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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출처 – 국제볼셰비키그룹(IBT)


붕괴의 벼랑으로 향하는 중국

기형적 노동자국가의 자본주의

   


자본주의가 증대되면서 중국의 수백만 노동자, 빈농 그리고 기타 자본주의에 희생된 인민은 대규모로 투쟁에 나섰다. 이들이 수립한 조직들은 원시적이며 지역에 고립되어 있으나 투쟁 참여 대중의 수와 투쟁의 강도는 증대되고 있다. 2002년 봄 중국 북동부 공업지대에 위치한 도시 다칭의 5만여 석유 노동자와 랴오위안의 3만여 금속 노동자들은 가두 시위, 도로 봉쇄, 점거농성 등을 통해 생산규모 축소와 정리해고에 대항했다. 이 투쟁들은 특정 국영기업들의 해체를 저지하고 해고 노동자들의 권리를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투쟁의 논리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1949년 중국혁명으로 수립된 국유화 및 중앙계획 기관들을 파괴하려는 자본주의의 악성 종양을 제거하기 위해 광범위한 공세를 펴야한다.

 

중국혁명으로 중국의 지배계급 하수인들과 이들의 제국주의 주인들이 소유하고 있던 생산수단은 몰수되었고 중국은 자본주의 세계시장의 지배에서 해방되었다. 중국공산당 지도자 마오저둥의 새 혁명 정권은 생활조건, 의료, 교육 등을 상당히 그리고 즉시 개선하는 조치들을 급속히 도입했다. 공산당 간부들은 자신들이 사회주의 새 중국의 기초를 건설하고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러나 공산당이 도입한 소련의 관료적 명령경제 체제는 노동계급 자신의 통치체제를 수립하지 못했고 할 수도 없었다. 노동계급 자신의 통치체제는 진정한 사회주의 발전의 핵심 전제조건이기 때문이다.

 

중국은 북한, 월남, 쿠바 등과 질적으로 유사한 “기형적 노동자국가”이다. 이 체제에서는 자본주의가 제거되었으나 정치권력은 “공산”당이 조직한 특권 관료층의 독점물이다. 특히 공업화의 기초가 성취된 뒤에는 직접 생산자들이 생산 결정과정에서 배제될 경우 집단적 경제체제는 효율적으로 운영될 수 없다. 더욱이 맑스와 레닌이 반복하여 주장했듯이 사회주의는 국제적 분업체제와 선진국 노동계급의 정치권력 장악이 없이는 생각할 수도 없다. 일국의 시야에 고착된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의 “일국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는 이들이 세계 제국주의와 타협하여 공존하려는 욕구의 표현일 뿐이다.

 

중국공산당의 타락한 관료층이 수행할 사회적으로 필요한 기능은 없다. 이들은 자신의 특권과 특전을 보존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다. 이들의 정치 강령은 근시안적 임기응변의 짬뽕에 불과하며 경쟁적 자본주의와 중앙계획이라는 근본적으로 적대적인 두 경제체제에서 빌려온 정책의 조합에 불과하다. 이러한 체제의 모순이 계속 축적되면서 공산당의 기동의 여지는 축소되고 있다. 중국의 부르주아 계급과 노동계급은 마오저둥의 농민 게릴라군대가 권력을 장악한 1949년 당시보다 훨씬 강력하다. 그리고 공산당 관료층의 사기, 자신감, 사회적 권위 등은 과거에 비해 크게 약화되어 있다.

 

1976년 마오저둥의 사망 직후 공산당의 등샤오핑 분파는 시장의 요소들을 도입하여 경제성장을 가속화시키겠다는 약속과 함께 권력을 장악했다. 이들은 경쟁 분파들에 의해 “자본주의자들”이라고 비난받았다. 그러나 등샤오핑 분파는 자본주의를 활용하여 노동자국가 내에서 당을 청산시키기는커녕 보다 강화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지금까지도 중국 경제의 잠재 이윤 창출이 상당한 전략 부문들에는 개인 투자가 금지되어 있다. 그러나 중국은 세계경제에서 비중이 더욱 커지고 있다. 외국인 직접투자는 1983년의 10억 달러에서 2002년의 530억 달러로 증가했다. 현재 중국은 전체 무역량에서 세계 6위를 달리고 있다. 그런데 이 액수의 상당 부분은 기계와 장비들을 수입하여 중국 국내에서 생산한 후 제품을 해외시장에 수출하는 외국기업들의 덕분이다:

 

 ”월마트 체인점에 들어가면 신발과 의류에서부터 장난감과 전자제품에 이르기까지 온통 중국산 제품들로 선반이 내려앉을 지경이다. 그러나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중국산” 레이블은 이 제품들 가운데 중국 토착기업에 의해 생산된 것은 거의 없다는 중요한 사실을 하나 감추고 있다. 사실 국제적으로 활동하면서 해외에 자신의 제품을 판매하는 중국 토착기업을 단 하나라도 찾아내기는 대단히 힘들다.

 

이것은 중국의 수출 주도형 제조업 팽창이 외국인 직접투자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외국인 직접투자가 중국 기업의 국내 활동을 대체하고 있다.”

와이 황, 티 카나, [대외정책](Foreign Policy), 2003년 7월-8월

 

 지난 25년 동안 소비재 부문은 급격히 팽창했다. 이 결과 중국 인구의 소수이지만 상당수가 높은 생활수준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 때문에 사회 모순이 격화되고 체제 안정이 위협받고 있다. 공산당 정권이 규칙을 정하고 에너지, 중공업, 금융 등 핵심 부문들을 국가기구가 직접 통제해왔기 때문에 중국의 자본주의는 심각하게 왜곡된 채 발전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새로 등장한 수천 명의 백만장자들은 공산당을 타도하고 중앙계획의 잔재를 해체하기를 열망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공산당의 “개혁”이 서서히 누적되는 것으로 달성될 수 없다. 집단적 소유체제에서 사적 소유체제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반혁명이 필요하다. 관료층은 새로운 부르주아 계급으로 변모될 수 없다. 공산당 간부들의 일 부분은 현재의 지위를 이용하여 막대한 재산을 축적할 수 있지만 나머지 대다수는 자본주의가 복귀될 경우 그나마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을 전부 잃게 될 것이다.

 

 

관료집단과 부패

 

개인 이득을 중시하는 쪽으로 나가고 있는 사회에서 중앙권력이 정치를 독점할 경우 대대적인 부패는 당연지사이다. 현재 중국의 모든 기업 심지어 대기업들도 자기들이 동원하거나 동원한다고 생각하는 정치적 특혜에 따라 운명이 정해진다. 정치적 행정적 재정적 연줄을 갖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이것을 관시(guanxi)체제라 한다.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하는 관료집단의 모순적 지위는 관시체제에 대한 관료집단의 태도에서 드러난다. 개인의 축재는 관직 수행에 따른 응분의 보답이라고 널리 간주되지만 부패는 처형으로 징벌될 수 있는 범죄이다. 사형은 일관되지는 않지만 빈번하게 강제된다.

 

관시체제로 인해 최고 정치지도자들의 자식들은 상당한 재산을 축적할 수 있었다. 1990년대에 등샤오핑의 막내아들 등지팡은 부동산과 금융업에 손을 대 부자가 되었다. 장저민의 큰아들 장미안흥은 샹하이 “정보통신산업의 제왕”으로 불리면서 막대한 재산을 끌어 모았다. 등샤오핑의 경구 “부자가 되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다”는 유명하다. 그러나 이런 일에도 한도가 있는 법이어서 공산당의 “소통령들” 일부는 부패 혐의에 연루되어 관직을 박탈당하고 공직에서 쫓겨났다.

 

상관들과 관계가 틀어지거나 대중매체에 폭로된 관리들이 부패 혐의로 기소되었다. 부패 폭로하는 것은 관료들 사이의 싸움에서 기본 무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위험한 게임이 될 수 있다. 폭로하는 자가 감옥에 갇힐 수도 있기 때문이다. 범죄조직, 토지 민영화, 국가재산의 대규모 절도 등에 연루될 경우 엄벌에 처해지고 국가소유의 리무진을 개인적 용도로 사용하거나 인가되지 않는 통행세를 부과하거나 친구에게 계약을 체결해주거나 저리융자 혜택을 주는 등 비교적 경미한 불법행위는 일상적으로 무시된다. 정실주의는 관시체제의 일부로 인정되고 있다.

 

가장 놀라운 부패 사건 가운데 하나가 중국 북동부에 위치한 랴오닝성의 수도이자 전국에서 4번째로 큰 도시인 선양에서 일어났다. 관직 매매, 절도, 계약서 위조, 살인 등이 1999년에 폭로되기 시작하자 처음에는 폭로자에 대한 탄압이 세차게 가해졌다. 부패를 보고하려던 퇴임 관리 조우웨이는 2년의 강제노동형에 처해졌다. 홍콩의 잡지 [전선]에 일련의 폭로 기사를 실은 기자 장웨이핑은 9년의 징역형에 처해졌다. 결국 정부에서 이 사건을 처리하게 되었을 때 랴오닝성의 지사 보실라이 등 연줄이 좋은 여러 명의 용의자들은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때 보실라이의 부친은 공산당 정치국원이었다.

 

정부의 공식 조사가 시작되어 부패 경찰, 검사, 판사, 의원, 세관 공무원, 은행가, 개인  사업자 등이 관련된 범죄망이 드러났다. 관련자들은 모두 선양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리우용이라는 고위관리는 자기가 개발하려던 부동산을 규제에서 해제시키기 위해 30명 이상의 살인을 조직하기까지 했다. 선양의 부시장 마시양동은 마카오와 라스베가스에서 도박 자금으로 공공기금 4백만 달러를 유용했다. 선양의 시장 무수이시는 6백만 달러 상당의 금괴와 150개의 롤렉스시계를 시골의 두 별장 벽 속에 숨겨놓았다. 그런데 그가 이 별장들을 장식하기 위해 진짜로 알고 들여놓았던 골동품들은 나중에 상당수가 가짜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러한 대규모의 부패는 기형적 노동자국가의 생명을 확실히 위협한다. 엄청난 국가재산을 연줄이 좋은 관료들이 전용한다는 비난이 빈번하게 서민들에 의해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부패가 국영기업의 파산과 뒤이은 대대적 실업의 주범이라고 생각한다. 공공재산을 보호하고 부패를 뿌리뽑기 위해 직장위원회 네트워크의 수립을 요구해야한다. 이 요구는 대중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을 것이며 잠재적으로 혁명적 의의를 지닐 것이다. 효과적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이 조직들은 현장 노동자들에 의해 민주적으로 선출되고 공산당 기구와는 완전히 독립해야한다. 이 위원회들은 반혁명의 공세에 대항하여 중국 노동자들을 투쟁으로 불러일으키는 중요한 단계가 될 수도 있다.

 

 

인민해방군

 

인민해방군의 장교 집단은 오랫동안 관료집단의 핵심부위가 되어 농장, 섬유공장 그리고 기타 사업들을 직접 운영해왔다. 군대 기업이 일반에게 제품을 판매할 수 있도록 허용한 등샤오핑의 결정은 예상했던 대로 장교 집단 내부에 광범위한 부패와 친자본주의 성향을 증대시켰다. 자신의 저서 [국가와 혁명]에서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 국가기구를 핵심적으로 집약하면 특정 사회계급의 이해 즉 이 계급의 소유체제를 방어하는 군대이다. 국가체제의 핵심인 군대의 일부가 다른 사회체제에 이끌리면 어떤 국가든지 즉각 위험에 빠진다. 1990년대 말 수상 주롱지는 공산당의 가장 공공연한 친자본주의 분파를 대표하고 있었다. 이 분파는 인민해방군이 시장에 더욱 이끌리는 것을 불편해 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관료집단의 다수는 사태에 위협을 느꼈다. 결국 1998년 7월 정부는 군대 기업의 청산을 요구했다. 1999년 초 더욱 단호한 조치를 취하여 군대의 중앙조달을 집중화하여 지방의 군사령관들과 기업가들 사이의 수많은 연줄을 끊어버렸다.

 

중국공산당은 대단히 잡다한 요소들의 집합체로서 노골적인 친자본주의 분자들로부터 1960년대에 재앙을 가지고온 문화혁명의 잔당인 정통 “맑스주의-레닌주의-마오저둥 사상”분자들까지 온갖 분자들을 포괄한 곳이다. 당을 유지시키는 요소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관료집단이 통제력을 상실할 경우 중국이 큰 혼란에 빠질 것이라는 것이며, 또 하나는 관료집단의 개인적 안전, 정치적 권위, 특권 등을 보존하려는 욕구이다. 소련과 동구 진영에서 자본주의가 복귀하면서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재앙이 닥쳤고 소련,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등이 해체되는 것으로 이 재앙은 절정에 도달했다. 이 역사를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잘 인식하고 있다.

 

축재를 할 정도의 빽이 없는 장교들 대부분은 민영화와 자본주의 세계시장으로의 계속된 편입에 대해 심각한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 기존의 사회 기관들을 그대로 보존하기를 원하는 보수적 분자로 이루어진 관료집단의 좌파는 산업이 하락하고 있는 북동부, 빈곤과 저개발의 서부와 중부 등에 집중되어있다. 자본주의 경제활동의 중심이 되고 있으며 호황을 누리는 남동부는 자본주의 복귀의 절정까지 경제 “개혁”을 완수하는데 가장 열성적인 관료집단 우파의 본산이다.

 

지금까지는 관료집단 내부의 싸움이 공산당 내부로 제한되었다. “실용주의” 중도파는 보수파와 친자본 “개혁파”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사적 부문의 계속된 성장과 세계시장으로의 더 깊은 편입이 생산성과 생활수준을 상승시켜 큰 탈 없이 현 상황이 지속되기를 실용주의자들은 희망하고 있다.

 

최근까지 공산당의 가장 유명한 보수주의자는 리펑 수상이었다. 그는 1991년 8월 소련의 반혁명 이전까지 소련공산당의 리가쵸프나 야나예프와 같은 노선의 관료였다. 소련의 옐친과 같은 친자본주의 분파의 지도자는 전임 수상 주롱지였다. 등샤오핑의 계승자인 장저민 주석은 고르바초프와 같이 양극단 분파들 사이에서 조정자 역할을 하고 있다.

 

중국의 페레스트로이카(개방)는 상대적으로 성공했다. 그 이유의 일부는 글라스노스트(민주화)와 함께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저민은 자본주의의 발전을 허용하면서도 핵심 경제부문들의 국가소유를 그대로 유지했다. 또한 언론, 경찰, 군대 그리고 기타 모든 통제 및 사법 기관들을 관료집단의 수중에 확실히 장악했다. 이 때문에 공산당체제는 그대로 유지되어왔다. 장저민의 후계자로 후진타오가 선택된 이유는 그가 공산당 통치체제를 유지시키는데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 실용주의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하여 장저민은 중앙군사위원회 의장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등샤오핑 역시 “정치에서 은퇴”했을 때 이렇게 했었다.

 

노동계급과 빈농에게 국가소유체제의 방어는 죽고 사는 문제이다. 노동계급의 정치혁명을 통해 공산당 타도를 주창하면서도 맑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 복귀에 대항하여 중국의 기형적 노동자국가를 무조건 방어한다. 그리고 반혁명에 대항하여 스탈린주의 관료집단과 군사적으로 동맹할 용의가 있다.

 

1991년 8월에 다수의 소련 노동자들은 옐친을 적으로 간주했으나 쿠데타를 일으킨 야나예프 등의 국가비상위원회 소속 보수파 스탈린주의 관료들은 노동계급에게 꼼짝 말고 있으라고 지시를 내렸다. 반혁명이 세력을 규합하여 대세를 장악하기 전에 사태에 개입할 준비가 된 소규모 혁명조직은 친사회주의 노동자들을 충분히 규합하여 사태를 반혁명의 패배로 유도할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었다. 옐친의 승리는 불가피하지 않았다. 다만 혁명 지도부의 부재가 이 결과에 하나의 조건을 제공했을 뿐이었다.

 

반혁명이 성공할 경우 중국의 자본주의국가는 러시아의 경우처럼 빠르게 그리고 상대적으로 피를 흘리지 않고 정착되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들의 이해가 “자본주의자들”과 대치된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는 수백만 중국 노동자들은 이미 관료집단과 완전히 독립적으로 투쟁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말의 러시아에 비해 중국 자본주의의 발전 리듬은 훨씬 완만하고 굴곡이 심했다. 따라서 집단적 소유를 방어하고 공산당을 타도하는데 필요한 계급의식, 강령, 조직 등을 발전시킬 기회는 아직도 있다.

 

 

자칭 트로츠키주의자들과 중국

 

노동계급 정치혁명의 강령은 원래 1930년대에 관료화된 소련에 대해 트로츠키가 제출했었다. 현재 트로츠키의 강령을 옹호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대부분의 자칭 트로츠키주의 조직들은 실제로는 이 강령을 이행하지 않고 있다. 예를 들어 미국 스파르타쿠스동맹(SL)의 중국에 대한 입장은 널뛰기의 연속이었다. 1997년 이 조직은 이렇게 선언했다: 일련의 국영기업들을 매도하려는 공산당의 계획은 “집단적 계획 경제의 그나마 남은 부분을 전부 청산하고 중국을 자본주의로 복귀시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노동자 전위], 1997년 10월 3일, 강조는 원저자). 그러나 이로부터 2년 후 이 조직은 여전히 이렇게 주장했다: “현재 중국에서 자본주의 복귀 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세력은 스탈린주의 정권 자체이다.”([노동자 전위], 1999년 6월 11일). 2000년에 이 조직은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이 기형적 노동자국가의 실질적 종말을 의미한다고 선언했다:

 

“세계무역기구 가입은 국가의 외국무역 독점의 남아있는 부분을 제거하면서 경제를 세계 자본주의 시장의 압력에 더욱 노출시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따라서 이 조치는 국영산업의 상당 부분을 민영화하려는 1997년 공산당의 결정을 밀어붙이는 도구가 될 것이다.”

[노동자 전위], 2000년 4월 7일

 

 이 비관적인 전망은 틀린 것으로 판명이 났다. 중국의 세계무역기구 가입은 세계시장에 중국을 통합시키는 상당한 조치이며 자본주의 복귀 압력을 가중시킬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국영부문의 극적인 민영화는 아직 현실화되지 않았다. 스파르타쿠스동맹은 중국의 스탈린주의자들을 자본주의 복귀의 주도 세력이라고 규정한다. 이것은 1991년 8월 옐친의 건달패들에 대항해 야나예프의 국가비상위원회에 대해 이 조직이 군사적 동맹을 선언하지 않은 사건을 회상시킨다. 이들은 스탈린주의 쿠데타 세력에 대한 우리 조직의 군사적 동맹 노선을 비판하면서 이들이 “옐친만큼이나 자본주의 복귀에 전념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국제볼세비키그룹 — 이 조직의 정체는 무엇인가?[The International Bolshevik Tendency --- What Is It?]“)

 

1996년 스파르타쿠스동맹에서 분립한 국제주의그룹(Internationalist Group[IG])의 지도자들은 개인적 권위 때문에 1991년 소련 쿠데타에 대한 스파르타쿠스동맹의 노선을 지지한다. 그러면서도 중국에 대해 기본적으로 같은 노선을 견지하는 스파르타쿠스동맹을 비판했다. 이에 대해 스파르타쿠스동맹은 이렇게 응수했다: 국제주의그룹은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이 혁명을 수행할 능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스탈린주의자들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다. 국제주의그룹의 지도자 잰 노든이 “동독의 늙어빠진 스탈린주의 통치자들이 혁명적 본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중국 관료집단의 일부가 자본주의 반혁명에 저항할 것이라는 환상을 유포했다”고 스파르타쿠스동맹은 비난했다([노동자 전위], 1999년 6월 11일). 그러나 스탈린주의 관료들의 일부가 자본주의 복귀에 대항하여 노동자들 편에 설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리고 혁명가들은 관료집단 내부의 모순들을 활용하여 독립적 정치투쟁에 나선 노동자들의 지위를 강화시키려고 당연히 노력할 것이다.

 

사실 국제주의그룹이 스탈린주의자들에 대해 환상을 가지고 있다고 스파르타쿠스동맹이 비판하는 것은 참으로 기이하다. 왜냐하면 이 조직이야말로 1980년대 초 “유리 안드로포프 여단”을 창설하여 세인의 관심을 끌었으며 아프가니스탄 친소 장교들의 쿠데타를 지원하기 위해 소련군을 그곳에 진주시킨 브레즈네프를 “찬양했기” 때문이다. 스파르타쿠스동맹이 스탈린주의자들에 대해 가지고 있던 환상은 1990년 1월 절정에 달했다. 이때 이 조직의 창립자이자 지도자인 제임스 라벗슨은 동베를린의 최고위 스탈린주의자 3명에게 공짜로 조언을 하기 위해 개인적 모임을 주선하려고 애를 썼었다. 이 3인은 소련의 장군 스네트코프, 동독 정보부장 볼프, 동독의 집권당인 통일사회당의 지도자 기지 등이었다([1917] 제 10호의 글 “마법의 나라의 라벗슨 추종자들[Robertsonites in Wonderland]“을 참조하시오).

 

스파르타쿠스동맹의 스탈린주의자들에 대한 환상은 가끔 스탈린주의자들에 대한 혐오증과 함께 나타난다. 예를 들어 1983년 대한항공 007호 스파이 비행기 사건 때 소련이 미 제국주의의 도발을 비행기 격추로 대응했을 때 [노동자 전위]는 소련을 “야만적 행위보다 더 나쁘다”는 표현으로 소련을 비난했다([트로츠키주의 게시판 제 1호](Trotskyist Bulletin No.1)를 보시오). 이에 반해 국제주의그룹은 스파르타쿠스동맹이 스탈린주의자들에 대한 환상을 가지던 순간에서 얼어붙어 있다. 이들은 기지, 스네트코프, 볼프에게 접근한 것을 오류라고 인정해본 적이 없으며 어쩌면 앞으로도 중국의 스탈린주의 지도부에게 조언을 하려는 유사한 시도를 지지할지도 모른다.

 

국제주의그룹과는 달리 스파르타쿠스동맹의 노선은 얼어붙어 있지 않다. 이 조직의 간부들은 특정 정치 강령이 아니라 지도자 라벗슨에게 충성하는 근본 속성을 가지고 있다. 라벗슨은  이 조직의 노선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 수년 동안 중국의 스탈린주의자들을 자본주의 복귀 세력으로 간단히 규정해 오다가 이 절박한 예측이 현실로 나타나지 않은 것에 양심이 찔려 노선을 조용히 바꾸고 자본주의 복귀에 대한 진지한 저항이 중국공산당을 분열시킬 수 있다고 다시 주장하고 있다.

 

지금까지 스파르타쿠스동맹은 자신이 이전에 보인 스탈린주의자들에 대한 혐오증 편향에 대해 어떤 설명도 해본 적이 없다. 그러면서도 노동자인터내셔널조직위원회(CWI)의 뻔뻔스러운 개량주의 지도자들이 자기와 같은 입장을 채택한 것을 분노에 차 비난하고 있다:

 

“피터 태프가 주도하며 영국에 중심을 둔 어느 조직은 중국공산당 제 16차 당 대회에 대해 이렇게 논평했다: ‘중국은 자본주의로 완전히 복귀하는 길에 서 있다. 다만 당의 지배 파벌은 서서히 그리고 억압적인 권위주의 통치를 유지하면서 이렇게 하려고 한다’([사회주의자], 2002년 11월 22일). 중국 정부를 ‘권위주의적’ 자본주의 복귀 정권으로 규정하는 것을 통해 태프의 추종자들 그리고 이들과 유사한 조직들은 ‘민주주의’를 증진한다는 미명 하에 제국주의자들이 지지하는 중국 내 공산주의 세력을 지지한다. 1991년 소련에서도 이들은 옐친의 ‘민주적’ 반혁명을 지지했다.

[노동자 전위], 2003년 11월 21일

 

 스파르타쿠스동맹은 지혜로운 척 이렇게 설교하고 있다:

 

“동유럽이나 구 소련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중국의 자본주의 반혁명은 스탈린주의 독재 체제의 붕괴와 공산당의 분열을 초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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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소련의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이 최후의 정치적 위기를 맞았던 1991년 8월에 스파르타쿠스동맹은 자기들이 지금 공격하고 있는 태프의 노선과 같은 노선을 주창하면서 이렇게 주장했다: 소련을 지금처럼 보존하려는 국가비상위원회 “보수파”와 자본주의를 복귀시키려는 옐친의 건달패들 사이에는 차이가 전혀 없다.

 

데이빗 노스의 사회주의평등당(Socialist Equality Party) 역시 트로츠키의 정치적 유산을 계승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조직은 자신의 웹사이트에 중국에 대한 특집기사를 정기적으로 올리면서도 중국이 부르주아 국가인지 기형적 노동자국가인지를 명시하지 않은 채 이 문제를 애써서 회피한다. 이 조직은 일관되게 스탈린주의 혐오증을 표방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옐친, 보웬사 등 소련 진영 내 모든 반혁명 분자들을 편들어왔다. 미래에 있을 결전의 날에 이들은 또다시 “민주적” 반혁명의 편에 확실히 설 것이라고 우리는 예상한다.

 

혁명 조직이라고 자처하는 여타 그룹들은 사회주의평등당보다는 덜 수줍어한다. 예를 들어 영국의 노동자권력 그룹은 이렇게 주장한다: 중국의 기형적 노동자국가는 이미 조금의 흠집도 없이 그리고 주위의 주목을 전혀 받지 못한 채 자본주의 국가로 복귀했다.

 

그러나 진지한 부르주아 정치평론가들이 이들보다 차라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

 

“1990년대 중국에 대한 가장 잘못된 생각은 이 나라가 사회주의 국가가 더 이상 아니라는 것이다. 정치국, 중앙위원회 그리고 5천만 당원의 전국망을 가진 자칭 공산주의 정권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이 잘못된 생각은 상식이 되어버렸다. 이 생각은 전 세계  기업들의 이사회 회의실은 물론이고 신문과 잡지에도 반복되었다. 중국의 공식 언론은 선전을 통해 매일 ‘중국의 특징을 가진 사회주의’라는 공식 신조를 선언하고 있다. 그러나 외부 세계는 이것을 정치적으로 수용하기 힘든 자본주의 개념을 중국식으로 표현한 것으로 간주한다….1990년대 중국은 자유시장 경제가 아니다. 다만 중국식으로 개조되고 있을 뿐 기본은 사회주의 국가이다.”

[중국의 꿈], 조우 스타드웰

 

 

중국의 증권시장, 은행 그리고 세계무역기구 가입

 

지금까지 자본주의는 중국을 위험스럽게 잠식해왔다. 그러나 여전히 자유시장과는 대치되는 사회적 정치적 질서에 의해 제한 받고 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와는 달리 중국의 증권시장이나 은행은 높은 이윤을 창출할 가능성이 가장 큰 것처럼 보이는 기업에 투자를 유도하는 기능이 없다. 중국에서 투자는 국가기구에 의해 통제되고 있으며 궁극적인 투자의 기준은 이윤 극대화가 아니라 지배 관료집단의 지위와 사회 통치를 유지하는 것이다. 부르주아 평론가들은 이것을 대단히 기이한 현상으로 간주한다:

 

“두 자리 수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고 있던 1990년대 초 중국은 국영부문에 대대적으로 투자했다. 투자의 대부분은 상업적으로 생존능력이 없었다. 이 결과 은행들은 엄청난 액수의 악성부채를 떠 안았다. 아마 이 액수는 은행 자산의 50%에까지 육박했을 것이다.

와이 황, 티 카나 [대외정책], 2003년 7월-8월

 

 기업이 현재 보유하고 있는 자산과 미래에 거둘 이윤에 기초하여 “주식”을 발행하여 자본을 확보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자본주의 주식시장의 기능이다. 주식 가격은 잠재적 이윤 능력에 따라 등락을 거듭하고 회사 주식의 대다수를 장악하는 투자자는 회사의 경영권을 행사한다.

 

자본주의 주식시장이 올바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특정 투자가 어느 정도의 이윤을 보장할 수 있을 지에 대한 정보가 널리 공개되어야 한다. 이 때문에 엄격한 언론검열이 시행되는 자본주의 국가 내에서 금융언론은 검열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롭다. 시장은 정보 공개, 회계, 감사, 보고 등과 관련된 정교한 규정들을 가지고 있다. 이 규정들은 이론상으로는 정보에 대한 접근의 차이로 인해 발생하는 경쟁 왜곡 현상들을 제거한다. 시장의 큰손들은 내부자 거래에 대한 금지조항들을 일상적으로 무시하지만 이 금지조항들이 충분히 대규모로 위반될 경우에는 제재가 가해진다. 왜냐하면 대규모로 자행되는 위반행위는 금융시장을 불안하게 만들고 자본가 계급 전체의 공동이익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샹하이와 쉔젠의 주식시장은 20년 간 운영되어왔고 현재 6천만 명의 중국인들이 거래 계좌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주식시장들의 역할은 투자 자본을 이윤이 높은 기업에 대주기보다 상장 기업들에게 재정을 지원하는 것이다. 그런데 상장기업의 대부분은 국영기업들이다. 정부는 어느 기업이 상장될 것인지 그리고 어떤 금융 정보가 공개될 것인지에 대해 결정권을 가지고 있다. 이 결과 주식 가격은 조작된 정보, 내부자 거래, 사기행각 등에 기초하여 널뛰기를 한다. 이러한 행위들은 자본주의 국가에서라면 금융언론에 의해 폭로될 것이다. 중국의 주식 보유자들은 주식 가격의 등락에 따라 돈을 벌기도 잃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은 기본적으로 경마장에서 경주마에 내기를 거는 관객과 같은 처지에 놓여있을 뿐이다:

 

“중국에서 관료들은 수문장의 역할을 하면서 자본 배분을 철저히 통제한다. 또한 개인기업이 주식시장 정보를 획득하고 성장을 위해 필요한 자본에 접근할 수 있는 능력을 엄격히 규제한다. 진정으로 중국 정부는 금융시장을 국영기업을 유지하는 방법으로 주로 활용해왔다. 이러한 정책들은 엄청난 왜곡을 불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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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엄청난 왜곡 때문에 [하버드 중국 평론]은 1998년 여름호에 이렇게 결론 내렸다: 샹하이 주식시장은 뉴욕 주식시장에 비해 약 800배나 주가 변동율이 심하다.

 

2001년 12월 세계무역기구에 가입했을 때 중국 정부는 이렇게 선언했다: 수입 상품이 국내에서 세계시장 가격으로 판매되는 것을 허용하겠다. 이 조치는 철강 등 전략산업 뿐 아니라 국민의 대다수가 살고 있는 농촌을 초토화시킬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문서상의 합의에도 불구하고 중국 정부는 국내 경제에 대한 상당한 통제력을 유지해왔다. 예를 들어 2년 내에 중국 시장에 진입할 것으로 예상되었던 외국 보험회사들은 정부의 허가증이 있어야 영업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정부 당국은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허가증을 내준다. 중국 통신시장의 절반은 외국 기업에 개방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으나 개방 조건은 중국 감독기관이 정한다. 문제는 이 감독기관이 중국 최대의 전화선 공급업체와 주요한 이동통신 회사 2개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규정에 따르면 전체 자본의 4분의 3은 중국측 합작회사가 내야한다([파이낸셜 타임즈](런던), 2002년 3월 15일).

 

세계무역기구와의 합의에 따라 외국은행들의 중국 내 영업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이 은행들이 각각 1년에 지사를 하나씩만 설립하도록 규정해놓았다. 현재 중국의 4대 국영은행들이 전국에 13만개의 지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외국은행들이 효과적으로 경쟁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지나야할 것이다. 모든 금융 거래의 3분의 2를 장악하고 있는 이 4대 은행들에 대한 지분은 재무부가 100%를 소유하고 있다. 다른 은행들과 신용기관 대부분 역시 정부 기관들의 소유이다. 그리고 이들은 새로운 투자와 관련하여 중앙 당국의 철저한 감시를 받고있다. 자본주의 국가와는 달리 중국에서 투자는 지배 관료집단의 필요에 의해 결정된다:

 

“중앙정부는 은행을 ‘부차적 예산’으로 간주한다. 이것을 통해 과거의 문제들을 슬그머니 무마시키는데 필요한 재원을 편리하게 마련한다. 문제가 심각한 국영기업을 수술하는 것은 출발점에 불과하다. 이와 함께 건설해야할 첨단기술단지가 있고 댐을 세워야할 강이 있고 서부지역의 모든 것이 개발을 기다리고 있다. 국가의 지도자들은 국영은행이 자신의 역할을 해줄 것을 기대한다.”

[중국에 닥칠 붕괴], 고든 창

 

 은행 대출의 대부분은 아직도 도시 노동력의 55%를 고용하고 있는 국영기업에 돌아간다. 이들 대부분이 빚을 갚지 못한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이런 상황이라면 자본주의에서는 은행이 지원금과 저리 융자를 통해 유지시키는 국영기업과 은행은 모두 파산할 것이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에서 국영기업은 정부의 포고령에 의해서만 파산된다.

 

 

경제특구와 국영기업

 

마오저둥의 사망 후 도입된 핵심 “개혁들” 가운데 하나는 집단농장을 가내기업으로 분해시킨 것이었다. 현재 농촌에서는 수백만 가구가 국가로부터 좁은 농토를 빌린다. 몇몇 농민들은 대규모 사업을 시작할 정도로 충분한 자본을 축적했지만 대다수는 절박한 빈곤으로 추락했다. 그러나 가장 성공한 중국의 농민도 서방의 초국적 거대 농업기업과는 경쟁이 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시카고 현물시장에서 옥수수는 2000년 9월에 톤당 100달러였으나 중국에서는 175달러였다([미니애폴리스 스타 트리뷴], 2000년 10월 1일). 현재 중국 농촌의 노동력은 거의 20%가 실업자이다. 1억 명 이상의 전직 농민들이 도시 주위의 빈민굴에서 노점상, 매춘, 경미한 범죄 등에 종사하면서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 중국 농업부의 예상에 따르면 세계무역기구의 요구에 따라 수입 규제를 완화할 경우 최소한 2천만 개의 농업 관련 일자리가 사라질 것이다.

 

1980년 정부는 홍콩과 인접한 광둥성에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4곳의 경제특구를 설치했다. 현재 경제특구는 약 1만2천 곳으로 늘었는데 대부분은 남동 해안에 집중되어 있다. 이것들은 근본적으로 기형적 노동자국가 내부에 존재하는 자본주의 경제 식민지인데 중국의 전체 제조업 생산량의 8분의 1을 차지하고 수출의 절반을 담당한다. 초기 투자를 한 홍콩과 대만 출신의 중국인 자본가들은 경제특구가 대단한 이윤을 창출한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중국은 세계에서 임금이 가장 싼 나라에 속해서 멕시코 임금의 절반 수준이고 미국 임금의 20분의 1 수준 밖에 되지 않는다. 임금이 이렇게 낮은 이유는 중국공산당이 노동조합 설립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기 때문이다.

 

공산당이 직접 관리하는 북동 지역의 거대한 국영기업들은 1949년 혁명이 수립한 집단적 경제의 핵심부이다. 1980년대에는 국영기업이 중국의 비(非)농업생산을 거의 전부 차지했지만 지금은 그 비중이 30%로 하락했다. 그러나 국영기업들은 중공업, 첨단 군수산업, 에너지산업, 통신산업 등 경제의 핵심부문이며 전체 고정자산의 약 70%를 차지한다. 더욱이 국가의 재정원인 세금을 비중에 비해 엄청나게 많이 낸다. 국가는 국영기업을 통해 노동자들에게 일자리, 식량, 의료, 주택, 연금 등 “철 밥그릇”을 보장하기 때문에 국영기업은 관료집단의 권력 유지에 필요한 핵심 도구이다. 시장의 압력이나 생산자의 민주적 통제가 없기 때문에 국영기업은 절대적 수치와 외국기업들과의 상대적 수치로 비교했을 때 당연히 생산성이 꾸준히 하락해왔다.

 

부르주아 금융언론은 국영기업을 실패한 체제의 유해로 간주하면서 가능하면 빨리 해체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제국주의자들이 없애려는 “유물”인 공산당 관료집단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1990년대 말부터 공산당은 국영기업 “합리화”를 시도해왔다. 생산성이 최악인 기업은 파산시키고 다른 기업들은 자본주의 기업을 모델로 합병을 추진하고 주식을 발행한다. 또한 생존능력이 부족한 부문들은 팔아치운다. 이것이 공산당의 계획이다.

 

2003년 5월 후진타오 주석은 이렇게 선언했다: 그동안 정부 부처나 지방자치단체가 운영해온 국영기업들은 이제 중앙의 국가자산감독경영위원회(SASAC)가 관리할 것이다. 이 조치의 목표는 일본이나 남한의 재벌을 모델로 하여 전략산업에서 국제적으로 경쟁력 있는 열 몇 개의 국영기업을 설립하는 것이다. 이 조치는 집단적 경제에 대해 관료집단이 통제력을 행사하는 근본 모순을 해결하지는 못할 것이다. 다만 단기적으로 국영기업의 실적을 개선시킬 수는 있을 것이다.

 

국영기업의 “합리화” 결과 노동자들과 은퇴자들의 기본 서비스는 감축되었고 노동력은 급격히 축소되었다. 1998년부터 지금까지 국영기업들은 2천5백만에서 5천만 개의 일자리를 없앴다. 노동계급의 생활수준이 이렇게 전방위로 공격당하자 수백만 노동자들은 크게 분노하고 있다. 실업률이 40%에 도달한 북동 공업지대에서는 “경찰과 도둑” 대신 “사장 죽이기”가 어린이들의 놀이거리가 되었다.

 

 

서부 지역의 거대 개발과 티베트, 신장의 민족문제

 

공산당은 최근 몇 년간 간쑤, 구이저우, 닝샤후여, 칭하이, 산시, 쓰촨, 윈난, 신장 등 서부지역 성들에 살고 있는 민족들을 위해 “서부 거대개발” 사업을 시작했다. 이 지역은 중국 전체 면적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3억 인구를 포괄하고 있다. 그리고 전략적으로 핵심적인 국경지역, 핵심 군사기지, 나라의 가장 중요한 석유 및 광물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지리적 고립, 정치 불안정, 원시적 사회기반시설, 낮은 교육 수준을 가지고 있으며 널리 흩어진 인구 등의 특징 때문에 이 지역은 자본주의 방식의 투자가 적합하지 않다.

 

거대 개발 사업은 도로, 철도, 공항, 신장에서 샹하이까지 2천5백 마일에 걸친 시가 140억 달러의 천연가스 파이프라인 등의 건설을 포함하는 것으로 국영부문의 대대적 팽창을 의미한다. 중국의 가장 넓은 성인 신장은 가장 빈곤한 성의 하나이며 터키어를 말하는 8백만 위구르족의 고향이다. 이곳에는 회교 민족주의의 불만이 들끓고 있다. 1997년 초 신장 서부의 도시 이닝에서 발생한 반체제 시위에서 위구르족 500명이 체포되었다. 국제사면위원회에 따르면 이 가운데 30명이 분리주의 및 종교와 관련된 활동으로 2001년 4월 사형선고를 받았다.

 

정부는 석유와 면화를 수출하는 신장에 한족의 이주를 적극 권장하고 있다. 한족은 이미 석유산업을 운영하고 있으며 이들이 새로 운영하는 대규모 면화농장은 위구르족이 운영하는 소규모 개인 면화농장을 생산량의 면에서 앞지르고 있다. 위구르족이 아직은 한족보다 수가 많지만 한족은 미래에 국가 주도 개발의 최대 수혜자가 될 것이다.

 

위구르족에 대한 정부의 억압은 서방 언론의 주목을 거의 받지 못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이 생포한 탈레반 포로들 가운데 300명이 위구르족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미국의 “테러대전”에 중국이 파트너로 비열하게 합류하려고 하지만 미국은 신장의 회교 근본주의에 대한 중국의 우려를 인정하거나 위구르족 포로들을 중국 당국에 넘기는 것을 한사코 거부하고 있다. 미국의 정책 결정자들은 신장의 회교 광신도들을 장차 이용할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이것은 미 중앙정보국이 20년 전에 오사마 빈 라덴의 아프간 무자헤딘에게 무기와 훈련을 제공한 것과 같은 논리이다.

 

위구르족과 달리 티베트족의 곤경은 친제국주의 “민주주의자들”의 마음에 가까이 다가와 있다. 그런데 이들은 1949년에 티베트가 대단히 후진적이고 승려들이 우글거리는 봉건사회였으며 인구의 평균수명이 30세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무시한다. 1950년대 초 권력을 처음 장악한 후 중국공산당은 티베트의 종교국가주의자 및 귀족 기생충들과 “공동전선”을 체결하여 응석받이 10대 소년 달라이 라마와 그의 하수인들에게 아양을 떨려고 했다. 그러나 이 협약은 몇 년 내에 깨지고 1959년에 대규모 반란이 인민해방군에 의해 진압되고 티베트족 수만 명이 희생되었다. 달라이 라마는 히말라야산맥을 넘어 인도로 도망쳤다. 중국 정부는 티베트를 직접 통제하고 귀족과 수도원의 토지들을 농민들에게 배분하여 전통 사회체제를 뿌리째 뽑아버렸다.

 

고유한 언어, 문화, 영토를 가지고 있는 티베트족이 한족의 지배에 분노를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위구르족과 마찬가지로 티베트족도 민족으로 존재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들은 중국 내 피억압 민족들의 민족적 권리를 기형적 노동자국가의 방어에 종속시켜야한다. “자유 티베트”를 위한 국제 캠페인은 중국에 대한 제국주의자들의 공격의 한 방식이다. 이것은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1959년에 미 중앙정보국이 티베트 반란에 개입한 것은 공공기록에 나와있다. 몇 년 전 연합뉴스(AP)는 이렇게 보도했다: “달라이 라마 망명정부는 미 중앙정보국으로부터 1960년대에 매년 170만 달러를 받았다고 오늘 인정했다….”([뉴욕 타임즈], 1998년 10월 2일). 18만 달러의 연간 지원금이 “달라이 라마를 위해 책정되었다.”

 

반동 이데올로기와 민족주의 감정은 계급으로 분열된 사회의 물질적 불평등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진실을 맑스주의자들은 인식하고 있다. 가능한 한 우리는 탄압보다는 교육과 경제적 동기부여를 통하여 사회 후진성의 영향력을 잠식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레닌주의 정부는 소수민족지역의 개발을 위한 풍부한 지원금을 진정한 자치와 결합시켜 한족 국수주의를 퇴치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지역 정치기관들을 토착민족이 스스로 장악할 권리, 이들이 원하는 언어로 교육과 정부의 공공 서비스를 받을 권리, 정치적 표현과 여행의 자유를 누릴 권리 등을 부여하는 것이 이 노력에 포함되어 있다. 티베트족과 위구르족이 자치의 권리를 누려야 한다는 점에 중국의 혁명정부는 동의할 것이다. 동시에 티베트의 전통 지배 집단 그리고 신장의 회교 지도자들이 대중의 지지를 받을 경우 이들과 혁명정부는 공존할 의향이 있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제국주의의 올가미

 

지난 몇 년간 중국의 목에 걸린 제국주의의 올가미는 상당히 촘촘해졌다. 제한 없이 제국주의적 약탈을 할 수 있는 곳으로 중국을 되돌리는 것이 미국의 가장 우선하는 핵심 전략이다. 미국이 최근에 벌이는 신식민지 전쟁들의 목적 가운데 하나는 기형적 노동자국가인 중국에 대한 우위를 강화시키는 것이다. 중국은 갈수록 수입 석유에 크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이라크에 생존능력이 있는 미국의 괴뢰정부가 수립될 경우 중국은 진짜 큰 위협을 받게 될 것이다.

 

아프가니스탄 점령 중에 키르기즈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 건설된 미군 기지들은 한때 소련의 영토였던 중앙아시아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차단시켰다. 아프가니스탄, 남한, 일본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는 미국은 현재 월남, 태국과 해군, 공군 기지 사용권 협상을 진행 중이다. 더욱이 대만에 계속 무기를 공급하고 있다. 현재 미국의 대외정책은 중국에 경제적 압력을 가하고 해외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저지시키는 데에 집중되어 있다. 동시에 미국의 미사일은 중국의 핵심 요충들을 영구히 겨냥하고 있다. 따라서 미국이 어떤 핑계를 대든 중국에 대해 군사도발을 일으킬 위험성은 상당히 있다.

 

 

파륜궁은 중국공산당에게 위협적인 존재인가?

 

중국공산당은 언제나 정치에 대한 독점권을 조심스럽게 지켜왔다. [중국의 꿈]에서 조우 스타드웰은 이렇게 말했다: “중국인들은 정부의 허가 없이는 낚시클럽, 알코올 중독자 자활 모임, 지역 신문 등을 조직할 수 없다.” 지역 밖의 다른 사람들과 연결이 되어 있는 어떤 조직도 위협으로 간주된다. 중국의 뉴스 매체들은 주요 산업재해, 부패 스캔들, 파업, 시위 등을 보도하지 않는 것이 관행이다. 정부에 대한 전국적 규모의 분노를 촉발시키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공산당의 통제는 언제나 불완전했으며 인터넷의 등장은 정권에게 새로운 골칫거리이다. 파륜궁의 급속한 성장에 인터넷이 기여했다고 널리 인정되고 있다. 파륜궁은 일종의 중국식 뉴에이지 명상/신체단련 운동으로 일반인들에게 제공하던 기공/태극권 강습에서 개발되어 나왔다. 정부는 오랫동안 기공/태극권을 대부분 노인들의 체력단련과 사회활동의 일종으로 간주하고 체제에 해롭지 않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이 운동의 많은 조류들이 가지고 있는 반(反)유물론적 철학의 토대를 하찮은 것으로 무시해버렸다. 정부는 심지어 기공연구협회를 설립하였다. 이 단체에서 리홍지의 주도로 파륜궁이 1990년대 초에 등장했다. 1994년 리는 이 협회에서 탈퇴하여 뉴욕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파륜궁은 “진실, 자비, 금욕”을 설교하면서도 혼혈 인종은 내세에서 자리를 제대로 잡기 어렵다고 경고했다. 또한 컴퓨터와 비행기 등 현대의 기계를 인간으로 위장한 외계인이 발명한 것이라고 가르친다. 일련의 5가지 운동을 연습하면 파륜궁 회원들은 자기 몸 속에 황금빛의 회전하는 “파륜”을 갖게 될 것이며, 이 파륜을 통해 이들은 종교적 해탈과 신체 건강을 동시에 성취하고 여러 우주들로부터 에너지를 흡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더욱더 많은 사람들이 연금이나 값싼 의료서비스의 혜택을 받지 못할 지도 모르는 사회에서 파륜궁의 미신은 당연히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 “새로운” 중국에서 성공하지 못하고 있는 노인, 실업자 그리고 기타 서민들에게 파륜궁이 인기인 것은 전혀 놀랍지 않다.

 

1999년 지방 당국이 파륜궁 집회의 소란스러움에 대해 불평하기 시작한 후 중국과학원의 이론물리학자 헤조우시우는 파륜궁의 가르침에 대한 비판서를 썼으며 이것은 널리 읽혀졌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 파륜궁 회원 1만 명은 1999년 4월 25일 중국의 정치 엘리트들이 사는 베이징의 종란하이 지구 외곽에서 명상 집회를 열었다. 공안 당국은 이 시위를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크게 놀랐다. 공산당은 직접적 요구에 초점이 맞추어진 지방 차원의 항의시위는 그냥 넘길 수 있다고 느낀다. 그러나 자신이 통제하지 못하는 조직 활동은 절대 금지하고 있다. 이 시위 이후 파륜궁 집회는 금지되었으며 다수의 파륜궁 지도자들이 감옥에 갇혔다. 그러나 이 운동은 지금까지 살아남아 있다. 최소한 5개의 성에서 파륜궁 지지자들은 한때 정부의 텔레비전 채널을 해킹하여 “파륜궁은 좋다!”는 단순한 권유문에서부터 시작하여 이 컬트를 선전하는 한시간 이상의 프로그램을 방영하기까지 했다.

 

중국 스탈린주의자들의 정치적 파산 상태는 너무 심각하여 파륜궁 같은 원시적 사상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공산당 지도자들은 사상에 사상으로 대처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탄압을 동원할 수밖에 없다. 파륜궁은 의심의 여지없이 제국주의자들과 이들의 용병인 반혁명 분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그러나 파륜궁은 폴란드의 연대 노조 운동과는 다르다. 연대 노조 지도자들은 폴란드의 기형적 노동자국가 내부에서 의식적으로 친제국주의 세력의 앞잡이가 되었다. 그러나 파륜궁에게는 이렇다할 정치적 사회적 강령이 없다. 맑스주의자들은 이 특이한 미신 운동에 대한 공산당의 탄압에 책임을 지지 않는다.

 

파륜궁은 무너지고 있는 노동자국가의 불안정한 삶과 물질적 궁핍을 피하려는 절박한 중국인들 다수가 애용하고 있는 확실히 해로운 아편이다. 그러나 공산당 내부를 포함하여 사회의 구석구석에는 파륜궁보다 훨씬 위험한 친자본주의 세력이 이미 뿌리내리고 있다. 문제는 한때 파륜궁이 인민해방군 내부 심지어는 공산당 상층부에까지 널리 전파된 적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현상은 한때 “맑스주의-레닌주의-마오저둥사상”에 고무를 받았던 공산당 간부들이 있었지만 지금 공산당은 자기의 특권과 특전을 유지하는 일에만 온통 관심을 쏟고 있다는 증거이다.

 

 

중국 노동계급의 투쟁사

 

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 내내 노동계급은 끊임없이 자신의 조직을 건설해왔다. 1956년-1957년의 짧았던 “백화제방”의 자유화 시기에 중국의 공식 노동조합인 전국노동조합총연맹(ACFTU)의 외부에서 현장 중심의 “불만시정회”가 다수 조직되어 파업의 물결을 일으켰다. 이 운동의 절정은 광둥성의 도시 광저우에서 부두 노동자 절반이 임금삭감에 맞서 투쟁했을 때였다. 그러나 결국 공산당은 파업투쟁을 진압하고 다수의 노동계급 지도자들을 강제노동수용소에 보냈다.

 

“문화혁명”으로 알려진 1960년대 중반 관료집단 내부의 권력투쟁은 잠시나마 노동계급의 독자적 투쟁을 위한 공간을 열어주었다. 수십만 노동자들을 포괄한 대중 조직들이 수립된 샹하이를 중심으로 1966년-1967년에 노동계급의 전투성은 상당히 상승했다. 노동계급 조직들은 공산당의 시 정부를 무너뜨리고 짧으나마 샹하이 인민 꼬뮌을 수립했다. 1967년 2월 초 백만 노동자들이 참석한 집회에서 꼬뮌은 수립되었다. 샹하이 꼬뮌은 단명한 삶 내내 공산당에 식상한 일 분파가 주도했다. 이들은 1871년 빠리 꼬뮌을 다룬 맑스의 [프랑스 내전]에 기초하여 통치할 의지를 천명했다. 그러나 이들은 대중에 의해 지도부를 선출하고 소환해야 한다는 이 고전적 저서의 언명은 무시했다. 결국 수립된 지 3주일이 지나서 꼬뮌은 위대한 지도자 마오저둥의 “요청”에 의해 해체되었다. 결국 “꼬뮌”은 중국공산당 일 분파의 도구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 조직에 대한 샹하이 노동자들의 열정은 번지수를 잘못 찾은 셈이었다. 이 사건은 관료집단의 불안정성과 노동계급의 휘발성을 동시에 증명했다.

 

1976년 4월 마오저둥주의 극좌파였던 “4인방”의 정책에 대항하여 현장 중심의 투쟁이 또 다시 물결쳤다. 이 혼란에 책임을 지고 등샤오핑은 두 번째로 잠시 권력에서 쫓겨났다가 다시 복귀했다. 등샤오핑의 “자본주의자”들은 권력을 강화시키는 과정에서 정치탄압을 잠시 완화시켰다. 이 틈을 타서 노동자들은 독자적인 노동조합 수립을 요구하고 저임금, 자의적인 경영진 그리고 기타 새로운 시장 “개혁”의 해악 등을 비난했다. 타이유안 제련소에 중심을 둔 어느 신문은 이렇게 제안했다: 진정으로 자기 이해를 방어하려면 노동자들이 직접 대표들을 선출하고 소환하는 독자적 조직을 건설해야한다. 이 주장은 즉시 침묵을 강요당했으나 이 신문이 주창한 사상은 지금도 살아남아 있다.

 

1989년 4월 초 학생 시위자들이 천안문광장을 점령하고 민주개혁을 요구하자 베이징 공장 노동자 대표들이 즉시 이 투쟁에 합류했다. 이 달 말 베이징노동자자치연맹(WAF)이 철도, 제철, 항공 노동자들에 의해 수립되었다. 다른 주요 도시들에서도 이와 유사한 조직들이 건설되었다. 초기에 이들은 전국노동조합총연맹과는 별도의 독자적 노동조합을 합법화시키라는 요구에 역량을 집중했다. 그러나 곧 임금, 생활수준, 관료적 특권, 임금격차, 직장 민주주의 등의 사안들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다른 도시의 노동자 조직들은 조직적 연대를 시작하여 다수 조직들이 베이징노동자자치연맹에 대표들을 보냈고 자치연맹은 운동의 중심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1989년 5월 18일에 대부분 노동자들로 구성된 1백만 인파가 베이징에서 시위에 나섰다. 이로부터 일주일 후 전국”노동자자치연맹” 준비위원회가 수립되었다. 공산당은 이 움직임을 심각한 위협으로 간주했다. 대중의 총파업 요구에 긍정적이던 전국노동조합총연맹은 갑자기 6월 2일 노동자자치연맹을 불법화시킬 것을 정부에 요구했다. 그리고 이틀 후 정부에 충성하는 군부대들이 시위대에 무자비한 공격을 가해 수백 명을 살해했다. 노동자 자치 운동에 참여한 혐의로 기소된 수천 명의 노동자들은 감옥에 갇히거나 처형되었다.

 

노동자자치연맹은 결국 진압되었지만 이 조직은 노동계급의 독자적 정치행동의 잠재력을 강력하게 증명시켰다. 1990년과 1994년 사이에도 노동자 권리 향상을 위한 조직들이 시도되었으나 탄압 당했고 활동가들은 감옥에 갇혔다. 공산당의 노동자 통제기구인 전국노동조합총연맹만이 합법성을 인정받고 있다. 또한 이 조직에게는 “합리적 요구”를 제출하고 “시장 개혁을 지지하며 가능한 한 생산의 정상적 질서를 회복시키는” 선에서만 노동 분쟁이 허락되고 있다.

 

 

노동자 투쟁의 상승

 

최근 몇 년간의 대대적 실업으로 촉발된 노동자 투쟁의 상승은 1949년 혁명이래 최고의 전투성을 보이고 있다. 공안부가 작성했다고 인정되는 보고서에 따르면 1998년과 2002년 사이에 일상적 항의투쟁의 평균수치는 2배 이상으로 증가했다. 이 투쟁들의 대부분은 개별 직장 차원의 일자리 회복, 의료서비스, 실업수당 등 직접적 요구들에 집중되고 있지만 시위자들은 빈번하게 경영인들과 지역 당국의 부패를 비난하기도 한다.

 

노동자 투쟁의 규모와 범위가 상승하자 공산당 당국은 바짝 긴장하고 있다. 2001년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어느 연구 결과는 이렇게 보고했다: “미숙한 일 처리와 다른 복합적인 이유들 때문에 최근 몇 년간 일부지역에서 집단행동의 빈도가 증가해왔고 투쟁의 규모도 확대되어 천 명 또는 만 명 수준의 투쟁이 빈번하다”([뉴욕 타임즈], 2001년 6월 2일). 이 보고서는 이렇게 불평했다: “시위자들은 빈번하게 교량과 도로를 봉쇄하고 당과 정부의 사무실에 난입하고 당과 정부의 위원회에게 강제로 명령한다. 심지어는 폭력행사, 기물파괴, 약탈, 방화 등 범죄행위를 자행한다.” 시위에 “농민과 은퇴 노동자들로부터 현업노동자, 개인기업주, 제대 병사, 관리, 교사, 학생들까지 가세하는” 양상이 더욱 우려스럽다.

 

1989년 노동자 투쟁에 관련되었던 일부 투사들이 현재 노동자 투쟁에서 나름의 역할을 하고 있다. 1989년 노동자자치연맹 투쟁에 연루되어 7년 징역형에 처해진 장샹광은 1998년에 다시 10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번에는 미국의 선전매체인 [자유 아시아 라디오]에 정보를 제공했다는 명목으로 기소되었다. 그러나 그의 진짜 범죄는 해고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한 슈푸군 노동자협회를 조직한 것이었다. 이 조직은 자의적인 세금징수에 대한 농민들의 항의투쟁을 지원하기도 했다. 유에티안시앙은 고참 노동운동가로 1983년 샤오양 시의 노동자공제회를 출범시켰다. 1989년에 샤오양 시의 자치노동자조합을 지도한 혐의로 그는 감옥에 갇혔다. 그리고 1999년에 간쑤성에서 [중국 노동자 모니터]를 출판한 역할과 관련하여 다시 10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999년 수에지펑은 허난성의 독립 노동조합을 조직한 죄로 정신병동에 수감되었다. 2002년 4월 30일에 발표된 국제사면위원회의 보고서는 카오마오빙의 투쟁을 소개했다. 독립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관리자들의 부패를 폭로하려던 그는 장쑤성의 비단공장 노동자였다. 그는 결국 정신병동에 보내져 약물을 강제로 복용과 전기충격 “요법”을 당했다.

 

[자유 아시아 라디오]와 연관되어 있는 홍콩의 [중국 노동 게시판]과 친자본주의 민주당 등 제국주의 앞잡이 조직들은 중국공산당의 지배를 와해시키기 위해 냉소적으로 노동자 투쟁을 부추기고 있다. 대다수의 노동운동가들은 자본주의 시장”개혁”의 부정적 결과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다수는 제국주의자들의 “민주” 하수인들이 늘어놓는 사탕 발림식 약속에 대해 환상을 가지고 있다. 지역의 투쟁을 지도한 분자들은 스탈린주의 공산당의 탄압으로 희생되었으나 친자본주의 “개혁가들”과 동맹 이외의 다른 대안을 찾지 못할 경우 자본주의 반동의 하수인으로 쉽게 전락할 수 있다.

 

 

노동계급의 정치혁명을 위하여!

 

소련과 동구에서 자본주의 반혁명이 승리하면서 국제노동운동은 역사상 최대의 패배를 당했다. 이제 중국의 기형적 노동자국가도 같은 운명에 놓일지 모른다는 절박한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인종, 종교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계급의 차원에서 사회적 긴장이 축적되고 있기 때문에 현 상황은 그대로 유지될 수 없다. 그러나 1990년대 페레스트로이카를 경험한 소련 노동자들과는 달리 현재 수천만 중국노동자들은 다음을 올바로 인식하고 있다: ‘자본주의 시장관계의 증대는 자신들의 삶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대중의 불만이 고조되면서 동시에 중국의 강력한 부르주아 계급은 강력한 힘을 얻고 있다. 이들은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이 강요하는 자본주의 발전에 대한 규제에 불만을 품고 있다. 제국주의자들과 이들의 이념가들은 기가 꺾인 공산당이 타도되고 중국이 “정상적인” 자본주의 신식민지로 변모하기를 고대하고 있다. 이렇게 사태가 귀결될 경우 중국은 “세계화”의 야만적인 파괴와 생산수단의 전면적 민영화에 노출될 것이다. 이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부패한 공산당을 타도하고 자본주의 소유관계를 모두 몰수하고 노동자의 진정한 민주적 통치기구들을 수립하는 것이다.

 

만약 혁명조직이 전투적인 중국노동자들 속에 뿌리를 내릴 경우, 그 혁명조직은 자본주의의 증대를 치명적인 위험으로 인식하고 있는 수억 근로인민의 지지를 급격하게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중국노동계급은 반복해서 자신이 새로운 자본주의 사회질서의 증대에 저항할 수 있는 사회적 영향력과 의지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왔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요인이다. 현재 중국의 가장 중심적 사안은 새로 건설될 혁명적 노동자 정당의 중핵을 결집시키는 것이다. 이 트로츠키주의 정당은 제국주의의 파괴에 결연히 대항할 수 있는 국제주의 강령으로 무장되어야하며 중국혁명의 성과를 무조건 방어하고 확대시키는 일에 헌신해야한다. 미래 중국 노동자들의 정치혁명은 1949년 중국의 “상실”보다 세계 제국주의 질서에 훨씬 더 큰 타격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 혁명은 일본, 한국 그리고 기타 아시아 국가들에 혁명의 물결을 일으켜 세계적 차원에서 사회적 정치적 현실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를 통해 모든 인류에게 사회주의 미래를 향한 길을 열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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