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운동과 혁명정당

(IBT) IBT 3차 세계회의: 의미 있는 일보 전진( 24호, 2002)

by 볼셰비키-레닌주의자 posted Dec 24,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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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출처 – 국제볼셰비키그룹(IBT)



IBT 3차 세계회의



의미 있는 일보 전진



2001년 10월초에 열린 [국제볼세비키그룹](IBT)의 제 3차 세계회의는 [우크라이나혁명청년맑스주의그룹](YRM)의 조직 가입과 함께 막을 내렸다. 이것은 IBT에게는 정치적으로 의미 있는 일보 전진을 뜻한다. 왜냐하면 이때까지 IBT는 전적으로 제국주의 국가들에서만 조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혀 다른 정치적 경험으로 단련된 투사들이 이 조직에 들어오면서 이 조직이 세계를 이해하고 결국 세계를 변화시킬 능력에 중요한 보탬이 되었다.

YRM은 키에프에 거주하고 있던 십대들의 써클에서 출발했다. 이들은 1989년 트로츠키의 [배반당한 혁명]을 한 권 입수하여 이 책이 주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에 대한 심오하게 의미 있는 정치적 통찰력을 가득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당시에 자본주의 복귀 세력들은 퇴보한 노동자국가인 소련에서 힘을 얻고 있었다. 이 써클에서 시작하여 스탈린주의에 비판적이며 대부분의 경우 자신들을 트로츠키주의자로 인식하는 다양한 스펙트럼의 좌익 조직들이 우크라이나에 다시 등장했다.

YRM으로 결집된 청년들은 스탈린주의 세력과 자유부르주아 세력으로부터 정치적 독자성을 유지하려는 결의를 강하게 보였다. 이들은 소련이 존재하는 동안은 소련 체제를 방어하는 노선을 취했으며 자본주의 복귀의 반혁명에 반대했다. 또한 스탈린주의 관료 특권층을 노동계급의 정치혁명으로 타도하려는 트로츠키의 전망을 자신의 노선으로 받아들였다. 트로츠키주의를 자임하는 여러 국제조직들을 파악한 후 1998년 YRM은 잠정적으로 자신이 IBT에 가장 정치적으로 가깝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YRM에게 특히 중요했던 IBT의 노선은 1991년 8월 모스크바에서 터진 쿠데타에서 옐친의 자본주의 복귀 세력에 대항한 야나예프 등 국가비상위원회로 결집한 스탈린주의자들의 군사적 승리를 주창한 것이었다.

YRM의 핵심 중핵들은 격심한 사회적 정치적 격동의 시기에 사회주의를 주창하고 스탈린주의를 반대하는 청년들이었다. 이들은 맑스, 엥겔스, 레닌의 저작들에 대한 진지한 학습이 흔하게 진행된 지적 환경 속에서 성장했다. 그리고 이 지적 환경에는 크리스티안 라코프스키의 역사적 영향력도 조금은 존재하고 있었다. 그는 레닌이 살아있던 당시 우크라이나소비에트 정부 수반이었으며 나중에 트로츠키의 좌익반대파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YRM 동지들은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이 정치권력을 장악하기 전 혁명 초기의 진정한 볼세비키 전통을 다시 확립하려는 의식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어려운 작업이었다. 왜냐하면 최소한 50년간 우크라이나에는 혁명적 맑스주의 조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YRM은 어느 누구의 도움도 없이 트로츠키 노선의 핵심 내용들을 철저히 소화하는데 성공했다. 이 대단한 성취는 오직 이들의 노력 덕분이었다.

IBT와 정치토론을 갖자는 애초의 결정은 YRM의 소수파로부터 반대를 받았다. 이 소수파는 옐친의 승리가 반혁명의 승리라는 견해를 거부했다. 이들은 YRM에서 탈퇴하고 [혁명적 코민테른 동맹](LRCI)에 접근했다. 당시 LRCI는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 구소련의 해체와 함께 탄생한 국가들을 “다 죽어가는” “노동자 국가”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YRM의 소수파가 자신들을 LRCI의 우크라이나 지부라고 선언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 기이한 노선은 LRCI 지도부에 의해 공식적으로 폐기되었다. 그러나 LRCI는 “다 죽어가는 노동자 국가” 노선을 폐기했지만 지금까지도 1991년 8월 쿠데타 사건에서 옐친의 반혁명 세력을 지지한 자신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LRCI를 지지하는 소수파가 조직에서 나간 직후인 1999년 11월 IBT 대표가 키에프를 방문하여 YRM 동지들을 만났다. 이들에게는 IBT의 용어, 분석의 특이함, 방법론 등이 낯설었다. 그러나 YRM과 IBT의 근본 강령이 아주 유사하다는 사실이 명확해졌다. 예를 들어 YRM은 즉시 군사적 지지와 정치적 지지의 차이를 구별했다. 이것은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에 대항하여 노동계급의 정치혁명을 옹호함과 동시에 옐친보다는 스탈린주의자들이 승리하는 것이 더 낫다는 입장을 표현하는데 유용한 개념이었다.

트로츠키 사후 지금까지 이어져온 트로츠키주의 운동사를 이해하고 지난 60년간 혁명가들이 직면했던 정치적 사안들을 진지하게 연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YRM 지도부는 이해했다. 이 연구는 IBT와 YRM의 정치적 합의를 상당히 심화시켰다.

YRM 동지들은 혼합민족 문제에 대한 IBT의 입장을 받아들였다. 이 입장은 두 민족 이상이 같은 지역을 차지한 북아일랜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등의 민족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70년대의 혁명조직 [스파르타쿠스동맹]이 정식화한 노선이었다.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인민은 서부지방에서 억압받고 있으며 우크라이나어를 사용하는 인민은 동부지방에서 억압받고 있다. 또한 YRM은 크리미아 반도에서 타타르 소수민족이 인종 박해를 당하고 있는 현상과 미국에서 흑인들이 당해왔던 인종 차별의 유사성을 파악했다.

우크라이나 동지들이 민족문제의 복잡성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은 세계회의에서 명백히 드러났다. 이때 “국경을 개방하라”는 단순한 무정부주의적 공상주의 요구가 갖는 문제 그리고 이민 문제에 대한 레닌주의 노선이 토론에 올랐다. 동유럽의 예를 들어 맑스주의자들이 원칙적으로 부르주아 국가의 모든 이민 통제 정책을 반대하되 대규모 이주가 국수주의를 부채질하고 계급의식을 잠식하기 위해 반동적 선동가들에 의해 사용될 수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고 YRM 동지들은 설명했다.


공동전선 대 선전연합

트로츠키주의와 중도주의의 특징적인 차이들 가운데 하나가 선전연합에 대한 태도이다. 2000년 말 우크라이나에서 터진 부르주아 세력들 간의 다툼에서 YRM은 이 문제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우크라이나 대통령 쿠츠마가 유명한 정권비판 인사를 살해한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증거들이 나왔다. 그러자 좌익 조직들은 대부분 열성적으로 쿠츠마를 반대하는 부르주아 세력 주도의 인민전선 운동에 가담했다. 그러나 YRM은 쿠츠마의 범죄행위를 올바르게 비난하면서 동시에 착취계급인 부르주아 세력의 어떤 분파와도 동맹하기를 거부했다.

2001년 3월 YRM은 LRCI 지지자들을 포함한 좌익 조직들과 함께 민주적 권리를 옹호하고 급격히 성장하고 있는 파시스트 세력의 위협에 대항하는 연합을 결성했다. 그러나 이 공동전선 시도는 어떠한 구체적 투쟁도 해내지 못한 반면 정치적 단결의 기초를 확대했다. 이 중에는 “IMF, 족벌, 부르주아 계급과 그 하수인들, 근로인민의 배신자들로부터 우크라이나를 해방”시키자는 구호가 포함되었다.

이때 IBT는 YRM 동지들에게 경고했다: 사회주의 혁명 촉구에 해당되는 요구들에 기초하여 개량주의 및 중도주의 조직들의 연합에 참여하는 것은 이 조직들의 “혁명성”에 정치적 신뢰를 보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YRM은 연합의 기초가 “좌익적”으로 표류하는 것에 불안감을 나타내고 있었으나 대처방안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YRM은 진정한 공동전선(참여조직들이 자신의 독자적 정치노선을 표현하면서 공동투쟁을 하는 연합)과 선전연합(참여조직들이 정치적 차이를 억제하고 공통의 정치적 목표와 공통의 전략을 공유한다고 공언하는 연합)의 차이를 재빨리 이해했다.

사실 LRCI 지지자들과 YRM의 목표는 이 특정 상황에서 매우 달랐다. LRCI는 쿠츠마를 반대하는 부르주아 세력을 노동계급이 물론 “독자적으로” 지지하기를 원했다. 반면 YRM은 부르주아 반정부 세력에 대한 어떠한 정치적 지지도 거부하고 민주적 권리의 옹호와 반파시즘 투쟁에 노동계급을 독자적으로 추동하기를 원했다. 즉각 그리고 단호히 애초의 오류를 정정하는 것을 통해 YRM은 정치적 진지성을 증명했으며 동시에 공동전선 전술의 이용과 오용을 더욱 깊이 이해했다.


위대한 전통

세계회의에서 채택된 <임무와 전망> 문서는 IBT가 세계에 널리 분산된 소(小)선전그룹임을 명시했다. 지난 세계회의 이후 IBT는 특히 북미와 독일에서 귀중한 청년 혁명가들을 조직했다. 그러나 과거에 중요한 기여를 했던 나이가 더 많고 경험이 더 풍부한 동지들을 잃었다. 이 손실은 불가피했다. 이 동지들이 혁명가로 남아있을 수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을 완전히 소진시켰기 때문이었다.

IBT 핵심 중핵의 다수가 아직도 혁명적 의지를 상실하지 않았지만 “1968년 세대”가 더욱 늙은 것은 사실이다. 세계회의의 문서는 이렇게 주목했다:

“IBT의 전신 혁명조직에서 훈련된 회원들은 현재 수도 적도 나이도 많이 들었다. 이것은 혁명 지도자가 되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50회 생일을 맞이하여 레닌은 나이 50을 넘긴 혁명가들은 전부 총살되어야 한다고 농담했다. 하여간 노쇠한 동지들의 틈을 메우는 일은 현재로는 매우 어렵다.”

혁명조직의 결정적인 시험대는 이 조직이 혁명가들을 재생산할 능력을 가지고 있는 가에 있다. 따라서 젊은 동지들이 위대한 전통을 계승할 존재라는 점을 이들에게 주지시키는 것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노동계급 정당 수립을 위한 투쟁]이라는 저서에서 미국의 트로츠키주의 지도자 제임스 케넌은 이렇게 말했다: “혁명가의 특징은 맑스주의 사상, 투쟁방식, 전통에 대한 집착에 있다.” 혁명 전통을 옹호하는 투쟁은 혁명 세력의 재편 과정에서 재편의 핵이 될 국제 선전그룹을 건설하는 핵심적인 투쟁이다.

세계회의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트로츠키주의 운동사에서 중요한 문서들이 IBT와 YRM 내에 배포되었다. 회의 기간에 진행된 교육 과정은 1950년대 파블로주의에 대한 투쟁, [국제스파르타쿠스그룹]의 결성, 1980년대 초반 이 그룹의 퇴보에 대한 IBT 전신 [외향 그룹]의 투쟁 등에 대한 토론으로 구성되었다. 또한 1970년대 [국제스파르타쿠스그룹]과 1930년대와 1940년대 제임스 케넌이 이끌었던 [사회주의노동자당(미국)]의 장단점 분석, 미국의 혁명적 청년 조직사업, 투사 법정투쟁 지원 사업, 혁명적 노동조합 활동 등의 역사 역시 교육 내용에 포함되었다.

제 2차 세계회의와 제 3차 세계회의 사이에 있었던 업적 가운데 하나는 [이행 강령]의 신판 발간이었다. 이 출판물에서 우리는 트로츠키의 제 4 인터내셔널 강령이 어떻게 레닌 생전 혁명적 코민테른으로부터 유래하는 가를 개괄했다. 또한 이 책은 트로츠키주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가장 알려지지 않은 업적 즉 미국 핵심 산업 노동조합에서 [이행 강령]에 기반한 [스파르타쿠스동맹]의 모범적 혁명 분파 결성 사례 등을 싣고 있다.


제국주의 반대와 ‘세계화 반대’

제국주의 세계 질서는 지구상 거의 모든 나라에서 혁명적 격동이 일어날 객관적 조건들을 만들었다. 세계회의의 결의문은 이렇게 표현했다:

“세계 경제는 빈자와 부자의 양극화 현상을 증대시켰다. 이 기본적인 경제적 경향은 ‘공산주의의 멸망’ 이후 상당히 심화되었다. 발칸 반도, 인도, 중남미, 중동, 인도네시아 등 여러 지역에서 대대적인 격동이 어느 순간에도 터질 수 있다. 제국주의 신식민지와 구소련 국가들에서 빈곤, 질병, 인종갈등이 창궐하고 있다. 구 소련 지역의 급격한 생활수준 하락은 사회질서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 아프리카의 대중에게 가해지고 있는 사회적 경제적 재앙은 완화될 기미를 보이지 않은 채 계속 악화되고 있다. 중국의 수억 노동자 농민의 삶을 유린할 자본주의 부문의 증가는 비자본주의 경제 사회 체제에 기초한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의 정치적 독점과 더욱 더 충돌하고 있다.”

 <임무와 전망, 2001년>

세계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공습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것의 정치적 파장 특히 “세계화 반대” 운동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상당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회의에서 채택된 주요 문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미분화된 이 급진적 운동의 새로운 물결은 아직도 유아기 상태에 있다. 이 운동은 아직 주요한 패배를 당한 적이 없으며 이 운동의 영향력은 국제적으로 청년들에게 계속 확산되고 있다. 이 운동 내의 정치적 분화는 아직까지는 상대적으로 느리게 진행되고 있다. 보호무역주의, 생태개량주의, 제 3 세계 지역주의, 자유공상주의적 국제주의, 전투적 무정부주의 등은 각기 다른 비율로 대부분의 주요한 행사에서 결합되어 있다. 이 운동은 자칭 맑스주의 좌익과는 독자적으로 발전했다. 그리고 이 운동의 핵심 중핵은 비혁명적 무정부주의자와 생태계 및 ‘인권’ 활동가들이다. 이 운동이 불가피하게 분화과정을 겪으면서 자칭 맑스주의 좌익에게 제공될 조직 확대의 기회는 각 조직들에게 반응을 강제할 것이다. 이 반응은 과거의 노선차이를 그대로 반복할 것이며 동시에 새로운 노선 차이를 드러낼 것이다.”

<위와 같은 글>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공습은 “세계화 반대” 운동을 상대적으로나마 정치적으로 균일하게 만든 공유된 가정의 틀 바깥에서 사안들을 제기하고 있다. 이에 대한 반응은 평화주의, 친제국주의 개량주의, 제국주의 침략자에 대항하는 혁명적 충동 등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왔다. 미국 주도의 연합군이 패배하기를 바라는 “세계화 반대” 시위자들은 맑스주의자들이 정치적으로 접촉해야 하는 대단히 중요한 청년운동 부위이다.


제 4 인터내셔널의 부활을 위하여!

혁명적 맑스주의를 세계정세의 중요한 요인으로 다시 위치시킬 수 있는 규율에 입각한 국제 전투정당의 중핵 결집, 이것이 우리의 목표이다. 극히 적은 규모의 국제 소선전그룹인 IBT의 핵심적 임무는 수정주의 왜곡에 대항하여 트로츠키주의의 역사적 강령을 방어하는 것이다. 이 목적을 위해 피상적으로 트로츠키주의 강령에 가장 가까운 것처럼 보이는 정치조직들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이를 통해 이 조직들 내의 진정한 혁명 분자들을 끌어내고 결집시켜야 한다. 한편 볼세비키주의의 역사적 강령과 중도주의 아류 노선들을 명확히 구분시켜야 한다.

좌익반대파의 핵심적 지도자 여러 명이 운동 대오에서 이탈한 현상에 대해 트로츠키는 이렇게 말했다:

“변절자들의 특성은 기억력이 좋지 않다는 것이다. 또는 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기억력이 좋지 않다고 가정한다. 이와 반대로 혁명가들은 기억력이 좋다. 혁명정당은 노동계급의 기억력이라고 진정으로 말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 과거를 잊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것이 우리의 첫 번째 가장 중요한 임무이다.”

 <형편없는 문서> 1929년 7월 27일

IBT의 제 3차 세계회의는 제 4 인터내셔널 부활의 긴 여정으로 가는 작지만 중요한 일보 전진이었다. 현재 IBT는 아주 작은 조직이다. 그러나 우리는 혁명적 거인 선배들의 어깨 위에 서있다. 우리는 혁명적 맑스주의의 정치적 유산을 적극 수용하며 볼세비키주의가 이 지구상에서 살아남을 뿐 아니라 결국에는 승리할 것을 보증하기 위해 자랑스럽게 투쟁에 동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