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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성폭력 사건’에서 배운다

 

‘담배성폭력 사건’은 ‘여성주의, 성폭력론, 피해자중심주의, 2차 가해’ 등과 관련하여,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성폭력 2차 가해자로 몰렸던 S가 자신이 실질적 피해자임을 주장하며 거꾸로 기존의 ‘피해자’들을 제소하였고, 2013년 5월 9일 <서울대 “성폭력 대책위” 사건 및 반성폭력 운동에 대한 공개토론회>가 개최되었다. 그 토론회엔 A의 소속 단체인 <공간>, 사회대 여성주의자 <달>, S의 지지자 모임인 <성폭력 대책위 사건 피해자 지지모임>, <사노위> 관악분회가 각각 발제문을 제출하였다.


우리는 <성폭력 대책위 사건 피해자 지지모임>의 사건 해석을 대체로 지지한다. 아주 구체적인 사항으로 가면 몇 가지 논의거리가 있겠지만, <지지모임>이 제출한 대부분의 문제의식에 공감했고 고통 속에서 얻어낸 통찰을 배울 수 있었다.


1년 반 이상, 자기가 속한 주위의 거의 모든 조직과 인간관계 그리고 기존의 신념으로부터 외면당하고 공격받는 상황에서, 무너지거나 굴복하지 않고 살아남아 진실을 움켜쥔 S의 투쟁에 ‘영웅적’이라는 표현을 감히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래는 <지지모임>의 발제문(서울대성폭력공개토론회자료집.pdf)에서 특히 의미 있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발췌한 것이고, 간단한 소제목을 붙였다.


  

‘여성에 대한 폭력’으로서 성폭력 개념의 부적절함


그렇다면 ‘여성에 대한 폭력’으로서의 성폭력 개념은 이런 식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우선, 이것은 지나치게 모호하며 엄밀히 따지면 모든 폭력을 전부 포괄한다고까지 할 수 있다. … 이것은 결국 피해자가 생물학적으로 여성인 모든 폭력 사건은 성폭력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사기든 도난이든 교통사고이든 여성이 당한 모든 피해는 여성주의의 정치적 의제가 되어야 할 것이며, 피해자가 원할 때마다 공개심리의 원칙은 폐기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여성주의 운동의 역량을 얼마나 소모적인 사안들에 낭비하게 할지, 또한 여성주의 운동 자체를 얼마나 폭압적으로 만들지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게다가 이러한 관점은, ‘성폭력에 민감한 시각’을 가지려면 결국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언제나 잠재적으로 성적인 것으로 바라볼 것을 요구한다. 이것은 여성을 남성의 성애의 대상으로서만 규정한다는 점에서 뒤집어진 이성애중심주의, 남성중심주의다.

…‘성적 자기 결정권’ 개념은 사라진다.…‘여성에 대한 폭력’으로서의 성폭력 개념은 대중에 의해서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다.

 

 

피해자 중심주의


요컨대 대책위에서 공간이 취한 입장은 성폭력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고, 잘못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피해자가 잘못이라고 이야기하는 것만으로 이미 결론이 지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공간이 ‘객관성’의 대안으로 제시한 것은 테이블의 모든 구성원이 피해자의 관점을 수용하는 것이었다. 여성주의의 이름으로 객관적, 합리적 기준을 정하려는 시도를 피해호소인의 자의로 대체해버린 것이다.…<사노위>의 경우도 ‘피해자가 피해를 호소하면 성폭력이든 아니든 피해로 인정해야 한다’는 관점에 기초하여 가-피해 구도를 받아들이고 있었고, 진상 조사와 성격 규정을 주장하기는 했지만 이는 객관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함이라기보다 상례를 따르고 사건을 원활하게 ‘해결’하기 위함이었다. <사노위> 회의에서 수진이 ‘객관적으로 정당화할 수 없는 요구에 왜 따라야 하느냐’고 항의하자, 구성원들은 ‘객관적 기준을 세운다는 게 가능하냐’는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둘째, 피해자중심주의는 ‘피해자를 비판하는 것은 피해자에게 상처를 주고 사건 해결을 방해하는 것’이라는 의미로 적용되었다. 원제소자(A)의 입장에 대한 비판은 금기시되었으며 제기되었을 때는 급하게 무마되거나 2차 가해로 낙인찍혔다.…셋째, 피해자중심주의는 ‘피해자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해도 되며 피해자가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주어야 한다’는 의미로 적용되었다. B에 대한 ‘야. 이. X. X. X. 야. 담. 뱃. 불. 로. 지. 져.도. 시. 원. 찮. 을. X. X. 야’ 등의 욕설이 문건으로 올라왔는데도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고, B는 이 모욕을 받아들이고 오히려 거듭하여 A에게 사과해야 했다.

 

 

2차 가해


가해당사자가 사건을 은폐할 것을 종용하기 위한 수단으로 고통을 호소하며 피해자를 비난하거나 불리한 여론을 조성하지 않는 한, 가해당사자가 피해를 호소하는 것마저 2차 가해라고 할 수는 없다. 하물며 이 피해가 피해호소인과 그녀에게 편중된 절차에서 비롯된 부당한 폭력 때문에 생긴 것이라면, 이를 2차 가해라고 부르는 것은 가해지목인은 어떤 부당한 일을 당해도 어떤 이의도 제기하지 말라는 뜻이다.


2차 가해라는 말은 그간 지나치게 자의적으로 사용되어 왔고, 그 외연을 정의하려는 것은 자칫 ‘협소한 관점’이라는 비난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시도되지 않았다. 그 문제점이 외면할 수 없는 형태로 드러난 지금, 2차 가해라는 말로 모든 비판적 토론을 봉쇄하고 피해자에게 무한 권력을 쥐어주는 일에 제동을 걸 필요가 있다. 2차 가해의 한도를 설정하고 개념이 만들어진 맥락을 환기하지 않으면, 2차 가해라고 볼 수 없는 행동들이 제소자(A)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2차 가해로 규정되고 처벌되는 일이 언제든 반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2차 가해의 현재 정의는 “피해자에게 재차 피해를 입히는 행동 또는 사건 해결을 방해하는 행동”으로 규정되어 있으나, ‘피해’와 ‘상처’를 구분하지 않는 사람이 적지 않고 사건 해결이라는 말 또한 피해호소인의 요구안을 무조건 들어주는 것으로 해석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러한 정의는 피해자가 기분나빠하면 단순한 이견 또는 피해자의 신상이 유출되지 않는 선에서 사건에 대해 공론화하고 토론하는 것까지 2차 가해로 몰려 죄악시되는 결과를 낳았다. 앞으로 2차 가해는 “피해자에 대한 인권 침해나, 사건을 정치적으로 다루는 것에 대한 방해”와 같이 좀 더 엄밀하게 재규정될 필요가 있다.

 

 

‘인권감수성’과 비이성적 사고방식


대책위에 참여하기 전 <사노위>는 여성사업팀 주관으로 관악분회 대상 내부 교육을 실시하였고, 교육의 요지는 주로 ‘성폭력은 아니지만, 당사자의 입장에서 폭력적인 상황이었음을 이해해야 한다. 그런 태도가 인권 감수성’이라는 것이었다. 이를 기점으로 관악분회 구성원들은 가-피해 구도를 주어진 것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즉, 관악 페미니스트들뿐만 아니라 여성단체에서 활동하는 선배들 또한 이러한 관점을 내면화하고 후배들에게 교육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피해호소인에 대한 공감과 배려를 권고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제기가 정당하냐 아니냐와는 다른 문제다. 상처가 될 수 있는 상황임을 인정하는 것과 그것을 공동체가 제재해야 할 폭력으로 인식하는 것은 다르기 때문이다. 감정적으로 연민할 수 있는 것과 정치적으로 지지할 수 있는 것을 구분하지 않는 것은 인권 감수성이 아니라 단순히 비이성적 사고방식이다. 그럼에도 내부 교육은 전자를 설득하는 듯 가장하면서 사실상 후자를 설득시켰다. 이는 관악분회 구성원들이 대책위에서 벌어지는 부조리한 일들에 대해 문제제기를 금기시하게 되는 큰 요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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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문 첨삭이라는 방식의 폭력성


이 사건이 애초에 성폭력 사건도 폭력 사건도 아니며 일방적으로 사과할 상황이 아니었다는 점을 차치하더라도, 사과문이 핵심적인 원칙을 인정하지 않거나 사실을 호도하는 것이 아닌 한 단순히 피해자가 흡족하지 않다는 이유로 세세한 부분까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요구하는 것은 가해자는 자신의 내면을 남김없이 심판의 대상으로 내놓으라는 뜻이며, 일체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말고 피해자의 앵무새가 되라는 뜻으로, 가해자를 괴롭힘으로써 A의 복수심을 충족하는 것 이외의 어떤 의미도 찾을 수 없다. 이는 피해에 대한 구제를 명목으로 하여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수치스러운 내면의 감정과 생각까지 공개하고 생각과 말을 모두 다른 사람의 의지에 복속시켜 다른 사람의 악의를 자기 자신에게 쏟아부으라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폭력적인 요구로, 누가 보아도 피해자권력을 남용한 응징이나 보복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다.

…공간은 이에 대한 수진과 <사노위>의 문제제기를 사과문을 둘러싼 어떤 요구도 봉쇄하는 것으로 왜곡하고, 가해자를 조리돌림하며 고해성사를 강요하는 방식까지 ‘2차 가해를 막는다’는 방어의 명목으로 합리화하고 있는데, 이들은 논리에 따르면 ‘다시 국가를 위태롭게 하는 것을 막기 위해’ 사상범들에게 전향서를 강요하는 한국 정부의 탄압도 완전히 합리화될 수 있을 것이다.

 

 

사건의 비공개 처리의 부당성


물론, 대책위가 운동적 정당성을 잃어버리고 개인의 인권을 유린하면서 정파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이전투구의 장이 되어버린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사태가 이렇게 된 데에는 그 누구보다도 권력을 지양한다면서 사실은 여성주의적 권위와 중재자의 지위에서 나오는 권력을 십분 활용했던 공간의 책임이 가장 컸다.  게다가 사건은 사실 ‘비공개’된 것도 아니었다. A와 (가) 등은 이미 자신들과 친한 학내 여성주의자들을 중심으로 A 중심의 사건 경위를 확산시키고 있었고, 이는 사회대 새맞이 기간에 문화팀이 학생회를 비토할 뻔하는 등 수진에게 실제로 치명적인 정치적 위기를 초래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해지목인들은 비공개를 강요당했기 때문에 이러한 소문이 누구에게 어떻게 퍼져 있는지 확인할 길도 물론 없었으며 어쩌다가 소문을 들은 사람이 가해지목인들에게 물어보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최소한의 해명 기회조차 박탈당했다. 이 사건에서 소위 ‘비공개 원칙’이란 일방에게만 유리한 여론을 조성할 권리를 독점시키고 다른 쪽은 발언권을 일절 박탈하는 무기일 뿐이었다.


 

<사노위> 여성사업팀


물론 공간과 행진보다 더 결정적으로 작용했던 것은 여성사업팀이라는 <사노위> 내부의 여성주의적 권위자였다. 이들이 공간과 행진에서 주장하는 피해자중심주의를 상당 부분 인정해주었기 때문에, <사노위> 구성원들은 이들을 거스르지 않고서는 여기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인권과 민주성을 명분으로 내건 패권주의


대책위 구성원들은 고통을 호소하는 모든 사람의 목소리를 존중해 듣고 인권을 확장시킨다는 미명으로 A의 요구를 관철시켰지만, 수진이 고통을 호소하는 것은 묵살하거나 심지어 비난하였으며 피제소인들의 기본권을 침해하면서도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았고, 민주적 논의를 복원시키는 것을 대책위로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책위에서 비판적 의견이 봉쇄되는 것에 대해서 전혀 경계하지 않았다. 대책위에서 인권과 민주성은 정치적 명분일 뿐, 실제 행위의 원칙이 아니었던 것이다. 실제 행위에서 일관적으로 관철된 원칙은 피해호소인과 공간/행진의 패권을 보전하고 관철시키는 것뿐이었다. 그 결과, 반성폭력 운동이 줄기차게 비판해온 가해자들의 전형적인 행태(문제제기의 묵살·무마·탈정치화·은폐, 피해자에 대한 책임전가, 책임회피 등)가 대책위에서 그대로 반복되었다. 이는 ‘근대적 보편성을 비판한다’는 명목으로 보편적 정당화를 포기한 여성주의는 기득권 여성의 패권주의 이상이 될 수 없음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성폭력 상담소의 편파성과 폭력성


실제로 수진이 사퇴 이후 상담소를 찾아가 ‘A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가.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이 된다’고 상담하였기 때문에 상담소에서는 사건의 전말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담소의 자문 내용은 ‘원 사건이 성폭력인지 아닌지는 판단하지 않는 것을 전제로 이야기하겠다’ ‘가해자가 피해를 호소하는 일은 흔히 있다’ ‘익명화를 한다 해도 성폭력 사건을 피해자의 동의 없이 공개하는 것은 명예 훼손에 해당한다’는 것 등 수진을 가해자로 규정하고 사건을 비공개하라는 것이었다.…상담소는 이에 대해 “일반적인 절차와 피해자 보호, 성폭력 사건의 비밀유지 원칙과 관련된 입장 등 원칙적인 내용”이었다고 해명하였다. 그러나, 성폭력 사건이 아닌 사건에 대해 “성폭력 사건인지 아닌지는 판단하지 않는다”고 해놓고 ‘성폭력 사건’의 일반적 원칙을 근거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사건이 성폭력이 아니라는 사실을 외면하기 위해 논의를 유보하고 사실상 사건을 성폭력으로 취급하는 것으로, 성격 규정을 생략하고 사실상 사건을 성폭력으로 취급했던 공간의 방식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 게다가 “가해자가 피해를 호소하는 일은 흔히 있다”는 것은, 가해자로 취급받는 것이 너무나 부당하고 고통스럽다는 수진의 지금까지의 호소를 완전히 무성의하게 묵살하는 발언이었고, “명예 훼손” 운운은 조언이라기보다 사실상 운영위원회에 대한 협박에 가까웠다. 성폭력상담소의 조언 내용은 전문 기관의 것이라기에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편파적이고 폭력적이었으며, 이는 대책위에 관여한 학생 활동가들뿐만 아니라 여성주의의 전문가들 역시 말썽을 만들기보다 소수의 피해자를 침묵시킴으로써 운동의 일관성을 유지하기를 선호하는 경우가 있다는, 매우 비관적인 결론을 시사한다.



2013년 8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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