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운동과 혁명정당

(IBT) 프랑스 ‘최초고용계약법’ 반대 투쟁(29호, 2007)

by 볼셰비키-레닌주의자 posted Dec 24,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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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출처 – 국제볼셰비키그룹(IBT)



프랑스 ‘최초고용계약법’ 반대 투쟁

대중적 저항과 개량주의자의 배신

 

  

‘최초고용계약법(CPE-Contrat première embauche)’에 맞선 최근의 투쟁은, 노동과 생활 조건을 갉아먹으려는 자본가들에 맞서는 프랑스 노동계급의 사회적 힘을 보여줬다. 대학생과 고등학생이 불을 지피고 이끌었던 이 반격은, 인민 대다수의 지지를 받았다. 3월과 4월 초 수만 명의 노동자들이 24시간 항의 파업을 벌였고, 한편 학생과 노동자로 구성된 3백만 명의 시위대는 정부의 계획에 반대하는 행진을 조직했다.

 6개월 전인 2005년 10월, 노동조합들이 조직한 ‘행동의 날’에 백만 명의 인민이 참여한 바 있다. 도미니크 드빌팽 수상이 제안한, ‘소규모 기업은 2년의 시험 기간 동안에 노동자들을 아무 때나 해고할 수 있도록 한다’는 ‘신고용계약법(CNE-Contrat nouvelles embauches)’에 저항하기 위해서였다. 반대 의사를 밝힌 후, 노조 지도부는 그 문제를 버려두고 일상적인 업무로 되돌아갔다. 7월 중순경 28만 건의 ‘불안한’ 고용 계약이 새로 체결되었다(<르몽드>, 7월 17일).

 2005년의 10월과 11월, 경찰이 무고한 십대 두 명을 추격 끝에 죽음에 이르게 한 사건이 발생하자, 그 동안 대량 실업과 인종주의의 희생자였던 프랑스 변두리 지역의 흑인과 아랍 청년들의 불만이 폭발했다. 정부는 이에 대해 강력한 공권력을 동원했다. 이 사건이 잠잠해진 이후 내무장관인 니콜라 사르코지는 그의 선거기반인 파시스트 정당 <국민전선>의 비위를 맞추려는 노력의 하나로 이민정책을 다시 강화했다(<르몽드>, 3월 30일). 드빌팽은 보수정당 <대중운동연합(UMP)>의 2007년 선거 후보가 되고 싶어하는 사르코지의 주경쟁자이다. 그 드빌팽이 ‘특정 사용자의 세금과 사회기여를 면제해 주고, 15세 이상 노동자의 야간작업을 합법화하고, 도제에 들어갈 수 있는 나이를 14세로 낮추고, 학생이 학교에 잘 다니지 않을 경우 그 부모의 가족지원금을 삭감할 목적으로 ‘부모 책임’이라는 계약을 도입’하는 것을 주 내용으로 하는 법제화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드빌팽의 ‘기회평등법’ 중 가장 커다란 논란이 되는 부분은 겉으로는 청년 실업을 줄이겠다고 내건 26세 이하의 노동자를 겨냥한 ‘최초고용계약법’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법이 모든 노동자들의 직장의 안정과 임금을 위협하는 것이라고 인식했다.

 <노동조합총연맹(CGT)>의 사무총장인 베르나르 티바울트는, 드빌팽의 법안에 대한 견해를 묻자,  “수용할 수 없다.”고 즉각 응답했다(<르몽드>, 1월 18일). 프랑스 노조 관료들은 ‘사회적 파트너들’(노조 지도자와 사용자들) 사이의 협의를 거친 후에만 법안이 작성될 수 있다는 계급 협조 모델을 선호한다.


학생과 노동자들의 반격

 2월 7일, 주로 학생들로 구성된 40만 명의 시위대가 ‘’최초고용계약법’의 폐기’를 요구하며 거리로 나섰다. 이 시위는 <프랑스전국학생연합(UNEF)>, <노동조합총연맹(CGT)>, <프랑스노동자민주연대(CFDT)>, <프랑스기독노동자연대(CFTC)>, <노동자의 힘(FO)>, <통일노조연대(FSU)> 그리고 <전국자율노조연맹(UNSA)> 등으로 구성된 ‘노동학생조합 연석회의’에 의해 주도되었다. <공산당(PCF)>과 <사회당(PS)>을 포함하는 다양한 좌익 조직들이 이 시위를 지지했다. 주로 교사 노조들로 구성된 <통일노조연대(FSU)>는 심지어 이 날 통일적으로 휴무할 것을 촉구했다.

 이른바 ‘반(反)최초고용계약법’ 운동의 좀 더 전투적 인자들은 ‘기회평등법’ 전체의 폐기를 요구했다. 많은 시위 참가자들은 ‘반(反)최초고용계약법’ 운동이 ‘신고용계약법’ 저지 투쟁을 다시 촉발시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좀 더 정치적으로 선진적인 인자들은, 이민자들과 ‘생존 불안’에 시달리는 변두리 지역 청년에 대한 방어 투쟁을 포괄하는 방향으로, 이 투쟁이 나아가야 한다고 인식했다.

 2월 7일 시위의 성공은 학생들의 회합을 잇달아 일어나게 했고, 많은 시위를 불러일으켰다. 사회당과 가까운 <프랑스전국학생연합(UNEF)>의 지도부는 총회를 어떻게 조직할 것인지와 좌익의 영향력을 어떻게 차단할 것인지를 교육했다(<르몽드>, 2월 16일). 총회는 모든 학생들이 참가할 수 있고, 어떤 사안이건–즉, 회보 발행, 수업 거부, 건물 점거 등–참가자는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다. ‘반(反)최초고용계약법’ 운동 초기에 여러 학교들의 총회 참가자는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투쟁이 발전해 감에 따라 참가자가 꾸준히 증가했다.

 2월 13일부터 20일이 전국 ‘투쟁 주간’으로 선포되었다. 2월 18일에 30개 대학의 총회 대표자들 모임이 렌에서 열렸다. 이들은 ‘반(反)최초고용계약법’ 공동 투쟁, 동맹 휴업과 학교 봉쇄에 대해 논의했다. 이것이 여러 차례에 걸쳐 벌어지는 ‘공동 행동’의 시작이었다. 이 ‘공동 행동’은 공식적인 학생회들의 통합된 조직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프랑스전국학생연합(UNEF)>에 따르면, 3월 1일 경 13개의 대학이 휴업에 돌입했다.

 ‘노동학생조합 연석회의’가 주도한 3월 7일의 행동의 날엔 프랑스 160개 도시에서 백만 명(그 중 3분의 2는 노동자)이 참가했다. 파리 20만 명, 마르세유 10만 명, 보르도 7만 명, 뚤르세 5만 명 그리고 렌에선 3만 명이 행진했다(<르몽드>, 3월 9일). 그 날 전국 총파업을 벌일 것을 거부한 <노동조합총연맹(CGT)>의 지도부는 각 지부들에 참가여부를 맡겼다. <노동자의 힘(FO)>과 우체노동자와 철도노동자를 대표하는 <연대노조(SUD)> 그리고 <통일노조연대(FSU)>는 ‘직종 연대’ 파업을 선언했다. 파리와 다른 지역의 공공 교통이 영향을 받았고, 많은 공공 부문의 노동 현장들과 우체 통신 서비스 부문에서 파업이 전개되었다(<Nouvel Observateur [online]>, 3월 7일).

 3월 8일, 학생들이 1968년 이후 처음으로 소르본 대학을 점거했다. 3월 9일, 38개의 대학 학생들이 휴업에 돌입했고, 고등학교와 전문대학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정세가 고조됨에 따라, 정부가 결국은 후퇴할 것이라는 전망이 확산되었다. 그러나 드빌팽은 버텼다.

 

‘갈등이 고조되다’

 3월 11일에 폭동진압 경찰이 소르본 대학을 점거하고 있던 학생들을 공격한 것은 ‘최초고용계약법’ 반대자들에 대한 경찰의 무자비함을 보여주는 사례 가운데 하나였다. 드빌팽은 그날 밤 TV에 출연하여 “국회에서 통과된 법은 발효될 것이다.”라고 노골적으로 선언했다. 그의 발표는 새로운 저항을 촉발했다. 특히 그에 자극받은 수십만의 고등학생들이 3월 14일 거리로 나섰다. 많은 학교가 학생들에 의해 휴교되고, 시위대 일부는 자본가들의 지역 사무소를 점거하거나 철도를 봉쇄하는 등의 행동에 들어갔다. 3월 16일 학생 행동의 날엔 파리에서만 10만이 참여하는 등 전국적으로 50만 가량이 참가했다.

 ‘반(反)최초고용계약법’ 운동이 대도시와 그 인근 지역에서, 작은 마을들과 지방 소도시들로 번져가자, 지배계급 내에 심각한 위기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여론조사기관인 IFOP는 “갈등이 고조됨에 따라…청년들이 급진화되고 점점 더 극좌 조직들 쪽으로 기울고 있다.”고 발표했다(<르몽드>, 3월 24일). 저항을 무디게 하는 데에 실패한 정부는 파시스트들을 고무했다. 일례로 3월 16일 ‘쇠몽둥이로 무장한’ 수십 명의 우익들이 툴루즈 제1 대학에 진입하여, 점거 농성을 벌이던 학생들을 공격했다 (<르몽드>, 3월 17일).

 그 다음 날 대학총장들은 드빌팽과 만났다. 메스대학 총장인 리차드 리오게는 “수상! 우리는 폭발 직전에 있소. 뭔가 좀 하시오.”라고 주문했다 (<르몽드>, 3월 20일). 내무장관인 사르코지는 “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의 선동이,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근교 지역들을 자극할 위험이 있다.”라고 불안을 표현했다 (<르몽드>, 3월 24일). <경영자총회(MEDEF)>의 대표인 로렌스 파리소는 갈등이 ‘사회 통합’을 위협하고 있다며 걱정스러워했다 (<르몽드>, 3월 27일).

 3월 18일 토요일에 열린 3차 전국 행동의 날에, 주로 노동자로 구성된 백오십만 명의 시위대가 참가했다. 35만 명이 파리, 13만 명이 마르세유, 5만 명이 툴루즈에서 행진했다 (<르피가로>, 3월 19일). 경찰은 또 다시 거칠게 대응했다. 파리에서만 167명이 연행되었고, 39살의 노동조합 활동가인 시릴 페레즈는 심하게 구타당해 3주 동안 혼수상태로 있었다.

 18일의 시위 이후 노조 지도부는 “공화국의 대통령과 정부에게 사회적 긴장을 종료할 것을 심각하게 호소”했다. 3월 20일 67개의 대학들과 전체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4,330개 고등학교가 수업 장애를 겪었다. 몇몇 곳에서는 학교 당국이 ‘반(反)최초고용계약법’ 운동을 방해하기 위해 대학과 고등학교를 ‘휴교’하기도 했다. 보수당인 <대중운동연합(UMP)>의 지지 학생들로 구성된 ‘시위 반대’ 그룹들이, 학교 당국의 지원을 업고 정치에 무관심한 학생들을 동원하여, 휴업과 수업거부를 저지하려 시도한 사례들이 여럿 있었다. 성공한 경우도 있지만, 반동들은 노동계급 청년들의 분노와 절망감이 쌓여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3월 19일 전국 학생들의 회의가 디용에서 열렸고 그들은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했다. 

“전국학생연대는 ‘기회평등법’과 ‘신고용법’이 철회될 때까지 휴업할 것을 결의한다. 이 결의는 대학과 고등학교의 휴업과 시위대열을 건설하고 확대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각 학생회 조직의 지도부들이 ‘기회평등법’과 ‘신고용법’ 철회를 목표로 휴업 선언을 할 것을 촉구한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각 대학과 고등학교에서의 총회 소집을 촉구한다. 

전국학생연대는 3월 20일 열리는 ‘노동학생연석회의’가 3월 23일 대파업을 결정할 것을 제안했다. ‘노동학생연석회의’ 그룹은 3월 28일을 ‘작업 중단과 파업과 시위를 동반하는 직종 간 행동의 날’로 선언하면서, 3월 23일을 학생 행동의 날로 승인했다.

 ‘노동학생연석회의’ 그룹은 그들의 회의 이후 성명서를 발표하여 “정부는 궁지에서 벗어날 지혜를 가져야 한다.”라는 희망을 피력했다. ‘최초고용계약법’의 철폐를 모든 논의의 전제조건으로 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노조의 지도자들은 3월 24일 수상과 자리를 같이 했다. 그들은 드빌팽과 만난 것은 단지 ‘최초고용계약법’이 모든 대화와 협상의 전제조건이라는 것을 확인시켜주기 위해 만났을 뿐이라고 위선적으로 주장했다. 그 만남 이후 <노동조합총연맹(CGT)>의 사무총장인 티바울트는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나는 수상이 상황의 심각성을 잘 모른다고 생각한다.…사회적 동요가 가라앉기를 기다리는 것은 위험하다. 그것은 학생들을 더 급진적으로 만들 것이다. 정부는 지금 불길과 맞서고 있다.”

<Le Journal du Dimanche>, 3월 26일

 3월 23일 주로 학생들로 구성된 45만 명의 시위대가 거리로 나섰다. 프랑스 가스 회사의 사유화에 항의하는 가스와 전력노동자들이 그 시위에 참가했다. 다시 한 번 경찰은 시위대를 공격했고, 수백 명을 체포했다. 자본주의 언론은, 경찰과의 대치전에 참여한 변두리 지역의 아랍과 흑인 청년들을 비난하는 단어로 주로 사용되어 온, ‘난동분자(casseurs)’들을 비난하는 데에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대중 매체는 시위대를 공격하고 카메라를 훔치는 극소수의 룸펜 청년들을 부각시켰다. 소위 ‘난동분자’들에 대한 비난은, 명백하게 노조의 관료들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인종적인 과민 반응을 겨냥한 것이었다. <노동조합총연맹(CGT)>의 방위대들이 변두리 청년 몇 명을 흠씬 두들겨 팬 후 경찰에 넘겨준 추한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Libération>, 3월 29일).

 삼백만 명의 민중이 3월 28일에 열린 4차 행동의 날에 참가했다. 파리 70만 명, 마르세유 25만 명을 비롯하여 250개의 마을과 도시에서 시위가 전개되었다. 공공 부문과 철강, 자동차, 통신과 운수 노동자들이 작업을 중단하고 거리로 나왔다. 경찰은 이 시위에서 800명을 연행했다 (<르몽드>, 3월 30일).

 3월 29일 ‘노동학생연석회의’ 그룹은, 그들의 회원들에게 시위 철회의 명분으로 사용할 수 있는, 국가 관료들에게 양보 조처를 단행하라고 다시 한 번 호소했다. 

“국가의 최고 지도부는 ‘최초고용계약법’을 철회하고 협상을 시작하라는 요구에 분명히 응답하고, 현 정국을 심각하게 바라보아야 한다. 이 나라가 더욱 깊은 위기 국면으로 빠지지 않기 위해선, 정부는 이 문제를 반드시 풀어야 한다. ‘노동학생연석회의’ 그룹은 대통령이 ‘최초고용계약법’ 철회를 위해 전권을 발동할 것을 요구한다.” 

3월 31일,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TV에 나와 노조와의 협상을 제안하면서, ‘기회평등법’은 발효될 것이지만 ‘최초고용계약법’은 발효되지 않도록 요청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것은 한편으로 드빌팽의 체면을 세워주고 한편으로는 투쟁에서 벗어날 구실을 노조지도부에게 제공하고자 하는 치졸한 술수였다. 이로 인해 청년들은 더 분노했고 시위는 계속 확산되었다. 한편으로 <사회당>의 지도급 인사들이 ‘정권의 위기’를 언급하는 가운데 (<르몽드>, 4월 3일), 고등학생의 대표자까지 포괄하는 전국학생연대는 4월 1일에 릴에서 만나 총파업을 다시 촉구했다.

 4월 4일에 열린 5차 전국 행동의 날엔 다시 3백만 명 정도가 참가했다. 이번엔 공기업 노동자들의 참가가 적었던 데에 비해 사기업 노동자의 참가가 더 많아졌다. 많은 노동조합의 투사들은 정부의 버티기와 지도부의 기회주의적 태도에 대해 점점 참을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4월 5일 파시스트 <국민전선>의 당수인 장 마리 르펜은 “트로츠키 선동가들이 노동조합원으로 가장하고 있다.”고 비난했고 “무정부 상태를 방관한다.”며 사르코지를 꾸짖었다 (<르몽드>, 4월 8일). 하지만 실제로 ‘반(反)최초고용계약법’ 운동 기간 동안 3000명이 넘는 참가자가 체포되었고, 이 숫자는 2005년 10월과 11월 파리 외곽의 폭동 당시 체포된 숫자와 비슷할 정도였다. 체포된 사람 중 몇몇은 급조된 재판을 통해 6개월의 징역을 언도받았다.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투쟁의 김을 빼다

 4월 초, 정국은 정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처음부터 ‘최초고용계약법’을 철회하도록 정부를 강제하고 새로운 협상에 참여하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던, 노조 관료들은 투쟁이 점점 그들의 통제권 밖으로 나아가는 것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이미 3월 11일부터 다시 시작된 노조 지도자들과 정부의 비공식적 접촉과는 별도로 (<르몽드>, 3월 13일), 노조 상층부는 ‘’최초고용계약법’의 철회’ 이전에 공식 협상을 벌일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상황이 통제할 수 없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그들의 우려는 현실적인 것으로 되었다. 드빌팽과 노동 5단체 연합과의 만남 이후 3월 24일 ‘노동학생연석회의’ 그룹 참가자 12명은 비슷한 모임을 요구했고, 다시 한 번 “이 나라가 처한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해 줄 것”을 환기시켰다.

 ‘최초고용계약법’을 발효하지 않을 것이라는 3월 31일 시라크의 발표는, 드빌팽의 낙마를 의미했다. 4월 1일 내무장관 사르코지는 협상의 주도권을 쥐기 위해 노동조합 지도부들과 만났다. 4월 10일, 정부는 ‘최초고용계약법’은 다른 법령으로 대체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노조 관료들은 여전히 ‘기회평등법’과 ‘신고용법’이 멀쩡하게 남아있음에도, 이것을 “진정한 승리”라며 환호했다. 전국학생연대는 투쟁의 지속을 호소했고 노조 상층부는 이것을 지지한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어느 정도 노동자의 지원을 받는 학생 투사들이 기차역과 우체국들을 점거하는 투쟁을 1주가량 진행했으나, ‘반(反)최초고용계약법’ 운동은 급속히 김이 빠져버렸다.

 

가짜 사회주의자들이 인민전선을 향해 달려가다

 <사회당>과 <공산당>정치인들에게 ‘반(反)최초고용계약법’ 운동은 2007년 대선에서 그들의 정책과 후보들을 돋보이게 하는 기회가 되었다. 처음부터 <사회당> 지도자 프랑수아 홀란드는 “좀더 현실적으로 보자. 법령은 통과되려 한다. 우리가 개입해 온 일은 거리에서가 아니라, 2007년의 투표함을 통해서 결정될 것이다.”라고 말했다(<르몽드>, 2월 1일). 2월 7일 1차 행동의 날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홀란드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나는 선거에서 이기는 것이 우익을 물리치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공산당>의 사무총장인 마리 조르쥬 뷔페는 “아무도 다르게 생각하지 않는다.”라며 동조하는 입장을 표명했다(<르몽드>, 2월 10일).

 <공산당>과 <사회당>의 지도부와 노동과 학생 관료들의 그 지지자들은 공식적으로는 투쟁을 지지한다. 그러나 그들의 주요 관심사는 일관되게 ‘사회 통합’이 깨지기 전에 정부가 정신을 차리도록 하는 일이었다. 시라크의 3월 31일 술수 이후, <공산당>은 정부가 “문제를 해결하려하기보다 통제할 수 없는 소용돌이로 몰아가고 있다.”고 불평해댔다(<L’Humanité>, 4월 1일). 

 1997년과 2002년 사이, 프랑스는 소위 ‘좌파’ 정권 즉, 개량주의적인 <사회당>과 <공산당>, 그리고 작은 부르주아 조직들(<녹색당>, <좌익급진당>, <시민행동> 등)과의 연대로 구성된 인민전선이 집권했었다. 다른 모든 인민전선처럼 그들의 모토는 ‘통일’ 즉, 부르주아지의 ‘진보적’ 진영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한계 내에 머무는 것이었다. <사회당> <공산당> 지도부들은 그들의 친자본주의적인 의제를 내걸 수 있는 구실로 연대 유지의 필요성을 줄곧 이용해왔다.

 <공산당>과 <사회당>이 2007년 선거를 위해 또 다른 인민전선 작업을 진행시키는 동안, ‘반(反)최초고용계약법’ 운동이 터져나왔다. ‘반(反)최초고용계약법’ 운동을 승인하는 잠재적인 부르주아 조직들은 <녹색당>, <좌익급진당>, <공화 좌파(GR)>, <공화국시민운동(MRC)>, <시민의 대안>, <대안들>, <사회공화주의적 대안을 위한 운동(MARS)> 와 <종교와 민중의 단결> 등이었다. 사이비 트로츠키주의 조직인 <혁명공산주의연맹(LCR)>은 인민전선 운동의 가장 왼쪽 자리를 차지했다. 3월 31일 ‘반(反)최초고용계약법’ 운동이 정점을 향해 달려가는 동안, <혁명공산주의연맹(LCR)>과 다른 야당들은 공동 기자 회견을 위한 전국 회의에 참석했다. 회의를 마친 후 발표한 공동성명서에서 그들은 “국가의 이익을 위해” 정부가 양보해 줄 것을 호소하며, “모든 시민들이 4월 4일 열릴 행동의 날에 참석할 것”을 요구했다.

 <혁명공산주의연맹(LCR)>은 2월 8일의 ‘좌파’ 정당들 모임 참가를 거부한 바 있다. ‘좌파 연합’ 정권을 만들고 싶어하는 자들의 ‘함정’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이틀 후 <혁명공산주의연맹(LCR)>은 그 모임에서 구성된 ‘투쟁위원회’에는 아마도 참가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혁명공산주의연맹(LCR)>은 그 후 ‘투쟁위원회’의 ‘의회의 ‘최초고용계약법’ 재심사’를 요구하는 비굴한 ‘대중 청원’을 승인함으로써 여러 좌익 조직들을 놀라게 했다.

 3월 하순 ‘반(反)최초고용계약법’ 운동이 정점에 치달을 무렵, 2002년 <혁명공산주의연맹(LCR)>후보의 파리 모임에 대한 언급은 <공산당>을 약간 어리둥절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올리비에 브장스노에게 지금의 상황은 1968년이나 1995년과 비슷하다. <혁명공산주의연맹(LCR)>은 ‘정치를 완벽하게 바꾸기 위해’ ‘대안의 내용’을 모든 좌파 세력들과 ‘공개적으로 토론’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드디어 말했다. 그러나 ‘이전 좌파연합’과는 어떤 형태의 연대도 거부한다고 반복하고 있다.”

<L’Humanité>, 3월 30일

 혁명적인 체하는 간헐적인 언급에도 불구하고, <혁명공산주의연맹(LCR)>의 인민전선 경향은 확고하다. 2002년 대통령 선거 결선에서 시라크에 대한 은근한 지지는 이 ‘혁명적인 공산주의자들’에게 맑스주의의 기본 원칙인 ‘부르주아로부터 노동계급의 정치적 독립’은 거의 무의미하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노동당(PT)>(이전 트로츠키주의자였던 삐에르 람베르트와 관련 있는)은 “민주주의 재수립” 투쟁의 일환으로 ‘최초고용계약법’에 맞서 싸웠다. <노동당(PT)> 대통령 후보 다니엘 그룩스타인은 “정부는 IMF와 마스트리히트-암스테르담 조약(즉, 유럽연합)의 질서에 단순히 따르기 위해 ‘최초고용계약법’을 도입하는 것이다.”라고 진단했다. 그는 또한 “유럽연합은 단순히 국제금융기구(IMF-다른 말로 하면, 미국 자본가들)가 시키는 대로 하고 있다.”고 불평했다 (<Informations Ouvrières>, 2월 19-25일). 이러한 태도는 ‘프랑스 노동자들의 주적은 프랑스 자본가들이 아니라 미국’이라는 거짓말을 하는 데에 지칠 줄 모르는 노동조합 국수주의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방어적 총파업: 승리를 향한 전략

 투쟁에 참가하는 인원이 점점 빠르게 증가하자, 방어적 총파업의 가능성이 명확해지기 시작했다. 소극적인 24시간 직종 간 연대 ‘행동의 날’ 대신에, ‘기회평등법’과 ‘신고용계약법’을 휴지조각으로 만들기 위한 총파업은 모든 서비스와 생산과 운송을 중단하기 위해, 모든 노동자를 동원하는 것을 의미한다. 정력과 열정을 투쟁에 쏟아붓고 있는 청년층은, 총파업이 제안되면 열렬히 지지하게 될 것이었다.

 총파업에 가장 큰 장애는 개량주의 정당들과 그들의 하수인인 노동조합 관료들의 반대였다. 비교적 큰 규모의 ‘극좌’ 조직들 중 어떤 조직도 총파업을 진지하게 다루지 않았다. 트로츠키주의를 표방하는 <노동자투쟁당(LO)>은 ‘반(反)최초고용계약법’ 운동에 거의 개입하지 않으면서, 더욱 빈번한 파업을 촉구하기만 했다. <노동자투쟁당(LO)>은 자본가들의 공격에 총파업으로 맞서자고 한 번도 제안하지 않았다. <노동당(PT)>은 총파업의 가능성을 언급하기는 했다. 그러나 단지 만약 ‘최초고용계약법’을 철회하지 않을 경우에 노동조합들이 정부를 위협할 카드로만 사용했다(<Informations Ouvrières>의 3월 9-15일의 내용을 볼 것). 조직의 모든 자원을 이 투쟁에 쏟아부은 <혁명공산주의연맹(LCR)>은 진짜 총파업과 김빼기용으로 쓰일 뿐인 직종 연대 24시간 파업을 일상적으로 혼동했다. <연대노조(Solidaires)>의 지도부는 때때로 총파업을 지지한다고 했다. 그러나 정부가 이 위기 상황을 끝내야 한다고 ‘심각하게’ 권고하는, 다른 노동 지도부의 대열에 곧 합류했다.

 총파업을 벌이기 위해선, 최소한 관료들의 저항을 극복해야 한다. 노동조합 지도부는 조합원들을 통제하기 위해서만 그 요구를 수용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기회가 되는 대로 모든 진지한 투쟁을 방해하려고 애쓸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모든 노동 현장에서 지역, 지방, 전국 대표 회의에 참석하여 총파업을 이끌어갈 파업 위원을 선출할 ‘총회’ 개최를 요구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이렇게 조직된 기구라 하더라고 사이비 사회주의자인 <사회당>이나 <공산당> 관료들의 정치적 영향력에서 온전히 벗어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조직은 한편으론 개량주의자들의 패배주의와 계급협조주의를 폭로하고, 한편으론 승리에 필요한 전술들을 제출하는 혁명가들의 활동영역을 넓혀줄 수 있을 것이다.

 효과적인 총파업은 정부를 끌어내리고 새로운 선거를 끌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직장의 안정을 공격하는 부르주아지에 대한 심대한 반격이 있기는 했으나, 부르주아 질서를 향한 직접적이고 혁명적 도전에 대한 전망은 전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선거는 아마도 ‘좌파’ 정권 즉, <사회당>과 <공산당>의 연합을 축으로 <녹색당> <MRC> 그리고 다른 소부르주아 조직들과 연대하는 인민전선을 창출하게 될 것이다. 여타의 ‘혁명적’ 조직들과 더불어 <혁명공산주의연맹(LCR)>은, 아마도 면피용으로 ‘비판적’이라는 수식을 달고 그 정권을 지지하게 될 것이다.

 1974년 그 당시엔 혁명적이었던 미국의 <스파르타쿠스동맹>은 ‘전체적 대응을 필요로 하는 노동계급 모두에 대한 공격에 영국 노동계급이 직면했으나, 그와 같은 계급투쟁을 조직할 지도부가 부재한 상황’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그와 같은 상황에 대해, <스파르타쿠스동맹>은 이렇게 결론지었다. 

“이길 수 있으나 지도부의 배신으로 패배하여 그 결과 보수당이 그들에게 어떻게 대응하든지 간에, 싸움도 해보지 않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관념적 수동주의야말로 최악의 상황이 될 것이다.”

“우리는 왜 영국의 총파업을 촉구하는가”, <노동자전위(Workers Vanguard)>,
1974년 3월 1일, <1917> 19호에 발췌됨

 최근 몇 해 동안 퇴보해 가는 <스파르타쿠스동맹>과 <국제공산주의동맹(ICL)>의 각국 조직들(<프랑스트로츠키주의동맹(LTF)>을 포함하여)은, 총파업이 혁명 정당의 헤게모니 아래에서만 가능하다는 이유로, 위와 같은 접근을 부정해 왔다. (이와 같은 정치적 무지에 대한 비판으로는 <1917> 20호의 “전술을 방어하며(In Defense of Tactics)”를 보시오.)  <프랑스트로츠키주의동맹(LTF)>은 ‘반(反)최초고용계약법’ 운동 기간 동안 발행한 선전물에서, 1968년과 지금의 프랑스의 상황이 어떻게 다른지를 비교하며, 총파업의 문제를 완전히 무시했다. 

“1968년 5월, 학생 운동은 3주간에 걸친 노동자들의 총파업을 불렀다. 수백만의 노동자들이 거리로 나섰고 뿐만 아니라 초기에 공장을 점거하기도 했다. 프랑스뿐 아니라 전 세계의 지배계급을 요동시켰던 것은 바로 그 총파업과 공장 점거였다. 그러나 혁명 정당의 부재로 인하여 그 파업 대열은 사기가 저하되었고 배신당했다. 특히 노동계급 내의 스탈린주의 공산당의 영향력은 프랑스 부르주아지의 목숨을 구해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1968년과 다르다. 1991-92년 퇴보한 노동자국가 소련의 몰락으로, 세계 자본가들은 1968년의 성과를 포함하여 그간의 노동자들의 성과를 빼앗는 데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최초고용계약법’은 프랑스의 자본가들이 자신들의 이윤 수준을 경쟁국들과 비슷한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하여 벌이는 그러한 공격 가운데 하나이다. 구소련의 반혁명은 노동자들의 심대한 사기저하를 초래했고, (미테랑, 죠스팽 정권 같은) 인민전선 정권의 긴축 정책을 불렀다. 그리하여 노동 계급은 현재, 혁명적 사회주의를 자본주의를 대체할 현실적인 체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노동자전위(Workers Vanguard)>, 3월 31일

 <프랑스트로츠키주의동맹(LTF)>의 최근의 투쟁 기록을 통해, <국제공산주의동맹(ICL)>의 사기가 프랑스 노동계급보다 훨씬 더 저하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의 투쟁과 1968년 투쟁의 대조를 통해, <프랑스트로츠키주의동맹(LTF)>은 총파업은 실패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1995년의 11-12월, <국제공산주의동맹>은 비슷한 비관적 전망으로 총파업을 기각한 바 있다. (관련해서는, <1917> 18호의 그 투쟁에 대한 분석을 보시오.)

 1991년 8월 소련 반혁명의 승리는 국제 노동계급의 막심한 패배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프랑스 노동계급이 자본가들의 공격을 격퇴시킬 능력을 상실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1968년과 1995년 그리고 지금의 문제는, 자신들이 사회주의자이며 ‘혁명가들’이라고 그들 중 상당수가 주장하는. 노동 조직의 잘못된 지도자들이 계급 협조주의 정책을 추구하는 것이다. 맑스주의자들의 임무는, 노동조합들이 자본주의의 공격을 저지하고 새로운 성과를 얻어낼 전술과 계급투쟁의 강령을 제시하는 것을 통해, 노동계급 내 친자본주의적인 영향력과 투쟁하는 것이다. 장차 우리가 건설해야할 대중적 영향력을 지닌 혁명 정당은 오직, 지금 벌어지는 투쟁에 올바른 지침을 내어놓는 투사들에 의해 건설될 것이다.

 (1984년의 람베르트 그룹과 분리된 스테판 저스트 그룹이 그 기원이 되는)<볼셰비키그룹(GB)>은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대부분의 조직들이 참여하는 뻔뻔스런 인민전선에 대해 적절한 비판을 해 낸 그룹이다. <볼셰비키그룹(GB)>은, 총파업을 통한 투쟁의 확산과 모든 노동 현장에서의 총회 소집을 촉구한 바 있다. <볼셰비키그룹(GB)>은 ‘반(反)최초고용계약법’ 운동이 인종주의와 외국인 혐오증에 대한 투쟁, 그리고 이민자와 사회 소수자를 방어하는 투쟁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볼셰비키그룹(GB)>은 노동 관료들과, <사회당> <공산당>(<혁명공산주의동맹>과 더불어)의 배신 행각을 비판했다. 그러나 노동조합 지도부가 투쟁을 주도해야 한다는 요구를 담은 많은 선전물들은 총파업으로 나아가는 길과 배치된다. 예를 들어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최초고용계약법’ 협상을 거부하라! 드빌팽이 철회할 때까지 총파업을 조직하자!”라는 3월 12일 선전물에서 <볼셰비키그룹(GB)>은 “당신들의 임무는 지금 총파업을 조직하는 것이다!”라고 조합 지도부에 충고하고 있다.

 혁명적 말버릇과 실제적 행동 사이의 모순을 드러내기 위해, 노동 조직의 지도부에 뭔가 요구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나 관료들이 공개적으로 저항을 가라앉히려 하는 상황에선, 총파업(노동자들에 대한 통제가 어려워지기 시작해야 그들이 고려할 문제인)에 대한 “책임”을 강조하는 것은, 그들을 끌어내리기보다는 그들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기 십상이다. 총파업이 노동조합 지도부를 넘어서 조직되기 힘든 것은 사실이지만, 혁명가들은 그들에게 이끌어달라고 설득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노조 관료들의 개량주의와 그들의 지지기반 사이의 모순을 최대로 이용하기 위해 혁명가들은, 왜 노동 관료들이 총파업을 위한 모든 진지한 준비를 거부하는지를 설명하면서, 노동 현장 총회 건설과 파업 위원회 건설을 선동해야 한다.

 

자본주의 ‘불안정성’ 대 사회주의 합리성

 프랑스의 투쟁에서 나타난 ‘유연성’과 ‘안정성’에 대한 논쟁은, 근본적 적대관계인 자본-노동의 대립을 반영하고 있다. ‘반(反)최초고용계약법’ 운동은, 그들의 생활과 노동 조건을 깎아내려는 자본가들의 시도에 대해 기꺼이 싸울 의지가 수십만의 청년과 노동계급의 투사들에게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맑스주의 전위들의 임무는, ‘불안정성’이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살아가는 임금 노동자의 항구적인 삶의 조건이며, 어떤 개량도 이러한 사실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설명해내는 것이다. ‘반(反)최초고용계약법’ 운동은, 청년과 노동 대중의 긴급한 관심사와 관련된 문제에 대한 현실적인 해결책과 그들의 투쟁이 사회주의 혁명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제기할 기회를, 혁명가들에게 제공하였다. 칼 맑스는 140년쯤 전에 노동 계급이 “잃을 것은, 그들의 사슬 이외엔 아무것도 없다.”고 지적한 바 있다. 노동계급의 역사적 이해는, 부르주아 질서를 전복하고, 이윤의 극대화가 아니라 인간의 요구에 의해 생산이 조직되는 국제 경제라는 합리적이고 계획적 질서를 창조해야만 실현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