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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출처 – 국제볼셰비키그룹(IBT)



레닌주의를 옹호하며: 무정부주의 조직과 전위

 

  

‘어떤 유형의 혁명조직이 필요한가’라는 질문은 무정부주의자들에게 항상 곤란한 것이었다. 가장 철저한 ‘조직적인’ 무정부주의 경향은 “플랫폼주의”이며, 그 이름은 ‘1926년 플랫폼’에서 따온 것이다. ‘1926년 플랫폼’은 파리에 본부를 둔 망명한 러시아 무정부주의자들의 신문 ‘디엘로 투르다’와 관련되어 있던 네스토르 매크노, 피터 아르시노프, 이다 메트 등등에 의해 창시된 것이었다. 플렛폼의 창시자들은 러시아 혁명에서 볼셰비키가 성공하고 무정부주의가 실패한 데에서 교훈을 찾으면서, 훈련되고 계획적이고 동질적인 무정부주의 조직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고 결론지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지금은 무정부주의가 조직혼란의 늪에서 빠져나와 명확한 이론적, 전술적, 조직적 입장의 기초 위에서 조직화된 집단적 행동으로 움직일 때이다.”

 2006년 1월의 문건, <왜 무정부주의의 조직화가 요구되는가.…그러나 ‘전위당’이 아니다>에서 <무정부공산주의북동부연맹(NEFAC)>의 웨인 프라이스는, 플랫폼주의는 비밀스런 레닌주의와 마찬가지라는, 플랫폼의 무정부주의 비평가들에 의해 오랫동안 지속돼온 비판을 제기했다. 부분적으로 프라이스의 문건은 <국제볼셰비키그룹(IBT)>의 2002년 소책자 “플랫포미즘 대 볼셰비즘”에 대한 반론이었는데, 그것을 그는 “그 주제에 대해 레닌주의자들이 유일하게 제기한 저작”으로 언급한다.

 ‘1926년 플랫폼’은, 4가지 조직원칙에 근거한 ‘무정부주의총연맹’의 창설을 주장했다. 중앙 집중주의에 대해 전통적 무정부주의자가 선호하는 ‘연방주의’에 더하여, 매크노 등은, ‘이론적 단일성, 전술적 단일성, 집단적 책임성’을 지지했다. ‘이론적 단일성’은 무정부주의 조직이 동일한 강령의 기초 위에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이것은 무정부주의자 그룹들이 극단적 개인주의자들, 노동조합지상주의자들 그리고 모든 다른 종류의 자칭무정부주의자를 포용하는 포괄적인 구조가 되어야 한다는, ‘통합주의’ 시각에 대한 직접적 도전이다. ‘전술적 단일성’(별칭은 ‘집단적 행동방법’)이란, 회원들에게 정치적 행동의 조화와 민주적으로 도달한 결정의 이행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약간은 ‘집단적 책임성’과 겹친다. 집단적 책임성은 회원들이 집단적 결정과정에 참여할 권리와 다수에 의해 결정된 견해를 준수할 의무 두 가지를 요구하는 것이다. ‘1926년 플랫폼’ 창시자들의 전망처럼 무정부주의의 집단적 책임성은 “각 회원들에게 확립된 조직의무 이행과 조직적 결정의 실천을 요구한다.”

 ‘플랫폼’의 창시자들은 계획된 ‘무정부주의총연맹’ 안에 노동 분업의 기관으로 집행위원회를 제안했다.

 

“모든 무정부주의총연맹 산하조직들의 공동행동을 위해 특별 기구로서 총연맹 집행위원회를 만들 것이다. 집행위원회는 다음의 기능들을 맡게 될 것이다. 즉, 총연맹에 위탁된 사안에 대한 총연맹 결정의 집행, 총연맹의 이론적 입장과 일반적 전술노선에 일치하는 독립된 조직들의 행동에 대한 이론적이고 조직적인 지도, 운동의 전반적 상황 관찰, 총연맹 안의 모든 조직들 사이의 조직적 연결과 활동의 지속, 다른 조직들과의 관계 등.”

 동시대의 무정부주의 비평가는 플랫폼주의자들의 그것을 레닌주의와 같다고 비난했다.

 “연방주의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들은 볼셰비즘과 별반 다르지 않고 플랫폼 창시자들은 감히 한발자국도 더 나가려 하지 않는다. 볼셰비키와 ‘플랫폼 무정부주의’ 사이의 유사성은 러시아 동지들을 깜짝 놀라게 한다. 무정부주의 당의 최고 조직이 ‘집행위원회’라고 불리건 아니면 우리가 이것을 국제연맹 사무국이라 부르건 아무런 차이가 없다.”

<플랫폼에 대한 답변(통합주의자)>, 1927년 4월, http://www.nefac.net

 ‘친 조직화’ 무정부주의 옹호자로 널리 알려진 존경받는 이탈리아 투사 에리코 말라테스타는, ‘플랫폼주의’의 집단적 책임성의 이념을 ‘개인의 독립성과 주도적 활동의 자유에 대한 절대적 부정’이라고 비판했다(<아나키스트 조직화 계획>, 1927년 10월). 이러한 비판을 예상하여 플랫폼은 다음과 같이 언급했었다: “가끔씩 연방주의 원칙은 무정부주의자 회원들 사이에서 왜곡되었다: 연방주의의 원칙은 너무나 종종 조직적 의무에 따르는 책임감 없이, 개인적 사고에 대한 권리로 이해되었다.” 플랫폼주의는, 진정한 혁명조직은 다수결의 원칙 위에 있을 때만 유일하게 기능할 수 있다는 관점에서, 개인적 자율을 극단적으로 옹호하는 사람들을 배제했다.

 

“거의 항상 그리고 거의 어디서나, 우리 운동의 실제 문제들은 다수결로 결정되었다. 동시에, 소수는 자신의 견해를 고수할 수 있다. 그러나 전체의 결정을 막지는 않는다. 즉, 보통 자발적으로 양보한다. 이것은 확실히 합리적인데, 왜냐하면 실제 행동에 참여하는 조직의 문제를 해결하는 다른 방법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 진정으로 행동하기를 원한다면 이 길 외에 다른 길이 없다.”

피터 아르시노프, <무정부주의의 구집단과 신집단: 마리아 이시딘에 대한 답변>, 1928 11~12월

 그의 문건 <왜 무정부주의의 조직화가 요구되는가.…그러나 ‘전위당’이 아니다, 2006년 1월>에서, 프라이스는 다수결의 원칙은 불가피하게 중앙집중의 요소를 필요로 한다고 인정한다.

 

“확실히, 무정부주의 연맹도 역시 어느 정도의 중앙집중적 요소가 있다. 즉, 특정한 조직 기구나 개인이 전회원에 의해 특정한 일을 위임받을 수 있다. 이러한 중앙조직은, 회원들 사이의 업무 순환에 의해 선출되고 언제든지 소환될 수 있다. 명확히 말하면, 연맹은 중앙집중과 분권화 사이의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즉, 중앙집중은 반드시 필요한 만큼만 이루어져야 하고, 분권화는 허용하는 최대치까지 허용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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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순히 ‘연방주의’를 폐기하는 대신에, 플랫폼 무정부주의자들은 그것을 ‘어느 정도의 집중화’를 포함하는 것으로 재정의하려 했다. 이것은 다른 무정부주의자들로 하여금 플랫폼주의가 레닌주의적 권위주의로 나아가려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게 하였다. 프라이스는 다음과 같은 근거로 플랫폼주의의 중앙집중을 레닌주의적인 것과 구별하려 한다.

 

“중앙집중”은 단순히 조정, 단일화, 협동은 아니다. 중앙집중(민주적이든 그렇지 않든)은 모든 것이 중심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수가 통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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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통제’하느냐는 질문은, 궁극적으로 회원들이 결정을 뒤집고, 새로운 지도부를 선출하는 것을 허용하는 어떤 메커니즘이 존재하는가에 달려있다. 왜 한 조직이 집중과 민주 둘 다 갖출 수 없는가에 대해 논리적 답은 없다. 그리고 중앙집중이 ‘모든 것이 중심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효과적이 되려면, 어떤 조직(무정부주의자건, 레닌주의자건, 단체건, 군대건)이든 중앙집중과 지방적 의사결정 사이에 균형을 유지해야 하며, 그 조직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 지시를 수행하는 데 있어, 충분한 양의 전술적 유연성을 허용해야 한다. 플랫폼주의의 ‘이론적 통일성’에 대한 내부 투쟁은 오직 평등하고 민주적인 방식으로 진행될 수 있는 반면 레닌주의 조직에서의 논쟁은 항상 자동적으로 권위적인 개인의 지배와 조직 내 민주주의의 위축으로 귀결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결국, 어떤 조직에서 관료주의에 대항하는 유일한 보증은 전회원의 정치 의식이다.

 프라이스는 이런 문제들을 레닌주의를 희화화시키는 것으로 비켜가려 한다.

 

“레닌주의자들 안에서, 중앙 집중화된 당은 철학적으로 정당화된다. 당은 진실을 알고, ‘과학적 사회주의’를 안다고 생각된다. 당은 프롤레타리아 의식의 구현체로 생각된다. 여기서 프롤레타리아 의식이란 프롤레타리아계급이 실제로 믿는 그 무엇이 아니라, 믿어야 할 그리고 믿어야만 하는 무엇을 말한다. 그리고 오로지 당만이 그것을 확실히 안다고 인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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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혐오스런 스탈린, 마오, 김일성 개인숭배집단은 불안정한 독재정권을 옹립하고 그에 대한 어떤 반대도 무자비하게 분쇄한다. 그러나 레닌 시기의 볼셰비키당은 매우 다르게 작동했다. 내전 상황에서조차도, 경제적 사회적 정책의 광범위한 문제들에 대한 활력 있는 논쟁들이 있었다. 그리고 가끔, 중앙의 지도력 자체는 뚜렷이 분산되었다(예를 들면, 브레스트 리토프스크에서 독일제국주의에 의해 강요된 약탈적인 ‘평화’ 조약기간 동안, 또는 나중의 노동조합 정책에서처럼).

 오랫동안 유지했던 입장을 새로운 변화에 맞게 급진적으로 바꿀 만큼 볼셰비키 지도부가 유연했기 때문에 10월 혁명은 가능했다. 1917년 4월에 당은 전략적 개념인 ‘무산계급과 소농계급의 민주적 독재’를 폐기했다. 그리고 레닌이 십여 년 간 비난했었던 트로츠키의 연속혁명론을 채택했다. 당은 또한 대규모 사유지를 없애고 그것을 개별적인 소농에 분배하라는 사회혁명당의 요구에 호응하여 장기간 유지했던 농업정책을 바꾸었다.

  

플랫폼주의를 표방하는<무정부공산주의북동부연맹(NEFAC)>

 전통적 플랫폼주의자들은 정치적 동질성을 최고의 우선순위에 두었다.

 

“무정부주의자라고 주장하는 개인들의 행렬은 무정부주의와 아무 관련이 없다. 이런 사람들을 ‘한 가족’으로 모아놓는 것(도대체 어떤 기초 위에?)과 그 모임을 ‘무정부주의 조직’이라고 말하는 것은 허튼소리일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해로울 것이다. 만약 그런 일이 운 나쁘게 일어난다면, 노동자들의 혁명적 사회운동으로 나가는 모든 무정부주의의 발전 전망은 사라질 것이다.

 “그것은 무차별적인 혼합이 아니라, 건강한 무정부주의자와 조직을 선별하여 운동에 필수적인 무정부주의-공산주의자 당으로 조직하는 것이어야 한다. 즉, 잡탕의 종합이 아니라, 단일한 강령을 끌어내기 위해 무정부주의 사상들의 차이를 확인하고 탐구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노동대중 속에 운동을 재건하고 강화시키는 유일한 길이다.”

<무정부주의 혼란주의자들에 답하여>, 1927년 8월

 <무정부공산주의북동부연맹>은 자신들이 플랫폼주의 전통 위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상적 동일성에 기초한 운동’이라는 사고는 거부한다.

 

“솔직해지자. 우리는 조직 그 자체를 운동이라고 믿지 않으며, 우리는 전혀 전체 무정부주의 운동을 대표하는 체하지 않는다. 물론 우리의 이념에 확신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가 최고의 진실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어떤 점에서는 잘못할 가능성도 있다. 그것이 바로 혁명적 다원주의를 옹호하는 이유이다.”

<혁명적 무정부주의 조직에 대한 의문: 무정부공산주의북동부연맹의 입장>, 2002년 9월15일 채택됨

 “분산은 파멸적”이기 때문에 “한 조직으로 뭉쳐야 한다.”고 주장한 1926년 플랫폼의 창시자들은, “혁명적 다원주의”가 비능률과 중복에 대한 처방임을 인정했다. 중요한 정치적 차이가 없다면, 더 정교한 분업 체계를 가진 큰 하나의 조직이 여러 작은 조직들에 비해 상당히 유리하다. 거의 비슷한 강령을 가진 여러 조직들이, 분리된 작은 조직을 고집하면서 동시에 각자의 대중조직사업을 주장한다면, 급진화하는 노동자들에게 신뢰를 주기 어려울 것이다.

 <무정부공산주의북동부연맹>의 창건자 중 하나인 니콜라스 페부스는, 그의 조직이 메크노, 아르시노프 등이 제안한 모델이 가진 문제점에 빠진 다른 측면을 솔직하게 기술했다.

 

“플랫폼주의를 표방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러 가지 면에서 연맹이라기보다는 네트워크에 가깝다. 심지어 <사랑과 분노(Love &Rage)>와 같은 조직은 지역들의 조직이었다. 우리의 기층 조직들은 완전히 자율적이며 중앙의 통제 없이 다른 모든 참여조직들과 끊임없이 접촉한다.

<우리는 걸으면서 배운다: <무정부공산주의북동부연맹>의 5년을 뒤돌아보며>,
북동부아나키스트, 10호(2005년 봄/여름호)

 페부스에 따르면, <무정부공산주의북동부연맹>은:

 

“[그 동안 우리는] 모든 회원들에 의해 통제되고 선출되는 중앙지도부를 구성할 수 없었다. <무정부공산주의북동부연맹>에는 선출된 중앙조직이 없다. 즉, 모든 일들은, 심지어는 간행물을 발행하는 정치적인 일들조차, 모호한 위임과 함께 여러 참여조직들에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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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심부’(즉, 지도부)의 부재는, 예견된 어려움을 만들었다.

 

“우리는 모든 수준에서 집단적으로 책임져야 하는 문제에 주기적으로 직면해야 했다. 전 연맹을 조정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여전히 위임에 따라야 하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비록 우리가 초창기보다 점점 더 좋아졌다 하더라도). 또한 전체적으로 우리는 예산을 세우는 것에 대한 혐오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우리는 자금을 가지고 있고 정기적인 회비를 내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조직의 일반적인 활동들은 회원들의 선의나 자발성에 의존하고 있다. 선의는 거의 항상 있다 하더라도, 자발성은 때때로 부족하다.”

같은 책

지도부, 전위와 혁명적 소수

 1926년, 무정부주의 투사 마리아 이시딘에 답하여, 플랫폼의 창시자들은 “혁명의 전진에 대한 무정부주의의 사상적 영향력이 극대화되도록 우리가 가진 힘을 다 쏟아부을 의무”가 있다고 선언했다(<조직상의 플랫폼[질문과 답변]의 부록>, 1926년 11월). 동시에 그들은 “무정부주의 이념에 의거한 ‘이론적 추진력’을, 국가 권력 장악을 목표로 하는 당들의 정치적 지도력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고 충고했다. 프라이스는 이 구분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강령적 전술적 통일성을 바탕으로, 플랫폼주의 조직의 회원들은 노동조합, 공동체 조직, 반전단체, (혁명적 시기에 나타나는) 노동자 그리고 지역 평의회 등과 같이 더 폭넓고 여러 사상이 섞인 단체들에 개입할 것이다. 그들 스스로 권력 장악을 목표로 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무정부주의 조직들은 ‘정당’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대중조직을 떠맡아 지배하려고 하기보다는, 이념이나 모범에 의해 지도할 것이다.”

앞에 인용한 책

 주류 무정부주의자들은 ‘이념적 지도’를 제공하려는 플랫폼주의의 희망을 늘 의심해왔다. 1927년에 한 통합주의 비평가가 다음과 같이 전망했다.

 

“우리는 ‘이념적으로’라는 부사를 ‘지도한다.’라는 말 앞에 덧붙인다고 해서 플랫폼 창시자들의 입장이 크게 변화되지는 않는다고 단언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잘 훈련된 당으로 조직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플랫폼에 대한 답변(통합주의자)>, 1927년 4월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혁명사상이 별로 인기가 없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그리고 <무정부공산주의북동부연맹>의 회원들은 북미 노동계급이 정치적으로 후퇴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이것을 바꾸는 것은 프라이스의 설명처럼, 혁명적인 사회변화의 필요성을 이미 이해하는 사람들의 노력을 요구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장기간의 견인을 통해서, 사람들은 불균등하게 급진화된다. 보수적인 시기에는 사람들은 한 명씩 두 명씩 혁명적이 된다. 모든 것들이 더욱 급진화될수록, 집단적으로 급진화된다. 그리고 모든 것이 급진적으로 될수록 각계각층은 혁명적이 된다. 그러다가 격변의 시기에 모든 대중이 들고 일어난다. 그러나 많은 또는 대다수의 새롭게 급진화된 사람들은 그들의 목표와 전략을 생각해낼 수 없다. 그들은 에너지로 충만하지만 경험을 통해서 그들의 사상을 정리하기까지는 혼란스럽고 불확실한 상태에 처해 있다. 이러한 시기에는 개량주의자들이 그들을 과거로 후퇴시키거나, 또는 권위적인 집단이 새로운 지배자를 내세우기 쉽다.…

 “노동자들을 비롯한 대중이 급진화되면, 그들은 (아직까지 급진화되지 않은) 나머지 대중들에 그들의 사상을 효과적으로 확산하기 위해 스스로 조직하게 된다. 하지만 이 조직이 모든 피억압인민의 자발적 조직과 대립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자발적 조직을 구성하는 한 부분일 뿐이다.”

앞서 인용한 책

 프라이스는 다음과 같이 문제를 제기한다.

 

“여기서 문제는, 혁명적 결론에 도달한 소수와, 혁명적 시기를 제외하고(당연하게도, 대다수가 혁명적이 된다는 것은 혁명적 시기라는 뜻이다) 대부분의 시기에, 비혁명적인 다수 사이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자발성주의자와 반(反)조직적 아나키스트들은 이것을 쟁점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들은 이 쟁점의 존재를 부인한다. 그들에게는 혁명적 소수에 대해 말하는 것조차 권위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그들은 부정의 세계에 존재한다. 만약 우리가 혁명적 소수와 다수 대중 사이에 분열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권위주의라는 위험에 맞서야 한다.”

앞의 책

 좋아하든 않든, 노동대중에게 지도력(‘이념적으로’든 아니든)을 제공할 수 있는 활동가들의 핵심을 조직하려는 모든 시도를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그것은 ‘전위주의’이다. 이것을 인식하는 것이 플랫폼주의자들에게는 항상 어려운 일이었다. 프라이스는 ‘이념적 지도력’을 제공하는 사람들은 진정한 지도자가 전혀 아니라고 암시함으로써 그 사실을 교란시키려 한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은 조잡한 희화화로 논의를 매듭지으려 한다.

 

“그것이 문제가 되는 개념일 때, 나는 단어의 정의를 어물쩍하지 않으려 한다.…그러나 ‘전위’는 자기 고유의 이념을 가진 단체만이 아니라, 혁명적 소수를 의미하게 되었다. 이것은, 그들이 모든 답을 알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지배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의미하게 되었다. 바로 이것을 무정부주의자들이 거부하는 것이다.”

앞의 책

 레닌주의는 “모든 답을 알고 있다”거나, “다른 사람을 지배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우리가 주장하는 것은, 맑스주의 이념만이 프롤레타리아로 하여금 계급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도록 정치적으로 무장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레닌주의자들은 ‘이념적 지도’를 제공하기를 열망한다. 다시 말하면, 노동계급과 피억압자의 선진부위가 맑스주의 강령을 품게 되기를 열망한다. 1917년에 노동자와 병사 소비에트 대표자 다수의 지지를 얻어내는 데에 성공한 볼셰비키의 정치투쟁은, 이것이 어떻게 성취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레닌주의자들은 또한  혁명파괴자들, 반동들 그리고 여타의 반동적 인자들에게 혁명적 다수의 의지를 부과할 권리를 옹호한다.

 플랫폼주의의 많은 실제 활동은 반인종차별, 반전 또는 빈곤철폐 연합에 참여하고, 그 속에서 그들은 ‘자발적 활동’과 ‘비권위적인’ 행동들을 고무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조직들에 의해 제기된 정책들에 대해, 심지어 추잡한 개량주의를 조장하는 내용이 있을 때에도, <무정부공산주의북동부연맹>은 별로 신경쓰는 것 같지 않다(NEFAC의 몬테리올 단체에 보낸 우리의 편지 11쪽을 보시오). 니콜라스 페부스에 따르면,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우리는 사회운동 내의 식민지총독이 아니라 승리를 위한 최상의 전략을 찾는 동지적 활동가들이다. 이것이 우리가 정치조직으로서 활동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왜 우리가 지도부이기를 원한다고 말하지 않고 ‘이념적 지도’를 원한다고 말하는 이유이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이들 운동 안에서, 무정부주의 이념의 영향력을 발전시키기 위해, 민주적 방식으로 투쟁하려고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앞서 인용한 책

 역시 <무정부공산주의북동부연맹>의 제프 샨츠는 같은 점을 지적한다.

 

“회원모집의 장으로(좀 더 공식적 조직이 종종 그러하듯) 또는 사교클럽으로(비공식 단체에 전형적인) 운동에 접근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이다. 우리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원칙에 의거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 고유의 조직을 건설하는 것보다, 우리의 공동체, 지역, 작업장에 노동계급의 힘을 강화하는 것을 우선시키는 것이다.

<Upping the Anti>, No.1, 2005

 <무정부공산주의북동부연맹>은 노동조합도 비슷한 태도로 접근한다.

 

“그들의 정력을 조합 선거에서의 반대파 후보자를 내세우는 데에, 또는 반대파 간부조직을 만드는 데 집중했던 좌익 그룹들과 달리, <무정부공산주의북동부연맹> 소속 연맹주의자들은 일반대중의 조직화와 투쟁성을 높이는 데 노력해왔다. 우리는 조합 지도력과 관계없이, 우리가 지역과 작업장을 넘어 투쟁적이고 결집된 일반대중의 운동을 건설할 때까지는, 조직된 노동자들의 진정한 힘은 실현되지 않을 것이라고 간주한다.”

앞의 책

 노동 권력은 노동계급의 선진부위가 얼마나 높은 혁명적 정치의식을 가지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그것은 현장대중의 실천주의의 부산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저런 조합선거에서 후보를 내느냐 마느냐는 부차적이고 전술적인 문제이다. 그것은 구체적인 상황에 의존하여, 자본의 노동자 하수인의 부정적인 영향력에 맞서 정치투쟁을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다. 고용주와 싸우거나 조합관료가 맺은 더러운 계약에 반대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필수적인 것은, 노동자들이 작업장에서 부딪히는 직접적 문제들 너머의 쟁점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이것은 일상적인 노동자 개량주의에 맞서 일관된 혁명적 정치대안을 제기하는 것이며, 노동자 조직들에서 개량주의적 생각들을 뿌리 뽑기 위해 투쟁하는 것이다.

 프라이스는 레온 트로츠키가 <이행강령>에서 제기한 ‘인류의 위기는 노동자계급 지도력의 위기로 환원될 수 있다’는 주장에 최종적으로 반대한다.

 

“이 지도력 개념의 해악은, 지도력을 가장 중요한 문제로 보게 한다는 점이다. 이에 따르면, 과제는 나쁜 지도자를 좋은 지도자로, 나쁜 당을 좋은 당 즉, 올바른 이념을 가진 당으로 교체하는 것이 된다. 인민들을 깨우는 데 초점을 맞추고, 그들의 독립성과 자존감을 불어넣는 대신에, 그 말은 필요한 모든 것은 올바른 지도부에 권력을 가지게 하는 것이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최악은, 당이 노동계급을 위한 대리자가 된다는 것이다.”

앞의 책

 혁명적 “지도력”을 위한 투쟁을 매우 편협하게 본다. 노동조합의 출세주의자들은 자본주의의 구조 속에서의 개인적 권력과 물질적 특권을 위해 싸우지만, 혁명적 “지도력을 위한 투쟁”은 자신의 객관적 계급이익을 인식하고, 그 위에서 누가 적이고 누가 동지인지 눈을 떠가는 많은 일반 노동자들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러시아 혁명: 무정부주의자를 끝없이 괴롭히는 유령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정치적 각성은, 고조된 사회투쟁의 시기에 나타나는 돌팔이들인 개량주의자와 좌익적 언사를 일삼는 중도주의자들의 헛소리를 점점 더 날카롭게 간파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이것이 바로 1917년 2월부터 10월까지 러시아에서 일어난 일이다. 당시 노동계급은 꾸준히 좌경화되었으며, 많은 경쟁적인 좌익조직의 지지자들을 포함한, 수만 명의 최상의 혁명적 의식을 가진 헌신적 투사들이 볼셰비키에 결합하였다.

 10월 혁명은 첫 번째의–그리고 지금까지 유일하게–노동계급이 권력 장악에 성공한 사례였다. 소련군이 점령하거나(동유럽, 북한), 또는 봉기를 일으킨 농민 게릴라군(중국, 베트남, 유고 그리고 쿠바)에 의해 성립된 기형적노동자국가와 달리, 러시아 노동자국가는 사회주의 혁명을 지향하는 혁명정당이 이끄는 매우 정치적이고 지적인 도시 프롤레타리아에 의해 건설되었다.

 1926년의 플랫폼주의자들은 전통적 무정부주의의 핵심 정책들이 러시아혁명 과정에서 시험되고 결정적으로 반증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1917년 러시아혁명 동안, 전국적 조직의 필요성을 가장 깊이 그리고 가장 절실하게 느꼈다. 자유주의운동의 분파주의와 혼란이 가장 심하게 나타난 것도 이 혁명 기간이었다. 조직의 부재로 인해, 많은 활동적인 무정부주의 투사들이 볼셰비키에 합류했다.

‘1926년 플랫폼’ 서문

 무정부주의 투사들은 볼셰비키의 뛰어난 조직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이 자본가 국가의 억압기구들을 파괴하고 생산 조직과 행정을 직접 선출된 노동자 평의회(또는 소비에트)를 대체하는 데에도 진지했기 때문에, 볼셰비키로 전향했다. 프라이스 동지는 다음과 같은 견해에 반대한다.

 

“…러시아혁명은 중앙 집중화되고, 위에서 아래로 조직되는 방식의, 볼셰비키 유형의 전위정당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런 당이 없었다면, 사회주의 혁명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날 그런 류의 당을 건설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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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부분의 무정부주의자들과는 다르게, 프라이스는 혁명에서 볼셰비키가 수행한 지도적 역할과 그 지도력에 의해 수행된 근본적인 사회변혁의 실제를 부정하지 않는다. 대신에 그는 “볼셰비키당은 그 당이 무정부주의 연방과 가장 비슷했을 때 러시아 혁명을 만들었다!”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머레이 부크친의 최근 의견을 인용한다.

 

“볼셰비키당은…혁명에 이르는 대부분의 기간 동안 불법 조직이었다. 그 당은 깨지고 일어서고를 반복했다. 그 결과 당이 권력을 잡을 때까지, 당은 결코 완전히 집중화되고, 관료적이고 위계적인 체제로 굳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그 당은 많은 분파가 존재했다…내전에 이르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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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닌과 트로츠키가 지도하는 볼셰비키당에 “많은 분파가 존재했다”는 것은, 정확하게 말하면, 건강한 민주적 중앙집중 조직만이 활발한 내부 토론과 논쟁을 통하여 복잡하고 급격히 변하는 사회 정치적 상황과 씨름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의 1936년의 노작인 ‘배반당한 혁명’에서, 트로츠키는 이렇게 주장한다.

 

“볼셰비키당이 분파활동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지금의 사고는 혁명 퇴조기의 미신에 불과하다. 실제로 볼셰비키당의 역사는 분파투쟁의 역사였다. 자본주의 세계를 타도하고 자신의 깃발 아래 가장 대담한 투사와 반란자들을 결집시키는 임무를 가진 진정한 혁명조직이, 지적 분쟁이나 일시적 분파 없이 살아 움직이고 발전할 수 있겠는가?”

 심지어 가장 심각한 시기에서조차도 최고 지도자가 날카로운 정치적 논쟁에 참여했던 혁명조직이, 무오류의 지도자와 위축되고 정치적으로 원자화된 평당원들을 가진 ‘완전히 집중화되고 관료적이고 위계적인 체제’로 변질된 것은 혁명조직의 질적인 퇴보를 의미하는 것이다.

 프라이스는 또한 알렉산더 라비노비치의 <혁명의 서곡: 페트로그라드 볼셰비키와 1917년 7월 봉기>를 인용한다.

 

“‘…1917년 볼셰비키당의 획일에 가까운 단일성 그리고 ‘철의 규율’은 대부분 허구였다(1991,pp 8-11).’…볼셰비키당의 중앙위원회는 많은 지방과 지역 조직들을 통제할 수 없었으며, 대개 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중앙위원회에는 강한 의지를 가진 투사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그들의 견해를 위해 싸웠고 가끔은 당의 원칙을 무시했다. 그러는 동안, 당이 수만 명의 새로운 노동자회원들에게 문호를 개방했는데, 그들은 모든 것을 상당히 어지럽혔다. 레닌이 러시아로 돌아왔을 때, 그는 고참 볼셰비키의 보수적인 정책들을 뒤엎기 위해 이 새로운 평당원에게 의지했다. 바비노비치는 이러한 ‘분산적이고 규율 없는’(p. 11) 분열은 약간의 어려움을 낳았지만, 전반적으로 참으로 유용했다고 결론짓는다.’ 볼셰비키의 조직적 유연성과 상대적 개방성 그리고 민감성…등은 당이 권력을 잡게 하는 중요한 원천이었다(1991,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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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그들의 지지가 궁극적으로 러시아 노동계급 내에서 볼셰비키의 패권 장악을 가능하게 했었지만, 새롭게 급진화된 노동자들의 유입은 확실히 내부적으로는 모든 것을 느슨하게 했다. 그러나 용감하고, 처음에는 정말로 인기 없었던 러시아의 제1차 세계대전 참전반대, 그리고 좌익적 언사를 쓰는 자유주의 부르주아 임시정부에 대한 당의 확고한 반대 때문에 볼셰비키당은 급진화하는 대규모의 노동자들의 필연적 집결지가 되었다. 고참 볼셰비키의 보수적 저항을 극복하기 위해 레닌이 ‘수만 명의 새로운 노동자당원들’에 의존한 것은, 어떻게 혁명조직이 잘못을 정정하고, 민주적인 내부 정치투쟁을 통해 전술적으로 날카로운 변화를 만들어갈 수 있는가에 대한 모범사례이다.

 중앙과 지방 볼셰비키 조직자 사이의 대화의 단절이 힘의 원천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힘을 집중하고 그리하여 영향력을 최대화하는 당의 능력을 그것이 축소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경쟁 조직들도 똑같은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심지어 가장 혼란스런 시기에서조차 지도부는 당원들의 정치적 신뢰를 얻고 있었고, 그랬기 때문에 정치적 통제가 가능했다. 이것은 7월의 나날동안 특히 중요했다. 당시 케렌스키 정부와의 성급한 대립은 피비린내 나는 패배로 귀결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케렌스키정부의 전복을 계속 추진하는 것이 어리석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가 볼셰비키 지도자들 다수를 설득하는 데 실패한 후, 어리석게도 원칙을 깨고 언론에 누출해서 계획을 좌초시키려 했던 것은, 중앙위원회의 “강한 의지를 가진 투사들”이 “당의 원칙을 무시”하는 것을 선택한 대표적 사례였다. 레닌은 두 “파업파괴자”를 그 배신에 대한 책임으로 제명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중앙위원회의 누구도 그의 제안을 지지하지 않았다. 아이작 도이처는 “볼셰비키당은 그 시작부터 전체주의와 획일성이 지배적이었다는 관점은 이 사건이나 이와 유사한 많은 사건과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무장한 예언자>).

 프라이스는 10월 혁명시기 레닌의 당을 유사(類似) 무정부주의로 색칠하면서, 한편으론 레닌의 당이 건설한 사회질서를 끔찍한 전체주의적인 “국가자본주의”로 취급한다. 이미 3년간의 제국주의 전쟁에 의해 지칠 대로 지친 나라에서 내전을 치르는 긴박함(그리고 외국의 개입)은, 사회주의적 민주주의가 아니라 군사적 편법에 기초한 통치를 볼셰비키에 강제했다. 내전이 길어지고 생활여건은 하락하고 볼셰비키 정권에 대한 대중적 지지가 줄어들자, 이 정권의 노동 계급적 기반이 크게 감소했다. 우리가 지적했던 것처럼, 이것은 이제 갓 탄생한 혁명 정부를 궁지로 몰았다.

 

“나라의 넓은 지역에서 그들이 더 이상 다수 대중들, 심지어는 노동계급에조차 지지를 호소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내전에서 볼셰비키가 제국주의에 맞서 승리하려 한 것을 비난하지 않는다.”

 . . .

 “진실은 항상 구체적이며, 투쟁의 어떤 단계에서건 혁명가에게 요구되는 전술은 존재하는 현실적 가능성과 일치해야 한다. 1920년의 러시아에는 단 두 가지 선택밖에 없었다. 적군이 승리할 것인가, 아니면 백군의 승리할 것인가. 만약 그 당시 소비에트에 새로운 선거가 있었더라면, 즉각 자본주의를 재도입 할 당들이 아마도 이겼을 것이다. 써지와 그 밖의 과거 무정부주의자들이 인식했던 것처럼, 공산당 정권의 유지는 러시아 부르주아 부활에 맞선 유일한 대안이었다.”

<플랫폼주의와 볼셰비키주의>, IBT

 프라이스는 자유선거가 “파시즘을 등장시켰을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하지만 결론은 정반대로 끌어낸다.

 

“그렇지만, 이런 방식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당내 반혁명인 스탈린주의로 이끌었다. 스탈린주의는 나치즘이 그랬던 것과 같은 잔혹한 전체주의이다. IBT 팸플릿에 따르면, 1917년 혁명 이후 얼마 지나지 않은 1924년부터 볼셰비키당은 더 이상 혁명적이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설령 투표에 의해 권력에서 밀려난다 하더라도, 볼셰비키가 초기 소비에트의 혁명적 민주주의를 고수하는 것이 훨씬 나았을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그 어떤 것도 실제 일어났던 것보다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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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군과 백군의 전쟁 결과가 사소한 것이라고 프라이스는 생각할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러시아 멘셰비키, 아나키스트, 다른 좌익 그리고 체제의 반대파들에게 그것은 문자 그대로 삶과 죽음의 문제라고 이해했다. 그것이 바로 그들의 의구심에도 불구하고 결국 볼셰비키를 지지한 이유이다.

 레닌 시기 전체 볼셰비키 지도자들은 러시아가 자체 힘으로 사회주의(즉, 다시 말하면 계급 없는) 사회로 발전할 수 있다는 생각을 실현될 수 없는 환상이라고 여겼다. 그들의 모든 전략은 러시아를 외국의 프롤레타리아 혁명, 가장 중요하게는 서유럽 혁명의 전초기지로 보는 관점에 기초하였다. 볼셰비키에 의한 소비에트 민주주의의 잠정적 제한(나중에 스탈린의 정치적 반혁명에 의해 체계화되고 심화된)은, 처음에는 시간을 벌기 위한 예외적이고 임시적인 응급조치로 보였다. 만약 서유럽에서 성공적인 혁명의 분출이 있었더라면, 아마도 실제로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스탈린 과두정치의 승리는 운명적인 것이 아니었다. 관료주의의 승리는 결국, 전후 유럽 혁명 물결의 패배의 결과였으며, 특히 1923년 위기로 형성된 기회를 낚아채지 못한 독일공산당 지도자들의 미숙과 무능력의 결과였다. 공산당 인터내셔널(제3인터내셔널)이 좀 더 빨리 그리고 과감하게 개입했다면, 그 균형을 깨뜨렸을 것이고 그 때문에 전체적인 역사과정은 달라졌을 것이다.

 현대의 무정부주의자들은, 1920년대 초반 레닌과 트로츠키가 지도하는 볼셰비키 체제가 취한 억압 조치들을 1930년대 중반 스탈린의 피의 숙청과 동일하게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는 질적인 차이가 있다. 몸소 그 변화를 목격한 초창기 무정부주의자였던 빅터 써지는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묘사한다.

 

“러시아의 내전과 고립은 심각한 위기의식을 조성했으며,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공공 안전 조치들이 명령되었다. 권력을 잡고 있는 당(멘셰비키의 배신 때문에 볼셰비키만이 권력을 잡고 있었음)에도 혁명대열 안에 있는 적들에게만큼 가혹한 것들이 명령되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멘셰비키들과 무정부주의자들에게 거부권을 박탈했다면, 그것이 설령 선의였다고 하더라도, 공동체의 방어는 매순간 극도의 위험에 직면했을 것이고, 공산당 당원도 심각하게 부족했을 것이다. 당은 결코 반대자들이 비판할 권리를 거부하지 않았으며, 결코 그들이 존재할 권리를 부정할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게다가, 만약 초기에 노동자들에게 표현의 자유를 배제하는 전체주의 정권 수립을 계획한다고 볼셰비키당이 선언했다면 당은 승리하지 못했을 것이다–감옥에 가기 위해 싸우는 대중들은 없다. 반대로, 당이 최대한의 노동자민주주주의를 선언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모스크바의 블랙가드가 무장 해제(1918)된 이후에도, 무정부주의적 조합주의 일간지는 계속해서 출판되었다. <노동자의 목소리[Golos Truda]>를 출판하는 무정부주의적 조합주의 인쇄소는 관료주의 반동이 승리했을 때인 1925년 또는 1926년에 사라졌다. 사회주의혁명당 좌파 조직과 <노동자의 깃발[Znamia Truda]>도 그 시기 사라졌다. 무정부주의 신문 <시작[Pochin]>과 <근본주의자>는 조금 일찍 굴복했다. 멘셰비키는 1919년 모스크바에 일간지 <전진[Vperyod]>을 가지고 있었다. 그 일부는 1923년까지 소비에트 내에서 분파를 유지했다. 그리하여, 트로츠키주의자들을 제명하면서 당내에서 관료주의 승리가 완성되고 톰스키와 부하린이 ‘프롤레타리아 독재 하에서, 서너 개의 당이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 중 하나가 권력을 잡으면 나머지들은 감옥으로 가는 조건에서 그러하다.’고 한 목소리로 외치는 소리를 듣게 되는 바로 그 1927년에 이르게 된다.”

 “…[레닌주의자들은] 승리하기 위해 꼭 필요한 엄격한 규율이나 집단적 사고의 장점을 포기할 수 없다. 그것은 곧 억압당하는 인민에 다수의 의지를 강요하거나, 또는 특정한 시기 종종 소심하고 무능하고 부패하고 부르주아에 의해 조종당하는 후진 부위에 선진 부위의 의지를 강요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또한 의견의 자유, 견해 차이, 대중에 의한 비판, 활발한 의견 교환, 생각의 대립과 같은 살아 움직이는 사고 없이, 사회주의는 생존할 수도 자라날 수도 없다는 것을 안다. 이러한 측면에서 스탈린주의는 노동계급에 심대한 타격을 입혔다. 서구의 프롤레타리아만이 이 상황을 구할 수 있었다. 이론과 현실에서 전쟁 중인 공동체국가를 지켜내는 데에 감옥국가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그것은 단지 승리한 관료들이 만들어낸 것일 뿐이었다. 자신들의 권력 강탈을 강요하기 위해서 그들은 사회주의의 기본적 원칙을 파괴하고 노동자에 대한 모든 자유를 박탈할 수밖에 없었다.”

<20년 후의 러시아>

1917 또는 1936: 승리와 패배 사이의 선택

 자본주의 국가가 억압과 불평등의 장치라는 것을 아는 많은 젊은 투사들은 모든 ‘권위’와 국가권력의 폐지라는 무정부주의 제안에 솔깃한다. 그러나 많은 러시아 무정부주의자들이 1917년에 깨달은 것처럼, 그러한 개념들은 사회혁명이 실제로 벌어지는 상황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다. 이 교훈은 20년도 지나지 않아 스페인에서 또다시 확인되었다.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이 이끄는 우익군대에 대항해서 노동자계급이 성공적으로 봉기한 후인 1936년 7월에, 무정부주의 조합주의인 <트라바조 국민연방(CNT)>과 <이베리카 무정부주의연방(FAI)>이 정치적으로 투항한 것이 그것이다. 자본가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직접적인 노동계급의 힘을 조직하는 것을 통해 투쟁을 전진시켰던 볼셰비키와 달리, ‘정치’에 관련되지 않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CNT/FAI 지도자들은 ‘민주적’인 부르주아 정부를 정치적으로 지지했다.

 한 유명한 FAI 지도자인 디에고 아바드 드 산틸란은, 카탈로니아에서의 노동자들의 봉기 이후 즉시, 루이스 콤파니 대통령이 아나키스트 지도자들에게 뭐라고 말했는지 묘사했다.

 

“파시스트 병사들을 당신들이 무찔렀기 때문에, 카탈로니아와 도시의 주인은 당신들이오. 당신들은 이겼고 모든 것은 당신들의 권력 안에 있소. 만약 내가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면, 만약 나를 대통령으로 원하지 않는다면, 지금 그렇게 말하시오. 그러면 나는 반파시스트 전투에서 한 명의 병사가 될 것이오. 그러나 만약 당신들이 나를 믿는다면, 그러면 아마도 나의 당 동지들, 나의 이름, 그리고 나의 명망이 당신에게 쓸모가 있을 것이요.”

피에르 브로우와 에밀 테밈, <스페인에서의 혁명과 내전>에서

 후에 경제장관의 자리에 오른 산틸란은 CNT/FAI의 지도자들의 투항을 ‘정치에 무관심’하고 ‘반(反)권위적인’ 그들 이데올로기의 필연적 결과라고 설명했다.

 

“우리는 홀로 남을 수 있었고, 우리의 절대적 의지를 부과할 수 있었고, 자치정부의 무효를 선포할 수도 있었고, 인민들의 실제 권력을 즉시 강제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독재가 우리를 향해 행사될 때 우리는 그 독재를 신뢰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편 다른 세력들에 대해 우리 스스로 그 독재를 실행할 수 있을 때에 우리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콤파니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 자치정부는 권력을 유지한 것이다.”

앞의 책

 CNT/FAI 지도자들의 투항을 비난했던 무정부주의 좌파 ‘두루티의 친구들’은 단도직입적으로 ‘혁명은 전체주의다.’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자본주의 국가를 파괴시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노동자 대표체로서의 혁명적 ‘임시정부’로 이를 대체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결론지었다. 우리가 우리의 책자에서 논했던 것처럼, 이것은 결과적으로 “실질적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옹호이다. 프라이스 동지는 이것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공산주의 하에서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든 사람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조건이 될 것이다(공산당선언)”라는 칼 맑스의 계획은, 부르주아의 사회통제 기구들을 파괴하고 그것을 새로운 노동계급의 기구들로 대체하는, 조직되고 훈련받은 혁명 투쟁을 요구한다. 무정부주의자, 사회혁명당 좌파와 다양한 다른 좌파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은 볼셰비키의 지도에 의해 수행된 러시아 10월 혁명은, 노동자계급이 자본계급 통치를 전복한 유일한 역사적 성공 사례이다. 오직 이 경험을 받아들이고 그 교훈을 이해하는 혁명가들만이 미래에 새로운 승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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