다는 가난하게 만들면서, 외국 산업자본주의가 네팔 국내 생산에 대해 우세를 점하는 데에 기여했다. 한편 승려와 국가 관료를 우군으로 끌어들이면서, 그들이 대표하는 국제적 이해를 국가권력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반대세력으로 형성시켰다.”—Stephen Mikesell, 「네팔의 계급, 국가 그리고 투쟁: 문서들」1989-1995


 

훨씬 싼 수입품에 의해 국내 생산품들이 대체됨에 따라, 농업과 수공업 사이의 전통적 균형이 파괴되었다. 네팔 오지의 마을들이 세계 경제로 편입되고, 농업 생산품의 수입과 생산품의 판매 모두 시장에 종속되고, 네팔 상인들에 대한 신용은 농민과 지주 모두에게 치명적인 문제가 되었다.

 

상인(그리고 그들을 통한 외국 산업자본)의 지배는 토지 자산의 사유화(즉, 자본주의화)를 촉진시켰다. 라나 왕조, 귀족 그리고 그들의 동맹자들은 제한 없이 그들의 자산을 대여, 저당, 판매 등을 통해 현금화할 수 있는 형태의 재산으로 바꾸려고 했다. 이것은 외국자본의 지배 아래 부동산과 상업자본의 결합을 가속화했다. 거상들은 지주가 되어 기존의 소작관계를 유지하고, 한편 지주들은 금융과 상업에 뛰어들었다. 맑스는 자신의 「민족학 노트(Ethnological Notebooks)」에서 1850년대 인도에서 일어난 비슷한 과정을 묘사하면서, 그 과정을 단순히 ‘봉건적’ 관계라고 설명하는 자들을 조롱한 바 있다.

 

1930년대에 라나 왕조는 외국자본 침투에 맞서고자 했다. 수입을 제한하고, 신설한 가내수공업부의 지원(특히 직물)을 통해 국내 산업을 되살리려 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많은 네팔 엘리트(상인, 지주 그리고 지식인)들은 라나 왕조의 통치에 반감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전에 있던 두 개의 반(反)라나 정당(네팔민족의회/ 네팔민주의회)을 합쳐 1950년 출범한 네팔 국민회의당(Nepali Congress Party)은 “민주적 사회주의”를 표방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것은 지주에 기반을 두고 설립된 부르주아 민족주의 정당이었다. 이 정당은 샤 왕조 잔당과 트리부하벤 왕(King Tribuhaven) 그리고 영국에 충성하는 라나왕조를 갈아치우고 싶어하는 인도국민회의당의 지지를 받았다. 인도정부는 네팔국민회의당의 병사들에게 무기를 제공하고 봉기 기지를 제공했다.

 

의회파는 정부군을 어렵지 않게 제압할 수 있었다. 그러나 라나 왕조만을 겨냥한 이 싸움이, 자칫 불평등한 착취체제 전체를 향한 전국적 저항으로 변질될지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를 피하기 위해 네루와 다른 인도 지도자들은, 왕과 라나 왕조 그리고 네팔국민회의당 사이의 협정을 체결하는 것을 도왔다. 1951년의 (‘민주주의 혁명’으로 불리는) 델리협정은 구체제의 국가 기구를 보존하고 기존의 사회관계를 유지했다. 한편 많은 수의 지배 엘리트들이 통치 업무에 관여할 수 있게 했다. 샤 왕조는 다시 우월한 지위를 획득했고, 라나 왕조와 네팔국민회의당은 공동정부를 구성했다. 보다 급진적인 변화를 갈망하는 인민을 달래기 위해, 트리부하벤 왕은 냉소적으로 제헌의회 선거를 약속했지만 곧 철회했다.

 

 

 

 

 

  Ⅱ. 네팔 마오주의: ‘인민전쟁’에서 ‘다당제주의’로

 

 

 

인도공산당 투사 모한 아드히카리[Man Mohan Adhikari (1920~1999) ULM(맑스레닌주의연합) 지도자. 1994년에서 1995년까지 네팔 수상. 네팔에서 선거로 뽑힌 최초의 공산주의자]가 이끈, 비랏나게르에 있던 섬유/의류 공장에서의 1947 년 파업이 네팔 공산주의의 기원이라고 일컬어진다. 네팔의 의미 있는 첫 번째 산업투쟁인 비랏나게르 파업은 강력한 공산주의 전통을 노동운동에 수립했다. 1949 년 9 월 아드히카리와 그의 지지자들은 푸쉬파 랄 슈레샤와 네팔국민회의로부터 나온 좌익 인사에 합세하여 네팔공산당 (CPN) 을 조직했다.

 

제헌의회 선거를 국왕이 불허하자 CPN 은 대중선동을 개시했다. 델리협약은 거부했지만, CPN(M)이 이후에 개진한 것과 기본적으로 같은 범(凡) 정당 연석회의, 과도정부 그리고 제헌의회를 요구하면서, 스탈린주의 2 단계 전략을 수용했다. 20 년 동안 계급협조주의적인 ‘첫 단계’가 전제군주에 맞서 네팔국민회의(Nepal Congress)와 동맹한 ‘반봉건’이어야 할지, 아니면 제국주의와 인도패권주의의 도구로 여겨지던 네팔국민회의에 맞서 다른 부르주아 정당(심지어 군주주의 정당)과 ‘반제국주의’ 동맹을 맺어야 할 것인지를 둘러싼 논쟁이 지속됐다. 처음에 CPN 은 네팔국민회의에 반대하는 ‘진보세력’의 통일전선을 주창했다. 1955년 CPN은 합법화 조치의 대가로, 공화국 요구를 포기하고 국가의 헌법적 수장으로서 왕의 존재를 인정했다.

 

1959 년 마헨드라 국왕은 군주에게 무한한 권위를 부여하는 왕실 제정 헌법 아래에서 네팔의 첫 총선을 허용했다. 승리한 정당이 비르타(birta) 토지소유제도에 약간의 개혁을 제안하자, 국왕은 비상대권을 발동하여 의회를 해산하고 정당을 금지하고 그 지도자들을 체포했다. 네팔국민회의(Nepal Congress)는 인도 땅에서 반란을 조직하려 했으나, 1962 년 발발한 중국과 인도 전쟁 때문에 네루 대통령이 반란에 대한 지원을 중단함에 따라 그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네팔국민회의로서는 어쩔 수 없이 냉전 상태를 ‘안정’시키는 힘으로 군주제를 수용했다.

 

의회의 <마헨드라 결의안(Mahendra’s dissolution of parliament)>과 1962 년 ‘정당 없는 민주주의’(Panchayat) 선언은 네팔공산당 (CPN)을 몇 개의 분파로 분리시켰다. 우파의 지지를 받는 중앙위원회는 왕의 행동을 “진보적”이라고 환영했다. 네팔공산당의 다른 부위는 의회의 복구를 위해 네팔국민회의와의 동맹을 옹호했다. 모한 비크람 싱이 이끄는 가장 큰 분파는 당의 애초의 요구인 제헌의회를 전면에 제기했다. CPN(M)은 1979년 “게릴라 훈련, 당 간부들의 프롤레타리아트화, 근거지 확립, 지역 부패에 대한 저항 그리고 농민 봉기 주도(Thapa에서 인용)”에 힘쓰던 싱의 네팔공산당 (4 차 총회)에서 나왔다. 1996년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작업은 거의 실행되지 않았다.

 

수년 동안 가장 두드러진 마오주의 그룹은 네팔공산당(맑스레닌주의)이었다. 그 당은 CPN(M)의 ‘인민전쟁’보다 이전에 있었던 유일한 공산주의 농민봉기인 1971 년 네팔 동부의 자파 봉기에서 탄생했다. 이웃한 인도의 낙살바리 마오주의 게릴라와 중국 문화혁명의 홍군을 모델로 하여, 자파 지역위원회 성원들은 농촌에 있는 “계급의 적” 일소를 결의하고, 정부군에 의해 진압되기까지 7 명을 처단했다. 실패로 끝났지만, 이 군사적 모험은 다른 스탈린주의 분자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1990 년 경 가장 규모가 큰 공산주의 조직인 CPN(ML)을 낳았다.

 

그 군사 이력에도 불구하고 CPN(ML)은 일관되게 네팔국민회의를 추종했다. 1979 년 전제군주적인 판차야트 체제에 저항하는 학생운동을 조직했고 그 운동에 대한 지지층은 빠르게 늘어났다. 그러나 (인도에서 가동되는) 네팔국민회의가 왕과의 협상 끝에 국민투표를 통한 문제 해결을 약속하자, CPN(ML)은 그 운동을 즉각 해산시켰다. 그러자 군부는 전면에 나서서 투표자를 협박하고 투표함을 부정표로 채우는 등의 방법으로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려 했다.

 

1980 년대 말 경, 농업이 지배적이었던 네팔은 서비스와 산업 부문이 많이 발전되었다. 많은 상인들은 호텔이나 관광시설에 투자했고, 카펫과 의류 공장이 설립되고 주력 수출품은 농산물이 아니라 공산품이 되었다. 1980 년대 중반 제국주의가 강요하는 ‘구조조정 계획’ 은 투자법규들을 ‘자유화’했고 주로 인도와 미국의 외국자본의 침투를 촉진했다. 모든 행위자들은 자신들의 경제적 역량에 상응하는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정권에 대한 인민들의 불만은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1960 년대, 마헨드라 왕의 토지개혁은 경작 가능한 토지의 1.5%만을 재분배했고 공공토지의 여분을 나누어 분배했으나 생존하기에는 턱없이 적은 크기였다. 그 후 새로이 ‘해방된’ 영세농들이 빚더미에 오르고 대지주에 의존하게 되면서, 땅이 없거나 가난한 농부들의 곤궁한 처지를 더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구조조정’과 사유화는 그 당시까지 농민과 도시빈민의 생존을 위해 지원되던 전기, 수도, 연료 그리고 기초 생활용품에 대한 보조금을 철폐시켰다.

 

1989년 CPN(ML)은 좌익조직 여남은 개의 지지를 얻어 정당의 법적 금지에 저항하는 잔 안돌란 (Jan Andolan: “인민 운동”)을 출범시켰다. 이 운동은 네팔국민회의와 그를 지지하는 지배계급 일부의 지지를 받았다. 1990 년 2 월의 첫 ‘대중 집회’로부터 CPN(ML)은 군주주의자를 소외시키지 않도록 하기 위해 네팔국민회의를 전면에 내세우고 운동의 선전자로 나서게 했다. 그러나 혹독한 경찰의 탄압과 대량체포는 지방과 도시 모두의 저항을 급진화시켰다. 그 운동은 1990년 4월 6일 절정에 도달하기까지 7주 동안 지속됐다. 카트만두에서 궁전을 향해 행진하는 노동자 대열에 1만 명의 농민여성들이 낫으로 무장하고 합류했다. 행진대열이 궁전에 다가가자 군대는 발포했고 약 1,500 명을 학살했다. 대중적 분노를 가라앉히고 시위대를 흩어놓기 위해 왕, 의회 그리고 CPN(ML)이 이끄는 좌익전선은 4월 9일 정당금지법 폐지에 신속히 합의했다. 대중저항이 가라앉자, 네팔국민회의와 왕당파는 CPN(ML)의 제헌의회 요구를 무시했고, 대신에 CPN(ML)의 대표들도 참여하는 ‘헌법기초위원회’를 설립했다.

 

그 위원회는 다당제 의회제를 허용하는 헌법을 기초했지만, 군주정에 광범한 ‘비상’ 권력을 부여했다. 1951 년의 ‘민주주의 혁명’처럼, 잔 안돌란 운동은 정치적으로 불만을 가진 특권 엘리트들에 정부기관의 한직(閒職)으로 진출할 기회를 제공했다. 두 경우 모두, 지배 계급의 모든 분파는 사적소유제 전체가 위협받는 공포 때문에 민중들의 결집에 반대했다. ‘노동자와 농민의 투쟁이 그 부르주아 “동맹”을 절대 해쳐서는 안 된다’ 라는 CPN(ML)의 주장은, 어떤 국가기관도 제공하지 못하는 효과 만점의 안전판을 착취계급에게 제공했다.

 

네팔의 계급투쟁 경험은, 노동인민의 우선적 과제는 ‘봉건제’의 철폐라는 주장을 반박한다. 1927년 중국 상황에 대한 트로츠키의 고찰은 네팔의 지금 정국에도 온전히 적용할 수 있다.

 

“밝혀진 것처럼, 부르주아지는 부하린이 말하는 ‘봉건제’에 맞선 혁명투쟁에 나서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우연이 아니다. 중국에서 부르주아지에 맞선 귀족 군주는 존재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지주는 도시 부르주아이다. 소지주―쿨락이나, 준귀족층―는 고리대금업자와 도시 부르주아와 긴밀히 얽혀있다.

 

“말장난을 하지 않는다면, 중국에 봉건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봉건제가 아니라 부르주아 소유형태와 부르주아 사회정치 질서로 완성된 농노소유관계가 중국 촌락에 존재한다. …물론 중국에서 빈곤과 억압은 봉건제에서도 좀처럼 보기 힘든 비인간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널리 유행하는 것처럼, 중국을 봉건제 국가라고 설명하려는 시도는 사실관계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와의 협력을 정당화하려는 순수한 욕망에 기초한 것이다. 실제사실은 그러한 시도에 복수를 할 것이다. 중국에서 이른바 ‘ 봉건제’, 결국 자기 자신에 맞서 혁명적 투쟁을 전개하려는 그러한 부르주아지나 부르주아 분파는 이제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중국 혁명을 위한 새로운 기회, 임무 그리고 새로운 실수들」, 1927년 9월, 트로츠키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향한 긴 행군

 

1991년 CPN(ML)은 작은 규모의 스탈린주의 조직으로 탄생했다. 그리고 보통 UML로 통하는 CPN(맑스레닌주의연합)으로 개칭했다. 부르주아 의회주의를 도입하면서, 선거 전에는 각종 공약들을 내세웠다가 나중에 부정하는 보통의 사회민주당과 유사한 활동을 UML은 개시했다. UML의 새 총수인 만 모한 아디카리는 “공산주의”라는 딱지는 단순히 “상표”일 뿐이라고 노골적으로 무시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이름을 기억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다른 것으로 바꾸는 데에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다른 나라에서라면 우리는 사회민주당일 것이다(Pacific Affairs, 1995년 봄).” CPN(M) 의 프라찬다는, “가장 반동적인 수정주의”를 이루기 위해 ‘신민주주의’ 전망을 포기했다고 UML을 비난한다 (“인민전쟁의 세 번째 격동”, 카르키와 세돈의 글에서 인용). 그러나 UML의 비겁한 선거주의와 부르주아 정당들과 더불어 입각하고자 하는 열망은, 온전히 계급협조주의와 2단계 전략의 논리적 결과물이다. 1993년의 첫 의회에서 UML은 “다당제 인민민주주의” 론을 “봉건제, 독점 자본주의 그리고 모든 억압과 착취에 맞서 지속적으로 투쟁하는 다당제 정치구조와 다원적 사회”로 나아가는 길로 승인한 바 있다(Pacific Affairs, 1995년 봄).

 

1990년 4 월 대중 시위가 30 년에 걸친 판차에트 정권을 끝장내었을 때, 폭압을 종식시키는 ‘민주주의’가 도입될 것이라는 희망으로 가득했다. “1990년의 헌법에 기초한 의회가 사회정의와 민족자결권, 여성해방 그리고 급진적 토지개혁을 가져다 줄 수 없다는 것을 대중이 점점 깨달으면서” 그러한 환상은 얼마 지나지 않아 증발되었다(주간정치경제, 2007년 5월 19일).

 

1994년 아디카리는 처음으로 남아시아에 이른바 ‘공산주의’ 정부를 수립했다. 9 개월의 집권기간 동안, UML은 온건한 토지개혁마저 법제화하는 데에 실패했고, 이전 정권이 해 놓은 사유화를 되돌리는 일도 거의 하지 못했다. 세계은행과 IMF의 ‘구조조정’이 실시되었고 채무원리금 변제액을 수출량으로 나눈 지수(제국주의 금융 자본가들의 지배 정도를 알리는 대략의 지표)는 전례 없이 35%까지 솟구쳤다. 1995년 7월 그의 정부가 해산하기 이전, 1996년 2월 CPN(M)이 무기를 들기 전에 네팔국민회의에 전달한 40개 요구목록을 38개 항으로 정리한 것을 아디카리가 받았지만 이내 무시했다.

 

‘인민전쟁’ 발발의 직접적 요인은 롤파와 루쿰의 마오주의 근거지의 저항에 대한 지원을 차단하려는 경찰의 잔혹한 진압작전 때문이었다. 무작위적인 체포와 고문 , 강간 그리고 초법적인 학살 등으로 점철된 일명 ‘로메오 작전’은 대단히 잔인한 것이었다. 어떤 마오주의 간부는 “그들은 돌덩이를 들어 자기 발등 위에 떨어뜨렸다.”라고 지적했다 (<타파 Thapa>에서 인용 ).

 

마오주의 봉기는 지방의 피억압인민이 지닌 분노와 절망의 물꼬를 터뜨렸다. 네팔을 신민주주의 국가로 만들겠다는 의지와 착취체제에 대한 전면적 비판에 기초하여, CPN(M) 은 지지자들을 규합했다. ‘민족자본가’는 혁명의 동맹이라는 이론을 떠받들면서, CPN(M)은 다른 모든 정당을 반동 또는 수정주의라고 비난했다. 이것은 비난의 대상인 그들이 곧 ‘민족자본가’의 정치적 대표체(그들과 더불어 이른바 ‘통일전선’ 을 결성해야 할)라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이다.

 

40개의 절충적 요구안은 더욱 혼란스럽게 했을 뿐이다. 외국자본 지배의 종식, 경작자에 토지 분배, 모든 이들에 일자리 보장 등 몇몇 중요한 사회적 목표들은 오직 자본주의 국가를 철폐한 후에야 성취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 ‘왕의 특권과 특혜’의 종식, 여성에 대한 평등한 재산권, 소수 민족의 자치, 인도와의 불평등조약 철폐, ‘인민대표’ 들에 의한 새 헌법의 제정 등 대부분의 제안들은 개량적인 것들이다. 힌두 영화와 신문 그리고 잡지 수입으로 인한 “문화오염” 을 막자는 인종주의적 요청 등 몇 가지는 명백히 반동적 성격을 띠고 있다. 어느 UML 대변인은 이렇게 말했다.

 

“그 요구들은 의회에 참가하고 있는 모든 야당이 만든 요구들과 크게 유사하며 정부내각의 일반적 결정으로 성취될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 네팔 사드바와나 당과 라스트리아 프라자탄트라 당 같은 극우 (군주주의) 정당들도 요즘 유사한 요구들을 제출하고 있다.” —「마오주의 운동과 그것이 네팔에 끼친 영향」, in Karki and Seddon


 

물론 UML을 포함한 어떤 야당도 집권 당시 이 정책들을 집행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의 실패가 CPN(M) 의 명백한 진정성과 결합하여, 마오주의 강령에 대중적 인기를 안겼다.

 

십 년의 ‘인민전쟁’ 동안 마오주의자들은 (모순되는) 양면정책을 추구했다. 한편으로 농민군이 방어하는 농촌 기지에서 초보적인 정치기구를 수립하며 전형적인 게릴라 작전을 펼쳤다 . 동시에 CPN(M) 지도부는 정부 그리고 야당들과 40개 요구안에 기초하여 공식/비공식적 대화를 시도했다. 많은 요구안들이 상대적으로 지엽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협상의 문이 열렸고, ‘진보적’ ‘반제국주의’ 전선의 동반자로 CPN(M)을 지지하던 야당들에게 제안될 수 있었다. 요구 목록은 점점 깎여나가다가, 임시정부, 제헌의회, 공화정 이 세 개의 ‘정치적’ 요구에 모든 관심이 쏠렸다. 2001년 초 마오주의자들은, 타협안을 성사시킬 욕심으로 심지어 공화정 요구마저 포기할 의향을 내비쳤다.

 

CPN(M)의 마오주의 좌파 비평가들은, 2005 년 이후 당의 변화가 ‘인민전쟁’의 책무를 망각하는 협상의 논리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CPN(M) 의 지도자들을, 그들 이전의 CPN(ML) 의 지도자들처럼, 신민주주의 노선을 저버리고, 어렵게 얻은 성과마저 부르주아지와 같은 자리에 앉기 위해 청산한 “우익기회주의 노선”의 신봉자들이라고 조롱한다. 이 같은 설명은 전략적 실패를, 그것을 수행한 개인의 결점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그와 같은 분석은 ‘인민전쟁’과 계급협조주의가 동전의 양면이라는 사실을 망각하는 것이다. 게릴라운동의 성공은 CPN(M)에게 ‘지배계급을 전복할 것인가 아니면 그들과 신민주주의적 타협을 할 것인가’하는 단 두 개의 선택지만 남겨 놓았다.

 

 

 

‘인민전쟁’ 의 역학

 

자파(Jhapa) 투사들과 인도 낙살당원(Naxalite)의 앞선 경험은, 농촌 반란군은 그들이 분쇄되기 전 몇 명의 지주들을 처형하는 것 이상으로 좀처럼 나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농민투쟁은 본성적으로 상업, 산업, 금융의 중심지로부터 떨어져 있다. 심지어 가장 가난한 농민―네팔에서, 수쿰바시(sukumbasi)―은 경작지를 얻는 것을 자신들의 최대 소원으로 간주한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 지주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으며 몰락한 지식인층이 선동하는 위험한 투쟁에 개입하기를 주저한다. 농민 봉기가 즉각 진압되지 않는 경우는 대부분, 지주와 부농의 분노를 누그러뜨린 경우이거나 사회적으로―지리적으로―외진 곳으로 후퇴한 경우이다. 인도의 숲 속에 사는 토착 ‘부족’들 속에 들어가 그들에 동화되는 것이 바로 낙살당원들이 그간 해 온 일이다. 낙살당원들은 결과적으로 마을과 도시만 잃은 것이 아니라, 경찰이 많이 깔린 자본주의적 경작지들마저 잃어버렸다(주간정치경제, 2006년 7월 22일). 농민들과 달리 노동자들은, 생산수단 운송 그리고 통신과의 전략적 연계 때문에, 자본주의 생명줄인 이윤의 흐름을 멈출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네팔 ‘인민전쟁’의 예외적 성공은 몇 가지 요인 때문이다. 도로와 철도의 미개발로 정부군이 게릴라군을 쉽사리 격퇴할 수 없었고, 다른 농민 봉기는 거의 누릴 수 없었던 험준한 지세가 방어를 용이하게 했다. 주간정치경제(Economic and Political Weekly)에 따르면, 대략 3분의 2 정도의 땅이 “개발 계획이나 사회보장을 접한 적이 없고 (경찰을 포함한) 정부기관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라고 한다. 경작지가 없는 농민이 상대적으로 많고 대지주가 서부지역에 없다는 점도 농민봉기에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경찰과 네팔 왕실군(Royal Nepal Army: RNA)의 일관된 잔인성은 또 다른 중요요인이다. 브뤼셀에 본부가 있는 국제위기감시기구(International Crisis Group)는 이렇게 진단했다 .

 

“2001 년 후반 상황이 더욱 심각해져서 네팔 왕실군이 개입하기 이전에도, 마오주의자에 대한 경찰의 대응은 잔인했고 동조자로 의심되는 모든 사람을 적대시했다. 영장 없는 체포, 고 , 강간 그리고 재판 없는 처형이 횡행했다. 2000 년에는 루쿰 지방의 카라에서 마을 하나를 전부 불태우는 등 과잉 폭력이 난무했다. 이와 같은 대응은 오히려 반란군의 인기를 높여줄 뿐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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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는 마오주의자들에게 본때를 보이겠다고 약속했고, 최고사령부와 왕실로부터 결과를 보이라는 압력을 받았다. 대(對) 인민봉기 작전경험이 없는 군대는 전략적 성과는 없으면서 살상만 늘렸다. 전투의 후반기 동안 군대와 밀접했던 인사는, ‘명령계통에서 살상 인원을 늘리라는 강도 높은 압박이 매일 떨어졌다.’라고 회상한다. 포상도 있었다. 성과를 내면 너희들이 소원하는 유엔평화유지군에 넣어주겠다고 지휘관과 하급병사에게 말하기도 했다.”―「네팔 : 평화와 정의」, 2010년 1월 14일

 

내전 기간 살해된 13,000명 중 “대다수는 정부군에 의한 것이다(같은 글 ).” 2002년 4월 내무장관 데벤드라 라즈 켄달은, 죽여서든 살려서든 CPN(M) 지도자를 잡아올 경우 현금으로 보상하는 계획에 대해 설명했다. “(마오주의자들)의 근거지를 알리거나 그들의 머리를 가져오는 사람에게는 그 머리를 담은 가방 크기만큼의 현금을 줄 것이다(주간정치경제, 2002년 9월 7일).”


 

네팔 지배계급을 후원하는 가장 큰 외국투자자는 미국과 인도이다. 자기 자신이 제국주의 지배의 먹잇감이면서, 인도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히말라야에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 네팔 사람들은 자기 나라가 인도 손아귀 안에 있고, 이웃의 산악 국가들과 같은 운명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인도 군은 1970 년에 시킴 [Sikkim: 인도의 서벵골 주 북부에 위치. 영국의 보호령을 거쳐 1950 년 인도의 보호국이 됨. 1975 년 5 월 주민들의 반대 운동을 무릅쓰고 시킴 왕국을 22 번째 주로 공식 합병시켰다] 을 총 한 방 쏘지 않고 점령했다. 이 작은 산악 국가는 이후 인도에 합병되었다. 1975 년 시킴은 인도 연방의 한 주(州)가 되었다. …

 

“불교를 신봉하며 오랫동안 독립국이었던 4 개의 히말라야 왕국―티베트, 라다크, 시킴, 부탄―은 이웃한 강국들인 인도와 중국에 합병되었다. 종교와 문화가 티베트보다 떨어질 것이 없지만, 다른 ‘작은 티베트’들인 세 나라의 합병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에릭 마골리스, 「세계 꼭대기에서의 전쟁 : 아시아의 지배권을 향한 충돌」


 

네팔이 중국과 경제 안보 관계를 발전시킬까 봐 인도는 노심초사한다. 1950년 네팔이 서명한 불평등조약이 약화될 것과 아직 개발되지 않는 광대한 수력발전에 접근하지 못할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1988 년 인도는, 1950 년 체결된 평화우호조약에 명기된 바를 지키지 않고 인도의 사전허락 없이 무기를 구매했다는 이유로 15개월 동안 네팔을 봉쇄했다. 인도 부르주아지는 네팔 마오주의 봉기의 성공이, 소름끼칠 정도로 착취당하는 자국의 피착취계층을 자칫 자극하여 “총을 들”게 할까봐 신경 쓰고 있다. 이 때문에 인도 정부는 네팔 군대의 무기 확충을 재정적으로 지원해 왔다. 인도 관리들은 스탈린주의 인도공산당 ( 맑스주의 ) 이 이끄는 서벵갈 주정부의 협조 속에, 망명한 네팔 마오주의자들을 구금하고 있다.

 

미국 제국주의는, 특히 ‘붉은 중국’ 을 상대로, 정보수집과 비밀작전 기지로 네팔을 이용해 왔다. 달라이 라마와 그의 반혁명 집단에게 건네진 수백만 달러는, 네팔에 기지를 두고 1960년대와 1970년대 초 작전을 전개한 ‘캄파’ 티베트 게릴라 활동을 지원하는 데에 쓰였다. 오늘날, 미국의 우선적 목표는 기형적 노동자국가 중국을 군사적으로 에워싸고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는 친인도 완충국으로 네팔을 유지시키는 것이다. 미국정부는 인도 자본가계급과 더불어, 네팔 마오주의자들의 영향력과 카트만두에서 낙살당원이 통제하는 인도 동쪽까지 이어지는 ‘붉은 회랑[回廊: 길게 이어진 땅]’의 확장을 경계한다. 네팔 내전 동안 부시 정부는 CPN(M)을 요주의 테러리스트 목록에 올렸다. 미 국무장관 리처드 아미티지는, 마오주의자는 “테러를 자행하며 국가안보, 외교 그리고 미국의 경제에 해를 끼치는 심각한 위협”이라고 선언했다(국무 분석, 2009년 1월 ). 미 대사관 제임스 모리아티가 비슷한 정서를 표출했다.

 

“모리아티는 말하길, 이 지역의 커다란 골칫거리는 이슬람 근본주의가 아니라 매우 열렬한 마오주의 집단이다. 그들은 미국을 침략할 것이라고 말해왔다. 나는 그것에 크게 신경 쓰지 않지만, 무시해서도 안 된다. 여러분들은 마오주의자와 그들의 위협에 대해서 콧방귀 뀌지는 못할 것이다.”—Harper’s Magazine, 2005년 5월


 

“범죄와의 전쟁” 일환으로, 미국은 군사지원 명목으로 수백만 달러와 20,000정의 M-16 그리고 한 떼의 군사고문단을 보내 네팔의 안보기구를 강화했다.

 

 

 

마오주의 근거지의 사회적 성과

 

네팔 지배계급이 자행한 전면적 억압과 살인적 착취에 맞서, 마오주의자들은 온건하지만 의미심장한 사회개혁을 실시할 수 있었다. 마오주의 근거지는 2001년 CPN(M)이 설립한 ‘통합혁명인민위원회(United Revolutionary People’s Council: URPC)’가 통제했다. URPC는 리, 읍, 면, 군 단위 인민위원회를 기초로 신민주주의를 실현하고 대안정부의 맹아로 고안되었다. 마오주의자들은 그것을 1940년대 국민당과의 2차 국공합작 당시 마오 당의 삼삼제(三三制)[항일전쟁기간에 공산당이 채택한 정책으로, 이에 따르면 공산당, 진보세력, 중도파 3세력이 반제국주의 민주주의 정부를 구성한다.] 정책을 따서 3자합동회의 (‘3-in-1 committees’)라고 불렀다.

 

“이른바 삼삼제 정책―공산주의자들이 게릴라 지역 정부의 3분의 1만 차지하는 정책―은 실제적으로 ‘공동전선’이 아니었다. 즉, 농민의 지지가 필요하다는 의미에서. 농민과 당의 결합은 삼삼제에 기초를 둔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농민들은 대중조직이나 군대를 통해서 공산주의자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삼삼제는 지역의 비공산주의 지도자나 지주, 부농 그리고 다른 유명 인사들을 지역 정부에 끌어들이기 위한 것이었다.”—Chalmers Johnson, 「농민 민족주의와 공산주의 권력 : 혁명 중국의 등장 1937~1945 」


 

CPN(M)의 3자합동회의는 당의 전선으로서 작동했다. 3분의 1의 성원은 공개적 당원이었고 나머지는 인민해방군과 마오주의자들이 이끄는 ‘대중조직’에서 충원되었다.

 

CPN(M) 근거지에서 대토지 소유자의 땅은 농민들에게 분배되었고, 부채는 탕감되었으며, 채무농노제는 폐지되었고 카마이야 농노에게는, 최소한 일정 지역에서, 드디어 어느 정도의 토지가 배분되었다. 마오주의자는 소규모 토지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비탈진 땅’ 을 협동경작하는 것을 장려했다. 한편 롤파와 루쿰에는 3개의 ‘해방구(commune)’가 설립되었다(Monthly Review, 2005년 11월). 식품 가공과 더불어 면화, 비누, 양초 그리고 종이의 소규모 제작이 시작되었고, 노동집약적 공공노동을 통해 기초적인 도로와 관개수로를 건설했다. 가난한 사람들 특히 여성과 달리트 (소위 ‘불가촉천민’이라 일컬어지는 카스트의 가장 낮은 계층)도 교육과 의료 혜택을 받게 되었다.

 

마오의 사례를 따라서, CPN(M)은 부농의 땅을 취하지 않았고, 도매업과 무역과 다른 개인적 상업행위를 방해하지 않았다. 이것은 단지 신민주주의와 호응되는 것만이 아니라, 당과 인민해방군이 세금을 거둘 기초가 되었다. 인도 패권주의에 대한 맹렬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마오주의자들은 “네팔에 있는 상당한 양의 인도 자산을 전혀 건드리려 하지 않았다(Saubhagya Shah, “A Himalayan Red Herring?” in Hutt).”

 

마오주의자들의 특별한 관심을 끈 것은 낮은 계층과 소수 민족에 가해지는 극심한 학대였다. 예를 들어, 어떤 지역에서는 달리트의 수도 도로 전기 사용을 금했다. 소수 민족은 역사적으로 카스트 제도의 낮은 계층으로 편입되었고 어느 정도 크기 이상의 토지 소유가 금지되었다. 계급, 카스트 그리고 민족 억압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가운데 극심한 여성 혐오 문화가 가세했다.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나는 계집보다는 개로 태어날 것이다.’ 라는 말을 네팔 사람들이 할 정도로 여성들은 비참한 처지에 놓여있다. 인신매매되는 여성, 애를 낳다가 죽는 여성, 유산이나 낙태로 감옥에 갇힌 가난한 문맹 여성, 춥고 비위생적인 움막에서 월경하는 여성, 사내아이를 낳지 못해 쫓겨나는 여성, 일부다처 중 하나로 들어앉거나 문화적으로 불이익을 당하면서 남자 형제와 비교하여 1:4의 비율로 노동을 분담하는 여자 아이 등이 네팔에서 볼 수 있는 여성의 모습이다.

 

“네팔의 성별 상황을 보면 여성을 차별하는 법이 23 개가 있다. 여성의 수명은 남성보다 2.5 년 정도 짧다. 40%가 넘는 소녀들은 15세에 출가하고 첫아이를 19 세에 낳는다. 출산하다 죽는 여성은 10만 명당 905명으로 이와 비슷한 수치를 가지고 있는 나라는 오직 아프가니스탄 정도이다. 아이 9명 가운데 1명은 다섯 살을 넘기지 못하고 죽는다. …신부 지참금, 일부다처제, 여성 구타, 인신매매가 흔하다. 시민권은 남성을 통해 얻을 수 있고, 결혼하지 않은 딸들만 재산 상속을 받을 수 있다.”—Cultural Dynamics Vol. 16, Nos. 2/3, 2004


 

마오주의 근거지에서 달리트와 소수 민족 그리고 여성에 대한 차별은 공식적으로 금지됐다. 그들은 ‘인민위원회’에 대표를 파견한다. 여성은 인민해방군의 낮은 직급 (비록 높지는 않지만)에 상당히 많다. 나중에 여성 전사들의 비율은 40%에 육박했다. 장총을 멘 마가(Magar)족 여성의 모습은 네팔 인민전쟁의 상징적인 모습이 되었다. 여성에겐 상속권 교육권 그리고 이혼할 권리가 주어진다. 가정폭력과 강간은 심각하게 처벌받으며, 여성은 더 이상 아동결혼과 일부다처제에 종속되지 않는다.

 

그러나 네팔 마오주의가 가져온 해방은 제한적이다. 이것은 단지 시골의 지독히 낮은 생산력 수준 때문만이 아니라, CPN(M)의 정치노선과 소부르주아 계급적 기초 때문이기도 하다. 모델로 삼는 러시아와 중국의 스탈린주의자들처럼, 네팔 마오주의자들은 핵가족이라는 반동적 제도를 옹호하고 권장한다. 2003년 마오주의자가 장악한 루쿰 지방을 여행한 르몽드 기자는 임시감옥을 방문했는데, 그곳에 갇힌 죄수들 중 3분의 1은 ‘혼전 성교나 혼외 성교’로 처벌받고 있었다(같은 글). 결혼과 순결은 당 바깥보다 당 내부에서 더 크게 강조되고 있다. 성이라는 주제에 대해 당의 주대변인인 지도적 지위의 여성은 히실라 야미(또는 파르바티)는 “여성과 남성, 특히 전투원을 위해 행동지침이 작성되었다. 만약 쌍방이 결혼하지 않았을 때 성행위를 하면 결혼을 한다.…만약 둘 중 하나 이상이 결혼을 했는데 성행위를 했다면 경고 받거나 처벌된다(같은 글).” 파르바티는 CPN(M)의 다른 지도자들에 비해 비교적 계몽된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최근 책 ‘인민전쟁과 네팔 여성의 해방’에서 ‘결혼제도’에 대해 비판하기도 한다.

 

“생산관계에서 남성의 헤게모니를 관철시키기 위해, 남성의 편의를 위한 결합이다. 여성에게 그 결합은 가사노예로 전락됨을 의미한다. 슬프게도 공산주의자들의 경우에도 그렇다. 비록 정도가 약하기는 하지만.”


 

CPN(M)의 지도자인 팜파 부샬은 결혼한 여성 동지와 ‘성적 부정’을 저지른 것이 밝혀진 후 중앙위원회에서 쫓겨나서 ‘재교육’을 위해 마을로 하방되었다. 동성애자들 또한 추방된다고 한다.

 

성도덕에 대한 마오주의자들의 관점은 소련에서 ‘가정에서의 테르미도르 반동’이라고 트로츠키가 규정했던 것을 떠올리게 한다. 스탈린을 정점에 세운 관료집단은 볼셰비키가 여성을 해방시키고 동성애를 비범죄화한 전무후무한 노력을 수포로 만들었었다. 궁극적으로 그것들은 CPN(M)의 계급적 기초를 반영한다. 성적 억압과 가부장제는 물질적으로 계급으로 분화된 모든 사회 특유의 가족제도 내에 뿌리를 두고 있다. 여성 억압은 가사노동을 대가 없이 담당하게 한다. 영세농의 지지를 얻기 위해 마오주의자들은 상속권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인 일부일처제라는 보수적인 관습에 맞설 수 없다.

 

한편으로 핵가족을 찬양하면서, CPN(M)은 도덕적 권고를 통해 그 문제점을 완화해보려 한다. 양성이 가사노동을 균등히 분담하는 캠페인 등이 그 예이다. 그러나 보육시설, 학교, 세탁소, 공공식당 등 사회기관에 대한 적극적 투자를 통해, 전통적으로 여성에 할당되었던 가사노동을 사회화하는 방법을 통해서만 여성해방을 이룰 수 있다. 네팔의 여성해방은 일국적 차원의 집산화된 계획 경제로서는 성취될 수 없다. 여성해방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서는 보다 높은 생산성을 가진 다른 나라로 혁명이 확장되는 것이 필요하다.

 

 

 

‘인민전쟁’과 도시 봉기에 대한 CPN(M)

 

CPN(M)은 그들이 통제하는 네팔의 80%에 달하는 지역 중 일부에만 안정적이고 권위 있는 ‘인민위원회’를 수립할 수 있었다. 그들 기지 바깥, 장악력이 떨어지는 지역에서는 인민해방군이 정부군의 주기적 공격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제 이전 국가는 도시와 지방청사 소재지 그리고 고속도로에만 존재한다(Monthly Review, 2005년 11월)”라는 2005년 바르바티의 승리선언은 오히려 마오주의자들이 장악한 곳이 보잘 것 없다는 것을 드러내주는 것이다. 나라의 주요 운송망이 있고 산업, 금융, 상업 그리고 정치행정기관을 갖춘 네팔 국가는 “포위” 되었지만, 위험에 처하지는 않았다. RNA는 나라 전체의 통제권을 확보하지 못했지만, 중무장 된 도시지역을 인민해방군은 장악할 수 없었다. 제국주의의 관대한 지원을 받아 RNA는, 부실하게 무장한 3 만 명의 인민해방군과 마오주의 전사들보다 상당히 큰 규모인, 무장이 잘 된 9 만 명의 병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CPN(M)은 이러한 상황을 예측해 왔던 것으로 보인다. 2001 년 1 월 2 차 전국총회는 도시 봉기와 지방의 ‘인민전쟁’의 결합인 ‘프라찬다 노선(Prachanda Path)’을 채택했다. 이전에 CPN(M)은 노동계급의 무장봉기는 오직 선진자본주의 나라들에만 적용 가능한 전략이라고 여겼지만, 이번 전환으로 러시아와 중국 모델 모두 적용 가능한 것으로 인정하고 최소한 1980년대 이후부터는 두 가지 전략을 혼용하는 것이 필요했다고 결론지은 것이다.

 

“기본적으로, 발전된 제국주의 나라들은 반드시 무장한 도시 봉기를 추구해야 하고 제 3세계의 피억압 나라들은 오늘날에도 인민전쟁이 유효하다는 것에 대해서는 오해의 여지가 없어야 한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변화된 세계정세는 무장봉기와 인민전쟁을 서로 연관시켰고 더구나 그렇게 해야 할 필요가 있다. …

 

“무장봉기 군사노선은, 정치선전의 기초 위에서 반동적 국가의 중심에 있는 노동계급 정당에 의한 지속적인 개입, 혁명적 요구에 기초한 지속적 파업과 가두투쟁을 통한 노동계급을 포함한 대중의 훈련, 군부와 관료집단 내의 계획적인 작업, 다양한 수정주의/개량주의 조직들에 대한 집중적인 정치투쟁, 마지막으로 국제 그리고 국내 상황에서 무장봉기를 통한 국가권력의 장악 등의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 제 3 세계 프롤레타리아가 무장봉기의 위와 같은 성격을 인식하고 적용해야 한다는 것은 명백하다.” —「대약진 : 불가피한 역사적 요구」, The Worker 7호, 2002년 1월


 

1970년대부터 네팔 사회는 크게 바뀌었다. 당시엔 경제활동인구 94%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오늘날엔 13%가 공업에 종사하고 또 다른 21%는 서비스산업에 고용되어 있다. 이 두 부문은 네팔 GDP의 60%를 상회한다. 카트만두 계곡과 타라이(Tarai)의 도시에 집중된 네팔 노동계급은 전투적이고 정치의식이 비교적 높다. 2006년 8월 12일 주간정치경제(The Economic and Political Weekly)는 보도하기를, 신문가판대에서 맑스주의 고전을 일반잡지와 나란히 진열해 판다고 한다. 노동조합 조직률도 높다. 미 국무성 보고서는 약 1백만 명의 노동자가 노동조합에 소속되어 있다고 추산한다(「2009년 투자환경보고 — 네팔」, 2009년 2월). 네팔의 노동조합들은 산업계통에 따라 조직되지 않고 정당에 가입하는 방식으로 조직되어 있다. 가장 큰 조직인 네팔전국노동조합연맹(General Federation of Nepalese Trade Unions: GEFONT)은 UML과 맺어져 있고 네팔노동조합총회(Nepal Trade Union Congress: NTUC)는 네팔국민회의 (Nepali Congress)계열이다. 두 연맹 모두 방직과 카펫 산업에 대표를 가지고 있지만 네팔전국노동조합연맹(GEFONT)은 블루칼라 노동자 비율이 높은 반면, 네팔노동조합총회(NTUC)엔 더 많은 공무원과 소부르주아 교수들이 소속되어 있다. 정당 영향력이 최근 몇 년 동안 약화되긴 했어도, 중요한 이슈와 관련해서 두 연맹은 모두 자신들의 활동을 줄곧 자신들의 의회 후견인들의 요구에 맞춰왔다.

 

프라찬다 노선에 서술된 무장봉기의 기초를 놓기 위해, CPN(M)은 도시에 대한 영향력을 높이려 노력했다. 2001 년 이미 중요한 세력이었던 마오주의 학생조합은 교육 불평등과 등록금에 반대하는 운동을 주도했다. CPN(M)계열의 다른 조직들은 카스트 제도와 종교적 차별에 대해서 그리고 군주제 , 정부 그리고 군대의 패악질에 대항한 시위를 조직했다. 마오주의자는 또한 그들 자신의 범(凡) 네팔노동조합연맹(All Nepal Trade Union Federation: ANTUF)을 설립했다. 노동자 조직에 대한 CPN(M)의 애증을 반영하듯, ANTUF 의 활동은 일관된 전략이 없어 보인다. 사업가들의 ‘기부’를 유도하는 연속적 폭파로 활동을 시작했다. 때로 임금과 노동조건 개선 요구를 제기했지만, 공격 목표로 삼은 공장의 노동자들로부터는 큰 지지를 얻은 것 같지 않다. 왜냐 하면 성공적 폭탄 공격은 기업 문을 닫아버리거나 종종 심대한 인원감축을 낳았기 때문일 것이다. 2004년 9월 12개 중요 기업에 반대하는 파업을 조직한 이후에 ANTUF에 대한 지지가 높아졌다.

 

도시와 프롤레타리아 투쟁을 단지 농촌에 기초한 ‘인민전쟁’의 보조수단으로 바라보는 CPN(M)의 관점은 도시 노동계급의 자신감과 충성심을 끌어내는 데에 한계로 작용해 왔다. 대중선동이나 이론적 문서 어디에도 이 당이 노동자평의회 또는 프롤레타리아 통치기관에 대한 언급이 없다. 대신에 마오주의가 지도하는 노동조합이 여러 계급이 함께 하는 ‘통일전선’ 내에서 노동자들을 적절히 대표할 것이라고 일컬어진다. ‘민족’ 자본가들이 ‘신민주주의적’으로 착취할 것이라는 전망은, 이미 네팔인 자본가들을 위해 충분히 고생하는, 대부분의 노동자들에게 매력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은 UML의 의회주의 백치증에 대한 광범한 반감에도 불구하고 도시 노동계급은 마오주의를 아직 그 대안으로 수용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2006년 4월 : ‘프라찬다 노선’의 종결

 

도시 노동자의 지지를 얻는 데 실패한 CPN(M)은 국가권력을 획득할 길을 잃었고, 그러자 수도에 대한 영향력을 높이기 위해 의회정당과의 타협을 모색해야 했다. 갸넨드라 왕의 2002 년 정부해산에 뒤이어, 바타라이는 “민주주의 혁명의 궁극적 승리가 봉건-관료 세력을 완전히 쓸어버리기” 전까지 “반동과 진보 세력 사이”의 갈등은 계속될 것이라고 썼다. 그러나 그는 또한 CPN(M)의 “민주주의 혁명”에 함께 할 동맹자들이 “봉건-관료” 세력과 상당히 편하게 지낸다고 비판했다.

 

“의회 정당이 지닌 원칙적인 약점과 실수는 봉건적 군주제를 반동 최고의 방어벽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동맹자라고 여기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지난 12 년 집권 기간, 이 정당들은 관료적 자본주의와 봉건제도의 뿌리를 뽑는 정치적 입장을 하나도 제기하지 못했고, 지속가능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기관의 물질적 기초를 마련하지도 못했다.

 

“또한 CPN(M)은 공개적으로 미래의 다당제를 주장해 왔다. 모든 의회 정당들에 대한 그들의 지속적인 호소가 ‘당신이 공화주의를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다당제를 받아들일 것이다.’이었던 이유이다 .—주간정치경제(Economic and Political Weekly), 2002년 11월 16일


 

프라찬다에 따르면, ‘다당제’의 유일한 한계는 “봉건제를 떠받들고 외국의 지배를 용인하는 그러한 요소들이 억제될 것”이라는 점이다( 주간정치경제, 2002년 9월 7일). 2003년 6월 CPN(M)의 중앙위원회는 “여러 당이 경쟁하는 민주 체제(주간정치경제, 2006년 7월 22일)” 를 공식적으로 승인했다.

 

그러나 군주제와의 불화에도 불구하고 UML이나 네팔국민회의 모두 마오주의자들의 제안에 끌리지 않았다. 이전 5 년 동안 이 의회에서 일하는 자본주의 하수인들은 마오주의 봉기를 진압할 때 민주주의적 고상함을 조금치도 고려하지 않았었다. 그리고 의회해산 이후 UML과 의회당 당원들은 왕의 재량에 따라 임명된 정부구성을 수용하고 입각했다. 2005년 2월 왕이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1990년 헌법에 따라 허용된) 모든 권력을 장악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군주주의자들이 몇몇 유명 정치가들을 체포하고 언론과 통신을 통제하자 의회정당들과 부르주아 ‘시민사회’는 저항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UML 과 네팔국민회의은, 인도와 미국 후견인의 요구에 따라, 수개월 동안 구 의회를 재가동하라는 요구로만 자신의 행동을 제한했다. 그러한 태도는 대중적 지지를 얻기 어려웠고, 공화제와 제헌의회 소집을 요구하는 마오주의자들의 인기가 (심지어 UML 과 네팔국민회의의 평당원들 사이에서도) 빠르게 높아지자, 이 정당의 지도자들은 태도를 바꿨다.

 

2005년 여름 동안, 인도는 일정한 의원을 가지고 있는 모든 정당의 연합체인 7정당연합(Seven Party Alliance: SPA)과 마오주의자의 토의를 중재했다. 바타라이는 “도시와 농촌의 중간계급 상당수가 혁명적 변화에 주저” 하고, 중국과 인도가 이 지역의 격변을 반대하기 때문에 민주적 공화제 단계를 거치는 것이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언급하기 시작했다 (Washington Times, 2005년 7월 30일 ). 2005 년 11월 SPA 와 마오주의자는 “독재 정치를 종식하고 완전한 민주주의를 수립”한다는 12항 합의문에 서명했다(주간정치경제, 2006년 10월 21일). SPA는 마오주의자의 공화제 요구를 거부했으나 새 헌법을 기초하기 위한 제헌의회 소집 제안에는 동의했다. 그 합의는 구체적인 항목을 모호하게 처리하고 구 의회의 부활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그것은 또한 마오주의자와 RNA 에 대해 유엔이 ‘감시’ 하라는, CPN(M)이 오랫동안 주장한 요구를 포함하고 있었다.

 

2006 년 3월 SPA와 마오주의자는 4월 6일부터 4일 동안의 총파업과 시민불복종운동을 전개한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정당 지도자들의 계획과 달리, 파업과 시위는 4월 9일 날 마무리되지 않았고, 오히려 더 규모가 커지고 전투적으로 변했다. 1990년의 잔 안돌란(Jan Andolan[인민저항운동])처럼 저항은 자기 자신의 계기를 만들면서 성장했고 참가자들은 곧 군주제의 종식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ICG(국제위기감시기구)에 따르면,

 

“우선, 당 간부와 지도자들은 시위대에서 좀처럼 볼 수 없었고 선두에 거의 서지 않았다. 조직된 모든 시위에 등장하는 당 깃발도 드물었다. 시위현장 곳곳의 대중토론과 집회와 행진은 자발적이거나, 당 중앙의 지도에 의하지 않은 지역활동가나 마오주의 간부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시위참가자들은 보통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주류 정당이나 마오주의 지지자들이 아니었다.”—「네팔 : 인민권력에서 평화로?」, 2006년 5월 10일


 

RNA의 ‘위반자는 사살하라’라는 명령으로 집행된 계엄령을 통해 시위를 제압하려는 시도는 실패했다. 시위대를 향한 발포는 오히려 인민의 분노를 더 치솟게 했을 뿐이었다. 19일 동안의 시위와 파업에 3백만에서 4백만 가량이 참가했다. 최대 규모의 시위가 카트만두에서 있었다. 6천 명이 부상당하고, 카트만두에서 18명이 죽고 150명은 팔이나 다리가 부러졌다. 1990 년과 달리 정권 지지를 내세우고 시위대를 공격하는 이른바 ‘보복위원회’의 모습은 보기 어려웠고, 전역한 병사나 심지어 경찰들도 이 시위행렬에 함께 했다고 보도되었다.

 

2006년 4월 네팔은 준혁명기에 있었다. 멈출 줄 모르는 총파업을 통해서 어떤 계급이 사회를 지배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이 선명하게 제기되었다. 주류 정당의 지도자들 특히 UML의 지도자들은 신뢰를 크게 잃었고, 노동자와 농민이 직면한 문제들에 대한 어떤 실질적 해결책도 제시할 수 없었다. 고위직을 포함한 많은 공무원들이 시위대에 참가하면서 국가 기관들은 멈춰 섰다. 지식인들과 교수들이 정권 지지를 포기했고, 정부 보안기관의 일부도 반기를 들었다. 이와 같은 상황은 혁명정당이 가장 전투적인 노동자들로부터 지지를 얻을 수 있는 폭넓은 기회를 제공했다. 그리고 그 혁명정당은 대중의 즉각적 일상적 요구를 국가 권력 장악에 대한 요구와 결합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볼셰비키-레닌주의 당은 군주제 종식 요구와 제헌의회 소집 요구를 민주적으로 선출된 노동자와 빈농 위원회의 요구와 결합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위원회는 RNA 와 여타의 부르주아 억압기구의 공격에 맞설 노동자정당방위대를 구성하는 등 투쟁의 방향을 제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다음에 자연스럽게 올 단계는 국내와 국외의 대규모 자본과 토지를 몰수하는 것이다. 그 엄중한 며칠 동안 현존 질서에 맞서 명확한 대안을 제출할 조직이 있었다면, 남아시아 지역과 그 밖의 나라들을 격동하는 사회혁명을 점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CPN(M) 은 혁명적 대안을 주장하는 유일한 당이었지만, 그와 같은 강령을 제기하지도 않았고 제기할 능력도 없다. 당 간부들이 소도시들에서 자기 역할을 했지만 카트만두의 노동자들에게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더구나 CPN(M) 지도부는 수도에서 부르주아 법질서 회복 책임을 다하기 위해 의회 정당들과 함께 하는 것을 선택했다. 궁지에 몰린 왕이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민정부를 선출하겠다고 제안했을 때, 심지어 이전 SPA 의 비굴한 의회 하수인들마저 왕의 추방을 주장해야 했다.

 

“왕의 제안은, 사태를 가라앉히기는커녕, 불에 기름을 끼얹은 격이 되었다. 인민은 더 많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계엄령에 저항함으로써 왕궁에 자신들의 확고한 의지를 보이고, 의회 지도자들에게 타협을 선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이었다.

 

“가장 인상적이고 평화로운 대중집회 가운데 하나가 열린 바 있던, 수도 바깥의 작지만 독립 정신이 강한 마을 키르티푸르는 텅 비었다. ‘아무도 없다. 우리는 모두 카트만두를 향해 가고 있다.’라고 한 젊은이는 수도를 향해 걸으며 말했다. ‘우리는 공화정을 원하고 모든 사람들이 지지한다.’ 카트만두의 쌍둥이 도시인 파탄 주위의 경계선을 넘고 수도로 가는 다리를 향한 내리막길을 행진하는 대열에 사람들이 더 가세한다. 왕을 반대하는 요란한 구호 속에서 ‘우리는 궁을 향해 가고 있다.’ 라는 외침이 울려 퍼진다.

 

“가장 큰 행진대열은 20 만에서 30 만은 될 것이라고 어느 서방 군사전문가가 추산했다.”—같은 글


 

통제 불능으로 변해가는 상황을 멈추기 위해 SPA 와 왕궁은 졸속 타협안을 만들어 냈다. 왕은 의회를 복원하고 12개 합의안에 기초한 ‘로드맵’을 모호하게 승인했다. 이 정도면 SPA가 갑작스런 승리선언을 하기에 충분했다. 더 이상의 시위를 취소하고 지금까지 성취한 모든 것에 대한 신뢰를 주장했다. CPN(M)은 그 타협안을 “역사적 실수”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2005년 11월 타협안에 대한 승인은 의회정당들에 대한 그들의 비난의 그다지 진지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SPA 지도자들이 카트만두에 설치한 방어벽을 치우라고 마오주의자들에게 요구했을 때, 투덜거렸지만 그렇게 했다. 두 번째 잔 안돌란은 종료되었다.

 

2006년 4월 동안 CPN(M)이 보인 선행은 그들의 의회 동맹자들과 네팔 지배계급의 눈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 다음 2 년 동안 SPA, 마오주의자 그리고 (약간 작은 비중이긴 했지만) 왕궁이, 어떤 형태의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실현할 것인지 협상을 벌였다. 첫 단계는 CPN(M)과, 부활된 의회를 이끌던, 네팔국민회의의 코이랄라(Koirala)사이에 맺어진 몇 가지의 타협안이었다. 1990년대 후반 코이랄라가 수상이었을 때, 그는 반(反) 마오주의자 공격을 지휘했었다. 그 당시 프라찬다는 그를 “파시스트”라고 규정했었다. 그러나 지금 코이랄라는 “반동 세력”의 질서문란 행위를 마오주의 언어로 경고하고 있다(BBC News Online, 2006년 11월 9일). 부활된 의회는 과도정부, 과도헌법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제헌의회 선거에 의해 대체될 것이었다. 과도정부 내에 자기 대표 파견을 확보하기 위해, CPN(M)은 지난 10년 동안 ‘인민전쟁’ 으로 성취한 모든 것을 청산하는 데에 동의했다. 마오주의 근거지의 ‘인민위원회’ 그리고 ‘인민법정’은 해소되었고 내전 기간 몰수된 모든 재산을 돌려주었다. 인민해방군은 부르주아 국가기구의 하나로 통합한다는 모호한 타협안을 지키기 위해, 마오주의자들은 UN ‘감시’와 부분적 무장해제에 동의했다. 인민해방군 간부들은 몇 개의 부대에서 해임되었다. 비록 창고 열쇠를 CPN(M)이 관리하기는 했지만, 무기는 창고에 보관되었다.

 

그 대가로 마오주의자들은 정부로부터 몇 가지 서면 언질을 받았다. “상대방” 즉, 마오주의자에게 무기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하나마나한 약속을 얻어내었다. 인민해방군에게 적용되었던 비슷한 제한조치를 RNA에게도 요구한다는 겉만 번드르르한 타협안이 만들어졌다. RNA 는 부대 안에 머물고 “같은 양”의 무기를 창고에 보관한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군대는 (2001년 이전 마오주의자 진압에 투입되었던) 경찰과 같이 국경 수비대, 공항 경비대 등으로 배치하여 치안을 다룬다는 합의도 담고 있다. 다른 조항들은 카스트제도와 민족, 지역, 성 차별의 종식, “과학적” 토지 개혁 그리고 “포괄적 민주주의” 등에 대한 약속을 다루고 있다. 프라찬다는 다당제의 예비단계가 “중간계급은 말할 것도 없고, 민족자본가와 부르주아지에게 필요한 과정”으로 확인되었었다고 선언했다(Journal of Contemporary Asia 38 권, 2008년 5월 2호에서 인용).

 

 

 

CPN(M)의 ‘예비 단계(sub-stage)’: 자본주의 정부의 운영

 

CPN(M)은 ‘프라찬다의 길’을 폐기해야 할 3가지 요인을 지적했다: ‘근거지의 낮은 경제 발전, 도시 지역에서 보다 많은 지지 획득 필요성 그리고 도시 봉기를 파괴할 외국 군대 개입의 위험성.’ 모든 혁명 운동은 반드시 제국주의 개입 가능성에 맞서 투쟁해야 하는 한편, 다른 두 요인은 오로지 농촌에 근거를 둔 게릴라 전쟁 전략에서 나온 것이다. 도시로 영향력을 확장하기 위해, CPN(M)은 부르주아 과도정부에 참가하기로 결정했다. 프라찬다는 이 노골적인 계급협조가 신민주주의로 가는 중요한 걸음이라고 설명한다.

 

“우리는 그 동안 계급 문제, 민족 문제, 성 문제, 지역 문제 등을 제기했다. 만약 이 4가지 문제가 모두 해결된다면 그것은 신민주주의 공화제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부르주아지와의 평화적 경쟁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으므로, 본질적으로 그것이 신민주주의이겠지만, 그 형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같을 것이다. —주간정치경제, 2007년 5월 19일


 

2008년 4월 10일 제헌의회 선거에서 놀랄 정도로 강력한 모습으로 등장한 마오주의자는 자신의 정치노선을 실현할 예기치 못했던 기회를 잡았다. (2008년 4월 12일치) 이코노미스트는, 그 결과에 앞서서, “믿을 만한 여론조사가 없는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마오주의자를 싫어하는 것으로 알려졌다.”라고 보도했다. 투표함이 열리자, CPN(M)은 575석 중 220개를 차지했고 그것은 2위인 네팔국민회의보다 두 배나 많은 의석이었다. 마오주의자는 최다득표당선제의 절반을 차지했고, 나머지 30%는 비례대표제를 통해 배정받았다.

 

“카트만두에 있는 서방 외교관과 인도와 중국 외교관들은 어떻게 마오주의자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는지 이렇다 할 설명을 하지 못했다. 다른 한편으로, 그들의 영향력이 선거로 인해 줄었다는 말도 나온다. 새로운 국면의 무장투쟁을 위해 정글로 돌아가는 것이나 새롭게 구성된 정부를 근본부터 흔들기에 충분한 의석을 거머쥐는 것 모두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Asia Times Online, 2009년 4월 19일


 

2008년 5월 제헌의회가 열리던 날, 네팔은 공화제라고 선포되었다. 군주제 문제는 더 이상 지배계급에게 중요하지 않았고 심지어 왕당파조차도 많은 수가 공화제에 표를 던졌다. 도시와 농촌지역의 마오주의자들의 대체 권력기구를 완전히 없애고 일상의 모습으로 되돌리는 것이 부르주아지들의 우선적 관심사였다 . 자본가들이 바라던 바는 아니었으나, 정부 내 CPN(M)의 존재는 현존하는 착취와 억압체제를 그럴듯하게 위장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2008년 여름 CPN(M)은 UML 그리고 전(前) 마오주의자가 이끄는 지역 정당인 마데시인권포럼(Madhesi Janadhikar Forum: MJF)과 더불어 연립정부를 구성하였다. 겉으로는 타라이 지방의 마데시 주민들을 대표한다지만, MJF는 농업개혁을 맹렬히 반대하는 대토지 소유자들을 대표한다. 프라찬다는 수상이 되었고, 네팔국민회의 지도자 람 바람 야다프는 (UML의 협조를 얻어) 의례적 지위인 대통령이 되었다. 사실 대통령 자리는 군대 통솔권을 나눠 갖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리하여 의회 다수당인 마오주의자도 법적으로 국가기구를 온전히 다룰 수 없게 한 것이다. 지배계급의 근본 이해를 전혀 위협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분명히 하기 위해 CPN(M)은 이에 따랐다. 바타라이는 연립정부 구성 협상 기간 동안 이 사실을 분명히 했다.

 

“전에 우리는 민족주의자 [자본가]와 상인들의 집회에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봉건제를 없애고 봉건적 생산관계를 철폐하고 민족적이고 국제적인 자본주의가 아니라 종속적인 자본주의를 없애는 것이 우리의 주된 관심사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애썼다. …우리는 생산적인 자본주의에 반대하지 않는다. 당신도 알 테지만, 그것은 상품을 공급하고 일자리를 낳고 이 나라에 가치를 생산한다. 우리는 제국주의적 개입에 저항할 뿐이다. 우리가 권장하는 것은 그런 종류의 민족적 자본주의이다. 우리가 그들에게 유리한 환경을 만들려고 한다는 사실을 민족주의자들과 상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주간정치경제, 2008년 5월 10일


 

이후의 인터뷰에서 바타라이는 계급협조주의를 더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자본가와 노동자는 지금 경제 발전이라는 같은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 둘은 봉건제, 독재 그리고 군주제에 맞서 같이 싸웠다. 지금 자본가와 노동자는 산업경제의 활력이라는 같은 이해관계 속에 있다. 그러나 이 사실을 그들은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이 정부는 둘의 건강한 관계를 만들기 위하여 노력할 것이다. 이 문제는 해결되어 가고 있다. 자본가들에게 호소하건대, 그들은 최소임금을 제공해야 한다. 노동자들은 정치 총파업이나 파업을 하지 않아야 한다. 만약 이러한 인식이 존중된다면 앞으로 우리는 좋은 미래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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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 일정 기간 동안, 공공부문에서, 고속도로 위에서 그리고 공업, 의료, 교육 부문에서 파업이 없어야 할 것이다. 정부는 이 문제에 대한 정치적 합의를 끌어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Kathmandu Post, 2009년 1월 12일


 

취재기자는 2 단계 전략의 핵심을 물어보았다.

 

“질문 : 네팔 자본가들을 두 범주로 구분하려는 노력을 한 적이 있는가? 그리하여 관료적이고 매판적인 자본가는 제외하고 생산적 자본가는 지원하는 정책을 고안했는가?


 

CPN(M)지도자는 ‘반동적’ 자본가와 ‘진보적’ 자본가라는 마오주의의 구분은 실상 의미 없는 것이라는 것을 시인했다.

 

“네팔에서 같은 사람이나 같은 집단이 종종 두 가지 성격을 가지고 있다. 계급적 차이는 아주 작다. 같은 사람이 농사일도 하고 서비스일도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나 집단을 어떤 계급으로 규정할 것인가는 대단히 어렵다. 자본가들 가운데에서도, 투자를 하면서 좋은 일을 하기도 하고 또한 외국 상품을 거래해서 이윤을 남기며 매판자본가 노릇을 하기도 한다. 두 가지 성격이 공존한다. 이것이 이행하는 사회의 모습이다. 그래서 우리는 인내심을 가지고 이 시기를 보내야 한다.”


 

만약 자본가들이 “이윤 남기기”에 싫증을 내고 그 대신에 “좋은 일”을 시작할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라면, 마오주의자들은 진짜 무진장한 인내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타라이 지역 농민이 장악한 전 왕족 소유 토지를 과도정부 내의 MJF의원에게 되돌려주자, 계급의 적에 대한 이 비굴한 굴종을 둘러싸고, CPN(M)내에서 갈등이 불거졌다. 연립정부의 토지개혁장관을 사임하고 끝내 당을 떠난 마트리카 야다프에게 그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당이 “혁명적 성격을 상실하고 의회정당들과 의회활동의 소용돌이의 포로가 되어버렸다(Telegraph Nepal, 2009년 2월 12일).”라고 비난했다. 야다프는 이후 ‘진짜 CPN(M)’ 이라는 신당을 만들었다.

 

2009 년 소규모 조직과 합당하여 네팔통합공산당 (마오주의) 또는 UCPN(M)이 된 CPN(M)이 지주에게 땅을 되돌려주고 이전 군주주의자들을 ‘민족주의자’라고 공식적으로 복권시켜 주자, 네팔 지배계급과 제국주의 후견인들은 이제 더 이상 마오주의자에게 정부를 운영하게 할 필요가 없다고 결론내렸다.

 

“연방민주주의 공화제로의 전환과 진보적이고 총체적인 ‘새 네팔’이라는 수사의 지속에도 불구하고, 구 네팔의 죽음에 대한 소문은 대단히 과장되었다. 군주제의 종식은, 많은 점에서, 그것이 이전에 복무했던 이해 당사자들의 이익을 증식했다 : ‘전 국왕 갸넨드라의 희생은, 그 자신에게는 슬픈 일이겠지만, 네팔 엘리트들이 새롭게 결집할 기회를 제공했다.’ 편협한 행동들이 그 사례로 부각되면서 UCPN(M)이 독재통치자로 그려지고 있고, 이런 상황에서 반(反) 마오주의자들은 민주주의자로 손쉽게 포장된다.

 

도시 상층계급에 의해 목소리 높은 보수층이 결집하고 있다. 그들이 예언한 것과 달리 마오주의자들은 새로운 크메르루주가 아니었지만, ‘전체주의 독재’ 라는 비명을 끊임없이 내질렀다. … 아이러니하게, ‘자유주의 민주파’들도 연대한, 파업 완전금지라는, 진짜 독재정책을 썼을 때 그런 비명이 터져나왔다. 대조적으로 마오주의 색채가 전혀 없는 예산안은 세계은행과 IMF 에게 만족시켰으나, 문맹퇴치계획 등이 국가전복을 위한 준비과정이라는 둥, 야심이 숨어 있다는 둥 하는 주장들을 늘어놓았다.—ICG, “비틀거리며 나아가는 네팔의 평화”, 2009 년 2월 19일


 

자본주의 언론은, UCPN(M)산하 청년공산주의동맹(Young Communist League) 5만 명가량의 회원들이 깡패짓을 한다는 기사로 도배하지만, 2009년 상반기에 발생한 살해 대부분은 경찰이 자행한 것들이었다. 2009년 8월 13일 ICG 보고서에 따르면, 마오주의 지지자들은 폭력행위의 가해자라기보다는 주로 피해자였다.

 

연립정부가 수립되기 이전, “의식화된” 인민해방군을 군대의 일원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한 군부 수장 카타왈 장군을 해임하려 했을 때, 반대파의 불만에 찬 목소리가 최고조에 달했다. 카타왈은 , 마오주의자 국방위원장의 반대를 무시하면서, 병사 수를 3천 명 가량 늘렸고 내전 기간 최악의 가혹 행위에 책임이 있는 장교 8명의 해임을 연기하였다. 또한 그는 UCPN(M) 당원들도 참여하는 국가 스포츠행사를 허세를 부리며 거부했다. 이른바 ‘맑스-레닌주의’ 국방 장관이 결국 카타왈을 해임했을 때, 야당들과 자본주의 언론 그리고 지배계급은 분노를 터뜨렸다. 그들에게 ‘독립적’ 군대는 마오주의자가 이끄는 부르주아 정부 아래에서 큰 변화가 없음을 보증하는 것이었다.

 

긴장이 고조되자 프라찬다는 베이징 방문을 취소해야 했다. 이번 중국 방문으로 1천 6백 4십만 달러의 경제 원조를 받고 중국을 네팔 최고의 국제 후원자로 만들 새로운 ‘평화우호’ 조약을 맺을 계획이었다(Asia Times Online, 2009년 3월 17일). 인도와 분주한 뒷구멍 외교를 하면서, 마오주의 연립정부의 참여자인 UML과 MJF는 그 해임에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람 바람 야다프 대통령도 그와 같은 문제는 ‘정치적 합의’ 가 필요하다는 과도헌법의 구절을 언급하면서 해임에 반대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바타라이는 예전에 “지금의 과도헌법에 의해 형성된 체제는 예전의 의회 체제가 아니다.”라는 주장의 근거로 그 구절을 언급했었다(Journal of Contemporary Asia, Vol. 38, No. 2, 2008년 5월). 의회 불신임 동의안으로 프라찬다는 수상직을 내놓았고, 그의 정부는 곧 UML이 이끄는 정부로 대체되었다.

 

 

 

네팔 지배계급이 ‘수하르토 식 해법’을 숙고하다

 

UCPN(M)의 ‘유연성’은 네팔 지배계급에게 손쉬운 승리를 안겨주었다. 인민위원회와 인민재판소가 대부분 해소되고 인민해방군은 소집해제 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주들은 자신들의 옛 땅을 돌려받았다. 하지만 UCPN(M)이 베푼 최고의 서비스는, 날카로운 혁명정세와 대중적 봉기로 인해 흔들거리던 자본주의 사회질서를, 새 단장한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정당성을 부여해 줌으로써, 안정시켰다는 점에 있다. 지배엘리트들은, 사용가치를 다 이용한 다음, 마오주의자들을 ‘다 짜낸 레몬’처럼 버렸다.

 

이 굴욕에도 불구하고, UCPN(M)은 여전히 네팔에서 상당한 세력을 가지고 있다. 2009년 5월 이후, 수만 명의 인민은 군부에 대한 ‘시민의 우위’를 요구하며 전국적 거리시위를 벌였다. 마오주의자가 영향력을 행사하는 곳에서는 인민위원회가 재가동되고 토지 점유가 재개되었다. 2009년 11월, 당은 수천 명의 땅 없는 ‘불법’ 거주자들을 서쪽 끝에 있는 땅으로 이주시켰다. 정부는 즉각 경찰을 보내 거주지를 없애고 1500채의 판잣집을 불태우고 4명의 거주자들을 살해했다. 마오주의자들은 2009년 12월 6일 수도의 상점, 도로, 공공 운송을 닫고 멈추는 하루 파업으로 항의했다.

 

근거지를 유지하고 자신들의 권위를 확대하기 위해서는 전투 행위를 계속 조직해야 한다는 것을, 마오주의 지도부는 알고 있었다. 급진적인 언사와 타라이 지역에서 과감한 토지 점유를 통해, 불만을 가진 상당수의 마오주의 간부들을 획득하는 데에 성공한 마트리카 야다프의 ‘진짜’ CPN(M)은 왼쪽에서 압력을 가했다. 2009년 5월에 발생한 사건들은 “연방민주공화제”를 “구축”해야 한다는 바타라이 노선에 맞서, (완전한 신민주주의라고 여겨지는) “인민연방공화제”로 신속히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좌파 인자들의 힘을 강화시켰다. 5 월 논쟁 이후 바타라이는 부르주아 통치의 ‘예비 단계’라는 그 자신의 이전 사상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다.

 

“우리는 군주제 철폐 이후, 부르주아 세력이 저항할 수 있고, 그러면 주요 모순은 우리와 부르주아 민주정당들 사이에 위치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

 

“2009년 4월 이후 … 제헌의회와 부르주아 공화제의 수립은 다소간 완전해졌다. 이제 신민주주의 혁명의 완수를 위한 투쟁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 “네팔 : 바루람 바타라이와의 인터뷰”, World People’s Resistance Forum (Britain) website, 2009년 10월 30일


 

다시 확인된 이 ‘신민주주의 혁명’에 대한 서약이 2단계 혁명이라는 파멸적 논리와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다른 국면의 계급협조로 나아가는 것이다. 마오주의자들의 전투적인 거리 시위는 주로 다른 의회정당들에게 압력을 가하기 위해 행해졌다. 2009년 10월, UCPN(M)은 UML이 주도하는 정부의 예산안을 지지하기 위해 제헌의회에 대한 거부를 보류했다. 2 개월 후 ‘주요 모순’이 바뀌었다고 선언되었다: “당 중앙위원회 결정에 따르면, 모순은 변화했다. 민족문제가 중심이 되었고 , 꼭두각시를 통한 제국주의 간섭 (주로 인도의 팽창주의)과 봉건 잔재, 그리고 네팔 인민” 사이에 주요 모순이 위치한다고 결정되었다(“UCPN(M)이 새로운 노선을 제기하다”, Red Star website [English], 1월 6일). 이로써, 한편으로 ‘국가독립’의 보증자로 군부를 바라보는 위험스러운 자기만족적 태도를 부추기면서, 이른바 ‘애국적’ 부르주아지와 더불어 또 다른 ‘반(反) 제국주의’ 캠페인을 전개하기 위한 길을 닦았다. 1965년 인도네시아 군부에 대한 아이디트의 환상을 되풀이하며, 어떤 결전에서도 군대가 마오주의자와 같은 편에 설 것이라고, 마오주의 지도자 릴라 마니 포카렐은 주장했다고 보도되었다: “네팔 군대는 누가 반역자이고 누가 진짜 민족주의자인지에 대해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 인도와의 불평등조약과 불평등관계는 젊은 층의 주된 관심사이어야 하고 [군대는] 여전히 네팔 독립의 호위병이다(Telegraph Nepal, 2009년 12월 28일).”

 

자본주의 억압기구에 대한 이 같은 망상을 통한 대중동원은 재앙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2005년 이래 처음으로, 인도는 네팔에 대한 군사원조를 재개했고, 인민해방군을 통합하는 계획을 공식적으로 폐기할 것을 노골적으로 부추기고 있다. 지금까지 바뀐 것이 없다. UCPN(M)은 모든 전사들에게 섞여들어 가라고 종용하고, 군대는 그들을 받아들이는 데에 반대하고, (인민해방군 세력이 약해져 가는 주둔지들을 감시하는) 유엔은 부분적 통합을 제안하고 있다.

 

2006년 평화협정 이후 금지된 무기수입을 재개할 기회를 군부는 엿보고 있다. 군부는 또한 세속주의와 봉건제에 대해 묻는 국민투표를 호소하는 긴 정치 문서를 통해 국내정치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으며, 네팔의 첫 군주인 프리트비 나라얀 샤 왕을 국가통합의 상징으로 내세우고 있다. 마오주의자에 대한 공격 준비가 시작되었다는 명확한 증거들이 나타나고 있다.

 

“평화협정이 앞으로도 준수될지는 보증할 수 없다. 장군들은 마오주의자에 대한 ‘죽기 살기’ 식의 결정적 공격에 대한 열망을 숨기지 않는다. 봉기로 인해 맞은 난국은 군대의 능력 부족 때문이 아니라 외부적 요인 때문이었다는 견해에 점점 더 많이 동조하고 있다: ‘갸넨드라 왕이 무모하고 불충분한 정치책략으로 네팔군을 배반했고, 그들이 가장 필요로 할 때 국제후원자들이 지원을 동결했고, 살상을 최소화하려는 결정에 얽매이고, 마오주의자들을 전쟁의 적이 아니라 ‘일탈한 형제자매’로 대하는 우를 범했다.’

 

“그 같은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옳아서가 아니라 상처 입은 자존심을 달래기 위해 나온 주장들일 뿐이다. 또는 네팔에 ‘스리랑카식 해법’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동조하는 자들을 위한 것이다: ‘타밀타이거 최후의 지도자인 프라바카란의 역할을 프라찬다가 맞는 유혈 낭자한 최후의 결말인….’

 

“… 마오주의자들의 침범과 무질서에 맞서 군부통치를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내용이 인도에서 보도되기도 했다.”—ICG, 「네팔의 미래 : 누구의 손으로?」, 2009 년 8 월 13 일


 

2009년 12월, 미국주재 네팔대사 수크데프 샤는, 1965년 인도네시아공산당의 해체와 칠레와 남한의 피에 젖은 우익 군부독재가, 네팔 부르주아지에게 가능한 ‘마지막 선택’의 본보기로 떠오르고 있다고 음산하게 얘기했다.

 

“앞으로 몇 달 또는 몇 년간 사태가 어떻게 전개될지는 전혀 알 수 없지만, 정당들과 마오주의자 사이의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싸움은 결전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이 상황이 되면, 주로 최고 지휘자들이 개입할 싸움에서, 군부는 승리를 거머쥘 큰 기회를 얻을 것이다. 남한의 박정희나 칠레의 피노체트,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 같은 철권통치자가 제때에 나타나서 반란자들을 제압하고, 국가기구를 동원하여 ‘강하고 번영한 국가 건설’이라는 임무에 매진할 수 있는 행운을 네팔이 누릴 수 있을지는 아직 불명확하다.

 

“빈곤을 퇴치하고 성장과 기회와 번영의 궤도에 올라타기 위해, 오랫동안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보았지만, 이 마지막 선택은 아마도 성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My Republica [Kathmandu], 2009년 12월 20일


 

네팔 지배계급은 착취자와 그 희생자 사이에 근본적 적대관계 가 있음을 명확히 알고 있다. 그러나 마오주의자들은, 인도네시아공산당을 재앙으로 이끈 바로 그 전략을 여전히 추구하고 있다.

 

 

 

Ⅲ. 마오주의 형이상학: ‘신민주주의’라는 수수께끼

 

네팔의 극적 변화는 마오주의자들 내에—특히 1984년에 CPN(M)을 포함하여 세계 20개 남짓의 마오주의 조직들이 모여 설립된 <혁명적국제주의운동(Revolutionary Internationalist Movement: RIM)>에—국제적 논의를 불러일으켰다. RIM은 1943년 코민테른 해체 이후 스탈린주의 ‘인터내셔널’을 조직하기 위한 첫 번째 시도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RIM은 중앙집중적 조직이 아니라, 서로 이질적인 조직들의 협의체였다. ‘맑스-레닌-마오주의’라는 정체성과 <승리의 세계(A World to Win)>라는 잡지가 그들을 묶어주는 유일한 끈이었다. 몇몇 RIM 소속 조직들은, UCPN(M)의 실수와 갈팡질팡 정책마저 현명한 전술이라고 칭송하며, 그 동안 모든 정책을 무비판적으로 방어해왔다. 예를 들어, 퀘벡에 본부를 둔 <공산주의혁명당(Parti communiste révolutionnaire)>은 네팔 마오주의자에 대한 비판을 다음처럼 무시한다.

 

“우리는 네팔 혁명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지지해왔다. 그리고 우리는 앞으로도 아주 명확하게 그리고 공산주의의 승리 가능성으로 고무된 열정으로 그렇게 할 것이다. 단언컨대 네팔의 혁명가들에게 맑스주의 국가론 강좌는 필요 없다. 그들에겐 설교가 아니라 혁명이 필요하다.”—<붉은 기(Red Flag)> No. 1 (영어), 2009년 12월-2010년 1월


 

<카사마(Kasama)>라는 웹사이트를 운영하는, 봅 아바키안의 <혁명공산당(Revolutionary Communist Party, USA: RCP)>의 이전 지지자 조직도 같은 관점을 가지고 있다.

 

“혁명이 일어날 때는 권력을 향한 어떤 보장이나 미리 정해진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몇몇이 주장하는 것처럼) 단지 두 개의 모델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다른 방식으로 설명해 보자. 만약 지금까지의 역사에서 노동계급이 스무 번의 혁명을 이루어냈다면, 아마도 스무 가지의 ‘모델’이 존재하는 것이다. 즉, 고정된 모델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J.B. Connors, “UCPN(M)에게 배우며”, 2009년 3월 30일


 

거의 십년 간, RCP는 네팔 동지들의 공적을 열정적으로 알려왔다. 게릴라 지역을 취재한 첫 ‘외국 기자’가 된 RCP 지지자 리 오네스토가 보내온 특보를 전면에 배치했었다. 그런데 2006년 4월 결전 이후 CPN(M)이 부르주아 정부에 참여하기로 결정하자, 철철 넘치던 관련기사가 확 줄어들었다. 2009년 초, 논쟁 공개 결정에 대한 설명으로, RCP는 ‘맑스주의 원칙’과 ‘국제주의자’의 임무를 엄숙하게 천명했다. 그러나 [공개 결정을 하게 된] 가장 큰 요인은 RCP 의장인 봅 아바키안의 심오한 지혜를 UCPN(M)이 존중하지 않은 것에 있어 보인다.

 

“이제 공개하는 것이 옳다고 결정했을 때, 로샨 키순이 작성한 문건이 영문 잡지 <붉은 별(Red Star)> 21호에 실렸다. 그 문건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위한 투쟁 문제를 미래 세대에 떠넘긴 채로, 네팔 혁명은 단지 현대적 자본주의 국가를 수립할 뿐이라는 공개 선언, 지금까지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모든 경험에 대한 공개적인 부정, 맑스주의 전체에 대한 노골적 부정이 담겨있다.

 

“<붉은 기> 21호에 담긴 반공산주의 비난의 일환으로, 키순은 우리 당 의장인 봅 아바키안에 대한 거칠고 무원칙한 공격과 개인적 비방을 시작했다. 참으로 괘씸한 일이며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2009년 1월 29일, CPN(M)에게 보내는 RCP의 편지”


 

봅 의장의 ‘신 변증법적 종합’에 그다지 깊은 감명을 받지 않았던 키순은, “미국 RCP 바깥에 있는 사람은 이 같은 실없는 소리를 아무도 믿지 않는다. 그리고 RCP는 진짜 공산당이라기보다는 괴팍한 개인숭배 조직에 가깝다. (<붉은 별> Vol. 2, No. 1, 1-15 2009년 1월)”이라고 가차 없이 꼬집었다. 봅 아바키안에 따르면, “봅 아바키안의 ‘신 변증법적 종합’이 없다면 오늘날 마오주의는 그 반대로 귀결될 것이다. 대약진을 이루어내는 대신에 후퇴할 것이고, 조만간—아마도 그리 멀지 않은 때에—혁명적 공산주의와 정반대의 결말을 맺을 것이다(<혁명> No. 162, 2009년 4월 19일).”라는 사실을 UCPN(M)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RCP와 그 지도자에 대한 키순의 언급이 일리 있지만, UCPN(M)의 정책들이 결국 “맑스주의 전체에 대한 노골적 부정”이라는 RCP의 주장도 틀린 말은 아니다. (수카르노에 대한 인도공산당의 굴복을 승인한 마오쩌둥에 대해서도 같은 지적이 가능하지만, 물론 RCP는 그렇게까지 나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네팔 마오주의자들의 타협정책에 대한 아바키안 지지자들의 비판은 상당히 날카롭다.

 

“혁명전쟁 동안 네팔 농촌지역에 수립된 민중권력의 골간은 해소되었고, 구(舊) 경찰병력은 다시 돌아왔으며, 전투에서는 전혀 패배당하지 않았던 인민해방군이 무장 해제되고 기지에만 머물게 되었다. 예전에 중화기로 무장한 차량의 호위 없이는 기지 바깥으로 나오기를 겁내던 (네팔왕실군이었다가 지금은 네팔군으로 바뀐) 과거의 반동 군대가, 이제는 CPN(M) 국방장관의 축원 아래 전국을 마음껏 활보하고 있다.”—<혁명>, No. 160, 2009년 3월 29일


 

RCP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예비단계(sub-stage)’라는 사상이 처음 제기된 바타라이의 2005년 10월 논문 「새 국가」가 문제의 뿌리라고 지적한다. 2008년 11월 4일자 편지에서 RCP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의 공동 독재’라는 깜짝 놀랄만한 이론”의 출발점으로 그 논문을 비난했다. RCP는 1917년의 성공과 대비되는 이란, 이라크, 인도네시아와 칠레에서 2단계 혁명론이 낳은 재앙을 알고 있다.

 

“레닌의 노선은 명확했다. 혁명임무는 부르주아 공화정을 수립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 국가기구를 ‘분쇄’하고 완전히 다른 국가를 수립하는 것에 있었다. 물론, 바로 그것을 그가 실행한 것이다.”—2008년 3월 CPN(M)에게 보내는 RCP의 편지


 

옳은 말씀이다. 그러나 CPN(M)에 계급협조의 틀을 제공한 신민주주의 사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바타라이는 2005년의 논문 「새 국가」보다 여러 해 전에 ‘다당제’를 명백히 승인했고, RCP는 반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레닌의 정책은 지배계급 모든 분파에 대한 가차 없는 반대였다.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와 부르주아지의 독재 사이에 중간 지대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국가와 혁명』의 중심 내용이다. 레닌과 마오를 화해시키려는 부질없는 시도로, RCP는 신민주주의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한 형태라고 주장한다.

 

“신민주주의는 프롤레타리아트와 그 전위의 지도 아래 혁명 계급들의 공동 독재를 필요로 한다. 즉, 민주주의 혁명 단계에 어울리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독특한 형태이다. 신민주주의 체제가 민족 부르주아의 이해를 인정하고 보호하는 한편, 그것은 매판적이고 관료적 자본주의 영역 즉, 네팔 자본주의의 지배적 형태를 그 적으로 간주한다.”—2008년 11월 4일, CPN(M)에게 보내는 RCP의 편지


 

그리하여 RCP는, “프롤레타리아”의 지도 아래 이 계급 협조 정권이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한 형태일 것이기 때문에, 적대적인 사회 계급이 “공동 독재”를 수립하는 일에 협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 몽매한 발상은 신민주주의론이 1949년 중국 혁명을 통해 실천적으로 입증되었다고 주장하기 위한 것이다. 인도네시아에서 실패했지만, 중국에서는 최소한 괜찮은 방향으로 갔다. 그런데 두 경험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즉, 인도네시아(그리고 이라크, 이란 등) 공산주의자와 달리, 마오의 중국공산당은 외국과 국내 자본을 몰수하는 사회혁명을 수행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마오가 신민주주의 강령에서 계획한 것은 아니었다. 중국공산당의 궁극적 승리는 ‘공동 독재’의 현실성이 아니라, 그 반대로 그 불가능성을 증명한 것이다.

 

 

 

중국식 인민전선인 ‘신민주주의’

 

신민주주의는 1935년 코민테른 7차 총회에서 공식적으로 채택한 ‘인민전선’ 전략의 중국 판본이었다. 이 전략은 나치 독일의 성장으로 정신줄을 놓은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이, 자본가와 동맹을 맺어 고조되는 위험에 대항하기 위해 구상된 것이다. 중국 서남부의 장시 소비에트에서 북서쪽 산시성 옌안의 동굴과 산악으로 이동한 ‘대장정’ 이후, 일본 제국주의가 중국 북동지방 침략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 점점 명확해지고 있었다. 중국공산당은 국민당과의 2차 ‘통일전선(united front)’을 제안한다. 공산주의자들은 이미 자신의 농업강령을 크게 완화했다. 부농과 중농의 자산을 보호하고 “모든 반일 병사들”(인민해방군에 입대한 아들이 있는 대지주까지 포괄하는)의 토지를 보장했다. 1937년 2월, 국민당은 몇 가지 전제조건을 제시하며 그 제안에 응답했고, 중국공산당은 그것을 수락했다. ‘소비에트’ 정부는 국민당이 지배하는 공화국으로 흡수될 것, 홍군은 국민혁명군으로 들어올 것, 토지 몰수의 종식 그리고 “보통 선거권에 기초한 온전한 민주 체제”의 도입 등이었다. 장개석은 애초에 국민당 통치 구역에서도 그 보통 선거권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었지만, 부농과 지주들에게 일정한 수단을 제공하기 위하여 공산당 통치 지역에 그것을 도입하는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이 정책은 중국공산당을 지지하는 농민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토지혁명이 가장 성공적인 지역에서 2차 통일전선에 대한 공포와 적개심이 가장 컸다. 즉, 농민이 혁명적 정치의식을 수용하고, 구 지배계급의 복귀가 새로운 정치경제 질서를 위협할 지역이었다. 공산당은 반일 민족 단결의 대의와 중국 다른 지역에서 투표권을 포함한 자유 쟁취를 위해 양보해 줄 것을, 이전에 토지 봉기를 주도했던 빈농과 고용노동자에게 호소했다. 토지혁명 전에 겪었던 지주와 군벌들의 압제를 기억하고 있지만, 일본 제국주의 공격의 혹독함을 겪어보지 못한 농민들에게 그것은 추상적인 내용이었다.”—마크 셀던, 「혁명 중국에서 옌안 노선」


 

이것이 1937년 5월에 공산당 근거지들에서 치러진 선거 당시 체제에 대한 명칭으로 제시된 신민주주의라는 말이 도입된 배경이었다.

 

공식적으로 홍군이 ‘팔로군[八路軍: 2차 국공합작 이후 국민혁명군으로 편입 배정된 홍군의 명칭]’으로 흡수되고 명목상 국민당 군사위원회의 통제를 받게 되었지만, 여전히 독립적으로 운용되었다. 근거지들 역시 중앙정부로부터의 자율성을 유지했다. 1938~39년 사이 국민당과의 연속적인 충돌은 중국공산당으로 하여금 “삼삼제”[三三制: 항일전쟁기간에 공산당이 채택한 정책으로, 이에 따르면 공산당, 진보세력, 중도파 등 3세력이 반제국주의 민주주의 정부를 구성하여, 그 중 1/3의 지위만 차지하는 정책]의 공식적 도입을 통해 ‘통일전선’에 대한 충성을 재차 천명하게 했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문서들은 「중국 혁명과 중국공산당」(1939년 12월), 「신민주주의에 대하여」(1940년 1월), 그리고 조금 나중의 「연립정부에 대하여」(1945년 4월) 등이다. 이 저작들은 서구 마오주의자들에게는, 문제되는 부분이 정리된 『마오쩌둥 저작선집』 영어판으로 알려졌다. 영어권 마오 저작의 편찬자인 스튜어트 슈람은 1969년에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선집은 1951년 북경에서 출판되었고, 지난 반세기 동안 저술된 마오의 저작 중 절반 정도가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다. 심지어 선집에 있는 내용들은 저자가 여러 차례에 걸쳐 심도 깊은 변경을 했고 그래서 마오가 애초에 적었던 것과 단 한 문장도 일치한다고 인정할 수 없을 정도였다.”—「마오쩌둥의 정치사상」


 

예를 들면, 선집 판(版) 「민족 전쟁에서 중국공산당의 역할」(1938년 10월)은 국민당에 대한 다음과 같은 찬사를 생략한다.

 

“국민당과 공산당은 반일 통일전선의 기초이다. 그런데 첫 자리에는 둘 중 국민당이 차지한다. 국민당 없이는 항전을 시작하거나 이끌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영광스런 역사 속에서, 국민당은 청나라 전복, 공화국 수립, 원세개[(1859~1916) 청나라 붕괴 이후 인민을 억압하며 다시 독재 체제를 수립하려 했던 우익 인사]에 대한 저항, 소련, 공산당 그리고 노동자 농민과의 3대 연합 정책의 수립 그리고 1926~7년의 대혁명 등을 이끌었다.

 

“반일 항전을 수행하면서, 그리고 반일 통일전선을 조직하면서, 국민당은 지도자였고 기초였다.…항전과 통일전선을 지지했다는 한 가지 사실만 보더라도, 국민당 앞에 밝은 미래가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같은 글


 

마오의 신민주주의 이론도 비슷한 수정을 거쳤다. 슈람에 따르면, 「중국 혁명과 중국공산당」에 쓰인 신민주주의의 원래 정의는 다음과 같았다.

 

“신민주주의 혁명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이끄는 광범위한 인민의 혁명이고 제국주의와 봉건주의를 향한 혁명이다. 그것은 몇 개의 혁명적 계급들의 통일전선에 기초한 혁명이다. 중국은 사회주의 혁명[1951년에 ‘사회주의 사회’로 바뀜]으로 나아가기 이전에 반드시 이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 다른 길은 없다.

 

“이런 형태의 신민주주의 혁명은 유럽과 미 대륙 나라들의 역사에 기록된 민주주의 혁명들과 크게 다르다. 그 혁명은 부르주아지의 독재가 아니라, 모든 혁명적 계급[1951년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 아래에서’가 삽입됨]의 통일전선 독재를 낳는다. 항일전쟁 기간, 수립되어야 할 항일 민주주의 정권[1951년에 ‘반일 근거지에서 중국공산당의 지도 아래 건설된 정치권력’으로 바뀜]은 부르주아지나 프롤레타리아트의 ‘한 계급 독재’가 아니다. 그것은 항일통일전선에 속한 ‘몇 정당들의 연립 독재’이다[1951년에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 아래 몇 개의 혁명적 계급들의 연립 독재’로 바뀜]. 일본에 맞서고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모든 자들은, 그들이 어떤 정당에 소속되어 있건 간에, 이 정치권력을 나누어가질 자격이 있다.”


 

마오는 ‘신민주주의 혁명’ 아래 수립될 ‘연립 독재’가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밝혔을 뿐만 아니라, 또한 중국공산당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적’ 역할을 경시했다. 1940년대 초 마오가 중국공산당은 국민당과 더불어 소위 ‘혁명적 계급들’의 대표자 중 하나로 어떤 ‘민주 정권’에 참여할 것이라고 본 것은 분명하다. 바타라이의 ‘민주적’ 예비단계와 유사한 것이 사실이다.

 

슈람은 선집 판(版)의 「연립 정부에 대하여」도 “공산당이 지도하는”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 아래” 같은 구절을 나중에 포함했다고 말한다. 이것은 그 문건의 장기적인 자본주의 발전 단계 예측과 균형을 맞추기 위한 것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왜 공산주의자가 특정 조건 속에서 그 발전을 옹호해야 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의 대답은 간단하다. 제국주의와 국내 봉건주의에 의해 억압받는 자들을 위해 일정한 정도의 자본주의적 발전은 진보일 뿐만 아니라 피할 수 없는 과정이다. 그것은 부르주아지뿐만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에게도 이익이 되고, 아마 후자에게 더 큰 이익이 될 것이다. 오늘날 중국엔 국내 자본이 아니라 외국 제국주의와 국내 봉건주의가 지배하고 있다. 사실 우리에게 자본주의는 너무 적다.”


 

중국공산당은 1943년부터 국민당과 그와 같은 ‘민주적’ 자본주의 정권의 역할을 두고 협상을 벌여왔다. 특히 진주만 공격 이후 미국이 2차 대전에 참전했을 때, 국민당은 일본에 맞서 싸우는 것만큼 많은 정력을 공산주의자들을 없애는 데에 쏟았다. 국민당은 1941년 중국공산당의 신사군[新四軍: 2차 국공합작 이후 국민혁명군에 소속되었던 중국공산당 휘하 부대]을 공격하여 3,000명가량의 공산주의 병사들을 학살했다. 국민당의 명확한 태도와 장개석 군대를 무장시키기 위한 미국의 600만 달러 원조 약속에도 불구하고, 중국공산당은 1946년 1월 미국 조지 마셜 장군이 후원하는 <정치자문회의(Political Consultative Conference)>에 참석한다. 충칭회의를 통해 절반은 국민당이 나머지 절반은 (공산당을 포함한) 다른 정당이 차지하는 연립정부 구성안을 합의했다. 또한 중국공산당의 군사 기구는 미국이 무장과 훈련을 돕기로 한 국민군대에 편입되는 것으로 합의되었다.

 

마오는 1946년 2월 중앙위원회 성명을 통해 이 합의안이 “중국 민주주의 혁명을 위한 위대한 승리이다. 앞으로 중국은 평화, 민주주의 그리고 재건이라는 새로운 단계에 진입할 것이다(Odd Arne Westad, 「냉전과 혁명: 소련과 미국의 경쟁 그리고 중국 내전의 기원」).”라고 찬사를 보냈다. 옌안의 중앙지휘부는 당의 각 기구들에 “당의 모든 행동은 새로운 단계에 맞춰져야 한다.”라는 지침을 내리며, “좌익적” 일탈을 경계했다. 나중에 류사오치[유소기, 1898년~1969년, 중국공산당 지도자, 마오쩌둥이 1959년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물러난 이후 국가주석이 되나 문화대혁명으로 1968년 실각]에게 이 기간 동안의 ‘우익 기회주의’ 혐의를 씌웠으나, 마오 자신이 “신민주주의 시대”라고 천명한 이 정책의 가장 정열적인 해설자로 알려져 있다.

 

중국 공산주의자는, 네팔 마오주의자들이 요즘 그렇게 하는 것과 똑같이, 국민당이 통제하는 도시들에서 합법적 지위를 얻는 조건으로 근거지에 수립된 정치권력을 해체하기로 합의했다. 미국 감시단과의 인터뷰에서, 류사오치는 국민당이 배신할 가능성이 있지만 적어도 그 배신은 “중국에서 민주주의가 일정한 기간 동안 진전된 이후에” 나타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류는 이 과정에서 다음에 할 일은 “미국이나 영국이 채택할 것과 유사한, 의회와 정부 체제를 통해 헌법을 기초하는 것(같은 글).”이라고 말했다.

 

1946년 중국공산당이 연립정부에 들어가지 않은 유일한 이유는 상대방의 적대적 태도 때문이었다.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원조를 받은 장개석은, <정치자문회의>의 합의문을 일방적으로 수정했고, 일본으로부터 수복한 만주 지역의 공산당 부대를 공격했다. 공산당 근거지에 대한 장악력을 확실히 하고 인민해방군을 재조직하며 토지 몰수를 재개하는 것으로 이에 대응했다. 이어진 내전은 국민당이 대만으로 도망가기 까지 3년 동안 이어졌고, 1949년 10월 마오는 중국을 인민공화국으로 선포했다.

 

1949년 6월, 북쪽을 장악하고 남쪽의 국민당 지역을 쓸어낼 당시, 마오는 「인민민주주의 독재에 대하여」를 썼고 그것은 마오주의 경전의 고전이 되었다. 1939년, 1940년, 1945년에 이미 인용된 논문들과 달리, 그것은 노동계급과 공산당의 지도라는 구절을 굳이 다시 첨가할 필요가 없었다. 내전 기간 중국 자본가들이 장개석을 압도적으로 지지했기 때문에, 민족 자본가들과 동맹하여 신민주주의 시대를 열려는 모든 시도는 실패했다. 인민해방군이 군을 확실히 장악하자, 마오는 노동계급, 농민, 도시 소부르주아 그리고 민족 자본가들이 단결하여 “민주적 연립정부”를 구성하지만 국민당과 그 “공범자들”은 배제되어야 한다고 신민주주의를 다시 설명했다. 마오는 이것이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아니라, 단순히 오랫동안 기다렸던 ‘연립독재’의 실현이라고 생각했다. 1958년, 재앙적인 ‘대약진운동’ 이후에야, 중국 국가권력의 공식적 규정으로 ‘인민의 독재’ 대신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했다(모리스 마이스너,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신민주주의는 애당초 완전한 허구였다. 내전 동안 장개석과 함께 했던 대자본가는 대만이나 홍콩 또는 서방으로 도망갔다. 남아 있던 자본가들은 나중에 ‘민족 자본가’로 규정되었다. 거의 대부분은 자본가라고하기에는 피라미들이었다. 구멍가게, 영세기업주 또는 상공업체의 관리자 등이었다. 그들은 장개석 치하에서 거의 영향력이 없었고, 마오 치하에선 더 그랬다. 부르주아 국가는 분쇄되었고 인민해방군에 의해 대체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오는 신민주주의를 수립하겠다고 나섰다. 1949년 9월 14개의 소규모 정치정당들과 더불어 새로운 ‘정치자문회의’가 소집되었다. 정부 24개 부처 중 11개가 우선적으로 비공산주의자에게 돌아갔다. 사실 이 정당들은 중국공산당에 완전히 종속되었고 정책 결정에 역할을 하지 못했다. 농촌의 지주를 없애는 것을 촉구하는 한편, 중국공산당은 상공업체의 사적 소유를 어느 정도 허용했다. 그러나 1956년 이것들도 모두 국유화했다.

 

쉽게 말해, 1949년의 중국혁명은, 마오가 역사의 필수 단계로 상정한 신민주주의 또는 그 비슷한 무엇도 만들어내지 않았다. 중국은, 생산수단의 사회화와 중앙계획 그리고 소부르주아 관료층의 정치권력 독점 등, 스탈린 치하 소련과 질적으로 유사한 체제로 변모했다. 그리하여 인민공화국은 처음부터 기형적 형태의 노동자국가였다. 이 사건은 적대적 사회계급 사이의 ‘공동독재’는 불가능하다는 맑스주의 기본전제를 다시 확인해 주었다. 국가 권력은 반드시 부르주아나 프롤레타리아 소유형태 중 하나만을 방어한다.

 

 

 

멘셰비키 단계론과 경제적 주의주의[主意主義: 지성이 아닌 의지를 존재의 근본 원리 또는 실체라고 보는 관념론]

 

신민주주의 강령은 여타의 스탈린주의 2단계론의 다양한 변종들처럼, 만약 ‘민족자본가’가 제국주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면 반(半)식민지 나라들에서 자본주의가 사회 진보, 경제 발전 그리고 민족 해방을 이루어낼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이것은 공상적이고 전혀 실현가능하지 않은 생각이다. 한 줌의 독점자본가들이 지배하는 세계 자본주의 시장의 탄생은, 선진자본주의국가들이 밟았던 ‘고전적’ 발전과정을 식민 또는 반(半)식민 국가들이 그대로 밟을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한다. 진보적 ‘민족자본가’를 찾는 것은 단순히 환상만이 아니라, 인도네시아 사례가 보여주는 것처럼 가끔 치명적 재앙으로 귀결된다.

 

‘민족자본가’는 정치적 편의에 따라 규정되고 또 재규정되는 개념이다. 2008년 6월 프라찬다가 네팔에 ‘특별경제구역(SEZs)’ 설치를 주장했을 때, <마오주의 인도공산당(Communist Party of India(Maoist))>은 날카롭게 비판했다. 빈농들로부터 빼앗은 서벵갈 지역의 광대한 토지 위에 ‘특별경제구역’을 설치하려는 스탈린주의 주도 좌익전선 정부의 시도에 맞서 인도 마오주의자는 주도적으로 투쟁해 왔다. 서벵갈 ‘특별경제구역’이 외국기업들과 더불어 타타(TaTa) 같은 거대기업에게 이익을 안겨주었기 때문에, 그들의 행위가 “부분적 또는 전체적으로 제국주의 세계화 정책”이라는 이유로 <마오주의 인도공산당>은 인도 자본가들을 ‘매판’이라고 규정했다. 대신에 그들은 “거대 다국적기업이나 매판자본가들로부터가 아니라 토착 부르주아지로부터 나오고 자신들의 요구에 복무하면서, 인민의 생활조건의 개선에 기여하는”, “인민 주도 발전”을 자본가들이 추구할 것을 제안했다(<인민의 행진>, 2007년 7월).

 

‘민족자본가’의 범주에 대한 그들의 불일치에도 불구하고, 마오주의 인도공산당과 UCPN(M) 모두는 사회주의 혁명을 말하기 이전에 자본주의 발전 단계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자신이 혁명투사라고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부르주아지에 순응하는 것은 ‘일국사회주의’라는 스탈린주의 교조의 수용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레닌 사후 소련 공산당의 지도부를 둘러싼 분파투쟁 도구로 처음 도입한 스탈린의 이 정식은, 제국주의 시기 자본주의는 서로 다른 나라들의 사회 구조를 묶는 세계 체제라는, 레닌주의 사상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만약 경제적 자족이 특정 국가 사회주의 혁명의 전제조건이라고 여긴다면, 네팔 같이 후진적인 나라에서는 반드시 ‘진정한’ 자본주의 단계를 과도적으로 밟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논리적이다. UCPN(M)의 신민주주의 사상은, 제국주의(그리고 그 국내 하수인인 ‘매판자본가들’)와의 관계 단절을 통해 네팔은 현대적인 자본주의 경제로 발전될 것이고 그리하여 나중에 그 국경 내에서 온전히 사회주의 사회를 수립할 물질적 기초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제에 입각해 있다. 네팔 지배계급에 대한 UCPN(M)의 순응은 바로 이 잘못된 사고에서 나오는 것이다.

 

맑스주의 원칙 가운데 하나는, 모든 이에게 물질적 풍요를 누리게 할 과학기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국주의 시기 자본주의가 세계적으로 생산력 발전을 가로막는다는 것이다. 1878년, <시카고 트리뷴>지(誌)와의 인터뷰에서 맑스는 “단순히 지역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노동자의 국제적 행동으로 풀어야 할 국제적 과제이다.”라고 사회주의를 묘사했다 (「미국에 대하여」, 맑스와 엥겔스). 국가적으로 고립된 현상으로 사회주의를 설명하는 스탈린의 반(反)맑스주의 사상을 줄기차게 방어해온 RCP는 네팔의 경제가 후진적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있다. 그러나 UCPN(M)에게 그 문제를 마오가 중국에서 했던 것처럼—즉, 공상적 이상주의로—해결하라고 충고한다.

 

“중국 혁명사 초기에, 후진국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사실 마오의 신민주주의 사상 전부는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보여주는 것이었고, 물론 그는 실천적으로 입증했다. 문화혁명 과정에서 마오는 ‘혁명을 부여잡고, 생산을 증대하라.’라는 구호를 제기했다. 그를 통해 보다 혁명적인 변화를 통해 사회의 생산력이 증대될 수 있다는 것을 올바로 보여주었다. 자본주의적 수단을 통해서만 발전이 가능하다고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과 완전히 반대의 사례이다.”—2008년 11월 4일 편지


 

마오의 경제적 주의주의는, 실현되지 않았지만 자본주의 발전 단계가 필요하다고 그 자신이 주장했던 신민주주의 멘셰비즘의 뒷면일 뿐이었다. 차르 치하 러시아보다 더 후진적인 나라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해, 마오는 현실을 부정하면서, 중국은 “사회주의 이행” 직전에 있다고 1956년에 선언했다. 1960년대의 문화혁명은, 마오쩌둥 사상은 모든 물질적 장애를 극복할 수 있고, 완전한 공산주의 사회가 혁명적 의지만으로 창조될 수 있다는 어처구니없는 사고에 기초해 있었다. 필연적으로 다가온 이 이상주의적 실험의 탈진 뒤엔, <국제혁명운동(RIM)>이 중국 자본주의 부활로 잘못 판정한, 등소평 주도의 시장개혁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타라이: 네팔엔 스탈린주의보다 트로츠키주의가 ‘더 적절하다’

 

네팔 지배자들의 환심을 사려 하다가 겪은 쓰라린 경험에도 불구하고, UCPN(M)의 지도자들은 신민주주의의 핵심 원칙들을 진지하게 검토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겉치레 트로츠키주의자인 <국제맑스주의경향(International Marxist Tendency: IMT)>은 네팔 마오주의 정당이 “레온 트로츠키의 역할을 인정한다(www.marxist.com, 20 October 2009).”라고 주장한다. 이 같은 주장의 근거는 UCPN(M)의 네팔어 잡지에 실린 바타라이의 논문이다. IMT의 번역에 따르면, 바타라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날, 제국주의 자본주의 세계화는 10월 혁명 시기와 비교했을 때 몇 배 더 증대되었다. 정보기술의 발전은 세계를 지구촌으로 바꿔놓았다. 그러나 제국주의 자본주의에 내재된 불균등한 극단적 발전으로 인해, 다른 국가들 사이에 불평등을 만들어 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10월 혁명과 유사한 일국의 혁명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나 그 혁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세계적이거나 최소한 서너 나라에서 발생하는 지역적 혁명 물결이 있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맑스주의 혁명가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의를 진전시키기에 트로츠키주의가 스탈린주의보다 더 적절하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붉은 불꽃(Red Spark)>, 2009년 7월, 1호, 10쪽, 네팔어로부터 IMT 번역).”—「네팔공산당이 레온 트로츠키의 역할을 인정하다」, www.marxist.com, 2009년 8월 20일


 

만약 번역이 맞다면, 트로츠키 정치 분석의 중요성을 네팔 마오주의 이론가들이 수용할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IMT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과거에, 네팔 마오주의자는 중국 사회주의가 흐루시초프, 브레즈네프 그리고 등소평이 도입한 ‘수정주의’ 때문이라고 비난해 왔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스탈린주의도 비판한다. 환영할 만하고 고무적인 일이다.”


 

·         ·          ·

 

“과거에, UCPN(M)은 마오주의와 스탈린주의로 당간부들을 교육해왔다. 그러나 10년 동안의 무장투쟁의 교훈은 연속혁명 원칙의 올바름을 강조해왔고(바타라이가 종합한 것처럼), 마오-스탈린주의 혁명이론 즉, ‘일국혁명’과 ‘2단계론’을 반박했다.

 

“네팔 마오주의자들이 지난 과오에서 나온 모순들을 해결하고 노동자 국제주의에 기초하여 실천가능한 전략을 개발하는 것을 국제맑스주의자들이 도울 때가 되었다.”—「네팔 마오주의자가 새로운 전략적 방향을 찾다」, www.marxist.com, 2009년 10월 20일


 

그러나 UCPN(M) 내에서 연속혁명을 수용했다는 어떤 증거도 아직 없다. 물론 “[스탈린 치하 소련과 마오 치하 중국의] 노동자 권력이, 핵심 지도부의 죽음이나 체포 이후 어떠한 유혈참사도 없이 왜 그 반대쪽으로 넘어갔는지(RCP에 보내는 CPN[M] 의 편지, 2006년 7월 1일).”에 대한 마오주의의 전형적 설명에 대해서는 분명히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 신민주주의에 앞서 부르주아 민주주의 예비단계가 필요하다는 사상을 처음 채택한 바타라이는, ‘인민공화국’으로 빨리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맞서, ‘이행단계’ 전략을 줄기차게 옹호했다. 네팔이나 다른 신식민지 나라들에 자본주의 발전단계가 필요하다는 그의 생각에 변화가 있었다는 어떤 증거도 우리는 보지 못했다. 그의 트로츠키주의에 대한 언급은 아무리 잘 봐줘도 모호한 수준이다. 마오사상과 권고를 통해서 경제적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또한 그 어떤 신민주주의 내에서 그들의 특권을 자발적으로 포기하도록 하는 것의 불가능성도—인식하고, 다른 곳에서의 혁명으로 인해 사회주의로 나아간다면 모를까, 바타라이는 네팔에서 사회주의 혁명은 논외의 일이라고 결론 내렸을 가능성이 높다.

 

어찌 되었건 간에, 폴란드의 레흐 바웬사 그리고 러시아의 보리스 옐친 같은 다양한 소부르주아 보나파르트주의자들이나 반혁명분자들을 기회주의적으로 찬양해 온 그들의 오랜 역사(「Marxism vs. ‘Militant’ Reformism」을 볼 것)를 볼 때, 지독한 청산주의 조직인 IMT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가르칠 자격이 거의 없다. 바타라이가 모종의 트로츠키주의자로 변했다는 IMT의 주장은 다음과 같이 말하는 어떤 UCPN(M) 지지자를 감동시키지 못했다.

 

“이것은 (IMT 웹사이트가 의식적으로 암시하는 것처럼) 트로츠키의 역사적 역할이나 핵심 주장을 승인한 것이라기보다는, 교조적인 사상과 기계적 사고에 맞선 도발적 주장이다.

 

“마오 지지자들에게 그런 방식으로 트로츠키를 인용하는 것은 상당히 이상하다. (물론 네팔인들 가운데 몇몇이 로자 룩셈부르크나 체 게바라 또는 트로츠키를 인용했다.)

 

“그러나…‘만약 어떤 이가 누구를 언급하면 그는 반드시 그 누구의 지지자야.’라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차베스가 트로츠키를 언급했을 때(그는 종종 그랬다), 똑같은 국제 트로츠키주의자는 그것을 차베스가 비밀스런 트로츠키주의자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자신의 천진함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다.”—난도 심스, 「네팔 마오주의자, 트로츠키주의 그리고 일국사회주의와 관련된 소문에 대하여」, kasamaproject.org, 2009년 10월 22일


 

자본주의 국가의 수장이라는 그의 지위를 이용하여 베네수엘라를 사회주의 사회로 점진적으로 변화시킨다고 주장하는 베네수엘라 대통령 우고 차베스는, 그의 부르주아 민족주의 정책들에 보다 좌익적 색채를 입히기 위해 종종 트로츠키의 저작을 인용했다. IMT는 ‘볼리바르 혁명’ 지도자의 그 같은 민중선동을 베네수엘라가 사회주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증거라고 해석해 왔다(「베네수엘라와 좌익」을 볼 것).

 

 

 

볼셰비키-레닌주의가 유일한 길이다

 

네팔에서 명확한 강령과 혁명 지도부에 대한 요구는 점점 더 날카로워지고 있다. 한편으로는 대중을 정치적 비무장 상태로 방치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중을 동원하면서 UCPN(M)은, 인도네시아공산당이 마오의 지도 아래 그러했던 것처럼, 피바다의 기초를 놓고 있다. 점점 자라나는 군사적 ‘해결책’은 자본가 정당들과의 또 다른 부패한 동맹으로는 저지될 수 없다. 시간이 많지 않다.

 

“마오주의자들이 정부를 떠맡은 이후 몇 개월 동안 게릴라 전쟁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이 점점 커지고 완고해졌다….”

 

·         ·         ·

 

“이것은 전투상황으로 돌아가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보이는 상황을 조성하기 위해 방해자들[급진 마오주의자들]이 힘을 쏟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발생 가능한 상황은 여러 가지이다.…이미 언론에서 언급되고 있는 ‘불관용’ 정책이 YCL[청년공산동맹]을 압박하고 그 반응을 확인하기 위해 쓰일 수 있다. 폭발 직전의 정치 상황과 다양한 사회 균열이 있으므로, 타라이 지방을 휘저어 분규를 일으키는 것은 그다지 어려워 보이지 않는다. 국가비상사태 선포가 사회 무질서를 억제하기 위해, 특히 지연된 입헌과정을 6개월 연장하기 위해, 필요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마오주의자들에 맞서 대통령이 개입하는 것을 반기는 여러 정당들의 지지를 통해, 대통령이 더 나아가도록 촉구될 것이다.—<국제위기그룹(International Crisis Group: ICG)>, 「네팔의 미래: 누구의 손에?」, 2009년 8월 13일


 

네팔 부르주아 언론의 점증하는 주문에 장단을 맞춰, ICG는 불만을 가진 마오주의자들에게 닥치거나 아니면 덤벼보라고 도전적으로 요구해 왔다. “만약 마오주의 이론가인 키란, 가우라브[지도적인 ‘좌익’ 인사들]와 그 동조자들이 진정으로 순수한 혁명가가 되기를 원한다면, 정글로 되돌아가라. 가서, ‘인민전쟁’을 재개하고, 이 합헌적 과정의 일원인 것처럼 행동하기를 중단해야 할 것이다(같은 글).”

 

재앙을 피하기 위해, 네팔 혁명가들은 부르주아 안정화 “과정”에 참여하기를 거부하고 대중들에게 국가권력 장악과 착취자 몰수만이 그들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길이라는 점을 설명해야 한다.

 

그러나 네팔의 고립된 노동자 혁명은 무한정 생존할 수 없고 무계급 사회를 성취하는 것은 더 어렵다. 노동계급은 어떤 혁명이든 반드시, 강력한 인도 노동계급(수십만 명의 네팔 이주노동자를 포함하여)에 번질 것이고 그 지역과 제국주의 중심부인 일본, 유럽, 북미 노동자들의 지원을 얻어낼 것이라는 인식에 기초한 국제주의적 전망을 가져야 한다. 상황을 결정할 열쇠는 중국 프롤레타리아트이다. 네팔 혁명적 노동자정부는 1949년 중국 혁명의 성과를 무조건적으로 방어할 것이고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을 쓸어버리고 자신의 프롤레타리아 정치권력을 수립할 것을 중국 노동인민에게 호소할 것이다.

 

네팔의 뿌리 깊은 후진성을 극복하고, 성적 차별과 인종적 차별을 종식하고 사회주의 미래를 성취하기 위한 길을 남아시아사회주의연방을 위한 투쟁을 향해 이어져있다. 네팔 노동자와 농민은 비범한 혁명적 열의를 표출해 왔다. 그들의 영웅적 에너지를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 트로츠키가 말한 “노동계급 지도부의 역사적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 그것은 단지 용기, 정력 그리고 희생할 의지만이 아니라, 그동안의 혁명역사의 교훈을 배우고 이를 적용할 능력 역시 갖춘 볼셰비키-레닌주의 당 건설을 통해 가능하다.

 

<끝>

 

[검은 색…<1917>의 주]

 

[초록색…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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