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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과 소위 ‘성폭력론’에 대하여

‘아가씨와 건달들’ 논쟁

논쟁의 배경과 개요:

2008년 10월 20일 노동해방연대(준)의 한 간부가 소위 ‘민투위’건과 관련하여 노힘의 무원칙성을 비판하며 쓴 ‘아가씨와 건달들’이라는 글을 게시판에 올렸다. 그러자 자신을 노힘 여성활동가라고 밝힌 동지들은 그 글이 “여성을 비하”하는 “성폭력”이라고 비판하며 “공식적인 사과”를 요구했다. 이후, 노힘 여성활동가들의 견해를 지지하는 견해와 그에 반대하는 견해들이 제출되었다.

이 논쟁은 여성해방운동과 페미니즘의 구별 필요성을 확인하고, 요즘 여기저기서 쟁점이 되고 있는 ‘성폭력론’에 대한 관점을 정립하고, 노동계급의 규율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제기하는 데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판단하여, IBT 지지자는 ‘K’라는 필명으로 이 논쟁에 참가하였다. 이 논쟁은 주로 11월과 12월에 여러 논쟁 참가자들의 참여로 전개되었는데, 여기서는 그 중 필명 ‘K’가 제출한 글들만 정리한다. 논쟁에 참여한 모든 글은 노동해방연대(준) 사이트(www.hbyd.org) 2008년 10월~12월 게시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차례>

페미니즘과 ‘극사실주의’ (2008/11/28)

소위 ‘성폭력론’과 ‘피해자 중심주의’와 관련하여 1 (2008/12/01)

소위 ‘성폭력론’과 ‘피해자 중심주의’와 관련하여 2 (2008/12/02)

‘성폭력론’의 폐해와 단일 인격체론 (2008/12/02)

여성해방, 페미니즘 그리고 사회주의 (2008/12/04)

‘성폭력론’의 폭력성에 관하여 (2008/12/07)

 

 

페미니즘과 ‘극사실주의’

2008·11·28

 

먼저 ‘걱정’의 퇴장 선언에 큰 아쉬움을 표한다.

“광수씨를 걱정”하며 등장했던 11월 20일부터 뭔가 이 님은 예사롭지 않았다. ‘타짜 또는 선수’를 만나는 느낌이랄까? 그의 말투에서 느껴지는 그 확고한(또는 확고할 것 같은) 신념, 묻어나오는 해박한(또는 해박할 것 같은) 지식, 격조 있고 유려한 문체, 상황을 저 높이서 관조하는 듯한 여유 그리고 그 뒤에 결정적으로 감춰진 소위 ‘사회적 장애인(주로 좌파 남성)’에 대한 강렬한 적개심 등. 혹시 이 분은 K의 꿈[ K가 비유적으로 쓴 'K'의 악몽이라는 글을 말한다.]에 나타나 꼼짝없는 말투로 K에게 ‘꿇어!’를 권했던 그 님이 아닐까?

‘걱정’ 이 분은 아마도 K의 포획 직전에 나타나 그가 던진 타올을 거둔 ‘주시자’를 비롯한 몇몇 훼방꾼(?)이 걱정하는, 소위 ‘아류 페미니즘’ 혹은 ‘분리주의 여성운동’ 또는 ‘부르주아 여성주의’의 핵심이나 그 언저리에 있는 분일 것이다. 박근혜나 한명숙 지지나 성매매방지법 또는 여성 백인위 등등의 일들과 직접 또는 한 다리 건너면 바로 닿는 연을 가지고 있는 분일 것이라는 느낌인데. 그리하여 노동계와 자본계를 막론하고(이게 중요하다. 막론하고!) 이 사회 어느 분야에서든 ‘중산층 인텔리 여성’(김규항의 표현을 빌리자면)들의 지위 향상을 꽤 오랜 기간 진두와 배후에서 지휘해 온.

그런 추측 탓에 지난 세기에 사망한 낡은 사상의 사망진단서에 관한 얘기나 페미니즘의 이론과 역사에 관한 그의 격 높은 얘기를 들어볼 수 있을까 기대했던 나로서는, 갑작스런 퇴장 선언에 깜짝 놀라 이렇게 아쉬움을 표하는 것이다. 혹시나 이 아쉬움의 표현으로 그의 발길을 돌려세울 수나 없을까 하는 기대와 더불어.

 

논쟁의 경과와 논점

김광수(호칭 존칭 생략)의 ‘노힘아가씨와 건달들’에 대한 노힘 여성활동가들의 문제제기로부터 논쟁이 시작되었다. ‘주시자’님이 지적하는 것처럼 이 문제가 강령적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주시자’님의 [사회주의정당건설운동]이라는 말머리를 지지한다. 그리고 ‘주시자’님이 내린 김광수 글에 대한 “별 문제 없다.”는 진단에 동의한다.

내 동의를 부연한다. 김광수는 그 글에서 노동계급에 대해 배신을 자행한 민투위와 그를 무원칙하게 용인한 노힘의 문제를 제기했다. 그래서 문제가 있는 그 둘을 우리 사회에서 간혹 만날 수 있는 두 부정적인 인물형인 건달과 아가씨에 비유했던 것이다. 비유하기 위해 등장시킨 남성은 “몰래 바람피우고 걸려 두들겨 맞다가 싹싹 빌다가 또 기회를 엿보는 바람둥이 건달”이고 여성은 “가정을 지키기 위해 혼자 살아갈 자신이 없어 그런 남편을 용인하고 훈육하기를 그치지 않는” 여성이다.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상 거기에 등장하는 남녀는 모두 문제적인 인간형일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노힘 여성활동가들이 호소하는 것처럼 김광수의 그 글을 ‘여성’에 대한 성폭력으로 해석하고 그 해석을 통해 김광수의 반여성적 가치관을 기소하는 것은 과하고 성급하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그 이후 ‘라디오레벨데’님은 자신의 블로그에서 이 문제를 둘러싼 다양한 반대 견해들을 “집단 성폭력”이라고 표현하고, 반대 견해자들을 2차 가해자들이라고 말한다. 눈살이 많이 찌푸려지는 대목이다. 대단한 언어폭력이 아닐 수 없다. 무시무시한 말들을 너무 함부로 쓰고 있지 않는가하는 것이 내 생각이다.

좋다. 그 글로 “성적 수치심”이나 “성폭력”을 말하는 것이 그리고 그 이후의 논의를 “집단 성폭력”이나 “2차 가해”라고 표현하는 것이 나 또는 많은 사람들이 과하다고 생각하더라도, 만의 하나라도 그 여럿이 정말로 잘못 생각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 설명을 되도록 쉬운 말로 자세히 해주기 바란다. 근거를 갖춘 친절한 반박의 형태로.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우리 모두에게 성찰할 기회를 주고 있는 노힘 여성 활동가분들 스스로도 성찰할 수 있기를 바란다. 혹시나 자신의 아픔을 호소하고 남의 폭력을 기소하면서, 자신들 역시 남에게 상처를 입히는 폭력을 자행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허세 위선 금기 상식 등에서 벗어난 극사실주의적 태도

이 논쟁에 끼어들 것을 생각하면서 스스로 다짐한 것이 있다. 유행하는 누구 말처럼 ‘극사실주의’적 태도로 임하겠다는 것이다. 거품은 경제에만 끼어 있는 것이 아니다. 가장 현실적이어야 할 노동 운동권에도 오랫동안 꽤 끼어 왔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번 논쟁은 그 영락없이 진짜처럼 보이는 거품을 거둬내는 일도 할 것이라고 본다. 노동 운동권에 끼어있는 허세 위선 금기 상식 등의 거품 말이다.

잘 모르면서 묻지 않고 다 알고 있는 척하고, 전면적으로 동의하지 않으면서 관계를 보존하기 위해 동의하는 척하고, 웬만하면 사람들 많은 쪽으로 가서 서려하고, 여럿이 주장하는 견해에 대해선 이상하다고 느끼면서도 문제제기하려 하지 않고, 복잡하고 까다로운 문제는 추상적인 수준에서만 논의하며 품위를 유지하려 하고, 경중과 옳고 그름에 대한 명확한 분석 없이 모든 아픔에 다 책임질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는 등등의 허세 위선 금기 상식 등 말이다. 그래서 극사실주의적 태도로 하늘 아래 모든 것들에 대해 다 의심하고 묻기로 한다. 영성이니 교조 따위는 믿지 않는다. 그것이 분명한 논리와 근거 그리고 노동계급의 원칙에 입각해 입증되지 않은 것이라면.

또 하나. ‘진보’니 ‘좌파’니 하는 말을 허투루 쓰지 않기로 한다. 이 말들은 너무 포괄적이고 애매하다. 심지어 오바마도 진보처럼 여겨지기도 하고, 노빠들도 그들 스스로는 극우보다는 왼쪽이라는 이유로 진보요 좌파라고 확고히 믿고 있다 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진보와 좌파를 감싸 안아보려는 되도 않는 허세도 부리지 않는다. 그 그럴듯한 진보와 좌파에 노동계급은 그 동안 얼마나 많이 속아왔고, 자기 스스로의 힘을 자각하는 일을 얼마나 오랫동안 늦추고 있는가?

 

마지막으로 해방연대의 태도에 대해

어떻게 내부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지 모른다. 민투위 건과 김광수 건을 서로 주고받는 타협(거래)을 해 보기로 논의가 끝난 것인지 그래서 객꾼(?)들이 귀찮은 것인지. 아니면, 객꾼(?)들로부터 용기를 얻고 이 문제를 근본에서부터 다시 검토해 보기로 생각하고 있는지.

어떤 선택을 하건 나는 참견할 자격이 없다. 다만 개인적 전망과 소망을 말해보자면, 지금 문제는 서로의 몫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가 아니라, 옳고 그름의 문제가 되어있다. 그렇기 때문에 해방연대를 비롯한 논쟁 참여자들의 주관적 바람에 관계없이 이 문제는 애매한 사과로 매듭지어지지 않을 것이다. 설령 객꾼(?)들이 모두 게시판에서 철수한다고 하더라도. 그런 점에서 필명 ‘반관료주의’의 “노힘 여성활동가들의 김광수 활동가에 대한 문제제기 지지”엔 진정성이 없어 보이고, 그 모호한 “지지”와 ‘민투위 건 인정’을 주고받으려는 것은 건강해 보이지 않는다. 지지하거나 사과해야 할 경우라 하더라도 충분히 논의가 이루어진 이후 구체적으로 행해져야 생산적이며 믿음을 서로에게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는 지금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곧 제기되었을 강령적 문제이다. 얼마 전에 나온 해방연대 학생지부의 ‘여성해방과 사회주의’라는 선전물은 꽤 훌륭한 것이었다고 나는 생각했었다. 하지만 여성해방 문제가 이러한 형태로 제기된 이상, 이 문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대답해내지 못한다면 그 훌륭함도 속이 빈 거품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        *        *

K 지나치다가님의 말을 더 들어보아야 하겠지만, uranus님의 걱정과는 다른 얘기인 것 같아요. 즉, 님의 말처럼 “성폭력 사건을 쉬쉬하고 숨겨서 당건립”하자 그런 얘기가 아닌 것 같아요. 만약 그런 것이라면 저는 명백히 반대입니다.

하지만 지나치다가님이 하고싶은 말은,

주관적이고 자의적이고 지나치게 확장되는 성폭력 개념을 문제시하는 것으로 보여요.

지금 노힘 여성활동가분들에 의해 김광수씨가 “성적 수치심”을 안긴 “성폭력”이라는 혐의를 받고, 그런 문제제기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들은 “집단성폭력”을 자행하는 “2차 가해”라고 규정되는 것처럼.

실제로 피해자의 의사에 반하여 물질적 인적 피해(이 범주를 앞으로의 논의를 통해 객관적으로 규정해야 할 것입니다)를 입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피해(또는 그것을 주장하는)자의 일방적인 기소로 강간 등을 떠올리게 하는 성폭력범으로 사람들의 말밥에 한번 오르면 정치적 명망에 치명상을 입게 되고 심한 경우 운동도 그만 둬야 될지도 모르지요.

게다가 영문도 잘 모르는 자식들은 그 아빠(엄마)를 어떤 눈으로 보겠어요. 친구들은 또 그 아이를 어떻게 보겠어요.

바로 이런 이유로 상대방을 성폭력 등으로 고발할 때는 그만한 무거운 책임감으로 해야 합니다.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그 고발 자체가 폭력입니다. 그러므로 고발이라는 폭력은 자행된 더 큰 폭력을 제압하고 응징 예방하기 위함이라는 분명한 명분을 가지고 실행되어야 합니다. 아픔을 느끼는 것은 자기만이 아니기 때문이죠. 신중해야 하고 명백한 사유를 가져야 합니다. (*여기서 고발이라 함은 문제제기의 한 가지 형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김광수씨 등에 대해 성폭력 문제를 제기하는 노힘 활동가분들에게 저는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제 입장을 밝혔고, 그럼에도 그렇게들 생각한다면 왜 그러한지 “쉬운 말로 자세하게 설명해 줄 것”을 요구한 것입니다.

그리고 노힘 활동가와는 별도로, 피 냄새를 맡은 상어처럼 홀연히 나타나 광수씨 주위를 선회하며 친히 걱정해 주셨던 그 분. 문제의 글을 성폭력이라 못 박아 혼내면서, 자신은 “얼치기 사회주의자” “찌질이 무뇌아”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봐야”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 등과 같은 언어폭력을 태연히 구사하는, 대단히 자기중심적이고 자가당착적인 윤리관을 가진 ‘걱정’ 그 분의 설명을 꼭 좀 듣고 싶어요. 왜냐하면 그 분은 선수 같거든요.

다시 돌아와서,

지나치다가님은 그런 의미로 “운동 바닥에서 좀 목소리 내는 남자들은 한번 찍히면 죽음”이라는 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가요, 지나치다가님? 뭘 말하려는 건지 더 들어보고 싶은데요.

‘극사실주의’적 관점으로, 모든 위선 가식 허세를 벗고 금기도 넘어 착한 척 아는 척 모두 접고 한 마디씩 한 마디씩 해야 합니다. 어떤 상황인지, 무엇이 문제인지.

08·11·29

 

소위 ‘성폭력과 피해자중심주의’와 관련하여 1: 필명 ‘추공’에 대한 답변과 질문

2008·12·01

1. “잘 읽어보시면 김광수씨는 여성을 ‘혼자 살아가기 힘든’ 존재로 보고 있습니다.”

==>김광수씨의 글을 열 서너 번 읽어 보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추공님의 해석처럼 읽을 수가 없다. 물론 ‘혼자 살아가기 힘든’ 여성이 등장한다. 하지만 그러한 여성이 나온다고 해서 김광수씨가 모든 여성을 그런 존재로 보고 있다고 해석하는 것은 페미니즘의 왜곡된 세계관 속에서나 가능할 것이다.

추공님의 독해법대로라면, 김광수씨는 여성만이 아니라, 모든 남성 *또한* 신의 없고 거짓말을 일삼는 존재로 보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남성이 등장하므로.

그래서 추공님은 성적 수치심을 느꼈을까(혹시 남성이라면)?

 

2. “그 이유가 경제적인 독립성이 없어서 라고 보는 우리나라 기성세대의 편견”

==> 경제적 독립성 여부가 사회적 남녀 차별 여부에 그리고 여성의 의존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 역으로 남성도 마찬가지이고, 이 사회의 모든 존재들이 그러하다. 그것은 편견이 아니다.

경제적으로 의존되어 있을 경우, 여성은 남성(남편이나 아버지)에 의존적이 될 수밖에 없다. 때로 매춘과 별반 다르지 않게 여겨지는 결혼 제도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버젓이 합리화되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페미니즘과 달리 여성해방론자들은 여성에 대한 편견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여성의 경제적 자립을 위해 투쟁해야 한다. 예를 들어 <노동계급의 여성해방운동을 위하여>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사회복지의 실현을 위한 투쟁,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실업의 해소와 실업 수당의 현실화, 동일노동 동일임금,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고용과 직장에서의 모든 여성 차별 철폐 등등. 그리고 여성해방을 위해 현실적으로 필요한 위의 조건들은 남성 노동자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단결 투쟁을 통해서만 쟁취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남성 노동자들의 이해와도 일치한다.

바로 이점이 페미니즘과 여성해방운동의 결정적 차이이다.

 

3. “성적인 수치심-이것이 왜 성적 수치심이냐고 묻는다면 할 말 없습니다.”

==> 이렇게 말하는 추공님이므로, 나를 한심하다고(?) 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물어보겠다. 모르면서도 점잔빼기 위해 아는 척하지 않기로 했으므로.

김광수씨의 그 글이 왜 여성일반에게 성적 수치심을 일으킬까? 그런 논리라면 남성들에게도 그 글은 성적 수치심을 일으키는 것이 아닐까? 성적 수치심은 여성들의 전유물일까?

 

4. “여성주의적 교양이 전혀 없는 분들이 활동가 중에 있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만”

==> 나는 허세와 위선 금기 상식 등의 거품을 반대하고 ‘극사실주의’적으로 문제를 바라보자고 말한 바 있지만, 추공님의 글엔 그런 허세와 위선 등이 참 많이 있다고 느끼며 읽었다. 나는 님이 말하는 여성주의적 교양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고, 모든(또는 많은) 활동가들이 그 교양에 익숙한지도 잘 모르겠다.

그리고 추공님이 말하는 그 여성주의가 페미니즘을 말하는 것이라면 왜 우리가 그런 교양을 일반적으로 추구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 문제성이 여러 사람들에 의해 지금 지적되고 있고, 심지어 때로는 반동적으로 작동하기도 하는데.

님이 말하는 것처럼 노동계급의 여성해방운동이 노동계급의 그것만 따질 뿐 그밖의 차별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않으므로 그 공백을 페미니즘(님 말에 따르면 가부장적 여성주의)이 메우고 있다는 얘기는 하나의 신화일 뿐이다. 맑스주의를 그렇게 *천박하게 해석*하는 것은 지난번 홀연히 들렀다 사라진 도사 연(然)하는 ‘걱정’ 같은 페미니스트나 아니면 사회주의를 지향한다고 하나 이론적으로 페미니스트의 자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믿는 허구일 뿐이다.

*페미니즘의 그 반동성(때로는 진보적일 때로 있지만)*은 지금 또 확인되고 있다. 자, 보자. 애당초 문제였던 노힘에 제기된 배신과 무원칙 문제는 노힘 여성활동가들이 제기한 성폭력문제로 인해 뒤로 숨었다. 그 문제를 정당하게 제기한 김광수씨는 이 문제에 걸려 비틀거리고 있다. 노힘은 이 문제가 제기된 지 한 달이 넘었는데도 이 문제 뒤에 숨어 추이를 지켜보며 꼼짝도 하지 않고 있다.

추공님은 *예상 밖의 오독(정치문화적 오독)*을 통해 이 문제를 성폭력이라고 규정하고 싶어하지만, 내 생각으로는 객관적인 재판정을 우리가 수립할 수 있다면, 김광수씨의 성폭력이 아니라, 오히려 이 사건은 노힘 여성활동가분들의 무고(誣告)죄로 판결날 가능성이 훨씬 높다고 생각한다.

 

5. “객관성 과학성과 별로 인연이 없는 피해자 중심주의로 성폭력범과 게시판에 성적수치심을 유발하는 글을 올렸던 몇몇 2차 가해자들도 처벌을 받았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사실 피해자 중심주의이라는 말은 서구에서 (그것이 객관성을 담보하지 못하기 때문에) 거의 쓰지 않고 있긴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이 정도의 발전도 상당한 발전이라 하겠습니다.”

==> 추공님은 피해자중심주의를 스스로 “객관성 과학성과 별로 인연이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다행한 일이다. 왜냐하면 여기저기 뻗친 페미니즘의 지금의 지배력 내에서 그렇게 인식하는 것 자체로 위험천만(?)하고 그렇기에 용기가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이어 뒤에서는 “한국 사회에서 이 정도의 발전도 상당한 발전”이라고 말한다. 자가당착이다. 부르주아 법정이 남성 중심적 판결을 일삼았다는 이유로 “객관성 과학성과 별로 인연이 없는” 피해자 중심주의를 “발전”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율배반이다.

지금 나는 김광수씨가 오히려 이 건의 피해자일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서로 피해를 주장하는 쌍방이 등장하면 어떻게 될까? 피해자 중심주의에 따르면 객관적으로 사건을 확인하지 않고 피해자의 주관적 주장으로 혐의가 성립하는데 둘이 서로 주장하면 어찌 되나?

아하! 이 경우에도 여성만 피해자가 되니 문제될 것이 없나?

여성에게만 적용되는 피해자 중심주의라면 그것은 여성의 권리 신장이 아니라 심각한 여성비하이다. 여성을 동정의 대상으로 만들고 심한 경우 징징대면 들어주는 어리광쟁이로 만들고 묘사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허세와 위선과 금기라는 거품이 잔뜩 끼어 있는 지금의 노동운동권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일 것이다. 거품 낀 노동운동은 해방을 이루어낼 수 없다. 자본가계급의 분열전략에 말려들어 허우적거릴 뿐이다.

 

 

소위 ‘성폭력과 피해자중심주의’와 관련하여 2:

08·12·02

1. 김광수의 글은 성폭력인가?

추공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글에서 페미니즘이 반동성을 가진 이유가 노힘이 문제에 답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면 논리적으로 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노힘이 대답을 하든 안 하든 전혀 상관없는 문제를 우리가 다루고 있습니다.”

추공님의 이 말에는 일리가 있습니다. 김광수씨의 ‘노힘아가씨와 건달들’에 대한 노힘 여성활동가의 성폭력 혐의 제기는 노힘과 민투위 건과 ‘상대적으로’ 독립된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 논의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추공님, 님이 오해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제가 “노힘은 *이 문제*가 제기된 지 한 달이 넘었는데도 이 문제 뒤에 숨어 추이를 지켜보며 꼼짝도 하지 않고 있다.” 할 때 *이 문제*는 민투위 건(만)이 아니라, 주로 이 김광수씨 건을 말했던 것입니다. 이 문제 역시 중요한 문제라면, 개인 활동가들의 문제제기로만 둘 것이 아니라 이 문제에 대해서도 노힘이 공식적으로 입장을 표명해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민투위 건은 한 달이 아니라 훨씬 오래 전부터 진행된 사안이지요.

둘째, 추공님 말처럼 이 사안을 독립된 문제로 다룰 때에 우리가 반드시 천착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계속 강조해왔던 것처럼 김광수의 글에 대한 노힘 여성활동가들의 문제제기가 정당한가에 대한 평가입니다. 그 평가를 하자고 원글을 올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님은 그 물음에 대해 “문장과 독해차이에 의해 비롯된 인식의 차이는 구태여 장황하게 말씀드릴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핵심 문제를 회피하고 있습니다. 님 말처럼 “문장과 독해차이에 의해 비롯된 인식의 차이”라면 우리의 얘기는 다 헛것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냥 서로의 인식의 차이일 뿐입니다. 이 문제는 규명 불가능한 것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님 말대로라면 민투위와 관련된 공방도 그냥 노힘과 다른 좌익단체들 사이의 인식의 차이일 뿐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제가 보기에도 님은 진보신당 내에서 소위 ‘혁명적 사회주의자’로서 고생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만, 님의 그러한 ‘혁명적 인식’이 뭔가 격조 있는 인품을 과시하기 위한 장식의 수준을 넘어서기 위해서는(미안하지만 이 대목에서 좀 독하게 말하고 싶습니다) 조금 더 문제의 본질에 철저해야 합니다. 그래야 “금기와 상식”에 도전할 수 있습니다. 혁명이라는 것이 본래 “금기와 상식”에의 도전 아니겠습니까?

 

2. ‘피해자 중심주의’는 우리의 원칙이어야 하는가?

“여성에게만 적용되는 피해자 중심주의라면 그것은 여성의 권리 신장이 아니라 심각한 여성비하이다. 여성을 동정의 대상으로 만들고 심한 경우 징징대면 들어주는 어리광쟁이로 만들고 묘사하는 것이다.”라는 저의 견해의 정당성에 동의하는 것을 듣고 반가웠습니다.

왜냐하면 페미니즘에 왜곡된 지금 우리의 정치문화에서, 님 정도의 견해만으로도 꽤 위험천만(?)한 일일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스꽝스런 현실이지만, 님의 그 정도 견해만으로도 소위 ‘2차 가해’니 ‘반여성주의’니 하는 혐의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특히나 진보신당 내에서라면 더욱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런 점에서 님의 고독한 싸움을 지지합니다.

그러나 추공님,

‘피해자중심주의’가 “객관성 과학성과 별로 인연이 없는” 것이라고 님은 인정하면서도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에 도입된 방식일 뿐”이며 그러므로 “피해자 중심주의에 대한 이해의 폭이 좀 있으면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든 ‘진보적인 것’으로 이해가 될 것”이라는 이율배반을 고수하는 태도에는 조금 실망스러웠습니다.

우리가 선택할 것은 ‘가해자중심주의’와 ‘피해자중심주의’ 두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두 가지는 우스꽝스런 양 극단일 뿐입니다. 게다가 이번 건은 그렇게 복잡한 법리 논쟁이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게시판에 올린 글이 문제가 되는 것이고 그것을 중심으로 그것이 성폭력인가 아닌가를 따지면 되는 것입니다. 다음 소개하는 글은 운동권 내에서 횡행하는 피해자중심주의가 지니는 문제점을 지적하는 어떤 변호사분의 견해입니다.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여성에게만 적용되는 피해자 중심주의는 궁극적으로 여성을 비하하는 것이며, 그 *해방이 아니라 예속에 기여*합니다. 당장은 유용해 보일지 몰라도.

 

3. 페미니즘의 진보성과 반동성

페미니즘이 무엇인가를 따지는 개념 논쟁은 자칫 구름 잡는 비생산적 논쟁으로 번질 우려가 있으므로 나중으로 미뤄두기로 합시다.

다만, 제가 페미니즘에 대해 지나치게 인색한 것 아닌가 하는 님의 우려에 대해 제 입장을 밝힙니다. 저는 자본주의 내에서 민주적 권리를 획득하는 투쟁도 진보적이라고 인정합니다. 하지만 거기에 머물러 그 근본을 지적하고 공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개량주의입니다. 따라서 ‘여성해방운동’(내가 페미니즘에 맞서는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는)은 전자를 옹호하면서 동시에 여성억압의 근원인 자본주의 체제를 극복하는 것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민주적 권리 투쟁에서 페미니스트와 연대하여 투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페미니즘은 그 속성상 더 나아가기를 멈추고 더 나아가려는 의식을 왜곡시키고 투쟁의 방향을 (자본주의 자체가 아니라 남성을 향하도록) 비틉니다. 그런 반동성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제 견해는 이 게시판에 퍼올린 <노동계급의 여성해방운동을 위하여>와 <맑시즘, 페미니즘 그리고 여성해방운동>과 같습니다. 페미니즘에 대한 제 개념을 더 이해하시려면 그 두 글을 참고하시면 큰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님의 건투를 빕니다.

 

성폭력론의 폐해 & 단일 인격체론

2008·12·02

 

:추공님에 답하며

링크한 두 편의 글 <맑시즘, 페미니즘 그리고 여성해방>과 <노동계급의 여성해방운동을 위하여>에 대해서 “약간의 차이”만 있을 뿐 동의한다는 말씀 대단히 반갑습니다. 예상은 못했습니다. 그 글들에 ‘공개적으로’ 동의를 밝히는 사람들을 많이 못 보았거든요.

그것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분명하게 님과의 대화가 꽤 생산적이라는 생각입니다.

역시 하지만,

님은 이번에도 우리의 핵심, “김광수의 글은 성폭력인가? 그렇다면 왜인가?”에 대해서는 모호하게 넘어가버렸습니다. 마치 이런 식으로 들립니다. “이것도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저것을 이해 못할 바는 또 아니다.”

 

1. 우리끼리는 ‘착한 사람이나 신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 우리의 논의가 생산적이기 위해서는 그 모호함을 명확함으로 바꾸어내어야 합니다. 님과 저 사이에야 허허 웃으며 악수하고 좋은 논의였지 하고 아름다운 기억을 서로 간직하며 헤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문제는 계속 끊임없이 [남녀를 불문한!] 노동계급의 진전을 교란할 테고, 그 때마다 우리가 오늘 행동지침을 마련해 놓지 않은 후과로 혁명운동은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헛되이 소모하게 될 것입니다.

그 사이 아가씨나 아줌마라는 말을 들을 땐 손이 떨려야 마땅하다고 “훈련된” 활동가 여성들이 느낄 정신적 소모와 혹시나 말 한 마디 실수나, 예기치 못한 신체접촉으로 성폭력범으로 몰려 정치를 마감할 것에 대한 남성 활동가들의 공포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장차 협동 작업을 서로 꺼리게 될 것입니다. 소위 “여성주의” 교육(?)을 받은 여성노동자(또는 활동가)들은 그 “여성주의” 세례를 받은 바대로 살아가기 위해 남성의 일거수일투족을 늘 예리하게 감시하느라 많은 에너지를 투여할 것입니다. (아가씨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문제가 될 정도로 그 “여성주의”의 센서는 지금 고도로 예민해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웬만한 것은 맘만 먹으면 거의 문제 삼을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한편, 여러 희생자(?)를 목도해온 남성노동자(또는 활동가) 또한 예민한 자기검열을 수행하느라 신경이 닳을 대로 닳을 것입니다. 결국엔 공동작업을 회피하는 현상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겠죠. 왜?–(어떤 분 말처럼) “찍히면 죽으니까!”

이런 되도 않는 반동적 이론을 진보입네 하며 수입하고 가다듬고 교육해온 소위 “여성주의” 이론가들은 이러한 현상들이 벌어지면, “사회적 장애인”(‘걱정’이라는 이론가에 따르면)이고 여성억압의 근원인 남성에 대한 통쾌한 복수를 환호할지 모릅니다. 그리고 여성 권력이 향상되었다고 좋아하겠지요. 실제로 그들(중산층 인텔리 여성)에게는 그런 일들이 권력 향상을 가져올 것입니다. 발언권이 훨씬 세지니까. 하지만 노동계급 여성과 남성에게 그것은 재앙입니다. 자본가 계급에게는 어떨까요?

 

2. 모든 여성들은 남성이 범접할 수 없는 공통의 이해와 감성을 공유하고 있는가? 여성은 단일한 인격체인가?

님은 마치 여성과 남성의 인식과 감성 사이에는 뛰어넘기 힘든 장벽이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리고 성적인 차이가 사회계급적 차이보다 인식과 감성에 더 큰 영향을 끼치는 듯이 말합니다. 그리하여 여성들이 마치 단일한 인격체인 것처럼 즉, 여성들끼리(만) 느낄 수 있는 공통된 감성과 의식이 있고, 그것을 남성들은 좀체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가정합니다.

허위의식일 뿐입니다. 얼핏 듣기에 솔깃한, 얼핏 말하기에는 뿌듯한.

이번 건만 하더라도 그러합니다.

‘아리’라는 노힘 여성활동가분의 성적 수치심에 대해 여성이라고 밝힌 필명 ‘여성주의’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김광수씨의 “혼자 살아갈 자신이 없다”는 말에 평소 여성주의에 대한 고민이 많은 저는 별로 거부감이 없었습니다. … “니가 여성을 이해하느냐”는 식의 억지논리를 끌어오지 맙시다. 여성운동이 운동판에서 소수고 실력도 없다는 것을 스스로 말하고 있는 꼴입니다.”

아리님의 주장에 대한 정면 반박이자, 님이 전제하는 ‘단일인격체론’에 대한 정면 반박이기도 합니다. 그러자 손영이라는 분은 표현보다는 표현하기 이전의 “여성주의에 대해 성실한 고려 없이 쓴 것에 방점이 찍혀”있는 것이라며 한 발 물러서죠. 맞는 말이기도 했거니와 그렇게 말한 사람이 여성이었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왜냐하면 남성으로 추정되는 논자들이 말할 때는 누구든 한 걸음도 인정하지 않았거든요.

또한 자신을 여성이라고 밝힌 uranus님은

“솔직히 말하면 저는 왜 성적인 느낌을 받았는지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저는 성적 수치심은 안 느껴졌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여성주의’님의 글과 마찬가지로, 고발의 대전제에 심각한 결함을 지적하는 고백이었습니다. 그러자 이론가 ‘걱정’은 uranus님에게 특별개인지도(?)를 실시합니다.

추공님, 이처럼 서로 다른 성은 이해하지 못하는 신비한 영역 어딘가에 성적 감수성의 차이가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의식과 감수성에 있어 개인의 차이보다 성적인 차이가 더 크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회계급적 차이보다 성의 차이가 그 감성과 인식에 더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님도 기억하시겠지만, 이 사실이 극명하게 드러났던 사건은 성매매방지법과 관련되어서였습니다. 그 법을 제정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던, 많이 배웠다는 소위 ‘여성주의자’들은 생존권을 호소하는 하층 여성들과 대화조차 하려들지(‘걱정’의 표현대로라면 “말을 섞으려 들지”) 않았습니다. 그들 즉, 부르주아와 소부르주아 여성들 그리고 그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주류여성주의자들과 하층 여성들의 이해 사이에는 말조차 “섞을 수 없을” 정도의 심연이 있습니다. ‘소통’ 불가의!

그러함에도 페미니즘은 마치 모든 여성의 이해를 대변한다는 듯이 허세를 부립니다. 모든 여성의 아픔에 귀기울일 것처럼 착한 척 합니다. 그리고 자꾸 이러한 허위의식을 조장합니다: ‘여성들 사이에는, 남성이 끼어들 수 없는, 사회계급적 차이를 떠난 공통된 감성과 의식 그리고 이해가 존재한다!’

그리하여 노동인민 내의 분열을 조장합니다. 마치 지배계급이 계급적 각성을 막기 위해, 인종적(‘걱정’이 든 대표적으로 예는 백인과 흑인) 차이가 그들의 계급적 차이보다 더 큰 것인 것처럼, 아니면 한국처럼 영남과 호남이라는 출신지역의 여부가 그들의 공통이해를 결정하는 것처럼 세뇌하듯이.

‘우리가 남이가?’라고 물을 때 우리는 무어라 대답해야 합니까?

 

사정이 이러하기 때문에 여성해방을 진정으로 추구한다면,

억압의 원인인 사회역사적 분석을 한사코 외면하고, 남성이 주공격 대상이라고 주입하는 페미니즘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추공님! 아직도 여전히 내 목소리가 여성해방론자의 목소리가 아니라 남성의 목소리로만 들리십니까? 

 

 

여성해방, 페미니즘 그리고 사회주의

2008·12·04

 

*’걱정’님에 답하며, 제 역량 상, uranus님과 추공님에겐 따로 답하지 못해 죄송하지만 님들에 대한 답장도 겸해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걱정’님이 돌아왔다. “발길을 돌려세울 수 없을까”하는 나의 목소리를 들으신 것일까? 지금까지 거의 모든 글들에서 ‘걱정’님을 불러왔는데, 그 간절함에 드디어 응하셨다.

자기중심적 성미는 여전하시다. 여성의 입장과 처지는 혼자만 걱정하신다는 듯이, 남성 그리고 사회주의자는 십 분도 걱정하지 않을 거라는 듯이 말씀하신다. 역시 ‘선수’다운 교묘한 악선동인데, 그래서 제목도 ‘다만 십 분만이라도’이다.

내가 ‘걱정’님과 대화하고 싶었던 데에는 까닭이 있다. 이 분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논쟁하고 있는 문제의 이념적 핵심에 있는 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 논쟁의 이념적 대척점!

 

1. ‘걱정’님의 가르침

‘걱정’님은 우리 사회는 “남성주류권력집단”이 지배하는 사회이고 “여성 자본가께서 그 여성 노동자를 가사노동자로 고용한다고 해도” “여성 자본가와 여성 노동자는 젠더로 하나가 되기도”하며 “여성 자본가를 욕하거나 비판하는 일은 ‘핵심’[문맥상 그 핵심은 남성주류권력에 대한 투쟁일 텐데--인용자]을 먼저 처리한 뒤 해도 늦지 않다”는 가르침을 베풀려 하셨다.

하지만, “무슨 일만 생기면 20세기 초 러시아로 달려가 마치 그것이 진리인 양 울궈먹는 전형적인 21세기 얼치기 사회주의자 무뇌아 찌질이들”이 떼로 나타나 그 가르침을 완강히 거부했다. 그러자 “주류권력도 아니면서 남성이라는 이유로 남성주류권력집단에 일조하는 언행을 일삼는 자들과는 말을 섞지 않”는 것을 신조로 여기는 그 ‘걱정’님은 지금까지 말을 섞어온 자신의 불결함이 부끄럽다는 듯이 주류권력에 이끌릴 듯한 uranus님에 대한 특별개인지도를 마지막으로 올 때처럼 또 홀연히 그의 세계로 사라졌었다. 마지막 가르침 중 한 구절은 이렇다. “돈이 많은 장애인이 돈이 없는 장애인보다 덜 고통을 당할 것이라 여기지는 않습니다. 돈이 많다고 해서 고민과 인간으로서의 연민이 적거나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 그렇고말고. 자본가들이 그 돈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고민이 많은지 노동천민이야 알 턱이 있나.

 

2. 등장과 퇴장 그리고 재등장의 사연

그런 ‘걱정’님이 다시 나타나신 것이다. 아마 그냥 믿고 떠나시기에는 자신의 세례를 받은 제자들의 역부족이 못미더우셨을 것이다. 눈에 밟히셨겠지.

현장, 임금, 고용 등만이 진정 사회주의적(?) 문제라고 여겨온 조합주의자들이 스스로 사회주의를 경제투쟁 지침쯤으로 전락시키면서 그 밖의 문제들 특히 여성 문제는 부르주아 사상을 차용해왔다. 그 사이 ‘억압의 원인은 사회역사적인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남성에게 있다고 믿는’ 페미니즘은 마치 노동계급 사상의 하나인 것처럼 대접받기 시작했고, 그 안에서 약진해 왔다. 남성 활동가들은 사회주의자나 여성해방론자들이 아니라 자기 주변 여성에게 관대한 ‘신사’가 되고 싶어했다.

그런데 그 어리버리하던 ‘사회주의자’들이 이제 김광수의 ‘노힘아가씨와 건달들’과 관련하여 제기된 성폭력 사건과 관련하여 발언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성폭력 혐의 자체를 문제 삼지는 않았다. 다만 ‘노힘 문제를 물타기 하려는 것 아니냐’라고 발언했다. 당사자인 해방연대의 김광수나 문창호 또는 ‘반관료주의’ 등은 노힘 문제의 인정과 성폭력건을 교환하려는 듯이 발언했다. 정확히 무엇을 어떻게 잘못했다는 것인지 밝히지 않으면서, 사과하고 노힘 여성활동가들이 제기한 성폭력 혐의를 지지한다고도 말했다.

그 때 ‘걱정’님이 등장한 것이다. 한편으로는 갖은 모욕적인 언사를 늘어놓으면서, 또 한편으로는 김광수씨의 처지를 진정 걱정하고 안타까워하면서 “며칠 동안 다른 건 접어두고 사과하는 자세에 관해 고민해 보세요.”라며 “활동 정지, 공개 사과, 상담 프로그램 이수 등의 천편일률적인(박훈 변호사)” 처벌을 집행하기 위한 2단계로 진입할 것을 그는 요구했다.

그런데 ‘성폭력론’에 대한 반항이 시작되었다. ‘주시자’님은 “김광수의 글 ‘노힘아가씨와 건달들’은 별 문제 없다.”고 ‘2차 가해성(?)’ 발언을 선도했고, 점, 대리운전노동자, 여성주의, K 등이 떼로 달라붙으며 거꾸로 소위 ‘성폭력론’을 “다구리(‘걱정’)”하기 시작했다. 이제 그들은 “남성주류권력집단”에 맞서는 투쟁수단인 ‘성폭력론’이나 ‘피해자중심주의’ ‘2차 가해’ 등마저 재검토하자고 달려들고 있다.

‘걱정’은 이제 느긋하게 광수씨나 걱정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는 이 세상은 “남성주류권력집단”이 지배하는 세상이고 그 권력이 무너지면 “여성자본가나 여성노동자들” 모두 꽤 살만한 세상이 된다고 믿는다. 그런 그에게 유용한 투쟁의 도구가 되어온 개념들이 공격받는 상황에서 이제 그는 광수씨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심각하게 걱정하게 된 것이다.

그러자 “무식해서 용감한” 것들과 “말을 섞지 않”기로 한 신조를 깨고 은퇴선언을 번복하고 다시 친히 링 위에 오르신 것이다.

 

3. ‘해박함’과 ‘진지함’

‘왜 다시 오셨어요? 다신 안 볼 것처럼 가시더니.’ 따위의 촌스러운 물음은 묻지 않기로 하자. 선수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우리는 더 깊이 있는 논의를 하기 위해 재림해 주신 것에 감사해야 할 뿐이다. 혹시나 또 심기가 상하여 홀연히 사라지실 것을 두려워하고 애지중지하면서.

역시 해박하시다. 낡아빠진 사회주의 따위엔 관심이 없으신 줄 알았는데 “사회운동적 조합주의이든, 생디컬리즘이든, 페이비어니즘이든, 계급적 노동운동 혹은 현장주의이든”하며 듣기만 해도 어지럼증이 느껴지는 전문용어들을 주르르 읊으며 “운동진영의 현 수준”을 걱정하시는 ‘걱정’님은 이제 또 화제를 바꿔 페미니즘의 역사와 조류들도 가배얍게 요약해 주신다. 역시 “아티클”깨나 읽으신 솜씨다. 함부로 까불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 우리의 쟁점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는 도통 모르겠지만.

그 다음 얘기들은 진지하다. 불경스러운 태도를 멈추고 귀 기울여 들어야 했다. ‘걱정’님이 “직접 경험하고 깨닫고 여전히 학습 중인 이야기”, 자신이 여성주의자가 되어야 했던, 여성차별 사회에서 겪었던 아픔의 기록이다.

요약하자면, 남아선호 사회에서 딸아이로 커오는 과정, 남자아이들이 놀 때 엄마 대신 집안일 거들기, 생리의 고통, 콩나물시루 같은 대중교통에서의 성추행, 남성문화에 편입되어 자각하지 못하는 여성을 볼 때의 안타까움, 그리고 사회에서의 일상적인 투쟁과정 등.

‘걱정’은 그런 고통을 “남성분들은 잘 모를 것이라 생각”한다. 그럴 것이다. 어느 누가 당사자와 똑 같은 아픔을 느낄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 아픔이 어떤 것인지 유추할 수는 있다. 자기가 겪은 비슷한 다른 아픔으로 그의 아픔을 이해하기 말이다.

아마도 그 아픔은, 어떤 TV 프로그램에 상담자로 나와 출연자의 아픔을 듣다가 상담은커녕 그 상담자와 부둥켜안고 하염없이 울기만 했던 어떤 동성애자 연예인이 사회에 대해 느끼는 깊은 서러움과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야만적 자본주의가 횡행하는 말도 통하지 않는 한국에 건너와 온갖 모멸을 견디며 노동해야 하는 이주노동자의 소외감과 억울함이 또 비슷할 것이다. 백인 주류 사회에서 언어 장벽 때문에 그들보다 서너 배 노력함에도 백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눈에 보이지 않는 은근한 차별을 당해야 하는 유색인종의 아픔도 또한 비슷할지 모른다. 똑같은 노동을 하면서 임금과 고용 등 모든 면에서 차별당하고, 자기들은 뭔가 다르다는 듯이 행동하는 정규직 노동자를 보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그것이 또 비슷할 것이다. 같은 여성자매라고 하다가도 자기들과 처지가 다르다는 이유로 자신들의 이야기는 들어보려고도 하지 않는 여성주의자들을 보며 성노동자들이 느꼈던 배신감도 닮았을지 모른다. 프레스에 찍혀 손가락이 잘려나가는 아픔이 그와 비슷할지도 모른다.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대학 강사의 아픔은 또 어떤가?

도대체 이놈의 세상은 얼마나 많은 아픔으로 가득 차 있는가.

똑같은 아픔을 느끼지는 못한다. 하지만 내가 보아왔던 다른 아픔으로 ‘걱정’ 당신의 아픔을 유추할 수는 있다. 그리고 내가 느꼈던 다른 아픔으로 당신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다. 공감한다.

하지만 ‘걱정’의 여성주의자가 되기까지의 삶의 추억을 읽으면서 안타까운 것이 있다.

첫째, 그 아픔이 지나치게 개인적이고 실존적이라는 것이다. 그 아픔을 느끼는 시선이 자기 안쪽으로만 향할 뿐 바깥으로 돌려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른 처지에서 느끼는 다른 사람들의 아픔으로 확장되어야 했다. 나의 아픔은 우리의 아픔으로, 나아가 ‘더 큰 우리의 아픔’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의 감수성은 미치는 범위가 너무 좁다. 자기중심적이다.

둘째, 그 아픔을 해결하기 위해선 직접적 원인에만 시야가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 근원으로까지 나아가야 한다. 그 아픔을 낳는 사회역사적 원인을 따져야 한다. 그것은 개인적 경험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류적 실천의 총화를 학습해야 한다. 그 실천의 총화 속에서 그 원인과 대안을 집중적으로 연구한 이론들이 맑스-레닌-트로츠키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는 것을 아마 ‘걱정’님도 알 것이다. 그리하여 그 아픔의 근본을 따지고 그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려고 나서는 자들은 이 시대에 사회주의자가 된다. 그리고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사회주의자들은 의식과 더불어 그 의식을 규정하는 객관적 조건을 변화시키기 위해 투쟁한다.

비유하자면, ‘걱정’이 호소하는 “콩나물시루 대중교통에서의 성추행”은 남자들의 의식을 변화시키는 것으로만 해결될 수 없다. 몸이 직접 맞닿을 정도의 공간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너무 높다. 사회주의자라면 남자의 ‘의식을 개조’하는 데에만 머물지 않을 것이다. 그와 더불어 대도시에만 밀집해 살지 않도록 지방의 문화조건을 개선하고 대중교통을 늘리고, 걸어서도 충분히 통학할 수 있도록 하거나 기숙사를 확충하거나 할 것이다. 물론 자가용으로 통학할 수 있었던 부르주아 자식들은 그런 어려움은 상상도 못할(했을) 것이다.

우리는 몸에 폭탄을 감고 폭사하는 테러리스트의 아픔에 공감한다. 얼마나 숨 막히는 고통과 분노가 자기 몸을 갈가리 찢기로 결심하게 했겠는가? 그러하기 때문에 애꿎은 사람들이 그 테러로 희생되더라도 우리가 그 테러리스트를 마냥 비난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비판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왜냐 하면 그러한 방식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고 애꿎은 다른 아픔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며 정작 그 속에서 문제의 근원은 숨어버리기 때문이다.

‘걱정’은 주변의 성차별적 사고를 가진 남성에 대항하라고만 말할 뿐, 차별의 근본을 철폐하기 위한 강령인 “임금 삭감 없는 노동 시간 단축을 통한 모든 실업 해소! 동일노동 동일임금,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쟁취!, 고용과 직장에서 모든 여성 차별 철폐! 무료 ‘낙태, 출산, 양육, 교육, 의료, 노인 부양’ 쟁취! 모든 가사 노동 사회화!” 등은 언급도 하지 않는다. 미네르바 말처럼 험한 세상에서 ‘각자 살아남으라’는 뜻일까? 아니면 그에게는 이미 그런 요구가 필요 없기 때문일까?

 

4. 경계심

그런데 이렇게 ‘걱정’님의 아픔에 빠져들다가 나는 화들짝 깨달아야 했다. 나는 너무 감정이입 되어 있었다. 나는 주제넘게 ‘걱정’에게 즉자적 인식에 머물지 않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여전히 우리들에게 즉자적 인식을 말하고 즉자적으로 대응할 것을 선동하고 있지만, 그는 여러 분야를 두루 공부했고 ‘문서’ 대신에 ‘아티클’이라는 단어를 쓰고 싶어하는 지식인이다. 충분히 대자적 인식으로 나아갈 기회도 시간도 있었고 아마 그랬을 것이다. “과문하지” 않다.

그런 점에서 내가 어쭙잖게 걱정했던 것과 달리 ‘걱정’의 현재 인식은 이제 더 이상 즉자적인 분노의 결정체가 아니다. 그 인식은 주위의 사회적 관계 속에서 일정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것이고 그 사회적 이해를 대변하고 있다. 그래서 ‘걱정’의 이야기는 페미니즘을 말하는 다른 사람들(예를 들어 노힘 활동가 등)의 얘기와 달리 훨씬 더 큰 경계심으로 들어야 된다는 것을 다시 눈을 크게 뜨며 깨닫는 것이다. 선수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5. 노동운동의 규율

“내가 타인을 배려할 때 타인도 나를 얼마나 배려하는지” 아는 ‘걱정’은 내가 쓴 <‘점’ 등의 언어폭력 규탄>의 의도를 의심한다. 내 “성급한 규탄” 뒤에는 “걸림돌을 차단하려는” 속셈이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미 그 글의 의도를 댓글에서 밝힌 바 있다. 즉, “페미니즘이 주장하고 몰아가는 남녀대립구도의 소위 ‘성폭력’이 아닌, [남녀를 불문한!] 폭력이나 언어폭력이 우리가 정작 문제 삼아야 하는 쟁점이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그리고 노동계급의 여성해방이 천박하게 해석되고 페미니즘의 기반이 강화되는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수위를 급상승시켜 정색하고 화를 내긴 했지만, 그 글의 기조는 여전히 옳다고 생각한다. ‘점’님도 이 문제를 숙고한다면 그리고 진정 사회주의 대의를 방어하겠다고 한다면 내 의도를 충분히 이해해 줄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걱정’님의 흑마술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리고 ‘걱정’이 눈치 채지 못한 것이 있다. 그 글의 제목엔 ‘등의’라는 말이 붙어 있다. 그 ‘등’이란 말로는 ‘걱정’님을 포괄하려 했다. “내가 타인을 배려할 때 타인도 나를 얼마나 배려하는지” 안다는 ‘걱정’은, 사실 남을 잘 배려하지 않는 분이었다. “얼치기 사회주의자” “찌질이 무뇌아”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봐야”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과 같은 화려한 언어폭력을 구사하며(<광수씨 걱정에…>) 등장하신 분이다. 그런데 지금 글엔 언어폭력으로 트집 잡을 만한 구절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걱정’님은 내 글에 대해 의심할 필요가 없다. 이미 그 효과를 몸소 입증하고 계시다.

내가 그 글을 쓰며 생각한 것은 “남녀대립구도의 소위 ‘성폭력’이 아닌, [남녀를 불문한] 폭력이나 언어폭력이 우리가 정작 문제 삼아야 하는 쟁점”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유행처럼 채택하는 ‘반성폭력규약’(아마도 한국 좌익들만 채택하는 것으로 생각되는)은 더 폭을 넓혀 성만이 아니라 모든 차별을 배격하는 조직 내 ‘민주주의 규약’으로 재편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조직의 단결을 저해하고 억압하는 기제는 성적인 차이만이 아니며, 폭력은 성폭력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다듬을 구석이 많은 ‘초안’은 이 글의 말미에 첨부한다.

 

6. 예상했지만 그래도 허망한 대답

자, 이렇게 먼 길을 돌아서 이제 우리의 쟁점, ‘김광수의 글은 성폭력인가? 그렇다면 왜인가?’에 도달했다. 그런데 해박한 지식을 과시하고 때로는 감성을 예민하게 자극하면서 장황할 정도로 다변이던 ‘걱정’님의 그 문제에 대한 대답은 참으로 간결하다: “그 글은 다시 봐도 문제적입니다.”

그럼 그렇게 판정하는 이유는? 불행하게도 그리고 놀랍게도 하지만 당연하게도, 없다!

그리곤 문제를 제기한 노힘 여성활동가들은 “남편에게 맞아 피를 철철(!) 흘리는 아내”로, 김광수씨는 그렇게 팬 “남편”으로, 반론을 펴는 사람들은 “여자와 북어는 사흘에 한 번씩 패야 한다.”는 한심한 말을 내뱉으며 2차 가해를 가하는 ‘가해자집단’으로 순식간에 공중부양 된다. 어이쿠, 이런! 이 결론을 말씀하시려 그 긴 이야기를 하셨다니.

하지만 이해 못할 일은 아니다. 민망하게 저 이야기만 달랑 하기에는 부끄러우셨던 게다. 그래서 ‘노동운동과 페미니즘을 두루 섭렵했고 민투위 문제마저도 생각이 미치지 아니한 바는 아니다’라는 불필요하게 과다한 양념들이 본재료의 빈약함을 숨기기 위해 꼭 필요하셨던 게다.

 

7. 페미니즘 VS 여성해방운동

나도 그럼 이제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이 없다.’는 말을 위로 삼으며 슬슬 자리를 걷어야 한다. 자리를 걷으며 한 가지만 이야기 하자. ‘얘들아 K가 너희를 중산층 인텔리 부르주아 여성이래. 너희들 이런 말 듣고도 참을 수 있니?’라는 젊은 여성활동가들을 향한 ‘걱정’의 악선동이 들려오기 때문이다. 혹시 이 악선동에 솔깃할 여성해방운동의 젊은 투사들에게 계속 강조하고 있는 다음 두 글을 우선적으로 진지하게 읽을 것을 권한다. 그리고 ‘대리운전노동자’님이 권하는 <여성해방과 혁명(책갈피)>도 (물론 1928~29년에 자본주의 반혁명이 일어났다는 비과학은 그것대로 비판하면서).

<맑시즘, 페미니즘 그리고 여성해방>

<노동계급의 여성해방운동을 위하여>

악선동을 방어하기 위해 몇 구절을 인용하여 말하기로 한다. 먼저, 페미니즘(그 중의 한 조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페미니즘은 계급 모순을 부정하거나, 성적 모순이 계급 모순과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사상이다. 억압의 근원이며, 해방을 위해 철폐해야하는 자본주의가, 그들에겐 선택 가능한 변수가 아니라,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수이다. 그리하여 자본주의는 그대로 둔 채, 그 틀 내에서 문제를 조금씩 다듬어 해결하려 하거나, 사회구성원들(특히 남성)의 의식에 문제의 원인이 있다고 제기한다.(<노동계급의 여성해방을 위하여>)”

그리하여 페미니즘은 세계에 대한 그 비과학적 이해 때문에 개별적인 여성주의자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궁극적으로 자본주의 체제를 온존시키는 데에 기여한다.

그 계급적 토대.

“그 페미니즘은 자본주의 유지에 기여한다는 점 때문에 부르주아 국가의 다각적 옹호 아래 자라나며, 실제로 사회 구조가 아니라 ‘의식’만 장애가 될 뿐인, 부르주아 또는 소부르주아 여성들이라는 계급적 토대를 가지고 있다.”–같은 글

그런 점에서 나는 김규항의 말로 바꾸어 ‘중산층 인텔리 여성’의 사상이라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명심할 것은, 이 말이 페미니즘의 영향 아래 있는 사람 모두 소부르주아나 ‘중산층 인텔리 여성’이라는 뜻은 아니다. 노동자들은 일상적으로 부르주아의 사상적 영향 아래 있지만, 그들이 부르주아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소부르주아 여성들이 직장이나 학업 등에서 차별에 맞서는 것은 진보적이다. 사회주의자는 민주적 평등권을 위한 그들의 투쟁을 지지한다. 하지만, 그들의 투쟁은 여성차별을 근본적으로 조장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온전히’ 성취될 수 없다. 자본주의를 철폐하는 계급투쟁이 격화되는 과정에서 그 일부는 부르주아편으로 붙을 것이고, 다른 일부는 노동계급의 강령 속에서 자신의 이해를 발견하고 여성해방운동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인식을 지지한다.

“여성해방은 개인적 삶의 영역에서 성취될 수 없다. 가사를 남녀가 좀더 균등하게 나누는 것으로는 어림도 없다. 육아, 방 청소, 식사준비 등이 개인의 책임에서 사회의 책임으로 전환되어야한다. 그러나 이것을 위해서는 사회를 완전히 개조하여 자본주의의 무정부적 생산을 생산자들 자신이 운영하는 사회주의 계획경제로 바꾸어야한다.”–<맑시즘, 페미니즘 그리고 여성해방>

여성해방은 사회주의 지향점 중의 하나이고, 사회주의는 진정한 여성해방의 전제이다.

 

노동조직 민주주의 규약(초안): 초안이고 거칩니다. 토론 제기용으로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기본원칙>

1. 사회주의 도덕률을 확립한다. 사회주의자(조직)에 대한 노동인민 전체의 신뢰를 확보하는 것이 정치적 목표이며 그 사회주의자의 도덕률은 곧 미래 사회주의 사회 전체를 관통하는 도덕률이 될 것이다. 인민은 사회주의자의 모습을 통해 미래의 도덕률을 보게 될 것이다.

1. 사회주의 도덕률의 기본은 모든 사람을 민주적으로 평등하게 대한다는 것이다. 조직 내에서 누구나 자유롭게 자신의 정치적 의견을 개진할 수 있도록 보장하고 그 권리가 침해되어서는 안 된다. 조직이 민주적으로 위임한 정치적 권위를 존중하되 직책 나이 성 등을 이용한 어떤 차별이나 억압도 허용하지 않는다.

<성적 차별과 관련하여>

1. 성차별적 사고를 배격하고 그에 맞서 단호히 싸운다. 여타의 부르주아 사상에 맞서 싸우듯 노동계급의 정치 내에 남성중심주의와 성분리주의에 맞서 싸운다.

1. 남성중심주의는 계급사회와 자본주의의 산물이며 자본주의라는 뿌리에서 자라나는 가지이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남성중심주의에 자양분을 공급해주는 자본주의를 철폐할 때 남성중심주의의 완전한 소멸로 나아갈 수 있다.

<징계>

1. 사회주의 도덕 원칙에 어긋난 행동이 노동조직 내에 발생하였을 때, 조사과정에서 또 다른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세심하게 주의하면서 사건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그 경중에 따라 처벌과 대응의 방법을 결정한다. 예를 들어 강간하거나 동료나 배우자 등에 직접적 폭력을 행사했을 경우 즉각 제명할 것이다. 언어폭력은 물리적 폭력의 전단계이며 조직성원의 관계를 심각하게 훼손한다. 상대를 존중하지 않고 폭력적 언사를 행하거나, 분명한 거부의사를 상대방이 표현하였음에도 욕이나 성적 암시를 담은 언사를 반복적으로 하여 상대방을 괴롭히는 경우, 경고조치 등을 취하고 그럼에도 같은 행위를 반복할 경우 그에 상응하여 처벌의 수위를 높인다.

 

‘성폭력론’의 폭력성에 대하여

2008·12·07

1. <2차 가해에 대한 고민>

지금의 성폭력론 논쟁과 관련하여 한 블로그에는 <2차 가해에 대한 고민>이 올라왔다. 그 글은 제목처럼 소위 ‘성폭력론’을 지탱하는 핵심 개념 중의 하나인 ‘2차 가해’에 대해 고민하는 글이다. 글쓴이는 이렇게 털어놓는다.

“반성폭력 운동을 이야기할 때마다 늘 나오는 이야기지만, 현실로 다가왔을 때는 늘 막히는 문제가 바로 2차 가해 문제다.…사건이 논쟁적일 때는 내가 그 논쟁을 원하기도 했다.…무엇이 옳고 그른지, 이것이 맞는지 틀린지 등에 대해 사람들이 자기 고민을 의견으로 이야기할 때 나는 그것을 2차 가해라 이야기하면서도 나 또한 그런 2차 가해성 발언을 했던 거 같다.”

이어 글쓴이는 그 회고를 바탕으로 초점을 지금의 논쟁으로 옮긴다.

“최근에 겪은 ‘아가씨와 건달들’에 대한 나의 문제제기 또한 그런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나의 문제제기에 수많은 댓글과 반박성 글들이 달리기 시작했다.…그럴 때 나 또한 같이 반박을 했지만, 종국에는 참을 수 없는 분노로 너의 그 글은 2차 가해라고 말해버렸다.…그런데 나의 이전 생각에는 마초와 같은 생각 없어 보이는 사람들에게 그저 입 다물라, 너희가 이것을 배워라 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여성주의는 아니라고 생각했다는 점이다.”

글쓴이는 자신의 과거의 경험과 지금의 경험을 통해서 뭔가 께름칙하고 서로 앞뒤가 안 맞는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자신의 경험적 논리와 ‘여성주의’ 논리 사이에서 모순을 발견하고 있다. 뭔가 이상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생각은 더 발전되어 결론으로 다가간다.

“…때로는 마초가 아니더라도 이러한 논쟁이 벌어졌을 때, 2차 가해자가 되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이 점에서 가해자라는 것이 현재 운동사회에서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를 이야기 해 볼 필요도 있겠으나, 그 보다는 그들이 말하는 이야기하고 싶은 자유가, 여성주의에서는 2차 가해인 이 상황에서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가 난망하다는 것이다.…그리고 나는 사실 이것이 양립불가능하지는 않을까 의심 중이다.”

글쓴이 말처럼 “사건이 논쟁적일 때, 무엇이 옳고 그른지, 이것이 맞는지 틀린지 말하고 싶은 자유”를 “여성주의에서는 2차 가해”라고 말한다. 그리고 과거와 지금의 경험에서 둘은 논리적으로 서로 모순된다는 것을 글쓴이는 느끼고 있다. 그래서 글쓴이는 묻는 것이다: “양립불가능하지 않을까?”

글쓴이의 물음에 동의한다. 그리고 그 물음에 이르기까지의 추론도 합리적이다. 그리고 나는 그 양립불가능은 사실을 객관적으로 살피기를 거부하고 나아가 그런 모든 시도를 ‘2차 가해’라고 봉쇄하는 반민주성과 비논리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언감생심이겠지만, 나의 생각에 글쓴이가 동의해 주기를 희망해 보기도 한다. 물론 그것은 희망사항일 것이다. 아마도 글쓴이는 남성의 반여성적 태도나 적(?)의 손아귀에 넘어가 “여성임을 자랑하며 반론을 펴는 여성들”이 문제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어릴 적 어떤 선생님의 가르침처럼, 분명한 것은 이렇다.

‘모든 부도덕은 비논리적이다.’ 비논리적이라고 해서 모두 부도덕한  것은 아니지만, 부도덕은 항상 비논리적이다.

 

2. ‘내 안에 파시즘 있다

소위 ‘성폭력론’의 핵심 전제에 대해 글쓴이가 이렇게 아주 ‘가느다란’ 회의를 토로하자마자, 페미니즘의 ‘자매’들은 흔들리는 그에 대한 격려 발언으로 ‘2차 가해론’ 사수에 나선다. 그 댓글들을 소개한다.

[poca]   “양립 불가능하다에 한표 ^^”

[해연] “양립불가능하다고 ‘느끼고’ 있는 것을 양립가능하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지 않을까요?”

[연부네 집] “이야기하고 싶은 자유(2차가해)=남의 인권을 유린할 자유=남에게 성적 수치심과 굴욕감을 느끼게 하고 싶은 자유=남의 인생을 망치게 할 자유…..누구신지는 모르지만 힘내셈!!! 양립불가능….하더라도 파이팅!!!”

[라디오레벨데] “양립불가능하지는 않나 라고 나도 의심을 넘어 생각 중”

문맥 상 이님들이 말하는 양립불가능 지지란 물론, 어떤 여성이 ‘성폭력’을 제기(‘아픔’을 호소)했을 때, “사건이 논쟁적일지라도, 무엇이 옳고 그른지, 이것이 맞는지 틀린지 말하고 싶은 자유”는 “2차 가해”라는 결론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라디오레벨데님의 유보적 견해만 빼놓고)

그 중 압권은 다음과 같은 명쾌(?)한 도식으로 정리해 주는 연부네님의 결론이다: “이야기하고 싶은 자유(2차가해)=남의 인권을 유린할 자유=남에게 성적 수치심과 굴욕감을 느끼게 하고 싶은 자유=남의 인생을 망치게 할 자유”

어떤가? 숨이 턱 막힐 정도로 명쾌한 논리 아닌가? 인간의 본성 가운데 하나인 이야기하고 싶은 자유가 그 표현의 자유가 그래서 사수해야 할 인간의 기본권이 ‘성폭력론’과 만나면 저렇게 흉악한 범죄가 되는 것이다. ‘마녀를 옹호하는 자 역시 마녀이거나 그 하수인이다’라는 논리는 왕년의 일이 아니다.

문제는 이렇게 파시즘적 논리를 자랑스럽게 그리고 명쾌하게 펼치는 이 님은, 여러분이 상상하는 것처럼 뉴라이트 운동 언저리에 계신 분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나는 그의 블로그를 읽으면서 이 분이 뉴라이트 간부가 아니라, 민주노총의 상층 간부라는 사실을 발견해야 했다. 그리고는 참담한 가슴을 쓸어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세상에나!

 

3. ‘진짜 2차 가해’와 ‘성폭력론 2차 가해론자’

올 초, 응징되어 마땅한 ‘진정한(?) 2차 가해’(내가 지금 말하는 ‘2차 가해’는 사실을 객관화시키려는 노력을 모두 가해라고 규정하는 ‘성폭력론’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것임을 유의하자.)가 있었다. 그것은 민주노동당 당원 몇이 소위 ‘일심회 사건’으로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되자(1차), 당 내부에 있던 자들이 그들을 국가보안법으로부터 방어하기는커녕 그 국가보안법의 논리를 그대로 받아 그들을 제명하자고 주장(2차 가해)한 사건이다. (그 사건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라면 아래의 자료들을 볼 것)

민중의 소리 기사(최기영, 이정훈 가족, “왜 수구보수세력이 하는 말만 듣고…”)

국가보안법과 전진의 배신 행위

그리고 그 ‘2차 가해자’들은 제명 안건이 관철되지 않자, 진보(?)라는 이름으로 새 당을 만들어 나갔다.

‘성폭력론’의 명쾌한 해설자이며 옹호자인 연부네 님은 그 중심인물 가운데 하나였다. 그 ‘진짜 2차 가해’를 가한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어찌하여 당 외부에서 수구보수세력들이 하는 말들은 귀 담아 들으면서 당원들이 가슴으로, 피눈물로 외치는 진실에는 왜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입니까?”라는 구속자 아내를 비롯한 일심회 가족의 호소에는 단호히 귀 닫았던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행위가 “남의 인권을 유린”했거나 “남의 인생을 망칠” 행위였다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로 인해 그 아내들은 아팠을지언정 자신은 ‘아프지’ 않았고, 그 가족들의 ‘아픔’은 자신의 정치적 이익과 무관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4. 파장은 계속 된다

‘성폭력론’ 논쟁은 그 당에서도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 듯하다. 너무도 당연하겠지만. ‘2차 가해’를 저지른 당원의 징계가 확정되었다. 그러나 그 당원은 그 결정에 승복하지 않고 징계를 거부했다. 그리고 몇몇 당원들이 여전히 또 다른 ‘2차 가해’자가 될 것에 대한 두려움 없이 ‘가해(혐의)자’를 방어하려 들고 문제를 다시 따져보자는 ‘2차 가해’성 발언들을 멈추지 않고 있다.

‘거북이’님의 “양립불가능성”에 대한 우려는 정확한 우려였다는 것이 여기에서 다시 확인되고 있다.

이 정당의 의견 자유 존중(?)은 유명하다. 심지어 ‘북괴라는 용어 사용이 정당하다는 둥, 민주노동당을 견제하기 위해 국가보안법 폐지 투쟁에 나서지 않아야 할 것이라는 둥’하는 논의들마저 버젓이 논쟁거리가 된 바 있고(아고라가 아니라 당원게시판에서!), 그런 반동적 견해를 지닌 자들에 대해 당 이념과 맞지 않아 출당을 요구하거나 재교육을 실시했다는 얘기는 들어본 바 없다.

그런데 소위 ‘성폭력론’에 대해서는 단호하고도 원천적으로 반론의 여지를 차단하고 있다. 혐의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 가해혐의자에 대해 6개월간의 재교육과 불응할 경우 제명 판정이 떨어졌다고 한다. 이런 모습을 보며 한 당원은 “우리당이 집권하면 ‘우리 패거리에 반하는 자는 다 숙청하라!’라는 파시즘이 될 것 같다.”고 앞날을 우려한다.

 

*                       *                       *

소위 ‘성폭력론’에 따르면, 모든 남녀 관계 속에서 여성이 피해를(아픔을) 호소하면, 가해혐의자(나는 확정되기 전까지 ‘혐의’라는 말을 붙여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성폭력론’에 따르면 혐의를 받는 순간 바로 가해자가 된다. 소명 기회가 박탈되기 때문이다.)의 소명이나 그 사건의 객관적 진상 파악 시도까지도 모두 ‘성폭력 2차 가해’가 된다.

이 ‘성폭력론’은 인텔리 여성들의 좌우를 막론한 권력 확대에 단기적으로 기여할지는 모른다. 그러나 노동운동의 규율을 확립하는 것에는 기여하지 못한다. 오히려 진짜 ‘성폭력’이 지나치게 광범위하게 해석되는 ‘성폭력’ 개념에 묻혀 장차 희석될 우려가 있고, 남성과 남성 사이나 여성과 여성 사이의 나이나 직책 등에 근거한 봉건적 관계나 폭력행위는 별문제가 아닌 것처럼 만드는 데에 기여한다. 게다가 지난 <성폭력론의 폐해와 단일인격체론>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노동조직 내의 여성과 남성 사이의 협동 작업을 재앙적으로 저해한다. 그리고 ‘아픔’을 호소하기만 하면 모든 가치를 제치고 들어주는 풍토는 여성 노동자나 활동가 스스로에게 장기적으로 전혀 바람직한 상황이 되지 못하며, 여성 활동가의 독립성과 평등성을 비하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반여성적이다.

표현의 자유나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심각함을 넘어 범죄적 수준으로 저해한다. 이러한 내용을 갖는 ‘피해자 중심주의’나 ‘2차 가해’론은 뉴라이트도 한 수 배워야 할 정도로 반민주적이며 파시즘적인 것이다. 이러한 ‘2차 가해론’은  하물며 자유주의와도 양립할 수 없다. 사회주의와는 말해 무엇 하랴!

?

  1. ‘담배 성폭력 사건’과 관련하여

  2. ‘맑시즘 2012’ 참관기 2: ‘맑시즘, 페미니즘 그리고 여성해방’

  3. 성매매방지법과 노동계급

  4. 노동계급의 여성해방운동을 위하여!

  5. (IBT) 성, 검열과 여성의 권리

  6. 페미니즘과 소위 ‘성폭력론’에 대하여

  7. (IBT) 맑스주의, 페미니즘, 여성 해방(19호, 1997)

  8. (IBT) 자본주의와 동성애 억압(15호, 1995)

  9. (IBT) 자본주의와 인종주의(12호, 1993)

  10. (IBT) 반동적인 낙태반대 운동을 분쇄하자!: 사회주의 혁명을 통한 여성해방을!(7호, 1990년 겨울)

  11. (IBT) 박탈당한 아일랜드 여성의 선택권: 요구에 의한 무료 낙태를 즉각 허용하라!(31호, 2009)

  12. (IBT) 히잡착용 금지에 반대한다(27호, 2005)

  13. 매춘방지를 위한 제 5차 국제회의/레닌

  14. (스탈린주의와) 성매매특별법 관련 논쟁

  15. ‘충남 성폭력’ 사건에 대한 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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