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익조직'들에 대한 분석/평가

다시 읽어보는 [무엇을 할 것인가?]

by 볼셰비키-레닌주의자 posted Dec 24,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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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어보는 [무엇을 할 것인가?]

— 경제주의: 남한 노동운동의 고질병

“…투쟁을 통해서 당은 역량과 활력을 얻는다; 당의 최대의 약점은 덩치만 갖추었을 뿐 정치적 성격이 모호한 것이다; 자신을 정화하면서 당은 더욱 강력해진다….”— [라쌀레가 맑스에게 보낸 편지] (1852년 6월 24일)

레닌의 팜플렛 [무엇을 할 것인가?]가 출판된지도 이미 100년이 넘었다. 그 동안 남한뿐 아니라 세계 도처에서 사회주의 혁명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레닌의 권위 또는 명성에 압도되어 나름대로 이 고전적 저작을 한번쯤 읽어보았을 것이다. 특히 남한의 경우 80년대 후반부터 사회주의 혁명을 지향하는 그룹들이 이 저서를 연구하며 운동의 문제들과 씨름한 적이 있었다. 지금도 이 저서는 소위 혁명운동의 입문서 비슷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대개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대화를 틀 때 보통 남자들이 “군대는 갔다왔소? 어디서 근무했소?”라고 질문하고 보통 여자들이 “결혼은 했나요? 애는 있어요?”라고 질문하듯이 운동권에서도 처음 만나는 사람과 얘기를 나눌 때 대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읽어보았소?”라고 질문할 정도이다.

그런데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좀 친해지면 종사하는 분야도 묻고 이 분야에서 잘 나가고 있느냐고 물으면서 좀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는 것이 대다수 사람들의 모습이듯이 우리 혁명운동권도 이제는 좀더 진전된 질문을 서로에게 던질 필요가 있다: “[무엇을 할 것인가?]의 정치적 내용을 잘 체득하고 실천하고 있소?” 이 질문을 받는다면 필자는 서양의 격언 하나를 떠올릴 것이다: “친구에게는 솔직할수록 적에게는 숨길수록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 그리고 “글쎄요”라고 솔직히 대답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회주의 혁명운동에 복무한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는 남한의 소규모 정치 조직들 대부분은 대중의 경제투쟁에 몸을 대주는 것에 자신의 임무를 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이 조직들이 운영하고 있는 웹사이트에 들어가 보면 금방 확인된다. 사이트에 올려져 있는 수도 없이 많은 글들은 거의 대부분 노동조합 투쟁에 대한 것들이고 정작 사회주의 혁명 정치의 핵심 내용 즉 강령 문제들을 다루거나 다른 조직의 정치를 비판하면서 정치적 내용으로 지지자를 규합하는 글들은 가물에 콩 나듯이 지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대중투쟁에 복무해야한다”는 명제는 마치 당연한 진리인 것처럼 인식되고 있고 “사회주의 혁명정당 건설에 복무해야한다”는 레닌의 엄명은 대중투쟁에 열심히 몸을 대주다 보면 저절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냐는 식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러니 1902년 레닌이 [무엇을 할 것인가?]를 통해 제기했던 문제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1) 레닌주의

레닌주의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레닌의 정치 및 조직 노선은 러시아 혁명의 성공에 의해 그 올바름이 입증되었다. 그리고 트로츠키에 의해 지금도 우리에게 계승되고 있다. 레닌주의는 한마디로 집약할 수 있다: “우리에게 혁명가 조직을 다오. 그러면 (사회주의 혁명으로) 러시아 전제를 전복시킬 것이다.” 여기서 혁명가란 직업 혁명가요 혁명 지도자를 의미한다. 사회주의 혁명운동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 올바른 강령으로 혁명 활동을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사회주의 혁명가 집단이 모이면 혁명의 승리가 보장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독일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독일에는 대중 조직이 존재하며 모든 것이 대중에게서 나온다. 노동계급 운동은 제 발로 걸을 정도로 성장했다. 이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수백만 대중이 ‘열댓 명’의 단련된 정치 지도자를 소중히 여기고 이들에게 확고히 밀착하는 모습을 보아라. 노동계급 정당에 적대적인 의원들은 의회에서 이렇게 외치면서 사회주의자들을 자주 놀려왔다: ‘당신들은 정말 훌륭한 민주주의자들이다! 당신들의 운동은 이름만 노동계급 운동이지 실제로는 똑같은 지도자 파벌이 언제나 다 해먹는다. 해가 지나고 또 지나도 맨 똑같은 베벨과 리이프크네히트 타령이다. 그리고 이 현상은 수십 년을 계속한다. 당신들이 선출한 소위 노동자 의원들은 황제가 임명한 관리들보다 더 오래 해먹는다!’ 그러나 ‘지도자들’과 ‘대중’을 분리시키고 대중의 해악적이며 야심 찬 본능을 자극하고 ‘열댓 명의 지혜로운 인간들’에 대한 대중의 신뢰를 무너뜨려 운동의 견고성과 안정성을 해치려는 참주선동에 대해 독일의 사회주의자들은 경멸의 미소를 보낼 뿐이다. 독일인들의 정치적 사고는 충분히 발전했으며 이들은 충분한 정치 경험을 쌓았다. 이 때문에 이들은 알고 있다: 재능이 있으며 전문적으로 혁명 훈련을 받았으며 오랜 경험을 통해 배운 것이 많을 뿐 아니라 서로 완전히 조화를 이루는 ‘열댓 명의’ 지도자들이 없이는 현대 사회에서 어떤 계급도 결연한 투쟁을 수행할 수 없다.(그리고 이 재능 있는 지도자들은 수백 명씩 태어나지도 않는다.)”

한마디로 전문적으로 혁명활동에 종사하는 직업혁명가 지도자들이 소수일지라도 확고히 조직만 되면 운동의 높은 수준과 성공이 보장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운동의 초보적 수준으로 인해 혁명가들의 권위를 떨어뜨린 것이 조직문제와 관련해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이 저지른 최악의 범죄”라고 레닌은 고백하고 있다. 그리고 “확고한 이론적 토대 위해 사회주의 기관지를 보유한 당이 존재할 경우 ‘노동계급 이외의’ 분자들이 당에 유입되더라도 운동은 자기가 가야할 길에서 이탈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이 주장에 부차적인 오류가 없는 것은 아니다. 레닌은 독일의 사회민주주의당이 혁명정당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이때 이미 이 정당은 개량주의 정당으로 맛이 가고 있었다. 1914년 8월 4일 이 정당은 독일 지배계급의 전쟁 노력에 지지를 보내면서 전쟁공채 법안에 찬성한다. 이로써 제 2 인터내셔널의 맹주인 독일 사민당을 비롯한 유럽의 사민당들이 자국 부르주아 계급의 전쟁을 지지하면서 세계 혁명을 목적으로 1889년 창립되었던 제 2 인터내셔널은 와해된다. 결국 자본주의가 가장 발달했음과 동시에 노동운동이 가장 왕성했던 독일에서 공산주의자들은 1918년에서 1923년까지의 혁명적 상황에서 혁명을 성공시키고 노동자국가를 수립하기는커녕 1933년 히틀러의 집권을 허용하고 1939년 제 2차 제국주의 세계대전을 막지 못한 채 노동자 인민이 제국주의 지배계급에 의해 전쟁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리고 레닌의 주장에는 러시아의 특수한 상황이 개입되어 있다. 무릇 운동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견고성과 지속성이 있어야한다. 이 견고성과 지속성의 핵심인 지도부를 짜르 전제의 탄압으로부터 보호하면서 운동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조직 보안이 필수이다. 이를 위해서도 이론적으로 확고하고 혁명 활동의 다양한 측면에서 훈련받은 소수의 혁명가 집단이 필요하다. 이것이 그는 주장이다. 그러나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보장되는 국가에서도 올바른 혁명활동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굳건한 이론적 토대를 가지고 있으며 상당한 경험을 축적한 소수의 지도부는 사회주의 혁명 승리의 전제조건일 수밖에 없다.

하여간 이 저서의 곳곳에서 레닌은 대중의 자연발생적 운동은 성장했으나 이 운동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 의식적인 소수 혁명지도부가 수립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운동의 치명적 약점이라고 한탄하고 있다. 그런데 이 한탄은 지금 우리 운동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1980년대 중반부터 우리 혁명운동은 일본에서 수입한 맑스-레닌주의를 연구하고 조직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는 소련과 동구의 “현실 사회주의권”은 체제 붕괴의 종착역에 다다르고 있었고 우리가 맑스-레닌주의라고 알고 있었던 것이 실제로는 “일국 사회주의” 이론에 입각한 민족주의의 변종인 스탈린주의였다. 결국 이 체제의 붕괴로 대다수 주관적 사회주의 혁명가들은 운동을 포기하거나 합법 대중정당을 통한 개량주의로 이탈했고 자유주의 학자들로 변신하면서 그나마 걸음마를 시작하려던 남한의 혁명운동은 다시 강보에 싸이게 되었다.

이 결과 소련과 동구의 붕괴 이후 지금까지 주위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현상들을 혁명적 맑스주의 전통에 입각하여 설명하며 운동을 이끌어온 정치 조직은 남한에 존재할 수가 없었다. 국제사회주의자들은 창립 초기에 레닌의 혁명정당론과 반(反)스탈린주의 국제주의를 주창하며 열심히 노력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 조직이 가지고 있는 강령의 개량주의 및 노동자주의 편향과 이의 부산물인 대중추수주의 조직 노선의 문제점으로 인해 이 정치 경향은 지금 [다함께]라는 간판을 내걸고 부르주아 평화주의에 입각한 반전운동에 매진하면서 소부르주아 시민운동의 수준으로 추락했다.

물론 이러한 부정적인 현상들은 남한의 대단히 열악한 상황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한국 전쟁 이후 일단 좌익의 씨가 말라버려 국제혁명운동과의 연결이 단절된 데다가 국가보안법으로 대표되는 반공 히스테리 속에서 혁명 지도자들을 배출하는 데 필수적인 정치 논쟁이나 투쟁이 본격적으로 진행될 수가 없었다. 사실 한국전쟁 이후 대중적 노동조합 운동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지도 아직 20년이 채 되지 않는다.

그런데 문제는 이 운동의 낮은 수준을 찬양하면서 운동의 전진을 저지하는 경향들이 레닌이 활동하던 러시아처럼 지금 남한에도 왕성하게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 경제주의 경향은 대중의 자연발생적 경제투쟁에 찬사를 보내고 몸을 대주면서 이 투쟁을 열심히 하다보면 자연적으로 운동이 발전한다는 지극히 기계적 사고를 유포하고 있다. 자본주의가 초래하는 모순이 대중투쟁을 촉발하고 이 투쟁으로 인해 시간이 흐르면 사회주의가 도래할 것이라는 속 편한 사고이다.

물론 자본주의의 진보적 시기에 활동했던 맑스와 엥겔스 그리고 제 2 인터내셔널 지도자들도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농민 출신이었던 노동자들이 더욱 계급의식을 발전시키면서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가 보장될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했다. 그러나 [제국주의론]에서 레닌이 설파했듯이 자본주의의 반동적 시기인 제국주의 시대에는 제국주의자들이 식민지에서 야만적으로 거두어들인 초과이윤의 일부로 제국주의국가 노동운동의 상층부를 매수하여 이들을 자본가의 사냥개로 이용하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노동자들이 계급의식 즉 혁명의식을 획득할 수가 없다. 바로 여기에서 혁명이론으로 무장된 의식적인 소수가 지도하는 혁명정당의 필요성이 도출된다. “노동계급의 투쟁이 사회주의 혁명가들의 강력한 조직으로 지도될 때에만 대중의 자생적 투쟁이 진정한 ‘계급투쟁’이 된다”고 말하면서 레닌은 이 저서에서 경제주의자들의 정체를 폭로하고 이들의 특징을 열거하고 있다.

(2)경제주의자들의 특징

혁명 정당의 건설과 올바른 강령 수립을 위한 정치토론 등에 대해 말을 꺼내면 경제주의자들이 흔히 하는 말이 있다: “똑똑한 사람들 몇 명이 모이면 당이 건설되나? 노동자 대중운동 속에 들어가서 이들을 결집해야 당이 건설된다.” 당연히 이 말에는 일리가 있다. 혁명정당이 몇 명의 똑똑한 “먹물들”로 이루어질 리는 없으며 대다수 혁명 노동자들이 이 정당의 구성원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만 이 상황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몇 명이라도 똑똑한 놈들이 똑똑한 정치적 내용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레닌이 [무엇을 할 것인가?]를 통해 주장하는 바였다. 심지어 경제주의자들은 노동자들로만 구성된 조직이라야 노동계급의 순수성을 유지하면서 끝까지 투쟁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소위 먹물들은 조직하지 말아야 한다는 좀더 극단적인 주장도 한다. 그러면 여기서 레닌이 규정한 바 경제주의자 대다수의 특징을 확인해보자:

“이론적인 모든 논쟁, 분파적 이견, 광범위한 정치적 문제, 혁명가들을 조직하는 계획 등을 경제주의자 대다수는 진정으로 혐오한다. 어느 날 상당히 일관된 어느 경제주의자가 ‘이 모든 것들은 해외에 나가 있는 자들이나 하게 내버려두어라’고 나에게 말했다. 이 말은 아주 널리 퍼져있는 노동조합주의 견해를 순수하게 표현한 것이다; 우리의 관심사는 우리 지역에서 벌어지는 노동자 운동이고 노동자 조직들이다. 나머지는 모두 비현실적인 공론가들의 발명품들이고 ‘이데올로기를 과대 평가하는 행위’에 불과하다.”

위에서 레닌이 얘기한 바 소수의 확고한 지도부를 수립하려면 상당한 우여곡절이 있을 수밖에 없다. 운동의 지도부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는 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론 논쟁, 분파 투쟁 등은 진정한 혁명 지도부 형성을 위해 피할 수 없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훈련받고 단련되는 분자들만이 혁명적 맑스주의의 이론적 실천적 전통에 입각하여 혁명투쟁을 지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 혁명 때 레닌이 귀국하여 4월 테제를 발표하면서 볼세비키당 기존 지도부의 노선을 완전히 그리고 올바로 바꾼 현상을 트로츠키는 이렇게 설명했다:

“지도자들은 우연히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들은 수십 년에 걸쳐 서서히 걸러지고 훈련되기 때문에 제멋대로 대체될 수 없다; 이들이 투쟁으로부터 강제적으로 제거되면 당은 치유되지 않는 상처를 입게 되면서 대개의 경우 상당한 기간 무기력해진다.”— 트로츠키, [러시아 혁명사, 제 16장: 당의 재무장], (1930년)

그런데 경제주의자들은 단순 무식하게 이런 과정들을 혐오하며 이론 싸움을 먹물들의 한계로 인식한다. 그러면서 대중의 자생성과 후진성에 의존하는 자신의 기회주의적 나약함을 몸 대주기식 혁명주의로 위장한다. 여기서 다시 레닌의 주장을 들어보자:

“우리는 러시아 뿐 아니라 외국의 동지들에게도 반드시 이렇게 말해야 한다: 가까운 미래에 가장 중요한 일은 연구이다.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한) 우리 러시아에서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외국 동지들은 특별한 의미에서 연구를 해야한다: 이들은 혁명활동의 조직, 구조, 방법 그리고 내용을 연구해야한다. 이들이 이렇게 한다면 세계 혁명의 전망은 좋을 뿐 아니라 대단히 밝을 것이다.”— 레닌, [코민테른 제 4차 세계대회 보고서], (1922년 11월 13일)

여기서 혁명운동을 연구해야한다고 레닌은 주장하고 있다. 이 주장은 노동계급 대중의 경제투쟁에 몸을 대주며 대중의 의식 즉 부르주아 의식에 영합하는 경제주의자들에게는 황당하게 들릴 것이다. “노동운동이 뭐 그리 어려운 일이냐? 대중에 대한 애정과 신뢰를 가지고 같이 투쟁하면 되지. 지금처럼 바쁜 때에 고시공부 하듯이 책을 파야 하는가?” 이 말은 필자가 경제주의자들로부터 직접 들은 말이다. 500년이 넘게 지속하고 있는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인류 최대의 대사가 이들에게는 너무도 단순 무식한 일이라 열정과 순수성만 있으면 운동을 계속하는데 아무 지장이 없다. 심지어 국제사회주의자들을 비롯한 대중추수주의자들은 대중의 경제투쟁 속에서 사회주의적 혁명의식이 창출된다고 말하면서 혁명 정당의 필요성을 부인하고 노동 대중의 후진성에 영합하는 노동자주의를 드러내고 있다. 여기서 다시 레닌의 주장을 들어보자:

“혁명이론 없는 혁명운동은 있을 수 없다. 이 사고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지금 유행하고 있는 기회주의의 설교가 실천 활동의 가장 협소한 형태에 대한 심취와 나란히 어깨동무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첫 번째로 우리 당은 형성 과정에 있을 뿐이고 그 특징들은 지금 규정되고 있는 중이다. 이 때문에 우리 운동을 올바른 길에서 이탈시키려는 다른 경향들과 정치투쟁을 통해 시시비비를 가릴 일이 아직 우리의 임무로 남아있다….두 번째로 사회주의운동은 그 본성상 국제적 운동이다. 국수주의를 배격해야할 뿐 아니라 운동의 초기 단계에 있는 나이 어린 운동은 다른 나라들의 경험을 활용해야만 자신의 임무를 달성할 수 있다….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경험들을 비판적으로 소화하여 독자적으로 우리 현실에 적용시키고 시험하는 것이다….세 번째로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의 임무는 다른 나라의 사회주의자들이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것이다….가장 선진적 이론으로 인도되는 당에 의해서만 전위 투사들의 임무는 달성될 수 있다….끊임없이 이 점을 기억해야한다: 사회주의는 과학이기 때문에 과학으로 연구되기를 요구한다.”

사회주의 혁명가들이 과학적 이론으로 무장해야 한다면 여기서 과학의 의미를 다시 되새길 필요가 있다. 낮에 구름이 없는 하늘이 파랗게 보이는 현상은 실제 하늘이 파래서가 아니라 햇빛이 대기권을 통과해 지구로 들어올 때 특정한 각도로 굴절되기 때문이다. 물리학이라는 자연과학이 겉으로 보이는 현상의 이면에 있는 실체를 탐구하고 해명했기 때문에 우리는 이 과학적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 맑스주의 사회과학도 마찬가지이다. 온갖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는 사회 현상의 이면에 있는 계급적 이해관계를 밝히는 것이 이 과학의 임무이다. 우리 운동이 맑스주의라는 이름을 갖게 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맑스라는 혁명가요 과학자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자본주의 착취관계를 탐구하고 해명했으며 이 관계를 극복할 대안을 사회주의 혁명 투쟁과 노동계급 독재 이론으로 마련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혁명가의 임무는 갈수록 소수로 또는 극소수로 몰리는 대 부르주아 계급이 자신의 계급 지배를 유지하기 위해 구사하는 온갖 거짓과 사기를 탐구 해명하고 이것을 극복할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사회주의 혁명가는 세계노동운동의 역사를 끊임없이 연구하면서 현실의 문제를 해명하고 대안을 제시해야한다. 리이프크네히트는 이 임무를 이렇게 요약했다: “연구하라, 선전하라, 조직하라.”

그리고 우리가 사회주의 혁명을 진지하게 연구를 해야할 이유는 또 있다. 레닌의 주장을 다시 들어보자:

“노동자들이 자신의 노동력을 더 좋은 조건으로 판매하게 만드는 투쟁 뿐 아니라 이들이 유산계급에게 자기 노동력을 팔도록 강요하는 사회체제를 철폐하기 위해 사회주의자들은 노동대중의 투쟁을 지도한다. 특정 고용주와의 관계에서 뿐 아니라 현대 사회의 모든 계급들 그리고 조직된 정치 세력인 국가와의 관계에서도 사회주의 운동은 노동계급을 대표한다. 따라서 사회주의자들은 자신의 임무를 경제투쟁에만 한정해서는 안될 뿐만 아니라 이 투쟁이 활동 전체를 지배하도록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 노동계급의 정치교육 및 정치의식의 발전에 우리는 적극적으로 책임을 져야한다….노동자들은 어떤 계급에게 가해지든 관계없이 모든 폭정, 억압, 폭력, 학대 등에 반응을 보이도록 훈련되어야 한다. 이럴 때에만 노동계급의 의식은 진정한 정치의식이 된다.”

사회주의 혁명가의 관심이 노동계급에게만 향하지 말아야 한다고 레닌은 주장한다. 모든 계급들의 동향과 정치적 이해관계 그리고 이들이 국제적으로 맺고 있는 계급적 관계들을 모두 탐구하고 이해해야 노동계급의 진정한 정치의식을 촉진시킬 수 있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렇다면 시시각각으로 벌어지는 온갖 사건들에 대한 분석 능력을 노동계급의 이해에 기초해서 구비를 해야 하는데 이 능력을 구비하려면 당연히 연구는 필수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레닌을 가장 위대한 혁명가라고 인정하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그는 운동이 필요한 모든 이론적 내용들을 끊임없는 연구를 통해 제공하면서 운동을 지도했기 때문이다. 그는 심지어 러시아 혁명이 한창 진행되던 때에도 적들의 탄압을 피해 숨어서 [국가와 혁명]을 저술했다. 노동자국가 수립 이후 본격적으로 진행될 사회주의 건설의 문제를 이론적으로 해명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혁명이 승리한 이후 노동자국가의 수반으로서 임무를 다하는 바쁜 와중에도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그리스 철학을 연구하면서 당시 만연하고 있던 반(反)맑스주의 철학을 제압할 궁리를 하고 있었다.

(3) 사회주의 혁명의 강령: 올바른 운동의 토대

세계의 위대한 혁명 지도자들의 이론적 실천적 연구 결과는 우리에게 혁명 전통으로 이어 내려져 오고 있다. 이것을 한마디로 혁명 강령이라고 얘기할 수 있다. 사회주의 혁명가들이 세계 노동운동사와 현실의 사회를 끊임없이 연구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올바른 강령을 수립하여 운동을 발전시키기 위해서였다. 이론과 실천이 분리되지 않는 것이 혁명적 맑스주의 전통의 특징인데 이 전통을 연구하면서 우리는 한국의 사회주의 혁명을 완수하기 위한 필요한 강령을 가져야 한다. 주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 뿐 아니라 다양한 쟁점들에 대해 혁명 전통에 기초하여 나름의 입장과 목표를 가지려고 노력하는 자체가 올바른 강령 수립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연구는 당연히 필수일 수밖에 없다. 맑스주의는 달달 외어야만 하는 한 다발의 규칙이 아니고 노동계급의 시각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운동의 올바른 방향을 찾기 위해 필요한 방법론이다. “혁명 이론 없이 혁명 운동이 있을 수 없다”는 바로 이 점을 집약한 명제이다. 트로츠키는 혁명 정당과 강령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했다:

“노동계급의 이해는 강령의 형태로만 올바로 표현될 수 있다. 그리고 강령의 내용은 당을 건설하는 것을 통해서만 옹호될 수 있다. 노동계급은 그 자체로는 착취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의 이해를 옹호하는 정치적 계급으로 변모하는 순간 노동계급은 독자적인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이것은 오직 당이라는 매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당은 노동계급이 계급의식을 획득하는 역사적인 기관이다”— 트로츠키 , [다음에는 무엇이?] (1932년)

사실 혁명적 맑스주의의 역사는 이론적 논쟁을 통해 올바른 강령을 수립해온 역사였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19세기 초반 청년이었던 맑스와 엥겔스는 근대 공업에 기반을 둔 자본주의의 온갖 해악을 극복할 강령을 수립하기 위해 연구를 진행했고 이 결과가 1848년의 [공산당 선언]이었다. 이 저작은 당시 유행하던 온갖 공상적 사상 조류의 본질을 폭로하고 자본주의 사회를 극복할 진정한 대안으로 과학적 사회주의를 제창했다. 역시 청년이었던 레닌은 1902년 [무엇을 할 것인가?]를 통해 당시 기회주의 조류였던 경제주의와 인민주의를 극복하고 사회주의 혁명을 수행할 수 있는 혁명 정당의 조직 노선을 확립했다. 역시 청년이었던 트로츠키는 1907년 [평가와 전망]을 통해 1905년 러시아 혁명의 경험에 기초하여 연속혁명론을 제창하여 기존의 러시아 혁명노선을 비판하고 제국주의 시대 후진국의 사회주의 혁명 문제를 해명했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혁명적 맑스주의의 고전인 [자본론], [프랑스 혁명 3부작], [제국주의론], [국가와 혁명], [러시아 혁명사], [배반당한 혁명] 등은 모두 중요한 고비 고비에 국제 운동인 혁명적 맑스주의 운동의 올바른 경로와 내용을 수립하기 위한 투쟁의 결과물이었다. 바로 이 때문에 이 저서들은 사회주의 혁명운동의 고전으로 남게 되었다. 이 고전들을 연구하고 현실에 적용하는 방법을 배우면서 우리는 운동의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야 한다.

현재 우리 운동의 주요한 장애물은 경제주의, 개량주의, 노동자주의, 인민전선, 민족주의 이외에 2단계 혁명론과 최대/최소 강령론 등이다. 이 장애물들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가 연구하고 현실에 적용할 혁명적 맑스주의의 이론적 전통이 집약된 저작은 위에서 얘기한 고전들 이외에 트로츠키의 [연속혁명론]/[평가와 전망] 그리고 [이행 강령]이다. 전자는 맑스주의의 핵심인 국제주의를 러시아 혁명 전후의 상황에 비추어 러시아 뿐 아니라 세계적 차원에서 해명한 저작이다. 후자는 노동대중의 절박한 생존권 투쟁에 맑스주의자들이 개입하여 이들이 투쟁 과정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절박하게 심어주는 방법을 담은 저작으로 트로츠키 자신의 표현에 의하면 레닌 사후 혁명운동의 최상의 성과이다.

(4) 혁명 정당 건설의 전제 조건: 선전 활동  

남한의 혁명적 맑스주의 운동을 위한 강령은 현 단계 우리 운동의 조직적 과제를 제기한다. 바로 강령에 입각해 노동계급 내부의 최상의 전위들을 결집할 선전그룹의 수립이다.

“열댓 명”의 지도자들에 대해 위에서 인용한 레닌의 주장은 다름이 아니라 노동운동 내 최상의 분자들을 일단 선전활동을 통해 결집시키고 훈련시켜 혁명 지도부를 수립하자는 것이었다. 레닌은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성공 후 러시아 혁명운동의 초기를 이렇게 회상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문제는 노동계급의 전위를 공산주의 강령으로 획득하는 것이었다. 이런 한에서 선전활동은 가장 중요했다”— 레닌, ["좌파" 공산주의 -- 소아병] (1920년)

우리 운동에는 노동계급 대중을 지도할 혁명 지도부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사회주의 혁명에 헌신할 최상의 분자들을 결집하는 작업이 가장 시급하다. 이것은 레닌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썼을 때 러시아의 상황과 동일하다. 그가 말한 그대로 당은 어느 날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지지 않는다. 혁명 전통에 입각해 가장 기본적 혁명 원칙 즉 강령을 가지고 선전활동을 끈질기게 수행하면서 가장 의식적인 분자들을 발굴, 훈련시키는 과정이 상당히 지속되면서 축적되는 결과물이다. 이것을 “중핵의 본원적 축적”이라고 말하는데 바로 이것이 우리 운동의 당면 임무이다.

경제주의자들의 특징들을 레닌이 위에서 언급했지만 이것들을 하나로 집약하면 무작정 대중투쟁과의 결합이다. 이들은 대단히 지루하고 힘겨운 선전활동 단계 즉 혁명 정당의 기초를 놓는 가장 중요하면서도 가장 힘든 투쟁을 생략한 채 대중의 경제투쟁에 개입만 하면 곧 노동대중을 지도할 수 있다는 자기 기만에 빠져있다.

그리고 이들은 대중 신문이라는 허울을 가지고 대중의 경제투쟁을 옹호하는 경제주의 신문을 발행한다. 이 신문은 노동대중의 부르주아 의식을 진정한 계급의식 즉 혁명 의식으로 바꾸어낼 수 있는 정치적 내용을 전혀 갖추지 못했으나 어쨌든 이름하여 대중 신문이다. 이 허세에 대해 트로츠키는 이렇게 주장했다:

“대중 신문을 발간하는 임무는 선전 조직과 그 중핵의 성장정도에 따라 설정될 수밖에 없다. 충분히 성장하여 중핵의 본원적 축적이 성취되고 확고한 강령적 기반이 수립된 된 후에야 이들이 신문을 매개로 대중을 혁명 사상으로 조직할 수 있다. 단순히 신문을 ‘대중 신문’이라고 이름 붙인다고 대중이 그렇게 받아들일 리는 만무하다.”— 트로츠키, [무엇이 '대중 신문'인가?] (1935년 11월 30일)

트로츠키의 언명을 우리나라의 경제주의자들은 잘 생각해 보아야 한다. 현장을 구해야 한다 또는 보존해야 한다는 말로 노동조합 투쟁에 뛰어드는 조직들이 발행하는 신문들을 보면 온통 노동조합에 대한 내용들로 가득하다. 여기에는 착취의 결과를 가지고 투쟁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착취 체제 자체를 끝장내야 한다는 혁명의식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또는 추상적으로 사회주의를 주장하지만 정작 대중이 이해하고 절박하게 느낄 수 있도록 구체적으로 묘사가 되어 있지 않다. 경제주의자들은 자기기만에서 하루바삐 벗어나 올바른 혁명 강령에 입각하여 조직을 추스르고 지식인 출신이든 노동자 출신이든 전위를 조직하여 이후 노동대중을 혁명 사상으로 무장시키는 임무를 준비해야한다. 이것만이 노동 대중을 진정한 자기해방의 주체로 세울 수 있는 방법이다.

특히 지금 남한은 심각한 경제위기를 겪고 있다. 이 때문에 운동을 좀 한다는 조직 치고 사회주의를 들먹이지 않는 조직은 별로 없다. 실제로 국제혁명운동사를 보면 자본주의 위기 국면에는 개량주의가 대중에게 먹혀들 수가 없다. 그래서 개량주의 조직들도 좌경화하면서 혁명적 대안을 갈구하게 되고 이 상황에서 준비된 선전그룹들이 진정한 대중적 혁명정당을 건설하는 절호의 기회를 갖게 된다.

다시 반복하지만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선전그룹을 통해 노동계급의 전위를 획득한 후에야 진정으로 노동계급은 부르주아 국가에 대항할 수 있는 혁명군대 즉 노동계급의 진정한 혁명정당을 자신의 정치적 무기로 가질 수 있다. 우리는 선전그룹의 단계를 자의적으로 생략할 수 없다. 이렇게 하는 것은 수학의 기초를 모른 채 고등수학을 통달하려는 어리석은 행위와 다를 바 없다.

무작정 대중선동으로 돌입할 경우 조직의 역량은 대부분 경제투쟁에 소진되고 이 조직이 그나마 가지고 있는 이론적 수준은 낮은 수준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이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예를 현장노동자 그룹이 보여주고 있다. 약 10년 전 국제사회주의자 그룹의 개량주의를 인식하고 레닌주의에 의거하여 혁명정당을 건설하겠다던 이 그룹은 현재 대중투쟁과의 결합에 매진하면서 애초의 목표는 까맣게 잊으면서 이론과 정치투쟁에 대한 경멸을 보이고 있다. 다수의 경제주의 조직들이 이룬 것이라고는 우리 운동을 전투적 조합주의와 운동의 초보 상태라는 막다른 골목에 몰아넣은 것뿐이다. 레닌은 이 점과 관련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경제주의자들의 초보적 계급전쟁은 현대적 군대에 농민 대중이 곤봉으로 대항하는 것과 비교되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은 전혀 훈련이 되어 있지 않지만 활력을 가지고 투쟁의 규모를 확대시키고 운동을 성장시키고 승리를 쟁취했다…그러나 진짜 진지한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이 투쟁 조직들의 결함들은 더욱더 뚜렷하게 느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이 시간도 노동대중의 경제투쟁은 나름의 활력을 가지고 진행되고 있고 일부 성과도 없지는 않다. 그리고 이 성과에 고무되어 경제주의자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진정한 사회주의자라고 생각하며 이 투쟁을 확대시키고 발전시키려고 동분서주한다. 그러나 정작 자본주의를 철폐하고 노동자국가를 수립하는 국가권력 장악 투쟁이라는 진짜 전쟁에 돌입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들은 어찌할 바를 모른다. 그리고 국가권력 장악 투쟁의 무기인 혁명정당이 준비되지 않았다는 처절한 자괴감에 젖어든다. 위에서 얘기한 경제투쟁의 활력은 무한정 지속될 수가 없다. 지금 대중운동이 직면한 위기는 위에서 레닌이 말한 그대로 혁명운동 위기의 반영이다.

노동조합이든 민주노동당이든 대학교이든 사회주의 혁명가를 자처하는 투사들이 활동하는 장은 중요하지 않다. 진짜 중요한 것은 이 투쟁의 장에서 혁명 강령으로 사회주의 혁명을 수행할 전위를 발굴, 양성, 훈련시켜 이들을 혁명 지도자로 상승시키는 것이다.

경제주의자들이 숭배하는 노동조합 활동이 올바른 혁명활동이 되려면 혁명 강령을 가진 선전 그룹을 통해 전위를 결집한 후 노동조합에 혁명 분파를 건설해야 한다. 이 혁명 분파는 혁명 강령으로 노동조합 대중을 조직하고 이 조직력으로 자본가의 하수인 집단인 노동조합 관료들을 노동조합에서 몰아내야 한다. 이를 통해서만 노동조합은 혁명의 정치부대가 될 수 있다:

“우리 시대 즉 제국주의 시대에 노동조합은 노동자들을 제국주의 자본의 하수인으로 만드는 부차적인 기관이 되던가 아니면 노동계급 혁명운동의 기관이 되던가 둘 중의 하나이다.”— 트로츠키, [제국주의 시대의 노동조합], (1940년), (국역: [트로츠키의 노동조합투쟁론], 풀무질 출판사)

그리고 노동조합 대중을 혁명군대로 조직하기 위한 강령이 바로 [이행 강령]이다. 1938년 제 4 인터내셔널 창립 강령인 이 역사적 문서는 노동 대중이 일상적으로 느끼는 절박한 요구들을 받아 안으면서 이것들을 자본주의를 철폐하고 노동자국가를 건설하는 혁명의식으로 발전시키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는 경제주의적 요구와 혁명적 요구의 양극단에 다리를 놓아야 한다. 일부 요구들이 노동자들의 현재 정서에 맞춰져 있어 기회주의적으로 보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일부 요구들이 노동자들의 실제 정서보다 객관적 현실을 좀더 많이 반영해 너무 혁명적으로 비춰지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객관적 요인들과 주관적 요인들의 간극을 될 수 있는 대로 줄이는 것이 우리의 임무이다. 이행 강령의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트로츠키, [이행 강령 토론], (1938년)

실제로 [이행 강령]에 나와 있는 내용은 1938년 당시의 국제 강령이다. 물론 개량주의자들의 최소/최대 강령의 이분법적 구분을 극복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지만 국제조직인 제 4 인터내셔널의 성격상 이 강령의 내용은 일반적으로 전 세계 혁명 운동에 적용될 수 있는 내용이었다. 이것을 우리 운동의 현실에 창조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우리의 과제이다.

그러나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임무는 혁명 강령에 입각한 선전 그룹의 활동이 성과를 누려 실제로 이것을 가지고 노동조합 투쟁을 지도할 수 있는 역량이 확보된 이후에나 가능하다. 물론 전위들이 이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결집되는 시기는 빠를 수도 있고 늦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일단 전위를 조직하기 위한 혁명 강령에 입각한 선전 활동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를 마지막으로 인용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겠다:

“학생그룹으로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안정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결론은 자명하다: 직업혁명가의 그룹이 있어야한다. 직업혁명가가 학생이든 노동자이든 이것은 중요하지 않다.”

<보론> 혁명 강령의 수립을 위하여

*** 이 글은 우리 운동의 혁명 강령 수립에 기여하려는 목적으로 작성되었다.

1.국가와 혁명

국가의 성격에 관한 이론은 혁명 이론의 가장 핵심 부분이다. 자본주의 국가는 부르주아 소유체제를 방어하는 “특별 무장기구들의 집합체”이다. 따라서 이것은 노동 대중의 이해에 복무하도록 접수되거나 창조될 수 없다. 이것을 파괴하고 이에 대신하여 노동계급의 소유체제 즉 집단적 소유를 옹호하는 국가 기구를 수립해야 노동계급은 진정한 사회의 주인이 될 수 있다.

현재 남한의 국가기구는 남한의 대자본가와 제국주의 거대자본 특히 미국과 일본 자본의 이해에 봉사하는 집행위원회이다. 그리고 남한을 비롯한 제 3 세계 신식민지 나라들이 제국주의 자본의 이윤 사냥터가 되고 있는 현실이 사회주의 혁명으로 바뀌지 않는 이상 남한 부르주아 국가의 제국주의 하수인 역할은 갈수록 증대될 것이다.

1997년 “환란” 이후 제국주의 자본은 남한에서 월등한 지위를 누리고 있다. 증권시장은 이미 외국자본의 장기 단기 이윤 사냥터로 전락했고 국민은행을 비롯한 금융산업에서는 외국자본의 점유율이 70%에 이르렀다. 또한 초우량 기업이라는 삼성전자 등의 경우 외국 자본의 점유율은 이미 50%를 상회하고 있다.

따라서 혁명운동은 남한 및 외국 자본의 공세에 저항하여 대중의 생존권 투쟁을 엄호해야 한다. 동시에 노동조합 내부에 혁명분파를 수립하고 이행 요구들을 창조적으로 적용하여 자본과 정권의 하수인인 관료집단을 몰아내어 노동조합을 혁명의 진지로 변모시켜야 한다. 이 과정에서 제국주의의 경제적 군사적 정치적 지배에 대한 투쟁은 핵심적으로 중요하다.

 부르주아 국가기구의 일부인 법원과 경찰의 노동운동에 대한 개입을 우리는 배격한다. 또한 자본주의 법정을 통해 관료적 부패를 시정하려는 노동조합 내부의 모든 “개혁” 세력에 반대한다. 노동자들은 집안 일은 자기가 알아서 처리해야 한다. 또한 자본주의 억압기구의 일부인 경찰관과 간수들을 노동조합 운동에서 추방해야한다.

부르주아 국가는 사회 세력들 간의 이해 다툼을 초당파적으로 조정하는 중재자가 아니라 자본가들이 이들 세력에 대항해서 권력을 휘두르는 무기일 뿐이다. 따라서 부르주아 국가가 극우 파시스트들을 “불법화”해야 한다는 개량주의 입장을 배격한다. 부르주아 법은 자본주의 반동의 돌격대인 파시스트 깡패들보다 노동자 운동과 좌익운동 전체에 언제나 훨씬 가혹하다. 극우 세력이나 파시즘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부르주아 국가에 호소할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과 피억압 계층을 동원하여 이들의 싹부터 제거해야 한다. 트로츠키는 [이행 강령]에서 이렇게 말했다: “파시즘에 대한 투쟁은 자유주의 신문의 편집실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공장에서 시작하여 거리에서 끝난다.”

제국주의 군대는 제국주의 자본의 이윤을 위해 세계 곳곳에서 노동자와 인민을 억압하고 학살한다. 우리는 이 사실을 언제나 폭로해야한다. 미 제국주의 군대가 미국 남부에서 흑인 소년학생들을 “보호하거나” 영 제국주의 군대가 북아일랜드에서 구교도들을 “보호하거나” 중동에서 평화를 “유지한다”는 등의 말은 거짓말일 뿐이다. 제국주의 군대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노동자 국제연대를 통해 제국주의 군대의 패배를 주창하고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과 군사적 동맹을 맺어야 한다.

한국과 일본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은 동북아에서 미 제국주의의 이해를 방어하고 노동자 인민을 억압하기 위해 주둔한 제국주의 군대이다. 따라서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이들을 쫓아내야 한다. 이것만이 동북아의 군사적 긴장과 전쟁 가능성을 감소시킬 수 있다.

2.당과 강령

노동계급은 국제 자본주의 질서의 광기를 끝장낼 수 있는 유일한 계급이다. 노동계급 특히 공업노동자들은 자신의 역사적 역할을 인식하여 계급의식으로 각성해야한다. 공산주의자의 기본 임무는 노동계급을 계급의식으로 무장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노동계급 이외의 계급 계층으로부터 사회 진보의 동력을 찾는 중도주의자, 개량주의자, 문화주의자, 부문주의자 등의 정치를 명백히 거부해야한다.

노동계급 해방을 완수하고 동시에 모든 형태의 사회적 억압의 물질적 기반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 혁명 지도부를 수립해야한다. 개량주의는 자본주의의 토대를 인정하고 이 토대의 개선을 주창한다. 이 때문에 노동운동 내부에서 계급협조주의를 주창하여 지배 이데올로기를 유포하는 것이 이 경향의 핵심 역할이다. 이와 반대로 혁명적 맑스주의는 자본가 계급과 노동계급 사이의 화해할 수 없는 적대관계를 인정하고 의미 있는 사회 진보의 전제조건으로 노동계급에 의한 사회적 생산수단의 장악을 주창한다.

다양한 형태의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통해 자본주의는 노동계급을 지배한다. 미국 트로츠키주의 운동의 대표적 지도자였던 제임스 캐넌은 [미국 공산주의 운동의 첫 10년]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본주의의 위력은 그 자체 또는 제도에 있지 않다. 노동계급 조직 내부의 지지기반을 통해서만 자본주의는 생존할 수 있다. 사회주의 혁명투쟁의 90%는 노동자 정당 등 노동자 조직 내부에서 부르주아 계급의 영향력에 대항하는 일에 할애되고 있다. 이것이 10월 러시아 혁명과 이후의 사건들이 우리에게 입증한 바이다.”

중도주의/개량주의 조직과 혁명 조직 사이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정치적 최종목표에 대한 추상적인 언사가 아니라 계급투쟁의 구체적 상황에서 제시되는 입장의 차이에 있다. 개량주의자들과 중도주의자들은 대중의 부르주아적 환상과 고정관념에 영합하여 정책을 수립한다. 반면 사회주의 혁명가의 역할은 대중에게 이들이 모르는 부르주아 계급 지배의 진실을 말해주고 이를 통해 이들을 혁명의식으로 각성시키는 것이다.

“강령은 노동자의 후진성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객관적 임무를 표현해야 한다. 강령은 후진성을 극복하고 정복하는 도구이다….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객관적 상황은 연기시키거나 수정할 수 없다. 대중이 위기를 해결할 것이라고 보장할 수는 없다. 다만 현실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강령의 임무이다.”— 트로츠키, [미국 노동자들의 정치적 후진성] (1938년)

혁명 강령에 기초한 분파를 노동조합 내부에 수립하여 노동계급 대중 속에 공산주의 강령을 뿌리내려야 한다. 공산주의 분파는 노동자의 부분적 개량적 투쟁에 적극 참여해야한다. 또한 “파업 방위선은 무조건 사수한다!” 등의 전투적 전통들을 가장 강인하게 옹호해야 한다. 동시에 협소한 현장의 전투성을 극복하고 초미의 관심을 끄는 정치적 문제들을 다루는 세계관을 가지고 가장 의식이 높은 노동자들을 조직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자본가의 이윤을 위한 생산의 무정부성을 철폐하고 인간의 필요에 부응하는 합리적이며 계획된 생산체제를 수립할 필요성을 노동자들에게 각인시켜야 한다.

1938년 제4 인터내셔널 창립대회에서 채택된 [이행 강령]에 기초하여 노동조합에서 활동해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 “완성된 강령”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난 역사를 분석하고 1938년 [이행 강령]에서 다루지 않고 있지만 노동계급 및 피억압 인민들의 구체적 투쟁들이 제기하는 문제들을 해결해야 한다. 그러나 [이행 강령]의 핵심 내용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노동계급이 정치권력을 장악해야할 필요성을 통해 노동계급이 당면하고 있는 객관적인 문제들을 사회주의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3. 연속혁명론

지난 500년 간 자본주의는 국제분업에 기초하여 단일한 세계경제 질서를 구축해왔다. 지금은 자본주의가 반동적으로 쇠퇴해 가고 있는 제국주의 시대이다. 20세기의 경험은 신식민지 국가의 민족자본가 계급이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역사적 과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음을 입증했다.

이런 국가에서 고전적인 부르주아 혁명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소유관계를 철폐하고 제국주의를 몰아내어 노동계급에게 고유한 집단적 소유체제를 확립해야 한다. 민족자본가 계급과 대지주를 정치적으로 제거하는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서만 생산력을 질적으로 높일 수 있다.

부르주아 계급의 “진보” 분파에 노동계급을 종속시키는 스탈린주의/멘셰비키 식의 “2단계” 전략을 거부해야 한다. 모든 나라에서 노동계급은 완전하고도 무조건적인 정치적 독립성을 확보해야 한다. “제3 세계” 민족 자본가계급은 예외 없이 제국주의 지배의 하수인이다.

민족의 주권을 지키기 위해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소부르주아 민족주의 운동이나 부르주아 정권에 대해 정치적 지지가 아니라 군사적 지지를 보내야한다. 예를 들어 1935년 맑스주의자들은 제국주의 이탈리아 군대의 침략에 저항한 이디오피아의 반동 군대에게 군사적 지지를 보냈다. 지금 이라크에서 미국 영국 제국주의에 맞서고 있는 반동적 회교 근본주의자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레닌주의자는 두 부르주아 국가들이 서로 싸우고 있을 때 이 국가들의 발전 수준에 의거하여 자동적으로 입장을 정하지는 않는다. 1982년 포클런드(Faukland) 전쟁에서 아르헨티나의 주권은 결코 위협에 처해 있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맑스주의자들은 영국과 아르헨티나 노동자들이 “총부리를 돌려” 자국 지배계급을 혁명적으로 패배시킬 것을 촉구했다.

어느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하여도 이 혁명이 국제적으로 확산되어 제국주의 세계체제를 대체하지 않을 경우 이 혁명은 패배할 수밖에 없다. 구 소련과 동구권의 자본주의 복귀는 이 점을 증명하고 있다. 맑스주의자는 국제적 차원의 혁명 지도부를 수립하여 국제혁명의 완수에 복무해야한다.

4. 게릴라 노선

사회주의 혁명은 노동계급 대중의 봉기를 통해서만 성공할 수 있다. 게릴라 노선은 때때로 보완적 전술일 수는 있어도 결코 혁명전략이 될 수는 없다. 게릴라 노선이 전략으로 자리잡을 경우 혁명적 계급의식을 보유한 조직노동자들은 방관자가 될 수밖에 없다. 급진 소부르주아 지식인들이 주도하는 농민 게릴라 운동은 운동 지도부의 주관적인 의도와는 달리 노동자권력을 결코 수립할 수 없다.

유리한 객관적 상황이 주어질 경우 게릴라 운동이 자본주의 소유체제를 뿌리뽑을 수 있다는 사실이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여러 번 입증되었다. 그러나 이 운동은 조직된 노동자계급에 기반하지 않기 때문에 기껏해야 러시아 혁명의 스탈린주의적 퇴보와 질적으로 유사한 민족주의적 관료주의 정권 (유고슬라비아, 알바니아, 중국 , 월남, 쿠바, 북한)을 수립할 수 있을 뿐이다. 이 “기형적 노동자국가”는 노동계급의 정치혁명으로 보완되어야 사회주의로 발전할 수 있다.

5. 특별한 형태의 억압: 인종주의와 여성 억압

현재 노동계급은 인종, 성, 민족 등으로 깊이 분열되어 있다. 그러나 인종주의, 국수주의, 성차별 등은 자본가 지배계급에 의해 사회적으로 길들여진 행동 양식일 뿐이다. 전 세계 노동자들은 현재 자신들의 의식수준과는 무관하게 핵심적인 공통점을 하나 가지고 있다. 즉 모든 형태의 억압과 착취의 사회적 기반을 일소하지 않고서는 근본적으로 자신의 상황을 개선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노동계급은 계급사회를 철폐하고 이를 통해 모든 형태의 “특별한” 억압을 일소하는 역사적 임무를 가지고 있다.

미국의 경우 노동자 권력 투쟁은 흑인해방 투쟁과 분리할 수 없이 결합되어 있다. 흑인 노동자와 백인 노동자 사이의 인종적 분리는 노동자 계급의식의 발전에 가장 주요한 장애물이 되어왔다. 미국 흑인은 민족이 아니라 피부색에 의해 구분되어 차별 당하고 있는 사회집단에 불과하다. 이들은 사회 밑바닥 생활을 강요당하고 있으며 절대 다수가 노동계급에 속한다. 특히 전략산업 노동자들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자유인의 나라(the land of the free)”라는 미국에서 이들은 폭력과 학대에 시달리고 있으며 체계적으로 차별 당하고 있다. 다수의 백인 노동자에게 침투하여 악영향을 미치고 있는 인종주의에 이들은 비교적 덜 감염되어 있다. 흑인 노동자들은 역사적으로 미국 노동계급의 가장 전투적인 부위가 되어왔다. 자본주의 미국에서 매일 발생하는 인종주의 폭력에 대항해서 흑인을 해방시키는 투쟁은 북미 대륙의 혁명적 전위당 건설 투쟁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수가 점점 증대하고 있는 중남미계 인종을 비롯해 소수인종에게 가해지고 있는 특별한 억압에 대항하는 투쟁도 미국 사회주의 혁명에서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

여성은 부르주아 사회질서의 기본 단위인 핵가족 제도에 의해 억압당하고 있다. 여성의 완전한 사회 평등을 향한 투쟁은 혁명운동의 핵심 전략이다. 이와 밀접하게 연관된 특별한 억압이 동성연애자들에게도 가해지고 있다. 이들은 부르주아 계급이 핵가족이라는 “사회규범”으로 강요하는 성 역할에 순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탄압을 받고 있다. 다만 동성연애자 운동은 여성해방 운동처럼 혁명운동의 핵심 전략은 아니다. 맑스주의자들은 동성연애자들의 민주적 권리를 옹호해야 하며 이들에게 가해지는 모든 차별조치들에 반대해야 한다.

노동조합의 공산주의자들은 모든 직종에 누구나 동등하게 참여할 기회, “남성 독점”분야에서 여성과 소수인종들을 채용하고 훈련시키는 프로그램, 동일노동 동일임금 등을 주창한다. 동시에 노동조합운동이 역사적으로 획득한 연공서열 체계를 옹호한다. 그리고 선택적 해고와 같이 노동자를 분열시키며 노동조합을 파괴하는 조치들에 저항한다. 자본주의 사회가 인위적으로 조장하는 노동자 분열장치에 맞서 계급의 공동 이해를 도모하여 노동계급을 단결시키는 것이 맑스주의자의 임무이다. 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모든 인민에 대한 차별과 불공평에 대항하여 가차없이 투쟁하고 가장 억압받고 착취 받는 자들의 이익을 옹호해야 한다.

피억압 계층들은 노동계급의 사회주의 혁명이 없이는 자신들을 해방시킬 수 없다. 레닌은 [국가와 혁명]에서 이렇게 말했다:

“대규모 생산과정에서 수행하는 경제적 역할 때문에 노동계급만이 모든 근로인민과 피착취 대중의 선두에 서서 투쟁할 수 있다. 부르주아 계급은 이들을 노동계급보다 더 착취하고 더 억압하지만 이들은 자신의 해방을 위해 독자적으로 투쟁할 능력이 없다.”

계급사회에서 모든 사회운동의 강령은 사회 통치 능력을 갖춘 양대 계급인 자본가 계급이나 노동계급 가운데 하나를 대변한다. 노동조합에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협소한 경제주의로 나타나며 피억압 계층의 운동에서는 부문주의로 나타난다. 흑인 민족주의, 페미니즘, 기타 다른 형태의 부문주의 이데올로기가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전제는 억압의 근원이 자본주의 소유체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양한 계급들이 참여하는 부문운동 내부의 계급분화를 촉진하는 것이 맑스주의자의 임무이다. 이 결과 가능한 한 다수의 분자들이 노동계급 사회주의 혁명의 전망을 획득하도록 노력해야한다. 동시에 다양한 부문의 분자들이 결합하는 전위당 건설의 필요성을 인식시켜야 한다.

6.민족과 “혼합민족”

“맑스주의는 민족주의와 화해할 수 없다. 이것은 ‘가장 정당하고’ ‘가장 순수하고’ 가장 세련되고 품위 있는 민족주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형태의 민족주의에 대항하여 맑스주의는 노동자 국제주의를 주창한다.”— 레닌, [민족문제에 대한 비판적 언급]

맑스주의와 민족주의는 근본적으로 반대되는 세계관이다. 우리는 모든 나라 사이의 평등한 지위를 옹호해야 하며 어떤 나라의 특권적 지위에 대해 반대한다. 동시에 맑스주의는 모든 형태의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거부한다.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 “강제와 특권에 기초하지 않은 민족 간의 모든 교류와 동화를 환영한다.” 민족문제에 대한 레닌주의자의 강령은 방어적 성격을 띤다. 즉 계급 문제를 명확히 부각시키기 위해 민족문제를 쟁점에서 제외시키려고 노력한다. 특히 소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의 호소력을 무력화시키는 데에 중심이 맞추어져 있다.

캐나다의 퀘벡주와 같이 프랑스어 민족이 억압당하는 “고전적” 민족억압의 경우에는 민족자결권을 옹호한다. 그렇다고 이 자결권이 반드시 행사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분리독립은 노동자를 나라 별로 분열시키는 부작용이 있기 때문이다. 키프로스, 북아일랜드,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등처럼 같은 지역에서 두 민족이 뒤섞여 사는 좀더 복잡한 경우가 있다. 이 때에 각 민족의 자결권이 동등하게 행사될 수 있는 길은 자본주의에서는 불가능하다.

아일랜드의 개신교도들과 이스라엘의 히브리어 사용 인구들은 모두 부르주아 계급 , 소부르주아 계급, 노동계급 등으로 분화되어 있다. 죄책감에 사로잡힌 중간계급의 도덕주의자들과는 달리 레닌주의자는 억압받는 민족의 민족주의를 단순히 지지하거나 민족주의를 옹호하는 소부르주아 정치집단들을 지지하지 않는다. 이렇게 할 경우 억압받는 민족 내부의 계급모순을 활용할 가능성이 스스로 봉쇄되고 억압받는 민족에 대한 민족주의자들의 헤게모니가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억압하는 민족의 노동계급은 억압받는 민족의 민족주의를 결코 인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들이 계급투쟁의 전망을 가지고 자신들의 객관적 이해를 위해 투쟁하도록 공산주의자는 도와주어야 한다.

전 세계 좌익의 대부분은 소부르주아 민족주의에 투항하여 1948년, 1967년, 1973년의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에 대항하여 아랍 통치자들을 지지했다. 이들에 의하면 아랍 국가들의 지배계급은 “아랍혁명”을 실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중동전쟁은 자본주의 지배계급들 사이의 전쟁으로 이 지역의 노동계급과 피억압 근로인민은 누가 승리하더라도 얻을 것이 없었다. 따라서 레닌주의자는 양국 모두의 패배를 주창해야했다. 왜냐하면 아랍 노동계급과 히브리 노동계급에게 진짜 적은 자국 자본가 계급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956년 중동전쟁은 상황이 달랐다. 이스라엘의 도움으로 프랑스와 영국 제국주의자들은 당시 이집트에 의해 국유화되었던 수에즈 운하를 다시 점령하려 하였다. 이에 이집트의 통치자 나쎄르가 무력으로 저항했는데 이 경우 제국주의에 대항한 이 아랍 민족주의자에게 군사적 지지를 보내는 것이 레닌주의자의 올바른 노선이었다.

민족주의를 반대하는 것은 하나의 원칙이다. 그러나 억압받는 민족과 억압하는 민족 사이에 싸움이 일어났을 때 레닌주의자는 결코 중립을 지킬 수 없다. 맑스주의자는 북아일랜드에서 영국군의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인 철수를 요구한다. 그리고 아일랜드공화군(Irish Republican Army)이 영국의 경찰, 군대, 영국 보수당 내각이 회의를 하기 위해 모인 브라이튼의 호텔 등을 공격하는 것을 군사적으로 지지한다. 이스라엘 군대에 대항하는 팔레스타인 민족해방기구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도 민간인에 대한 테러행위는 옹호할 수 없다. 물론 팔레스타인 인민에 대한 이스라엘 국가의 범죄적 테러행위, 북아일랜드 구교도에 대한 영국 군대와 그 신교도 동맹자들의 테러행위 등은 영국 민간인에 대한 이들의 테러행위보다 훨씬 극악한 것으로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영국 민간인은 국가기구에 의해 억압받고 있으며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 피해자이므로 이들에 대한 테러행위는 정당화될 수 없다.

남한 노동운동 내에서 부르주아 민족통일을 최대의 선으로 추구하는 민족주의자들을 몰아내야 한다. 이들의 소부르주아 민족주의에 대항하여 남한 노동계급의 사회주의 혁명 그리고 북한 노동계급의 정치혁명을 주창해야한다. 이를 통해서만 진정한 민족통일과 동북아 사회주의 혁명이 완수될 수 있다.

7.이민정책

누구든지 자신이 원하는 나라로 이주할 수 있는 민주적 기본권을 레닌주의자는 옹호한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민주적 권리들과는 달리 언제나 옹호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퇴보한 또는 기형적 노동자국가의 군사 안보에 위협을 초래할 개인들의 이민은 지지될 수 없다. 또한 개인의 이민권이 대규모로 행사될 경우 작은 나라의 자결권을 침해할 수도 있다. 따라서 맑스주의자들은 “국경 철폐” 주장을 일반적 강령으로 채택할 수 없다. 예를 들어 1930년대와 1940년대에 시온주의 유태인들의 대대적인 유입으로 팔레스타인 인민은 살던 땅에서 강제적으로 추방당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티베트에 한족이, 뉴칼레도니아에 프랑스인들이 무제한적으로 이주하여 원주민의 민족 자결을 말살하는 것을 지지할 수 없다.

“국경 철폐” 요구는 의도는 좋을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을 혼동하는 자유주의자/급진주의자들이 제기하는 요구에 불과하다. 이들은 제국주의 세계질서가 초래하는 끔찍한 불평등을 개선하자는 공상적 사고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대대적인 이주가 아니라 세계 사회주의혁명만이 자본주의의 온갖 고통과 빈곤으로부터 대다수 인류를 해방시킬 수 있다.

우리는 남한 경찰에 의해 체포된 동남아 및 조선족 노동자들의 석방을 요구한다. 또한 모든 이주 할당제(immigration quota)를 반대하며 이민 노동자에 대한 체포와 강제추방에 저항한다. 노동조합은 모든 이민 노동자들의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인 시민권 부여를 요구하며 이의 실현을 위해 투쟁해야 한다.

8. 민주집중제

혁명조직은 반드시 엄격한 중앙집중적 조직을 유지해야한다. 따라서 다수파 지도부는 하위 기구와 조직원들을 지도하고 이들의 공개활동을 통제할 완전한 권한을 갖는다. 대신 조직원들은 조직 내부에서 분파활동의 민주적 권리를 전면적으로 인정받는다. 분파활동은 조직 내부의 정치투쟁을 통해 지도부의 노선 수정 또는 퇴진을 실현하는 권리이다. 조직 내부의 민주주의는 단순한 장식물이거나 조직원들의 스트레스 해소용 장치가 아니라 혁명 조직이 복잡한 계급투쟁의 현실을 완전히 이해하고 필요한 행동을 취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또한 분파활동의 자유는 혁명 중핵을 양성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다. 조직 내부의 수정주의나 계급 배신행위에 대해 투쟁할 권리는 분파 결성으로 나타난다. 분파 결성의 민주적 권리는 혁명조직의 정치적 퇴보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안전장치”이다.

조직 내부의 중요한 정치적 차이를 얼버무리고 분파의 구분을 얼버무리려는 시도는 혁명조직을 약화시키고 혼란에 빠뜨릴 뿐이다. 정치적 차이를 명확히 하기보다 편의에 입각하여 이것을 얼버무리려는 외교술, 조직 내부에 존재하는 입장들의 최저 공통점으로 정치적 이견을 해소하려는 시도, 강령의 불명확성 등은 계급투쟁의 첫 시련이 닥치면 조직을 산산조각 내어버린다. 따라서 원칙에 입각하여 토론을 통해 강령을 합의하고 정치적 명확성을 위해 투쟁하는 것이 혁명조직의 필수 요건이다. 견해 차이의 표현이 공식적 비공식적으로 금지된 혁명조직은 경직되어 활력을 상실한 후 관료주의적 종파 즉 컬트 조직으로 전락한다. 또한 살아있는 노동운동으로부터 유리되어 조직의 임무 수행에 필요한 중핵의 재생산 능력을 상실한다.

특히 우리 운동에 만연한 인맥과 개인적 정실에 따른 조직 구성은 혁명 강령의 수립과 혁명 의식 획득에 장애를 초래하는 것으로 혁명 정당 건설을 위해 하루바삐 청산되어야 한다. 혁명 원칙에 입각한 공식적 조직 운영만이 운동의 사조직화를 막고 혁명 운동의 발전을 촉진한다는 점을 남한의 사회주의 혁명가들은 명심해야한다.

9. 인민전선

“지금 혁명운동에 장애가 되는 문제들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이 바로 인민전선이다. 중도주의 좌파는 이 문제를 전술이나 심지어 기술적 책략의 문제로 제기하면서 인민전선의 그늘 속에서 자기 물건을 팔아먹으려 한다. 그러나 인민전선은 이 시대 노동계급 혁명전략의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또한 인민전선은 볼셰비키주의와 멘세비키주의의 차이점을 가장 잘 가려낼 수 있는 시금석이다.”— 트로츠키, [맑스주의통일노동자당과 인민전선] (1936년)

정권 장악을 위해 노동자조직과 부르주아 대표자들 간에 강령에 입각한 연합을 체결하는 것이 인민전선이다. 이것은 계급 배신 정책이다. 이로 인해 1925-27년의 중국혁명, 1936-39년의 스페인 혁명, 1965년의 인도네시아 혁명, 1973년의 칠레 혁명 등이 공산주의 노동자들에 대한 살육으로 끝났다. 혁명가들은 인민전선에 참여하는 노동계급 정치 세력을 결코 지지할 수 없다. “비판적으로” 인민전선에 참여하는 세력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브라질 노동자당의 룰라는 지난 번 대통령 선거에서 부르주아 정당의 대표를 부통령으로 선택했다. 이것은 브라질 노동계급에 대한 배신으로 결코 지지될 수 없다.

남한에서 민주노동당의 개량주의 지도부는 걸핏하면 부르주아 정치 세력의 개혁적 분파와 연대를 할 수 있다고 공언한다. 부르주아 정치권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동원되는 이 술수 역시 인민전선의 일종으로 비난받아 마땅하다.

선거시기에 민주노동당과 같은 개량주의 노동자정당을 비판적으로 지지하고 이 정당에 표를 던지는 것은 이 정당의 내부 모순을 활용하기 위함이다. 즉 민주노동당의 정치적 토대는 당원의 50%를 넘는 노동자들 그리고 피억압 인민이다. 그러나 개량주의 지도부의 정치는 부르주아 체제를 인정하고 이 체제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민주노동당이 부르주아 또는 소부르주아 정치세력들과 정책연합이나 선거연합을 체결할 경우 이 모순은 연합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효과적으로 억압 내지 은폐된다. 계급협조주의 연합인 인민전선을 대표하여 후보로 나서는 민주노동당의 후보들은 사실상 부르주아 정치세력들의 하수인으로 선거에 나서는 것이나 다름없다. 따라서 이 경우 민주노동당에 대한 비판적 지지 전술은 철회되어야 한다. 따라서 사회주의 혁명가들은 개량주의 노동자 정당이 계급협조주의 연합인 인민전선을 파기할 경우에만 비판적으로 지지하겠다고 선언해야 한다.

10. 공동전선과 “전략적 공동전선”

대중운동 내에 공동으로 행동해야 할 긴급한 사안이 존재할 때 혁명조직이 개량주의/중도주의 조직과 공동투쟁을 제의하는 것을 공동전선이라고 한다. 이 공동투쟁을 통해 비(非)혁명조직들의 노동자들은 자기 지도부의 정치노선에 의문을 제기하고 결국 혁명 정치를 수용할 기회를 갖게 된다. 특정 사안에 대해 일시적으로 합의하거나 노동계급의 이익을 위해 특정 행동이 필요하다고 인정될 때 혁명조직은 소부르주아 또는 부르주아 정치세력과 공동전선을 체결할 수 있다. 예를 들어 1917년 8월 코르닐로프가 반동 쿠데타를 시작했을 때 볼셰비키당은 케렌스키 부르주아 정부와 공동전선을 체결하여 이 쿠데타를 분쇄하였다. 대중에게 필요한 요구를 달성하기 위해서 뿐 아니라 실제 행동을 통해 혁명 강령의 우수성을 입증시켜 혁명조직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확대하기 위해 구사하는 유용한 전술이 바로 공동전선이다.

중도주의/개량주의 세력과 혁명조직의 지속적인 연합 즉 “전략적 공동전선”을 배격해야한다. 맑스주의자는 전반적인 정치적 전망을 공유하는 선전적 입장이나 선언문을 수정주의자들과 함께 발표하지 않는다. 이러한 행위는 우선 정직하지 못하다. 혁명조직과 개량주의 조직의 정치적 차이를 감추고 혁명조직을 청산하는 배신행위이기 때문이다. “전략적 공동전선”은 자신의 미미한 영향력에 절망하여 더 광범위한 연합이나 최저 공동 강령 속으로 자신을 해소하여 더 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기회주의자들의 단골 책략이기도 하다. [중도주의와 제4 인터내셔널]에서 트로츠키는 혁명조직이 “원칙의 순수성, 입장의 명확성, 정치 노선의 일관성, 조직적 완벽성” 등을 보유함으로써 중도주의 조직과 구별된다고 했다. 혁명조직의 바로 이러한 특성을 파괴하기 위한 책략이 전략적 공동전선이다.

11. 노동자 민주주의

혁명적 사회주의자는 노동자 대중에게 오직 진실만을 말해야 한다. 따라서 좌익의 다양한 경향들과 공개적으로 정치투쟁을 수행함으로써만 정치적 역량을 강화할 수 있다. 그러나 개량주의 조직과 중도주의 조직들은 그렇지 못하다. 스탈린주의자들, 사회민주주의자들, 노동조합 관료들 그리고 기타 노동계급을 오도하는 자들은 모두 혁명적 비판을 두려워한다. 이들은 혁명조직에게 폭력을 가하고 이 조직을 공개토론장에서 배제함으로써 정치 토론과 논쟁을 무산시키려고 한다.

우리는 좌익운동권과 노동운동권 내에서 폭력을 휘두르거나 다른 조직을 공개 토론에서 배제시키는 행위 등을 반대한다. 반면 이 비민주적 행위에 대한 자기방어의 권리를 옹호한다. 또한 “부드러운” 폭력인 비방에 반대한다. 비방은 물리적인 폭력을 준비하거나 이와 함께 사용된다. 노동자 운동 내에서 자행되고 있는 비방과 폭력은 혁명적 맑스주의 운동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이것들은 노동계급 해방의 전제 조건인 혁명의식의 발전을 의도적으로 가로막기 때문이다.

12. 구 소련, 북한, 중국, 쿠바, 월남

구 소련의 퇴보한 노동자국가와 구 동구권, 월남, 중국, 북한, 쿠바 등 기형적 노동자국가는 경제적 토대는 노동계급에게 고유한 집단적 소유체제이되 정치는 노동자 인민과 무관한 관료집단에 의해 전횡되어온 모순적 체제이다. 우리는 사회주의적 요소를 가진 경제적 토대를 제국주의의 와해 공세와 내부 반혁명 세력의 책동에 대항하여 무조건 방어해야한다. 그리고 노동계급의 정치혁명을 통해 반(反)노동자적이고 배신적인 관료집단을 타도하여 이 체제의 사회주의적 발전을 촉진해야한다.

1920년대 “일국 사회주의 이론”을 들고나오며 득세한 스탈린 파벌의 승리는 이로부터 10년 후 레닌이 건설한 볼세비키당의 중핵들을 전멸시키는 것으로 그 절정에 이르렀다. 세계혁명의 전망을 포기하고 오직 소련의 안위만을 주창하면서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은 소련 체제의 방어와 세계혁명의 전망을 모두 결정적으로 훼손하였다. 이들을 타도하는 노동계급의 정치혁명은 곧 집단적 소유체제의 방어를 의미한다.

제 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소련군의 지원을 받아 토지개혁과 집단적 소유를 확립한 북한 정권은 집단적 소유체제의 장점을 발휘하여 한국전쟁의 폐허를 딛고 1970년대 초반까지 꾸준히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그러나 이후 관료적 명령경제의 폐해, 서방의 경제봉쇄, 과도한 군비지출, 자연재해 등으로 인해 지금 북한은 경제 붕괴의 직전에 있다. 레닌주의자는 북한에 대한 미 제국주의의 군사적 압박과 국내외 자본에 의한 자본주의 복귀 공작을 모두 반대한다. 남한 노동계급의 사회주의 혁명, 북한 노동계급의 정치혁명만이 노동계급에 의한 남북 통일을 성취하여 동북아 사회주의 혁명을 전진시킬 수 있다.

13. 제 4 인터내셔널의 재건을 위하여

“트로츠키주의는 새로운 운동이나 이론이 아니라 러시아 혁명 시기와 코민테른 초기에 주창되고 실천된 진정한 맑스주의의 회복이요 부활일 뿐이다.” — 제임스 캐넌, [미국 트로츠키주의의 역사]

트로츠키주의는 우리 시대의 혁명적 맑스주의이다. 그리고 노동계급의 공산주의운동이 150년 이상 축적한 투쟁 경험에서 우러나온 정치이론이다. 이 이론은 현대 역사의 가장 커다란 사건인 1917년 러시아 혁명 그리고 러시아 혁명 이후의 역사를 통해 그 올바름이 입증되었다. 볼셰비키당과 코민테른이 관료적으로 질식된 후 러시아 혁명의 실천과 강령인 레닌주의 전통은 트로츠키가 주도한 좌익반대파에 의해서만 계승되었다.

트로츠키주의 운동은 반동적이며 공상적인 “일국 사회주의” 이론에 대항하여 혁명적 국제주의를 옹호하는 투쟁을 통해 탄생되었다. 국제적 차원의 혁명조직을 건설해야할 필요성은 세계자본주의 체제로부터 도출된다. 각국의 사회주의 혁명가들은 국제적 차원의 전략으로 지도되어야 한다. 이 전략은 노동계급의 국제 지도부를 건설하는 것을 통해서만 마련될 수 있다. 부르주아 계급과 이 계급의 하수인인 사회민주주의자들과 스탈린주의자들의 민족주의에 대해 트로츠키주의자는 리이프크네히트의 불멸의 구호인 “노동계급의 주요한 적은 국내의 부르주아 지배계급이다!”를 대항 노선으로 제시한다. 혁명적 사회주의자는 맑스, 엥겔스, 레닌, 룩셈부르크, 트로츠키 등이 쌓아 올린 혁명 전통, 코민테른의 첫 4차 세계대회 그리고 1938년 제4 인터내셔널의 창립대회에서 채택된 강령적 기본원칙들에 기초하여 투쟁한다.

우리는 진정한 트로츠키주의 강령에 기초하여 국제적 차원에서 혁명 중핵들의 재편에 참여해야한다. 이 재편 과정이야말로 늦어도 이미 한참 늦은 사회주의혁명의 승리를 위해 투쟁하는 혁명적 사회주의 세계정당 즉 제4 인터내셔널의 재건을 위한 일보 전진의 길이 될 것이다.

“기존 사회에 대항하여 혁명을 주도할 정당을 조직하는 혁명 중핵들은 혁명이 너무 지연될 경우 사회의 계속된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혁명을 포기하고 퇴보하는 경향을 보여왔다. 이것은 오랜 역사가 입증하는 일종의 법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법칙의 예외도 존재하였다. 계속 맑스주의자로 남아 있으면서 혁명의 대의에 충실하고자 하는 혁명가들이 존재해 왔다. 혁명정당 건설의 초석인 맑스주의는 이제 백 년이 넘게 계속 현실에 적용되어 왔다. 혁명정당을 건설하는 맑스주의는 자신이 창조하는 정당들보다 더 강력하고 생명력이 있어서 이 정당들이 쓰러지고 퇴보하여도 계속 살아남는다. 퇴보한 조직 내에서 다시 혁명 투쟁을 수행할 인자들을 반드시 찾아내기 때문이다. 지금도 투쟁하고 있는 혁명 중핵들은 혁명의 계승자이며 정통노선의 수호자들이다. 혁명조직의 재편을 도모하는 혁명가들의 임무는 새로운 정치 진리를 발견했다고 선언하는 것에 있지 않다. 그동안 메시아를 자처하는 자들은 많았으나 이들은 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혁명가의 임무는 오랜 혁명 강령을 복원시키고 여기에 지나간 시대의 역사와 변화된 현실을 반영하는 데에 있다.”— 제임스 캐넌, [미국 공산주의운동의 첫 10년]

김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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