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소수자 해방운동

충남 성폭력 사건 공개토론회 참관기 : ‘인권감수성’과 ‘계급/정치 감수성’의 심각한 이상증세

by 볼셰비키-레닌주의자 posted Aug 27,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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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성폭력 사건 공개토론회 참관기

인권감수성계급/정치 감수성의 심각한 이상증세

 

공개토론회의 순서와 내용 / Y동지의 질의 / 욕설과 폭력 / 발언과 답변 / 페미니즘과 성폭력론은 노동계급의 사상인가? / ‘담배성폭력 사건’은 ‘충남 사건’과 무관한가? /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폭력론’은 보위되어야 한다? / 뒤틀린 ‘인권감수성’과 ‘정치감수성’ / 계급적 단결과 노동자 민주주의를 위하여

 

참고1: 관련 중요 문서 목록

참고2: ‘담배성폭력 사건’에서 배운다

참고3: 충남공대위에 묻는다

 


8월 20일 민주노총충남본부에서 열린 공개토론회에 참석했다. 여러 글에서 거듭 토로했지만 ‘성폭력, 피해자중심주의, 2차가해’와 관련된 문제는 대단히 예민한 문제이다. 주관에 따라 피해-가해가 규정되기 일쑤고 그러니 어떻게 방어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기 때문에 더 공포스러운 사안이다. 마치 캄캄한 정글 속을 횃불 하나 달랑 밝혀들고 탐색해 들어가는 기분이랄까? 이 문제를 대할 때면 늘 음산한 살기를 느낀다.


그러나 우리는 결심한 바 있다. 2004년 성매매특별법 통과를 주도한 ‘여성주의’의 반동성을 폭로한 것을 시작으로 우리는 ‘부르주아 여성주의’에 맞선 투쟁을 선포한 바 있고, 그로부터 몇 건의 논쟁적 글을 발표하며 각을 날카롭게 해 왔다. <사노위> 내 강령논쟁 때에도 그러했다. 소위 좌익 진영 거의 대부분 ‘여성주의(페미니즘)’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던 때였다. 맑스주의와 거의 대등한 반열로 떠받들어지던 때였다. 우리는 지금까지 공표한 말들에 책임을 져야 했고, 책임을 지기로 했다. 우리가 발표한 <볼셰비키-레닌주의자 강령안>의 첫머리엔 트로츠키의 이행강령에서 따 온 경구가 있다. “현실을 직시하고, 최소 저항선을 찾지 않으며, 사물의 이름을 올바르게 부르며, 아무리 쓰디쓴 진실도 대중에게 있는 그대로 말하며, 난관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우리는 노동계급의 위대한 선배가 남긴 가르침대로 실천하기로 했다. ‘최소저항선을 찾지 않는다!’


고속도로를 2시간 정도 달려야 하는 길이었다. 6시 이전에 도착하여 저녁을 먹고 여유 있게 참석하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일진은 순탄치 않았다. 내려가는 도중 한쪽 앞바퀴에 펑크가 났고, 견인되어 타이어를 교체해야 했다. 결국 8시가 되어서야 공개토론회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 예정 시간은 저녁 7시였으니, 이미 두 번째 발제자가 발표를 하고 있었다.

 

공개토론회의 순서와 내용


주최 측이 발표한 차례와 우리가 참석한 이후 진행된 순서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피해자로 살아온 시간

2. 왜 가해자가 드러나야 하는가: 민주노총 충남본부 교육부장 오은희

3. 성폭력사건 조사과정의 쟁점과 태도: 통합진보당 충남도당 사무처장 선춘자

4. 성폭력사건 이후, 우리는 어떻게 달라져야하는가: 유쾌한 섹슈얼리티 인권센터 대표 이은심

5. 질의응답

6. 주제토론

7. 피해자 소감(아마도 1번이 맨 뒤로 재배치된 듯)



이 중 ‘2. 왜 가해자가 드러나야 하는가?’와 ‘4. 성폭력 사건 이후, 우리는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가’는 자료집에 실린 발제문을 토대로 제목만 간략히 요약한다.


<왜 가해자가 드러나야 하는가>


1. 성폭력 사건을 ‘정파적’으로 해석하는 것 자체가 ‘정파적’이다. 2. ‘연대활동 중단’은 비상식적인 부당한 요구사항이 아니다. 3. 연대활동 중단은 ‘피해자보호’와 ‘2차 가해 중지’를 위해 필요한 조치이다. 4. ‘가해자 실명 공개’는 성폭력 사건의 해결에 있어 필요한 조치였다. 5. ‘연대활동 중단’을 요구할 권한은 우리 모두에게 있다. 6. 가해자 인권을 논하기 전에 피해자에게 ‘사과’부터 해야 한다. 7. 2차 가해 남용은 2차 가해자들이 저질렀다. 8. 2차 가해는 없다면서 공개적인 ‘2차 가해’를 일삼고 있다. 9. 마치며



<성폭력 사건 이후, 우리는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가>


책임자의 직권으로 결정하기 전에 왜 피해자와 상의하지 않나?-성폭력 사건의 조직적 해결이 아니라 개인적 해결을 위하여 1. ‘피해자다움’을 누가 어떻게 정의하는가? 2. 가해자의 인권 및 명예, 무죄 추정의 원칙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3. ‘또 다른 피해’가 ‘피해’를 넘어설 수 있는가? 4. 성폭력 사건의 구체적인 해결책 마련을 위한 몇 가지 제안들

 


 

Y동지의 질의


질의응답 시간이 주어졌다. 사회자가 질의할 사람이 있는지 물었지만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같이 간 Y 동지가 질문을 했다.


“세 가지 질문을 하고 싶다.


먼저, 왜 ‘또다른피해자모임’은 초대를 하지 않았는가? 이 토론회는 단지 피해자를 위로하기 위해서만 열리는 것이 아닐 것이다. 설령 그렇게 주제를 잡았다하더라도, 진정 피해자를 위로하기 위해서는 ‘또다른피해자모임’의 구성원들을 초대해서 그들 또한 스스로를 피해자라고 주장하니, 그들과의 토론이 필요한 것이다. 게다가 이들과 주최 측과는 다툼을 벌였음을 상기한다면 ‘또다른피해자모임’을 초청해서 2차가해라는 문제에 대해서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도 초대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둘째, 부르주아 사법기구에 소송을 낸 이유는 무엇인가? 피해자와 가해자, 그리고 ‘또다른피해자모임’ 등은 부르주아 경찰, 검사와 판사에게 이 사건을 내맡겼다. 이는 노동계급의 입장에서, 그리하여 공산주의적 입장에서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특히나 그들 부르주아들은 종북 세력으로 지칭하며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점에서 부르주아 사법기구에 소송을 낸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셋째, 왜 가해자 이름을 명기하였는가? 이제까지 가해자 이름을 명기하지 않아왔다. 그것은 통상적으로도 그랬고, 가해자의 신분을 보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다가 갑자기 가해자의 이름을 명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렇게 이름을 명기하는 것은, 가해자들에 대한 정치적 사형선고이다. 가해자는 가해에 대한 응당한 조치를 받으면 된다. 징역을 10년 살 일을 사형선고하는 것은 잘못된 일일 것이다. 그런 부르주아 법리논리보다 몇 배는 더 민주적이어야 할 노동계급의 입장에서 이름을 명기하는 것은 정치적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이다. 그런 이유로 묻노니 왜 이름을 이제까지 명기하지 않다가 갑자기 명기하게 되었는가? 가해자는 그에 합당하게 처벌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묻는 것이다.”


 

 

욕설과 폭력


그런데 질문 중간에 소동이 있었다.


Y동지가 둘째 질문까지 마치고 세 번째 질문을 하려고 “셋째”하는 순간, 오른쪽 대각선 쪽에 앉아있던 2~30대로 보이는 남성 참가자(A)가 갑자기 “이런 XX!”하면서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친다. 그러더니 벌떡 일어나서 앉았던 접이식 철제의자를 들어 올리려 한다. 치겠다는 것이다. 옆에 있던 다른 남성 참가자가 말린다.


돌발적 상황에 당황해 하던 Y동지가 외쳤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꿈쩍 않는다. 다시 외친다. “사과하세요!” 그러자 A가 또 “에이 XX!”하며 다시 의자를 들어 올리려 한다. 뒤쪽에 앉았던 다른 젊은 남성 참가자(B)가 반말로 가세한다. “거 하고 싶은 말이나 해!”


Y: “사과해요!”

B: “잔말 말고 하던 말이나 하라구!”

A가 밖으로 나가면서 Y동지에게 위협조로 말한다. “사과 받고 싶어? 사과 받고 싶으면 따라 나와!”


 

사회자, 발제자들 포함 참석한 그 누구도 방금의 욕설과 폭력적 행위에 대해 문제 삼지 않는 분위기다. 오히려 잘했다는 표정들.


사회자: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마저 질문하세요.



Y동지가 분을 애써 가라앉히고 마저 질문하려 하자 누군가 또 딴죽을 건다.


C: 의사 진행 발언 있습니다. 왜 한 사람이 두세 가지씩 질문합니까?

D: 앞으로 누구든지 발언할 때 소속을 밝히도록 하죠.




5분 남짓한 짧은 장면이지만 사실 이 장면이 공개토론회의 대부분을 담은 축소판이었다. 이 장면으로 지금 사태의 많은 것을 짐작하게 해 준다.

‘성폭력론, 피해자중심주의, 2차 가해론’과 관련해서 이견은 좀처럼 허용되지 않는다. 관용은 없다. 그것은 애써 먼 길을 달려 온 제3자에게도 허용되지 않는다. 초면불구이다.


도덕 감각이 심각한 불균형 상태이다. 욕설이 난무하고 물리적 폭력이 가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자기편 여성’에게 가해지지 않거나, 성적인 것이 아니면 문제 삼지 않는 태도를 통해 <공대위>가 지닌 도덕감각의 불균형을 스스로 분명히 드러냈다.


참가자들 대부분에게 여유가 보이지 않았다. 검열과 자기검열의 집단적 히스테리를 앓는 모습이었다. 눈앞에서 치사하고 비겁한 폭력이 행사됨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지키고자 하는 또는 자신들을 검열하는 ‘성폭력론, 피해자중심주의, 2차 가해론’ 앞에서는 다른 폭력은 아무것도 감지하지 못하는 맹목의 눈들을 하고 있었다. 낯선 마을을 찾아간 느낌이었다. 참가자들은 그런 신경질적이고 새된 반응과 목소리로 ‘성폭력론, 피해자중심주의, 2차 가해론’에 대한 충성을 확인하고자 하는 것 같았다. 공개토론회가 아니었다. 거의 종교 행사에 가까웠다. 자신들이 옳고 당당하다면 멀리서 애써 찾아온 이방인들을 그렇게 대해야 할 이유가 없다. 자신들의 사정을 이해시키고 신념을 전파할 좋은 기회 아닌가? 노동계급의 그것이 아니었다. 아니, 꼭 그렇지는 않다. 관료집단 치하의 노동계급의 그것과 닮아있었다. 출구를 찾지 못하고 공포에 찌든.


Y동지는 토론회 내내 분을 달래고 삭이느라 애쓰는 모습이었다. 돌아와서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떤가? <충남 공대위>는 그 날 있었던 욕설 등의 폭력 사태에 대해 반성하고 있는가? 사과할 용의가 있는가? ‘성적’ 폭력이 아니므로 문제되지 않거나, 정당방위인 것인가?

 

 

발언과 답변


질의응답 시간이 끝나고 주제토론 시간이 되었다.


역시 대체로 자기 의견을 내는 사람은 적었다. 발언을 했다. 다음은 약간의 손질을 가한 것이다.


“‘성폭력’ 사건은 너무도 예민한 문제이기 때문에, 이 문제에 연루되는 것은 조심스럽고 내키지 않는 일이지만, 사건이 발생한 이후 우리가 2008년 작성한 <페미니즘과 성폭력론>이 언급/인용되었고, 거의 자동적으로 개입하게 되었다. 그 후 우리는 <볼셰비키-레닌주의자> 명의로 지난 7월 25일, <‘충남 성폭력 사건’에 대한 입장>을 발표했다.


그 동안 ‘성폭력 2차 가해’와 관련된 여러 사건들이 있었다. 2008년에 사노준과 해방연대 사이에 ‘아가씨와 건달들’이라는 표현을 둘러싼 성폭력 논쟁이 있었다. 2011년에는 이른바 ‘담배성폭력’ 사건이 있었고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진행 중이다. 비슷한 시기에 다함께와 관련된 사건이 일어났고 역시 진행 중이다. 2012년에 전교조 정진후 전 위원장 사건도 매스컴을 타며 떠들썩했다. 지금 여기서 문제가 되고 있는 충남 사건은 작년에 발생한 사건이고 지금 보듯이 쉽게 끝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 사건들에서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들은 그 성폭력 가해 규정에 승복하지 않고 있다.


지금의 ‘성폭력론, 피해자 중심주의, 2차 가해론’은 객관적 사실을 확인하는 데에 소홀하고, 상대의 반론을 들어보기도 전에 일방적으로 ‘가해혐의자’가 아니라 가해자로 단정하며, 가해자임을 받아들일 것을 강요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사건이 확인되기도 전에 인터넷 실명공개 등의 ‘인격적, 정치적’ 형벌을 집행한다.


주관적이고 일방적이다. 그래서 파괴적이고 폭력적이다. 심지어 정파투쟁의 도구로 이용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낳고 있기도 하다. 그 ‘가해자’들은 가해 혐의를 완강하게 부정하고 있는데 그 ‘가해자’들이 상식이 없거나 측은지심을 못 느끼는 괴물들이기 때문인가? 그렇지 않다면 혹시 이 문제를 다루는 우리의 사고틀이 잘못된 것은 아닌가? 이 사고틀에 대해서 성찰할 때가 된 것은 아닌가?”



중간중간에 발언을 끊는 방해가 있었다. “왜 우리가 이런 강의 같은 긴 발언을 듣고 있어야 해요?” “무슨 얘기인지 너무 어려워요” “왜 무엇이 어떻게 문제인데요?” 등


발제자가 한 답변은 단호했다.


“우리의 사고틀에는 문제가 없다. 10여 년 동안 싸워온 반성폭력 운동의 성과이다. 이번 싸움을 통해서 우리의 사고틀은 더욱 발전할 것이다.”


 

 

페미니즘과 성폭력론은 노동계급의 사상인가?


페미니즘은 “인간 사회는 사회 계급이 아니라 남성과 여성으로 근본적으로 분열되어 있다.”라는 세계관이다. 이 사상은 맑스주의 사상과 다르며, 계급이 아니라 남성과 여성으로 근본적으로 분열되어 있다고 바라보기 때문에 계급과 계급의 이해가 격돌하는 그 지점에서 후퇴하고 현 체제에 순응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 그런 점에서 노동계급의 이해와 부분적으로만 일치할 뿐 노동계급의 사상도 아니다. 그런데 이 페미니즘은 발제자가 말한 것처럼, 남한에서 “지난 10여 년간” ‘성폭력론, 피해자중심주의, 2차 가해론’ 등을 제기하며 크게 성장해 왔다.


‘남한 사회의 급격한 산업화, 남성 노동자 1인 임금의 실질 구매력 하락, 여성 노동력의 대거 사회 진출, 맞벌이 시대의 개막, 소부르주아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와 남성기득권자와의 충돌과 좌절’ 등이 그 사회적 배경일 것이다.


페미니즘 등장의 사회적 배경에 대해 콜론타이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데, 참고할만하다.


“여성 의제는 대략 19세기 중반―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이 노동의 영역에 진입한 후 상당한 시간이 지난 때―에 부르주아 계급의 여성들에게 중요한 것으로 여겨졌다. 자본주의의 포악스러운 성공의 영향 때문에 중간 계급은 난국의 파도에 휩쓸렸다. 경제적 변화는 쁘띠 부르주아들과 중간 부르주아들의 재정상황을 불안정하게 했고, 부르주아 여성들은 위협적인 상황의 딜레마에 직면했다: ‘가난을 받아들이거나 일할 권리를 얻거나.’ 이러한 사회계층의 부인과 딸들은 대학, 예술 살롱, 편집학교, 사무실 등의 문을 두드리면서 그들에게 열려진 직업의 세계로 쏟아져 나왔다. 과학과 더 높은 문화적 이득에 대한 접근권을 얻고자 했던 부르주아 여성들의 열망은 그들이 갑자기 자신들의 요구를 충족시키려고 해서 생긴 것이 아니라, “일용할 양식”을 해결하는 문제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러나 부르주아 여성들은 처음부터 남성들의 견고한 저항에 부딪혔다. 완고한 전쟁은 “편안한 소일거리”를 고수하는 전문직 남성들과 일용할 빵 값을 버는 일에 풋내기인 여성들 사이에서 벌어졌다. 이 싸움은 “페미니즘”―함께 모여서 자신들의 적인 남성들에게 대항하여 공동의 힘을 모으고자 했던 부르주아 여성들의 시도―의 열기를 드높였다. 이 여성들은 노동 영역에 들어가게 되자 자신들을 ‘여성운동의 전위부대’라고 자랑스럽게 일컫기 시작했다. 이 여성들은 다른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경제적 독립을 달성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그들이 그들의 어린 자매들의 선례를 따르고 있고, 그 자매들이 물집 잡힌 손으로 빚어낸 결과물을 따먹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부르주아 여성운동이 태어나기도 전에 세계 모든 나라에서 수십만의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이 공장과 상점에 내몰려 산업의 이 분야 저 분야를 떠맡아왔는데, 여성들이 노동에 진출하는 길을 페미니스트들이 선구적으로 개척했다고 진정으로 말할 수 있는가? 여성 노동자들의 노동이 세계 시장에서 인정되고 있었다는 사실 덕분에 부르주아 여성들은 페미니스트들이 그렇게 자랑해마지 않는 사회에서의 독립적 지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의 투쟁의 역사 속에서 일반적인 페미니스트 운동이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의 물질적인 조건을 향상시키는 데 유의미한 공헌을 했다는 단 한 번의 예도 찾아보기 힘들다.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이 자신들의 삶의 질 향상에 있어서 얻은 것은 모두가 노동자 계급의 노력, 그 중에서도 특히 프롤레타리아 여성들 스스로 노력한 결과이다. 더 나은 노동조건과 더욱 풍족한 삶을 위한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의 역사는 프롤레타리아의 해방을 위한 투쟁의 역사이다.”--콜론타이, <여성 문제의 사회적 기초>



이렇게 등장한 페미니즘은 자본주의 역사와 사회주의 전통이 상대적으로 짧은 남한 사회에서 맑스주의와 대등한 정도의 ‘진보사상’으로 대접받고 있다. 심지어 마치 노동계급의 필수 사상의 하나인 양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면서 그동안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왔다. 산발적인 도전들이 있었지만, 그 모순과 반인민적이고 파괴적 성격이 대중들 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은 2012년 10월 경 이른바 ‘담배성폭력’ 사건을 통해서였다.

 

 

‘담배성폭력 사건’은 ‘충남 사건’과 무관한가?


이번 ‘충남 성폭력 사건’에서 ‘2차 가해’ 규정이나 ‘담배성폭력’ 사건에서의 가해 규정은 모두 ‘성폭력론, 피해자중심주의, 2차 가해론’에 근거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 둘은 서로 교차 검토될 수 있는 사안이다.


그런데 ‘2차 가해 규정이 옳고, 그들은 운동권에서 발을 못 붙이게 축출돼야 한다.’라는 입장을 가진 <공대위> 측은 충남 사건은 ‘담배성폭력 사건’과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충남 사건’에는 ‘담배성폭력 사건’에는 없는 ‘진짜’ 성폭력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물론 둘은 다른 사건이다. 특히 이 사건의 소위 ‘1차 가해’는 강간 미수에 가깝다. 아직 혐의를 온전히 수용하지 않는 가해혐의자의 반론을 들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확언할 수 없지만, 피해자 진술서와 징계결정문을 읽어본 소감은 ‘강간 미수이거나 그에 가까운 성폭력이 있었다.’이다.


하지만 첫째, 지금 주로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1차 가해’가 아니라, ‘2차 가해’이다. 실제로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되어 가장 큰 압박을 받고 있는 당사자는, 두 사건 모두에서 ‘1차 가해자’보다는 ‘2차 가해자’로 지목당한 사람들이었다. ‘담배성폭력 사건’에서 그 사건이 ‘성폭력’ 사건임을 부정했다는 이유로 ‘2차 가해자’가 된 당시 사회대 학생회장 S는, “조리돌림하며 고해성사를 강요(받아)…정신적 고통이 극에 달해 하루 종일 일어나지도 먹지도 못하는 등 문자 그대로 생활이 완전히 파괴되는 지경에 이르(<서울대 “성폭력대책위” 사건 및 반성폭력운동에 대한 공개토론회 자료집>: 이하 <자료집>)”렀다.


둘째, ‘담배성폭력 사건’도 ‘진짜’ 성폭력 사건으로 다루어지고 있었다. 2011년 3월에 발생하여 다음 해인 2012년 10월 성폭력 ‘2차 가해자’로 시달림을 당하던 S가 사회대 학생회장직을 사임하면서 사건을 공개하기 전까지, 그 사건은 ‘성폭력’ 사건이었다. 피해호소인의 소속단체 전국학생행진(행진) 그리고 S의 <사노위> 등이 참가한 대책위의 명칭은 ‘<사노위> 성폭력 사건의 올바른 해결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였다.


“대책위가 제안되었을 때부터 이미 사건이 성폭력으로 규정되었으며, 대책위도 아무 토론 없이 그대로 ‘<사노위> 성폭력 사건 대책위원회’로 명명되었으며, 가해지목인들은 소명의 기회도 없이 ‘ㅇㅇㅇ 성폭력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자신들을 비난하는 발제문을 제출받고 사과문을 써야 했다. 초동모임에서 <사노위>가 사실 관계 확정과 사건 성격 규정 토론을 제안하였으나 <공간>은 이를 논의조차 해보지 않고 묵살하였고, <사노위>가 여기에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면서 대책위 진행 절차는 B, 수진, D 순으로 사과문을 작성하는 것으로 합의되었다.”--<자료집>



S가 소속된 <사노위>가 ‘성폭력’ 규정에 이의를 제기했으나, 결국엔 <사노위>도 “사실상 성폭력 사건과 다름없는 가-피해 구도를 받아들”이면서 이 ‘폭력적인’ 대책위는 가동되었다. ‘성폭력론, 피해자중심주의, 2차가해론’은 <행진>만이 아니라 <사노위> 자신의 정치적 신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는 잘못이 있는지 없는지 따지기 전에 우선 사과부터 하자는 앞뒤 순서가 거꾸로 된 방식이었음에도 큰 충돌 없이 합의되었다. 이는 공간의 진행자가 가지고 온 안을 그냥 가결시키는 식으로 회의를 주도했기 때문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유일하게 이런 일방적인 방식에 이견을 제기했던 <사노위> 또한 성격 규정 이전에 사실상 성폭력 사건과 다름없는 가-피해 구도를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이다.”--<자료집>



셋째, ‘담배성폭력 사건’을 해결한 것은 ‘운동권’이 아니었다. 대중의 전국적 관심이라는 햇볕을 받아 이제 누구의 눈에도 명약관화해진 그 사건을 보며, 마치 이전부터 그렇게 생각했다는 듯이 ‘그 사건은 ‘진짜’ 성폭력이 있는 이 사건과 달라.’라고 말하지만, 그 사건을 그렇게 인식하도록 만든 것은 운동권이 아니었다. 그 사건은 언론과 대중이 해결한 것이다.


마치 습한 곳에 피어난 곰팡이가 강렬한 햇볕을 받아 이내 사라지듯이, 광범한 대중의 시야에 들어오자마자 그토록 완강하던 성폭력론이 일순간에 사라져버렸다. 대중적 관심을 받고 비난이 쏟아지자 이렇다 할 저항도 없이 슬그머니 꼬리를 감춰버린 모습에서도 ‘성폭력론, 피해자중심주의, 2차가해론’이 얼마나 비겁한 허위의식인지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상상을 해 본다. 만약 S의 영웅적 인내와 투쟁이 없었더라면, 그리하여 언론에 공개되어 대중적 관심을 받지 않았더라면? 만약 2차가해자로 몰리던 S가 대책위를 박차고 나오지 않고, 그 사건의 공개를 결정하지 않고, 그 사건이 전국적 관심을 받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그 사건 또한 ‘성폭력론, 피해자중심주의, 2차가해론’의 전리품으로 또 한 사람의 인생과 운동을 잡아먹으며 끝났을 것이다. 아찔하고 끔찍한 상상이 아닐 수 없다.


심지어 그 사건이 공개되어 그 코미디성을 대부분 인정하고 있는 때에조차, 이른바 ‘전문가’ 중 한 사람은, 대중의 그러한 반응과 판단은 ‘성폭력론, 피해자중심주의, 2차가해론’의 비과학성과 폭력성 때문이 아니라, “ㄱ씨가 피해를 주장하게 된 구체적 상황을 알지 못하면서…페미니즘에 대한 반감”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진보의 가부장제를 비판한 <오빠는 필요없다>의 저자이자 여성학자인 전희경씨는 “많은 사람들이 ㄱ씨가 피해를 주장하게 된 구체적 상황을 알지 못하면서 일단 ‘담배녀’라는 이름부터 붙여 사건을 단순화하고, ㄱ씨 개인과 페미니즘 전체에 대해 분노를 표출하는 것은 한국 사회가 유독 여성, 페미니즘에 대한 반감이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했다.”--<남친, 줄담배 피우며 “헤어지자”…성폭력?>, 경향신문, 2012년 10월 28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폭력론’은 ‘보위’되어야 한다?


‘성폭력론, 피해자중심주의, 2차가해론’의 폭력성과 파괴력 그리고 그 비논리성은 사실 그 ‘전문가’들도 이미 알고 있다. 발제자 이은심 대표는 이렇게 말한다.


“성폭력 사건이 발생하면 피해자뿐만 아니라 가해자도 극심한 고통을 받을 수 있다. 죄책감에 시달려서 자기 파괴와 학대를 하는 가해자도 있고, 정신과 치료를 받으면서 약물치료 및 심리상담을 병행하는 가해자도 있다. 최근에는 사회적으로도 성폭력 사건은 크게 비난받기 때문에 훨씬 더 높은 도덕적 기준을 가지고 있는 운동사회에서 성폭력 가해에 대한 인식은 매우 부정적일 뿐만 아니라, 가해자로 지목된다는 사실 그 자체로 정치가로서의 생명이 끝났다는 우려가 팽배하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이런 끔찍한 형벌을 받는 2차 가해자가 되는가? 역시 이은심 대표의 말을 들어보자.


“2차 가해의 경우 어디까지가 성폭력인지 어디까지가 성폭력이 아닌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은 경우가 많다. 또한 가해자를 두둔하거나 피해자를 비난하는 등의 문제적인 행동이라도(고) 해도 피해자와의 친분이나 조직 내 역관계를 고려하여 이를 단순경고로 그칠 것인지 2차 가해로 징계할지에 대해서도 고민하는 경우가 많다.


최근 2차 가해자로 제소되는 경우는 대부분 사건 접수를 받은 담당자나 책임자인 경우가 많은데, 악의적으로 사건을 축소은폐하기 위하여 피해자를 비난하거나 회유하는 경우도 있지만, 성폭력 사건의 특성을 잘 모르기 때문에 의도하지 않더라도 잘못된 사회통념을 따라 피해자를 비난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특히 가해자가 조직 내에서 높은 지위를 점하는 사람이라면, 특별히 가해자를 두둔할 의사가 없더라도 조직의 미래나 평판을 걱정하여 사건이 너무 크게 확대되는 것을 막으려고 하다가 결과적으로 사건을 축소은폐하거나 1차 가해자를 두둔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또한 성폭력 사건의 특성을 잘 알지 못하거나 사건 해결의 전문성이 부족하여 실수를 하는 경우에도 피해자와의 신뢰관계가 깨어져서 2차 가해로 제소되기도 한다.


…성폭력 사건의 처리과정에 관여하다가 2차 가해자로 지목되는 경우에 느끼는 억울함이나 피해자에게 가지는 원망이 어떨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강조는 인용자)




자, 생각해 보자.


왜 우리는,


“성폭력 사건의 특성을 잘 모르기 때문에, 의도하지 않더라도, 가해자를 두둔할 의사가 없더라도, 성폭력 사건의 처리과정에 관여하다가, 사건 해결의 전문성이 부족하여 실수하는 경우에, 결과적으로 사건을 축소은폐하거나 1차 가해자를 두둔하는 효과”를 낳았다는 이유로,


“성폭력인지 아닌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은” 것을, 기어이 ‘성폭력’으로 판단해서


범죄자로 만들어야 하는가?


왜 그렇게 견강부회의 억지를 써서


“극심한 고통, 죄책감, 자기 파괴와 학대, 정신과 치료, 정치가로서의 생명 끝남”이라는 잔인한 형벌을 주어야 하는가?

 


이거 뭔가 끔찍하지 않은가? 누가, 왜, 그런 권리를 가지려 하고 행사하려 하는가?


이은심 대표는 말한다.


“어떠한 노력이라도 성폭력 피해 자체를 의심하거나 부정되는 목적으로 이용된다면, 이미 원래의 핵심 논점을 벗어나는 것이다.”



“항상 옳은 것이 아닐 수도 있고, 오류가 있더라도” 의심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폭력론, 피해자중심주의, 2차가해론’은 의심되거나 부정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여성주의’가 보위되기 위해선 제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얼마나 더?

 

 

뒤틀린 ‘인권 감수성’과 ‘정치 감수성’


우리의 도덕감각과 ‘인권 감수성’ 그리고 그와 관련된 ‘정치/계급 감수성’은 지금 심각한 이상증세를 보이고 있다. 이 사회의 주된 억압이 남성에게서 나온다는 비과학적 인식이 횡행하고 있다.


그리하여 여성의 억압과 피해만 과장 부각된다. 남성의 여성에 대한 잘못은 작은 잘못도 용납되지 않고 잔인하게 그 책임을 묻는다. 한편 남성과 남성 사이, 선배-후배 사이의 폭력이나, 여성이 남성에게 가하는 폭력엔 둔감하기 짝이 없다. 우리가 충남의 <공개토론회>에서 듣고 당한 욕설과 반말 그리고 물리적 위협은 별 문제 안 되는 것처럼 치부하는 <공대위>와 그 참가자들은 이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피해자나 피해자 측에 있는 사람이 가해자나 가해자 측에 있는 사람에 대한 무분별한 폭력은 그대로 용인된다. 폭력에 의한 피해를 호소하면서, 폭력을 거리낌 없이 행사한다. 이번 사건 이후 소위 ‘2차 가해자’에게 가해진 욕설과 인격을 짓밟는 잔인한 말들 그리고 물리적 폭력은 일그러진 우리의 균형감각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들이다. 이러한 모습은 ‘담배성폭력’ 사건에서도 고스란히 있었다. 피해를 호소한 A는 가해자로 지목한 이들에게 옮기기 민망스러운 막말을 함부로 내뱉었고, 당시에 그것을 저지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아무리 그 ‘2차 가해자’들이 후진적이고 저열한 인식을 실제로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의도되거나 자신들의 배타적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그런 식으로 대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노동계급은 진보적일 수밖에 없는 계급적 토대를 가지고 있을 뿐이지, 그 자체로 진보적이지는 않다. 특히 혁명 이전까지는 상대적으로 항상 후진적이다.


그러는 사이 정작 예민해져야 할 ‘정치/계급 감수성’은 엉망이 되고 있다. ‘선거에서 부르주아 후보를 지지하거나, 이라크와 리비아 등에 대한 제국주의 침략에서 중립적 입장을 취하거나 심지어 제국주의 편을 들거나, 북핵에 대해 방어하지 않고 양비론이나 제국주의 편을 드는 정치적 배신행위들’이 있지만, 그런 반동적 사상과 실천에 대해서는 ‘여유롭고 관용적’이다. 굳이 계량한다면, 위에 언급한 정치적 사안은 최소 수백 많게는 수십만의 애꿎은 목숨이 좌우되는 것들이다. 어느 당에서는 당기위를 소집해 여럿을 제명시켰는데, 대부분 성폭력 ‘2차 가해자’들이라고 한다. 그 당은 부르주아와 계급 연합을 추구하고, 제국주의 폭격을 지지하며, 북핵에 대해서 단호히 남한 정권/미제국주의와 같은 편에 서지만, 그 때문에 크게 논란이 되거나 당기위가 소집되거나 제명자가 나온 적은 없다고 한다.

 

 

계급적 단결과 노동자 민주주의를 위하여


성적(sexual) 호기심, 성적 탐색, 성적 호소, 성적 경쟁 등은 우리의 일상이다. 자극적이고 선정적이다. 그래서 쉽게 관심을 끌어 모을 수 있고 상대를 쉽게 공격할 무기를 제공한다. 정치 그 자체를 공격하지는 않지만, 정치적 적수의 신뢰를 쉽게 떨어뜨릴 수 있다. 때로는 성적인 스캔들과 관련하여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목적을 이룰 수 있다.


그러나 쉬운 만큼 해악도 많다. 우리가 지금 보는 것처럼 비과학적이고 파괴적이고 폭력적이다. 그리고 우리 것도 아니다. 결국 우리 발목을 잡을 것이다. 그것은 노동계급의 것이 아니다. 노동계급의 단결을 결정적으로 저해하고 대체로 반동적이다.


노동자 민주주의를 사수하자. 성폭력뿐만 아니라, 상대의 의사를 존중하지 않는 욕설과 왜곡날조 등의 언어폭력 그리고 물리적 폭력 등 모든 폭력에 반대하자. 계급적 바리케이드를 사수하자.

 

2013년 8월 28일

볼셰비키-레닌주의자

 


참고1:

 

관련된 볼셰비키-레닌주의자의 중요 문서 목록

 

 

‘충남 성폭력’ 사건에 대한 입장: 2013년 7월 25일

 

성매매특별법 관련 논쟁: 2013년 1월

 

‘담배 성폭력 사건’과 관련하여: 2012년 10월 24일

 

페미니즘과 소위 ‘성폭력론’에 대하여: 2008년 11월~12월

 

노동계급의 여성해방운동을 위하여!: 2007년 6월

 

성매매방지법과 노동계급: 2005년 4월

 

맑스주의, 페미니즘, 여성 해방 ( 19호, 1997)

 


참고2:

 

‘담배성폭력 사건’에서 배운다.

 

‘담배성폭력 사건’은 ‘여성주의, 성폭력론, 피해자중심주의, 2차 가해’ 등과 관련하여,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성폭력 2차 가해자로 몰렸던 S가 자신이 실질적 피해자임을 주장하며 거꾸로 기존의 ‘피해자’들을 제소하였고, 2013년 5월 9일 <서울대 “성폭력 대책위” 사건 및 반성폭력 운동에 대한 공개토론회>가 개최되었다. 그 토론회엔 A의 소속 단체인 <공간>, 사회대 여성주의자 <달>, S의 지지자 모임인 <성폭력 대책위 사건 피해자 지지모임>, <사노위> 관악분회가 각각 발제문을 제출하였다.


우리는 <성폭력 대책위 사건 피해자 지지모임>의 사건 해석을 대체로 지지한다. 아주 구체적인 사항으로 가면 몇 가지 논의거리가 있겠지만, <지지모임>이 제출한 대부분의 문제의식에 공감했고 고통 속에서 얻어낸 통찰을 배울 수 있었다.


1년 반 이상, 자기가 속한 주위의 거의 모든 조직과 인간관계 그리고 기존의 신념으로부터 외면당하고 공격받는 상황에서, 무너지거나 굴복하지 않고 살아남아 진실을 움켜쥔 S의 투쟁에 ‘영웅적’이라는 표현을 감히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래는 <지지모임>의 발제문에서 특히 의미 있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발췌한 것이고, 간단한 소제목을 붙였다.


 

 

‘여성에 대한 폭력’으로서 성폭력 개념의 부적절함


그렇다면 ‘여성에 대한 폭력’으로서의 성폭력 개념은 이런 식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우선, 이것은 지나치게 모호하며 엄밀히 따지면 모든 폭력을 전부 포괄한다고까지 할 수 있다. … 이것은 결국 피해자가 생물학적으로 여성인 모든 폭력 사건은 성폭력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사기든 도난이든 교통사고이든 여성이 당한 모든 피해는 여성주의의 정치적 의제가 되어야 할 것이며, 피해자가 원할 때마다 공개심리의 원칙은 폐기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여성주의 운동의 역량을 얼마나 소모적인 사안들에 낭비하게 할지, 또한 여성주의 운동 자체를 얼마나 폭압적으로 만들지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게다가 이러한 관점은, ‘성폭력에 민감한 시각’을 가지려면 결국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언제나 잠재적으로 성적인 것으로 바라볼 것을 요구한다. 이것은 여성을 남성의 성애의 대상으로서만 규정한다는 점에서 뒤집어진 이성애중심주의, 남성중심주의다.

…‘성적 자기 결정권’ 개념은 사라진다.…‘여성에 대한 폭력’으로서의 성폭력 개념은 대중에 의해서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다.

 

 

피해자 중심주의


요컨대 대책위에서 공간이 취한 입장은 성폭력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고, 잘못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피해자가 잘못이라고 이야기하는 것만으로 이미 결론이 지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공간이 ‘객관성’의 대안으로 제시한 것은 테이블의 모든 구성원이 피해자의 관점을 수용하는 것이었다. 여성주의의 이름으로 객관적, 합리적 기준을 정하려는 시도를 피해호소인의 자의로 대체해버린 것이다.…<사노위>의 경우도 ‘피해자가 피해를 호소하면 성폭력이든 아니든 피해로 인정해야 한다’는 관점에 기초하여 가-피해 구도를 받아들이고 있었고, 진상 조사와 성격 규정을 주장하기는 했지만 이는 객관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함이라기보다 상례를 따르고 사건을 원활하게 ‘해결’하기 위함이었다. <사노위> 회의에서 수진이 ‘객관적으로 정당화할 수 없는 요구에 왜 따라야 하느냐’고 항의하자, 구성원들은 ‘객관적 기준을 세운다는 게 가능하냐’는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둘째, 피해자중심주의는 ‘피해자를 비판하는 것은 피해자에게 상처를 주고 사건 해결을 방해하는 것’이라는 의미로 적용되었다. 원제소자(A)의 입장에 대한 비판은 금기시되었으며 제기되었을 때는 급하게 무마되거나 2차 가해로 낙인찍혔다.…셋째, 피해자중심주의는 ‘피해자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해도 되며 피해자가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주어야 한다’는 의미로 적용되었다. B에 대한 ‘야. 이. X. X. X. 야. 담. 뱃. 불. 로. 지. 져.도. 시. 원. 찮. 을. X. X. 야’ 등의 욕설이 문건으로 올라왔는데도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고, B는 이 모욕을 받아들이고 오히려 거듭하여 A에게 사과해야 했다.

 

 

2차 가해


가해당사자가 사건을 은폐할 것을 종용하기 위한 수단으로 고통을 호소하며 피해자를 비난하거나 불리한 여론을 조성하지 않는 한, 가해당사자가 피해를 호소하는 것마저 2차 가해라고 할 수는 없다. 하물며 이 피해가 피해호소인과 그녀에게 편중된 절차에서 비롯된 부당한 폭력 때문에 생긴 것이라면, 이를 2차 가해라고 부르는 것은 가해지목인은 어떤 부당한 일을 당해도 어떤 이의도 제기하지 말라는 뜻이다.


2차 가해라는 말은 그간 지나치게 자의적으로 사용되어 왔고, 그 외연을 정의하려는 것은 자칫 ‘협소한 관점’이라는 비난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시도되지 않았다. 그 문제점이 외면할 수 없는 형태로 드러난 지금, 2차 가해라는 말로 모든 비판적 토론을 봉쇄하고 피해자에게 무한 권력을 쥐어주는 일에 제동을 걸 필요가 있다. 2차 가해의 한도를 설정하고 개념이 만들어진 맥락을 환기하지 않으면, 2차 가해라고 볼 수 없는 행동들이 제소자(A)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2차 가해로 규정되고 처벌되는 일이 언제든 반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2차 가해의 현재 정의는 “피해자에게 재차 피해를 입히는 행동 또는 사건 해결을 방해하는 행동”으로 규정되어 있으나, ‘피해’와 ‘상처’를 구분하지 않는 사람이 적지 않고 사건 해결이라는 말 또한 피해호소인의 요구안을 무조건 들어주는 것으로 해석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러한 정의는 피해자가 기분나빠하면 단순한 이견 또는 피해자의 신상이 유출되지 않는 선에서 사건에 대해 공론화하고 토론하는 것까지 2차 가해로 몰려 죄악시되는 결과를 낳았다. 앞으로 2차 가해는 “피해자에 대한 인권 침해나, 사건을 정치적으로 다루는 것에 대한 방해”와 같이 좀 더 엄밀하게 재규정될 필요가 있다.

 

 

‘인권감수성’과 비이성적 사고방식


대책위에 참여하기 전 <사노위>는 여성사업팀 주관으로 관악분회 대상 내부 교육을 실시하였고, 교육의 요지는 주로 ‘성폭력은 아니지만, 당사자의 입장에서 폭력적인 상황이었음을 이해해야 한다. 그런 태도가 인권 감수성’이라는 것이었다. 이를 기점으로 관악분회 구성원들은 가-피해 구도를 주어진 것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즉, 관악 페미니스트들뿐만 아니라 여성단체에서 활동하는 선배들 또한 이러한 관점을 내면화하고 후배들에게 교육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피해호소인에 대한 공감과 배려를 권고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제기가 정당하냐 아니냐와는 다른 문제다. 상처가 될 수 있는 상황임을 인정하는 것과 그것을 공동체가 제재해야 할 폭력으로 인식하는 것은 다르기 때문이다. 감정적으로 연민할 수 있는 것과 정치적으로 지지할 수 있는 것을 구분하지 않는 것은 인권 감수성이 아니라 단순히 비이성적 사고방식이다. 그럼에도 내부 교육은 전자를 설득하는 듯 가장하면서 사실상 후자를 설득시켰다. 이는 관악분회 구성원들이 대책위에서 벌어지는 부조리한 일들에 대해 문제제기를 금기시하게 되는 큰 요인이었다.

 

 

사과문 첨삭이라는 방식의 폭력성


이 사건이 애초에 성폭력 사건도 폭력 사건도 아니며 일방적으로 사과할 상황이 아니었다는 점을 차치하더라도, 사과문이 핵심적인 원칙을 인정하지 않거나 사실을 호도하는 것이 아닌 한 단순히 피해자가 흡족하지 않다는 이유로 세세한 부분까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요구하는 것은 가해자는 자신의 내면을 남김없이 심판의 대상으로 내놓으라는 뜻이며, 일체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말고 피해자의 앵무새가 되라는 뜻으로, 가해자를 괴롭힘으로써 A의 복수심을 충족하는 것 이외의 어떤 의미도 찾을 수 없다. 이는 피해에 대한 구제를 명목으로 하여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수치스러운 내면의 감정과 생각까지 공개하고 생각과 말을 모두 다른 사람의 의지에 복속시켜 다른 사람의 악의를 자기 자신에게 쏟아부으라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폭력적인 요구로, 누가 보아도 피해자권력을 남용한 응징이나 보복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다.

…공간은 이에 대한 수진과 <사노위>의 문제제기를 사과문을 둘러싼 어떤 요구도 봉쇄하는 것으로 왜곡하고, 가해자를 조리돌림하며 고해성사를 강요하는 방식까지 ‘2차 가해를 막는다’는 방어의 명목으로 합리화하고 있는데, 이들은 논리에 따르면 ‘다시 국가를 위태롭게 하는 것을 막기 위해’ 사상범들에게 전향서를 강요하는 한국 정부의 탄압도 완전히 합리화될 수 있을 것이다.

 

 

사건의 비공개 처리의 부당성


물론, 대책위가 운동적 정당성을 잃어버리고 개인의 인권을 유린하면서 정파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이전투구의 장이 되어버린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사태가 이렇게 된 데에는 그 누구보다도 권력을 지양한다면서 사실은 여성주의적 권위와 중재자의 지위에서 나오는 권력을 십분 활용했던 공간의 책임이 가장 컸다.  게다가 사건은 사실 ‘비공개’된 것도 아니었다. A와 (가) 등은 이미 자신들과 친한 학내 여성주의자들을 중심으로 A 중심의 사건 경위를 확산시키고 있었고, 이는 사회대 새맞이 기간에 문화팀이 학생회를 비토할 뻔하는 등 수진에게 실제로 치명적인 정치적 위기를 초래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해지목인들은 비공개를 강요당했기 때문에 이러한 소문이 누구에게 어떻게 퍼져 있는지 확인할 길도 물론 없었으며 어쩌다가 소문을 들은 사람이 가해지목인들에게 물어보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최소한의 해명 기회조차 박탈당했다. 이 사건에서 소위 ‘비공개 원칙’이란 일방에게만 유리한 여론을 조성할 권리를 독점시키고 다른 쪽은 발언권을 일절 박탈하는 무기일 뿐이었다.

 

 

<사노위> 여성사업팀


물론 공간과 행진보다 더 결정적으로 작용했던 것은 여성사업팀이라는 <사노위> 내부의 여성주의적 권위자였다. 이들이 공간과 행진에서 주장하는 피해자중심주의를 상당 부분 인정해주었기 때문에, <사노위> 구성원들은 이들을 거스르지 않고서는 여기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인권과 민주성을 명분으로 내건 패권주의


대책위 구성원들은 고통을 호소하는 모든 사람의 목소리를 존중해 듣고 인권을 확장시킨다는 미명으로 A의 요구를 관철시켰지만, 수진이 고통을 호소하는 것은 묵살하거나 심지어 비난하였으며 피제소인들의 기본권을 침해하면서도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았고, 민주적 논의를 복원시키는 것을 대책위로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책위에서 비판적 의견이 봉쇄되는 것에 대해서 전혀 경계하지 않았다. 대책위에서 인권과 민주성은 정치적 명분일 뿐, 실제 행위의 원칙이 아니었던 것이다. 실제 행위에서 일관적으로 관철된 원칙은 피해호소인과 공간/행진의 패권을 보전하고 관철시키는 것뿐이었다. 그 결과, 반성폭력 운동이 줄기차게 비판해온 가해자들의 전형적인 행태(문제제기의 묵살·무마·탈정치화·은폐, 피해자에 대한 책임전가, 책임회피 등)가 대책위에서 그대로 반복되었다. 이는 ‘근대적 보편성을 비판한다’는 명목으로 보편적 정당화를 포기한 여성주의는 기득권 여성의 패권주의 이상이 될 수 없음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성폭력 상담소의 편파성과 폭력성


실제로 수진이 사퇴 이후 상담소를 찾아가 ‘A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가.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이 된다’고 상담하였기 때문에 상담소에서는 사건의 전말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담소의 자문 내용은 ‘원 사건이 성폭력인지 아닌지는 판단하지 않는 것을 전제로 이야기하겠다’ ‘가해자가 피해를 호소하는 일은 흔히 있다’ ‘익명화를 한다 해도 성폭력 사건을 피해자의 동의 없이 공개하는 것은 명예 훼손에 해당한다’는 것 등 수진을 가해자로 규정하고 사건을 비공개하라는 것이었다.…상담소는 이에 대해 “일반적인 절차와 피해자 보호, 성폭력 사건의 비밀유지 원칙과 관련된 입장 등 원칙적인 내용”이었다고 해명하였다. 그러나, 성폭력 사건이 아닌 사건에 대해 “성폭력 사건인지 아닌지는 판단하지 않는다”고 해놓고 ‘성폭력 사건’의 일반적 원칙을 근거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사건이 성폭력이 아니라는 사실을 외면하기 위해 논의를 유보하고 사실상 사건을 성폭력으로 취급하는 것으로, 성격 규정을 생략하고 사실상 사건을 성폭력으로 취급했던 공간의 방식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 게다가 “가해자가 피해를 호소하는 일은 흔히 있다”는 것은, 가해자로 취급받는 것이 너무나 부당하고 고통스럽다는 수진의 지금까지의 호소를 완전히 무성의하게 묵살하는 발언이었고, “명예 훼손” 운운은 조언이라기보다 사실상 운영위원회에 대한 협박에 가까웠다. 성폭력상담소의 조언 내용은 전문 기관의 것이라기에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편파적이고 폭력적이었으며, 이는 대책위에 관여한 학생 활동가들뿐만 아니라 여성주의의 전문가들 역시 말썽을 만들기보다 소수의 피해자를 침묵시킴으로써 운동의 일관성을 유지하기를 선호하는 경우가 있다는, 매우 비관적인 결론을 시사한다.




참고3:


충남공대위에 묻는다

 

 

우리 볼셰비키-레닌주의자는 지난 8월 20일 충남성폭력공동대책위원회(이하 충남공대위)가 주최한 공개토론회에 참석했고그 공개토론회 현장에서 폭행위협욕설 등의 폭력사태가 있었다.

 

8월 29일에 제출한 글(<볼셰비키-레닌주의자 충남 성폭력 사건 공개토론회 참관기>)을 통해 어떠한 폭력사태인지를 밝혔고그에 대한 공대위의 견해를 물었다.

 

<충남공대위>는 그 날 있었던 욕설 등의 폭력 사태에 대해 반성하고 있는가사과할 용의가 있는가? ‘성적’ 폭력이 아니므로 문제되지 않거나정당방위인 것인가?--8월 29, <참관기>

 

하지만 지금까지 아무런 답변이 없다.

 

한 달이 넘도록공개적 이견과 명백한 폭력에 대해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충남공대위의 모습을 보며충남공대위가 과연폭력 일반에 대해 일관된 태도를 가지고 있는지이견에 대해 열린 태도를 가지고 있는지혹시 공대위가 내거는 "()폭력에 맞선 투쟁"이 위선인 것은 아닌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충남공대위에 다시 묻는다.

 

-8월 20일 발생한 일이 폭력적 사태였다는 것을 인정하는가?

 

-폭력적 행위와 언사의 대상이 된 피해자에게 사과할 의향이 있는가?

 

-혹시 성폭력 이외의 폭력은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충남공대위가 주최하는 앞으로의 행사에서 공대위의 입장과 다른 견해가 제출될 경우 유사한 폭력사태가 또 다시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데그것을 예방하거나 저지할 의향이 있는가?

 

-우리는 지난 7월 25<‘충남성폭력’ 사건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통해 서로의 입장이 맞서는 상황에서완전한 결론과 합의에 도달하지는 못할지라도진지하고 깊은 토론을 통해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에 대한 지침을 노동계급 다수에게 제공하기 위한 공개토론회를 제안한 바 있다그러나 충남공대위가 8월 20일 주최한이른바 '공개토론회'는 주최자의 견해와 다른 견해에 폭력으로 대응했고 여지껏 그에 대해 일언반구 없다그렇다면 충남공대위는 이 문제를 공개적으로 토론할 용의가 없는 것으로 간주해도 되는가?

 

2013년 9월 27일


볼셰비키-레닌주의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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