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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중국 북한 등 노동자국가들의 사회성격 논쟁

 

논쟁의 배경과 개요:

사회주의노동자연합(이하 사노련)은 2008년 6월 7일 소련 중국 북한 등 노동자국가의 성격을 국가자본주의로 규정하는 글  사회주의노동자연합의 <우리의 입장>을 논쟁적으로 해설한다!: 소련, 북한 등의 스탈린주의 국가 체제에 대한 태도를 발표했다. 이에 대해 2008년 7월 말 전국노동자정치협회(이하 노정협)은 맑스주의 방법론과 원리를 포기한 사노련의 국가자본주의 비판: 소련사회에 대한 전면 분석에 앞서를 발표하여 국가자본주의 입장을 비판하고 소련의 사회주의적 성격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행동강령’은 2008년 9월 23일 노정협의 ‘사노련의 국가자본주의론 비판’을 읽고 를 발표하여 사노련의 국가자본주의론에 대한 노정협의 비판을 지지하면서, 한편 스탈린주의적 관점으로 경사되어 있는 노정협을 비판하였다.

이리하여 삼각 구도를 지니는 논쟁이 본격화되었다. 즉, 한쪽(사노련)은 소련 등을 국가자본주의로 규정하고, 다른 한쪽(노정협, ‘국제주의’)은 소련을 사회주의로 규정하여, 퇴보한 노동자국가로 규정하여 노동자 정치혁명을 주장하는 트로츠키주의를 좌편향적 무정부주의로 인식한다. 마지막 한쪽(‘행동강령’)은 레닌 사후 트로츠키와 제4인터내셔널 전통을 따라 소련을 퇴보한 노동자국가(중국 북한 등은 기형적 노동자국가)로 규정한다. 그리하여 하나의 입장은 다른 두 입장에 대해 맞서면서, 동시에 하나의 입장에 대해 다른 한쪽과 더불어 비판하는 형태로(예를 들어, ‘행동강령’의 경우 국가자본주의론자들과 스탈린주의에 경도된 정치적 태도 모두의 공격에 맞서면서, 국가자본주의론을 비판할 때는 노정협과 스탈린주의를 비판할 때는 클리프주의와 의견을 같이 하게 되는 등으로) 논쟁이 전개되었다.

‘행동강령’의 논쟁을 중심으로, 지금(2008년 11월 16일)까지 제출된 거의 모든 글들(몇 개의 쪽글들을 제외하고)을 정리 편집했다. 몇몇 글은 전문을 싣지 않고 링크로 처리했다. [2008년 11월 16일 편집]

관련된 글 목록

A. 소련 등 노동자국가들에 대한 세 가지 입장

1. 사회주의노동자연합의 <우리의 입장>을 논쟁적으로 해설한다!: 소련, 북한 등의 스탈린주의 국가 체제에 대한 태도–사노련, 2008/06/07

2. 맑스주의 방법론과 원리를 포기한 사노련의 국가자본주의 비판: 소련사회에 대한 전면 분석에 앞서–노정협, 2008/07

3. 노정협의 ‘사노련의 국가자본주의론 비판’을 읽고–국가자본주의론과 스탈린주의 모두에 반대한다!–행동강령, 2008/09/23

 

B. ‘행동강령’과 노정협, ‘국제주의’와의 논쟁

4. ‘행동강령’에 대한 비판–국제주의, 레닌주의, 2008/09/24

5. 국제주의, 레닌주의에 대한 답변–행동강령, 2008/09/27

6. ‘행동강령’에 대한 비판–국제주의, 2008/09/27

7. 노정협 동지, ‘국제주의’에 답하며–행동강령, 2008/10/01

8. 독단에 갇혀 역사적 사실과 진실을 왜곡하는 ‘행동강령’–국제주의, 2008/10/02

9. 어떤 독단? 그리고 어떤 왜곡?–행동강령, 2008/10/10

10. 숨 죽어버린 ‘행동강령’과의 논쟁–국제주의, 2008/10/14

11. 논쟁의 숨을 살려내기 위하여–행동강령, 2008/10/16

12. 죽은 논쟁 부여잡기–국제주의, 2008/10/21

13.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구하기–행동강령, 2008/10/27

 

C. 국가자본주의론자들과 ‘행동강령’의 논쟁

14. 사노련회원 2008/09/25———- 행동강령 2008/09/26

15. 대리운전노동자 2008/09/26———- 행동강령 2008/09/26

16. 이론의 빈곤 2008/09/26———-  행동강령 2008/10/01

 

D. ‘대리운전노동자’와 ‘국제주의’의 논쟁

17. 내가 이해하는 국가자본주의론과 마르크스주의: ‘노정협’과 ‘행동강령’에 대한 비판–대리운전노동자) 2008/10/06

18. 나 홀로 ‘기준과 범주’에 빠져 있는 ‘대리운전노동자’–국제주의 2008/10/10

 

 


3. 노정협의 ‘사노련의 국가자본주의론 비판’을 읽고

노정협의 ‘사노련의 국가자본주의론 비판’을 읽고

–국가자본주의론과 스탈린주의 모두에 반대한다!

**모든 굵은 글씨 강조는 글쓴이가 한 것이다.

1.

현실 노동자국가 분석의 중요성

<전국노동자정치협회>(이하 노정협)는 지난 43호 <노동자정치신문>을 통해 ‘맑스주의 방법론과 원리를 포기한 사노련의 국가자본주의 비판’을 발표했다.

우리 모두 알다시피, 1991-2년 발생한 소련의 붕괴, 그리고 공교롭게 비슷한 시기에 수입된 IS의 클리프주의는 ‘국가자본주의론’을 급속히 유행시켰다. 그리하여 IS의 한국지부인 <다함께>뿐만 아니라, <사회주의노동자연합>(이하 사노련)이나 <사회주의노동자신문> 등도 소위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을 ‘국가자본주의론’으로 인식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이 ‘국가자본주의론’이 유행하게 된 까닭은, 클리프의 ‘국가자본주의론’이 탄생한 1940년대 말이 그러했던 것처럼, 한국 특유의 맹렬한 반북 반공 히스테리에 힘입은 바 크다.

그런데 요즘, 대응하기 까다롭고 설명하기 어려운 문제를 ‘국가자본주의론’을 통해 회피하려는 데에서 나아가, 그것을 이론으로 정립하려는 독자적인 시도들이 나타나고 있다. 사노련이 지난 6월 <사회주의자> 2호에서 발표한 ‘소련, 북한 등의 스탈린주의 국가 체제에 대한 태도’는 그러한 시도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노정협의 ‘사노련의 국자자본주의 비판’은 시의적절하고 가치 있는 것이다. 소위 ‘현실 사회주의 국가’의 하나인 북한 그리고 중국에 인접하고 있는 남한의 노동계급에게 이 문제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IBT는 이 문제를 이렇게 말한다.

“남한의 일부 사회주의자들은 소련의 성격 문제 등과 더불어 북한의 성격을 규명하고, 그에 대한 태도를 결정하는 문제가 이론적으로만 중요할 뿐, 실천적으로는 그다지 날카로운 쟁점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생각이 다르다.

말할 필요도 없이, 혁명은 국제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한 나라 혁명의 성공과 그 방어는 국제적 역관계 속에서 규정된다. 즉, 남한 혁명은 남한 내 노동과 자본의 역관계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역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구체적으로 자본주의 세계 질서를 지탱하는 축인 미국과 주변의 나라들인 중국, 북한, 러시아 그리고 일본의 정세는 남한 역관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것이다. 그리고 동아시아의 혁명적 상황은 남한이 아니라, 구소련과 동구의 붕괴 때 그러했던 것처럼, 중국이나 북한의 격동을 통해서 시작될 수도 있다. 미래를 단언할 수는 없지만, 현재로서는 중국과 북한 체제가 남한이나 일본보다 더 불안정하기 때문에 동아시아의 혁명 상황은 (그것이 정치혁명으로 나아가든, 아니면 자본주의 반혁명으로 나아가든 간에) 천안문 사태와 같은 격변으로 시작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국경을 맞대고 있고, 같은 민족이라는 사정 때문에, 북한의 정세 변화는 남한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주게 될 것이다. 따라서 중국과 더불어 북한의 성격을 정확히 규정하고 정치적 입장을 명확히 하는 것은 날카로울 뿐만이 아니라, 사활적인 문제이다.

한편, 사회주의를 지향한다는 많은 좌익 조직들이 ‘국가 자본주의론’으로 중국이나 북한의 성격을 규정하고 있다. 이 ‘국가자본주의론’은 참 편리한 이론이다. 토니 클리프는 자신의 굴복을 치장하는 데 이 이론을 동원했다. 또한 이 이론은 손에 때 묻히기를 싫어하는 쁘띠 부르주아 공론가들의 이상주의적 성향을 만족시키기도 한다. 이들에게는 현실보다 자신들의 공상이 우선한다. 이들은 맑스주의의 구체적인 실현 즉, 구소련의 역사나 중국, 북한 등이 자신의 머릿속 추상과 일치하지 않는 데에서 오는 실망이나 당혹스러움을 ‘국가 자본주의’라는 거짓 이론으로 달랜다. 누추해 보이는 ‘현실 사회주의(노동자 국가)’를 국가 자본주의로 일축하는 것을 통해, 허약하기 짝이 없는 자신의 사회주의 이상이 보존되었다고 안도한다.

중국이나 북한을 간단하게 국가자본주의라고 규정하는 자칭 사회주의자들은, 아마도 이들 나라들이 ‘마땅히 무너져야 할 체제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 제대로 건설하면 된다.’라고 편리하게 생각하는 듯하다. 하지만 그 누추해 보이는 소위 ‘현실 사회주의 국가 (퇴보한 그리고 기형적인 노동자국가)’들을 자본주의의 공격에 맞서 건설하고 지키기 위한 계급투쟁의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인민들이 처절하게 죽어갔는지를 상기해야 한다. 소련에서 수천만의 인민이 내전과 2차 대전을 통해 죽어야 했다. 한반도에서만 내전과 전쟁을 통한 계급투쟁에서 죽어간 인민이 3백만이 넘는다.

사실 사회는 가장 높은 수준의 그리고 가장 복잡한 형태의 물질 운동이어서 그것을 이해하는 일이 쉽지 않다. 게다가 역사의 전개는 추상화된 모습이 아니라, 우여곡절을 겪으며 전개된다. 현실은 그 추상을 법칙적으로 실현하지만, 그 구체적인 실현 형태는 그 추상과 때로 달라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상반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20세기에 있었던 노동자 혁명(들)은 그 극명한 실현 형태였다. 맑스와 레닌이 혁명으로 가는 지침과 해석의 도구를 많이 남겼지만, 노동자 혁명의 성공, 고립 그리고 스탈린주의라는 퇴행은 인류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사건이었다. 그 혁명을 이끌었고 중심에 있었던 좌익반대파와 트로츠키마저도 그 사건을 명확히 해석해 내는 데에는 10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었다.

우리는 그보다는 쉽다. 맑스, 레닌과 트로츠키가 남긴 이론적 유산은 20세기에 일어났던 굵직한 역사적 현상들을 거의 설명가능하게 해 준다. 그 범주에서 벗어난 사건은 중국, 북한 쿠바, 베트남 등 노동자 혁명 없이 수립된 노동자 국가들이었다. 하지만 그 역시 <배반당한 혁명> 등을 비롯한 트로츠키의 노동자 국가 분석을 바탕으로 한 유추를 통해 해석해 낼 수 있었다.

중국과 북한은 강 건너 불이 아니다. 남한 혁명의 사활적인 문제이다. IS 그룹의 지도자들이야 그 동안의 일관된 굴복의 역사를 숨기기 위해서라도 그 이론을 고수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좌익 그룹들이 중국과 북한을 손쉽게 ‘국가 자본주의’라고 규정하고 외면해 버리는 것은, 나태를 넘어 범죄적일 수 있다. 20세기에 유산된 수많은 혁명에서 목도했지만, 노동계급 지도부의 불철저는 인민의 피를 헛되이 흘리게 하기 때문이다.”–17대 대선에 대한 IBT 입장

 

청산주의 우려와 그 현실화

노정협의 이번 문건에는 ‘국가자본주의론’을 옹호하는 사노련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들이 많다. 다음 인용문은 그 중의 하나이다.

“현실 사회주의 분석에 있어서 전면 부정하는 태도는 자칫하면 청산주의를 낳을 수 있다. ‘국가자본주의론’처럼 소련이 사회주의가 아니라고 주장한다고 해서 자본주의 사회의 대중들에게 새겨져 있는 사회주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현실 사회주의를 있는 그대로 분석하면서 우리가 맞닥뜨릴 수 있는 혁명의 현실을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노정협

‘국가자본주의론’은 결국, 노동계급의 기존 성과를 청산하려는 경향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노정협의 우려에 동의한다. <가자! 노동해방> 14호에서 그 우려는 현실이 되고 있다.

“북한 김정일의 사망, 그리고 북한의 관료적 지배체제의 붕괴에 대해 우리가 슬퍼해야 할 이유가 없다. 무너져도 빨리 무너져야 할 반동 체제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중략) 나아가서 이런 상황에서는 북한 노동자 민중은 ‘미제 축출’을 내건 북한 관료집단의 영향력에 다시 포섭될지도 모른다. 남한에서도 계엄령을 비롯한 살벌한 반동 조치들이 활개 치면서 노동자 민중의 수십 년의 투쟁 성과들을 무로 돌리려 할 것이다.”–최영익, 북한 김정일 체제의 위기-부시와 이명박의 야합에 맞서야 한다!

이 글에서 사노련은, 북한 정권은 “무너져도 빨리 무너져야 할 반동 체제”라며 미제와 남한 부르주아들과 인식을 같이 한다. 머리를 풀숲에 묻어버리면 세상의 모든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 꿩처럼, 일제 민족해방투쟁과 해방 후의 미군정, 한국전쟁, 반공반북이데올로기를 통한 혁명운동에 대한 잔인한 탄압 등 한반도의 근현대사에 대해 사노련은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은 듯하다. 아마도 조합주의 경향 때문일 것이다.

전 세계 자본주의 초과 착취의 버팀목이고, 국제적으로 자행되는 온갖 만행에 연관되어 있으며, 남한 부르주아의 산파인 “미제”를 “축출”하자는 구호는 북한 관료집단의 구호일 뿐이라고 사노련은 생각한다. 남한 혁명이 성공하기 위해선, 최소한 한반도 차원에서라도 미제를 축출해야 한다. 남한 부르주아(국제적으로는 미제의 하위파트너)들이 해방 이후부터 지금까지 줄기차게 미군의 존재에 목을 매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사노련은 미제 축출 없이도 사회주의 혁명이 과연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리고 북한의 붕괴는 노동계급에게 또 다른 패배를 가져다 줄 것이다. “자본주의적 재앙의 한반도화가 진행될 것(IBT)”이고, “부르주아는 기고만장(노정협)”해질 것이며, “북한 인민은 아시아 등지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나 중국 동포들처럼 가장 혹독하게 착취당하는 처지가, 남한의 노동 계급은 북한의 값싼 잉여노동으로 인해 현재보다 더욱 열악한 노동 조건을 강요받게(IBT)” 될 것이다. 1990년대의 소련과 동구권 몰락이 노동계급의 전 세계적 사기저하를 몰고 왔다는 사실을 사노련은 정녕 모르고 있는 것일까?

“무너져도 빨리 무너져야 할 반동 체제”라고 말하며, 기존의 진지를 쉽사리 적에게 내어주는 사노련은, 그 동안 남한에서 쌓아 올린 “투쟁 성과들을 무로 돌(릴)” 가능성만을 걱정한다. 반면, 사노련이 “빨리 무너져야 할 반동 체제”라고 규정한 북한을, 훨씬 더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을 자본가 단체들은, 이렇게 묘사한다.

“북은 근로자의 임금을 ‘생활비’라고 부른다. 생활비는 기본노임, 가급금, 상금 및 장려금으로 구성된다. 기본노임은 직종과 소속 산업부문, 노동 부류에 따라 정액 임금제와 도급 임금제로 구분된다. 공통적으로 노동의 양과 질에 따라 차등화 되어 있다. (중략) 다만, 무상 치료제, 무료 의무교육제, 사회보장제, 영예군인 우대제 등의 사회적 시책들은 계속 실시되고 있고 , 연금이나 생활보조금은 인상됐다.”–북한투자전략연구소, 주간 북한경제동향 3호http://www.dprkinvest.org/

사노련은 ‘촛불노동자 13대 행동강령’에서 ‘국유화, 무상 의료, 무상 교육’ 등을 제기했다. 북한에서 실시되고 있는 ‘국유화, 무상 의료, 무상 교육’은 그 강령과 무관한 것인가?

 

‘사회주의’라는 용어 사용의 문제

사노련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이다’라고 말하는 반면, 노정협은 ‘현실 사회주의이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사회주의라는 용어 사용에 대해 분명히 해 둘 것이 있다. 트로츠키의 견해를 들어보자.

“공산주의로 가는 첫걸음인 노동자국가에서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 즉 각자가 일할 수 있고 일하기 원하는 정도에 따라 노동을 허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더욱이 일의 많고 적음과 무관하게” 각자의 필요에 따라” 모든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도 없다. 공산주의를 달성할 정도로 생산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우선 임금이라는 관습에 의존할 필요가 있다 . 즉 개개인 노동의 질과 양에 비례하여 재화를 분배해야 한다. 마르크스는 새로운 사회를 향한 이 첫 단계를 “공산주의의 가장 낮은 단계”라고 불렀다.” (중략)

달성된 노동생산성과 무관하게 소유형태만 가지고는 이 문제가 완전히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이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견해이다. 마르크스에게 공산주의의 가장 낮은 단계란 처음부터 경제발전에서 가장 발전한 자본주의보다도 높은 수준에 도달한 사회를 의미했다. 이론적으로는 이 논리에 허점이 없다. 왜냐하면 최초의 낮은 단계에서도 세계적 차원에서 공산주의는 자본주의보다 더 발전한 체제이기 때문이다.” (중략)

“러시아는 자본주의의 가장 강한 고리이기는커녕 가장 약한 고리였다. 현재 소련은 세계의 경제수준을 능가하고 있기는커녕 자본주의 국가들을 따라잡으려고 노력하고 있을 뿐이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당대에 가장 발전한 자본주의의 생산력을 사회화시킨 기초에서 형성될 사회가 공산주의의 가장 낮은 단계 즉 사회주의 사회이다. 그렇다면 소련은 명백히 사회주의 사회가 아니다. 왜냐하면 소련은 자본주의 국가들보다 기술, 문화, 재화의 측면에서 상당히 뒤떨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 소련이 보여주고 있는 모든 모순적 요소들을 인정할 경우 이 체제는 사회주의가 아니다. 다만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예비적 체제(preparatory regime)로 보는 것이 더 진실에 가깝다.”–트로츠키, <배반당한 혁명>, 갈무리출판사, IBT, 제3장, 사회주의 체제와 국가

이렇게 길게 인용하는 의도는, 양측의 용어 사용 모두 특정한 정치적 전통에 기초해 있고, 일정한 편향을 지니고 있으며, 그로 인해 (퇴보한 또는 기형적) 노동자 국가를 과학적으로 이해하는 것에 장애가 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노련은, 스스로 인정하건 그렇지 않건, 소련 등 소위 ‘현실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견해는 토니 클리프를 대표로 하는 ‘국가자본주의론’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한편, 노정협은, 뒤에서 자세히 다루겠지만, 스탈린주의의 전통에 기대어 있다.

트로츠키는 레닌과 더불어 1917년 10월 혁명으로 탄생한 사회체제를 사회주의라고 규정하지 않았다. 생산수단의 국유화와 소비에트 권력에 기초한 노동자 국가로 인정했다. 관료집단의 집권과 그 퇴보 이후, 트로츠키는 그것을 퇴보한 노동자국가(degenerated workers’ state)로 규정했다. 트로츠키가 1940년 사망한 이후, 2차 세계 대전 소련이 장악한 동유럽에서, 그리고 중국, 북한, 쿠바, 베트남 등 민족해방운동을 통해, 소련 체제를 이식한 노동자국가들이 등장했다. 이 노동자국가들을, 제4인터내셔널의 전통을 이은 혁명가들은, 기형적 노동자국가(deformed workers’ state)라고 규정한다. 앞으로 논쟁이 되어야겠지만, 나는 트로츠키와 제4인터내셔널 전통에 따른 명명법이 과학적이라고 믿는다.

 

‘대담함’으로 과학을 대치하는 사노련

사노련은 ‘어떤 과정을 통해, 어떤 시기에, 어떤 소유관계에 기초해서’와 같은 사회 성격 규정의 핵심적인 문제들에 대한 논증을 생략해 버린 채, 격앙된 느낌표와 “피의 강물이라는 문학적 수사(노정협)”로 느닷없이(!) 소련 중국 북한 등에 부르주아 정권을 등장시킨다.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잡든 다음은 분명하다: “러시아를 제외한 어느 나라에서도 노동자 권력이 수립되어 사회주의로 전진한 경우는 없다! 노동자 권력의 외피를 둘렀던 사회 체제는 스탈린주의 체제의 소부르주아 판에 불과했다! 동양의 소부르주아 혁명정부는 국가자본주의 관료 체제로 전화해나갔다! 이들은 혁명의 시기든, 이후의 반동화되는 시기든 공히 노동자계급운동에 대한 파괴자로 군림하거나, 노동자계급운동의 파괴를 반영했다!”–사노련(노정협의 인용과는 다른 부분)

이에 대해 노정협은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반박한다.

“그런데 과연 역사상 부르주아 혁명의 역사적 과제를 담당하는 부르주아 계급이 중국, 북한, 쿠바, 베트남에서 이루어진 혁명적 조치를 취한 적이 있는가? 이들 국가들은 봉건적 소유관계를 철폐했을 뿐만 아니라 지주 토지의 무상몰수, 무상분배, 소작세의 폐지로부터 시작해서 집산화와 국유화로 나아갔다. 뿐만 아니라 무상의료, 무상주택, 무상교육 조치를 실시했다. 다만 역사적으로 제한된 생산력 발전의 낮은 수준 때문에 그 질이 그다지 높지 않았을 뿐이다.”–노정협

 

‘국가자본주의론’과 제국주의

또한 노정협은 ‘국가자본주의론’이,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건, 궁극적으로 제국주의 입장으로 귀결된다는 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이러한 역사발전의 변증법적 과정을 보지 못하고 이들 국가들을 일면적으로 반동체제로 규정해버리면 이 주장은 반공이데올로기로 무장하고 현실 사회주의를 포위해오던 제국주의의 입장과 같게 되는 것이다.”–노정협

‘국가자본주의론’은 토니 클리프 고유의 발명품이 아니다. 이미 레닌이 배신자라 칭한 카우츠키는 1917년 혁명 직후, 내전에 시달리고 있던 소비에트 정권을 국가자본주의 체제라고 규정했다. <미국사회주의노동자당> 소속이던 맥스 색트먼은 2차 세계대전 직전, 소련을 ‘집산 자본주의’라고 규정 소련 방어를 거부했고 트로츠키주의로부터 이탈했다. 이후 그들은 우경화를 거듭하다가, 그 중 일부는 신보수주의 이론가가 되었다. 토니 클리프의 ‘국가자본주의론’은 한국전쟁 무렵 등장했다. 2차 대전 직후 극심해진 반공 공세 속에서 소련을 국가자본주의라고 규정하고, 6. 25 전쟁 때 어느 편도 들 수 없다는 입장을 취했다. 스탈린 사후 소련에서 진행되던 스탈린 격하 운동으로 인해 갈등을 빚던 모택동은 소련을 국가자본주의라고 부르며 1972년 미 제국주의와 반(反)소련 동맹을 맺는다.

이처럼 국가자본주의는 단순히 이론인 것만이 아니다. 카우츠키에서부터 모택동에 이르기까지, ‘국가자본주의론’은 제국주의로의 경도이거나 압력의 결과였다.

 

국유화에 대한 관점

소련, 중국, 북한 등을 자본주의로 규정하고자 하는 사노련은 국유화는 사회주의적 소유가 아니라는 대단히 놀라운 입장을 제기한다. 소위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만이 아니라, 자본주의 국가들에도 국유화한 기업이 부분적으로 있다는 이유에서이다.

“이들은 사회주의를 일종의 국유화 체제로 간주한다. 만일 국유화 체제가 사회주의라면 자본주의 체제에서 존재하는 “국영기업들”은 사회주의 체제의 일부일 것이다. / 물론 사회주의자들은 “국영기업이나 공기업의 민영화 정책”에 대해 반대한다. 이것은 사적 소유 체제, 그리고 이로부터 비롯되는 생산수단의 부르주아적 사용에 대한 반대를 표현한다. 그러나 이로부터 “국영기업과 공기업”을 모종의 사회주의 소유관계로 접근하는 것은 맑스주의를 완전히 웃음거리로 만드는 것이다.”–사노련(노정협과 다른 부분에서 인용)

사회주의적 국유화와 자본주의적 국유화를 혼동하며, 기존 노동자국가들의 국유화를 얼렁뚱땅 무시해버리는 사노련에 대해, 노정협은 다음과 같이 옳게 지적한다.

“물론 생산수단의 국유화는 사회주의의 형식이다. 그러나 그것은 주요한 사회주의 형식이다. (중략) 그런데 자본주의에서 국유화는 자본주의 초기에 독점자본이 형성되지 않은 가운데 국가가 주된 자본축적의 주체로 나설 때나, 공황으로 파산한 사기업을 국가가 매입해서 국유화하거나, 파시즘처럼 전시체제를 효과적으로 운영하기 위하여, 사민주의 정부에 의해서 일부 산업에 대한 국유화가 이뤄지기도 한다. 파시즘 하에서 국유화 비율이 높지만 자본주의에서 모든 국유화는 사적소유 체제를 인정하면서 사적 독점자본을 위해서 존재한다. 국가는 사적자본이 성장하거나 요구가 있으면 언제든지 사유화 조치를 취한다. 이렇게 자본주의에서 국유화와 사회주의에서 국유화는 분명히 다르다.”–노정협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생산수단의 국유화가 사회주의의 충분조건은 아니다. 하지만, 생산수단의 국유화는 사회주의의 핵심 필요조건이다. 사노련처럼 도식으로 말한다면, 사회주의는 ‘생산수단의 국유화+노동자 민주주의+자본주의 최고의 생산성’일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의 국영기업의 성격과 사유화 반대 투쟁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촛불정국과 <사노련>의 조합주의적 기회주의’에서 언급한 바 있다. 여기서는 사노련이 혼동하는 사회주의적 국유화와 자본주의적 국유화의 차이를, 노정협의 지적에 더해, 몇 가지 덧붙이고자 한다.

노동자 국가의 국유화는 ‘혁명’을 통해 등장하지만, 자본주의적 국유화는 국가투자를 통해 등장한다. 노동자 국가의 생산수단 국유화는 경제 체제 전체를 지배하는 ‘전면적’인 것이지만, 자본주의 국유화는 자본주의 체제를 강화 보완하는 수준에서 일면적으로 이루어진다. 노동자 국가의 국유화는 ‘노동계급의 이익’에 봉사하며 ‘계획 경제’의 일부가 되지만, 자본가 국가의 국유화는 시장 경제의 일부이며 자본가 계급의 이익에 봉사한다. 노동자 국가의 국유화 체제가 전면적인 사적 소유체제로 변화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반혁명’이라는 사회격변을 동반하지만, 자본주의 국가의 국영기업은 매각 조치로 이루어진다.

생산수단의 소유형태는 사회 성격을 가늠하는 맑스주의의 핵심 문제이다. 맑스는 생산수단의 소유 여부에 따라 계급이 구성된다고 가르친다. 노동자 민주주의로 보완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무너져도 괜찮은’ 체제라고 규정하는 사노련이야말로, “맑스주의를 웃음거리로 만드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자본가 진영의 편을 드는 반동적인 태도이다.

*               *            *

이처럼 사노련의 국가자본주의론에 대한 노정협의 비판에는 의견을 같이할 만한 내용이 많으며, 대부분 동의한다.

2.

하지만, 노정협의 ‘사노련의 자본주의 비판’을 읽으면서 우려스러운 것이 있다. 그것은 국가자본주의로부터 맑스 레닌주의와 노동자국가(퇴보한 또는 기형적인)를 이론적으로 방어하는 데에 머무르지 않고, 더 나아가 스탈린주의까지 방어하려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

트로츠키(주의)에 대한 태도

그런 의심이 드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소련의 성격을 왜곡하는 ‘국가자본주의론’에 맞서 싸우면서, 소련의 성격을 규명하는 데에 주역이었고, 여러 수정주의적 견해들에 맞서 소련 방어를 위해 일생을 걸고 투쟁한 트로츠키를 인용하는 데에는 참 인색하다는 점이다.

레닌 생전에도 감지되긴 하였지만, 그 퇴보가 명백히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의 죽음 이후였다. 그리하여 소련의 퇴보와 맞서 싸우고 또 한편으로 소련 성격에 대한 여러 조류의 수정주의적 견해와 맞서 싸운 것은 레닌이 아니라 트로츠키였다. (그런 점에서, 트로츠키의 핵심과업인 소련 방어를 정면으로 거부하는 IS나 그 한국지부인 <다함께> 그리고 <사노련> 등이 스스로를 트로츠키주의로 자처하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들의 강령에 걸 맞는 정확한 명칭은 ‘토니 클리프주의’일 것이다.)

노정협은 딱 한 번 트로츠키를 인용한다. 그런데 트로츠키(또는 트로츠키주의)를 부정적으로 비판하는 듯한 “4장 좌편향적 무정부주의”에서, 그것도 ‘국가자본주의론’ 비판과는 별로 관련이 없는 ‘평가와 전망(1906년)’ 일부를 인용한다. ‘평가와 전망’은 트로츠키가 연속혁명론을 펼친 첫 저작인데, 연속혁명론은 스탈린이 ‘일국사회주의론’을 확립하기 위해 반드시 타격해야 했던 목표였다.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격하 운동

그런 의심은 흐루시초프가 ‘레닌의 유서’를 공개하며 벌인 ‘스탈린 격하 운동’에 대한 다음의 평가에서 커져간다.

“지금까지의 대략적으로 서술한 경제정책을 중심으로 벌어졌던 볼셰비키 내부의 투쟁의 전 과정에 대한 엄밀한 평가가 필요하다. 흐루시초프는 스탈린 사후 스탈린의 개인숭배를 비판했다. 그런데 이 비판은 스탈린 시대에 대한 온전한 비판과 평가가 아니라 개인의 권력욕 때문에 모든 일이 빚어진 것이라는 식으로 역사를 단순화 한다. 이는 소련사회 구성체에 대한 진지하고 올바른 접근을 막고 개인의 문제, 개인 간의 권력다툼이 독재의 원인이라는 부르주아 역사관이다.”–노정협

물론,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비판은 온전한 것이 아니다.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비판은 아이러니하게도 대단히 스탈린주의적인 동기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스탈린주의는 “제국주의의 군사적 압박으로 정치적 공황 상태에 빠진 관료들의 세계관이다. 그들은 제국주의라는 당면한 위협에 질식되어, 노동계급의 장기적 국제적 이익을 도모하는 안목을 상실하고, 관료 집단의 당면한 일국적 이익만을 도모한다.(IBT, 같은 글)” 혁명가가 아니라, 국유화에 기생하는 특권층인 자신들의 모습을 숨기기 위해, 그들은 맑스나 레닌의 대리인으로 행세한다.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비판은 그런 맥락에서 나왔다. 즉, 스탈린(정확히는 스탈린주의 체제)에 대한 반감이 고조되어 있는 노동계급 앞에서 스탈린을 비판함으로써,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공격의 예봉을 피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것은 같은 뿌리에서 탄생한 노태우가 전두환을 법정에 세우고 처벌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한편, 중국의 모택동이나 북한의 김일성은 레닌의 대리인일 뿐만이 아니라, 소련 즉, 스탈린의 대리인으로서도 행동했다. 그런 점에서 자신의 근본을 흔드는 스탈린 격하운동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그런 점에서 각각 흐루시초프 정권과 갈등을 빚었다.

그런 점에서 스탈린주의 세계관과 체제 전체가 아니라 스탈린 개인의 비판에만 머무르고 있는 흐루시초프의 비판은 온전한 것이 아니며, 혁명가들은 그 점을 지적해야 한다. 하지만 노정협은 그 점을 언급하는 대신, 흐루시초프의 비판마저 부르주아 역사관이라고 일축해 버린다.

 

상황적 불가피론과 일국 사회주의론

나아가 노정협은 네 번째 장인 “4. 소련사회 분석에 있어서의 좌편향적 무정부주의”에서 ‘상황적 필연론’으로 스탈린을 옹호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스탈린의 등장(트로츠키에 의하면 소련판 테르미도르 반동) 당시를 노정협은 “유럽에서의 혁명의 기대가 송두리째 무너졌을 때” “세계 혁명의 가능성이 물 건너 간 상황”이라며 과장한다. 물론 당시 볼셰비키들이 독일혁명에 크게 기대했고, 그 실패가 커다란 패배감을 불러일으킨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계 혁명의 가능성이 “송두리째 무너”지거나 “물 건너 간” 것은 아니었다. 소련 혁명의 성공으로 인해 고무된 노동계급은 1919년 독일만이 아니라 각 나라에서 혁명적 상황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문제는 ‘일국사회주의론’과 스탈린 관료집단이, 중국, 영국, 스페인, 또 다시 30년대의 독일, 프랑스 등 그 뒤로 연이어 발생하는 여타 나라들의 혁명적 상황을 물 건너가게 했다는 데에 있다. (자세한 내용은, ‘날조를 일삼는 스탈린일당 재판 (스파르타쿠스동맹, IBT)’, ‘스페인 전쟁(트로츠키, 풀무질, IBT)’, ‘레닌 사후의 제3인터내셔널(트로츠키)’, ‘프랑스 인민전선비판(트로츠키, 풀무질, IBT)’, ‘트로츠키의 반파시즘 투쟁(풀무질, IBT)’ 등을 참조할 것)

그리고 노정협은 그 ‘일국사회주의론’이 마치 당 대회의 신임을 얻은 정당한 결정인 것처럼, 반면, 그에 맞선 트로츠키와 좌익반대파 등은 민주적 절차에 따라 정당하게 기각당한 것처럼 말한다.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론’은 1925년 12월 제14차 당대회에서 압도적으로 가결됐다.”–노정협

‘일국사회주의론’을 압도적으로 가결했다고 소개하는 1925년 14차 당 대회가, 사실상 스탈린주의 관료화를 완성하는 대회였다는 사실을 노정협은 언급하지 않는다. 그 과정을 빠르게 살펴보자. 독일혁명의 실패(1919-23년), 내전과 많은 핵심 당원들의 전사(1917-23년), 레닌의 뇌졸중 발병(1922), 잠깐의 회복 기간 동안 ‘레닌의 유서’로 알려진 스탈린의 서기장 해임 등을 요구하는 ‘당 대회에 보내는 편지’ 구술(1923년 초), 스탈린-지노비예프-카메네프 삼두체제 성립(1923년 4월, 13차 당 대회), 반(反)트로츠키 캠페인 시작(1923년 12월), 레닌의 죽음(1924년 1월), ‘레닌의 소집(Lenin’s Levy)’이라는 이름의 당원 확충 운동과 출세주의자, 쿨락 등의 대대적인 당내 유입(1923년부터), 트로츠키의 군사 인민위원장직 해임(1925년 1월) 등.

 

스탈린주의 이분법

그리고 노정협은 스탈린이 애용했던 흑백논리를 다시 들고 나온다. 즉, ‘(스탈린주의화된) 소련을 옹호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혁명을 배반하는 것이다.’라는 논리이다. 바로 그 논리로 좌익반대파를 먼저, 그 다음엔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등을 연이어 숙청하였고, 세계 혁명 운동을 압살했으며, 좌익반대파 그리고 제4인터내셔널 트로츠키주의 운동을 제국주의 간첩으로 몰아 탄압했고, 급기야 트로츠키에게 자객을 보냈다.

노정협은 비장한 물음을 던진다.

“가능성 없는 세계혁명에 기대어 러시아혁명은 산화해야 하는가? 아니면 일국에서의 사회주의를 일궈가야 했는가?”–노정협

이 물음을 통해 노정협은 마치 선택할 길은 두 가지 즉, ‘혁명을 산화시키거나, 일국 사회주의를 채택하거나’밖에 없던 것처럼 느끼게 한다. 그러면서 일국사회주의에 반대하는 견해들을 “좌편향적 무정부주의”로 부르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 이분법적 물음은 엉터리이다. 노정협이 은연중 암시하는 것과 달리, 트로츠키는 “혁명의 산화”를 주장하고 추구한, 모험주의자도 이상주의자도 또한 청산주의자도 아니었다. 트로츠키와 좌익반대파가 스탈린 관료집단과 ‘일국사회주의론’에 대항해 싸웠던 문제는 혁명의 성과를 어떻게 해야 제대로 방어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트로츠키(레닌과 더불어)의 연속혁명론의 핵심 가운데 하나는, 국제 혁명을 통해서만 러시아 혁명은 보완될 수 있고,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반면, 스탈린은 소련 방어에 모든 국제 혁명을 종속시켰다.

일국사회주의 소련은 트로츠키가 예견한 두 가지 방향(노동자의 정치 혁명과 자본주의 반혁명) 중 하나를 실현시키며, 결국 붕괴하였다. 그런 점에서 결과적으로, 1925년 13차 당 대회는 소련의 붕괴를 압도적으로 가결한 대회였다. 다만, ‘일국 사회주의’ 소련이 70여 년 가량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그 이후 전개된 세계사적 특수성 때문이었다. 즉, 제국주의 국가 상호 갈등과 2차 대전으로 인하여 정치 군사적 공백이 생겼고, 그로 인해 동유럽과 중국, 북한, 베트남, 쿠바 등에서도 기형적이나마 노동자 국가들이 들어서면서 일국적 성격이 보완되었기 때문이었다.

과학적 교훈

노정협은 다음과 같은 문단으로 글을 맺는다.

“그러나 세계혁명의 가능성이 당분간 없는 상황에서 일국에서의 사회주의는 필연적으로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은 패배주의이자 청산주의다. 이 말을 강조하는 것은 유행처럼 번지는 스탈린주의 비판이 물질적 조건을 중심으로 한 분석이 아니라 스탈린이 이러 저러한 잘못된 사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접근하는 분석의 오류를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사적 유물론을 거꾸로 적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분석은 소련 사회주의의 승리와 패배의 경험으로부터 과학적 교훈을 얻지 못한다.”–노정협

노정협이 말하는 것과 달리, 트로츠키는 ‘전혀’ 스탈린주의를 사회 역사적 맥락과 따로 떼어 “개인적인 사상의 문제 개인의 권력욕 때문에 모든 일이 빚어진 것이라는 식으로 역사를 단순화”하거나, “스탈린(개인)이 이러저러한 잘못된 사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배반당한 혁명’과 ‘맑시즘을 옹호하며’ 등에서 행하는 트로츠키의 스탈린주의 비판은 대단히 유물론적이다. (그것을 확인하는 것은 독자에게 맡기기로 하자.)

그런 점에서 노정협이 “4. 소련 사회 분석에 있어서의 좌편향적 무정부주의”에서 가하는 비판이 트로츠키(주의)에 대한 비판이라면 그것은 트로츠키의 저작들을 주의 깊게 읽어보지 않은 탓이거나, 스탈린과 일국사회주의를 옹호하려는 정치적 태도 때문이다.

노정협은 “소련 사회주의의 승리와 패배의 경험으로부터 과학적 교훈”을 얻을 것을 주문한다. 나는 이에 적극 동의한다. 왜냐 하면, 이것은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미래의 문제이며, 중국 북한과 인접해 있는 남한 운동에게는 더더욱 절실하고 예리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물론 ‘국가자본주의론’이 그 “과학적 교훈”이 아니라는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스탈린주의이어서도 안 된다고 믿는다. 왜냐 하면 스탈린주의는 과학적이지도 교훈적이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혁명을 나락으로 이끌고, 종국에는 소련 자신을 붕괴시킨 패배의 철학이기 때문이다.

 

행동강령

2008년 9월

 

***노동자국가 성격 문제 논쟁을 위해 추천하는 참고 자료들***

(별표는 ‘주관적으로’ 생각하는 중요도를 의미한다.)

<트로츠키 저작>

***** 배반당한 혁명–갈무리/IBT(www.bolshevik.org)

***** 맑시즘을 옹호하며–IBT

**** 소련의 계급적 성격–IBT

**** 노동자국가, 테르미도르 그리고 보나파르티즘–IBT

<국제볼셰비키그룹(IBT)>

**** 남한 17대 대선에 대한 IBT의 입장 (2007년 11월)

** 북한을 방어하자! (2006년 11월)

*** 붕괴의 벼랑으로 향하는 중국 (NO26, 2004)

** 소련의 관료지배층은 계급이 아니었다 (NO 24, 2002)

**** 러시아: 자본주의 생지옥 (NO 24, 2002)

** 스페인: 전쟁과 혁명 (NO 18, 1996)

** 소련에서 반혁명이 승리하다 (NO 11, 1992)

** 루비콘강을 건넌 소련과 좌익의 반응 (NO 11, 1992) <1917> 한글어판 1호

*** 죽음의 고통에 처한 스탈린주의: 동유럽 국가의 몰락과 클리프파의 정치적 오도 (NO 8, 1990) <1917> 한글판 2호

**** 소련의 사회성격에 대하여 (NO 6 1989) <1917> 한글판 2호

**** 남한 <국제사회주의자(IS)>에게 보내는 편지-무엇이 올바른 길인가? (1994) <1917> 한글어판 1호

<스파르타쿠스동맹과 기타>

*** 소련은 왜 자본주의 체제가 아닌가?

**** 날조를 일삼는 스탈린 일당 재판(再版)

*** 국가 자본주의 이론: 나사가 빠진 엉터리 시계


B. 노정협, ‘국제주의’와의 논쟁

4. ‘행동강령’에 대한 비판–’국제주의’  

러시아 혁명이 사회주의 혁명이 아닌가? 신경제정책에서 국가자본주의 요소를 도입한 것은 러시아가 사회주의 국가가 아닌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 하에서의 국가자본주의적 요소를 도입한 것이다. 대외 무역의 독점, 금융기관과 국가기간 산업의 국유화와 노동자 통제 등이 러시아의 사회주의 국가로서의 모습을 유지하는 것이었다면 노동자 국가의 유도에 따라 사적부분의 부활 등은 국가자본주의적 요소였다.

그런데 트로츠키와 더불어 레닌이 1917년 혁명으로 탄생한 국가가 사회주의가 아니라 노동자 국가라고 했다는 주장은 대체 무슨 말인가? 레닌은 사실 트로츠키의 노동자 국가주장에 대해 노동자 국가가 아니라 노동자-농민의 국가라고 했다. 이 말은 러시아가 사회주의가 아니라는 의미가 아니라 노동자-농민의 국가, 즉 노동자-농민의 동맹에 기초한 사회주의 국가임을 말하기 위함이었다.

트로츠키는 러시아가 70년 동안 자본주의도 아닌 사회주의도 아닌 과도기 체제라고 말했다. 소련 사회구성체가 이렇게 이것도 아닌 저것도 아닌 사회구성체라는 말은 사회분석을 포기하는 것이다. 소련이 노동자 국가라면 그것이 사회주의 국가라는 말 아닌가?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이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라면 1917년 2월 혁명이 부르주아 혁명이 아니란 말인가? 러시아 혁명은 사회주의 혁명이었다. 레닌이 4월 테제에서 2월혁명에서 부르주아 혁명이 이뤄졌기 때문에 이제는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사회주의 혁명을 하자고 해서 볼셰비키 내부에서조차 격렬한 반발을 일으킨 것이 아닌가?

레닌은 러시아 혁명을 사회주의 혁명이라고 했다. 다만 러시아 사회의 후진성, 내전, 제국주의의 포위라는 현실적 여건 때문에 러시아는 농촌의 집산화 조치를 곧바로 취하지 못하고 협동조합을 이행의 정책으로 강화하기도 했다. 러시아의 PT독재는 곧 사회주의다. 사회주의는 낮은 수준의 공산주의기도 하다. PT독재가 사회주의가 아니면 무엇인가? 러시아 혁명이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라면 러시아 혁명은 PD가 흔히 말하는 민중권력을 말하는가?

레닌도 당내에서 부하린이 심지어 러시아를 사회주의가 아닌 ‘관료적인 왜곡을 지닌’ 노동자 국가라고 규정한다고 하면서 씁쓸하게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레닌의 이 말은 러시아가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 아니라 당시 러시아 사회주의가 성숙한 사회주의가 아닌 상황에서 취하는 여러 조치에 대해 설명하고 혁명의 현실적인 어려운 상황을 말하기 위함이었다.

영구혁명론에서 나타난 트로츠키의 오류는 실제 독일과의 강화조약에서 엄청난 재앙으로 나타났다. 당시 볼셰비키는 당내에서 무수한 토론을 통해 독일과의 강화조약을 체결하기로 결정했다. 레닌은 독일과의 강화조약을 체결하는 것이 러시아 혁명을 지키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했다. 레닌의 이 주장에 대해 당내 강경파들은 레닌을 맛 간 사람으로 취급했다. 그러나 레닌은 혁명적 현실주의자답게 당시의 주객관적 상황을 분석하고 강화조약을 체결해야 한다고 일관되게 주장했다.

트로츠키는 독일과의 협상에서 강화조약을 체결하라는 당의 입장을 어기고 강화도 아닌, 전쟁도 아닌 입장을 견지했다. 이 때문에 러시아는 이후 독일과 더욱 불리한 강화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혁명의 진전은 레닌의 입장이 올바랐음을 증명하고 있고 트로츠키와 당시 강경파들의 좌편향적 오류를 드러냈다.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론은 독일혁명의 패배라는 결정적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등장했다. 그러나 불가피한 조건은 전시공산주의나 신경제정책처럼 바람직한 정책이 아니라 당시의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강요된 상황에서의 불가피한 정책이다. 그래서 레닌도 처음에는 일국에서의 사회주의도 가능하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최종적 승리는 여전히 세계혁명으로 전진할 때만이 가능하다. 당시 일국에서의 사회주의가 불가피하다고 해서 그것이 이후 30년에 스탈린이 취한 잘못된 혁명전략을 동의하는 것이 아니다.

스탈린과 당시 코민테른은 반파시즘 정책에서 여러가지 좌우 편향을 했다. 독일에서 사민당을 파시즘의 첩자라고 해서 사민당의 영향을 받는 일반 당원들을 내쳐버린 것은 좌편향적 오류였다. 독일과의 반파시즘 투쟁에서 인민전선 정책은 드미트로프 테제에서 시작된다. 이 테제는 파시즘에 맞서는 일시적인 조치였는데 부르주아와의 연합이었다. 파시즘과의 투쟁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자와의 일시적인 제휴는 불가피한데 문제는 이것이 하나의 노선으로 굳어지면서 반파시즘 투쟁이 피티 독재로 나아가기 위한 계기가 아니라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으로 되어 버렸다.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는 중국혁명에서 국민당에게 무기지원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스탈린은 국민당을 지원함으로써 국민당의 장제스가 소련에 우호적인 과거 손문의 국민당 시절의 정책을 유지하는 것으로 바꾸려고 했던 것 같다. 이것은 국민당이 일본 제국주의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소련에 우호적인 세력으로 남아 있으면 소련의 후방에서 소련을 위협하는 일본 제국주의의 실질적인 위협이 사라지면서 소련의 사회주의가 방어될 수 있다는 판단에서 비롯됐다.

하지만 이 정책은 일본 제국주의와 함께 국민당에 맞서 싸우는 중국 공산당을 끊임없이 곤란하게 했다. 소련의 방어는 중국혁명의 승리와 노동자 국가간의 국제주의에 의해 온전하게 보전된다. 국민당과의 통일전선이 아닌 국민당의 지원은 노동자 독자성의 포기이다. 스탈린은 중국혁명의 특수성을 이해하지 않고 도시에서의 노동자 계급이 주도하는 혁명을 원칙적으로 강조하기도 했다. 이러한 정책도 중국의 현실에서 오류로 드러났다.

그러나 독일혁명의 패배는 코민테른의 오류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국내 독일 혁명세력으로 오류인 것이다. 반면에 스탈린과 코민테른의 오류에도 불구하고 중국 혁명의 승리는 중국 공산당의 역량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또한 스탈린과 코민테른의 여러가지 오류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중국뿐만 아니라 전세계 인민들의 희망이고 투쟁을 불러일으키는 동력이었다는 것이다.

마지막에 스탈린 비판이 사적유물론에 기반한 비판이 아니라는 것은 지금 현재 유행하는 국가자본주의론자에 대한 비판이었다. 

 

 레닌주의

“현재 소련이 보여주고 있는 모든 모순적 요소들을 인정할 경우 이 체제는 사회주의가 아니다. 다만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예비적 체제(preparatory regime)로 보는 것이 더 진실에 가깝다.”(–트로츠키, <배반당한 혁명>, 갈무리출판사, IBT, 제3장, 사회주의 체제와 국가)고 말하고 있다.

레닌은 제국주의는 사회주의 혁명의 전야라고 했다. 이 말은 제국주의와 사회주의 혁명 사이에 중간체제는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러시아 혁명이 비록 저발전한 국가에서 만들어졌다고 해서 이 규정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혁명 이후 러시아에서의 pt독재는 높은 수준의 공산주의로 가는 과도기였다. 그런데 혁명 이후 러시아가 사회주의로 가는 예비적 체제라면 자본주의와 낮은 수준의 공산주의 즉 pt독재=엄밀히 말하면 노동자-농민의 국가 사이에 또다른 사회구성체가 있다는 말인지…

노동자-농민의 국가가 사회주의가 아니라면 이 사회는 무엇으로 규정할 수 있는지…

여러가지 굴곡에도 불구하고 70여년 이상 과도기체제로 유지될 수 있는지… 

 

5. 국제주의, 레닌주의에 대한 답변–행동강령

 

1.

‘사노련회원’과 ‘국제주의’ ‘레닌주의’의 문제제기 댓글을 검토하면서 느낀 흥미로운 공통점은, 그들 모두 내가 <노정협의 ‘사노련의 국가자본주의론 비판’을 읽고>에서 각각의 진영에 제기한 문제들에 대한 총체적인 답변은 유보한 채, 그 글의 가장 약한 고리라고 생각하는 일부의 문제(어찌 보면 지엽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만을 제기한다는 점이다. ‘사노련회원’은 과거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노동자국가들 중에서 가장 자본주의적으로 보이는 중국(요즘)의 성격 문제를 들고 나왔다. ‘국제주의’와 ‘레닌주의’는 사적 소유가 철폐된 소련을 왜 사회주의라고 부르지 않느냐 하는 문제를 들고 나왔다.

그래서 감히 희망하건대, 독자 일부는 양 진영이 그 글의 대체적인 문제의식을 그런 방식으로 수용하고 있다는 점을 알아차리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부분적이거나 지엽적이라고 해서 의미 없는 문제라는 뜻은 아니다. <노정협의 ‘사노련의 국가자본주의론 비판’을 읽고>의 중심 내용은 아니지만, 관련이 되어 있고 따져봐야 하는 것들이다.

 

2.

‘레닌주의’의 문제제기는 ‘국제주의’와 거의 같은 내용이므로 국제주의에 답하는 것으로 대신하겠다.

내용의 흐름으로 보아 아마도 ‘국제주의’는 노정협 글의 작성자로 보인다. 그런데 글을 인용할 때 출처를 밝혔으면 좋겠다. 그래야 상대방이나 독자도 읽어보며, 검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출처를 밝혔으면 하는 구절들이다.

“레닌은 사실 트로츠키의 노동자 국가주장에 대해 노동자 국가가 아니라 노동자-농민의 국가라고 했다.”: 언제, 어떤 논문에서?

“영구혁명론에서 나타난 트로츠키의 오류는 실제 독일과의 강화조약에서 *엄청난 재앙*으로 나타났다.”: 어떤 엄청난 재앙이 있었는지, 어떤 자료를 근거로 그렇게 말하는지 궁금하다.

“그래서 레닌도 처음에는 일국에서의 사회주의도 가능하다고 했던 것이다.”: “처음”이라는 것이 언제인지. 어떤 논문에서 그랬다는 것인지.

 

3.

본론으로 들어가서,

‘국제주의’와 ‘레닌주의’가 제기하는 문제의 핵심은 이것이다.

“트로츠키는 러시아가 70년 동안 자본주의도 아닌 사회주의도 아닌 과도기 체제라고 말했다. 소련 사회구성체가 이렇게 이것도 아닌 저것도 아닌 사회구성체라는 말은 사회분석을 포기하는 것이다. 소련이 노동자 국가라면 그것이 사회주의 국가라는 말 아닌가?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이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라면 1917년 2월 혁명이 부르주아 혁명이 아니란 말인가? 러시아 혁명은 사회주의 혁명이었다.”–국제주의

나는 트로츠키의 대리인이 아니다. 사실, ‘국제주의’가 묻는 내용들에 대한 대답은 <배반당한 혁명>에 다 있다. 이미 <노정협을 읽고>에서 인용한 부분만 심각하게 읽었더라도 어떤 뜻으로 그렇게 말하는지 알 수 있는 내용들이고, 물음에 대한 대답 역시 있는 것이다.

그런 것을, “러시아 혁명이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라면 러시아 혁명은 PD가 흔히 말하는 민중권력을 말하는가?”라는 식으로 트집잡는 ‘국제주의’(노정협의 대리인일지도 모르는)의 물음은 조금 민망스러운 수준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럼 소련은 뭐란 말이냐?’하며, 혼란스러워하는 ‘국제주의’와 ‘레닌주의’를 안심시키기 위해 더 인용해 보자. 쪽수는 갈무리출판사의 1995년판 기준이다.

“부르주아 분배 규범은 물질적 생산력의 성장을 촉진하면서 사회주의 건설의 목적에 봉사해야 한다. *사회주의 국가*는 시작부터 곧바로 *이중적인 성격*을 띤다. :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형태를 옹호하는 한 사회주의 국가이다; 그러나 생필품의 분배가 자본주의 가치척도에 따라 이루어지고 이 모든 결과들을 바탕으로 국가를 운영하는 한 부르주아 국가이다.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이 모순적 성격 규정은 교조주의자들과 현학자들을 공포에 빠뜨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필자는 이들을 위로할 수 있을 뿐 현실을 바꿀 수는 없다. 노동자국가의 최종적 성격은 노동자국가 내부의 부르주아 경향과 사회주의 경향 사이의 변화하는 관계에 의해 결정될 수밖에 없다.

후자가 승리하면 경찰기구는 사실상 최종적으로 없어진다. 즉 국가가 자치 사회 내로 해소될 것이다. 소련의 관료집단이 그 자체로서 그리고 하나의 징후로서 제기하는 문제가 얼마나 의미심장한 가는 이 측면을 보더라도 충분히 이해가 갈 것이다!”–3장 사회주의 체제와 국가, 86쪽

이제 안심이 되는지. 트로츠키도 1917년 10월 혁명 이후에 등장한 소련 체제를 “사회주의 국가”라고 불렀다! 게다가 소련에 대한 이중적 성격 규정으로 공포에 사로잡힐 70여년 후의 한국의 후배투사들을 위로까지 해주고 있다.

“용어를 정확히 사용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 현학자의 허세인 것은 아니다. 결국 모든 사회체제의 힘과 안정성은 이 체제의 상대적 노동생산성에 달려 있다. 자본주의보다 뛰어난 기술 수준을 보유한 사회주의 경제체제는 사회주의적 발전을 확실히 보장받을 것이다.”–그 글에서 인용했던 부분의 바로 다음 단락, 80쪽

지난 번 인용문에 이어지는 이 부분에서, 트로츠키는 10월 혁명으로 등장한 소련의 특수성, 즉 소유관계는 사회주의‘적’이나, 노동생산성은 자본주의‘적’인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생산관계와 생산력 사이의 모순이 소련 사회에 내재해 있고, 그 모순이 소련 사회의 안정성을 위협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분석이 옳다는 것은 소련 등의 붕괴(외부 침략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부 붕괴의 형태로)로 ‘실로 안타깝지만’ ‘실천적으로’ 입증된 바 있다.

다음 인용은 그러한 규정이 어떤 실천성을 담고 있는지를 더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게다가 70여년 이후에도 존재할 “교조주의자들의 불만족”(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제주의와 레닌주의를 자처하는!)에 대한 예견과 그들에 대해 ‘왜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실천적이고 과학적인지’에 대한 설명을 담고 있다.

“소비에트 체제는 이행기 또는 과도적 체제이다. 즉 소련은 자본주의 (따라서 “국가자본주의”)나 사회주의라는 완결된 사회적 범주에 들어갈 수 없다. 이 두 범주를 소련에 적용하는 것은 그 자체로 완전히 불합리하다. 이 뿐이 아니다. 소련 사회가 사회주의로 이행할 수밖에 없다는 잘못된 생각을 이끌어낼 수 있다. *실제로 소련이 자본주의로 복귀하는 것은 전적으로 가능하다. 소련 사회를 좀더 완전하게 규정하려는 시도는 복잡하고 거북스러울 뿐이다.*

소련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중간에 위치한 모순적 사회체제이다. 특징을 살펴보면 (1) 국가 소유에 사회주의적 성격을 부여하기에는 생산력이 아직 너무 낮다; (2) 궁핍에 의해 조성된 자본주의적 본원적 축적(primitive accumulation)의 경향이 계획경제의 수많은 숨구멍을 통해 솟아나고 있다; (3)부르주아적 성격의 분배 규범이 새로운 사회분화의 기초가 되고 있다; (4) 경제성장은 근로인민의 상황을 호전시키고 있지만 특권층의 급속한 형성을 촉진하고 있다; (5) 사회적 적대관계를 활용하면서 관료집단은 사회주의에 적대적인 독립적 계층으로 전환했다; (6) 사회혁명은 지배정당에 의해 배신당했지만 소유관계와 근로대중의 의식 속에 여전히 남아 있다; (7) 모순이 더 축적될 경우 소련은 사회주의로 나아갈 수도 있고 자본주의로 다시 후퇴할 수도 있다; (8) 자본주의 복귀를 위한 반혁명은 노동자들의 저항을 분쇄해야 한다; (9) 사회주의로 나아갈 경우 노동자들은 관료집단을 타도해야한다. 결국 소련의 사회성격은 국내외의 살아 움직이는 사회세력들 간의 투쟁에 의해 최종 결정될 것이다.

*물론 교조주의자들은 이 전제들이 도출하는 결론에 대해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이들은 딱부러지는 정식을 좋아한다: 옳으면 옳고 그르면 그른 것이지 뭐가 이리 복잡한가!* 그러나 만약 사회현상들이 항상 완결된 성격을 가지고 있다면 사회학 문제들은 확실히 지금보다 더 단순하게 해결될 것이다. 논리적 완벽성을 추구하기 위해 판에 박힌 정식을 구상할 수는 있다. 그러나 오늘 이 정식의 내용을 훼손하고 또 내일 이 정식의 내용을 완전히 뒤집어엎을 요인들을 현실 밖으로 던져버리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역사상 유례도 없고 유비(類比)도 존재하지 않는 *소련 사회의 역동적 성격*을 강제적으로 도식에 맞추면서 훼손하려는 시도를 무엇보다도 피했다. 정치적 과제와 더불어 과학적 과제는, 과정이 완료되지 않은 대상을 완벽하게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단계들을 예의 주시하면서 그 진보적인 경향을 반동적인 경향과 분리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양자의 상호관계를 드러내어 이후 전개될 사태의 다양한 측면들을 예측하며 이 예측을 통해 행동의 기초를 마련하는 것이다.”–9장 소련의 사회적 관계, 256-257쪽

어디 트집잡을 문장 없나 찾지 말고, 시간을 내어서 전체적으로 곰곰이 읽어서 이해해주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래야 논쟁도 생산적일 것이 아닌가?

 

3.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론은 독일혁명의 패배라는 결정적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등장했다. 그러나 불가피한 조건은 전시공산주의나 신경제정책처럼 바람직한 정책이 아니라 당시의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강요된 상황에서의 불가피한 정책이다.”–국제주의

이건 지난번 내용의 반복이다. 나는 그 글에서 왜 불가피하고, 어쩔 수 없이 강요된 상황이라는 것인지를 물었다. 추가해서 하나 더 묻자. 여러 걸음 양보해서 “불가피하게 등장”하긴 했지만, ‘일국사회주의론’이 맑스주의도, 레닌주의도 아니라는 사실은 인정하는가? 

행동강령

 

 

6. ‘행동강령’에 대한 비판–국제주의

1. 지금의 인터넷상의 논쟁은 노정협의 입장을 담고 있으나 노정협은 개인이 아니기 때문에 공식적인 글이 아닌 인터넷 상의 논쟁에서 노정협이 아닌 개인 이름으로 글을 쓰는 것이다. 다만 익명으로라도 책임있게 글을 쓰느냐 무책임하게 익명의 뒤에서 숨어서 찌라시 수준의 답변을 글을 쓰는가는 다른 문제다.

2. 지엽적인 답변이 아니라 ‘행동강령’의 글에 대한 핵심적 반비판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소련이 국가자본주의가 아니라는 입장에서는 ‘행동강령’과 나의 입장이 일치하는 부분이 많기 때문에 그 글에 대해 모든 부분에 대해서 답변할 필요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

3. ‘행동강령’은 나의 주장에 대해 핵심적인 질문 “1917년 10월 혁명이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라면 2월 혁명이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아니라는 말인가”, “노동자 국가 즉 피티 독재가 사회주의(낮은 수준의 사회주의)가 아니면 무엇인가?” 등에 대해서는 트로츠키가 주장한 내용으로 인용을 하면서 몇몇 주장과 질문에 대한 출처를 요구했다.

이에 대한 간략한 답변을 한다.

1) “레닌은 사실 트로츠키의 노동자 국가주장에 대해 노동자 국가가 아니라 노동자-농민의 국가라고 했다.” 언제, 어떤 논문에서?

레닌의 이 주장은 최근 노동자정치신문의 레닌 글 번역에서 ‘직업동맹, 현 시기 뜨로츠끼 동지의 오류에 대하여’라는 글에 있다. 그리고 이 주장은 당장 출처를 댈 수는 없어서 그렇지 레닌의 다른 글에도 실려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2) 강화조약에서 트로츠키는 외무인민위원을 맡고 있으면서 강화교섭 대표단의 수석이었다.

트로츠키가 독일과의 강화조약 체결이라는 당의 공식적인 입장을 어기고 ‘강화도 전쟁도 아닌’ 입장을 가지고 조약을 체결하지를 않아서 이후 더욱 불리하고 굴욕적인 내용으로 조약을 체결했다. 이는 쏘련의 공식 역사서가 아니더라도 여러 역사책에도 나와 있는 역사적 사실이다.

예를 들어 일본학자가 쓴 ‘사회사상사적 연구 러시아 혁명사’라는 책에도 있고, 조영명의 ‘러시아 혁명사’에도 있다. 물론 이 책은 트로츠키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지만 사실관계를 중심으로 살펴보는 데는 크게 문제가 될 것은 없다.(명백한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이렇게 책을 뒤지면서 출처를 확인시켜줘야 하나?)

독일과의 강화조약에서 부하린 등 좌익공산주의자들과 트로츠키는 레닌의 강화조약 입장에 대해 비판적이었고, 당의 입장과 달리 강화조약 체결을 미룸으로써 당과 소련에 엄청난 문제를 일으켰다. 이로 인해 레닌은 이에 대한 레닌의 비판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레닌 전집 22권에 있다고 하는데 이 부분은 직접 찾아보지 못했다.)

3) 일국에서의 사회주의의 승리라는 문제는 1915년 ‘유럽 합중국 슬로건에 대하여’라는 글에 있다. 직접 전체를 읽어보지는 못하고 인용문만 접했다. 그것을 다시 인용하면

“경제적 및 정치적 발전의 불균등성은 자본주의의 무조건적인 법칙이다. 이로부터 사회주의의 승리는 처음에는 소수의 자본주의 나라에서 또는 단 하나의 자본주의 나라에서도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론다”

4. 레닌은 처음에는 자본주의의 불균등성 때문에 처음에는 일국에서 사회주의의 승리가 가능하다고 했다. 사실 맑스도 선언에서 이와 유사한 주장을 했다. 그러나 우리는 소련 초기에 유럽혁명이 실패하면서 맞게 되는 불가피한 조건을 하나의 노선으로 격상시키고 이것이 최종적인 승리를 가능하다는 스탈린의 주장에 대해 비판했다.

처음에 일국에서 건설된 사회주의는 방어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세계혁명으로 나아가기 위한 교부보가 되어야 하고 일국의 방어를 위해 다른 나라에서의 혁명을 패배로 몰아간다면 당연히 잘못된 것이다. 그래서 중국혁명의 예를 비판적으로 든 것이다.

5. 소련은 공식명칭은 소비에트사회주의연방이다. 소련의 공식 출범은 레닌 생전인 1922년이다. 물론 소련의 공식명칭에 사회주의가 들어갔다고 해서 이것이 성숙한 형태의 사회주의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공식 국가 명칭에 사회주의가 들어가 있다는 것은 소련의 지도부들 스스로도 소련이 사회주의라고 인정했다는 것이다. 레닌은 사회주의는 높은 수준의 공산주의로 가는 동안에 끊임없는 이행의 시기를 거친다고 했다. 당시 러시아 혁명은 높은 수준의 공산주의로 이행하는 첫 출발이었던 것이다.

6. ‘행동강령’은 트로츠키가 ‘배반당한 혁명’에서 트로츠키가 이렇게 주장했다는 식의 출처를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질문에 대한 설득력 있는 답변도 아니고 나를 전혀 설득시키지 못하고 있다. 

국제주의

강화조약 관련한 논쟁은 레닌전집 26권에 수록된 것으로 확인했다.

레닌은 1918년 1월 11일 당중앙위원회 토론에서 강화에 대한 부하린과 트로츠키의 입장에 반대하면서 러시아 사회주의 정부가 다가오는 6개월 이내나 그 정도의 짧은 기간에 유럽혁명 특히 독일혁명이 발발하리라고 기대하면서 전략을 수립하는 것은 과오이고, 맹목적인 도박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7. 노정협 동지, ‘국제주의’에 답하며

노정협 동지 ‘국제주의’에 답하며

*<노정협의 ‘사노련의 국가자본주의론 비판’을 읽고>에 대해 ‘국제주의’가 제기한 문제제기에 대해 답변을 했고, ‘국제주의’는 다시 답변을 했다. 이 글은 그 글에 대한 답변이다. 여기서 노정협 동지라 함은 대체로 ‘국제주의’를 말하는 것이다.

**모든 굵은 글씨 강조는 글쓴이가 한 것이다.

***‘일국사회주의는 레닌주의인가’ 부분은 트로츠키의 ‘레닌 사후의 제3인터내셔널’을 많이 이용했다는 사실을 밝힌다.

레닌의 죽음 이후 스탈린 관료집단은 혁명가가 아니라, 국유화에 기생하는 특권층이 되었다. 그들은 그러한 자신들의 모습을 은폐하기 위해 레닌의 대리인 으로 행세했다. 그들은 레닌의 제사장(집단)이 되어, 레닌 사체의 영구방부처리, 거대 동상의 제작 등에 나섰다. (하지만 레닌의 유서는 공개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레닌의 유일한 대리인이 되기 위해서는 그들의 세계관인 ‘일국사회주의’를 레닌의 신탁(神託)으로 도금해야 했고, 레닌의 혁명 정신을 계승하려는 자들을 이단으로 만들어야 했다. 레닌의 우상화, 일국사회주의론, 반(反)트로츠키 캠페인은 바로 그러한 맥락에서 나왔다.

그리하여 레닌은 스탈린주의의 정치적 필터로 걸러져 재구성된다. 레닌의 제사장이 되기 위하여 스탈린은 운명적 정적인 트로츠키를 레닌의 이단아로 만들어야 했다. 트로츠키는 레닌에 사사건건 정치적으로 맞서는 트집쟁이로, 모험주의자 또는 무정부주의자로, 레닌의 대리인에 감히 맞서 반혁명을 모색하는 레닌의 이단아이자 제국주의 간첩으로 묘사된다.

노정협은 바로 그러한 레닌주의 즉, 스탈린주의의 필터로 걸러진 레닌주의 에 기초해 있다. 그리하여 스탈린주의가 수십 년 동안 해왔던 레닌주의의 왜곡 즉, 반(反)트로츠키 캠페인의 내용을 그대로 믿는 것에만 머물지 않고 그 캠페인을 ‘지금 이곳에서’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

노정협 동지(‘국제주의’)에 대한 답변 형식으로 쓰이는 이 글의 목적은 바로 그런 점을 논증하기 위한 것이다.

 

먼저 확인할 것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확인할 두 가지가 있다.

노정협 동지는 이렇게 말한다.

“익명으로라도 책임 있게 글을 쓰느냐 무책임하게 익명의 뒤에서 숨어서 찌라시 수준의 답변을 글을 쓰는가는 다른 문제다.”–국제주의

이 문장은 대단히 거칠다. 나의 본 글과 답변들은 무한한 책임감을 느끼면서 그리고 나름 성실한 고민과 자료 수집을 통해 쓴 글이다. 앞뒤 문맥으로 보아도, 나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냥 넘어가기에는 거칠다. 누구를 가리키는 것이든 간에 이런 표현은 노정협의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의심하게 만든다. 나는 개인적으로, 때로 기분 나쁠 수도 있고, 그리고 논쟁에 임하는 각자가 개선해야겠지만, 찌라시 수준의 글도 허용해야 한다(허용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또한, 노정협이 인터넷 실명제를 주장하는 것으로 오해할 여지도 있다.

둘째로, 국제주의는 다음이 핵심적인 질문이었다고 말한다.

“1917년 10월 혁명이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라면 2월 혁명이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아니라는 말인가”, “노동자 국가 즉 피티 독재가 사회주의(낮은 수준의 사회주의)가 아니면 무엇인가?”

위의 문제에 대해서는 트로츠키의 견해를 인용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이 물음들과 똑같은 물음은 이미 트로츠키 스스로 듣고, <배반당한 혁명> 등을 통해 더 분명하고 생생하게 대답한 바 있다. 촛불정국에 관한 이야기라면 모를까, 나는 그 문제들에 대해 트로츠키보다 더 조리 있게 말할 자신이 없다. 그래서 트로츠키의 대답을 그대로 인용해 주었던 것이다.) 사실, 그러한 물음은 노정협의 정치적 수준으로 볼 때, 너무도 기초적인 것이고, <노정협을 … 읽고>로 시작된 나와의 대화에서 적어도 그 정도 수준은 서로 동의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네, 아니오.’식의 직접적인 답을 하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정협 동지는 ‘그러한가, 아닌가?’식의 ‘직접적인 대답’을 듣기를 원하므로, 그렇게 답하기로 하자.

맞다. 2월 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이었고, 10월 혁명은 사회주의 혁명이었다. 그리고 10월 혁명으로 등장한 국가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실시되는 노동자 국가였다. 그리고 그것은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첫걸음을 뗀 국가이다.[ '행동강령'은 이 부분에서 10월 혁명에 대한 스탈린주의의 도식적 이해를 그대로 수용하는 듯이 답변하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해 '대리운전노동자'는 내가 이해하는 국가자본주의론과 마르크스주의에서 "1917년 2월 혁명을 부르주아혁명(단계)으로, 그리고 10월 혁명을 사회주의혁명(단계)으로 이해하는 사고 방식이 바로 러시아혁명에 대한 스탈린주의 해석방식이다. (중략) 2월과 10월은 하나의 연속과정으로 봐야 하며, 2월 혁명으로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과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농민의 토지 문제 해결은 10월 노동자권력 쟁취, 사회주의적 과제의 실현을 통해 가능했던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대리운전노동자의 이 부분에 대한 비판은 대체로 옳다.--편집]

이렇게 대답해도 노정협 동지의 머릿속에는 의문이 남을 것이다. 즉, “그럼 왜 이랬다저랬다 하느냐? 왜 어떨 때는 사회주의라고 했다가, 또 어떨 때는 아니라고 하느냐?” 이 물음 역시 트로츠키의 입으로 충분히 해명되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답답해할 노정협 동지를 위해 그것은 뒤의 ‘일국사회주의론은 레닌주의인가?’에서 보충한다.

 

노동자국가 문제에 대한 레닌과 트로츠키의 이견?

‘국제주의’는 첫 번째 답 글에서 레닌과 트로츠키 사이에 다음과 같은 강령적 이견이 있었다고 말한다.

“레닌은 사실 트로츠키의 노동자 국가주장에 대해 노동자 국가가 아니라 노동자-농민의 국가라고 했다.”–국제주의

정말 레닌이 10월(2월이 아니라) 혁명 후의 러시아를 ‘노동자-농민의 국가’라고 말했다면, 레닌의 의견은 “(10월 혁명으로 등장한 국가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실시되는 노동자국가 ”라는 노정협 자신의 말과도 모순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근거가 무엇인가를 묻는 나의 물음에 대해, 최근 노동자정치신문에 번역되어 실린 ‘직업동맹, 현 시기 뜨로츠끼 동지의 오류에 대하여’를 살펴보라고 대답한다.

맞다. 노정협이 말한 것처럼, 레닌은 그 회의에서 노동자-농민의 국가라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레닌은 20일 후 다음과 같이 그 표현을 수정했다.

“지난 12월 30일 회의와 관련하여 나는 잘못을 수정해야 합니다. 나는 그 때 “우리의 국가는 사실상 노동자 국가가 아니라 노동자와 농민의 국가 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부하린 동지가 “어떤 종류의 국가? 노동자와 농민의 국가라고요?”라고 외쳤습니다. 그 대답으로 나는, 그 때 막 끝난 8차 소비에트 대회를 지적했습니다. 나는 그 후 그 회의 기록을 살피면서 내가 틀렸고, 부하린 동지가 옳다 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나는 그 때 이렇게 말했어야 했습니다. “노동자 국가[라고만 하는 것은-역주]는 추상적이다. 우리가 실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특수한 조건 속에 있는 노동자 국가 이다. 먼저, 우리나라의 절대다수는 노동계급이 아니라, 농민이다. 둘째로, 관료적 뒤틀림이 있는 노동자 국가이다.”라고 말입니다.”–레닌, ‘당의 위기’, 1921년 1월 19일

말 그대로 노동자 국가(노동자와 농민의 국가가 아니라)는 ‘부르주아의 존재 기반인 생산수단의 사유제를 철폐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그것이 민주적이든 아니든 간에)가 실시되는 국가’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혁명의 주체 문제 즉, ‘노동자냐, 노동자와 농민의 동맹이냐, 아니면 농민의 지지를 받는 노동자냐’ 등의 문제와는 다른 개념이다.

레닌은 러시아의 당면 과제는 부르주아 혁명이라고 생각했고, 따라서 1917년 2월 이전까지 사회주의 혁명을 상정하지 않았다. 다만, 차르 전제주의를 타도하는 부르주아 혁명의 주체로 노동자와 농민의 동맹을 제기했다. 노농동맹 민주주의 혁명론이 바로 그것이다. 그 오랜 정식을 2월 혁명 이후의 상황을 목도하며, 어떻게 레닌이 실천적으로 변화시켜 10월 혁명을 성공시켰는지는 노정협도 이해하고 있을 것이라 믿는다.

 

트로츠키는 강화조약을 통해 “엄청난 재앙”을 불러왔는가?

또한 노정협 동지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조약에서 트로츠키가 “당의 공식적 입장을 어기고”, “조약을 체결하지 않아서” 결국 “더욱 불리하고 굴욕적인 내용으로 조약을 체결”했고, “당과 소련에 엄청난 재앙과 문제를 일으켰다.”고 말하면서, 그것이 “명백한 역사적 사실”이라고 주장한다.

트로츠키의 ‘나의 생애’와 크루프스카야의 ‘레닌의 회상’에 그 강화조약 장면이 나온다. 그걸 통해 강화조약 상황을 재구성해보면 다음과 같다. 혁명으로 등장한 소비에트 정권은 당시 진행 중이던 독일과의 전쟁을 종결지어야 하는 중대한 임무가 있었다. 전쟁의 종결과 평화는 볼셰비키의 혁명 공약이기도 했다. 강화에 대한 독일제국주의의 요구는 이러했다. “점령하고 있는 모든 영토를 할양할 것, 약 30억 루블의 배상금을 수년에 걸쳐 지불할 것(레닌의 회상)” 이에 대해 당시 당은 세 가지 의견으로 나뉘었다. 즉, 레닌: 소비에트는 독일과의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없다. 패전은 혁명을 파괴할 것이다. 트로츠키: 전쟁도 안 되고 강화도 안 된다. 부하린(좌익 공산주의 그룹): 혁명전쟁을 수행하자. 독일 제국주의와의 강화 체결은 혁명과 국제프롤레타리아의 대의에 대한 배신이다.

보다시피, 레닌과 트로츠키 사이의 의견이 달랐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 당내 의견구도에서 주요한 대립은, 강화를 주장하는 레닌과 혁명전쟁을 제기하는 좌익공산주의 그룹과의 대립이었다.

또한, 노정협 동지의 말처럼 “엄청난 재앙”을 트로츠키가 몰고 왔고, 그것이 “명백한 사실”이라면, 다음의 의문점들이 해명되어야 한다. 첫째, 어떻게 “당과 소련에 재앙을 몰고 온” 트로츠키는 그 후에도 내전에서 적군을 이끄는 총사령관의 지위를 계속 맡을 수 있었을까? 둘째, 스탈린집단의 검열 아래 쓰였을(1933년에 쓰이고, 트로츠키에 대한 부정적, 스탈린에 대한 긍정적 묘사 일관, 1919년으로 종결되고 그 이후부터 레닌의 죽음까지 중요한 시기에 대한 언급이 없음 등) 크루프스카야의 ‘레닌의 회상’에는 노정협 동지가 말하는 그 “엄청난 재앙”이 언급이 안 되고 있을까?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조약 문제는 반(反)트로츠키 캠페인의 중요 목록 가운데 하나였고, 노정협 동지가 지금 그것을 재탕하고 있다. 노정협 동지가 주장하는 것처럼 그 문제는 “출처 확인”도 불필요한 “명백한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국가를 장악하고 있던 스탈린집단의 반(反)트로츠키주의 캠페인은 방대하고도 집요하게 조직되었다. 그 캠페인에는 코민테른의 권위를 통해 각 나라의 스탈린주의 공산당들도 동원되었다.

쌍방 의견이 대립할 경우, 그 진상을 알기 위해서 한쪽의 의견만 들어서는 안 되는 것이 기본이다. 그런 과정도 없이 “명백한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노정협 동지를 보면서, 내가 노정협에 대해 품고 있는 스탈린주의 혐의는 더욱 짙어질 수밖에 없다.

상대편 당사자 트로츠키는 이렇게 회상한다.

“믿기 힘든 일이지만 스탈린과 지노비예프 일파는 1924년에 내가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 당과 정부의 결정에 ‘반하는’ 행동을 한 것처럼 보이도록 이 사태를 묘사하려고 시도했다. 이 얼간이 같은 거짓말쟁이들은 신경 써서 옛 의사록을 들추며 자신들이 했던 발언을 다시 읽어보지도 않았다. (중략) 지노비예프야말로 반대 1표의 압도적 다수의 지지로 채택된, 강화조약의 조인 거부를 찬성하는 결의의 제안자였다.

(1918년) 2월 14일, 내가 중앙 집행위원회에 보고한 뒤에, 스베르들로프가 볼셰비키파를 대표하여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되는 결의안을 제출했다. “중앙집행위원회는 강화대표단의 보고를 듣고 충분히 검토한 결과,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의 대표단의 행동에 전면적으로 찬성한다.” (중략) 1918년 3월의 당 대회에서 지노비예프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트로츠키는 중앙위원회의 다수의 결의에 따라 행동했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옳은 말이다. 그것에 대해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있다.” 마지막으로 레닌도 이 대회에서 “중앙위원회에서는 … 강화 조약에는 조인하지 않는다는 제안이 채택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 강화조약에 조인하는 것을 거부한 것은 트로츠키의 개인적인 행동이었다는 새로운 교의(敎義)가 코민테른 내에 확립되었다.” (중략)

“스탈린의 입장은 무엇이었을까? 그에게는 여느 때처럼 자신의 입장이라는 것이 없었다. 그는 그냥 기다리면서 책략을 꾸미고 있었다. (중략) 그는 결코 공식적으로는 발언하지 않았다. 명백한 것은 나의 주요한 과제–전 세계의 프롤레타리아트가 강화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가능한 한 좋게 이해하도록 만드는 것–가 그에게는 부차적인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그가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은 훗날의 ‘일국사회주의’와 같이 ‘일국 평화’였다. 결정적인 투표에서는 그는 레닌에 동조했다. 그는 몇 년 뒤에 가서야 비로소 브레스트리토프스크의 사태에 대한 ‘견해’ 비슷한 것을 자기 자신을 위해 작성했고, 그것은 오로지 ‘트로츠키주의’와 투쟁하려는 목적에서 나온 것이었다.”–‘나의 생애’

물론 스탈린주의자들은 이 진술을 명백한 거짓이라고 할 것이다.

 

일국사회주의는 레닌주의인가?

노정협 동지는, <노정협을 … 읽고>에서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론’을 노정협이 상황적 불가피론으로 정당화시키고 있다고 추궁하자, ‘일국사회주의’가 마치 레닌에 근거한 사상인 것처럼 소개한 바 있다. 그래서 그것에 대한 근거를 묻자, 1915년 ‘유럽 합중국 슬로건에 대하여’라는 글의 다음 한 구절을 제시한다.

“경제적 및 정치적 발전의 불균등성은 자본주의의 무조건적인 법칙이다. 이로부터 사회주의의 승리는 처음에는 소수의 자본주의 나라에서 또는 단 하나의 자본주의 나라에서도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노정협 동지가 인용하는 위의 문장은 대단히 유명한 구절이다. 왜? 스탈린 집단이 ‘일국사회주의’를 합리화시키기 위해 레닌에게서 끌어온(끌어올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구절이기 때문이다. 다음이, 그 유명한 구절을 가리키며, 스탈린이 레닌(?)의 ‘일국사회주의론’을 소개하는 장면이다.

“우리 당에서 일국에서 사회주의 경제를 건설하는 문제는 레닌이 1915년에 처음으로 제기했습니다.”—스탈린, 중앙집행위원회 7차 총회, 1927년

하지만 레닌의 그 글에서도 근거로 그 한 구절 이상 제시할 수는 없다. 왜? 문맥과 연결되는 순간, 그 구절들이 ‘일국사회주의론’과 전혀 관련이 없다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우선, 그 논문의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레닌이 말하는 ‘일국’은 후진국 러시아가 아니라, 서유럽의 선진 자본주의국가를 말하는 것이었다. 위에서 잠깐 이야기한 것처럼, 1915년의 레닌에게 러시아는 사회주의 혁명에 해당되지 않는 나라였다. ‘일국사회주의론’을 제기했다는 그 해, 레닌은 러시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프롤레타리아의 임무는 군주제에 대한 단호하고 영웅적이고 혁명적인 투쟁이다. 그 투쟁은 모든 민주적인 대중 즉, 가장 우선적으로 농민을 끌어들일 것이다. 동시에, 유럽 프롤레타리아와의 연대에 기초한 유럽 사회주의 혁명 을 위해, 국수주의에 대해 가차없이 투쟁해야 한다. 전쟁 위기는 농민을 포함한 쁘띠부르주아 계층을 좌로 이동시키는 경제 정치적 여건을 강화시키고 있다. 바로 거기에 러시아 민주주의 혁명 승리를 가능하게 하는 객관적 기초가 놓여 있다. 서유럽에 완전히 성숙해 있는 사회주의 혁명을 가능하게 할 그 객관적인 조건은, 모든 선진 자본주의 나라들의 영향력 있는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전쟁 전에 확인되었다.”–레닌, 1915

둘째로, 레닌이 1915년 ‘유럽 합중국 슬로건에 대하여’에서 말하는 ‘사회주의’의 의미는 그 다음 구절까지 보아야 확인할 수 있다. 스탈린(주의자들)에 의해 한껏 유명해진 그 구절 그 다음은 이렇게 이어진다.

 경제적 및 정치적 발전의 불균등성은 자본주의의 무조건적인 법칙이다. 이로부터 사회주의의 승리는 처음에는 소수의 자본주의 나라에서 또는 단 하나의 자본주의 나라에서도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자본가들을 수탈하고, 사회주의적인 생산을 조직한 그 나라의 승리한 프롤레타리아 는 다른 나라의 억압당하는 계급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고, 그 나라들의 자본가들에 대항해 봉기를 일으키고 필요할 경우, 그 나라 정부와 지배자들에 맞서 군사력을 동원하면서, 나머지 자본주의 세계에 대항할 수 있을 것이다.”—레닌, 1915

자, 이 문맥 속에서 레닌이 사회주의라는 말을 어떤 의미로 쓰고 있는가. 여기서 레닌은 “자본가를 수탈하고, 사회주의적 생산을 조직하고, 나머지 자본주의 세계에 대항하는” 국가를 말한다. 그것은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 또는 그로 인해 성취된 즉, 1917년 러시아혁명을 통해 성취된 것과 같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수립한 노동자 국가”를 말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말하면, ‘PT 독재와 사회주의를 동일시’하는 노정협은 이제 이렇게 물을지 모른다. “그것 봐라. 1917년에 등장한 것은 사회주의였다.”

노정협을 헷갈리게 할 짓궂은 의도는 없지만, 레닌은(또는 맑스주의자는) 사회주의라는 말을 혁명을 통해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를 수립해 가는 권력으로서의 사회주의 (PT 독재)와, 그리고 생산관계와 생산성이 일치하는 사회체제로서의 사회주의 (즉, 생산수단 사적 소유의 일소 위에 자본주의를 능가하는 생산성, 부르주아적 분배의 종식, 국가의 소멸 시작 등을 특징으로 하는)를 구별하여 말하고 있다. 게다가 맑스와 레닌이 추상의 수준에서 말할 때, 전자는가장 발전된 생산력을 사회화한 노동자국가 (즉, 선진자본주의국가에서 등장한 노동자국가)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구체적인 모습으로 역사에 등장한 것은 후진 자본주의를 사회화한 노동자국가 였다.

트로츠키가 <배반당한 혁명>에서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예비적 체제”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농민이 대다수를 이루는 러시아에서 혁명으로 등장한 소비에트를 가리켜 한 말이었다. 즉, ‘혁명을 통해 노동자권력이 성립하고, 중요 생산수단을 사회화했지만(사회주의적이지만), 생산성은 최고 수준의 자본주의는커녕 그 자본주의를 뒤쫓기 바쁘고, 그리하여 소비재 결핍으로 인해 부르주아적 분배가 엄존하며, 그리하여 국가가 사라지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강화되는(자본주의적인)’ 소련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스탈린(집단)은 그 소련에 대해 1935년 “최종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완전한 사회주의 승리”를 선언한다. 그 사회가 외부가 아니라, 내부의 모순으로 인해 “돌이켜졌다”는 것은 우리가 목도한 바 있다.

레닌은 사회주의와 러시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스탈린(주의자)이 유일하게 추출해 낸 1915년 즉, 혁명 이전이 아니라, 혁명 이후의 논의들이다. 레닌은 당시 러시아의 사회주의적 성격을 부정한다.

“우리보다 훨씬 더 발전할 우리 다음세대에서도 사회주의로의 완벽한 이행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레닌, 소비에트정부 전국중앙집행위원회 보고, 1918 4월 29일

“완벽한”이라는 말이 걸리는 구절이라면, 다음,

“우리는 우리 세대에 사회주의 질서 를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우리의 자식들이나 손자 세대쯤에 가서라면 그것을 기대해 볼 수 있을 것이다.”–레닌, 협동조합 총회 연설, 1919년 12월 3일

이젠 굼뜬 독자라도, “자식들이나 손자 세대쯤에 가서라면 기대해 볼 수 있을” 사회주의가 단순히 PT독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하고 있을 것으로 믿는다. 또 다음,

“소련에서, 국가권력은 이미 노동계급 손에 있다. 세계 자본주의에 대항한 3년간의 영웅적인 투쟁 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는 소비에트 정부를 유지하고 강화해 왔다. 러시아는 광대한 천연자원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산업적인 측면에서 보면 쁘띠부르주아 인구가 지배적인 후진국이다. 러시아는 지금 우리가 막 들어선세계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통해서만 사회주의에 이를 수 있다 .“—레닌, 1921년

레닌에 따르면, 1921년 러시아는 “사회주의에 이르지” 않았고, 그것은 “세계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통해야만” 한다. 후진국 러시아에서 등장한 노동자국가인 소련이 가진 생산의 후진성을 극복하게 할 유일한 길이라는 측면에서도, 선진자본주의 국가의 혁명은 절실한 것이었다. 그런 보완이 있어야만, 러시아는 “사회주의에 이를 수 있다.”고 레닌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일국사회주의라니! 그것도 레닌이 말했다고, 스탈린(주의자)은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레닌의 사상은 생소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많은 문건, 연설 그리고 출판을 통해 러시아의 상황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와 다르고, 러시아는 영세 농민이 압도적 다수이고 산업 노동자는 소수라는 사실을 강조해왔다. 그러한 나라에서 사회 혁명은 오직 두 가지 조건 속에서만 성공할 수 있다. 첫째, 하나 이상의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사회 혁명 에 의해 제 시간에 지원받는 것이다. 둘째, 독재를 수립하거나 국가권력을 장악한 프롤레타리아와 다수를 차지하는 농민들 사이의 협력이다.” (레닌 저작 18권)

“많은 문건, 연설 그리고 출판을 통해” 반복적으로 표명되어 온 것이었다. 레닌은 여기서 또 러시아의 후진성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혁명”으로 인해 보완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스탈린(집단)은 ‘일국사회주의론’을 레닌에게서 배운 것이라고 우긴다.

스탈린 자신도 관료집단의 정치적 대변자가 되기 이전에는 볼셰비키의 그 기본적인 정식 을 알고 있었다.

“한 나라에서 부르주아 권력의 전복과 프롤레타리아 정부의 수립은 사회주의 승리를 보장해 주지 못한다. 사회주의 생산의 조직이라는 사회주의의 핵심 과제는 여전히 우리 앞에 남아 있다. 서너 개의 선진 국가 프롤레타리아트와의 공동 노력이 없어도 이 과제를 이룰 수 있을까? 일국에서 사회주의의 승리를 얻어낼 수 있을까? 아니, 불가능하다. 부르주아 권력을 전복하는 문제 라면 한 나라의 힘으로 충분하고, 우리는 그것을 증명했다. 그러나 사회주의를 완수하고 사회주의적 생산을 조직하는 문제 는, 일국의 특히 러시아 같은 농민국가의 노력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것을 위해서는 서너 개의 선진국 프롤레타리아의 도움이 필수적이다. 전체적으로 그와 같은 것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대한 레닌주의 이론의 특징 적인 성격이다.”— 스탈린 , 레닌과 레닌주의자, 1924년 판, 1926년 판에서는 이 부분이 삭제됨

이 글에서, 1924년 이전의 스탈린은 그 이후의 스탈린을 통렬하게 반박하고 있다. 일국사회주의론’의 허구성 을 깔끔하게 정리해 주고 있다. “일국에서 사회주의의 승리를 얻어낼 수 있을까? 아니, 불가능하다. 부르주아 권력을 전복하는 문제라면 가능하겠지만, 사회주의를 완수하고 사회주의적 생산을 조직하는 문제는, 일국의 특히 러시아 같은 농민국가의 노력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그와 같은 것이 레닌주의 이론의 특징”이었던 것이다.

스탈린에 동조하여 트로츠키를 반(反)레닌주의로 기소한 부하린은?

“혁명은 역사의 기관차다. 심지어 후진적인 러시아에서도 그 기관차의 대체할 수 없는 기관사들은 프롤레타리아였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는 부르주아 사회의 생산관계라는 틀 내에서 머물 수 없다. 그들은 권력과 사회주의를 향해 나아간다. 그러나 러시아에서 (사회주의를) 일상적 삶으로 만드는 과업은 일국 내에서는 불가능하다. 그리하여 노동계급은 국제 노동자 혁명을 통해서만 분쇄할 수 있는, 뛰어넘지 못하는 벽 을 만난다.”

 ”전쟁 전, 맑스주의 출판물에서, ‘사회주의가 일국에서 성취될 수 있을까’ 하는 문제 는 여러 차례 거론되어 왔다. 대부분의 논자 들은, 이 문제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 를 밝혀왔다.”

 

 생산력의 발전은 오직 서너 개의 선진국 프롤레타리아의 승리와 더불어 시작 가능 하다.  그러므로 세계 혁명의 전면적인 발전과 선진국과의 튼튼한 경제 협력이 러시아에 필요 하다.”—부하린, 1917년,

1917년 혁명정신을 간직하고 있던 부하린은, “러시아에서 (사회주의를) 일상적 삶으로 만드는 과업은 일국 내에서는 불가능 하다.”고 말한다. 일국사회주의 건설은 “ 국제 노동자 혁명을 통해서만 분쇄할 수 있는, 뛰어넘지 못하는 벽 ”이다. 그는 이어 증언하기를, “사회주의가 일국에서 성취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대해 “ 대부분의 논자들 은, 부정적인 견해를 밝혀왔다.”고 한다. 하지만 스탈린주의자들에 의해 방부 처리된 레닌은, 그 “대부분의 논자” 중에서 어느덧 예외가 된다.

1927년 혁명정신을 상실한 그 부하린은, 스탈린에 뒤이어 연단에 서서 다음과 같이 레닌(주의)을 수정한다. 그리하여 레닌(주의)을 진압하기 시작한다.

“우리 당에서 일국에서 사회주의 경제를 건설하는 문제는 레닌이 1915년에 처음으로 제기했습니다.”—스탈린

 

“트로츠키 동지가 지금도 주장하는 연속혁명의 이론에는, 우리 혁명의 후진성 때문에, 세계 혁명이 없다면 우리 혁명은 쇠퇴할 것이라는 내용이 있습니다.”—부하린, 중앙집행위원회 7차 총회, 1927년

레닌이 스탈린집단에 의해 어떻게 진압 당하는지, 트로츠키가 어떻게 레닌을 계승하고 있는지를 비극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마치며

<노정협의 ‘사노련의 국가자본주의론 비판’을 읽고>와 이 글에서 살펴본 바처럼, 노정협 동지들의 정치는 스탈린주의에 경도되어 있다. 스탈린주의 입장에 경도되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그것을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

반(反)트로츠키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노정협의 <사노련의 국가자본주의론 비판>의 일부 내용이 그러하고, 답변 글들이 그러하다. 최근에 번역하여 게재한 레닌 글도 그런 캠페인의 일환이 아닐까 하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까닭은, ‘전시 공산주의라는 특수한 체제에서의 노동조합 위상 논쟁’은, 우리 현실에서 그다지 실천적 중요성이 없기 때문이다. 노정협에겐 레닌이 공박하는 “트로츠키 동지의 정치적 오류”가 선택의 중요기준이 아니었을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에게 한정되어 있는 대단히 소중한 번역 역량을 스탈린주의 재생산에 소모하고 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 본다.)

소련 등 노동자국가들의 성공과 그 성과를 방어해야 한다는 노정협의 정치에 나는 크게 공감한다. 하지만, 미래의 혁명을 책임져야 할 우리는, 과거 혁명의 성공만이 아니라, 그 실패의 과학적 교훈도 더불어 분석해 내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야만, 부르주아들의 희화화로부터 사회주의라는 이상을 방어할 수 있고, 반공이데올로기에 굴복한 가짜 맑스주의인 국가자본주의론에 대해 효과적으로 싸울 수 있다.

나는 레닌이 맑스 이후의 맑스이었듯이, 트로츠키가 레닌 이후의 레닌이었다고 믿는다. 스탈린주의를 고집해야 할 물적 토대가 없고, 정치적으로 충분히 진지한 노정협이, 트로츠키(주의)에 대해서도 심각한 검토를 앞으로 할 것이라고 믿고, 또 그러기를 희망한다.

행동강령

2008년 10월 1일

 

 

8. 독단에 갇혀 역사적 사실과 진실을 왜곡하는 ‘행동강령’–국제주의

1. 오해한 부분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먼저 ‘행동강령’ 동지가 오해한 부분이 있다. ‘행동강령’ 동지가 ‘국제주의’는 노정협 글의 작성자로 보이는데 글의 출처를 밝혔으면 좋겠다는 부분을 왜 노정협 공식적 명의가 아니라 출처를 밝히지 않고 익명의 ‘국제주의’ 명의로 글을 쓰느냐고 힐난한 것으로 오해했다. 여기서 출처를 작성자로 잘못 오해한 것이다. 그래서 답변에서 노정협은 개인이 아니기 때문에 노정협의 입장을 담고 있으나 개인 명의로 글을 쓰는 것이라고 한 것이다. 바로 그 밑에 글은 다만 익명일지언정 익명의 뒤에 숨어서 비겁하게 글을 쓰는 게 아니라 책임 있는 논쟁을 하겠다는 말이었다. 글의 문맥상 그것은 인터넷 실명제 주장이 아니라 익명의 인터넷 글이지만 책임감을 가지겠다는 것이다. 화면상으로 글을 얼핏 보고 기억에 의존해서 글을 쓰다 보니 소통이 제대로 안된 것 같다.

 

2. 역사적 진실과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려는 노력이 스탈린주의로 매도당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행동강령’ 동지가 스탈린이 레닌의 대리인으로 행세한 것이나, 제사장이 되어 레닌 시체를 방부처리 한 것이나, 거대동상을 제작한 것을 왜 이 논쟁에 끌어들이는지 모르겠다. ‘행동강령’ 동지는 그것이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와 나의 입장을 교차시키고 이를 통해 스탈린의 역사적 오류를 부각시키고 이를 통해 자신의 정당성을 확인하려 하고 있다.

소련 사회주의를 일구는 과정에서 트로츠키의 몇몇 오류를 지적하는 것이 곧바로 스탈린주의라는 낙인을 찍는 태도는 옳지 못하다. 내가 동지와 논쟁하면서 단 한번이라도 트로츠키주의라고 낙인찍으며 논쟁을 한 적이 있는가? 나는 역사에 대한 제한적 자료와 정보의 혼란과 왜곡을 넘어서 실사구시 하는 자세로 역사적 진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반공주의적 비난과 험담이 판치는 현실에서 소련사회의 진실을 그대로 보고 혁명의 교훈으로 삼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 유행하는 스탈린주의 비판이 소련 사회를 제대로 보고, 역사적 조건 속에서의 스탈린의 정책이나 노선을 스탈린 개인의 문제, 스탈린의 잘못된 사상의 문제로 돌려서 역사를 단순화 시키려는 흐름에 도전하고자 하는 것이다. 스탈린주의의 문제와 현실 사회주의의 문제는 변증법적 유물론의 입장에서 제대로 평가하고 비판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소련의 패배에서 진정한 혁명적 교훈을 얻는 길이라고 본다.

 

3. 처음에 일국에서의 사회주의의 건설이 국제주의의 배신인가?

유럽혁명 특별히 독일 혁명이 패배한 상황에서 소련에서의 일국에서의 사회주의의 건설이라는 문제가 집중적으로 등장했다. 나는 당시 상황에서 일국에서의 사회주의의 건설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일국주의 노선을 합리화 시켜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혁명은 동시혁명이 아니라 일국에서의 혁명으로 시작해서 세계혁명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일국에서의 혁명이 패배한다면 세계혁명의 교두보는 무너지고 만다. 처음에 일국에서의 혁명의 승리가 최종적인 승리가 되기 위해서는 세계혁명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처음에 일국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해야 하는 불가피한 조건을 하나의 노선으로 격상시키는 것에 비판했다. ‘행동강령’ 동지는 이것에 대한 비판을 전혀 보지 않고 처음에 일국에서 사회주의 건설의 불가피성의 문제를 국제주의를 배신한 일국사회주의 노선으로 독단적으로 해석하고 노정협의 입장이나 나의 입장에 대해서 비난하고 있다.

일국에서의 사회주의의 교두보와 세계혁명의 문제는 러시아 혁명을 일궜던 혁명가들의 가장 첨예하고 현실적인 문제였다. 바로 우리의 문제이기도 하고 지금의 논점이기도 하다. 1918년 독일과의 강화조약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레닌은 당시 러시아 혁명이 패배할지라도 세계혁명을 촉발시켜야 한다는 부하린을 중심으로 한 좌익공산주의 세력들을 모험주의적인 좌익맹동주의로 신랄하게 비판했다. 레닌은 혁명적 현실주의자였기 때문이다.

‘행동강령’ 동지는 “소련 혁명의 성공으로 인해 고무된 노동계급은 1919년 독일만이 아니라 각 나라에서 혁명적 상황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문제는 ‘일국사회주의론’과 스탈린 관료집단이, 중국, 영국, 스페인, 또 다시 30년대의 독일, 프랑스 등 그 뒤로 연이어 발생하는 여타 나라들의 혁명적 상황을 물 건너가게 했다는 데에 있다.”고 주장한다. 30년대 스탈린의 오류에 대해서 나도 비판한 바 있다. 그러나 30년대의 스탈린과 코민테른의 오류가 처음에 일국에서의 사회주의가 건설되어야 하고 승리할 수 있다는 나의 입장의 필연적인 귀결인가? 오히려 나는 그 점을 비판했다고 본다.

그런데 ‘행동강령’ 동지는 독일혁명의 패배로 세계혁명의 가능성이 당장 없는 상황에서 일국에서의 사회주의를 건설하고 승리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중국, 영국, 스페인과 30년대의 독일, 프랑스의 예를 들어 세계혁명의 가능성은 계속 있었다는 식으로 주장한다. 당연히 18년 이후에도 이러한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행동강령’ 동지가 보지 못하는 것은 당시의 상황은 당장의 제국주의의 공격과 내전의 위협이라는 상황에서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그래서 레닌은 1918년 1월 11일 당중앙위원회 토론에서 강화에 대한 부하린과 트로츠키의 입장에 반대하면서 “러시아 사회주의 정부가 다가오는 6개월 이내나 그 정도의 짧은 기간에 유럽혁명 특히 독일혁명이 발발하리라고 기대하면서 전략을 수립하는 것은 과오이고, 맹목적인 도박”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던 것이다.

여기서 역사적 사실의 문제를 살펴보자. 과연 강화조약에서 트로츠키가 범했던 심각한 오류가 단순히 트로츠키를 중상모략하는 반트로츠키 캠페인의 일환이고 내가 확대 재생하고 있는 것인가? ‘행동강령’ 동지는 트로츠키를 방어하는데 급급해서 독단에 빠져 역사적 사실 -그것도 일국사회주의와 세계혁명과의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인 독일과의 강화조약에서 있었던 여러 가지 쟁점과 사실 -마저도 심각하게 왜곡한다. 나에 대한 답변 형식의 글이 그것을 논쟁하기 위한 것인데 과연 제대로 논증을 했는지 살펴보자!

1) 노동자 국가/ 노동자 농민의 국가의 핵심 논점

‘행동강령’ 동지는 <노동자국가 문제에 대한 레닌과 트로츠키의 이견?>이 없었다는 것을 논증하고 싶어 한다. ‘행동강령’ 동지는 이후 레닌이 노동자-농민의 국가라고 했던 자신의 주장을 수정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레닌 주장의 핵심이 틀렸다는 말은 아니었다.

동지가 인용한 대로 레닌의 자신의 발언을 수정한 뒤에 “나는 그 때 이렇게 말했어야 했습니다. “노동자 국가[라고만 하는 것은-역주]는 추상적이다. 우리가 실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특수한 조건 속에 있는 노동자 국가이다. 먼저, 우리나라의 절대다수는 노동계급이 아니라, 농민이다. 둘째로, 관료적 뒤틀림이 있는 노동자 국가이다.”라고 말입니다.”–레닌, ‘당의 위기’, 1921년 1월 19일”라는 뒷부분의 글에서 잘 나타나 있는 것이다.

노동자 국가/노동자 농민의 국가라는 논쟁의 핵심은, 소련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시작했지만 당시 소련의 문화적 후진성, 생산력의 낮은 조건, 농민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은 상황에서 어떻게 사회주의를 강화하고 승리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였다. 그래서 레닌이 부하린의 공산주의의 ABC에서 당시 소련을 ‘관료적인 왜곡을 지닌 노동자 국가’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이 슬픈 -가령 이렇게 말한다면? – 꼬리표를 그것에 달아야만 하지 않겠습니까? 바로 이것은 여러분들에게 나타난 이행의 현실성입니다”라고 말한다.

레닌은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켰지만 사회주의를 강화하고 공산주의로의 이행을 하는데 있어서의 현실의 어려움을 말하고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이행기 하에서 노조를 국가기구화 하려는 트로츠키의 입장을 비판하는 것이다. 

2) 강화조약 관련한 역사적 진실

동지는 <트로츠키는 강화조약을 통해 “엄청난 재앙”을 불러왔는가?> 묻고 있다. 그러면서 트로츠키의 ‘나의 생애’와 그룹스카야의 ‘레닌의 회상’을 통해 강화조약에서 트로츠키의 입장이 레닌과 크게 다르지 않았고, 오류가 없었음을 논증하려 한다. 당시 강화조약 논쟁에서는 레닌의 강화입장, 트로츠키의 중간적인 전쟁도 강화도 아닌 입장, 부하린 등 좌익공산주의자들의 혁명전쟁 입장이 있었다. 그런데 사실상 논쟁에서는 즉각적 강화입장인 레닌의 입장과 좌익공산주의자들이 혁명전쟁이 첨예하게 대립했지만 좌익공산주의자들은 당장 독일에서의 혁명의 기운이 없자 트로츠키의 전쟁도 강화도 아닌 입장을 지지하면서 레닌에 반대하고 대립하는 것으로 옮겨갔다. 실제 중앙위원회에 투표결과에서도 이것이 확인된다.(marxists.org에서 레닌의 글에 대한 각주에서 이를 확인하기 바란다.)

‘행동강령’ 동지는 이에 대해 그룹스카야의 레닌 전기인 ‘레닌의 회상’에서 이것이 언급되지 않냐고 묻고 있다. 동지는 이 글이 스탈린집단의 검열 아래 쓰였을 것이라고 추측하면서 트로츠키에 대해 부정적이고 스탈린에 대해 긍정적 묘사로 일관하고 있다고 한다. 레닌의 부인이자 레닌의 평생 동지였던 그룹스카야가 레닌에 대한 전기를 쓰면서 스탈린집단의 협박 때문에 왜곡됐을 것이라고 하는 것은 그녀에 대한 모욕이다. 오히려 (물론 나도 추측이지만) 트로츠키의 자서전 격인 ‘나의 생애’ 보다 더 자의적인 면이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누구의 글이 더 신뢰성이 있는가의 문제는 여기서 논점이 아니다. 사실 나도 트로츠키의 ‘나의 생애’는 읽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논점은 ‘행동강령’ 동지가 ‘레닌의 회상’을 인용하면서 “크루프스카야의 ‘레닌의 회상’에는 노정협 동지가 말하는 그 “엄청난 재앙”이 언급이 안 되고 있을까?“라고 주장하는데 있다.

언급이 안됐다고 하니까 비록 길지만 강화조약에 대해 그룹스카야가 어떻게 언급했는지 직접 인용해보겠다.

“공산주의 ‘좌파’ 중에는 일리치가 여러 해 동안 손을 잡고 일해왔으며 투쟁의 어려운 시기에 그가 지지를 구하곤 했던 절친한 동지들이 매우 많았다. 이제 그의 주위에는 동공이 생겼다. 그가 비난받다니! 트로츠키에게는 할 말이 많았다. 점잖빼기 좋아하며, 미사여구를 즐기는 그는 어떻게 하면 소비에트 공화국을 전쟁에서 빼내어 힘을 회복시키고 대중을 결집시킬 휴식기를 줄 것인가를 생각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자기를 드러낼 것인가를 생각했다. ‘우리는 불명예스런 어떠한 강화도 체결하지 않는다. 우리는 어떠한 전쟁도 수행하지 않는다.’ 일리치는 이를 오만한 자세라 부르고, 이 구호를 조국 즉, 프롤레타리아가 권력을 접수하여 위대한 건설이 시작되고 있는 조국을 약탈과 무정부 상태로 돌리는 모험주의적 도박이라 불렀다. 중앙위원회의 다수파가 처음에는 레닌에게 반대했다. 1월 24일 다수파(9명)는 트로츠키의 동의안 -우리는 강화를 체결하지 않으며 군대를 해산한다 -에 찬표를 던졌고, 반대표는 7표였다. 2월 3일에는, 강화 체결을 지금 할 것인가 여부에 대하여 찬성이 5표, 반대가 9표였다. 2월 17일에는, 독일에 대한 즉각적인 강화 제의에 찬성이 5표, 반대가 6표였다. 2월 18일에는 독일에 대하여 강화협상 재개를 제의할 것인가에 대하여 6명치찬표를, 7명이 반대표를 던졌다.

2월 23일, 독일군이 전진을 시작하여 도시를 차례로 공략하면서, 독일이 그들의 조건을 제시하고 48시간 내로 회답을 요구하자, 상황이 바뀌었다. 이런 혁명적 미사여구 정책이 계속된다면, 자기는 중앙위원회와 정부로부터 사임하겠다고 레닌이 선언하였다. 독일의 조건을 수락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투표의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7명이 찬성하였고, 4명이 반대하였으며, 그런 시점에 그런 중대한 문제에 대한 책임부담을 두려워하여 트로츠키를 포함한 4명이 기권하였다. …..

‘….여러분은 도박꾼처럼 행동했다. 여러분들은 일어나지도 않은 행운에 모든 것을 걸었다. 여러분들은 필연적으로 일어날 것이지만 아직 성숙하지 못한 국제혁명을 기대하면서 현실의 냉엄함을 직시하지 못했다.’(전집, Vol 27, pp, 79-80)’

….그리고 여기서 일리치와 나는 다시 네바 강을 따라 내려갔다. 그 동안 그는 ‘강화도 없고 전쟁도 없다’는 관점이 근본적으로 틀린 이유를 거듭 반복하며 말했다.”

이 글에서는 그룹스카야의 트로츠키에 대한 감정적인 표현이 가끔 나오기는 하지만 역사적 진실을 파헤치는 데는 더할 나위 없이 필요한 내용이 담겨져 있다. 강화조약에서 레닌의 트로츠와 부하린에 대한 비판과 트로츠키의 입장은 레닌의 글만 보아도 충분하게 알 수 있다. 과연 노정협과 나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반트로츠키 캠페인의 주모자가 된 것인가? ‘행동강령’ 동지는 트로츠키를 옹호하는 것을 넘어서 독단에 빠졌다.

4. ‘유럽합중국 슬로건에 대하여’에서의 문제

1) ‘행동강령’ 동지는 레닌의 ‘유럽합중국 슬로건에 대하여’가 스탈린이 일국사회주의를 합리화하기 위한 부분적 인용이라고 주장한다.

레닌은 이 주장을 1915년 유럽을 염두에 두고 했지만 이 주장은 1917년 혁명 이후 러시아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주장이다. 자본주의 발전법칙에 대한 불균등발전이론은 레닌의 핵심 사상 중의 하나이고, 이것은 레닌이 혁명에서도 견지한 입장이었다. 이로부터 후진적인 국가인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고 이것이 세계혁명의 도화선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이른바 약한 고리론으로 러시아 혁명에 그대로 적용됐다. 과연 이 주장이 ‘행동강령’ 동지의 주장대로 유럽에만 적용되고 러시아에는 적용되지 않는가?

레닌은 여기서 처음에는 소수의 또는 단 하나의 자본주의 나라에서도 가능하다고 했다. 물론 뒷부분에서는 ‘행동강령’ 동지의 인용대로 일국에서의 사회주의의 승리를 교두보로 해서 자본주의와 맞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레닌의 이 주장은 나의 주장대로 정확히 처음에 일국혁명에서의 혁명의 승리가 가능하고 이를 기반으로 최종적으로는 세계혁명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과 일치하는 것이다.

2) 사회주의의 문제에 대해

‘행동강령’ 동지는 레닌이 사회주의라는 말에 대해 “‘자본가를 수탈하고, 사회주의적 생산을 조직하고, 나머지 자본주의 세계에 대항하는’ 국가를 말한다.”고 한다. 맞다.

‘행동강령’ 동지는 “우리보다 훨씬 더 발전할 우리 다음세대에서도 사회주의로의 완벽한 이행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우리 세대에 사회주의 질서를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우리의 자식들이나 손자 세대쯤에 가서라면 그것을 기대해 볼 수 있을 것이다.”라는 레닌의 주장을 가지고 레닌이 당시 소련을 사회주의라고 하지 않았다고 한다.

레닌은 ‘국가와 혁명’에서 맑스와 엥겔스의 국가론을 계승 발전시키면서 낮은 수준의 공산주의와 높은 수준의 공산주의를 비교했다. 이 점은 굳이 따로 인용하지 않겠다. 레닌에게 낮은 수준의 공산주의는 바로 사회주의=피티독재였다. 레닌에게 자본주의로부터 공산주의로의 이행기 사이에는 필연적으로 피티독재가 위치한다고 했다. 이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주요 산업이 국유화되고 소비에트 국가체제를 가지고 있지만 여전히 자본주의의 흔적이 남아 있고, 여전히 생산성 수준이 낮기 때문에 부르주아적 분배규정이 여전히 남아 있다고 했다. 이 피티독재는 국가이면서도 국가가 아닌 준국가다. 바로 사멸해가는 국가이다. 다만 이를 위해서는 더욱 더 피티독재가 절실한 것이다. 그래서 레닌은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에 성공했지만 그것은 공산주의로 가는 첫출발이었던 것이다.

‘행동강령’ 동지 스스로 인용한 글에서 “레닌은(또는 맑스주의자는) 사회주의라는 말을 혁명을 통해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를 수립해 가는 권력으로서의 사회주의(PT 독재)와, 그리고 생산관계와 생산성이 일치하는 사회체제로서의 사회주의(즉, 생산수단 사적 소유의 일소 위에 자본주의를 능가하는 생산성, 부르주아적 분배의 종식, 국가의 소멸 시작 등을 특징으로 하는)를 구별하여 말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과연 누가 헷갈리고 있는가? 정확하게 동지가 인용한 글에서 pt독재를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를 수립해 가는 권력으로서의 사회주의로 말하고 국가의 소멸이 시작하는 것도 사회주의라고 말고 있지 않은가? 이말을 이해하지 못하다 보니 동지 스스로 어떨 때는 소련을 사회주의라고 했다가 어떨 때는 사회주의로의 과도기 체제라고 하는 것이다.

레닌의 ‘국가와 혁명’도 혁명 직전에 쓰여 졌기 때문에 혁명 이후의 러시아에는 적용되지 않는 것이라고 할 것인가? 그렇다면 혁명 이후 레닌의 이 말을 인용해보겠다.

“나는 우리가 사회주의로의 과도기의 첫걸음을 떼었을 뿐이고 아직 사회주의에는 도달하지 못하였다는 데 대하여 환상을 그리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국가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라고 당신들이 말한다면 그것은 정당한 말이다.”

 

“우리는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의 과도기를 끝내기에는 아직 멀었다. …. 우리는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길이 얼마나 곤란한가 하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길에 들어선 까닭에 우리 소비에트 공화국을 사회주의적이라고 부를 의무가 있다. 그리고 이 말은 결코 공담으로는 되지 않을 것이다.”(1918 1월 노동자병사농민 대의원 소비에트 제3차 전러시아대회)

“사회주의에 도달하지는 못하였는데 우리는 사회주의 공화국이다!” 이것이 레닌이 굳이 구별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낮은 수준의 공산주의와 높은 수준의 공산주의를 내용적으로 구별하여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5. 마지막으로

1) 직업동맹, 현 시기 트로츠키 동지의 오류에 대하여 번역 문제

‘행동강령’ 동지는 이 글을 번역 소개하는 것이 반트로츠키 캠페인의 일환이다. 이쯤 되면 거의 피해의식 수준이다. 트로츠키에 대한 비판이 실려 있다는 이유로 중요한 역사적 논쟁을 소개하는 것을 반트로츠키 캠페인이라고 매도하고 있다.

과연 위 번역 글이 “우리 현실에서 그다지 실천적 중요성이 없”는 것인가? 우리는 혁명 이후 번역되지 않은 레닌의 주요 저서를 소개해 왔다. 그것도 한 역량 있는 동지의 도움을 빌어 레닌의 모국어인 러시아어로 생생하고 소개하고 있다. 당시 논쟁은 분파주의의 문제도 있지만, 이행기에 있어서 대중, 대중조직과의 관계라는 핵심적인 논쟁을 담고 있다. 그것이 우리에게 현실적 실천성이 없다면 모든 혁명기 문서들은 다 우리에게 소용없는 것이다. 심지어 이를 두고 “우리에게 한정되어 있는 대단히 소중한 번역 역량을 스탈린주의 재생산에 소모하고 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 본다.”는 동지의 주장을 접하면 ‘행동강령’ 동지가 얼마나 심각한 독단과 종파주의의 섬에 갇혀 있는지를 알 수 있다.

 

9. 어떤 독단? 그리고 어떤 왜곡?–행동강령

 

답변을 한다 하면서도, 다른 일들이 겹쳐 시일이 좀 지났다.

‘국제주의’ 동지는 제목을 통해 내가 “독단”에 빠져 “역사적 사실과 진실을 왜곡”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본문을  거듭 읽어보았지만, 다소 선정적인 그 제목을 뒷받침할 만한 내용을 찾기가 어렵다.

먼저, 우리의 지금 논쟁에서 10월 혁명 후의 러시아의 성격 문제는 초점이 아니다. 다만, 그 문제를 논의하고 있는 까닭은 그 성격 규정에 관해 레닌과 트로츠키 사이에 이견이 있었다는 얘기를 ‘국제주의’ 동지가 제기했고, 그 근거를 내가 물으면서 시작된 얘기이다. 나는 “레닌 주장의 핵심이 틀렸다.”고 말했던 것이 아니다. 적어도 그 문제에 관한 한, ‘국제주의’ 동지가 주장하는 이견은 없었다는 것을 말했던 것이다.

둘째, 강화조약 문제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 문제는 ‘국제주의’ 동지가, 트로츠키가 “당의 공식적 입장을 어기고”, “조약을 체결하지 않아서” 결국 “더욱 불리하고 굴욕적인 내용으로 조약을 체결”했고, “당과 소련에 엄청난 재앙과 문제를 일으켰다.”고 말하면서, 그것이 “명백한 역사적 사실”이라고 주장하기에, “어떤 엄청난 재앙을 야기했는가?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가 무엇인가?”하고 물었던 것이다. 따라서 ‘국제주의’ 동지는 “트로츠키가 당의 공식적 입장을 어겨 초래한 그 엄청난 재앙”이 어떤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증명하면 될 일이다.

나더러 “역사적 사실과 진실을 왜곡”한다고는 말하지만, 강화조약과 관련한 장황한 부연 속에 정작 무엇을 왜곡했다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다. 또한 이번에도 그 “재앙”을 설명해내는 데에 실패하고 있다.

셋째, 레닌과 ‘일국사회주의론’이 왜 아무런 연관이 없는지, 사회주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는 이미 지금까지의 글에서 충분히 설명했고, ‘국제주의’ 동지가 좀 더 인용한 레닌의 글들도 혁명으로 탄생한 노동자국가인 소련의 이중적 성격을 보강할 뿐, 반박하는 내용이 아니므로, 지금까지의 논쟁 과정을 진지하게 추적한 독자에게 판단을 맡기기로 하겠다.

넷째, 나는 당연하게도, 노정협이 어떠한 기준으로 번역할 글의 우선순위를 정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지난 호 번역과 관련하여 제기한 반(反)트로츠키 캠페인 얘기는, 노정협의 반(反)트로츠키 캠페인을 보면서 ‘그럴지도 모른다.’는 내 의심을 표현한 것이었다. ‘국제주의’ 동지는 “우리에게 한정되어 있는 대단히 소중한 번역 역량을 스탈린주의 재생산에 소모하고 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 본다.”라고 인용하는데, 그 문장 앞에는 추측의 내용과 더불어, “만약 그렇다면,”이라는 단서가 붙어 있다.

일관성 있는 일련의 행동을 보며, 어떤 행동이 그 연속선상에 있는 것이 아닌지를 의심(단정이 아니라)하는 것은 합리적이다. “독단”도 아니고 “사실의 왜곡”은 더더구나 아니다. 물론 의심 받는 상대방의 마음에 상처를 남길 수는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국제주의’ 동지가 내게 말하는, “독단”과 “역사적 사실과 진실의 왜곡”에 대해서나 “종파주의의 섬”에 관련해서는 참 뜬금없는 얘기라고 생각하지만, 의심을 품은 결례에 대해서는, 언젠가 내가 노정협에게 사과할 일이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아직은 그 때가 아니다.

다섯째, ‘국제주의’ 동지는 내가 제기한 노정협의 스탈린주의 혐의에 대해 억울해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번 글에서도 그러한 측면이 여전히 드러난다. 지금까지 그 혐의와 그 근거에 대해서 많은 얘기를 했으므로 여기서는 한 가지만 덧붙이기로 한다.

‘국제주의’ 동지는 이렇게 말한다.

“레닌의 부인이자 레닌의 평생 동지였던 그룹스카야가 레닌에 대한 전기를 쓰면서 스탈린집단의 협박 때문에 왜곡됐을 것이라고 하는 것은 그녀에 대한 모욕이다. 오히려 (물론 나도 추측이지만) 트로츠키의 자서전 격인 ‘나의 생애’ 보다 더 자의적인 면이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누구의 글이 더 신뢰성이 있는가의 문제는 여기서 논점이 아니다. 사실 나도 트로츠키의 ‘나의 생애’는 읽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왜 ‘국제주의’ 동지는, *“역사적 진실과 사물을 그대로 보려고 노력”*한다면서, 별다르게 반증할 자료도 없으면서 크루프스카야가 ‘레닌의 회상’을 쓸 때 “스탈린집단의 협박”이 없었거나, “왜곡”이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어 할까? 반면에, “읽어보지 못했”다면서, 트로츠키의 글이 “더 자의적인 면”이 많을 것이라고 추측할까?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부하린, 라데크 등 평생을 나름 혁명에 바친 수많은 볼셰비키들이 다른 것도 아닌 간첩혐의를 받고, 그것도 중책에서 물러나는 숙청이 아니라 사형을 당해야 했다. 레닌의 아내였다고 해서 스탈린집단이 협박하지 않았을까? 물론 그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왜? 레닌의 아내였으므로, 그리고 자신들은 그의 대리인이어야 했으므로.

크루프스카야와 스탈린에 얽힌 일화 하나를 소개한다. ‘나의 생애’에 레닌이 병상에 있을 때, 레닌이 트로츠키에게 보내는 편지 구술을 도왔다는 이유로 스탈린이 크루프스카야에게 “거칠게 굴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위키피디아(영문판)에는 어떻게 거칠게 굴었는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스탈린이 크루프스카야에게 몹쓸 욕["syphilitic whore"]을 퍼부었다는 것이다. 레닌 생전의 일이고, 이 사건은 레닌이 스탈린과의 관계 단절을 선언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레닌 생전에 그랬다면, 레닌이 죽은 다음은 말해 무엇하랴? 물론, ‘국제주의’ 동지에게는 이 일화 또한 “반공주의적 비난과 험담”으로 들릴지 모른다.

행동강령

 

 

10. 숨 죽어버린 ‘행동강령’과의 논쟁–국제주의

‘행동강령’과의 논쟁이 갑자기 숨 죽어버렸다. ‘행동강령’의 이번 답변은 나와의 핵심적인 논점을 대부분 피해가는 것이었다. 국가자본주의론을 비판하는 데에서는 ‘행동강령’과 나의 입장이 대체적으로 일치한다. 원래 이 논쟁은 국가자본주의 대 국가자본주의에 비판적인 입장을 중심으로 논점이 형성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하지만 국가자본주의 입장을 가진 사노련이 아직까지 공식 답변을 하지 않아서 ‘행동강령’과 나와의 상대적으로 부분적인 쟁점을 중심으로 논쟁이 진행됐다.(물론 지금 상대적으로 부분적인 쟁점은 향후 더 커질 수도 있다.)

“독단에 갇혀 역사적 사실과 진실을 왜곡하는 ‘행동강령’”에서 내가 던진 주요한 비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소련사회를 바라보는 과학적 태도의 문제

둘째, 강화조약 관련한 역사적 사실과 진실의 문제

셋째, 유럽합중국 슬로건의 문제

넷째, 사회주의의 문제

첫째와 관련해서 ‘행동강령’은 내가 스탈린주의 혐의에 대해 억울해 한다고 하고 있다. 먼저 나는 ‘행동강령’의 판단과는 다르게 스탈린주의 혐의에 대해 전혀 억울해하지 않는다. 나는 다만 과학적 인식을 위한 노력을 스탈린주의라고 매도하는 학문적, 지적, 정치적 풍토를 개탄할 뿐이다. ‘행동강령’ 동지에 대해서는 트로츠키를 방어한다는 입장에서 멀리 나가서 역사적 사실과 진실을 제대로 보지 않으려는 점이 안타까울 뿐이다. 또한 레닌이 이행기 하에서의 트로츠키의 노조관을 비판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 현실에서 그다지 실천성이 없고, 레닌의 글을 번역하는 것이 반트로츠키 캠페인이라고 할 정도로 ‘행동강령’이 맹목과 독단에 사로잡히는 것이 또한 안타까울 뿐이다.

나는 오직 맑스레닌주의 입장과 원칙에 충실하면서 소련사회를 과학적으로 바라보려 한다. 물론 정보의 제한, 반공주의, 가치판단의 차이에서 오는 해석의 차이가 가져오는 사실관계의 혼란 등이 나의 이러한 노력을 가로막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국가자본주의론의 몰과학적 입장과 종파주의적 입장을 비판하면서 소련사회에 대한 좀 더 풍부하고 철저한 인식을 향해 조금씩 조금씩 전진해 나가고 있음을 느낀다.

둘째, ‘행동강령’은 나에게 여전히 스탈린주의의 혐의가 있다는 근거로 크루프스카야의 ‘레닌의 회상’과 관련한 나의 언급을 예로 들고 있다. ‘행동강령’은 다른 논점은 회피하고 이 부분에 대한 답변으로 글을 절반 가까이를 채우고 있다.

‘레닌의 회상’과 관련한 언급은 먼저 ‘행동강령’이 했다. ‘행동강령’은 트로츠키가 강화조약 관련해서 ‘엄청난 재앙’을 불러왔다는 나의 주장에 대해 “스탈린집단의 검열 아래 쓰였을(1933년에 쓰이고, 트로츠키에 대한 부정적, 스탈린에 대한 긍정적 묘사 일관, 1919년으로 종결되고 그 이후부터 레닌의 죽음까지 중요한 시기에 대한 언급이 없음 등) 크루프스카야의 ‘레닌의 회상’에는 노정협 동지가 말하는 그 ‘엄청난 재앙’이 언급이 안 되고 있을까”라고 주장했다.

나는 이에 대해 ‘레닌의 회상’에서 크루프스카야가 강화조약 관련해서 트로츠키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부분을 직접 인용해서 답변했다. 그러면서 나는 ‘레닌의 회상’에서는 “트로츠키에 대한 감정적인 표현이 가끔 나오기는 하지만 역사적 진실을 파헤치는 데는 더할 나위 없이 필요한 내용이 담겨져 있다.”고 했다.

그런데 ‘행동강령’은 자신이 먼저 주장했던 ‘레닌의 회상’에 엄청난 재앙이 언급되어 있음이 분명히 확인되었는데도 이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지나간다. 그러면서 ‘레닌의 회상’이 스탈린집단의 협박 아래 쓰여 졌다는 ‘행동강령’의 주장에 대해, 트로츠키의 ‘나의 생애’가 더 자의적인 면이 있을 것이라는 나의 추측을 물고 늘어지고 있다. 그러면서 스탈린이 얼마나 나쁜 놈인지를 묘사하기 위해 레닌 생전 크루프스카야에 대한 욕설을 한참 언급한다. 역사유물론을 논해야할 자리에서 개인의 품성이 묘사되고 있다니!

나는 ‘레닌의 회상’이 스탈린집단의 협박 때문에 왜곡됐을 것이라는 ‘행동강령’의 주장에 대해서 그런 식의 가정이라면 트로츠키의 자서전도 자의적인 측면이 있을 거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직접 그 책을 읽지 않았기 때문에 단지 추측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논점은 ‘레닌의 회상’에 강화조약 관련한 ‘엄청난 재앙’이 언급되어 있는지와 더불어 그것이 강화조약 관련한 역사적 사실과 진실을 밝히는 데는 더할 나위 없이 필요한 내용이 담겨져 있다는 것이라고 했다.

사실 이 역사적 사실과 진실을 밝히기 위해 ‘스탈린집단의 협박’ 아래 쓰여진 ‘레닌의 회상’을 먼저 언급한 것은 ‘행동강령’ 동지가 아닌가? ‘행동강령’ 식으로 다시 묻겠다. ‘레닌의 회상’에 강화조약 관련한 트로츠키의 ‘엄청난 재앙’이 언급돼 있는가? 없는가?

‘행동강령’은 “레닌과 트로츠키 사이의 의견이 달랐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 당내 의견구도에서 주요한 대립은, 강화를 주장하는 레닌과 혁명전쟁을 제기하는 좌익공산주의 그룹과의 대립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역사에 대한 명백한 왜곡이다. 당시 논쟁은 처음에는 “러시아 혁명이 산화하더라도 혁명전쟁을 수행하자”던 입장이었던 부하린을 중심으로 하는 좌익 공산주의자와 레닌 사이의 논쟁이었지만 나중에 독일 혁명이 사실상 물 건너가자 ‘강화도 전쟁도 아닌’ 트로츠키의 입장을 좌익 공산주의자들이 지지하면서 논쟁의 원래의 한 측면에 더해 ‘즉각 강화’ 입장인 레닌과 ‘강화도 전쟁도 아닌’ 트로츠키의 입장으로 첨예하게 갈라져서 전개됐다. 레닌은 부하린과 트로츠키에 대해 혁명을 걸고 벌이는 눈먼 도박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당시 강화조약 체결을 두고 당이 내분을 겪는 동안 독일이 침공해오고 러시아가 뒤늦게 강화조약을 체결하면서 훨씬 더 불리한 조건으로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혁명전쟁을 수행하자”는 부하린과 좌익공산주의자와 ‘강화도 전쟁도 아닌’ 트로츠키의 입장으로 인해 혁명 러시아는 제국주의자들에게 권력을 빼앗길뻔 했다.

‘행동강령’에게 묻겠다. 과연 강화조약 관련해서 레닌과 트로츠키 사이에는 단지 의견이 달랐을 뿐인가? 이것이 과연 ‘엄청난 재앙’이 아닌가?(트로츠키가 강화조약 대표단으로서 당의 공식적 입장을 어기고 조약을 체결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는 두 권의 책의 출처를 밝혔고, 이후 다른 국내 논문에서도 확인했다. 다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트로츠키가 직접 쓴 ‘나의 생애’에서 다른 주장을 하고 있으므로 역사적 진실을 밝힐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 부분은 앞으로 당의 역사와 레닌의 저서를 중심으로 살펴볼 것이다.)

셋째, 처음에 일국에서의 사회주의의 건설 문제 관련해서 나는 유럽합중국 슬로건의 문제를 언급했다. ‘행동강령’은 이에 대해 “레닌이 말하는 ‘일국’은 후진국 러시아가 아니라, 서유럽의 선진 자본주의국가를 말하는 것이었다. 위에서 잠깐 이야기한 것처럼, 1915년의 레닌에게 러시아는 사회주의 혁명에 해당되지 않는 나라였다.”고 했다.

다시 나는 “레닌은 이 주장을 1915년 유럽을 염두에 두고 했지만 이 주장은 1917년 혁명 이후 러시아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주장이다. 자본주의 발전법칙에 대한 불균등발전이론은 레닌의 핵심 사상 중의 하나이고, 이것은 레닌이 혁명에서도 견지한 입장이었다. 이로부터 후진적인 국가인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고 이것이 세계혁명의 도화선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이른바 약한 고리론으로 러시아 혁명에 그대로 적용됐다. 과연 이 주장이 ‘행동강령’ 동지의 주장대로 유럽에만 적용되고 러시아에는 적용되지 않는가?”라고 물었다. 

‘행동강령’은 이에 대한 답변을 하지 않고 있다.

넷째, 러시아의 사회주의 문제에서 나는 티피독재는 사회주의이고 공산주의로 가는 이행기라고 했다. ‘행동강령’은 이 주장이 “특정한 정치적 전통에 기초해 있고, 일정한 편향을 지니고 있으며, 그로 인해 (퇴보한 또는 기형적) 노동자 국가를 과학적으로 이해하는 것에 장애가 되고 있다”라고 주장하면서 이것이 스탈린주의의 전통에 기대어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는 ‘행동강령’의 이 주장에 대해 레닌의 ‘국가와 혁명’의 인용과 혁명 이후 연설 등을 인용하면서 왜 터무니없는 주장인지 입증했다.

그런데 ‘행동강령’은 “우리의 지금 논쟁에서 10월 혁명 후의 러시아의 성격 문제는 초점이 아니다. 다만, 그 문제를 논의하고 있는 까닭은 그 성격 규정에 관해 레닌과 트로츠키 사이에 이견이 있었다는 얘기를 ‘국제주의’ 동지가 제기했고, 그 근거를 내가 물으면서 시작된 얘기이다. 나는 “레닌 주장의 핵심이 틀렸다.”고 말했던 것이 아니다. 적어도 그 문제에 관한 한, ‘국제주의’ 동지가 주장하는 이견은 없었다는 것을 말했던 것이다.“고 답변하고 있다. 물론 노동자 국가냐 노동자-농민의 국가냐의 문제는 심각한 논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10월 혁명 후의 성격문제에 있어서 사회주의 ‘용어 사용의 문제’는 ‘행동강령’의 주장에서는 핵심적인 주장이었다. 국가자본주의와 더불어 사회주의라는 용어 사용의 문제가 특정한 정치적 전통에 기초해있다고 하는 ‘행동강령’이 레닌의 글과 연설을 통해 입증한 나의 주장에 대해 명확한 답변을 회피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행동강령’ 동지의 이러한 태도로 인해 나와의 논쟁은 숨 죽어 버렸다.

11. 논쟁의 숨을 살려내기 위하여!–행동강령

논쟁의 숨을 살려내기 위하여

 

이 논쟁의 출발점은 <사노련의 핵심사상을 논쟁적으로 밝힌다!>였다. 그런데 논쟁이 막상 시작되자, 사노련에서는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나서지 않고 있다. 최근 노동자당 건설과 관련되어 움직임이 바쁘게 일고 있다. 강령 토론도 전보다 훨씬 활발해졌다. 반가운 일이다. ‘국제주의’ 동지와 내가 전개하는 우리의 이 논쟁도 크든 작든 그 일에 보탬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이하 호칭 생략)

1.

“a. 첫째와 관련해서 ‘행동강령’은 내가 스탈린주의 혐의에 대해 억울해 한다고 하고 있다. 먼저 나는 ‘행동강령’의 판단과는 다르게 스탈린주의 혐의에 대해 전혀 억울해하지 않는다. 나는 다만 과학적 인식을 위한 노력을 스탈린주의라고 매도하는 학문적, 지적, 정치적 풍토를 개탄할 뿐이다. b. 또한 레닌이 이행기 하에서의 트로츠키의 노조관을 비판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 현실에서 그다지 실천성이 없고, 레닌의 글을 번역하는 것이 반트로츠키 캠페인이라고 할 정도로 ‘행동강령’이 맹목과 독단에 사로잡히는 것이 또한 안타까울 뿐이다.”

**a: 과학적으로 인식하고자 노력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며, 지지한다. 나는 과학적 인식이나 그 노력을 스탈린주의로 매도하지 않는다. 우리 서로 과학적 인식을 위해 노력하기로 하자.

b: 그 문제에 관해서는 ‘국제주의’와 노정협이 스탈린주의 혐의에서 벗어나는 날 사과할 것을 지난 글에서 약속한 바 있다. 그 날 나는 “노정협과 ‘국제주의’가 스탈린주의에 경도되어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맹목과 독단에 사로잡혔었다.”고 사과할 것이다. 하지만 다시 말하건데, 아직은 때가 아니다.

 

2.

“a. ‘행동강령’은 자신이 먼저 주장했던 ‘레닌의 회상’에 엄청난 재앙이 언급되어 있음이 분명히 확인되었는데도 이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지나간다. (중략) b. 그러면서 스탈린이 얼마나 나쁜 놈인지를 묘사하기 위해 레닌 생전 크루프스카야에 대한 욕설을 한참 언급한다. 역사유물론을 논해야할 자리에서 개인의 품성이 묘사되고 있다니!”

**a: ‘국제주의’가 인용한 레닌의 회상 전문이다.

“공산주의 ‘좌파’ 중에는 일리치가 여러 해 동안 손을 잡고 일해왔으며 투쟁의 어려운 시기에 그가 지지를 구하곤 했던 절친한 동지들이 매우 많았다. 이제 그의 주위에는 동공이 생겼다. 그가 비난받다니! 트로츠키에게는 할 말이 많았다. 점잖빼기 좋아하며, 미사여구를 즐기는 그는 어떻게 하면 소비에트 공화국을 전쟁에서 빼내어 힘을 회복시키고 대중을 결집시킬 휴식기를 줄 것인가를 생각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자기를 드러낼 것인가를 생각했다. ‘우리는 불명예스런 어떠한 강화도 체결하지 않는다. 우리는 어떠한 전쟁도 수행하지 않는다.’ 일리치는 이를 오만한 자세라 부르고, 이 구호를 조국 즉, 프롤레타리아가 권력을 접수하여 위대한 건설이 시작되고 있는 조국을 약탈과 무정부 상태로 돌리는 모험주의적 도박이라 불렀다. 중앙위원회의 다수파가 처음에는 레닌에게 반대했다. 1월 24일 다수파(9명)는 트로츠키의 동의안 -우리는 강화를 체결하지 않으며 군대를 해산한다 -에 찬표를 던졌고, 반대표는 7표였다. 2월 3일에는, 강화 체결을 지금 할 것인가 여부에 대하여 찬성이 5표, 반대가 9표였다. 2월 17일에는, 독일에 대한 즉각적인 강화 제의에 찬성이 5표, 반대가 6표였다. 2월 18일에는 독일에 대하여 강화협상 재개를 제의할 것인가에 대하여 6명치찬표를, 7명이 반대표를 던졌다.

2월 23일, 독일군이 전진을 시작하여 도시를 차례로 공략하면서, 독일이 그들의 조건을 제시하고 48시간 내로 회답을 요구하자, 상황이 바뀌었다. 이런 혁명적 미사여구 정책이 계속된다면, 자기는 중앙위원회와 정부로부터 사임하겠다고 레닌이 선언하였다. 독일의 조건을 수락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투표의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7명이 찬성하였고, 4명이 반대하였으며, 그런 시점에 그런 중대한 문제에 대한 책임부담을 두려워하여 트로츠키를 포함한 4명이 기권하였다. …..

‘….여러분은 도박꾼처럼 행동했다. 여러분들은 일어나지도 않은 행운에 모든 것을 걸었다. 여러분들은 필연적으로 일어날 것이지만 아직 성숙하지 못한 국제혁명을 기대하면서 현실의 냉엄함을 직시하지 못했다.’(전집, Vol 27, pp, 79-80)’

….그리고 여기서 일리치와 나는 다시 네바 강을 따라 내려갔다. 그 동안 그는 ‘강화도 없고 전쟁도 없다’는 관점이 근본적으로 틀린 이유를 거듭 반복하며 말했다.”

숨은 그림 찾기에 둔한 나는 저 인용한 문구 어디에 ‘국제주의’가 주장하는 그 “당의 공식결정을 어기고 트로츠키가 초래한 엄청난 재앙”이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꼭 집어 설명도 없이 윽박지르지 말기를 바란다. 레닌과 트로츠키는 강화조약을 둘러싸고 의견이 달랐다. 혹시 레닌과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개진한 것이 그 재앙이라는 말인가? 아니면 레닌의 회상이 묘사하는 트로츠키의 “점잖 빼기 좋아하며, 미사여구를 즐기는” 품성이 그 재앙이라는 말인가?

b: 왜곡하지 말라. 스탈린의 개인적 품성을 따진 것이 아니라, 크루프스카야에게 가해졌을 협박을 설명하기 위해 당시 정황을 따진 것이었다. 그 위 문단에서 말한, 고참 볼셰비키들의 숙청 문제도 품성의 문제였나?

 

3.

“나는 ‘레닌의 회상’이 스탈린집단의 협박 때문에 왜곡됐을 것이라는 ‘행동강령’의 주장에 대해서 그런 식의 가정이라면 트로츠키의 자서전도 자의적인 측면이 있을 거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직접 그 책을 읽지 않았기 때문에 단지 추측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논점은 ‘레닌의 회상’에 강화조약 관련한 ‘엄청난 재앙’이 언급되어 있는지와 더불어 그것이 강화조약 관련한 역사적 사실과 진실을 밝히는 데는 더할 나위 없이 필요한 내용이 담겨져 있다는 것이라고 했다.”

**나의 생애는 자서전이다. 당연히 주관적인 요소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국제주의’가 단정하지 않고 “추측”한 것도 맞다. 내가 지적했던 문제는 그 “추측”의 편향과 근거 없음에 대한 것이었다. 즉, 레닌의 회상이 스탈린 집단의 협박 아래 작성되었을 것이라는 (내용과 정황상으로 충분한 개연성이 있는) 항간의 견해에 대해서는, 크루프스카야를 모욕하지 말라는 둥 하며 협박이 없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면서, 왜 나의 생애는 “읽어보지 못했”다면서 마치 트로츠키가 사실을 왜곡한 것처럼 “추측”하는가 하는 점이 하나였다. 또 하나는, 견해가 상반되는 사안에 대해 왜 상대방 견해는 들어보지도 않고 “명백한 사실”임을 주장하는가였다. ‘국제주의’가 보기에, 트로츠키와 관련된 사안은 반대 견해를 들어보지 않더라도 “명백한 역사적 사실”임을 알 수 있는가? 왜 그랬나? 나도 좀 대답을 들어보자.

 

4.

“사실 이 역사적 사실과 진실을 밝히기 위해 ‘스탈린집단의 협박’ 아래 쓰여진 ‘레닌의 회상’을 먼저 언급한 것은 ‘행동강령’ 동지가 아닌가? ‘행동강령’ 식으로 다시 묻겠다. ‘레닌의 회상’에 강화조약 관련한 트로츠키의 ‘엄청난 재앙’이 언급돼 있는가? 없는가?”

**지난 글에서 나는, ‘국제주의’가 주장하는 “트로츠키가 당의 공식입장을 어기고 초래한 엄청난 재앙”과 관련하여 두 가지를 물었다. 그 중 한 가지는 ‘국제주의’가 지금 언급하고 있는 것이고, 지금까지 대답하지 않고 있는 (‘국제주의’ 식으로 말하면, 회피하고 있는) 두 번째 물음은 이것이었다. “어떻게 당과 소련에 재앙을 몰고 온 트로츠키는 그 후 내전에서 적군 총사령관의 지위를 계속 유지할 수 있을까?”

당내에 이견이 있다는 것과, 다수에 의해 결정된 공식 방침을 어기는 것은 차원이 다른 것이다. 당내 이견은 당연한 것이다. 때로 곤란을 겪기도 했지만, 당내 이견과 분파의 존재는 볼셰비키가 살아있다는 증거이고, 한편 승리의 중요한 요인이기도 했다. 이견과 분파의 말살은 스탈린집단의 정치적 반혁명 과정에서 마치 볼셰비키의 전통인 것처럼 고착되었다. 그러나 공식 방침을 어기는 것은 전혀 다르다. 10월 봉기를 앞두고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가 방침을 어기고 그것을 외부 언론에 공개하는 등의 해당 행위를 저질렀을 때, 레닌은 그 둘을 “파업파괴자”라고 부르며 당에 제명을 요구한 바 있다.

‘국제주의’ 말처럼 “당의 공식 방침을 어겨 엄청난 재앙을 불러오고, 제국주의에 권력을 빼앗길 뻔한” 사안이었다면, 당연히 제명 요구가 있어야 했던 것 아닌가? 왜 그 후에도 트로츠키는 강화조약 체결 대표보다 훨씬 더 막중한 임무라고 할 수 있는 적군 총사령관이 되었는가?

 

5.

“‘행동강령’은 “레닌과 트로츠키 사이의 의견이 달랐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 당내 의견구도에서 주요한 대립은, 강화를 주장하는 레닌과 혁명전쟁을 제기하는 좌익공산주의 그룹과의 대립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역사에 대한 명백한 왜곡이다. 당시 논쟁은 처음에는 “러시아 혁명이 산화하더라도 혁명전쟁을 수행하자”던 입장이었던 부하린을 중심으로 하는 좌익 공산주의자와 레닌 사이의 논쟁이었지만 나중에 독일 혁명이 사실상 물 건너가자 ‘강화도 전쟁도 아닌’ 트로츠키의 입장을 좌익 공산주의자들이 지지하면서 논쟁의 원래의 한 측면에 더해 ‘즉각 강화’ 입장인 레닌과 ‘강화도 전쟁도 아닌’ 트로츠키의 입장으로 첨예하게 갈라져서 전개됐다. 레닌은 부하린과 트로츠키에 대해 혁명을 걸고 벌이는 눈먼 도박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

조금만 상식을 가지고 보아도 “즉시 강화” 입장과 “혁명전쟁”을 주장하는 견해가 양 극단 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것이 주요한 대립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역사에 대한 명백한 왜곡”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트로츠키는 “투쟁은 나중에 퍼진 얘기와 달리 나와 레닌 사이에서가 아니라 레닌과 당의 주요 조직의 압도적 다수 사이에서 일어났다. (중략) (나의) 정식은 현실적으로 레닌의 입장에 이르는 가교 역할을 했다.”고 회상한다. 이 문제와 관련된 반대쪽 당사자의 진술이다. 자의적으로 보일지라도 과학을 추구하려면, 특히 이 문제처럼 양쪽의 진술이 상반될 경우 참고해 봐야 한다.

 

6.

“a. 셋째, 처음에 일국에서의 사회주의의 건설 문제 관련해서 나는 유럽합중국 슬로건의 문제를 언급했다. (중략) 다시 나는 “레닌은 이 주장을 1915년 유럽을 염두에 두고 했지만 이 주장은 1917년 혁명 이후 러시아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주장이다. 자본주의 발전법칙에 대한 불균등발전이론은 레닌의 핵심 사상 중의 하나이고, 이것은 레닌이 혁명에서도 견지한 입장이었다. 이로부터 후진적인 국가인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고 이것이 세계혁명의 도화선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이른바 약한 고리론으로 러시아 혁명에 그대로 적용됐다. b. 과연 이 주장이 ‘행동강령’ 동지의 주장대로 유럽에만 적용되고 러시아에는 적용되지 않는가?”라고 물었다. ‘행동강령’은 이에 대한 답변을 하지 않고 있다.”

**a: 우리는 ‘일국사회주의론’을 따지고 있었다. 그것이 초점이었다. 지난 글에서 ‘일국사회주의론’이 왜 ‘국제주의’가 주장하는 것과 달리 레닌주의가 아니며 완전한 허구인지를, 레닌뿐만 아니라, 스탈린 부하린 등의 입을 통해서도 확인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제주의’는 이번 글에서 일국사회주의가 불가피한 것도 아니고, 레닌주의에 반대되는 내용이라는 나의 주장에 대해 명확한 대답이 없었다. 그러면서 상식에 가까운 물음이 마치 대단한 중요성을 가진 핵심질문이며, 마치 내가 논점을 회피하고 있는 것처럼 물어본다.

b: 적용된다, 러시아에도. 후진적인 사회지만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수립할 수 있고, 그것은 곧장 사회주의 정책들을 도입할 것이다.

그 문서를 스탈린주의자들이 레닌이 ‘일국사회주의론’을 처음 주창한 문서로 왜곡하기 때문에, 그 문서에 대해 설명하는 과정에서, 그것은 주로 유럽을 염두에 두고 쓰인 것이라는 점을 지적했던 것이다. 그걸 가지고, “러시아에는 그럼 적용되지 않는가?”라고 묻기에, 초점도 아니고 상식적인 질문이어서 그냥 지나쳤던 것뿐이다. 말꼬리 잡기를 하자면 서로 너무 피곤하지 않은가?

 

7.

“넷째, 러시아의 사회주의 문제에서 나는 피티 독재는 사회주의이고 공산주의로 가는 이행기라고 했다. (중략) a. 나는 ‘행동강령’의 이 주장에 대해 레닌의 ‘국가와 혁명’의 인용과 혁명 이후 연설 등을 인용하면서 왜 터무니없는 주장인지 입증했다.”

**인용하기는 했다. 그런데 “터무니없는 주장인지 입증”했다는 자평은 대단히 주관적이다. 구체적인 답변은 다음 단락으로 간다.

 

8.

“그러나 10월 혁명 후의 성격문제에 있어서 사회주의 ‘용어 사용의 문제’는 ‘행동강령’의 주장에서는 핵심적인 주장이었다. 국가자본주의와 더불어 사회주의라는 용어 사용의 문제가 특정한 정치적 전통에 기초해있다고 하는 ‘행동강령’이 레닌의 글과 연설을 통해 입증한 나의 주장에 대해 명확한 답변을 회피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첫 글 <노정협의…읽고>에서, 소련을 사회주의라고 부르기 보다는 “퇴보한 노동자국가”라고 부르는 것이 과학적이라고 제안한 바 있다. 왜 그러는 것이 바람직한지에 대해서는 첫 글에서부터 지금까지 반복적으로 설명했다. “논점을 회피한다.”는 둥 “논쟁이 숨죽어 버렸다”는 둥 하지 말고, 꼬박꼬박 거듭 설명해야 하는 나의 애로에 대해서도 헤아려 달라.

지금까지 줄곧 그 문제를 설명해 왔고, 가깝기로는 지난 <노정협 동지 ‘국제주의’에 답하며>의 ‘먼저 확인할 것’ 둘째와 ‘일국사회주의론’은 레닌주의인가?’에서 답한 바도 있다. 도대체 얼마나 설명해야 ‘국제주의’에게 “명확한 답변”이 될 수 있는지 측량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한 번 더 설명하기로 한다. 다시 말하지만, 추상과 구체, 이상과 현실의 간극을 그냥 사회주의라는 말로는 표현해 낼 수 없고, 또한 그 말로 혁명의 성공을 표현할 수는 있을지언정, 그 붕괴와 붕괴를 초래한 내부원인에 대해서 소련 사회를 과학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 내 요지였다. 보통 쓰는 것처럼 ‘현실 사회주의국가’라고 하더라도 일상적으로는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지난번 ‘국제주의’가 나의 “터무니없는 주장”을 반박하며 인용한 레닌의 글을 읽어보자.

“나는 우리가 사회주의로의 과도기의 첫걸음을 떼었을 뿐이고 아직 사회주의에는 도달하지 못하였다 는 데 대하여 환상을 그리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국가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라고 당신들이 말한다면 그것은 정당한 말이다.”–레닌

 

“우리는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의 과도기 를 끝내기에는 아직 멀었다. …. 우리는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길이 얼마나 곤란한가 하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길에 들어선 까닭에 우리 소비에트 공화국을 사회주의적이라고 부를 의무가 있다. 그리고 이 말은 결코 공담으로는 되지 않을 것이다.”–레닌, 1918, 1월 노동자병사농민 대의원 소비에트 제3차 전러시아대회

레닌은 당시 소련 사회를 모순적으로 진술한다. 즉, “우리는 사회주의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우리는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의 과도기를 끝내기에는 아직 멀었다.”라고 진술하는 동시에, “그러나 우리 국가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라고 당신들이 말한다면 그것은 정당한 말이다.” “우리 소비에트 공화국을 사회주의적이라고 부를 의무가 있다.”라고도 말한다. 레닌이전자를 통해 소련의 구체적 현실 을, 후자를 통해 소련이 지향해 나갈 추상적 이상과 그 길의 선두에 선 자부 를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국제주의’는 동의하는가?

게다가 레닌이 말하는 “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의 과도기 ”라는 표현이 지난번 내가 <배반당한 혁명>에서 인용한 트로츠키의 “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예비적 체제”라는 표현과 무엇이 다른가? 지난 첫 번째 반론(9월 24일)에서 ‘국제주의’는 이렇게 주장한 바 있다.

 트로츠키는 러시아가 70년 동안 자본주의도 아닌 사회주의도 아닌 과도기 체제 라고 말했다. 소련 사회구성체가 이렇게 이것도 아닌 저것도 아닌 사회구성체라는 말은 사회분석을 포기 하는 것이다. 소련이 노동자 국가라면 그것이 사회주의 국가라는 말 아닌가?”

‘국제주의’는 자신이 트집 잡았던 문제와 정확히 반대되는 레닌의 인용문을 가지고, 내 주장이 “왜 터무니없는지를 입증”했다고 자평한다. ‘국제주의’에 따르면 레닌은 “사회분석을 포기”했다.

자꾸 이렇게, 말로는 “과학적으로 역사적 사실을 밝히려 노력”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며칠 전에 한 말도 잊고 “맹목적”으로 트로츠키 공격에 나서기 때문에, 반(反)트로츠키 캠페인을 벌이고 있고, 스탈린주의에 경도되어 있다는 혐의를 지울 수 없는 것이다.

 

9.

**하나 더, ‘노동자국가냐 노동자-농민의 국가냐’라는 문제는 물론 초점이 아니다. 10월 혁명으로 등장한 사회가 노동자국가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얘기이다. 내가 문제 삼았던 것은, 그 문제와 관련하여 레닌의 주장에 반대되는 주장을 트로츠키가 개진했다고 ‘국제주의’가 주장했던 것이었다. 그 문제에 대해 ‘국제주의’는 대답을 해야 한다고 본다. ‘레닌의 1920년 글만 보고 그렇게 말했는데, 그 20일 후 얘기를 보니 꼭 그런 것은 아니더라.’식의. 사실 핵심은 그것이 아니었다는 둥, 얼렁뚱땅 다른 얘기로 빠지지 말고.

마치며

“죽어버린 논쟁의 숨”을 살려내기 위해서, ‘국제주의’ 동지가 오늘의 내 대답을 잘 읽어주길, 그리고 묻고 있는 문제에 대한 명확한 답이 있기를 기대한다.

행동강령

10월 16일

  

12. 죽은 논쟁 부여잡기–국제주의,  2008-10-21

 

‘행동강령’은 이 논쟁이 강령토론에 있어서 보탬이 될 것이라고 하고 있다. 물론 논쟁 초기에는 그런 측면이 있었지만 지금 행동강령과의 논쟁은 진실공방으로 가면서 점차로 그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 문제는 진실공방 그 자체가 아니라 내가 수차례 역사적 사실과 관련한 근거를 대도 ‘행동강령’ 동지는 트로츠키는 잘못한 게 없고, 다르게 주장한다는 식으로 답변을 하기 때문에 논쟁이 동어반복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점이다. 독자들은 이미 이 논쟁에 대해 자신의 관점대로 가치판단을 하게 됐다고 본다.

1. 다시 한 번 스탈린주의의 문제에 대하여

나는 ‘행동강령’과의 논쟁에서 스탈린주의 혐의에 대해 전혀 억울해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도 ‘행동강령’은 여전히 말귀를 못 알아듣고 “’국제주의’와 노정협이 스탈린주의 혐의에서 벗어나는 날 사과할 것을 지난 글에서 약속한 바 있다.”라고 하고 있다.

나는 맑스레닌주의의 원칙에 서서 과학적으로 현실사회주의의 문제를 바라볼 뿐 이른바 ‘여론’이 말하는 스탈린주의 혐의 같은 건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러니 세인들의 ‘여론’을 벗어나려고 발버둥치지도 않을뿐더러 설령 그 ‘여론’에게 사과할 것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대신 자본론 서문에서 맑스의 말로 대신하고자 한다.

“나는 과학적 비판에 근거한 의견이라면 무엇이든 환영한다. 그러나 내간 한 번도 양보한 일이 없는 이른바 여론이라는 편견에 대해서는 저 위대한 플로렌스사람〔단테〕의 다음과 같은 말이 항상 변함없이 나의 좌우명이다. ‘제 갈 길을 가라, 남이야 뭐라든!’”

2. 다시 한 번 강화조약과 역사적 진실에 대해

브레스트 강화조약의 문제 관련해서 나의 주된 관심은 트로츠키의 오류를 입증해내는 것 그 자체가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일국에서의 혁명과 세계혁명과의 문제 -당시 러시아 혁명의 사활적인 문제인 동시에 바로 우리가 감당해야하는 문제기도 한 -이다. 내가 여기서 제출하는 몇 가지 출처가 역사적 조작이라는 근거를 ‘행동강령’ 동지가 객관적으로 밝혀낸다면 나는 내가 입증한 사실이 왜곡이라고 인정할 것이다.  

‘레닌의 회상’에는 트로츠키의 ‘재앙적 오류’가 충분하게 설명되어 있다.

“… 그는 어떻게 하면 소비에트 공화국을 전쟁에서 빼내어 힘을 회복시키고 대중을 결집시킬 휴식기를 줄 것인가를 생각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자기를 드러낼 것인가를 생각했다. ‘우리는 불명예스런 어떠한 강화도 체결하지 않는다. 우리는 어떠한 전쟁도 수행하지 않는다.’ 일리치는 이를 오만한 자세라 부르고, 이 구호를 조국 즉, 프롤레타리아가 권력을 접수하여 위대한 건설이 시작되고 있는 조국을 약탈과 무정부 상태로 돌리는 모험주의적 도박이라 불렀다. … 그런 시점에 그런 중대한 문제에 대한 책임부담을 두려워하여 트로츠키를 포함한 4명이 기권하였다. …..여러분은 도박꾼처럼 행동했다. 여러분들은 일어나지도 않은 행운에 모든 것을 걸었다. 여러분들은 필연적으로 일어날 것이지만 아직 성숙하지 못한 국제혁명을 기대하면서 현실의 냉엄함을 직시하지 못했다.’

이것이 과연 레닌과 트로츠키가 단지 의견이 다른 수준의 문제인가? 앞부분 품성을 언급한 부분을 뺐다. 과연 이 글에 트로츠키의 품성에 대한 문제만 있는가?

크루프스카야에 대해 모욕하지 말라는 것은, ‘스탈린집단의 협박’이 있었는지의 여부가 아니라 레닌의 동지이자 부인으로서 평생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투쟁해 왔던 그녀가 과연 협박이 두려워서 역사적 진실을 왜곡할리 없다는 표현이었다. ‘행동강령’은 한편으로는 ‘레닌의 회상’에 강화조약 관련한 트로츠키의 재앙적 오류가 없다고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이 스탈린집단의 협박때문에 왜곡됐을 것이라고 모순적인 주장을 한다.

‘행동강령’은 트로츠키가 ‘나의 생애’에서 “투쟁은 나중에 퍼진 얘기와 달리 나와 레닌 사이에서가 아니라 레닌과 당의 주요 조직의 압도적 다수 사이에서 일어났다. (중략) (나의) 정식은 현실적으로 레닌의 입장에 이르는 가교 역할을 했다.”는 부분을 인용한다.

나는 이 책을 읽지 못했고, 자서전이 자의적일 것이라는 것을 추측이라고 했으나 이 글을 보니 추측이 아니라 얼마나 자의적인지 알 수 있게 됐다. 과연 트로츠키의 입장이 자신의 말처럼 레닌의 입장에 이르는 가교 역할을 했는가? 그렇다면 부하린과 트로츠키에 대한 레닌의 신랄한 비판과 중앙위원회에서 트로츠키의 입장을 지지한 좌익 공산주의자들의 투표행위는 무엇인가?

트로츠키가 당의 결정을 어기고 엄청난 재앙을 초래했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지난 논쟁에서 출처를 이미 밝혔다. 일본학자가 쓴 ‘사회사상사적 연구 러시아 혁명사’라는 책과 조영명의 ‘러시아 혁명사’, 소련공산당사와 국내논문으로는 이론11호에 실린 ‘트로츠키와 부하린’을 보기 바란다.   

당과 소련을 재앙으로 몰고 온 트로츠키가 그후 내전에서 적군 총사령관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당시 볼셰비키의 관용정신이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무장봉기 사실을 공개해서 이적행위를 했던 지노비예프가 다시 볼셰비키의 중앙위원을 할 수 있었던 사실을 보라!

 

3. 일국사회주의와 세계혁명의 문제

‘행동강령’ 동지의 말대로 이 논쟁의 핵심은 일국사회주의론의 문제다. ‘행동강령’은 나에게 “일국사회주의가 불가피한 것도 아니고, 레닌주의에 반대되는 내용이라는 나의 주장에 대해 명확한 대답이 없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누가 일국사회주의론을 이야기했는가? 사노련의 국가자본주의 비판 글을 그대로 인용해보겠다.

“일국에서의 사회주의는 처음에는 승리할 수는 있지만 국제혁명으로 나아가지 않는 한 최종적으로 승리할 수는 없다. 스탈린은 레닌도 일국에서의 사회주의의 승리를 말했다고 하지만 레닌은 최종적인 승리를 말하지 않았다. 일국에서의 사회주의의 최종적인 승리를 더 나아가 완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피한 조건을 하나의 원칙으로 격상시키는 것이다. 각국에서의 사회주의자들은 일국에서의 사회주의의 존립과 강화를 위해 싸워야 하지만 일국 사회주의는 세계혁명으로 전진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투쟁해야 한다. 또한 자칫 일국으로의 고립조건에서 나타날 수 있는 민족주의 사상에 맞서 국제주의 사상과 국제적 노동자계급의 연대를 위해 부단하게 투쟁해야 한다. 그러나 세계혁명의 가능성이 당분간 없는 상황에서 일국에서의 사회주의는 필연적으로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은 패배주의이자 청산주의다.”

‘행동강령’은 이러한 입장을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왜곡된 입장으로 ‘허수아비’ 논쟁을 한다. 자본주의의 불균등발전 법칙에 의해 처음에 일국 또는 몇몇 국가에서 사회주의가 승리할 수 있다. 다만 일국에서 사회주의가 최종적 승리를 거둘 수는 없다. 이것은 정확히 레닌의 입장이고 나의 입장이기도 하다. 브레스트 강화조약에서의 논쟁은 이것을 거부하고 러시아에서 혁명이 패배하더라도 세계혁명을 촉진해야 한다는 무정부적인 입장과의 투쟁이었다. 이와 관련해서 일본의 한 레닌주의자의 변증법적 관점을 인용해보겠다.

“일국사회주의건설이 가능한가 하는 문제에 관한 주지의 논쟁(트로츠키와 부하린)에서 이것에 관계되는 레닌의 이해가 문제로 되었었는데, 그 점에 대해 잠깐 살펴보자. 레닌은 국제적인 관점에서는 사회주의가 일국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하는 것을 불가능하다고 시종일관 강조하였다. 반면에 내부적(소비에트의 사회주의적 개조라는 측면)으로는, 아무리 오랜 기간의 과도적 단계를 거치더라도 사회주의가 승리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이 양 측면을 분리하여 기계적으로 파악하는 입장은 어떤 것이든 중대한 잘못을 포함한다. 즉, 러시아와 같은 후진국에서 일국 사회주의의 건설은 서구의 혁명 없이는 불가능하고, 소비에트권력은 유럽제국에 혁명을 전파하는 데 힘을 집중해야 한다는 트로츠키의 생각은 궁극적으로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내부적 역량의 과소평가로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역으로 일국에서 자조적인 사회주의가 완성되고 나아가 공산주의에로 이행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견해는, 현단계에서 제국주의와 사회주의가 아직 병존하고 있고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의 이행기라는 세계사적 단계의 규정성을 무시하고 있다. 이 견해는 나아가 전인민적 국가론 등의 오류를 낳게 된다. 양측면을 통일적으로 파악하면서 다음의 점에 주의해야 할 것이다. 즉, 일국규모라 해도 그 구체적인 특수성에 입각하는 사회주의건설을 행할 필요가 있고, 그런 의미에서는 일국사회주의건설을 가능한 것이다. 동시에 사회주의의 발전은 세계사적으로는 제국주의의 전반적 위기의 심화와의 관계에서 파악되지 않으면 안된다.”

처음 일국에서의 사회주의 건설의 문제와 관련해서 ‘행동강령’은 레닌의 글 어디에 그런 입장이 있는가라고 물었다. 나는 레닌의 ‘유럽합중국 슬로건에 대하여’에 있다고 답했다. 그러자 ‘행동강령’은 “레닌이 말하는 ‘일국’은 후진국 러시아가 아니라, 서유럽의 선진 자본주의국가를 말하는 것이었다. 위에서 잠깐 이야기한 것처럼, 1915년의 레닌에게 러시아는 사회주의 혁명에 해당되지 않는 나라였다.”고 답했다.

이에 대해 나는 “레닌은 이 주장을 1915년 유럽을 염두에 두고 했지만 이 주장은 1917년 혁명 이후 러시아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주장이다. 자본주의 발전법칙에 대한 불균등발전이론은 레닌의 핵심 사상 중의 하나이고, 이것은 레닌이 혁명에서도 견지한 입장이었다. 이로부터 후진적인 국가인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고 이것이 세계혁명의 도화선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이른바 약한 고리론으로 러시아 혁명에 그대로 적용됐다. 과연 이 주장이 ‘행동강령’ 동지의 주장대로 유럽에만 적용되고 러시아에는 적용되지 않는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행동강령’은 “적용된다, 러시아에도. 후진적인 사회지만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수립할 수 있고, 그것은 곧장 사회주의 정책들을 도입할 것이다. 그 문서를 스탈린주의자들이 레닌이 ‘일국사회주의론’을 처음 주창한 문서로 왜곡하기 때문에, 그 문서에 대해 설명하는 과정에서, 그것은 주로 유럽을 염두에 두고 쓰인 것이라는 점을 지적했던 것이다.”고 말한다.

“주로 유럽을 염두에 두고 쓰인 것”이라는 것과 “레닌이 말한 ‘일국’은 후진국 러시아가 아니라, 서유럽의 선진 자본주의 국가를 말하는 것이었다. 위에서 잠깐 이야기한 것처럼, 1915년의 레닌에게 러시아는 사회주의 혁명에 해당되지 않는 나라였다.”는 분명히 다르지 않은가?

처음에 일국에서 사회주의의 승리가 가능하다는 입장의 근거로 나는 레닌의 글을 인용했고, ‘행동강령’은 그것을 반박하기 위해 그것은 러시아가 아니라 유럽을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오히려 그 글은 유럽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러시아를 염두에 두고 그것을 러시아 혁명에 그대로 적용했다고 말하고 싶다. 레닌의 모든 글은 어느 나라를 말하더라도 러시아에서의 혁명을 촉진할 목적으로 쓰여 졌다. 나의 입장을 반박하기 위해 러시아가 아니라 유럽을 말하는 것이라고 해서 레닌의 약한 고리론을 들어 ‘행동강령’을 반박했는데 그것이 핵심적인 논점 잡기지 말꼬리 잡기인가? 불가피한 조건을 하나의 노선으로 격상시킨 ‘일국사회주의 노선’이 아니라 “처음에 일국에서의 사회주의의 승리는 가능하다. 다만 최종적인 사회주의의 승리는 일국에서 불가능하다”는 입장에 동의하는가? 그렇다면 더 이상 일국사회주의론 운운하면서 허수아비 비판을 중단하기 바란다.

말꼬리 잡기는 오히려 ‘행동강령’이 하고 있다. 나는 소련이 자본주의도 아니고 사회주의도 아닌 과도기 체제라는 트로츠키와 ‘행동강령’의 입장을 비판하는 중에 “레닌은 사실 트로츠키의 노동자 국가주장에 대해 노동자 국가가 아니라 노동자-농민의 국가라고 했다. 이 말은 러시아가 사회주의가 아니라는 의미가 아니라 노동자-농민의 국가, 즉 노동자-농민의 동맹에 기초한 사회주의 국가임을 말하기 위함이었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행동강령’은 레닌이 ‘당의 위기’라는 글에서 “나는 그 후 그 회의 기록을 살피면서 내가 틀렸고, 부하린 동지가 옳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나는 그 때 이렇게 말했어야 했습니다. ‘노동자 국가[라고만 하는 것은-역주]는 추상적이다. 우리가 실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특수한 조건 속에 있는 노동자 국가이다. 먼저, 우리나라의 절대다수는 노동계급이 아니라, 농민이다. 둘째로, 관료적 뒤틀림이 있는 노동자 국가이다.’라고 말입니다.”라고 했다고 했다.

나는 이에 대해 이와 관련한 핵심 논점은 “노동자 국가/노동자 농민의 국가라는 논쟁의 핵심은, 소련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시작했지만 당시 소련의 문화적 후진성, 생산력의 낮은 조건, 농민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은 상황에서 어떻게 사회주의를 강화하고 승리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였다.”고 답했다. 

여기서 핵심 논점은 소련이 사회주의인가, 노동자 국가인데 사회주의도 자본주의도 아닌 과도기 체제인가의 문제다. 나의 주장의 핵심은 “이 말은 러시아가 사회주의가 아니라는 의미가 아니라 노동자-농민의 동맹에 기초한 사회주의 국가임을 말하기 위함이었다”에서처럼 러시아가 사회주의가 아닌 과도기 체제라는 점을 반박하는 것이었다. 또한 소련이 혁명을 통해 사회주의를 건설했으나 농민이 다수이고, 문화적, 경제적으로 후진적인 러시아의 조건 때문에 이행기의 현실성을 말하기 위함이었다.

실제 레닌은 ‘행동강령’이 인용한 글의 바로 뒷부분에서 “내 연설의 전체를 읽은 사람은 누구든지 이 수정이 나의 논거와 결론에 차이가 없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자, 과연 레닌의 20일 뒤 얘기를 가지고 누가 말꼬투리를 잡고 있는가?

그런데 ‘행동강령’이 자신의 주장을 옹호하기 위해 인용한 레닌의 글 ‘당의 위기’는 사실 노동조합 논쟁에서 분파주의에 빠져 당을 위기로 몰아넣은 트로츠키와 레닌과 트로츠키의 입장을 화해시킨다고 하다가 트로츠키의 입장을 옹호하게 된 ‘완충그룹’의 리더인 부하린을 비판하기 위함이었다. ‘행동강령’ 동지도 자신도 모르게 반트로츠키 캠페인에 동참했는가?

 

4. 소련 사회 성격문제에 대해

‘행동강령’의 말대로 소련사회의 성격과 관련해서 레닌의 말은 소련의 구체적 현실과 소련이 지향해 나갈 추상적 이상과 그 선두에 선 자부를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나의 일관된 입장이었다. 다만 남은 문제는 트로츠키가 말한 소련 ‘과도기 체제’라는 분석과 레닌의 주장이 일치하는가의 문제다.

레닌은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으로 소련은 사회주의가 되었으나 위에서 말한 소련의 여러 가지 현실적 조건 때문에 아직 높은 수준의 공산주의로 가기에는 먼 길이 남아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트로츠키의 과도기 체제 주장은 ‘행동강령’이 말한 대로 소련의 구체적 현실과 소련이 지향해 나갈 추상적 이상과 그 선두에 선 자부를 표현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트로츠키는 소련이 자본주의도 아니고 ‘타락한 노동자 국가’라는 의미에서 ‘과도기 체제’를 사용했다. 트로츠키는 스탈린이 지배하는 관료체제를 정치혁명으로 타도한다면 진정한 사회주의로 나아갈 수 있는데 그렇지 않으면 자본주의로 복귀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에서 과도기 체제를 사용했다. 이것은 레닌이 말한 공산주의로의 이행기라는 의미와 전혀 다르다.

 

사실관계 2008-10-22

필자가 추천하는 “일본학자가 쓴 ‘사회사상사적 연구 러시아 혁명사’라는 책과 조영명의 ‘러시아 혁명사’”는 모두 대표적인 스탈린주의 저작입니다. 일본학자의 그 책은 이른바 네오스탈린주의적 입장에 씌어진 책인데, 스탈린 사후 후르시초프, 브레즈네프 시기의 수정주의와 전인민의 국가론을 정통 스탈린주의 입장에서 비판하고 있는 책입니다.조영명의 ‘러시아혁명사’는 스탈린 생전의 소련 공식 교과서입니다. 그러니 그 책에서 말하는 사실들은, 적어도 트로츠키와 관련된 부분은 모두 날조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정도로 철저히 스탈린주의적인 책입니다.

여기 양측의 논쟁에 대해서는 일단 더 지켜보겠습니다. 판단이 서면 본인도 입장을 제시하며 개입을 약속하겠습니다. 오늘은 위 추천된 책들과 관련한 사실관계만 지적하는 것으로 만족하겠습니다. 참고로 본인은 친트로츠키주의자입니다. 

 

레닌주의자 2008-10-22

레닌이 일국 사회주의론을 제창했다고? 레닌이 “처음에 일국에서 사회주의의 승리 가능성”을 언급했다?

이것은 명백히 레닌의 제국주의 시대의 약한 고리론을 왜곡하는 것이다.

레닌은 (유럽합중국 슬로건에 관하여라는 글을 포함해 몇몇 논문에서) 어떤 일국이 세계 제국주의 사슬의 약한 고리를 이룰 수 있고, 이 고리를 끊어(돌파)서 일국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날 수 있음을 강조했을 뿐이다. 유럽 동시다발 혁명을 추상적으로 제기하는 것에 대해 비판한 것이다.

그런데 이를 일국 사회주의, 즉 처음에 일국에서 사회주의의 승리 가능성이라고 둔갑시키는 것은 노정협이 스탈린주의 일국사회주의론을 레닌한테 덮어 씌우는 상투적인 스탈린주의 수법을 따라 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노정협은 스탈린주의를 레닌주의로 착각하고 있거나, 아니면 레닌주의에 대한 스탈린주의적 왜곡 행렬에 가담하고 있거나 둘 중 하나다. 

 

국제주의자 2008-10-23 | 15:57:15  

사실관계/

위에서 언급한 책들이 트로츠키에 비판적인 입장에서 쓰여졌던 것이라는 것을 이미 지난 번에 언급했다. 그리고 소련공산당사는 3판인 브레즈네프판이다. 2판 후르시초프판에서는 스탈린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도 언급돼 있고, 3판에서는 절충적으로 언급돼 있다. 다만 문제는 그래서 그것이 사실관계에 있어서 왜곡인지 밝혀달라고 한 것이다. 나는 강화조약에서 트로츠키의 재앙 또는 오류를 입증하는 것 그자체로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일국혁명과 세계혁명과의 관계에 관심이 있고, 이것이 강화조약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위의 언급한 책들과 논문이 날조라는 것의 객관적 근거를 입증해주면 당의 입장을 어기고 재앙을 초래했다는 점에 대해 정정할 것이라고 했다. 아울러 레닌의 회상이 스탈린집단의 압박으로 날조됐다는 것도 밝혀주기 바란다. 다만 그렇다고 해도 당의 입장을 어긴 것에 대한 정정은 되겠지만 강화조약 관련한 트로츠키의 ‘강화도 전쟁도 아닌’ 입장이 명백한 재앙적인 오류라는 것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레닌주의자/

누가 레닌이 일국 사회주의론을 제창했다고 했는가? 처음 일국에서 사회주의의 승리라는 것은 말 그대로 레닌 자신의 표현이자 입장이다. 다만 레닌은 처음에는 일국에서 사회주의 승리가 가능하나 그것은 세계혁명으로 나아가서 최종적 승리를 거둬야 한다는 것이다. 일국이 세계 제국주의의 사슬의 약한 고리를 끊는 것, 일국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날 수 있는 것 그것이 처음에 일국에서 사회주의의 승리아닌가?

묻겠다. 일국에서 사회주의가 혁명이 일어나는 것이 그럼 사회주의의 패배인가? 왜 모호한 말로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 즉 약한 고리를 끊는 것을 ‘일어나는 것’이라고 표현하는가? 처음에 일국에서 제국주의의 약한 고리를 끊고 사회주의 혁명이 승리할 수 있다. 이것이 출발이 되어 높은 수준의 공산주의로 이행해가는 것이다. 다만 이것이 세계혁명으로 나아가지 않고 일국으로 고립된다면 사회주의의 최종적 승리를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 2008-10-24 | 00:20:47  

사실관계님한테 궁금한게 있는데 위 저작들이 스탈린주의적 관점에서 쓰여졌기 때문에 트로츠키에 대한 언급이 왜곡과 날조라면 -단지 스탈린과 트로츠키가 대립했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반대로 트로츠키의 저작에서 스탈린에 대한 평가역시 트로츠키 본인의 관점에 근거한 왜곡과 날조 아닌가요?; 논리가 좀 이상한거 같습니다. 단지 스탈린주의적 관점이라고 해서 왜곡과 날조라는건 설득력이 없는거 같네요. 

 

레닌주의자 2008-10-24 | 01:02:14  

“일국에서 사회주의의 승리”와 “일국에서 사회주의혁명 승리”가 어디 같은 것인가? 레닌은 명백히 “일국에서 사회주의혁명의 승리”를 얘기했지, 노정협처럼 일국사회주의론을 암시하는 “일국에서 사회주의의 승리”를 얘기한 적이 없다. 사회주의혁명의 승리와 사회주의의 승리는 명백히 다른 것이고, 레닌 역시 다르게 썼다.

“일국에서 사회주의혁명의 승리”는 명백히 유럽 동시다발혁명이라는 좌익공산주의자들의 추상적 국제주의를 비판하는 맥락이었지, 노정협처럼 혁명의 국제적 확산이 안 될 경우 일국에서라도 사회주의가 “승리”하고 안착할 수 있다는 식의 논리가 결코 아니었다. 스탈린도 일국사회주의론 얘기할 때 일국에서 사회주의가 최종적 승리, 안착할 수 있다고 무식하게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노정협처럼 스탈린도 ‘일시적으로’라고 얘기했다. 스탈린도 그렇게 내놓고 레닌주의를 청산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수정주의가 아닌 상황적 논리로 얘기했다.

그 점에서 노정협의 ‘일국에서 사회주의 승리’론은 정확히 스탈린의 일국 사회주의론과 일치한다. 중요한 것은, 노정협이 레닌의 제국주의 시대의 사회주의혁명 불균등발전법칙론과 약한고리론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거나, 아니면 비변증법적이고 기계적인 스탈린주의의 일국사회주의론을 여전히 레닌에게 덮어씌어 왜곡하는 민중민주주의자들(PD)의 영향 하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거나 둘 중의 하나다. 아니, 어쩌면 둘 다이다. 

 

국제주의 2008-10-24 | 11:37:16  

지금 레닌주의자(?) 동지는 언어의 유희(말장난)를 즐기고 있다. 레닌이 처음에 일국 또는 사회주의 몇몇 국가에서 사회주의의 승리가 가능하다고 했다고 하니, 그것은 단지 일국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는 것이 가능하다고 했다가 나중에는 일국에서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를 얘기했다고 한다.

다시 묻겠다. 일국에서 제국주의의 수탈과 압제의 고리를 끊고 약한 고리를 끊는 것,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는 것, 처음에 일국에서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가 가능하다는 것이 과연 처음에 일국에서 또는 소수의 몇몇 국가에서 사회주의가 승리할 수 있다는 것과 다른 말인가?

레닌의 말을 직접 인용해보자!

“경제적 및 정치적 발전의 불균등성은 자본주의의 무조건적인 법칙이다. 이로부터 사회주의의 승리는 처음에는 소수의 자본주의 나라에서 또는 단 하나의 자본주의 나라에서도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자본가들을 수탈하고, 사회주의적인 생산을 조직한 그 나라의 승리한 프롤레타리아는 다른 나라의 억압당하는 계급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고, 그 나라들의 자본가들에 대항해 봉기를 일으키고 필요할 경우, 그 나라 정부와 지배자들에 맞서 군사력을 동원하면서, 나머지 자본주의 세계에 대항할 수 있을 것이다.”

짧은 글에서 “노정협처럼 혁명의 국제적 확산이 안 될 경우 일국에서라도 사회주의가 “승리”하고 안착할 수 있다는 식의 논리가 결코 아니었다.”라고 나의 글을 왜곡하는 레닌주의자(?)의 파렴치한 능력이 놀랍다.(지금 나는 조직적 논쟁이 아니라 조직의 입장을 담고 있으나 개인의 이름으로 논쟁을 하고 있다. 노정협의 이름으로 공식적 매체로 논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최소한의 매너를 지켜주기 바란다.)

혁명의 국제적 확산이 안될 경우 일국에서라도 사회주의가 승리하고 안착할 수 있다고 언제, 누가 얘기했는가?

레닌주의자는 일국혁명과 세계혁명의 변증법을 이해하지 못하고 레닌주의자라는 이름으로 레닌을 모욕하고 있다. 일국에서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 즉 사회주의의 승리는 공산주의로 이행하는 첫출발이다. 그것은 자본주의 국가권력을 타도하고 사회주의 생산관계를 도입하는 출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국에서의 사회주의의 승리를 통해 소비에트 권력의 기초를 다지고, 농민과의 동맹을 강화하면서 사회주의 권력을 강화하고 공고히 한다.

그런데 이러한 일국에서의 혁명의 승리는 자본주의 분배의 흔적이 남아 있고(특히 후진적이고 농민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은 러시아에서는 더욱 극심하게 나타난다.), 제국주의의 포위 속에서는 결코 높은 수준의 공산주의의 최종적 승리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세계혁명을 촉진하는 것이 단지 세계혁명의 도래를 기다리거나, 세계혁명의 가능성에 사회주의 국가의 운명을 맡기고 의존하거나, 일국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패배하더라도 세계혁명을 촉진하자는 모험주의적인 것은 아니었다.

일국에서의 사회주의 생산관계를 강화하고, 생산성을 높이기 투쟁하고, 농민(특히 빈농)과의 동맹관계를 강화하는 것이 일국에서의 사회주의를 공고하게 하고 승리하기 위해 투쟁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국에서의 사회주의는 내전과 제국주의의 공세 앞에서 혁명의 승리를 방어해야 한다. 이러한 일국에서의 혁명의 성과를 자본주의의 압제에 시달리는 국가들에게 혁명의 전망과 열망을 갖게 하는 것과 제국주의 국가, 식민지, 반식민지 국가의 혁명을 지원하고 원조하는 것, 제국주의 국가가 군사적, 정치적 투쟁을 강화하는 것, 노동자의 국제적 단결을 강화하는 것이 일국에서 승리한 사회주의 국가의 임무이다. 이것이 일국에서 승리한 사회주의 국가가 사회주의의 최종적 승리를 위해 나아가는 것이다.

브레스트 강화조약은 그런 점에서 일국에서 혁명의 승리 이후에 일국혁명과 세계혁명의 관계에서 맞게되는 최초의 가장 거대한 시험대였다. 좌익공산주의자들은 러시아 혁명이 패배하더라도 세계혁명을 촉진해야 한다고 했다. 트로츠키는 ‘강화도 전쟁도 아닌’ 입장으로 레닌의 가는 가교가 아니라 부하린과 함께 레닌의 정반대편에 서 있었다. 

 

 

13.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구하기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구하기

 

노정협의 문필가 ‘국제주의’ 동지는 이 불편한 논쟁을 빨리 끝내고 싶어하는 것 같다. 지난번 글의 제목은 “숨 죽어버린 논쟁”(10월 14일)이었고, 이번엔 “죽은 논쟁 부여잡기”(10월 21일)이다. 그도 그럴 것이 “명백한 사실”이라고 믿어오던 꽁꽁 굳은 그 믿음들이 반론에 부딪히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제기되는 반론들을 모두 극복한 뒤에야 우리는 비로소 “명백한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스탈린주의 선전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반론은 트로츠키의 것이다. 왜냐하면 스탈린주의는 스탈린을 정점으로 하는 관료집단이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트로츠키를 정점으로 하는 혁명가들을 제거하면서 등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반론이 여전히 ‘어느 정도의(최소로 말해서)’ 설득력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당당하게 “명백한 사실”을 주장하는 ‘국제주의’의 대범함, 반대견해는 몇 줄 읽지 않아도 “얼마나 자의적인지 알 수 있”는 그의 통찰력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다. 그것도 트로츠키의 글은 내가 인용해주는 글들로 거의 처음 접해보는 것으로 보이는 ‘국제주의’가.

그래서 그는 시작부터 불편한 내색을 한다.

“물론 논쟁 초기에는 그런 측면이 있었지만 지금 행동강령과의 논쟁은 진실공방으로 가면서 점차로 그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 . 문제는 진실공방 그 자체가 아니라 내가 수차례 역사적 사실과 관련한 근거 를 대도 ‘행동강령’ 동지는 트로츠키는 잘못한 게 없고, 다르게 주장한다는 식으로 답변을 하기 때문 에 논쟁이 동어반복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점이다.”

“역사적 진실과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려고 노력”한다고 ‘국제주의’는 줄곧 주장해 왔다. 그러한 그가, “진실공방”으로 인해 “논쟁은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스탈린주의는 진실의 날조 위에 기초한 사상이다. 반면 ‘국제주의’는 트로츠키가 진실을 날조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진실공방은 그런 점에서 필연이다.

‘국제주의’가 “역사적 사실과 관련된 근거”를 제대로 대었다면, 논쟁이 이렇게 “동어반복”으로  흘러가지 않았을 것이다. ‘국제주의’는 여러 스탈린주의 문서들(그것도 거의 절판되어 확인하기 어려운)을, 특히 강화조약과 관련해서, 이렇다 할 인용도 없이 제목만 나열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국제주의’는 여기서 또 논점을 은근히 비튼다. 나는 트로츠키가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주장한 적도 없다. 너무도 당연하지만, 레닌도 그러했듯이, 트로츠키 역시 잘못 생각했을 때가 있었다. 몇 가지 문제 즉, 노동자국가냐, 노동자-농민의 국가냐의 문제, 강화조약 문제 등은 트로츠키가 잘못한 것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함이 아니다. 스탈린주의자들이 상용 그러한 것처럼, ‘국제주의’가 레닌과 트로츠키 사이의 이견과 트로츠키의 잘못을 과장하기 때문에, 근거들을 들어서 그 과장됨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트로츠키의 무오류를 논증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무오류를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스탈린주의 삼단논법–‘레닌과 트로츠키는 의견이 사사건건 달랐다. 트로츠키에 맞서 스탈린은 레닌 편에 서서 레닌을 방어했다. 그러므로 스탈린은 레닌의 계승자이고 트로츠키는 혁명의 파괴자이며 이단자이다.’–을 논박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스탈린관료집단의 볼모가 된’ 레닌을 구하고자 할 뿐이다.

 

둘러대기

‘국제주의’는 둘러대기에 참 능하다. 대단히 많은 예가 있지만, 몇 가지만 들자.

사실 나는 첫 번째 문제와 관련지어 레닌의 20일 후의 글을 찾아내고 반박했을 때(10월 1일), 내심 ‘이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인정하겠지’하고 기대했었다. 그런데 “레닌은 트로츠키의 노동자국가 주장에 대해 노동자국가가 아니라 노동자-농민의 국가라고 했다”(9월 24일)이라고 말했던 ‘국제주의’는, 묻는 말에 딴전을 피우며 레닌이 말하는 핵심은 그것이 아니라는 둥하며 넘어간다(10월 2일, 10월 21일).

‘국제주의’는 ‘일국사회주의론’이 레닌에 근거한 사상이며 그것에 반대한 트로츠키(주의)는 “무정부주의 청산주의 패배주의”라는 스탈린주의의 오래된 선전을 똑같이 따라한다. 그에 대해 레닌뿐만 아니라 당시의 모든 볼셰비키, 심지어 ‘일국사회주의론’을 제창한 스탈린과 부하린이 했던 말까지 인용하여 반박하자(10월 1일, 10월 16일), 이젠 슬쩍 비켜 ‘일국사회주의론’에 대한 약간의 유보적인 문구를 쓴 바 있다는 이유로 ‘일국사회주의론’과 무관한 양 “허수아비 비판을 중단”하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레닌의 회상>은 스탈린집단의 협박 아래 왜곡 혐의를 받는 책이라는 내 견해에 대해 “레닌의 동지이자 부인으로서 평생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투쟁해 왔던 그녀가 과연 협박이 두려워서 역사적 진실을 왜곡할리 없다”라며 크루프스카야를 추켜 세워주는 제스처로 스탈린집단과 스탈린주의 선전을 방어하려 나선다. 생사의 혁명과정을 겪어낸 수많은 볼셰비키들이 심지어 간첩죄를 시인(?)하고 처형당했다. 크루프스카야의 혁명성을 끔찍하게 여기는 ‘국제주의’를 위해 백번 양보하여, 설령 크루프스카야가 온갖 압력과 협박에도 불구하고 왜곡하지 않았다고 치자. 그렇다면 과연 <레닌의 유언장>을 감추었던 그들의 손에서 출판이 가능했겠는가? 조금 상식적으로 생각하자.

또 10월 16일 나는 “’국제주의’ 말처럼 “당의 공식 방침을 어겨 엄청난 재앙을 불러오고, 제국주의에 권력을 빼앗길 뻔한” 사안이었다면, 당연히 제명 요구가 있어야 했던 것 아닌가? 왜 그 후에도 트로츠키는 강화조약 체결 대표보다 훨씬 더 막중한 임무라고 할 수 있는 적군 총사령관이 되었는가?”하고 물은 바 있다. 그러자 ‘국제주의’는  그것은 “바로 당시 볼셰비키의 관용정신이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무장봉기 사실을 공개해서 이적행위를 했던 지노비예프가 다시 볼셰비키의 중앙위원을 할 수 있었던 사실을 보라!”고 대답한다. 대단한 “관용정신”이 아닐 수 없다. 하긴 스탈린이 그 “레닌의 동지이자 부인”인 크루프스카야에게 욕을 한 사실을 지적하자, “품성” 문제를 왜 따지냐고 “관용”했던 ‘국제주의’이기도 하다. <노동자의 힘>의 과거사를 문제 삼는 몇몇 조직들은 ‘국제주의’가 지금 언급하고 있는 이 “관용정신” 을 보고 배울 일이다.

혁명 직후 레닌은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에 대해 제명요구를 했다. 6년 후 죽음을 앞둔 레닌은 그들의 죄과를 유언장에 다시 언급하며 “우연이 아니었다.”고 당에 그 둘을 경고했다. ‘국제주의’에 따르면 “당의 공식 방침을 어겨 제국주의에 권력을 빼앗길 뻔한 엄청난 재앙을 불러온” 트로츠키에게는 제명요구는커녕 강화 조인 직후, 적군사령관으로 ‘새로’ 임명(“유지”가 아니라)되었다. 그 두 사안이 같은 것이라고 ‘국제주의’는 둘러댄다. 이 정도라면 개그맨 ‘유담’이 진행한다는 그 프로그램에 한번쯤 초대될 만하다.

 

논쟁의 의미

남아 있는 스탈린주의는 일본과 북한을 통해 맑스주의를 배우던 80년대 운동의 화석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 논쟁이 우리 정치의 발전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계기가 되고 있다고 여긴다. 그래서 이 논쟁에 많은 시간과 정력을 투여하고 있다. “동어반복”이라고 ‘국제주의’가 주장하지만, 의미 있게 전개되고 있다. ‘국제주의’가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스탈린주의라는 낙인을 찍는 태도는 옳지 못하다”(10월 2일)고 하던 그는, 이제 “스탈린주의 혐의 같은 건 신경쓰지 않”(10월 21일)을 정도로 의연해졌다. 우리의 논쟁은 의미 없지 않다.

게다가 ‘국제주의’의 10월 21일의 글로 나는 이 논쟁이 비약할 큰 희망을 느꼈다. ‘국제주의’의 약속 때문이다.

“내가 여기서 제출하는 몇 가지 출처가 역사적 조작이라는 근거를 ‘행동강령’ 동지가 객관적으로 밝혀낸다면 나는 내가 입증한 사실이 왜곡이라고 인정할 것이다.”

이 약속을 나뿐만 아니라, 이 논쟁을 지켜보고 있는 독자들이 꼭 기억할 것이다.

 

‘국제주의’가 일러준 길

‘국제주의’는 “당의 결정을 어기고 트로츠키가 소련에 초래한 엄청난 재앙”의 근거로 <레닌의 회상> 내용을 또(이번이 세 번째이다) 인용한다. ‘나는 아무리 거듭 그 구절을 읽어도 잘 모르겠으니, 꼭 집어서 그 “엄청난 재앙”이 무엇인지 설명해 달라’는 내 청(10월 16일)에도 불구하고. 나의 “모순적 주장”이 어떻다는 둥 알 수 없는 소리를 늘어놓으며 ‘그냥 읽어보면 안다’는 식이다. 그리고 절판되어 구하기도 어려운 책들을 인용도 없이 던져준다.

나는 ‘국제주의’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이 논쟁을 지켜보는 독자들을 위해서라도 그리고 이 논쟁을 매듭짓기 위해서라도, “명백한 사실”임을 입증할 수 있다면, 그 내용을 지적해 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게다가 “엄청난 재앙”이 있었음을 주장한 것은 ‘국제주의’였다.

일본학자가 쓴 ‘사회사상사적 연구 러시아 혁명사’라는 책과 조영명의 ‘러시아 혁명사’는 구하지 못했다. 다만 다행히 이론11호에 실린 ‘트로츠키와 부하린’은 인터넷을 뒤져 찾아냈다. 그리고는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 관련된 내용은  이것이 전부 이다.

“1918년 2월 23일에 다시 소집된 당 중앙위원회는 레닌의 강화 즉시 조인 안에 찬성하였지만, 트로츠키가 파기한 강화를 재조인한 대가는 독일에 훨씬 더 많은 영토를 할양한 것과 불리한 조건을 강요받은 것이었다.”–김남국, 트로츠키와 부하린

당시 서울대 박사과정인 저자는 수많은 참고자료들로 각주를 치장해 놓았다. 하지만 ‘국제주의’가 우리에게 ‘읽으면 알 것’이라며 일러준 이 문단에는 “트로츠키의 재앙”이 역사적 사실임을 입증할 만한 근거는 없다. 근거가 무엇이냐고 저자에게 묻는다면 무엇이라고 할지 궁금하다. 그는 애써 찾아온 우리에게 ‘사회사상사적 연구 러시아 혁명사’를 쓴 일본 학자나 ‘러시아 혁명사’의 조영명에게 가보라고 일러주거나, 자신이 아는 또 다른 스탈린주의 선전물을 댈지 모른다. 혹시나 ‘국제주의’의 최근 글들을 읽어보라고 얘기할지도 모른다. 마치 담뱃가게가 어디 있느냐고 묻는 사람에게 ‘약국 옆에 있다’고 대답하는 식이다. 그럼 약국은?

세계의 스탈린주의자들은 이렇게 날조된 사실을 끈끈한 상호보증을 통해 “명백한 사실”로 떠받치고 있다. 대단한 국제주의적 상호보증 이다.

그 글에 대한 소감도 지적하자. 그동안 출판된 국내외의(아마도 주로 일본의) 스탈린주의 문서들을 모아 자기 생각인 양 짜깁기했을 뿐, 그 사실들을 1차 자료들을 통해 확인하는 데에는 대단히 게을렀을 것처럼 느껴지는, 정말 창의성이라고는 눈곱만큼 있는 글이었다. 그 중 재밌는 한 단락을 소개한다.

“a. 트로츠키는 이미 1906년에 “유럽 프롤레타리아의 직접적이고 국가적인 지지가 없다면 러시아의 노동자 계급은 획득한 권력을 유지할 수도 없을 것이고, 또한 일시적인 지배권을 영속적인 사회주의적 독재로 전환시킬 수도 없을 것이다.”고 전망한 바 있었다. b. 그는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가 사회주의로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그렇지 못할 것인가 하는 문제들은 유럽과 세계 자본주의의 운명에 달려있게 될 것”이라는 주장을 20년대 말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라고 쓴다. 그러면서 각주에 트로츠키의 <평가와 전망>을 들고 쪽 번호를 붙여놓았다. 그런데 예민한 독자라면 금방 이 문장들을 읽고 ‘어디서 많이 본 구절들인데’하고 느낄 것이다. 그렇다. 앞부분(a)은 노정협의 43호 글에서 보았을 것이고, 뒷부분(b)은 내가 10월 1일 소개한 부하린의 문장–”트로츠키 동지가 지금도 주장하는 연속혁명의 이론에는, 우리 혁명의 후진성 때문에, 세계 혁명이 없다면 우리 혁명은 쇠퇴할 것이라는 내용이 있습니다.”(부하린, 중앙집행위원회 7차 총회, 1927년)–을 살짝 바꾼 것이다. 그리고 위의 두 문장은 트로츠키를 비방하는 스탈린주의 문서에 거의 빠짐없이 나오는 구절들이다.

아마도 저자는 1차 자료들에 대한 자신의 독서와 분석을 통해 저 문단을 쓰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렇게 추정하는 이유는 첫째, <평가와 전망>에는 세계 혁명을 주장하는 여러 문장이 있는데 왜 하필 스탈린주의자들에 의해 수없이 반복 인용되어 상투적이라고 의심받을 저 문장일까 하는 점이다. 둘째, 그 이후에도 트로츠키는 수십 년에 걸쳐 같은 사상으로 방대한 양의 저작을 남겼다. 최근에 가까울수록 좋을 텐데 왜 그의 사상이 덜 여물었을 1906년 글을 인용할까하는 점이다. 1927년의 스탈린과 부하린은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지만 저자는 많았다. 셋째, 각주에서는 부하린을 언급도 않고 있다. 자신의 문장처럼 말하고 있다. 그런데 “1920년대 말”은 1927년의 부하린에게나 의미 있는 것이다. 연속혁명 사상은 트로츠키가 죽을 때까지(1940년) 간직한 사상이다. 강화는 1918년의 일이다. 그렇다면 저 “1920년대 말에도”라는 표현은 ‘1990년대에, 1918년 강화조약을 분석하는’ 저자의 표현으로 대단히 우스꽝스런 표현이다.

저자는 그저, 소련에서 코민테른을 통해 각국에 보낸 선전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한 어느 나라(아마도 일본) 스탈린주의자의 글을 읽고 그 내용을 마치 자기 생각인 양–즉, 자신이 1차 자료를 읽고 분석해서 내린 결론인 것처럼, ‘적어도 저 부분에서는’–뻔뻔하게 쓰고 있는 것이다. 스탈린주의자들은 이렇게 문필가적 양심마저 없다.

이제 독자들의 눈엔 날조가 “명백한 사실”로 둔갑하는 스탈린주의 선전의 계통도 가 보일지도 모른다. ① 스탈린관료집단의 당내투쟁과정에서 생성된 비방 자료→② 각국 공산당에 전달, 각국의 언어로 번역 생산→③ 스탈린주의 이론가들이 그것을 바탕으로 논문 작성→④ 그것을 서로 인용, 학습, 보증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새 문건 작성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와 관련된 증언들

진실을 확인시켜줄만한 책 중에 번역된 책으로는 아이작 도이처 의 <무장한 예언자 트로츠키>가 있다. 풍부한 1차 자료를 바탕으로 강화조약 문제를 60쪽에 걸쳐 서술해 놓았다. 그 책에도 ‘국제주의’가 주장하는 “당의 결정을 어기고 트로츠키가 소련에 초래한 엄청난 재앙”은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이처가 ‘한때’ 트로츠키주의자였음을 이유로 그 책이 “자의적”이라고 주장할지 몰라 더 좋은 자료를 찾아보았다.

그러다가 <역사란 무엇인가?>의 저자로 유명한 E. H 카아 가 저술한 <소련의 역사 (A Hostory of Soviet Russia)>의 제3권 <볼셰비키혁명 1917~1923(The Bolshevik Revolution)>을 구해 ‘10월에서 브레스트-리토프스크까지’ 부분을 읽었다.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몇 구절들을 소개한다.

“1918년 1월 21일 회의는 3월의 최종 결정에 이르기까지의 논쟁 동안 당의 견해를 나누어 놓은 세 가지의 대체적인 노선 을 분명히 했다. 참석한 62명의 볼셰비키 지도자 가운데 32명은 11월과 12월에 걸쳐 당을 지배해 왔던 무비판적인 자신감을 여전히 흔들리지 않은 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레닌으로부터 “모스크바파”라고 호칭되었는데, 그것은 모스크바 당위원회가 가장 고집스럽게 이 입장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한편 그들은 “레닌의 이전 입장” 위에 기초해 있다고 주장했다. 레닌의 명망과 설득력을 모두 동원한 결과 그의 새 입장 즉, “어떤 대가를 치르고라도 강화한다.”에 불과 15명의 지지자를 끌어내었다. 남은 16명은 전쟁은 절대 다시 시작할 수 없지만 독일 조건에 따라 강화하는 것은 불필요하고 잘못된 것이라는 트로츠키의 입장을 지지했다. 그는 첫 번째 그룹이 주장하는 혁명전쟁의 실현 가능성을 부정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에 혁명이 도래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협상의 술수를 통해 유예기간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 했다.”–E. H. 카, <볼셰비키 혁명: 1917~1923>, Pelican Book

10월 혁명 직후 볼셰비키 정권은 각국에 강화의사를 포고했다. 그로부터 3개월이 지난 1월 21일의 당 내부 의견분포도이다. 3개월 동안의 논쟁이 있었지만 레닌은 여전히 소수이다. 트로츠키는 “혁명전쟁의 실현가능성을 부정”한다는 측면에서 혁명전쟁파와 달랐고, 한편 유럽혁명을 고취하기 위해 강화 유예를 주장한다는 점에서 ‘즉시 강화’를 주장한 레닌과 달랐다.

다음은 그 3일 후인 1월 24일에 대한 묘사이다. 1월 28일의 회담에서 트로츠키가 전쟁 당사국들에게 일방적으로 전쟁종결 선언을 하게 되므로 이 회의는 그 회담에 대한 당의 방침을 결정하는 중요한 자리였다.

“트로츠키에 대한 지시사항의 공식 결정은 3일 후인 24일의 중앙위원회의 결정에 달려 있었다. 이 회의 이전, 트로츠키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레닌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혁명전쟁 입장을 지지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러자 레닌은, 그렇다면 트로츠키 입장은 ‘아마도 그다지 위험한 것은 아닐 것’이라고 대답했다. 레닌은 익살스럽게 리투아니아와 에스토니아를 잃게 되겠지만, “트로츠키와 평화를 이룰 수 있다면” 잃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덧붙였다. 레닌은 위원회에서 즉각 강화 안건을 다시 제출했고 스탈린의 단호한 지지와 지노비예프의 미심쩍은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레닌에 의해 제기된 다소 모호한 공식 제안 즉, ‘가능한 한 협상을 지연할 것’ 이라는 결정은 12대 1로 가결되었다. ‘혁명전쟁’을 찬동하는 제안은 오직 부하린과 드레진스키 2명의 지지만 얻었다. ‘전쟁을 중지한다. 강화는 체결하지 않는다. 군대를 해산한다.’ 는 트로츠키의 동의안이 9대 7이라는 근소한 차이로 가결되었다.”–같은 책

‘국제주의’와 김남국은 “트로츠키가 당의 결정을 어기고 강화를 파기”한 것처럼 말하지만, 바로 위의 당 결정을 1월 28일의 회담에서 트로츠키가 수행한 것이다.

독일은 2월 18일부터 공격을 재개했다. 그리고 이전보다 가혹해진 새로운 강화안을 제시했다. 그것을 두고 2월 23일 회의가 열렸고 다음은 그 회의에 대한 묘사이다.

“레닌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의 거취와 관련하여 최후통첩을 제기했다. 만약 ‘혁명적 미사여구 정책’을 지속한다면, 정부와 중앙위원회로부터 사퇴하겠다는 것이었다. 어려운 결정에 직면해야 했다. 그는 ‘독일과 협상을 재개하면서 다시 한 번 연기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제안하는 스탈린을 무시하면서(brush aside)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인하지 않을 가능성을 주장하는 스탈린은 틀렸다. 이 조건에 우리는 조인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조인하지 않는다면, 3주 안에 소비에트 권력의 사망신고서에 사인해야 할 것이다. 독일 혁명은 아직 무르익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여러 달 걸릴 것이다. 그 조건을 우리는 수용해야 한다.”–같은 책

강화라는 첨예하고 위태로운 문제를 둘러싸고 많은 지도부들의 견해는 동요해야 했다. 여기에는 스탈린의 동요가 묘사되어 있다. ‘즉시 강화’파이던 그는 이날 강화 지연파로 발언한다. 긴장감이 최고조에 다다른 회의였다. 아이작 도이처에 따르면 이 회의에서 트로츠키는 당의 “분열을 피하기 위해” 기권하고, 그의 기권으로 인해 레닌은 비로소 다수를 점하게 된다.

E. H. 카아는 트로츠키와 레닌의 의견차이 그리고 그의 강화조약에서의 역할을 이렇게 평가한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와 관련된 트로츠키에 대한 레닌의 이견은 부하린 지지자들에 대한 것보다는 덜 심각한 것이었다. 트로츠키의 강한 개성과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의 극적인 역할은 동시대인과 후대인 모두의 눈에 두드러지고 커다란 중요성으로 부각되었다.” –같은 책

자, ‘국제주의’ 동지! “트로츠키가 당의 공식적 입장을 어기고 조약을 체결하지 않아서 당과 소련에 엄청난 재앙과 문제를 일으켰다.”는 것이 여전히 “명백한 역사적 사실”인가?

이 정도로 충분하다고 여겨지지만, 이번에는 당 회의록 을 살펴보자. E. H. 카아의 기록과 교차 검토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1918년 1월 24일 회의. ‘전쟁을 중지한다. 그러나 평화조약에 조인하지 않는다.’는 트로츠키 동지의 동의안이 찬성 9표 반대 7표로 통과되었다.”–당 회의록, 트로츠키의 <날조를 일삼는 스탈린 일당>에서 재인용

다시 확인하다시피 당의 이 결정을 가지고 트로츠키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로 간 것이었다. 한편, 몇 년 후 이 사안을 반(反)트로츠키 캠페인 아이템으로 들고 나올 스탈린은 그 당시엔 다음처럼 트로츠키의 입장에 공감한 바 있었다.

“1918년 2월 1일 회의. 스탈린 동지: 이 어려운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은 트로츠키의 중간 입장을 통해 제시되었다.”–같은 책

다음은 E. H 카아의 글에서도 묘사됐던 2월 23일 회의 기록이다.

“1918년 2월 23일 회의.

 

스탈린 동지: 우리는 조인할 필요가 없다. 강화협상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레닌 동지: 조인하지 않을 가능성을 주장하는 스탈린은 틀렸다. 이 조건에 우리는 조인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조인하지 않는다면, 3주 안에 소비에트 권력의 사망신고서에 사인해야 할 것이다. 독일 혁명은 아직 무르익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여러 달 걸릴 것이다. 그 조건을 우리는 수용해야 한다.

 

우리츠키 동지: (스탈린을 반박하며) 제안된 조건은 받아들이거나 거부하거나 해야 한다. 협상을 지속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같은 책

E. H. 카아와 당 회의록의 증언 그리고 트로츠키의 증언은 기본 사실에 있어 상호 일치한다. 그리고 도이처의 기록과도 모순되지 않는다. 위의 넷은 다음 명제를 확인시켜 주고 있다. 즉, ‘트로츠키가 당의 결정을 어겨서 엄청난 재앙을 초래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스탈린은 자신이 강화조약의 대표가 아니었다는 이유로–즉, 현장에서 책임지고 뛰지 않았다는 이유로– 몇 년 뒤에 슬쩍 빠져나와, 트로츠키를 “당의 결정을 어기고 조약에 서명하지 않았다.”( 스탈린 )고 기소한다. 그리고 그것을 ‘국제주의’가 열거하는 책들을 포함해 각 나라의 스탈린주의 공산당과 스탈린주의 출판물들이 반복하고 ‘ 국제주의 ‘는 그 문서들을 들며 스탈린과 똑같은 문장을 구사하며 “명백한 사실”이라고 주장한다. ‘국제주의’가 지금 하고 있는 말들은 전혀 새로운 주장이 아니다. 대부분 80년 동안 재탕 삼탕 되어 온 말들이다. 날조된 , 다만 소련 등의 국가권력과 그들 사이의 상호보증으로 연명되어 온 .

 

‘일국사회주의론’에 대해 다시 한 번

일국사회주의 문제에 대해 ‘국제주의’ 동지는 한 발 빼고 싶어한다. “일국사회주의는 원칙으로 격상되어서는 안 되며 세계혁명으로 전진해야 한다.”는 말을 한 적 있다는 이유로 “허수아비 비판을 중단”해 달라고 한다.

여기서는 위의 주장이 타당한지 즉, 노정협의 43호 글 그리고 지금까지 ‘국제주의’가 제출한 글들을 통해 과연 43호 글과 ‘국제주의’의 글들이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론’과 무관한지를 살펴보자.

스탈린관료집단은 트로츠키를 비롯한 노동계급의 전위투사들을 당과 국가권력으로부터 배제하기 위해 ‘일국사회주의론’을 들고 나왔다. 그들은 그 근거로 레닌의 <유럽합중국 구호에 대하여>를 제기하고, 트로츠키의 <평가와 전망>의 구절을 인용하며 트로츠키와 당내 지지자들을 무정부주의 패배주의 청산주의라고 주장했다.

노정협과 ‘국제주의’는 바로 스탈린집단이 인용하는 <평가와 전망>의 그 구절(43호에서 인용한 똑같은 구절)을 인용하며, 스탈린처럼 레닌의 <유럽합중국 구호에 대하여>의 바로 그 구절(9월 27일)을 근거로 들어 레닌도 인정했다고 주장하며, 스탈린집단이 붙인 똑같은 딱지 “무정부주의, 청산주의, 패배주의”를 붙여(43호 소제목과 이후의 글들) 트로츠키(주의)를 공격한다.

뭔가 좀 다른 것이 있는가? 도대체 뭘 허수아비 공격이라는 것인지. 노정협이 43호에서 한 그 정도의 국제주의자인 양하는 정치 수사 역시 세계 스탈린주의자들의 공용어였다. 세상의 어느 스탈린주의자가 순진하게 ‘우리는 소련 사회주의밖에 모르오. 세계혁명에는 관심이 없소.’하겠는가. 대부분 다 나름대로는 스스로를 국제주의 혁명가라고 생각했고 스탈린주의와 스탈린주의로 방부처리 된 레닌을 진정한 레닌주의라고 믿고, 그 믿음으로 살다가 대부분 깨치지 못한 채로 죽었다.

‘국제주의’는 그런 혁명가 한 분을 우리에게 또 소개한다. “변증법적 관점”으로 해석하신다는 일본의 한 레닌주의자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러시아와 같은 후진국에서 일국 사회주의의 건설은 서구의 혁명 없이는 불가능하고, 소비에트권력은 유럽제국에 혁명을 전파하는 데 힘을 집중해야 한다는 트로츠키의 생각 은 궁극적으로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내부적 역량의 과소평가로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

‘저 생각’이 트로츠키 혼자만이 아니라 레닌을 포함하여 당시 볼셰비키들 모두의 생각이었다는 것을, 그들의 생생한 증언을 인용하여 10월 1일의 글 <노정협 동지 ‘국제주의’에 답하며>에서 지적한 바 있다. ‘국제주의’는 스탈린주의의 체로 걸러진 것이 아니면 레닌의 말조차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독자들은 그 글을 다시 한 번 살펴주기 바란다.

스탈린집단에 의해 수십 년 동안 반복되어온 말을 ‘국제주의’는 자신의 목소리인 양 반복한다.

 세계혁명 의 가능성이 당분간 없는 상황에서 일국에서의 사회주의 는 필연적으로 패배 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은 패배주의이자 청산주의다.”–노정협, 43호

이 말은 위에서 소개한 일본의 한 레닌주의자(?)의 견해와 상통한다. 과연 둘이 주장하는 것이 맞는지 10월 1일의 인용문들(그것들은 지금 소개하는 것만큼 가치 있다. 스탈린 스스로 일국사회주의를 부정하는 증언을 포함하여)에 더하여 그 당시의 증언을 더 들어보자. 독자들은 위 두 레닌주의자(?)의 문장을 메모한 뒤 다음 구절들과 대조하며 읽으면 훨씬 이해가 빠를 것이다.

“오직 서구 노동자들과의 연대 위에서, 오직 서구 자본주의 기초를 흔든 다음에야, 우리는 러시아 혁명의 승리를 생각할 수 있다. 이 사실을 노동자들과 병사들이 알게 해야 한다.”–스탈린, 1917년 8월, 트로츠키의 <러시아혁명사> 부록 ‘일국사회주의’에서 재인용, 이하 같음

스탈린도 1917년 8월 무렵에는 ‘아직’ 혁명가였다.

“러시아 혁명이 시작될 때부터,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의 정당[볼셰비키]은 러시아 혁명에 의해 시작된 국제 혁명이 전쟁과 자본주의를 압살하거나, 국제 자본이 러시아 혁명을 압살하는 것 두 가지 밖에 없다는 것을 계속 주장해 왔다.”–부하린, 1918년 1월

스탈린과 같이 ‘일국사회주의론’을 주창하며 반대파들을 “무정부주의자 청산주의자 패배주의자”로 공격했던 부하린도 이때까지는 ‘아직’ 혀가 꼬이지 않았다.

스탈린 “서구에 혁명 운동이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이 아니라 가능성만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가능성에 기댈 수는 없다.” 레닌 “특정한 측면에서 서구에서 혁명이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그러한 관점에 따라 우리의 전술을 바꾼다면, 우리는 국제 사회주의 혁명의 배신자가 될 것 이다.”–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조약과 관련된 회의 중

흥미롭다. 다른 누구도 아닌 스탈린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떻게 관료집단의 우두머리로 추앙되게 되었는지 단초 중의 하나를 이 회의에서 볼 수 있다.

“만약 그들이 권력 장악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이 지구 위 어떤 것도 볼셰비키가 장악하지 못할 권력은 없다. 세계적인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할 때까지.”–레닌, ‘볼셰비키는 과연 국가 권력을 장악할 수 있을까?’

“세계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할 때까지”가 레닌이 정한 기한이었다.

“세계사적 사실들은 러시아 혁명의 사회주의 혁명으로의 전환은 모험이 아니라 불가피한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왜냐하면 다른 선택이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세계적으로 볼셰비키 정치가 승리하지 않는다면 , 영국-프랑스와 미국 제국주의는 결국 러시아의 독립과 자유를 목조를 것 이다.”–레닌, 1918년 11월

노정협 43호의 말과 완전히 반대되는 레닌의 주장이다. ‘국제주의’ 말에 따르면 레닌은 패배주의이자 청산주의자이다. 물론 또 어떻게든 둘러대겠지만.

“우리는 한 국가 내에서만이 아니라, 국가들의 체제 내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제국주의 국가들이 존재하는 조건 속에서 소련이 오랜 기간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결국 한쪽이 다른 한쪽을 정복하게 될 것 이다.”–레닌, 1919년 3월

 

“우리는 전쟁기에서 평화기로 이동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전쟁이 또다시 발생할 것이라는 것을 한시도 잊지 않고 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병존하는 한, 우리는 평화롭게 살아갈 수 없다. 장기적으로 둘 중의 하나가 나머지를 정복할 것 이다. 소련 또는 세계 자본주의의 죽음을 슬퍼하는 장송곡이 장차 울려 퍼질 것 이다. 지금은 단지 유예기간일 뿐 이다.”–레닌, 1920년

같은 맥락의 말들이고, 레닌이 여기서 예견하고 있는 “한쪽이 다른 한쪽을 정복”한 후 “울려 퍼질 장송곡”은 실현되었다. 노동계급이 바라던 정반대의 방향으로.

우리는 당연히 그 원인을 과학적으로 해명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제주의’는 레닌과 똑같이 말했다는 이유로 트로츠키와 그 전통을 “무정부주의 청산주의 패배주의”라고 규정하고, 스탈린집단이 구축한 그 정반대의 주장을 맞다고 우긴다. 그러면서 레닌주의자임을 스스로 칭한다. 참칭이다.

 일국사회주의론 ’은 그것을 도구로 하여 노동계급 전위에 대한 스탈린을 정점으로 하는 관료집단의 승리 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바로 그 관료화는 레닌 마지막 시기에 조짐이 보였고, 레닌은 최후까지 자신의 죽음을 재촉하면서까지 그에 맞서 투쟁했다. 그 문서들이 <레닌의 유언장> 등 말년의 글들이다(그 문서들은 신평론출판사, <레닌의 반스탈린 투쟁> 을 볼 것). 트로츠키와 좌익반대파의 제거로 관료집단은 승리했다. 그리고 그들은 영국, 중국, 스페인, 프랑스, 독일 등의 혁명적 상황들을 말아먹었다 (< 날조를 일삼는 스탈린일당 재판>을 참고할 것). 그리고 결국엔 소련 자체를 말아먹었다 . 그것을 막기 위해 트로츠키는 ‘정치혁명’으로 관료집단을 타도해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국제주의’는 바로 이러한 주장을 트로츠키가 했다는 이유로 트로츠키는 레닌과 다르단다.)

 

다시 한 번 소련사회의 성격 문제에 대하여

나는 지난 글(10월 16일)에서 ‘국제주의’의 주장과 레닌 주장(나의 “터무니없음”을 논박하려고 ‘국제주의’가 인용한) 사이의 모순을 추궁한 적이 있다. 그러자 이번에는 레닌의 원문을 자기 멋대로 해석하면서, 여전히 자기가 맞고 트로츠키 주장은 틀렸다고 말한다.

독자 앞에 세 개의 글을 나란히 놓는다.

먼저, ‘국제주의’:

 트로츠키는 러시아가 70년 동안 자본주의도 아닌 사회주의도 아닌 과도기 체제 라고 말했다. 소련 사회구성체가 이렇게 이것도 아닌 저것도 아닌 사회구성체라는 말은 사회분석을 포기하는 것 이다. 소련이 노동자 국가라면 그것이 사회주의 국가라는 말 아닌가?”–’국제주의’, 9월 24일

다음, 트로츠키:

“러시아는 자본주의의 가장 강한 고리이기는커녕 가장 약한 고리였다. 현재 소련은 세계의 경제수준을 능가하고 있기는커녕 자본주의 국가들을 따라잡으려고 노력하고 있을 뿐이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당대에 가장 발전한 자본주의의 생산력을 사회화시킨 기초에서 형성될 사회가 공산주의의 가장 낮은 단계 즉 사회주의 사회이다. 그렇다면 소련은 명백히 사회주의 사회가 아니다 . 왜냐하면 소련은 자본주의 국가들보다 기술, 문화, 재화의 측면에서 상당히 뒤떨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 소련이 보여주고 있는 모든 모순적 요소들을 인정할 경우 이 체제는 사회주의가 아니다. 다만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예비적 체제(preparatory regime) 로 보는 것이 더 진실에 가깝다.”–트로츠키, <배반당한 혁명>, 갈무리출판사, IBT, 제3장, 사회주의 체제와 국가

마지막으로 레닌:

“나는 우리가 사회주의로의 과도기 의 첫걸음을 떼었을 뿐이고 아직 사회주의에는 도달하지 못하였다 는 데 대하여 환상을 그리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국가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라고 당신들이 말한다면 그것은 정당한 말이다.”–레닌

 

“우리는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의 과도기 를 끝내기에는 아직 멀었다. …. 우리는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길 이 얼마나 곤란한가 하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길에 들어선 까닭에 우리 소비에트 공화국을 사회주의적이라고 부를 의무가 있다. 그리고 이 말은 결코 공담으로는 되지 않을 것이다.”–레닌, 1918, 1월 노동자병사농민 대의원 소비에트 제3차 전러시아대회

레닌이 ‘국제주의’가 해석하는 것처럼(10월 21일)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으로 소련은 사회주의가 되었으나 …여러 가지 현실적 조건 때문에 아직 높은 수준의 공산주의로 가기에는 먼 길이 남아 있다고 말하고 있”는가?  누가 맞는지, 독자들은 대답해야 한다.

그렇게 여러 차례 설명했음에도 ‘국제주의’는 소련에서 표현된 추상과 구체의 변증법을 알아듣질 못한다. <국가와 혁명>은 레닌이 추상의 수준에서 말한 것이다. 위에서 레닌은 소련이라는 구체적인 사회를 말하고 있다. ‘국제주의’ 말처럼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했다고 해서 모두 사회주의라고 한다면, 레닌이 말하는 “사회주의 로의 ” “사회주의에는 도달하지 못하였다 ” “사회주의 로의 과도기 ” “사회주의 로 이행하는 ”은 뭔가? ‘국제주의’는 스탈린주의 전통 독해법에 따르지 않고서는 레닌도 읽어내질 못한다. 누가 레닌주의자인가?

 

마치며

10월 14일 ‘국제주의’ 동지는 “오직 맑스레닌주의 입장과 원칙에 충실하면서 소련사회를 과학적으로 바라보려 한다.”면서, 그러한 태도에 “정보의 제한, 반공주의, 가치판단의 차이에서 오는 해석의 차이가 가져오는 사실관계의 혼란”이 장애가 된다고 호소한 바 있다. 그러나 우리의 논쟁과 그 동안 출판된 많은 책들은 정보의 제한이라는 장벽을 깨뜨려내고 있다. 물론 반공주의적 견해에 대해서는 나 역시 ‘국제주의’와 노정협의 편에서 싸울 것을 약속한다. 가치판단의 차이는 사실의 엄밀한 검증을 통해 극복되어야 한다. 우리는 지금 그렇게 하고 있다.

나는 ‘국제주의’ 동지를 포함하여 노정협 동지들의 충심을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동시에, 그 충심이 노동계급에게 희망이 되기 위해선, 오직 스탈린주의 잔재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맑스-레닌주의 입장과 원칙에 충실하면서 소련사회를 과학적으로 바라보려 할 때뿐이라는 것도 믿어 의심치 않는다.

10월 28일

행동강령

 

※더욱 깊이 이해하고자하는 선진노동자들에게 권하는 추천 도서(문서) 목록

*국가와 혁명, 레닌: 이 문제만이 아니라 언제든지 중요한 필독서

*레닌의 반스탈린 투쟁, 신평론출판사: 절판되었다면 복구 필수

*아이작 도이처 트로츠키 3부작: 이 문제에 관심이 많다면 강화조약 부분부터, <나의 생애>를 안 읽었다면 그것부터

* 날조를 일삼는 스탈린 일당 재판: ‘무지무지 중요’, 현대 트로츠키주의 운동사

*배반당한 혁명, 트로츠키, 갈무리

특히 3장, 5장, 9장, 11장

*배반당한 혁명 중 ‘보론’–일국사회주의


C. 국가자본주의론자들과의 행동강령의 문답

14. 회원: [행동강령에게]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지금의 중국도 ‘노동자 국가’란 말인가? 2008·09·25 01:29

 

행동강령, 당신에게 한 가지만 묻겠다. 당신은 1948년 이후 중국을 노동자 국가라고 규정한다. 그런데 현재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중국도 노동자 국가인가?

지금의 중국을 노동자 국가나 사회주의라고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행동강령 당신의 “퇴보한 노동자 국가”론에 의하면 지금의 중국도 노동자 국가이다. 그리고 미국과 중국 간의 제국주의 경쟁체제에서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자 국가인 중국을 지지해야 하는 것으로 된다. 그것이 당신의 논리이다. 

나는 당신의 논리가 결국 중국 지배계급=자본가계급을 지지하는 논리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당신의 이론은 레닌과 트로츠키를 말하지만 실은 레닌과 트로츠키의 정신을 부르주아적으로 왜곡하는 이론라고 생각한다. 

혹시 당신이 지금의 중국에 대해서는 자본주의라고 규정하는지 모르겠다. 만일 당신이 지금의 중국을 ‘퇴보한 노동자 국가’에서 자본주의로 변신한 것으로 본다면 당신의 논리는 자가당착이 된다. 왜?

당신은 당신의 글에서 “노동자 국가의 국유화 체제가 전면적인 사적 소유체제로 변화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반혁명’이라는 사회격변을 동반”한다고 밝히고 있다. 나는 이 말에는 동의한다. 그런데, 그렇다면 ‘(퇴보한) 노동자 국가’였던 현대 중국에서 언제 “‘자본주의 반혁명’이라는 사회격변”이 일어났다는 것인가? 모택동이 죽고 나서 등소평이 권좌에 올라 개혁 개방을 취한 것이 “자본주의 반혁명이라는 사회격변”인가? 그렇게 평화적인 반혁명도 있는가? 중국공산당이 계속 권력에 있고 모든 당 관료들이 그들의 정치적 경제적 지위에서 아무런 변동도 없이 진행된 모택동→등소평 이행이 “사회격변”인가? 그렇게 순탄한 사회격변도 있는가?

중국이 모택동 체제에서 오늘날의 등소평 “개혁개방 체제”로 이행한 것은 ‘(퇴보한) 노동자 국가’에서 반혁명을 거쳐 자본주의로 이행한 것이 아니다. 반혁명 같은 것은 일어난 적이 없다. 모택동 사후 그가 지명한 후계자 화국봉과 문혁 주도세력인 4인방이 등소평에 의해 숙청된 사건은, 행동강령 당신의 비유를 빌리면 노태우가 전두환을 귀양보낸 것일 뿐 반혁명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노동자 국가→ 자본주의>가 아니라 <쇄국적 국가자본주의 → 초국적 국가자본주의(글로벌화에 편입된 국가자본주의)>이다. 1948년 이후 오늘날까지 중국에서 근본 단절이나 사회격변은 없었다. 자본주의로서의 연속성이 오직 존재할 뿐이다.

소련 또한 마찬가지다. 1989년 고르바초프가 실각하고 소연방이 와해되었을 때 어떤 자본주의 반혁명도 일어나지 않았다. 소련 집권 노멘클라투라 (당 관료)는 그 지위에 아무런 변동 없이 1989년 이후 옐친 체제 하에서 그대로 지배계급을 이루고 있었다. 국영기업들이 사유화되었을 때 기존 국영기업 지배인들이 고스란히 사장으로 변신했다. 노동자 국가에서 자본주의로 바뀐 것이라면 행동강령 당신 말대로 반혁명적 격변이 일어났어야 한다.

그러나 기존 지배계급인 당 관료 노멘클라투라는 지극히 평화적으로 사적 자본가들로 변신했다. 노동자들은 그대로 착취받는 노동자들이었다. 물론 국영기업이 사유화하면서 구조조정과 정리해고가 벌어짐으로써 노동자들은 더 고통받았다. 그러나 그것이 자본주의 반혁명이라고 말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우리는 대처와 레이건, 또는 김대중과 이명박 하에서 사유화와 구조조정 공세가 전면적으로 펼쳐지고 그에 따른 노동자의 고통이 증대되었다고 해서 이를 자본주의 반혁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영국 노동당 집권 하에서 국유화가 많이 이루어져 있었다고 해서 그 상황을 노동자 국가라고 부르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점들을 인정한다면 행동강령 당신의 ‘퇴보한 노동자 국가’론은 이론적으로도 틀렸고, 실천적으로도 가장 반동적인 결론을 이끈다.

 

 

행동강령: (사노련) 회원에게 08·09·26 01:27

이 글은, 특히 제목만큼은,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이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조금 덜 진지한 독자들의 마음이다. 왜냐 하면 지금의 중국은 그들에게 ‘완전히’ 자본주의적인 것처럼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런 인상은 상해나 북경 등을 다녀온 수많은 관광객, 유학생, 사업가들의 한결같은 증언으로 들려온다. “도대체 이 나라가 어째서 공산주의라는 거지?” 그래서 그들은 중국의 정치 경제사나 1948년부터 지금까지 줄곧 집권해 온 당의 명칭과 자신들의 인상과의 모순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증언하는 것에 자신의 생각을 순종시키려 한다. “과거에 어찌되었건 간에 중국은 자본주의이다. 이제 그건 상식이다.”

하지만 이들은 사회주의자라고 보기 어렵다(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최소한 진지한 사회주의자는 아니다. 진지한 사회주의자라면, 분명한 검증 없이, 맑스주의적 원칙과 현실과의 진지한 대조 검토 없이, 그냥 다수가 추종하는 ‘인상’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맑스주의는 신념이기 이전에 과학이기 때문이다.

‘사노련회원’은 <노정협의 ‘사노련의 국가자본주의론 비판’을 읽고>에서 제기한 여러 가지 문제들(‘촛불노동자강령’과 북한 국유화 무료교육 무료의료 등에 대한 태도와의 모순, 미제 축출이라는 구호에 대한 태도 문제, 국가자본주의론과 반공이데올로기와의 관련성, 자본주의적 국유화와 사회주의적 국유화의 혼동 문제, 생산수단과 계급의 문제 등)에 대한 대답 등은 회피하고, 그가 생각하기에, 그 글의 가장 약한 고리라고 여기는 ‘현재 중국의 성격 문제’를 들고 나왔다. 그리하여 사노련의 국가자본주의론을 공격하는 그 글의 신뢰를 떨어뜨려 자신(들)의 믿음을 지키고 싶어한다.

물론, 어떤 문제제기이건 ‘그것이 그럴듯할 경우’, 나는 성실히 논쟁을 제기한 의무를 다할 것이다. 사노련도 이 문제에 진지하다면, 중국 문제만이 아니라, 그 글에서 제기한 나머지 문제들에도 답해줄 것을 바란다.

1.

“a. 지금의 중국을 노동자 국가나 사회주의라고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b. 그런데 행동강령 당신의 “퇴보한 노동자 국가”론에 의하면 지금의 중국도 노동자 국가이다. 그리고 미국과 중국 간의 제국주의 경쟁체제에서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자 국가인 중국을 지지해야 하는 것으로 된다. 그것이 당신의 논리이다.”

***

a: 다수라고 해서 진리인 것은 아니다. 러시아 2월 혁명 이후, 4월 레닌이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라는 구호를 처음 들고 나왔을 때, 이름 있는 볼셰비키 거의 대부분은 그 황당해 보이는 주장을 지지하지 않았다.

b: 맞다.

 

2.

“a. 나는 당신의 논리가 결국 중국 지배계급=자본가계급을 지지하는 논리라고 볼 수밖에 없다. b.그래서 당신의 이론은 레닌과 트로츠키를 말하지만 실은 레닌과 트로츠키의 정신을 부르주아적으로 왜곡하는 이론라고 생각한다.”

***

a: ‘사노련회원’의 논리 즉, 국가자본주의론이 맞는다면,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 ‘사노련회원’은 중국 지배계급은 자본가 계급이라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b: 아마도 레닌과 트로츠키에 대한 이해가 서로 다른 것으로 보인다. 나는 나름대로 여러 전거들을 들어가며, 트로츠키(주의) 정치의 핵심이 무엇인지 설명하려고 애써 왔다.

그럼에도 ‘사노련회원’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사노련회원’이 생각하는 트로츠키(주의)는 무엇인지를 우리가 지금 다루고 있는 쟁점과 관련해서 설명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내가 어떻게 그들을 “부르주아적으로 왜곡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3.

“a. 혹시 당신이 지금의 중국에 대해서는 자본주의라고 규정하는지 모르겠다. b. 만일 당신이 지금의 중국을 ‘퇴보한 노동자 국가’에서 자본주의로 변신한 것으로 본다면 당신의 논리는 자가당착이 된다. 왜?”

***

a: 나는 그 글에서 이미 중국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b: 상대방의 견해를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 왜곡하거나 오해한 내용을 공격하는 것을 보통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라고 한다. 허수아비는 쉽게 공격할 수 있지만, 그 실체에는 별로 아픔을 주지 못한다. 물론 신경은 쓰인다.

 

4.

“a. 당신은 당신의 글에서 “노동자 국가의 국유화 체제가 전면적인 사적 소유체제로 변화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반혁명’이라는 사회격변을 동반”한다고 밝히고 있다. 나는 이 말에는 동의한다. b. 그런데, 그렇다면 ‘(퇴보한) 노동자 국가’였던 현대 중국에서 언제 “‘자본주의 반혁명’이라는 사회격변”이 일어났다는 것인가? c. 모택동이 죽고 나서 등소평이 권좌에 올라 개혁 개방을 취한 것이 “자본주의 반혁명이라는 사회격변”인가? 그렇게 평화적인 반혁명도 있는가? 중국공산당이 계속 권력에 있고 모든 당 관료들이 그들의 정치적 경제적 지위에서 아무런 변동도 없이 진행된 모택동→등소평 이행이 “사회격변”인가? 그렇게 순탄한 사회격변도 있는가?”

***

a: 중요한 동의이다. 우리는 이 동의를 꼭 붙들고 다음 논의로 가야 한다.

b: 동의한다. 일어나지 않았다.

c: 언성을 높일 필요는 없다. 그것과 관련하여 나는 아무 주장도 한 적이 없고, 그리고 서로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를 진지하게 읽어주길 바란다.

 

자, 그러면 ‘사노련회원’과 나는 이제, a와 b를 통해, 이런 동의 지점에 와 있다. “1948년 이후 중국에 자본주의 반혁명은 없었다.”

그렇다면, 이제 1948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따지면 되는 듯하다. 일제가 제국주의 전쟁에서 패전하고 난 후 중국엔 내전이 있었다. 어느 진영과 어느 진영 사이에 벌어진 내전인가? 대만으로 쫓겨 간 장개석이 대표한 계급은 어떤 계급이었나? 일제와 장개석집단이 놓고 간 토지, 공장 등은 국가소유가 되었다. 그리고 무료 교육과 무료 의료 등이 실시되고, 혁명적인 남녀평등 조항들이 발표되었다. 그것은 “사회 격변”이었나? 생산수단의 소유권이 다른 계급에게 이동하지 않았나?

그 대답의 여하에 따라 그리고 위의 a, b의 동의에 따라, 우리는 다음과 같은 ‘둘 중 하나의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A. 만약에 내전이 계급투쟁이었고, 계급 사이에 소유권이 전면적으로 이동하는 “사회 격변”이 있었다면, ‘사노련회원’의 논리에 따르면, 중국은 지금도 자본주의 사회가 아니다.

B. 만약에 중국이 지금 자본주의 사회라면, 그 때에도 사회격변은 (적어도 사노련에게만은) ‘없었어야’ 한다.

 

5.

“<노동자 국가→ 자본주의>가 아니라 <쇄국적 국가자본주의 → 초국적 국가자본주의(글로벌화에 편입된 국가자본주의)>이다. 1948년 이후 오늘날까지 중국에서 근본 단절이나 사회격변은 없었다. 자본주의로서의 연속성이 오직 존재할 뿐이다.”

***

이 단락은 통째로, ‘사노련회원’이 아니라, 사노련 전체에게 묻고 싶은 내용이다. 여기서 회원이 말하는 “쇄국적 국가자본주의”이니, “초국적 국가자본주의(글로벌화에 편입된 국가자본주의)”이니 하는, 맑스 레닌 등 어느 누구도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적어도 맑스주의 전통에서는) 대단히 생소한 개념어들은 사노련의 공식 입장인가?

 

6.

“a. 소련 또한 마찬가지다. b. 1989년 고르바초프가 실각하고 소연방이 와해되었을 때 어떤 자본주의 반혁명도 일어나지 않았다. 소련 집권 노멘클라투라 (당 관료)는 그 지위에 아무런 변동 없이 1989년 이후 옐친 체제 하에서 그대로 지배계급을 이루고 있었다. 국영기업들이 사유화되었을 때 기존 국영기업 지배인들이 고스란히 사장으로 변신했다. 노동자 국가에서 자본주의로 바뀐 것이라면 행동강령 당신 말대로 반혁명적 격변이 일어났어야 한다.

그러나 기존 지배계급인 당 관료 노멘클라투라는 지극히 평화적으로 사적 자본가들로 변신했다. 노동자들은 그대로 착취받는 노동자들이었다. 물론 국영기업이 사유화하면서 구조조정과 정리해고가 벌어짐으로써 노동자들은 더 고통받았다. 그러나 그것이 자본주의 반혁명이라고 말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c. 우리는 대처와 레이건, 또는 김대중과 이명박 하에서 사유화와 구조조정 공세가 전면적으로 펼쳐지고 그에 따른 노동자의 고통이 증대되었다고 해서 이를 자본주의 반혁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영국 노동당 집권 하에서 국유화가 많이 이루어져 있었다고 해서 그 상황을 노동자 국가라고 부르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

a: 소련 문제도 위에서 얘기한 중국의 경우를 그대로 따라가면 될 것이다.

b: ‘사노련회원’에 따르면, 1990년 초 소련엔 이런 일이 있었다. “소연방이 와해되었다. 국영기업들이 사유화되었다. 소련 집권 당 관료는 사적 자본가들로 변신했다. 구조조정과 정리해고가 벌어져 노동자들은 더 고통 받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반혁명을 의미하는 사회 격변은 없었다.”

이제 내가 좀 물어야 한다. ‘사노련회원’이 생각하는 자본주의 반혁명이나 사회격변은 무엇인가? 혹시 발사된 대포 알 수나 사상자 수로 사회격변을 계량하는가?

c. 여전히 사회주의적 국유화와 자본주의적 국유화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1917년 이후 러시아의 국유화는 어떻게 부를 것인가?

 

7.

“이런 점들을 인정한다면 행동강령 당신의 ‘퇴보한 노동자 국가’론은 이론적으로도 틀렸고, 실천적으로도 가장 반동적인 결론을 이끈다.”

***

실천적으로 어떻게 가장 반동적인 결론을 이끄는지 밝혀주길 바란다.

 

행동강령 08·09·26 12:12

조금 부연합니다.

나는 *중국의 운명은 위태하다. 하지만 아직, 판가름나지 않았다*고 봅니다. 중국의 운명은 조만간 다시 한 번 발생할 천안문 사태와 유사한 사태와 그 추이에 의해 결정될 것입니다. 그 때 *소유형태를 방어하고 결정하는 ‘군대’가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 즉, 노동계급을 지지할 것인가 아니면 자본주의 반혁명을 지지할 것인가가 핵심적인 이벤트가 될 입니다. *중국공산당은 (미래의) 그 사건을 주도할 정치적 역량이 없습니다.* 소련의 경우에서처럼, 그들은 그 사건의 와중에 공중분해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과거) 당원이나 당관료들은 자신의 위치에 따라, *노동계급의 편과 자본주의 반혁명,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어찌되었든,

**기형적이라도 그것이 혁명의 성과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방어해야 합니다. 소련의 혁명, 동유럽의 편입 그리고 붕괴와 기형적 노동자 국가들의 존재 등으로 제국주의적 세계 분할은 지금도 진행 중입니다.

그 갈등의 정치 경제적 성격을 구체적으로 살펴야 하겠지만, 대체적으로 본다면, 중국을 제국주의 자본가 국가라고 인식하면, 미제국주의와 중국제국주의 사이의 갈등에서 지지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 반대편에 서는 것이 합당한 논리적 귀결입니다.

제 입장에 대한 더 자세한 이해는, <붕괴의 벼랑으로 향하는 중국><러시아:자본주의 생지옥> 등을 참고하기 바랍니다.

 

 

15. 대리운전노동자: 행동강령에게 08·09·28 02:02

행동강령님이 사노련 회원의 글을 반박하면서, 핵심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1948년 이후 중국사회는 자본주의 “반혁명”이 없었기 때문에, 어찌되었든 (기형적인) ‘노동자국가’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제가 볼 때 행동강령님은 현실에는 눈을 감고, 오로지 책(텍스트) 속에서 사고하는 듯하다. 물론 이론적, 역사적 논리를 무시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반대로 그 이론 혹은 주장이 현실과 모순되어서도 안된다. 그리고 제가 볼 땐 그가 주장하는 이론 속에서도 문제가 있어 보인다.

우선 행동강령님이 왜 현실을 무시하는 지를 보자.

중국이 자본간의 경쟁을 통해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사회라는 것은 아마도 국제자본가 집단들이 더 잘 알 것이다. 당장 최근의 언론 기사들을 보자.

“원자바오(溫家寶) 중국 총리는 25일 세계 금융시장 안정을 위해 전 세계 모든 국가들이 단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중국신문들은 원 총리가 이날 뉴욕에서 미국 재계 및 금융계 인사들과 만나 ‘중국은 미국과의 협력을 강화할 준비가 돼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고 보도했다….원 총리는 ‘세계 경제가 도전에 직면하고 있는 지금 시점에서 중국과 미국이 상호 신뢰를 증진하기 위해서는 대화와 협력을 강화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연합뉴스> 2008년 9월 26일자.

중국 최대 은행인 공상은행(ICBC)은, “남아프리카 기준 은행 주식 20%와 마카오 청싱은행 주식 79.9%를 매입하는 등 해외 영업망 구축사업도 순조롭게 추진하고 있다.”<온바오>

또, <아시아경제>는 2008년 9월 26일자에, 중국 최대은행 공상은행의 장젠칭 회장의 말을 보도하면서, “중국 은행들은…리먼브러더스의 채권 보유로 손실이 불가피해”졌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몇 가지 사실만 보더라도, 중국은 현재 자본주의 첨단을 걷고 있다. 행동강령님이 말하는 ‘노동자국가’인 중국은, 행동강령님이 그렇게도 비판해 마지 않는 미국 제국주의와 긴밀한 협력도 서슴지 않고 있다. 또 중국은 최근 ‘노동자 국가’의 이윤을 최대한 짜 내기 위해 세계 곳곳을 누비고 있다. 이윤이 창출되는 곳이면, 중국 금융자본은 지옥이라도 갈 태세이다.

중국은 현실로 보면, 엄연히 자본주의 사회이다. 중국노동자들은 갈수록 자본으로부터 강요받는 착취의 강도가 심해지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고, 중국 내 반자본노동운동이 가끔씩 언론에 보도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현실이 이러함에도, 어찌되었던 중국은 ‘노동자국가’라고 강변하는 행동강령님의 주장은 현실 자체로보면 억지이다. 당근 ‘실사구시’와도 배치되는 주장이다.

행동강령님이 이런 논리에 빠져 든 이유는, 앞서 지적한대로, 1949년 중국은 장개석을 몰아내고 ‘노동자국가’를 세웠고, 그 이후에 중국에서 자본주의 반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주장과 논리를 견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1949년 중국혁명을 ‘노동자국가’를 세운 사회주의 혁명으로 볼것인가, 그렇지 않은가가 역사적 배경 논점에서는 핵심이 된다.

나는 여기서, 행동강령님의 논리를 일부 따라서, 역으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즉, 중국사회는 1949년 이후 자본주의반혁명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현재 엄연히 중국사회는 자본주이 길을 가고 있기 때문에, 1949년 중국사회변혁은 ‘노동자국가’를 세운 사회변혁이 아니었다. 라고!!!

행동강령님의 주장과 논리에서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하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무상교육, 무상의료, 혁명적 남녀평등’ 등이다. (생산수단의 국유화문제는 후에 다시 논의하기로 하고)

위 내용들에 대해 앞으로 하나하나 짚고 따져야 할 문제지만, 우선 나도 행동강령님에게 역으로 문제제기부터 하나해야 겠다.

해방 직후에 북한에서 있었던 하나의 사건을 예로 들겠다. 그리고 이 사실은 1990년대초 소련과 수교되면서 소련비밀문서들(한국관련)이 공개되면서 밝혀진 사실(사진)이다(당시 한 일간지가 보도함. 아마 인터넷검색하면 나올 것). 당시 해방직후에 김일성과 소련군정 담당관(행동강령님의 논리대로라면 소련 ‘노동자국가’에서 파견된 사람) 메크레르 중좌는 평양 시내 한 요정 花房에서 기생들을 옆에 차고 술을 마셨는데,………. 과연 이러한 행위가 해방직후 그 엄중한 시기에, 그것도 그 사회 변혁의 핵심의 위치에 있던 사람들이 “혁명적 남녀평등”을 위한 노동자국가를 지향하는 행위인가?

일찍이 마르크스는 1868년 ‘쿠겔만 박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역사를 조금이나마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여성의 적극적인 참여 없이는 사회적 대변혁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회적 진보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어떠한가 따라서 정확히 측정될 수 있는 것입니다.”

무상교육 무상의료문제도 맹목적으로 생각할 문제는 아니다. 오늘날 무상의료 무상교육을 먼저 생각해 보면, 지금 북한 같은 경우 제도상으로는 무상의료이지만, 현실에서 제구실을 못하고 있다. 사소한 일상 약품도 제대로 공급을 못하는 데 무상의료제도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리고 병원이 사회구성원의 이용자신분에 따라 등급화되어 있다. 고위 관료집단들이 가는 병원이 있고, 하위 노동자들이 가는 병원 따로 있다. 교육기관도 무상교육이라 하지만, 사회 신분에 따라 자기 마음대로 가지를 못하며, 상급학교로 진학할수록 재력, 성분에 따라 갈 수 있는 교육기관이 이미 정해져 있다.

그리고 더 근본적으로, 교육사적으로 보면, 원래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넘어오면서 ‘국민교육’이 일반화되었다. 사회주의자는 ‘국민교육제도’를 자본주의이데올로그들처럼 교육일반권 확대로만 보지 않으며, 자본주의 착취제도와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사회주의변혁 과정에서 무상교육, 무상의료가 핵심이 아니라고 본다. 물론 중요한 한 요소이기는 하나, 그것은 사회주의변혁과정에서 한 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핵심고리는 아니다. 사회주의변혁문제는 다음의 내용이 담보되는 노동자권력 문제 등과 함께 총체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본다.

마르크스주의(사회주의)변혁인가 아닌가 판단하는 기준은, 다시말해 노동자국가를 판가름하는 기준은, 마르크스가 파리꼬뮨 분석에서 정식화한 것이다. 즉, 1)노동자대표의 자유로운 투표에 의한 선출과 즉시 소환권, 2)노동자대표의 일반 노동자의 평균적인 보수유지, 3)민주적 민병대의 대치이다.

 

 

행동강령: ‘대리운전노동자’에게

**사회주의 혁명가들이란 사람들은 대체로 현실 감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현실의 삶에 충실하기 보다는 원칙과 이상을 추구한다고 하죠. 그리하여 일상의 시기, 보통 사람들의 눈엔 얼빠진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고, 대다수의 생각과 참으로 다른 생뚱맞은 주장을 합니다. 그들이 현실감각이 있는 것처럼 보일 때는, 오직 혁명의 순간입니다. 그 순간엔 오직 그들만이, 제대로 된 현실 감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 역시 현실 감각이 어지간히 없는 셈이고, 아마도 대리운전노동자님 역시 주위로부터 그런 핀잔을 적잖이 들었으리라 추측해 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역시 올림픽도 보고, 중국을 다녀온 사람들의 인상도 주의 깊게 듣고, 이런저런 보도나 문서도 읽으며, 지금 중국이 아주(!) 빠른 속도로 자본주의화 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정도의 현실 감각은 있습니다. 그래서 *중국의 운명은 위태하다*라고 말했던 것이고요. 그 문장을 *중국의 운명은 ‘대단히(!)’ 위태하다*라고 바꾸어 말하면, 조금 더 현실 감각이 있어 보일까요?

**님은 ‘사노련회원’에게 제기한 *주장의 일관성을 지키기 위한 선택* 중 하나를 선택하였습니다.

즉, B. 1948년 중국엔, 계급 사이에 소유권이 전면적으로 이동하는 “사회 격변”이 ‘없었다’. 맞습니까?

**님이 소개한 신문보도는 그다지 대단히 비밀스러운 스탈린 관료집단의 만행은 아닌 듯싶고요. 그래서 저는 관료집단을 “혁명가들이 아니라, 집산제에 기생하는 집단”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스탈린 관료집단의 죄악상은 비밀문서를 뒤지지 않더라도 5만 7천 가지는 발굴해 낼 수 있을 겁니다.

**무상교육, 무상의료의 질적인 문제는 노정협의 글을 인용하여 일부 답을 했습니다. 우리는 목욕물을 버리면서 아이까지 버려서는 안 됩니다.

**노동자 민주주의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지만, 사회구성체의 핵심은 생산수단의 소유 관계에 있습니다. 노동자 민주주의가 훼손되었다는 이유로, 자본주의 아닌 것을 자본주의라 할 수는 없습니다. <공산당 선언>에선 이렇게 말하는 군요.

“이러한 의미에서 공산주의자의 이론은 *사유재산의 폐지*라는 단 하나의 문구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16. 이론의 빈곤 08·09·26 23:06

1. 사회주의 노동자 혁명이 격렬하고 단절적인 ‘사회적 격변’을 치르듯이, 이 사회주의 노동자 혁명을 자본주의 반혁명으로 뒤엎는 것도 격렬하고 단절적인 ‘사회적 격변’을 치를 수밖에 없다. 어떻게 자본가들, 자본가 장성들이 노동자권력을 파괴하는 반혁명이 일어날 때 평화적일 수 있겠는가? 이런 반혁명을 분쇄하지 못하고 노동자권력이 반혁명에 당한다면 피의 강물이 흐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노동자권력이 그냥 자본가들에게 권력을 헌납할 가능성도 있다는 가정을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중국에 대해 행동강령 동지가 바로 이런 가정을 한다. 중국 ‘노동자 국가’가 평화적으로 자본가 국가가 된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말이 안 된다는 거다. 스탈린이 1920년대 말까지 자본주의 반혁명을 수행하는 데는 볼셰비키 지도자들을 모두 살해하고, ‘진급자’라고 불리는 수십만 명의 새로운 당 – 국가 관료들을 지배계급으로 끌어올리고, 이 지배관료집단을 통해 농업 강제 집단화를 결행, 2천만 명의 농민을 죽음으로 내몰고 그 과정에서 도시로 탈주한 임금 공업노동자 대중을 착취하여 자본의 본원적 축적/ 대대적인 공업화를 이루어냄으로써 피의 강물이 흐르는 유혈 반혁명을 수행했다. 이런 정도의 단절적인 ‘사회적 격변’이 있어야 반혁명이라고 할 수 있는 거다.

그래서 1917년 10월의 사회주의 노동자 혁명이 스탈린의 유혈 자본주의 반혁명을 거쳐 1930년에 관료 국가자본주의로 안착한 것이다. 이 관료 국가자본주의가 1989년 서방의 초국적 자본주의에 의해 그 성채가 뚫리면서 초국적 자본주의에 편입되어 사적 자본주의로 수평 이동한 것이다. 자본가들은 사회주의가 자유민주주의/자유시장에 패배했다고 하지만, 패배한 것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다른 변종일 뿐이다.

행동강령 동지가 자본가들과 다른 것이 있다면 패배한 것이 사회주의 대신 ‘노동자 국가’라고 주장한다는 거다. 사회주의와 노동자국가를 현학적으로 구별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면 행동강령 동지는 결과적으로 자본가들과 동일한 주장을 하는 거다. 우리는 1989년 소련의 스탈린주의 체제가 해체된 것에 대해 낙담해야 할 이유가 없다. 다만 그 해체의 결과가 서방의 초국적 자본주의에 편입되어버렸다는 것에 아파할 뿐이다.

2. 행동강령 동지는, 중국은 지금 “급속히 자본주의화” 되고 있는 중일 뿐, 본질은(즉 생산양식)은 의연히 노동자 국가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급속히 자본주의화”를 수행하고 있는 주체는 누구인가? 중국공산당이 아닌가. 그리고 중국공산당이 곧 중국 국가 상부구조 아닌가. 그렇다면 중국 국가, 즉 중국 노동자국가가 “급속히 자본주의화’를 수행하고 있다는, 말도 안 되는 논리 아닌가. 또한 중국의 투쟁하는 노동자들은 자신의 노동자 국가에 대항하여 투쟁하고 파업하고 있는 것이라는 해괴한 결론으로 이끈다. 그래서 행동강령 동지의 모든 이론은 궤변이거나, 아니면 중국의 투쟁하는 노동자 대중들을 노동자 국가를 파괴하려는 반혁명 세력에 의해 인도되고 있는 대중들로 보고 있다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행동강령 동지는 둘 중 어느 입장인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

3. 행동강령 동지는 1948년에 중국에서 노동자혁명이 일어났다고 주장한다. 노동자가 참가하지 않은 노동자혁명도 있나? 대중파업, 공장평의회, 노동자 정방대, 노동자 민병대, 노동자 소비에트(평의회), 이러한 노동자 투쟁과 노동자 투쟁기구들에 기반한 노동자 무장봉기, 그 어느 것도 1948년에 일어나지 않았다. 단지 반제 반봉건 혁명을 자기 과업으로 하는 민족민주 인텔리겐챠 중심의 중국’공산당’과 농촌의 농민들로 압도적으로 구성된 홍군에 의해 장개석 국민당과 그 군대가 내전에서 패배당하고 대만으로 내쫓긴 일만이 일어났을 뿐이다. 혁명의 목표(사회주의 혁명 아닌, 반제반봉건 혁명)도, 혁명의 주체도 그 어느 것도 사회주의 노동자 혁명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런데도 행동강령 동지는 1948년에 사회주의 노동자혁명이 일어났고, 그래서 수립된 노동자 국가가 현재 2008년까지 의연히 계속되고 있다고 강변한다. 따라서 오늘날의 중국은 여전히 노동자국가이므로 미국-중국 대립에서 중국을 방어하고 지지해야 한다는 것이 변함없는 행동강령 동지의 전술이다. 이것은 반노동자적인, 따라서 반동적인 전술이다. 또한 미국과 중국 간의 제국주의 전쟁이 일어난다면 중국노동자들에게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화시키라고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조국 방위주의에 나서라고 호소하는 반동적인 사민주의 – 멘셰비키 전술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 노동자들은 중국 자본주의를 타도해야 하다. 따라서 중국 국가자본/중국 금융자본의 정당인 중국공산당을 타도해야 한다. 제국주의 경쟁/전쟁에서 중국노동자들은 자국의 금융자본주의를 방어하고 지지하도록 이끄는 기회주의 세력과 가차없는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

여기서 행동강령 동지는 어느 편에 설 것인가?

 

행동강령…<이론의 빈곤에게> 08·10·01 06:13

대답이 조금 늦었다.

사노련 게시판에서, ‘사노련회원’, ‘대리운전노동자’ 등과 논쟁을 하면서, 마치 릴레이 경주자들에 맞서 장거리 시합을 하는 느낌이 들었다. 제기한 문제에 대해 반박을 하면, 어느새 사라져 버리고 다음 주자가 나타난다. 그리하여 반박하면, 이제 새로운 주자가 내 주장에 반박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미 반박했던 비슷한 논리를 가지고 또 나타난다. 이번엔 ‘이론의 빈곤’ 동지가 나타났다. 현란한 수사와 감정의 과잉 등으로 볼 때, 더욱 중심에 접근한 것 같긴 하다.

그런데 중심에 접근한 기쁨을 느끼자마자, 실망을 느껴야 했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간단하게 몇 가지 문제만 지적한다.

첫째, 실망은 독해의 빈곤으로 기인한 것이다.

‘이론의 빈곤’ 동지는 이렇게 시작한다.

“중국에 대해 행동강령 동지가 바로 이런 가정을 한다. 중국 ‘노동자 국가’가 평화적으로 자본가 국가가 된 것처럼 말이다.”–‘이론의 빈곤’

나는 이렇게 말한 적이 없다. 다시 읽어보기 바란다.

그러므로 “그래서 말이 안 된다는 거다.”하며 그 다음에 줄줄이 늘어놓는 비판은 나랑 아무 관련이 없다. 혹시나, 어리버리한 독자들을 후려칠 생각이라면 몰라도.

둘째, 사회주의를 한다는 ‘이론의 빈곤’ 동지가 생산수단의 소유 관계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예의 “피의 강물”론으로 일관하는 모습을 보면서 또한 실망해야 했다. ‘이론의 빈곤’ 동지에겐 이미 얘기한 <공산당 선언> 한 구절을 다시 들려주는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공산주의자의 이론은 *사유재산의 폐지*라는 단 하나의 문구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실망의 세 번째 이유는 맑스주의를 말하면서, “초국적 자본주의”니 “사적 자본주의”니 하는 대단히 반(反)맑스주의적인 신조어를 거리낌 없이 남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나의 궁금증은 해명되었다. 그런 신조어들은 ‘사노련회원’ 혼자서 쓰는 말이 아니었다.

자본주의 자체가 초국적이고 사적이기 때문에 그런 수식들은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것이다. 마치 “포유류 호랑이”니 “식물 무궁화”니 하는 말들과 같은 것이다. ‘파충류 호랑이나 곤충류 호랑이 또는 걸어다니는 무궁화’가 있어야 그런 말들이 의미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넷째, 트로츠키주의를 주장하면서(아니면 그렇게 알려져 있으면서) 트로츠키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a. 사회주의와 노동자국가를 현학적으로 구별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면 b. 행동강령 동지는 결과적으로 자본가들과 동일한 주장을 하는 거다.”–‘이론의 빈곤’

a: 용어를 정확히 사용하는 것이 왜 현학적 허세가 아닌지는 국제주의, 레닌주의에 대한 내 대답에서 트로츠키가 설명하고 있다.

b: 어떻게 a에서 b라는 결론을 끌어낼 수 있는지, 내 머리로는 아무리 궁리해도 이해할 수가 없다.

다섯째, ‘이론의 빈곤’ 동지는 이렇게 묻는다.

“a. 중국 국가, 즉 중국 노동자국가가 “급속히 자본주의화’를 수행하고 있다는, 말도 안 되는 논리 아닌가. 또한 b. 중국의 투쟁하는 노동자들은 자신의 노동자 국가에 대항하여 투쟁하고 파업하고 있는 것이라는 해괴한 결론으로 이끈다.”

a: 부하린의 노선이 그러했었다. 후진국에서 생산관계의 사유제만을 폐지한 채, ‘일국사회주의론’으로 생산성을 향상시키려 할 경우, 언제든지 빠져들 수 있는 정책이다.

b: 노동자국가가 자신의 이해에 충실하지 않고 관료들에 장악되어 있다고 판단할 때 저항하는 것은 당연하다. 트로츠키는 파업만이 아니라, 정치혁명을 통하여 관료집단을 타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섯째, 내가 ‘사노련회원’에게 중국과 관련하여 물었던 (아주 간단히 명제화하여) 것에 대해서는 한 마디 대답도 없이, 또 이렇게 왜곡한다.

“1948년에 중국에서 *노동자혁명*이 일어났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말한 적이 없다. 다시 읽어주길 바란다.

“반제 반봉건 혁명을 자기 과업으로 하는 민족민주 인텔리겐챠 중심의 중국’공산당’과 농촌의 농민들로 압도적으로 구성된 홍군에 의해 장개석 국민당과 그 군대가 내전에서 패배당하고 대만으로 내쫓긴 일만이 일어났을 뿐”

대체로 역사적 사실과 일치한다. 이왕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는 김에, 그 이후 중국이 어떻게 변했는지까지도 설명하면 좋았을 뻔했다.

마지막으로, 이 논쟁 과정 자료를 수집하면서 우연히 만난 글을 소개한다. IS 이론가인 알랙스 캘리니코스와 <영구혁명론-책갈피>을 번역한 정성진 교수와의 대담에서 알랙스 캘리니코스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국제사회주의 경향의 뜨로쯔끼주의를 선택한 것은 국가자본주의론 때문입니다. 소련이 미국과 마찬가지로 억압적인 자본주의 착취체제의 일부라고 보는 국가자본주의론은 내가 그것을 처음 접했을 때부터 올바른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국가자본주의론이 나를 국제사회주의 뜨로쯔끼주의로 인도한 것*이지요.”

자타가 공인하는 IS 이론가와 트로츠키 ‘연속혁명론’의 번역자가, 트로츠키가 <배반당한 혁명(1936년)>과 <맑시즘을 옹호하며(1942년 사후 출간)>를 통해서 맞서 싸운 내용이 ‘국가자본주의론’이라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만약 내가 본 자료가 거짓이 아니라면, 그 둘은 남한의 노동계급에게 뻔뻔한 거짓말을 늘어놓고 있거나 방조하는 것이다. “트로츠키주의는 국가자본주의론이다.”라고.

‘사노련회원’과 ‘이론의 빈곤’ 동지 등 국가자본주의론이 옳다고 믿는 동지들에게 바라는 *최소한의 희망*은 “국가자본주의론은 트로츠키의 정치가 아니며, 트로츠키 스스로 자식, 비서, 자기 자신 등을 피의 강물에 빠트려 가며 싸웠던 정치적 경향은 스탈린주의만이 아니라 국가자본주의론도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해 달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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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세계정세 퀘벡 학생들이 길을 보여주다 볼셰비키-레닌주의자 2012.12.24 2871
27 '좌익조직'들에 대한 분석/평가 국가보안법과 ‘전진’의 배신 행위 볼셰비키-레닌주의자 2012.12.24 6237
26 '좌익조직'들에 대한 분석/평가 클리프주의자들의 계급협조주의 볼셰비키-레닌주의자 2012.12.24 2951
25 '좌익조직'들에 대한 분석/평가 국가자본주의 이론 — 나사가 빠진 엉터리 시계 볼셰비키-레닌주의자 2012.12.24 3245
24 남미와 베네수엘라 칠레 인민전선 볼셰비키-레닌주의자 2012.12.24 3830
23 세계정세 ‘맑시즘 2012’ 참관기 4: ‘오늘날 그리스의 경제·정치 위기와 저항’ 볼셰비키-레닌주의자 2012.12.24 2501
22 '좌익조직'들에 대한 분석/평가 촛불정국과 사노련의 조합주의적 기회주의 볼셰비키-레닌주의자 2012.12.24 2424
21 여성/소수자 해방운동 성, 검열과 여성의 권리 file 볼셰비키-레닌주의자 2012.12.24 4015
20 여성/소수자 해방운동 노동계급의 여성해방운동을 위하여! 볼셰비키-레닌주의자 2012.12.24 3487
19 세계정세 ‘맑시즘 2012’ 참관기 3: ‘중국의 부상과 미국의 귀환—동아시아는 어디로?’ 볼셰비키-레닌주의자 2012.12.24 3568
18 여성/소수자 해방운동 성매매방지법과 노동계급 볼셰비키-레닌주의자 2012.12.24 4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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