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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출처 – 국제볼셰비키그룹(IBT)

 

자본주의와 동성애 억압

 

올바른 과학적 사고와 강령을 획득하기 위해 혁명가들은 동성애 문제를 이해해야한다. 맑스주의자들은 언제나 사회를 총체적으로 이해하고 생산관계, 종교, 가족 등 모든 사회현상들을 사적 유물론의 관점에서 분석하려고 노력해왔다.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레닌이 말했듯이 노동계급에게 직접 영향을 미치는 문제에만 관심을 집중하면 안된다:

“노동자들은 구체적이며 특히 시사적 정치적 사실과 사건들을 통해 모든 사회계급의 지적, 도덕적, 정치적 삶의 모든 측면들을 관찰하여 교훈을 도출해야한다. 그리고 모든 계급, 계층, 집단들의 삶과 활동의 모든 측면들에 대해 실제로 유물론적으로 분석하고 판단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것을 통해서만 노동계급의 의식은 진정한 계급의식이 된다.”

레닌은 노동계급 정당을 “인민의 호민관”이라고 불렀다. 이 정당은 자본주의에서 발생하는 모든 억압에 대한 투쟁을 지도하고 피억압 인민의 투쟁을 노동계급 권력 장악 투쟁으로 연결시키려고 노력한다. 맑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의 모든 억압에 대항하고 이 정신에 입각하여 동성애자, 이성의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 성전환자, 가학 피가학성 성애자 등에 대한 탄압을 명확히 반대한다. 또한 성 관계 당사자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인정하는 한 성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단호히 반대한다.

자본주의는 자신이 가하는 고통을 여러 집단에게 분산시킨다. 한 집단만이 모든 고통을 겪는다면 이 집단은 통일된 힘으로 투쟁하여 자본주의를 심각하게 위협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임무는 단순하고 쉬울 것이다. 자본주의는 자신이 발생시키는 고통을 혼란스러워 보이는 패턴으로 분산시키고 장애인, 이민노동자, 종교 소수파, 노인, 청년 등 고통을 당하는 자들이 서로 고립된 채 홀로 투쟁하게 만든다. 피억압 인민 모두의 이익을 옹호하고 이들의 투쟁을 노동계급 혁명의 중심축으로 조직하는 것이 노동계급 혁명정당의 임무이다.

레닌이 말했듯이 맑스주의자는:

 

“인민의 호민관이 되어야한다. 어디서 발생하든 어떤 계급이나 계층에게 가해지든 모든 형태의 폭압과 억압에 대항해야한다. 이 모든 폭압과 억압의 현상들을 일반화시켜 경찰의 폭력과 자본주의적 착취라는 단일한 청사진을 제시해야한다. 아무리 작은 사건도 전부 활용하여 모든 사람들의 눈앞에 자신의 사회주의적 신념과 민주적 요구들을 제시해야한다. 또한 모든 사람들에게 노동계급 해방 투쟁의 세계역사적 의의를 명확히 이해시켜야한다.”

 

[무엇을 할 것인가?]

이 사고는 청년 레닌이 제시한 일시적 전술적 입장이 아니었다. 민주적 권리와 피억압 인민의 옹호는 볼세비키주의의 핵심이었다. 맑스주의자는 “자기 계급의 이익에만 관심을 두어야 한다”는 생각을 레닌은 명확히 거부했다. “모든 혁명 분자들을 지도한다는 ‘블랑키주의적 망상’을 버려야한다”는 멘세비키들의 충고 역시 그는 명확히 거부했다.

맑스주의 전위가 인민의 호민관이 되어야 한다는 언명이 명확히 드러난 고전적 예가 바로 드레퓌스(Dreyfus) 사건이었다. 1894년 프랑스 총사령부에 소속된 유태인 장교 알프레드 드레퓌스 대위는 반역죄로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모욕을 당한 후 감옥에 갇혔다. 이후 그가 무죄라는 사실이 명확히 드러나자 우익과 교회와 반유태주의의 본부인 프랑스 총사령부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이 진실을 감추었다. 1898년과 99년 내내 드레퓌스를 옹호하는 지식인, 사회주의자, 부르주아 급진주의자들은 우익 세력과 거리에서 충돌했다. 좌익의 일부는 노동운동과 전혀 무관한 부르주아 장교를 노동운동이 옹호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인한 싸움은 프랑스 제 3공화국의 토대를 무너뜨릴 뻔했다. 프랑스의 사회주의자 대다수는 민주적 권리 투쟁을 자본주의 타도 투쟁으로 연결시켜야 한다는 점을 이해했다.

역사적으로 동성애는 “인간 본성에 어긋나는 행위”와 종족 보존에 대한 위협 때문에 탄압을 받아왔다. 사실 이 두 이유는 서로 밀접히 관련되어있다. 동성애가 “인간 본성에 어긋나는 행위”인 이유는 이 행위로는 자식을 낳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쾌락을 위한 이성간의 성행위, 수음, 독신 상태 등이나 동성애나 자식을 낳을 수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생물적 요인과 사회적 요인의 결합으로 사람의 성 취향이 결정되는 방식을 확실히 인식하는 것은 아직까지는 불가능하다. 또한 동성애가 갖는 생물적 기능도 증명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한가지는 명확하다: 사회적 압력을 통해 이성애만이 개인들에게 강요되고 있다. 지금보다 좀더 관용적인 사회 분위기는 동성애의 증가를 초래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인구 전체에 대한 동성애자의 비율을 증대시키거나 이성애자들의 감소로 인간의 종족 유지에 심각한 장애가 초래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종족 유지가 동성애로 위협받지는 않는다. 인류의 종족 본능에 필요한 이성애 행위는 실제 성 관계의 아주 적은 부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이전의 동성애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법적 제재의 강도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대체로 고대에는 특정 형태의 동성애가 용인되었다. 1980년 예일대학교 교수 잔 바즈웰은 [기독교, 사회적 관용, 동성애]라는 저서를 통해 카톨릭 교회가 지배한 유럽에서 11세기 중반부터 12세기 중반까지 성직자들 사이에서 동성애 시들을 포함하여 동성애와 관련된 노골적인 행위와 문필활동 등이 개화했음을 묘사하고 있다. 이 현상은 당시 성직자들의 결혼을 금지한 조치와 연관되어 있었다. 그리이스 정교회는 지금도 성직자의 결혼을 인정하고 있는데 이전까지만 해도 서방 카톨릭 교회에서도 결혼은 인정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철회되면서 동성애가 확산되었다. 동성애 성직자들은 성직자의 이성 결혼을 가장 강력하게 반대한 세력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이성 결혼이 금지된 것은 교회가 봉건제 생산양식에 적응해야했기 때문이었다. 봉건 사회에서 토지를 비롯한 재산은 장자에게 상속되었으며 이 원칙이 결혼한 성직자 가족에게 적용될 경우 교회의 재산은 곧 바닥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교회는 성직자들이 결혼하여 남아를 생산하지 못하도록 막아야했다.

성직자들의 이성 연애가 금지되자 동성애 역시 규범으로 인정하거나 금지하는 조치가 필요했다. 이 문제는 1179년 로마 라테란 대성당에서 열린 제 3차 종교회의에서 동성애 금지 결정으로 결말이 났다. 물론 이 결정은 즉시 각 지역의 법에 반영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1250년과 1300년 사이에 동성애는 봉건 유럽의 거의 모든 국가에서 사형으로 다스릴 수 있는 중죄로 규정되었다.

이렇게 동성애는 먼저 교회에서 금지되었으나 곧 극히 사악한 죄로 사회 전체에 널리 규정되었으며 이후 국왕의 법정에서 다루는 중죄가 되었다. 교회의 막강한 권위와 영향력을 생각하면 이 현상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교회가 힘을 잃고 이 규범도 힘을 잃는 요인들이 발생했다.

 

자본주의와 핵가족

동성애 탄압은 14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 감소되다가 19세기 후반에 다시 급격하게 강화되었다. 이 현상은 핵가족이 사회의 규범이 되고 혼외정사가 금기가 된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1848년에 발표된 [공산당선언]에서 맑스와 엥겔스는 부르주아 가족과는 달리 노동계급 가족을 소멸되는 제도로 묘사했다. 그러나 이로부터 2세대 내에 핵가족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계급 가족의 특징적 형태로 확고히 정착되었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노동계급 가족의 특정 형태를 요구하지 않는다. 노동력을 팔아 생존을 유지할 수밖에 노동자들이 충분히 공급될 경우 노동계급 재생산 방식은 지배 계급에게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산업혁명 초기에 노동계급 가족은 사회적 토대를 나날이 상실하고 있던 전(前)자본주의적 다세대 가족이었다. 그러나 농촌의 농민이 공장 노동자로 전환되는 과정은 사회와 개인 모두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대대적 사회 혼란과 가족생활의 무질서가 난무했다. 이와 관련된 술 중독, 아동 학대 등이 빈발했다. 남성, 여성, 아동이 모두 장시간 노동 기아 임금으로 가혹히 착취당하자 정상적이고 평온한 핵가족이 정착될 수 없었다. 이 현상을 [공산당 선언]은 “부르주아 계급은 부모와 자식간의 성스러운 협동적 관계를 외치면서 허풍떨고 있다”고 묘사했다. 실제로 자본주의 대공업이 발전하자 “노동계급 가족의 모든 긴밀한 관계들은 철저히 파괴되었으며 아동은 상거래용 물건이자 노동의 도구로 전락했다”.

그러나 노동계급 가족 형태가 확고히 정착되지 못하자 자본주의는 난관에 봉착했다. 출산, 산후 조리, 육아를 공장과 기업이 떠맡는 것은 무리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본가 계급은 노동력 재생산을 위한 이 필수적 기능들이 공장 바깥 즉 가정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수행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바로 이것이 노동계급 핵가족의 물질적 기초이자 유래이다. 그리고 이 물질적 기초가 존재하는 한 핵가족은 계속 유지될 수 있다.

노동계급의 새로운 세대를 사회화시키고 노인을 돌보고 성인 노동자에게 필요한 건강과 정서적 안정을 제공하는 것이 가족의 기능이다. 지배계급의 물질적 이익에 부합되는 이 기능이 효율적으로 수행될 수 있게 가족 제도는 역사적으로 발전해왔다. 그리고 지배계급 자신의 필요에 의해 미리 정착된 가족제도가 노동계급 가족의 이상적 형태로 선전되었다. 이것이 바로 부르주아 계급이 모든 매체를 동원하여 대중을 세뇌시키는 “평온한 가족(Home, Sweet Home)”의 정체이다.

핵가족은 부르주아 질서를 위해 상당한 사회적 응집력과 안정을 제공했다. 일터에서 고용주에게 노예처럼 부림을 당한 남성 노동자는 가정에 돌아와 이제 자신이 “보스”가 되었다. 따라서 다음날 일터에서 당할 괴로움을 잠시나마 잊고 자신의 개인적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었다. 가정은 남성 노동자가 자신의 운명을 감내하게 만드는 도구가 되었다. 또한 가정은 새로 노동자가 될 노동자의 자식들이 계급 사회의 위계질서를 인정하게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아버지의 권위). 동시에 남성 노동자의 가정에 대한 책임은 고용주의 통제력을 강화시켰다. 작업 반장을 때려눕히거나 파업에 찬성하는 표를 던지기 전에 그는 자기 밖에 의존할 데가 없는 불쌍한 아내와 자식들을 생각해야했다.

그러나 핵가족은 그 모든 효용에도 불구하고 노동계급을 완전히 통제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따라서 핵가족은 상당한 정도의 법적, 물질적, 이데올로기적 지원을 받았다. 여성과 아동의 노동시간을 제한한 공장법, 다양한 비국교도 종파들이 강조한 평민적 정조와 금주와 자기희생 등 영국에는 다양한 지원장치가 존재했다. 19세기 말 핵가족이 지배적 가족형태로 확립되자 아동기는 연장되었고 가사는 여성의 바람직한 정규직으로 권장되었다. 또한 매춘은 배척받는 직업이 되었고 동성애는 경멸과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동성애 탄압과 노동계급 가족

맑스와 엥겔스가 묘사한 부르주아 가족은 다음과 같은 전제를 가지고 있었다: 자기 재산이 자기 혈육에게 확실히 상속될 수 있기 위해 부르주아 남성은 자기 부인의 성을 독점한다. 물론 이것 때문에 이성애든 동성애든 남편의 외도를 금지할 필요는 없었다. 부인 이외의 섹스 파트너와의 성 관계는 재산상속을 위협하지 않았으므로 금지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노동계급과 인민에게 핵가족이 지배적 가족 제도로 확립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금기들이 필요했다.

우선 핵가족의 대안 형태들을 억압할 필요가 있었다. 이것들이 핵가족에 대항하는 가족형태가 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기 때문이다. ‘남자는 공장에서 일하고 여자는 집에서 다섯 자식을 키우는 전혀 쉽지 않은 일을 감내하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다’라고 인민을 설득시키려면 핵가족보다 더 편리한 가족 형태들을 용인할 수 없다. 매춘부와 성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독신이나 동성애 부부 또는 좀더 자유분방한 가족 형태는 노동계급 핵가족보다 더 흥미롭고 만족을 주며 물질적으로도 더 안락한 대안으로 인식되면 안되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가 동성애를 억압하는 또 다른 유래가 있다. 19세기 자본주의에서 노동계급의 가정 생활을 지배하는 중심적 사실은 다음 세대를 기르는 비용 전부는 사회적 책임이 아니라 개인적 책임에 있다는 것이었다. 아동이나 엄마나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없었다. 다음 세대를 길러내기 위해서 충분한 임금을 벌 수 있을 정도로 생산력이 있는 남성이 엄마와 아동을 돌보아야 핵가족이 성립될 수 있었다. 그러나 가족계획이라는 현대 과학이 아직 존재하지 않은 상황에서 출산이 연기되기 위해서는 십대에게 대단한 금욕과 정절이 요구되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으므로 개인적 좌절과 사회적 긴장을 유발시켰다. 이때 국가가 성 관계 동의 연령을 정해 이 문제에 개입하고 도덕적 권위를 행사하는 종교가 지원사격을 하여 청년의 금욕과 정절을 유지시켜야했다.

영국의 공립학교는 십대의 동성애를 면밀하게 제도화시켰다. 그런데 이것이 가능하지 않을 경우 동성애를 허용하면서 이성애를 금지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다. 이 결과 19세기 후반에 상당한 우려가 제기되었다: 강력한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경우 정욕이 왕성한 남성 십대들이 동성애로 정욕을 해소할 것이다. 동성애가 이성애를 압도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이 시기에 동성애를 탄압하는 조치들은 정당화되었다. 동성애 십대에 대항하여 아버지의 권위를 유지시킬 필요의 중요성과 함께 “청년의 도덕적 부패”에 대한 두려움은 1890년대에 진행된 작가 오스카 와일드에 대한 동성애 재판에서 검사, 판사, 언론들이 떠들어댄 주제였다. 이 재판은 영국과 다른 나라에서 동성애를 탄압하는 사회도덕을 명확히 확립하는데 아주 중요한 계기였다( 만가머리 하디드 저, [오스카 와일드], 1976년을 읽어보시오).

한편 여성은 사회적으로 덜 중요하며 근본적으로 섹스에는 관심 없는 존재로 치부되었다. 따라서 이들의 성생활은 적극적으로 탄압될 필요가 없었다. 젊은 여성은 남성보다 훨씬 심한 감시를 받아 가정에 갇히는 경우가 많았다. 십대 여성의 성에 대한 억압이 순조롭게 진행되자 레즈비언 행위는 대체로 무시되었다. 이 결과 일반적으로 동성애에 대한 극단적 편견은 남성에게 가해졌다. 레즈비언 행위는 여성이 “남성”의 성행위를 모방하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초기 사회주의자들과 동성애 탄압: 슈바이처 사건

세계노동운동은 동성애 탄압을 반대한 상당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제 1차 세계대전이 터지기 전까지 독일의 사회주의 운동은 세계에서 가장 거대하고 강력했는데 특히 이 나라에서 동성애 탄압을 반대한 역사는 상당하다. 1862년 8월 독일 만하임의 어느 공원에서 두 할머니가 조용히 산책을 하고 있었다. 이때 재능 있는 젊은 변호사 장 밥티스트 폰 슈바이처와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청년이 동성애를 즐기는 것이 목격되었다. 이 결과 슈바이처는 감옥에서 2주일을 보낸 후 변호사 자격이 박탈되었다. 이 사건으로 그가 페르디난트 라쌀레의 독일노동자총연합 회원 자격도 박탈당해야 한다는 제안이 있었다( 제임스 스테클리 저, [독일의 동성애 해방운동], 1975년). 그러나 라쌀레는 그를 이렇게 옹호했다:

“슈바이처의 행위는 아름답지는 않지만 범죄행위는 결코 아니다. 어쨌든 그처럼 능력 있는 사람을 잃는 것을 방관해서는 안된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성행위는 개인적 취향의 문제이므로 다른 사람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는 한 개인이 알아서할 문제이다. 물론 그런 사람에게 내 딸을 결혼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 잔 로리슨, 데이빗 쏘스타드 저, [초기의 동성애 권리 운동(1864-1935)], 뉴욕, 1974년

1864년 라쌀레는 여자 문제로 결투를 하다가 사망했으며 슈바이처가 이후 8년간 라쌀레의 노동조합 조직을 지도했다. 맑스와 엥겔스가 지지한 아이제나하파는 라살레파와 날카로운 정치적 논쟁을 벌였으나 공개적 논쟁이 동성애 문제로 오염된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1875년 5월 두 조직은 통합하여 이후 제 2 인터내셔널의 지도적 지부가 된 독일사민당을 창당했다.

 

독일사민당과 동성애 문제

아이제나하파의 지도자이자 독일사민당의 출중한 지도자였던 아우구스트 베벨은 동성애를 옹호하고 동성애 형법 조항에 반대하는 연설을 제국의회에서 여러 차례 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 적도 있었다:

“수많은 존경스럽고 명예로우며 용감한 인물들 특히 고위층 또는 최고위층 인물들이 수치심으로 또 어떤 경우는 협박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매년 자살하고 있습니다. 의원 여러분들은 이 불행한 현실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있습니다.”

 

로리슨과 쏘스테드, 앞의 책

영국의 작가 오스카 와일드에 대한 동성애 재판에서 독일 맑스주의자들은 그를 옹호했다. 그는 동성애를 금지하는 1885년 라부쉐 수정법에 의해 1895년 기소되었다. 독일사민당 우파의 이론적 지도자 에두아르드 베른슈타인은 당이론지 [신시대]의 1895년 4월호와 5월호에 와일드를 옹호하는 장문의 논문을 썼다. 그는 이렇게 논평했다:

“성생활과 관련된 주제는 사민당의 경제적 정치적 투쟁의 우선 순위에 한참 벗어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판단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가 아닌 것은 아니다. 이 기준은 자의적인 도덕에 의해서가 아니라 과학과 지식에 의거하여 정해져야한다.”

앞의 책

동성애가 “인간의 본성에 어긋나는” 행위이므로 탄압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그는 반박했다. 그리고 인간의 행위 가운데 “인간의 본성에 어긋나지 않는”것은 거의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예를 들어 글을 제출하여 논쟁하는 것도 이 가운데 하나라고 그는 보았다. 인간의 어떤 행위가 자연스럽거나 부자연스럽다는 판단은 자연보다는 사회의 발전 정도를 반영한다고 주장하면서 그는 “도덕적 태도는 역사적 현상”이라고 지적했다.

이집트, 그리스, 로마 등 고대의 위대한 문명권의 대부분에서 동성애는 자유롭게 인정되었다고 설명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동성간의 성교는 너무 오래되었고 보편적이어서 이것이 없었던 인류 문화의 단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있다.” 동성애를 질병으로 간주하는 이론을 비난하면서 그는 이것이 위장된 도덕주의의 한 형태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1905년 제국의회 토의에서 사민당원이었던 아돌프 티일러 역시 베른슈타인과 같은 주장을 펼쳤다. 그러자 독일사민당 좌파 지도자 카알 카우츠키 역시 동성애 탄압을 반대했다. 그러나 이 정당 지도자들 다수의 공개적 입장 표명에도 불구하고 독일사민당은 이 문제에 대한 공식 입장을 채택하지 않았다.

한편 맑스주의 운동의 창시자들은 이 문제와 관련하여 당대의 편견들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처럼 보인다. 맑스는 이 문제에 대해 딱 한번 발언했다. 동성애 관련법의 완화를 위해 진지한 작업을 한 최초의 인물인 울리히의 저서를 그는 1869년 엥겔스에게 주었다. 이 저서는 [동성애의 자연사]였음에 틀림없는데 브랫포드에 살고 있던 독일 공산주의자 빌헬름 슈트론이 맑스에게 빌려준 적이 있었다. 이 저서를 맑스 자신이 읽어보았다는 증거는 아직도 없다. 1869년 12월 17일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맑스는 이렇게 말했다: “슈트론이 브랫포드에서 이곳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그는 [동성애의 자연사] 또는 이름이 무엇이든 동성애에 대한 그 책을 돌려 받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한편 1869년 6월 22일 맑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엥겔스는 이 저서에 대해 논평을 가했다. 빌헬름 리이프크네히트가 슈바이처의 라쌀레파를 너무 부드럽게 대한다고 서두를 꺼낸 후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 보내준 그 책의 내용은 아주 신기합니다. 대단히 부자연스러운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동성애자들은 자신들의 수를 파악하면서 힘있는 사회 세력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동성애자들의 조직은 아직 없는 것 같은데 이 책에 의하면 비밀조직은 이미 있는 것 같습니다. 로징부터 슈바이처까지 오랜 정당과 새로운 정당에 중요한 인물들을 보유하고 있으므로 이들은 결국 승리할 것입니다. ‘여성 성기에 대한 전쟁, 항문에 대한 평화’가 구호로 등장할 것 같습니다. 이들이 승리하면 신체적 공물을 우리에게 요구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태를 두려워하기에는 우리 나이가 너무 많습니다. 다행이라고나 할까요. 그러나 젊은 세대는 불행합니다! 그런데 유독 독일에서만 이와 같은 인물이 등장하여 음담패설을 이론으로 치장하고 우리에게 들어올 것을 권유할 수 있습니다…. 슈바이처가 우리에게 유용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를 설득하여 고위층에 포진한 동성애자들을 파악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그가 마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와 우리는 서로 동지들이니까요.”

엥겔스는 이 문제에 대해 무지와 도덕론에 가득 찬 발언을 세 번 자신의 저서를 통해 기록했다. 그의 기념비적 저서인 [가족, 사적 소유, 국가의 기원]의 제 2장에 이 발언들은 짧게 소개되어있다.

 

러시아 짜르 시대의 동성애

러시아 짜르 시대에는 동성애에 대한 사회의 태도가 상대적으로 자유스러웠다. 서유럽을 휩쓴 동성애에 대한 봉건적 탄압의 물결은 러시아에는 미치지 못했다. 19세기 후반까지 로마노프 왕조는 자본주의 공업을 도입하려고 노력했을 뿐 노동계급의 핵가족화를 시도하지는 않았다. 짜르의 형법에는 동성애와 관련된 조항이 두 개 있을 뿐이다. 995항은 항문 성교를 금지하는 조항이었다. 996항은 동성애자들의 강간과 미성년 및 정신 지체 남성에 대한 유혹을 다루었다( 사이먼 칼린스키, [역사에 파묻힌 동성애의 과거를 복원하며], 런던, 1989년). 칼린스키가 인용한 어느 역사학자는 이 조항들에 의거한 1890년대의 유일한 재판은 13세의 학생을 유혹한 남성 교사의 경우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기소된 지 5년만에 그 교사는 다시 복직되었다.

1890년대 러시아에는 유명한 동성애 커플들이 있었다. 화려한 성격의 대공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는 빈번하게 자기 애인을 공개 석상에서 소개시켰다. 발레로 유명한 디아길레프 써클 회원들도 동성애를 숨기지 않았다. 러시아 국내에 이름을 떨친 시인 쿠즈민과 클리우에프 등 유명 문학가들이 포함된 동성애 사회가 존재했다. “자신들의 동성애가 공개되었으나 이들은 사회활동과 직업 활동에 아무런 지장을 받지 않았다” (칼린스키, 앞의 책).

볼세비키들은 동성애에 대한 상대적으로 관용적인 사회 분위기 때문에 맑스와 엥겔스처럼 이 문제에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10월 혁명 전이나 후에 레닌과 트로츠키가 이 문제에 대해 글을 남겼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이 문제에 대한 편안하고 관용적인 입장을 취했다. 1924년에 출판된 [문학과 혁명]에서 그는 아무런 편견 없이 몇 편의 공개된 동성애 시들을 비평했다. 또한 양성애를 공공연히 드러낸 시인 세르게이 에쎄닌에 대한 동정적이며 거의 애정 어린 사망기사를 1926년 1월 19일자 [프라우다]지에 실었다(트로츠키, [문학과 예술에 대해], 뉴욕, 1972년).

 

러시아혁명 이후의 동성애

러시아혁명이 성공 후 수립된 혁명정권은 “혁명의 의식과 법 상식에 모순된다”고 판단된 짜르 시대의 모든 법들을 폐기시켰다(인민위원회 사법 정의에 관한 포고령, 1917년 12월 5일). 이 포고령은 암묵적으로 동성애를 범죄에서 제외시켰다. 1922년 내전 후 새로운 형법이 선포되었을 때 동성애에 대한 모든 언급은 삭제되었다.

동성애 문제에 대한 혁명 정권의 진보적 태도는 1918년 초 게오르기 치체린의 외무인민위원 임명에서 드러났다. 그는 화려한 성격의 인물로 공개적으로 자신의 동성애를 드러냈다. 어떤 부르주아 정권도 그런 인물에게 외무장관직을 맡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잔 맘스테드의 글 [미하일 쿠즈민: 그의 삶과 시대에 대한 연대기]는 저명한 러시아 동성애 시인 미하일 쿠즈민과 치체린 사이의 초기 관계와 계속 오간 편지들을 싣고 있다( 쿠즈민 시전집 제 3권). 외무인민위원 시절 치체린의 인습과 벗어난 복장과 직무 방식에 대한 묘사는 알렉산더 바민의 저서 [살아남은 자: 소비에트 체제 어느 러시아인의 개인사](뉴욕, 1945년)에 실려있다.

소련 정권 초기에 과학에 대한 견해는 관료집단의 “총노선”에 의해 결정되지 않았다. 당시 소련의 성과학자들 대부분은 동성애에 대해 진보적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23년 모스크바 사회보건원 원장인 그리고리 밧키스 박사는 새로운 법률에 대해 찬성하는 논평을 가했다:

“소련의 법은 다음의 원칙에 기초하고 있다: 특정 개인의 이익이 침해되지 않는 한 성생활 문제에 대해 국가와 사회는 절대 개입하지 않는다. 유럽 국가들의 법은 동성애 등 다양한 성적 만족의 형태들을 공공도덕에 대한 범죄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소련의 법은 이것들을 소위 ‘자연스러운’ 성교와 동등하게 취급한다. 타인의 권리에 대한 침해나 손상 등 폭력이나 협박이 사용될 때만 이것들은 범죄로 간주되어 기소 대상이 될 수 있다.”

[러시아의 성혁명], 베를린, 1925년, 1923년에 러시아에서 발간된 저서의 독일판으로 추정됨, 로리슨과 쏘스태드의 앞의 책에서 인용.

그러나 동시에 동성애를 중병으로 간주한 전문가들이 있었다. 1923년 국립출판국이 발간한 [현대 청년의 성생활]에서 이스라일 겔만은 이렇게 주장했다:

“동성애는 악의나 범죄가 아니라 질병이다. 이 사실을 과학은 의심을 허용하지 않는 엄밀성으로 증명했다….동성애는 성도착증세이며 보통 인간이 보유한 정상적인 성적 매력과는 무관하다.”

칼린스키의 인용, 앞의 책

시간이 흐르고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이 노동자국가의 권력을 서서히 장악하자 동성애에 대한 이 관점은 영향력을 확대했다. 동성애자들의 삶이 악화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 증상의 대표적인 예가 있었다: 1924년 초 레닌의 사망과 함께 치체린의 정치적 영향력은 급속히 쇠퇴했다. 1929년에 발간된 [의학 대백과사전]은 동성애를 완전히 질병으로 분류했다. 이에 따라 동성애자들에 대한 탄압이 증가했다. 노년의 독일 혁명가 클라라 제트킨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탄압을 당하고 있던 일부 동성애자들을 보호했다.

결국 1933년과 1934년 사이에 동성애는 공식적으로 다시 범죄가 되었다. 임신중절을 다시 범죄로 분류하는 등 여성의 권리에 대한 공격이 진행되었으며 이와 마찬가지로 국가 주도의 동성애 탄압이 다시 시작되었다. 이 현상은 핵가족을 보수적 사회질서의 기본 단위로 강화시키려는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의 정치적 목적을 드러냈다.

 

스토운월과 그 이후

지난 몇십 년간 특히 유럽, 북미, 오세아니아 등지에서 동성애자들은 자신의 정체와 정치적 영향력을 상당히 증대시켰다. 이러한 성과의 중요한 요인이 하나 있었다. 1969년 미국 뉴욕주 그리니치 마을에서 일어난 스토운월 봉기를 필두로 동성애 권리를 위한 전투적 정치투쟁이 시작되었다. 1970년대 초기에 전개된 적극적이고 자신감에 넘친 동성애 해방운동은 정치지형의 좌경화와 성의 자유화라는 일반적 사회분위기 속에서 가능했다. 이 시기에 폭발한 여성해방운동은 “정상적” 가부장적 가족의 신화에 도전했다. 여성운동의 일부는 동성애(“여성이 파악한 여성”)를 페미니즘의 가장 일관된 표현으로 인정하고 이를 적극 옹호했다.

동성애 해방운동의 제한적이나마 성취된 진전은 핵가족 유지방식의 변화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여성 사무직의 증대, 여성 인력의 대대적 팽창, 남성의 임금만으로 유지될 수 없는 생활수준 등이 남성과 여성의 “올바른 위치”라는 전통적인 사고를 공격했다. 피임기술의 증대된 효율성과 연관된 또 다른 중요한 변화는 십대의 성애에 대한 사회적 용인이었다. 십대의 이성애가 광범위하게 진행되면서 억압된 성이 동성애로 탈출구를 찾을 “위험성”이 줄어들었으며 이 위험성에 따른 특별한 조치들도 필요 없게 되었다. 동성애는 여전히 핵가족의 규범을 파괴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혼외정사가 인정되는 사회에서 이 요인은 핵가족을 붕괴시키는 여러 위험 요인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그러나 핵가족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전히 강력한 제도이다. 애정, 친밀감, 정서적 안정 등 개인의 가장 중요한 정서적 욕구들이 핵가족을 통해 충족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가족생활에서 고통과 소외를 경험한 사람들도 가족이 진정한 안식처라는 미신에 강하게 사로잡혀있다. 노동계급 생활수준의 계속적 저하, 사회보장 프로그램의 붕괴, 고질적 실업의 증대 등이 제국주의 국가들 내부의 현실이 되자 노동계급 가족은 대대적 실업의 희생자가 된 상당수 청년들의 그나마 남아있는 안식처로 그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 더욱이 부동산이나 기타 물질적 자산을 보유할 정도로 풍요를 누리는 노동계급과 소부르주아 계급 일부 부위에게 상속될 재산에 대한 부모의 장악력은 핵가족 제도를 필요로 한다. 이것은 부르주아 계급의 경우와 크게 유사하게 핵가족을 유지하는 통제방식으로 작동한다.

지난 몇십 년간 동성애 집단이 성취한 성과는 상당하지만 아직도 미약한 수준이며 언제든지 상실될 위험에 놓여있다. 혼외정사 특히 동성애는 근본주의 종교세력과 사회 보수층 등 사회의 강력한 지배집단들로부터 여전히 맹렬하게 공격받고 있다. 동성애자의 군복무를 허용한 미국 클린튼 대통령의 임시 조치를 국방성과 의회는 맹렬하게 반대했다. 이것만으로도 동성애자들의 권리가 얼마나 허약한 지를 알 수 있다. 1994년 8월 미국 상원은 압도적 다수의 표결을 통해 “동성애를 삶의 방식으로 인정하는 교육을 실시하는 학교들에 대해 연방정부의 재정적 지원을 폐기하도록 결정했다”(1994년 8월 2일자 [뉴욕 타임즈]지). 학생들에게 제공된 “혐오스럽고 외설적인 자료들”에는 레즈비언 부부를 다룬 [헤더는 엄마가 둘이야]가 포함되어있다.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경쟁논리에 따라 자본가들은 노동계급의 생활수준을 계속 공격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하에서 노동자와 인민의 생활수준이 극도로 악화되자 그나마 핵가족으로 형성된 인간적 관계들은 파탄 직전에 있거나 파탄되었다. 이에 대해 반동들은 “가정의 신성한 가치”를 외치면서 가족의 붕괴가 동성애자, “사회적 휴머니스트”, 낙태 권리 옹호자, 페미니스트 등 때문이라고 호도하고 있다.

낙태, 포르노, 동성애 등을 반대하는 보수적 분자들은 현재 유럽과 북미에서 세를 증대시키고 있는 파시스트 세력의 정치기반으로 포섭되고 있다. 동성애에 대한 공격은 자본주의의 광기와 불평등을 미친 듯이 옹호하는 반동들의 조직적 무기가 되고 있다.

또한 에이즈의 확산에 대해 반동들은 동성애에 대한 편견과 섹스에 대한 일반적인 두려움을 조장시키고 있다. 이 결과 종교를 등에 업은 도덕적 공포의 물결이 대중을 사로잡고있다. 그러나 “신세계질서”의 지배자들은 에이즈의 예방, 치료, 연구에는 말도 되지 않는 적은 기금을 내놓고 생색을 부리고 있다. 자본주의의 모든 사회악과 마찬가지로 에이즈는 사회 밑바닥 계층에게 가장 큰 타격을 가하고 있다.

제국주의 국가들에서 가장 큰 고통을 당하고 있는 계층은 붕괴하고 있는 공공보건 서비스에 가장 크게 의존하는 빈민과 피억압 소수자들이다. 절망적 빈곤으로 허덕이는 신식민지 국가들이 제국주의 국가들보다 에이즈에 의해 더 큰 타격을 입고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나마 가장 생산적인 인구의 더욱더 많은 비율이 정신적 신체적 장애를 당하거나 사망하고 있다.

최근 몇 년 간 전투적 동성애자들은 에이즈 퇴치 기금 확보 투쟁을 적극 벌여왔다. 그리고 에이즈 환자에 대한 노골적인 태만과 학대를 폭로해왔다. 우리는 부르주아 의료집단과 국가에 저항하는 동성애 활동가들의 대단한 용기를 존경한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투쟁할 기회가 오기를 기대한다. 이들의 투쟁에 더욱더 많은 계층들이 참여해야한다. 특히 노동계급 조직들은 이 사안들을 수준 높은 무상의료 쟁취 투쟁의 핵심적 부분으로 받아 안아야한다.

그러나 동성애 권리 확보와 에이즈 퇴치를 위한 투쟁 자체가 혁명적인 것은 아니다. 지난 수십 년간 동성애자들이 획득한 성과의 부산물은 부르주아 사회의 품위를 열망하는 동성애자 전문직 계층 특히 에이즈 산업과 관련된 전문직들의 지위 상승 현상이다.

 

동성애 해방운동의 전술

전투적 동성애 그룹들이 구사해온 전술들은 효과 면에서 큰 차이가 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장소에서 동성애의 장면들을 크게 부각시키는 전술은 이성애자들에게 충격을 가해 이들이 동성애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나도록 유도한다. 이것은 해가 되지 않는 전술이며 우리는 동성애자들이 자기 성취향을 당당히 공개하는 것을 당연히 지지한다. 그러나 정치 전략으로서 이 방식은 동성애 탄압의 뿌리가 자본주의가 아니라 개인의 의식에 있다고 오도하는 결함을 지니고 있다.

또 하나의 전술은 덜 충격적인 방식으로 “커밍 아웃”하면서 자신의 성취향을 공개하는 것이다. 이것은 동성애자들에게 하나의 정치 전략이기보다는 자부심과 사회적응을 향한 개인적 결단으로 인식되고 있다. 따라서 개인적 선택의 문제로 인식되고 있다. 자신의 성취향 노출이 가져올 결과를 두려워하여 정체를 숨기는 동성애자들이 여전히 많은 현실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부르주아 관료들이 자신의 동성애를 숨기면서 동성애 탄압에 앞장서서 가장 악질적인 정책을 시행하는 피할 수 없는 위치에 놓이는 경우가 있다. 최근 몇 년간 동성애 운동가들은 유명한 우익 동성애자들의 정체를 폭로하는 “아우팅”을 구사해왔다. 이것은 새로운 전술은 아니다. 독일의 초기 동성애 운동에서 이것은 “시체를 밟고 지나가기”로 명명되었다. 그러나 이 전술은 1900년대 초에 정반대의 불리한 결과를 가져왔다. 우리는 이 전술을 일반적으로 반대한다. 운동의 진전이 느린 데에서 나오는 절망감과 폭로 대상들에 대한 혐오감은 이해가 간다. 그러나 이 전술은 동성애를 숨기면서 살고 있는 보통 사람들의 노출에 대한 두려움을 증폭시킬 뿐 아니라 가장 저질의 동성애 비방 선전과 동성애에 반대하는 역작용을 초래하는 경향이 있다.

노동계급에게 과학적 의식을 이해시키고 이들이 도덕론과 신비화를 극복하도록 돕는 것이 맑스주의 정당의 임무이다. 우리는 “사회주의 가족”을 선전하는 스탈린주의 노선과 이 결과 발생하는 여성과 동성애자들에 대한 후진적 편견의 확산에 저항한다. 자본주의의 모든 반동적 편견들과 마찬가지로 동성애에 대한 편견은 노동계급의 분열과 사기저하를 초래하여 지배계급에 의한 노동통제에 이용된다. 또한 노동계급이 자신의 역사적 이익을 이해하는데 방해가 될 뿐이다. 계급투쟁과 사회적 경제적 정의를 위한 투쟁에서 공동전선 전술을 구사하여 노동계급과 피억압 계층 내에 존재하는 동성애에 대한 편견을 공격해야한다.

혁명정당은 사회 전체에 대한 과학적 의식을 구현해야한다. 자본주의의 다양한 억압에 희생당하는 계층을 투쟁에 동참시키고 이들의 투쟁을 이 억압의 기초인 사회제도 타도 투쟁으로 연결시켜야한다. 세대, 정치적 역정, 문화 배경 등이 각기 다른 동지들이 같은 조직에 있으면서 서로의 의식에 도움을 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동성애자들의 특별한 소외는 함께 투쟁하는 다른 계층의 투사들에게 부르주아 사회에 대한 폭넓은 시야를 확보해준다. 이를 통해 노동계급 전위의 맑스주의적 의식은 대단히 풍부해진다.

 

부문주의의 한계를 깨고 가교 조직을 건설하자

여성, 흑인, 청년, 원주민, 동성애자 등에 대한 모든 형태의 특별한 억압에 대해 맑스주의자들은 저항을 조직한다. 그러나 이 억압들의 토대가 계급 사회라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는다. 혁명가들은 피억압 인민의 상황을 개선시킬 수 있는 모든 개량을 지지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이윤이 아니라 인간의 필요에 부응하는 생산에 기초한 사회주의 사회를 위해 투쟁할 때만 사회 억압의 뿌리가 제거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

부문주의자들과는 달리 맑스주의자는 이 점을 인식하고 있다: 생산과 경제에서 차지하는 전략적 위치 때문에 노동계급은 근본적 사회변화의 결정적 요인이다. 동성애자, 여성, 흑인 등을 따로 조직하여 부문운동에 몰입할 경우 불가피하게 계급을 초월한 조직이 형성되고 이것은 투쟁을 자본주의 합리성의 틀에 가두게 된다. 그러나 다른 형태의 사회 억압들과 마찬가지로 동성애 억압은 기존 사회질서의 한계를 넘어서는 강령을 통해서만 성공적으로 근절될 수 있다.

혁명정당에게는 가교 조직이 필요하다. 이 조직은 피억압 인민의 투쟁을 하나로 모으고 정치적으로 가장 선진적인 분자들을 노동계급 권력장악 투쟁으로 획득한다. 동성애 옹호 투쟁에 개입하는 혁명정당은 이 투쟁을 위한 가교 조직을 건설할 것이다. 동일한 규율에 입각한 동일한 성격의 혁명운동에 소속되는 이 조직은 동성애 옹호 투쟁에 집중하면서 동시에 노동계급 권력의 필요성을 인식시키는 강령을 제시할 것이다.

맑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가 발생시키는 모든 억압에 대해 투쟁한다. 그러나 모든 형태의 억압들이 혁명 전략을 위해 똑같은 비중을 갖는 것은 아니다. 동성애 억압은 예를 들어 미국의 흑인과 여성에 대한 억압보다는 혁명 전략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낮다. 동성애자들은 노동계급의 특정 핵심 부위에 집중되어있지 않다. 대규모로 쉽게 조직될 수 있는 지역구민을 이루고 있지도 않다. 또한 성취향 억압은 인종 억압이나 여성 억압처럼 명백하게 인식되지도 않는다. 더욱이 동성애 억압에는 중요한 경제적 요인이 결부되어 있지도 않다. 현재의 사회구조에서 자식이 없는 동성애자 대부분은 경제적 이득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최근 몇십 년간의 동성애 옹호투쟁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동성애에 대한 편견과 억압은 반동 우익 세력에게 “강력한 심리적 구심”으로 남아있으면서 대중에 대한 반동적 공세의 중요한 도구가 되고 있다. 따라서 기존 체제를 방어하는 강력한 도구로 남아있다. 동성애 억압 문제는 맑스주의자들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사안이다. 다만 예를 들어 여성 억압의 문제처럼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핵심적 전략적 사안이 아닐 뿐이다.

동성애 억압은 자본주의의 필요에 기초하고 있다. 따라서 동성애자의 해방은 빈곤, 무지, 사회불평등을 제거할 인류의 무궁무진한 생산력을 합리적으로 활용하는 것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 무계급 사회에서 핵가족과 국가는 사멸하기 시작할 것이며 좀더 자유롭고 자발적인 인간 연합체로 대체될 것이다. 이 자유 연합체에서는 인간의 성이 가질 수 있는 놀라운 다양성과 신축성이 자유롭게 표현될 것이다. 그리고 가부장적 자본주의 사회가 전통적으로 성”도착자들”에게 가한 두려움, 편견, 걱정이 불식될 것이다.

 

Capitalism & Homophobia, <1917>, No.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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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매하다. 2016.11.22 13:25
    동성애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지만, 성 소수자들에 대한 배려와 이해는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도 인간이며 또한 같은 사랑을 나누고 싶어하며 그것은 자유이며 권리를 가진 사람들이니까요. 단순히 이념적으로 인해 성 소적자들이 탄압을 받는다면.. 평등이란 주체가 무너진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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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볼셰비키 2016.11.22 14:13
    동의합니다. 이 글은 동성애 등 개인의 성적 지향을 이유로 차별하거나 억압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핵심입니다. 좋은 의견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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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ㅁㄴㅇㄹ 2017.05.31 16:36
    "동성연애자", "이성의 옷을 입고 다니는 변태성욕자", "성전환자" 따위의 부적절한 표현에 매우 불쾌하군요. 해당 부문에 대한 이해가 일천한 상태로 급진적인 문장만 번역하여 허공에 날린다고 각 부문운동이 변혁적으로 결합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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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볼셰비키 2017.06.04 00:02
    ㅁㄴㅇㄹ님//
    IBT의 원문은 1995년에 발표되었고, 번역은 그 이후에 진행한 것입니다. 번역 당시 성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상당했고, 그리하여 (당시 그리고 지금도) 사전(辭典)에 ‘변태’ 운운 등 편견을 반영한 표현이 있(었)습니다. 그 표현들을 걸러내었어야 함에도, 그렇지 못하고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잘못을 인정합니다.

    ※다음과 같이 수정합니다.
    동성연애→동성애
    이성의 옷을 입고 다니는 변태성욕자→이성의 옷을 즐겨 입는 사람
    가학 피가학성 변태 성욕자→가학 피가학성 성애자
    (‘성전환자’는 transsexual의 번역입니다. “부적절”한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우리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피억압인민이고, 피억압인민의 편에 서서 세상을 해석하고 문제의 해결을 위해 상당한 에너지와 시간을 들여왔지만, 충분하지 못한 점들이 꽤 있습니다. 충고와 비판은 우리의 부족한 점을 드러내고 보완하는 데에 큰 힘이 됩니다. 앞으로도 많은 충고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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