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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자본주의 이론 — 나사가 빠진 엉터리 시계




러시아 혁명 당시 저명했던 경제학자 프레오브라젠스키(Preobrazhensky)는 그의 저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가치법칙은 상품경제 체제인 자본주의를 자동적으로 조정하는 장치이다.”(Preobrazhensky, [The New Economics], p. 147) 그러나 그가 강조했듯이 이 법칙은 사물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인간 사이의 관계를 표현하고 있다. 가치법칙은 상품가격의 관계를 결정한다. 그러나 가치, 가격, 잉여가치 등의 범주 뒤에는 이러한 범주들로 인해 가려지고 신비화된 인간의 사회적 관계가 존재한다.

가치법칙은 노동가치론(labor theory of value)에 기초를 두고 있다. 간단히 말하면 상품의 교환가치는 상품생산에 투여되는 평균노동시간에 의해서 결정된다. 이 시간은 사회적으로 결정된다. 모든 상품에는 두 종류의 가치가 존재한다. 상품의 효용성을 나타내는 사용가치(use value)가 그 첫 번째이다. 상품의 효용성은 실재할 수도 있고 인간에 의해서 상상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없이는 상품이 시장에 모습을 드러낼 수가 없다. 두 번째가 교환가치(exchange value)이다. 이것은 상품생산에 투여된 평균노동시간을 나타낸다. 이 시간은 사회적으로 결정된다. 교환가치 즉 가치는 추상적 노동을 내포한다. 즉 상품생산에 투여된 노동의 형태는 갖가지일 수 있으나 이것은 시간이라는 단일한 추상적 단위로 표현된다.

사회적으로 결정된 평균노동시간을 조금 설명할 필요가 있다. 이 평균노동시간이 기술수준과 기술의 응용에 달려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맑스의 노동가치론을 저속하게 이해하고 있다.(M. Kidron, [Marx's Theory of Value], International Socialism No. 32) 물론 상품생산에 필요한 평균노동시간은 기술수준에 의해 상당한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평균노동시간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은 이것뿐이 아니다. 사회의 계급적 성격, 계급 역관계, 수요 등도 여기에 포함된다.

바란(Baran)과 스위지(Sweezy)는 미국 자동차산업의 경우를 예로 들고 있다. 1956년에서 1960년까지 새로운 모델을 개발하는 데 드는 비용은 자동차 구입가격의 무려 25%에 달했다. 그러나 자동차의 효용성은 조금도 개선되지 않았다. 더욱이 이 비용은 당시 미국 국민총생산량의 2.5%를 차지했다.(Baran and Sweezy, [Monopoly Capital], Ch. 5) 이것은 아주 흥미있는 수치이다. 영국 탈취제 산업의 영업비용도 구입가격의 약 25%였기 때문이다. 새로운 모델 개발이나 영업에 투여되는 노동량도 독점자본주의사회의 관점에서 보면 `사회적’ 필요노동이다. 바로 이 점이 중요하다. 오늘날 투여되고 있는 노동의 많은 부분은 합리적으로 운용되는 계획경제에서는 전혀 생산적이지 않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제품들을 생산-판매하여 이윤을 취하는 자본가들에게는 당연히 필요한 노동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바란과 스위지에게도 문제는 있다. 이들은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들고 있다. 맑스는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을 생산적 노동이라고 불렀다. 의사의 진료 등과 같은 비생산적 노동도 사회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의사의 노동은 잉여가치를 생산하지 않는다. 사회의 총잉여가치 중 일부에서 이런 비생산적 노동에 대한 대가가 나온다. 합리적 계획경제 체제에서는 자본주의사회가 필요로 하는 비생산적 노동의 많은 부분은 불필요하게 된다.

한편, 수요수준 즉 시장관계도 중요한 요인이 된다. 주어진 기술수준에서 자동차 한 대를 생산하는 데 갑 시간이 든다고 하자. 그러면 갑 시간이 자동차 한 대를 생산하는 데 사회적으로 결정된 평균노동시간이 된다. 그러나 생산된 자동차가 모두 소비되지 못할 경우 자동차 생산에 투여된 총노동시간은 낭비라는 결론이 나온다. 따라서 조정이 뒤따른다. 경쟁이 치열한 상태라면 자동차 가격은 자동차에 투여된 필요노동시간 즉 자동차의 원래 가치 이하로 판매된다. 결국 노동가치론은 기술 요인만 고려해서는 성립할 수 없다. 사회적 필요노동은 사회적으로 결정된다. 이 사실을 잊을 경우 경제 결정주의(economic determinism)라는 함정에 빠지게 된다.

그러면 이 가치법칙을 토니 클리프는 어떻게 보고 있을까? 지금 우리가 검토하는 그의 저서에 “노동자국가의 경제”라는 장이 있다. 여기서 그는 가치법칙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자유경쟁의 상태 즉 자본, 상품, 노동력이 자유로이 이동할 때만 가치법칙이 완전히 지배한다. 따라서 가장 초보적인 독점적 조직 형태도 이미 어느 정도 가치법칙을 부정하고 있다. 예를 들어 자본과 노동력 배분, 상품가격 등을 통제할 때 이 상태는 당연히 자본주의의 부분적 부정 상태가 된다.”  (T. Cliff, [Russia: A Marxist Analysis], p. 111)

그리고 자신의 주장을 확증하기 위해 그는 곧바로 레닌을 인용한다:

“예를 들어 자본가들이 국방 관련 생산을 하면서 정부 예산으로부터 돈을 받을 때 이 경우는 더 이상 `순수한’ 자본주의적 행위가 아니라 국민경제의 특별한 형태가 된다. 순수한 자본주의는 상품생산을 의미한다. 상품생산은 미지의 시장을 위해 물건을 만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선 지적할 것은 토니 클리프에게 자유경쟁이란 완벽한 경쟁 즉 정적인 모델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는 가치법칙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 가치법칙은 이러한 조건이 없이도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가격과 가치를 혼동하고 있다. 대개의 경우 상품 가격은 상품 가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럴 경우에도 가치법칙은 여전히 작동한다. 가격은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를 표현하는 척도(measure)이기 때문이다. 맑스는 이 점을 그의 저작에서 수없이 강조하고 있다. 하나의 예만 들기로 하자:

“수요와 공급이 일치하더라도 이 현상은 아무 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상품의 시장가치에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특정 화폐량으로 표현되는 상품가치가 왜 존재하는지 그 이유를 더욱 모르게 은폐한다.”  (K. Marx, [Capital], Vol. 3, p. 145)

가치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수요 공급의 균형을 넘어서서 그 근원을 파악해야한다. 가치법칙은 완벽한 경쟁이 지배하지 않더라도 작동한다. 이것이 맑스의 주장이다.

그리고 클리프는 또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는 가치법칙의 “부분적 부정(partial negation)”을 말한다. 그러나 부분적 부정이 말이 되는가? 어떤 것을 부정한다는 것은 그것의 완전한 대립물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는 가치법칙의 “부분적 부정”이 “자본주의의 부분적 부정”이라고 말한다. 사실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은 자본주의의 수정(modifications)이다. 그런데 자본주의가 수정되더라도 자본주의는 총체적 의미에서 여전히 자본주의이다. 그렇지 않다면 “부분적으로 부정된” 부분은 무엇이 된다는 것인가? 아직 알려지지 않은 확실치 않은 사회질서란 말인가? 독점의 도입이 자본주의를 수정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수정된 이후에도 자본주의는 여전히 자본주의이다. 그리고 클리프는 레닌을 잘못 인용했다.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레닌은 자본주의의 부분적이든 아니면 무엇이든 자본주의의 부정을 말하고 있지 않다. 그렇다고 가치법칙이 “부정되고 있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그는 자본주의가 “더 이상 순수하지 않다” 즉 더럽혀지거나 수정되었다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의 이런 오류들은 자체로만 보면 별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오류들이 애매하고 혼동된 결론을 이끈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이것에 대해서는 소련 경제의 가치법칙 작동과 관련하여 설명하겠다. 여기서 한가지만 더 짚고 넘어가자. 어떤 글을 인용할 때는 인용문이 자신의 주장을 지지하는 근거가 되기 때문에 인용한다. 즉 인용문이 실제로 어떤 주장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 클리프가 인용한 레닌의 글은 그의 가정과 똑같은 내용을 주장하고 있을 뿐 이 가정의 근거를 제공하고 있지는 않다. 이 경우 클리프는 레닌의 권위에 기대기만 할 뿐 자기 주장의 근거를 결코 설득력 있게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다시 독점의 문제로 돌아가보자. 이 문제는 대단히 중요하다. 다른 문제들을 해결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독점체가 시장을 장악할 경우 독점가격은 상당한 정도 독점체의 주관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러나 가격이 무한정 주관적으로 책정될 수는 없다. 엄연히 객관적인 한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한 상품을 어느 독점체가 완전히 독점하고 있다고 치자. 이 경우는 극히 드물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독점체가 완전한 독점을 유지하며 제품 가격을 무한정 독자적으로 정할 수는 없다. 총수요에서 자신의 시장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다른 생산업체와 경쟁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결국 독점체도 경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가치법칙은 클리프가 주장하듯이 경쟁을 통해서가 아니라 교환을 통해 작동한다. 따라서 독점체도 교환과정에 종속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완전경쟁의 상황에 비해서 독점체가 자본의 규모에 걸맞는 시장점유율을 확보할 가능성은 훨씬 높다. 그러나 이것도 경제의 비독점부문을 희생시킨 결과 위에서나 가능하다. 그리고 생산규모, 혁신, 새로운 상품의 개발 등으로 발생하는 생산성의 차이로 인해 독점체가 잉여이윤을 취하는 경우도 상당히 자주 발생한다.

클리프는 독점이론을 통해 국가자본주의 이론을 수립한다. 그리고 늘상 그렇듯이 인용문들을 제시하면서 자기 주장을 강화시킨다. 이번에 그는 힐퍼딩(Hilferding)을 인용한다:

“독점체들이 경쟁을 철폐할 경우 이들은 객관적 가격법칙이 실현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을 제거한다. 가격은 이제 객관적으로 결정되지 않고 가격을 결정하는 자들의 의지와 의식에 의해 계산된다. 결과가 아니라 가정이 되며 객관적이 아니라 주관적이 된다. 자본집중 즉 독점적 합병에 관한 맑스주의 이론은 현실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현실은 곧바로 맑스주의 가치이론을 무력화시킨다.” (Cliff, p. 152)

“이제 가격은 통제기능을 상실하고 분배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경제 그리고 경제활동의 지수들은 국가에 의해 지배되어 그것의 종속물이 되어 버린다.”  (Cliff, p. 154)

경제현상에 대한 힐퍼딩의 통찰력이 어떻든 그는 확실히 여기서 오류를 범하고 있다. 독점은 주어진 영역에서 경쟁을 억제한다. 그러나 다른 수준에서는 더욱 치열한 경쟁을 불러일으킨다. 더욱이 경쟁을 억제하는 독점에 대해서 더 이상 자신있게 얘기할 수 없게 되었다. 독점이 가격경쟁을 주기적으로 억제한다고 얘기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시장을 완전히 장악하는 독점체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여러 거대기업이 공동으로 시장을 장악한다. 맑스의 용어로 과두제 지배가 된다. 경쟁을 종식시키기는커녕 이들 거대기업들은 시장점유율을 더욱 높이기 위해 자기들끼리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 그리고 앞에서 얘기한대로 어느 독점체도 총수요 전체를 장악할 수는 없다. 전세계적으로 가장 규모가 큰 기업들도 세계시장 또는 일국시장 내에서 보았을 때 시장의 일부만을 점유할 뿐이다. 더욱이 힐퍼딩은 클리프와 똑같이 가치와 가격을 혼동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가격은 가치의 척도일 뿐 사회적 필요노동이 가치를 결정한다. 나무토막의 길이를 재기 위해 사용되는 자가 나무의 길이를 결정하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힐퍼딩은 독점가격이 가치 결정 기능을 상실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거꾸로 전개된 논리이다. 독점체는 일정한 한계 내에서만 주관적으로 가격을 결정할 수 있을 뿐이다. 이 한계를 넘어설 경우 독점체는 시장에서 객관적으로 결정되는 요인들에 종속된다. 일정 수준에서는 독점가격이 개개 상품의 가치에서 벗어나 주관적으로 결정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런 현상도 가치에 대한 왜곡에 지나지 않는다. 경제의 독점부문이 가격을 상향조정하면 할수록 비독점 경쟁부문은 가격을 하향조정할 수밖에 없다. 한 경제에서 창출되는 잉여가치는 제한되어 있다.

힐퍼딩과 클리프는 둘 다 가치법칙이 경쟁을 통해 표현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오류이다. 자유무역 시기가 자본주의 역사에서 상대적으로 짧은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들은 잊고 있다.

클리프의 방법론은 노동자국가 즉 이행기 체제를 분석할 때 그 진면목이 드러난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의 방법론은 형식논리에 의존할 뿐 변증법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그는 대립물의 통일(unity of opposites)이나 모순의 총체성(contradictory totalities)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의 글을 인용해보자:

“국가자본주의와 노동자국가는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시기의 두 단계이다. 국가자본주의는 사회주의의 반대 극단이다. 이 둘은 완전히 대립하고 있으며 서로 변증법적으로 통일되어 있다.”  (Cliff, p. 113)

이 글은 단계라는 용어를 잘못 사용하고 있으며 단선적인 사고의 일단을 보여주고 있다. 단계란 본성상 중간적 존재를 의미하며 모순적이며 대립적인 현상이다. 더욱이 이 글은 형식과 내용을 혼동하고 있다. 노동자국가는 과거 모순들의 종합이다. 국가소유이면서도 독점자본주의의 요구에 종속된 국가자본주의적 소유형태를 철폐하고 부르조아지의 생산수단을 몰수했기 때문이다. 형식적 법률적 형태가 클리프를 헷갈리게 만들었다. 국가자본주의와 노동자국가가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두 단계라고 말했을 때 그는 자신이 사적유물론자가 아니라 경제결정론자임을 명확히 입증했다. 자본주의 체제가 혁명을 겪지 않고도 사회주의로 이행한다는 말이 아닌가. 클리프의 관점에서 보면 자본주의는 봉건제와 사회주의 사이의 한 단계에 `불과한 것’이 된다! 이런 식으로 단계를 말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조잡한 숙명주의, 운명주의에 불과하다.

더욱이 국가자본주의가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단계라면 독일의 철도산업을 국유화한 비스마르크와 미국 철강산업을 국유화한 윌슨의 조치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그렇다면 이들이 사회주의 혁명가란 말인가? 국가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완전히 대립하고 있으며 변증법적으로 통일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은 말장난에 지나지 않으며 변증법을 우습게 만들고 있다. 이 두 체제가 완전히 대립된 체제인 것은 사실이다. 그가 의미하는 바 국가자본주의는 자본주의적 관계들을 극단까지 밀어붙인 것이다. 자본주의하에서 이루어지는 국유화는 부르조아 지배를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강화시킨다. 정치적으로 말하자면 사민주의 정부 하에서 이루어진 국유화는 노동계급에게 환상을 심어주는 역할을 했을 뿐이다. 경제적으로 말하자면 국유화로 인해 채산성이 없는 기업들이 국가에 의해 관리되면서 독점자본의 이해에 봉사하였을 뿐이다. 노동자국가의 국유화 조치는 이러한 형태들을 더욱 진전시키고 있는 것으로만 보인다. 그러나 이 조치의 진짜 내용은 완전히 다르다. 이러한 조치를 취하는 국가의 성격은 변화된 계급 역관계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부르조아지는 생산수단을 몰수당하고 권력에서 추방된다. 노동자국가는 발전단계 즉 과거와 직접 연결된 고리이기는커녕 과거와의 날카로운 단절이며 변증법적 비약이다. 변증법적 통일이 결코 아닌 것이다.

클리프와 그의 추종자들은 노동자국가 쿠바와 자본주의 국가 이집트의 국유화를 같은 성격으로 보고 있다. 두 경우 모두 제국주의와의 투쟁에서 나타난 조치들이다. 그러나 이 조치의 결과는 두 나라에서 전혀 다른 계급 역관계를 표현한다. 나세르의 수에즈운하 국유화는 이집트 민족부르조아 계급을 강화시키기 위한 조치이다. 반면 쿠바의 국유화는 제국주의 자본을 몰수하는 것을 통해 집단적 계획경제 체제인 쿠바의 노동계급 경제를 강화시키기 위한 조치이다.

클리프는 계속 이렇게 말하고 있다:

“노동자국가에서 임노동은 더 이상 상품이 아니다. 노동자국가에서의 노동력 `판매’는 자본주의국가에서의 노동력 판매와 다르다. 노동자국가에서는 노동자들이 개인으로 노동력을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 내에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자기 노동력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Cliff, p. 113)

노동자국가의 이행기적 성격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의 무능력이 바로 여기에서 드러난다. 가치와 물질적 재부는 적대관계에 놓여있다. 왜냐하면 모든 조건이 같을 경우 생산성의 증가는 생산된 상품의 가치를 하락시키기 때문이다. 즉 상품의 가치가 하락할수록 많은 상품이 생산되어 물질적 재부가 증가한다. 생산성의 증가에 따라 상품 하나를 생산하는 데 필요한 평균노동시간이 감소하므로 이 결과는 당연하다. 이행기 사회에서 가치와 물질적 재부 사이에 적대관계가 존재하는 이유는 또 있다. 상품의 상대적인 부족때문에 생산성이 증가될 필요가 있다. 생산성이 증가되기 위해서는 생산수단에 더 많은 투자가 필요하다. 한편 개개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물질적 재부를 증가시키려고 노력한다. 개개 노동자의 물질적 재부가 증가하려면 생산수단에 대한 투자를 될 수 있으면 적게 해야한다. 이 두 요구 사이에는 모순이 존재한다. 이 모순이 존재하는 한 사회 전체의 재부에 대해 개개 노동자가 공헌하는 노동량과 이 재부에서 자신의 몫으로 가져가는 부분을 측정하는(measuring) 수단이 존재해야 한다. 물질적 재부가 풍부하여 사회 성원 전체의 욕구를 전부 충족시킬 수 있다고 하자. 이럴 경우 공동의 재부에서 개개 노동자가 가져가야 할 재부를 분배하고 이 분배량 만큼 노동을 강요할 필요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물질적 재부가 풍부한 사회에서 노동은 더 이상 노동이 되지 않고 개개인의 가능성을 실현하는 자유행위가 된다.

노동자국가가 탄생한 지 얼마 안되는 시점에서 노동자 각자가 생산수단과 맺고 있는 관계는 사회주의보다는 자본주의에 더 가깝다. 이것은 사회의 이행기적 성격 때문이다. 이 사회에서는 재부를 생산하는 노동자의 역할과 지배계급의 일원인 노동자의 역할 사이에 모순이 발생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런 모순이 존재하지 않는다. 힘들게 재부를 생산하는 역할과 자본의 지배를 받는 계급의 일원으로서 갖는 역할은 전혀 충돌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행기 사회에서 그는 자신의 노동으로부터 여전히 소외되고 종속되지만 이제 새로운 지배계급의 일원으로서 이런 상태를 경험한다. 이것은 모순이다.

이행기 사회에서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력을 사회에 판매하지 않는다는 클리프의 주장은 말도 안된다. 그리고 자신의 노동력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용한다는 말은 궤변에 지나지 않는다. 이 사회에서 상품교환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존재하며 소비재를 구하기 위해 노동자가 노동력을 판매하는 현상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여전히 가치법칙 즉 사회적으로 필요한 평균노동에 의해 지배받는다. 비유를 들어보자. 노동조합 상근자는 집단체인 노동조합에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지 않는가? 집단에 속해있는 노동자는 이 집단에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지 않는가? 양으로 측정될 수 있는 상품을 구입하기 위해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는 것을 통해서만 노동자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자기 노동력을 이용할 수 있다. 상품이 모두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을 정도로 풍부해질 때까지 노동력으로 측정되는 가치는 여전히 상품의 분배를 결정할 것이다.

클리프의 혼란은 그가 생산수단의 집단적 소유와 노동력의 개인적 소유를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노동력은 독특한 상품이다. 즉 개인적으로만 소유될 수 있으며 이것을 소유하고 있는 노동자와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클리프는 한술 더 뜬다. 노동자국가에서 노동력이 더 이상 상품이 될 수 없다고 말하더니 곧바로 이어서 노동자국가에서 노동력의 판매는 자본주의에서 노동력의 판매와 다르다고 한다. 노동력이 더 이상 상품이 아니라면 그것은 더 이상 노동력이 아닌 것이다. 노동력이 판매되지 않을 경우 생산에 투여된 노동은 소외되고 유리된 노동이 아니라 노동자가 스스로 인간임을 확인하는 자발적 활동이 된다. 더 이상 강제적인 고역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이행기 사회에서는 이 강제가 여전히 존재하며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이 아니라 노동력을 여전히 판매해야 한다. 클리프는 노동과 노동력의 범주도 혼동하고 있다.

자본주의를 타도하고 성립하는 이행기 사회에서 상품이 가장 오래 순환되는 부문은 바로 소비재 부문이다. 노동력이 개인적으로 소유되기 때문이며 계획경제를 담당하는 당국이 소비를 완벽하게 계획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부문에서 시장관계를 철폐하기 위해서는 언젠가 폐기될 엄격한 배급제를 실시하거나 모두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풍부한 재부를 생산하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이행기 사회는 전자를 통해 후자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클리프는 노동자국가의 경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이 체제의 이행기적 성격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노동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사고는 물질적 재부가 사회성원 모두를 충족시킬 수 있는 사회주의에서만 통용될 수 있다. 이런 사회에서 노동력을 말하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 노동력은 다른 모든 상품과 마찬가지로 사용가치에 의해서 대체되기 때문이다.

클리프는 소련에서 가치법칙이 작동되는 현상을 발견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을 찾을 수 없다. 이것은 큰 문제이다. “이 체제가 모종의 자본주의 체제라면 가치법칙이 작동해야 한다. 그러면 이 법칙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자본재 부문인 제1부문에는 가치법칙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는 생각한다. 맞다. 이 부문에서 국가는 가격을 회계적 장치로만 사용하고 있으며 자본재 시장이 소련 내부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부문의 제품은 필요한 사용처에 정확하게 배분된다. 따라서 이 제품에 대해 `매겨지는’ 가격은 회계적 장치에 불과하다. 그러나 스탈린이 나중에 알게 되듯이 이 가격은 자의적으로 매겨질 수가 없다. 이 제품의 가치를 객관적으로 결정하는 요인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요인은 노동력의 구매에서 발생한다. 이 결과 생산가격이 결정되는 것이다. 그런데 클리프는 이 논리를 거부하고 임금재(소비재) 부문 즉 제2부문에서도 가치법칙이 작동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소련 경제 내부에서만 본다면 생산의 원동력이자 규제력인 가치법칙의 근원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내릴 수밖에 없다. 마치 러시아는 중앙에서 직접 관리하는 거대한 공장과 같이 기업, 노동자, 고용주 국가 사이의 관계가 확립되어 있다. 모든 노동자들은 소비재를 일한 대가로 받고 이것을 소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Cliff, p. 159)

여기서도 클리프는 혼동을 보이고 있다. 자본주의 공장에도 기술적 분업과 사회적 분업이 존재한다. 이 두 분업 유형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존재한다. 전자는 기술에 의존하고 있으며 후자는 계급적 관계에 의존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계급은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사회적 분업의 표현 형태이다. 바로 이 분업이야말로 자본주의 사회를 특징짓는 근본 요인이다. 클리프가 암시하고 있듯이 기술적 분업이 근본 핵심이 아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가 있다. 가장 근본적인 작동법칙들 중의 하나가 존재하고 있지 않은 사회 체제를 클리프는 주장하고 있다. 이 주장의 과감성에 대해서는 경탄할 따름이다. 그러나 이 사회 체제가 어떤 체제이든 이 법칙 즉 가치법칙이 작동하지 않을 경우 소련은 자본주의 사회가 될 수 없다.

그러면 이 문제 중의 문제를 클리프는 어떻게 해결하고 있을까? 외국무역은 소련 경제의 아주 적은 부분에 지나지 않으므로 이것이 소련 경제에 가치법칙을 주입한다고 주장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여기서 그는 위대(胃大)한 발명을 해냈다. 즉 군비경쟁을 통해 가치법칙이 소련에 주입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소련과 서방자본주의 사이에서) 상업적 투쟁보다는 군사적 투쟁이 더 중요한 위치를 점해왔다. 국가 사이의 경쟁이 주로 군사적 형태를 띰으로 가치법칙은 자신의 대립물 즉 사용가치를 향한 투쟁으로 표현되고 있다”

“국가는 군비를 받는 대가로 다른 상품을 제공하지 않는다. 경제 전체에서 거둔 세금과 대부금으로 군비에 드는 비용을 지불한다. 다른 말로 하면, 군비의 부담은 경제 전체에 골고루 전가된다. 사용가치가 이제 자본주의 생산의 목적이 되었다.”

“현재 역사 단계를 표현하는 무정부적 세계시장을 가치법칙이 지배하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러시아 경제 역시 가치법칙이 지배한다.”  (Cliff, p. 160 161)

클리프의 이 글에는 오류와 혼란이 온데 널려 있다. 두 번째 인용문단에서 클리프는 자본주의 군비경쟁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 주장의 내용을 염두에 두고서 그의 사고를 검토해보자.

우선 가치법칙은 교환가치를 통해 표현된다. 이미 말했듯이 상품은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가지고 있다. 사용가치는 교환가치가 입고 있는 옷과 같다. 즉 상품이 시장에 등장할 때 구매자에게 필요한 사용가치가 있어야 한다. 상품에 체현된 사회적으로 결정된 평균필요노동량은 교환가치가 된다.

교환가치는 추상적 혹은 일반화된 노동이다. 상품의 상대적 교환가치를 결정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상품을 교환하는 것이다. 이러한 교환행위 과정에서 구매자들 사이에 그리고 판매자들 사이에 아니면 양자 사이에 경쟁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필요불가결한 요건은 아니다. 경쟁이 없이도 상품이 판매될 수 있는 조건이 존재할 수 있다. 일시적 독점, 품귀, 구매력 저하 등의 상황이 이런 경우에 해당된다. 그런데 교환을 경쟁으로 대체하면서 클리프는 자기 스스로 만들어낸 딜레마를 이제 해결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을 심각하게 받아들인다면 가치법칙이 경쟁을 통해 올림픽에도 작동하고 있다고 말해야 할 판이다! 클리프는 가치법칙을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분석도구로부터 신비주의에 가까운 가장 저열한 주관주의적 도구로 끌어내리고 있다. 그의 사고를 다시 현실의 수준으로 끌어내리기 위해서는 한마디만 하면 족하다. 즉 침략의 위협을 받고 있는 어떤 노동자국가도 무기를 생산할 필요가 있다는 상식 말이다. 이행기 체제의 경제영역 바깥에 존재하는 가치법칙이 이 체제 내부로 이전되어 작동하고 있다고 클리프와 키드런은 주장한다. 따라서 이들은 지구상에 단 하나의 자본주의 국가만 존재해도 노동자국가가 안정된 기반 위에 성립할 가능성이 없다고 이들은 말한다. 이들의 논리에 따르면 노동자국가는 국방을 위해 무기를 생산하는 한 가치법칙의 지배를 받으며 국가자본주의 체제가 된다는 것이다.

둘째, 자본주의 체제가 이윤 추구 동기를 사용가치 생산 동기로 대체했다는 주장 역시 상상의 나래에 지나지 않는다. 교환과정에서 상품 구매자는 사용가치 즉 상품의 효용성을 추구한다. 그러나 모든 자본주의적 교환과정에서 상품 판매자는 잉여가치 즉 이윤을 실현하고자 하는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 국가가 무기를 구매할 때는 구매자임으로 무기의 효용성을 추구한다. 그러나 무기 판매자가 이러한 효용성만을 제공하는 데 관심이 있다는 말인가? 이런 거래에서 이윤은 생기지 않는 것일까? 더욱이 무기 제조업자는 노동력을 구매했으므로 이로부터 잉여가치를 실현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물론 경제 전체가 무기구입에 드는 비용을 지불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누가 이익을 보며 누가 세금을 지불하는 다수를 이루고 있는가? 이제 생산이 시장 즉 수요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맑스주의자(?, !) 클리프는 주장한다. 그는 수요가 생산과 투자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맑스의 견해를 거꾸로 뒤집고 있다.

그리고 클리프가 주장하는 대로 가치법칙이 정말 소련경제를 지배하고 있었는가? 이에 대한 해답은 간단하다: 전혀 그렇지 않다. 가치법칙이 소련을 지배했다면 소련경제는 그렇게 대단한 성장을 기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소련경제가 가치법칙에 의해 지배되었을 경우 시장이 자원의 배분과 우선 품목의 주문 순위를 결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생산수단 부문인 제1부문에는 시장이 존재하지 않았다. 국가가 자본재를 직접 생산하고 배분하고 이용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경제행위는 생산단계 이전에 이미 계획되어 있었다. 생산 이후 시장에 의해 조절되지 않았다. 만약 가치법칙이 소련 경제를 지배했다면 자본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실시 초기에 가장 이윤이 높았던 부문인 소비재 산업, 농업으로 흘러들었을 것이며 이 결과 자본재는 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물론 가치법칙은 무시되거나 잊혀질 수 없다. 최적 경제성장률을 달성하고자 하는 이행기 사회에서 가치법칙은 의식적으로 통제되어야 한다. 노동계급이 경제의 한 부문에서 다른 부문으로 가치가 이전되는 것을 명확히 인식할 수 있도록 아주 면밀한 회계를 운용할 경우 이것이 가능하다. 물질적 풍요의 단계에 도달하지 못한 채 노동생산성을 올리려고 애쓰는 사회에 대해 가치법칙은 당연히 압력을 행사한다. 노동자국가가 이 가치법칙을 의식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사용하는 가장 효과적인 무기는 계획과 외국무역독점이다.

예를 들어, 새로운 산업을 시작하기 위해 자본주의 국가로부터 노동자국가가 기계를 도입해야 한다고 생각해보자. 기계를 도입하기 위해서는 외국돈이 필요하며 외국돈을 벌기 위해서는 상품을 수출해야 한다. 물론 금으로 수입대금을 결재할 수도 있다. 그런데 수출상품을 생산하는 비용이 국제시장가격보다 높을 경우는 국가가 생산보조금을 지급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은 이 상품의 본래 가치보다 더 낮은 가치 즉 세계시장가격으로 이 상품을 수출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상품에 대한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의 생산성이 월등히 높은 상황에서 이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이 상품이 국가로부터 보조금을 받아 수출되려면 노동자국가 경제 전체가 세금을 내야한다. 결국 생산보조금만큼 더 많은 부담을 경제 전체가 안게 된다. 이렇게 해야 가치가 이 상품에 이전되어 국제시장의 가격으로 수출될 수 있다. 만약 국가가 외국무역을 독점하지 않을 경우 값싼 수입품이 국내로 들어와 높은 가치를 보유하고 있는 국산품을 몰아낼 것이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이행기 경제가 가치법칙을 통제하는 방법은 외국무역의 독점과 계획밖에 없다. 국내적 차원에서 이러한 통제는 계획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이윤율은 낮되 사회적 우선순위는 높은 생산수단에 투자를 집중시키는 것을 통해 가능하다. 따라서 가치법칙이 압력을 행사하더라도 경제 전체를 지배할 수는 없게 된다. 이행기 사회에서 의식적 계획과 가치법칙은 서로 우위를 장악하기 위해서 싸우게 된다. 이 사회가 사회주의 체제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시장이 종속되어야 한다. 그러나 물질적 풍요가 달성되기 전까지 시장은 철폐될 수 없다.

이러한 과정에 대해 그리고 이 과정이 소련 경제에 전개되는 방식에 대해 클리프는 전혀 무지하다. 소련이 10월 혁명 이전에 러시아를 지배하고 있던 후진성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소련 경제가 가치법칙에 의해 지배당했기 때문이 아니라 가치법칙 자체를 통제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 과정에서 엄청난 인적 손실이 발생했다해도 이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초창기에 노동계급이 잔인하게 착취를 당한 상황을 클리프는 소련 노동계급이 경제성장 과정에서 당했던 희생적 상황과 동일시한다. 그러나 그가 영국의 산업혁명 과정을 제대로 이해하고 이것을 소련의 공업화 과정과 비교했던들 그는 양자의 발전과정이 서로 달랐다는 사실을 실감했을 것이다. 이 차이점은 시간의 격차에 의해서 설명될 수 없다. 각기 다른 계급이 역사적 상황 속에서 강요한 사회 유형에서 이 차이가 발생했다.

클리프는 “가치법칙과 경제위기”를 논의하는 데 무려 29쪽을 할애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관련 서적들을 친절하게 소개하고 있다. 부하린, 투간-바로노프스키의 저작을 단편적으로 소개하면서 경기침체와 침체 극복을 위한 경제확대 방안을 개괄적으로 논술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그는 경제위기를 1929년의 대공황과 명확하게 동일시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그가 소련경제와 관련하여 자신의 경제위기론을 전개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무려 29쪽이 다 끝난 지점에서 그는 이렇게 이 사안을 비켜간다:

“지금 세계 정세로 볼 때, 전시경제 `해법’이 소련 관료집단에게는 경제 유지의 유일한 편의책인 것처럼 보인다. 사회주의 또는 야만주의가 정통 자본주의이든 국가자본주의이든 이들 자본주의 체제에 내재해 있는 모순들을 해결할 때까지 말이다.”

소련을 `자본주의’ 체제라고 규정한 그가 어떻게 이런 근본 문제를 회피할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일관된 이론을 제시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그가 이 문제를 슬쩍 피하면서도 어떻게 자기 이론의 신빙성을 주장할 수 있는지 역시 이해하기 어렵다. 소련에서 `경제위기’가 어떤 형태를 띨 것인지에 대해 클리프는 단 한 번도 주장을 펴려고 하지 않는다. 실업, 주기적 경제파동, 이윤율의 저하, 잉여자본, 자본수출 등 맑스주의 경제학의 기준으로 볼 때 소련은 자본주의 체제가 될 수 없다. 국가자본주의 이론을 이리도 오래 주장한 클리프가 이제는 이 문제들에 대해서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우리는 기대해 왔다. 그러나 사태는 전혀 다르다. 이 문제들과 씨름하는 대신 역사가 이 문제들을 해결할 것이라는 말로 클리프는 이 문제들을 간단히 무시한다. 대단한 이론이다!

언뜻 보면 클리프의 이론은 대단히 인상적이다. 그러나 꼼꼼히 검토하면 그의 이론은 인용문들을 무수히 연결시켜놓은 절충적 사고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변증법과 이행기 사회에 대한 이해 부족은 그가 이렇게 이론적으로 실패한 핵심 이유에 속한다. 그는 사물을 흑백으로 즉 형식논리를 통해서만 인식한다. 변증법이 없는 맑스주의 이론은 스프링이 빠진 시계와 같다고 트로츠키가 말한 적이 있다. 이 말은 클리프에게 딱 들어맞는다. 클리프의 `시계’는 몇 십 년이 지난 지금도 똑같은 시간을 가리키고 있다. 그의 이론이 발명된 시기는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이 후퇴하고 고립되었던 때였다. 당시 공산주의운동은 스탈린주의라는 빙하에 갇혀 있었다. 그리고 제국주의 세력은 더 없이 강력해 보였다. 클리프류의 절망적인 이론이 이때 발명된 것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의 이론은 절망의 이론이다. 이 점은 너무도 분명하다. 그에 의하면 국제혁명의 승리 하나 하나는 국가자본주의의 승리에 불과하다! `관료집단’의 승리에 너무 눈이 박힌 나머지 제국주의 세력의 패배는 그에게 반 정도 잊혀진 현실이 되어 버렸다.

클리프가 자신의 이론을 처음 개진했을 때 당시 상황은 예외적이라고 생각되어졌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소련의 후진성과 고립이 `국가자본주의’체제 전개의 주요한 요인이었다. 그러나 그때 이후 중국, 쿠바, 월남 등지에서 혁명이 성공했다. 그런데 이런 거대한 사건들이 그에게는 예외적인 현상으로 비추어진 모양이다. 당시는 그에게 예외가 규칙이 되는 그런 시대였던 모양이다. 정말 대단히 암울한 전망이 아닐 수 없다.

 통계수치의 사용에 대하여

클리프의 이 저작은 사실과 관련된 자료들을 많이 인용하고 있기 때문에 대단히 인상적이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완고한 자료들’이 나타나면서 확고하게 논리를 전개한다. 자료의 양과 학자와 같이 꼼꼼한 주석달기에 거의 어안이 벙벙할 지경일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좀더 꼼꼼하게 이 자료들을 들여다보면 자료의 신빙성이 의심가기 시작한다.

33쪽에서 클리프는 소련에서 소비가 축적에 종속되는 현상을 논의하기 시작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대중의 소비는 축적에 종속된다.” 그리고 이것이 “기본적인 관계”라고 말하면서 이 주장을 강조한다. 그리고 한 세트의 수치들을 제시하면서 이러한 종속이 소련에서도 지배적이라고 주장한다.

총생산량에서 차지하는 생산수단(A)과 소비수단(B)의 비율

1913

1927-8

1932

1937

1940

1950

A

44.3

32.8

53.3

57.8

61.0

68.8

B

55.7

67.2

46.7

42.2

39.0

31.2

 

이 간단한 표는 많은 것을 지적하게 만든다. 우선, 총생산량을 통해 밝힐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생산수단에 대해서는 순수치를 알아야 한다. 즉 순수치가 있어야 새로 축적된 생산수단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 지를 알 수 있다. 둘째, 이 표에서 1913년 수치는 클리프의 주장을 반박하고 있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가 생산수단의 축적에 종속된다고 했다. 그러나 이 수치에서는 생산수단에 대한 비율이 더 적다. 따라서 이 수치에 따르면 1913년 러시아는 자본주의 국가가 아닌 셈이 된다! 셋째, 사용되고 있는 범주의 성격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다. 이 수치들은 가치를 계산한 것인지 가격을 계산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일반화된 용어만 나와있을 뿐 이 용어를 규정하는 조건이 없다. 맑스는 생산의 두 부문 즉 생산수단 부문과 소비수단 부문을 매우 추상적인 방식으로 사용했다. 그런데 클리프는 훨씬 낮은 추상의 수준에서 이 범주들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혼란을 발생시킨다. 이것은 범주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길 수 있으나 엉터리 방법론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자본주의와 소비의 종속에 대한 클리프의 규정은 너무 애매하여 전혀 의미가 없다. 어떤 사회든지 새로운 축적은 소비의 축소를 의미한다. 소비될 수 있는 부분이 소비되지 않은 채 생산수단에 투여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미 소진된 생산수단을 대체하기 위해서 소비를 희생시키지 않는다면 어떤 사회도 살아남을 수 없다. 수확된 밀의 일부를 봄에 파종하기 위해 소비하지 않는 농부 역시 자신의 소비를 축적에 종속시키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에 대해서 얘기한다고 한 후 클리프는 초역사적 범주를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주장은 전혀 알맹이가 없다.

소비를 축적에 종속시킨다는 주장을 계속하기 위해서 클리프는 수치를 계속 늘어놓는다:

“소련에서 개인적으로 소비할 수 있는 면제품의 일인당 수치는 1927 28년의 15.2미터에서 1940년의 10미터 이하로 떨어졌다. 1937년 영국의 수치와 비교하면 이 수치가 얼마나 하락했는지를 알 수 있다. 영국에서는 일인당 60평방미터의 면제품이 생산되었다.”  (Cliff, p. 37)

여기서 클리프는 너무 황당한 실수를 하고 있다. 그는 서로 비교할 수 없는 수치들을 비교대상으로 하고 있다. 모든 산출량이 소비되는 폐쇄된 사회를 상정하지 않는 한 소비량과 산출량을 비교할 수는 없다. 더욱이 1930년대에도 영국의 면제품은 수출되고 있었으므로 총산출량은 국내 소비량에 대해서 아무 것도 말할 수 없다. 소련에 비해서 당시 영국의 국내 소비량은 많을 수도 적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을 클리프가 제시하는 수치로는 알 수가 없다. 이 사실을 그는 잊어버리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는 미터를 평방미터와 비교하고 있다. 미터와 평방미터가 같은 것이라면 이 사실을 명시해야 하지 않을까?

주택문제를 비교할 때도 클리프는 똑같은 오류를 반복하고 있다:

“1923년과 1939년 사이 16년 동안 러시아 도시의 주택면적은 1억6백6십만 평방미터밖에 증가하지 않았다. 1925년과 1928년 사이 4년 동안 잉글런드와 웨일즈에서 7천만 평방미터 이상의 총건평이 건축되었다.”  (Cliff, p. 39)

여기서도 서로 비교할 수 없는 단위들이 비교되고 있다. 러시아의 경우 농촌과 기타 비도시 지역의 주택은 제외되어 있다. 반면에 잉글런드와 웨일즈의 경우는 이 두 경우가 다 포함되어 있다. 더욱이 소련의 농촌인구는 잉글런드와 웨일즈의 경우보다 절대적으로나 상대적으로 훨씬 많다. 따라서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소련의 농촌지역까지 포함시켜서 계산해야 한다. 주택문제에 대해서 그는 계속 이렇게 말하고 있다:

“4평방미터의 생활공간이 어느 정도인지 실감하기 위해서는 영국의 경우 새로운 주택의 경우 최소한 550에서 950평방피트 즉 방 하나당 51에서 88 평방미터 정도의 넓이가 나온다는 것을 생각하면 된다.”  (Cliff, p. 38)

그러나 클리프 자신의 수치에 의하면 부엌, 욕실, 홀 등은 4평방미터 안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이러한 공간들이 포함될 경우 수치는 4평방미터를 훨씬 넘을 것이다. 물론 이 정도의 공간은 영국의 기준으로 보면 빈약할 것이다. 그렇지만 왜 두 가지 다른 기준들을 들이대면서 실제보다 상황이 더 나쁜 것처럼 포장하는 것일까? 그는 주택을 협소하게 규정된 생활공간과 비교하고 있다.

이러한 엉터리 수치 비교는 다른 곳에서도 발견된다. 예를 들어 35쪽에는 비교를 위해 두 지수가 제시된다. 그러나 이것들은 기준년이 서로 다르다. 결국 주장하는 바를 입증하기에는 전혀 쓸모가 없다.

소련의 노동자와 농민들은 제1차 5개년 계획 수행 기간 동안 엄청난 희생을 감수해야 했다. 이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리고 생활수준이 하락한 것도 의심할 수 없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 아니다. 문제는 통계수치를 잘못 다루면서 자신의 주장을 강화시키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결국 클리프가 제시하는 증거의 많은 부분은 의심받지 않을 수 없다. 단순한 수치들에 대해서도 오류를 저지르는 만큼 그가 좀더 복잡한 수치들에 대해서 오류를 범할 가능성은 그만큼 큰 것이다. 그러나 그가 제시하는 수치들의 제1차 자료를 입수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가 이것들을 얼마나 올바르게 사용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The Theory of State Capitalism – The Clock Without a Spring

켄 타벅 지음, [맑스주의 연구] 제 2권 제 1호, 1969년-1970년 겨울호에서 번역

By Ken Tarbuck, translated from the Winter 1969-70 issue of Marxist Studies, Vol. 2, No. 1

http://www.bolshevik.org/hangul/miscel/clockwithoutspring.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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