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국가(소련/중국/북한 등)의 사회성격

중국은 어디로? : 정치혁명과 반혁명의 갈림길(31호, 2009)

by 볼셰비키-레닌주의자 posted Dec 24, 2012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원출처 – 국제볼셰비키그룹(IBT)



중국은 어디로? : 정치혁명과 반혁명의 갈림길


 

 미국 트로츠키주의의 역사적 지도자 제임스 캐넌은 1939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러시아 문제는 곧 혁명의 문제이다. 그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어야 한다. 경박하게 다뤄서는 안 된다. (<노동계급정당을 위한 투쟁>)” 중국 문제는 오늘날의 혁명가들이 바로 그러한 태도로 다루어야 하는 문제이다.

 

지난 30년간 진행된 ‘시장화’는 자본주의적(어떤 경우에는 심지어 전(前)자본주의적) 착취를 중국 노동자에게 강제했다. 이것은 많은 좌익운동가들로 하여금, ‘중국공산당 관료들은 그 자체로 새로운 지배계급이 되었으며 중국의 ‘붉은 자본가’로 변모했다’고 결론 내리게 했다.

 

중국공산당의 검열과 서방언론의 인상주의적 뉴스 편집은 중국 사회성격에 대한 광범한 혼란을 형성하는 데에 기여해왔다. 중국의 광대함과 다양성은 최근의 변화들을 이해하는 것을 한층 복잡하게 만든다. 산업화 붐이 일고 있는 남동부와 시들어가는 북동부 그리고 상대적으로 저개발 되어 있고 고립된 서부 지역 사이에는 커다란 지역적 편차가 존재한다. 또한 같은 지역의 성(省)들 사이나, 같은 성 내의 도시들 사이 그리고 심지어 같은 도시의 마을 사이에도 큰 격차가 존재한다. 예를 들어, 집단 농업 생산이 유지되고 있는 헤난성의 난지에 마을은 생산기업들이 여전히 마오쩌둥이 1950년 도입한 ‘철밥통(평생고용)’을 노동자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헤난성의 마을들에 있는 국유화되거나 집산화된 기업들 대부분은 거의 완전히 사유화되었다.

 

궁극적으로 국가의 계급적 성격은 토대를 이루고 있는 생산의 사회적 관계에 기초한다. 1949년의 중국 혁명은 스탈린 치하 소련을 모델로 하여 관료적이고 기형적인 노동자국가를 건설해 내었다. 외국과 국내자본을 광범위하게 몰수하면서, 과거에 민족적으로 고립된 ‘사회주의’ 중국을 향한 경제 자립 정책을 약속하면서 한편으로는 국제적으로 계급협조정책을 추구했던, 중국공산당의 상층부위에 정치권력이 집중되었다.

 

중국이 여전히 기형적인 노동자국가라는 주장이, 과거 수십 년 간 진행되어온 중국공산당의 정책들이 자본주의 부활을 향한 동인을 축적해왔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 주장은 중국공산당의 계급적 성격, 1949년의 사회격변으로 나타난 국가의 근원과 그 발전 그리고 중국혁명의 미래에 대한 선택적 진단인 것이다.

 

자본주의로의 복귀 즉, 중국공산당의 전복과 토지, 은행 그리고 국가소유 경제부문의 사유화를 단행할 정권으로의 교체는, 즉시 노동자나 농민이 대부분인 13억 중국인민에 타격을 가할 것이다. 그것은 또한 다른 노동자국가들인 베트남, 북한과 쿠바에 국제적인 압박을 심대하게 가할 것이다. 광대한 중국 시장의 고삐 풀린 외국자본에의 개방은 아마도 반혁명의 전리품 분배를 둘러싸고 미국과 일본 그리고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의 무질서하고도 위험한 경쟁을 촉발하게 될 것이다.

 

 

오늘의 중국 문제

 

맑스주의 국제주의자들에게 중국은 오랫동안 중요한 시금석이 되어왔다. 1925-27년의 2차 중국혁명의 피비린내 나는 패배를 보며 레온 트로츠키는 그의 연속혁명론을 일반화하였다. 트로츠키는, 짜르 치하의 러시아처럼, 중국과 다른 후진국들의 토착 자본가들은 외국 제국주의와 긴밀하게 밀착되어 있고 그래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수행하기에는 인민의 저항을 지나치게 두려워한다고 결론 내렸다.

 

“자본주의적 발전이 뒤처진 나라들 특히 식민지나 반(半)식민지 나라에서, 연속혁명은 완전하고 진정한 민주주의와 민족해방이라는 과업의 성취는 피억압민족 전체 무엇보다도 농민대중의 지도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통하지 않고서는 생각할 수가 없다.”

<무엇이 연속혁명인가?>

 

1930년 마오쩌둥의 지도 아래 중국공산당은 멘셰비키-스탈린주의적인 ‘두 단계’ 혁명 전략을 옹호했다. 이 계급협조적인 전략은 우선적으로 (장개석의 국민당으로 대표되는) 소위 ‘진보적’ 부르주아 세력과의 단결 단계인 ‘신민주주의’ 단계로 나아갈 것을 호소했다. 그것이 착취자[자본가]와 그 희생자[노동자 농민] 모두에게 이익이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사회주의적인 ‘두 번째 단계’는 확정되지 않은 먼 훗날로 연기되었다.

 

그러나 중국 사회를 양극화한 격렬한 장기 내전 속에서 중국공산당은 국민당과의 연합에 대한 생각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1949년 중국공산당의 농민군들은 급기야 중국의 중요 도시들로 진격했고 장개석과 그의 장군들은 대부분의 대자본가들과 더불어 타이완으로 도망갔다. 중국공산당의 승리는 존재하던 부르주아 국가를 분쇄했고 중국을 제국주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켰다. 봉건지주 계급의 자산은 몰수되었고 수백만 헥타르의 농경지들은 빈농과 중농들에게 분배되었다. 도시에서는 ‘관료적인 부르주아’에 속해 있던 자산들이 국유화되었고 국제무역의 국가독점이 수립되었다. 동시에 중국공산당은 노동운동의 독립적 정치 행동들을 가차없이 억압했고 관료적인 중앙집권적 계획경제를 수립했다.

 

중국혁명은 장개석을 지지하던 제국주의자들을 망연자실하게 했고 동아시아와 그 너머 지역들에서 식민 정책에 반대하는 사회격변을 부채질했다. 혁명은 즉각적으로 중국인들 대다수에 커다란 진보를 가져왔다. 거의 노예적으로 살아가던 여성들은 처음으로 사회 경제적인 삶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읽기 쓰기 교육이 광범위하게 수행되었고 의료, 주택, 교육과 여타 사회 기초서비스가 큰 폭으로 개선되었다. 농업 생산을 발전시키는 데에 필수적인 관개수로 사업이 거대한 규모로 이루어졌다. 혁명 전 35살이었던 평균수명은 1970년 중반 즈음에는 거의 두 배인 65살이 되었다.

 

1950년대 후반의 ‘대약진’ 운동의 재앙적 결과와 1960년대의 ‘문화혁명’의 혼돈에도 불구하고, 중국 경제는 지속적으로 성장했다. 1950년과 1977년 사이 산업생산은 연평균 13.5%로 확장되었다. 그것은 같은 시기 개발도상국이나 선진국들 중 어떤 나라보다도 높은 수치였다. 역사가인 모리스 메이스너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마오 시기의 산업 혁명이 없었다면, 마오 이후에 두각을 나타낸 경제 개혁가들은 아마도 할 일이 거의 없었을 것이다.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인민공화국의 역사>”

 

레닌과 트로츠키가 이끈 볼셰비키혁명과 달리, 마오쩌둥의 공산당이 이끈 1949년의 중국혁명은 그 시작부터 관료적이고 기형적이었다. 1917년의 러시아혁명은 수 년 간의 정치 투쟁으로 학습한 계급의식적인 노동운동 핵심부로서의 볼셰비키에 의해 수행되었다. 볼셰비키는 노동자민주주의–즉, 노동자 평의회–에 기초한 국가를 건설하려고 했고, 10월 혁명이 세계 사회주의 혁명으로 나아가는 첫 걸음이라고 여겼다. 군사관료적인 사회격변을 동반한 중국공산당의 집권과 그것이 창조해 낸 기구들은 퇴보한 소련의 그것을 모델로 한 것이었다. 중국공산당 관료는 스탈린의 반동적인 ‘일국사회주의’론을 채택했다. ‘일국사회주의론’은 혁명 국제화의 중요성을 부정하고, 대신에 민족적 경계라는 한계에서의 발전을 강조하는 입장이다.

 

트로츠키는 1923년 이후 권력을 장악한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이 새로운 형태의 소유 계급이 아니라 유약하고 모순적인 특권계층으로 보았다.

 

“맑스주의자는 계급을 예외적으로 중요하게 그리고 더욱이 과학적으로 한정된 의미로 규정한다. 계급은 국민총소득의 분배에 참여하는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경제의 전반적 구조 속에서의 독자적 역할과 사회 경제적 토대에 내린 독자적 뿌리에 의해 규정된다. (중세의 귀족, 농민, 소부르주아, 자본가, 노동계급 등) 각 계급은 자기 나름의 소유형태를 갖는다. 그러나 관료집단은 이러한 사회적 특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생산과 분배 과정에서 독자적 지위가 없으며 독자적인 소유의 뿌리도 없다. 관료집단의 기능은 기본적으로 계급 지배의 정치적 기술(technique)과 관련되어 있다.”

<소련의 계급적 성격>, 1933

 

소련 관료의 권력과 특권은 역설적으로 노동자국가의 집산화된 소유형태로부터 나온다. 그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계급 착취가 아니라 사회에 기생하는 고유의 방식을 통해 “인민들을 약탈”한다. 트로츠키는 그들의 특권을 국가자산의 사유화를 통해 보전하려는 관료분파들이 자본주의 복귀세력과 함께 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대규모의 사유화 과정에서 큰 손해를 볼 그룹에 주로 있을, 보다 보수적 분파는 반혁명에 저항할 것이고 나아가 사회주의를 지키려는 노동자들의 봉기에 그들의 운명을 걸 것이다. 트로츠키는 계속해서 말한다. 스탈린주의 집단은 필수적인 사회적 기능을 가지고 있지 않다. 만약 노동계급이 정치혁명을 통해 관료집단으로부터 권력을 빼앗아 내지 못한다면, 자본주의 반혁명이 노동자국가를 파괴할 것이다.

 

중국혁명에 대한 우리의 분석은 그것이 아직 혁명적 조직이었던 1960년과 1970년대의 스파르타쿠스동맹(SL)의 역사적 기여에 기초하고 있다. (이 그룹의 이후 퇴행에 대해서는 <스파르타쿠스동맹(SL)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참고할 것) 1960년대 후반 시기, 마오의 ‘문화혁명’이 신좌파들과 소위 ‘트로츠키주의자’들 사이에서 환영받을 때, 스파르타쿠스동맹(SL)은 그것이 관료집단 내부의 불화로 인한 것이라고 올바르게 지적했고, 중국공산당 모든 분파는 세계의 사회주의 혁명의 확장에 궁극적으로 의존되어 있는 중국의 사회주의적 발전에 장애물이라고 주장했다. 이 입장은 1970년대 초기 소위 ‘자본주의 노선’을 주장하는 경쟁자들에 대한 승리로 힘을 얻은 마오쩌둥 분파가 소련의 퇴보한 노동자국가에 맞서 미제국주의와 노골적인 반혁명 동맹을 맺은 것으로 그 옳음이 입증되었다.

 

중국이 걸어가고 있는 커다란 변화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의 마오쩌둥 집권기와 덩샤오핑의 1980년대 그리고 후진타오의 오늘날은 본질적인 연속성이 있다. 1949년의 혁명으로 건설된 기형적인 노동자국가는 아직 파괴되지 않았다. 마오/스탈린주의 관료가 정치권력을 독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자본주의 복귀에 맞서 중국 기형적 노동자국가를 무조건적으로 방어하면서 사회혁명의 성과를 옹호한다.

 

 

인상주의자들: 개량주의 필름 거꾸로 돌리기

 

15년 전에 몇몇 좌익인사들은 덩샤오핑의 ‘시장사회주의’가 계획경제와 시장경제 사이에서 실행가능한 ‘제3의 길’일지 모른다고 상상했다. (이 관점을 우리는 <1917> 14호에서 비판한 바 있다.) 오늘날엔 그와 같은 환상은 들어설 자리가 없다. ‘시장사회주의’를 한때 소리쳐 외쳤던 많은 자들은 요즘엔 중국이 완전히 자본주의 사회로 변모되었다고 주장한다. 1990년대 덩의 ‘개혁’ 조치들을 칭찬했던 중국학 학자 빅터 리핏은 그 이후로 특정 형태의 자본주의 복지국가가 우리가 희망할 수 있는 최대치일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Critical Asian Studies, 2005년 1월).

 

그의 비관적 전망을 공유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빅터 리핏은 사회민주주의적 관점으로 중국 국가를 바라본다. 즉, 계급 중립적인 기구로서의 국가는, 만약 관료적인 계획이 실패하면, 시장요소들을 도입하는 것을 시작하여 완전한 자본주의 사회로 점진적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트로츠키는 그와 같은 관점을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소련 정부가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에서 부르주아적으로 바뀌었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개량주의 필름을 거꾸로 돌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같은 책).”

 

개량주의자들과 달리 맑스주의자에게–레닌이 <국가와 혁명>에서 설명했던 것처럼–국가는 본질적으로 특정 소유 형태를 방어하기 위해 독점적 폭력을 행사하는 “특별한 무장 기구들”로 구성되는 것이다. 시장요소들의 양적 증대를 통해서 자본주의를 노동자국가에 부활시키는 것은, 금융과 산업의 공공부문을 점진적으로 확장하는 것을 통해 부르주아 국가를 소멸시키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한 일이다.

 

중국 내 ‘자본주의 부활’을 주장하는 대부분의 견해들은 경제에서 시장관계가 명백히 지배적이라는 주장에 기초해 있다. 심지어 소유권에 대한 문제에 있어 아주 예민한 제국주의 금융자본기구들도, 어느 정도의 단서를 달기는 했지만, 중국을 “자본주의”라고 주기적으로 언급해왔다. 예를 들어, 2008년 9월 20일치 <이코노미스트>는 러시아와 중국 모두 “국가주도” “소수 독재” 자본주의라고 말한다. 다른 언론에서는 중국 경제를 “권위주의 자본주의” “관료적 자본주의” 그리고 “성장해가는 자본주의” 등으로 묘사해 왔다.

 

어떻게 중국공산당이 완전한 자본주의 복귀를 주도했는지에 대한 보다 그럴듯한, 소위 ‘트로츠키주의’적 인 체하는 설명들 가운데 하나는 <노동자인터내셔널위원회(CWI)>가 발간한 <Socialism Today> 2007년 12월/2008년 1월 판에 보인다. “중국 자본주의 반혁명”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CWI 내에서 소수파를 대표하는 빈센트 콜로는 중국 스탈린주의자들은 완전한 자본주의 복귀를 수행해내었다고 주장했다. 그 논문은 “지난 20년간의 가차 없는 사회적 반혁명 기간 동안…전(前) 마오-스탈린주의 관료들이 소련과 동유럽에서와 마찬가지로 중앙계획경제를 포기하고 자본가 위치로 옮아가는 것을 보았다.”고 주장했다.

 

콜로는 중국공산당의 ‘개혁’이, 이전에 지방 협동농장과 도시의 국유기업을 통해 보장되던 그러나 지금은 많은 이들이 그 혜택을 누릴 수 없는, 교육과 의료 보장에 어떤 파괴적인 결과를 낳았는지를 생생하게 묘사한다. 그는 중국은 무역과 외국자본의 침투라는 측면에서 볼 때 러시아나 다른 전(前) 소련 국가들보다 더 세계자본주의 체제 내로 편입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중국 기업들은 노동조합 파괴, 부패, 환경파괴와 위험한 작업환경 등으로 악명 높다고 지적한다. 중국 은행들이–그가 “자본주의 세계의 그것들만큼 기생적”이라고 여기는–국가에 의해 엄격히 통제된다는 것을 인정하는 한편, 아시아에서 그것이 특별히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그는 말한다. 그는 중국에서 토지는 공식적으로 국가소유로 남아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성공적인 ‘개혁’은 그 사용을 효과적으로 사유화했고 그것은 “토지의 반혁명”으로 귀결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콜로는 집단농장과 국영기업의 고용이 지난 10년 동안 기업 혁신, 합병과 축소, 외주경영과 주식상장 등으로 인해 절반으로 줄었다고 지적한다. 오늘날, 4분의 3의 도시 노동력은 공공부문 바깥에서 고용된다. 투자된 불변자본의 다수가 국영기업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콜로는, 그것들이 이윤을 낳도록 강제되는 한, 국가부문은 “에너지와 통신의 기본적 산업시설을 제공하고 일본과 남한 모델에 뒤이어 첨단산업을 겨냥한 자본주의 경제를 주도하는 지렛대”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국영기업들의 크기가 축소되었고 그것들이 이윤을 생산하도록 강제되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중국 프롤레타리아 내에서 친(親)사회주의 정서의 기반이 되는 국영기업 노동자들이 방어적으로 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중국공산당 최근 분파주의의 상호작용과 중국 ‘개혁’의 진화과정에 대한 면밀한 연구에 따르면 중국국가는 아직 질적 변화를 겪지 않았다. 그것은 여전히 기형적인 노동자국가로 남아있다.

 

 

시장개혁과 중국공산당의 통제

 

중국 스탈린주의자는 토착 자본가 계급의 배양이나 국영기업을 축소하려는 시도 없이 시장개혁을 1978년에 도입했다. 그와 상반되게 그들은 시장경쟁 선동은 국영기업들을 보다 효율적이게 하고, 수출을 자극하고 생산기술을 현대화하며, 그리하여 마오쩌둥이 줄곧 추구했던 것처럼 중국이 ‘초강대국’ 반열에 오르는 데 기여하리라고 희망했다. 그러나 우리가 그동안 지적했던 것처럼 (<1917> 14호와 26호를 볼 것) 시장경제 논리는 국가소유와 중앙계획경제와 조화로이 섞일 수 없다. 자본주의 시장은 노동자와 경영자들에게 ‘가치법칙’을 강제한다. 즉, 노동력이 너무 비싸면 버려지며, 경쟁력이 없으면 그 기업은 파산한다. 자본주의 시장의 ‘효율성’은 노동력과 생산수단 모두의 상품화에서 기원한다.

 

노동자국가의 계획은 그 반대로, 의식적인 경제조정에 가치법칙을 복속시킨다. 1920년대 좌익반대파의 지도적 경제학자였던 예브게니 프레오브라젠스키는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시기에 두 법칙은 완전히 상반되는 두 개의 경향으로 작용한다고 <신경제>에 기술했다. 그는 첫 번째를 ‘사회주의적 축적법칙’이라고 규정했고, 두 번째는 가치법칙이다. 그 두 가지가 충돌할 때, 만약 가치법칙이 억압되지 않는다면 계획경제는 사라지게 될 것이다. 즉, 희소한 투자자원은 사회적 효용이 아니라 이윤의 최대화를 위해 사용될 것이다.

 

1980년대를 통해 중국정부의 경제정책은 시장지표들에 대한 신뢰에 부정적인 결과들이 명백해지자 ‘개혁’과 움츠림 사이를 오가며 갈팡질팡했다. 1989년 천안문시위의 가혹한 진압은 중국공산당 지도부 내의 보수파와 덩샤오핑이 이끄는 친(親)시장주의자 사이의 알력에 뒤이어 터져 나온 것이다. 1992년 덩샤오핑 분파의 승리는 방해받지 않는 극적인 ‘개혁’을 낳았고, 그 결과들이 중국이 자본주의로 바뀌었다는 증거로 인용되고 있다.

 

시장개혁은 대규모의 국가소유자산에 대한 합법적 또는 불법적 잠식을 낳았다. 이것은 사회적 반혁명과 동반될 것이라는 현상들 즉, 부패, 환경 파괴, 대량 해고 그리고 사회안전망의 파괴 등을 낳았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들이 중국이 나아가는 방향을 분명히 나타내긴 하지만, 자본주의가 복구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반드시 살펴야 하는 중요한 점은 경제적 사유화의 정도이다. 중국의 농업 부문은 정치 사회적으로 대단한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7억 명–대략 전체 인구의 절반인–이 농업 인구이다. 몇몇 좌익인사들은 덩샤오핑의 집산화 해체를 실질적인 사유화로 잘못 인식한다. 그러나 사실 토지는 국가소유로 남아있다. 그리고 이것은 시장 가변성의 충격으로부터 가난한 농민 가족들을 보호해주고 있다. 지역적 상황의 차이가 크긴 하지만, 동등한 점유권을 보장하기 위해 지방정부가 토지사용권을 재분배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다. 토지를 농경용도 이외의 사용을 법적으로 금지하는 것은 투기나 자본주의적 사적소유를 제한하고 있다. 중국 동부 해안의 수출 산업지역에서 해고되어 내륙의 자기 고향으로 돌아온 수백만의 이주노동자들에게 토지 사용목적의 제한은 생존의 최소 저항선이 되어왔다(China Leadership Monitor, 2009 겨울호).

 

이러한 법률들이 몇몇 지방정부들이 농경 토지를 산업이나 상업 용도로 파는 것을 완전히 막지는 못했다. 작년에 있었던 9만 건의 대중적 저항의 절반가량은 바로 그러한 약탈로 인해 발생한 것이다. 어떻게 절망에 빠진 농민들이 불법적인 토지 약탈로부터 자신들의 토지 점유권을 보호하기 위해 사유화를 수용해왔는지를 서방의 부르주아 언론은 환호작약하며 보도했다. 친사유화 정서는 실제로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보편적 현상은 아니다. 2008년 베이징에 가까운 마을인 롱주아오슈의 수백 명의 성난 농민들은 자신들의 토지를 농업 이외의 용도로 토지목적을 변경한 것에 대한 쥐꼬리만한 보상에 저항하였다. 그들의 현수막엔 “집단소유 농지를 상업적 목적으로 사용하지 말라!”라고 쓰여 있었다(Toronto Star, 2008년 11월 15일). 3일 동안 그들은 트럭과 불도저 포클레인 등을 봉쇄했다. 용역 깡패와 지방 경찰들에 의해 결국 해산되었지만, 이와 같은 사회적 기생행위에 대한 저항의지는 토지문제가 미래의 정치사회적 투쟁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할 것이라는 점을 시사해 준다.

 

2001년 중국의 WTO 가입은 제국주의 국가의 기계화된 대규모 농업에 경쟁상대가 되지 않는 농민들의 생계를 위협했다. 중국정부는 한편으로 관세인하와 수입쿼터 등 WTO의 의무사항을 이행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수백 만 세대의 농업생산자들이 파산하지 않도록 보호해왔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수업료를 면제하고 농업 세금을 깎고 사회기반기설을 확대하고 사회안전망 기금을 확대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중국공산당의 ‘신사회주의농경’ 계획은 많은 농민가족들의 생활여건을 개선하였다.

 

산업부문에서 국영기업들은 10년 전에 극적인 변화를 겪었다. 3천만 명의 노동자들이 해고되고, 수만 개의 중소기업들이 주식발행이나 연합기업으로 합병되는 방식으로 사유화되거나 통합되었다(<1917> 26호를 볼 것). 이와 같은 조치들은 중국이 WTO에 가입하기 위한 ‘충격요법’으로 주룽지/ 장저민 지도부가 밀어붙인 것이었다. 그들의 의도는 국가소유권을 유지하면서 대규모의 국영기업들이 국제 경쟁력을 갖추도록 압박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국영기업들은 그들의 이윤생산능력이 아니라 은행시스템의 국가통제로 인해 살아남았다.

 

2003년 국영기업들은 전체 불변자본의 70%, 비농업 생산의 30%를 점했다. 국가부문은 대형기계, 철강, 정유, 비철금속, 전기, 통신과 운송 등 가장 전략적인 산업에서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최근 몇 해 대형 국영기업들의 사유화는 중단되었다. 단지 10분의 1 가량의 운영불능 국영기업들이 2007년과 2008년 파산처리 되었다. 나머지는 정부자산에 대한 접근권을 잃어버릴 것을 걱정한 지방 관리들에 의해 그렇게 처리되는 것이 금지되었다(Economist, 2008년 12월 13일).

 

국가부문의 크기는 소위 ‘아시아의 호랑이’ 나라들을 포함한 주변의 자본주의 국가들로부터 중국을 구별되게 한다. 싱가포르의 국영기업은 국민총생산의 10분의 1을 담당하고 있고, 남한은 5%, 대만은 그의 절반이다(UBS Investment Research, “중국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사유화를 통한 잠식에도 불구하고 토지소유권을 포함한 국가부문을 보면, 중국은 여전히 집산경제가 지배적인 나라이다. 예일대학의 경제학자 지우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유화에도 불구하고, 자산가치가 약 4조 달러에 달하는 11만 9천 개의 국영기업이 있다. 국가소유 토지는 7조원을 상회한다. 합쳐서 이 국가소유 자산들은 중국 전체 생산 자산의 4분의 3을 차지한다.

 

“국가가 그처럼 많이 소유한 가운데, 지난 30년간 자산으로부터 나온 대부분의 소득은 국고로 들어갔다. 대부분의 가정이 생산자산을 소유하고 있지 않고, 그들은 자산 수입을 얻을 수 없다. 대부분의 국민들에게 임금이 수입의 유일한 원천이다.”

Globe and Mail [Toronto], 2008년 11월 26일

 

물론, 기형적인 노동자국가는 국가소유의 양만으로 규정될 수 없다.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는 전략 부문의 기업을 지탱하거나 심각한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큰 규모의 국유화라는 수단에 의존하는 많은 자본주의 국가들이 실제로 존재한다. 여러 신식민지 국가들은 국가재원을 확충하고 제국주의 약탈자들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석유나 다른 국가자원들을 국유화했다. 그러나 이 어떤 것도 ‘반(反)자본주의적’ 행위가 아니다. 다만 부르주아의 지위를 강화하기 위한 행위이다.

 

중국을 자본주의국가라고 보는 자들은 국가소유 자산들이 지금 바로 이러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중국공산당 관료를 외국과 국내자본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하수인이라고 말한다. 중국의 자본가들이, 최소한 지금은, 중국공산당의 전복이 아니라 ‘개혁’을 말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제국주의자들이나 토착자본가들은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구매할 수 있는 만큼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부르주아 ‘다당제 민주주의’의 확립을 갈망하고 있다.

 

경제영역에서 부르주아 지식인들은 자본주의적 축적을 방해하는 규정을 철폐할 것과 국가부문을 점진적으로 축소하는 방향으로 ‘개혁’할 것을 제안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조치들은 지금 중국이 서서히 미끄러져 들어가 필연적으로 맞닥뜨리게 될 정치적위기 시, 자본주의 복구 세력을 강화하게 될 것이다.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경제학을 강의하고 있는 중국인 교수인 윙씨에우의 2006년 논문은 자본주의 복귀를 바라는 자들의 소원 목록을 제공하고 있다.

 

“중국에서 가장 중요한 경제적 과제는 세계 경제의 역사가 입증한 최선의 경제성장 엔진을 장착하는 것이다. 그것은 경쟁력 있는 사유 기업이 표준이 되고 국가는 오직 공공상품 공급과 사회안전망에만 초점을 맞추는 시장경제이다. 새로운 성장엔진을 가동하기 위해서 중국은 기본적으로 독점사업이 아닌 국방관련 이외 기업들의 사유화를 지속하고 사적소유 영역을 침해하는 법적 제한을 과감하게 철폐해야 한다.”

Journal of Chinese Economic and Business Studies, 2006년 2월

 

2008년 12월, 한 무리의 ‘반대자’들은 세계에 “2008 헌장”을 제출했다. 그것은 체코슬로바키아 자본주의 복귀세력의 집결점이 되었던 1977년 선언인 “1977 헌장”보다 노골적으로 반혁명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었다. “2008 헌장”의 서문은 “내전에서 민족주의자들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승리는 나라를 전체주의 나락에 빠뜨렸다.”라며 1949년의 혁명을 비난한다. 그 문서는 다음과 같은 사회반혁명 청사진을 담고 있다.

 

“우리는 자유롭고 공정한 시장경제 체제를 증진하고 사유재산권을 보호하고 확립해야 한다. 상업과 공업의 정부 독점을 철폐해야 하며 새로운 기업을 시작할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 전국입법부에 보고하는 ‘국가소유자산위원회’를 수립하여야 한다. 그것은 공정하고 효율적이고 질서 있게 국영기업들이 사유화되는 것을 감독할 것이다. 토지 사유권을 증진하고, 사고 팔 권리를 보장하고, 사유재산이 시장의 실제 가치를 적절하게 반영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토지 개혁을 실시해야 한다.”

New York Review of Books 1월 15일치가 다시 발간함

 

외국과 국내의 자본주의 사유기업 비중의 증가는 반혁명 세력을 강화한다. 그러나 그것이 자동적으로 어떤 계급이 지배하는가 하는 기본적인 문제를 해소하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 반혁명의 결정적인 과제는 국가권력을 정치적으로 정복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적 잠식에 대항하여 중국 전역에서 터지고 있는 대중적이고 끊임없는 노동자와 농민의 저항은, 아직 정치적으로 성숙되어 있지 않지만, 중국혁명의 궁극적 운명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증거이다.

 

 

중국공산당의 좌선회

 

장저민/주룽지 통치기간(1996년에서 2002년까지) 동안, 지배관료의 영향력 있는 분파는 지배권 손상이나 사회갈등을 동반하지 않고도 점진적이고 조화로운 자본주의 경제로의 전환이 가능하다는 견해를 공공연히 수용했었다. 그러나 완전히 사유화된 경제에서 자신들이 맡을 역할이 없다는 것을 당관료 대다수가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관료들은 국영기업들이 이윤을 내야한다고 생각하고 있고 실제로 지난 몇 년간 그래왔다. 그러나 당관료들에게 국영기업의 가치는 단순히 경제적인 데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중국공산당 정치권력의 기반, 그 존재의 구실 그리고 핵심 간부들의 훈련공간을 제공한다. 국영기업에서 모든 최고위급의 임명과 진급 그리고 해임은 당의 조직위원회와 인사부의 승인이 있어야 한다.

 

경력을 쌓고자하는 국영기업의 관리자들은 반드시 이윤성과 당에서 하달된 다른 요구들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 2002년, 페트로차이나의 마후사이와 시노펙의 리이종이라는 두 명의 석유 관리자가 16차 총회에서 당중앙위원회 보결회원에서 정회원으로 올라가는 승진심사 대상이 되었다. 그들은 모두 그들이 담당하던 회사의 파업에 대응해야 했었다. 그러나 회사의 이윤을 지키기 위해 노동자와의 타협하기를 거부했던 마후사이는 보결회원으로 남겨진 반면, 사회통합을 걱정하는 당을 생각하여 양보조치를 했던 리이종이는 정회원이 되었다(Erica S. Downs, “Business Interest Groups in Chinese Politics: The Case of the Oil Companies,” in China’s Changing Political Landscape).

 

사회불안에 대한 걱정은 중국공산당의 사유화 계획을 제한해왔다. 여전히 경제의 핵심을 구성하는 국영부문의 노동자들은 국가자산이 자신들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사적자본가들에 대해 적개심을 보인다. 부동산개발업자에게 국영창틀공장이 팔리는 것을 목격했던 한 노동자는 다음과 같이 통렬하게 지적했다.

 

“공장 안에 있던 모든 잔디와 철강은 우리 노동자의 것이다. 그것들은 우리의 땀과 노동이다. 불탄 땅 위에 창틀 조각들이 떨어져 있는 것을 보았을 때 사람들은 눈물을 흘렸다. 그것들은 국가자산이었고 관료들은 그것들을 낭비했다….”

Theory and Society, 2002년 31권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의 침탈을 비난하면서, 국영기업 노동자들은 중국공산당의 사회주의적 수사를 흔히 거론한다. 창장설탕공장이 사유화될 때 그 노동자들은 다음과 같이 항의했다.

 

“자산의 형태를 다시 구성하는 문제는 반드시 노동자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 지방정부는 단독으로 그 문제를 결정할 수 없다…. 노동자들은 기업의 주인이고 개혁의 주역이다. 노동자들 그리고 직장위원회와 상의 없이 구조조정하고 노동자에게 알리지 않고 공장을 파는 행위는 노동자의 민주적 권리에 대한 심각한 침해이다. 우리는 우리의 민주적 권리를 돌려줄 것을 요구한다.”

Modern China, Vol. 29, No. 2 2003년 4월

 

그와 같은 항의는 중국사회의 깊은 공감을 얻고 있다. 노동인민을 희생시킨 시장개혁에 의해 부자가 된 부유하고 힘 있는 상위층의 도구로 정부가 행동하고 있다는 생각이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후진타오(공산당 총비서이기도 한) 주석과 원자바오 수상의 현행정부는 천안문 사태 이후 처음으로 좌선회로 대응하고 있다. 그리고 이 행정부는 자기 스스로를 노동자 농민의 보호자 그리고 자본주의 노선 주장자들의 과속질주에 대한 반대자로서의 모습으로 보이려 하고 있다.

 

이와 같은 움직임의 첫 신호는 지금은 “중국신좌파”로 잘 알려진 지식인들이 몇 개의 국영기업의 사유화 과정에 있었던 공공자산의 대규모 유용을 폭로했던 2004년에 있었다. 그 해 11월, 중국정부는 국영기업 사유화의 주 수단인 경영 외주화를 금지했다. 한편 국영기업 관리감독 위원회(SASC, 2003년에 국영기업 관리를 위해 설립)는 국가자산의 가치를 최대화하고 자산 약탈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들을 도입했다. 그 이후 대형 국영기업의 사유화는 멈췄다. 철강회사의 외국소유는 금지되었고 몇 개의 작은 사유 광산들(커다란 홍수 피해가 있었던)은 갑자기 다시 국유화되었다.

 

이 조치들은 WTO를 지향하는 ‘시장개혁’의 주된 수혜자들인 국내의 ‘붉은 자본가들’(기업가가 된 공산당 관리들)과 외국투자자들을 제재하는 조치들과 동반되었다. 중앙정부는 도시의 토지거래를 엄밀히 통제하고 있고 식품을 포함하여 가격과 소비를 통제하고 있다. 지방 관리와 사적 사업가 사이의 공모를 표적으로 하고 해안지대의 상층부에 초점을 맞춘 대대적인 반부패 운동이 시작되었다.

 

2006년과 2007년 사이, 중국공산당은 외국자본에 대한 새로운 법령을 제정하고, 외국자본이 배후에 있는 합병을 정밀조사하고 은행, 소매업과 제조업에 대한 규제조치를 강화했다. 국내회사들을 후원하고 빈곤과 불평등을 완화할 목적으로 취해진 이와 같은 조치들은 급기야 마이론 브릴리언트(미국 상공회의소 아시아분과 부위원장)가 다음과 같이 불평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단지 외국투자자들에 대한 위협만이 아니라, 중국이 시장경제로 나아가는 것을 가로막는 것이다(New York Times, 2007년 11월 16일).

 

대단히 제한적이긴 하지만, 이와 같은 사적부문에 대한 억제는 아래로부터 압력을 받고 있는 중국공산당 내의 많은 계층이 시장개혁의 속도와 정도를 불편해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2007년 6월, 빈곤지역에 속하는 샹시에서 어린이와 정신지체자들이 벽돌공장에서 거의 노예와 다름없이 강제로 일했다는 것을 국영방송이 보도했다. 지방 중국공산당 관리가 승인했을 것이 분명한 이 치명적인 폭로는 대중적 분노를 자아냈고 친자본주의적 개혁에 대한 대중적 반감을 재점화했다.

 

퇴역 장성과 전직 장관들이 포함된 17인의 중국공산당 원로그룹은 ‘개혁’과 동반된 저임금, 국영부문의 축소 그리고 외국자본 침투를 비판하는 공개서한을 발표했다. 그 서한의 작성자들은 친자본주의적 행로를 수정하고 마오쩌둥 사상으로 돌아올 것 즉, 재국유화와 중앙계획으로 돌아올 것을, 다가오는 17차 당 총회에 호소했다. 만약 시장개혁이 계속된다면 “옐친과 같은 인자가 나타날 것이고, 당과 나라는 곧 비극적으로 파괴될 것이다.”라고 그들은 경고했다(reproduced on mrzine.monthlyreview.org).

 

마오주의 반대파들의 제안은 통과되지 않았다. 그 ‘보수파’는 중국공산당 내에서 소수이고 공개적인 마오쩌둥파(派)는 더 적다. 그러나 그 서한에 서명한 17인은 전혀 이류 인사들이 아니다. 중국공산당 내에서 이와 같은 ‘보수’적 정서가 얼마나 퍼져있는지를 측정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갈팡질팡하는 중국 재산법의 역사는 그들이 절대로 무시할 만큼 적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시사한다. 2007년 전국인민대회는 찬성 2826 대 반대 37 기권 22라는 압도적인 숫자로 ‘중국 인민공화국의 재산권에 관한 법’을 승인했다. 처음으로 사적재산 소유자의 권리를 명시한 이 법은 지난 13년간 마오주의 반대파와 ‘보수파’에 의해 저지당했었다. 2006년 늦게까지, 그들은 그것을 검토할 시간이 없었다. 그런 점에서 반대의견들이 닫힌 문 안에서 팽배했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중국공산당 관료는 대중 앞에서 통일된 모습을 보이려 애썼지만, 후진타오의 인민을 의식한 좌선회는 내부적 긴장감을 높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보수파들은 기승을 부리는 자본주의적 경쟁으로 발생한 문제들에 대해 강경히 대응한다고 한껏 선전했지만, 점점 더 거세지는 인민의 불만을 그런 것들로 잠재우기에는 역부족이라고 보고 있다.

 

 

중국의 노동자 정치혁명을 위하여!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그 속도가 어떠할지를 예견하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자본주의적 잠식과 ‘붉은 자본가’층의 두터운 성장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기형적인 노동자국가로 남아있다는 사실이다. 중국공산당 관료는 새로운 소유 계급으로 전환되지도 않았고 외국과 내부 자본의 믿음직한 도구가 되지도 않았다. 중국 스탈린주의 관료는 세계 제국주의 압력의 전달벨트처럼 행동하는 부서지기 쉽고 모순적인 특권층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그의 정치권력과 특권은 1949년 혁명으로 수립된 집산화된 소유형태로부터 오는 것이다. 깊게 균열된 최고위 인사들 중 비중 높은 분자들이 공공연히 중앙계획경제로의 복귀와 노골적인 자본주의 부활이라는 전혀 상반된 강령을 각각 옹호하는 것은, 권력을 쥐고 있는 중국공산당의 손아귀 힘이 점점 빠지고 있다는 증거이다.

 

중국이 세계경제의 초강대국으로 떠올랐다는 이야기들이 정점에 달했던 것은 2008년 베이징올림픽 때였다. 그러나 그 직후 이어진 금융위기는 수출 위주 발전 모델의 취약성과 국내 사회적 불안정성 그리고 제국주의 국가들의 유보 없는 적개심을 부각시켰다. 세계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중국이 진입한 부정적 결과들이 가장 극명하게 나타난 곳은 사유화가 많이 이루어졌고 수출 의존적인 남부에서였다.

 

절반 이상의 중국 장난감 생산 공장들은 이백만명의 실업자를 낳으며 사업을 중단하였다. 67만 개의 작은 회사들이 2008년에 문을 닫았고 그로 인해 6백 70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졌다. 건설 계획들은 중단되었고, 자동차 판매는 급강하했으며, 부동산 가격은 하강하고 있다. 실업자가 된 노동자들의 시위와 파업과 폭동은 휘청거리는 수출지역을 연일 강타했다. 대부분의 사건이 중국 언론에 소개되지 않지만,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크게 걱정하고 있다. 2008년 12월 원격회의에서, 공안부 장관인 멩지안추는 경찰 수장들에게 “세계 금융위기로 촉발된 도전을 심각하게 여기고 사회안정을 유지하는 데에 최선을 다하라(China Daily website, 19 November 2008).”고 신신당부했다.

 

중국의 사유화된 수출부문의 폭발적 성장 배경은 자본이 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공개적이고 암묵적인 보장이었다. 이것은 중국공산당의 개입 능력을 제한해 왔다. 광동성 동관에 있는 웨이수 신발공장이 파산하고 그 소유주가 노동자 4000명의 두 달치 임금을 떼어먹고 도망갔을 때, 그 지역의 택시운전사는 “그 회사는 국영회사가 아니다…. 그러므로 당신들은 정부를 그 문제로 괴롭혀서는 안 된다. 그 문제는 당신들과 사유회사 사이의 문제이다 (Financial Times, 11 November 2008).”라고 말했다. 그러나 중국공산당 관료는 만약 지나치게 손을 떼게 되면 노동자들은 소유주들과 직접 문제를 해결하려 할 것을 우려한다. 그리하여 수출의 3분의 1 가량을 담당하는 광동성의 진주강 유역 지방정부들은 체불된 임금을 지불하도록 하여 시위를 막으려고 하고 있다.

 

북경의 관료들은 1997-98년의 아시아 금융위기 때 그랬던 것처럼 정부지출 확대로 세계 경제 하강으로 인한 영향을 개선해보려 한다. 중국공산당은 주택, 지방의 사회기반시설, 수도와 전력, 운송, 환경개선, 기술 개선, 의료와 자연 재해 재건 등의 다양한 사업에 중국 연간 총생산의 16%에 달하는 4조 위안을 투여하겠다고 약속하고 있다.

 

은행가들과 여타의 금융소득자들을 구제하는 데에 공적자금이 쓰이는 미국 등 제국주의 국가들의 ‘부양 정책’과 중국의 계획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중국에서, 중앙정부의 지출은 전체 지출의 4분의 1만을 담당하고 있고, 나머지 대부분은 국영은행과 국영기업들 즉, 노동자국가의 가장 특징적인 부문에서 담당한다.

 

“금융중개회사인 CLSA의 크리스우드는 중국에서 자본주의 경제가 차지하는 비중과 관련지어 부흥 계획의 효과에 관해 이야기 한다. 더 자본주의적이라면 지금 경기하강은 더 깊을 것이다. 계획경제 더 가깝다면 그것을 회복할 가능성이 더 클 것이다. 3분의 1 가량의 산업 생산과 모든 투자의 절반을 담당하는 국영회사들은 일자리를 삭감하거나 자본지출을 축소하라고 요구받지 않았다. 모든 대형 은행들은 국가소유이며 그 책임자들은 정부에 의해 임명된다. 만약 그들이 대출을 더 해주라는 전화를 받는다면 그렇게 할 것이다.”

Economist, 1월 24일

 

중국정부는 또한 크게 사유화된 수출지향 산업을 떠받치는 역할도 수행한다. 값싼 노동력과 사적소유부문의 이윤을 보장하기 위해 중국정부는 계획된 최저임금 인상을 지연시켜 왔고, 수출산업에 대한 세금을 감면해 주고 사라졌었던 보조금을 부활시켰다. 도시의 주택시장을 다시 활성화시키기 위해 부동산 거래세가 깎였고 은행들엔 주택자금 대출을 장려했다. 재정부 차관인 왕준은 2009년 약간의 흑자재정에서 3000억 위안의 적자재정이 될 것이라고 예측한다(Caijing website, 24 December 2008). 수년 동안 이윤을 남기라는 압력을 받아왔던, 몇몇 은행 관계자들은 자산목록에 채무이행불능의 대출이 많이 쌓이던 때로 돌아가려는 것을 꺼려한다. 한 고참 은행가는 이렇게 투덜거린다. “당신 같으면 은행이 정부의 전화를 받고 즉각 대출하리라고 생각하는가?(Caijing website, 2008년 12월 26일)”

 

중국의 사적부문이 축소됨에 따라, 중국공산당 지도부들은 달갑지 않은 선택지에 직면한다. 지속가능한 국가부문의 확장은, 최소한, 외국과 국내자본의 세금을 대폭 올리게 될 것이고, 그리하여 이윤을 더욱 짜내고 실업과 폐업을 가속화시킬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국가 재정을 확대하는 데 실패하면 정권의 권위와 안정성을 크게 위협하는 사회 균열을 낳을 것이다. 1989년 천안문과 비슷한 규모의 인민 저항은 중국공산당을 보수파와 자본주의복구세력으로 양분하게 할 것이다. 결정적 대결의 시기, 보수파는 필연적으로, 오직 간접적인 방식으로, 인민대중의 지지에 의존하도록 강제될 것이다. 반면 친자본주의 집단은 국내 기업가들과 외국의 많은 수의 중국인 부르주아지들 그리고 세계 제국주의에 의해 지지받게 될 것이다.

 

중국에 자본주의는 이미 복구되었다고 주장하는 자칭 ‘혁명가들’은 중국공산당의 분열을 단지 부르주아지 진영 내부의 분열로 볼 것이다. 이와 같은 입장의 논리는 그 문제에 대해 중립을 취하려 하거나, 또는 더 가능성 높게, 소위 ‘민주적인’ 반혁명을 지지하려 할 것이다. <노동자인터내셔널위원회(CWI)>, <노동자권력(Workers Power)>, <통합서기국(United Secretariat)> 그리고 그 밖의 겉치레 트로츠키주의 조직들이 1991년 8월에, 야나예프의 ‘비상위원회’로 대표되었던 스탈린주의 잔존자들에 대항한 보리스 옐친 무리들을 지지했던 것처럼.

 

중국 스탈린주의 보수파와 자본주의 복구파들과의 결전에서, 1991년 소련 사태에서 우리가 그러했던 것처럼(<1917> 11호의 “루비콘강을 건넌 소련과 좌익의 반응”을 보시오), 트로츠키주의자는 후자에 맞서 전자를 지지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트로츠키가 이행강령에서 주창했던 입장과 일치하는 유일한 노선이다.

 

“이러한 정치적 전망 속에서 ‘소련 방어’의 문제가 더욱 구체적인 시급성을 띠고 있다. 만약 내일 소위 ‘부텐코 분파’라고 명명되는 부르주아-파시스트 분파가 정치권력을 넘볼 경우 ‘라이스 분파’는 불가피하게 바리케이드의 반대편에 서서 이들의 기도에 저항할 것이다. 일시적으로 스탈린의 동맹자가 되더라도 결국 이 분파는 보나파르트 파벌이 아니라 소련의 사회적 기초 즉 자본가로부터 빼앗아 국가소유로 변모시킨 소유체제를 방어할 것이다. ‘부텐코 분파’가 히틀러와 동맹하고 있는 사실이 증명된다면 이 ‘라이스 분파’는 소련 국외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파시스트들의 군사적 개입에 대항하여 소련을 방어할 것이다. 이와 다른 정치행동은 세계혁명에 대한 배신행위이다.

 

“소련에 대한 자본주의 반혁명 세력의 공공연한 공격에 대항하여 관료집단의 테르미도르 분파와 제 4 인터내셔널이 ‘공동전선’을 수립할 가능성을 미리 엄격하게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소련에서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과제는 아직까지도이 테르미도르 관료집단을 타도하는 것이다. 이 집단의 지배기간이 하루씩 연장될수록 경제의 사회주의적 요소는 파괴되고 자본주의 반혁명의 성공 가능성은 증대된다.”

 

중국공산당 보수파는 본질적으로 중국 기형적 노동자국가의 근본모순 즉, 집산화된 생산수단과 타락하고 무능력한 보나파르트주의 관료의 정치독점 유지 사이의 모순을 해결할 능력이 없다. ‘급진적’ 자본주의 복구세력과의 대결에서 스탈린주의 보수파의 승리가 노동계급의 손에 정치권력을 즉각 쥐어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혁명가들에게, 중국공산당으로부터 정치권력을 빼앗을 정치혁명의 전망 속에서, 중국 노동계급의 가장 선진적인 부위를 획득할 기회를 그 엄중한 때에 제공할 것이다. 반면에 중국의 옐친이 승리하게 된다면, 그것은 중국과 세계 노동계급에게 치명적인 역사적 패배가 될 것이고 미래의 투쟁에 심각히 어려운 정치지형을 만들게 될 것이다.

 

고르바초프의 소련과 지금의 중국 상황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들이 있다. 한편으로, 중국의 사적 부문은 대략 1억의 산업노동자를 양산하면서 동시에 갓 태어나기 시작한 1991년의 러시아 자본가들보다 강력하고 응집력 있는 자본가 계층을 키워왔다. 사유 기업은 중국 GDP의 50%를 차지하며 몇몇 도시에서는 70%의 고용을 담당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중국 노동자들은 소련 노동자들보다 자유시장의 착취에 대하여 훨씬 분명히 이해하고 있다. 대량의 실업자를 낳고 있는 현재의 세계 경제위기는 중국의 프롤레타리아와 그들의 동맹자인 빈농들 사이에 자본주의에 대한 반감을 부채질하고 있다.

 

중국 노동자들은 유약하고 깊이 균열된 중국공산당 관료집단을 전복하는 데에 필요한 투쟁정신과 사회적 힘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 노동계급 정치혁명은 진정한 노동자민주주의에 기초한 중앙계획경제 기구와 국내외 자본의 몰수를 통하여 평등한 사회주의 미래를 향한 길을 열어낼 것이다. 성공적인 봉기엔 국제적이고 트로츠키주의 강령으로 무장한 사회주의 혁명정당이 이끄는 수백만의 분출이 필요하다. 그와 같은 정당은 사유화된 착취현장 노동자들이 당면하고 있는 과제들과 관련된 강령을 제출할 것이고, 그 투쟁과 국영기업 노동자들의 사유화와 해고 반대 투쟁과 결합시킬 것이다. 혁명가들은 또한 농민과 지방의 협동농장 구성원들, 소수민족, 여성 그리고 그 밖의 피억압자들의 특수한 문제들도 자신의 문제로 떠안을 것이다.

 

중국 프롤레타리아 정치혁명의 승리는 세계의 역사적 사건이 될 것이다. 그것은 그 즉시 세계 정치지형을 통째로 바꾸어 놓을 것이다. 그것은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에서부터 남한과 일본, 그리고 멀리는 북미와 유럽 제국주의 요새의 혁명적 분출을 점화할 것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한 첫 걸음은 1949년 사회혁명의 성과를 무조건적으로 방어하는 중국 트로츠키주의의 핵을 결집하는 것이고, 제4인터내셔널 재건을 위한 중국 조직을 건설하는 것이다.


Articles

4 5 6 7 8 9 10 11 12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