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와 베네수엘라

(IBT) 베네수엘라: 국가와 혁명(28호, 2006)

by 볼셰비키-레닌주의자 posted Dec 24,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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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출처 – 국제볼셰비키그룹(IBT)


베네수엘라: 국가와 혁명

중남미 사회주의연방을 위하여!

 

 

중남미는 세계에서 소득 격차가 가장 큰 지역이다. 세계은행의 보고서 “세계개발지수”(2005년)에 따르면 중남미에서 1억이 넘는 인구가 하루 2달러도 안되는 수입으로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이 강요해온 긴축 및 민영화 정책으로 이 지역은 수십 년간 피폐에 피폐를 거듭하고 있다. 2005월 7월 5일자 [뉴스위크]지는 이렇게 보도하고 있다: “국영기업을 이 지역보다 빨리 팔아치운 곳은 없다. 1990년대 말까지 개발도상 지역들에서 발생한 민영화 수익의 55%가 이 지역에서 나왔다….”

 

제국주의 금융 자본가들은 “공공부문”을 축소하여 수도, 전기, 가스 등 공공시설들을 민영화해왔다. 그리고 냉소하며 주장하고 있다: 이 지역에 만연한 처절한 빈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외국자본이 더 많이 유입되어야한다. 그러나 제국주의 기업들에게 거대한 이윤을 안기는 국제통화기금의 긴축정책은 대중의 생활수준을 악화시키기만 했다. 제국주의자들의 뻔뻔한 거짓 주장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신자유주의”는 남미 전역에서 대대적인 저항을 불렀다. 2005년 6월 볼리비아는 석유/가스를 민영화한 1996년의 조치를 철회하라는 대대적인 항의시위가 터져 거의 내전에 직면했다. 한편 카리스마를 가진 베네수엘라 대통령 차베스는 미국 주도의 제국주의 정책(“워싱턴 합의”)에 반대하는 가장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그는 “볼리바르 혁명”의 기치를 내걸고 수백만 빈농과 노동자들의 지지를 구했다. 시몬 볼리바르는 스페인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남미의 독립투쟁을 벌인 인민 봉기의 지도자였다. 그의 이름을 딴 차베스의 “볼리바르 혁명” 운동은 미국 기관들의 지원으로 차베스 정권을 위협하고 전복하려는 베네수엘라 지배계급의 끈질긴 공격을 받아왔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 공격은 실패를 거듭했다.

 

한편 국제 좌익 조직들의 상당수는 “자본주의 극복”, “21세기 사회주의 건설”등 차베스가 남발해 온 언사에 한껏 흥분되어 있다. 이들은 열정적으로 소망하고 있다: 대통령의 지위를 이용하여 차베스가 반동세력에게 결정타를 가하고 베네수엘라를 혁명의 새로운 미래로 인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정말 위험한 환상이 아닐 수 없다. 1871년 파리 코뮌이 패배한 후 맑스는 이렇게 말했다: “노동계급이 기존의 (자본주의) 국가기구를 단순히 접수하여 이것을 자신의 목적에 맞게 행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본주의 국가기구를 철폐하고 자신에게 고유한 국가기구를 새로 수립해야한다.)”

 

베네수엘라 노동운동의 “맑스주의자들” 일부는 스승의 이 기본적 언명을 무시하고 있다. 테드 그랜트와 앨런 우즈가 주도하며 국제맑스주의경향(International Marxist Tendency)으로도 불리는 맑스주의인터내셔널준비위원회(Committee for a Marxist International, CMI)가 이의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 조직은 맑스주의 고전에 나오는 정의들과 인용문구들(‘기존의 국가기구를 철폐해야한다’ 등등)을 끊임없이 들먹이는 “종파주의자들과 형식주의자들”을 비난해왔다. 후자에 의해 맑스주의의 과학적 명제들이 공문구와 종교적 주문으로 돌변했다는 것이다(Marxist.com, 2004년 5월 4일). 맑스주의 기본원칙들을 종교처럼 또는 다른 방식으로 추종한다고 CMI를 비난하기는 절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어느 곳과 마찬가지로 베네수엘라에서도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하려면 부르주아 국가기구를 철폐하고 노동자권력 옹호에 헌신하는 기관들을 수립해야한다.

 

 

베네수엘라의 계급과 국가

 

북미의 제국주의 공룡 미국은 베네수엘라 사회를 결정적으로 규정해왔다. 자동차 문화의 태동기인 제 1차 세계대전 중에 거대한 석유 매장지가 베네수엘라에서 발견되었다. 이 때문에 이 나라는 전략상 크게 중요해졌다. 현재 이 나라는 세계 제 5위의 석유수출국이다. 석유는 이 나라 국내총생산의 3분의 1과 수출총액의 80%를 넘게 차지하고 있다. 1970년대 유가 상승으로 국내경제는 호황을 누렸고 이 때문에 도시화가 크게 진행되어 지금은 전체 인구의 87%가 도시에 살고 있다. 그러나 심각한 빈부격차 때문에 노동력의 절반은 도시의 거대한 빈민지역에 집중된 “비공식 부문”에 종사하고 있다. 이에 비해 농업은 국내총생산의 6%를 차지할 뿐이다. 식량 수요의 3분의 2는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1976년 1월 1일 페레스 정권은 석유산업을 국유화하고 베네수엘라석유공사(PDVSA)를 발족시켰다. 이로 인해 정부의 석유 수익은 증대되었다. 그러나 기존의 경영진이 새로 수립된 석유공사를 계속 운영했기 때문에 국제 석유 거대회사들은 이 나라의 원유를 상당히 할인된 가격에 계속 구입할 수 있었다. 1980년대에 베네수엘라석유공사는 해외에서 석유의 정제, 유통, 판매 관련 자산들을 매입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미국의 시트고 주유소 체인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1990년대에 석유산업은 또 다시 외국자본에 문을 열어주었고 현재 석유생산의 약 4분의 1은 외국기업들의 몫이다([차베스 시대의 베네수엘라 정세], 스티브 엘너 및 대니얼 헬링거 편집, 2003년).

 

제국주의자들이 베네수엘라를 움직이는 또 하나의 지렛대는 이 나라의 외채이다. 세계은행의 2005년 “세계개발보고서”에 따르면 2002년 현재 베네수엘라의 외채는 325억 달러로 국민총소득의 약 3분의 1이다. 외채의 상당 부분은 1970년대에 발생했다:

 

“외채는 1973년의 12억 달러에서 1978년의 110억 달러로 늘어났다. 천문학적 규모의 외국자본이 거대 국책사업들에 투입되었다. 수백만 달러 단위의 사업계약들이 현행법과 헌법을 무시하며 체결되었다. 유착의 고리들이 여기저기 형성되면서 엄청난 액수의 공적자금이 유용되었다. 이 과정을 통해 금융자본이 막대한 이윤을 챙겼다. 금융자본의 유명인사들이 국가기구의 요직을 차지했다.”

프레데릭 레베크, 중남미정보연대네트워크(RISAL), 2004년 5월 17일

 

베네수엘라의 “극소수 지배 엘리트들”은 제조업, 수송, 은행, 언론 등 핵심 부문들을 소유하면서 사회와 정치를 장악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수많은 연줄들을 통해 제국주의 금융자본의 중심부와 연결되어있다. 한편 이들의 사촌격인 거대지주들은 농촌을 지배하고 있다. 미국의 수도 워싱턴의 아메리카대륙위원회 선임연구원 씨쓰 들롱에 의하면 1960년의 토지개혁에도 불구하고 “개인소유 토지 전체의 약 75% 내지 80%를 전체 지주의 5%가 소유하고 있다”(Venezuelanalysis.com, 2005년 2월 25일). 극소수 백인 지배계급이 누리고 있는 기생적 지위는 인종주의에 의해 합리화되고 있다. 엘리트 “유럽인들”이 흑인, 인디오, 메스티조 대중보다 인종적으로 우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카톨릭 교회의 반(反)계몽주의 반동들은 이 지배 이데올로기를 신성한 교리로 위조하여 퍼뜨리고 있다.

 

 

‘카라카소’에서 ‘볼리바르 혁명’으로

 

유가 하락과 외채 급등으로 1980년대에 베네수엘라는 심각한 재정적 위기에 직면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페레스 정권은 국제통화기금이 명령한 긴축 및 “구조조정” 정책을 수용했다. 이에 따른 일 단계 조치는 연료 가격의 자유화였다. 1989년 2월 27일 아침 직장으로 향하던 인민은 버스요금이 밤새 100% 인상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들의 분노는 폭발했다:

 

“버스가 뒤집히고 불태워졌다. 그러나 이것은 봉기의 첫 징후에 불과했다. 몇 시간 내로 봉기는 확대되어 각종 상점의 약탈과 파괴가 확산되었다. 빈곤과 분노로 열이 오른 빈민지역 청년들이 카라카스의 상업중심지에 몰려다녔고 도시 중심부에 가까운 아빌라산 기슭의 특권 부유층 거주지에 모여들었다. 밤새 그리고 다음날까지 봉기와 약탈이 저지 받지 않고 계속되었다. 카라카소라고 불리는 이 저항운동은 위력을 보이며 장기화되었으나 곧이어 군대의 잔인한 탄압이 며칠간 이어졌다.”

[해방자의 그림자 속에서], 리처드 가트, 2000년

 

곧이어 군대의 발포로 무려 3천 명이 사망했으나 봉기는 진압되지 않았다. 이때부터 기존의 사회통제 방식은 무력화되기 시작했다. 베네수엘라공산당에서 떨어져 나온 민족주의 좌파 조직들인 사회주의운동(MAS)과 급진적 대의(LCR)는 급격히 성장하기 시작했다. 군대의 장교집단도 대중의 저항에 영향을 입었다. 1992년 2월 차베스 대령 주위로 결집한 장교들은 페레스 정권과 “신자유주의”를 전복하는 쿠데타를 감행했다. 그러나 이 시도는 실패하고 9개월 후 이들은 다시 쿠데타를 기도했으나 역시 실패했다. 이 거사는 “잠시” 중단되고 있을 뿐이라고 지지자들에게 공언한 후 차베스는 감옥에 끌려갔다.

 

1969년부터 1974년까지 대통령이었던 칼데라는 1994년 다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는 대중의 반감을 샀던 조치 일부를 즉시 철회하고 부도 은행 몇 개를 국유화한 후 차베스를 사면했다. 더욱이 사회주의운동(MAS)의 대표가 장관이 되자 칼데라 정권의 인민주의 색채는 더욱 강화되었다. 그러나 새 정부는 경제를 되살릴 수 없었고 1996년 4월 국제통화기금의 구조조정 정책에 다시 합의했다. 1993년부터 1999년까지 실질임금은 급격히 감소했으며 노동조합 조직률은 반감하여 13.5%에 불과했다. 실업률은 6.3%에서 14.9%로 배로 늘어났고 “비공식” 경제부문은 확대되었다:

 

“하루 소득이 2 달러가 채 되지 않는 빈곤층의 비율은 1991년의 32.2%에서 2000년의 48.5%로 늘어났다. 마찬가지로 하루 소득이 1 달러가 되지 않는 극빈층의 비율은 11.8%에서 23.5%로 늘어났다.”

 [국가개요: 베네수엘라], 세계은행, 2004년 8월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가속화되었다: “극빈층의 소득이 전체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981년의 19.1%에서 1997년의 14.7%로 낮아졌다. 반면 극부층의 소득 비중은 21.8%에서 32.8%로 증가했다”([차베스 시대의 베네수엘라 정세]),

 

1994년 3월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차베스는 “군민연합”의 기치 아래 제5공화국운동(MVR)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부패와 신식민지 노예상태에서 베네수엘라를 해방시키자는 강령을 내건 정당연합체 “애국의 구심(Polo Patriotica)”에 합류했다. 1998년 12월 선거에서 이 연합체의 대통령 후보로 나선 그는 56%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차베스는 세 가지 공약으로 1998년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첫째, 기독교민주당과 민주행동당의 양당정치체제인 ‘푼토 피호 체제”를 철폐한다(푼토 피호는 두 정당이 협약을 맺은 곳); 둘째, 부패를 종식 시킨다; 셋째, 빈곤을 완화시킨다.”

그레고리 윌퍼트, Venezuelanalysis.com, 2003년 11월 11일

 

대통령에 당선된 지 수개월 후 차베스는 제헌의회 소집 국민제안을 발의하고 압도적 지지를 얻었다. 1999년 7월 제헌의회 선거에서 그의 지지자들은 압도적 의석을 확보하여 다수당이 되었다. 이들은 베네수엘라가 “법과 정의에 의거하여 민주주의와 사회발전을 지향하는 국가”임을 선언하는 새로운 헌법 초안을 작성했다. 1999년 12월의 국민투표에서 70%의 찬성으로 새 헌법이 비준되었다. 이로써 “베네수엘라 볼리바르 공화국”이라는 새로운 정치체제가 탄생했다. 이로부터 7개월 후인 2000년 7월 차베스는 새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이제 국가기구 내부에서 구체제 지지자들과 신체제 지지자들 사이에 갈등이 격화되었다. 차베스는 그의 지지자들 상당수와는 달리 지위를 이용하여 개인적 이해를 추구하는 데 무관심한 것처럼 보였다. 구체제 출신들은 당연히 그를 신뢰하지 않았다. 볼리바르 운동이 빈곤과 “세계화”를 비난하면서 궁핍한 대중을 선동하지 않을까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군대 내의 충성파 간부들을 동원하여 차베스가 공무원 사회를 감시하자 이들은 크게 놀랐다:

 

“어느 고위급 경제고문이 이렇게 설명했다: ‘군대가 모든 곳에서 움직이고 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비밀 사업이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 군대의 정당이 진짜 존재하고 있다. 일부 부처에서는 이중권력이 형성되었다.’”

가트, 위의 글

 

미국 역시 차베스의 정책에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제국주의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차베스 정부는 외국 자산을 건드리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가트의 주장에 의하면 이 약속이 발표되었을 때 차베스는 개인적 책임을 회피하려고 국외에 나가 있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를 격렬히 비난하면서도 차베스 정권은 전기 및 알루미늄 공사의 민영화를 제안했다. 다만 석유공사는 계속 국영으로 남겨두었다. 취임연설에서 차베스는 정부의 경제계획을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 정부의 경제정책은 국가주의도 아니고 신자유주의도 아니다.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국가의 보이는 손을 맞잡는 중도노선을 추구하고 있다. 필요한 만큼의 국가개입과 가능한 많은 시장 질서를 원한다.”

위의 글

 

사회정의를 외치면서도 정부는 외채를 계획대로 계속 상환했다. 그리고 반동세력을 안심시키려고 마리차 이사구이레를 재무장관으로 임명했다. 그녀는 칼데라 정권의 장관으로 있을 때  대중의 분노를 산 조치들을 도입했었고 차베스의 지지자들로부터 비난 받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정부의 보수적 경제정책에도 불구하고 정권을 지지하는 대중들은 대통령이 자기편이라고 믿으면서 대담성을 발휘했다. 2001년에 구체제 추종자들과 신체제 추종자들 사이의 갈등이 폭발했다. 인기 하락을 만회하기 위해 차베스는 선거공약의 일부를 실현하는 49개 조치들을 밀어붙였다. 이 중의 하나는 외국기업의 석유산업 통제력을 제한하고 석유 로열티를 배로 인상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우익 야당은 정권 전복 기도를 본격화했다.

 

베네수엘라 자본가들 일부는 차베스 정권과 타협을 원했다. 그러나 대다수 자본가들과 소자본가들은 격렬하게 정부에 저항했다. 베네수엘라노동총연맹(CTV)의 부패한 노동관료들은 노동자들의 올바른 불만사항 일부를 참주선동으로 활용하면서 자본가들 편을 들고 차베스에 대항했다. 썩었으며 냉소적인 좌익 일부, 특히 알바니아를 지지했던 [적기] 그룹의 타락한 스탈린주의자들 역시 제국주의와 손잡은 “민주” 야당을 지지했다. 경영자협회와 석유공사 경영진의 지지를 등에 업고 노동조합총연맹은 2001년 12월 10일 차베스가 1개월 전에 발표한 포고령에 항의하며 1일 총파업에 나섰다. 그러나 2002년 2월 차베스는 석유공사의 최고 경영진을 해고하면서 이에 맞섰다. 이 조치는 이로부터 2개월 후 미국의 지원을 업고 일어난 쿠데타의 도화선이 되었다.

 

미국민주주의재단(NED)은 1980년대에 니카라과 반군에게 미국중앙정보국의 자금을 건네는 중간자 역할을 했었다. 그리고 미국노동총연맹(AFL-CIO) 산하 국제노동연대미국쎈터(약칭 연대쎈터)를 통해 베네수엘라노동총연맹에 오랫동안 자금을 제공해왔다. 연대쎈터는 과거 악명 높았던 자유노동개발미국연구소의 최신판이다. 1997년부터 2002년까지 미국민주주의재단은 연대쎈터에 베네수엘라 정부 전복활동 명목으로 70만 달러를 공식적으로 제공했다([월간평론]지, 2005년 5월). 베네수엘라 전복활동을 위한 미국민주주의재단의 예산은 2002년 4월 쿠데타 직전 시기에 4배나 증액되었는데 이것은 결코 우연한 사건이 아닐 것이다. 특히 이 단체는 베네수엘라의 미래전망과 우선적 정책과제들을 논의하는 회의를 2002년 3월에 주재했다. 이 회의에는 베네수엘라노총의 관료들, 경영자연합의 대표들, 카톨릭 교회의 고위층이 참석했다.

 

 

2002년 4월 쿠데타: 미국산(美國産)

 

2002년 4월 11일 베네수엘라 군부의 일부 분자들이 차베스 대통령을 체포했다. 그리고 경영자협회 회장 페드로 카르모나가 곧이어 대통령을 자칭했다. 그는 즉시 신헌법을 폐기하고 의회를 해산했으며 대법원의 권한과 운영을 정지시켰다. 또한 차베스의 포고령들을 전부 철회시켰으며 볼리바르 운동 지도자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더할 나위 없이 냉소에 차서 그는 이렇게 선언했다: “자유, 다원주의, 법치 등이 이 나라에서 충분히 존중되고 있다는 것을 모두 피부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연합통신사, 2002년 4월 12일). 그는 언론사, 지식계층 다수, 장교집단, 카톨릭 교회 그리고 물론 대자본가들과 거대지주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리고 그의 쿠데타 정부는 미국, 스페인, 국제통화기금 등에 의해 즉시 인정되었다. 그러나 선거로 수립된 정부를 미국 주도 하에 전복한 행위를 열성적으로 지지하는 나라는 중남미에는 하나도 없었다. 이 쿠데타에 미국이 개입한 사실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소식통들에 의하면 ‘이미 몇 개월 전에’ 카르모나 자신을 포함하여 쿠데타 모의자들은 미국을 방문하기 시작했고 지난 주말의 거사 몇 주 전까지 이 방문 행렬은 계속되었다. 이들은 백악관에서 부시가 중남미 핵심 정책입안자로 임명한 오토 라이쉬의 영접을 받았다.   라이쉬는 우익 성향의 쿠바계 미국인으로 레이건 행정부 시절에는 공개외교국 책임자였다. 이 기관은 이론상으로는 국무부 소속이었다. 그러나 의회조사 결과 그는 백악관에서 근무하는 레이건의 국가안보 보좌관 알러버 노쓰 대령에게 활동내용을 직접 보고한 것으로 드러났다.”

 [옵저버]지(런던), 2002년 4월 21일

 

미 해군 정보장교였던 웨인 마즌은 이렇게 보고했다:

 

“정보분석가 마즌씨가 어제 이렇게 말했다: ‘카라카스의 미국 대사관에서 육군무관 대리였던 제임스 라저스 중령이 쿠데타 기초 작업을 위해 현지로 간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다. 우리의 마약단속반 요원들도 이 일에 일부 관련되었다. 쿠데타와 무관한 작전 때문에 해군은 베네수엘라 해역에 있었으나 쿠데타가 진행되는 동안 통신정보를 지원했다고 알고 있다. 해군은 베네수엘라 군부에게 통신 방해 활동을 지원했으며 차베스 지지를 표명한 쿠바, 리비아, 이란, 이라크 등의 외교공관에서 오고 나가는 통신에 특히 관심을 집중했다.’”

[가디언]지(런던), 2002년 4월 29일

 

카르모나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시간은 48시간이 채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짧은 시간 안에 그는 스페인과 미국 대사들을 만났다. 그러나 차베스를 지지하는 수십만 대중이 미라플로레스 대통령궁 외곽에 집결하여 그의 대통령 직 복귀를 요구했다. 또한 쿠데타에 대한 정보를 미리 입수한 후 대통령궁 지하실에 숨어있던 차베스 충성파 군인 수백 명이 나타나 카르모나를 체포했다. 이로써 쿠데타는 실패로 끝났다.

 

일부 보도에 따르면 애초에 쿠데타에 가담했던 일부 고위 장교들은 쿠데타 첫날 카르모나가 보인 독재적 행동에 너무 구역질이 나 결국 그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이 사건은 쿠데타 불발 직후 차베스가 보인 행동을 일부 설명해준다. 차베스는 대통령직에 복귀하자마자 우익 대표들과 “대화”를 시도했으며 개혁조치 일부를 철회했다. 또한 해고된 석유공사 경영진이 복귀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 유화 제스처에 마음을 누그러뜨리기는커녕 우익 대표들은 그가 허약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해석했다. 그리고 2002년 12월 차베스 정권 타도를 위한 전국 총파업과 직장 폐쇄를 감행했다. 대자본가들 전부와 소수 노동자들은 직장폐쇄를 지지했다. 이 집단행동은 심각한 경제적 손실을 초래했으나 두세 달 후 와해되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차베스가 강경하게 나와 석유공사 경영진을 포함하여 가담자 1만8천 명을 즉시 해고했다.

 

노동계급 대다수와 중요 노동조합들 일부는 직장폐쇄를 적극 반대했다:

 

“석유공사의 직장폐쇄를 저지하고 현장이 복구되는 과정에서 그리고 특히 엘 일레나데로 데 야구아, 푸에르토 라 크루즈, 엘 팔리토 등의 정유소에서는 노동자들이 생산을 직접 통제하는 실험을 다양하게 전개했다. 후자의 경우 수십 명의 노동자들이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경제 사보타지에 저항했다. 노동자들의 압력 때문에 페라리 정유소는 강제로 조업을 재개하여 휘발유를 배급했다.

 

다른 산업에서도 이와 유사한 실험들이 있었다. 직장폐쇄 중에 노동자들은 회사를 점거한 후 조업재개와 노동자에 의한 생산 통제를 요구했다. 마라카이의 섬유공장 텍스달라와 라라주의 설탕공장 쎈트랄 카로라가 이런 경우에 속했다.”

프레데릭 레베크, 중남미정보연대네트워크, 2003년 6월 5일

 

2004년 4월 2일자 [전국카톨릭기자]지의 보도에 따르면 우익세력은 차베스 정권 전복을 위해 미국으로부터 연간 백만 달러를 지원받고 있었다. 직장폐쇄가 차베스 정권을 타도시키지 못하자 이들은 대통령 소환 국민투표를 위한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결국 2004년 8월 15일의 국민투표에서도 정권 반대 세력은 처참하게 패배당했다. 소환 국민투표를 주도했던 수마테 그룹의 지도자 마차도는 제국주의 앞잡이로 유명했다. 투표 결과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외국의 자금을 불법으로 사용했다는 죄목으로 그녀는 지금 형사 재판을 받고 있다. 그러나 차베스 정권을 압박하기 위해 부시는 2005년 5월 그녀를 백악관에 초대했다.

 

국민투표에서 차베스가 결정적으로 승리하자 정권 반대세력의 위력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국민투표 직후 열린 2004년 지방선거에서 차베스 지지 후보들이 승리했다. 대법원에서도 차베스 지지 판사들이 다수파가 되었다. 우익세력이 이렇게 후퇴하자 차베스는 최소한 말로나마 좌경화하여 포르투 알레그레에서 열린 2005년 1월의 세계사회포럼에서 “사회주의” 정책을 추구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정권 반대 세력이 우익 반동이라는 이유로 다수의 국제좌익들은 소환 국민투표에서 차베스를 지지했다. 그러나 차베스를 소환하고 대통령 선거를 새로 실시하자는 제안에 반대표를 던지는 것은 집권 부르주아 정부를 정치적으로 지지하는 행위이다. 맑스주의자들은 어떤 경우에도 이렇게 해서는 안된다. 노동계급의 명확한 대안을 표명할 수 없는 이런 상황에서 계급의식에 투철한 베네수엘라 노동자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은 투표용지를 더럽혀 무효표를 만드는 것이었다. 동시에 우익이나 이들의 제국주의 상전들이 법의 한계를 무시하고 차베스 정권을 군사적으로 공격할 때는 무기를 손에 들고 차베스 정부를 즉시 방어할 것이라는 점을 이들은 명확히 해야 했다.

 

 

사회 개량과 ‘볼리바르 운동’

 

차베스 정권은 “임무(missions)”라고 불리는 상당한 사회개량 조치들을 시행해왔다. 이로 인해 수백만 빈민은 정부로부터 중요한 지원을 받게 되었다. 임무 메르칼(Mission Mercal)은 대형할인점 체인을 수립하여 정부지원금으로 낮게 책정된 가격의 상품을 제공했다. 대대적인 문맹 퇴치 프로젝트인 임무 로빈슨(Mission Robinson)은 이미 백만 명이 넘는 빈민에게 읽기와 쓰기를 가르쳤다. 임무 리바스(Mission Ribas)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공부를 계속하도록 도와주고 있으며 임무 수크레(Mission Sucre)는 빈곤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제공하여 대학교에 다닐 수 있게 하고 있다. 임무 부엘반 카라스(Mission Vuelvan Caras)는 임무 리바스 과정을 마쳤거나 기타의 경우에 속하는 사람들에게 품위 있고 생산적인 직업을 영위할 수 있는 기술을 가르친다.

 

임무 바리오 아덴트로(Mission Barrio Adentro)의 목표는 무상의료 서비스 체계를 수립하는 것이다. 이미 쿠바의 의료전문가 2만 명이 병원을 차려서 도시와 농촌 빈민에게 건강 및 치아 관련 서비스를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베네수엘라는 국제시장 가격보다 훨씬 낮은 가격으로 쿠바에게 석유를 판매하고 있다. 2005년 6월에 시작된 임무 바리오 아덴트로 제 2편은 진료소, 재활 시설은 물론이고 병원도 세우고 있다. 현대 의료장비 구입을 위한 임무 바리오 아덴트로 제 3편은 차베스에 의해 이미 공언되었다. 임무 기적(Mission Miracle)은 환자 수천 명을 쿠바로 보내 돈이 없어서 하지 못한 수술을 할 수 있게 해주고 있다.

 

임무 프로그램들은 대중의 엄청난 호응을 얻고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수백 만 빈민이 “기층”의 참여라는 구호 속에 정치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임무 프로그램들의 다수는 “볼리바르 써클”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이 써클은 7명에서 10명 단위의 지역 조직이며 대중의 “임무” 프로그램 가입을 돕고 있다. 또한 프로그램의 과정을 지원하고 그 결과를 체크한다. 국가기구에 대해 준(準)독립적인 볼리바르 써클은 한때 적극 회원 2백만을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되었다. 그러나 현재 이 조직의 위세는 한풀 꺾이고 있으며 다른 조직들로 대체되고 있다.

 

2002년 2월 차베스 정부는 ’100가구에서 200가구로 구성되는 토지위원회가 빈민지역 주민에게 토지소유권을 부여하겠다’는 내용의 토지 소유와 관련된 획기적 계획을 발표했다. 이로 인해 도시지역의 토지위원회가 “볼리바르 혁명”의 중심으로 우뚝 섰다:

 

“볼리바르 써클이 한물가면서 이제 도시지역의 토지개혁이 대중을 동원하는 촉매가 되고 있다….5천 개가 넘는 토지위원회들이 적극 활동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5백만 명 즉 전체 인구의 20%가 토지개혁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이제 도시지역의 토지위원회는 베네수엘라 최대의 사회운동이 되었다.”

그레고리 윌퍼트, Venezuelanalysis.com, 2005년 9월 12일

 

또한 정부는 여성은행과 인민은행 등 소규모 금융기관들을 수립하여 중소기업과 협동조합에게 저리 융자를 제공하고 있다. 2003년에 수립된 전국주부연합은 “토착민 주도 개발” 계획의 핵심 세력이다:

 

“주부연합의 지도자 프라다는 이렇게 설명했다: ‘여성들에게 중소기업 활동과 지역사업을 위한 협동조합 수립 방법을 가르치는 인력도 우리에게 있다. 예를 들어, 바나나와 같은 원재료가 풍부한 지구는 이것을 이용하여 제과점을 차릴 수 있고 사업의 필요에 따라 지역의 수송수단을 사용할 수 있다. 이 모든 활동들이 지역 활동을 좀더 촉진할 것이다.’ 요리법, 식품 유통, 직물, 봉제 등과 관련하여 주부연합에 가맹한 협동조합들도 있다.”

 벤저민 댕글, ZNet, 2005년 4월 27일

 

그러나 이런 조치들은 극빈층 다수의 삶을 개선시킬 수는 있지만 제국주의 세계질서가 조성한 사회 불평등의 뿌리는 전혀 건드리지 못한다. 최근 차베스는 “21세기 사회주의”를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제시된 조치들은 “인도주의적 자기관리형 경쟁 경제체제”의 개발을 제시한 1999년-2000년의 “점진적 경제 프로그램”을 크게 넘어서지는 못하는 것 같다:

 

“인도주의적 자기관리형 경쟁 경제체제의 배경에는 사회적 생산체제가 자리 잡고 있다. 이 체제에서 생산 자원과 요소들을 배분하는 기본 장치인 시장은 협동조합, 전략적 소비자/생산자 조합 등 생산의 역동적 다양화를 촉진하며 가치를 부가시키는 보완적인 사적소유형태들을 통합한다.”

 

경제의 핵심 지렛대들을 소유하고 통제하는 베네수엘라 자본가들과 이들의 제국주의 상전들의 이해관계는 이 나라 대중들의 이해관계와 깊게 그리고 근본적으로 충돌하고 있다. 일부 경우에 자본가들은 대중에게 양보하도록 강제될 수도 있다. 그러나 부르주아 국가체제가 그대로 있는 한 노동대중의 투쟁성과는 역관계가 불리하게 바뀔 경우 손쉽게 유실될 수 있다.

 

 

볼리바르 농업정책의 한계

 

소위 “거대농장에 대한 전쟁”은 볼리바르 운동의 한계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2001년 11월 차베스가 공포한 49개 포고령 가운데 극소수 지배 엘리트들을 특히 분노시킨 것은 온건 토지개혁의 임무를 띤 전국토지연구소 수립에 대한 포고령이었다. 이 법에 따르면 전체 면적 가운데 80% 이상이 노는 토지에는 세금이 더 부과되고 “비옥도가 높은 100 헥타르 이상의 토지 또는 비옥도가 낮은 5,000 헥타르 이상의 토지”는 완전 보상을 조건으로 국가가 접수할 수 있다. 이렇게 접수된 토지는 농민협동조합에 관리권을 넘기기로 계획되었다. 이 개혁 조치는 토지 소유에 대한 빈농의 갈증을 해소하고 농촌을 현대화하며 농업생산 증대를 통해 “식량 주권”을 강화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전국토지연구소 소장 레오네테는 이것이 반(反)자본주의적 조치는 아니라고 지적했다: “이 나라 지주들은 자본가도 아니다. 자본가들은 자기 토지를 이용한다….유럽 자본주의는 이런 종류의 기생적 행태를 이미 오래 전에 제거했다”([외교세계]지, 2003년 10월).

 

그러나 기생 부재지주들을 가끔 말로만 비난했을 뿐 차베스 정권은 3년이 넘게 사유 토지를 전혀 건드리지 않았다. 이러는 동안 거대지주들의 무장조직은 100명이 넘는 농민 지도자들을 살해했다. 어떤 경우에는 지방 행정 당국이 지주를 편들었다:

 

“야라쿠이, 아푸레, 카라보보 등의 주에서 야당 출신 주지사 또는 구체제 정치인들은 우리의 적이다. 그러나 2002년 1월 코헤데스주의 엘 로발에서 적들을 풀어준 자는 바로 랑겔이었다. 그는 여당인 제5공화국운동의 후보로 선거에 당선되었다. ‘그는 농민들을 내쫓고 농장과 농기구들을 파괴했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하나도 없다’고 무토지 농민인 바스케스는 그동안 일어난 사태에 대해 아직도 분노하며 말했다. 혁명정부의 주지사가 어떻게 혁명에 반대하는 행동을 할 수 있는가?

[외교세계]지, 2003년 10월

 

차베스 정권이 반동들과 화해할 생각이 별로 없었던 2005년 1월에 랑겔은 3만2천 에이커의 대농장 엘 차르코테에 국가방위군 소속 군인 200명을 보냈다. 이 대농장은 영국의 백만장자 베스티경이 소유했으며 몇 년 동안 수백 명의 무토지 농민들이 이곳에 눌러앉아 있었다. 2005년 1월 14일자 [워싱턴 포스트]지는 차베스가 “민주주의와 자유기업의 근간을 침해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유재산에 대한 공격”이라고 이 사건을 즉각 비난했다. 그러나 유럽의 언론은 이 사건에 대해 히스테리를 보이지는 않았다. 영국방송공사(BBC)는 토지개혁이 가속화될 것이라는 차베스의 선언에 대해 “다수가 기대했던 것보다 온건한 조치”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2005년 3월 15일 네덜란드국영라디오방송은 이렇게 보도했다:

 

“차베스 대통령이 ‘거대농장에 대한 전쟁’을 공언했지만 정부는 ‘몰수’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조심하고 있다. 언제나 ‘공공재산’이었으나 개인 지주들과 기업들이 의심스럽게 ‘차지해온’ 토지는 ‘다시 정부의 손에 들어가는 것’일 뿐이다.”

 

최근 정부는 지주들과 “조정”을 통해 합의를 시도했으며 농민의 거대농장 점거를 지지할 생각이 없음을 계속 보여주었다. 이것은 “거대농장에 대한 전쟁”에 대한 강한 언사와 실제로 취해진 미온적 조치들 사이의 불일치를 뚜렷하게 증거하고 있다. 급진적 언사들을 수없이 남발했으나 차베스는 잘 알고 있다: 거대농장을 근본적으로 뿌리 뽑는 진정한 농업혁명은 도시의 자본주의 소유관계도 위협한다. 지난 몇 년에 걸쳐 차베스 정부는 거대지주를 자극하지 않으면서도 빈농을 달래기 위해 2백만 헥타르가 넘는 국가소유 토지를 13만 농민가구와 협동조합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이를 통해 정권은 농촌에서 자본주의 시장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거대지주의 지배체제를 그대로 유지했다.

 

 

차베스와 공식 노동조합

 

차베스 정권은 여러 번에 걸쳐 최저임금을 인상했다. 2005년 5월에는 최저임금을 물가인상율과 거의 맞먹는 26% 인상했으며 고용주들이 노동자를 해고하는 것을 더 어렵게 만들기도 했다. 이 조치들은 “공식”경제부문 노동력의 절반에만 적용되고 있지만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는 것을 더 쉽게 만들었다.

 

차베스가 정권을 잡을 당시 주요 노동조합연맹은 매우 관료화한 베네수엘라노동총연맹이었다. 이 조직은 구체제 양당체제의 한 축이었던 자칭 “사회민주주의” 정당인 민주행동당과 전통적으로 유착되어 있었다. 2000년 3월 차베스는 임금인상과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한 석유공사 노조의 파업을 불법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협상을 계속하려면 새 지도부를 선출하라고 요구했다. 정부의 요구를 따르는 것이 불리하다고 판단한 노동조합 지도부는 파업을 즉시 철회했다. 그러나 7개월 뒤인 10월에 석유 노동자 3만 명이 다시 파업에 들어갔다. 그리고 4일간의 파업 후 60%의 임금인상을 따냈다. 이때 정부는 개입을 원치 않았다. 백만 명이 넘는 공공부문 노동자들이 연대파업을 선언했기 때문이었다([영국방송공사 뉴스 온라인], 2000년 10월 15일).

 

노동조합총연맹 관료들의 아성을 깨기 위해 정부는 2001년에 포고령을 내려 모든 노동조합들이 즉시 선거를 치를 것을 강제했다. 물론 노총 관료들에 질린 다수의 노동자들은 차베스의 개입을 지지했다. 그러나 맑스주의자들은 노동조합에 대한 부르주아 국가의 개입을 원칙적으로 반대한다. 노동조합의 부패에 저항하기 위해 관료적인 국가기구에 도움을 요청할 경우 약화되는 것은 노동운동뿐이기 때문이다. 노총 관료들이 선거에서 승리하자 차베스 지지자들은 조직을 나와 2003년 4월 전국노동조합(UNT)을 결성했다. 이후 새 연맹은 급격히 세를 늘려 지금은 공공노동자의 압도적 다수 그리고 민간부문 노동자들의 절반을 대표하고 있다.

 

차베스를 혁명적 사회주의자로 인정하고 싶어 하는 좌익의 일부는 최근 정부의 국유화 조치에 흥분되었다. 맑스주의인터내셔널준비위원회(CMI) 그룹의 지도자 앨런 우즈는 이렇게 선언했다:

 

“차베스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사회주의를 지지한 사실은 볼리바르 혁명의 목표를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전에는 베네팔(Venepal) 그리고 지금은 발불라스전국건설회사(CNV)의 국유화가 이 목표를 확인시키고 있다. 볼리바르 혁명이 사회주의로 나아가지 않을 경우 실패할 것이라고 우리는 지적해왔다. 이제 우리를 비판한 자들이 완전히 틀렸다는 것이 드러났다.”

Marxist.com, 2005년 6월 10일

 

베네팔 제지공장은 소유주가 2002년-2003년의 자본가 “총파업”에 참여한 후 파산했다. 한편 수백 명의 공장 노동자들은 2004년 9월 직장폐쇄에 대항해 공장을 점거하고 조업을 계속했다. 결국 이 공장에 대한 2005년 1월의 국유화 조치는 정부의 사후 승인에 불과했다. 차베스는 이것이 사회주의를 향한 조치라고 허세를 부리지도 않았다: “베네팔의 몰수는 정치적 조치도 아니고 정부의 조치도 아니다. 그저 예외적인 경우에 불과하다. 토지가 당신의 것이라면 그것은 당신의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몰수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폐쇄되고 버려진 공장은 모두 접수할 것이다”(Venezuelanalysis.com, 2005년 1월 20일). 회사가 파산을 공식 선언한 후인 2004년 12월에야 정부는 국유화 조치를 취했다. 그리고 소유주에게는 공장의 시장 가치를 전부 보상한 후였다. 발불라스전국건설회사(CNV) 역시 석유공사 사장 출신의 피에트리가 공장을 폐쇄한 후 정부가 나서서 시설을 접수했다. 이 경우에도 정부는 약 60명의 공장 노동자들이 공장을 점거한 후에야 조치를 취했다.

 

한편 정부는 노동자들이 회사측과 “공동 관리”한 민간기업 일부와 기타 파산 기업들을 사회생산기업(EPS)으로 전환시키는 계획을 발표했다:

 

“전기회사 카다페, 수도회사 히드로벤, 수도지하철회사 메트로, 국영항공사 콘비아사 등이 사회생산기업으로 전환될 기업들이다. 석유공사는 자본주의 기업에서 사회생산기업으로 전환이 완료된 기업이다. 이것이 차베스의 설명이다…. 이 계획을 위해 취해질 공장 접수 조치는 최후 수단일 뿐이다. 일단 소유주들과 합의를 도출할 것이다. 이 결과 정부의 지원을 통해 이들은 사회생산기업으로 다시 문을 열 수 있을 것이다. ‘소유주가 기업의 상황을 개선하고 노동자 참여를 증진하며 제품 유통과 기업이윤 분배에 이들을 참여시키려는 용의가 있을 경우에만’ 합의가 가능할 것이라고 차베스는 말했다.”

Venezuelanalysis.com, 2005년 7월 18일

 

좌익 일부의 헛된 소망에도 불구하고 고용주와 노동자의 “공동 관리”는 사회주의와 아무 관계가 없다:

 

“카다페는 베네수엘라 전기 총량의 60%를 제공하는 국영전기회사이다. 이 회사 노동자들은 1998년 차베스가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공동 관리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2년 4월의 불발 쿠데타 직후 공식으로 공동 관리체제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로부터 3년이 지난 후 회사운영 결정과정의 노동자 역할은 5인 관리위원회에 2명이 참여하는 것에 그치고 있다. 더욱이 관리위원회는 회사 사장에게 권고를 할 수 있을 뿐 사장은 권고를 받아들일 의무가 없다. 전기연맹의 지도를 받은 회사 노동자들은 공사 경영진에게 진정한 공동 관리를 시행할 기회를 준 후 자신들의 불만을 표현하는 일련의 항의 행동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것은 위험한 전략이다. 왜냐하면 회사 노동자 대다수가 차베스를 열렬히 지지하고 있는데 이들의 항의는 회사를 관리하는 정부 부처인 동력자원부에 필연적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월간평론]지, 2005년 6월

 

공동관리의 최대 “성공” 사례는 알카사이다. 공업도시 푸에르토 오다즈 소재의 이 국영 알루미늄회사는 부서별로 노동위원회를 설치하여 회사의 “참여예산”을 논의할 수 있게 만들었다. 2005년 4월 이 공장의 노동자 2천7백 명은 5명의 회사 이사 가운데 2명을 직접 선출했다. 게릴라투쟁 지도자 출신인 이 회사 사장 란즈는 이렇게 제안했다: “이것은 노동자들의 공장 통제 조치이며 바로 이 때문에 21세기 사회주의로 향한 일보 전진이다”([영국방송공사 뉴스 온라인], 2005년 8월 17일). 그러나 실제로는 이 실험은 작업 속도를 높여 생산성을 증대시키는 조치에 불과하다. 그리고 경영진은 언제든지 이런 것을 환영한다:

 

“주물공장의 열 때문에 얼굴에 땀을 줄줄 흘리면서 지게차의 굉음과 공장 선풍기의 소음 속에서 이 회사 노동자 고메스는 이렇게 말했다: ‘경영진과 노동자들이 회사를 함께 운영하고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열심히 일하려는 동기를 새로 갖게 된다.’”

[뉴욕타임즈]지, 2005년 8월 3일

 

차베스를 지지하는 노동조합 지도부는 정권의 공동관리 정책을 “사회주의”로 규정하기를 좋아한다. 전국노동조합 연맹이 내건 2005년도 노동절의 2대 구호는 “공동관리는 혁명이다”와 “베네수엘라 노동자들은 볼리바르 사회주의를 건설하고 있다”이다([녹색좌익주간지], 2005년 5월 11일). 노동자들이 경영진과 얼굴을 맞대고 결정사항들을 협의하며 국가가 대대적인 사회복지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분권적 시장경제를 “사회주의”로 바라보는 것은 베네수엘라 인민 다수에게 고무적인 일일 것이다. 그러나 사회 전체의 이익을 의식하며 인도주의적 지향을 가지면서 노동자들이 관리하는 자본주의는 현실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소자본가의 환상에 불과하다.

 

볼리바르 가짜 사회주의는 회사를 망친 자본가들을 공공자금으로 회생시키는 것에서 시작하여 모든 일이 잘 풀릴 경우 노동자들을 소자본가/직원으로 전환시킬 수 있을 뿐이다:

 

“지금은 없어진 베네팔 노동조합의 운영위원 이었으며 현재 인베팔(국유화된 베네팔의 새로운 이름)의 이사 오르네보는 이렇게 설명했다: 이제 경영진이 없기 때문에 노동조합도 필요 없다; 노동자들은 이제 협동조합으로 조직되어 회사를 운영한다. 그리고 그는 재빨리 이렇게 지적했다: 협동조합으로 조직되어 있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정관에 따라 세금이 면제되는 등 여러 가지 혜택을 누리고 있다; 또한 1999년의 볼리바르 헌법에 의하면 회사 주식의 49%를 보유하고 있는 협동조합은 주식 지분을 95%까지 늘릴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는다.”

[월간평론]지, 2005년 6월

 

그렇다면 번창하는 협동조합들은 시장 점유율을 충분히 확보하여 경쟁기업들을 파산시킬 것이다. 그리고 이윤율이 떨어지는 협동조합들을 흡수하고 재조직하여 영업을 확장할 기회를 얻으려할 것이다. 또한 자신들의 전문 능력에 대한 보상으로 미래에 창출될 이윤의 일부를 원할 것이 틀림없다. 성공한 협동조합 회원들은 여러 가지 사업을 챙기느라 진짜 필요한 일을 할 시간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들의 수입은 갈수록 전체 이윤에 대한 몫인 배당금으로 채워질 것이다. 이것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이다. 그리고 베네수엘라에 독특한 조화롭고 자비로운 종류의 자본주의라는 환상에 의해 잠시 그 본질이 위장될 것이다. 사회계급인 자본가 집단의 생산수단을 몰수하고 이들의 억압적인 국가기구를 해체해야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이윤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경쟁이 아니라 계획과 협동의 원리에 기초한 새로운 경제기관들을 수립해야한다. 바로 이 때에 진정한 사회주의는 시작된다.

 

 

볼리바르식 보나파르트

 

지금까지 차베스는 반대세력과의 모든 정치적 대결에서 결정적으로 승리했으며 현재 국민 대다수의 확실한 지지를 누리고 있다. 그러나 생산, 통신, 수송 등의 주요 수단들은 아직도 자본가들의 손에 있으며 이들의 국가기구도 기본적으로 달라진 것이 없다. 그리고 이들 자본가들은 ‘이후의 주요한 정치 대결에서 자신들은 제국주의 초강대국 미국의 지원을 받는 중남미 자본가 정권들의 지원을 기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인식하고 있다. 지금까지 베네수엘라 군부가 차베스를 확고하게 반대하거나 지지하지 않고 불투명한 입장을 보인 것은 최소한 부분적으로 ‘여타 중남미 국가들에서와는 달리 베네수엘라의 장교들은 상당수가 피억압 대중 출신이다’라는사실에 기인 한다.

 

그런데 심지어는 차베스 지지자들도 “자본주의는 좀 덜 그리고 사회주의는 좀더 많이”(ZNet, 2005년 4월 10일)라는 혼란스럽고 민족주의 좌파적인 그의 언사를 의심하고 있다. 차베스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연속선상에 놓인 두 지점이며 국유화 경제의 비율에 따라 체제의 성격이 결정될 수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당연히 두 체제는 혁명 또는 반혁명 즉, 내전에 의해 그 생사가 판가름나는 상호 적대적 사회체제이다. 차베스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것으로 간주되고 있는 어느 여론조사 회사의 2005년 여론조사에 따르면 전 국민의 70% 이상이 전반적으로 대통령의 직무수행을 지지했으며 35%는 정부가 사회주의를 수립하기를 원했다. 그리고 10%는 대통령을 지지할지 말지를 결정하지 못했다. 그러나 차베스 지지자들 가운데 그가 사회주의를 수립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경우는 20%도 되지 않았다(Venezuelanalysis.com, 2005년 5월 3일).

 

차베스는 쓸데없이 나서서 예수를 칭송했다: “그는 가장 위대한 혁명가들 가운데 하나이다…진정한 예수는 빈민의 구원자이다”(ZNet, 2005년 4월 10일). 그리고 2005년 7월 이렇게 주장했다: “베네수엘라 역사에서 지금 정부보다 기독교의 원칙에 더 가까운 정부는 존재하지 않았다”(Vheadline.com, 2005년 7월 14일). 사실을 말하자면 차베스 정권의 주요한 “원칙”은 바로 보나파르트주의이다. 맑스가 가장 먼저 사용한 이 용어는 서로 경쟁하는 사회계급들의 갈등을 초월하여 사회 위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들 사이에 위태롭게 곡예를 하는 “강력한” 정부를 지칭한다.

 

운신의 폭을 유지하기 위해 차베스는 볼리바르 혁명의 특징으로 간주되는 “참여 민주주의”를 필요에 따라 무시했다:

 

“후보들을 뽑기 위해 경선 제도를 도입하자는 세력이 차베스 진영 내에서 점점 대중적 세를 얻자 차베스는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입장을 취했다. 지난 달 그는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는 이미 후보들을 천명했다. 이들이 우리의 후보이다. 단결을 원치 않는 자들은 반대세력에 가담해도 좋다.’ 그러나 이 후보들은 여당인 제5공화국운동이 장악한 전국위원회에서 모두 지명되었다. 이 때문에 참여 민주주의에 대한 언사를 실천에 옮길 것을 요구하는 다수의 지역들이 이에 맹렬히 반대했다.”

2004년 10월 17일

 

2005년 12월의 국회 선거에서 차베스를 지지한 “변화 지향 그룹”의 후보들도 기층대중이 아니라 “전국전술특공대”에 의해 임명되었다.

 

차베스의 보나파르트식 행태는 자본주의 소유체제를 침해하지 않은 채 빈민과 짓밟힌 대중의 삶을 개선시키려는 자신의 욕구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노동계급과 자본가계급의 근본 이해는 화해 불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말은 사회주의를 말하지만 차베스는 ‘자신의 권력은 자본가 국가의 수반이라는 직위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는 독재자처럼 행동할 필요가 없기를 소망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볼리바르 운동을 지지하는 대중에 의거하여 중요한 사항들을 결정할 수 없다. 이렇게 할 경우 그의 아슬아슬한 곡예는 끝장날 것이기 때문이다.

 

유럽의 제국주의자들은 백악관 주위에 모인 “다시 태어난 기독교인들”보다는 “볼리바르 혁명”과 같은 것에 좀더 세련되게 반응하고 있다. 이들은 베네수엘라 사태에 대해 크게 민감한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2005년 10월의 유럽 순방 도중에 차베스는 이탈리아의 우익 수상 베를루스코니와 회담했다. 후자는 나중에 이탈리아 신문 [공화국]지에 이렇게 말했다: 차베스는 우리와 같이 일할 수 있는 “실용주의적 인물이다. 차베스는 미국과 이데올로기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으나 양국의 상업 관계는 서로에게 도움이 된다. 나는 차베스를 이제 좀 안다. 나도 그와 좋은 관계에 있다”(Venezuelanalysis.com, 2005년 10월 18일). 현재 경영자협회 회장 베탄쿠르트 역시 공개적으로는 차베스에게 나머지 한쪽 뺨도 갖다댈 태세로 이렇게 선언했다: “공공투자와 민간투자가 합작하는 것이 이 나라를 조화롭게 발전시키는 유일한 길이다”(Venezuelanalysis.com, 2005년 10월 26일). 베탄쿠르트는 겉으로 보기에는 “베네수엘라 경제개발 과정에서 소유권이 존중받을 것이라는 차베스의 선언에 대해 적절하게 반응했다”(같은 글).

 

그러나 베네수엘라 지배계급의 압도적 다수는 여전히 차베스를 맹렬히 증오하고 있다. 이들은 나라의 정치 지도자들과 긴밀한 개인적 재정적 관계를 유지하는데 익숙해 있다. 그런데 국가를 책임지고 있는 자가 좌익적 발언을 일삼는 보나파르트식 독재자인 것이 영 마음에 걸린다. 그러나 차베스가 지배계급으로부터 상대적 독립성을 유지하는 것이 베네수엘라 자본의 이해를 위해서는 더 좋다. 이 역설을 차베스는 카라카스에서 열린 “거시경제원탁회의”에서 설명했다. 베네수엘라와 미국의 자본가들 그리고 정부 관료들이 참석한 이 회의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대통령이 되기 전에도 말했지만 베네수엘라는 일종의 시한폭탄이다. 우리는 1995년과 1997년에 이렇게 말하곤 했다. 틱톡, 틱톡. 우리는 이 폭탄을 해체하기 시작할 것이다. 지금 이 폭탄이 완전히 해체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1985년 1988년 1989년보다 지금 이 폭탄이 터질 가능성은 훨씬 적어졌다. 그 때에는 폭탄이 이미 터졌다. 1990년에서 1998년까지 빈곤과 불평등은 만연했다.”

[베네수엘라/미국 기업 대표들에 대한 차베스 대통령의 연설], Venezuelanalysis.com, 2005년 7월 6일

 

차베스는 사회주의적 언사를 사용하여 자본주의가 “야만 체제”라고 말했다. 그런데 사회모순을 “해체시키고 있다”는 그의 표현은 사회주의적 언사에 크게 대조되면서도 볼리바르 프로젝트의 핵심을 찌르고 있다. 그는 ‘좀더 포괄적이고 사회적으로 책임지는 “토착적” 형태의 경제개발을 통해 빈민과 제국주의 금융자본의 이해를 동시에 증진시키겠다’는 등의 실현 불가능한 약속을 하고 있다.이를 통해 그는 우익 세력이 이후 강력하게 피의 보복을 감행할 미래를 자기도 모르게 준비하고 있다.

 

 

볼리바르 혁명의 ‘제국주의 반대’

 

미국은 차베스 정권을 가차없이 적대하고 있다. 지구상의 무지몽매한 인민들을 위해 미국이 “민주주의”와 “자유”를 옹호하고 있다는 부시 행정부의 거짓 주장을 이 태도는 생생하게 폭로하고 있다. 미국 관리들은 차베스 세력의 계속된 선거승리가 “엄밀한 의미에서는 합법적”이라고 마지못해 시인한다. 그러면서도 차베스 정권이 “권위주의의 새로운 유형”이라고 경고한 후 그가 “민주적으로” 통치하지 않는다고 즉, 미국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고 불평한다.

 

차베스는 미국의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침공을 비난하고 국제통화기금과 아메리카주 자유무역지대를 맹렬히 비판했다. 그리고 카스트로와 친하게 지내왔다. 최근 베네수엘라 중앙은행은 외환보유고 대부분을 미국 달러에서 유로화로 전환시키기 시작했다(Venezuelanalysis.com, 10월 5일). 또한 차베스는 석유수출대금도 유로화로 결제할지도 모른다고 암시했다. 이 모든 것 때문에 미국의 제국주의 선전기구들은 그를 흉악한 짐승으로 묘사하고 있다. 신의 왕국이 건설되어야 한다는 편협한 주장을 일삼으며 부시를 강력하게 지지하는 복음주의자 팻 라벗슨은 심지어 차베스를 암살하라고 율법에 근거한 명령을 내렸다. 2005년 6월 볼리비아에서는 대대적인 반정부 투쟁이 준혁명적 상황까지 치달았다. 그러자 미국의 서반구담당국무차관보 라저 노리에가는 “볼리비아에서 차베스의 영향력은 처음부터 명백히 드러났다”([마이애미헤럴드]지, 2005년 6월 8일)고 주장하며 사태의 책임을 차베스에게 전가했다. 환각에 빠진 반공 광신도들에게 중남미의 악마로 항상 취급받아온 카스트로는 차베스에게 이렇게 농담조로 불평했다: “당신과 친구가 되면서 기존의 나의 이미지가 손상을 입고 있다는 것을 나는 요즘 실감하고 있소”([로이터통신사], 2005년 4월 30일).

 

미국의 이라크 모험이 점점 꼬이면서 베네수엘라에 대한 미국의 즉각적 군사 공격은 가능성이 적어졌다. 그러나 침공 계획은 확실하게 수립되고 있다. 지난 몇 년간 미국은 콜롬비아의 군대를 대대적으로 지원하여 그 덩치를 세배나 불려놓았다. 이제 미국은 이 지역에서 콜롬비아라는 믿을만한 하수인을 두게 되었다. 차베스가 민병대를 소폭 증강하고 러시아제 에이케이 47 소총 10만정과 40대의 헬기를 구입할 계획을 발표하자 부시 행정부는 그가 이 지역의 평화를 위협하고 있다고 투덜거렸다. 미국의 국방장관 럼스펠드는 냉소에 차서 이렇게 질문했다: “도대체 어떤 위협 때문에 베네수엘라는 저렇게 많은 무기들을 구입했는가?”([영국방송공사 뉴스 온라인], 2005년 7월 1일).

 

시장을 다원화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베네수엘라는 석유수출의 약 3분의 2를 미국 시장에 의존하고 있다. 이 때문에 차베스 추종자들은 미국과 화해할 이유가 충분히 있다고 암시해왔다. 2002년 4월의 쿠데타가 불발로 끝난 후 차베스는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은 채 이렇게 선언했다: “내가 정권을 잡고 있기 때문에 미국으로 석유가 제대로 공급되고 있다. 나를 권력에서 밀어내려고 반대세력을 지원한다면 내전과 함께 석유공급이 중단될 것이다”(ZNet, 2002년 9월 10일). 2005년 7월의 원탁회의에서 차베스는 미국 지배계급 “양당 모두에 친구들이 있다”고 말했다. 세계사회포럼이 열렸던 포르투 알레그레에서 차베스는 연단을 주먹으로 치며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열변을 토해 자신의 좌익 팬들을 그렇게도 흥분시켰다. 이제 그는 이들을 무시하고 “평화”, “이해”, “투명성”, “진정한 통합”을 추구하자고 자신의 “친애하는 북미 사업가 친구들”에게 호소했다. 볼리바르 사회주의를 통해 “자본주의를 극복하자”고 촉구하기는커녕 ‘토빈세는 “정부와 사회가 인류의 생존을 위해 역사적 동맹을 체결할 기금을 조성”시킬 것이다(Venezuelanalysis.com, 2005년 7월 6일)’라며 토빈세 실시 등을 주장하면서 제국주의 세계체제가 평화적인 방식으로 개혁될 수 있다는 환상을 유포했다.

 

국제유가의 폭등으로 “볼리바르 혁명”의 사회개량 프로그램들의 확장에 필요한 자금이 마련되었다. 1998년 차베스가 집권했을 때 석유는 배럴당 약 12 달러였는데 2005년에는 60 달러가 되었다. 그가 집권하면서 외국 석유회사들이 정부에 지불하는 로열티는 총수익의 명목적인 1%에서 16.6%로 올랐다([뉴욕타임즈]지, 2005년 7월 5일). 그러나 정부의 석유 수익은 급등했으나 공공 부채 역시 증가했다. 베네수엘라 은행들에게 넉넉하게 지원금을 퍼주는 의도적인 정책이 이 결과에 큰 몫을 했다:

 

“베네수엘라신용은행의 회장 멘도사는 이렇게 말한다: ‘정부는 자신의 석유수익 전부를 약 5%의 이자를 받고 같은 은행들에 예금한다. 그리고 14%의 이자를 주고 이 돈을 다시 빌린다. 미치도록 좋을 지경이다. 은행들이 돈을 벌기가 너무 쉽다. 이 정부가 부자들의 정부라고 내가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크리스티안 파렌티, “차베스와 석유 인민주의”, [나라]지, 2005년 4월 11일.

 

중남미 국가들 사이에 무역과 경제협력이 확대되면 미국에 대한 이 지역의 종속성이 감소될 것이라고 차베스 추종자들은 상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미국 지배의 아메리카주 자유무역지대에 대한 대안으로 차베스가 제안한 “아메리카주의 볼리바르식 대안”은 지금까지 쿠바만 반기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볼리바르식 연대 프로젝트를 통해 기타 자본주의 국가들을 포섭하려는 계획이 내포하는 논리가 2005년 8월에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투자와 일자리 증대를 요구하며 에콰도르의 석유수출을 중단시킨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항하여 차베스는 에콰도르 정부 편을 들었다. 노동자들의 강점인 연대투쟁을 갉아먹으며 차베스 정권은 이렇게 선언했다: “요즘 에콰도르 정부가 충족시킬 수 없었던 석유수출 약정을 베네수엘라가 대신 이행할 것이다. 에콰도르 정부는 단 한 푼도 낼 필요가 없다”([로이터통신사], 2005년 8월 21일).

 

 

베네수엘라의 맑스주의와 국가

 

그러나 차베스를 칭송하는 여러 국제 좌익 조직은 그의 파업 파괴 책동에 대해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 중 맑스주의인터내셔널준비위원회(CMI)는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자본가계급으로부터 노동계급의 정치적 독자성을 문서상으로는 옹호하고 트로츠키의 연속혁명 강령을 실천할 레닌주의 전위당을  주창하고 있다. 하지만 베네수엘라에는 자기의 주장과 이론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이 그룹은 생각하는 모양이다.

 

빈민과 무산자들의 삶을 개선시키는 차베스 정부의 조치들을 맑스주의자들은 폄하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사회주의의 근본 원칙들이 현실에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다고 결론내리지도 않는다. 다른 모든 곳과 마찬가지로 베네수엘라에서도 자본가와 노동자는 물질적 이해관계가 서로 대립된다. 볼리바르 연금술사들이 아무리 요술을 부려도 자본주의 착취를 방어하고 증진하는 부르주아 국가기구는 사회해방의 기구로 변신할 수 없다.

 

차베스가 “국가기구를 부분적으로 숙청했다”(Marxist.com, 2004년 5월 20일)고 CMI는 주장한다. 이 조직의 지도자 앨런 우즈는 심지어 이렇게 말한다: 노동자와 자본가들을 중재시키려는 차베스의 보나파르트적 시도는 “베네수엘라 국가기구가 더 이상 자본가들에 의해 통제되고 있지 않다”(Marxist.com, 2004년 5월 20일)는 것을 의미한다. 차베스가 부르주아 국가의 수반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이 국가기구가 아직 자리를 잡지 않은 “혁명”을 위협한다고 경고하면서도 우즈는 이렇게 해결책을 제시 한다: 아직 국가기구 내에 몸을 숨기고 있는 “모든 보수주의자들을 제거하는 것이 필요하다”(Marxist.com, 2004년 5월 20일). “혁명의 중심부에서 보내는 목격담”에서 이 조직의 지지자는 베네수엘라 부르주아 국가기구 내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주장되는 거대한 혁명투쟁을 숨을 헐떡거리며 이렇게 묘사했다:

 

“이 나라 국가기구는 자본주의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혁명가들과 혁명이 너무 나아갔다고 생각하는 세력 사이에서 무자비한 투쟁이 벌어지고 있다. 미라플로레스 대통령궁, 정부 부처들 그리고 모든 종류의 공직들은 개량주의자들과 혁명가들에 의해 거대하게 분열되어있다. 일부 부처들 예를 들어 노동부에서는 좌익이 강력하다. 크리스티나 이글레시아스는 전국노동조합 연맹과 협력하여 자본가들의 반노동자적 행태들에 대항하고 있다. 또한 노동조합에서 노동자 참여를 증진시키고 있으며 공동관리 조치들을 더욱 발전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Marxist.com, 2005년 9월 7일

 

혁명을 무력화시키는 베른슈타인의 개량주의 처방이 바로 이 글에서 모두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다: 노동계급은 자본가의 국가기구를 평화적으로 접수하여 이것을 억압의 기구에서 해방의 기구로 서서히 전환시킬 수 있다.

 

CMI는 주장한다: “일반적으로 차베스는 좌경화했으며 혁명적 맑스주의자들은 이 지향을 지지하고 전진시켜야한다”(Marxist.com, 2004년 5월 19일). 차베스나 그를 칭송하는 CMI를 비판하는 자들은 “차베스와 대중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를 파악하지 못하는 “종파주의자”로 낙인찍혀 무시의 대상이 된다:

 

“우리는 내내 차베스를 비판적으로 지지해왔다. 즉 그가 제국주의와 베네수엘라의 극소수 지배 엘리트들에 타격을 가하는 한에서만 그를 지지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동요하면서 이들에게 양보할 때에는 그를 비판할 것이다.”

앨런 우즈, Marxist.com, 2004년 7월 23일

 

이것은 1917년 2월 러시아에서 짜르가 타도된 후 수립된 부르주아 임시정부에게 스탈린, 카메네프 그리고 볼세비키당 우파 전부가 채택했던 바로 그 노선이다. 역사에 길이 남을 문서 “4월 테제”를 통해 레닌은 이 노선을 단도직입적으로 거부하고 아무리 “진보적”이더라도 모든 부르주아 정부에 대한 강경한 반대 노선을 고수했다. 1917년 10월 혁명 승리의 정치적 기초가 된 이 입장은 러시아 사회주의 운동의 온갖 기회주의 대표들로부터 종파주의 광기(狂氣)라고 비난받았다. 지금의 CMI처럼 이들은 모두 자본주의 “좌파” 정부에게 압력을 가해 “혁명의 역동성”이 전개되기를 기다렸다.

 

CMI는 차베스를 혁명의 촉매제로 보고 그의 대담한 조치들이 노동계급을 혁명으로 나아가도록 밀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즈는 말한다: “노동계급이 투쟁의 장에 진입하는 순간, 이들은 나름의 역동성과 운동성을 획득 한다”(Marxist.com, 2005년 1월 21일). 차베스가 혁명으로 도도히 전진하는 역사과정의 담지자라고 보고 CMI는 그에게 모든 희망을 건다. 그리고 차베스와 그의 추종자들이 노동계급 내부에 유포하는 소자본가적 환상들에 대해 투쟁해야할 책임을 모두 내 던진다:

 

“차베스와 그의 지지자들은 베네수엘라의 극소수 지배 엘리트들과 제국주의에 타격을 가하기 위해 대중의 지지에 의존한다. 이들은 원래 사회주의 전망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부패를 척결하고 베네수엘라를 현대화할 생각 밖에 없었다. 이들은 좀더 공정하고 정의로우며 평등한 사회를 원했으나 이것이 자본주의의 한계를 넘어서지 않고도 가능하다고 상상했다. 그러나 바로 이 생각 때문에 이들은 자본가계급과 제국주의에 즉시 충돌하게 되었다. 대중이 거리로 나서면서 이 과정은 전혀 다른 역동성을 부여받았다. 대중운동은 차베스에게 자극제가 되었으며 그는 이 운동이 혁명을 지향하도록 고무해왔다.”

앨런 우즈, Marxist.com, 2004년 5월 20일

 

차베스는 자기를 연모하는 CMI를 주목하고 자신의 주간 텔레비전 프로그램 “대통령과 함께”에 이 조직의 대표들을 초대했다. CMI는 자랑스럽게 이렇게 보도했다: 우즈와 다른 한명의 조직 회원이 “대통령 바로 반대편의 눈에 확 들어오는 앞자리에 앉혀졌다. 이 대담 프로그램 도중 차베스는 우즈의 이름을 최소한 3번 언급했다”(Marxist.com, 2004년 4월 19일).

 

물론 텔레비전에 나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그러나 레닌은 제 2 인터내셔널의 세련된 체 하는 속물들을 비웃었다. 이 속물들은 독일제국의 장관들 그리고 유명한 자본가들과 사이좋게 지내면서 노동자들에게는 ‘사회주의를 선사할 준(準)자동적인 역사과정의 도도한 물결을 참을성 있게 기다리라’고 가르쳤다  우즈는 추종자들에게 “조만간에 대중은 자신의 행동이 진정으로 의미하는 바를 의식할 것이다”(Marxist.com, 2005년 1월 21일)”라고 확신시켰다. 그러나 그의 확신은 정말이지 별볼일이 없다. 대중이 정치의식을 획득하도록 투쟁하지 않는다면 사회주의 조직은 전혀 쓸모가 없다. 노동자들이 사회현실을 이해하고 자신의 진정한 이해에 따라 행동하며 이를 통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의해 몽롱해진 “즉자적 계급”이 아니라 “대자적 계급”이 되도록 돕는 것이 바로 혁명가들의 진정한 임무이다.

 

 

혁명인가 반혁명인가?

 

베네수엘라의 빈민과 노동자들은 자본주의가 자신들에게 강요한 빈곤과 절망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무슨 일이든지 하겠다는 의지를 반복해서 증명했다. 자본가들을 계급집단으로 바라보고 이들의 생산수단을 몰수한 후 사회주의의 기초 위에 사회 재건을 시작하는 것이 역사가 우리에게 부여한 임무이다. 이 임무를 선진적 분자들에게 이해시키는 것이 맑스주의자들의 소명이다. 이 소명을 완수하는 데에 필요한 첫 단계는 착취자들과 화해하거나 전략적으로 타협하자는 노선을 격퇴시키는 것이다.

 

베네수엘라는 정지해 있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사회주의로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표류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제국주의 공룡 미국은 이라크에서 된통 당해왔기 때문에 중남미에서 대규모 군사작전을 새로 감행할 의사가 없다. 그러나 이 공룡의 하수인인 콜롬비아의 지배자들은 지금 할 일이 많은 것 같다. 그리고 볼리바르 운동에게 3번 연속 패배한 베네수엘라 우익 반동들은 재집결하면서 패배의 상처를 보듬고 있다. 이들의 손에는 언론뿐 아니라 경제의 핵심 지렛대들이 그대로 쥐어져 있다. 따라서 이들이 다시 한번 공세로 나서는 일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칠레의 피노체트나 스페인의 프랑코가 감행했던 우익 쿠데타를 저지하기 위해서 베네수엘라 노동자들은 공장, 정유소, 광산 그리고 기타 모든 일터에서 선거를 통해 대표들을 선출해야한다. 그리고 이들의 네트워크를 통하여 자신들을 투쟁 부대로 조직해야한다. 협력의 네트워크를 전국 차원에서 수립하는 노동자평의회 체제는 생필품의 생산과 유통을 장악하고 사회의 피억압 계층 대부분을 정치투쟁의 장으로 동원할 것이다. 그리고 자본가들과 이들의 용역 깡패들이 대중에 대한 잔인한 탄압을 통해 기존의 특권을 그대로 유지하겠다는 책동을 모두 효과적으로 격퇴할 것이다.

 

권력 장악 투쟁에 헌신하는 정치 지도부를 노동운동 내부에 수립하는 것, 바로 이것이 지금 베네수엘라에서 필요하다. 이 지도부는 노동계급에 뿌리 내린 레닌주의 전위당이다. 이 정당은 볼리바르 운동을 계급적으로 분화시키고 노동계급을 자본가 계급과의 결전에 대비시켜야한다.

 

좌익 일부는 ‘차베스 정권이 카스트로의 7월 26일 운동과 같은 길을 갈 것이다’라고 희망하고 있다. 카스트로의 운동은 급진 자유주의 조직으로 시작하여 기존의 부르주아 국가기구를 분쇄한 후 자본가 계급의 생산수단을 몰수하여 중앙집중화된 명령경제체제를 수립했다. 이 결과 미국 플로리다주 해안에서 약 150 킬로미터 떨어진 쿠바에서 기형적 노동자국가가 수립되었다. 이것은 쿠바 자본가들과 이들의 상전인 미국의 제국주의자들이 고삐를 늦추지 않고 비타협적으로 카스트로 정권을 적대한 결과였다. 그러나 제국주의의 대항 세력으로 소련의 퇴보한 노동자국가가 있었기 때문에 쿠바 노동자국가는 성립될 수 있었다.

 

2006년 베네수엘라와 1960년 쿠바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 지금 소련은 사라졌고 베네수엘라의 부르주아 국가기구는 온존하고 있다. 차베스는 정권에 특히 적대적인 분자들을 제거했지만 자본주의 국가체제의 핵심은 건드리지도 않았고 그럴 의사도 없다. “볼리바르 혁명”의 실험은 일시적인 막간극에 불과할 것이다. 지금 베네수엘라 사회 앞에 놓인 길은 ‘노동계급이 자본가 계급의 생산수단을 몰수하여 이 계급을 청산하는 길로 전진하든가 아니면 자본가 계급이 노동계급을 압살하든가’의 두 가지밖에 없다.  “제 3의 길” 또는 중간의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생산수단이 극소수 지배계급의 손에 남아있는 한 중남미 대중의 고통과 불행은 해소되지 않을 것이다. 러시아의 위대한 혁명가 트로츠키는 지금부터 70년이 넘는 과거에 이미 이렇게 말했다:

 

“중남미는 모든 국가들을 하나의 강력한 연방으로 단결시키는 것을 통해서만 후진성과 노예상태에서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다. 그러나 뒤늦게 등장했으며 외국 제국주의에 철저히 굴종하는 남미 자본가 계급은 이 임무를 달성할 수 없다. 이 임무는 피억압 대중 지도자로 선택된 남미의 젊은 노동자들에게 맡겨져 있다. 따라서 세계 제국주의의 폭력과 음모 그리고 식민지의 토착 매판자본 파벌들의 피비린내 나는 더러운 억압에 대항할 구호는 중남미 소비에트 합중국이다.”

“전쟁과 제 4 인터내셔널”, 1934년 6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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