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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주의의 反트로츠키

날조와 비방 Q&A

 


<차례>

서론

반트로츠키 캠페인의 뿌리/ ‘무적 패러다임’의 희비극/ 천동설과 스탈린주의/ 스탈린주의의 정서: 관료집단, 난관 회피, 영웅 의존/ 우리의 임무

Q&A

Q1. 트로츠키주의는 ‘국가자본주의론’인가?

스탈린주의 삼단논법/ 국가자본주의론과 트로츠키주의는 양립할 수 없다/ 관련논문 몇 가지

Q2. ‘관료집단을 타도’하자는 것은 노동자국가를 타도하자는 것인가? 스탈린으로 대표된 관료집단을 타도하면, 퇴보한/기형적 노동자국가를 약화시킬 것인가?

노동자국가 방어를 위한 관료집단 타도/ 역사가 증명한 관료집단의 해악/ 스탈린주의 국가관: ‘관료집단=국가’/ 관료집단, 혁명적 진출의 장애물/ 소련 반혁명에 대한 권정기의 연구: ‘관료집단 성장→자본주의 부활’/ 스탈린주의 ‘갑툭튀’ 이론

Q3. 트로츠키주의자들이 파시스트 독일에 복무한 반면, 스탈린은 소련 방어의 영웅이었나?

스탈린 영웅 신화

Q4. 트로츠키는 혁명 승리가 임박하자 볼셰비키 진영에 합류한 출세주의자인가?

‘메시지 공격이 어려우면 메신저를 공격하라!’/ 혁명가 트로츠키의 삶/ 약력 검토로 확인된 사실들

Q5. 트로츠키는 레닌과 사사건건 적대한 반(反)레닌주의자인가? 스탈린은 레닌의 적통을 이은 계승자인가?

‘국가의 무역독점’을 둘러싼 투쟁/ 대러시아 국수주의에 맞선 투쟁/ 레닌의 유언 그리고 트로츠키와 스탈린/ 스탈린의 폭언과 관계의 파탄

Q6. 스탈린주의 선전이 끝없이 우려먹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논쟁’, ‘노동조합 논쟁’은 무엇이었나?

1.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조약
   트로츠키는 강화조약을 통해 "엄청난 재앙"을 불러왔는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와 관련된 증언들

2. 노동조합 논쟁

   논쟁의 배경/ 스탈린 관료집단의 노동자 민주주의 분쇄

 



서론


반트로츠키 캠페인의 뿌리

스탈린주의의 반트로츠키 비방과 날조가 반복되고 있다. 스탈린주의 정치의 근본적 오류와 한계는 남탓을 해야만 감춰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되풀이되는 반(反)트로츠키 캠페인은 스탈린주의가 존립하기 위한 필연이다. 전국노동자정치협회(노정협)와 노동사회과학연구소(노사과연)는 그 캠페인의 전위이다.

스탈린주의는 노동운동의 상승으로 특권을 차지한 관료집단의 사상이다. 그 특권이 노동운동의 상승에 비롯하기 때문에 한편으로 특권의 기초인 노동운동을 방어한다. 그러나 관료집단과 노동계급 일반의 이해는 크게 어긋나기 때문에, 스탈린주의는 노동운동의 올바른 진격을 가로막고 결정적 순간 반동적 역할을 한다.

스탈린주의는 러시아 혁명의 성공과 위축이라는 두 가지 측면을 반영한 사상이다. 역사상 최고의 진보를 인류에 보여준 러시아 혁명이었지만, 불운하게도 세계적 규모의 자본주의 체제의 종식과 인류 전체의 해방에 이르지는 못했다.

혁명 이후 벼락출세한 기득권 세력이 넓고 깊게 형성되었다. 혁명과 내전을 거치면서 혁명을 주도한 노동계급의 선진 부위는 상당수가 희생되었다. 그 사이 혁명의식이 엷은 비(非)노동계급 부위가 당과 국가에 대거 들어왔다[노사과연의 권정기는 그것을 정치적 문맹자의 대거 유입이라고 표현한다.]. 대지주를 몰아내고 토지를 분배받은 절대다수의 농민 역시 혁명으로 인한 이득을 곧바로 차지한 계층이었다.

이 두 부문은 서유럽 혁명이 주춤하여 고립된 러시아 정치에 강력한 보수적 압력을 가했다. 혁명을 통해 상당한 이득을 얻은 집단이기 때문에 이 두 집단은 물론 혁명을 지지한다. 그러나 러시아 관료집단과 농민의 이해는 러시아 노동계급 전체, 나아가 국제 노동인민의 대의와 일치하지 않는다. 부분적으로 겹치지만, 근본적으로는 다르며 궁극적으로 모순관계이다.

바로 이 점은 정치사상으로도 표현된다. 부분적, 표면적으로는 혁명사상 즉, 마르크스주의의 방어자로 행세하지만, 전체적, 본질적으로는 마르크스주의를 왜곡하고 적대한다. 관료집단의 이익에 맞게 각색한 ‘마르크스주의’인 스탈린, 마오쩌둥, 김일성, 시진핑의 ‘사상’을 혁명사상 반열에 올려 그들을 추앙한다. 그런 방식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는 관료집단의 이익을 미화하고 은폐하는 포장지로 이용된다.

러시아 노동계급 전체와 국제 노동계급의 관점에서, 관료집단의 이해가 전자와 상충한다는 비판은 그들에게는 자신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는 행위이다. 그리하여 비판자를 적으로 간주하고 공격한다. 단지 다른 견해인 것만이 아니고 자신의 특권과 이해에 대한 공격이기 때문에 비판자에 대한 스탈린주의의 공격은 매우 격렬하고 잔인하다. 신경질적인 윽박지르기와 욕설로 시작하여 테러와 살해가 뒤따르기도 한다. 왜냐 하면 사생결단의 자기 이익 방어이기 때문이다.

 

무적 패러다임’의 희비극

스탈린주의는 자신의 특권에 대한 방어일 뿐 사실과 과학에 기초한 일관된 혁명사상이 아니기 때문에, 비논리로 가득하다. 관료집단의 이해를 불가침의 영역으로 만들기 위해, 관료집단의 인격화인 스탈린이라는 영웅을 내세우고 그의 무오류를 주장한다. 이런 비과학적, 비(非)마르크스주의 논리는 허점을 끊임없이 노출할 수밖에 없다. 사실과 모순되고, 검증된 기존의 이론에서 일탈해야 한다. 관료집단의 이익은 불가침이어야 하고, 스탈린 무오류성은 ‘절대 패러다임’이기 때문에, 객관적 사실들은 이 패러다임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만 인정된다. 허점은 그때그때 임기응변의 억지논리로 미봉된다. 미봉은 폭압을 통해 의심과 저항을 뚫고 관철된다.

거짓말을 한 번 하게 되면 그것을 감추기 위해 연쇄적인 한 다발의 거짓말이 필요하다. 나중엔 아예 거짓말끼리 서로 싸우게 된다. 그때그때 오류를 감추기 위해 동원한 억지논리는 사실과 과학적 마르크스주의하고만이 아니라, 나중엔 날조와 비방끼리 서로 말이 안 맞는 지경에 이른다. 이른바 관료집단의 이해에 대립하는 모든 것을 ‘트로츠키’라고 부르며 싸우다가, 급기야 스탈린주의 vs 스탈린주의의 투쟁으로 발전한다.

스탈린주의자들은 스탈린으로부터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수정 수법과 내용까지 그대로 따라 배운 흐루쇼프와 맞서 싸우고, 중국판 스탈린주의 화신 마오쩌둥과 흐루쇼프가 서로를 ‘트로츠키주의’라 부르며 멱살잡이를 한다. 스탈린주의 후예들은 눈 감고 못 본 척하지만, 그 과정에서 마오쩌둥은 미 제국주의와 손잡고 ‘국가자본주의론자’가 되기도 했다. 각자 자기 특권의 기초는 흔들리지 않아야 하며, 관료집단 특권 방어의 인격화인 스탈린의 무오류라는 절대 신화는 결코 흔들리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희비극이다.

 

천동설과 스탈린주의

노동계급의 역사적 실천과 과학적 사유로부터 스탈린의 무오류를 방어하고자 하는 부질없는 노력은 천동설을 방어하는 천문학자들과 닮았다. 천동설과 모순되는 관찰이 끊임없이 발견되고, 자신들 스스로 그 발견의 주체이기도 했지만, 천동설론자들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절대 패러다임’을 결코 버릴 수 없었다. 천동설이라는 절대 패러다임을 통해서만 사실을 설명했고, 그 패러다임에 모든 과학적 추론과 관찰 사실을 욱여넣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과학자’였다. 세월이 흐를수록 논리는 점점 더 기괴해졌다. 운동원리가 설명되지 않는 복잡하며 괴이한 천체도가 그려졌고, 그것만으로 설명되지 않기에 불일치를 미봉할 수십 여 장의 임기응변의 천체도를 따로 그려야 했다. 그래도 감출 수 없었으므로 코페르니쿠스 등 지동설 주장 과학자들을 살해해야 했다.


<그림1> 천동설론자들이 설명하는 천체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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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2> 천동설론자의 천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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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주의의 정서: 관료집단, 난관 회피, 영웅 의존

스탈린주의는 노동운동 상승으로 특권을 차지한 관료집단 정서의 이론화이다. 사회적 위치로 인해 부분적으로 진보적이고 또 부분적으로 반동적이라는 점에서 이들의 정서는 소부르주아의 정서와 닮았다. 이 정서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계급투쟁의 최종 지점에서 벌어지는 극단적 대결에 대한 공포와 회피 심리이다. 날카로운 대결로, 이미 얻은 기득권이 자칫 파괴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그래서 일상적 시기에는 ‘혁명, 사회주의 등’ 급진적 언사를 남발하다가도, 정작 정세가 날카로워지면 불가피한 대결을 에두르고 지배계급과 타협하려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스탈린주의 정치는 결정적 시기마다 적대계급인 자본가에 의존하는 방향으로 기운다. 노동계급의 정치적 조직적 독자성을 포기하고 자본가계급과 함께 하려는 계급협조주의 경향, 존재하지 않는 이른바 ‘우호적’ 제국주의를 상정하고 그 앞에서 정치 · 조직적으로 무장해제하는 경향[1943년의 코민테른 해산은 그 극명한 표현], 제국주의와 평화공존이 레닌주의라고 주장하는 경향, 현실의 계급 대립은 그대로 둔 채 협정이나 법조항 등으로 평화와 화해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환상 등이 바로 이 정서의 표현이다.

두 번째는 혁명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우여곡절의 난관 앞에 절망하여, ‘위대한 영웅’을 통해 그 절망에서 벗어나기를 소망하는 영웅 의존 심리이다. 이 정서는 현실의 고통에서 구원해 줄 초월적 존재에 대한 종교적 믿음이나 영웅에 대한 이른바 ‘빠심’과 닮았다. 고통에서 벗어나고픈 자신의 욕망을 특정 대상에 투사하여 그 대상이 문제를 해결해 줄 것으로 기대한다. 게다가 혁명전위와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은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프랑스대혁명에서 로비에스 피에르가 제거된 뒤 철권을 잡은 나폴레옹이나, 조선 건국 이후 정도전 일파를 제거한 뒤 막강한 권력을 차지한 이방원과의 비교도 흥미롭다.]. 대규모의 군대와 자원을 부리는 국가권력을 쥐고 있다. ‘승리한 것이야말로 진실이고 강한 것’이라는 속물적 실용주의가 스탈린주의에 대한 믿음을 지탱한다. 그들은 자신의 욕망이 투사된 그 대상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한다. 그리하여 그 대상에 대한 공격을 자기 자신에 대한 공격처럼 아파한다. 자신의 희망을 깨뜨리고, 믿음을 어지럽혀 다시 절망에 빠뜨리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 비판이 옳건 그르건 따지지 않고 그 믿음의 대상을 공격하는 자는 적이거나 적에 부역하는 자로 간주된다.

 

우리의 임무

국가자본주의론, 노동자주의, 부르주아 여성주의와 더불어 이 스탈린주의는 노동계급 해방을 가로막는 사상적 족쇄이다. 노예의 사상으로는 결코 혁명적 실천에 이를 수 없다. 그리하여 우리는 상당한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 그 비과학과 해악을 설명해 왔다[레닌의 반스탈린 투쟁/ 소련 중국 북한 등 노동자국가들의 사회성격 논쟁/ 어느 스탈린주의자와의 대화/ 흐루쇼프의 비밀연설과 스탈린주의등 참조]이제 또 마르크스주의를 왜곡하는 스탈린주의 날조와 비방은 많이 쌓였다. 노동계급의 선두 부위조차 상당한 피곤과 혼란을 느낄 정도이다. 날조와 비방을 걷어내어 노동계급의 시야를 밝혀야 한다. 먼저 깨닫고 나선 분들의 고귀한 헌신을 갉아먹고 잘못된 길로 이끌기 때문이다.

스탈린주의 반트로츠키 캠페인은 계속 이어졌지만, 새로울 것이 없다. 스탈린 당대에 이미 개발된 패턴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그럴 듯해 보이는 몇 가지를 서로 다른 여러 문건에 지루할 정도로 되풀이한다. 되풀이되는 그 몇 가지 패턴을 추려서 하나씩 설명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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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A


Q1. 트로츠키주의는 ‘국가자본주의론’인가?

노정협과 노사과연 등 스탈린주의 정치세력은 트로츠키와 국가자본주의론을 묶어서 반복적으로 언급한다. 그런 방식으로 트로츠키주의가 마치 국가자본주의론인 것 같은 착시를 불러일으키려 한다.

“리비아 침공 당시에 뜨로츠끼주의를 내세운 국가자본주의자들과 전 세계의 ‘좌파’를 자임하는 정치세력들 상당수가 까다피 ‘독재’에 맞서는 리비아의 ‘민주주의 투쟁’을 적극 지지하고 나섰다. 한국에서도 다함께를 위시로 뜨로츠끼주의를 자처하는 국가자본주의 정치세력들은 외세를 끌어들이는 괴상한 ‘민주주의자’들을 적극 지지하고 나섰다.”―노동자의 사상 6호를 발행하며, 2015년 5월

“트로츠키주의 정치세력, 특히 국가자본주의 세력은 노골적으로 쏘련과 동유럽의 사회주의 체제를 비롯해서 현실 사회주의를 타도해야 하는 반동체제로 보고 있다.”―「한국 사회 이른바 ‘좌파’ 노선의 심대한 오류에 대하여」, 노정협, 2015년 6월(이하 ‘심대한 오류’)

“특히 한국사회에서는 이들 중 대다수가 트로츠키주의 진영 중에서 가장 극악한 종파주의 세력인 토니클리프의 「국가자본주의」 노선을 수용했다.”―심대한 오류

“<노동자연대> 같은 트로츠키 단체의 반동적 인식과 북에 대한 적대감과 혐오감은 어디서 비롯됐는가?”―「위대한 러시아 혁명의 산물: 쏘련 사회주의, 그 깃발을 짓밟는 소부르주아 반동 ‘맑스주의자들’」, 노정협, 2017년 7월(이하 ‘위대한 산물’)

“이들 트로츠키주의자들이 국가자본주의론의 근거이자 스탈린을 악마화하기 위해 즐겨 인용하는 문장이 있다.”―위대한 산물

“현실의 사회주의 역사를 중상모략하는 것이 국가자본주의론자들을 포함한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상투적인 수법이라는 것을 잘 알 수 있다.”―위대한 산물

“북과 쿠바를 타도해야 하는 반동권력으로 보는 트로츠키주의 노건투(혁명적노동자당건설현장투쟁위원회)는”―한국사회 민족문제 이해를 위해서―「한국의 양두구육식 반쏘 반북 ‘진보급진파’들에게」, 노정협, 2018년 1월(이하 ‘양두구육’)

“북을 타도해야 하는 트로츠키주의 국가자본주의로 보는 입장이 결국은 북을 “작은 강도”로 묘사할 정도로 적개심을 표하게 만들고“―양두구육

“쏘련이 국가자본주의였고 스탈린이 반혁명의 화신으로 레닌의 변절자로까지 취급하는 트로츠키적 역사해석의 이론적 선구자라 할 수 있는 정성진 교수조차 이러한 흐름에 합류하고 있다.”―「쏘련과 스탈린 시대에 대한 역사 ‘수정주의’를 환영한다」, 노정협, 2018년 1월(이하 ‘수정주의 환영’)

“이 운동에 대해 트로츠키주의자들을 비롯해서 부르주아 진영에서는 사회주의 “강제노동”으로 취급하며 비방을 했다.“―노동자의 사상 8호, 2018년 3월



* * *

스탈린주의 삼단논법

상대의 주장을 있는 그대로가 아닌 공격하기 쉬운 다른 대상으로 바꾸어 그것을 공격하는 것을 ‘허수아비 공격’이라고 한다. 한편, 부분을 ‘전체’로, 한두 번을 ‘항상’으로 범주를 비약하여 인식하는 오류를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라고 한다. 이 둘은 대단히 초보적인 오류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흔히 빠지는 함정이기도 하다. 상당히 효과적이어서 스탈린주의가 트로츠키주의를 비방하기 위해 지루하게 반복하는 수법이다.

스탈린주의는 트로츠키 사상이 마치 소련 북한 중국 등 이른바 ‘현실 사회주의’ 나라들의 노동자국가적 성격을 부정하고 자본주의로 간주하는 사상인 것처럼 만들려 한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엉터리 삼단논법을 주문(呪文)처럼 반복하는 것이다.

‘클리프주의자들은 트로츠키주의를 표방한다./ 그들은 국가자본주의론자이다.// 그러므로 트로츠키주의는 국가자본주의론이다.’

 

국가자본주의론과 트로츠키주의는 양립할 수 없다

트로츠키 사상의 핵심은 10월 혁명의 방어이다. 그것은 다음 두 가지 내용을 가진다. 하나는 혁명의 성과를 찬탈한 관료집단으로부터 혁명의 사상적, 물질적 성과를 방어하겠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제국주의와 내부 자본주의 복귀세력으로부터 생산수단 사적소유 철폐에 기초한 노동자국가를 방어하겠다는 것이다.

스탈린 관료집단이 장악한 소련 사회성격에 대한 트로츠키의 분석은 ‘퇴보한 노동자국가’라는 표현에 함축되어 있고, 그 표현은 위의 두 측면을 포괄하고 있다. 소련을 자본주의라고 규정하고 국제노동계급의 방어의무를 저버린 정치세력을 트로츠키는 날카롭게 비판했다. 국가자본주의론과 트로츠키주의는 양립할 수 없다.

스탈린주의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표방한다고 해서, 마르크스-레닌주의가 관료집단 옹호론이 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제국주의 압력에 굴복한 국가자본주의론자들이 트로츠키를 표방한다고 해서, 트로츠키의 사상이 국가자본주의론이 되는 것은 아니다.

관련논문 몇 가지를 추려 소개한다.

소련의 계급적 성격(1933), 트로츠키

노동자국가, 테르미도르 그리고 보나파르트주의(1935), 트로츠키

배반당한 혁명(1936), 트로츠키

맑스주의를 옹호하며(1940), 트로츠키

소부르주아 사회주의와 ‘국가와 혁명’: 국가자본주의론 비판

소련의 사회 성격에 대하여

소위 ‘현실 사회주의’ 국가 성격에 관한 Q & A

 

 

Q2. 관료집단을 타도하자는 것은 노동자국가를 타도하자는 것인가? 스탈린으로 대표된 관료집단을 타도하면 퇴보한/기형적 노동자국가를 약화시킬 것인가?

트로츠키는 이 책에서 쏘련의 경제적 성취를 긍정하고 경제적 토대를 유지하면서도 “테르미도르 반동” 체제인 쏘련의 상부구조, 즉 당과 국가를 정치혁명으로 타도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위대한 산물

(정통) 트로츠키 노선이 국가자본주의자들과 구별된다고 하는 노선은 쏘련 및 현실사회주의에 대한 방어노선이었다. 그런데 파시즘과 쏘비에트 체제의 운명을 걸고 전쟁을 준비해나가고 있는 시점에서 쏘련의 경제적 토대는 방어하되 상부구조, 즉 당과 국가를 타도한다는 노선은 쏘련을 국가자본주의 착취제제로 보고 타도해야 한다는 “국가자본주의” 노선과 본질적으로 무엇이 다른가?―위대한 산물

정통 트로츠키주의를 자처하는 제4인터내셔널 경향은 제국주의 공세에 맞서 현실 사회주의를 ‘방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국유화, 계획화에 바탕을 둔 소련 및 현실사회주의(노동자국가)의 경제적 토대는 방어하되, 상부구조를 타도하는 정치혁명을 해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입장이다. 그런데 이들이 말하는 현실 사회주의 상부구조는 당과 국가인데, 당과 국가가 전 사회에 지도력을 발휘하면서 경제적 토대를 일궈가고 있는 현실에서 이들의 방어노선이 현실에 적용된다면 국가자본주의 입장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심대한 오류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소련 사회주의의 실질적 건설자인 스탈린을 도살자, 독재자, 관료라고 부르며, 쏘련 “관료집단”을 타도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쏘련 인민들이 시시각각 닥쳐오는 전쟁에 맞서 쏘비에트 체제의 명운을 걸고 투쟁을 준비할 때 트로츠키는 쏘련 관료집단, 즉 당과 국가를 타도하자는 선동을 하며 제국주의의 이해에 적극 복무했던 것입니다.―양두구육


* * *

주문(呪文)을 외듯 자극적인 몇 마디를 지루하게 반복한다. 세뇌되었다는 것이고, 세뇌하겠다는 뜻이다. 역시 대상을 우그러뜨려 공격하기 쉽게 만들고 원래 대상이 마치 그런 내용이라는 착시를 불러일으키는 허수아비 공격 수법이다.

 

노동자국가 방어를 위한 관료집단 타도

다시 말하지만, 『배반당한 혁명』, 『이행강령』 등에 정리된 퇴보한 노동자국가 소련에 대한 트로츠키주의 노선의 핵심은 이렇다: ‘한편으로 10월 혁명의 성과인 국유화된 소유체제를 방어하면서, 다른 한편 국가와 소유체제를 좀먹는 관료집단 타도.’ 이것은 ‘노동자국가 방어와 정치혁명’으로 요약된다.

관료집단은 노동자혁명의 성과인 국가소유 체제의 관리자이다. 한편으로 자기 특권의 기초인 국가소유 체제를 방어하면서, 다른 한편 그 특권을 영속적으로 누리고자 한다. 그 욕망은 사유화 경향으로 발전하고 결국엔 1989년~91년 소련과 동유럽에서처럼 노동자국가 자체를 무너뜨린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트로츠키를 비롯한 혁명가들은 10월 혁명의 성과인 노동자국가 소련을 지키기 위해 스탈린으로 대표되는 관료집단을 끌어내리고 노동자민주주의에 기초한 혁명지도부 구축을 주장하였다. 그렇지 못할 경우 내부모순이 자라나 자본주의 반혁명이 일어날 수 있다고 예측했다.

 

역사가 증명한 관료집단의 해악

불행하게도, 1930년대의 이 분석은 부정적 방향으로 그 옳음이 증명되었다. 1989년~1991년 사이 동유럽과 소련 노동자국가 진영은 붕괴했다. 예측했던 것처럼 비대해진 관료집단의 배신으로 내파했다. 노동계급의 거대한 패배였고, 반면 제국주의 자본가진영에게는 엄청난 횡재였다. 붕괴된 나라들엔 자본주의 착취체제가 부활했고, 동유럽은 제국주의 속국으로 하나씩 하나씩 넘어갔다. 그 나라들은 거대한 자원부국 러시아에 대한 장악력을 높이고, 다른 한편 중국 자본주의 반혁명을 촉진하기 위해 제국주의 전진기지로 재편되었다.

이렇듯 관료집단은 10월 혁명의 성과를 야금야금 갉아먹다가 급기야 노동자국가 자체를 붕괴시켰다. 제국주의의 이해에 온전히 복무했다. 그 반동성을 역사적으로 입증했다. 분통하게도 이루어내지 못했지만, 그들은 그 이전에 타도되었어야 했다.

 

스탈린주의 국가관: ‘관료집단=국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정협 등은 관료집단 타도는 “제국주의 이해에 적극 복무”하는 노선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관료집단 즉, 당과 국가”라며 관료집단과 국가를 동일시한다. 그래서 관료집단 타도는 곧 국가 타도이고, 제국주의에 대한 복무라는 것이다. 도둑이 도리어 몽둥이를 드는 격이다. “관료집단 즉, 당과 국가”라는 이 정식은 전혀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며, 그 해악이 실천적으로 입증된 반동적 국가관이다.

애초에 스탈린주의는 관료집단의 이해와 정서 방어를 위해 구축된 세계관이다. 그렇기 때문에 위와 같은 반동적 국가관은 자연스런 귀결이다. “이들 들쥐들은 ‘사회적 부’가 아니라 ‘배타적인 집단의 부’를 위해, 그리고 그 집단 보스의 ‘개인적 부’를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하고 있다(권정기, 2017년).” 그래서 이들은 “자본주의냐, 공산주의냐? 전진이냐, 후퇴냐? 내 알 바 아니다. 내 갈 길을 가라! 남들이 뭐라든!(같은 글)”이라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이 곧 세계의 중심이다. 그러므로 자신들 타도는 국가의 타도나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관료집단, 혁명적 진출의 장애물

노동계급의 진출은 일정한 성과를 낳고, 궁극의 목표에 이르지 못할 경우 그 제한된 성과를 배타적으로 누리는 일부 집단이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성과 위에 올라탄 그 집단은 한편으로 운동을 방어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운동을 사유화하면서 그 운동이 더 나아가지 못하도록 하는 장애물 역할을 한다. 이들은 제한된 형태로나마 노동계급의 이해를 표현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자본가계급의 압력을 노동계급에 전달한다. 후자의 측면에서 이들은 노동진영 내에 있는 자본가계급의 하수인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계급이 혁명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자본가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는 이들 관료집단 제거는 피할 수 없는 작업이다.

노동조합과 민주노총 사례를 통해, 우리는 과거 노동계급 투쟁 성과 위에 걸터앉아 오늘의 진출을 가로막는 노동관료를 수시로 보아왔다. 2016년 분출된 박근혜퇴진 국면에서, 투쟁이 통제불가능한 수위로 솟구칠까봐 노심초사하여 최소한의 개입만 하며 자유주의자들에게 주도권을 넘겨준 민주노총 지도부나, 호시기였던 2013년과 2016년, 내외적으로 상승한 파업투쟁열기를 제멋대로 꺼버리며 자본가 정치인들에게 그 해결을 백지위임한 철도노조 지도부는 그 단적인 예이다. 2013년 파업을 배신한 당시 철도노조위원장은 더욱 출세하여 2017년엔 민주노총 위원장이 되었고 지금 민주당 자본가정권에 대한 (‘사회적 합의주의’라는 어려운 이름으로 지칭되는) 투항적 경향을 노골적으로 주도하고 있다.

이들의 친자본적 본질을 폭로하는 것은 사회주의자의 임무이다. 노동계급의 대중적 각성을 촉진하여 이들을 끌어내리고 혁명적 지도부로 대체하는 것은 필연의 과업이다. 투쟁이 상승한 순간의 배신은 더욱 가치가 크며, 배신은 더욱 치명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투쟁 국면이라고 해서 그 작업이 유보되어서는 안 된다. 대중적 각성과 진출을 통해 관료집단을 끌어내릴 경우 투쟁은 상승하며 노동조합은 강화된다.

사실, 불을 보듯 당연한 것이다. 국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관료집단 즉, 당과 국가”라는 정식을 노동조합에 적용하면, ‘사회적 합의주의’를 추구하고 입신출세를 위해 노동운동을 말아먹고 자본가 진영으로 넘어가 버리는 민주노총 관료를 끌어내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민주노총 파괴세력이고 자본가계급의 첩자라고 몰아붙이는 꼴이 된다.

 

소련 반혁명에 대한 권정기의 연구: ‘관료집단 성장→자본주의 부활’

이 문제에 대한 노사과연 권정기 소장의 연구 「흐루쇼프 수정주의의 발생과 소련에서의 반혁명(2017년 12월)」은 흥미롭다. 전형적인 스탈린주의 세계관에 빠져 있긴 하지만, 필자는 소련 붕괴의 원인을 생산수단 국가소유의 특권에 기생한 관료의 성장으로 설명한다. 국가소유와 관료집단의 모순에 대한 관찰은 상당히 성실하며, 붕괴 원인에 대한 내재적 분석은 유물론적이다.

모든 문장을 위 글에서 따와, 소련 반혁명 과정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거대한 성공은 거대한 부와 절대적 권력을 낳았다. 그리고 그 모두를 공산당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 부와 권력을 사유화하려는 세력이 고급관료들에서, 관료주의의 형태로 나타났다. 사회주의에서 관료주의란, 프롤레타리아 국가기구 내부에서 자라나고 있는 부르주아 국가의 싹이다. 1930년대 성장한 관료(당 관료, 국가관료, 기업의 경영진)들은, 1956년부터 수정주의를 본격적으로 추진하는 주체들이다. 생산의 목적만이 아니라, 생산의 결과물까지 자신의 치부 수단이 되었다. 생산의 목적이 생산의 결과물을 복종시킨 것이다. 내용이 하나씩 하나씩 모두 부정되면서, 사회적 소유형태는 더 이상 사회에 봉사할 수 없어진다. 공장은 개인의 치부를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었다. 사회적 소유물이 사적 소유물처럼 기능한 것이다. 자본주의는 내용적으로 부활했다. ‘전체 씨족제도(공동체사회)가 자신의 대립물(계급사회)로 전화하였듯이’, 사회주의 또한 1991년에 자신의 대립물인 계급사회(자본주의)로 전화하였다. 소련에서 자본주의는 부활했다. 사회주의는 패배했다. 인류는 다시 동물계로 추락했다.”


권정기도 동의하는 바, 관료집단의 성장은 소련 반혁명의 원인이다. 그들은 결국 노동계급 최대의 성과인 소련을 말아먹었다. 자본주의 반혁명을 일으켰고, 노동자국가를 타도했다. 연구자의 인과분석을 따른다면, 자본주의 반혁명을 막으려면 그들이 노동자국가를 타도하기 이전에 노동계급이 관료집단을 타도했어야 했다.

 

스탈린주의 ‘갑툭튀’ 이론

스탈린주의자들은, ‘관료집단의 정점이자 인격화인 스탈린’을 무오류의 화신으로 묘사한다. 지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악덕에서 벗어난 무오류의 천사장으로 스탈린을 묘사하는 한편, 모든 악덕과 잘못을 흐루쇼프 등에게 전가한다. 1세대 영웅인 스탈린이나 마오쩌둥과 달리 흐루쇼프나 덩샤오핑 같은 후레자식들이 ‘갑자기 툭 튀어나와’ 모든 것을 망쳤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치 문맹자 대거 유입”으로 인한 공산당의 탈노동계급화, 관료집단의 성장과 국가장악, 사유화 경향의 상승, 제국주의와 평화공존주의 등은 이미 스탈린 “영웅시대” 당시 발생한 것들이다. 스탈린주의자들이 모든 악덕을 덩샤오핑에게 덤터기 씌우며 또 하나의 영웅으로 떠받드는 마오쩌둥 역시 악덕의 뿌리였다. 소련과의 관계가 악화하자, 마오쩌둥은 ‘국가자본주의론자’가 되었다. 소련에 자본주의가 부활했다고 선언했으며 소련을 ‘사회 제국주의’라고 불렀다. 소련에 맞서기 위해 1972년 미 제국주의 닉슨을 불러들여 ‘반소 동맹’을 맺었다. 미국과 전쟁 중이던 베트남에 대한 지원 중단을 약속한 것도 마오쩌둥이었다.

스탈린과 마오쩌둥은 노동계급의 혁명적 진출로 특권을 얻은 관료집단의 화신이었다. 모든 악덕의 정점이었고, 그 최종 책임자였다. 그러나 관료집단 이해와 정서의 응집인 스탈린주의는 그 둘을 비판의 대상으로 내어줄 수 없다. 그렇게 하는 것은 관료집단 전체의 자기부정이다. 그래서 그들을 무오류로 만든다. 속세의 모든 것을 다 알지만 속세와 무관한 그들은 가끔씩 내려와 사악한 자들을 정리한다. 그리고는 더러운 지상의 것과 섞이지 않은 채 다시 하늘로 올라간다. 그리곤 짐짓 속상한 표정을 짓는다. 지상의 모든 악덕은 흐루쇼프와 덩샤오핑에게 떠넘겨진다. 불세출의 두 “영웅”을 제외한 나머지들은 죄다 ‘제국주의 첩자’로 밝혀진다.

관료집단 비대화와 소련 반혁명 사이의 인과를 유물론적으로 밝혀냈지만, 권정기 역시 이 ‘갑툭튀’ 이론을 수용한다. 그의 결론은 조금 전까지 서술한 연구 내용과 모순된다. 천동설이 그러했듯이, 자신이 밝혀낸 사실 자체와 싸워야 하고 자신의 말과도 싸워야 하며 다른 스탈린주의와 싸워야 한다. 이렇게, 싸우면 싸울수록 명쾌해지기는커녕 난마에 뒤얽혀야 하는 것이 스탈린주의 ‘절대 패러다임’이 강요하는 숙명이다.



Q3. 트로츠키주의자들이 파시스트 독일에 복무한 반면, 스탈린은 소련 방어의 영웅이었나?

“국가자본주의론자들 뿐만 아니라 (정통)트로츠키주의자들은 위대한 “대조국전쟁”에서조차도 스탈린에 대한 중상을 그치지 않는다. 그런데 스탈린의 혜안이 없었으면 어떻게 히틀러와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을까?“―위대한 산물

“히틀러가 쏘련에 대한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을 때, 선동가 뜨로츠끼는 붉은 군대에게 쿠데타를 실행하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한 사건은, 파시스트 탱크에 국가전체를 열어주어, 대재앙이 되었을 것이다!”―루도 마르텐스, 노사과연, 정세와 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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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 영웅 신화

스탈린의 영묘한 지도력이 있었기에 2차 대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고, 그리하여 2차 대전은 스탈린의 지도력을 새삼 확인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스탈린과 국가를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스탈린 타도는 국가 타도와 동의어라는 것이다.

흐루쇼프는 스탈린 생전 심복 중 하나였다. 그 심복들은 스탈린의 팔다리였고, 눈 코 입이었다. 흐루쇼프는 스탈린 사후 권력투쟁에서 승리하여 당권을 장악한다. 그는 중앙위원회의 토의를 거쳐 연설문을 작성하고 20차 당 대회에서 그 연설을 행한다. 너무 충격적이어서 참석자 중 몇몇이 실신하기도 했다는 그 대회에서, 흐루쇼프는 ‘2차 대전에서 보인 스탈린의 영묘한 지도력’이라는 스탈린주의 신화와 정반대의 사실을 폭로한다.

1. 스탈린은 전쟁 직전 군대의 핵심 지도자들을 ‘트로츠키와 작당한 친나치 반란’ 혐의로 처형했다. “간부요원들의 엄청난 손실”로 인해 2차 대전 초기 소련은 상당 기간 일방적으로 당했다. 2800만 명이라는 막대한 희생도 이와 무관치 않다. 2800만 명이라는 수치는 소련 인민의 눈물 겹고 위대한 체제수호 의지의 표상이면서도, 피할 수 있었지만 무능한 지도자로 인해 처참하게 당한 인민의 희생을 나타내는 숫자이기도 하다.

‘붉은 나폴레옹’이란 별명을 지닌 내전의 군사영웅이며, 숙청 당시 군 총수였던 투하체프스키를 2차 대전 직전인 1937년 처형한 것이 그 대표적 사례이다. 그 무렵 “에스파냐와 극동 지역에서 어느 정도 전쟁 수행 경험을 쌓았던 군 간부들이 거의 모두 제거”되었다.

2. 영국 처칠이 독일의 소련 침공 임박을 여러 차례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은 경계태세를 갖추지 않았다. 오히려 경계태세를 갖추지 말라고 명령했다. 독일을 자칫 자극할지 모른다는 이유에서였다. 그 명령에 따라 “훨씬 적은 희생을 치르도록 했을” 충분한 장비와 조치들은 보급되거나 취해지지 않았다. 스탈린은 독일과 2년 전 맺었던 '불가침협정'을 철석같이 믿었던 것이다.

3. 하지만 곧 이어, 독일군 공격 준비가 국경 지대에서 계속 되고 있고 곧 넘어올 것 같다고 전방 사령관들이 긴급히 타전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조작된 도발이며 국경에서 어떤 준비 작업도 해서는 안 되며 독일군이 우리에 대한 군사행동을 개시할 명분을 줘서는 안 된다는 답변을 보냈다.”

4. 급기야 독일군이 국경을 넘어 소련 땅에 쳐들어왔다. 그런데 그때조차 스탈린은 “사격에 대응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스탈린은 “독일군 내의 규율 잡혀 있지 않은 몇몇 부대의 도발이라고, 만약 우리가 독일군에 대응한다면 그것은 전쟁 개시를 위한 명분이 될 것이라”며 ‘반격 절대 금지’를 명령했다.

5. '불가침협정'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침공이 기정사실로 확인되고 소련 전방부대가 괴멸 당하자, 스탈린은 공황상태에 빠졌다. “초기의 실패와 패배를 겪은 후…스탈린은 실제로 오랫동안 군사작전을 지휘하지 않았고, 업무도 전혀 보지 않았으며, 몇몇 정치국 위원이 그에게 가서 지금 당장 전선 상황을 바로잡기 위한 특정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말했을 때에야 지도부에 복귀”했다.

6. 소련군은 천신만고 끝에 전세를 역전시켰다. 그러자 스탈린은 “승리에 적지 않게 기여한 많은 지휘관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전선에서 이뤄진 업적이 자기 이외의 다른 사람에게 돌려질 가능성을 전혀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7.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레닌그라드 사건, 밍그렐 민족주의자 조직 사건, 의사-반역자 사건’ 등을 끊임없이 조작해내어, 정적을 숙청했다.

8. 스탈린 전기문이 씌어졌다. 스탈린은 처음에 “스탈린, 그는 오늘날의 레닌이다.”라고 써넣었다. 흡족하지 않았던 스탈린은 이후 그 구절을 다시 고쳐 썼다. “스탈린은 레닌이 하던 사업의 정당한 계승자이거나, 혹은 우리 당에서 이야기되듯 스탈린, 그는 오늘날의 레닌이다.”



Q4. 트로츠키는 혁명 승리가 임박하자 볼셰비키 진영에 합류한 출세주의자인가?

“1900년대 초부터 1917년 혁명 몇 달 전까지 트로츠키는 레닌과 볼셰비키를 비난하면서 멘셰비키 진영에 발을 담그기도 하면서 반볼셰비키 진영에 있었다. 1917년 2월 혁명 이후에 혁명의 물줄기가 볼셰비키 쪽으로 향하자 그제야 트로츠키는 볼셰비키 진영에 가담했다.”―노정협, 위대한 산물

“결국 이처럼 반쏘 반공주의의 정치적 기원은 트로츠키주의이기도 한데, 트로츠키는 수십년간 기회주의 회색분자, 멘셰비키질 하다가 1917년 혁명적 분위기가 고조되자 뒤늦게 볼셰비키 혁명호에 승선해놓고는 나중에 레닌과 볼셰비키가 자신의 혁명론을 받아들여 그렇게 했노라며 거만하게 역사를 자기중심으로 돌리며 기회주의적 정치적 행보를 합리화합니다. 그런데 수십 년간 기회주의 행보가 우연이겠습니까?”―노정협, 양두구육


* * *

‘메시지 공격이 어려우면 메신저를 공격하라!’

논쟁 내용이 아니라, 그것을 주장하는 상대방의 약점을 공격하여 주장 자체를 무력화시키는 수법이다. 노정협은 트로츠키를, ‘수십(!) 년’ 간 기회주의를 일삼다가 혁명의 물줄기가 볼셰비키 승리 쪽으로 향하자, 은근슬쩍 볼셰비키에 합류한 출세주의자로 만들려 한다.

 

혁명가 트로츠키의 삶

이 스탈린주의 악선전이 옳은지 살피기 위해서 트로츠키의 약력을 따져보자. 1917년까지는 비교적 상세히, 이후는 간략히 살핀다.

1879년에 태어난 트로츠키는 10대 후반 나로드니키에서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어,

1897년 흑해 인근 니콜라에프에서 노동운동에 참여한다.

1898년 1월 200명의 조합원과 함께 체포되어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진다.

1902년 여름 유형지에서 탈출하여,

1902년 10월 런던에 도착한다. 레닌을 비롯한 <이스크라(불꽃)> 팀에 합류한다. 당시 23세였다. 레닌은 트로츠키를 <이스크라> 편집진 정회원으로 추천했으나, 플레하노프의 반대로 무산된다.

1903년 8월 러시아사회민주노동자당 총회에서 당원자격 문제를 둘러싸고 당은 멘셰비키와 볼셰비키 두 분파로 분열한다. 분열에 담긴 함의를 이해하지 못했던 트로츠키는 분열의 책임이 레닌에게 있다고 보고 멘셰비키의 일원이 된다.

멘셰비키와 볼셰비키의 가장 큰 차이 중 하나는 자유주의 자본가진영(리버럴)에 대한 태도였다. 멘셰비키의 친자유주의 정치와 갈등하며 트로츠키는 1904년 이후 1917년까지 거의 무당파 사회민주주의자로 활동한다. 이 시기 동안 두 분파의 통합을 추구한다.

1905년 1월 혁명 발발하자, 2월 러시아에 귀국한 트로츠키는 페테르부르크에서 혁명에 참여한다. 그 해 11월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의장으로 선출된다. 26세 때였다.

혁명은 패배하고 그 해 12월에 체포되어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진다. 1905년 혁명 분석을 토대로, ‘다가올 러시아 혁명은 프롤레타리아가 주도하는 차르 타도 민주주의 혁명이면서 동시에 그 혁명을 주도한 노동계급의 이해를 실현하는 사회주의 혁명으로 필연적으로 나아간다는 노선’ 즉, 연속혁명론을 정립한 『평가와 전망』을 저술한다.

1907년 1월 재차 탈출한다.

1908년 볼셰비키의 카메네프, 멘셰비키 파견 필진과 더불어 <프라우다(진실)> 일원이 되고, 이를 매개로 두 분파의 화해를 시도한다.

1912년 볼셰비키는 당의 최종적 분열을 선언한다.

1914년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1915년 9월 레닌이 주도한 짐머발트 국제사회주의자 반전 회의에 합류한다.

1916년 3월 스페인 정부가 트로츠키를 미국으로 추방한다.

1917년 2월 혁명이 발발하고 차르가 퇴위한다.

1917년 4월 3일 레닌이 귀국하여, ‘임시정부 지지 거부와 노동계급의 권력 장악’을 주장하는 「4월 테제」를 발표한다.

트로츠키는 그로부터 다시 한 달 뒤인 5월 4일에 귀국한다. 페테르부르크 지역 느슨한 사회주의 조직 메즈라욘치 그룹에 합류한다.

메즈라욘치그룹이 볼셰비키당에 입당하던 무렵인 7월은 위기의 나날이었다. 페테르부르크에서 충동적 무력시위가 전개되었고, 이를 빌미로 케렌스키 정부는 볼셰비키에 대한 대대적 탄압을 자행한다. 8월 7일 트로츠키를 비롯한 지도부 대다수는 체포되었고 레닌은 검거를 피해 핀란드로 도피한다. 코르닐로프 쿠데타 실패 이후 석방될 때까지 40일 간 구금된다.

9월 볼셰비키는 소비에트의 다수파가 된다. 트로츠키는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장으로 선출된다.

소비에트군사혁명위원회를 지도하여, 10월 25일 케렌스키 임시정부를 타도하는 봉기를 성공시킨다.

이 공로를 훗날 스탈린은 확신을 가지고 말한 바 있다.

“봉기와 관련된 모든 실천적 작업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장 트로츠키 동지의 직접적 지휘 아래 실행되었다. 군대가 소비에트 진영으로 신속히 넘어오도록 하고 군사혁명위원회를 효과적으로 조직한 데에는, 우선적이고 주로, 트로츠키 동지에게 우리 당이 빚진 바 있다는 것을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다.”―<프라우다>, 1918년 11월 10일


혁명 직후 외무인민위원(외무장관)이 된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의 책임자가 된다.

내전(1918~1922)이 발발하자 적군을 창설하고, 적군사령관이 되어 내전을 승리로 이끈다.

1922~23년 레닌과 함께, 점증하는 관료주의, 대외무역독점 폐지, 대러시아 국수주의에 맞서 투쟁한다.

1923년 3월 레닌이 3번째 쇼크로 회복불능 상태에 빠지자, 스탈린-지노비예프-카메네프 등이 ‘고참 볼셰비키 3인방’을 구축하여 반트로츠키 캠페인을 전개한다.

1925년 육해군 인민위원에서 실각한다.

1926년 10월 정치위원회에서 실각한다.

1927년 11월 공산당에서 제명된다.

1928년 1월 알마아타로 추방되었다가,

1929년 2월 소련에서 추방된다. 여러 나라를 전전하다가, 멕시코로 망명한다.

1940년 8월 스탈린의 자객 라몬 메르카데르에 살해된다.

 

약력 검토로 확인된 사실들

1. 레닌과 트로츠키가 분열해 있던 시기는 1903년부터 1917년까지 14년간이었다. 짧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노정협이 말하는 “수십 년”은 거짓이며 과장된 것이다.

2. 트로츠키는 볼셰비키와 멘셰비키의 통합을 추구하며 볼셰비키 밖에 있었지만, 1905년 혁명 당시 소비에트 의장이 되는 등, 사회주의자로서 치열한 투쟁을 전개했다.

3. 트로츠키가 볼셰비키 당에 합류할 당시는 레닌이 핀란드로 도피할 정도로 벼랑 끝을 걷는 때였다. 정세의 파도는 볼셰비키를 강타하고 있었다. 혁명 승리가 훤히 보이는 상황에서 출셋길을 좇아 당에 무임승차한 것이 아니었다. 다음 인용문들은 그 7월 시기의 엄중함에 대한 묘사이다.

“5일 아침에 나는 레닌과 만났다. 대중의 공세는 이미 격퇴당하고 있었다.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 ‘이번에는 그들이 우리를 하나씩 총살할 걸세. 그들에게는 절호의 기회이니까.’”―트로츠키, 『나의 생애』


“우리끼리 얘긴데, 그들이 나[레닌]를 죽이면, 내 공책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을 발간해주길 자네[카메네프]에게 부탁하네.”―알렉산더 라비노비치, 『혁명의 시간』


“세계에 그토록 많은 거짓말과 비방이 단 한사람에게 쏟아진 적이 없다. 인쇄 매체에 레닌의 간첩 행위, 그와 독일 최고사령부의 연계, 그가 받은 돈 등에 관한 글과 시와 그림 등이 나왔다. … 거짓말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적은 더욱 뻔뻔하고 교활하게 비방을 해대고 있었다. … 힘들고 괴로운 나날이었다.”― 같은 책 중 지노비예프의 회상


4. 앞서 인용한 스탈린도 인정한 것처럼, 10월 봉기 승리에서 트로츠키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5. 10월 혁명의 성취와 방어에서 트로츠키의 헌신과 기여는 위대했다. 이로써 그는 마르크스주의 연속성을 계승하는 혁명가로서 불멸의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그 대가로 이렇다 할 개인적 특권을 누린 것은 없다. 차라리 그는 거대하게 성장한 관료집단에 굽히지 않은 이유로, 박해와 곤궁 속에서 살아야 했다. 첫 아내와 2남 2녀의 자식들은 자살, 결핵, 총살, 암살 등으로 운명했고, 수많은 혁명 동지들도 그렇게 잃었다. 자신은 망명지 멕시코에서 스탈린이 보낸 자객에 암살당했다. 그런 점에서 출셋길을 좇아 볼셰비키 호에 승선한 것처럼 묘사하는 것은 스탈린주의에 찌든 파렴치한 안목이다.

6. 물론 트로츠키는 1903년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분열에 담긴 혁명적 함의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상당한 시간을 낭비하며 기회주의와의 통합을 추구했다. IBT는 그 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트로츠키는 2차 당대회부터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는 십 수 년 동안 사회주의 운동 내에서 대단히 쓸모없는 조직을 만들면서 낭비했다. 때로는 멘셰비키에 접근했고 다른 경우에는 바깥에서 양 분파를 통합하려는 헛된 시도를 했다. 이와 반대로, 같은 시기의 레닌은 강령에 입각해서 강고한 전위당의 중핵을 건설했다. 이후 트로츠키 자신도 동의했던 것처럼, 혁명적 기회가 찾아왔을 때 그 필수불가결함이 입증되었다.”―IBT, 『트로츠키의 유산』


트로츠키 스스로도 그 점을 여러 차례 인정했다.

“나는 나 자신을 중앙집권주의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마도 그 당시의 나는 구질서와의 전쟁에서 몇 백만의 대중을 이끌고 나가려면 혁명정당이 얼마나 열정적이고 당당한 중앙집권주의를 필요로 하는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나는 아직 독자적으로 레닌의 중앙집권주의가 명확한 혁명 개념의 논리적 귀결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의 생애』


“8월 동맹 …나는 이 동맹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내가 이 동맹을 만들었다. …나는 당의 노동계급 경향에 대항하는 온갖 잡탕들과 일시적인 동맹을 수립했다. …레닌은 8월 동맹에 대해 가차 없는 비판을 퍼부었으며 가장 매몰찬 타격은 나에게 가해졌다. …이 비판은 가혹했으나 사실이었다.”―『맑스주의를 옹호하며』


7. 그러나 트로츠키는 1917년 볼셰비키에 합류한 이후 이 문제에서 더 이상 실수가 없었다. 레닌은, “그 때 이후로 트로츠키보다 더 훌륭한 볼셰비키는 없었다(1917년 11월 14일, 페테르부르크 위원회),”라는 말로 그 점을 확인했다.

8. 멘셰비키와의 화해는 스탈린이 추구했다. 레닌 귀국 이전 임시정부 지지 노선을 펴면서 멘셰비키와 급격히 가까워지자 스탈린은 멘셰비키와의 통합을 추진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스탈린은 ‘러시아 같이 자본주의가 충분히 발전하지 못한 후진국에서, 혁명은 부르주아가 주도하는 민주주의 혁명의 성격을 띨 것이고, 사회주의 혁명은 그 다음이다. 노동계급은 부르주아의 민주주의 혁명을 돕는다.’라는 내용의 멘셰비키 2단계 혁명론을 여기저기 재탕했다. 그로 인해 중국, 스페인 등 여러 혁명적 기회를 유실하고 노동계급 지도부를 적의 손에 넘겨주었다.

<그림3> 1917년 당시 레닌과 함께 했던 중앙위원회 위원들

빨간색 표시는 스탈린에게 살해 당한 중앙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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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5. 트로츠키는 레닌과 사사건건 적대한 반(反)레닌주의자인가? 스탈린은 레닌의 적통을 이은 계승자인가?

“레닌은 트로츠키를 비롯한 분파주의자들의 행위를 거듭 경고하며 당내 당인 분파의 금지와 당의 단결을 거듭 외쳤다. 레닌 사후에도 트로츠키는 계속해서 당조직에 반하는 행위를 하였다. 신경제정책, 브레스트 강화조약, 노동조합 문제, 집산화 시기와 방식 문제 등에서 트로츠키는 언제나 반레닌적 입장을 취하며 극렬하게 분파주의를 일삼으며 당을 분열시키고 심지어 쏘비에트 체제를 위기로 몰아넣었습니다.”―양두구육

“트로츠키주의자들은 트로츠키가 1917년 2월 혁명 이후에 볼셰비키당에 가입을 했고 그 이후에는 레닌과 정치적으로 일치했다고 여기는데 사실 혁명 이후에도 레닌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조약, 노동조합 논쟁, 신경제정책 등을 둘러싸고 일관되게 트로츠키주의에 맞서 투쟁해 왔다.”―노정협, 한 트로츠키주의 레닌 번역자의 레닌주의 사상 “왜곡·날조”, 2018년 4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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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협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조약, 노동조합 논쟁, 신경제정책 등” 몇 가지 사안에서 의견 차이가 있었다는 이유로, 트로츠키가 사사건건 레닌과 반대한 적대자였다고 주장한다. 물론 스탈린이 레닌의 충실한 계승자였다는 신화를 합리화하기 위한 것이다. 역시나 어처구니없이 유치한 논리의 비방이고 날조이다.

노동계급의 혁명정당은 가장 높은 수준의 복잡계인 인간사회 그 중에서도 특히 혁명적 변화를 다루는 조직이다. 인간이 목적의식적으로 다루는 것 중 가장 복잡하고 날카로운 이해관계가 교차하는 대상이다. 아무리 뛰어난 천재라고 하더라도, 대상을 구성하는 다양한 측면과 역동성을 모두 포착 · 분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집단지성이어야만 하고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시행착오, 이견, 논쟁 등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문제는 이견을 다루고 논쟁을 조직하며 진리견해로 나아가는 방식이다. 혁명정당은 ‘내부적으로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토론과 외부적인 행동의 통일’ 즉, 민주집중제의 원리로 이 문제를 풀어나간다. 반면에 스탈린주의는 소위 ‘지도자’와 다른 의견을 적으로 간주한다. 범죄로 규정하고 첩자로 몰아 살해한다. 왜냐하면 스탈린주의는 관료집단의 이해를 응집한 사상이기 때문에, 노동계급의 역사적 이해와 부분적으로 겹칠 뿐, 전체적으로는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애초에 노동계급의 역사적 이해에 기초한 이견을 과학적으로 설득할 수가 없다. 논쟁을 하면 할수록 관료집단과 역사적 이해 사이의 모순만 폭로된다. 그렇기 때문에 관료집단 이해의 인격화인 ‘권위자’에 대한 절대적 복종(‘신심’이라고 일컬어지는)과 ‘숙청’이라는 방식을 통해서만 이견을 해소할 수 있다. 날조와 비방은 그 도구이다.

몇 가지 논쟁이 있었다는 이유로, 트로츠키는 레닌에 대한 “극렬하고 일관된” 적대자이고, 스탈린이 레닌의 계승자라는 주장은 허황된 신화이고 날조이다. 몇몇 사안에서 일시적 의견 차이가 있었지만, 혁명 이후 레닌과 트로츠키의 관계는, 사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정치적 의미에서, 매우 돈독했다. 실제의 적대는 스탈린을 중심에 두고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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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들의 혁명적 헌신으로 내전에서 승리하긴 했지만, 내전은 러시아 사회체제에 큰 타격을 입혔다. 특히 내전의 선두에 서서 싸웠던 노동계급 전위를 상당히 잃었다. 당과 국가의 노동계급 사회구성비가 급감했다. 당과 국가의 탈(脫)노동계급화와 관료화가 급속히 진행되었다. 비(非)노동계급과 사회후진부위의 지지를 받으며 혁명의 성과를 사유화하려는 관료집단은 스탈린을 중심으로 결집했다. 레닌과 트로츠키로 대표된, 러시아와 국제 노동계급의 역사적 이해를 담지한 혁명가 집단은 위기의식을 느끼며 그에 제동을 걸었다.

관료주의는 ‘무역의 국가독점 완화’와 ‘대러시아 국수주의’로 제 모습을 드러냈다. 이 문제에서 정치적 입장을 같이한 레닌과 트로츠키는 서로에게 두터운 신임을 보내며 행동을 함께 했다. 1922년 5월 뇌졸중이 처음 발병한 이후 1923년 3월 그의 정치활동을 끝장낸 3차 쇼크까지, 레닌은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이 투쟁에 초인적으로 개입했다. 스탈린주의자들이 진저리치며 부인하지만, 그 투쟁에서 트로츠키는 가장 가까운 동맹자였다. 레닌이 트로츠키에 보낸 정치적 일체감과 신뢰는 레닌의 마지막 서신들에 남아있다. 진지한 독자들에게 그 서신 모두를 읽어볼 것을 기대한다. 여기서는 그 둘의 정치적 유대를 엿볼 수 있는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 소개한다.

 

‘국가의 무역독점’을 둘러싼 투쟁

국가의 무역독점은 갓 태어난 소련의 후진적 경제체제를 제국주의로부터 방어할 방파제 같은 조치였다. 1990년대 동유럽과 소련의 붕괴에서 보듯, ‘무역 자유화’는 노동자국가 체제의 존립을 심각히 위협한다. 그런데 1922년 10월 6일, 레닌과 트로츠키가 불참한 가운데, 스탈린이 주도한 당 중앙위원회는 무역의 국가독점을 완화하는 소부르주아적 지향의 결의안을 통과시킨다. 그 소식을 접한 레닌은 즉각 그 조치에 항의하며 연기를 요청한다.

“10월 6일의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의 다음과 같은 결정…사실상 대외 무역독점을 파기하는 것입니다.…저는 그 문제에 관한 결정을 2개월 동안, 즉 다음 전원회의 때까지 연기할 것을 제안합니다.”―대외 무역 독점에 관해 러시아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위원들을 위하여 스탈린에게 보내는 편지, 레닌, 1922년 10월 13일


2개월 후, 전원회의에 즈음하여 레닌은 트로츠키에 공동투쟁 의사를 확인하는 편지를 보낸다.

트로츠키 동지, 크레스친스키의 편지를 동봉합니다. 가능한 한 빨리 당신의 의견을 알려 주십시오. 전원회의에서 독점을 위해 싸울 생각입니다.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레닌, 1922년 12월 22일 [이하 모든 밑줄은 인용자의 것]


무역의 국가독점 필요성에 동의하는 트로츠키의 답변을 받은 레닌은, 전원회의 참석자들에게 트로츠키의 답장 사본을 동봉한 편지를 보낸다. 그 편지를 통해 레닌은, 트로츠키 역시 동의를 표했다는 것, 만약 전원회의에서 관철되지 않으면 문제를 당 대회로 이관할 것 즉, 전면적 당내투쟁을 전개할 것을 경고한다.

“(트로츠키의 편지 사본 재중)…오늘 트로츠키 동지로부터 봉함 편지를 받았습니다. 아마도 마지막 행에 쓰여있었던 듯한 국가계획위원회에 관한 부분만 제외하고는 모든 본질적 사항에서 그에게 동의합니다. 저는 트로츠키에게 편지를 보내 그와 의견이 같음을 알리고 병 때문에 빠질 수밖에 없는 전원회의에서 제 입장을 옹호해 달라고 요청할 예정입니다.…만일 트로츠키가 국가산업 발전의 기초 위에서 수행되는 국가계획위원회의 과업은 대외 무역인민위원회의 모든 부문의 활동이라면, 그와 저 사이에 의견이 일치되지 않는 대목은 없다고 생각됩니다.…이 문제는 기본적으로 매우 중요한 문제이며, 따라서 전원회의에서 동의를 얻지 못한다면 저는 그 문제를 당대회로 이관할 작정이며, 그에 앞서 다가오는 소비에트 대회에서 우리 당의 일각에 존재하는 의견불일치를 공표할 생각입니다.”―프룸킨 동지와 스토모냐코프 동지에게, 레닌, 1922년 12월 12일


다음 날 레닌은 위 편지를 동봉한 답신을 트로츠키에게 보낸다. 무역독점에 대한 의견 일치를 확인하며, 전원회의에서 “우리의 공통된 입장을 수호”해 줄 것을 트로츠키에게 부탁한다.

“(프룸킨과 스토모냐코프에게 보내는 편지 사본 재중) 트로츠키 동지,…당신과 저는 더할 나위 없이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어쨌든 다음번 전원회의에서 당신께서, 절대적으로 대외무역 독점을 유지하고 공고화할 필요가 있다는 우리의 공통된 입장을 수호하는 일을 맡아야 한다는 것이 제 요구입니다.”―L. D. 트로츠키 동지에게, 레닌, 1922년 12월 13일


이렇게 전열을 정비한 레닌은 이틀 후 이번에는 스탈린에게 편지를 보낸다. 트로츠키와 뜻이 같다는 것을 확인했고, 다른 중앙위원들도 견해를 바꾸어 동조한다는 것을 전하며, 그러므로 이 문제 의결을 뒤로 미루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고 경고한다.

“대외 무역 독점에 관한 제 견해를 수호하기 위한 트로츠키와의 협의를 마쳤습니다.…저는 대외 무역 독점 문제의 해결을 조금이라도 지연시키는 것에 단호히 반대합니다. 만에 하나, 도대체 어떤 이유로든지(그 문제에 대한 결정에 제가 참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제안을 포함하여) 차기 전원회의까지 그 문제의 해결을 미룬다는 발상이 제기된다면, 저는 그것에 더할 나위 없이 단호하게 반대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 자신은 물론 트로츠키 역시 제 견해를 옹호할 수 있으리라고 제가 확신하기 때문입니다.”―러시아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위원들을 위하여 J. V. 스탈린에게 보내는 편지, 레닌, 1922년 12월 15일


같은 날, 트로츠키에게도 편지를 보낸다. 자신이 참석 못할 가능성이 높은 전원회의에서, 혹시나 트로츠키가 이 위급한 문제에 대한 투쟁에서 주저하지나 않을지 하는 레닌의 걱정이 담겨 있다. 자신의 건강 문제를 걱정하지 말고, 타협해서는 안 된다고 트로츠키를 독려한다.

트로츠키 동지, 우리는 완전한 합의에 도달했다고 생각합니다. 전원회의에서 우리의 연대를 선언하시기 바랍니다.…우리의 결정이 통과되지 않는다면 소비에트 대회의 그룹에 요청하셔야 하고, 당대회에 그 문제를 제기하겠노라고 선언하셔야 합니다.…제가 이 문제로 인해 몹시 걱정하고 있고 그것 때문에 제 건강이 악화되지 않을까 염려하고 계시다면, 그것은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결정이 지연되어 가장 기본적인 문제들 중의 하나인 우리의 정책이 매우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있는 것을 오히려 더 크게 걱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저는, 우리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나 대의(大義)를 위해서나, 우리가 어떤 타협이든 다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고는 믿지 않습니다.”―L. D. 트로츠키에게, 레닌, 1922년 12월 15일


1922년 12월 18일 열린 당중앙위원회는 대외무역 독점을 완화하는 10월의 결의안을 폐기했다. 레닌과 트로츠키의 동맹은 승리했다. 3일 후, 레닌은 트로츠키에게 “우리의 입장을 관철”시킨 승리를 축하하는 편지를 보낸다. 그러나 그 결정이 현실화되기까지 결코 방심하지 않기를 당부하는 내용도 담고 있다.

“어찌 보면, 단 한 방의 총도 쏘지 않고 그저 시늉만으로도 우리의 입장을 관철시킬 수 있었던 듯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가 멈추지 말고 공격을 계속해야 한다고 제안하는 바입니다.”―L. D. 트로츠키에게, 레닌, 1922년 12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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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편지들을 통해서 스탈린이 중심이 된 관료화와 노동권력 약화에 맞서 목숨을 건 투쟁을 레닌이 전개했다는 것, 그 투쟁에서 트로츠키는 핵심 동맹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더불어 혁명가로서 레닌이, 일이 되게 하려고 얼마나 철두철미하게 작업하는지, 얼마나 헌신적이었는지 역시 뜨겁고 존경스런 마음으로 확인하게 된다.

트로츠키는 가장 가까운 레닌의 동맹이었다. 반면 스탈린은 레닌의 적자가 아니었다. 소부르주아 압력에 이끌린 관료화의 주범이었고, 그리하여 투쟁의 대상이었다.

 

대러시아 국수주의에 맞선 투쟁

혁명은 러시아만의 일이 아니었다. 차르러시아에 복속되어 있던 소수민족과 그 나라들에서도 혁명이 발생했고, 승리했다. 여러 민족이 자주적 결정에 따라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에 평등하게 참여하는 것은 소수민족 인민으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혁명 방어와 노동자국가 건설에 참여케 하는 긴요한 일이었다.

적군은 프랑스와 영국군 전진기지 역할을 하던 그루지야(조지아)를 그루지야 볼셰비키의 도움을 얻어 해방시켰다. 차르 러시아에 억압받던 소수민족이었던지라, ‘대러시아 민족주의’에 대한 그루지야 인민의 의심과 적대감정을 세심히 배려하면서 통합을 이루어야 했다.

그런데 민족문제 인민위원 스탈린과 코카서스 군사령관 오르조니키제는 그루지야에서 마치 총독처럼 행동하면서, 중앙집권적으로 통제되는 ‘러시아사회주의연방소비에트공화국(‘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이 아니라)’에 들어오라고 강요하였다. 그들의 권리를 존중함으로써 자신들의 통치에 정통성을 부여받으려는 므지바니 등 현지 볼셰비키는 반발하였다. 그러자 스탈린―오르조니키제―제르진스키 등은 그루지야 현지 볼셰비키를 ‘분리주의적 감상가’, ‘민족주의적 사회주의’로 비난하며 명령에 따를 것을 윽박질렀다. 그루지야는 다른 소수민족과 더불어 민족자결권을 지키려는 저항의 중심이 되었다.

레닌은 이 사실을 1922년 여름 알게 되었고 크게 근심한다. 그러나 그 해 5월 첫 번째 뇌졸중 쇼크로 쓰러진 후 간신히 회복 중이었기에 즉각 대응하지 못한다. 조금 더 회복된 9월부터 이 문제에 개입을 시작한다. 관련자들을 만나고 편지를 작성하며 사태를 바로잡으려는 작업에 착수한다.

“카메네프 동지! 당신은 독립된 공화국들을 RSFSR(러시아사회주의연방소비에트공화국)로 통합하는 데 대한 스탈린의 위원회의 결의안을 그로부터 이미 받았으리라 믿습니다.…저는 어제 소콜니코프와, 오늘은 스탈린과 그것에 대해 토론했습니다. 내일은 므지바니(‘분리주의적’ 감상가로 의심받고 있는 그루지야 출신 공산당원)를 만날 것입니다.…제 생각으로는 이 문제는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스탈린은 너무 서두르고 있습니다. 당신은 한때 이 문제를 담당하고자 했었고, 그에 대해 상당히 연구한 바 있기 때문에 이 문제를 더욱 확실하고 더욱 철저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러시아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정치국원들을 위하여 L.B. 카메네프에게 보내는 편지, 레닌, 1922년 9월 29일


상황의 심각성을 더 구체적으로 이해한 며칠 후 레닌의 어조는 격렬해졌다.

“저는 대러시아 국수주의를 끝장내자는 전쟁을 선언합니다. 저는 이 몹쓸 썩은 치아를 빼버리고 건강한 치아로 그것을 먹어치울 것입니다. 러시아인 · 우크라이나인 · 그루지야인 등등이 교대로 연방 중앙집행위원회의 의장직을 맡아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합니다. 강력히!”―대러시아 국수주의와의 투쟁에 관해 L.B. 카메네프에게 보내는 메모, 레닌, 1922년 10월 6일


12월 13일~15일 두 번째 쇼크가 레닌을 강타했고, 가까스로 회복한 레닌은 하루 5~10분 동안의 구술만 허락받는다. 12월 30일부터 레닌은 민족문제에 관한 비교적 긴 메모를 생명을 짜내어가며 구술한다. 그 메모에서 레닌은 현재의 국가는 온전히 노동계급의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와 차르주의자의 뒤범벅”이라고 말하며, 스탈린을 문제의 원인으로 거듭 지목한다. 스탈린에 대한 언급은 더욱 노골적이며 거칠어진다.

“사실 우리의 것이라고 여겼던 기관은 아직도 우리에게는 완전히 낯선 것입니다. 그것은 부르주아와 차르주의자의 뒤범벅이며,…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정당화시켰던 ‘연방으로부터의 탈퇴의 자유’는 단지 휴지조각에 불과할 것이며, 전형적인 러시아 관료가 그러하듯이 실제로는 악당이며 폭군인 진정으로 러시아적인 남자, 즉 그 대(大)러시아 국수주의자(스탈린을 가리킴-역자)의 맹공격으로부터 비(非)러시아인을 방어할 수 없으리라는 점은 너무도 당연합니다.…스탈린의 성급함과 순수 행정에 대한 심취, 그리고 소위 악명 높은 ‘민족주의적 사회주의’에 품은 적의가 여기서 치명적인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으로 정치에서 악의를 품는 것처럼 천박한 역할을 하는 것은 없습니다.”―민족 문제 또는 자치공화국화 문제에 대해, 레닌, 1922년 12월 30일


그 다음날에 이어진 메모는 스탈린의 행동으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연대가 파괴”되고 있다고 다시 강조한다.

“큰 민족의 국민인 우리는 역사적으로 거의 언제나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폭력 사용의 과오를 범해 왔습니다.…문제의 이러한 측면을 무시하거나 ‘민족주의적 사회주의’라는 비난을 아무데나 내뱉어 버리는 그 그루지야인(사실, 그 자신이 진정으로 그리고 참으로 ‘민족주의적 사회주의자’이며 심지어는 통속적인 대러시아적 골목대장입니다)은 실질적으로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연대를 파괴하고 있습니다.”―레닌, 12월 31일


1923년 3월 레닌은 트로츠키에게 ‘극비’ 서한을 보내며, 4월로 예정된 당 대회에서 이 문제에 대해 싸워줄 것을 요청한다.

“친애하는 트로츠키 동지: 당신이 당 중앙위원회에서 그루지야인의 입장을 옹호할 임무를 맡아야 한다는 것이 저의 간절한 요청입니다. 지금 스탈린과 제르진스키는 그루지야인의 입장을 ‘박해’하고 있으며, 따라서 저는 그들이 공명정대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정반대라 생각합니다. 당신이 이 임무를 맡는다면 저는 안심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이유로든 당신이 그렇게 하기를 거절한다면, 그 동안 제게서 받은 모든 자료들을 돌려보내 주십시오. 그러면 당신이 받아들이지 않는 표시로 알겠습니다. 가장 동지적인 인사와 함께”―L.D. 트로츠키에게 극비 사신(私信), 레닌, 1923년 3월 5일


그 다음날은 므지바니 등 그루지야 볼셰비키에게 또 다른 극비서한을 보내며, 그들에게 연대의 감정을 전하면서 트로츠키와 카메네프도 같은 편이라는 점을 알린다.

“트로츠키 및 카메네프 동지에게 사본 보냄. 동지들: 저는 진심으로 당신들의 입장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르조니키제의 무례함과, 스탈린과 제르진스키의 묵계에 대해 분개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에게 보내는 편지와 연설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삼가 레닌 드림.”― P.G 므지바니, F.Y 마하라제, 그 밖의 다른 동지들에게, 극비, 1923년 3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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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은 레닌의 계승자가 아니었다. 소부르주아 압력에 이끌린 급속한 관료화의 중심인물이었다. 레닌 자신의 생명을 짜내며 싸운 ‘극비’의 투쟁대상이었다. 반면에 트로츠키는 레닌의 첫 번째 동맹자였다.

 

레닌의 유언 그리고 트로츠키와 스탈린

차르 러시아의 반봉건적 유산, 유럽 혁명의 불발로 인한 혁명 러시아의 고립, 내전으로 재화와 인력의 막대한 손실 등은 노동자국가의 급속하고도 심각한 관료화를 촉진했다. 혁명의 성과를 사유화하는 관료집단은 점점 두터워졌고 그들은 스탈린을 중심으로 결집했다. 당과 국가에 대한 장악력을 점점 더 강화했다.

1922년~1923년 사이 뇌졸중에 시달리던 레닌의 마지막 나날은 혁명 러시아에 관료주의라는 어두운 구름이 컴컴하게 밀려오던 때였다. 국제 노동계급 역사적 대의의 화신이었던 천재 혁명가 레닌의 마지막 삶은 그 흐름을 멈추고 되돌리려는 투쟁에 바쳐졌다.

‘레닌의 유언’으로 알려진 「대회에 보내는 서한」은 앞서 살펴본 ‘대외무역 국가독점’과 ‘대러시아 국수주의’ 관련 투쟁 와중에 작성된 것이다. 1922년 12월 23일부터 1923년 1월 4일까지 구술 · 기록된 이 서한은 공산당의 분열을 막기 위한 방책에 대한 것이고, 그 정점은 스탈린의 권력박탈에 있다.

23일 작성된 첫 번째 초고는 ‘중앙위원회의 증원과 국가계획위원회 결정에 입법력 부여’에 대한 것이었다. 레닌에 따르면 후자는 “트로츠키 동지의 희망을 일정 정도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이었다.

“저는 이번 대회에서 우리의 정치체제에 상당한 변화가 이루어지기를 강력히 촉구하는 바입니다. 저는 제가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고 있는 문제들을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최우선적으로 저는 중앙위원회 위원수를 수십 명 내지 심지어 백여 명에 이르도록 증원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다음으로 저는 대회가 국가계획위원회의 결정들에 일정한 조건하에서 입법력을 부여해 줄 것을 제안하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이 점에서 트로츠키 동지의 희망을―일정 정도, 일정 조건하에서―충족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레닌, 1922년 12월 23일


12월 25일로 구술 날짜가 명기된 ‘초고의 계속(24일)’은 스탈린,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부하린, 피야타코프 등 당 지도부 인물들에 대한 평가가 담겨 있다. 아마도 레닌 자신의 퇴임 이후 권력 구성에 대한 우려와 더불어 일정한 방향 제시 역시 담겨 있는 것이라고 추측된다. 특히 스탈린과 트로츠키 사이에 장차 발생할 수 있는 분열, 결국 발생하고야만 그 분열을 우려한다.

“저는 당면한 미래에 있을 분열을 막을 보장으로서의 안정성을 염두에 두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개인적인 자질에 관한 몇 가지 생각을 언급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안정성의 문제에서 가장 먼저 제기되는 인물들은 스탈린과 트로츠키와 같은 중앙위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그들 사이의 관계가 분열의 위험의 대부분을 이루는데, 이러한 분열은 피할 수 있는 것이므로 제 생각에는 무엇보다도 중앙위원회 위원을 50~100명 선으로 증가시키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 것입니다.

서기장이 되어 있는 스탈린 동지는 자신의 손에 무제한적인 권력을 집중시켜 놓고 있습니다. 저는 그가 언제나 충분한 주의력을 가지고 그러한 권한을 잘 사용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확신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편 트로츠키 동지로 말하자면, 운수교통 인민위원회 문제에 관해서 중앙위원회에 대항하여 투쟁했던 사례에서도 이미 입증되었다시피, 탁월한 능력만으로도 단연 돋보입니다. 아마도 그는 개인적인 능력에서 현재의 중앙위원회 내에서 가장 유능한 인물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지나친 자신감을 보여 왔으며 사업의 순전히 운영적인 측면에 지나치게 이끌리는 경향을 보여 왔습니다.

현재의 중앙위원회를 이끌고 있는 탁월한 두 지도자가 갖고 있는 이들 두 가지 자질은 조금만 주의를 게을리 하면 당의 분열로 귀결될 수 있는 요인들입니다.”―레닌, 1922년 12월 25일


그로부터 10일 가량 후인 1923년 1월 4일엔 레닌은 스탈린에 대한 의사를 보다 분명하게 밝힌다. 대회에서 스탈린을 서기장직에서 해임할 것을 권고한다.

스탈린은 너무도 무례합니다. 그리고 이 결점은 우리들 공산주의자들 속에서 사업을 할 때나 우리들 사이에서는 용인될 수 있을지라도, 서기장직을 맡는 데에서는 용납될 수 없습니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저는 동지들이 스탈린을 그 직위에서 해임하는 방법을 생각해 볼 것을 제안하는 바입니다. 다른 모든 측면에서 스탈린 동지와는 다른 사람을, 말하자면 보다 참을성 있고, 보다 성심 있으며, 보다 공손하고, 동지들에 대해 보다 세심하게 배려하며, 덜 변덕스러운 등등의 그런 사람을 그 대신 지명하도록 요청합니다. ”―1922년 12월 24일자 서한에 대한 추신, 레닌, 1923년 1월 4일


이 편지들은 1923년 4월로 예정된 12차 대회에 보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편지들은 그 대회에 보내지지 않았다. 3월 10일 레닌에게 세 번째 쇼크가 찾아오고 이는 그의 정치적 생명을 완전히 끝장내 버렸다. 이 편지들은 레닌이 회복되기를 기대하며 비밀리에 보관되었다. 레닌은 회복하지 못했다. 편지는 레닌을 통해 공개되지 못했다. 마지막 한 방울의 생명력까지 노동계급의 대의에 바친 불세출의 혁명가는 1924년 1월 21일 서거했다. 편지는 1924년 5월 열린 13차 당대회 직전에 지도부 몇몇에게만 알려졌다. 낭독을 하되 아무도 필기를 하지 않는다는 매우 제한적인 조건에서였다. 스탈린과 관료집단은 그 유언을 당 대회에 공개하지 않았다.

그렇게 편지가 알려지긴 했으나 편지에 담긴 레닌의 바람은 실현되지 않았다. 그 바람이 실현되기에 레닌의 부재는 너무나 치명적이었고 관료집단은 걷잡을 수 없이 웃자라버렸다. 그 사이에 스탈린은 관료집단의 강철 같은 지지를 얻으며 철옹성의 권력을 구축했다. 그리고 세계 노동계급이 주춤하며 움츠린 사이, 고립된 노동자국가는 “무례하고, 참을성과 성심이 없고, 공손하지 않으며, 동지들을 배려하지 않고, 변덕스러운” 자의 집권을 허용했다. 그리고 역사는 그러한 자가 권력을 손에 쥘 경우 어떠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를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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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의 폭언과 관계의 파탄

스탈린에 대한 레닌의 평가는 이미 분명했지만, 그들의 관계를 더욱 추락시키는 사건은 그 뒤에 또 일어났다.

대외무역 독점 문제에서 승리한 후 레닌이 트로츠키에게 편지(1922년 12월 21일)를 보냈다는 사실을 스탈린이 알았다. 레닌과 트로츠키의 반격으로 살얼음판을 걷고 있던 스탈린은 불같이 화가 났다. 스탈린은 곧장 레닌의 아내 크루프스카야에게 전화를 걸어 버럭 욕을 하며 협박했다. 크루프스카야가 항변하자, 스탈린은 그녀에게 ‘창녀’, ‘매독 걸린 암캐’ 같은 쌍욕을 퍼부었다. 크루프스카야는 이 모욕적인 사건을 레닌에게 알리지 못했다. 하루 10분 이내의 구술만 허용된 환자를 충격으로부터 보호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대신 카메네프의 도움을 구했다.

“의사 허락 하에 블라디미르 일리치가 구술하고 제가 받아 적은 짧은 편지와 관련하여 스탈린은 어제 저에게 너무나도 무례한 언동을 했습니다.…지금 저는 극도의 자제심이 필요합니다.…제발 저를 난폭한 사생활 침해, 비열한 욕설과 협박으로부터 보호해주십시오.”―크루프스카야의 편지, 1922년 12월 23일


레닌은 두 달 반이 지난 1923년 3월 이 일을 알았다. 그리고는 스탈린에게 절교를 경고하는 편지를 보낸다.

“스탈린 동지에게 제1급 비밀 친서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 동지에게도 복사본 전달됨.


친애하는 스탈린 동지,

동지가 제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심한 욕설을 퍼부었다니 정말 동지의 태도는 거칠기 짝이 없습니다. 비록 그녀가 그 일을 잊어버리기로 마음먹었다고 동지에게 말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은 이미 그녀의 입을 통해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에게도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저에게 퍼부어진 그와 같은 모욕을 결코 그렇게 쉽사리 잊어버릴 의향이 없습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저는 제 아내에게 퍼부어졌던 모욕은 제게 퍼부어진 것이나 다름없다고 여깁니다. 그러므로 저는 당신에게 당신이 했던 말을 취소하고 사과를 하든가 아니면 우리 사이의 관계를 파기하기를 택하든가 둘 중 하나를 심사숙고할 것을 요청하는 바입니다.”―레닌, 1923년 3월 5일


이 편지를 쓴 5일 뒤 레닌은 치명적인 마지막 쇼크를 맞는다. 스탈린이 이 편지를 받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 혹은 사과를 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스탈린은 후속조치의 필요성을 그다지 느끼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서거 뒤, 레닌의 생전 요청과 크루프스카야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은 레닌의 시체를 방부처리하여 전시한다. 생전의 레닌은 무섭고 위험한 존재였지만, 죽은 레닌은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할 전시물로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Q6. 스탈린주의 선전이 끝없이 우려먹는 브레스트 리토프스크 논쟁’, ‘노동조합 논쟁 은 무엇이었나

  

레닌은 트로츠키를 비롯한 분파주의자들의 행위를 거듭 경고하며 당내 당인 분파의 금지와 당의 단결을 거듭 외쳤다. 레닌 사후에도 트로츠키는 계속해서 당조직에 반하는 행위를 하였다. 신경제정책, 브레스트 강화조약, 노동조합 문제, 집산화 시기와 방식 문제 등에서 트로츠키는 언제나 반레닌적 입장을 취하며 극렬하게 분파주의를 일삼으며 당을 분열시키고 심지어 쏘비에트 체제를 위기로 몰아넣었습니다.”양두구육

 

트로츠키주의자들은 트로츠키가 19172월 혁명 이후에 볼셰비키당에 가입을 했고 그 이후에는 레닌과 정치적으로 일치했다고 여기는데 사실 혁명 이후에도 레닌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조약, 노동조합 논쟁, 신경제정책 등을 둘러싸고 일관되게 트로츠키주의에 맞서 투쟁해 왔다.”노정협, 한 트로츠키주의 레닌 번역자의 레닌주의 사상 왜곡·날조”, 20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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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주의자들은 트로츠키는 레닌에 대한 적대자이고, 반면 스탈린이 계승자이다.’라는 날조된 정식을 위해 레닌과의 모든 이견을 문제시한다. 그 논쟁이 어떤 것이었는지 사실관계와 내용은 중요하지 않다. 그저 언제 어떤 사안으로라도 레닌과 맞섰다면, 어찌되었건 극렬한 분파주의자이고 당을 분열시키고 쏘비에트 체제를 위기로 몰아넣은증거라고 외쳐댄다.

 

 

1.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조약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조약은 스탈린주의자들이 줄곧 우려먹는 메뉴 가운데 하나이다. 그들은 트로츠키가 당의 결정을 어겨서 엄청난 재앙을 초래했다.’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이미 10년 전 노정협이 그러한 주장을 제기했을 때, 각종 증거를 수집하여 자세하게 설명(소련 중국 북한 등 노동자국가들의 사회성격 논쟁, 2008년)한 바 있다. 그것으로 충분하므로 다시 보탤 필요가 없다. 그 때의 설명을 약간 편집하여 다시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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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츠키는 강화조약을 통해 “엄청난 재앙”을 불러왔는가?

 

노정협 동지[이하 호칭 생략]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조약에서 트로츠키가 당의 공식적 입장을 어기고”, “조약을 체결하지 않아서결국 더욱 불리하고 굴욕적인 내용으로 조약을 체결했고, “당과 소련에 엄청난 재앙과 문제를 일으켰다.”고 말하면서, 그것이 명백한 역사적 사실이라고 주장한다.

 

트로츠키의 나의 생애와 크루프스카야의 레닌의 회상에 그 강화조약 장면이 나온다. 그걸 통해 강화조약 상황을 재구성해보면 다음과 같다. 혁명으로 등장한 소비에트 정권은 당시 진행 중이던 독일과의 전쟁을 종결지어야 하는 중대한 임무가 있었다. 전쟁의 종결과 평화는 볼셰비키의 혁명 공약이기도 했다. 강화에 대한 독일제국주의의 요구는 이러했다. “점령하고 있는 모든 영토를 할양할 것, 30억 루블의 배상금을 수년에 걸쳐 지불할 것(레닌의 회상)” 이에 대해 당시 당은 세 가지 의견으로 나뉘었다. , 레닌: 소비에트는 독일과의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없다. 패전은 혁명을 파괴할 것이다. 트로츠키: 전쟁도 안 되고 강화도 안 된다. 부하린(좌익 공산주의 그룹): 혁명전쟁을 수행하자. 독일 제국주의와의 강화 체결은 혁명과 국제프롤레타리아의 대의에 대한 배신이다.

 

보다시피, 레닌과 트로츠키 사이의 의견이 달랐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 당내 의견구도에서 주요한 대립은, 강화를 주장하는 레닌과 혁명전쟁을 제기하는 좌익공산주의 그룹과의 대립이었다.

 

또한, 노정협 말처럼 엄청난 재앙을 트로츠키가 몰고 왔고, 그것이 명백한 사실이라면, 다음의 의문점들이 해명되어야 한다. 첫째, 어떻게 당과 소련에 재앙을 몰고 온트로츠키는 그 후 내전에서 적군을 이끄는 총사령관의 지위를 맡을 수 있었을까? 둘째, 스탈린집단의 검열 아래 쓰였을(1933년에 쓰이고, 트로츠키에 대한 부정적, 스탈린에 대한 긍정적 묘사 일관, 1919년으로 종결되고 그 이후부터 레닌의 죽음까지 중요한 시기에 대한 언급이 없음 등) 크루프스카야의 레닌의 회상에는 노정협이 말하는 그 엄청난 재앙이 언급이 안 되고 있을까?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조약 문제는 반()트로츠키 캠페인의 중요 목록 가운데 하나였고, 노정협이 지금 그것을 재탕하고 있다. 노정협이 주장하는 것처럼 그 문제는 출처 확인도 불필요한 명백한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국가를 장악하고 있던 스탈린집단의 반()트로츠키주의 캠페인은 방대하고도 집요하게 조직되었다. 그 캠페인에는 코민테른의 권위를 통해 각 나라의 스탈린주의 공산당들도 동원되었다.

 

쌍방 의견이 대립할 경우, 그 진상을 알기 위해서 한쪽의 의견만 들어서는 안 되는 것이 기본이다. 그런 과정도 없이 명백한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노정협을 보면서, 내가 노정협에 대해 품고 있는 스탈린주의 혐의는 더욱 짙어질 수밖에 없다.

 

상대편 당사자 트로츠키는 이렇게 회상한다.

 

믿기 힘든 일이지만 스탈린과 지노비예프 일파는 1924년에 내가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 당과 정부의 결정에 반하는행동을 한 것처럼 보이도록 이 사태를 묘사하려고 시도했다. 이 얼간이 같은 거짓말쟁이들은 신경 써서 옛 의사록을 들추며 자신들이 했던 발언을 다시 읽어보지도 않았다. (중략) 지노비예프야말로 반대 1표의 압도적 다수의 지지로 채택된, 강화조약의 조인 거부를 찬성하는 결의의 제안자였다.

 

(1918) 214, 내가 중앙 집행위원회에 보고한 뒤에, 스베르들로프가 볼셰비키파를 대표하여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되는 결의안을 제출했다. “중앙집행위원회는 강화대표단의 보고를 듣고 충분히 검토한 결과,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의 대표단의 행동에 전면적으로 찬성한다.” (중략) 19183월의 당 대회에서 지노비예프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트로츠키는 중앙위원회의 다수의 결의에 따라 행동했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옳은 말이다. 그것에 대해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있다.” 마지막으로 레닌도 이 대회에서 중앙위원회에서는 강화 조약에는 조인하지 않는다는 제안이 채택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 강화조약에 조인하는 것을 거부한 것은 트로츠키의 개인적인 행동이었다는 새로운 교의(敎義)가 코민테른 내에 확립되었다.” (중략)

 

스탈린의 입장은 무엇이었을까? 그에게는 여느 때처럼 자신의 입장이라는 것이 없었다. 그는 그냥 기다리면서 책략을 꾸미고 있었다. (중략) 그는 결코 공식적으로는 발언하지 않았다. 명백한 것은 나의 주요한 과제전 세계의 프롤레타리아트가 강화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가능한 한 좋게 이해하도록 만드는 것가 그에게는 부차적인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그가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은 훗날의 일국사회주의와 같이 일국 평화였다. 결정적인 투표에서는 그는 레닌에 동조했다. 그는 몇 년 뒤에 가서야 비로소 브레스트리토프스크의 사태에 대한 견해비슷한 것을 자기 자신을 위해 작성했고, 그것은 오로지 트로츠키주의와 투쟁하려는 목적에서 나온 것이었다.”나의 생애

 

물론 스탈린주의자들은 이 진술을 명백한거짓이라고 할 것이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와 관련된 증언들

 

진실을 확인시켜줄만한 책 중에 번역된 책으로는 1) 아이작 도이처 의 <무장한 예언자 트로츠키>가 있다. 풍부한 1차 자료를 바탕으로 강화조약 문제를 60쪽에 걸쳐 서술해 놓았다. 그 책에도 국제주의’[노정협을 대표한 필명. 이하 같음]가 주장하는 당의 결정을 어기고 트로츠키가 소련에 초래한 엄청난 재앙은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이처가 한때트로츠키주의자였음을 이유로 그 책이 자의적이라고 주장할지 몰라 더 좋은 자료를 찾아보았다.

 

그러다가 <역사란 무엇인가?>의 저자로 유명한 2) E. H 카아 가 저술한 <소련의 역사 (A History of Soviet Russia)>의 제3<볼셰비키혁명 1917~1923(The Bolshevik Revolution)>을 구해 ‘10월에서 브레스트-리토프스크까지부분을 읽었다.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몇 구절들을 소개한다.

 

“1918121일 회의는 3월의 최종 결정에 이르기까지의 논쟁 동안 당의 견해를 나누어 놓은 세 가지의 대체적인 노선을 분명히 했다. 참석한 62명의 볼셰비키 지도자 가운데 32명은 11월과 12월에 걸쳐 당을 지배해 왔던 무비판적인 자신감을 여전히 흔들리지 않은 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레닌으로부터 모스크바파라고 호칭되었는데, 그것은 모스크바 당위원회가 가장 고집스럽게 이 입장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한편 그들은 레닌의 이전 입장위에 기초해 있다고 주장했다. 레닌의 명망과 설득력을 모두 동원한 결과 그의 새 입장 즉, “어떤 대가를 치르고라도 강화한다.”에 불과 15명의 지지자를 끌어내었다. 남은 16명은 전쟁은 절대 다시 시작할 수 없지만 독일 조건에 따라 강화하는 것은 불필요하고 잘못된 것이라는 트로츠키의 입장을 지지했다. 그는 첫 번째 그룹이 주장하는 혁명전쟁의 실현 가능성을 부정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에 혁명이 도래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협상의 술수를 통해 유예기간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E. H. , <볼셰비키 혁명: 1917~1923>, Pelican Book

 

10월 혁명 직후 볼셰비키 정권은 각국에 강화의사를 포고했다. 그로부터 3개월이 지난 121일의 당 내부 의견분포도이다. 3개월 동안의 논쟁이 있었지만 레닌은 여전히 소수이다. 트로츠키는 혁명전쟁의 실현가능성을 부정한다는 측면에서 혁명전쟁파와 달랐고, 한편 유럽혁명을 고취하기 위해 강화 유예를 주장한다는 점에서 즉시 강화를 주장한 레닌과 달랐다.

 

다음은 그 3일 후인 124일에 대한 묘사이다. 128일의 회담에서 트로츠키가 전쟁 당사국들에게 일방적으로 전쟁종결 선언을 하게 되므로 이 회의는 그 회담에 대한 당의 방침을 결정하는 중요한 자리였다.

 

트로츠키에 대한 지시사항의 공식 결정은 3일 후인 24일의 중앙위원회의 결정에 달려 있었다. 이 회의 이전, 트로츠키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레닌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혁명전쟁 입장을 지지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러자 레닌은, 그렇다면 트로츠키 입장은 아마도 그다지 위험한 것은 아닐 것이라고 대답했다. 레닌은 익살스럽게 리투아니아와 에스토니아를 잃게 되겠지만, “트로츠키와 평화를 이룰 수 있다면잃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덧붙였다. 레닌은 위원회에서 즉각 강화 안건을 다시 제출했고 스탈린의 단호한 지지와 지노비예프의 미심쩍은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레닌에 의해 제기된 다소 모호한 공식 제안 즉, ‘가능한 한 협상을 지연할 것이라는 결정은 121로 가결되었다. ‘혁명전쟁을 찬동하는 제안은 오직 부하린과 드레진스키 2명의 지지만 얻었다. ‘전쟁을 중지한다. 강화는 체결하지 않는다. 군대를 해산한다.’는 트로츠키의 동의안이 97이라는 근소한 차이로 가결되었다.”같은 책

 

국제주의와 김남국은 트로츠키가 당의 결정을 어기고 강화를 파기한 것처럼 말하지만, 바로 위의 당 결정을 128일의 회담에서 트로츠키가 수행한 것이다.

 

독일은 218일부터 공격을 재개했다. 그리고 이전보다 가혹해진 새로운 강화안을 제시했다. 그것을 두고 223일 회의가 열렸고 다음은 그 회의에 대한 묘사이다.

 

레닌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의 거취와 관련하여 최후통첩을 제기했다. 만약 혁명적 미사여구 정책을 지속한다면, 정부와 중앙위원회로부터 사퇴하겠다는 것이었다. 어려운 결정에 직면해야 했다. 그는 독일과 협상을 재개하면서 다시 한 번 연기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제안하는 스탈린을 무시하면서(brush aside)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인하지 않을 가능성을 주장하는 스탈린은 틀렸다. 이 조건에 우리는 조인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조인하지 않는다면, 3주 안에 소비에트 권력의 사망신고서에 사인해야 할 것이다. 독일 혁명은 아직 무르익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여러 달 걸릴 것이다. 그 조건을 우리는 수용해야 한다.”같은 책


강화라는 첨예하고 위태로운 문제를 둘러싸고 많은 지도부들의 견해는 동요해야 했다. 여기에는 스탈린의 동요가 묘사되어 있다. ‘즉시 강화파이던 그는 이날 강화 지연파로 발언한다. 긴장감이 최고조에 다다른 회의였다. 아이작 도이처에 따르면 이 회의에서 트로츠키는 당의 분열을 피하기 위해기권하고, 그의 기권으로 인해 레닌은 비로소 다수를 점하게 된다.

 

E. H. 카아는 트로츠키와 레닌의 의견차이 그리고 그의 강화조약에서의 역할을 이렇게 평가한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와 관련된 트로츠키에 대한 레닌의 이견은 부하린 지지자들에 대한 것보다는 덜 심각한 것이었다. 트로츠키의 강한 개성과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의 극적인 역할은 동시대인과 후대인 모두의 눈에 두드러지고 커다란 중요성으로 부각되었다.” 같은 책


, ‘국제주의동지! “트로츠키가 당의 공식적 입장을 어기고 조약을 체결하지 않아서 당과 소련에 엄청난 재앙과 문제를 일으켰다.”는 것이 여전히 명백한 역사적 사실인가?

 

이 정도로 충분하다고 여겨지지만, 이번에는 3) 당 회의록을 살펴보자. E. H. 카아의 기록과 교차 검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1918124일 회의. ‘전쟁을 중지한다. 그러나 평화조약에 조인하지 않는다.’는 트로츠키 동지의 동의안이 찬성 9표 반대 7표로 통과되었다.”당 회의록, 트로츠키의 <날조를 일삼는 스탈린 일당>에서 재인용


다시 확인하다시피 당의 이 결정을 가지고 트로츠키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로 간 것이었다. 한편, 몇 년 후 이 사안을 반()트로츠키 캠페인 아이템으로 들고 나올 스탈린은 그 당시엔 다음처럼 트로츠키의 입장에 공감한 바 있었다.

 

“191821일 회의. 스탈린 동지: 이 어려운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은 트로츠키의 중간 입장을 통해 제시되었다.”같은 책


다음은 E. H 카아의 글에서도 묘사됐던 223일 회의 기록이다.

 

“1918223일 회의.

 

스탈린 동지: 우리는 조인할 필요가 없다. 강화협상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레닌 동지: 조인하지 않을 가능성을 주장하는 스탈린은 틀렸다. 이 조건에 우리는 조인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조인하지 않는다면, 3주 안에 소비에트 권력의 사망신고서에 사인해야 할 것이다. 독일 혁명은 아직 무르익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여러 달 걸릴 것이다. 그 조건을 우리는 수용해야 한다.

 

우리츠키 동지: (스탈린을 반박하며) 제안된 조건은 받아들이거나 거부하거나 해야 한다. 협상을 지속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같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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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H. 카아와 당 회의록의 증언 그리고 트로츠키의 증언은 기본 사실에 있어 상호 일치한다. 그리고 도이처의 기록과도 모순되지 않는다. 위의 넷은 다음 명제를 확인시켜 주고 있다. , ‘트로츠키가 당의 결정을 어겨서 엄청난 재앙을 초래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스탈린은 자신이 강화조약의 대표가 아니었다는 이유로, 현장에서 책임지고 뛰지 않았다는 이유로몇 년 뒤에 슬쩍 빠져나와, 트로츠키를 당의 결정을 어기고 조약에 서명하지 않았다(스탈린).”라고 기소한다. 그리고 그것을 국제주의가 열거하는 책들을 포함해 각 나라의 스탈린주의 공산당과 스탈린주의 출판물들이 반복하고 국제주의그 문서들을 들며 스탈린과 똑같은 문장을 구사하며 명백한 사실이라고 주장한다. ‘국제주의가 지금 하고 있는 말들은 전혀 새로운 주장이 아니다. 대부분 80년 동안 재탕 삼탕 되어 온 말들이다. 날조된, 다만 소련 등의 국가권력과 그들 사이의 상호보증으로 연명되어 온.

 

 

2. 노동조합 논쟁

 

논쟁의 배경

 

노동조합논쟁1920년 가을부터 신경제정책이 도입된 이듬해 19213월까지, 노동조합의 자율성과 규율성의 한도를 둘러싸고 진행된 논쟁이다. 당시 러시아는 잔혹한 내전을 치르고 있었다. 혁명 러시아의 모든 역량은 가장 우선적으로 내전의 승리를 위해 배치되었다. 적군사령관이자 전쟁장관이었던 트로츠키는 파괴된 철도를 복구하는 데에 노동조합을 동원하면서, ‘전시공산주의 시기노동조합은 국가기구의 하부기구처럼 동원될 필요성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노동조합의 군사적 동원과 국가기구화 주장은 노동조합 활동가들의 불만을 불러왔고, 레닌은 이러한 강압적 방식이 관료화의 증상이라고 보고 날카롭게 비판했다. 이는 위태한 러시아 상황과 결합하여 격렬한 당내 논쟁으로 번졌다.

 

이 논쟁은 7~8개의 분파가 만들어질 정도로 커졌고 결국 1921310차 당 대회에서 크게 세 분파로 압축되었다.

 

트로츠키 분파는 노동자국가에서 국가와 분리된 노동자의 이익은 존재하지 않는다. 노동계급의 역사적 이익은 노동자국가와 국가를 이끌고 있는 전위당을 통해 옹호된다. 따라서 노동조합의 완전한 국가기구화, 노동조합이 정부기구에 흡수되는 것을 통해 노동계급의 이익이 옹호될 수 있다.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국가를 대변해 노동규율을 확립해 생산성 향상시키는 역할을 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한편, 실랴프니코프와 콜론타이가 이끄는 노동자반대파는 산업운영을 노동조합과 공장위원회가 담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정부와 당이 노조를 감독하는 것에 항의했다. 이들은 생디칼리즘적 경향을 대표했고 임금정책도 평등주의를 강화할 것을 주장했다.

 

레닌 분파는 노동조합의 중립성을 거부하고 노동규율 확립과 생산성 향상의 임무를 달성하기 위한 역할을 해야 하지만 대중과의 연관, 접근방법의 문제에서 완전한 국가기구화에 반대했다. 노동조합은 국가기구로서 강제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을 위한 기구이며 노동자들을 설득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레닌은 이미 노동조합이 상당 부분 국가 정책을 대변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소련은 농민 대중이 우세한 나라이며 관료적으로 일그러진 노동자국가이기 때문에 노동계급은 국가로부터도(그 자신의 국가임에도) 자신을 방어할 조직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소련의 관료화 경향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기도 했다.

 

모든 산업 노동자를 포괄하는 노동조합은 지금 지배하고 통치하는 계급의 조직입니다 이 계급은 독재 체제를 확립했고 국가를 통해 강제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노동조합이 국가기구는 아닙니다. 노동조합은 강제력을 행사하려고 만들어진 기구가 아니라 교육을 위한 기구입니다. 노동자들을 끌어당기고 훈련하는 기구입니다. 노동조합은 사실 학교입니다.지금 우리 노동자 국가에서는 대규모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가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 프롤레타리아의 임무가 됐고, 우리의 임무는 이 노동자 조직들을 이용해 노동자들을 노동자 국가로부터 보호하는 한편 노동자들로 하여금 우리 국가를 보호하게 하는 것입니다.”레닌, <노동조합, 현재 상황, 트로츠키의 오류>, 레닌평전 4에서 재인용

 

레닌과 트로츠키 사이에 입장 차이가 있었지만 이것은 노동자반대파와의 차이처럼 근본적인 것은 아니었다. 레닌과 트로츠키 모두 경제 재건을 위해 일인경영제를 도입하는 등 노동규율 확립을 위한 투쟁의 필요성을 인식했다. 반면 노동자반대파의 생디칼리즘은 당시 봉착한 경제적 혼란을 해결할 수 없었다.

 

1921310차 당 대회에서 레닌의 주장이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트로츠키도 레닌의 주장이 옳았음을 인정하며 이 논쟁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3년간에 걸쳐 내전을 경험한 노동자 대중은 점차 군대식 규율 방법에 복종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져 갔다. 레닌은 그 정확한 정치적 본능으로 위기의 순간이 바싹 다가오고 있는 것을 알아챘다. 내가 순수하게 경제적인 고려에서 전시 공산주의에 입각해 노동조합에서 한층 더 집중적인 노력을 끌어내려고 애쓰고 있을 때, 레닌은 오히려 정치적인 배려에 이끌려 군대식 압력을 경감하는 방향을 취했다.”―『나의 생애

 

그러나 당시의 내전시기 경제상황을 생각할 때 트로츠키의 노동계급의 자발적 희생과 영웅적 분발 주장 역시 이해할만한 것이었다. 전시 공산주의 시기에 권위와 혁명적 희생과 군사적 규율을 강조했던 트로츠키였지만, 내전이 끝난 이후로는 특권을 향해 몰려드는 관료집단에 맞서 노동자 민주주의 방어를 위해 투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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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주의자들에겐 이러한 논쟁의 배경이나 내용은 중요하지 않다. 그저 레닌과 그 문제로 다투었다는 사실만 중요하다. 레닌과 다투었으므로, 트로츠키는 레닌에 대한 적대자이고 스탈린을 통해 레닌이 계승되었다는 것만 말하고 싶은 것이다.



스탈린 관료집단의 노동자 민주주의 분쇄

 

국가로부터, 특히 관료적으로 일그러진 국가로부터 레닌이 방어하려 했던 노동조합의 자율성은 조만간 스탈린이 중심이 된 관료집단에 의해 처참히 분쇄되었다는 사실은 생각지도 않는다. 관료집단에 맞선 거의 최후의 저항세력이었던 트로츠키 좌익반대파가 제거된 후, 노동조합 민주주의는 스탈린 관료집단에 의해 가루처럼 바수어졌다. 관료집단의 통치에 대한 잠재적 도전을 제거하기 위해, 노동조합 최고 책임자였던 톰스키 같은 인물들을 처형하는 등 노동조합의 자율성을 거세하고 국가화하였다.

 

당내 우파의 거두이자 노동조합 최고 책임자인 톰스키 등을 제거하고 노조의 영향력을 축소하기 위해 스탈린은 1928년 봄부터 노조를 재편하는 작업에 나서게 된다. 단순한 지도부 교체를 넘어 조직 전반의 인적, 기능적, 구조적 재편이었다.”―『스탈린 체제의 등장과 소련 노동조합의 재편, 조준배

 

신경제정책 초기에는 강제조정을 노동조합에 부과하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으나, 192512월 제14차 당 대회에서 강제조정안이 채택되었다. 그리고 경제행정부서에 강제조정 요청권을 부여했으며, 지역조정위원회에서 기업 관리자층의 영향력을 강화시켰다. 이제 대부분의 노사분규는 교섭에 의한 타협보다는 강제조정에 의해 해결되었다.”―「1920년대 초 소련의 노동조합 논쟁과 이행기 국가 문제, 박승호

 

“1930년대의 급속한 성장을 위해서, 1920년대에 비해서 노동자의 권리와 노동조합의 민주주의를 약화시키고, 관리자의 권한을 강화시켰다.”―「흐루쇼프 수정주의의 발생과 소련에서의 반혁명(201712), 권정기


혁명 방어를 위한 일시적 긴급조치가 아니라 스탈린 지배체제 아래에서 노동자 민주주의는 상시적으로 실종되어 버렸다. 그 자리엔 무조건적 복종을 의미하는 철의 규율과 개인숭배가 들어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신봉하는 그 우상이 살해한 노동조합의 시체를 옆에 두고 노동조합 논쟁을 들먹인다. 부끄러움을 통 모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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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해방 2018.05.18 15:25
    혹시
    노정신의

    http://mlkorea.org/v3/?p=5950

    이 글 보셨나요?

    헛소리로 트로츠키주의를 비방하는데 반박 안하이
    시나요?
  • ?
    볼셰비키 2018.05.19 04:06
    해방님 또한 즉각 "헛소리"라고 인식한다면, 굳이 반박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이미 위글에서 반박한 내용의 재탕이어서 새로울 것이 없습니다.
    친분관계를 떠나 혁명적 대의를 우선시하고 문제를 객관적이고 논리적으로 고찰하는 분이라면, 우리 글과 노정신 글의 비교 검토를 통해, 대부분 님과 같은 결론에 어렵지 않게 도달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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