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국가(소련/중국/북한 등)의 사회성격

소련의 사회 성격에 대하여

by 볼셰비키 posted Aug 19,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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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프트대구> 2017년 7월 13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소련의 사회 성격에 대하여



1. 10월 혁명으로 등장한 체제


노동계급의 자치기구인 소비에트에 기반해 노동계급 혁명전위인 볼셰비키당의 지도로 이루어진 10월 혁명은 전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였다. 지배계급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는 착취자를 착취하기 위한 조처에 착수했다. ‘피착취 근로인민의 권리 선언을 통해 러시아가 소비에트들의 공화국임을 선포했고 착취자를 무자비하게 분쇄하고 사회주의적 토대 위에 사회를 재조직하기 위해 토지의 사적 소유 폐지, 생산과 교통수단의 국유화등을 위한 조처의 실행을 선포했다. 이러한 조치들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결국 현실화되었고 부르주아지는 소유를 몰수당하고 불타는 적개심으로 소비에트 체제에 저항했다. 러시아 노동자들은 착취받는 임금노예에서 사회의 주인으로 등장해 이들에 맞서 싸웠다.


이렇게 수립된 노동계급 소유체제는 소련이 처한 어려움에도 그 효율성을 발휘했다. 관료적 비효율에도 불구하고 후진 농업국가는 급속히 성장해 공업국가로 변모했다. 그간 부르주아 이데올로그들이 벌인 계획경제는 불가능하고 경제 성장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등의 선전이 모두 거짓임이 현실의 언어로 입증되었다. 소련 경제는 수 십 년간 중단 없이 역동적으로 성장했다.

 

1925년 소련은 전기 생산량에서 세계 11위였다. 그러나 1935년에는 독일과 미국 다음으로 최대생산국이 되었다. 석탄생산의 경우에는 10위에서 4위로, 강철생산에 있어서는 6위에서 3위로 도약했다. 그리고 트랙터와 설탕 생산에서는 세계 제1위가 되었다. 공업에서의 엄청난 성취, 처음부터 아주 밝은 전망을 보여준 농업, 구 공업도시들의 비범한 성장과 새로운 도시들의 건설, 노동자 수의 급격한 증가, 문화적 수준의 향상과 문화적 수요의 증대 등은 모두 의심할 여지없이 10월 혁명의 결과였다.

- 배반당한 혁명, 트로츠키

 

또한 이윤이 아니라 인간의 필요를 우선하는 체제였기 때문에 소련의 인민대중은 상대적으로 낮은 생산력 수준에도 불구하고 무상교육과 무상의료, 완전고용과 평생고용, 퇴직연금을 비롯한 사회보장제도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노동자국가의 이중적 성격

 

10월 혁명으로 수립된 노동계급 독재체제는 본질적으로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이행기 체제다. 공산주의는 높은 생산력을 달성해서 인간생활에 필요한 재화를 풍부하게 제공해 인간의 욕구를 한껏 충족시킬 수 있을 때 실현될 수 있다. 이러한 높은 생산력 수준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혁명이 일어나더라도 곧바로 달성될 수 없다. 따라서 공산주의 사회에 이를 수 있는 정도의 생산력에 도달하고자 이행하는 단계에서는 이전 사회의 흔적과 다가올 미래 사회의 모습을 모두 지닐 수밖에 없다. 이 기간 동안 이전 사회의 관습에 따라 노동자들을 독려하고 생산력을 끌어올려야 한다. 트로츠키는 노동자국가가 가지는 이중적 성격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르크스의 이 주목할 만한 견해를 설명하면서 레닌은 이렇게 덧붙였다 : "소비재 분배와 관련해 존재하는 부르주아 법은 당연히 부르주아 국가를 전제로 한다. 왜냐하면 규범의 준수를 강제할 수 있는 기구가 없이는 법은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산주의 체제하에서는 당분간 부르주아 법이 존재할 뿐 아니라 부르주아 계급이 없는 부르주아 국가도 존재한다!" 현재 소련의 공식 이론가들에 의해서 완전히 무시되고 있는 이 매우 의미 있는 결론은 소련의 국가 성격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소련이라는 국가를 이해하는 첫걸음을 내딛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사회주의 건설의 임무를 맡고 있는 국가가 강제력을 동원하여 불평등을 옹호할 수밖에 없다면 즉 소수의 물질적 특권을 옹호할 수밖에 없다면 이 국가는 부르주아 계급이 없는 "부르주아" 국가일 수밖에 없다. 이 주장에는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칭찬이나 비난이 전혀 없다. 다만 사물의 성격을 있는 그대로 부르는 것뿐이다.


부르주아 분배 규범은 물질적 생산력의 성장을 촉진하면서 사회주의 건설의 목적에 봉사해야 한다. 사회주의 국가는 시작부터 곧바로 이중적인 성격을 띤다 :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형태를 옹호하는 한 사회주의 국가이다 ; 그러나 생필품의 분배가 자본주의 가치척도에 따라 이루어지고 이 모든 결과들을 바탕으로 국가를 운영하는 한 부르주아 국가이다.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이 모순적 성격 규정은 교조주의자들과 현학자들을 공포에 빠뜨릴 지도 모른다. 그러나 필자는 이들을 위로할 수 있을 뿐 현실을 바꿀 수는 없다. 노동자국가의 최종적 성격은 노동자국가 내부의 부르주아 경향과 사회주의 경향 사이의 변화하는 관계에 의해 결정될 수밖에 없다. 후자가 승리하면 경찰기구는 사실상 최종적으로 없어진다. 즉 국가가 자치 사회 내로 해소될 것이다. 소련의 관료집단이 그 자체로서 그리고 하나의 징후로서 제기하는 문제가 얼마나 의미심장한 가는 이 측면을 보더라도 충분히 이해가 갈 것이다!

- 위의 책, 트로츠키


완전한 사회주의 사회라면 자본주의는 복구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부르주아 없는 부르주아 국가인 이행기 체제는 부르주아 경향과 사회주의 경향을 모두 가지고 있다. 이는 노동계급 혁명 이후에도 자본주의가 복귀할 수 있는 사회적 기반이 된다.

 

 

2. 관료적으로 퇴보한 노동자국가

 

관료적 퇴보의 원인

 

10월 혁명의 승리로 러시아 노동계급은 지배계급이 되었다. 그러나 러시아 노동계급이 처한 현실은 가혹했다.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인구의 다수가 농민인 후진 러시아는 제국주의 세력의 간섭전쟁과 내전, 경제 봉쇄라는 혹독한 상황에 직면했다. 산업 생산은 크게 파괴되었고 대다수가 궁핍으로 내몰렸다. 일부 지방에서는 인육을 먹는 일까지 있었다. 선진 노동자들은 이러한 가혹한 현실이 제국주의 세력 때문이며 세계 혁명을 통해 해결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그러나 노동계급은 탈진상태에 이르렀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주체인 프롤레타리아는 상당수가 해체되었다. 가장 선진적인 노동자들은 내전에서 죽거나 국가기구의 관료가 되었다. 많은 수가 농촌으로 돌아가 다시 농민이 되기도 했다. 산업이 파괴되고 그나마 남은 공장들도 계속해서 가동이 중단되었다. 이렇게 되자 소비에트 민주주의는 제대로 작동할 수 없었다. 관료주의가 그 자리를 비집고 들어왔다.

 

러시아 10월 혁명의 노동계급적 성격은 세계 정세, 러시아 국내 세력들의 특수한 상호 관계에 의해 결정되었다. 그러나 사회계급들은 짜르 체제와 후진적 자본주의의 등장이라는 야만적 상황 속에서 형성되었다. 따라서 계급들은 결코 사회주의 혁명의 요구에 따라 주문되어 형성되지 않았다. 실제는 이와 정반대였다. 혁명에 대한 반동이 불가피하게 혁명 대중의 대오에서 일어난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많은 측면에서 여전히 후진적이었던 러시아 노동계급이 몇 개월 사이에 반봉건 왕조체제에서 사회주의 독재체제로 도약한 역사상 유례없는 상황 때문이었다. 이 반동은 파도를 타고 연속해서 진행되었다. 국외 상황과 사건들이 서로 앞을 다투어 반동의 조건을 성숙시켰다. 내전에 대한 제국주의 세력의 반동적 개입이 잇따르면서 혁명을 괴롭혔다. 혁명은 서구로부터 어떠한 직접적 도움도 구할 수 없었다. 혁명 이후 농촌은 번영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불길한 궁핍이 아주 오랫동안 농촌을 지배했다. 더욱이 노동계급의 뛰어난 대표들은 내전 중에 전사하거나 관료사회의 사다리를 몇 번 오르더니 대중으로부터 멀어졌다. 결국 적대 세력들 간의 유례없는 팽팽한 긴장, 희망, 환상 후에 피로, 위축, 혁명에 대한 실망감 등이 지배하는 긴 시기가 이어졌다. "인민적 긍지"가 썰물처럼 사라진 후 공백을 소심함과 출세주의의 밀물이 메웠다. 새로운 지배집단이 이 물결을 타고 권력을 장악했다.

- 위의 책, 트로츠키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적 관념론자들은 소련 사회의 관료화를 볼셰비키가 권위주의적이어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이론의 문제가 아니었다. 소비에트가 다시 제 역할을 하고 노동자 민주주의가 구현되려면 노동계급을 해체시킨 물질적 취약성을 극복해야 했다. 이것은 머릿속에서 이루어지는 민주주의에 대한 존중이 아니라 세계혁명, 특히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의 혁명을 통해 해결될 수 있었다. 그러나 새로이 등장한 관료집단은 이를 가로막았다. 이들은 노동계급 혁명을 위한 장기적 전망에 기초를 둘 수 없었다. 이들의 해악적 정책은 곳곳에서 노동계급을 패배로 이끌었으며 이로 인한 고립과 패배감은 다시 소련에서 관료주의를 강화시켰다.

 

국제정세는 소련 내부의 관료주의 경향을 강력하게 추동시켰다. 세계노동계급에게 가해지는 자본가계급의 철퇴가 무거울수록 소련 관료집단은 점점 자신감을 얻었다. 그러나 이 두 사실 사이에는 시기적 인과적 연관이 모두 존재하였다. 그리고 이 연관은 두 가지 방향으로 작동하였다. 즉 관료지배층은 노동계급의 패배를 조장했으며 노동계급의 패배는 이들의 권력을 더욱 강화시켰다. 1923년 불가리아의 대중봉기가 진압되었으며 독일의 노동자 정당은 굴욕적으로 혁명에서 후퇴하였다. 1924년 에스토니아의 봉기 기도는 곧 붕괴했다. 1926년 영국 총파업은 노동관료들의 배신으로 끝났다. 폴란드에서는 필수드스키(Pilsudski) 독재정권의 등장 앞에 폴란드 노동자당이 굴욕적으로 항복했다. 1927년 중국혁명은 끔찍한 피의 학살로 끝났다. 마지막으로 최근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패배는 더욱 불길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이들 일련의 역사적 대재앙으로 세계혁명에 대한 소련 대중의 신념은 사라졌다. 이로써 관료집단은 구원의 유일한 빛으로 받아들여져 더욱 높은 고지를 점령했다.

- 위의 책, 트로츠키

 

1920년대 소련에서는 3개의 분파가 등장했다. 부하린으로 대표되는 우익반대파(이들은 국제 부르주아지와 쿨락의 압력을 받아 소련의 자본주의 복귀 위험을 증대시키는 강령을 가졌다.), 노동계급의 역사적 대의를 대변한 트로츠키의 좌익반대파, 이들 사이에 있던 당 관료를 대변한 스탈린의 중앙파.


트로츠키를 비방하는 이들 중에는 이 분파 투쟁의 의미를 격하하고 마치 레닌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벌이는 개인적 경쟁처럼 묘사한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개인적 권력다툼이 아니었다. 소련의 운명이 걸린 노선 투쟁이었다. 때문에 이 투쟁에서의 승리는 개인적 자질이 아니라 계급 투쟁의 역학에 의해 결정되었다. 트로츠키의 말처럼 좌익반대파는 예리한 분석력을 지녔고 현안을 더 정확하게 분석했으나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한 중앙파에게 패배를 거듭했다.


노동계급은 정치적으로 탈진 상태였으나 부르주아지의 반혁명 기도를 물리칠 만큼은 강했다.(이는 노동계급 전위당인 볼셰비키당의 무자비한 독재를 통해 가능했다.) 근본적으로 이 상황이 스탈린 분파를 권력 장악에 이르게 했다.


 

테르미도르 반동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해서 이전 사회의 흔적은 점차 사라지고 국가는 사멸하기 시작해야 했다. 그러나 현실은 반대로 나타났다. 노동계급 위에 군림하는, 사멸할 의사가 전혀 없는 전제적인 관료 국가가 등장했다.


당내 분파 투쟁에서 관료집단이 승리했고 소비에트 민주주의와 당내 민주주의는 체계적으로 억압되었다. 고립과 봉쇄의 혹독한 조건 하에서 노동계급 독재를 방어하기 위해 이루어진 일시적 조치들(소비에트 내 야당 금지, 당내 분파 금지 등)은 사회주의의 원칙인 것처럼 왜곡되었다. 반대파 성원들은 체포되거나 추방당했다. 오랜 시간 볼셰비키당의 혁명가로 활동해온 지노비에프, 카메네프, 부하린 등은 제국주의의 간첩이라는 혐의로 사형되었다. 10월 봉기의 지도자 트로츠키는 외국으로 추방당했다. 당 기구는 당원들로부터 자립성을 획득했다.

 

지난 몇 년간 당내 민주주의는 볼셰비키당의 전통에 반하여, 일련의 당 대회의 결정에 직접 반하여 체계적으로 폐지되어왔다. 실제로 관리에 대한 진짜 선거는 사라지고 있다. 볼셰비키주의의 조직 원칙은 사사건건 왜곡되고 있다. 당 규약은 상부의 권한을 확대하고, 당 기초 단위의 권리를 축소하는 방향으로 체계적으로 바뀌고 있다. 군위원회, 지구위원회, 지방위원회의 권한 위임은 중앙위원회에 의해 1, 2, 그리고 그 이상으로 연장되어왔다.


지방위원회, 지방 집행위원회, 지방 노동조합협의회 등의 지도부는 사실상 해임할 수 없다(3~5년이나 그 이상 동안). '근본적인 견해 차이를 전체 당의 여론에 호소'(레닌)하는 모든 당원, 모든 당원 그룹의 권리는 사실상 폐기되고 있다. 당 대회나 당 협의회는 모든 문제에 대한 전당의 자유로운 사전 토론 없이(레닌 시대에는 항상 이와 같은 토론이 열렸다) 소집된다. 이러한 토론을 요구하면, 당기 위반으로 간주된다.

- 통합반대파 강령 초안, 1927, 레닌 이후의 제3인터내셔널에서 재인용

 

소비에트 민주주의의 쇠퇴와 관료적 퇴보는 사회 여러 분야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군대에서는 장교계급의 부활로 나타났다. 러시아 사회의 후진성 때문에 적군은 내전 시기 짜르 장교들도 받아들이는 등의 조치가 불가피했다. 그러나 이후 관료집단은 한발 더 나아가 장교제도를 도입하기에 이르렀다.

 

19359월 소련의 우방과 적대국을 포함하여 문명세계는 깜짝 놀랄만한 소식을 들었다. 적군이 소위에서 총사령관까지 장교제도를 도입했다는 것이다. 전쟁성의 실제 지도자인 투하체프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장교 직위의 도입은 지휘 및 기술 분야의 간부들을 개발할 좀 더 안정적인 기반을 제공한다." 그러나 이 설명은 고의적으로 애매하다. 지휘급 간부들은 무엇보다 병사들의 자신감에 의해 강화된다. 바로 이 때문에 적군은 장교단을 일소하기 시작했다. 위계 체제의 부활은 군대의 이해와 조금도 관계없었다. 중요한 것은 계급이 아니라 지휘할 수 있는 위치이다. 엔지니어와 의사들은 계급이 없다. 그러나 사회는 이들을 필요한 위치에 배치시키는 수단을 찾아낸다. 지휘권은 연구, 자질, 성격, 경험 등에 의해 보장되며 더욱이 이에 대한 지속적이고 개별적인 평가가 필요하다. 소령 계급은 대대 지휘관에게 실제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5명의 고위 지휘관을 총사령관으로 승진시킨다고 해서 이들이 새로운 재능이나 보충적인 권한을 갖는 것은 아니다. "안정적인 기반"을 부여받는 것은 군대가 아니라 장교집단일 뿐이다. 더욱이 지휘관들은 병사 대중과의 유대감을 상실하는 대가를 치루어야 한다. 군대 체제의 개혁은 지휘관들의 중요성을 증대시킨다는 순전히 정치적 목적을 추구하고 있을 뿐이다. 더욱이 단순히 계급 제도를 도입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지휘관 사옥 건설이 더욱 빠른 속도로 진행된다. 1936년에 47,000채의 가옥이 건설되어야 한다. 그리고 지난 해에 비해 봉급 예산이 57% 증가해야 한다. "지휘관들의 중요성 신장"은 군대의 도덕적 유대를 약화시키면서 장교들을 지배집단과 더 밀접하게 유착하도록 한다.

- 배반당한 혁명, 트로츠키

 

또한 가족과 여성 문제에 있어서도 테르미도르 반동이 일어났다. 10월 혁명을 통해 볼셰비키는 완전한 여성 참정권과 이혼의 자유를 보장했다. 낙태의 자유도 보장되었다. 부부 중 한 쪽의 요구만으로도 이혼이 가능해졌고 국립병원에서 무료로 낙태 시술을 시행했다. 이러한 정책들은 10월 혁명이 이룩한 자랑거리였다. 그러나 이 자랑스러운 정책들은 관료지배층에 의해 후퇴되었다. 스탈린 정권 시기에 이혼의 자유는 침해받게 되었고 낙태는 다시 금지되었다.

 

여성의 권리인 낙태 역시 지금의 사회적 불평등 체제에서 특권으로 변질되었다. 낙태의 관행에 대해 언론에 조금씩 흘러나오는 정보는 그야말로 충격적이다. 우랄 지방의 어느 지구에 있는 농촌 병원 한곳을 통해서만 1935"195명의 여성이 산파에 의해 몸을 상했다." 이중에는 33명의 근로여성, 28명의 사무직 노동자, 65명의 집단농장 여성, 58명의 주부가 포함되어 있었다.

...

여성들은 의학과 위생시설의 도움으로 낙태를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정부는 이 서비스를 제공할 수 없게 되자 갑자기 방침을 바꾸어 낙태를 금지시켰다. 그리고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정책 전환의 필요성을 강변하고 있다. 대법원 판사 솔츠(Soltz)는 결혼문제 전문가인데 곧 시행될 낙태금지 정책을 옹호하면서 실업자 없는 사회주의에서 여성은 "엄마가 될 기쁨"을 거부할 권리가 없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경찰의 권한을 가진 성직자의 철학이다.

- 위의 책, 트로츠키

 


관료집단의 반혁명 정책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의 성격은 이중적이다. 관료집단은 생산수단이 국유화된 체제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 체제 하에서 관료집단은 특권을 누린다. 따라서 이들은 계획 경제가 파괴될 경우 일자리를 잃게 되고 생계유지를 위해서는 계획경제를 방어해야 한다. 한편 이들이 누리는 특권은 허약하다. 생산수단의 소유를 통해 세습되지 않기 때문에 불안정하다. 이들이 누리는 특권이 안정화되려면 생산수단의 사유화가 필요하다. 이 때문에 관료집단은 노동계급으로부터 자립하여 부르주아적 경향, 사적 소유에 대한 열망을 간직한다. 이 두 가지 경향을 관료집단은 모두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노동계급과 자본가 계급 사이에서 동요하고 첨예한 시기에는 쪼개진다. 91년 소련 자본주의 반혁명 당시 관료집단은 노동자국가를 방어하려는 국가비상위원회 보수파와 옐친으로 대표되는 반혁명 세력으로 나뉘었다.


관료집단의 이중성은 정치 노선으로도 나타난다. 스탈린주의 혐오증의 정치노선을 가진 제3진영 기회주의자들은 스탈린주의가 혁명적 역할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집산제에 기반을 둔 관료집단은 때로 혁명적 역할을 한다. 2차대전 이후 동유럽 등으로 진주한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은 생산수단을 국유화해 (기형적) 노동자국가를 수립했다. 그러나 더 많은 경우에 특히, 관료적으로 통제하기 어려운 노동계급 투쟁이 분출하는 경우 스탈린주의자들은 기회주의적 정책으로 혁명을 가로막는다. 2단계 혁명론과 인민전선을 통해 반혁명적 역할을 수행한다.

스탈린주의자들은 당 관료와 국가를 동일시한다. 이들은 소련에서 관료지배층의 존재를 부정하며 관료집단의 각종 범죄적 정책들을 때때로 저지를 수도 있는 혁명전위의 오류라고 변명한다. 그러나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은 단지 실수로 치부할 수 없는 수많은 정책들로 혁명의 장애물이 되었다. 1930년대 코민테른은 3초좌익 전술을 통해 나치에 맞선 노동자 공동전선을 거부하고 사민당을 사회파시스트로 비난하며 계급적 선을 흐렸다. 이 정책으로 독일 공산당은 제대로 된 싸움 한 번 하지 못한 채 히틀러에게 권력을 내주었다. 그 뒤에는 정반대로 돌변하여 19357차 코민테른 대회에서 인민전선 전술을 채택했다. 이를 통해 자유부르주아지와 손을 잡고 노동계급을 정치적으로 종속시켰다. 이 노골적인 계급협조주의를 통해 소련의 스탈린 정권은 분출하던 노동계급의 투쟁적 기상을 억누르고 부르주아지에게 아양을 떨었다.

스페인에서 스탈린주의 공산당의 정책을 보자.

 

러시아에서 레닌과 볼셰비키들은 "임시정부를 타도하고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고 요구했었다. 그러나 스탈린주의 공산당, 맑스주의통일노동자당, 무정부주의자들(이들은 국가를 부정한다고 주장하면서 노동자 정부도 거부했다!) 등 스페인의 노동자 정당들은 19369월 부르주아 정부에 합류했다. 노동자들을 권력 장악으로 인도할 의사가 없다고 스탈린주의자들은 부르주아 친구들에게 확신시켰다.

...

공산당과 사회당의 지지를 보장받자 아자냐와 콤파니스는 부르주아 법질서를 재확립하기 시작했다. 첫 조치는 노동자 신문의 검열이었다. 이어 카탈로니아 정부는 7월에 수립된 혁명위원회의 해산을 명령하는 포고령을 발표했다. 그리고 10월 말에는 전선 후방의 노동자들에 대한 무장해제를 명령했다. 곧이어 맑스주의통일노동자당과 전국노동자연맹 지도자들은 노동자 탄압 조치들을 전부 지지했지만 정부에서 축출되었다. 또한 스탈린주의자들과 소련 비밀경찰(GPU)의 통제 하에 비밀경찰이 조직되었다.


그러나 이것도 노동자들의 저항을 분쇄할 수 없었다. 도발이 필요했다. 193753일 스탈린주의자들은 전국노동자연합 노동자들이 장악하고 있던 바르셀로나 전화국을 공격했다. 몇 시간 내에 도시 전체에 바리케이드가 설치되고 노동자들은 또 다시 권력을 장악할 기회를 가졌다. 그러나 맑스주의통일노동자당과 무정부주의 지도자들은 보복이 없을 것이라는 아자냐의 약속에 넘어가 중앙정부에 항복했다. 이로부터 이틀 후 정부의 공격 특수부대가 도착하여 전화국을 점령하면서 수백 명을 사살하고 수만 명을 감옥에 집어넣었다. 한 달 내에 맑스주의통일노동자당은 불법화되었고 스탈린주의자들의 요구대로 이 정당의 지도자들은 체포된 후 결국 총살되었다. 공산당은 즉시 공격 특수부대를 이끌고 집단농장과 노동자 민병대들을 해체시켰다. 내전은 일 년 반을 더 끌었지만 결과는 이미 정해진 후였다. 노동자와 농민들은 더 이상 싸울 이유가 없었고 급격히 사기가 저하되었다. 파시스트 반란군은 월등한 화력을 보유했기 때문에 승리를 보장받았다.


내전 기간 내내 스페인공산당은 부르주아 질서의 옹호자로 나섰으며 무정부주의 조직들, 맑스주의통일노동자당, 집단농장, 노동자 민병대 등을 공격했다. "민주적" 제국주의 강대국들과 동맹하려는 필사적인 욕구에 사로잡혀 스탈린은 파시즘이 승리하는 한이 있어도 스페인 혁명을 절대적으로 반대했다. 패배의 거대한 조직자 스탈린은 스페인혁명의 학살자라는 타이틀을 하나 더 얻었다.

- 스탈린주의 대 트로츠키주의, 볼셰비키그룹

 

비단 스페인만이 아니었다. 스탈린 정권은 중국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을 지지하고 중국공산당에 국민당과 타협할 것을 종용했다. 2차 대전 직후 프랑스와 이탈리아 공산당은 부르주아 연립정부에 참가한다. 이외에도 노동계급 운동의 역사는 스탈린주의자들에 의해 자행된 이런 범죄적 정책들로 가득 차 있다. 또한 스탈린은 19432차 대전 도중에 부르주아지에게 코민테른 해산이라는 선물을 준다. 이를 통해 세계사회주의혁명정당이 세계혁명이 성공하기 전까지 노동계급을 지도해야 한다는 레닌주의 기본 원칙과 얼마나 거리가 먼지를 과시했다.


이러한 계급협조주의의 역사는 도저히 혁명전위의 실책으로 볼 수 없다. 관료지배층으로서의 성격을 파악하지 못하면 이러한 행태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3. 국가자본주의론

 

한편 좌익운동권 내에 소련의 노동계급적 성격을 완전히 부정하는 사상도 널리 퍼져있다. 이들은 마르크스주의를 희화화하는 것을 통해 자신들의 기회주의를 합리화한다. 소련 국가자본주의론 중 가장 지지자를 많이 획득한 것은 클리프주의다. 토니 클리프의 국가자본주의론은 맑스주의의 기본 개념들을 심각하게 왜곡하고 있다.


 

군사적 경쟁론

 

클리프주의자들은 소련이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과 군사적 경쟁을 하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된다고 주장한다.

 

소련의 지배 관료들은 서방의 사기업 사장들과 마찬가지로 노동자들을 착취했다. 서방과의 군사적 경쟁 때문에 소련은 자본 축적 논리(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규명한 자본주의의 논리)의 지배를 받았다.

- ‘토니 클리프 탄생 1백 년을 기리며’, 노동자연대

 

그러나 군사적 경쟁은 다수 자본들이 이윤을 놓고 벌이는 경쟁과는 다른, 사용가치(효용성) 차원의 경쟁이다. 다음의 글은 클리프의 이론적 오도를 잘 설명하고 있다.

 

클리프의 "국가 자본주의" 이론은 경제적 경쟁과 축적 등 맑스주의 경제학 용어의 의미들을 핵심적으로 왜곡하고 있다. 자본주의 경제관계와 관련지어 맑스가 말한 경쟁은 그 의미가 명확하다: 시장에서 상품의 교환가치를 놓고 개별 자본들이 각축을 벌이는 현상.


맑스는 "다수 자본들의 상호작용"을 경쟁의 "핵심 성격"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소련에서 이 현상을 증명할 수 없는 클리프는 "경쟁"을 자기 멋대로 다시 규정하고 있다. 그래서 이렇게 재규정된 경쟁은 모든 종류의 정치적-경제적 라이벌 관계나 갈등을 의미한다.

...

그러나 이 주장은 용어의 의미를 엉성하게 바꿔치기하는 술수에 불과하다. 맑스주의 경제학 이론에서 "개별 생산자"는 민족 국가가 아니라 사적 자본가를 의미하며 "경쟁"은 군비 경쟁이 아니라 시장에서 교환가치를 획득하기 위한 경쟁이다.

- 소련은 왜 자본주의체제가 아닌가?

 

건강한 노동자국가도 세계혁명이 최종적으로 승리해 자본주의 국가가 남지 않을 때까지 부르주아 국가들과 군사적 경쟁을 벌여야 한다. 이 상황에서 노동자국가는 상대 부르주아 국가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위해 생산력 수준과 무기 등을 비롯한 군사력 수준을 비교하며 경쟁해야 할 것이다. 때로는 군비 확장을 위해 노동자의 복지 수준을 낮추기도 해야 할 것이다. 노동자국가라는 노동계급의 무기를 방어하는 것은 당장의 생황수준 향상보다 중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자본주의적 경쟁이 아닐 뿐 아니라 혁명 과정에서 노동자국가가 겪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게다가 군사적 경쟁을 벌이면 자본주의가 된다는 클리프주의 논리에 따르면 노동계급 혁명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다. 동시에 전 세계에서 혁명이 일어나 경쟁의 대상이 될 자본주의 국가를 한방에 타도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반화된 상품생산체제

 

맑스는 자본주의를 명확히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일반화된 상품생산체제.


반면 소련이 자본주의 사회라는 무리한 주장을 하기위해 클리프주의자들은 자본주의에 대한 정의도 수정한다. 이들은 자본주의를 경쟁적 축적 체제라고 말한다. 그런데 무엇을 축적하는 것일까? 자본은 사적으로 소유되는 상품이다. 반면 소련의 생산수단은 시장에서 구입할 수 있는 사적 소유물이 아니다. 자본 축적과 생산 수단의 축적은 그 성격이 전혀 다른 것이다. 그런데 클리프주의자들은 이 둘을 동일시한다. 이것은 노동자국가(특히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포위되어 있던 소련)의 급속한 공업화 정책에 반대하는 조합주의적 사고에 기초하고 있다. 클리프주의는 스탈린이 급속한 공업화로 방향을 선회했던 19285개년 계획을 자본주의 반혁명의 시작으로 규정한다. 경제개발계획으로 사회 성격이 서서히‘ ’평화적으로바뀐다는 이런 종류의 황당한 주장에 대해 트로츠키는 소련의 계급적 성격에서 소비에트 정부가 노동자권력에서 자본가 권력으로 서서히 바뀌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말하자면 개량주의의 필름을 거꾸로 돌리는 것과 같다고 말한바 있다.

 


조합주의로서의 국가자본주의론

 

국가자본주의론의 이론적 엉성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좌익 운동권 내에서 일정한 지분을 가진 것은 제국주의의 압력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들의 이론은 노동계급 후진 부위의 조합주의 의식에 호소한다.

 

관료적으로 퇴보하거나 기형화된 노동자국가들에 대한 "3진영" 조직들의 분석은 지적으로는 엉성하기 그지없지만 나름의 매력이 있다. 미국 국제사회주의자들의 "관료적 집산주의" 이론만큼 클리프의 "국가 자본주의" 이론은 진짜 매력이 있다. 왜냐하면 조합주의의 관점에 입각한 분석이기 때문이다. 영어권 나라들에서는 계급투쟁이 상대적으로 가라앉으면서 노동조합의 경제주의가 지배적 조류가 되었으며 자본가 계급에 대항하는 무기로서 노동자국가에 대한 개념은 멀어 보이기만 한다. 이 상황 속에서 클리프나 섁트먼 등 제3진영 경향들의 이론은 노동운동권 내부에서 나름의 중요성을 획득할 수 있었다.


클리프와 섁트먼 이론의 진정한 정치적 내용은 이렇게 표현 된다: 사회의 근본 갈등은 직접 생산자들과 이들의 소비 욕구를 한편으로 하고 행정가들과 이들의 축적 욕구를 또 한편으로 하여 발생한다. 달리 표현하면 지금 더 많은 임금을 받으려 하는 노동자들의 욕구와 지금의 욕구 불만을 감내하고 미래에 투자하여 경제적 축적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행정가들의 욕구 사이의 갈등이다. 클리프와 섁트먼의 전망과 호소력의 원초적 근원은 이렇게 표현될 수 있다: "이놈들이 내 임금을 빼앗아 이것으로 공장을 짓는다. 이들이 누구이고 어떤 사회를 위해 일하든 나는 상관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이놈들이 나를 더 가난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클리프와 섁트먼 이론의 핵심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후진국의 공업화는 노동자 민주주의 체제에서 노동자들이 인정할 수 없는 축적률을 요구한다; 따라서 공업화는 전체주의 체제를 요구한다;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은 위에서 노동자들에게 강요되는 가속화된 축적의 앞잡이들이다; 따라서 이들은 착취계급이다.

- 위의 글



관료집단은 계급인가

 

국가자본주의론 외에도 소련 사회의 노동계급적 성격을 부정하는 관료적 집산주의론이 있다. 이들은 소련을 자본주의는 아니지만 새로운 종류의 계급 사회로 규정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여러 생산양식에서 지배계급의 도구였던 관료집단이 갑자기 하나의 계급이 될 수 있는가? 3진영 인상주의자들과 달리 트로츠키는 계급을 맑스주의적으로 정의한다.

 

노동계급 독재체제에 대한 한 점 오류도 없는 설명은 어디에 그리고 어느 책에 나와 있는가? 계급의 독재라고 해서 이 계급의 대중 모두가 국가 운영에 언제나 참여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 점은 우선 소유계급들의 경우를 통해 이미 목격되었다. 중세의 지배계급인 귀족들은 왕정을 통해 사회를 지배했다. 이때 이들은 왕정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 자본가 계급의 독재는 이 계급이 두려워할 것이 전혀 없었던 자본주의 상승기 때에만 민주적 형태를 비교적 발전시켰다. 우리가 보는 앞에서 독일의 히틀러는 파시즘이라는 독재를 통해 민주주의를 대체한 후 기존의 자본가 정당들을 전부 박살내어 버렸다. 현재 독일의 자본가 계급은 사회를 직접 지배하지 않는다. 이들은 히틀러와 그의 하수인들에게 정치적으로 완전히 굴복하고 있다. 그러나 자본가 계급의 독재는 독일에서 신성불가침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왜냐하면 자본가 계급이 사회를 지배하는데 필요한 모든 조건들은 보존되고 강화되어왔기 때문이다. 자본가 계급을 정치적으로 몰수하는 것을 통해 히틀러는 일시적으로나마 이들을 경제적 몰수로부터 구원해주었다. 독일 자본가 계급이 파시스트 정권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은 자본가 계급의 사회 지배가 위험에 처해 있으나 전혀 파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

맑스주의자는 계급을 예외적으로 중요하게 그리고 더욱이 과학적으로 한정된 의미로 규정한다. 계급은 국민총소득의 분배에 참여하는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경제의 전반적 구조 속에서의 독자적 역할과 사회의 경제적 토대에 내린 독자적 뿌리에 의해 규정된다. 중세의 귀족, 농민, 소부르주아, 자본가, 노동계급 등 각 계급은 자기 나름의 소유형태를 갖는다. 그러나 관료집단은 이러한 사회적 특성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 생산과 분배 과정에서 독자적 지위가 없으며 독자적인 소유의 뿌리도 없다. 관료집단의 기능은 기본적으로 계급 지배의 정치적 기술(technique)과 관련되어 있다. 형태와 구체적 사회적 비중이 다양한 관료집단은 모든 계급 지배체제에 존재한다. 관료집단이 누리는 권력은 지배계급이 휘두르는 권력의 반영에 불과하다. 관료집단은 경제적 지배계급과 떼어낼 수 없는 관계를 맺으면서 지배계급의 사회적 뿌리에서 영양분을 취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유지한다. 그리고 지배계급과 함께 몰락한다.

- 소련의 계급적 성격, 트로츠키

 

인상주의자들은 관료집단이 노동자들 위에 군림하는 모습만 바라보며 노동계급 독재가 아니라고 강변한다. 그러나 생산수단의 국유화, 다시 말해 자본가들의 소유를 몰수하여 자본가계급에 대한 독재를 수행하는 한 이 국가는 노동계급의 도구로 남아 있는 것이다.

 


맑스주의 대 카우츠키주의 : 소부르주아적 민주주의 물신론

 

무정부주의자, 사회민주주의자 혹은 이들과 방법론을 공유하는 자칭 사회주의자들은 사회를 살아있는 계급투쟁이 아니라 추상적인 일반 민주주의로 파악한다. 이들은 소련의 사회 성격을 민주적 통제의 유무로 판단한다. 근본적으로 관념론적인 상부구조로 사회 성격을 파악하는 이 방법론은 마르크스주의의 교황카우츠키에 의해 주창되었다. 카우츠키는 이미 1918년에 민주주의가 없으므로 소련이 국가자본주의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소유가 핵심이라는 것은 맑스주의의 기본 중의 기본이다. 맑스와 엥겔스의 다음과 같은 언명은 이들이 맑스주의 방법론에 기초하지 않음을 말해준다.

 

공산주의의 명백한 특질은 소유 일반의 폐기가 아니라 부르주아적 소유의 폐지이다. 그런데 현대 부르주아적 사적 소유는 계급적대에 기초한, 소수에 의한 다수의 착취에 기초한 생산물의 생산, 전유 체제의 최종적이고도 가장 완벽한 표현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공산주의자의 이론은 사적 소유의 폐지라는 단 하나의 문구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 공산당 선언, 맑스엥겔스

 

또한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현재 계급 지배는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가? 지주와 자본가의 소유는 철폐되었다. 승리한 노동계급은 이 소유를 철폐하고 철저히 파괴시켰다. 바로 이 점에서 노동계급의 지배는 표현되고 있으며 존재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소유의 문제가 우선이다. 현실에서 소유의 문제가 결정되면 계급 지배는 확보된 것이다.지배 계급들이 서로 뒤바뀌었을 때 이들은 소유관계도 뒤바꾸었다.”

– 『레닌 전집4, 30, 426-427

 

물론 노동자 민주주의는 필요하다. 그러나 민주주의 물신론자들과 달리 노동계급에게 민주주의는 계급 독재를 실현하고 무계급 사회로 나아가는 도구일 뿐이다. 노동자 민주주의를 통해서만 당과 국가는 건강함을 유지할 수 있다. 노동자국가의 경제는 자본주의처럼 가치법칙의 자동 조절 시스템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계급 투쟁의 상황에 따른 정치적 고려로 결정된다. 따라서 이전의 모든 지배계급과 달리 의식적으로 계획되어야 하는 노동계급의 사회주의 건설 과업에 있어 상부구조는 경제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노동계급의 역사적 전망이 아니라 자신의 특권 유지가 우선인 관료집단은 노동대중의 이해에 온전히 부합되지 못한다. 또한 생산 현장의 민주주의, 언론 자유 등이 없는 경제 계획은 관료적 오류, 비효율, 낭비, 부패 등을 해결하지 못하고 계획 경제의 효율성을 갉아 먹는다.(자본주의 경제가 주기적으로 과잉 생산 공황을 겪는 것과 달리 관료적 비효율은 내부에서 계획 경제를 삭아 들어가게 한다.) 이는 소련과 동유럽의 몰락 과정에서 입증되었다. 따라서 노동계급 소유형태는 노동자 민주주의라는 도구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스탈린주의 국가들에서 정치혁명을 통해 관료집단을 타도하고 노동자 민주주의를 수립하는 것은 이들 나라들에서 노동계급 소유를 튼튼히 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은 민주적 절차를 무엇보다 우선하기 때문에 노동계급 소유를 방어하는 것은 뒷전으로 밀어둔다. 봉기를 일으키기 위해서도 소비에트의 민주적 절차에 한 치의 어긋남이 없어야 하고 반혁명의 위협 앞에서도 민주적 절차의 정당성이 더 소중하다. 이렇게 민주주의를 신줏단지로 모시는 자들은 혁명이라고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4. 결론

 

트로츠키는 소련의 사회 성격과 노동계급의 임무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소련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중간에 위치한 모순적 사회체제이다 특징을 살펴보면 (1) 국가 소유에 사회주의적 성격을 부여하기에는 생산력이 아직 너무 낮다; (2) 궁핍에 의해 조성된 자본주의적 본원적 축적(primitive accumulation)의 경향이 계획경제의 수많은 숨구멍을 통해 솟아나고 있다; (3)부르주아적 성격의 분배 규범이 새로운 사회분화의 기초가 되고 있다; (4) 경제성장은 근로인민의 상황을 호전시키고 있지만 특권층의 급속한 형성을 촉진하고 있다; (5) 사회적 적대관계를 활용하면서 관료집단은 사회주의에 적대적인 독립적 계층으로 전환했다; (6) 사회혁명은 지배정당에 의해 배신당했지만 소유관계와 근로대중의 의식 속에 여전히 남아 있다; (7) 모순이 더 축적될 경우 소련은 사회주의로 나아갈 수도 있고 자본주의로 다시 후퇴할 수도 있다; (8) 자본주의 복귀를 위한 반혁명은 노동자들의 저항으로 분쇄되어야 한다; (9) 사회주의로 나아갈 경우 노동자들은 관료집단을 타도해야한다 결국 소련의 사회성격은 국내외의 살아 움직이는 사회세력들 간의 투쟁에 의해 최종 결정될 것이다.

- 배반당한 혁명, 트로츠키


1991년 소련의 해체는 엄청난 충격파를 몰고 왔다. 70년 이상 자본가들을 괴롭혀온 소련의 운명은 엉성하기 그지없었던 8월 쿠데타에서 결정되었다. 이 때 트로츠키의 퇴보한 노동자 국가론에 기초한 국제볼셰비키그룹은 소련 방어 노선을 천명했다. 옐친 반혁명 세력에 맞서 부통령 야나예프 등이 이끈 국가비상위원회, 이른바 스탈린주의 보수파의 쿠데타에 대해 군사적 지지를 보냈고 동시에 노동계급 정치혁명을 통해 노동자 민주주의의 회복을 주장했다. 그러나 노동계급에 뿌리내린 대중적 혁명정당이 없었기 때문에 노동계급은 갈 길을 찾지 못했고 옐친 반혁명 세력은 승리를 거두었다. 이 쓰라린 패배로 세계노동계급은 심대한 사기저하에 빠졌다. 이 노선은 오늘날에도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아직 관료적으로 기형화되었으나 노동자국가로 남아있는 중국, 북한, 쿠바 등은 자본주의 반혁명의 위협 속에 아슬아슬하게 생존해있다. 특히 중국은 내부에서 부르주아지가 성장하고 있으며 이는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의 해악적 정책에 의해 이루어졌다. 위험은 증가하고 있으며 91년 소련의 반혁명은 이들 나라에서도 얼마든지 현실화 될 수 있다. 이 때 혁명적 노선을 견지하는 전위조직이 없다면 91년의 패배가 이들 나라에서도 반복될 것이다. 이 패배는 해당 국가에서 러시아의 사례가 보여주었듯이 공공의료의 붕괴로 인한 평균수명 감소와 질병의 창궐, 여성의 지위 저하, 각종 범죄·성매매·알코올 중독 등 온갖 병리현상들의 급증으로 표현된 살인적인 재앙을 야기할 것이고, 노쇠한 제국주의 금융자본은 대대적인 약탈 과정을 통해 원기를 회복하고 이어서 나머지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계급에 대해서도 착취의 강도를 높일 것이다. 이는 세계노동계급에게 또 한번의 거대한 패배가 될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진 소련의 사회 성격 문제는 오늘날에도 혁명의 문제이며 노동계급의 생사가 걸린 문제다. 이들 국가에서 반혁명 시도에 맞서고 10월 혁명이 보여준 사회주의적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유일하게 볼셰비키주의를 계승한 제4인터내셔널의 전통에 기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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