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연락처 :
bolle1917@gmail.com

* 원출처 – 국제볼셰비키그룹(IBT) 웹사이트


소비에트 중앙아시아 여성들 내에서

초기 볼셰비키의 활동

[녹색] : 역주

<여성과 혁명>[1970년대 혁명적 트로츠키주의 조직이었던 스파르타쿠스 동맹(Spartacist League)이 창간한 여성/흑인/동성애자 등 소수자 의제를 다룬 계간지] 12, 1976년 여름.


 

러시아 여성들의 삶에 극적인 변화를 준 1917년 10월 혁명의 승리는 제정 러시아의 식민지배를 받았던 중앙아시아 여성들의 삶에도 거대한 변화를 끼쳤다하지만 많은 여성들이 가축보다 못한 대우를 받는대체로 봉건적 또는 반봉건적인 이슬람 문화권에 속하는 지역에서 변화는 조금 더뎠다.

물론 문화권마다그리고 문화권 내에서도 사회계급과 생산 공정의 성격에 따라 여성들이 처한 상황은 각기 달랐다그러나 볼가강 어귀와 코카서스투르키스탄이란아프가니스탄몽골과 북쪽의 시베리아를 포함한 지역에서 사실상의 노예화가 규범으로 자리 잡았다노동을 해야만 하는 빈곤층 여성들—유목민농민 여성들—에 대한 규제는 필연적으로 덜 엄격하게 적용되었지만 말이다도시에서의 일정수준의 무역과 산업안정적인 생활이 이슬람법의 엄격한 집행을 위한 전제조건이었다.

이슬람 여성의 상태를 결정짓는 것으로는 코란의 경구뿐만 아니라 종교적 관습법[샤리아(Shariat)]과 민법[아다트(Adats)]을 성문화한 지역의 관습법도 있었다코란에 기초한 약간의 부분적 개혁—여아 살해의 금지일부다처제의 제한여성의 소유/상속권의 제한적 인정—은 대체로 지역의 샤리아와 아다트에 의해서 무산되었다.

사실상 보편화된이슬람 혼인제도의 거래적 성격을 보여주는칼림(kalym) 또는 신부값 제도는 정서적 유대감이나 개인적 약속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일부 지역에서 신부는 결혼식에 참석할 필요도 없었다여성의 몸값은 양가 사이에서 사전에 협상되었고결혼식은 단지 거래가 성립되었음을 공표하는 의식이었을 뿐이었다결혼계약은 언제나 남편에 의해 파기되었으며일부다처와 조혼은 아주 흔한 일이었다부부관계를 갖기에 육체적으로 미숙한 아이들은 성관계가 가능하도록 성기를 찢는 끔찍한 수술을 당해야 했다.

칼림은 여성을 신부값을 지불한 남편에게 예속시켰다종종 어린 시절부터 그러하기도 했다.만약 여성이 도망치면 그녀의 남편 또는 남편의 친족들이 그녀를 범죄자로 수배하고 처벌할 수 있었다도망친 아내는 다리를 부러뜨리는 형벌이나 다른 야만적 고문을 받을 수 있었다.불륜이 의심되는 여성에게 알맞은 형벌은 달군 쇠로 성기에 낙인을 찍는 것이었다.

빈곤층을 위하여 약탈혼이 종종 칼림을 대체하기도 하였다여성이 한번 납치되어 강간당하면그 여성은 선택권이 없었고 납치범과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그녀가 불명예를 떠안았고 그녀를 취할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과부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왜냐하면 신부값으로 구매된 그녀는 남편의 가족 또는 친족의 소유물이었고 남편의 형제에게 상속되었기 때문이다이슬람법에 따르면 자살이 유일한 대안이었다그러나 천국에 가는 것도 남편의 선택에 달렸다.아내가 자살을 통해서 계약을 위반했다면 남편은 그녀를 천당으로 초청하지 않을 것이다.

여성에게 베일을 쓰고 격리될 것을 요구하는 규칙은 641년 페르시아 귀족들이 개종하면서 이슬람법에 도입되었다중앙아시아의 많은 지역들에서 요구된 베일로는 단지 입만 덮는 야시무크(yashmuk)만 있었던 게 아니라 볼 틈과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얼굴과 몸 전체를 덮는 파란자(paranja)도 있었다수세기 동안 많은 여성들은 몸을 꽁꽁 싸매고 그녀들의 이치카리스(ichkaris, 격리된 생활공간안에서 고립된 생활을 하였다야쿠츠크 전설은 이슬람교의 모범적인 딸을 묘사하고 있다그녀의 몸은 썰려져서 손님에게 식사로 제공된다여자는 침묵을 지키며 고통을 견딜 뿐만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웃고자 노력한다.

1880년대 제정 러시아의 진출은 무슬림의 동방에 사회구조와 기술상의 약간의 진보를 가져다주었다가난한 러시아 농민들은 이 지역의 미개인들에 비하면 왕족처럼 살았다.

당시 짜르 정부는 농촌 마을에 식용작물 대신 면화 재배를 강요했다그리고 생산물을 러시아의 방직공장으로 수송하기 위한 철도가 개통되었다철도 노동자들을 따라온 것은 베일을 쓰지 않은 여성들—러시아의 매춘부들이었다오랫동안 이들은 무슬림 유목민과 농민들에게 러시아 자본주의가 여성에게 선사한 해방의 유일한 모델이었다.

 

10월 혁명이 중앙아시아를 변혁하다

10월 혁명의 승리와 더불어 볼셰비키는 중앙아시아로 시선을 돌렸다어마어마하며 또한 절실하게 요구되는 천연자원 개발에 대한 희망을 품으면서 말이다그러나 이 자원들을 서쪽으로 운송하는 일에 차질이 생겼다중앙아시아가 처음부터 모든 종류의 반혁명 세력과 퇴각한 백군을 위한 피난처였기 때문이었다이 지역에서 부르주아 세력의 결집은 제국주의 세력에 반소 공격을 위한 기지를 제공할 것이었다.

또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중앙아시아로의 확대는 경제적으로 낙후한 지역에서 급성장하는 민족주의의 저항을 약화시키고 지구상의 여타 저개발 지역의 근로인민들을 고무시킬 사회주의적 개발의 전형이 될 수 있었다.

거대한 경제적 문화적 도약을 위해서는 소비에트 중앙아시아를 볼셰비키 권력을 통해 변혁된 사회와 통합하는 것이 필요했다트로츠키는 이 지역을 일컬어 선사시대의 것이 아직도 남아있는 후진 지역 중에도 가장 후진 지역이라고 불렀다확실히 모스크바에서 동쪽으로 출발하여 중앙아시아를 가로지르는 여행은 인류 발전의 세기를 거슬러 올라가는 여행이었다.

볼셰비키는 여성에 대한 극도의 억압을 사회 전반의 전근대성을 보여주는 지표로 여겼는데,이런 접근법은 도덕주의가 아니라 유물론에 기초한 것이었다여성이 베일을 쓰고 갇혀있고 매매된다는 사실은 단지 문제의 표면만을 보여줄 뿐이라고 그들은 이해했다칼림은 여성 일반에 대한 모종의 사악한 음모인 것이 아니라 다만 토지와 물에 대한 권리와 긴밀하게 연관된 생산 조직을 위한 핵심적 장치일 뿐이었다종종 모든 친족들이 오랫동안 하게 되는 칼림의 지불은 궁극적으로 지역의 베이(beys, 지주와 상인)의 사병으로 참여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부채의무충성의 복잡한 체계에 참여함을 약속하는 것이다이렇게 해서 모든 약속은 봉토에 대한 협박과 피의 복수에 의해 지탱된다.

이러한 친족과 부족의 충성은 사회진보에 걸림돌이 되었다왜냐하면 이것들이 계급관계를 흐리고 토지와 기타 소유에 대한 몰수와 재분배를 막았기 때문이었다부의 균등화로 이득을 보게 될 빈농들이 몰수의 위협을 받는 그들의 부유한 친척의 소유물을 숨겼다피의 복수는 침묵을 강요했다그리고 소비에트의 권위는 옛 압제자들의 음모로 약화되었다.

 

내전

볼셰비키는 얻을 것이 가장 많은 여성들이 봉건제의 사슬을 끊는 고리가 되길 희망했지만이것은 상당한 준비를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여성을 억압하는 이슬람 제도들은 실제 사회적 기능을 수행했으며간단하게 철폐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부르주아 가족과 마찬가지로 이것들 역시 대체되어야 할 것들이었다.

레닌은 토착 제도와의 조급한 대립을 피해야 한다고 경고하였다심지어 그것들이 공산주의 원칙과 소비에트 법에 명백하게 위배되는 것일지라도 말이다대신에 레닌은 소비에트 국가권력을 이용하여 그것들을 조심스럽고도 체계적으로 약화시키면서 소비에트 제도가 우월함을 입증할 것을 제안하였다이것은 강력한 러시아 정교회에 대하여 훌륭하게 수행된 정책이기도 했다.

이러한 실천을 중앙아시아로 확대하면서소비에트 정부는 전통적인 이슬람 카디(kadi) 법정과 법규에 대한 대안으로서 소비에트 법률 제도와 시민 법정의 권위를 세우는 캠페인에 착수하였다비록 카디 법정이 열리는 것이 허용되기는 했지만정치적 소송 또는 어떤 소송이라도 쌍방이 소비에트 법정 대신 카디에서 분쟁을 해결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경우에는 이 소송들을 처리하는 것을 금지해서 이들의 권한을 제한하였다소비에트 법정이 훨씬 인정받으면서형사사건은 카디의 영향력에서 벗어났다그 다음정부는 카디 법정의 판결에 불만스러워하는 당사자들이 소비에트 법정에서 항소할 수 있도록 했다이러한 방식으로 소비에트는 피억압자들의 편에 서 있다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동시에 카디가 현상유지를 옹호한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다결국 카디는 소비에트 법에 저촉되는 어떤 이슬람법도 집행할 수 없게 되었다제노텔(Zhenotdel)—노동자농민여성부—의 활동가 한 명을 포함하는 두 명의 소비에트 대표자들이 모든 카디 법정의 심리 절차를 감독하고 판결을 승인하는 일에 할당되었다최종적으로카디에 제공되던 와프크(wafks, 기부금)가 몰수되고 농민들에게 재분배되면서카디는 완전히 사라졌다.

이 비대립정책은 결코 후진적이고 억압적인 제도에 대한 굴복을 의미하지 않았다이것은 공산주의와 코란이 화해할 수 없음을 명확하게 보여주었다민족자결권과 토지를 경작자에게 분배할 것을 약속한 볼셰비키 강령에 이끌린 붉은 율법사들(Red Mullahs)”이 그들의 추종자들에게 이슬람이 곧 사회주의이고 사회주의가 곧 이슬람이라고 설교했지만볼셰비키는 여성의 기본권을 근거로 소비에트와 무슬림 법은 결코 공존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였다.

제국주의자들의 지지를 받는 반혁명 세력에 맞서 싸운 볼셰비키 국가를 할퀸 유혈낭자한 내전은 신생 노동자 국가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생존에 심각한 위협을 가했다이 시기에볼셰비키가 중앙아시아에 개입할 여력이 없었을 때그들의 가짜 사회주의 반대파들이 사용한 조잡한 전술은 반소비에트 감정을 조장하였다.

중앙아시아의 철도 중심지인 타슈켄트에서소비에트 정부는 러시아 이주노동자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이들 다수가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의 지도를 받는 철도 노동자들이었다장차 있을 스탈린주의 정책의 전조로서 대러시아 국수주의와 방종이 활개를 치는 와중에이들은 가장 존경받고 있었던 이슬람 단체들의 재산을 몰수하고토착 지식인들과 소비에트에 호의적인 율법사들을 비노동계급 세력으로 규정하고 소비에트에서 축출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근로대중의 자결권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동시에 이들은 전직 백군 장교들과 협력하였다내전 중 최악의 식량난 속에서 타슈켄트 소비에트가 독단적으로 농민들에게 음식을 징발하기 시작하자레닌은 이를 중지시키기 위하여 개입하였다그러나 반소비에트 반란군의 씨앗은 뿌려졌다.

볼셰비키에 공공연히 적대적인 바스마치(Basmachis)라는 부족들과 복고주의 세력들(주로 우즈벡/타지크인)은 현상유지를 위하여 싸우는 추악한 세력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모스크바로부터 지역에 사절로 파견된 터키의 엔베르 파샤(Enver Pasha)[오스만 제국의 장군()투르크주의자. 1차 세계대전 당시 오스만 제국의 국방장관이었다종전 후 독일로 망명한 그는 독일에 체류하고 있던 볼셰비키 지도자 칼 라데크의 협조로 러시아에 머무를 수 있게 되었다.]가 바스마치에 항복하면서 서로 싸우던 베이들을 광신적 이슬람 테러리스트 부대로 통합시키는 데 필요한 지도력과 권위를 제공하자중앙아시아에서의 내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곧 수천 무슬림들이 이들에게 가담하였다.

소수의 중앙아시아 여성들이 내전 시기에 볼셰비키의 편에 섰고이들 중 극소수만이 살아남았다가족과 법예언자의 말씀에 반기를 든 이 여성들의 영웅적인 활약은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것이었다차이네트 헤스미토바(Tsainet Khesmitova)는 이러한 여성들 중 한 사람이었다그녀는 늙은 남편에게서 도망쳐 나와서비록 여전히 어린 소녀였음에도 적군(赤軍)의 첩보원으로 활약하였다그녀의 남편이 고용한 자객이 결국 그녀를 잡아서 혀를 자르고상처투성이인 그녀를 사막에서 아사하도록 목까지 파묻어 버렸다그녀는 적군에 의해 구조되었지만 불구가 되어서 노동불가능한 볼셰비키 당원을 위한 모스크바 요양소에서 여생을 보내야 했다.

또 다른 여성으로 다게스탄 최초의 여성 활동가인 우무 쿠숨 아메르하노바(Umu Kussum Amerkhanova)가 있다그녀는 백군과 동족 남성들에게 사형을 선고 받고 여러 차례 탈출을 하였다남성복 차림으로 그녀는 다게스탄 전선에서 내전이 끝날 때까지 적군을 지휘했으며,살아남아서는 중앙아시아 여성들의 역할을 바꾸기 위한 활동을 수행하였다.

 

억압의 베일 벗기기

볼셰비키의 중앙아시아에 대한 효과적 개입력은 내전의 종료와 더불어그리고 전시공산주의라는 비상정책이 신경제정책 실시와 더불어 안정화로 바뀌면서 재건되기 시작했다출중한 군사령관 M. 프룬제(M. Frunze)와 중앙아시아 출신의 볼셰비키 지도자 G. 사파로프(G. Safarov)의 지도 아래 투르키스탄 위원회(Turkestan Commission)가 설치되었다.

혐오의 대상이 된 이주 노동자들은 러시아로 소환되었으며이들이 몰수한 토지는 이슬람 노동자들에게 분배되었다식량징발이 물납세(物納稅)로 대체되고 정부가 비축한 종자와 식량이 분배되면서바스마치 반란은 끝나게 되었다그러나 국수주의적 멘셰비키 정책에 대한 농민들의 경험은 잊혀지지 않았다농업에서의 긴장이 또 다시 악화된다면차후에도 저항이 벌어질 수 있었다.

전쟁의 종료는 무슬림 여성들 사이에서의 볼셰비키의 체계적인 활동이 시작됨을 의미했다.토착 활동가의 부재 속에서제노텔의 가장 헌신적이고 용기 있는 활동가들이 무슬림 여성들을 만나서 새로운 소비에트 법과 그녀들의 삶을 바꿀 강령을 설명하기 위하여 파란자를 입었다지역의 금기를 위배하여 남편아버지형제들의 분노를 사 살해당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임무였다실제로 수많은 제노텔 조직가들의 훼손된 시신이 발견되면서결국 소비에트 정부는 명백한 반여성주의적” 살인을 반혁명적 범죄로 다루면서 사형제도를 부활시킬 수밖에 없었다.

제노텔 활동가들은 해당 지역의 지리적 여건에 따라 붉은 천막(Red Yertas)”, “붉은 보트(Red Boats)”, “붉은 모퉁이(Red Corners)”를 조직하였다이들은 위생과 수공예에 관한 교육을 실시하면서오락거리와 사회화된 공간을 제공하면서부족한 소비재들을 나눠주면서 지역의 여성들을 끌어당겼다처음에 이 모임은 새로운 법을 홍보하고 설명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지만이후에는 문화와 교육의 중심부가 되었으며성공적인 문맹퇴치 캠페인을 벌였다.

1924년 제13차 당대회에서 중앙아시아 여성들을 생산과 정치로 진출시키기 위한 운동이 시작되었다여성대표자들의 조직을 위하여그리고 칼림과 일부다처제에 맞서 싸우기 위한 연합을 위하여 중앙과 지역 예산으로부터 기금이 조성되었다또한 생산자/소비자조합의 구성과 문맹퇴치와 위생을 위한 모임보건소의 건설을 위한 계획이 수립되었다.

낡은 가치들이 너무 뿌리 깊게 자리 잡아서 종종 중앙아시아의 공산주의자들도 여성의 상태를 크게 개선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고여성들도 자신들을 겨냥한 범죄를 제소하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였기 때문에이러한 조치들의 실행은 계속해서 한 줌의 제노텔 활동가들의 진취성에 의존하였다새로운 조치들에 대한 지역당의 반응은 공공연한 적대와 사보타지에서부터 의도치 않은 몰이해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예를 들어다게스탄의 지역당은 칼림을 철폐한 법을 신부값을 인하하는 제도인 양 설명하였다일부 지역에서 당은 공정한 가격 책정 방식을 도입하였다예를 들면부유한 집안의 젊고 아름다운 여성은 300 루블얼굴이 얽은 과부는 뿔 없는 소와 같은 가격.

1924년경 제노텔 조직이 많은 지역으로 확장되었다그리고 이것은 그들의 영향력과 물질적 조건의 변화에 기인하는 것이었다중앙아시아 여성들은 처음으로 선거를 하였다투표는 여성들이 공공장소로 나가기 위한 정당한 사유이며때문에 그녀의 남편들이 망신당할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당이 공식적으로 요청했다는 사실 때문에 이러한 진보는 촉진되어졌다.

회의석상에서 여성들에게 당직에 출마하라는 권유가 있었다동시에 법의 개정과 토지 재분배가 이루어지고생산자/소비자조합을 통해서 종자와 농기구를 얻고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고 여성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설 수 있게 되었다이혼법이 공표되고 결혼의 경제적 종속에 대한 이러한 대안들이 실행되자 이혼율이 증가했다특히 어린 신부들2, 3부인들이 이를 주도하였다.

 

스탈린주의화

훈련과 교육에 평등하게 접근하게 된 새로운 이혼녀들은 농업을 집단화하고 산업의 노동자성을 강화하는 열정적 전위가 되었다노동에 따른 가계소득 증가로 남편들의 적대감을 누그러뜨린 결혼 여성들도 이 대열에 합류하였다그러나 13차 당대회에 앞서 열린 1924년 1월 당대회에서 당의 지도부강령방법들은 결정적으로 바뀌었다.

1923년 이후 혁명의 퇴보는 일국사회주의” 이론으로 표현되었으며소련의 노동자 민주주의를 교살하면서 정부의 모든 부문에 침투하여 그것들을 뒤틀리게 했다.

강제적 농업집단화와 같은 3” 정책의 불길한 서곡으로중앙아시아의 전통적 풍습에 대한 법적 공세가 이혼율이 급격하게 증가할 때까지 강화되었다비록 지역당지부는 공세의 속도에 저항했고 당사자들 모두에게 악영향을 줄 것이고 소비에트 권력의 유지에 위협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으나제노텔은 여성의 이혼을 위한 편향적 선동을 계속 진행하였다감당할 수 있는 수준 이상으로붉은 천막클럽병원이 이혼녀들로 가득 찰 때까지 말이다이를 지지할 수 없는 여성 대중의 영향 하에서 자포자기한 모임들은 청산되었다어떤 경우에는 이 모임들이 매춘의 장으로 변질되었다.

1927이 공세는 격리와 베일에 반대하는 쿠드슘(Khudshum)이라는 이름의 단일쟁점 캠페인으로 제한되었다우선 당 회의에서 남편들은 아내의 베일을 벗겼다그리고 1927년 3월 8세계 여성의 날을 기념하는 대중집회에서 수천의 열광적 참가자들이 파란자를 버려라!”라는 구호를 외치며 베일을 찢고 파라핀을 붓고는 불태웠다. “베일이 없어졌으면과 같은 시들이 낭송되어졌고 두 번 다시 칼림은 없다가 상영되었다공공장소와 종교적 장소에서의 강제적 격리폐지를 추진하면서제노텔 선동가들은 거리에서 베일을 벗은 여성들의 행진을 이끌었다병사들의 보호를 받는 빈민 여성들의 무리가 부유한 여성들의 베일을 찢고,숨겨진 식량을 찾아내고범죄로 규정된 전통(칼림을 위한 혼담을 성사시키려는 것 등)을 고수하는 자들을 색출하면서 거리를 누볐다.

3월 8일의 쿠드슘은 성공적인 듯 했다그러나 3월 9베일을 벗은 여성들 수 백 여명이 그들의 친족과 종교 지도자들의 부추김을 받아 성장하는 반동들에게 학살당했다종교지도자들은 당시에 발생한 지진을 베일을 벗은 것에 대한 알라의 징벌이라고 설명했다바스마치 반란군의 잔당들은 타시 쿠란(Tash Kuran, 지하 반혁명 조직)으로 재편되었다이들은 나르흐(Narkh, 지역의 풍습과 가치들)의 수호를 약속했고 그 결과 번성하게 되었다.

이혼을 요구하는 여성들은 흉악한 자경단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그리고 당간부들을 겨냥한 린치는 제노텔 활동가들을 말살했다침 뱉기조소에서부터 윤간과 살해에 이르기까지베일 벗은 여성에 대한 대대적 테러가 대다수 여성들에게 다시 베일을 착용하도록 강요했으나 곧 다시 거부되었다.

당은 여성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민병대를그리고 콤소몰(Komsomol)[소련에서 사회주의 정치 교육을 위하여 공산당의 지도 아래 조직된 청년 단체]종국에는 일반 당원들과 적군을 조직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러나 이것이 자멸적 정책을 바꾸지는 못했다세계 여성의 날의 대실패는1928, 1929년에도 비슷한 재앙적 결과를 초래하면서 반복되었다당간부들 가운데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말이다살아남은 모임들에서 제노텔의 지도력이 약화되면서법적 공세는 이제 사라졌다.

1929모스크바가 지시한 강제적 농업집단화에 대한 농민대중의 총체적 저항이 중앙아시아를 휩쓸었다중앙아시아 무슬림 여성들을 위한 의미 있는 사회적 진보는 연기되었다전근대적 이슬람 전통을 약화시킬 수 있을 정도로 계획경제의 생산력이 일자리교육의료사회복지를 제공할 수 있는 수준으로 충분히 발전해서 의미 있는 성과를 내기 시작하는 것은 10년 안에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러시아 혁명은 여성해방의 객관적 전제조건들을 창출했다그러나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의 형성은 소련 사회 전반에 걸쳐 여성들이 얻은 중대한 성과들을 역전시켰다이리하여퇴보한 노동자 국가가 제공할 수 없는 서비스는 가정이 제공한다고 여기는점점 고립되어가는 체제에 의하여레닌이 지도하는 볼셰비키가 가사노동의 사회화로 대체하려고 했던 억압적 가족구조가 경제적 제도로서 부활하였다가족제도를 방어하기 위해 낙태는 불법화되었고이혼은 보다 쉽지 않게 되었다그리고 정부보조금과 모성영웅(Mother Heroine)” 메달을 통해 여성들이 되도록 많은 아이를 양육하도록 장려했다. 1934타시 쿠란의 테러에 의한 중앙아시아에서의 제노텔의 물리적 청산을 승인하기라도 하듯이소비에트 정부는 제노텔을 조직적으로 청산했다.


Early Bolshevik Work Among Women of the Soviet East

?

  1. ‘담배성폭력 사건’에서 배운다

    Date2018.09.29 Category여성/소수자 해방운동 By볼셰비키 Views826
    Read More
  2. 무죄추정의 원칙을 방어하자!: 안희정 1심 판결에 부쳐

    Date2018.09.23 Category여성/소수자 해방운동 By볼셰비키 Views2831
    Read More
  3. (IBT)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그리고 ‘미투 운동’

    Date2018.03.04 Category여성/소수자 해방운동 By볼셰비키 Views4498
    Read More
  4. 「국제여성의 날을 맞이하여」 레닌

    Date2018.02.27 Category여성/소수자 해방운동 By볼셰비키 Views2511
    Read More
  5. 착란적 사상 ‘남녀적대주의’와 그 복무자들

    Date2017.11.11 Category여성/소수자 해방운동 By볼셰비키 Views2541
    Read More
  6. 사회 하층끼리의 '이이제이' 싸움과 그에 몰입케 하는 소위 '좌파' '진보'에 대하여

    Date2016.10.27 Category여성/소수자 해방운동 By볼셰비키 Views835
    Read More
  7. 메갈리아와 여성해방에 대한 우리의 입장

    Date2016.07.30 Category여성/소수자 해방운동 By볼셰비키 Views18711
    Read More
  8. 퀴어문화축제조직위원회의 노동자연대 부스 취소 결정에 대하여

    Date2016.05.28 Category여성/소수자 해방운동 By볼셰비키 Views1538
    Read More
  9. (IBT) 소비에트 중앙아시아 여성들 내에서 초기 볼셰비키의 활동

    Date2015.05.24 Category여성/소수자 해방운동 By볼셰비키 Views828
    Read More
  10. (IBT) 사랑과 결혼: 동성애, 자본주의 그리고 평등

    Date2014.12.10 Category여성/소수자 해방운동 By볼셰비키-레닌주의자 Views7472
    Read More
  11. 세칭 '다함께/대학문화 성폭력 사건'에 대한 몇 가지 생각

    Date2014.12.05 Category여성/소수자 해방운동 By볼셰비키-레닌주의자 Views1799
    Read More
  12. 「노동여성에게」 레닌

    Date2014.03.24 Category여성/소수자 해방운동 By볼셰비키-레닌주의자 Views2347
    Read More
  13. 충남 성폭력 사건 공개토론회 참관기 : ‘인권감수성’과 ‘계급/정치 감수성’의 심각한 이상증세

    Date2013.08.27 Category여성/소수자 해방운동 By볼셰비키-레닌주의자 Views5143
    Read More
  14. ‘충남 성폭력’ 사건에 대한 입장

    Date2013.07.27 Category여성/소수자 해방운동 By볼셰비키-레닌주의자 Views5731
    Read More
  15. (스탈린주의와) 성매매특별법 관련 논쟁

    Date2013.02.25 Category여성/소수자 해방운동 By볼셰비키-레닌주의자 Views4974
    Read More
Board Pagination Prev 1 2 Next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