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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주의와 총파업


노동운동사의 교훈

 

 

<국제볼세비키그룹(IBT)의 탐 라일리는 1998년 4월 30일 캐나다의 온테리오주 세인트 캐써린즈시에서 열린 공개집회에서 강연을 했다. 이 행사는 이 도시의 1일 총파업 “행동의 날” 전야제의 일부였다. 그의 강연 내용을 편집하여 소개한다>

 

총파업 문제는 맑스주의 운동 내에서 논란의 대상이 된 경우가 자주 있었다. 이 문제를 복잡하게 만드는 요인 가운데 하나는 이 용어가 대대적인 대중 봉기부터 대단히 관료화된 1일 항의 파업까지 다양한 투쟁들을 포괄한다는 사실이다. 총파업은 경제적 목적, 국가 탄압에 대한 저항, 다양한 정치적 사회적 성과들을 쟁취하고 방어하는 등 다양한 목적을 위해 일어났다.

 

1920년 독일에서는 노동자 총파업이 우익의 쿠데타를 저지했다(카프 폭동). 1934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총파업으로 항만노동조합은 부두 하역 노동자들의 직업소개소를 장악했다. 1936년 스페인에서는 프랑코 장군의 파시스트 쿠데타에 저항하여 노동자들이 즉시 총파업과 반(半)자발적 봉기를 일으켰다. 이 투쟁으로 쿠데타 초기에는 프랑코의 반란군이 노동자 민병대에 압도당했다. 총파업의 역사가 긴 벨기에에서는 1950년대 초에 두 번의 정치 총파업이 일어났다. 1950년 총파업은 친나찌파 레오폴드 3세 국왕을 반대하기 위해 1952년 총파업은 징병 복무기간을 단축시키기 위해 일어났다. 1972년 캐나다 퀘벡주에서 일어난 총파업에서 노동자들은 3명의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투옥에 저항하여 반(半)봉기를 일으켰다. 총파업의 예는 말 그대로 수백 건이 넘을 것이다.

 

총파업은 어떤 경우에도 체제에 대한 주요한 도전이 된다. 최소한 암묵적으로 사회의 진정한 주인이 자본가인지 아니면 노동자인지를 묻기 때문이다. 잠재적으로 너무 많은 것이 걸려있기 때문에 총파업은 대개 더 큰 투쟁으로 격화되거나 아니면 항복으로 끝나도록 강요된다.

 

파업이 끝날 때까지 기다린 끝에 자본가 계급이 승리한 경우도 있었다. 노동자들도 먹고살아야 하기 때문에 수입이 없이는 오래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 자본가들이 탄압을 통해 총파업을 압살한 경우도 있었다. 또는 경찰의 압력과 대개 소부르주아 분자들로 구성된 대체인력을 결합하여 버스를 운행시키고 하역작업을 재개시켜 총파업을 깨는 경우도 있었다.

 

국가 탄압의 기구들을 대대적으로 동원하는 것만으로 노동자들의 기를 죽인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탄압이 투쟁에 불을 질러 파업 노동자들에 대한 인민 대중의 지지를 급격히 상승시킨 경우도 있었다. 노동운동이 강력하고 그 대의가 다수 인민의 지지를 받고 있을 경우 파업노동자들은 대체인력을 격퇴하고 자본가 계급의 억압기구들을 무력화시킬 수 있었다. 이때에는 자본가 계급은 대개 협상을 통해 총파업을 끝내기를 간절히 바랬다.

 

 

총파업의 선구자들

 

총파업 문제와 관련하여 총파업의 기원과 발전 과정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상대적으로 가까운 현대에 들어와 처음으로 총파업을 주창한 인물은 장 멜리에였다. 그는 프랑스의 비주류 신부로서 1700년대 초에 활동했다. 그는 무신론자로 비난받았는데 아마 최초의 “해방신학” 선구자였는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한 명 남은 신부의 창자로 마지막으로 한 명 남은 왕을 목 졸라 죽이면” 인류는 마침내 해방될 것이라고 그가 말했다고 한다. 그의 이 의미심장한 말을 볼테르는 대단히 즐겁게 반겼다. 또한 소문에 의하면 그는 “평민”이 노동을 그만두면 귀족과 성직자 계급은 자기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붕괴할 것이라고 말했다.

 

귀족에 대항해 총파업을 벌이자는 멜리에의 제안은 약 60년 후 프랑스 혁명 당시에도 회자되고 있었다. 국민의회 의원 꽁스땅뗑 볼네이가 1791년에 출판한 영향력 있는 저서에는 “사회에 필요한 모든 직업”에 종사하는 “인민”과 “노동하는 자들을 벗겨 먹으면서 빈둥거리는” “특권 계급” 사이의 대화가 실려있다. 여기서 인민은 특권 기생충들과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되고 있다:

 

“우리는 뼈빠지게 일하고 그대들은 노동의 성과를 누린다; 우리는 생산하고 그대들은 써버린다; 우리에게서 부가 나오면 그대들은 이것을 흡수한다. 인민과 동떨어진 특권 계급의 작자들아, 나라를 따로 차려서 그대들끼리 통치하거라.”

[유적지, 또는 제국 내부에서 일어나는 혁명에 대한 하나의 연구], 1819년

 

장 폴 마라, 그라퀴스 바베프 같은 유명한 혁명가들도 총파업을 언급했다. “영국의 자코벵파”로 알려진 “런던편지클럽”은 볼네이의 책을 번역하고 출판했다. 이들도 역시 총파업을 주장했다.

 

그러나 총파업을 실현시키려는 최초의 시도는 1820년 4월 스코틀랜드에서 벌어졌다. 악명 높은 피털루 학살 사건(역자 주: 1819년 8월 영국의 맨체스터에서 일어난 유혈사태. 곡물법 폐기와 의회개혁을 요구하는 군중이 의회에 청원서를 들고 행진하는 동안 기병대의 공격으로 11명의 사망자, 400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개혁운동의 불이 붙었다.)후 자행된 정부의 탄압에 대해 노동자들은 총파업으로 저항했다. 처음에는 글래스고우의 급진주의자들이 영국에서 제안된 세금거부 반란에 합류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1820년 이들은 이렇게 결정했다:

 

“돌아오는 3월 1일 모든 곳에서 일을 ‘중지’하고 며칠 동안 이 상태를 계속 유지한다. 이것은 봉기가 될 것이다.”

1977년 토미스 및 홀트 공저, [1789년에서 1848년까지 영국에서 혁명이 터질 뻔한 사건들]에서 인용

 

이들의 목적은 “급진 개혁, 보통 선거권, 매년 의회의 개원” 등을 쟁취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스코틀랜드와 함께 잉글랜드에서도 동시에 파업을 벌이려고 했다. 파업은 일주일을 끌었고 처음에는 글래스고우와 인근 지역의 모든 사업장이 문을 닫았다. 그러나 이 파업은 확산되지 못하고 정부에 의해 기선을 제압 당했다. 곧이어 소규모 반란자들과 영국군 사이에서 “보니무이어 전투”라고 명명된 총격전이 벌어졌다. 결국 반란자들은 패배하고 파업은 끝이 났다.

 

이 최초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총파업은 사회의 불평등을 시정하는 수단으로 계속 애용되었다. 1830년대에 총파업의 최고 주창자는 윌리엄 벤보우였다. 그는 급진 성향의 구두 수선공이자 퀘이커교 선교사를 역임했다. 총파업을 주제로 한 팜플렛 [거대한 인민 공휴일과 생산계급의 대회]를 그는 1832년에 출판했다. 인기를 누렸으며 널리 유포된 이 팜플렛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사람들은 삶을 누리지만 동등하게 누리지는 못한다….상당한 편의, 쾌락, 행복을 누리는 사회의 유일한 계급이 사회 전체에 필요하고 유용한 것들을 가장 적게 생산한다.”

 

벤보우에 의하면 인류 대중이 부족한 것은:

 

“우리 자신이 엄청난 위력을 가지고 있다는 인식과 이것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권리이다.”

1960년 크룩 저, [공산주의와 총파업]에서 인용.

 

그는 약 한달 동안 노동자들이 노동을 거부하는 “거대한 인민 공휴일”을 통해 사회 불평등을 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계획은 해결해야할 몇 가지 문제를 안고 있었다. 예를 들어 파업기간 동안 노동자들이 어떻게 먹고살 것인지를 해결해야 했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당시 가장 선진적이고 전투적인 노동계급 운동인 인민헌장운동의 주창자들(차티스트들)에 의해 채택되었다.

 

1842년 8월에 영국 북부지방에서 광산 노동자들과 섬유 노동자들이 잔인한 임금 삭감에 저항하여 파업에 돌입했다. 이 파업은 “신속 대응 파업 방위대”를 동원하면서 이 지역과 스코틀랜드, 웨일즈로 확산되었다. 이 파업은 “플러그 음모”라고 종종 불린다. 생산을 중지시키기 위해 모든 공장에서 파업노동자들이 증기 보일러의 플러그를 잡아 뺐기 때문이었다. 인민헌장운동가들은 이 투쟁을 지지했다. 이들은 이 투쟁을 지도하지 않았지만 이 투쟁과 종종 관련되어 연상되고 있다. 파업의 절정기에는 약 50만 명의 노동자가 투쟁에 참여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서서히 굶주리고 있었기 때문에 파업은 한 달이 지나자 흐지부지되었다.

 

1860년대에 제 1 인터내셔널의 영국 회원들은 개혁동맹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은 (남성) 노동자들의 선거권을 요구하며 “노동을 완전히 중지하겠다”고 위협했다. 토리당 정부는 이 위협을 심각하게 받아들여 선거권을 상당히 확대하는 개혁법을 즉시 통과시켰다.

 

 

벨기에 총파업과 독일사민당

 

1891년 노동절에 벨기에의 왈룬 지역 탄광노동자들이 주축이 되어 10만 명의 노동자들이 파업을 통해 참정권을 요구했다. 이 투쟁은 3주일 후에 요구를 쟁취하지 못한 채 끝났다. 그러나 이들의 투쟁에 대한 대중의 지지도는 엄청났다. 결국 벨기에노동자당(POB)의 개량주의 지도부는 총파업이 효과적인 전술이 될 수 있다고 확신했다. 1893년에 벨기에노동자당이 주도한 총파업이 성공했다. 파업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정부는 혼비백산하여 남성 노동자들에게 참정권을 부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이것은 평등 선거권은 아니었다. 재산 보유, 교육 수준, 직업 등이 우수한 시민은 몇 표가 더 주어졌기 때문이었다.

 

벨기에 총파업의 승리는 국제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켜 제 2 인터내셔널 내부에 총파업 전술에 대한 광범위한 논의를 촉발시켰다. 특히 인터내셔널의 종주 정당인 독일사민당(SPD) 내에서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3개 경향이 등장했다. 노동조합 지도부가 중심이 된 우파는 주로 총파업의 합법성 문제에 관심을 보였다. 안정적이고 안락한 직책을 보유한 “실리적” 노동관료들은 혁명을 위해 대중파업을 활용하는 것을 어리석으며 위험한 발상이라고 생각했다. 이들에게 총파업은 참정권을 획득하거나 노동조합의 법적 지위 그리고 기타 민주적 권리들을 보호하는 수단이었다. 따라서 총파업은 명확한 목표가 있어야 하며 노동조합 지도자들에 의해 확실히 통제되어야했다.

 

그러나 사민당 좌파는 정반대의 입장을 보였다. 이들의 대표는 폴란드의 뛰어난 망명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였다. 그녀는 “대대적인 파업”을 대중의 혁명 역량을 발휘시키는 수단으로 보았다. 한편 당시 세계의 최고 맑스주의자로 인식된 카알 카우츠키는 “중앙파” 지도자였다. 우파에 대항하여 카우츠키는 대대적인 파업이 이론적으로는 혁명의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총파업은 노동자 조직의 공식 지도자들이 지도하고 통제해야하는 근본적으로 방어적인 무기라고 그는 주장했다.

 

이 세 경향 사이의 분열은 총파업 전술 뿐 아니라 더 광범위한 정치전략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수정주의” 우파의 주요 인물 베른슈타인은 점진적 개량주의 노선을 공공연히 옹호했다. 그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운동은 모든 것이며 ‘사회주의의 최종 목적’이라고 보통 얘기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1918년 독일공산당을 창당한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알 리이프크네히트는 좌파 지도자로서 혁명이 지금 당장이라도 터질 수 있다고 믿었다. 카우츠키는 우파와 좌파의 중간에 위치했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사회주의 혁명은 필요하고 불가피하지만 언제 도래할 지 알 수 없는 미래에나 가능한 사건이다.

 

1902년에 벨기에 노동자들은 또 다시 총파업을 벌였다. 이번에 이 운동의 목표는 여성을 포함한 모든 성인에게 평등 보통 선거권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투쟁 참가 대중의 숫자는 1893년보다 훨씬 높아서 35만 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정부는 지난번보다 준비를 훨씬 철저히 하고 있었다. 이들은 대체인력을 조직해 놓았으며 1893년 총파업 당시 동요를 보였던 군대를 확실히 단속했다.

 

정부가 완강하게 나올 것을 눈치챈 벨기에노동자당 지도부는 즉시 물러서기 시작했다. 우선 이들은 여성참정권을 요구사항에서 제외시켰다. 그 다음에는 일련의 양보조치를 제시했다. 그러나 이들이 양보할 때마다 정부는 더 강경하게 나왔다. 벨기에노동자당이 후퇴하자 동요하던 중간 계급은 더욱 정부의 편에 붙었다. 이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마지막으로 노동자당 지도부는 마지막 체면치레용 술수를 부렸다. 이들은 국왕이 의회를 해산하여 정부를 교체할 것을 요구했다. 당연히 국왕은 정부의 편을 들었다. 그러자 노동자당 관료들은 승리를 선언하고 파업을 철회했다. 이로써 노동자들은 얻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이 파업을 독일사민당의 당원들은 모두 면밀히 관찰했다. 이 파업에는 많은 노동자들이 참가했으며 처음에 노동조합은 상당한 대중적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전반적 분위기에 편승하지 않고 로자 룩셈부르크는 이 파업이 실패작이라고 규정했다. 그녀는 총파업 실패의 책임을 노동자당 지도부에 돌렸다: 이들은 파업 초기부터 “법”을 지킬 것이라고 비겁하게 선언했다. 이 선언을 정부는 이렇게 해석했다: 우리가 어떻게 나오든 노동조합 지도부는 저항하거나 보복에 나서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지배계급은 언제든지 계산을 하게 마련이다: 어떤 때에는 탄압이 효과를 발휘하지만 잘못하면 대중의 분노에 불을 질러 사태를 걷잡을 수 없이 몰고 갈 수 있다. 이것은 위험한 게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부가 어떻게 나오든 반격하지 않겠다고 상대방이 미리 선언하면 정부는 당연히 대담하게 탄압에 나서기 마련이다.

 

1902년 벨기에 총파업은 이 점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벨기에 노동자당의 겁먹은 합법주의 때문에 매순간 노동자들은 사기가 저하되었으며 정부는 더욱 강하게 나왔다. 룩셈부르크는 패배의 이유를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

 

 

1905년 러시아 총파업: 총파업에서 봉기까지

 

1905-6년 러시아 총파업으로 국제사회주의운동은 또다시 총파업에 대해 격렬히 논쟁을 벌였다. 짜르의 러시아는 압도적 다수의 농민 위에 군림하는 봉건적 전제체제였다. 그러나 동시에 해외 자본에 의해 대단히 현대적인 자본주의 공업 부문도 존재했다. 공장들은 첨단 기술과 잠재적으로 강력한 노동계급을 보유하고 있었다. 특히 노동계급은 젊고 대단히 밀집되어 있었으며 악랄한 착취를 당하고 있었다. 이들은 정치적 권리가 전혀 없었으며 종종 육체적 폭력에 시달렸다.

 

벨기에, 영국, 독일의 노동운동을 지배했던 특권 노동귀족층이 러시아에 등장할 여지는 거의 없었다. 노동조합 조직에 관련될 경우 감옥에 갈 각오를 해야했다. 이 상황에서 편안한 사무실, 판공비, 상당한 봉급을 누리는 서구의 노동조합 관료들과 러시아의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전혀 유형을 달리했다.

 

짜르의 경찰은 노동자들의 파업 대오를 말을 타고 무자비하게 깔아 뭉겠으며 구타, 체포, 살해를 예사로 저질렀다. 다수의 파업은 깨졌으며 많은 노동조합원들은 감옥에 갇혔다. 이웃 공장에서 일하는 자기 친구나 친척들이 경찰의 공격을 받자 노동자들은 이에 분노하여 자발적으로 동조파업에 나섰다. 이것은 탄압을 막는 대단히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것이 곧 드러났다. 왜냐하면 분쟁에 직접 관련이 없는 공장주들이 경찰이 개입을 자제하도록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여러 공장의 노동자들이 동시에 파업을 할 경우 이들은 같이 모여서 상황을 논의하고 다음 투쟁을 공동으로 계획하였다. 이 모임은 1905년 “소비에트” 즉 노동자 평의회의 시초가 되었다.

 

1904년 짜르는 일본과 전쟁을 벌이다 참패를 당했다. 이로써 군대는 사기가 떨어지고 정권은 불신을 당했다. 1905년 1월 페테르부르크의 중요한 공장인 푸틸로프 제철소에서 가폰 신부가 주도한 파업이 벌어졌다. 그는 신부이면서도 경찰의 첩자였는데 파업을 통해 투쟁을 통제하려했다. 동시에 그는 파업노동자들에게 성과를 가져다 주어야할 압력에 직면했다. 따라서 그는 노동자들에게 동궁의 짜르에게 청원을 하자고 제안했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대규모로 대오를 형성하여 성상과 짜르의 초상화를 들고 가폰의 지도하에 행진에 나섰다.

 

그러나 짜르는 모든 파업들에 대해 짜증이 났기 때문에 청원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정했다. 대신 그는 시위자들에게 발포하라고 군대에 명령했다. 군대의 발포로 시위대 가운데 800명이 살해되었고 수백 명이 부상을 당했다. 짜르는 무력 진압을 통해 누가 주인인지를 “서민들”에게 증명하려 했다. 그러나 그의 의도는 실현되지 못했다. 학살은 전국의 인민을 분노시켜 파업의 물결을 일으켰다. 처음으로 파업은 제국 전체로 확산되었다. 노동자와 학생들에 의해 시작된 투쟁은 마침내 많은 지역에서 농민들의 반란을 촉발시켰다. 장원들이 불에 타고 지주들이 살해되었다. 반란이 전국에 확산되었기 때문에 짜르 정권은 대책이 없었다.

 

이 대중적 분노는 군대에도 확산되었다. 귀족의 장원에 군대가 파견되어 반란을 진압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대부분이 농민 출신이었던 병사들은 반란 농민이 아니라 장교들과 하사관들을 총살시켰다. 세르게이 아이젠슈타인의 1926년 영화 “전함 포템킨”은 1905년 6월에 일어난 유명한 수병 반란을 묘사했다.

 

원래 이 반란들은 거의 전부 자발적이었다. 각 지역의 좌익 정당들이 투쟁에 참여했으나 투쟁 계획이나 중앙의 지도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투쟁을 억누르기는 더 힘들었다. 각기 다른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함께 비공식적으로 회의를 갖는 것이 초기의 소규모 투쟁에서는 흔한 일이 되었는데 이 규모가 확대되었다. 이 회의는 많은 지역에서 투쟁의 구심 역할을 했다.

 

1906년에 출판된 자신의 저서 [대중파업]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이 사건들의 유동적 성격을 이렇게 포착했다:

 

“러시아 혁명이 보여주듯이 대대적인 파업은 너무도 가변적인 현상이다. 이것은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의 모든 측면들과 혁명의 모든 단계들과 요인들을 반영한다….정치파업, 경제파업, 대대적인 파업, 부분 파업, 시위성 파업, 투쟁적 파업, 개별 산업 부문의 총파업, 도시 전체의 총파업, 평화적 임금투쟁과 거리의 학살, 바리케이드 투쟁 등이 서로 연이어지고 겹치고 넘치면서 끊임없이 움직이며 변하는 투쟁의 바다이다.”

 

이 투쟁의 절정은 전국 총파업으로 나타났다. 1905년 9월 모스크바의 인쇄공 파업으로 시작하여 10월 모스크바의 철도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갔다. 이후 기관사, 전신, 우편 노동자들의 파업이 전국에 걸쳐 터져 나왔다. 곧 다른 부문의 노동자들도 모두 파업에 참여하여 전국의 수송과 통신이 마비되었다. 이 때문에 군대는 이동할 수도 없었고 통신을 주고 받을 수도 없었다. 이제 파업 노동자들의 요구는 더욱 정치성을 띠었다: 선거를 통해 정부를 구성하고 기본 시민권을 보장하라!

 

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그리고 기타 도시들의 파업공동위원회(소비에트)가 파업을 지도했다. 각 지역 공장들의 대표들로 구성된 소비에트는 식량 공급과 사회질서 유지에 책임을 지기 시작했다. 이것은 공식 정부와 함께 나란히 노동자 정부가 초보적인 형태로 등장했음을 의미했다.

 

사태를 통제하기 위해 짜르는 “10월 선언”을 통해 주요한 정치적 양보조치처럼 보이는 것을 내놓았다. 그는 자신이 기적과 같은 변화를 겪었으며 이제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인식했다고 말했다. 이제부터 의회가 개원될 것이며 시민들은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라고 그는 밝혔다. 이 발표는 당연히 대단한 인기를 누렸으며 곧 대부분의 파업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승리했다고 생각하며 공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투쟁의 파고가 가라앉자마자 정부는 탄압을 시작했다. 반란지역들에 대한 징벌 작전이 시작되었다. 제국 전체에서 가장 말썽이 많은 지역 가운데 하나였던 폴란드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군대는 반란의 지도자들을 군사법정에 회부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좌익 조직들은 11월 총파업을 촉구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파업투쟁이 다시 상승하자 정부는 다시 전술적 후퇴를 했다. 군사법정을 폐지하고 계엄령을 해제하며 다른 양보조치들을 제시했다. 그러나 파업의 준비가 소강상태에 들어가자마자 정부는 다시 공세로 돌아섰다. 이번에 경찰은 트로츠키를 포함한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지도자들과 기타 유명한 노동운동 지도자들을 체포했다.

 

다시 한번 노동운동은 총파업을 재개하려했다. 이번에 정부는 페테르부르크를 통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모스크바와 다른 지역들에서 투쟁은 새로 가열되었다. 투쟁이 가라앉자마자 정부가 약속을 거둔다면 정부의 양보조치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 명백했다. 볼세비키들의 지도를 받아 모스크바 노동자들이 봉기를 일으켰다. 그러나 이 봉기는 몇 주일의 시가전과 함께 패배로 끝났다. 이후 투쟁은 18개월 동안 산발적으로 터졌으나 짜르 정권은 서서히 통제력을 되찾았다.

 

모스크바 봉기는 총파업을 봉기의 가교로 삼은 최초의 진지한 시도였다. 이로부터 15년 후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 1905년의 “총 예행연습”이 없었다면 1917년의 승리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정치의식을 가진 광범위한 노동자들이 정권의 정체를 알았으며 이것을 개혁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했다. 이 경험을 통해 혁명가들은 대중투쟁의 정치역학과 국가권력에 도전하는 실제적인 방식들을 배웠다.

 

또한 1905년의 경험은 총파업의 한계를 드러내었다. 총파업으로 국가권력을 뒤흔들고 최소한 서류로나마 양보조치들을 받아냈다. 그러나 결국 정부가 통제력을 다시 장악하면 개혁은 도로아미타불이 되었다.

 

레닌은 10월이 되어서야 러시아에 돌아올 수 있었으나 사건들을 면밀히 관찰했다. 정부를 마비시키고 노동계급 주위로 피억압 대중을 결집시킬 수단인 대대적인 파업의 중요성을 그는 명확히 인식했다. 또한 맑스를 비롯한 사회주의 이론가들이 예측하지 못한 노동계급 결집체 소비에트의 중요성을 그는 인정할 수 있었다.

 

반란의 중심이었던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를 주도했던 트로츠키는 레닌과 똑같은 결론을 도출했다. 전제를 마비시키고 일부 양보조치들을 강제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못했다. 피억압 인민의 선두에 선 노동계급이 짜르의 경찰과 군대를 제압하고 지주와 자본가들의 생산수단을 몰수한 후 노동계급의 권력기관을 수립하는 것이 필요했다.

 

룩셈부르크 역시 레닌과 트로츠키와 대체로 견해를 같이했다. 1905년 12월에 대대적인 파업을 넘어서서 국가권력을 장악해야 했다고 그녀는 인정했다. 그리고 이를 위한 러시아 노동자들의 영웅적 투쟁에 경의를 표했다. 다만 그녀는 레닌이나 트로츠키보다 대중의 자발적 혁명 에너지를 발휘시키는 대대적 파업의 위력에 더 많은 강조했다. 그러나 노동운동의 공식 지도자들이 인위적으로 선언한다고 총파업이 실현되지 않는다는 점을 그녀는 올바르게 보았다:

 

“러시아 혁명이 보여주었듯이, 대대적 파업은 노동자 투쟁을 좀더 효과적으로 만들기 위해 섬세한 논리로 개발한 기발한 방식이 아니다. 이것은 노동계급 대중 투쟁의 방식이며 노동계급 혁명투쟁의 모습이다.”

[대중파업]

 

 

총파업의 종류들

 

1905년 혁명이 30년이 지난 시점에서 트로츠키는 영국독립노동당(ILP)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에서 그는 1893년 엥겔스가 한 말을 인용했다:

 

“군대가 대단히 동요한 벨기에의 총파업처럼 정치파업은 협박을 통해 즉시 승리해야한다. 아니면 대대적인 실패로 끝난다. 아니면 바로 바리케이드를 쌓아올리는 봉기로 나아간다.”

 

1905년 러시아 총파업, 1893년 벨기에 총파업 등은 첫 번째 경우에 속한다고 트로츠키는 말했다. 즉 정부는 진지하게 싸워보지도 않고 미리 겁을 집어먹고 양보조치들을 게워 내었다.

 

“대대적인 실패”의 경우는 정부가 충분한 대비를 하고 군대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고 있을 때 일어난다. 또한 파업이 관료적으로 진행되어 “결정적 전투가 아니라 적을 ‘겁주는’ 목적을 위해 계산되었을 때”에도 똑같은 결과를 낳는다. 자본가들은 이런 것들에 대해 많은 정보를 보유하여 노동운동 지도부가 진지하게 투쟁을 준비하지 않았다는 금방 알게된다. 그러면 이들은 유화조치를 거두고 좀더 공격적으로 나온다.

 

총파업의 세 번째 유형은 “바로 바리케이드를 쌓아올리는 봉기로 나아간다.” 트로츠키는 이 총파업 봉기가 승리하거나 실패하는 요인들을 이렇게 들고 있다:

 

“사회의 계급 분화, 노동계급의 사회적 비중, 소부르주아 계급 하층의 정서, 군대의 계급적 구성과 정치적 정서 등. 그러나 봉기가 승리하기 위한 중요한 조건 가운데 하나는 올바른 혁명적 지도부와 이들의 명확한 정세 파악 그리고 총파업에 이은 공개적인 혁명투쟁이다.”

“영국독립노동당과 제 4 인터내셔널”, 1935년 9월 18일 (강조는 원저자)

 

다른 가능성들도 존재한다. 혁명가들은 국가권력 장악을 즉각적 목표로 설정하지 않은 채 총파업을 촉구할 수 있다. 트로츠키는 1935년 프랑스의 상황을 이렇게 분석하고 있다:

 

“현재의 과도적 정권이 대단히 불안정하다는 사실, 바로 이것 때문에 총파업은 커다란 부분적 성공을 성취할 수 있다. 이로 인해 정부는 보나파르트 체제의 포고령, 2년 군복무 등의 문제에서 양보조치를 내놓도록 강제될 수 있다.”

“다시 한번, 프랑스는 어디로?”

 

그러나 좀더 낮은 목적들을 위해 시도되더라도 총파업은 최소한 암묵적으로는 권력의 문제를 제기한다:

 

“총파업을 시작한 구호와 동기가 무엇이든, 진정한 대중을 투쟁에 포함시키고 대중이 투쟁의지가 확고하다면 총파업은 나라의 모든 계급들 앞에 이 문제를 필연적으로 제기한다: 누가 나라의 주인이 될 것인가?”

위의 책에서

 

영국독립노동당에 보내는 편지에서 트로츠키는 다른 유형의 “총파업”을 하나 더 제시한다. 이것은 최근 캐나다 온태리오주에서 벌어진 “행동의 날” 투쟁과 훨씬 비슷하다. 이런 유형의 “총파업”에서 노동조합 지도부는:

 

“파업의 경과와 결과에 대해 자본가들과 미리 합의한다. 의회와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대중의 축적된 분노가 어느 순간 탈출구를 찾아야 한다고 느낀다….이런 경우 이들은 정부의 뒷문으로 들어와 총파업을 지도할 허락을 얻는다. 물론 국가기구에 전혀 손상을 입히지 않은 채 될 수 있으면 빨리 투쟁을 끝낼 의무가 이들에게 있다.”

 

이러한 합의는 공개적으로 또는 몰래 체결될 수 있다. 온태리오주의 총파업은 후자의 경우에 속한다. 그러나 핵심 요소는 동일하다: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항의의 날”을 이용하여 정치적 발언을 하고 대중이 분노를 배출하도록 기회를 제공한다. 이들은 조합원들에게 진지하게 투쟁에 임한다는 인상을 주려고 한다. 그러나 미리 자본가들에게 불편한 일은 없을 것이라고 신호를 보낸다. 프랑스 노동조합은 이런 유형의 “총파업”을 1934년 2월 12일 우익의 쿠데타 시도 일주일 후 촉구했다. 이에 대해 트로츠키는 이렇게 말했다:

 

“계급의식이 있는 모든 노동자들은 스스로 이렇게 말해야한다: (노동조합 최고지도자) 주오가 잠시 만이라도 활발히 움직였다면 아래로부터의 압력은 상당히 위력을 발휘했을 것이다. 물론 지금 얘기하고 있는 총파업은 본래의 의미에서 총파업이 아니라 24시간 항의 시위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시한은 대중이 정한 것이 아니라 노동조합 지도부가 명령을 내린 것이었다.”

“다시 한번, 프랑스는 어디로?”

 

온태리오주의 “행동의 날” 투쟁은 매우 제한적이었고 아주 면밀히 통제되었으며 대체로 진지한 총파업이라기보다는 도시 전체의 시위가 연속해서 벌어진 형태였다.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이 시위들을 우익 토리당의 수상 마이크 해리스 정권과 진지하게 대결하기보다는 압력을 행사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들의 목표는 협상 테이블에 자리를 배정받아 토리당의 정책이 어떻게 시행에 옮겨질 것인지에 대해 자기 예기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삭감은 어느 부문에서 언제 이루어질 것이며 어느 학교와 병원이 삭감 대상이 될 것인가 등등. 대중동원의 성격과 방식은 이들의 의도를 잘 반영하고 있다.

 

“행동의 날” 투쟁은 노동조합 기구들을 동원시키는데 크게 의존했다. 노동조합들은 직원을 더 많이 고용했으며 기존 직원들은 초과임금을 상당히 많이 받았다. 또한 이들은 광고와 홍보에 자원을 쏟아 부었다.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투쟁을 정치화시킬 용의도 능력도 없었다. 그리고 이들은 진지한 전투성을 격려할 생각이 없었다. 이 투쟁이 자본가들이나 해리스 정부에 대항하는 진지한 투쟁이라는 인상을 주기 않기 위해 이들은 면밀하게 투쟁을 통제했다.

 

온태리오주 노동연맹(OFL) 지도부는 아주 제한적인 “행동의 날” 투쟁조차 약화시키려는 “사이비” 노동조합들에게 공손하게 굴기까지 했다. 지난 선거에서 노동조합 파괴를 획책한 신민주주의당(NDP)과 이 정당 지도자 밥 레이에게 표를 주지 않은 자들이 혼이 나야 된다고 말하면서 철강노동조합과 제지노동조합 지도자들은 토리당의 공격을 거의 환영하는 듯했다.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마치 수도꼭지를 다루듯이 노동조합운동의 분노를 풀어주고 잠그는 일을 마음대로 하고 싶어한다. 또한 이들은 좀더 전투적인 분자들이 좌파로 등장하여 자신들의 투쟁성을 우습게 만드는 것을 피하려한다. 지금까지 드러난 대로 이들이 운동을 통제할 수 있다면 자본가들은 크게 불편을 겪을 일이 없다.

 

이제 “행동의 날” 투쟁을 많이 보았으므로 이런 종류의 투쟁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지는 모두 뻔히 알고 있다. 그러나 처음에는 이 투쟁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제대로 알 수 없었다. 도시 전체가 마비된 경우는 1995년 12월 온태리오주 런던시에서 처음 있었다. 그런데 런던시는 급진노동운동의 메카로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 기업들은 “노동조합 지도자들”에게 저항할 것을 시민들에게 격려하는 공격적인 광고를 하느라 많은 돈을 들였다. 도시 노동조합들도 이들의 지지를 구하기 위해 나름대로 사전에 노력했다. 이들은 미리 몇 번의 집회를 개최했는데 높은 지지도에 깜짝 놀랐다.

 

가장 심각한 대결은 도시 바깥의 포드사 소속 탤보트빌 공장에서 일어났다. 이 공장은 규모가 상당히 크며 포드사를 위해 많은 이윤을 남겨주는 곳이다. 캐나다자동차노동조합(CAW)은 하루 동안 공장 조업을 중지한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포드사는 하루의 생산량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파업방위대의 대오를 금지하는 법원의 명령서를 미리 받아 놓았다. 그리고 회사는 모든 노동자들에게 출근 명령을 내리고 이것을 어길 경우 심각한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협박했다. 온태리오주 경찰청(OPP)은 법원의 명령서를 강제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선언하고 필요하다면 시위진압 경찰을 공장 내로 투입시키겠다고 위협했다. 아무도 법을 어길 생각이 없었으며 포드사 공장은 조업을 계속해야했다. 그러나 캐나다자동차노동조합 위원장 하그로우브는 공장이 조업을 중지하게 될 것이라고 평온히 말했다.

 

모든 것이 대단히 극적이었다. 이날 밤 우리는 토론토시에서 런던시로 차를 몰았다. 이 동안 라디오를 통해 10분마다 뉴스를 들었다. 확실히 큰 충돌이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우리가 현장에 도착하자 공장문은 확실히 닫혀 있었으며 경찰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150명 정도의 잘 조직되고 규율이 확실한 캐나다자동차노동조합원들이 공장 정문을 지키고 있었다. 이들은 상황을 어떻게 요리할 지를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정말로 멋진 광경이었다. 이것이 바로 “노동계급의 세상”이었다.

 

자동차노동조합은 명확히 했다: 포드사가 파업을 법에 의거해 공격적으로 나온다면 생산손실은 훨씬 커질 것이다. 마침내 일년 정도 지나 이 문제가 법원에 회부되자 일부 기술적인 문제로 소송이 기각되었다. 이 사건은 중요한 교훈을 남기고 있다. 물론 이 사건은 널리 선전되지 않았다. 경제난에 조그만 소식으로 실렸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어떤 전술을 사용할 것인지에 대해 중요한 모범이 된다. 사실 처음 노동조합을 수립할 때의 전술이 바로 이것이었다. 이 투쟁은 비록 규모는 작았지만 진정한 총파업이 어떤 모습을 보일 것인지를 미리 보여주었다.

 

“행동의 날” 투쟁의 절정은 1996년 10월 토론토시의 마비로 나타났다. 포드사의 탤버트빌 공장처럼 자본가들은 개별 노동자들과 노동조합에 대해 징계조치와 법원의 명령서 등을 들먹이면서 협박을 가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노동조합은 이 협박을 무시했다. 그리고 하루동안 토론토시를 마비시키는 행동에 들어갔다.

 

이 투쟁의 핵심은 대중교통이었다. 법원은 명령서를 발부하여 버스와 지하철이 정상운행 되도록 조치를 취해놓았다. 이에 대해 노동조합은 200명에서 300명에 이르는 진지한 파업 방위대를 낮 시간 운행 조가 교대되기 전 한 밤중에 주요 교통 요충지에 보냈다. 이들은 유인물이나 배포하기 위해 파견되지는 않았다. 출근한 몇 명의 멍청한 열성 관리자들과 일부 노동자에 대해 이들은 당연히 계급투쟁의 현장교육을 실시했다. 이렇게 해서 대체인력은 완전히 차단되었고 법원의 명령서는 무시되었으며 대중교통은 완전히 정지되었다. 경찰은 긁어 부스럼이 되지 않기 위해 파업노동자들과의 대결을 회피했다.

 

토론토시의 대중교통이 정지되면 자가용 운전자들의 출근 러시로 시내 교통이 엄청난 체증을 겪을 것이었다. 이것이 일반적인 예상이었다. 그러나 그날 토론토시 시내는 유령도시 같았다. 출근을 시도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몇 개월 동안 고함을 지르고 협박을 하던 자본가들은 노동자들과 대결하는 것이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회사 문을 하루 동안 닫아 걸기로 작정했다. 물론 토론토시는 캐나다의 금융 중심지이고 특히 노동조합이 강력한 도시는 아니다. 온태리오주 노동연맹 지도부도 처음에는 토론토시를 마비시키는 것을 꺼려했었다. 따라서 이 사건은 노동조합의 단결력이 확실히 과시했다.

 

여론조사에 의하면 토론토시 1일 총파업 직후 해리스 정부에 대한 지지도는 급락했다. 대신 노동조합에 대한 지지도는 급상승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현상이었다. 노동자들은 스스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런, 그 동안 정부의 공격을 괜히 참고만 있었네. 우리에게도 힘이 있구나.” 그리고 다음 투쟁 계획에 대해서 논의들이 분분했다. 이제 온태리오주 전체에 대한 “행동의 날”을 계획할 차례가 된 듯했다. 이 정서는 널리 주목받았으며 토리당 지지기반인 자본가들은 해리스 정부가 노동자들을 너무 자극한 것 같다고 걱정하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에 대한 정부의 노골적인 공세가 이익보다 해가 더 많을지 모른다고 이들은 계산했다.

 

그러나 온태리오주 노동연맹 지도자들은 이들보다 더 걱정이 컸다. 자신들이 통제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을 자극하지 않았나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노동조합 대중의 자신감은 급상승했으며 토론토시 총파업의 성공에 이어 토리당에 대한 반격이 강화될 것이라는 일반적인 예상이 나돌았다. 이들은 이에 대해 겁에 질려버렸다. 그러자 이들은 재빨리 이렇게 선언했다: 그 동안의 투쟁으로 노동조합은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표현했으므로 더 이상 사태를 악화시키는 투쟁은 없을 것이다. 그러자 곧 대중의 전투성이 사그러졌다. 그리고 토리당에 대한 지지도는 이전의 수준을 회복했다.

 

 

세 번의 결정적 시점

 

지난 3년간 노동조합은 반격을 통해 해리스 정부에 심각한 타격을 가할 기회를 세 번 맞이했다. 물론 이때마다 위험부담은 있었다. 그러나 노동조합이 주요한 승리를 따낼 수 있는 확률은 50%보다 훨씬 높았다. 온태리오주 공공노동연맹(OPSEU) 소속 5만여 조합원들은 1996년 3월 파업에 돌입했다. 이 때가 첫 번째 기회였다. 최악의 지도부에도 불구하고 공공노동자들의 대오가 무너지지 않자 노동운동은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몇 대의 텔레비전 뉴스 카메라가 지켜보는 가운데, 온태리오주 경찰청 소속의 시위 진압조가 해리스의 지시를 받고 퀸즈 공원에서 평화 시위를 하고 있는 10여명의 파업노동자들을 공격했다.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그날 저녁 뉴스에서 경찰의 공격을 지켜본 사람들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려고 했다. 평범한 공무원들이 평화적으로 피켓을 들고 시위를 하고 있는데 시위진압 경찰들이 시커먼 복장을 하고 이들을 공격했다. 텔레비전 뉴스를 보고 있던 많은 사람들에게 이 광경은 충격이었다. 경찰이 민주적 권리 등에 신경을 쓸 필요 없이 노동자와 시민을 공격하는 곳은 세계에 널려있다. 그러나 캐나다는 민주적 권리가 존중되는 곳이라고 모두들 생각하고 있었다.

 

온태리오주 노동연맹의 지도자 고드 윌슨은 경찰의 공격이 계속되면 노동조합이 정당방위대를 조직하여 “반격하겠다”고 위협했다. 물론 이것은 좋은 생각이었다. 그러나 진짜 이렇게 할 생각은 그에게 없었다. 그러나 해리스 정부의 폭력행위에 대해 분노한 쪽은 노동조합만이 아니었다. 신부, 목사, 랍비 등 유명한 인사들이 조사를 요구했다. 그러자 주하원 의장인 토리당 의원이 조사를 실시하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기습을 당한 해리스 역시 조사를 실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이 조사를 통해 드러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나 이 순간 토리당과 파업파괴자들에 대해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동조파업을 일으켰을 경우 해리스 정부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두 번째 기회는 토론토시 파업과 함께 다가왔다. 해리스 정부, 법원, 자본가들에 대항해 노동조합이 토론토시를 하루동안 마비시킨 다음날 25만 명이 시위에 참가했다. 이것은 캐나다 역사상 최대의 시위였다. 이때 노동조합은 잠시 대중으로부터 엄청난 지지를 받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노동계급과 노동 조직의 위력을 실감했다. 이에 비해 해리스 정부와 토리당은 지저분한 소인배들로 보였다. 토론토시의 총파업은 이들과 이들이 대변하고 있는 대기업 자본가들을 뒤흔들어 놓았었다. 이제 모두에게 질문 거리는 “그렇다면 다음에는 어떤 투쟁을 준비하고 있는가?”였다. 그러나 노동조합 지도부가 여세를 몰아 밀어붙일 의도가 없다는 점이 명백해지자 토리당은 다시 자신감을 되찾았다. 몇 주일 내에 모든 상황은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마치 그 동안에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세 번째 기회는 1997년 10월 교사들의 파업과 함께 찾아왔다. 인민과 노동계급은 해리스 정부의 공격을 받아 의식이 급격히 좌경화되고 있었다. 물론 노동조합 지도부의 성격상 이 현상은 계속 될 수 없었다. 온태리오주는 미국혁명 과정에서 영국의 국왕에게 충성한 자들이 미국에서 쫓겨난 후 캐나다에 건설한 보수적인 지역이었다. 이 주에서 12만 5천 여명의 보수적 교사들이 2주일 간 정치파업을 통해 공교육에 대한 토리당의 공격을 패배시키려 나섰다는 것은 엄청난 사건이었다. 토리당은 교사들의 파업을 민주주의를 전복시키는 위험하고 “불법적인” 행위라고 비난했다. 또한 이들은 파업이 어린이들의 교육권을 침해했다고 공격했다. 주요 신문들과 방송 시사 해설가들도 전부 이런 식으로 떠벌렸다.

 

그러나 이들의 공격은 먹혀들지 않았다. 대중은 교사들의 불법 행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고 토리당의 교육 “개혁”에 대해서는 대단히 불만이 많았다. 이 현상을 분석하기 위해 지배계급은 대형 광고, 집중 연구 그룹, 자문위원 등을 대거 동원했다. 우익에게 법과 질서라는 구호는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나 파업에 대한 자본가 언론의 거의 만장일치식 공격도 소용이 없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해리스 정부 자체가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법치”에 대한 인민의 환상을 깨는데 큰 기여를 했다. 자신들이 원하는 법을 통과시키기 위해 토리당은 의회의 규정들을 뜯어 고쳤으며 야당의 역할을 격하시켰다. 이것을 본 다수 대중은 소위 민주주의 과정의 정당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교육 체제를 파괴하고 부자와 가난한 자의 격차를 넓히려는 토리당의 시도에 저항하여 교사들이 “법을 어기고 있었다.” 이에 대해 대중은 이들의 행동이 옳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것은 잠재적으로 대단히 의미 있는 현상이었다.

 

교사들의 파업이 2주 째 접어들 무렵 이들에 대한 지지는 확고했고 지지도가 상승하는 경향마저 보였다. 파업 10일 째인 1997년 11월 5일 전통적으로 토리당을 대변하는 캐나다 자본주의의 최대 대변지 [글로우브 앤드 메일]지는 해리스 정부에게 이렇게 충고했다:

 

“정부는 여론의 지지를 얻는 싸움에서 패배할 수도 있다. 교사들의 명백한 불법파업은 수백만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일상생활을 파탄시키고 있다. 그러나 지금 시점에서 온태리오주 주민들은 정부보다 교사들의 현실인식을 선호하고 있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어지기 시작하자 이 신문의 사설 위원들은 해리스에게 교사들에 대한 양보안을 제시했다. 그런데 사설이 인쇄에 들어갈 순간 속보가 날아 들어왔다. 이 속보는 즉시 신문의 일면 톱기사가 되었다: “교사들이 파업을 끝낼 지도 모른다.”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굴복한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정치적 지도력의 위기가 전형적으로 드러났다. 교사들은 투쟁을 원했고 지도자들의 정치적 근성만 있었으며 투쟁은 승리로 귀결될 수 있었다. 크나큰 기회가 이렇게 허비되었다.

 

 

온태리오주 ‘행동의 날’이 남긴 교훈

 

“행동의 날” 투쟁으로부터 중요한 교훈들이 도출될 수 있다. 첫째, 조직된 노동계급은 사회억압에 대한 투쟁을 성공으로 이끄는 열쇠이다. 이 점은 이미 널리 인식되고 있다. 역으로 노동계급이 토리당과의 주요 결전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장애인, 병자, 홀 부모, 원주민, 이주민, 피난민, 인종적 언어적 소수자, 경찰 폭력의 희생자, 생활보호대상자 등 억압당하고 있는 계층의 이해를 옹호하여 이들을 해리스 정부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해야한다.

 

세 번째의 명백한 교훈은 현재 노동조합 지도부가 대단히 보수적이며 근본적으로 친자본적이라는 사실이다. 노동관료집단은 소부르주아 계층으로 “노동운동 내부에서 자본의 앞잡이”이다. 그러나 이들의 생존 자체가 노동계급 조직의 보존에 의존하기 때문에 이들은 모순적이다. 따라서 대중의 압력을 받으면서 자신의 이해가 위협 당한다고 느끼면  제한적이나마 노동 관료의 일부는 자본주의 합법성의 틀을 넘어설 준비가 되어 있다. 이런 경우는 자주 있었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행동의 날” 투쟁의 또 하나 매우 중요한 교훈이 있다: 투쟁의 필요성을 누가 제시한다면 평조합원들과 노동 대중은 투쟁할 것이다. 뭔가 중요한 것이 걸려 있으며 소속 조직이 투쟁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느끼면 노동조합 대중은 위험을 마다하고 투쟁한다. “행동의 날” 투쟁은 이 점을 다시 한번 보여주었다. 이것은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노동조합 지도부의 소심함으로 인해 “행동의 날” 투쟁은 토리당의 공격을 저지하는데 이렇다하게 성공하지 못했다. 이 점은 중요하다. 그러나 이 투쟁은 참여했던 대중과 심지어 단순히 투쟁을 목격한 대중들에게 아주 중요한 실전 체험이 되었다. 이것은 측정하기는 약간 힘들 것이지만 앞으로의 투쟁에 매우 중요할 수가 있다. 이 제한된 투쟁은 노동계급이 진정한 사회적 힘을 가지고 있으며 총파업은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말 그대로 온태리오주 수백만 대중은 이점을 아주 명확히 인식했다.

 

교사 노동조합이 파업을 철회한 후 이들은 퀸즈 공원에서 마지막 집회를 열었다. 주로 교사들로 이루어진 5만여 대중이 이 집회에 참여했다. 이들 다수가 지도부의 굴복에 분노하고 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연단에서 관료들이 연설을 하자 대중의 절반은 분노에 차 “총파업! 총파업!”을 외치며 혐오감을 표출했다. 투쟁을 접기는커녕 투쟁이 확대되기를 원한다는 이들의 열망이 이렇게 표현되었다. 이들은 이 투쟁을 총파업으로 전환시켜 법안 160번(공교육을 공격하는 토리당의 법안)을 폐기하고 해리스를 타도하기를 원했다.

 

 

총파업과 혁명 지도력

 

미국 스파르타쿠스 동맹의 캐나다 조직인 트로츠키주의 동맹(TL) 등 일부 좌익 그룹들은 지금 시점에서 토리당을 타도하기 위해 총파업을 촉구하는 것은 올바르지 못한 전술이라고 생각한다. 해리스 정부가 타도될 경우 사회혁명의 문제가 제기될 것이며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노동자 대중의 혁명정당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해리스 정부를 타도하는 대대적 파업 투쟁이 혁명 상황으로 발전할 가능성은 물론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가 “행동의 날” 투쟁 기간동안 총파업을 촉구한 것은 혁명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우리는 당면 과제로 제기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총파업을 촉구했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투쟁의 다음 단계였다. 불행하게도 지금 우리는 사회주의 혁명을 당면 목표로 제시할 수 없다. 이를 위해서는 투쟁이 상당히 진전되어야 한다.

 

국제노동운동의 경험에 의하면 대대적 파업은 즉시 혁명 상황을 조성하지 않더라도 상당한 것을 성취할 수 있다. 대담하고 능력 있는 지도부와 기술적 정치적으로 적절한 준비가 필요하다. 대대적인 파업은 소규모일지라도 혁명조직들에게 중요한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예를 들어, 1934년 미국 미니애폴리스에서 한 줌의 트로츠키주의 투사들은 투쟁을 촉발시켜 공격적인 트럭 노동자들의 파업을 지도했다. 그리고 마침내 도시 전체에서 총파업이 터져 미니애폴리스는 노동조합운동의 아성으로 돌변했다. 이 도시는 이후 트로츠키주의자들에게 중서부 노동운동의 강력한 기반을 제공해주었다. 트로츠키주의 동맹의 동지들은 동맹이 대중 정당으로 발전한 이후에야 총파업 구호를 제기할 계획인 것 같다. 이들이 그렇게 하겠다면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레닌, 트로츠키, 미국 트로츠키운동의 역사적 지도자 캐넌 등이 이 문제를 접근한 방식은 결코 아니다.

 

노동조합 내부의 맑스주의자들은 노동계급의 역사적 이해를 대변하는 강령을 제시해야한다. 노동조합 관료들이 좀더 전투적이 되도록 압력을 가하는 대신 혁명가들은 자본가들에 대한 이들의 근본적 충성심을 폭로하고 새로운 유형의 지도부를 수립할 필요성을 제기해야한다. 새로운 지도부는 자본가들의 규칙을 준수하는데 헌신하지도 않을 것이며 이 비이성적 사회체제가 정상적으로 돌아가게 만들 노력도 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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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크라 2015.04.06 23:13
    청장년 노동자들은, 그리고 노동자계급 전위투사들은 투쟁강령을 제시하라!! 우리 프롤레타리아트 운동의 당면 임무를 강령으로 제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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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노동운동과 혁명정당 (IBT) 트로츠키주의와 전술(19호, 1997) 1 볼셰비키-레닌주의자 2012.12.24 5778
» 노동운동과 혁명정당 (IBT) 맑스주의와 총파업 (21호, 1999) 1 볼셰비키-레닌주의자 2012.12.24 6354
6 노동운동과 혁명정당 (IBT) 북한을 방어하자! 관료집단을 타도하여 혁명적 재통일을! (2010년 12월 15일) ( 33호, 2011) 볼셰비키-레닌주의자 2012.12.24 6717
5 노동운동과 혁명정당 (IBT) 파시즘을 어떻게 격퇴할 것인가? file 볼셰비키 2017.09.07 7073
4 노동운동과 혁명정당 (IBT) 어떤 정당이 필요한가? 볼셰비키 2016.01.23 7871
3 노동운동과 혁명정당 『레닌과 전위당』 옮긴이 후기 볼셰비키 2016.03.02 9719
2 노동운동과 혁명정당 (IBT) 1920~1950년대 미국노동운동 속에서의 혁명활동 볼셰비키 2015.11.13 9861
1 노동운동과 혁명정당 경사노위에 대한 우리의 입장 file 볼셰비키 2019.01.27 913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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