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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lle1917@gmail.com

* 원출처 – 국제볼셰비키그룹(IBT)


붉은 10월을 기리며

러시아혁명의 역사적 위치


 

<차례>

서문

1부: 노동계급은 어떻게 권력을 장악했는가?

자본주의적 발전과 세계 대전2월 혁명과 이중권력임시정부의 황혼‘세계를 뒤흔든 열흘’

2부: 혁명의 진화

혁명이란 무엇인가?/ 유물사관의 시각/ 부르주아혁명 시기/ 프랑스혁명

3부: 프롤레타리아혁명의 등장

1848년 혁명/ 마르크스와 프롤레타리아혁명/ 파리코뮌/ 1905년, 러시아혁명의 서막/ 프롤레타리아혁명

4부: 10월 혁명의 교훈

혁명과 국가/ 프롤레타리아독재/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혁명, 의식, 정치조직/ 노동귀족과 전위당/새로운 10월 혁명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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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력(舊曆) 1917년 10월 25일, 러시아 노동계급은 빈농의 광범한 지지 속에서 국가권력을 장악했다. 역사에서 처음으로 성공한 사회주의 혁명은 ‘세계를 뒤흔들었다.’ 새로 탄생한 소비에트 노동자국가는 세계 곳곳의 피억압 인민에게 희망의 횃불로 타올랐다. 뒤이은 관료적 퇴보에도 불구하고, 소비에트연방은 1991년 붕괴 이전까지 세계 정치질서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볼셰비키당의 첫째가는 지도자 V. I 레닌의 이름을 딴 혁명적 사회주의 정치노선과 조직 형태를 일컫는 레닌주의의 성공은 나름의 자본주의 전복 전략을 내세우던 여타 사회주의 경향들을 시들게 했다.

20세기 동안 레닌주의를 표방했던 조직들 가운데 다수가 진정한 볼셰비즘과 무관하지만, “공산주의 유령”은 여러 세대 동안 세계 지배계급의 꿈자리를 뒤숭숭하게 만들었다. 동유럽, 동아시아, 쿠바 등에, 퇴보한 노동자국가 소련을 모델로 하여 ‘공산주의’를 내세운 나라들이 들어선 뒤 특히 그러했다. 제3세계의 소부르주아 급진주의자들은 제국주의 아성 가운데 하나를 전복했던 유일한 정치조직과 동류가 되고자, 사회주의자 또는 ‘맑스-레닌주의자’를 표방했다.

수십 년 동안 이어진 스탈린주의 관료 통치 이후 1989년과 1991년 소비에트 블록이 붕괴되고, 중국과 여타 기형적 노동자국가에서 자본주의 부활을 도모하는 지속적 시도 이후, 좌익이건 우익이건 부르주아 지식인들은 레닌주의는 이제 끝났다고 선언했다. 모스크바를 지지하는 유럽 등지의 공산당들은, ‘자유 시장’을 노골적으로 받아들이며, 해체되거나 급격히 우경화했다. 로버트 서비스의 『세계 공산주의 역사Comrades! A History of World Communism』 서평에서 도날드 사순은 “1917년 11월 볼셰비키가 겨울궁전을 점령하면서 공산주의 운동이 탄생했고,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1991년 12월 소련이 붕괴되던 시점에 공산주의는 사망했다.”라고 주장했다(<포린 어페어스Foreign Affairs>, 2007년 7/8월). 미 대통령 조지 W 부시는 “소련 제국”의 붕괴로 미국이 지배하는 “새로운 세계 질서”가 도래했다고 천명했다.

이 때다 싶은 비평가와 정치가 다수는 더 나아가, 자본주의를 사회주의로 대체하려는 시도는 불가능했거나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견해는 노동계급 선진부위 가운데에서도 넓게 퍼졌다. 1989년 미국 국무부 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악명 높은 『역사의 종말』을 출판했고, 그 저서에서 “정치경제적 자유주의의 명백한 승리” 즉, 자본주의 민주주의의 승리로 역사 과정은 정점에 도달했다고 주장했다.

부르주아지의 자아도취에 취한 큰소리는 급속히 하강하는 세계 자본주의 질서의 가혹한 현실과 마주하면서 수그러들었다. 반혁명 이후 몇 십 년 동안 드러난 것은 레닌주의나 사회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폐물이라는 사실이었다. 자본주의 운동 법칙은 점점 더 강력한 경제, 사회, 정치, 환경 재앙을 낳았다. 제국주의 전쟁, 쉽게 치료될 수 있는 병이나 영양부족으로 죽는 수많은 사람들, 환경 악화, 민주적 권리와 자유의 쇠퇴, 호된 금융 충격으로 인한 경제 침체 등과 그 밖의 쇠퇴한 자본주의로 인한 부산물은 매년 불길한 그림자를 더욱 짙게 드리우며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그러나 점점 안 좋아지는 상황으로 가장 크게 영향 받는 피억압인민의 대응은 사민주의적 개량주의와 정체성 정치의 혼합물인 타락한 자유주의 지식인의 헛소리로 인해 파편화되고 오염되었다. 이로 인해, 노동자는 자본주의와 충돌하지 않을 수 없는 위치로 몰아가는 지배엘리트의 이해와 정면으로 대치되는 특별한 사회 계급이며 노동계급의 권력 장악이 계급투쟁의 궁극적 귀결점이라는 사상은 주변화되었다. 인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객관적 조건은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었으나 주관적 필요조건은 거의 존재하지 않다시피 하는 기묘하고도 비참한 상황과 직면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공은, 사회주의 투쟁을 궁극까지 정력적으로 수행할 준비가 되어있는 권위 있는 지도부와 대중조직이라는, 혁명의 주관적 요소에 달려있다.

러시아혁명의 역사적 의미는 그것이 단지 ‘역사적’이지 않다는 사실에 있다. 100년 전 있었던 노동계급의 권력 장악은 객관적 조건과 걸맞은 혁명의 주관적 조건이 어떻게 형성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실천적 사례이다. 자본주의로부터 공산주의 생산양식으로 이행은 인류가 살아남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걸음이다. 레닌주의 정당 지도하의 노동계급 혁명이라는 사상을 부정하는 부르주아 사상가와 이전 사회주의자들은 그 어떤 대안이나 희망도 제공하지 못한다. 만약 인류가 그 어떤 미래를 가지고 있다면, 러시아 혁명은 세계 사회주의 혁명을 알리는 첫 번째 포성으로 재조명되어야 한다.

 


‘붉은 시월’은 단지 백 년 전의 매력적 이야기인 것만이 아니다. 객관적 조건뿐 아니라 혁명적 주체의 적극적 개입으로 형성된 핵심 사건들과 그 발전의 논리는 어떻게 자본주의가 세계적 규모에서 전복될 것인지를 보여주는 소중한 교훈이다.


자본주의적 발전과 세계 대전

러시아혁명은 자본주의가 혁명적으로 전복된 본보기를 제공한다. 그러나 러시아가 자본주의적 발전에 본보기인 나라는 아니었다. 마르크스주의자는 수십 년 동안, 혁명은 우선적으로 자본주의 산업이 앞선 나라 즉, 영국, 독일, 프랑스 또는 미국 등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전망해왔다. 말년의 마르크스가 후진국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발생할 가능성을 논의하긴 했으나, 사회주의 운동의 주류는, 한편으로 차르 왕조가 혁명에 임박했다는 것을 인식하면서도, 그 혁명은 러시아를 봉건적 후진성에서 건져내고 자본주의 발전의 길로 인도하는 정도로 제한될 ‘부르주아적’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같은 생각은 러시아를 고립된 사회체제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19세기 말, 존재하는 경제체제를 사회, 경제, 정치적 관계로 얽어 묶으면서, 자본주의는 완전한 세계 체제가 되었다. 레닌과 그밖의 몇몇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는 19세기 후반 가장 높은 발전단계 즉, 제국주의가 되었다는 인식에 도달했다. 그 체제 속에서 선진 자본주의국가들은 ‘미개발된’ 나라들을 경제적으로 지배한다. 제국주의 ‘금융자본’에 대한 예속은 식민지나 반(半)식민지 나라들의 운명이었다. 뒤늦게 출발했기 때문에 후자는 저개발 상태에 남을 것이었다. 보다 강력한 선진 경제들은 이미 그 국경 너머 세계를 다 개척했다. 그리하여 더 이상은 기존의 과정을 따른 온전히 ‘순수한’ 자본주의적 발전은 가능하지 않게 되었다. 정치와 지역 패권을 다툰 가장 강력한 나라들끼리의 경쟁은 1차 세계대전을 낳았다. 첫 번째 제국주의 상호 군사 충돌이었고 그것은 부르주아적 생산양식이 역사적으로 낡아버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러시아는 그 전쟁에 뛰어들었다. 압도적 다수의 빈농을 거느린 뒤떨어진 반(半)봉건 제도와 (대부분 외국인 소유의) 선진 자본주의 기업들의 결합이 러시아 경제의 특징이었다. 이를, 세계무대에서 독립적 역할을 하는 강력한 국가가 지배하는 나라였다. 빼어난 저작인 『러시아혁명사(1930)』에서, 위대한 혁명가 트로츠키는 어떻게 뒤늦은 자본주의적 발전이 러시아를 사회주의 혁명에 무르익은 나라로 만들었는지를 설명한다.

“역사의 법칙은 현학자의 도식과는 전혀 다르다. 발전의 불균등성은 역사의 가장 일반적 법칙이다. 그러나 이것은 후진국의 역사발전에 가장 날카롭고 복잡하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 외세의 압력에 직면하여 후진국의 문화는 도약을 강요받는다. 따라서 보편 법칙인 발전의 불균등성에서 결합발전 법칙이라고 부를 수 있는 또 다른 법칙이 따라 나온다. 즉, 역사의 각 단계들이 겹치게 되면서 현대적인 형태들이 낡은 형태들과 혼합된다. 이 법칙이 내포하고 있는 구체적 내용 전체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러시아 또는 이류, 삼류 아니 이보다 더 후진적인 나라의 그 어떤 역사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트로츠키에게 “러시아 역사의 근본적이면서도 가장 일관된 특징은 사회 발전의 느린 속도이다. 이 결과 경제의 후진성, 사회형태의 원시성, 문화수준의 낙후성이 초래되었다.” 세계무대에서 자본주의 불균등 발전을 통해, 이 후진성은 선진 자본주의 구조와 얽힌다. 보다 발전된 서구 유럽의 중심부에 상당히 종속되어 있었으면서도, 러시아 자본주의는 제국 주변의 더 약한 나라들을 착취하며 이득을 얻고 있었다. 불균등 결합 발전은 매우 폭압적인 차르 전제에 맞선 혁명적 분출에서, 비교적 작은 규모이지만 정치적으로 발전된 프롤레타리아가 핵심적 역할을 하도록 했다. 러시아 자본주의의 선진적 측면은 현대적 계급투쟁의 토대가 된 한편, 후진성은 그 투쟁을 매우 날카롭고 급박하게 만들었다.

제국주의 동맹의 일원으로서 세계대전의 승자가 되었지만, 러시아는 그 전쟁으로 인해 탈진 상태에 이르렀다.

“군수물자와 자금 면에서 러시아는 동맹국들에게 노예처럼 종속된 존재에 불과하다. 이 사실이 전쟁과 함께 갑자기 드러났다. 이것은 러시아가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게 전반적으로 종속되어 있음을 군사적으로 표현한 것일 뿐이었다. 그러나 동맹국들의 지원이 상황을 호전시키지는 않았다. 탄약의 부족, 적은 수의 탄약생산 공장, 탄약수송용으로는 너무도 빈약한 철도망 등으로 러시아의 후진성은 곧바로 패배라는 익숙한 단어로 번역되었다. 전쟁 패배로 러시아 자유부르주아 계급은 선대가 부르주아 혁명을 완수하지 못했으며 후대가 역사에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프랑스 사회주의 지도자 줄 게드는 “전쟁은 혁명의 모태이다.”라고 얘기한 바 있다. 1차 세계 대전은 러시아 사회에 엄청난 압력을 가했다. 막대한 전쟁 사상자(2백5십만 명 사망)를 낳았을 뿐만 아니라 후방은 더욱 혹독해진 가난과 곤경에 시달려야 했다. 전쟁 압력이 1917년 2월 혁명을 촉발하자, 훗날 레닌이 언급한 ‘제국주의 사슬’ 중 ‘가장 약한 고리’가 끊어졌다.

 

2월 혁명과 이중 권력

비록 사회적 긴장이 치솟고 상당 규모의 사회혼란이 있으리라고 예상되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현실로 닥친 혁명은 놀라운 것이었다. 혁명 한 달 전, 스위스에 망명 중인 레닌이 자기 생전에 혁명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말한 일은 유명한 일화이다.

트로츠키는 어떻게 상황이 그토록 빠르게 전개되었는지를 설명한다.

“2월 23일은 국제 여성의 날이었다. 사회민주주의 운동권은 늘 그랬듯이 이 날을 집회, 연설, 유인물 배포 등으로 기념할 생각이었다. 이날이 혁명을 시작하는 첫날이 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날 파업을 촉구한 조직은 하나도 없었다. 더욱이 대단히 전투적인 볼셰비키당 뷔보르그 지구위원회 노동자들은 모두 파업에 반대하고 있었다. 이 지구위원회 지도자 카유로프는 대중의 정서가 아주 긴장되어 있었다고 말했다. 어떤 파업도 공공연한 전투로 급격히 상승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 위원회는 전투적 투쟁으로 돌입하기에는 때가 무르익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당은 역량이 충분하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병사들 사이에서 지지자들을 별로 확보하지 못했다. 이들은 파업을 촉구하기보다 미래의 혁명 투쟁을 준비하기로 결정했다. 2월 23일 전야에 뷔보르그 지구위원회의 방침은 이러했고 모두들 동의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23일 아침, 이 방침은 지켜지지 않았다. 여러 공장의 여성 섬유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갔다. 그리고 지원을 호소하기 위해 이들은 금속노동자들에게 대표들을 보냈다. 카유로프는 이렇게 말한다: “볼셰비키들은 마지못해 지원에 동의했으며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 소속 노동자들도 이에 동조했다. 그러나 대대적인 파업이 일어나면 모든 사람들을 거리로 불러 이들의 선두에 서야한다.” 카유로프는 이렇게 하기로 결심했고 뷔보르그 위원회도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리로 나서자는 생각이 오랫동안 노동자들 사이에서 무르익고 있었다. 그러나 거리로 나서는 순간 그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몰랐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2월 혁명은 혁명조직들의 반대를 극복하고 아래에서 시작되었다. 노동계급의 가장 억압받고 핍박받는 여성 섬유노동자들이 자진해서 선두에 나섰다. 물론 이들 중에는 병사 부인들이 많이 있었다. 너무 길게 늘어선 빵 배급 줄이 혁명을 촉발시킨 마지막 자극이 되었다. 이날 남녀 모두 합쳐 약 9만 노동자들이 파업에 참가했다. 데모, 집회, 경찰과의 대치 과정에서 전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위는 대규모 공장들이 밀집한 뷔보르그 지구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페테르부르크를 가로질렀다. 비밀경찰의 증언에 의하면 다른 곳에서는 파업이나 시위가 없었다. 이날 경찰을 돕기 위해 군대가 투입되었으나 이들의 수는 많지 않았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이들과 대치하지 않았다. 비(非)노동자를 포함한 여성의 무리가 빵을 요구하며 시의회 건물로 몰려갔다. 그러나 이것은 염소 수컷에게 젖을 달라고 하는 것과 같았다. 도시 여기저기에 붉은 깃발이 등장했다. 깃발의 구호는 노동자들이 왕정이나 전쟁이 아닌 빵을 원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렇게 해서 국제 여성의 날은 열정적으로, 그러나 사상자 없이 성공적으로 지나갔다. 저녁때가 되도록 이날의 진짜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아차린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대중의 혁명적 열기는 제한되거나 가라앉지 않고 계속 쌓여갔다. 하나의 성과에 새로운 성과가 보태졌다.

“그 다음날 이 투쟁은 수그러들기는커녕 두 배나 커진다. 2월 24일 페테르부르크 공업노동자의 약 절반이 파업에 참가한다. 아침에 노동자들은 공장에 출근하여 조업에 나서는 대신 집회를 연다. 그리고 도시 중심지로 행진한다. 이 운동에 다른 노동자 지구들과 인민의 새로운 부위가 합류한다. ‘전제 타도!, 전쟁 종식!’의 커다란 구호 소리에 묻혀 ‘빵을 달라!’는 구호는 들리지도 않는다.”

“25일이 되자 파업은 확산되었다. 정부 수치에 따르면 24만 명의 노동자가 파업에 참여했다. 노동자의 가장 후진적 부위들이 선진 부위를 따르고 있다.”

“27일 아침 노동자들은 다시 공장으로 줄지어 들어갔다. 그리고 공개 집회를 열어 투쟁의 지속을 결의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뷔보르그 지구 노동자들은 강한 결의를 보였다. 그러나 다른 지구들의 아침 집회도 열기로 가득했다. 투쟁을 계속한다! 그러나 이것은 오늘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가? 총파업으로 대규모 노동자들이 혁명 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시위대는 군대와 충돌했다. 오늘도 투쟁을 계속한다는 것은 무장봉기를 촉구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 내용을 명확히 표현하지 못했다. 무장봉기는 사태의 전개 속에서 불가피하게 도출되었다. 혁명정당이 무장봉기를 촉구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파업노동자와 시위대가 국가의 핵심인 ‘무장 기구’ 군대와 경찰을 제압하자, 결정적 국면이 전개되었다. 명령을 수행하면서 시위대를 학살하지 않고, 하급 병사들은 그 총구를 명령을 내리는 상관에게 돌리면서 혁명진영으로 합류했다. 구 권력의 폭압기구는 바스라졌고 혁명이 승리했다. 차르는 퇴위했고 뭔가 불확실한 순간이 다가왔다. 기존 정권이 무너진 자리에 무엇이 들어설 것인가?

2월 혁명은 기본적으로 ‘아래로부터’의 혁명이었다. 중앙 지도부가 없는 반쯤은 자발적인 봉기였다. 그러나 정치는 진공상태를 용납하지 않는다. 그리고 아나키스트가 말하는 ‘지도자 없는’ 지속적인 격동은 허무맹랑한 몽상일 뿐이다. 러시아 대중은 낡은 정권을 해소하면서, 누구에게 그 권력을 쥐어줘야 하는지를 살폈다. 처음에 그들은 두마(의회)의 비겁한 부르주아 정치인들을 발견했다. 그들은 차르 정권 내에서 잘 지냈고 그런 점에서 그들의 차르 비판은 허세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혁명을 원하지 않았으며 사실 거리에서 벌어지는 일에 잔뜩 겁먹었다. 그러나 타우리데 궁전에 있던 부르주아 의원들은 혁명 대중에 떠밀려 권력을 잡을 수 있었다. 부르주아 ‘임시정부’가 들어서 차르 정부가 놓아버린 권력의 고삐를 움켜쥐었다. 한편, 정치권력의 또 다른 잠재적 중심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 시각, 혁명은 같은 건물의 덜 화려한 곳에서 또 다른 기관을 수립하고 있었다. 혁명 지도자들은 이 기관을 발명할 필요가 없었다. 1905년 소비에트의 경험은 영원히 노동자의 의식 속에 새겨져 있었다. 전시(戰時)에조차 운동이 상승하면 언제나 소비에트 사상은 자동적으로 부활했다. 소비에트의 역할에 대한 평가가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사이에 달랐고 사회혁명당은 소비에트에 대해 일관된 평가를 내놓지 못했다. 그러나 소비에트라는 조직 형태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었다. 감옥에서 풀려난 멘셰비키들은 군사산업위원회 회원들과 함께 타우리데 궁전에서 우파를 포함한 노동조합과 협동조합 운동의 지도자들, 멘셰비키 의원단의 지도자 치헤이제와 스코벨레프 등을 만났다. 그리고 곧바로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 임시집행위원회’를 수립했다. 이 임시집행위원회는 이날 하루 동안 주로 과거 혁명가들로 채워졌다. 이들은 대중적 기반이 없었으나 여전히 과거의 ‘명망’을 가지고 있었다. 볼셰비키들도 포함된 집행위원회는 노동자에게 대표를 즉시 선출할 것을 요청했다. 같은 날 저녁, 타우리데 궁전에서 첫 회의가 열렸다.…”

“…소비에트의 임무와 기능은 대중의 압력을 받아 끊임없이 증대한다. 이제 소비에트는 의심의 여지없는 혁명 중심부이다. 지금부터 노동자, 병사 그리고 곧이어 농민들도 오직 소비에트에만 의존할 것이다. 이들의 눈에 소비에트는 모든 희망과 권위의 초점이 되어 혁명의 화신이 된다. 그리고 유산 지배계급 대표들이 비록 분해서 이를 갈면서도, 분쟁 해결을 위해 소비에트에 보호와 조언을 구할 것이다.”


공장위원회와 지역 소비에트는, 부르주아 임시정부와 지역 권위기구가 아니라,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를 노동자, 농민, 병사 대표의 정점으로 여겼다. 이러한 ‘이중권력’ 정세는 본질적으로 불안정하다. 그러나 대중적 지지를 누리고 있던 개량주의 정당들이 양쪽 기관을 실질적으로 좌지우지하면서 자본주의를 구원하는 역할을 확고히 하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 모순이 감춰졌다. 초기에, 임시정부는 거의 별 볼일 없었다. 그러나 개량주의자들이 그것을 진짜로 만들어주었다. 그들은 노동대중 내 상당한 지지층을 이끌면서 이후 몇 달 동안 대규모로 임시정부에 들어갔다.

레닌이 아직 망명지에 있던 초기에, 볼셰비키는 임시정부를 비난하면서 소비에트에 ‘민주공화국’ 건설을 위한 제헌의회 소집을 요구했다. 앞으로의 혁명은 ‘부르주아적’일 것이고 ‘노동자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를 건설해야 한다는 볼셰비키 이전 노선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3월 13일 망명지에서 돌아온) 당 지도부 카메네프와 스탈린의 지도로 이 노선은 “노동계급과 혁명적 농민을 만족시키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한”이라는 단서를 붙여, “실천적으로 임시정부를 지지한다.”라는 노선으로 바뀌었다(E. H. 카, 『볼셰비키 혁명』 1권 1917~1923). 레닌은 이 정치적 동침을 격렬히 반대했다. 4월 3일 페트로그라드에 도착한 그는 논쟁적인 「4월 테제」를 발표했다. 그것은 노동계급의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새로운 방향을 당에 제안하는 것이었다.

10개 가운데 처음 3개의 테제는 임시정부를 거부하면서 러시아의 전쟁 지속을 날카롭게 비난하는 것이다.

“1) 그 정부의 자본가적 속성으로 인해 르보프와 그 패거리들의 새 정부 아래에서도 러시아는 약탈적인 제국주의 전쟁을 수행하고 있다. ‘혁명적 패전주의’에 대한 한치의 타협도 용납하지 않는 것이 이 전쟁에 대한 우리의 태도이다.

…자본과 제국주의 전쟁 사이의 끊을 수 없는 연관을 인민대중에게 설명하고 자본의 전복 없이는, 전쟁을 끝내고 진정한 민주적 평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필요하다.…

2) 현재 러시아 상황의 특이성은 나라가, 프롤레타리아의 불충분한 계급의식과 조직화로 인해 부르주아지의 손에 권력을 주었던 혁명의 첫 단계로부터, 프롤레타리아 및 농민의 극빈계층이 권력을 장악해야 할 혁명의 두 번째 단계로 넘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3) 임시정부를 지지하지 않으며, 특히 합병지의 포기와 관련하여, 임시정부의 모든 약속의 뻔뻔한 기만성을 분명히 드러내어야 한다. 이 자본주의 정부에게 제국주의 정부이기를 그만두라는, 용서할 수 없는 환상을 자아내는 ‘요구’ 대신에 폭로를.


다음 다섯 개의 테제는 부르주아 임시정부를 새로운 노동자 정부로 대체할 필요성을 설명한다.

4) …우리가 소수파인 한 우리는, 인민들이 경험을 통해서 자신들의 오류를 극복할 수 있도록, 잘못들을 폭로하고 비판하는 작업을 계속하며, 동시에 전체 국가권력을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로 이전시켜야 할 필요성을 설득한다.

5) 의회제 공화국이 아니라―노동자 대표 소비에트에서 의회제 공화국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퇴보이다―전국에 걸쳐 머리에서 발끝까지 노동자·농업노동자·농민 대표 소비에트공화국이 되어야 한다.

6) 농업강령에서, 강조점을 농업노동자 대표 소비에트로 이전할 것.

7) 나라 안 모든 은행을 단 하나의 국립은행으로 즉각 합병하고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가 통제할 것.

8) 우리의 당면 임무는, 사회주의를 ‘도입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사회적 생산과 생산물의 분배를 즉각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가 통제하도록 하는 것이다.


레닌은 노동자국가 수립을 위해 이중권력 상황을 끝내는 두 번째 혁명,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혁명을 옹호했다. 이는 ‘노동자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라는 (비록 추상적이지만) 당의 이전 정식과의 결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독일 같이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의 성공적 혁명 속에서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단계 이전에 자본주의적 발전이 먼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2월 혁명과 이후의 정치적 전개는 이 2단계 발전의 환상적 성격을 드러내 보였다. 역사 무대에 올라선 노동계급이 자본주의 경계를 넘어서는 자신의 요구를 제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매우 논리적이다. 레닌은 경제의 사회주의적 변화를 개시하기 위한 노동계급의 권력 장악(노동자독재)을 제기했다. 그 과정이 완성되기 위해선 혁명이 선진 자본주의 국가로 확대되는 것이 필요했다.

레닌의 마지막 테제 두 개는 당 총회에 당명과 강령을 새롭게 바꾸고, 중심 지부들이 자기 나라 지배계급의 전쟁 정책을 지지했던 제2인터내셔널을 대체할 새로운 국제조직 출범을 제안하는 것이었다.

6월, ‘전러시아소비에트대회’ 첫 회의가 열렸다. 전국의 노동자 대표들이 모였다.

“투표권을 가진 822명의 대표 가운데, 사회혁명당은 285명, 멘셰비키는 248명 볼셰비키는 105명이었다. 약 150명의 대표는 다양한 소수 정당에 속했고, 45명은 무소속이었다. 지방 소비에트 많은 곳에서 정치적 소속감은 여전히 유동적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볼셰비키 지도자들은 온힘을 기울여 참여했다. 트로츠키와 루나차르스키는 ‘통합사회민주당[메즈라욘치 그룹]’의 대표 10명 가운데 있었다. 그들은 3주 동안의 총회에서 볼셰비키를 확고히 지지했다.”—E. H. 카, 『볼셰비키 혁명』 1권 1917~1923


총회는 ‘중앙집행위원회’를 선출했고, 250명의 위원 중 볼셰비키는 35명이었다.

 

임시정부의 황혼

볼셰비키는 소수파로 오래 남지 않았다. 전쟁이 계속 되고 생활조건이 악화되자, 노동인민들은 ‘온건 사회주의자’들의 정치적 파산을 더 분명히 이해하게 되었다.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이전해야 한다는 레닌의 혁명정책으로 무장한 볼셰비키는 프롤레타리아트 내에서 세를 얻었다. 볼셰비키 지도부는 더 유리한 조건이 될 때까지 불만을 억제하려 했지만, 갈리시아의 새로운 군사 캠페인으로 자극 받는 페테르부르크 노동자들은 이제 볼셰비키를 확고히 지지하면서 임시정부에 맞선 무장봉기로 밀어붙였다.

“이즈베스티아지는 7월 3일의 사건 개요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오후 5시에 무장을 갖춘 제1기관총 연대가 거리로 나왔다. 뒤이어 모스크바연대, 수류탄연대, 파블로프스키연대 등의 일부가 거리로 나왔다. 노동자 군중이 이들과 합류했다. … 밤 8시 경 연대에 소속된 부대들이 하나씩하나씩 크셰신스카야 궁전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들은 철저히 무장하고 있었으며, 소비에트 권력을 요구하는 붉은 깃발과 플래카드를 들고 있었다. 발코니에서 연설이 있었다. …10시 30분 타우리데 궁전 앞 광장에서 집회가 열렸다. …병사들은 집행위원회에 보낼 대표단을 선출하고 이렇게 요구했다: ‘10명의 자본가 장관 경질,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이전, 공세의 중지, 부르주아 언론의 인쇄소 몰수, 토지의 국유화, 생산의 국가통제.’” 연대 전체를 “연대의 일부”라고 축소하고, 모든 공장 노동자를 “노동자 군중”이라고 바꿔친 것을 제외하면 체레텔리와 단의 공식 기관지는 시위의 전반적 상황을 왜곡하지 않았다. 특히 이 신문은 시위의 두 중심부인 크셰신스카야 궁전과 타우리데 궁전을 정확히 주목했다. 그날의 시위는, 정신적으로나 물리적으로 적대적인 이 두 궁전을 축으로 진행되었다. 볼셰비키당의 본부인 크셰신스카야 궁전에서는 지시, 지도력, 영감을 불어넣는 연설을 기대했고, 소비에트 본부인 타우리데 궁전에서 이들은 요구사항을 제시하고, 집행위원회 지도자들을 약간 위협할 생각이었다.

“전부 다 해봐야 전체 대의원의 3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고 확신한 멘셰비키당과 사회혁명당은 대회장을 나가버렸다. 회의장 이탈은 이제 민주주의자들이 애용하는 전술이 되고 있었다. 다수파에서 밀려나는 순간부터 이들은 소비에트를 보이콧하기 시작했다. 집행위원회의 권력장악을 촉구하는 결의안은 반대파의 공석 때문에 276표의 찬성으로 통과되었다. 25인 위원회 선출 작업이 즉시 시작되었다. 25명 가운데 10명은 소수파를 위해 공석으로 남겨 놓았는데 나중까지 결코 채워지지 않았다. 볼셰비키들로 위원회가 구성되었다는 사실은 적과 동지 모두에게 다음과 같은 의미로 전달되었다: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노동자 부문은 앞으로 볼셰비키당의 진지가 될 것이다.’ 거대한 전진의 일보가 아닐 수 없었다! 4월에 볼셰비키당은 페테르부르크 노동자 약 3분의 1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소비에트에서는 완전 열세였다. 그러나 7월 초 볼셰비키당은 노동자 부문의 약 3분의 2를 장악했다. 이것은 대중에게 볼셰비키당이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음을 의미했다.”―『러시아혁명사』, 트로츠키


볼셰비키당 중앙위원회는 권력장악 이전에, 여전히 소수였던 다른 주요 도시들에서도 지지세 확장을 원했지만 기다릴 필요성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무장 시위에 동의했다. 그러나 반란을 선동하는 대신, 전단지를 통해 “평화적이고 조직된 시위를 통해 여러분의 의지를 회기 중인 집행위원회에 제시하라.”라고 촉구했다.

‘7월 시기’ 동안, 시위대가 정부군(그리고 다른 반혁명 세력들)과 격돌했지만 혁명적 전복을 성취하지는 못했다. 패배는 대중에게 소중한 교훈을 남겼다. 트로츠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작은 충돌, 사상자, 성과 없는 투쟁, 실제적 목적의 불명확성 등이 운동의 특징이었다. 볼셰비키당 중앙위원회는 시위 중지를 촉구하는 결의문을 통과시켰다. 집행위원회는 이 결의문에 즉각적인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대중은 이것에 대해 거의 저항하지 않았다. 이들은 다시 착 가라앉은 채 교외로 되돌아갔으며 다음날 투쟁을 계속할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소비에트로 권력을 넘기는’ 문제는 보기보다 훨씬 복잡하다는 것을 이들은 실감했다.”


E. H. 카[영국 역사가, 『소비에트러시아의 역사 1917~1929』 저술]는 볼셰비키 신문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프라우다는 탄압받았다. 볼셰비키 지도부 3명을 체포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카메네프는 체포되었고, 레닌과 지노비예프는 몸을 감춰 핀란드로 피신했다.”

“며칠 후, 갈리시아 공격은 막대한 피해를 입으며 실패했다. 내각의 위기는 르보프의 사임과 케렌스키의 수반 임명으로 이어졌다. 트로츠키와 약 4천의 뛰어난 회원들로 이루어진 메즈라욘치는 마침내 볼셰비키당에 가입했다. 그리고 체포의 홍수가 일어나 트로츠키, 루나차르스키, 콜론타이 등이 체포되었다.―『볼셰비키 혁명, 1917-1923』 1권


이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근원적 정치모순이 점점 더 심화됨에 따라 볼셰비키의 영향력은 성장했다. 명목상 사회주의 ‘수상’이었던 알렉산더 케렌스키는 독재를 수립해 볼셰비키와 소비에트를 군사적으로 탄압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그는 자기 손으로 ‘총사령관’으로 승진시켰던 코르닐로프 장군에게 배신당했다. 코르닐로프는 볼셰비키뿐 아니라 케렌스키와 다른 ‘온건파’를 포함 모든 사회주의자를 제거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고 결정했다. 케렌스키는 자신이 배신당했다는 것을 깨닫고 장군을 소환하려 했지만, 장군은 정부와 공개적으로 단절하고 페테르부르크로 진군했다. 그러나 코르닐로프가 주도한 반혁명은 실현되지 못했다. 음모는 노동계급의 저항에 직면하자 무너져 내렸다. 트로츠키는 볼셰비키가 케렌스키를 운명에 맡기기보다, 우익 쿠데타에 맞서 군사적으로 방어했다는 점을 설명했다.

“(정부 측) 집행위원회는 크론슈타트와 뷔보르그에 전화통지문을 보내 상당한 병력을 수도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29일 아침이 되자 군대가 도착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주로 볼셰비키가 장악한 부대들이었다. 집행위원회의 부대 호출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볼셰비키당 중앙위원회의 승인이 있어야했다. 이보다 약간 이른 28일 정오에 겸손한 요청처럼 들린, 케렌스키의 명령에 따라 오로라 순양함의 수병들은 동궁 방어 임무를 맡았다. 이들 중 일부는 7월 시위에 참여한 죄로 여전히 크레스티 감옥에 있었다. 근무가 없는 시간을 이용하여 수병들이 감옥에 갇힌 크론슈타트 수병들, 트로츠키, 라스콜니코프 그리고 기타 인물들을 면회했다. 방문한 수병들이 물었다: “정부 장관들을 체포할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부정적인 답변이 나왔다: “아니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 케렌스키를 총 받침대로 이용하여 코르닐로프를 저격해야한다. 그리고 나서 케렌스키를 정리할 것이다.””―『러시아혁명사』, 트로츠키

 

세계를 뒤흔든 열흘

다음 2달 동안 ‘화해주의’ 정부가 더욱 절망적이 될수록 볼셰비키의 영향력은 전국적으로 급격히 증가했다. 레닌은 여전히 숨어 있었지만, 볼셰비키를 이끌게 된 트로츠키는 감옥에서 풀려났고,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다른 볼셰비키 조직가 및 선동가들과 함께 공개적으로 활동하며 임시정부 잔당들을 쓸어버릴 준비를 했다. 트로츠키는 어떻게 나라의 여론이 레닌의 당으로 기울었는지 설명했다(몇 달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다).

“그러나 봉기 직전 시기에 위에서 열거한 선동가들보다 훨씬 효과적이었던 것은 이름 없는 노동자, 수병, 병사들이 수행한 기본적이면서도 단순한 선동이었다. 이들의 선동으로 대중은 차례로 혁명의 편으로 넘어왔으며, 마지막 남은 의심과 망설임을 떨쳐버렸다. 정치활동이 열정적으로 전개된 몇 개월 동안 하부에서는 수많은 중핵들이 탄생했으며 수십만 명의 거칠지만 소중한 투사들이 육성되었다. 이들은 정치를 위에서가 아니라 아래에서 바라보는 데 익숙해 있었다. 바로 이 때문에 학구적인 연설가가 가지기 힘든 날카로움으로 이들은 사실과 인물들을 파악했다. 페테르부르크 노동자들은 혁명의 선두에 섰다. 대대로 노동자였던 이들은 특출난 혁명 기질, 높은 수준의 정치 문화, 독자적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선동가와 조직가들을 배출했다. 노동조합과 공장의 목수, 재단공, 대장장이였던 이들은 이미 주위에 자신의 유파, 학생, 그리고 미래 소비에트 공화국의 건설자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러시아 전역에서 두 번째 혁명이 가속화되었다.

“동요하고 있으며 의심스럽고 중립적인 분자들을 대중은 더 이상 참아 넘기지 않았다. 이들은 모두를 붙잡고 잡아끌고 설득하고 획득하려했다. 공장은 연대와 함께 대의원들을 전선으로 보냈다. 참호는 후방 근처의 노동자 농민과 연결되었다. 전선 인근의 마을에서는 집회, 회의, 협의 등이 끝없이 이어졌다. 여기서 병사와 수병들은 노동자 농민과 결합했다. 바로 이 방식을 통해 백러시아 전선은 볼셰비키 사상으로 획득되었다.”


볼셰비키의 영향력은 전역에서 노동계급 너머로 확산되었다.

“페트로부르크와 모스크바의 공장과 연대들은 더욱 끈질기게 농촌의 나무 대문을 노크하고 있었다. 노동자들이 한데 모여 대의원들을 출신 지역으로 내려보냈다. 연대들은 볼셰비키당을 지지하라고 농민들에게 촉구하는 결의문을 통과시켰다. 도시 노동자들은 주위 농촌으로 내려가 신문을 배포하면서 미래 볼셰비키 중핵으로 커나갈 기초를 놓았다. 이 과정을 통해 이들은 농민 전쟁의 불길을 가슴에 담고 도시로 돌아왔다.

볼셰비키 사상은 전국을 장악했다. 볼셰비키당은 정복될 수 없는 세력이 되었다. 인민이 이들과 함께 했다. 크론슈타트, 짜리친, 코스트로마, 슈이아 등 1인 1표로 선거를 실시한 시의회는 볼셰비키당이 완전히 장악했다. 모스크바 지구의회 선거에서 볼셰비키당은 52%를 득표했다. 공장이 전혀 없는 사마라와 같이 외지고 조용한 톰스크에서도 볼셰비키당은 의회를 장악했다. 슐뤼셀부르크 군(郡)의회[젬스트보] 의원 4명 가운데 3명이 볼셰비키였다. 리고프스키 군 의회에서 볼셰비키는 50%를 득표했다. 모든 곳에서 상황이 이렇게 유리하지는 않았지만 모든 곳에서 같은 방향으로 상황이 바뀌고 있었다. 볼셰비키당의 상대적 비중은 급격히 상승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중이 볼셰비키당을 지지하는 경향은 계급 조직들 속에서 훨씬 명확히 드러났다. 수도의 노동조합들은 50만 노동자들을 포괄하고 있었다. 아직도 일부 노동조합의 집행부를 장악하고 있던 멘셰비키들은 자신들이 과거의 유물이라고 느꼈다. 노동계급의 어떤 부위가 조직을 수립하건 이 조직의 당면 목표가 무엇이건 이들은 결국 볼셰비키당의 정치적 결론에 도달했다. 이것은 전혀 우연이 아니었다: ‘노동조합, 공장위원회, 영구적이건 일시적이건 노동계급의 경제적·문화적 조직들은 전체적 상황에 내몰려 모든 개별 문제에서 같은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가 주인인가?’”


부르주아 국가권력이 해체되기 시작하고, 볼셰비키가 장악한 노동자 조직은 계속 발전하면서 이중권력 상황이 거의 저절로 해소되기 시작했다.

“최근에 수립된 민주적 지방자치정부들은 정부기관들과 함께 죽어가고 있었다. 물, 불, 연료, 식량 보장과 같은 가장 중요한 임무들은 더욱더 소비에트와 다른 노동자조직에게 떨어졌다. 페테르부르크 발전소의 공장위원회는 도시와 인근을 뛰어다니면서 터빈을 돌리기 위해 한때는 석탄 한때는 그리스(유지)를 찾아 다녀야 했다. 그리고 공장주와 경영진에 반대하여 투쟁하고 있는 다른 공장위원회들을 통해 이것들을 공급받았다.

소비에트정부는 근거 없는 환상, 임의적인 구조물, 당 이론가들의 발명품이 아니었다. 이것은 억누를 수 없는 힘으로 아래에서 산업의 붕괴로 인한 소유주의 무기력과 함께 대중의 필요로부터 나왔다. 소비에트는 실제로 정부가 되어 있었다. 노동자, 병사, 농민들에게 다른 길은 존재하지 않았다. 소비에트 정부에 대해 논쟁하고 사색할 시간이 없었다. 이것은 실현되어야했다.”


상황은 ‘제2차 전러시아소비에트대회’의 소집에 이르렀다. 6월에 개최된 1차 대회에서 선출된 개량주의 지도자들은 볼셰비키로 대체될 것이란 사실을 알고 2차 대회 소집을 방해했다. 레닌의 조직은, 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 소비에트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기구를 창설하겠다고 위협하며, 중앙집행위원회가 동의할 것을 촉구했으나 이들은 이를 철회시키기 위해 마지막 발악을 했다. 트로츠키는 대회를 조직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대회 소집을 둘러싼 투쟁은 지역에서 소비에트의 볼셰비키화에 마지막 추진력을 제공했다. 스몰렌스크와 같은 다수의 후진적 지역에서 볼셰비키당은 혼자 또는 사회혁명당 좌파와 함께 대회 소집을 위한 투쟁과정 중에 또는 대회에 참석할 대의원 선거를 치르면서 처음으로 다수파가 되었다. 심지어 시베리아 소비에트 대회에서도 볼셰비키당은 10월 중반에 사회혁명당 좌파와 함께 항구적인 다수파를 수립하는 데 성공했다. 이를 통해 당은 지역 소비에트들에게 쉽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15일에 키에프 소비에트는 찬성 159표, 반대 28표, 기권 3표로 당면한 소비에트 대회를 ‘권력 기관’으로 인정했다. 16일에 민스크 즉 서부 전선의 중심에서 개최된 북서지역 소비에트 대회는 전국 소비에트 대회 소집을 미룰 수 없다고 선언했다. 18일에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는 전국대회에 보낼 대의원들의 선거를 실시했다. 볼셰비키당 대의원 명부―트로츠키, 카메네프, 볼로다르스키, 유레네프, 라쉐비치―는 443표를 얻었으며 사회혁명당 대의원 명부는 162표를 얻었다. 사회혁명당 대의원 명부에는 볼셰비키당으로 기울고 있던 사회혁명당 좌파의 이름만 올랐다. 한편 멘세비키당 명부는 44표의 지지를 얻었다. 크레틴스키가 의장이었던 우랄지역 소비에트 대회는 110명 대의원 가운데 80명이 볼셰비키였다. 이 대회는 22만 3천 9백 명의 조직 노동자와 병사들을 대표하여 이렇게 요구했다: ‘정해진 날짜에 소비에트 전국대회가 개최되어야한다.’ 같은 날인 19일 전국에서 노동계급을 가장 직접적이고 의심의 여지없이 대표하는 전러시아공장위원회회협의회는 즉각적인 소비에트로의 권력 이전을 요구했다. 20일,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소비에트는 이렇게 선언했다: ‘지방의 모든 소비에트들이 “임시정부를 반대하는 공개적이고 가차 없는 투쟁을 전개해야한다.”’ 또한 지역의 산업 및 행정 문제들을 소비에트가 독자적으로 해결할 것을 촉구했다. 지방정부당국 타도를 촉구한 이 결의안에 반대 1표, 기권 1표만 나왔다. 22일, 볼셰비키당 신문은 소비에트 권력을 요구하는 56개 조직의 새 명부를 발표했다. 이들은 모두 진정한 인민 대중, 그리고 상당한 정도의 무장 대중을 대표하고 있었다.”


이중권력 상황은 결정적 국면을 향해갔다. ‘새롭고 권위 있는 소비에트 대회가 10월 25일로 예정됐다. 볼셰비키의 다수파는 모든 권력을 노동자 기구의 손으로 이전할 것을 공약했다.’ 임시정부는 2월 혁명의 진이 다 빠진 유물이지만, 단순히 평화적으로 스스로 해산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9월이 되자 레닌은 권력장악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볼셰비키 지도부 내의 저항에 직면했다. 특히 레닌의 오랜 협력자인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가 그러했다. 10월 10일 볼셰비키 지도부는 표결을 통해 10대 2로 무장봉기 준비를 결정한다. 이 임무를 감독하기 위해 레닌, 트로츠키, 스탈린, 소콜니코프, 부브노프와 심지어 반대했던 지노비예프, 카메네프까지 포함된 정치국이 수립된다. 일주일 뒤 카메네프는 지노비예프의 지지를 받으며 볼셰비키의 봉기 계획을 폭로해 권력장악 의도를 비판했다. 레닌은 이들을 혁명의 ‘파업파괴자’로 규정했지만, 이 사보타지 행위를 이유로 당에서 이들을 축출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트로츠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이를 온몸으로 흡수하는 것보다 혁명이 끝난 후 이것을 이론화하는 것이 더 쉽다. 봉기로 가는 길은 봉기를 일으키는 정당의 위기를 불가피하게 초래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지금까지 역사가 알고 있는 것 가운데 가장 단련되고 가장 혁명적인 정당의 경험으로 이 점이 입증되었다. 봉기 며칠 전 레닌은 자신의 가장 가깝고 가장 출중한 두 제자의 출당 처분을 요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입증될 것이다. 최근, 이 갈등을 개인적 성격 차이로 인한 ‘사고’로 환원시키려는 시도들이 있어왔다. 그러나 이 시도는 당의 과거를 순수 종교적 관점에서 이상화시키는 것이다. 1917년 가을, 레닌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완벽하고 더 결연하게 봉기의 객관적 필연을 표현했다. 반면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솔직하게 당내의 투쟁 봉쇄 경향, 우유부단한 정서, 소부르주아 연줄의 영향, 지배계급들의 압력 등을 표현했다.”


원래 멘셰비키가 수도 방어를 위해 제안했던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는 ‘군사혁명위원회’를 창설했다. 트로츠키가 지도하고 볼셰비키 다수파와 사회혁명당 좌파 및 아나키스트들이 참여했다. 이 위원회는 실제로 봉기를 수행했다. E. H. 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17년 10월 25일 이른 아침 볼셰비키 부대는 행동에 들어갔다. 임시정부의 거점이 점령되었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체포되거나 도망갔다. 오후가 되자 레닌은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회의에서 ‘노동자·농민 혁명’의 승리를 선언했다. 그리고 저녁이 되자 제2차 전러시아소비에트대회에서 러시아의 모든 권력을 노동자·병사·농민대표 소비에트로 이전한다고 선포했다. 1917년 10월 26일 저녁, 대회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회의에서는 평화와 토지에 관한 법령을 채택했고, 소브나르콤(Sovnarkom)으로 알려진 최초의 노동자농민정부인 인민위원협의회의 구성을 승인했다.”


트로츠키는 이렇게 말했다. “무장봉기가 혁명에서 차지하는 역할은 전체적으로 혁명이 진화에서 차지하는 역할과 같다. 봉기는 결정적인 순간으로, 이 때 축적된 양이 폭발하여 질로 전화된다.”

멘셰비키 우파와 사회혁명당이 소비에트에서 퇴장하면서 타우리데궁은 소란스러웠다. 트로츠키가 적절하게 말했듯, 그들은 ‘역사의 쓰레기통’으로 스스로 사라졌다. 10월 혁명을 다룬 미국 공산주의자 존 리드의 명저 『세계를 뒤흔든 열흘』을 인용하면서 트로츠키는 『러시아 혁명사』에서 레닌이 소비에트 무대에 등장하는 순간을 상기한다.

“아직까지 대회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레닌에게 평화문제에 대해 보고하도록 발언권이 주어졌다. 그가 연단에 오르자 대회장은 열렬히 환호했다. 전선의 병사를 대표하는 대의원들은 이 신비로운 인물을 눈을 똑바로 뜨고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그들은 그를 증오하라고 배웠으며 그를 본 적도 없지만, 이제 사랑하게 되었다. ‘교탁 가장자리를 잡고 기다린 채 레닌은 조그만 눈을 반짝거리며 대의원들을 둘러보았다. 그는 몇 분간 계속된 박수의 물결을 잊은 듯했다. 박수가 끝나자 ‘이제 사회주의 질서 건설을 진행합시다.’라고 그는 간단히 말했다.”


그리고 트로츠키는 레닌이 소비에트에서 낭독한 선언문 초안을 인용한다.

““10월 24일과 25일 혁명으로 수립되었으며 노동자 병사 농민 대의원 소비에트에 기초한 노동자농민정부는 정당하고 민주적 평화협정을 위해 즉각 협상에 나설 것을 모든 교전국 인민과 정부에게 제안한다.” 정당한 조건은 병합과 배상을 배제했다. 병합은 유럽이나 해외 먼 나라에 사는 인민들을 강제로 복속시키거나 이들의 의지에 반하여 이들을 전유하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소비에트 정부는 앞서 제시한 평화조건이 최후통첩이 아니므로 평화협정을 위한 다른 조건들도 검토할 용의가 있다고 선언한다.” 가능한 한 빨리 협상을 시작하고 협상 과정에서 어떠한 비밀도 없어야만 한다고 요구했다. 이 요구에 응할 경우 소비에트 정부는 비밀외교를 철폐하고 1917년 10월 25일 이전의 비밀조약들을 공개하겠다고 약속했다. 러시아 지주와 자본가들의 이윤과 특권, 그리고 대러시아인에 의한 소수민족 억압을 위한 조약의 모든 부분을 “정부는 무조건 그리고 즉시 폐지한다고 선언한다.” 평화협상을 위해 최소 3개월의 휴전을 즉각 체결하자고 제안했다. 노동자 농민 정부는 “모든 교전국 정부와 인민에게…특히 가장 선진국인 영국, 프랑스, 독일 3국의 의식 있는 노동자들에게”도 동시에 이것을 제안했다. 그리고 “근로 인민과 피착취 대중을 모든 노예상태와 착취로부터 해방시키는 과제의 원군”은 바로 이들이라는 점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선언했다.”


사람들은 레닌의 연설에 열광했다.

“자부심이 저절로 치솟는다. 눈빛이 반짝인다.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이제 아무도 담배를 피지 않는다. 아무도 숨을 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최고회의, 대의원, 귀빈, 보초병 등이 봉기와 형제애를 찬양하는 노래를 합창한다. 봉기에 참여해 이것을 관찰하고 기록한 봉기의 시인 존 리드는 이렇게 말했다: “갑자기 집단적 충동으로 우리는 일어섰다. 처음에는 중얼거리듯이 그러나 곧 부드럽고 힘차게 ‘인터내셔널가’를 합창했다. 백발이 성성한 늙은 병사가 어린애처럼 흐느껴 울었다.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눈물을 감추려고 눈을 연신 깜박거렸다. 거대한 합창 소리가 대회장을 흔들고 창문과 출입문을 확 열어젖히며 조용한 하늘로 치솟았다.” 이 소리를 하늘이 들었을까? 십자가에 못 박힌 유럽의 음침한 가을 참호, 파괴된 도시와 마을, 통곡하는 어머니와 부인들이 이 소리를 들었을까? “일어서라 그대 굶주림의 포로여! 일어서라 그대 대지의 비참한 자여!” 이 노래 가사는 모든 장애물에서 풀려났다. 이것은 정부 포고령과 만났고, 이제 직접 행동의 힘으로 울려 퍼졌다. 이 시간에 대회장에 모인 모두는 자신이 더 위대하고 더 중요한 인물이라고 느꼈다. 혁명의 심장은 전 세계를 뒤덮을 정도로 팽창했다. “우리는 해방을 성취할 것이다….” 독자성, 주도성, 대담성의 정신―보통 상황에서 피억압대중에게 박탈된 이 환희의 감정을 이제 혁명이 불러일으켰다. “…우리의 손으로!” 차르를 무찔렀으며 이제 자본가계급을 타도한 수백만의 전능한 손은 이제 전쟁의 목을 비틀 것이다. 뷔보르그 지구의 적위대, 얼굴에 흉터가 있는 회색 병사, 수년간 중노동형을 산 고참 혁명가, 검은 수염을 한 오로라호의 젊은 수병—이들 전부는 끝까지 이 “마지막이고도 결정적 투쟁”을 수행하겠다고 맹세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새로운 세계를 건설할 것이다!” 우리는 건설할 것이다! 마음속에서 우러난 이 열정적 말에는 곧 전개될 내전의 몇 년과 노동과 궁핍의 5개년 시기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아무 것도 아니었던 자가 모든 것이 될 것이다!””


낙후된 차르 제국의 가장 밑바닥에 있던 노동자와 빈농이, 왕·지주·자본가들을 역사의 무대에서 쓸어냈다. 전에는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이었지만. 일이 지나간 후에는 얼마나 쉬워 보이는가. 10월 혁명은 단지 러시아의 사건만이 아니었다. 페테르부르크 거리에서 러시아 노동자들은 자본주의가 얼마나 실패했는지를 인류에게 보여준 것이었다. 세계가 과연 그 이전과 같을 수 있겠는가?

<1부 끝, 2/3/4부로 이어짐>


23 October 2017
Celebrating Red October
The Russian Revolution in Historical Perspect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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